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이란!

속죄론의 발전과 현대적 의미 연구

하나님아들 2020. 4. 11. 12:24

속죄론의 발전과 현대적 의미 연구

이재용

 

 

 

I. 연구 목적과 구성

 

제임스 패커는 그의 책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복음의 핵심이 바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라고 단언하였다. 그가 이렇게 자신 있게 선언할 만큼, 속죄론은 기독교 신앙에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속죄론(atonement)에서 속죄란 죄를 덮어 가리는 것, 치워 버리거나 제거해 버리는 것, 그래서 죄가 더 이상 인간과 하나님의 우호적인 교제에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 속죄론의 의미는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신 것, 즉 대리형벌(penal substitution)을 받은 것을 말한다.

 

속죄론은 구원론과 더불어 기독론의 핵심적인 이해 사항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속죄론은 기독론의 구원사역을 설명하는 방법론으로, 기독론의 핵심적인 구성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기독론을 속죄론적 지평에서 이해하는 방식은 성서적 전통으로부터 유래한다. 리츨에 의하면, 신약성서에서 야고보서와 유다서를 제외한 거의 모든 문서들이 예수의 죽음을 희생제물의 관점에서 고찰하고 있다. 또한 교회사 속에서도 이레니우스로부터 발전한 속죄론 논의는 안셀무스에 이르러 주요한 신학적 화두가 되었다.

 

그러나 속죄론은 고대로부터 심각한 질문과 문제제기를 받아왔다. 원시 기독교공동체에게는 “어떻게 십자가에 달린 죄인 예수가 인류를 구원하는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제기되었고, 중세의 교회에는 “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방법으로만 구원이 이루어졌는가? 또한 도대체 어떤 정의가 의인을 비참한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가?”라는 문제 등이 제기되었다. 오늘날에도 역시 속죄론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이 제기된다. 현대사회의 속죄론은 과연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속죄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고대의 신화적인 세계관의 산물이 아닌가? 과연 속죄론이 21세기 세계화에 직면하고 있는 인류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까? 만일 속죄론이 오늘날에도 유의미하다면, 정부의 외교정책이나 중동의 미래, 그리고 테러리즘과 기후변화 등의 현대사회의 문제에, 속죄론은 어떠한 의미와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책임적 신학이 시대의 요청과 필요에 응답하고 계시의 말씀을 재해석하는 것이라면, 오늘날 기독론의 속죄론 역시 이러한 시대의 요청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본 논문은 기독론 이해의 핵심사항 중에 하나인 속죄론에 대한 전통신학의 입장을 소개하고, 그 의미를 현대적 맥락에 적합하도록 해석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하여 먼저 원시 기독교의 상황에서 속죄론의 형성과정을 살펴본다. 또한 교리사적으로 중세에는 속죄론에 대한 어떠한 논의들이 있었는지에 대하여 소개한다. 본 논문은 속죄론에 대한 각 시대의 적합성을 중요하게 살펴보며, 이후 현대적 맥락에서의 속죄론을 재구성하는데 관심을 기울인다. 여기에는 먼저 전통적인 속죄론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그에 대한 대안적 재구성을 시도한다. 그리고 속죄론의 배경에는 죄론과 악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 후에, 현대적인 의미에서 과연 속죄론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찰해보도록 한다.

 

II. 예수의 죽음과 속죄론의 발전

 

기원 30년, 예수라는 한 갈릴리의 목수이자 순회 설교자인 한 사람이 예루살렘 어귀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처형을 당한다. 당시의 세계관에 있어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을 당한다는 것은 당사자 뿐 만 아니라 그(또는 그녀)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불명예스러운 것이었다. 십자가형은 대체로 반란자에 대한 벌로서 이루어졌으며, 온갖 처벌 중에서도 가장 수치스러운 방법에 속하였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던 키케로는 “십자가라고 단지 불리기만 하여도 그것은 로마 시민의 몸으로부터만 아니라, 그의 생각들과 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단순한 처형의 수단을 넘어 최대의 모욕과 수치를 안겨다 주는 냉혹과 잔혹의 상징이었다.

 

여기에서 질문이 제기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원시 기독교공동체는 이 비참하고 잔인한 처형을 비길 데 없이 훌륭한 구원의 사건으로 선포하게 되었을까? 어떻게 예수의 십자가형이 원시 기독교공동체의 케리그마의 중심에 위치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이 불명예스러운 죽음이 그렇게도 빨리 속죄적인 희생의 죽음으로 해석되었을까? 이는 너무나 진부하고 식상하지만 동시에 필수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속죄론을 이해하기에 앞서 그 형성과정인, 원시 기독교공동체의 역사적 상황과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예수의 죽음 이해를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유익하며 또한 필수적인 작업이다. 왜냐하면 기독론이 형성된 최초의 역사적 기억과 맥락인 원시 기독교공동체의 경험을 살펴보지 않는다면, 이후 발전하는 속죄론은 가현(假現)적이며 비역사적인 해석학적 산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하기 때문이다.

 

1. 원시 기독교공동체 상황 속에서 예수의 죽음 이해와 속죄론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의 죽음 이후 제자들은 분명히 큰 충격을 받았고 무척이나 당혹스러워 했다.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 앞에서 모두 도망쳤으며(막 14:50), 베드로는 저주하며 예수를 부인하고(막 14:71), 다른 제자들 역시 실망한 채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눅 24:21) 이 절망의 경험은 비단 제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예수 자신에게도 그의 죽음은 절망스러운 것이었다.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는 겟세마네의 마지막 기도에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눅 22:42)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바라보면서 처절하게 절규한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그러므로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죽음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절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혹자는 이를 그리스도의 부활을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수사학적인 장치라고 볼 수도 있으나, 예수의 죽음에 대한 역사적 반응이 거의 절망에 가까웠으리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반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원시 기독교공동체가 구성되기 전(前) 역사적 예수의 죽음이 가져다준 충격과 혼란이 이토록 크고 엄청난 것이었다면, 그들은 과연 어떠한 계기로 예수의 죽음을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속죄로 이해했을까? 그에 대한 해답을 알아보기 전에, 우선 원시 기독교공동체가 예수의 죽음을 어떻게 수용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성서에는 이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해답이 제시되어 있는데, 이는 원시 기독교공동체의 부활절 현현 경험이다. 윤철호는 원시 기독교공동체에 있어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사건은 그들의 신앙의 뿌리경험이었다고 지적한다. 즉 예수의 죽음을 두고 절망하며 낙담했던 제자들이 다시 모여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목숨을 바쳐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할 수 있었던 이유를 찾을 때,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제외하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시 기독교공동체가 예수의 죽음을 이해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먼저 부활사건에 대한 확실한 경험에 있다. 부활은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원시 기독교공동체의 이해와 선포의 핵심으로서, 물론 원시 기독교공동체가 성령 체험이라는 종교적 황홀경의 집단체험을 했다는 점과 임박한 종말론적 위기의식을 공유했다는 점도, 예수의 죽음에 대한 해석학적 열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부활보다 분명하고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는 사건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의 죽음을 해석하는 열쇠가 된다. 부활에 대한 원시 기독교공동체의 초기 고백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인데, 이것은 분명한 부활경험을 반증하는 표현이며, 동시에 예수의 가르침을 확인시키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의 무죄를 입증하신 사건이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예수의 죽음에 주는 가장 근원적인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이제 더 이상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그 악의 세력이 완전히 무너졌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입증되었고 하나님이 승리했다! 제자들이 예수의 죽음이라는 절망을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희망으로 극복함으로써, 부활신앙은 고대세계에서 마치 폭발하는 것처럼 작용하였다. 죽음이 생명의 승리에 삼켜졌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예수의 죽음은 이제 보다 보편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그리스도는 단지 한 개체로 부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자 전 인류의 ‘새 아담’이요 ‘모든 피조물의 장자’로서 부활하였다.

