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생명을 살리는 교회(마12:1-13)

하나님아들 2019. 1. 11. 21:14

생명을 살리는 교회(마12:1-13)

 

오늘은 우리교회가 10살이 되는 날입니다.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의 나이를 이곳 금천구 시흥동에서 보내었습니다.

교회의 생존여부가 불투명한 오늘 이 시대에 우리 대민교회가 9주년 감사예배로 드리게 됨을 하나님앞에 감사를 드리면서 또한 지금까지 여러 모습으로 헌신과 충성을 아끼지 아니한 우리 모든 대민교회의 지체들과 우리 교회를 사랑하여 주시고 기도해 주시며 목회자를 위해서도 사랑을 베풀어 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까닭에 담임목사는 충분히 행복한 목사입니다. 목회라는 과정이 결코 평탄치 않은 것이 사실인데 지금까지 1년12달을 9번 지내오면서 교회를 지키면서 말씀을 전할 수 있었고 크고 작은 일을 경험하면서 많은 교훈을 삼았습니다.

왜 행복한 목사입니까? 우선 구원받음이 행복이요, 목회자로 사용하시니 행복이요, 대민교회를 허락하셔서 행복이요 무엇보다도 성도들의 사랑을 받음이 행복입니다. 이외에도 행복한 이유를 말하려면 너무 많아서 열거할 수 없음 정도입니다.

이제 교회가 이전보다 더 성장해서 생명을 살리는 일을 위해서 더 크게 쓰임 받음이 행복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주신 것 가지고 나누는 행복도 함께 소유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성장은 참으로 어렵다고 하고 현상유지만 하면 잘하는 것이라는 하는 이야기가 있지만 교회는 여전히 성장할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가득 차있기 때문입니다.

【교육인적자원부 조사보고에 의하면 청소년들의 체격은 좋아졌는데 체력은 나빠졌다고 합니다. 남자를 예로 들어보면 10년 전에 비해 체격을 나타내는 키는 3.87cm 커졌고, 체중은 4.47kg 무거워졌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체력을 나타내는 100m 달리기는 0.3초 느려졌고, 턱걸이도 2.7회나 줄었고, 던지기도 3.7m 기록저하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

체력 저하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건강한 삶을 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활기차게 자기가 할 일을 해나가기 힘들고, 적극적으로 인생을 설계하며 나아가기가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또한 질병에 쉽게 걸리고 병치레로 허덕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청소년들을 바라보며 저들의 미래와 나아가 우리 사회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청소년들을 오늘의 한국교회에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도 체격은 커졌는데 체력은 약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가 과거 같지 않습니다. 철야기도, 산기도, 금식기도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힘들어 졌습니다. 모이는 것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부흥회도 일주일씩, 4일씩 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주일 출석도 그렇습니다. 성도들의 봉사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인들이 과거와 같이 전도의 열매를 맺는다든지 일터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냄으로써 존경과 칭찬을 받는다든지 하는 일을 찾아보기 힘이 들어졌습니다. 교회 안에 조그만 문제가 생겨도 쉽게 큰 문제로 비화되서 교회에 갖가지 갈등소리와 파열음이 들립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상처를 받습니다. 교회에 대해 큰 실망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 밖에서도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가 않습니다. 심지어 교회가 스스로 전도를 막는 일들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바라보며 혹자는 ‘교회 무용론’을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교회라면 존재할 이유가 무엇인가?” 또 어떤 이는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고 쓴 소리를 내 뱉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쨌든 오늘의 한국교회를 바라볼 때 걱정스럽고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교회는 존재해야 합니다. 가정이 문제가 많고 큰 짐이 된다고 해도 가정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나라가 문제가 많고 싫어도 나라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가 문제가 많고 실망스러워도 여전히 교회는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존재는 무엇보다도 생명을 살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대민교회가 생명을 살리는 교회로서 주님앞에 서는 날까지 존재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힘쓰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생명을 살리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의 모든 지체들 즉 성도들이

 

