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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기독교

하나님아들 2020. 4. 9. 17:17

일본의 기독교


 

 

 

Ⅰ. 서론

근세 봉건사회의 성립을 향해 치닫고 있던 전국시대는 미지의 세계로부터 새로운 문명과 문화의 파도가 일본에 밀려들어온 때였다. 16세기 중반 포르투갈의 흑선이 가져온 총과 '동양의 사도'로 칭해진 자비에르가 전한 기독교가 그것이다. 일본의 기독교는 남만무역과 함께 포교활동이 이루어졌다. 1549년 일본 포교를 시작한 예수회의 프란시스 자비에르가 가고시마에 도착하여 오우치씨의 보호를 받으며 포교를 하였다. 막부는 초기에 기독교에 대해서는 방임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기독교의 포교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침략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신도가 신앙을 위해 단결하는 것을 꺼려하여 1612년 직할령에 금교령을 내리고, 다음해에는 전국으로 확대해서 신자의 개종을 강제했다. 이후 막부와 각 번은 선교사와 신자들에 대해 처형과 국외추방 등의 혹독한 박해를 가하게 된다.

 

Ⅱ. 본론

 

1. 기독교 유입과 배경

막부 출범부터 기독교의 유입은 무역과 달리 수난의 길을 걸었다. 1543년 포르투갈 인을 태운 중국 배가 규슈 남부의 다나가시마에 표착했는데 이것은 일본에 온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이때 영주가 포르투갈 인이 갖고 있는 철포를 구입하여 가신들에게 사용법과 제조법을 가르친 이후, 포르투갈 인들은 매년 규슈의 각 항에 내항하여 무역활동을 했다. 스페인인도 1548년 나가사키현의 히라도에 내항하여 무역을 개시했다. 이들 포르투갈인과 스페인 인을 남만인이라 부르고, 그 무역을 남만무역이라 불렀다.

큐우슈우의 제영주는 포르투갈배의 기항을 희망하고 생사나 군수품을 구입하기 위해 기독교 보호에 노력하였다. 포교와 무역의 일체화를 가장 강력히 추진한 다이묘는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로, 1562년 세례를 받고 영내의 기독교화를 도모하여 요코세우라와 후쿠다(福田), 나가사키 등 3개항을 개항하였다.

기나이(畿內)지방 포교는 1559년 빌레라 신부에 의해 착수되었는데, 다음해 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만나보고 포교허가를 얻었다.

당시 민중은 히에이산의 파괴에 따른 구세력의 몰락, 잇코오종(一向宗)의 세속적 제 세력과의 연합과 쇠퇴 등의 구질서가 붕괴되면서 이미 영혼의 안식처를 잃은 상태였다. 이때 등장한 선교사는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천체와 기상현상을 설명해 주는 등 농민의 천문지식에 도움을 줌으로써 기독교가 용이하게 경작 농민사이에 침투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게다가 농민을 직접 지배하고자 했던 영주층은 사원과 결탁한 재지세력을 억압하기 위해 스스로 개종을 행하고 나아가 영민의 개종을 추진하여 영주권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오다 노부나가가 사원대책을 취하면서 통일 정책의 도구로서 선교사를 보호하고 기독교를 이용한 것은 교세확대를 더욱 촉진하였다.

 

2. 기독교의 포교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에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통일정책이 일환으로서 보호하고 이용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히데요시는 1587년 6월 돌연 하카다에서 <선교사 추방령>을 발하고 예수회 신부들에게 일본 퇴거를 명령하였다. 그리고 나가사키를 몰수하고 직할령으로 삼았다.

"신국(神國)" 일본을 표방하며 이단종교의 선교를 금한 이 추방령은 한편으로는 상선의 내항만큼은 환영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결국 나가사키의 직할령화는 무역독점을 위한 포석이었던 샘이다. 그리고 일본국내에 공포한 법규에 따르면, '200정 2만 3천 이상을 소유한 자'가 기독교인이 될 경우 히데요시의 허가를 받아야 하였으나, 그 이하의 무사는 어떤 신앙을 갖든 자유였다. 일반 하층민에게도 기독교 신앙은 자유에 맡겨졌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잇코오종파(一向宗波)인 본원사 승려들처럼 천하에 해를 미칠 가능성을 확인하고, 기독교에 잇코오잇키와 같은 구조적 성격이 있음을 느껴 위기감을 심화시킨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조선침략의 거점으로서 큐우슈우를 중시한 그에게 이는 중대한 문제였다. 또한 인격의 평등을 설파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통일자 히데요시 자신의 신격화를 위해서도 허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예수회가 일본, 포르투갈 양국 상인의 조정자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상품의 독점매입에 실패하게 되자 예수회 신부에 대한 금력을 완화시키고 나가사키에 포르투갈 인을 위한 교회재건을 허가하였다. 그곳에 관리를 파견하고 봉행을 두었으나 나가사키는 이후에도 계속 기독교 도시로 남아있게 된다.

히데요시의 금령 후 예수회 신부는 히라도에서 회합을 갖고 순교할 각오로 일본체류를 결정하였다. 박해 속에서도 선교사들은 아리마, 오오무라, 아마쿠사지방에서 포교에 주력하고 투철한 신앙심의 배양에 정진하였다.

한편 1593년 프란시스코회 수도사가 필리핀 총독사절로서 내일하여, 히데요시의 금교령을 무시하고 교토에서 과감한 포교를 전개하였다. 1596년, 때마침 도사의 우라토에 표착한 스페인선박 "산 펠리페호"의 승무원이 "스페인왕은 기독교로 먼저 인심을 끌어 모은 후 그 나라를 정복한다"하 호언장담한 것이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박해는 다시 강화되어 다음해 2월 프란시스코회 신부와 기독교인 26명이 나가사키에서 처형당하였다.

 

(1) 황도적 일본 기독교

중세이래 유럽의 신생 민족국가들의 탄생과 함께 단일 유럽의 이상은 해체되었고 기독교와 민족의식 간의 문제는 늘 현실적 관건이 되었다. 따라서 교회와 민족, 또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대결구도 아니면, 양자가 결합하는 형태로 진행되어 나갔다. 이 중 교회와 민족국가가 '동일시'되어 나타난 사례는 영국의 경우에서 명료하다. 이러한 의식은 훗날 다민족국가인 미국에 있어서도 해외선교와 백인의식의 결합형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보면, 기독교는 민족과 제휴되어 역사적 실존을 보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실존성 속에 포함되어 있는 '특수한 정황'은 교회사의 '공통성'과 '개별성'을 결정짓는 요소가 된다.

