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회사
<서론>
하나님의 우주창조와 함께 출발된 기독교 역사는 약6000여 년간 전개 되어지면서 크고 작은 수많은 역사를 아우르고 포용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를 진행시켜왔다. 수많은 기독교 역사학자들과 일반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기독교의 역사를 때로는 주관적 입장에서 때로는 객관적 입장에서 정리하고 평가해왔다. 그러나 그토록 수많은 기독교 역사서적 가운데 하나님의 기독교역사를 바르고 정확하게 정리하고 평가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기독교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시대와 장소, 민족적 문화와 전통, 학문적 변화에 따라 기독교의 진리가 수없이 오류 되고 변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기독교 신학원리에 의하여 바르게 정리, 평가 되지 못하였으며 역사학자 개인들의 주관적 신학이나 개인적 신앙 및 역사관에 의하여 또는 당시의 신학사상이나 시대적 역사관 등등에 의하여 진리가 무시되고 오히려 오류와 비진리가 진리와 정통으로 둔갑하여 정리되고 평가된 일이 부지기수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오류를 재범하지 않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원칙을 기초로 하여 기독교역사를 정리하고 그에 대한 신학적 평가를 할 것이다.
첫째: 하나님의 섭리에 충실한 기독교역사를 정립한다.
지금까지의 역사학자들은 기독교 역사학자나 일반 역사 학자에 구별 없이 모두 다 기독교역사를 정리하고 평가함에 있어서 인류구원에 대한 역사적 차원에만 매달려왔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류구원을 위하여 세워지고 존재하고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意-義>를 위하여<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세워지고 존재하고 진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인류구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인류구원이 인간에게는 최고 최대의 문제이겠지만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은 아니며 하나님께서 기독교를 설립하신 궁극적 목적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창조로부터 시작되는 인류역사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라는 것과 인류에게 주어진 사명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임을 성경을 통하여 여러차례 선포하셨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선포가 아니라 할지라도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에 기독교의 본질이 인류 구원이라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만약에 기독교의 본질이 인류 구원이라면 그리하여 기독교의 역사가 인류구원을 위한 역사라면 하나님께서는 오직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되시며 인간을 위하여 죽으신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고 찬양할 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예수가 죽은 것이었다. 즉, 성자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몸으로 오시었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대속죄제를 죽음으로 치루신 것이다. 그리고 성자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 죽은 궁극적 목적은 성부하나님의 의<意또는義>를 이루기 위함이며 성부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것이었다. 성자하나님께서 예수로 십자가에 죽은 것을 통하여 인류의 구원이 완성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죽음의 궁극적 목적은<성부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성부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 것이었으며 인류의 구속역사는 그 궁극적 목적을 이루는 과정중의 지엽적인 하나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류의 구원을 본질로 하는 기독교역사를 정리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意또는義>를 구하는 기독교역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기독교역사를 정리하고 평가할 것이다.
둘째: 기독교역사 속의 일반역사를 정리한다.
지금까지의 역사학자들은 기독교 역사학자나 일반 역사 학자에 구별 없이 모두 다 기독교역사를 정리하고 평가함에 있어서 일반역사 속의 기독교역사를 논증하였다. 그리하여 일반역사에 슬그머니 참여한 하나의 종교적 차원에서의 기독교역사를 다룬 것이다. 일반 역사학자들은 인류사회가 상당히 오랜 역사적 진행을 거듭한 어느 시점에 기독교가 발생한 것으로 생각한다. 저들은 기독교가 로마 점령하의 유대에서 태어난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출발되어진 것으로 인식한다. 때문에 저들의 기독교 역사에 대한 개념은 언제나 당연히 인류역사 속의 기독교역사이다. 이러한 개념은 기독교 역사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기독교 역사학자들은 기독교가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출발되어졌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저들은 기독교역사를 정립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신적 작정에 의해서 출발되는 창세전부터의 기독교역사를 전혀 배제한 채 그리고 심지어는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출발되는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회까지도 거부한 채 사도들로부터 시작되는 초대교회를 기독교 역사의 시발점으로 정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개념들은 기독교역사는 물론이요 일반 역사에 대해서도 매우 오류된 개념이다.
성경은 언제나 현존하는 모든 역사가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여 출발되고 전개된다는 역사적 진리를 선포한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섭리역사를 전개하시기 위함이었으며 하나님의 섭리역사는 곧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섭리역사는 기독교라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적 도구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어진다. 따라서 기독교가 모든 역사의 출발이고 중심이며 결론인 것이다. 일반역사는 그것이 아무리 대단하고 다양한 것이라 할지라도 기독교역사를 변증하고 보좌하는 역사적 도구에 불과하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일반역사를 어떻게 포용하시고 아우르시는가 하는 것을 도처에서 증거함으로서 일반역사가 기독교역사를 변증하고 보좌하는 섭리적 도구임을 밝혀준다. 예를들면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이스라엘민족을 형성한 후 애굽을 떠나는 과정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라던가 패역한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하여 바벨론과 메대파샤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또는 로마제국을 통하여 전 세계를 기독교화 하는 하나님의 섭리 등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반역사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역사를 정리하지 아니하고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역사를 정리할 것이며 일반역사는 기독교역사를 변증하고 보좌하는 차원에서 적용할 것이다.
셋째: 기독교 역사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섭리적 도구로서 완전무결한 최고, 최상의 종교이다. 때문에 기독교는 종교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을 절대 거부하고 기독교의 명칭하에 독립적으로 존재함으로서 일반종교와 철저하게 구별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역사는 진리에 바로 서있는 역사보다는 수많은 오류와 비진리에 빠져 기독교의 본질로부터 이탈되어진 역사를 진행시켜왔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학자들은 기독교역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점을 수없이 간과하였다.
역사를 정리한다는 것은 다만 역사의 진행과정이나 결과만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정리한다는 것은 그 역사의 시작과 진행과 결과에 대한 사실적인 기록과 함께 그 역사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과 배경까지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역사의 진행과정에 존재했던 오류와 비진리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하지 않는 것은 기독교 역사학자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역사학자는 역사에 대한 평가를 함부로 해서는 않된다. 역사에 대한 평가를 잘못하면 진리가 비진리로, 비진리가 진리로 뒤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기독교역사에 대한 평가는 역사학자들의 주관적인 신학과 신앙 및 역사관에 의하여 그리고 시대와 문화적 전통에 의한 객관적 역사관에 의해서 이루어져왔다. 때문에 하나의 주제가 역사학자들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다르게 평가됨으로서 혼란과 갈등을 야기 시켰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기독교역사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는 성경이 있으며 신학이 있고 그 신학에서 비롯되어진 신앙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주관적 신학이나 역사관 및 개인적 신앙이나 시대적인 문화와 전통 등등에 의한 객관적인 차원에서 기독교 역사를 평가하지 않고 오직 성경과 그 성경을 토대로 형성된 신학에 근거하여 기독교역사를 정리하고 평가할 것이다.
넷째: 하나님의 점진적, 단계적 역사 진행에 유의할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역사는 때로는 태풍과 번개처럼 급진적으로 전개되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완만하고 또한 점진적, 단계적으로 진행되어져왔다. 기독교가 아담으로부터 출발되어졌지만 그로부터 2000여 년이 경과한 후에 아브라함을 통하여 본격적인 진행이 시작되었으며 아브라함을 통하여 약속된 예수그리스도는 그로부터 다시 200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서 강림하셨다. 그리고 모세와 바울을 비롯한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정립시켜주신 성경과 그 성경으로부터 정립되어져야할 기독교신학은 예수그리스도 이후 다시 200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기독교의 본질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정립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들이 있기까지에는 수많은 역사적 완만함과 점진적이며 단계적인 역사들이 계속되었다. 이와같은 역사적 완만함과 점진적이며 단계적인 역사들은 하나님께 어떤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인간들의 무지함과 아둔함 때문이었다. 인간들은 성령하나님의 특별하신 조명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깨닫는 일에 항상 어두웠으며 하나님의 섭리에 일사분란하게 순종하지 못하고 좌로나 우로 치우침으로서 하나님을 답답하게 하였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역사를 빠르게 진행하지 아니하시고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시면서 점진적으로 그리고 단계적으로 완만하게 역사를 진행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역사와도 관련된다. 일반역사도 성령의 조명을 받지만 일반역사가 받는 조명은 기독교가 받는 특별한 조명과는 차원이 다르다. 때문에 일반역사의 진군은 더욱 완만하며 또한 점진적, 단계적 발전을 이루어나가게 된다. 반면에 기독교역사는 독립적이지만 또한 일반역사를 아우르고 이끌어 가는 특수성을 갖기 때문에 일반역사와 필연적으로 동행하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역사는 일반역사의 완만함과 점진적, 단계적 진군에 조화를 이루며 진행하게 됨으로서 같은 차원에서 완만하고 점진적이며 단계적인 역사적 진군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적 진행에 절대 유의하여 기독교역사를 함부로 왜곡하거나 평가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섭리보다 앞서 가는 만행도 범하지 않을 것이다.
제1장. 역사의 출발.
역사학자들의 연구 활동을 살펴보면 언제나 인류역사를 전제로 한 역사연구가 진행된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인류의 역사를 우선으로 전제한 후 정치역사, 종교역사, 산업역사, 문화역사, 예술역사, 전쟁역사, 학문역사 등등의 역사를 인류역사에 적용하고 병행하여 전개해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학자들은 역사의 출발을 언제나 인류 역사로부터 시작한다. 인류학자, 고고학자들이 고대역사의 현장들을 발굴하는 목적도 인류역사의 가장 최 근원을 찾아내려는 목적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출발은 언제나 그리고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출발되어져야한다. 왜냐하면 역사의 출발은 역사를 창조한 창조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 역사를 정립함에 있어 그 출발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다.
제2장. 역사의 중심.
역사학자들의 역사 연구가 인류역사로부터 출발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역사 논증 중심은 당연히 인간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역사를 정립하지 않고 인간을 중심으로 하여 역사를 정립한다는 것은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된 것으로서 창조주와 피조의 위치가 바뀐 것이다. 그와같은 역사의 정립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자신의 피조 세계를 섭리하시는 것이 되지 못하고 인류역사를 뒤 쫓아 가면서 인류역사의 진행에 맞추어 자신의 섭리 역사를 꿰어 맞추는 하나님이 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와같은 역사의 정립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욕하고 거부하는 용서받지 못 할 악행이다.
역사의 출발이 창조주 하나님이신 것과 같이 역사의 중심 역시 하나님이시다. 우주만물은 3류 종교들이 말하는 것처럼 어느 날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며 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어떤 기운이나, 정신이나, 운동력에 의해서 생겨나고 발전된 것도 아니고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미생물들로부터 진화되어 현재에 이른 것도 아니다. 우주만물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목적에 의하여 작정되고, 계획되어, 창조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목적에 따라 진행되어져왔고 계속하여 진행되어져 갈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중심은 당연히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일반 역사가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개념 하에서 인간을 모든 역사의 중심으로 세운다. 그러나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 것은 인간이 스스로 어떤 능력을 발휘하여 자체적으로 만물의영장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는 임무를 부여하셨고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이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인간을 통하여 자신의 피조 세계를 진행하시는 섭리주 하나님이시다.
제3장. 기독교 역사와 인류 역사의 관계.
역사의 중심이 하나님이신 반면에 하나님의 섭리역사의 주역은 인간이다. 하나님께서는 섭리역사의 중앙 무대에 인간을 주역으로 세우셨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인간들의 역사를 진행하시고 그 인간들의 역사를 아우르시고 다듬으시면서 기독교역사를 진행하신다. 이와같은 사실은 기독교역사가 시작되고 진행되는 시 공간에는 언제나 이미 인류역사가 먼저 존재하고 있었음을 통하여 증명되어진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의 역사가 진행되어질 시 공간에 이미 인류역사<일반역사>를 전개시키시어 그들이 기독교역사를 보좌, 준비, 예비, 보증, 변증하게 하신다. 성경은 이와같은 하나님의 섭리를<때가 이르매>라고 표현한다. 때가 이르매 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기독교역사를 진행하실 때 일반역사들이 기독교역사에 보조를 맞추어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일반역사가 기독교역사를 보좌, 준비, 예비, 보증, 변증하게 하실 때에 일반역사의 진행을 조절하시어 때로는 빠르게 진행시키시는가 하면, 때로는 천천히 진행시키시어 조화를 이루게 하신다. 우리는 이와같은 하나님의 섭리에 입각하여 기독교역사를 정립해 나가는 과정에 일반역사를 함께 병용하고 적용하여 일반역사들이 하나님의 기독교역사에 어떻게 사용되어지는가를 증명한다.
제4장. 기독교역사와 하나님의 종들.
기독교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하나님에 의하여 출발하고 진행되지만 기독교의 중심적 활동은 하나님의 종들에 의해서 진행되어진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여러 유형의 종들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각각 고유한 사명을 부여하시며 또한 그 사명에 적합한 은사와 능력들을 부여하시어 그들이 맡은바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신다. 기독교역사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역사적 기록들이 수 없이 등장한다. 이때에 하나님의 종이라함은 반드시 인간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종에는 국가를 비롯하여 가정, 민족, 직장 등등의 각종 조직사회 영역들이 포함되어지며 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 교육, 과학, 철학, 상업, 공업, 문화, 예술, 체육 등등의 영역들이 포함되어지고 심지어는 천사까지도 포함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또한 반드시 선한 종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악한 자들을 들어 쓰시며 심지어는 사단까지도 들어 쓰신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역사를 정립함에 있어서 하나님께 등용되어지는 여러 유형의 하나님의 종들의 활동들을 정리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들의 활동을 정리함에 있어서 그들의 개인적인 신상이나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는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구체적인 논증을 삼갈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종들의 개인적 신상이나 삶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역사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께 무엇에 대하여 쓰임 받았으며 어떻게 쓰임 받았는가 하는 것과 그들을 통하여 진행되고 결과 되어진 하나님의 섭리역사만을 논증한다.
제5장. 기독교역사와 사단의 활동.
어떤자<한국침례교 성락교회의 김기동>는 기독교역사를 예수그리스도와 사단의 한판 승부에 대한 역사라고 주장한다. 그는 예수그리스도는 사단을 제압하기 위하여 강림하였으며 따라서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이 있을 때까지 사단과 계속적인 싸움을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같은 주장은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므로 논증하거나 반박할 가치조차 없다. 사단은 첫 사람 아담을 공격한 이래 현재에 이르기 까지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끊임없이 끼어들어 온갖 오만 방자한 악행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단의 악행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 성경은 이와같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욥1:6-12>을 통하여 증거한다. 어떤 몰지각한 자들은<욥1:6-12>을 함부로 오해하여 사단의 활동이 하나님의 의도적인 섭리에 의하여 허락되었으므로 아담을 통하여 인류역사에 도입된 죄악이 결국은 하나님의 의도적인 섭리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사단의 악행을 정죄하시어 심판하시지 아니하시고 그의 악행을 오히려 섭리역사에 적용하신다는 이유에서 사단의 활동이 하나님의 의도적인 신적 작정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되어진 오류이다. 사단의 활동이 여전히 계속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적인 섭리가 아니라 관용적인 섭리이다. 사단은 이미 정죄 받았으며 심판 받았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심판은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최후의 심판 때에 이루어진다. 사단에 대한 이와같은 하나님의 관용은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때문에 우리는 사단의 오만 방자한 악행을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허용하시며 오히려 사단의 악행을 통하여 당신의 역사를 유유히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적 섭리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사단은 아담을 무너뜨린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섭리를 훼방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그러한 훼방을 오히려 적절하게 아우르시면서 당신의 섭리역사를 전개하신다. 우리는 여기에서 고군분투하며 헛수고를 하는 사단의 불쌍하고 피곤한 모습과 그것을 유유하게 다스리시며 오히려 그것을 시의 적절하게 적용하시어 승리의 역사를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멋지신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기독교역사를 정립해 나감에 있어서 악전고투하는 사단의 어리석은 활동과 그것을 멋지게 다스리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유유한 섭리역사를 구체적으로 정리한다.
제6장. 기독역사와 성령의 사역.
어떤 자들은 성령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을 때<행2:1-4>에서부터 출발되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들은 그와같은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장차 보혜사성령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요14:16><요15:26><요16:7>을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성령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이미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의 창조에 대한 계획을 세우실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따라서 성령하나님은 기독교의 출발에서부터 함께 하셨고 기독교의 모든 진행 과정에 쉬임없이 역사하시며 기독교의 역사와 영원히 함께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역사 속에 촌각의 틈도 없이 영원히 함께하시는 성령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역사 속에 영원히 함께하시는 성령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낱낱이 증거하고 선포한다.
제7장. 시대적 기독교의 특성들.
하나님의 우주적인 창조세계에는 수많은 영역들이 있고 그 영역들은 각자에 부여된 고유한 사명에 따라 자신들의 역사를 진행해 나간다. 이러한 영역 사회적 역사성은 기독교 세계에도 동일한 원리로 적용된다. 하나님역사의 주역이며 중심인 기독교에 소속되어 있는 수많은 교회들은 시대와 영역의 특성에 따라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특별한 사명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각각의 지 교회들에게 개 교회적인 사명을 부여하심과 동시에 또한 시대적 또는 지역적 교회들이 연합하여 하나님의 섭리역사를 진행하게 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역사를 정립하는 과정에 개 교회적으로 부여된 사명을 정리하는 동시에 시대적, 지역적 교회들에게 연합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들을 신학적 차원에서 심도 있게 정리한다.
제8장. 기독교의 비진리적 역사.
기독교역사 속에는 수많은 교회들이 등장하지만 그 교회들이 한결같이 하나님의 법과 진리 안에서 맡은바 사명을 감당한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역사 속에는 수많은 교회들의 비진리적인 역사들이 등장한다. 이와같은 사실은 신학적 차원에서는 사단의 흉계이지만 신앙적, 사명적 차원에서 보면 교회 지도자들의 열악한 신학수준과 그로부터 비롯되어진 오류적신앙, 그리고 다듬어지지 못한 인격과 사명감의 부재 등등으로 인하여 비롯되어지는 비진리적 역사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독교역사가 비진리적인 것으로 얼룩진 이면에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각종 욕심들이 있었다.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명예욕, 권세욕, 권위욕, 재물욕, 지위욕, 성욕 등등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각종 비진리적 행위를 전개함으로서 기독교역사를 피멍으로 얼룩지게 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교회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비진리적 역사들을 묵묵히 품에 안으시고 아우르시며 당신의 역사를 진행해 나가신다. 우리는 이러한 비진리적 교회 역사들을 숨김없이 공개하여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교회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증거한다. 그리고 아울러 현재의 교회들과 미래교회들이 더 이상 부끄러운 역사를 계속하지 못하도록 경종을 울린다.
제1부. 인류 사조<思潮>역사.
기독교역사를 정리하기 전에 먼저 기독교역사 현장 주변의 일반역사와 그 일반역사를 이끌어 갔던 인류 사조의 역사적 흐름을 고찰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역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역사를 함께 이끌고 가면서 자신의 역사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역사와 인류역사는 인류 사조의 흐름과 맥<脈>을 같이 하여 전개되어짐으로 피차에 불가분리의 절대적 연관을 갖게 된다. 우리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인류 사조역사를 고찰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역사를 진행하심에 있어 인류 사조를 적절하게 적용하신다. 기독교가 히브리니즘-헬라니즘-라틴니즘-오리엔트니즘을 포용하면서 진행된 것이 그 증거다.
둘째는 하나님의 종들의 사명 현장들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기독교역사를 진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주변의 일반역사와 인류 사조의 역사적 흐름에 막대한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사실은 동방신학자들과 서방신학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신학 논쟁과 성경해석의 차이를 통하여 증명된다. 초기 신약 기독교시대에서 서방신학자들은 라틴적 사조에 영향 받았던 반면에 동방신학자들은 헬라적 사조에 영향받았다. 당시의 라틴사조는 로마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주로 법률적이었고 따라서 성경을 근거로 하였다. 반면에 헬라사조는 철학적이었기 때문에 인간적이었고 신화적이었다. 그리하여 서방신학자들의 신학은 비교적 성경을 근거로 하는 반면에 동방신학자들의 신학은 문화적이었고 신화적이며 인본주의적이었다.
역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확인될 것이지만 인류 사조가 기독교에 사용되는 과정에는 전혀 다른 두 가지 차원의 결과를 이룬다. 인류 사조가 하나님의 섭리에 적용될 때에 그것은 항상 형이상학적인 결과를 이룬다. 반면에 인류 사조가 하나님의 종들에 의하여 적용될 때에는 두 가지의 상반된 결과를 이룬다. 때로는 형이상학적인 결과를 이루는가 하면 때로는 반대로 형이하학적인 결과를 이루기도 하는 것이다.<이 문제는 앞으로 다양한 차원에서 입증 될 것이다.>인류역사에 나타나는 인류사조는 크게 구분하여 다음과 같은 4가지로 요약되어진다.
첫째: 시오니즘으로 대변되는 이스라엘역사와<히브리니즘>
둘째: 마케도니아 중심의 그리스역사와<헬라니즘>
셋째: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로마제국의 역사와<라틴니즘-로마니즘>
넷째:인도,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역사와<오리엔트니즘>
이 4개의 지역적 역사와 사조는 각각 특별하고 독특한 특성들을 형성하고 있는데 반하여 모두가 기독교역사에 응용되고 적용되는 역사적 의의<意義>를 갖는다. 그러나 기독교역사 현장의 주변역사들과 그 역사에 나타나는 사조<思潮>들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매우 다양했음으로 그것을 모두 소개할 수는 없다. 따라서 기독교역사가 진군되어지던 시대를 전후 한, 그리고 기독교역사가 전개되어지던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주변의 일반역사와 인류사조의 역사적 흐름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한편 우리가 기독교 주변의 일반역사들을 정리함에 있어서 일반 역사적 차원에서의 역사적 정리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다만 기독교역사를 보좌하는 차원에서의 역사적 정리를 할 것임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제1장. 이스라엘역사와 히브리니즘.
1.이스라엘민족 역사.
이스라엘민족의 역사를 정리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종교적 차원에서 이스라엘민족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고 다른 또 하나는 순전히 일반역사적 차원에서 이스라엘민족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민족 역사는 타 민족과는 매우 다른 민족적, 역사적 특성을 갖는다. 그들의 역사는 민족적역사가 곧 종교적 역사이며 종교적 역사가 곧 민족적 역사이다. 민족적 역사와 종교적 역사가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집약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을<히브리민족>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의 조상이 히브리 민족이었고 그 명칭이 하나님에 의한 것이라는 자부심과 긍지 때문이다. 이스라엘민족 역사를 정리하려면 당연히 창세기로부터 전승되어지는 그들의 시조인 아담으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아담은 물론 인류의 시조이기도하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은 노아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모두 홍수로 멸망하였다. 따라서 홍수이후 살아남은 노아의 후손으로부터 히브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노아에게는 셈, 함, 야벳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셈이 히브리민족의 시조가 된다. 한편 일반 역사가들은 히브리민족의 시조를 아브라함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셈의 후손이다. 따라서 일반역사의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민족이 주장하는 셈은 모두 다 아담으로부터 출발 되어지는 히브리민족의 후예이므로 어떤 방법대로 정리해도 결론은 동일하다. 히브리인이라는 민족적 명칭의 유래는<창14:13>에 최초로 증거 되어지는데 그 명칭의 어의<語意>는<강 저편에서 온 자>로 전해진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애굽에서 거대한 민족으로 발전한 후 모세와 여호수아의 연계적 지휘 하에 가나안에 이르고 가나안에 정착한 후 사울을 왕으로 옹립하여 이스라엘국가를 건설하였다. 이스라엘 국가는 다윗과 솔로몬시대를 거치는 동안 근동일대를 평정하는 국가적 민족적 부흥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솔로몬이 사망한 후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하였으며 북이스라엘은 B.C.721년에 앗수르에 멸망당하고 남유다 역시 B.C.587년, 바벨론에게 멸망당하였다. 그 후 이스라엘은 계속하여 바사<페르시아>헬라, 로마 등등의 열강들에 의하여 통치된다.
2. 히브리니즘<Hebraism>
히브리인들의 역사는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따라서 야훼하나님과 동행하는 역사였다. 때문에 그들의 생활, 문화, 사조, 사회제도 등등은 모두가 야훼하나님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특성 하에서 형성되고 발전된 히브리니즘은 당연히 오직 야훼하나님 중심의 종교적 사조였는데 그들의 야훼 중심 종교사조는 사실상 그들에 의하여 자체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수립해 주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에게 세워주신 사조<히브리니즘>은 오직 신본주의 사조<야훼중심사조>로서 야훼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전제로 하는 율법적 사조이며 야훼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절대 이의 없는 순종이 요구되어지는 수직적<垂直的>사조였다. 히브리인들의 삶은 언제나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하는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들의 모든 것에 대한 개념은 당연히 아니면의 둘 중에 하나였다. 그들의 삶 속에는 중도<中度>나 타협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야훼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로 순종하면 그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셨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로 거부하면 그들에게 징계를 내리시어 그들을 훈련시키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을 그와같이 이끌어 가셨던 것은 하나님께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이거나 또는 하나님의 성격이 포악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히브리인들을 통하여 기독교역사를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의 종교적 훈련이었으며 기독교의 기본 원리들을 신학적으로 정립하기 위한 의도적인 섭리였다. 한편 이스라엘민족은 시온니즘이라는 또 하나의 독특한 사상을 발전시켰다. 시온니즘은 하나님 백성들의 신앙적 삶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예루살렘성전이 있었던 시온산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만이 오직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개념 하에 시온산을 하나님의 도성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 들였고 시온니즘이란 사상을 발전시켰다. 따라서 시온니즘은 곧 히브리니즘이었다.
제2장. 그리스역사와 헬라니즘<Hellenism>.
1.그리스역사.
그리스라는 국가적 명칭은 라틴어 그레키아의 음역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리스 국민은 인도-아리안계<系>에 속하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헬렌<Ελλην-Hellen>여신의 후손이라 하여<헬레니스 또는 헬레네스>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그리스는년>을 전후하여 다양한 도시국가를 형성하였다. 그중에 가장 강력한 도시국가는<아테네>와<스파르타-라케다이몬-Lakedaimon>였는데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고대그리스의 역사를 크게 좌우하였다. 스파르타는 기원전 6세기에 이르러 무력을 앞 세워<펠로폰네소스>반도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규합하는<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체결함으로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실제적인 맹주가 되었다.년>에 페르시아의 식민지였던 이오니아에서 독립을 전제로 하는 집단적인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때에 아테네가 그들을 지원하였다. 이에 페르시아는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을 단행하였다. 당시의 페르시아는 막강한 대제국이었던 반면에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수없이 분열되어 있는 소국<小國>이었기 때문에 전쟁의 결과는 당연히 페르시아의 것이었다. 그러나 페르시아는년>의 1차 육지전쟁<마라톤전쟁>에서 아테네에게 패하였고년>의<살라미스>해전에서도 역시 아테네에게 패하였으며년>의 3차 전쟁<플라타이아전쟁>에서도 아테네, 스파르타 및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군에게 대패하였다. 아테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군사력을 앞세워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해군력을 장악하는 동맹을 맺었다.년>이 동맹은 본부가<델로스>섬에 있기 때문에<델로스동맹>으로 전해진다.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을 체결한 것은 이미 6세기경부터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맹주로 자리 잡은 스파르타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델로스동맹은 명목상으로는 페르시아 해군을 견제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아테네의 해상력<海上力>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아테네는년>에 동맹본부를 아테네로 옮겼고 동맹 국가들로부터 동맹을 유지하기 위한 자금을 거출하였다. 이로서 아테네는 그리스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스파르타와 함께 폴리스의 맹주가 되었다. 아테네가 점점 강성하면서 폴리스들을 장악해 나가자 스파르타는 그것을 좌시하지 않았고 아테네를 꺽을 기회를 노렸다. 이러한 때에 코르키라와 코린토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아테네가 코르키라를 지원하였다. 그러자 아테네의 횡포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폴리스들은 스파르타를 부추겨 아테네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리하여년>에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이때에 스파르타는 이미 아테네를 제압하기 위하여 페르시아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해군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스파르타는 즉시 펠로폰네소스 동맹회의를 열어 연합군을 조직한 후 아테네와의 전면전에 들어갔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알려진 이 전쟁에서 아테네는 대패하였고 스파르타의 예속국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스파르타 역시 크게 타격을 입었다. 스파르타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점점 쇠퇴해 갔고 그리스 일대의 맹주다운 면모를 잃어 갔다. 그러자 코린토스, 테베, 아테네, 아르고스 등등이 페르시아의 후원 아래 동맹을 하여 스파르타와의 전쟁을 일으켰다. 코린토스전쟁년>으로 알려진 이 전쟁에서 스파르타는 다시 한번 그리스를 배반하였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에게 그리스 일대의 식민지들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페르시아가 개입하여 전쟁이 종료되었으나년>에 이르러 테베가 다시 스파르타에 도전하였다. 스파르타는 레우크트라전투에서 테베군에게 대패하였고 그리스의 패권은 테베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테베도 전쟁의 후유증으로년>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와같이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동족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끊임없는 전쟁을 치루다가 서로 멸망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페르시아는 그리스의 폴리스들을 장악하기 위하여 풍부한 자금을 폴리스들에게 지원하면서 그들을 이간시키고 권력투쟁을 조장하였으며 결국은 스스로 궤멸하게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년>에 이르러 그리스 북방의 마케도니아가 필리포스2세재위>의 영도 하에 그리스정복을 시작하였다. 그리스는 동맹군을 결성하여 마케도니아에 대항 하였으나년>케로네아전투에서 대패하였다. 필리포스2세는 코린토스동맹<헬라스동맹>을 통하여 그리스의 폴리스들을 하나로 규합하였다. 이로서 그리스의 폴리스시대는 드디어 종말을 고하였고 스파르타를 제외한 그리스 전체가 마케도니아의 통제아래 들어갔다.년>에 이르러 필리포스2세가 암살된 후 그의 아들 알렉산더재위>가 마케도니아왕으로 즉위하였다. 알렉산더는 부왕이 이루지 못한 페르시아 정복을 이루기 위하여년>부터 전쟁을 시작하였다. 알렉산더는 35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소아시아의 시리아, 팔레스티나, 이집트 등등을 차례로 정복한 후 드디어년>에 아르벨라전투를 통하여 다리우스3세의 페르시아군을 굴복시켰다. 이로서 알렉산더에 의한 마케도니아제국이 형성되었다. 알렉산더대왕의 마케도니아 제국은 서쪽으로는 지중해연안의 모든 영토와 북쪽으로는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페르시아제국의 모든 영토와 남쪽으로는 이집트제국의 영토와 동쪽으로는 인더스강 하류에 이르기까지의 드넓은 지역을 포함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더는년>에 아라비아와 지중해 원정을 준비하던 중 열병으로 급사하였다. 알렉산더대왕이 임종할 때에 장군들이 후계자를 지명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알렉산더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강한자가 제왕이 될 것>이라고 말한 후 부왕 필리포스의 충실한 신하였던 페르디카스장군에게 자신의 반지를 주었다. 장군들은 후계자 문제를 놓고 의논한 결과 알렉산더의 동생 아리데우스와 알렉산더의 왕비<빅토리아왕국출신>록사네가 아들을 낳을 경우 둘 중에 하나를 후계자로 세우기로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일단 아리데우스와 록사네가 공동으로 통치하고 페르디카스가 섭정을 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마케도니아제국은 크게는 4개, 작게는 20여개로 분열되었다.
섭정을 맡았던 페르디카스가 점점 세력을 확장하여 제국의 실권을 장악하려하자 지역을 맡아 관리하던 총독들이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알렉산더의 시체를 마케도니아에 안치하기 위하여 바벨론에서 운구할 때에 애굽의 총독이었던 프톨레미가 수리아에서 운구행렬을 공격하고 알렉산더의 시체를 가로채어 애굽으로 가져가서 장사지냈다. 페르디카스는 그것을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여년>에 애굽을 공격하였으나 기병대장 셀루쿠스를 비롯한 수하 장군들에게 살해당하였다. 이러한 혼돈의 와중에서 마케도니아 주권을 둘러싼 싸움이 계속되었고 제1차 후계자 전쟁을 통하여 마케도니아제국은 캇산드로스 왕조의<마케도니아>셀레코스 왕조의<시리아>프톨레미 왕조의<이집트>등 세 개의 나라로 분할되었다.
2.헬라니즘.
헬라문화로 상징되는 그리스문명은세기에 이르는 동안 서양문화의 근간을 형성하는 역사적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스문명의 원조는 미케아문명인데 미케아문명은 아케아계<系>의 초기 그리스인들이 크레타문명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한 문명이었다. 크레타는년>경부터 크레타섬의 크노소스왕궁을 중심으로 하여 번영을 누리고 있던 호전적 민족이었으나 그들의 문명은 평화와 자유의 문명이었다. 아케아계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호전적 문명과 크레타의 평화와 자유적 문명을 결합 시켰다. 그리하여 탄생된 것이<폴리스문명-그리스 도시국가적 문명>이다. 따라서 그리스의 도시국가 문명은 독립과 주권, 자유와 평화를 구가하는 문명이었는데 이러한 그리스 도시국가의 문명이 그리스문화<헬라문화>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헬라니즘은 이러한 헬라문명을 근본으로 하여 형성되고 발전되었다. 따라서 헬라니즘은 자유적이면서 또한 도전적이고 학문적 사조이며 예술적 사조이다. 헬라니즘은 논리적인 반면에 공격적이고 문학적 예술적인 반면에 자유적이며 독립적인 표현력을 갖는다. 또한 헬라니즘은 동양적이면서도 서양적이다. 헬라니즘은 그리스가 도시국가 형태였을 때에 생긴 사상으로서 처음에는 신화적이고 학문적이며 철학적이고 예술적인 것이었는데 이러한 사조는 지정학적 차원에서 오리엔트니즘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헬라니즘에 포함되어 있는 오리엔트니즘은 전통적인 오리엔트니즘과는 다르다. 전통적인 오리엔트니즘은 감성적이고 신앙적인 반면에 헬라니즘에 포함되어 있는 오리엔트니즘은 신화적이고 학문적이며 예술적이다. 즉 감성적인 오리엔트니즘이 헬라화 되면서 헬라적인 특색을 지닌 새로운 오리엔트니즘을 형성한 것이다. 한편 헬라니즘은 지정학적 차원에서 서양적인 요소를 함양하고 있다. 유럽적 사조인 서양사조가 헬라적인 사조에 깊은 영향을 주면서 또 다른 차원의 서양적사조<헬라화 된 서양적사조>를 형성한 것이다. 이와같이 동서양의 사조가 지정학적 차원에서 헬라사조와 교류하면서 원래적인 그리스적 헬라니즘과는 다른 헬라문화와 헬라사조를 형성한 것이다. 이러한 헬라적사조가 마케도니아제국 문화를 거치면서 물질적이고 화학적인 것이 추가 되었고 또한 인간 중심적인 것이 연합되어지는 가운데 이기주의적이며 개인주의적<인본주의적>인 것으로 변형되었다. 한편 그리스의 폴리스문명이 헬라문명화 되기까지에는 아테네의 역할이 컸다. 아테네는년>펠로폰네소스전쟁이 발발한 후부터 27년간의 전쟁을 치루면서도 참으로 아름다운 문화적 유산들을 후세에 남겼다. 이러한 아테네의 문화는 훗날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등의 철학적 정치학적 사상들을 성립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의 고전문화를 헬라문화로 발전시킨 것에 대한 가장 큰 공로는 역시 알렉산더대왕에게 돌려야할 것이다. 알렉산더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자신의 영토를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어 나갔다. 그것은 알렉산더의 차원 높은 정치력이었다. 원래 고대그리스어는 매우 차원 높은 언어로서 예술적이며 학문적이었다. 고대그리스어는 그리스본토와 터키, 알바니아 등등의 여러 가지 방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크게 나누면<아티카방언><이오니아방언><아르카디아방언><키프로스방언><아이올리스방언><북서그리스방언><도리스방언>등등으로 구분된다. 그중에 아테네언어인 아티카방언은 매우 특별한 것으로서 문학적인 요소와 예술적인 요소를 함양하고 있었다. 때문에세기>경부터 아티카방언이 당시 그리스의 맹주 중 하나였던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여 그리스 일대에 폭넓게 사용되어지고 있었다. 전승에 의하면 알렉산더대왕은 그리스 일대를 완전정복 하여 마케도니아제국을 이룩한 후 제국의 언어를 하나로 통일시키기려고 하였다. 알렉산더는 능력 있는 언어학자들로 하여금 대중적이면서도 품위있는 헬라적 언어를 연구하게 하였고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코이네>다. 한편 일반역사가들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B.C.4세기 초에 이르러 알렉산더에 의한 마케도니아제국이 수립되었을 때부터 그리스문화권이 하나로 통일되어짐에 따라 그리스인들의 국가적 의식이 크게 신장되고 또한 하나의 제국하에서 통일된 언어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코이네가 탄생되었다고 한다. 코이네는 아티카방언을 중심으로 하여 이오니아방언을 추가하고 그것에 기타 여러 방언들의 중요한 요소들을 포함시켜 만들어졌다. 마케도니아제국의 헬라니즘사조는 코이네를 중심으로하여 형성되고 발전되었다. 인류 언어 중에 헬라어 특히<코이네>가 매우 학문적언어, 예술적언어인 것은 그것이 헬라니즘을 반영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제3장.로마제국역사와
라틴니즘-로마니즘.
1.로마제국의역사.
로마의 건국신화에 의하면 로마제국의 건국시조는 로물루스이다. 1세기 말의 연대기 작가 타키투스와 리비우스의 증언에 의하면 로마는년4월21일>에 창건되었다. 로물루스는 고대 이탈리아 로마 남부지역 알바롱가<家>의왕 누미토르의 딸인 레아실비아가 마르스신<神>을 통해 낳은 쌍둥이 아들 중에 형 이었다. 그는 동생레무스와 함께 티베르강<현재의 테베레강>에 버려졌으나 이리의 젖을 먹으며 자라던 중 양치기 파우스툴루스에 의해 발견되어 그의 손에 양육되었다. 그는년4월21일>에 동생과 함께 새로운 도시 로마를 건설했는데 그들이 건설한 로마는 테베르강과 아니에네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라티움이다. 이곳은 에트루리아, 라틴, 사바누스의 3종족이 접하는 곳이며 그러한 교통 도시의 요소에 시장도시로서 로마가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간에 반목이 생겼고 로물루스는 레무스가 도시의 신성한 경계를 넘었다는 이유로 그를 죽였다. 로물루스왕조는 7대로 마감하였고 그 후 로마는 에트루리아왕조의 지배 하에서 시벽<市壁>을 갖춘 도시로 성장했다. 에투트리아왕조는 3대세기말>에 이르러 폭군 정치를 하다가 추방 당 하였다. 이때부터 로마는 귀족들에 의한 공화제를 실 시 하였고 여러 라틴제도시의 맹주가 되면서 고대 로마제국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로마가 공화제를 실시할 때에 로마의 정치적 중추 기관은 원로원이었다. 원로원은 최고의 정치가들로 구성된 최고의 기관으로서 로마제국에 대한 전체적인 문제를 총괄하였다. 때문에 로마제국 황제들은 항상 원로원과 충돌하였고 황제와 원로원의 정치적 반목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로마제국은 B.C.4세기 후반에 라티움을 통일하였고 3세기 중엽에는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였다. 그 후 로마는 시칠리아섬에서 카르타고와 충돌하면서 지중해 제패를 위한 전쟁에 들어갔다. 로마는년>까지 제1,2차 포에니전쟁을 통하여 카르타고를 격퇴시키고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였다. 이때에 지중해 동부지역에서는 여러 헬레니즘 왕국들이 분쟁을 계속했는데 로마는 여기에 개입하여 마케도니아, 시리아, 아이톨리아 동맹등과 싸워 그들을 모두 정복하였다. 로마는 그 후 계속하여 세계 정복을 추진해 나갔고 유럽 일대와 아프리카 및 아시아에 이르는 세계적인 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세계를 지배하게 된 로마는 방대한 지역을 통치하기 위한 군사문제로 진통을 겪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로마는 귀족들과 제후들의 세력 싸움에 의한 내전으로 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제1차 내전이었던 B.C.80년대의 마리우스파와 술라파의 싸움, 그리고 제2차 내전이었던 B.C.40년대 전반의 카이사르파와 폼페이우스파의 싸움 등등의 크고 작은 전쟁으로 인하여 로마는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제1차 3두정치<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락수스>제2차 3두정치<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시대를 거치면서 옥타비아누스파가 최후 승리자가 되어 로마의 통치자가 되었다. B.C44년 카이사르<시저>암살 후 전개된 내전의 궁극적 승리자 옥타비아누스는 B.C.29년에 원로원의 제1인자가 되었고 B.C.27년에는 공화제 재건을 제창하여 공화제를 실시하였다. 이때에 원로원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존엄한자>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의 공화제는 형식적으로만 공화제였고 옥타비아누스 황제가 모든 실권을 장악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및 지중해 일대의 제1인자<元首>가 되었는데 이러한 정치체제는 원수정치<元首政治-Principatus>로서 역사가들은 그것을<제정정치>라고 불렀다. 이후부터 황제에게 제국에 대한 모든 권력이 집중되었으며 국가가 곧 황제의 것이라는 정치적 사조가 발생하였다. 이제 황제는 새로운 시대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되었고 따라서 황제에 대한 개인숭배 및 신격화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때로부터 신격화되기 시작한 황제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였고 황제들의 폭군적 통치와 귀족과 제후들의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로마는 점점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A.D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을 무렵 로마는 제국의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고 밀라노와 라벤나에 로마제국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이 옮겨졌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일념 하에 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이전하였는데 그것으로 인하여 로마제국은 양분되었고 따라서 로마의 멸망이 시작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A.D.4세기 말에 이르러 게르만 민족을 비롯한 여러 부족들의 대대적인 이동이 있었고 이로 인하여 로마는 수많은 전쟁을 치루게되었다. 동로마제국은 라인강과 다뉴브강쪽에서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서로마제국에서는 발렌티니아누스1세재위>황제와 그의 동생인 동로마제국황제 발렌스재위>의 협력도 소용 없이 알라만인이 침입하고 갈리아의 바가브타에가난<亂>을 일으켰으며 브리타니아, 파노니아, 북아프리카 등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년>에는 고트족이 반란 일으켰고년>에는 흉노족에게 쫒긴 서고트족이 제국 안에 정착하려고 고트족들과 함께 트라키아전토를 침입하여 발렌스황제의 군대를 괴멸시켰다. 로마는 내란과 외적들의 침입을 진압하기 위하여 군대를 강화하였으나 인적자원의 부족으로 인하여 외국인들로 구성된 군대를 조직할 수밖에 없었다. 고트족들은 테오도시우스1세재위>황제에게 패하여 쫒겨 갔으나년>에 다시 침입하여 정착지를 요구하였고 외국인들로 구성된 군대는 그들과의 전투를 기피하였다. 황제는 결국 그들과 협상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에게 제국영내 정착을 허락하였다. 테오도시우스1세는 로마제국 전체를 통치하던 최후의 황제였으나 그가 사망 후 제국은 동서로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리하여 동로마제국은 아르카디우스가 다스렸고 서로마제국은 호노리우스가 통치하게 되었다.
그 후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인 무장<武將>스틸리코가 장악하였으나 그가 처형된 후 각지에 황제들이 난립하여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년>에 이르러 알라리크왕이 거느리는 서고트족 군대가 로마시를 점령하였고 게르만인 반달족이 아프리카로 진군하여 왕국을 건립하였으며 부르쿤트족과 프랑크족이 갈리아에 침입하였고 색슨족은 브리톤섬에 진군하였다.년>에 로마의 장군 아에티우스가 서고트와 프랑크의 힘을 빌려 카탈라우눔전투에서 아틸라가 이끄는 흉노족을 격퇴 하였으나년>에 로마시는 반달족에게 다시 정복되었다. 그 후 게르만인 장군이 로마를 접수하였으나년>에게 르만인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로 물루스아우구스툴루스황제를 폐위하고 서로마제국을 장악하였고 이로서 서로마제국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한편 동로마제국은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안정 속에 제국의 위상을 지켜갔으나년>에 오스만투르크에게 멸망당하였다.
2.로마니즘.라틴니즘.
라틴니즘은 라틴어로부터 출발되어졌다. 라틴어는 본래 중부 이탈리아 반도를 동서로 흐르는 테베레강<江>하류의 라티움지역 방언 중 하나로서 그 언어를 사용하였던 라티니족의 언어였다. 이 부족은 본래 알바노산 기슭에 살고 있었으며 이 부족에게는 로마니를 비롯한 여러 부족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라틴니즘과 로마제국은 라티움지역, 로마니부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있다. 그것은 로마가 테베르강과 아니에네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라티움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라틴어는 로마제국의 언어로서세기>경부터 고대 지중해 지역의 공용어가 되었고 후에 유럽일대 언어의 근원이 되었다.
로마제국을 통하여 형성되어진 로마니즘<라틴니즘>은 법적, 행정적, 사조이며 또한 정치적, 군사적 사조이다. 때문에 라틴니즘은 사회조직적 체계의 질서와 규율이 엄격하였고 분명하였으며 특히 상하<上下>의 위계질서가 조직적이었고 일사분란하였다. 이러한 라틴니즘은 로마제국의 발전과 확장에 따라 더욱 강화되면서 권위주의적인 것이 되었고 따라서 장엄하고 웅장한 것이 되어지는 가운데 무겁고 경직된 것이 되었다. 로마제국이 이러한 라틴니즘을 발전시킨 것은 방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가운데 정책적으로 발전시킨 것이었다. 로마제국은 유럽과 북아프리카 및 아시아 일대를 정복하면서 그들을 통치하기 위한 법적, 행정적, 정치적, 군사적 수단을 강화하게 되었고 이러한 제국적 통치수단과 방법이 자연스럽게 강하고 권위주의적인 라틴니즘을 형성시킨 것이다. 한편 라틴니즘은 본래 유럽적<서양적>사조 위에 세워진 것이었으므로 실용주의적이며 현실주의적인 사조가 기본적으로 함양되어 있었다.
제4장. 오리엔트니즘.
일반적인 차원에서 고찰할 때에 인도,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어진 오리엔트니즘은 감성적사조이다. 인류역사에 위세를 떨쳤던 철학사상을 크게 구분하면 서양철학으로 대변되는 헬라니즘, 로마니즘이 있고 동양철학으로 대변되는 힌두니즘, 오리엔트니즘이 있는바 힌두니즘은 힌두교의 브라만사상을 근본으로 하여 전개되었고 오리엔트니즘은 공자. 맹자. 노자 등등의 중국계 현인들의 사상들을 근본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그러나 힌두니즘과 오리엔트니즘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양대니즘은 하나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곧 오리엔트니즘의 특징인 감성적<感性的>사조이다. 감성적사조는 신앙과 긴밀한 유대를 이루는 사조이다. 때문에 인간적감성이 내재된 동양 특유의 오리엔트니즘은 종교적 신앙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면서 더욱 다양하게 발전되었다. 힌두교와 불교처럼 같은 뿌리를 가진 종교적 사상과 효<孝>를 중심으로 하여 발전되어진 유교적 사상은 모두가 인간적 감성에 깊이 호소하는 동양 특유의 오리엔트니즘을 바탕으로 형성되어진 신앙적 사상들이다. 따라서 오리엔트니즘은 영적이고 신앙적이지만 정신적이고 박애<博愛>적이며 타애<他愛>적이다.
제5장: 기독교와 4대사조<四大思潮>의 관계.
동서양에 형성되어진 4대사조<四大思潮>는 인류역사와 함께 형성되고 발전되었으나 기독교역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기독교는 그 사조들의 영향을 받으며 진군하는 가운데 발전을 거듭하였다. 우리는 기독교와 4대사조의 관계를 정리면서 4대사조의 형성과정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 계셨음을 본다. 어떤 이들은 우리의 이러한 주장을<아전인수>라고 비판한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사조의 형성에 관여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적당히 사용하신 것이라고 한다. 이와같은 주장대로라면 사조와 기독교의 관계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필연이 아니라 시대적 흐름이 하나님 섭리에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같은 주장에 반대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섭리 없이 진행되는 역사가 없다는 신학적 차원에서 반대하고 둘째는 사조들이 기독교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 참으로 정교하고 시의적절하게 그리고 많은 공헌을 하였다는 이유에서 반대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조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의도적, 강제적, 주권적으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조들은 지역적 특성과 민족적 특성들에 따라 자연적으로 형성되었고 그것들을 형성한 것은 각 지역의 민족들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 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셨음이 분명하다. 즉 성령하나님께서 그 사조들이 형성되는 과정에 관여하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성령하나님의 조명하심>이라고 정의한다. 우리의 이러한 주장은 그 사조들이 하나님의 기독교 역사에 매우 귀하게 적용된 것을 통하여 보증 받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정리하면서 우리는 참으로 안타까움을 토로하게 된다. 물론 지나친 욕심이겠지만 하나님의 종들<특히 신학자들>이 그 사조들을 기독교에 적절하게 반영하고 적용하였다면 보다 차원 높은 기독교역사가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신학자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반대로 사조들의 영향을 받아 성경을 해석하였다. 때문에 신학의 정립 과정에 수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고 아직까지도 완전한 신학정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반면에 우리는 그토록 수많은 시간과 그토록 어리석은 종들의 역사를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여전히 기뻐하심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에 절대적 경의를 드린다. 우리는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4대사조가 어떻게 적용되어 졌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면서 그 과정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배우고자 한다.
1.히브리니즘과 하나님의 섭리.
1)성경의 확립.
기독교는 이스라엘의 히브리민족을 통하여 본격적인 진군을 시작하였다. 하나님께서 기독교를 진군시키실 때에 가장 우선적인 당면 과제는 하나님의 섭리일체를 고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히브리인들에게만 주어지는 당면 과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독교 전체에 영원히 주어지는 과제였다. 따라서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기에 구두<口頭>로 고지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성문화<成文化>된 법전<法典>이어야했다. 하나님께서는 일차적으로 모세를 통하여<모세5경>을 성문화 하셨고 계속하여 또 다른 여러 사람들을 들어 쓰시어 성문서<聖文書>들을 기록하게 하셨는데 기독교는 그것을 구약성경이라고 명칭 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 이후에 또 다른 사람들을 세우시어 새로운 성경을 확립하셨는데 기독교는 그것을 신약성경이라고 명칭한다. 이 두개의 하나님<법전>인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그 내용에 따라 율법서, 역사서, 선지서, 지혜서, 복음서, 목회서신 등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구분된다. 기독교는 성경을<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명칭하며 성경이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이유에서 신학<神學>이라고 명칭 한다. 하나님과 기독교, 하나님과 인간의 역사적 진행은 신학<성경>에 의하여 진군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 당신의 자녀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신학으로 말씀하시고 당신의 종, 당신의 자녀들에게 임재하실 때에도 역시 신학으로 임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일반종교의 가공적 신들과는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형상으로 존재하시지 아니하시며 따라서 인간들에게 강림하실 때에도 언제나 말씀<신학>으로 강림하신다. 이때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곧 법이요 권위이고 권세이며 능력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임재하실 때에 당연히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는 율법으로 오셔야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먼저 법적인 관계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창조주하나님, 섭리주하나님, 통치주하나님, 심판주하나님 등등의 법적인 하나님으로 오셔야하는 것이다. 에덴동산으로부터 출발되어지는 기독교의 역사가 창조주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여 섭리주하나님, 통치주하나님, 심판주하나님을 계속하여 선포하는 것과 인간에게 처음 주어진 모세오경이 또한 창조주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여 섭리주하나님, 통치주하나님, 심판주하나님을 계속하여 선포한 것은 이와같은 하나님과 피조세계의 관계에 대한 원칙 때문이었다.
따라서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곧 법이며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서 곧 하나님 자신이시다. 이러한 원리에 의하여 하나님과 기독교,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신학적 함수관계는 의논이나 타협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수직적<垂直的>인 것으로서 명령하심과 순종, 임재하심과 영접을 전제로 한다. 조직신학 차원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체결되어진 신학을 계약신학이라고 하지만 그 계약은 인간대 인간의 계약과 같은 차원의 타협적, 절충적 계약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계약은 창조주와 피조사이의 계약이며 따라서 절대적 명령권자와 절대적 순종자 사이의 수직적, 일방적 계약이다. 계약의 두 당사자 관계에서 하나님은 소유주, 명령권자로서 계약을 선포하시는 계약의 수여주<授與主>이시며 인간은 피소유자, 순종자로서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계약을 다만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계약의 수납자<受納者>이다. 이러한 원리에서 기독교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 타협, 절충, 변경, 누락, 추가 등등을 행사할 수없으며 다만 아멘으로 수납하고 이행하고 순종할 뿐이다. 이러한 기독교원리의 특성 때문에 신학이 정립되어지는 기독교 출발과 확립의 진행과정에는 율법적이며 수직적인 히브리니즘이 필연적으로 요구되어진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기록한 성경기자들이 한결같이 히브리인들이었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학이 히브리니즘을 필연적으로 전제하였음을 여실히 증명한다. 히브리니즘에 익숙한 성경기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함에 있어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에 입각하여 매우 분명하고 단호하게 기록하였다. 이러한 역사는 성경의 정경 정립과정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성경의 정립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그 문서가 과연 사도적인 권위가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의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섭리와 히브리니즘에 관한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성경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기독교 전래의 선구자이며 예수그리스도의 직접 제자들인 사도들의 권위에 호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역사적 과정에 사도들의 권위<히브리니즘>가 적용되었음을 본다.
히브리니즘은 하나님의 신학이 조직화<조직신학>되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적용되어졌다. 물론 신학자들이 신학을 정립할 때에 그들이 히브리니즘을 의도적으로 반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목숨 걸고 추구했던 하나님 절대주권신학이란 곧<히브리니즘>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히브리니즘은 구약시대 히브리인들의 사조로만 존재했었던 것이 아니라 기독교 안에서 신학적 사조로 영원히 존재하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 것이다. 이와같은 역사적 의의를 보면서 우리는 히브리민족에게 수직적인 율법적 사조<히브리니즘>가 형성되어진 배경에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계셨다고 믿는다.
3.헬라니즘과 하나님의 섭리
히브리니즘이 하나님의 역사에 중요하게 사용된 것과 같이 헬라니즘도 하나님의 역사에 크게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학문적사조, 예술적사조인 헬라니즘을 통하여 성경이 기록되게 하셨다.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임에도 불구하고 인류역사가 영원히 최고의 문학으로 인정하는 것은 문법과 내용이 학문적, 문학적, 예술적 탁월함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은 율법서, 선지서, 시가서 등등이지만 아직 예수그리스도 강림 이전의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히 히브리니즘적 수직적 사조를 바탕으로 기록되어야 했다. 그러나 구약성경이 예표하던 예수그리스도께서 강림한 이후의 성경은 히브리니즘을 필연적 전제로 하면서도 또 다른 차원을 요구한다. 이제 신학<성경>은 하나님을 율법적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으로만 선포해서는 않되고 율법과 공의를 사랑, 자비, 은혜로 승화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성경은 히브리니즘<수직적>이면서도 사랑, 자비, 은혜가 선포되는 차원의 것이어야 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학문적이면서 문학적인 헬라니즘을 반영하시어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된 후에 다시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었던 것과 대부분의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된 것은 이와같은 하나님섭리의 특성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헬라니즘의 형성 과정에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 있었음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차원에서 기독교에 사용된 헬라니즘의 특성을 네 가지로 구분하고 그들이 기독교에 적용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헬라니즘의 인본주의적 특성.
헬라니즘은 신본주의적인 히브리즘과는 반대로 철저하게 인본주의<人本主義>적이다. 헬라인들이 파르테논신전과 올림푸스산을 배경으로 하여 전개시킨 수많은 신화<神話>들은 그것들이 신들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언제나 인본주의적인 것이었다. 이와같은 사실은 그리스신화에 나타나는 신들의 이야기들이 한결 같이<신 중심이면서도 신들과 인간의 교류가 있으며 신들은 절대적 존재가 아닌 상대적 존재로서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영역싸움과 주권싸움에 패한 신은 권토중래하거나 조용히 은퇴하는 반면에 항상 인간과 타협하거나 때로는 인간을 의지 한다>는 사실들을 통하여 입증된다. 그러나 이와같은 헬라문화<헬라니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기독교신학을 정립하는데 절대 필요한 요소이다. 기독교신학이 절대적 신본주의로서 하나님과 인간관계를 수직적으로 정립하지만 기독교는 오직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만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대 인간, 인간대 자연의 관계를 포함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절대적 수직 관계이지만 인간대 인간의 관계는 당연히 수평적<水平的>이다. 기독교신학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정립할 때에는 수직적인 히브리니즘이 필요한 반면에 인간대인간의 관계를 정립할 때에는 수평적인 헬라니즘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때에 수직적인 것이나 수평적인 것 모두는 당연히 하나님의 신본주의를 근본으로 전제한다. 수평적인 것이라 하여 인본주의적인 것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수평적 사조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속성을 따라 정립된 신본주의적인 것과 인간의 속성을 따라 정립된 인본주의적인 것 사이에는 비교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신본주의적인 것은 원형으로서 영원하고 무조건적이며 절대적 완전성으로 진행되지만 인본주의적인 것은 불완전하고 일시적이며 조건적이고 상대적이다. 성경이 인간대 인간에 관한 모든 문제를 정립할 때에 가장 강조된 것은 기독교의 기본 원리인 평등, 사랑, 용서, 자비 등등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인본주의적인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에 의한 것으로서 곧 원형적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 용서, 자비, 등등이 기독교에 의하여 그대로 진행되는 것이다. 성경 기자들은 헬라니즘을 적용하여 인간대 인간에 관한 신학을 정리하되 인본주의적으로 정리하지 않고 신본주의적으로 정립하였다. 때문에 성경에 나타나는 평등주의는 인류사회에 존재하는 차원 낮은 평등주의가 아니라 원형적 평등주의로서 형이상학적인 평등주의인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성경을 해석하는 것에도 동일하게 적용 되어진다. 성경을 해석할 때에 인본주의에 입각한 해석을 하여 하나님의 신학을 형이하학적인 것으로 낮추지 말고 신본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해석하므로 하나님섭리의 완전성을 증거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비진리자들은 헬라니즘의 인본주의 특성을 그대로 적용하여 기독교신학을 오류, 변질시켰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알미니우스의<인본주의 예정론>과 슐라이에르마허의<도덕적 그리스도론>이다. 그리고<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기독교를 전혀 알지 못하고 오직<구속사>적 기독교만 아는 자들이다.
2)헬라니즘의 학문적 특성과 예술적 특성.
헬라니즘은 지극히 논리적인 학문적 특성을 갖추고 있으며 그것을 표현함에 있어서 매우 예술적이다. 쏘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등의 철학자들이 내어 놓는 사상들은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전혀 비논리적인 것이지만 당시로서는 세인<世人>의 이목을 집중 시킬 만큼 대단히 논리적인 학문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사상을 전개하는 방법도 매우 문학적이고 예술적이었다. 하나님께서 헬라니즘과 헬라어를 들어 쓰신 것은 율법적인 히브리니즘을 통하여 세우신 기독교신학을 학문적, 문학적, 예술적, 조직신학으로 다듬어 정립하시기 위함이었다. 기독교는 일반종교와는 비교할 수 없는 특별성을 갖는다. 일반종교의 종교적 교리들은 내용에 있어서도 매우 조잡하지만 표현방법에 있어서도 매우 저급하고 무지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독교신학은 내용상에 있어서도 완전하지만 표현방법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속성에 조화를 이루어야함으로 지극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하며 또한 당연히 품위와 예술성을 갖추어야한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히브리니즘을 통하여 전수되어진 율법적 기독교신학을 체계적, 조직적으로 정립함에 있어서 학문적, 예술적으로 다듬어 표현하기 위하여 헬라니즘과 헬라어를 들어 쓰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을 통하여 그리고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경<특히70인 역본>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생하게 나타난다. 헬라어로 기록되고 번역된 성경의 문장 형태는 지극히 논리적이고 학문적이며 또한 문학적이고 예술적이다. 성경 기록에 사용된 각종 용어들이나 그 용어들이 적용된 문장들은 성경의 내용이 하나님의 영원한 신학<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임재>임을 차원 높게 증거 할 뿐만 아니라 성경의 논리적학문성과 예술적문학성을 아울러 입증한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로고스>신학이다.
3)헬라니즘의 묵시적 특성.
쏘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등의 철학자들의 사상 속에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에 대한 묵시가 들어 있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의 사상 속에 하나님의 기독교에 관련된 묵시적 증거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 속에는 분명히 기독교에 대한 신학사상들이 묵시적으로 담겨져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이해한다. 이와같은 사실은 훗날 쏘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등을 추종하는 그들의 후배들이 선배들의 사상 속에 기독교적인 신학사상들이 함유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을 통하여 증명된다. 예를들면 쏘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 있었던<모든 것을 파생시킨 절대적 지고의 존재에 대한 개념>과<목적적 우주론>이다. 물론 저들이 말하는 절대적 지고의 존재가 기독교의 하나님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 속에 있는 절대적 지고의 존재는 주권과 속성과 섭리 등등에 있어서 거의 기독교하나님을 예표하고 상징한다. 저들은 또한 우주의 존재함에는 어떤 불가사의적 존재에 의한 필연적인 목적이 함유되어 있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헬라니즘에 형성된 그러한 묵시들을 기독교신학을 정립하는 과정에 적용하셨다. 훗날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러한 저들의 주장을 토대로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변증하였고 조직신학을 정립하는 과정에서도 저들의 묵시적 철학 사상들을 대거 적용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에 어두운자들은 헬라철학의 묵시들을 바르게 적용하지 못하고 반대로 적용하므로서 오히려 기독교신학을 오류시키고 변질시켰다. 초기 신약 기독교시대의 영지주의 자들이나<저스티누스. 오리게누스>등등의 동방교부들, 그리고<터툴리아누스>를 비롯한 서방교부들의 신학적 오류들은 모두가 헬라철학의 묵시적 요소들을 잘못 이해하고 적용한 것에서 비롯되어진 결과들이었다.
4)헬라니즘의 변증적 특성.
헬라철학에는 기독교신학을 변증할 수 있는 요소들과 논리적인 방법론들이 있었다. 예를들면 밀레토스학파의 탈레스나 그의 제자였던 아낙시만더를 비롯한 일단의 철학자들은 하나님의 우주창조를 변증할 수 있는 다양한 우주론들을 내놓았고 쏘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비롯한 철학자들은 기독교신학을 논리적으로 변증할 수 있는 학문체계를 구축했던 것이다. 초기 기독교시대, 수많은 사이비이단자들의 비진리들이 난무할 때에 하나님의 종들은 헬라철학자들이 형성한 변증적 요소와 변증법들로 기독교신학의 진리를 변증하였고 저들의 오류와 이단사상을 책망하였다. 그러나 참으로 유감스러운 것은 이미 앞에서도 논증한바 있고 앞으로도 여러 차례 지적하게 될 것이지만 역대 기독교신학자들이 헬라니즘의 이러한 특별성을 기독교신학, 기독교역사에 제대로 적용하지 못하고 헬라철학을 기독교신학에 접목함으로서 각종 오류를 발생시켰다. 특히 동방교회는 수많은 신학적 논쟁을 전개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의 신학이 히브리니즘적인 것이 아니고 헬라니즘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신학적 논쟁에서 사용된 변증법의 논리적 순서가 뒤바뀌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신학의 변증순서는 일단 신학이 히브리니즘적 신학<하나님의 주권적신학-수직적신학-신본주의신학>으로 정립된 후에 그것을 헬라니즘<논리적-학문적-문학적-인본주의적>사조들을 통하여 변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이와같은 순서를 뒤바꾸어 먼저 기독교신학을 헬라니즘적 신학<인본주의적 신학-수평적신학>으로 정립한 후에 그것을 다시 헬라니즘<논리적-학문적-문학적-인본주의적>사조들을 통하여 변증하였다. 때문에 저들은 수많은 시간과 정열만 허비하였고 결과적으로는 수많은 비진리적 교리들을 양산해 내고 말았던 것이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져스티누스의 로고스론과 진화론자들의 기독교 진화론이다.>
3.라틴니즘과 하나님의 섭리.
기독교가 로마를 통하여 성장하고 전 세계에 전파된 배경에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 있었다. 로마제국을 통하여 형성된 라틴니즘은 법적, 정치적, 행정적 사조로서 조직사회 체계의 질서와 규율을 수립할 수 있는 기본요소였다. 로마가 당시의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광대한 제국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라틴니즘 때문이었다. 기독교는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로서 단일적 유기체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법적, 정치적, 행정적 차원의 일사 분란한 조직체계를 이루어야 하며 엄격한 규율과 질서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은 기독교의 조직적 특성을 정립하기 위하여 라틴니즘을 들어 쓰시었다. 라틴니즘을 통하여 교회에 법적, 행정적, 정치적 제도와 질서를 세우신 것이다. 실제로 라틴니즘의 영향아래 있던 서방교회는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결속되어지는 가운데 법적, 행정적, 정치적, 차원의 교회 조직체계를 이루었고 나중에는 군사적 체계까지 이루었다. 그리하여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로마카토릭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로마카토릭은 교권주의에 매달린 채 각종 비진리를 양산하면서 기독교로부터 스스로 이탈되어져 갔으나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체제를 유지하면서 현재까지도 세계적인 종교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헬라니즘의 영향 하에 있는 동방교회는 로마카토릭과 같은 교회적 조직을 구성하지 못하였다. 동방교회는 교회적 조직체계를 이루려는 노력보다는 교구적 주도권 싸움에 매달려 이전투구만을 거듭하였고 그리하여 교회를 법적, 행정적, 정치적, 조직화 하는데 실패하였다. 동방교회는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 사이에 심한 세력싸움을 벌였고 나중에는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까지 가세하여 주도권싸움을 벌이다가 드디어는 사분오열<四分五裂>된 분파 속에서 지리멸렬<支離滅裂>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현대 기독교사회에도 여전히 답습되고 있다. 로마카토릭교회는 로마니즘의 기반 위에 수립되어진 법적, 행정적, 정치적, 조직체계를 그대로 유지하여 아직까지도 단일적 교회조직 사회를 이루고 있는 반면에 대부분의 개혁주의 기독교 교파들은 로마니즘적인 교회조직체계를 이루지 못하고 끝없는 분열과 분파를 계속해 나감으로서 기독교의 위상을 스스로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4.오리엔트니즘과 하나님의 섭리.
오리엔트니즘은 감성적인니즘으로서 신앙과 각별한 관계를 이루는 사조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신학으로 말씀하시고 신학으로 임재하시지만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들은 신학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선다.
한편 신앙에는 감성적인 오리엔트니즘이 요구된다. 신앙이란 신학을 근거로 하여 형성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신학 안에서 매우 다양한 형태를 형성한다. 왜냐하면 신학을 통하여 신앙이 형성되는 과정에 인간 특유의 감성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은 체계적으로는 신학적이며 논리적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며 감정적이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순종은 하나님의 절대주의 신학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하나님께 순종할 때에는 논리적인 신학이 아니라 진실이 수반된 신앙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께 지은 죄를 회상하며 속죄의 회개를 할 때에는 논리적인 신학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적인 신앙으로 하며 저들이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와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미할 때에도 논리적인 신학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적인 신앙으로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감성적인 오리엔트니즘을 들어쓰시는 섭리이다. 기독교가 유대, 로마, 유럽, 아메리카 등등을 거쳐서 동양<한국>에 진출하는 동안 가장 기독교적 신앙을 형성한 것은 한국기독교였다. 그동안의 기독교는 히브리니즘적, 헬라니즘적, 라틴니즘적, 신앙을 형성하면서 진행되었다. 때문에 기독교신앙은 히브리니즘 하에서 율법적이었고 헬라니즘 하에서 인본주의적 이었으며 라틴니즘 하에서 제도적, 정치적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신앙은 한국의 오리엔트니즘 하에서 비로소 본연의 형태를 갖추었다.
우리는 이와같은 사실을 한국기독교를 통하여 확인하게 된다. 한국기독교는 오리엔트니즘의 특성 때문에 신앙적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오리엔트니즘의 영향 아래 토속적 종교생활을 하던 한국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감성적인 기독교신앙 문화를 형성하였고 때문에 서양을 비롯한 타 지역의 기독교역사에 비하여 매우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혁신적인 신앙적 역사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는 특히 하나님께서 감성적 사조인 오리엔트니즘을 현대 기독교의 마지막 보루<堡壘>라고 할 수 있는 동양<특히 한국>에 세워주신 섭리를 떨리고 비장한 심정으로 감사하고자한다.
5.로마에서 연합되어진 4대사조<四大思潮>
인류역사에 존재하는 4대사조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 하에 형성된 것이라는 우리의 주장은 그 4대사조가 로마제국에서 연합되어지면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었던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보증 받는다.
동서양 인류의 사대 사조인 히브리니즘, 헬라니즘, 라틴니즘, 오리엔트니즘은 로마제국을 통하여 하나로 연합되어지면서 매우 특별하고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였다. 이와같은 4대사조의 연합의 과정역사를 고찰하면 하나님의 섭리의 놀라운 경륜을 발견하게 된다. 동서양 인류의 4대사조가 로마에서 연합을 이루는 과정을 순서적으로 정리하면 먼저 라틴니즘이 형성되어 졌고 다음에 헬라니즘이 유입되었으며 그 다음에 히브리니즘이 유입되었고 마지막으로 오리엔트니즘이 유입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4대사조의 전래 과정의 배후에는 한결같이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이미 언급했거니와 라틴니즘의 형성 과정에는 로마의 정복전쟁이 있었다. 라틴니즘은 로마제국이 부국강병 해지면서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고 다스려 나가는 가운데 정치적, 군사적, 행정적 차원의 정책적 필요성에 의해 형성되었다. 반면에 헬라니즘은 알렉산더대왕 이후에 근동일대에 확산되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로마에 까지 전래되었는데 그 과정에는 로마의 명문 귀족출신 장군 리비우스의 카르타고전쟁이 있었다. 리비우스장군의 집에는 전쟁 포로출신의 그리스소년 노예가 있었는데 그는 매우 지혜롭고 총명한 문학가였다. 리비우스는 그를 매우 사랑하여 자신의 가문 이름을 적용하여 리비우스안드로니쿠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그를 노예가 아닌 가정교사로 채용하였다. 안드로니쿠스는 주인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리비우스가 카르타고전쟁에서 승리한 다음해인년>에 전승기념 축제를 준비하였다. 이때에 그는 자신의 조국 그리스에서 유행하였던 연극을 준비하였고 자신이 직접 출연하였다. 그의 연극은 리비우스를 비롯한 로마 귀족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는데 이를 계기로 하여 안드로니쿠스는<오딧세이><트로이의 목마>등등의 그리스문학을 라틴어로 번역 출간하였다. 안드로니쿠스의 그리스문학 번역은 로마에 그리스문화를 전래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때로부터 로마에 헬라니즘이 본격적으로 전래되었다. 로마인들은 헬라문화, 헬라니즘을 받아들여 로마화 하였고 헬라니즘은 로마에서 새로운 헬라니즘<라틴적 헬라니즘>으로 크게 번영하였다. 히브리니즘의 로마 유입은 로마의 팔레스틴 원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마케도니아를 정복한 로마가 팔레스틴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히브리인들이 포로가 되어 로마에 왔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야훼중심의 시온주의 사상<히브리니즘>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의 히브리인들은 조국 예루살렘으로부터 전파된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그들을 통하여 다른 포로노예들과 심지어는 로마의 귀족들까지도 기독교 신자가되었다. 황제를 신격화하였던 로마는 오직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였으나 탄압이 가중 될수록 기독교는 오히려 왕성하게 번창하여 로마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결국은 기독교가 승리하여 로마제국을 장악하였으며 헬라니즘의 경우와 같이 히브리니즘도 로마에서 새로운<라틴적히브리니즘>으로 크게 번영하였다. 마지막으로 로마에 유입된 오리엔트니즘은 십자군전쟁을 통하여 입성하였다. 십자군 원정이 끝난 후 유럽일대에는 오리엔트문화가 하나의 전리품처럼 자연스럽게 유입되었는데 오리엔트니즘은 특히 로마에서 크게 번영되었다. 이렇게 동서양의 4대사조가 로마에서 연합을 이루었지만 그러한 역사를 가장 혁신적이고 의미있게 연합시킨 영역은 기독교였다. 그것은 기독교가 당시의 모든 영역의 중심이었던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4대사조의 라틴적 연합이었기에 그러한 결과는 당연이고 필연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로마에서 4대사조를 연합시키시고 그것을 통하여 기독교 체제를 확립하셨으며 아름답고 찬란한 기독교문화를 또한 확립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와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보면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경륜을 찬양하지 않을 수없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전쟁을 비롯한 사악하고 참혹한 각종 사건들을 일으킨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일으킨 사악하고 참혹한 사건들을 통하여 오히려 찬란하고 위대한 역사적 승리를 이루신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인류사회를 파괴하고 패망시키는 사건을 일으키고 각종 패륜적 죄악을 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인간들의 그 사악하고 참혹한 사건과 범죄의 현장들을 치유하시고 아우르시면서 하나님의 찬란하고 위대한 승리를 이루시고 또한 인류사회에도 보다 발전된 역사를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여러 영역들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증거한다.
1)기독교문화의 형성.
동서양 인류의 4대사조가 로마를 통하여 연합되는 가운데 매우 특별하고 새로운 문화를 형성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에 의한 것이었다. 16세기 기독교개혁이 일어나기까지의 유럽문화는 곧 기독교문화였다. 유럽의 각 제국<諸國>들은 나름대로의 민족적 국가적 문화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종합 문화는 여전히 기독교 문화였다. 그것은 당시의 유럽 전체가 기독교 안에 존재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유럽제국들은 기독교가 어떠한 입장이 되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유럽의 문화적 변천사<變遷史>를 통하여 확인한다. 유럽제국들의 문화는 기독교의 문화적 변천에 따라 같이 변화하였던 것이다.
유럽사상을 대표하였던 라틴니즘은 헬라니즘, 히브리니즘, 오리엔트니즘 등등이 차례로 유입될 때마다 본래의 사조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하였다. 헬라니즘이 로마에 유입된 것은 기원전3세기 초였다. 로마가 마케도니아 일대를 정복하면서 헬라니즘을 접하게 되었을 때 로마는 헬라니즘의 찬란한 예술적 감각에 매우 놀랐다. 때문에 로마는 리비우스가<家>의 젊은 가정교사가 헬라문학을 소개하였을 때 곧 헬라문화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으며 헬라문화를 중심으로 한 라틴니즘을 발전시켰다. 당시의 로마는 군사적이며 정치적인 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제국적인 기틀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술적인 문화나 사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헬라문화의 찬란함을 접하게 된 로마는 크게 고무되었고 따라서 급격하게 헬라문화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라틴니즘은 주후2세기경에 로마에 히브리니즘이 유입되면서 다시 한번 새롭게 변형된다. 로마가 히브리니즘을 받아들인 것은 헬라니즘을 받아들인 것과는 경우가 다르다. 로마가 헬라니즘을 받아들인 것은 헬라니즘의 찬란함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던 반면에 히브리니즘은 로마에 유입된 기독교인들의 끈질긴 신앙적 투쟁의 결과에 의하여 로마에 유입되었다. 로마는 기독교가 로마에 입성하였을 때 철저하게 기독교를 박해하였다. 그러나 그토록 강력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기독교는 오히려 상대적인 상승적 발전을 거듭하였으며 결국은 로마가 기독교 앞에 무릎을 꿇는 결과를 이루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로마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히브리니즘에 젖어 들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히브리니즘과 헬라니즘은 각각 유대와 그리스에서 형성되고 출발되었지만 로마에서 라틴니즘과 연합되면서 그 찬란한 꽃을 피우는 역사적 쾌거를 이루었다. 라틴니즘은 십자군전쟁 후에 로마에 오리엔트니즘이 유입되면서 또 한 차례의 변혁을 하게 된다. 오리엔트니즘은 라틴니즘에 오리엔트니즘의 전통적 특성인 감성을 유입시켰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동서양의 4대사조가 연합되고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 새로운 문화가 탄생되었는데 그것이 곧 기독교 문화였다. 기독교문화는 히브리니즘<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절대 수직적-절대 신본주의>과 헬라니즘<학문적-예술적-수평적-평등주의>과 라틴니즘<법적-정치적-행정적>과 오리엔트니즘<감성적-신앙적>문화가 연합하여 어우러지고 조화를 이룬<신학-조직-규율-질서-신앙>의 문화<장엄-웅장-예술-학문-찬란>의 문화를 이룬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증거를 4대사조의 연합이 이루어진 후에 비로소 찬란하게 꽃 피워졌던 유럽의 문화와 예술<기독교의 문화와 예술>을 통하여 제시한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은 유럽에 헬라니즘, 히브리니즘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계속적인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것의 최종적 발전은 오리엔트니즘이 유입되어 기독교 문화가 완성되었던 16세기에 이루어졌다. 건축, 음악, 미술,문학 등등의 유럽문화 예술은 미켈란젤로, 네오나르드다빈치, 라파엘로, 모차르트, 바하, 헨델, 베토벤, 셰익스피어 등등의 예술적 거장들에 의하여 인류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역사를 이루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무렵에야 비로서 찬란하게 꽃 피워졌던 유럽의 문화와 예술은 16-18세기까지, 크게 발전한 후 유럽의 기독교 몰락과 함께 조용히 은퇴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그 역사가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시작하고 진행되고 결과 되었다는 사실을 자증하는 것이다.
2)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
동서양의 4대사조 연합에 의한 기독교문화 형성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추구하는 기독교의 궁극적 목적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하나님께서 시날평야의 바벨탑사건을 통하여 민족을 구별하시고 그들에게 각각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하사하시었지만<창11장>그들에게 주어진 공통의 사명은 오직 단 하나<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었고 그러한 사명이 진행되는 가운데 계속하여 선포되어지고 결과 되어지는 것은 결국<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원리를 세계 각국의 기독교문화를 통하여 확인하게 된다. 세계 각국의 기독교는 국가와 민족, 시대와 장소의 특성들에 의하여 각각 다른 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켜 왔지만 그 문화는 결국 히브리니즘<하나님의 절대주권적-절대 수직적-절대 신본주의>과 헬라니즘<학문적-예술적-수평적-인본주의>과 라틴니즘<법적-정치적-행정적>과오리엔트니즘<감성적-신앙적>문화가 연합하여 어우러지고 조화를 이룬<신학-조직-규율-질서-신앙>의 문화<장엄-웅장-예술-학문-찬란>라는 공통적<기독교>문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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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된다.
기독교역사의 전반적인 흐름은 대단히 장구<長久>하고 요원<遙遠>하였지만 지금까지의 결과들을 종합해 보면 이제야 비로소 기독교가 본격적인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에덴동산으로부터 출발한 기독교가 현대 기독교에 이르는 동안 헤아릴 수 없는 다사다난<多事多難>의 역사가 있었지만 그것을 크게 구분하면<신학의 형성과 정립><교회의 조직체계 구축><신앙의 수혜와 정립>으로 단락되어 진다. 이와같은 역사를 근거로 할 때에 하나님께서 기독교를 세우신 목적이었던<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라는 대전제는 아직 시작조차도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인류역사에 4대사조를 정립시켜 주신 의미를 자각<自覺>하고자한다. 이미 앞에서 밝힌바 있듯이 기독교는 히브리니즘을 통하여 하나님의 신학을 전수받았고 헬라니즘을 통하여 하나님의 신학을 체계적, 조직적으로 정리하였으며 로마니즘을 통하여 교회의 법적, 행정적, 정치적 체계를 조직화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리엔트니즘을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감성적 신앙을 정립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독교를 세우신 목적이었던<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라는 대전제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담교회에게 내리셨던 명령<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정복하고 다스리라>을 준수하는 것이며 예수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교회를 비롯한 모든 교회들에게 영원히 내리셨던 명령인<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룩하는>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와같은 소명의식을 가슴깊이 새기면서 하나님의 기독교역사를 정리하는 가운데 기독교가,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종들이 기독교역사 속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이행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정립하고자 한다.
기독교는 최고의 신학과 최상의 신앙이 절대적 조화를 이루어야 비로서 하나님의 기독교가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는 또한 구성원들인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의 고차원적 인격과 백절불굴의 사명의식을 절대적으로 요구한다.
따라서 기독교는 먼저<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절대 수직적-절대 신본주의>신학을 정립하고 사수하고 보존하고 보전해야 하며<법적-정치적-행정적>교회조직 체계를 이루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일사분란한 역사를 진행시켜야 하며 하나님을 향한 신실하고 순전한<감성적 신앙>의 순종과 그 순종에 입각한 사명을 이행해야 할 것이다.
제2부.기독교 설립 역사.
제1장.기독교의 출발.
1.역사 학자들의 개념.
일반역사 학자들은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이나 또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한 시기를 기독교의 출발로 이해한다. 저들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미 구약성경을 통하여 수 없이 예고되어진 하나님의 우주적인 메시야인 것을 알면서도 기독교와 유대교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서로 다른 두 개의 종교로 구분한다. 저들은 기독교가 이스라엘의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었거나 또는 독립되어진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반면에 종교역사 학자들은 기독교와 유대교가 본래 같은 것으로서 이스라엘인들의 국가적, 민족적 종교였으나 이스라엘이 예수그리스도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유대교에 머물고 기독교는 세계적인 기독교로 발전하였다고 이해한다. 종교역사 학자들의 이러한 개념은 기독교를 표방하는 이단자들을 통하여 더욱 발전되어진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기독교 이단자들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본래는 이스라엘민족만의 메시야였는데 이스라엘민족이 예수그리스도의 메시야 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여 십자가에 처형시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계획을 변경 하시어 이스라엘 민족을 버리시고 예수그리스도를 온 인류의 메시야로 확장하셨다고 주장한다. 이와같은 논리에 의하여 저들은 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의 배교를 크게 감사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이와같은 개념은 일부 기독교역사 신학자들에게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일부 기독교역사 신학자들은 기독교를 예수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여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로 나눈다. 저들은 구약시대를 유대교로 명칭하고 신약시대를 기독교로 명칭한다. 역사학자들이 기독교의 출발을 그와같이 구분하는 것은 첫째는 예수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배격했던 유대인들에 근거한 것이고 다른 또 하나는 사도바울이 자신이 과거에 소속되어 있던 바리새파적 교회를 유대교로 명칭 한 것<갈1:13-14>에서 비롯되어졌다. 그러나 바울사도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기독교와 유대교를 구분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의 율법적인 것과 신약시대의 복음적인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사도는 구약시대의 기독교와 신약시대의 기독교가 오직 하나의 기독교임을 언제나 선포하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사도의 구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이 기독교로부터 스스로 분리하는 것을 허용하셨다고 믿는다. 그들은 본래 기독교의 출발이었으나 그들이 끝내 예수그리스도를 비롯한 하나님의 섭리를 거부함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기독교로부터 스스로 분리하여 유대교에 머무는 것을 허용하신 것이다.>
2.성경의 증거.
성경은 현존하는 모든 역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되어 졌음을 선포한다. 그리고 모든 것의 출발이신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존재<자존-自存>하셨다고 선포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존하심으로부터 시작된 역사 자체가 곧 기독교의 출발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이러한 개념 하에<창1:26>을 기독교설립의 시작과 목적에 대한 하나님의 선포이며 증거라고 이해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기로 신적 작정하신 목적을 기독교설립의 목적과 같은 차원으로 해석하며 따라서 에덴동산 창설을 기독교의 창설로 해석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주만물 창조를 완성하신 후에 가장 먼저 하신 일이 에덴교회를 창설하신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에덴교회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창2:8-14>
여기에서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첫 교회이며 에덴으로부터 발원하여 흘러 갈라진 네 개의 강은 에덴교회로부터 시작되어 동서남북 사방 곧 세계로 확산되어지는 하나님의 기독교교회들을 말하는 것이다.
제2장.교회 설립의 목적.
기독교역사 학자들 및 신학자들은 기독교의 본질과 사명이<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것>이라고 정립하였다.<주후1647년>영국의 웨스트민스터회의에서 결정한<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비롯한 각종 신앙고백서들은 한결같이 기독교의 본질이<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것>이라고 선포하였고 기독교 각 교파의 헌법들도 한결같이<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것>을 전제로 하여 수립되어져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기독교설립 목적에 대한 신학적 정립이다.
한편 기독교는 기독교라는 명칭이 의미하듯이 메시야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조직사회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인류의 구속사<救贖史>와 연관된다. 기독교는 창세로부터 예정된 것이지만 그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이 타락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인류구원을 결정하심에 따라 설립된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인류구원 문제로 인하여 설립되어 졌다고 하여 기독교의 본질과 설립목적을 인류 구령사업<救靈事業>이라고 정립하면 않된다. 기독교가 인류의 범죄와 그에 대한 구속사 차원에서 설립되어졌다고 할지라도 기독교의 본질과 설립목적은 여전히<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것이며<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인류창조의 목적과 인류에게 부여된 사명에 근거한 것이다.
성경은 인류창조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
그리고 인류에게 부여된 사명을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7-28>
이와같은 성경의 증거를 근거로 할 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인류세계에는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면서<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고><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조직사회가 구성되어지게 되어있었다. 어떤 이들은 만약에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인류세계에 기독교가 수립되지 않았을 것이며 어떤 조직사회도 세워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들은 범죄 하지 않은 인류사회에 조직사회의 필요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개념이다. 인류사회는 소수<小數>로 구성된 개인사회가 아니다. 인류사회는 하나님의 전 피조세계에<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을 이루는>대 단위적인 사회이다. 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부여된<정복하고 다스려야 할>영역은 자연세계로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의 전 피조세계에 적용된다. 따라서 인류사회는 아담의 범죄와 관계없이 지역과 영역에 따른 조직체계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와같은 원리는 이미 천사들의 세계와 아담과 하와로 구성된 가정사회를 통하여 입증된다. 천사들의 세계에는 범법행위와 관계없이 분명한 조직체계가 구성되어 있었으며 아담과 하와는 가정이라는 사회체계를 이루고있었다. 따라서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당연히 구성되지 않았을 것이지만 반면에 하나님의 피조세계를<정복하고 다스리기 위한 체계><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한 체계><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기 위한 체계>는 분명히 구성되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체계는 당연히 성자하나님에 의하여 통치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원리에 입각하여<정복하고 다스리기 위한 체계><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한 체계><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기 위한 체계>와<인류 구속을 위한 기독교>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구성되었다고 정립한다.
제3장.최초의 교회.
하나님께서 최초로 세우신 교회는 에덴동산의<에덴교회>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최초로 세우신 에덴교회의 설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창2:8-14>
<창2:8-14>에는 기독교에 대한 모든 것이 압축되어 있다. 에덴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최초의 교회로서 장차 계속하여 세워질 하나님의 모든 교회를 대표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전체 교회들에 대한 모든 것을 상징하고 예표한다. 우리는 에덴교회를 통하여 정립 시켜주시는 하나님의 기독교교회 전체에 대한 신학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교회의 수장<首長>.
로마카토릭의 제45대 교황 레오1세재위>는년>로마제국황제, 발렌티니안3세를 통하여 교회의 수장을 교황이라고 선포하였다. 따라서 로마카토릭의 교회수장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교황이다. 로마카토릭의 교황은 교회 수장에 대한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교회의 모든 결정권을 교황에게 일임하였고 교황의 의복을 구약시대 대제사장의 의복과 같이 하였으며 심지어는<교황 무오설>교리를 만들어 내어 교황의 말에는 일점의 오류도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의 수장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한분이며 모든 교회는 예수그리스도를 수장으로 하는 지체임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모든 종들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라고 명령한다.<엡1:22; 4:15; 5:23><골1:18; 2:10><롬8;28>
예수그리스도께서 기독교의 수장되심은 창세전부터 신적 작정된 것으로서 하나님의 우주창조 때부터 실현되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신 후 에덴교회를 설립하셨을 때 에덴교회의 중심에 세워진 생명나무는 곧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이며 예표였다. 이 예표와 상징은 훗날 예수그리스도께서 자신을<생명>이라고 선포하신 것을 통하여 입증되어진다. 기독교가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유기적 조직체계를 이루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메시야<생명의원리>로서 기독교의 근원이며 원리이고 또한 기독교의 오직 유일한 통치주이시며 관리주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예수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수장되심을 여러 경로를 통하여 증거하고 선포하는바 그것을 신학적, 역사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인류에게 매우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인류에게 발생한 문제는 크게 세 가지로서 첫째는 매우 아름다운사회<하나님의 나라-천국-에덴교회>가 종료된 것이며, 둘째는 하나님과 인류사이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며, 셋째는 인류역사에 타락, 범죄, 무질서 등등이 도입된 것이었다. 반면에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명령이 거부되는 결과가 발생되었다. 이때에 거부되어진 하나님의 명령을 신학적으로 정립하면<명령의 거부-공의의 상실-무너진 주권>으로 연계되어 진다. 따라서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발생된 문제 중에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문제였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에 불과한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절대적 주권주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인 아담은 자신의 범죄에 대한 심판과 형벌을 받으면 되지만 하나님의<거부된 명령-상실된 공의-무너진 주권>은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다. 왜냐하면 피조인 인간은 하나님의 문제를 해결해 드릴 수 있는 아무런 능력이나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인간이 그에 대한 형벌을 받을 수는 있으나 그가 받은 형벌로 무너진 하나님의 주권이 회복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하나님께 발생한 문제는 오직 하나님께서 해결하셔야 했다. 이것이 성자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로 십자가를 통하여<다 이루신>문제의 해결이었다. 성자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로 십자가 대속죄제를 치루시었을 때 그 대속죄제 의식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예수의 죽음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공의를 회복하기 위한 그리스도<로고스>의 회복이었다. 이때에 예수의 죽음은 육체적<신체적>죽음으로서<형벌의 죽음>이며 그리스도의 회복은<로고스의 회복-하나님공의의 회복-하나님주권의 회복>이었다.>그리스도는 이때의 회복의식을 통하여 하나님께<만왕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전 피조세계에 대한 통치권을 위임받았으며 기독교의 수장이 되신 것이다. 성경은 이와같은 역사적 진리를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엡1:20-22>
한편 그리스도의 회복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이 회복되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회복은 인류의 구원문제를 동반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다시 찾은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회복된 인간과의 관계를 유지하시기 위하여 상대적으로 문제가 심각해진 인간들에게 더욱 깊은 배려와 애정을 쏟으신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를 재건하시고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진행시킬 종들을 세우시며 그들에게 각종 사명과 은사를 부여하시고 성령하나님을 통하여 그들을 인도하신다. 기독교는 이와같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된 인간의 사명을 진행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적 도구로 세워진 것이었다.
따라서 모든 교회는 이와같은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여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유기적 조직체계를 이루는 가운데 힘을 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사명을 이룩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2.교회의 권위.
에덴교회에 생명의 원리인 예수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것은 곧 교회의 절대적인 권위를 상징하고 예표한다. 교회의 권위는 영원한 생명을 통하여 세워진다. 교회가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면 한시적인 생명이 존재하는 일반3류 종교들 위에 절대적인 종교적 권위로 군림할 수없다. 하나님의 교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계시며 그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어짐으로 교회의 절대적인 권위가 또한 세워질 수 있고 보장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언제나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만을 선포하고 있으며 바울사도는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이름을 주신바가 없다<행4:12>고 단언함으로서 교회의 권위가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절대성을 갖는다고 선포한다.
3.교회의 권세.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절대적인 교회권위는 하나님께서 교회들에게 부여하신 권세를 통하여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권세는 두 가지로서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다른 또 하나는 하나님의 종들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권세는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라는 하나의 원리 안에 존재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예수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그 권세를 행사하는 것이다.성경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요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요1:14>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던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3>
따라서 교회에 하달되어진 권세는 도구적 차원에 있어서는 두 가지이지만 신학적 원리에 있어서는 하나이다. 즉 하나님의 법<말씀-로고스-λογος-예수그리스도>하나인 것이다. 교회에서 가시적으로 사용되어지는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의 도구적 기능에 불과하며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 즉 예수그리스도 안에 존재할 때에 교회의 권세로서의 기능을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4.교회의 상태.
<창2:8-14>은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권세와 권위와 거룩성과 영광성을 아울러 선포한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과실나무를 나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인도, 보호하심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상태적으로 아름다울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가운데 훌륭한 결실들을 이룰 것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특히 강들이 아름답고 훌륭한 보석들로 상징되고 표현되는 것은 장차 계속하여 세워지게 될 하나님의 교회들에 대한 권세와 권위와 거룩성과 영광성을 아울러 선포하는 것이다. 에덴교회를 통하여 선포되어진 하나님교회들의 권세와 권위와 거룩성과 영광성들은 훗날 기독교역사들을 통하여 실제적으로 입증된다. 인류역사에 수많은 종교들이 범람하였지만 그들에게는 기독교 교회들에게 존재하는 것과 같은 권세와 권위와 거룩성과 영광성 등등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반 종교들에게는 인류의 생명을 영원히 책임질 수 있는 어떤 기능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담이 범죄 하기 이전의 인류사회<기독교>는 그러한 사회<에덴교회>였다. 에덴교회는 하나님과 동거, 동행하면서 최고의 권세와 권위를 누렸고 거룩함과 영광적인 삶을 살았다. 우주만물은 교회의 통제 하에 있었으며 아담<하나님의 종>으로부터 이름을 부여 받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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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기에서 인류의 범죄와 관련된 과실수<果實樹>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정리한다. 사단이 인간을 유혹하는 도구로 사용하였던 것은 과실수였다. 그리고 그 과실수는 다른 과실수 하고는 다른 것으로서 인간의 욕심을 자극할 수 있는 특별한 것이었다. 인간의 욕심을 자극할 수 있는 특별한 것, 그것은 곧 권세로서 최고의 권세인 하나님의 권세였다. 하나님의 권세는 이미 사단이 욕심내었던 권세였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자들이 탐하였던 권세였다. 반면에 우리는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의 권세를 탐하였던 자들의 결과를 수없이 확인한다. 사단이 그랬던 것처럼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권세를 탐한 자들은 한결같이 몰락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에덴교회에 존재하였던 하나님의 권세<과실수>를 인간의 범죄와 연관시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세우신 것으로 오해해서는 않된다. 에덴교회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권세는 모든 교회들에게 존재하는 하나님권세의 실제이다.
한편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님의 교회는 두 가지의 유형으로 현존한다. 하나는 천상의 교회이고 또 다른 교회들은 지상의 교회들이다. 천상의 교회는 오직 단 하나로서 지상교회를 통하여 영입된 하나님의 자녀들로 구성되어져 있으며 완전하고 영원하다. 반면에 지상의 교회는 장차 천상의 교회에 들어가게 될 하나님의 자녀들과 하나님의 종들로 구성되어있으며 불완전하고 임시적이다. 이러한 두 가지 유형의 교회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각각 부여된 사명을 완수하고 있으나 언제나 영적유기체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천상교회에 부여된 사명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많은 제약을 받는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천상교회를 직접적으로 소개하지 않으며 따라서 천상교회는 우리들에게 불가견적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상교회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직접적으로 존재하며 우리는 또한 지상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 부여받은 사명적 삶을 살게 됨으로 지상교회는 우리에게 있어서 가견적 교회이며 대단히 중요한 신앙적 현장 교회이고 존귀하고 고귀한사역적 현장 교회이다. 반면에 지상교회는 영적 유기체로만 형성되어져서는 않되고 반드시 실제적, 현재적 유기체로 구성되어져야 한다. 만약에 지상교회가 영적유기체로만 존재하고 실제적, 현재적 유기체로 구성되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의 불가견적 단체에 불과할 뿐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각각의 지체적 교회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현존하는 가견적 지상교회들을 설립하시어 그들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일사 분란한 조직체계를 이루어<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
5.교회의 사명.
한편 에덴교회는 하나님께서 전체 교회들에게 부여하시는 사명을 모든 교회의 선두교회이며 또한 대표교회로서 수령하였다. 에덴교회의 구성원은 비록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이었지만 에덴교회는 하나님의 모든 교회들의 출발교회와 대표교회로서 모든 교회에 일률적, 공통적으로 부여되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대한 사명 일체를 수령 받은 것이다. 에덴교회가 받은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생육과 번성을 통한 충만이며 그 충만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는 것으로 압축되어진다.<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어떤 신학자들은<창1:28>을 다만 문자적인 것으로만 해석하여 그것을 자연에 대한 정복과 관리와 다스림으로만 해석한다. 따라서 저들은<창1:28>을 교회적인 사명으로 이해하지 않고 자연에 대한 인간적인 사명으로만 이해한다. 물론<창1:28>을 당시의 입장에서만 적용한다면 그것은 교회적인 차원의 사명이라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당연히 자연에 대한 인간적인 사명으로만 해석될 수있다. 신학적 무지로 인한 좁은 안목에서 볼 때에 하나님의 기독교교회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에덴은 교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차원에서<창1:28>이 당시의 에덴교회에게만 적용되어질 때에 그것은 우선적으로 자연에 대한 것만을 의미하게 되며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인간들의 숫자적인 생육과 번성을 통한 지구 전역에 대한 충만함으로 제한되어진다. 이러한 사실은 아담 이래의 초기 인류의 생명이 매우 장구하였던 점을 통하여 분명하게 증명되어진다. 왜냐하면 교회가 아직은 오직 에덴교회 하나뿐이었으며 따라서 교회적인 연합이라던가 하는 유기적 조직체제 하에서의 교회적사명은 아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기독교>을 창조<설립>하신 궁극적 목적은 인간<교회>들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우주적인 창조 세계를 주권적으로 다스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인간<교회>는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역에 생육하고 번성하여<확장되고 발전하여>충만한 가운데 하나님의 모든 피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여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부여된 정복과 관리의 사명은 인류사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하여 자연, 정신, 사상, 학문, 문화, 예술 등등의 영역사회에 이르기까지 전 포괄적으로 적용된다. 반면에 그러한 정복과 통치는 일반적이며 물리적인 권력과 수단에 의하여 실시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 주어진 수직적인 권위와 권세인 하나님의 말씀<신학>과 수평적인 권위와 권세<사랑과 봉사>와 실천적인 권위와 권세인<신앙과 사명>으로 실시되어지는 것이다.
6.교회의 확장.
