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성결하게 하라(수3:1-3)
오늘날 믿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성결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도 예수 믿는 우리가 자기들과는 다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을 향한 요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은 하나님의 요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기를 바라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별되어야 할 모습을 한 마디로 성결이라고 개념화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은 후에 이루어 가야할 목표, 유지 발전시켜 가야할 목표가 바로 이 성결입니다. 이것이 또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성결이라는 말은 한자로는 성스러울 聖에 깨끗할 潔을 썼습니다. 우리 말 사전을 찾아보면 한자 뜻 그대로 성결이란 “성스럽고 깨끗함”이라고 되어있습니다. 히브리어 원어로는 코데쉬라는 말을 씁니다. 이 말을 우리가 성결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 코데쉬의 중요한 특징은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씻은 상태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나주실 정도로 하나님께서 그 정도면 됐다고 허락해 주신 상태 그것이 바로 성결입니다.
구약성경에 여호수아가 요단 앞에 섰습니다. 2백만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부 요단을 건너야 가나안이 그들 앞에 펼쳐집니다. 요단강이 그들 앞을 가로막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했던 것은 지금부터 헤엄칠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수3:5). “너는 문제를 해결하는 전략과 방법에 관심이 있지만 그 전략과 방법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거룩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일을 하실 때마다 성결케 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급에서 구원받는 유월절 때는 양의 피를 발라 성결케 하였습니다(출12장).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도 옷을 빨아 성결케 하라고 하였습니다(출19:10). 광야에서 메추라기를 주실 때도 성결케 하라 하였고(민11:18). 지도자를 구별하여 세울 때도 성결케 하라고 하였습니다(요엘2:15-16). 요단강을 열어주실 때도 스스로 성결케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결의 생활은 한마디로 깨끗하게 목욕한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하며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사람이 목욕을 하고 새옷을 입었으면 더럽혀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정결한 삶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외적인 모습만 변화해서는 안됩니다. 내적인 중심도 변화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중생을 해서 인생관이 변화되면 중심이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나의 의지에서 예수님을 의지하는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옛날에 좋아하던 것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변화를 받게 됩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다 보면 점진적인 성숙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사람은 점진적으로 지어져 가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순간 성숙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가고, 세월이 가고, 경험을 쌓고, 공부를 하는 동안 사람은 점차적으로 발전하고 성숙해지고 향상되어 가는 존재입니다. 신앙도 보면 마찬가지입니다. 신앙도 은혜를 받으면 그 시간으로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가고, 세월이 가고, 연륜이 쌓이는 동안 점차적으로 성숙해져서 인격이 여물어가고, 영적인 생명이 풍성해져서 진리의 삶을 추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숙해져 가는 삶이 곧 성결한 삶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이런 생활을 “제2의 축복”이라고 하였고 “온전한 구원”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결한 삶은 중생한 후에도 계속 노력하는 삶이고, 자기수련에 힘쓰는 삶이고, 신앙의 내용을 발전시켜 나가는 삶입니다.
이런 삶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인격성장이나 지식의 성장이나 의식이 성장하려고 하면 그에 따른 수련과 절제와 공부가 있어야 하듯이 영적인 성장을 이루려고 하면 노력하는 삶이 있어야 하고, 자기수련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비로소 만족할만한 성결한 삶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을 성결하게 위하여 경건의 훈련을 끊임없이 이어나가 하나님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성결을 이루어 나가기를 바랍니다.
1.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훈련(1)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기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일을 행할 때에는 항상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수6:12;7:16;8:10). 이는 그가 안일함을 좋아하지 않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매우 즐겨했으며, 그 맡겨진 일에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앞서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었음도 시사해 줍니다(막 1:35),
한국 교회의 특징도 바로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훈련입니다. 즉 새벽기도입니다.
새벽은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 함께 하시는 분이시기에 낮에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밤을 지으신 분이시며 그 밤에 우리를 쉬게 하시는 분이시기에 깊은 밤에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만나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신앙의 위인들은 언제나 새벽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새벽에 큰 역사를 이루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새벽 오히려 미명"에 기도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매일 새벽 빠짐없이 규칙으로 기도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때문에 새벽기도를 율법적으로 적용하여 새벽기도를 할 수 없는 어린신자들을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또 사회구조가 다양화되어지고 복잡해 졌습니다. 농경 사회에서는 물론 중진들과 믿음 좋은 성도들이 다같이 새벽에 모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형편에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정기적으로 새벽기도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시 하는 태도도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정해진 새벽시간에 기도할 수만 있다고 하면 나는 남다른 은혜를 지금 체험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 감사한 일입니다.
