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기도문 !!

[스크랩] 주기도문

하나님아들 2012. 9. 23. 22:33


사람마다 운전하는 습관들이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익숙한 길을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어느 편인가 하면 후자입니다. 그래서 갔던 길 그대로 돌아오기 보다는 다른 길을 통해서 돌아오길 좋아하고 또 평소에 익숙한 길 보다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지난 화요일에 시흥교회에서 노회가 있었습니다. 시흥동에 있는데 이미 그 교회 제가 몇 번 가봤기 때문에 길을 잘 알죠. 근데 이미 아는 길을 또 갈려니까 1시간 넘게 운전할 생각하니까 좀 지루할 것 같습니다. 근데 마침 시간도 좀 여유가 있고 그러니까 그때 언뜻 외곽순환도로 달릴 때 시흥톨게이트가 있는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시흥톨게이트를 통해서 내려가게 되면 시흥동에 도착하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톨게이트를 내려서 한참 가보니까 이상한 도시가 나왔습니다. 시흥동이 아니고 시흥시였습니다.
아차, 이거 길을 잘못 들었구나...하고 지도를 보니까 다행히 시흥시하고 시흥동이 그렇게 멀지는 않더라구요.. 그래서 다시 고속도로를 타고 다시 가는데 한 시간이면 갈 거리를 두 시간 넘게 헤매면서 고생고생해서 겨우 도착을 했습니다.
그 경험하면서 야 이거 새 길이 반드시 좋은게 아니구나..좋은 길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한 길이 좋은 길이구나 깨달았습니다. 또 좁은 길, 지름길 그게 좋은 길 아니고 많은 사람이 다니는 대로가 정말 좋은 길이다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믿는 사람치고 기도를 한번 잘해보고 싶은 욕심이 없는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기도를 잘 할 수 있을까, 기도의 지름길은 없을까, 아주 신비한 특별한 기도의 길은 없을까, 뭐 그런 생각 할 수 있죠. 어떻게 하면 꼭 응답받는 기도의 방법이 없습니까,
그런 기도의 방법을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많은 기도의 방법들이 개발됐어요. 환상기도, 명상기도, 침묵기도 해서 새로운 기도방법이 많이 생겨났는데 그러나 그 모든 기도의 길 중에서 가장 좋은 길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 가장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길, 바로 주기도문의 길입니다.
친히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신 이 기도가 제일 좋은 기도입니다. 그래서 신비한 새로운 기도의 방법 개발하는것 좋지만, 주기도문을 잘 알고 주기도문을 잘 활용하는 법을 익히면 우리 신앙생활에 큰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 완벽한 기도가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을 습관적으로 그냥 생각도 없이 외울 것이 아니고 그 뜻을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평소에 이 주기도문의 패턴을 따라서 기도하면 기도생활에 놀라운 승리가 있을 줄 믿습니다.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익숙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는 거기에 함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을 한 구절 한 구절 우리가 살펴보면서 그 뜻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이제 올바르게 주기도문을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9절을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므로 기도는 시작이 되죠. 사랑의 아버지, 친근한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육신에 있는 아버지하곤 조금 다릅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능력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또 어떤 아버지는, 육신에 있는 아버지는 성깔이 조금 고약한 분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다른 분입니다. 능력이 한이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아버지, 또 모르시는 것이 없이 전지하신 하나님, 또한 아니 계신 곳이 없는 전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전에는 ‘무소부재’ 해서 안 계신 곳이 없는 분 그렇게 말했는데, 요즘은 전재라는 용어를 써서 전지, 전능, 전재하신 하나님!
이 분이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
여러분, 어디에 가니까 하늘이 없던가요?
비행기를 타고가도 하늘이 있고, 섬에 가도 하늘이 있고, 깊은 산 속에 들어가도 하늘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어디에 가서도 만날 수 있는 분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안에 있어야 대화가 가능하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어디에서나 대화할 수 있는 분입니다.
어떤 아이가 한 밤중에 소변이 마려워서 잠이 깼습니다. 그리고 화장실을 다녀서 이제 집으로 들어가는데 마당에 누가 있는거 같습니다. 시계를 보니까 12시가 됐는데 그 감나무 밑 벤치에 같이 사는 고모가 앉아있습니다. 고모가 “아, 애인이 필요해” 그러고 있거든요. 그리고 며칠 지나니까 아니나다를까 고모가 애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야, 알았다고. 저 벤치가 뭔가 신비한 힘이 있는가보다..’생각하고는 이 아이가 일부러 12시까지 기다렸다가 살금살금 그 벤치에 가서 앉아 자기 고모처럼 포즈를 취하고 “아, 세발자전거가 필요해.”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 어떤 시간, 그 어떤 장소에 마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 내가 이번에 말이야 어떤 기도원에 가서 기도 응답받았어..어, 그 기도원 어디야? 나도 한번 가볼래...이렇게 어떤 특정한 장소에 가야, 기도 응답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특정한 시간에 기도해야 기도 응답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인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습니다. 언제고 만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은 바로 예수님을 보내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탕자의 아버지처럼 우리를 용서하시는 무한한 넓은 가슴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러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그 짧은 기도문 해 놓고 제가 방금 말씀드린 이것을 생각할라그러면 시간이 꽤 많이 걸리겠죠..그래서 하나하나 뜻을 생각하면서 주기도문 하면 주기도문 다 외우고 나도 한 5분 10분 걸릴 수 있는 거예요...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아버지 이름이 높임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보통 무슨 대통령만큼, 교장선생님만큼 그 정도가 아니고 거룩하다는 다르다는 뜻이니까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도,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도 특별히 다르게 아주 아주 높임을, 최고로 높임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주기도문 하는 사람에 첫 번째 소원입니다.
내 소원, 그것은 다음이죠.. 첫 번째 소원은 하나님이 높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죠. 그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높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높임받길 원하면 높임 받을 일을 해야 되겠죠.
마태복음 5장 16절 이하에 보면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자녀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빛난 존재, 두드러진 존재, 최고의 존재가 됨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에서,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온 백성이 함께 기뻐했습니다. 가장 마지막, 온 사람들이 모든 사람이 다 보는 그 앞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지고 금메달이 주워 졌을때, 개인의 영광이기 전에 바로 대한민국의 영광이였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을 위해서 황영조 선수가 얼마나 힘든 훈련을 쌓았을까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독사라는 별명을 가진 그 감독이 얼마나 지독하게 훈련시키는지 너무너무 힘들어서 뛰다가 옆에 지나가는 차를 보면서 그냥 그 차 밑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문득문득 느끼곤 했다는 것입니다. 황영조 선수가 개인의 영광을 위해서는 그같이 참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어깨에 조국의 영예가 걸려있었기 때문에 그 힘든 훈련과정을 이기고 마침내 영광의 면류관을 따서 본인도 영광스럽게 되고 본인이 영광스럽게 될 때, 바로 조국이 영광스럽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가능성, 70%, 80%만 발휘해도 만족하는 삶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가능성을 100% 발휘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됩니다. 학생이면 학업에서, 직장인은 자기 직장에서 최고의 존재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가능성을 100% 발휘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최고의 존재가 될 때, 우리 아버지되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제 수능고사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얼마나 수험생들이 열심히 공부합니까?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의 안일한 미래를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라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좋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참고 또 참고, 인내하고 또 인내하며 열심히 공부해야죠. 그래야 나를 통해서 아버지 이름이 영광 받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최고가 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고가 못 되도 최선의 사람은 될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최고의 존재가 되기보다는 최선의 사람이 됨으로 더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아주 운동 잘 하는 사람, 아주 돈 잘 버는 사람, 기술이 탁월한 사람을 우리가 존경합니다만, 그러나 진정한 존경은 도덕적인 우월성을 가진 사람에게 주워집니다. 정직한 사람, 진실한 사람, 사랑의 사람에게 우리는 진정한 존경을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된 사람, 정직한 사람, 사랑의 사람이 됨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잘못 생각해서 거짓말을 밥먹듯 한다든지, 사기 친다든지, 이기적 삶을 살게 되면 나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에 욕이 돌아갈 수도 있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로마서 2장 24절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했습니다.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 기도할 때, 하나님 절대로 하나님 이름에 누를 끼치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겠습니다, 하는 결단이 그 기도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10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나라가 무엇입니까? 여기서 나라라는 것은 단순한 영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누가복은 17장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있다 저기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이 내 삶 속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게 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내가 내 가족에게 전도하여서 온 가족이 예수믿고 온 가족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면 바로 그 가정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 됩니다.
내가 속한 직장에 모든 사람이 다 예수믿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면, 바로 직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주기도문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성경의 핵심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모든 사역에 초점입니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왔다.’ 이것이 예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의 관심의 초점은 하나님의 나라에 가있어야 됩니다.
어떻게해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수 있을까요?
분명한 것은 모든 사람이 예수 믿어야 되겠죠.
모든 사람이 예수 믿기 위해서는 먼저 믿은 우리들이 희생하고 헌신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였기에 주님께서도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2장 42절에 보면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만약 예수님의 기도가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시옵소서 그것으로 끝났다면, 인류의 구원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 기도 때문에 인류의 구원이 가능했습니다.
누가 손해보기를 좋아하겠습니까, 누가 욕 먹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때로는 그 사람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는 내가 물질적인 손해를 감수해야 됩니다.
내가 욕 먹어야 됩니다. 인격적 모독을 당해야 됩니다. 그것을 감수하고야 복음을 전할 수 있고 그것을 감수하고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어떠할까요?
그냥 쉽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고민과 갈등이 일어난다고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진정으로 부끄러운것은 그 고민과 갈등의 시간의 끝에, 결론이 내 뜻일 경우에 그건 정말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고민과 갈등 끝에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로 결심했다면, 순종하기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그렇게 기도했다면 그것은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길 원합니다 기도했지만, 첫 번째 기도하고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직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뜻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또다시 기도하셨습니다.
두 번째 기도하고 나서도 완전하게 기쁨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기가 아직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또 기도하셨습니다.
세 번 기도하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고 하나님께서 나보다 더 지혜롭다는 것이 믿어졌을 때, 기꺼이 진심으로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삶 속에서 이런 갈등의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기도하고 또 기도하십시오.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기 원합니다. 계속 기도해서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될 때, 바로 거기에 형통이 있고 바로 거기에 기쁨이 있고 바로 거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할 때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천국의 기쁨과 평화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잘 이용하므로 날마다 천국의 삶을 누리시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드립니다.

그 다음 11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여기보니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여러분 저금통장에 예금 잔고가 많이 있고, 여러분 냉장고에 먹을 것이 가득가득 차기 때문에 일용할 양식을 위해선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나의 일용할 양식이 아니고 우리의 일용할 양식입니다. 지금 이 지구상에 3분의 2는 영양실조 상태에 있습니다. 아시아에 수많은 사람들이 절대빈곤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이것은 아주 심각한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북한의 동포들, 소말리아, 아프리카에 있는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진지하게 하나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기도해야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양식만을 위한 기도는 아니겠죠.
마틴루터는 이 구절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을 보존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은 양식인데 그 속에는 음식물, 건강한 몸, 좋은 기후, 집, 가정, 아내, 자녀들, 좋은 정부, 평화가 포함되어 있다’ 그랬습니다.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우리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건 바로 우리 기도를 따라서 하나님께선 이것을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우린 하루하루 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단 하루도 하나님의 축복하심과 공급함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신앙고백이 바로 이 속에 나오는 것입니다.
근데 일용할 양식 그랬어요. 내일 할 염려 주님께서 하지 말라고 그러셨어요. 일용할 양식 있습니까?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리고 내일은 하나님을 의뢰할 수 있길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이발소를 운영하는데 홍보수단으로 ‘내일은 공짜입니다’ 딱 써 붙였어요.
그 다음에 사람들이 많이 왔습니다. 오늘 공짜라면서요? 오늘 공짜가 아니고 내일은 공짜입니다. 자 보십시오, 내일은 공짜! 그 다음날 또 사람들이 왔습니다. 오늘은 공짜죠? 아니요, 내일이 공짜라고. 아무도 그 이발소에서 공짜로 머리깎은 사람이 없답니다. 왜냐하면 내일은 결코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내일을 위해서 염려하십니까?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내일은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오늘을 사는 것이지 내일을 사는 사람 없습니다. 그러므로 미래에 대한 염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하루하루 주어진 하루의 분복을 즐기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매일매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다음 12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짓는 자이기에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얼핏 보면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떻습니까.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을 하는 사람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을 하는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가 먼저입니다. 이 용서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가 또한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주어야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용서가 내 삶속에 흘러 들어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큰 죄는 용서 받았고, 하나님께로부터는 용서를 받아놓고는 다른 사람이 내게 한 작은 잘못을 용서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사람은 더 이상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6장 14절, 15절,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여긴 예외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그랬는데, 우리가 만약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지 않으면 하나님 내 죄도 용서해 주지 말아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109편 7절에 보면, “그 기도가 죄로 변케하소서” 하는 말이 나옵니다.
만약 우리가 내게 잘못한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고 주기도문을 외운다면, 그 기도가 바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용서하라 하셨지만, 도저히 이 사람은 용서 못하겠습니다, 내가 지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 말씀에는 순종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는 기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제가 몇 번 강조하여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용서의 문은 마치 호텔의 회전문과 같습니다. 고급 호텔에 들어가게 되면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문이 있지요. 어떤 사람이 그 회전문을 한쪽을 꽉 잡으면 보통 문이 서너개가 있는데 한쪽 문을 꽉 고정시켜버리면 다른쪽 문도 돌아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절대로 용서하지 못해’ 하고 그 용서의 문을 꽉 잡아 버리면, 하나님의 용서가 내 삶속으로 흘러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을 진심으로 외우려면 용서하고 이 주기도문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용서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기에 우리가 구하면 용서할 능력을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용서하기를 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옵소서‘ 하나님께 구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용서할 의사만 있으면, 용서하기를 원하면,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하시면, 용서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심으로 주기도문을 외울때 우리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용서한 사랑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13절 말씀 같이 읽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우리 모두는 연약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시험에 걸려 넘어질 염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악에 빠지지 않게 지켜주십시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도움없이 승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굳게 결심합니다, 결심으로 안됩니다. 사탄은 우리의 결심을 조롱합니다. 우리의 모든 수고도 조롱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에는 벌벌 떱니다. 내가 결심하여 악을 이길 수 없습니다만 우리가 기도하면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 시험에 들지 않게 해주십시오, 악에서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할 때,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악에 대한 승리자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습니다, 다시한번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송영을 함으로 주기도문은 끝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영광이 주기도문 하는자의 궁극적 관심인 것입니다.

기도의 대로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대로를 아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고, 기도의 대로를 걷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좋을지 알았습니다. 이제는 실천하십시오. 이 주기도문의 뜻을 잘 생각하면서 또박또박 이 주기도문의 패턴을 따라서, 한 제목 한 제목 따라서 열심히 기도하시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그 풍성한 응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 약속의 말씀을 경험하시는 복된 기도자들,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드립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저희들에게 주시고, 기도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복 받을 수 있는 모든것을 주님께서 다 제시해 주셨으니 이제는 이 기도를 활용하여 날마다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기쁨, 풍성한 사랑을 누리며 살게 하시고, 천국의 삶을 이 땅에서 사는 참으로 복된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어떤 경우에도 기도에 게으른 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주께서 예비하신 선물을 놓치는 어리석은 사람 한 사람도 없도록 주님 우리를 열심있는 기도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갈렙  
 2002년 11월 24일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아멘  
 마태복음6:9-13 
 
 
2002. 11. 24 설교방송 (설교본문)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아멘
마태복음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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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앞으로는 사도신경만 주로 우리가 고백하는 그런 형편이 아니라 주기도문의 진정한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내 개인을 위한 것인지 교회 생활에 더욱 필요한 것인지를 한번 챙겨보아 주기도문에 입각한 그런 예배도 드려야 되겠다 싶어서 오늘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흔히 말씀들 하여서 이 땅에는 희망이 없다. 그런 말씀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미워하고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이렇게 합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희망이 있다는 것인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희망은 천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존재하고 있다 저는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약에 천국이 아직도 희망할 것이 있다면, 또 천국이 아직도 모자라서 고쳐야 될 그런 부분이 있다라고 한다면 저는 거기 가는 것을 상당히 실망을 할 수밖에 없다 싶습니다.
천국에는 이 세상과 달라서 더 이상 고칠 것도 없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인 줄 압니다. 그래서 저는 천국을 사모하는 것이지요.
우리 주께서 가르쳐 하게 하신 기도를 보십시오.
10절에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그랬어요.
땅에 어떤 뜻이나 땅의 어떤 신앙이 하늘에 수출될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시옵시고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이 땅에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하고 또 그대로 되어지도록 우리더러 뛰라고 주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천국으로 수입해 수출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 땅에서 천국에 있는 것을 수입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망이 천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땅에 있습니다.
물론 이 땅에는 희망이 너무 많을 만큼 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어두운 면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을 포기할 것인가?
주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와 그 행하라 하신 것을 보면 이 세상을 사랑해야 합니다. 관심이 많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변화 시켜야 합니다.
사랑함이 없으면 변화시키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중에는 이 세상 잠시 잠깐 살다 갈 것이라 하면서 박대하고 이 세상에 가까이 가는 것을 마치 죄짓는 것처럼 생각하고 천국 천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듭난 이후에도 이 땅에 살게 하신 것은 이 세상을 변화시키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아직도 희망할 것이 너무나 많고 고쳐야 될 것이 너무나 많으니까 너희가 직접 하라 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안 되는 겁니다. 세상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또 주께서 이 세상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나라이 임하여 오셔서 이 땅이 천국과 같이 되도록, 이 땅의 희망 사항이 다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할 기도의 내용을 가르쳐 주셨을 때
그 9절 처음 내용이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그랬어요.
이 기도의 내용을 가르쳐주시면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신 이 "그러므로"에 대한 뜻이 무엇인지를 유의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 바로 이해할 수가 있다 그것입니다.
문장의 형태로 보아서 "그러므로" 시작되는 것으로 보아서 이 기도 앞에 이 기도와 관련되는 그런 사건이 앞에 있었구나 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기도문, 사도신경 이렇게 고백할 때에 그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렇게만 늘 들어갔기 때문에
이 기도를 왜 해야 되는지? 그 앞의 상황을 전혀 모릅니다.
그래서 시험에 드는 것은 어떤 것이며 일용할 양식은 무엇이며 악에서 구원받아야 될 것은 어떤 악이냐? 이런 것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지요.
책을 읽을 때 그렇게 잃으면 이해를 못하는 것이지요.
이 문장의 형태로 보아서 "그러므로"를 보아서 그 앞에 분명히 내용이 있는데 그 앞에 있는 내용도 어떤 것인가를 미리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이렇게 하지 않고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뒤에 가르쳐주신 기도 내용과 같은 상황이 앞에 있었겠습니까 전혀 다른 상황이 앞에 있었겠습니까?
옛날 공부하던 때 국어실력을 좀 발휘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이렇게 기도하라 라고 했으면 앞의 사람들이 잘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앞사람들처럼 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라고 한 것을 보니까 앞의 사람들이 한 짓이 틀렸다 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앞의 사람들 그 당시의 사람들의 틀린 내용들을 우리가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 기도의 진정한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 아쉬움이 부족함이 있다 그런 것이지요.
그러면 앞에 있는 내용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제가 한번 읽어볼까 합니다.
6장 1절부터 4절까지 보겠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의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영광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이 제자들이 살고 있던 당시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전 생활을 중심 하면서 성전에 모이게 되었을 때에 주로 어떻게 했느냐.
자기가 영광을 받으려고 자기가 칭찬을 받으려고 구제도하고 봉사도 하고 의를 행했다 그것입니다 당시에. 남에게 다 보이려고.
또 5절 이하를 보겠습니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당시에 사람들의 그 성전 중심 생활을 본다면 기도를 한다든지 전도를 한다든지 예배수종을 든다든지 할 때에 저들은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사람을 의식하고 주로 하고 있다 그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중에도 계신데 하나님 중심으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의식하고 더 하고 있다 그것입니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도 하나님은 계신데 사람이 없으면 하지 않는다.
사람만 나타나면 알아주기를 바라서 기도도 그저 외식하므로 기도하고 평소에는 기도도 잘 안 하는 사람이 사람 나타나면 기도하고 이렇게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스스로를 이 말씀 앞에 비추어볼 때 어떻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저의경우를 잘 압니다.
제가 주의 종이 되기 전까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서 종으로 부름 받을 때 성령으로 감동되어서 천국 경험을 한 그 이전까지 많은 경우에 하나님을 의식한 것보다 사람을 의식하고 한 것이 더 많았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부름 받기 전 장로로 있을 때에 기도회로 모이면 그저 대강 대강 졸기도 하고 먼저 와서 있다가 목사님이나 성도님이 나타나게 되면 기도를 제대로 하는 것처럼 이렇게 하고 대접을 한다든지 충성을 한다든지 이렇게 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나도 모르게 많이 의식하고 생활했다 라는 것을 제 자신이 고백을 아니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니까 "목사가 그랬냐?" 목사 되기 전이라 안합디까? 그런데 목사가 된 이후에도 백프로 진실하게 하나님만 의식했느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성도님들이 전화를 하면 성이 났다가도 성 안난 것처럼 "여보세요" 평안하기를 빕니다. 이렇게 되어집니다.
없을 수는 없지만, 또 물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오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참으로 제가 중직을 갖고 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한때가 많았음을 저도 고백하면서
여러분의 그 마음 중심도 오늘 이 같은 말씀 앞에서 한번 비추어 보시고 체크해보셔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께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라는 것을 염두해 두고서 이 가르쳐 주신 기도 내용을 전부 풀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앞에 있는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외식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다 했습니다.
칭찬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열심히 하고 칭찬해 주지 아니하면 그만 성나고 하나님의 칭찬을 하나님의 상급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상급을 기다린다.
그래서 잘한다 잘한다 해주면 더 열심히 하고
그 사람은 "잘한다 잘한다"하는 것으로 이미 상을 다 받았으니까 하늘의 상은 기대하지 말라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사람에게서 받는 상 그것 별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을 얻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상이 진실하고 영원히 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무엇을 위하여?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바꾸기 위해서,
희망이 많은 이 세상을 정말 고치기 위해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라고 하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런데 여기에서 이 문장에서 빠진 말이 있습니다. 간단히 하다 보니까 빠진 단어가 있는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 불렀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겁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는데 이 이름 앞에 뭐가 빠졌겠습니까? 어떤 단어가 빠졌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조금 길더라도 "아버지의" 라고 하는 정말 아버지를 넣었으면 더 구체적이었을 텐데 그냥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하니까 막연합니다.
그런데 앞에 사람들이 하나님 이름보다 자기 이름을 더 내려고 했는데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말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하라 했으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러면 거기에 더 보탠다면 뭡니까? 아버지의 이름이 내 이름보다 더 나시기를 원하오며. 아멘? 그렇습니다.
이 앞의 내용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라는 것을 연결해서 풀지 아니하면 이것이 실질적으로 풀어지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내 이름보다 더 나시옵시고.
그런 것으로 충분히 이해가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내 이름보다 더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아멘 안하시렵니까? 정말 여기는 동의해야지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누구 이름보다? 내 이름보다 더 높이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의 충성과 나의 헌신과 나의 기도를 인하여 나 보다는 아버지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오며.
헌신과 봉사를 남에게 보이려고 혹은 나 좋으라고 해서도 안되고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하옵시고"
시험에 든다니까 뭔가? 싸우는 것을 말하는가 헌금하기 싫은 것을 말하는 것인가 주일 성수 하기 싫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
시험에 드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참 복잡합니다. 잡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라는 것을 대입시켜서 앞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이 무엇이기에 "시험에 들지 말게" 했느냐?
교만한 시험에 들지 말라 그겁니다. 자랑하는 시험에 들지 말라 그겁니다. 이해가 되시면 아멘 합시다.
시험 내용을 알아야 됩니다. 막연하게 외워버리니까 앞뒤 것을 다 떼어버리니까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밤낮 기도하지만 구체적으로 내게 와 닿는 게 없다 그것입니다.
그 앞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기도할 때에도 외식하므로,
그저 자기 개인생활이나 개인 마음은 그게 아니면서 사람들 모인 곳에서, 교회 모인 곳에 가서는 아주 경건한척하고 외식하고.
그리고 무엇인가 열심히 하는 것도 사람에게 칭찬 또 목사에게 칭찬 이것이 있으면 하지만 이것이 없으면 그저 안할 정도가 아니라 시험에 들어 가지고 성이 날 정도 되는 이런 형편이 된다라고 한다면 우리 그러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도 모르게 그리하고 있지만 이것은 이미 어디에 든 것이라고요? 시험에 든 것이다 그겁니다.
그래서 악에서 구하옵시고. 이 악이 뭡니까? 악은 죄요 악은 마귀다 그겁니다.
마귀는 뭡니까? 사단마귀의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교만하게 하고 자랑하게 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게 하고 이것이 악이 하는 것이다 그것입니다.
거기에서 구하옵소서. 날 건지어 주시옵소서. 내가 시험에 들어있었나이다. 이 시험에서 나를 다만 구해주옵소서.
지금 다른 것 요구할 것이 아니라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제 자신이 헌금하며 내 자신이 헌신하며 내 자신이 예배에 수종들면서 타인에게 보이려고 내가 영광을 얻으려고, 사실은 내 본심이 그랬겠나이까?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내가 진정 원했겠나이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귀가 나를 뒤집어씌웠나이다. 이 악에서 나를 구원해주옵소서.
그래야 교회가 바뀌고 교회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뀌다 그겁니다.
주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은 너무 엉망이기 때문에 희망이 많다. 할 일이 너무 많다 그겁니다. 주님이 바라시는 것이 천국에는 없어요. 이 세상에는 너무 많아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그대로 임하여서 하나님 나라의 마음씨와 하나님나라의 그 가슴과 하나님나라의 그 계절이 이 땅에 와서 이 땅을 하늘같이 되기를 바란다 그겁니다.
쓰다가 버릴 때에는 버리더라도 말입니다.
왜? 구원받은 당신의 백성이 사는 곳이기 때문에 말이지요.
이 기도가 엄청난 것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너희는"

또 13절 하반 절에 보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그것 좋은 고백이지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하니까 그저 간단해요. 평범한 얘기 같아요 그러나 옳은 말 같아요.
그러나 그렇게 여기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를 생각하고 이 구절을 보라 그겁니다.
그랬다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 있었습니까. 하나님께 있을 것이 백성이 차지하고 있었습니까?
이 세상 사람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겁니다.
왜? 저들이모든 것을 주장하는 줄 알고 저들이 마음대로 운영하고 있었다 그겁니다.
외식하고 자랑하고 저들이 온 백성이 이끌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겁니다.
주께서 그런 모습을 보시면서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말고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했다 그겁니다.
그러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라고 기도하라 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뭐가 빠진 겁니까? 사람에게가 아니라.
이 사람에게라 아니라는 말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러므로" 앞을 알아야 된다 그겁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사람에게가 아닌 하나님에게 영원히!
곳곳에서 아멘 아멘 여러분 고백을 해 주시는데 하나님이 그 아멘에 기뻐하실 겁니다.
과연 현실적으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입니까? 과연 아멘인가? 이 아멘은 결코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이 아멘의 진정한 뜻은 무엇입니까? 이것이야말로 고백입니다. 장난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아멘
우리 교회에서 아멘 이것 너무 쉽게 쉽게 많이 합니다.
어느 부흥강사 왔는데 "나 오늘 비행기 타고 왔는데 믿습니까?" 아멘.
비행기 타고 온 것이야 아멘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이 아멘 우리 기독교에서 가장 귀한 단어가 할렐루야 아멘 입니다.
이 할렐루야, 구약에 보면 전부 시가 뒤에 보면 할렐루야입니다. 할렐루야 앞에는 뭡니까? 하나님께 영원히 입니다.
그 다음에 신약에 와서는 아멘 입니다.
그것은 진실로 그리되옵소서 진실로 나도 동감입니다. 진실로 이것은 나의 신앙입니다. 이래서 아멘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멘은 신앙고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실 때에 그저 있사옵나이다 라고 하고 끝내어야 할텐데 아멘 까지 기록했다 그겁니다.
뭡니까? 너희가 아멘 시켜라 그겁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진실로 아버지께 영원히, 이르지 못한 이 세상, 이르지 못한 이 교권자들, 이르지 못한 이 세상의 왕들,
그러나 너희가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 임하게 하셔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 영원히 다 돌아가도록, 있도록 하라 아멘 하라. 그리고 영광이 사람에게 있어서 되어지지 아니할지라.
너희는 외치고 이 세상을 고쳐가라는 것이지요.

