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들!! 제자들!!

[스크랩] 구약 예언자 이해

하나님아들 2018. 12. 21. 21:47

 




구약 예언자 이해


 

 글쓴이: 김문영


1. 들어가는 말

구약에 나타나는 중재자(예언자)의 명칭은 “나비”이다. 이 명칭은 다양한 명사형으로 에브라임 문한에 200여 회 이상 나타나는데, 그 대다수는 신명기 역사서와 예레미야서에서 나온다. 이에 반하여, 에브라임 전승 외에서는 바빌론 포로 이전의 예언적 문헌에 약 30회 가량만 나타나고, 그 중에 17회는 에스겔서에 나오는데 이 책 역시 에브라임의 다른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 호칭은 포로기 이후의 문헌에 산발적으로 나타나고, 열왕기서에서 인용한 구절에 몇 번 나오기는 하지만, 특히 역대기에서 많이 사용된다. 이러한 수치는 나비라는 호칭을 에브라임 전승만이 사용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호칭에 예언에 대한 그 전승의 견해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시사하여 준다.



불행하게도 나비라는 호칭 자체는 이 호칭이 붙여진 인물들의 특징에 대하여 거의 알려주는 바가 없다. 이 호칭은 성서 밖에서 사용된 예가 드물기 때문에 그 용례도 그 의미를 연구하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으며 나비라는 단어 자체의 어원도 불확실하다. 나비는 아마도 “부르다, 알리다, 명명하다”라는 뜻을 가진, 아카디아어 동사인 나부와 연관된 것 같으나, 그 어형이 능동적인 의미를 가졌는지 수동적인 의미를 가졌는지는 불확실하다. 그런데 아카디아어 자료에 의하면 수동형의 해석을 지지하는 듯하다.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이면 이 명칭은 ‘부름을 받은 자’를 언급하는 것일 것이다. 만약에 아카디아어와 히브리어 명사인 나비가 연관이 있다면 이 예언자의 호칭도 또한 부름 받은 자를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구약성서에서 흔히 사용되는 히브리 명사의 기초가 되는 언근의 원래의 의미를 확실하게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것을 B.C. 1천년기 중기의 예언자에 대한 기본적인 관념의 결정적인 증거로 취할 수 있을 것인가?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흔한 말들은 어원학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비록 어원이 밝혀진다 하더라도 그러한 단어들은 적어도 그 어원만큼이나 중요한 의미 있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것은 예언자라는 단어의 역사이다.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의 공동체 안에서 등장하였고 역할을 했던 예언자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2. 예언자의 특성