1.예배를 중요시 여겨야 합니다.(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구약시대 사람들은 '주일'이 아니라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안식일은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으신 후에 이레 째 되는 날에 안식하신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라 피곤해서 쉬신 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들을 위해 하나님은 안식(쉼)을 주셨는데, 이는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요 사랑입니다. 생명력 있는 삶을 위한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우리의 삶에 쉼이 없다면 그것은 비극적인 삶이 될 것입니다. 쉼이 있기 때문에 힘들어도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노예들의 삶이 고달픈 것은 쉼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주일 중에 하루 동안의 쉼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쉼을 통해 인간은 피로를 풀뿐만 아니라 재충전의 기회로 삼기도 합니다. 어느 모로 일과 쉼은 매우 깊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쉼이 없는 일은 고역(苦役)과 같습니다. 일하지 않고 쉼만을 추구하는 것은 창조 질서에 역행(逆行)하는 처사입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쉼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입니다. 그러기에 쉼이 있는 삶, 휴식이 있는 삶은 축복의 삶입니다. 쉼이 없는 삶은 그것 자체가 불행이요 지옥입니다.

한마디로 안식일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커다란 축복의 날이요 은혜의 날입니다. 이날 사람들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러한 안식일은 잘 지켜졌습니다. 예수님도 안식일을 회당에 가서 지켰습니다. 주님도 율법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이 안식일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왔다"(마5:17)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은 안식일 문제로 인해 많은 다툼을 야기하였습니다. 오늘 본문도 안식일에 일어난 사건을 소개해 놓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안식일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밀밭사이로 지나가는데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먹었습니다. 이것을 바리새인들이 보고는 예수님에게 하는 말이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계시던 예수님이 사무엘상 21장에 나오는 다윗의 일행이 매우 배가 고파서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성전의 떡상에 진설 되어 있는 떡을 먹음으로 안식일을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죄가 없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8절에 하시는 말씀이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에 예수님은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거기에 한 쪽 손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때 다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심판하려고 묻기를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이 질문을 받은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을 하셨습니까? 여기서 잃은 양 비유를 하셨습니다. 양 한 마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그 양을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한 존재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는 선을 행하는 것 이 옳은 일이라고 강조 하였습니다.

당시의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은 규정과 규칙을 내세우면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려 하였지만 오히려 안식일의 본질을 흐리게 하였습니다. 형식적이고 의식적으로, 알맹이는 빠지고 껍데기만 남은 날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안식일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며, 감격하며,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날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서 편안히 쉬고,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는 뜻으로 종과 가축들까지 편안히 쉬게 하는 날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기쁜 날이다. 좋은 날이다. 감사하는 날이다. 자유하는 날이다. 결코 규칙과 규정으로 억압받는 날이 아니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7절에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왕이 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너희 손에 붙일 터이니 아말렉의 모든 것을 다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울의 군대는 아말렉 군대에게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좋은 말과 살찐 소와 실한 양을 죽이는 것이 아까왔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가축들은 남겨 두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울의 진영에 갔을 때에 짐승들의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임금님! 이 짐승들의 울음 소리는 무엇입니까?” 왕이 대답하기를 “하나님께 제사 지내려고 남겨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구요! 하나님께 바치려구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구요!”

사울 왕의 말을 들으면 사울 왕이 무척이나 경건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욕심 때문에 숨겨 놓은 것입니다. 속으로는 자기 욕심을 채우지만 겉으로는 경건을 가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 같지만 실제는 세속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울왕을 향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제사 지내는 것을 좋아하시겠습니까?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시겠습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왕을 버리셔서 이제 왕이 되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규정과 규칙들을 들먹이면서 안식일을 잘 지키는 것 같고 경건한 것 같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에게 한 것과 똑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규정이나 규칙을 따지면서 감격 없이 예배드리는 것이 나으냐? 하나님 앞에서 기쁨과 감격 속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리는 것이 더 나으냐?

안식을 잘 지켰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책망하는 것이 나으냐? 안식일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 가운데 평안하게 안식하는 것이 나으냐?