주께서 이 기도 끝에 아멘 이라고 하라 하신 것은 우리고 하여금 이 땅을 바꾸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이 천지와 그 가운데 만물은 다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어떤 나라 어떤 족속의 장도 하늘로서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세워지지 못한다 했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하나님께서 다 세워주셨건만 하나님께서 그 영토들과 백성을 흩어져 나누어 있게 했건마는, 또 언어를 혼란시켜서 각 다른 언어를 쓰게 하는 민족들끼리 모여 살게 했건마는 아직도 그 영토와 같은 말을 쓰는 백성을 다 자기 소유로 삼고 있는 그런 독재도 얼마 있다 그겁니다. 이 세상에 말입니다.
이 세상에 그런 것이 있어서는 안되지요. 이 세상에 어디 개인의 민족이요 백성이 어디 있습니까? 다 하나님의 백성이고 개인의 영토가 어디 있습니까? 다 하나님의 것이지요.
마치 어느 왕이 자기 개인의 것인 줄 알고 모든 영토를 개인 사유화해서 대를 이어서 말이지요. 왕의 것이다 왕족의 것이다. 이 짓하고 있다 그겁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 복음이 전파되면서 이러한 영광을 가로챈 그 임금들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오늘날처럼 나라와 민족과 영토를 자기 소유로 만든 그런 왕들이 무너져가고 있음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언제부터 가능해진 것입니까?
저와 여러분 같은 주의 제자들처럼 이 기도에 아멘한 사람들이 이와 같이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겁니다.
이와 같이 만들어가고 있는, 우리가 살고있는 이 나라를 비롯한 이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는 것도 참 좋은 제도입니다 마는 잠깐 잘못하면 하면 하나님을 서운케 해 드릴 수 있어요.
뭐냐? 민주주의 국가는 그야말로 국민이 주인이다 그것입니다.
국민이 집권자들과 위정자들을 세우는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국민이 나라의 진정한 주인이 아니고 이 나라가 국민의 소유가 아닙니다.
진실로 우리는 무엇을 고백해야 되느냐
"주여 이 나라와 이 백성은 다 하나님의 것이옵나이다 우리가 뽑아 세운 것도 우리가 투표했을 뿐이고 제비 뽑았을 뿐이지 우리의 제비를 사용하고 우리의 마음들을 하나님이 이용하셔서 세우는 군왕들과 세우는 그 통치자들도 다 하나님이 세운 줄 믿습니다."라고 하고 이와 같은 자리에 올라선 사람도 "이 나라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신의 가호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렇게 끝내어야 할텐데 "이 백성아 너는 나 때문에 잘 산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거짓말입니다.
하나님 아니고 그 누구 인간이 나라를 잘 살게 합니까?
여러분 살펴보십시오. 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빼앗았던 그런 나라요 그의 주의 그런 사상 그런 사람들 다 무너져갑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러한 곳이 많고 아직도 이런 위정자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는 희망이 있다 그겁니다.
희망이 있다라고 하니까 그것이 좋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고쳐져야 하기 때문에 고칠 희망이 있다 그겁니다.
희망할 내용이 남아있으니 기도할 뿐만 아니라 여러분께서 행동으로 고쳐지도록 간절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늘 기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자신은 그러면 어떠합니까?
물어봅시다. 여러분의 자녀, 진정 여러분의 자녀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맡아 기르고 있는 청지기입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의 소유입니까? 하나님의 소유입니까? 하나님의 소유인줄을 인정하시면 아멘 합시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서 여러분의 자녀를 여러분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아끼며 사랑하며 내 몸같이 사랑하며 키우고 있지만 누구를 위하여 키웁니까?
여러분을 위하여 키웁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키웁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키우는 것이 맞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다 키워서 하나님의 주신 뜻을 따라서 이 세상을 바꾸어 갈 수 있는 주의 일을 하는 쪽의 사람이 되든지 세상을 이끌어갈 지도자가 되든지 이렇게 키워서 성인을 만들고 나면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 선물에 대하여 성장하는 과정에 제 임무를 다했사오니 이 자식이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내어보내야 할텐데 자식에게 사랑을 쏟는 것을 보면 마치 자기 소유같이 여기고 있다 그겁니다.
그리고 나이든 다음에는 자기 자식에게 얼마나 많은 기대를 했던지 "내가 어찌 키웠는데" 이 소리가 심방가보면 빠지지 않아요.
다 내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내 자녀에 대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내 재산이 다 내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셨다 라고 십일조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 몸이 내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몸이 내 것이라고 내가 갈 수 싶을 만큼 내 몸을 살리고 내가 안 아프고 건강할 만큼 건강하게 만들어집니까?
아니요. 아프고 안 아프고 낫게 하는 것도 하나님 장 중에 있는 것이고 내가 죽고 사는 것도 하나님의 수중에 있습니다. 이건 변경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나 이 무지몽매 한 인생이 자기 몸과 자기 호흡도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다 자기 것인 줄 압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하여 건강관리를 열심히 합니다.
자녀들을 위하여 건강 관리를 열심히 합니다. 돈을 모아도 자기를 위하여 모으고 자식을 위하여 돈을 모웁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돈도 여러분의 건강도 여러분의 호흡도 여러분의 수명도 다 하나님의 것인데 예수님 당시에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의 현실처럼 오늘날도 거의 대부분이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면 가족 중에 하나님이 누가 먼저 데리고 가든지 늦게 데리고 가든지 초연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셨다가 하나님나라에 젊은 딸이 필요했구나 젊은 아들이 필요했구나 또 하나님이 내 아이를 치셨구나 하나님이 내 아이에게 복을 주셨구나.
아이가 크게 복된 일을 해도 하나님 때문에 기뻐해야 하고 크게 어려운 일을 당해도 "아 하나님께서 처결하시는구나"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사무적으로 대해야될 청지기에 불과하면서 모든 영광을 우리 자신이 가지지 아니하냐?
영광 돌려드리나이다. 돌려드리나이다 할 때 무엇 돌려줄 것인데요? 하면 몰라요 그냥 외우고 있어요.
아니요. 진실로 뺏어 온 영광을, 도둑질한 그 영광을 더 오래 참으시기 전에 돌려드리시기 바랍니다.
내 자식을 돌려드리고 내 재산을 돌려드리고 내 몸을 돌려드리고 내 호흡을 돌려드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으매 이 모든 것이 주의 것이니이다 고백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과연 이 같은 장엄한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있어야 하는데 육신은 추수를 한, 그래서 저장한 곡식을 먹으면 되겠지만 영혼이 죽고서야 육신이 어찌 삽니까?
그리고 이 주께서 가르쳐 주신 내용을 살펴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또 그 앞으로 가보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백합화도 주께서 기르시고 공중에 나는 새들도 깃들 곳이 없어도 주께서 먹이시는데 그것을 걱정하지 말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고쳐야 될 것이 다 무엇입니까? 육신적인 겁니까? 영적으로 고치라 합니다.
그래서 이 진정한 양식은 무엇이냐? 일용할 양식이라는 것은 우리 세 때 먹는 쌀보리 그것이 아니라 이 기도에서 가르쳐준 일용할 양식이 무엇입니까?
영의 영식을 먹으라는 겁니다.
일용할 영의 양식을 주시옵시고, 영의 양식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63장 하반 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했습니다.
주의 말씀이 영의 양식이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성경을 상고하거나 설교를 듣기만 하면 되는가?
어느 날 야곱의 우물가에 제자들이 예수님 잡수실 음식을 준비해 가지고 마을에 갔다 왔습니다.
그 사이에 예수님은 물 길러 온 여인과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에게 준비한 음식을 갖다 드리니까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구원하고서 그리고 수가성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말씀을 전하고 나서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뛰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고서 제자들에게 특색 있는 예수님 잡수시는 음식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양식을 소개하고 있었어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예수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먹는 양식이 흘러 들어와야 우리에게 영양이 공급되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거듭났으니 거듭난 영혼은 예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부모가 먹는 양식이 그대로 자식에게 가지 않습니다,
부모가 갖고 있는 저항력이 그대로 자식에게 가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의 양식이 무엇이냐? 제자들이 갖고 온 그런 양식을 논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양식이 있었는데 오늘 그 양식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요한복음 4장 31절 이하를 보겠습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은 마을에 가서 음식을 준비해오고 이 여인은 유대인과 상종도 못할 예수님이 상종도 할 수 없는 그런 여자였지만 주께서 사랑을 베푸사 구원을 받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 사람을 데리고 간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제자들은 통 이해를 못했고 주님께서도 "너희는 이 양식을 알지도 못하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갖다 드렸는가?
3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이 뜻은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상고하고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몇백 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뜻을, 따라합시다.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시간 많이 설교를 듣습니다. 언제나 성경을 상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2장 26절 말씀같이 행함이 없는 말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그랬어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이 없는 말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오늘 우리는 이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절실함을 알고 예수님처럼 양식을 먹어야 할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듣기만 할 것이 아니라 들은 말씀을 하나 하나 행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 행할 때에 그 말씀에 영양과 생명이 여러분에게서 솟구칠 줄 믿습니다.
또 그 들은 말씀대로 이루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루어 나갈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고 이 세상은 변화될 줄로 믿습니다.
아직도 희망할 것이 많은 이 세상을 천국처럼 희망할 것이 없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하는 데에 저와 여러분이 동참하여 사역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내어드린 주기도문을 뜻을 생각하면서 불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축도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임하여 교통하심이 진실로 주의나라 주의권세 주의 영광 하늘에 있는 그대로 이 땅에 임하여 이루어지이다 기도하며 이 기도한대로 예수님 양식 잡수신 것처럼 행하고 온전히 이루어드리는 현장에서 뛰려 결심한 모든 성도께 이제로부터 그 이룰 때까지 함께 있을 지어다" 아멘
 
 
 
 
 
 
 
 
 김성광  
 2002년 08월 04일  
 주기도문  
 마태복음6:9-13 
 
 
2002. 8. 4. 설교방송 (설교본문)

주기도문
마태복음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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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장 9~13절)

설교개요

A. 주기도문에 대하여
1. 주기도문
2. 본문 배경 설명
B.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1.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이루어지이다
-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마 6:9~10)
2.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양식을 구하는 기도(마 6:11)
3.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회개기도(마 6:12)
4.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
- 시험에 들지 않기를 구하는 기도(마 6:13)
C. 주기도문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기도하여서, 응답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자

 

A. 주기도문에 대하여

1. 주기도문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는 세 가지 표준이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주신 구약의 십계명과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 사도들의 교리 기준인 사도신경이 그것입니다. 특히 오늘은 그 중에서 주기도문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독일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 1483~1546)는 “주기도문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기도 중의 기도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프랑스의 칼뱅(Jean Calvin ; 1509~1564)은 “주기도문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총괄되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주기도문 속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모든 기도가 요약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의 뜻만 잘 알고 깨닫고 주기도문대로만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축복하시고 함께하심을 믿습니다.

2. 본문 배경 설명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의 한 산에서 설교하신 ‘산상수훈’ 말씀 중에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며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모범으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올바로 기도할 수 있는지 등 기도의 올바른 자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는 바리새인들처럼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고, 이방인들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 준 기도대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도해도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또 기도의 의무도 깨닫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기도문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오늘 참석한 성도 여러분, 기도의 모범인 주기도문의 그 말씀, 참된 의미를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배우고, 또 이 말씀을 깨달아서 여러분도 주기도문 같이 기도함을 통해서 응답받고 기적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넘쳐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셋째,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하셨습니다. 넷째,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B.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1.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이루어지이다
-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기도는 누구에게 하는 것입니까?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산이나, 골짜기, 바다, 태양과 달을 보고 ‘비나이다, 비나이다’를 외칩니다. 자연을 향해서 기도하는 것, 이것은 헛된 것이요, 우상숭배입니다. 우리의 기도대상은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마치 자녀가 부모에게 말하는 것처럼,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처럼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 나의 사정을 하나님께 고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이름을 부른 후에는 그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내 자신보다도, 내 이름보다도,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를 통해서, 주의 복음을 통해서 이 땅에 전파되게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14절 말씀에 사도요한이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를 해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내 뜻대로 아무거나, 무엇이든지 기도한다고 해서 모두 응답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늘의 것을 목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땅의 것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Soren Aabye Kierkegaard ; 1813~1855)는 “기도란 것은 하나님이 내게 나오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은총과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고 한 걸음, 두 걸음 몸과 마음과 물질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교만과 불신앙으로 잘못된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페니(James Cash Penney ; 1875~1971)라고 미국 최초의 대규모 백화점 체인을 설립해서 백화점 왕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성공하고 축복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에 그는 1천 6백 6십 개의 분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성공비결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이 성공비결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백화점을 통해서 많은 물질의 축복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시고, 백화점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하시고, 또 속임수를 쓰지 않고 양심적으로 사업을 하게 해달라고 늘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게 행하려는 자세, 또 주신 축복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자세가 바로 그에게 성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의 사업의 신조는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회사의 직원들에게도 모두 그 말씀을 교육시켰습니다.
여러분, 사업이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오랫동안 번창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사업의 신조가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의 신조가 되고, 인생의 신조가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나라는 부강해 집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회사는 번창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가정은 복되고 형통한 가정이 됩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고 성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가 떠나면 그 사람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 사람의 명예도 오래가지 못하고, 재산도 오래가지 못하고, 그의 지위도 오래가지 못하고 멸망과 파멸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양식을 구하는 기도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11)

요즘 사람들은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 우리에게 필요한 것, 먹고 마시는 것까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달라고 기도하면서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고, 주신 양식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비를 주시고, 농사가 잘 되고 형통하여지도록 허락하셔야 생기는 것이지, 비가 오지 않는다든지 또 병이 든다든지, 사고, 위험, 재난 같은 것을 당하게 된다면 결코 양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직장을 위해서 기도하고,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우리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28장 20절 말씀에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던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께 서원을 합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라고 기도드렸습니다.
20년 만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축복하시고 축복하셔서 자손을 번창케 하시고, 재물을 많이 주셔서 거부가 되어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오게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어려움 당할 때, 고난을 당할 때, 또 들판이나 광야에서 고난과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 앞에 서원하고 기도해서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잠언 30장 7~9절 말씀에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너무 가난하게도, 너무 부하게도 하지 마시고 오직 필요한 만큼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루하루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한국 사람들은 많이 먹어서 병이 들지, 굶거나 영양실조로 죽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볼 때, 굶주림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World Food Summit(세계식량정상회담)’이 발표한 바에 의하면 세계 최대의 적은 바로 굶주림이라고 했습니다. 특히 아프리카 같은 나라는 수천만 명이 굶주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북한만 하더라도 한해에 6백만 명이 굶주려 죽는다고 합니다.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의 동아시아태평양소위원회가 주최한 북한 인권 청문회에서 “북한에 닥칠 식량 위기로 인해서 국민 6백 4십만 명이 굶주려 죽을 것이다.”라고 밝혔습니다. 그 외의 공산주의 국가들, 후진 국가들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물질 때문에, 또 잘못된 생활 때문에 죄를 짓고 타락하고 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최근 신문에 ‘사람 잡는 카드 빚’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 적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전북 익산에서 35세 회사원 권씨가 아내와 딸을 목 졸라 죽이고 자신도 동맥을 끊어서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카드 빚 6천만 원 때문에 가족을 모두 살해하고 자살을 하려 한 것입니다.
청주에서는 이십대 청년이 카드 빚 2천만 원을 갚기 위해서 강도로 나섰습니다. 그리고 병원 원장인 35세 박씨를 흉기로 찌르는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또 경상남도 거제에서는 32세의 전씨가 카드 빚 4백만 원을 갚기 위해서 한 달에 5차례나 강도짓을 하다가 적발되었습니다.
오늘날 물질 때문에 죄를 짓고, 자살을 하고, 타락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탐심, 욕심, 교만을 떠나게 하시고 하루하루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을 살게 하시고, 행복하게 살게 하시고, 승리하게 만들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이 6·25사변으로 인해 폐허가 된 다음 선교사들이 교회를 세우고, 교회마다 하나님 앞에 열심히 부르짖고 기도했습니다. 새벽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 등 기도를 했기 때문에 한국경제가 급성장을 하여 88올림픽까지 치렀습니다.
사람들이 물질이 풍성해지니까 축복을 받은 상태에서도 하나님 앞에 더 이상 기도하지 않고 여행만 다니고 과소비하고 교만해지니까 IMF가 왔습니다. IMF가 오니까 정신을 차리고 교회 나와서 회개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기도소리가 들렸습니다. 기도소리가 많으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기도소리가 적으면 점점 가난하고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어려운 형편에 있습니까? 기도를 멈춰서 그렇습니다. 기도소리를 다시 하나님께 올리고, 기도의 쉬는 죄를 범치 말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여 주셔서 죄 짓지 않게 하시고, 굶주리지 않게 하시고, 하루하루 승리하게 만들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명동에서 의상실을 하고 있는 김숙성 성도의 간증입니다. 처음에 그가 명동에 의상실을 차렸을 때는 장사가 잘 되었습니다. 손님도 많고 바쁘다보니 교회도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점점 가게의 수입이 줄고, 종업원의 월급도 밀리고, 세금과 가게세도 내지 못하고 문을 닫아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10년 동안 다녔지만 한번도 가게를 통해서 축복을 달라고 기도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노력하고 잘났기 때문에 복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게가 어려워지고 고통을 당하자 그는 비로소 구역예배에 나가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구역예배가 끝나고 주기도문을 외우다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대목에서 “왜 너는 복을 구하지 않느냐”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의 잘못된 신앙을 깨닫고 기도원에 가서 3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며 하나님께 회개하고 도우심을 구하였습니다.
그래서 가게를 열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심을 구하고 믿으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그 후부터는 불황이나 불경기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 사업장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찬송하고 또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만해서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장이 하루하루 승리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회개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 실수한 사람, 허물이 있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해 주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심판의 종교가 아니라 회개하는 사람을 용서해주는 종교입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나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 우리가 잘못했을 때에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크고 작은 모든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바르게 잘 산다고 하여도 실수할 때가 있고, 허물이 있고, 죄가 있습니다. 여러분, 눈을 감고 길을 가면 자신은 똑바로 가는 것 같으나 삐뚤게 가게 됩니다. 영의 눈이 감긴 사람은 수많은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나 죄를 짓느냐 안 짓느냐 보다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회개하고 기도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역대하 7장 14절 말씀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고 하셨습니다. 솔로몬 왕이 성전을 완공한 후에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어떠한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죄에서 용서하시고 그 땅을 통해서 축복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기도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땅을 고쳐주시고 그 땅을 통해서 축복하여 주십니다.(대하 7:14)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사 55:7),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 주십니다.(행 2:38) 사고와 위험에서 보호하시고, 천국까지 인도해 주십니다.(행 11:18)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멸망을 당합니다.(민 32:15) 심판을 받습니다.(시 7:12~16) 형통하지 못합니다.(잠 28:13)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게 되고(겔 3:19),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마 18:3) 흥하는 것 같으나 결국 망하는 것입니다.(눅 13:3)
영국의 성직자 테일러(Jeremy Taylor ; 1613~1667)는 “회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위대하고 귀중한 축복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회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는 지름길이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것이요, 회개를 통해서 우리의 잘못된 것을 바로 잡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보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성형수술 붐이 일어 다른 병원에 비해 성형외과는 불황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잘못된 얼굴은 고칠 수 있다지만, 잘못된 마음은 어디에 가서 고칩니까? 못된 성격, 교만한 마음, 강퍅한 마음은 어디에 가서 고칩니까?
여러분,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나님, 내 마음을 온전하게 하시고, 겸손하게 하시고, 충성되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최근에 언론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은 무엇입니까? ○○총리 임명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국회에서 임명동의안을 표결에 부쳤으나 결국 부결되었습니다. 그에게는 부동산 투기, 학력 위조, 영주권 취득, 아들의 국적, 주민등록증 보유 문제, 이중 급여, 아파트 불법 개조 등의 많은 문제점이 드러났습니다.
그렇지만 부결된 이유는 단지 그의 허물과 문제점만이 아니었습니다. 한 의원은 “거짓말과 책임전가로 일관하여 신뢰성과 책임감이 없어 보인다.”고 했습니다. 죄와 허물이 있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그 일에 대해 겸손함과 낮아짐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죄와 허물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의 죄와 허물에 대해 겸손한 태도나 회개하는 마음, 잘못된 것을 인정하는 태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 1379~1471)는 “죄를 범하고 지나친 변명을 하는 것보다 진실한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 낫다.”라고 말했습니다. 변명보다는 차라리 고백을 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사업가가 사업이 바쁘다고 하여 주일날 예배도 못 드리고 기도도 못하고 뛰어다녔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은 못가도 아들은 교회에 보내고자 교회학교를 출석시켰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들이 자전거를 타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였습니다.
사업가는 병원에 입원하여 누워있는 아들에게 달려갔습니다. 아들 옆에 앉아 손을 꼭 잡고 아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들이 “아빠, 너무 아파요.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나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줄 모른단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들은 계속 기도를 해달라고 졸랐고, 그가 계속 모른다고 하자 그 아들이 교회학교에서 배웠다면서 주기도문을 읽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들에게 주기도문을 읽어주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그는 이 부분을 읽다가 그만 눈물을 쏟으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다친 것이 다 자신의 죄 값이라 생각되었습니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주기도문을 다 읽고나자 아들은 잠이 들었습니다. 그는 잠든 아들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께 다시 한번 하나님을 떠났던 죄를 눈물로 간절히 회개하고, 아들을 고쳐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얼마 후, 아들은 의사가 깜짝 놀랄 정도로 빨리 완쾌되었고, 그 아들이 병원에서 퇴원했을 때에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신앙과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교통사고를 당하고 죽을병에 걸리고 사업이 망하고 깜짝 놀랄 만한 위기에 봉착해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닥치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미리 겸손하게 기도하는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4.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
- 시험에 들지 않기를 구하는 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13)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 시험이 있습니까? 악한 마귀, 사탄을 통해서 욕심, 정욕, 탐욕, 교만 등 여러 가지 시험이 닥칠 때에 하나님께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 많은 여러 가지 종류의 악함, 그 악함으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께 돌린다고 고백하는 것이 주기도문의 내용입니다.
주기도문은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 가정문제, 직장문제, 사업문제, 우리의 목숨, 우리의 전 생애까지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41절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잠이 들었습니다. 이 잠자는 제자들을 깨워서 예수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잠만 자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새벽기도를 하고, 밤에는 철야기도를 하고, 금식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 미리미리 기도하는 사람들은 결코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누가 시험에 들고 사고를 당합니까? 누가 악한 마귀의 포로가 됩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생각지 못하는 사고와 위험 속에서 인생의 패배자로, 실패자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을 당하기 전에, 핍박을 당하기 전에, 어려운 환경과 역경에 빠지기 전에, 죽음이 임하기 전에, 근심과 걱정이 닥칠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악한 마귀 사탄은 우리의 약점을 알고 그 약점을 통해서 공격을 합니다. 탐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욕심과 탐심으로 공격을 하고, 명예와 감투에 약한 사람은 명예와 감투를 통해서 공격하고, 쉽게 성내는 사람, 쉽게 삐지는 사람도 그것을 통해서 공격을 합니다.
마귀에게 약점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하나님, 내 약함을 강하게 만들어 주시고, 부족함을 채워주시고, 악한 마귀와 싸워서 승리하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함을 통해서 약점을 보완시켜 나가야 합니다.
최근 신문기사에 미국에 이민을 간지 2년 밖에 안 되는 남매가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식에서 미국의 대통령상과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내용이 실렸습니다. 그 남매의 부모는 윤광식 목사님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의 자녀들이 이민간지 2년 만에 상을 받게 되자 주변에서는 모두 놀라 목사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아이들이 언어실력도 부족하고 정서적으로도 혼란하고 학교에 적응을 못할까봐 많이 걱정을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보통의 수준이었던 남매였는데 미국에 와서 매일 잠들기 전에 자녀들을 붙들고 기도한 결과,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해 주셨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부모의 기도를 통해서 자녀들에게 축복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아들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딸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부모의 기도를 통해서 응답하여 주십니다.

C. 주기도문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기도하여서, 응답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자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본받아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앞으로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주기도문을 통해서 응답받고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간증입니다. 어느 여교사가 있었는데 교사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몸이 아프고 혈압이 높아져서 혈압을 낮추는 약을 계속해서 복용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할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한 동료 교사가 ‘강남금식기도원에 가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남금식기도원을 찾아갔는데, 사람들이 다들 금식하면서 기도를 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3일을 금식해야겠다고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금식은 따라서 하겠는데 기도를 할 줄 모르니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전도사님께 기도하는 법을 알려달라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 전도사님은 찬송가 맨 뒤에 있는 주기도문을 찾아 펼쳐주면서 그것을 따라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주기도문을 열 번, 백 번, 천 번, 만 번, 계속해서 복창을 했습니다.
그런데 금식 3일째 되는 날 갑자기 목구멍에서 뭉클하고 핏덩어리 세 개가 올라왔습니다. 그 순간부터 혈압이 낮아지고 어지럼증도 없어졌습니다. 금식이 끝난 후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으니 질병에서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기도문이 내 병을 고쳤습니다.’ 하고 간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기도할 줄을 모르면 고민하지 마시고 주기도문을 계속해서 복창하십시오. 몇 번이 되었든 기도 중의 기도요, 기도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완전한 주기도문만이라도 열심히 해서 병 고침을 받고, 문제해결을 받고, 응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조봉희  
 2002년 01월 20일  
 당신은 얼마나 거룩한 기도를 드리는가?  
 마태복음6:9-13 
 
 
2002. 1. 20 설교방송 (설교본문)

당신은 얼마나 거룩한 기도를 드리는가?
마태복음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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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알렉산더 대제 휘하여 알렉산더라는 동명의 졸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형편없는 생활로 말미암아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과 명예가 더렵혀지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알렉산더 대왕은 어느 날 예고 없이 사병의 막사를 찾아갔습니다. 겁에 질려 경례하고 있던 졸병 알렉산더에게 "네가 알렉산더인가?" "네, 그렇습니다."
"내가 두 가지를 명령한다. 네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네 삶을 바꾸어라! 그래서 그 이름의 오욕을 씻어라."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지 말든지, 아니면 그리스도인답게 처신해야 합니다.

따라서 기도의 목적 중 하나는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자기중심적인 기도 일변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데도 인격적인 성숙이나 발전이 없다면 일차원적 기도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출발은 마음을 비우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릇에 새것을 담으려면 먼저 비워야 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을 담으려면 깨끗이 비워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기도의 첫 출발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우리가 예수님의 기도를 살펴보면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를 최대한 높여드리는 기도로 시작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2:28)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그 하나님 아버지를 최대한 높여드리려고 "거룩하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요한복음 17:11). "거룩하신 아버지여!"
아버지 하나님을 최대한 경배하는 기도로 시작합니다.
특히 우리 동양인들은 아버지에 대한 경외심에 있어서 참 성경적입니다. 어른들이 물으십니다.
"자네 아버지 함자가 어떻게 되나? 예, OO 자, OO 자입니다."
아버지를 최대한 높여드리는 예의를 갖춘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먼저 하나님 아버지를 경배하는 기도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경배없는 기도는 영혼없는 몸과 같습니다."
미국의 신학자요 설교가인 R.C. Sproul은 "하나님이 존경받지 않는 곳에서는 그분의 형상을 지닌 사람들 역시 존경받지 못하는 고통을 당할 것이다"라고 경고합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거룩을 상실한 현시대는 온통 사악함과 폭력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존경받지 못하는 만큼 죄악으로 사악해지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지 않는 나라들은 모두가 다 가난합니다. 공산주의 국가들의 공통된 현실입니다.
역사학자 A. Toynbee가 경고하듯이, "아무리 위대한 물질문명도 그것을 받쳐줄 정신적 문명이 없으면 안으로부터 붕괴하고 맙니다."
따라서 거룩을 상실한 현대인들은 스스로 화를 자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고 존귀하게 여김을 받는 나라와 민족은 모두 다 복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는 나라는 최고의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미국의 청교도 신앙은 아직도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높으므로 번영의 복을 누리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응답의 최고 비결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Billy Graham 목사님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다른 기도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같은 기도들은 천국에 가면 더 이상 필요없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기도는 천국에서도 계속 필요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 8절을 보면 천국에서의 기도내용은 『거룩하신 하나님만을 계속해서 경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당신은 얼마나 거룩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 같습니까?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는 것도 참 중요하지만, 질적으로 수준있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주기도문의 원리요, 본질입니다.
단순히 주문처럼 외우라고 주신 기도문이 아니라, 기도의 본질과 대 원리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것이 기도의 놀라운 효과입니다. 우리가 본질적인 기도를 할수록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1. 하나님께만 영광돌리는 삶이 되도록 기도하자

기도의 첫 번째 순서는 우리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시작하면 언제나 하나님을 경배하는 내용으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기도문의 전제가 "아버지와 자녀 관계"라면, 그 기도의 첫 번째 내용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부터 우리가 기도를 시작할 때, 맨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은 기도의 순서를 영어로 이렇게 정의하기도 합니다. ACTS.
Adoration(경배), Confession(고백), Thanksgiving(감사), 그리고 Supplication(간구).

여기 거룩이라는 말이 hagios 인데, 그 속에는 doxa(영광)와 eulogia(찬양)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의 삶의 목적이 언제나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침에 기도를 시작하기만 하면, 오늘은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면 좋을까요 하는 기도를 드리자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선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God's glory includes all good).
이것이 마태복음 6장의 총 주제(33절)입니다. 기도응답의 비결을 총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위대한 성가를 많이 작곡했던 Franz Joseph Haydn에게 하루는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그 놀라운 음악을 작곡하는 영감을 어디에서 얻습니까?
하이든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이 제게 지혜를 주시기 때문에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작곡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며 또한 제가 작곡한 음악을 주님 앞에 드립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기도한 것입니다."

그의 곡 가운데 '천지창조'라는 유명한 성가가 있는데, 이 곡은 성경의 창세기와 존 밀턴의 '실락원(失樂園)'에 근거하여 지은 것입니다. 이 곡이 비엔나에서 공연되던 날 하이든은 몸이 몹시 아파 뒤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연주가 끝났을 때 수많은 청중들이 지휘자에게 박수를 보내자 지휘자는 박수를 중단시키며 뒷좌석 발코니에 앉아있는 하이든을 가리켰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 분입니다. 저 분이 이 놀랍고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 하이든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하이든은 청중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를 중단시키고는 두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분이 모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오직 그 분께만 영광을 돌리십시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당신은 얼마나 거룩한 기도를 드리고 계신가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돌리는 삶을 위해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고전 10:31).


2. 하나님께 최상의 것을 드리는 헌신의 삶이 되도록 기도하자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마음 속에 다짐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헌신을 향한 결단입니다.
여기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이라는 뜻입니다.
Pascal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대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먼저 하나님께 바치고 드리는 헌신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첫 새끼, 첫 열매, 첫 수확, 첫 아들, 첫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요구합니다.
이것이 거룩의 개념입니다.

우리나라의 문화권에서는 거룩의 개념이 잘 이해가 됩니다.
우리 가정에서는 거의가 아버지의 수저와 밥그릇이 따로 구별되어 있습니다.
똑같은 한 솥에서 나오는 밥이라도 어른의 밥은 따로 먼저 떠서 구별해 놓습니다.
신앙적인 차원에서도 하나님 아버지를 이렇게 섬기며 헌신하는 기도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주일 하루를 거룩하게 드리고, 십일조를 따로 떼어 드리고, 하루의 첫 시간, 수입의 첫 지출을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삶을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 응답의 비결은 무엇을 받으려는데 집착하기보다는, 내 인생을 어떻게 바치고 드리는 헌신을 할 것인가를 놓고 간구하는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기도의 첫 출발을 헌신에 초점을 맞추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무엇을 요청하기 전에, 먼저 헌신을 결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나가 기도응답을 받은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병을 고쳐주시면 힘을 다해 헌신하겠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돈을 주시면 그 돈으로 선교하고 의미있게 쓰겠다고 헌신하는 기도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헌신이 곧 기도응답의 비결이라고 결론 내려주십니다.

어떤 전도자가 한 대학생에게 전도를 하자, 그 젊은이는 '내가 나이를 먹어 늙은 다음에 믿겠어요. 지금은 엔조이 할 일들이 너무나 많아요. 지금 신앙생활 하기는 젊임이 너무나 아깝잖아요?'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 건강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소식을 들은 그 전도사님은 학생의 병실에 꽃다발을 보냈는데, 꽃잎이 다 떨어져 가는 시들은 꽃다발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학생은 화가 났습니다. 예수 믿는 전도사가 어째 이렇게 쩨쩨할 수 있을까?
그때 전도사님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다 시들어버린 인생을 받기 원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젊음을 헌신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 귀한 것 드려 젊을 때 힘 다하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당신은 얼마나 거룩한 기도를 드리고 계신가요?
오직 하나님께 최선의 삶으로 헌신하기 위해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로마서 12:1).


3. 하나님 앞에서 성결한 삶을 살도록 기도하자

저는 이번 주기도문 강해 설교를 통하여 기도 업그레이드를 추구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점을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시작하면서 먼저 자신의 성결을 위해 기도하는 습관을 형성하기 바랍니다.
이미 서론에서 말씀드린 대로, 기도는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생각을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내면 세계를 깨끗이 씻는 작업입니다.

