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눈에 보는 교회사 총정리(31~59)
31. 종교개혁의 선구자 |
이름 | 연도 | | 신상명세 |
토마스 브래드워딘 | 1290년경 -1349년 | 구원에 있어서 신(神)의 은총을 강조함 | | | 영국의 신학자이며 수학자로 1349년 켄터베리 대주교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흑사병으로 사망하였다. |
리미니의 그레고리 | ?-1358 | 구원에 있어서 신(神)의 은총을 강조함 | | | 이탈리아 철학자이며 어거스틴수도회 수도사였다. |
존 위클리프 | 1329년경 -1384년 | 화채설을 부인함 | 교회의 부(富)의 축적, 면죄부 판매를 반대함 | 성서의 권위를 강조함 | 옥스포드대학 교수로 1381년 농민반란과 연루되어 해직되었고 라틴어성서 대부분을 영어로 번역하였으며 그가 죽은 후 그의 시체는 발굴되어 1428년 화형을 당하였다. |
존 후스 | 1373년경 -1415년 | 교회를 성사(聖事)보다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자들의 모임으로 규정지음 | 면죄부 판매, 성상숭배 반대함 | 성서의 권위를 강조함 | 보헤미아의 사제로서 프라하대학 교수였으며 콘스탄스회의의 결정에 의해 화형에 처해졌다. |
베젤의 존 | 1420년경 -1489년 | 화채설을 부인함 | 면죄부 판매, 성직자 독신주의에 반대함 | 성서의 권위를 강조함 | 독일 신학자로 공동생활의 형제단 일원으로 개종한 후 이단으로 정죄되어 투옥생활 끝에 사망하였다. |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 1452 -1498 | | 교황의 부도덕성을 공박함 | | 이탈리아 도미니코수도사로 플로렌스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어 화형을 당하였다. |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 1466년경 -1536년 | | 교회내 성직자의 위선과 모순을 지적함 | | 화란의 인문주의자로 루터가 사용한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편찬하였으며 그의 명저 "우신 예찬(In Praise of Folly)"은 교회의 무능력함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
32. 대표적인 종교개혁가 |
구분 | 이름
| 마르틴 루터 | 울리히 쯔빙글리 | 존 칼빈 | 존 녹스 |
연도 | 1483-1546 | 1484-1531 | 1509-1564 | 1514-1572년 |
출생지 | 독일의 아이슬레덴 | 스위스의 북부 토겐부르크 | 프랑스의 노용 | 스코틀랜드의 핫딩턴 |
교육 장소 | 라이프찌히 | 비엔나, 바젤 | 파리, 오를레앙 | 성(聖) 앤드류 |
사제서품 연도 | 1507 | 1506 | | 1536 |
주요 저서 | - 95개조 반박문
- 로마 교황 반박서
- 독일 귀족에게 고함
- 교회의 바빌론 유수
- 의지의 노예
- 대 요리 문답집
- 소 요리 문답집
- 로마서 강해
- 갈라디아서 강해
- 상담론
| | | - 괴물같은 여성통치에 관한 제1차 나팔소리
-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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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사실들 | - 형제단 생활에 관심을 지님
- 1505년 어거스틴수도회 입문
- 1508년 비텐베르크대학 강의
- 1517년 95개조 반박문 게재
- 1520년 종교적인 파문당함
- 1521년 보름스국회에 소환됨
- 1521-1534년 독일어성서 번역
- 1525년 농민반란에 반대함
- 1525년 카데린 폰 보라와 결혼함
| - 에라스무스에 깊은 영향을 받았음
- 사제서품을 받았고 스위스인의 외국인 용병제를 반대하였음
- 1518년 쮜리히로 소환됨
- 그의 개혁은 루터보다 급진적인 방향으로 진행됨
- 일단의 추종자들은 재세례파로 넘어갔으며 이들에 의해 박해를 받기도 함
- 가톨릭 주(州)와의 전투에서 사망하였음
| - 파리에서 공부,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함
- 1533년 파리로 망명
- 1536년 파렐의 설득으로 제네바 종교개혁에 가담함
- 제네바에서 피신한 후 스트라스부르크에 장착하여 결혼함
- 1541년 제네바에 돌아온 후 개혁을 주도함
- 유럽의 프로테스탄트들의 망명지였던 제네바는 칼빈의 사상의 근거지가 됨
| - 토마스 귈리암과 조오지 위샤트에게 영향을 받음
- 1년 반 동안 노예선상생활을 함
- 1549년 영국에서 가톨릭에 대항하여 설교함
- 1553년 제네바에서 칼빈의 영향받음
- 1558년 에리자베스 1세의 등극에 때맞춰 여성통치자를 비난하는 팜플렛을 발간함
- 1559년 스코틀랜드에 돌아와 종교개혁을 주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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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독일의 종교개혁가 |
이름 | 연도 | 출신 학교 | 주요 사실 |
토마스 뮌쩌 | 1490년경 -1525년 | 라이프찌히 | - 어린시절 루터의 영향을 받았다가 후에 급진적인 종교개혁가로 변신하였다.
