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연구의 필요성
서론(序論)
기독교의 신앙과 역사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그 순간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그 역사는 누가 기록을 하든지 하지 않든간에 지금까지 기록되어 왔고 앞으로도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계속 기록되어 질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예정된 구속의 역사는 그누구도 잡아 놓거나 중단시킬수 없으며 또한 뒤로 물러가게 할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예정된 구속의 역사는 이 땅의 피조물들에 의하여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 이루어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태어난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역사를 부인할수도 없으며 부인해서도 안된다.
다만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속에 들어가 그의 살아 계심을 인정하고 그와함께 할때만이 참된세상, 참된인생, 참된길을 걸어 갈수가 있다.
기독교는 신적 기원을 가진 역사적 종교이다1). 그리고 역사란 그 시대에 일어났던 사건들의 사실이며 그 사실을 증명하는것이다. 바꾸어 말해본다면 하나님께서 이땅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실 때 죄지은 인간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시어 죄인들을 구원하신 구원사 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또한 그를 통하여 구원받은 믿음의 선진들이 그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기 위하여 핖밖속에서도 담대히 순교의 피를 흘리고 이 땅의 미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고 한시대를 믿음으로 살다간 거룩한 사람들의 순교사이기 때문에 교회사는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러한 순교사적 역사의 기록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2000년이란 긴 세월을 지내는 동안 수 많은 역사가 기록되었고 또한 하나님의 그 구원의 역사는 너무 광범위하여 인간의 짧은 지식으로는 그 역사의 기록을 처음부터 일목요연하게 연구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교회사를 연구하는 역사 신학자들도 많이 있고 연구 발표한 저서들도 수없이 많이 있다. 그러나 학자들마다 연구한 방법들이 다 다르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한눈에 이해할수 있도록 쉽게 정리 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이다.
왜냐하면 어느 한나라에 국한된 민족사가 아니라 온 인류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께서 남긴 세계사이기 때문이다. 또한 대부분 학자들이 객관적입장에서 보다는 주관적인 입장에서 기록되어진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는 그 시대마다 그 장점이 있고 공헌이 있으며 잃어버린 것이 있는가 하면 잊혀진것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의 역사를 연구해야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역사적 사실로 기록되어진 성경의 사건을 이해하고 또한 성경속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인간사속에 능력으로 나타나 쉼없이 일해오신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이 베프신 은혜를 현실속에서 깊이있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21세기를 바라보며 사는 우리들의 삶도 그 의미를 부여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서양문명의 원천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큰 저력(底力)이 된다. 그리고 기독교 교회사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중심해서 그리스도의 이전의 역사와 그리스도 이후의 역사로서 나누어 연구 할수 있는데 그리스도 이전의 역사를 총칭하여 구역의 역사라고 하며 그리스도 이전의 역사를 교회사라고 한다. 이러한 기독교의 역사는 세계사의 구심점이 되고 있
다.
敎會史 硏究의 必要成
알렉산더 밀러(Alxander Miller)는 기독교 역사 연구의 필요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을 했습니다. “역사의 연구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과 연대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 자신에 대하여 배우는 것이다 즉 우리는 역사를 통하지 않고는 자신을 설명할수 없다”는것이다. 이 말의 뜻은 나 자신에 대한 삶의 설명은 지나간 나의 삶에 역사를 알아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역사를 연구하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역사해오신 일들을 알수가 없기 때문에 기독교 역사연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를 연구해야될 또 하나의 필요성이 있다면 그것은 절대자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인 그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바로 이해하기 위한 지성인들의 간절한 학분적인 열망과 참 진리의 척도가 무었인가에 대한 탐구로 우리를 초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1900년대를 지나 2000년대의 또 다른 강을 건너왔고 하나님은 21세기에도 변함없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에 역사는 진행되어갈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주인공은 누가될수 있을것인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한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사의 한 페이지를 남기기 위해서 오늘의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되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할것이다.
