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종교와 계시
5-1. 종교
참된 신학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서만 시작될 수 있다. 신학은 경건하고 종교적이어야 한다. 신학은 신본주의적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식의 시작이다(잠 1:7). 경건 없는 신학은 무의미하며 무가치하다.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 혹은 경건(religion or piety)이란 하나님을 알며 두려워하고, 그를 믿으며 높이고, 그를 섬기며 순종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칼빈은 말하기를, 종교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가진 신뢰심이며, 그에게 대한 합당한 예배를 포함한다고 했다(기독교강요, 1. 2. 2).
참된 종교 혹은 경건은 성경에 증거된 인류 초기의 경건한 선조들의 삶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창세기 초두에만 하더라도 아벨, 셋의 자손들, 에녹, 노아 등의 삶이 그러하다. 아벨은 양의 첫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제사드렸다(창 4:4). 셋은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는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 4:26).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다(창 5:22). 노아는 의인이며 당세에 완전한 자로서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방주를 짓고 거기에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다 준행하였다(창 6:9, 22).
경건한 선조들의 종교는 하나님의 원시적 계시에서 기원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일반계시이었는지 혹은 특별계시이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여하튼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하나님께서 그들을 에덴 동산에서 내어쫓으셨을 때, 그는 그들을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셨다(창 3:21). 그것은 그가 그 옷을 위해 짐승들을 죽였음을 의미하며 거기에 짐승 제사의 어떤 암시가 있었던 것 같다. 그 후,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제사드렸고(창 4:4), 오랜 후 노아도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 번제로 단에 드렸다(창 8:20).
종교는 두 가지 요소를 가진다. 첫째로, 종교는 하나님의 계시와 교훈, 그리고 예배 의식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종교의 객관적 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이런 요소는 흔히 '율법'(토라)이라는 말로 요약된다(신 1:5). 그것은 '말씀'(다바르), '명령'(미츠와), '법도'(미슈파트), '규례'(코크) 등 여러 말로 표현된다. 구약의 율법은 도덕적 계명들과 교훈들과 함께, 제사 의식들과 성전 예배 등을 포함한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요구를 표현하기를,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다(신 10:12, 13).
신약성경에서 종교의 객관적 요소는 흔히 '복음'(福音, 유앙겔리온)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 외에, '말씀'(로고스), '진리'(알레데이아) 등의 말이 그것을 표현한다. 에베소서 1:13은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라고 표현하였다. 신약의 복음은 또한 세례와 성찬의 의식을 포함한다(마 28:19; 고전 11:23-26).
둘째로, 종교는 사람이 하나님께 대해 가지는 두려움과 경건을 가리킨다. 이것은 종교의 주관적 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이런 요소는 '경외하다'(두려워하다, 야레[300회 이상]) 혹은 '경외'(이르아[42회])라는 말로 흔히 요약된다(잠 1:7). 그 외에, '사랑하다'(아하브), '듣다'(솨마), '행하다'(할라크, 아사), '지키다'(솨마르), '섬기다'(아바드) 등의 말이 동일한 것을 표현한다(신 6:5; 10:12, 13).
신약성경에서 종교의 주관적 요소는 '믿는다'(피스튜오[248회]) 혹은 '믿음'(피스티스[244회])이라는 말로 흔히 요약된다(요 3:16). 그 외에, '예배하다'(프로스퀴네오), '섬기다'(레이투르게오) 혹은 '예배'(라트레이아), '경건'(유세베이아, 드레스케이아) 등의 말이 사용된다(요 4:24; 행 13:2; 롬 12:1; 딤전 4:7; 약 1:27).
종교 특히 그 주관적 요소의 좌소(座所, 자리)는 어디인가? 철학자 칸트는 종교를 사람이 그 도덕적 의무를 수행하는 주된 행위로 보았다. 헤겔은 종교를 포함하여 사람의 전(全)생애를 단지 사상 혹은 관념의 과정으로 보았다. 현대 자유주의의 시조 슐라이엘마허는 종교의 본질을 하나님을 의지하는 감정으로 보았다. 이처럼 종교의 본질을 어떤 이들은 의지의 면에, 어떤 이들은 지식의 면에, 다른 이들은 감정의 면에 치우쳐 이해하였다.
그러나 참된 종교 혹은 참된 경건은 단순히 사람의 지식이나 감정이나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세 요소(지식, 감정, 의지)를 포함한 마음(heart, 레브, 카르디아)에 있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는 마음을 다하고(베콜 레바베카)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했다(신 6:5). 바울은 로마서에서 성도의 믿음을,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에크 카르디아스) 순종하여"라는 말로 표현하였다(롬 6:17). 또 그는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엔 테 카르디아 수)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카르디아)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했다(롬 10:9, 10).
마음에서 나온 종교적 태도, 즉 마음에서 우러나온 두려움과 믿음이 참된 종교요 참된 경건이다. 다시 말해, 종교는 단순히 지식주의도, 감정주의도, 도덕주의도 아니요, 지식과 감정과 의지의 세 요소를 다 포함하는 전(全)인격의 문제, 곧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종교는 삶 전체의 문제요 신학은 사상의 문제이므로, 종교의 범위는 신학의 범위보다 더 넓다. 그러나 그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이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우선, 참된 종교는 건전한 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일 어떤 종교가 건전한 신학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맹목적 종교 혹은 미신(迷信)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섬긴다면, 그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7:3). 또 베드로 사도는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성도들에게 권면하였다(벧후 3:18). 기독교는 단순히 감정주의 혹은 신비주의나 도덕주의가 아니고, 전인격적 마음의 종교이다. 이와 같이, 참된 종교는 반드시 건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바른 지식 없이 신앙 생활과 봉사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물론, 바른 지식이 곧 믿음과 봉사는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바른 지식 없이 바른 믿음과 바른 봉사는 불가능하다. 교회 목회의 경우도, 목사가 신학 지식만 가지고 목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바른 신학 지식 없이도 바르고 충실하게 목회할 수 있다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다른 한편, 건전한 신학은 참된 종교 혹은 참된 경건으로 나타나야 한다. 신학은 단순히 지식 활동에 그쳐서는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죽은 개념들만을 다루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종류의 신학 활동을 요구하거나 기뻐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는 구약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기를,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고 하셨다(마 15:8).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지식이 바로 그러하다.
그러므로 신학이 참된 의미를 가지려면 반드시 종교의 일부분이어야 한다. 만일 어떤 신학 활동이 참된 경건과 믿음을 가지고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신학은 이미 신학으로서의 의미와 가치를 잃은 것이다. 경건 없는 신학은 실상 형식주의와 위선에 불과하다. 죽은 자가 어찌 살아계신 하나님을 이해하며 논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건전한 신학은 반드시 참된 종교와 참된 경건으로 표현되며, 건전한 신학자는 먼저 참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계시(啓示, revelation)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신의 속성과 뜻을 나타내시는 행위이다. 구약성경에서는 라아('보다,' 창 12:7)와 갈라('나타내다,' 창 35:7) 등의 말이 사용되었고, 신약성경에서는 파네로오('보이다,' 롬 1:19)와 아포칼�스('계시,' 계 1:1) 등의 말이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계시들에는, 그 방식에 따라, 하나님께서 자연만물과 그 현상들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시는 '자연 계시'와, 하나님께서 기적들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시는 '초자연 계시'가 있다. 또한 계시의 목적에 따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자와 일반적 섭리자로 나타내시는 '일반계시'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죄인들의 구주로 나타내시는 '특별계시'가 있다.
역사상,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잘못된 생각들도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자연신론과 범신론이다. 자연신론(自然神論, Deism)이란 하나님께서 그가 창조하신 자연세계를 초월해 계시며 자연질서를 간섭지 않으시고 오직 자연만물을 통해서만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이신론(理神論)이나 초연신론(超然神論)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격성을 인정하나 그의 초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결국 하나님의 기적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속죄 등 하나님의 초자연 계시나 특별계시를 부정하고, 자연 계시나 일반계시만 인정한다. 초기 자유주의 신학은 대체로 이런 입장이었다.
그러나 자연신론은 성경의 계시개념과 명백히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가 창조하신 자연세계를 내버려 두시고 자연질서를 간섭지 않으신 것이 아니었다.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그는 역사상 수없이 많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때때로 초자연적 기적들을 통하여 자연질서 속에 직접 개입하셨고 자신을 밝히 나타내셨다.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이란, 하나님이 자연만물 속에 충만히 내재(內在)해 계시며 자연만물 자체가 하나님을 나타낸다는 생각이다. 범신론에 의하면, 하나님과 자연만물 곧 우주는 실상 하나이다. 또 인간의 본성도 자연만물의 일부로서 하나님으로 충만하므로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명상함으로써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에 관하여 논할 수 있다고 본다.
범신론은, 자연신론과 달리, 하나님의 초월성 대신 그의 내재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자연신론과 같이, 범신론도 하나님의 자연계시나 일반계시만 인정하고 그의 초자연계시나 특별계시는 부정하고 만다. 범신론에서는 엄격한 의미에서 인격적 하나님의 계시를 생각하기 어렵다. 오늘날 다수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범신론적이다.
그러나 범신론은 성경의 계시 개념과 명백히 충돌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충만하시지만 동시에 세상을 초월해 계신다. 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다(단 2:18; 3:26). 그는 세상이나 인간과 본질상 무한한 차이가 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결코 피조세계와 동일시 될 수 없으시다. 그러므로 인간은 결코 본성을 명상함으로써 하나님에 관한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
일반계시란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자와 일반적 섭리자로 나타내시는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연만물과 그 현상들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신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기를,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고 하였다(시 19:1). 바울 사도도,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말했다(롬 1:20). 또 그는 하나님께서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통하여 자신을 증거하셨다고 말했고(행 14:17), 그가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고 우리가 그 안에서 살며 움직이며 존재한다'고 했다(행 17: 27, 28).
하나님께서는 또한 사람의 마음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신다.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종교의 씨앗'이라고 불리우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 혹은 생각과, 하나님의 도덕성을 반영하는 양심이 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고 했다(롬 1:19). 또 그는 양심을 가리켜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표현하였다(롬 2:15).
하나님께서는 역사적 사건들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기도 하신다. 대체로,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징벌하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것은 역사상 전쟁이나 천재지변,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질병이나 경제적 고난 등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일반계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의로우심과 선하심 등을 어느 정도 나타내지만, 하나님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주지는 못한다. 그것은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을 주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일반계시는 구원 사역에 보조적 역할을 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자연만물은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고 혼란과 부패 속에 있다. 땅은 저주를 받았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창 3:17, 18). 저주받은 땅에는 자연적 재해들과 질병들이 가득하다. 피조세계는 지금 허무한 데 굴복하며 탄식하고 있다(롬 8:20-22). 그러므로 자연만물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지식은 매우 불완전하고 불충분할 수 밖에 없다.
더욱이, 사람의 마음은 죄로 인해 어두워져 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백성을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라고 표현하였다(사 9:2). 바울은 이방인들을 묘사하기를, "저희 총명[이해력]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고 하였다(엡 4:18). 또 그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고전 1:21). 이와 같이, 사람의 마음은 죄로 인해 어두워져 있기 때문에, 실상 일반계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제한적 지식조차도 가지지 못하며, 헛된 우상숭배에 떨어지곤 하는 것이다(롬 1:21-23).
일반계시에 근거한 하나님의 지식을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이라고 부른다. 로마 천주교회는, 하나님과 피조물 간에 '본질적인 유사성' (analogia entis)이 있기 때문에 피조물에 대한 지식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천주교회의 신학체계에서는 일반계시에 근거한 자연신학이 신학의 한 본질적 부분이다. 즉 카톨릭 신학체계는 이층 구조인데, 1층은 자연신학이며, 2층은 계시 신학이다. 역사상, 자연신론이나 이성주의는 일반계시에 근거한 자연신학만 인정하려고 한다.
사람이 중생하기 전에는 영적으로 어두워 있어서 일반계시를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중생한 후에는 성령의 지혜와 깨달음을 받으므로 그것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중생치 못한 자에게 일반계시에 근거한 자연신학은 불가능하지만, 중생한 자에게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Hodge, I, 22-25; Robert Dabney, Lectures in Systematic Theology, pp. 6, 7).
