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舊約 中間史 時期에 나타난 하나님의 攝理에 對한 歷史的 考察
朴 柱 元 (한성신학대학)
< 目 次 >
Ⅰ.序 論
Ⅱ.歷史的 背景 考察
1.페르샤와 알렉산더 大帝下의 유대인.
2.프톨레미와 셀류쿠스 王朝下의 유대인.
3.마카비가와 하스몬 王朝下의 유대인.
4.로마 統治下의 유대인.
Ⅲ.結 論
*參考 文獻
Ⅰ.序 論
이 세상(世上)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데 그들은 누구나 그들 나름대로의 가치관(價値觀)과 세상을 보는 기준(基準)이 있게 된다. 특히, 그 중에서도 기독교인(基督敎人)들의 경우 그들만이 가지는 독특(獨特)한 세계관(世界觀)과 신앙(信仰)이 그들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다.
기독교인(基督敎人)들이 흔히 사용(使用)하는 말 중에 쉽게 접할 수 있는 말이 하나님의 뜻 혹은 하나님의 섭리(攝理)라는 말이다. 지나간 역사(歷史)를 통하여 보면 하나님의 뜻이나 섭리는 선지자(先知者)들을 통하여 성경을 통하여 쉽게 알려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크게는 구약(舊約)성경과 신약(新約)성경을 통하여 그들의 백성과 주위 사람들에게 전달(傳達)되곤 하였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에게 가장 분명(分明)하게 보여준 하나님의 뜻이 절정(絶頂)을 이룬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誕生)과 그의 공생애(共生涯)를 통하여 나타났다. 그리하여 그의 탄생(誕生) 이전 시대를 구약시대(舊約時代)라 하고 그후를 신약시대(新約時代)라고 크게 구분하여 볼 때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시기(時機)인 예수 그리스도 탄생(誕生) 직전의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언(豫言)이나 기록(紀錄)이 성경에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내용(內容)은 아주 중요하면서도 깊이 있게 다루어야 할 가치(價値)가 있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어떤 중요한 사건이나 시기를 연구(硏究)할 때 그 시점이나 인물을 기점(起點)으로한 직전과 직후는 그 인물이나 사건을 알아보고 연구(硏究)하는데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류 역사(歷史)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의 공생애(共生涯) 33년간의 기간이었는데 성경(聖經)은 이 중요한 사건과 기간을 설명하기 위하여 온 힘을 쏟고 있다. 그리하여 그 이전은 구약(舊約)이 그 이후는 신약(新約)이 분명한 말씀으로 예견(豫見)하고 증거하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 구세주를 만나고 주(主)로 모셔들임으로 분명(分明)한 삶을 살았고 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신구약(新舊約) 성경은 이 분에 대하여 초점(焦點)을 맞추고 있으면서도 정작 이분의 직전(直前)의 역사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기간(期間)에 대하여 침묵(沈黙)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 사건의 배경(背景)에 대한 궁금증은 더하여 진다. 바로 이것을 해결(解決)해 보고자 하는 것이 본 논문에서 추구하는 바이다. 바로 이러한 필요에 의하여 이 시기(時機)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攝理)를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밝혀 보고자 하는 데 본 논문 연구(硏究)의 목적(目的)이 있다.
인류 역사를 나누어 볼 때 나누는 학자의 견해(見解)에 따라 다양하게 나누는데 본 논문(論文)에서 다루는 부분은 신약(新約)과 구약(舊約)의 중간시대인 흔히 침묵기(沈黙期) 혹은 계시(啓示)가 멈춘 시기라고 알려진 신구약(新舊約) 중간 시대인 4~6세기 정도의 기간을 다루려고 한다. 대체적으로 이 시기를 400년의 공백기(空白期)라고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본 글에서 다루는 섭리(攝理)라는 말도 맹목적(盲目的)인 세계관에 대하여 일정한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를 전제(前提)한 세계관(世界觀)으로 우주(宇宙)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뜻1)으로 정하고 있음을 밝혀 준다. 좀 더 구체적(具體的)으로 말하면 이 하나님의 섭리(攝理)는 계몽기(啓蒙期) 이후의 근대(近代) 신학에서 취한 이신론(理新論)의 형태나 19세기 후반의 역사주의(歷史主義) 신학에서 인간 중심의 섭리론(攝理論)으로 기울어졌던 것이 아니며,종교개혁자들이 제시(提示)했던 성서의 섭리(攝理) 신앙을 새로운 형태에서 해석 적응하려고 노력한 것을 포함 한다. 그리하여 창세기 22장의 여호와 이레의 말씀으로 소급(遡及)해 올라가는 개념(槪念)2)을 갖고 있다. 본 논문(論文)은 하나님의 섭리(攝理) 즉 그 뜻은 인류 역사의 시작인 천지창조(天地創造)에서 부터 분명하게 성경을 통하여 제시(提示) 되고 있지만, 신구약(新舊約) 중간 시기인 400년 정도의 뜻은 성경에 없으므로 역사적 고찰(考察)을 통하여 밝혀보고자 한다. 그리하여하는 그 시대 구분을 대략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考察)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본론에 들어가서 역사적 배경을 고찰(考察)하면서 유대인들을 통하여 나타난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으로 제시(提示)하고자 한다.
첫째는 페르샤와 알렉산더 대제(大帝)하의 유대인의 역사를, 그 다음으로는 프톨미와 셀류쿠스 왕조(王朝)하의 유대인의 역사를, 그리고 마카비가와 하스몬 왕조하의 유대인의 역사를 끝으로, 로마 통치(統治)하의 유대인의 역사를 살펴본 후, 결론(結論)에 가서 신구약(新舊約) 중간(中間)사 시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역사적 고찰(考察)의 결과를 제시(提示)하므로 끝을 맺고자 한다.
Ⅱ.역사적(歷史的) 배경(背景) 고찰(考察)
구약(舊約)이 끝나고 신약(新約)이 시작되는 사이의 기간을 흔히 하나님께서 계시(啓示)를 멈추신 침묵기(沈黙期), 암흑기(暗黑期), 혹은 400년간의 공백기(空白期)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 시기의 역사가 멈추거나 더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더 분명(分明)하게 외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시기에는 역사의 획을 그을 만한 인물들이 있기도 하다. 고레스, 다리우스, 알렉산더, 마카비, 하스모니안 왕조, 로마의 통치(統治) 등 뿐만아니라 이 시기에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신앙 공동체(共同體)인 회당(會堂)을 발전시켰고 다양한 종파(宗派)의 출현과 자기들의 작으마한 왕국을 건설키 위한 난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기독교인(基督敎人)들은 구약성경(舊約聖經)을 보면서 메시아에 대한 소망(所望)과 약속(約束)이 성취될 것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본다. 이 기대는 때가 차매(갈4;4) 이루어졌던 그리스도의 탄생(誕生)과 그의 역사로 이어진다. 본 장(章)에서는 구세주(救世主)의 탄생(誕生)과 그의 강림(降臨) 직전에 일어난 사건들을 살펴보고 평가하는 데 필요한 배경을 좀 더 상세하게 살펴 보려는 데 있다. 그리하여 페르샤 왕조(王朝)에서부터 로마 통치(統治)하의 상황까지 살펴 보고자 한다.
