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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서영감설

하나님아들 2012. 7. 25. 15:51

 

 

성서영감설 


성서의 영감에 대하여 Inspirationslehre, Theopneustie.

 

 

 

박영식

 

 

 

 

 

1. 출처: Werner Elert, Der Christliche Glaube, Furche Verlag, Hamburg 1960.


성서의 권위는 교회의 도그마를 통해 확정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신약성서 내에서부터, 그리고 교회의 삶 속에서 그 권위를 인정받아 왔다(169-170).

 


16세기에 칼빈의 영향 아래 성서의 권위를 영감설 Inspirationslehre를 통해 형식적으로 정초시키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물론 영감설은 이미 아타나시우스나 크리소스톰 같은 이들이 주장해 왔었다(170).

 


영감설이 교리화 되면서 파생되는 문제는 성서의 권위 Schriftautoritat나, 성서의 내용보다는 영감설이라는 말에 더 의존하는데에 있다.

 


성서의 영감에 대해: Wilhelm Baier (Comp.V.Ed., 1704, 73): 하나님께서 기술되어야만 하는 모든 것을 대상에 적합하게 작성하도록, 뿐만 아니라 단어와 표현까지도 그대로 옮기도록 초자연적 방법을 통해 저자들의 지성과 쓰는 행위의 의지를 자극한 행위이다(170).

 


☞ 엘러트의 해석: Drei Momente: suggestio rerum, suggestio verborum, impulsus ad schribendum


19세기 도그마틱에서의 분류: Real-, Verbal-, PersonalInspiration


- 성서의 권위 문제보다는 기록된 문서에서 일어난 역사적 과정hist. Vorgang이 중시됨(170)

 


소위 축자영감설: 성서기자는 낱말의 형성에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 그것은 신성모독의 영역이다. Theopneustie als Diktat des Hl.Geistes - Calvin, Tridentum und danach Quenstedt (171)


☞ Calvin, Inst. IV, 8, 8f.; Trid., Sess. IV, Decr. de can.script.; Quenstedt, Syst. I, 67f.


☞ 엘러트의 해석: mechanische Auffassung이며, 성서의 언설에 대한 폭력이다.

 


영향: 축자 영감으로 인해 신앙과 계시에 대한 도그마틱의 서술 방식도 규정되었다.


성서는 res revelatae(계시된 사실)이며, 신학의 중심으로 자리.


신학의 과제는 이 res를 신학의 각 조항의 시스템으로 확장해 나가는 것.


Quenstedt: fides est una copulativa (신앙은 하나로 함께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신앙의 각 조항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 조직적 서술이 요구될 뿐 아니라, 하나를 부인하면 모두를 부인하는 셈이 되어 버렸다(171).

 


☞ 엘러트의 영감설 비판: 신앙의 결단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다음 그의 사도들에 놓여 있는 것이지, 영감된 성서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결단을 초대교회는 성서의 영감에 의존해서 촉구하기보다는 그들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은 증거(Augen- und Ohrenzeugenschaft)를 통해서 했다. 성서는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듣고 본대로 그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결단을 위해 필수적이다(172).


성서는 이전처럼 입으로 전해지는 선포로서 우리를 신앙의 결단 앞에 세도록 하는 수단(Mittel)일 뿐, 실제토대(Realgrund)는 아니다 (173).

 


2. 출처: Heinrich Ott, Klaus Otte, Die Antwort des Glaubens, W. Kohlhammer 1999.

 


- 성서의 권위에 도달하려는 세 가지 가능성(41-42).

 


① 모든 개별 문장은 하나도 예외없이 진리를 말하고 있으므로 이 사실을 알고 인정하는 기독교인들에게 구속력이 있다.(축자 영감설)


② 특정 부분만 진리와 관련되어 있고 권위가 있으며 나머지는 인간적 문서이다.(부분 영감설)


③ 두 입장의 종합으로 시간적으로 제약된 것과 궁극적인 것(Zeitbedingtes und Letztgultiges)은 서로를 관통하여 성서 정경의 전체 영역에 미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은 동시적으로 서로 얽혀 있다. 그러므로 전체성서는 순수히 역사적이다. 즉 그 시대의 인간적 문서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역사적 문서에서 우리는 갑자기 궁극적 요구, 즉 하나님의 요구로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그런 요구를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 인간적 문서에서 신적인 요구와 신적인 진리를 발견하고 경험하기 위해 어떻게 이 책을 해석해야만 하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여기서는 해석학의 문제가 중요하다.

 


3. 출처: Bernhard Lohse, Epochen der Dogmengeschichte, Kreuz-Verlag 1969.

 


성서 영감설의 발전 (220): 영감에 대한 언급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신약성서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다.(예, 디모데후서 3:16, 베드로후서 1:12) 무엇보다도 영감설은 헬라유대교가 이미 알고 있었으며, 고대 교회도 이 영감설에 스스로를 관련시킬 수 있었다.