둘째는 인생의 바른 가치관의 실천적 요청 때문에 역사연구가 필요하다.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 역사를 보면서 사람이 어디서와서 어떤존재로 무었을 추구하며 살아야하며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하는가를 바로 알기 위해서이다.
그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알 듯이 그 시대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수 있기 때문이다.
참된 인생관의 형성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객관적인 진리를 주관적으로 체험하는데서 비롯되듯이 그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여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한걸은 앞당겨 나갈수가 있는 것이다.
셋째로 교회사는 하나님의 구원에 역사이기에 중요하다. 죄로 타락한 인류를 하나님께서 지난 시대마다 어떠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알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 과거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하여 미래를 조명하여 볼 수 있는 기회가 될수있기 때문이다2).
화란의 역사학자 레너(G.I. Renier)는 역사를 마치 어망(魚網)처럼 모든시대에 걸처 개인이나 단체에서 얼어난 얽히고 설킨 복잡한 사건들과 함께 묶어놓은 지나날의 인간들에 체험이다 라고 정의 한다. 이것은 역사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전기를 결합한 이야기의 정수라는 의미이다. 즉 사람들이 살다가간 체험이기 때문에 연구의 필요성을 느낀다. 따라서 로마의 역사가 키케로(Cicero)는 역사를 참된시대의 증인이며 진리의 빛이라고 했다. 이 말은 역사를 통하여 지난날 인류와 우주의 흔적을 되돌아 볼수 있기 때문이라는것이다.
결국 역사는 오늘의 시점에서 과거에 관한 지식을 탐구,정돈, 해석하여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학문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역사는 어제를 살다간 인간들의 체험을 통하여 내일에 대한 소망과 꿈을 키워갈수있는 학문적 가치가 될수 있기 때문에 연구하지 않으면 않될 학문중의 학문이다.
1920년대 독일의 신학자 칼바르트(Karl Barth, 1886-1965) 는 교회사를 신학의 한 보조학문으로 취급하였다. 그는 역사신학을 통하여 역사주의를 비판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그는 루터나 칼빈을 자주 인용하였다. 신학이 하나님으로부터 사유한다고 하면 역사는 인간으로부터 사유하기 때문이라는것이다. 그는 신학과 역사를 이원화하고 신학적 계시는 그것이 인간에게 전달될 때 역사로 매게된다고 주장하였다. 그결과 그는 계시중심에 무게를 두어 역사의 객관성을 약화 시켰다. 그러나 1933년-1945년 독일 히틀어의 나치하에서 교회의 투쟁은 그의 교회사 연구를 새롭게 하는 전기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이후 교회의 역사는 더 이상 보조학문이 아닌 교회사 연구의 신학적 의의를 더욱 부각시켰다.3)
이탈리아의 역사학자 크로체(Beneditto Croce. 1866-1952) 는 “모든역사는 현대사”라고한다. 이말은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제의 눈을 통하여 과거를 봄으로부터 성립이 되고 따라서 역사가의 중요한 일은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만일 역사학자가 과거를 평가하지 않는다면 무었이 기록될만한 것 인지 알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시대 평가를 받고 기록된 역사는 연구해야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영국의 역사가 에이취카 (E,H Carr)4)는 “역사란 무었인가”에서 역사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역사란 현제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연구란 과거와의 대화이기 때문에 계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2 敎會史의 신학적 理解
1). 神學의 正意
신학(Theology) 이란 용어는 헬라어 신(神)이라는 단어 데오스(theos)와 말씀이라는 단어 로고스(logos) 의 합성어이다. 이 말은 헬라어의 문법상 소유격이나 주격과 목적격으로 다 사용되어 “하나님이 말하신다”와 “하나님을 말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신학이라는 용어가 성경에서 직접 발견되지는 않지만 바울은 고린도전서 8:1절의 말씀을 통하여 성도들을 바로 인도하고 이들에게 영적이며 지적인 계몽을 말하고자 할 때 논쟁적 의미의 “지식”이란 단어를 통하여 표현되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놀라운 신학의 발전을 가져왔고 그 반면에 다양한 신학의 홍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렇게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을 변증하지 못하고 영계를 흐리게하는 이때 우리는 지금 바른 신학을 정리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만 정리할수 있는지 그 방향을 설정하기가 그리 쉽지가 않다.