안식일에는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날이다. 안식일의 주인공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너희들은 알아야 한다. 나는 성자 하나님이다. 내가 안식일에 예배를 받아야 하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그런데 안식일의 주인인 나와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지내는 나의 제자들을 왜 책망하느냐? 너희들도 나와 함께 기뻐하자. 나와 함께 즐거워하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기억하는 상징적인 날입니다. 이 안식이 주일로 변경된 것은 주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이라는 사실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부활의 날이 창조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계약과 구원사역의 궁극적 완성의 날이고 하나님의 다스림이 실현되어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날이므로 안식일이 주일로 변경된 것은 좋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이 단순히 쉬는 날로 설교되어 사람들이 쾌락을 위한 스포츠 나 복권이나 알코올 등으로 보내게 되는 것은 안식일 정신을 해치는 것이 됩니다. 안식일은 세상적인 즐거움을 위해 쉬는 날이 아니라 기도와 찬양과 복음선포와 성도의 친교와 예배의 참석을 위해 쉬는 날이 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주일의 중심은 교회에서 행해지는 예배 입니다. 이것이 주일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주일에는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주일은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 드리는 날로 우리의 마음 가짐, 정성을 드려야 합니다.

옷도 제일 좋은 옷을 입고 나오고, 예배를 드릴 때에도 감사함으로 정성껏 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위하여 목회자도 준비하고, 예배 위원도 준비하여야 하고, 성도들도 준비하여야 합니다. 잘 준비된 예배를 하나님께 정성껏 드리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왔다 갔다 해서는 안됩니다. 예배 중에 왔다 갔다 해서도 안됩니다.

우리의 몸 뿐 아니라 마음 중심까지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몸과 마음을 다 드리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주일날 주방에서 봉사하고, 예배를 안내하고, 찬양대, 찬양단으로 봉사하기 위하여 무척이나 분주한데 아무리 분주하여도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예배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 않습니다.

봉사를 하되, 먼저 예배를 정성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되 시작부터, 축도 마칠 때까지 온전하게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를 기뻐하시며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더욱 큰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처럼 예배를 중요시 여기는 성도가 되어야 예배를 통해서 큰 은혜를 받고 은혜를 받은대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쓰임 받을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로 구성된 생명을 살리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2.선을 행해야 합니다.(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구약의 안식일이 오늘날의 주일로 바뀐것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주일을 어떻게 보내느냐를 아는 것은 신앙생활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우리가 평일 날 교회에 나와서 주의 일을 하기가 쉽지 않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주일날 어려운 이들을 찾아보고, 환자들을 돌아보고, 낙심한 이들을 찾아가 전도하고, 이웃에게 선한 일도 스스로 찾아 행하는 것도 주일을 바르게 지키는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녀 성도들이 회원들의 병 문안과 심방을 가는 것도 주일을 바르게 지켜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낙심한 사람을 찾아가는 것도 참 좋은 일입니다. 지역에 굶주린 사람을 찾아가 사랑을 나누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우리는 주일을 온전하게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거의 모든 종교가 “선을 행하라”고 가르칩니다. 불교, 이슬람교, 유교, 힌두교를 막론하고 착하게 살고 어려운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며 살라고 가르칩니다. 세상 거의 모든 도덕과 윤리도 “선을 행하라”고 가르칩니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에서 보듯이 “권선징악”이라는 주제를 동화에 담아 가르치기도 합니다. 물론 기독교 역시 “선을 행하라”고 가르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손마른 병자를 치료해 줌으로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보다도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이 더 중요한 것임을 가르쳐 주고도 있습니다.

곧 예수님은 병든 자,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임을 가르쳐 주면서, 안식일에 친히 병자를 치료해 주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선을 행하면서 생명을 살리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 있는 대로 우리는 선을 행해야 합니다. 선을 행한다는 것이 의무가 아니라 사명으로 느껴져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사명이 될 때 하나님의 기쁨과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야고보서4장17에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라고 야고보는 지적합니다. 선(善)은 아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행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뭐하는 과연 무엇을 하는 곳이어야 합니까?

구제하는 곳입니까? 자선 사업하는 곳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곳이요, 생명을 구원해 내는 곳입니다.

