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g130602 사랑하는 만큼 헌신한다. (요한복음 12:1-8_
죽어 썩어가는 나사로를 살려주신 예수님께서 얼마 후에 그 베다니 동네를 다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반가워서 난리가 났습니다. 베다니 동네의 문둥이였던 시몬의 집에서 잔치를 열었습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에 의하면 예수님은 유월절에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몰랐지만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나사로의 집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예수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위로하는 잔치 같았습니다. 이 때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향유를 붓는 일이 발생합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도 예수님 곁에 있었고, 동네 사람들도 예수님과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마리아가 아주 비싼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깨뜨려 식사하는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마리아는 500ml의 값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그분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습니다. 소중한 향유였지만 마리아는 감히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지 못하고 그분의 발에 물처럼 붓고, 수건 대신 자신의 머리털로 닦았습니다. 자신을 종보다 더 낮추어 예수님을 섬긴 것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존귀하신 분인지 알았던 마리아의 행동은 존귀하신 주님께 어울리는 사랑과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자 그것을 본 가롯 유다가 펄쩍 뛰면서 마리아를 책망합니다. 그것을 팔면 삼백 데나리온이나 받을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울 수 있는데 왜 그것을 허비하느냐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마리아가 값진 향유를 예수님께 사용한 것을 부적절한 용도에 허비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의 행동을 거침없이 비판했습니다. 가룟유다에게는 마리아와는 달리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을 존귀히 여기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가장 고귀한 분에게 값지고 귀한 것을 드리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자기 생각의 정당성을 그것은 구실에 불과할 뿐 재물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재정을 맡고 있는 고로 종종 주님과 복음을 위해 써야할 돈을 횡령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예수님께 아낌없이 쏟아 붓고 있는데, 다른 한 사람은 “왜 그렇게 귀한 것을 허비하느냐”고 책망을 합니다.
그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는 “그를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하셨다고 마태와 마가복음은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여자가 행한 것이 곧 복음과 나란히 전파되어야 할 중요한 사실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리아가 행한 일이 무엇이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요? 그리고 가룟 유다의 주장인,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일까요?
어느 여 집사님이 자기 교회 건축할 때 폐품을 모아 팔아서 드리기로 작정하고 열심히 폐품을 모았습니다. 1년 쯤 지나서 건축헌금을 바치기로 한 전 날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천사의 인도를 받고 천국에 가서 주님도 만나 뵈었습니다. 천사가 집사님의 집으로 안내하겠다고 해서 따라갔습니다. 황금보석으로 지은 집들이 즐비한 길을 걸어갔습니다. 내 집도 저런 집 들 중의 하나겠지. 생각하며 기분이 들떠서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폐품으로 지은 거지같은 집 앞에 멈추어서는 ‘이 집이 그대가 살 집이니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도 창피하고 실망이 되었습니다.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천사가 계속 말했습니다. “그대가 정성으로 지은 천국의 집은 폐품 집이니라.” 그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고 허둥대다가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회개 기도를 했습니다. “값비싼 보석과 현찰은 장롱 속에 감추어 놓고 폐품을 모아 바치려한 인색한 마음을 용서하소서.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드려야 하는데 귀한 것은 감추어 놓고 폐품을 팔아 부스러기 같은 것을 바치려 한 죄를 용서하소서.” 그는 자기가 가진 귀한 것으로 드리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 폐품을 주워 팔아 바치는 것이 왜 잘못이겠습니까? 그것은 너무도 귀한 일입니다. 과부의 동전 한 닢을 귀하게 보신 예수님이십니다. 가난한 사람이 적은 물질 바치는 것을 탓하시는 주님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자의 많은 헌금보다 더 크다고 주님이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좋은 것은 감추어 놓고 값싼 것으로 바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얼마든지 여유가 있는데도 쩨쩨하게 드리는 것은 주님을 멸시하는 행위입니다.
본문 11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사실은 나사로 혼자가 아니라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 세 사람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나사로와 그의 두 자매가 예수님을 증거하게 된 배경과 동기가 무엇입니까?
요 11:5에 보면,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주님을 증거합니다. 나사로 가족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고,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게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에 나타난 그들의 모습을 보면, 비록 나사로의 부활 사건 후의 모습이지만, 그들의 원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줄 알았습니다. 세 사람은 마음이 부드럽고 열려 있어서 주님의 사랑을 흠뻑 받았았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평소에 예수님 일행을 친절하게 대접하곤 했습니다. 예수님은 피곤하실 때마다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 가서 쉬시기도 하고 음식을 잡수시기도 했습니다. 마 21: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눅 10: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는 예수님을 친절하게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그 사랑으로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인도하는 사람들이 되었고 오고 오는 세대에 믿음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을 증거한 나사로와 두 자매의 역할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일
1절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나사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성경은 그저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기록하고, 그 다음 다시 살아났다고 기록할 뿐입니다.
