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교회사 |
여러분이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세계교회사를 알아야 할 것이며, 세계교회사를 공부하는 동안 가톨릭과 개신교와의 관계, 가톨릭과 동방교회와의 관계를 이해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교회가 다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교(기독교)이면서도 왜 여러 교파로 나누어지게 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발전사, 그중에서도 특히 가톨릭교회의 발전사를 살펴 세계교회사를 통해 로마 가톨릭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어느 정도 알고 나서 우리는 다시 한국에서 가톨릭이 어떤 식으로 발전해 왔는지도 공부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우리나라에 수용될 당시 사회적, 정치적, 사상적 여건은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 이를 용감하게 받아 들이고, 또 전할 수 있었던 우리 조상들의 구도모습과 한국천주교회의 발전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찾아 얻은 진리에 대한 더 큰 관심을 가지고, 더욱더 적극적인 신앙자세를 가다듬고자 한다.
가톨릭교회의 역사는 30년경 유다교의 축일인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베드로를 중심으로 군중 앞에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면서 구약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러한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이들이 사도들을 중심으로 사랑과 일치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는데, 초창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유다교 예배에 참여하였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유다교 종파 중의 하나로 보았다. 그러나 초대교회 신자들은 자신들만의 예배, 즉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를 거행하면서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사도단과 그들을 보좌하는 이들로 공동체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구세주로 고백하면서 그분의 기쁜 소식을 열심히 전하였으니,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루살렘 밖으로까지 전파되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이들을 그리스도교인이라 불렀다. 처음에는 유다인들을 중심으로 전파되던 그리스도교는 차츰 그리스인, 로마인들에게도 전파되었으며, 사도들과 성 바울로와 다른 여러 제자들의 열성적인 선교활동 덕분에 로마제국 안에 있는 큰 도시들 대부분에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70년 예루살렘의 멸망 후에는 유다인들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쇠퇴하기 시작했고, 외국인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날로 커져 갔다. 이들 초기교회 공동체는 아직도 유다교의 전통을 어느 정도 따르면서도 나름대로의 교리와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사도들이 죽은 후, 2세기로 접어들면서 주교를 중심으로 하여 장로(사제)와 부제들이 보좌하는 지역공동체(교회)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들 공동체들은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교리문제를 해결하면서 급속도로 로마제국 안에 퍼지게 되었다. 교회가 발전하면서 로마 황제들과 잦은 마찰이 있게 되면서 2세기부터 4세기 초에 걸친 대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를 낳게 되었다.
수많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발전을 거듭하던 교회는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밀라노에서 내린 칙령에 의해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이후로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 황제들의 호의적인 도움을 받으며 세계적 종교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마침내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29년에 포고령을 통해서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하였고, 이러한 국교시대를 맞이하여 그리스도교는 여러 분야에 걸쳐서 발전하게 된다. 이때 많은 수도원이 창설되어 영성에 대한 도움을 주었으며, 공의회가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조직으로 등장하였고 신앙생활의 활성화로 인하여 전례가 발전되기 시작하였으며, 그밖의 교리 논쟁 등은 여러 공의회를 통하여 해결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정통 가톨릭 교리가 정립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당시 로마제국 안의 큰 도시들에 세워진 교회들은 훌륭한 주교들과 학자들의 영향으로 전례와 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주위의 작은 지방교회들은 이 큰 교회들로부터 전례와 신학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어느 일정한 지역 전체에 영향을 행사하는 큰 교회들이 생겨났으니, 이들 교회들을 총대주교좌(總大主敎座) 교회라고 불렀다. 5세기에 이들 총대주교좌 교회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 예루살렘에 있었다. 이들 교회들은 서로 협력하면서도 각자 서로 다른 역사를 걸어가면서 발전하였다. 로마를 제외한 다른 교회들로부터 파생된 교회를 우리는 현재 동방교회들이라고 일반적으로 부르고 있다.
