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도리(약1:2-8)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모든 사실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사건을 말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건이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이 사건자체는 우리를 구원하신 사건이고,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을 때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구원을 얻는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은혜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로 고안해 낸 신이거나 막연하게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실재로 살아 계셔서 우리와 교제하시는 분이십니다.
믿음을 가진 자는 세상이 주는 어려움을 이깁니다. 고독을 이깁니다. 시련을 이깁니다. 세상을 이기고 죽음을 이기는 믿음,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어느 분야든지 그 분야에 맞는 도리 즉 방법이 있습니다. 집을 짓는데도 건축 공학적 방법이 있고, 총을 쏘는데도 사격 방법이 있으며, 교량을 건설하는 데도 교량건설의 공법이 있으며, 수영을 하는데도 수영방법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데도 “믿음의 도리” 즉 믿는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붙들고 사느냐 하는 것에 따라 그 운명이 결정됩니다. 사단을 붙들면 멸망하게 됩니다. 죄를 붙들고 거짓을 붙들면 그 댓가를 받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굳게 잡아야 할 것은 예수 믿는 믿음이며, 거기에 영생과 구원, 승리와 성공, 사명과 상급이 있게 될 줄 믿습니다.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우리는 이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고 사는 신앙인들이 모두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도리는 다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번은 밧세바가 아들인 솔로몬 왕을 방문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일어나 어머니께 큰절을 한 후 우편에 자리를 베풀어 앉게 하였습니다. 우편은 권위와 영광의 상징입니다. 이것은 어머니께 최대의 존경과 경의를 표하는 아들의 도리였습니다. 이점을 솔로몬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즉 믿는 자는 도리를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일수록 더욱 도리를 지켜야 합니다.
또한 열왕기상19장19절 이하에서 선지자로 세움을 받는 엘리사가 도리를 다하고 잘 갖추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는 먼저 스승되는 엘리사에게 달려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 허락을 받았습니다. 제자와 후배의 도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한 후 부모에게 달려가서 사정 이야기를 드리고 작별인사를 하였습니다. 이것 역시 아들의 도리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은혜받은 자는 도리를 다해야 합니다. 성공이 여기 있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우리의 도리를 다 해야 됩니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도 해야 됩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믿는 우리 즉 성도된 우리는 국민의 도리, 직장인의 도리도 다해야 됩니다. 내가 회사 사장이면 사장의 도리, 부장이면 부장의 도리, 사원이면 사원의 도리를 다해야 됩니다. 그리고 사업주로서의 도리, 또한 주부로서의 도리, 학생으로서의 도리,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도리는 하나님 자녀로서의 도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 길을 잘 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성도인 것을 남들이 압니다. 나도 알고 천사도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의 도리를 언제나 잘 감당해야 됩니다.
더욱이 성도된 우리들은 믿음의 도리를 다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늘 통독하는 일에 힘쓰며 말씀을 통하여 깨닫는 바를 실천하는 일에도 힘써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성도된 우리가 실천해야 할 믿음의 도리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나 많은 말씀을 들은 것은 사실입니다. 들었으면 행해야 합니다. 믿음의 도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1.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성도의 신앙 생활중에 한 과정이 있다면 시험을 만나는 것이 있습니다.
즉 살아가다 보면 이런저런 여러 종류의 시험을 만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물질로 인한 시험도 있고, 질병으로 인한 시험도 있고, 사람 때문에 당하는 시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나라적으로 시험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험은 전혀 의외의 상황에서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이처럼 시험은 우리를 고려해 주거나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시험은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시험은 종종 영적 안테나에도 잡히지 않고 찾아옵니다.
또한 성경의 기록된 대다수의 인물은 시험이라는 용광로에서 재련된 경쟁력 있는 인품(人品)들입니다. 온실에서 무기력하게 자란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이라는 거치른 들판에서 비바람과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으며 자란 '들풀'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시험을 오히려 축복의 기회로 만들었으며, 시험이라는 파도타기를 여유있게 감당한 멋진 믿음의 선진들입니다.