그러므로 신학을 바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시대에 국한된 신학이나 어느 한 개인이 주장하는 신학을 따르기 보다는 신학의 역사적 변천사의 연구를 통하여 바른 신학을 정립할 수가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대 희랍철학자들은 신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자신들의 이성으로 신들을 알기 위하여 깊이 연구하여 발전시킨 학문이 철학이다. 그런가 하면 초대 교회때 로마의 박해와 이교도들의 신에 대한 도전에 직면한 변증가들, 예를 들면 2세기 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나 순교자 저스틴등은 이에 맞서 기독교의 참된 진리를 강력히 변호하였다. 당시 변증가들은 신론이나 삼위일체론, 기독론에 한정되었으나 중세를 지나면서 신학이 정립되어 가기 시작하였다.
중세 신학자 안셀롬은 신학을 이사야 7:9절의 라틴어역에 근거하여 “지성을 추구하는 신앙”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독교회들은 거기에계시와 구속적 의미를 더 부여하였는데 그후 종교 개혁자들은 이 말을 새롭게 정의하여 항상 하나님의 존재와 특성을 바로 인식하는 것으로 신학을 정의하였다.5)
바른 신학은 성경을 근거하여 하나님을 바로 가르치고 하나님에 의하여 가르쳐지며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하면서 성경말씀이 인간의 편에서 해석되어지고 부적합한 성경의 해석들이 신학이라는 옷을 입고 나름대로의 정당화로 행세 하려고한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이나 교부들은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안에서 살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그길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세상의 영화 보다는 순교의 길을 택하였던 선진들과는 반대로 세월이 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들의 생활에 적용하여 해석을 하다보니 여러 가지의 신학이 태동하게된 동기가 되었다.
억압을 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적용을 하다보니 해방신학이 나오게되었고 여성들의 권위회복에 적용을 하다가 보니 여성신학이 나오게 되었으며 인간들의 삶에 편리하도록 적용하여 해석을 하다가 보니 자유주의 신학이 나오게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신학은 곧 분리를 대변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복음이 들어와서 시간이 흐르다보니 보수주의니 진보주의니하는 신학 때문에 통합측과 합동측과 기장측이 갈라지게된 동기가 된 것이다.
신학이란 인간의 언어와 사고의 형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설명하려는 학문적 시도이기 때문에 각자의 목소리가 다를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중심으로 한 바른 신학의 학문적 체계를 위한 연구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이기에 깨어 있어야 할것이다.
신학은 구약과 신약을 포함하는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그리고 선교신학이 있다. 이와 같은 신학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바로 알기 위하여 연구한 학문이라면 고대의 스콜라신학이나 현대의 자유주의 신학이나 해방신학, 여성신학등, 수 없이 등장한 신학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들의 형평에 맞추어 성경을 해석하고 그 해석을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하려 한것들이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수많은 신학이 다양하게 등장하여 포화 상태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문화와 생활이 발전할수록 영계가 흐려지는 이유는 무었일까 내적인 평화를 잃어 버리고 외적인 표적을 향해 방황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늘어가고 있다.
신학이 믿음의 실천과 헌신을 강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불신의 이탈을 조장하고 겸손을 배양하지 못하면 오만과 교만을 가저오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더욱 바른 신학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2). 역사의 學問的 이해
역사의 두가지 의미는 객관적의미와 주관적의미로 말할수있는데 객관적의미란 과거에 있던 사실로서의 역사와 주관적의미로 조사되어 기록된 과거라고 한다. 그리고 학문적 의미는 역사학은 인간활동의 변화적 측면을 연구하는것이며 역사가는 사료를 가지고 과거역사를 탐구하며 그 결과를 자신의 사관에 입각하여 서술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가는 사실의 해석과 기술에 주관이 작용될수 있기 때문에 엄정한 과학적 인식을 토대로 해야 한다.