하나님께서는 <창2:10-14>을 통하여 에덴교회를 시작으로 하여 진행 되어지는 하나님의 교회 확장을 선포하신다. 에덴으로부터 발원하여 흐르는 네 개의 강은 곧 에덴교회를 근원으로 하여 확장되어 지는 교회의 역사적 발전을 예표하고 상징하는 것 이다. 이러한 교회의 확장과 발전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내포되어져 있다. 하나는 장차 하나님의 교회들이 전 지역으로 확산되어 설립되어 진다는 것 이며 다른 또 하나는 그 모든 교회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단일적, 유기적, 조직체계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원리는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실제적으로 증명되었다. 에덴교회로부터 출발한 기독교는 이스라엘, 로마, 유럽, 아메리카 등등을 경유하면서 유유히 흘러흘러 현재 전 세계에 확장되어 있는 것 이다.
7.행위언약과 에덴교회의 실패.
에덴교회에 하달된 생육, 번성을 통한 충만함과 정복, 다스림을 통한 관리는 교회의 사명임과 동시에 교회에 부여된 권위이며 권세였다. 그러나 교회에게 주어진 모든 사명과 권위와 권세는 순종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즉 교회가 하나님의 법과 질서에 절대 순종할 때에만 교회의 사명이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며 또한 교회가 하나님의 법과 질서에 절대 순종할 때에만 교회의 권위와 권세가 살아 역사되어지는 것이었다. 성경은 이와같은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8-17>
이와같은 성경의 선포는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었으며 우리는 그 언약을 신학적으로 정립할 때에<하나님의 계약>또는<하나님의 계약신학>이라고한다. 아담교회에 주어진 언약은 사람의 행위가 전제되어지는 것이라 하여<행위언약>또는<행위계약>이라고 한다. 아담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계약>은 아담교회의 승인이나 의사를 전혀 반영하지 않는 것으로서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체결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일방적인 언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교회의 승인이나 의사를 반영한 것 이상의 은총이 배려된 것이었다. 아담교회는 피조로서의 특성상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은총적 배려에 버금가는 어떠한 의견을 제시할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담교회는 피조로서의 부족함 때문에 이미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못하는 결과를 이루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담교회에게 주신<행위언약>은 이미 실패를 전제로 한 것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실패한 행위언약에 대한 후속조처로서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은혜언약>이 또한 전제되어 진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죽게 된다는 말씀은 그 나무의 실과가 그를 죽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금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면 하나님께 징계 받아 죽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때의 죽음은 인간의 육체적인 죽음과 영적인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사명과 권세와 권위에 대한 죽음을 아울러 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회가 하나님의 법과 질서에 순종하면 교회는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하면서 찬란한 역사를 진행하게 될 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풍요로운 상태 하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진리는 이미 앞에서 논증한바 있듯이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법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대로 진행되어질 때에 교회로서 존재할 수 있는 반면에 그 반대의 경우에 해당될 때 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끊어지게 된다는 것에 대한 분명한 선포였다. 그러나 에덴교회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서 교회에 부여된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으며 아울러 교회에 부여된 권위와 권세도 몰수당하였다. 성경은 이와같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창3:23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에덴교회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폐지된 것은 아니었다. 에덴교회는 이제 더 이상 <에덴교회> 명칭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되었고 <아담교회>의 명칭으로 존재하게 된다. 에덴교회가 아담교회로 존재하게 된 것은 물론 예수그리스도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에덴교회가 영원히 폐지되지 않고 아담교회로 존속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관리에 대한 특별하신 섭리를 나타낸다. 만약에 에덴교회가 영원히 폐지되어 진다면 에덴교회를 근원으로 하는 기독교의 계속적인 확장도 영원히 종료 되어지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 교회의 영원성 때문에 에덴교회는 영원히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아담교회로 명칭이 바뀌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같은 차원에서 <에덴교회>는 기독교의 전체교회인 <천상교회>이며 <아담교회>는 현존하는 <지상교회>를 상징하고 예표한다.
한편 하나님의 교회는 외형적인 것 이 아니라 내형적인 것이다. 외형적인 교회는 내형적인 하나님의 교회를 담고 있는 하나의 그릇에 불과하다. 따라서 교회가 폐지되는 것은 내형적인 교회의 폐지가 아니라 외형적인 교회의 폐지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교회들을 폐지하시는 것은 교회의 외형적인 것 즉 그릇을 폐지하시는 것이며 내형적인 교회 즉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유기적 조직체를 이루는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자녀>들은 또 다른 외형적 교회<그릇>들로 옮겨질 뿐 이다.
8.에덴교회의 실재.
지금까지 성경의 증거를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의 최초의 교회인 에덴교회에 대하여 고찰해보았다. 기독교인이 라면 누구나 성경의 증거와 선포를 이의 없이 받아들이며 그것을 또한 의심 없이 믿는다. 따라서 우리는 에덴교회가 실제로 있었으며 그 교회가 하나님에 의하여 설립되어진 기독교 최초의 교회임을 의심 없이 믿는다. 그리고 에덴교회는 현재 <천상교회>로서 모든 교회의 근원으로 존재하며 또한 모든 기독교인들이 입성하게 될 <최종교회>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신학자로서 에덴교회의 실제성을 역사적으로 증명해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이와같은 우리의 책임과 의무는 하나님의 섭리 역사를 부인하고 거부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역사를 부인하고 거부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고 가르쳐 주어야할 아무런 의무와 책임을 갖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역사를 이의 없이 믿고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에게 하나님 섭리의 실제성을 확실하게 가르치고 전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같은 이유에 의하여 에덴교회의 실제성에 대한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증하고자한다.
기독교 역사 학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일반 역사학자들은 에덴동산이나 아담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인정하지 않는다. 저들은 에덴동산이나 아담에 대한 성경의 기사들을 유대 민족에 의해서 발생된 신화나 전설로 간주한다. 저들은 그러한 주장을 보증하기 위하여 세계 각국의 민족들에게 존재하는 다양한 건국설화나 민족의 시조들에 대한 전설적 신화적 설화들을 근거로 내놓는다. 그러나 우리는 저들의 그와같은 주장에 대하여 반박할만한 충분한 자료들을 가지고 있다.
1)히브리민족의 실재.
히브리 민족의 민족적 설화나 이스라엘의 건국적 설화는 다른 민족들의 민족적, 건국적 설화하고는 전혀 다르다. 대부분의 세계 각국 민족들의 시조에 대한 설화나 건국설화들 그 내용들이 우화<寓話>적이고 만화<漫畵>적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누가 보아도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화적 또는 전설적인 설화들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히브리민족의 민족적 설화나 건국 설화는 우주창조, 인간의 죄악성을 비롯한 현재적인 상태에 대한 완전한 증거 등등을 체계적, 논리적, 실제적으로 설명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역사에 대한 실제성을 일반 역사가 보증할 만큼 실제적 이다.
언어학자, 인류학자, 고고학자, 등등의 일반 역사가들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셈족>이 성경과 일치하는 최초의 민족이 된다. 셈족에 대한 역사 학자들의 기록은 1781년 실뢰쪄가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역사 학자들은 셈족의 본래 고향을 찾아내지는 못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셈족은 문명의 여명기에 이르러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살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히브리인들의 민족적 명칭에서도 입증된다. <히브리인>이 라는 명칭의 의미는 <강 건너에서 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성경에 등장하는 셈족의 후예들이 실존한다는 역사적 증거는 성경에 나오는 셈족의 조상들이 또한 실제적으로 존재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증거 하여 주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셈족을 학문적으로 정립한 것은 인류역사 학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류 언어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언어 역사연구학자들이 연구한바에 의하면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 이스라엘, 아라비아, 터어키, 레바논, 북아프리카인들이 셈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그들의 조상이 같은 민족이었다는 사실을 증거 한다. 그리고 그러한 증거는 하나님께서 인류세계를 언어적, 민족적으로 분산시킨 역사<창11장>와 일치된다. 노아홍수 이후에 노아의 후손들에 의하여 형성된 부족적 집단들이 분산되지 않고 뭉치어 살고자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다르게 하시고 그들을 언어별로 구별하시어 민족을 형성하게 하신 후 그들이 세계 만방에 분산되도록 하셨다. 이때에 분산되어진 여러 민족들 중 에 셈족이 있었음은 성경이 증거 하는바와 같으며 일반 역사학자들에 의해서도 증명된 사실이다.
이때에 셈족은 특히 인류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셈족의 후예들 중에 몇몇 부족들은 유대인들을 통하여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 영향을 끼쳤고 아랍인들을 통하여 아프리카 대륙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와같은 역사적 사실을 역으로 추적해 들어가면 셈족이 노아의 후손이었음이 증명되고 노아가 셈족의 조상이라는 것이 확인되면 노아가 아담의 후손이라는 성경의 증거도 아울러 확인되는 것이다.
일반 역사학자들은 <셈족>이 성경에 나오는 기록들과 일치한다는 점을 근거로 하여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민족설화를<셈족>과 연결시켰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보 같은 주장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들이 셈족 이상의 역사를 찾아내지 못했을 뿐이지 셈족의 조상이 실제로 전설적 이거나 신화적인 존재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셈족의 실존을 통하여 그들의 조상인 아담의 실존과 에덴교회의 실존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제3부. 구약 기독교 역사.
하나님께서는 에덴교회를 창설하신 후 계속하여 교회들을 설립하시고 확장시켜 나가셨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확장해 나가시는 역사를 순전히 우리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 그것은 참으로 답답하리만큼 매우 느리게 진행 되어졌다. 교회가 에덴교회로부터 출발한 이래 야곱의 민족교회에 이르기까지 2천년 이상이 걸렸고 야곱의 민족교회가 예루살렘교회로 발전하기 까지 또한 2천년 가까운 기간이 걸렸으며 예루살렘 교회 이후 사도들에 의하여 설립된 교회들이 현대교회로 확장되기 까지도 2천년 가까운 기간이 소요된 것 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 확장의 완만한 역사 속에는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진행하실 때에 일반 역사의 상황에 맞추어 진행하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일반역사가 기독교 역사에 조화를 이룰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때가 되면 비로소 역사를 진행하시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때문에 저들은 성경이 말하는 <때가 이르매>를 일반 역사가 기독교 역사에 조화를 이루는 때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와 같은 수동적 역사를 진행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능동적 역사 즉 주권적 역사를 진행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일반적 역사를 아우르시고 인도하시면서 그 일반 역사들이 하나님의 기독교 역사를 때로는 준비하게 하시고 예비하게 하시는가 하면 때로는 변증하게 하시고 보좌하게 하신다. 때문에 일반 역사가 아직 기독교 역사의 진행을 준비하지 못했거나 또는 보좌할 만한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에는 기독교 역사의 진군을 잠시 지연시키신다. 반면에 기독교 역사의 진군이 필연적일 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역사가 아직 준비 되지 않아 그것을 감당할 수 없을 때에>는 일반 역사를 재촉 하시어 기독교 역사의 진군에 맞추신다. 그러나 반대로 기독교 역사의 진군이 아직 준비 되지 않았는데 일반 역사가 앞질러 나가게 될 때에는 기독교 역사의 진군에 맞추어 일반 역사의 진행을 지연시키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 섭리 역사의 중심은 언제나 기독교 인 것이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기독교 역사를 진군시키는 과정에 수많은 교회들을 세우시고 확장해 나가시면서 그 교회들에게 시대적, 영역적 상황에 부합되는 사명들을 부여하신다. 이때에 참으로 놀라운 것은 당시의 교회들이 부여 받은 시대적, 영역적 사명들은 당시의 시대적 영역적 현실에 적합한 사명들이지만 그 사명들은 또한 시대와 영역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하나님의 모든 교회들 에게 일률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주어지는 공통적인 사명들이라는 점이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원리를 <역사는 되풀이 된다>라는 속담에 비추어 이해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반복이 아니라 계속되는 진군이다. 따라서 기독교 역사는 되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새로운 역사이다. 때문에 교회들에게 부여된 사명이 시대와 영역을 초월한 일률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같은 사명이면서도 차원이 다르다. 우리는 앞으로 계속하여 공통적이면서도 차원이 다른 기독교 교회들의 시대적, 영역적 사명들을 정리해 가면서 장엄한 하나님의 섭리역사를 증거 할 것이다.
제1장. 가정교회, 부족교회.
에덴교회 이후의 교회는 대부분 가정 중심의 교회로 전승 되어졌고 인류의 번성과 함께 인류사회에 부족적 집단이 형성되어짐에 따라 부족적교회로 확산 되어졌다. 성경에 나타나는 교회의 흔적들을 살펴보면 아담, 아벨, 가인 등등에게서도 교회적인 흔적이 나타난다. 그러나 <창4:26>이 증거 하는바에 의하면 아담의 아들 셋이 에노스를 낳았을 때를 기점으로 하여 비로소 교회의 모습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노아가 하나님께 명령받아 방주를 지은 것을 근거로 할 때에 노아의 아들들에게도 교회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셈의 후예이며 아브라함의 아버지였던 데라가 우르와 하란에서 달신<月神>을 섬겼던 것을 근거로 할 때에 <수24:2>에덴교회 이후의 교회들은 아담, 셋, 노아, 셈의 가정교회로 전승되어진 것으로 보이며 그 외에는 이렇다할 교회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에덴교회 이후의 교회는 아담, 셋, 노아, 셈의 교회로 전승되어 지다가 얼마동안의 침체기를 거친 후 아브라함에 이르러 비로소 본격적인 교회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 하였으며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삭, 야곱 등등의 가정교회 및 부족교회로 확산 되어져 간 것으로 보아야한다. 그러나 교회가 가정교회 형태에서 벗어나 실제적인 부족적교회 형태를 이룬 것은 야곱시대였다. 물론 노아시대의 교회에서도 부족적교회의 흔적이 있음을 엿볼 수는 있으나 당시의 교회 형태는 부족적교회라기 보다는 가정적교회 형태에 더욱 가까웠다. 반면에 야곱은 12아들을 생산하여 하나의 부족적 형태를 이루었으며 따라서 야곱이 가장 으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이끌어갔다. 따라서 야곱교회를 부족교회의 출발 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야곱의 부족교회는 그때까지의 교회 역사상 가장 왕성한 교회이면서 또한 첫 번째 부족교회이자 마지막 부족교회였다. 야곱 이후의 교회는 부족교회 형태를 벗어나 하나의 민족적 교회형태를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에덴교회의 실패는 모든 교회들에게 그대로 동일하게 전승 되어졌다. 때문에 에덴교회 이후의 모든 가정교회 및 부족교회들에게서는 교회의 사명이나 교회의 권위 및 권세 같은 것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당시의 교회들은 교회로서의 기능을 발휘하는 교회들이 아니라 장차 전개되어질 교회들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역사를 준비하는 과정의 교회들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정교회 또는 부족교회들 중 특별한 교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노아 교회.
노아교회는 에덴교회 이후 세워진 대표적 교회이다. 노아교회 이전에도 하나님을 예배한 흔적들이 발견되지만 에덴교회 이후 교회로서의 위상을 갖춘 것은 노아교회가 처음이다. 노아교회는 특히 방주교회라는 교회적 외형을 갖춘 교회로서 최초의 외형적 교회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노아교회를 통하여 인류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께 택함 받은 자에 대한 인류의 구원을 선포하시며 특히 구원의 방주로 상징되는 노아교회를 통하여 인류구원의 방주인 하나님의 교회의 특성들을 선포하신다.
1)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선포.
하나님께서는 노아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시고 그 심판을 실제적으로 진행하셨다. 인류의 생육 번성과 더불어 인류사회가 점점 번창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법과 질서에 순응하기 보다는 오히려 반대적인 것이 되어갔다. 그들의 삶은 도덕적, 윤리적으로 무질서하고 죄악된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사기에 충분하였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심판을 통한 징계를 내리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리고 그 심판은 장차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최후의 심판을 예표하고 상징하는 것이었다. 노아교회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아직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조상들의 구전<口傳>적 가르침을 통하여 아담의 범죄와 그로인한 하나님의 징계를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하나님의 징계를 직접적으로 체험하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특히 아벨을 살해한 가인의 죄가 하나님에 의하여 용서되었고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것을 문제 삼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징계가 선포되었을 때<창4:13-15>그것이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권위라는 신학사상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역으로 이용하여 자신들의 행악을 무용담으로 크게 자랑하는 오만방자함을 보였다.<창4:23-24>노아교회시대에 이르는 동안 사람들의 행악이 점점 더 기승을 부린 것은 하나님의 용서원리에 대한 이와같은 잘못된 개념 때문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는 당시의 실정으로는 필연적인 것이었으며 그 이후의 인류사회에 영원히 존재하게 될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바로 잡는 신학적 이정표였다. 만약에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악을 심판하지 않았더라면 인류사회는 하나님의 심판이 실제적으로 전개되는 순간까지 계속하여 영원히 하나님의 용서를 오해하였을 것이며 또한 하나님심판의 실제성을 간과하거나 부인하였을 것이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노아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는 심판과 징계라는 차원을 초월하여 오히려 그러한 모든 것들을 종합적으로 정립시켜 주는 하나님의 섭리적 배려였던 것이다.
2)하나님의 구원의 방주인 교회.
그러나 노아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심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시 시행되어진 것이 아니라 매우 오랫동안의 유예기간이 있었다.<창6-7장><벧전3:20>노아교회가 방주를 지은 기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상이한 해석들이 주장되어 진다 .어떤 신학자들은<창6:3>과<벧전3:20>을 근거로 하여 그 기간을 120년으로 주장하는 반면에 또 다른 신학자들은 그것을 부인하고 다만 어느 정도의 기간이 소요된 것은 사실이지만 120년이 소요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어떤 신학자들은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기간이 120년이나 소요된 것은 방주의 규모와 당시의 여건상 당연한 것이며 따라서 그 기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또 다른 신학자들은<창6:3>의 120년이란 방주 제작의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수명이 120년으로 제한되어 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창5:32>에는 노아가 오백세 이후에 셈, 함, 야벳 등등의 3아들을 낳았다고 증언하며<창7:6>은 방주가 완성되고 홍수가 시작된 것이 노아의 나이 육백세 때라고 증언한다. 이와같은 성경의 증거들을 근거로 하면 노아방주의 제작 기간은 백년이내가 된다. 그러나<창6:3>과<벧전3:20>을 근거로 하고 노아가아들을 낳기 이전부터 방주를 제작하였다고 가정하면 노아방주 제작기간이 120년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노아방주 제작 기간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논증을 삼간다. 그러나 그 기간이 어느 정도 길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사랑과 용서,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심판 받을 자들에게 충분한 유예기간을 주심으로서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서기를 기다리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노아방주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용서와 사랑.
하나님께서는 노아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사랑을 증거 하신다. 노아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되어진 후 하나님께서는 이미 선포한 심판을 오랫동안 늦추시면서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서기를 기다리셨다. <창6:3>의 120년이라는 기간이 인간의 수명에 대한 제한을 말하는 것이지만 이기간은 범죄 한 인간들이 각자의 수명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기간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따라서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자신의 수명이 다할 때 까지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죄인 회개에 대한 기다림은 곧 영원한 기다림임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기다림은 사랑의 원천인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극명하게 증거 하는 것이며 또한 기독교가 마땅히 배우고 명심하여 따라야할 용서와 사랑의 원리에 대한 실제적인 교육이었다.
(2)하나님의 섭리와 교회.
노아교회는 거대한 방주로 대변된다. 노아의 거대한 방주교회는 하나의 지교회이지만 기독교 전체 교회를 대변한다. 따라서 노아의 방주교회는 하나님의 모든 섭리가 지 교회들을 비롯한 전체교회, 즉 기독교를 통하여 진행되어진다는 원리를 증거 한다. 생명 있는 것들이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이 함께 방주 안에 들어간 것은 모든 피조세계가 기독교를 중심으로 운행되어진다는 것을 상징하며 특히 구원이 기독교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선포한다. 반면에 그것은 장차 교회에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있다는 것을 예표한다. 노아의 방주교회는 또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교회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증거 하기도 한다. 노아의 방주 안에는 홍수 즉 하나님의 심판이 적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같은 증거는 하나님의 교회 즉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영원히 면제된다는 신학적 교리를 정립하는 것이었다.
(3)신앙의 원리.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방주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모든 교회들이 정립해야할 신앙적인 모습을 선포하신다. 당시의 사람들은 노아교회가 방주를 제작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는 물론이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중심의 신앙적 삶을 사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때문에 신실한 신앙적 삶을 사는 자들 일수록 때로는 비웃음과 조롱을 받게 된다. 노아교회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웃음과 조롱을 받았을 것이며 친지들로부터도 외면 받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노아교회는 매우 오랫동안 방주를 제작하면서 그러한 조롱과 비난과 멸시 등등에 관계없이 이미 자체적으로 자제력을 잃을 수도 있었고 지치고 절망하여 스스로 무너져 버릴 수도 있었다. 어쩌면 자신들이 받은 계시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꿈이거나 또는 환상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방주건조를 중단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노아교회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노아교회는 오히려 자신들을 조롱하고 비난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향하여 회개하고 돌아와 자신들과 함께 할 것을 간곡하게 권유하였다. 노아의 방주교회에 대한 유대의 전승과 전설에 의하면 노아교회는 방주를 건조하면서 끊임없이 회개를 선포하는 설교를 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벧후2:5>을 통해서도 보증 받는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와같은 유대적 전승과 전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을 신뢰하였기 때문에 난폭하였으며 일체의 선한 행위를 경멸하였다.....그러나 노아는 그들의 태도를 불쾌하게 여기고 실망하여 그들의 성격이나 행위를 선하게 고치려고 설득하는데 힘을 썼다.>
노아교회는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하였으며 묵묵히 자신들의 사명을 감당해 나갔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은 노아교회의 신앙과 사명감을 통하여 하나님의 모든 교회들에게 하나님의 약속하심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따르는 철두철미한 절대적 신앙과 사명감을 정립시켜 주시는 것이다.
3)하나님의 홍수심판.
(1)홍수심판의 시기.
<창5:1-32>에 나타난 아담의 계보를 계산하면 하나님의 홍수심판은 아담창조 후 1656년이 된다. 한편<창11:10-26>에 나타난 셈의 계보를 근거로 하여 홍수로부터 아브라함까지를 계산하면 292년이 된다. 그리고 성경에 나타난 연대를 기초로 하여 아브라함에서 예수그리스도까지를 계산하면 대략 2050년 정도가 된다. 이와같은 계산법에 의하면 아담창조는 대략 B.C.4000년 정도가 되고 하나님의 홍수는 B.C.2350년 정도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년대는 확실한 것이 아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류의 계보는 인류의 족보를 정확하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께 대한 하나님의 선포인<여인의 후손-창3:15>을 증거 하는 것으로서 정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이 하나님의 홍수심판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기 위하여 그에 대한 정확한 년대를 세우기 위하여 노력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홍수심판에 대한 정확한 년대가 규명되지 않음으로 그들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짜 맞추기식의 년대를 세운다. 그러나 역사는 짜 맞추기가 되어서는 않된다. 분명하지 않은 역사의 년대는 차라리 대략적인 역사적 년대로 남겨두는 것이 역사적인 것이지 짜 맞추기식의 잘못된 역사가 되어서는 않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홍수심판에 대한 정확한 년도를 정립하기 위하여 무리한 년대를 추정하여 세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홍수심판이 실제적으로 분명하게 있었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규명하는 것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인류역사에 전승되어져 있는 대홍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홍수심판의 실제성을 다음과 같이 증명한다.
(2)홍수심판에 대한 역사적 전승들.
① 이집트의 전승.
이집트에는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신의 홍수심판이 기록으로 전해진다. 인간의 오만방자함을 참다못한 창조주라는 크게 진노하여 피의홍수로 그들을 멸망시켰는데 이때에 피가 신들의 집인 헬리오폴리스까지 넘쳤다고 한다. 그러나 <라>는 당시의 참혹한 결과를 보고 크게 후회하였고 그리하여 다시는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한편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인 티마이오스를 통하여 이집트의 홍수에 대한 설화를 기록하였다. 플라톤은 거기에서 신들이 큰 홍수를 내려 땅을 정결하게 했는데 그때에 목동들 몇 명이 높은 산으로 도피하여 목숨을 부지했다고 했다.
②인도의 전승.
힌두교의 경전인 리그베다에는 홍수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인도의 홍수에 대한 전설은 마누법전을 통하여 전해진다. 마누법전에는 북방의 산에서 내려온 마누의 하산에 대한 설화와 홍수에 얽힌 이야기가 기록되어있는데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한 마리의 물고기가 마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홍수가 모든 피조물을 쓸어버릴 것이니 배를 만들고 나를 경배하라 물이 불어나면 그 배에 들어가라 그러면 내가 너를 구하리라.)마누는 배를 만들고 홍수가 닥치자 배 안으로 들어갔다. 마누는 배의 줄을 물고기의 지느러미에 잡아매고 북쪽의 산들을 지나갔다. 이때에 물고기는 마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내가 너를 구했다. 너희들이 산 위에 머무는 동안 물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나무에 배를 매어놓으면 물이 빠지는 대로 너도 내려갈 것이다.)물이 줄어들은 후 마누가 배에서 내려왔을 때 모든 피조물들은 홍수에 의하여 멸망되었고 오직 마누만 살아남게 되었다.>
③ 중국의 전승.
홍수에 대한 중국의 전승은 예기<禮記>에 기록되어 있는바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 옛날에 사람들이 우주의 최고 권력자를 무시하고 경멸하여 거역함으로 우주의 질서와 조화가 무너져 버렸고 우주에는 대 환란이 닥쳐와 파멸되었다. 해와 달과 별들이 운행을 바꾸어 버림으로 하늘의 기둥들이 무너져 내렸다. 땅의 기초가 무너짐으로 땅이 갈라져 지하에 있던 물들이 격렬하게 터져 나와 온 땅에 넘쳤다.
④그리스의 전승.
플루타르크에 의하면 그리스인들에게는 홍수에 관한 5개의 설화들이 전해 내려온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데우칼리온전승인데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우스신은 사람들의 사악함에 진노하여 땅 위에 큰 홍수를 내리기로 결심하였다. 그 소식을 알게 된 프로메우스는 그의 아들 데우칼리온에게 홍수에 관하여 경고했다. 데우칼리온은 즉시 방주를 만들고 피르라와 함께 그 안으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주는 테살리에 있는 파르낫수스산에 걸렸다. 그들은 배에서 나와 세상에 다시 사람이 생겨나도록 하였다. 그것은 매우 환상적인 작업이었는데 그들은 테미스여신이 던진 돌을 다시 던지어서 사람을 만들어 내었다. 데우칼리온이 던진 돌들은 남자가 되었고 피르라가 던진 돌들은 여자가 되었다.>
홍수에 대한 또 다른 전승 중에 루시안의 설화가 있는데 그것은 노아의 홍수설화와 비슷하다. 땅에 큰 홍수가 내려 사람들이 큰 배를 만들어 피신하였다는 것과 비둘기를 내보내어 물의 경감상태를 알아보는 장면이 노아의 홍수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호머나 헤시오도스는 홍수설화에 대하여 침묵하였다.
⑤영국의 전승.
영국에도 인간의 타락과 신의 심판에 대한 홍수설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내려 온다.
<사람들이 사악해지자 최고의 신이 땅 위에 큰 장마를 내렸다. 바다의 물이 넘쳐서 영국 국경의 고지대를 침수시켰고 온 땅은 홍수로 완전히 침수되었다. 이때에 지혜로운 족장이 큰 방주에 선택된 사람들을 태우고 문을 닫아 생명을 건졌다.>
⑥아메리카 인디언의 전승.
남북 아메리카에는 약120여족의 인디언 부족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 중에 홍수에 관한 설화를 가지지 않은 부족은 하나도 없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전승되어진 홍수설화는 매우 다양하지만 사람들의 악함과 이에 대한 신의 심판적 홍수에 대한 것에서 내용이 일치하며 새들을 내보내어 물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도 거의 대동소이하다.
⑦바빌로니아의 전승.
바빌로니아의 홍수설화는 B.C.4세기 경의 그리이스 역사가 베로수스를 통하여 후세에 전해졌는데 악한 자들에 대한 신의 심판적 홍수와 방주를 통한 피신의 과정 내용이 노아의 홍수이야기와 거의 비슷한바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르다테스의 아들 크시수트루스의 통치시대에 신의 노여움에 의한 큰 홍수가 일어났다. 크시수트루스는 크로노스신에 의하여 미리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큰 방주<길이 약915M, 폭 약355M>를 만들어 가족과 친구들과 여러 종류의 짐승들을 데리고 피신하였다. 홍수가 그친 후 새들을 내보내어 상태를 알아 본 후 육지가 들어나자 배에서 나와 신에게 희생 제사를 드렸다. 그들이 살던 땅은 원래 바빌로니아였는데 홍수가 끝난 후 배가 머문 땅은 아르메니아였다. 그들은 나중에 바빌로니아로 돌아갔다.>
⑧설형 문자토판.
홍수에 대한 가장 오래 된 전승 설화는 B.C.30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바빌로니아 설형 문자토판의 기록이다. 이것은 1870년 조오지스미드에 의해서 발견되었는데 180여줄로 되어있다. 토판설화의 중심인물은 길가메쉬이다. 그는 유프라테스제방에 위치한 패악으로 가득 찬 도시 슈립팍에 살았다. 그는 홍수가 임박해왔음을 전해 듣고 집을 정리한 후 배를 만들었다. 그 배는 길이와 넓이가 다 함께 140규빗으로 똑 같았고 6층으로 되었으며 7개의 칸막이로 막은 마루가 9개였다. 그는 많은 신들과 생명을 가진 모든 종류의 짐승들과 씨앗들과 함께 방주 안으로 피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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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대부분의 홍수설화가 성경의 노아시대의 홍수와 거의 일치한다.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점을 들어 성경의 노아홍수 사건이 고대로부터 전승되어진 설화들을 근거로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들은 특히 바빌로니아의 토판기록이 노아의홍수 사건보다 약600년 이상 앞섰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노아홍수 사건의 조작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의 노아홍수 사건에 대한 년도나 바빌로니아의 토판기록 년대는 확실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만을 가지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오히려 노아홍수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인류의 분산역사와 함께 분산 되어졌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것은 많은 홍수설화 전승들이 매우 다양한 내용으로 전승되어짐에도 불구하고 주제의 핵심이 언제나 동일하다는 것을 통하여 증명되어진다. 만약에 저들의 주장대로 성경의 노아홍수 사건 기록이 다른 설화들을 집대성 하여 구성한 조작적 기록이라면 성경의 노아홍수 사건 기록은 원본이 아니라 하나의 사본에 불과하다. 만약에 그렇다면 성경의 노아홍수 사건 기록은 당연히 원본 보다 미완성적 이어야한다. 그러나 내용 면에 있어서나 조직 면에 있어서 노아의홍수 사건 기록은 타의 추종을 전혀 불허한다. 어느 홍수설화도 노아의홍수 사건 기록에는 전혀 못 미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사본이 원본의 결점을 보강하여 더욱 충실하게 했다면 오히려 사본이 원본보다 차원 높은 홍수설화를 기록했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의홍수 설화는 어떤 이론을 근거로 하는 학문이 아니라 실제적 사건이다. 따라서 원래의 사건 기록이 더욱 정확하고 그것이 전해지면서 점점 오류 되어진 것이 당연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류역사에 전승되어진 홍수에 관한 설화들 중에는<이것이 바로 원본이다>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홍수설화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한결같이 전설적설화 또는 신화적설화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형이하학적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노아홍수 사건 기록이 원본이고 다른 것 들이 사본이라는 우리의 주장은 당연한 것이다.
(3)노아방주교회의 규모.
방주의 조직과 규모에 있어서 성경의 노아방주는 다른 설화들의 그것을 초월한다.
성경의 방주 규모는 길이300규빗<약168m> 넓이50규빗<약28m> 높이30규빗<약17m>이다. 이러한 배의 규격은 대서양을 횡단하기 위하여 건조한 증기선의 규격과 매우 가까운 것으로서 지극히 과학적인 제원이었다. 1901년에 만든 화이트스타회사의 켈틱호는 길이230m, 넓이22m, 높이160m였으며 1858년에 건조한 그레이트이스턴호의 제원은 길이180m, 넓이83m, 높이18m로서 노아의 방주와 매우 비슷하다. 한편 설형문자 토판의 방주는 길이 넓이 높이가 모두 140규빗<약80m>로 되어있는데 그와같은 제원은 배의 제원으로서 전혀 합당하지 않다. 이와같은 사실은 결국 성경의 노아사건 기록이 더욱 사실적인 것이고 토판의 기록이 노아의홍수 설화를 근거로 하여 후대에 작성되었다는 것을 뒷받침해 준다.
(4)홍수심판의 범위.
노아의홍수가 과연 우주적이었는가? 하는 것은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관심사였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노아의홍수 사건을 전체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지역적인 것으로 본다. 저들이 노아홍수 사건을 전체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지역적인 것으로 보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①노아의 홍수사건은 인류를 심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인류가 지구 전체에 분산되어 있지 않고 한 지역에 제한되어 있었다. 인류의 분산은 노아홍수 이후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아홍수는 전체적인 것이 아니라 당시에 인류가 존재하였던 지역에 한정된 것이 분명하다.
②당시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유프라테스계곡 지역의 지표는 세계적으로 높은 산들의 지표보다 낮았다. 따라서 유프라테스지역이 홍수로 완전히 침몰되었다 할지라도 세계적으로 지표가 높은 산들이 있는 다른 지역들 까지 모두가 침몰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③지구 전체가 홍수로 인하여 완전히 침몰 된다는 일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홍수로 지구 전체가 완전히 침몰 당했다고 한다면 그 물들로 인하여 지구의 종말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상당히 논리적인 주장들로서 어느정도 설득력이 있다. 때문에 많은 역사학자들이 노아시대의 홍수가 지역적인 제한적 홍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질학자들을 비롯한 과학자들은 인류역사에 지구가 완전히 침몰한 홍수가 있었음을 주장한다. 지질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빙하기시대 이후에 엄청난 지표적 변화들이 있었으며 지리학자들의 연구 결과에서도 빙하기 말기에 천지 대변혁이 있었음을 나타내 준다. 저들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북반구에서 빙하시대의 얼음이 녹으면서 홍수와 관련된 범지구적 인류멸망이 있었으며 그 기간에 동물들의 멸망도 아울러 있었음이 나타나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아일랜드산<産>고라니, 호랑이, 사자,물소, 하마, 코끼리 등등이 빙하기 말에 홍수로 인하여 선사시대의 인류와 함께 사라진 것으로 보고 되고 있으며 북아메리카에서는 큰 산고양이, 말, 맥, 아메리카산약대, 마스토돈 및 코끼리 등등이 역시 함께 멸종된 것으로 보고 되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연구 조사한 바에 의하면 노아의홍수 사건은 실제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체적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노아의홍수가 과연 제한적이었느냐? 아니면 전체적이었느냐? 하는 것을 중요하게 논증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노아의홍수가 전설적 또는 신화적 전승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물론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에 우리가 노아의홍수 사건이 과연 실제적 사건이었다는 사실을 반드시 밝혀야 할 필요는 없다. 성경이 그것을 선포하고 증거 했다면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따라서 그것은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성경이 선포한 실제성, 역사성을 증명하고 밝혀야 할 신학자로서의 사명적 책임과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2.아브라함교회.
노아교회 이후 성경에 나타난 교회는 아브라함교회이다. 노아교회 이후 한 세기가 지나기까지 하나님의 교회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노아의 신앙상태로 보아 노아교회시대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했음이 분명하겠지만 노아가 점점 늙고 인구가 계속하여 번성하는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상대적으로 소멸되어져 갔다. <창11장>을 근거로 할 때에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었다. 또한 아브라함의 아버지인 데라는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섬겼다.<수24:2> 따라서 노아교회 이후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불러 세우신 아브라함교회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반면에 아브라함교회는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교회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교회를 통하여 아담교회가 상실한 모든 것을 회복하는 역사를 전개하시는 것이다.
1)하나님의 은혜언약.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교회를 통하여 장차의 모든 기독교 교회들에 대한 중대한 약속<계약>을 체결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교회에게 주신 언약은 아담교회가 실패한<행위언약>에 대한 후속조처로서 이미 창세전에 준비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교회와 장차의 모든 교회들이 자력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에 순종하지 못할 것을 이미 아셨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행위언약의 실패에 대한 후속조처로서 새로운 언약을 준비하셨는데 그 새로운 언약은 교회의 순종을 전제로 하지 않은 것으로서 교회로서는 무조건적인 것이었으나 하나님께로서는 조건적인 것이었다. 즉 교회는 아무런 조건 없이 다만 받는 것이었으며 하나님께서는메시야이신예수그리스도의희생을조건으로하여수혜하시는언약<계약>이었다. 때문에 이 새로운 언약은<하나님의 은혜언약>또는<하나님의 은혜계약>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은혜계약<은혜언약>은 그 후로 지금까지 계속하여 유효하여 왔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하여 유효할 것이다. 우리는 그와같은 사실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기독교역사의 수많은 교회들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용서와 인도하심을 통하여 확인하게 된다.
2)메시야언약.
아브라함교회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언약은 메시야를 원천으로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교회의 실패로 인하여 단절된 하나님과 교회와의 관계회복을 위하여 하나님과 교회 사이를 연결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존재이신 메시야의 강림과 희생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약속은 아담이 범죄 한 직후에 즉시 주어졌다. 성경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 찌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4-15>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은 직접적, 또는 구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유적이며 점진적으로 주어졌다. 성경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 하였음이니라-창22:17-18>
3)사명의 회복.
<창3:14-15>과 <창22:17-18>말씀은 당시로서는 그 뜻이 아직은 확실하게 들어나지 않았지만 그것은 메시야의 강림에 대한 선포가 분명하였으며 계속하여 점진적으로 구체화 되는 메시야의 강림과 희생의 결과들은 결국 하나님과 교회 사이에 단절된 모든 것들이 회복되는 것에 대한 증거들이었고 선포들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회복은 당연히 아담교회를 통하여 부여되었던 교회의 사명에 대한 회복을 말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 말씀을 구속사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하여 그것은 곧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인류구원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하면 진보적인 어떤 신학자는 이 말씀 속에 교회의 사명에 대한 회복이 포함되어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기독교역사는 인류 구속사를 위한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역사이다. 따라서 그 말씀을 역사적, 순서적으로 정립함에 있어서나 또는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 정립함에 있어서나 그 말씀에 대한 신학정립은 똑같은 결론을 내리게 된다. 즉<그 말씀은 인류구속사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 말씀 속에 교회의 사명에 대한 회복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그 말씀은 예수그리스도의 강림은 하나님과 교회의 관계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그 과정에 인류구원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라고 정립되어져야 한다.
4)교회 확장의 언약.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들이 확장되고 번성할 것을 약속하신다. 성경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말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 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5-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 하였음이니라-창22:17-18>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통하여 세계적인 하나님의 교회들이 세워질 것이며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그 교회들을 이끌어 가게 될 기독교의 중심적 본산지가 될 것이라는 말씀이 들어있다. 그리고 이러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훗날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교회를 설립했을 때 실제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예수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하여 강림하심으로 완성되어졌다.
3.야곱교회.
하나님의 교회는 아브라함교회, 이삭교회를 거쳐서 야곱교회로 계승되고 발전 되어진다. 우리는 성경<창27장-31장>의 증거 속에서 야곱을 통하여 부족교회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보게 된다. 성경<창25:21-23>은 하나님께서 에서를 통하여 역사를 전개하시는 것이 아니라 야곱을 통하여 역사를 전개하신다고 증거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리브가에게 예고되어진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에게 둘째 아들인 야곱을 통하여 당신의 역사를 전개하실 것을 예고하셨다. 따라서 리브가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야곱에게 그와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조용히 가르쳐 주면서 자신은 물론이고 야곱도 기도하면서 기다리도록 해야 했다. 그러나 리브가는 기다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야곱을 충동질 하여 문제를 어렵게 만들었다.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야곱은 외가인 라반의 집에 가서 4명의 아내를 얻어 12명의 아들을 낳는다. 그리고 후에 그 12아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부족교회를 세우게 된다. 성경은 야곱이 외가 집으로 가게 된 동기를 야곱의 결혼 때문인 것으로 증거 한다. 그것은 본래 야곱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인 이삭의 뜻이며 또한 어머니인 리브가의 뜻이었다. 이삭과 리브가는 장자인 에서가 이방인 헷족속의 딸들을 아내로 맞아들인 것으로 인하여 심기가 매우 불편하였다. 때문에 그들은 야곱을 외가에 보내어 자신들의 친족 중에서 아내를 맞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였고 사실은 에서로부터 야곱의 생명을 보존하게 하려는 리브가의 계략이었다. 리브가는 쌍둥이 형제인 두 아들 중에서 에서보다는 야곱을 더욱 사랑하였다. 때문에 리브가는 야곱과 공모하여 이삭을 속이고 장자인 에서가 받아야 할 축복을 야곱이 대신 받게 하였다. 이에 분노한 에서는 이삭이 죽은 후에 야곱을 죽일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것을 알게 된 리브가는 형제간의 골육상쟁<骨肉相爭>을 막고 야곱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결혼을 명목으로 하여 야곱을 외가로 피신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리브가의 생각이었다. 한편 우리는 여기에서 사단의 흉계를 추론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야곱의 후손>을 통하여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강림할 것을 계획하셨고 아브라함에게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심으로서 인류 구원의 대역사와 세계적인 기독교의 역사를 아울러 선포하셨다. 사단은 이와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미 알고 있었음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훼방하기 위하여 나름대로의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사단은 리브가와 야곱의 마음을 뒤흔들어 리브가로 하여금 야곱을 편애하게 하였고 야곱으로 하여금 장자의 권위를 욕심나게 하였다. 그리하여 야곱이 팟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사는 사건과 리브가와 야곱이 공모하여 이삭을 속이고 에서가 받을 축복을 가로채는 사건들이 일어나게 하였다. 사단의 이와같은 흉계는 장차 메시야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어질 기독교 역사를 야곱을 죽게 함으로서 미연에 막아 보겠다는 계산된 음모였다. 야곱이 죽으면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에서는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 야곱을 죽여복수 할 것을 다짐한다.
그러나 결과론적인 하나님의 섭리역사를 볼 때에 거기까지 가리브가의 한계였고 또한 사단의 한계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노력과 흉계를 당신의 섭리역사에 멋지게 반영하시어 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 내시었던 것이다. 야곱은 외가에 가서 많은 재산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4명의 아내들을 통하여 12아들을 얻음으로서 하나님의 교회가 부족적교회로 성장하는 역사를 이룩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이 사단의 음흉한 흉계와 인간의 어리석은 계획을 오히려 역으로 적용하시어 당신의 역사를 멋지게 성취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기독교역사에 계속하여 반복되어 졌고 또한 영원히 반복되어질 것이다.
한편 우리는 야곱교회가 애굽으로 이동하는 장면에서 또 한번 놀라우신 하나님의 경륜을 보게 된다. 우리는 성경<창37장-50장>을 통하여 야곱의 부족교회를 민족적 교회로 확장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보게 되는 것이다.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야곱의 부족교회가 애굽으로 이주하게 된 동기가 두 가지로 나온다. 하나는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또 하나는 당시에 극심한 흉년 때문에 야곱의 부족교회가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이주하게 된 것이다.
야곱교회가 애굽으로 들어가는 근본적인 동기는 야곱의 11째 아들인 요셉과 요셉의 10형들과의 반목 때문인 것으로 되어있다. 순전히 일반적인 시각으로만 보면 요셉은 당연히 형들로부터 미움을 사게 되어있었다. 요셉은 야곱으로부터 가장 총애를 받는 부인으로부터 노년에 얻은 아들로서 야곱의 편애적 사랑을 받았으며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께 고자질하는가 하면 자신이 형들의 왕이 되는 꿈을 자랑하였기 때문에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장자인 르우벤의 만류로 이스마엘 족속인 미디안사람들에게 팔아 넘겼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의 배후에 있는 사단의 역사를 눈여겨본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야곱교회를 통하여 큰 역사를 진행하실 것을 눈치 채고 있었고 특히 요셉을 통하여 그 일들이 진행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사단은 요셉을 죽일 계획을 세웠고 특히 형들을 통해서 그 일을 진행시킴으로 야곱교회를 붕괴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거기까지가 사단의 한계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단의 계산 위에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흉계를 역으로 다스리시면서 요셉을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세우셨고 그를 통하여 야곱교회가 애굽에서 안주하게 하심으로서 이미 세우신 계획을 진행하셨던 것이다. 성경은 이미 하나님께서 애굽을 통하여 야곱교회를 부흥발전 시키실 것을 예고하였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 할 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 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 함이니라-창1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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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에덴교회 이후에 교회가 활성화 되지 아니하고 오히려 침체 되어졌던 점에 유의해야 한다. 순전히 우리의 입장에서만 욕심을 낸다면 에덴교회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징계를 받았다 할지라도 기왕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교회를 회복하여 주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좀더 신속하고 활발하게 교회를 확장시켜 주시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와같은 의혹은 매우 근시안적인 우리들의 안목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 이미 서론에서 논증한바 있거니와 하나님의 섭리역사는 기독교만을 섭리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여 모든 세계와 영역들을 섭리 역사하신다. 역사란 모든 세계와 영역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룰 때에 비로소 아름답고 의의가 있으며 또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역사를 진행시키심에 있어서 기독교 주변의 역사 즉 기독교역사를 예비하고, 준비하고, 보좌하고, 보증하고, 변증할 일반역사들과 조화를 이루시기 위하여 때로는 늦추시는가 하면 때로는 빠르게 진행시키시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그와같은 주권적 섭리의 특별성을 체험한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는<하나님께서 안 계신 것이 아닌가?><하나님께서 나를 떠나신 것이 아닌가?>하는 의혹을 할 정도로 오래동안 침묵하시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광풍노도<狂風怒濤>와 같이 몰아치시는 속전속결<速戰速決>의 역사를 전개하신다. 성경을 참고로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노아교회시대의 홍수사건 이후에 아브라함을 부르시기까지 오래동안 침묵하신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와같은 일들은 기독교역사에 수 없이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때때로 섭리역사를 중단 한다거나 외면 또는 방관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한 오류다.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시121:3-4> 하나님께서는 섭리 역사를 단 한순간도 소홀히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 주변의 역사<일반역사>가 기독교역사와 조화를 이룰 때까지 기다리시면서 서서히 그리고 유유히 기독교 역사를 진행하신다. 성경은 이와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야곱의 부족교회가 애굽의 보호 하에서 민족교회로 성장하는 과정을 통하여 증거 한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매우 다급하게 역사를 진행하실 때가 있다. 사람들이 시날 평야에서 바벨탑을 쌓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단 한번의 만류도 없이 어떤 경고도 없이 일순간에 훼파하셨다. 성경<창11:1-4>에 의하면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기 시작한 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삶의 자구책 이었으며 또한 인간적인 욕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일순간에 무너뜨린 것은 사람들의 욕심에 대한 징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진행하신 것이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하나님의 전 피조영역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을 이루어야 했고 또한 하나님의 전 피조영역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해야 했다. 따라서 그들은 계속해서 한 곳에 모여 정착할 것이 아니라 사방팔방으로 흩어져서 자신들에게 부여된 사명을 진행시켜야 했다. 그러나 영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자체적인 지혜와 지식으로 그 일을 진행할 수 없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일순간에 바벨탑을 훼파하시고 그들을 흩으시어 예정된 섭리대로 진행하신 것이다. 성경과 기독교역사는 이와같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역사의 빠르고 느림을 수 없이 증거하고 있으며 모든 하나님의 종들은 자신들의 사역현장에서 때로는 개인적으로 때로는 집단적으로 그와같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수없이 체험한다.
제2장. 민족교회
1. 애굽교회.
야곱의 부족교회는 애굽에 들어가서 사백년<430년>간 머물게 된다. 우리는 야곱의 부족교회가 애굽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머물게 되는 과정을 통하여 전개되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를 살펴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볼 때에 야곱의 부족교회가 애굽으로 들어가게 된 것에는 두 가지의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당시에 야곱의 부족교회가 머물러 있던 일대에 기근이 심하여 식량을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요, 다른 또 하나는 그때에 마침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경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그들이 또 바로에게 고하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곳에 우거하려 왔사오니 청컨대 종들로 고센 땅에 거하게 하소서-창47:4>
한편 성경은 야곱의 부족교회가 애굽에 들어가서 오랫동안 머물게 될 것을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미 예고하였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 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 함이라-창15:13-16>
따라서 야곱의 부족교회가 애굽에 머물게 되는 것은 야곱의 부족교회가 머물러 있던 일대에 기근이 심하여 식량을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거나 또는 그때에 마침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있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미 애굽을 통하여 어떤 목적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증거 하는 것을 근거로 하여 야곱의 부족교회가 애굽에서 이루게 되는 하나님의 섭리 역사를 다음과 같이 정립한다.
1)일반역사의 준비.
야곱의 부족교회 당시 가나안 근동 일대의 일반역사는 아직 하나님의 기독교역사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준비들이 되어 있지 않았다. 성경이 말하는 아모리 사람의 문제는 단순히 아모리민족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예수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의 가나안 근동 일대를 전체적으로 언급한 것이었다. 아모리인이라는 말은 아카드어로<서쪽사람>이라는 말이다. 세기>에 이르러 아모리 추장들이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퍼져 있던 토착민인 아카드<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군주들을 대신해서 들어섰으며 그 과정은세기>말, 이란 서쪽에 있는 자그로스산들로부터 지중해에 이르는 중요한 정치적 요충지의 거의 전부에 아모리인들이 정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세기>이후부터 아모리족속은 시리아와 페니키아 해안 일대를 비롯한 팔레스틴 해안 일대를 장악하여 여러 개의 도시국가들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년>경에 이르러 아모리족의 소도시 국가들은 애굽제국의 일부가 되었다가세기>경에는 헷족속에 정복되어 북부 도시국가들은 헷족속의 지배를 받았고 남부도시 국가들은 명목상으로는 애굽제국에 속해 있었으나 실제적으로는 헷족속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가나안의 도시국가들은 서로 단합을 이루며 어느정도 건재해 있었다. 헷족속과 애굽 제국으로부터의 통치와 위협이 교대적으로 계속되었지만 그 세력은 약소하였고 그리하여 나름대로의 자치와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아모리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라>는 말은 가나안 근동일대의 도시국가들이 아직 건재하므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할 시기가 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즉 팔레스틴 근동일대의 일반역사가 아직 하나님의 기독교역사와 조화를 이루는 준비가 않 되었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근동일대의 일반역사가 기독교역사와 조화를 이룰 때까지 야곱의 부족교회를 애굽에서 머물게 하셨던 것이다.
2)민족교회 형성.
하나님의 섭리에 보조를 맞추지 못한 것은 야곱의 부족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야곱의 부족교회는 기독교역사를 본격적으로 진행시켜야 하는 중대한 과정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야곱의 부족교회는 아직 기독교역사를 본격적으로 진행 시킬 수 있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기독교 역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의 강림이 전제되어지는데 메시야께서 강림하기 위해서는 먼저 메시야를 맞이할 수 있는 준비가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맞이하도록 예정하셨고 그 대명<大命>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야곱교회를 통하여 진행되는 것이다. 야곱의 부족교회는 우선적으로 민족교회로 성장해야 했다. 그것은 장차 가나안에 입성했을 때를 위한 전초적인 과정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팔레스틴 일대는 생존을 위한 부족과 부족, 민족과 민족간의 끊임없는 전쟁이 계속 되었고 애굽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영토확장을 위하여 소수민족들을 계속하여 제압해 나갔다. 이와같은 상황 하에서 야곱의 부족교회가 하나의 민족적 교회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지켜주고 보호해 줄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울타리가 필요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상황으로는 애굽이 그에 대한 최고의 적임자였다. 애굽은 그 당시 가나안을 중심으로 하는 근동일대를 장악하고 호령하는 가장 막강한 국가였다. 그리하여 야곱의 부족교회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애굽에서 사백년간 머물면서 민족교회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3)교회건축의 준비.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부족교회를 통하여 장차 광야에서 성막교회를 건축하게 될 때를 대비하셨다. 야곱의 부족교회는 애굽의 보호를 받으면서 거대한 민족적 교회로 성장하기는 했지만 애굽에서 특별한 기업을 얻을 수는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생존을 위한 여러 가지를 소유하고는 있었지만 재정적으로는 넉넉할 수 없었고 특히 교회를 건축할 만한 어떤 준비를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정황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섭리를 전개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교회 건축에 필요한 재물을 준비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시어 애굽이 10가지의 재앙을 당하게 된 이유 중에는 하나님의 이와 같으신 특별 섭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토록 무서운 재앙을 계속하여 당하면서도 바로가 이스라엘의 출국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할 때에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애굽인들이 이스라엘을 떠나보낼 때 그들에게 많은 재물을 주어서 보내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애굽으로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떠나주는 것만으로도 황송하고 감사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속히 들어주어 그들이 한시라도 빨리 떠나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한편 우리는 야곱교회의 출애굽을 통하여 당신의 교회를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멋지신 긍휼을 또 한번 보게 된다. 야곱교회가 애굽으로부터 받은 멸시와 수모는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자존심과 긍지에 크게 상처가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곱교회가 허둥지둥 애굽을 떠나게 된다면 그것은 기독교역사에 수치스러운 기록을 남기는 것이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야곱교회의 출애굽을 그와 같게 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교회가 애굽을 떠날 때에 패잔병들처럼 허둥지둥 도망치듯 떠나지 않게 하셨다. 야곱교회는 승리자로서 애굽으로부터 수많은 전리품들을 챙겨 가지고 보무<步武>당당하게 떠났던 것이다.<출12:35-36>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사 바로와 애굽에게 크나 큰 패배를 안겨 주셨고 야곱교회로 하여금 승리자로서 출애굽 하시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야곱교회에 대한 자존심을 세워주셨으며 야곱교회가 그동안 겪은 고초를 크게 위로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예고하시고 약속하신 것<창15:14->에 대한 성취였다.
4)하나님의 영광선포.
야곱교회 말기에 일어난 교회와 애굽간의 분쟁, 그리고 드디어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하는 하나님 교회의 이동은 하나님의 교회역사에 대한 또 하나의 획기적인 이정표를 세운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건들을 통하여 교회 위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역사를 광범위한 차원에서 증거하시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만방에 선포하셨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시어 그들에게 10가지의 재앙을 내리신 것에는 보다 큰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능력을 선포하고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모세가 하나님의 존재를 묻기까지 그리고 모세와 바로의 대결이 있기까지 하나님은 근동일대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분이셨다.
이스라엘 민족이 나름대로의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가지고 종교적 신앙생활을 하였고 근동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셈어 계통의 사람들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사상이 나타나기는 하였지만 하나님은 아직 감추어지신 분이셨다. 하나님은 다만 근동일대의 사람들이 섬기는 많은 신들중에 하나 정도로만 인식되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리셔야할 필요가 있었다.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능력의 완전하심을 선포하는 것은 세 가지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첫째는 이스라엘에 대한 선포와 가르침이다. 이스라엘은 이제 곧 모세의 인도 하에 애굽을 떠나서 가나안을 향하여 진군하게 된다. 그러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자신들을 인도하는 것이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증명해주고 확인시켜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모세가 소명을 받고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존재한 자>라고 선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 <자존자>라고 선포하심으로서 자신이 일반신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오직 유일무이 하신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셨던 것이다. <출3:13-14>자존자 라는 이름은 당시는 물론이요 종교역사상 영원히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이름으로서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독보적인 이름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와같은 선포는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무지한 그들에게 이해될 수 없는 것 이었다. 따라서 애굽의 재앙사건과 홍해사건을 통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증명하고 확인시켜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둘째는 애굽에 대한 선포와 가르침이다. 애굽은 국왕 바로를 절대적 신으로 섬기는 국가였다. 따라서 그들은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을 잡신 중의 하나로 인식하였고 무시하였다. 그러한 애굽에게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능력을 확인시켜 주지 않으면 그들은 계속하여 이스라엘을 잡아두려 할 것이며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할 것이었다.
이때에 비로소 선포되어진 자존자 하나님은 그러나 모세와 바로간의 대결을 통하여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증거 하신다. 우리는 모세와 대결하는 바로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당신의 역사를 주권적으로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경륜을 보게 된다. 여러 차례의 절망적인 패배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여전히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자신을 비롯한 전 국민의 장자들과 짐승들의 초 태생까지 죽음을 당한 후에야 비로소 이스라엘을 내보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바로는 다시 마음을 바꾸어 이스라엘을 공격함으로서 실추된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의 인간적 욕심이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교회를 궤멸시키려는 사단의 끈질긴 도전과 그것을 통하여 오히려 교회적 승리의 역사를 진행시키시는 하나님의 경륜이었다. 성경은 바로의 어리석음을<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셨음>으로 증거한다. 따라서 그것은 한편으로는 사단의 끈질긴 투쟁의 역사였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를 선포하시려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도적, 섭리역사의 결과였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바로가 모세와 대결한 처음 몇 번의 상황들은 바로가 패배를 인정하기에 부족한 것 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결이 거듭될수록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는 모세와 애굽에 돌아가는 엄청난 피해를 감안할 때에 바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꺽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 이하의 일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의도적으로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신 하나님의 목적 있는 주권적 섭리의 결과였던 것이다.
셋째는 장차 이스라엘이 진군하는 과정의 부족들과 민족들에 대한 선포였다. 하나님의 교회가 진군하는 과정의 주변들에 존재하는 부족과 민족들은 아직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연히 이스라엘의 진군을 가로막고 방해할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애굽과 바로를 통하여 장차 이스라엘의 가나안 진군 과정을 가로막을 자들에게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확실하게 보여주신 것이다.
결국 애굽과 바로에 대한 하나님의 선포는 애굽과 바로에 대한 하나님의 선포일 뿐만 아니라 가나안을 향하여 진군하는 하나님의 교회 앞을 위협하려는 국가와 민족들에 대한 선포였으며 궁극적으로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하게 될 모든 세계를 향한 영원하신 선포였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바로의 대결에 사용하신 각종 방법들은 점진적으로 그 차원을 높여가다가 장자의 죽음 사건과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을 통하여 절정에 이른다. 결국 장자들의 죽음사건은 모든 것에 대한 생사여탈<生死與奪>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었고 홍해사건은 대 자연의 운행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진리를 선포하는 장엄한 선포들이었다.
5)광야교회의 준비.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민족교회를 통하여 또 다른 역사를 준비하신다. 모세라는 위대한 지도자를 예비하시고 그를 통하여 광야교회를 준비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사단의 흉계와 하나님의 역사를 대비해볼 수 있다. 사단은 하나님의 교회를 붕괴시키기 위하여 애굽의 국가 정책적 차원에서 이스라엘 교회의 남자 어린아이들을 참살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모세라는 사내아이 하나를 애굽왕궁을 통하여 지도자로 양육하신다. 모세는 애굽 왕궁에서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로 크게 성장하였고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장차의 이스라엘 광야교회를 이끌어 가게 되는 하나님의 훌륭한 종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이르자 이스라엘 민족교회는 모세라는 훌륭한 지도자의 인솔 하에 애굽을 떠나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가나안 교회를 향하여 진군하였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 궁정에 맡겨서 탁월한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로 성장시키신 것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다. 모세는 장차 광야교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로서 수많은 전쟁을 치루어야했고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율법을 통하여 성경을 기록해야할 중대한 사명 자였기 때문이다.
6)메시야의 대속죄제선포.
하나님께서는 야곱교회를 통하여 메시야의 대속죄제를 통한 하나님과 교회의 관계회복에 대한 섭리를 신학적으로 정립하셨다. 메시야에 대한 신학정립은 모든 애굽인들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된 장자의 죽음사건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장자들을 치실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인방과 좌우설주에 뿌림으로서 장자의 죽음을 모면했다. <출12:21-22>그러나 그것은 장자의 죽음을 모면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를 통한 인류구원에 대한 예표적 선포였고 나아가서는 하나님과 교회의 관계회복에 대한 선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성경은 훗날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2:14-16>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는 좁은 차원에서는 구속사적인 것이었지만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과 교회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원론적 신학체계에서 구속사적인 문제는 하나님과 교회의 관계회복에 뒤따라 진행되어지는 결과론 적인 것들 중에 하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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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이미 예고하신대로 그리고 작정하신대로 하나님의 교회를 탄압한 애굽을 징계하셨고 그 징계를 통하여 교회 위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선포하셨다. 능력의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 권위의 하나님의 절대성을 선포함과 동시에 아울러 하나님 교회의 권위와 권세와 능력을 또한 알리신 것이다. 애국과 관계된 하나님의 선포는 기독교 역사의 진행이 결코 전설적인 것이나 신화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임을 확인시키고 보증하시는 의도적 섭리였다.
애굽의 이스라엘 민족교회에 대한 역사성과 실제성은 당시의 일반역사들을 통하여 실제적인 확인과 역사적인 보증을 받는다. 역사가들에 의하여 다양한 주장들이 있지만 우리는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민족교회가 애굽왕 아멘호텝2세의 치세 하에서 출애굽 한 것으로 본다. 이와같은 견해는 애굽의 비돔과 라암셋성 건축역사와 히브리인들에 대한 박해정책이 모세가 출생하기 이전 곧 모세의 나이 80세 이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볼 때에 그러한 역사적 사실들이 애굽18왕조의 첫 왕인 아모스를 비롯하여 그의 후계자들인 아멘호텝1세 투트모스1세 투트모스2세 투트모스3세 아멘호텝2세의 통치하에서 있었던 것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애굽을 비롯한 당시의 주변 역사문헌들을 통하여 증거 되고 있다. 물론 애굽의 역사서에는 히브리인들에 대한 박해문제와 출애굽사건을 전후한 애굽의 재앙과 홍해사건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일반 역사가들 중에는 그 점을 근거로 하여 출애굽을 전후한 성경의 증거들을 부인하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당시의 애굽 역사에 그 점이 의도적으로 누락되어졌거나 아니면 후대의 애굽 역사가들이 그 점을 고의적으로 제외해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의 애굽왕 파라오는 애굽에 있어서 영원불멸의 신적 존재였고 따라서 노예집단인 히브리인들과의 대결에서 파라오가 패배한다는 것은 국가적인 수치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애굽 주변 민적들의 역사와 고대 팔레스틴 지역민족들의 역사에는 히브리민족의 이동역사가 비교적 상세하게 나타난다. 히브리인들에 의해서 애굽의 국고성인 비돔과 라암셋이 건축되었음이 나타나며 히브리인들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진군하는 과정에 있었던 각종 전쟁들이 나타난다.
2.광야교회.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의 민족교회는 모세의 인도 하에 광야교회 시대로 전환된다. 이스라엘의 광야교회는 모세의 지휘권이 여호수아에게 넘어가기 까지 약40여 년간 수많은 산전수전을 겪는 가운데 교회의 내적, 외적 기틀을 세운다. 모세의 광야교회에 주어지는 신학적인 문제들은 매우 다양하지만 교회사적인 차원에서 부분별로 정립하게 될 것임으로 여기에서는 역사적인 문제만을 논증하기로 한다.
1)율법의 정립.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광야교회를 통하여 10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정립하셨다. 모세오경으로 명칭 되는 율법서는 모세를 통해서 기록정리 되어졌는데 거기에는 교회에 대한 전체적인 하나님의 섭리가 압축되어있다. 광야교회를 통하여 정립된 하나님의 율법에는 예수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는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모든 섭리가 압축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아직은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점진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예표적, 상징적인 것이었다. 하나님의 섭리가 구체적으로 정립되지 않고 점진적, 예표적, 상징적으로 정립된 것은 당시의 신학적 수준이 아직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일 만한 경륜이 되지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이와같은 율법의 점진성을<몽학선생>이라고 표현함으로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어지는 하나님의 점진적 섭리임을 증거 하였다.
2)의식의 제정.
하나님께서는 광야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제사>법을 비롯한 각종 의식들을 제정하여 주셨고 제사장들을 세우시어 교회를 목회하고 치리하는 각종 원리들을 제정하여 주셨다. 이와같은 것들은 장차의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조직적 체계를 이루는 원리가 되었으며 신약교회 시대의 기독교가 구약시대 기독교와 동일한 하나님의 기독교라는 사실을 증거해준다. 광야교회에는 이외에도 교회건축을 비롯한 많은 것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았는데 그 모든 것들은 앞으로 분야별로 상세하게 논증되어 질것임으로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3)신앙적 방황.
광야교회는 신학적인 면에서는 기독교 역사에 하나의 금자탑을 세우는 쾌거를 이룩하지만 신앙적인 면에 있어서는 부끄러운 역사를 후세에 남겼다. 광야교회는 가나안을 향하여 진군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신앙적 오류를 범하였지만 특히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광야로 회군하는 부끄러운 역사를 후세에 남겼다. 이러한 광야교회의 신앙적 실패역사는 교회의 양면성을 실제적으로 보여준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면서 또한 성도들의 교회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일 때에 교회에는 언제나 승리만 존재한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패배하지 않으시며 오직 승리의 전진만을 계속하신다. 반면에 교회가 성도의 교회일 때에 교회는 수많은 실패를 거듭한다. 교회가 성도의 교회일 때에 거듭되는 실패의 원인을 고찰해보면 교회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가 순종을 전제로 하 는 행위 계약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이미 행위 계약에서 면제되어 하나님의 은혜계약 안에 존재한다. 따라서 교회의 실패는 행위 계약에 관련된 불순종 문제로 실패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실패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섭리밖에 있느냐? 하는 문제 때문에 일어난다. 훗날 예수그리스도는 이점을<교회가 예수 안에 있고 아니 있고>의 문제로 정립시킨다. 즉, 교회가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유기적 조직체로서 하나님의 법과 질서에 순종할 때에<교회가 하나님의 교회가 되어있을 때에> 그 교회는 계속하여 승리의 전진을 계속하게 되지만 교회가 그 반대의 입장이 되어 위법과 편법 등등의 불법을 행할 때에<교회가 성도의 교회가 되어있을 때에>그 교회는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실패는 다만 인간적 교회만 실패할 뿐 하나님의 교회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교회가 불법을 행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자체를 종료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패의 원인인 사람들을 교체시키시어 다른 사람을 세우심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존속시키고 계속하여 진행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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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같은 사실은 에덴교회 이래의 모든 교회들의 역사를 통하여 나타나며 특히 모세와 여호수아의 임무교대를 통하여 증거 된다. 에덴교회가 실패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교회자체를 멸절시키지 아니하시고 아담교회로 존속 유 지하셨다. 모세는 아직 건강하여 맡은바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예루살렘 교회가 실패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디아스포라교회로 확산하시어 오히려 교회를 확장하셨다. 이와같은 사례는 기독교역사에 수 없이 나타난다. 결국 사라지거나 폐지되는 것은 교회의 내적인 부분이 아니라 교회의 외형적인 부분이다. 교회는 지휘자가 바뀌거나 또는 장소가 변경되면서 여전히 존재하고 오히려 더욱 크고 다양하게 확장되는 것이다.
4)하나님의 교회전파.
이스라엘의 광야교회 40년 역사는 내면적으로는 많은 애환을 겪지만 외면적으로는 근동일대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를 전파하는 중요한 역사를 전개한다. 당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향하여 진군하는 여정에는 크고 작은 많은 국가와 민족들이 있었다. 그들은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광야교회를 통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을 선포하신다. 그들은 광야교회의 승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권위와 위엄을 알고 광야교회의 실패를 통하여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보게 된다. 아직 문화와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의 상황 하에서 권위는 곧 힘으로 상징되었고 힘은 곧 전쟁의 승리를 통하여 나타난다. 광야교회의 계속되는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선포하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일반적인 개념에 의하면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스라엘에게 대항하는 주변국가와 민족의 도전은 참으로 이해되지 않을 만큼 어리석고 무모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를 강팍하게 하시어 그들에게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선포하신 것과 같은 차원의 하나님 섭리였다.
5)교회훈련과 교육.
광야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는 당시의 근동일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모든 교회들을 훈련하시고 교육하신다. 교회들이 설립되는 과정이나 성장하는 과정이나 또는 크게 성장한 후의 모습들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거의 공통적인 유사성이 있다. 그것은 교회적 훈련과 연단의 과정이며 방황과 실패의 과정이며 불법과 불순종의 과정들이다. 교회들은 거의 예외 없이 그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하고 발전하는가 하면 때로는 실패하고 무너지기도 하였다. 광야교회는 그러한 교회들의 특성을 예표하고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모든 교회를 향한 실전 사례적 교육현장 이었다. 따라서 모든 교회들은 광야교회 역사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하나님의 섭리에 절대 순종해야 한다.
3.실로교회와 12부족교회.
성경이 말하는<아모리족속의 죄악관영>은 세기>초에 이루어졌다. 이때에 가나안과 아모리족의 도시국가 지도자들은 지나친 권력과 권세욕에 의한 전쟁과 원시 종교적 축제를 통한 극심한 퇴폐와 향락으로 인하여 혼란과 무질서를 자초하였다. 이러한 틈을 타서 애굽은 다시 팔레스틴을 정복하여 통치권을 회복하였고 헷족속은 북부 팔레스틴과 시리아 내륙으로 후퇴하였다. 이로서 아모리 족속을 비롯한 가나안의 도시국가들은 애굽의 식민지가 되었고 그들의 도시국가들은 거의 지리멸렬<支離滅裂>상태가 되었다.
한편 모세로부터 지휘권을 이어받은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광야교회 시대를 마감하고 가나안 교회시대를 열기 위하여 고군분투한다. 여호수아에 의하여 인도되는 이스라엘 교회는 초기에는 광야교회의 상황을 계속하여 답보한다. 그러나 모세로부터 강하고 담대한 지휘권을 전수받은 여호수아의 지휘 하에서 이스라엘 교회는 드디어 가나안 정복을 시작한다.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너 산악지대를 점령한 후 가나안의 여러 도시국가들을 계속하여 정복하면서 서부 팔레스틴을 장악하였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자 이스라엘 12부족에게 지역을 분할해 주었고 실로에 교회를 세운다. 실로에 세워진 교회는 장차 세워질 이스라엘 12부족교회를 총괄하게 되는 총회교회였다. 당시의 실로는 가나안의 중앙에 위치한 성읍으로서 12부족교회의 총회교회 위치에 매우 적당하였다. 실로에 총회교회를 설립한 여호수아는 계속하여 가나안 각 지역에 12부족 교회를 세워나간다. 실로의 총회 교회와 가나안 12부족교회는 장차 세워질 예루살렘 총회교회와 예루살렘 총회교회를 주축으로 하여 유기적 조직 체제를 형성하게 될 이스라엘의 전체적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유기적 조직체계를 이루는 하나님의 모든 기독교 교회를 상징하고 예표 하는 것이었다.
성경을 구속사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하면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와 안식의 땅으로서 곧 하나님의 나라<천국>을 예표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독교 교회사적 차원에서 이해할 때에 가나안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들에게 부여되는 사명과 그 사명을 완수하는 사역적 현장을 예표한다. 가나안이 영원한 안식의 하나님 나라를 예표 한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을 통해서 영원한 안식을 누려야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결코 가나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지금까지 살아왔던 험난한 삶 이상의 고된 삶을 살았다. 항상 크고 작은 전쟁에 시달렸으며 왕들의 독재 정치 하에서 고된 신음을 하였고 나중에는 외세의 침략을 받아 국가가 멸망하고 민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비극을 맞이하였다. 물론 그러한 결과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신앙적 삶의 대가였지만 어쨌든 그들에게 있어서의 가나안은 결코 영원한 안식의 하나님 나라가 아니었다. 우리는 이러한 차원에서 가나안을 평안과 행복의 하나님 나라로 인식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교회적 사명의 고군분투적 사역현장으로 해석한다. 교회에 주어진 사명들은 교회들이 지고 가야할 십자가로 상징된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여러차례 말씀하신<자기 십자가>란 성도들의 개인적 사명 일 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들에게 일률적으로 주어진 사명이었다. 십자가, 곧 교회의 사명은 분명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과 어려움을 넘어서 기쁨이요 평안이요 영광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고난당하고 고통을 겪는 것은 곧 하나님 앞에 감사이고 기쁨이고 영광이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젓과 꿀이 흐르는 안식처로 말씀하신 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룬 교회들의 기쁨과 영광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가나안을 예표하는 젖과 꿀을 평안과 안식의 달콤하고 풍요로운 젖과 꿀로 인식하지 않고 젖과 꿀을 영원한 복음, 생명수인<하나님의 말씀-로고스-예수그리스도>로 받아들이며 가나안을 예수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사명적 차원의 고군분투적 교회로 해석한다. 그리고 가나안에 대한 이러한 우리의 해석은 이스라엘의 고군분투적 가나안 삶과 그 곳을 통하여 오신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입증되었다. 교회의 평안과 안식과 기쁨과 영광은 육체적, 신앙적인 것을 포함하지만 오히려 그것들을 초월한다. 육체적, 신앙적 평안과 안식과 기쁨과 영광은 나를 위한 것이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잠시적인 것이며 일시적인 것으로서 형이하학적이다. 하나님의 종, 하나님 자녀들의 형이상학적 안식과 기쁨과 영광은 육체적, 신앙적인 것을 포함하면서 신학적, 이데아적, 인격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맡은바 사명을 완수하는 사역의 현장들과 사명이 행의 과정들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와같은 차원에서 가나안은 곧 당시의 실로교회와 12부족교회를 비롯한, 그리고 하나님의 기독교 역사 속에 영원히 세워지는 모든 교회들의 고군분투적 사역의 현장이 되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젖과 꿀로 선포하신 것에는 또 다른 신학이 있다. 교회가 하나님의 섭리에 절대 순종할 때에 교회는 당연히 젖과 꿀의 풍요와 안녕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의 섭리에 역행할 때에 교회는 당연히 고난과 환난을 당한다. 결국 교회는 이미 젖과 꿀<풍요와 안녕>으로 주어졌지만 교회가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여부에 의하여 상황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와같은 사실은 가나안을 통하여 젖과 꿀<풍요와 안녕>을 누릴 수 있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섭리에 역행하다가 끝내고 난과 역경을 자초한 것에서 증명된다.
이러한 차원에서 여호수아 지휘하의 교회역사를 논증할 때에 우리는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길이 없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복한 후 그곳에 실로의 총회교회와 가나안 12부족교회를 설립한 것으로 끝나지 말고 오히려 그때부터 본격적인 교회의 기틀을 세워야했다. 12부족교회들에게 제사장들을 목회자로 세워 부족교회들이 제사장의 인도하에 하나님 중심의 신앙적 삶을 살게 하며 또한 실로교회의 대제사장 제도를 통하여 12부족교회를 일사분란하게<一絲不亂>하게 이끌어가는 교회조직체계를 세웠어야 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여호수아 시대의 교회는 그럴만한 신학적 경륜이 없었음으로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같은 주장에 반대한다. 여호수아 시대의 교회는 가나안 12부족교회를 일사불란하게 이끌어 갈 수 있는 유기적 조직적 교회체계 기능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 모세 시대의 광야교회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조언을 받아들여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 등등의 조직적 행정적 지휘체계를 세웠고 특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막교회와 제사장 제도를 중심으로 하는 조직적 교회 운영제도를 실시했다. 따라서 모세의 광야교회 제도를 그대로 전수받은 여호수아 시대의 교회는 실로총회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이스라엘 전체 교회체제를 충분하게세울 수 있었다.
만약에 여호수아 시대의 교회가 그러한 교회조직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진행 하였더라면 이스라엘 국가와 히브리 민족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가나안을 중심으로 하는 근동일대는 당연히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지배하에 예속되었을 것이고 이스라엘은 세계를 정치적 종교적으로 이끌어가는 기독교의 중심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교회에 약속하신 열국의 아버지, 제사장 나라가 되는 영광을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 시대의 교회는 조상대대로 약속되어진 가나안을 평안과 풍요를 통한 삶적 유토피아로만 인식하였지 그곳을 통하여 하나님의 기독교가 전 세계를 향하여 본격적인 진군을 하게 된다는 개념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가나안에 입성하는 것에서 만족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여호수아 교회로부터 바톤을 이어받은 사사시대의 교회는 참으로 오랫동안 그에 대한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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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가나안에 12부족교회를 세웠다는 우리의 주장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이 있다. 첫째는 성경은 결코 가나안의 12부족교회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둘째는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교회를 세우셨다는 외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와같은 이의제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증하기로 한다.
성경이 가나안 2부족교회에 대하여 문자적으로 증거 하지 않는다고 하여 가나안의 12부족교회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성경의 많은 것들을 거부해야 한다. 성경은 모든 것을 문자적으로 명시해 주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당시의 여러가지 정황들을 성경의 증거로 제시하고자 한다.
1.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12부족들에게 분배할 때에 레위지파는 제외하였다. 레위지파에게는 가나안 전 지역의 이스라엘 12부족 성읍 중에서 48개 성읍이 주어졌으나 그것은 기업이 아니라 다만 주거용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이와같은 조치는 레위지파가 제사장으로서 가나안 전 지역 12부족들에게 분산되어져 살면서 그들의 신앙적 삶을 인도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이와같은 당시의 상황은 12부족의 삶의 현장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을 증거 한다.
2.이스라엘 사람은 일년에 세 번씩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께 예배해야하는 규례가 있었다. 따라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년에 세 번 실로의 교회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였다. 반면에 이스라엘 사람은 안식일 중심의 신앙적 삶을 살았다. 따라서 레위지파의 제사장들은 12부족 전체에 분산되어져 살면서 이스라엘의 신앙적 삶을 인도하였다. 이와같은 당시의 상황은 12부족의 삶의 현장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을 증거 한다.
3.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것은 다만 그들이 현세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보내시고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들을 세우시며 그 교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기독교 역사를 개하시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가나안에 입성한 12부족에게 교회를 세우시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4.한편 하나님께서는 그들 12부족에게 실로의 중앙총회교회와 같은 외형적인 교회를 세워주시지 않았다. 그것은 아직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섭리역사를 수용할 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실로의 중앙총회교회와 버금가는 외형적인 교회를 세워주시면 그들은 곧바로 부족적 교회별로 독립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분열시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5.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12부족들에게 단을 쌓게 하심으로서 부족교회들을 외형적인 교회로 세우셨다. <수22:10-34>이스라엘 12부족의 교회들은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반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가에 세운 교회를 기점으로 하여 세워졌다. 르우벤 지파와 므낫세 반지파가 요단언덕 가에 처음으로 교회를 설립하였을 때 이스라엘 모든 회중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그것을 훼파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자신들의 신앙생활에 큰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됨에 따라 모든 부족들이 함께 교회들을 세웠다. 이러한 교회의 설립은 훗날 포로시대에도 계속되어 졌으며 이스라엘은 그것을 회당<수나고게-συναγωγη>으로 명칭 하였다. 이때 이후로 저들의 부족교회들은 교회로서의 기능만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 의회, 정부의 행정기관, 재판정, 학교 등등의 기능을 함께 행사하였다.
4.사사시대 교회.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이스라엘 교회는 지도자 공백기를 맞았다. 여호수아는 후계자를 길러 세우지 않았으며 또한 특정한 자를 지목하여 세우지도 않았다. 여호수아는 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신앙적 삶을 살 것을 촉구한 후 죽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교회는 일정한 지도자의 지휘체제 하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위기 때마다 세우시는 사사들에 의해서 인도되었다. 때문에 이스라엘 교회는 지도자 공백상태 하에서 수많은 신앙적 방황을 하였다. 성경은 이와같은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17:6>
한편 이스라엘은 아직 가나안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하였음으로 가나안 원주민들과의 싸움을 계속하였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원주민과의 계속되는 전쟁에서 처음에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였지만 점차로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들 마음대로 하였고 나중에는 가나안 원주민들과 적당히 타협하는 가하면 종래에는 그들과 연합하는 가운데 그들과 통혼<通婚>하였으며 드디어는 그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섬겼다. 이제 이스라엘 교회는 윤리적, 신앙적으로 심히 타락하고 부패한 가운데 혼란과 무질서의 암흑적 역사를 반복하였다. 사사시대의 교회는 거의 유명무실한 상태였고 교회로서의 기능은 거의 마비상태에 있었다. 성경은 이와같은 역사적 사실을 실로교회의 상황을 통하여 증거 하여준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 하더라 그 제사장들이 백성들에게 행하는 습관은 이러하니 곧 아무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살 갈고리를 가지고와서 그것으로 남비에나 솥에나 큰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되 실로에서 무릇 그 곳에 온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뿐 아니라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치 아니하고 날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취하라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개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 이었더라 -삼상2:12-17>
<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 있었더라-삼상4:4>
엘리 대제사장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 제사장들의 만행은 제사장으로서는 결코 행할 수 없는 악행들이었으나 당시의 대제사장인 엘리는 그들을 징계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이스라엘 장로들은 불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하자 지성소에 있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전쟁터로 옮겼는데 이때에 엘리 대제사장은 그것을 용납 내지 방관하였다.<삼상2:12-17; 4:4>이러한 성경의 증거들은 당시의 실로 교회가 여호와 하나님의 법도에서 크게 벗어나있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 반면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실로교회의 그러한 불법성을 일시적으로 허용하셨다. 성경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일시적인 허용을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은즉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 같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사2:20-22>
사사시대의 교회가 하나님의 법도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배교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의 12부족들은 가나안에 입성한 후 부족별로 교회들을 세웠고 이때로부터 부족교회들은 실로의 총회교회로부터 어느정도 독립하여 자치권을 행사하였다. 즉 ,실로의 중앙총회교회와 신학적 ,신앙적, 행정적인 유기적 조직체계를 이루지 아니하고 점차 독립적인 신앙적 삶을 구축해 나간 것이다. 그들은 일년에 세 번씩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절기에는 실로의 중앙총회교회에 올라가 제사를 드렸으나 안식일을 비롯한 일반절기와 축제들은 지방의 부족교회를 통하여 자체적으로 지켰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사망한 후 사사시대에 이르러서는 중앙총회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이 점차 사라져갔고 나중에는 그러한 민족적 일체성의 신앙생활들이 아예 유명무실 하여버렸다. 따라서 이러한 부족적 교회들의 독립은 아직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체계를 갖추지 못한 부족교회들을 변질시키고 교화시키는 결과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사사시대 교회를 버리지 아니하셨다. 사사시대 교회는 사무엘이 등장하기까지 무려 315년간이나 계속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사사 교회를 보호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교회의 배교를 좌시 하시지 아니하시고 이방인들을 통하여 매섭게 징치 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이방인들의 압제로부터 항상 구원해 주셨으며 그들의 신앙적 삶을 수시로 독려하셨다. 사사교회의 암흑적 315년은 그들에게는 매우 가혹한 시련의 세월 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세월을 통하여 또 다른 놀라운 섭리 역사를 전개하신다.
우리는 사사 시대교회의 315년간에 대한 의미를 하나님께서 일반역사를 등용 하시는 섭리적 차원에서 정리한다. 당시의 일반 역사는 아직 하나님의 기독교 역사를 보좌하거나 변증하거나 보증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지 않았고 다만 준비하고 예비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기독교를 보좌하고 변증하고보증하게 될 로마나 마케도니아 페르시아 같은 국가들은 아직 하나님의 역사를 보좌 할만한 준비를 갖추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의 왕국이 건설 될 수 있는 준비도 아직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사사 교회를 주권적으로 힘차게 진군 시키지 아니하시고 일반 역사의 진행에 맞추어 서서히 진군 시키셨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반역사의 진행에 맞추기 위하여 사사시대 교회를 고의적으로 방치하시거나 또는 침체 시키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사사시대 교회로 하여금 장차 세워지게 될 이스라엘 왕국을 준비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12민족에게 가나안을 나누어 주신 것은 다만 땅에 대한 분배 즉, 그들의 삶의 터전에 대한 분배로 보아서는 않된다. 그것은 일반 역사적인 차원에서는 이스라엘 왕국건설에 대한 지역적 배치이며 행정적 분할이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적 차원에서 그것은 예루살렘교회를 주축으로 하는 교회의 확장이다. 하나님께서는 사사시대 교회를 통하여 실로 총회 교회<나중에는 예루살렘 총회교회 >를 주축으로 하는 12 교회들을 세우시고 그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기독교 역사의 확장을 준비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사사시대 교회는 장차 이스라엘에게 세워질 신정적 왕정국가를 준비하는 과정의 교회였으며 전 세계에 확장되어질 기독교 교회의 토대를 준비하는 중요한 시대적 사명을 받은 교회였다. 그러나 사사시대 교회는 물론이고 그 이후의 왕국 시대 교회들까지도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와 교회의 시대적 사명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때문에 예루살렘 총회 교회를 통하여 확장되고 발전할 기독교 역사는 그들이 무시하고 배척한 이방의 국가와 민족들의 몫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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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우리는 사사시대 교회의 고난을 오해하여 그것을 하나님의 의도적인 주권 섭리 역사라고 생각해서는 않된다. 물론 모든 역사는 당연히 하나님의주권적 섭리역사에 의하여 시작되고 진행되고 결과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역사를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것으로 잘못 인식하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모든 잘못의 책임자로 만드는 망령된 죄를 범하게 된다. 그런 식으로 인식하면 여호수아가 후계자를 세우지 아니한 것이나 이스라엘의 배교와 타락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의도적인 계략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신 것이나 이스라엘의 진군을 방해하는 자들의 마음을 강팍케 하신 것을 이스라엘 교회에도 적용하면 않된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사람들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시는 것은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이나 또는 악한 일에 등용 되어지는 일반적인 종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 즉, 하나님의 선한 역사에 등용 되어지는 하나님의 선한 종들에게는 그러한 강팍함의 섭리역사가 적용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용서와 긍휼과 은혜만 적용된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과 종들에게 자율권을 주시고 그들의 인격을 또한 존중하시어 그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순종하고 충성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선한 종들은 하나님의 강제적인 주권적 진행에 기계적으로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자원적인 노력과 순종과 충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역사에 동참 하는 것이다. 여호수아의 실수나 사사시대 교회의 잘못들은 모두가 그들 자신들의 잘못이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한 의도적 결과가 아니다. 그들이 만약에 지혜롭고 아름다운 순종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따라갔다면 그들의 315년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열매들을 맺어가는 멋지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역사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교회 지도자들은 사사시대 교회를 통하여 후계자 문제에 대한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교훈을 받아야 한다. 지도자들이 후계자를 양육하여 세우지 않은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모세의 은퇴와 여호수아 은퇴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모세가 은퇴하였을 때에는 여호수아가 준비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교회는 건재 하였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은퇴 하였을 때에는 후계자를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교회는 고난과 분열을 맞는다. 오늘날 크게 발전하고 성장했던 교회들이 지도자가 교체되는 과정에서 사분오열 되고 더러는 아예 지리멸렬 하는 것은 지도자들이 후계자에 대한 문제를 지혜롭게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를 인도하는 지도자들은 시간적 영역적 도구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들은 당연히 다음 세대에 대한 대비를 철저하게 하여 자신은 물러나도 교회는 영영히 존재하게 해야 한다.
5.사무엘시대 교회.
이스라엘 사사시대 교회의 암흑기간은 사무엘의 출현으로 인하여 종료 되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이라는 지도자를 세우시고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민족을 군왕 정치체제의 국가로 세우신다. 어떤 사람들은 <삼상8장>을 근거로 하여 이스라엘이 왕정 국가가 되는 것을 이스라엘의 민족적 염원 때문인 것으로 주장하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왕정국가를 세우시는 것을 싫어하신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류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에 왕정 국가 세우실 것을 예정 하셨으며 따라서 이스라엘의 왕정국가에 대한 계획을 세워 놓으셨다. <창35:11><신17:14-20>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왕정국가를 허락하신 것은 모든 민족들과 조화를 이루시는 섭리이다. 당시에 대부분의 민족들이 왕정 국가 체계를 이루고 있었으며 앞으로도 오랫동안 왕정 국가가 유지될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도 왕정국가가 세워져야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만 이스라엘 왕정 국가가 일반 왕정 국가와는 다르게 하나님 중심의 신정치<神政治>체계를 이루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사무엘 시대의 교회는 이스라엘 교회가 민족적 교회로부터 왕국 교회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교회였다. 사무엘은 명실상부한 마지막 사사로서 또는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되는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의 민족적 교회가 왕국 교회로 전환되는 과도기적 교회를 이끌어간 위대한 지도자 였다. 이스라엘이 불레셋과의 전투에 크게 패배한 후 엘리 대제사장의 가문이 무너짐에 따라 지휘봉을 잡은 사무엘은 미스바 대성회를 열어 극도로 침체된 이스라엘 교회의 신앙을 회복 시켰다. 그리고 불레셋과의 전투에서의 대승을 통하여 의기소침해 있던 이스라엘의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였다. 사무엘은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와해되었던 이스라엘 교회의 신앙적 공동체의식을 회복하였고 민족을 하나님 중심의 신앙적 공동체로 결속 시켰으며 머지않아 세워지게 될 왕정국가로서의 초석을 다졌다. 이스라엘의 왕정국가는 이러한 사무엘시대 교회의 신앙적, 민족적 승리를 기초로 하여 수립 되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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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우리는 여기에서 이스라엘이 왕정국가를 세우는 과정에 있었던 하나님의 허용하심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에 대한 문제를 신학적으로 정리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왕국 정치를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의 강제적 주권 섭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용적 주권섭리에 의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제사장 중심의 종교적 국가가 되기를 원하셨고 또한 선지자 중심의 신정적 국가 체제가 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하신 하나님의 원하심을 거절하고 주변 국가들과 같은 왕정 국가를 고집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이 그것을 원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절할 것을 알고 계셨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의사를 존중하시어 그들에게 왕정 국가를 허락 하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허용적 주권 섭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의사를 존중하시어 그들에게 왕정 국가를 허락하셨지만 그들의 불순종을 분명하게 책망하신다. <삼상12장> 그러나 하나님의 책망하심은 심판적 책망이 아니라 교육적 책망이다. 우리는 이러하신 하나님의 허용하심과 책망하심의 역사 속에서 은혜 계약 하에 있는 우리들에 대한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용서하심과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 역사를 주관하시는 과정에서 어떤 사건들을 진행 시키실 때에 때로는 강제적 주권 섭리를 진행 시키시지만 반면에 당신의 종, 당신의 자녀들을 인격적으로 예우하시며 그들의 주장과 행들을 강제하시지 아니하시고 그것들을 허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주장과 행함이 비진리적 일지라도 그것을 허용하시면서 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스스로 회개하고 돌아와 바로 서기를 촉구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아담 이래의 이스라엘 교회들을 통하여 보아왔으며 뿐만 아니라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기독교 역사 현장들을 통하여 무수히 보아왔다. 어떤 사람들 <알미니안주의자, 자유주의자> 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비진리에 빠진 경우에 그것을 허용하시는 것은 죄에 대한 방관임으로 사랑이 아니다 > 라고 주장한다. 저들은 또한 <비진리적 행동에 대한 죄의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 것을 생각 때에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 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그와같은 주장이나 항변은 하나님의 은혜 계약에 대한 불 이해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 이미 앞에서 말한바 있듯이 하나님께서 자녀들과 종들의 비 진리적 주장과 행함까지도 강제 하시지 아니하시고 허용하시는 것은 자녀들과 종들의 죄와 비 진리에 대한 방관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주장들과 행함 들을 허용하시고 그들이 자신들의 주장과 행함 들을 진행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서게 하시는 것이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총의 섭리는 자녀들과 종들의 잘못을 허용하시되 방관 하시지 아니하시고 책망을 통하여 교육하시는 과정에서 분명하게 증거 된다. 따라서 자신들의 비진리적 죄에 대한 대가를 치루게 됨으로 하나님의 허용하심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주장도 잘못된 것이다. 은혜계약 하에서의 하나님의 자녀들의 죄는 하나님께 영원히 용서되어졌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원한 용서를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 지 아니하리라-사43:25>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 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 이니라- 렘31:34>
제3장.국가교회.
이스라엘이 민족적 공동체에서 왕정 국가로 전환됨에 따라 민족적 교회였던 하나님의 기독교 교회도 국가적 교회로 전환 되어졌다. 교회가 민족적 교회에서 국가적 교회로 전환 되는 것은 교회적 전환이 아니라 교회적 확장이고발전 이었다. 이제 하나님의 기독교는 세계적 기독교로 확장되고 발전되는 중요한 역사적 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와같은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의 왕정 국가형태는 일반적인 왕정국가와는 다른 매우 특이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왕정 국가는 하나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집중시키는 신 중심 정치적국가 형태로서 즉, 신정 왕국 국가 형태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세우신 국가는 장차 모든 국가에게 적용되어질 기독교적 국가 형태였다. 훗날 개혁주의자들에 의하여 정립 되어지게 될 하나님의 기독교적 국가형태는 정치와 종교가 각각 독립적인 형태를 유지하면서 그러나 서로를 보완하고 서로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었다. 즉 국가정부와 교회가 각각 독립적인 정치적 운영 형태를 유지하면서 서로의 강점은 존중하고 서로의 약점은 보완해 주고 충족시켜 주면서 다 함께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국가정부와 교회의 관계는 이미 모세를 통하여 정립되었다. 모세는 제사장제도가 세워지기 이전에는 종교와 정치 일체를 주관하였으나 제사장제도가 수립된 후에는 교회는 제사장들에게 맞기고 자신은 정치적 영역만 주관하였다. 그러나 모세가 교회에 대하여 완전히 방관한 것은 아니다. 모세는 제사장들과 긴밀히 협력하면서 피차의 영역 지휘권을 침범하지 않는 가운데 상호협력, 상호보완적 지휘체계를 이루었다.
한편 이스라엘 왕국은 왕국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교회였다. 비록 국가와 교회가 상호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고 충족시켜 주는 국가적, 종교적, 정치체계를 이루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집중시키는 신정치체계 하의 왕정 국가였기 때문에 왕국이나 교회가 근본적으로는 다함께 하나님의 교회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국교회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섭리에 불순종하였다. 특히 사울왕시대가 끝나고 다윗과 솔로몬으로 계승되는 왕국정치 체제 하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다윗과 솔로몬의 치세 하에서 이스라엘의 왕국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는 지하 감옥에 깊숙이 매장되었다. 이미 사사시대 때부터 변질되기 시작한 이스라엘 기독교는 사무엘선지에 의하여 다시 정비 되었으나 다윗과 솔로몬의 치세 하에서 완전히 변질되어 본래의 위치에서 멀리 이탈하였다. 이스라엘 기독교는 본래 기독교의 출발로서 제사장적 위치와 권세와 사명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리지 못한 것과 하나님의 경고를 만홀히 여기고 타락과 부패에 빠진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들로 인하여 본래의 위치와 사명을 스스로 버렸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스라엘왕국 교회의 안타까운 비진리적 역사를 성경을 기초로 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사울시대 교회.
사울이 왕으로 있을 때의 이스라엘 교회는 두 개로 분열되어져 있었다. <삼상11:8> 성경은 이스라엘 12부족 교회가 유다지파의 1개 교회와 나머지 11개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 지파 교회로 분열되어 있음을 증거 하나 그 원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적, 부족적 분열은 이스라엘이 다윗왕 시대를 거쳐서 남북 왕조로 분열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계속되고 있다. 사울왕국 시대의 교회는 아직 왕국과 교회간의 영역적 분리가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았으나 사무엘의 종교적 지도가 엄격하였기 때문에 사울왕의 국가행정부는 사무엘 지도 하의 교회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였다. 그러나 다윗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그리고 사단의 영향 하에 들어가 거의 이성을 잃어버린 사울은 제사장들을 무참하게 살해함으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모독하고 탄압하였다. 이때로부터 교회의 권위는 크게 위축되어 왕들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하였으며 상대적으로 왕들은 교회 위에 권위적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2.다윗시대 교회.
사울왕에 의하여 실추된 왕국교회는 다윗왕조 시대에 들어가서 더욱 추락하였다. 본래 다윗은 이스라엘국민 전체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이스라엘 12부족은 이스라엘 11부족과 유다 1부족으로 양분되어 있었고 다윗의 부족인 유다지파만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였을 뿐 나머지 11개 지파는 사울이 사망한 후에 그의 아들이 스보셋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이스보셋이 사망한 후 다윗이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이스라엘을 통일한 다윗 왕국시대의 교회는 처음에는 매우 희망적이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통일한 후 명실상부한 통일국가의 군주가 되자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겼고 실로의 총회교회도 예루살렘으로 옮겼다. 본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돈독하였던 다윗왕을 통하여 교회 확장시대가 도래하는 듯 하였다. 특히 다윗이 오랫동안 기럇여아림에 방치되어 있던 여호와의 궤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옮겨 안치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다윗왕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절대적이었던 반면에 세속적인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서 군왕으로서의 품위를 상실하였고 특히 여자를 좋아하여 많은 처첩을 거느리면서 심히 타락하였다. 다윗은 밧세바를 취하기 위하여 밧세바의 남편이자 충실한 부하 장군인 우리야를 교사하는 패륜적 죄악까지 범하였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 나단으로부터 책망과 경고를 받았으나 회개하지 않았고 패륜과 악행에서 돌아서지도 않았다. 이러한 와중에서 다윗의 왕권은 더욱 권세적인 것이 되어갔고 교회지도자들은 상대적으로 다윗의 왕권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러한 당시의 실상은 나단선지자의 행동을 통하여 증거된다. 나단선지는 처음에는 선지자의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여 다윗과 밧세바에 대한 불륜을 엄중하게 책망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밧세바와 야합하여 솔로몬을 왕 위에 추대하는 비진리적 입장을 취했다. 결국 다윗왕조 시대의 이스라엘 교회는 교회로서의 권위를 행사하지 못하고 왕의 권위에 적당히 야합하는 비진리적 상태 하에 있었다.
1)다윗에 대한 오류적 평가.
거의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다윗을 이스라엘 왕들 중 최고의 성군, 모범적 군왕, 신앙적 지도자 등등으로 추대한다. 그리하여 목사장립 때나 교회설립예배 때에 후배 목회자들에게 다윗과 같은 목회자가 되라고 권고한다. 저들이 다윗을 모범적 성군으로 추대하는 배경에는 성경 주석들이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행적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해석한다. 저들은<삼상13:14><왕상3:14><왕상15:5><행13:22>등등과 다윗이 기록한 수많은<시편>들을 근거로 하여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아름답고 훌륭한 신앙적 통치자였다고 해석한다. 주석가들은 다윗을 매우 현명하고 의로운 신앙적 통치자로 인정하여 그가 임종시에 솔로몬에게 내린 피의 복수<왕상2장>까지도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즉 다윗을 적대한 자들은 곧 하나님을 적대한 자들임으로 그들을 엄중하게 처단하여 새로운 왕조 하에서는 그러한 불미스러운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게 하였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때문에 많은 목회자들은 이러한 주석가들의 견해를 받아들여 다윗을 의로운지도자, 신앙적지도자, 모범적지도자, 훌륭한지도자 등등으로 생각하여 다윗과 같은 목회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다윗을 성군으로 추대하는 성경적 근거.
