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1장 9 - 11절(개역개정)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부활의 생명과 능력이 우리에게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설교 역시 사도신경의 순서에 따라서 주님의 승천과 하늘보좌에 앉으심에 대한 고백입니다. 본문에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의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이 보는 곳에서 승천하신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려져 가셨습니다. 주님의 승천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믿는 자의 휴거 즉 공중으로 끌려올라가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주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하늘로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성경 살전 4:16,17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하늘에서 세 가지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입니다. 그 소리와 함께 주님께서 재림하시는데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일어납니다. 첫째 부활입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믿음의 사람들이 부활한 사람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갑니다. 그리고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주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후 구름이 가려서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때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니 남자처럼 보이는 두 천사가 그들 곁에 서서 그들에게 말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승천하신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승천하셔서 지금 어디에 계실까요? 성경 히브리서에서는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히 8:1)라고 말씀합니다. 하늘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데 예수님은 그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오늘 설교의 초점은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는 주님이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입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은 대표적으로 4가지 일이 있습니다.
1. 우리가 거할 처소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성경 요 14:1-3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주님은 천국에 가셔서 우리의 거처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거처가 준비되면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죽음은 천국 가는 과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죽음의 슬픔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어린 아이들에게 설교를 하시다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죽어서 천국을 가는데 너희들은 나중에 죽어서 천국을 가고 싶으냐? 아니면 지옥을 가고 싶으냐?”라고 묻자 모든 아이들이 일제히 손을 들고서 “천국을 가고 싶어요!”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너무나 기쁜 마음에 목사님께서 또 다른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럼, 너희가 천국을 갈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라고 묻자 한 아이가 번쩍 손을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속으로 틀림없이 이 아이가 “예수님을 믿어야 되요!”라고 말할 것을 기대하면서 그 아이에게 답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자신 있게 손을 든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렇게 크게 말했다고 합니다. “네,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해요!” 맞는 말인데 굉장히 웃긴 말입니다. 맞습니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죽음은 이런 의미로 보면 슬픔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우리가 작은 집에 살다가 큰 집으로 이사를 해도 기쁜데 영원한 천국으로 이사를 가는 것이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우리는 믿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임종에 관한 간증을 종종 듣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이 일반인들과 다른 것은 내세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어느 여집사님이 친정아버지를 떠나보내고, 1년 후에 시아버지를 병으로 떠나보냈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난 뒤 집사님께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셨습니다. “1년을 사이에 두고 두 아버지를 떠나보냈습니다. 1년 전에는 친정아버지를, 그리고 올해에는 시아버지를 떠나보냈습니다. 그런데, 두 아버지의 이 세상에서의 삶이 극명하게 차이가 났듯이, 죽음 앞에선 두 아버지의 삶 역시 너무나도 차이가 났습니다. 친정아버지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순간까지 삶에 대한 애착을 불태우며 모든 의료적인 시도들을 하게 하시며 하루라도 더 살려고 갖은 수를 다 쓰셨습니다. 그리고 내일이면 곧 병상에서 일어나서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재산들을 다시 관리하겠노라고 장담하셨습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았기에 도저히 놓고 가실수가 없으셨나 봅니다. 그래서 바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어디에 돈이 얼마 있고, 누구에게 얼마 빌려주었는지 집안 식구들 누구에게도 심지어 어머니에게조차 가르쳐주시기를 거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두고 홀로 가셨습니다. 친정아버지께서 떠나신 뒤 세금을 어떻게 내고, 재산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를 몰라 가족들이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릅니다. 남아있는 사람에 대한 일말의 배려도 없이 가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도 안타까웠습니다. 그 후 1년 뒤 일흔이 넘으신 시아버지를 떠나보내면서 ‘참 다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흔 중반을 넘기신 나이에 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으신 뒤 시아버님의 충격이 컸을 법도 한 대, 시아버님께서는 외손주를 비롯한 모든 가족들을 불러 모으신 뒤, 비록 가난하게 사셔서 얼마의 돈 밖에 없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에 얼마 있는 것은 누구에게, 어디 것은 누구에게 주라고 하시며 교통 정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남아계신 어머님에게도 죄송하다는 말씀과 더불어 감사하다는 말씀을 잊지 않으시며, 온 가족들을 향해 ‘첫째도 믿음, 둘째도 믿음, 셋째도 믿음이다.’