보들레르는 그의 책 「나심」(裸心)에서 "기도는 영적인 것을 향상시키고, 동물적인 것을 하강 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정의해줍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나 자신의 육체적 본성과 죄성을 항복시키며,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새롭게 하시는 거룩한 성품으로 승화시켜나가는 작업입니다.
우리가 엎드려 기도할수록 나 자신의 근본적인 죄성을 깊이 깨달아집니다.
그래서 더욱 절규하는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다윗의 기도의 핵심 중 하나는 성결을 위한 기도입니다(시편 51:7,10).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해주십시오. 내가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나를 씻어 주십시오. 내가 눈보다 더 희게 될 것입니다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시고 내 속을 견고한 심령으로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성결케 되도록 진중하게 대제사장적 기도를 드리십니다(요한복음 17:17)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당신은 얼마나 거룩한 기도를 드리고 계신가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성결해지는 은총을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마태복음 5:8).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날마다 성결케 되기를 위해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너 성결키 위해 네 머리 숙여 저 은밀히 계신 네 주께 빌라
주 사귀어 살면 주 닮으리니 널 보는 이마다 주 생각하리" (찬송가 212)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할 때 맨 먼저 간구할 내용을 『거룩』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존경받지 않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들 역시 존경받지 못하는 고통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면, 우리는 그분만을 경배하며 높여드리는 기도부터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의 첫 제목을 개인적인 소원 성취보다는, 헌신하기 위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마음의 성결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 초청) (찬 212장)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은 얼마나 거룩한 기도를 드리고 계신가요?
기도를 시작하는 첫 순간에 하나님을 최대한 높여드리는 경배의 기도, 헌신을 결단하는 기도, 성결을 사모하는 깨끗한 영혼의 기도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이동원  
 2001년 08월 05일  
 기도의 의미  
 마태복음6:9-13 
 
 
2001. 8. 5 설교방송 (설교본문)

기도의 의미
마태복음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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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그 인간도 동물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인간 존재 안에 우리가 동물성 혹은 동물적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의에서 인간도 동물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기독교적 전망 또한 성경적 가치관에서 볼 때 우리 사람은 분명히 동물과 차별화 되는 존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렇다면 인간은 동물과 차별화 되는 존재일까요?
저는 두 가지의 특별히 영역을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인간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문화와 종교야말로 인간을 다른 동물과 차별화 시키는 독특성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능 사고하는 기능이 우리에게 문화를 발전시켜 온 것이지요.
그래서 예술도 하고 과학도 발전시키고 이 생각하는 기능이 우리에게 문화생활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가 종교를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동물에게는 문화생활이 있다든지 또 동물에게 종교생활이 있다는 흔적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 신학자는 인간다움의 증거가 무엇이냐? 그것은 우리가 생각할 줄 알고 기도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인간다움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생각하지않고 인생을 살고 있다면 이 사람은 사람답지 않은 사람, 인간이 아니라고 우리는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 똑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기도하지 않고 산다면 사람이 아니다, 인간다운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한번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질문을 해 보십시요. “기도하고 사십니까?” 이렇게 한번 질문 하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옆에 사람에게. “기도하고 사십니까?” 아이 질문을 좀 해봐요! 녜, 그리고 대답을 들어보세요 대답을, 기도하고 사십니까? 한번 대답을 들어보세요.
네, 대답이 시원치 않다든지 괜히 침묵 지키고 있는 사람, 이건 자신이 없다는 얘기에요 그렇죠? 그러니까 그런 사람을 다시 쳐다보시면서 인간이 아니시로군요? 하하하~~ 이렇게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시작, 하하하~~

어느날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산 마루턱에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일어서시는 주님에게서 어떤 영광스러움 거룩함 신비로움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기도하고 일어난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기도하고 싶다라는 기도의 갈증이 기도의 목마름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1장에 보시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달려가요. 달려가서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선생님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때 정말 기도를 배우고 싶니? 그러면서 주 기도를 가르쳐 주신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기도가 아니에요. 우리의 기도에요. 어떤 사람은 정확하게 말하면 제자들의 기도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것은 예수님에게 적용이 안되거든요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라! 그러면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것입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면밀하게 분석하고자 할만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은 이 주기도문을 분석적으로 접근하기보다도 개괄적으로 포괄적으로 접근하면서 이 주 기도문 속에 나타난 기도의 의미,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것을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기도의 의미, 무엇일까요?

이 주기도문에 의하면 첫째로 기도란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서 하십시다.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이다”
자, 이 주 기도문이 어떤 말로 시작 됩니까? 주 기도문 시작이 어떻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다시 말하면 아버지를 부르는 것으로, 하나님이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는 것으로 이 기도가 시작됩니다.
제가 미국 있을 때 한번 어떤 미국교회에 갔다가 청년 한 사람이 모노드라마를 혼자서 드라마를 하는 것을 보았어요. 그런데 제목이 주기도문이에요.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교회에서 누군가 언제 한번 시도해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합니다만
자, 혼자서 모노 드라마를 하는데, 주기도문을 하는데 이렇게 나와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여” 그러니까 마이크로 녹음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왜 불러?” 그러니까
“아이 나 지금 주기도문 하고있어요 나를 방해하지 마세요”
“어, 너 나 부르지 않았니?”
“그러면 다시 하죠.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여 이름이…”
“너 나 또 불렀니?”
“아이, 나 주 기도문 하는데 왜 자꾸 방해 하십니까?
“아, 너 그러면 정말 나를 부르는 것이 아니로구나?” 이러면서 시작이 돼요.
우리가 이 주기도문을 너무나 외우는 것, 암송하는 어떤 종교 의식적인 무엇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암송하는 일에 급급하지,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고 계십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여. 그래서 기도라는 것은 단순히 어떤 종교 의식적인 주문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또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필요한 무엇을 구하여 얻기만 하는 행위이기 전에 앞서서 본질적으로 기도라는 것은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지하게 불렀고 그분이 살아계시다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그 분은 나에게 다가오시고 나를 만나주시고 나는 그 분과의 만남 속에 그분과의 대화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본질적 경험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우리가, 저와 여러분이 어느날 기도생활 다운 기도생활을 갖지 못할까요? 뭐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거에요. 그런데 아마도 중요한 원인은 우리들의 조급함 때문일지 모릅니다. 그것은 어쩌면 현대 문화적인 경향, 우리문화가 자꾸만 우리를 급하게 만들잖아요? 그러니까 기도하는 시간을 시간낭비라고 생각합니다.
또 특별히 현대문화의 특성가운데 하나가 이런 컴퓨터의 클릭시대, 우리는 한번 딱 클릭을 하면 내가 원했던 정보가 튀어나와야 합니다. 이런 시대적인 경향, 거기다가 이러한 시대적 정신이 끼쳐준 기도에 대한 오해, 우리는 마치 컴퓨터의 클릭처럼 기도란 것도 내가 딱 기도하면 즉각적으로 응답이 와야 하는데 기도해 보아도 응답이 없단 말이죠. 그러니까 정말 하나님 살아계실까? 기도가 정말 필요한 것일까? 이런 본질적인 기도에 대한 회의를 갖습니다. 이것은 바로 이런 급해지는, 또 컴퓨터의 클릭시대의 영향도 적지않게 기도생활에 영향을 끼친다고 저는 생각을해요.
요즘 컴퓨터식 주기도문이 나와있는 것 여러분 아십니까? 컴퓨터식 주 기도문. 제가 한번 소개 해 드리지요.
하드디스크에 계신 우리 프로그램이시여.
패스워드를 거룩하게 하옵시고 운영체계에 임하옵시며
명령이 키보드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모니터에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데이터를 주시옵고
우리가 프로그램의 오류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오타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바이러스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다만 불시의 정전에서 구하옵소서. 엔트. 하하하~~

네, 여러분 기도가 컴퓨터와 차별화 되는 특성이 무어라고 생각하십니까?
기도의 본질은 이미 말씀 드린 것처럼 정보의 획득이 아니라 이것은 본질적으로 인격의 대화입니다. 그리고 이 대화의 깊이는 기다림의 그 과정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충분한 시간을 통해서 나는 기도하는 대상인 인격자이신 하나님과의 친밀함의 관계를 개발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가 있습니다.

저 뱅크웨어에 리젼트라는 유명한 신학교가 있는데 신학교의 학장이신 제임스 휴스턴 박사는 기도를 정의를 하면서 이런 독특한 정의를 했어요. 기도란 뭐냐? 기도는 하나님과의 우정이다. “friendship with God” 하나님과의 우정이다.
저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주 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을 때 이 첫마디가 딱 끝나고 나서 아마도 제자들은 굉장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자, 다시 한번 주 기도문이 어떻게 시작이 돼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시대에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가장 많이 보편적으로 사용한 칭호가 있다면 “여호와, 야훼” 라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너무 거룩한 이름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함부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대신 아도나이, 뭐 주님, 이러한 표현을 많이 썼어요.
어쨌든 구약의 하나님은 굉장히 멀리 계신 하나님,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 거룩하신 하나님, 이런 이미지가 있었는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여!”
우리가 예수님이 실제로 그의 공생애 가운데 복음서에 보시면 예수님이 하나님을 향한 호칭 속에서 그는 마지막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꼭 한번 엘리 엘리, 나의 하나님 하나님! 그 표현을 써셨을 뿐 예수님은 주로 사용하신 표현이 뭐냐하면 “아버지” 이렇게 써셨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어떤 나라 언어를 써셨을까? 학자들은 예수님이 아라믹 랭기지, 아람어를 써셨을 것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아람어에 의하면 이 아버지라는 거창한 존칭이 없습니다. 대신 아주 간단한 애칭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우리말의 아빠와 같에요. 그래서 아람어로도 “아바” 입니다. 아바, 아바. 그래서 아빠란 뜻이에요. 그러면 이렇게 가르쳐 주신 거예요.
야, 너희들 앞으로는 기도할 때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시여!”
아니 아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단순하게 아버지를 부르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요. 나는 아빠 같은 분이야 하나님은 말이야, 그러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아빠, 그러면서 그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라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늘이란 말이 복수입니다. 하늘들, 이것은 하늘들을 만드시고 만유를 만드시고 만유를 통치하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 아빠다 우리 아빠다.
우리 부모들은 특별히 아버지들은 어린아이들이 아빠하고 부를 때 어떤 행복을 느끼잖아요 아빠 된 행복을 느낍니다.
그런데 한 신학자가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도 그의 자녀들이 아빠하고 부르며 나올 때 그는 행복해 하시며 기뻐하시며 우리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주시는 분이시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오늘 그 하나님에 관해서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왜 우리가 기도 속에 들어가지 못합니까?

현대 실존주의 작가 가운데 커다란 영향을 끼친 프란츠 카프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분은 현대인을 그의 작중 인물들을 통해서 묘사하면서 자주 이 단어를 썼어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마치 아버지를 잃어버린 고아와 같다. 아버지를 잃어버린 고아와 같다.
이것은 프란츠 카프카 자신의 경험을 사실은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분의 아버지가 있었어요. 그런데 한 저널에서 일기 가운데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자기 아버지가 있었지만 그는 단 한번도 아버지와 의미 있고 친밀한 대화를 나누어본 경험이 없다. 자기는 고아처럼 느끼고 있었다.
오늘 현대인들의 문제가 거기에 있습니다. 자기가 믿고 부를 수 있는 아버지를 갖지 못한 현대인들, 요즘 현대 와서 이 동성연애 자들이 더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 증가되는 원인을 여러가지 이유로 진단하고 설명하지만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여러분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 소위 그 게이, 호모, 동성연애자가 되는 것 아세요? 아버지를 잃어버린 고아들, 고아들.
프란츠 카프카의 그 작품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가 성(城) “The castle” 이라는 작품이죠. 이 작품에 보면 케이라는 주인공이 나오는데 척량사에요. 그래서 자기가 어떤 계약문서를 가지고 성을 찾아갑니다. 어떤 마을을 통과하면서 성을 찾아가서 성에 들어 갈려고 하는데 이상하게 성에 들어가지 못해요. 작품의 마지막에 그는 성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으로 마을 주변에서 배회하는 것으로 이 작품은 막을 내립니다.
기독교 문화 평론가들은 그것이 카프카가 어떤 신앙을 그리워하고 하나님을 그리워했지마는 그러나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땅의 아버지도 아버지다운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카프카의 소외된 외로움이 이 작품을 탄생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성은 신의 존재, 영혼의 고향이 되시는 하나님의 품과 같은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끝내 그 성에 들어가지 못한단 말이지요.
우리는 아~ 뭐 기도해보겠다는 마음을 감히 갖지마는 그 하나님 속에 들어가지 못해요. 하나님 임재 속에 들어가지 못해요. 하나님이 어려워 보이고 멀리 있는 분으로 보이고.
그런데 예수님은 이 주기도문을 가르치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 아빠!
단순한 마음을 가진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있는 어린 아이들이 아빠하고 부르면 왜? 하고 다가오시는 하나님 처럼,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고백한다면 내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 부를 때 마다 내게 다가오시는 하나님, 기도란 그 하나님과 만남이요 그 하나님과의 교제요 그 하나님과의 대화요 그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감이 바로 기도의 본질이라는 사실입니다.
기도란 무엇일까요? 기도란 것은 하나님의 그 임재를 구하는 사건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이 주기도문에 의하면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서 하세요. “기도는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로 하나님의 사역을 이룰 수가 있을까요? 세가지 차원이 있어요.
우리가 기도함으로 할 수 있는 것, 또 우리가 기도함으로 마땅히 해야 할 것, 세가지가 있다는 것 이에요.
첫째는 뭐냐?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를 넓힐 수가 있어야 합니다.
세번째, 하나님의 섭리를 펼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로 할 수가 있는 것, 그리고 기도로 마땅히 해야 할 것이 세가지가 있다.
첫째 기도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주기도문의 어떤 부분이예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또 하나님의 나라를 기도로 확장 시키고 넓힐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떤 부분이에요?
“나라이 임하옵소며”
또 기도로 하나님의 섭리를 펼쳐갈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떤 부분입니까?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런데 이 주기도문의 전반부를 여러분이 면밀하게 관찰해 보면 이 전반부에 특별히 강조된 단어하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 번역에서는 그 단어가 의도적으로 생략되어 있어요. 그것이 “당신” 이라는 단어에요 당신, 당신.
왜 생략되었을까? 저는 이해는 돼요. 왜냐하면 우리 한국어에서는 당신이라는 그 표현이 상당히 비하적인, 사람을 낮추는 뜻을 갖고있기 때문에 당신! 뭐 이러잖아요?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께 써는 것은 불경하다, 우리의 선배들이 그렇게 느꼈을지 몰라요. 그러나 영어나 외국어 권에서는 당신이라는 말이 결코 사람을 낮추는 표현이 아니죠. 그래서 본래는 이렇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다음에 뭐에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 이름이 아니에요. “당신의 이름이” Thy name., Thy name, Your name.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 다음에 그냥 나라이 임하옵시며 가 아니라 당신의 나라가 “Thy kingdom, Your kingdom” 당신의 나라가 임하여 주옵시고, 그 다음에 뜻이, 그냥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Thy will be done 당신의 뜻이 Your will, 당신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당신의 뜻.
그래서 이 주기도문의 전반부는 그 초점이 어디에 있나 하면 나에게 있지 않아요.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필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에 있어요.
기도란 본질적으로 단순히 내 소원을 만족시키고 내 욕심을 채워가는 것이 아니라 기도란 것은 하나님의 관심, 또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필요에 일차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이 기도이여야 한다, 이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것을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
그래서 산상수훈의 다른 부분에서는 주님이 또 우리에게 가르치시기를 너희는 먼저 뭘 구하라고 그랬어요? 그의 나라와 그 다음에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렇게 가르치셨단 말이죠.

여러분 기독교가 다른 종교의 기도와, 다른 종교의 사람들도 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타종교의 기도가 차별화 되는 특성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이 대목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일, 거기에 일차적 관심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만약 그것을 무시하고 그것을 망각하고 우리의 필요, 소원에만 몰두하는 기도를 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기복적 수준의 기도로 타락해 가는 것입니다. 그때 기독교인의 신앙이 기복적 신앙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면 우리의 소원을 기도하는 것이 잘못일까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의 소원, 우리가 구하고 싶은 것, 구해야지요. 기도 해야지요. 마땅히 해야 돼요. 그러나 우리의 소원만 기도하면 안된다는 말이죠. 우리의 소원을 기도해야 되지마는 우리의 기도 속에 관심이 오직 나의 필요 밖에는 없다, 우리의 필요 밖에는 없다, 우리의 소원 밖에는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기독교적 기도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게 바로 기복적인 기도에요.
우리가 내 필요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앞서서 정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일에 관심을 가질 수가 있느냐?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고 그의 통치의 영광이 이땅에 모든 영역 속에서 드러나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일에 내가 정말 관심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느냐? 그래서 기도에 관한 본질적 정의 하나는 기도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역을 실현하는 혹은 하나님의 사역을 성취하는 방편이 된다는 사실이에요.
여러분이 우리교회에 와서 성경공부를 하시다 보면 기도를 배우는데 그때마다 매우 중요하게 강조하는 성경구절 하나가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이야말로 기도의 정의를 가장 아름답고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에스겔36장에 나오는 말인데요. 36장37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에스겔 36장을 펼쳐보시면 1절부터 36절까지 시온의 회복의 약속입니다.
자, 저 바벨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시온의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시온의 땅에 다시 강이 흐를 것이고, 백합화가 피어날 것이고, 사막이 다시 새로운 땅으로 개간 될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내가 반드시 그것을 이루겠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요. 에스겔 36장37절에 보시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그래도 내 백성 이스라엘 백성이 이와 같이 이루어 달라고 나에게 “구하여야” 할지라. 할 수 있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시온의 회복을 약속하시면서 내가 이루겠다, 그러면 이루시면 될 것 아니에요? 하나님 혼자 하시면 될 것 아니에요? 그런데 시온의 회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이 그래도 내 백성이 나에게 이렇게 이루어 달라고 구하여야 한다. 무슨 말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기도가 뭔 줄 알 수가 있어요. 하나님은 시온의 회복을 약속해 놓으시고 성경은 약속의 책이에요. 놀라운 약속들이 있단 말이죠. 하나님은 그 약속을 해 놓으시고 기다리신다는 거에요. 뭘 기다리실까요? 저와 여러분이 기도하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는 순간 하나님의 액션이 시작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그가 약속하신 바를 그가 계획하신 바를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 주신다는 것에에요.
그렇다면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란 단순히 내 생각과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기도란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는 방편입니다. 내가 기도할 때 나는 하나님의 일에 파트너가 되어, 동참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의 기도를 통해서 이땅에 하나님의 뜻을 펼쳐 가십니다. 놀라운 사실이 아닙니까?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땅에서 이루어져 간다. 여기에 Christian prayer, 기독교 기도에 아주 중요한 정곡의 핵심이 있는 것이에요.
기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자, 기도의 의미 무엇일까요? 첫째로 저는 기도란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이라고,
자 기도란 무엇일까요? 둘째로 기도는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는 것이라고.

세 번째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 주기도문에서 배울 수 있는 기도의 의미, 기도는 셋째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다같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자, 주기도문의 전반부는 당신, 즉 하나님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마는 후반부는 다시 우리의 필요로 돌아옵니다. 우리의 필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또 그것에 대해서 도움을 구하는 것이 결코 잘못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물론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의 뜻이 펼쳐져 가고 이루어져 간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사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의 일상적인 필요에도 관심이 있어요. 그것에 대해서 도움을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 어떤 영역에서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할까요? 세가지 영역에서, 세가지 영역.
첫째, 일상적 생존을 위해서 우리의 일상적 생존을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둘째로, 관계적인 평화를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영적전쟁 신령한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자, 어떤 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돼요?
첫째 일상적 생존을 위해서, 그것이 어떤 대목입니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자, 그 다음에 두 번째로 뿐만 아니라 우리는 관계적 평화를 위해서 도움을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대목입니까?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또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영적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또 어떤 대목입니까?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저는 이 세가지 영역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가장 필수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일상적 생존, 우리가 육체적으로 생존하기위해서 하니님의 도움을 구해야죠. 하나님께 양식을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에 대해서 냉소적인 어떤 사람은 이렇게 비판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한다고 양식이 하늘에서 떨어지니? 물론 기도하는 그 순간 하늘에서 양식이 떨어지지 않을지는 몰라요. 우리가 기도란 것은 곧 기도한 그대로 어떤 사건이 내 눈앞에 어떤 제품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기도가 하나님이 약속한 그대로 진지한 하나님 앞에서 약속의 사건이라면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양식을 얻을 수 있는 에너지 주시고 상황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기도는, 성경이 가르치는 성서적 기도는 우리의 기도에서 책임 있는 노력을 그 다음에 요청해요.
그러니까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상식적 기도가 아니지요.
얼마 전에 우리가 수해가 있었는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에 수해를 입었어요. 그래서 지붕으로 대피했습니다. 물이 막 차 올라요. 그런데 이 사람이 크리스챤인데 상당히 엉뚱한 생각을 가진 크리스챤 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지붕에 올라가자 말자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낼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왔사오니 기적을 일으키시사 이 지붕에 서 있는 저를 구출해 주시옵소서”
자, 그 마을이 거의 물에 잠기면서 이제 구명 보트들이 당도합니다. 그래서 여기 저기 사람들이 구명보트를 타고 나갑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에게 구명보트가 네번씩이나 왔는데 거절하면서 나는 괜찮다고, 내가 기도했으니까 하나님이 기적을 주실 것이라고,
자,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이 계속 차오르면서 이 사람은 물 속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좀 억울했겠죠? 그래서 돌아가시자 마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 앞에 이렇게 질문을 했답니다.
“하나님! 제가 기적을 일으켜서 저를 살려주시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어 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 왜 기적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기적을 안주었니? 네 번씩이나 기적을 베풀었는데”
“뭐가요?”
“내가 네 번씩이나 네 기도를 응답하고 너에게 구명보트를 보내지 않았더냐?”
기도라는 것은 기도에 따르는 상식적인 우리의 책임을 면제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다시 말하면 예를 들어서 우리가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우리의 가정과 직장에 나타나게 해 달라고, 그러면 그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가치가 나타날 수 있도록 우리는 책임 있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기도했다면 그 기도에 합당한 노력을 이제 하나님이 주시는 에너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장에서 땀 흘리는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도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이 신실하게 응답하신다! 이것을 믿어야 할 것으로 믿습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가 일상적 생존에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 아주 중요한데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행복의 전부는 아니지요.

또 하나,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다고 주님은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업니까? 관계의 평화에요. 우리가 먹을 것이 있어도 아무리 배불러도 여러분이 인간관계의 상처와 갈등을 경험할 때 얼마나 아프세요 살 맛이 안나잖아요? 인간관계가 왜곡되고 갈등과 미움과 분쟁과 어려움이 생길 때 우리는 얼마나 아픔을 겪어야 합니까? 그래서 주님은 관계의 평화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못지않게 중요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하나님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나님 내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요 그리고 주님이 내 죄를 용서하여 주신 것처럼 저에게서 상처를 입혀준 사람도 내가 용서할 수 있게끔 해달라고, 내가 용서를 받고 또 용서를 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또 사람을 향하여 누릴 수 있는 마음의 당당한 평화, 이것은 행복을 위해서 얼마나 필요한 것입니까? 만약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이 내가 이웃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간단할 것입니다. 충분히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요. 기도해 보세요. 아무리 그 상처가 아파도, 예리해도, 그 사람을 품고 기도해 보세요. 그를 용서할 수 있는 넉넉한 여유를 주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어요. 영적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에요. 우리가 정말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영적 전쟁에서 승리가 필요합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가 죄 짖고 있다면 시험 속에 빠져있다면 우리가 악함 속에 빠져있다면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아, 나는 괜찮은데?” 거짓된 평안이에요. 거짓된 행복이에요. 우리가 죄의 악에서 탈출함이 없이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누가 우리를 악 속에 빠트립니까? 성경은 그것이 악한자의 계략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어떤 번역에는 그냥 악에서 구하옵소서가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구하옵소서” 어떤 사본에는 그렇게 되어있어요. 악한 자에게서, 우리로 악을 경험하게 만들고 악에 빠지게 만드는 악한자의 공격에서 나를 지키고 죄악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이 싸움에 승리의 비밀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기도하지않고 우리는 결코 악한자와의 싸움에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고 산다는 것, 이것은 얼마나 인생에 대해서 위태로운 모험인지요. 우리가 기도 없이 산다는 것, 하나님의 도움을 거절하고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수년 전에 세상을 떠나간 그 스위스의 라브리를 중심으로 해서 공동체 운동을 했던 프랜치 쉐이프 박사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그의 책 가운데서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오늘 우리 시대에 사람들을 죄와 악 속에 물들게 하는 가장 강력한 기독교의, 반 기독교적인 이단 운동이 하나 있다. 나는 그래서 이게 뭐 여호와 증인을 얘기하나? 몰몬을 얘기하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그 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 기독교 신앙을 본질적으로부터 위협하는, 그리고 많은 사람의 진정한 행복과 경건을 빼앗아가는 무서운 이단 사상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세속적인 인본주의다, 소위secular humanism이다. 세속적인 인본주의. 오늘날 문화와 철학, 삶의 모든 영역 속에 이 세속적 인본주의가 침투해 들어오고있다고 그는 경고합니다.
지나간 6월인가요? 티모시 맥베이 라는 사람, 미국의 오클라호마 시티에 그 주 청사를 폭발물로 습격해서 168명인가 그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던 사람이 독극물 주사로 사형을 당하는 뉴스가 전 세계에 보도되었죠. 끝까지 자기는 뉘우치지 않는다고,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
그러면서 그가 죽기 직전에 할 말이 있는가? 라는 말 앞에 영국의 윌리암 어네스티 헨리의 시를 인용하면서 죽어갔다는 사실이 전세계에 보도되었습니다. 그 시의 내용이 이런 것이였습니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 그리고 내 영혼의 선장”
얼른 겉으로 들으면 굉장히 멋있는 소리 같지요? 그런데 이것이 바로 여러분, 세속적 인본주의의 모토라는 것을 아세요? 나는 내 운명의 주인, 그리고 내 영혼의 선장.
이것은 철저하게 반 기독교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에요 하나님이십니다. 내 영혼의 선장도 하나님이십니다. 세속적 인본주의의 사고는 우리의 생각의 틀 안에서 하나님을 추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런 세속적 인본주의 사상의 결과로서 그런 일까지 저지를 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필립 얀시가 “크리스챤 잇 투 데이” 라는 잡지에 기고를 하면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이 티모스 맥배이의 사건, 그의 불행은 단순히 인생을 잘못 살아왔던 한 청년의 비극이 아니라 바로 세속적 인본주의에 고무된, 그 이단사상의 피해자로 우리는 이 사람을 보아야 한다고.
그러면서 얀시는 이런 글을 남깁니다. 당신이 불행해 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신을 추방 하십시요. 신을 거절 하십시요 그리고 기도를 거절 하십시요. 그러나 정말 행복해 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당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복귀 시키십시요.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을 배우십시요. 나의 연약성을 내가 안다면, 내가 죄인이고 하나님 앞에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겸허히 깨닫는다면 나는 그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호흡할 수도 없는 존재 생존이 불가능한 존재, 따라서 그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며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 하나님에 의해서 내가 쓰임을 받아 하나님의 역사를 펼쳐가는 그 보람 속에서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면 기도를 배우십시요. 기도란 바로 나의 도움에 대해서 하나님의 공급을 체험할 뿐만 아니라 내 인생이 하나님께 붙들림을 받아 쓰임을 받는 설레이는 모험, 그것이 바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모험이요 기도의 의미인 것입니다.
중세기에 그 유럽의 어떤 수도원에 수도사들이 기도하고 있었든 프레어 챔버, 기도방이 있었는데 기도 방에 현판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에도 그것이 요즘 많이 소개가 되고 있어요. 그런데 굉장히 소개되면서 변질이 되었어요. 아마 제가 번역한 것이 오리지널에 굉장히 가까운 내용일 것입니다.
본래 그 제목은 이런 제목입니다.

“네 삶이 가난해도 나를 원망치 말라”
네 삶이 가난해도 나를 원망치 말라
너는 나를 주라고 부르면서 나를 주인 삼지 않았고
너는 나를 진리라고 하면서 내게 배우지 않았고
너는 나를 빛이라고 하면서 나를 바라보지 않았고
너는 나를 길이라고 하면서 나를 따라오지 않았고
너는 나를 능력이라 하면서 나를 의지하지 않았고
너는 나를 응답이라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았나니.

제목이 뭐에요 제목이? “네 삶이 가난해도 나를 원망치 말라”
오늘 삶의 창백함은 바로 기도의 상실에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기도를 배우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무더위 속에서 다시 한번 사랑하는 우리의 아빠 되시는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 그리고 우리를 섭리하시는 그분 앞에 나와서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 저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요! 기도를 배우는 그 위대한 연습 속에 들어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우리 다 일어나셔서 우리 기도하는 마음으로 우리 주 기도문을 찬양하시겠습니다.
우리 가사의 뜻을 깊이 기억하면서 기도하시면서 주기도문을 찬양하시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름 거룩하사
주님 나라 임하시고 뜻이 이루어 지이다
일용할 양식 주시고 우리들의 큰 죄 다 용서 하옵시고
또 시험에 들게 마시고 악에서 구원하소서
주여 주의 나라 주의 권세 주의 영광 영원히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전능하시고 또 사랑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한평생을 살 것을 기대하시며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초청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한결같은 사랑과 우리를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과 성령님의 우리와 함께 하심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기도 속에 한평생을 당당하게 건강하게 살 것을 기대하시는 성령님의 평안케 하심과 기도로 인도하심이 오늘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의 일생을 살기를 작정하며 삶의 자리로 떠나가는 당신의 백성들의 걸음마다 삶의 장마다 기도의 거룩한 사역이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복 하옵나이다 아멘.

 
 
 
 
 
 
 
 
 피종진  
 2001년 07월 22일  
 이렇게 기도하라  
 마태복음6:9-13 
 
 
2001. 7. 22. 설교방송(설교본문)

이렇게 기도하라
마태복음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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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항상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사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은혜를 받게 하시는 절차로 '내게 구하라! 부르짖으라! 간구하라!' 이렇게 기도를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기도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까, 또 어떤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는가, 또 기도해놓고 과연 내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실까 등등 여러 가지로 마음에 많은 생각을 해볼 때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어떻게 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오늘 본문의 내용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첫째, 한적한 곳에 기도의 장소를 정해놓고 기도하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절) 여기에 보면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골방'이란 한적한 곳으로 기도하는 장소를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회당이나 거리 등 사람이 많은데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보다도 사람을 향하여 '우리는 이렇게 기도를 많이 한다. 우리는 이렇게 의롭다. 우리는 이렇게 거룩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거리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도의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이 세상에 문어다리같이 많은 채널을 만들어 연결해놓고, 또 세상의 각 곳에 마음 문을 다 열어 놓으면 마음이 산만해지고, 또 그중에 주님께 향하여 하나의 창문을 열어 놓는 이런 복합적인 상황 속에서는 올바른 기도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기도할 수 있는 좋은 장소를 때때로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 가정에도 기도 장소가 있는 것이 좋습니다. 하다 못해 기도하는 방석이라도 갖다 놓고 기도하는 장소를 구별해놓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 회사에서도 기도하는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으면 참 좋습니다. 예배하는 처소가 있으면 물론 더 좋습니다. 마음 속에 이 생각 저 생각을 다하다 보면 기도의 줄이 잘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걱정 근심, 불안 공포, 대인관계, 사업 관계로 인한 세상 문을 좀 닫고 오직 주님께만 향하여 마음문을 열어 놓고 하나님께 집중하여 기도할 때에 그 속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1:35에 보면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새벽기도의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새벽기도를 드리는 분들은 지혜로운 분들이고, 새벽기도를 안 드리는 분들은 굉장히 위험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벽에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으면 하나님께서 하루를 보장해주십니다. 그래서 기도는 예방도 되고, 처방도 됩니다.
어떤 분은 미리 기도를 해놓고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받으며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분은 기도로 이미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을 의지하며 살기 때문에 좋은 일이 있어도, 어려운 일이 있어도 승리하는 삶을 삽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꼭 처방기도만 합니다. 꼭 사건이 일어나야만 '주여, 이것 보세요. 저것 보세요. 이렇게 고쳐주세요. 저렇게 치료해주세요. 해결해주세요. 승리하게 해주세요.' 하면서 기도합니다. 물론 일이 있을 때라도 기도하면 천만 다행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미리 기도하는 것도 없고, 어떤 사건이 있어도 기도하지 않고 오히려 좌절하며, 아예 주님께 대해서는 도움을 청하거나 의지할 틈도 없고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만 살다가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이것은 바로 기도가 결여된 상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생활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많은 일을 벌려 놓는 것도 귀하지만, 기도의 문을 열어 놓는 것은 더 귀합니다. 그 기도 속에 하나님의 응답이 있고, 그 기도 속에 하나님의 보장이 있게 되고, 그 기도 속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열왕기하 4:33∼35에 보면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었을 때 엘리사가 그 시신이 있는 곳에 가서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문을 닫고, 거기에서 시신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그 때에 이 시신이 따뜻해지기 시작하더니 재채기를 일곱 번 하고 살아났습니다. 여기에서 문을 닫고 그 방에 들어갔다는 것은 얼마나 집중적인 기도를 드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도하기 좋은 한적한 곳에 기도의 골방을 만들어놓고 죄악된 세상과 단절하고 오직 주님께만 향하여 마음문을 열어 놓고 매일 매일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골방에 들어가 기도할 때 비록 여러분의 힘과 능력이 좀 부족해도 여러분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능하신 손으로 여러분의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며, 여러분이 해결하기 힘든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실 줄 믿습니다.