그러나 교회와 국가는 동일한 차원의 조직이기보다는 상이한 질서와 목표를 지닌 조직으로서 상호간의 보안과 균형이 요구되며, 이것이 무너질 때 발생하는 파국 또한 역사의 도처에서 증거 되고 있다. 즉 교회가 복음의 핵심적 진리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민족국가의 정치적 목적에 봉사할 수 없었던 역사적 경험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형태적으로 보면 '황도적 기독교'는 또 하나 '민족주의와 제휴된 기독교'이다. 이는 곧 독특한 역사적 실존성을 지닌 것이다. 우선 그 형성과정에 주목하고자 한다. 천황제의 특성은 기독교 신앙과 손쉽게 병행될 수 없는 '종교적 성격과 권위'를 지닌 것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일본 기독교가 천황제에 순응하는 기독교로 형성되는 과정이 그토록 순탄한 경로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국가와 교회가 상호 추진하던 '적응'(교회)과 '정책'(국가)의 힘을 바탕으로 예상보다는 원만히 그것이 진행되었다. 첫째, 일본기독교인들은 정부가 허용한 '신교자유'에 대해 비록 그것이 제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국가의 큰 배려로 받아들이기는 정서가 강했고 또한 그것이 천황의 특별한 은혜임을 믿으려고 노력했다. 특히 당시 확장된 천황 권위의 강력한 민중적 통합력을 주시할 때 여기에 순응하지 않으면 기독교의 유지나 확산 자체가 불가능하리라는 현실적 판단이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있었다. 둘째, 일본 정부로서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확산, 국민적 통합, 대외적인 제국주의적 목표 수행 등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세력의 안정적 참여가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이른바 '신교자유'를 통한 기본적 종교자유를 허용하고, '삼교회동'을 통한 기독교에 대한 '기성종교화 정책'이라는 회유책을 폈다. 그리고 제국헌법내의 '종교자유'와 모순된 조항인 '천황의 신성 불가 침성'의 삽입, '교육칙어'의 발포를 통한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국민적 통제력 확충, 교육법을 통한 학교교육에 있어서의 기독교 교육의 제한 등의 수순으로 탄압책을 함께 폈다. 더구나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를 '초종교'인 '국가신도'나 '천황'에 대한 예속화를 추진하는 일을 통해 유일 신앙체계인 기독교에서 나타날 수 있는 저항 자체를 원초적으로 봉쇄하였다. 이상의 두 가지 '상응적 추진 동력'에 의해 '황도적 기독교'가 형성되는 데 있어 심각한 갈등이나 결정적인 저항사례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황도적 일본 기독교'의 형성과정에서 전적으로 문제가 발생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 부분적 갈등현상을 살필 수 있다.

 

기독교의 특징적 진리를 선양하고 그 고유한 도덕을 발휘하는 것은 전도자의 급무이다. 어쩔 수 없이 시세의 필요에 응하여 일본사회를 구하고자 하는 욕심을 부려보아도 그 본질을 잃으면 모든 것은 덧없는 일이 되고 만다. 여기 천고 이래로 내려오는 복음, 이 진수의 복음이야말로 진정 일본을 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리라.

 

이는 복음주의적 신앙경향을 보이던 대표적인 일본기독교 지도자 우에무라의 논급이다. 그는 이와 같은 자신의 의중을 피력하면서 "교회는 구약의 예언자처럼 금일 사회변천의 의미를 통찰하고 시세에 따른 전도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 고유의 진리를 선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전제했고 당시의 설교가들이 기독교 본래의 영적 진리를 '케리그마화'하는 데 대한 노력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 지도자에 따라서는 매주일 예배당에서 초등학교의 교실처럼 '교육칙어'를 봉행하는 도덕시간으로 채우는 경우가 있는 점을 힐책했다. 그러나 한편에서 일본기독교인은 '제국의 신민'으로서 '교육칙어'에 상당한 경의를 표하는 국민적 덕육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기본'은 빼놓지 않았다. 여기에서 우에무라가 지닌 일정부분의 고뇌를 읽을 수 있다. 기독교 고유의 진리와 '컨텍스트', 곧 '시세'와의 '경중'을 비할 때 물론 '천고의 진리'가 우선한다는 데에는 추호도 양보없는 신앙적 입장을 논한다. 다만 당시 '메이지시대' 일본기독교인의 천황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와 정황적 이해의 한계는 그로서도 다른 방도가 없는 출발점이 되고 있다. 그렇지만 우에무라가 원칙론적인 기독교 신앙 입장에 대하 주장을 조심스럽게 시도한 배경, 그리고 우에무라의 입장이 지닌 또 다른 한계를 논한 도히의 분석에 이르면 '복음진리'와 '시세정황'의 갈등 유형이 곧 '황도적 기독교' 형성과정의 한 부분임을 간파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의 '교계시폐'를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곧 그는 '복음'을 '심령적 진리'로 한정하고 그 전도도 '영성 존망의 대사로 설'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의 복음이해는 의도적으로 내면화된 것이며, 사람들의 '경건의 비의를 계발'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분명히 그는 사회변혁의 가운데에서 고난의 체험은 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복음신앙으로 인해 우치무라처럼 혹독한 시련을 직접 겪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여기서는 우에무라의 복음진리 우선의 논조는 일면 유효한 저항이면서도 내면화된 신앙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제한적인 '실령적 진리'를 설파하는 데 머물고 있다는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이 무렵 우에무라의 완곡한 논조에 비해 더욱 직접적으로 천황의 지상적 권위에 대해 도전하는 듯한 논조도 등장하였다. 하나님 앞에 동등한 천부적 모든 인간의 권리, 천황에 대한 그리스도의 우위, 인간이 만든 '칙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성서'의 권위 등을 설파한 '사설'이 있다. 또한 다행이 천황의 배려로 신교자유의 헌법 하에 살지만, 만약 '칙어발포'등 다른 어떤 이유에서든 신앙의 자유가 유련될 시에는 신앙위주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착찹한 심경도 논설되고 있다.