라는 말씀을 남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양육과 외부활동으로 인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을 보내던 제게도 ‘아가~ 일도 좋지만, 건강이 더 중요하단다.’라는 따뜻한 말씀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시아버님께서는 밝은 미소를 머금은 채 아버님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너무나도 극명하게 비교되는 이 두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보며 저는 ‘아, 이게 바로 믿음의 힘이구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데반은 죽음을 앞두고도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밝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천국에 대한 확신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금 하늘에서 우리의 거처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2.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하십니다. 성경 롬 8:34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기도의 힘은 놀랍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능력의 천사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도와주게 하십니다. 중보기도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기도는 여기서 하지만 역사는 거기서 일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중보기도의 능력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하다가 아말렉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군사들을 이끌고 전쟁터로 나갔고 모세는 아론과 훌을 데리고 산으로 기도하러 갔습니다. 모세가 산 위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니 산 아래 전투현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힘이 빠져서 기도하던 손을 내리니 아멜렉이 이깁니다. 신기하게도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가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던 아론과 훌이 모세를 앉히고 좌우에서 모세의 팔을 붙들어줍니다. 모세의 손이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승기를 잡게 되고 결국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했습니다. 이 아말렉과의 전쟁이 우리들에게 가르쳐주는 진리는 중보기도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중보자들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기도가 향하고 있는 그곳에서 역사해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중보기도는 위력이 있습니다. 더딘 것 같으나 반드시 응답되며 때가 되면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 저는 이 나라가 이만큼 되어진 것이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하거나 나라에 자원이 많아서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역사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대표기도를 합니다. 대표기도하는 시간에 모든 성도들이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기도를 하는데 그 때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해주시는 것입니다. 또 새벽기도나 철야기도를 하는 사람들도 늘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 하나하나를 다 들으시고 응답하셔서 이 나라를 든든하게 새워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번에 국회의원후보자 가운데 노원갑에 출마한 0후보는 기독교를 척결대상이다. 범죄집단이라고 막말을 하는데 그 어리석은 사람이 영적인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막말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 아들이고 신학교를 나왔어도 영적인 것은 열리지 않으면 모르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척결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이 감사해야 할 대상입니다. 기독교가 있기에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이만큼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불안한 나라입니까? 북한은 틈만나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리겠다고 하고 중국은 이어도가 자기들 땅이라고 하고 일본은 독도가 자기들 땅이라고 합니다. 가진 것도 별로 없고 인구도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나라가 계속해서 발전하는 것은 이 나라에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때문입니다. 서울을 방문했던 앤드루 영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이분은 흑인 최초로 유엔대표부 미국대사를 지냈고 애틀랜타 시장도 지낸 분입니다. 이분이 애틀랜타 시장으로 재직 중이던 1996년 올림픽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애틀랜타는 날씨는 무덥고 사회간접시설도 제대로 구축되지 않았기 때문에 올림픽을 무난히 치를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답니다. 그러던 중 마침 88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을 지낸 박세직 집사님을 만났답니다. 그분은 박세직 집사님에게 “어떻게 해서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었나요?” 질문했습니다. 박세직 집사님은 “저희에게도 북한 테러 위협, 대회기간인 9월17일∼10월2일에 장대비가 올 것이라는 일기 예보 등 난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만 한국 교회의 중보기도로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라고 답해주었습니다. 앤드루 영 시장은 박세직 집사님의 대답에 감동을 받아서 즉시 애틀랜타의 모든 교회에 올림픽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호소했고 애틀랜타 교회들은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대회 직전 며칠 동안 비가 흠뻑 쏟아져 대지를 식혀주었고 애틀랜타올림픽을 � 별坪岵막�끝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중보기도의 힘입니다. 사람의 중보기도에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풍성한 열매를 주시는데 우리 주님이 직접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시니 우리는 얼마나 든든합니까? 우리는 주님의 중보기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겸손하고 또 담대하게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제가 부흥회를 나가서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은혜를 많이 받습니다. 어떤 때는 저도 놀랄 정도로 은혜를 받습니다. 저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제게 능력이 있어서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부족한데 저를 위해서 늘 기도해주시는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저를 위해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간구하시는 주님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믿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살기에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도움이 있기에 담대하기를 바랍니다.