예언자들의 결정적인 체험은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하라는 소명이었다. 이사야 6장의 이사야의 극적인 소명은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소명과 비슷하다. 아모스의 경우는 특별히 흥미로운데,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을 예언자로부터 특별히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이때까지도 왕과 연관을 맺고 있었던 직업적 예언자들의 무리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그의 무리들 가운데서 택하셔서 “가서 이스라엘에게 말하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언자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에 대해 생기 있고 살아 있는 의식을 갖도록 해준 하나님과의 인격적 체험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 체험은 그들로 하여금 그 당시의 관습들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교리나 새로운 윤리를 선포하려고 애썼던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삶속에 하나님의 엄위에 대한 새로운 의식을 일으키려고 애썼던 것이다. 비록 환상이 이 예언자들의 공통점이긴 했지만 그들의 주된 도구는 말씀, 즉 기록된 말씀과 구두로 전해진 말씀의 양자 모두였던 것이다. 그들이 그들의 세계 속에 소개했던 하나님의 말씀은 근본적으로 상황을 변화시켰다. 예레미야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위를 부수는 방망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말을 하시면 그 말은 결코 헛되이 도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예언자들이 전하는 이 메시지는 이스라엘이 그들과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를 보증한다고 믿고 있었던 모든 제도들, 왕정 제도뿐 아니라 직업적 예언자들과 심지어 제사조차도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사에 대한 강한 정죄는 예언과 제사 사이의 관계에 특히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몇몇 학자들은 예언을 제사적 예배 자체의 일부로 간주한다. 그러나 비록 예언자가 때로는 예배 장소에서 발견될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그들이 특별한 소명 때문에 독립적인 존재들이었고 따라서 자유롭게 그들이 본 잘못을 비평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언서에서 발견하게 되는 제사적 예배의 강한 거부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들은 제사를 없애고 그 대신에 좀 더 인격적이고 영적인 종교로 대치하려고 했던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신약적인 많은 것과 우리 자신의 종교적인 선입관을 가지고 구약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것이다. 예언자들이 고발했던 것은 제도들이 아니라 백성들이 이 제도들을 가지고 행했던 일이었다. 백성들은 그들의 행위가 어떻든지 간에 이런 전승들이 그들로 하여금 분명히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해 줄 것이라고 믿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묶여 있으며 이런 가시적 전승들이 하나님의 은총의 담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예레미야의 무시무시한 말 속에 보면 선지자들과 제사장들 모두가 일을 거짓으로 처리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선전 자체도 일종의 물신이 되어 버렸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계속해서 악한 행위를 그치지 않았다. 이사야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허물진”백성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언자들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언자 이사야가 단순히 제사를 정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사야 1:16에서 볼 수가 있다. 그 곳에서 이사야는 그들의 도덕적 청결을 상징화하기 위해 사실상 의식적 청결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예언자들의 의도는 형식적 종교의 비판 그 차제보다 더 깊은 그 무엇에 있었다. 그들의 의도는 문제의 핵심에까지 직접 들어가는 것이었다. 종교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표현하는 그 무엇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종교는 인격적 결단과 전자아의 굴복을 요구하는 인격적 이해의 영역 안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종교는 도덕적 의의 생활을 그 결실로 맺어야만 했던 것이다. 아모스는 말한다.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찌로다.(암 5:23-24)”



3. 예언자와 정치

예언은 이스라엘에 처음 등장할 때부터 정치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그때, 예언자들의 무리는 불레셋과 싸우는 성전에 참여하도록 이스라엘사람들을 고무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는 방법으로 그들은 사람들을 격동시키는 군가를 신들린 듯이 부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때 이전의 카리스마적인 사사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열광적인 기운”에 도취되어 있었다. 이 열광이란 말도 글자대로의 뜻은 하나님께로부터 영감을 받는다는 뜻이다. 엘리야와 엘리사도 이스라엘 신앙을 그와 같이 격정적으로 옹호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스라엘의 병거이며 기마병”이라고 불려 졌었다.

그러나 초기의 예언자들은 성전의 열렬한 옹호자 그 이상이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은 특별한 상황을 위한 야훼의 말씀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방법으로 널리 인정된 것으로는 세 가지가 있다. 즉 꿈, 제사장들이 다루는 거룩한 주사위, 그리고 예언이 그것이다. 사무엘상 28:6에 보면 사울은 좌절상태에 빠져 있을 때 이 세 가지 방법을 모두 시도해 보았으나 아무런 대답을 얻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두 가지 타입의 종교적 지도자 즉, 예언자와 제사장 중에서 정치적 위기의 때에 야훼의 대변자로 적격자는 예언자였다. 제사장은 성례를 집행하고 백성들에게 과거의 전승을 가르치고, 거룩한 주사위를 놀려 긍정 부정을 정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었지만, 예언자는 야훼의 영의 영향을 받아 말하므로 사건의 의미를 해석하고 이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예언자의 무리가 서로 얽혀서 노래하고 뛰고 하는 동안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위기가 일어날 때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예언자의 무리로부터 탈퇴해서까지라도 독립하는 예언자의 수가 증가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이미 다윗의 시대에 예언자 나단은 단독으로 궁정에서 영향력 있는 위치에까지 올랐던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다윗과 맺으신 계약에 대한 그의 신탁은 이스라엘 생활과 사상에 영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동시에 그는 다윗왕한테, 권력의 악용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보라고 서슴지 않고 왕을 지고의 심판대 앞에 불러 낼 수도 있었다.