1.페르샤와 알렉산더 대제(大帝)하의 유대인
이 시기는 유대인들이 전 세계로 흩어진 역사의 장(場)이라고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히브리 사람으로 잘 표현되고 있는데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移住)해가는 역사가 B.C.18세기에 시작된다. 요셉을 따라 애굽에 내려갔던 그들은 모세의 영도(領導)하에 B.C.1300년경 애굽을 탈출(脫出)하게 된다. 그들은 사사시대를 거쳐 사울왕과 다윗왕 그리고 솔로몬왕의 번영을 뒤로하고 남북으로 나뉘게 된다. 북쪽에는 10개 부족의 북이스라엘이 남쪽에는 2개 부족의 남유다가 형성되어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발전하다가 북(北)은 B.C.722년 앗시리아에 ,남(南)은 B.C.586년에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정복(政服) 당함으로 멸망(滅亡)하게 된다. 그후 바벨론에서 귀환(歸還)하여 유다족 중심으로 뭉쳤던 그들은 페르샤와 알렉산더 제국의 지배(地排)하에 들어간다.
먼저 페르샤 통치하의 유대인들의 역사에 대해서 살펴보면,예루살렘이 멸망(滅亡)한 직후에 이스라엘 자손(子孫)들은 유대땅과 갈릴리, 사마리아 주변 그리고 이집트와 바벨론에 집단적(集團的)으로 거주(居住)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크게 나누어 보면 예루살렘 중심지와 Diaspora에 산재한 여러 중심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유대땅에 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으면서 당시 바벨론에서 임명(任命)했던 총독인 그달리야를 살해(殺害)했고 그런후 이집트로 많은 사람들이 도망하게 된다. 당시 유대땅에 남아있던 자들중 일부는 바벨론의 신(神)을 섬기거나 가나안 원주민의 발알신을 숭배하는 자들도 나타났다. 또한 그들중 조상(祖上)의 하나님에게 여전히 충성(忠誠)하는 자들도 없지는 않았었다.
한편 갈리리와 사마리아 주변에 남아 있던 자들 중에서도 새로 정착(定着)된 이방의 이민들과 혼혈(混血) 결혼을 하는 자들이 증가(增加)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화에서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요인은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랑민들의 집단이었다. 이들은 정착(定着)한 곳에서 일종의 조건적인 자유를 누리며 대부분 농사를 지었던 것 같다. 그들은 재산을 모으고, 서로 화합할 수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유대 땅에 남아 있던 자들과 서신(書信)을 교환하며 가정(家庭)과 지파별로 이루어진 집단 거주에서도 그들의 본래적인 사회구조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3)
드디어 예루살렘을 사로잡아 멸망(滅亡)시켰던 바벨론 왕국이 주전 538년에 페르샤의 왕 고레스의 손으로 들어가면서 고레스왕은 1년 후에 유대의 유랑민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再建)을 허락하게된다. 뿐만 아니라 이 일을 위하여 느브갓네살에 의하여 B.C.605년, B.C.597년, B.C.587년에 강제로 이주(移住)하면서 수세기 동안 유대 땅에만 집중 되었던 상태에서 근동과 중동, 소아시아, 유럽에까지 확산된 하나의 종교적(宗敎的)인 시기가 되는 것이다.
포로 기간을 포함한 페르샤의 통치 기간 동안 북왕조는 타민족과 완전히 합류(合流)하게 되고 남왕조는 국제(國際) 결혼을 거부하고 유대교 신앙(信仰) 공동체(共同體)를 형성하게 된다. 그들의 공동체는 지도자인 장로(長老)와 율법(律法), 그리고 회당(會堂)로 이루어져 발전되며 이 기간동안 고레스의 화해(和解) 정책에 따라 고국(古國)으로 귀환(歸還)한 유대인들은 율법의 교육(敎育)과 전수(傳受)에 집중하며 안식일을 지키고 제사를 준행(遵行)하며 이방인과의 통혼(通婚)을 금지(禁止)하고 이미 얻어진 이방인 아내들은 돌려보내게 된다.
결국 이 시대의 유대의 역사는 양극성(兩極性)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중심지와 Diaspora에 산재(散在)한 여러 중심지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140년 넘게 세계를 제패(制覇)했던 페르시아 치하에서 유대는 B.C.400년까지 138년간 페르샤에 예속(禮俗)된 하나의 주(province)였으며 이때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제국 128개주 전역(全域)에 분산(分散)되어 그들 나름대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제한적(制限的)이지만 자유를 누리며 살게 된다.
그 다음 알렉산더 대제(大帝)하의 유대인들의 역사에 대하여 살펴보면 마케도냐의 립포스왕은 상호분쟁(相互分爭)으로 힘을 잃은 그리스의 주변 도시 국가들을 하나 둘 정복하면서 그 두각(頭角)을 나타내다가 페르시아 제국까지 정복하려는 꿈을 실현 시키지도 못하고 암살(暗殺) 당하게 된다.
그 뒤를 이어서 약관(弱冠) 2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자가 바로 알렉산더이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벌써 군사원정에 참여하여 공(共)을 세우기도 하고 용맹성(勇猛性)과 부하 사랑을 몸소 보이면서 지도자로서 탁월(卓越)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부왕이 전쟁에 나갔을 때 부왕을 대신하여 국정(國政)을 수행하기도 했었다. 그는 어려서 철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모시고 정치, 철학, 문학,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걸쳐 지도자적 소양(素養)을 쌓기도 했다. 부친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그는 주변 국가들을 정리한 후 B.C.334년 그는 세계정복의 길에 나서게 된다.
당시 서남아시아와 에집트를 포함한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던 페르샤 제국의 군대에 비해 알렉산더가 일으킨 정복군은 수적(數的)으로 열세(劣勢)에 있었다. 즉 보병 3만명에 기병이5천명이었다. 보병(步兵)수에 비해 기병(騎兵)의 수가 많았고4) 그들의 반은 마케도니아인이었고 그 나머지는 그리스의 동맹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는 해협(海峽)을 건너 소아시아로 진군(進軍)하였으며 Granicus강에서 페르샤군과 최초의 접전을 벌려 대승리를 거두었고 이어 다리우tm가 직접 지휘하는 페르샤 대군을 Issus에서 맞아 또다시 대파(大破)하였다. 다리우스 3세는 겨우 목숨을 건지고 도주했으나 그의 아내와 딸들은 포로로 붙잡히게 된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의 가족들에게 그가 살아 있음을 전하고 그들을 보호하며 왕족으로 대우(對偶)할 것이라는 약속을 하는 등 인간적인 면을 보여 주기로 했다.5)
알렉산더의 군대는 승승장구(乘勝長驅) 승리하여 에베소, 밀레도, 시돈, 두로, 가사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입성(入城)하게 된다. 당시 대제사장이던 야두아가 나아가 절(折)을 하며 다니엘서의 예언을 해석하며 그를 맞이하게 된다. 예언(豫言)의 해석인 즉 알렉산더가 그리스 최초의 왕이 되고 페르샤 제국을 정벌하여 대제국의 맹주(盲主)가 된다는 내용이었다. 알렉산더는 무혈(無血) 입성(入城)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친구가 됨과 동시에 유대인들에게 아주 호의적(好意的)인 감정을 갖게 된다. B.C.322년 애굽을 공격하던 그에게 당시의 지배자이던 페르시아를 증오하던 애굽인들은 대대적인 환영(歡迎)으로 그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 그곳 승려들은 알렉산더를 그들이 섬기는 암몬신의 아들이라고 찬양까지 하게 된다.6) 애굽에 알렉산드리아라고 하는 도시를 설립하여 그리스 문명을 이식(移植)하고 유대인들에게는 자유롭게 이주하며 살수 있는 특권(特權)도 부여(附與)하게 된다.
페르샤왕 다리우스는 후한 조건으로 평화를 제의해 왔으나 이를 단호히 거절한 알렉산더는 동북진(東北進)하여 Gaugamela전투에서 승리하고 바벨론을 점령한후 동진하여 페르샤를 거쳐 박트리아를 점령하게 된다. 알렉산더는 전쟁을 수행하면서 동서양(東西陽) 융합(融合)을 시도하며 진군(進軍)로를 따라 70개 이상의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우면서 도시마다 원주민과 자신의 군대간에 통혼(通婚)을 시도하게된다.
