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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나를 드린 삶이 된다.

하나님아들 2019. 5. 1. 14:49

하나님께 나를 드린 삶이 된다.

 

이용원 목사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삶이 된다. 성령이 임하셔서 사로잡으셔서 나를 하나님께 드리신다. 하나님께 드린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심으로서 나의 의지로도 이 일이 시작되지만 예수님의 피를 뿌려서 정결하게 하는 것은 결정적이고 뚜렷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의 나타남이고 주권과 능력의 나타남이다.

 

1. 드린다 give, offer 는 말은 에너지의 전환개념이다.

  예를 들어서 
나의 돈을 남을 위하여 드린다면 내가 나를 위하여 쓸 수 있는 돈을 남이 자기의 원하는 대로 쓰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을 드린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나의 존재를 나를 위하여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하여 쓰는 것이다.

주권도 목적도 다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성령을 부으셔서 하나님이 사로잡으시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존재인가?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고 죄로 타락하였을지라도 사단이 우리를 소유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를 소유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렇게 하신다.

만일 더 이상 재생불능, 사용할 수 없음이라고 하면 이 땅을 밟고 살아갈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결국 그는 죽고 말 것이다. 죽음이란 하나님이 모든 생명의 공급자이신데 그 육체의 생명조차 주시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리대로 하시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땅에 머물 이유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이 어떠하다는 것은 그가 그 주어진 기간 안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자기를 드리라는 기간인 것이다. 자기를 위하여 살아가는 자는 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의 일을 말할 때에 가장 현명한 방법은 하나님께 나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저를 주님께 드립니다. 마음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고백하라. 인간이 할 수 있는 기도중에 가장 탁월한 기도중의 하나인 것이다.

사람이 죄에 빠졌으므로 사단이 소유한다고 가르치는 자는 잘못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 사역자들이 몇 몇이 있다. 죄로 인하여 타락하고 더러워졌을지라도 하나님이 여전히 모든 것 세상만물을 소유하고 계신다.

 

로마서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11: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11: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아멘이라는 후렴은 진실로 그러하다는 사도 바울의 스스로의 고백이다. 이 깨닫게 하시는 것에 대한 사도 바울의 경건한 고백이다.

성령께서 사도 바울에게 깨닫게 하신 바는 이것인데 곧 만물은 그 흐름이 주님이 만드셨고 주님께 돌아가는 중인 것이다. 이 돌아가게 하는 작업을 오직 예수님이 하시고 성령님이 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는 자가 이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스스로 이 일을 못하는 것이다. 이유인즉 나는 스스로 하나님을 잘 모르는 것이다. 전혀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나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계시하시지 않으신다면 나는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드리는 일은 오직

1. 성령으로 된다.

2. 예수님의 피를 뿌려서 된다.

이 예수님의 피를 뿌리는 자는 정결해지기 때문이다.

3. 이것이 제사장의 사역이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기 때문인데 가장 귀한 제물은 사람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이 한 일이고 이는 로마서 15:16이다.

 

로마서 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말하자면 로마서 12:1이 되는 것이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드리라 하신다. 드릴 때에 하나님이 성령으로 사로잡아 참으로 드리게 하신다. 하나님은 드려지지 않은 것을 취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계속 가르치시고 훈련하시고 연단하시고 징계하시면서 이렇게 하게 만들어 가시는 것이다. 우리의 주권은 포기하게 만드시고 우리의 삶은 드리게 하시고 우리의 동기도 드리게 하신다. 온전히 성령이 우리안에서 역사하시는데 장애물이 없도록 우리를 정리하신다.

아예 처음부터 그렇게 하면 좋을 것인데 우리는 우리안을 잘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거부하고 불순종하고 자기를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실 때에 정결함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것의 시작은 말씀으로 되고 깨달음으로 되지만 그 정결함의 완성은 오직 예수님의 피로 된다. 그때에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는 거룩해지는데 이 거룩함은 바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상태인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받으신다 하심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하나님안에 있고 하나님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녹아지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몸과 마음과 영이 하나님의 성령이 마음대로 거하시고 행하시고 사용하시는데 드려지는 것이다.

주권의 문제로 보자면 나의 주권은 주님께 양도되고 주님의 주권만 나타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 우리를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방법은 예수님의 피를 뿌리고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를 사로잡으시고 우리의 모든 부분, 영 혼 육, 정신, 사상, 인생, 마음, 심지어 우리의 동기(motive) 조차 주님이 사용하셔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행하시는 것이다. 그 삶을 어떤 용도로 사용하시든지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본인은 고3이 되는 1월 달에 하나님께 저의 삶을 마음대로 사용하시옵소서. 라고 드렸다. 구원을 주셨는데 이 땅에서의 삶을 드리는 것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에 대하여 다 갚을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렇게 했는데 주님이 인도하심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내가 드리는 것은 반드시 성령께서 관리하셔야 한다. 나는 관리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령이 나에게 임하실 때에만 나를 관리하시는 것이다.

 

이 사실을 절감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매일 아침 성령께 나를 드리고 나의 주권을 포기하고 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본다.

 

우리는 요셉을 볼 때에 그를 하나님의 시각에서 본다. 이미 그에 대한 모든 것이 정리되어서 하나님이 그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당시 하나님의 시각을 소유하기 어려웠던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11 형제가 요셉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나중에 일어나서 “참 요셉은 감방살이도 했다던데........ 그런데 총리 노릇을 잘 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인물에 대하여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다 알고서 그를 보는 것이지만 그 당시 사람들 중 일부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이는 그러한 정보와 시각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베드로보다 사도 바울이 더 많은 일을 하였다고 본인은 믿는데 그러한 일을 한 이유도 우리는 잘 알지만 그 당시 사람은 다 모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시각을 주님께 드릴 때에 성령님은 사로잡으시고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신다. 그리고 결국은 만물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게 하신다. 곧 하나님의 생각대로 보는 것이요 하나님이 보게 하시는 대로 보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이 우리를 가르치심이다.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 정보를 아는 것이 보는 것이다. 즉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면 세상이 올바로 보이는 것이다. 말씀이 바로 올바른 안경인 것이다. 이에 비하여 소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 볼 수 없는 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자, 잘못 푸는 자가 사람을 허물과 죄로 이끌게 되는데 두 소경이 동시에 구덩이에 빠져버리고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 구덩이에서 나올 방법이 없다. 글자 그대로의 구덩이는 우리가 일어나서 나오면 되지만 죄란 구덩이는 주님의 은혜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글자 그대로의 구덩이도 깊이에 따라서 다르다. 그 구덩이가 10m만 되어도 사람은 나올 수 없다. 점프력이 그렇게 뛰어난 사람은 없다. 눈을 떠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소유하시려고 예수님의 피로 씻으시는 것이므로

구원을 받은 자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하여 살아서는 안된다.

 

로마서

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이 구절만 보면 사도 바울이 다른 목적을 말하는 경우도 있겠지 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앞뒤 구절을 보면 분명히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아간다고 증언하고 있다.

 

로마서

14: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렇게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도 바울 주변에 있었다.

우리의 교회에 이런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주님께 자기 인생을 바칠 목적을 물어보고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 구체적인 발걸음이 옮겨진다. 사람이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성령이 우리안에서 우리의 발걸음을 옮기게 하신다. 이것이 복음의 신을 신은 것이다. 전신갑주는 성령이 무장하게 하여 주시는 것이다.



출처: https://raptureinjesusblood.tistory.com/entry/예수 [말씀과 예수님의 피와 성령의 역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