다윗을 모범적 성군으로 추대하는 자들이 제시하는 성경 귀절들은 다음과 같다.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삼상13:14>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 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13:22>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왕상3:14>
<이는 다윗이 헷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 하였음이라-왕상15:5>
(2)성경에 대한 해석.
①<삼상13:14>
<삼상13:14>은 사무엘이 사울에게 한 말로서 사울이 왕으로서의 본분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왕 위를 다른 이에게 양도하신다는 것이다. 주석가들은 이 말씀에 나오는<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를 다윗을 지칭한다고 해석한다. 본문의 내용에 있는<구하여>라는 용어를 적용할 때에 그것은 내정된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합당한 자를 구한다는 것으로서 다윗을 지칭한다고 할 수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 속성적, 섭리적 차원에서 해석할 때에 이미 다윗이 내정되었음이 분명하므로 그것이 다윗을 지칭 한다는 해석은 매우 정당하다. 반면에<삼상13:14>은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되기 이전의 말씀으로서 다윗이 패역한 자가 되기 이전, 즉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무장되어 있던 때의 말씀이다. 따라서 <삼상13:14>을 근거로 다윗이 모범적 성군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분명한 오류다.
②<왕상3:14>
<왕상3:14>은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후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어 하신 말씀이다. 주석가들은 이 말씀에 나오는<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을 근거로 하여 다윗이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성경이 증거 하는바에 의하면 다윗은 결코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였다. 본래 왕에게는 네 가지의 기본적인 지침이 명령되어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이스라엘민족이 왕을 세울 것에 대비하여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지침을 내리셨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서 그 땅을 얻어 거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열국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우리라는 뜻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사람으로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왕인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 것이며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 이니라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 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신17:14-20>
A.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왕권이 타민족에게 계승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훗날 이스라엘의 왕권은 이두메인 혜롯에게 넘어가므로 하나님의 명령이 지켜지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의 원조는 다윗이었다. 다윗이 하나님의 뜻대로 왕위를 지키지 않은 것이 후대 왕들과 국민들에게 전이<轉移>되어 국가와 민족 전체가 하나님을 배교하였고 결국은 국가와 민족이 패망하여 그러한 역사적 결과를이룬 것이다.
B.왕인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후에는 그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군대를 의지하는 통치를 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통치를 하라는 것이다. 말<馬>은 군대를 의미한다. 당시의 군대 중에 최고의 군대는 기병대<騎兵隊>와 전차대<戰車隊>였는데 모두 말들이 이끌었다. 둘째는 애굽과 교류하지 말라는 것이다. 당시에 애굽의 기병대와 전차대가 단연 으뜸이었는데 그것은 애굽의 말들이 가장 우수했기 때문이다. 각국 왕들은 애굽말을 사들여 기병대와 전차대를 조직하였고 애굽은 비싼 금액과 정치적 조건을 내세워 애굽말을 공급하여 국력을 크게 신장하였다. 애굽이 말 공급을 빌미로 내걸은 조건들은 대부분 정치적인 것이었으며 그중에는 애굽 왕족여인들과의 정략결혼이 포함되었다. 애굽이 왕족 여인들과의 정략결혼을 추진한 것은 애굽 여인들을 통하여 애굽의 신을 보급하기 위함이었다. 애굽의 신은 곧 애굽왕 파라오<바로>다. 애굽왕은 약소국가들로 하여금 자신을 신으로 섬기게 하기 위하여 그러한 정책을 시행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들에게 말을 금지한 것과 애굽 출입을 금지한 것은 말과 애굽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이와같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군대를 의지하였고 말을 사들이기 위하여 애굽과 교류하였다. 다윗의 군대 의지와 애굽 교류는 그렇게 절대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 솔로몬은 부왕의 전철을 계승하여 군대를 절대적으로 의지하였고 군대를 양성하기 위하여 애굽과의 교류를 확대하였다. 성경은 솔로몬 군대의 위용을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솔로몬의 병거의 말의 외양간이 사만이요 마병이 일만 이천이며-왕상4:26>
그러나 솔로몬의 군대가 강성해지는 것에 비하여 이스라엘민족의 하나님신앙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변질되어 갔다.
C.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 것이며
이 말씀은 왕들이 많은 처첩들을 취하게 될 때에 발생하는 각종 부조리들을 경고하신 것이다. 왕들에게 처첩들이 많으면 처첩들 간의 분쟁이 일어나게 되며 왕위 계승을 위한 골육상쟁이 일어난다. 뿐만 아니라 이방민족 처첩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을 유입시키어 민족적 배교를 일으킨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금지시킨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이 명령도 지키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처첩들을 취하여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모든 일들을 스스로 자초하였다. 압살롬의 역모를 비롯하여 솔로몬과 이복 왕자들 간의 권력 다툼이 발생하였고 그로 인하여 결국은 국가와 민족이 분열되었다. 그리고 이방의 신들이 대거 유입되어 민족적 배교가 성행하였다.
D.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이 말씀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국민들의 재물을 취하지 말라는 것이며 특히 왕족들의 생활을 위하여 국민들에게 짐을 지우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이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결코 호화로운 삶을 살지는 않았으나 수많은 처첩들과 그들로 인하여 형성된 왕족들의 삶 때문에 백성들에게 과다한 짐을 부과하였다. 다윗의 실족은 이부분에서도 솔로몬에게 그대로 전이되었다. 솔로몬은 부왕의 전철을 계승하여 다윗보다 더욱 많은 처첩들을 취하였고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전보다도 호화롭고 화려한 궁전을 건축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이 행사되었다. 때문에 백성들은 상대적으로 고난의 삶을 살았다. 성경은 솔로몬이 죽은 후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를 계승하였을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온회중이 와서 르호보암에게 고하여 가로되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왕상12:3-4>.
E.그가 왕 위에 오르거든 레위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 왕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국가와 민족을 인도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이 명령대로 살지 않았고 이 명령대로 국가와 민족을 인도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왕상3:14>을 통하여 다윗이<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켰다>고 말씀하셨을까? 우리는<왕상3:14>의 말씀을 하나님의 속성적 차원에서 해석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하나님 뜻대로 살고 하나님 뜻대로 국가와 민족을 인도했다고 말씀하신 것은 다윗이 실제로 그렇게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한 것이었다. 노아가 실제로 의인이었기 때문에 의인이라고 한 것이 아닌 것과 욥이 실제로 의인이었기 때문에 의인이라고 한 것이 아닌 것과 같이 다윗도 의인이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어 다윗을 의인이라 칭하신 것이다. 그리고 다윗은 많은 잘못을 범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한 자였다. 때문에 한가지의 선함을 보시고 만 가지 잘못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은 다윗의 그 점을 기뻐하시어 다윗을 의인으로 받아주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는 솔로몬의 패륜적 성정과 그의 불순종적 신앙을 이미 알고 계셨을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최소한 다윗과 같은 신앙을 갖기를 원하시어 그렇게 경고하시고 그렇게 달래셨을 것이다.>
③<왕상15:5>
<왕상15:5>은 열왕기상의 저자가 다윗을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몆 가지 사례를 살펴본 바와 같이 다윗은 결코<헷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한 자>가 아니었다. 따라서 열왕기상의 저자가 다윗을 그렇게 평가한 것은 분명한 편견이요 오류다. 만약에 그럼에도 불구하고<왕상15:5>을 근거로 내세워 다윗을 모범적인 군왕으로 주장한다면 우리는 성경의 증거들을 더 이상 믿을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히 다윗의 사적이 하나님의 뜻대로가 아니었음을 증거 하는데도 불구하고<왕상15:5>은 다윗을 의인으로 추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④<행13:22-23>
<행13:22-23>은 사도바울이 예수그리스도께서 다윗의 가문을 통하여 강림하셨다는 것을 말하는 과정에서<삼상13:14>을 인용한 것이다. 따라서<삼상13:14>을 근거로 다윗이 모범적 군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한 오류다.
⑤다윗의 시편들.
시편의 증거에 의하면 하나님을 향한 다윗왕의 신앙은 절대적이다. 그는 자신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주권 앞에 있음을 전제하여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고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한다. 그는 수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의 시편들에는 한나라를 이끌어 가는 군왕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영도하기 위하여 지혜를 구하거나 신원하거나 고뇌하는 시가 없다. 그는 오히려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을 고발하고 원망하며 복수해 주기를 간청한다. 그의 시는 군왕다운 시가 아니라 일개 촌부의 시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다윗의 시는 그의 신앙적 삶과 연결된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신앙을 고백하고 수금을 연주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그의 신앙적 삶은 전혀 다르다. 그러나 다윗의 삶에 비진리적인 것이 많았다 하여 그의 시를 거짓과 위선적인 것이라고 말해서는 않된다. 다윗의 시는 분명히 진실하고 솔직한 것이다.
2)다윗에 대한 정당한 평가.
우리는 다윗의 시와 그의 삶의 이중성을 보면서 그것이 곧 우리들의 신앙적 삶임을 깨닫는다. 우리를 포함한 대부분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신앙으로 기도하고, 찬양하고, 회개하고, 다짐하면서도 실제적 삶은 다윗과 같이 패륜적이고 방탕적인 경우가 허다하다.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자신의 행위로는 어림없는 일이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실감하고 하나님께 진정과 신령의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실패는 사실대로 정리되어야 한다. 그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초기 왕국교회를 인도한 지휘관으로서 기독교 역사에 매우 중요한 사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다윗을 성군으로 추대하면서 다윗과 같이 목회하라고 권고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목회하지 말고 불법, 불의, 편법, 탈법의 목회를 하라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말고 타락과 부패의 삶을 살라는 것이며 교회를 황폐케 하고 끝내는 폐교시키는 목회를 하라는 것이다.
다윗은 국가를 인도하고 통치하는 지도자로서 신앙적 표본과 모범을 보여주어야 했으나 오히려 모든 면에서 반대였다. 이러한 모습은 밧세바와 연관된 사건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일생동안의 삶을 통하여 나타나며 특히 죽음을 앞두고 솔로몬에게 자신을 대적한 자들에 대한 피의 복수를 지시하는 장면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다윗의 불륜과 타락은 이미 군왕의 범위를 초월하였고 하나님 백성의 법도를 스스로 저버렸다. 다윗은 군왕으로서 후계 체제에 대한 질서를 확립하여 형제간에 벌어질 수 있는 권력투쟁을 사전에 봉쇄해야 했으며 훌륭한 율법사나 또는 고명한 선지지들을 스승으로 세워 자녀들을 철저하게 교육함으로서 그들이 하나님의 법과 질서 안에 살게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녀들에 대한 사랑은 지극하였으나 자녀들을 전혀 신앙으로 기르지 않았다. 때문에 다윗의 자녀 중에 신앙적 삶을 살은 자가 전혀 없었고 자매를 강간하거나 형제간에 골육상쟁을 벌이거나 심지어는 아버지의 왕권을 탈취하기 위하여 모반을 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다윗에게는 지도자로서의 사랑, 관용, 용서, 자비는 물론이요 신앙인으로서의 윤리도 도덕도 없었다. 다윗은 임종 때에 솔로몬에게 복수를 명령함으로서 솔로몬의 통치가 처음부터 피의정치, 철권의 정치가 되게 하였다. 다윗이 만약 지혜로운 자이며 의로운 신앙인이며 모범적인 군왕이었다면 자신을 반대하고 적대했던 자들을 사랑으로 용서하고 솔로몬에게 연결시켜 주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들은 다윗의 사랑에 감사 감읍하면서 충성하였을 것이고 솔로몬도 사랑과 용서의 통치를 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솔로몬과 적대자들이 모두 다 그렇게 하지 않았을 지라도 다윗은 신앙인으로서 그렇게 했어야한다. 그러나 다윗이 그렇게 하지 않고 피의복수를 명령함에 따라 솔로몬은 피의복수와 강압적 통치를 하였다. 결국 솔로몬시대의 이스라엘은 국가적 번영은 누렸으나 종교는 퇴락하였고 드디어는 하나님의 경고대로 솔로몬 사후에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단된 후 끝내 모두 멸망하고 말았다. 따라서 다윗은 결코 성군이 아니었고 모범적 신앙인도 아니었다. 다윗은 오히려 이스라엘의 국가적 민족적 비극과 멸망을 초래한 원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다윗과 솔로몬을 이스라엘의 최고성군<聖君>으로 추켜세우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섭리역사를 모르는 신학적 무지 때문이다. 저들은 기독교에 대한 신학을<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 것으로 정립하지 않고<인류구원>을 위한 구속사적 차원으로 정립하였다. 때문에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기독교를 진군시키는 것을 알지만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은 제대로 알지 못한다. 저들은 다만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다윗가문을 통하여 도래하실 메시야와 그를 통한 구속사만 알지 이스라엘 교회가<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하여 부름 받아 세워진 전체 기독교의 선임교회이며 수장교회라는 것은 알지 못한다. 저들에게 그와같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역사적 개념과 이해가 있었다면 다윗과 솔로몬에 대한 개념과 평가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다윗과 솔로몬의 치세가 얼마나 비기독교적이며 하나님의 섭리에 불순종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아울러 깨달았을 것이다. 이와같은 상황은 당시에나 현재나 동일하다. 당시의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학이 정상적으로 정립된 사람이 전혀 없었다. 일반인들이나 정치지도자들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랍비를 비롯한 종교지도자들 중에도 우주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자가 전혀 없었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과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선택하시고 구원하시고 지켜주시고 보살펴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학만 있었을 뿐 하나님을 위하여 부름 받고 세워진 사명적 차원의 신학과 신앙은 전혀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현실적인 부국강병에만 환호하였을 뿐 다윗의 악행이 자신들을 파멸과 파국으로 이끌어 갔다는 개념이 성립되지 않았다. 그들이 성경에 다윗의 치적을 그토록 높이 평가하여 기록한 이유와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거부하여 십자가에 처형시킨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대기독교 지도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성경, 조직신학, 기독교역사 등등을 통하여 기독교의 본질과 기독교역사에 발생하고 진행되었던 각종 오류들을 배웠다. 따라서 이제는 기독교와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학정립이 전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때문에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이스라엘민족이 보았던 것과 같은 차원에서 성경을 보고 역사를 보기 때문에 다윗이 국가를 부국강병하게 한 성군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둘째는 다윗이 많은 시가서를 저작했다는 이유다. 그러나 다윗이 많은 시가서를 저작했다 하여 그의 신앙을 모범적인 것이라고 믿는 것은 분명한 오류이다. 왜냐하면 그의 저작 문헌들에는 국가와 민족을 하나님 뜻대로 이끌어가려는 지도자로서의 의지, 고민, 고통 등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다윗의 삶에는 모범적인 신앙의 모습이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성경에는 때때로 다윗의 아름다운 신앙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 정도를 근거로 하여 다윗을 모범적 신앙적 지도자로 평가하는 것은 분명한 오류이다. 왜냐하면 다윗은 국가적, 민족적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국가적, 민족적 지도자에게는 개인적 삶이 없다. 특히 기독교 차원의 국가적, 민족적 지도자에게 개인의 삶은 더더욱 없다. 성경은 그 점을 누누이 여러 차례 선포한다.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말하기를...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7-8>
라고 선포하였던 것이다.<지도자들도 인간이다.>라는 말은 그들의 지도를 받는 백성들은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본인들은 그러한 말을 할 수 없다. 지도자들은 언제나 국가와 민족에 대한 문제로 고민하고 고통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지도자들의 삶은 이론적 삶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들의 지도 하에 있는 민초들은 그들의 삶에 영향 받아 자신들의 삶을 정립하기 때문이다. 특히 기독교 지도자들의 삶은 더욱 그러하다. 만약에 기독교 지도자들의 삶이 신학과 신앙이 동일하지 않다면 그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다만<울리는 꽹가리>에 불과하다. 다윗의 삶은 기독교 지도자로서는 물론이요 기독교 일반성도의 수준에도 전혀 미치지 못하는 불륜, 타락, 불법, 악행 등등의 삶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향하여 심히 책망하시고 성도들에게<저들의 말은 듣되 그들의 행동은 전혀 본 받지 말라>고 교훈하신다. 그러나 현대기독교 목회자 중에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삶을 산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사는 것에 대하여 전혀 잘못을 느끼지 못한다. 저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종은 귀한 존재이므로 그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개념 하에 심지어는 불법, 타락, 악행까지도 잘못이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때문에 저들은 다윗과 솔로몬을 패역무도한 실패자로 보지 않고 위대한 성군으로 보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우리의 이와같은 주장에 불만하면서<그렇다면 다윗의 시가 성경으로 정립될 이유가 없으며 다윗의 사적<史蹟>도 성경에 기록 될 이유가 없지 않느냐?>라고 항의한다. 이와같은 항의는 역사를 통하여 교훈을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 부패하고 타락한 사적을 남긴 왕들의 이야기가 다윗이나 솔로몬의 이야기 뿐 인가? 남북 이스라엘왕조 군왕들 대부분의 사적이 그와같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그러한 불미스러운 역사를 성경에 기록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교육이다. 기독교<특히 목회자들>은 성경을 통하여 진리적 역사와 비진리적 역사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하며 그 역사들을 통하여 교훈을 받아야 한다. 진리의 역사를 통해서는 자신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으며 비진리 역사를 통해서는 자신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받는 것이다. 그것이 비진리의 역사를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사실 그대로 우리에게 전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셋째는 목회자들의 권위를 세우고자 하는 고의적 왜곡이다. 저들은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 부은 종<사울>을 해하지 않고 끝까지 충심으로 섬겼다는 점을 부각 시켜 성도들로 하여금 목회자들에게 충성과 순종을 하게 하려는 고의적 의도로 다윗을 성군으로 추대한다. 저들은 이러한 의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였다는>것을 근거로 내세운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다윗과 함께 하시어 그에게 승리와 영광을 주셨고 그의 왕국과 그의 가정에 온갖 복을 내리시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밧세바를 취하기 이전까지의 일이다. 밧세바사건 이후로 다윗은 점점 패역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 떠나갔다. 다윗은 나단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준엄하신 책망과 징계를 받았으나 죄를 뉘우치고 돌아서지 않았으며 오히려 점점 타락과 패역을 거듭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때에 이미 다윗가문에 대한 징계를 선포하셨다.<삼하12:7-12>다윗가문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가<王家>이기 때문에 다윗가문에 대한 징계는 곧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징계이다. 다윗은 이때에 당연히 진정과 신령의 회개를 하고 밧세바와의 패륜을 정리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돌아서야 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는 나단선지자의 말만 의지하고 진정과 신령의 회개를 하지 않았으며 패륜적 삶을 청산하지도 않았다. 이와같은 다윗의 타락과 패역은 밧세바가 낳은 아들이 죽은 후의 다윗행적을 통하여 나타난다. 다윗은 아들이 죽기 전에는 하나님께 금식의 회개를 하지만 아들이 죽자 회개를 중단하고 먹고 마셨을 뿐만 아니라 밧세바와의 관계를 계속하였다. 따라서<삼상13:14><행13:22>을 근거로 내세워 다윗을 성군으로 추대하는 것은 편견이며 왜곡이고 오류다.
3.솔로몬시대 교회.
솔로몬은 처음 왕위에 올랐을 때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리고 지혜를 구하는 등 하나님중심의 신정왕국 국가 형태를 유지하였다. 특히 솔로몬은 하나님의 예루살렘 총회교회를 건축함으로서 신정왕국 국가로서의 외적형태를 갖추었다. 그러나 솔로몬 통치시대에 이르러 예루살렘교회의 권위는 더욱 크게 하락되었다. 솔로몬시대에 교회의 권위가 특히 크게 약화된 것은 두 가지로서 첫째는 솔로몬의 정치형태이고 다른 또 하나는 그의 세속적 타락이다. 솔로몬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정치를 행하지 않고 주변 국가들과 연합하는 외교적 정치 형태를 추구하였다. 때문에 솔로몬은 주변 국가들과의 정략적 결혼을 통하여 많은 이방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솔로몬은 특히 애굽의 정치형태를 도입하였다. 이때에 솔로몬과 결혼한 이방여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을 이스라엘에 도입시켰다. 이스라엘은 과거에도 이방신들을 섬기어 하나님께 징계 받은 역사가 수 없이 있었으나 솔로몬 치하에서 우상숭배가 만연하였다. 이와같은 사실은 솔로몬이 예루살렘교회를 건축하는 과정을 통하여서도 입증된다. 솔로몬은 다윗시대에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성전건축 설계도를 통하여 예루살렘교회를 건축하였다. 그러나 솔로몬은 교회의 기구들을 만드는 과정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설계도대로 하지 않고 이방인들의 신전과 같은 형태를 도입하였다.<왕상7:25-29> 이와같은 일은 성전건축에 등용된 자들이 가나안 원주민들이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솔로몬의 처첩들의 영향 때문이었다. 솔로몬의 이방여인들은 솔로몬이 예루살렘교회를 건축할 때에 자신들이 섬기던 신전의 양식을 도입시켰다. 어떤 주석가들은 솔로몬이 예루살렘교회 건축에 세운 소나 사자들의 형상들을 발전된 종교적 개념으로 해석한다. 그리하여 그것을 이방신상의 모형을 도입한 것이라는 해석을 자유주의자들의 비진리적 편견이라고 공격한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적 개념의 발전이 아니라 이방신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교회건축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광야교회의 성막 양식을 근거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동물들의 형상이 교회건축에 사용될 여지는 전혀 없는 것이다.
두 번째는 솔로몬의 타락에 의한 사치와 쾌락이었다. 그는 부왕인 다윗보다도 더 많은 처첩을 거느렸으며<왕상11:3>방대한 궁전을 건축하여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삶을 살았다.<왕상7:1-12>당시의 왕은 절대적 권한을 행사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솔로몬의 사치와 쾌락은 그의 절대적 권력 하에서 시정이 촉구되지 아니하고 오히려 정부 관리들을 비롯한 귀족들의 삶으로 전이 되어졌으며 이와같은 솔로몬 치세 하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자연스럽게 타락하고 부패한 삶을 살게 되었다. 솔로몬시대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기는 가운데 음란과 퇴폐가 국가와 민족 전체에 만연되었다. 따라서 교회는 사실상 유명무실한 상태로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하였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왕상<11:26-39>을 통하여 이스라엘 국가의 분단을 예고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아히야를 통하여 솔로몬이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시돈의<아스다롯> 모압의<그모스> 암몬의<밀곰>을 섬겼기 때문에 이스라엘 국가를 두개로 나눌 것이라고 선포하신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열두지파 중에 열 지파를 여로보암에게 주고 솔로몬의 아들에게는 하나의 지파만을 주어 국가적 명맥을 유지하게 하실 것이라고 선포하신다. 만약에 이때에 솔로몬이 지혜로운 사람이었거나 또는 기본적인 신앙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즉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하여 자신의 개인적 환난은 물론이요 국가적, 민족적, 환난과 멸망을 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여로보암을 죽이려하였다. 이러한 솔로몬의 악행은 그가 불륜의 씨앗이라는 이유에서 그리고 다윗이 밧세바에 대한 애정 때문에 그를 특별히 총애하였던 이유에서 뿐만 아니라 다윗이 그에게 신앙적 교육을 실시하지 않은 이유에서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4.분열 왕국시대 교회.
솔로몬왕의 무리한 건축과 강압 정치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이미 왕국에 대한 의미를 상실하였다. 때문에 솔로몬이 죽고 르호보암이 왕위에 올랐을 때 하나님의 예고대로 이스라엘 왕국은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분열되었다. 그리하여 남왕국 유다는 유다지파와 시므온지파의 두 부족 왕국이 되었고 북왕국 이스라엘은 유다지파와 시므온지파를 제외한 10개 부족의 왕국이 되었다. 남쪽 유다왕국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였고 북쪽 이스라엘 왕국은 세겜을 수도로 하였다가 제6대 오므리왕때에 사마리아로 수도를 옮겼다.
성경<왕상12장>은 이스라엘 왕국의 분열을 르호보암이 백성들의 조세 인하와 강제노동 완화를 거절했기 때문인 것으로 증거한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서<왕상11:26-39>은 이미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패역함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남북 왕조로 나누실 것이라고 예고하였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전에 이미 나단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의 죄악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국가적 분열을 예고하셨다.<삼하12:7-12> 따라서 이스라엘의 남북왕국 분열의 근원은 다윗의 패역한 죄악의 결과다.
한편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솔로몬의 왕위 계승을 정당한 것으로 보며 특히<삼하7:12-16><삼하12:25-26>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사랑하사 다윗의 후계자로 내정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같은 견해에 반대한다. 우리가 그와같은 견해에 반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와같은 주장은 첫째, 하나님의 속성에 위배된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그러한 주장은 하나님을 불의한 하나님, 불법의 하나님으로 격하시키는 망령된 주장이다. 솔로몬은 다윗과 밧세바의 패륜에 의해서 출생한 아들이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여 뿐만 아니라 윤리적, 도덕적 차원에서도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자이다. 특히 솔로몬은 장차 하나님 앞에와 이스라엘 국가와 민족 앞에 불순종과 타락과 행악함으로 일관하여 이스라엘 국가를 분열시킬 장본인이다.<삼하7:12-16>에는 이미 그와같은 하나님의 예고가 선포되어 있다. 그러한 자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기뻐하시어 왕위에 세우셨다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시며 오히려 불법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그러한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이실 수 없다.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신 것이 아니다. 정상적인 절차에 의하면 솔로몬 아닌 다른 왕자가 다윗의 왕위를 계승해야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다윗, 솔로몬, 밧세바 그리고 선지자 나단까지 가세한 인간적 욕심과 음모에 의하여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다만 그것을 허용하셨을 뿐이다.
<사무엘하12:25-26>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사랑하셨다고 해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용서하신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용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밧세바가 비록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를 범했으나 그들을 용서하셨던 것이다. 열왕기서의 저자는 다윗이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그것은 분명한 오류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여전히 사랑하신 것은 다윗의 행위가 의로웠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신 것에는 특별한 교훈이 들어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특히 하나님의 종들>은 결코 다윗의 불의를 본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께 불의한 자들에게도 여전히 용서의 기회를 주신다는 것이다.
솔로몬이 다윗의 후계자로 왕위에 등극한 것은 하나님의 신적 작정이 아니다. 솔로몬이 왕위에 등극한 것은 밧세바의 욕심이고 밧세바를 편애한 다윗의 어리석음이다. 그리고 선지자의 본분을 다하지 않고 불의와 야합한 나단의 직무유기다. 하나님께서는 다만 그들의 불법과 악행을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허용하셨다.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혼란을 감안하신 하나님의 섭리였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다윗, 밧세바, 나단 등등의 불법을 허용하시지 않고 다른 왕자를 왕위에 세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틀림없이 솔로몬을 왕위에 세우기 위하여 조치를 강구하였을 것이고 이스라엘은 그로인하여 극심한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이 장차 솔로몬을 왕위에 앉힐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다윗에게 분명한 경고를 하셨다.<삼하7:12-16> 따라서 솔로몬이 왕위에 즉위하는 것에는 엄중한 조건이 제시되어 있었다. 즉 솔로몬이 하나님의 법에 충실하면 모든 죄가 용서되거니와 그렇지 아니한 경우에는 국가적 민족적 분열이 있을 것이 경고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이스라엘의 분열은 이미 예고되어진 것이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다윗과 솔로몬이 하나님께 자신들의 패역무도함을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기회를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끝까지 악행을 계속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역사를 함부로 오해하여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사랑하여 왕위에 등극시키신 것으로 주장하거나 또는 의도적으로 솔로몬을 왕위에 앉히시어 고의적으로 이스라엘을 분단시키셨다고 생각해서는 않된다. 이스라엘왕국의 분열 원인은 어디까지나 다윗과 솔로몬의 악함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전제 된 허용이었다.
한편 이스라엘왕국의 분열에 따라 이스라엘 교회도 남북으로 분열되어 진다.그리하여 남쪽 유다는 예루살렘교회를 주축으로 하는 교회가 구성되고 북쪽 이스라엘에는 그리심산교회를 주축으로 하는 교회가 구성된다. 그러나 분열왕국시대의 교회는 다윗이나 솔로몬시대의 교회들보다도 더욱 교회답지 못하였다. 이스라엘 남북교회는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우상숭배에 혈안이 되었으며 온갖 불법과 타락과 비윤리적, 비도덕적, 패륜행위를 계속하여 나감으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재촉하였다. 당시에 남쪽교회에는 오바댜, 요엘, 이사야, 미가, 나훔, 예레미야, 스바냐, 하박국, 에스겔 등등의 선지자가 있었고 북쪽교회에는 엘리야, 엘리사, 아모스, 호세아 등등의 선지자가 있었다. 선지자들은 교회가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눈물로 촉구하였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다. 패역한 이스라엘 교회들은 특히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의 선지자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400명과 벌인 갈멜산의 대결에서 일방적으로 승리하는 것을 경험하고도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였다. 물론 이러한 교회의 배교는 당시의 군왕들의 비진리적 지도에 영향 받은 것이라는 변명을 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들이 선지자의 애절한 절규적 선포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하나님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징계 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선지자들의 끊임없는 회유와 애절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던 이스라엘과 유대왕국은 결국 앗수르와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멸망한다. 북쪽이스라엘은 북왕국 마지막왕인 제19대 호세아왕 때인B.C.722년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했고 남쪽유다 왕국은 제20대 히스기야왕 때인B.C.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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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스라엘 왕국시대 교회를 돌아보면서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국가정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이다. 개혁주의 자들이 찾아낸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두 영역이 독립적으로 공존하면서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를 보완, 보충하면서 다함께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왕국은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처음부터 외면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스라엘교회를 풍비박산<風痱雹散>내어 사면팔방<四面八方>으로 흩어버렸다.
우리는 이스라엘왕국 역사를 돌아보면서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이스라엘에 왕국을 세우셨으며 또한 그들의 만행을 주권적으로 다스려 징치하심으로서 그들이 그러한 만행을 저지르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하게 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의문은 비단 이스라엘 왕국과 교회와의 관계에 대해서만 갖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역사 속에 등장하는 모든 국가행정부와 교회와의 관계들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다.
기독교역사를 보면 국가행정부의 이러한 악행과 만행은 비단 이스라엘 왕국 뿐만 아니라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거의 대부분의 국가행정부에서 일어나는 공통된 상황이었다. 기독교역사가 진행되는 역사적 과정을 보면 국가행정부가 한 때 하나님의 기독교에게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어 순종한 때도 있었으나 그것은 지극히 잠시의 일이었고 국가행정부는 언제나 하나님의 기독교에 대항하고, 적대하고, 탄압하는 역사적 관계를 계속하였다.
우리는 이와같은 의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신학적 정립을 한다. 이미 여러차례 논증한바 있으나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한번 기독교역사와 일반역사를 대비<對比>한다. 하나님의 섭리역사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궁극적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그것은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어 진다는 것은 이미 수차례 논증한바 있다. 하나님 섭리역사의 주도권은 언제나 기독교에 있다. 일반역사가 때로는 기독교 역사보다 앞서가거나 또는 기독교 역사를 이끌고 가는 것 같은 경우들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결국 기독교역사에 대한 준비나 예비에 불과하며 기독교 역사를 변증하고 보좌하고 보충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것은 기독교에게 주어진 사명이며 따라서 기독교역사의 현장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지 일반국가 행정부에 주어진 사명이나 일반역사의 현장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빛과 소금의 전사는 국가행정부를 비롯한 일반역사의 지도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종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이다.
일반역사와 국가행정부는 하나님의 기독교를 준비하고 예비하고 보좌하고 보완하고 보충해 주는 기능적 역할을 감당하지만 때로는 오히려 하나님의 기독교역사에 걸림돌이 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사정없이 공격하고 유린하여 파괴시키기도 하면서 하나님의 섭리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통하여 당신의 역사를 멋지고 아름다운 승리로 진행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증거 되어진 일반역사와 국가행정부의 역사들 속에서 하나님의 기독교역사를 찾으려 하지 말고 그것들을 하나님의 기독교 역사에 적용하여 나가야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패역함과 불순종, 특히 다윗과 솔로몬의 악행을 이미 알고 계셨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이스라엘에 신정적 왕국을 세우시고 그 왕국이 하나님의 기독교적 국가와 교회형태를 아울러 유지하도록 촉구하셨던 것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이행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세계적인 기독교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시겠다는 계약을 하셨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지키셨던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약속이 모두 다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이미 보았듯이 하나님의 약속은 여러번 무효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무효가 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 편에 그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영원히 약속을 지키시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거부하고 불순종함으로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어떤 답답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강제하시면 될 것 아니냐는 주장을 한다. 이 문제는 이미 여러번 논증한 문제이지만 다시 한번 설명한다. 그와같은 하나님의 강제는 사람을 기계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강제하시면 인류역사에 비진리가 허용되지 않는 반면에 인류역사는 하나님의 각본에 의하여 진행되는 기계적 역사만 있게된다. 그러한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 역사란 자유의지에 의하여 진행될 때에 역사가 될 수 있으며 역사로서의 의미도 있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인간들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무효되는 것에 대비하여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기독교의 본원이 될 수 있는 은총을 약속하셨지만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하여 그토록 많이 그리고 오랫동안 자비와 긍휼을 베푸셨지만 이스라엘이 끝내 불순종하여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아시기 때문에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장차 진행 될 마케도니아와 로마 등등을 통한 하나님의 기독교 역사이다.
제4장.포로시대 교회.
1.이스라엘왕국교회 시대의 주변정세.
이스라엘 국가와 민족의 터전이었던 가나안을 중심한 팔레스틴 지역은 고대문명의 중심지인 메소포타미아와 애굽을 잇는 중간지대로서 경제적, 문화적 유통의 길목이며 정치적,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항상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에 기독교의 중심부를 세우시어 기독교의 세계화를 추진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역사의 중요한 이정표 시대였던 기원전 말기의 이스라엘 주변역사를 정리한다. 왜냐하면 이제 곧 예수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하여 기독교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인데 예수그리스도강림 당시의 일반역사가 기독교역사를 어떻게 준비하고 보좌하였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1)바벨론제국.
바벨론제국은 인류 최고<最古>의 문명 발상지로서 인류역사상 매우 중요한 제국이었다. 바벨론 제국은 고대 바벨론 제국과 신 바벨론 제국으로 구분된다. 고대 바벨론제국은 아카드족과 셈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족인 갈대아인<바빌로니아인>이 바벨론을 수도로 하여 건설한 강대한 제국이었다. 고대 바벨론제국은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지칭하기도 하는데 남쪽은 페르시아만에서 북위32도 부근의 슈메르 지방까지 였고 그곳에서 다시 거슬러 올라가 북위 34도 부근의 아카드지방까지를 포함하는 광대한 영토를 장악하고 있었다. 남부 슈메르지방의 중요도시는 우르, 라르사, 라가슈, 에레크, 니푸르등이고 북부 아카드지방의 중요 도시는 보르시파, 키시, 바벨론, 시파르등이었다.
역사학자들은 바벨론제국의 역사를 네 시대로 구분한다.
1.슈메르-아카드시대-
2.고대바벨론시대-
3.앗수르시대-
4.신바벨론-페르샤시대-
고대 바벨론제국의 전성기는 바벨론 제1왕조 제6대왕이었던 하무라비왕재위B.C.1729-1686>시대였다. 그는 위대한 정치가요 군사 전문가로서 제국을 부국강병하게 하였고 슈메르법을 자료로 하여 저 유명한<하무라비법전>을 만들었다. 하무라비법전은 구약성경이 기록되는 과정에도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난다. 고대 바벨론제국은 앗수르에게 멸망하여 <살만에셀3세><디글랏 빌레셀3세><산헤립><에살핫돈><앗슈르바니팔>등등에 의하여 통치되어지다가 바사<페르시아>만안<灣岸>의 갈대아인에게 침략당하여 갈대아의 부족<비트야킨-Bit-Yakin>의 지배자인<부로닥발라단>이 왕이 되었다.이후 왕하20:12>그후 갈대아의 한 관리에 불과하였던 나보폴랏살재위>이 왕위에 오르고 신 바벨론제국<갈대아제국>을 건설하여 앗수르를 함락시켰다. 그의 아들 느부갓네살2세는 카르케미시헷족속의 중요도시>전투에서 애굽왕<느고>를 격파하고 주변일대를 장악하였으며 2차에 걸쳐서 예루살렘을 침략하여유다왕국을 멸망시킨 후 여호야긴왕을 바벨론으로 압송해 갔다.<왕하25:27> 그러나 신 바벨론제국은년에 페르시아왕 고레스에 의하여 멸망당했다.
2)페르시아제국.
페르시아왕 고레스는 바벨론제국을 멸망시킨 후 이스라엘 포로들을 비롯한 각국의 포로들을 고국으로 귀환시켰다.<대하36:22-23> 페르시아제국은시대에 가장 융성했었는데 이시기에 이르러 이스라엘 백성들도 함께 평안함을 누렸다. 아닥사스다1세의 아들인 다리오2세치세 때에 애굽에서 대규모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에 애굽인들은 동물의 희생 제사를 반대하여 엘레판틴에 있던 이스라엘 성전을 파괴하였다. 엘레판틴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페르시아인 총독 바고아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요하난<요나단>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아무런 회답이 없자 그들은 다시 바고아총독에게 서신을 보내어 엘레판틴 요새에 야호성전을 재건축 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요청은 허락되었고 다리오2세는 애굽의 지방장관이었던 아신에게 명령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서 부교절 의식을 지킬 수 있게 하였다. 그 후 아닥사스다2세가 부왕다리오 2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후 형제인 고레스<키루스>의 반란을 물리치고 소아시아에 대한 스파르타의 개입을 격퇴시켰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서 애굽을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반면에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성전을 파괴하였다.
3)마케도니아 제국.
이무렵년>에 이르러 그리스북방의 마케도니아가 필리포스2세재위>의 영도 하에 그리스정복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필리포스2세는년, 다리오 3세가 페르시아 왕으로 즉위하였을 때 페르시아 원정 도중 암살당하였고 그의 아들 알렉산더재위>가 마케도니아 왕으로 즉위하였다. 알렉산더는 부왕이 이루지 못한 페르시아 정복을 이루기 위하여년>부터 전쟁을 시작하여년>에 아르벨라전투를 통하여 다리오 3세의 페르시아군을 굴복시켰다. 알렉산더는 계속하여 주변을 정복해 나갔으며 서쪽으로는 지중해 연안의 모든 영토와 북쪽으로는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페르샤제국의 모든 영토와 남쪽으로는 이집트제국의 영토와 동쪽으로는 인더스강 하류에 이르기까지의 드넓은 지역을 포함하는 마케도니아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더는년>에 아라비아와 지중해 원정을 준비하던 중 열병으로 급사하였다.
4)로마제국.
년4월21일>에 창건된 로마제국은 B.C.4세기 후반에 라티움을 통일하였고. 3세기 중엽에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였다. 그 후 로마는 시칠리아섬에서 카르타고와 충돌하면서 지중해 제패를 위한 전쟁에 들어갔다. 로마는년>까지 제1,2차포 에니전쟁을 통하여 카르타고를 격퇴시키고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였다. 로마는 이어서 마케도니아, 시리아를 정복하였고 유럽일대와 아프리카 및 아시아에 이르는 세계적인 제국이 되었다. 예수그리스도의 강림이 있을 무렵의 팔레스틴 지역은 로마제국의 통치 하에 있었고 이스라엘의 통치자 헤롯은 로마에 조공을 바치는 분봉왕이었다. 때문에 이스라엘에 대한 실질적인 통치권은 로마제국의 총독에게 있었다.
2.일반역사의 기독교 준비.
이스라엘 남북왕국의 멸망을 전후한 근동일대의 일반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역사를 준비하고 보좌하기 위하여 매우 숨가쁜 역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순서적으로 돌아 볼 때에 앗시리아, 메대, 페르시아 등등으로 연계되어지는 제국들의 정복 역사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제에 의한 통일천하를 예비하는 것이었고 알렉산더 대제의 통일천하는 로마의 천하통일을 준비하는 역사적 과정이었다. 정복과 전쟁은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자연적 질서와 끝없는 인간적 욕망에 의한 어쩔 수 없는 과정이며 결과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기독교 역사를 준비하고 보좌하는 일반역사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었다. 정복과 전쟁은 서로 다른 차원에서 두 가지 결과를 이룬다. 하나는 인류역사의 발전이다. 정복과 전쟁은 인류역사를 다양하게 발전시킨다. 인류역사는 전쟁을 통하여 각종 무기를 제작하면서 과학을 발전시키고 문명을 발전시킨다. 그러나 전쟁과 정복의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또 다른 결과이며 특히 중요한 결과는 하나님께서 그 역사를 통하여 진행하시는 기독교 역사이다.
1)이스라엘의 기독교
강대국들의 정복전쟁 와중에서 멸망당한 이스라엘은 그러나 기독교역사에 중대한 이정표를 세우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기독교 준비는 다음과 같다.
(1)하나님과 메시야 전파.
이스라엘 민족은 국가의 멸망으로 인하여 로마를 비롯한 세계 각지로 분산되었다. 그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적 삶을 살면서 하나님과 메시야를 알렸다. 물론 그들은 선민사상을 절대 고수하였기 때문에 자신들만의 하나님, 자신들만의 메시야를 전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의 민족들은 그들의 종교적 삶을 통하여 은연중에 하나님과 메시야를 전달받았다.
(2)기독교 전파.
기독교가 전 세계를 향하여 진군할 때에 세계 각지에 분산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기독교 전파의 핵심이며 모체가 되었다. 그들 중에 많은 이들이 예루살렘 방문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직접 보았고 오순절 마가다락방의 성령하나님 임재 역사를 통하여 기독교를 알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거주지에 그 사실을 전하였고 그들에 의하여 세계 각지에 기독교가 설립되었다. 사도들이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세계 각지를 순회할 때에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회당은 기독교 전파의 모체가 되었고 유대인들은 기독교 전파의 핵심이 되었다. 결국 이스라엘의 패망은 기독교의 세계화를 준비하는 역사였던 것이다.
2)헬라의 기독교 준비.
알렉산더에 의하여 수립된 마케도니아 제국은 크게 두 가지의 역사적 유산을 남겼는데 하나는 헬라어이고 다른 또 하나는 헬라니즘<헬라문화>이다. 알렉산더는 그리스 일대를 정복하여 마케도니아 제국을 건설하고 자신의 정복지를 헬라어, 헬라문화로 통일시켰다. 헬라어, 헬라문화는 인류역사에도 크고 위대한 공헌을 하였지만 특히 기독교역사에 크게 공헌하였다. 헬라어에서 라틴어가 발전하였고 라틴어에서 영어가 발전하였다. 헬라문화는 라틴문화에 영향을 주었고 라틴문화는 서양문화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 언어와 학문을 비롯한 서양문화의 원조는 헬라어, 헬라문화다. 그리고 그 서양문화는 장차 기독교를 세계에 전파하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헬라어로 구약성경을 번역하고 기록하였으며 헬라철학으로 성경을 변증하고 조직신학을 정립하였다. 따라서 알렉산더에 의한 마케도니아 제국 건설과 헬라어 헬라문화의 통일은 장차 세계로 전진하는 기독교를 위한 만반의 준비였다.
3)로마제국의 기독교 준비.
로마제국의 정복과 통치역사는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 제국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기독교역사를 준비하였다. 로마제국의 기독교 역사준비는 정복전쟁으로 집약되지만 그것을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1)정복과 식민지 정책.
로마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를 정복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로마의 정복과 식민정책은 정복당한 자들에게는 매우 불행한 역사였으나 결론적으로는 기독교를 준비한 것이었다. 국가와 민족간에 정복이 없어도 상업적 교류를 통하여 문화와 종교의 왕래가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매우 제한적이고 따라서 미약하다. 반면에 정복을 통하여 정복지가 식민지화 되면 정복국가와 피 정복국가간의 다양한 교류가 이루어진다. 로마제국의 정복 이전에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등등에 의하여 근동일대가 정복되었고 그로인한 민족적 교류를 통하여 문화와 종교의 왕래가 있었고 특히 알렉산더의 정복에 의하여 마케도니아, 그리스, 애굽, 팔레스틴 등등의 지역에 폭넓은 문화적, 종교적 교류가 있었다. 그러나 로마제국에 의하여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일대가 정복됨에 따라 그 동안 있었던 민족들 간의 교류보다 훨씬 폭넓은 교류가 이루어졌다. 특히 로마는 정복지의 민족적 단결을 와해시키기 위하여 민족 분산정책을 시행하였다. 정복지의 주민들을 로마를 비롯한 각 지역으로 분산 이동시킨 것이다. 때문에 유대인들의 세계적 분산이 이루어졌는데 특히 유대인들은 상업에 능하여 다른 민족들 보다 더 많이 각처로 분산되어 상업에 전념하였는데 그것은 결국 기독교역사를 준비한 것이었다.
(2)종교 정책.
로마제국은 식민지를 원활하게 다스리기 위하여 정복지 주민들의 종교를 이용하였다. 로마는 정복지의 종교를 활성화하고 장려하여 그들이 종교생활에 전념함으로서 로마제국에 반역하지 않도록 하였다. 로마는 또한 로마에 정복지 주민들을 이주시키면서 그들의 종교를 유입시켰고, 만신전<滿神殿>을 세워 이주민들의 신을 유입하였다. 로마의 정책으로 인하여 유대인들도 전혀 제한받지 않고 회당중심의 종교생활을 하였다. 그들의 회당중심 신앙이 기독교를 준비했음은 앞장에서 이미 논증하였다.
(3)도로 건설.
로마제국은 정복지를 관리하기 위하여 군사도로를 개설하였다. 정복지에 군사를 주둔시켰으나 반란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신속히 군대를 파견할 수 있도록 모든 지역에 군사도로를 개설한 것이다. 때문에<모든 길은 로마로 통 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 도로는 로마제국에게는 군사도로였으나 기독교에게는<복음 전파도로>였다. 훗날 하나님의 종들이 그 도로를 통하여 세계에 기독교를 전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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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의 진군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패망과 그에 연관 된 주변 국가들의 역사를 고찰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점에 있어서 특별히 명심해야 할 신학적 과제가 있다. 그것은 기독교역사를 진군시키시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정립하지 못한 사람들은 모든 역사의 진행을 하나님의 주권적섭리에 함부로 적용함으로서 그것들의 결과들을 하나님의 고의적인 진행으로 결론 내렸으며 따라서 그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렸다. 예를들면 우리가 앞에서 논증한 이스라엘의 패망과 마케도니아, 로마 등등의 역사를 기독교역사를 진행하기 위한 하나님의 신적 작정에 의한 주권적 섭리로 결론지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하나님의 신적주권을 오히려 제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범죄자로 만든다. 그러한 주장대로라면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신적작전<작정-각본>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가 되며 따라서 그 모든 역사에 등장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행위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작전<각본>대로 행동한 하나의 기계적인 행위들이 되고 따라서 그들에게는 원칙적으로 아무런 잘못이 없으며 모든 책임은 하나님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강제적 주권이고 다른 또 하나는 허용적 주권이다. 강제적 주권은 피조의 의사나 형편을 불문하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대로 행사하시는 주권을 말하는 것이고 반면에 허용적 주권은 피조의 의사나 형편을 충분히 고려하시어 허용하시는 주권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적 주권을 행사하심에 있어서 강제적 일 수도 있고 허용적 일수도 있다. 두 가지의 주권이 모두 다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속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필요에 따라서 두 가지 주권을 모두 행사하신다. 하나님의 두 주권 행사는 모두 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의 기독교 역사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더 좋은 결과를 이루어 주는 차원에서 행사되어 진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주권을 행사하심에 있어서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의 의사와 상황을 존중하시고 배려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언약 하에서의 허용적 절대 주권이다.
어떤 답답한 사람들은 이와같은 우리의 견해에 대하여 개인 또는 집단적인 불행들<예를들면 전쟁의 와중에서 개인 또는 집단이 겪게되는 불행들>을 근거로 이의를 제기한다. 저들은 하나님의 허용이 그들을 불행으로 몰아넣었다는 전제하에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신학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의 단면만을 보는 근시안적 개념이다. 역사란 때로는 개인의 것이며 단면적인 것이지만 결국은 전체적인 것 중에서의 개인적인 것이며 단면적인 것이다. 따라서 개인적인 것, 단면적인 것만을 가지고 이의를 제기해서는 않된다. 우리는 우주적인 역사를 볼 때에 역사의 중심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하며 그 역사의 중심이 진행되는 과정에서의 지역적인 역사와 공간적인 역사가 하나님의 중심적인 역사에 어떻게 적용되어지고 등용되어지는가 하는 것을 보아야한다. 이와같은 차원에서 볼 때에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역사를 위하여 일반역사를 아우르실 때에 일반역사의 전체적인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시어 그 역사의 결과들을 허용하시면서 그것들을 기독교역사에 적용해 가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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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우리는 이와같은 하나님의 섭리 역사 속에서 또 다른 역사의 흐름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기독교역사가 때때로 수백 년의 정체적 역사를 진행하는 이유에 대한 해답이다. 야곱교회가 애굽에서 수백 년의 정체적 역사를 진행했던 것을 비롯하여 기독교역사는 때때로 수백 년 동안의 정체적 역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시대적 사조가 형성되고 발전되며 또한 변천되고 연합되어지는 과정에 당연히 소용되어지는 필연적 시간이었다. 물론 현대와 같은 시간적 흐름은 그러한 과정에 수백 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이 소용될 필요가 없는 것이겠지만 예수그리스도의 강림을 전후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오늘날과 달라서 그만한 시간의 필요가 당연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일반역사가 기독교역사를 보좌할 수 있을 때까지 때때로 수백 년 이상의 역사적 정체를 허용하시면서 기독교의 역사를 전개하셨다. 물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일반역사의 속도를 조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는 다양한 영역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진행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강제적인 조절은 많은 부작용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하나님의 강제적 진군에 조화를 이루며 순응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3.포로생활 시대의 교회.년-B.C.444년>
북왕국 이스라엘의 포로들은 북부 메소포타미아와 메디아로 끌려갔고<왕하18:11>남왕국 유다의 포로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가 그발강 가의 텔아빕과 텔하르사 텔멜라 가시뱌등지로 분산되었다. 한편 앗수르에 의해서 끌려간 북왕국 포로들은 혹심한 고생을 하였다. 그러나 앗수르를 멸망시킨 바벨론은 포로들에게 관대한 정책을 베풀었다. 포로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자유로운 생활이 허용되었으며 특히 종교적 생활이 보장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다니엘을 후대한 느부가넷살의 경우<단2:46-49>와 포로였던 유다왕 여호야긴을 후대한 느부가넷살의 아들인 에윌므로닥의 경우<렘52:31-34>를 통하여 증거 된다. 남북 이스라엘이 포로 되어 이주한 것은 다음과 같다.
<북왕국 포로>
제1차 포로=B.C.733년
제2차 포로=B.C.722년
<남왕국포로>
제1차 포로=B.C.605년-여호야김3년-바벨론왕 느부갓네살왕<단1:1-5>
제2차 포로=B.C.597년-여호야긴-바벨론왕 느부갓네살<왕하24:10-17>
제3차 포로=B.C.586년-시드기야11년-바벨론왕 느부갓네살<왕하25:8-12>
제4차 포로=B.C.582년-그달랴총독-바벨론왕 느부갓네살<렘52:30
이스라엘의 포로시대 교회는 고통과 슬픔의 신앙적 삶을 사는 반면에 하나님의 기독교가 범세계적인 기독교로 확장되는 역사를 준비하고 예비하는 중요한 사명을 감당했다.
이스라엘 교회는 앗수르 또는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는 동안 잃어버렸던 신앙을 회복하는 중요한 신앙적 역사를 이룩한다. 그들은 회당을 세워 랍비 또는 장로들의 지도 하에서 하나님 중심의 신앙적 삶을 살았다. 이때에 그들의 회당중심 신앙생활은 여호와 하나님을 근동일대에 널리 전파하는 중요한 역사였다. 당시에 메소포타미아를 비롯한 근동일대는 이미 애굽에서 출발한 히브리민족과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소문에 익숙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한 때 천하를 호령하던 이스라엘 제국에 대한 이야기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그토록 막강하던 이스라엘 제국과 히브리 민족이 무슨 이유로 그렇게 멸망하여 포로로 잡혀 오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뉴스였다. 이때에 이스라엘의 포로시대 교회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은 신앙적 행동으로 인하여 그러한 결과가 발생했다는 것을 말했을 것이고 또한 장차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야의 도래하심도 말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이 포로시대 교회를 통하여 장차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들을 준비하시고 전파하셨던 것이다.
제5장.포로귀환 시대 교회
남북 이스라엘의 포로생활 기간은 총289년이었다. 남북 이스라엘이 포로생활을 마치고 귀환한 것은 다음과 같다.
<포로 귀환>
제1차 포로귀환=B.C.537년-고레스칙령-스룹바벨 인도<스2:1-70>
제2차 포로귀환=B.C.458년-아닥사스다1세-에스라 인도<스7:1-10>
제3차 포로귀환=B.C.444년-아닥사스다1세-느혜미야 인도<느2:9-11>
신학자들은 이스라엘이 포로생활을 마치고 2-3차로 귀국했던 B.C.458-444년 당시를 이스라엘의 종교개혁 시대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에스라와 느혜미아에 의하여 주도 되었던 성전 재건축과 신앙적 회복의 노력에 대한 역사적 평가이다. 포로생활로부터 자유함을 얻어 귀환한 이스라엘 교회는 우선적으로 성전 재건축에 들어갔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전 재건축은 종교적 신념이었고 소망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국가적, 민족적 패망이 자신들의 잘못된 신앙생활에서 비롯되어졌다는 사실을 통감하면서 성전 재건축을 통한 신앙의 회복과 국가적, 민족적 기능을 아울러 회복하고자 하였다. 특히 종교적 지도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회복함으로서 모든 것이 아울러 회복될 것을 고대하였다. 그들이 종교 개혁적 신앙의 회복을 도모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기본적인 신앙 때문이었다. 그들이 비록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국가적, 민족적, 멸망을 자초하였고 수십 년 또는 수백 년간의 포로생활까지 하는 비극적 생활을 하였지만 그들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하는 기본적 신앙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아브라함을 위시한 자신들의 조상들에게 대대로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들의 신앙적 회복을 통하여 다시 유효하게 되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와같은 열망은 오히려 그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다. 아직 하나님의 교회역사는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때>가 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기독교 역사는 이스라엘이 바라고 원하던 것과 같은 차원의 것이 아니기도 하였지만 그<때>도 아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사실을 알수 없었던 그들은 그로 인하여 크게 실망하였고 실망의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그들의 실망은 절망으로 상승되어져 갔다. 이러한 상태 하에서 그들은 조상들로부터 전수되어온 메시야에 대한 사상을 키워 나갔다. 그러나 그들의 메시야에 대한 개념은 하나님의 섭리하고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나라가 멸망하고 오랫동안 포로생활을 하면서 열강들의 정치적, 군사적 능력 상태를 익히 보아왔던 이스라엘교회는 따라서 당연히 현실주의적인 신앙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국가적 주권을 상실한 상태에서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지도자들의 의식구조 역시 현실주의적인 것으로 변모해 갔다. 때문에 그들의 메시야에 대한 대망도 당연히 현실주의적 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은 메시야가 강림하여 이스라엘의 영광을 재현해 줄 것을 갈망했다. 그들이 갈망했던 메시야는 군사적, 정치적, 종교적인 메시야로서 곧 다윗과 솔로몬시대의 영광을 재현해 줄 메시야였다. 이와같은 메시야관에 대한 오해로 인하여 이스라엘 민족 및 교회는 장차 더욱 어려운 상황을 계속하여 맞이하게 된다.
제6장.말라기선지자 이후의 교회.년->
포로귀환 이후 한 때 흥성하였던 이스라엘 교회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눈에 띄게 나타나지 않음으로 인하여 오히려 그들에게 침체와 낙심의 신앙적 후퇴를 가져다주었다. 때문에 그들을 향한 선지자들의 목 메인 외침은 허공을 치는 부메랑이 되었고 이스라엘교회는 점점 변질되어져 갔다. 특히 말라기선지자 이후의 이스라엘교회는 교회로서의 외적요소 조차도 제대로 유지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으로 낙후되어져 갔다. 기독교 역사학자들은 구약과 신약 사이의 공백기를 신구약의 중간기 역사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에 해당하는 기간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 어떤 신학자들은 말라기선지자 이후 예수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기까지의 기독교 역사를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역사라고 말하는가 하면 또 어떤 신학자들은B.C.200-A.D. 100년을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 역사라고 명칭 한다. 또 어떤 신학자들은 말라기시대 이후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를 공백기 또는 침묵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아무런 역사를 전개하시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해서 구약기독교와 신약기독교 간에 중간기라는 역사는 없다. 기독교역사를 구약역사와 신약역사로 구분하는 것은 시대적으로 구분하는 하나의 표현방법이지 구약에서 신약으로 전환 된다던가 또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변경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않된다. 기독교역사는 에덴교회 설립 이후 현재에 이르기 까지 촌보의 쉼도 없이 진행되었다. 인간적 시각에 서는 기독교역사가 때로는 쉬는 것 같고 때로는 정지 되어있는 것 같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기독교 역사를 외면하신 것 같고 때로는 기독교 역사를 떠나 계신 것 같은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역사를 잠시도 중단하지 아니하셨으며 잠시도 기독교역사를 떠나 계시지 아니하셨다. 이러한 사실은 기독교 역사의 현장들을 통하여 증명되어 진다.
우리는 여기에서 당시 이스라엘을 비롯한 주변에 대한 정세 및 역사적 상황들을 다시 한번 돌아다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교회의 오랜 침체기만 보면 하나님께서 멈추어 쉬시는 것 같고 또는 교회로부터 멀리 떠나 계신 것 같으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스라엘을 통하여 강림하실 메시야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역사를 준비하시기 위하여 일반역사의 진군을 재촉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B.C.336-A.D.1년 사이의 역사는 하나님의 기독교 역사를 위한 특별한 기간이었다. 물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없는 것이지만 그 기간은 예수그리스도의 강림을 앞둔 역사적인 시점이었기에 어느 시대의 역사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장차 예수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를 대비하여 아주 특별한 역사들을 진행하셨는바 그것을 요약하여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1.헬라니즘의 형성.
B.C.336년, 약관 20세의 나이로 마케도니아제국의 왕 위에 즉위한 알렉산더대왕재위>은 부왕이었던 필립포스2세의 숙원이었던 세계의 헬라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세계정복을 진행하였다. 알렉산더는 정복지를 철저하게 헬라화 시켰고 이러한 그의 정책 하에서 근동일대는 헬라어와 헬라문화로 결속되어져 갔다. 반면에 알렉산더는 3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는 후계자를 정확하게 지명하지 않음으로서 그토록 힘들여 이룩한 헬라적 마케도니아 제국이 사분오열되는 가운데 결국은 힘을 잃고 로마에 정복당하는 괴이한 의문의 역사를 후세에 남겼다. 그러나 근동일대의 헬라화는 알렉산더가 사망한 후에도 그의 후계자들을 통하여 여전히 가속화 되었다.
2.유대인의 헬라화.
알렉산더는 자신의 점령지 중에서 특히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호의를 베풀었다. 그것은 자신의 페르시야 정복을 성경이 예고한 때문이었다. 알렉산더는 B.C.332년에 두로와 가사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일대를 정복하였는데 그때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당시의 대제사장이었던 앗두아의 인도로 예루살렘성전에서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렸다. 그때에 대제사장 앗두아는 알렉산더에게<단8:5-7,20-21>을 해석하여 주었는데 그의 해석에 의하면 알렉산더가 페르시아제국을 멸망시키고 제국의 대왕이 되는 것이 성경에 예고되어 있었다. 이에 크게 고무된 알렉산더는 이스라엘에 많은 종교적 특혜를 베풀었다. 그리하여 메데, 바벨론, 팔레스타인 등지에 분포되어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조상대대로 전수되어진 여호와 하나님중심의 신앙적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알렉산더제국의 호의적 유화정책에 의하여 종교적 자유를 보장 받은 유대인들은 그 어떤 민족들보다도 빠르게 헬라화 되어져 갔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알렉산더제국의 전 지역에 흩어져 살았는데 그들은 특히 상업과 무역업에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당시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들의 기업적 특성은 또 다른 특성으로 이어져갔는데 그것이 바로 유대인 헬라화의 가속이었다. 유대인들은 여러 민족들을 상대로 하여 상업과 무역업을 함으로서 당시의 공통어와 공통 문화를 이루는 헬라화에 빠르게 동화되어 가는 것이 당연하였다. 이때에 유대인들은 회당 중심의 신앙적 공동체를 이루었는데 따라서 그들의 신앙적 공동체도 자연스럽게 헬라문화에 동화되어 갔다. 유대인들 중에 헬라문화를 가장 많이 받아들인 자들은 상공업 중심의 사두개파였다. 사두개파가 부활신학을 거부한 것은 헬라문화의 영향을 받은 때문이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종교적 자유는 알렉산더 사후에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알렉산더의 후계자들은 알렉산더의 정치적 방침을 그대로 계승하여 모든 정복지들을 헬라문명 하에 결속시켰고 이미 헬라식 종교로 전환된 그들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여 그 체제를 유지시켰다. 이러한 와중에서 유대인들의 헬라화는 유대민족 사회의 전통과 종교를 크게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헬라문화는 히브리문화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히브리문화는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신본주의 사조였기 때문에 거룩성과 근엄성이 살아 있었던 반면에 헬라문화는 인본적, 예술적, 사조였기 때문에 요소요소에서 인간의 육체적 아름다움과 쾌락을 추구하였다.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헬라인들의 나체경기와 나체공연에 심한 저항감을 느꼈지만 어느 사이엔가 그것에 동화 되어갔고 오히려 그것을 즐기게 되었다. 이러한 헬라식 삶의 영향아래서 유대인들의 종교적 거룩성은 점점 퇴조되어 갔고 급기야는 기본적 윤리까지도 무너져버렸다. 당시의 헬라문화는 수많은 이방종교들을 품어 안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도 이방종교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그 중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이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었다. 조로아스터교는 이원론적인 종교관을 강하게 부각시키어 선하게 살면 천국에 가고 악하게 살면 지옥에 간다는 간단한 원리를 보급시켰다. 물론 조로아스터교에 여러 가지 신상들이 있었고 불을 숭배한다던가 하는 제례적 의식들이 있었지만 복잡한 율법주의적 종교에 많은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조로아스터교의 간단한 신앙원리에 쉽게 동요되었다. 그러나 이때에 유대교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근원적으로 보면 조로아스터교가 유대교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조로아스터교의 교리 중에는 구약성경에서 영향 받은 것들이 많다. 조로아스터교의 종말론이 기록된 두루마리문서 중에<빛의 아들들과 어두움의 아들들의 싸움>이란 것이 있는데 그것은<사24-27장><사65:17이하>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당시의 유대교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것은 유대교의 묵시 문학이나 바리새파의 저서들 그리고 쿰란공동체의 문헌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당시의 조로아스터교는 페르시아를 통하여 크게 부흥되었는데 페르시아가 멸망한 후에도 얼마동안은 위세를 떨쳤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유대교적 입장에서 볼 때에 헬라문화의 번성은 유대교를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존재였고 하나님의 섭리에 크게 위배되는 사악한 것이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적 차원에서 볼 때에 헬라문화의 번성은 기독교에 크게 일조했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율법적 종교관을 반드시 초월해야 한다. 기독교가 유대교의 율법적 종교관을 무너뜨리고 초월하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성립될 수 없다. 훗날에 바울사도가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를 강력하게 성토하면서 율법주의란 유대교가 기독교의 관문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다만<몽학선생>에 불과하다는 것을 천명한 것은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무너뜨리고 초월하는 역사를 통하여 기독교가 성립되기 때문이었다.
3.70인역의 헬라어성경.
B.C.2세기경에 히브리어 구약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되는 역사적사건이 있었다. 이때에 번역된 헬라어 성경은 70인역, 또는 셉투아진트라고도 불리우는데 그것은 성경을 번역한 사람들의 숫자와 관련 있는 명칭이다. 당시에 이집트 일대를 통치하던 프톨레미2세가 이스라엘 각 지파의 72장로들을 초청하여 각각 다른 방에서 율법서를 번역하게 하였는데 나중에 대조해 본 결과 오차 없이 동일한 결과가 나왔다고한다. 70인역 헬라성경이 번역된 역사를 하나님의 역사적인 차원에서 보지 않고 인간의 역사적인 차원에서 고찰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70인역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알렉산더대왕이 죽은 후에 이집트 일대를 통치하던 프톨레미2세가 자신의 통치영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원활하게 다스리기 위한 정치적 방법에서 생각해 낸 것이었다.
당시에 대부분의 지혜로운 정치가들이 점령지의 주민들이나 또는 피난민들을 원활하게 통치하기 위하여 그들의 종교를 장려하고 보호하는 정치방법을 사용하였는데 프톨레미2세도 그와같은 방법을 적용하여 알렉산드리아 일대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70인역 성경번역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알렉산더를 통하여 근동일대를 헬라화 시키신 것에는 특별한 섭리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적 기독교를 위하여 기독교의 성경을 정립하여 보급시키실 계획을 세우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근동일대의 헬라화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근동일대의 헬라화는 기독교의 세계화를 위한 전초적 역사이기도 했다. 당시의 헬라어는 매우 고급적인 언어로서 철학과 예술이 어우러진 언어였다. 따라서 당시의 헬라문화 역시 모든 것을 철학과 예술적 감각으로 다듬어 표현할 수 있는 고차원적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고차원적인 헬라문화와 고급스러운 헬라 언어를 통하여 세계에 공급하심으로서 기독교역사가 하나님의 차원 높은 섭리를 배우고 깨닫고 진행할 수 있게 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최초의 헬라어 공용성경이 출간되었는바 그것이 저 유명한 70인역 헬라어 번역 성경이다. 70인역 헬라어 번역 성경은 장차 기독교역사에 위대한 역사적 발자취를 남기게 된다. 신약성경 기자들은 70인역 성경을 인용하여 신약성경들을 집필하였으며 신약교회들은 70인역 성경을 통하여 기독교를 배우고 전파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명칭 자체가“기름부음을 받은자”또는를 가리키는 70인역 성경의 용어이다.
4.유대인의 저항.
한편 우리는 여기에서 또 다른 하나님의 경륜을 보게 된다. 그것은 헬라문화와 로마에 대한 유대의 저항이다. 일반적으로 볼 때에 헬라문화와 로마에 대한 유대인의 저항은 국가적, 민족적 차원에서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역사를 위한 또 하나의 하나님 섭리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유대인들의 민족적 저항을 통하여 기독교역사를 멋지게 전개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보게 된다.
1)유대의 상황.
알렉산더대왕의 통치 하에서 어느정도 신앙의 자유를 누렸던 유대는 그의 사망 후에도 얼마동안은 신앙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제국들의 분열과 주권싸움의 소용돌이 속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의 패권이 수시로 바뀜에 따라 힘들고 고통스러운 식민지적 상황을 감수해야 했다. 제국들의 식민지적 통치 하에 있던 유대인들 중에는 통치자들과 야합하는 가운데 자신의 안녕을 구가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신속하게 헬라문화를 받아들여 자신들을 헬라화 하였고 권력자들에게 아부하여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을 유지하였다. 그들은 주로 부자상인들과 제사장 계열이었다. 그들은 수시로 왕궁을 드나들며 왕에게 뇌물을 주어 왕의 환심을 샀고 그 반대급부로 자신들의 유익을 챙겼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유대의 여호와 하나님중심 신앙은 거의 상실되어져 갔고 제사장 제도마저 무너져버렸다. 아론의 반차와 관계없는 자들이 통치자들과 야합하여 대제사장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대제사장직은 돈과 권력에 의해서 수시로 바뀌게 되었다.
(1)토비아스가<家>와 오니아스가<家>의 세력싸움.
요세푸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에 유대에는 토비아스가<家>와 오니아스가<家>의 두 가문이 대부호<大富豪>로서 권력자들과 결탁하여 정치적인 권력과 상업적인 권력을 함께 누리고있었다. 이때에 오니아스가문은 대제사장직에 있었고 토비아스가문은 전국을 총괄하는 세리직에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두 가문은 심한 권력투쟁을 하였다. 안티오쿠스대제 때재위>에 팔레스타인의 주권이 프톨레미왕조에게서 셀류커스왕조로 이양되었다. 이때에 많은 부호들이 앞을 다투어 새 권력자인 셀류커스왕조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많은 헌금을 하였다. 그러나 오니아스가문은 돈을 매우 사랑하였음으로 새왕조에게 많은 돈을 헌납하지 않았다. 오니아스가문은 그동안 프톨레미2세에게 매년 내야하는 세금 20달란트를 내지 않았다. 셀류커스4세재위>때에 약삭빠른 토비아스가의 시몬이 총리대신을 충동질하여 대제사장오니아스3세를 축출하고 성전의 성금을 가로채려 하였다. 오니아스3세는 셀류커스 궁전으로 달려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이로 인하여 예루살렘에는 커다란 소동이 일어났으며 토비아스가와 오니아스가의 권력싸움은 더욱 증폭되었다. 두 집안의 권력싸움은 셀류커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안티오쿠스4세재위>때에 절정에 이르렀다. 이때에 유대사회는 경건주의자들<바리새파의 전신>을 중심으로 한 정통파 유대인<히브리니즘의 유대인>들과 친시리아파유대인<헬라주의 유대인>들로 양분되어 있었다. 헬라주의 유대인들은 다시 친이집트파와 친시리아파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오니아스3세는 친이집트파였다. 친시리아파들은 친이집트파였던 오니아스3세 때문에 자신들의 입지가 좁았었던 점을 해소하기 위하여 친시리아 계열인 안티오쿠스가 왕위에 오르자 그와 협상하였다. 그리하여 오니아스3세가 잠시 외국에 간 틈을 노려 친시리아파인 그의 동생인 여호수아<야손이란 이름의 헬라적명칭>가 안티오쿠스에게 많은 돈과 충성을 맹세하고 대제사장직을 임명받았다.<마카비상1:10-15><마카비하4:7-17> 그러나 몇 년후 야손의 친구였던 메넬라우스가 토비아스가문의 도움을 얻어 안티오쿠스에게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충성을 맹세하고 대제사장직을 계승하였다.<마카비하4:23> 메넬라우스는 아론의 가문이 아니었음으로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으나 안티오쿠스는 오히려 그점을 이용하였다. 그는 메넬라우스가 아론지파가 아니었기 때문에 유대의 신앙적 결속을 파괴하는데 더욱 유리할 것이라는 계산 하에 그에게 대제사장직을 계승시킨 것이다. 이때에 정통파 유대인들은 제사장직이 하나님의 법에 의하여 계승되지 않고 정치 권력자들에 의하여 불법적으로 매관매직되는 것에 크게 분노하여 이의를 제기하였고 시정을 촉구하였다. 이에 메넬라우스의 추종자들은 유대사회에 공개적으로 헬라적 생활방식을 권장하며 정통파 유대인들에게 대항하였다. 결국 예루살렘에서 정통파 유대주의자들과 헬라파 유대인들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났다. 이때에 안티오쿠스가 이집트 원정 중에 전사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기회를 엿보던 야손이 예루살렘으로 달려와 메넬라우스를 몰아내고 대제사장직을 되찾았다.<마카비하5:5이하> 당시의 유대는 유대인 대 이방인들 간의 정치적, 군사적 싸움보다는 종교적 이념과 권세를 둘러싼 유대인 대 유대인의 싸움이 더욱 치열하였다. 이러한 싸움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헬라주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 밖의 유대 정통주의자들의 싸움이었다.
(2)안티오쿠스의 박해.
그러나 안티오투스는 전사하지 않았다. 그는 원정에서 돌아오자 즉시 사태 수습에 들어갔다. 그는 헬라문화를 통하여 자신의 왕국을 단결시키려 하였다. 그는 우선적으로 팔레스틴을 완전히 헬라화 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유대인들이 메넬라우스 대제사장을 몰아내고 야손을 복직시킨 것을 자신의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선포하고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야손을 추방한 후 메넬라우스를 다시 복직시켰다. 이때에 그는 군대를 동원하여 저항하는 유대인들을 가차 없이 처단하여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했는데 군대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의 기명<器皿>들을 훔쳐갔고 제사장들을 욕보였다.<마카비상1:20-28> 이러한 그의 행동에 유대민중이 크게 반발하자 그는 박해의 강도를 더욱 높여 유대교를 완전히 말살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올림프스의 제우스 형상을 본따서 만들은 자신의 형상을<데오스에피파네스-나타나있는 신>이라고 명칭한 뒤 그것을 신으로 섬기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에피마네스-미친사람>이라고 명칭하여 조롱하였다. 안티오쿠스는 유대인들의 제사를 헬라식으로 드리게 하였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고 자신을 섬기도록 강요하였다. 그는 율법서들을 파기하였고 할례를 금하였으며 각종 절기와 제사를 파기하였고 자신의 형상을 섬기는 각종 우상제단을 세워 그것에 제사하고 제물을 드리게 하였다.<마카비하6:18> 그리하여년 기슬레월-12월25일>에 예루살렘성전에서 안티오쿠스식 올림프스제우스에 대한 제사가 드려졌고 돼지고기가 번제단에 바쳐졌다.<단11:31-32; 마카비상1:41-64; 마카비하6:1-11> 이러한 의식은 매달 시행되었고 황제의 명령에 의하여 유대 전역에서 실시되었으며 황제의 명령에 불응하는 자들은 지방 장관들에 의하여 체포되고 사형 당하였다. 이때에 많은 유대인들이 죽었으며 살아남은 자들은 안티오쿠스의 헬라화 정책에 순종하거나 아니면 종교적 자유를 찾아서 유대를 떠나갔다. 이러한 사실들은<마카비상1:57-64>를 통하여 전해지고 있으며<마카비하6-7장>에 나오는<엘르아살과 7형제의 순교이야기>도 당시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3)마카비우스가<家>의 저항.
예루살렘이 완전히 이교화 된 것과 달리 유대 전역에서는 안티오쿠스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유대인들의 저항은 박해가 약할 때는 산발적이고 소극적이었던 반면에 예루살렘이 완전히 이교도적인 것이 되자 드디어 거세게 불붙어 전 유대적인 저항으로 상승되었다. 이때에 유대인들의 저항을 주도한 사람은 하스몬가의 마타디아스제사장이었다. 그는 예루살렘 북서쪽에 위치한 모데인이라는 마을의 제사장으로서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었다.<마카비상2:1이하> 그는 시리아의 한 관공리가 모데인에 와서 안티오쿠스에게 제사할 것을 강요하자 그것을 거절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교한 유대인들이 안티오쿠스에 대한 제사를 드리자 그들과 관공리를 함께 처형해 버렸다. 이에 진노한 정부에서 군대를 파견하자 마타디아스는 다섯 아들들과 함께 산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에 많은 유대인 정통파들이 그들을 따라가서 합류하였다. 특히 유대적 경건주의 자들이었던 핫시딤파<마카비상2:42>가 그들과 합심하였는데 그들과의 합심으로 저항운동은 더욱 큰 힘을 받게 되었다. 마타디아스의 저항운동은 그의 세 아들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그리고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마카비<대장쟁이>라는 별명을 가진 유다가 제1대 지휘자가 되어까지 저항하였고 요나단이 제2대 지휘자 시몬이 제3대 지휘자로 계승하였다. 유다는년12월25일>에 이르러 안티오쿠스의 군대를 물리치고 예루살렘성전을 장악하였으며 이때에 유다의 지휘 아래 성전이 청소되었고 유대적 제사가 드려졌다.<마카비상4:36이하><마카비하10:1-7비교> 이 사건은 하누카절기봉헌>또는 빛의 절기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유대교에서 지켜지고 있다.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었지만에 이르러 안티오쿠스의 섭정이었던 리시아스가 유대에 관용을 베풀어 유대적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예루살렘을 비롯한 유대 전역에서 유대적 제의식이 거행되어졌고 완전한 종교적 자유가 보장되었다.<마카비상6:58이하> 리시아스는 유대인들과의 불화를 종식시키고 유대인들과의 관계를 도모하기 위하여 대제사장 메넬라우스를 처형하였다. 유대에 대한 종교적 자유가 보장되자 핫시딤파가 저항운동을 멈추고 마카비로부터 떠나갔다. 그들의 투쟁목표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왕이었던 데메트리우스1세<안티오쿠스5세의 후계자>는 아론의 반열인 알키무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는데 핫시딤파는 그를 열열이 지지하였다. 한편 마카비는 종교적인 자유에 만족하지 않고 유대의 정치적인 독립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처음 몇 번은 유대인들이 승리하였으나 계속하여 참패하는 가운데 마카비가에 엘랏사에서 사망하였다.<마카비상9:18이하> 그 후 대제사장 알키무스가 죽었고 예루살렘에는 7년동안 대제사장이 없는 공백상태가 되었다. 마카비가 죽은 뒤 그의 동생 요나단이 동생인 시몬의 도움을 받아 제2대 지도자가 되었다. 요나단은 대제사장이 되어 정치적 종교적인 지도자가 되었으나 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당시의 왕 트리폰에게 살해당하였다. 요나단의 동생 시몬이 제3대 지도자가 되어 여전히 저항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는년에 데메트리우스2세재위>의 포고령에 의하여 대제사장 직에 올랐다. 오니아스가에서 세습되어지다가 오니아스3세가 파면 당한 후 비정상적으로 계승되어지던 대제사장 직이 이때부터 하스몬가에서 세습되었다.
그리고 이때에 이르러 유대는 국가적인 독립을 하였고 대제사장이 종교적, 군사적,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하스몬가문이 실권을 잡은 동안에 계속되었다. 그러나 시몬은 사위인 프톨레미에게 배신당하여 살해되었고 그의 아들 요한힐카누스가 권좌에 올랐다.
(4)하스몬 왕조.
하스몬이란 말은 하스몬가에 속했던 마타디아스와 그의 아들들의 가족명에서 유래되었다. 마카비가문에 대한 유대문헌은 그들의 가문을 하스몬으로 명칭한다. 유대인들은 마타디아스의 가문을 말함에 있어서 유대인들의 저항운동을 지도한 경우를 말할 때에는 마카비로 명칭하고 그들이 유대를 다스렸던 경우를 말할 때에는 하스몬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유대는 요한힐카누스1세때에 잠시 동안 자유를 잃었으나 년에 다시 독립을 쟁취하였고 당시에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었던 로마원로원의 인준을 받았다. 요한힐카누스는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는 남쪽의 이두메를 점령하였고 북쪽의 사마리아를 점령하여 그리심산의 성전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하스몬왕조는 국민들로부터 불신 당하였다. 유대국민들은 하스몬왕조가 다윗의 후손이 아니기 때문에 왕위에 올라서는 않 된다고 반대했으며 또한 하스몬왕조가 대제사장 직에 있으면서 대제사장다운 종교적 면모를 보여주지 않고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권력만 누리는 것을 혐오하였다. 하스몬왕조에 대한 유대국민의 불만은 요한힐카누스 때에 이르러 표면화 되었고 이때에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분열하였다. 힐카누스는 처음에는 바리새파와 교류하였으나 바리새파가 대제사장 직을 내놓으라고 하자 그들과 관계를 끊고 사두개파와 교류하였다. 바리새파는 힐카누스의 배신에 분노하였고 특히 그가 헬라문화를 좋아한다는 것과 자신의 어머니와 동생인 안티고누스를 살해하는 일에 동조한 것 때문에 그를 맹렬히 비판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힐카누스의 두 번째 후계자인 알렉산더안네우스때에 일어났다. 힐카누스의 사망에 따라 그의 아들인 아리스토불르스가 왕위에 올랐으나 그가 일 년 만에 사망하였음으로 그의 형인 알렉산더안네우스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즉위 초에 자신의 동생 아리스토불루스의 미망인과 결혼하였다. 안네우스는 부왕의 전철을 밟아 헬라적 문화에 심취하였고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에 주력하였으며 제사장 직분을 세속화하고 등한시하였다. 그는 장막절 제사 때에 제사장 직무를 행함에 있어 형식적인 태도를 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장난스럽게 제의<祭儀>를 행사하여 백성들의 분노를 샀다. 이때에 그는 제주<祭酒>를 제단에 붓지 않고 땅에 함부로 부어버려 장막절 제사를 의도적으로 모욕했다. 이에 분노한 백성들은 제사에 사용하려고 가지고 왔던 불수감<佛手柑-citron>이라는 나무를 그에게 던지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화가치민 안네우스는 군대를 동원하여 자신을 모욕한 유대인들을 성전 뜰에서 살해하였다. 이로 인하여 내전이 발발하였고 싸움은 6년이나 계속되었는데 안네우스는 그동안 800명의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이때에 바리새파와 유대 정통파들은 잠잠하였는데 바리새파의 세력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보고 위기를 느낀 안네우스는 왕후로 임명한 알렉산드라를 통하여 바리새파에게 많은 권세를 주어 그들을 회유하였다. 안네우스가 사망한 뒤 왕후인 알렉산드라재위>가 왕위에 올라 큰 아들 힐카누스2세를 대제사장에 임명하였다. 힐카누스는 바리새인들을 두려워하여 그들과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였고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세력은 더욱 막강해졌다. 바리새파와 세력을 다투던 사두개파는 바리새파가 세력이 막강해지면서 자신들을 무시하고 압제하자 알렉산드라의 둘째 아들인 아리스토불루스를 옹립하였고 알렉산드라가 죽자 군사를 일으켜 힐카누스와 대결하여 여리고 근처에서 그를 격퇴시켰다. 힐카누스는 모든 실권을 잃고 추방되었으며 아리스토부루스가 왕과 대제사장이 되었다. 힐카누스는 추방되어 이두메의 총독 안티파터에게로 갔다. 안티파터는 힐카누스를 충동질하였고 아라비아의 통치자인 아레타스3세의 도움을 받게 하여 예루살렘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이때에 로마원로원은 팔레스타인에 개입하기로 결정하였고 폼페이우스를 파견하였다. 폼페이우스는 스카우르장군을 보내어 소요를 평정하도록 하고 아리스토불루스에게 뇌물을 받아 그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아리스토불루스가 음모를 꾸미려하자 직접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점령해 버렸다. 아리스토불루스는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었고 힐카누스가 대제사장이 되었다. 이로서 유대의 독립국가 역사는 막을 내렸고 로마의 속령<屬領>이 되었다. 로마는 힐카누스를 유대의 분봉왕으로 세웠다.
제7장.예수그리스도강림 직전의 교회.
1.혜롯 왕조.
폼페이우스에 의한 예루살렘 점령으로 인하여 유대국이 로마의 속령이 되자 이두메의 총독인 안티파터는 폼페이우스를 지지하였다. 그러나년 폼페이우스가 몰락하자 그는 방향을 바꾸어 시져가이사>를 지지하였다. 이때에 시져는 안티파터에게 로마의 시민권을 부여하고 그를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시져는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인 정책을 베풀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시져를 좋아하였으나 안티파터가 이두메인 출신으로서 로마에 지나치게 아부하였음으로 그를 미워하였다. 그리하여년>에 시져가 사망하고 카시우스가 시리아 총독이 되어 과중한 세금정책과 종교탄압 정책을 통해 유대를 박해했을 때 안티파터가 그에 동조하자 정적들을 사주하여 그를 독살하였다. 이듬해 빌립보전쟁 후 안토니우스가 권세를 잡았을 때 그는 안티파터의 두 아들 파사엘과 혜롯을 분봉왕으로 임명하여 힐카누스2세가 대제사장으로 있는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얼마 후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인 안티고누스가 반란을 일으켜 파사엘과 힐카누스를 감옥에 가두었다. 파사엘은 자살했고 힐카누스는 추방당했다. 혜롯은 도망하여 로마로 갔다. 혜롯은 로마에서 안토니우스로부터 유대의 분봉왕으로 임명되었다. 그는에 로마의 도움을 받아 3개월간의 전투를 치룬 후에 안티고누스를 죽이고 왕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로서 유대에 대한 이두메인 혜롯왕조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혜롯왕조의 통치 하에서 유대의 헬라화 정책이 가속화되었다. 혜롯은 유대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하여 2중정책을 펼쳤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에 맞는 정책을 행사했고 이방 민족들에게도 그들에게 맞는 정책을 사용했다. 그는 힐카누스의 손녀인 미리암네와 결혼하고 에 예루살렘의 새 성전을 건축하여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두메인이 유대의 왕이 된 것에 반감을 가졌고 특히 그가 유대를 헬라화하려는 것에 대하여 저항하였다. 혜롯은 자신이 대제사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자 대제사장 직의 세습제도를 없애고 대제사장 직을 자신이 임명할 수 있도록 법을 고쳤으며 대제사장 직이 평생직인 것을 고쳐서 임기제도로 바꿨다. 대제사장들은 혜롯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그에게 충성했고 그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하였다. 혜롯 당시에 유대에는 많은 헬라인들이 이주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유대인들 보다는 혜롯에게 우호적이었다. 때문에 그는 점점 헬라적인 정책을 행사하였고<헬라니즘의 수호신>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그의 행정부는 헬라적 정치 형태를 도입하여 강력한 중앙 집권체제의 관리체제를 구축했다. 혜롯은 유대인들의 정치 자문기구인 산헤드린을 무시하였고 헬라주의자들로 구성된 왕실 고문단을 만들어 그들을 등용하였다. 혜롯은 지금까지 권력을 행사해 오던 귀족계급들을 무시하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자들을 새로운 귀족으로 임명하여 등용했다. 혜롯은 예루살렘에 헬라식극장을 세웠고 들판에는 거대한 로마식 원형경기장을 건설했다.
(Ant는요세푸스의저서인Antiquities의약자이다)
혜롯은 매5년마다 시져를 기념하는 성대한 경기를 거행했으며 비용을 아끼지 않고 올림픽경기를 지원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에 많은 신전들을 세워 가이사황제에게 헌정했고 그 신전들을 통하여 가이사 황제를 예배하도록 명령했다. 혜롯이 가이사황제를 위하여 신전을 세우고 그를 경배한 것은 자신의 입지를 높이기 위함이었다. 그는 전국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국민들로 하여금 자신을 숭배하게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가이사황제를 경배하게 함으로서 황제의 노여움을 사지 않아야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의 혜롯과 로마에 대한 저항은 끊임없이 일어났고 혜롯과 로마는 유대인들의 저항 때문에 항상 긴장하였다. 수많은 애국투사들이 전투에서 죽어갔고 잡혀서 고문을 당하였지만 유대인들의 저항은 끊일 줄을 몰랐다. 유대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자신들을 마카비의 후예라고 천명하였다.
2.유대교 분파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강림에 앞서 일반역사를 통하여 기독교역사를 조율하고 계신 것과는 달리 당시의 교회는 하나님의 섭리를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 종교적인 퇴보를 거듭하고 있었다. 오류 된 메시야 사상과 변질된 신앙들에 의해서 교회는 사분오열 되어져 있었고 역사적 전통적으로 전수되어져 왔던 각종 교회의 제도들도 무너져 버린 채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이때에 존재했던 종파들 중에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1)바리새파.
바리새<φαριδαιος>라는 명칭은 히브리어 페루쉼<מישׁורפ-prushim> 아람어 페리샤아<אישׁירפ-perishayya> 헬라어 파리사이오이<φαρισαιοι-pharisaioi>에서 유래한 것으로서<분리된 자들>이라는 뜻을 갖는다. 바리새파의 기원은<마카비>서에 기록되어 있는<경건당>에서 유래되었다. 경건당은 기원전 2세기 당시에 성행하였던 유대인들의 헬라화에 반대하여 당시의 학자계열들이 결성했던 신앙적 조직체였는데 유대인들의 헬라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자들이 그들을<바리새-반대자>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바리새파들은 자신들을<형제들>이라고 호칭하였고 자신들만이 진정한 유대교<유대주의>적 신앙인들이라고 생각하였다. 저들은 자신들만을 참된 이스라엘인이라고 구별하여<하늘나라의 시민권자>라고 주장하였고 자신들 이외의 일반 시민계급을 율법을 알지 못하는<땅의 백성>이라고 호칭하여 천시하였다.<요7:49>바리새인들은 모세5경외에 선지서와 장로들의 유전까지도 권위 있는 하나님의 율법으로 받아들였다. 때문에 그들은 모세5경과 선지서들과 장로들의 유전에 입각한 신앙생활을 고수하였고 그로 인하여 예수그리스도에게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는 문제로 격렬한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들은 헤롯통치 하의 시대에 6천명 이상의 당원을 결성하고 있었는데 회당조직을 통하여 유대 전역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마23:2-7> 그들은 부활 문제와 유대인들의 헬라화 문제로 사두개파와 항상 충돌하고 대립하였다. 그들은 유대교를 국민생활의 중심에 두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에 유대적 수구세력들의 신임을 얻었으며 많은 경건한 율법학자들을 통하여 종교적 지도자들을 훈련시켰다. 바울이 사울이었던 시절에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가말리엘은 당대 최고의 경건하고 존경받는 율법주의 학자였다. 그러나 바리새파는 신앙적의<義>는 율법의 엄격한 실행에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율법의 준수를 내적 신앙으로 하지 않고 가시적이고 형식적인 것으로 과시함으로서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으며 특히 세례요한과 예수그리스도께 통렬한 책망을 받았다.
2)사두개파.
사두개파 또는 사두개인이라는 신앙적 집단은 예수그리스도의 강림을 전후한 시대<기원전2세기-예루살렘멸망>에 이르는 동안 바리새파와 함께 유대교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던 종파 중 하나이다. 사두개라는 명칭은 윗, 솔로몬시대에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적 제사장이었던<사독>의 이름에서 유래 되었다. 사두개파는 귀족계급에 속한 사람들로서 교양이 있었으며 대제사장 및 예루살렘의 유력자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세력이 막강하였다. 그들은 항상 바리새파와 대립하였는데 바리새파는 종교적인데 반하여 사두개파는 정치적이었다. 그들은 바리새파에 비하여 숫자적으로는 매우 열세였으나 세력은 오히려 막강하였다. 그들은 종교적으로는 보수적이었던 반면에 현세적으로는 자유주의적 이어서 헬라문화를 빠르게 받아들였다. 때문에 그들은 마카비전쟁시대의 종교적 혁신적 세력들에게 심한 냉대를 받았으나 마카비의 후계자들이 세속화 되었을 때에 다시 세력을 확장하면서 바리새파와 대립을 하였다. 그들은 헤롯왕조와 정치적으로 연합을 이루어 로마와 정치적 교류를 하였는데 그것은 자신들 세력의 구심점이었던 제사장직에 대한 권리를 보존하기 위한 정책 때문이었다. 그들은 헤롯과 로마와 제휴함으로서 예루살렘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적 세력을 확보하였고 공회의 의원인<산헤드린>회원들을 다수 확보하여 정치적, 종교적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들은 오직 모세의 5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였고 그 외의 다른 성경과 장로들의 유전은 인정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고 천사를 비롯한 영적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 모세오경에는 죽은자의 부활에 대한 교리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인간의 영혼이 육체와 함께 죽음으로 모든 것이 종료된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인간의 미래를 부정하였다. 이러한 신앙관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께 하늘에 대한 표적을 요구하였고 부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시험하였다. 사두개파는 예루살렘교회가 완전히 파괴되었던 주후70년을 기점으로 하여 사라졌다. 예루살렘교회의 파괴로 인하여 제사장들의 사역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과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세력의 확장으로 더 이상 활동이 전개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3)엣세네파.
엣세네파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필론>의 해석에 의하면 경건한<또는 거룩한>사람들을 의미하는 수리아의 셈어“하사이야”의 복수>가 헬라어화 되어“호시오이”<경건한, 거룩한 사람들>로 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가장 유력하다.
엣세네파는 농경 및 수공예 생산에 종사하는 자들로서 개인재산을 소유하지 않고 모든 재산을 공유하였다. 재산은 각자의 필요에 따라 분배되었고 지극히 검소한 삶을 살았다. 겉옷이 두 벌인 자는 한 벌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고 실밥이 헤어지도록 아껴 입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는 사상에 의하여 노예제도를 거부했고 결혼제도를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정결을 중요하게 여기어 독신주의 생활을 했다. 그들은 또한 항상 목욕을 하였으며 채식주의 생활을 했다. 그들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엄수했으며 율법을 절대 엄수했고 율법연구에 전념했으나 동물의 희생 제사를 반대하여 예루살렘성전에서 제사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적 삶에 지장 받지 않으려고 새로운 사람이 가입하려면 자신들의 법을 절대 엄수할 것을 서약한 후에 가입시켰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갈등이 있었다. 특히 자신들의 조국이 로마를 비롯한 외세에 의하여 식민통치 됨으로 외세에 대처하는 문제로 갈등했다. 그들 중에 어떤 이는 오직 신앙생활만을 강조하는 가운데 무저항주의 또는 수동적 저항주의를 주장하는 반면에 또 어떤 이들은 적극적인 저항을 주장했다. 적극적인 저항을 주장하는 자들은 대부분 열심당에 속해 있었던 자들이다. 그들은 주로 사해부근에 거주했는데 그들이 거주하던 사해일대의 쿰란지역은 기원66-70년대에 있었던 유대반란 전투시에 격렬한 전쟁터였다. 따라서 당시에 엣세네파의 저항운동자들이 그 전쟁에 참가했을 가능성이 크다. 성경은 엣세네파교회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엣세네파에 대한 기록은<필론><에우세비우스><요세푸스>등의 저서들을 통하여 알려져 왔고 사해문서들과 쿰란문서들을 비롯한 문서들을 통하여 나타난다. 특히 요세푸스는 엣세네파와 직접적인 교류를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많은 역사 신학자들은 엣세네파교회와 쿰란교회를 같은 신앙적 공동체로 생각한다. 그러나<요세푸스>의 연구조사에 의하면 예수그리스도 당시에 약4천명 이상의 엣세네파 사람들이 존재한 반면에 고고학자들의 발굴조사에 의하면 쿰란공동체는 약2백명정도에 불과하다. 따라서 쿰란공동체는 엣세네파의 일원이었거나 또는 엣세네파 중에서도 특별히 구별된 지도자적 계열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엣세네파는 제1차 유대전쟁 이후A.D.70년에 이르러 자취를 감추었다.
4)쿰란공동체.
쿰란공동체는 사해문서 중의 쿰란사본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 형성하고 있던 신앙적 공동체이다. 쿰란폐허가 발굴되는 과정에서 그들의 존재가 알려졌는데 그들은 쿰란동굴에서 엄격한 계율을 지키며 수도사적인 신앙생활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쿰란공동체의 신앙생활을 알려주는 자료로는 교단교규계율<敎團敎規戒律-IQS> 회중규정<會衆規定-IQSa> 감사의시편<感謝의詩篇-IQH>외에 1910년에 카이로에서 발견된 다메섹문서 등이 있다. 자료에 의하면 쿰란사람들은 자신들을<언약의 백성><택함 받은자><참된 이스라엘>등등으로 호칭했다. 그들은 3명의 제사장을 포함한 12명의 성도로 구성된 최고회의를 운영하였으며 12명의 최고회의 회원들은 교리적, 정신적 지도자로서 성도들을 지도했다. 그들은 또한<큰 자들>이라는 지도자조직을 만들어 교단에 새로 가입하는 자들을 심사하고 결정하였으며 게율을 범한 자들을 재판하였다. 쿰란공동체는 자신들의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 자들을 증오하고 배격했으며 철저한 폐쇄주의적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적 공동체는 유대교의 종료와 기독교의 발전에 따라 사멸되었다. 역사가들은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네파, 열심당원 등등은 파<派>또는 당<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반면에 쿰란종파에 대해서는<쿰란공동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그 이유는 다른 종파들은 때때로 종교적 파벌의식에 따른 갈등과 분쟁을 하면서도 민족적인 문제에 직면하면 동족으로서 하나가 되었던 반면에 쿰란공동체는 오직 종교적 집단의식에만 집중하여 민족적 문제에도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들을 동족으로 인정하지 않고 다만 신앙적 공동체로 분류하여 배척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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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독교 신학자들 중에<마태공동체><마가공동체><누가공동체>등등을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공동체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앞장에서 정리한 바와 같이 유대인들은 종교적 파벌을 형성하면서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민족적 개념 하에 분리될 수 없는 형제로 인식하였다. 유대인들이 파<派>또는 당<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공동체라는 명칭을 오직 쿰란종파에만 적용한 것은 그들이 자신들과 동족이기를 거부한 때문이었다. 마태, 마가, 누가 등등은 이와같은 유대인들의 개념에 의하여 자신들을 추종하는 별도의 그룹을 형성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본질은 한분 아버지하나님을 섬기는 한 가족이며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영적, 실제적, 유기체이다. 따라서<마태공동체><마가공동체><누가공동체>등등을 말하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며 기독교 역사를 오류 시키는 것이며 기독교를 분산시키는 것이다.
5)열심당.
열심당은 유대의 애국적 정당으로서 헬라어로<셸롯당>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이스라엘의 야훼하나님에 대한 독점적 배타적 신앙관을 유지하는 정치적, 종교적, 신앙집단이다. 그들은 유대에 대한 어떤 외세의 개입도 불허하고 증오하며 폭력을 통해서라도 그것을 저지하고자 한다. 당시에 야훼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메시야를 통하여 다윗과 솔로몬시대의 영광을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장 크게 가진 자들이 바로 열심당원들이었다. 열심당의 역사적 결성은 유대민족이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의 폭정 하에 시달리던 때에 갈릴리사람 유다의 지도하에 창설되었다는 학설이 가장 유력하다.
열심당은 셀룟당, 가나안당, 갈릴리 당으로도 불리웠는데 그것은 열심당의 창설자였던 유다의 이름이 헬라어로<셀룟>이었고 그가 갈릴리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유다는년> 혜롯이 죽자 갈릴리 지방에서 대규모적인 봉기를 일으켰고<주후6년>에는 바리새파의 사둑과 연합하여 로마에 저항하였다.<행5:37> 갈릴리폭동 이후 갈릴리는 유대 독립운동의 본원지가 되었으나 헤롯의 아들 아켈라우스재위>가 학살을 단행하여 크게 위축되었다.