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원시 기독교공동체는 예수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승리를 보았다. 또한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부활과 생명의 주가 되심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을 통하여 예수의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 예수의 죽음의 의미가 바로 다름 아닌 ‘우리’를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원시 기독교공동체는 예수의 삶과 마찬가지로 그의 죽음을 통해서도 예수의 모범적인 것, 즉 예수의 겸손(빌 2:3-8)과 고난의 감내(벧전 2:21-23), 사랑(엡 5:2) 등의 경건한 성품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모범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는(딛 2:14) 행위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후 예수의 죽음은 보다 발전하고 우주론적으로 확대된다. 이것은 가현적인 사실 왜곡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과 현현이라는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해석학적 산물이다. 원시 기독교공동체는 예수가 우리의 ‘모범’으로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서, 우리가 지어야 할 죄와 사망의 권세를 대신 담당했다는 사실을 선포하게 된다.(롬 5:10)

 

그렇다면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것이었고, 그것이 우리의 모범을 위한 것이며, 우리를 대신해서 죽고 다시 산 것이라면, 그 죽음이란 결국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에 대한 원시 기독교공동체의 답변은 바로 ‘화해’였다. 원시 기독교공동체는 예수의 죽음이 가지고 있는 대리적 성격과 모범적 성격을 직시하였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하나님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높이 드셨다는 사실과 더 이상 죄와 사망의 권세가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공동체를 해하지 못함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부활 앞에서, 이제 죄의 권세와 악의 세력은 인간에게 충성을 명령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그 어떤 악의 권력도 하나님과 그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을 수가 없게 되었다.(롬 8:38-39)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예수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결국 원시 기독교공동체는 예수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을 실존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이 경험은 다양한 해석학적 방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렇다면 속죄론은 과연 어떠한 배경 하에서 형성되었을까? 이에 대한 해답으로는 원시 기독교공동체가 가지고 있었던 신적 진노와 종말론적 심판이라는 개념을 들 수 있다. 윤철호에 의하면, 원시 기독교공동체의 속죄론은 크게 5가지의 관점에서 해석되고 발전했다. 그것은 먼저 ①유대교의 대리징벌 개념과 ②구약성서의 희생제사의 관점, ③고대의 채권관계를 통한 해석과 ④고대 신화적인 세계 속에서의 속전의 개념, 마지막으로 ⑤구약성서의 유월절 어린 양에 대한 역사적 기억이다. 원시 기독교공동체의 속죄론은 위와 같은 5가지의 관점에서 발전하게 된다. 이것은 속죄론이 형성되는 요람인 동시에, 장차 속죄론이 성장하고 발전하게 되는 마당이 되었다. 즉 속죄론은 유대교적 전통에서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충분히 용인될 수 있는 개념이었다. 그 예외적 사항이란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고백이었다. 그러나 이 신앙고백을 제외하고는, 속죄론의 기본 도식은 유대교적 전통에 매우 적절하게 부합한다. 마르틴 헹겔 역시 당시의 상황에서 예수의 죽음이 속죄의 개념을 가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즉 ‘자발적 죽음을 통하여 성취된 영웅적 신격화’의 세계관은 이미 그레코-로마 세계에서 통용되는 관념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이 비참하고 절망적인 경험이었음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이 속죄론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어느 정도의 사회문화적인 개연성 역시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죽음 이해는 위와 같은 5가지의 차원에서 해석되고 구성된다. 결론적으로 원시 기독교공동체에게 있어 구속론은 부활의 경험에 의한 예수의 죽음에 대한 해석학적 산물이며, 이것은 당시의 시대와 사회에 이해 가능한 패러다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2. 중세 교회사 속에서의 속죄론

 

다음으로 중세 교회사 속에서의 속죄론을 살펴보는 이유는, 첫째로 원시 기독교공동체의 속죄론이 시대에 따라 어떠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함이고, 둘째로는 중세 교회사 속에서 속죄론이 얼마나 시대적 적합성을 가지고 발전했는지를 고찰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교회사 속에서 특별히 11세기와 12세기는 기독론 논의 속에서 속죄론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이해가 늘어가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즉 기독교가 국교가 되고 많은 신학적 구성들이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교회에는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어떻게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었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물음이 제기되었다. 당시의 구원론적인 관점은 성육신에 대한 관심에서 십자가의 목적에 대한 관심으로 변화했다. 그 결과 3가지의 전통적인 속죄론이 나타나게 된다.

 

중세 교회사의 속죄론 중 가장 유명한 이론은 바로 안셀무스의 속죄론이다. 안셀무스의 그의 책 왜 하나님―인간(Cur Deus Homo)에서 그의 유명한 ‘만족설’을 설명한다. 만족설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보속(satisfactio)의 효과를 가지는 것으로, 신의 정의와 양립 가능한 유일한 인간 구원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안셀무스의 만족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이해하는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안셀무스는 죄란 '하나님께 드려야 할 몫을 돌려드리지 않은 것'이라 말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은 곧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영예를 드리지 않아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한 것이 된다. 안셀무스는 이 죄를 갚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명예를 회복시켜 드릴 수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에 그의 명예 또한 무한하기 때문이다. 유한한 인간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명예를 되갚을 길이 없다. 하나님의 명예를 회복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명예를 회복시킬 수 없다. 그 이유는 죄의 책임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는 딜레마에 놓여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하였고 그것을 되갚을 책임이 있지만 그것을 갚을 길이 없고, 하나님만이 자신의 명예를 회복시킬 수 있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없는 것이다. 안셀무스에 의하면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인 분 뿐이다.