종교를 가지게 되는 많은 사람들마다 소원을 가지고 소원을 이루기 위해 각자의 종교대로 종교의식을 행하게 됩니다. 불교는 불공을 드리고, 회교는 엎드려 기도 드리며, 기독교는 두 손모아 기도를 드리고, 천주교는 성호를 긋는 등 다양한 모습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연 그 사람이 소원하는 바가 다 이루어진다 해서 그는 앞으로 문제점 없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또 다른 문제가 그에게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인생이 존재하는 한, 생명이 있는 한, 인간에게는 항상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으면 인간에게 문제가 해결이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을 믿으면 만사가 형통된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러한 사람의 신앙은 바른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믿음이 좋아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 받는다. 또 시험이 오지 않고, 연단도, 시련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 좋으면 좋을수록 다가오는 시험은 더 클 수도 있습니다. 계곡이 깊으면 깊을수록 산등성이가 높은 것처럼, 신앙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 큰 시험이 더 큰 연단이, 시련이 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기도를 열심히 하면, 시험도, 문제도, 연단도 없을 것이다. 아주 평안한 삶을 살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기도하신 뒤에 다가온 것은 시험이었습니다. 기도한다고 해서 시험이 다가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가장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곳, 에덴 동산에 평화롭게 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 앞에 동산 중앙에 큰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그 나무에 달린 열매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과일을 따먹기만 하면, 정녕 죽으리라.' 에덴 동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시기에 좋았더라.' 문제 있는 인생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시험이나 시련이나 연단이 닥쳐오면 이 시험은 개인이기 때문에 오는 것이지, 아마 신성한 교회 공동체는 그러한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도 교회가 성장하려고 하면, 시험이 옵니다. 교회가 성전 건축을 하고 난 후나 전에 꼭 시험이 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좀 열심히 기도하면, 교회가 평안하리라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교회는 목사님이 교회를 위해서 평강을 위해서 40일간 산에 가서 기도원에서 금식기도하고 돌아왔더니 이미 다른 목사님이 그 교회에 시무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교회도 역시 시험과 연단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시험을 만나든지 간에 우리가 어떤 자세로 임해야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답을 주고 있습니다. 즉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는 것입니다.
불평하고 원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쁘게 여겨야 그 시험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이겨서 기쁜 것이 아닙니다. 기뻐해야 이기는 것입니다. 시험을 만났다고 "죽었다! 망했다!"라며 야단법석을 떨면 이미 그것은 진 것입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시련을 기쁘게 여길 때 그 시험을 우리가 무난히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파도를 타는 사람은 큰 파도가 몰려올 때 오히려 기뻐하는 법입니다. 또 칼싸움을 하는 무사도 적수를 만나면 오히려 기뻐합니다. 시험을 만나셨습니까? 온전히 기쁘게 여기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어린 시절 학교 운동회 때 장애물 경기를 다 해 보셨을 것입니다. 얼마나 즐겁습니까? 때로는 뛰어서 넘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물 밑으로 기어서 통과해야 될 때도 있습니다. 잘못하면 무릎이 까집니다. 그래도 그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깔깔거리면서 모두가 재미있어 합니다. 때로는 밀가루 속에 숨겨져 있는 사탕을 입에 물기 위해서 손을 뒷짐지고 얼굴을 그 속에 쳐 박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온 얼굴에 밀가루 범벅이 되지만, 그래도 그저 즐겁습니다. 시험을 만날 때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씩 통과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우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끝까지 기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중도에서 좌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시험을 당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두 가지 상반되는 반응이 있습니다. 하나는 부정적인 반응이 있습니다. 일단 시험을 당하면 실망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체념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도 은연중에 부담을 주고, 주변 사람들 역시 자신처럼 부정적이 되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또 하나는 긍정적인 반응입니다. 시험이 크면 클수록 더욱 강력한 도전의식으로 무장이 되어서 그 시험을 이기고 극복하려는 자세를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만난 이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가지신 계획이 무엇인지를 탐색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가 시험을 만나거든 기뻐해야 할 이유에 대해서 오늘 본문 3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이 말은 곧 시험이란 믿음의 합격 여부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학생들에게 있어서 시험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학생들은 시험을 싫어합니다. 시험을 좋아한다는 사람이 정상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학생들에게 있어서 시험은 학업의 성취도를 측정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본문에서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는 시련과 시험을 기뻐하는 태도로 대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질병, 사고, 고통, 슬픔, 실망, 고생, 죽음 등의 시련을 만날 때, 시험의 유혹을 만날 때, 우리가 기뻐할 수 있겠 니까? 시련이 우리가 가는 길에 닥칠 때, 우리는 절망하고 낙담하며 탄식하기 일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때 온전히 기뻐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기 때문(3)'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시련을 시쁘게 받을 수 있는 것은 그 시련이 성도들의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해주는 '인내'(휘포노네)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시련'(도키미온)이라는 말은 금, 은 등을 불 속에서 제련하여 순수한 것으로 만드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던 말로, 이는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의 목적이 성도들을 실족케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더욱 연단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고자 하는 것임을 뜻합니다.
시련들을 잘 극복할 때, 우리는 훨씬 더 강한 사람이 됩니다. 즉 더 견고하고, 더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 됩니다. 시련과 시험에 맞서 싸울 때, 우리는 우리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참으로 생생한 증인이 됩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임재와 능력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그분이 실제로 우리의 마음속에 거하시며 우리에게 영생을 주심을 증거하게 됩니다. 시련은 인내의 힘을 길러주고 믿음의 능력, 확신을 가져다주고, 온전한 신앙 인격자가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2.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성도라 하면 믿음의 도리를 다해야 하는데 믿음의 도리중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구하는 일입니다. 즉 기도는 성도가 반드시 지켜야할 믿음의 도리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지혜를 얻는 방법의 유일한 길은 성도가 하나님께 탄원하고 기도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어리석은 자일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구하게 되면 지혜롭게 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지혜를 구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까?