둘째, 먼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라.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10절) 여기에 보면 '뜻이 땅에서 이룬 것같이 하늘에서도 이루어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땅의 것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이 임하기를 기도하는데, 그것은 앞뒤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모릅니다. 내가 보기에 좋고 나에게 유익된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그것을 기뻐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날마다 기도 속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더 큰 역사가 함께 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6:33에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서 '먼저'라는 말이 대단히 귀합니다. 여러분, 무엇이든지 내가 옳다고 생각해도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내게 유익이 된다 할지라도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됩니다. 만약에 그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라면 하나님이 더 좋게 더 넘치는 복으로 채워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기뻐하시는 그 일을 행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제단을 쌓을 때도 예배의 핵심이 있쟎아요? 창세기 8:20에 보면 노아가 제단을 쌓을 때에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제단을 쌓을 때 자기를 위하여 쌓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한 번도 자기를 위하여 쌓거나 자기를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단을 쌓았는데, 하나님께는 물론 영광이 되고, 결국은 그 복이 자기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바로 자기를 위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한 일은 결국은 하나님께도 자기에게도 위하는 일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에 표준을 두고 살아야 되는데,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1에 보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바울 자신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마태복음 7:21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뜻 이것은 대단히 귀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언제나 사모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모든 것에 하나님의 뜻을 찾아나가기 위해서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자신을 복종시키는 자가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2:2에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기 위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셋째, 용서하면서 기도하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12절) 우리는 용서하며 기도하는 일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할 줄 모르면 하나님의 용서도 우리가 받을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 11:25에 보면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용서받기 원하십니까? 서로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용서해주신다고 했습니다. 만약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9:1,2에 보면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을 차단시키고, 형제간의 좋은 관계를 차단시키며, 부부와 자식간에 성도간에 큰 암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서로 용서할 때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용서하기를 좋아하시기 바랍니다. 피카쿠스는 말하기를 '용서가 복수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특히 원수갚는 일을 옛날에 조상들이 많이 했습니다.
또 라노스쥬크 명언에 보면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만큼 용서한다'고 했습니다. 용서를 많이 하는 사람은 사랑이 큰 사람이고, 용서를 적게 하는 사람은 사랑이 적은 사람입니다. 얼마나 여러분이 용서하는 생활을 하느냐에 따라서 사랑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용서를 크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대단하신 분입니다. 조금 감정 상한 것, 손해본 것, 또 자기 명예를 손상시킨 것, 이런 것을 가지고 끝까지 이를 가는 사람은 대단히 위험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서로 용서하는 일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로마서 12:19에 보면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원수까지도 저주하지 말고 용서하며 축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4:32에 보면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해주신 것을 기억하면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할까요? 마태복음 18:21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수로 치면 490번이지만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끝없이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용서받기 위해서도 용서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이 가르쳐주신 이 기도를 통해서 한적한 곳에 기도의 장소를 정해놓고 기도하고,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며, 서로 용서하며 기도함으로 기도로 늘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동호  
 2001년 02월 11일  
 주기도문(21)  
 마태복음6:9-13 
 
 
2001. 2. 11 설교방송 (설교본문)

주기도문(21)
마태복음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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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일류대학이라고 하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강의하시는 교수님 한 분이 방학 동안에 공부를 하기 위하여 10권의 책을 사다 놓고 읽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요즘은 대학마다 교수평가제를 실시하여 학기마다 교수에 대한 평가가 순서대로 발표되기 때문에 방학이라고 마음놓고 쉴 수 있는 형편이 아니기 때문이었답니다.
그런데 좀처럼 책을 읽는 것이 진도가 나가지 않아 무척 힘이 들었는데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기가 왜 공부를 이렇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생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중고등학교 때는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하여 공부를 하였고 좋은 대학에 가서는 학점을 잘 따서 외국의 좋은 대학에 유학하기 위하여 공부를 하였고 유학 중에는 박사 학위를 따서 좋은 대학의 교수가 되기 위하여 공부를 하였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쉽지 않은 목표를 다 이루어 지금 유명한 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학에서도 상당히 인정받는 실력 있는 교수가 되었습니다. 꿈과 목적을 거의 다 이룬 지금 그는 왜 더 공부를 하여야 하는지를 알 수 없게 되었고 그것이 더 이상의 공부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왜 더 열심히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답니다. 많은 생각 끝에 얻은 결론은 '세상을 바꾸기 위하여'였답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하여 공부를 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자 다시 공부를 할 마음이 생겨서 열심히 공부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을 아이들에게도 가르쳐 주어 아직 초등학교도 다니지 않는 막내 아이 까지도 책을 읽고 나름대로 공부를 할 때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하여!'라는 구호를 외친다고 합니다.
공부를 잘 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왜 공부를 하여야 하는가를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부를 끝까지 열심히 잘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왜 공부를 열심히 잘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유와 목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잘하려면 왜 공부를 열심히 잘해야 하는지를 먼저 분명히 알아야만 합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유와 목적을 알고 예수를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를 끝까지 열심히 그리고 잘 믿을 수 있습니다.
'왜 예수를 믿는가?'라고 할 때 여러 가지 방면에서 대답을 할 수 있지만 그 중 한 대답은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기 위하여'입니다. 인간은 제법 똑똑하고 유능한 존재인 것 같지만 인간은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자신과 세상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지 않고는 우리는 한시도 살 수 없는 삶의 무능력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고백한 바와 같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꾼의 경성함이 허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신앙의 능력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한다면 그것은 기도의 능력과 말씀의 능력입니다.
기도에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할 수 없는 것도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신유의 역사를 믿습니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는 것과 같은 어려운 일을 당하였을 때에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우리의 기도대로 응답해 주심을 저는 믿습니다.
기도에 능력이 있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그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고 간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그 신앙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가장 중요한 면 중에 하나가 바로 이 기도의 능력 때문입니다. 기도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간증하며 살기 때문에 기독교의 신앙이 그 뿌리를 계속 이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의 능력보다 더 힘이 있는 강력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의 능력입니다. 기도의 응답도 우리에게 큰 은혜와 축복이 됩니다. 그러나 말씀의 응답은 그보다 더 큰 은혜와 축복을 우리에게 가져다줍니다.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의 삶에 이루어질 때도 은혜와 축복이 되지만 하나님의 소원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삶에 이루어질 때에 더 큰 은혜와 축복이 됩니다. 기도의 능력보다 말씀의 능력이 우리에게 더 큰 은혜와 축복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아직도 말씀의 응답보다는 기도의 응답에 더 치우친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보다 성숙한 교회가 되기 위하여 우리 한국 교회는 기도의 응답 보다 말씀의 응답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1995년 포항에 한동대학교가 세워졌습니다. 처음부터 학생 전원 기숙사 생활을 원칙으로 학교가 세워졌습니다. 개교 전에 학교를 세우려고 하였던 기업이 부도가 났기 때문에 개교 할 때에는 학교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해 줄 재단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냥 학교만 운영하라고 하여도 어려웠는데 해마다 입학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기숙사까지 건축을 하여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동대학교는 그와 같은 불가능한 일을 지금까지 기도로 해결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 일이 힘들어지자 학교에서는 재작년부터인가 기숙사에 입사하는 학생들에게 100만원씩의 기탁금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입사 할 때 100만원을 기탁하면 졸업하여 퇴사할 때 그 돈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재정적인 압박을 좀 덜어 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학교는 그만큼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학교에 방침에 따라 100만원의 기탁금을 내고 입사를 하는 학생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모든 학생이 다 그 기탁금을 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100만원의 기탁금을 내기 어려운 학생들은 그냥 기탁금 없이 기숙사에 입사를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동안 기탁금 제도를 강제적으로 시행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보통 학교 같았으면 강제적으로 시행하지 않는 기탁금을 내는 학생들이 있었겠습니까 만은 한동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재정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은 기탁금을 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학교와 기숙사 그리고 학생들 사이에는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것만 보더라도 한동대학교가 다른 대학과 다른 학교라는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없어서 드디어 올해부터는 전교생에게 기숙사를 다 보장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말았습니다. 할 수 없이 몇 퍼센트 정도의 학생들은 학교 밖에 방을 얻어 나가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근처에 마을이 없어서 버스를 타고 몇 십분 정도를 나가야만 방을 얻을 수 있는데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학생들에게 손해가 되는 일이고 부담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누구나 다 학교 기숙사에 있기를 원하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할 수 없이 기숙사에 입사 할 수 있는 자격 기준을 제시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기준 중에 학교는 기탁금을 낸 사람을 우선적으로 입사 시킬 수밖에 없다는 방안을 내놓게 되었습니다. 학교로서는 그렇게 이야기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학교의 방침에 대하여 학생들은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탁금을 냈기 때문에 기숙사에 먼저 들어갈 기득권이 있다는 것은 세상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한동대는 하나님의 식으로 하나님의 인재를 양성하는 하나님의 대학이기 때문에 모든 일을 세상 식으로 생각하고 결정하지 말고 하나님의 식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식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 학생들의 생각과 주장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식은 기탁금을 내지 못한 학생들이 기숙사 입사에 대한 우선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기탁금을 낼 수 있는 학생은 그래도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이고 기탁금을 내지 못한 사람은 재정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인데 재정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은 기숙사 밖으로 나가게 하면 저들이 어떻게 학교를 다닐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은 기탁금을 내지 못하는 학생들이 기숙사 밖으로 나가게 되는 일을 막기 위하여 재정적으로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학생들이 먼저 자진해서 기숙사 입사 신청을 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 손해와 부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진해서 그 손해와 부담을 지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일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식이 세상에 이루어지게 될 때 얼마나 엄청난 큰 역사가 일어나는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세상이 즉시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원죄가 있습니다. 그 원죄의 뿌리는 욕심입니다. 모든 자리와 권세와 영광을 자기가 차지하고 누리려고 하는 욕심입니다. 그 욕심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 욕심이 죄를 낳고 그 죄가 자신과 세상을 파멸로 몰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나라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모든 나라 다시 말해서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 드리고 그 자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권세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모든 권세와 권력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고 그 모든 권세와 능력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모든 명예와 영광에 대한 욕심을 깨끗이 버리고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며 그 모든 영광과 명예를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라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여 참으로 충성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주의 몸 된 교회에 전에 없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만 돌려졌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모두 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람에게로 돌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그 자리와 권세와 영광에 대한 기득권을 주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신의 아들에게 큰 대형교회를 물려주기로 하신 어떤 목사님은 세습에 대한 변명을 하시면서 자신이 교회를 위하여 얼마나 충성하고 수고하였는가를 주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평생 휴가도 가본 일이 없이 교회에만 충성을 하였다고, 교회가 이만큼 부흥하고 성장하게 된 것은 자기의 능력과 헌신 때문이라는 주장을 서슴치 않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신의 아들에게 담임목사 자리를 물려 준 것에 대한 변명을 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의 최고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평생 휴가도 가지 않고 목회를 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그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냥 휴가를 가시고 교회를 아들에게 세습시키시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터인데 하는 생각을 장난처럼 해 보았습니다.
이것은 몇몇 목사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교회 안에는 온통 자기 자리와 권세와 영광을 확보하기 위하여 보이지 않는 긴장과 갈등이 팽배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교회에 봉사하고 충성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충성과 헌신은 순수하지 않습니다.
저는 솔직히 목회자로서 요즘 주일날 예배만 드리고 가는 교인들보다 교회에 나서서 직분을 맡아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는 사람들이 조금 무섭습니다. 저렇게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한 후에 무엇을 요구하려고 할까가 걱정이 됩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예배만 드리고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 주는 분들이 훨씬 더 좋은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자기의 자리와 기득권을 지키는데만 급급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작년에 우리는 당회에만 편중되어 있던 상당 부분의 교회의 권력을 제직회에 이양하는 개혁을 거행하였습니다. 언젠가는 당회와 제직회와 서로의 역할을 잘 이해하여 서로 존중하며 협조하는 완벽한 개혁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만은 아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는지 모르겠으나 당회와 제직회가 서로 자기의 권리와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고 할 수 있는대로 더 많은 권력과 기득권을 잡기 위하여 파워 게임을 벌이는 것이 아닌가하는 염려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개혁은 아주 참혹한 실패를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실제로 두려워해야만 합니다.
개혁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제도의 변화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제도와 변화를 이끌어가는 말씀의 정신이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한동대학교 학생들의 정신을 본 받으라고 권면 하고 싶습니다. 자기의 기득권과 이익을 지키려하지 말고 반대로 상대방의 이익과 기득권을 위하여 포기하는 삶을 살아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말씀의 능력이 역사하는 교회를 만들어가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교회개혁도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목사입니다. 목사의 최고의 기쁨이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설교한 하나님의 말씀이 목회 하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잠시 동안이라도 가르쳤던 한동대에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저는 제가 목회하고 설교하는 동안교회에서 그와 같은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냥 교회만 조용히 왔다 갔다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정말 최선을 다하여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고 충성하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렇게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신하신 후에도 그것으로 자기의 자리를 삼지 않고 기회로 삼지 않고 기득권으로 삼지 않고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전적으로 하나님께로 돌려 보내고 자기 자리 없이 자기 이름 없이 자기 영광 없이 사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로 주기도문에 대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모든 기도가 제게는 참으로 큰 은혜였습니다. 저는 주기도문으로 평생 신앙과 삶의 목표를 삼으렵니다. 주기도문 강해를 마치는 마지막 주일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기도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입니다.
저는 이 기도가 제게서 꼭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저는 이제 제법 이름이 알려진 목사입니다. 제가 목회하는 우리 동안교회도 이제는 제법 큰 교회가 되었기 때문에 이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담임목사인 제가 마음만 먹으면 그것을 이용하여 얼마든지 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확장해 나갈 수 있습니다.
제 궁극적인 기도의 제목은 헌신과 충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헌신과 충성으로 인하여 승리하고 성공했을 때 그 승리와 성공과 영광에 연연하지 않고 그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영원토록 하나님께만 돌리고 겸손하게 내 인생을 마칠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많은 실패와 좌절이 있었지만 저는 이 기도 다시 말해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기도에는 실패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반드시 이 기도에 성공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도 주기도를 외우실 때마다 이 기도를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간절히 이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기도의 응답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응답이 이루어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만 존귀와 영광을 돌려드리는 참으로 충실한 하나님의 종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동호  
 2001년 01월 14일  
 주기도문 (19)  
 마태복음6:9-13 
 
 
2001. 1. 14 설교방송 (설교본문)

주기도문 (19)
마태복음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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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시험과 유혹 그리고 악은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같은 현실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에 가기 전까지 우리는 계속되는 시험과 유혹 속에서 살아야만 합니다. 그것은 조금만 생각하면 아주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시험과 유혹 그리고 악이 없다면 이게 무슨 세상이겠습니까? 구원이 무슨 필요가 있겠으며 천국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이 세상은 두루말이처럼 말려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두루말이처럼 말려 없어질 불완전한 세상입니다. 이 세상이 시험도 없고 유혹도 없으며 고통과 악도 없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시험과 유혹 그리고 고통과 악이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때문에 일부러 자초할 필요는 전혀 없지만 살아가는 동안 그와 같은 일을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지극히 정상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혹시 그와 같은 일을 만난다고 하여도 당황할 것 없으며 절망할 것 없습니다.
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는 것이 때때로 힘들고 내 맘 같지 않아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게 세상이다'라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시험과 유혹을 이겨내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도 정말 힘들면 천국을 생각합니다. 천국을 생각하면 '세상은 좀 힘들어야 한다' '세상은 좀 재미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힘들고 재미없는 세상을 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게 된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힘들고 어려운 일에 대한 불평을 하나님께 하는 것은 공평치 못한 일입니다. 이 세상이 힘들고 어려우며 온갖 불의와 유혹이 난무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이 이 세상에 있게 된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요 우리들 때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성경 중에 로마서 8장 28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입니다. 저도 이 말씀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시험과 유혹이 있습니다. 그리고 역경과 어려움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시험과 유혹이 있고 역경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시험과 유혹 그리고 역경과 어려움은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에게 차별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사람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시험과 유혹 그리고 역경과 어려움을 당하고 격어야만 합니다.
똑같은 시험과 어려움을 당하는데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모든 시험과 유혹 그리고 역경과 어려움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는데 반하여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시험과 유혹 그리고 역경과 어려움이 합력 하여 악을 이룹니다.
똑같은 풀이지만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똑같은 시험과 유혹 그리고 역경과 어려움이라도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합력 하여 선이 되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합력 하여 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시험과 유혹은 오히려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의지하는 기회가 됩니다. 이 세상에 온갖 시험과 유혹이 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늘 깨어서 조심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위험하고 힘들수록 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하여도 세상이 전혀 문제가 없고 어려움이 없다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마음은 점점 느슨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역설적이지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좀 흔들리고 어려운 것이 우리의 믿음을 지키기에는 더 좋은 것입니다.
둘째 아이가 군에 입대한지 열 달이 되었습니다. 처음 아이를 군에 보내놓고 얼마나 마음에 염려가 되는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하였습니다. 제가 아이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우리 아이를 지켜주십시오'라는 기도였습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운 때가 지나가고 이제는 군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는 것을 보자 매일 아이를 위하여 기도는 하게 되지만 전과 같이 그렇게 간절한 기도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저희 아이가 일주일동안 혹한기 훈련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이가 혹한기 훈련에 들어가자마자 정말 혹한이 찾아왔습니다. 서울도 영하 15도가 되고 철원에는 영하 26도를 넘어갔다고 하는데 얼마나 염려가 되는지 몰랐습니다.
물론 군대에서 그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하고 훈련을 시킬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다시 하나님께 대한 기도가 간절해 졌습니다. 아이는 어제 무사히 훈련을 마치고 건강한 모습으로 귀대하였습니다. 아이는 훈련을 통하여 더 강하여졌고 저는 아이의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과 조금 더 가까워 졌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시험과 역경은 오히려 삶의 아름다움을 가져다줍니다. 의와 선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시험과 유혹이 찾아 올 때 쉽게 그 시험과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그 시험과 유혹에 빠지지 않고 반듯하게 살기 위하여 나름대로 애를 씁니다. 혹시 실수하여 그 시험과 유혹에 빠지는 때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연출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요즘 매일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들을 읽곤 합니다. 얼마나 좋은 글들이 올라오는지 모릅니다. 며칠 전에 게시판에 올라 온 글 하나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저와 제 남편은 1999년 12월 18일 결혼을 하고 2000년 1월 1일 첫 예배부터 동안교회에 정식으로 등록하고 출석을 하였습니다. 남편과 저는 1년 동안 동안교회에 출석하면서 매주일 말씀의 은혜를 깊이 받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이 일주일동안 자꾸만 생각이나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일주일 내내 저와 남편의 삶을 지배했습니다.
제 남편은 그 동안 그냥 교회만 다니던 사람이었는데 요즘 남편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살기 위하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참 많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회사에서 컴퓨터 유통을 하고 있습니다. 중고 PC와 노트북을 팔고 있는데 전에는 영업이 잘 되기 만을 위하여 기도하였었는데 요즘은 기도가 바뀌었습니다. 요즘은 죄 짓지 않고 삶의 원칙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영업을 하기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리고 세금을 정직하게 내지 못한 것에 대하여,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영업을 한 것에 대하여 그리고 거래처 사람들을 접대하는 것에 대하여 너무나 힘들어하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1년 동안 우리 동안교회에 출석하면서부터 변화 된 저희 남편의 모습입니다. 기도의 내용이 달라졌습니다. 남편이 힘들어하는 부분을 위하여 계속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희 부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와 같은 글을 읽으며 목회의 보람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참으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완전한 삶의 승리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그 때문에 고민하고 갈등하며 기도하고 있지만 저는 반드시 그 교인이 자신의 삶에서 승리하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직 승리하기 전이지만 그 유혹과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또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사는 삶을 아파하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역설적이지만 세상의 유혹과 시험이 오히려 사람을 아름답게 합니다. 이 세상에 그와 같은 유혹과 시험이 없다면 그와 같은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우리는 도대체 어디서 찾아 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세상의 시험과 유혹이 오히려 우리를 아름답게 합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시험과 유혹을 무서워 할 것만은 없습니다. 세상의 시험과 유혹을 이용하여 우리의 삶을 더욱더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시험과 역경은 연단과 승리를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은 시험과 역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을 강하게 연단 하십니다. 제 인생관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말씀들이 몇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예레미야 12장 1절에서 6절의 말씀입니다. 설교 중에 벌써 여러 번 인용한 말씀이지만 오늘도 다시 그 말씀을 반복하려고 합니다.
예레미야서 12장 1절에서 5절 사이에는 하나님께 대한 예레미야의 질문이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은 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제 멋대로 사는 사람들이 도리어 더 어려움 없이 편히 사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너무나 근사합니다. 하나님의 답변은 질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질문 속에 답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 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 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

질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말과 경주하여 이기는 사람 그리고 요단의 창일 한 중에서도 능히 이겨 사는 강한 사람으로 연단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어려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이 예레미야 12장의 말씀과 함께 우리가 늘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서 5장 3절 하반절에서 4절의 말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환난과 시험이 있을 때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험과 환난을 당할 때 저들은 자연 인내하게 됩니다. 환난을 당할 때 믿음으로 인내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연단이 됩니다. 연단이 되게 되면 드디어 소망을 이루는 능력의 사람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망을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듯 떨어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환난을 통하여 사람을 연단 시켜 자신의 힘으로 소망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식이십니다. 그냥 보행자와 함께 경주하고 온실같이 편안한 상황 속에서나 겨우 겨우 살아가는 나약한 인간이 아니라 정말 말과 경주하고 요단의 창일 한 중에서도 능히 살 수 있는 강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시험과 역경은 필수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시험과 역경이 없이 어떻게 사람이 강한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시험과 역경을 믿음 안에서 잘 활용하고 선용만 할 수 있다면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더욱 더 강한 하나님의 군사로 성장해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가 죽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 전 까지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시험과 역경은 피할 수 없는 선택입니다. 시험과 역경이 없는 세상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기대입니다.
시험과 역경을 일부러 자초할 필요는 없지만 구태여 그것을 두려워하고 회피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저를 키워주신 임택진 목사님의 사모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사모님께서 어느 날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가난이 싫어. 그러나 가난이 무섭진 않아"

저는 그 말씀이 평생 잊혀지지 않습니다. 저도 시험과 역경이 싫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무서워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것을 무서워하여 도망 다니지는 않겠습니다. 오히려 시험과 역경을 믿음으로 직면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과 싸우겠습니다. 그러나 자만하지는 않겠습니다. 싸우면서 늘 하나님께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겠습니다. 그렇게 살면 오히려 시험과 역경 때문에 저의 삶은 하나님과 더 가까워 질 것이고, 더 아름다워 질 것이고, 더 강하여 질 것입니다.
시험과 역경에 굴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꿋꿋하게 그것과 직면하여 싸우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싸우되 자만하지 아니하고 늘 하나님께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겸손히 그러나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시험과 역경 때문에 더 아름답고 강인한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동호  
 2001년 01월 07일  
 주기도문 (18)  
 마태복음6:9-13 
 
 
2001. 1. 7 설교방송 (설교본문)

주기도문 (18)
마태복음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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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있던 교회에서 집사님 한 분이 학교 교사로 계시다가 퇴직하신 후 일시금으로 받은 퇴직금을 사기 당해 단 몇 달만에 정말 알거지가 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후에 알고 보니 교사나 공무원들의 퇴직금을 전문적으로 노리는 사기단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와 같은 일을 당하게 되면 참으로 어려워집니다. 시험과 역경을 젊어서 만나면 다시 회복할 시간이나 있는데 그와 같은 시험을 절대적으로 안정이 필요한 노년에 만나게되면 그 어려움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죽는 것은 아니지만, 또 살아날 구멍이 있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어려움과 고통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전에 살던 동네에서 어린 아이 하나가 유괴 됐습니다. 저희가 살던 골목 바로 뒷골목에 살던 집의 아이였습니다. 세상에 아이가 유괴 당하는 것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그것은 아이가 죽는 것보다 오히려 더 힘들고 어려운 고통입니다.
아이가 죽는 고통은 아마 우리 인간이 격을 수 있는 최고의 아픔과 고통일 것입니다. 세상에 그보다 더 힘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고통도 시간이 가면 조금씩 조금씩 줄어듭니다. 생각과 감정이 정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괴는 정리가 되지 않습니다. 아이를 잃어버린 고통이 쉽게 정리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도 어느 정도 조금씩은, 아주 조금씩은 좀 줄어들겠지만 하여튼 아이가 유괴되는 사건은 우리가 당할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럽고 불행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지난 주 어느 텔레비전 방송에서 철책선 안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의 생활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여 방송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이가 군대에 가있으니 자연 관심이 많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유심히 보았습니다.
철책선 근무를 하는데 있어서 위험한 일들이 많이 있겠지만 가장 위험한 일 중에 하나는 철책선 안에 매설된 지뢰들이랍니다. 그 지뢰의 수가 수 백만 개에 달한다고 하니 참으로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철책선 안에 눈에 띄는 글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길이 아니면 가지 마라'는 글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보다 더 위험한 나라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도 아시는 바와 같이 캄보디아입니다. 거기에도 우리나라 휴전선 못지 않게 지뢰가 많은데 우리나라는 그래도 휴전선 안에 지뢰가 집중적으로 매설되어 있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는 철저하게 훈련된 소수의 군인들만이 나름대로 안전이 보장된 길로만 다니기 때문에 생각처럼 많은 사고는 나지 않지만 캄보디아와 같은 곳은 휴전선이 아니라 저들이 사는 지역 전체가 지뢰밭이기 때문에 지뢰로 말미암아 부상을 당하고 장애자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가끔 텔레비전을 보면 밀렵꾼들이 산에 덫을 놓아 짐승들을 잡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덫을 숨겨 놓아 짐승을 잡는 경우도 있고 덫 속에 짐승들이 좋아하는 먹이를 숨겨 놓고 짐승들을 유혹하여 잡는 경우도 있습니다. 덫에 걸린 동물은 참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덫에 걸려 죽은 동물이나 아직 죽지 않고 고통을 받고 있는 동물들을 보면 참으로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몇 몇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사기 당하는 이야기, 유괴 이야기, 그리고 지뢰 이야기와 덫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사탄의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저는 사탄이 우리의 평생의 삶을 순식간에 사기하는 사기꾼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사탄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유괴하고 평생 우리에게 고통과 아픔을 가져다 주는 유괴꾼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사탄이 사방에 지뢰를 매설하고 우리가 그것을 밟고 죽거나 다치기를 기다리는 적군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사탄이 덫을 놓고 생명을 노리는 밀렵꾼과 같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우리를 덫으로 유혹하는 미끼에 현혹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우리가 실수하여 사탄의 덫에 걸렸을 때 우리를 그 덫에서부터 건져달라고 기도하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얼마나 중요한 기도인지 모릅니다. 그와 같은 간절한 기도 없이 산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새 해와 새로운 세기를 시작하는 첫 달 첫 주일에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2000년 마지막 주일에 주신 말씀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였습니다. 2000년 마지막 주일에 하나님은 우리들이 그동안 지었던 모든 죄를 깨끗이 회개하라 말씀하셨고 2001년 첫 주일에 시험에 들지 않도록 조심하라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와 같은 말씀의 흐름 속에서 살아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느낍니다.
제가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지는 모르나 여러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이 말씀을 놓칠 것입니다. 이 말씀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흘려 버리실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은 '길이 아니면 가지 마라'는 경고를 보지 못하고 아무 길로나 막 다니다가 지뢰를 밟는 사람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반드시 생명의 말씀을 경홀히 한 대가를 치루게 될 것입니다. 그 대가는 사기와 유괴를 당하고 지뢰를 밟고 덫에 걸리는 것입니다. 치명적인 대가를 치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중에 들을 귀가 있어서 이 말씀을 새겨들으시는 분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를 진심으로 하나님께 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께 상달하게 될 것이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말미암아 저들은 사탄의 사기와 유괴를 피하게 될 것이고 사탄이 매설한 지뢰와 덫에 걸리지 않는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할 때 시험은 test가 아니라 temptation 즉 유혹입니다. 사탄은 지뢰를 매설하고 덫을 놓을 때 그냥 지뢰와 덫만 놓지 않습니다. 확실하게 그 지뢰를 밟고 덫에 걸리게 하기 위하여 미끼를 사용합니다. 그 미끼를 가지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 미끼가 바로 오늘 본문이 말씀하시는 '시험'인 것입니다.
그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고 기도한다는 것처럼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그 가장 중요한 말씀을 교훈으로 주시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정말 사탄의 시험에 들지 않기를 위해 노력하고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탄이 쓰는 덫이 많이 있지만 저는 오늘 그 중에 몇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어느 때나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2001년도에 사탄이 집중적으로 쓸 것으로 예상되는 덫 몇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 덫은 '절망'이라고 하는 덫입니다. 사탄이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덫 중에 하나입니다. 특히 올해와 같이 경제적인 전망이 어두운 해에 많이 사용하는 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일수록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게 하십니다. 강한 사람으로 연단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와 같은 연단과 훈련 중에 사탄은 언제나 역사 합니다. 우선 하나님의 연단을 하나님의 포기와 심판으로 이해하게 속입니다. 그리고 절망하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심하게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원망하게 만듭니다. 그리고는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 만듭니다. 사탄의 모든 덫과 함정의 목적은 하나님을 떠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께 있는 줄을 아는 사탄이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면 결국 죽게 된다는 것을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절망'이라는 덫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안에 있는 우리들에게 절망적인 상황은 있을 수 있으나 절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예수님이 이 땅에 재림하셔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살아있는 동안 당하는 모든 어려움은 우리의 각성을 위한 하나님의 채찍이 아니면 우리를 훈련시키시기 위한 연단입니다. 채찍과 연단의 목적은 생명과 구원이지 죽음과 실패가 아닙니다.
절망적인 상황이 올 때 사탄은 우리에게 절망하라 그리고 하나님을 의심하라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떠나라라고 유혹할 것입니다. 그 시험에 들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가 송구영신 예배 때 배운 것처럼 '생명 주께 있네, 능력 주께 있네, 소망 주께 있네'를 찬송하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야곱처럼 하나님께 생명을 걸고 매달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덫은 '탈선'이라는 덫입니다. 경기가 좋을 때에도 하나님은 좁은 길이십니다. 경기가 나쁠 때 하나님은 도저히 길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좁은 길이 되십니다. 경기가 좋을 때에도 하나님의 길 다시 말해서 정도(正道)를 걷는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경기가 나쁘고 어려울 때 다시 말해서 세상의 길마저 좁아지는 때 하나님의 정도를 지키면서 산다는 것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사탄은 우리들에게 탈선을 권면 하는데 다른 때도 어렵지만 올해처럼 세상이 전체적으로 힘들고 어려워질 때 이 유혹을 뿌리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가 지뢰밭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뢰밭에서 길을 잃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마음에 명심해야 합니다. 사탄은 탈선이 사는 길이라고 우리는 속이지만 경기가 좋을 때든 경기가 나쁠 때든 탈선은 곧 사망과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 경기가 좋을 때에도 세상 사람들은 탈선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정도를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세상 경기가 어려워지면 어느 정도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정도를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탈선의 유혹을 이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삶이 힘들고 어려워져도 길을 잃으면 안 됩니다. 정도를 벗어나면 안 됩니다. '죽으면 죽으리다' 고집을 부리며 하나님의 길을 지키는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삽니다. 성공합니다. 승리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간절히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탄의 유혹과 덫은 정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경기가 좋을 때 쓰는 덫이 있고 경기가 나쁠 때 쓰는 덫이 있습니다. 때문에 사탄은 세상과 경기를 가리지 않습니다.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생활과 삶이 불안정할 때 걸리기 쉬운 덫이 있고 생활과 삶이 안정되었을 때 걸리기 쉬운 덫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시도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됩니다. 사탄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하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늘 하나님께 기도해야만 합니다. 사탄의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고 사탄의 덫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옛날에 쓰던 쥐덫 중에 철사로 만든 그물 상자 모양의 쥐덫이 있었습니다. 그 상자 안에 미끼를 넣어 놓고 쥐가 상자 안에 들어오면 문이 닫히게 만든 쥐덫입니다. 그 쥐덫에 갇혀서도 열심히 미끼를 먹고 있는 쥐가 있습니다. 쥐 중에서도 지능 지수가 아주 떨어지는 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쥐는 쥐덫에 갇히면 불안해서 미끼를 먹지 못합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탈출하려고 노력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지능 지수가 낮은 쥐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탄의 덫에 걸렸는데도 사탄이 준 미끼를 먹는 데만 정신이 팔려서 자기가 덫에 걸렸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탈출하려고 생각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우리들 중에도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우리들 중에도 많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 가르쳐 주시지만 악에서 구해 달라는 진실한 기도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악을 악인 줄 모르고 자기가 있는 곳이 덫인 줄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기도가 간절한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 기도와 함께 정말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필사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믿음을 지키고 정도를 지키기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다' 생명을 거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다가도 실수하여 덫에 걸리게 되거든 하나님을 향하여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울부짖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 덫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발버둥질 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동물들은 대부분 밀렵꾼의 덫에 걸리면 벗어나지 못하고 죽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탄의 덫에 걸려도 벗어날 길이 있습니다. 동물들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동물들의 생명을 사람에게 허락하셨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사탄에게 허락하신 적이 없으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비록 우리가 실수하여 사탄의 덫에 걸렸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그 사탄의 올무와 덫에서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새해 첫 주일에 하나님의 전에 나아와 예배하는 오늘 우리들에게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이 기도로 승리하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동호  
 2000년 12월 17일  
 주기도문(15)  
 마태복음6:9-13 
 