- 쯔박카우 예언자들과 제휴하여 농민반란을 주도한 죄로 처형되었다.
- 루터가 농민반란에 대해 취한 태도를 신랄히 비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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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스 폰 칼슈타트 | 1480년경 -1541년 | 에어프루트 꼴로뉴 | - 비텐베르크대학에서 루터의 동료교수로서 존 엑크와의 논쟁시 95개조항을 옹호하였다.
- 교황칙서를 비난하였고 루터와 결별한 후 스위스 재세례파에 심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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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멜랑흐톤 | 1497 -1560 | 하이델베르크 튀빙겐 | - 에라스무스에게 사사받은 후 21세때 비텐베르크대학의 그리스어 교수가 되었으며 루터신학의 대변자이자 조직신학자였다.
- 최초로 프로테스탄트 조직신학서(Loci Communes)를 출판하였고 개혁파와 가톨릭과의 화해를 시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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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아스 프라시우스 일리리쿠스 | 1520 -1575 | 베니스 비텐베르크 | - 루터와 멜랑흐톤에게 공부한 후 비텐베르크대학의 히브리어 교수가 되었다.
- 중재자로 알려진 멜랑흐톤과 결렬된 후 그와 견해차이가 큰 사람들을 격렬히 비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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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켐니츠 | 1522 -1586 | 비텐베르크 | - 멜랑흐톤에게 공부한 후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철학강의를 담당하였다.
- 브룬스비크에 교단을 세웠으며 합의신조채택에 협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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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리아 우르시누스 | 1534 -1583 | 비텐베르크 | - 제네바의 칼빈을 방문한 후 하이델베르크와 브레슬라우에서 가르쳤고
- 카스파 올레비아누스와 하이델베르크신조를 저술하였고 후에 독일 개혁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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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파 올레비아누스 | 1536 -1587 | 파리 오를레앙 부르쥬 제네바 | - 프랑스 태생으로 칼빈과 베자에게 공부하였고 개혁노선을 따라 하이델베르크교회를 조직하는데 협력하였으며 자카리아 우르시누스와 함께 하이델베르크 신조를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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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
이름 | 연도 | 출신 학교 | 주요 사실 |
요한 오에콜람파디우스 | 1482 -1531 | 볼로냐 하이델베르크 | - 법률과 신학을 공부한 후 유명한 문헌학자가 되었으며 에라스무스, 루터, 멜랑흐톤의 영향 아래 바젤에서 종교새혁을 일으켰다.
- 마르부르크회담에 참여하였고 쯔빙글리와 깊은 유대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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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파렐 | 1489 -1565 | 파리 | - 자크 르페브르에게 공부한 후 프랑스에서 추방당하였으며 이후 그는 스위스에서 순회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 베른과 제네바를 종교개혁의 도시로 만드는 데에 기여했으며 제네바 개혁교회에서 칼빈이 활약하도록 주선하였고 말년에 뉴샤텔에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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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부처 | 1491 -1551 | 하이델베르크 | - 종교개혁의 교회화해론자로 불리며 도미니코 수도사로서 에라스무스에게 인문주의를 체득했으며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루터주의자였으나 칼빈의 영향도 받아서 스트라스부르크개혁을 주도하였다.
- 기회가 닿는대로 루터파, 개혁파, 그리고 가톨릭과의 화해를 시도하였으며 토마스 크랜머의 초청으로 캠브리지대학에서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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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불링거 | 1504 -1575 | 꼴로뉴 | - 에라스무스, 루터, 멜랑흐톤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쮜리히의 쯔빙글리의 후계자로 제 1,2차 쯔빙글리파 신앙고백문 작성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장교파는 반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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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오도르 베자 | 1519 -1605 | 오를레앙 | - 법률학도로서 1548년 심한 질병 후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였으며 제네바와 로잔에서 그리스어를 강의하였고 제네바 아카데미의 원장이 되었다.