그러나 '황도적 기독교'형성기에 야기된 가장 큰 사건이자 논쟁은 앞서 잠시 언급된 '우치무라의 불경사건'이다. 우치무라는 이른바 일본의 대표적 '무교회주의적 기독교 지도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특히 그는 독특한 일본적 기독교를 주창했으며, '메이지시대'일본 지성인에게 공통되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녔다. 그러나 이른바 '불경사건', 그후 '러일전쟁'에 있어서의 이른바 '비전론'주장 등으로 일정한 부분에서는 예언자적 독자 역할을 수행한 선구적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바로 그러한 우치무라가 도쿄제일고등학교의 촉탁교사로 재직하던 1891년 1월 9일 천황이 직접 서명한 교육칙어 봉배식에서 최경례로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세인의 혹독한 비난을 면치 못하고 결국은 직장도 잃고 '기독교 불경한'의 이름을 얻어 고통 중에 처해야 했던 사건이 일어났다. 곧 '우치무라의 불경사건'이다.

 

우치무라는 곤란해졌다. 경례라면 할 생각이었으나 배례라면 천황을 신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 있어서 칙어 앞에서 머리를 숙이지 않는 일은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는 확실히 알 수 있는 일이다. 배례는 이미 시작되었다. 교사들은 조용히 한 사람 한 사람 단 위에 올라가 정중히 최경례로 배례하고 내려왔다. 우치무라의 차례는 세 번째였다. 그는 조용히 생각한 후 결정하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는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는 상황이니 그들과 같은 식으로 행동할까 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그는 특히 자신과 함께 기숙사에 기거하는 학생들 십수명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들 앞에서 하나님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게 결심했을 때 그의 차례가 왔다. 그는 성큼 성큼 단위로 올라가 칙어 앞으로 가서 그대로 한 바퀴 돈 뒤 돌아 내려왔다. 단상에 섰을 때 어느 정도 머리를 숙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그것은 결코 보통의 경우 행하는 경례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물론 최경례는 더더욱 아니었다. 60명의 교직원과 1천 명의 학생들의 눈이 일시에 빛났다. 우치무라는 자기 자리로 돌아와서 학생들 중에 적어도 수명은 자신의 진실을 알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를 실망시킨 것은 그가 기대하고 있던 학생들이 차례 차례로 칙어 앞에 가서 최경례를 하고 만 것이다.

 

역시 우치무라의 이와 같은 행동은 일본 전국을 들뜨게 했다. 이같은 입장과 행위를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며 이러한 일을 계기로 일본의 천황제 국체와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도무지 공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주장을 편 대표적인 인물이 당시 도쿄제국대학 교수 이노우에 였다. 그의 비판은 우치무라 개인의 행위에 대한 비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의 기독교 자체가 과연 합당한가라는 기독교 신앙체계 전체에 대한 배척이었다. 이노우에의 집요한 비판과 기독교 전체에 대한 모독에 대해 맹종적인 관료나 교육가들이 오히려 형식적인 충성에 머물고 있으며 국체에의 충성과 신앙적 양심을 구별하는 기독교인들이 오히려 진정한 일본인으로서, 혹은 천황의 '적자'로서의 본분에 충실하고 있음을 내비치는 글을 썼다.

 

도대체 천황은, 교육칙어를 경배하라며 그것을 하사하였을까,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우리에게 실행하라고 한 것일까. 어느 쪽일까. 잘 생각해보면 좋으리라. 도코제국대학이 이노우에 교수는 나를 규탄하고 있다. 그러나 겉으로는 천황에 대해 감사하고 감사하심을 연신 발하며 머리를 숙이면서도 돌아서서는 듣기에 거북할 정도로 비열하게 비칙어적인 행동을 하는 인간들이 교육계, 도쿄제대나 문부성에도 우글우글 붙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사건을 계기로 천황제 확립기에 있어 일본기독교의 큰 위기가 온 것이다. 전통적인 '기독교사교론'은 차치 하더라도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형성, 강화과정에서 역시 기독교가 문제의 걸림돌이 된다는 여론이 일었다. 기독교지도자들은 일단 우치무라의 입장을 지지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들에게 있어 '신앙적 양심'이라는 것도 무엇보다 중요한 결단의 가치임에 분명하였다.

여기서 우치무라의 입장을 지지한 당시 대표적 일본 기독교계 지도자들의 입장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혼다의 경우를 보면, 그는 이노우에를 반박한 논지로서, 예수의 '로마의 것과 이스라엘의 것'에 대한 구별, 곧 '정교분리론'의 원칙을 내세웠다. 또한 기독교는 역사상 어떤 정치체제 안에서도 성립했고 순응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고 강조하며 일본에서도 결코 기독교가 국가체제나 목표와 충돌하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그는 양자를 분리시키는 논리를 통해 충돌의 가능성 자체를 일축했고 나아가 천황제 가족국가와 기독교공동체, 천황의 은혜와 하나님의 은총을 '상류하는 것'으로 규정하여 천황제 국체를 적극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둘째, 요코이의 경우를 보면, 그는 성서에서 가르치는, 유교의 충효와는 다른 방식의 충효를 강조했다. 즉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먼저 올바르게 세우는 보편적 도의를 확립한 후에 설정하는 부모와 나라에 대한 특수한 충효정신을 세우는 순차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기독교의 만국동포주의가 국가적 교육목표와 상충될 우려에 대해, 기독교는 국가적 종교는 물론 아니지만 현재 세계의 가장 넓은 지역에 확장된 기독교가 어떤 곳에서도 개별적 국가이념과 상충되지 않고 있다는 적응성을 들어 이를 반박하였다. 오히려 보편적 원리의 가치로서 특수한 국가적 이념의 응용에 공헌할 가능성을 설파했다. 셋째, 오니시의 경우를 보면 그는 이노우에를 논리적으로 공격하였다. 이른바 '기독교도 자체'와 '기독교 교리'를 구별하고, '비 국민적'이라는 말의 의미와 '반국민적'이라는 뜻도 첨예하게 구별하였다. 혹 기독교 교리가 '국가적인 경향'의 특성을 지니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을 국가의 통일, 통합에 반하는 것이라고 몰아붙이는 일은 옳지 않다고 했다. 넷째, 우에무라의 경우를 보면, 그는 우선 당시 일본사회의 정황, 곧 도덕과 교육이 추락한 시점에서 천황의 교육칙어 자체를 지극히 소중한 일로 인정했다. 그러나 그 칙어는 하사와 봉독으로 그치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실행에 뜻이 있다고 했다. 여기에서 기독교인들의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암시한 것이다. 그는 이노우에의 이른바 '충돌론'을 지극히 진부한 논리로 직접 대적할 가치도 못 느낀다는 입장을 취했고 훗날 이노우에로부터의 직접적 반론에도 간접적 내용을 논하는 것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다섯째, 특히 주목해보아야 할 인물이 가시와키이다. 일본조합교회 안나카교회 목사 가시와키는 중심적인 제도권 교회 목회자이면서도 '예언자적 풍모'를 잃지 않고 '교육칙어'의 논리로 기독교의 핵심을 압박하는 세력을 향해 의분으로 강력히 저항했다. 그는 우치무라 비판의 선봉에 섰던 이노우에게 가장 격렬하고 첨예한 논리로 반박을 가하며 논쟁을 떠맡고 나선 기독교 측 대변자였다.