그러나 로마 카톨릭의 생각과 달리, 기독교 신학체계에서 자연신학은 본질적이지 않고 단지 보조적일 뿐이다. 또한 일반계시는 그 해석이 과장되거나 그 적용이 잘못되기 쉽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게 취급되어야 한다. 일반계시는 항상 특별계시인 성경의 빛 아래서 통제되어야 한다.
기독교 신학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에 의존한다. 특별계시란, 하나님께서 자신을 죄인들의 구주로 나타내시는 행위를 가리킨다.
6-1. 특별계시의 목적
일반계시의 불충분성에서 특별계시의 필요성이 암시되었었다. 즉 사람이 일반계시만으로는 참 하나님과 자신의 죄악의 심각성과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특별계시가 필요한 것이었다. 여기에 특별계시의 목적이 드러난다. 특별계시는 사람으로 하여금 참 하나님을 바로 알고 죄로부터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한 계시이다. 특별계시는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계시인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특별계시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 . .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4:32-35).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절정은 그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었는데, 그 목적은 요한복음 3:16에 밝히 말씀되어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은 이렇게 진술하였다: "비록 본성의 빛과, 창조와 섭리의 일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므로 사람들로 핑계할 수 없게 하지만, 그것들은 구원을 위해 필요한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지식을 주는 데 충분치 못하다. 그러므로 주께서 여러 시대에 여러 방식들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의 교회에게 그의 뜻을 선언하시기를 기뻐하셨고 . . ."
하나님께서는 신현(神現), 말씀, 그리고 기적이라는 세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특별히 계시하셨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육신의 눈으로 뵐 수 없는 영(靈)이시지만(요 4:24; 딤전 6:16), 사람들에게 종종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셨다. 이것을 신현(神現, theophanies) 혹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라고 부른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매우 친근히 교제하셨다. 그는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셨다'(창 3:8).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불과 구름으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하나님께서 처음 모세를 부르셨을 때, '여호와의 사자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다'(출 3:2). 또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도달했을 때, 여호와께서는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불 가운데서 시내산에 내려오셨다(출 19:18).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막을 만들어 봉헌했을 때도, 구름이 그것을 덮었는데, 성경은 그것을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다'고 표현하였다(출 40:34). 후에,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봉헌했을 때도 구름이 그 곳에 가득하였다(왕상 8:10).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천사의 모습 곧 사람과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창세기 18:1, 2은 기록하기를,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본즉 사람 셋이 맞은 편에 섰는지라"고 기록했다. 이 세 사람 중에 한 분이 하나님이셨던 것 같다(10, 13절; 19:1 비교).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한 후에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다'고 증거하였다(창 32:24, 29, 30). 호세아는 그 사건을 언급하기를, '야곱이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겼다'고 하였다(호 12:3, 4).
하나님의 나타나심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사건이었다. 요한 사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라고 증거하였다(요 1:14).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달라'고 말하는 빌립에게 말씀하시기를,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하셨다(요 14:9). 전통 사본에 의하면, 바울 사도도 디모데전서 3:16에서 '하나님은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셨다'고 증거하였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또한 말씀하셨다.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지 않으셨다. 그는 말씀하신 하나님이셨다. 히브리서 1:1은 증거하기를,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모세는 자주 그의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께서 미디안 광야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부르셨을 때, 그는 음성으로 '모세야'라고 말씀하셨다(출 3:4). 시내산 앞에서도 '모세가 말할 때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대답하셨다'(출 19:19). 또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 여호와께 말씀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다'(민 7:89). 하나님께서는 친히 증거하시기를, '모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였다'고 하셨다(민 12:8).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보다 빈번히 꿈이나 이상(異象)을 통해 말씀하셨다. 그러한 현상들은 정신 없는 혼미한 상태에서 일어난 애매모호한 사건들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명확한 계시 사건들이었다. 창세기 15:1은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였다'고 증거한다. 야곱은 꿈에 '여호와께서 사닥다리 위에 서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창 28:12, 13).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미리암에게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라고 하셨다(민 12:6). 신약 시대에도 꿈과 이상은 종종 하나님의 계시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마 1:20; 행 9:10).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아마 가장 빈번한 방식은 성령의 특별한 감동으로이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성령의 특별한 감동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전달했다. 베드로 사도는 증거하기를,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했다(벧후 1:21).
선지자들에게 주신 성령의 특별한 감동의 방식은 우리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을 명확히 구별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선지자들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등의 표현을 빈번히 사용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언(傳言)하는 것이라고 문자 그대로 이해되어야 한다.
구약의 우림과 둠밈도 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사무엘상 28:6은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셨다'고 증거한다. '우림과 둠밈'은 문자적으로는 '빛과 완전함'이라는 뜻이다. 그것들은 대제사장 아론의 판결 흉배 안에 넣어두는 어떤 물건이었던 것 같다(출 28:30).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는 도구가 되었는지 잘 알 수 없지만, 그것을 지닌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성령의 내적 깨달음을 받았던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절정은 역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었다. 히브리서 1:1, 2은 증거하기를,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의 특별계시이며, 그의 모습은 하나님의 모습이며, 그의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또한 기적들을 행하셨다. 성경에서 기적을 표현하는 세 단어는 '기사,' '능력,' '표적'이다. '기사'(奇事, wonder, 히브리어 모페드 혹은 팔라, 펠레, 헬라어 테라스)라는 말은 그것이 사람에게 놀라움을 줌을 나타내며, '능력'(power, 히브리어 게부라, 헬라어 뒤나미스)이라는 말은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함을 나타낸다. 기적을 위해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말은 '표적'(表蹟, sign, 히브리어 오드, 헬라어 세메이온)이다. 그것은 기적이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는 표시임을 나타낸다. 이 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적(오드)과 기사(모페드)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셨다(신 4:34, 35). 요한 사도는, 그가 그의 복음서에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들을 몇 가지 기록한 목적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사람들로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증거하였다(요 20:30, 31). 베드로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다'고 했다(행 2:22). 히브리서는 '하나님께서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으로 사도들과 함께 복음을 증거하셨다'고 표현하였다(히 2:4).
성경에서 기적들이 일어난 시대는 주로 네 시대이었다. 각 시대마다 기적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확증하였다. 첫번째는 모세와 여호수아의 시대이었다. 그 시대는 하나님의 율법의 전달, 기록 및 확증을 통해 구약 계시의 기초를 확립한 시대이었다. 두번째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이었다. 그 시대는 참 종교가 심히 쇠약하고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숭배가 심히 강성한 배교의 시대이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기적들을 통해 참된 경건과 진리의 지식을 재확증하셨던 것이다.
세번째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시대이었다. 그 시대는 이스라엘의 포로 시대로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망하고 이방 나라들의 권세가 크게 우세했던 시대이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여전히 세상의 주권자이심을 증거하셨다. 마지막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시대이었다. 그 시대는 구약 시대에 예언되었던 메시아가 오신 시대요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절정과 완성의 시대이었다. 이 때 하나님께서 기적들을 가장 많이 주신 것은 합당하였다. 이 때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완전한 기록물로서 기록되었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은 언어적, 역사적, 점진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로,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언어적(言語的)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전달 수단은 인간의 언어이었다. 비록 사건 계시라 하더라도 반드시 그 사건의 설명이 뒤따랐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언어로 특별계시를 주심으로 우리로 그 계시를 잘 이해할 수 있게 하셨다. 여기에서 인간 언어의 인식적(認識的, cognitive) 기능은 당연한 것으로 전제된다. 만일 누가 인간 언어의 인식적 기능을 부정하고 언어의 불완전성만을 주장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불신하는 것이 될 것이다.
오늘날 신정통주의(Neo-Orthodoxy)라고 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한 부류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객관적으로 기록될 수 없고 단지 주관적으로만 경험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불신임하고 있다. 신정통주의는 계시를 하나님과 사람의 인격적 만남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본다. 신정통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인격적-경험적 계시만을 주장하고, 그의 언어적-명제적 계시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정통주의의 이러한 계시 개념은 비성경적이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인격적-경험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언어적-명제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언어로 말씀하셨고 그 말씀들을 객관적으로 명확히 성경책에 기록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의 객관성을 부정하는 것은 기록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임을 불신하는 근본적 오류요 이단 사상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역사적(歷史的)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모든 특별계시는 역사적 계시사건들이었다. 성경의 절반 이상은 역사이다. 또한 역사가 아닌 내용들, 예를 들어 예언들, 시들, 서신들도 어떤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들 속에서 주어졌다. 예를 들어, 이사야가 본 이상(異象)과 받은 예언의 말씀들은 "유다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주어졌다(사 1:1). 에스겔이 처음 하나님의 이상을 본 것도 '제30년 4월 5일에 그가 그발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었을 때'이었다(겔 1:1). 하나님은 역사적, 문화적 상황들을 계시의 수단으로 사용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때때로 계시의 내용으로도 삼으셨다(예, 십자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대체로 성경에 증거된 사건들의 신빙성을 부정한다. 그들이 말하는 계시 사건은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적 사건의 역사(Historie)가 아니고, 하나님의 세계의 사건의 역사 혹은 초월적 역사(Geschichte)이다. 그러나 이렇게 두 차원의 역사를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역사성을 혼동시키고 실상 부정하는 것이다. 소위 초월적 역사란 역사가 아니다. 초월적 역사로서 계시 사건들을 긍정하는 것은 성경의 사건들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고, 실상은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명백히 이단적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점진적(漸進的) 성격을 가진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점진성은 구약 시대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그리고 특히 구약과 신약을 비교해 봄으로써 분명해진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중심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시대에 '뱀의 머리를 밟으실 여자의 후손'(창 3:15), '아브라함의 씨'(창 12:7; 22:18), 성막 제도와 제사의 규례들(출애굽기, 레위기), 그리고 '다윗의 씨' 등으로 예표적으로 또는 예언적으로 점점 계시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신약 시대가 되어, 그는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인류의 구주로 최종적으로 그리고 절정적으로 밝히 계시되셨다. 구약은 그림자요 신약은 실체이며, 구약은 약속이요 신약은 성취이었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에 걸쳐 점진적으로 더 확실하고 풍성하게 계시된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끝났는가, 아니면 오늘도 계속되는가라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특별계시들이 충족한가라는 문제와 관련된다. 만일 하나님께서 역사상 당신의 뜻을 충족히 계시하셨다면,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것이다.
과연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충족성을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6:31). 이것은 구약성경의 충족성을 잘 증거한다.
히브리서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기록했다(히 1:1,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라는 말은, 신약 계시가 하나님의 최종적, 결정적 계시임을 증거한다. 신약 계시에 첨가할 또 다른 어떤 계시는 필요치 않다.
요한 사도도 요한계시록 맨 끝부분에서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엄숙히 말하였다(계 22:18, 19). 이것은 이 마지막 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종말 예언의 말씀이 충분하다는 것을 증거한다.
이상의 모든 말씀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충족히 주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그것이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특별계시의 종결성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엄격히 말하면, 특별계시의 이전 방식들의 종결이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그의 뜻을 계시하시던 이전의 그 방식들은 지금은 중지되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하나님께서 자신을 더 이상 계시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제 그의 특별계시의 기록인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이것은 특별계시의 계속성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이다.
7-1. 특별계시와 성경과의 관계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성경책에 기록되었다. 특별계시와 성경은 기록 혹은 저장(貯藏)이라는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모든 특별계시가 다 성경으로 기록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만큼 취사선택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성경에 기록되었고 성경에만 기록되었다. 우리는 성경과 같은 다른 책을 모른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유일한 저장소이다.
특별계시와 성경의 관계를 생각할 때, 우리는 그 둘의 차이점과 일치점을 깨닫게 된다. 특별계시는 하나의 사건이요, 성경은 그 기록이다. 여기에 특별계시와 성경의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특별계시는 성경에 그리고 성경에만 기록되어 있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나타내신다. 여기에 특별계시와 성경의 일치점이 있다. 오늘날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성경은 동일시된다. 성경은 단순히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낡은, 그리고 죽은 문자로 된, 기록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현재적 계시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곧 지금도 역사(役事)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사람에게 꼭 필요한 책이었다. 성경의 필요성에 관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은 다음과 같이 적절히 진술하였다: "그러므로 주께서 여러 시대에 여러 방식들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의 교회에 그의 뜻을 선언하시기를 기뻐하셨고, 그 후에는 그 진리를 더 잘 보존하고 전파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육신의 부패성과 사탄과 세상의 악한 뜻에 대항하여 교회를 더 굳게 세우시고 위로하시기 위하여, 그 동일한 진리를 온전하게 기록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이것이 성경을 가장 필요하게 만든다."