- 포이시회담에서 프로테스탄트 개혁파를 옹호하였으며 제네바 종교지도자인 칼빈의 후계자로서 베자 사본을 발견하였으며 프랑스 위그노들의 자문역할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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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종교개혁의 급진파 |
단체 | 분류 | 핵심 인물 | 활동 지역 | 특성 |
재세례파 | 성서적 입장 강조 | 콘라드 그레벨 펠릭스 만쯔 게오르그 블라우록 루드비히 해찌 발타사르 휩마이어 | 쮜리히 신성로마제국 | -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끊었다.
- 교회는 신자들의 자발적인 단체이다.
- 유아세례를 인정치 않았다.
- 철저하게 교리에 따랐다.
- 평화애호론자였다.
- 일부는 경제적 공동체실현을 주장했다.
- 만민에 대해 종교적인 관용을 지녔다.
- 검소한 생활모습을 유지하였다.
- 미카엘 샤틀러의 추종자들이 1527년 형제연합을 강조한 쉴라이트하임 고백(Schleitheim Confession)을 채택하였다.
- 일단의 모임은 신비주의적인 색채가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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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터파 | 공동체생활 강조 | 야콥 후터 | 모라비아 다코타 서부 캐나다 |
쉬벵크펠더파 | 신비주의 강조 | 카스파 쉬뱅크펠트 폰 오지히 | 독일 펜실베니아 |
메노파 | 성서적 입장 강조 | 메노 시몬스 | 화란 펜실베니아 |
아미쉬파 |
36. 영국의 종교개혁가 |
이름 | 활동 시기 | 출신 학교 | 주요 사실 |
윌리암 틴델 | 1494년경 -1536년 | 옥스퍼드 캠브리지 | - 망명지 유럽대륙에서 신약성서를 영어로 번역, 출간했으며 결국 그는 브뤼셀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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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크롬웰 | 1485년경 -1540년 | 알려지지 않음 | - 추기경 울지의 비서로 의회의원이 된 후 헨리 8세 치하에 대주교 대리직을 수행하면서 수도원을 해체, 관리, 감독하였고 Great Bible의 발간을 후원하였으며 헨리 8세와 독일 루터파 사이 결혼동맹제휴를 시도하였으며 결국 그도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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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크랜머 | 1489 -1556 | 캠브리지 | - 헨리 8세와 캐더린 사이의 이혼문제에서 왕을지지한 후 1533년 켄터베리 대주교에 임명되었고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온건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 국교도의 기도서 1집과 2집을 발간했으며 튜더왕조 메어리여왕치세에 이단자와 반역자로 몰려 체포되었고 곧 화형되고 석방되었으나 그의 구속해제가 비난받자 교수형을 받은 후 화형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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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래티머 | 1485년경 -1555년 | 캠브리지 | - 1535년 우세스터의 주교가 된 후 헨리 8세에 의해 두 차례 투옥되었으며 에드워드 6세 치하에 지도적인 설교가로서 활약했으나 튜더왕조 메어리여왕 치하에 옥스퍼드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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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리들레 | 1500년경 -1555년 | 캠브리지 | - 크랜머와 헨리 8세의 사제로서 1547년 로체스터의 주교가 되었으며 이후 1550년에 런던 주교로 임명되었다. 국교도의 기도서 1집과 2집의 발간위원으로 일했으며 래티머와 함께 체포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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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후퍼 | 1495년경 -1555년 | 옥스포드 | - 어거스틴수도회에 입문하여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 후 시골로 망명생활을 하였고 쮜리히에서 불링거의 친구로서 우스터와 글라이스터의 주교가 되었다. 그후 그는 튜더왕조 메어리 치하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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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즈 커버델 | 1488 -1568 | 캠브리지 | - 어거스틴수도회에 입문하여 프로테스탄트가 된 후 수도회를 떠나 은거생활을 하였고 틴델의 성서번역을 돕다가 그의 사후 이를 완성하였으며 Great Bible과 Geneva Bible을 발간하였다. 1551년 엑시터의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튜더왕조 메어리 치하에서 망명생활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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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파커 | 1504 -1575 | 캠브리지 | - 앤 볼린의 사제로서 말년에 부처와 교제하였고 튜더왕조 메어리 치하에 강제추방생활을 하였으나 1559년 켄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며 엘리자베스 치하에서 청교도주의를 반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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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영국의 청교도 지도자 |
이름 | 연대 | 출신 학교 | 교파 | 주요 저서 | 주요 사실 |
토마스 카트라이트 | 1535 -1603 | 켐브리지 | 장로교 | | - 장로교파를 옹호하다가 캠브리지에서 강의를 못하게되어 예생을 제네바에서 보냈으며 청교도주의를 신봉하다가 7차례 투옥된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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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이콥 | 1563 -1624 | 옥스포드 | 회중교회 | | - 브라운운동(분리주의)의 일원으로 라이덴의 존 로빈슨 교회에 속했으며 영국의 사우드워크에 최초로 회중교회를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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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크롬웰 | 1599 -1658 | 켐브리지 | 회중교회 | | - 1628년 의회에 진출하여 내란 동안 의회군을 장악하고 찰스 1세의 처형이후 종신호국경이 되었다.