 

그러므로 안셀무스는 예수의 죽음을 보속의 필연성 속에서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안셀무스의 속죄론은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나 칼 바르트의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안셀무스의 속죄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반대에 부딪힌다. 안셀무스의 책이 출판된 지 30년 만에 아벨라르드는 안셀무스가 이해하는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또한 아벨라르드는 그의 로마서 주석(1133-1140)에서 안셀무스의 이론에 대항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바로 “어떻게 하나님은 그의 무죄한 아들의 죽음을 기뻐하실 수 있는가?”이다. 이는 무고한 자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속죄는 그 자체로 부정의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것은 인간의 원죄보다 더 큰 범죄이기 때문에, 신의 진노를 더욱 살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때문에 아벨라르드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을 인간의 구원을 위한 속전(pretium)으로 이해하는 것은 부적절한 것이다. 결국 아벨라르드는 안셀무스의 만족설을 거부하고 새로운 구원론을 주장하게 되는데, 이것이 흔히 알려진 아벨라르드의 ‘도덕적 모범설’이다. 아벨라르드에 의하면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을 달래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것이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드러낸 위대한 사건으로서, 예수의 죽음은 인간을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공포로부터 해방시켜 우리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욕구를 불붙인다. 이러한 욕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신 모든 것을 충족시키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용서하게 만든다. 아벨라르드의 모범설은 과거 속죄에 대한 개념을 보속의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의 중심적인 의미로 격상시킨 시도였다.

 

정리하면, 안셀무스와 아벨라르드의 대립은 그리스도의 보속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에 관한 갈등의 문제였다. 안셀무스의 만족설은 하나님의 정의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보속이 필연적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입장이었고, 아벨라르드의 모범설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 사역의 중심으로 옮겨놓은 입장이었다. 이러한 안셀무스와 아벨라르드의 입장을 종합적으로 전개한 신학자는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였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죄인인 인간에게 그리스도의 보속은 필연적이었다. 이점에서 토마스는 기본적으로 안셀무스의 만족설을 따른다. 그러나 토마스는 여기에서 한 걸음 나아가, 하나님은 인간의 보속에 대한 필연성 속에 갇혀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신학대전 3부, 문제 46의 제2절에서, 그리스도의 보속에 대한 성부의 결정은 자발적인 사랑에 의한 것이라고 논하였다. 즉 토마스는 그리스도의 보속을 필연적으로 보는 동시에 그 죽음은 하나님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사랑이라고 말함으로서, 안셀무스의 만족설과 아벨라르드의 모범설을 모두 충족하고 있다. 나아가 토마스는 그리스도의 보속이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논증함으로서, 중세의 속죄론을 완성하였다.

 

안셀무스로부터 시작하여 아벨라르드를 거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중세의 속죄론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변증법적 관계에서 발전하였다. 여기에서 본 논문의 관심은 단순히 속죄론을 설명하고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과연 그 속죄론이 당시의 시대적 요청에 적합했느냐는 문제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11세기와 12세기에 일어난 속죄론에 대한 논쟁에서 안셀무스와 아벨라르드의 대립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속죄론이 얼마나 큰 논쟁의 중심이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가 살았던 13세기 역시 이슬람의 부흥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발흥으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제기되었던 시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이 제시한 속죄론은 당시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려는 신학적 시도였다. 윤철호는 특별히 안셀무스의 만족설이 고대의 절대군주적 왕권통치 체제와 라틴 문화의 법적 제도의 틀 안에서, 예수의 죽음을 보속의 사역으로 해석했다고 평가한다. 즉 안셀무스의 만족설이 11세기 당시의 라틴 사람과 사회에는 이해 가능한 속죄론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중세에 제기되었던 다양한 속죄론들은 저마다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려는 신학적 시도였으며, 이러한 결과로서의 속죄론은 당시의 시대에 매우 유의미한 해석학적 의미를 지녔으리라는 것은 쉽게 생각해볼 수 있다.

 

III. 속죄론의 현대적 이해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원시 기독교공동체는 예수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부활 경험을 통하여 속죄론의 원형을 형성하였다. 또한 이후 중세, 그리고 종교개혁 당시의 신학에서는 역사적 경험에 근거한 속죄론 보다는, 속죄론을 교의학적으로 구성하기 위하여 보다 합리적이고 이해 적합한 형태로 재구성하는데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적인 속죄론은 해당 시대에 유의미하고 이해하기에 적합한 시도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현대사회는 어떠한가? 과연 전통적인 속죄론이 오늘의 시대적 요청에 적합한가? 이에 대한 문제의식은 본 논문의 서두에서도 제기한 바 있다. 그렇다면 속죄론에 대한 현대적 재구성을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신학적 작업은 과연 무엇일까? 본 논문은 전통적인 속죄론에 대한 해석과 수용의 문제를 살펴보고, 지난 교회사 속에서의 속죄론과 같이, 현대사회 속에서의 속죄론을 재구성하는데 노력해보도록 한다.

 

1. 전통적 속죄론에 대한 해석의 문제

 

1) 예수에게 속죄라는 의식이 있었을까?

 

속죄론을 중심으로 신약성서를 해석할 때 발생하는 문제에서 가장 먼저 제기되는 질문은, 과연 예수가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속죄의 죽음으로 이해했을까 하는 질문이다. 물론 예수가 자신이 불의의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예감했으리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는 당시의 유대 통치자들과 심각한 충돌을 겪고 있었고, 오히려 그것을 정면으로 부딪쳐 대결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예루살렘으로 상경하였고, 결정적으로 성전을 숙정하여 십자가형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예수에게 이렇듯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확실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대속적 죽음으로 이해했느냐는 질문에는 명확한 답이 되지 못한다. 예수에게 속죄의식이 있었는가의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역사비평적 성서해석의 논의를 추종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통적인 속죄론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의 문제에서, 예수의 상(象)을 재구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G. 프리드리히는 예수가 자신의 대리적이고 희생적인 죽음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옳다고 하였다. 프리드리히는 복음서 안에 기록된 예수의 ‘대리적 죽음에 대한 암시’는 원시 기독교공동체의 해석의 산물로 이해한다. 즉 많은 사람을 위해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내어주겠다는 언급(막 10:45; 눅 22:24-27)이나 성만찬 제정에 대한 예수의 말씀 중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과 피”(눅 22:19-20) 등의 표현은, 모두 예수의 속죄적인 죽음을 염두한 후대의 부연 해석에 의해 보충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슈바이처 역시 예수는 인류의 구원 등의 속죄보다는 강력한 묵시사상의 영향 아래에서 죽었으리라고 보았다. 슈바이처에 의하면, 예수는 세계 역사의 종말을 가져올 ‘하나님의 나라’라는 불가능한 꿈을 꾸었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가 멈추지 않자, 예수는 스스로 그 수레바퀴에 몸을 던지게 된다. 결국 슈바이처에게 예수는 그 고매한 인격만 남은 실패한 묵시사상가일 뿐이고, 속죄론과 같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는 역사적 예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일 뿐이다.