(3). 역사의 단어적인 이해
歷史라고하는 단어의 語原은 “질문”에 해당하는 헬라어(historia)에서 유래되었다. 이것을 그리이스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BC484-425)는 자신에 대한 탐구를 산문형식으로 기록하던 모범을 기초로 인간의 행적에 대한 산문적 탐구를 서술하는것이라고 한다.
(4).역사의 성경적 이해
히브리적 사관은 하나님의 신앙에 기초하여 역사를 되돌리거나 반복될수 없는것으로보고 직선적 혹은 단선적 역사관을 주장하였다. 역사의 전 과정은 계시된 언약 즉 구약에 기초하여 창조로부터 에덴의 황금시대와 타락과 심판 출애굽이후의 혹독한 시련을 통해 선민의식을 더룩 견고히하며 앞으로 도래할 메시야 왕국을 소망하는 종말론적 사고를 강조한다. 그리고 기독교 사관이라 할수 있는 신약 성경을 보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역사를 기록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여 서술하였다. 요한복음5:46절의 말씀을 보면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말씀하셨는데 이말씀의 뜻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믿게하기위하여6) 기록하였다고 말씀하는데 그렇다면 역사란 예수를 믿게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요한복음19:20절의 말씀을 통해서 보면 “예수의 못밖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은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말로 기록하였다”고 하는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수 있도록 여러 나라 말로기록하였음을 알수 있고 또한 기록할수 있는 역사의 연대역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다.7) 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역사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운행하시고 섭리하셨는가를 인간들에게 알리고 믿게 하시려고 하신 것이다.
에이취카(E.H Carr)라고하는 역사가는 “역사란 무었인가”8) 라는 책에서 “역사란 현제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한다. 즉 역사란 끊임없이 변화할수가 있기 때문에 언제나 역사를 바르게 해석하기 위하여 연구해야 하는데 그것이 곧 대화의 방법이라는것이다.
(5). 역사의 사전적 이해
역사는 “인류 사회의 과거에 있어서의 변천과 흥망성쇠의 기록이다. 또한 어떤 사물이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변화의 자취9)라고 하였다. 이처럼 학자들마다 역사의 정의를 다양하게 주장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 이유는 연구하는 학문이 구약의 히브리적 사관이나 미래학자들이 보는 진보적사관10)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시어 죄지은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교회를 세우시고 준비된자와 함께 일해오신 그 자취를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을 요청하고 있으며 갑절의 헌신과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가는 역사관을 바로 갖고 연구하며 신앙을 통해 항상 과거와 대화하는 역사가로서의 자신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렇치 않는다면 하나님의 역사적 셰계의 신비를 체험할수 없기 때문이다.
2). 신학의 구분
역사적 기독교 신학이란 무었인가? 우리는 여기서 신학 개별적 특징을 따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신학은 크게 자연신학과 계시신학으로 분류할수 있다. 자연신학을 종족들의 신학이라고 할수 있다면 계시신학은 기독교사와 하나님의 말씀을 분야별로 연구하는 신학의 뿌리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 신학은 4개 분야로 나눌수 있는데 주경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실천신학이 그것이다,
주경신학이 총론과 주석학을 취급하는 신학이라고 한다면 역사신학은 성경역사 성경교리, 교회사, 교부학, 신조학등을 들수 있고 조직신학은 변증학, 교의학, 화해론, 윤리학, 논증학,이며, 실천신학은 요리문답과, 예배학, 설교학, 전도학, 목회학, 등을 말한다.