- 1656년 왕위를 제의받았으나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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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구드윈 | 1600 -1679 | 켐브리지 | 회중교회 | | - 존 카튼의 영향 아래 분리주의자가 된 후 대주교 로드에 의해 화란으로 망명하게 되었으며 웨스트민스터총회의 조합파를 주도했었다.
- 크롬웰의 자문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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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밀턴 | 1608 -1674 | 켐브리지 | 회중교회 | | - 청교도 시인이자 평론가였으며 대주교 로드 때문에 국교회 목회일을 사임하고 크롬웨정부 관리로 봉사하였으며 왕정복고시 은퇴하여 여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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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박스터 | 1615 -1691 | | 국교회 | - 성자의 영원한 안식
- 개혁자 목사
- 이교도를 위한 신앙 안내서
| - 정치적인 면과 신학적인 토론에 무관심하였고 일시적으로 찰스 2세의 궁정목사로 봉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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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웬 | 1616 -1683 | 옥스포드 | 회중교회 | | - 12세에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19세때 석사학위를 받았다. 내란시 의회파를지지하여 크롬웰의 소속목사로 봉사하였으며 옥스포드 대학의 부총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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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번연 | 1628 -1688 | | 침례파 | - 천로역정
- 성전(聖戰)
- 죄인 괴수에게 넘친 은혜(영적 자서전)
| - 땜장이의 아들로 의회군에 가담한 후 벳포드에서 침례교 설교자가 되었다. 왕정복고 후 12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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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플라벨 | 1630년경 -1691년 | 옥스포드 | 장로교 | | - 클레른던법에 의해 추방될 때까지 닷트머스의 목사였으며 1671년 목사직에 복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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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하우에 | 1630 -1706 | 켐브리지 옥스포드 | 국교회 | | - 그레이트 토링턴의 목사로서 크롬웰과 그의 아들 리차드의 소속목사로 봉사했으며 청교도의 신학을 발전시키는 모임의 일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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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알레인 | 1634 -1668 | 옥스포드 | 장로교 | | - 1663년 그의 집에서 찬송과 설교를 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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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튜 헨리 | 1662 -1714 | 아버지로부터 가정교육 | 장로교 | | - 원래는 법률연구가였다.
- 1687-1712년 체스터의 목회일을 감당한 후 6권의 성서주석을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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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가톨릭의 반동종교개혁가 |
이름 | 연대 | 국적 | 출신 학교 | 주요 사실 |
토마스 드 토르케마다 | 1420 -1498 | 스페인 | 발라돌리드 | - 도미니코 수도사로 페르디난도와 이사벨라의 고해신부였으며 최초의 스페인 종교재판소장으로 임명되었고 스페인에서 유대인과 무어인을 추방하는데 앞장서서 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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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지메네스 | 1436 -1517 | 스페인 | 살라만카 | - 스페인의 저명한 설교가로 프란시스코 수도회에 입문한 후 이사벨라 여와의 고해신부로서 톨레도의 대주교, 후에는 추기경이 되었고 알칼라대학을 설립하였으며 수개 국어 대역성서를 출판, 관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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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바니 카라파 (바오로 4세) | 1476 -1559 | 이탈리아 | 나폴리 | - 1506년 체에테 주교로 영국, 플란더스, 스페인 등지의 교황 사절로 활동했다.