 

물론 예수에게 있어 속죄의 의식이 있었는가의 문제는 아마도 풀지 못할 숙제일 것이다. N.T.라이트나 스텐리 그렌즈와 같은 학자들은 성서의 진술과 예수의 행적 등을 종합하여, 예수에게 속죄자로서의 자의식이 있으리라는 강한 확신을 보인다. 그러나 하르낙의 선언, 즉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가 선포한 그리스도는 다르다!”라는 강연 이후, 분리된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사이의 해석학적 긴장관계는 좀처럼 쉽게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슈바이처와 불트만 이후 신약성서의 해석학은 전반적으로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를 양분하는 경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속죄론이 과연 전통적인 차원의 의미를 보존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다.

 

2) 예수의 죽음에 대한 속죄적인 해석이 옳을까?

 

스티브 찰크는 복음주의적 교회들이 예수의 죽음을 지나치게 ‘대리적 형벌’(penal substitution)로만 이해했다고 비판하면서,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속죄론이 다각도의 관점에서 발전했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대속적인 제사 개념은 신약성서 중 단지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앞서 원시 기독교공동체의 상황을 설명할 때 살펴본 것처럼,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죽음은 대속의 개념(마 20:28), 동일화의 개념(빌 3:10), 모범의 개념(마 16:24), 대표의 개념(롬 5:19) 등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또한 찰크는 예수의 죽음을 대속적 형벌로 보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보았다. 전통적인 속죄론에 의하면 하나님은 죄인인 인간에 대하여 진노하고 심판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가 분노에 대하여 엄중한 제한(마 5:22)을 두었고, 보복에 대하여도 금지(마 5:38-42)한 점을 생각해보면, 전통적인 속죄론에서 ‘진노하는 하나님’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으로 마치 무시무시한 전제군주와도 같은 이미지이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왜곡을 야기할 수 있는 해석이다. 또한 찰크에 의하면, 예수가 제시한 하나님 상(象)은 오히려 집을 나간 자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자녀를 위해서 뛰쳐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랑의 하나님이다.(눅 15:11-32) 이는 안셀무스의 만족설에 나타난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대하여는 특별히 여성신학자들이 많은 비판을 가하고 있는데, 안셀무스의 만족설 속에서의 하나님의 은혜는 ‘희생제물’이라는 고전적 조건에 제한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정의는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압도해버린다. 레베카 파커는 “우리가 정말 이렇게 잔혹하고 무자비한 하나님을 꼭 믿어야 되는가?”라며, 안셀무스의 속죄론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거부하였다.

 

윤철호 역시 속죄론에 나타나는 보속의 교리가 하나님의 이미지의 원형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는 십자가를 단지 하나님의 공의와 만족과 명예의 회복을 위한 배상을 위해 한 인간이 대신 당해야 하는 대리적 형벌로 이해하는 것은, 고대의 왕정체제의 절대 군주의 표상이 하나님에게 투사된 것으로 본다.

 

 

3) 현대사회에 속죄론은 적합한가?

 

게다가 문제는 성서해석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현대사회는 더 이상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 사회적으로 죄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기독론에서 속죄론이 형성될 여지를 두지 않는다. 오늘날 기독교의 원죄론은 인간의 자유와 결정에 방해를 주는 것으로 간주된다. 즉 기독교가 원죄를 상정하는 것은 인권에 대한 심각한 훼손이며, 하와가 범죄를 야기했음으로 여성에 대한 억압의 정당화요, 성적인 문제에 대한 왜곡으로 보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죄는 범법이라는 차원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속죄가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죄를 강조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죄 개념 자체를 폐기함으로서 속죄의 교리가 들어설 여지를 두지 않는다. 이것은 매우 근본적인 문제제기이다. 즉 더 이상 현대는 속죄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여전히 성서적 세계관을 굳건히 붙들고 있다. 즉 죄의 삯은 사망이며(롬 6:23), 그 결과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죄의 개념이 사라지면서, 이제 많은 사람들은 점차 영혼과 육신의 영원한 징벌 따위의 문제를 더 이상 믿지 않고 있다. 1990년 유럽의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미국의 65%, 이탈리아의 36%, 영국의 25%, 프랑스의 16%, 네덜란드의 14%, 그리고 스웨덴의 7%의 사람들만이 ‘지옥의 존재를 믿는다.’고 답변하였다. 즉 죄와 처벌이라는 관념들이 현대인들에게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죄에 대한 관념과 의식이 약화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속죄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또한 전통적인 속죄론은 구원에 대하여 단순한 이해를 초래하게 만든다. 즉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단순 논리가 구원론에 적용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자는 모두 구원을 받는다는 너무나 단순화되고 편협한 고정관념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인 삶 또는 삶의 가치의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게 만들며, 단순히 “나는 십자가의 보혈을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다!”(My eternal destiny is guaranteed!)는 수동적인 방관주의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다. 결국 이러한 속죄론과 구원관은 죄와 속죄의 관계성에 대하여 지나치게 단순하고 편리하게 이해해버리는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속죄론 이해는 분명 성서적일 수도, 시대적일 수도 없는 착오의 발상이다. 만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전통적인 속죄론에 의해 수동적이고 타율적인 구원론에 집착하게 된다면, 교회는 오늘날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수많은 사회적 문제들에 대하여 침묵할 수밖에 없는 군중을 야기하게 된다.

 

 

2. 현대의 맥락에서의 속죄론

 

1) 현대사회의 죄와 악의 문제

 

현대적 차원에서 속죄론을 논함에 있어 가장 근원적이며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부분은 기독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죄론’에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대사회는 더 이상 죄를 중요한 문제로 다루지 않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와 악의 문제가 실감이 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현대사회에 죄의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일 뿐이다. 오늘날 죄는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차원뿐 만 아니라, 사회적이며 역사적, 구조적, 생태학적 차원의 문제에서 고려해보아야 한다.