분명한 것은 새벽은 기도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새벽기도는 한국교회의 자랑입니다. 한국교회 많은 성도들이 함께 깨어 새벽에 기도한다는 것은 교회에도, 기도하는 개인에게도 대단한 의미가 있습니다. 온 교회가 깨어 기도할 때는 함께 동참할 수만 있으면 커다란 유익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새벽에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나라의 주인공이요 애국자입니다. 새벽에 주님 전에 달려나와 누구보다도 이른 시간에 교회의 아픔과 상처, 교회의 축복을 가슴에 끌어안고 기도하는 사람이 이 교회의 주인입니다. 이 교회의 축복과 부흥이 여러분의 몫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새벽에 기도하는 성도가 교회를 지키고 나라를 지키고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군인들은 그들의 수고가 나라를 지킨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정치가들은 그들의 모임과 회의와 연구가 나라를 지킨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기업가들은 그들의 땀과 수고가 나라를 지킨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의인 10사람의 간구가 이 나라를 붙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어떤자리에서 무슨 일 하든지 간에 기도의 사람이 이 나라를 지키는 주인공들입니다. 새벽에 잠든 도시는 위험합니다. 새벽이 잠든 교회는 성령이 역사 할 수 없습니다. 새벽에 잠든 나라는 이미 영적인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새벽을 깨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밤이 맞도록 술을 마시고 춤추었습니다. 새벽이 잠든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새벽에 주님을 만나는 사람, 새벽 기도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사람은 삶 전체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 알렌이란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새들보다 먼저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새들보다 늦게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요, 영혼이 맑은 사람입니다. 역사는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새벽 기도가 타락한 영국교회를 새롭게 하였습니다. 루터의 새벽 기도가 타락한 천주교회를 개혁하는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아이젠 하워와 죠지 워싱톤의 기도가 미국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훈련을 열심히 하여 새벽에 기도하는 습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영국에 있는 한 학자가 이런 연구를 했다고 합니다. "왜 스코트랜드장로교 출신의 중산층 자녀들은 성공하는가?"
영국을 이끌어가는 많은 인재들이 주로 스코트랜드의 장로교 출신의 중산층 자녀들 중에서 배출된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분석한 내용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모유법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왜 스코트랜드 장로교 중산층에서 인재들이 쏟아져 나오는가?"
첫째 스코트랜드 장로교 중산층 산모들의 모유법에 그 비밀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들 중산층 부인들은 아이들 젖먹이는 방법부터 달랐다는 것입니다. 보통의 어머니들은 아이들이 울면 우는 즉시 아이들에게 먹을 수 있는 젖을 줍니다. 그러나 이 중산층 어머니들은 정확하게 4시간 단위로 하루에 여섯 번씩 아이들에게 젖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중산층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아무리 울어도 먹을 것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습득하게 되고 자연적으로 어려서부터 인내하는 훈련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들 부모들은 아이들이 무엇을 사달라고 조르면 절대로 즉석에서는 사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아이들에게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한번 약속하면 반드시 그 약속을 이행하여 나중에 원하는 것을 사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어린이들은 어려서부터 계약의식에 사로잡히게 되고 약속한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 가운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하나님이 인간에게 약속한 모든 것들이 반드시 응답된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체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훈련이 거듭되다보니까 어려운 난관이 올 때에도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기고 또 상거래를 할 때에도 서로간으 신용을 중요시하게 되어 상공업이 발달하고 금융업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인내하면서 약속을 기다리면서 기도하는 생활은 우리의 생활을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32,600가지의 약속이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기도하면 받드시 응답하여 주시겠다는 약속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가 다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도했고, 기도한 후에는 그 기도에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저들의 믿음은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기도하는 훈련을 통하여 자신을 성결하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언약궤를 따르는 일(3)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쫓으라”
3일 동안을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세한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그것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뒤를 좇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수십년간의 광야 여정 중 함께 하던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을 인도하지 않았습니다(민9:15,23). 이러한 때 여호수아는 백성들로 하여금 언약궤를 바라보고 그 뒤를 좇으라고 합니다.
언약궤가 무엇입니까?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를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까? 언약궤란 것은 법궤를 말하는데, 때로는 증거궤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을 보관한 함이 언약궤라고 합니다. 언약궤의 뚜껑은 속죄소였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바로 속죄소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언약궤를 따라간다는 것은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산다는 것이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속죄소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상징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언약궤를 앞세우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예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멀리 떨어져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을 보면서 따라갔지만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모시면서 길을 가야만 합니다.
오늘날 우리 앞에 법궤, 언약궤를 모시고 나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보다 앞서 가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나아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가정을 이끌어가도록 위임하고 위탁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앞서가실 때 우리는 다만 믿음으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을 성결하게 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많은 무리들 중에 특별히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하나님 의 언약궤를 멜 때에 그 뒤를 좇아가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 앞에 제단 쌓는 일을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한 해 동안 언제 어디서든지 예배드리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을 참으로 귀히 여기면서 충성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에 충성할 때에 다른 일들이 형통하게 되어질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배 중심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배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행위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행위이며,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 중에 임하여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광야를 행군할 때 제일 중앙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셔둡니다.
그리고 동서남북 네 군데에 각각 세 지파씩 포진을 하고 전진을 합니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하나님의 언약궤를 중심으로 행군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배가 삶의 중심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어느 방향에서나 항상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고 항상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이스라엘의 진영이 배치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멈추어 있을 때에도 적용되었습니다.
항상 진의 문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바라보도록 했으며, 문을 열고 나오면 제일 먼저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도록 했던 것입니다.