행복과 불행은 삶의 지혜가 좌우합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살아날 모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들이 많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많은 시험들과 싸워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그러나 꼭 인내만이 우리의 시험을 이길 수만은 없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인내만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지혜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혜는 우리에게 늘 부족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그 부족한 부분을 하나님께 구하라고 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지혜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혜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소피아로 "인간의 사고나 지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노시스로 "인간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아는 인간의 지식"을 말합니다. 즉, 인간에게 주어진 인간 스스로의 삶의 지혜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은 소피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지혜를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지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잠 4:6)
이 말씀은 지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또한 의인화하여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지혜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골 1:9)
그리고 야고보서 3장 17절에는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궁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라고 하시어 하나님의 선한 성품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욥기서는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욥 28:28)라고 하여 주를 경외하는 것이 곧 지혜라고 하였습니다.
이렇듯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며,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선한 성품이며, 주를 경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우리에게 바른 믿음을 세워주기 위한 말씀의 책입니다. 곧, 바른 실천적 삶을 실행하는 믿음을 세워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는 이런 믿음의 삶을 이루기 위해 기도와 함께 해야 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로 하루의 삶을 시작하고 마쳐야 합니다.
기도의 삶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생명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기도와 함께 출발했고 기도와 함께 마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심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특별한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도 중요한 기도의 삶이 잘못되는 경우가 있다고 야고보는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기도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잘못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야고보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약4:2)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3)라고 했습니다. 기도가 생명 있고 능력 있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기도의 생활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의 목적이나 방법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야고보서 안에서 기도가 왜 필요한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기도가 필요한 것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부르면서 기도를 시작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기도함으로서 하나님과의 가족적인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적인 관계 안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하나님과 함께 나눔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꾸짖지 아니하시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5절) 이심을 말씀하였습니다. ‘고난당하는 자는 기도하고 즐거워하며 찬송하라’(5장 13절) 면서 하나님과 함께 기도로 나눌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심으로 하나님 앞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 가운데 함께 즐거워하시고 기뻐하시며, 우리의 아픔과 염려에 함께 아파하시기도 하시고 함께 염려해 주시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하나님께 구함으로 해결 받는 것임을 말씀하였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문제와 삶의 과제를 해결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시험을 깨닫고 극복하기위한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며 기도하라(1:5)고 하였습니다. 병든 자를 위해서도 기도하라면서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라”(약5:15)고 하였습니다.
야고보는 기도가 하나님과 함께하며 하나님께 구함으로 받을 뿐 아니라, 행함을 드러내는 믿음을 구현하게 해 주는 것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기도는 믿는 바를 실행하게 해줍니다. 야고보는 성도가 서로 다투는 것을 보며 기도할 것을 말씀(4장2절) 하였습니다. 온전한 성도로의 성숙함은 기도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믿는바 대로 실행하는 믿음은 기도함으로 이루어 갈수 있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믿는 바를 실행하는 행함을 이루도록 기도해야 할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믿음의 도리인줄 아는 성도가 되어서 하나님께 열심을 다하여 기도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두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우리가 하나님께 모든 상황에서, 어떤 문제를 구한다고 할지라도 듣고 응답하시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기도할 때 의심하는 기도는 듣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기도응답의 조건은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야고보가 의심하는 자를 설명하면서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설명하였습니다. 바다는 바람의 영향을 받아 움직입니다. 이와 같이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아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을 의심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충격을 받으면 어느 길로 가야할 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때에 흔들리며 결정을 못내리는 사람을 가리켜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왜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였을까요? 이것은 외부적인 시험이 찾아올 때 하나님을 유일한 소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마음이 흔들려 세상과 하나님 양쪽을 기웃거리는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는 하나님을 향하지만, 또 어떤 상황에서는 세상을 향합니다. 세상에 기대를 가지는 것과 하나님께 기대를 가지는 것 사이에 갈등하는 것을 가리켜 의심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의심하는 자는 기도응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 응답의 조건은 하나님에 대하여 의심하지 말고 약속하신 대로 이루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에는 큰 능력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의심에도 큰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에는 하나님이 역사 하시고 의심에는 사탄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자기의 부족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하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채워주신다고 하였습니다. 반대로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고 하였습니다. 의심하는 자의 삶에는 풍랑이 심합니다. 때로 그 요동하는 물결에 빠지어 허우적이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기도할 때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는 두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세상을 향한 마음입니다. 혹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두 마음을 품고 하나님과 우상,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입술로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마음으로는 돈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하면서, 집에서는 조상에게 제사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 세상의 것을 더 의지하고 있습니다.
천국의 소망을 두고 산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보물을 쌓기보다는, 세상에 보물을 쌓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잘 살수록 하나님의 교회보다는 자신의 집을 세우는 데만 온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생활의 여유가 있을수록 하나님을 아름답게 하기보다는 자신을 아름답게 하는데 관심이 갖고 살아 갑니다.
이것이 바로 풍요와 번영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앞으로 잘 살고, 번성하면 할수록 더욱 두 마음을 품고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두마음을 품고 신앙생활해도 무방하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다 잘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두 마음을 품지 않고 하나님만 섬기는 한 마음을 품는 것이 믿음의 도리인줄 아시고 믿음의 도리를 다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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