 

먼저 실존론적인 차원의 죄의 문제로 우리는 소외의 문제를 들 수 있다. 틸리히는 인간의 실존상황을 ‘소외’로 표현하였다. 여기에서 소외란 세계로부터의 분리 상태를 포함하여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소외를 지칭한다. 틸리히에 의하면, 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본질적인 하나 됨을 파괴한다. 왜냐하면 죄는 교만과 정욕에 의해 생명과 힘, 그리고 의미를 인간 자신의 유한성 안에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틸리히의 통찰은 사회학적인 차원으로도 확대 해석될 수 있다. 오늘날 경제 세계화와 관련한 신자유주의의 횡포와 국제적인 빈익빈 부익부 현상의 근본문제는, 세계의 하나 됨을 해체하는 인간과 사회의 무한한 교만과 정욕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윤철호는 틸리히의 죄와 악의 문제를 다루면서, 인간의 실존이 절망 속에 놓여있다고 진단한다. 마찬가지로 몰트만은 전통적으로 죄의 문제를 ‘교만’으로 보는 해석에 더하여, 현대적 죄의 다른 차원은 ‘절망’에 있다고 진단하였다. 즉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교만도 죄였지만, 하나님이 인간에게 기대하는 인간적인 것들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절망 역시 죄라는 것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절망은 모든 희망을 내려놓게 하여 생명을 파괴하거나 쾌락을 탐닉하는 뿌리 깊은 권태로 발전해 나간다. 이는 오늘날 급속도로 늘어가는 사건 사고에 대한 신학적 반성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인류의 역사에서 그 어느 때에 비인간적인 살인 등의 사건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 비인간적인 사건과 사고는 끊이지 않고 더욱 늘어가고 있다. 또한 오늘날의 유흥문화의 발흥은 그 도를 넘어서고 있다. 비단 극단적인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재미와 흥미’는 삶의 이유이자 원동력이 된다. 물론 재미라는 요소가 인생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현대의 심리학에서도 다루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재미란 단순히 유쾌한 감정을 넘어 허무주의라는 뿌리 깊은 권태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결국 재미란 절망에서 몸부림치는 인간 실존의 발악인 것이다.

 

게다가 현대사회가 죄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죄의 상황에 놓여있다고 말할 수 있다. 몰트만은 2천년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기도할 때 제자들이 깊은 잠에 빠져 스스로의 영혼을 마비시킨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우리의 영혼을 마비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무관심이라는 명목 하에, 현재의 중대하고도 시급한 문제들을 무시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핵전쟁의 위협은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었고,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폭발사고는 원자력에 대한 위험을 만천하에 공개하고야 말았다. 이로 인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죽거나 평생 장애를 지니고 살아야만 했다.

 

또한 생태계의 문제는 보다 근본적으로 시급한 상황에 놓여있다. 생태계 파괴의 문제는 이미 인간의 삶의 터전을 넘어 전 지구적인 위기로 대두되고 있다. 이미 지구의 자연자원은 재생 불가능한 자원들과 에너지원이 숨 가쁜 속도로 폐기되고 소비되고 있다. 토양은 보다 많은 수확을 올리게 하는 여러 종류의 화학적인 비료들과 농약의 사용을 통해 오염되고 생명력이 약화되고 있으며, 무분별한 삼림의 파괴와 과도한 방목 등으로 인해 토양의 생명력이 약화되고 토양의 침식이 가속화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 반세기도 안 되는 기간에 지구의 경작면적의 1/5, 열대우림의 1/5이 소실되었다. 지하수 오염은 인체뿐만 아니라 어패류의 생장과 번식에도 해를 끼치고 각종 수인성 전염병을 유발했다. 또한 생명체를 위한 자연의 요람인 바다는 산업공해 쓰레기와 오물을 버리는 용기로 전락하였다. 바다는 원자로에 의해 열오염이 발생하는데, 이를 통해 바다의 모든 생물들이 필요로 하는 산소의 농도가 현격히 저하돼, 물의 재생능력이 없어지고, 정상적인 생태계의 리듬과 상호작용의 관계가 파괴되었다. 이 밖에도 생태계 파괴의 실상과 사례를 일일이 열거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할 정도로 심각하고 시급한 문제가 우리 사회 곳곳에 산제해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수많은 심각한 상황을 현대사회가 죄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현대인들은 이러한 실존적이고, 개인적이며,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죄의 문제들을 인식하지 않은 채, 이를 과학기술의 발전이나 국가적 개입을 통한 해결 등으로 손쉽게 해결하려고 한다. 이 역시 틸리히와 몰트만의 해석에 따르면 죄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대사회에 있어 죄의 문제는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무시를 받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즉 세계 내에는 여전히 심각한 죄의 상황이 놓여있는데 사회가 애써 그것을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들, 즉 인간의 실존적 소외 상황, 절망에 기반한 비인간화와 허무주의, 쾌락에 대한 탐닉, 전쟁과 핵의 위협, 생태계의 파괴 등 이 모든 것들은 현대사회의 죄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며, 현대사회에도 여전히 죄의 문제가 상존함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현대사회에 죄가 더 이상 의미가 없기 때문에 속죄론이 폐기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나, 예수의 죽음이 현대사회의 모든 죄를 단번에 보속하였다는 속죄론의 단순이해, 양자 모두를 부정한다. 도리어 현대사회의 통전적인 속죄론은 전통적인 속죄론의 세계관을 재구성하여야 하며, 동시에 현대사회의 죄와 악의 문제에 대하여도 책임적으로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죄의 현실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계시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본 논문은 전통적인 속죄론을 현대적 의미에서 재구성하기 위하여 어떠한 전통적 요소를 제거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 이후 현대사회의 죄의 현실성 앞에서 속죄론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서 제안하기로 한다.

 

2) 그리스도의 대리적 형벌 개념의 폐기와 대표적 화해의 재구성

 