3. 주를 위하여 사는 자들을 격려하고 계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격려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목사도 사람이기에 격려가 필요하고 격려를 받으면 새 힘이 납니다. 영국에 설교를 잘 하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분이 낙심에 빠졌습니다. 공원에 나가 ‘이제는 다 그만 둬야겠어’하며 괴로워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여자가 지나가며 “아, 목사님이시군요. 제가 목사님 설교 때문에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지 아십니까?”하는 겁니다. 그 목사님은 자서전에서 그 때의 일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 앞에서 안개가 걷히고 태양이 비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무한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새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목사님 설교 듣고 은혜 받았다는 그 한마디에 격려를 받고 헤매던 목사가 일어난 겁니다. 우리 주변에는 낙심 중에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절망의 늪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격려하므로 일으켜 세워줘야 합니다. 성경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설교하던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 이를 가는데 스데반은 영적인 눈이 열려서 하늘을 보게 됩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보좌에 앉아계시던 주님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갈 때 벌떡 일어나셔서 스데반을 격려하셨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주님의 응원을 받으며 순교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격려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격려를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내면에 안정감이 있고 더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격려를 받으며 자란 사람은 그 격려를 통해서 에너지를 공급 받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뛰어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한 아이는 또래보다 성장이 늦어서 11살이 되어서야 겨우 글씨를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가 무슨 글을 써 놓으면 사람들이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언제나 그를 위로하며 격려해 주었습니다. “아들아, 너는 아직 꽃봉오리가 맺히지 않아서 그래. 때가 되면 너의 꽃봉오리가 맺혀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될 거야. 낙심하지 말고 자꾸 글을 써 보아라.” 그 아이가 바로 위대한 작가 안데르센입니다. 어머니의 격려로 그가 그렇게 위대한 작가가 된 것입니다. 격려는 에너지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응원하십니다. 우리들을 격려하십니다. 저는 간혹 낙심이 되어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기도하다가 주님이 주시는 격려를 받고 힘을 얻어서 일어나곤 합니다. 기도하는 시간에 주님은 저를 위로하시고 저를 격려하시면서 용기를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격려를 받으십시오. 우리가 예배를 드리거나 기도를 하는 시간은 주님에게 영광이 되기도 하지만 우리 자신에게도 큰 유익이 됩니다. 특히 지치고 힘이 빠지고 낙심이 될 때 주님 앞에 나와서 중심을 드리면 주님은 우리를 격려하셔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미국 보스턴 지역에서 골든 목사라고 하면 유명한 설교가이며, 능력 있는 말씀의 사도로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큰 교회의 담임목사였기 때문에 설교하는 데에만도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어느 날, 설교 준비를 하다가 피곤하여 의자에 앉은 채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꿈속에서 그는 주일에 의자가 모자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교인들 가운데 30세 정도의 낯선 사람에게 왠지 모르게 시선이 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배가 끝난 후 그 사람을 만나보고자 했습니다. 교인들이 목사님과 인사를 나누고 교회 밖으로 나갔는데,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안내위원들에게 물어보니 그분은 예수라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라고 하는 바람에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이후로 골든 목사님은 회중 가운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앉아계신다고 믿고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교인들도 예배 때마다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 계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위로자 예수, 격려자 예수님께서 우리의 예배시간에 함께 하십니다. 예배를 통해서 주님을 만나시고 위로 받고 격려 받고 새 힘을 얻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4. 세상 역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성경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사도요한이 하늘에 올라가서 하늘에서 드리는 예배를 목격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5장을 보면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는데 일곱 인으로 봉하여졌습니다. 그것이 떼어져야 역사가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요한이 보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천상천하에 인류의 역사를 주관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사도요한이 크게 울었습니다. 그러자 장로 중에 하나가 사도요한에게 말합니다.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여기서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고 그분이 그 일곱인을 떼신다고 했는데 그가 누구입니까?