 
2000. 12. 17 설교방송 (설교본문)

주기도문(15)
마태복음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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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이 기도해 주시는 가운데 뉴질랜드 KOSTA(KOrean STudent Abroad)와 호주 코스타를 은혜 중에 마치고 잘 돌아왔습니다. 뉴질랜드는 이번 코스타가 첫 번째 코스타이었고 호주 코스타는 이번이 다섯 번째 코스타이었습니다. 뉴질랜드는 약 450명의 학생이 모였고 호주는 약 400여명의 학생들이 모였습니다. 두 집회 모두 은혜 충만한 가운데 마쳤습니다. 이로서 올해 12 나라에서 열린 코스타 집회를 모두 마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청년들이 은혜 받는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라고 생각하는데 코스타 집회에는 코스타 특유의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서 모이든 코스타는 언제나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느낍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우리가 코스타를 위하여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여 헌신을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도 많은 강사가 참여하였습니다. 미국에서 의사와 회계사를 하는 장로님들이 바쁘고 분주한 일을 뒤로하고 강사로 참여하였습니다.
시카고에서 오신 목사님 한 분은 연말에 뉴질랜드 비행기 티켓을 구할 수 없어서 서울을 경유하는 티겟을 구해 코스타에 참석하였습니다. 찬양 사역자 중에 악기를 연주하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은 가스펠 쪽에서도 유명한 사람이지만 대중 음악 쪽에서도 손꼽히는 연주자입니다. 이번 코스타 기간에 수 백만원의 개런티를 받을 수 있는 연주 제의를 받았지만 그것을 사양하고 아무런 보수 없이 기쁘게 코스타에 참여하였습니다.
코스타 성공의 비결은 그와 같은 집중적인 헌신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헌신 중에 부족하지만 우리 동안 교회의 헌신도 늘 빠지지 않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으뜸으로 코스타에 참여하고 후원하는 몇 안 되는 교회 중에 우리 동안교회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코스타에 대한 우리 동안교회의 수고와 헌신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반듯이 아름다운 열매로 우리를 칭찬해 주시고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이번에 여러분들의 기도와 후원이 많았습니다. 교인들 중에는 제가 강의하는 시간을 맞추어서 기도해 주신 분들도 있었습니다. 이번 집회는 학생들이 어리고 조금 산만한 아이들이 참석하여서 집회 시작 전에 걱정이 많았으나 결국 저들도 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찬양하며 하나님께 저들의 삶을 헌신하는 아름다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이일을 위하여 계속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번에 코스타와 부족한 사람의 사역을 위하여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 주신 여러 교우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귀한 기도와 후원위에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요즘 우리는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져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영적인 구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아야 하듯 경제적인 구원도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큰 일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작은 일 다시 말해서 일용할 양식 정도의 문제는 기도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작은 일용할 양식도 하나님께 기도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일용할 양식도 해결할 수 없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사람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어디 가서 밥 세끼 못 먹으랴'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저는 그와 같은 생각을 버렸습니다. 저는 밥을 먹고사는 일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일이라고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지 않으신다면 당장 밥 한끼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저의 모든 크고 작은 생명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일용할 양식 하나까지도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직 밥 세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때에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겸손한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작은 것 하나도 하나님이 아니시면 해결할 수 없다는 겸손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귀히 보시고 힘들고 어려운 세상에서도 능히 이겨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 7: 7-11)는 기도도 잘 살펴보면 떡과 생선을 달라는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예를 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와 같은 믿음과 자세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들에게 일용할 양식과 물질을 주시어 힘들고 어려운 세상 속에서도 능히 승리하며 사는 사람으로 붙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세상을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는 겸손하면서도 간절한 기도로 이겨내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 하시면서 '나에게'라는 표현을 쓰시지 않으시고 '우리에게'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깊으신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자신의 입만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도 생각하며 사는 사람되기를 원하십니다. 나의 양식만을 위하여 염려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양식을 위해서도 염려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제자들이 벳세다 광야에서 주린 많은 사람들을 염려하고 걱정했을 때 예수님은 저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입으로만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비록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라도 그것을 하나님께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드리며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오천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동안교회와 동안교회의 교우들은 지금 먹을 것이 없어서 주린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벳세다 광야와 같은 상황에 처한 우리나라와 민족을 구원하고 먹이기 위하여 하나님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리는 교회와 교인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힘이 작고 보잘것 없어 보여도 그와 같은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작은 믿음을 보시고 이 나라와 민족을 구원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오늘도 일으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저는 이번 주 성경을 읽다가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7장 12절의 말씀인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그 말씀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7장 7절에서 12절의 말씀을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7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 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9절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10절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절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12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 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여기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12절의 말씀은 문맥으로 볼 때 전혀 엉뚱한 말씀 같아 보입니다. 하나님께 구하라는 말씀 속에 그것과 상관이 없어 보이는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떡과 생선 하나까지라고 하나님께 구하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요구하시고 또한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밤낮 구하기만 하고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베풀 줄도 알고 대접할 줄도 아는 사람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 끝에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의 입만을 생각하며 밤낮 하나님께 그것만을 구하며 사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자신만을 위하여 쓰지 아니하고 그것으로 남을 구제하며 베풀며 대접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며 기도하라는 말씀 끝에 넣으신 줄 아십니까? 그것은 남을 대접 할 줄 아는 마음이 가장 효과적인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경제가 어려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베푸는 것입니다.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유가 있을 때는 좀 베풀 수도 있고 대접하며 살수도 있지만 경제가 힘들고 어려워지면 주머니를 꽉 졸라매고 나만을 위하여 모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떡과 생선을 위하여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효과적인 기도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베푸는 것과 대접하는 것이 막히면 돈이 돌지를 않습니다. 돈이 돌지 않으면 있는 사람은 문제가 없지만 정말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정말 살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돈이 돌지 않으면 경제가 점점 더 경색이 됩니다. 결국은 나라가 함께 죽고 망할 수밖에 없어지게 됩니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나만을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다시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때를 맞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대로 기도와 베풂으로 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십시다. 겸손한 마음으로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기도하십시다. 아직 밥 세끼까지는 염려하지 않아도 될 때 그것을 어리석게 자신하지 말고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는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힘들고 어려울 때 도리어 남에게 베풀고 대접하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에게 베풀고 대접하는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오늘도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그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한 우리나라와 민족 속에 일으키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주위를 살펴보세요. 친척 중에 혹은 구역 식구 중에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이 없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작은 것 하나라도 함께 나누며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만을 생각하지 말고 우리를 생각하며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며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읽었던 아름다운 글 하나를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집에 불이 나서 온 몸과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은 어느 부인의 이야기이었습니다. 시각 장애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딸을 하나 나았었는데 몇 년 전에는 그 남편까지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결국은 거지가 되어 하루 하루 구걸로 연명을 하는 아주 불쌍한 부인의 이야기이었습니다.
어느 기관에서 그 부인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되어 돕게 되었는데 도움을 받는 그 부인이 어느 날 동전이 가득 든 통을 내어놓으면서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데 써 달라고 부탁을 하였답니다. 그 통을 뜯어보니 100원짜리 동전이 1,006개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 부인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주는 돈 중에 1,000원짜리는 모아서 생활을 하고 500원 짜리 동전은 몸이 약해서 수술을 받아야 하는 딸의 수술비로 모으고 100원 짜리 동전은 자기 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하여 쓰려고 모았다며 그 1,006개의 100원 짜리 동전을 내어놓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릅니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걸인도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며 피보다 더 귀한 돈을 모았는데 넓고 따뜻한 집에서 아직도 다이어트를 생각하며 사는 우리들이 밤낮 '내 양식'만 생각하며 '우리 양식'에 대하여 무관심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때 많은 우리의 이웃들이 실직이 되고 노숙자로 길거리로 내 몰리게 된 이 때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시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에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마 6장 1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마 14장 16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 이요 선지자니라 (마 7장 12절)

우리의 기도와 대접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재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동호  
 2000년 12월 03일  
 주기도문(14)  
 마태복음6:9-13 
 
 
2000. 12. 3 설교방송 (설교본문)

주기도문(14)
마태복음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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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우리는 여러 주일에 걸쳐서 주기도문 중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도를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도를 생각해 왔습니다. 오늘은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를 중심으로 함께 말씀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신 예수님은 이어서 우리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 가르쳐 주셨습니다. 평범한 기도인 것 같지만 우리는 이 기도 속에서 많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 기독교는 하늘만 생각하며 사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잘못 생각하면 하늘이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하늘만 있다면 땅은 아무런 가치나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땅을 무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기독교의 바른 정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땅과 세상을 부정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성경이 부정하는 세상과 땅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오염된 땅과 세상이지 본래의 땅과 세상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중히 여기시지만 땅과 세상도 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는 하늘도 있어야 하지만 땅도 있어야 합니다.
하늘을 부정하고 땅만 생각하고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위험한 일입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우를 범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은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만 생각하고 땅을 부정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특별히 열심히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그와 같은 극단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은 생각과 자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 일러 주신 후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하여 하늘과 땅을 모두 긍정하며 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람에게 떡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떡이 없어도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늘 반복하여 말씀을 드립니다만은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떡에 대하여 완전 부정을 하시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치우치지 않으시는 균형 감각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하늘과 세상의 균형입니다. 그 균형 감각을 잊어버리고 살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건강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늘을 잃어버리고 세상에 치우쳐 삽니다. 어떤 사람은 땅을 잃어버리고 하늘에만 취하여 삽니다. 둘 다 옳은 것이 아닙니다. 둘 다 건강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의 건강한 균형감각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로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순서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게 하셨고 일용할 양식 즉 땅에 대한 것을 나중에 구하게 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균형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늘과 땅의 순서입니다. 제가 중히 여기는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균형과 순서입니다. 저는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일을 할 때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을 하고 그러기 위하여 먼저 할 것과 나중 할 것의 순서를 깊이 생각하려고 합니다.
대학이라고 하는 책에 제가 참으로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만물에는 근본과 지엽이 있나니 곧 먼저 할 것과 나중 할 것이라. 사람이 먼저 할 것과 나중 할 것을 바로 알면 도(道)에 가까우니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먼저 할 것과 나중 할 것을 바로 아는 것이 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순서를 정확히 아는 것이 지혜라는 말씀입니다. 근본은 먼저 할 일이고 지엽은 나중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근본이 되는 것을 먼저 구하고 지엽이 되는 것을 나중에 구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순서를 바로 지키며 근본과 지엽을 모두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서를 어기면 둘다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지엽을 먼저하고 근본을 나중에 하면 근본과 지엽을 모두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말로 근본을 으뜸이라고 하고 지엽을 딸림이라고 합니다. 근본은 으뜸으로 하면 지엽은 자연히 따라 온다고 하여 근본을 으뜸이라고 하고 지엽을 딸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문제가 저는 극단적인 치우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늘에 치우쳐 땅을 잃어버리던가 아니면 땅에 치우쳐 하늘에 치우쳐 하늘을 잃어버리던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큰 문제는 하늘과 땅을 다 인정하면서도 그 순서를 바로 알지 못하여 결국 하늘과 땅을 모두 잃어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우리들에게 하늘과 땅의 균형을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의 순서를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늘과 땅 모두를 얻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은 언제나 일관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은 우리에게 모두 있어야 할 것이어서 우리는 하늘도 구하고 땅도 구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러나 언제나 하늘을 먼저 구하고 땅을 나중에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늘도 얻고 땅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이 일관되게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교훈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서도 먼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 가르쳐 주신 후에 이어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늘을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에 땅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늘만 생각하는 사람도 되지 말고 땅만 생각하고 사는 사람도 되지 마십시오. 땅을 먼저 생각하고 하늘을 나중에 생각하는 사람도 되지 마십시오. 언제나 하늘을 먼저 생각하고 땅을 나중에 생각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하늘과 땅의 복을 모두 받는 사람이 되실 줄 믿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세 번째 것은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의 식으로 구하고 일용할 양식은 세상에서 세상 식으로 구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가장 큰 문제점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식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세상에 나가서는 하나님의 식과는 전혀 상관없이 세상 식으로 살아가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의 일용할 양식도 하나님께 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루트가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이고 하나는 하나님입니다. 어느 것이 쉬우냐만 놓고 보면 세상이 쉽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옳으냐를 놓고 보면 하나님이 옳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옳고 그름을 생각하지 않고 쉽고 어려움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쉽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속에 생명이 있느냐 생명이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도둑이 도둑질을 하려고 할 때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개였습니다. 개가 짖으면 도둑질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도둑질을 하기 위하여 먼저 개를 죽이곤 하였습니다. 개를 죽이는 방법은 아주 쉬웠는데 그것은 개가 좋아하는 음식에 독을 타는 것이었습니다.
도둑이 개를 독살하기 때문에 좋은 개를 기르는 주인들이 개에게 도둑이 주는 독이 든 음식을 먹지 않도록 훈련을 시키곤 하였습니다. 주인 아닌 다른 사람들이 음식을 줄 때에 그 음식에 쓴 약을 타 놓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주는 음식에는 그와 같은 쓴 약을 타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반복을 통하여 개들은 주인이 주는 음식만 먹어야지 주인이 아닌 사람이 주는 음식을 먹으면 혼이 나는구나 라는 것을 학습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도둑이 아무리 좋은 고기를 가져다 주어도 먹지 않게 됩니다.

우리 사람들은 훈련된 개만도 못할 때가 많습니다. 훈련된 개는 주인이 주는 것만 먹어 죽지 않는데 우리 사람들은 자기가 먹는 것이 주인이 준 것인지 도둑이 준 것인지 생각지도 않고 막 먹다가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80년대 초 통일교의 돈으로 성지순례를 한 목회자들이 있어서 교계에 큰 문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통일교는 성지순례를 하는 목회자들에게 300만원씩의 돈을 주었습니다. 지금도 300만원은 큰돈이지만 그 당시 300만원은 상당히 큰돈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돈을 가지고 여행을 하였던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그 돈이 통일교의 돈인 줄 몰랐다 라고 변명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변명이 될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냉면 한 그릇을 사겠다고 하여도 그 이유를 알아보고 대접을 받는 것이 상식인데 세상에 돈이 300만원이나 되는 돈인데 그 돈이 누구 돈인지 어떤 돈인지 알아도 보지 않고 받았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돈에 눈이 어두워 그 돈이 통일교 돈인지 북한의 공작금인지 알아도 보지 않고 받았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 천만한 행동인지 모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와 같은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인지 아니면 사탄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인지 생각도 하지 않고 무조건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만 하면 덥석 덥석 받아먹다가 어리석은 개처럼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큰 돈과 자리는 물론이지만 일용할 양식과 같이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께만 구하는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만 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만 살려고 하는 고집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이 주어질 때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인가를 살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천하에 없는 것이라고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지 않은 것이면 거들 떠 보지도 않는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만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안전하게 살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지 않습니다. 누가 주든 상관없이 받아먹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저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 먹고살겠습니다.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천하를 다 준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것은 거들 떠 보지도 않고 살겠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저에게 언제나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교훈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하늘과 땅에 균형을 잘 잡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하늘과 땅의 순서를 바로 알고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고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세상의 것들을 나중에 구하면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에게만 구하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 먹으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하늘과 땅의 균형을 잘 잡아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건강한 삶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과 땅의 순서를 바로 알아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고 세상의 것을 나중에 구하며 살아가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언제나 일용할 양식 하나라도 하나님께만 구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만 고집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동호  
 2000년 11월 19일  
 주기도문(13)  
 마태복음6:9-13 
 
 
2000. 11. 19 설교방송 (설교본문)

주기도문(13)
마태복음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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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계속하여 오던 주기도문 설교를 계속하려고 합니다. 저는 이번 추수감사주일을 마음으로 준비하면서 무엇을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할까 생각하던 중 그 동안 우리가 계속해서 다루어 오던 주기도문 속에 우리의 감사의 조건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주기도문을 거의 기도가 아닌 기도회나 회의를 마칠 때 주문처럼 외워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은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도였기 때문에 당연히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있으셨습니다.
저는 추수감사절 설교를 따로 준비하려다가 주기도문 속에 이미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추수감사주일인 오늘 그냥 계속하여 주기도문 강해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제가 첫 번째로 생각한 응답과 감사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감사가 있다면 저는 그것을 '죄 사함에 대한 감사'라고 생각합니다.
천하의 몹쓸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의 보혈로 죄를 씻어 주시고 하나님이 가장 귀히 여기시는 사역에 일꾼으로 써 주시는 은혜는 온 삶을 다 바쳐 하나님을 섬겨도 갚을 수 없는 큰 은혜라는 사실을 저는 압니다.
저는 지금 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부족한 것이 아직도 많은 사람이지만 저 자신을 생각하면 저는 대 성공을 한 사람입니다. 때때로 저도 저의 성공으로 인하여 교만하여지는 때가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저는 제가 본래 이렇게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아직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은혜는 죄 사함의 은혜입니다.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저는 사도바울이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라고 고백한 말씀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바울의 고백이 지금 저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제게는 십자가의 은혜가 있습니다. 저는 그 십자가의 은혜가 바로 주기도의 응답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주기도로 기도할 때마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었는데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제가 두 번째로 생각한 응답과 감사는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어려서부터 저에게 믿음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설교 잘 듣는 은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말씀이 믿어졌습니다. 어려서부터 말씀의 찔림도 있었고 말씀의 감동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 말씀에 순종하고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노력해서 된 것이 아니고 어려서부터 하나님이 제게 주신 은혜요 은사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말씀에 은혜를 받는 일에는 남에게 별로 뒤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래서 말씀에 은혜를 받지 못하고 밤낮 말씀에 체하여서 뒤에서 말꼬리나 잡고 뒷소리하는 사람들이 제일 불쌍해 보입니다.
하나님이 제게 주신 은사 중에 하나는 비판 능력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을 졸업할 때 논문상을 받았는데 그 논문의 제목이 '칼빈주의 예정론 비판'이었습니다. 저는 논쟁과 비판에 관한 한은 남에게 크게 뒤지지 않고 잘 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감동은 비판적인 능력이 없는 사람의 유치한 맹신적 믿음과는 다른 것입니다.
누구 못지 않게 비판적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만큼은 거의 맹신적이라고 하리만큼 믿음이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집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은 저에게 감동과 은혜를 줍니다. 아주 건방진 말씀이 될 수도 있지만 저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수가 어느 정도 보입니다. 그것이 제가 받은 최고의 축복이라고 저는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그 믿음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천국입니다. 구원입니다. 성공입니다. 승리입니다.
저는 가정생활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저는 성격적으로 원만하고 성공적인 가정을 꾸밀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혼자 자라서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합니다. 부부관계나 자녀관계에 치명적인 성격적 결함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가정에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완전한 성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저는 가정에 실패하지 않았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저희 가정에서 천국을 느낍니다. 아내에게서 아이들에게서 저는 천국을 느낍니다.
제가 가족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믿음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제 아내와 특별히 제 아이들에게 제 약점은 숨길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약점 가운데 장점으로 보여졌던 것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저의 믿음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 아이들은 제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그 말씀대로 살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작년에 쓴 '생사를 건 교회개혁'이라는 책에 에필로그로 쓴 글 중에 일부를 읽어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월요일마다 포항에 있는 한동대학교에 내려가 '크리스천 베이직'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한다. 나의 큰 아이와 둘째 아이가 한동대의 3학년과 2학년인데, 두 아이가 다 내 과목을 듣는다.
외부에서 많은 압력을 받아서 아주 힘들었던 주간에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올라왔더니 컴퓨터 메일에 큰 아이가 보낸 편지가 올라와 있었다.
'아버지 저 부열입니다. 오늘 강의 정말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주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려는 아버지의 치열한 삶의 투쟁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저도 하나님 보시기에, 아버지 보시기에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도록 노력할게요. 올라가시는 길 안전하도록 기도할게요. 몸조심 하시구요"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상은 이미 다 받았다. 더 이상 바랄 상이 없는 최고의 상을 받았다. 내 아들이 나의 이 싸움을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려는 치열한 삶의 투쟁'이라고 인정해 주었다. 됐다. 그러면 됐다. 누가 뭐라든 난 이젠 아무 상관없다.
이 이상의 상은 없다. 상은 다 받았다. 이제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시면 된다. 이제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면 된다. 나는 내 아들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려는 치열한 투쟁'이라고 인정해준 그 근사한 싸움에 정말 내 생명을 걸 것이다"

믿음이 바로 저희 가정을 구원하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저는 믿음으로 구원 얻는 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제가 그 증인입니다. 저에게는 많은 약점이 있지만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가 저의 온 삶을 구원하였습니다.

저는 제 목회에서 구원을 얻은 사람입니다. 목회적으로 볼 때도 저는 아주 부적격자입니다. 저는 성격적으로 목회가 맞지 않습니다. 저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 어울리는 것이 너무나도 힘든 사람입니다. 그러나 목회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 잘 어울려야만 하는 직업입니다. 그러나 저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 30분 이야기를 하면 3시간 잠을 자야 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사람 대하는 것이 제일 힘들고 어렵습니다.
저는 무척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사람입니다. 당회를 하기 전 저는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막상 회의를 시작하면 멀쩡하게 대범하게 밀고 나가지만 회의를 하기 전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본래 성격이 소극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저는 성격적으로 목회가 어려운 사람입니다. 부적격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제 목회에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받은 특별한 은혜입니다. 저는 저를 알기 때문에 제 목회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제가 제 목회에 실패하지 아니하고 저로서는 대 성공이라고 할 만큼 된 까닭은 믿음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도 다 마찬가지이지만 저 또한 목회를 믿음으로 하려고 노력합니다. 세상 상식을 따라 목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제 믿음인데 그 믿음이 저를 성공할 수 없었던 목회에서 구원을 얻게 하였습니다.
가정과 목회에서 저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가정과 목회는 제 세상입니다. 세상의 전부입니다. 제 천국은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도 있습니다. 저는 가정과 목회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날마다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가 응답된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오늘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셋째로 제가 생각한 응답과 감사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입니다.
저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집에서 자라난 사람입니다. 특히 아버님이 연세가 많으셨기 때문에 저는 어려서부터 '우리 아버지 세상 떠나시면 나는 어떻게 먹고사나?'를 염려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고 그 기도의 응답을 받아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저도 얼마든지 경제적으로 어려워 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정말 순식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저는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제가 누리고 있는 경제적인 안정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압니다. 저는 경제적인 안정이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는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신학을 졸업하고 전도사가 되어 처음으로 제대로 된 월급을 받기 시작하였을 때 제일 먼저 한 일 중에 하나는 적금을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적금 통장 둘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나 자신을 위한 적금 통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쓰려는 목적으로 든 적금통장이었습니다.
그 적금을 타서 어디에 썼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틀림없이 그 적금은 타서 본래의 목적대로 사용했습니다. 저는 정말 그 이후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격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제 나름대로는 믿음으로 살림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영적인 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일에도 적용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 포항에 있는 아이와 군대에 가 있는 아이에게 저의 수입과 지출을 상세하게 일러 주었습니다. 어떻게 돈을 쓰는가를 가르쳐 주기 위하여서였습니다. 저는 돈에 대하여 내 자식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제가 제 아이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경제적인 안정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주기도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저는 영적으로 구원을 얻었고 경제적으로도 구원을 얻었습니다. 저는 죽어서도 천당을 가게 되었고 살아서도 제 세상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가정과 목회에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밖에도 저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제가 감당할 수 없는 모든 악으로부터 저를 지켜주시고 건져주셨습니다. 그 또한 주기도문에 대한 응답이라고 저는 믿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저는 남은 여생 '내게 주신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고민하였던 시편 기자의 고민을 하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저는 그 해답도 주기문에서 얻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저는 열심히 주기도문을 외우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기도를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저의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려고 노력하려고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다 이 같은 복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며 '내게 주신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무엇을 보답할꼬' 고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동호  
 2000년 11월 05일  
 주기도문 (12)  
 마태복음6:9-13 
 
 
2000. 11. 5 설교방송 (설교본문)

주기도문 (12)
마태복음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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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설교는 비교적 어렵지 않습니다. 어느 때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을 쉽게 하는 은사를 주시지 않았나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설교의 표현은 쉬우나 그 내용은 대개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의 설교를 듣기는 쉬우나 살기는 어려운 설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담임목회를 하던 시절 계속 부담이 되는 설교를 하자 장로님 한 분이 찾아 오셔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세상을 모르셔서 그럽니다. 세상에서는 도저히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목사님이 계속 그렇게 설교하시면 교인들은 부담이 되어서 교회 못 옵니다. 일년에 한 두 번 정도만 그런 설교를 하시고 보통 때는 교인들을 위로하고 품어주는 설교를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있다가 그 다음 주일날 장로님께서 부담을 느끼시고 말씀해 주셨던 그 설교를 원고 하나 고치지 않고 다시 그대로 하였습니다. 좀 지나치지 않았나 하는 반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원칙적으로 잘못되지 않았다고 저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때 그 장로님의 말씀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정말 목사는 세상을 모릅니다. 그러니 은혜 받은 대로 겁 없이 설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절대로 만만치 않습니다. 최소한 80% 이상이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세상엔 세상 식이 있습니다. 그 세상 식을 따르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나름대로의 무서운 룰이 있습니다. 그 세상의 식은 하나님의 식과 서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심각한 갈등을 격을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식대로 이야기하고 생각하지만 세상에 나가서는 세상 식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갈등하다가 나중에는 포기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사랑하는 제 자녀들에게 유언으로 남길 단 한마디가 무엇이냐고 혹 누가 묻는다면 저는 서슴없이 '예수 잘 믿는 사람이 되라'라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저는 예수를 잘 믿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 유언을 자식들에게 남기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제가 그 말씀을 유언으로 남기게 될 때 우리 아이들이 세상에서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야 하는지 저는 압니다. 그것이 저는 마음이 아프고 아이들에게 미안합니다. 부모로서 너무 무책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식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놓지는 않고 무조건 말씀대로 살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참으로 무책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부모로서 자식에게 해 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살기 좋은 세상을 물려주는 것이 부모의 가장 중요한 책임입니다.
살기 좋은 세상이란 어떤 세상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좋은 세상을 그저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문명이 발달하여 편하게 사는 세상을 좋은 세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절대로 그것만으로 좋은 세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살기 좋은 세상은 천국입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뜻과 식이 통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 이 나라와 세상을 가장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길입니다. 여러분 정말 이 사실을 믿으신다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세상에 하나님의 뜻과 식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보다 더 좋은 세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사랑하는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그와 같은 세상을 물려주어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하여 우리는 모두 하나님 나라의 독립군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정시대 때 우리들은 조선 사람이면서도 조선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일본말을 하면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우리의 성을 빼앗기고 일본 성을 가져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희생을 무릅쓰고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싸운 분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독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나라 사람 중에 독립을 위하여 싸운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면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에게 독립을 주시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독립할 자격이 없는 민족에게 하나님은 독립을 주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독립을 위하여 싸우지 않는 민족에게 하나님은 독립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영적인 독립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세상의 말을 하면서 살아야만 합니다. 이와 같은 때 누군가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하나님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독립군과 같이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과 식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일이 일어나게 하여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과 식대로 마음놓고 살 수 있게 하여야만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왜정시대 때 친일파 노릇을 하며 사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왜정시대 때 친일파로 살면 모든 것이 편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영적인 친일파 노릇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완전히 세상 사람이 되어 세상 식대로 살면 편히 세상적으로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그보다 더 어리석고 악한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편히 살기 위하여 자기 자식을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마귀의 자녀로 살게 하겠다는 것보다 더 악하고 어리석은 일과 생각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 나라의 독립을 위한 영적인 전쟁을 포기하며 살수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가장 큰 문제는 이 중요한 영적인 전쟁을 포기 한 채 교회라고 하는 성 안에서만 열심히 큰 소리를 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을 위하여 참으로 중요한 곳은 교회 뿐 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 볼 때 교회보다 더 중요한 곳이 있다면 그곳은 세상입니다. 교회는 엄밀히 이야기하면 일주일 중에 하루를 사는 곳이고 세상은 일주일 중에 엿새를 사는 곳입니다. 우리의 삶의 대부분을 살아야 하는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지 않고 우리는 절대로 잘 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목사를 성직자라고 부릅니다. 목사는 성직자입니다. 그러나 목사만 성직자는 아닙니다. 교인들은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제가 목사만 성직자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니까 맞다 목사만 성직자가 아니라 장로도 성직자다라고 이야기하는 분이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게 아닙니다. 제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직업이 성직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목사도 직업으로 이해합니다. 그 대신 직업이라는 말을 매우 성스럽게 이해합니다.
성직자란 성스러운 직을 감당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성직자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성스러운 일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입니다. 예수 믿는 모든 사람의 직업이 성직이라고 함은 예수 믿는 모든 사람의 직업은 궁극적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쓰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든 직업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성직이라는 면에서 똑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직업은 어디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느냐는 책임과 소명에 따라 서로 다릅니다. 목사의 책임과 소명은 원칙적으로 교회입니다. 교인들의 책임과 소명은 원칙적으로 세상입니다. 목회자는 교회가 主이고 세상이 副입니다. 교인들은 세상이 主이고 교회는 副입니다. 다시 말해서 목회자는 교회의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았고 교인들은 세상의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만인제사장 설입니다.
어느 교수님 한 분이 복음과 상황이라고 하는 신앙잡지에 만인제사장인데 왜 목사만 교회에서 설교를 하느냐는 식의 글을 몇 년전에 썼습니다. 제가 그 주장에 반박하는 글을 실었습니다. 제 주장은 '왜 의사만 수술하느냐 나도 한번 째보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교수의 주장이 맞다면 '만인 의사설'과 '만인 약사설'도 주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주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교회의 제사장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세상의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동안교회의 제사장으로 그리고 여러분을 여러분이 살아가고 계시는 세상의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
몇 년 전 외국어대학교의 교수님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수님 중에 한 분이 학교 게시판에 자신을 예수 믿는 교수라고 밝히고 자신과 함께 성경공부 할 학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붙였습니다. 삼십 여명의 학생이 신청을 하였고 그 중에 아홉 명이 전혀 예수를 믿지 않는 학생이었습니다.
여러분 만일 제가 외국어대학교 게시판에 '나는 옆에 있는 동안교회의 김동호 목삽니다. 나하고 함께 성경공부 할 사람?'하고 광고를 붙인다면 과연 올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 몇은 올는지 모릅니다. 예수를 아주 열심히 믿는 학생 중에 혹 몇 명 정도 올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마도 예수를 전혀 믿지 않는 학생들은 오지 않을껍니다. '자기 교회나 열심히 하지 왜 여기까지 와서 설쳐?'하고 빈정거릴는지 모릅니다.
교회에서는 교수보다 목사가 더 힘이 있고 영향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목사보다 교수가 훨씬 더 힘이 있고 영향력이 있습니다. 목사는 교회의 제사장이지만 교수는 학교의 제사장으로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책을 여러 권 냈습니다. 기독교 출판계는 워낙 시장이 좁기 때문에 3만권 이상 인쇄하는 책을 쓰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도 3만권이 넘어서 책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날 저는 참으로 기뻤습니다. 그러나 그 날로 그 기쁨과 자랑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신문을 보니 김건모라고 하는 가수의 판이 300만장을 넘어섰다는 기사가 나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들 말로 게임이 되지 않았습니다. 김건모라고 하는 가수의 영향력은 저의 꼭 100배 였습니다. 저는 그날 '김건모가 예수를 잘 믿으면 좋은데...'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몇 년전에 그 가수가 세금 문제로 어려움을 격게 되어 잠시 활동을 중단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파워 인터뷰'라고 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와서 인터뷰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 가수가 인터뷰 중에 자기가 이렇게 어려움을 격게 된 이유가 성공했을 때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아서라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이야기를 그 날 인터뷰하면서 세 번이나 반복해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후에 자기는 가스펠 가수가 될꺼라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저를 보고 부엌에 있던 제 아내가 '당신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내가 다 안다' '당신 지금 김건모 데려다가 교회에서 컨서트하고 싶어서 그러지?'라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가시나무새라는 노래를 만들고 불러서 히트한 하덕규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지금 명성교회 안수집사입니다. 그 하집사님이 우리 교회에서 컨서트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가스펠 컨서트도 모르는데 대중가요 컨서트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 날 2000석이 넘는 우리 교회 본당이 꽉 찼었습니다.
컨서트가 끝난 후 제가 그 집사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집사님은 복음성가하지 말고 대중가요를 열심히 해'
많은 사람들은 은혜를 받으면 대중가요를 하지말고 가스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짧은 생각입니다. 문화계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면 우선 실력 있는 크리스천 가수들이 건정한 대중가요를 많이 만들고 불러야만 합니다. 가스펠은 교회용이지 세상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있는 가수 중에 유승준 이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그 가수가 아주 믿음이 좋은 가수랍니다. 얼마 전 컨서트 중에 자기 신앙간증을 하였고 신앙간증을 하다가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라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관중들이 다 찬송을 따라 불렀습니다.
그 가수가 자기는 앞으로 목사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가수를 한번 만나고 싶습니다. 만나서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하지 말고 끝까지 가수를 잘하라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교회 일만이 거룩한 일은 아닙니다. 목사만이 성직자는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교회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에만 열심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교회는 교인들을 교회로만 무조건 불러모으는 일을 좀 자제해야만 합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훌륭한 교회의 일꾼이 되게 하기보다는 훌륭한 세상의 일꾼이 되도록 훈련하고 가르쳐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 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동안교회를 귀히 여기시고 섬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살고 계시는 가정과 동네 그리고 직장과 세상을 더 귀히 여기시고 섬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은 가정과 동네 그리고 직장과 세상의 제사장으로 불러 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일해서 그곳에서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곳에 하나님의 식과 뜻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도록 기도하며 노력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선 편히 살겠다고 자기의 본분을 잊어버리고 세상 사람들과 같이 세상 식으로 살려고 하지 마시고 우선은 좀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식과 원칙을 고집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남보다 좀 천천히 가는 한이 있어도 남보다 좀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식대로 살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되어 바람에 날릴 때 여러분은 시냇가 심기운 나무와 같아져서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축복과 성공을 통하여 하나님의 식의 우월함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고 가르치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일은 조금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좁은 길을 가는 것과 같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과 같지만 반드시 생명과 구원과 축복의 길입니다. 승리와 성공의 길입니다. 교회에서만 아멘 아멘 하지말고, 교회에서만 거룩한척 하지 말고, 교회에서만 열심을 내지 말고 여러분의 사역지인 세상에서 열심히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 사랑하는 후손들에게 좋은 세상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살기 좋은 세상이란 하나님의 뜻과 식이 통하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하나님 나라의 독립군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상상하지 못하던 때에 광복이 왔듯이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때에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옵니다. 이루어집니다. 그때에 영적인 친일파 노릇을 하며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한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입니다. 한 목숨 십자가에 걸어도 좋을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그 동안 너무 하나님의 나라를 교회에만 세우려고 하여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 안에만 세워져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보다 세상에 세워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교회에 세우는 것은 저의 사명이요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가정과 세상에 세우는 것은 여러분들의 주된 사명이요 책임입니다. 날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주기도문을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면서 하나님 나라의 독립군으로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동호  
 2000년 10월 15일  
 주기도문 (10)  
 마태복음6:9-13 
 