지금까지 본 논문은 원시 기독교공동체와 중세교회사 속에서 속죄론의 적합성 여부를 지속적으로 따져보았다. 그 이유는 속죄론에 대한 당시의 사회적인 정합성과 적절성을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즉 앞서 살펴보았듯이, 원시 기독교공동체 당시의 속죄론은 예수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정체성에 근거하는 동시에 그 당시의 사회문화적 상황에 응답하는 차원으로 발전했고, 중세기독교 역시 당시의 시대적 물음에 대하여 보속의 교리를 발전시켰다. 이것은 당시의 신학이 전(前)시대의 교리적 반복을 추구하지 않고, 동시대적 요청에 따른 구성적 성격을 가지고 신학적 도전을 계속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현대 교회들이 전통적인 속죄론에 대하여 동일한 방식으로 발전해야 함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즉 속죄론이라는 교의학적 정체성을 보존하여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에 근거한 속죄론을 지키며, 오늘날의 시대적인 요청과 사회문화적인 맥락에 적합하도록 전통적인 속죄론을 수정하는 것이야말로 현대인을 위한 속죄론에 필수적인 구성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몰트만이 선언한 현대 기독교와 신학의 ‘정체성과 적절성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향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요청에 의해 본 논문이 가장 먼저 시도하는 방법론은 그리스도의 대리적 형벌에 대한 개념을 폐기하는 것이다. 이는 속죄라는 표현이 주는 의미가 현대적 맥락에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윤철호가 지적하듯이, 현대인에게 “예수가 희생 제물로 우리를 위해 죽었다”거나 “하나님과 악마와의 우주적 전투에서 그리스도가 승리했다”는 등의 신화적 세계관은 더 이상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서적인 의미의 속죄론이 오늘날의 세계관과 우주관에 맞게 적절하게 비신화화되고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하여 본문이 살펴볼 중요한 속죄론의 재해석은 바로 흑인여성신학(Womanist Theology)의 속죄론이다. 그것은 흑인여성신학이 보여준 속죄론에 대한 논의들은 지금까지의 자못 형이상학적이거나 지나치게 고답적인 차원의 논의를 일삼았던 서구 백인의 신학과 근본적으로 다른 현장성과 구성적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흑인여성신학이 기독론과 속죄론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경험에 근거한다. 즉 흑인들은 자신들의 고통의 경험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그들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소망했다. 여기에서 특별히 흑인 여성들의 경험은 보다 깊은 차원의 의미를 갖는데, 그것은 전통적으로 흑인들이 처했던 인종에 대한 차별과 억압은 흑인 여성의 경우 성적 차별의 기능을 포함하여 이중 위험(double jeopardy)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교회에서의 참여를 거부당하는 것이 포함되면서 흑인여성들은 결국 삼중적인 위험(triple jeopardy)에 놓이게 되었다. 때문에 이들의 속죄론이 보다 실존적이고 실천적이며, 구체적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흑인여성신학 이들이 가지고 있는 속죄론에 대하여 간략하게 소개를 하면, 데올리스 윌리암스(Deores Williams)는 예수의 죽음에 의한 구속의 사역을 거부하였고, 그리스도의 구속은 예수의 죽음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의 삶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윌리암스는 십자가 자체에는 어떠한 신적인 것도 있지 않고, 도리어 신성을 모독하는 인간의 죄가 드러나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그녀는 예수에게 대리적 형벌의 사명은 없었으나, 하나님은 그에게 ‘대리모’(surrogacy)의 역할을 맡김으로서 예수는 다른 이들에게 도덕적 선의 모범을 보이는 자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잭클린 그랜트(Jacquelyn Grant)는 예수를 “함께 고통 받는 자”(Co-Sufferer)로서 이해하며 아프리카계 미국 흑인들의 삶의 경험을 예수의 죽음에 투영하였다. 즉 그랜트의 입장은 예수의 죽음을 속죄론적으로 이해했다기 보다, 예수의 죽음을 함께 고통을 겪는 동반자적 공통 경험으로 본 것이다. 조앤 마리 테럴(JoAnne Marie Terrell)은 예수의 수난이 오늘날 다른 사람들이 겪는 고통보다 더욱 비참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반대한다. 대신에 테럴은 십자가의 의미를 보다 윤리적이고 신학적인 차원에서 확대해석한다. 테럴에 의하면,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고통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시며 결코 우리의 양적이고 질적인 차원의 고통을 대신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테럴은 예수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고통을 짊어지게 하는 것을 금지하시며, 나아가 우리가 고통을 받는 그 어떤 순간이라도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고 또 구원받으리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결국 테럴의 관점은 그리스도의 수난이 인간의 비극에 대한 궁극적인 이미지라는 것이다.

 

이상 흑인여성신학에서 이해하는 속죄론의 해석을 살펴보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흑인여성신학은 전반적으로 속죄론을 고대나 중세의 시대와 같이 형이상학적인 담론으로 비약시키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즉 예수가 인류를 대신하여 희생제물이 되었다든지,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기 위해 대리적 형벌을 받았다든지 하는 교리적 논쟁과는 거리가 멀다. 흑인여성신학은 흑인여성들의 실제 삶의 현장 속에 주목하고 있으며, 이들에게 대리적 형벌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대신 그들은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표상을 통하여 자신들의 경험을 투영하여 동일시하며 나아가 부활이라는 해방과 자유의 희망을 품는데로 나아가고 있다. 결국 흑인여성신학은 전통적인 속죄론에서 대리적 형벌이라는 개념이 현대적 사고에서 용인하기 힘든 동시에 적용가능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직시하였다. 예수의 대리적 형벌을 통하여 개인의 죄책감이 해소된다는 주장은 속죄론을 단순히 종교심리적인 현상으로 전락시키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에는 아무런 대리적 역할이 없을까? 그렇다면 원시 기독교공동체가 애초에 예수의 죽음을 우주론적인 차원에서 해석한 것은 단순히 탈역사적이고 신화적인 해석에 불과했을까? 또한 오늘날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죽음을 묵상하면서 대리적인 만족과 기쁨을 누리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황홀경에 의한 심리적 차원의 현상일까? 그렇다면 속죄론은 그저 버려야 할 구시대적 유물이 아닌가? 그것은 아니다. 본 논문이 주장하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대리적 형벌 개념의 폐기가 곧 예수의 죽음에 대한 대표성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어디까지나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선포하는 종교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라는 신앙고백은 기독교의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이다. 즉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그 자체로 대표적인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인 것이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속죄론에서 대리적 형벌의 개념을 폐기한다는 것이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대표성 자체를 폐기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 대표성을 갖는가?

 

틸리히와 바르트에 의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화해의 사건을 볼 수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표적인 화해자이다. 틸리히는 실존과 본질이라는 존재의 딜레마에서 인간이 희망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은 본질과 실존이 연합된 ‘새 존재’(New Being)인데, 바로 역사적 예수 안에서 이 ‘새 존재’가 발견되며, 예수는 시간과 공간 안에 ‘새 존재’를 가져왔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이 겪는 존재의 소외를 치유할 수 있는 희망은 ‘새 존재이신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이다. 즉 틸리히에게 있어 예수는 새 존재를 보여주며 동시에 새 존재를 가져다주는 대표자인 것이다. 이는 바르트에게도 나타난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에 대하여 “Yes 또는 Ya”를 선포하신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인류를 긍정하시며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 하나님과 참 인간에 대하여 관계를 가지게 된다. 결국 틸리히와 바르트, 두 신학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대표적인 화해자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화해의 대표적 개념으로 보는 것은 비단 이 두 신학자 뿐 아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예수를 그리스도의 원형적 인간으로 보며 그의 사역이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의 대표적인 직무를 띠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고, 몰트만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의 사회 참여의 정당화와 궁극적 희망의 지표가 된다고 보았다. 또한 스킬레벡스는 예수가 인간 실존의 가장 깊은 차원에 대한 최상의 상징이라고 말하였고, 안병무는 예수의 고통과 죽음은 민중의 고통이요 죽음이었다고 지적하였다.

 

결국 거의 모든 신학적 전통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대표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의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 “예수는 그리스도시다!”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통적 속죄론과 현대적 화해론은 상이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경험의 지평 위에 놓여있다. 그것은 자신이 곤고한 자(롬 7:24)임을 깨닫는 인류의 공통경험, 즉 실존상황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그 실존상황을 극복하게 되는 것이 모두 그리스도의 화해사건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속죄론이 현대적인 화해론으로 전이되는 것에는 큰 무리가 없다. 이미 슐라이어마허로부터 바르트에 이르기까지 화해의 원리는 속죄론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의 이해와 더 나은 선교적 방법론을 위하여, 고전적 속죄론은 화해론으로서의 변화와 발전에 더욱 노력해야하며, 이를 위하여 대리적 형벌의 개념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적인 화해의 직무를 강조해야 한다.