한편 열심당은 극단적 유대민족주의 단체였는데 예수그리스도의 제자 중에도 열심당 출신이 있었다. 그는 셀룟인이라 하는 시몬<눅6:15><행1:13> 또는 가나안인 시몬<마10:4><막3:18>이었다. 가말리엘은 예수그리스도를 열심당과 연관시켜 언급한 적이 있고<행5:36-37>바울도 열심당이라는 혐의를 받았다<행21:38>열심당원들은 원래 하나님에 대한 열성이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우상숭배에 대하여 심히 분노하였고 자신들이 우상숭배자들을 처단하는 하나님의 군사라고 자처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어두움의 세력>들과 싸우는 하나님의 성전에 부름 받은 하나님의 군대라고 믿었다. 열심당원들의 행동은 자신들의 조국과 민족에 대한 애국애족의 정신이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야훼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에서 비롯되어진 것이었다. 하스몬가의<맛다디아>가 자신의 죽음에 임박하여 야훼하나님에 대한 열의에 불타올랐던 비느하스와 엘리야를 예증하여 자신의 애국애족적 통분함을 토로한 것은 열심당원들의 성향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따라서 열심당원들의 신앙적 전통과 기원은 야훼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에 의하여 바알의 예배자를 살해한 제사장 아론의 자손<비느하스-민25:7-13; 시106:28-31>와 만군의 야훼하나님을 위하여 목숨 걸고 사투를 벌인 엘리야<왕상18장>의 신앙을 뒤따르는 것으로 보게 된다. 열심당원에 대한 기록은 유다의 역사가<요세푸스>에 의하여 전해진다. 요세푸스는년의 겨울에 걸쳐 예루살렘에서 반란을 일으킨 열심당원들의 과격적 행동에 대하여 기록하면서 그들을<도적>이라고 부르고 있다. 요세푸스가 그들을 도적이라고 부른 것은 당시에 그들이 로마군을 공격하면서 매우 잔악한 살인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이에 격분한 로마가 대군을 파병하여 유대와 유대인들을 잔혹하게 탄압한 것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열심당원들은 년 예루살렘이 안전하게 정복되고 파괴된 후로 더 이상 활동하지 못했으나 지엽적인 저항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제4부.신약기독교의 출발.
제1장.예수그리스도의 교회.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독교가 완전한 구성을 이루기 전까지는 기독교를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국가와 민족 안으로 제한하셨다. 예수그리스도는 이와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10:5-6>
<나는 이스라엘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15:24>
따라서 기독교는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셨던 초기 시대에까지 오직 이스라엘에게로만 제한되었다. 역사학자 중에는 이와같은 것을 근거로 하여 기독교를 유대교로부터의 확장으로 보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 유대교만의 하나님이었는데 이스라엘의 유대교가 예수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전 세계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며 따라서 기독교는 유대교의 메시야 거부에 의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출발되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도처에서 세계적인 기독교가 하나님의 신적작정에 의하여 창세전부터 이미 예정되어진 것이라고 선포한다. 기독교가 창세전부터 작정되어진 세계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께서 메시야임을 선포하시기전 까지 오직 이스라엘의 교회로만 제한되었던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 때문이었다.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그리스도다. 기독교의 모든 교회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유기적지체로서 하나의 완전한 통일성을 이룬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어 자신이 기독교의 오직 유일무이<唯一無二>한중 심이며 머리라는 사실을 선포하기 까지는 기독교를 하나의 단일적인 교회로 제한시켜야 했다. 만약에 예수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선포하기 이전에 국가단위 또는 민족단위, 부족단위로 교회들이 세워졌다면 기독교는 설립되기도 전에 이미 우상숭배적 사이비종교로 수 없이 분열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그리스도께서 강림하셨을 때 이미 유대교가 여러 종파로 분열되어져 있음을 통하여 증거 된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독교의 모든 것이 완전하게 선포되기 까지는 기독교를 이스라엘의 국가적, 민족적, 단일교회로 제한하셨던 것이다.
한편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선포한 후에 사마리아로부터 시작되는 세계적인 기독교 확장을 선포한다. 예수그리스도는 먼저 기독교의 근원이며 원형인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를 신학적으로 완전하게 정립한 후 드디어 하나님의 세계적인 기독교를 선포한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는 불과 3년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교회의 3년 역사는 아담교회 이래 그때까지의 모든 기독교 역사와 예수그리스도교회 이후의 모든 교회역사를 총괄하여 대변하고 증거하고 선포하는 위업을 이루었다. 4복음서를 비롯한 신약성경들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된 하나님의 세계적인 기독교를 다양한 차원에서 증거하고 선포한다.
1.기독교신학의 완성.
기독교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한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교회와의 모든 관계를 진행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섭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계시되고 진행된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강림 이전까지는 하나님의 섭리일체가 완전하게 계시되지 않았다. 예수그리스도 이전까지 주어졌던 하나님의 말씀<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섭리일체가 상징적이며 예표적인 것으로 주어졌고 그것도 서서히 단계적이며 점진적인 것으로 주어졌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하나님의 섭리일체가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주어졌다. 예수그리스도는 지금까지 예고되고 계시되었던 메시야가 곧 자신임을 선포했고 따라서 자신이 곧 기독교의 주체임을 선포했다. 예수그리스도는 모든 것은 오직 자신을 통하여서만 가능할 뿐이며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고 선포했다. 예수그리스도는 지금까지 상징적, 예표적, 점진적, 미완성적으로 주어졌던 기독교의 신학체계를 구체적, 실제적으로 완성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께서 기독교신학 체계를 문서로 정립한 것은 아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나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말씀으로 그것을 정립시켰다. 그리고 그것은 훗날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사도바울을 통하여 문서화 되었고 그것이 성경으로 정립되었다.
<교리에 대한 신학정립은 교리 정립역사에서 상세하게 논증할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더 이상의 논증을 생략한다.>
2.교회조직의 완성.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는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세베대의 아들>, 요한, 빌립, 바돌로메, 도마, 마태, 야고보<알패오의 아들>, 다대오, 시몬, 유다 등등의 12사도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조직을 세웠다. 성경에는 예수그리스도께서 12제자를 불러 세운 것 이외에 다른 어떤 특별한 교회조직을 구성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지 않다. 교회조직은 훗날 사도들에 의하여 점진적으로 세워졌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께서 불러 세운 12제자가 곧 교회조직의 시작이며 동시에 완성이다. 교회조직은 이미 광야교회시대에 성막교회와 제사장제도를 통하여 상징과 예표로 주어졌으며 특히 여호수아시대의 12부족교회를 통하여 더욱 체계화 되었다. 그러나 사사시대교회와 왕국교회시대를 거치면서 교회조직은 와해되어져서 유명무실한 것이 되었고 왕국교회가 무너진 후 포로교회시대와 유대국에 대한 이방인들의 식민통치 과정에서 완전히 이교적인 것이 되었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께서 12제자를 세운 것은 그 12제자를 중심으로 하여 다시 세워지게 되는 교회조직을 감안할 때 교회조직의 개편, 또는 교회조직의 재건으로 언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교회조직의 시작이며 완성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교회조직은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교회조직에 대한 상징과 예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12제자를 통한 교회조직은 지금까지의 교회조직을 총체적으로 반영하고 적용하였다. 그것은 훗날 사도들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교회조직의 형태가 광야시대로부터 세워진 교회조직 형태를 그대로 적용한 과정에서 증명된다. 예수그리스도 이전의 교회조직은 대제사장을 최고 지도자로 하는 조직형태였다. 대제사장은 영원하고 완전한 대제사장인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상징과 예표였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의 강림함에 따라 대제사장은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제는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조직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세운 12제자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지휘 하에 지교회들을 인도하고 대표하는 직분 자들이다.
<교회조직에 대해서는 교회조직 역사에서 상세하게 논증할 것임으로 여기에서는 더 이상의 논증을 생략한다.>
3.하나님나라 선포.
예수그리스도교회에는 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은 기독교 성도가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실체가 궁금하여 모여들었고 예수그리스도께서 행사하시는 기적과 이적을 보기 위하여 또는 자신의 질병을 고치기 위하여 모여들었다. 반면에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한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시는 하나님나라는 두 가지로서 하나는 현세를 마친 후 구원받은 자들이 부활을 통하여 가는 하나님나라<천국>이었고 다른 또 하나는 성도들의 신앙적, 사명적 삶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 선포되고 증거 되는 하나님나라였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그 두 개의 하나님나라 중에 후자를 더욱 강하게 선포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유대국과 이스라엘 민족을 복구시켜 줄 현세적인 메시야를 원하였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선포하는 두 개의 하나님나라를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선포하는 하나님나라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사도들에 의하여 비로소 전파된다. 그러나 사도들이 전파하고 가르치는 하나님나라는 오직 하나로서 구원 받은 자들이 가는 하나님나라<천국>이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성도들이 어떠한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곧 현세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라는 신학원리는 몰랐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초기 기독교와 중세기독교는 물론이요 현대기독교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아직도 많은 목회자들이 구원받은 자들이 가는 천국에 대한 개념에만 몰두해 있을 뿐 기독교가 현세적으로 이루어야 하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이다.
4.하나님섭리 선포.
예수그리스도교회는 교회에 주어진 사명 중 하나인 하나님의섭리 선포에 전념하였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공중 나는 새들과 들에 핀 백합화 한 송이도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를 선포했고 특히 기회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고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선포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천국만을 하나님나라로 이해했듯이 하나님의 섭리도 자신들을 구원하는 구속사적 차원의 섭리로만 이해하였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몰이해<沒理解>역시 초기기독교와 중세기독교는 물론이요 현대기독교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아직도 많은 목회자들이 구속사적 차원의 하나님의 섭리에만 몰두해 있을 뿐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이다.
5.하나님말씀 선포.
예수그리스도교회는 제자들에게는 물론이요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들은 훗날 사도들을 통하여 성경으로 정리되었다.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신학이었다. 때문에 요한사도는 예수그리스도를<말씀-로고스-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고 선포하였고 신학자들은 그것을<로고스신학>이라고 정립하였다.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일으키는 기적과 이적을 보기위하여 모여들었으나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병자를 고치거나 귀신을 내쫒는 일을 하기 전에 먼저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그것은 교회의 사명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것이며 병자나 귀신들린 자를 내쫒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진행하는 과정에 부차적으로 진행하는 보조적인 것임을 교육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를 모르는 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보다는 병자나 귀신들린 자를 내쫒는 기적과 이적에 더욱 매력을 느끼며<행8:18-24>이러한 비진리는 현대기독교에서도 여전히 존재한다.
6.제자훈련.
예수그리스도교회는 교회의 사명 중 하나인 제자훈련을 실시하였다. 예수그리스도의 제자훈련은 신학적인 것임과 동시에 신앙적인 것이었다. 예수그리스도는 자신의 실제적 삶을 통하여 제자들을 훈련시켰다. 예수그리스도께서 가르치는 것과 일치하는 삶을 사신 것은 기독교인들의 삶이 그러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모범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하나님의 종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하며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기 위한 목적적 삶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그리스도의 제자훈련은 기독교역사에 항상 무시되어 왔다. 거의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제자훈련을 실시함에 있어 예수그리스도의 교육방침을 따르지 않았다. 저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이루는 섭리적 차원에서의 신학을 가르치지 않고 구속사적인 차원의 교리만 가르쳤으며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이루는 사명적 차원의 신앙을 가르치지 않고 목회자에게 충성 복종하는 신앙을 가르쳤다. 그리고 자신들은 전혀 가르치는 대로 살지 않고 오히려 반대의 삶을 살아<저들은 이미 자기상을 받았다-마6:2>는 말씀과<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행하는 바는 본받지 말라-마23:3>는 말씀을 그대로 입증하고 있다.
7.교회사명 부여.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완성하여 명실상부한 기독교의 수장이 된 후 통치주로서의 권위와 권세로 모든 교회에게 사명을 부여하였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그것은<창1:28>을 통하여 부여된 사명으로서 아담교회 이후의 모든 교회들에게 일률적으로 영원히 부여된 사명이었다. 그리고 그 명령 속에는<마5:13-16>과<마6:33>을 포함한 지금까지의 모든 말씀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예수그리스도는 승천하기 직전 다시 한번 교회들에게 사명을 상기 시켜주면서 모든 교회들의 사역 현장에 자신의 영<성령>이 함께 하사 교회들이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겠다는 약속을 인<印>쳐주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교회의 사명은 조직신학에서 정리할 문제임으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고 원론적인 것만 정리한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정립하여 주신 교회사명의 원론은 다음과 같다.
*진리를 사수하고 보존하고 보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모든 창조영역을 정복하고 통치하고 관리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하고 양육하고 관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교회들을 계속하여 영원히 세워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것이다.
교회는 이와같은 사명을 진행함으로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로 온전한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하며 그들을 빛과 소금의 전사들로 양육하여 그들이 자신의 현제적 삶의 영역들에서 맡은바 사명을 감당하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복되고 통치되고 관리되어지는 가운데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만천하에 세워짐으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한편 구속사적인 차원에서의 복음전파는 위와같은 교회의 사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진행되어진다. 결국 인류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역사의 총체 또는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역사 중의 한 영역이며 따라서 복음전파 역시 교회사명의 총체 또는 주체가 아니라 교회사명의 한 영역인 것이다.
8.메시야의 사명 완성.
예수그리스도교회의 역사 중에 가장 장엄하고 가장 거룩한 역사는 예수그리스도의 메시야사명 완성이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메시야사역을 완성하는 역사적인 순간들을 통하여 숨 가쁘게 진행되는 기독교역사의 장엄함과 거룩함을 보게 된다. 예수그리스도의 메시야사역 완성은 사단의 계략으 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에 사단은 참으로 곤경에 처해 있었다. 사단의 지혜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제 곧 어떤 어마어마한 역사를 전개하실 터인데 그것이 과연 무엇이며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그 역사를 진행하실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분명히 지금 어떤 어마어마한 역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며 그 엄청난 역사의 중앙에 예수그리스도께서 계신 것도 확실한데 그 내용과 방법을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만약에 사단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서 메시야 사명의 대 역사가 완성된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결코 가롯유다를 통하여 그를 체포당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고 유대인들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아넣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알지 못하는 사단은 하나님의 역사진행의 내용과 방법을 알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고 느낌상 그때가 가까워짐에 따라 참으로 난리가 났던 것이다. 사단은 당시의 권력층이었던 왕을 비롯한 정부 관리들과 제사장들과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열심당원 등등을 총동원하여 그 내막을 알아내려 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하여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다급한 사단은 예수그리스도만 죽으면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판단 하에 예수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아넣기 위하여 가롯유다를 이용하였고 제사장들과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열심당원 등등을 총동원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제거하였다. 사단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올려다보면서 하나님이 보호하사 사단만세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이 곧 메시야 사명의 완결일 줄을... 우리는 이 장면에서 바보 같은 사단의 한계와 그 위에 계시는 하나님의 멋진 경륜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로마법정인 빌라도 법정에서 재판을 받은 후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당시의 유대는 로마의 정치적 관할 하에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재판은 허용되었으나 사형을 언도하거나 집행 하는 것은 금지되었고 그것은 로마 법정에서만 가능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그리스도께 사형을 언도받게 하기 위하여 그를 로마의 법정에 세웠다. 예수그리스도의 죄명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종교적인 것으로서 신성모독죄였고<마26:63-66> 다른 또 하나는 정치적인 것으로서 반란 기도 죄였다.<마27;11> 제사장들은 처음에는 예수그리스도께 신성 모독죄를 적용하였다. 그러나 신성모독죄는 유대의 종교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로마법정에서 유죄판결을 얻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예수그리스도를 로마 법정에 세울 때는 반란죄로 고소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총독이며 재판관이었던 폰티우스필라티우스는 예수그리스도에게서 반란죄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총독은 정치적인 이유에서 유대의 실권자들과 마찰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결정권을 유대의 군중들에게 맡겼다. 당시의 유대군중들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의 입장에서 예수그리스도 대신 바라바를 선택 하였다. 하나는 잘못된 메시야 사상이었고 다른 또 하나는 로마에 대한 적개심이었다. 유대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은 메시야가 도래하여 다윗과 솔로몬시대의 영광을 재현해 줄 것을 기대하였다. 그리고 그 메시야는 다윗의 가문을 통하여 올 것으로 기대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메시야의 강림하심이 적어도 다윗 가문을 통한 귀족적인 강림일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한 그들에게 초라한 목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께서 메시야임을 자처하고 나섰을 때 그것은 대꾸할 가치조차 없는 코메디였다. 그러나 그들이 목수의 아들을 무시하고 비웃는 사이에 사태가 이상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목수의 아들이 감히 하나님의 아들임을 공공연하게 주장하는가 하면 자신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통로라고 선포하더니 이제는 아예 자신과 하나님을 동격으로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민초들을 상대로 하여 변두리광야나 빈들을 헤매던 그가 대중들이 따르는 것에 기고만장하여 이제는 감히 예루살렘성전에까지 난입하여 난동을 부리는가 하면 제사장들을 훈계하고 드디어는 제사장들을 비롯한 바리새파 사두개인 등등의 민족적,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들을 싸잡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하면서 심판하겠다고 협박하고 나섰다. 이러한 예수그리스도의 행보는 당시의 유대인들, 특히 지도자 계열로서는 도저히 참고 묵과할 수 없는 오만방자한 것이었다. 한편 로마의 학정에 대한 분노와 민족적 국가적 애국심에 불타는 자들에게는 가난한 자들과 어울리면서 사랑 타령이나 부르는 목수의 아들보다는 실력으로 로마와 대적할 수 있는 바라바가 더욱 요구 되었다. 이러한 두 가지 이유에 의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사형 죄의 명목으로 십자가 처형을 언도 받았다. 그러나 당시의 재판장이었던 폰티우스필라티우스총독은 예수그리스도의 무죄함을 분명하게 선언하였다.<마27:24>
우리는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빌라도법정에서의 예수그리스도 재판을 회상하면서 참으로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재판장 스스로가 무죄를 선언하면서 예수그리스도에게 무죄함을 변론하라고 했지만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다만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단 한마디 변호 외에는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26:39>라고 울부짖던 예수그리스도는 정작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는 오히려 자신을 위한 한마디의 변호조차 삼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하심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죽음조차도 두려워해서는 않 된다는 진리를 하나님의 종들에게 몸소 실천적으로 보여주는 완벽한 실제적 교육이었다. 성경은 이러한 예수그리스도의 로마법정을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사53:7-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로마법정에서의 재판보다 더욱 장엄한 것이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썼고 십자가에 달리어 두 손과 두 발에 못이 박혔으며 민초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다 받았다. 예수그리스도를 압송하던 군사들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입었던 옷마저 벗기어 제비 뽑아 나누어 가졌고 그리하여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벗은 몸으로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민초들은 예수그리스도께 침까지 뱉으면서 조롱하였고 심지어는 살인강도까지도 예수그리스도께 향하여 조롱과 야유를 퍼부었다. 참으로 망극한 일이었고 참으로 슬픈 일이었고 참으로 참담한 일이었다. 그것은 정녕 하늘이 무너져야 할 일이었고 땅이 꺼져버려야 할 일이었다. 세상이 온통 무너져 버리고 깨어져 버리고 날아가 버려야 할 일이었다. 세상에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않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메시야께서 인간을 위하여, 그것도 그냥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하고 저주하고 멸시하고 조롱한 바로 그 인간들을 위하여 메시야께서 죽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에 참으로 엄청난, 상식을 초월하고 세상을 경악하게 하는 형이상학적 사건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그 메시야께서는 오히려 세상을 용서하시고 축복하셨던 것이다. 메시야께서는 자신의 모든 고통을 감수 하시면서 마지막 숨이 멎으시는 그 순간까지 저들의 잘못을 변명하시면서 그들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셨으며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셨다. 결국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은 결코 비통이나 패배가 아니었다. 아니 그것은 분명히 비통과 패배였지만 그것은 잠시에 불과하였고 곧 승리의 역사를 알리는 팡파레가 만천하에 울려 퍼졌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숨이 멎으시기 직전 하늘이 울었고 땅도 울었다. 우주만물이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에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잠시, 아니 순간의 일이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시면서<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는 순간 하늘의 울음도 땅의 울음도 순식간에 멎어 버렸다. 하늘에서는 지성소와 성소를 가리웠던 휘장이 찢어져 내리면서 승리의 팡파레가 만천하에 울려 퍼졌고 천군천사가 합창하는 영광의 찬양이 온 천하에 메아리쳤다. 그것은 인간의 말과 글과 감정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는 장엄한 순간이었고 인간의 눈으로는 바라다 볼 수조차 없는 찬란함과 눈부심, 거룩함과 영광의 순간이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메시야로서의 사명을 완성한 것이다.
9.예수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예수그리스도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을 통하여 그 짧고도 위대한 역사를 마감하고 사도교회들에게 그 역사적 바톤을 넘겼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인류역사를 뒤 흔들어 놓고도 남음이 있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사건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조용히 진행되었다. 사망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난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다시 살아남을 만천하에 광고하지 않고 자신의 제자들을 비롯한 몇몇 성도들에게만 조용하게 나타내었다. 그리고 그의 승천도 부활과 같은 경우이었고 같은 상황이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부활 후 40일간 제자들과 함께 보내시면서 예수그리스도교회에 대한 마무리를 한 후 그 바톤을 제자들의 교회들에게 넘기고 그들만이 보는 가운데에서 조용하게 승천하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조용한 부활과 조용한 승천을 통하여 하나님의 경이로우신 권세와 능력을 실감한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나 승천과 같은 사건들은 인류역사상 그 경우를 찾아 볼 수 없는 차원의 역사적 사건들로서 그러한 사건의 당사자라면 누구라도 그 사실을 만천하에 광고하고 자랑하게 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그와같은 자신의 엄청난 사건을 그저 담담하게 진행시켰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승천을 의심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반동적 소문이 지금까지도 심심치 않게 주장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에 대한 침묵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하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곧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알리기 위하여 동분서주 할 필요가 없으며 또한 그렇게 하면 않된다. 그것은 하나님으로서의 권위와 품위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하여 바쁜 자는 강한 자가 아니다. 강한 자는 자신을 알리려고 노력할 필요나 이유가 없다. 강한 자는 다만 자신의 역사를 진행할 뿐이다. 자신의 존재를 알려야할 필요성은 약한 자에게만 존재한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엄청난 사건을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조용히 진행하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하신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절대적 권세와 권위를 아울러 실감하게 된다.
10.예수그리스도의 역사성.
예수그리스도의 탄생, 죽음, 부활, 승천 등등은 인류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역사적 사건이었다. 예수그리스도의 생애는 일반적 인간차원의 범주를 초월하는 것으로서 역사학자들의 논란과 연구의 대상이었다. 종교학적 차원에서 논증할 때에 종교를 창설한 자나 또는 그 종교를 대표하는 인물에 대해서 신격화 시키는 것은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 종교의 위상과 권위와 신실성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모든 종교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지도자나 핵심인물들을 신격화하기 위하여 그들의 출생이나 자라온 과정을 비롯한 일생에 관하여 수많은 전설적, 신화적 설화들을 만들어 내었고 그리하여 상식을 초월하는 설화들이나 심지어는 전혀 만화 같은 설화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종교학자이면서도 종교의 범주를 초월하여 종교를 이해하려는 자유주의 종교학자인 슐라이에르막허 조차도 그 위대성과 신비성에 매료되어<인류역사상 다시 존재할 수 없는 최고의 스승적 인간>이라는 찬사를 할 정도로 위대하고 장엄한 역사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의 예수그리스도께 대하여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간단하게 언급한다. 성경은 30여년의 예수그리스도의 생애를 말함에 있어 그가 사역하였던 3년여의 기간에 대한 활동사항과 그의 가르침만을 언급할 뿐 심지어는 그의 탄생일자 까지도 정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대단한 일도 엄청난 일도 신비한 일도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필연적인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권위와 품위상 스스로 예수그리스도를 광고하지 아니하시는 대신에 예수그리스도의 실존성을 역사적으로 부각시키심으로서 예수그리스도의 실존성에 의문을 품는 자들을 침묵시키신다. 우리는 성경을 근거로 한 예수그리스도의 실제성을 다음과 같이 정립한다.
1)탄생의 역사성.
예수그리스도의 강림<출생>에 대한 실제성과 역사성은 많은 논란의 대상이었다. 어떤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의 실제적 강림을 부인하고<가현적강림>을 주장하는가 하면 도 어떤 사람은<환상적강림>을 주장하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보통의 일반적인 사람이었는데 제자들의 추대에 크게 고무되어 스스로 메시야임을 자처하였다고도 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실존성과 역사성은 많은 기록문서들을 통하여 입증된다. 우리는 그것을 일일이 모두 소개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 중에 중요한 몇 가지만을 소개한다.
(1)로마의 역사적 증거.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실제성을 증명해 주는 가장 최초의 증거는 로마역사에 의한 증거이다.<눅2:1-20>에 나오는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증거는 로마제국 황제 가이사아구스도<가이우스옥타비우스-Gaius Octavius-B.C.27-A.D.14재위>의 명령에 의하여 실시되었던 로마제국 속령 하의 모든 사람에 대한 인구조사를 배경으로 한다. 그때에 유대의 관할권은 수리아<시리아>의 총독 구례노<퀴리니우스-Quirinius>에게 있었다. 당시에 로마정부는 식민지 관리와 세금징수를 위하여 14년마다 정기적인 인구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역사가들은 이 인구조사가년>에 실시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예수그리스도 탄생과의 연관성을 거부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구례노가 시리아총독으로 두 번 근무했다는 것과<눅2:2>의 첫 번이라는 단어인<프로테-πρωτη>가 일반적으로는<첫번째>를 의미하지만 때로는<이전의>또는<앞의>로도 해석되기 때문에 반드시년>의 인구조사로만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서력기원의 년대 측정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역사의 년도에 중심을 둘 것이 아니라 역사의 사실성에 중점을 두어야한다. 한편 구례노 총독의 인구조사는 히브리 역사학자인 요세푸스의 저서에도 나온다.
또한 팔레스틴 출신 가이사랴 감독 유세비우스팜필루스의 교회사는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이 아우구스투스황제의 재위42년, 톨레미왕조의 종식을 가져온 애굽의 정복 및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죽은지 28년 되던 해에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고 증언하며 당시에 시리아의 총독이었던 구례노<퀴리니우스-Quirinius>에 의해 인구조사가 있었다고 증언한다.<유세비우스 교회사-엄성옥편-제1권제5장>
한편 예수그리스도를 재판한 본디오빌라도<폰티우스필라티우스>는에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 등등을 통치한 로마제국의 총독이었다. 그는 당시에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운집한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에 대비하여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그리스도를 재판하였다. 로마역사는 빌라도의 재판에 대한 기록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비롯한 실재성을 증거 한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통하여 일반역사를 적절하게 적용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보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때가 이르매>는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적용하시는 섭리적 역사에 대한 시간적 적용을 말하는 것이다.
(2)헤롯왕조의 역사.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은 유대의 분봉왕이었던 혜롯 왕조의 역사를 통하여서도 증명된다. <마2:16>에는 혜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2세 이하의 어린아이를 학살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마크로비우스의 저서인 축제에 나오는데 마크로비우스는가이사아구스도황제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헤롯의 명령에 의해서 시리아 일대의 두 살 이하 사내아이들이 살해당할 때에 그 속에 헤롯 자신의 아들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차라리 그의 아들이 되기보다는 돼지가 되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이다.>
반면에 요세푸스는 헤롯의 유아학살에 관한 이야기를<고대 문물기-Antiquities-17권>와<역사서제2권>을 통하여 더욱 상세하게 기록한다. 요세푸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헤롯의 비참한 종말을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다루면서 그것이 예수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하여 어린아이들을 학살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증언한다.
(3)서력기원의 증거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은 서력기원에 의해서도 증거 된다.
서력기원<西曆紀元>이란 서양에서 사용되고 있는 기원<紀元>에 대한 동양적인 명칭이다. 유럽에서는 그리스도 기원이라고 하며 그리스도탄생의 해라고 간주되는 해를 기준으로 하여 출발되어 진다. 서력기원은 A.D.6세기경에 로마의 수도사<修道士>인디오니시우스엑시구스가 창시하였다. 그는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로마건국 기원 754년이라고 하여 그 때를 서력기원 1년으로 출발시켰다. 그러나 많은 연대 학자들은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로마건국 기원 750년으로 계산하여 실제로는 A.D.4년을 예수그리스도 탄생의 해로 간주한다. 서력기원이 유럽에서 사용된 것은 A.D8세기 이후부터이다. 서력기원은 그리스도 탄생 이전을 기원전<紀元前-B.C.-Before Christ>라고 하고 그리스도탄생 이후를 기원후<紀元後-A.D.-Anno Domini-주의해-主의年>라고 표기한다. 서력기원은 현재 세계 각국에서 이의 없이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이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탄생 년도를 기점으로 하여 출발하였다는 것도 이의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2)부활의 역사성.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실제성과 역사성을 부인하는 많은 주장들이 있어 왔는데 그중에 중요한 것 몇 가지를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
(1)시체 도적설과 유대의 전승.
예수그리스도부활의 실제성과 역사성을 가장 처음 거부한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한 유대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들이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아리마대사람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었을 때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은 후 사흘 후에 부활할 것이라고 예고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때문에 그들은 총독 폰티우스필라티우스를 찾아가 로마의 군대가 예수그리스도의 무덤을 지켜달라고 청원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예수그리스도의 재판에 관여하기를 꺼려했던 총독은 더 이상 그 일에 관여하기를 싫어하여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스스로 해결하라고 하였다. 저들은 할 수 없이 자체적인 수직군사들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의 무덤을 지키게 하였다.<어떤 역사가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하여 로마군대가 예수그리스도의 무덤을 지켰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저들은 수직군사들이 지키는 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살아생전에 일으켰던 각종 기적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들은 거대한 돌로 무덤 입구를 봉쇄하였다. 그러나 그 어떤 조치도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예고한 대로 장사한지 삼일 후에 살아난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우려<憂慮>가 실제로 나타남에 따라 난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직군사들에게 돈을 주어 자신들이 자는 사이에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질해 갔다는 소문을 내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만들어 유포한 헛소문은 오래가지 않았고 결국은 헛소문을 내게 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흉계의 전말이 유대 전역에 들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마28:11-15>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유대인들의 야사<野史>에도 여러 가지로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2)기절설과 로마의 증언.
예수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 다만 기절했었다가 살아났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주로 삼류 소설가들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예술과 관계없이 수입을 목적으로 하는 몆몆 삼류 소설가들은 예수그리스도가 기절하였다가 다시 살아난 후 더 이상 활동하지 않고 숨어살다가 나이 먹어 죽었다는 내용의 소설을 써서 많은 수입을 걷어 들였는데 이러한 일들은 근래에도 계속되고 있다. 어떤 미국 여자소설가는 예수그리스도가 기절했다가 살아난 후 막달라마리아와 함께 로마를 거쳐서 프랑스로 간 후 그곳에서 자녀를 낳고 살다가 사망했다는 소설을 써서 많은 돈을 벌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로마에 의해서 확인되었다. 마카비가<家> 후예들의 인도 하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 당시의 로마황제와 원로원은 반란의 원인과 규모에 대한 문제를 보고 받으면서 그것이 정치적인 이유의 반란임과 동시에 유대의 종교적인 이유가 복합된 반란임을 보고 받았다. 그리고 이때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어 장사된 후 3일만에 다시 살았다는 보고를 함께 받았다. 그러나 로마의 관심은 정치적인 반란에 있었지 종교적인 반란에 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지극히 합리적인 로마의 개념으로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이야기는 하나의 종교적인 설화로만 인식되어 가볍게 간과 되어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보고에 대한 기록은 로마역사 문헌에 작게나마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3)에뎃사왕과 다대오의 이야기.
예수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실제성과 역사성을 증명해 주는 또 다른 역사적 기록이 있다. 그것은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에 있는 에뎃사라는 작은 나라의 왕국 공문서인데 이 공문서에는 당시의 왕이었던 아그바루스의 질병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아그바루스왕은 백약이 무효인 질병을 앓고 있던 중에 유대의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예수그리스도께 편지를 보내어 초청하였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초청에 응하지 않고 제자를 보내어 질병을 치료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약속은 훗날에 성취되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한 후 도마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칠십문도 중의 한 사람이었던 다대오를 에뎃사로 보냈다. 다대오는 복음의 전령사로서 사명을 이행하던 중 왕에게 자신이 오게 된 내역을 전달하였다. 즉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은 후 부활하여 승천하였고 따라서 자신이 도마의 명을 받고 에뎃사로 오게 되었다는 전말을 왕에게 고한 것이다. 이때에 왕은 다대오를 통하여 질병을 치유 받았다. 이러한 내용은 에뎃사의 고대역사와 아그바루스왕의 의사록을 담고 있는 공문서에 사실대로 기록되어 오늘날 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우리는 그 문서를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고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기록되어 있는 당시의 서신을 소개하기로 한다.
(1)아그루스바왕이 예수그리스도께 보낸 편지.
<이 서신은 특사인 아나니아가 예루살렘의 예수그리스도께 전달했다.>
에뎃사의 임금 아그바루스는 예루살렘 변경에 출현한 탁월한 구세주 예수에게 문안합니다. 나는 당신이 약이나 약초를 사용하지 않고도 병자를 고쳤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당신은 눈먼 자를 보게 하고 저는 자를 걷게 하며 오랫동안 고생하여온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여주고 죽은 자를 살렸다고 합니다. 당신에 관한 이런 소문을 듣고서 나는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즉 당신은 하나님으로서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이러한 일을 행하시는 것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당신이 나를 방문하여 나를 괴롭히고 있는 질병을 고쳐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나는 또 유대인들이 당신에게 대해 불평을 하고 있으며 당신을 해치려는 음모를 꾀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나는 비록 작지만 고귀한 국가를 소유하고 있으니 이것은 우리 두 사람을 위해서 충분할 것입니다.
(2)예수그리스도께서 아그바루스왕에게 보낸 답신.
오 아그바루스여! 나를 보지도 않고서도 믿는 그대에게 복이 있습니다. 기록되기를 나를 본 자는 나를 믿지 않을 것이며 나를 보지 못한 자가 나를 믿고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을 방문해 달라는 요청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반드시 이루어야할 일이 있습니다. 내가 이곳에 온 것도 바로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이것을 이루어 나를 보내신 그분의 영접을 받아 하늘로 들려올라 간 뒤에 나는 당신에게 내 제자 한 사람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가 당신의 질병을 고쳐주고 당신 및 당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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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그리스도의 실제성과 역사성에 대한 증거들은 공식 또는 비공식적인 역사문서들을 통하여 무수하게 증명 된다. 반면에 성경을 비롯한 기독교 역사문서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실제성과 역사성을 증명하고 부각시키려는 어떤 노력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성경은 예수그리스도께 대한 모든 것을 간략하고 짧게 기록하고 있으며 예수그리스도께서도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함에 있어, 자신의 어떤 점을 부각시키려 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된 신학적인 문제만을 열심히 정립시켜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문서들도 예수그리스도의 실제성과 역사성을 거부하려는 자들을 향하여 성경을 근거로 하는 변증은 하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어떤 설화들을 만들어 낸다던가 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우수성이다. 기독교는 기독교를 부각시키려는 어떤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계시느냐? 않 계시느냐? 예수그리스도께서 실존재로 강림하였느냐? 아니면 가현적, 또는 환영적으로 강림한 것이냐? 예수그리스도께서 진실로 부활 승천하였느냐? 하는 것들은 그것을 논증한다는 것 자체로서 이미 하나님께 대한 불경이다. 기독교는 다만 하나님의 섭리대로 살고 하나님의 섭리대로 일하면 된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하나님의 섭리를 증거하고 전파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섭리는 어떤 논증에 의하여 존재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존원리에 의하여 당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존재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2장.사도시대의 교회.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한 후 본래의 자기 위치로 승귀 하시면서 하나님의 교회들을 제자들에게 맡겼다. 그것은 이미<마16:18-19>>을 통하여 예고되어진 것이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16:18-19>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은 이제 제자들에게 당신의 교회를 맡긴다는 것이었지만 그 말씀 속에는 교회들에게 주어지는 절대적인 권위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의 머리이신 만왕의 왕 예수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성령>을 통하여 영원히 교회를 주관할 것이며 또한 영원히 함께 하여 주심으로 승리의 교회들이 될 것임을 약속하신 것이었다. 사도들은 이와같은 예수그리스도의 약속하심과 명령하심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이끌어 가는 사명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쳤다. 그들이 예수그리스도께 물려받은 교회는 내용적으로는 영광의 교회였지만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생명을 걸어야 하는 절대 절명의 험난한 교회였다. 우리는 사도들이 목숨 바쳐 전개한 복음전파와 교회설립의 현장들을 돌아보면서 그 처절한 그러나 참으로 영광스러운 기독교역사를 실감하게 된다.
1.예루살렘교회년>
1)예루살렘교회의 역사성.
기독교 역사가들은 신약시대 최초의 교회를 안디옥교회로 본다. 그것은<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11:26>의 말씀을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신약시대 최초의 교회는 예루살렘교회다. 예루살렘교회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시고 사역하셨던 교회이며 성령하나님의 공식적인 가시적 임재하심이 최초로 계셨던 교회다. 따라서 예루살렘교회는 기독교역사에 길이 남을 중대한 역사성을 갖는다. 비록 예루살렘교회가 신약시대 최초의 교회로서 기독교 본산의 핵심적 위치에 서지 못했고 비운 속에 사라져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최초의 신약시대 교회인 예루살렘교회가 갖는 역사성에 항상 주목해야 한다.
예루살렘교회가 예수그리스도에 의해서 설립되어진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 사단의 시험을 거치고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한 때였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잠시 동안 갈릴리, 나사렛, 스불론, 납달리의 가버나움 등등의 지역에서 휴식을 취함으로서 이사야선지를 통한 하나님의 예고<사9:1-2>를 완성한 후<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를 선포하면서 공생애를 시작하였고<마4:12-17>이때에 예루살렘교회를 설립하였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설립한 예루살렘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건물<예배당>이 아니었다. 당시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설립한 예루살렘교회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머무는 시간과 장소였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현장들이 곧 교회였으며 예수그리스도께서 기도하고 기적과 이적을 행하는 현장들이 곧 교회였다.
2)예루살렘교회의 위치.
예루살렘교회가 하나의 장소적인 위치를 갖게 된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승천한 후 사도들이 교회를 인계 받았을 때이다. 예루살렘교회의 위치에 대해서는 몇 가지의 서로 다른 주장이 있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것은 세 가지로서 첫째는 솔로몬에 의하여 건축된 예루살렘성전이며 둘째는 쿰란공동체 또는 엣세네파들의 예배 처소이고 셋째는 마가의다락방이다. 우리는 그중에서 마가의다락방을 예루살렘교회로 본다. 학자들 중에는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예루살렘성전을 수시로 드나들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솔로몬의 예루살렘성전이 예루살렘교회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당시의 사도들은 아직은 유대교의 입장에서 성전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었으며 또한 당시에는 성전 앞뜰에서 자유로이 토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의 성전 출입은 제한받지 않았었다. 반면에 예루살렘성전의 동쪽 편에 위치해 있던 솔로몬행각이 사도들의 복음 전파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솔로몬행각은 긴 장랑<長廊>으로 되어있었는데 여름에는 뜨거운 햇빛을 피하는 곳이었고 겨울에는 눈과 비를 피하는 곳이었으며 성전에 예배드리러 온 사람들로 항상 붐볐다. 때문에 사도들은 이곳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의 예루살렘성전은 예수그리스도를 고소한 자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음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들로 구성된 예루살렘교회가 성전에서 공식적인 기독교 활동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한편 쿰란공동체나 엣세네파 역시 예수그리스도의 메시야 되심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교회의 일원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의 공동체가 예루살렘교회가 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예루살렘교회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면서 성례전을 정립해 주었고 예수그리스도의 승천 후에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였으며 성령의 임재하심이 가시적으로 있었던 마가의다락방이 분명하다.<행1:13><행2:1-13>
3)성령하나님의 가시적 임재.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그리스도 이후의 교회 즉 사도들의 주관 하에 있던 교회역사는 주로 유대 밖의 교회들에 대한 역사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으로부터 시작되는 예수그리스도 이후의 교회역사는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시작되는 사도주관 하의 교회역사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부터 출발된다.
예루살렘교회는 세례요한을 통해서 예고되어지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약속하셨던 성령하나님의 가시적인 임재하심에 대한 증거를 기독교역사에 남겼다.<마3:11><요14:16,26; 15:26; 16:7><행1:8>
성령하나님의 가시적인 임재하심은 예루살렘교회가 가롯유다로 인하여 결원된 사도의 숫자를 보강한 후 오순절날에 이루어졌다.<행1:15-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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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15-2:13>을 곡해하여 많은 비진리들이 주장되고 있는바 그중에 대표적인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성령 강림절.
신학을 모르는 자들이<행1:15-2:13>을 성령하나님의 강림하심에 대한 기원으로 간주하여 성령강림 주일이라는 절기를 만들어 내었다. 저들은 특히 성령하나님의 강림하심이 오순절 날에 이루어졌다 하여 오순절 날에 대한 의미를 크게 강조한다.
*성령 세례.
신학을 모르는 자들이<행1:15-2:13>을 성령세례와 연결시킨다. 저들은 세례요한이 증거 한<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3:11>의 말씀과 성령하나님께서 임재하심이<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더니-행2:3>의 말씀을 곡해하여 성령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성령세례를<불-火>로 선포한다. 그리하여 성령을 받을 때에 뜨거움을 체험한다고 주장하고 성령세례 역시<불세례>로서 뜨거운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하나님의 섭리역사하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 성령하나님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 하나님으로서 이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기독교역사에 처음 관여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부터 기독교역사에 참여하셨다. 성령하나님께서 이때에 제자들 앞에 가시적으로 임재하신 것에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 있다.
첫째: 보혜사 성령을 보내신다는 예수그리스도의 약속하심에 대한 확인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교회, 종, 자녀들에게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보증이다.
셋째: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성령하나님에 의하여 진행된다는 선포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만왕의 왕으로서 교회의 머리로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가시적인 역사하심이 아니라 불가시적인 역사하심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적속성과 권위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불가시적인 영, 즉<성령-성부하나님의영-성자하나님의영>으로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성령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없는 당시의 제자들과 성도들은 그러한 신학원리를 알 수 없었다. 사도들을 비롯한 성도들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심에 따라 예수그리스도의 역사가 끝난 것으로 생각하여 실망하고 낙심하여 정체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기독교의 정체성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령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가시적으로 확인시켜 주심으로 그들과의 약속을 지키셨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셨으며 또한 참으로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이후의 모든 교회, 모든 성도, 모든 종들을 향한 배려적 차원의 확인시켜 주심이기도 했다.
당시의 예루살렘교회와 제자들과 성도들 그리고 기독교역사 속의 모든 교회와 종들과 성도들은<행2:1-13>의 성령하나님의 가시적인 임재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 안에서 안심하고 살게되며 강하고 담대하게 사명을 진행하는 것이다.
한편<행2:1-4>은 성령하나님께서 가시적으로 임재하심을 증거하고 있지 성령하나님께서 강림하시는 것을 증거하고 있지 않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행2:1-4>
이와같이 당시의 성령하나님께서는 가시적으로 임재하신 것이지 하늘로부터 내려오신<강림하신>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와같은 성령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성령강림 하심이라고 말하면 않된다.
<이 문제는 조직신학에서 논증할 문제 임으로 여기에서는 더 이상의 논증을 삼가기로 한다.>
4)예루살렘교회의 신학사상.
하나님의 기독교가 에덴교회로부터 출발되어 졌으나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통하여 기독교역사가 진행되었으므로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유대인, 즉 히브리인들이었다. 그들의 역사는 곧 야훼하나님의 역사였고 기독교의 역사였다. 그들이 비록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아넣는 망령된 일을 저질러 천추에 씻지 못할 민족적 한을 남겼지만 그들은 조상대대로부터 전승되어진 메시야에 대한 신학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메시야사상은 몇 가지의 종교적 사상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유대인들을 수 천 년간 이끌어 온 정치적, 종교적, 핵심은 율법이었다. 그들이 한때 착각하고 실수하여 하나님의 신정치<神政治>를 거부하고 왕정치<王政治>를 요구하였지만 그들을 통치하고 인도하는 것은 언제나 율법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메시야 사상은 당연히 율법과 연관된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또한 조상대대로 전승되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제사장나라가 되는 것이며 히브리민족이 제사장민족이 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국가가 하나님께 선별되고 선택되어진 제사장 국가라는 것을 굳게 믿었으며 또한 자신들의 민족이 하나님께 선별되고 선택되어진 제사장 민족이라는 것을 굳게 믿었다. 이러한 신학과 신앙은 그들을 지탱시켜주는 유일한 희망이요 등불이었다. 이러한 신학과 신앙으로 인하여 그들은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되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가 되었어도 결코 절망하지 않고 여전히 야훼하나님을 섬기며 훗날을 기약했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당시에 만연했던 그레꼬로만의 사회적 문명 속에 휘말리는 것을 거부하고 민족적 전통문화와 종교를 목숨 걸고 지켰다. 그레꼬로만 문명 속에 안주하는 자들의 입장에 보면 야만스럽고 무지하기까지 한 유대인들이었지만 그들은 장차 자신들이 오히려 그들을 지배하고 다스릴 것이라는 기대감 속에서 모든 고난을 감수하였다. 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알아 볼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신학적, 신앙적 사상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약속되어진 메시야는 이스라엘을 제사장국가로 세워주고 히브리인들을 제사장민족으로 세워줄 야훼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가진 메시야였다. 때문에 그들은 초라하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자신을 가리켜 약속된 메시야라고 했을 때 비록 그가 때때로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당연히 예수그리스도 아닌 목수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내던진 것이었다. 이러한 그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고 예수그리스도의 메시야성을 인정하게 되는 충분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메시야사상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자신들에게 약속되어진 메시야 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약속된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한 사실에 스스로 충격을 받았지만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그가 약속되어진 메시야갸 분명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강하고 능력 있는 자신들의 메시야사상을 다시 한 번 확인함과 동시에 이제는 하늘의 천군천사<千軍天使>를 대동하고 장엄하게 강림하게 될 메시야를 대망하게 되었다. 이제 이스라엘은 세계를 통치하는 영광스러운 제사장 국가가 될 것이며 히브리민족은 세계를 주도하는 영광스러운 제사장 민족이 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이러한 대망은<물론 나중에는 그러한 오해가 모두 정리 되었지만>베드로를 비롯한 예수그리스도의 사도들에게도 어느정도 남아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그리고 더욱 율법주의적 메시야 사상에 매달려 설레이는 기대감 속에서 자신들의 전통적 문화와 종교를 지켜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메시야사상에 대한 오해는 오순절 마가다락방의 예루살렘교회에 임재된 성령하나님의 공적, 가시적, 임재를 통하여 서서히 바로 잡아지게 되었다. 그때에 성령하나님의 임재하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각 나라의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을 때 가장 먼저 놀란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유대인들이었지만 사도들은 자신들이 예수그리스도 즉 메시야에 대하여 크게 오해 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로부터 메시야사상에 대한 역사적 전환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메시야 사상의 전환은 일반 유대인들 보다는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인식에서 보다 빠르게 전개되었다. <행2장>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이제 그들이 인식하는 메시야는 더 이상 유대교적 메시야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예수그리스도께서 율법적이며, 군사적, 정치적 권능과 권위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메시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을 통한 대속 죄의 메시야로 오셨음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과 달리 일반인들의 의식 속에는 아직도 여전히 유대교적 메시야, 율법적 메시야 사상이 잔존하고 있었다. 신약교회 초기시대에 성도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교회에 내 놓거나 나누어 가지는 삶을 살았던 것은 사실은 천국에 대한 소망과 기대감 보다는 이와같은 메시야의 강림을 기대했던 신앙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예수그리스도의 메시야적 강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그리고 사도들의 가르침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메시야와 예수그리스도를 다 함께 오해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기까지에는 오랜 세월이 요구되었다. 사도들의 복음전파에 유대인들이 율법적 제동을 걸었던 것은 이와같은 신학적, 신앙적 배경 때문이었다.
5)예루살렘교회의 갈등.
예루살렘교회가 유대교적 메시야 신앙에서 기독교적 메시야 신앙으로 서서히 귀환하게 되면서 예루살렘교회는 성령의 임재하심 속에서 기독교로서의 본격적인 사명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는 현실적인 많은 문제들로 인하여 점점 어려움을 겪었다. 최초의 교회적 분규는 교회내의 구제 문제로 인하여 일어났다. 이때에 예루살렘교회에는 크게 두 종류의 성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히브리파 유대인 성도였고 다른 하나는 헬라파 유대인 성도였다. 숫자적으로는 헬라파 유대인 성도가 더 많았지만 실권은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쥐고 있었다. 때문에 헬라파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 문제에서 불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불만으로 인하여 결국은 분규가 발생했다. 헬라파 유대인 성도들은 자신들에 대한 구제 문제를 표면화 하여 불만을 제기했다. 이에 사도들은 일곱 집사를 세워서 구제 문제를 전담시켰는데 헬라파 유대인 성도들에 대한 배려를 위하여 일곱 집사를 모두 헬라파 유대인 성도로 세웠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신학 문제였다. 당시의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인정하여 예루살렘교회에 들어 왔으나 아직은 율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때문에 그들의 신학과 신앙은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기독교의 복음주의가 혼합된 것이었다. 그들은 안식일 엄수 및 할례의 절대 시행을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예배의식도 여전히 유대교적 율법주의에 입각한 예배의식을 고집하였다. 때문에 심지어는 베드로가 무할례자인 고넬료의 집에서 식사를 한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여호와하나님이 이방인들의 하나님이 되는 것을 인정할 만한 신앙적 준비가 아직은 되지 않았다. 특히 경건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의 교류를 죄악으로 여기어 금지하였고 같은 유대인들이라 할지라도 헬라파 유대인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반면에 당시의 12사도들도 아직은 유대교적 신학으로부터 완전히 결별할 만한 신학적 체계를 갖추지 못하였다. 때문에 사도들은 유대교적 율법주의 기독교신학과 신앙, 그리고 복음주의적 기독교신학과 신앙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들을 시원하게 해소해주지 못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예루살렘교회는 자연히 유대교적 율법주의가 성행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유대교적 율법주의는 이미 오랜 전통에 의하여 신학적, 신앙적인 정립이 되어 있었던 반면에 복음주의 기독교신학과 신앙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저들은 이방선교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핑계를 대어 이의를 제기하였고 나중에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가 허락된 후에도 그것을 기뻐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이방교회에 간섭하여 할례 및 안식일 엄수를 강요하는 집요함을 보이기까지 하였다.
6)기독교총회로서의 기능행사.
예루살렘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유대인들만의 유대교에서 세계의 기독교로 확장되는 분수령적 위치와 권위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예루살렘교회가 아직은 유대교적 율법주의에 매달려 기독교 교회로서의 위상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교회는 기독교역사를 주도해 나가는 위치와 권위와 기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직 기독교라는 명칭으로 선포되지 않았고 하나님은 유대교의 하나님으로만 소개되어 있는 상황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예루살렘교회는 이제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기독교역사의 총회 본부적 권위와 기능을 행사 하였고 기독교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각종 현안들을 심의하고 처리하였다. 예루살렘교회는 고넬료의 회심사건과 성령 받은 사건을 통하여 이방인 선교를 결정하였고 수리아의 안디옥 신자들을 위하여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예루살렘교회가 안디옥교회에 바나바를 파송한 것은 곧 총회교회로서 안디옥교회를 인준한 것이었다. 예루살렘교회는 또한 바울의 사도성을 공인하여 주었으며 바울이 제기한 할례의 무용성을 인정하여 할례 폐지를 허락하였다. 이로서 하나님의 기독교는 드디어 합법적인 기독교의 위상을 가지고 본격적인 역사적 진행을 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보면서<역시 우리하나님께서는 참으로 훌륭하시고 멋지신 하나님이시도다>라는 찬양을 금할 길이 없다.
예루살렘교회가 안디옥교회를 인준한 것과 바울의 사도성을 공인하여 준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사건과 같은 차원에서 정립되어야할 문제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공생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때에 세례요한은 깜짝 놀라<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거늘 주님이 내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느냐>라고 당황해 한다. 그러나 이때에 예수그리스도의 대답은<허락하라 우리가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3:14-15>였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세례요한의 말과 같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이셨고 메시야이셨기 때문에 그것은 오히려 그의 메시야로서의 위상을 낮출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에 나타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자 함이었다. 하나님의 의는 질서와 순종을 요구한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상황의 경중이나 크고 작음에 관계 없이 질서와 순종을 절대적으로 요구하시는 것이다.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께서 공생애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의 질서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룬 것이었다. 안디옥교회나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의 인준을 받아야할 아무런 의무가 없었다.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종들은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신적, 주권적 작정에 의하여 준비된 것으로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주관 하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교회역사의 전통을 지키는 차원에서 예루살렘교회를 통하여 그러한 질서적 절차를 진행시키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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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이다. 그 세례에는 두 가지 차원의 하나님섭리가 들어있다.
첫째는 메시야의 강림을 준비하는 죄인으로서의 회개이다. 죄인들은 메시야의 강림을 회개로 준비한다. 그것은 구원의 서정 세 번째 단계인<회심>에 관계되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종들이 사역에 들어가기 전에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법<질서>에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을 때에 적용 한<하나님의 의>는 이와같은 두 가지의 섭리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대속죄제의 제물로서 율법의 정죄 하에 있기 때문에 예수 역시 회개로 메시야를 맞아야 한다. 반면에 그리스도는 공생애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의 종으로서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질서에 순종해야 한다.
반면에 예수그리스도께서 받은 요한의 세례는 일반인들이 받는 세례와는 차원이 다르다. 일반인들이 받는 세례는 두 가지 모두가 회개를 전제하는 세례이지만 예수그리스도의 회개는 다르다. 예수의 세례는 죄인의 입장에서 회개의 세례이지만 그리스도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질서에 순종하는 의식적 세례이다. 그리스도는 죄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7)예루살렘교회의 선교.
예루살렘교회는 사면팔방으로부터의 핍박 속에서 절대 절명의 위기적 상황에 있었지만 초대기독교 총회본부 교회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였다. 예루살렘교회는 그토록 어렵고 힘든 상황 하에서도 복음 선교의 진군을 쉬지 않았다. 특히 예루살렘교회는 유대인들로서는 절대 금기였던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복음 선교를 출발시켰고 나아가서는 에티오피아를 비롯한 이방선교를 진행하였다. 예루살렘의 사마리아 선교를 비롯한 이방선교는 스데반의 순교를 통하여 시작되었고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을 통하여 더욱 활성화 되었다. 우리는 스데반의 순교와 베드로와 고넬료의 극적인 만남을 통하여 진행되어지는 예루살렘교회의 이방선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우신 또 하나의 경륜을 보게 된다.
첫째는 스데반의 순교년>이다. 당시의 예루살렘교회는 사면팔방에서 조여 오는 박해의 절대적 위기에 빠져있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는 정치적, 종교적, 민족적인 문제들로 인한 박해였지만 우리는 그러한 역사의 배후에 사단의 집요한 흉계가 있었음을 확인한다. 예수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아넣음으로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여 자화자찬<自畵自讚>의 찬가<讚歌>를 불렀던 사단은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완성시키는 수단이 되었음에 기절초풍을 하였을 것이고 그로 인하여 슬피 울며 이를 갈았음이 분명하다. 어쩌면 사단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스스로 분노하였을 것이고 자신의 무능함에 비관하여 좌절하고 절망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알기로 그쯤에서 포기할 사단이 아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제2 제3의 공격을 계획하였을 것이다. 사단이 세운 계획은 분명히 예루살렘교회를 해산시키기는 것이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여 아니 계시고 남은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잔당인 예루살렘교회 뿐이었기 때문이다. 사단은 이번에는 더욱 많은 힘을 기울여 예루살렘교회의 와해작전에 돌입하였다. 그리하여 스데반을 공격하여 죽게 만들었고 계속하여 사도들을 공격하여 죽음으로 몰아넣음으로서 드디어 예루살렘교회를 와해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역시 거기까지가 사단의 한계였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자신의 어리석은 행위를 멋지게 적용하시면서 기독교역사를 전개하시리라는 것을 꿈에도 눈치 채지 못하였다. 사단의 흉계에 의하여 예루살렘교회가 위기에 몰리고 사도들을 비롯한 교회지도자들이 생명의 위기를 피하기 위하여 흩어졌을 때 그것이 결국은 세계기독교를 향한 선교의 출항이었을 줄을 사단은 전혀 깨닫지 못하였다. 사단이 공격한 것은 무너지고 와해되어지는 예수그리스도의 잔당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독교역사의 현장에 투입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기독교역사의 본당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예루살렘교회의 박해를 위하여 등용한 사울이 장차 바울이 되어 하나님의 기독교역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을 줄을 사단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였다. 불쌍한 사단, 바보사단은 이번에도 또 실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또 다시 크게 사용되어진 것이다.
두 번째는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역사이다.
고넬료와 베드로 그 두 사람은 이미 기독교를 위하여 예비 된 사람들이었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예수그리스도와 관계없이 따로 떼어놓고 보면 전혀 관계를 도모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해 있는 사람이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 하에서 만날 수 없는 관계적 입장이었고 또한 만나서도 않되는 입장의 사람들이었다. 베드로는 예수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전 철저한 유대교인이었고 유대의 민족주의자였다. 반면에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대의 하급 장교 백부장이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고넬료는 조국의 원수였고 고넬료에게 있어서 베드로는 경계해야 할 요 주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두 사람의 만남을 통하여 세계적 기독교역사의 닻을 올리셨다. 그 두 사람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참으로 엄청난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고넬료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하셨다. 그리고 때가 이르매 고넬료와 베드로 두 사람에게 각각 의미 있는 환상을 통하여 서로 만나게 하셨다. 당시의 상황으로 고넬료가 베드로를 초청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거니와 베드로가 고넬료의 초청에 응한다는 것은 더욱 곤란한 일이었다. 자칫하면 피차가 정치적, 종교적, 반역자로 몰릴 수 있는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두 사람은 만났다. 그리고 드디어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반신반의<半信半疑>한 입장에서 베드로를 따라 온 예루살렘성도들은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을 강복하시는 성령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게 되었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전 세계의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예루살렘교회는 드디어 이방인을 향한 복음전파의 깃발을 올렸고 사마리아를 시작으로 하여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의 돛을 올렸던 것이다.
이방선교의 깃발을 제일 먼저 올린 것은 예루살렘교회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이었던 빌립이었다. 빌립은 박해를 피하여 사마리아로 갔고 거기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다. 우리는 빌립의 사마리아 선교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경륜을 보게 된다. 예루살렘교회의 박해는 전체적인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도들에게는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집사들을 비롯한 성도들은 박해를 피하여 뿔뿔이 흩어졌지만 사도들은 아직 예루살렘교회를 사수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 사도들의 예루살렘교회 사수를 위한 결연한 신앙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도들을 함부로 박해했을 때 자칫하면 민란이 일어나 예루살렘을 비롯한 유대 전역에 큰 소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아직 때가 아니었으므로 사도들을 예루살렘교회에 머물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세미한 부분까지 주관하시어 당신의 섭리역사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전개하신다. 이러한 사실은 사마리아 선교의 과정에서 나타난다. 만약에 사도들이 먼저 사마리아에 들어가 예수그리스도를 전파했더라면 유대인들과 극심한 반목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들은 즉시 그것을 거부했을 것이다. 사마리아는 이방 집권자들의 오랜 정치적 정책에 의하여 혼혈 민족이 되었기 때문에 순수한 히브리민족을 고집하는 유대인들과는 물과 기름처럼 반목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빌립은 사도가 아니었고 디아스포라에서 돌아온 헬라파 유대인이었으며 또한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서 쫒겨나 사마리아에 피신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어느정도 동질적 입장이었던 사마리아인들에게 즉시 거부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심한 시간적 섭리 역사였다. 사마리아인들은 빌립을 통하여 역사되어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고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의없이 받아들였다. 사마리아가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된 예루살렘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하여 본격적인 사마리아 선교를 추진하였고 그 후 빌립에 의하여 에디오피아 관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자 더욱 본격적인 이방선교에 들어갔다.
8)예루살렘교회의 박해.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예루살렘교회가 운영되어질 때에 일반적 유대인들은 예루살렘교회에 대하여 아직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아직은 율법이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유대교인들은 조상대대로 전수되어온 율법을 자신들의 종교적 삶의 절대적 법으로 믿었고 예루살렘교회도 아직은 같은 이유에서 율법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다. 율법에 관한 문제는 장차 바울에 의해서 율법이 몽학선생으로 정립되기 전까지 유대교와 기독교를 갈라놓는 분수령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유대교인들은 예루살렘교회가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네파 등등과 같은 유대교 종파 중에 하나인 것으로만 생각했다. 문제는 예수그리스도였다. 예루살렘교회는 예수그리스도를 자신들의 메시야로 믿었고 반면에 유대교는 예수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초기 예루살렘교회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되도록 유대교와의 마찰을 피하고 그들과 어울려 살기를 희망했다. 왜냐하면 유대교가 곧 자신들의 뿌리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모두 자신들의 부모 형제이고 친척이며 이웃이고 동족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은 예루살렘교회를 바라보는 유대교인들도 같은 심정이었다. 따라서 예루살렘교회는 유대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믿고 인정하여 자신들과 하나가 되기를 희망했다. 반면에 유대교인들은 예루살렘교회가 고집을 버라고 정통 유대교로 환원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동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더 이상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들의 개념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유대교인들은 예루살렘교회를 아예 이방인으로 취급하고 적대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십자가에 처형한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고 섬기는 예루살렘교회를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예루살렘교회를 인정하는 것은 곧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는 것이고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는 것은 곧 자신들의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엣세네파와 쿰란공동체들도 예루살렘교회를 거절하였다. 그들은 예루살렘교회를 불경건한 집단으로 간주하여 교류를 거절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일개 목수의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야로 떠받들어 섬기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망령되고 불경스러운 것이었다. 열심당원들은 한술 더 떴다. 그들은 로마의 정복자들을 향하여 돌격하기를 거절하는 예루살렘성도들을 매국적 집단이라고 하여 박해하였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로마당국도 예루살렘교회를 곱지 않은 눈으로 주시하였고 혜롯정부도 예루살렘교회를 와해시킬 틈을 노렸다. 예루살렘교회는 그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 하에서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예루살렘교회의 종료는 지도자들의 순교로부터 시작되었다. 예루살렘교회 핍박의 주역은 예수그리스도의 강림 때에 예수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하여 영아들을 살해했던 헤롯왕의 손자<눅1:5>이며 세레요한을 살해했던 갈릴리 분봉왕 혜롯 안티파스의 조카, 헤롯아그립바1세년>였다. 헤롯왕가는 유대에 통치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로마의 분봉왕이었기 때문에 유대에 대한 전반적인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는 반면에 실제적 권한을 가진 로마의 눈치를 항상 살펴야 했다. 뿐만 아니라 헤롯왕가는 유대민족이 아닌 이두메<에돔>인으로서 민족적 근원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적대를 받았다. 헤롯왕가는 자신들의 권좌를 누리기 위하여 로마와 유대 양편의 눈치를 항상 예의 주시해야하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입장의 헤롯왕가는 특히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되는 예수그리스도의 기독교를 항상 염려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기회만 있으면 와해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입장의 헤롯에게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유대인들의 호감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요 방편이었다. 유대인들도 헤롯왕가 못지않게 기독교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헤롯왕가는 예루살렘교회를 공격함으로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 자신들의 근심을 없애는 이중적인 유익을 얻으려했다. 헤롯왕가는년>에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살해하였고, 년>에는 바리새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의 명령에 의해서 예수그리스도의 형제 야고보가 살해당하였다. 이때에 체포당했다가 탈출한 베드로를 위시한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은 박해를 피함과 동시에 이방선교를 위하여 예루살렘교회를 떠났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핍박은 하나님의 섭리를 반영해 주는 아름다운 역사적 증거였다. 이미 앞장에서 논증한바 있듯이 예루살렘교회의 와해는 곧 하나님의 기독교가 전 세계적 기독교로 확장되는 역사의 출발이었다. 박해를 피하여 예루살렘교회를 떠난 사도들과 전도자들은 각지로 흩어지면서 세계 만방에 기독교를 전파하게 된 것이다. 한편 우리는 예루살렘교회의 핍박을 통하여 전개되어지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자비하심을 체험하게 된다. 당시에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순교당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일반적인 죽음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곧 하나님 나라에서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의 순교적 죽음은 하나님을 위하여 죽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영광적 죽음이다. 반면에 헤롯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비참한 죽음을 당한다.<행12:23>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영광을 주시고 하나님을 적대하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징계를 내리시는 것이다.
9)열심당의 저항과 유대의 멸망.
로마와 혜롯왕조의 이중 통치 하에서 유대의 민족주의는 점점 강력하게 뻗어나갔다. 유대인들은 로마와 혜롯왕조의 통치에 맞서서 끊임없이 저항하였는데 그것을 지휘한 것은 마카비의 후예를 자처한 열심당이었다. 로마는 이러한 그들의 도전을 좌시할 수 없었다. 로마는 티투스를 보내어 유대의 저항을 종식시켰다. 로마와 유대의 전투는 5년간계속 되었고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티투스는 예루살렘성전을 완전히 파괴하여 유대의 종교적 구심점을 없애버렸다. 이때에 유대는 완전히 멸망하였고 그 후에 아키바랍비의 후원을 받은 바르코흐바또는 벤코세바-Ben Kosebah>가 다시 한 번 독립전쟁을 일으켰으나 3년만에 패퇴하였다. 전쟁이 종료된 후 로마황제 하드리안의 칙령에 의하여 모든 유대인들은 유대지방으로부터 추방당하여 뿔뿔이 흩어졌고 예루살렘은<엘리야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이제 예루살렘에서는 야훼하나님의 유대교나 히브리니즘의 외형적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유대인들이 예수그리스도에게 까지 자랑하였던 야훼하나님의 솔로몬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어 흔적만 남았고 유대인들이 그토록 멸시하고 무시하였던 이방신전들과 헬라식 극장들과 검투사들의 경기장들이 대거 들어선 헬라니즘식 도시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10)유대교의 잔존.
유대와 이방인들의 싸움은 곧 히브리니즘과 헬라니즘의 싸움이었다. 따라서 유대의 패배는 곧 히브리니즘의 패배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니즘은 사라지지 않았다. 유대라는 국가와 유대교의 외형적인 모습은 사라졌으나 유대의 히브리니즘과 그들의 야훼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사라지지 않았다. 유대인들의 야훼신앙이 수많은 변절과 배교의 역사를 되풀이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야훼하나님을 영원히 버리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국가와 민족의 와해 속에서도 민족적 종교를 사수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의 야훼하나님 신앙은 국가와 민족의 절대적 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분발되었다. 로마와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조국과 민족의 멸망을 예견한 요하난벤자카이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직전에 팔레스타인 해안에 위치한 얌니아마을로 가서 율법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유대민족의 민족적 자존심과 아울러 그들의 종교를 계속 유지하게 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이제 국가도 없고 예루살렘성전도 사라져 버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얌니아 율법학교는 그들의 민족적, 종교적 방주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남아있는 야훼하나님은 본래의 야훼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의 국가관 민족관인<시온니즘>에 의하여 변형된 하나님이었다. 때문에 그들에게 율법서를 비롯한 구약성경이 있었으나 그들이 해석하고 이해하는 율법이나 성경은 본래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11)예루살렘교회의 종료.
사도들이 예루살렘교회를 떠난 뒤 남은 지도자들은 예루살렘교회를 요단강 건너편의 펠라로 옮겼다. 그 후 율법의 해석과 신앙문제로 인한 대립이 더욱 심화되었다. 예루살렘교회 성도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국가적, 민족적, 종교적 멸망이 선지자들을 통한 회개의 촉구를 거절한 이스라엘의 배교와 불순종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또한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시키면서 그 책임을 자신들과 자신들의 후손들이 영원히 질 것이라고 호언장담한 유대인들의 교만함과 오만방자함으로 인하여 유대교에는 더 큰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년>에 이루어진 로마군에 의한 예루살렘 파멸을 그 시초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나아가서 성경에 나타난 예언자들의 예언의 주제가 유대인들만의 여호와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인정하고 따르는 자들로 구성된 세계적 기독교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라는 신학사상을 정립하게 되었다. 예루살렘교회의 이와같은 신학사상은 유대인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였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교회를 국가적, 민족적, 종교적, 반역자로 보았고 따라서 예루살렘교회를 적극적으로 탄압하고 핍박하였다.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불신은 기독교에 의해서도 제기되었다. 기독교는 처음에는 예루살렘교회를 같은 기독교로 인정하였고 나아가서는 기독교의 중심 모체로 인정하였다. 때문에 예루살렘교회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했을 때 경제적인 후원을 보내었으며 교리적인 문제로 논란이 일어났을 때 예루살렘교회의 해석을 요구하였다.<행11:27-30><행15장> 그러나 예루살렘교회가 계속하여 율법주의를 버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에도 계속하여 율법준수를 강요하게 되자 더 이상 예루살렘교회를 기독교로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때문에 예루살렘교회는 유대교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닌 어정정한 종교가 되어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로부터 외면당하는 입장이 되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요단강 건너로 이주한 예루살렘교회는 모든 유대인들과의 교류가 단절되어 점점 어려운 상황에 놓였고 그곳의 이방인들과 교류하면서 점점 더욱 괴이한 종교형태로 변질되어갔다. 그리고 기원5세기경 이후에는 아예 자취가 없어져 버렸다.
12)하나님의 섭리.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한 히브리인들의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열국의 아비, 곧 하나님의 세계적인 기독교의 총회 본부적 교회가 되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을 수차에 걸쳐서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끝없는 배교와 불순종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는 국가와 민족의 멸망을 자초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메시야까지 거부하고 고소하여 죽음으로 몰아넣다가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아예 단절되어버린 비극적 종말을 이루고 말았던 것이다. 남북왕조가 멸망하면서 시작된 이스라엘의 국가적, 민족적 비극은 2000년 이상 계속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 국가를 재건한 현재에도 중동의 아랍 세력들과 불편한 관계 속에서 끊임없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유대제국의 멸망은 기독교를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풀기 어려운 과제였다. 비록 유대인들의 배교와 불순종이 그 정도를 넘어선 것으로서 지나친 것이기는 하였지만 그동안 수많은 배교와 불순종을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용서하시면서 그들을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 유대의 멸망에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신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행위계약이 인간들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파기되어질 것을 아시고 은혜계약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고 스스로 선택하신 민족을 젖과 꿀이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으며 다윗과 솔로몬시대에 그들을 매우 영화스럽게 하셨다. 그러나 그러하신 하나님께서 메시야의 도래를 목전에 두고 이스라엘 남북왕조가 멸망하도록 허락하신 것과 이미 메시야께서 오신 상황에서 그리고 메시야를 통해서 인류구원이 드디어 성취된 시점에서 유대제국이 멸망하도록 허락하신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 한 것이었다.
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두 가지로 해석하였다. 첫째는 교육론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교육적 차원에서 유대제국의 멸망을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둘째는 징계론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국가적. 민족적 수난을 겪었으면서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메시야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처형하면서 그에 대한 죄의 대가를 자신들과 자신들의 후손들이 담당하겠다고 호언하였으므로 진노하시어 그들을 징계하셨다는 것이다. 징계론은 예루살렘교회 당시의 유대인들과 디아스포라 기독교인들도 인정한 견해이며 역대 기독교 신학자들 대부분과 현대이스라엘인들 중 일부도 같은 견해를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하나님의 섭리를 함부로 오해하고 제한하는 해석이다. 따라서 그러한 해석은 다음과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첫째는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무효가 된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약속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약속을 하신 것이다. 따라서 유대제국의 멸망에 대한 하나님의 허용하심이 이스라엘의 배교와 불순종에 대한 징계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이 무효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용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징계의 하나님이 되신다.
둘째는 하나님을 상당히 쩨쩨하고 치사한 하나님으로 평가 절하시키는 망령을 범하게 된다. 유대인의 배교와 불순종이 비록 메시야에 대한 거부까지로 극단화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그와같은 징계적 차원에서 유대의 멸망을 허용하셨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매우 쩨쩨하시고 치사한 하나님이 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미 그러한 결과들을 알고 계셨음이 분명함에도 불구하시고 그들의 행위에 대한 결과만을 노여워 하사 징계하신 입장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와같은 해석을 거부하고 유대제국의 멸망을 필연적으로 허용하시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진군시키시는 하나님의 멋지시고 아름다우신 경륜을 보고자 한다. 우리는 유대제국의 멸망에 대한 하나님의 허용하심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①율법시대의 종료를 위한 허용.
기독교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정립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계시-성경>에 근거하여 모든 것을 진행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가 완전하게 정립되어져 있다. 그러나 성경은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주어질 수없는 특성을 갖는다. 그것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루어 나가야할 인간의 부족성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무수한 시간과 역사적인 과정들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성경을 정립시켜 주셨다. 그러한 시간적, 역사적 과정 중에 필연적으로 요구되어졌던 것 중에 하나가 율법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교회에 가장 먼저 주신 것은 율법이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임재하시는 방법은 신학<로고스-말씀-계시-성경>이다. 반면에 교회는 하나님 앞에 절대적 신앙<순종>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교회의 신앙의 근원과 기초는 신학<로고스-말씀-계시-성경>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신학에 기초한 신앙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광야교회에 성전을 주셨을 때로부터 교회는 성전중심의 제의식<祭儀式>적 생활을 하였다. 아직 신학에 대해서 무지한 그들에게는 신학이나 신앙보다는 제의식이 더욱 쉬웠다. 이러한 그들의 제의식적 신앙생활은 교회가 국가교회로 발전되었을 때 까지도 계속되었다. 이스라엘교회가 법궤를 중요시 하여 전쟁터에 법궤를 메고 나간 것은 법궤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말씀<신학>때문이 아니라 법궤에 대한 제의식적 신앙 때문이었다. 사울이나 다윗을 비롯한 왕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곁에 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등한시 하고 제사중심의 정치를 진행한 것도 같은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문제였다. 그들의 성전 중심적 신앙생활은 포로시대에 이르러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어 졌다. 예루살렘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드릴 수 없었던 그들에게 있어서 성전의 의미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에스라 같은 신학자의 입장은 달랐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국가적, 민족적 비극을 신앙문제로 이해했고 자신들의 신앙이 잘못된 것은 신학<율법>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성전중심의 제의적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에스라가 포로생활에서 귀국한 후 제일 먼저 시행한 것이 율법준수를 통한 종교개혁이었다. 이때로부터 부각되어진 율법은 유대민족의 신앙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그들은 이제 성전중심의 제사적 신앙생활에서 율법중심의 신앙생활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신앙적 흐름을 주도한 것은 서기관들이었다. 유대전승에 의하면 당시의 서기관들은 에스라의 뒤를 이어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서기관들의 활약은 유대사회에 산헤드린이 조직되어 그 임무를 맡기까지 계속되었는데 유대사회에 끼친 영향이 대단하였지만 반대로 부작용도 많았다. 그들의 잘못된 해석 때문에 율법과 전혀 관계없는 전통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유대의 율법주의 신앙은 하나의 민족적 종교적 단결을 촉구하였고 따라서 유대민족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 되었다. 유대민족이 헤롯과 로마, 그리고 헬라니즘에 그토록 강력하게 저항한 것은 정치적 민족적 이유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그들의 율법고수에 대한 강력한 신념이 보다 더욱 큰 이유이기도 했다. 유대의 헬라화를 추진한 집권자들은 유대의 히브리니즘을 말살시키기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그들의 율법을 파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때문에 안티오쿠스4세는 율법서를 닥치는 대로 불살랐고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이나 할례를 금하였으며 또한 금지된 돼지고기를 먹게 하거나 제의식에 올림으로서 그들의 율법을 말살시키려한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사실상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교회를 유지시켜주고 진군시키면서 하나님과 교회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몽학선생적 중보역할을 감당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이며 완전한 계시이신 예수그리스도<말씀-로고스-λογος-성경>께서 오시어 하나님의 섭리 일체가 구체적으로 완전하게 정립되어지게 되었을 때 이제 율법은 몽학선생이었던 자기소임을 다한 것이었다. 이제 율법은 더 이상의 독자적인 권위를 행사하지 않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자기 위치에 만족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제국이 계속하여 부국강병하고 예루살렘성전이 여전히 율법적 제의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유지하려 한다면 그것은 곧 예수그리스도의 메시야적 기독교역사를 방해하는 것이 되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의 율법적 역사의 진군을 허락하실 수 없었기 때문에 율법적 역사를 종료시키시기 위하여 유대교의 멸망을 허락하신 것이었다. 이러한 우리의 역사적 해석은 예수그리스도께 율법으로 맞섰던 바리새인들의 도전과 사도바울이 평생을 율법주의자들과 싸워야 했던 초기 기독교역사들이 보증해 준다.
②세계적 기독교역사를 위한 허용.
우리는 하나님께서 유대제국의 멸망을 허용하신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본다. 그것은 유대제국이 존속되면 세계적 기독교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역사가 유대제국에 의해서 제한되어지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선민>사상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이러한 선민사상은 이스라엘민족에게 아직까지도 존재한다.>그러한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오직 자신들만의 하나님이어야 했다. 때문에 그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제한하였고 오직 히브리인들만의 하나님, 유대민족만의 하나님을 고수하려했다. 유대제국의 부국강병은 하나님의 세계적 기독교를 거부하는 강력한 걸림돌이었으며 유대제국의 잔존은 세계적 기독교역사의 진군을 방해하는 적극적인 요소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유대제국의 붕괴를 허용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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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이와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함에 있어서 매우 조심스러워야 한다. 자칫하면 하나님의 그러한 허용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고의적인 것으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허용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인 반면에 그것은 고의적인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에 순응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에 반기를 든 것에 대한 보복적 차원의 허용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장차의 이스라엘에 대한 자비와 사랑의 차원에서 그것을 허용하신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용하시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유대제국의 잔존을 허락하셨다면 그리하여 유대민족을 제외하고 다른 민족들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를 강림하게하시고 다른 민족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기독교 역사를 진군시키셨다면 유대는 국가적 민족번영과 잔존은 누렸겠지만 하나님의 섭리 밖에 있게 됨으로 거국적인 차원에서 볼 때에 오히려 국가적 민족적 비극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유대의 국가적 민족적 붕괴를 논증함에 있어서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아직도 여전히 유효 하신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하나님의 섭리적 경륜 앞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회개가 선행되어진 후에 비로서 하나님의 우주적인 심판이 진행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포하심에 주목한다. 그리하여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 영원한 용서의 하나님, 영원한 자비의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그들을 기다리실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독교역사를 진군시키시기 위하여 예루살렘교회의 종결을 허락하시고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세계적기독교의 역사가 진군되어지도록 하셨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이스라엘을 향하여<돌아오라><돌아오라><이제 그만 돌아오라>라고 애절하게 부르실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다시 그들을 품에 않아주시며 그들을 사랑하시고 기뻐하실 것으로 믿는다. 왜냐하면 아담교회 이래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불행과 비극들은 그들 스스로 자초한 오만한 민족주의에 의한 결과라고 보며 유대제국의 멸망 허용은 그들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징계라고 믿는다. 아울러 우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 하루 속히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도한다.
2.사도시대교회.
1)사도교회시대의 서막.
기독교역사는 예루살렘 교회시대를 마감하고 사도시대 교회로 넘어간다. 어떤 역사학자들<특히 종교역사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배교로 인하여 하나님의 기독교역사가 어떤 차질을 빚었다고 말한다. 저들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배교로 인하여 하나님의 기독교 역사는 한동안 주춤하였으며 사도들이 예루살렘의 박해를 떠나 소아시아 전역으로 흩어질 때까지 어느정도의 공백기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역사적 궤도 수정을 위하여 사울을 급히 부르셨으나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직접 받지 못했던 사울은 바울이 되기까지 그 준비를 하기 위하여 기다려야 했으며 따라서 이때가 기독교역사의 공백기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저들은 그러한 주장의 근거로 바울의 은둔기간을 내세운다. 바울이 하나님께 부름 받은 후 아라비아에서의 3년을 비롯한 14년간을 은둔했던 것은 사역을 위한 준비과정이었다고 하면서 그 기간이 기독교의 공백 기간이라고 주장한다.<갈1:17,18; 2:1-> 성경에는 바울의 아라비아와 다소의 14년 행적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주석가들은 바울이 그 기간에 과연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에 대하여 두 가지로 해석한다. 하나는 수리아, 길리기아지방에 전도한 것으로 보는 견해<행11:25-26><갈1:21-24>이고 다른 또 하나는 바울이 그동안에 율법주의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주의로 돌아서는 연구를 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이다. 이와같은 견해는 철저한 율법주의자 였던 바울이 복음주의자로 변하기까지는 그러한 과정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라는 차원에서 제기되었다. 우리는 두 가지의 견해를 다함께 수용한다. 우리는 바울이 그 기간에 철저하게 기도하면서 복음연구와 전파를 병행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독교가 잠시나마 주춤하였을 것이라는 저들의 견해에는 동조할 수 없다. 사도바울이 신약초기 기독교역사의 중요한 인물이었었음은 역사가 증거 하는 바이지만 그러나 바울이 기독교역사의 중심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사명을 진행할 수 있는 경륜을 갖출 때까지 기독교역사가 정체되었다는 주장은 하나님의 경륜을 무시하고 모독하는 것이다. 기독교역사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유명 인사들은 다만 하나님의 역사에 등용되는 종들에 불과하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진행되며 하나님섭리의 핵심은 예수그리스도이시다. 기독교역사는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신적작정에 의한 섭리적 주관 하에서 순간의 주춤도 없이 그리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된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교회가 종료되기 이전에 이미 차세대의 기독교역사를 주도해 나가게 될 교회를 준비하셨다. 그것은 사도교회였다. 그리고 사도교회의 서막은 예수그리스도의 12사도와 바울이라는 특별한 사도를 통하여 서서히 올라가고 있었다.
2)사도바울.
기독교역사에 부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은 수 없이 많으며 그들은 모두가 존귀한 하나님의 종들로서 상대적인 우열이나 경중에 대한 비교를 해서는 않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역사를 전개함에 있어서 사도바울 개인에 대한 특별한 논증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기독교역사의 중대한 시기에 쓰임 받았던 상황을 고려하여 사도바울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바울의 본래 이름은 사울로서 그는 소아시아 길리기아주<州>의 수도인 다소에서 태어났다. 다소는 시리아주<州>의 하나인 길리기아주의 수도로서 당시 세계문명의 양대 주류였던 그리이스, 로마문명이 교차하면서 꽃피워지고 있었던 전형적인 문화도시였다. 당시의 문화와 학문은 대체적으로 두 개의 조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하나는 헬라니즘적인 것이었고 다른 또 하나는 로마니즘적인 것이었다. 헬라니즘은 철학, 과학, 의학, 문학 등등을 발전시켰고 로마니즘은은 정치, 법률, 군사, 경제 등등을 발전시켰다. 다소는 동양문명과 서양문명이 교차하고 합류하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양대 문화를 다함께 받아들여 다양한 영역들에 대한 학문들이 차원 높게 전개되었다. 특히 아카데미학파, 에피쿠로스학파, 스토아학파의 철학이 다소에서 펼쳐지고 있었으므로 다소는 당대 최고의 문화 속에 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문명적, 문화적 환경에서 성장하여 그 시대를 주도하는 정치, 사회, 군사, 문화, 예술, 교육 등등에 대한 지식을 두루 섭렵하였고 특히 당시 근동일대의 보편적 언어였던 코이네 헬라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어학적 실력을 갖추었으며 로마어와 히브리어는 물론이요 아람어 방언까지 구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바울의 어학적 실력을 비롯한 각종 영역에 대한 학문적 실력은 훗날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전파하고 변증하는 사명완수에 충분한 기반이 되었다.
한편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당대 최고의 율법학파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전수함으로서 또 다른 차원에서의 기독교역사를 준비하였다. 그것은 그의 평생을 다 바치게 되는 성경의 기록, 변증 과정에서 율법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복음으로 완성되어지는가? 하는 것을 세우고 정립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바울이 되기 이전의 사울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기독교가 북부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확산됨에 따라 정통적 율법주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크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시각에서 볼 때에 기독교는 지금까지 발생하였던 여러분파 중에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기독교는 하나의 분파적 차원을 넘어서 유대교 전체를 위협하는 이교도적 존재로 부상하고 있었다. 특히 기독교는 목수의 아들인 예수를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 주장하는가 하면 아예 하나님의 아들로 부각시키기도 하고 심지어는 아예 하나님과 동등하거나 또는 동일한 존재로까지 추켜세웠다. 이제 기독교는 유대인들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존재 정도가 아니라 유대교의 근본을 뿌리 채 뽑아버리려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결코 좌시할 수 없는 극악무도한 종교적, 민족적 배신자였다. 특히 애국애족의 열혈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울,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울에게 기독교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사악한 무리들이요. 당연히 궤멸시켜야 할 민족적 반역자였다. 사울은 바리새파 유대교인으로서 철저한 율법주의자였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성도들을 율법을 파기하여 하나님을 모독하고 부인하는 배신자, 신성모독 자들로 간주하여 저주하였다. 그리하여 예루살렘교회의 박해에 앞장섰고 특히 스데반의 순교에 증인으로 동참하였으며 대제사장의 허락을 받아 다메섹의 기독교인들을 닥치는 대로 주포 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와 잔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다메섹도상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났고 자신이 예수그리스를 크게 오해하였음을 깨달은 후에 회심하여 하나님의 사도, 바울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교회를 위하여 모세를 준비하셨듯이 사도시대교회를 위하여 바울을 준비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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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말리엘.
가말리엘은 힐렐의 손자요 시몬의 아들로서<라반 가말리엘1세-Rabban Gamaliel. I>로 알려졌는데 유대사회의 정치적, 종교적 최고기관이었던 산헤드린의 회원이었고 율법학자였다. 그가 속한 힐렐학파는 샴마이학파와 쌍벽을 이루는 당대 최고의 학문기관이었다.
샴마이학파는 완고한 보수파인 반면에 힐렐학파는 비교적 온건한 실용주의적 학파였다. 가말리엘은 학문적으로도 당대 최고였을 뿐만 아니라 인격에서도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의 문하에는 샴마이학파 보다도 더욱 많은 생도들이 모여들었다. 이러한 사실은 산헤드린 회원들이 법정에서 사도들을 심문할 때에 가말리엘이 중용적인 입장으로 연설하여 사도들을 죽이기에 혈안이 된 산헤드린회원들의 격양된 마음을 가라 안치고 사도들을 구한 것에서 증명된다. 가말리엘의 신학사상은 율법에 대한 랍비들의 주석인 미쉬나에 많이 적용되어진다.
한편“클레멘타인승인”이라는 중세초기의 문서에는 가말리엘이 죽음에 임박하여년>에 기독교를 받아들였다고 기록되어있는데 자신의 제자인 바울과의 관계를 감안할 때에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이다.
3)사도시대의 교회들.
예수그리스도의 12제자들과 바울 등등 하나님의 사도들에 의하여 복음이 전파되어진 곳에는 예외 없이 교회들이 세워졌다. 사도들은 아시아를 거쳐서 유럽까지 이르러 교회들을 세웠다. 이와같은 기독교역사는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비롯한 성경의 증거들을 통하여 소개된다. 우리는 그중에서예루살렘교회 이후 가장 최초로 세워진 안디옥교회와 기독교역사상 가장 중요한 역사를 남겼던 로마교회를 소개한다.
(1)안디옥교회.
①안디옥교회의 설립.
예루살렘교회 이후 처음 세워진 교회는 수리아의 안디옥교회였다. 수리아의 안디옥은 수리아지역의 지중해로부터 약32km내륙에 위치한 도시로서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480Km의 거리에 있었다. 수리아 안디옥은년>경에 셀류쿠스니카토르1세에 의하여 설립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의 아버지인 안디옥<안티오쿠스-Antiochus>의 이름을 따서 안디옥으로 명명되어졌다고 한다. 요세프스의 기록에 의하면 안디옥은A.D.1세기경 로마제국의 영토 중에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큰 도시로서 인구 약50만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안디옥은 지정학적 위치상 동서문화가 혼합되어 상존했으며 전체 인구 중1/7정도가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다. 년>에는 갈리귤라의 통치 아래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 초기 기독교역사에서 안디옥교회는 기독교확장의 전진기지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행13:1-3> 안디옥교회는 기독교가 유대교 명칭에서 기독교 본연의 명칭으로 전환한 이정표적 교회였다. 안디옥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명칭으로 출발한 기독교의 첫 열매교회였으며<행11:26> 유대인들과 할례문제를 통한 신학적 대립에서 승리하여 할례가 더 이상 기독교에 존재하는 것을 근절시킨 역사적 교회이기도하다.<행15:1-2><갈2:11-21>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핍박의 결과에 의하여 설립되어졌다. 박해를 피하여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진 성도들은 각지에 정착하여 자신들이 왜 예루살렘에서 피신하였는지를 설명하면서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전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복음전파는 대부분의 경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로 한정되어있었다.<행11:19> 그러나 안디옥에서는 헬라인들에게도 그 사실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로 인하여 안디옥에 기독교 명칭으로서의 첫 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②바나바 파송.
안디옥에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교회는 크게 놀랐다. 고넬료 사건으로 시작 된 이방선교가 사마리아로부터 시작되어 어느정도 확산되고 있었지만 예루살렘으로부터 480여km나 떨어져 있는 수리아의 안디옥에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사실은 예루살렘교회로서는 참으로 놀라운 소식이었다. 예루살렘교회는 자세한 전말을 알기 위하여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하였다. 바나바는 구브로섬 출신의 레위족 후손으로서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으나 설교를 잘하여 사람들로부터 바나바<권위자, 위로의 아들, 격려의 아들>라는 이름을 받은 능력의 종이었다.<행4:36> 어떤 사람들은 바나바가 안디옥에 파송된 것에 대하여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이 모두 선교활동을 하기 위하여 교회를 떠나 있었음으로 예루살렘교회에 사도들이 부재 중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나바는 이미 요셉에서 바나바로 이름이 바뀔 만큼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바 나바는 안디옥에서 가까운 구브로섬 출신이었기 때문에 안디옥에 구브로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 살고 있을 것으로 가정할 때에 안디옥 파송의 최고 적임자였다. 바나바의 안디옥 파송은 역시 하나님의 섭리였다. 바나바는 바울의 신학적, 신앙적 경륜을 알아보고 안디옥 지도자로 천거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나바는 바울을 발견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종으로 키우고 추천한 사람이었다.<행9:27> 바나바는 안디옥교회를 어느정도 확장 시킨 뒤 다소에 가서 바울을 데려와 협동목회를 통하여 안디옥교회를 크게 성장시켰다.
③안디옥교회의 성장과 선교.
안디옥교회는 초기에는 바나바와 바울 그리고 베드로에 의해서 지도되었고 세기에는 이그나티우스와 데오빌로가 인도했으며 세기에는 루시안, 데오도르, 크리소스톰 등등의 유명한 지도자들이 이끌었다.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교회와는 전혀 달랐다. 예루살렘교회는 아직도 율법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율법과 복음 사이에서 방황과 갈등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교회의 발전보다는 교회내의 갈등을 해결하는 문제가 더욱 크고 복잡하였다. 반면에 안디옥교회는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성도들 중에 유대인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오랜 디아스포라 생활을 통하여 이미 헬라화 되어 있었음으로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었다. 때문에 안디옥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인 율법으로부터 자유해 있었다. 오히려 안디옥교회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크게 고무 되어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감사가 넘쳤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물 드림을 주저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안디옥교회는 재정적으로도 매우 풍족하였다. 안디옥교회는 각처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였고 예루살렘교회에도 선교비를 보내었다.
한편 안디옥교회의 급진적 발전과 선교의 열정은 지도자인 바나바와 바울의 탁월한 지도력에 크게 영향 받았다. 바나바는 자신의 재산을 하나님께 드릴만큼 성숙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그리고 그는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바울을 능가할 정도의 고결한 인격을 소유한 지도자였다. 바울 역시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능력의 종이었다. 바나바와 바울의 신학과 신앙이 결합된 협동목회는 안디옥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쏟아 붇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고 따라서 안디옥교회는 일취월장<日就月將>의 급진적 성장을 하였다. 그러나 안디옥교회의 급진적 성장은 그것을 재촉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 때문이었다. 안디옥교회는 이제 본격적인 기독교 확장의 역사를 주도하게 되는 교회확장의 선두주자로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신학적, 신앙적, 재정적인 성장을 급진적으로 이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이다.
안디옥교회가 어느정도 성장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안디옥교회에게 복음선교와 교회확장의 명령을 내리셨다. 이에 안디옥교회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한다. 이때에 안디옥교회에는 바울과 바나바 외에 많은 지도자들이 있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지도자들을 다수 양성하여 복음선교에 대비하였다. 그들은 언제라도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선교지로 달려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놓았던 것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아시아를 거쳐서 유럽으로 진군하게 되고 드디어는 전 세계로 확산된다. 그리고 복음이 전파되어지는 곳에는 예외없이 하나님의 교회들이 설립되었다. 안디옥교회는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하기까지 그의 복음선교와 교회설립의 중추적 역할을 다하였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순교한 후에도 안디옥교회는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기독교를 이끌어 가는 구심점이 되었으며 안디옥교회를 통하여 구축된 안디옥학파는 알렉산드리아학파와 함께 기독교신학을 주도한 초대 기독교 역사의 신학적 본산이 되었다.
④안디옥교회의 바울 선교.
A.제1차 선교:키프로스, 소아시아<베니게(버가)비시디아의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 두라, 데베-행13-14장>
B.제1차 선교:소아시아, 유럽<빌립보, 데살로니가, 아테네(아덴)고린도-행15-17 장>
C.제1차 선교:갈라디아, 에베소, 마케도니아, 드로아, 밀레노, 예루살렘-행18장>
(2)로마교회.
①로마선교와 바울.
사도시대 교회는 로마교회를 통하여 세계를 향한 기독교 확장의 깃발을 드높이 세우게 된다. 바울은 아시아와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유럽선교과정에서 로마를 향한 선교열정을 끊임없이 불태웠다. 바울의 로마선교에 대한 열정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사명감이었지만 기독교를 세계화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로마선교는 기독교 세계화의 역사적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넘어야할 거대한 산이었다. 반면에 사단은 로마를 통하여 전개되어질 하나님의 기독교를 저지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사단은 로마의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상황들을 총동원하여 기독교를 탄압하고 박해하려는 모든 준비를 하였다. 따라서 로마선교의 주역인 바울과 베드로는 로마선교를 위하여 목숨을 건 사투를 벌여야만 했고 실제로 바울과 베드로는 로마선교에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바쳤다. 예수그리스도는 이와같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마지막 교훈을 하면서 그토록 안타까워 하셨던 것이다. <요21:18-19>하나님께서는 바울로 하여금 안디옥교회를 거점으로 한 3차의 선교과정을 통하여 로마선교를 준비하게 하셨고 그러한 과정에서 로마선교에 대한전의를 불태우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바울의 3차 선교여행 과정을 통하여 주의 종들의 선교역사와 기독교역사를 아울러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경륜에 탄복할 수밖에 없다.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었지만 그리고 아라비아와 다소에서 14년간 기도하면서 율법을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승화시키는 신학적 정립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아직 세계적 선교사가 되기에는 경륜이 짧았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안디옥교회에서 바나바와 더불어 협동목회를 하게 하심으로 목회와 선교에 대한 실전을 쌓게 하시고 다음으로는 작은 지방을 시작으로 하는 선교활동을 통하여 선교사로서의 경륜을 쌓게 하신 후에 점점 선교의 지경을 넓혀 가게 하셨으며 특히 로마 입성 전에 로마 외곽의 유럽지역 선교를 통하여 로마선교에 대비하는 훈련을 철저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훈련과 실전경험을 통한 연륜과 경륜 배양과정은 기독교 역사 속에 등용되어지는 하나님의 모든 종들에게 일률적으로 주어지는 훈련과 연단과 실전 경험의 과정들이다. 하나님의 모든 종들은 그러한 과정 과정들을 거친 후에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 것이다. 특히 중대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하나님의 종들일수록 그 과정들은 더욱 길고 험하고 혹독하다. 성경은 모세와 바울 같은 하나님 종들의 훈련과정을 통하여 그와같은 원리를 가르쳐준다.
②로마의 상황.
로마교회를 고찰하기 전에 이해를 돕기 위해서 먼저 당시의 로마의 상황을 알아본다. 당시의 로마는 지중해를 내륙의 호수처럼 끌어안고 있으면서 영국에서 페르시아까지 그리고 북아프리카에서 북유럽까지를 관장하고 있는 대제국이었다. 사도들이 활약하던 시대의 로마제국은 오랜 전쟁을 종식시킨 후 약200년 간 계속되는<로마의 평화-Pax Romana>기간에 속해 있었다. 로마제국은 오랜만에 누리게 되는 평화 속에서 정치, 경제, 군사적인 번영을 이루었고 특히 헬라니즘과 로마니즘의 연합을 통하여 이루어진 문화 속에서 안정과 발전을 거듭하였다. 로마의 집권자들은 정복지를 원활하게 다스리기 위하여 정복지들에게 군사적, 정치적인 문제를 제외한 자유를 보장해 주었으며 외국인들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하여 그들의 로마생활을 허락하였다. 로마는 특히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 주어 정복지의 종교를 로마에 영입하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유대인들의 유대교와 기독교는 로마에서 각각의 자유를 누렸다.
그러나 유대교와 기독교의 종교적 자유는 그리 오래 갈 수 없었다. 로마의 종교적 자유보장은 장차 유대교와기 독교에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③로마교회 설립.
로마교회의 설립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세 가지의 서로 다른 견해들이 있다. 첫째는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설립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바울이 로마교회를 설립했다는 것이며, 셋째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 의하여 로마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것이다.
A.베드로 창립설.