- 오리겐에 의하면, 영감설은 저자의 자의식을 소멸해 버리는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특별한 비추임을 통해 일어난다고 보았다.


- 종종 성령에 의한 축자영감(글자를 그대로 받아씀)이 주장되곤 했으나, 이 이론이 고대교회와 중세시대에 강하게 대두되지는 않았다.


- 로마카톨릭 교회의 성서와 전통의 영감설은 개신교 측에서는 성서만이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라는 주장으로 좁혀졌다.


- Mathias Flacius Illyricus (1520-1575): 문자뿐 아니라, 심지어 구약성서의 모음기호까지도 영감받은 것이라고 주장(220-221).


- 그 후, 스콜라적 분류법에 따라 성서의 역동적인 원인(wirkende Ursache der Heiligen Schrift)과 덜 중요한 원인(weniger entscheidende Ursache) 사이의 구분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성서의 저자들의 개성은(덜 중요한 원인) 성서작성에서 아무런 역할을 담당할 수 없으며, 단지 성령의 자극에 따라 문자대로 받아 적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고 주장(221).


- David Hollaz(1648-1713): 성서영감의 외적 규준(기적, 증거의 일치성, 순교자의 강직성)과 내적 규준(하나님의 위대함, 정경의 필체의 진지성)을 주장(221).


- 축자 영감설에 대한 공격:


Hermann Rahtmann(1585-1628): 성서의 영감은 성서사용과 무관하게 이미 성서 안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선포에 의해서만 출현한다. 하나님은 성서를 문서에 기록된 죽은 문자로 머물게 하시려고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성서를 성령과 신앙 안에서 우리 안에 살아있게 하시려고 또한 우리를 새로운 인간으로 만드시려고 계시하셨다 (221-222).


경건주의: 정통주의의 영감설을 이론 학문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실천적인 적용성에서 비판, 즉 성서에 대한 맹목적인 인식과 권위에 대한 피상적인 인정은 충분치가 않은 것이다. 이를 통해서는 죽은 역사적 신앙을 넘어설 수 없다. 오히려 성서진술의 진리를 자기 자신 안에서 경험해야만 한다.


경건주의의 지도자들 Philipp Jakob Spener(1635-1705), August Hermann Franke(1663-1727), Zinzendorf(1700-1760) 등 서로 다양한 입장을 취함(223).

 


- 정통주의의 맞공격:


마지막 정통주의자이며 최고의 대표자인 Valentin Ernst Loscher(1673-1749)은 경건주의가 신앙을 대상을 주관적 심리적 신앙심 뒤로 감추어버린다고 비판했다(224).

 


- 역사적 사유의 대두:


역사적 사유의 대두는 신학전반에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기존의 신학적 지위가 하락한 것은 사실이나, 동시에 이로 인해 신학적 교설의 새로운 의미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특히 형이상학적으로 증명가능했던 진리에 더 이상 신앙이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매 순간 신앙은 새로운 결단을 요구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225-226).

 


4. 나가는 말

 


① 성서 영감설과 교황무오설


앞에서 우리는 영감설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살펴 보게 되었다. 영감설은 영감 자체가 아니라,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영감설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화학적 반응이나 물리적 현상인지, 또는 어떤 신비현상인지 이런 저런 비유를 들어 해명하려고 하는 터무니없는 노력을 할 것이 아니라, 성서의 권위,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서라는 신앙고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오히려 분명히 함으로써 이에 대해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 카톨릭이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현대인으로서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교황무오설을 주장함으로써, 현대세계에 터무니 없는 종교적 권위를 드러내는 꼴이 되어버렸다. 베델을 방문하여 강의한 로마 베네딕트 대학의 카톨릭 신학자 살만 교수에게 이를 질문했을 때, 교황무오설은 단순히 교황 개인의 무오설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교황의 수령 하에 있는 전체 카톨릭 교회의 순수성을 말해 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그것 또한 궁색한 답변일 수 밖에.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전혀 순수하지도 무오하지도 않은데, 카톨릭 교회만 순수하고 무오하단 말인가?


도대체 순수하고 무오한 것이 무엇이 그리 좋단 말인가? 영적인 결백증이 아닌가? 이런 순수에 대한 거짓 환상들이 나치즘을 잉태케 했고, 백인우월주의, 그리고 인종간의 무서운 분쟁의 씨앗이 된 것은 아닌가?

 


성서 영감설을 말하면서, 교황 무오설을 말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말처럼, 카톨릭에는 교황이 있듯이, 개신교에도 종이교황이 있기 때문이다. 종이교황, 무오하고 순수한 절대적인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서?!

 


② 언어(글자)로 된 성서.


