“21세기 신학,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실패 거울삼아야” [20세기와 21세기의 접점에서 보는 신학] 목창균 총장 편 21세기는 인류문명이 새롭게 털갈이 하듯이, 20세기부터 시작된 문명의 세계관적 변화가 완전히 이루어질 중대한 전환기이다. 20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쇠퇴의 길을 걸었지만 자유주의 신학에서 흘러나온 많은 신학들이 다원화의 물결 속에 자리잡고 있다. 많은 신학자들과 기독인들은 21세기에는 신학이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지, 또한 새로운 어떤 신학이 나올 것인가라는 것에 궁금해하며 주목하고 있다.
본지는 '20세기와 21세기의 접점에서 보는 신학'이란 기획을 마련, 한국의 저명한 신학자들을 인터뷰하여 20세기의 신학을 정리하고 21세기 신학의 방향성을 모색, 전망하려 한다. 그 세 번째로 서울신학대학교 목창균 총장을 만나봤다.
-한 세기가 종료되고, 또 다른 세기가 시작되는 역사적 전환기를 맞아 지나간 과거를 되돌아보며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방대하지만 지난 20세기의 신학을 되돌아본다면.
20세기 신학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작용으로 유럽과 미국에서 각각 신정통주의 신학과 보수주의 신학이 나왔다. 신정통주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온건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근본주의 신학은 이에 대해 공격적이고 전투적이었다. 현대신학을 세 가닥으로 본다면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근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 20세기의 신정통주의 신학, 최근의 세속화 신학, 해방 신학, 과정 신학 등은 외형적으로 볼 때, 매우 다른 형태의 신학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현대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해석하고 전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신학적 고심의 산물이다. 희망의 신학, 해방신학, 여성신학, 흑인신학, 아시아신학 등은 인간의 경험을 중시한다.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그가 겪은 전쟁 포로 수용소의 체험으로부터 태동된 것이다. 그는 희망을 가진 사람이 생존 확률이 높다는 것을 발견하고 희망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며, 신죽음의 신학의 도전에 직면하여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희망을 신학화했다.
해방신학은 전체 인구의 5퍼센트가 전체 재산의 80퍼센트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남미의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불균형과 가난한 자에 대한 정치적 억압상황을 제거하고 보다 자유롭고 인간적 사회를 건설하려는 공동 노력의 체험에서 생긴 신학사상이다. 여성신학은 기독교의 성차별적이며 여성 억압적 요소를 자각하고 '신에 대한 인간경험의 의미와 가치를 여성 입장에서 성찰'하는 것이다. 북미의 흑인신학은 미국에서 흑인들이 백인들로부터 받은 억압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최근 신학은 다양한 형태와 흐름으로 전개되었으나 또한 그 수명이 길지 못하고 유행성이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새로운 형태의 신학이 출현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다가도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르게 사라진다. 하나의 신학을 이해하고 평가하기도 전에 그것이 쇠퇴하고 또 다른 신학이 등장한다. 이는 상황에 의존하기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현대신학은 현대 사상의 도전에 직면하여 기독교 생존 전략의 하나로 시작되었으며, 현대에 대한 적응문제가 그 중심과제였다. 현대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해석하고 전달해야 하는 문제에 대해 많은 신학자들이 고심했고 그에 따른 많은 신학들이 전개되었다. 21세기에도 이러한 고민들은 계속될 것이라 생각된다.
서구 세계와 문화는 역사적 전환기에 있다. 현대와 현대사상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시대와 사상이 출현하고 있다. 포스트모던(postmodern) 시대와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이 그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는 문학, 예술, 철학, 사회이론, 매스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하나의 현상이 아닌 여러 현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통일된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거나 모순되고 혼란스러운 현상을 포스트모던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실체가 완전히 드러난 것이 아니라 아직도 형성 과정에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도 두 형태가 있다. 해체주의와 건설주의다. 해체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은 세계의 본질에 대한 현대의 가정들을 해체하고 파괴하려고 한다. 특히 서구의 전통 형이상학의 실재론에 공격을 집중하며 신과 도덕성의 죽음, 자유의 존재, 의미와 목적을 부정했다. 그들은 해체를 허무주의적 파괴 아닌 잘못된 개념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치료로 이해한다. 해체주의는 서구정신의 자기 파괴의 표현이며 파괴가 곧 구원의 도래를 촉진한다는 역설이다.
한편, 건설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 정신을 거부하기보다 개정하려는 것이다. 현대 과학의 통찰력과 지혜를 수용하는 한편, 현대인의 관점에서 과거의 전통을 재평가해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해체주의는 현대 세계관의 가능성을 제거하고 해체하는 방법을 택하는 반면, 건설주의는 현대의 전제들을 개정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많은 학자들은 21세기 초반을 이끌어 갈 신학으로 포스트 모더니즘 신학과 복음주의 신학을 뽑고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 신학은 앞에서 언급했으니, 복음주의 신학의 소개와 복음주의 신학이 최근 대두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달라.