그리하여 마케도니아 군인과 아시아 여인간에 결혼을 명령하게 되고 자신이 앞장서서 수사궁의 공주와 다리오의 딸 공주 그리고 페르샤의 공주와 결혼을 하게 된다. 유럽과 아시아의 식물(植物) 교합(交合)을 시도하고 세계를 하나로 통일하려던 그는 마침내 B.C.323년 33세의 나이로 열병(熱病)을 이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가 죽은 후부터 로마가 그리스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시기의 시작까지 약 3세기 간의 역사를 헬레니즘 시대라 말한다. 다시말하면 그의 정복의 결과로 이루어진 그리스와 동방(東方)의 여러 요소들이 혼합(混合)된 문명이 형성되었는데 이 문명을 고전적인 그리스문화와 구별하여 헬레니즘 문화라고 부른다.7) 알렉산더는 불과 10여년 만에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광대한 지역을 정복하고 통합(統合)한 위대(偉大)한 왕이었다.
그의 정복과 꿈의 실현은 정치 군사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문화사상 큰 의미를 남겼으며 훗날 기독교의 태동(胎動)과 발전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즉, 그에 의해 이루어진 그리스와 Orient세계의 통합(統合), 그리고 동서융합(東西融合) 정책은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두 문화권의 융합(融合)을 가져오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하나의 문명권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의 세계 정신은 이 지역의 통치권을 이어 받은 로마에 의해 계승(繼承)되어 지중해를 내해(內海)로 한 하나의 세계를 형성(形成)케 하였고 기독교 전파와 발전의 발판(發判)이 되었다. 또한 그의 원정과 통치를 계기(癸期)로 이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사용되기 시작한 그리스어는 이 지역의 여러 민족(民族)이 함께 사용하는 당시의 세계어가 되었는데 기독교 복음의 내용을 그것으로 기록하게 되어 기독교 전파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결국, 알렉산더대왕의 정복은 그리스인들이 페르샤제국의 막대한 보화(寶貨)를 소유한 후 그들이 비도덕화(非道德化)하게 되고 동양의 사치(奢侈) 풍조(風潮)에 물들어 나약해진 단점을 가져왔으나 그리스인과 이방인들 간의 구별을 완화하게 하고 헬라어가 문화어로 세계 통용어가 되게 함과 동시에 유럽에서 인도에 이르는 해로(海路)를 발견케 하는 기여(其餘)를 하게 된다.
특히, 유대인들에게는 그가 건설한 도시 어느 곳에서나 많은 유대인들이 자유롭게 살도록 호의(好意)를 보여 줌으로 유대인의 광범위(廣範圍)한 분산으로 인한 기독교의 복음 전파를 예비(豫備)한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바벨론 포로에 의한 유대인들의 강제 이주와 페르샤 치하에서의 128개 주에 이르는 자유로운 거주(居住)이전의 호의(好意)와 알렉산더 대왕의 유대인에 대한 주거(住居)의 자유로운 배려가 훗날 기독교 복음의 신속한 전파와 확장에 밑거름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2. 프톨레미와 셀류쿠스 왕조(王朝)하의 유대인.
알렉산더 대왕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가 이룩했던 대제국의 붕괴(崩壞)를 초래(招來)하게 되었다. 그의 이복형제(異腹兄弟)는 저능아(低能兒)였고 그의 유일한 후손(後孫)은 록산나의 뱃속에 남겨진 유복자(遺腹子)였기 때문이다. 제국은 군사력을 가진 그의 부하 장수들에 의하여 나뉘어 졌으나 안티고누스의 후계자들은 마케도냐를, 셀류쿠스의 후계자들은 소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프톨레미의 후계자들은 에집트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들 중 직접적으로 유대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에집트의 프톨레미 왕국과 시리아의 셀류쿠스 왕국이었다. 부하(部下) 장수(將帥)중의 하나였던 프톨레미 소테르(B.C367~282)는 알렉산더가 죽자 에집트의 총독으로 임명(任命) 되었는데 그는 그가 알렉산더의 시신(屍身)을 입수(入手)하여 알렉산드리아 시(市)에 안치(安置)하였다는 것 때문에 다른 장수들 보다도 심리적으로 유리한 강점(强占)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었다.8)
팔레스틴 지역은 에집트를 지배(支配)하게 된 프톨레미 왕조(王朝)와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등을 통치(統治)하게 된 셀류쿠스 왕조 사이의 세력 각축(角逐)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B.C.301년의 입수스 전투 이후 B.C.198년까지 팔레스틴 지역은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統治)하에 있게 된다.9) 프톨레미Ⅰ세는 팔레스틴 지역에서 10만명을 에집트로 이주(移住)시켰으나10) 프톨레미 치세중 유대인들은 대체로 그들의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지키면서 평화(平和)롭게 사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 왕조의 지배(支配) 기간중 일어난 중요한 사건은 예수살렘 제사(祭祀) 공동체와 사마리아 공동체의 완전한 분리였다.
그 근원(根源)은 B.C.722년 사마리아가 앗시리아에 정복(征服)되면서 이주 정책에 의해 혼혈(混血)된데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베델이나 길갈,실로,세겜 등지를 방문케 되고 토착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 위에 새로운 제사 센타를 세웠다.
에집트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居住)하였는데 대체적으로 이들의 생활은 자유로웠고 대우면에서도 마게도냐인이나 그리스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다만, 치세 기간중 프톨레미 4세인 필로파테르(B.C.221~203)에 의한 박해(迫害)가 있었다. 프톨레미 4세는 B.C.217 년에 셀류쿠스 왕조(王朝)의 공격(攻擊)을 승리(勝利)로 이끌고 이를 축하(祝賀)하기 위하여 팔레스틴을 포함한 동부(東部) 지중해 연안 지방을 여행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성전(聖殿)에서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재물을 헌납(獻納)한 후 지성소에 대한 관심으로 안에 들어가려다 마비가 되어 쓰러진다.
예루살렘에서 귀환(歸還)한 그는 수치심과 분한 생각 때문에 애굽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보복(報復)하고자 지금까지 허락했던 모든 특권(特權)을 박탈하기로 결심함으로 유대인들까지 왕(王)을 따라 유대인들을 박해하게 된다.
시리아의 셀류쿠스 왕조(王朝)는 알렉산더의 휘하 장군(將軍)들 중 하나인 셀류쿠스 1세 (B.C.258~280)에 의하여 창건(創建)되었다. 그는 바벨론 총독(總督)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에집트와 인도를 제외한 알렉산더 제국(帝國)의 거의 전부를 그의 지배하에 두게 된다.11) 팔레스틴 지역(地域)은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쿠스 왕조의 수많은 쟁탈(爭奪)전을 거친후 B.C 198년 셀류쿠스 왕조(王朝)의 승리로 그 지배권을 장악하게 된다.12) 셀류쿠스 왕조하에서 유대인들은 각종 특혜(特惠)를 부여 받게 된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반입 금지(禁止) 품목(品目)을 지켜주고 세금(稅金)도 면제해 주고 호의(好意)를 누리며 번영(繁榮)을 누리게 된다.