 
2000. 10. 15 설교방송 (설교본문)

주기도문(10)
마태복음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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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지금 거의 석 달 가까이 주기도문을 가지고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천국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두 달이 넘게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천국에 대한 설교가 왜 이렇게 길어지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들의 천국에 대한 병적인 망각과 상실이 생각보다 심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한 두 번의 설교로 그 중한 병을 치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폐병은 요즘 의학으로 충분히 고칠 수 있는 병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십니까? 요즘도 그 고칠 수 있는 폐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오히려 점점 그 수가 더 늘어간다는 것이 폐병을 전문으로 치료하고 있는 의사들의 말입니다.
왜 폐병을 고칠 수 있는 약이 있는데 고치지 못하고 사람들이 죽어 가는지 아십니까? 그것을 약을 먹다가 조금 나아지면 계속 약을 먹는 것을 게을리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의사가 약을 먹으라고 하는 기간까지 계속 약을 먹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약을 끊기 때문이랍니다.
그렇게되면 폐병균이 약에 대하여 내성을 갖게 되어 결국에는 충분히 고칠 수 있는 병을 고치지 못하고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병을 완전히 치료하려면 병이 뿌리가 뽑힐 때까지 약을 먹고 치료를 받아야만 합니다.

이러 면에서 우리가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만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설교의 반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많은 목회자와 교인들이 설교가 반복되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매주일 다른 설교를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어떤 병에 걸렸든지 약을 하루치 밖에 투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아주 약한 병은 하루치 약을 먹고도 날 수 있지만 어떤 병은 여러 날 혹은 여러 달을 계속해서 먹어야만 날 수 있는 병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영적인 병에 대하여 매주일 약을 바꿉니다. 때문에 치료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약을 계속적으로 먹지 않는 사람들에게 약에 대한 내성이 생기듯 설교를 집중적으로 듣지 못하는 교인들에게 설교에 대한 내성이 생겼습니다.
앞으로 중요한 설교는 같은 주제를 가지고 집중적으로 반복하여 하고 듣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많은 설교를 다양하게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한 설교라도 깊이 듣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다른 설교도 마찬가지이지만 여러분 최근에 집중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주기도문 설교 특히 천국에 대한 설교에 집중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껏 예수를 믿어 오셨고 두 달이 넘게 천국에 대한 설교를 들어오셨는데 과연 여러분의 마음과 삶 속에 천국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이 있으십니까? 세상적인 환경과 상관없이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간증하고 찬송할만한 영적인 실력이 있으십니까?
그와 같은 삶이 될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고 노력하고 수고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말씀에도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하였는데 천국을 욕심내어 침노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결국 천국을 정복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공부를 하는 학생들 중에 공부를 잘 하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가 있습니다. 어떤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고 어떤 아이들이 공부를 잘 못하는지 아십니까? 많은 사람들은 머리가 좋은 아이들은 공부를 잘하고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공부를 잘 못하는 것으로 알고 계시는데 그 보다 더 중요한 요인이 있습니다.
그것을 교육학에서는 성취동기라고 하는데 무엇을 성취하고자 하는 동기가 강한 학생이 공부를 잘 하고 그와 같은 성취동기가 약한 아이들은 공부를 잘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과연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인가? 성취동기가 강한 사람이 예수를 잘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는 무엇을 성취하기 위하여 믿는 것인가? 그것은 구원 즉 천국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천국에 대한 성취동기가 강한 사람이 예수를 잘 믿는 사람입니다. 천국에 대한 성취동기가 약한 사람은 절대로 예수를 잘 믿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를 다니지만 예수를 참으로 잘 믿는 사람은 몇 사람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성적이 지극히 나쁜 낙제생들입니다. 열등생들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 중에 저와 여러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열등생으로 살아가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천국에 대한 성취동기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천국에 대한 욕심과 생각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오직 생각과 욕심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입니다. 세상적인 성공을 욕심내며 그것을 기도하며 예수를 믿으니 예수를 잘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성공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닙니다. 여러 번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 기독교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죄악시하지 않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말하는 것은 그것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의 삶에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고 그보다 덜 중요한 세상은 나중에 구하라는 것이 우리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제발 천국에 대한 욕심을 좀 가지세요. 천국의 삶을 살기 위하여 노력하고 기도하세요. 천국의 삶이 살아지지 않는 것에 대하여 좀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세요. 그리하여 정말 은과 금으로 살 수 없는 천국을 믿음으로 들어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세상과 상관없이 항상 기뻐하며 늘 감사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실 수 있기를 위하여 노력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천국으로 바뀌면 세상도 천국이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실 수 있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끊임없이 노력하세요. 포기하지 말고 될 때까지 노력하고 기도하세요. 그것은 절대로 어렵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것보다 쉽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노력해도 얻지 못하는 수가 있어도 천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먹고 노력하면 그리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천국을 주십니다.
여러분 마음이 바뀌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 제일 먼저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안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바뀐 것은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을 때까지 여러분의 노력과 기도를 멈추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제일 먼저 아는 것은 얼굴을 보고 압니다. 마음이 바뀌면 제일 먼저 얼굴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얼굴 표정과 색깔이 바뀝니다. 마음의 천국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얼굴은 그 표정과 색깔이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누구나 단번에 구별해 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얼굴을 남들이 보기 전에 여러분들이 먼저 보시기 바랍니다. 영어에 포커 페이스(poker face) 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포커를 하는 사람은 좋은 패가 들어와도 좋은 표정을 짓지 않고 나쁜 패가 들어와도 나쁜 표정을 짓지 않는답니다. 상대방이 얼굴을 보고 패를 잃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랍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얼굴은 해븐 페이스(heaven face)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의 얼굴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포커꾼이 되려면 포커 페이스를 가져야만 합니다. 예수를 잘 믿는 예수쟁이가 되려면 해븐 페이스를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바뀌는 것이 생각과 말입니다. 그리고 행동입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얼굴과 생각고 말과 행동을 보고 우리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얼굴과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천국을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천국을 특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볼 수 있도록 노력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그것이 가장 좋고 효과적인 전도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권면을 듣고는 예수 믿지 않을 사람들도 우리의 마음 속에 천국이 있어서 그 천국이 우리의 얼굴과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 속에 드러나게 되면 우리가 말로 권면하지 않아도 우리의 전도를 받게 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하신 후에 거기서 멈추지 마시고 여러분의 가정과 동네와 직장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시기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가정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 가정의 마음을 천국으로 바꿀 수 있도록 목표를 가지고 기도하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가정의 마음을 바꾸기 위하여 가족의 마음을 바꾸어야만 할 것입니다.
전염되는 병이 있습니다. 그러나 꼭 나쁜 병만 전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마음과 말과 행동도 전염이 됩니다. 천국도 얼마든지 전염이 됩니다. 사람은 비록 지금 타락하였지만 본래 마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들이기 때문에 누군가 아름다운 천국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옆에 있으면 그 천국의 마음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옆으로 옆으로 전염되게 되어 있습니다.
천국을 전염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아내에게 남편에게 부모에게 자식에게 형제에게 친척에게 천국은 전염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어떠한 상황에도 천국을 포기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족들 중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옥을 전도하고 전염시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그와 같은 일을 많이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족 중에 누군가 지옥을 전염시키려고 할 때 여러분이 천국의 마음을 가지고 싸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그 악을 이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가족과 가정의 마음을 천국의 마음으로 바꾸어 놓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경 쓰고 노력하지 않으면, 이것을 매우 중요한 영적인 전투라고 생각하고 치열하고도 끈질긴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누구나 어느 가정이나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정을 지옥으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들이 살아가시는 가정을 천국으로 만들어야만 합니다.
넓은 집에서 좋은 가구들을 들여놓고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그것으로 우리의 가정이 천국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정의 마음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가족들의 마음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가 먼저 우리의 마음 속에 천국을 심어 놓고 그 천국을 전파하고 좋은 의미에서 전염시키기 위하여 영적인 싸움을 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끈질기고도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만 합니다.

우리의 가정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천국으로 바꾸기 위하여 힘쓰고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세상의 마음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세상에는 세상 나름대로 마음이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마음은 전혀 천국적이지 않습니다. 삐뚤어지고 모나고 악한 마음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밤낮 정치와 경제만 생각하고 이야기합니다. 정치와 경제가 바뀌면 세상이 좋아지는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이 좋아지려면 세상의 마음이 바뀌어야만 합니다. 세상의 마음이 좋은 마음, 바른 마음, 아름다운 마음으로 바뀌어야만 합니다. 마음이 바뀌어야만 정치가 바뀝니다. 경제가 바뀝니다. 마음을 바꾸지 않고 정치와 경제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시궁창에 빠진 아이를 목욕시키지 않고 옷만 갈아 입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마음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아니고 세상의 마음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세요. 그러면 세상이 천국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면 높은 산과 거친 들도 그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세상의 마음을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가정과 세상에 심기 위하여 영적인 전투를 벌이시기 바랍니다. 마음과 마음의 싸움에서 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정의 마음을 바꾸고 세상의 마음을 바꾸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정과 세상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배우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식과 생각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 자식을 낳아 기른다는 것은 죄악입니다. 잔인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자녀들을 사랑한다면 세상을 바꾸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하여 싸우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골리앗만 하고 우리는 마치 다윗과 같이 작아서 싸워 이길 수 없을 것 같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싸움은 하나님께서 지원하시고 보급해 주시기 때문에 싸우면 결국 우리가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 과정이 비록 좁은 길을 가고 십자가를 지는 것 같아서 힘들고 어려울 뿐이지 결국 승리는 우리가 하게 되어 있습니다.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가정을 바꿀 수 있습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진 천국 같은 가정을 만들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리스도 예수의 생각과 방식이 통하는 천국 같은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천국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먼저 자신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심어 놓은 후 그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들이 살고 있는 가정과 세상에 넓혀 나가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동호  
 2000년 10월 08일  
 주기도문(9)  
 마태복음6:9-13 
 
 
2000. 10. 8 설교방송 (설교본문)

주기도문(9)
마태복음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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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거지가 성전 문 앞에서 구걸을 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이 그 걸인에게 '내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일어나 걸으라'라고 말하자 앉은뱅이는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일어나 걷습니다.
세상에 은과 금처럼 좋고 귀한 것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 중에 첫 번째가 돈이 아닐까 싶습니다. 돈은 좋은 것입니다. 돈은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것들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돈이 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돈은 앉은뱅이 거지를 하루아침에 부자로 만들 수 있습니다. 평생을 굽신거리며 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굽신거림을 받으며 사는 사람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돈은 능히 앉은뱅이 거지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돈이 좋은 것입니다. 돈이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돈을 좋아하고 돈을 벌려고 안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돈으로 할 수 없는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돈은 앉은뱅이 거지를 하루아침에 부자로 만들 수는 있지만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게 할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은과 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에게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우습게 여겼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다른 종교는 사람의 환경과 팔자를 고쳐 준다고 하는데 기독교 신앙은 사람의 환경과 팔자를 고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꼭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꼭 출세를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 중에도 부자가 있고 예수를 잘 믿는 사람 중에도 가난한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별 큰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는 은과 금이 우리에게 줄 수 없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앉은뱅이 거지를 부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게도 하고 뛰게도 할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은과 금이 앉은뱅이 거지의 환경을 바꿀 수 있었음에 반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앉은뱅이 거지의 인생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금이나 은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은과 금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있으면 좋지만 없다고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은과 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들에게 별로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 중에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출세하여 유명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돈과 권력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돈과 권력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좀 편하게 살 수 있게 할 뿐입니다. 그것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천국과 세상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앉은뱅이 거지를 부자 되게 하는 것까지 우리에게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앉은뱅이 거지를 일어나 걷게 하고 뛰게 하는 것을 우리에게 줄 수는 없습니다.
천국은 혹 앉은뱅이 거지를 부자로 만들어 주지 않을는지는 모릅니다. 천국은 그것을 별로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게도 하고 뛰게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축복 받은 사람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세상과 천국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천국을 사는 사람에게 세상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부하면 부한 대로 살고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삽니다. 천국을 사는 사람에게 가난과 부함은 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천국을 사는 사람에게 세상 환경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과 상관없이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천국을 사는 사람에게 세상은 그저 그렇구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도 은과 금은 없을 수 있습니다. 세상 권력은 혹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믿음이 있습니다. 은과 금으로 얻을 수 없는, 세상의 그 어떤 권력으로도 꿈도 꿀 수 없는 천국의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은과 금이 없다고 한탄하지 마세요. 가난을 못하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돈이 없는 것은 가난한 것이지 절대로 못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으로 크게 출세하지 못하여 권력이 없다고 명예가 없다고 위축되지 마세요. 기죽지 마세요. 세상 부러워하지 마세요.
믿음으로 천국을 사세요. 믿음으로 천국을 살면 세상 부자 하나도 안 부럽습니다. 믿음으로 천국을 살면 세상에서 출세한 사람 하나도 안 부럽습니다. 별것도 아닌 세상에서 세상적으로 잘 살려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에서 잘 살려고 힘쓰세요.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천국을 살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 별로 중히 여기지 않는 세상에만 관심을 가지고 세상 문 잘 열리지 않는 것을 놓고 안타까워하고 속상해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세상을 살려고 하지 마시고 천국을 살려고 힘쓰세요. 세상은 돈으로 사는 나라이지만 천국은 믿음으로 사는 나라입니다. 천국은 돈 없어도 믿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갈 수 있습니다. 천국은 세상적인 권력이 없어도 믿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갈 수 있습니다. 천국은 돈 암만 많아도 믿음 없으면 못 갑니다. 세상 권력이 아무리 많아도 믿음 없으면 절대로 못 갑니다. 믿으면 아멘 하세요.
돈 없어도 믿음 있으면 구원을 얻고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씀이 무엇인줄 여러분 아세요?. 그것을 아주 평범한 말로 말하면 돈 없어도 믿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누구든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도 믿으면 아멘 하세요.
사탄은 우리들에게 돈이 있어야만 사람은 행복해 질 수 있고 돈이 없으면 사람은 행복하게 살 수 없다고 속입니다. 세상적으로 출세하고 권력을 얻어야만 행복하고 그렇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속입니다.
돈이 없고 권력이 없는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이라고 속여 믿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국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불행한 사람이라고 확신하며 원망과 불평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게 하고 있습니다.
돈 좀 있고 세상적으로 출세 좀 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성공이라고 속이고 그러므로 너희들은 행복한 것이라 속입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답답한 것은 많은 신앙인들 까지도 그 속임수에 넘어가 그것을 성공인 줄로 알고 그것을 행복인 줄로 알고 앉은뱅이 부자로 만족하며 평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속지말고 일어나세요. 다른 세상을 살아 보세요. 다른 인생을 살아보세요. 그와 같은 세상과 인생을 여러분에게 없는 은과 금으로 풀려하지 마시고 이미 여러분에게 있는 믿음으로 풀어 보세요. 살아보세요.

자기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으십니까? 자기 스스로를 실패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자신에게는 낙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나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자포자기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속으신 것입니다. 사탄에게 속으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절망하고 낙심하는 환경들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환경이란 참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환경을 바꾸기 위하여 힘쓰고 노력하는 것은 절대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힘써서 그 환경을 바꾸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 환경을 바꾸시기 전에 먼저 아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환경이 바뀌어야만 행복해 질 것이라고 생각하시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환경이 바뀌기 전에도 얼마든지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환경이 바뀌기 전에 환경이 아닌 믿음으로 행복해지지 않으신다면 정작 환경이 바뀌어도 여러분은 절대로 행복해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환경을 바꾸려고 힘쓰세요. 그러나 환경을 바꾸기 이전에 환경 때문이 아니라, 세상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먼저 행복하게 사시는 것을 훈련하고 연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밤낮 괴롭게 살지 마시고 기쁘게 사세요. 믿음으로 기쁘게 사는 법을 연습하세요. 밤낮 불평과 불만 속에서 하나님과 세상과 사람을 원망하며 살지 마시고 작은 일에도 감사하며 사세요.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사람에게 감사하며 사세요. 부모에게 감사하고, 자식에게 감사하고, 남편에게 감사하고, 아내에게 감사하고, 직장 동료에게 감사하고, 이웃에게 감사하며 살아보세요. 밤낮 미워하고 시기하며 살지 마시고 사랑하며 사세요. 사랑 받는 것을 조금만 뒤로 미루시고 먼저 사랑을 베풀며 사세요. 생각하면 사람 다 부족하지만 그것 조금만 잊어 버리시고 먼저 사랑하세요. 사랑을 베풀어 보세요.
사는 식을 바꿔 보세요. 세상 식으로 살지 마시고 하나님 식으로 한번 살아 보세요. 가정에서 직장에서 동네에서 한번 그렇게 살아 보세요. 설교를 통해서 주신 말씀을 그냥 듣기만 하지 마시고 한번 세상에서 적용해 보세요. 세상과 반대로 한번 살아 보세요.
욕심에 눈 어두어 부끄러움과 수치 우습게 여기고 막살지 마시고 세상 욕심 한번 과감히 내 버리고 반듯하게 살아보세요. 정직하게 살아보세요. 아름답게 살아보세요. 세상 사람들에게까지 칭찬 들으며 한번 살아보세요. 그런 것들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하는 것 아닙니까? 믿음으로 기도하고 노력하며 그렇게 살면 얼마든지 이 땅에서도 천국의 삶을 살게 될 줄로 저는 믿습니다.

우리 한번 지금 당장 실험을 해 볼까요? 여러분 옆에 혹시 남편이나 아내, 부모나 자식 아니면 형제끼리 앉아 계신 분 계세요. 서로 한번 손을 잡고 눈을 마주 보세요. 그리고 소리를 내서 사랑한다고 이야기해 보세요. 할 수 있으면 한번 안아 보세요. 정말 한번 그렇게 해 보세요.
서로 손을 잡고 눈을 감으신 후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 이렇게 좋은 아내를 만나 함께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좋은 남편을 만나 함께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좋은 부모를 만나고 좋은 자식을 만나 함께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해 보세요.
옆에 있는 분 누구의 손이나 한번 잡으시고 그를 위하여 한번 하나님께 축복하는 기도를 해 보세요. 무엇을 위하여 기도해 주면 좋겠는가를 물어 보세요.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그를 위하여 기도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세상적으로 바라는 것들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어도 그것과 전혀 상관없이 천국이 열리는 것을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느낄 수 있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는 환경을 바꾸려고 하시지 마시고 사는 식을 바꿔 보세요. 마음을 바꿔 보세요. 생각을 바꿔 보세요. 행동을 바꿔 보세요. 천국이 여러분 눈앞에 있습니다. 손앞에 있습니다. 그것을 그냥 믿음으로 붙잡으세요. 그리고 그 천국을 그냥 사세요.

없는 돈 가지고 안달하며 살지 마시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이미 주신 믿음을 가지고 행복하게 사세요. 돈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천국을 사세요. 크게 바꿀 수 없는 환경을 가지고 마음 졸이고 썩이며 살지 마시고 여러분이 이미 가지고 있는 믿음을 키우고 잘 활용하여 기쁘게 사세요. 세상 좋은 환경에서 사는 어떤 사람도 절대로 살 수 없는 천국을 사세요. 세상 사람들 부러워하지 말고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 부러워하며 살게 하세요. 믿음으로 천국 사는 것이 전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 부러워하게 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초대 교회가 바로 그와 같은 전도로 인하여 부흥한 것이 아닙니까?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먼저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를 기도하라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천국은 돈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사는 것도 아닙니다. 천국은 오직 믿음으로만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돈을 주시지는 않으셨지만 우리 모두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물질의 부요한 자가 되기를 힘쓰기 이전에 먼저 믿음의 부요한 자가 되기를 힘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천국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와 같은 삶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믿음의 소중함을 증거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행복할 자격이 있습니다. 항상 기쁘게 살고 늘 감사하며 살며 아름답게 근사하게 훌륭하게 살 능력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앉은뱅이 부자는 꿈도 꾸지 못하는 삶을 살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제 까지는 사탄에게 속아 불행한 삶을 착각하며 살아왔지만 오늘부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보혈을 값으로 열어 주신 천국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아 세상의 앉은뱅이 부자들이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동호  
 2000년 10월 01일  
 주기도문 (8)  
 마태복음6:9-13 
 
 
2000. 10. 1 설교방송 (설교본문)

주기도문 (8)
마태복음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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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잔다는 뜻의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상이몽 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 천명을 먹인 기적이 있은 후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따랐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을 자신의 왕으로까지 섬기려 하였습니다. 저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려 하였던 이유는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먹고사는 문제 즉 경제 문제가 해결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보다 훨씬 더 귀한 것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저들을 피하여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었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앉은뱅이을 일으키시고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시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을 살리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병과 장애를 가지고 사는 것이 너무나 불쌍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당신의 능력으로 저들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들의 병을 고쳐주신 후에 아무에게도 가서 이야기하지 말라는 말씀을 자주 하시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신 일이 퍼져 나가는 일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당신이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었다는 사실이 퍼져 나가는 일을 원치 않으셨을까요?
예수님이 겸손하셨기 때문일까요?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오해 할 것을 두려워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병 고침을 받고 건강하게 사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사실 건강의 문제는 경제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돈을 잃은 것은 조금 잃은 것이요 건강을 잃은 것은 많이 잃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건강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이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우리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따른 많은 사람들 중에는 단순히 병 고침을 위하여 예수님을 따른 사람도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것도 동상이몽이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고사하고 삼 년 동안을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며 살았던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그와 같은 동상이몽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한 자리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순간까지도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참으로 구제불능 적인 동상이몽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건만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이루시고 승천하시건만 제자들의 생각과 관심은 오직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만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동상이몽은 참으로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평생 예수를 헛믿게 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헛믿지 않고 바르게 믿기 위하여 그와 같은 신앙의 동상이몽이 없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와 같은 심각한 신앙의 동상이몽이 우리들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천국을 주시고 싶어하시는데 우리들은 그 천국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별로 중요하지 않는 세상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을 좇아 다니고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들볶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가장 답답해하시는 것입니다. 안타까워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라" "그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에게 있는 신앙의 동상이몽을 버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라 가르쳐 주시셨습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도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오늘 무슨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셨습니다. 여러분은 요즘 무슨 꿈을 꾸며 사십니까? 여러분의 그 기도와 관심과 꿈은 하나님의 관심과 일치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하나님 나라인데 여러분의 궁극적인 관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입니까 아니면 세상입니까? 오늘도 여러분들은 무슨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이 성전에 나오셨습니까?
우리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입니다. 구원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고 천국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은 많은 신앙인들이 기독교의 궁극적 목적인 구원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삶을 한번 바꾸어 보십시다. 세상 욕심은 잠시 뒤로 미루고 우리의 관심과 욕심을 하나님 나라에 두어 보십시다. 세상을 살려하지 말고 천국을 살려해 보십시다. 우리의 삶의 목적을 세상에 두지 말고 천국에 두십시다.
내 마음과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기도와 소원을 가지십시다. 내 사랑하는 자녀와 가족의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 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기도와 소원을 가지십시다.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십시다.