- 1524년 테아테수도회를 설립했고 1536년 추기경이 된 후 1556년부터 교황직을 수행했으며 "금서목록"을 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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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포 사돌레토 | 1477 -1547 | 이탈리아 | 피사 페라로 로마 | - 레오 10세와 클레멘트 7세의 비서로 1536년 추기경이 된 후 멜랑흐톤, 칼빈과 함께 가톨릭교회와 화해를 도모하였으며 그의 개혁이상은 대체로 성직자계급문제로 난관에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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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파로 콘타리니 | 1483 -1542 | 이탈리아 | 파두아 | -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주재 베니스 대사로 임명된 후 1536년 추기경이 되었으며 프로테스탄트와 화해를 시도하였고 1541년 레겐스부르크에서 부처, 멜랑흐톤과 함께 칭으론을 함께 저술, 출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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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티우스 로욜라 | 1491 -1556 | 스페인 | 알칼라 살라만카 파리 | - 1521년 부상입은 군인으로 도미니코수도회에 입문하였다.
- "영성훈련"이라는 저서를 통해 1534년 예수회를 창설하고 1551년 로마대학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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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기날드 폴 | 1500 -1558 | 영국 | 옥스퍼드 파두아 | - 헨리 8세의 이혼에 반대하여 추방된 후 1536년 추기경이 되었다.
- 영국에 가톨릭 복고를 시도하였으며 크렌머 후임으로 켄터베리의 대주교직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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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슐레 기슬리에리 (비오 5세) | 1504 -1572 | 이탈리아 | 보스코 | - 도미니코 수도회 입문 후에 로마종교재판소를 관장하였고 1557년 추기경, 1566년 교황직에 오른 후 화란과 프랑스의 신교도들을 박해했고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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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레이네즈 | 1512 -1565 | 스페인 | 알칼라 파리 | - 예수회 창설초기 6인 가운데 한명으로 신교도에 대한 비판을 제기 하였고 후에 예수회의 원장으로 트렌트 회의의 교황측 담당관으로 반(反)프로테스탄트 신조를 작성하는데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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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카니시우스 | 1521 -1597 | 독일 | 꼴로뉴 | - 1543년 예수회에 입문하고 남독일지역 반동종교개혁의 지도자로 활약한 후 세권의 "교리서"를 저술하였는데 이것은 12개국어로 번역된어 폭넓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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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보로메오 | 1538 -1584 | 이탈리아 | 아로나 | - 12세에 아로나 수도회의 대수도원장에 임명되어 1559년 추기경이 된 후 1560년에는 밀라노의 대주교가 되었고 트렌트회의의 개혁을 몸소 실천하여 수많은 학교와 