첫째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특별계시를 더 잘 보존하시고 전파하시기 위해 필요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로운 방법이었다. 성경 기록이 없었더라도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사람의 기억력과 구전(口傳)을 통해 어느 정도 보존되고 전파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인간의 연약과 실수로, 그리고 사탄의 방해로 많이 손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성경책에 명확히 기록됨으로써 그것은 더 잘 보존되고 더 잘 전파될 수 있게 되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들을 책에 기록하였다(출 24:4; 신 31: 24).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하시고 행하신 일들을 책에 기록하였다. 기독교는 책의 종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특별계시들을 책에 기록되게 하셨다. 요한 사도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들을 책에 기록한 목적이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진술하였다(요 20:30, 31). 바울 사도도 성경의 목적을 '사람이 예수 믿고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딤후 3:15).
둘째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의 부패성과 사탄과 세상의 악한 뜻에 대항하여 교회를 더 견고하게 설립하고 위로하시기 위해 필요했다. 우리는 육신의 부패성을 가지고 있고, 이 세상에는 사탄의 활동과 세상의 악한 일들이 많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명확한 말씀이 없었더라면 구원받은 자들은 더욱 빈번히 흔들리고 낙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계시의 말씀들을 기록하여 주심으로써 우리는 성경을 통해 더욱 견고하게 서고 많은 위로를 받게 되었다.
누가는 자기가 기록한 복음서의 목적을, '데오빌로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표현하였다(눅 1:1-4). 바울은 성경의 유익에 대하여 증거하기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하였다(딤후 3:16). 이사야는 율법과 증거의 말씀이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판단하는 기준이 됨을 증거하였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이는 그들 속에 빛이 없기 때문이니라"(원문 직역)(사 8:2).
'하나님의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자가 복되다'(시 1:2). 나무에게 시냇가가 복이 되듯이, 성경은 성도들에게 영적 복이 되는 책이다. 바울 사도는 성경이 성도에게 위로의 책임을 이렇게 말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
성경은 또한 내용이 명료한 책이다. 성경의 명료성(明瞭性)이란, 성경이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전달함에 있어서 모든 사람이 이해할 만하게 명료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목적은 죄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참 지식을 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성경이 결코 어려운 책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의 명료성에 관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7은 이렇게 진술한다: "성경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 자체에 있어서 똑같이 명백한 것은 아니고 또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분명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구원을 위해 알고 믿고 지켜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은 성경의 이곳 혹은 저곳에 분명히 제시되고 드러나 있어서, 유식한 자들뿐 아니라 무식한 자들도 일반적 수단을 적절히 사용함으로 그것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은 두 가지 점에서 명료하다. 첫째로, 성경은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 알아야 할 교리적 내용에 있어서 명료하다. 요한 사도는 그가 요한복음을 쓴 목적을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하였다(요 20:31). 바울 사도도,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증거하였다(딤후 3:15).
사실, 성경은 이 구원의 진리를 뒷받침하는 하나님의 지식 전반에 있어서 명료하다. 하나님께서는 하박국 선지자에게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 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합 2:2). 그는 또한 예레미야를 통해 장차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그를 알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렘 31:34).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말하기를,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한다'고 하였다(시 19:7).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진리들은 결코 애매모호하지 않고 확실하며 명료하다.
둘째로,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거룩한 생활을 위한 윤리적 교훈들에 있어서도 명료하다. 시편 저자는 증거하기를,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고 했다(시 119:105). 불확실한 교훈은 결코 빛이 될 수 없다. 바울 사도도, "모든 성경은 . . .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라고 말했다(딤후 3:16-17). 하나님의 정확 무오한 교훈만이 사람을 유익케 하고 온전케 한다.
성경의 필요성과 명료성에서 당연히 결론내릴 수 있는 한 사실은, 성경은 모든 성도들이 읽을 수 있도록 원어들로부터 각 나라의 쉬운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수단일진대, 성경이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명료하게 전달하는 책일진대, 성경은 마땅히 모든 나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8은 성경 번역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옛 하나님의 백성의 모국어이었던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과, 기록 당시 여러 나라들에게 매우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었던 헬라어로 된 신약성경은 직접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으며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으므로 믿을 만하다. 따라서 종교상 모든 논쟁들에서 교회는 최종적으로 그 성경들에 호소한다. 그러나 그 성경들을 읽을 권리와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것들을 읽고 연구하라는 명령을 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원어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성경들은 그것들이 들어가는 모든 나라의 통속적(通俗的, vulgar) 언어로 번역되어야 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사람 속에 풍성히 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방식으로 그를 예배하고 인내와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성경 번역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원칙들이 필요할 것이다. ① 축자(逐字, 글자) 영감의 교리에 맞게, 성경 본문은 가능한 한 직역되어야 한다. 소위 '의미적 번역'(dynamic equivalence)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② '코이네'(통속적) 헬라어의 성경에 맞게, 성경은 쉬운 대중적 용어들로 번역되어야 한다. ③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고려하여, 성경은 가능한 한 품위있는 용어들로 번역되어야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신약의 전통 사본(혹은 다수 사본, 비잔틴 사본)의 본문을 따르고 기존하는 개역 성경의 본문을 가능한 한 유지하는 새로운 번역 성경이 필요하다.
성경의 명료성은, 만일 성경이 실제로 바르게 해석되지 않는다면, 무의미해지고 만다. 성경이 바르게 해석되지 않는다면, 성도는 성경을 많이 읽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의 기갈을 가질 수 있다.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성경이 바르게 해석될 때에만 충분히 나타나고 성취된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몇 가지의 건전한 원리들이 있다.
첫째로, 성경은 문법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문법적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단어들의 뜻과 어순과 문맥 등이다. 문법적 해석은 많은 경우 문자적(literal) 해석을 의미한다. 그것은 지극히 평범하고 상식적인 해석이다. 성경은 일차적으로 학자들에게 주어진 책이 아니고 평범한 일반 성도들에게 주어진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대부분은 특별하고 이상한 해석에 의해서가 아니고 단순한 문법적 해석에 의해서 하나님의 명확한 뜻을 잘 드러낸다.
그러므로 성경의 시들나 예언들에 나오는 상징적 표현들은 비유적으로, 영적으로 이해되어야 하지만, 성경의 모든 부분들을 비유적으로, 영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 해석을 소위 '풍유적(allegori- cal) 해석'이라고 부른다. 이런 태도는 교회 역사상 항상 있어 왔고 오늘날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풍유적 성경 해석은 성경의 순수한 뜻을 혼란시키고 성경 본문의 명확한 의미 대신에 다양하고 불확실한, 주관적 해석들만을 남기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비유적 혹은 풍유적 해석을 매우 삼가야 한다.
둘째로, 성경은 역사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성경의 많은 부분들, 아마 절반 이상은 역사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특별계시들을 어떤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 주셨다. 그러므로 역사적, 배경적 지식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자는 일차적으로 성경 역사에 익숙해야 하며, 또한 성경 시대의 세속 역사의 지식도 가지도록 힘써야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비록 이러한 역사 지식이 많지 못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생각과 뜻을 파악하기에 어렵지 않다.
셋째로, 성경은 신학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것은 다른 말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 "성경 해석의 정확 무오한 법칙은 성경 자체이다. 그러므로 의미가 여럿이 아니고 단 하나인 어떤 성구의 참되고 완전한 뜻에 관해 문제가 일어날 때에는 보다 더 명백하게 말하는 다른 곳들에 의해 그 뜻을 찾아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성경의 참 저자는 하나님 자신이시므로, 성경의 어느 곳의 좀 불분명한 의미는 성경 다른 곳의 보다 분명한 의미에 의해 해석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각 부분은 성경 전체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특히, 구약은 신약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점진성과 신약 계시의 최종성을 인정하면서, 구약은 신약에 비추어, 그리고 신약의 빛 즉 신약 계시를 넘어서지 말고, 해석되어야 한다. 이와 비슷하게, 신약은 구약의 기초 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신약 계시는 구약 역사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 창조, 타락, 심판, 그리고 이스라엘의 선택, 거역, 멸망, 회복의 역사적 배경에서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전체 내용이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더욱이 구약 율법의 초등 교육을 통해 인생의 전적 부패와 무능력을 증거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은혜의 구원의 복음은 밝히 제시되었다.
이렇게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원리를 신학적 해석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학이란 성경의 진리를 전체적으로, 체계적으로 정돈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신학은 불명료한 성경 구절들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일단 성경적 신학이 정립되었다면, 그 신학은 성경 해석의 기본 원리로서 도움을 준다. 즉 바른 신학에 의해 성경이 해석될 때, 성경의 모든 부분들은 밝아지고 탈선된 해석은 방지된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의 뜻을 충족히 전달하는 책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은 이렇게 진술하였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사람의 구원과 신앙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에 관한 하나님의 모든 뜻이 성경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거나 혹은 건전하고 필연적인 논리에 의해 성경으로부터 추론될 수 있다. 그 하나님의 뜻에 어느 때든지 성령의 새로운 계시들이나 사람들의 전통들에 의해 아무 것도 첨가될 수 없다." 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그의 뜻을 계시하시던 이전의 그 방식들은 지금은 중지되었다"고 말했는데, 그것도 결국 성경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 충족한 책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구약성경은 모세의 율법 시대로부터 그 충족성을 스스로 증거해왔다. 모세는 말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고 했다(신 4:2). 율법에 무엇을 더하는 것은 그것의 불충족성을 의미할 것이다.
구약성경의 핵심은 율법이며, 선지서와 성문서는 내용적으로 율법에의 첨가라기보다 율법의 내용의 설명, 확증, 적용이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라고 증거하였다(시 19:7). 또 이사야 선지자도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모세의 율법]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이는 그들 속에 빛이 없기 때문이라"(원문 직역)고 증거하였다(사 8:20). 예수께서도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구약성경의 충족성을 이렇게 증거하셨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31).
신약성경은 구약의 진리와 다른 무엇이 첨가되었다기보다는 구약에 예언되고 증거된 그리스도의 오심을 선포하고 해설한 것이다. 신약성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족보]라"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에 관한 일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의 글들과 시편'에 예언되어 있음을 증거하셨다(눅 24:27, 44; 요 5:39).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그 성격상 구약성경과 일치한다. 신, 구약성경의 중심 인물과 대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신약 교회의 창설자들인 사도들은 구약성경을 가지고 충족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가르쳤던 것이다.
이제 사도들로 통하여 기록된 신약성경은 충족한 계시의 기록으로서 더 이상 무엇이 첨가될 필요가 없다. 히브리서 1:1, 2의 증거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절정이요 종결이셨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의 복음은 사도들을 통하여 밝히 계시되고 해설되고 전달되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 단언하였다(갈 1:8, 9). 또 그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형제들아, 굳게 서서 우리의 말로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들[전해 들은 내용들]을 지키라"고 말하였다(살후 2:15).
주께서는 종말 예언까지 충족히 주셨다. 성경의 맨 마지막 책의 끝부분에는,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는 엄숙한 경고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주께서 종말 예언까지 충족히 주셨음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알리기를 원하시는 그의 모든 뜻을 성경에 다 기록하셨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신약성경으로 완성되고 종결되었다. 바울 사도는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가 일시적일 것을 말한 후 "이는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할 것임이니라"고 증거하였다(고전 13:8-10).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관한 한, 그 '온전한 것'은 곧 신구약 66권의 성경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이 완성된 후 성경 외에 또 다른 특별계시들을 주실 필요가 없으셨다. 모든 사람은 신구약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고 깨닫고 믿고 마음에 새기고 바라고 실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성도는 성경으로 만족한다.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문제에 관해서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일반적 의지에 근거하여 그의 뜻을 추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담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사실이 "살인하지 말라"(출 20:13)는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므로, 성도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옳다. 여성의 미니 스커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여자들은 아담한[단정한, 품위 있는] 옷을 입으라'(딤전 2:9)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미니 스커트는 성도로서의 합당한 복장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기록이다. 하나님께서는 특별계시의 더 나은 보존과 전파를 위하여 그리고 교회의 더 견고한 설립과 위로를 위하여 그것을 책에 기록케 하셨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전달함에 있어서 모든 사람이 이해할 만하게 명료하다. 이런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원어 성경은 각 나라의 쉬운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 또 성경은 건전한 해석 원리에 의해 해석되어야 한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함에 있어서 충족한 책이다. 오늘날 성도에게 이 책 외에 더 이상 다른 계시는 필요치 않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기록인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뿐이다. 이 66권의 책들을 '정경'(正經, canon)이라고 부른다. '정경'이라는 말은 성경이 성도들의 믿음과 생활의 잣대 혹은 규범이라는 뜻이다.