현대 들어 복음주의란 말은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 두 가지로 사용되고 있다. 넓은 의미의 복음주의는 18세기 부흥운동을 계승한 신앙전통을 말한다면, 좁은 의미는 그 하부 그룹인 신복음주의를 말한다. 신복음주의의 최근 동향은 21세기 복음주의 신학을 전망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신복음주의는 근본주의 영향권에서 성장한 온건한 보수주의 기독교인들의 운동이요,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중간에 위치하기를 선호하는 북미 개신교 내의 제 3세력이다. 신복음주의자들은 정통 교리를 유지하면서도, 학문적 연구에 가치를 부여하고 사회문제에 적극적 관심을 표명했다. 영혼을 구원할 뿐 아니라 문화를 변혁시키는 복음에 대한 비전을 회복했다.
신복음주의는 1950년대 미국에서 중요한 대중 운동으로 성장했으며, 1970년대 초에 이르러서 그 중요성이 널리 인정되었다. 신복음주의는 1970년대에 성경 무오성 문제로 보수적 복음주의와 진보적 복음주의, 두 그룹으로 분열되는 진통을 겪기도 했다. 전자는 근본주의 입장을 계승하여 무오를 신앙에 대한 테스트로 강조한 반면, 후자는 무오가 성서의 권위를 정의하는 방법으로는 너무 편협하다고 생각하고 대부분 성경의 제한적 무오를 주장한다.
신복음주의의 출현은 현대 미국 교회에 복음주의의 부흥을 일어나게 했으며, 보수주의 학계에 반 지성적 경향이 개선되는 새로운 지성적 활력을 불어넣었다. 신복음주의의 중요한 업적은 현대 후기의 급진 신학에 굴복하지 않고 근본주의적 극단성의 늪으로부터 복음주의 교회와 신학을 구출하는 데 크게 공헌한 것이다.
최근 대두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자면,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의 신학으로 발전했다. 대중성보다는 소수 엘리트들의 신학으로 발전했다. 복음주의는 철학을 배격하고 성경을 강조한다. 대중적이고 실용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다. 복음주의가 미국의 실용주의 사상과 결부돼 사람들에게 성경을 쉽게 가르쳤기 때문에 신앙의 운동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본다.
-총장님께서 생각하시는 21세기의 사회와 이와 함께 신학의 모습을 그려달라.
21세기 신학 역시 시대적 상황과 종교적 경험을 신학의 중요한 자원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현대 신학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탈 현대성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 신학과 다른 모습으로 전개될 것이다. 따라서 이성보다는 감성이나 영성이 강조될 것이라고 보여진다.
한편 복음주의 신학계는 그 취약점 중 하나인 반지성적 경향을 치유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신 복음주의자들이 복음주의 지성을 주도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 쪽으로 편향하여 복음주의 신학을 개정하기를 계속할 것이다. 반면, 온건한 복음주의자들은 전통 신학과 현대 사상의 경계선에서 조심스럽게 활동하리라 예상된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위해 존재한다. 그 시대에 맞게 기독교 신앙을 재진술하는 것은 중요하고도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위험한 일이다. 그것을 재진술하지 않으면, 진부하게 되거나 시대에 부적합하게 되는 반면, 잘못 진술하면 기독교 신앙을 손상하게 되거나 그것에 위해가 된다. 따라서 어떻게 그것을 시대에 적합하게 하느냐, 즉 어떻게 상황화하느냐가 중요하다. 상황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기독교 신앙의 기본 내용까지 부인하거나 포기하게 된다.
21세기 신학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실패를 거울 삼아야 할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인에게 복음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가 하는 올바른 문제의식을 가졌으나 잘못된 해결책을 제시했다. 기독교 복음에 가해질 해악은 고려하지 않고 현대 문화가 쉽게 수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복음을 해석한 것이다.
-이와함께 21세기를 시작하는 한국 신학이 가야할 방향은 어디인가.
한국신학이 단순히 서구신학을 소개하는 것보다는 이를 한국적으로 소화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결국은 한국 사람들의 심성과 정서에 맞게 성경을 해석하고 신학적인 입장을 제시해야 한다. 한국신학은 한국 사람들이 직면하는 여러 상황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답해야 한다.
특별히 한국의 신학교육은 교회를 위한 신학으로 나가야 한다. 신학과 교회가 따로 되서는 안된다. 신학의 사명은 교회를 위한 학문이다. 교회가 필요로 해야 하고 또한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교회를 의식하지 않고 교회와 단절된 신학은 문제가 있다. 독일신학은 발전했지만 독일교회는 발전되지 못했다. 반면 미국교회는 신학에 실용적인 면이 있지만 교회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한국신학은 한국교회의 발전과 성숙에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신학이 실용적이고 현장중심적이어야 교회와 공감대를 이룰 수 있다. 교회가 직면하는 난제에 신학자들은 답은 제시하고 성서적인 토대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한국신학이 나아갈 방향이다. 서울신대는 교회를 섬기고 봉사할 수 있는 목회자를 키우려 노력한다. 신학은 단순히 학문을 위한 신학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학문이 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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