고아원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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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벨라르만 | 1542 -1621 | 이탈리아 | 파두아 | - 1560년 예수회에 입문하고 루뱅에서 신학을 강의하며 그의 생애를 가톨릭 변증가로 보냈으며 1599년 추기경이 된 후 갈릴레오의 가르침을 정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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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프랑스의 위그노 지도자 |
이름 | 연대 | 역할 | 주요 사실 |
가스파르 드 꼴리뉘 | 1519 -1572 | 군대 지도자 | 귀족가문 태생으로 1552년 프랑스 해군제독이 된 후 화란에 있는 스페인 감옥에 있는 동안 신교도가 되었으며 찰스 9세의 자문역을 담당하였다. 브라질과 플로리다지역에 위그노들의 식민지를 세웠으며 성(聖) 바돌로뮤 대학살 때 살해되었다. |
앤 듀 부르즈 | 1520 -1559 | 순교자 | 법률을 공부한 후 오를레앙대학에서 강의하였고 1559년 신교도의 대변인으로 활약한 후 이단자로 낙인찍혀 화형당하였다. |
필립뒤플리시스모르네이 | 1549 -1623 | 정부 관리 | 나바르 앙리의 고문으로 영국과 화란대사로 임명되었고 소뮈르의 총독으로 소뮈르대학을 세웠으며 개혁신앙의 변증에 관해 저술하였다. |
앙리 4세 | 1553 -1610 | 군대 지도자 | 위그노인 나바르 부르봉 왕가의 태생으로 1572년 가톨릭의 발로아가(家)의 마가렛과 결혼한 후 꼴리뉘 후계자로 위그노를 지휘하였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최초로 부르봉 왕가의 왕으로서 1598년 낭트칙령을 발표하여 위그노들에게 관용을 인정하였으나 1610년 가톨릭 광신자에게 암살되고 말았다. |
피에르 드 물랭 | 1568 -1658 | 목사 | 캠브리지대학에서 연구 후 라이덴대학에서 강의하였다. 많은 세월을 샤랭톤지역 개혁교회에서 목회하였다. |
장 데이유 | 1594 -1670 | 신학자 | 소뮈르에서 교육받은 후 뒤플리시스 모르네이의 담당사제가 되었으며 교황저서를 바난하고 알미니안주의를 후원하였다. |
모제 아미로 | 1596 -1664 | 신학자 | 소뮈르에서 스코틀랜드인 조 카메론에게 사사받은 후 동(同)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사이에 타협안을 제시하여 아미랄디안주의로 알려지게 되었다. |
피에르 지르외 | 1637 -1713 | 신학자 | 소뮈르에서 연구한 후 개혁신앙을 옹호하였다. 위그노의 회복을 예언한 묵시록을 신봉하였으며 루이 14세 정부 타도를 변호하였고 세벤느전쟁에서는 카미사르파에 의해 예언자로 간주되기도 했다. |
앙트네 꾸르 | 1696 -1760 | 목사 | 루이 14세의 박해기간 동안 흩어진 교회를 인도하였으며 로잔느에 위그노신학교를 설립하였고 30년 동안 관장하였다. 개혁교회와의 활발한 접촉을 수행하였다. |
폴 라보 | 1718 -1794 | 목사 | 로잔느궁전에서 수학한 후 흩어진 교회에서 은둔생활을 하였고 프랑스에서 개혁과 지도자로 인정된 후에는 프로테스탄트의 안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
40. 종교개혁기의 종교전쟁 |
내용 | 시기 | 지역 | 주요참가 대상 | 지도자 | 주요 사실 |
농민반란 | 1524 -1525 | 독일 | 농민 대(對) 귀족 | 토마스 뮌쩌 헤세의 필립 공 | 농민반란 진압 12개 합의조항 |
카펠전쟁 | 1529 -1531 | 스위스 | 가톨릭지역 대(對) 프로테스탄트지역 | 울리히 쯔빙글리 | 쯔빙글리의 죽음과 프로테스탄트들의 패배 |
슈말칼덴전쟁 | 1546 -1555 | 독일 | 독일 프로테스탄트 대(對) 신성로마제국 | 황제 챨스 5세 헤세의 필립 공 삭소니의 존 프리드리히 삭소니의 모리스 공(公) | 프로테스탄트 패배 잠정협약 체결 관용정신이 대두됨 루터파가 정식으로 인정됨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宗敎和議) 체결 각 영방제후는 자신의 영지에 알맞는 종교를 선택할 수 있으며 영지의 주민은 제후의 선택에 따라 종교를 갖게 됨 |
네델란드 독립전쟁 | 1559 -1579 | 네델란드 | 스페인 대(對) 네델란드 | 필립 2세 침묵왕 윌리암 | 네델란드는 북부 유트레히트 중심의 가톨릭(벨기에)으로 독립됨 |
30년전쟁 | 1618 -1648 | 독일, 중부유럽 | 신성로마제국 독일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스페인 |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 황제 페르디난드 구스타부스 아돌푸스 바바리아의 막시밀리안 공(公) 요한 틸리 크리스티안 4세 알브레히트 발렌슈타인 | 베스트팔렌 평화조약 체결 정치와 종교의 구분이 확정됨 제한적인 종교적 관용이 허용됨 예수회를 신교도 지역에서 추방함 칼빈파를 인정함 |