안티오쿠스(B.C. 222~187)는 수많은 유대인들을 자신이 건설한 성읍(城邑)들에 정착하게 하였다. 그러나 불행(不幸)하게도 이러한 호의는 오래 가지 못하였고 더욱이 팔레스틴의 통치(統治)권이 수리아에 넘어가므로 애굽에 있는 유대인과 팔레스틴의 유인들은 정치(政治)적으로 분리가 되었으며 이러한 현실은 유대교에 심각(深刻)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B.C.190년 안티오쿠스 3세는 서머나에서 로마군과의 싸움에서 패하게 되고 로마에 의한 배상금(賠償金)을 지불해야 하는 과정에서 그는 나라 안의 신전(神殿)과 예루살렘 신전神殿)의 재산과 신전(神殿)이 보유한 금은 보화(寶貨)와 재물을 강탈(强奪)하다가 왕국(王國)의 남동부에 있는 한 신전에서 재물을 압수하는 도중 살해(殺害)당한다. 그의 죽음은 셀류쿠스 왕조의 몰락(沒落)을 알리는 신호(信號)가 되었고 유대인들에게는 그의 뒤를 이은 안디오쿠스 4세에 의하여 전무(全無)후무한 박해(迫害)가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다.
안티오쿠스4세(Antiochus Ⅳ Epiphanes, 175~164.B.C)는 안티오쿠스3세의 사후(死後) 사활을 건 왕위 쟁탈(爭奪)전 끝에 왕좌를 차지한 인물로 그는 헬레니즘 찬양자로서 자기가 지배하는 지역을 헬레니즘화 시키려고 결심하게 된다. 그는 전형적인 동양(東洋)의 왕으로 행세 했으며 기만술과 가장술에 능통(能通)하였고 사악(邪惡)한 행위를 일삼고 명예(名譽)를 추구(追求)하는 인물이었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그리스의 관습(慣習)을 심어주고자 하는 그에게는 비위가 상하는 민족(民族)이었다. 그는 에집트와 로마의 위협(威脅)에 직면하여 있었고 재정적 필요(必要)를 더욱 느끼게 되어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서슴치 않았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직을 돈을 많이 주는 자에게 팔았고 심지어는 제사장 가문이 아닌 사람에게까지 팔아 넘기게 된다.13)
안티오쿠스 4세는 팔레스틴의 대도시들에다 체육관(體育館)과 신전(神殿), 경주(競走)용 경기장, 대중 목욕탕들을 세웠다. 그리스의 복장과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고 성전(聖殿)의 제사장들은 그들의 제사장직을 소홀히 하고 운동 경기장의 세속적(世俗)인 쾌락(快樂)을 탐닉 하였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우상숭배(偶像崇拜)와 마찬가지로 곳곳에서 펼쳐지는 쾌락(快樂)과 방종(放縱)에 대하여 강한 반발을 보이게 된다. 곳곳에서 헬레니즘의 관습과 히브리적인 사고(思考)와 그들의 율법(律法)이 명하는 가르침과 부딪히고 있었다. 안티오쿠스 4세는 네 차례에 걸쳐 애굽에 선전(宣戰) 포고(布告)를 하였으며 애굽을 침공한 후 애굽의 왕으로 선포하게 된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가 반란(反亂)을 일으키게 되고 안티오쿠스 4세가 애굽에 대한 제2차 전쟁(戰爭)을 성공적으로 수행(遂行)하고 있는 동안 유다의 상황이 악화(惡化)되었다. 예루살렘으로 진군(進軍)해 들어간 안티오쿠스 4세는 피로 얼룩진 보복을 자행(自行)하게 된다.
수리아 군병(軍兵)들은 많은 유대인들을 노예로 잡아 팔아버리고 4만에 이르는 남녀와 어린이들을 대량(大量)으로 학살(虐殺)하게 된다.14) 안티오쿠스는 거룩한 성소(聖)에 들어가 약탈(掠奪)을 자행하며 황금 제단과 기명들과 기구(器具)들을 다른 보물들과 함께 노략질하게 된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무거운 세금(稅金)을 부과하여 그의 사치스런 생활의 비용과 전쟁(戰爭) 수행 비용을 충당(充當)하게 된다. 전쟁을 치르면서 그의 부하들을 시켜 곡물 창고를 습격(襲擊)하게 하고 무거운 세금을 내지 못하는 마을은 불사르며 주민들은 잡아다가 노예로 팔기도 하였다.
또다시 시작된 애굽과의 전쟁(戰爭)에서 애굽의 요청으로 당도(當到)한 로마군의 위세(威勢)에 몰려 퇴각(退却)하던 그는 귀환(歸還)길에 유대인들에게 분노(忿怒) 풀기로 작정하고 그들의 신앙(信仰)과 사고(思考)를 그리스적인 것으로 개조시키고자 하였다. 예루살렘 성읍에 들어간 그는 악랄(惡辣)한 방법으로 수천명의 시민들을 학살하고 여자와 아이들을 잡아다가 노예(奴隸)로 팔게 되며 성(城)은 불타게 된다. 뒤이어 안티오쿠스 4세는 칙령(勅令)을 발표하여 모든 유대인들은 수리아의 법과 관습 그리고 종교를 받아들이도록 명령한다. 그리스의 신들에게 경배(敬拜)하게 하고 안식일 준수와 할례 의식이 금지 된다.
부정(不淨)한 음식의 구별과 예루살렘 반입(搬入) 품목이 없어지고 돼지고기를 먹으며 제단의 제물(祭物)로 바쳐지게 된다. 만약 이러한 명령(命令)을 위반(違反)할 때는 가차없이 사형(死刑)에 처하도록 명령이 내려 졌다. 심지어 자기 아들에게 할례(割禮)를 행한 어머니들은 그들의 아기들을 목에 두른체 십자가에 달려 처형(處刑)되는 상황이 많은 사람들의 눈 앞에서 벌어졌다. 성전(聖殿)은 돼지고기와 그 피로 얼룩져 있었으며 술군들의 체류지가 되고 보기 흉한 난장판으로 변해 갔다. 불경(不敬)스런 이방(異邦) 종교 의식이 유대인들의 거룩한 성전 의식(儀式)을 대신 했고 이러한 일련의 악한 행동들은 유대인들의 가슴을 끓게 하고 종교적인 반감(反感)으로 넘쳐나게 하고 있었다.
이러한 안티오쿠스 4세의 행동(行動)은 오히려 영웅심이 많은 유대인들을 사로잡게 되어 신앙(信仰)을 위하여 순교(殉敎)하고자 하는 마음을 굳히게 하였다. 가는 곳곳마다 우상의 제단(祭壇)들이 설치(設置)되어 있고 공공연하게 율법책이 불에 태워지고 많은 유대인들이 처형(處刑)되는 광경을 보면서도 그들은 여호와의 언약(言約)에 충성하고자 맹세하며 죽어 갔다. 이러한 상황(狀況)을 마카비 1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 그들은 부정한 음식을 먹어서 몸을 더럽히거나 거룩한 언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달게 받기로 결심하였고 사실 그들은 그렇게 죽어 갔다. ” (마카비 1서 1:62~63)15)
수리아인들은 계속하여 그들의 잔악(殘惡)함을 드러내어 곳곳에서 그들의 칙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죄목(罪目)으로 유대인들을 죽이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하여 죽였다. 마카비 2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때 뛰어난 율법학자들 중에 엘르아살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미 나이도 많았고 풍채도 당당한 사람이었다. 박해자들은 강제로 그의 입을 열고 돼지고기를 먹이려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생활을 더럽히고 살아가는 것보다 명예롭게 죽는 것이 낫다고 하여 자진하여 형틀로 가면서 그 돼지고기를 뱉어 버렸다. 참된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먹어서는 안될 것을 물리칠 용기를 가져야 하는데 엘르아살이 바로 그런 사람이어서 돼지고기를 뱉어버렸던 것이다. 율법에 어긋나는 이 희생제를 관장하는 사람 중에서 엘르아살과 오랜 친분이 있던 사람들이 그를 따로 불러 그에게 율법에 어긋나지 않은 다른 고기를 준비했다가 그것을 가져오도록 권하면서 왕의 명령대로 희생제에 바쳐진 고기를 먹는 체 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기만 하면 엘르아살은 오랜 친분으로 맺어진 사람들의 인정을 이용해서 자기 목숨을 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노인은 자기의 나이에 따르는 위엄과 백발이 된 머리를 생각하고 어렸을 적부터 나무랄데 없이 살아온 자기 생애를 돌이켜보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율법에 따라야겠다고 생각하여 고결한 결심을 꺾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빨리 죽여달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말을 마치고 그는 형틀로 직행하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엘르아살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들이 엘르아살이 한 말을 듣고 미친 놈의 소리라고 생각하며 돌변하여 그에게 악의를 품게 되었다. 엘르아살은 모진 매에 못이겨 거의 죽어가면서 신음하는 소리로 말하였다.“주님은 거룩한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니 내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는데도 불구하고 육체적으로 매를 맞아 무서운 고통을 당하고 있으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으로 이 고통을 달게 받는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이렇게 그는 자기의 죽음으로 젊은이에게 뿐만아니라 대부분의 동포들에게 용기의 모범과 덕행의 본보기를 남기게 되었다. (6:18~31).