게르만 민족의 이동과 프랑크 왕국과 교황청의 융합이라는 과도기(450∼750년)를 거치면서 시작되는 중세기(750∼1300년)는 시대적으로 양분(兩分)될 수 있다. 중세 전기에는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서구 그리스도교 제국이 창설되었고 종교적 입장에서는 그리스도교 교세의 확장과 교황령(敎皇領)의 탄생 등, 외적 발전이 이룩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국가로부터 물질적인 혜택을 받은 반면에 황제의 내정간섭을 받아 교권이 약화되고 교회가 세속화 되었고,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가 밀착되었던 프랑크 제국이 정치적으로 붕괴됨으로써 교회의 권위와 교황의 권한이 쇠퇴하는 교회의 암흑기를 맞게 된다. 암흑기 동안에 그리스도교는 처음에 로마 귀족의 지배를 받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교회 내정간섭으로 자율성을 잃게 된다. 아울러 성화상 파괴 논쟁으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신학적 충돌을 하였고, 교리 논쟁 이후로 서방 라틴교회와 동방 비잔틴교회는 각기 다른 노선으로 발전하게 된다. (1) 성화상 파괴 논쟁 (2)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결별(1054년)
중세 후기에는 클뤼니 수도단체의 개혁과 그레고리오7세의 교회쇄신으로 교회는 세속권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권을 회복할 뿐 아니라 세속권을 지배하는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이러한 개혁운동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각성시켰고, 평신도의 영성강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는 11세기에 시작된 십자군운동과 청빈운동에서 나타난다. 십자군운동은, 이슬람교도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성지순례에 불편을 느끼고 있던 중,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1세가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서방교회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교황 우르바노2세는 1095년 두 차례의 종교회의에서 서방 그리스도교 국가에 이를 호소하였다. 이때 동방교회를 돕기 위한 염원과 이교도로부터 성지를 탈환하려는 열망은 국가란 장벽을 넘어 서구 세계를 단결시켰다. 이 십자군운동은 대중의 종교적 운동으로 시작되어 몇 세기 동안 8차례 (또는 4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십자군운동은 그리스도교적인 목적을 위하여 일어났지만 기사들의 모험심, 명예욕 등의 세속적 동기도 있었다. 그리고 기사들의 활력은 비그리스도교적인 광포로 나타나 십자군 운동을 중세의 한 잔인한 현상으로 변질시키기도 했다. 십자군운동으로 인해 기사 수도회가 탄생했으며 비잔틴 문화와 이슬람 문화와의 접촉이 가능했고, 학문, 특히 스콜라 철학과 신학, 예술의 발달에 이바지 한 점 등이 그 긍정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14∼15세기(1300∼1500년)에 있어서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는 중앙집권의 정치체제 또는 지방분권화의 정치적 상황으로 단일성을 상실하였다. 또한 교회는 일련의 대사건 즉 교황청의 아비뇽 환도(遷都)와 대분규(大紛糾, 西歐의 大離敎)로 인한 교황권의 약화로 말미암아 공의회 우위사상의 흐름 속에서 이단 운동이 발생하여 혼란 속에 빠졌다. 프랑스인들이 교황으로 뽑히면서 그들이 프랑스의 아비뇽에 머무는 70여 년 동안(1305∼1377년) 교회는 중심을 잃고 크게 흔들렸으며, 교회 개혁 또한 지지부진하게 되었다. 로마로 다시 천도한 이후에 교회는 큰 위기를 맞게 되는데, 그것은 세 명의 교황이 선출됨으로써 서로가 자신을 정통 교황이라고 주장하게 되고 이로써 교회 전체가 분열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콘스탄스공의회(1414∼1417년)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렸고, 이로써 분규는 끝났으나 그 후유증은 오래 남았으니, 영성의 쇠퇴, 신학의 퇴보, 교회 쇄신 작업의 실패로 교회는 날로 흔들려 갔다. 한편 일반대중의 신심생활은 매우 활발하였으며 이는 수많은 성당의 건립, 자선활동, 신심서의 보급확대, 모국어 성서의 번역, 새로운 신심의 번창에서 볼 수 있다(묵주 기도, 십자가의 길, 성지순례 등). 