예수님 말씀에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욕심낸다고 다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를 하지만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사람은 그 중에 일부일 뿐입니다.
부자는 언제나 몇 사람 뿐 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빠듯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한 출세한 사람은 몇 사람 뿐 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세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닫혀 있지만 천국은 많은 사람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세상 보다 중요한 천국의 문이 열려 있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천국의 문을 열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천국은 그냥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적으로 잘 살려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권력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돈이 있으면 잘 사는 것이고 돈이 없으면 못 사는 것입니다. 권력이 있으면 잘 사는 것이고 권력이 없으면 못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천국은 그것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돈은 천국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권력도 천국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돈으로는 천국에 못 갑니다. 천하에 없는 어떤 권력으로도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천국은 돈 없어도 됩니다. 권력 없어도 됩니다. 천국은 돈으로 가는 나라가 아니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입니다. 마음으로 가는 나라입니다. 생각으로 가는 나라입니다. 믿음으로 마음과 생각을 바꾸면 그리고 살아가는 식을 바꾸면 놀랍게도 여러분이 있는 그 자리에서, 그 환경과 여건 속에서 그대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과 나는 간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업이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생각이 문제입니다. 사는 식이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식을 바꾸면 놀라운 세상이 열립니다. 천국이 열립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식을 바꾸면 혹 우리의 삶이 가난하다고 하여도, 그리고 가난하여 남들이 보고 사는 세상 재미 하나도 못보고 산다고 하여도, 남들처럼 호의호식하지 못하고 산다고 하여도 여러분 세상 재미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천국의 기쁨이 충만한 삶을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사는 식을 바꾸면 혹 우리의 삶이 가난하여 세상 사람들처럼 편히 살지 못하고 옹색하게 불편하게 산다 하여도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 가운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뉘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찬송하며 살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살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식을 바꾸면 세상의 부요한 사람들 세상적으로 출세한 사람들 서로 속이고 다투며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피곤한 삶을 살아갈 때, 그 피곤하고 고달픈 세상을 잊기 위해 술 취하고 방탕한 삶을 살아갈 때, 그리하여 자신의 삶과 가정을 서서히 파괴시키며 죽어 가는 삶을 살고 있을 때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잔이 넘치는 삶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천국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가난하고 실패한 사람들만 천국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으로 부요하고 성공한 사람들도 천국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의 있는 것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천국을 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잘못 되도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도 얼마든지 세상적으로 가난할 수 있습니다. 혹 실패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이 절대로 실패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문은 수시로 닫히고 그 닫힌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중에 얼마 되지 않지만 천국의 문은 항상 열려 있고 누구나 그 문으로 들어가려고만 하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열어 놓으신 문을 닫을 사람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세상을 살지 말고 천국을 사십시오. 세상 걱정과 욕심을 다 버리고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세상에 대한 욕심을 다 버리십시오. 저와 여러분의 삶은 세상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대한 욕심을 가지십시오. 천국을 살기로 작정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고 노력하십시오. 기쁘게 사십시오. 행복하게 사십시오. 서로 사랑하며 사십시오. 서로 도우며 사십시오. 늘 감사하며 사십시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리세요. 여러분 말씀 속에 천국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설교 말씀을 듣다가 은혜를 받으면 말씀이 그냥 천국 됩니다. 말씀의 은혜를 사모하세요.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메듯이 말씀의 은혜를 사모하세요. 말씀의 은혜 속에 천국이 열린다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세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길을 삼고 식을 삼으세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여러분의 마음과 삶 속에서 이루어지며 즉시 여러분의 마음과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세요.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세요. 그리고 기도한 것을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세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면 천국이 열립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세요. 꾀와 요령으로 세상을 살려하지 말고 말씀과 기도로 세상을 살아보세요. 세상이 천국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찬송을 해 보세요. 교회에서만 찬송을 부르지 말고 집에서나 직장에서 찬송을 불러 보세요. 좋은 찬송을 배워 보세요. 요즘 얼마나 좋은 찬송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찬송에 은혜가 있습니다.
찬송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찬송 중에 천국을 경험하게 됩니다. 찬송 중에 은혜를 받고 천국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의 삶이 바뀌게 됩니다. 표정이 바뀌게 됩니다.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저는 찬송 중에 천국을 경험해 보았습니다. 신학대학 기숙사에서 밤새도록 찬송을 부르며 친구들이 잠을 깰까봐 불도 켜 놓지 못하고 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누워서 속으로 찬송을 부르며 눈물로 침상을 적셨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세상은 알지도 못하고 줄 수도 없는 천국의 삶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입을 여세요.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세요. 돈으로도 갈 수 없고 권력으로도 열 수 없는 천국의 문이 열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세상의 문은 닫혀 있습니다. 열려고 해도 쉽게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힘써 열려고 하면 혹시 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을 열었다고 해도 생각처럼 우리의 삶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문은 열렸을 때나 닫혔을 때나 사실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문은 열려 있습니다. 누구나 열려고만 하면 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문을 열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문을 열려고 힘쓰시기 이전에 먼저 천국의 문을 열려고 힘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부요한 자가 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은혜를 사모하고 늘 말씀대로 순종하며 늘 마음의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늘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천국의 삶을 체험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천국을 침노하는 자가 되어 이 땅에서도 믿음으로 천국을 정복하여 어디서나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서로 사랑하며 천국의 삶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동호  
 2000년 09월 24일  
 주기도문 (7)  
 마태복음6:9-13 
 
 
2000. 9. 24 설교방송 (설교본문)

주기도문 (7)
마태복음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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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짧은 인생을 실패하지 아니하고 성공적으로 살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 몇 가지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지혜와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두 가지가 없다면 우리는 절대로 인생의 경주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실패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꾀와 요령으로 살려고 하지만 성공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지혜로 살려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하고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정확하고 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입니다. 정확하고 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이 없다면 그는 그 다음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다 헛일입니다. 색맹이 정확한 색을 볼 수 없고 음치가 바른 음을 낼 수 없듯이 정확하고 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바른 삶을 살아 낼 수 없습니다. 그만큼 정확하고 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 중요한 판단력과 분별력을 주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승리하는 삶과 아름다운 인생을 욕심내고 꿈꾸는 사람은 반드시 지혜에 대한 욕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저울이 정확하지 않으면 정확한 무게를 잴 수 없고 자가 정확하지 않으면 정확한 거리를 잴 수 없듯 지혜가 없어서 정확한 분별력과 판단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아름답고 훌륭한 인생을 살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훌륭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욕심내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지혜에 대한 욕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이 꾀와 요령으로 인생을 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실패하는 길입니다. 꾀와 요령으로는 절대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지혜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지혜를 얻기 위해 기도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라면 그 기도와 노력으로 말미암아 정말 금보다 귀한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혜만큼이나 우리의 인생과 삶에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기입니다. 아무리 지혜가 있어도 그 지혜대로 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길을 알아도 가지 않으면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지혜를 가지고 그 지혜대로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 모릅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혜대로 세상에서 사는 것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지혜가 없어서 잘 못 살기도 하지만 지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지혜대로 살지 못하여 잘 못 살고 실패하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지혜를 가지고도 그 지혜대로 살지 못하는가? 왜 그것이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가?
그것은 세상과 사람들이 타락하였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혜대로 살지 않고 악한 꾀와 요령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세상에서 지혜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리만큼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그와 같은 세상에서 지혜를 가지고 지혜대로 살아가려면 무엇 보다 필요한 것이 용기입니다. 세상을 거스리고 대적하는 용기와 힘이 있어야만 이 세상에서 지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비로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Paul Tillich이라고 하는 신학자가 존재의 용기(Courage to be)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존재하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이 용기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책제목을 존재의 용기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얼마나 예리한 통찰력인지 모릅니다.
용기 없이 바르게 살 수 없습니다. 용기 없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지혜만큼이나 우리의 인생과 삶에서 중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용기를 얻기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지혜와 용기는 반드시 우리에게 있어야만 합니다. 둘 중에 하나만 있으면 안 됩니다. 반드시 둘을 함께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용기 없는 지혜와 지혜 없는 용기는 아무 쓸데 없는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참으로 여러분과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신다면 그리하여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짧은 인생의 경주에서 진정으로 승리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신다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지혜와 용기를 중히 여기며 그것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줄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소중한 그 지혜와 그 용기를 어디서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지혜와 용기를 얻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불의한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지혜와 용기를 가로막는 것은 바로 세상에 대한 욕심입니다. 그 욕심이 우리를 어리석게 하고 그 욕심이 우리를 비겁하게 합니다.
세상과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지혜로울 수 없습니다. 용기 있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정말 1%의 가능성도 없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승리하는 인생을 살려고 하는 사람은 지혜와 용기를 가져야만 합니다. 지혜와 용기를 가지려면 그 무엇보다도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만 합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만 버리면 얼마든지 지혜도 얻을 수 있고 용기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혜와 용기만 있다면 누구나 자신의 인생의 경주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이 우리에게서 가장 힘들고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가 다 원죄를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런데 성경은 죄의 뿌리가 바로 욕심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죄를 세상적인 것에 대한 본능적인 욕심이라고도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 본능을 버리고 꺽는다는 것이 어떻게 말처럼 쉬운 일이겠습니까?

설교 중 여러 번 사용한 예화 이지만 오늘 말씀에 가장 적절한 예화 라고 생각되어 다시 사용하려고 합니다. 청량리 중앙교회 임택진 목사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청량리 중앙교회가 주일날 교인이 약 200명 정도 출석하는 교회였을 때 약 800명 정도 출석하는 교회에서 청빙이 왔었습니다. 지금도 800명이면 작지 않은 교회인데 당시로서는 무척이나 큰 교회였습니다.
어느 정도 목사님 마음이 움직이셨던 같았습니다. 그것을 눈치챈 장로님들이 목사님을 가시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그러면서 장로님 한 분이 '목사님 큰 교회에서 생활비를 많이 드려서 그러십니까? 우리도 다음달부터 목사님 생활비 올려 드리겠습니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장로님들에게 ' 소 시장의 묶어 논 소는 부르는 사람에 따라 값이 올라도 가고 내려도 가지만 나는 소 시장의 소가 아닙니다'라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 그 때 그와 같은 말씀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저는 얼마나 감동했었는지 모릅니다. 나도 평생 소 시장의 소 노릇하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을 얼마나 마음으로 굳게 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이 참으로 쉽지 않았습니다.
77년도 신대원 졸업반 때 큰 메리야스 공장을 하시던 장로님으로부터 설교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 공장에는 직장 예배가 있었는데 그 예배에 와서 설교를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설교를 하였더니 교통비를 하시라며 봉투를 주셨습니다. 거기에는 7천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77년도에 7천원은 적지 않은 돈이었습니다. 가난한 신학생에게는 한달 용돈이 될만한 돈이었습니다.
장로님은 그 후로 거의 한 달에 한번 이상 저를 강사로 초청해 주셨습니다. 그 일로 인해 저는 갑자기 용돈이 궁하지 않은 신학생이 되었습니다. 어느 주일날 그 장로님의 부인 되시는 권사님이 저에게 회사의 직원들이 저의 설교를 좋아한다며 이번 달에는 네 번을 계속해서 올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갈 수 있겠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을 할 때 제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사칠은 이십 팔'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저 자신에게 참으로 실망을 하였었습니다.
소 시장의 소 노릇하지 않겠다는 감동이 있었고 그 감동은 진심이었지만 그 진심보다 더 무서운 본심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는 '사칠은 이십 팔'이었습니다. 돈과 세상에 대한 욕심이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은 우리의 본심입니다. 본능입니다. 그것을 버리고 끊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 원죄적 본능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리석어지고 비겁해 집니다. 그리고 그 어리석음과 비겁함으로 인하여 부끄러운 삶, 실패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과연 지혜롭고 용기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끊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아주 효과적으로 끊고 버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을 보는 것입니다.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은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곳입니다.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천국을 볼 뿐만 아니라 사는 사람은 절대로 세상에 대하여 미련과 욕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올 1월 달에 케냐에 가서 우리 청년들이 봉사하고 선교하는 현장을 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거의 원시 수준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의 생활은 제가 한국에서 생활하는 것과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케냐 원주민들의 생활에 대하여는 조금도 욕심이 없습니다. 미련이 없습니다. 얼마든지 버릴 수 있고 얼마든지 떠날 수 있습니다. 혹시 저들을 사랑하고 저들에 대한 선교적 소명 때문에는 그곳에 갈 수도 있고 저들과 함께 살수도 있을는지 몰라도 저들의 생활과 삶이 욕심나서 그곳에 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있는 줄도 모르는 케냐 원주민들이 있다면 저들은 그 하찮은 것들에도 욕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도적질하고 거짓말하고 심지어는 살인까지 할는지 모릅니다. 그것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참으로 죽기보다 더 어려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들도 저와 같은 문명 생활을 하게 된다면 그 순간부터 그 하찮은 것에 대한 욕심은 배설물처럼 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천국을 바라보고 천국의 삶을 살게되면 세상을 버릴 수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을 끊을 수 있습니다. 세상과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끊을 수 있으면 지혜가 생깁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보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하나님의 지혜를 갖게 되면 정확한 분별력과 판단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세상 욕심을 버리면 용기가 생깁니다. 우리를 향한 세상의 공갈은 우리가 욕심내는 세상을 빼앗겠다는 것인데 세상에 대한 욕심이 없는 사람이 세상을 빼앗겠다는 말에 겁을 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세상에 가장 무서운 사람은 욕심 없는 사람입니다. 욕심 없는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을 바라봄으로 세상에 대한 욕심을 끊고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 사람이 달라집니다. 아름다워 집니다. 훌륭해 집니다. 정말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사람들과 특히 자녀들에게 사랑 받고 존경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특히 자녀에게 사랑을 받고 존경을 받게 되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세상이 아름다워집니다. 정말 초막에 살거나 궁궐에 살거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떠나 세상을 보면 세상도 아름답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세상을 보면 세상도 천국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얼마나 중요한 기도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도만 하면 누구에게나 임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것들은 원해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것들은 원해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얻지 않는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얻지 못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과 욕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마음과 가정과 삶 속에 임하게 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질과 명예와 권력을 정말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는 근사한 능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세상 욕심을 버리게 되면 지혜가 생깁니다. 용기가 생깁니다.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면 훌륭한 인격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존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삶이 주는 만족은 세상이 주는 만족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은 만족을 누리게 되면 세상이 변합니다. 세상이 천국 됩니다. 세상은 더 이상 큰 의미 없습니다.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부하면 부한대로, 높으면 높은대로 낮으면 낮은대로, 초막에 살든 궁궐에 살든 아무 상관없이 천국이 됩니다. 세상과 나는 간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는 놀라운 삶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를 염려하고 기도하기 이전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 마음과 가정과 삶 속에 임할 수 있기를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삶 속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자유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고 세상으로부터 자유하는 삶을 살므로 지혜롭고 용기있는 사람이 되어 세상에서도 승리하는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도 천국을 사는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김동호  
 2000년 09월 10일  
 주기도문(6)  
 마태복음6:9-13 
 
 
2000. 9. 10 설교방송 (설교본문)

주기도문(6)
마태복음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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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일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차례대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고 있으며 요즘 최근에는 그 중에서도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가 받는 복은 이루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수 많은 복중의 단연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복은 하나님 나라의 복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구원의 복은 구원의 복을 제외한 그 모든 복을 합한 것 보다 더 크고 중요합니다.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구원을 제외한 모든 복을 다 받았다고 해도 구원을 얻지 못했다면 그는 실패한 사람이요 구원을 제외한 복을 다 놓쳤다고 해도 구원을 얻었다고 그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는 종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면에서 다른 미신적인 종교와 구별됩니다. 미신적인 종교의 관심은 세상입니다. 저급한 종교일수록 세상적인 욕심을 채우는 것만을 목적으로 합니다. 흔히 사람들이 고급 종교라고 하는 제법 수준이 있는 종교는 인간답게 사는 바르고 의로운 삶을 가르치고 목적으로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종교를 가지고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기도하라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구원을 얻게 되는 길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으로 들어간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도 율법과 행함을 중히 여기는 종교입니다. 계명을 가지고 있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계명을 지키고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른 종교와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차이에 우리 기독교의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계명을 지키고 행함이 중요하지만 구원은 행함으로 얻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얻습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자신의 구주로 인정하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시 우리의 주인이시고 아버지이신데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우리 인간들이 그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자기와 세상의 주인이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사망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인하고 탕자처럼 하나님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당신과 우리의 관계를 끊지 아니하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만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을 자신의 구주와 아버지로 영접하고 고백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가 아무리 탕자와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상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고 영접하는 것으로 완벽하게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은 그것을 우리들에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계명은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야 할 삶의 규범이지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는 삶의 규범은 아닙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영접하는 것으로 구원은 완성됩니다. 이 사실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말씀하면서 그것을 '자녀가 되는 권세'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의 '권세'라는 표현에 유의하여야만 합니다. 자녀가 되면 권세가 있습니다. 여러분 자녀의 권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집이 자기 집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친구를 집으로 데려올 때 친구들에게 무어라고 하면서 데려오는지 아십니까? '우리 집 가자'입니다. 여러분 '우리 집'이라는 말의 뜻이 '자기 집' 다시 말해서 '내 집'이라는 것을 아시지요?
엄밀히 이야기하면 자기 집이 아니라 아버지 집이지요. 그 집을 사는데 아이는 단돈 10원도 보탠 적이 없지요. 등기부 등본을 비롯하여 모든 서류가 다 아버지 이름으로 되어 있고 모든 법적인 권리가 아버지로 되어 있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버지의 자녀에게 아버지 집은 곧 자기 집입니다. 누구도 그것에 대하여 시비하지 않습니다. 부정하지 않습니다.
자녀가 되면 아버지의 집이 자기 집이 됩니다. 아버지의 것이 다 자기의 것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자녀의 권세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를 영접하면 우리는 즉시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의 나라와 집이 우리의 집과 나라가 되는 복을 자동으로 받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자녀의 권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2절이 그것을 자녀의 권세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죄인들입니다. 성경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는 다른 사람과 달리 죄인이 아니고 의로운 사람이겠거니 착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의 의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중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틀림없이 죽어서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왜 인줄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한 우리를 당신의 자녀가 아니라고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때리시고 책망하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를 버리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값없이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값을 우리가 치루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치루셨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치루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따로 값을 치루지 아니하고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자녀의 권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게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심과 사람이 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은 생명입니다. 온 천하를 얻는다고 하여도 생명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에게 있으셔서도 가장 귀한 것이 있으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이 우주에서 가장 것입니다. 세상에 그 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생명을 우리의 구원의 댓가로 지불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되심과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 엄청난 값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지불하셨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우리의 구원과 생명을 위하여 지불할 아무것도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믿음 하나만을 가지고 값없이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지불하신 값이 너무 크고 많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떤 죄인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자리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신 십자가에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생명을 버리심이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과 자리를 버리셨습니다. 그 상상할 수 없는 댓가를 치루셨음으로 우리는 단지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만으로 엄청난 구원과 복을 값없이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이사야 53장의 말씀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제가 이사야 53장의 말씀을 읽어 드릴터인데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 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 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 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 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아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기독교의 궁극적인 소망은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그 하나님 나라에 모두 들어갈 수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댓가를 지불하심으로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즉 누구나 하나님의 집과 나라를 자신의 집과 나라로 삼으실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값을 치루심으로 우리는 누구나 다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죽어서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그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 나라는 돈이 있어야 하고 권력이 있어야하고 명예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그런 것들이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믿음만 있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고 누릴 수 있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은 내가 원해도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내가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나라는 예수를 믿어도 얼마든지 잃어버릴 수 있지만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는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 나라를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찮은 세상에 얽매여 울고불고 하지 말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를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께 좀 더 집중하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믿음의 부요함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지불하신 구원의 삶을 마음껏 누리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들어가 살기만 하면 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외면하고 세상에만 몰두하며 사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우셔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삶을 욕심내라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삶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과 관계없습니다. 돈과 상관없습니다. 권력과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만 하면 누구나 들어가 살 수 있는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이 있습니다.

찬송가를 보면 그와 같은 삶을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간증적인 찬송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469장 찬송입니다.

1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2 내 맘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히인 보배로다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 자 그 누구랴 안심일세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3 내 영혼에 평화가 넘쳐 남은 주의 축복을 받음이라 내가 주야로 주님과 함께 있어 내 영혼이 편히 쉬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4 이 땅위의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 다 예수를 친구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저는 이 말씀과 찬송을 생각하면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에게 하였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내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은과 금으로 살 수 없는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값으로 치루시고 우리를 위하여 사셨습니다. 은과 금으로 비교할 수 없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부요함을 가지고 이 땅에서 천국을 살고 죽어서도 천국에 가시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김동호  
 2000년 09월 03일  
 주기도문 (5)  
 마태복음6:9-13 
 
 
2000. 9. 3 설교방송 (설교본문)

주기도문 (5)
마태복음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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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금욕주의자도 아니고 더군다나 염세주의자는 더더욱 아니지만, 그리고 세상의 맛을 알고 세상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 세상 유혹에 대하여 그 누구 못지 않게 약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 중에 하나이지만 그래도 제 마음의 가장 큰 소원은 이 세상에서 원 없이 한번 살아보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면서도 그것도 아주 열심히 살면서도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도 낙오하지 아니하고 성공하면서도 이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이 세상에 대하여 아주 자유로운 삶을 살아 보는 것입니다.
정말 쉽지 않겠지만 저는 세상에 얽매여 세상 욕심 때문에 온갖 죄를 다 지으며 추하게 부끄럽게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며 싸우며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정말 잘 살고 싶습니다. 근사하게 살고 싶습니다. 아름답게 살고 싶습니다. 훌륭하게 살고 싶습니다. 반듯하게 살고 싶습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평화롭게 아름답게 세상과 사람과 자연과 동물들을 사랑하며 그리고 세상과 사람과 자연과 동물들의 사랑을 받으며 저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다 하나님 부르시면 아무런 미련 없이 기쁨으로 정말 하늘에 있는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높은 산에 살아도 거친 들에 살아도, 초막에 살아도 궁궐에 살아도 그것과 아무런 상관없이 그 어디나 하늘이라 노래하며 사는 꿈같은 삶이 되리라 믿어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궁궐에서 사는 삶을 자랑하지 않고 그러나 부인하지도 않고 초막에서 사는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러나 그것도 자랑하지 않고 부한데도 처할 줄 알고 비천한데도 처할 줄 알며 궁궐에서도 궁궐 때문에 천국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천국을 살고 초막에 살아도 초막과 상관없이 하나님 때문에 천국을 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그런 삶이 부럽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제 삶과 인생의 목적이요 목표입니다. 저는 그 때문에 예수를 믿습니다. 예수를 믿는 목적은 바로 그 세상에 대하여 자유하며 그 어디서나 하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자유 하는 삶을 살기에 구태어 세상을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을 부정한다는 것은 엄밀히 이야기하면 완전히 세상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자유 하는 삶은 세상에 얽매이지 아니 할 뿐만 아니라 얽매이지 아니함으로 구태어 떠나려 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대단한 것으로 여기지 않지만. 그리고 그와 같은 것들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고 사는 것을 우습게 여기지만 그러나 세상 그 자체를 우습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나름대로 세상을 귀히 여깁니다. 그리하여 세상에서도 열심히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공부도 하고 돈도 법니다. 그리고 출세도 합니다. 그와 같은 것들을 위하여 열심히 노력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것들을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것들을 보다 중요한 어떤 것을 위한 좋은 도구로 다시 말해서 바울의 로마시민권과 같은 좋은 도구로 사용합니다. 그와 같은 것들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도구로 삼음으로 세상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열심이지만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에 대하여 자유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이 돈을 벌면 돈이 바르게 흐르지 못하여 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궁핍의 어려움을 격어야만 하겠기에 열심히 돈을 법니다. 그리고 그 열심히 벌어 모여진 돈을 하나님의 뜻과 식과 방법대로 잘 사용합니다. 그리하여 돈이 아주 건강하게 흐르게 합니다. 돈이 막히지 않고 잘 흐르게 하는 것이 경제가 아니겠습니까?
돈에 욕심이 없는 사람 그러나 돈에 대하여 소명과 사명감이 있는 사람이 돈을 벌어야만한 경제가 살아납니다. 좋아집니다. 돈에 대하여 소명감과 사명이 없는 사람이 욕심으로 돈을 벌게 되면 경제가 나빠집니다. 죽습니다. 오늘날 우리들 세상의 문제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조건 돈에 대하여 욕심 없는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돈에 대한 욕심은 없으면서도 돈에 대한 사명감과 소명감이 있어서 힘들어도 그러나 열심히 하나님의 식과 법대로 돈을 버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사람에게 물질의 은사를 주시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부요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를 부요하게 하심으로 세상을 부요하게 하려 하실 것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우리 동안교회 교인들을 통하여 그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가 많이 나타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소원합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자리와 지위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적인 자리와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욕심 없는 사람이 세상적인 자리와 지위를 얻어야만 합니다. 세상적인 자리와 지위를 소명으로 알고 그것을 통하여 바른 정치를 하려고 하는 사람이 세상적인 자리와 지위를 얻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이 세상에 바른 정치가 이루어져 많은 사람들이 억울함을 당하지 아니하고 정의로운 세상에서 반듯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세상적인 자리와 지위에 욕심이 없다고 세상적인 자리와 지위에 대한 소명까지 버리고 세상적인 자리와 지위에 대하여 인간적인 욕심을 부리는 사람들에게 그 모든 자리와 지위를 다 내어 주는 것은 죄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이 세상을 정복하게 되면 바른 정치가 없어지게 됩니다. 정치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경제가 돈의 건강한 흐름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정치는 법과 질서의 건강한 흐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돈과 법과 질서가 건강하게 흐르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욕심을 가지고서가 아니라 소명을 가지고 열심히 세상을 살아야만 합니다. 열심히 사업을 하여 돈도 벌고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여 출세도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그와 같은 것들을 떠나서 보지 않고 살면 모르겠으나 그와 같은 것들을 보면서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세상적인 것에서 성공하여 많은 물질과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주는 인간적인 만족에 눈 어둡지 않고 깨끗하고 반듯하며 욕심을 따라 살지 않고 소명을 따라 산다는 것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평생을 그와 같은 삶을 살 수 있기 위하여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삶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싸우며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말은 번듯하게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돈과 자리와 지위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추하게 자신과 세상을 망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이름까지 욕보이며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자신과 세상을 위하여 모두 불행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악한 일입니다. 하나님 보다 세상을 더 사랑한다는 것이 죄요 욕심으로 세상을 정복하여 바른 경제와 바른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게 함으로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못살게 함으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죄를 가지고는 살아서도 천국을 살지 못하고 죽어서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한다고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엄히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욕심으로 세상사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은 가장 치명적이고 나쁜 죄입니다. 세상에 자기 아내와 남편보다 다른 남자와 여자를 더 사랑하는 것보다 나쁜 죄가 어디 있겠습니까?
저 자신을 포함하여 많은 교인들이 자신이 간음하지 아니하고 도적질과 강도질도 하지 않고 살므로 자신이 별로 큰 죄를 짓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하여 별로 심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소명감을 가지지 못하고 욕심을 가지고 사는 것 그리하여 세상에 대하여 자유하지 못하고 세상에 얽매여 살아가는 것 자체가 죄인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을 믿어도 세상에 얽매여 세상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하는 자신을 안타까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면서도 육신으로는 세상과 죄의 법을 섬기는 것을 안타까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그보다 더 심각한 죄가 어디있겠습니까? 과연 여러분들은 그와 같은 죄에 대하여 자유 하십니까? 자신이 있으십니까? 떳떳하십니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밤낮 그와 같은 말씀을 설교하는 사람으로서 그와 같은 삶을 반듯하게 살아내지 못하는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아니하고 한번 끝까지 붙어 보겠습니다. 싸워 보겠습니다. 정말 쉬지 않고 기도해 보겠습니다. 기필코 죽기 전에 그런 삶을 살아보겠습니다. 포기하지 아니하고, 그와 같은 삶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그와 같은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을 괴로워하고 안타까워하며, 발버둥질 치고 기도하고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삶 즉 다시 말해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에 대하여 자유하며 세상을 욕심으로서가 아니라 소명으로 살아가는 진짜 그리스도인 하나님이 성경 속에서 그토록 찾으시던 의인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로서는 할 수 없으나 우리 하나님은 능히 저를 그와 같은 사람되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많은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 대한 소명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명 때문에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욕심 때문에 세상을 살아갑니다. 세상에는 돈과 명예에 대하여 전혀 자유하지 못하며 세상 사람보다 더 욕심을 부리며 살아가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세상을 욕심으로서가 아니라 소명으로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안타깝게 찾으시는 의인이 바로 그와 같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에서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그토록 애타게 찾으시던 의인이 바로 그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와 같은 수준의 삶을 사는 사람은 소돔과 고모라에 열 명도 되지 않았고 정말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안타깝게 하는 것은 그와 같은 의인이 예루살렘에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과연 욕심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소명을 가지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세상에 대하여 성실한 분이십니까 불성실한 분이십니까? 여러분은 세상에 대하여 자유 하시는 분이십니까 아니면 세상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얽매여 사시는 분이십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세상엔 소망 없습니다. 세상엔 구원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욕심으로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여러분 그 세상에 대한 욕심이 바로 여러분 자신과 세상을 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그 세상으로부터 자유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세상을 우습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대단히 여기지도 않는 사람, 때문에 세상에서 성실하게 열심히 살면서도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한 사람되기를 원하십니다.
욕심이 아니라 소명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사람되기를 원합니다. 소명을 가지고 성실히 세상을 살아 세상에서도 성공하고 그 세상적인 힘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사용하여 바른 경제와 바른 정치가 이루어지는 그리하여 이 세상도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와 같은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면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때문에 죽어서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도,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는 참으로 근사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되면 자신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게 되고 이 세상에 사는 사람도 마치 천국에서 사는 것과 같은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입니다. 근사한 일입니다. 아름다운 일입니다. 여러분 한번 그와 같은 삶에 도전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와 같은 삶에 욕심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욕심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욕심을, 아니 우리의 욕심을 세상에서부터 하늘로 한번 바꾸어 보십시다. 예수님은 오늘 주기도문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기도하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욕심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라는 말씀입니다. 천국을 꿈꾸지 않는다면 그는 절대로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인 아닙니다. 천국을 소망하며 천국을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는 절대로 크리스천 아닙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는 금욕주의자도 아니고 더군다나 염세주의자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리고 세상의 맛을 알고 세상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 세상 유혹에 대하여 그 누구 못지 않게 약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의 가장 큰 소원은 이 세상에서 원 없이 한번 살아보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면서도 그것도 아주 열심히 살면서도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도 낙오하지 아니하고 성공하면서도 이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이 세상에 대하여 아주 자유로운 삶을 살아 보는 것입니다.
정말 쉽지 않겠지만 저는 세상에 얽매여 세상 욕심 때문에 온갖 죄를 다 지으며 추하게 부끄럽게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며 싸우며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정말 잘 살고 싶습니다. 근사하게 살고 싶습니다. 아름답게 살고 싶습니다. 훌륭하게 살고 싶습니다. 반듯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이 절대로 쉽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포기하지 아니하고 한번 끝까지 싸워 보겠습니다. 정말 쉬지 않고 기도해 보겠습니다. 기필코 죽기 전에 그런 삶을 살아보겠습니다. 포기하지 아니하고, 그와 같은 삶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그와 같은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을 괴로워하고 안타까워하며, 발버둥질 치고 기도하고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삶 즉 다시 말해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에 대하여 자유하며 세상을 욕심으로서가 아니라 소명으로 살아가는 진짜 그리스도인 하나님이 성경 속에서 그토록 찾으시던 의인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로서는 할 수 없으나 우리 하나님은 능히 저를 그와 같은 사람되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저는 정말 앞으로 주기도문을 외울 때마다 이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를 기도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와 같은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욕심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유 하는 천국의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김동호  
 2000년 08월 27일  
 주기도문(4)  
 마태복음6:9-13 
 
 
2000.8.27 설교방송 (설교본문)

주기도문(4)
마태복음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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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중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도는 구원에 관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구원에 관심이 많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의 관심은 세상에 있습니다. 물론 세상도 중요합니다. 세상도 없으면 우리에게 상당한 불편과 어려움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세상보다 크고 귀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온 세상보다 크고 귀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상에서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솔로몬은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보통 많은 사람들이 욕심내고 부러워하는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강물은 연하여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한다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세상의 부귀와 영화와 온갖 쾌락들이 마치 강물이 바다로 흘러 오듯 솔로몬에게로 흘러 들어 왔지만 그것으로 자신의 삶이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그와 같은 경험을 통하여 세상의 것들로 구원을 얻고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헛된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기쁨과 평안 그리고 사랑과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것에는 그와 같은 것들이 없습니다. 재미와 편안함은 있으나 기쁨과 평안은 없습니다. 사랑은 성적인 문란과 쾌락으로 변질되어가고 있고 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적인 것에는 생명이 없어서 점점 세상은 말세 즉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에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돈과 권력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돈과 권력으로 으로 기쁨과 평안을 살수도 없고 돈과 권력으로 진정한 사랑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돈과 권력으로 생명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돈과 권력은 어느 정도 힘이 있어서 날아가는 새를 떨어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떨어진 새를 날아가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돈과 권력 즉 세상은 죽고 망하게 하는 능력은 있으나 구원과 생명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이 세상인 것입니다.
인간 최대의 어리석음과 불행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만족과 구원을 주지 못하는 세상에 욕심을 부리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 끝없고 헛된 욕심 때문에 사람들은 누구나 다 말로 다할 수 없는 피곤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족 없고 구원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죄를 짓고 그 죄 때문에 눈물과 근심과 걱정과 아픔이 끊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쓸데없는 헛된 세상에 대한 끝도 없는 욕심이 바로 원죄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입니다. 세상은 오늘날의 선악과입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지만 거기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름이 없고 마셔도 마셔도 시원함이 없습니다.