로마카토릭은 전통적으로 사도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창설했고 로마교구의 첫 번째 감독<주교>으로서 25년간 로마교회를 통치하다가년>네로 황제의 박해 때에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주장한다. 다음은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창설했다는 로마카토릭 신학자들의 주장들이다.
a.베드로는 예루살렘과 팔레스틴에서 선교하다가 로마를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갔는데<사도12:17> 역사의 증언<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의하면년>에 로마에 가서 로마교회를 창설하였고 거기에서 그의 첫 번째 편지를 썼으며<1베드5:13> 네로의 박해 때인년>에 로마에서 순교하였다.<한국카토릭 대사전 편찬위원회편. 한국 카토릭대사전.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2.P.134>
b.로마공동체의 가장 오래된 전설과 전승된 증언들에 의하면 베드로사도가 로마교회를 세웠다고 보고 있다. 그는년> 옥중에서 천사의 도움으로 풀려나와 예루살렘에서 다른 곳으로 갔다가<사도12:17> 49년에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참석하였다.<사도15:7> 성문헌은 43년부터 49년사이의베드로의 활동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으나 체사레아의 에유세비우스에 의하면 44년에 베드로는 로마에 가서 25년간 머물러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따라서 로마교회는 43-49년에 베드로에 의해서 설립된 것으로 간주될 수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 이후 베드로는 다시 로마에 거주하면서 63-64년에 그의 첫 번째 편지를 썼고<1베드5:19>네로황제의 박해 때 순교하였다. 베드로는 로마주교들의 모든 명단에서 첫 자리에 놓여 있는 로마교회의 창설 사도로서 언급되고 있다. <벨기에 루뱅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서울카토릭대학 신학부 교수를 역임한 김성태 신부의(세계교회사 I)서울성바오로출판사. 1990. pp104-105>
c. 그러므로 벌써 오래전부터 로마에 신자집단이 있었다는 사실은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가 이 신자집단을 창설하였을까? 로마교회의 가장 오랜 전통은 그 창설을 항상 베드로에게 돌렸다. 베드로는 42/43년에 예루살렘에서 도망한 다음 다른 곳으로 갔다.<사도12:17>고 하는데 곧바로 로마로 갔던 것일까? 아니면 조금 후에 간 것일까? 이러한 사실은 비록 베드로가, 예컨대 50년 사도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다시 왔을지라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것은 또 바울이 그의 로마서를 썼을 때<57/58> 또는 그가 로마에 잡혀 있을 때 베드로가 로마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로마교회를 창설한 다음 전도열에 자극되어 곧 다른데로 떠났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의 교회사 교수였던 아우구스트프란쯘 신부의 교회사. 최석우 역편-왜관. 분도출판사.1990-pp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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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로마카토릭교회가 베드로의 초대 교황권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조작한 편법과 오류들이다. 우리는 저들의 편법과 오류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로마카토릭의 많은 신학자들은 사도바울의 회심기를 기원36년경으로 추산한다. 또한 그들은 갈라디아서의 집필 년대를 기원56-57년경으로 추정하며<갈2:1-10>의 시기를 기원49년경으로 추정한다. 한편 바울은<갈1:18>에서 회심 후 3년이 지난 후 예루살렘에서 사도베드로를 만났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갈2:1-10>에서 회심 후 14년이 지난 후 두 번째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사도베드로를 만났다고 증언한다. 한편 많은 로마카토릭 신학자들은 베드로가 로마에서 25년간 주교로 있었고 기원67년에 순교했다고 주장한다. 저들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를 근거로 하여 베드로가 기원42년경에 로마교회를 창설한 후 25년간 주교로 있다가 기원67년경에 순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의 기록에 의하면 베드로는 49년경까지는 예루살렘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왜냐하면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베드로를 만났던 것이 39년과 49년경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로마카토릭의 주장대로라면 42년경에 로마에 가서 로마교회를 창설한 후 49년에 잠시 예루살렘에 갔었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로마카토릭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추론일 뿐 사도들의 역사 어디에도 그러한 이야기는 없었으며 당시의 복음전파 역사도 그러한 상황을 변호해 줄 수 없다. 반면에 바울사도의 로마서 기록 년대는 학자마다 다르지만 대략56-58년까지로 추정한다. 그러나 바울은 <롬16:3-16>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하면서도 유독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고 있다. 만약에 베드로가 그때에 로마에 있었다면 바울은 틀림없이 베드로에 대한 인사를 했을 것이며 베드로가 그때에 로마에 없었다 할지라도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설립한 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은 틀림없이 베드로의 노고를 크게 치하하고 위로 하였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이 베드로에 대한 경쟁의식 때문에 베드로에 대한 것을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에 대한 모독이며 조잡스러운 편견이다. 바울의 신앙이나 인격은 결코 그렇지가 않다. 한편<행28:15-16>은 사도바울의 로마 도착을 증거하고 있는데 학자들은 그 시기를 기원61년경으로 추정한다. 이때에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울이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았다고 증언했는데 여기에서도 베드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에 베드로는 그 기간에 로마에 있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은 로마카토릭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창설하였다는 것을 부정하는 증거들이 된다. 왜냐하면 당시의 로마교회는 지도자가 그토록 수시로 또는 오랫동안 교회를 떠나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B.바울 창립 설.
바울을 추종하는 자들은 바울의 로마순교를 근거로 내세워 바울에 의해서 로마교회가 설립되어 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교회를 설립했다는 주장은 성경의 증거와 전혀 맞지 않는다. 성경<롬1장>이 증거 하는 바에 의하면 바울이 로마서를 보냈을 때년경>로마에는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고 바울은 그들에게 로마서를 보냈기 때문이다. 바울은<롬1장>의 서두에서 자신이 로마교회를 방문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힘쓰고 기도하였음을 말하면서 로마교회를 통하여 복음이 확산되는 것을 찬사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에 의해서 로마교회가 설립되었다는 주장은 분명한 오류이다.
C.디아스포라 창립 설.
로마교회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 의하여 설립되어졌음이 분명하다. 당시의 로마에는 로마의 식민지 유화정책에 따라 많은 민족들이 이주해 살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많았다. 역사학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에 로마에는 약4만 명 정도의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로마에 거주하게 된 동기는 여러 가지이다.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철학자인 필로에 의하면 로마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이며 장군이었던 폼페이우스의 군대가년>에 팔레스티나를 침공했을 때 많은 유대인들을 로마에 포로로 압송하여 로마시 건설에 노예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들은 나중에 석방되었는데 그들 중에 다수가 로마에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도 탁월한 상술을 가진 자들이 로마에 몰려들었을 것이며 도시지향적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로마에 이주하여 정착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로마에 기독교를 최초로 전파한 것은 베드로나 바울이 아니었으며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직계제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로마로 통하는 많은 그리고 편리한 도로와 해상을 통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로마를 왕래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복음이 자연스럽게 로마에 전파되었고 따라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 의하여 로마교회가 구성되고 설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견해는 성경<행2:10>에 의하여 보증 받는다.
<행2:10>에 의하면 오순절 마가다락방의 성령임재 사건 당시에 로마로부터 온 유대인 기독교 개종자들이 있었다. 때문에 학자들은 이미 예루살렘 왕래를 통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직접 보았거나 또는 예수그리스도께 대한 소식을 전해들은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며 또한 오순절마가 다락방 사건을 직접 경험한 유대인들이 로마로 돌아가 그 소식을 전하는 가운데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로마교회가 설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와같은 사실은(쿼바디스도미네ㅡ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소설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그 소설에는 로마의 카타콤교회를 처음 방문한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설교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때에 베드로는 로마의 카타콤 교회성도들에게 자신이 예수그리스도를 세 번 부인했던 자라고 고백한다.>
④로마교회의 성장.
베드로나 바울이 로마교회를 설립한 것은 아니었으나 로마교회를 성장 시킨 장본인은 분명히 베드로와 바울이었다. 물론 베드로나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기 이전에도 로마교회는 날로날로 발전하고 있었고 로마시 외각에 까지 복음을 전하였지만 베드로와 바울의 로마방문으로 인하여 로마교회가 더욱 크게 발전하였다. 예수그리스도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베드로가 직접 목격하고 사사받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은 그들에게 있어서 참으로 감동적인 것이었다. 특히 예수그리스께서 잡히시던 날에 자신이 직접 세 번씩이나 예수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었다는 이야기와 예수그리스도의 로마법정이야기 그리고 골고다 언덕에서의 십자가 고난과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살인강도를 비롯한 적대자들을 용서하신 이야기, 또한 그가 운명하시는 순간에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과 그의 부활을 전후한 사건 등등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들은 그들이 말로만 전해 들었던 예수그리스도께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보증하는 감동적인 실화였을 것이다. 베드로는 틀림없이 그러한 이야기들을 전하면서 예수그리스도께 대한 죄송함으로 목이 메었을 것이고 부활 승천하시기 전 자신에게 베푸신 사랑과 자비에 흐느껴 울었을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의 설교를 들으면서 로마의 성도들도 감격하여 함께 울었을 것이다. 로마의 성도들은 바울 때문에도 울었을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몰랐던 시절 기독교인 들을 잡아 죽이기 위하여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이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압장섰던 이야기와 다메섹도상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이야기를 하면서 바울인들 어찌 통한과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바울의 간증을 들으면서 로마의 성도들인들 어찌 감격하여 울지 않았겠는가? 로마교회 성도들은 베드로와 바울이 생생하게 전해주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자신들의 개인적인 신앙발전은 물론이요 교회적인 발전과 성장을 크게 진작시켰던 것이다.
<로마교회에 대해서는 기독교가 세계화 되는 과정을 통하여 다시 상세하게 고찰할 것이다.>
제5부. 기독교박해의 역사.
사도시대교회는 기독교의 세계화를 위하여 준비되어진 하나님의 교회 역사이지만 참으로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사도시대에 이르러 수많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들이 인간으로서는 참아내기 어려운 지경의 각종 박해를 받았으며 때로는 십자가에서, 때로는 단두대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속절없이 죽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그 모진 박해를 기쁨으로 받아들였고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사나운 맹수들에게 찢기어 삼키 우면서도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림으로서 박해자들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기독교에 대한 무서운 박해는 기독교 역사가 본격적으로 진군하기 시작하였던 로마교회를 통하여 시작되어 졌다. 우리는 사도시대의 기독교박해를 고찰하면서 그 박해가 발생하게 된 이유와 배경을 신학적으로 분석하며 또한 그 박해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신학적으로 정립한다.
제1장.유대인들에 의한 박해.
사도시대 기독교교회에 대한 박해는 유대교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때에 유대인들은 같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유대교와 기독교로 갈라져 서로 대립하는 형편이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대립은 이스라엘 본토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세계 전역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전체에 확산 되었다.
1.유대교와 기독교의 대립.
초기 기독교 당시 유대인들은 매우매우 혼란스러운 입장에 처해 있었다. 유대인들은 수세기 동안 외세의 침략과 정복에 의하여 국가 없는 조국을 마음 속에 지키고 그리며 살았다. 그러 그들에게는 조상대대로 전승되어 온 메시야사상에 의한 시온니즘적 대망이 있었고 그 대망이 이루어지는 날을 기다리며 살았다.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출현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가난한 일개 목수의 아들이 메시야를 자처한 것도 민족적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는데 그 목수의 아들이 점점 오만방자해 지더니 이제는 아예 하나님과의 내선일체를 주장하고 나섰다. 유대인들은 심히 분노하였고 그를 로마법정에 세워 처단해 버렸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줄 알았던 예수그리스도의 잔영<殘靈>이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되살아 났다.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점점 늘어가면서 상대적으로 유대교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미 국가의 멸망으로 민족 전체가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졌고 본토에 남은자 마져 교리적 문제로 사분오열되었으며 밀려들어오는 헬라니즘, 그레꼬로만니즘 등등의 이방문화로 인하여 전통적인 시온니즘이 와해되고 있는 상황 하에서 가볍게 보았던 신흥종파가 유대인 사회 전체를 위협했다. 이러한 상황은 본토 예루살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로마, 그리스, 이집트, 팔레스틴 등등의 지역에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 사회 전체에 만연되었다. 특히 디아스포라 유대인 사회는 본토 유대인 사회보다 더욱 심각한 상황이었다. 여러 가지 사연으로 인하여 조국을 떠나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조상대대로 계승되어 온 시온니즘 하에서 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적 삶을 살았다.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어느 날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드디어 고대하던 메시야가 탄생하였다는 희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전해들은 소식들은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경우에는 진실보다 많이 오류 되어 있거나 무시되어 있어서 신경 쓸 것 없는 가벼운 이야기였고 어떤 때는 너무 과장되어 놀라운 소식일 때도 있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처음 전해들은 이야가는 참으로 놀라우면서도 실망스러운 이야기였다.
*베들레헴의 어느 마구간에서 목수의 아내가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해서 동방의 박사들이 경배했다. 이에 헤롯이 놀라 당시에 태어난 사내아이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유대인들은 한편으로는 놀라움과 기대감을 가졌고 한편으로는 실망하였다. 그들은 조상대대로 전해 내려온 구세주가 드디어 왔는가? 하는 점에서 놀라움과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러나 구세주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사실에 의문과 실망을 하였다. 그들은 구세주가 헤롯왕조의 후예로 태어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헤롯은 유대인이 아닌 이두메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상식대로라면 구세주는 목수의 아들이 아닌 다윗가문 중에 명망 있는 어느 집안에서 태어나게 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 후로 30여년이 흐르도록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가 더 이상 전해지지 않음에 따라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잊어버렸다. 그러나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목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들려왔다. 그가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은 후 광야에서 시험받은 이야기를 비롯하여 각종 이적과 기적을 행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그들은 크게 놀랐고 흥분하였으며 메시야에 의한 조국과 민족의 영광이 재현될 것을 열망하게 되었다. 특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했다는 대목에서 그들은 크게 고무되었고 새로운 시온니즘에 대한 정열이 불타올랐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다시 실망스러운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이었다. 비록 그가 약속한 대로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함께 전해졌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소식은 믿을 수 없는 낭설로 받아 들여졌다.
그러나 계속하여 전해지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으로 인하여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종교적 집단으로 나누어 졌다. 그들에게 전달되는 예수그리스도는 전해주는 자의 성향에 따라 크게 달랐고 경우에 따라서는 심히 대조적이었다. 민족적 시온니즘 자들이 전하는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에 허무하게 죽어간 허약하고 나약한 가난뱅이였으며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위선자이며 사기꾼이었고 매국노였다. 반면에 평화주의자들이 전하는 예수그리스도는 각종 기적과 이적을 일으키는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죽는 순간까지 모든 죄인을 용서하는 사랑의 메시야였으며 사망권세를 물리치고 부활 승천한 왕중의 왕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오시어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주였다. 때문에 유대인들은 전해주는 자들의 성향과 전해 받는 자들의 성향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되었다. 전달하는 자나 전달받는 자가 모두 민족적 시온니즘자들인 경우에 그들은 유대교에 머물면서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후예들을 증오하고 적대하였다. 반면에 전달하는 자와 전달받는 자가 다 함께 평화주의자일 경우에 그들은 새로운 평화주의적 시온니즘을 형성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런데 또 다시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오순절 성령임재 사건이 전달된 것이다. 성경은 그 때에<천하 각국으로부터 온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 사건에 동참했다-행2:5>고 증거 한다. 그때에 천하 각 국으로부터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통하여 성령임재 사건을 전해들은 유대인들은 민족적 시온니즘에서 탈피하여 평화주의적 시온니즘으로 돌아섰고 그리하여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러나 수 십 세기 동안 계승되어진 시온니즘 주의자들은 여전히 그 소식을 낭설로 받아들였다. 때문에 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는 유대인들을 반역자로 몰아 증오하고 적대하였다.
2.민족적 개념에 의한 대립.
당시에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야훼하나님이 세계의 하나님으로 전파되는 것에 분노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선택된 백성은 오직 히브리민족 이스라엘 뿐 이었다. 수천 년 간 조상대대로 계승되어온 선민사상과 자신들만의 하나님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로 살아온 그들에게 세계적인 하나님을 주장하는 기독교 유대인들은 이제 더 이상 동족이 아니라 매국노였고 역적이었다. 특히 같은 유대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와 기독교사이에는 조국과 민족의 멸망과 비극에 대한 역사관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조국과 민족의 비극적 멸망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처형한 유대교인들에게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책임을 다윗과 솔로몬에게까지 소급하였다. 이러한 개념은 일반인들에게서는 별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성경에 밝은 지도자 계열에서는 단호하게 나타났다. 저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중심의 신정 국가적 정치체제를 세우지 아니하고 인간주의적 정치체제를 이루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받았으며 특히 다윗이 밧세바를 왕비로 취하기 위하여 우리야를 살해한 것과 밧세바가 낳은 솔로몬을 왕위에 앉힘으로서 이스라엘이 남북왕조로 분단되었고 솔로몬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 하는 이방여인들과 통혼함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국가와 민족이 멸망했다고 주장하였다. 유대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의 그러한 주장에 크게 진노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다윗과 솔로몬은 이스라엘국가를 부국강병의 국가로 발전시킨 위대한 성군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주장을 국가와 민족에 대한 배신행위로 간주하였고 기독교인들을 증오하고 저주하였다. 한편 유대교인들은 자신들의 조국과 민족적 패망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아니한 이단적 유대교 분파들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기독교라는 새로운 이단분파로 인하여 유대민족에게 하나님의 더 큰 진노가 있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2.교리적 개념에 의한 대립.
유대교인들은 기독교가 조상대대로 전수되어 온 자신들의 신앙적 구심이었던 율법을 소홀히 여기고 함부로 간과하는 것에 크게 분노하였다. 그들은 이미 안식일 문제를 비롯한 율법문제로 예수그리스도를 공격하였다가 번번이 참패당한 상처와 감정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바울이 아예 율법을<기독교를 안내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폄하 하였다. 유대교인들은 크게 경악하였고 무너진 자존심과 극심한 상처에 심히 분노하였다. 그들은 기독교를 그대로 방치하면 유대교 자체가 송두리째 와해 될 것이라는 위기감과 불안감에 전전긍긍 하였다. 이때의 유대교는 로마당국으로부터 공인받은 종교였던 반면에 기독교는 아직 신흥종교로서 그러한 지위를 확보하지 못했다. 때문에 유대교는 기독교를 사정없이 몰아 세워 로마정부에 고소하였고 기독교는 오히려 로마정부의 보호를 요청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한편 로마정부는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은 기독교를 본격적으로 탄압하지 않았다. 로마정부는 처음에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갈등을 유대인들 사이의 종교적 갈등 정도로만 이해하였다. 따라서 로마정부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갈등에 관여 하려 하지 않았다. <행18:12-17>에는 그와같은 당시의 상황이 증거되고 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웠을 때에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핍박하기 위하여 아가야의 총독 갈리오<마르쿠스 안네우스 노바투스-Marcus Annaeus Novatus>에게 바울을 고소하였으나 갈리오총독은<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무슨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일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주는 것이 가하거니와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하고 그들을 재판정에서 쫒아내었다.<행18:12-17> 로마정부는 폭동이나 난동이 생길 때에는 치안유지를 위하여 군대를 동원하고 주모자를 색출하여 체포했지만 종교적, 민족적 갈등에는 되도록이면 간섭하지 않았다. 당시의 기독교는 오직 복음전파에 주력하였으며 따라서 로마정부의 심기를 거슬리는 일이 복음전파에 지장을 준다는 차원에서 로마정부를 자극하는 어떤 행동을 삼갔다. 반면에 유대교도들은 여전히 로마에 대하여 적대적이었다. 그들은 로마로부터의 정치적 자유를 쟁취하려 했으며 기회만 있으면 로마에 저항했다. 때문에 기독교가 유대교와는 다르다는 사실이 점점 들어나게 됨에 따라 로마정부는 기독교에는 어느정도 호의적인 반면에 유대교는 우려의 눈길로 예의 주시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에 대한 유대교의 감정은 더욱 나빠지게 되었다.
로마의 역사학자 수에토니우스의 저서<클라우디의생애-Life of Claudius>에 의하면 A.D.50년경에 로마에서 유대교와 기독교사이에 폭력이 동원되는 마찰이 있었다. <행18:2>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글라우디오의 명령에 의하여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이주한 것을 증거 한다. 이때의 글라우디오는 로마제국의 제4대 황제였는데 그는 이때에 기독교와 유대교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유대인들을 로마로부터 추방시켰다. 수에토니우스는 글라우디오황제가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시킨 것은 크레스투스라는 사람의 선동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계속하여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증언한다. 학자들 중에는 크레스투스가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여 기독교인들이 유대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유대교인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으로 이해한다.
이토록 오랫동안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던 기독교와 유대교는 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붕괴와 성전의 파괴를 계기로 하여 더욱 심화되었다. 기독인들은 그러한 민족적, 국가적 비극의 종말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불순종 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한 유대교에게로 돌렸다. 때문에 유대교인들은 더욱 분노하였고 그리하여 년에 이르러 드디어 엄청난 사태가 일어났다. 유대교도들은 회당예배 의식을 통하여 기독교인들의 파문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그들이 선포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자렛인들(Nazarenes-기독교인들을 가리킴)과 다른 모든 이단들은 순식간에 멸망을 받고 생명의 책(Book of Life)으로부터 지워질지어다.>
이로서 기독교 유대인들과 유대교 유대인들은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결별을 이루었으며 로마에 의한 기독교 탄압의 와중에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유대교인들의 박해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제2장.이방인들에 의한 박해.
로마를 제외한 지역들에서는 기독교가 다양한 종교들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로마제국의 종교정책 하에서 다신론 종교사상이 만연되었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비록 기독교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특별성을 고집함으로서 다소 이상하기는 했지만 이미 디아스포라 유대교인들을 통하여 그들의 하나님 유일신앙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오히려 하나의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족끼리 서로 대립하고 마찰하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로마의 상황은 달랐다. 다른 지역의 기독교와 달리 로마의 기독교는 각종 이방민족들에 의한 박해에 시달려야 했다. 로마제국 정부는 두 가지 차원에서 다신론적 종교정책을 시행하였다. 첫째는 주변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다신론적 종교사상이다. 로마의 정복자들은 자신들 앞에 패배한 자들이 섬기는 신들이 매우 연약한 신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강한 능력을 소유한 신들의 후원이 절대 필요하며, 하나 또는 소수의 신들에게 의존하는 것보다는 많은 신들의 후원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또 하나는 정복지를 관리함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정복지 주민들의 종교를 탄압하지 않고 오히려 장려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두 가지 차원에서 로마제국 정부는 정복지의 종교와 신들을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였으며 로마시에 만신전<모든 신들의 신전-Pantheon>을 설립하여 정복지에서 유입한 모든 이방민족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의 형상을 만들어 세우게 했다. 만신전에 세워진 신들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하나님과는 성격이 달랐다. 그 신들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만을 고집하지 않고 모든 신들과 어울려 사이좋게 지냈다. 로마의 종교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섬기던 신만을 고집하지 않고 마음에 드는 신들을 골라 섬기는 다신숭배적 신앙생활을 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대교와 기독교를 증오하게 되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신의형상이 없었기 때문에 만신전에 그들의 하나님 신상을 세우지 않았고 신을 세우라는 종교행정 당국의 지시에도 절대 불응했다. 종교행정 당국은 유대교와 기독교에게 신의 형상이 없음으로 신을 세울 수 없다는 저들의 변명을 이해했지만 이교도들은 그것을 자신들에 대한 종교적 모독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유일신을 고집하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다신론적인 자신들의 신들과 자신들을 동시에 무시한 것으로 생각하여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된 것이다. 그들은 특히 기독교를 이상하게 보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대교는 이미 어느정도 알고 있었던 종교였다. 그러나 기독교는 동족인 유대교로부터도 배척되어진 종교로서 여러 가지 차원에서 생소했고 이해할 수 없는 요소들이 많았다. 당시에 로마에는 기독교에 대한 오류 된 소문들이 많았다. 기독교에 대한 소문들은 주로 그들의 신앙적 생활에 대한 오해로 인한 것이었다. 기독교 신자들은 매일 같이 애찬을 위한 모임을 가졌다. 그것은 성도들의 특별한 모임이었는데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 세례를 받은 자들만의 모임이기도 했다. 모임에 참예한 기독교 성도들은 서로를 형제, 또는 자매라고 불렀으며 자신의 배우자들에게도 이러한 호칭이 사용되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들 마음대로 상상하여 이야기하였고 그것들이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는 가운데 이상한 소문으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기독교인들의 예배는 비밀리에 한데 모여 먹고 마시며 방탕을 즐기며 나중에는 불을 끈 다음 남녀노소가 어울려 혼음을 하며 심지어는 근친상간까지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기독교에 대한 또 다른 나쁜 소문은 성찬식 때문에 생겨났다. 기독교신자들은 성찬식을 거행할 때에 예수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취한다고 했으며 또한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새신자의 입교식 때에 유아를 커다란 빵 속에 감추어 두고 입교자에게 그 빵을 자르게 한 후 아직도 따뜻한 유아의 살을 함께 먹는다는 소문을 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먹은 자들은 자신의 범죄가 탄로날까봐 침묵을 하게 되고 어쩔 수 없이 기독교에 머무르게 된 다는 소문이 추가되었다. 이때에 로마에는 실제로 그러한 종교집단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도 그러한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온 인류를 증오하고 저주한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것은 유대교인들과의 갈등 때문에 생겨난 소문이었다. 사람들은 같은 유대인이면서도 유대교적 유대인들을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그들이 동족까지도 미워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온 인류들을 증오하고 저주할 것이라고 소문낸 것이다. 이러한 헛소문들에는 유대인들도 관여되어 있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처형한 유대인들을 경멸하자 그것을 기독교인들이 전 인류를 증오하고 저주하는 것으로 오류 시켜 확산했다. 때문에 네로 통치시대에 로마에 화재가 나고 그것이 기독교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퍼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고발하거나 또는 직접 위해를 가하는 일이 도처에서 발생했다. 또 어떤 자들은 아기 예수께서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와전시켜서 기독교인들이 당나귀 또는 송아지에게 예배한다고 소문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형편없이 무자비하고 무식한 종교집단이라고 믿었으며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탄압받아 마땅한 자들이라고 비웃고 증오했다. 기독교에 대한 비난과 비판은 지식층, 또는 학자들에게서도 나왔다. 그들은 기독교에 대한 것을 다각도로 연구조사 했다.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소문과 같이 패역하고 부도덕한 종교 단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독교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구세주로 오셨는데 그가 목수의 아들로서 마구간 말구유에 태어났고 십자가에 죽은 후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갔으며 나중에 세상을 심판하러 온다는 이야기는 그들에게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이야기들이었다. 로마인들은 본래 지극히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힘을 강조하는 군사문화 속에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헬라문화를 받아들여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개념을 그들의 합리적인 라틴니즘과 연합시켰다. 때문에 그들은 신을 인식함에 있어서 강하고 능력 있는 신만이 최고의 신이라고 믿었다. 그러한 로마인들에게 최고의 능력을 가졌다는 유일한 신의 아들이 마구간 말구유에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이미 상식 밖의 일이었고 더구나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다는 이야기는 도저히 말이 않되는 이야기였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그렇게 변변치 못한 구세주란 용납되지 않는 것이며 그가 살아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과 나중에 세상을 심판하러 온다는 이야기들은 모두가 허황된 거짓말 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기독교를 유대교에서 갈라져 나온 종파들 중에서 가장 저급한 종파로 보았다. 로마인들은 원래 유대교와 기독교의 주장을 어불성설<語不成說>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유대교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이외의 모든 신들을 만들어 세운 가짜라고 무시하는 것을 종교적인 논리로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만약에 로마의 만신전에 있는 신들이 모두가 가짜라면 유대인들은 그 가짜를 무시하지 못하고 왜 두려워하여 그들 곁에도 가지 않는가? 그리고 또한 그토록 강하고 최고의 능력을 가진 신의 아들이 어찌하여 십자가에 죽었으며 그토록 전능하신 신께서 어째서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을 망하게 하고 돌아보지 않는가?>
로마의 지식인들은 기독교를 어리석고 무식한 자들의 종교적 집단으로 규정하고 조롱했다. 그들 중에 가장 기독교를 무시하고 조롱한 자는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의 치세 기간 중에 명성을 날린 지식인 들 중 하나였던 켈수스였다. 그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마리아와 로마병사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라고까지 하면서 기독교를 조롱했다. 그는<진정한 말씀-The True Word>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기독교를 조롱했다.
<개인들의 가정에서도 우리들은 옷감과 자갈을 가지고 일하는 자들, 즉 가장 무식하고 교양 없는 자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집안의 가장 앞에서는 이들은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침묵을 지킨다. 그러나 기회만 있으면 어린아이들과 혹은 무지한 여인들을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이야기로 꼬이기 시작한다.....따라서 내가 진정 진리를 알기 원한다면 스승들과 아버지를 떠나 여인들과 아이들을 쫓아 목공소나 철공소, 혹은 여인들의 사랑방으로 가라. 거기서 완전한 생활의 지혜를 배울 수 있으리라. 이것이 곧 소위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을 쫓는 자들을 기만하는 방법이다.>
<도대체 하나님이 이와같은 방법으로 지구를 방문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과연 인간들 가운데 일어나는 사건을 알아보기 위해서였을까? 그렇다면 그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지 못한단 말인가? 그렇지도 않다면 그가 아시기는 하지만 직접 내려오시기 전에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악행을 처리하실 수 없기 때문이었을까?>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죽은 후에 다시 부활할 것을 믿으며 가르친다. 이러한 신앙의 기반 위에서 다른 이들이 믿을 수 없는 완강한 고집으로 죽음을 맞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공정하게 보아도 그 존재가 불확실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내세를 위하여 그 존재가 분명한 현세를 포기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더욱이 최후의 부활이야말로 기독교가 갖는 웃음거리 중 대표적인 것이다. 인간이 부활한다면 불에 탔거나 혹은 짐승이나 물고기 등에 의해 먹혀버린 시체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시체의 흩어진 부분을 찾아 세상을 헤매야 하실 것인가? 이를 다 찾아 꿰매지 못하는 경우에는 부활한 육체에 부족한 것이 생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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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지식인들의 이러한 반박들은 기독교의 신학원리를 깨닫지 못함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그것은 현대 종교학에서도 때때로 제기되는 질문들이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분명하게 해주어야한다. 그것이 신학자들에게 주어진 변증의 책임이며 의무이다. 그러나 현대 목회자들 중에는 이러한 질문에 해답을 주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더 많은 불신을 당하는 논리를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기독교인들은 부활해야 하기 때문에 사망했을 때 화장해서는 않되고 반드시 매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전쟁이나 화재 등등을 당하여 시신 자체가 완전히 훼손되어 버린 성도들은 결코 부활 할 수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수백 년 전에 사망한자들은 비록 매장했다 할지라도 완전히 사라져 흔적조차 없으며 비록 그들이 흙으로 남아 있다 할지라도 개발, 건축 등등을 통하여 이미 흩어져 버린 상태이므로 부활할 수 없다. 인간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죽은 자의 상태는 아무의미가 없다. 기독교성도의 죽음을 매장으로 고집하는 자들은 이러한 원리를 모르는 무식한자들이다. 저들은 초기 기독교시대의 로마인들과 같은 어리석은 자들인 것이다.
제3장.로마정부에 의한 박해.
기독교에 대한 행정적, 법적 구속력이 없는 유대교나 일반 종교들의 박해는 지엽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보다 확실한 박해는 로마정부 당국에 의한 박해였다. 로마정부 당국은 기독교에 대하여 수세기 동안 그리고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박해하였다. 로마정부 당국의 박해는 로마 통치 하의 전 지역에서 시행되었으며 그 유형과 사례도 매우 복잡하고 다양했다. 따라서 그것을 일일이 다 소개할 수 없기에 그 중에 대표적인 사례들을 선별하여 정리한다.
1.박해의 원인.
1)정치적 원인.
이스라엘 남북왕조 멸망 후 세계 각지로 계속하여 흩어져 이주해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로마에도 상당수가 거주하고 있었다. 기원 후 1세기경의 로마정부 기록을 보면 로마시내에 12개정도의 유대교회당들이 있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로마통치 하의 전 지역에서 매우 뜨거운 감자였다. 유대인들은 유일신앙을 고수하여 로마의 종교정책에 정면으로 항거했다. 그들은 특히 자신들의 예루살렘 성전을 시온성전이라고 불렀고 자신들의 종교적 사상을 시오니즘이라고 주장했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거나 성전 보수에 사용될 헌금을 보냈는데 그 헌금 액수가 과다 하여 때로는 한 지방의 경제사정을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때문에 로마통치 하에 있는 각 지방의 통치자들은 유대인들을 미워했고 때때로 그와같은 사정을 로마정부에 보고하여 어떤 특별조치를 내려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로마정부로서는 유대인들을 함부로 홀대할 수가 없었다. 유대인들은 탁월한 상술을 통하여 각 지방의 경제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함부로 대했다가는 경제가 악화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황제숭배라던가 만신전 봉례행사 같은 종교적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러한 행사에 소용되는 막대한 비용들을 헌금하는 것은 거절하지 않았으며 각종 빈민구제와 병자 치료 및 장례에 부조하는 등등의 사회적 봉사를 많이 했다. 때문에 로마정부로서는 그들을 탄압하기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로마정부는 그들이 특별한 반란적 행위를 하지 않는 한 그들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이 오히려 그들을 다스리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유대인들의 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해 주었다. 따라서 기독교도 유대교의 그늘 아래에서 어느정도의 편의가 제공되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로마에 들어간 초창기에 로마는 기독교와 유대교를 같은 종교의 분파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한 구분이 이루어지고 특히 유대교와 기독교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첨예화되면서 심지어는 폭력이 수반된 충돌이 계속되자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를 탄압하게 되었다. 특히 유대 본토의 마카비우스가<家>에 의한 폭동에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이 독립자금을 보내거나 반란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게 됨에 따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2)종교적 원인.
로마제국 정부는 로마의 정치적 안정을 위하여 종교를 이용했다. 로마정부는 식민통치 하에 있는 여러 지방에서 유입되어지는 민족들의 종교들을 모두 인정하고 연합시키는 정책을 펴 나갔다. 로마정부가 종교 다원화 정책을 세운 것은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로마의 종교적 자존심의 발로이기도 했다. 로마는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했다. 로마는 그 어 떤 신도 배타하지 않고 섬기는 다신론적 종교 국가였다. 원래 로마는 전통적으로<쥬피터><마르스><퀴리노스><다이아나><넵튠><쥬노><플라멘다알리스>등등의 신을 최고의 신으로 받들어 섬겼다. 로마정부는 정부 산하에 승원이라는 종교기관을 신설하고 승려제도를 만들어 종교를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로마가 세계정복에 나섰을 때 그들은 대부분의 국가들이 일정한 소수의 신들만을 구별하여 섬겼기 때문에 전쟁에서 패한 반면에 자신들은 신들을 구별하여 섬기지 않고 모든 신들을 다 함께 섬겼기 때문에 그 많은 신들이 자신들을 승리하게 도와주었다고 믿었다. 따라서 로마정부는 정복지 주민들이 로마에 이주해 살면서 들여온 그들의 신들을 배타하지 않고 모두 수용하였다. 로마정부는 모든 신들이 결국은 하나의 최고적 신들 밑에 존재하는 다양한 신들이라는 논리를 세웠다. 그리하여 만신 전을 만들어 모든 신들을 그곳에 모신 후 사람들이 자유롭게 신들을 선택하여 섬기게 했다. 그러나 이때에 유대교와 기독교는 그러한 로마정부의 종교정책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하 나님만을 섬기었으며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았고 신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로마정부 당국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다 함께 불순종하는 무리로 간주했다. 그러나 로마정부는 아직은 그것 때문에 기독교를 탄압하지 않았다. 앞장에서 이미 논증한바 있듯이 아직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분파로 인식하 고있 었던 반면에 유대교를 함부로 다스리는 것보다는 그들의 종교를 인정해 주는 것이 오히려 로마의 이익이 된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로마정부가 기독교를 탄압하게 된 것은 기독교와 유대교가 완전히 구분되어진 후에 발생 한기독교에 대한 부도덕한 소문들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이 기독교 유대인과 유대교 유대인으로 구분되어진 후에 기독교에 대한 아름답지 못한 소문이 로마에 퍼지기 시작했다.
로마의 탄압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로마정부의 눈길을 피하여 주로 새벽이나 깊은 밤에 지하 동굴이나 카타콤지하묘지>등에서 집회를 가졌는데 그것이 새로운 박해의 원인이 되었다. 로마정부는 기독교의 비밀집회를 정치적 차원에서 우려했다. 유대인들이 비밀지하결사대를 만들어 폭동을 일으키려는 것으로 의심한 것이다.
3)사회적 원인.
로마인들은 로마제국에 대한 특별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로마는 곧 자신이었으며 종교였다. 그들의 로마사랑은 애국차원을 넘어서 신앙이었다. 그러한 로마인들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고집하며 군대복무를 거부하고 때로는 로마제국과 황제까지도 거부하는 기독교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로마인들은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기독교인들의 불충성에 대한 신의 노여움이라고 믿었다.
한편 로마인들이 기독교를 증오한 이유 중에는 기독교인들의 특별한 사생활도 포함되었다. 당시의 로마인들은 향락과 사치를 추구했으며 노예제도를 실시했고 특히 노예들을 검투사로 양성하여 검투사 시합을 즐겼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면서 노예제도에 반대했고 특히 노예들이 검투시합을 통하여 속절없이 죽어가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기독교인들은 또한 성적으로 부도덕한 로마인들의 삶을 거부했으며 절대적 가부장제도 하에서 실시되는 각종 부도덕한 악행<예를 들면 여자아이를 낳았을 때 가장이 그를 싫어하여 내다 버리는 관습이나 아내를 마음대로 버릴 수 있는 관습>들을 거부했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차원 높은 윤리적, 도덕적 삶은 로마인들의 자존심을 무너뜨렸고 그것이 기독교를 증오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4)황제들의 음모.
로마정부가 처음에 종교 다원화정책을 세운 것은 로마 거주민들이 종교적인 문제로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지 않게 하려는 정치적인 책략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정책이 나중에는 종교들을 하나로 묶는 정책으로 바뀌었다. 로마정부는 만신전의 신들 위에 로마황제를 좌정시켰다. 즉 로마황제가 신들 중의 신으로서 최고의 신이며 따라서 모든 신들은 로마황제의 통치 하에 있는 하급신이라는 종교체계를 세운 것이다. 로마가 이러한 종교적 체계를 세운 것은 대략 두 가지 이유로 전해진다. 하나는 고대 애굽의 바로 왕조가 시행했던 정치체제를 모방한 것으로서 황제를 신격화 하여 신정치 체제의 제국을 건설하려한 것이고, 두 번째는 모든 신들 위에 황제를 좌정시킴으로서 로마제국의 종교적인 통합을 이루려 한 것이다. 그러나 로마정부의 종교정책은 로마집권자들의 정치적 계략에서 산출된 것이었다. 당시의 로마는 황제에 의한 군주정치를 옹호하는 정치세력과 원로원 위주의 공화정치를 옹호하는 정치세력간에 보이지 않는 암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원로원 위주의 공화정치 체제를 원하는 정치세력들은 황제의 군주정치가 독재적일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결국은 로마제국을 붕괴시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황제에 의한 군주 정치체제를 막으려고 노력했다. 이에 반하여 사사건건 황제의 정책에 이의를 제기하는 원로원들에 대한 불만이 있는 황제와 황제의 측근들은 원로원의 힘을 약화시키거나 또는 아예 원로원 자체를 붕괴시키고 황제에 의한 군주정치 체제를 세우려고 했다. 황제와 황제의 측근들은 이러한 계략 하에서 황제의 신격화를 주장했고 드디어는 황제의 신적 지위를 만신전 위에 둠으로서 로마 전역에 대한 황제숭배를 강요했다. 원로원은 처음에 황제의 신격화를 단호하게 반대했으나 황제의 강압적인 권위에 눌려 그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그 대신에 황제가 신으로 추대되는 것은 황제 생존시에는 불가하고 황제가 죽은 후 원로원의 결의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제는 그것을 받아들여 원로원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황제들은 계속하여 원로원을 몰아 부치어서 황제들이 생존시에 신으로 추대하게 하였고 황제들의 무력적 권위 앞에 원로원은 어쩔 수없이 굴복했다. 로마시내 전역은 물론이고 로마통치 하의 모든 지역에는 수많은 황제<신>들의 동상들이 건립되었으며 사람들은 그 앞에서 분향하고 경배해야 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황제숭배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차라리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결코 황제를 신으로 받들어 섬기거나 경배하지 않았다. 때문에 황제는 그러한 기독교도들에 대하여 크게 분노하였고 그것이 기독교를 탄압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이다.
2.박해의 역사.<10대 박해>
로마제국의 기독교박해는 주로 황제들의 주도 하에 일어났는바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을 요약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네로의 박해.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박해 서곡은 네로황제<54-68재위>에 의하여 울려 퍼졌다.
네로의 본명은 루키우스도미티우스아헤노바르부스로서 클라우디우스황제의 양자였다. 클라우디우스황제는 가이우스도미티우스아헤노바루스의 부인이었던 아그리피나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 들였는데 네로는 가이우스도미티우스아헤노바루스와 아그리피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다. 네로의 어머니인 그리피나는 황제의 근위병들을 매수하여 남편인 클라우디우스황제를 독살하고 17세의 네로를 황제로 추대했다. 네로는 즉위 후 초기5년 동안은 근위대 장관이었던 브루루스와 철학자이며 스승이었던 세네카의 후원을 받아 훌륭하게 황제의 직무를 행사했다. 그는 해방된 노예들을 정부 기관에 등용했고 세금을 감면했으며 매관매직을 근절시키고 원로원의 의견을 존중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네로는 여자를 좋아하고 술과 가무를 즐겨하게 되면서 타락하기 시작했다. 네로는 점점 잔인하고 폭력적인 사람이 되어가면서 재위 5년째인 58년부터는 국정을 돌보지 않고 문란한 생활에 빠져들었다. 네로는 포페아사바나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하여 의붓 동생인 브리타니쿠스와 황후인 옥타비아와 어머니까지 살해했고 나중에는 포페아사바나마져 살해했다. 네로는 특히 근위대장관인 브루루스가 병사<病死>하고 세네카마저 은퇴하자 거의 반미치광이가 되어갔다. 네로는 헬라문화에 크게 심취하여 헬라의 체육, 예술을 로마에 도입했고 스스로 예술가를 자처하여 직접 무대에 섰다. 그는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4대제전<四大祭典>을 개최하고 직접 경기에 출전했다. 네로는 당시의 로마시를 없애고 헬라니즘적인 예술적 로마시를 건축하겠다는 야심에 불타 64년에 로마시 전체에 불을 질렀다. 이때에 네로는 로마로부터 수마일 떨어진 안티움궁전의 옥상에서 시인의 복장을 하고 칠현금을 뜯으며<트로이의 파괴>를 노래했다. 로마의 화재는 무려7일간이나 계속되었고 불길이 잡힌 뒤에도 3일간이나 계속되었다. 이때에 로마시의 14구역 중 10구역이 화재로인 하여 소실되었다. 로마의 화재가 진압되는 과정에서 네로가 헬라니즘적인 새로운 로마시를 건설하기 위하여 계획적으로 방화했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그가 시적 감흥을 얻기 위하여 방화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로마 시민들은 분노하였고 네로의 궁전으로 달려갔다. 범시민적 폭동이 일어나게 되자 네로는 당황하여 그것을 부인했으나 시민들은 납득하지 않았다. 이때에 네로의 측근들 중에 기독교인들을 증오하는 자들이 계책을 내 놓았다. 그것은 방화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씌우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네로는 로마의 화재가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각종 우상숭배를 증오하여 방화한 것이라고 선포하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체포명령을 내렸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체포되었고 그들은 네로의 잔학한 방법들에 의하여 죽어갔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때로는 짐승들에게 찢기워 죽게 했고 때로는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거나 또는 화형에 처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정원에 나무를 세워 그들을 묶어놓은 후 기름을 발라 화형에 처함으로서 그들이 인간봉화가 되게 하였다.
당시에 로마화재의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가 타키투스는 당시의 상황들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황제의 거듭된 부인과 신들에게 바쳐진 희생제사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화재를 명령했다는 의심은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네로는 이 소문을 없애기 위하여 이미 배덕적 행위로 인하여 시민들의 증오를 받고 있던 기독교 신자들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이들을 잔혹하게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네로가 희생양으로 삼고자한 그리스도인들은 티베리우스<디베료>재위 기간 중에 폰티우스필라티우스<본디오빌라도>에 의해 처형된 인물을 추종하는 자들이다. 이 악한 미신은 한동안 주춤했으나 곧 유대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사교들이 모여들었던 로마에 다시 출현하였다. 그리하여 우선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했던 자들이 체포되었고 이들의 증언에 의하여 더 많은 숫자가 정죄 받게 되었다. 그 이유는 화재 자체라기보다는 이들이 인류를 증오했기 때문이었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죽이기 전에 시민들을 위한 오락에 이용했다. 신자들 중 일부는 털옷을 덮어씌워 개들이 찢어 죽이게 하였고 또 다른 자들은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또 다른 이들은 몸에 불을 질러서 밤에 등불처럼 밝히게 하였다. 네로는 자기의 정원을 열어 이러한 쇼를 연출하였고 그는 마치 전차경주자처럼 옷을 입고 전차를 타고 돌아다님으로서 원형경기장에서 비참한 광경을 연출하였다. 이 때문에 시민들은 벌을 받아 마땅한 이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느끼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일반인들의 분노를 가라 않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잔인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죽어갔기 때문이다.>
타키투스는 친 로마적인 역사가였으나 대체적으로 공평한 역사가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비록 기독교인들에게 우호적인 입장은 아니었으나 네로에 의한 기독교의 박해가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만행이었음을 증언했다. 그러나 네로에 의한 기독교 박해는 로마시로 한정되었다. 로마시 외의 기독교인들은 네로의 박해로부터 면제되었다. 그러나 로마시 외의 기독교인들이 네로의 박해에서 면제되었던 것은 네로의 칙령이 로마시내로 한정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네로의 칙령은 당연히 전 로마적인 칙령이었다. 그러나 화재가 로마 전역의 화재가 아니라 로마시 만의 화재였기 때문에 로마시 외의 기독교인들이 로마시의 화재에 대한 책임을 질 이유도 없었지만 네로의 통치권은 이미 로마시내를 벋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로마의 원로원을 비롯한 지식인들은 드디어 네로를 불신하였고 따라서 네로를 더 이상의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와중에서 68년에 갈리아에서 네로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고 그 반란 이전 로마지역으로 확산되어 갈 때에 히스파니아<스페인>총독이었던 갈바가 로마로 진격했다. 이때에 원로원을 비롯한 각계각층이 갈바를 지원했고 심지어는 황제의 근위병들까지도 이에 합세했다. 네로는 측근 몇 명의 도움을 받아 시골로 달아나 어느 지하실에 숨어 있다가 군대가 몰려오자<세상이 나 같은 예술가를 잃는 구나>하고 비통해 하면서 부하의 칼에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2)도미티아누스재위>의 박해.
네로가 퇴위된 후 정치적인 불안이 계속되는 가운데 69년 한 해에 네 명의 황제가 교체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은 베스파시안황제에 의하여 종식되었고 로마는 안정을 되찾았다. 네로의 기독교탄압에 대한 칙령이 철회된 것은 아니었으나 베스파시안황제는 더 이상 기독교를 탄압하지 않았다. 기독교는 베스파시안황제 치하에서 평안을 누렸으며 이 평안은 그의 아들 티투스의 치하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티투스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가 황제에 등극하였을 때 상황이 달라졌다. 도미티아누스는 처음에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무관심했다. 그러나 그가 로마의 종교적 전통을 고집하면서 자신을 신격화 했을 때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 도미티아누스는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를 자신의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리하여 로마 시민들에게 로마의 전통적 신들을 특별히 섬기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신으로 선포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는 우선적으로 로마의 시민들이 로마의 전통적 신들을 특별히 섬기게 한 후 황제가 신들의 신이라고 선포하여 황제숭배를 강요했다. 로마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각종 서약서들에는<황제의 천재성에 걸고>라는 문구가 관습적으로 사용되었는데 도미티아누스는 그 문구를 황제의 공문서에 의무적으로 적용했다. 역사가들 중에는 도미티아누스의<황제-신>발상이 유대교인들이 예루살렘에 보내던 헌금을 황제에게 드리게 하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역사학자들은 고대 애굽왕 바로의 신격화를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유지를 위하여 매년 또는 수시로 예루살렘에 헌금을 보냈는데 기원70년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자 도미티아누스는 유대인들에게 그 헌금을 황제에게 바치라고 명령했다. 황제의 강압에 의하여 일부 유대인들이 황제에게 헌금했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것을 거절했다. 황제는 유대인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자신을 신으로 선포하고 황제 즉 신에게 헌금을 바치지 않는 자들을 가차 없이 처형하겠다고 선포했다. 황제는 자신의 명령의 지엄함을 증명하기 위하여 자신의 인척 중에 기독교인이었던 플라비우스 클레멘스와 그의 아내 플라비아도미틸라를 처형했다. 이때에 로마에 다시금 기독교 박해의 열풍이 불어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했는데 유대교도 황제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에 함께 탄압받았다. 기독교인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로마를 떠나거나 또는 지하로 은둔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도미티아누스의 박해를 통하여 또 하나의 특별한 역사를 이루시었다. 그것은 황제의 박해에 의하여 밧모섬에 유배된 요한을 통하여<요한계시록>을 집필하신 것이다.
3)트라야누스재위>의 박해.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트라야누스황제 때에 이르러 더욱 극심했다. 이때에 새로운 법령이 발표되었는데 기독교인만 아니면 아무리 극악무도한 흉악범이나 살인범이라 할지라도 극형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순교자 저스틴은 자신의 저서인 변명론에서<기독교인이라는 단어는 곧 죽음이라는 단어의 대명사가 되었다.>라고 증언했다. 기독교인들에게 가해진 박해는 점점 극심해져서 심지어는 그들을 산채로 소금에 절인 때도 있었고 길가의 높은 나무에 매달아 밤새도록 불로 태워 죽인 일도 있었다. 그러나 트라야누스황제의 기독교박해는 비시니아지방 총독의 기독교박해에 대한 사건으로 인하여 크게 완화되었다. 기원112년 소아시아의 비시니아비두니아-현재의 터키북부지방의 해안도시>지방 총독이던 소<小>플리니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처벌을 시행하는 와중에서 로마의 법치주의와 종교적 현실이 대립하게 됨에 따라 갈등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트라야누스황제에게 기독인들에 대한 처벌문제를 문의하는 공문을 보냈다.
전승에 의하면 플리니는 전형적인 로마인으로서 로마의 법과 전통을 존중하였던 공의로운 귀족이었다. 그가 비시니아지방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비시니아 지역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었고 기독교 이외의 이교도들은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이교도들의 신전이 남아 있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가 부임했을 때 기독교를 증오하는 어떤 자가 새로운 총독에게 환심을 사기 위하여 기독교인들의 명단을 고발했다. 총독은 기독교가 불법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사에 들어갔다. 이때에 소환된 자들은 자신들이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또는 과거에는 기독교신자였으나 현재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총독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들로 하여금 황제의 신상에게 향불을 피운 후 절하고 그리스도를 저주하라고 했다. 총독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차라리 목숨을 버릴지언정 그와같은 배교 행위는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때에 소환된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주장한 자들은 총독이 하라는 대로 한 후에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는 자들은 목숨을 버릴지언정 배교행위를 하지 않았다. 총독은 그들에게 세 번의 구명 기회를 주었으나 그들은 끝까지 배교를 하지 않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다. 총독은 그러한 자들을 처형했고 그 중에 로마시민권을 가진 자들은 로마법에 따라 처결하기 위하여 로마법정으로 이송했다. 당시에 로마시민은 오직 로마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어있었다. 이때에 총독은 두 가지의 의문을 갖게 되었다. 하나는 과연 기독교인들의 범죄 한 내용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과 다른 또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자신들의 신앙을 고수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총독은 기독교인들의 신조와 신앙생활을 자세하게 추적했다. 그러나 총독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은 범죄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모범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은 소문대로 인육을 먹거나 영아를 살해하여 제물로 바치거나 하지 않았으며 근친상간을 비롯한 부도덕한 성행위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동이트기 전에 함께 모여서 그리스도라는 사람을 찬양하고 그에게 기도하며 절도와 간음과 폭력 등등의 부도덕한 범죄들을 저지르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며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 것을 피차에 맹세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또한 과거에는 공동식사를 하기 위하여 함께 모였었으나 로마당국이 비밀집회를 금지한 후로는 그 모임도 중지했다. 총독은 조사결과에 만족할 수 없었다. 소문과 조사결과가 너무 대조적이었기 때문이다. 총독은 진실을 알아내기 위하여 두 명의 여신도들을 심하게 고문해 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총독은 매우 당황했다.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고 오히려 사회에 유익한 모범적 삶을 사는 자들을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처벌한다는 것은 로마의 법 정신에 위배되는 일이 거니와 로마의 정의로움에 크게 위배된다는 것이 그의 개념이었다. 총독은 기독인들에 대한 처벌문제를 일단 중지시킨 후 황제의 의견을 알아보기 위해 트라야누스황제에게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린 소년소녀들도 어른들처럼 가혹하게 처벌해야 합니까? 누구든지 기독교도가 되면 꼭 그렇게 처형되어야만 합니까? 그들은 실제로 무슨 나쁜 일을 한 것이 틀림없는 사실입니까? 만일 피고 스스로 기독교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를 놓아 주어도 되겠습니까?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시인하는 자들에 대해 저는 그들이 로마시민일 때에는 로마로 보내도록 하고 로마시민이 아닐 경우에는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허나 저는 그들은 고집이 너무 세기 때문에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바 입니다. 저는 그들이 폐하의 제단에 분향하고 그리스도를 욕하면 살려주려고 세 번이나 기회를 주었습니다. 저는 진짜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들어 왔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어떤 특정한날 동이트기 전에 서로 만나서 그리스도에게 찬송을 드리는 것 외에는 결코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남의 것을 훔치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제가 비밀집회를 금지한 후 그들이 그것을 포기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공동식사를 하기 위하여 계속 모입니다. 제게는 집사라고 불리 우는 여자 노예들이 몇 명 있는데 저는 그들을 고문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서 몇 가지 미친 생각들 이외에는 나쁜 것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어리석은 것에 감염되어 우리의 신전은 거의 텅 비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비시니아총독의 질의 공문에 대하여 트라야누스황제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황제의 답변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로마통치 영역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은 로마의 법령에 따라야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처벌에 관해서는 별도로 규정한 법이 아직은 없다. 따라서 그들이 특별한 죄를 범하지 않는 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색출해 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시간과 국력을 낭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고발된 자들은 로마법대로 처벌하라. 황제 신상에 분향하고 예를 올리는 자는 방면하되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은 처벌하라. 그러나 익명으로 고발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말라. 그것은 로마의 법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트라야누스황제의 칙령은 고도의 정치적인 방책이었다. 황제는 정치적 차원에서 로마의 법을 세워 로마제국과 황제의 위신과 자존심을 세우는 한편 불필요한 학정을 시행한다는 논란의 여지를 제거하였고 동시에 계속되는 기독교인들과의 마찰을 피했다. 황제신상에 예를 갖추지 않는 자들을 처벌해야 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절대 필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비록 그것이 황제들의 욕심에 의해서 세워진 비진리적인 법령이라 할지라도 일단 세워진 이상에는 지켜져야 로마제국의 권위가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황제는 로마제국과 황제의 권위를 위하여 그것을 여전히 고수하게 하는 반면에 특별한 죄를 범하지 않는 한 기독교인들을 고의적으로 색출하여 탄압하지 않게 함으로서 정치적인 안정을 도모하였다. 트라야누스황제의 칙령은 비시니아총독에게만 전달되었을 뿐이었고 다른 지역에는 전달되지 않았으나 그것은 비시니아에만 적용되지 않고 다른 지역으로도 확산 적용되었다. 이로서 로마사회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의 신앙이나 그들의 신앙적 삶이 국가나 사회에 어떤 위험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때문에 기독교를 적대시하던 자들이 오히려 기독교에 입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아울러 기독교에 대한 박해도 당분간은 주춤했다.
4)하드리아누스재위>의 박해.
기독교에 대한 트라야누스의 칙령은 트라야누스의 양자인 하드리아누스가 황제에 등극했을 때에도 여전히 유효했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는 로마의 전통적인 다신론주의 자였고 특히 황제신격화에 주력했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고집하면서 하나님 이외의 어떤 신을 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는 기독교를 심히 증오했다. 그는 소아시아의 총독 미누키우스폰다누스에게 칙령을 내려 기독교인으로 고발되는 자들을 반드시 처형하라고 할 정도로 기독교를 박해했다. 그는 로마통치 하의 전역에 황제 신상을 비롯한 신상들을 세우고 그것들에게 경배하라고 명령했으며 그것을 거절하는 자들을 가차 없이 처형했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의 기독교 박해는 황제가 직접적으로 주도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지방 총독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것은 비시니아총독의 질의를 받은 트라야누스황제 때부터 이미 시작된 현상이었는데 이때에 황제들은 명분 없이 무고하고 모범적인 기독교인들을 탄압하는 것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어렵게 한다는 판단 하에 기독교에 대한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지방의 총독들에게 일임했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지방총독들의 통치 개념과 방법에 따라 기독교탄압의 양상이 달랐다. 어떤 지방의 총독은 무조건 기독교를 증오하고 탄압하는가 하면 또 어떤 지방의 총독은 기독교도들에게 뇌물을 받으면서 적당히 그 문제를 조율하였고 어떤 지방의 총독들은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여 기독교도들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이때에 심지어는 남몰래 기독교를 받아들인 총독도 있었으나 정치적인 이유에서 그것을 철저하게 은폐했다.
5)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재위>의박해
하드리아누스의 통치가 끝나고 안토니우스피우스재위>통치시대에 이르러 기독교는 일시적이나마 자유를 누렸다. 안토니우스황제는 기독교에 대하여 관대한 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의 치세 하에서 기독교박해가 재현되었다.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는 오랜 전쟁을 종식시킨 후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하여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적 관습을 회복했다. 이러한 그의 정책에 가장 걸림돌이 된 것은 역시 기독교였다. 그는 황제에 의한 군주정치를 종식시키고 원로원에 의한 민주적, 공화적 정치체제를 구축했다. 그의 기독교 박해는 기독교인들이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로마의 전통적 종교관습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의 기독교박해는 처참할 정도로 잔인하고 공격적이었다. 그는 론계곡의 리용과 비엔나에 거주하던 기독교인들을 모두 고문하고 죽이라고 명령했으며 로마시민권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목을 베어 죽였고 로마시민이 아닌 기독교도들은 짐승들의 밥이 되게 했다. 심지어는 감옥에서 죽은 기독교인들의 시체를 굶주린 개들에게 던져주어서 장례조차 지내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마르쿠스아울렐리우스 치세 때에는 역병이 극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흉년과 가뭄으로 인하여 기근이 극심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기독교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가중시켰다.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유일신 신앙인들로 보지 않고 신들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들로 보았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신들을 무시하고 섬기지 않음으로 신들이 진노하여 역병과 흉년 가믐 등등의 재난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기독교박해에는 유대교인들도 한 몫 거들었다. 유대교인들은 기독교와는 달리 로마당국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기독교탄압에 일조했다. 유대교인들이 기독교탄압에 동조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기독교가 유대교의 모든 전통들과 특히 율법을 무시하고 모독하여 훼파했기 때문이었고, 다른 또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을 메시야 처형의 주범들로 몰아세우면서 유대인들의 국가적, 민족적, 종교적, 멸망과 붕괴의 비극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메시야를 처형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조치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6)셉티미우스세베루스재위>의 박해.
로마제국은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황제가 사망한 뒤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나약하고 변변치 못한 반면에 허황되고 욕심 많은 황제들이 연이어 등극하여 정치체계 질서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황제들이 무능하여 정치체계가 혼란하고 무질서하자 각 지역 원주민들의 반란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로마제국은 그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전쟁을 계속했으나 황제들은 환락과 사치에 빠져 쾌락추구에 여념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기독교에 대한 관심은 격감되었고 기독교인들은 한동안 자유와 평안을 누렸다. 이 무렵에 기독교는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고 확장되어 로마 전역이 기독교의 물결로 출렁대었다. 그러나 셉티미우스세베루스가 황제에 올랐을 때 기독교박해가 다시 시작되었다. 셉티미우스황제는 아프리카의 군인 출신으로서 종교에 대하여 무관심하였으므로 기독교에 대해서도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셉티미우스황제가 기독교를 탄압하게 된 동기는 당시의 로마제국 정세와 그의 왕비 돔나때문이다. 셉티미우스황제는 황제에 등극한 후 그동안의 군인적 경륜을 살려 지역들의 반란들을 제압했다. 그러나 황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역적 반란들이 완전히 평정되지 않았다. 특히 라인강과 다뉴브강 건너에 살고 있던 민족들이 계속하여 로마제국에 저항했다. 반란세력은 제국의 내부에도 존재했다. 특히 기존의 군부세력은 아프리카출신의 황제를 불신했다. 언제 군부가 반란을 일으켜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고 자신을 축출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에 왕후가 황제에게 방법을 제시했다. 왕후 돔나는 에메사출신으로서 태양신을 섬기는 엘가발사원의 대제사장 딸이었다. 그녀는 황제에게 로마의 전통적 종교들을 부활시켜 로마의 정치체제를 종교적, 정치적 통일체제로 만들어 반란세력을 와해시키라고 했다. 황제는 왕후의 조언을 받아들여 우선적으로 로마의 전통 종교들을 부활시켰다. 그는 로마 전지역에<솔인빅투스-Sol inbictus-정복되지 않은 태양>을 예배하도록 명령했다. 황제는 태양신을 지존의 신으로 세운 후에 다른 모든 신들을 그 아래 두어 섬기게 함으로서 종교적 통일을 이루었다. 그것은 친정에서부터 태양신을 섬겨온 왕후의 계략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명령은 기존의 종교인들로부터 불신을 받았고 특히 유대교와 기독교로부터 거부되었다. 황제는 종교인들을 힘으로 제압했고 그 중에 가장 강력한 반대 세력인 유대교와 기독교를 혹독하게 탄압했다. 황제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말살시키기 위하여 두 종교들이 더 이상의 신자를 받아들일 수 없는 법령을 공포했다. 누구든지 유대교와 기독교에 가입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공포한 것이다. 이 법령은 트라야누스황제의 칙령과 병행하여 적용되었기 때문에 유대교와 기독교는 다함께 무차별적 탄압을 감수해야 했다. 이때에 로마통치 하의 전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기독교 탄압이 시작되었는데 특히 애굽과 북아프리카에서 극심한 탄압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위대한 신학자였던 오리겐의 부친 레오니다스가 참수되었으며, 카르타고에서는 귀부인이었던 퍼폐튜아가 충직한 몸종 펠리시타스를 비롯한 5명의 시종들과 함께 짐승에게 던져져 순교했다.
7)막시미누스재위>의 박해.
셉티미우스세베루스의 치세 말년에 이르러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중단되었다. 이때에 왜 박해가 중단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기록이 없다. 그러나 전설에 의하면 황제가 기독교를 박해한 것을 몹시 후회했다는 이야기와 왕후인 돔나에게 어떤 불행한 일이 발생하여 그것이 기독교박해 때문인 것으로 여겨져서 박해를 중단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로마에서의 박해는 중단되었으나 유럽일대에서는 산발적인 박해가 계속되었다. 셉티미우스세베루스가 사망한 후 카라칼라재위>가 황제로 등극했다. 이때에도 박해는 중단되었으나 북아프리카지역에서는 산발적인 박해가 계속되었다. 그 뒤에 엘라가바루스재위>황제와 알렉산더세베루스재위>황제는 셉티미우스세베루스황제의 정책을 답습하여 종교 혼합정책을 추구했으나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았음으로 기독교박해는 거의 중단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알렉산더 세베루스황제는 자신의 개인적인 신전에 수많은 신들과 함께 그리스도와 아브라함의 신상들을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실제로 황제의 모친인 줄리아맘메아는 오리겐의 강의를 듣기 위하여 알렉산드리아까지 갔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막시미누스황제 치하에서 다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있었다. 당시에 로마교회는 두 사람의 감독들-폰티아누스와 히폴리투스에 의하여 분열되어 있었는데 황제는 그들을 모두 사르디니아의 금광광산으로 유배시켰다. 그러나 막시미누스황제 치하의 박해는 간헐적이었으며 기독교인들을 처형하지 않고 유배형에 처했기 때문에 순교역사는 거의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기독교에 대한 오해들이 거의 풀렸고 기독교가 참 진리의 종교라는 인식이 퍼져 나가면서 오히려 많은 귀족들이 기독교에 입문했다.
8)디키우스재위>의 박해.
막시미누스황제 치하에서 안정을 누렸던 기독교에 다시 무서운 폭풍이 불어 닥쳤다. 기원 249년에 데시우스가 황제에 올랐을 때에 로마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국경 넘어 사는 민족들은 호심탐탐 제국을 넘보고 있었고 수시로 국경을 침범하여 제국을 위협했다. 로마 식민통치 하의 각 지방에서도 독립을 원하는 반란과 폭동들이 수시로 일어났고 이러한 혼란 속에서 경제도 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황제는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하여 고심했다. 황제는 로마가 영광을 상실하게 된 동기를 종교적 차원에서 찾았다. 그는 로마가 전통적인 신들을 배신했기 때문에 신들 또한 로마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국민들이 신들을 극진하게 섬길 때에는 신들이 로마를 절대적으로 보호하고 도와주었기 때문에 로마가 번영과 영광을 누렸던 반면에 국민들이 신들을 배반하고 섬기지 않게 되자 신들이 진노하여 로마를 돌보지 않음으로 로마에 위기가 닥쳐왔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따라서 황제는 로마가 전통적인 신들을 다시 극진하게 섬기면 신들이 마음을 돌려 로마를 보호하고 지켜줌으로서 로마의 영광이 재현될 것으로 믿었다. 그리하여 신들의 형상들을 다시 정비하여 세우고 황제의 신상도 재정비하여 세웠다. 데키우스황제의 의지는 매우 단호하고 결연했다. 신들 앞에 제물을 드리지 않거나 황제의 신상 앞에 분향하지 않는 자들은 체포되었다. 황제는 신들 앞에 제물을 바치고 황제의 신상에게 분향하는 자들에게는 증명서를 발급했다. 증명서가 없는 자들은 황제의 칙령을 거부한 죄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황제는 죄인들을 처형하지 않고 그들을 회유하는데 주력했다. 황제는 불순종하는 자들을 체포한 후 무서운 고문과 회유정책을 통하여 그들을 개종시켰다. 당시에 많은 자들이 체포되었으나 황제의 회유정책에 의하여 마음을 바꾸어 풀려나는 자들이 속출했다. 이때의 양상은 다양했다. 어떤 자들은 아예 일찌감치 마음을 바꾸어 황제의 명령에 따르는가 하면 어떤 자들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어 보다가 체포되면 할 수 없이 명령에 순종했고 또 어떤 자들은 관리들을 매수하여 돈을 주고 증명서를 구입하여 순종을 위장했다. 때문에 순교자들은 별로 많지 않았으나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킨 자들도 많았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두 가지의 신조어가 생겼다. 하나는 끝까지 신앙을 지킨 자들로서<고백자>라는 칭호를 얻었고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여 신앙을 버린 자들은<배교자-Apostat>라고 호칭되었다.
9)발레리아누스재위>의 박해.
디키우스의 뒤를 이어 갈루스재위>가 황제가 되었을 때 그는 기독교박해를 중지 시켰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발레리아누스황제에 의해서 다시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의 박해는 불과 3년 정도 밖에 안 되었지만 기독교에 많은 어려움을 주었다. 당시에 질병과 흉년이 발생하자 황제는 그 책임을 기독교에 돌렸다. 기독교가 로마의 전통적인 신들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에 신들이 노여워서 그러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황제는 기독교인들의 집회를 금지했고 그들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했으며 감독, 목사, 장로, 집사 등등의 지도자들을 처형하거나 유배시켰다.
10)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의 박해.
발레리아누스황제의 박해는 그가 페르시아인 들에게 포로 되었음으로 종료되었고 향후 40여년간 더 이상의 박해는 없었다. 그러나 4세기 초 마지막이 가장 조직적이고 가혹적인 박해가 발생했다. 기원284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에 등극하였는데 그는 로마제국을 재정비했다. 그는 로마제국에 새로운 황제제도를 수립했다. 그는 황제를 두 가지로 구분했다. 하나는 아우구스투스황제이고 다른 또 하나는 시저황제이다. 아우구스투스황제는 로마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통치하는 최고의 황제이며 시저황제는 아우구스투스황제들의 휘하에서 그들의 명령을 받는 휘하 황제 이다.이때에 로마 전체에 대한 최고의 통치권은 동로마를 통치하는 황제에게 있었다. 아우구스투스황제는 오직 시저황제들이 계승하게 되며 시저황제들이 아우구스투스황제를 계승하여 황제 자리가 결원되면 새로운 시저황제를 선출하여 보강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가 이러한 정책을 시행한 것은 거대한 제국이 분열되지 않고 질서 있게 통치되게 하기 위함 이었다. 로마제국은 황제계승 문제로 인한 암투 때문에 끊임없는 내란과 부란을 겪어왔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이러한 황제 계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2중적인 황제제도를 세워 황제 계승을 법통대로 이어가는 동시에 황제계승을 둘러싼 암투와 내란을 종식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정책은 처음에는 잘 지켜졌으나 나중에는 권력 쟁취를 위한 황제들 간의 암투로 인하여 더욱 혼란이 가중되는 결과를 이루었다. 이때에 아우구스투스황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로 서디오클레티아누스는제국의 동방을 맡았고 막시미아누스는 제국의 서방을 맡았다. 시저황제는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클로우스로 서갈레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휘하의 황제였고 콘스탄티우스클로우스는 막시미아누스 휘하의 황제였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최고황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였고 나머지 세 명의 황제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 휘하의 황제들이었다. 세 명의 휘하 황제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의 탁월한 권위적 지도 하에 맡은 지역을 질서 있게 다스렸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가 건재 하는 동안에 로마제국은 권력문제로 인한 암투가 없었고 제국은 비교적 평안했다. 다만 갈레리우스가 다뉴브강 유역의 내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정했고 페르시아 원정을 위해 또 한번 출정한 것 외에는 별다른 사건도 없었다. 4명의 황제 치하 초기에 기독교는 평안함을 누렸다. 황제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별로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아내인 프리스카와 그의 딸인 발레리아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기독교에 대하여 매우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엄청난 박해가 군대 문제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에 기독교 성도들 중에는 자원하여 군대에 입대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성도들의 군 입대를 반대했다. 때문에 군 입대한 성도들 중에 군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들이 있었다. A.D.296년경, 군대에서 병영을 이탈한 기독교 신자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처형당했다. 갈레리우스황제는 기독교인들의 병영 이탈 문제를 좌시하지 않았다. 그는 결정적인 시기에 기독교 신자들이 병영을 이탈하여 군대의 사기가 와해될 것을 크게 염려했다. 때문에 그는 군대에서 모든 기독교 신자들을 축출할 것을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건의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그 건의를 받아들여 모든 기독교 신자들을 군부로부터 축출하는 칙령을 내렸다. 이때에 다뉴브강 주둔군의 현지 지휘관들 중에서 황제의 칙령대로 행하지 않고 기독교 신자들에게 신앙을 거부하도록 강요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로인하여 기독교 신자들이 반발하자 다뉴브강 주둔군 사령관이 기독교신자들을 명령 불복종 죄로 처형하였다. 이 사건 이후로 갈레리우스는 기독교인들을 더욱 불신했다. 그는 303년에 이르러 로마제국내의 모든 관직에서 기독교인들을 축출하게 해달라는 건의서를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에게 올렸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그 건의를 받아 들였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자들을 모든 관직에서 파면할 것과 기독교 건물들을 모두 파괴하고 기독교에 관한 문서들도 모두 파괴하라는 칙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처음에는 황제의 칙령이 단호하게 시행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우호적이었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로마제국의 관직에 있었으며 그 중에는 고위관직에 있는 자들도 상당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성스러운 경전 문서들이 파기되는 것을 결사반대하여 정부의 탄압에 맞서자 상황이 악화되어 도처에서 고문과 처형이 자행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황궁에 두 차례에 걸친 화재가 발생했는데 갈레리우스는 그것이 기독교 신자들이 박해에 대하여 복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갈레리우스가 기독교를 탄압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화재를 일으켰다고 증언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크게 진노하여 황실에 근무하는 모든 기독교 신자들로 하여금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를 올리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때에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아내인 프리스카와 그의 딸인 발레리아는 황제의 명령에 순종하였으나 당시의 로마 수상이었던 도로테우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길을 택했다. 로마제국 전체에 걸쳐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진행되었다. 수많은 교회들과 기독교 문서들이 파괴되고 불탔으며 기독교를 증오하던 관리들은 이때다 싶어 기독교인들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이러한 박해의 와중에서 제국 내에 내란이 일어나자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황제는 그것이 기독교 신자들에 의한 반란이라고 의심하여 더욱 혹독하게 기독교를 탄압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체포되어 고문 당하거나 처형되었다. 신앙을 거부하고 황제를 숭배하는 자는 방면하기로 되어 있었고 그것을 거부하는 자는 로마의 시민권과 모든 법적인 권리를 박탈하는 차원에서 방면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러한 법령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기독교를 증오하는 관리자들은 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기독교인들을 무조건 고문하고 처형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과 목숨을 지키기 위하여 다시 지하로 숨었고 일부는 국경을 넘어 페르시아로 탈출했다. 이에 황제는 더욱 분노했고 탄압은 더욱 극심하게 자행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갈레리우스의 권위는 최고에 올라 로마제국 전체를 장악하게 되었다. 304년에 이르러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중병에 걸려 허약해지자 그의 황제로서의 권위도 따라서 약화되었다. 갈레리우스는 기원305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를 협박과 회유로 설득하여 황제의 자리에서 퇴진시켰다. 이때에 아우구스투스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퇴위하고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클로우스가 아우구스투스황제자리에 올랐다. 갈레리우스가 동로마를 다스리는 황제로서 로마의 최고황제가 된 것은 당연하다. 시저황제의 자리에는 세베루스와 막시미누스다이어가 등극했는데 그들은 실권이 전혀 없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갈레리우스의 계략적인 황제 등극에 대하여 군부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때에 로마군부의 차기 실세 자는 콘스탄티우스클로우스의 아들인 콘스탄틴과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막센티우스였다. 그들 중에 특히 콘스탄틴을 지지하는 세력이 막강하였다. 이때에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틴을 황궁에 머물게 했다. 갈레리우스가 콘스탄틴을 황궁에 머물게 한 외적 명분은 황제의 정치적, 군사적 보좌였지만 내용은 콘스탄틴의 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클로우스와 콘스탄틴을 지지하는 군부세력의 반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콘스탄틴은 사실상 볼모로 연금된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틴은 지지 세력의 도움을 받아 황궁을 탈출하여 부친과 합류했다. 콘스탄틴을 지지하는 군부세력은 기원306년에 콘스탄티우스클로우스가 사망하자 갈레리우스를 거부하고 콘스탄틴을 아우구스투스황제로 추대했다. 한편 막센티우스는 자신의 지지 세력을 규합하여 로마로 진격해 세베루스황제를 폐위시켰다. 세베루스는 자살하였고 갈레리우스는 막센티우스를 제거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휘하 장군들이 오히려 막센티우스편에 합류하므로 실패했다. 궁지에 몰린 갈레리우스는 이미 은퇴한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로마제국은 매우 혼란스러운 정치적 공백을 맞이했다. 로마 속령의 지방에서는 야심찬 군부세력들이 힘을 비축하며 틈을 노리고 있었고 서방지역에서는 콘스탄틴과 막센티우스 두 황제가 각각 황제를 자처하면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도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계속 되었다. 갈레리우스와 막시미누스다이어는 계속하여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했다. 특히 막시미누스다이어는 기독교 신자들의 신체를 절단하고 그들을 채석장에 보내어 강제노역을 시키는 악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이에 맞서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채석장의 강제노역 현장에 교회를 세우고 신앙적 삶을 고수했다. 진노한 막시미아누스는 그들을 가차 없이 처형했으나 기독교 신앙의 불길은 그럴수록 더욱 거세게 타 올랐다. 어쩌면 로마의 기독교가 완전히 종료될지도 모른다는 절망적인 우려 속에서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갈레리우스가 갑자기 급환으로 쓰러진 것이다. 황제는 외음부에서 화농증이 발발하여 점점 발진하면서 창자의 내부로 퍼져들어 갔기 때문에 치료가 불가능했다. 상처에는 벌레가 들끓었고 냄새가 지독하여 곁에 서 있기가 역겨울 정도였다. 고통 중에 신음하는 그에게 측근이 조언했다. 그의 조언은 황제의 급병이 기독교인들을 탄압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으로 빨리 기독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멈추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황제는 자신의 악행에 대하여 크게 후회했다. 황제는 서둘러서 기독교에 대한 관용령을 발표했다. A.D.311년4월30일의 일이었다. 다음은 갈레리우스가 발표한 라틴어 칙령의 헬라어 번역문을 요약한 것이다.
<우리들은 이제까지 제국과 백성들의 공익을 위해 여러 가지 조처를 강구했다. 먼저 우리는 모든 일들을 로마인들의 전통과 공적인 제도에 따라 질서를 복구하고자 하였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들은 특별히 자기 선조들의 종교와 신앙을 저버린 기독교 신자들이 진리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자신들의 뜻과 의지에 따라 법률을 만들어 쫒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다른 의견들을 가진 여러 계열의 분파들이 생기게 되었다. 때문에 우리가 황제의 칙령을 통하여 그들에게 옛 조상들이 세워놓은 관습으로 되돌아가라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생명을 구하기 위해 이에 복종하였으나 많은 사람들이 위협을 받고 여러 가지 형태의 죽음을 택했다. 그러나 아직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자기들의 고집을 꺾지 않으며 이들은 불멸의 신들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도 않고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에게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우리는 저들이 여전히 우리가 만백성에게 용서를 베풀어 온 자비함과 변함없는 관습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고 있으나 우리는 이일에 있어서도 모든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만인들을 향한 자비의 눈으로 볼 때에 이들을 사면하고 이들이 공공질서를 해치지 않는 한 자기들끼리 집회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 옳을듯하다.
그럼으로 기독교인들은 다시 자신들의 모이는 장소를 재건하며 자신들의 신앙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아도 좋다. 우리는 또 다른 칙령을 통해 공직자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취급해야 할지를 지시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양보하였음으로 이러한 은혜에 보답하여 기독교 신자들은 제국이 번영을 누리고 자기들 스스로가 평안하게 그 생명을 보존할 수 있도록 우리들과 공공복리와 자기 자신들을 위해 자기들의 신에게 기도해야만 한다. 그리고 사방에서 공공의 복지가 보존되며 그들이 각기 자기 집에서 무사하게 살게 되기를 기원해야 한다.>
갈레리우스황제는 칙령을 발표한 후 5일 후에 사망했는데 그는 운명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나는 참으로 미친 짓을 했다....물론 공포에 질린 수천 명의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저버린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반면에 또 다른 수천 명의 기독교인들은 의연한 모습으로 그들의 신앙을 피로서 입증했다.>
갈레리우스의 칙령으로 인하여 로마 전역에서 시행되어 졌던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공식적으로 해제되었다. 모든 지역의 감옥 문이 열리고 감금되어 있던 모든 기독교인들이 석방되었으며 몰수 되었던 교회 및 개인들의 재산이 환수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기독교 박해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다른 황제들은 박해를 종식시킨 반면에 막시미누스다이어황제는 여전히 박해를 계속했다.
3.박해의 종료.
1)기독교박해와 콘스탄틴의 전쟁역사.
갈레리우스가 사망한 후 로마제국은 리키니우스, 막시미누스다이어, 콘스탄틴, 막센티우스 등등에 의하여 4개로 분할 통치되었다. 이때에 리키니우스, 막시미누스다이어, 콘스탄틴 등등은 서로를 인정하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막센티우스를 반역자로 규정하여 적대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완전하게 종료되어지는 역사적 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콘스탄틴에 의해서 종료되었다. 그리고 콘스탄틴에 의하여 로마 기독교가 국교로 공식화 되며 로마교회를 통하여 기독교의 세계화가 추진된다. 따라서 우리는 콘스탄틴에 대한 역사를 정리한다.
콘스탄틴은 기원274년에 다뉴브강 남쪽의 나이수스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디오클레시우스의 서로마 부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클로루스였고 어머니는 헬레나였다. 장남인 그는 부친이 293년에 서로마의 부황제가 되자 디오클레시우스의 황궁에서 비잔틴식 군주정치를 수업했다. 그는 부왕이 사망하자 측근들에 의해 서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투스황제 자리에 등극했다. 콘스탄틴은 로마제국의 맹주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을 확장하면서 군부를 강화시켜 나갔다. 그는 특히 고울지방과 영국 일대에 튼튼한 기반을 조성했다. 그는 당시 만족<蠻族-오랑캐>로 알려진 민족들이 출몰하던 라인강유역의 방위를 강화하고 선정을 베풀어 그 지역 주민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는 원래 이상적이고 도덕적인 인격을 소유한 군주는 아니었으나 매우 현명하고 지혜로운 정치가였다. 그는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의 주민들을 최대한으로 보살피어 그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대신 치외권에 속하는 자들에게는 혹독하고 잔인한 정복자였다. 당시에는 각종 경기장에서 격투기를 비롯한 각종 경기들이 유행하였는데 그것은 당시의 사람들이 격렬한 경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콘스탄틴은 사람들의 흥미를 만족하게 채워주기 위하여 수시로 경기를 열었는데 이때에 격투기, 검투기, 또는 짐승들과의 싸움에는 주로 전쟁포로나 노예들이 사용되었고 특히 만족출신의 전쟁포로들이 동원되었다. 역사가 들이 전하는바에 의하면 이때에 죽어간 만족 출신의 전쟁포로들의 숫자가 엄청났다고 하며 심지어는 짐승들마저도 사람을 죽이는 일에 싫증을 냈다고 한다. 특히 그는 노련하고 치밀한 군사 전문가로서 전쟁을 할 때에 철저한 사전 준비와 전략을 세워서 속전 속결적인 전투로 아군의 피해를 최대한으로 줄이는 대신에 최대한의 전과를 올리는 승리의 귀재였다. 콘스탄틴은 오랫동안 준비를 갖춘 후에 자신의 통치지역을 먼저 철저하게 방비하여 내란이나 반란을 사전 차단하면서 군대를 고울<갈리아>지역에 집결시켰다. 그리고 순식간에 알프스산을 넘어 막센티우스가 다스리는 로마로 진격했다. 이때에 투입된 군대는 전체 병력의4/1이었다. 그는 로마 전투에서 패할지라도 본국에서의 내란으로 인하여 더욱 큰 실패를 하지 않으려는 계산을 철저하게 하였다. 콘스탄틴과 막센티우스의 한판 승부는 매우 불가사의 한 의문적 전쟁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전쟁 역사가들의 연구조사에 의하면 그 싸움은 처음부터 막센티우스가 절대적으로 승리하게 되어 있었다. 로마는 자체적으로 완벽한 수비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콘스탄틴의 군대는 험준한 알프스산을 넘어 오느라 이미 지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콘스탄틴의 군대는 후방 보급로가 알프스산을 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할 한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약점이 있었다. 콘스탄틴이 예상치 못한 때에 갑자기 공격한 것과 속전속결로 전쟁을 마무리하려고 하는 것에는 이와같은 약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막센티우스가 철통같은 방어만 하고 기다리는 지구전으로 나갔으면 콘스탄틴은 스스로 무너지거나 후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막센티우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막센티우스는 콘스탄틴이 진격해 오자 즉시 군사회의를 소집했는데 이때에 의견이 엇갈렸다. 대부분의 장군들은 콘스탄틴이 저절로 지칠 때 까지 아우렐리안의 성벽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다급해진 콘스탄틴이 무리한 공격을 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방어 후 공격을 주장했다. 그러나 주술가들은 반대의 의견을 내 놓았다. 그들은 콘스탄틴군이 이미 지쳐있을 때 공격하여 그들을 패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들에게 휴식의 기회를 주면 피로가 회복되고 또한 후방에서 보급물자가 도착하면 저들의 사기가 올라 무찌를 수 없게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아울러 그들은 자신들의 주술로 콘스탄틴군을 이길 수 있다고 호언장담<好言壯談>했다. 그들은 전쟁의 장소를 구체적으로 지정하여 티베르강의 밀비안다리가 승리의 격전장이 될 것이라고 까지 했다. 막센티우스는 당연히 군사 전문가들인 장군들의 의견을 따랐어야 하는데도 비 군사 전문가들인 주술사들의 의견을 따랐다. 한편 콘스탄틴은 결전이 있기 전 날에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 콘스탄틴이 하나님께 받은 계시는 여러 가지로 전승되어지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정확한지 알 수 없다.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에서 웅변학을 가리키던 라틴계의 변증가이며 기독교 역사가였던 락탄티우스의 증언에 의하면 콘스탄틴은 꿈속에서 기독교의 상징을 병사들의 방패에 부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에 콘스탄틴은 꿈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병사들의 방패와 군기에 승리를 보증하는 표식으로 헬라어 알파벳 중에“키”CHI와“로”RHO
를 결합한 장식무늬를 그려 넣으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 문자는“그리스도”의 처음 두 문자 임으로 그 표식은 기독교를 상징하는 것이 될 수 있다. 315년에 로마에서 발행된 동전 화폐에 이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4세기 후반의 역사가들은 이 무늬를 라바룸이라고 명칭 하였다. <이러한 전설에 영향을 받은 일부 교회들은 XP를 기독교 상징의 문자로 사용하였고 이러한 관행은 오늘 날에도 일부 교회들에 의하여 지켜진다.>
한편 유세비우스의 증언에 의하면<이것으로 정복하리라>하는 단어들과 함께 공중에 그 깃발의 환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또 어떤 전승은 십자가 깃발을 앞세우고 전투하라는 음성이 있었다고도 한다. 콘스탄틴이 계시를 받게 된 사연에 대한 증언들도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콘스탄틴이 하나님께<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주시면 기독교 핍박을 종식시키고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하겠다.>고 기도한 후에 계시를 받았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네가 승리하면 기독교인이 되겠느냐?>라고 하문하시어 콘스탄틴이<제게 승리를 주시면 반드시 하나님의 종이 되겠나이다.>라고 대답한 후 계시를 받았다는 등 여러 가지가 있어서 과연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다. 콘스탄틴이 하나님께 받은 계시의 진위성을 우리가 확인할 수는 없으나 결과는 한가지로 전해진다. 콘스탄틴과 막센티우스의 전투는 로마근교 북방의 작은 마을인 삭사루브라에서 벌어졌다. 그들은 티베르강의 밀비안에서 최후의 격전을 벌였는데 이때에 막센티우스가 밀비안다리 위에서 싸우다가 강물 속으로 떨어져 빠져 죽었다. 이로서 콘스탄틴이 로마제국의 서부를 완전히 장악하였고 제국의 동부지역은 리키니우스와 막시미누스다이어가 공동으로 통치했다. 콘스탄틴은 로마제국의 서부를 장악한 뒤 동부를 공격하려는 야심을 감추고 리키니우스와 평화 동맹조약을 체결하였다.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는 밀란에서 동맹 협정을 체결했는데 이때의 협정서 중에 기독교에 대한 조항이 들어 있다. 그 협정서에는 기독교에 대한 모든 탄압을 즉시 중지할 것과 몰수 된 교회와 개인들의 재산들을 환원한다는 조항이 들어있다. 역사가들은 그 협정조약을<밀란칙령-Edict of Milan-A.D.313>이라고 명칭 하였다. 역사가들 중에는 이 칙령을 관용의 칙령이라고 명칭하기도 하였는데 이 칙령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한 것은 아니었고 종교적 양심에 의한 절대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준 것으로서 기독교를 여타의 종교들과 대등한 위치에 올려놓은 것이었다.<밀라노 칙령은 분실되었음으로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으나 당시에 니코메디아 관리들에게 기독교에 관한 세부규정을 설명한 리키니우스황제의 포고문은 남아있다.>
그러나 막시미누스다이어는 갈레리우스의 칙령에 따른 기독교 박해를 계속했다. 콘스탄틴은 동부를 공격하고자 하는 야심을 철저하게 은폐하면서 리키니우스와 막시미누스다이어가 전쟁을 하도록 은밀하게 유도했다. 콘스탄틴은 리키니우스가 안심할 수 있도록 자신의 사촌 여동생 콘스탄스를 리키니우스와 결혼시켰다. 콘스탄틴은 마지막 결전에 대비하여 전력을 비축하면서 여러 경로를 통하여 그들이 전쟁을 하도록 계략을 꾸몄다. 콘스탄틴의 계략에 휘말린 그들은 드디어 전쟁에 돌입했다. 전쟁은 막시미누스다이어가 먼저 시작했다.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의 동맹에 불안을 느낀 막시미누스는리키니우스가 밀란에서 콘스탄틴과 함께 있을 때에 리키니우스의 영토에 침입하여 비잔티움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리키니우스가 즉시 반격하여 막시미누스다이어를 패퇴시켰다. 막시미누스다이어는 도주했고 얼마 후 사망했다. 이로서 로마제국은 리키니우스와 콘스탄틴이 동서를 양분하여 통치하게 되었다. 리키니우스는 이탈리아 전체와 이집트를 통치했고 콘스탄틴은 서부유럽과 북아프리카를 통치했다. 사람들은 두 황제들이 사촌 매부 처남 관계였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의 전쟁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두 황제는 다 함께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망을 불태우고 있었다. 두 황제는 전력을 정비하고 다듬으면서 호심탐탐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전쟁의 불꽃이 튀었다. 콘스탄틴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었는데 조사결과 배후에 리키니우스의 친척이 있었음이 드러났다. 그는 도망하여 리키니우스에게로 갔고 콘스탄틴은 리키니우스에게 그를 송환 할 것과 납득할 수 있는 해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리키니우스는 그것을 거부하고 전쟁을 선포했다. 이미 전쟁의 구실을 찾고 있었던 콘스탄틴은 즉시 군대를 동원하여 리키니우스를 공격했다. 두 차례의 격전 끝에 콘스탄틴이 비잔티움을 정복했다. 비잔티움을 빼앗기면 아시아와의 교통이 두절되어 보급로가 차단될 것을 두려워한 리키니우스는 비잔티움을 돌려받는 대신에 유럽영토 대부분을 콘스탄틴에게 양도하기로 하고 평화협정을 맺었다. A.D.314년의 일이었다. 그 후 두 황제 사이의 권력 투쟁은 한 동안 소강상태에 들어갔고 제국은 평안했다. 그러나 A.D.322년에 이르러 최후의 승부를 판가름하게 되는 전쟁이 일어났다. 콘스탄틴은 야만족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다뉴브강을 건너 리키니우스의 영토를 침략했다. 리키니우스는 이것을 고의적인 도발로 간주하고 즉시 대항했다. 이때에 콘스탄틴의 군대병력은 리키니우스 군대병력에 비해서 극히 소수였다. 그러나 전투는 콘스탄틴의 승리로 끝났다. 이때의 전투에서 리키니우스의 군대가 콘스탄틴의 군대보다 훨씬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패전한 것에 대하여 당시의 역사가들이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전해준다. 이때에 도콘스탄틴군은 기독교를 상징하는 깃발들을 앞세우고 전투에 임했는데 리키니우스의 군대가 그 깃발을 몹시 두려워하여 전의를 상실하게 되자 리키니우스는 병사들에게 그 깃발을 바라보지 말고 고개를 숙인 채 전투에 임하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리키니우스군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전투에 임했으므로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해 보고 패전하였다는 것이다. 또 어떤 역사가는 리키니우스군이 콘스탄틴군의 깃발을 보면 아예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림으로 전투가 매우 싱겁게 끝났다고도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역사가는 당시의 전투가 매우 치열했으나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리키니우스가 패했으며 패배 이유는 깃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략과 전술적 차이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리키니우스가 많은 병력으로 소수의 콘스탄틴군을 포위하여 활과 창으로 공격했으면 충분하게 이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일하게 맞대결 하여 칼로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정예군인 콘스탄틴군에게 패했다는 것이다.
리키니우스는 비잔티움으로 패주하였으나 콘스탄틴의 추격을 견디지 못하고 바다를 건너 소아시아 지방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콘스탄틴의 추격으로 연전연패 하면서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이때에 콘스탄스와 니코메디아의 감독 유세비우스가 리키니우스의 구명을 탄원했다. 콘스탄틴은 리키니우스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조건으로 그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이로서 드디어 전쟁은 끝났고 콘스탄틴은 전 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2)콘스탄틴에 대한 역사적 평가.
콘스탄틴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들의 역사적 평가 기준에 따라 각기 다르다. 그 중에 특히 기독교 역사학자들과 기독교를 거부하는 역사학자들 사이의 평가가 첨예한 대립을 이룬다. 콘스탄틴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평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기독교 역사학자들의 평가.
기독교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틴을 훌륭한 기독교인으로 추대한다. 그들은 심지어 콘스탄틴을 신앙적 영웅 황제로 추대한다. 그들이 콘스탄틴을 신앙적 영웅 황제로 추대하는 이유는 그를 통하여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가 사실상 종료되었고 기독교가 제국의 국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콘스탄틴이 밀비안전투 이전에 하나님께 계시를 받았을 때 회심하여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모든 전투에 하나님의 군대를 이끌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출전하였으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승리하였다고 주장한다. 저들은 특히 밀비안다리에서 막센티우스를 패퇴시킨 것과 아드리아노플에서 리키니우스를 패퇴시킨 것을 하나님의 군대의 승리라고 말하며 따라서 콘스탄틴을<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황제><하나님의 황제><기독교의 수호황제>라고 명칭했다.
(2)일반 역사학자들의 평가.
기독교 역사학자들이 콘스탄틴을 영웅시 하는 것과는 달리 일반적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틴을 종교인<특히 기독교인>으로 보지 않고 노련하고 출중한 정치적 역량을 가진 탁월한 정치가로 본다. 그들은 콘스탄틴이 치밀한 계산적 정치 책략에 의한 고도의 정치 기술을 발휘하여 제국을 통치했다고 본다. 저들이 그러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콘스탄틴이 추구한 종교적 정치 노선이다. 콘스탄틴은 기독교 박해를 종식시킴과 동시에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까지 추대했음에도 불구하고 퇴위하기 직전까지 여전히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를 인정했고 그 중에<정복되지 않는 태양신>을 가문적 수호신으로 받들어 섬겼으며 심지어는 이방종교들의 제사장 역할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콘스탄틴은 비잔티움을 새로운 로마의 수도로 건설한 후에 그곳에 기독교적 유물들만 건설하거나 옮겨 놓은 것이 아니라 제국 전체에 산재해 있는 모든 종교들의 각종 종교적 유물들을 거의 다 옮겨놓았다. 때문에 일반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틴은 기독교인이나 종교인으로서가 아니라 다만 정치가로서 모든 종교를 공평하게 수용하고 적절하게 아우르는 정책을 수용한 정치가 였다고 보는 것이다.
(3)기독교에 적대적인 역사학자들의 평가.
기독교에 적대적인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틴을 기회주의자이며 교활한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고 평가한다. 저들은 콘스탄틴이 밀비안 전투에서 막센티우스에게 승리할 때와 아드리아노플에서 리키니우스를 패퇴시킨 것은 기독교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계산된 사기극에 의한 승리라고 주장한다. 즉 꿈속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 것과 환상 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모두가 치밀하게 계산된 거짓말이고 사기라는 것이다. 저들의 주장에 의하면 콘스타틴은 당시에 이미 기독교인들에 대한 개념이 옛날과는 많이 달라져서 사람들 중에는 기독교의 하나님은 정말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과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황제들의 말로가 하나같이 비참하였고 특히 전임 아우구스투스황제였던 디오클레시아와 갈레리우스가 비참한 종말을 고했다는 점에 착안하여 자신이 직접적으로 기독교의 하나님께 계시 받았다고 거짓 유포하고 기독교를 상징하는 깃발들을 만들어 전투대열의 선봉에 세움으로서 적군의 사기를 꺾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은 막센티우스와 리키니우스를 불운한 황제로 보았고 특히 리키니우스를 더욱 불운한 황제로 동정하였다. 저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사실상 막센티우스나 리키니우스는 특별히 기독교를 탄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크게 학정을 베풀지는 않았다. 리키니우스가 콘스탄틴과 대결하기 직전에 한때 기독교를 탄압하였지만 그것은 고의적인 탄압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그를 배척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리키니우스 통치 하의 기독교는 여러분파로 분열되어 있었고 그들의 분파적 갈등과 다툼은 사회적 질서를 파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리키니우스는 할 수 없이 친위대를 동원하여 기독교의 종교적 갈등을 진압했는데 이때에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들은 리키니우스를 배척하고 콘스탄틴을 지지했다. 이에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틴 지지자들을 색출하여 처벌했는데 이로 인하여 콘스탄틴 지지자들은 점점 늘어가는 반면에 군대의 사기는 점점 저하되었고 때문에 결국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객관적차원에서의 평가.
콘스탄틴에 대한 객관적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콘스탄틴은 개인의 권력에만 집착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로마제국의 영광을 복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이었다. 그는 로마제국의 영광을 위하여 원로원과도 과감히 맞섰고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조차도 제거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과거의 데키우스나 디오클레시안 황제들처럼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그들과 달랐다. 과거의 황제들은 로마의 전통적 종교 위에 로마의 영광을 세우려고 했지만 콘스탄틴은 기독교의 토대 위에 로마의 영광을 복원하려 하였다. 콘스탄틴의 이러한 정책은 원로원을 비롯한 귀족들의 결사적인 반대를 받았고 심지어는 콘스탄틴을 제거하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려는 음모까지 있을 정도로 심각한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힘으로 원로원을 제압하였으며 황제퇴위 사건에 연루된 자신의 큰 아들 크리스푸스리키니우스와의 전쟁에서 함대 사령관이었다>까지도 과감히 처형하였다. 때문에 객관적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틴을 로마를 사랑한 아름다운 황제로 평가한다.
(5)우리의 평가.
역사란 보는 사람의 견해에 의하여 얼마던지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 하나의 사건을 어떠한 개념에서 어떠한 눈으로 보는가? 하는 것에 따라서 반역이 혁명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혁명이 반란이 될 수도 있다. 충신이 역적이 될 수도 있고 역적이 충신이 될 수도 있으며 간적이 영웅이 될 수도 있고 영웅이 간적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전승들에 의하여 당시의 상황들 살펴보게 될 뿐이다. 때문에 과연 어떠한 견해가 바른 견해인지를 알 수 없으며 어떠한 상황이 사실적인 역사인지를 함부로 정립할 수도 없다. 따라서 콘스탄틴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참으로 조심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기독교역사에 많은 아름다운 역사를 제공한 콘스탄틴을 평가한다는 것은 자칫하면 편파적인 것이 될 수 있기에 더욱 조심스럽다. 따라서 그 점을 미리 밝히면서 기독교 박해역사를 종식시킨 콘스탄틴과 당시의 기독교와 당시의 로마의 상황을 역사적 차원에서 조명한다. 아울러 다음부터 기록하는 것들은 모두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추론일 뿐 그것이 정확한 실제적 역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미리 밝혀둔다.