그러나 이 시대의 신심은 개인주의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고, 현세적 두려움을 피하고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 치중하여 미신적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으로 교회 안에서는 비난과 함께 개혁를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지기에 이른 것이다.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의 성 아우구스띠노 수도회의 수사신부이며 성서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는 대사(大赦) 남용에 대해 항의하면서 대사 교리의 재정립을 제의하기 위해 그의 교구장과 동료, 교수, 신부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에는 유명한 95개 조항의 신학명제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정통신앙의 뿌리를 뒤흔들어 놓았으며 그리스도교 교계를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개신교)로 분열시키는 종교개혁 시대를 열게 되었다. 여기서 마르틴 루터와 대사남용에 대하여 잠시 살펴 보자. (1) 마르틴 루터 (2) 대사논쟁(大赦論爭) 이러한 대사제도는 초대 교회 박해시대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시 교회의 보속 규정에 의하면 죄인은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자신의 죄를 보속하는 속죄기간을 거쳐야 그에 해당하는 벌을 사면받는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박해기간 동안에는 이러한 규정을 지키기가 힘들었고, 후에 신자들이 다시 교회에 들어오는 데 일종의 장애 요소로도 작용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특별한 경우에 주교들은 속죄기간을 단축하여 주기도 하였는데, 이 속죄기간의 단축이 대사의 기원을 이룬다. 그후 속죄기간의 단축이 아니라 속죄를 사면하는 관습이 생겨났고, 이는 이른바 대사의 원형이 되었다. 그후 십자군운동이 일어나면서 대사는 십자군에 참가하는 자나 십자군을 위하여 재산을 기부하는 자에게 주어졌는데, 이 대사는 십자군운동이 끝난 후에도 일정한 공익사업을 위해 기부하는 자에게도 주어졌다. 즉, 이는 중세말 소위 '대사 설교가'라는 사람들이 나타나 대사를 남용하면서 소위 '면죄부(免罪符)'라고 알려진 증서를 발매하기에 이른 것인데, 이것이 바로 루터의 95개항의 '항의명제(抗議命題)'가 나온 원인이다. 1506년 성 베드로 성전을 개축할 때 막대한 돈이 필요했으므로 교황들은 전대사(죄의 벌을 전부 사해주는 것)를 반포하고 신도들에게 재정지원을 청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당시 대사의 반포가 너무나 자주 있었고, 그외에 대사 선전자들 주변에는 흔히 탐욕이 뒤따랐다. 그들은 이 대사를 기회로 잡아 돈벌이에 이용하였고, 그 폐단이 사람들 사이에서 비난거리가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대사는 교회의 중요한 수입원으로 오용되어 설교가들은 모금의 성공을 위하여 대사의 효과를 과대하게 설명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죄의 용서와 죄벌 사이의 구분이 불투명해졌고 무지한 신자들은 대사와 구원을 혼동하여 대사 부여를 약속하는 고해성사표를 곧 천국 통행증으로 오해하였다. 신자들은 고해성사표에서 강조하는 대사를 얻기 위한 내적 정화를 등한시하여 돈이면 구원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대사 교리가 중세 말기의 지배적인 견해였고 여기에 근거한 대사 시행과 대사 판매의 행위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공식적으로 이러한 과장된 교리를 밝힌 적이 없었다. 이에 교회 안에서는 잘못된 대사 시행에 대해 개혁의 소리가 높았고, 대사에 대한 본래의 의미를 재확인하여 공식적으로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볼 때 루터가 대사 교리에 대한 토의를 제기하기 위해 '95개항 명제'를 공표한 사실은 자연스러운 사건이라고 하겠으나 교회 안에서의 개혁이 아니란 사실이 지극히 아쉬운 관점이라 하겠다. 이와같이 루터의 사상과 대사 논쟁은 결국 루터의 파문과 함께 그리스도교 세계가 양분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프로테스탄트에서는 독일의 루터 종교개혁을 위시하여 스위스에서는 쯔빙글린의 종교개혁과 칼빈의 종교개혁, 그리고 재세례파의 급진적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영국에서는 국교회(성공회)가 탄생하였다.