8-1. 구약의 정경성
성경은 언제 정경(正經, canon)으로 완성되었는가? 정통적 유대교의 전통에 의하면, 구약 39권은 최종적으로 주전 5세기경 에스라와 대공회원들에 의해 수집되고 결정되었다. 주후 1세기 경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증거하기를, 에스라의 생존시 아닥사스다 롱지마누스(B.C. 464 -424) 통치 때에 정경이 완성되었고 그 이후엔 선지적 말씀 사역이 중지되었으므로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진 책들이 없었다고 했다(Josephus, Against Apion, I. 8; William Henry Green, General Introduc- tion to the Old Testament: The Canon, pp. 37, 38). 탈무드에는, "후기의 선지자들인 학개, 스가랴, 말라기 후 성령께서는 이스라엘을 떠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Green, p. 39, no. 1). 우리는 정통 유대교의 전통을 받아들인다.
에스라 시대는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들의 사역이 끝난 후이었고, 아마도 말라기 선지자의 활동 시기이었으므로, 율법들과 선지서들과 성문서들을 다 수집하기에 적합한 때이었다. 더욱이 에스라는 '율법에 익숙한 학사[학자]'(스 7:6)요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한' 자이었으므로(스 7:10), 성경을 수집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어떤 이들은 주후 100년경 잠니아 회의에서 정경성의 문제가 토론되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구약 정경이 그 때까지 확정되지 않았다고 추측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확실한 근거를 가지지 못한다. 정경성을 의문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정경의 결정 연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구약성경 39권이 정경으로 확정된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이었는가? 정통 유대교가 구약 39권만을 정경으로 확정한 것은, 그것들만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들이라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다. 모세와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직접 하나님의 말씀들을 받았고 그 말씀들을 신실하게 전달하였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성령의 특별한 감동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모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였다'고 증거하셨다(민 12:6-8).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 미가야는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고 말하였다(왕상 22:14).
참 선지자들과 거짓 선지자들은 명백히 구분되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참선지자들이었다는 사실은 그들 당시의 경건한 자들에 의해 인정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글들이 기록되었을 때, 그것들도 신적 권위를 가진 것들로 인정되었다. 거기에는 오랜 사색과 변론이 필요치 않았다.
신약교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증거가 추가된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정통 유대교의 성경관을 그대로 받아들이셨다. 예수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실 때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으로 물리치셨다(마 4:4). 그것은, 그가 구약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규범인 신적 권위의 말씀으로 여기신 증거이다. 또 그는 '성경은 폐하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0:35). 이것은 성경, 특히 구약성경이 신적 권위의 말씀이라는 확실한 선언이시다. 또한 그가 '성경'을 단수명사(헤 그라페)로 부르심으로써 구약 39권의 책들이 한 권의, 신적 권위의 성경임을 증거하셨다.
바울 사도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증거하였다(딤후 3:16).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원어(데오프뉴스토스)는 성경 말씀이 하나님에게서 나왔음을 보이며 그것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포함한다. 베드로는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증거하였다(벧후 1:21). 그것도 구약성경의 권위에 대한 명백한 증언이다.
구약 39권 외에, 외경(外經, Apocrypha)이라고 불리우는 13권 가량의 책들이 있다. 그것들은, (1) 토비트, (2) 유딧, (3) 에스더, (4) 지혜서, (5) 집회서, (6) 바룩, (7-9) 다니엘(세 아이들의 노래, 수산나, 벨과 뱀), (10) 마카비 상, (11) 마카비 하, (12) 에스드라 1서, (13) 므낫세의 기도 등이다. 이것들은 대략 주전 300년부터 주후 100년 사이에 기록된 것들이다. 이 책들은 신 구약 중간 시대의 유대교 사상을 반영한다. 거기에는 우상숭배의 사라짐, 강한 유일신 신앙의 성장, 메시아 소망, 부활과 미래의 보상과 형벌에 대한 신념 등이 나타나 있다(F. L. Cross, ed.,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pp. 68, 69).
구약 외경들은 헬라어 70인역에 구별 없이 포함되어 있고, 제롬의 라틴어 벌게이트역에도 포함되어 있다. 로마 천주교회는 종교개혁 후 트렌트 회의에서 1546년 구약의 에스드라 1, 2서와 므낫세의 기도를 제외하고 모든 외경들을 정경에 포함시켰고, 제외된 3권은 부록으로 포함되었다. 로마 천주교회는 1870년 제1 바티칸 회의에서도 트렌트 회의의 결정을 확인하였다(Philip Schaff, Creeds of Christendom, II, pp. 81, 241). 또한, 구약 외경들은 초기 영어 흠정역(KJV)에 부록으로 포함되기도 하였다(Cross, p. 69).
그러나 개신교회는 구약 외경들을 영감된 성경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3은 진술하기를, "보통 외경(外經)이라고 불리우는 책들은 하나님의 영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성경의 정경(正經)의 한 부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에서 아무 권위도 갖지 못하며 다른 인간적 글들보다 다른 것으로 인정되거나 사용될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개신교회는 몇 가지 이유에서 구약 외경들을 정경에서 제외시킨다.
(1) 정통 유대교는 구약 외경들을 정경(正經)으로 인정치 않았다. 따라서, 히브리어 성경은 외경들을 포함하지 않는다. 주후 2세기 탈무드 책자인 바바 바드라(Baba Bathra)는 거룩한 책들의 목록에 오늘날 우리의 39권만을 포함했다. 주후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의 아피온 반박(I, 8)에서 동일한 목록을 언급하였다(Green, pp. 119, 120). 팔레스틴의 정경과 알렉산드리아의 정경이 달랐다는 주장은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Ibid., pp. 124-129).
(2)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정통 유대교의 정경을 받아들이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 있게 여기셨고 권위 있게 인용하셨다(마 4:4; 22:29; 요 5:39; 10:35). 바울 사도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맡겨졌다고 증거하였다(롬 2:1, 2). 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증거하였다(딤후 3:16). 따라서 예수님과 사도들은 구약성경으로부터 많은 구절들을 인용하셨으나, 외경들로부터는 아무 구절도 인용하지 않으셨다.
(3) 초대 교회는 구약 39권만을 영감된 성경으로 받아들였다. 주후 2세기, 사르디스의 감독 멜리토는 오늘날 우리의 구약성경 39권과 거의 같은 목록을 증거하였다. 단지 거기에 에스더서가 생략되어 있다. 같은 시대에, 옛 시리아어역은 오늘날 우리의 39권만을 가지고 있다(Ibid., p. 162). 주후 3세기, 헬라 교부 오리겐은 오늘 우리와 같은 구약 정경을 증거하였다(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VI, 25). 윌리암 그린은 말하기를, "이와 같이, 우리는 2세기와 3세기에 멜리토에게서와 옛 시리아어역에서 동방 교회의 증거들과, 오리겐에게서 헬라 교회의 증거와, 터툴리안에게서 라틴 교회의 증거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은 다 합쳐서 개신교회의 정경을 인정하고 외경을 배제한다"고 하였다(Green, p. 164). 4세기 이후에는 증거들이 더 풍부하다.
(4) 외경들은 내용상 역사적 진실성, 성경과의 조화, 도덕적 표준 등에 있어서 결함들을 가지고 있다. 토빗과 유딧은 지리적, 연대적 오류들을 가지고 있다. 그 책들은 미신을 조장하고 거짓말을 정당화하며, 구원과 죄 용서를 공로적 행위들에 의존시킨다. 솔로몬의 지혜는 유출설(流出說)과 영혼들의 선재, 선재하는 물질로부터의 세상 창조 등을 주장하는 것 같다. 에클레시아스티커스는 구제가 죄를 속한다고 말하며 노예에 대한 잔임함이나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미움을 정당화한다. 바룩에는 잘못된 역사적 진술들과 하나님께서 죽은 예레미야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말이 있다. 마카비 1서에는 역사적, 지리적 오류들이 있고, 마카비 2서에는 전설들과 우화들, 또 자살의 정당화, 죽은 자를 위한 기도들과 예물 등이 나온다(Green, pp. 195-200; 메릴 엉거, 구약 총론, 108-112쪽).
이 책들 외에 가경(假經, Pseudepigrapha) 혹은 묵시 문학(默示文學, Apocalyptic Literature)이라고 불리우는 책들도 있다. 이 책들은 대략 계시, 전설, 시, 교훈 등으로 분류된다. 계시적 책들에는 에녹서, 바룩의 계시, 모세의 승천, 이사야의 승천, 스바냐의 계시 등이 있고, 전설적 책들에는 아담의 언약, 열두 족장의 언약, 욥의 언약, 솔로몬의 언약, 노아서,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등이 있다. 시적 책들에는 솔로몬의 시 등이 있고, 교훈적 책들에는 모세의 마술서, 마카비 3서, 마카비 4서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책들은 교회 안에서 권위 있게 인정받지 못했다.
신약 성경 27권은 언제 정경으로 인정되었는가? 네 복음서들과 바울 서신들 등 신약성경의 대다수는 기록된 즉시 신적 권위를 가진 영감된 책들로 인정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책들은 전체 교회의 인정을 받는데 얼마 동안 시간이 걸렸다. 그것은, 아마도 그 책들을 직접 받지 않았던 지역들에서 그것들의 사도적 저작성 혹은 승인을 확인하는데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세기 이전에 시리아 그리스도인들의 성경으로 사용되었던 페쉬타 시리아어역은 베드로후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모든 책(22권)을 포함했다. 또한 2세기의 옛 라틴역은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3권만 생략했다.
주후 325년 유세비우스는 그의 교회사에서 정경 문제에 관계된 책들을 3부류로 나누었다: ① 보편적으로 인정된 책들(호모로구메나)--네 복음서들, 사도행전, 바울 서신들, 요한일서, 베드로전서, 요한계시록, ② 논쟁된 책들(안티레고메나)--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후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③ 거짓된 책들(노다)--바울의 행전, 베드로의 계시록, 바나바의 서신 등 많은 수의 외경 복음들, 사도행전들, 서신들, 계시록들(Euse- bius, III, 25).
그러나 주후 397년 칼타고 회의에서 서방의 모든 교회들은 신약 27권을 정경으로 수납하고 확인하였고, 주후 500년경 동방의 모든 교회들도 그러하였다.
그러면, 교회가 신약 27권을 정경으로 인정한 것은 무슨 원리에 근거해서인가? 그것은 다음 4가지 원리로 요약된다.
첫째 원리는 내용이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증거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그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히브리서 1:1, 2은 증거하기를,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했다. 아들을 통한 계시는 하나님의 특별계시 중의 특별계시이며, 그의 최종적, 절정적 계시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고(요 10:30),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4:9). 또 그는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4:35).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예언들의 성취로 오셨다. 구약의 특별계시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었다. 예수께서는 구약에 예언된 바로 그 분, 오실 그 메시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니라"는 말씀으로 시작된다(마 1:1). 이것은 예수께서 구약에 예언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다윗의 자손'이심을 뜻한다. 예수께서도 친히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고 말씀하셨고(눅 24:44), 또 성경은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5:3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구약 예언들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내용인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책으로 인정되었다.
둘째 원리는 사도성(使徒性)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사도들[12사도와 바울]은 주께로부터 말씀 전파에 대한 특별한 명령을 받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셨다(마 28:16-20).
사도들은 또한 주께로부터 성령에 대한 특별한 약속을 받았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고(요 14:26), 또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하셨다(요 16:13).
사도들은 또한 주께로부터 기적을 행하는 특별한 능력의 표를 받았다. 예수께서 12제자들을 사도로 부르시고 세우셨을 때 그는 그들에게 병고치며 귀신을 내어쫓는 능력을 주셨다(마 10:1; 막 3:13-15; 눅 6: 13). 또 사도행전 2:43은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라고 증거했다(행 5:12도 참조). 바울도,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 증거하였다(고후 12:12).
사도들이 이와 같이 독특한 직분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교회의 기초라고 불리웠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말했다(엡 2:20). '사도들의 터'라는 말은 단순히 '인간 사도들'을 가리키기보다 '그들의 교훈들의 터'를 가리킬 것이다(살후 2:15 참조).