 

가시와키의 이노우에 비판을 살피자. 이노우에가 처음 '담화'에 의하면, 1.기독교의 도덕은 '무국가적'이며 2.미래를 중요시하여 '현세적 사물을 천시하거나 경하게 보는 정서'를 불러일으키며, 3.그들이 자주 말하는 '박애'는 묵자가 말하는 '겸애'와 같은 것으로 '무차별적 사랑'으로, 자신의 아비를 사랑한 후 세상 사람들로 그 사랑을 확산해 나가는 '차별적 사랑'을 말하는 칙어의 박애와는 다르며, 4. 칙어도덕의 정수인 '충효의 이덕'을 강조하지 않는 점에서 칙어와는 상용될수 없다고 했다. 가시와키는 "충효의 정신과 기독교 정신과의 관계"에 대해 전체적으로 논한 뒤, '기독교와 국가', '기독교와 현세', '기독교와 박애', '기독교와 효행' 등의 각론을 다루었다.

 

가시와키가 행한 이노우에에 대한 반박 개요는 다음과 같다. 첫째, 천황이 국민도덕을 훈시한다고 하면 기독교는 세계인류를 위한 인간의 대도를 세우는 것이라고 하였다. 곧 기독교는 원리이고 국민도덕은 응용인데, 기독교는 결코 무국가주의가 아니며 보편적 원리로서의 위치에서 각국의 차이를 초월하는 가치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즉 천황의 칙어가 국가의 중심이요 표준으로 설 뿐 개개인의 내면이나 학문연구의 각론적 분야에까지 관여하지 않는, 일본국의 보편적 가치이듯이 기독교는 인류의 대도로서 또한 보편적 가치라는 것이다. 따라서 칙어와 기독교 간에는 상용 여부를 논할 같은 차원의 비교 준거도, 상치될 이유도, 윤리적 가치가 대립될 기준의 '상사'도 없다. 둘째, 기독교는 결코 장래의 완성만을 염원한다던가, 현재의 안락만을 추구한다던가, 혹은 현세적 가치를 경시하는 차원이 아니다. 셋째, 박애를 논하며, 유교의 박애가 친자간에 정애, 곧 '자연적 사랑'으로 출발한다면 기독교의 박애는 "하나님이 그 스스로 인간을 사랑하심을 시작으로, 저자서리의 사람들이란 곧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피조물들이며 그분의 형상인 것을 확신하여 그들을 존중함으로써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진실로 서로 돕고 사랑하는 것이다. 넷째, 기독교가 칙어의 충효도덕을 방해한다 함은 옳지 않다. 인간의 품성은 실로 그 '경건의 염'의 성숙과 발달로 좌우된다. 임금과 부모에 대한 존숭의 마음가짐도 '경건의 염'과 무관치 않다. 깊은 기도교적 경건은 충효의 함양에 기여한다. 기독교를 두고 교육과 종교의 충돌 운운은 진리의 본체 안에서 서로 통하는 인간 성품의 경건과 행위의 문제를 간과한 소치이다.

'우치무라의 불경사건'은 천황제 국체 확립기에 있어 일본기독교와 국가적 가치가 갈등한 극점을 이룬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당사자인 우치무라보다도 더욱 강력하게 압박세력에 대항하며 논의를 편 인물이 가시와키이며 그의 논리가 당시 일본기독교 지도자들의 천황제와의 대립구도에서 가장 강성의 비판 수준으로 보아도 틀림이 없다. 그런데 그와 같은 '극도 강성'의 가시와키 논리 역시 앞서 살핀 다른 반박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구조에 있어서는 체제에 대한 적대로서의 기독교 비판에 대해, '결코 그렇지 않음'의 변증으로 일관한 내용이다.

결국 일본 '황도적 기독교'의 형성 노정에서는 '적응과 갈등', '순응과 대치'에 있어 '반박 강도의 스펙트럼'은 형성되었지만, 적어도 제도권 교회 내부의 상황전개 안에서는 이른바 '황사영형'의 양태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훗날 이른바 '소종파'나 '극단적 섹트 형태의 소그룹'에서 발견될 개연성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며 일본기독교는 '황도적 기독교'로 그 정체성을 형성해 나간다. 더욱 철저히 천황제 국가체제에 적응하고 그 국체에 적대되지 않은 공동체로서의 성격구축을 위해 노력하고 변증하며 국가 안에 포섭된 신앙공동체로서의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2) 황도적 일본기독교의 특성과 존재양식

일본 근대국가의 '근대화', 곧 '메이지유신'을 기점으로 기독교 수용론이 일단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당시 주요 지도자들은 '화혼양재'의 사상하에 '기독교사교론'의 전통적 금교정책을 포기하지 않았다. 더구나 일본 근대국가가 지향하던 애초의 정책기조가 '신도국교화'를 통한 천황 신성화였고 이는 여타 다른 종교사상, 특히 강력한 유일신 신앙과 신앙정조의 배타성을 지닌 기독교에 대한 경계는 철저하였다.

그러나 일본 근대국가의 대외적 교섭, '탈아입구론'에 의한 서구적 근대화 지향 노선의 대류에 의하면 '국교화정책'이나 '신앙자유의 제한'등은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도 '신도국교화'를 통한 국민교화정책이 불교를 비롯한 다른 기성종교의 반발 등으로 실패조짐을 보였다. 이에 일본 근대정부는 '국교화정책'을 포기하는 '신교자유'의 방향으로 노선을 수정했고 다만 일반 '교파신도'와의 분리정책으로 태동한 '초종교'로서의 '국가신도'와 '천황 신성성'을 상위에 두고 다른 모든 신앙 종교체계를 그아래에 두는 '종교 예속화'정책을 실현시키면서 실질적인 종교통제 효과는 계속 유지하고자 했다. 특히 '신교자유'를 명기한 제국헌법은 그 자유의 조건으로 국가의 안녕 질서를 해치지 않고, 신민 으로서의 의무에 반하지 않을 때라는 단서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더구나 이와는 별도로 다른 헌법조항에는 천황의 신성 불가침성을 명기하여 종교적 신앙양심도 천황의 신성성 앞에서는 제한, 통제될 수 있는 개연성을 모두 열어두었다.