성경과 신조의 저자 박해경은 신학을 아래와 같이 말한다. 성서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신학이라고 한다면 조직신학은 하나님의 존재를 강조하는 반면 역사신학은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고 있는가 하면 실천신학은 하나님의 역사를 강조한다라고 한다.
신학(Theology)이란 용어는 헬라어 신(神)이라는 단어 데오스(theos)라는 말과 말씀이라는 뜻을 가진 로고스(logos)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이 말하신다”와 “하나님을 말한다”라는 뜻이다.
신학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직접 발견되지 않지만 고린도전서 8:1절에서 말씀을 따라 성도를 바로 인도하고 이들에게 영적이며 지적인 계몽을 말하고자할 때의 논쟁적의미인 “지식”이란 단어를 통하여 표현되었다.
이같은 신학은 놀라운 발전을 가져왔고 현재는 그 연구 방법이 너무 다양한 신학의 홍수시대가 되었다. 따라서 바른 신학을 정립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신학의 범위가 너무 방대하고 또한 그 목적과 방향이 하나님을 향한것보다는 사람들의 편에서 해석 연구되어 지기 때문이다.11)
중세 신학자 안셀롬(Anselm) 은 신학을 이사야7:9절의 라틴어 역에 근거하여 “지성을 추구하는 신앙”(fdes quaerens intellec
-tum) 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지식과 지성은 인간의 비판과 기능을 포함하는 이성의 역할로 희랍적인 이교 사상에 근거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회는 거기에 독창적으로 계시와 구속적 의미를 부여하여 사용해 왔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같은 경향을 새롭게 정립하여 항상 하나님의 존재와 특성을 바로 인식하는 것으로 신학을 정의 하였다. 그 결과 개혁자들은 신학을 우리의 믿음에 관하여 합리적인 설명으로 규정하며 말씀에 기초한 믿음이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게할수 없다.12)
바른신학은 성경을 근거로 하나님을 가르치고 하나님에 의해 가르치며 하나님께로 인도한다. 이것이 일반적인 문화의 맥락속에서 현대의 언어로 표현되고 삶의 문제들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신학이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지만 하나님의 계시 자체와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보다는 계시의 인간적 이해이며 이것을 교훈과 설교를 통하여 더 명확하게 표현하고자하는 노력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이란 구약과 신약 성경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의 다양한 주제들의 교리를 다루는 학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곧 신학이 인간의 언어와 사고의 형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설명하려는 학문적시도이다.
결론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기초하여 사람들에게 끼칠 결과를 깊이 생각하며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다양하게 생각하고 표현할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신체의 여러 기관이 있듯이 신학이란 성경을 중심하여 성경의 계시속에 다양하게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신학이 우리 믿음의 실천과 헌신을 강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신을 조장하게되고 겸손을 가르치지 못한다면 오만을 조장하게 될것이고, 양심을 일깨우지 못한다면 오히려 심령을 완악하게 할것이다. 그래서 교회에는 신학이 없고 신학교에는 복음이 없다고들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신학을 할 때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더욱 옳바른 신학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1). 성경신학
제임스 스마트라고 하는 학자는 성경신학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성경신학이란 1940대에 일어나서 1950년대에 번성하였지만 1960년이후 쇠퇴한 학문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 신학은 신약과 구약의 말씀을 역사학적인 방법으로 연구하여 신학에 도달하는 방법론을 가르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방법론은 신학의 철학적 이해와는 달리 성경 그 자체의 계시와 자료를 중심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성경신학이란 역사적인 요소와 주석적인요소, 비평적인요소와 신학적인 요소들의 종합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13). 성경신학은 역사적인 상황속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발전 과정을 성경에 있는 그대로를 조직적으로 취급하는 신학의 한분야이다. 즉 하나님의 계시는 한번에 모두를 다 말씀해 주지 않으시고 여러 시대를 거처 조금씩 점진적으로 말씀해 주셨고 또한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의 옷을 입고 구체적이며 완전한 형태로 발전해 왔기 때문에 성경 신학은 성경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특정한 시대에 특정기사를 이루어 가시는 자기 계시의 과정을 해석하고 분석하는 학문인것이다. 즉 아브라함에게 보이셨던 계시보다 이사야나 예례미아에게 보이신 계시가 훨신 더 구체적인 것 처럼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하고 이해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하는 그 뜻을 발견하여 조직적으로 정리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조직신학과는 다르다. 조직신학이 성경과 성경 이외의 학문을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참된 진리의 교리를 종합적으로 취급한다고 한다면 성경신학은 성경만을 텍스트로 하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신학은 조직신학의 예비단계라고 할수 있다. 따라서 성경신학이 성경기자들의 관점에서 논의하는 학문이라고 한다면 반면에 조직신학은 현대적 관점에서 교리를 논의하는 학문이라고 할수있다.