사울의 시대에 예언자의 열광적인 힘으로 불붙은 야훼께 대한 충성은 이스라엘을 결속시키는 힘이었다. 그러나 예언은 그와 같은 국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실로 큰 역할을 감당하기도 하지만, 위험의 요소 또한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본래의 열정과 자발성을 잃게 되면 쉽사리 직업적으로 타락할 수 있었다. 더욱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은 점차로 정치는 자신의 독점무대라고 느껴 제사장 직분을 국가의 사당에 매어 놓은 것처럼 “예언자의 아들들”을 자신의 수중에 놓고자 하였다. 이렇게 되자 예언이란 것은 국가주의의 좋이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이기 보다는 백성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을 자연히 지껄이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위대한 예언자들은 때때로 이와 같은 직업적 예언자들과 충동했으며, 특히 아모스는 자기가 그들과 동일시 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왕들이 예언자들의 외침을 잠잠케 하려고 애썼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4. 예언자와 청중

예언자들의 활동 범위는 광범위했다. 개인들은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을 찾아갔다. 이스라엘의 여러 왕들과 군사 지도자들은 이웃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쟁을 앞두고, 또는 전쟁기간 중에 예언자들의 자문을 구했다. 하지만 그러한 의논은 분명히 일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정치적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예언보다 현자의 충고에 의지했으며 이 사실은 두 전문가들 사이의 경쟁관계로 번질 경우도 있었다. 그 사회의 전반적인 관계에서 보면 예언의 말은 재난을 당했을 때 집단 금식에 대한 응답으로 나오기도 하여, 심판의 말로 그러한 금식을 유도할 수도 있었다.

예언자들이 정기적으로 예배의식에 참가했느냐 하는 의문도 나올 수 있다. 개인의 자격으로, 그리고 특히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그러했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고대의 의식은 그 진행이 엉성하여 귀를 기울이고 있는 청중들에게 온갖 사람들이 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사실 여기에는 특별한 하나님의 계시가 있기를 바라는 기대와 소망이 있었다. 예언자들은 물리적으로 왕의 상대가 되지 않았으나, 이스라엘의 논리에 따르면 그들은 여호와를 대표한다는 점에서 왕보다 높은 위치에 있었다. 예언자들은 나라 최고의 사법장관인 왕을 비판하는 권리를 가지고 행사했으며, 따라서 어떠한 형태의 사법적 조치도 받지 않았다. 근동의 다른 곳에서도 그러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성전을 건설하는 허가를 내릴 수도 있었고, 금기할 수도 있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나라 지도자들을 개별적 또는 집단적으로 규탄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중재하고 따르지 못했으며, 속죄물과 기타 보수를 받아들이기에 너무 열을 올렸다고 해서 공격을 받았다. 예언자들은 그들이 지켜야 할 규범을 어겼다는 이유로 비난을 당했다. 공격을 받은 다른 집단들로서는 속임수와 몰지각한 탐욕에 빠진 장사꾼들, 이기적이고 오만한 사치에 넋을 잃은 성내의 여인들이 있다. 비난하는 말을 악, 악함, 거짓 등의 일반적인 표현에 담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구체적인 죄의 목록은 대체로 율법과 지혜문학에 나오는 것과 같다. 다른 신을 경배하는 것, 우상숭배, 살인, 매음, 간통, 절도, 탐욕, 술취함, 빚에 대한 이자, 그리고 근친상간 등이 앞서 지적한 것에 추가된다.

예언자들에게 특별히 관심 있는 것 중에 군사 및 기타 인간 활동을 신뢰하는 것이 들어 있다. 우상숭배와 압제는 모두 신뢰의 방향이 빗나간 사례로 보고 있으며 간혹 다른 나라들이 무너지는 이유는 그들의 오만한 자신에서 찾고 있다. 원칙적으로 대적하는 백성은 유죄하다고 판정을 받는데,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국제적인 압제,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또는 다른 나라에 파괴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이 규탄의 원인이 된다. 이스라엘의 청중에게는 적국에 대항하는 신탁의 공세가 여호와에 대한 확신을 조성 지원하는 것이다. 비판적인 말과 약속의 말의 차이는 그들이 압제나 기타, 다른 형태의 악을 가하느냐, 아니면 그러한 것들로부터 구원을 요구하느냐 하는 청취자들의 처지에 크게 좌우된다.