가톨릭도 15세기 초부터 교회 쇄신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던 중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자극을 받아 교회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교회 쇄신을 바라는 사람들이 공의회의 개최를 요구함에 따라 1545년 트렌트에서 공의회(1545∼1563년)가 개최되었으니, 여기서 타락한 교회에 대해 반성하면서 신학과 교리를 재정리하고 교회 규율을 혁신하였다. 이 공의회는 종교개혁으로 혼란스러워진 가톨릭 교의를 명백히 하였고 교회 개혁을 추진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8세기에 이르러 계몽주의는 외적으로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켰다. 그 영향을 받은 가톨릭 교회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일부 지역에서 점점 그 권위를 상실하게 되었고 세속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과 세속화는 교회가 자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교황청과 지방교회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고, 이에 교회는 반가톨릭 국가에서 단결하게 되었고 국가지상주의와 국교회 사상에 강력하게 도전하는 운동, 즉 교황지상주의(敎皇至上主義)가 세력을 넓혀가게 되었다. 이에 제1차 바티칸공의회는 상처받은 교황 권위를 회복하였으며 가난해진 교회는 근로대중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는 반교회적 요소들에 대한 대처방안과 이에 따른 교회법의 개혁에 대한 필요성 때문에 1869년에서 1870년까지 열리게 되었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신앙과 계시의 속성에 대한 헌장과, 이성과 신앙 및 교황의 무류성과 수위권에 대한 헌장을 반포하였다. 레오 13세(1878∼1903년)는 1891년 '가톨릭 사회주의 대헌장' 또는 '새로운 사태'라 불리는 회칙을 반포하여 근로대중을 위한 사회의 개선을 요구하였다. 이 회칙은 널리 유포되기 시작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운동을 어느 정도 저지하고 그리스도교 노동조합을 창설, 발전시키며 가톨릭 정신이 구현되는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그리스도교적 정당을 탄생시켰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가톨릭 교회는 새로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우선 성직자 중심의 교회체제에서 벗어나 평신도의 지위와 사명이 부각되었으며 '평신도 신학'이 정립되어 성직자와 평신도가 교회에 대해 함께 책임을 지는 그리스도 공동체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20세기 가톨릭의 중요한 사건은 교황 요한23세(1958∼1963년 재위)가 소집하여 교황 바오로6세(1963∼1978년)가 마무리지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이다. 바티칸 성베드로대성전에서 개최된 이 공의회는 화해와 쇄신을 통해 교회가 인류의 복지와 평화와 구원을 촉진시킬 수 있는 교회로 되기 위한 공의회였다고 할 수 있겠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는 급변하는 현대세계에 적응하는 정책을 수립하여 시행하는 동시에 다른 그리스도교와의 일치를 위해서 계속 노력하고 있다. 또한 비그리스도교 종교들과도 폭넓은 대화의 길을 모색, 진행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미래세계를 향한 일치와 희망으로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결론 : 그리스도 교회는 초기 사도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세계 안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고 온 인류에게 희망을 제시하며 생활해 왔다. 이러한 교회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박해와 이단사상, 그리고 분열의 고통과 아픔을 겪으면서도 좌절하거나 후퇴함이 없이 더욱더 성숙되어 하느님의 사명을 실현해 왔다. 이를 통해 교회는, 하느님이야말로 세상과 교회의 역사를 이끄시는 분임을 고백하며 더욱 새롭게 변화된 모습으로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이웃과 갈라진 형제들과의 일치를 위하여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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