이와 같은 국가적 정황과 대세 하에서 일본 초기 기독교는 이른바 신교의 자유와 포교권을 획득한 것이다. 이는 이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신교의 자유가 국가나 천황으로부터 받은 대단한 은혜요, 선물로 인식하는 정서를 지니게 하였다. 전통적 '기독교 사교론'과 특히 근대 천황제의 강력한 국가체제 성립과정에서 서구의 신앙체계를 신봉하는 '방해자'로서의 자신들을 자비로 용납하고 허용하는 천황제 국가의 은혜는 모든 충성을 다하여 응답해야 할 '특은'으로 인식하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지닌 강력한 종교적 성향, 특히 '교육칙어'의 우상시된 배포, 국민적 실천 강요 과정에서 일부 기독교 신앙자들과의 갈등은 야기되었다. 우에무라를 비롯한 복음주의적 지도자들의 기독교 신앙 우선에 대한 신앙적 원칙론 개진, 그리고 '우치무라의 불경사건'이 구체적 계기가 되어 가시와키로 대표되는 기독교 논객들의 호교 변증론에서 전개된 '기독교와 천황제의 상용 논쟁'과정이 그 갈등의 대표적 사례이다. 그렇지만 이 무렵의 일본기독교 지도자가 지닌 기본적 정체성은 신앙에 있어서 '국가적응 신앙유형'의 전형이었다.

이들이 근대 천황제 국가에 대해 성명한 내용의 핵심은 이 기독교의 본질이 추호도 천황제 국체나 교육칙어의 도덕적 실천목표, 일본 제국의 대외적 목표, 전통적인 일본의 문화체계나 가치에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혹 그들간에 차이나 간격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차원이 다른 데서 오는 비교불가의 원형적 문제이지 상용불가의 평면적 문제는 아니라는 설득이었다. 또 한번 이들 초기 기독교 수용자들의 대다수가 비록 현실적 몰락 경험의 비율은 높지만, 가문적 전통이 '귀족 사무라이'나 각 지방 지도급의 사회성분이었던 관계로 국가나 주군(천황)에 대한 충성 태세의 기반이 갖추어져 있었다는 사실도 기독교와 천황제 국가 간의 갈등을 원만히 극복하고자 하는 경향의 바탕을 제공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상의 경로를 통해 형성된 일본 초기 기독교의 성격을 '황도적 기독교'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황도적 기독교'의 존재양식은 어떤 것이었을까.

 

교회나 기독교계 학교가 당면했던 천황제와 관련된 문제를 살펴보자. 천황제가 이와 같은 조직에 관여한 방법으로서는 '히노마루'의 게앵, '기미가요'의 제창, '교육칙어'의 봉독, '어진영'의 하사와 경배, 천황폐하 만세 화창 등의 실시를 강요한 것 등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것들은 학교의 입학식, 졸업식, 그리고 기타의 특별 행사에서 실시되었는데, 또 한 가지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것들이 국가의 축제일, 황실의 경조일에 봉행 되었다는 사실이다. 국가축제일이라는 것도 모두 천황과 관계된 것이다.

 

국가의 요구에 대해 특별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순응하는 교회나 기독교계 학교의 적응양식은 당시 일본기독교의 존재양식의 전형이었다. 이들 천황제 국가의 상징적 행사나 의식에 종교적 성격이 포함되지 않았다거나 기독교 계율과의 상충이 없다라는 신학적인 검증이 선행되어 이와 같은 적응과정이 용이했다 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일본사회의 직접적인 압력이 더욱 크게 작용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일본 기독교 스스로가 천황제 국가체제 안에 적응해 나가는 길만이 당시 시대적 정황 아래서 일본기독교가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임을 자각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교회나 기독교계 학교는 천황과 황후의 은덕을 말하고 충성의 뜻을 표명해 왔다. 그들은 천황제 아래 압박을 받으며 그 이데올로기에 자신들의 신앙체계를 침해당하여 왔다는 피해의식을 지닌 것이 아니라 천황제 아래 놓인 자신들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그 이데올로기와 기독교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연결지으면서 자신들의 목표를 추진해왔다. 그러나 당시 사회 분위기는 그러한 기독교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반국체 관념을 주장하는 외래종교로서 일방적으로 배척하였다. 기독교에 대한 반대 세력의 방해나 위해는 불교계, 혹은 보수계열의 신문, 잡지의 논조를 통해 집요하게 제기되었다. '교육과 종교의 충돌'과 같은 논쟁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의 기회나 계기를 통해 그들은 반기독교적 논평과 기사를 게재하였다. 이와 같은 언론 활동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전도집회나 예배, 교회헌당식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이들의 집회를 방해한다던가, 위협을 가하는 일이 많았다. 또한 학교 교사나 교육 관계자들은 학생들이 기독교 집회에 참석하는 일을 싫어하거나 노골적으로 금지시켰다. 상급생들로부터 이러한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는 일도 많았다.

 

결과적으로 '황도적 기독교'의 존재양식의 특성은, 당시 일본사회로부터 가해지는 기독교에 대한 압박, 천황제 국가의 정책적인 회유와 탄압이라는 외부적 조건과 일본기독교 스스로의 적극적인 천황제 국가체제에 대한 적응의지라는 내부적 동인이 함께 형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우선순위의 문제는 어떤 각도에서 보는가에 따른 일일 것이다.