구원은, 행복한 삶은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닫고 헛되고 쓸데없는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을 끊고 버리지 못하는 한 절대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 나라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만큼 하나님 나라가 커집니다. 세상 나라에 대한 욕심이 크면 그만큼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삶 속에서 작아지게 되고 세상 나라에 대한 욕심이 작아지면 그만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 속에서 커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 즉 구원의 삶은 우리가 얼마나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불교도 우리에게 세상 욕심을 버리는 것의 중요함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세상의 욕심을 버리는 것에 대하여 우리 기독교와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불교는 세상과 세상의 욕심을 피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속세를 떠나 산 속으로 들어갑니다. 아예 세상과 인연을 끊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세상을 떠남으로 세상을 버리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세상을 바르게 쓰고 사용함으로 세상을 버리는 종교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물질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기 위하여 물질 자체를 부정하고 버리는 종교가 아닙니다. 물질 자체를 버리고 떠나면 아예 물질에 대한 욕심을 부릴 수 없게 되겠지만 물질을 통하여 할 수 있는 선하고 귀한 일까지 할 수 없게 되는 폐단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그럼으로 물질 자체를 부정하거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 대한 욕심만 버리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물질은 긍정하고 물질에 대한 욕심만 부정하게 되면 물질을 통하여 할 수 있는 많은 선하고 귀한 일들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기독교는 엄밀히 이야기하면 세상과 물질을 버리는 것을 가르치는 종교가 아니라 물질과 세상을 바르게 쓰는 것을 가르치는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과 세상을 바르게 쓰는 것을 통하여 물질과 세상을 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물질을 축복이라 하지 않고 은사라고 부릅니다. 물질을 축복이 아닌 은사로 이해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축복은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다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은사는 예수를 믿는다고 누구나 다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축복입니다. 때문에 구원은 예수르 믿으면 누구나 다 받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방언은 은사입니다.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고 누구나 다 방언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물질은 축복이 아니라 은사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누구나 다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질이 은사가 아니고 축복이라면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다 부자가 되고 믿지 않으면 누구나 다 가난뱅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것과 부자가 되는 것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물질이 축복이 아니라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쓰면 늘어나고 아끼면 줄어드는 특성이 있습니다. 세상과 물질은 축복이 아니라 은사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쓰지 않고 아끼면 줄어들거나 부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쓰고 사용하면 세상과 물질은 점점 더 커지고 커질 뿐 만 아니라 깨끗해 질 것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도 천국을 사는 것과 같은 구원의 삶을 살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마음속에 원죄로 자리잡고 있는 쓸데없는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부터 훈련하고 연습하여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만큼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욕심을 부리는 것만큼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밀려나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이 쓸데없는 세상적인 욕심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훈련을 시키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안식일과 희년의 법 그리고 십일조와 구제의 법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욕심에 눈 어두워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을 막으시기 위하여 안식의 법을 정하여 주셨으며 세상이 궁극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희년의 법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소득의 십분의 일을 떼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밭의 네 귀퉁이를 남겨두어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는 삶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와 같은 법과 훈련을 회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법들을 구약의 법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법과 훈련은 지금 우리들에게도 얼마나 유효한 것인지 모릅니다.
정직한 십일조 생활을 하시기를 권합니다. 정직한 십일조 생활은 세상과 물질에 대한 원죄적인 욕심을 버리게 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훈련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십일조 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세상과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정직한 십일조 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모르나 살아있는 동안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을 누리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살아서 누리지 못한 천국을 어떻게 죽어서 들어갈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죽음은 세상의 모든 것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은 십일조를 한 사람과 하지 못한 사람을 불문하고 세상적인 욕심을 죽음을 통하여 완전히 떠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일조 생활과 훈련을 통하여 이 땅에서도 세상과 물질에 대한 욕심을 컨트롤하는 사람은 죽어서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구원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의 법을 지키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 때문에 일주일 내내 쉬지 않고 살아가게 되면 혹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부자가 될 수는 있을는지 몰라도 세상으로부터 자유 하는 삶을 살수는 없습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일하지만 일주일에 하루는 세상 욕심 버리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쉬실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주일에 문을 닫고 쉬면 하나님께서 토요일과 월요일에 손님을 더 많이 보내 주신다 라고도 이야기합니다. 물론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주일날 문을 닫으면 보통의 경우 손해를 봅니다. 손해를 보면서도 주일을 지키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성실하면서도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희년의 법도 지키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너무나도 성경적으로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 버렸지만 때문에 구약에 있는 그대로 희년의 삶을 살기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생각만 하면 얼마든지 희년의 정신을 지키며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재산의 사회환원이라는 개념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세상에 환원 시켜야만 합니다. 그리고 죽어 세상을 떠날 때 유산을 자손들에게 남기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드림으로 희년의 정신과 삶을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그러나 목사이기 이전에 원죄를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저도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이 어렵습니다. 정직한 십일조 생활과 바른 구제 생활 그리고 안식과 희년의 삶을 실천한다는 것이 힘듭니다. 누구 못지 않게 이와 같은 부분에 열심히 노력하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교인들에게 설교하면서 살아왔지만 아직도 저는 이것이 힘듭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힘쓰고 노력하고 기도할 것입니다. 죽을힘을 다하여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도록 애쓸 것입니다. 그래야만 다시 말해서 세상 욕심을 버려야만 그만큼 내 마음과 내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부족하지만 그래도 예수를 믿기 때문에 어차피 죽으면 세상 욕심 버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겠지만 죽어서만 가는 천국이 아니라 살아서도 천국을 사는 복을 받기 위하여 저는 세상을 떠나기 전 이 세상에서부터 정직한 십일조 생활과 구제생활 그리고 안식일과 희년의 법을 실천하는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누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천국이 있습니다. 눈물도 근심도 걱정도 아픔도 없는 영원한 기쁨과 평안 그리고 사랑과 생명이 있는 천국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세상을 떠나야만 합니다. 세상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때문에 예수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죽음으로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은 세상을 떠남을 의미합니다. 죽음으로 세상을 떠나는 일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물론 죽는다고 누구나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죽음으로 세상을 떠나지 않고는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럼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에게 죽음은 화가 아니라 복입니다. 때문에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 죽음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죽음으로만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기 이전에 마음으로 먼저 떠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연연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세상을 떠나면 이 세상에서도 천국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 미련을 두고 욕심을 두고 살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명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힘이 들고 어려워도 포기하지 말고 조금씩 조금씩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떠나는 훈련을 하세요. 그리하여 죽어서 갈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도 누리고 살아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세상을 부정하지 않지만 세상에 소망을 두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죽은 후에도 영원히 살 수 있는 하늘이 있습니다. 그리고 죽어도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하늘이 있어서 우리는 죽음도 축복이라고 감사하지만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하늘에 소망을 두고 하늘을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욕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과 소원을 두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나라에 대한 욕심을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훈련하고 연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동호  
 2000년 08월 13일  
 주기도문(3)  
 마태복음6:9-13 
 
 
2000. 8. 13 설교방송(성경본문)

주기도문(3)
마태복음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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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독교는 땅과 현세를 부정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부와 건강과 세상적인 성공을 무조건 백안시하거나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독교는 그와 같은 것에 소망을 두고 사는 종교도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는 궁극적인 소망을 하나님 나라에 두고 사는 종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천국이라고 부릅니다. 천국은 말 그대로 번역하면 하늘 나라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하늘에만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늘과 땅 모두를 포함한 곳으로 어느 곳에나 있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느 곳에나 있고 또 어느 곳에나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역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내세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세와 내세를 포함한 영원한 시간 속에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으며 또한 내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어제도 없을 수 있었고 오늘도 없을 수 있으며 또한 내일도 없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부요함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요함 속에도 하나님의 나라는 있을 수 있지만 부요함 속에 얼마든지 하나님의 나라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가난함 속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함 속에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나라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건강함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나약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약함 속에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나라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성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공 속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실패 속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에도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부요함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가난함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느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건강함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건강치 못함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느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적인 성공 속에 있는 하나님 나라가 있고 세상적인 실패 속에 있는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느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부요함 속에 있는 하나님 나라와 건강함 속에 있는 하나님 나라 그리고 세상적인 성공속에 있는 하나님 나라가 가난함 속에 있는 하나님 나라와 건강치 못함 속에 있는 하나님 나라 그리고 세상적인 실패 속에 있는 하나님 나라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틀렸습니다.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얻었다면 그것이 너무나 크고 대단한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의 세상적인 부와 건강과 성공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얼마든지 살 수 있기 때문에 그 둘 사이에는 정말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한가 가난한가 건강한가 약한가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연 그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는가 들어가지 못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부한데도 처할 줄 알고 비천한데도 처할 줄 안다라고 고백한 것이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요 찬송가 중에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고백한 가사가 바로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천국 즉 하나님 나라의 삶은 시공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삶의 조건을 초월합니다. 때문에 시간과 공간에 상관없이 뿐만 아니라 부와 가난 건강과 약함 성공과 실패라고 하는 조건과 전혀 관계없이 항상 기뻐하고 범사 즉 늘 감사할 수 있는 정말 놀라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얻었다면 세상의 그 무엇을 얻지 못했다고 하여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는 사람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얻지 못하였다면 세상의 그 무엇을 다 얻었다라고 하여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는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사람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천국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그는 절대로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삶의 소망과 욕심을 그저 세상적인 부요함과 건강함 그리고 성공에만 두고 산다면 그는 누가 뭐라고 하여도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요즘 여러분의 소원은 어디에 있으십니까? 요즘 여러분의 소망은 어디에 있으십니까? 요즘 여러분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세상적인 부와 건강과 형통 즉 성공을 기도할 수 있지만 만일 그것만이 유일한 여러분의 기도 제목이라면, 만일 그것만이 유일한 여러분의 소원과 소망이라면 여러분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다 이루어진다고 하여도 절대로 여러분은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이 없는 부요함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부요함이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하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삶이 없는 건강함은 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물론 건강하지 못한 것보다는 좋겠지만 그 건강이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하겠습니까? 그것은 세상적인 성공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삶이 없는 부요함과 건강함 그리고 성공은 절대로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삶의 성공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삶의 승리와 행복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삶 뿐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나라를 기도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처럼, 믿음이 전혀 없는 세상 사람들처럼 세상적인 부요함과 건강함 그리고 형통함만을 욕심내며 기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탄에게 속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탄에게 속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오늘 하나님의 나라를 기도하라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을 욕심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우리의 모든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마음속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가정 위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직장과 세상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면 그동안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며 살아왔던 모든 것들이 우리의 생각처럼 대단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거친 들에서 사는 것과 궁궐에서 사는 것이 생각처럼 대단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거친 들에서 사느냐 궁궐에서 사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 임하였느냐 임하지 아니하였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바와 같이 열심히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 임하시기를 위하여 기도하여야만 합니다. 이것은 얼마나 중요한 기도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마음과 삶 속에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바라며 여러분의 세상적인 삶이 가난하든 부하든 건강하든 약하든 상관없이 항상 기쁘며 늘 감사하는 천국의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계시록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길도 황금길이고 집도 열두 보석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것을 사실 그대로 믿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금길과 열두 보석으로 지어 진 집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그와 같은 것들은 앞에서도 누누이 말씀을 드렸지만 천국의 본질적인 것들이 아닙니다. 천국은 초막이나 궁궐에 좌우되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이 세상이 이렇듯 살기 힘들고 어려워 진 이유는 단 하나 우리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거역하며 살아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고통과 괴로움이 그치지 아니하는 것은 그리하여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것은 우리와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자기 뜻대로 자기 욕심을 좇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소망하시고 욕심내신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와 같은 우리의 욕심에 관한 것을 먼저 생각하고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 즉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먼저 생각하고 그것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먹을것과 입을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의에 달려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그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기도의 모범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 예수님의 기도가 오늘 우리들의 기도가 되어야만 합니다. 정말 우리도 내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원대로 살아가기 위하여 기도하여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정말 우리가 예수님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원과 뜻대로 사는 사람이 된다면 그리하여 오늘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바와 같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우리의 마음과 가정 그리고 직장과 세상에서 이루어진다면 우리의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우리는 언제나 이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항상 기쁘고 범사에 감사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지나가는 100사람에게 요즘 어떻게 사시느냐고 물었습니다. 뭐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았겠습니까? 아마도 1등은 '그럭저럭 삽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었을 것이고 2등은 '마지 못해 삽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3등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죽지 못해 삽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과연 요즘 어떻게 사십니까? 예전 보다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으리만큼 부요해 졌습니다. 평균수명도 전에 비하면 비교도 되지 않으리만큼 길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보다 조금도 더 행복해지지 않았습니다.
먹는 것과 입는 것 그리고 마시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와 같은 것들은 생각처럼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없으면 불편하지만 막상 있다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밤낮 그런 것들만 생각하고 욕심내며 그런 것들만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밤낮 그런 것들만 소망하며 욕심내고 기도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나름대로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천국의 삶을 살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답답하고 무의미한 세상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 자신의 구주를 삼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 뿐 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행복하게 사시기를 원하십니까? 정말 항상 기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사는 복된 삶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소원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바꾸시기 바랍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심으로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라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의 마음과 가정과 직장과 생활의 현장 속에 임하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높은 산과 거친 들 초막과 궁궐에 상관없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간증하며 찬송하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천국의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김동호  
 2000년 07월 30일  
 주기도문(1)  
 마태복음6:9-13 
 
 
2000.7.30 설교방송(성경본문)

주기도문(1)
마태복음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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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과 기도생활은 서로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생활이 없는 신앙생활은 병든 신앙생활이라고 단정하여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무조건 기도생활만 열심히 한다고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의 생활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수준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기도에도 수준이 있느냐고 말씀하실 수 있지만 분명 기도에도 수준이 있습니다. 높은 수준의 기도가 있고 낮은 수준의 기도가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은 낮은 수준의 기도도 무시하지 않으시고 들어주시지만 기도에는 분명 낮은 수준의 기도가 있고 높은 수준의 기도가 있습니다.

교회성장적인 측면에서 볼 때 우리 한국 교회는 성공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한국 교회와 교인들은 성숙한 교회와 성숙한 교인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는 좀더 성숙한 교회와 교인이 되기 위하여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숙한 교회와 성숙한 교인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기도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힘쓰는 것입니다.
기도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자세히 살펴보고 공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문을 보면 볼수록 정말 최고 수준의 완벽한 기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을 그저 회의나 예배를 끝낼 때 주문처럼(?) 외우는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정말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가 되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우리의 자신과 교회를 보다 성숙한 교인과 교회로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주기도문을 설교하게 되면서 남은 여생을 주기도문으로 간절한 나의 기도를 삼고 그 주기도문을 철저히 이루기 위하여 살아야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설정할 수 있었습니다. 주기도문으로 나의 기도를 삼고 주기도문으로 나의 삶과 신앙의 목표를 삼아 그 목표를 하나 하나 이루어 가는 삶을 살 수만 있다면 참으로 주님을 닮아가며 주님의 향기를 발하며 주님의 편지로서의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꼼꼼히 공부해 나가면서 주기도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 하시는 하나님의 교훈을 배워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의 기도의 수준을 높이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과 삶을 보다 성숙하게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주기도문 중에서 제일 먼저 생각하려고 하는 말씀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우선 이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분은 우리와 어떤 상관이 있으신 분인지를 분명히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 즉 우리가 기도를 하여야 할 대상은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말씀인 것 같지만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러 해 전 신학대학교 학생들이 어떤 문제 때문에 데모를 하고 시위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들이 데모를 하면서 마당에 천막을 치고 그 천막에서 금식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금식기도를 한다고 크게 글자를 써 붙이고 마당에서 사람들 보는 앞에 금식기도를 한다고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금식기도로 데모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학생들 대표를 불러 그것이 옳지 않음을 일러주었습니다. 경우에 따라 데모는 할 수도 있지만 금식기도로 데모를 할 수는 없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금식기도로 데모를 할 때 그 기도를 받으시는 대상이 하나님이냐 사람들이냐를 물었습니다. 사람들 보라고 사람들 앞에서 금식기도를 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그것은 금식기도가 아니라 단식투쟁이라는 것을 일러주었습니다. 학생들은 제 말을 옳게 듣고 당장 금식기도를 폐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 데모를 하였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이 가장 평범하고도 기본이 되는 사실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기도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오직 하나님 한 분 뿐 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통하여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시라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고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을 왕과 주인으로 인식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신하와 종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정확하고 완벽한 하나님 인식과 자기 인식이 됩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우리의 왕과 주인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신하와 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시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왕으로 우리 자신을 당신의 신하로 여기며 사는 것을 옳게 여기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식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여기며 사는 것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당신과 우리의 관계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고 부르는 것을 가장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부모를 잘 만나는 것처럼 중요한 복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부모를 잘 못 만나 놓으면 평생 고생을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아이에게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러나 반대로 좋은 부모와 훌륭한 부모를 만난 아이들을 참으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부모를 잘 만나야 합니다. 부모를 잘 만나는 것이 복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는 것이 왜 복이 되는지 아십니까? 예수를 믿으면서 받는 최고의 복중에 하나가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나는 복입니다. 세상에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만나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파격 중에 파격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불경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다가도 하나님이라는 글씨를 읽어야만 할 때가 되면 소리를 내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위대하신 분이었고 대단하신 분이었습니다. 감히 하나님이라는 소리까지도 내지 못할 만큼 엄위하신 분이었습니다.
그것은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의 임금과 왕 앞에만 나가도 우리는 아마 입이 얼어 붙어서 말을 하라고 하여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함께 식사를 하자고 하면 아마 긴장이 되어서 음식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것이며 음식의 맛을 느끼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임금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처럼 대해 주시고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였다면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얼마나 대단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으로 자신 아버지를 삼은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는 그것을 자녀의 권세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로 삼은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이 될 것입니다.
다윗은 우리가 잘 아는 시편 23편에서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고백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 즉 자신의 아버지가 되어 주셨기 때문에 자신이 받고 누린 복을 자신의 시편 23편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시편 23편을 통하여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섬기는 사람이 받는 복이 어떠한 것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어떤 것인가를 알아 낼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시고 아버지가 되어 주시기 때문에 우선 자신의 삶에는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셨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부족함이 없는 삶으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의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자녀를 모든 것이 부족한 거칠고 물 없는 사막으로 인도하려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그와 같은 상황으로 인도하는 부모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자녀를 당신이 원치 않는 그런 곳으로 절대로 인도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윗과 같이 부족함이 없는 삶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와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난 사람이 받는 복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권세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다윗의 삶이 부족함이 없는 삶이었는가 언제나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와 같은 삶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 다윗처럼 험난한 인생을 산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는 고사하고 그는 거의 평생을 전장과 광야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사울에게 쫓기고 나중에는 아들에게까지 쫓기는 피곤하고 고단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결국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셨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야만 했던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훈련과 연단이고 둘째는 죄로 인한 심판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험난한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이와 같은 과정과 삶을 거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이 모든 역경과 고난으로부터 우리를 건져 주십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연단 시키시기 위하여 전장과 광야로 우리를 내 모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듯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와 같은 역경과 고난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좁은 길과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과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좁은 길과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좁은 길과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범죄 함으로 당하는 심판으로서의 고난과 역경으로부터 우리를 결국은 구원해 주십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죄의 결박을 푸시어 결국은 우리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런 저런 이유로 좁은 길과 십자가의 길 그리고 역경과 고난의 길을 걸을 수 있으나 그것은 과정이요 결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다윗과 같이 부족함이 없는 삶,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와 같은 삶의 축복을 결국 받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신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끊임없이 우리의 잠자는 영혼을 일깨워 주시고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는 영혼도 소생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우리를 언제나 옳고 바르고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부족한 저도 사랑하는 제 아이들을 끊임없이 정신 차리게 깨우치고 정말 최선을 다하여 바른 길과 좋은 길을 열어 주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제가 아이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노력한다는 표현을 썼는데 사실은 그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자식을 위하여 노력하는 부모는 엄밀히 말하면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다른 것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과 다릅니다. 다른 것은 정말 노력하여야 하는데 자식을 위한 노력은 특별한 노력이 사실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자동으로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자동으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고 우리를 언제나 바른 길로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능입니다. 자동적으로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동으로 우리를 깨우치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능이십니다.

살다보면 힘든 일을 만날 수도 있고 어려운 일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위험한 일을 만날 수 도 있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표현을 하였습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은 다윗은 실제로 그와 같은 삶을 많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와 같은 일을 당할 때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까닭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와 아버지가 되어 주셔서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자신을 안위해 주실 줄로 믿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목자는 양을 지키고 부모는 자식을 지킵니다. 부모와 목자는 능력이 부족하여 자식을 잘 그리고 바르게 지키려고 하는 마음은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많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는 그런 무능함과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하늘에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고 하여도 능히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내실 수 있으십니다. 다윗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다윗과 같이 이 놀라운 사실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윗과 같이 그 믿음으로 승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땅의 부모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합니다. 살이라도 베어주고 싶고 피라도 쏟아 부어 주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마음 뿐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세상의 어떤 부모도 자식의 삶을 충만히 채워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채우시기를 원하시며 또 실제로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 때문에 자신의 잔이 언제나 넘쳤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언제나 자신에게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주시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심으로 자신의 삶은 언제나 넘치는 삶이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신데 어떻게 그것이 당연한 일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사람이 원수 앞에서 망신을 당하며 채워지지 않는 빈잔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이치에 맞지 않고 논리에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평생을 함께 하실 것이고 자신도 영원토록 하나님의 집에 거할 것이라고 고백하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은 사람이 받는 최고의 복은 구원의 복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사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녀의 권세인 것입니다. 자녀는 때때로 실수합니다. 잘못합니다. 죄를 지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는 그것과 상관없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집에서 삽니다.
우리 자녀보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도 세상에는 많이 있고 성격과 성품이 좋은 아이도 세상에는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제 아이와 함께 삽니다. 다른 아이들이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아무리 성격이 좋고 성품이 좋아도 저는 제 아이하고만 삽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은 실력 때문도 아니고 성품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녀의 권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사는 구원의 축복은 자녀의 권세입니다. 자녀만이 누릴 수 있는 권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귀한 복음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거부하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였다면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영접하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가 아니라고 거부하시는 법을 없습니다.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부인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그분의 자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는 실족하지 않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어떤 경우에도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실족하고 망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주기도문의 첫 번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을 절대로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아니 못하십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라도 상관없습니다. 그가 지존파라도 상관없고 라합 이라도 상관없고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라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나는 너 같은 자식을 둔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누구든지 진심으로 그리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축복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받았다고 간증하고 고백한 시편 23편의 축복을 누구나 다 받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이것저것 길게 기도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지간히 힘들 땐 이런 저런 기도가 나오지만 정말 다급하고 힘이 들면 기도도 말도 나오지 않는 법입니다. 그때 구태여 이런 저런 말로 기도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럴 땐 그냥 엎드리어 하나님을 부르기만 하시면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기만 하시면 됩니다.
그것으로 기도는 완벽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순간 기도는 완성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 맞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본능적인 축복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 한 마디에 완전하고 완벽한 기도가 이미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다윗이 받았던 그 놀라운 축복을 여러분들도 다 받으시고 다윗과 같은 간증을 하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김동호  
 2000년 07월 23일  
 북한을 위한 기도  
 마태복음6:9-13 
 
 
2000. 7. 23 설교방송(성경본문)

북한을 위한 기도
마태복음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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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최근에 북한 평양을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 고향이 평북 선천이었기 때문에 저의 평양 방문을 남다른 감회가 있었습니다. 많은 은혜가 있었지만 아침에 일어나 묵고 있는 호텔에서 같이 간 일행들이 함께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며 말씀을 나누었던 경건회 시간은 참으로 깊은 은혜가 있었습니다.
특히 저는 첫날 아침 예배를 마치면서 함께 외웠던 주기도문에서 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이 바로 오늘 우리가 북한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가장 완벽한 기도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북한을 위하여 그리고 통일을 위하여 많은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남북정상 회담 이후 많은 사람들이 흥분하고 기대에 부풀어 있지만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평화 통일의 가능성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50년간은 서로 주적관계로 대치하고 살아왔던 남과 북이 갑자기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 또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 어느 때 보다 더 깊은 그리고 많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야만 합니다. 막연한 기도가 아니라 추상적인 기도가 아니라 구체적인 기도가 필요합니다. 북한과 평화 통일을 위한 구체적인 기도를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통하여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한민족복지재단이라고 하는 단체의 이사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하였었습니다. 한민족복지재단은 북한에 의료장비와 약품 그리고 어린이들을 위한 영양식품을 지원하는 단체입니다. 지난 한해만도 제약회사와 교회들의 협조를 받아 약 천 만불이 넘는 장비와 약품 그리고 식품을 지원하였습니다.
이번에 평양을 방문한 것도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좀더 효과적으로 북한을 지원할 수 있을까를 의논하고 연구하기 위하여 방문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이 일에 참여하면서 왜 이 일을 하여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이 일을 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스스로 질문을 하여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해답을 주기도문에서 찾았습니다. 주기도문은 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제 자신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이 지금 우리가 북한을 위하여 기도하려고 할 때 가장 구체적인 완벽한 기도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주기도문이 가르쳐 주는 북한을 위한 기도의 첫 번째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입니다.

저는 평양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는 순간 북한을 위한 사역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그 동안 하나님의 이름은 잘못 왜곡되게 이해되어져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과 기독교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거룩하고 명예스러운 이름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잘못된 인식을 바꾸어 주어야 할 책임과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들의 삶과 행동을 통하여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들의 거짓 없고 순수한 그리고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행동과 활동을 통하여 우리는 북한 땅에서 다시 하나님과 기독교에 대한 명예를 회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잘못 왜곡되게 이해되어지고 있는 북한 땅에 하나님의 이름이 바르게 인식되게 하는 일을 위하여 우리의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심 없고 깨끗한 봉사를 통하여 그리고 헌신적인 봉사를 통하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이 사랑하는 북한 동족들에게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수 있게 할 수만 있다면 다시 말해서 부정적으로 인식되어져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위하여 우리의 피를 쏟아 부어도 기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의 사역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걸려 있습니다. 우리는 대북한 사업을 할 때 항시 이것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정직하고 순수하고 반듯한 자세로 일을 하여야만 합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하나님의 이름은 점점 더 북한 땅에서 왜곡되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의 사명이 얼마나 막중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평양에서 드린 첫 번째 경건회 시간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며 주기도문을 시작하면서 받았던 은혜와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북한을 위하여 기도할 때 우리의 첫 번째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사랑하는 북한 땅과 그곳에 사는 우리 동족들에게 우리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수 있기를 위하여 늘 간절한 기도를 드리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의 간절한 기도와 그 기도를 이루기 위하여 하는 모든 사업과 행동을 통하여 사랑하는 북한과 북한의 주민들에게 우리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시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주기도문이 가르쳐 주는 북한을 위한 기도의 두 번째는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입니다.

일주일 동안을 평양에 머므르면서 함께 동행하는 북한의 참사에게 '당신은 우리들이 왜 이와 같은 일을 하려고 하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잘 모르겠다고 대답을 하는 저들에게 저는 그 이유와 목적을 이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북한에 있는 주민들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말씀과 뜻대로 살기 위하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을 보았는데 우리가 나름대로 이렇게 우리의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단 하나 우 리가 섬기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기 위함이다.
우리는 부족하여 서로 싸우고 그 동안 서로 원수와 같이 살아왔지만 하나님께는 남과 북이 다 똑같은 한 하나님의 자녀이시다. 하나님은 남과 북이 서로 하나가 되고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어려움과 기쁨을 함께 나누면서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뜻을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뜻으로 비유하여 설명을 하니 이해가 빠른 듯 싶었습니다. 그밖에 더 좋은 설명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그렇게 설명을 했습니다만 한민족복지재단의 대북한 사업의 이유는 단 하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나름대로 완벽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북한을 돕고 섬기는 까닭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북한과 북한의 주민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저들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저들을 섬기고 함께 나누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저들을 섬기고 저들과 함께 나누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한과 남한의 사람들을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똑같이 북한과 북한의 동포들을 사랑하십니다. 북한과 북한의 동포들이 어렵게 되었을 때 남한과 남한의 사람들이 북한과 북한의 동족을 섬기고 함께 나누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그 분명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우리의 최선을 다하여야 하는 것이고 노력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평양에서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씀에 큰 은혜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정말 저희들의 적은 수고와 희생을 통하여 북한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북한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위하여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북한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우리들의 헌신과 열심을 통하여 북한에 이루어지게 된다면 그와 같은 일을 통하여 북한 땅에 다시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게 될 것입니다. 북한은 본시 기독교가 왕성하였던 나라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평양과 정주와 선천과 같은 곳들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우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북한에는 두 곳의 교회 밖에는 없습니다. 봉수 교회와 칠곡 교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면 그리하여 북한을 향하신 하나님을 뜻이 북한에서 이루어지게 된다면 다시 북한에 하나님의 교회들이 회복되게 될 것이고 우리 북한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아름다운 명예를 다시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북한에 하나님의 교회들이 회복되고 북한이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회복하게 되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북한의 교회를 통하여 북한에 축복을 쏟아 부어 주실 것입니다. 남한의 교회를 통하여 남한을 축복하신 하나님께서 북한의 교회를 통하여 북한을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남한의 교회를 통하여 남한을 축복해 주셨던 하나님의 역사가 북한에 다시 재현 될 것이라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반드시 그와 같은 역사가 북한에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남한과 북한 그리고 남한의 교회와 북한의 교회가 하나가 되어 세계와 세계교회를 섬기게 된다면 세계는 우리 남한과 북한 그리고 남한과 북한의 교회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북한을 위하여 기도하실 때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를 뜨거운 마음으로 기도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기도문이 가르쳐 주는 북한을 위한 기도의 세 번째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입니다. 오늘날 북한을 위하여 기도할 때 이처럼 구체적인 간절한 기도는 있을 수 없습니다. 북한은 최근 몇 년 동안 홍수와 가뭄의 피해로 말미암아 말로 다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격고 있습니다.
저희는 지난 7월 11일날 평양에 도착을 하였었는데 그 전날 단비가 내렸다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 단비가 오기 전 가뭄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50년만의 가뭄이라며 걱정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북한은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하여 지금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굶주림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너무나도 잘 아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때에 북한을 위한 기도는 당연히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이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벳세다 광야에서 굶주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굶주리고 있는 북한의 동포들을 위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다 저들의 먹을 것을 해결해 줄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믿습니다.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여도 그것을 하나님께 내어 놓으면 5천명이 먹고도 12 광주리가 남는 놀라운 기적이 오늘도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입으로만 기도하지 아니하고 오병이어를 하나님께 내어놓는 행동으로 기도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실제로 이번에 저희들은 평양에 한국의 유명한 제빵 회사의 도움을 받아 평양에 제빵 기계를 설비하고 하루 만 명의 어린이들에게 아주 크고 영양가가 높은 빵을 생산하여 배급하기로 약속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한 명의 어린이에게 한 달분의 빵을 공급하는데 약 5천원 정도가 들어갈 예정입니다. 5 천원이면 한 명의 어린이에게 한 달분의 빵을 공급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이 성공하면 이북의 12개 도를 비롯하여 각 지방마다 이와 같은 시설을 하고 북한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빵을 공급해 나가는 일을 확대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해 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라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금 북한의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말로만 기도하지 아니하고 북한의 동포들을 위하여 우리의 오병이어를 내어놓으면서 행동으로 기도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몸으로 오병이어의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북한의 동포들에게도 일용한 양식을 허락해 주시고 12 광주리가 남는 역사를 일으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평양 호텔 방에서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할 때 뜨거웠던 마음의 감동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는 지금 우리가 북한을 위하여 기도할 때 빠트려서는 아니 될 가장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주기도문이 가르쳐 주는 북한을 위한 기도의 네 번째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입니다. 남한과 북한 사이에는 서로 피맺힌 원한이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북한에는 남한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많은 사람들이 있고 남한에는 북한에 의해 죽임을 당한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남한과 북한에는 그 죽임을 당한 가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남한과 북한은 정확한 표현으로 서로 원수입니다. 말 그대로 피맺힌 한이 있는 원수입니다. 그러므로 북한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기도 중에 하나는 당연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이어야만 합니다.
피맺힌 원한을 푼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서로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간절하게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줄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야만 합니다.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함께 나누고 병들어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약품과 의료장비를 보내는 일보다 더 힘들고 더 중요한 일은 서로를 진심으로 용서하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평양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를 기도할 때 온몸에 감전된 듯 흘렀던 전율도 잊을 수 없습니다. 서로를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되 저들은 불행히도 아직 하나님을 모르니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먼저 이 일과 기도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기도문이 가르쳐 주는 북한을 위한 기도의 다섯 번째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입니다. 남과 북이 하나되는 일에 있어서 세계 모든 나라가 다 좋아하고 환영하는 것 같으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바와 같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것을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은 남과 북 밖에는 없습니다. 저는 정치를 잘 모르지만 미국도 러시아도 중국도 일본도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을 기뻐하고 좋아할 리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근히 남과 북이 하나되는 것을 경계하고 방해하는 세력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과 북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거의 불가능하다 싶으리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고 막아 주시지 않으신다면 남과 북은 얼마든지 시험에 빠질 수 있고 악에게 넘어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주기도문을 통하여 배우는 북한을 위한 기도는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어느 기도보다도 이 기도가 북한을 위하여 가장 절박한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을 훌륭한 지도자로 또는 국부로 추앙하고 섬기는데는 의의가 없습니다. 자기들이 자기들의 주석과 위원장을 훌륭한 지도자로 믿고 따르는데 우리가 기다 아니다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다시피 북한에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은 훌륭한 지도자 이상의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신격화 되어 있습니다. 북한에는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에게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에 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볼 때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북한이 몇 년째 홍수와 가뭄을 격으면서 재앙을 격고 있는 이유가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북한을 위하여 기도한다면 그 무엇보다도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기도를 간절히 그리고 아주 열심히 하여야 하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는 평양에서 주기도문을 암송하면서 이 주기도문이야말로 완벽한 북한을 위한 기도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주기도문을 암송하실 때마다 북한을 생각하며 암송해 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북한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주기도문을 기억해 주시고 주기도문으로 간절히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브솔영성아카데미
글쓴이 : 생각하는어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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