그 때에 일곱 형제를 둔 어머니가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왕에게 고기를 먹으라는 강요를 받았다. 그들 중의 하나가 대변자로 나서서 말하였다. “우리를 심문해서 무엇을 알아내겠다는 것입니까? 우리 조상의 법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습니다.” 왕은 이 말은 듣고 화가 나서 솥과 가마를 불에 달구라고 명령하였다. 명령대로 당장에 솥과 가마를 뜨겁게 달구자 남은 형제들과 어머니의 눈 앞에서 왕은 그들의 대변자로 나섰던 사람의 혀를 자르고 머리카락을 밀고 사지를 자르라고 명령하였다. 완전히 폐인이 되었지만 아직도 생명이 붙어 있는 그를 왕은 뜨겁게 달군 솥에 넣어버리라고 명령하였다. 솥에서 연기가 사방으로 멀리 퍼져나갈 때에 나머지 형제들을 어머니와 함께 서로 격려하고 고상하게 죽자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7:1~5)
이러한 순교(殉敎)의 본보기는 그 남은 여섯 형제들을 통하여 계속해서 보여졌고 마침내는 그의 어머니도 꼭 같은 길을 걸어 가므로 신앙의 절개(節槪)를 지켜 나갔다. 안티오쿠스 4세 때에 자행된 이러한 만행(漫行)과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버렸던 이들의 숭고함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11:35~38).16)
지금까지 전술(前述)된 것을 토대로 하여 볼 때 프톨레미와 셀류쿠스 왕조하의 유대인들은 그들을 지배하고 있던 왕에 따라 좋은 대우를 받기도 했으나 그 기간이 짧았다. 결국, 이 기간은 유대인들을 향한 핍박(逼迫)과 박해(迫害)의 절정(絶頂)을 향하여 걸어간 시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유대인들의 공동체(共同體)가 프톨레미 왕조하에서는 팔레스틴과 알렉산드리아를 중심(中心)으로 발전했으나 셀류쿠스 왕조하에서는 팔레스틴이 수리아 측으로 넘어가게 됨에 따라 정치적으로 지리적으로 나뉘게 되어 유대인들의 공동체에 큰 변화를 가져온 시기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이 시기를 통하여 유대인들을 정착(定着)케 하고 지역적 분할을 통한 공동체(共同體)의 이질적 발전과 환란(患亂)과 핍박(逼迫)을 통하여 순교의 절정을 향하여 걸어가게 하고 있다.
3.마카비가와 하스몬 왕조하의 유대인.
안티오쿠스 4세의 유대교 박해(迫害)는 많은 순교자를 내었다. 왕은 특별히 천성적으로 잔악(殘惡)한 바키데스에게 병력(兵力)을 주어 많은 사람들을 박해하고 고문하였다.17)
박해(迫害)와 핍박에 대하여 순교와 무저항으로 소극적이던 저항(抵抗)운동은 점차 적극적인 공격으로 변하기 시작 했다. 폭동(暴動)의 불길은 예루살렘 북서쪽에 있는 모데인이라는 마을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마을에는 하스몬가의 마타디아스라는 제사장이 다섯 아들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어느날 시리아의 한 관리(官吏)가 이 마을에 찾아와 이교의 제사를 강요 했다. 마타디아스는 거절(拒絶) 했으나 배교(背敎)한 자들을 죽였다.
이것이 계기(契機)가 되어 마타디아스는 그의 아들들과 산으로 도망쳐 많은 유대인 열심파들과 합류(合流)하게 된다. 저항운동은 마타디아스의 세 아들 즉, 마카비라는 별명을 가진 유다(B.C166-16)와 요나단(B.C160-143) 그리고 시몬(B.C142-134)에 의하여 차례로 주도 되었다.18) 이들의 저항(抵抗)운동은 계속해서 성공을 거두게 되고 B.C165년 12월 25일19) 유다의 지휘(指揮) 아래 성전이 청소(淸掃)되고, 재 봉헌(奉獻)되고, 예배(禮拜)를 다시 드리게 된다. 안티오쿠스 4세의 뒤를 이어 당시 8살의 그의 아들인 안티오쿠스 5세20)가 왕위를 물려 받으며 리시아스가 섭정(攝政)을 하게 된다. 이때21)리시아스는 유다에게 관용(寬容)을 베풀어 절기(節氣)를 마음대로 지킬 수 있도록 완전한 종교적인 자유를 허락하게 된다.
핫시딤은 그들의 목표(目標)인 종교적인 것의 달성(達成)으로 마카비에 대한 후원(後援)을 멈추게 되지만 유다는 종교적인 자유를 넘어서서 정치적인 독립을 추구하게 된다. 승승장구(乘勝長驅)하던 유다도 참패를 당한 후 B.C.160년 엘랏사에서 살해되고 그 지도권은 요나단에게 넘어가게 된다. 요나단이 민족주의 유대인들의 지지로 지도자로 부상 했을 때 시리아는 왕권(王權)의 문제로 여러 사람들이 경쟁을 하며 음모(陰謀)를 꾸미던 시기였다.
B.C.153년 데메트리우스 1세(B.C.162-150)와 알렉산더 발라스의 정쟁(政爭)에서 두 사람은 요나단을 서로 끌어들이려고 했고 요나단은 발라스를 지원(支援)하기로고 결정한다. 결국 발라스의 승리(勝利)가 굳혀지고 요나단의 푸른 계절이 도래한다.
발라스는 요나단을 왕의 친구(親舊)로 부르게 되고 자주색 옷과 금관을 보내오게 된다. 요나단은 왕과 제사장을 겸하게 된다. 한편 발라스는 왕위에 오르자 술과 여색에 탐닉하게 되고 부도덕한 행실(行實)이 잦아지자 백성들은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당시 애굽의 왕이던 그의 정적(政敵) 데메트리우스 2세가 왕위를 주장하며 발라스를 공격하게 된다. 이 와중에서 전투(戰鬪)가 진행되던중 그는 살해(殺害)된다. 수리아 제국(帝國)의 통치자로 데메트리우스 2세가 등극(登極)하고 그동안 요나단은 힘을 비축하게 되고 외교적 수완으로 권세를 누린다.