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요한이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고 말합니다. 그 어린 양 되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두루마리를 받으십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6장부터 어린 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인봉을 떼십니다. 사도요한이 목격한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인봉을 떼시는 것은 그분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롬 11:36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만물이 주님으로 인하여 시작 되었습니다. 그리고 만물이 주님으로 인하여 움직입니다. 또 만물이 주님에게로 돌아갑니다. 우주의 출발과 유지와 마무리가 주님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아기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고통이었지만 결국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께서 아름다운 결과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한나에게서 사무엘이 태어나게 하셔서 한나의 원수인 브닌나 앞에서 한나를 높여주셨습니다. 한나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응답 받은 삼상 1장을 보면 태의 문을 막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 태의 문을 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삼상 1:5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하나님께서 한나의 태의 문을 닫아두신 것입니다. 삼상 1:19,20입니다.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20 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한나가 임신하게 하신 분도 역시 하나님이셨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낳은 후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삼상 2장에 보면 한나의 기도가 나옵니다. 그 기도의 포인트는 6,7절입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이게 무슨 고백입니까? 모든 것의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주시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고 자식을 낳지 못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도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도 하나님의 손에 있으며 부하게 되고 가난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낳을 수 없었던 사무엘을 얻게 된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한나는 아들을 낳고 이름을 사무엘이라 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름을 지을 때 크게 세 가지 원칙을 따라서 짓습니다. 하나는 현실의 투영입니다. 아기를 낳을 때 그 때의 형편을 그대로 이름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대상 4장에 나오는 야베스의 기도로 유명한 야베스입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의 뜻은 ‘슬픔, 고통’입니다. 그의 이름을 어머니가 지은 것을 보니 유복자로 태어났을 것입니다. 야베스가 태어날 때 너무나 힘든 상황에서 낳았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가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앞으로 되어질 일에 대한 예언적인 성격의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태어나실 때 천사는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적 성격의 이름입니다. 또 하나는 신앙고백적 이름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사무엘입니다. 한나가 아들을 낳고 사무엘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삼상 1:20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한나가 아기의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한 이유는 자기가 하나님께 구했더니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으로 사무엘을 주셨다는 신앙고백입니다. 한나의 고백을 보면서 우리는 모든 주권이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주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도록 힘을 써야겠습니다. 그분 마음에 들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그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든 것이 막히게 됩니다. 제가 군대생활을 할 때 저희 부대에는 1년에 한번 위문품과 위문편지가 왔습니다. 부대에 도착한 위문품과 위문편지는 각 소대별로 나눠줍니다. 위문품에는 다양한 선물이 오는데 비누나 치약도 많고 화장품이나 비싼 면도기 등도 있습니다.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이 비싼 면도기이고 가장 인기가 없는 것이 럭키치약이나 다이얼비누였습니다. 위문편지는 초등학생이 보낸 편지부터 중학생, 고등학생들이 보낸 편지가 오는데 가장 인기가 있는 편지는 여고생이 보낸 편지였습니다. 여고생의 편지를 받은 병사는 굉장히 좋아하고 관물대 속에 고이 간직했다가 읽고 또 읽습니다. 가장 인기 없는 편지는 나이를 불문하고 남학생들이 보낸 편지였습니다. 남학생들이 보낸 편지는 주로 방한화 밑바닥에 깔창으로 사용했습니다. 위문품과 위문편지를 분배하는 것은 내무반장의 주권입니다. 고참들이야 자기가 원하는 것을 좀 골라서 받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병사들은 내무반장이 주는 대로 받아야 합니다. 내무반장은 평소에 자기에게 잘못 보인 병사들에게는 위문품봉지에 다이알 비누나 럭키 치약을 잔뜩 넣어서 줍니다. 그건 받으나 마나입니다! . 왜냐하면 부대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나오는 보급품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위문편지는 무조건 남학생이 보내준 것만 줍니다. 그러니 평소에 내무반장에게 잘못보인 병사는 위문품이나 위문편지는 오나마나입니다. 기분만 상합니다. 그런데 평상시에 내무반장 마음에 들었던 병사는 그날이 잔치 날입니다. 위문품 봉지에 고급 면도기가 들어있고, 스킨과 로션이 세트로 들어있는 화장품도 받고, 위문편지는 예쁜 꽃그림이 그려진 여학생의 편지를 받게 됩니다. 그렇게 받고 나면 그날 그 병사의 기분은 그야말로 띵호야입니다. 잠 10:22입니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살아야 합니다. 모든 주권이 주님에게 있습니다. 축복과 저주의 권한도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시고 다윗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합한 사람이 되십시오. 그래서 주의 축복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는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시는 일을 살펴봤습니다. 주님은 하늘에서 우리가 거할 처소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하십니다. 또 우리를 격려하며, 세상 역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