생활의 중심도 예배였고 삶의 위치도 하나님의 임재와 예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예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계획에서 예배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자기를 찾는 자들을 축복하시고, 진심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우리들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행을 하다가도 주일이 되면 반드시 돌아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는 나라와 그 지역은 평화와 하나님의 보호가 함께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배를 철수하는 곳에는 천재와 인재, 한재, 풍재 뿐 아니라 그곳에는 평화가 없고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곳에 성령이 임재하고,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고, 하나님께 찬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천군 천사가 함께 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답답하고 어려울 때일수록 예배드리고, 기쁘고 감사한 일이 있을 때에도 예배드리며, 위험한 일이 있을 때에도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민족이 제단을 쌓으면 민족이 살게 되고, 가정 제단을 쌓으면 가정이 살게 되고, 교회의 제단이 무너지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예배는 영적인 사람을 만드는 통로입니다. 예배는 바른 신자를 만드는 훈련입니다.
매 주일 성도들이 드리는 예배는 믿음을 규칙적으로 자라게 하고 인격과 성품, 생활과 의식, 가치관과 인생관들을 균형 있게 성장하도록 영적인 자양분을 공급합니다. 주일예배는 성도들의 영적인 부분과 인격적인 부분 모두를 다루어 건강하고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 만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모아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고 나타내 보이시는 날이 예배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가장 활동적으로 일하시는 시간도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예배를 구별되게 지키고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헌신하는 모습을 보이고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날이 주일이 아니라면 여러분의 영적 생활은 병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별하신 가장 성별 된 날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날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예배는 우리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최대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사랑하고 드렸던 믿음의 선배들이 이 길을 고집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너무나 기뻐했고 또한 그것을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 휠씬 감동적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
주의 궁정에 사는 사람들이 오늘의 예배 자들입니다. 세상의 어느 곳에서 예배의 기쁨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배 드리기 위해 주의 성전을 가까이하고 주의 전에 머무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희생과 아픔, 노력과 인내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수고가 따라야 하고 세상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세상에서의 시간을 줄이고 주의 장막과 주의 궁정에 있는 시간을 늘리는 사람은 믿음이 자랍니다. 이것은 인내가 따르는 일이고 악한 영들과의 싸움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사탄에게 이기는 방법은 예배를 최고의 자리에 두는 것입니다.
예배보다 다른 프로그램들에 더 많은 관심과 시간을 드리는 것은 올바른 신앙의 태도가 아닙니다. 주일예배에 철저하게 참석하는 훈련은 하나님을 주목하는 것을 배우게 하고, 진정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데 중대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자신을 성결하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언약궤를 가까이 하지 않는 일(4)
“그러나 너희와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언약궤를 좇아야 했지만 거기에도 규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2천 규빗의 간격을 유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규빗'은 통상 손가락 끝에서 팔꿈치까지의 거리를 말하며 약 45.6cm입니다. 그러므로 2천 규빗은 약 912m입니다. 한편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궤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해야만 했던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①언약궤의 신성함과 그것이 나타내는 하나님 임재의 거룩함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삼하 6:6, 7). 즉 하나님은 인간을 초청하여 가까이 하시지만, 인간은 여전히 죄인이기 때문에 그의 거룩함에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Calvin).
② 또한 많은 사람이 언약궤를 용이하게 주목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Keil. Pu-lpit Commentary). 즉 언약궤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으로서. 백성들 앞에 나아감으로써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분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잘 보기 위해서 '이천 규빗' 정도 떨어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본절의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라는 말로 더욱 구체화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는 길은 전에 가 본 적이 없는 낮선 땅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땅은 하나님의 인도가 없으면 가야할 방향을 알 수 없는 새로운 땅이었습니다.
본절에서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고 하였습니다. 즉 2000 규빗의 거리를 두고 따라가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받으라는 것입니다. 즉 말씀의 존엄성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영적으로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금물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세상을 행해서는 담대해서 싸워야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담대해서 말씀을 함부로 풀고, 함부로 말하고 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거리를 두고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무엘하6장6-7절에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 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아니하여 웃사는 죽음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사무엘상6장19절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고로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인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 하였더라" 고 하였습니다.
언약궤에 거리를 두고 따라가야지 앞서 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면 오늘날도 규칙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험한 규칙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길로 자기의 백성을 이끄신 것은 그들을 낮추시기 위함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으로 사는 법을 배우게 하시기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전도자 빌리그래함 목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십자가의 길을 걷기 전에 황금 길부터 걷기를 원한다` 험하고도 힘든 고난의 길을 걸어 보지 않고 어찌 영광의 길을 걸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지났던 광야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출14:18).
때로는 막힌 규칙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막다른 길에 서 있게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두 손 다 들게 하신 다음에 하나님은 `두 눈으로 똑똑이 봐라. 내가 어떤 하나님인지를` 하고 보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실 때 하라는 것과 하지말라는 명령을 통해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천 규빗쯤 되게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는 말씀은 규칙입니다.
오늘 우리가 자신을 성결하게 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하며 하나님의 정하신 규칙대로 해야함을 명심하여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게 하라는 말씀을 듣고 자신을 성결하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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