리게 된다. 수리아는 분쟁(分爭)을 계속해서 겪으면서 알렉산더 발라스의 아들이 수리아의 왕으로 추대(推戴)되니 그가 안티오쿠스 6세다. 이때 실세(實勢)는 수리아의 장군인 트리포 였고 왕위(王位)를 노리던 트리포22)는 수리아 왕좌(王座)와 가까운 요나단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요나단을 초청(招請)하게 된다. 아무런 의심없이 성내로 들어오던 요나단과 경호(警護)병들은 체포되어 처참하게 살해되고 만다.23) 요나단의 뒤를 이은 사람은 마타디아스의 둘째 아들인 시몬으로 그 집단(集團)의 지도자로 추대 될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였다.24)
나와 나의 형제들과 그리고 우리 가문(家門)이 율법과 성소를 수호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한 사실(事實)과 우리가 치른 전쟁과 고통(苦痛)이 어떠하였는가는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나의 형제(兄弟)들은 모두 이스라엘을 위해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은 나 하나 뿐입니다. 나는 지금 어떠한 어려움을 당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내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내 형제에 비해 조금도 나은 점이 없습니다. 나는 내 민족과 성소(聖所) 위하여 그리고 여러분의 처지를 위하여 원수(怨讐)를 갚을 것입니다. 모든 이방인들이 지금 우리를 없애버리려고 중오심에 불타 모여 있습니다.
시몬은 지도자가 되면서 헬라파와 하시딤 그리고 마카비파를 통합(統合)하였으며 수리아의 합법적인 왕이던 데메트리우스 2세 협정(協定)을 체결(締結)하게 된다. 데메트리우스는 유대를 독립적 동맹(同盟)국가로 인정(認定)하고 유대인들을 모든 조세(租稅) 에서 면제(免除)하여 주고 정치적인 독립(獨立)을 허락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시몬에게 절대군주의 지위를 제공(提供)하고 국가 통치자의 직위를 그 가문(家門)에서 세습(世襲)하도록 결정(決定)하게 된다.25) 또한 유대인들은 다른 신실(信實)한 예언자가 일어나기까지 시몬이 계속해서 대 제사장이 되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고 그 또한 그를 받아들여 대 제사장직에 오르게 된다. 오니아스가에서 세습(世襲)되어 오던 대 제사장직이 그가 파면(罷免)된 후 이제 하스몬 계통에서 세습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유대는 독립적인 국가(國家)로 세워지고 대 제사장이 민간 지도자이면서 동시(同時)에 군사(軍士) 지도자가 된 것을 볼 수 있다.26) 시몬은 로마와 협정(協定)을 체결하고 욥바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1번 국도(國道)를 장악(掌握)했으며 절대군주의 상징(象徵)인 자국의 주화(鑄貨)도 발행하게 된다. 그는 유대인 배교자와 이교도를 추방시켰으며 술사(術士)들을 교수(絞首)형에 처했다. 시몬이 통치하던 시절(時節)에 대하여 바카비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27)
시몬이 다스리는 동안 유대 땅은 평온(平穩)한 나날이었다. 그가 마음 쓴 것은 자기 민족의 행복(幸福) 뿐으로 날마다 백성들은 그의 권위와 영광을 환영(歡迎)하고 기뻐하였다. 그는 욥바를 취하여 자기 항구(港口)로 만들었고 해로(海路)를 터놓았으며 영토를 넓혔고 온 나라를 안전하게 다스렸다. 백성들은 평화롭게 자기 땅을 가꾸었고 노인들은 거리에 나와 이야기 꽃을 피웠으며 젊은이들은 화려한 군복(軍服)을 입고 다녔다. 시몬은 여러 도시에 식량을 공급하고 무기(武器)를 공급하여 방위를 튼튼히 했다. 그는 이 나라에 평화를 가져왔고 이스라엘에는 기쁨이 넘쳐 흘렀다. 사람마다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았으며 모든 원수(怨讐)들이 그 땅에서 사라졌다. 시몬은 연약한 백성들에게 힘을 북돋아주었고 스스로는 율법을 엄수(嚴守)하면서 율법을 저버린 자들과 악한들을 모두 없애버렸다. 성전을 아름답게 꾸미고 기물(器物)들을 많이 갖추어 놓았다.
시몬은 불행(不幸)하게도 자신의 노력과 계획의 열매들을 즐길만큼 오랫동안 살지 못하고 그의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비참(悲慘)한 최후(最後)를 마치게 된다.
B.C.135년 시몬은 그의 아들들과 함께 여리고 평원(平原)의 요새(要塞)를 시찰하던 중 환영 만찬에 참여했다. 그러나 왕위를 노리던 사위 프톨레미28)에 의하여 그의 아들들과 함께 살해(殺害)되고 만다. 그의 부인 또한 인질(人質)로 잡혀있다가 살해된다. 마카비가의 영웅(英雄)적인 헌신과 희생은 B.C.165년부터 B.C.135년까지 유대를 살리게 되고 역사에 길이 남게 된다. 유다와 엘르아살은 전쟁터에서 죽었고, 요한과 시몬 그리고 요나단은 반역자에 의하여 살해(殺害)된다.29) 이들의 헌신(獻身)과 희생(犧牲)으로 조그만 도시국가인 예루살렘이 통일된 왕국(王國)으로 성장(成長)하고 성전은 이교도의 행위로부터 정결(淨潔)케되고 유대인은 다시금 대제사장과 세습(世襲) 군주를 갖게 되고 종교적 자유를 누리며 정치적 독립(獨立)을 구가하게 된다.
되었다.
이어서 하스몬 왕조(王朝)하의 유대인들의 상황을 살펴보면 하스몬이라는 말은 하스몬가에 속했던 마타리아스와 그의 아들들의 가족(家族)명에서 유래하게 된다. 프톨레미는 그의 장인(丈人)과 처남(妻男)을 죽이고 왕위를 얻고자 했으나 시몬의 셋째 아들인 요한 힐카누스가 도피(逃避)하여 살해의 음모에 대한 경고를 받으면서도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이 아버지가 담당했던 대제사장의 직임(職任)을 받게 된다.
수리아의 공격(攻擊)으로 유대는 위기에 처하나 수리아에서 또다시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므로 이스라엘은 강세(强勢)를 유지하게 된다. 힐카누스의 통치(統治)는 괄목(刮目)할만한 것으로 솔로몬 시대의 지역을 확보하며 31년간 통치를 하게 된다. 힐카누스는 주화(鑄貨)30)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은 최초의 유대 군주(君主가 되며 번영(繁榮)을 누리다가 B.C.106년에 사망(死亡)하게 된다.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1세가 왕위를 계승(繼承)했다. 그런데 그는 무자비하고 잔인한 야망(野望)가로 친헬라적이며 그리스문화를 장려(獎勵)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모친을 투옥하여 아사(餓死)시켰고 형제를 살해하는 일에 가담하였으며 한 형제는 구금(拘禁)하였다. 그는 자기 형제의 죽음을 멀리하려는 고뇌(苦惱) 속에서 죽게 된다. 그는 죽기 전에 그의 계승(繼承)자로 자기 부인을 지명(指命)하게 되고 부인인 알렉산드라는 시동생인 알렉산더 얀내우스를 해금(解禁)하여 대제사장에 임명하고 얼마후 그와 결혼하여 그를 왕으로 추대(推戴)하게 된다. 그 또한 인물됨이 잔악(殘惡)했으며 야심가(野心家) 였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미 힐카누스에게 대제사장직을 내놓으라하여 사이가 좋지 않았고 더욱이 다윗의 후손이 아닌데 왕으로 자칭(自稱)한 것에 대하여 감정이 좋지 않았었다. 그러던중 알렉산더 얀내우스가 그 형제의 미망인(未亡人)과 결혼한 것에 대하여 대제사장으로서는 해서는 안될 일을 한 것으로 바리새파 사람들의 노여움을 가중(加重)시켰다. 얀내우스는 차츰 종교적인 직분보다는 왕권의 강화(强化)와 주변국을 치는데 주력하였으며 급기야는 장막절 제사에서 제주(祭酒)를 땅에 쏟으므로 제의(祭儀)를 의도적으로 모욕하게 된다. 백성들은 분노하여 그에게 항의(抗議)하고 화가난 그는 군대에게 명하여 바리새인들을 잔인(殘忍)하게 학살(虐殺)하게 된다. 백성들은 그를 혐오(嫌惡)하게 되고 그가 죽은 후 왕권은 그의 부인이었던 알렉산드라에게 넘어가게 된다. 알렉산드라는 남편의 유언(遺言)에 따라 바리새인들과 함께하며 태평(太平)성세(聖世)를 누리게 된다. 알렉산드라는 9년간 나라를 통치하면서 신하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된다. 그녀는 바리새인들을 중용(重用)하였고 유대교 예식을 회복(回復)시키며 성전(聖殿) 유지(維持)를 위한 인두(人頭)세를 부과(賦課)하고 모든 유대인 자녀들에게 의무 교육을 실시하게 된다. 알렉산드라는 왕좌(王座)에 앉으면서 그의 큰 아들 힐카누스 2세를 대 제사장에 임명했다. 힐카누스는 바리새파에 호의적(好意的)인 태도(態度)를 보였고 그들의 세력은 차츰 커졌다. 이로 인하여 곤란해지 사두개파는 작은 아들인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충돌(衝突)질하게 된다. 알렉산드라가 죽자 아리스토불루스는 군대를 동원(動員)하여 여리고 근처에서 그의 형을 격퇴시키고 왕과 대 제사장이 되어 B.C.66년부터 B.C.63년까지 계속 통치를 하게 된다.