그런데 일본 최초의 교회라고 볼 수 있는 요코하마공회 설립 당시의 규칙안과 그 규칙이 후에 일본기독교의 신조로 정식 채택되지 못한 경위를 살피면 어느 정도 그 선후의 문제가 객관적 우선 관계를 보이기도 한다. 곧 일본기독교의 적응의지는 사회적 저항을 현실적으로 받고 난 이후 타협의 존재양식으로 형성된 차후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일본인이 참여한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1872년 3월에 요코하마에 설립된 일은 잘 아는 바와 같다. 그런데 정부의 위탁으로 기독교 내부에 잠입했다는 첩자 안토에 의하면 설립된 당시의 교회규칙에 "제1조, 황조토신의 묘전에 배례하지 않을 것(출애굽기 20장 3-5 인용), 제2조 왕명이든 그 어떤 가르침도 신앙의 길에 어긋날 시에는 굴종치 않을 것(사도행전 4장 19절, 5장 29절 인용), 제3조 부모 혈육의 은혜에 애착을 가지지 않을 것(마태 12장 48절, 요한 2장 4절 인용)"을 첨가하자는 이들이 있었다고 하며, 더욱이 그들은 "천지간에 있는 신기부조 등의 우상에 종사하는 마음을 없이하고......(사도들이)성령의 감화에 의해 정부 주장에 대해 강경 불굴의 기개를 지녔던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역시 강인함을 허락해 줄 것"을 기도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앞의 세 가지 규칙안, 혹은 기도제목은 종교성이 농후한 천황제 국체를 형성해나가고자 했던 일본 근대국가의 방침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것이요, 황도정신의 선양을 위한 국가적 목표와 상충될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이는 곧 전통적인 '기독교사교론'을 자극시켰고 사회분위기도 기독교에 대한 경계태세로 돌입하게 하는 한 가지 원인제공이 될 수 있었다. 마침내 일본기독교 지도자들은 빠르게 그 적응의 길을 택했다. 그로부터 수개월 후에 나온 '공회'의 규칙에는 원칙론적인 규칙만 나열되었고 1874년 10월에 '교하마', '한신'의 4대 공회 대의원, 선교사들이 모여 채택한 '일본기독공회조례'에는 아예 그와 같은 조항은 모두 삭제되었다. 결과적으로 일본기독교의 진로는 현실적 선택으로 적응의 방향을 택했고 그 명분은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의 분리'에 있었다.

이상에서 살핀 '일본 황도적 기독교'의 존재양식이 지닌 '신학적 특성'은 어떻게 정리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 현실적으로는 가장 철저히 국가사회에 적응된 기독교의 존재양식을 취하면서도 그 명분으로 밝히는 '신앙과 사회', '종교와 국가'의 분리에서 찾을 수 있다. 이미 앞서 일본의 대표적 복음주의적 기독교 지도자 우에무라의 논지에서 '복음진리'와 '시세정황'을 구별하는 발상을 살핀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우치무라의 불경시비를 기독교 입장에서 지원하던 혼다의 논지에서 '이스라엘의 것과 로마의 것'을 구별하는 논거를 살핀 바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논거는 대개 성서적으로 보면, '신약적', 특히 복음서에 근거를 둔 '개인적 심령적 구원'에 기대어 있음을 발견한다. 특히 우에무랑서 처럼 '구약의 예언자'보다는 '기독교 고유의 진리, 곧 영적 진리'를 강조하는 입장, 그에 대한 훗날의 비평자들이 논하는 것과 같은 '내면화된 신앙'과 '심령적 진리'를 강조하는 '탈역사적 기독교'로의 '전가현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황도적 기독교'의 신학적 존재근거가 '신약적', 혹은 '개인 구원적' 특징에 의존하여 '신앙과 민족',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는 소극적 태도에 머무는 것만으로 당시의 정황을 다 수용할 수는 없었다. 또한 여기까지의 특성만으로는 '황도적'이라는 명칭에 걸맞는 '정황적 기독교'의 성격에 당도하지 못한다. 결국 마지막으로 이러한 일본의 기독교는 자신들의 기독교가 일본의 국가적 목표와 이상에 저촉됨이 없는 '국가적응'의 기독교임을 변증하여야 했다. 심지어 기독교 고유의 '보편적 진리성'과 국가체제로부터의 '독립성'을 강력히 주장하던 강성의 논객 가시와키마저도 '체제저항'이나 '국가배타'의 성향이 아닌, 철저한 '적응'의 '변증론'을 지녔다. 이것은 곧 '탈서구', '동양적', '일본적' 기독교로서의 특수한 정황을 수용하는 지향성을 지닌 것이다.

 

(3) 일본 기독교 신학

일본의 신학교육의 과제는 '교회적 주체성의 확립'에 있다. 그러나 그 주체성의 확립은 단지 싱학 제학과를 열심히 학습하는 것이나 주관적 결단이나 노력에 의해서 달성되는 것은 아니다. 이 주체성의 확립은 저 양극성 즉 테제와 안티테제의 양극 대립의 초극으로서 실현되는 것이다. 테제와 안티테제를 극복하고 보다 높은 차원의 준테제로 올라가므로 그 주체성은 성립되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이 양극성, 즉 테제와 안티테제의 대립이 저 거대한 세계관적 상극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내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그와 같은 것이 있다면 그 극복은 단순한 사변적인 윤리조작에 의해서 실현될 수 없다. 왜 이 양극성의 극복이 '교회의 주체성'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가가 여기에 걸려있다. 그것은 이 상극의 극복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확실한 자리, 확실한 토대, 튼튼히 서 있는 것이 없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자연'과 '역사'의 상극의 극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요한계시록에 있는 것같이 '신천신지'의 출현에 의하지 않고는 현실화하지 않을 것이다. 신천신지라고 하는 종말론적 개념 안에는 '천지'라는 자연개념과 '새롭다'라는 역사개념이 결합해 있다. 혹은 같은 종말론적 개념이 '육체의 부활'혹은 '부활한 육체'라는 개념도, 육체라는 자연 개념과 부활이라는 역사개념을 결합시키고 있다. 어쨌든, '자연'과 '역사'라는 세계관적 상극을 지양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고려된다면 그것은 종말론적 차원에 눈을 돌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혹시라도 그것이 종말이전에 즉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중간 시대에 생긴다고 하면 그것은 종말론적 가능성을 선취한 교회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는 자연과 역사의 종말론적 극복을 선취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서 우리들은 뢰비트와 같은 그 상극을 양자택일이 아닌 초극하는 것이다.

확실히 '교회'는 일본에서는 외래종교의 한 요소로 간주되고 있고, 따라서 테제에 대한 안티테제의 구성요소의 하나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것은 교회가 이 양극구조를 지금까지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티테제의 구성요소로 간주되는 것을 피해서, 테제(내셔널리즘)에 굽힌다고 해도 의미는 없다. 우리들은 교회가 이 양극성을 극복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발휘하여 그 극복을 실현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이 문제를 라인홀드 니버가 좋아해서 인용하는 아모스의 예언에 의해서 고찰해 보려고 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들은 내게 구스 족속 같지 아니하냐.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블레셋 사람을 갑돌에서 아람 사람을 길에서 올라오게 하지 아니하였느냐..."(암 9:7).