요 11:1-2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나사로는 병들었다가 죽었고, 죽었다가 나흘 만에 예수님에 의해 다시 살아난 사람입니다. 그가 한 일은 죽었다가 살아난 일입니다. 그런데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예수님이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16:31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그런데 나사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된 것은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받으면서 살다가 죽었고, 주님의 특별한 은혜로 다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요 11장에는 그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임을 거듭 밝히고 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3절).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5절).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36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으면서 살다가 죽으면 그것이 바로 주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은혜 충만한 신앙생활 가운데 병들어 아파하다가 병 고침을 받아 다시 일어나 앉으면 그것이 바로 주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나사로는 예수님과 그저 함께 앉아 있었는데, 새로워진 그의 존재가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나사로의 동네인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3km 정도 떨어진 매우 인접한 동네입니다. 따라서 이곳은 자신을 적대시하여 찾고 있는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에 의하여 체포될 위험성이 높은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다니가 다음날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행하기에 적합한 곳이었고 그곳에 자신이 사랑하는 자들이 살고 있었으므로 이곳으로 오신 것입니다. 어느 의학박사가 오랜 세월 진료를 통해 얻은 경험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 때 세 가지가 변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얼굴이 환하게 변하고, 둘째는 말이 부드럽게 변하며, 셋째는 간이 깨끗하게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몸과 영혼이 건강하고 아름다워지고 그래서 주님을 증거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다시 살아난 나사로처럼 됩시다. 옛사람의 죄성은 죽어지고 예수님을 점점 닮아감으로 얼굴은 언제나 환하고 우리의 말은 부드럽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예수를 전하는 산 증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진정한 봉사
2절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 마르다는 예수님을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여기 ‘일을 하고’ 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 계속적인 행동을 가리킵니다. 원문의 뉘앙스를 살려 다시 번역하면 ‘그리고 마르다는 계속 식사 시중을 들고 있었다’ 가 됩니다. 마르다는 매우 부지런하며 손님 접대하기를 힘쓰는 여성이었고(눅 10:40), 자신의 오라비를 살려준 데 대하여 매우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이 회람되던 초대교회 안에서 섬기는 직분을 가진 ‘집사’(디아코노스)라는 단어도 여기 ‘일을 하다’(디아코네오)에서 왔음을 보면 저자는 교회에서의 봉사의 미덕을 상기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마르다는 진정한 봉사의 성도였습니다. 우리가 눅 10:40에서 보듯이 마르다는 여전히 예수님의 시중을 드느라 분주합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섬기는 모습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분주함입니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적어도 15-20명 이상일 것인데, 여기서 마르다는 손님 접대를 함에 있어서 과거(눅 10:40)와는 달리 침묵으로 일관하며 극진하게 섬기고 있습니다. 그녀는 그간 예수님을 통해서 많은 교훈을 배웠으므로 성숙한 신앙의 자세를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주님의 종들을 대접하는 일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성경은 봉사의 사람들을 높이 평가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도 자신의 소유로 주님과 제자들을 대접하며 섬겼습니다.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눅 8:2, 3). 가이오는 온 교회의 식주인(食主人)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도 바울과 성도들을 대접했고 복음 전하는 나그네들을 선대(善待)했습니다.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롬 16:23).
히브리서에는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히 13:2)고 했고, 예수께서도 “너희도 남을 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이들처럼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을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마르다가 단순히 봉사만 열심히 한 성도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녀는 나사로가 중병이 들었을 때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요 11:3). 슬픔과 절망의 시간에 주님께 나아가 도우심을 요청하는 기도의 사람은 귀한 사람입니다. 마르다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그의 봉사는 기도로 단련된 믿음의 결실이었습니다.
영국 런던에 위치한 메트로폴리탄 교회는 스펄전 목사님이 목회하던 교회였습니다. 1866년에 소속 성도가 4천3백66명으로 그 당시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하루는 스펄전 목사님이 성도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을 향해서 가슴이 뜨거운 사람, 열 두 명만 있다면 이 런던의 삭막하고 고독한 환경을 기쁨이 충만한 곳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4천3백66명이 있다고 할지라도 전부가 다 미지근한 성도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마르다와 같은 가슴이 뜨거운 봉사의 사람, 기도의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몸을 던져 헌신하는 봉사의 일꾼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마르다처럼 하나님 나라와 주님의 영광을 위해 몸을 던져 섬기며 봉사하는 일꾼이 될 수 있어야겠습니다.
헌신하는 사람
3절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유대인들은 손님이 오면 손님의 머리에 기름과 향유를 부어주는 습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집에 오실 때마다 이 일을 늘 마리아가 했다는 말입니다. 이전 장인 11장에서도 본 것처럼 마리아는 늘 예수님의 방문때 향유를 뿌려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마리아가 향유 몇 방울이 아니라 향유 한통을 다 부어드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주변에서 말하기를 저것을 팔아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행동을 칭찬해 주셨습니다. 주님께 향하여 적극적인 헌신과 적극적인 충성이 있어야 합니다. ‘나드’는 ‘나르도스타키시 자카만시’라고 불리우는 향나무의 뿌리에서 추출되는 향기로운 점액성의 향유입니다. 팔레스틴에서는 재배되지 않았고, 주로 히말라야 산맥이나 인도 지방에서 재배되었기 때문에 이를 수입하는 가격이 매우 비쌌다고 합니다.