동생으로부터 축출(逐出)된 힐카누스는 이두매의 안티피터의 후원(後援)과 충돌질 속에 재기(再起)를 꿈꾸게 되고 결국 형제간의 싸움은 로마를 자연스럽게 팔레스틴에 끌어들이게 된다. 성(城)은 함락되고 왕권은 또다시 힐카누스에게 돌아가고 아리스토불루스는 로마로 압송(押送)된다.
지금까지 설명된 마카비가와 하스몬 왕조하에서의 유대인들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유대인들의 종교적 자유와 정치적 독립을 얻게 된다. 하지만 종국(終局)에 가서는 왕위 다툼으로 인한 외세(外勢)의 세력을 끌어들임으로 스스로 자멸의 길을 걸어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다시 말하면 마카비가의 영웅적(英雄的)인 투쟁과 헌신 그리고 희생(犧牲)으로 얻어진 자주권(自主權)과 독립을 유지하기가 더 어려웠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팔레스틴에 세력(勢力)을 갖고자 했던 로마의 패권 정책이 유대 자국(自國)의 내분(內紛)으로 인하여 쉽게 연결되게 되고 역사의 한정점을 향하여 줄달음 치게 되었다.
4.로마 통치하의 유대인
로마의 세력(勢力)이 자연스럽게 팔레스틴에 들어오고 주도권(主導權)을 쥐게 된 안티파터는 폼페이 장군(將軍)을 지지하다 주전 48년 그의 몰락(沒落)을 보면서 시저를 지지하게 된다. 그 결과 시저는 안티파터를 유대의 총독(總督)으로 임명(任命)하고 로마의 시민권까지 주었다. 유대인들은 로마에 너무 의존하는 에돔 출신의 안티파터를 싫어했고 열광적(熱狂的)인 유대인에 의하여 그는 독살(毒殺) 되고 만다. 유대는 그의 큰아들인 당시 유대의 군대(軍隊) 사령관이던 파사엘에게 넘겨 졌고 작은 아들인 헤롯은 갈릴리 분봉(分封)왕(王)으로 있었다. 이때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인 안티고누스는 그의 왕위 계승(繼承)권(權)을 시인해 주는 파티안스의 지지를 얻게 된다. 그리하여 대제사장으로 있던 힐카누스와 파사엘은 옥에 갇히게 된다. 파사엘은 자결(自決)했으나 헤롯은 피신(避身)하여 로마로 가게 되고 거기서 유대의 왕으로 임명(任命)되어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이미 유대를 차지하고 있는 안티고누스와 대결(對決)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는 로마의 도움으로 안티고누스를 죽이고 드디어 헤롯 대왕(大王)으로의 통치를 시작하게 된다. 헤롯과 그의 아들들이 통치하는 동안 헬라화 정책(政策)은 급진적으로 추진(推進)되었으며 헤롯은 많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리하여 아리스토불루스 3세의 여동생이며 힐카누스 2세의 손녀이며 마카비 왕가(王家)의 공주인 마리암네와도 정략적으로 결혼(結婚)하기로 했다. 주전 20년에 시작한 예루살렘의 새 성전 건축도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고자 의도(意圖)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헬라적이며 에돔인이었던 그의 생각과 신분(身分)은 유대인들을 기쁘게 할 수 없었다. 대 제사장이 될 수 없었던 헤롯은 자기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 대 제사장에 앉혔다. 그것도 세습(世襲)제도를 철폐(撤廢)하였다. 헤롯은 곳곳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기도 하였다. 헤롯은 정권 때문에 가족내에 암투를 벌여 부인과 아들들까지도 살해(殺害) 하였다. 역사에 남는 잔인함은 주전6~5년으로 추정되는 때에 베들레헴에서 무죄한 유아(幼兒)들을 학살(虐殺)시킨 사건으로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나오는 내용(內容)으로 두살이하의 사내 아이들이 예수님 때문에 죽게 되었던 것이다.
그 잔인하던 헤롯도 34년의 통치(統治)를 마감하고 주전 4년에 죽게 된다. 헤롯이 죽자 갈릴리 지방에서 폭동(暴動)이 일어났고 이 곳은 그 이후 유대 민족주의의 온상이 되었다. 갈릴리의 폭동(暴動)은 헤롯의 큰 아들 아켈라우스가 학살(虐殺)을 단행(斷行)함으로써 위축되고 말았다. 그는 헤롯의 뒤를 이어 유대의 총독이 되었으나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항의(抗議)로 로마 정부에 의해 추방(追放)되고 말았다. 헤롯의 손자 헤롯아그립바 1세가 유대의 왕으로서 통치한 3년을 제외하고는 이 나라는 로마의 총독(總督)들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헤롯의 둘째 아들인 헤롯 안티파스는 신약(新約)성경(聖經)과 제일 밀접한데 불법(不法)으로 결혼했다. 그는 침례 요한을 투옥(投獄)하고 처형(處刑) 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신문(訊問)했던 인물이다. 아랍 공주(公主)와 이혼하여 전쟁을 치렀고 왕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당했던 사람이다. 헤롯의 셋째 아들인 빌립은 아들중 최상(最上)의 통치자로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증오심(憎惡心) 때문에 이 지방으로 잠깐 피신한 적이 있다. 총독들은 세금을 징수(徵收)하고 주둔군을 통솔하며 재판업무까지 장악(掌握)하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 활동(活動) 시대에 본디오 빌라도 총독이 10년간 총독으로 있었으나 유대인에 대하여 잔인(殘忍)했다 하여 주후 36년 고울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그 뒤에도 헤롯 아그립바 1세와 2세 그리고 여러명의 총독들이 유대인들을 통치하게 된다. 실제적으로 헤롯의 손자인 아그립바 1세가 유대의 왕으로 통치한 3년을 제외하고는 (A.D.41-44) 이 나라는 로마의 총독들에 의하여 통치 되게 된다. (A.D.6-66) 이 기간 동안에 유대의 민족주의(民族主義)는 점점 강하게 뻗어 나갔으며, 특히 로마인들의 통치는 절대로 용납(容納)할 수 없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던 제롯당의 생각과 행동으로 드디어 A.D.66-70년 유대인의 반란(反亂)이 일어난다. 원인은 총독인 플로루스가 성전의 보물(寶物) 창고(倉庫)에서 일부를 탈취하자 유대인들이 격분하여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아그립바 왕의 자체 진압이 실패하고 수리아 총독의 원정(遠征) 진압(鎭壓)도 실패하자 로마에서 보낸 티루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은 무너지고 수십만의 유대인들이 살해(殺害)되거나 포로(捕虜)가 되고 만다. 예루살렘의 멸망(滅亡)은 유대교의 동질성을 상실케 되고 그로 인하여 유대인들의 구심점(求心點)이던 성전 제사가 멈춰지고 유대교의 영향력있는 계급이던 제사장직이 소멸되고 유대인들의 영향력(影響力)있는 기관이던 산헤드린이 잠적(潛跡)하고 만다.