 

여기에서 놀랄 만한 일은 이스라엘은 구스 족속이나 아람사람을 같은 계열에 두고 더욱이 구원의 대 사건인 출애굽은 다른 민족의 민족 이동과 병렬되어 있다. 절대적인 하나님 아래서 세계역사의 모든 것은 상대화되어 있다. 이 독특한 상대주의를 신학적 상대주의로 부른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점에서의 세계의 상대화이고 그 세계 가운데 모든 민족의 역사가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니버는 여기서 "세계사"라고 하는 개념의 최초의 발생을 보는 것이다.

이 예언자의 사상을 어떻게 받아들일까는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 당시의 이스라엘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이 저 테제와 안티테제의 대립을 극복해서 '교회적 주체성'을 확립하려고 한다면, 이 예언자의 사상을 바르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분명히 교회는 외래적인 것으로서 그 자신의 구체적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일본의 전통적인 것과 상극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교회가 이 예언자 아모스에 의해서 나타난 하나님을 갖게 되므로 그 테제와 안티테제의 대립 상황을 상대화하는 것이 가능한 힘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교회는 자기상대화의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으로 절대적인 하나님과의 결합에 의해서 가능하게 자기 상대화인 것이다. 이것이 신학의 능력이다. 자기 상대화란 반성이며 거기에는 자기 비판이 포함된다. 일본의 신학자 와타나베젠타씨는 "교회의 존속은 교회가 신학을 갖는 것이며 또한 교회가 신학으로 견지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이 발언은 진리성을 가지고 있다. 왜 이단이 오래가지 못하는가. 확실히 중세말기에는 이단심문이 있었고 이단을 처단했다. 고대의 마르키온은 강력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왜 그 이단이 살아남지 못했는가, 그것은 이단심판의 성과라기보다는 오히려 신학에 버티지 못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학이라는 반성능력을 교회가 갖는다고 하는 것은 교회의 강력함인 것이다. 그것은 '교회적 주체성'의 기능인 것이다. 일본의 전통적인 것(테제) 가운데는 이와 같은 자기 상대화의 능력은 없다. 일본이 의지하는 세계적 근거로서의 '자연'은 이와같은 자기 상대화를 불러 일으킬 하나님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테제와 안티테제의 상극의 극복은 안티테제쪽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역사적으로는 안티테제에 속하여 있다고 하더라도, 그 본래의 자리는 그 극복으로서의 준테제에 있다. 그 위치를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자전거느 정지해서 서있기 위해서(테제)는, 그것을 넘어뜨리는 힘(안티테제)을 방지하는 받침이 필요하다. 그러나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 받침을 치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넘어뜨리는 힘은 오히려 앞으로 나가는 힘으로 바뀌어, 자전거는 달리게 되어, 보다 동적으로 서는 것이다. 정지한 상태(테제)에서 서는 것과는 달리 고차원적으로(준테제)서는 방법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이 계속 서있게 하기 위해서는 달리지 않으면 안되고 그러기 위해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현재의 상태를 의식하고 또한 가야 할 앞길을 시야에 넣지 않으면 안된다.

이 신학은 예를 들면 결단을 강조하는 실존론적 신학과 가은 점적인 것보다 더욱 큰 역사적 시야를 갖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아모스와 같이 세계적 시야를 갖는 신학, 역사의 신학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역사학을 이용하는 역사신학이 아니라 아모스에게서와 같은 수지가원을 가짐으로써 주어지는 역사적 시야를 갖는 역사의 신학인 것이다.

이 준테제라고 하는 고차원적인 위치를 신학적으로 확보하므로 교회는 구화주의의 일익을 떠맡는다는지 혹은 거꾸로 국수주의에 영합한다든지 하는 양극의 사이를 우왕좌왕하는 것으로부터 탈피하고 그리고 일본에서 혹은 동북아시아에서 교회가 어떠한 역할을 완수할 수 있을까를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 기독교의 박해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를 용인하였는데, 그결과 신도는 수십만으로 증가하고 야소카 이외에도 프란시스코파, 도미니코파 드잉 전국에 퍼졌다. 그러나 신자의 증가는 막번체제의 붕건지배에 위협을 느끼게 했으며, 전통적인 불교와 유교측에서도 반대했다. 특히 신교국인 화란과 영궁에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영토침략의 의도가 있다고 소문을 퍼트렸다. 때마침 막부의 관리 중에서도 신자가 적발되자 이에야스는 금교를 결심 1612년 직할령에 금교령을 내린데 이어, 다음해에는 전국으로 확대했다. 이때 많은 선교사와 신자를 체포하거나 추방하고, 동시에 개종을 강요했다.

이러한 막부의 금압은 오히려 신자들의 신앙을 강화시켰으며, 잠재하는 시도들이 각지로 퍼져가는 상황으로 되었기 때문에 막부는 카톨릭교를 절멸시키기 위해 가혹한 박해를 가하여 각지에서 장렬하게 순교하는 신도들이 적지 않았다. 거기에다 1622년 나가사키에서는 대순교라고 불리는 대규모 처형이 행해졌다. 이런 정세 속에 1637년 큐우슈우의 시마바라와 아마쿠사에서 신도 농민들의 봉기 (시마바라아마쿠사이키)가 일어났다.

막부는 1616년 유럽선의 기항지를 히라도와 나가사키로 한정함으로써 무역통제의 고삐를 죄었다. 이윽고 영국은 화란과의 경쟁에서 실패하고 이익면 에서도 신통치 않자 1623년 스스로 히라도의 상관을 폐쇄하고 중국과 인도의 무역에 주력하게 되었다. 다음 해 스페인선의 내항마저 금지됐으며 또한 1635년에는 일본의 해외도항과 해외거주 일본인들의 귀국조차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1635년 포르투갈 인을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옮겨서 격리시켜 놓고, "시마바라의 난" 후 1639년에는 포르투갈선의 내항을 금지함으로써 오랫동안 대일 무역의 주역이었던 포르투갈이 일본에서 철수하게 되고 이로써 본격적인 쇄국이 시작되었다.