사도들의 역할과 권위가 이러했기 때문에, 그들이 전하고 가르친 내용들과 그들이 기록한 책들은 신적 권위를 가진 책들, 신앙과 행위의 규범이 되는 책들이 되었다.
마가복음, 누가복음, 사도행전, 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는 사도들이 직접 쓰지 않았지만, 사도들의 인정을 통하여 성경으로 받아들여졌다.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는 베드로의 동역자이었다(벧전 5:13). 전해진 바에 의하면, 그는 베드로의 통역자이었다. 마가는 또한 바울의 동역자이기도 하였다(딤후 4:11).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바울의 동역자이었다(골 4:14; 딤후 4:11). 오리겐에 의하면, 마가는 베드로가 그에게 설명한 대로 복음서를 썼고, 누가복음은 바울이 추천한 복음서이었다(Eusebius, VI, 25). 그들의 책들은 베드로와 바울의 권위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확실히 알지 못하지만, 그 책은 확실히 사도적 권위 아래 받아들여졌다. 히브리서 13:23에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는 말씀은 히브리서 저자가 디모데와 가깝고 따라서 바울이거나 바울이 잘 아는 인물임을 보인다.
야고보서의 저자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것 같다(마 13: 55).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한 지도자로서 사도적 인물이었다(행 15:13; 갈 1:18, 19). 바울은 갈라디아서 2:9에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라는 표현을 하였다. 유다서의 저자 유다는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표현하였다(유 1). 그 책은 야고보의 권위로 받아들여졌다. 이와 같이, 신약성경은 사도들이 직접 썼거나 그들의 인정을 받은 책들이었다.
셋째 원리는 영감이다. 사도들의 신적 권위성은 그들의 영감성을 포함했다. 사도들은 성령의 사람들이었고 성령으로 가르치고 전파한 자들이었다. 그들의 교훈과 글들은 사람의 견해가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들이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7:40에서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견해가 단순히 인간의 생각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에서 나온 것임을 증거하였다. 또 그는 고린도전서 14:37에서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고 담대히 말했다. 또 그는 데살로니가전서 2:13에서 그가 전한 바가 '사람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임'을 언급하였고, 데살로니가후서 2:15에서는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고 성도들에게 말하였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후서 3:15, 16에서 바울의 편지들을 성경과 동등한 권위의 책으로 간주하였다: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요한 사도는 요한계시록 22:18, 19에서 그의 받은 계시의 영감성을 담대히 증거하였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주후 95년경 로마의 클레멘트는 기록하기를, "복된 바울 사도의 서신을 들고 보라.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때에 그가 무엇을 너희에게 썼는가? 그는 참으로 성령의 감동으로(프뉴마티코스) 너희에게 썼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신약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들로서 하나님의 책으로 받아들여졌다.
마지막으로, 신약 정경의 결정 원리는 보편성이다. 초대 교회들은 그 책들을 보편적으로 받아들였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비록 몇 권의 책들이 어떤 지역들에서 변론되었지만, 대부분의 책들은 일찍부터 인정을 받았고, 4세기말에 와서 서방 교회는 신약 27권을 정경으로 확인하였고 500년경 동방교회도 그러하였다. 교회의 이러한 보편적 인정은 2천년의 시대적 간격을 가진 오늘 우리들에게 무게있는 증거가 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신구약 66권의 책들은 신약 교회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되었다. 그것들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정확무오한 유일한 규칙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0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그에 의해 모든 종교상의 논쟁들이 결정되어야 하며, 그에 의해 모든 회의들의 작정들, 고대 저자들의 견해들, 사람들의 교리들, 개인의 정신들이 검토되어야 하며, 그의 선고를 우리가 신뢰해야 하는 최고의 심판자는 오직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뿐이시다."
성경 원본(原本, autographa)의 무오성(無誤性)의 교리는 성경 사본들(寫本, manuscripts)의 문제 혹은 성경 본문(本文, text)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것은 오늘날의 한 논쟁적 주제이다.
9-1. 성경 본문의 두 종류
구약성경에는 '마소라 본문'(Masoretic Text)이라는 권위 있는 히브리어 전통 본문이 있다. 또한, 주전 3세기경의 것으로 생각되는 헬라어 70인역(LXX, Septuagint)이 있고, 중세 서방교회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라틴 벌게이트역(Vulgate) 등이 있다. 라틴 벌게이트역은 주후 390-404년 제롬이 옛 라틴역(Old Latin)을 개역(改譯)한 것이다. 한편, 종교개혁자들은 전통적 사본들에 근거한 원어 성경들을 가지고 있었다.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에도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벤 카임 본문이다(1524-25년). 그것은 주로 주후 13, 14세기 사본들에 근거한다. 그것은 약 400년 동안 표준적 마소라 본문이 되었고 킹 제임스 영어 성경도 그 본문에서 번역되었다. 키텔의 히브리어 성경(Biblia Hebraica) 제1, 2판은 이 본문이다. 둘째는, 벤 아쉐르 본문이다. 그것은 주후 1008년 것이라고 보는 레닌그라드 사본(B19A 혹은 L)의 본문을 따른 것이다. 키텔의 히브리어 성경 제3판(1937년)은 이 본문을 따랐다.
신약성경에는 두 가지 종류의 본문이 있다. 첫째는, 비잔틴 사본들이라고 불리우는 다수(多數)사본들에 근거한 헬라어 전통 본문(Traditional Text)이다. 1516년 에라스무스에 의해 최초의 헬라어 성경이 출판된 이후, 로버트 스티픈스 제3판(1550년)과 제4판(1551년), 그리고 데오도르 베자 제4판(1598년) 등은 이러한 전통 본문을 반영한다. 킹 제임스 영어 신약성경(1611년)은 이 본문에 기초하였다. 스티픈스, 베자, 그리고 그 후 1633년의 엘저비어판의 본문은 본질적으로 같다. 엘저비어판 이후, 그 본문은 '공인(公認)본문'(TR=Textus Receptus, Received Text)으로 불리웠다. 그것은 몇 곳의 두드러진 차이점을 제외하고는(예를 들어, 롬 16:25-27; 요일 5:8) 대체로 비잔틴 다수 사본의 본문과 같다.
신약성경의 두번째 종류의 본문은, 소수의 고대 사본들에 기초한 비평 본문(Critical Text)이다. 1881년 영국 교회의 감독인 웨스트코트(Westcott)와 캠브리지 대학교의 홀트(Hort)는 바티칸 사본과 시내산 사본에 근거하여 신약성경 공인 본문(TR)의 개정판을 출판했다. 그들은 신약성경 공인본문을 약 5,600곳 이상 고쳤다. 웨이트 박사는, 그가 확인한 5,604곳 중 1,952곳은 생략이고, 467곳은 첨가이고, 3,185곳은 변경이었다고 증거하였다(D. A. Waite, Defending the King James Bible, p. 42). 오늘날 네슬레나 연합 성서 공회의 헬라어 신약성경은 이 본문을 반영한다. 1881년 이후의 대다수의 영어 번역들(RV, ASV, RSV, NASB, NIV)은 비평 본문에 근거하고 있다. 한글 개역 성경도 여기에 속한다.
신약성경의 고대 사본 중에 중요한 것으로는, 바티칸 사본(B), 시내산 사본(??), 체스터 베티 파피러스(P45, P46, P47), 보드머 파피러스(P66, P72, P75)가 있다. 바티칸 사본(B)은 주후 4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며, 1481년 이후 로마의 바티칸 도서관에 있다. 시내산 사본(??)은 주후 4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며, 1844년과 1859년에 티쉔돌프(Tischendorf)에 의해 시내산 성 캐더린 수도원에서 발견되었다. 체스터 베티 파피러스들(P45, P46, P47)은 주후 200년부터 3세기경의 것들로 추정되며 1933-37년에 케뇬(F. Kenyon)에 의해 편집되었다. 보드머 파피러스들(P66, P72, P75)은 주후 200년부터 3세기경의 것들로 추정된다.
특히, 신약 본문의 경우, 전통 본문과 비평 본문 중 어느 것이 성경 원본의 본문을 반영하는가?
우선, 신약의 비평 본문은 믿을 만하지 못하다. 그 이유는, 바티칸 사본과 시내산 사본과 파피러스 사본들 등 소위 고대 사본들의 본문이 많은 곳에서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다음에 인용된 주요 사본들 혹은 번역본들의 약자는 다음과 같다: Byz--비잔틴 다수 사본들(주로 9-11세기), P45, P46, P47--체스터 베티 파피러스들(주후 200-3세기), P66, P72, P75--보드머 파피러스들(주후 200-3세기), P49--(3세기), ??--시내산 사본(4세기), B--바티칸 사본(4세기), A--알렉산드리아 사본(5세기), C--에브라임 사본(5세기), D--베자 사본(5세기), K--(9세기), Vg--제롬의 라틴 벌게이트역(4-5세기), Syrc, s--시리아어역(4세기), Copsa--콥틱어역(사하릭)(3세기), Goth--고딕어역(4세기).
9-2-1. 바티칸 사본(B)과 시내산 사본(??)이 서로 다른 예들
눅 10:1, "72인"--P75, B, D, Vg
"70인"--Byz, ??, A, C
눅 14:5, "아들이나 소"--Byz, P45, P75, A, B
"나귀나 소"--??, K, Vg
눅 23:17, (생략)--P75, A, B, K
"명절을 당하면 반드시 한 사람을 놓아주더라"--Byz, ??, Vg
눅 24:51, "하늘로 올리우시니"--Byz, P75, ??c, A, B, C, Vg
(생략)--??, D
행 13:48, "하나님의 말씀"--B
"주의 말씀"--Byz, P45, ??, A, Vg
갈 6:15, "할례나 무할례"--P46, B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Byz, ??, A,
엡 3:9, "모든 사람이 알게 하려"--Byz, P46, B, C
"드러내게 하려"--??*, A
빌 4:23, "있을지어다"--B
"있을지어다. 아멘"--Byz, P46, ??, A
벧전 3:18, "고난을 받으사"--Byz, B
"죽으사"--P72, ??, A, C
9-2-2. 시내산 사본(??)과 바티칸 사본(B)이 파피러스 사본들과 다른 예들
눅 10:42, "한 가지가 필요하다"--Byz, P45, P75, A, C*, Vg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B 눅 12:31, "그의 나라"--??, B
"하나님의 나라"--Byz, P45, A, Syrc, s
"그 나라"--P75.
눅 15:21,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B, K.
(생략)--Byz, P75, A, Vg, Syrc, s
요 11:22, (생략)--??, B, P75
"그러나"--Byz, P45, P66, A
요 12:9, "그"--??, B
(생략)--Byz, P66*, P75, A
행 13:26, "우리에게"--??, A, B
"너희에게"--Byz, P45, C, Vg
행 16:32, "하나님의 말씀"--??, B
"주의 말씀"--Byz, P45, A, Vg
롬 16:25-27, (한글 본문)--??, B, C, D, Vg
15:33 후에--P46
14:23 후에--Byz
고전 3:3, "시기와 분쟁"--??, B, A, C
"시기와 분쟁과 분열들"--Byz, P46
고전 9:20,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B, A, C
(생략)--Byz, P46
고전 10:9, "주를 시험하지 말자"--??, B, C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자"--A
"그리스도를 시험하지 말자"--Byz, P46, Vg
고후 6:16,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 B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Byz, P46, C
엡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A, B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Byz, P46, ??2, D
9-2-3. 시내산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이 명확히 부정확해 보이는 예들
눅 14:5, "나귀나 소"--??, K, Vg
"아들이나 소"--Byz, P45, P75, B, A
눅 24:51, (생략)--??, D
"하늘로 올리우시니"--Byz, P75, ??c, B, A, C, Vg
요 11:2, "마리암"--B
"마리아"--Byz, P66, ??, A
행 13:48, "하나님의 말씀"--B
"주의 말씀"--Byz, P45, ??, A, Vg
고전 7:15, "너희를"--??*, A, C
"우리를"--Byz, P46, B
갈 1:11, "왜냐하면"--B
"그러나"--Byz, P46, ??*, A
9-2-4. 파피러스들 간에 서로 다른 예들
눅 12:31, "그의 나라"--??, B
"하나님의 나라"--Byz, P45, A, Syrc, s
"그 나라"--P75
요 6:69, "하나님의 거룩한 자"--P75, ??, B, C*, D
"하나님의 거룩한 그리스도"--P66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Vg, Syrs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Byz, C3vid, K
요 10:34, "아우토이스 호 예수스"--Byz, P75, ??, A
"아우토이스 예수스"--P45, B
요 10:38, "피스튜에테"--P75, B
"피스튜사테"--Byz, P45, A
요 11:32, "마리암"--P75, B, C*
"마리아"--Byz, P45, P66*, ??, A
엡 5:9, "빛의 열매"--P49, ??, B, A, D*
"성령의 열매"--Byz, P46, Dc, K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소위 고대 사본들은 상호 간의 빈번한 차이점들 때문에 그 신빙성, 정확성, 그리고 권위성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그 어느 사본도 정확무오한 원본의 본문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고 인정할 수 없다. 단순히 어떤 사본의 연대(年代)가 이르다는 사실이 그것이 원본의 본문에 가깝다고 단정할 충분한 이유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아주 초기의 사본들도 교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버려졌던, 부정확하거나 심지어 변질된 사본들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비평 본문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성경의 짧은 본문들이 원본에 가깝고 비잔틴 본문이 짧은 본문들을 수정 보완한 긴 본문들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그와 반대되는 경우들, 즉 비잔틴 본문이 고대 사본들보다 더 짧은 경우들이 빈번히 보인다. 다음에 열거된 구절들은 그 예들이다. 마 24:36; 27:49; 막 3:14; 14:14; 눅 15:21; 롬 16:16; 고전 9:20; 15:31; 엡 2:17; 살전 4:1; 빌 1:14; 약 2:2; 벧전 5:2; 요일 2:23; 유 23, 25.