교회의 성도는 내가 믿고 구원 받았지만, 이웃에게도 복음을 증거하여 이웃의 영혼, 생명을 구원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시는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 주시기를 원하시는 영혼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전도요, 성도의 사명은 전도입니다.

구제는, 선행은, 자선사업은 전도하기 위한 방법으로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인도의 성자로 불리우는 썬다 싱이 언젠가 밀림 지대에서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안 연대장이 썬다 싱을 잡아다 때리고 욕보이다가 마지막에는 밀림 속 돼지우리에 발가벗겨 지내게 하였습니다. 지독한 모기에게 뜯겨서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썬다 싱은 밤새도록 "날 구원하신 예수를 영원히 찬송하겠네" 하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썬다 싱의 찬송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미친 놈이네, 저렇게 모기에 뜯기면서도 노래를 부르다니” 하고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어떻게 저런 가운데서도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를 생각하였습니다. 저러한 환경 속에서도 노래하게 만드는 예수는 과연 누구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는 가운데 예수님이야 말로 생명의 주님, 구원의 주님이심이라는 감동이 왔습니다. 나도 저런 고통 가운데서도 찬송하게 하는 예수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교회마다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작은 교회는 작은교회대로 구제하는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도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기 위하여 하는 것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의 삶 속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하여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친절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예수님의 이름이 전파될 것이고, 복음의 역사, 생명의 역사, 전도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고 또한 우리들은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하는 성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하는 교회가 되어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쓰임 받는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회복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본문 9절이하에 신체장애를 가진 한 사람이 나옵니다. 한쪽 손이 근육이 마비되면서 정상적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의 손이 이렇게 된 것은 선천적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다가 한 쪽 손에 장애를 가지게 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살아가다가 사고나 질병으로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한 쪽 손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은 이 사람의 인생을 뒤 흔드는 큰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본문 말씀과 관련된 다른 자료들을 보면 이 사람의 직업은 미장이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문제가 된 손이 한 편 손이라고만 하였고 왼 손인지 오른 손인지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누가복음 6장에 보면 오른 손이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장이가 오른 손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이 사람이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벌어서 먹고사는 사람이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 이상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 때부터 이 사람의 인생은 많이 고달프고 힘들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13절에서 이 사람에게 명하시길 “네 손을 내밀라” 명하셨고, 이 사람이 예수님 말씀대로 손을 내밀었는데 놀랍게도 이 사람의 손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 하나는 회복이란 단어입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장애를 가진 손이 치료되고 회복되게 된 것은 단순히 장애를 가진 손 하나가 회복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손에 장애가 옴으로서 이 사람에게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쫓겨나는 상황도 생각해볼 수 있고, 이 사람의 실직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가정의 위기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장애를 가진 손이 회복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모든 좋지 않은 상항에서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경우에서 보듯이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심으로서 우리의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회복은 예수님께서 힘써 일하셨던 사역의 목표일뿐 아니라 예수님의 간절한 바램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병원에 문병 가서 이렇게 인사를 하곤 합니다. "빠른 시일 내에 쾌유하길 빕니다." "속히 회복되어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시다." 이러한 인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하는 인사입니다. 그 어떤 병이든 회복되지 않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회복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회복되지 못함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병에서 회복되길 바라는 것은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병에서 치유 받고 회복되길 원하는 마음은 환자들의 다 같은 마음이듯이, 하나님도 우리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치유 받고 회복되길 원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보내신 것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도 궁극적으로 회복시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회복은 주님의 사역의 목표이자 하나님의 바램 인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이런 마음을 잘 알고서 회복을 위해 힘써 일해 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이러한 뜻을 이 땅위에 이루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말씀을 전파하시고 가르치실 뿐 아니라 약하고 병든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병으로 세상에서 소외되고 멸시받던 이들을 치유함으로 공동체의 일원으로 정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모든 권리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람을 치유하고 회복하심의 목적은 하나님이 지으신 본래의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바램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말씀하신 것처럼 "보시기에 참 좋은"(창1:31)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삶을 살아가도록 병으로 짓눌리고, 악령으로 짓눌려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을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치료해 주시고 종교적인 잇속을 챙기는 장가꾼들처럼 치료를 해 주었으니 돈을 내노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늘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심정으로 하신 것입니다.