*우리는 당시의 상황들과 그의 정치적 결과들을 근거로 하여 콘스탄틴을 노련하고 탁월한 정치가로 인정한다. 그리고 그의 야심 찬 로마영광 재현의 꿈도 사실로 인정한다. 아울러 우리는 그가 막센티우스와의 전투전에 받았다는 계시도 인정한다. 역사가들의 전승들이 서로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 모든 것들을 다 함께 인정한다. 왜냐하면 계시의 내용이 똑같아야 한다는 이유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의 계시를 다양하게 내려주셨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그가 분명한 기독교인이었음을 확신한다. 그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밀비안 전투에서 였을 것이다. 그 이전의 콘스탄틴은 다만 로마제국의 맹주가 되어 로마제국을 과거의 화려하고 웅장하고 강하고 영광스러운 로마제국이 되게 하려는 야심 찬 정치가였다. 그가 야만족 포로들을 경기장에서 무참하게 죽도록 한 것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보면 분명 악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당시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대로마제국의 황제로서 비난받을 수 없는 통치적 행위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틴이 밀비안 전투를 통하여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부터 그에게는 새로운 삶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가 죽음에 임박할 때까지 세례를 받지 않은 점과 이방 신상들을 섬긴 것은 그가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이거나 또는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망서렸다거나 또는 계산된 정치적 계략에 의한 양다리 걸치기식의 비열한 태도는 아니었을 것으로 본다. 우리는 그가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그의 삶이 인격적인 기독교인의 삶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해서는 않된다. 그가 비록 회심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로마의 귀족으로서 수십 년간 생활해 온 그가 하루아침에 성경이 요구하는 차원의 기독교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대로마제국의 황제인 그가 순식간에 전형적인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그의 신앙적 삶에 대하여 많은 욕심을 내서는 않된다. 또한 우리는 당시의 로마제국과 기독교의 상반된 입장을 역사학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로마제국은 세계를 호령하는 대제국이었던 반면에 기독교는 아직 로마제국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분야들은 전통적인 로마의 귀족들에게 편중되어 있었고 따라서 황제는 그들을 무시할 수 없었으며 로마에는 또한 수많은 종교들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배려도 당연히 요구되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황제가 기독교라는 어느 한편에 치중하는 정치적 노선을 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그가 말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세례를 받고 정식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사실과 그가 이방종교들과 계속하여 꾸준히 교류를 가졌다는 것을 당연히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오히려 그때에 콘스탄틴이 오직 기독교만을 주장하지 않고 보편적인 종교정책을 펼친 것에 대하여 그의 탁월한 지혜를 칭찬한다. 만약에 그가 오직 기독교만을 주장하여 기독교 이외의 종교들을 탄압했다거나 또는 비잔틴 건설을 오직 기독적인 도시로 건설하여 다른 종교들의 접근을 일제히 차단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은 분명 콘스탄틴의 몰락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며 더욱 극심한 기독교 탄압의 역사를 재현하는 결과를 만들었을 것이다. 콘스탄틴이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먼 장래를 내다보는 지혜로움으로 그러한 정책을 펼쳤는지 아니면 다만 정치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했는지를 우리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통치 방법은 분명히 기독교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콘스탄틴의 통치 하에서 기독교는 다방면에 걸친 발전을 이루었던 것이다.
4.로마제국의 박해와 하나님의 섭리역사.
많은 역사 학자들은 로마제국에 의한 기독교 박해를 보면서 많은 의혹을 품었다. 특히 기독교역사학자들은기독교에대한로마제국의박해를보면서참담한심정을토하였다.
저들의 공통적 의문은 참으로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 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어찌하여 저토록 오랜, 그리고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시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침묵하시는가?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살아 계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이 저토록 오랫동안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불신하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기독교인들이 불쌍하고 어리석어 보였다. 한편 사람들은 또 다른 차원에서 기독교에 대한 의문을 갖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박해를 전혀 돌아보지 않는 하나님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아니하고 여전히 섬기는 기독교인들을 이해 할 수 없었다. 특히 경기장에서 불에 타 죽거나 맹수들에게 찢기워 죽어가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밝고 평안하고 의연한 자세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독교인들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토록 길고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멸절되지 않고 오히려 더욱 확장되어 가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상 이러한 의문은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모두를 막론하고 박해를 받던 당시의 사람들이나 그것을 역사 속에서 보고 알게된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이 갖는 공통된 의문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신학자로서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시원하게 풀어 주어야할 책임과 의무를 갖는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립한다.
1)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기독교에 대한 로마제국의 박해는 기독교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증명한다. 로마제국의 박해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속하게 발전하는 기독교의 역사는 일반상식으로는 절대로 이해될 수 없는 상황이다. 일반적인 상식대로라면 박해가 극심하면 극심할수록 기독교는 움츠러들어야 하고 기독교 성도들의 숫자도 줄어 들어야한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가공할만한 박해를 보면서 기독교인이 되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없고 죽음과 고통을 이겨 내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며 따라서 기존의 기독교 성도들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하여 기독교를 포기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숫자가 자연적으로 줄어들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은 그토록 심한 박해 속에서도 기독교인의 숫자가 오히려 증가되며 뿐만 아니라 박해가 심하면 심할수록 기독교가 오히려 확산 되어갔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의 원리이다. 기독교의 발전이나 기독교인들의 증가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에 어떤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로 인하여 기독교의 발전이 영향을 받아 침체 되거나 또는 답보적 상태를 갖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박해에 대한 상대적인 자극을 받아 기독교 전체 또는 기독교 개인들의 신앙이 성장하거나 분투하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의 발전과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박해를 비롯한 외부적인 것들에 전혀 영향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하여 진군된다. 하나님께서 이미 선택한 자들은 박해와 전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되면 하나님께 나오게 되어있다.
때문에 로마제국의 그토록 극심한 박해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정해진 때에 하나님 앞에 나왔고 기독교는 유유히 그 역사를 진행해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역사는 당시의 기독교역사를 통하여 증명 받는다. 그토록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복음의 특전사들은 로마 전 지역을 비롯한 세계 전 지역에 교회들을 설립해 나가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고 전파했다. 그리고 진리의 기록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기록하였고 아울러 복음전파의 현장들에 있었던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기록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각종 철학 사상가들과 사이비이단들을 비롯한 비진리자들의 끊임없는 교리적 공격을 진리로 변증하는 가운데 기독교의 진리,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다듬어 정리해 나갔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정하신 섭리에 따라 훗날에 성경이 완성되고 정립되었으며 또한 조직신학이 완성되고 정립되었으며 하나님의 기독교역사가 기록으로 남겨져 후세에 전승되는 역사를 이룩해 나갔던 것이다.
어떤 역사가들은 하나님께서는 로마제국의 박해 없이도 주권적으로 기독교역사를 확장하고 진군 시킬 수 있었지 않느냐? 라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로마제국의 박해 없이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얼마든지 기독교역사를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 아니냐?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적 특성과 또한 인류역사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함에서 비롯되어진 우문<愚問>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정립해야 할 것이 있다. 먼저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대한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진행시키심에 있어서 주로 두 가지의 방법을 사용하신다. 하나는 의도적, 고의적 차원의 주권적 역사를 창출하시는 것이며 다른 또 하나는 허용적 차원에서 인간들의 역사를 주권적으로 적용하시는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기독교역사는 대부분 의도적, 고의적, 주권인 반면에 일반역사는 대부분 허용적 주권이다. 물론 기독교 역사에도 허용적 주권이 적용되며 일반 역사에도 고의적, 의도적, 주권이 적용된다. 그러나 특별한 역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경우 기독교 역사는 대부분 의도적, 고의적, 주권인 반면에 일반역사는 대부분 허용적 주권이다. 이와같은 차원에서 볼 때에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하나님께서 의도적, 고의적으로 그것을 창출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필요에 의하여 그것을 허용하신 것이다. 즉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로마제국 당국자들이 로마를 위하여 일으킨 사건들이었고 유대인들의 박해나 로마시민들 및 이방종교인들의 박해 역시 그들의 입장을 위하여 일으킨 사건들이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의 발전적 진군을 위한 차원에서 그것들을 허용하셨고 적용하셨다.
2)기독교의 발전.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기독교인 개인들에게는 참아내기 어려운 고통들을 주었지만 결국은 하나님기독교의 역사적 발전을 크게 도와주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기독교를 박해한 로마제국의 황제들은 물론 네로와 같은 정신병자도 있었지만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대부분 정상적인 황제들이었고 개중에는 훌륭한 현제<賢帝>들도 있었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 등등의 황제들은 로마제국의 입장에서는<5현제>들에 포함되는 훌륭하고 영민한 황제들이었다. 또한 황제들의 박해도 개인적인 유익을 위한 박해나 사적인 감정을 위한 박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로마제국의 영광과 평안을 위한 정치적, 종교적, 차원에 의한 박해들이었다. 로마제국을 통치하는 황제의 입장에서 볼 때에 기독교는 다양한 차원에서 암적 존재였기 때문에 그들은 로마제국을 위해서 기독교를 탄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로마의 기독교박해는 기독교를 멸절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전역과 나아가서는 세계 전역으로 확산시키는 결과를 만들어 주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로마를 떠나 로마제국의 각 지역과 세계의 전역으로 흩어지면서 가는 곳마다 기독교를 전파하고 교회들을 세워 나감으로서 기독교는 자연적으로 로마제국 전 지역화, 세계 전 지역화를 이루었던 것이다.
따라서 로마제국의 입장에 의한 기독교박해는 일반 역사적 차원에서는 로마제국을 위한 필연적인 것이었지만 그것이 바로 기독교역사의 진군을 크게 추진하고 후원하는 절대적인 요소가 되었다.
한편 로마의 기독교 박해가 로마제국 전체에서 행하여졌지만 로마시내의 박해는 극심했던 반면에 로마시외 각 지방의 박해는 그다지 심하지 않았으며 로마시로부터 멀어질수록 박해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약했다. 이러한 상황 역시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이었다. 만약에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박해하지 않고 오히려 보호하고 장려하고 확장했더라면 어떠한 결과가 나왔을까? 물론 그러한 경우에도 기독교의 확장과 발전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하에서 당연히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을 때에 기독교가 확장되고 발전하는 속도와 범위는 박해로 인한 확장과 발전 속도와 범위보다 상대적으로 더디고 제한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인간들의 기본적인 특성은 대체적으로 어려움 속에서는 더욱 진취적이고 전투적인 반면에 평안할 때에는 오히려 누리고 즐기며 안주<安住>하려고 한다. 그리고 특히 인간의 종교적 특성은 위기적 일 때에는 진리를 위하여 투쟁하고 희생하는 반면에 평안할 때에는 오히려 비진리에 빠져 안주하고자한다. 따라서 만약에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보호하고 후원하는 입장이었다면 기독교의 세계화는 그 속도에 있어서 매우 완만하였을 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비진리적인 것으로서의 확산이 되었을 것이다. 즉, 수많은 비진리적인 교리들의 난무 속에서 수많은 분파를 이루는 가운데 기독교 아닌 기독교들로 분산되어 졌을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역사의 현장들이 증명해준다. 기독교가 박해 하에 있을 때에도 물론 비진리적 교리들과 분파와 분당들이 난무하였지만 그것은 미약하고 지엽적인 것으로서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라면 어떤 영역 어떤 사회에서도 언제나 있게 되는 흔하고 보편적인 현실들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기독교박해가 끝나고 신앙적 평안이 허용되었을 때를 기점으로 하여 전개되어진 기독교역사를 보면 참으로 안타까움과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참담한 신앙적 순교위에 세워진 기독교역사는 그때를 기점으로 하여 타락되고 변질되어져 갔으며 수많은 비진리적 교리들의 출현 속에서 수많은 분당과 분파로 갈라지고 흩어지는 역사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부끄럽고 안타까운 역사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3)박해받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께서 기독교의 확장과 발전을 위하여 로마제국의 박해를 허용하셨다. 라는 우리의 주장에 대하여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가혹하신 하나님이 아니신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제국의 박해 때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견뎌내기 힘든 고통과 수난을 당했으며 심지어는 비통하고 비참하게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선포한다. 로마제국의 박해로 인하여 고통 받은 것은 시간적으로 볼 때에 아무리 길어도 잠시의 일이며 최고의 고통은 고문이나 형벌 등등에 의한 육체적 고통과 죽음이라고 할 때에 그것을 상태적인 차원에서 말한다고 할지라도 역시 한시적인 것이지 영원한 것은 아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당시를 비롯한 기독교인들이<주를 위하여 받는 고통과 핍박>에 대하여 참으로 많고 영원하고 아름다운 최상의 상급과 면류관들을 선물로 하사 하신다. 성경은 도처에서<주를 위하여 받는 고통과 핍박>을 받은 자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상급들과 면류관들을 선포한다. 따라서 그들은 잠시의 고난과 고통에 대하여 계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보상 받았음으로 오히려 하나님께 무한하고 영원한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상급과 면류관의 선물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최소한 네 가지 기본적인 이유에서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의 찬양과 경배를 영원히 드려야한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하고 완전한 최상의 하나님나라 국민으로 세워 주셨으며
둘째는 창조주하나님, 통치주하나님, 섭리주하나님, 심판주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게 하셨으며
셋째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하나님의 종으로 불러 세워주셨으며
넷째는 이 모든 것들을 이루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내려오시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그와 같은 고난을 겪으시었는데 우리의 고통과 고난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다고 단 한마디 말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말로나 글로서는 표현조차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다만 무한히 그리고 영원히 감사하고 찬송해야 할 것이다.
4)박해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로마제국의 박해에 동원된 황제를 비롯한 모든 자들은 당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받았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거니와 기독교역사가 중의 한 사람이었던 락탄티우스는 기독교를 박해한 황제들의 비참한 말로를 기록으로 남기면서 갈레리우스황제의 회개가<너무 늦었다>고 지적했다. 기독교를 박해한 황제들을 비롯한 모든 자들의 비참한 말로는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또 하나의 역사적 의미를 선포한다. 즉, 누구든지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자들은 그에 대한 댓가를 내생<來生>에서도 당연히 받게 될 것이지만 그전에 이미 금생<今生>에서도 필연적으로 받는다는 것이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네로,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 셉티미우스세베루스, 갈레리우스 등등의 최후이다. 네로는 신하의 칼에 엎어져 자살했고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는 아들에 의하여 암살되었으며 셉티미우스세베루스는 황후와 함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였고 갈레리우스 역시 중병에 걸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 외의 황제들도 모두 한결같이 비참한 말로<末路>를 당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그와같은 불변의 진리를 보고 들어 알고 있는 자들<심지어는 기독교 지도자들>중에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고 탄압하는 자들이 부지기수로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을 결코 핍박하고 탄압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며 따라서 그와같은 자신의 행위가 악한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저들은 오히려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의 종에게 감히 순종하지 않는 악한 자들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핍박과 탄압의 양상은 달라도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고 슬프게 하는 자들은 곧 하나님의 섭리를 거부하고 반대한 악한자들, 핍박자들, 탄압자들, 박해자들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은 회개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 할 것이며 내세의 심판뿐만 아니라 현세에서의 심판도 당연히 받게 될 것이다.
5)사단의 심정.
로마제국에 의한 기독교 박해의 역사를 마무리 지으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불쌍하고 가엾은 사단의 처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지나간 역사적 이야기들이지만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가 완전히 종료된 순간 사단은 얼마나 처참한 심정이었을까? 초기 기독교에 무자비한 박해들이 진행되었던 배후에는 사단의 극성스러운 활약이 있었음을 우리는 안다. 사단은 아마도 박해의 극심한 상황을 일일이 점검하면서<이제 거의 끝나간다><조금만 더>를 연발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이번만은 절대로>라는 각오를 새롭게 하면서 고군분투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나고 기독교승리의 팡파레가 온 천하에 울려 퍼질 때에 사단, 그는 어떠한 모습,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목숨 걸고 고군분투한 3백여 년의 사투에 온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을 것이고 박해에 총 동원된 졸개들은<이번에도 또?>라는 한심한 눈으로 사단을 바라다보았을 것이 아니겠는가? 얼마나 참담한 심정이었을까? 연전연패, 단 한번도 이겨보지 못한 하나님과의 승부, 사단은 어쩌면 졸개들 앞에 부끄럽고 창피하여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좌절감과 무력감에 젖어 차라리 자살이라도 해서 그 처참한 일생을 마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사단은 영적 존재라 하나님께서 조치하여 주시지 아니하면 죽을 수도 없는 존재인 것을.....아! 가엾은 사단이여! 불쌍한 사단이여!
제6부. 순교의 역사.
제1장. 사도들의 순교.
신약 초기의 기독교는 수많은 성도들의 순교를 발판으로 하여 성장하고 발전했다. 기독교의 순교역사는 사도들의 순교로부터 출발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직접 제자였던 12사도와 바울사도가 기독교를 전파하다가 처참하게 순교 당했다. 그러나 성경은 사도들의 순교에 대하여 전혀 침묵한다. 사도들에 대한 순교는 다만 역사적 전설로 후대에 전해졌다. 우리는 사도들의 순교에 대한 성경의 침묵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다시 한번 보게 된다. 기독교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역사이지 어느 개인에 대한 역사가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수많은 그리고 훌륭한 하나님의 종들이 부름 받아 사역하였고 그들에 의하여 위대한 역사들이 진행되었으나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역사였을 뿐 그들의 역사는 아니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의 종들로서 하나님의 역사에 귀중하게 쓰임 받은 것으로 맡은바 소임을 다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그들의 노고를 결코 잊지 아니하시며 그들을 위한 과분한 상급과 면류관을 예비하셨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는 것이지 이 땅에서 받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이 땅에서 그들에 대한 영광이 반포되어지면 어리석은 자들에 의하여 그들이 추앙되거나 경배되어 그들이 이루어 놓은 영광스러운 역사들이 오히려 빛바래지고 하나님께 죄송스러운 것이 된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와같은 조치를 내리시어 하나님의 귀중한 종들이 이루어 놓은 영광스러운 역사들과 그들의 개인적인 영광들을 보호하시는 것이다. 오늘날 로마카토릭에서는 실제로 그러한 비진리적인 행위들이 연출되고 있다. 로마카토릭에서는 기독교역사에 부름 받아 사역한 사도들을 비롯한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을<성자>라는 칭호로 섬기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들의 공로를 나누어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괴이한 비진리적 논리를 내세워 하나님의 은혜를 함부로 삭감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사도들의 순교를 정립함에 있어서 성경이 사도들의 순교를 일일이 증언하지 않기 때문에 전승되어 내려오는 일반적인 자료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그 전승들이 대부분 정확하지 않다. 전승들이 정확하지 않은 것은 전해내려 오는 과정상의 문제들도 있지만 그보다는 처음부터의 도적으로 가공되어진 경우들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초기부터 특정 도시의 교회들이 자신들의 교회에 대한 사도적 기원의 전통과 역사성을 내세우기 위하여 사도들의 이름을 교회에 적용하였고 따라서 가공되어진 사도들의 순교적 설화들을 전승시켰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로마카토릭에 의한 베드로 초대 교황설이다. 로마카토릭은 베드로를 초대 교황에 좌정시키기 위하여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창립했다고 거짓 주장하였으며 진실이 역사적으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그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가공되어진 전승들은 특히 2세기 말에 더욱 심하게 나타났다. 그때에 대부분의 큰 도시교회들은 한결같이 사도적 전통들을 만들어 세웠다. 알렉산드리아교회는 로마와 안디옥에 대항하기 위하여 사도 마가를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설립자로 내세웠고 콘스탄티노플이제국의 수도가 되자 콘스탄티노플교회는 빌립을 교회의 설립자로 내세웠다. 히스파니아<스페인>교회들은 바울과 베드로와 야고보가 보낸 일곱 명의 사자들에 의해서 스페인교회들이 세워졌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베드로가 5명의 사자들을 보내어 스페인을 복음화 했다는 전승은 기원 5세기 경에 등장했다. 반면에 기원 8세기 경에 등장한 야고보사도에 의한 스페인 교회설립 설화는 더욱 구체적이다. 저들은 야고보가 갈리키아와 사라고사에서 복음을 전했으나 큰 성과를 얻지 못하고 실망하여 돌아가던 중에 성모마리아가 기둥 위에 선 모습으로 나타나 그를 격려하면서 스페인에 교회를 설립하라고 하여 야고보가 힘을 얻고 스페인에 교회를 세웠다고 주장하였다. 이 전승은<기둥 위의 성모-Virgon del pilar>라는 제목으로 지금까지도 스페인에 남아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헤롯에 의해 목이 잘려 순교했는데 스페인 제자들이 야고보의 시체를 스페인의 콤포스텔라에 장례 지냈다고 한다. 야고보는 지금도 스페인의 성자로 받들어 진다. 그러나 이러한 전설은 전혀 신빙성이 없다. 대체적으로 로마카토릭교회들이 사도들이나 성모마리아를 높이 받들어 비진리적 신화들을 만들어 내었기 때문이다. 한편 어떤 전승에 의하면 요한이 끓는 기름 가마 속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시기에 요한은 밧모섬에서 요한계시록을 집필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또 어떤 전승은 요한이 에베소에서 사역하다가 A.D.100년경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들이 모두 거짓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같은 이름의 복음 전도자들에 대한 순교 이야기들이 서로 혼동되어 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사도들의 순교에 대한 전승들의 불확실성 때문에 사도들의 순교를 역사적으로 정립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다음에 정리하는 사도들의 순교에 관한 이야기들은 어디까지나 전승에 불과할 뿐 정확성이나 신빙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사도들의 순교에 대한 전승들은 다음과 같다.
1.베드로.<Πετπος-Petros>
베드로는 예루살렘교회를 인도하다가 로마에 복음을 전하던 중 네로의 박해 때년경>에 순교했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십자가에 처형되기 전 자신 같은 존재가 감히 예수그리스도와 같은 죽음을 할 수 없다고 하여 자진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되었다고 한다. 베드로의 순교에 대해서는 많은 역사가들이 증언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에우세비우스의 증언-
*클레멘스의 증언-<클레멘스5장>
*이그나티우스의 증언-<이그나티우스의 로마서4:3>
2.안드레<Ανδρεας-Andreas>
전승에 의하면 안드레는 아가야에서 X자형의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 했다고 하며 그 후 X자형의 십자가를<안드레의 십자가>로 부르게 되었다고한다. 한편 안드레의 유물 두 개를 운반해 가던 배가 키프러스섬 북동쪽의 항만에서 난파하여 그곳이 나중에<안드레만>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전승도 있다.
에우세비우스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흑해의 북안<北岸>인 스구디아에도 전도했다고 한다.
3.야고보<세베대의아들>ακωβος-Iakobos>
대<大> 야고보로 불리 우는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는 헤롯아그립바1세유대왕-A.D.37-44,재위>에 의하여 순교했다. 헤롯대왕의 손자였던 아그립바1세는 갈릴리를 통치하면서 기독교를 증오하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당시 갈릴리 지역에 복음을 전하던 야고보를 살해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야고보를 재판정으로 연행해 간 사람이 야고보의 담대한 신앙고백과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자신도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는 야고보와 함께 형장으로 가는 도중 야고보에게 용서를 구했고 야고보는 그에게 평안이 있을 것을 약속했다. 그들은 함께 목 베임을 당해 순교했다.
4.요한.<Ιωαννης-Ioannes>
전승에 의하면 소아시아의 에베소에서 활동하다가 도미티아누스재위>때에 밧모섬에 유배되었다고 한다.
5.빌립.<Φιλιππος-Philippos>
빌립은 예수그리스도와 동행하였으나 예수그리스도의 승천 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에우세비우스는 빌립이 골로새지역 근교의 히에라폴리스에서 잠들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전도자 빌립과 혼동한 것으로 여겨진다.
6.바돌로매.αρθολομαιος-Bartholomaios>
전승에 의하면 바돌로매는 인도에서 전도하다가 아르메니아의 알바폴리스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7.도마.<Θωμας-Thomas>
에우세비우스의 전승에 의하면 도마는 파르티아<현재의 이란 북부>에서 전도했다. 그밖에 도마가 인도에서 복음 전하다가 순교했다는 설도 있고 유브라데강의 에뎃사에서 장사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러한 전승들은 모두 근거 있는 것들인데 도마가 에뎃사와 인도에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도마는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고 후에 그의 제자들이 시신을 에뎃사에 안치했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8.마태.<Μαθθαιος-Maththaios>
마태복음을 기록하고 유대인 사회에 복음을 전했다는 것 외에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9.야고보<알패오의 아들>ακωβος-Iakobos>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하기 위하여 소<小> 야고보라고 불리우는 그의 일생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10.다대오<Θαδδαιος-Thaddaios>
전승에 의하면 유브라데강 건너의 에뎃사에서 시리아의 에뎃사 왕인 아브가르5세재위>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파송되어 전도했다는 것 외에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11.시몬.<Σιμων-Simon>
시몬의 순교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12.맛디아.<Μαθθιας-Maththias>
예수그리스도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부터 따랐으며 가롯유다 대신에 12사도 반열에 올랐다. 맛디아의 행적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기록이 없는데 교부이레니우스년경의 아시아 신학의 대성자>와 에우세비우스는 그가 순교했다고 전한다.
13.바울.<Παυλος-Paulus>
바울은 네로의 박해 때 순교했다. 바울의 순교는년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에우세비우스는년>으로 증언하고 히에로니무스는 년으로 증언한다. 유세비우스는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의 네로황제에 의해서 순교했음을 증언하면서 그들의 이름이 로마시의 공동묘지에 남아 있다고 기록하였다. 유세비우스는 또한 제피리누스가 로마의 감독으로 있을 무렵에 출생한 가이우스라는 이름의 기독교 작가가 브리기아 분파의 지도자였던 프로클루스와 벌인 논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나는 그 사도들의 기념비를 보여줄 수 있다. 만일 당신이 바티칸이나 오스티안거리에 간다면 교회의 기초를 놓은 이 사람들의 기념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고린도의 감독 디오니시우스는 로마인들에게 행한 설교 속에서 이들 두 사람이 거의 같은 시기에 순교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증명하였다. “당신은 이처럼 권면에 의해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와 고린도에서 심어 놓은 번영의 씨앗을 섞어 놓았습니다. 이들 두 사도들은 고린도에서 우리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교훈을 주었으며 이탈리아에서도 거의 같은 방법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순교했습니다.”
<유세비우스교회사. 엄성옥 역. 제2권 제25장. P.128>
제2장. 하나님의 종들의 순교역사.
사도들의 순교 못지않게 하나님의 기독교 역사를 위하여 순교한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온다. 우리는 기독교 역사를 이해하기 위하여 당시에 있었던 하나님의 종들의 순교상황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지면 관계상 기독교 역사에 순교한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의 순교를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다. 따라서 로마의 박해 와중에서 순교한 하나님의 종들 가운데 몇 분의 순교만을 소개한다.
1.바나바αρνβας-Barnabas>
예루살렘교회의 성도였고 70문도 중의 한 사람이었던 바나바는 탁월한 설교와 신앙으로 인하여 예루살렘교회 사도들의 인정을 받아 안디옥교회에 목회자로 파송되었으며 바울을 천거하여 함께 동역하고 선교했다. 성경은 바나바의 순교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으나 전승에 의하면 그는 살라미스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2.전도자 빌립<Φιλιππος-Philippos>
전도자 빌립은 예루살렘교회의 7집사 중 하나였다. 그는 사마리아에 전도자로 파송되었으며 성령의 인도를 받아 구스왕 간다게의 내시에게도 복음을 전했고 그의 딸들 4명도 선지자 직무를 행했다. 그는 골로새지역 근교의 히에라폴리스 지역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3.디모데<Τιμοθεος-Timotheos>
바울이 극진하게 사랑하였던 제자로서 바울과 동역했다. 성경 이외의 초기 기독교 문헌에는 디모데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후기 문헌에 의하면 그가 에베소교회의 초기 감독이었으며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재위>치하의 박해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4.예수그리스도의 형제 야고보.
그는 12제자 중에 들지 않았으나 제자들과 늘 동행했다. <갈2:9>은 그를 기둥같이 여기는 사람이라고 증거 한다. 헤롯아그립바 1세가 유대를 통치하게 되었을 때에 갈릴리에서 대야고보를 죽이어 유대인들에게 호감을 산 것을 생각하고 다시 유대인들의 호감을 사기 위하여 베드로를 죽이려했으나 베드로가 기적적으로 탈출하여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자 그가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유세비우스는 야고보의 순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바울이 황제에게 상소하였기 때문에 베스도는 그를 로마로 압송했다. 따라서 자신이 놓은 덫으로 그를 잡으려는 희망이 좌절 된 유대인들은 당시 사도들에 의해 예루살렘의 감독에 임명되었던 주의 형제 야고보를 공격했다. 그들은 야고보를 공공장소로 데리고 가면서 그에게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부인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 기대와는 달리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군중들 앞에서 자신의 소신을 말했고 또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라고 고백했다. 덕이 많고 경건하여 사람들 중에서 가장 의롭다고 여겨지는 이 사람의 증언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던 그들은 당시 무정부 상태로 인해 야기된 파격적인 기회를 이용하여 그를 살해했다. 왜냐하면 이 무렵 유대의 총독 베스도가 사망하여 이 지방에는 총독이나 수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전의 익면<翼面>에서 밀려 떨어져 곤봉에 맞아 죽었다.*
사도시대 직후에 활동한 헤게시푸스는 자신의 주석서 제5권에 야고보에 관해 가장 정확한 기사를 다음과 같이 제공했다.
*당시 같은 이름의 인물이 여럿 있었음으로 의인 야고보라고 불리웠던 주의 형제 야고보는 주님의 시대로부터 사도들과 함께 교회의 통치를 맡고 있었다. 이 사도는 어머니의 복중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께 바쳐졌다. 그는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았으며 생명이 있는 음식을 삼갔다. 또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았고 기름을 바르지 않았으며 목욕도 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오직 야고보만이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그는 결코 털옷을 입지 않고 베옷을 입었다. 그는 홀로 성전에 들어가는 습관이 있었는데 종종 무릎을 꿇고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처럼 쉬지 않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기 때문에 그의 무릎은 마치 낙타의 발처럼 딱딱해졌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그에 대해 선포한 것과 같이 그는 지극히 경건했기 때문에 의인 또는 오블리아스 또는이라고 불리웠다. 오블리아스란 공의와 백성들의 보호를 의미한다. 나의 주석서에 언급된 일곱 분파의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이 그에게 예수에게로 이르는 문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 분이 구세주라는 사실이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을 듣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된 이단들은 부활 그리고 장차 그가 모든 사람의 공로에 따라 상급을 주러 오실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야고보 때문에 그렇게 믿었다. 통치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자 유대인들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소요를 일으켰으며 백성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기대하게 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함께 야고보에게 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성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기대하여 그를 좇음으로 빗나가고 있습니다. 부디 그들을 제지하여주십시오. 우리는 유월절을 지키러 오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에 관해 올바르게 권면하여 주시기를 당신에게 간청합니다. 우리는 모두 당신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모든 백성들은 당신이 의로운 사람이며 사람을 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확신 합니다. 그러나 높은 곳, 당신의 모습이 뚜렷이 보이고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음성을 쉽사리 들을 수 있도록 성전의 익면에 서십시오. 모든 지파의 백성들과 이방인들이 유월절을 지키려고 모여 올 것입니다.>
이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야고보를 성전 익면에 세우고 그에게 소리쳤다.
<오 그대 의인이여 우리는 모두 당신을 믿습니다. 백성들은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를 좇아 잘못된 길로 가면서 우리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문<門>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야고보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왜 당신들은 나에게 인자이신 예수에 관해 묻습니까? 그는 지금 하늘나라에서 전능자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장차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야고보의 증언에서 확신을 얻고 영광을 돌리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외쳤다.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서로에게 말했다.
<우리는 예수에 대해 그러한 증언을 제공하게 만드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러니 저리로 올라가서 그를 내려 던집시다. 그러면 사람들은 무서워서 그를 믿지 못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외쳤다.
<오! 오저스투스(Justus)는 미혹되었도다. 이사야서에 기록되어진바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화가 있으리니 화가 있을 것은 그 손으로 행 한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는 말씀이 성취되었다.>
그들은 성전으로 올라가서 이 의인을 밀어 떨어뜨리고 의인 야고보를 돌로 치자고 말했다. 그들은 야고보가 땅에 떨어졌으나 죽지 않았으므로 그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야고보는 몸을 돌려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오 주 하나님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은 자기의 하는 행위를 알지 못하고 있나이다.>
이렇게 야고보에게 돌을 던지고 있을 때에 예레미야가 말한 레갑의 자손인 제사장이 소리치며 말했다.
<그만 두시오 당신들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습니까? 의인은 지금 당신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때 어느 피혁업자가 북을 두드리는 곤봉으로 야고보의 머리를 쳤다. 이리하여 야고보는 순교했으며 사람들은 그를 성전 옆에 매장했다. 이곳에는 아직도 그의 비석이 남아있다. 야고보는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충실히 증거 한 증인이 되었다. 이일이 있은 직 후 베스파시안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장악하였다.*
이와같은 헤게시푸스의 증언은 클레멘트의 증언과 완전히 일치한다. 야고보는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었고 그의 공의로움은 모든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따라서 지혜로운 유대인들은 베스파시안의 예루살렘 공격이 야고보 순교직후에 일어났음을 근거로 하여 그 사건이 하나님의 징계라고 주장한다. 요세푸스는 그의 저서에 야고보의 순교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이 일들은 야고보를 죽인 죄에 대한 보복으로서 유대인들에게 발생했다. 야고보는 그리스도라 불리 우는 사람의 형제로서 지극히 의로운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를 살해했다.*
요세푸스는<고대문물기>제20권에서 야고보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베스도가 사망했음을 안 황제는 알비누스를 유대의 총독으로 보내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했던바 제사장직을 얻은 아나누스2세는 성질이 과격하고 무모했다. 그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바와 같이 재판을 시행하는데 있어서 유대인들 중에 가장 무자비한 분파인 사두개인이었다. 이런 성품을 지니고 있었던 아나누스는 때 마침 베스도가 사망하고 알비누스는 아직 부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판사들의 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라고 불리 우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비롯한 몇 사람들을 그곳으로 데려와 그들이 율법을 범했다고 고발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데 있어서 지극히 온건하고 정확했던 그 도시의 사람들은 이일로 인해 크게 분노했으며 은밀히 아그립바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아나누스의 행동은 합법적인 것이 못되니 이런 일을 행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부임하러 오는 도중에 있는 알비누스총독 을 찾아가 아나누스가 그에게 알리지 않고 산헤드린을 소집한 것은 불법이라 고 알려주었다. 이 설명을 들은 알비누스는 격노하여 아나누스에게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는 경고의 편지를 보냈다. 한편 아그립바왕도 같은 이유로 아나누스의 제사장직을 박탈했다. 결국 아나누스는 3개월 동안 제사장으로 있었으며 담매우스가 그의 후임이 되었다.
<유세비우스교회사. 엄성옥 역. 제2권 제23장. P.121-126>
5.시몬
예루살렘교회의 제2대 감독이었던 시몬은 120세까지 장수한 사람이다. 그는 트라야누스황제 치하에서 애티쿠스가 유대총독으로 있을 때 순교했다. 역사가 헤게시푸스는 시몬의 순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또 한 순교자이며 주님의 친척들로서 모든 교회를 이끌어 나간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온 교회에 평화가 깃들었을 때부터 트라야누스황제 시대에 이르기까지 살았다. 트라야누스 황제 때에 클레오파스의 아들로서 주님의 친척인 시몬이 이단자들의 공격을 받아 자기와 거의 비슷한 지위에 있는 애티쿠스의 재판을 받았다. 그는 여러 날 동안 고문을 받은 후에 마침내 순교했다. 그의 불굴의 신앙은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재판장 자신도 120세나 된 노인이 그러한 고문을 견디어 내는데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결국 그는 십자가에 처형하라는 선고를 받았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엄성옥역. 제2권제32장. p175>
6.이그나티우스
트라야누스황제 때에 수리아 안디옥지방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는 시리아에서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된 후 로마제국 법정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원형경기장에서 사나운 맹수의 밥이 되어 순교했다.<전승에 의하면 이그나티우스는A.D.30-35년 경에 태어났는데(마18:2)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안으신 아이가 바로 이그나티우스라고 전해진다.> 이그나티우스의 죄명은 기독교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를 전했다는 것이었다. 이그나티우스가 체포된 것은 세가지로 전해진다. 첫째는 이교도들이 안디옥의 기독교가 이그나티우스의 인도 하에서 발전하는 것을 시샘하여 고발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당시에 안디옥교회에 몆 개의 이단적 분파들이 있었는데 이그나티우스감독이 그들의 비진리적 교리들을 용납하지 않고 맹렬하게 비난했기 때문에 그들이 분노하여 고발했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로마정부가 군사적 승리를 기념하는 축제에 안디옥교회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를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의 밥이 되게 하여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한편 기독교에게 경종을 울리게 하기 위하여 체포했다는 것이다. 그 중에 어느 것이 과연 진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세 가지가 모두 일리 있는 주장들이다. 왜냐하면 이그나티우스는 누구에 의해서 고발되었는지가 불문에 붙여진 채 로마로 압송되어 로마제국 법정에서 형식적인 재판을 간단하게 거친 후에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의 밥으로 던져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름답고 훌륭한 종의 순교를 무의미하게 용납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그나티우스의 순교를 통하여 당시는 물론이요 후세의 기독교 역사에 매우 아름다운 금자탑을 세우셨다. 이그나티우스는 로마로 압송되는 와중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맹렬하게 전했고 또한 7개의 훌륭한 서신들을 발송하는 놀라운 저력을 보였다. 이그나티우스가 로마로 압송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인근 각지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가 지나면서 머무르게 될 처소들에서 그를 기다렸다. 이그나티우스를 반드시 로마 법정에 세워야하고 또한 반드시 원형경기장에 세워야하는 중책을 맡은 로마 군부는 혹시 중도에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 것에 대비하여 호송 군사들로 하여금 그를 철저하게 감시하였고 심지어는 사나운 표범까지 동원하여 엄중하게 그를 호송했다. 당시의 상황을 이그나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시리아로부터 로마로 가는 도중 나는 열 마리의 표범들과 군인들에게 묶여 있었으면서 육로나 해로에서 밤낮으로 사나운 짐승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나는 군인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데도 그들은 대단히 난폭하게 행동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불법행위의 와중에서도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 때문에 의롭다함을 얻지는 않습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저 짐승들로 인해 유익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 나는 나를 해칠 짐승들이 빨리 발견되기를 기원합니다. 나는 그 짐승들이 나를 해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신속하게 먹어치우도록 유혹하고 대들 것 입니다. 만일 그런데도 그 짐승들이 나를 해치려 하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나를 해치게 만들 것입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나는 순교가 얼마나 큰 유익을 주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제야 나는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첫걸음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얻을 수만 있다면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그 어느 것도 나의 야망을 자극하지 못합니다. 내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얻게만 된다면 화형이나 십자가나 사나운 짐승의 공격이나 또는 내 뼈를 찢고 사지를 부러뜨리며 온 몸에 멍이 들도록 매를 맞는 등 그 어떤 마귀의 괴롭힘도 참고 견디겠습니다.*
<유세비우스의교회사 엄성옥역. 제2권제36장. p179-180>
그러나 몰려드는 기독교인들의 애절한 간청과 그들의 아름다운 신앙적 모습에 감명 받은 호송책임자는 엄중한 호위를 늦추지 않는 대신에 이그나티우스가 그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때문에 이그나티우스는 그들과 만나서 신앙적 대화를 할수 있었고 심지어는 자신의 편지를 대신하여 쓸 수 있는 비서를 대동할 수 있었다. 이때에 이그나티우스를 찾아 온 사람들은 마그네시아의 감독과 두분의 장로와 집사이었고 트랄레스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비우스와 에베소교회의 오네시무스오네시모-빌레몬서에 나오는 오네시모일 가능성이 있다.> 감독이 인도하는 일단의 사절단 등등이었다. 이그나티우스는 그들과 격려와 감사의 신앙적 대화를 나누었고 서머나에서 그들의 교회들에게 서신을 써서 보냈으며 트로아에서 서머나교회와 필라델피아교회와 그곳의 감독인 폴리갑에게 보내는 세 통의 편지를 썼다. 이때에 이그나티우스가 쓴 7통의 서신은 당시 기독교의 역사적 상황을 변증하는 중요한 문서로 평가받는데 그중에서도 서머나에서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가 가장 중요하다. 이그나티우스는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자신을 구출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만류했다. 그는 이미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었고 반면에 자신의 구출문제로 인하여 로마의 기독교인들을 비롯한 전체 기독교가 박해받게 될 것을 염려했다. 이그나티우스는 자신의 순교가 자신을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드는 것으로 생각했고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죽음 앞에서 나약해 질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로마교인들에게 자신을 구출하여 욕되게 할 것이 아니라 시련과 고통을 이기고 승리하여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게 기도해달라고 간청했다. 이그나티우스가 순교를 결심한 것은 개인적인 신앙 때문이었지만 당시의 박해 속에 사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위로와 소망과 인내를 주고자 하는 지도자적 책임과 사명감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이 담대하게 순교를 받음으로서 모든 기독교인들의 배교를 차단하고 아울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강하고 담대한 신앙적 삶을 살게 해주어야 한다는 지도자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자신을 구출하려는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신을 보내었다.
*나는 그대들의 친절이 나를 오히려 해치리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당신들은 그 계획을 성공시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디 나의 부탁을 들어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얻게 하라.....그리하여 내가 단지 기독교신자라고 불리울 뿐만 아니라 기독교신자로서 행동할 수 있게 해 달라.....나는 더 이상 육신의 양식을 탐하지도 않는다....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몸이신 하나님의 떡을 맛보기를 원한다.....또한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할 그의 보혈을 마시기를 원한다.....나는 고난을 당할 때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할 것이며 언젠가 자유스럽게 그와 함께 다시 부활할 것이다.....나는 그리스도의 순수한 떡으로 바쳐질 수 있도록 짐승들의 이빨에 찢겨야 할 하나님의 밀알이다.....만일 그대들이 나를 위해 침묵을 지킨다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이 나의 육신에 연연한 사랑에 의해 흔들린다면 나는 단지 인간의 목소리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서영일역-p.73-74>
이그나티우스는 로마로 압송된 후트라야누스황제에게 심문을 받았는데 이레니우스의 서신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황제-너는 마귀다.
*이그나티우스-나는 내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셨다.
*황제-폰티우스필라티우스에게 죽은 예수가 그렇게 소중한가?
*이그나티우스-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그리스도가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분이시다.
이그나티우스는 콜로세움 경기장에서 짐승에게 던져졌는데 이때에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저를 영화롭게도 순교의 반열에 세워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이 맹수의 이빨 사이에 끼인 하나님의 곡식가루로 빻아져서 거룩한 빵이 되기를 원하옵나이다.>
7.폴리갑
폴리갑은 소아시아의 상업도시였던 서머나교회의 감독으로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사랑받는 하나님의 종이었다. 그는 비교적 박해가 심하지 않았던 안토니우스피우스재위>치하의년경>에 서머나에서 화형 당했다. 폴리갑의 순교는 일반성도들의 순교와 연장되어진 것이었다. 당시에 일단의 기독교 신자들이 로마의 신들을 예배하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는데 그들은 모두 끝까지 로마의 신에게 경배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들은<이 세상에서의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 피난처를 구 한다>고 하면서 즐거운 신앙으로 관헌들의 고문을 이겨냈다. 그들 중에 젊은 청년 성도였던 게르마니쿠스의 순교이야기가 폴리갑의 순교와 연결 되어진다. 게르마니쿠스가 처형장에 섰을 때 재판관이 그의 젊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고문당하고 죽지 말고 마음을 바꾸라고 권면 하였다. 이때에 그는 대답하기를<로마제국의 잔악한 통치 하에서 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평안하게 사는 것이 더욱 아름답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짐승들을 향하여 외쳤다.<어서 오너라 어서 와서 나를 먹으라>그의 용기 있는 모습을 본 구경꾼들은 분노하였고 재판관을 향하여 외쳤다.<무신론자들을 죽여라><폴리갑을 체포하라> 기독교를 증오하는 자들은 일제히 폴리갑의 처형을 요구하고 나섰다. 저들이 폴리갑 처형을 요구한 것은 기독교인들이 폴리갑의 영향을 받아 담대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게르마니쿠스를 비롯한 순교자들의 소식을 전해들은 폴리갑은 자신도 순교할 것을 각오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인하여 시 외곽의 농장으로 피신했다. 그는 몇 명의 신자들과 함께 그 곳에서 기도하며 숨어 지냈는데 체포되기 사흘 전날 밤 엎드려 기도하던 중에 잠들었다가 자기가 베고 자는 베개에 불이 붙어 타버리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자신이 불에 타서 순교할 것임을 말하고 처형장으로 가려했으나 성도들의 만류로 피신처를 옮겼다. 그러나 자신을 체포하려는 병사들이 자신이 있는 곳을 찾아내자 더 이상 피하지 않고 그들을 맞이하였다. 병사들은 자신들 앞에 나타난 폴리갑을 보고 크게 놀랐다. 폴리갑은 매우 늙은 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굳건하고 장엄한 인품이 그대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은 이토록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을 체포해야 한다는 것에 심히 가슴 아팠으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폴리갑은 그들에게 음식과 음료수를 대접하면서 한 시간 동안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요청하였다. 이미 폴리갑의 인품에 크게 매료되었던 병사들은 정중하게 승낙하였다. 폴리갑은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총독은 그의 나이 많음을 생각하여 마음을 바꾸고 고통과 죽음을 면하라고 권면하였다. 이때에 폴리갑이 거절하자 총독이 그에게<무신론자들은 물러가라>고 소리 지르도록 하였다. 그때에 폴리갑은 군중들을 향하여<무신론자들은 물러가라>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같은 말이었지만 내용은 달랐다. 총독이 명령한<무신론자>자는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에서의<무신론자>였고 폴리갑이 외친<무신론자>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에서의<무신론자>였다. 군중들은 폴리갑의 외침에 대한 의미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어리둥절하거나 웃거나 분노하였다. 폴리갑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총독이 은밀하게 폴리갑을 설득하였다. 황제를 섬기겠다고 맹세하고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살려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때에 총독이 요구한 것은 진정한 맹세나 배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거짓말로 맹세하고 거짓말로 배교한 후 석방되어 돌아가서 계속하여 기독교인으로 살라는 것이었다. 이때에 폴리갑이 총독에게 대답한 말은 기독교 순교역사에 길이 남을 거룩하고 아름다운 신앙고백이었다. 그는 이때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내가 86년 동안 그를 섬겼으나 그는 내게 은혜만 베푸셨을 뿐 한번도 나를 저버리신 일이 없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저주할 수 있겠는가?>
이에 총독이 진노하여 산 채로 태워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폴리갑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당신은 잠시 붙었다가 곧 꺼져버리는 불로 나를 위협하고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장차 임할 심판과 악인을 위해 예비 된 영원한 형벌의 불을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시행하라>
당시에 군중들, 특히 유대교인들은 재판관에게 폴리갑을 사자 밥이 되게 하라고 외쳤다. 그러나 원형경기장에서의 행사가 이미 종료되었으므로 총독은 허락하지 않았다. 군중들은 폴리갑을 화형에 처하라고 요구하였고 결국 그는 자신이 꿈에서 보았던 대로 화형 당했다. 군중들은 폴리갑을 화형 시키기 위해 기둥에 그를 묶은 후 큰 못으로 고정시키려 하였다. 그러자 폴리갑이 말했다.
<나를 이대로 두시오 나에게 화형을 견뎌낼 힘을 주실 분께서는 당신들이 못을 박지 않아도 장작더미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견딜 능력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하늘을 우러러 크게 기도하였다.
<사랑하는 복된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당신에 관한 지식을 주신 아버지시여 당신 앞에 살고 있는 모든 천사들과 천군들과 피조물, 그리고 모든 의인들의 하나님이시여 당신께서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잔에 참예할 수 있게 해주시고 내 몸과 영혼이 성령의 썩지 않는 축복 속에서 영생의 부활을 얻기에 합당하다고 여기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늘 나는 신실하고 참되신 하나님이신 당신께서 예비하시고 계시하시고 이루신 풍성하고 가납 될만한 제물로서 당신이 보시는 앞에서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 모든 일을 인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 영원한 대제사장을 통하여 당신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며 영광을 돌리나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이제부터 영원히 영광이 있을 것 입니다. 아멘>
폴리갑이 기도를 마치자 집행관들이 불을 붙였다. 이때에 사람들은 참으로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불길이 크게 솟아올랐을 때 불꽃은 마치 바람을 맞은 돗처럼 둥근 형태를 이루어 폴리갑의 육체를 담처럼 에워쌌다. 불길 가운데 있는 폴리갑은 전혀 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마치 용광로에서 정련되는 금이나 은 같았다. 뿐만 아니라 불길은 사방에 아름다운 향기를 내뿜었다. 폴리갑이 불에 타죽지 않자 유대인들을 비롯한 박해자들이 집행관에게 칼로 찔러 죽이라고 외쳤다. 집행관이 칼로 폴리갑을 찌르자 피가 솟구치며 불이 꺼져 버렸다. 폴리갑이 순교한 후 기독교인들은 폴리갑을 장사하기 위하여 시신을 요구했으나 유대인들이 벌 떼 같이 들고일어나 반대했다. 이미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한 유대인들은 폴리갑이 순교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가 다시 살아날 것을 두려워했다. 때문에 그들은 혜롯의 아버지이며 달세의 형인 니세타스를 총독에게 은밀히 보내어 만약에 폴리갑의 시신을 내어주면 그의 추종자들이 폴리갑이 다시 살아났다고 주장하면서 그를 경배하게 될 것이라고 충동질했다. 유대인들의 결사적인 반대로 인하여 폴리갑은 다시 화형에 처해졌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엄성옥역-제14장,사도적교부,폴리갑-217P>
폴리갑의 순교에 대한 기록은 서머나교회가 필로델리움교회로 보내진 서신을 통하여 전승되었는데 그것은 스데반의 순교 이후 그리스도인의 순교에 대한 최초의 자세한 공식 기록 문서였다. 다음은 서머나교회가 필로델리움교회를 비롯한 여러 교회에 보낸 서신내용이다.
*서머나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필로델리움 및 각처에 있는 거룩한 보편교회의 지체들에게 하나님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자비와 평화와 사랑이 더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당신들에게 순교자들과 복된 폴리갑에 관한 일들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폴리갑은 마치 자신의 순교로서 그것을 인봉하려는 듯 박해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둘러서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채찍으로 맞아 찢어진 그들의 온 몸에서 유혈이 낭자하게 흐르며 속살이 드러나고 창자까지 보이게 된 모습을 보고서 지극히 놀랐습니다. 그 후 그들은 바다조개껍질이나 땅위에 놓인 창의 끝에 눕혀졌으며 온갖 종류의 고문을 받은 뒤에 사나운 짐승들의 밥으로 던져졌습니다. 대단히 고귀한 청년 게르마니쿠스는 특별히 훌륭한 순교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힘을 얻어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에 대한 본성적인 두려움을 극복하였습니다. 지방총독은 그를 설득하려고 노력하였으며 그에게 자신의 젊음을 생각하여 스스로를 긍휼히 여겨야 한다고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를 공격하는 사나운 짐승들을 자극하고 화를 돋구어 마침내 이 불의하고 무법한 세대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 사람의 영광스러운 죽음을 본 군중들은 이 경건한 순교자의 용기, 그리고 모든 기독교인들의 강건한 믿음에 놀라<악인들을 제거하라, 폴리갑을 데려오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외침으로 인해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제3장.성도들의 순교역사.
기독교 순교의 역사는 사도들을 비롯한 하나님의 종들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의 순교역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순교에 대한 피어린 역사를 후세에 전해준다. 숫자적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순교보다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순교가 훨씬 많다. 그리고 그들의 순교는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순교에 비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는 아름답고 숭고한 것이었다. 우리는 당시의 기독교역사를 이해하기 위하여 그들의 순교상황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지면관계상 그들의 순교에 대하여 일일이 다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들의 순교역사 중에 몇 분의 순교에 대한 이야기만을 소개한다.
1.오리겐과, 레오니다스.
오리겐의 아버지인 레오니다스는 알렉산드리아 대학에서 헬라문학을 가르치다가 셉티무스세베루스 치하의 박해 때년>에 순교했다. 레오니다스가 체포될 때에 18세였던 오리겐은 아버지를 따라가 함께 순교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옷을 감추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따라 가지 못하자 감옥에 있는 아버지에게 은밀하게 편지를 보냈다. 오리겐이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가족들 때문에 신앙을 버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후 오리겐 역시 순교했는데 오리겐은 처형장에서 순교한 것은 아니었으나 데키우스 치하의 박해 때년>투옥되어 오랫동안 고초를 당하다가 그 후유증으로 2년 후 두로에서 사망했다. 오리겐의 묘소에는 십자군 원정 때까지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2.퍼페투아와 그의 동료들.
이들은 몬타누스파로서년>경 셉티무스세베루스황제 치하에서 순교했다. 퍼페투아는 당시 귀족출신의 여성이었다. 이때에 10대의 젊은이들을 포함하여 5명의 성도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퍼페투스의 시종들로서 펠리시타스, 레보카투스, 세터니누스, 세쿤두르스 등등이었다. 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였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그들이 체포 당하자 그녀의 부친은 신앙을 포기하고 생명을 구하도록 종용하였다. 이때에 그녀는 대답하기를<만물은 모두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새로이 그 이름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며 나는 이미 기독교신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음으로 바꿀 수없다.>고 했다. 이때에 퍼페투아는 젖먹이 어린아이의 어머니였고 또한 임신 중에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젖먹이 어린아이의 엄마와 임신 중이라는 이유 때문에 혹시 순교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당시 로마제국의 정책은 기독교인들을 처형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탈퇴하게 하는 것이었다. 관리들은 그들을 회유하여 기독교로부터 탈퇴하게 하기 위하여 계속하여 고문하고 달래었다. 때문에 그들에 대한 심문과정이 길어지게 되었고 그녀는 체포된 후 8개월 동안 감옥에서 생활하는 도중에 여자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는 곧 다른 기독교 여신도에게 입양되었다. 그녀가 아이를 낳을 때에 해산의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자 간수들이<그 정도로도 고통스러워하면서 어떻게 원형경기장에서 짐승들의 공격을 당해 낼 수 있겠느냐?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말고 기독교를 포기하고 살아서 나가라>고 종용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현재 나의 고통은 나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야수들에 대항할 때는 또 다른 이가 내 가운데 역사하실 것이다. 내가 그를 위해 고난을 당하니 그가 내 대신 또한 고통을 받으실 것이 틀림없다.>
그녀의 대답은 당시 순교자들의 공통적인 신앙이었다. 그들이 원형경기장에서 순교할 때에 먼저 레보카투스, 세터니누스, 세쿤두르스 등등의 남자 세 명이 끌려 나갔다. 레보카투스와 세터니누스는 비명도 지르지 않고 용감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데 이때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짐승들이 혼자 남은 세쿤두르스를 전혀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공격을 지시하는 병사들을 공격한 것이다. 이때에 세쿤두르스가 한 표범에게 어서 자신을 공격하라고 말하자 그때에서야 그 표범이 그를 공격하여 죽게 했다. 그 후 이어서 퍼페투아와 펠리시타스가 끌려 나갔다. 이때에 그녀들의 순교는 참으로 장엄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들은 먼저 사나운 들소들에게 공격당했다. 들소들이 그녀들을 사정없이 공격하여 상처투성이가 되었을 때에 그녀들이 잠시 시간을 달라고 간청했다. 관리들은 그들이 마음을 바꾸려는 가 싶어서 들소들을 제지한 후 이유를 묻자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오늘은 내 생애 가운데 가장 기쁜 날이기 때문에 헝클어진 머리로 죽을 수 없으니 머리를 단정하게 다시 묶고 죽을 수 있게 해 달라. 헝클어진 머리로 죽는 모습은 슬프고 애석해 보여서 내 죽음에 합당하지 않다.>
병사들은 그들의 간청을 들어주었고 그들은 머리를 단정하게 손질한 후에 피투성이의 모습으로 경기장 한 가운데에서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시 만나자는 마지막 작별의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칼에 찔려 죽었다. 그들의 아름다운 신앙에 감동한 관리들이 더 이상 그들이 고통 받지 않고 죽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었다. 전승에 의하면 이때에 많은 사람들이 동요<動搖>하였다. 사람들은 그녀들의 장엄하고 경건한 순교를 지켜보면서 크게 감격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진하여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3.아피아누스
아피아누스는 리시아주<州> 파가스의 매우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베리투스에서 헬라문학을 배우는 동안 기독교인이 되었다. 학업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부유하고 쾌락적인 생활보다는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지역 최고의 지위를 누리는 그의 가문에서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신앙적 삶을 살기 위하여 가이사랴로 갔다. 당시에는 막시미누스, 가이사황제의 칙령에 의하여 모든 사람이 황제의 신상 앞에 경배하게 되어 있었다. 어느 날 가이사랴의 성문 앞에서 황제 신상에게 경배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고 관리들이 지명한 자들이 나와서 황제신상에게 분향했다. 우르바누스라는 사람이 분향을 하기 위하여 제단 앞에 나갔는데 이때에 아피아누스가 조용히 그의 곁으로 다가서서 헌주 드리는 우르바누스의 손을 잡아 헌주 드리는 것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엄숙하게 말했다.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과 악마에게 제물을 드리는 것은 잘못하는 일입니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모두가 경악했으며 그는 즉시 체포되어 심한 매질을 당하였다. 그는 감옥에 갇힌 뒤 사지를 잡아당기는 고문을 받았고 만신창이가 되어 다음 날 재판정에 끌려 나갔다. 재판관은 그로 하여금 황제신에게 경배하게 하려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여 고문했지만 그의 신앙은 결코 꺾이지 않았다. 심한 고문으로 인하여 그의 몸과 얼굴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 되었고 그럼에도 그가 굴복하지 않자 재판관은 그의 두발에 기름을 흠뻑 적신 천으로 덮은 후 거기에 불을 붙였다. 불은 그의 살을 태우고 뼈 속으로 파고들어가 체액이 마치 밀납처럼 녹아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굴복하지 않음에 재판관은 오기가 발동하여 기절한 그를 일단 감옥에 가둔 후 사흘 만에 그가 정신을 차리자 다시 고문을 하였다. 그러나 역시 아무런 소용이 없자 분노한 재판관은 그를 바닷물에 던져 버렸다. 이때에 큰 변고가 일어났다. 잔잔하던 바다가 갑자기 요동하기 시작했으며 맑고 푸르던 하늘도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했다. 먹구름과 천둥번개가 어우러져서 뇌성벽력을 치고 장대 같은 비가 쏱아졌으며 바다 역시 산더미 같은 파도를 일으켜 온 세상이 뒤집혀지는 듯 하였다. 그리고 아피아누스의 시신이 튕겨져 오르더니 성문의 제단 앞에 떨어졌다. 막시미누스황제 치하 크산티쿠스월2일, 로마력으로 4월2일 금요일의 일이었다.
제4장. 자원 순교자들과 거짓 순교자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의 순교에 대한 역사적 이야기들은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을 만큼 많고도 다양하며 또한 그 아름다움과 거룩함과 숭고함도 필설로는 다 옮길 수 없는 지경이다. 오직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초인간적인 신앙으로 그 모든 박해들을 이기고 승리하여 순교의 길을 걸어간 우리의 위대한 신앙 선배들의 순교역사 이야기는 너무도 평안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오히려 불평과 불만을 쉬지 않는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하나의 질책으로 전승된다. 그러나 이렇듯 아름답고 숭고한 순교역사의 뒤안길에는 참으로 수치스럽고 어이없는 뒷이야기들이 있어서 우리를 곤혹스럽게 한다. 순교자들의 아름답고 성스러운 순교역사에 흠집을 낸 비정상적인 순교의 유형은 여러 가지였는데 그 중에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오류적 신앙에 의한 자원 순교.
당시의 순교자들 중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잘못된 신앙으로 인하여 자원하여 순교를 택한 자들이 있었다. 저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지나치게 동경하여 하루빨리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이 유익하다고 판단하여 자원 순교의 길을 택했다.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순교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신다고 생각하여 자원적 순교를 감행하였다. 이러한 오해와 오류는 로마의 지독한 박해를 하나님께서 왜 방관하시는가? 하는 문제 때문에 발생했다. 로마의 이교도들은 기독교인들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을 야유하고 조롱했다. 그들의 야유와 조롱은<전지전능의 하나님, 무소불위의 하나님께서 왜 자신의 자녀들이 저토록 처참하게 죽어 가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방관하는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향하여<아마도 너희들의 하나님께서 주무시는가 보다><너희들의 하나님께서 편찮으셔서 누워 계시나 보다.><술에 취하셔서 못 일어나시나 보다.><여자하고 여행가셨나 보다.><돌아가셨나 보다.>라고 조롱하였다. 이때에 기독교인들은 저들의 조롱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도 했지만 자신들이 생각해도 자녀들의 박해를 돌아보시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름대로 해답을 찾아 낸 것이<하나님께서 순교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라는 것과<순교하여 하나님나라에 하루라도 빨리 가는 것이 더욱 유익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을 조롱하는 자들을 향하여 자신들이 왜 그토록 무서운 박해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않고 자원하는가? 하는 이유를<하나님께서 순교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라는 것과<순교하여 하나님나라에 하루라도 빨리 가는 것이 더욱 유익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으로 밝히면서 스스로 순교함으로 그것을 증명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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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와같은 순교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다. 순교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나라에 빨리 가겠다는 생각으로 순교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위배 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내 놓는 것으로서 자살행위에 속하는 것이며 따라서 살인적 범죄행위에 속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순교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순교해야 한다는 생각도 어리석은 생각이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순교하기까지 신앙을 지키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마5:10>그러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순교를 허락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순교를 허락하시는 것은 그들의 신앙을 확인하시기 위함도 아니며 또한 그들의 순교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그것을 방관하심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순교를 허락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기독교 역사를 진행하시는 과정에 존재하는 다양한 섭리역사 때문이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자녀 및 종들의 순교를 허락하시지 않고 그것을 일일이 차단하시며 그때마다 박해하는 자들을 일일이 즉결처분 하신다면 과연 어떠한 결과가 될까? 하는 것을 생각하면 분명한 해답이 나올 것이다.
2.명예욕에 의한 자원순교.
사람들 중에는 명예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도 과감히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명예를 최고의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죽음 같은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당시의 기독교인들 중에도 그러한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후세에 자신의 이름을 명예롭게 남기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과감하게 자원하여 순교했던 것이다. 이때에 특히 몬타누스주의자들이 명예로운 순교와 순교에 대한 오류적 개념으로 인하여 자원하여 순교하려고 했는데 얼마 후 그들의 허구적 순교가 들어났다. 그들의 순교열정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였고 잠시 후에 그들은 오히려 박해를 피하여 달아나거나 은둔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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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자원순교 역시 불순한 것으로서 순교자들의 거룩성에 흠집을 내는 거짓 순교에 속한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오직 진실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자신의 어떤 유익을 위한 신앙은 위선이고 거짓이다.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향하여 준엄한 책망과 진노를 아울러 하신 것이다.
3. 불 신앙자들의 거짓순교.
신앙이 전혀 없는 자들이 단순히 순교자의 명예를 얻기 위하여 거짓 순교를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특히 남은 여생이 별로 의미 없는 자들이 거짓 순교를 자행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순교자라고 하지 않고<자살자>라고 비난하면서 당연히 그런 자들을 색출하여 순교자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5장. 배교자들에 대한 처리문제.
한편 모든 박해가 종료되고 새로운 기독교의 역사가 문을 활짝 열었을 때 이미 예상되었던 문제들이 대두되었다. 그것은 배교자들과 거짓 순교자들에 대한 처리 문제였다. 데키우스황제 치하의 박해 때부터 기독교내에 새로운 호칭들이 생겼다. 그중에 둘은 명예로운 호칭으로서 죽음으로 신앙을 지킨 자들에게 붙여진<순교자>라는 칭호와 비록 죽음으로 순교자가 되지는 못하였으나 끝까지 박해를 견디면서 신앙을 버리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에게 붙여진<고백자>라는 칭호였다. 다른 또 하나는 불명예스러운 호칭으로서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신앙을 버린 자들에게 붙여진<배교자-Apostat> 또는<변절자-Lapsed>라는 칭호였다. 그중에 순교자와 고백자들은 모든 기독교인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으나 배교자, 변절자들은 무시되고 거부되었다. 이때에 많은 사람들이 배교자, 변절자에 대한 처리문제를 제기하였다. 배교자들 중에는 용서받을 수 없는 파렴치한 자들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배교했음으로 동정 받을 수 있는 자들도 많았다. 배교자에 대한 처리문제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황제의 칙령이 발표되자마자 앞을 다투어 배교한 자들과 기독교인들을 고발하여 자신의 목숨을 구한 자들은 물론 동정의 여지기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부모형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어쩔 수없이 배교한 자들과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거짓으로 배교증명서를 구입했을 뿐 실제로는 전혀 배교하지 않은 자들과 배교했으나 곧 크게 뉘우치고 회개한 후 정상적인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산자들은 배교자로 처리하기에는 매우 곤란했다. 사람들은 이 문제를 박해를 무릅쓰고 끝까지 신앙을 지킨<고백자>들에게 일임하였다. 이때에 북아프리카 지방의 일부 고백자들은 자신들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스스로 주장하면서 일부 배교자들을 교회로 귀환시켰다. 그러자 많은 성도들과 교회의 감독들이 이에 크게 반발했다. 성도들은 고백자들과 감독들이 배교자들을 지나치게 용서한다고 불만하면서 배교자들을 엄중하게 처벌하라고 요구하였다. 한편 교회 감독들은 그러한 문제는 개인적인 입장에서 해결할 수 없으며 교회들이 회의를 열어서 결정해야 정당하고 공평하며 또한 일률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교회의 감독들이 모여서 회의를 한 결과 칼타고의 감독이었던 키프리안과 칼타고의 장로였던 노바티안에게 이 문제를 맡기게 되었다. 그러나 키프리안과 노바티안은 서로 입장이 달랐다. 키프리안은 변절자들을 선별하여 구제해야 할 자들은 구제해야 한다고 하면서 변절자들이 진심으로 회개하면 다른 절차 없이 그들을 교회에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노바티안은 키프리안의 선별 방법이 지나치게 변절자들을 용서하는 것이라 하여 반대했다. 키프리안에 대한 반대는 노바티안 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로부터도 제기되었다. 키프리안은 박해 때에 순교하는 것 보다는 숨어서 목숨을 의지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며 성도들을 인도하는 것이 더욱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박해가 끝날 때까지 계속하여 숨어 다니면서 열심히 일을 하였는데 사람들은 그의 신앙을 의심했다. 키프리안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칼타고지역의 감독회의를 소집했다. 감독회의에서는 실제로 제사에 참여하여 황제의 신상에 경배하지 않고 거짓으로 배교증명서를 구입하거나 또는 취득한 사람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교회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고 실제로 배교한 사람들은 진심으로 회개하였을 때에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되 그들의 회개가 진심이라는 것이 객관적, 구체적, 실제적으로 증명될 때에 한하여 허락하기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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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현재의 것일 뿐만 아니라 후세의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역사는 언제나 진실과 사실로 후세에 전달되어야 한다. 진실과 사실의 역사를 통하여 후세가 배우고 깨우치는 가운데 제2의 역사를 진행하면서 제3의 역사, 제4의 역사들을 계속하여 후세에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기독교역사를 정립함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모든 기독교의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 역사이며 또한 후세를 위한 교육이고 지침서이다. 후세의 기독교인들은 현재의 역사를 지침서로 하여 교육되고 훈련되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고 또한 제2, 제3의 지침서들을 후세에 전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진실과 사실만을 기록으로 남겨야 할 책임과 의무를 갖는다. 그러한 점을 전제로 하면서 우리는 키프리안이라는 신앙의 선배에 대하여 정리한다. 우리가 그에 대하여 정리하는 것은 그의 신앙적 삶 속에서 우리가 배우고 깨우쳐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에 대해서 함부로 평가 절하 해서도 않되고 또한 함부로 칭찬해서도 않된다. 우리는 오직 그가 걸어간 진실과 사실의 신앙적 삶 속에서 어떤 것을 배우고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그에 대하여 남겨진 기록들은 우리에게 어떤 진실과 사실을 남겨주기 보다는 당시의 상황들만을 전달해 준다. 때문에 우리는 과연 그가 어떠한 각오로 자신의 삶을 진행시켰는지에 대하여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당시의 상황과 그의 입장과 그의 삶을 살펴보면서 몇 가지의 진실과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첫째 그는 한 지역을 관할하는 감독의 위치에 있었다. 그의 관할 하에는 많은 성도들이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그에게는 그들의 신앙적 삶을 보살피고 인도해주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었다. 특히 당시와 같은 박해의 연속적 상황 하에서 지도자가 갖게 되는 책임과 의무에 대한 개념은 더욱 컸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람들은 그가 박해를 위하여 숨어 다닌 것을 신앙인, 특히 지도자로서 비겁하고 누추한 비신앙적 행위라고 비난하였다. 때문에 훗날 그가 변절자들을 선별하여 교회에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자신이 변절자와 같은 입장에 있었음으로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또 어떤 학자는 키프리안의 행위가 그의 교회관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유스토,L,곤잘레스는 그 문제를 다음과 같이 논증하였다.
*키프리안이 이처럼 변절자들에게 교회의 교제에 다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자 노력한 이유는 그의 교회관 때문이었다. 교회는 곧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 머리의 승리에 함께 참여할 것이다. 따라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으며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못한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이 물론 신자가 교회의 계급제도에 전적으로 동의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키프리안 자신도 로마의 교회체제에 동의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역시 교회의 통일성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런데 고백자들의 행동이 바로 이러한 통일성을 위협하고 있었음으로 키프리안은 이들의 행위를 거부하고 감독회의에서 변절자들에게 관한 문제를 결정해야만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서영일 역, 제10장, P.150>
우리는 곤잘레스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는다. 당시의 신학사상에 의한 보편적인 교회관을 참고로 할 때에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그와같은 이유 외에 다른 차원에서의 이유를 추가하고 싶은 것이다. 앞에서 말한바 있듯이 이것은 키프리안자신의 실제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며 다만 우리의 추상적인 생각일 뿐이다.
우리는 키프리안의 당시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추론하여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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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프리안은 자신이 순교함으로서 개인적인 명예를 취득하는 것보다는 살아서 성도들을 지도하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때에 그는 자신의 그러한 행위가 훗날 어떻게 평가되어질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충분히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훗날,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입장을 이해하려하기 보다는 자신의 행위를 비겁하고 치사한 비신앙적, 비진리적, 행위라고 비난할 것을 충분히 예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수하기로 했을 것이다. 그는 순교는 언제라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한번 죽은 목숨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부활 이외에는 다시 살릴 수 없을 것임을 생각하면서 앞으로 순교의 기회가 자신에게 다시 주어질 것이며 그때에 순교해도 늦지 않을 것이지만 지금 자신이 순교한다면 남은 하나님의 성도들은 지도자 없는 상황에서 더욱 방황하고 약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고 그리하여 자신이 훗날에 받을 모욕과 비난을 감수하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실제로 키프리안은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변증하였다.
<순교의 영광은 하나님의 은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하신 시기 이전에는 은거하여 신앙을 배반하지 않고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기다리며 참된 기독교인의 삶을 사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기회가 주어졌을 때 당당하게 순교함으로서 자신의 신학과 신앙을 증명하였다. 그는 주후258년 발레리안황제 치하의 박해 때에 총독 갈렐리우스에 의하여 순교하였다.
박해가 끝난 후 키프리안이 변절자들을 선별하여 교회에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는 또 다른 명분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에 대한 그의 신학사상과 신앙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비롯한 인간들이 구원받은 이유는 자신들의 어떤 의로운 행위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의한 용서 때문이었음을 변절자들의 교회복귀에 적용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변절자들의 일시적인 배교를 그럼에 도 불구하시고 용서하시어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와같은 추론을 전제로 하여 우리는 키프리안의 지도자적 신앙모습을 아름답고 숭고한 것으로 추모하고 본받고자한다. 자신에게 돌아올 온갖 모욕과 비난과 불명예스러운 것들을 감수하면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외롭고 괴롭고 서글펐던 길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그리고 당당하게 갔던 선배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그러한 길을 그렇게 가야 한다는 각오를 다짐하는 것이다.
제6장. 순교와 하나님의 섭리.
역사학자들은 기독교인들의 순교와 하나님의 섭리 사이의 연관에 대하여 많은 의혹을 품었다. 그들의 공통된 의문은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당신의 자녀, 당신의 종들이 저토록 혹독한 고통을 받고 있는데도 그들을 구원하시지 아니하시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때에 많은 사람들이 순교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을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의한 의도적인 침묵으로 이해하였다. 때문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위하여 고의적으로 자원하여 순교 당하는 사례까지 있었던 것이다. 이 문제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 문제와 같은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미 전장에서 박해와 하나님의 섭리를 통하여 논증한바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기독교 역사의 진군과 발전을 위하여 로마제국의 박해를 허용하셨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자녀와 종들의 순교를 또한 허용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순교의 고통 속에 있는 당신의 자녀, 당신의 종들을 외면하시지 아니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의 고통스러움 속에 함께 하시어 그들을 담대하게 하셨고 그들에게 신념과 용기를 주시어 그들의 변절을 막으셨으며 그들에게 소망과 평안함을 또한 주시어 그들의 순교를 거룩하고 명예롭고 아름답게 하셨다. 그들은 순교의 과정에서 인간들로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불행들을 하나님의 함께하심 속에서 견디고 이겼으며 결국은 승리의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앞에 올라갔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 역사 속에서 고통 받으며 순교하는 신앙의 선배들을 안타까워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순교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워하심을 바라본다.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면서 자녀삼아주시고 종으로 불러주신 하나님께서 그 자녀 그 종들의 고통을 허락하실 때의 그 아프심과 안타까움이 과연 어떠하셨겠는가? 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제7장. 순교역사와 사단.
한편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의 순교역사를 고찰하는 가운데 그 역사를 스스로 자원하여 진두지휘하였던 사단의 패악한 악행을 본다. 사단은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하나님의 역사에 끼어들어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독교가 전 세계를 향하여 진군함에 있어서 사단의 방해가 하나님의 기독교 역사에 장애물이 되지는 못한다. 사단의 온갖 방해와 음흉한 계략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만 기독교 역사의 발뒤꿈치를 살짝 물었을 뿐이고 하나님께서는 그 정도는 전혀 느끼시지도 않으신 채 유유히 당신의 역사를 전개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 선교를 저지하기 위한 사단의 전의<戰意>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사단은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위기감에 로마 선교를 마지노선으로 간주하고 최대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로마 선교를 향한 사단의 강력한 저지를 어느정도 수용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로마 선교가 주의 종들의 피 흘림이 없이 무혈입성<無血入城>되는 것은 오히려 기독교 역사의 세계를 향한 진군에 방해적 요소가 되기 때문이었다. 역사의 결과를 볼 때에 기독교 역사는 심한 박해 속에서는 오히려 힘차게 전진하였다. 기독교 역사는 참으로 오묘하다. 극심한 박해로 인하여 수많은 순교가 진행될 때에는 진리가 솟구쳐 올라 온 누리를 밝히는 역사적 쾌거를 이룩한다. 반면에 평화가 주어지고 안녕이 허락되면 오히려 낙후되고 퇴보되고 침체되는가하면 진리마저 왜곡되고 오류 되고 변질된다. 그것은 예루살렘교회 이후 기독교가 전 세계로 진군되어 가는 역사 속에 언제나 동일하게 발생하였던 역사적 되풀이였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들의 속성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들이었다. 때문에 바야흐로 로마를 시작으로 한 본격적인 기독교 발진의 역사에는 순교자들의 피어린 고군분투가 필연적으로 요구되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동참을 잠시 허용하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단은 이번에도 전심전력을 다하여 고군분투 했으나 역시 하나님의 역사에 크게 일조하였고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께 상급과 면류관을 받도록 열심히 협력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들을 비롯한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순교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면서 그 역사의 뒤에 지쳐서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사단의 비참한 모습을 본다. 도대체 언제까지 저렇듯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온갖 패괴한 악행을 저지르려는지 모르는 사단의 모습은 그러나 참으로 불쌍하고 비참하기까지 하다. 사단은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언제나 하나님 앞에 연전연패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에 사용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심판 날에 받을 형벌을 자신의 머리에 쌓아 놓고 있기 때문이다.
제7부. 세계 기독교로의 확장.
하나님의 기독교가 로마의 박해를 딛고 일어서 세계적 기독교로 확장된 것에 대하여 많은 오해와 역사적 오류가 있었다. 과거 기독교역사를 알지 못했던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가 전 세계적인 기독교로 확장된 시점을 로마의 기독교 박해가 종료된 때부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오류이다. 기독교 확장은 오히려 로마의 박해가 화산처럼 폭발하고 있을 때에 이루어졌다. 기독교의 세계화는 많은 부류의 사람들에 의하여 그리고 참으로 다양한 목적과 이유와 사연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의 박해를 피하여 로마로부터 피신하여 간 곳에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생업인 상업을 위해 이주해 간 곳에서 개인적 신앙생활을 했던 것이 발전하여 교회가 된 경우도 있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사도 또는 전도자들의 요청에 의하여 자신의 집을 예배처소로 내놓은 것이 곧 교회로 발전하기도 했다. 당시의 교회는 처음부터 특별한 건물을 만들어 세워 교회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가정집에서 말씀을 배우고 예배를 드리는 가정교회 형태로 출발했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가능했다. 이렇듯 기독교의 세계화는 로마의 박해에 관계없이,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히려 로마의 박해에 영향 받으며 전 세계에 확장 되어진 것이다.
한편 기독교가 그토록 극심한 로마의 박해를 이기고 세계적 종교로 발전한 것에 대해서도 많은 오류적 견해가 있었다. A.D.약180년경의 역사 학자였던 셀수스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본 기독교 발전과 확장을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기독교인들이 서로 간에 의견의 일치를 유지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특히 이들에게 아무런 믿을만한 기본적 토대가 없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 경탄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적인 소수자들이라는 점에서는 공동의 유대가 있고 외부인 들에 대한 공포감이 오히려 이들을 단결시키는데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요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강화 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셀수스의 견해는 로마의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크게 확장되고 신장되는 기독교에 대한 당시 일반인들의 개념을 대표하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독교가 박해에도 불구하고 더욱 크게 확장되는 이유를 하나의 집단 사회적 현상으로 이해하였다. 즉 위기에 몰리게 되면 스스로 단결하며 자신들을 협공하는 자들에게 공동으로 대처하는 집단 사회적 본능 현상으로 기독교의 확장을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순전히 인간사회적, 또는 일반 종교적, 개념에 기초한 것이었다. 물론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단결이 로마의 박해를 통하여 더욱 굳게 다져진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 논증한바 있듯이 로마의 박해로 인하여 기독교의 확장이 이루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처음부터 인간들에 의하여 출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섭리에 의한 신적 작정으로부터 출발되었다. 기독교의 모든 역사적 진행은 하나님 섭리의 신적작정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기독교 발전은 사실상 로마의 박해에 의하여 그 진행이 어떤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로마의 박해를 적절하게 아우르시면서 당신의 기독교 역사를 진행시키신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로마의 박해가 기독교 확장을 이룬 것이 아니라 로마의 박해는 원래 하나님의 기독교 확장을 저지하려는 사단의 집요한 투쟁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사단의 피 어린투쟁을 가볍게 감싸 안으시고 어루만지시며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기독교 확장의 역사적인 진전을 이루어 가신 것이다.
제1장. 로마의 기독교 .
기독교가 세계로 확장되어지는 역사를 논증함에 있어서 먼저 로마의 기독교를 고찰하는 것이 적절한 순서일 것이다. 예수그리스도 이후의 기독교가 세계의 기독교로 확산되는 과정에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가 먼저 있었으나 세계적 기독교의 확장은 로마교회로부터 진군되어 졌기 때문이다.
1. 로마교회의 부흥과 성장.
1)로마교회의 부흥과 성장원인.
로마제국의 박해로 인하여 로마의 기독교가 처음부터 지하교회인“카타콤교회”로 출발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교회의 역사를 모르는 자들의 오류이다. 로마교회는 처음에는 지상교회로부터 출발했다. 로마교회가 지하로 은둔한 것은 로마제국의 박해가 극심하게 전개되었던 때부터이다. 로마황제의 정치적 개인적 이유에 의한 박해가 오히려 기독교의 전세계화를 돕는 형국이 되었던 반면에 로마교회의 발전은 로마의 박해로 인하여 오히려 더디어졌다. 그러나 로마교회의 발전적 더딤은 외형적인 것이었을 뿐 내용적인 면에 있어서는 전혀 관계없었다. 로마교회의 내적 발전은 아무런 지장 없이 유유하게 진행되었다.
데키우스황제의 박해가 한창 진행 중이던년경> 로마교회는 매우 크게 성장해 있었다. 교회의 재정은 매우 풍족하여 인근 각지의 어려운 교회들을 도왔으며 데시우스황제의 박해에 쫒기는 수많은 감독들을 로마에 피신시켜 돌보았다. 이때에 로마교회는 감독1명, 장로46명, 집사7명, 서리집사7명, 사제보조42명, 귀신 쫒는 자52명과 그 외에 수많은 낭독자 등등으로 성장해 있었다. 이러한 로마교회의 성장과 발전은 여러 방향을 통하여 이루어졌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1)기독교의 사랑.
로마인들은 처음에는 오직 유일신만을 고집하는 기독교인들을 우려의 눈길로 경계하였지만 기독교의 평등사상과 진실한 사랑의 보편성에 크게 감동 받았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의 순교를 통하여 확인했을 때 로마인들은 기독교야말로 진정한 종교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로마인들의 기독교 입문은 다양한 차원, 다양한 이유에서 이루어졌는데 그중에 하나가 기독교의 사랑에 매료 된 사람들의 입문이다. 계속되는 전쟁과 그로인한 사회적 각박 속에서 진정한 사랑에 목말라했던 사람들은 기독교의 진실한 사랑과 그 진실한 사랑의 보편적 나눔에 크게 매료되었다. 가난한 사람들과 고아와 과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보며 감옥에 갇힌 자 광산에 유배된 자들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고 기근, 지진, 역병 등등으로 쓰러진 자들을 자신의 몸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희생적으로 돌보며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자들, 죽어가는 자들을 자상하게 돌보는 기독교인들의 박애적 사랑은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인도하는데 충분했다. 기독교인들이 여행자들을 사랑하고 대접하는 것도 특이했다. 기독교인들은 여행자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확인되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사흘 이상의 숙식을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기독교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가리지 아니하고 여행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다. 특히 죽은 자를 정성껏 장례하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2세기 후반부터 로마와 칼타고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공동묘지를 구입했다. 기독교의 장례문화는 유대교의 전통적 장례문화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는데 죽은 자에 대한 그들의 깍듯한 예우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감동적인 것이었다. 전쟁포로와 노예 신분이었던 가난한 자들에게는 사후에 자신들이 엄숙하게 장례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들의 죽음은 곧 버려진 죽음이었다. 이러한 그들에게 기독교인들은 무조건 경건하게 장례된다는 사실은 크게 감동적인 것이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사랑에 감동되어 스스로 자원하여 기독교에 입문했다.
(2)기독교의평등사상.
기독교의 평등사상도 로마인들을 기독교로 입문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로마사회는 신분제도가 분명했다. 때문에 낮은 신분 자들은 모든 문제에서 사회로부터 공평한 대우를 받을 수 없었다. 그러한 그들에게 모든 사람을 신분에 관계없이 형제라고 부르고 그들을 진정한 형제로서 대우해 주는 기독교인들의 평등한 삶과 사상은 참으로 특별한 것이었고 또한 감동적인 것이었다. 특히 노예와 종들에 대한 기독교의 평등사상은 참으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기독교는 노예제도를 불법이라고 비난하거나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으나 노예나 종들에 대한 평등적 예우를 실행하면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다 함께 평등하다는 진리를 은연중에 선포했다. 기독교는 교회 밖에서는 노예제도를 비난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 내에서는 노예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형제로 예우했다.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동등하며 따라서 인간이 인간에 대한 어떤 소유권을 가질 수 없으며 특히 기독교인들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구원을 받은 하나님나라의 백성이고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로 하는 한 가정적 형제라는 사실을 실천적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평등사상은 바울사도를 통해서 고린도교회에 정립시켜주신 하나님의 신학원리<고전7:17-24>에 근거한 것이었다. 우리는<빌레몬서>를 통하여 노예에 대한 처리를 함에 있어 하나님의 섭리에 충실하였던 바울사도의 지혜로움을 본다. 바울사도는 달아난 노예 신분이었던 오네시모를 기독교인으로 양육시킨 후 그를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이해시켜 빌레몬의 체면도 유지시켜주고 오네시모도 자유하게 해 주었다.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사건은 당시의 노예 신분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아름다운 표본적 전례로서 후대에 전승되었다. 이때에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노예를 해방시켜주고 그들과 함께 신앙적 삶을 공유하면서 기독교의 평등사상을 만천하에 선포하였고 교회는 재정을 동원하여 노예들의 값을 지불해줌으로서 노예들을 해방시켜주었다. 콘스탄틴황제는 기독교신자 노예 주인이 교회의 감독 앞에서 자기 노예를 석방시키겠다고 서약한 것은 국가 행정부 관리 앞에서 노예를 해방하겠다고 서약한 것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 것이라고 인정했다. 따라서 노예주인이 감독 앞에서 노예해방을 서약한 증서를 국가행정부에 제출하면 국가행정부는 별도의 서약을 요구하지 않고 즉시 그 노예의 신분을 정리해주었다. 해방된 노예출신 자들 중에는 감독의 지위에까지 올라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 3세기경의 로마교회 감독 칼리스투스이다. 이때에 교회들 중에 정책적으로 노예들에게 성직을 임명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노예들에게 성직을 임명함으로서 기독교의 평등사상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문제로 인하여 교회와 노예주인들 특히 귀족들과의 마찰이 일어났다. 때문에 4세기경에 이르러 주인의 허락이 없거나 또는 주인에게 보상을 해주어 해방된 자가 아니라면 교회에서 성직으로 임명할 수 없다는 것이 국법으로 선포되었다. 로마의 국법에는 노예들의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조항이 없었고 평민들이 노예와 결혼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며 귀족이 노예와 정식으로 결혼할 때에는 귀족신분에서 면직되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그러한 법률이 일체 적용되지 않았고 누구나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으므로 노예와 귀족의 결혼도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받는 아름다운 결혼이 되었다. 이러한 교회의 평등사상에 입각한 노예처우와 해방운동은 수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입문시키는 결과를 이룩했다. 한편 기독교는 교회 안에서는 노예나 종들에 대한 평등권을 실행하는 반면에 교회 밖에서는 여전히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이중적인 처세를 했는데 이러한 기독교의 처세는 참으로 현명한 것이었다. 당시의 사회계급제도는 노예나 종들에 대하여 매우 엄격한 규제를 하였고 특히 노예는 일종의 재산이었기 때문에 노예나 종들에 대한 평등권을 들어 내놓고 주장하게 되면 정치적,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게 됨으로서 또 다른 차원의 박해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이러한 처세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모면하려는 어떤 기만적인 행위는 아니었다. 기독교는 죽음 앞에서도 진리를 사수하는 신학적 원리를 그대로 실행하기 때문에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술책을 사용하지 않았다. 기독교가 교회 안에서는 노예들을 형제로 예우하면서도 교회 밖에서는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롬13장>을 통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이 국가정부나 사회조직의 법과 질서에 순종할 것을 명령하셨다. 하나님의 명령은 교회나 국가정부 및 사회조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위하여 허락된 영역임을 천명하신 것이며 따라서 모든 기독교인들은 그러하신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에 일체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독교인들의 평등사상은 신분 문제에 대해서만 감동적인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의 평등사상은 남녀에 대한 평등사상을 크게 일깨워 주었다. 당시의 남녀에 대한 성적차별은 귀족사회 안에도 여전히 존재했다.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하여 상대적인 제한을 받았고 이러한 문제로 인한 갈등은 특히 귀족사회 안에 팽배했다. 여자들은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결국은 주부의 위치에 있었고 따라서 정치, 경제 등등을 비롯한 조직사회 영역에서 제한된 입장이었다. 때문에 여자들에게는 신분적인 권세는 있었으나 인격적 권위나 영광적 명예는 존재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여자들은 사랑의 대상으로서는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았으나 그것은 육체적인 기능으로서의 가치에 대한 인정이었을 뿐 인격적인 차원에서의 존중은 아니었다. 당시의 여자들은 정치적 목적이나 수단에 의한 권세와 권위는 누릴 수 있었으나 인격체로서의 권세와 권위는 없었음으로 특히 귀부인들의 사회적 불만이 팽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러한 차원의 남여적 차별이 없었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은 여자의 연약함을 인격적으로 극진히 보호하고 다독여주었다. 원형경기장에서 기독교인들이 처형당할 때 기독교인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여자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하여 보호하고 아끼는 것을 직접 목격한 로마의 귀부인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종들을 통하여 기독교인들의 평등사상과 특히 여자들에 대한 존중과 아낌을 전해들은 후 기독교의 특별한 평등성에 크게 매료되었다. 때문에 로마의 귀부인들은 자신들의 시종들의 안내를 받으며 은밀하게 기독교에 접근했다.
유세비우스를 비롯한 로마의 역사가들은 황제의 처첩들이나 원로원 의원들의 부인들 중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었음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사례가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와 함께 공동 통치했던 그의 아들 콤모두스의 처첩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이다.
(3)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
기독교인들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도 로마인들의 기독교 입문에 크게 기여했다. 당시 로마의 만신전에 있는 신들은 거의 대부분 인간들의 현재적인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신들이었을 뿐 인간들의 영원한 미래를 보장해 주는 신들은 아니었다. 때때로 어떤 신들이 미래적인 통치자로 부상했지만 그러한 신들은 다만 인간들의 미래를 통치하는 신들이었을 뿐 인간들을 영원한 신의 나라 천국으로 인도하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런데 기독교의 신은 인간들을 영원한 신의 나라 천국으로 인도한다는 것이었다. 원형경기장에서 또는 감옥에서 그토록 처절한 고통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몹시 궁금하였던 로마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매우 크게 놀랐고 그리하여 그에 대한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본 후에 그것이 기독교의 진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앞을 다투어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은 귀족들이나 천민들의 구별이 없이 모든 로마인들을 동요시켰다. 천민들은 희망 없고 괴로운 현세에서의 삶을 마감한 후에는 아름답고 최상의 영원한 나라에서 살 것이라는 기대로 인하여 기독교에 입문했고 귀족들은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려 보았으나 인생이란 결국은 덧없는 것이라는 사실 앞에 괴로워하던 중 하나님의 영원무궁한 나라에 대한 소식을 듣고는 희망에 불타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4)콘스탄틴의 승리.
그러나 로마교회를 크게 부흥시킨 사건은 역시 콘스탄틴과 막센티우스 사이에 벌어진 밀비안다리의 전투였다. 콘스탄틴이 막센티우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 기독교의 하나님 때문이었다는 소문이 로마제국 전역을 비롯한 세계에 확산되어 나갈 때 기독교는 이제 더 이상 전도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 로마제국 시민들은 물론이고 그 소식을 들은 세계인들이 앞을 다투어 기독교에 입문했던 것이다. 이제 로마의 기독교는 드디어 전 세계의 기독교가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로마제국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서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 앞에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까지 그토록 오랜 그리고 그토록 심한 박해의 역사는 모두가 기독교의 역사적 진군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 의한 것이었음이 드디어 밝혀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로마의 박해를 통하여 기독교인들의 무수한 순교를 통하여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을 알려주시고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시다가 콘스탄틴의 밀비안전투를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단 한번에 만천하에 들어내시고 선포하셨다. 이 얼마나 장엄한 순간이며 이 얼마나 통쾌한 순간인가?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리고 기독교의 역사이며 또한 우리들의 역사이다.
2)로마교회의 부흥과 성장과정.
A.D.312년, 콘스탄틴이 밀비안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물리치고 승리한 후 313년에 밀라노칙령을 선포하여 기독교의 박해를 종식시킴으로서 기독교의 오랜 암흑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본격적인 부흥과 발전의 역사적 진군을 시작한 로마제국의 기독교는 A.D.323년에 콘스탄틴이 명실상부한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어 기독교를 국가적 종교로 보호하게 되자 곧 세계적인 기독교로 부흥 발전하였다. 콘스탄틴대제는 매우 강력하게 기독교의 법적인 승인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 이외의 종교를 탄압하지는 않았다. 그는 베스타여신을 섬기는 부녀자들을 계속하여 후원했으며 황제에게 붙여지는 이교도적인 종교명칭을 그대로 사용했다. 당시에 황제들에게는“최고승원장”이라는 종교적 명칭이 있었는데 그것은<대제사장>을 의미했다. 황제의 이러한 정책은 정치적인 차원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황제의 강권으로 우상숭배를 금지시키거나 또는 기독교로의 개종압력을 행사할 때에 발생할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부작용과 저항을 염두 해 두었다. 로마제국은 방대함과 광활함으로 인하여 항상 이방인들의 공격에 대비해야 했다. 때문에 황제는 될 수 있는 한 이방인들을 자극하는 일을 삼갔다. 그리하여 교회의 전도를 통하여 제국이 점진적으로 기독교화 될 수 있도록 물밑작전을 펴나갔던 것이다. 그의 정치적 정책은 자신의 종교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는 이미 기독교로 개종했으면서도 세례를 받는 등의 공식적 기독교의식은 그의 사망이 가까워질 때까지 보류했다. 그러나 그는 우상숭배를 스스로 금하였다. 그의 가문은 본래 태양신을 섬겼는데 이제는 그것을 철폐하였으며 선황제<先皇帝>들의 신상<神像>들에게 절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황제의 정책 하에서 기독교는 급성장했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기독교는 콘스탄틴의 후계자들에 의해서 더욱 급성장했다. 콘스탄틴대제와 달리 그의 계승자들은 매우 강경한 종교정책을 시행했다. 한때 율리아누스황제재위>가 기독교를 공격하고 탄압하면서 과거의 로마제국 전통종교들을 복원하려 했으나 그가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사망하자 그 뒤를 계승한 황제들은 율리아누스의 패전과 사망이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으로 받아들여 더욱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활성화시켰다. 황제들은 기독교를 보호하고 육성하는 강력한 법령을 제정하여 공포함으로서 그 누구도 기독교에 저항하지 못하게 했고 이방신전이나 사찰들은 그것이 로마제국 소유이거나 개인소유이거나를 가리지 않고 모두 몰수하여 교회에 귀속시켰다. 디오클레시안황제의 박해 때에 파괴되었던 교회들이 복원되었으며 새로운 교회들이 건축되었다. 이방신상과 사원들은 모두 파괴되었고 그 자리에 교회들이 건축되거나 아니면 기독교와 관련 있는 건물들을 세웠다. 이방 신상들에게 경배하거나 황제신상에게 경배하는 행위들이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되었고 그것을 어기는 자들은 형사범<刑事犯>으로 간주되어 국법으로 엄히 다스려졌다. 기독교에 반대하는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자들은 형사처벌을 받았고 기독교에 반대하는 서적들은 모두 수거되어 불태워졌다. 때문에 이단자들의 서적들은 대부분 소실되었고 따라서 그들의 주장은 기독교 신학자들의 변증서나 비판서 등등을 통하여 전승되었다.
2.기독교가 로마제국에 준 영향.
기독교가 로마제국 정부에 의하여 법적인 종교로 공인된 것은 기독교에게만 좋은 결과를 준 것이 아니라 로마제국의 국민들과 국가정부에도 아름다운 결과들을 제공해 주었다. 기독교의 차원 높은 종교적 사상들은 지금까지 로마제국이 경험하지 못한 새롭고 차원 높은 정신과 문화를 아울러 이루어 주었던 것이다.
1)십자가 처형제도의 폐지.
십자가 처형제도는 로마시민 이외의 사형수들에게 행해지던 처형제도로서 로마제국의 형벌 중에 가장 잔인하고 혹독한 처형제도였다. 전승에 의하면 십자가 처형제도는 페르시아에서 도입되었다고 한다. 십자가 처형제도에는 특별한 절차가 있었다. 죄수는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피가 날 때까지 매질을 당하는데 그것은 십자가 위에서 오랫동안 고통당하지 않고 빨리 죽게하려는 죄수에 대한 일종의 배려였다. 죄수는 매질을 당한 후에 자신이 매달릴 나무십자가를 메고 처형장까지 걸어가게 되며 처형장에 이르게되면 십자가를 땅에 뉘어 놓고 거기에 양팔을벌여 밧줄로 묶이게 된다. 때에 따라서는 양손에 못을 박기도 하는데 그러한 경우는 드물었다. 십자가에 묶인 죄수는 처형장에 세워놓은 수직말뚝에 연결되는데 이때에 수직말뚝의 중간에 작은 토막의 나무나 또는 나무 못을 가로로 박아서 그위에 죄수의 둔부가 받쳐지도록 했다. 그것은 못박힌 죄수의 고통을 덜어줌과 동시에 죄수의 몸의 중량 때문에 손이 찢어져 십자가에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절차였다. 훗날 로마인들은 로마제국이 이토록 극심하고 잔혹한 형벌을 사용한 것에 대하여 매우 수치스러워 했고 특히 십자가 처형제도가 예수그리스도를 비롯한 기독교인들에게 수없이 사용되었다는 것에 대하여 곤혹스러워했으며 어떤 역사가들은 로마에서 십자가 처형제도가 있었음을 부인하기까지 했다.
한편 콘스탄틴대제는 십자가 처형제도를 폐지하고 십자가를 군대의 깃발로 제정했다. 콘스탄틴이 십자가 처형제도를 폐지하고 십자가를 군대의 깃발로 제정한 것에 대해서 두가지의 이야기들이 전승되어 온다. 하나는 로마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비롯한 기독교인들이 십자가에 의하여 처형되었다는 이유로 십자가를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인정하여 콘스탄틴에게 십자가 처형제도를 폐지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라는 것과 다른 또 하나는 콘스탄틴이 밀비안전투에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십자가 깃발을 앞세우고 싸워 막센티우스를 이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의 전승을 모두 지지한다. 그리고 십자가 처형제도가 로마의 입장에서는 악형인 것이 분명하지만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영광과 기독교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였다는 것을 선포한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메시야로서 십자가를 통하여 영광의 승리를 완성했으며 인류의 영원하신 메시야로서 십자가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였다. 그리고 우리들의 신앙선배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적 승리를 만천하에 선포했으며 십자가를 통해서 기독교신앙의 승리적 금자탑을 영원히 후세에 전승했다. 로마제국의 십자가는 기독교의 영원한 승리의 표징이며 기독교의 영광과 거룩의 표상인 것이다.