 

3) 예수의 죽음에 대한 주술적 믿음의 폐기와 상징적 이야기의 보존

 

전통적인 속죄론을 현대사회에 유의미하도록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주술적인 믿음과 속죄에 대한 감상주의적 태도에서 깨어나야 한다. 특별히 복음주의 진영 및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속죄에 대한 감상주의적 해석은 많은 폐단을 낳고 있다. 그들은 마치 예수의 십자가가 어떤 마법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 죽음 자체를 매우 신격화하고 있다. 존 스토트는 기독교 신앙을 한 마디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라고 답했다. 그는 교회의 상징이 성육신의 상징인 구유나, 노동의 상징인 목수 선반이나, 가르침의 상징인 호수 위의 배나, 부활의 상징인 빈 무덤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라는 점을 들어 이렇게 확신했다. 또한 많은 한국교회에서는 고난주간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Passion of Christ)를 상영하며, 예수의 고난에 대하여 감상주의적으로 묵상하는 일이 빈번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윤철호가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예수의 죽음을 그의 역사적 삶과 분리하여 해석하는 시도는 매우 탈역사적이며 신화적인 구속교리를 낳는 가현적 해석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인간 예수의 사건이다. 윤철호는 예수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고자 전적으로 헌신하였으며, 죽기까지 순종하고 충성하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본 논문이 앞서 원시 기독교공동체의 경험을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의 십자가의 의미는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통해 재해석된다. 그렇기에 원시 기독교공동체에 있어서 십자가 사건은 예수의 고난을 감상주의적으로 묵상하고 슬퍼해야 하는 사건이 아니라, 부활의 전조요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의 표상이며, 동시에 교회가 마땅히 걸어가야 할 모범적인 전철이었다. 결국 예수의 죽음을 속죄론적으로만 이해하거나 희생제물로서 고통스럽게만 바라보는 관점은, 매우 왜곡된 십자가 이해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예수의 죽음에 대한 속죄론적인 해석은 자칫 그 죽음에 대한 주술적인 신앙으로 맹신될 위험이 높다. 한신대의 명예교수인 김경재는, 오늘날 한국교회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속죄론을 잘못 이해하여 사고의 경직화와 신앙의 주술화를 스스로 초래했다고 비판하였다. 김경재에 의하면, 이스라엘 종교사에서 ‘희생제물’ 드리는 예배 곧 양들과 소들과 날짐승을 가지고 제단에 바치는 행위는 매우 상징성을 지닌 것이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고대인들이 “생명은 피에 있다”(창9:4, 레17:10-11, 신 12:23)고 생각하는 이스라엘 고대인들의 생명론의 의식구조에서 출발한 전제이고, 이것이 바로 예수의 죽음에 대하여 “피로서 정결하게 되며,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도 없느니라.”(히9:22)라고 상징화된 것이다. 즉 본 논문이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원시 기독교공동체들은 예수의 죽음사건 속에서 ‘속죄신앙’의 완전한 성취를 보았고, 그렇게 예수의 죽음을 대제사장으로서 단 한 번에 드리는 속죄제사로서 해석한 것이다.(히 9:27; 벧전 1:19). 그러나 김경재는 사람의 생명이 피에 있다고 생각하는 셈 족계 사회와 다른 생명관을 가진 문명권의 사람들에게 ‘피흘림으로서 속죄 제사를 드림’이라는 종교적 개념의 영적-상징적 의미를 ‘객관적 사실적 진리’로서 받아들이리기를 강요할 때, 기독교의 중요한 속죄론의 의미는 경직된 교리의 외피로 덮혀버린다고 지적한다. 결국 현대사회에서 속죄론에 대한 교리적 주입은 ‘속죄론의 교리적 비인격화, 경직화, 주술화’를 진행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에 대한 감상주의적 해석과 주술적 믿음은 동시에 고통에 대한 숭배로 이어질 수 있다.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인 엘리 위젤(Elie Wiesel)은 고통을 찬양하는 종교는 언제나 누군가가 고통을 받는 것을 찾는다고 하였다. 또한 일부 여성신학자들은(feminist theologians) 전통적인 속죄론이 예수의 고통과 수난을 찬양하고 영웅화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이러한 고통숭배의 종교는 여성과 아동에 대한 사회적 악의 구조에 수동적으로 묵종(黙從)하는 태도를 양산한다고 지적하였다.

 

결국 전통적인 속죄론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함에 있어, 예수의 죽음을 단순히 속죄론적으로만 치부하여 이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을 강요하는 것은 폐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죽음을 단순히 역사적 사건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과연 현대사회의 이해에 도움이 될까? 신앙에 있어 감성적인 영역을 제하여 버리는 것이 과연 신앙적일까? 물론 그럴 수 없다. 리쾨르는 종교적 언어가 시적 언어의 특성을 지닌다고 보았다. 이는 종교적 언어에도 어디까지나 시적 또는 문학적 언어의 특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리쾨르에 의하면, 텍스트의 외 역사적 지시체로부터 텍스트 내 문자적 의미를 단절시키는 것은 케리그마의 근거를 상실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속죄론에 나타나는 예수의 죽음 이야기가 감상주의적 신앙관을 양산한다 하여, 이를 함부로 잘라내는 것은 옳지 못한 시도이다.

 

또한 김경재는 현대의 속죄론이 자율성과 타율성의 이분법적인 도식을 넘어설 때, 이러한 감상주의적 주술화의 위험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지적한다. 김경재에 의하면, 속죄론은 인간의 참여와 책임성을 배제한 ‘타율적 사건’도 아니고, 또한 인격적 개인의 주체적 책임성만을 강조하는 ‘자율적 사건’도 아니다. 속죄론은 ‘자율이냐 타율이냐’의 이분법을 넘어선 ‘타율이면서도 자율인 역설적 은혜 세계’라는 것이다. 김경재는 전통적인 속죄론이 인간을 집단주의에 매이게 한 과오를 범했지만, 현대의 인간관은 자신에 대해 과잉적인 신뢰를 가짐으로서 영웅주의적인 자기과장의 우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때문에 김경재는 구속론에 대한 감상적이고 주술적인 신앙은 비판되어야 하지만, “빈 손 들고 앞에가 십자가를 붙드네.”라고 찬송가를 부르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고 진실된 영혼의 은혜 안에서 고백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김경재는 또한 속죄론이란 교리지식이 아니고 실존적이고 영적인 신앙체험 속에서만 살아있는 진실이라며, 이를 위해서는 성령의 조명에 의해 ‘죄의 현실성’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경재에 의하면, 오늘날의 속죄 신앙이란 십자가를 짊어지시기로 작정하시고, 죽음으로써 세상을 지배하는 ‘죄와 죽임의 권세’를 절대사랑, 절대용서, 절대진실, 절대정의, 절대순명으로써 이기신 예수의 생명 속에 나의 실존을 내던져 일치시킴으로서, 나를 지배하던 ‘죄와 죽임의 세력’을 실존적으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자유하게 된 영적 체험 속에서만 진리로서 숨 쉰다. 결국 속죄란 과거에 지었던 죄들의 결과를 ‘도말’(없앰)시키는 용서사건일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더 이상 죄의 세력에 지배받지 않는 ‘새 사람’에로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라야 한다고 김경재는 지적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신앙생활 속에서, 한번 중생체험을 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십자가의 대속적 능력을 경험했던 신자는 ‘칭의’에서 점진적 ‘성화’를 이뤄가야 한다고 말하며 강의를 마치고 있다.