막부가 쇄국을 취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역을 독점하여 막부의 재정을 확보하려는 경제적인 목적이었으며, 둘째는 정권안보의 차원에서 통치이념과 배치되는 그리스도 교를 금지시키고, 셋째로는 큐우슈우의 시마즈 호소카와 아리마 등의 번에서 그때까지 무역을 활발히 하여 부를 축적하자, 모반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고, 다이묘오의 재정을 궁핍화시키려는 통제책의 일환으로 쇄국을 실시한 것이다.

따라서 에도시대의 쇄국은 정치적으로는 체제의 안정을 굳건히 유지하면서, 경제적으로는 독점적인 통제무역을 통해서 폐쇄 회로적 통상을 추구했던 것이다. 즉, 수입에서는 폭리를 취하고 해외정보를 독점하는 한편, 수출에서는 은의 과다 노출을 막아 물가를 조절하는 등 오늘날 말하는 소위 "통제된 국제무역"을 실기함으로써 메이지유신의 근대화 과정으로도 그 맥락이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1641년에는 유일한 유럽인인 화란 상인마저 히라도의 상관으로부터,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격리시켜 일본인과의 접촉을 철저히 금지시키고, 막부의 파견관리인 나가사키부교오의 감시하에 두었다. 이러한 쇄국조치는 1854년까지 존속되었다.

이러한 막부의 조치 목적에는 카톨릭 금지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 이외에 해외 무역을 막부의 독점아래 두려는 의도도 더해져 있었던 것이어서 완전히 해외 관계를 차단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후 오랫동안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는 동안에 쇄국이라고 해서 깨뜨려서는 안되는 규정이라고 생각되게끔 되었다. 이처럼, 쇄국 체제는 일부는 이 지배자를 제외한 일반 사람들을 세계문명의 빛으로부터 차단함으로써 현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세계진보의 자극으로부터 멀어지게 했고, 국내에 대한 엄중한 사상 통제와 더불어 막부 전제하의 봉건 사회를 오래 유지하려고 한 것이다.

 

Ⅲ. 결론

처음에 이에야스는 카톨릭교의 포교를 묵이하고 있었으므로 신도들의 수는 점차 증가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영국과 네덜란드의 등장으로 남만무역에 대신하는 새로운 무역루트가 열리자 묵인정책을 고쳐 1612년 직할령에 금교령을 내려서 교회를 파괴하고, 선교사와 개종하지 않는 카톨릭 교도를 국외 추방했다. 이에야스는 시마바라의 난과 같은 민의 통제와 사상적 문제에 의한 무역통제를 위해 카톨릭을 강하게 탄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당시 일본 사회에 결핍되어 있던 가치관, 인간관, 세계관을 사회적 실천을 통해 영주 지배층뿐 아니라 일반 서민에게까지 가르쳐 주는 등, 일본근세의 서막을 장식하기에 충분한 일대 문화활동이었다고 보여진다.

일본에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50년 전인 1549년이다. 이 해 예수회 창립자의 한 사람인 프란시스 사비에르가 일단의 선교사들을 이끌고 일본에 들어와 포교를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는 일본의 전국시대였다. 기존의 권위가 모두 무너진 상황에서 각 지의 영주들이 패권을 잡기 위해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무사들은 물론 일반 백성도 이러한 싸움 속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죽는 것이 오히려 행운이었다.

각종 수탈과 도적들의 습격, 지진, 태풍 등 천연재해와 전염병 때문에 사는 것이 더 어려웠다. 이런 가운데 부활과 천국의 희망을 전해 주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민중 속에 쉽게 파고 들어갔다. 기독교도는 선교가 시작된 지 반세기만에 30만을 넘었다. 당시 인구가 2천만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전국시대의 영웅들 중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외래 문물에 호의적이었던 만큼 기독교에도 호의적이었다. 그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 시(豊臣秀吉)는 매우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기독교의 사상을 배척하면서도 심하게 탄압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 뒤 일본 천하를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였다. 그는 기독교를 탄압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한국인 오다 줄 리아의 순교도 이 때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일본인답게 그 탄압도 실용적이었다. 기독교도라고 무조건 처벌하지 않고 개종을 하면 용서하는 식이었다. 그 때 쓰인 도구가 후미에(踏繪)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나 성모 마리아가 그려진 그림을 땅에 놓고 이를 밟고 지나가 면 기독교를 버린 것으로 간주해 용서하는 식이었다. 지금도 후미에는 일본말로 어떤 사상적인 자기 증명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기독교도 의 저항은 1637년 시마바라(島原)성의 항전으로 끝을 맺었다. 기독교도이던 상당수의 사무라이와 농민들은 성 함락과 함께 모두 학살당함으로써 일본에서 기독교는 종말을 고했다.

그로부터 250여 년 후 메이지(明治) 유신과 함께 다시 기독교가 일본 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일본인들은 기차나 전 기, 군함, 용광로 등은 열심히 받아들이면서도 기독교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했다. 지금도 기독교는 일본에서 거의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일본에도 추기경까지 있지만 인구가 1억2천만을 헤아리는 지금 기독교도는 1백만 명 미만이다. 300년 전과 달라진 그 이유가 단지 시대 상황의 탓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300년 전이 특수한 경우였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일본에서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그 이유야말로 일본인의 정신 세계를 이 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일본인에게 기독교의‘원죄’나‘구원’은 매우 낯선 개념이다. 일 본인에게는 오히려‘운명’이나 이러한 운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체념’이 훨씬 친숙하다. 사회 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으로부터 수치를 당하지 않는 것이라고 루스 베네딕트도 말한 바 있다.

한 예로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아들을 죽인 사무라이의 이야기가 있다. 이 가난한 사무라이의 아들이 어느 날 떡집에서 떡을 훔쳐먹었다 는 혐의를 받는다. 사무라이는 당장 떡집 주인이 보는 앞에서 아들의 배를 갈라 떡을 훔쳐먹지 않았음을 증명한 뒤 떡집 주인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결백을 증명치 못하고 수치스럽게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2차 대전 중 일본군이 포로가 되기보다는 장렬하게 전사하는 옥쇄를 선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주 보통의 일본인들에게는 실제로 존재하는 눈앞의 사물을 두려워하고 숭배하는 신도(神道)가 잘 맞았다. 일본인의 실용성이 현실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기적이라든지 부활, 최후의 심판과 같은 개념을 믿기 어렵게 만드는 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서정민 역(2000) 『일본기독교의 한국인식』. 한울출판사

후루야야스오(1994) 『일본의 신학』. 대한기독교서회

무라카미 시게요시(외) 최길성 역 (1993) 『일본의 종교』. 예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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