역사학의 영향 아래, 오늘날 성서학은 성서가 여타의 다른 문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시대상황과 언어에 의존하고 있음을 자명한 전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원본이 없는 성서, 즉 필사본만이 존재하는 성서의 세계를 이해한다면, 성서의 언어적 특성 내지는 언어 자체의 언어성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언어 없이 쓰여진 성서가 어디 있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대체 언어란 무엇인가? 우리는 신학적으로 언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 언어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성서 또한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역사성이란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데, 하나는 시대에 국한된다는 의미와 또 하나는 동시에 그 시대의 언어를 통해 그 시대를 넘어가려고 하고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모든 언어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구체적인 상황에 귀속되어 있으며, 동시에 이 귀속성을 넘어가려고 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를 언어의 시대 귀속성과 시대 초월성이라고 말해 두자.


- 언어의 귀속성과 초월성은 해석의 지평을 열어 준다. 언어는 쓰여진 그대로 읽어질 수 있지만, 쓰여지고 읽어지는 그대로 이해되고 있지는 않다. 즉, 우리가 김소월 님의 시 [진달래 꽃]을 읽을 때, 우리는 한국인으로 거기에 쓰여진 언어들을 쉽사리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다. 그러나 실제로 이해란 매순간 우리의 지평, 읽는 독자의 현재적 지평과 함께 움직인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③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서.

 


언어와 관련해서, 우리는 신학적으로 언어를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언어를 우리는 귀속성과 초월성이라는 두 측면에서 생각해 보았다.


윤동주 시인이 '어머니'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 그는 일상적인 의미의 '어머니'를 통해서, 동시에 이 일상적 의미를 넘어가는 새로운 포괄적인 '어머니'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의 글을 읽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이러한 귀속성과 초월성이라는 언어의 두 측면을 신학적으로 음미해 볼 때, 우리는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기독교의 기본진리의 구조를 되새겨 볼 수 있다. 로고스의 육화를 우리는 하나님의 언어화로 이해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 그 분은 대체 어떻게 우리에게 찾아오시는가? 이 해명하기 어려운 질문에 대해 우리는 마치 하나의 가설처럼 하나님, 그 분은 우리의 언어 안에 오신다고 말해 보자. 아니, 만약 하나님, 그 분이 우리의 언어 안에 오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대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으며, 말할 마음이라도 가질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언어 안에 오시지 않는다면, 아니 언어로서 우리에게 오시지 않는다면, 대체 우리의 신학적인 언어란 하나의 허위광고일 뿐이다. 속없는 껍질일 뿐이다. 아니 도대체 가장 어리석은 인간의 헛지껄이가 될 뿐이다.

 


성육신의 진리처럼, 기독교의 기본적 진리로서 '말씀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하나의 공리로 상정하고자 한다.

 


시편을 읽어보자. 시편은 하나의 기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설교를 들어보자. 설교는 설교자의 입에서 나오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이웃에게 우리 안에 담겨있는 진실을 말해보자. 우리의 이웃은 음성학적으로 분석가능한 어떤 진동소리만을 듣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수도 있지 않은가!

 


- 성서를 누군가가 단순히 인간의 언어요, 신화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그녀는 내게 단순히 여자일 뿐이라고 말하는 자와 같다. 그의 말은 생물학적으로는 전혀 틀리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완전히 어리석은 말이 될 것이다.


- 성서는 옛 이야기일 뿐이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그녀는 나를 낳은 여자일 뿐이라고 말하는 자와 같다. 그의 말은 생물학적으로는 전혀 틀리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어머니를 모독하는 말이 되고 있는 것이다.


- 성서는 인간의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이를 분석적으로 해명하거나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다만, 실존적으로, 우리의 삶의 경험 안에서 진실되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④ 성서 해석을 위한 제안.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하거나 고고학적으로 역사학적으로 증명, 설명하려고 하는 태도는 성서에 대한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된 처사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는 귀속성과 동시에 초월성을 가지고 있어서, 과거의 한 시점에 귀속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가 성서를 구약과 신약으로 표기하듯이, 약속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성서는 과거로 우리를 끌고 가는 말씀이 아니라, 다가오는 미래의 약속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말씀이다.

 


구약이란 지나가 버린 약속을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오래되고 가치 있다는 의미에서, 유서깊은 약속이다. 신약이란 구약의 약속을 폐지하지 않으며, 구약의 약속의 전통 아래에서 보다 뚜렷하게 그 약속의 현실화(완성)에 우리를 초대하는 말씀이다. 구약과 신약은 하나의 거대한 약속의 전통 안에서 서로를 비추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통해 자신의 유래를 보며,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보는 것이다.

 


성서를 읽을 때, 우리는 이것이 과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사실인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의 진정한 의미와 이 사건이 오늘날 우리 삶의 현실에서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즉, 성서의 과거적 사실성을 연구하려는 고증학적인 자세에서 벗어나서, 성서의 유산과 전통과 전승의 힘에 동참하여 오늘을 파헤쳐가고자 하는 탐험적 자세가 요구된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는 언제나 살아있다고 하겠다.

 


 
 


출처 : 주사랑
글쓴이 : 항공모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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