41. 신학논쟁-프로테스탄트 대(對) 로마가톨릭 |
분야 | 주제 | 프로테스탄트 입장 | 가톨릭 입장 |
성서론 | 의존도 | 오직 성서로만 | 성서와 교회의 전승을 동등시함 |
외경 | 인정치 않음 | 인정함 |
인간론 | 원죄 | 전적 타락과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악 강조 | 타락과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악의 경향 강조 |
인간 의지 | 죄(罪)에 예속됨 | 선한 뜻을 펼 수 있는 자유로움 |
구 원 론 | 예정설 | 신(神)의 의지에 근거함 | 신(神)의 예지에 근거함 |
속죄 |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죄값을 치름 |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공로로 구원의 은총이 허락되며 이 은총은 성찬을 통해 죄인에게 주어짐 |
신(神)의 은총 | 일반은총은 만인에게 주어지며 특별은총은 선택된 자에게 한정되어 주어짐 | 선행적 은총은 영세를 받은 자에게 믿음을 주며 능력의 은총은 인간의지와 연합하여 복종하게 함 |
선행(善行) | 어떤 종류의 공로에 힘입어서보다 신(神)의 은총에 의해 실행됨 | 공로로 가능함 |
중생(重生) | 예정된 자를 성령이 거듭나게 함 | 영세 때에 은총을 받음 |
칭의(稱義) | 신(神)의 객관적이고 최종적인 심판 행위임 | 영세를 통하여 죄를 용서받지만 인간이 지은 도덕적인 죄는 고해성사를 통해 사함을 받음 |
교회론 | 교회와 구원 | 유형교회와 무형교회로 구분함 | 교회(가톨릭) 밖에는 구원이 없음 |
성례 | 은총의 수단으로서 믿음으로만 가능 | 성례는 단순히 수행되는 것으로 은혜를 전하는 것임 |
사제관 | 만인사제설을 주장함 | 사제는 신(神)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임 |
화채설 | 거부함 | 수용함 |
종말론 | 연옥 | 부정함 | 긍정함 |
42. 신학논쟁-루터파 대(對) 개혁파 |
주제 | 루터파 입장 | 개혁파 입장 |
구원의 순서 | 소명→감화→회심→중생→정의→성화→신자의 영광 | 선택→예정→그리스도와 연합→소명→중생→신앙→회개→칭의→성화→신자의 영광 |
신(神)의 은총 | 은총은 세례와 설교를 통해 주어지며 신(神)의 거듭난 은총을 인간이 저항할 경우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음 | 불가항력적임 |
회개 | 신앙으로 인도함 | 신앙에서 나옴 |
세례 | 죄의 근원과 인간의 범죄를 제거하는 중생의 작업임 | 은총의 계약 속에 포함되어 있음 |
성만찬 | 그리스도께서 성찬 때에 객관적으로 임재하심 | 은총의 계약을 신자들에게 확인시키는 기념예식으로 그리스도 신앙으로 확인함 |
교회와 국가 | 국가교회는 프로테스탄트를 후원하는 통치자의 신앙에서 볼 때 보호자 관계임 | 신성공화국에서 교회와 국가는 모두가 그리스도인의 모임이지만 그들 각자의 임무는 구별되어 수행됨 |
교회법규 | 성서에 허락된 것은 금지할 것이 없음 | 성서에 금지된 어떠한 것도 명령할 수 없음 |
43. 신학논쟁-칼빈주의 대(對) 알미니안주의 |
주제 | 칼빈주의 입장 | 알미니안주의 입장 |
원죄 | 인간의 전적 타락 및 부패를 강조함 | 아담으로부터 연약함을 물려받음 |
인간 의지 | 원죄에 예속됨 | 선한 의지를 사용할 수 있는 한 자유로움 |
| 일반은총은 만인에게, 특별은총은 선택받은 자에게 주어짐 | 은총은 만인에게 주어지며 구원은총은 믿는 자들에게 허락되고 은총의 연속성은 복종하는 자들에게 전해짐 |
예정설 | 전적으로 신(神)의 의지에 달림 | 전적으로 신(神)의 예지에 근거함 |
중생 | 일회적임 | 종합적임 |
속죄 |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죄값을 치름 | 그리스도의 죽음은 은혜로운 신(神)이 인간의 형벌을 대신 치른 희생임 |
속죄의 범위 | 예정된 자들만을 위해 계획하심 | 만인을 위해 계획하심 |
속죄의 수행 | 신(神)의 뜻에 따라 성령의 능력으로 함 | 죄인의 뜻에 응답하여 성경의 능력으로 함 |
구원의 순서 | 선택→예정→그리스도와 연합→소명→중생→신앙→회개→칭의→성화→신자의 영광 | 소명→신앙(믿음)→회개→중생→칭의→은총의 연속→신자의 영광 |
은총의 연속성 | 신(神)의 은총에 의해 선택된 만인에게 주어짐 | 신(神)의 은총은 복종하는 바에 의거하여 주어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