 

4) 화해의 그리스도와 화해의 그리스도인

 

지금까지 본 논문은 전통적 속죄론을 현대적 의미에서 재구성하기 위하여, 전통적 속죄론 안에서 폐기해야 할 요소와 발전시켜야 할 요소를 구분하여 제시했다. 그 결론은 앞서 김경재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자율과 타율의 변증법적인 관계성 속에서 설명될 수 있고, 몰트만이 언급한 바와 같이 신앙의 정체성과 적절성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전통적인 속죄론이 가지고 있는 약점으로서의 자율성인 ‘감상주의적이고, 주술적인 십자가 이해’를 버려야 하며, 동시에 약점으로서의 타율성인 ‘대리적 형벌 개념’을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인 속죄론을 발전시켜 본래 전통적 속죄론의 정체성인 ‘그리스도의 화해 사건’(객관적, 보편적 구원)을 보존해야 하며, 속죄론을 현대사회에 유의미하도록 하는데 적절한 ‘그리스도인의 속죄론적 성화’(실존적, 실천적 구원)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 본 논문의 핵심이다.

 

본 논문은 앞서 예수의 죽음에 대한 원시 기독교공동체의 속죄론 형성 과정을 함께 살펴보았다. 원시 기독교공동체는 예수의 죽음이라는 어마어마한 절망 속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희망을 발견했고,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적 화해사건’으로 해석함으로서 당시의 모든 핍박과 고난을 해쳐나갔다. 그러므로 속죄론이란 그 형성사에 있어서 이미 실존적이며 참여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이는 현대의 흑인여성신학의 맥락에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단순히 역사적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이들의 신앙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이자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적 모범으로 나타난다. 김경재가 말한 바와 같이, 이러한 실존론적 그리고 실천적 차원이 속죄론의 바른 위치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중세의 속죄론은 당시의 시대적 정황에는 매우 유의미한 신학적 답변이었을지는 몰라도, 원시 기독교공동체나 흑인여성신학보다는 속죄론의 원형에서 다소 멀리 떨어져버린 신학적 유산이 되어버렸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사건은 죄가 위협하는 현실 속에서 궁극적인 희망이 되었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하나님과의 화해가 짙게 서려있다. 결국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떨어트릴 수 없다(롬 8:)는 이 확신이 속죄론의 밑바탕이 된다. 그렇다면 이 신앙의 확신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 구원에 대한 낙관주의적이고 수동적인 방관일까? 그렇지 않다. 윤철호는 십자가의 구속사건은 단지 과거의 객관적, 보편적 화해사건일 뿐 아니라 오늘의 실존적인 신앙의 응답과 헌신을 통해 삶 속에서 늘 새롭게 현실화되어져야 하는 현재적 사건이라고 언급했다. 즉 속죄론은 우리의 마음을 감화시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것이다. 이 말은 곧 ‘그리스도로 인해 선포된 화해’가 ‘그리스도인에 의해 실현’되는데 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결국 속죄론은 단순히 일회적인 예수의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계속되는 구원사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속죄론은 그리스도의 화해사건에 힘입어 예수의 길을 따르는 우리의 사건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당장이라도 할 수 있고 선포해야만 하는 화해의 사건이란 무엇일까? 물론 다양한 논의가 있을 수 있으나, 본 논문은 우선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의 죄의 현실성인 ‘절망’과 ‘권태’에 초점을 두고 싶다. 왜냐하면 앞서 몰트만과 틸리히의 지적대로, 오늘날의 수많은 현대인들은 정신적으로 병들었거나 실존적으로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의미와 행복을 개인의 성취된 일과 소유, 이윤과 경력, 명예와 스포츠, 쾌락 추구 등에서 찾고 있다. 현대인들은 모두 자신감에 넘치고, 매사에 바쁘고, 진취적이며 박학다식한 것으로 보이지만, 정말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를 두려워한다. 결국 자본주의의 거대한 소비문화에서 인간 역시 소비의 도구이자 대상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대인의 인간성은 너무나 쉽게 충동적, 향락적, 권력지향적, 집단적, 심지어 비인간적이 되어버리기 일쑤다. 이 모든 것이 바로 현대 사회에 팽배한 절망과 권태, 즉 죄의 현실성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화해사건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의 이 죄의 현실성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세계의 상황에 놓인 그리스도인들 앞에 놓여있는 것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오늘 여기에 서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너는 누구인가? 또 너는 어디에 서있는가?

기회주의 때문에 진리를 거부한 정치가 빌라도 옆에?

종교적 율법이나 규범을 위해 한 인간의 안녕을 희생시킨 대사제 안나스와 가야바 옆에?

다급한 김에 친구요 스승을 모른다고 한 베드로 옆에? 또는 아예 스승을 팔아먹은 유다 옆에?

명령은 명령이니까 온갖 야비함과 잔혹함을 발휘했던 로마 경비병들 옆에?

혹은 예수의 십자가 아래 믿음으로 서있던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부인들 옆에?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는 오늘도 묵묵히 자신의 걸어간 길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결국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속죄론에 대하여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실존적이고 실천적인 구원의 영역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IV. 결론

 

본 논문은 지금까지 속죄론에 대한 전통신학의 입장을 소개하고, 그 의미를 현대적 맥락에 적합하도록 해석하였다. 물론 고대의 속죄론이나 초대 교부들의 속죄론, 특히 오리겐과 이레니우스의 속죄론도 다루지 못했고, 종교개혁자들의 속죄론이나 근대 이후 현대 신학자들의 속죄론 역시 다루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또한 현대적 의미에서의 재구성 역시 논문의 말미에서 감상주의적으로 급하게 마무리된 감도 없지 않다. 본래 기획했던 해방신학과 정치신학으로서의 속죄론이 던져주는 그리스도인의 사명과 역할을 다루기에는 필자의 역량이 따르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속죄론은 예수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에서 조명된 해석학적 산물로서, 원시 기독교공동체를 넘어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객관적, 보편적이며 동시에 실존적, 실천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십자가가 오늘도 그리스도인들을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히 10: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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