2). 歷史神學
역사 신학은 여러 세기의 교회역사를 통하여 발전되어온 신학의 변천과정의 역사에 대하여 연구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역사신학은 성경신학과 조직 신학을 연결하여 서로 조화를 잘 이루도록 돕는 학문이다. 즉 창조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부터 수천년동안 이어온 역사적 발전을 통하여 완성된 계시와 구원의 주체이신 주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일해 오신 사역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할수 있다.
그리고 역사신학이란 추상적이거나 허황된것이나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신학을 중심하여 믿음의 선진들이 살다간 실제의 삶과 문헌들을 통하여 역사적 사실을 신학적으로 입증하는 학문이다14). 다시 말하면 역사신학이란 기독교 전반에 걸처 역사적으로 발전되어온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구원등 교회들에 관한 각 시대의 핵심 교리들이 무었이며 그것들이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되어 왔는지를 규명하는 학문이다. 즉 교회가 한 시대를 살아온 시대를 통하여 내려오는 사상들을 추적하는 것이다.
독일의 진보주의 신학자 에벨링은 역사신학을 성서 해석의 역사로 보았다. 그런가 하면 뮐러나 숄더라는 학자는 신학의 한 분과 중에서의 역사 신학은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역사 신학이 신학의 발전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면 교회사는 하나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들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수천년 동안 이룩해오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의 증거를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수 있다.
또한 교회사가 역사신학속의 한 분야라고 말하지만 교회사(敎會史)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독립성을 지닌 신학이다. 왜냐하면 역사신학이 신학의 발전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인 반면 교회사는 하나님께서 실재적으로 일하신 역사를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사는 신학이라고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일하신 역사를 체계적으로 연구 정리하는 독립된 학문의 한 분야로서 연구해야 될 충분한 가치가 있는 학문이다.
3).교회사의 결론
교회사는 기독교의 기원과 발달,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그의 구원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에 대하여 연구하는 학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세상을 향해 어떻게 역사해 오셨고 그에 속한 크리스챤은 세속사회에서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 왔는가 하는 개인적인 삶을 취급하는 학문이며 반면에 다른 신학들이 갖지 못하는 종합적이고도 포괄적인 역사적 사건을 취급하는 학문으로써 제2 의 사도행전이라 할수 있다.
기독교의 역사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역사요. 구원의 역사이며 세계사이다. 세계의 역사도 하나님을 배제하고는 바로 기록되어 질수 없다. 이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구원계획의 역사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진것들이 아니다. 구약의 족장들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신약의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일꾼들이 수 천년 동안 이루어 왔던 증거들이며 중세 어두었던 시대에 순교를 불사하고 기독교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몸부림쳤던 개혁자들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교회사를 연구 한다는 것은 과거 하나님의 역사속에 등장했던 수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만날 수도 있고, 또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우리들에게 남긴 귀중한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께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되며 종들이 남긴 믿음의 흔적들을 우리도 잘 연구 정리하여 후대에 전해 주기 위하여 교회사를 연구해야 한다. 또한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부과된 하나의 사명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