2)유아살해의 금지.
로마제국에는 어린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원하지 않을 경우 그 아이를 질식사<窒息死>시키거나 또는 집 밖에 내다버려 고의로 죽게 만들 수 있는 제도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다가 길러서 노예로 팔아먹는 것을 직업적으로 했는데 이로 인하여 불행한 일들이 부지기수로 발생했다.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 무시되어 지는 가운데 도처에서 유아살인 행위가 벌어졌고 심지어는 어려서 버려진 아이들이 자라난 후에 형제자매간에 결혼하게 되는 일들도 발생했다. 기독교는 이와같은 비윤리적, 비도덕적 폐단을 강력하게 비난했고 근절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행정부에 건의하여 법으로 금지시켰다. 이로서 모든 어린이들은 교회의 축복 속에 보호받게 되었고 자기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3)우상숭배 금지.
로마종교는 다신론적 이면서 또한 범신론적이었다. 그들은 만신전<滿神殿>인 판테온에 수많은 각종 신상들을 세우고 각자 취향대로 신들을 섬겼다. 로마의 종교적 제사는 다양하고 수많은 신들을 섬기는 것이었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규정된 일정한 의식이 없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의 종교적 제사는 보편적으로 기도와 서원이 수반되는 희생 제사였다. 이를 위해서는 제물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제물은 동물이 아닌 경우도 있었지만 동물 희생제사가 다른 제물들을 드리는 제사보다 효력이 강한 것으로 인식되어 할 수 있는 한 동물 희생 제사를 드렸다. 제물로는 돼지가 가장 보편적인 제물로 사용되었고 중요한 제사일 때는 양과 소가 추가 되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희생 제사는 사람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것이었다. 이때에 사람의 생명을 상징하는 심장, 간장, 신장 등등이 제물로 바쳐지기도 했다. 이러한 인신제사<人身祭祀>는 검투사들의 경기에서 비롯되어 졌다는 설이 있다. 검투사들은 대부분 노예 출신들이었는데 특히 귀족들과 황제의 소유였다. 그들은 자신의 주인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했는데 특히 황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을 영광이라고 했다. 로마의 황제들은 신적존재로 추앙되었으며 따라서 검투사들이 경기에서 패했을 때 승자가 그를 죽이는 것은 황제<신>을 위한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그것이 발전하여 인신제사가 성행했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가 최고의 종교로서 국가적 종교가 되었을 때 이와같은 우상숭배들이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4)노예제도의 수정.
로마제국 전역에는 수많은 노예들이 있었다. 기독교가 아직 사회적인 지배권을 갖지 못했을 때에 로마제국 인구의 절반 이상이 노예들이었다. 초기 기독교시대의 인구 통계에 따르면 로마제국 전 지역의 노예와 자유민 비율이 1/5이었고 로마시<市>에서는 1/3이었다. 가구당 노예의 숫자는 황제소유의 2만 명에서 중하위 귀족들의 2-8명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었다. 로마제국이 공화정치를 시행할 때에 정치적 이유에서 수많은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이로서 자유민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늘어났는데 이때에 노예들과 해방된 노예 출신의 자유민들이 결혼하게 됨으로서 1세기 말경에 이르러 노예와 자유민들 사이에 태어난 혼혈 계통이 수없이 발생하였고 통계상으로 계산할 때에 로마제국 국민의 절반 이상이 노예 출신이었다. 로마정부는 이와같은 사태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미 1세기 초부터 노예 소유자가 사망할 때에 1백명 이상의 노예를 해방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시켰다.
노예들은 여러 방면에서 발생하였는데 범죄로 인한 경우, 부채에 의한 경우, 자원노예, 가내출산<家內出産>노예 등등이 있었으나 가장 많은 경우는 전쟁 포로들이나 버려진 유아들이었다. 노예들은 법적인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였고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이 오직 주인에게만 존재하였다. 노예들은 공개된 경매장에서 매매되었고 일반적으로 동방노예<헬라, 애굽, 수리아, 유대>들이 서방노예<게르만, 갈리아, 사르디니아, 브리타니아>들 보다 비싼 값으로 매매되었다. 인종적으로 보면 대부분이 백인종이었으나 흑인 노예들도 있었다.
기독교는 이러한 노예제도를 개선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기독교는 노예제도를 개선할 때에 매우 지혜롭게 했다. 노예제도의 부당성을 지적하거나 비판하지 아니하고 기독교적 사랑과 평등사상을 실천적으로 적용함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공감하는 가운데 노예 해방운동이 사회적으로 일어나게 했다. 교회재정을 투자하여 노예들의 값을 지불함으로서 주인들을 자극하지 않고 노예들을 자연스럽게 해방시켜 나갔으며 교회 안에서 노예들을 동일한 형제로 깍듯이 예우함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노예에 대한 개념을 바꾸게 했다. 이러한 기독교의 노력으로 노예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면서 노예에 대한 대우도 신장되었다. 그리고 기독교가 국가적 교회로 공인되었을 때에 이르러서는 노예들에 대한 제도가 법적으로 보장되었다. 이제 노예들은 자신들을 부당하고 잔혹하게 대우하는 주인들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게 되었으며 결혼이나 출산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고 심지어는 유급휴가까지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노예들은 지금까지는 꿈에서 조차도 생각하지 못했던 지위와 인권을 누리게 되었으며 이러한 법적제도는 로마제국의 전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노예제도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결단에 의해서 차츰차츰 사라져 가다가 나중에는 아예 폐지되었다.
5)검투사시합의 폐지.
로마인들은 쾌락적인 각종 경기를 즐겨 개최했는데 그중에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이 마차경기와 검투사들의 경기였다. 검투사들 중에는 명문 귀족출신이나 군부출신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귀족들과 황제의 노예들이었다. 황제와 귀족들은 자신의 명예와 권위를 과시하기 위하여 검투사들을 양성하였고 특히 황제에게 아부하는 귀족들은 황제의 검투사들에게 적당히 패해줌으로서 황제들을 즐겁게 하였다. 검투사들의 목숨은 단지 귀족들과 시민들의 즐거움을 위한 것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문적으로 검투사들을 훈련하고 양성하는 직업적 검투사 양성자들이 생겨났는데 그들은 주로 노예들을 검투사로 양성하여 귀족들에게 팔았다. 이러한 로마제국의 검투사 경기는 주전1세기 말에 발생한 노예반란 사건을 통하여 후대에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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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팔타쿠스의 노예반란
주전73년에 대대적인 노예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노예반란을 주도한 지도자는 트라키아 태생의 노예로서 중부 이탈리아 키푸아의 노예검투사 양성소소속의 검투사 스팔타쿠스였다. 그는 70여명의 검투사들을 이끌고 검투사 양성소를 탈출한 후 당시의 하위 계층이었던 목자<牧子> 빈농<貧農> 농노<農奴>들을 규합하여 로마정부를 향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제국정부에서 보낸 진압군 2개 군단을 차례로 격파하고 남부 이탈리아를 지배했는데 그가 한창 승승장구 할 때에는 그의 병력이 12만 명에 도달했다. B.C.72년에는 새로 파견된 진압군을 다시 격파하고 북부 이탈리아의<포-Po>강변에 도달하여 갈리아인, 게르마니아인 노예들을 귀향시키려 하였으나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보다는 로마와의 전투를 원했음으로 그들과 함께 남부 이탈리아로 진격하면서 3차례나 로마군단을 격파했다. 그러나 남부 이탈리아에서 시칠리아섬으로 건너가려다가 실패한 후 B.C.71년에 원로원에서 파견한 크락수스의 군단과 전투하던 중 루카니아에서 패전하여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스팔타쿠스의 이야기는 전설적 이야기로 다양하게 후세에 전해졌는데 그중에 가장 아름답고 장엄한 것이 그의 아들이 후에 장성하여 다시 로마에 반란하여 결국은 노예들의 자유를 쟁취했다는 것이다.
한편 기독교의 사상에 의하여 생명의 소중함이 로마제국에 퍼져가기 시작함에 따라 원형경기장에서 수시로 진행되던 검투사들의 경기가 폐지되었다. 로마시민들은 기독교를 통하여 쾌락위주의 저급한 삶에서 벋어나 차원 높은 인격적인 문화와 영적 삶을 추구하게 되었고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생명의 존엄성을 더욱 인식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검투사 경기의 저급성을 혐오하게 됨으로서 검투사 경기가 사라져가게 된 것이다. 로마제국의 검투사 경기는년>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열린 승려“텔레마쿠스의 경기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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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년간 지속되어진 로마제국의 검투사 경기를 종료시키고 나아가서는 영원불멸일 듯싶던 노예제도까지 종료시킨 것은 로마제국 황제의 권위나 권세가 아니었으며 검투사 스팔타쿠스의 칼도 아니었다. 그것을 종료시킨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평등적 은혜였다. 그리고 그 지고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평등 원리를 말로만 외치지 아니하고 실천으로, 지혜롭게, 진군시킨 기독교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섭리의 장엄함을 깨닫게 된다. 다시 한번 확인하건데 역사란 결국 인류역사 속에 기독교의 역사가 아니라 기독교역사 속에 인류역사, 곧 하나님의 섭리역사 속에 인류역사이다. 인류역사가 기독교역사를 대동하거나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독교역사가 인류역사를 데리고 가며 이끌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고찰해 보면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그와같은 신학적 원리를 수 없이 가르쳐 주셨고 또한 실제로 기독교역사를 통하여 수없이 그것을 확인, 또 확인 시켜주셨건만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기독교는 그와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수없이 보고 들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오류와 비진리의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다.
기독교가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하여<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신 명령들의 원리를 좀더 일찍 깨달아 그 명령을 준행했더라면 오늘날 세계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며 기독교의 위상이 달라졌을 것이다. 21세기 현재의 상황은 기독교가 인류역사를 데리고 가지도 못하며 이끌어 가지도 못한다. 기독교 역사가 오히려 인류역사의 뒤를 허둥지둥 쫒아 다니기도 바쁜 실정인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기독교 지도자들의 책임이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좀더 하나님에 대하여 기도하고 공부하고 연구하였더라면,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를 명심했더라면 하나님의 기독교가 이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에게 부여된 소임은 다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유익과 명예와 권위와 권세를 탐하여 동분서주 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완전한 기독교가 3류 일반종교와 같은 수준으로 하락되어 일반역사에게 정복당하고 통치당하는 수모를 겪고 있는 것이다.
3.로마제국 기독교의 타락.
로마의 기독교가 국가적 종교로 확립된 후 본격적인 부흥과 발전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아름답지 못한 비진리적 상황들이 발생하였다. 교회가 하나님의 법과 질서에 의한 오직 순수한 신앙적인 모습으로 성장하지 않고 일반 종교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각종 비진리적 상황들이 교회 내에 유입되어 기형적인 교회로 변질되어 간 것이다.
1)황제숭배.
일단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비롯한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콘스탄틴대제에 의하여 기독교의 자유가 이루어졌음을 지나치게 부각시켜서 콘스탄틴대제를 거의 신격화 하였다. 때문에 교회에는 하나님을 예배 한다기보다는 콘스탄틴황제를 더욱 드높이는 무리들이 모여들었다. 어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권위보다 콘스탄틴황제의 권위가 더욱 막강했다. 이러한 상황은 특히 귀족들과 정부 고위관리들이 기독교인이 되어 교회에 출석하게 됨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그리하여 교회가 마치 콘스탄틴황제 정부의 산하기관과 같은 상태가 되어갔다. 반면에 교회 지도자들은 이와같은 상황을 하나님의 법과 질서로 가다듬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연합하고 동조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로마제국 정부와 은밀한 거래까지 했다. 황제의 측근 세력들과 제국정부의 고위 관리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권위를 내세워 교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했고 재정적으로 풍부한 귀족들이 교회에 많은 헌금을 하면서 자기 목소리를 냈다. 그들은 심지어 교회의 중요한 성직을 차지하기까지 하면서 권력과 권세를 휘둘렀다. 이러한 가운데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여 운영함으로서 어떤 교회들은 기독교와 전혀 무관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세속 권력자들의 권세 과시로 인하여 교회 내에 상서롭지 못한 일들이 많이 발생하고 그로인하여 교회가 많은 혼란과 갈등을 겪었으나 아직은 교회가 진리로부터 완전히 이탈되지는 않았다. 교회가 타락하여 진리로부터 완전히 이탈된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2)교회의 거룩성 훼손.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가적 종교가 되고 교회가 평등원칙에 의하여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게 됨에 따라 로마인들은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기독교인이 되었다. 몇몇 사람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버리지 않고 교회에 들어가기를 꺼려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와같은 사람들은 사회적인 대우를 받지 못했다. 기독교도가 아닌 자들은 이단자 또는 우상숭배자라 하여 냉대 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로마제국 국민들이라면 당연히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불문율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교회의 거룩성이 훼손되기도 하였다. 누구나 다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에 그리고 교회 내에서는 누구나 동일하다는 사상이 보편화 되었을 때에 무지하고 비도덕적, 비윤리적인 자들에 의하여 교회의 법과 질서가 무시되어졌고 그리하여 교회의 거룩성이 무너지게 된 것이다. 교회 내에서 버릇없는 하인들이 상전들에게 불손하게 대드는 일이 발생하는가 하면 물리적인 힘을 앞세운 자들이 성직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심지어는 음란한 자들의 성적 범죄까지 일어났다. 교회가<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에 의하여 자유와 평등을 보장해준 반면에 몰지각한 자들에 의하여 자유와 평등이 남용되고 오용됨으로서 교회 안에 방종과 무질서가 난무했던 것이다.
4.로마교회의 분렬.
1)콘스탄틴의 천도<遷都-A.D.330년>
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된 콘스탄틴은 인류 역사에 영원히 남을 로마를 건설하려고 했다. 콘스탄틴대제는 로마시에 각종 우상들과 그들의 사원들이 만연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우상숭배를 버리지 않기 때문에 로마시가 기독교 국가인 로마제국 수도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콘스탄틴대제는 우상들이 전혀 없는 아름다운 도시를 새로 건설하여 기독교적인 로마제국의 수도로 번영시키려 했다.
그는 새로운 로마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결정했다. 비잔티움은 새로운 수도로서 가장 이상적인 지정학적 위치에 있었다. 비잔티움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가교적 위치에 있었다. 북으로는 흑해를 잇는 보스포루스해역을 통치할 수 있는 곳이었고 남으로는 지중해를 잇는 헬레스폰트<현재다다넬즈>해협을 통치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 해협들은 둘 다 길이가 60마일이며 폭은 대체적으로 1마일정도로서 어떤 지역도 폭이 4마일을 넘지 않았다. 비잔티움은 지리상으로 볼 때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천연적 요새였으며 천년동안이나 발전을 거듭해 왔고 2500년 동안이나 외침을 받지 않은 도시였다.
그러나 당시의 비잔티움은 대제국 로마의 수도로서는 너무도 좁고 옹색하였다. 때문에 콘스탄틴은 비잔티움을 거대한 도시로 재건축하였고 도시의 미적, 예술적 감각을 살리기 위하여 로마 전 지역의 예술품들을 비잔티움으로 옮겼다. 그리고 주민 이주정책을 세워 로마 전 지역으로부터 주민들을 영입했다. 이로서 비잔티움은 세계적인 도시가 되었고 훗날<비잔틴제국>이라는 칭호를 들을 만큼 발전했다.
그는 새로운 로마를<콘스탄틴의 도시>를 의미하는<콘스탄티노플>로 명칭 했다. 새로운 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는 우상이 전혀 없었으며 따라서 우상을 섬기는 사원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콘스탄틴이 전국 각처에서 이주 시킨 예술품 중에 과거 우상숭배의 대상이었던 것들이 많이 있었으나 그것들은 이제 우상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재였고 예술품이었다. 콘스탄티노플에는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졌는데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산타소피아교회다. 산타소피아교회는 콘스탄틴이 마지막으로 세운교회로서 매우 아름답고 웅장했다.
2)로마제국의 분열.
새 수도로 천도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제국이 분열했다. 로마제국이 너무 방대하고 광활하여 통치가 어렵게 됨에 따라 콘스탄틴은 제국을 분할 통치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이미 디오클레시안황제에 의하여년>에 실행되었던 정책이다. 황제는 여러 명의 부황제<副皇帝>들을 임명하여 제국을 분할 통치하였고 데오도시우스 황제 때재위>에 로마제국이 아드리아해를 경계로 하여 동서로 완전히 분리되었다. 이때부터 동로마제국은 헬라 로마제국으로 불리어졌고, 서로마제국은 라틴 로마제국으로 불리어졌다. 로마제국의 분열은 곧 로마교회의 분열로 연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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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로마제국 정부에 의하여 합법적 종교로 인정된 것과 나아가서는 국가적 교회로 공인되어 보호받게 됨으로서 획기적인 부흥과 발전의 역사적 진군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기독교가 로마국가 정부에 많은 혜택과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리적인 차원에서 논증한다면 오히려 로마제국 정부가 기독교로부터 많은 은혜와 영향을 받은 것이다. 우리가 이미 여러차례 논증한 바 있듯이 인류역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신적주권에 의하여 섭리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차피 기독교의 부흥과 발전은 로마정부에 의하여 영향 받아지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하여 이루어져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기독교가 로마정부에 은혜를 입어 부흥 발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로마제국 정부의 역사가 기독교의 역사적 진군에 영향 받아 자신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이와같은 사실을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만약에 로마제국 정부가 기독교의 역사에 자신의 역사를 철저하게 맞추어 나갔다면, 그리하여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로마제국 정부가 철저하게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이루는 역사를 진군시켰더라면 로마제국은 영원히 세계적 제사장나라가 되어 세계를 이끌어 가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와같은 사실을 이미 이스라엘을 통하여 보고, 알고, 깨달은 바 있었다. 그리고 로마제국 역시도 이스라엘과 같은 전철을 밟았음을 보고 들어 알고 있는 것이다.
제2장:세계적 기독교로의 확장.
기독교는 여러 방향에서 로마제국의 전역으로 확장되어갔다. 로마제국에 의한 기독교 박해가 그토록 극심하였고 비기독교인들의 방해 공작이 기독교를 멸절시키기 위하여 그토록 집요하게 전개되었지만 오히려 그들이 이해할 수 없고 또한 놀랄 지경으로 기독교는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되어갔다. 이때에는 헬라어가 로마제국 전역의 공용어로 자리 잡았고 또한 헬라문화와 로마문화가 로마제국 전역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 양대 문화는 기독교가 로마 전 제국에 빠르게 확장되는 것을 크게 도왔다.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교회의 확산 과정은 크게 나누어 로마,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동부지역, 북아프리카지역 등등의 6개 지역으로 구분될 수 있다. 로마교회에 대해서는 앞장에서 어느 정도 소개했음으로 여기에서는 나머지 5개 지역의 기독교 확장에 대한 것만을 소개하기로 한다.
1.이탈리아지역 기독교.
기독교의 확장은 특히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지역에서 빠르게 진전되었다. 년>경에는 이탈리아반도 내에 만약100여개의 감독교구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을 참고로 하면 이탈리아 지역의 기독교 위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제국에 의한 기독교 박해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당시의 교회들이 모두 지하세계<카타콤>에서 예배를 드렸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박해로 인하여 많은 지역교회 건물들이 때때로 몰수되거나 또는 파괴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교회들은 자체적인 예배당을 건립하였고 어떤 지역 교회들은 넓은 교회 소유의 토지들과 교육시설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의 이탈리아 지역교회들은 로마교회와의 긴밀한 협조를 이루며 황제들의 개인적 박해와 로마제국의 정치적 박해에 공동으로 대처해 나갔으며 따라서 그토록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 위세가 오히려 날로날로 신장해 나갔다. 황제나 로마제국 정부는 이러한 기독교의 부흥성장을 이해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들이 기독교를 그토록 극심하게 몰아붙였던 이유 중에 하나는 탄압하면 탄압 할수록 오뚜기처럼 일어나서 확산되어가는 기독교의 알 수 없는 부흥성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황제와 로마제국 정부가 기독교를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기독교의 양적 부흥성장이었다, 그들은 날로날로 성장해가는 이탈리아 전역의 기독교가 어느 날 작심하고 연합하여 제국정부에 대항하게 되면 제국정부로서는 겉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들이 두려워한 다른 또 하나는 이탈리아 지역 교회들의 재정적 부흥 성장이었다.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 교회들은 숫자적 부흥성장과 함께 재정적인 부흥성장을 아울러 이루어갔다. 특히 재정적인 권력을 가진 귀족들과 일부 군 출신 및 상업적 부호들이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 그들의 재정적 권위와 아울러 군사적 능력이 겸비되어짐에 따라 황제나 제국정부는 당연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같은 이탈리아 지역에서도 아직은 헬라어와 헬라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지역들의 기독교화는 빠르게 진행되지 않았다. 언어의 장벽과 문화적 이질감 때문에 기독교의 진군이 쉽게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2.고울프랑스>의 기독교.
많은 초대교회 역사가들은 사도바울의 제자 그레스게딤후4:10>가 고울<프랑스>지방에 기독교를 처음 전파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예=헨리체드윅-Henry Chadwick의초대교회사-서영일역>그러나 그것은 고울 지방과 갈라디아 지방을 혼동한 것에서 비롯된 오류임이 분명하다. 갈라디아 지방은 현재의 터키인 소아시아지방의 캅바도기아 부근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울은 현재 유럽의 프랑스였다. <딤후4:10>에 그레스게가 갈라디아로 갔다는 것을 갈라디아에 대한 복음전파로 해석할 때에 역사학자들의 오류는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어떤 연유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에 갈라디아 지방에 유럽민족 중에 하나인 고울인들이 정착하여 살았는데 고울사람을 헬라어로<갈라타이-Γαλαται-Galatai>로 불렀던 때문에 갈라디아와 갈라타이를 혼동하여 고울지방에 대한 복음전파로 오해했을 수 있으며 다른 또 하나는 기원전 58년경에 케사르의 로마군이 고울을 정복했을 때의 그곳 지명<地名>이 갈리아로 불리웠기 때문에 갈라디아와 갈리아를 혼동해서 그러한 오류가 발생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갈리아가 로마에게 정복당하여 점차 로마문화와 연합되어져 갔을 때 역사가들은 갈리아문화와 로마문화의 연합적 문화를<갈로로만 문화>라고 표현하였다. 고울 지역의 갈로로만 문화는 매우 오랫동안 지속되어 고울 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될 때 까지도 여전히 남아있었다. 고울 사람들은 이탈리아와 근접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헬라문화, 로마문화. 또는 그레꼬로만 문화에 흡수되지 않고 자신들의 문화인 갈로로만 문화를 여전히 지켰던 것이다. 그것은 고울인들의 민족적 특성과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들은 조상대대로 전승되어진 문화적 전통과 종교적 전통을 쉽게 바꾸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문화, 헬라문화, 그레꼬로만 문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따라서 고울프랑스>지역의 기독교화는 상대적으로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고울인들의 민족적 자존심이나 종교적 문화적 전통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2세기경의 론계곡< Rhone Valley>에는 헬라인 기독교인들이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리용에 주재한 감독의 통치를 받았고 소아시아 교회들과 밀접한 교통을 하면서 교세를 크게 확장해 나갔다. 비엔나에는 집사의 인도 하에 교회들이 설립되었는데 그 교회들은년>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의 박해 때에 심한 고통을 당했으나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였고 영지주의자들의 극성스러운 활동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했으나 리용의 감독 이레네우스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안정을 찾았다. 4세기 초에 이르러 프랑스의 각 지역에 교회들이 설립되면서 아를르, 베종, 오튄, 로우엘, 파리, 보르도, 트리에르, 라임 등등에 감독 교구들이 설치되었고 그로인하여 프랑스 전 지역에 기독교가 확장되었다. 고울<프랑스>지방은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프랑스국가의 원조였던 프랑크족이 메로빙왕조<王朝>의 프랑크왕국<王國>을 세웠을 때부터 본격적인 기독교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프랑크족은 라인강중, 하류의 동안<東岸>에 거주했던 서<西>게르만민족들 중의 한 부족으로서 단일부족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살리족, 리부아리족, 카티족 등등의 여러 부족들이 연합을 이룬 민족 집단이었다. 프랑크족은 살리족이 지도적 위치에 있었으나 살리족들이 다른 부족들을 통치한 것은 아니었다. 여러 부족들은 비록 소수 부족들로서 살리족의 세력보다는 약한 부족이었지만 살리부족에 통치 받지 않고 각각 독립적인 상태에서 동맹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발전해 나갔다. 프랑크족은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지방에 이주하여 세력을 구축했는데 5세기 말에 이르러 살리족의 수장이었던 메로베우스 가문의 클로비스가 전 부족을 결속시킨 후 메로빙가왕조를 수립하여 국가적 형태로 발전했다. 메로베우스의 손자이며 메로빙가왕조가 배출한 최고의 영웅 클로비스는 기독교신자였던 부르군디족의 공주와 결혼했으며 전쟁에 출전할 때에 만약에 자기 아내의 신이 자신에게 승리를 준다면 기독교로 개종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한 후 약속을 지켰다. 그는년>성탄절날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고 그후로부터 대부분의 귀족들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년>에 부르군디족이 프랑크족에게 정복당하여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자 전국민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러나 메로빙가왕조는 그후에 계속하여 나약한 왕들을 배출함으로서 7세기경에 이르러 거의 몰락했고 현재의 수상<首相>에 해당하는 군신들이 국권을 장악했다. 이무렵, 모슬렘군이 스페인을 정복한 후 피레네산맥을 넘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유럽의 심장부를 향해 진군했다. 이때년>에 프랑크왕국의 군신들 가운데 하나였던 챨스마르텔은 프랑크군을 이끌고 투르에서 모슬렘군과 결전을 벌여 그들을 대패시켰다. 이때에 그는 실제적인 프랑크왕국의 실권자였지만 국왕의 권좌에 앉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 페핀은 바보라고 알려졌던 국왕 칠드릭3세를 제거하였다. 그는 당시의 교황이었던 쟈카리어스의 동의를 얻어 칠드릭 국왕을 폐위시켜 수도원에 유폐시켰다.그 후 페핀은 교황의 지시에 따라 보니페이스감독에 의해 국왕에 임명되었다. 페핀이 프랑크국왕이 된 사건은 일반역사와 기독교역사에 다 함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 주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중세 초기 유럽의 국가역사와 기독교 역사에 가장 훌륭한 업적을 이루었던 샤를마뉴 대제가 바로 페핀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고울<프랑스>기독교는 비록 늦게 출발되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지리적인 차원에서 크게 성장할 조건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고울은 우선 로마, 이탈리아, 소아시아 지역들과 가까웠기 때문에 로마 및 이탈리아의 신학과 신앙을 거의 여과 없이 받아들였다. 때문에 고울의 기독교는 정통주의적 신학과 신앙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고 그러한 신학과 신앙 때문에 훗날에는 로마교황청과 대등한 입장에 서게 되었으며 뿐만 아니라 한때는 로마교황을 주포하여 연금시키거나 또는 독자적인 교황을 세워 로마로부터 독립하기도 했다.
3.대영제국 기독교.
대영제국은 로마제국의 통치에 완전히 복속된 적이 한번도 없었다. 하드리안황제는 대영제국의 본토인 섬을 남북으로 양분하는 성벽을 건축했는데 그 남부는 로마제국의 일부였으나 북부는 픽트족과 스코트족들이 독립을 유지했다. 로마는 영국을 완전하게 장악하기 위하여 노력했고 브리튼에 대규모의 군단들을 파견했지만 대륙의 전황 때문에 브리튼에 주둔한 군단병력들을 철수시켜야 했다. 로마제국이 영국을 완전하게 장악하지 못한 것은 대륙의 크고 작은 부족들이 항상 로마군을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로마군단이 철수한 브리튼지역은 앵글족과 색슨족에 의하여 정복되었다. 앵글족과 색슨족들은 나중에 켄트 에섹스 써섹스 동, 앵글리아 웨섹스 노스움부리아 메르시아 등등의 일곱 왕국들을 건설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기독교도들이 아니었다. 영국에는 로마군이 주둔하는 동안에는 기독교도들이 존재하였지만 로마군단이 철수함에 따라 기독교도 함께 철수했음으로 기독교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영국에 기독교가 전파된 것에 대한 자료가 불분명함으로 영국의 기독교 전래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터툴리안과 오리겐이 자신들의 저서를 통하여 영국의 전 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다고 주장한 것이 사실이라면 영국의 기독교는 2세기 말에서 3세기 초에 이미 활성화 되었다고 보아야한다. 그러나 또 다른 자료들을 참고로 할 때에 영국의 기독교는 3세기 중반까지도 미약한 상태였음이 분명하다. 4세기 초에 아를에서 열린 종교회의에 영국의 런던, 요오크, 콜체스터에서 3명의 대표단이 참석했던 것과년> 에아리미눔에서 열린교회 회의에 참석한 영국대표 중에 세명이 여비가 없어서 외부로부터 지원을 받아야 했던 점을 미루어 볼 때에 영국교회는 4세기 중반까지도 매우 어려웠던 것 같다. 한편 영국의 기독교는 콘스탄틴의 부친이었던 콘스탄티우스의 적극적인 보호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하여 제국적 박해를 덜 받았다. 그러나 영국의 원주민들인 브리톤인들은 로마의 오랜 지배 하에서도 그레꼬로만 문화에 쉽게 동화되지 않았고 때문에 기독교의 번성 또한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초기 영국 기독교의 대표적인 인물은 펠라기우스였는데 그는 영국에서보다 로마에서의 활동이 더욱 활발했다. 년>경 성패트릭이 아일랜드감독이 되어 아일랜드지역에 선교할 때쯤에는 이미 앵글족과 색슨족이 영국을 침입하기 시작했었다.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앵글족, 색슨족은 원주민 브리톤인들에게 밀리어 코온웰, 웨일즈, 아일랜드지방으로 분산되어 쫒겨 갔는데 브리톤 원주민들 중에 기독교인들은 앵글, 색슨족들을 야만인 침략자들로 증오하여 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지 않았다. 성패트릭 감독이 남긴 문서 중에 브리톤 원주민 종교지도자들의 폐쇄적인 정책을 비난하는 것이 있는데 감독은 거기에서 그들의 폐쇄성 때문에 아일랜드지역 선교에 어려움이 많다고 불평하였다. 패트릭감독은 특히 기독교인이었던 쿠로티쿠스왕자의 군사들이 기독교에 입교하여 세례 받은 앵글, 색슨 인들을 체포하여 노예로 팔은 것에 대하여 강력하게 항의하는 공문서를 왕자에게 보내었다. 앵글로 색슨족들에 대한 전도는년>경 교황 그레고리가 켄트왕국에 복음을 전할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로마교황청은 항상 영국선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교황청은 로마군단의 브리톤 철수로 인하여 영국선교가 중단된 것을 매우 아쉬워하였으며 영국선교를 위하여 많은 준비를 했다. 영국선교에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은 대<大>그레고리였다. 그는 항상 영국에 선교사로 가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년>교황이 된 후에 본격적인 영국선교를 실행했다. 그레고리는년>에 자신이 소속되어 있었던 수도원 출신의 수도사 어거스틴을 지도자로 하는 일단의 선교사들을 앵글로족에게 파송했다. 어거스틴과 동료선교사들의 앵글로족 선교는 앵글로족들의 완강한 거부로 인하여 거의 불가능 했고 그리하여 선교를 포기하고 귀국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레고리는 그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고 계속하여 선교할 것을 명령했다. 선교사들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켄트왕국에 입국했다. 켄트왕국의 국왕 에델베르트는 기독교신자와 결혼했기 때문에 그들을 어느정도 환대해 주었고 얼마 후에 자신이 기독교로 개종함으로서 켄트왕국 전체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문을 열어주었다. 어거스틴은 켄트왕국의 수도인 켄터베리의 초대 대주교가 되었고 주변의 왕국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켜 나갔다. 따라서 켄터베리는 영국 전체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켄트왕국에 의하여 앵글로족과 색슨족 전체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영국의 기독교는 앵글로 색슨족에게 기독교가 전파된 때를 기점으로 하여 본격적인 발전을 이룩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브리톤 원주민들과는 달리 기독교를 국가적 민족적 종교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영국이 대영제국으로서의 위상을 갖추고 세계적인 영국으로 확장되어 갈 때에 영국의 깃발이 세워지는 곳 전역에 기독교를 전파했다. 이와같이 로마로부터 시작된 복음의 세계화는 앵글로 색슨족의 대영제국에 의해서도 이루어져 갔던 것이다.
한편 아일랜드는 로마제국에 예속된 적이 없었으나 로마제국을 통하여 기독교가 전파되어 자리 잡고 있었다. 아일랜드에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여러 경로를 통한 것이겠지만 역사학자들은 아일랜드 선교의 일등 공신을 성패트릭으로 단정한다. 패트릭은 브리튼 출신이었는데 소년시절에 아일랜드인 약탈자들에 의하여 포로가 되어 아일랜드에서 노예생활을 했다. 갖은 고생과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아일랜드에서 탈출한 패트릭은 복음을 받은 후에 아일랜드 전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수많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내 아일랜드로 돌아갔고 결국은 그곳에 기독교를 전래했다. 이러한 패트릭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아일랜드에 수도원들과 학교들이 설립되어 기독교학문과 신앙을 발전시켰다. 아일랜드는 유럽을 휩쓸던 침략과 약탈에서 항상 제외되었으며 따라서 비교적 안정된 상황 속에서 고대 로마제국의 문명과 문화를 보존하여 후대에 전했고 정통주의 기독교 문화와 학문들을 후대에 전하는 중요한 역할도 감당했다. 아일랜드는 여러 나라에 선교사들을 파송했는데 그중에 특히 스코틀랜드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스코틀랜드 기독교를 발전시켰다. 아일랜드에서 파송한 스코틀랜드 선교사 중에 가장 유명한 선교사는년>경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작은 섬 이오나에 정착하였던 콜룸바다. 이오나에 설립된 수도원은 아일랜드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이오나신앙 공동체를 본 받아 또 다른 수도원들이 건립되었다. 아일랜드의 스코틀랜드 선교는 결국 앵글로족들과 색슨족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결과를 만들었다.
한편 아일랜드의 기독교와 스코틀랜드의 기독교는 로마제국 본토의 기독교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점들이 있었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기독교는 로마교황이나 교황청에서 임명한 감독들의 지휘를 거부했다. 그들은 콜룸바로부터 전수되어진 신앙적 전통을 지켰고 수도원적 공동체들을 관장하는 원장들의 지휘를 받았다. 때문에 어거스틴 대주교의 지휘를 받는 로마교황청 소속의 교회와 아일랜드, 스코틀랜드교회들 간에 마찰이 일어났다. 특히 부활절을 지키는 날자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한편에서는 금식을 하면서 슬퍼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축제 분위기에서 잔치를 하게 됨에 따라 기이한 양상이 벌어졌다. 그중에서도 노스움브리아왕국의 종교적 마찰이 가장 심각했다. 노스움브리아 국왕은 아일랜드 전통을 따르는 반면에 왕후는 로마전통을 따랐기 때문에 갈등이 특히 심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어려운 점들을 해결하기 위하여년>에 휘트비에서 종교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로마측은 베드로가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천국문의 열쇠를 받았기 때문에 로마의 전통이 콜룸바의 전통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했다. 이때에 국왕은 베드로가 천국문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인지를 확인한 후에 마음을 바꾸어 로마의 전통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국왕은 이때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나는 베드로에게 순종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천국 문 앞에 섰을 때에 베드로가 천국 문을 걸어 잠그고 열어 주지 않으면서 나를 쫒아 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국왕이 로마의 전통을 따르기로 결정함으로서 그 문제는 해결되었다. 노스움브리아를 비롯한 영국지역의 교회들은 콜룸바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로마의 전통을 따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4.동로마지역의 기독교.
동로마지역에서는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가 기독교의 중심지역이 되었고 5세기 경에는 예루살렘에 대주교 교구가 설치되어 팔레스타인 지역 교회들을 이끌어갔다. 2세기 말엽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클레멘트가 증언하는 바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베드로의 제자인 마가<벧전5:13>에 의해 설립한 것으로 나타난다.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안디옥교회와 더불어 동부지역 교회를 대표하였고 신학교를 세워 안디옥학파, 알렉산드리아학파를 이루는 동방교부, 동방교회의 신학적 본산이 되었다. 그러나 앞으로 자세하게 논의 되어질 것이지만 알렉산드리아교회와 안디옥교회는 헬라 철학적 신학사상으로 인하여 동방지역의 기독교를 거의 이단적, 비진리적 교회로 오류 시키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러한 사실은 로마교회가 2세기 중엽에 알렉산드리아 교회에 신학자들을 보내어 마르시온주의와 발렌티누스주의자들의 가르침에 현혹되지 않도록 조처한 것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한편 동로마제국의 동부지역 기독교를 대표하는 이집트의 기독교에 대해서도 전승되어지는 확실한 자료들이 많지 않다. 전승되어지는 파피루스의 파편들을 보면 2세기경에 나일강변을 따라 기독교가 전파되어졌음이 나타난다.
5.북아프리카지역 기독교.
칼타고를 중심으로 하여 확장되었던 북아프리카의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는 년>경에 라틴어로 기록된 누미디아지방 스킬리움의 순교자들의 행전을 통하여 처음으로 소개되어졌으나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 볼 때에 북아프리카지역의 선교는 이미 그보다 더욱 오래전에 시작된 것으로 보여 진다. 학자들은 칼타고가 무역도시였기 때문에 당시에 가장 큰 무역도시였던 레반트로부터 복음이 전래되었거나 또는 로마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에 의하여 복음이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년>경 터툴리안이 활동하던 시대에 북아프리카의 칼타고에는 수많은 감독교구들이 설립되어 있었다. 터툴리안의 변증서 제7권에는 북아프리카 교회들에 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비록 어저께 시작했으나 당신들이 가진 모든 장소를 채웠다. 즉 도시들과 섬들과 요새와 촌락과 시의회와 궁중과 원로원과 재판소들을 보라 우리는 당신들에게 단지 신전만을 남겨주었을 뿐이다.>
북아프리카 교회는 서방교회의 신학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다. 훗날 로마교구가 전체 기독교의 수도<首都>적 위치에 올라 교황청이 신설되었지만 신학적인 교리 정립문제가 한창 전개되어질 때의 서방교회 신학은 거의 북아프리카학파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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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에 입성하자마자 폭탄적인 박해를 받았던 기독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2세기도 채 않되는 짧은 기간에 전 세계를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를 가볍게 보고 무시했던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 학문적, 사상적, 지도자들은 그토록 극심한 각종 악조건 속에서도 활화산처럼 폭발적으로 타오르며 확산되어 가는 기독교의 세계화를 바라보면서 절대적 불가능을 필연적 가능으로 전환시키는 기독교의 권위에 크게 놀랐다. 그들은 또한 기독교가 일반종교와는 전혀 달리 사상적, 학문적, 체계를 이루는 가운데 당시 최고를 자랑했던 헬라문화, 로마문화, 그레꼬로만문화, 갈로로마문화 등등을 여지없이 격파하고 굴복시키면서 비호같이 내달려 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 능력적 권세 앞에 스스로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렇듯 인류역사의 모든 부분을 때로는 굴복시키고 때로는 아우르면서 그토록 짧은 기간에 전 세계를 정복했던 하나님의 기독교역사를 보고 알고 깨달으면서 그 역사를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경이로움과 장엄함으로 찬양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하여 이와같은 아니 이보다 더 한층 차원 높은 역사적 승리들을 전개하시게 될 하나님의 기독교역사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된다. 그리고 아울러 우리 자신들을 비롯한 하나님의 수많은 종들이 과거의 기독교역사에 쓰임 받았던 선배들처럼 그렇게 귀하게 쓰임 받게 될 것을 또한 기대하면서 벅찬 감격을 달랠 길이 없다.
제8부. 초기 신약교회시대의 이단들.
제1장. 기독교와 철학의 충돌.
초기 신약교회시대에 많은 외적요소들이 기독교를 위협했는데 그중에 하나가 헬라의 철학 사상이었다. 앞장에서 이미 강조한바 있듯이 하나님께서 헬라어를 비롯한 헬라문화를 기독교 역사에 적용하셨던 이유는 장차 기독교신학을 조직적, 체계적으로 정립함에 있어서 기독교신학의 위대함을 철학사상을 대비시켜서 증명하는 동시에 헬라 철학적 용어들과 학문적 원리들과 방법들을 통하여 기독교신학을 정립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헬라어, 헬라문화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지 못했고 기독교신학이 헬라철학보다 우선함도 알지 못했다. 특히 안디옥, 알렉산드리아로 대표되는 동부 기독교 지도자들은 오랫동안 전통적으로 계승되어온 헬라문화와 헬라철학에 젖어 있었다. 그들은 특히 쏘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등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했다. 때문에 그들은 헬라철학으로 기독교 신학을 변증하고 정리하지 않고 반대로 기독교신학으로 헬라철학을 정리하고 변증하였다. 때문에 초기 신약기독교는 여러 영역에서 헬라철학과 충돌했다.
1.기독교신학에 영향을 준 고대철학.
우리는 여기에서 초기 기독교신학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하여 초기 기독교신학에 막대한 영향을 준 서양학문의 원조<元祖>인 고대그리스 철학을 잠시 살펴본다.
1)서양학문의 출발.
서양학문은 철학으로부터 출발되었고 철학의 출발은 그리스의 고대 도시국가인 밀레토스라는 항구도시<港口都市>를 통하여 시작되었다. 밀레토스는 아테네로부터 에게해<海>를 건너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서쪽 해변<사모스섬 남쪽>에 위치한 항구도시였다. 현재의 유적은 해안선에서 9km 떨어진 내륙에 있으나 고대에는 마이안도르스강<江>이 흘러들어가는 만내<灣內>에 돌출한 곶<串>에 건설된 항구도시였다. 고대그리스의 시인이며 <오딧세이아>의 저자인 호메로스는 밀레토스를 갈리아인<人>의 도시라고 했으며 미케네시대에는 상업도시로서 크게 번성하였다 .B.C.585년경의 밀레토스는 도시국가의 이념과 해상교역을 대표하는 훌륭한 도시국가로서 고대그리스의 낭만적 문화와 경제적 풍요를 함께 누렸던 아름다운 곳이었다. 밀레토스는 B.C.7세기 경에 이르러 동<東>지중해와 흑해 연안에 약70여 개 이상의 식민도시들을 건설하였으며 이집트의 나일, 메타 등등에도 상업적 식민도시들을 건설하였다. 때문에 밀레토스는 당시 도시국가들의 소식을 전달하는 뉴스메이커였고 문화적 교류를 중개하는 교차로였으며 각종 문화와 예술을 표현하는 공연장이기도 하였다. 특히 흑해를 통하여 전개되었던 동방과의 무역교류는 오리엔트의 인본주의적, 지적, 유산과 문화와 전통들을 도입시켰고 이로서 전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지식들이 날마다 전달되었다. 때문에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부유하면서 시간이 남아돌았던 지식인들이 밀레토스에 모여 들었다. 그리하여 밀레토스는 항상 분주하고 변화는 가운데 계속하여 발전했다. 밀레토스의 이러한 지리적, 시대적, 역할 속에서 철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이 탄생하고 발전했다. 특히 올림푸스산을 배경으로 하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들은 신적 존재에 대한 무한한 세계를 인간들에게 고지했고 이에 영향 받은 밀레토스인들은 신과 인간의 역사적 교류를 자신들의 지적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나타내는 일을 하나의 운명적 사명으로까지 인식했다. 그리하여 훗날 역사가들이<이오니아 자연철학>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던 철학세계가 탄생되었고 탈레스, 아낙시만더, 아낙시메네스 등등을 주축으로 하는 소피스트들의 집단인<밀레토스학파-이오니아학파>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밀레토스학파의 뒤를 이어 피타고라스학파, 소크라테스학파, 플라톤학파, 아리스토텔레스학파 등등의 거장<巨長>들을 중심으로 하는 학파들이 나타나 각종 영역의 학문세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2)고대의 철학자들.
우리는 여기에서 고대의 철학자들 중에 초기 기독교신학에 많은 영향을 준 몇몇 철학자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쏘크라테스
수많은 명문학파들과 위대한 철학자들을 배출한 헬라철학은 특히 소크라테스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쏘크라테스는 B.C.470년에 아테네에서 출생했다. 쏘크라테스의 용모는 심히 불규칙하여 보는 이들을 긴장시켰으나 그와 대화를 나눈 사람은 한결같이 그에게 매료되었다. 쏘크라테스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는 이미 청년시절부터 대단한 천재로 각광받았다. 당시의 사람들은 쏘크라테스를 쏘피스트들 중의 하나로 생각했다. 그러나 쏘크라테스는 쏘피스트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비평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쏘크라테스는 많은 사람들과 끊임없는 문답을 했기 때문에<문답자 쏘크라테스>라고 불리었으며 그의 문답법을<쏘크라테스 문답법>이라고 한다. 반면에 그는 언제나<인간은 아직도 그것을 모른다>라는 결론을 내리어 상대 문답자가 자신의 무지를 스스로 인정하게 했다. 쏘크라테스의 문답론을<무지론>이라고하며 그의<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격언으로 전해진다. 쏘크라테스는 문답자들에게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항상 노력하고 발전하라는 의미에서<무지론>을 전개했다. 그러나 상대 문답자들은 나중에<쏘크라테스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 쏘크라테스의 음흉한 농간에 조롱당했다고 분노하였고 쏘크라테스는<회의론 자><파괴론 자><패배론 자>등등의 오명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결국은 고발당하여 재판정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처형되었다.
쏘크라테스는 단 한권의 저서도 저술하지 않았다. 쏘크라테스에 대한 모든 자료는 그의 측근들과 추종자들에 의하여 전승되었기 때문에 그의 사상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전승되어 과연 어떤 것이 진실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고 역사가들은 그것을<쏘크라테스 문제>라고 했다. 역사가들은 쏘크라테스의 제자 중 가장 걸출한 제자였던 플라톤의 기록을 토대로 하여 쏘크라테스를 이해한다. 따라서 우리도 플라톤을 통하여 정립된 쏘크라테스의 사상을 그대로 접수한다. 쏘크라테스의 사상은 곧 플라톤의 사상이므로 이 문제는 플라톤의 사상을 통하여 소개한다.
(2)플라톤
쏘크라테스의 사상은 플라톤에 의하여 집대성되었고 발전되었다. 쏘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사상은 우주, 국가, 정치, 문화, 종교, 과학, 역사 등등의 다양한 차원에서 역대 소피스트들의 사상을 폭넓게 초월하였다. 때문에 그들의 철학사상은 오랫동안 헬라 철학자들의 사상으로 전승되어졌고 소위 지식인들을 자처하는 자들은 스스로 자신들을<쏘피스트><쏘크라테스주의><플라톤주의><신플라톤주의>등등으로 자처하면서 종교, 정치, 문화, 예술 등등의 각종 영역들을 섭렵하고 호령했다.
①플라톤의 생애.
플라톤은년>에 고대의 도시국가였던 아테네의 저명한 귀족가문에서 출생했다. 이때에 장차 그의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는 41세였고 아테네는 밀레토스학파의 영향을 받은 소피스트들의 다양한 영역적 활동 속에서 문화적, 예술적 번영을 크게 누리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어린 플라톤에게 가문의 혈통을 고대 아테네의 왕족이라고 가르쳤으며 더욱 거슬러 올라가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이라고 했다. 플라톤의 모친은 페릭티오네스였는데 그의 오빠인 카르미데스와 사촌인 크리티아스는 년>에 있었던 페로폰네소스전쟁에서 아테네가 몰락한 후 단 기간 동안 아테네를 이끌었던 과도적 정치체제의 지도자들이었다. 플라톤의 부친은 플라톤이 아직 어렸을 때에 사망했고 그의 모친은 남편이 사망한 후 당시의 저명인사였던 페리클레스의 친구, 피릴람페스와 재혼했다. 본래 귀족 가문출신이었던 플라톤 가문은 그의 모친이 귀족들과 결혼을 통한 연합을 이루는 가운데 아테네의 저명인사 가 문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자라난 플라톤은 어린시절부터 예술, 정치, 문화 등등에 관한 소피스트들의 철학사상을 두루 섭렵했다. 플라톤은 펠로폰네소스전쟁과 그의 스승이었던 쏘크라테스의 죽음을 통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정치적인 사상을 수립하였다. 플라톤은 이때에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위대한 정치적 지도자들을 배출할 수 없는 반면에 오히려 쏘크라테스와 같은 위대한 인물들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플라톤은 아테네의 붕괴와 쏘크라테스의 사형집행 과정을 통하여 민주주의 정치 체제에 대하여 크게 실망하였다. 때문에 그는 권위와 지식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정치 지도자에 대한 구상을 하게 되었다. 플라톤은 그러한 정치 지도자상<像>을 배<乘>를 통하여 정립했다. 그는 국가는 하나의 배로 비유할 수 있으며 배가 경험과 지식을 갖춘 권위적 선장에 의하여 운항되어야 하듯이 국가도 정치에 대한 충분한 경험과 지식을 갖춘 권위적 통치자에 의하여 운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은 아테네에 만연하였던 다양한 형태의 철학들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플라톤의 철학사상을 형성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쏘크라테스의 철학적 가르침과 그의 철학적 삶이었다. 플라톤은 어릴 때부터 쏘크라테스의 지도를 받았기 때문에 그의 사상과 삶의 유형은 거의 쏘크라테스의 것과 같았다. 플라톤의 철학사상은 쏘크라테스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전문화 된 기술적 행동이 아니라 삶의 방식 그 자체였다. 철학은 과학과 인간행동의 영역에 공히 적용되기 때문에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지적 능력뿐만 아니라 도덕적 품성도 요구된다는 것이 플라톤의 철학 사상이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모든 지식의 분야<分野>들이 추구하고 목적하는 궁극적인 사명은 인간들로 하여금 우주의 전체적인 체계와 조화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인간들은 스스로 노력하면서 철학적인 삶을 정열적으로 사는 가운데 철학에 내포된 각종 영역적 지식들을 이해하고 깨닫고 적용하면서 우주 전체적인 영역에 자신을 적용시키는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쏘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플라톤 역시 자신이 완전한 지식이나 절대적 진리를 발견했다고 자부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지식적 존재가 되는 확실한 방법은 모든 영역적 사상들에 대한 끈임없는 변증이라고 생각했다. 플라톤은 변증법이란 대화나 논술의 기술로서 어떤 문제에 대한 학설<學說>이나 주장<主張>에 대하여 더 이상의 총체적인 이의<異意>와 의문<疑問>과 반론<反論>이 있을 때에 그것에 대한 합리성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고 확인시켜 주는 것이거나 또는 반대로 그것에 대한 총체적인 이의<異意>와 의문<疑問>과 반론<反論>을 논리적으로 제기하는 기술이라고 정의했다. 쏘크라테스는 매우 겸허하고 포용력 있는 삶을 살기위하여 그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조건과 방법을 스스로 세운 후에 그것에 대한 변증을 긍정적 차원과 부정적 차원에서 끊임 없이 시도했다. 쏘크라테스는 실제로 제자들을 문하에 거느린 적은 없었지만 플라톤은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쏘크라테스의 영원한 제자였으며 쏘크라테스는 또한 평생에 전혀 작품을 남기지 않았으나 플라톤은 스승, 쏘크라테스의 사상과 학문과 철학적 삶을 자신의 저술들을 통하여 정립하고 보존함으로서 그것을 후세에 전했다. 플라톤은 쏘크라테스의 사형을 지켜보면서 정치에 대한 환멸을 느꼈고 그리하여 어릴 때부터의 꿈이었던 정치가에 대한 꿈을 접어버렸다. 그러나 플라톤은 정치가 시대와 역사에 주는 영향이 얼마나 대단하고 중요한가? 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가들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일에 전념했다. 플라톤이 자신의 저술인 대화편<對話篇>들을 거의 완성하였던 무렵인년경> 그의 나이 40세 때에 그의 학문적, 사상적, 권위는 그 방면의 정점<頂點>에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는 아테네근교, 그리스의 전설적 영웅 아카데모스를 모신 신역<神域>에 아카데미아학원을 세웠다. 아카데미아학원은 서구 역사상 최초로 설립된 대학<大學>이었다. 아카데미아학원이 지향했던 주요목적은 본원적인 탐구를 통하여 철학적, 과학적,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었고 플라톤의 주요 관심사는 정치가들에 대한 교육과 훈련이었다. 플라톤은 정치가들의 능력과 권위가 시대와 역사를 주관한다는 인식의 전제 하에 정치가들에 대한 훈련과 교육을 매우 철저하게 시행했다. 플라톤은 정치 지도자들의 정신<正信>은 속견<俗見>과 감정을 배제할 수 있어야 하고 엄격한 사유<思惟>를 통해 실재를 직시하고 지식에 입각하여 상황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 정치 지망생들에게 수학, 천문학, 화성학<和聲學> 등등을 포함한 과학교육을 시행했고 실천적 삶을 위주로 하는 지적<知的>철학 교육훈련을 엄격하게 시행했다. 이와같은 플라톤의 엄격한 교육과 훈련으로 인하여 학문적 이론만을 내세운 채 실제적 삶은 무시했던 허구적 쏘피스트들의 철학체계는 논박과 비판의 대상이 되어버렸고 쏘크라테스의 실천적 철학을 추구하는 진리적 쏘피스트들이 아카데미아학원에 몰려들었다. 플라톤은 20여년간 아카데미아학원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영역들을 계발했고 후진양성에 주력하다가 년경> 향년 80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②플라톤의 사상.
플라톤의 사상은 이미 앞 장에서 언급한바 있듯이 거의 대부분 쏘크라테스의 사상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쏘크라테스의 철학 사상은 그가<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것이 증명하듯이 그 자신의 무지<無知>를 깨닫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플라톤은 쏘크라테스의 무지론<無知論>을 발전시켜 쏘피아와 이데아의 철학세계를 구축했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인식론<認識論>을 비롯한 많은 학문 체계를 정립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플라톤의 사상 중에 기독교 신학역사에 영향을 주었던 몇 가지를 요약하여 소개한다.
A.이데아론.
이데아형상-形相>라는 용어는 플라톤 이전에도 쏘피스트들에 의하여 사용 되어졌었지만 플라톤에 의하여 철학적인 학문적 용어로 세련되게 다듬어졌다. 이데아는<보다, 알다-idein-를 의미하는 동사에서 파생된 용어>로서 원래는<보이는것, 모양, 모습, 물건의 형식이나 종류를 의미하는>단어였다. 그러나 플라톤 철학에서의 이데아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플라톤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 불변히 존재하는 것을 이데아라고 했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설명함에 있어<생성에 대한 존재><다(多)에 대한 하나><타(他)에 대한 동(同)><인간의 육안(肉眼)이나 감각(感覺)을 통하여 보게 되거나 느껴질 수 없는 것><오직 영혼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정신, 사상, 개념, 이념>등등의 형상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데아는 아이데스보이지 않는 것>라고 불리우며 이성<理性>만이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는 영원불변하고 단일한 세계를 이루는 것이며 때문에 가시적이면서 끊임없이 변천하는 잡다한 사물 세계와는 엄격하게 구별되어진다. 철학자,<특히 플라톤과 같은>들이 인식하는바에 의하면 생성하는 감각 세계의 가시적인 사물들은 이데아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은 진실한 존재가 아니다. 철학자들에게 있어서 진실한 실유<實有-ousia-우시아>즉 궁극의 실재를 추구하는 진지<眞知-필로 쏘피아-Philo-Sphia-진실한 지식, 진실한 지혜, 진실한 실유>는 오직 이데아일 뿐이다. 플라톤의 필로쏘피아는 곧 쏘크라테스의 필로쏘피아다. 그러나 쏘크라테스의 필로쏘피아는 <자신을 모르는>무지<無知>적인 것에 머물러 있는 반면에 플라톤의 필로소피아는 이데아를 통하여 그 무지를 초월하는 필로쏘피아이다.
B.우주론.
플라톤의 중요 관심사는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이었지만 그는 과학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플라톤의 자연에 대한 이론인 물리학은 주로<티마에오스-플라톤의 대화편>을 통하여 나타난다. 플라톤 시대의 과학은 매우 고착상태에 빠져서 더 이상의 진행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당시에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아낙시만더, 아낙시메네스, 데모클레이토스 등등의 과학분야 거장들의 주장들은 상호 모순은 물론이고 자체적인 모순까지 겹치고 또 겹쳐서 전혀 믿을 수가 없었다. 쏘크라테스는 이미 그들의 주장에 환멸을 느껴서 그 분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았으며 플라톤 역시 같은 입장이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플라톤은 과학<특히 자연과학>에 집착하게 되었고 그것이 발전하여 우주에 대한 자신의 사상 체계를 구축하였다. 플라톤은 피타고라스학파의 수학원리를 적용하여 우주관을 정립하였다. 그러나 피타고라스학파가 만물을 수<數>라고 묘사하고 그 수<數>에 근거한 수학<數學>원리에 의하여 우주를 설명한 반면에 플라톤은 만물을 수라고 묘사하지 않고 만물은 수<數>를 분유<分有>한다고 말하였으며 따라서 사물들이 수를 분유하는 차원에서의 수학원리를 적용하여 우주론을 전개하였다. 당시의 우주관은 데모클레이토스의<우연적결합론>으로서 <우주는 어떤 우연적인 결합에 의하여 생성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플라톤은 데모크레이토스의<우연적결합론>을 반대하고<목적적우주론>을 주장하였다. 플라톤은 우주가<절대적 지고의 실유가 어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만물에 존재적 근거를 제공하며 또한 만물의 배열과 운행을 주관한다.>고 하였다. 플라톤은 세계는 수없는 변화와 불완전으로 가득차 있으면서도 존재적 목적에 따라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하였고 이러한 우주만물의 배후에는 우연하면서도 계기적인 메커니즘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플라톤은 이와같은 자신의 주장을 우주에 만연되어 있는 행성들이 일련의 엄밀한 기하학적 간격에 따라 상호조화를 이루어 배열되어 있는 것과 그 행성들의 운행 역시 기하학적 법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궤도를 따라 운행되어 지고 있음을 근거로 변증하였다.<훗날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러한 사상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실유 존재하심에 대한 우주론적 논증과 목적론적 논증이 성립되었다.>그러나 플라톤이 말하는 절대적 지고의 실유는 종교적 차원에서의 신적 존재가 아니라 철학적 차원에서 의<정신-이데아>였고 따라서 그의 우주론은 종교적 차원에서 의<창조론>이 아니라 철학적 차원의<생성>이었으며 우주만물의 질서나 운행 역시 종교적 차원에서의 창조주에 의한 섭리가 아니라 철학적 차원에서의 수학적, 또는 기하학적 배열이나 그에 따른 운동에 불과하였다. 플라톤은 만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정신이기 때문에 우주에는 지성적 작용과 질서가 존재하는 것이며 이러한 역학관계는 인간과 세계 사이에도 유사하게 적용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정신과 인간은 우선 지적이고 영원한 요소를 함유하고 있으며 다음으로 감각적이고 일시적인 요소를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이원성<二元性>이 영혼과 육신의 결합적 존재인 인간을 통하여 표현된다고 하였다. 플라톤은 이와같은 차원에 신에 대한 개념과 영혼불멸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였는데 그것은 이미 소크라테스가 정립한 사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지고의 절대적 신에 대한 개념과 영혼불멸에 대한 개념은 일반종교나 기독교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플라톤은 그것을 종교적 용어가 아닌 철학적 용어로 다듬어 정리하였다. 플라톤은 우주만물의 생성 원인을<정신>또는<동인-動因>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때의<정신>과 <동인>은 곧 조물주<造物主-Demiourgos>를 의미한다. 플라톤은 우주론은 결국 이데아론을 근거로 한 것이다. 플라톤의 우주론을 요약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플라톤의 우주론>
*우주는 두 개의 세계로 구분되어 존재하는바 하나는 생성의 세계<가시적세계-현상세계>이며 다른 또 하나는 존재의 세계<이데아의 세계-실유의 세계-불가시적 세계>이다. 생성의 세계는 항상 존재의 세계를 분유<分有>하며 존재한다. 그러나 생성의 세계는 존재의 세계를 모방하고 추구함으로서만 비로소 존재의 세계를 분유하며 존재할 수 있다. 생성의 세계와 존재의 세계 사이에는 실물과 그림자, 실물과 모상<模像>의 비례가 있다. 인간의 필로쏘피아는 생성 세계에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가시적인 세계와 천상의 실유적 존재 세계와의 유사점을 발견하는 가운데 천상의 참 존재<실유>를 상기하여<상기설-想起說>그 실유의 세계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에로스설>이다.
세계는 변화와 불완전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분명한 목적과 질서가 있음을 보여준다. 우주는 일련의 엄밀한 기하학적 간격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어져 있으며 그 간격을 면밀하게 계산해 보면 신비스러울 정도의 조화로운 비율이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우주는 그 진행에 있어서도 질서정연함과 신비스러운 조화를 유지한다. 우주가 이렇듯 조직적, 질서적, 조화를 이루면서 배열되어 존재하고 운행된다는 것은 그들의 존재함과 진행함의 뒤에 어떤 필연적이고 계기적인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주는 것이며 또한 그 원인이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우주에게 그러한 질서와 조직과 조화를 부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물에 질서와 조화를 부여하는 것은 정신<情神>이다. 따라서 우주에 질서와 조화를 부여한 것은 어떤 정신의 지성적 작용이다. 한편 인간과 세계는 상호유사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양자는 우선 지적이고 영원한 요소를 함유하며 그 다음으로는 감각적이고 일시적인 요소를 함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원성<二元性>은 영혼<정신>과 육신의 결합으로서의 인간을 통하여 표현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영역세계 속에도 영혼<정신>이 존재하며 모든 영역세계는 그 영혼<정신>을 통해 질서 있고 조화롭게 배열되는 것이다. 생성을 거듭하는 우주만물은 어떤 필연적인 동인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때의 필연적인 동인은 곧 조물주(Demiurge)를 말한다. 조물주는 정신들 중에 최고, 최대, 최상의 절대적 지고의 존재로서 영원불멸의 존재이다. 그러나 조물주는 새로운 사물들을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그는 다만 이미 존재하는 사물들을 질서 있고 조화롭게 배열할 뿐이다. 사물들은 어떤 존재에 의하여 창조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물들은 가장 처음에<이데아>또는 어떤 정신에 의하여 형상화 되어지며 조물주가 형상화 되어진 정신 또는 이데아들을 조직적, 체계적으로 조화 있게 배열함으로서 사물들이 형성되는 것이다. 조물주는 세계를 형성시킴에 있어서 자신의 형상을 닮은 선한 세계로 형성하고자 했으나 세계는 그의 뜻대로 형성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이데아 또는 정신의 세계는 지성과 이성의 세계인 반면에 상대적인 필연<必然>, 즉 지성과 이성을 방해하는 또 다른 존재인 악<惡>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물주에 의해 형성된 모든 선한 영역세계는 그것에 반대하는 필연인 악과 계속해서 조우<遭遇>하고 대결하게 된다.*
위와같은 개념에 의하여 플라톤은 절대적 권능과 권력을 가진 지고<至高>의 신<神>을 주장하였고 따라서 일반 종교가 섬기는 저급한 신들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적인 개념에서 비롯된 사상이 아니라 철학적 개념에서 비롯된 사상이었다.
한편 쏘크라테스나 플라톤이 말하는 지고적 신의 경지는 기독교의 하나님에 비교할만한 가치조차 없는 존재로서 너무나 허약하고 초라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말하는 지고적 신의 능력과 경지는 당시의 모든 종교들이 섬기는 신들에 비하여 훨씬 높고 넓은 경지에 있었다. 때문에 아직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경륜이 없었던 초기 기독교 당시의 철학자들은 기독교의 하나님보다 쏘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말하는 신적 존재가 더욱 우월한 존재인 것으로 인식했다. 특히 쏘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소개하는 신적 존재가<지고의 절대적 신>이라는 헬라 철학적 용어로 표현되었을 때 당시의 문화적 종교적 관습에 의하여 그<지고의 절대적 신>은 당연히 기독교의 하나님 보다 우월한 존재로 받아 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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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기에서 플라톤의 유한성과 고집스러운 편협성을 함께 본다. 플라톤이 절대적 지고의 실유적 존재를 말하면서도 그 존재를 간단하게 최고의 유일한 신적 존재라고 말하지 못하고 정신, 이데아, 동인, 데미우르고스 등등의 다양한 존재로 묘사하는 것과 또한 그가 우주만물의 기원을 말함에 있어서 창조라는 가장 근본적인 원리를 무시하고 정신, 이데아, 동인, 데미우르고스 등등에 의한 생성을 고집하는 것은 그의 유한성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플라톤의 학문적 경륜을 고려할 때에 그것은 오히려 그의 고집스러운 편협성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는 분명히 창조의 원리가 무<無>로부터의 창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로부터의 창조는 창조자 자체의 무로부터의 창조 즉 창조자의 자존성을 의미한다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이러한 우리의 주장을 지나친 가설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당시에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지역에는 이미 예루살렘을 떠나 분산되어진 히브리인들의 야훼사상이 폭넓게 전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그러한 창조주와 창조원리를 전혀 무시하고 오히려 그리스의 전설적 하급신인 데미우르고스를 조물주로 등장시켜 그에 의한 생성을 고집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그의 유한성이나 또는 편협성 때문이 아니라 당시 최고의 소피스트임을 자부하는 그리스 최고의 철학자로서의 자존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본래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최고적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쏘피스트들의 자존심은 인간적 자존심의 경지를 이미 초월한 것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하게도 이러한 플라톤적 고집스러운 편협성과 학문적 자존심이 모든 학자들의 역사적, 전통적 공통분모로 계승되어져 왔다. 그리고 이러한 고집적 편협성과 학문적 자존심은 특히 기독교 신학자들에게 더욱 극심하게 계승되어져 내려왔다. 초기 기독교의 신학자들이 동, 서 양대 진영으로 갈라져 피 어린 사투를 전개하였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으며 현대 기독교가 수많은 분파로 갈라져 하나님의 섭리보다는 자신이 소속된 교파의 입장에 더욱 전념하고 있는 현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C.인식론<認識論>
플라톤의 사상 체계는 이데아를 통한 무지로부터의 탈피 방법을 체계화 하여 정립한 것으로서 즉, 이데아를 통한 인식<認識-알고, 느끼고, 깨우침>론이다. 플라톤은 자신의 인식론을<동굴의 비유><분할된 선(線-line)의 비유><형상론-이데아론>등등을 통하여 정립했다. 플라톤은<동굴의 비유>에서 인간은 보는 것 안에서만 인지하게 된다는 원리를 제시하면서 이데아가 인간의 보는 범위를 확장시켜줌으로서 인간의 인식범위가 넓어지게 된다는 원리를 정립시켰고<분할된 선의 비유>를 통해서는 인간이<상상><신념><사고작용><완전한 지혜>의 4단계를 거쳐서<최고의 인식>차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주장했으며<형상론>에서는 인간은 우주적 실유세계인 영적세계<이데아>의 조명을 통하여 진정한 실유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플라톤의 인식론은 본인이 진실로 그렇게 생각했는지에 관계없이 자연스럽게 쏘피스트들의 지<知>적 능력을 일반인들의 그것에 비하여 매우 고등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버렸다. 초기 기독교시대에 영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스스로 고등한 지적존재들로 구분했던 것도 사실은 플라톤의 인식론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D.영혼론<靈魂論>
플라톤의 영혼에 대한 개념은<육체묘표설-肉體墓標說>이다. 플라톤은 영혼이 원래 천상에 선재해 있으면서 참 실재의 관조<觀照>를 즐겼으나 사악한 생각으로 인하여 지상으로 전락<轉落>되어졌고 땅<육체>속에 매몰되어 생물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초기 기독교시대, 알렉산드리아학파의 거장이었던 오리겐이 영혼선재설을 주장한 것은 플라톤의 영혼선재설에 영향 받은 것이다.>
한편 플라톤은 영혼을 이성<理性-reason>기개<氣槪-spirit>욕망<慾望-appetite>등등의 3가지 차원으로 구분했다. 그는 모든 인간이 분유<分有>하고 있는 내적 혼란과 갈등에 대한 공통의 경험을 근거로 하여 영혼의 3분법을 추출했다. 인간에게는 첫째 목적이나 가치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비롯되어지는 이성적 행위가 있으며, 둘째 행동을 유발시키는 충동<기개>가 있으며, 셋째 현상적 사물세계와 관련된 욕망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영혼을 3개의 상이<相異>한 영역으로 구분한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영혼 개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플라톤의 영혼론>
인간의 육신은 육신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다. 따라서 인간의 사고<思考>나 행동은 육신의 삶의 근거인 영혼에 의해서 비롯된다. 인간의 영혼은 이성<理性-reason> 기개<氣槪-spirit> 욕망<慾望-appetite>등등의 3가지 차원으로 구분되어지는데 이것은 인간의 내적 갈등이 이성, 기개, 욕망 등등의 세가지 행동 양상으로 표출된다는 사실에서 증명된다. 한편 인간영혼의 이성적 부분은 기개의 부분과 욕망의 부분을 지배할 권리를 갖는다. 반면에 이성은 행동을 위해 하나의 목적을 제시할 수 있지만 그 행동은 감각적 욕망에 의하여 전도<轉道>될 수 있다. 따라서 기개의 힘은 이들, 감각적 갈망들 때문에 위<형이상학적차원>로나 아래<형이하학적차원>으로 끌려가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영혼의 3부분은 서로 결속되어 그들의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해 함께 매진해야 한다. 영혼의 이성적 부분이 비록 기개의 부분과 욕망의 부분을 지배할 권리를 갖는다 할지라도 그, 부분들에 대해 동일한 관계 하에 있게 된다. 왜냐하면 기개와 욕망의 힘들 역시 인간의 삶 그 자체에 필수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기개와 욕망과 함께 그것들 위에 작용하며 기개와 욕망 역시 같은 차원에서 이성을 움직이도록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이성, 기개, 욕망 등등은 이성의 상태에 의해 어떤 결론에 도달한다. 즉 목적지향적인 기능에 의한 결정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인간의 삶 속에 항상 평행적으로 등장하는 쾌락에 대해서는 다른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 왜냐하면 쾌락은 인간의 삶의 필수적인 요소이고 인간의 감정은 쾌락이라는 목적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쾌락을 제공하는 사물들을 향해 충동적으로 움직이므로 실제적인 쾌락을 제공하는 대상들과 단지 쾌락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들 사이를 구분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때에 있어서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의 고유한 기능이 참된 목적을 구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성이 사물들의 본성에 맞추어 삶의 참 목적으로 기개와 욕망을 인도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은 기개와 욕망의 무질서를 잠재우고 인간의 삶을 차원 높은 수준으로 옮겨 놓는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들은 자신의<무지>를 이데아를 통하여 필로쏘피아적<최고의 지식>경지로 상승시켜 놓았을 때에 비로소 이루어지게 된다.
플라톤의 이러한 사상들은 훗날 철학자들에 의하여 다양한 사상들로 변형되었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영지주의자들의<절대적 지식론>과 이성론자들의<절대적 이성론>이다. 영지주의자들은 플라톤의<최고의 지식론>을 근거로 자신들의<그노시스니즘>을 성립하였고 이성론자들은 플라톤의 이데아를 통한 필로쏘피아적 이성론에서 이데아의 역할을 배제한 필로쏘피아적 이성론을 성립하였다.
(3)아리스토텔레스.
①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
아리스토텔레스는년>, 트라키아의 북동쪽 해변에 위치한 스타게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친은 마케도니아 왕국의 전의<典醫>였다. 당시의 마케도니아 의사들은 아들들에게 해부학<解剖學>을 전수하는 것이 전통적 관습이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도 부친에게 해부학을 전수 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과, 과학, 특히 인체학<人體學>은 이미 어릴 때부터 형성되어진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7세 때에 아테네로 가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학원에 입학했다. 그는 아카데미아에서 20여 년간 공부하고 가르쳤으며<아카데미아의 예지-銳智>라는 칭호를 받았을 만큼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처음에는<형상론>을 비롯한 플라톤의 사상에 크게 매료되었으나 나중에는 오히려 플라톤의 사상을 비판하는 입장이 되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적 차이는 주로 과학부문에서 나타났다. 플라톤의 과학은 사유<思惟>적이었던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은 실존적이었다. 그러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영원한 사제지간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을 영원한 스승으로 섬겼기 때문에 그들의 사제관계는 영원히, 그리고 참으로 아름답게 후대에 전해졌다. 반면에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있을 때에는 주저 없이 배웠다. 그들의 관계는 학문적 차원에서는 피차가 스승이 되고 또한 제자가 되는 형이상학적 관계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생전에는 결코 아카데미아를 떠나지 않았으며 평생 동안 플라톤의 사상을 비판하지도 않았다. 그가 아카데미아를 떠난 것은 플라톤이 사망하고 플라톤의 조카인 시퓨시포스가 아카데미아를 경영할 때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퓨시포스의 경영 정책이 너무나 과도하였기 때문에 아카데미아를 떠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미아를 떠난 후년경>에 과거, 아카데미아의 학생이었던 아소스의 군주 헤르메이아스왕의 초청을 받아 아소스로 갔다. 아소스는 트로이 근처에 있는 작은 왕국이었지만 헤르메이아스국왕은 철인다운 군주였고 아소스 국민들은 평화와 번영을 함께 누렸다. 헤르메이아스국왕은 궁정 안에 유명한 학자들을 초청하여 그들이 학문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후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소스의 궁정에서 많은 학자들과 교류하는 가운데 3년간 저술 활동과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년>에 아소스에 인접해 있는 레스보스섬으로 건너가 그곳에 정착하면서 해양생물을 비롯한 생물학 연구에 전념했고년>에 마케도니아의 필립대왕에게 초청되어 알렉산더의 스승이 되었다. 필립대왕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알렉산더의 스승으로 초청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그리스도시국가의 통일론>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필립대왕은 마케도니아 및 그리스의 통일을 위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고 그 위업을 자신의 후계자인 알렉산더에게 계승시키기 위하여<그리스도시국가의 통일론>주장자인 아리스토텔레스를 알렉산더의 정치적 스승으로 초청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필립대왕이 사망하고 알렉산더가 부친의 왕위를 계승하자 고향으로 잠시 돌아갔다가년>에 다시 아테네로 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때에 마케도니아의 유력한 정치가였던 안티파트로스의 후원을 받아 리케이온학원을 설립했다. 리케이온 학원은 쏘크라테스가 사색을 즐겼던 아테네 근교의 아폴로 신전주변에 있는 리케이온 숲에 세워졌기 때문에 그 지명<地名>을 따라 리케이온학원이라고 명칭 되었으며 오늘날 프랑스의 고등학교 이름인 리세의 기원이 되었다. 이 학원은 페리파토스라고도 명칭 되었는데 페리파토스는 원래 고대의 철학자들이 숲 속이나 동산을 산책하면서 강의를 주고받았던 관습에서 유래된 회랑<廻廊>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페리파토스는 일반적으로 학교의 건물과 학원 전체를 의미하는 말이었으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리케이온학원의 명칭으로 사용된 후에는 리케이온학원의 명칭으로만 사용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페리파토스라는 학원의 명칭과 전통에 걸맞게 학원주변 숲 속의 산책로를 한가롭게 거닐면서 제자들과 토론하고 그들을 가르쳤다.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학파는<소요학파-逍遙學派-Peripatetic>라고도 불리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학원에서 13년간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논리학,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학, 미술학 등등을 비롯한 학문체계를 수립했고 많은 후학들을 양성했다. 그러나 알렉산더대왕이 사망했던년>직후에 마케도니아에 내분이 일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이 매우 어렵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마케도니아, 그리스의 통일국가론을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알렉산더 사망 후 마케도니아제국을 분할하여 지배하려던 군주들로부터 적대를 받았던 것이다. 이때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쏘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불경죄>로 기소되었는데 그는 쏘크라테스의 전철을 밟지 않았다. 전해지는바에 의하면 이때에 아리스토텔레스는<아테네시민들이 철학에 대하여 또 한번 죄를 저지르지 않게 하기 위하여...>라고 말하면서 리케이온을 떠나 칼커스로 피신했다고한다. 그는 칼커스에서년>에 오랜지병이었던 위장병으로 사망했다.
②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체계는 플라톤의 사상체계로부터 영향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체계는 플라톤의 사상체계와는 전혀 다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적 차이는 누가 더욱 신중하게 해석하고 정립했는가? 하는 것이겠지만 어떤 면에서 있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체계가 플라톤의 사상체계 보다 오히려 앞서있는 경우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학분야에 있어서는 플라톤 보다 적은 관심을 보였던 반면에 과학이나 생물학 분야에 있어서는 오히려 진보적인 열성을 보였다. 따라서 그들의 후예들은 플라톤이 간과하였거나 실패하였던 부분, 또는 플라톤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던 것들을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하여 전수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학, 미술학 등등을 비롯한 많은 학문체계를 수립했으나 우리는 다만 기독교 신학역사에 영향을 주었던 분야만을 요약하여 소개한다.
A.논리학.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식논리학을 창안했으며 개별 과학들에 대한 개념들을 최초로 적용시켰다. 그에게 있어서 논리학과 과학은 절대 불가분리의 밀접한 관계 하에 있다. 그는 논리학을 어떤 과학이 내포하는 문제들을 분석할 때 그것들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언어적 도구라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을 입증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과학에 대한 적절한 용어의 적용에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과학에 있어서의 논리학의 용어들은 일반 문법학자들이 다루는 논리적 용어하고는 달라야하며 반드시 과학을 입증할 수 있는 최상의 전문적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것은 당시의 과학적 용어들이 거의 대부분 실존적인 용어가 아니고 사유<思惟>적인 용어였기 때문이다. 플라톤을 비롯한 당시의 과학자들이 말하는 과학들은 거의 대부분 실존적인 것이 아니라 사유<思惟>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용어들도 당연히 사유적인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유란 거의 추론적인 것에 불과함으로 실 존재에 대한 것을 정확하게 증명하지 못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실재적인 사상을 정립하기 위하여 플라톤의 사유적 사상으로부터 이탈하였고 용어 하나하나 까지도 실재적인 것을 적용하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노력에 의하여<삼단논법-三段論法-Syllogism>이 등장했다. 삼단논법이란 전통적인 형식논리학<形式論理學>에 있어서의 대표적인 방법인 간접추리논법<間接推理論法>을 말하는 것인데<서론>과 <본론>의 2개 전제와 1개의 <결론>으로 형성된다. 삼단논법은 그 전제의 성격에 따라<정언삼단논법-定言三段論法><가언삼단논법-伽言三段論法><선언삼단논법-選言三段論法>으로 구분되는데 이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정언삼단논법-定言三段論法>으로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삼단논법이 곧<정언삼단논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삼단논법을<어떤 사물들을 진술하는 표현양식이며 진술되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 필연적으로 그 진술로부터 나타나게 되는 표현양식>이라고 정의 했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을 비롯한 논리학을 기독교 신학에 적용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비롯한 조직신학 체계를 정립했다.*
B.형이상학<形而上學-Metaphysica>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과학체계를 정립함에 있어서 형이상학을 도입 시켰다. 형이상학이란 물질적, 또는 비물질적으로 현존하는 모든 세계의 궁극적 근거를 연구하는데 적용되는 학문이다. 경제학은 경제사상을 성립시키고 있는 경제법칙을 연구하고 물리학은 물리사상을 성립시키고 있는 물리법칙을 연구한다. 반면에 과학은 인식의 본질에 의존하는 특수성을 갖는다. 과학은 어떤 특수한 시야에 영역을 고정시킴으로서 그 대상과 방법을 얻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원리에 의하여 일체의 존재자<세계>의 궁극적 근거를 연구하는 것이 바로 형이상학이다. 형이상학은 영역적, 부분적, 지식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면서 또한 전체적인 지식을 요구한다. 형이상학은 특수과학에 대한 지식의 총화나 또는 특수과학의 지식을 성립시키는 주관적인 근거<인식론적 근거>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형이상학은 모든 존재자들에게 근거를 부여하는 궁극적 실재근거<實在根據>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은 현존하는 모든 일반적 영역세계들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인간들의 개념 속에 존재하는 가상적인 특수 영역들까지도 초월하는 지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존하는 것들에게 존재성을 부여하는 궁극적 실 존재를<제1의 원리>라고 명칭 했고 그<제1의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를<제1철학-Prote Philosophia>라고 명칭 하여 그 학문체계의 최고위에 좌정시켰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을 학문적 체계로 성립시켰지만 그것을<형이상학>이란 학문적 명칭으로 정립시킨 것은 로도스의 안드로니코스였다. 안드로니코스는세기경>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집<全集>을 편집 간행하였는데 이때에<제1철학>을 자연학<自然學-Physica>에 관한 책 다음에 두었으므로<자연학 다음의 책-ta meta ta physica>이라고 불렀던 것에서<형이상학-Metaphysica>이라는 명칭이 생긴 것이다. 형이상학이란 용어는 본래 라틴어의 역어이다. 이때부터 형이상학이란 명칭은 생성소멸 하는 자연물<自然物>에 근거를 부여하는 영원불멸의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에 적용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현존하는 자연물들에게 존재의 근거를 제공하는 영원불멸의 궁극적 실재를 찾아내는 것은 고대 그리스철학자들의 공통된 숙명적 과제였다. 플라톤은 그 궁극적 실재를 절대적 지고의 유일한 존재라고 표현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제1철학-Prote Philosophia>역시 궁극적 실재로서 결국은 플라톤이 말하는 절대 지고의 유일한 존재 즉 신<神>에 대한 지식, 또는 지혜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스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초기 기독교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론을 하나님에 적용시켜 발전시켜 나갔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기독교신학 변증에 적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로 기독교신학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형이상학론을 변증하는 어리석음을 범함으로서 주객<主客>이 전도되는 결과를 만들었다. 한편 근대과학 역시 형이상학을 통하여 궁극적 실재를 밝히는 것에 실패했다. 임마누엘칸트는 사유적인 형이상학론을 옹호하는 반면에 이성론적인 학문으로서의 실재적인 형이상학을 아예 부정했다. 그는 심지어 이성론적 형이상학을<썩어 빠진 독단론>이라고까지 혹평했다. 신화적<神話的>형이상학적, 실증적<實證的>이라는 3단계를 거쳐서 지식이 발전한다고 주장했던 꽁트 역시 과학의 경험적인 결과에 의해서 궁극적 실재를 규명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형이상학을 무시했다. 이와같이 근대 과학은 오직 특수과학의 방법에 의존하여 궁극적 실재를 규명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우주 탐험을 비롯한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을 거듭했지만 아직도 궁극적 실재를 규명하는 쾌거를 이루지 못한 채 오히려<형이상학>의 근본원리를 붕괴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형이상학의 본질적 원리에 입각하여 논증할 때에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학자들의 개념 속에 있는 형이상학은 인간의 인식 속에 존재하는 최고의 지식이며 모든 세계의 궁극적 근거로 환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시간과 공간적으로 영원한 것에 대한 가장 적당한 개념이며 인간의 한계로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대변하는 초월적 학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을지라도,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모든 학자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부인 할지라도 형이상학이란 결국 하나님과 기독교에 대한 신학을 말하는 것이다. 일반적 입장에서 학자들은 자신들이 밝혀내지 못한 모든 것들의 궁극적 실체나 또는 자신들의 개념과 지식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것들을 총체적으로 묶어서<형이상학>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그렇다면 인간들의 개념과 지식 속에 분명히 존재는 하면서도 인간의 개념과 지식으로 밝혀내거나 설명하거나 입증할 수 없는<형이상학적 실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곧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이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이란 일반학문들에게는<분명히 존재는 하면서도 인간의 개념과 지식으로 밝혀내거나 설명하거나 입증할 수 없는 그 무엇>이지만 사실은<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이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인 것이다.
C.윤리학<倫理學>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중에 특별한 또 하나는 그의 윤리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들에게는 성취하려는 목적이나 수행하려는 기능이 절대적으로 존재한다는 신념을 근거로 하여 자신의 윤리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자신의 윤리학을 다음과 같이 진행시킨다.<모든 예술과 모든 학문, 또한 모든 행동과 추구는 선(善)을 지향한다.>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대하여 많은 이들이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인간의 행동이 지향하는 선이란 과연 무엇인가?>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인간이란 선의 이데아에 대한 지식을 지향하는 존재이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선의 최고원리는 경험적 세계나 개인적 삶과는 구별되는 것이었고 정신이 가시계<可視界>로부터 가지계<可知界>로 상승할 때에 비로소 도달되는 경지였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선의 최고 원리는 모든 개인들에게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본성을 탐구함으로서 선의 최고원리를 발견할 수 있으며 일상생활의 현실적인 행동들을 통하여 선의 최고원리를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선의 최고원리는 인간들의 본성에 내재된 것으로서의 도덕적 최고의 선을 말하는 것이었다.
성경이 가르쳐준 기독교의 윤리적, 도덕적, 신앙적 삶의 주제는 형이상학적인 것으로서 철학이나 문학이 주장하는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기독교나 현대기독교가 여전히 계속해서 주장하는 기독교의 윤리적, 도덕적, 신앙적 삶의 주제는 성경이 가르쳐 준 것에 절대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서 일반사회적인 것 아니면 3류 종교적인 것이었다. 초기기독교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기독교의 도덕과 윤리는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 입각한,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 전제되어 있는 도덕과 윤리가 아니라 다만 구원에 연관된 선한 행동적 차원의 도덕과 윤리에 불과하며 나아가서는 인본주의 사회적, 또는 종교적 차원에서의 도덕과 윤리에 불과한 것이다. 인류세계에 존재하는<하나님께서 인류세계에 부여한>도덕과 윤리는 창조주하나님께서 피조인 인류에게 부여하신 것으로서 하나님과 연관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을 전제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궁극적 목적으로 한다.
2.기독교와 철학의 충돌 원인.
1)철학자들이 기독교를 무시함으로 인한 충돌.
아직 이렇다 할 학문적 발전이 없었던 초기기독교 당시의 학문분야는 전적으로 헬라철학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특히 쏘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계승된 헬라철학은 종교, 정치, 문화, 예술, 과학, 의학 등등의 분야에 오직 유일하면서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였다. 그들의 사상은 사실은 진리의 본질에서 멀리 벗어난 것이었고 매우 조잡스러운 것이었지만 당시로서는 무소불위적 권위로 군림하였다. 정치, 문화, 예술 등등으로 자처하면서 종교의 각종 영역들을 섭렵하고 호령하였다. 소피스트들은 자신들을 최고의 지적존재로 자부했고 일반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각종 학문적 용어들을 남발하면서 오만방자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자 그들과 기독교 사이에 여러 분야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헬라문화의 배경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었다. 하나는 올림푸스산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신화였다. 헬라문화는 그리스의 수많은 신들과 우호적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형성되고 발전했다. 다른 또 하나는 헬라철학이다. 헬라문화는 헬라철학에 의하여 형성된 우주론, 영혼론, 신론 등등의 종교사상에 영향 받아 발전했다. 그리고 그 두개의 배경들은 각자 독특한 체계를 이루었으나 근본적으로는 하나였다. 순서적으로 정리하면 그리스신화가 우선이다. 그리스신화의 출발은 정확히 언제부터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헬라철학의 뿌리는 그리스신화이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는 헬라철학이 그리스신화 보다 앞서있다. 그리스신화는 거슬러 올라 갈수록 조잡하다. 반면에 그리스신화는 헬라철학이 왕성하게 발전하고 활동하는 역사와 더불어 점점 고급스러워졌다. 결국 그리스신화를 배경으로 헬라철학이 태동했지만 나중에는 그리스신화가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아 발전한 것이다. 헬라철학은 또한 헬라어를 발전시켰다. 대중적이고 보편적이면서도 문학적, 학문적, 예술적, 언어였던 코이네라를 발전시킨 것도 헬라철학이었다. 그런고로 헬라철학자들은 자신들이 그리스신화를 비롯한 모든 헬라문화를 이끌고 발전시켰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자랑했고 상대적으로 다른 문화나 다른 종교들을 무시하고 폄하했다. 기독교가 헬라문화권을 정복하고 잠식해 나가던 당시에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절대적 신앙이었던 것과 같이 헬라인들에게는 헬라철학이 절대적 지주였다. 특히 당시에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하여 학문적 단체를 형성하였던 지식인들은 철학을 절대적인 것으로 신봉하여 철학을 모든 것의 근원이며 원리라고 믿었고 따라서 모든 것의 해답을 오직 철학에서 얻고자 했다. 당시의 헬라철학적 지식인들은 기독교의 사상이 헬라철학에 절대 미치지 못하는 저급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기독교를 미신적이고 무지하며 열등한 종교라고 무시했다. <행17:16-34>은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나타내 준다. 바울이 아덴에서<에비구레오>와 <스고이고>등등의 철학자들과 변론할 때에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기독교를 무시하고 조롱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역사적 상황 속에 등장한 기독교신학은 철학의 모든 자존심들을 순식간에, 그리고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철학은 지금까지 꿈에서조차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기독교신학의 위대한 진리들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특히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였다. 지금까지 철학이 알고 주장해 왔던 신들의 사랑은 기독교 하나님의 사랑 앞에 그 명함조차 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하고 빈약했다. 신이 인간을 용서하고 구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는 기독교 하나님의 사랑은 철학의 개념으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사망의 권세를 신적 죽음으로 무시하고 부활하여 제압한다는 것도 철학사상으로는 도저히 논증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그것이 하나의 신화적 전설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주장했고 그 실제적 사건의 후속역사가 지금 현재 자신들의 눈앞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철학자들의 논리적인 저항들을 오히려 무시하고 거부했다. 때문에 철학자들은 지금까지의 역사적, 전통적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어 맹렬하게 기독교를 공격했다. 당시에 명망이 높았던 수많은 철학자들은 철학적 논리를 앞세워 기독교를 신비주의적 종교, 또는 사기와 거짓으로 조작된 종교라고 비난했다. 한편 이렇듯 철학이 기독교사상에 도전장을 내고 달려들었을 때 아직 기독교 진리의 위대함을 알지 못했던 기독교신자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을 지배해왔던 철학의 매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기독교를 철학으로 이해하였다. 즉 기독교의 하나님을 올림프스산의<제우스>나 판테온신전의 유피테르<쥬피터>와 같은 차원에서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그리스도에 의한 하나님의 구원을 아테네의 파르테논의 신들에 의한 구원으로 이해하였다. 당시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철학자들의 사상을 기독교에 유입했던 것은 당시의 시대적, 역사적, 문화와 정서 때문이었다. 당시의 문화는 전적으로 헬라적이었으며 따라서 헬라어를 모르는 자들과 헬라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야만인>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 중 일부는 자신들의 독특한 히브리문화에 헬라문화가 이식되는 것을 절대 반대했는데 그것은 헬라문화의 침투로 인하여 자신들의 야훼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변질된 것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중에 동방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헬라어를 배워 사용하지 않고 아람어를 배워 사용했다. 이러한 상황은 로마제국 일대에 점점 분포되어져 가는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대로 계속되었다. 기독교인들 역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하여 헬라문화와 헬라식 종교관을 아울러 거부했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의 종교사수를 위한 헬라문화 배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야만인으로 취급했고 이에 자극받은 일부 기독교인들은<야만인>취급을 당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헬라화 되었으며 일부교회들도 헬라적 기독교화를 선호했다. 따라서 기독교와 헬라철학과의 충돌은 당시의 상황으로는 거의 필연적이었다.
2)철학이 계시된 로고스라는 주장에 의한 충돌.
기독교가 로마제국 전역을 향하여 줄달음치기 시작했을 때 철학자들 사이에 괴이한 변화가 일어났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의 공통된 개념은 철학만이 오직 유일한 진리이며 그 외의 사상들은 철학과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저급한 것으로 무시되어 왔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독교 신학자들이 철학을 인간적 사상이라고 거부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무모하고 저급한 비진리적 사상이라고 무시하더니 드디어는 철학이란 야만스럽고 저질스러운 3류적 사상이며 인류역사에 해악을 끼치는 간악한 마귀의 사상이라고까지 선포하고 나섰다. 철학자들은 이러한 기독교 신학자들의 공격에 크게 분노하여 기독교 신학자들과 과감히 맞서서 철학의 위대함을 증명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참패당했다. 지금까지 주장했던 철학의 위대함은 기독교신학의 진수<眞秀> 앞에 언제나 허약하고 초라한 것으로 들어났고 심지어는 허구적이며 무모하고 억지적인 것으로까지 증명되었다. 이제 쏘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등의 영원한 진리자들은 더 이상 존경되지 않았고 오히려 시대적 오류를 범한 속물들로 간주되었으며 그들과 그들의 사상은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져갈 운명이 되었다. 이러한 위기적 상황을 감지한 철학자들<특히 쏘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숭배자들>은 어떤 자구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않 되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철학의 위대성을 증명하려는 노력에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이제 시대와 역사적 상황이 자신들의 손을 들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直視>했다. 그들은 이제 철학은 기독교 앞에 더 이상 독립적으로 군림할 수 없게 되었으며 오히려 기독교신학과 타협하고 조화를 이루지 않는 한 완전히 퇴출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름대로의 자구책을 만들어 내었는데 그것은 참으로 괴이한 것이었다. 그들은 철학을 기독교에 적절하게 접목시켰다. 그들은 쏘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신적개념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재조명했다. 그들은 과거에 무시하고 홀대했던 기독교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이제 철학이 인류역사의 영원하고 유일한 최고의 진리이고 따라서 기독교의 신학도 철학 앞에 무릎꿇어야하며 철학을 통하여 기독교신학이 세워져야 한다는 과거의 오만방자한 자세를 완전히 낮추어서 오히려 기독교 앞에 철학을 무릎꿇리는 완전한 항복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철학이 기독교를 위하여 예비된 하나님의 섭리적 은혜라는 논리를 들고 나왔다. 그들은 쏘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말한 절대적 지고의 신이란 곧 기독교의 하나님을 예표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괴이한 주장은 사실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에 의해서 이미 주장되어졌던 사상이 되살아난 것이었다. 필로는 예수그리스도와 동시대의 인물로서 헬라철학사상과 히브리율법사상을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히브리의 율법선지자들이 헬라의 철학자들 보다 우선하여 존재했으며 따라서 헬라의 철학자들이 히브리 율법선지자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필로의 주장에 의하면 헬라철학사상에는 히브리 율법사상이 전반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헬라 철학사상과 히브리 율법사상은 궁극적으로는 동일하며 다만 표현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히브리 율법은 상징적으로 모든 것을 표현한 반면에 헬라철학은 풍유적으로 모든 것을 표현했다고 주장하면서 따라서 성경을 풍유적으로 해석하면 둘 사이의 일치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필로의 주장은 교만한 철학자들에 의해서 사정없이 매도되고 거부되었으나 이제는 오히려 그의 주장이 진리로 받아들여 졌다. 특히 필로의 주장은 동방교부들에게로 전이되었고 동방교부들의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사상으로 나타났다.
한편 필로의 주장이 되살아나 철학자들의 자구책으로 변질되어 기독교에 유입되면서 더욱 괴이한 사변적 사상들이 발생되었다. 아직도 철학의 매력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신학자들 즉 철학적 기독교신학자들은 철학과 기독교를 묘하게 접목시켰다. 그들은 철학은 하나님께서 헬라인들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로서 기독교 신학의 원리이며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율법과 철학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미리 계시한<계시적로고스>라는 신학적 논리로 연합시켰다. 이러한 로고스 교리는 유스티누스, 클레멘스, 오리겐 등등에 의하여 수립되고 발전되었다. 그들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직접적인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제사장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교제가 이루어졌었음을 근거로 하여 로고스교리를 추론해 내었다. 그들은 지고한 절대적 존재인 하나님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인간들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할 수 없다는 가정 하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하는 매개체로 로고스 교리를 세웠다. 그들은 성경에서하나님이 모세를 비롯한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시거나 또는 직접적인 현현<顯現>을 하셔야 했을 때 로고스를 통하여 하셨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철학과 율법과 예수그리스도는 모두 다<절대적 지고이신 성부하나님의 신적 로고스>이며 철학과 율법은<계시적 로고스>이고 예수그리스도는<실제적 로고스>라는 괴이한 논리를 수립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을 로고스로 주셨고 헬라인들에게는 철학을 로고스로 주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적 기독교신학자들은 율법은 유대인들의 몽학선생이고 철학은 헬라인들의 몽학선생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하여 유대인들과 계약을 맺으셨고 철학을 통하여 헬라인들과 계약을 맺으셨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듣고, 깨닫게 되는 것이며 헬라인들은 철학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듣고,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이러한 원리를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율법을 고수하면서기독교를 배척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였음으로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주장했고 따라서 헬라인들은 유대인들과 같은 실패를 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이며 완전한 계시라고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오직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에 성경이<제1원리>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기독교는 성경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고, 이해하며 그 방법은 오직 철학을 통하여 보고, 듣고, 이해하는 것이라고 믿고 주장했다. 이와같이 철학에 의존하는 기독교 신학자들은 기독교 신학원리를 오직 철학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신앙보다는 철학에 의한 지식과 지혜를 더욱 크게 강조했다. 그들은 신앙이란 철학의 지혜와 지식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섭리를 완전하게 알게 되었을 때에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결과적 열매로 보았다. 때문에 그들은 계시를 깨닫는 일이 구원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며 깨닫고 아는 일이 믿는 것 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함으로서 철학의 절대적 필요성과 우월성을 크게 강조했다. 이러한 철학사상의 기독교적 변조는 훗날 알렉산드리아학파에 의하여 전혀 새로운 기독교사상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저스틴마터에 의해서 놀라운 변종적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기독교가 헬라문화권에 들어서자마자 영지주의가 개입한 것도 당시의 이러한 헬라 철학사조 신봉에 영향을 받은 때문이었다.