 

【어느 잡지에 실린중학교 선생님 이야기입니다.

중학교 1학년을 가르치는 여선생님으로서 독실한 크리스챤입니다. 이 선생님 반에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처음 입학할 때에는 1등, 수석입학한 학생입니다. 그런데 이 여학생이 점점 성적이 떨어져 가고, 망가져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춘기라 그런지 반항적이고, 불량한 학생으로 점점 변해 가는 것입니다. 수석 입학해서 처음에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더니, 나중에는 왕따 당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선생님 본인도 이 학생을 문제아 취급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 학생은 수업 시간에 안 들어오는 경우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이 이 학생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그 이유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부모가 현재 별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랬구나! 이런 아픔이 있었구나!” 이 학생의 환경조사서를 보았더니, 그 배경이 기독교인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선생님이 이 학생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선생님은 양쪽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번호가 둘인데, 정말 부부가 따로 따로 전화를 받는 것입니다. 다른 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지요. 아들 성적문제로 의논하고 싶다고, 학교에 오실 수 있냐고 묻고는, 똑같은 시간에, 교무실로 오시게 하였습니다.

이 학생의 부모들은 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 혼자 온 줄 알았더니, 웬수같은 누구도 온 것입니다. 둘다 처음에는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고, 선생님에게 대하는 태도도 썩 좋지 않았답니다. 그래도 선생님이 설명을 합니다.

"아드님의 성적을 다시 회복하고,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두 분 중의 한 분의 도움 가지고는 될 수 없습니다. 두분의 도움이 모두 필요하기 때문에 제가 실례를 무릅쓰고, 두 분 다 학교에 오시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선생님께서 충격적인 그 학생의 답안지를 부모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영어 시험을 본 답안지인데, 답이라고는 한자도 안 적고, 전부 낙서를 해 버린 것입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말이지요. 엄청난 반항이지요. 그런데 그 휘갈겨 쓴 낙서중에 맨 마지막 부분에서 이 학생의 진실을 선생님이 본 것입니다. 거기다가 빨간 줄을 쳐 놨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이걸 좀 보시죠." 빨간 줄이 쳐진, 휘갈겨 쓴 글씨속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아빠, 엄마 난 누구하고 살아? 난 누구하고 살아? 이혼하면 누구하고 살아? 아빠 엄마, 난 누구하고 살아.. 아빠 엄마 난 둘다 필요해. 난 둘다 필요해"

그리 고 또 한마디 마지막에 맨 구석에는 "아빠 엄마 우리를 사랑해? 아빠 엄마 우리를 사랑해?" 그 글을 읽는 순간, 아버지가 고개를 떨어뜨립니다. 엄마도 고개를 떨어뜨립니다. 깊은 정적이 지났습니다.

"두 분이 다, 기독교 배경을 가지고 있지요? 저도 그리스도인 입니다. 제가 기도해 드릴까요?"

선생님이 아빠 엄마의 손을 잡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교무실은 통곡의 장으로 변합니다.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울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이 가정의 회복의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 입니다. 이 부부는 다시 합쳐졌습니다. 그리고 이 학생은 다시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지요. 그 선생님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맨 마지막에 함께 기도하고 교정을 나서는 이 부부. 이 학생의 아버지와 엄마. 교정을 나설 때, 나는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내 생애에서 이것보다 더 귀한 축복이 어디 있겠는가?"

한 선생님의 관심과 기도가 결국 깨어질 뻔한 가정을, 그로인해 타락할 뻔한 한 학생을 구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떻습니까? 깨어져 가는 가정의 주인공이 아니라, 그러한 사람을 구해주고, 회복시켜주는 주인공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회복운동이 일어나 교회가 든든히 서갈 때 생명을 살리는 교회로 쓰임 받을 수 있음을 알아 회복운동에 열심을 다하는 우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양로원 갑천뉴스타트
글쓴이 : 엘리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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