그 뒤 주후 115년에 또다시 독립의 시도가 있었으나 트라얀 황제의 진압(鎭壓)으로 살육(殺戮)의 전장으로 팔레스틴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궤멸(潰滅)되고 로마 제국 전역(全域)에 산재한 유대인들은 혹독(酷毒)한 제한 조치를 받게 된다. 팔레스틴은 이교도가 번성(繁盛)하며 유대교의 종식(終熄)을 맞게 된다.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싸움은 이로써 끝이 났다. 그리고 모든 면에서 지고 말았다. 그러나 헬레니즘이 강압적(强壓的)인 힘만으로 유지될 수 없었듯이 유대교도 군대의 힘으로 멸절(滅絶)시킬 수는 없었다.
어떤 개인이나 사회 그리고 종교와 사상(思想)은 주변(周邊)에 형성된 여건(與件)과 환경(環境)에 따라 큰 영향을 받게 되고 그 흐름을 형성(形成)하여 나간다. 로마 통치하에서의 유대인들은 지중해를 내해(內海)로 하는 강력(强力)한 세계적 국가를 이룬 로마 속의 한 집단(集團)으로 그들의 공동체를 형성해 나갔고 사상적(思想的)으로는 헬라문화의 계속적인 지배하에 있게 된다. 또한 억세게도 자신들의 종교인 유대교를 신봉(信奉)하고 수호(守護)하기 위하여 몸부림 쳤으며 민족주의의 지속적인 유지를 위하여 생명을 내걸었었다.
Ⅲ.결론(結論)
어느 시인(詩人)의 시를 보면 이런 구절(句節)이 있다. 한송이 국화 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우리는 가을에 활짝 핀 국화(菊花) 꽃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 국화 꽃 한송이를 피우기 위해 거슬러간 세월(歲月)은 봄부터이고 또 소쩍새가 울었던 것이다. 우리는 역사(歷史)를 바라보면서 보여진 사건을 따라서 역사(歷史)를 재 해석하고 음미하게 된다. 특별(特別)히 기독교(基督敎) 역사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부단(不斷)히 자기계시(啓示)를 하고 계시다.
구약시대에는 구약(舊約)시대의 방법으로 신약(新約)시대에는 또 그에 맞는 방법으로 하셨다. 그런데 유독(惟獨)히도 신구약 중간사 시대 만큼은 하나님의 계시가 없고 중단(中斷) 되었으며 침묵(沈黙)하신 기간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가 없다하여 역사(歷史)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쩌면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아야 하는 기간의 무계시의 역사였던 것이다. 인간은 침묵(沈黙)했으나 하나님은 역사(役事) 하셨다.
신약(新約)과 구약(舊約)은 별개의 사건이나 역사가 아니라 하나의 연장 선상에 있다. 신약의 배경(背景)과 신약성경이 기록된 분위기(雰圍氣)는 구약으로만 설명될 수 없고 신약의 직전(直前) 시대인 신구약 중간사 시대의 몫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理由)로 신구약 중간사 시대를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시대에 대하여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이나 섭리(攝理)가 없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전술(前述)한 역사적 배경을 토대(土臺)로 하여 이 시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攝理)를 밝혀 보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정점을 향하여 줄기차게 역사를 이끌고 가셨다. 그리하여 세계(世界) 여러나라 민족 중에서도 유대 민족을 선택(選擇)하시고 그 들의 역사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시다.
페르샤와 알렉산더 대제(大帝)하의 유대인들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페르샤라고 하는 국가가 세워지기 전에 바벨론을 통하여 팔레스틴에 정착(定着)하여 있던 유대인들을 강제로 흩으셨다. 그런후 페르샤 통치하에서 그들 나름으로의 공동체를 형성(形成)케 하시며 페르샤 128개도 전역(全域)에 흩어져 공동체를 이루어 가게 하셨다. 때가 되매 팔레스틴으로 귀환(歸還)하여 남아 있던 자들과 외국(外國)에 가서 살면서 다져진 신앙(信仰)으로 공동체를 더욱 소중(所重)하게 여기며 발전시키게 하셨다. 그런후 새로운 힘을 가진 알렉산더 제국을 통하여 더 넓은 세계로 또 하나의 사상(思想) 체계로 무장(武裝)한 막강한 역사의 힘으로 확산(擴散)되게 하셨다. 작으마한 하나의 세계가 아닌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로 확산(擴散)되는 물줄기를 타게 만드셨다.
알렉산더 대왕(大王)이 죽고 뒤이어 나타난 프톨레미와 셀류쿠스 왕조하에서 유대인들은 엄청난 시련(試鍊)을 맞이하게 된다. 프톨레미 왕조하에서는 팔레스틴과 알렉산드리아가 동질적(同質的)인 공동체를 유지하지만, 셀류쿠스 왕조하의 지배하에 팔레스틴이 들어가면서 신앙 공동체의 분리(分離)는 물론이요 안티오쿠스 4세의 학정(虐政)과 핍박(逼迫)으로 유대인들은 전무후무한 시련기를 맞게 된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깝다고 말했듯이 아마도 새벽을 향해 달리는 어둠같이 시련은 깊고도 깊었던 것이다. 마침내 견디다 못한 유대인들이 폭발하여 바카비가의 위대한 영웅적 결단(決斷)과 헌신(獻身) 그리고 희생으로 하스몬 왕조의 결실을 보게 된다. 어떠한 정점을 향하여 달리기 위해서는 하나의 단합(團合)된 힘이 필요(必要)하며 폭발적인 추진력(推進力)이 있어야 한다. 유대인들은 이 기간을 통하여 이러한 결정체(結晶體)를 이루어가게 된다.
마침내 세계 제국(帝國)의 꿈을 실현 시켜나가는 로마의 세력이 자연스럽게 끌어들여지고 하나의 정점에 다다르게 되니 그것이 바로 때가 차매(갈4:4) 이루어진 하나님의 섭리(攝理)요 역사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대한 제국(帝國) 로마를 통하여 일을 이루어 가시되 세계의 정치,경제, 사회의 센터였던 로마 치하의 상황을 통하여 일을 이루신 것이다. 당시는 종 교적(宗敎的)으로는 다신교(多神敎)요 그럴듯한 종교(宗敎)하나 없던 상태였으며 각 사람의 심령(心靈)이 메말라 있던 시대 상황(狀況)이었던 것이다. 로마의 세계는 세계로 뻗어가는 도로망(道路網)과 이미 통일된 헬라어와 단일 화폐(貨幣)를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신구약 중간사 시기에 침묵하고 계셨으나 구세주(救世主)를 보내시기전, 당시 지중해(地中海) 세계를 로마 제국으로 통일케 하시어 국경의 장벽(障壁)을 허시고, 잘 닦였진 길을 따라 당시 보편적(普遍的) 공용어가 된 헬라어로 종교적으로 갈급(渴急)해 있는 여러 민족의 심령(心靈)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던 것이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갈4:4)
과연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적 여건(餘件)을 성숙(成熟)케 하시고 구세주(救世主) 예수를 보내신 것이다.31) 신구약 중간사 시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攝理)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위하여 시대적(時代的) 여건을 만드시며 침묵(沈黙)하신 그 분만의 섭리(攝理)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