3)하나님의 예비하심.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러한 헬라철학적 도전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으셨다. 그것은 바울을 비롯한 위대한 기독교 신학자들이었다. 바울은 기독교의 바울이 되기 이전 즉 유대교의 사울시절에 자신의 고향 다소에서 헬라철학에 충분하게 젖어있었다. 때문에 그는 이미 헬라철학의 오만방자한 도전을 익숙하고 여유 있게 제압할 수 있었다. 우리는 헬라철학의 거만스러운 도전을 부드럽게 아우르면서 그들을 노련하게 이끌어 가는 바울의 멋진 모습을<행17:16-34>을 통하여 확인한다. 바울은 철학자들의 무분별한 종교사상이 교회 내에 침입하기 시작하자 교회들에게 보내는 서신들을 통하여 그것을 엄히 경계하게 하였고 교회들이 철학자들의 사상에 현혹되지 않도록 신학적인 교리들로 그들을 교육했다. 한편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신실한 기독교신학자들은 철학적 기독교신학자들을 향하여 미신적, 이단적, 야만적 사상가들이라고 공격했고 하나님의 우주적 주권섭리를 인간들의 허구적 사상으로 제한시키려는 철학자들을 향하여 강력히 경고했으며 그들의 비진리적 사상들이 교회에 유입되는 것을 강력하게 규제했다. 이러한 하나님의 종들의 활약을 일일이 모두 다 소개할 수는 없다. 따라서 터툴리안과 힙폴리투스가 당시에 철학적 기독교 신학자들을 향하여 외친 유명한 경고들을 소개함으로서 당시에 활약한 하나님의 종들의 활약을 대신한다.
*철학은 이단의 어머니다.<터툴리안>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학교가 교회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터툴리안>
*철학은 마귀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결국 철학사상을 통하여 기독교신학을 세우려고 하는 이단들은 마귀의 사상을 주장하는 것이다.<힙폴리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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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철학사상이 기독교와 마찰을 하는 가운데 종래에는 기독교와 연합하면서 참으로 묘한 결과를 만들어 내었음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앞으로 더욱 심각한 양상으로 확대 발전하게 된다. 우리는 앞으로 동방교부들, 특히 알렉산드리아학파를 중심으로 하는 교부들의 신학사상을 고찰하게 될 것인데 그들의 신학사조에 헬라철학사상, 특히 플라톤의 사상이 절대적 지주로 군림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3.스토아학파와의 충돌.
헬라철학이 오만방자하게 기독교에 간섭하다가 각종 망신을 당한 역사 속에 스토아주의자들에 대한 역사 한 페이지가 기록되어있다.
스토아주의학파는 플라톤주의 보다 약간 늦게 생긴 철학파 중의 하나다. 스토아주의학파는 B.C.3세기에 서로마제국의 말기에 이르는 후기 고대의 철학사상을 대표하고 주도하였던 철학파다. 스토아주의 학파는 키프로스의 제논이 아테네의 스토아포이킬레에서 창설했다. 이 학파가 스토아학파로 명칭된 것은 이 학파의 창설자인 제논이 아테네의 광장에 있던 공회당<채색주랑-彩色柱廊>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 제자들을 스토익주랑의 사람들>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 되었다.아테네의 클레안테스가 제논의 뒤를 이었고 키리키아의 항구도시 소로이 출신의 클리싯포스가 클레안테스의 제자로서 스토아학파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립했으며 로도스섬 니카고라스인<人> 파나이티오스가 스토아학문을 로마인들에게 전파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스토아학파의 영향을 받았으며<키케로-B.C.106-43>와 네로황제의 스승이었던<세네카-B.C.4-A.D.65>노예출신의 에픽테투스로마황제 마루쿠스아우렐리우스등등과 같은 사람들이 스토아학파의 중요 인물들이다. 고대 그리스철학자들이 대부분 명문귀족 가문의 후손들이었던 반면에 스토아학파는 변경<邊境>의 시골사람들이나 심지어는 노예출신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때문에 전통적 그리스 철학자들은 때로는 스토아주의자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으나 대부분 무시하거나 외면했다. 스토아철학에 대한 자료는 로마인들의 저작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후대에 전해지지 않았음으로 그 사상체계를 정확하게 소개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시에 스토아학파들을 비난하고 공격했던 자료들을 근거로 할 때에 초기 스토아철학은 당시의 여러 학설들을 모방하거나 절충, 혼합하였음이 분명하다.
스토아 철학은 논리, 윤리, 자연 등등의 세 부분으로 구분되었다. 그러나 이세 부분은 엄격하게 구분되는 독립적 요소를 이루지 않고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하나의 지혜를 사랑하고 구하는 철학사상의 3요소로 구성되어져있다. 스토아 철학에 있어서 지혜는<신의 일과 사람의 일에 대한 지식>이라고 정의되지만 이것은 사물에 관한 관조적<觀照的>지식이 아니라 인간생활에 있어서의 모든 것을 올바르게 처리하기 위한 실천적 지식이다. 스토아 철학이 이렇듯 모든 면에 있어서 지혜의 실천적 성격을 근거로 하여 진행되어지기 때문에 사유적<思惟的>철학이었던 당시의 그리스철학들에 대한 일종의 반성<反省>적 철학이 되었고 따라서 그들과 수시로 충돌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스토아철학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인생<人生>이란 실천적 삶의 지혜를 습득하기 위한<삶의 실천적 연습과정>이며 그 과정을 통하여 실천적 삶의 지혜를 습득한 자가 곧 현자<賢者>다. 현자의 지혜는<자연에 따라 사는 것>을 알고 깨닫는 지혜다. 한편 자연은 순수한 반면에 인간은 순수하지 못함으로 인간은 자연에 따라 살지 못하고 자연과 충돌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에 의하여 존재할 수밖에 없으므로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연과의 충돌을 피할 수없게 된다. 이러한 인간과 자연의 충돌이 지나칠 때에 인간은 육체적, 정신적인 차원에서 여러가지 질병을 얻게 된다. 반면에 현자는 자연과의 충돌로 인하여 발생하는 질병들에 연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극복하고 제압하면서 활발한 삶을 살게 된다. 따라서 현자의 유덕한 삶이란 이성을 갖춘 유한한 개개의 인간들이 자연과의 충돌로 인하여 발생하는 모든 고난에 좌우되지 않고 그것을 운명으로 알아 그 운명대로 살아감으로서 우주만물의 본원<本源>적 존재인 자연과 일치하는 동의<同意> 동체<同體>적 삶을 사는 것이다. 때문에 현자의 삶은 자연 그 자체가 이성적 존재자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자기귀환<自己歸還>에의 활동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현자는 모든 자연물의 근원인 자연 그 자체로서의 신<神>과 일치한 자이며 신과 같은 자이며 신 그 자체가 된다.*
스토아 철학의 특징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독립적인 존재함과 상호충돌 및 대립의 역학관계를 강조하면서도 결국은 그 둘이 하나로 귀결된다는 신비주의적 사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범신론적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은 인도의 힌두사상, 또는 불교의 우주적 동체사상<同體思想>과 그 맥을 같이한다. 때문에 일부 종교학자들은 스토아철학이 인도의 힌두사상이나 불교의 동체사상으로부터 영향 받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스토아철학, 인도의 힌두사상, 불교의 동체사상은 외적 내용은 비슷하나 내적 내용은 전혀 다르다. 스토아주의의 범일<汎一>사상은 범신론<汎神論>적 사상인 반면에 인도의 범일사상은 인간이 고행을 통하여 신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다. 반면에 불교의 우주적 동체사상은 불교의 교주 석가모니를 우주와 동일시하는 것으로서 후기 불교가 석가모니를 신격화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허구이다.
한편, 스토아철학 사상은 초기 기독교신학에 여러 가지로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당시의 신학자들은 스토아 철학을 통하여 기독교신학을 변증하지 못하고 오히려 스토아철학을 기독교신학에 반영시켰던 것이다.
스토아학파는 본래 만물이 불로부터 기원했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유물론주의 자들이었는데 기독교가 등장했을 때 많은 스토아학자들이 변질하여 종교적 개념을 가진 학문적 사상들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들은 대체적으로 신들을 비판하는 입장이었다. 그들이 신들을 비판한 것은 주로 로마의 판테온 만신전의 신들이었다. 그들은 신들이 인간을 도덕적으로 인도하지 않고 자기들의 만족을 위해 인간들 위에 군림한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주로 지혜에 의존하는 인간적, 도덕적 삶을 강조했고 그러한 삶의 지침으로서 자연법을 주장했다. 그들은 모든 자연 속에 내주하는 신적존재를 주장했고 인간은 자연 속에 내주하는 신적존재를 지식과 지혜를 통하여 인식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그들은 기독교의 하나님을 자연 속에 내재해 있는 범신론적인 하나님으로 주장했다. 그리하여 진정한 기독교 신앙이란 자연 속에 내재해 있는 하나님의 법칙인<자연의 법칙과 조화>에 순응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들에게는 아직 하나님의 특별섭리와 일반섭리 같은 차원 높은 신학적 교리가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학문은 언제나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심오함이 결여되어 있었고 오직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연연하는 형이하학적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성령의 역사하심 같은 것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인간의 지혜와 지식에 의존하는 신학과 신앙만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무지를 깨달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들의 학문이 매우 보편적인 학문이라고 자랑했다. 그들은 일체의 걱정으로부터 자유 하는 생활신조인 스토아적 아파테이아의 이상적 생활관을 내세우면서 자신들이야 말로 보편적 종교인으로서 세계의 시민임을 주장했다. 이때에 스토아학자들의 주장에 일부 기독교인들이 동조했다. 아직 하나님과 기독교에 대하여 알지 못한 초신자 중에 몇몇이 스토아학파들의 논리적인 주장이 매우 일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동조한 것이다. 특히 로마의 잡신론, 다신론적인 종교관에 도덕적, 윤리적 차원에서 비판적이었던 기독교인들은 스토아학파가 로마의 만신적 종교를 비판하고 나섰을 때 동료의식을 느꼈다. 고대 스토아철학은 현실 세계에 대한 욕심과 야망으로부터 초월하여 인간의 내면적 성화를 이루는 길이 곧 신을 만나는 길이라고 가르쳤다. 현실세계의 모든 것들은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들이라고 규정하고 인간이 참 행복을 얻는 길은 현실세계에 대한 탐욕으로부터 자신을 억제하고 초월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던 스토아철학은 어떤 면에서 기독교와 매우 흡사했다. 때문에 터툴리안은<세네카는 마치 기독교인처럼 말할 때가 많다.>라고 감탄했다. 스토아학파가 자신들을 세계적인 종교적 시민으로 주장했을 때 인종을 초월한 보편적인 종교로서 스스로를<새로운 인종적 종교>라고 자천했던 기독교인들은 스토아학파와 자신들이 동일한 신학사상을 가진 것으로 오해했다. 때문에 많은 기독교 변증가들과 윤리학자들이 스토아학파의 범신론적인 신학과 자연신론적인 신학을 받아들여 사용함으로서 전혀 비기독교적인 신학사상들을 양산해 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스토아 철학사상에 대해서도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으셨다. 바울은 스토아학파를 비롯한 철학주의자들의 종교관과 기독교 종교관이 얼마나 현저하게 다른가 하는 것을 로마서를 비롯한 교리적 서신들을 통하여 상세하고도 구체적으로 정리했다. 로마서를 비롯한 바울서신들에는 기독교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해 작정되고 진행되고 종결되어 진다는 기독교신학의 원리가 상세하게 정립되어져 있다. 특히 바울서신들에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이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만 예정되고 인정된다는 하나님의 독특한 주권적 신학원리가 정립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예수그리스도 밖에서의 기독교인들이란 전혀 존재할 수 없다는 신학원리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정립하고 선포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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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철학이 당시로서는 모든 영역들을 전체적으로 아우르고 대변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이 때로는 얼마나 무모하며 이기주의적이었고 또한 저급하며 비 진리적이었던가? 하는 것을 인류역사에 명멸하였던 각종 철학 사상들의 역사를 통하여 경험해 왔다. 경험주의, 이성주의, 신비주의, 체험주의, 계몽주의, 합리주의, 공산주의, 실증주의, 자유주의 등등의 수많은 철학 사상들이 한 때는 시대와 영역들을 제압하고 통치했으나 결국은 완전하고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함으로서 언제나 또 다른 사상들에게 밀려 자리를 내주고 역사의 뒤안길로 말없이 사라져버렸던 것을 우리는 수없이 경험해 왔던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기독교 신학사상은 그 모든 철학 사상들의 끈질긴 도전과 위협에 단 한번도 굴복하거나 밀려본 적이 없다. 하나님의 기독교사상들은 오히려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염치도 모르고 달려드는 철학 사상들을 때로는 어루만지고 때로는 감싸주고 때로는 책망하면서 그들의 버릇없는 도전들을 유유히 이끌어 주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기독교신학의 절대성을 증명해왔던 것이다.
제2장. 기독교와 로마종교의 충돌.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입성하여 활성화 되어질 무렵, 로마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난입되어져 있었다. 로마인들에게 있어서 신은 곧 능력이었고 권위였다. 능력 있는 신은 더욱 권위적이었던 반면에 능력 없는 신은 상대적으로 허약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와 신들을 차별하여 무시하거나 버리지 않았다. 모든 신들은 인간을 위하여 필요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다 같이 존귀하다는 것이 그들의 종교관이었다. 그들은 능력과 권위의 강약을 구분하지 않고 많은 신들을 다 함께 존중하여 섬김으로서 신들의 연합적, 복합적 보호 속에서 평안을 누리고자 했다.
한편 로마인들은 헤라클레스나 아스클레파이우스 같은 영웅들이 신들의 경지에 올랐다는 사실을 전승되어진 신화들을 통하여 공감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인간도 곧 신이 될 수 있다는 개념이 있었다. 로마제국의 황제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신으로 추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종교적, 신적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반면에 로마의 종교는 수많은 신들을 섬겼기 때문에 일정한 교리적 체계를 갖출 수도 없었지만 로마의 판테온 만신 전에 가득한 신들은 하나 같이 사람들에 의해서 가공되어진 3류적 존재들이었음으로 이렇다 할 신학적 체계를 갖출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신학이라는 종교적 교리 문제보다는 신들의 능력과 역사적 전통들이 더욱 중요했다. 그러나 이러한 로마의 종교적 전통에 반대한 색다른 종교가 로마 전역에 확산되었다. 그것은 기독교였다. 기독교는 로마의 종교적 전통과 문화개념에 절대 동의하지 않았다. 기독교는 여러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의 절대적 지고의 신만을 섬겼으며 황제를 비롯한 로마의 신들을 전혀 무시하고 섬기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기독교가 오직 유일하게 섬기는 절대적 지고의 신은 참으로 초라하고 허약한 존재였다.
그들이 들어 아는바 대로라면 그토록 지고하고 절대적이라는 기독교는 신의 아들이 인간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내려왔는데 식민지 유대 땅 한적한 시골 동네의 마구간 말구유에서 가난뱅이 목수의 아들로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 신의 아들은 30년이 되도록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전혀 소식도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을 하다가 십자가에 처형되어 죽었는데 그것도 같은 동족들에 의하여 죽음을 당했다. 그 후 그들의 제자들은 그의 시체를 훔쳐다가 은밀하게 숨긴 후 그가 약속한대로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갔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에 대한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로마의 지식인들에게 전혀 상식 밖의 일이었다. 모두가 거짓말로 들리는 것은 물론이요 지극히 야만스러운 이야기들이었다. 로마인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매우 저급한 야만인들의 수준 낮은 종교였다. 그런데 그 수준 낮은 야만인들의 기독교가 감히 대로마제국의 종교를 무시하고 배척했다. 그것은 결국 대로마제국과 로마인들에 대한 무시오 모욕이었다. 로마의 자존심은 신들에 대한 경배에서도 손상되었다. 로마인들에게 있어서 신을 섬기는 행위는 하나의 축제였다. 술과 고기를 나누어 먹으면서 흥겹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축제가 곧 신을 위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달랐다. 기독교는 자신들의 신 이외에 다른 신들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신을 경배함에 있어서도 매우 조용하고 은밀하며 엄숙하고 경건했다. 로마인들의 제사는 동<動>적인 반면에 기독교의 경배는 정<情>적이었다. 때문에 로마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 기독교도들의 행위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 마음에 들 수가 없었다. 특히 로마에 만연하였던 헬라 철학의 입장에서 볼 때에 로마인들의 종교적 행위는 분명히 철학적인데 반하여 기독교의 주장은 오히려 철학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것이었다.
자존심 강한 로마시민들은 기독교를 오만스럽고 방자한 야만인, 무신론자들이라고 미워하게 되었다. 로마인들은 도처에서 일제히 들고 일어나 기독교와 대적했다. 로마와 기독교의 종교적 갈등은 황제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탄압이나 박해와는 다른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영역에서 기독교를 피곤하고 힘들게 했다. 이러한 로마와의 마찰과 갈등은 일반 역사적차원에서 볼 때에는 흔히 있을 수 있는 보편적인 일로 간주할 수 있다. 인간이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기독교와 로마의 종교적 갈등은 사회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즉 기독교의 종교적 특별성은 로마의 집단적 종교사회에 대립되는 형국이었기 때문에 기독교와 로마종교와의 갈등과 마찰은 사회적 차원에서 논증할 때에 어떤 사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 볼 때에 그것은 매우 의미 있는 사건으로 정리된다. 기독교와 로마의 종교적 갈등과 마찰은 장차 기독교의 로마 제국화, 나아가서는 기독교의 세계화를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로마가 정책적 차원에서 판테온 만신 전을 세우고 그곳에 모든 종교의 신들을 집합시킨 것은 결국 그 신들과 하나님을 대비시킨 결과로 나타났다. 물론 한 때는 기독교의 하나님이 저급하고 무능한 신으로 몰리어 조롱받고 무시당했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고 만신전의 각종 신들은 하나의 조각품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그것들이 오히려 모두 배척되어지고 하나님만이 섬겨지게 된다. 로마에는 더 이상의 우상적 종교들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오직 하나님의 기독교만이 국가적 교회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었다.
제3장. 이단주의자들에 대한 신학적 변증.
1.사도들에 의한 변증.
초기 기독교의 출범과 함께 밀어닥친 이단주의자들의 공격은 아직 신학이 정립되지 않은 기독교 전체에 대단한 위협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에 대한 모든 대비를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을 통하여 이단주의자들의 비진리적 주장들을 퇴치하셨다.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은 예수그리스도로부터 기독교 복음 선교와 교회설립의 지휘권을 임명받아 맡은바 사명을 진행하게 되었을 때에 크게 두 가지의 중요한 사역을 전개했다.
첫째는 교회를 설립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사도들은 로마의 정치적, 종교적, 박해와 목숨 걸고 싸우면서 교회를 설립하고 복음을 전파했다.
둘째는 신학을 사수, 보존, 보전하는 것이었다. 사도들은 기독교 신학에 도전하는 철학자, 비진리자, 사이비이단자들의 각종 주장들을 신학<말씀-교리>로 변증하면서 기독교 신학을 사수, 보존, 보전했다. 사도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언행록을 기록하거나 또는 각 교회에 서신들을 보내어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신학을 전수해 주는 일과 그들의 신앙을 다독여 주는 일을 병행했다. 특히 바울사도를 비롯한 몇몇의 사도들은 교회들에게 신학적, 신앙적, 목회적 서신들을 발송했는데 교회의 지도자들은 사도들의 이러한 노력들에 힘입어 각종 철학 사상들과 비진리적 이단자들의 교리적 공격으로부터 교회와 성도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일을 진행하는 역사적 현장들은 각종 철학사상과 사이비 비진리자들의 도전적 공격으로 인하여 잠시도 평안한 날이 없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불어 닥친 유대교들의 율법주의 폭풍은 사도들이 세운 교회들을 공중분해 시킬 듯이 맹렬했고 수많은 철학자들의 사상들과 이단자들의 시도 때도 없는 교리적 공격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미혹시키고 괴롭혔으며 나아가서는 기독교의 진리들을 계속하여 오류 시키고 변질 시키는 가운데 이제 막 일어서려는 기독교를 뿌리 채 뽑아버리려고 날뛰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사도들은 목숨을 건 절대 절명의 사역적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에 사도들이 얼마나 대단한 각오와 사명감으로 신학전투에 임하였는가? 하는 것은 바울사도가 기록한<엡6:10-20>을 통하여 실감나게 전승된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서 능히 악한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6:10-20>
사도들은 유대교적 기독교의 율법주의에 맞서 싸웠고 헬라 철학자들과 로마 정통주의자들과의 철학과 대적해 싸웠으며 각종 비진리적 사이비이단자들과도 싸웠다. 사도들이 벌인 신학적 전투는 철저하게 논리적이었고 학문적이었다. 그들은 비진리자들의 거센 공격들을 학문적 논리로 차분하게 대응하면서 기독교의 진리를 때로는 변증하고 때로는 선포하면서 기독교의 진리를 사수하고 보존하는데 전심전력을 다했다.
한편 사도들의 서신들은 당시의 현재적 상황으로는 율법주의자들을 비롯한 각종 이단자들의 공격에 대한 변증이었지만 사실상 그것은 율법주의자들과 이단자들의 주장에 대한 신학적 변증차원을 훨씬 초월하여 기독교 조직신학의 초석을 세우고 선포하는 것이었다. 훗날 하나님의 신학자들은 이단과의 교리적 논쟁을 통하여 기독교 조직신학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정립하게 되는데 이때에 사도들을 통하여 세워지고 선포되어진 신학적 교리들이 모든 기독교의 조직신학의 근본 원리들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의 사도들은 자신들의 서신들이 훗날 기독교 정경으로 정립될 것이라는 사실과 또한 그 서신들이 장차 기독교 조직신학의 초석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에게 부여된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고자 하는 사명감에 의해서 그 일을 했을 뿐이었다.
2.교부들에 의한 변증.
이단자들에 대한 기독교의 대응은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사명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단자들의 범람을 막고 교회와 진리를 사수, 보존, 보전하기 위하여 수많은 종들을 예비하셨다. 사도들의 뒤를 이은 교회의 지도자들<교부-속사도>은 이단자들의 비진리로부터 하나님의 진리를 사수하기 위하여 그들과 신학적 논쟁을 했는데 그 논쟁은 처음에는 일정한 장소에서 함께 모여 직접적인 대화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주로 문서들을 통하여 진행되었다. 따라서 그것은 논쟁이라기보다는 이단들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변증이었다. 당시에 진행 되었던 각종 변증 중에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1)유대교에 대한 신학적 변증.
교회와 이단자들 사이의 최초 신학 논쟁은 유대교와의 논쟁이었다. 기독교와 유대교의 신학 논쟁은 이미 바울과 유대교 사이에 율법 문제로 크게 진행되었으나 바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바있다. 그러나 2세기 중반에 이르러 유대교인들은 다시 한번 신학 논쟁을 제기하였다. 정통파 유대교인들은 기독교와 유대교의 동일성을 부정하였고 모세율법을 기독교에 대한 몽학 선생으로 해석하는 것에 분노하였다. 정통파 유대교인들은 기독교가 모세를 통하여 정립시켜준 유대교의 절대 불변적 정통교리들을 함부로 왜곡하여 자신들의 교리에 적용하였다고 분노했으며 기독교가 유대교의 야훼하나님을 도적질하여 자신들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둔갑시켰다고 공격했다.
이에 대하여 기독교는 우주적인 하나님을 오직 유대인들의 야훼로 제한시키려는 유대교인들의 편협성을 크게 꾸짖었다. 기독교는 모세율법이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정립되는 기독교의 신학을 위한 준비였으며 따라서 기독교에 대한 몽학 선생이라는 바울의 견해를 적극 지지했다. 유대교인들은 또한 아브라함의 후손들만이 택함 받은 하나님의 선민이며 하나님의 자녀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만 제한되어지는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도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만 허락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의 구원은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체결된 새로운 언약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으로 아브라함의 후손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여 유대교인들을 흥분시켰다.
유대교인들과의 신학논쟁에 가장 앞장선 것은 저스틴마터였다. 그는 산상보훈을 통하여 율법을 해석하는 원리를 발견했는데 그가 해석한 모세율법의 신학적 원리는 유대교의 사상과 일치하면서도 기독교의 전 우주적인 신학에 적용되는 전 포괄적인 것이었다.
년>경 저스틴마터는“유대인 트리포와의 대화”라는 저술을 통하여 유대인들을 공격했다. 이 책은 매우 광범위한 종교문학 형태로 저술되었는데 내용은<기독교야말로 구약선지자들이 대망<待望>하던 우주적인 종교이다.>라는 것이었다. 저스틴마터는 이 책에서 구약의 메시야에 관한 예언구절들을 폭넓게 적용하면서 구약시대의 기독교와 신약시대의 기독교가 같은 것임을 체계적으로 변증했다.
2)철학에 대한 신학적 변증.
철학의 부산한 공격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기독교 신학이 도처에서 변질되고 오류될 수 있는 상황에 몰려있을 때 수많은 기독교 신학자들이 그것을 막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철학의 기독교 유입을 선호하여 기독교와 철학을 조화시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결코 용납하시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종들을 세우시어 철학의 기독교 유입, 철학과 기독교와의 조화를 막으시면서 철학의 주장들에 대비하여 기독교 신학의 진수를 교리적, 신학적으로 멋지게 정립하셨다. 이때에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철학의 공격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성경으로 변증하였는데 그중에 중요한 몇몇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타티아누스의 야만인 변증.
타티아누스는 저스틴의 제자로서 훌륭한 변증가였으나 훗날 마르시온주의에 빠져서 이단이 되었다. 그는 헬라 철학자들이 기독교인들을 비롯하여 헬라어를 사용하지 않는 모든 자들을 야만인이라고 매도했을 때<헬라인에게 주는 글-An Address to the Greeks>이라는 자신의 저서를 통하여 변증했다. 그는 최고의 문화를 자랑하는 헬라적인 것들이 헬라로부터 자생되어진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들이 말하는 야만인들로부터 취득한 것임을 지적했다. 헬라문화가 바빌로니아인들에게서 천문학을, 이집트인들에게서 기하학을, 페니키아인들에게서 문자를 빌려왔음을 지적한 것이다. 다음으로는 헬라의 문화적 역사가 야만인들의 문화적 역사보다 후세의 것이었음을 지적했다. 헬라가 자랑하는 플라톤의 저술이나 호머의 저술들 보다 히브리인들의 모세오경이 앞서 있음을 지적하면서 헬라의 종교와 철학과 문학이 사실은 히브리인들의 그것으로부터 유래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했다. 타티아누스의 이러한 지적은 근거가 분명한 것이었다. 헬라문화와 문명이 자랑하고 과시하는 표현들은 구약성경에 이미 나타나 있는 것들과 유사한 경우가 매우 많았던 것이다. 타티아누스는 특히 호머를 비롯한 헬라 시인들이 히브리문학의 우수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석게 함부로 해석하여 히브리인들의 지혜서를 크게 변질시키고 오류 시켰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헬라인들의 비도덕적 행위를 지적했다. 그는 헬라인들이 자신들을 고도의 도덕적 존재로 주장하면서도 같은 인간을<야만인>으로 분류하여 무시하고 하대하는 비도덕적 행위를 범하고 있음을 강력하게 지적한 것이다.
(2)아리스티데스의 무신론 변증.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무신론자라고 비난한 것은 그들이 오직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들을 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아리스티데스는 기독교 신자들이 결코 무신론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변증함에 있어서 성경과 로마의 판테온 신전에 운집해 있는 각종 신들을 증거로 제시했다. 아리스티데스는 판테온 신전에 운집해 있는 신들의 본래적 위치가 어디였는가? 하는 것을 질문한 후에 그들이 사실은 인간들에 의하여 가공되어 세워진 조각품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역설했다. 그리고 그 신들이 가공하여 세워진 동기가 지배계급에 있는 자들이 백성들을 통치하기 위하여 만들어 세운 통치방법 중의 하나라고 공격했다. 그리고 그러한 엉터리 조각품들을 신이라고 받들어 섬기고 추모하는 시인, 종교지도자, 정치지도자들이야 말로 진정한 무신론자들이라고 싸잡아 비난했다. 그는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 세운 신상들을 도둑들이 훔쳐다가 부수어 팔아먹는 것을 막기 위하여 신전을 경비하는 군대를 증거로 내세우면서 자신들을 훔쳐다가 부수어 팔아먹는 도둑들로부터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것들이 무슨 신이냐고 비꼬았고 그러한 무능력적인 신들이 어떻게 인간들을 보호할 수 있으며 인간이 만들어 세운 신들이 어떻게 인간보다 우월할 수 있겠느냐고 비웃은 후 그러한 바보 같은 조각품들은 내다버려도 된다고 조롱했다.
(3)아데나고라스의 부활론 변증.
기독교의 부활에 대한 논란은 부활이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 에 대한 교리적인 문제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의 부패한 시체 또는 이미 오래되어 흙으로 변했거나 또는 불에 타 버렸거나 또는 물에 빠져서 물고기 밥이 되어 흔적조차 없는 시체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 날 수 있는가? 하는 부활의 방법론 때문에 일어났다. 이점에 대하여 아데나고라스를 비롯한 변증가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근거로 변증했다. 그들은 일제히 무로부터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실 능력이 없겠는가? 라고 반문한 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은 죽은 자의 자체적인 어떤 요소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역설했다.
(4)테오필루스의 기독교 윤리학 변증.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가 근친상간 및 혼음, 영아살해 및 인육섭취 등등의 부도덕한 삶을 산다고 비난한 것에 대하여 데오필루스를 비롯한 변증가들이 성경의 가르침과 기독교인들의 실제적인 삶을 통하여 변증했다. 변증가들은 기독교의 죄에 대한 개념을<마5:21-22>과 <마5:27-28>들어 반박했다. 즉 기독교인들은 형제들에게 노하거나 욕하거나 조롱하는 것까지도 심판받을 살인죄로 정죄 받으며 또한 마음속에 스쳐간 음욕까지도 간음죄로 정죄 받을 정도로 철저한 윤리적, 도덕적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러한 가르침 속에 사는 자들이 어떻게 영아를 살해하고 그것을 먹는 죄를 범할 수 있으며 근친상간이나 혼음 같은 성적범죄를 저지를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윤리적, 도덕적인 삶을 사는가 하는 것을 실제로 와서 보고 확인하라고 촉구했다. 그리고 실제로 살인하고 간음하는 자들은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비 기독교인들이라고 책망했다. 당시에 로마인들이 섬기는 신들 중에는 심지어 부녀지간 또는 모자지간에 혼음을 하는 신들이 있었으며 그러한 신들을 제사할 때에는 제사장들이나 신도들이 실제로 혼음했다. 그리고 당시의 로마에는 영아를 유기하여 아사<餓死>하게 하거나 또는 동사<凍死>하게 하는 풍습이 있었다. 변증가들은 이러한 로마인들의 악행을 준엄하게 책망하면서 오히려 기독교인들의 윤리와 도덕을 변증하여 세웠던 것이다.
(5)황제 예배 거부에 관한 변증.
로마의 집권자들은 기독교가 로마황제를 경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로마에 대한 적대행위로 확대 해석했다. 따라서 그들은 기독교인들의 로마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했으며 정치적 불순 세력으로 간주하여 탄압하고 박해했다. 이점에 대하여 거의 대부분의 변증가들이 일제히 그것의 부당함을 변증했다. 변증가들은 기독교인들이 황제를 경배하지 않는 것은 순전히 종교적인 문제일 뿐 정치적인 문제나 애국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변증했다. 변증가들은 기독교인들이 전혀 국가나 황제들에게도 전하지 않는 충성스러운 백성임을 강조하면서 겉으로는 황제에게 경배하지만 틈만 나면 반역을 일으키는 무리들과 비록 종교적인 문제 때문에 황제에게 경배는 하지 않지만 국가와 황제를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하는 기독교와 둘 중에 어떤 것이 진정한 애국적 로마백성인가? 하는 점을 크게 부각시켰다.
(6)철학과 기독교의 부조화에 대한 변증.
당시의 많은 기독교 변증가들이 기독교에 도전하는 각종 비진리들에 대하여 확실하고 깔끔한 변증들을 했지만 철학과 기독교 신학의 부조화에 대한 변증에는 거의 실패했다. 그들이 철학과 기독교 신학의 부조화에 대한 변증에서 실패한 것은 그들의 기독교 신학에 대한 부족 때문이었다. 그들은 철학에 대해서는 어느정도의 수준적 경지에 올라 있었지만 아직은 기독교 신학을 완전하게 대변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철학과 기독교 신학이 조화를 이루지 못함을 신학적으로 변증하지 못했던 것이다. 저들은 철학이 기독교 신학의 범주 안에 예속되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각각 독립적인 영역으로 대비하였다. 저들은 철학을 기독교 신학에 적응시켜야 하는 원리를 몰랐기 때문에 철학을 기독교 신학에 적용하려 함으로서 모든 부분에서 난관에 부디 쳤던 것이다. 때문에 저들은 베드로사도가 책망한 것<벧후3:16>과 같이 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억지로 접목 시키려다가 이상한 이단적 교리들을 만들어 내었다. 우리는 이러한 철학자들의 실패적 사례들을 일일이 모두 소개할 수없음으로 그 중에 대표적인 것 하나를 소개한다. 다음은 저스틴이 철학과 기독교 신학의 조화를 설명하기 위하여 로고스신학을 인용한 것을 요약 설명한 것이다
①저스틴의 로고스신학.
저스틴은 기독교신학과 철학 사이에 몇 가지 접촉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쏘크라테스와 플라톤을 예로 들면서 훌륭한 철학자들에게 모든 것을 파생 시킨 절대적 지고의 존재<신>에 대한 개념이 있음을 전제로 하여 기독교신학과 철학 사이의 유사성을 설명했다. 그는 쏘크라테스나 플라톤은 예수그리스도를 전혀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기독교의 하나님을 만날 기회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하나님<절대적 지고의 존재>을 알고 있었으며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부활<영혼불멸>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스틴은 철학과 기독교 신학의 이러한 유사성 내지 일치성을 로고스신학을 통하여 설명했다. 그의 설명에 의한 로고스 이론은 다음과 같다.
<저스틴의 로고스신학>
로고스는“말씀”과 “이성”또는“지성”을 동시에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이다. 헬라 철학에서 오랫동안 견지해 온 전통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 또는 지성은 모든 실제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로고스, 혹은 우주의 이성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로고스를 이해하면 결국 모든 실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만약에 우리가 2+2=4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우리들의 지성과 우주적 개념 속에 2+2=4로 만드는 이성, 혹은 질서인 로고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들의 사고에 언제나 함께 하면서 인간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이해하게 할 수 있는 로고스가 2+2=4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다. 제4복음서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로고스, 혹은 말씀이<육신>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성육신에서 발생한 사건은 온 우주를 떠받치고 있는 이성,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다. 제4복음서에 의하면 이 로고스야 말로 모든 이들을 비추는 진정한 빛이시다. 이는 곧 로고스가 성육신 이전에 이미 모든 진정한 지식의 근원이셨음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미 히브리인들의 신앙이 다름 아닌 그리스도에 기초하고 있었는데 그리스도는 성육신 이전에 그들에게 계시되었다고 했다.<고전10:1-4> 따라서 비록 정확하게 인식하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쏘크라테스나 플라톤 같은 철학자들은 이미 로고스의 존재를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쏘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사상이나 저술 등등에 진리가 포함되어있다면 그러한 진리를 깨우쳐 주고 저술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로고스임이 분명한 것이며 그 로고스야 말로 곧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한 바로 그 로고스인 것이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볼 때에 쏘크라테스나 플라톤 같은 지혜로운 철학자들은 이미 기독교인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지혜는 곧 예수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성육신의 불필요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옛날 이러한 철학자들은 부분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알았는데 비하여 성육신을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본 자들만이 예수그리스도를 온전히 알기 때문이다. 결국 철학자들에 의해 생성되어진 모든 진리들은 기독교에 속한 것이다. 따라서 철학과 기독교신학은 결국 하나의 공통 진리를 형성하는 것이 당연하다.
②성경의 로고스신학
우리는 지금까지 저스틴의 사상과 개념을 살펴보았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저스틴은 기독교의<로고스신학>에 대하여 전혀 무지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하여서도 너무나 무지했다. 그는 로고스신학과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하여 철저하게 무지할 뿐만 아니라 그 둘 사이의 특별한 역사를 계속하여 혼동하고 있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로고스신학에 대하여 언급한바 있으나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다시 한번 로고스신학을 논증함으로서 당시의 철학자들이 얼마나 신학적으로 부족하였나 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로고스신학이란(요1:1-5)과 (요1:14)을 근거로 한 신학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1-5>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여기에서 육신이 된 말씀이 곧<로고스>이다. 그러나 로고스를 말할 때에 말씀이 육신으로 변했다고 한 다던가 또는 말씀과 육신의 둘이 하나가 되었다고 하면 않되며 로고스 또는 예수그리스도를 말씀과 육신의 혼합체라고 해서도 않된다. 그와같은 표현은 예수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모두를 동시에 파괴하는 것이다, 말씀과 육신은 하나로 연합 또는 혼합된 것이 아니라 함께 공존한다. 즉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반드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정립해야 하며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말씀과 육신이 함께 공존한다고 해야 바른 신학적 정립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말씀과 육신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정립해야 한다. 말씀과 육신을 신학적으로 정립함에 있어서는 두 가지의 특별한 해석방법이 요구되어진다. 첫째는 하나님의 인류 구속사적인 차원에서의 해석 방법이고 다른 또 하 나는 하나님의 교회사적인 차원에서의 해석 방법이다. 구속사적인 차원에서 해석할 때에 말씀은 곧 제2위 하나님인 성자하나님을 의미한다. 그리고 육신은 인간의 몸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때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는 것은 제2위이신 성자하나님께서 육신 곧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의미에서 해석할 때에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함께 공존한다는 것이 증명된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는 메시야로서의 신성과 제물로서의 인성을 각각 독립적으로 가지고 계심과 동시에 또한 함께 가지고 계시게 된다.
다음으로 교회사적인 차원에서 해석하면 말씀은 곧 하나님의 법이며 권능이다. 그리고 육신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자비이다. 저스틴은 형이하학적인 헬라 철학개념에서 문자적인 의미로만 로고스를 이해하여 말씀과 이성 또는 말씀과 지성으로 로고스를 해석했지만 로고스를 형이상학적 헬라 철학개념으로 해석하면<법>과 <사랑과 자비>라는 두 가지의 복합된 의미로 해석된다. 이와같은 기독교 신학원리는 요한사도에 의해서 기록된 제4복음서를 통하여<로고스신학>으로 정립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절대적 지고의 법>과 <절대적 지고의 사랑과 자비>로 교회에 오신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교회사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구속사적 차원에서의 메시야 임재하심과도 동일한 원리가 된다. 성자하나님께서 메시야로 오신 것은<법>과 <사랑과 자비>의 2중적 목적과 의미를 갖는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죄인의 입장에서 다 함께 동일한 원리로<법>과 <사랑과 자비>의 2중적 목적과 의미를 갖는 것이다. 왜냐하면 메시야로서의 직무를 완성하심으로서 하나님과 죄인의 법적인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셨고 또한 인류를 구원하시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증거 하시고 선포하실 때에 그것이 곧 인간에게는 계산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서의 사랑과 자비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하나님께서 왜 그러한 방법으로 오셔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신학적으로 정립해야 한다. 먼저 구속사적인 차원에서 정립하면 예수그리스도는 메시야로 오셨기 때문에 당연히 신성으로 오셔야 했고 반면에 속죄의 제물로 오셨기 때문에 또한 당연히 인성으로 오셔야했다. 때문에 말씀 곧<신성>이 육신 곧<제물>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독립적으로, 그러나 함께 공존하시는 것이다. 한편 교회사적차원에서 정립하면 하나님께서는 신학 곧 <법>으로 교회에 임재 하셔야 하는데 그 신학<법>은 곧 지고의 절대적 신학<법>이어야 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곧 로고스<말씀-지고의 법-권위와 능력>으로 교회에 오신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말씀은 곧<신학이고 법이며 권위이고 능력>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으로 교회에 임재 하신다. 물론 하나님께서 법으로 임재 하시느냐 또는 사랑과 자비로 임재 하시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달려있는 문제지만 하나님께서는 법으로만 임재하시지 아니하시고 동시에 사랑과 자비로 임재 하신다. 그것은 이미 구속사적인 차원에서 제2위이신 성자하나님께서 법으로 오심과 동시에 사랑과 자비로 오셨음으로 교회사적인 차원에서도 당연히 법과 동시에 사랑과 자비로 오시게 되어있지만 그 보다는 하나님의 속성과 섭리가 법으로 오심과 동시에 사랑과 자비로 오시게 되어있다. 기독교는 인간을 위한 기독교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기독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일반종교들처럼 인간들 위에 군림하시는 하나님이시기를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으로 인간들과 함께 하시기를 즐거워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과 섭리하심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하나님나라의 백성의 위치에 두시지 아니하시고 자녀의 반열에 두셨음에서 분명하게 증거 된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법으로 임재하심과 동시에 사랑과 자비로 임재하시지만 결정적인 때에는 언제나 법을 초월하여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 곧 아버지하나님으로 자녀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은<법과 권위>의 하나님으로 임재하심과 동시에<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으로 임재 하신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신학, 로고스신학의 원리이다.
따라서 쏘크라테스나 플라톤 같은 철학자들이 이미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주장과 그들이 어떤 면에서 기독교인 일수도 있다는 주장들은 기독교신학 특히 로고스신학에 대한 인식 부족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
③로고스의 어원적 유래.
로고스라는 신학적 어원을 사용한 것은 제4복음서의 저자인 사도요한이다. 그러나 로고스라는 용어는 당시에 이미 헬라 철학용어로 사용되어지고 있었다. 헬라 철학에서 로고스는<말씀><논리><진리><원리><논리적인 말>등등의 의미로 사용되어지고 있었는데 이 말에 더욱 깊은 의미를 부여한 사람은 에베소 출신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였다. 에베소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와 쇼핑을 즐겼던 사치의 도시 이며 바울이 기원 후 53년경에 3년간 머물면서 복음을 전파했던 도시이다.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을 저술하면서<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것에서 로고스<말씀>이라는 신학적 용어를 사용했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로고스신학을 정립했다. 요한복음의 저작자와 저작 장소에 대한 서로 다른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역사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요한복음을 사도요한이 기록했다고 주장하며 저작 장소를 에베소라고 인정한다. 한편 요한이 전개한 로고스신학은 요한복음의 요한 저작설과 에베소 저작설을 동시에 뒷받침한다. 요한사도가 에베소에서 활약할 때에 로고스라는 용어가 에베소 출신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하여 에베소에 널리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원래 왕족 출신으로 높은 공직에 있었으나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민주정치가 종종 무정부 상태를 초래하자 실망하여 동생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둔, 사색, 공부로 일생을 마감했다. 그는 성격이 고집스럽고 엄격하여<어두운 철학자>로 알려졌으며 철학적 지혜로 현실 정치를 바로 잡으려고 한 최초의 철학자였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더 많은 것을 배우려고 피타고라스를 찾아 갔으나 피타고라스가 인간의 감각과 주관적 판단을 매우 중요하게 주장하자 그를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그는 인간이 많은 지식을 가지게 되면 그로 인하여 영혼의 변화 속에 숨어있는 역동적 리듬을 파악하는데 지장을 준다고 믿었다. 그는 물질에 대한 연구를 벗어나 세계를 지배하는 하나의 원리인 로고스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정신은 외부의 세계로부터 내부의 세계로 향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인류는 자연에 대한 신화적 신비주의를 벗어나 이성에 의한 합리주의적 사고를 갖게 된다는 원리를 발견했다. 그는 이러한 원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로고스를 사용했다. 그는 로고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모든 것은 흘러간다. 따라서 영원하지 않다. 아무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가지 못한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라 새로운 나이며 어제의 강은 오늘의 강이 아니라 새로운 강이다. 사람들은 어제와 오늘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로고스이다. 로고스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멸의 신성한 불꽃이 바람과 연료에 따라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로고스를 알기 위해서는 인간적 감각이나 주관적 판단에 기울어서는 않된다. 인간의 감각이나 느낌은 일시적이며 피상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각은 세상을 정지된 것, 고정된 형상으로 파악할 뿐 그 뒤에 존재하는 생성과 소멸의 역동적 리듬을 못 본다. 반면에 로고스는 직감과 직관으로만 파악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직감과 직관은 인간에게 존재하는 지식적 직감이나 직관이 아니라 사물 자체에 영원히 존재하는 로고스적인 직감과 직관이다.>
제4장.초기 신약교회시대의 이단주의자들.
이 장에서는 초기 신약교회시대 당시의 이단주의자들의 주장들과 그들의 결과들에 대해서 정리한다. 이단주의자들의 주장과 그들의 결과는 이미 앞 장에서 어느정도 소개했기 때문에 중복되겠지만 앞으로 전개하게 될 기독교 신학정립의 역사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다시 한번 정리한다. 하나님의 종들이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는 곳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이비 이단자들이 등장하여 비진리적 사상들을 퍼트렸기 때문에 당시의 교회 내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각종 이단주의 사상들이 침투되었다. 특히 당시의 상황은 아직 성경이 정경으로 정립되지 않았고 교회 지도자들도 아직은 하나님의 섭리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이단이고 어떤 것이 또한 진리인지를 구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은 각종 사이비 이단주의자들의 비진리를 정확하게 가려내어 그들을 퇴출 시켰다. 이러한 사이비 이단자들의 주장과 그들을 가려내어 퇴출시킨 하나님의 종들의 수고롭고 아름다운 승리의 역사를 일일이 고찰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 중에 매우 중요하고 심각했던 것들만을 선별하여 소개한다.
1.영지주의.
아직 성경이 정경으로 정립되어 공급되지 않았고 반면에 사도적 권위가 있는 지도자들이 은퇴하거나 또는 그들이 돌보던 지역 교회들이 너무 많아서 교회에 약간의 지도적 틈이 생겼을 때에 교회를 크고 강력하게 공격했던 것은 그노시스교의 이원론적 철학 사상이었다. 그노시스교 이원론은 우리 용어로 영지주의<靈知主義>로 번역된다.
1)그노시스교의 역사.
그노시스교 또는 그노시스주의라는 어원은 지식을 의미하는 헬라어 그노시스에서 비롯되어 졌다. 그노시스교의 역사적 기원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다르다. 년>사이에 기독교 안에서 자생한 후에 기독교로부터 이탈한 분파라는 주장이 있고 리밴트지방동부지중해 여러 섬과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등등의 연안제국>에 흥성하였던 각종 혼합종교들을 총칭하여 그노시스교라고 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가장 믿을만한 전승에 의하면<행8:9-24>에 등장하는 시몬마구누스가 영지주의의 근원이다. 시몬마구누스가 영지주의의 근원이라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사도바울이 이미 고린도교회의 영지주의에 대하여 책망하고 있으며 영지주의 자들 중에 어떤 분파가 시몬마구누스를 구세주로 섬기고 있었고 그들이 주장하고 전파하는 구원의 방법론 중에 시몬마구누스가 직업적으로 행했던 주문과 마술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러 전승들을 종합해 볼 때에 시몬마구누스에 의해서 시작된 이단적 행위가 여러 사람들에 의하여 리밴트지방에 계속적으로 전수되어 지다가 2세기에 이르러 사토르닐루스 바실리데스에 의하여 교리적으로 발전되어지게 되었고 3세기에 이르러 발렌티누스에 의하여 더욱 체계적인 교리로 확립되어 졌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사실은 영지주의가 처음부터 단일 체제적 교파와 교리를 통하여 발전되어지지 않고 여러 개의 수많은 분파로 전래되어 오다가 2-3세기에 이르러서야 오히려 어떤 체계적인 교리를 세우게 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2)그노시스교의 사상.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신학사상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신학사상이 아니라 철학사상이다. 그들의 철학사상은 이원론<二元論>적 철학사상인데 본인들은 부인하지만 플라톤주의 철학사상을 많이 따르고 있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의 사상은 하나로 통일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한 가지로 정리할 수는 없다. 역사 학자들의 연구조사에 의하면 그노시스교 분파는 최소한 12개에서 수십 개로 추산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가장 크게 활동했던 몇 개 분파의 사상들을 소개한다.
(1)발렌티누스파
발렌티누스파는 영지주의를 대표하는 분파이다. 발렌티누스파는 로마출신의 플라톤주의자인 발렌티누스와 이집트출신의 플라톤주의자인 바실리데스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그러나 바실리데스의 사상은 매우 조잡스럽고 앞 뒤가 전혀 맞지 않아서 영지주의의 교리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영지주의라 함은 대체적으로 발렌티누스의 영지주의 사상을 말한다.
①우주 기원론.
발렌티누스파를 비롯한 대다수 영지주의자들의 창조론은 기독교의 창조론과는 다르다. 그것은 창조론이라고 할 수없고 우주 기원론이라고 하는 것이 적합하다. 저들의 우주 기원론은 선한 영적 세계와 악한 물질적 세계로 구분되는 이원론적 우주 기원론이다. 그러나 저들의 이원론은 마니교도를 비롯한 타 종교들의 이원론과는 전개 과정상에서 약간 다르다. 영지주의자들의 우주 기원론은 철학과 기독교의 연합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의 우주 기원론은 출발부터 이미 기독교의 창조론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저들의 우주 기원론은<창세기1장>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 해석하지 않고 플라톤의 티마에우스에 기록된 우주 진화론에 접목시켰다. 영지주의자들의 우주 기원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영지주의자들의 우주 기원론>
지존의 절대적 존재가 우주를 창조할 때에 물질세계는 창조하지 않았고 다만 영적인 세계<정신의 세계>만을 창조했다. 절대적 지존이 물질세계를 창조하지 않고 영적세계만을 창조한 것은 그의 주권적 섭리의 결과다. 이때에 창조된 영적 세계는 1년12개월에 해당되는 365개이다. 이때 365개의 영적 존재 중 하나인<지혜>가 독자적으로 무엇인가를 창조하고자 하는 욕망에 의하여 지존의 존재로부터 멀리 이탈하여 창조한 것이 물질세계이다. 이와같이 물질세계는 절대적 지존자의 섭리를 무시하고 불법으로 창조되었기에 불법적인 것으로서 악한 존재가 되었으며 또한 절대적 지존자에 의해서 창조되지 않았음으로 완전한 실재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허상에 불과한 미완성적인 것이 되었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의 눈에는 우주만물의 세계가 실재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고차원적인 통찰력을 가진 지혜로운 사람들은 물질세계가 단지 시각적인 착각이거나 또는 가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저들의 물질세계에 대한 이러한 개념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에 대한<가현설-Docetism>이 제기되었다. 예수그리스도는 육체를 가진 실제적 인간으로 강림한 것이 아니라 다만 가시적인 육체로 강림하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한편 영지주의자들은 물체의 실재가 영적인 것으로서 하나의 정신이라고 믿었다. 이와같은 사상도 결국은 플라톤의 철학사상에서 비롯되어진 것이었는데 저들은 이러한 원리를 인간에게 죄가 도입되는 과정에도 적용했다. 저들은 아담과 하와의 원초적 범죄를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 해석하지 않고 플라톤의 철학으로 해석했다. 그리하여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인간의 실재적 사상과 행동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보지 않고 정신에 의한 것으로 연결시켜서 여성적 힘또는 모성이 신의 뜻을 거스린 불법적, 범죄적 행위로 해석했다. 따라서 인간세계에 죄가 도입된 것은 실재적 사상과 행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만 정신에 의한 불법적 범죄 행위라는 것이다.
②구원론.
영지주의자들의 최고의 관심사는 구원에 대한 문제였다. 저들은 인간의 죽음을 영혼의 자유로 보았다. 저들은 플라톤의 사상이었던 영혼의 불멸을 근거로 하여 기독교의 영혼 부활교리에 반대했다. 저들은 인간의 영혼이란 죽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죽었다가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죽을 때에 육체만 죽고 영혼은 죽지 않은 채 다만 분리된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이 각각 천국과 지옥으로 간다는 기독교 교리를 반대했고 특히 육체적 부활을 무시하고 부인했다. 저들은 영혼불멸 사상을 오해하여 인간은 영혼만이 실체이고 전부이며 육체는 악이거나 또는 허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저들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이원론적 차원에서 해석한다. 저들에 의하면 인간은 육체 속에 유배되어 갇혀있는 영원한 정신이다. 그리고 육체는 정신의 감옥일 뿐만 아니라 오감<五感>을 통하여 인간의 윤리적 도덕적 정신을 쾌락적인 방향으로 오도<誤導>시킴으로서 악한 존재이다.
그러나 저들은 자신들의 이원론적인 우주관이 인간의 구원문제를 해결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인간의 세계는 지존적 존재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지존적 존재로부터 창조된 피조 중에 하나<지혜>가 지존적 존재의 섭리를 무시하고 임의로 창조한 것이며 따라서 부족하고 불완전한 비물질적 실재로서 하나의 가시적 형상에 불과하고 또한 악한 세계에 속해있기 때문에 그 불안전하고 악한 세계로부터 해방되어야 하지만 인간을 악한 영역으로부터 해방시켜 자유하게 해줄 수 있는 능력은 악하게 물질세계를 창조한 자에게는 전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지존의 절대적 존재만이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들은 인간의 구원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묘안<그러나 참으로 괴상한 엉터리 사상>을 만들어 내었다.
저들은 물질세계가 비록 지존자의 허락 없는 불법적인 창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존재에 의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속에는 비록 완전하지는 못하나 일종의<영적섬광들> 또는<영적파편들>이 들어있다는 사상을 만들어 내었다. 저들은 물질 속에 들어있는 영적기능을<살전5:23>의 <영, 혼, 몸>에 연결시켜 괴상한 3분설을 만들어 내었는데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영지주의자들의 구원론>
우주만물은 세 가지 차원의 기능적 영역으로 3등분 된다. 1차원은 절대적 지존자에 의하여 창조된 완전한 영적 영역으로서 곧 천국이고 본향이다. 그러나 그 세계는 현재 우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2차원은 1차원과 3차원의 중간지대로서 선한 영적 영역이나 악한 육적영역이 아니다. 2차원의 영역은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영역으로서 3차원을 제외한 우주 영역이다. 3차원은 7개의 혹성에 속한 영역으로서 악한 존재들에 의하여 지배되는 현세적 영역이다. 인간들도 같은 차원에서 3등분 된다. 1차원의 인간들은 <영>의 존재들로서 최고의 영적기능을 가진 그노시스교 추종자이다. 그들에게는<영적섬광> 또는<영적파편>이 있어서 구원 받을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 안에<영적섬광> 또는<영적파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력으로는 깨달을 수 없고 영적 세계로부터 능력 있는 존재<메신저>가 와서 그 사실을 깨우쳐주어야 한다. 한편 인간의 불행함을 마음아파하신 절대적 지존자가<메신저>를 보내어 인간들에게<영적섬광><영적파편>이 있음을 알려주었는데 그 메신저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다.<영적섬광>또 는<영적파편>을 가지고 있는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들의 존재와 능력을 깨달은 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지식을 통하여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자신들의 본향인 천국으로 들어간다.
그들의 영혼은 육체가 죽은 후에 각종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7개의 혹성계를 통과하여 1차원의 세계인 천국으로 가게 된다. 이때에 7개의 혹성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각종 악한세력들을 막아내기 위하여 강력한 부적이나 정확한 주문들을 외워야하기 때문에 그것을 열심히 배워 익혀야한다.
2차원의 인간들은<혼>의 존재들로서 신앙은 있으나 진정한 지식을 소유하지 못한 일반 성도들이다. 그들은 다만 의식정신의 미세한 영역>적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은 내세에서 약간의 중간적인<연옥적 차원의>행복을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다. 3차원의 인간들은<몸-육체>의 존재들로서 비 기독교인들을 말하는데 그들은 구제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흙덩어리에 불과하다.
(2)사토르닐루스파
사토르닐루스는 안디옥 출신으로서 시리아 영지주의파의 시조이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알 수 없는 아버지 신이다. 아버지 신이 7명의 천사를 창조하였는데 가장 하급적 천사였던 마지막 천사가 물질세계를 창조했다. 사람도 그 천사가 만들었는데 사람은 처음에는 영이 없고 혼만 있는 동물적인 존재로서 벌레처럼 기어 다니었다. 인간을 비롯한 물질세계를 창조한 7째 천사는 여러 가지로 부족하고 또한 저급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들을 사랑으로 인도하지 아니하고 공의로만 인도하며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사정없이 징계로 다스렸다. 때문에 인간들은 그로 인하여 항상 고난의 삶을 살았다. 이러한 상황을 보신 아버지 신은 인간을 불쌍하게 여기시어 인간들에게 생명의 빛을 주어 영적인 존재가 되게 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었음으로 아버지 신이신 하나님께서 영적 존재인 아이온하급적 신중의 하나>을 보내어 인간들을 구원하시기로 결정했는데 그가 곧 예수그리스도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실재적 존재가 아니라 가시적 존재인 환영인데 그는 인류를 악마로부터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창조한 신의 징계로부터도 구원한다. 인간은 3종류의 영적차원으로 구분되어 졌는데. 그 중에 가장 영적인 존재가 영지주의자들이며 그 이외의 사람들은 영적으로 매우 미숙하다. 때문에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영적지식과 지혜가 있어서 아버지 하나님께 구원 받을 수 있으나 나머지 두 종류의 사람들은 그러한 지적 영적 능력이 없기 때문에 구원에 참여할 수 없다. 반면에 영지주의자들도 구원받기 위해서는 독신<獨身>으로서 금욕생활을 해야 한다.
(3)기타 종파.
영지주의에 있어서 발렌티누스파를 제외하면 거의 오합지졸들로서 뚜렷한 분파적 명칭으로 전승되어 오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교리라는 것도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어서 소개할 만한 가치도 없다. 따라서 그중에 몇 가지 분파들의 이야기만 소개하기로 한다.
영지주의 분파 중에 오파잇파뱀을 숭배하던 자들>은 창세기의 우주 창조기사를 아예 헬라적 신화로 바꾸어 버렸다. 저들은 아담과 하와를 타락으로 유도한 뱀을 입으로 꼬리를 물고 우주를 둘러싸고 있는 레바이어단리워야단>이라고 주장했다. 저들은 리워야단이 매우 높은 지혜를 가지고 있는 선한 존재로서 열등한 창조주와 그의 아들인 예수그리스도를 물리쳤다고 믿었다. 그들에게는 리워야단이 선한 존재이고 예수그리스도가 악한 존재였다. 때문에 그들은 예배를 드릴 때에 예수그리스도를 저주했다. 어떤 종파는 시몬마구누스를 구세주로 믿었고 또 어떤 종파는 희랍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를 구세주로 믿었다.
또 어떤 종파는 구약성경의 예언서들에서 히브리 문학의 특성들을 배제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하나님의 섭리까지도 완전히 제외하고 자신들의 철학적 상상력을 적용하여 전혀 다른 이야기들로 바꾸어 놓았다. 예를 들면 아마겟돈을 우주창조의 첫 번째 창조물로 해석하거나 또는 인간들이 갖게 되는 심리적인 현상으로 묘사하는 것 등등이다. 또 어떤 종파에서는 물질세계를 비롯한 현실 세계는 실상이 아니고 허상이기 때문에 그것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고 함으로서 성도들로 하여금 염세주의에 빠지게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종파에서는 현실세계가 절대적 지존자에게 의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악의 세력에 의해서 창조되었다고 주장했고 따라서 절대적 지존자에 의하여 선택 되어진<영지주의자>들은 현실 세계의 질서와 법에 순종할 책임과 의무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때문에 영지주의자들은 사회나 정부 당국의 법과 질서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또 어떤 종파들은<진리 안에서의 자유>를 함부로 곡해하여 자신들은 최고의 영적 지혜를 소유한 자들이기 때문에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유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사도들보다도 더욱 심오한 지혜와 깊은 신비적 체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자신들은 초자연적인 영적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일반 기독교인들과는 전적으로 다르다고 호언장담했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과 개념이 다른 기독교인들을 무시하였고 따라서 교회 안에 파벌이 형성되었다. 그들의 자유함에 대한 오류로 인하여 교회 안에 매우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범죄가 발생했다. 저들은 자신들이 성적인 문제로부터 자유하다고 주장하면서 윤리적, 도덕적으로 문란한 성적범죄를 행하는가 하면 또 어떤 자들은 반대로 정결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부부간에도 일체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저들은 우상의 제물을 마음대로 먹거나 또는 우상에게 경배하는 것까지도 자유롭게 했는데 그것은<우상은 실상이 아니라 허상이기 때문에 그것에 경배하거나 또는 그것들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는다고 하여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라는 개념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상 때문에 스페인 등지의 기독교인들 중에 어떤 자들은 황제숭배의 사제<司祭>직을 맡아 행하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당당했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이 모두 다 동일한 사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완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같은 영지주의자 간에도 서로 맞지 않고 충돌하는 일이 빈번했다.
3)그노시스교의활동.
영지주의자들은 각처에 존재했지만 다른 곳의 세력들은 대체적으로 미비했던 반면에 고린도교회와 골로새교회를 중심으로 한 분파들의 활동은 매우 활발했다. 영지주의가 고린도교회와 골로새교회에서 특히 성행했던 것은 고린도와 골로새 지방의 문화적, 역사적 전통들과 관련되어 진다. 이 두 도시는 오래 전부터 헬라문화의 영향을 받아 헬라철학에 익숙했다. 특히 고린도는 일리어드와 오딧세이의 저자인 호머가 말할 정도로 헬라철학 문화에 젖어 있었다. 고린도에는 각종 우상숭배와 퇴폐적 향락문화가 번창했기 때문에 영지주의가 성행할 수 있는 바탕이 충분하게 조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바울이 활동하던 시대부터 이미 영지주의가 성행하여 교회에 침투되어 있었고 따라서 바울은 이에 대한 문제들을 신학적으로 다양하게 정립했다.
4)교회의 조치.
고린도교회와 골로새교회로부터 시작된 영지주의자들의 활동은 처음에는 미약하였으나 점차 세력이 확장되는 가운데 기독교 전체 교회들로 확산되었다. 이때에는 아직 성경이 정경으로 확정 되어지지도 않았고 따라서 기독교 조직신학이 정립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신학 자체가 아직은 부족하였고 수준 높은 신학적 지도자들도 별로 없었을 때였다. 영지주의의 교회 침투는 매우 심각한 것으로서 자칫하면 기독교 전체가 이단사상에 빠질 수도 있는 위기적 상황이 되었다. 이에 교회의 지도자들이 일치단결하여 영지주의를 맹렬하게 공격하면서 교회를 보호했다. 년경>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는 <감독들의 권위는 사도들의 권위를 계승 한다>라는 것을 전제한 후 하나님께서 주신 감독의 권위로 영지주의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년경>에는 역시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이레니우스가 같은 감독의 권위로 영지주의자들을 정죄했다. 감독들을 비롯한 교회지도자들의 맹렬한 공격과 기독교 신학에 대한 계속되는 정립과 교육을 통하여 영지주의의 허구성이 들어남에 따라 3세기에 이르러 영지주의는 더 이상 교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사멸되었다.
2.마르시온주의
영지주의자들의 교회침투와 쌍벽을 이룬 것이 마르시온주의자들의 교회 침투이다. 마르시온주의란 마르시온에 의해 형성된 사상을 말한다. 마르시온은 포투스본도>지방의 시노페감독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기독교사상에 익숙해 있었다. 그는 유대교적 사상과 물질세계에 대한 깊은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따라서 반유대적, 반물질적 사상을 기독교신학에 대비시켰다.
마르시온의 교리는 영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마르시온은년경>에 쉬프스리더의 초청을 받고 로마에 갔다. 그는 로마에서 크레도라는 사람으로부터 영지주의 사상을 전수 받았는데 그때에 크레도에게 배운 핵심적인 사상은 다음과 같다.
<율법과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선포된 신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율법과 선지자들이 소개한 야훼하나님은 알려진 하나님이었고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은 알려지지 않았다. 야훼하나님은 부족하고 공의로운 반면에 우리 주님의 아버지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마르시온은 크레도의 교리에 크게 감화를 받았으며 이때부터 크레도에게 배운 영지주의를 위주로 한 나름대로의 종교사상을 조립했다. 그는 영지주의 이원론을 변형시켜서 또 하나의 독자적인 사상을 전개시켰다. 그는 영지주의 자들이 말하는 지존의 절대적인 하나님을 기독교의 하나님이라고 했고 구약의 하나님 곧 유대교의 하나님은 “데미우르고스”로서 지존의 절대적 존재인 하나님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악한 물질세계를 창조한 열등한 신이라고 했다. 마르시온이 구분한 두 하나님은 존재적 차원에서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능력과 속성에 있어서도 완전하게 구분된다. 유대교의 야훼하나님은 기독교의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영적 존재 중의 하나로서 불완전하고 무지하며 독선적이고 악한 하나님이다. 때문에 그가 창조한 물질세계는 그의 능력과 속성을 따라 부족하고 불완전하며 악하다. 그는 물질세계를 창조 한 후에 인간을 창조하였는데 인간이 악한 존재로 창조되자 그것이 자신의 무지와 악함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결과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화가 나서 인간들을 악한 물질세계에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도움을 주지만 자신에게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가혹한 징벌과 심판을 내려 복수한다. 그가 히브리인들만을 선택하여 구별한 것은 그의 독선적 속성 때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인들을 멸망하게 한 것은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진노와 복수 때문이다.
마르시온은 성경의 증거들을 일일이 예로 들면서 유대교의 야훼하나님을 무지하고 악한 신으로 평가 절하했다. 마르시온에 의하면 유대교의 야훼하나님 은 무지하고 원칙이 없어서 어떤 일에 대처할 능력이 부족했으며 따라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즉시 해결하지 못하고 더듬적거리거나 우왕좌왕했다. 그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였을 때에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아담아 어디 있느냐?>하고 아담을 찾아 다녔고 소돔과 고모라의 실태를 알아보기 위하여 천사들을 둘씩이나 데리고 직접 확인하러 내려왔으며 우상을 만들면 죽이겠다고 엄포하고서도 그것을 잊어먹고서 모세에게 구리 뱀을 만들게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능력이 부족하여 아담과 하와를 범죄와 무관한 존재로 창조하지 못하고 시시하게 뱀 따위에게 속아 넘어가서 죄를 범하는 허약한 존재로 만들었다. 세상이 이토록 악하고 불완전한 것은 결국 야훼하나님이 불완전하여 완전하게 세상을 창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죄에 대한 창조자이며 따라서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인간들을 영원히 구원할 능력이 없음으로 인간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능력 안에서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아야 한다. 마르시온은 다윗과 같이 성적으로 문란하고 악한 살인자를 왕으로 삼은 것과 솔로몬같이 패역하고 부도덕한 악의 씨앗을 계속하여 왕으로 세운 것은 야훼하나님의 독선적 성격과 그 자신이 부도덕하고 악하기 때문에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함으로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심지어 다윗을 음흉하고 무식하고 비루한 산적 출신이라고 했다. 다윗이 율법 책을 가까이 하지 않은 것과 자녀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은 그가 산적 출신이라 무식하여 글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다윗이 정신없이 여자를 끌어드린 것은 그가 저급한 산적이므로 여자를 밝혔기 때문이고 심지어 우리야 까지 죽이면서 여자를 빼앗아 온 것도 그에게 산적 기질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르시온은 인간이 남녀의 결합을 통하여 후손을 이어가게 된 것도 수치스럽고 저속한 것으로서 역시 야훼하나님의 무능력 때문에 이루어진 결과라고 주장했다. 저속하고 추잡한 남녀의 성적관계를 통한 후손 양성방식이나 임신의 불편과 임산부의 아름답지 못한 모습, 그리고 해산때의 고통들은 야훼하나님의 무능력 때문에 비롯되어진 결과라는 것이다.
반면에 기독교의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의 아버지하나님<성부하나님>으로서 절대적 지고의 주권과 능력을 가지신 완전무결, 영원무궁, 의지존적 하나님이시다. 그는 복수심이나 진노하심이 없는 자비와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때문에 그는 복종이나 경배를 요구하지 않으며 단지 사랑의 교제를 원한다. 그는 오직 순수하고 선한 영적세계만을 창조하셨다. 때문에 유대교의 야훼하나님이 창조한 물질세계에 대한 어떤 책임과 의무가 전혀 없다. 그러나 그는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자비와 긍휼과 사랑 때문에 인간들의 불행을 좌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독생자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어 인간들을 구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요셉의 정혼녀인 마리아에게 서 태어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때에 예수그리스도는 야훼하나님의 악한 세상에 속하게 됨으로서 구원자로서의 직무를 행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기독교인들, 특히 사도들이 조작해 낸 날조극이라고 했다. 마르시온은 자신이 직접 작성한 누가복음 역문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티베리우스황제 치세 때에 하늘로부터 직접 내려와 메시야로서의 직무를 마치고 다시 올라갔다고 주장했다. 마르시온은 이와같은 개념 때문에 성경을 부인했는데 구약성경은 악하고 완전하지 못한 야훼하나님의 것이라는 이유로 거부했고 신약성경 중에서는 바울서신과 누가복음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거부했는데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직계 제자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진의<眞義>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경을 잘못 기록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마르시온은 결국 그것들까지도 불신했는데 이유는 유대교도들의 음흉한 술책으로 인하여 원본이 많이 훼손되었거나 또는 본래의 내용이 수정되어져서 진리가 오류 되어졌다는 것이었다. 마르시온은 자신이 직접 원본을 회복시키겠다는 생각으로 누가복음을 개편하고 바울서신 중에서 저급한 야훼하나님에 관한 내용을 모두 삭제하여 새로운 성경들을 만들어 내었는데 역사학자들은 그것을 마르시온의 정경이라고 부른다.
마르시온은 유대교와 기독교는 전혀 별개이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유대교에 관한 모든 것을 완전히 배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의 기독교에는 율법이 있을 수 없었고 오직 복음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복음도 예수그리스도 중심의 기독교 복음이 아니라 마르시온 중심의 제한적 복음이었다.
마르시온이 정립한 교리는 결국 크레도에게 배운 영지주의사상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가 예수그리스도의 실재적 강림을 거부하고 가현설을 주장한 것이나 현상세계의 실재성을 거부하고 환상설을 주장한 것도 모두 영지주의로부터 전수 받은 교리들이었다. 때문에 그의 신앙적 요소도 거의 영지 주의적이었다. 그는 현상세계가 모두 악한 것이라 하여 현실세계로부터 초월하고자 했으며 육식<肉食>이나 성교<性交>는 유대교의 창조신의 악한 계획을 따르는 것이라 하여 철저하게 금지했다. 마르시온은 로마교회에 막대한 헌금을 하고 정착한 후에 많은 추종세력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제한적 교리가 기독교의 신학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이단으로 정죄 받고 파문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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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우르고스
데미우르고스라는 명칭은 숙련된 노동자를 가리키는 헬라어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이 명칭은 플라톤의 사상 체계에서는 조물주의 이름으로 사용되었고 헬라 철학적 기독교 신학자들은 그 용례에 따라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했다. 반면에 영지주의 자들은 이 단어를 물질세계를 창조한 신으로서 영적세계를 전혀 알고 있지 못하면서도 자신이 최고의 신인 것으로 착가하고 있는 열등한 신적 존재에 적용했다. 영지주의 자들은 이 열등한 신 데미우르고스가 성경에서 자신을 참된 신이라고 공언하면서 사람들을 미혹시킨다고 주장했다.
3.마니교
마니교는 기원3세기경 페르시아사람인 마니가 창건한 이란<페르시아>의 종교이다. 마니는 본래 조로아스터교의 성도였는데 인도와 중국을 여행하면서 알게 된 불교의 교리와 기독교 교리를 혼합하여 하나의 교리체계를 만들었다. 마니교는 기독교역사에 적지 않은 누를 끼쳤는데 아우구스티누스도 한때 마니교에 심취하여 10여 년간이나 마니교를 신봉하였다. 마니교의 교리는 조로아스터교의 근본 원리를 따라 2원론적인 체계를 이룬다. 이 세계는 원초적부터 광명<선함>과 암흑<악마>으로 이원화되어 있으며 그 두 세력은 상대적인 존재를 견지하기 위한 필연성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광명의 세력과 암흑의 세력은 자연세계와 인간세계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이 대결한다. 반면에 인간의 구원 문제에서는 불교의 교리로 변한다. 인간은 광명과 암흑의 대결로 인하여 죄악 된 세상에 살게 되었는데 그 죄악 된 세상으로부터 해탈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금욕을 해야 하며 육식을 먹는 것과 망령된 말을 금해야 한다. 따라서 마니교는 세 가지의 인봉<印封>을 한다. 첫째는 입의 인봉으로서 육식과 망령된 말을 금하는 것이고 둘째는 손의 인봉으로서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가슴의 인봉으로서 정욕과 모든 악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마니교의 교직제도에는 기독교의 교리가 적용된다. 마니교는 인간 예수는 거부하지만 신의 아들<그리스도>를 거룩한 구원자로 인정한다. 그러나 마니교가 인정하는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그리스도하고는 전혀 다르다. 마니교의 그리스도는 구원자이지만 인간의 구원을 완전하게 책임지는 구원자가 아니라 다만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안내자에 불과하다. 마니교에는 아담, 에녹, 석가, 조로아스터, 예수 등등의 선지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지역적 전도자들로서 민족적 전도자에 불과하며 마니는 세계적 전도자이고 최후의 전도자이다. 마니 밑에는 12명의 사도가 있고 12명의사도 밑에 70명의 감독이 있다. 감독들 밑에는 많은 교사들이 있으며 교사 아래에 수도사들이 있다. 수도사들은 택한 자와 듣는 자로 구분되는데 택한 자들은 세 가지 인봉을 가진 자들을 말하며 듣는 자들은 듣고 배운 후에 택한 자의 반열에 올라가게 된다. 마니는 페르시아왕궁에서 환대를 받으며 교세를 확장했으나 조로아스터교에 의하여 제소되고 정죄 받아 십자가에 달려 가죽을 벗긴 후 화형 당했다. 마니교는 한 때 크게 융성하여 중앙아시아 일대와 인도, 중국, 로마, 북아프리카, 스페인 등지에서 크게 발전했으나 13세기에 이르러 쇠퇴하기 시작한 후 14세기 완전히 소멸되었다. 마니교의 교리는 사실상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기독교가 아직 교리적인 정립을 이루지 못했을 때에 기독교에 여러모로 누를 끼쳤다. 그러나 기독교에 정경이 확립되고 교리가 조직적인 체계를 이루어 정립되어짐에 따라 더 이상 기독교내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축출되었다.
마니교의 교리를 가장 적극적으로 공격한 것은 과거 마니교에 심취하였던 아우구스티누스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의 이원론적 교리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그는 하나님의 창조를 근거로 하여 마니교의 이원론을 반박했다. 세계는 하나님에 의하여 본래부터 선한 것으로 창조되었으며 인류사회에 존재하는 악의 세력은 선에 대항하는 필연적인 상대세력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발생시킨 범법적 결과라는 성경의 증거를 근거로 하여 마니교의 이원론 교리를 주저앉힌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인간이 부패한 죄인이 된 것은 첫 사람 아담의 원죄와 부패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라는 원죄의 교리를 적용하여 마니교의 이원론 사상에 종지부를 찍어주었다.
4.몬타누스주의
몬타누스파는 창시자인 몬타누스의 이름을 따라서 명칭 되어진 이단 분파이다. 몬타누스는 본래년경>소아시아의 프로기아지방에 존재하였던 시벨레종교의 제사장이었다. 그는 년>에 기독교로 개종했으나 자신이 오랫동안 몸담았던 시벨레 종교의 흔적을 버리지 못하고 시벨레적인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방언과 입신과 예언을 특히 강조했는데 예언을 할 때에는 반드시<나 여호와가 말하노라>로부터 시작했다. 몬타누스는 두 여자 성도인 프리스카와 막시밀라를 대동하고 다니면서 예언을 했는데 그들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무의식적 황홀상태에서 예언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성령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주장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입을 통하여 새로운 예언을 하신다고 주장했는데 그 내용은 영지주의자들의 주장들을 공박하는 것이었다. 몬타누스파의 3총사라고 불리어졌던 그들은년>페푸자에 여성형<形>예수그리스도가 재림할 것이라고 예언했으나 거짓말로 판명되었다. 그들이 모두 사망한 후 데미소가 지도자가 되어 몬타누스파를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설교자에게 월급을 주었으며 그것을 위하여 교인들에게 헌금을 부과하였고 재정을 철저하게 관리하여 부정을 막았다. 그는 한 때 감옥 생활을 하는 등 박해를 받았으나 그것을 순교자의 일생이라고 자랑했다. 몬타누스주의가 서방에 전파되었을 때에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몬타누스주의를 받아 들였는데 년경>에 터툴리안이 몬타누스주의자가 되어 열열 하게 몬타누스주의를 변호했다. 한편 아우구스티누스는 몬타누스주의를 반대하여 그들의 집회를 금지시켰으며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는 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몬타누스주의자들의 교리 중 중요한 것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몬타누스주의 교리.
(1)기독교의 역사.
기독교의 역사는 구약시대-복음서시대-성령시대-로 구분 되어지며 성령 시대가 가장 우월하다.
(2)계시의 계속.
성령시대에도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시가 여전히 계속적으로 주어지며 따라서 성경은 계속하여 기록되어 질 수 있다.
(3)성령의 은사.
성도가 세례를 받으면 성령을 받아 방언과 예언을 하게 되고 입신에 들어가게 된다. 세례를 받은 성도에게 이와같은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는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한 것이다.
(4)예수그리스도의 재림.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이 곧 임하게 될 것이다. 년 페푸자에 여성형 예수그리스도가 재림할 것이라고 예언했으나 거짓말로 판명되었다>
(5)금욕주의 신앙생활.
구원 받기 위해서는 철저한 금욕주의적 신앙생활을 해야 하며 따라서 결혼이나 재혼을 하지 않아야 한다.
(6)순교자.
몬타누스 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순교자들을 기뻐하신다고 강조하여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때에 자원적 순교자들이 발생했다. 그러나 데키우스황제의 박해 때를 제외하면 몬타누스 주의자들의 순교는 거의 없었다. 그들이 박해를 피하여 뿔뿔이 흩어져버렸기 때문이다.
(7)여성들의 지도력 인정.
몬타누스는 기독교가 여자들의 지도력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두 여자성도 인프리스카와 막시밀라를 대동하여 함께 일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을<몬타누스의 3총사>라고 불렀는데 그들의 예언들이 모두 거짓으로 들어났고 반면에 그들의 연합적인 활동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들이 발생하게 됨에 따라 많은 불신과 비난을 받았다.
2)교회의 대응.
교회지도자들은 몬타누스 주의자들의 사상이 교회에 유입되기 시작하자 교회로부터 그것을 몰아내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다했다. 몬타누스주의 반대운동에 가장 앞장섰던 것은 교황 엘레우테리우스재위>였고 밀티아누스, 아폴리나리우스 등등이 그 뒤를 이었다. 년>이고니움교회 회의가 몬타누스파에게서 받은 세례의 무효성을 선포했을 때 몬타누스파는 사실상 파문당한 것이었다. 몬타누스 주의자들은년>에 있었던 데키우스황제의 박해 때에 대부분 몰락하여 소멸되었으나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중 기원 4세기 후반에 이르러 점점 쇠퇴하다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5.니골라당
니골라당은 에베소교회와 버가모교회에 존재했던 이단종파 중 하나다. <계2:6,15>니골라당의 창시자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동방교회 최고의 신학자 중 하나였던 이레나에우스경>와 히폴리투스의 견해이다. 그들은 니골라당의 창시자를 예루살렘교회 7집사 중 하나였던 니골라집사<행6:1-6>라고 주장했다. 니골라 집사가 나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자 변질되어 이단적인 종파인 니골라당을 창시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견해는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였던 클레멘스경>의 견해이다. 그는 예루살렘의 니골라집사는 본래 엄격한 금욕주의자이기는 했으나 매우 경건한 신자였는데 후에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신앙을 제대로 본 받지 아니하고 그의 신학사상을 잘못 해석하여 변질된 신학사상과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한편 에우세비오스도클레멘스의 주장에 동의한다.
니골라당은 예루살렘 회의에서 규정한 명령<우상에게 드린 것과 음행을 피해야 할 명령-행15:20,29>을 거역하고 그러한 것들로부터 자유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비윤리적, 비도덕적 신앙에 빠졌다. 전승에 의하면 그들은 우상의 제물을 함부로 먹었고 문란한 성적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중세시대에 사제들의 독신주의를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들이 결혼한 사제들을 비웃어 니골라당이라고 불렀다.
요한은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서신을 통하여 니골라당을 책망했고 버가모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는 니골라당이 발람과 같은 방식<신24:1-25; 31:16>으로 가르친다고 정죄했다.<계2:6,15> 니골라당은 별로 위세를 떨치지 못했고 2세기 후반에 이르러 자취를 감추었다.
6.유대교적 분파들.
사도들이 활약하던 시대를 전후한 기독교에는 유대교적 분파들이 있었다. 그들은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도 여전히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고수했으며 자신들의 전통적인 신앙적 삶을 고집했다. 이러한 유대교적 분파는 여럿이 있었으나 그중에 몇 개 분파만 소개한다.
1)나사렛파
나사렛파는 예수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동정녀 탄생을 거부했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 부활, 승천 등등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인성<人性>만을 인정했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가 율법적으로 온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하늘로부터 어떤 신비한 느낌이 주어졌으며 이때부터 예수그리스도는 자신이 어떤 특별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후에 많은 사람들이 따르며 추종하게 되자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구세주를 자처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기독교내에 신성을 거부하는 사상들과 예수그리스도의<메시야 자천설><예수 인간설>이 나오게 된 근본 동기는 나사렛파의 주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나사렛파의 활동은 지극히 미비하여 기독교 역사에 어떤 영향을 주지 못했고 교회로부터 거부되어지다가 스스로 자멸했다.
2)에비온파
유대인 기독교인들 중에 몇몇이 자신들을 에비온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명칭은 요단동편 지방에서 유행되었던 종교적 명칭이었는데 히브리어로<가난한자>라는 의미를 가진 용어였다. 이러한 명칭은 유대인들<특히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추종한 성도들이 대부분 가난했던 것을 비꼬아 부른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에비온파는 그 명칭을 스스로 사용하면서 하나의 분파를 형성했는데 그들은 반드시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강조한 분파들 중에 하나였다. 그들은 할례, 안식일, 금식 등등의 율법준수를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바울과 대립했다. 그들은 바울이 예수그리스도의 직접적 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의 사도성을 부인했고 바울이 이방인들을 기독교로 인정했다는 이유로 그가 유대교를 배신했다 하여 그를 배반자라고 불렀으며 따라서 바울서신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거부함으로서 교회에 많은 말썽을 일으켰다. 예수는 본래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보통 사람이었는데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순간 그의 완전한 성결<聖潔>함이 인정되어 메시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께 받은 메시야로서의 신적인 능력에 의하여 이적과 기사를 행 했으나 그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신적 능력이 떠났는데 이때에 예수가<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 다시 그에게 신적능력을 부여하시어 그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에비온파는 자기들 끼리 따로 교회를 세워 신앙생활을 했는데 마태복음만 사용하고 다른 성경들을 거부했다. 에비온파는 로마감독이었던 클레멘트를 추종하여<클레멘트의 인식>과<클레멘트의 설교>라는 자서전 형식의 문학서적을 사용했다. 그 책의 내용은 서로 비슷한 것으로서 클레멘트가 바나바를 만나게 된 과정과 베드로를 만나서 복음전도 한 것에 대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에비온파는 한때 많은 추종세력을 얻었으나 2세기 이후에 점점 쇠퇴하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3)엘카이파
엘카이파는 2세기 초에 활동했던 유대인 엘카이에 의하여 창설된 분파다. 엘카이는 동양철학에 심취했다가 나중에 기독교인이 되었으나 동양철학의 매력을 버리지 못하여 동양철학과 기독교사상을 연합했다. 엘카이는 자신의 사상을 기록한 책을<엘카이서>라고 했는데 그것을 페르시아에서 기도하던 중에 천사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책의 구성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인용했으나 아주 조금만 인용했고 바울서신들은 모두 제외했다. 그 책의 내용은 거의 모두가 동양철학, 동양종교 사상들을 근거로 하며 그것에 기독교사상을 약간 연합시킨 것이기 때문에 여러 곳에서 동양의 무속적 종교사상이 그대로 나타난다. 엘카이는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메시야가 아니라 보통 인간들과 같은 하나의 인간에 불과하며 어쩌면 아담이 예수로 환생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앞으로 또 다른 예수가 태어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엘카이는 성도들이 세척의식<洗滌儀式>을 자주 행함으로서 정결한 몸을 유지해야 신<神>과의 교류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율법의 준수와 자기 정결의 유지와 금욕주의 고행적 신앙의 삶 등등을 통하여 신을 만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상 때문에 신과 만나기 위한 각종 방법들이 계속하여 추가 되었는데 나중에는 각종 점성술들이 등장했고 주문들과 부적들까지도 등장했다. 한편 엘카이파는 안식을 비롯한 율법준수를 철저하게 했으며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고 경배하는 신앙적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제사는 드렸으나 희생제사는 거부했다. 엘카이파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을 대부분 인정했지만 그들은 일시적인 선지자들인 반면에 엘카이는 최후의 선지자이며 또한 최고, 최상, 최대의 선지자라고 했다. 엘카이파는 기원2세기 말에 요단강 하류 사해의 동편에서 집단적인 생활을 했고 3세기 초에는 알키바데스라는 사람이<엘카이서>를 가지고 로마에 가서 전도했으나 큰 호응을 얻지 못했으며 점차 쇠퇴하다가 사라져버렸다.
7.신<新>플라톤학파.
기독교가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하자 로마의 재래종교들이 기독교로 인하여 완전히 사멸될 것을 우려한 자들이 등장했는데 그들 중에 기독교를 가장 적극적으로 공격한 것이 신<新>플라톤학파다. 신플라톤학파는 영지주의자들과 같이 포괄적인 종교 형태를 형성하지는 않았으나 플라톤의 철학사상을 개조하여 종교적 요소를 추가한 새로운 학문을 형성했다. 신플라톤학파의 시조는 암모니우스삭카스년사망>이다. 그는 양친으로부터 기독교 교육을 받았으나 성장한 후에 로마의 재래 종교로 돌아갔다. 그는 특히 플라톤 철학에 심취하여 모든 것을 플라톤식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그의 학문이 전해지지 않으므로 그의 학설은 알려지지 않았다. 반면에 신플라톤학파를 본격적으로 지도한 것은 플로티누스이다. 플로티누스는 암모니우스사카스로부터 영향 받아 새로운 사상체계를 수립했다. 신플라톤주의가 주장하는 신적존재는 플라톤이 주장한 것과 같은<초월적, 지고적 존재>이다. 신플라톤 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종교적 사상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영원히 존재하는 초월적, 지고적 존재는 형이상학적으로는 신적인 빛을 발하여 이데아의 세계를 끝없이, 그리고 영원히 주관한다. 반면에 그 존재는 형이하학적으로는 이성도, 생명도 없는 암흑의 수렁에 까지 주관한다. 부족한 상태의 인간은 이러한 초월적 지고적 존재로부터 신비한 조명을 받아 영적, 정신적 부족함을 채움으로서 차원 높은 영적상태를 이루고 높은 사고<思考>를 갖게 되며 악하고 저급한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수준 높은 이데아적 세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인간의 이러한 상태는 이데아적, 영적 영역에서는 가능하지만 인성을 포함하는 육체적 영역에서는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육체적 영역과 이데아적 영역 사이에는 영원히 평행선으로 존재하는 선<善>과 악<惡>이라는 무한하고도 질적인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과 인간의 관계는 신학적으로 인간에게 하강하는 것이며 신앙적으로는 신에게 귀의하는 것이다. 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얻는 길은 물질의 속박을 벗어나 신에게 귀의하는 것이다. 신에게 귀의하는 방법은 덕<德>이다. 그러나 덕은 신을 직관하고 신의 조명에 자신의 모든 것을 일치시킬 때에 비로소 완성된다. 인간이 온전한 덕을 형성했다는 증거는 사랑<에로스>를 통하여 입증된다.*
이러한 사상 때문에 신플라톤 주의자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했고 그리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실제적 존재가 아닌 환영<幻影>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플라톤이 말한 사랑<에로스>를 강조하여 진정한 신앙은 에로스를 통하여 확인되고 입증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플라톤 주의자들은 그들을 체계적 조직적으로 일사분란하게 이끌어 갈만한 지도자가 없었으므로 스스로 와해되고 말았다. 신플라톤주의 사상으로 기독교를 공격했던 자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은 다음과 같다.
1)플로티누스
플로티누스는 이집트에서 출생하여 암모니우스사카스에게 배운 후 고리티아누스황제가 페르샤와 전쟁할 때에 종군하면서 페르샤로부터 동양학문을 배웠다. 그는 전쟁이 종료된 후에 로마에서 신플라톤주의를 열심히 가르쳤으며 기독교에 신플라톤주의를 접목시키기 위하여 노력했다.
2)포르피리우스
포르피리우스는 로마의 전통종교들을 신봉하는 다신론 주의자로서 15권의 저술을 통하여 기독교를 공격하고 비판했다. 그가 기독교를 비판하고 공격한 것 중에 대표적인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구약과 신약은 서로 일치하지 않으며 모순투성이다.
*예수그리스도는 거짓말을 하였고 제자들에게 전혀 본이 되지 못했다. 때문에 사도들은 교리적인 문제로 일치할 수 없어 자기들이 편리한 대로 해석하거나 사족<蛇足>을 달았고 그로 인하여 언제나 분쟁할 수밖에 없었다.
8.기타.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붕괴시키기 위하여 박해와 탄압을 가할 때 철학자임을 자부하는 자들이 기독교 음해에 열심 했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자들은 다음과 같다.
1)루키아누스-A.D.120-200>
에피크로스학파였던 루키아누스는 수리아의 사모사타 출신으로서 풍자<諷刺>와 조소<嘲笑>의 문장으로 기독교의 신앙적 삶을 공격했다. 그는 A.D.180년경에 기독교인들과 키니크학파를 조롱할 목적으로<페레그리누스의 죽음>이라는 소설을 발간했다. 이 소설은 A.D.165년의 올림피아경기 때에 키니크학파인 페레그리누스가 불속에 투신하여 순교한 것을 토대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빗나갔고 오히려 그 소설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입문했다.
2)셀서스
셀서스는 2세기 후반 사람으로서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다. 그는 플라톤학파 소속이었으나 에피크로스를 더욱 추종했다. 그는<참말>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기독교를 비판하고 공격했는데 당시에 많은 지식인들이 그 책을 즐겨 읽었음으로 상류 사회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편견이 심각했다.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겐이<셀서스를 반박 한다>라는 저서를 발간하여 셀서스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제5장.이단들에 대한 교회의 조치.
철학자들의 사상들이 교회 내에 계속하여 반입되어지고 각종 이단적 교리들이 교회 내에 침투했을 때 교회의 지도자들은 당연히 위기의식을 느꼈으며 힘을 합하여 대처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도 철학자들과 이단자들에 대한 사명적 임무를 수행했지만 교회들이 연합하여 공동적으로 대처해 나가야 할 절대적인 필요성 하에서 연합적인 조치를 강구했다.
1.교회의 단결.
교회지도자들이 강구한 첫 번째 조치는 교회들의 연합과 단결이었다. 그들은 철학 사상들과 이단자들의 비진적교리들이 교회 내에 침투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교회들이 연합하고 단결함으로서 공동 대처했다. 그리하여 우선적으로 철학사상과 이단들로부터 기독교교회를 구분했다. 이때에 등장된 기독교 교회의 명칭이“카토릭교회”다. 카토릭이란“보편적”이라는 의미적 용어이지만“전체에 의하여”라는 의미적 용어이기도 하다. 따라서<카토릭교회>라는 명칭은“전체에 의한"교회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즉<모든 사도들의 전체적인 증언에 의한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로서 카토릭이라는 명칭 하에 이루어진 교회 연합에 귀속되지 않은 철학파들의 집단이나 각종 이단적 종파들은 기독교로 인정될 수 없었다. 전체 교회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어떤 종파들이 자신들의 교회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교회가 어떤 사도에 의하여 설립되었다고 주장할 때에 그들의 주장은 교리적인 문제의 진위성을 확인하기 이전에 과연 전체 사도들이 그 교회를 인정하였느냐? 하는 문제가 우선적으로 확인되어야 했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전체 사도성>의 결여로 인하여 인정받을 수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교회연합과 단결이 이루어지면서 교회 회의들이 자연스럽게 구성되었다. 이제 교회의 문제들은 교회 회의를 통하여 논의 되고 심의되었다. 교회 회의의 결정에 순종하지 않는 교회 및 개인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어 교회로부터 파문당했다.
2.교리의 정립.
교회의 지도자들은 시도 때도 없이 제기되는 철학 사상들과 이단들의 교리적 논쟁들에 대처하기 위하여서는 기독교 교리가 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리하여 이때로부터 기독교 교리 정립에 대한 역사적 과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기독교 교리 즉 기독교 조직신학의 정립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적으로도 많은 역사를 필요로 하지만 내용적으로도 많은 분야적 영역을 완주<完走>해야 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적 역사를 필연적으로 거쳐야했다.
3.정경의 정립.
교회 지도자들은 기독교 교리 정립의 과정에서 또 하나의 절대적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것은 정경의 필요성이었다. 어떤 철학 사상과 비진리적 교리들에도 흔들리지 않는 교리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복음적 기사들과 교리적 기사들이 정경으로 확고하게 정립되어져서 그것<철학사상과 비진리적교리>들을 심의하고 구분하여 배격하고 퇴치할 수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공감했던 것이다. 때문에 이때로부터 정경 정립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4.이단들에 대한 조치.
교회의 연합과 단결이 이루어지고 공통적 복음과 교리들이 형성됨에 따라 철학자들의 사상이 함부로 교회 내에 반입되는 것이 저지되었고 각종 이단자들의 비진리적 교리가 교회를 위협하는 것이 거부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지도자들은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각종 사이비 이단자들은 자기들의 주장들이 교회로부터 거부되어지자 파당을 만들거나 또는 분파를 형성하여 더욱 강력하게 활동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더욱 강한 조치를 강구하여 성도들이 비진리에 현혹되지 않게 했다. 교회 지도자들은 그러한 일이 발생할 때마다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그 문제를 심의, 논증했고 이단자들을 정죄하고 파문하여 교회의 신학적, 신앙적, 질서들을 바르게 세웠다.
5.교훈.
우리는 기독교 교리에 대항하는 각종 철학 사상들과 이단들의 공격 및 그들의 분당과 분파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주장들과 활동이 하나님의 기독교 역사에 미치는 영향과 그들의 결국을 통하여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깨닫게 된다.
1)영향.
철학자들의 사상들이나 비진리적 이단자들의 교리가 시도 때도 없이 교회를 위협하였던 것은 사실이나 그들은 결코 교회에 나쁜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물론 그들의 비진리적 교리들의 범람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미혹 당하고 그리하여 비진리와 오류에 빠졌으나 그것은 일시적이거나 지엽적인 것에 불과했고 그들의 활동은 오히려 교회가 신학적, 신앙적인 질서를 회복하는데 일조했다. 교회는 철학자들이나 이단자들이 교회를 위협할 때마다 연합하고 단결하여 그것에 공동대처했으며 그들의 비진로부터 하나님의 진리를 사수하고 보존하며 교회를 보호하고 보전했다. 그리고 교회의 이러한 노력들 속에서 기독교에 필연적으로 요구되어지는 각종 현안들이 정립되었다. 성경의 정립과 조직신학의 정립과 교회의 조직 등등의 역사적 현안들이 하나하나 해결되어져 갔던 것이다. 따라서 비진리자들의 활동은 오히려 기독교의 진리를 세우는 결과를 촉진시켰다.
2)특징.
한때 교회를 위협했던 철학자들의 사상이나 이단자들의 교리나 활동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1)비진리적 교리.
그들의 사상이나 교리 또는 그들의 활동에는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사상이나 교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비롯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진리일 수도 없었겠지만 우리는 여기에서<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에 대한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차이를 실감하게 된다. 저들의 주장들은 언제나 비논리적이며 비상식적이고 비과학적이다. 때문에 언제나 허위로 끝나고 무효로 끝났다. 그리고 저들의 활동 역시 비진리적, 비상식적, 비논리적인 것으로서 신학적, 신앙적 차원에서도 거부되었지만 도덕적, 윤리적인 면에서도 지탄받아 마땅한 것들이기 때문에 사회적 차원에서도 당연히 책망 받았다. 저들의 주장들과 저들의 활동 중에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신비주의적 사상들과 행동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신비주의가 아니라 거짓이고 기만이며 사기이다. 때문에 언제나 유효할 수 없었고 당연히 무효로 끝났다.
(2)개인추종.
기독교역사에 등장하는 이단자들은 한결같이 개인을 추종하는 집단적 형태로 존재했다. 그들의 사상이나 교리도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에 불과했고 그들의 집단적 운영 형태도 종교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 위주의 형태였다. 기독교 사회는 어떤 개인의 사상이나 이념을 추종하는 집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 충실하고 충성하는 하나님섭리 중심의 집단적 사회이며 또한 어떤 인간 개인을 추종하는 종교사회적 집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경배하는 하나님 중심의 사회적 집단이다. 따라서 개인의 사상을 추모한다거나 또는 개인을 추종하는 집단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기독교가 될 수없다.
(3)파벌형성
이단자들의 특성 중 또 하나는 그들은 언제나 전체 기독교 안에 하나의 교회로 존재하기를 거부하고 개인 또는 소수의 무리를 중심으로 하여 파벌을 형성하는 분파적, 분당적, 형태로 떨어져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개인의 의견이나 소수의 의견이 때로는 진리일 수도 있고 전체의 의견이 오히려 비진리가 될 수도 있다. 그러한 경우에 개인 또는 소수의 진리가 숫자가 많다는 이유로 인하여 전체의 비진리를 따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전체를 무시하거나 배척해서는 않된다.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의 교회에 혼란이 발생하고 그로 인하여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 즉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자신의 의견이 진리이고 전체의 의견이 비진리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까지 그리고 전체가 그것을 알고 깨달을 때까지 전체 안에 조용히 머무르면서 전체의 비진리가 진리로 돌아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물론 예외는 있다. 로마카토릭교회의 경우처럼 비진리자들이 개인적인 권위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멀리 그리고 계속하여 달아나는 경우이다. 로마카토릭은 하나님의 진리의 종들이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전혀 반성하지 않는 채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의 종들을 탄압하고 박해했다. 이러한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하여 그들과의 결별을 선언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는 분당이나 분파가 아니라 진리로의 복귀이다.
3)결과.
사이비, 비진리적, 이단자들의 주장들이나 활동들은 한때는 천하를 집어삼 킬 것 같은 요란함을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오래가지 못하고 지리멸렬<支離滅裂>하면서 사라져 버린다. 이단자들은 창시자가 사망하게 되면 즉시 주도권 싸움에 돌입하여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이다가 결국은 사분오열하면서 더욱 다양한 이단적 분파를 형성하다가 끝내는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퇴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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