더욱이, 고대 사본들에 근거하여 편집된 비평 본문은 매우 주관적이다. 네슬레나 연합성서공회의 성경 본문은 고대 사본들의 차이점들에 관하여 어떤 확실한 객관적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실, 어떤 객관적 기준을 가질 수도 없을 것이다. 소위 비평 본문은 때때로 고대 사본들의 어느 것을 택하고 다른 것을 버리며, 또 어떤 때는 고대 사본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전통 본문을 택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로마서 8:35, "그리스도의"(UBS 본문)--Byz, A, C, D; "하나님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B.
또 비평 본문은 불확정적이다. 그것은, 연합성서공회의 성경 본문이 매본문의 확실성 정도를 비평 각주에 A B C D로 표기할 때 드러난다. 비평 본문의 견해에 의하면, 많은 교회들이 성경 원본의 정확한 본문을 갖고 있지 않았고 또 지금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나 성경 원본의 본문이 보존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이 보존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그러한 결론은 받아들일 수 없다.
사본 대조의 현상황이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단호히 비평 본문의 이론을 버리고, 헬라 정교회의 전통적 사본의 본문을 고수(固守)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그러면 전통 본문의 신빙성은 어떻게 증거될 수 있는가? 신약성경의 전통 본문의 신빙성의 근거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성경 본문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 보호를 믿는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축자적으로 영감하셨고 그 본문을 훼손되거나 상실되게 내버려두시지 않고 잘 보존되게 섭리하셨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8, "옛 하나님의 백성의 모국어이었던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과, 기록 당시 여러 나라들에게 매우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었던 헬라어로 된 신약성경은 직접 하나님의 영감(靈感)을 받았으며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으므로 믿을 만하다. 따라서 종교상 모든 논쟁들에서 교회는 최종적으로 그 성경들[원어 성경]에 호소하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성경을 위탁받은 교회의 권위와 역할을 중시한다. 적어도 성경의 본문에 관한 한, 우리는 그것을 위탁받은 교회들, 특히 헬라어를 계속 사용해왔던 비잔틴 교회들 혹은 헬라 정교회들의 권위와 역할을 중시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고 말했다(롬 3:1, 2).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을 보존해 왔듯이, 비잔틴 교회는 신약성경을 보존해 왔다. 예언의 말씀을 더하거나 감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가 신약성경의 맨끝에 기록되어 있음을 생각한다면(계 22:18, 19), 성경이 경건한 성도들을 통하여 어떻게 조심스럽게 보존되어 왔을 것을 알 수 있다.
셋째로, 우리는 다수 사본들의 지지를 중시한다. 이것은 헬라 정교회의 전통적, 귄위 있는 본문을 밝히 증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5,000개 이상의 사본들 가운데 다수 사본들이 일치하게 가지는 본문을 성경의 원본의 본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소위 고대 사본들의 본문이란 흔히 소수의 사본들의 일치만을 가지며, 그것도 많은 경우 서로 간의 불일치가 없지 않고, 또한 후대사본들의 지지가 매우 적다(Kurt Aland, Text und Textwert der griechischen Handschriften des neuen Testaments, Berlin, 1991). 그러므로, 만일 소수의 고대 사본들의 본문을 정확한 원본의 본문이라고 추정한다면, 성경 원본의 본문은 4, 5세기 이후 오랫 동안 상실되었다는 말이 되는데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결론인 것이다.
잭 무어맨(Jack Moorman)은 현존하는 88개의 파피러스 단편 사본들을 연구한 결과 그 중 13개(15%)는 비평 본문에 맞고, 75개(85%)는 전통 본문에 맞다고 보고하였다(Waite, p. 54). 대문자 사본들은 267개가 있다. 그 중 오직 9개(3%)만 비평 본문에 맞고, 258개(97%)는 전통 본문에 맞는다. 소문자 사본들은 2,764개가 있다. 그 중 오직 23개(1%)만 비평 본문에 맞고, 2,741개(99%)는 전통 사본에 맞다. 성경 교독문(lectionary) 사본들이 2,143개가 있는데, 그것들은 전부(100%)가 전통 본문에 맞다. 합치면, 현존하는 신약성경 본문 사본들 5,255개 중 단지 45개(1%)만 비평 본문에 맞고 나머지 5,210개는 전통 본문에 맞다(Waite, pp. 54-57).
넷째로, 전통 본문의 고대적 증거들이 없지 않다. 전통 사본들이 주로 9-11세기의 후대 사본들이지만, 그들의 본문이 반드시 후대의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고, 빈번히 고대의 사본들이나 역본들, 혹은 교부들의 인용문들에서 확증된다. 예를 들어, 파피러스들(3세기)이 시내산 사본(??, 4세기)이나 바티칸 사본(B, 4세기)과 다르고 비잔틴 사본들과 일치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는 것이다:
막 16:9-20, (생략)--??, B, Syrs, Copsa ms
본문--Byz, A, C, D, Vg, Syrc, Copsa, Goth
눅 10:42, "그러나 한 가지가 필요하다"--Byz, P45, P75, A, Vg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B
눅 12:31, "그의 나라"--??, B
"하나님의 나라"--Byz, P45, A, Syrc, s
"그 나라"--P75
눅 15:21, (생략)--Byz, P75, A, Vg, Syrc, s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B, K
요 12:9, "그"--??, B
(생략)--Byz, P66*, P75, A
행 13:26, "우리에게"--??, A, B
"너희에게"--Byz, P45, C, Vg
행 16:32, "주의 말씀"--Byz, P45, A, Vg
"하나님의 말씀"--??, B
고전 3:3, "시기와 분쟁"--??, B, A, C
"시기와 분쟁과 분열들"--Byz, P46
고전 9:20,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B, A, C
(생략)--Byz, P46
고전 10:9, "주를 시험하지 말자"--??, B, C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자"--A
"그리스도를 시험하지 말자"--Byz, P46, Vg
고후 6:16,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 B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Byz, P46, C
엡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A, B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Byz, P46, ??2, D
엡 5:9, "빛의 열매"--P49, ??, B, A, D*
"성령의 열매"--Byz, P46, Dc, K
뿐만 아니라, 초대 교부들의 성경 인용문들에서 전통 본문은 풍성하게 증거된다. 전통 본문의 옹호를 위해 가장 크게 활약했던 존 버건(John W. Burgon, 1813-88)의 책들을 그의 사후에 편집했던 에드워드 밀러(Edward Miller)는 몇 가지 점들을 보고하였다. 첫째, 주후 400년 이전에 죽은 교부들의 글들에서 신약성경의 전통 본문 인용문들이 있었다. 둘째, 전통 본문 인용문들은 비평 본문 인용문들보다 다수이었다. 셋째, 전통 본문 인용들은 3대 2의 비율이었다. 주후 400년 이전에 죽은 76명의 교부들의 4,383개의 인용문들 가운데서, 전통 본문으로부터의 인용문들은 2,630개(60%)이었고, 비평 본문으로부터의 인용문들은 단지 1,753개(40%)이었다. 이것은 전통 본문이 후대의 본문이 아니며 매우 고대적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Waite, pp. 58, 59).
9-4. 킹제임스(KJV) 영어 성경이 무오(無誤)한가?
오늘날 어떤 이들은 킹제임스(KJV) 영어 성경만이 무오(無誤)한 성경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1885년 나타난 신구약 개역판과 그 이후의 대부분의 영어 번역 성경들, 그리고 한글 개역 성경을 이단적 번역이라고 비평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독단적인 잘못된 주장이며 과격한 정죄라고 생각된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결코 무오한 사본에서 번역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의 최선의 사본들에서 가장 잘 번역된 성경에 불과하다. 당시에 갖고 있었던 헬라어 신약 사본들은 제한되어 있었다. 오늘날까지 원본의 본문을 무오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인정된 사본은 없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들에게 무오한 사본을 주지 않으신 것 같다. 비잔틴 다수 사본들 간에도 약간의 차이점들이 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믿음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잘못된 믿음이다.
신약성경의 전통 본문이나 비평 본문은 전체적으로 둘 다 성경의 기본 교리들을 부정하거나 그것들에 충돌하지 않는다고 본다. 비록 그것들 상호간의 차이점들이 어떤 부분들에서는 크지만, 전체적으로 그것들은 교리적으로 치명적 결함은 없다. 한글 개역성경에 근거한 성경 교리들의 체계가 킹제임스 성경에 근거한 체계와 다를 바 없다. 하나님께서는 두 종류의 성경 본문이 내용적으로 전혀 다른 교리적, 윤리적 교훈을 하도록 허용하지 않으셨다. 그는 전통 본문이나 비평 본문이나 어느 것이든지 죄인들의 구원과 성도들의 성화를 위해 사용하셨고 지금도 사용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한 종류의 것을 이단적이라고 비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 동안 사용하여 많은 구원과 은혜의 역사를 하신 사실을 부정하거나 과소평가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신약성경의 전통 본문은 다시 회복되어야 하지만, 이제까지 귀히 사용된 한글 개역성경에 대한 과격한 비난과 정죄는 용납될 수 없다. 건전한 태도는, 한글 개역성경을 존중하면서, 조심스럽게 성경의 바른 본문을 확인하고 확증하는 것이라고 본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신약성경에 있어서 몇몇 고대 사본들에 근거한 소위 비평 본문을 원본의 본문을 반영한 정당한 본문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소수의 고대 사본들은 그들 서로 간에도 불일치가 많다. 또한, 그것들이 불일치하는 경우에, 그 성경 본문은 어떤 객관적인 판단기준이 없이 매우 주관적인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인다. 따라서 오늘날 고대 사본들에 근거한 신약의 비평 본문은 매우 주관적이고 불확실하고 불확정적이다. 비평 본문 이론에 의하면, 성경 원본의 본문은 후대 교회에 보존되고 전달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불확실한 생각을 버리고 전통 본문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그 이유는, 첫째로, 하나님의 섭리적 보호를 믿기 때문이며, 둘째로, 교회의 권위와 역할을 생각하기 때문이고, 셋째는, 강력한 다수 사본들의 증거를 중시하기 때문이며, 넷째로, 전통 본문의 고대적 증거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본문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전통적 다수 사본들의 본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성경의 신적 권위의 원천은 하나님 자신이다. 성경의 신적 권위는 하나님 자신께로부터 나온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계시들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신적 권위는 전적으로 그 내용들의 참된 저자이신 하나님께 의존하며 그에게로부터 나온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적절히 진술하기를, "그것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믿고 복종해야 하는 바 성경의 권위는 어느 사람이나 교회의 증거에 의존하지 않고 그것의 저자이시며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1:4).
10-1. 역사적 권위
성경의 신적 권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된다. 첫째는 역사적 권위이다. 그것은 성경이 역사적으로 진실하고 믿을 만함을 의미한다. 성경의 역사적 권위, 곧 그것의 신빙성은 다음과 같이 확증된다.