5. 예언자의 메시지

문서 예언자들 이전의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들의 실제적인 메시지들은 전승되었으며, 그들의 짤막한 구원의 메시지는 삶 자체에 관한 걱정이 다시는 없을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일깨웠다. 예언자들의 메시지의 주된 내용은 백성들 가운데서 죄를 고발하는 것이었다. 훨씬 후대에 아모스가 북 왕국에서 사회적인 죄악을 공격하였던 반면에 호세아는 혼합주의와 배도를 책망하였다. 그 때에 남방 유다에서는 이사야가 외적인 종교와 부정을, 미가는 거짓 종교와 불평등을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죄는 항상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로우신 행위들을 배경으로 하여 지적되고 있었다. 특별히 언약 속에 표현되어 있는 이 하나님의 자비를 이스라엘은 일축하여 왔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어겼고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



호세와의 감동적인 비유적 표현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사야의 경우에 있어서 예언은 다윗의 언약의 영향을 받고 있다. 따라서 그는 “잠잠하고 신뢰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라고 백성들에게 요구한다. 이와 같이 그들은 자신들이 배척을 받는 것이 아니요 징계를 당하는 것으로 얘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희망은 메시야라는 인물에 그 초점이 놓여져 있었다. 이것이 후대 유대주의의 규범적인 메시야 사상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때때로 예언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길들을 고치려는 중요한 시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개혁이 히스기야 왕과 요시야 왕의 통치시대에 각기 일어났다. 전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미가의 설교가 영향을 끼쳤다. 비록 그 개혁이 단명에 그쳤을지라도 예언자들의 자극은 계속해서 그 열매를 거두었다.

예언자들의 실제 의도는 일차적으로 율법을 선포하고 개인과 국가의 죄를 공개적으로 묘사하는 데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시대 상황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지 않았으며 일차적으로 그들 자신의 역사적인 현실을 해석하는 자들, 곧 국가의 살아있는 양심도 아니었다. 아모스는 평화의 시기에 하나님과 국가 사이의 건강한 친교가 취소되었음을 선언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그의 설교의 나머지는 모두가 다 이 메시지 즉 이제까지 이스라엘에서 들려지지 않았던 바, 국가 전체에 대한 재난 선고를 발전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레미야는 구원을 설교하는 자들과는 반대로 은혜와 구원의 시기가 지나갔다고 선포했다.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의로운 심판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은 구속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데 있다. 이사야가 말하듯이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청결케 하기 위하여 자신의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심지어 진노중이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심판은 결코 기계적인 숙명으로 간주될 수는 없는 것이며, 심판은 항상 인격적인 관계의 상황에서의 실제적 인격의 표현인 것이다. 이 때문에 항상 하나님 안에는 희망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노를 한없이 품을 수가 없는 분이시다. 이와 같이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확실히 미래를 향한 살아 이는 소망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우리는 일찍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인근 국가에까지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경향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롯의 이야기는 구약에서 일찍이 그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며 후에 예언자 요나는 고전적인 본보기가 된 것이다. 여기에 궁극적으로 이방 도시 니네베에 대한 예언에 동의하기 전에, 하나님의 소명을 피해 도망치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 니네베 백성은 회개하였고, 요나의 분통이 터지게도 하나님은 그 성을 용서하셨다. 여기에 하나님의 크신 긍휼이 크게 나타나며,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소원이 명백히 나타난다. 비록 분명치는 못하나 어떤 방법을 통해서 예언자들은 모든 열방이 언젠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6. 나오는 말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특별에서 특별하게 인정된 직분에 속하여 있던 사람들이었다. 왕, 사사 그리고 제사장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예언자의 지위는 그들의 것과 같지 않았다. 왕이나 제사장은 세습적인 것이었지만, 반면 예언자는 세습적인 신분이 아니었다. 예언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임명이 되었고 그의 직임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왕, 제사장 그리고 사사는 세워진 법과 순서에 따라 행하였다. 하나님이 이와 같은 중재자 직분을 통하지 않고 직접 말씀하시고 원하실 때 항상 예언자를 택하셨다. 예언자는 신성한 주권자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자였다. 그의 주된 관심은 특별한 그 당시의 상활에 대해서 하나님의 메시지로 확신하고 있는 내용을 전달하는 데 있었다.