300데나리온이면 근로자의 일 년동안 수고해서 벌어들이는 한 3000만원 정도의 엄청난 가치를 지닌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나드 한 근은 마리아가 일생동안 저축한 돈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그것을 사랑과 감사의 선물로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두 발을 닦은 행위는 지고(至高)한 헌신과 존경을 나타내는 예배의 태도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리아는 예수님을 향하여 뜨거운 마음과 넘치는 사랑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누구보다 훌륭한 스승으로 여겨 항상 예수님의 말씀과 교훈에 귀 기울여왔습니다(눅 10:39). 그녀는 오라버니 나사로에게 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사역을 기점으로 하여 자신이 소유한 최고의 것으로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하였습니다.
"순전한 나드"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향유입니다. 한 근이라고 했는데 다른 성경에는 한 옥합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부피로 따지면 한 옥합이고, 무게로 보면 한 근이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옥합에 담아 가지고 와서 옥합을 깨뜨렸다"고 했고, 마가복음에는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에게도 물론 최선이었지만, 예수님도 일생 동안 그렇게 진지한 헌신을 받아 보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친히 "이 세상에 복음이 증거 되는 어느 곳에도 이 여인의 행한 일을 기록하여 전하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부었지만, 그것은 예수님에게 일생 동안 잊혀 지지 않는 감동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이제 일 주일 후면 예수님은 죽으십니다. 그래서 시비하는 유다에게 "가만 두어라! 가난한 사람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막14장에는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밀 준비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드린 향유는 결국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소중한 기름이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항상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말씀 들으며 은혜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발 앞에 엎드려 자신의 소중한 머리털로 기름에 적셔진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최대한 낮춘 표현입니다. 당시에 손님의 발을 씻는 일은 노예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구약 성경의 규례 중 여자의 머리를 풀게하는 행위는 간음한 여인에 대한 처벌(민 5:18)에 해당하였으므로 공개석상에서는 절대 그런 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행위를 시도한 마리아의 행위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철저한 헌신의 행위입니다. 마리아는 마음과 정성을 온전히 드렸고, 이는 곧 그가 참된 예배를 드리는 진정한 예배자임을 의미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요한이 3절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팔아 향유를 붓고 헌신하는 마리아와 4절에서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를 병렬시켜서 대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돈궤를 맡은 최측근인 반면 마리아는 평범한 여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온전한 헌신을 표현한 반면, 가룟 유다는 며칠 내로 스승을 팔아넘겨 버립니다. 요한은 이러한 병렬을 통해서 마리아와 유다의 태도를 극명하게 대조시키며 성도들에게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삶 가운데 어떤 태도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며 섬길 것인가를 결단하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변호하셨습니다. 변호 정도가 아니라 그녀의 행위 속에는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즉 마리아가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행위는 단지 주님을 접대하기 위한 의미 뿐 아니라 장차 있을 십자가의 죽음을 예비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마가복음의 표현을 빌린다면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다”(막 14:8)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도유(塗油)행위를 단지 주님에 대한 감사와 접대의 차원을 넘어 메시야 구원 사역의 절정인 십자가 사건과 연결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행위를 하나의 아름다운 선행 정도가 아니라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함께 전해지도록 하는 영원한 기념비적 사건으로까지 승화시켜 주셨습니다(막 14:9).
어떤 큰 교회가 새로운 건물을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런저런 핑계와 이유를 대며 좀처럼 교회건축에 뜻을 모으지 않았습니다. 이에 낙담한 목사님은 어느 날 저녁시간을 정해서 교회 건축문제를 놓고 온 교인이 함께 기도하기로 광고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기도회에 참석한 인원은 극소수였습니다. 그 중 한 여성도는 아이를 맡아 줄 사람이 없어서 다섯 살 난 딸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어린 아이는 집으로 돌아온 후 교회 건축이 무엇하는 것이냐고 엄마에게 꼬치꼬치 캐묻더니 한참만에야 알아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그 꼬마 아이는 혼자서 목사님 댁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 맺혀 있었고 옆에는 벽돌 두 장이 실려 있는 아이의 장난감 손수레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 두 장의 벽돌은 교회 건축을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아이가 목사님에게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주일 아침 예배시간에 목사님은 이 일에 대해 교인들에게 이야기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듣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그리하여 아이가 바친 두 장의 벽돌은 크고 아름다운 새 교회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아무리 작은 헌신일지라도 주님을 위해 한 것이면 끝까지 기억해 주실 뿐만 아니라 더 크게 사용하여 주심으로써 드린 자를 영화롭게 해 주십니다. 인간의 눈에 작아 보인다 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고 오히려 더욱 큰 기쁨과 정성으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더 큰 계획과 섭리 속에서 여러분이 드린 것을 받으시고 사용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마리아처럼 주님을 위해 물질과 몸과 마음을 드려 헌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믿음의 분량대로 힘껏 내게 있는 것을 드려 헌신하면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드러나며 복된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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