첫째로, 진실은 하나님의 세계의 덕이며, 거짓은 마귀의 세계의 특성이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마귀는 "처음부터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증거하셨다(요 8:44). 영생과 영벌의 엄숙한 구원 진리를 증거하고 기록함에 있어서 진실이 없다면, 이 땅의 어디에서 진실을 찾을 것인가? 만일 성경이 진실하고 믿을 만한 증거의 말씀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책이 아니고 마귀의 책일 것이며, 거룩한 책이 아니고 심히 악한 책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마귀의 책일 수 없음은, 그것이 마귀의 영원한 지옥형벌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마 25:41; 계 20:10).
둘째로, 하나님께서 모든 종류의 거짓을 정죄하시며, 거짓 증인을 미워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제9계명에서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고 명령하셨다(출 20:16). 잠언 6:16-19은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6, 7가지니 곧 . . . 거짓된 혀와 . . .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거짓] 증인과"라고 말씀했다. 성경 마지막 부분에도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 . .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선언되어 있다(계 21:8).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는 구약의 사건들을 언급하심으로 그 역사적 진실성과 신빙성을 증거하셨다. 그는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음을 언급하셨고(막 10:6), 노아의 때와 롯의 때를 언급하셨고(눅 17:26-29), 모세 시대에 하늘에서 내린 떡, 만나에 대해 말씀하셨고(요 6:32),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의 일들을 증거하셨고(눅 4:25- 27),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을 증거하셨다(마 12:39, 40).
넷째로, 성경의 인간 저자들, 특히 신약의 저자들은 '증인들'로 불리웠다. 요한복음 21: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사도들은 자신들을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고 자처하였다(행 10:39). 구약성경에도 '증인'이나 '증거'라는 말이 69회나 나오지만, 신약성경에 '증인'이라는 말이 34회, '증거'라는 말이 57회, 그리고 '증거하다'는 말이 82회나 사용되었다. 제자들은 복음을 위해 핍박을 받았고, 스데반이나 야고보처럼 마침내 순교의 피로 그들의 증거를 확증했다. 순교의 피는 성경의 진실성의 가장 힘있는 증거이다.
둘째로, 성경의 신적 권위는 규범적 권위를 가리킨다. 이것이 보다 중요한 부분이다. 성경의 규범적 권위란, 성경이 우리의 믿음과 생활에 대한 신적, 절대적 규범이 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앞에서 생각한 성경의 정경성의 의미이다.
성경의 규범적 권위는 모든 참된 교회들의 기본적, 공통적 신앙이다. 종교개혁의 세 전통인 루터교회, 영국교회, 개혁교회는 성경만이 최고의, 유일의, 최종의 신적 권위를 가짐을 확고히 믿고 강조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2은 진술하기를, "성경 즉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명칭 아래 현재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모든 책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 . . 이 모든 책들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믿음과 생활의 규칙이다"고 하였다. 심지어, 전통과 교황의 신적 권위를 동등하게 아니 실상 더 중요하게 믿는, 로마 천주교회까지도 형식적으로는 성경의 규범적 권위를 믿는다고 말한다.
성경의 규범적 권위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성경자체이다. 이것을 '성경의 자증(自證, autopistos)'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성경의 신적 권위가 교회나 전통 등의 외적 증거를 필요치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순환적 논법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증거가 하나님 자신에 의해 가장 완전하게 제시되듯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증거는 성경 자체에 의해 가장 완전하게 제시된다.
성경의 규범적 권위에 대한 성경 자체의 증거들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5은 다음과 같은 요점으로 서술하였다.
첫째로, 성경의 내용은 천적(天的)이다. 성경은 단순히 땅의 일들이나 사람의 일들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주로 하나님의 특별계시들, 곧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시고 말씀하시고 기적을 행하신 일들에 관하여 증거하고 기록한 것이다.
둘째로, 성경의 교훈은 효력이 있다. 성경의 교리적, 윤리적 교훈들은 죄인들을 구원하고 성도들을 새롭게 하는데 효력이 있고 적응성이 있다. 오늘도 죄인들은 이 말씀을 통하여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거룩한 삶을 산다.
셋째로, 성경의 문체는 장엄하다. 성경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가라사대" 등의 말씀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성경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한다. 그 누구도 감히 이런 표현으로 인간의 사상을 전달할 수 없다.
넷째로, 성경의 모든 교훈들은 서로 일치한다. 성경은, 1500여년간 30여명의 인간 저자들에 의해 저술되었지만, 전체적으로 일치된 교훈을 증거한다.
다섯째로, 성경 전체의 가장 고상한 목표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실 그대로를 증거하고 어떤 인간을 미화(美化)시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성경은, 경건한 왕 다윗의 악하고 부끄러운 간음과 살인의 죄를 그대로 기록하였고(삼하 11장), 주의 귀한 종 바울 사도가 주를 알기 전에 행했던 교회 핍박의 일을 세 번이나 자세히 기록하였다. 성경은 인간을 높이는 인간적 책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는 하나님의 책이다.
여섯째로, 성경은 사람들의 구원의 유일한 길을 충족하게 증거하고 있다. 성경은 인간의 근본문제인 죄의 문제와,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길에 대하여 명확하고 풍성하게 증거하고 있다. 성경 외에 참 구원의 길을 증거하는 책은 없다. 죄인들은 이 책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넉넉히 발견할 수 있다.
일곱째로, 성경은 그 외에도 많은 비교할 수 없는 뛰어난 점들을 가지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완전하다. 성경은 윤리적으로 탁월하다. 또 성경은 기적들과 예언들의 성취를 통하여 그 신적 권위가 증거되었다. 성경은 율법, 역사, 예언, 시, 교리, 윤리, 종말 예언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완전하여 교리나 윤리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계시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성령께서 우리 속에 주시는 내면적 증거를 통해 온다. 성령께서 우리의 어두운 마음을 밝히시고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실 때, 우리는 성경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케 된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증거하였다(고전 2:12). 요한 사도도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라고 말했다(요일 2:27).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5은 적절히 진술하기를, ". . . 그것[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완전한 납득과 확신은 우리 마음 속에 그 말씀으로 그리고 그 말씀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면적 활동으로부터 온다"고 하였다.
물론, 규범적 권위는 성경의 모든 내용에 다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성경의 역사적 내용들의 경우, 규범적 권위는 그것들에 내재한 원리들에만 적용될 수 있다. 또한 구약의 율법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율법 중 도덕법은 그 성격상 영속적이지만,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으로 오늘날에는 폐지되었다. 또 재판법들도 세속 국가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여기에 건전한 성경 해석과 적용이 필요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이다. 영감(靈感, inspiration)이란, 성경 저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내용들을 잘 이해하고 오류 없이 기록하게 하신 성령의 독특한 감동과 간섭을 가리킨다. 이것은 성경 저자들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을 받을 때보다 그것들을 기록할 때에 받았던 성령의 감동을 말한다.
11-1. 성경적 증거들
성경의 영감에 대한 증거들은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의 성경 기록의 명령과 섭리가 성경의 영감을 전제(前提)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그의 특별계시들을 책에 기록하라고 명령하셨다. 출애굽기 34:27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고 증거하였다. 예레미야 30:2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네게 이른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라"고 증거하였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성경을 기록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하게 기록되도록 성령으로 감동하시고 도우실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을 실수투성이의 인간에게 내버려두셨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을 주셔서 깨닫게 하실 때 성령의 비상한 감동이 있었듯이, 그 내용들을 기록하게 하실 때도 당연히 그러하였을 것이다.
둘째로, 앞에서 이미 고찰한 성경의 정경성과 신적 권위는 성경의 영감을 내포한다. 성경이 성령의 특별한 감동과 간섭으로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을 정확히, 오류 없이 기록한 책이 아니라면, 그것은 정경성과 신적 권위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믿음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범인 사실 자체가 그 책의 영감성을 내포하며 증거한다. 성경이 영감된 책이 아닐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신앙과 생활에 규범이 되는 신적 권위를 가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요 10:35)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성경이 인간적 작품이 아니고 하나님의 특별한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한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4:37에서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고 말했고, 데살로니가후서 2:15에서는 "우리의 말로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들을 지키라"고 했다. 그것은 그의 서신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임을 암시한다. 또한 요한 사도가 쓴 요한계시록 22:18, 19에는 이 예언의 말씀을 가감치 말라는 엄숙한 경고가 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과 도우심 가운데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정확무오하게 기록하였음을 전제한다.
셋째로, 성경의 영감에 대한 성경 자체의 직접적인 언급들이 있다. 성경의 영감성에 관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증거하셨다. 마태복음 22:43에 보면, 예수께서는 시편 110:18을 인용하시면서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가 시편의 영감성을 증거하신 것이다. 영감된 성경이 어찌 시편뿐이겠는가? 이것은 성경에서 시편까지도 영감되었다는 증거이며 곧 성경 전체의 영감의 증거이다.
또한 사도들도 성경의 영감성을 밝히 증거하였다. 사도행전 1:16에 보면, 베드로 사도는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라고 말하면서 시편 69:25과 시편 109:8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시편의 영감성은 성경 전체의 영감성을 증거한다. 또 사도행전 4:25에 보면, 사도들은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라고 말함으로써 성경의 영감을 다시 증거하였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후서 3:16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증거하였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이라는 원어(데오프뉴스토스)는 '하나님께서 숨을 내쉬신'(God-breathed)이라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성경의 영감성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또한 성경 내용의 신적 기원과 신적 권위를 보인다. 베드로 사도는 또한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증거하였다(벧후 1:20, 21).
히브리서 3:7도 시편 95:7-11을 인용하면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라고 증거하였다. 바울 사도는 또한 고린도전서를 쓰면서 고린도전서 7:40에서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쓰고 있는 서신의 교훈이 성령의 영감 가운데 있음을 증거하였다.
성경의 영감은 축자적(逐字的, verbal) 영감이다. 축자적(逐字的)이라는 말은 '글자의'라는 뜻이다. 축자적 영감이란, 성경의 영감이 성경의 모든 부분들, 심지어 글자들에까지 미쳤다는 뜻이다. 성경이 스스로 증거하는 영감 개념은 축자적 영감이다.
예수께서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마 5:18). '일점일획'이라는 말은 성경의 지극히 작은 부분을 가리킨다. 이 표현은 히브리어의 요드(??), 와우(??), 레쉬(??) 같은 작은 글자를 생각나게 한다. 비록 이 말씀이 과장적 표현이라 할지라도, 주께서 하신 말씀의 뜻은 분명히 성경의 지극히 작은 부분도 하나님의 섭리와 영감 가운데 주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2:43-45에서,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라고 말씀하셨고, 요한복음 10:34, 35에서,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두 구절들은 성경 말씀의 한 단어도 중요함을 보인다. 즉 성경 영감이 한 단어에까지 미침을 보이는 것이다.
바울 사도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말했다. '모든 성경'은 성경의 모든 책들과 각 책의 모든 부분들을 다 포함한다. 성경에서 영감되지 않은 부분은 없다.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 또한,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3:16에서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라고 말했다. 이 구절은, 성경에 사용된 단어가 복수명사냐 단수명사냐 하는 문제까지도 중요함을 보인다. 이것은 성경의 영감이 글자에까지 미침을 증거한다.
이와 같이, 성경의 영감은 완전하고 축자적이다. 성경의 모든 책들이 영감되었다. 구약 39권 전부와 신약 27권 전부가 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 성경의 어느 책도 제외시킬 수 없다. 구약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이 한 번도 안나오는 에스더나, 겉으로 보기에 남녀 간의 사랑의 노래인 아가서, 또한 신약에서 은혜의 복음 진리와 충돌되는 듯이 표현된 야고보서나, 매우 개인적 편지같이 보이는 빌레몬 등도 다 영감되었다.
또한 성경의 각 책의 모든 내용들이 영감되었다. 성경의 교리적, 윤리적 내용 뿐만 아니라, 역사적, 지리적, 혹은 과학적 사실들까지도 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으며, 참되고 확실하다. 또, 단지 성경의 각 책의 주요 내용들 곧 사상들만 영감된 것이 아니라, 또한 그것의 단어들까지도 영감되었다. 사상들은 단어들을 통해 표현되고 전달되기 때문에, 성경 영감은 글자 영감이어야 한다. 단어들의 오류는 성경 내용 곧 그 사상의 오류를 가져오고 말 것이다. 성경에서 글자들의 오류를 허용하는 것은 결국 성경의 신적 권위성을 파괴하고 말 것이다.