B.C. 9세기경 엘리야 시대에 많은 예언자들로 이스라엘이 넘치고 있었지만 참으로 선한 일을 행한 예언자는 그렇게 많지 않은 사실을 보게 된다. 주를 대신해서 말하는 다양한 예언 속에는 사실상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을 알지만 거짓 예언자의 문제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였다. 그리고 당시에는 이방 종교의 제사장이나 예언자들의 위협도 대단한 것이었다.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는 이 같은 과정을 극적으로 중단시키는 운동을 지휘하였으며, B.C. 6세기경 남북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정치적인 의미의 국가를 멸망시키려 하시며, 그 백성들을 열국 가운데 흩으실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예언하기를 하나님은 팔레스타인에 다시 그들을 회복시킬 것이며, 하나님의 왕국의 새롭고 영광스런 시대가 땅위에 시작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스라엘과 유대는 멸망을 당하고 그들의 백성들은 흩어지게 되었으나 예언자들의 말씀 없이는 아무도 그 참상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될 것이다.



모든 예언자들은 모세 아래에 있다. 모세가 그리스도의 모형인 것처럼 예언자 무리도 모세 아래 있는 집단이며 장차 올 위대한 예언자의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예언자들이 그들의 메시지에 대하여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그들은 다가오는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 말하였다.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여러 방법으로 이스라엘의 자녀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메시지가 전부 받아 들여졌을 때, 그들이 메시야 사역의 통일된 모습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죄악된 세계에 구속자의 오심을 알리셨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은 단순한 종교적 천재나 지도자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그들을 단지 그렇게만 생각하는 것은 그들을 완전히 오해하는 것이다. 그들의 메시지는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모든 예언의 말씀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이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 참고도서

 

 

최종진

이스라엘의 종교

소망사(1990)

김철현

예언자의 연구

이문출판사(1983)

홍반식

성경의 핵심교훈

교회교육연구원(1984)

류형기

성서대사전

한국기독교문화원(1980)

C. F. Fritsch

예언자의 세계(문익환 역)

기독교서회(1971)

C. F. Whitley

예언자들의 중심사상(양승애 역)

성바오로출판사(1982)

Robert. R. Wilson

고대이스라엘의 예언과 사회(최종진 역)

예찬사(1991)

J. Blenkinsopp

이스라엘 예언사(황승일 역)

은성사(1992)

G. H. Livingston

모세오경의 문화적 배경(김의원역)

기독교문서선교회(1992)

William Dyrness

주제별로 본 구약신학(김지찬 역)

생명의말씀사(1990)

B. W. Anderson

구약성서의 역사와 이해(이군호 역)

창학사(1984)

W. H. Schmidt

역사로본 구약신앙(강성열 역)

나눔사(1990)

George. L. Robinson

메시야 이전의 열두선지자(김남준 역)

겨자씨(1991)

G. E. 라이트, R. H. 홀러

하나님의 구원행동(김득중 역)

컨콜디아사(1984)

E. J. Young

선지자연구

기독교문서선교회(1991)

 

기독교대백과사전

교문사(1991)

 

성서대백과사전

성서교재간행사(1989)

 

그리스도교대사전

대한기독교서회(1981)

 

아가페성경사전

아가페출판사(1991)


 

    *위 글은 오래 전에 쓴 내용으로 원문은 다소 내용이 길기 때문에  간략히 일부만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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