성경의 영감은 또한 유기적(有機的, organic) 영감이다. 유기적 영감이란, 하나님께서 성경 저자들을 사용하실 때 단순히 받아쓰는 기계들이나 도구들로가 아니고 인격체들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기록한 성경들은 그들의 독특한 문체, 성격, 타고난 재능, 교육 정도 등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기록한 내용들은 하나님의 생각을 반영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권위로 인쳐진 것이었다. 성경의 축자적 영감은 자유주의자들의 잘못된 비난처럼 구수(口授, 받아쓰기, dictation) 혹은 기계적 영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여러 면에서 그것의 유기적 영감을 스스로 증거한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말과 지식에 능한 모세를 사용하여 처음 다섯 권의 책('모세오경')을 기록하게 하셨고, 시적 재능과 지혜를 가진 다윗과 솔로몬을 사용하여 시편, 잠언, 아가 등을 기록하게 하셨다. 구약의 성문서들(율법과 선지서들 외의 책들)은 인간 저자들의 참된 시들이요 기도들이요 찬양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성경 기록자들은 때때로 다른 기록물들을 하나님의 진리를 확증하는 보조 자료들로 참조 혹은 인용하였다. 예를 들어, 민수기 21:14에는 '여호와의 전쟁기'라는 기록물이 언급되며 거기에서 한 구절이 인용되었다. 또 민수기 21:27-30에는 시인들이 읊은 시의 내용이 인용되었다. 역대상 4장에는, 족보들이 언급된 후에 "이는 다 옛 기록에 의지한 것이라"고 언급되어 있다(4:22).
어떤 이들은, 모세오경과 이방 법전들의 내용의 유사성을 모세가 이방 법전들을 참고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으나, 그것은 성경의 신적 권위성과 영감성에 충돌하는 생각이라고 본다. 모세의 법들과 이방 법들의 유사성은, 아마도 모세 시대 이전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 공통적 법들에 기인할 것이다.
신약성경의 경우에도 누가가 쓴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은 그의 의학적 지식과 의사다운 세심한 성격을 반영한다. 또한 누가는 누가복음 초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하여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살폈다"고 증거했는데(눅 1:3), 그것도 유기적 영감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바울을 사용하여 많은 서신들을 쓰게 하셨는데, 그가 지식과 논리적 재능을 가진 자라는 것은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같은 그의 서신들에서 잘 증거된다. 빌레몬서에서 가장 잘 나타나듯이, 그의 서신들이 실제의 편지들이었다는 사실도 유기적 영감의 한 증거이다.
어떤 이는, 성경 영감의 증거가 순환논법 즉 성경의 영감을 성경 자체에 의해 증거하려는 논법이라고 반론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 가장 잘, 가장 확실하게 증거되며, 이와 같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기록인 성경도 그 자체에 의해서 가장 잘, 가장 확실하게 증거된다.
또 어떤 이는, 성경 영감이 성경 원본에만 적용되고 사본들에는 부정확함이나 오류들이 있으므로 실제로 무가치하다고 반론한다. 그러나 성경 원본(autographa)의 영감은 성경의 신빙성과 직접 관계된다. 원본이 영감되었다면 사본들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기본적으로 믿을 만하지만, 원본이 영감되지 않았다면 성경의 신빙성은 확립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성경 사본들 간의 차이점이란 실제로 매우 작으며, 특히 전통적 다수 사본들에 근거하면 원본의 본문은 거의 확정된다.
성경 무오(無誤, inerrancy)의 교리는 성경적 기독교와 자유주의 이단을 구별하는 기본적 잣대가 되는 매우 중요한 교리이다. 성경에 오류들이 많이 있다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생각은 기독교의 근본을 파괴하는 이단 사상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은 성경이 정확무오한 진리임을 믿는 것이다.
우선, 성경의 무오(無誤)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로, 성경의 무오는 성경 원본(原本, autographa)의 무오를 의미한다. 성경의 사본들이나 역본(譯本)들에는 상이점들이 있고, 또 어떤 것들에는 오류들이 있다고 인정되지만, 성경의 원본은 무오하고 그 본문(text)은 하나님의 섭리로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우리는 믿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8, "옛 하나님의 백성의 모국어였던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과, 기록 당시 여러 나라들에게 매우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었던 헬라어로 된 신약성경은 직접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으며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으므로 믿을 만하다. 따라서 종교상 모든 논쟁들에서 교회는 최종적으로 그 성경들에 호소하는 것이다."
물론, 성경의 사본들이나 역본들 중에서 원본의 본문에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 없어 보이지만, 사본들과 역본들의 비교 연구(본문비평학)를 통해 원본의 본문이 대부분 확인될 수 있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사본들이나 역본들 간의 차이점들 혹은 오류들이란 매우 작은 것이어서, 그것들이 성경의 교리 체계나 윤리 체계에 어떤 중대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둘째로, 성경의 무오는 성경의 모든 역사적, 교리적, 윤리적 진술들의 무오를 의미한다. 성경의 역사적 사실들은 성경계시의 기본적 내용이므로, 만일 그것들의 정확성과 신빙성이 부정된다면, 그것들에 근거한 성경 교리들도 파괴되고 말 것이다. 성경의 역사는 무오하다. 또한, 성경이 계시하는 교리들과 윤리들은 무오하다. 바울 사도는 '나는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는다'고 증거하였다(행 24:14). 또 그는 "형제들아 굳게 서서 우리의 말로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들[전해 들은 내용들]을 지키라"고 말했다(살후 2:15).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다 믿고 다 지켜야 한다. 성경의 오류를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세째로, 성경의 무오는 성경에 오류처럼 보이는 난해구절들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성경에는 성경의 다른 부분들과 외형적으로 불일치하는 구절들(discrepancies)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것들은 성경의 난제(難題)들이고 오류들은 아니다. 오류(誤謬)는 단순히 오류처럼 보이는 것들이 아니고, 명확히 잘못이라고 확인되고 증명된 것이어야 한다. 성경의 모든 난제들은 어떤 가능한 설명들이 있는 것들이다. 성경에는 증명된 오류란 하나도 없다. 오류와 난제는 다르다.
성경 무오의 첫번째 증거는 성경의 신적 권위이다. 앞에서 살핀 대로, 성경은 신적 권위를 가진 책이다. 예수께서는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라고 선언하셨다(요 10:35). 바울 사도도 "굳게 서서 우리의 말로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고 말했다(살후 2:15). 요한 사도도 요한계시록 맨 마지막에서 성령의 감동 중에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는 엄숙한 선언을 하였다(계 22:18, 19).
성경의 이러한 신적 권위는 성경의 무오를 증거한다. 만일 성경이 무오하지 않다면, 그것은 신적 권위를 가질 수 없다. 오류 있는 책은 결코 신적 권위를 가질 수 없다. 비록 성경의 아무리 작은 한 부분의 오류를 말한다 할지라도, 일단 성경의 오류를 말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성경 전체에 영향을 미치며, 성경의 신적 권위는 여지 없이 파괴되고 만다. 사실 이것이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해온 바로 그 일이다. 성경의 오류를 말하며 출발한 자유주의 신학은 단순히 성경의 지엽적 사실들을 파괴한 것이 아니고, 성경의 근본적인 사실들과 교리들을 부정하였다.
성경 무오의 두번째 증거는 성경의 축자적(逐字的) 영감 진리이다. 앞에서 살핀 대로, 성경은 축자적 영감의 책이다. 예수께서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마 5:18). 바울 사도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증거했다(딤후 3:16). 또 그는 갈라디아서 3:16에서 성경의 영감이 한 단어에 미치고, 그것도 그 단어가 복수명사인가, 단수명사인가에 관계된다고 증거하였다.
성경의 이러한 축자적 영감은 성경의 무오를 증거한다. 만일 성경의 영감이 성경의 모든 책에, 각 책의 모든 부분들에, 그리고 심지어 단어와 글자에까지 미치는 것이 사실이라면, 성경에서 오류의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되고 만다. 하나님의 축자적 영감과 배려가 있는 곳에 어찌 인간의 어떤 오류가 허용될 수 있겠는가? 성경 영감은 곧 성경 무오를 내포한다. 촬스 핫지는 말하기를, "교회의 공통적 교리는 영감이란 어떤 선택된 자들을 하나님의 마음과 뜻의 무오한 전달을 위한 하나님의 기구들로 만든 성령의 감화라는 것이다"고 하였다(Systematic Theology, I, 154).
성경 무오의 세번째 증거는 성경의 독특한 목적이다. 성경의 목적은 한마디로 죄인의 구원이다. 그 구원은 예수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는 칭의(稱義)와, 거룩하게 되는 성화(聖化)를 포함한다. 구원은 진리와 비진리, 의와 불의, 생명과 죽음,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일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하고 중대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목적을 위해 성경을 주셨다.
시편 19:7, 8은 증거하기를,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고 하였다. 여기에 성경의 속성들과 목적들이 증거되어 있다. 또한 디모데후서 3:15-17은, 성경이 죄인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며,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증거했다.
성경의 이러한 독특한 목적은 성경의 무오를 요청한다. 만일 성경이 이러한 목적을 위해 주어졌다면, 그것의 교리적, 윤리적 교훈들은 무오해야 한다. 만일 성경에 오류가 있다면, 성경의 독특한 목적은 실패하고 말 것이다. 워필드는 적절히 말하기를, "계시는, 만일 그것이 무오하게 전달되지 않는다면 반(半)계시뿐이요, 또 만일 그것이 무오하게 기록되지 않는다면 반(半)전달뿐이다"고 했다(B. B. Warfield, Inspiration and Authority of the Bible, pp. 441, 442).
덧붙여 말할 수 있는 것은, 성경 무오의 교리는 성경적 교리일 뿐만 아니라, 또한 교회의 역사적 교리이다. 주후 1세기에 로마의 클레멘트는 기록하기를, "여러분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성경을 자세히 상고하였다. 거기에 아무 불의하거나 거짓된 것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안다"고 하였다(The Epistle of S. Clement to the Corinthi- ans, 45). 초대교회의 어거스틴은 제롬에게 쓴 편지에서 "나는 [성경]의 저자들의 아무도 어떤 점에서나 기록상 잘못을 범하지 않았다고 아주 확고히 믿습니다"고 썼다(Letters, 82).
종교개혁시대의 루터와 칼빈도 성경의 신적 권위와 무오를 믿었다. 개혁교회의 표준적 신조인 17세기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진술하기를, "[성경의] 모든 책들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믿음과 생활의 규칙이다"고 하였고(1:2), 또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완전한 납득과 확신은 우리 마음 속에 그 말씀으로 그리고 그 말씀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면적 활동으로부터 온다"고 하였다(1:5).
그러면, 성경에 실제적으로 오류가 있는가?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에 자연 현상에 대한 어떤 서술들을 과학적 오류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욥기 37:18에 '부은 거울 같은 견고한 궁창'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들은 이런 것을 오류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은 과학적 서술이 아니고 통속적 혹은 시적 서술로 볼 수 있으므로 오류라고 할 수 없다.
자유주의자들은 또한 성경에 많은 역사적 오류들이 있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그것들 중의 대다수가 고고학적 발견들로 반증(反證)되고 오히려 성경의 역사성이 증거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매우 제한된 역사 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비판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어떤 이들은 또한 주장하기를, 성경에 기록된 야곱의 일부다처의 생애, 노예 제도,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함, 시편의 저주시들 등을 도덕적 오류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옛 시대의 도덕적 정도를 보고 임시로 허용하신 것과 그가 도덕적 선으로 인정하신 것과는 서로 다르다. 또 인간의 개인적 보복과 하나님의 공의의 선언과 시행은 다르다.
또한 어떤 이들은 신약 저자들이 구약을 자유롭게 인용하거나 해석한 것을 오류라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인용과 해석이 원문의 참된 의미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오류라고 볼 수 없다.
어떤 이들은 성경의 역사적 보도들의 불일치들을 오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것들이 전체적 서술과 부분적 서술의 차이, 자세한 서술과 간략한 서술의 차이, 혹은 강조점들의 차이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그것들은 오류라고 볼 수 없다.
(Stewart Custer, Does Inspiration Demand Inerrancy?, pp. 93-114; 박윤선, 공관복음 (상), 293-300쪽; 요한계시록, 417-424쪽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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