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투구
에베소서 6:17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로마 병사의 투구는 아주 매력적입니다. 대단히 섬세하고 완벽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하나의 예술 작품 같았습니다. 정말 아름답다고 표현하면 맞을 것입니다. 투구를 쓰고 있는 로마 병사는 참으로 늠름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그 만큼 정교하고 화려한 것이 로마 병정들의 투구였습니다.
투구는 동으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얼굴의 광대뼈와 턱을 보호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고 특히 병사의 머리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투구 안에는 스폰지가 여러곂 덮혀 있어서 외부의 어떠한 충격에도 머리가 상하지 않고 끄떡 없었습니다. 또한 강한 동으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왠만한 손 망치나 손 도끼에는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강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궁금함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투구에 비유하였을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우리는 먼저 투구라는 원어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투구 또는 헬멧을 의미하는 헬라어 원어는 (페리케팔라이아)입니다. 그 뜻은 ‘머리 주변’(Around– Head)라는 뜻입니다. 로마 병사들은 왜 헬멧이 필요했을까요? 그 당시 상대 원수들은 작은 손도끼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따라서 헬멧을 쓰고 있지 않으면 적이 머리를 공격할 때 취약하게 됩니다. 만일 도끼에 약간만 머리를 맞아도 로마 병사는 쓰러지게 되고 그 머리는 잘려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 병사가 투구를 차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투구와 연결시킨 이유는 투구는 우리의 머리를 보호해 주는 점에서 구원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곧 구원과 “머리를 보호하는 것”과는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계시를 통해 구원을 지키는 것은 정확하게 우리의 머리를 보호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즉, 구원과 우리의 사고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일 구원의 투구를 쓰고 있지 않으면 적군은 우리의 머리를 잘라갈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가 잘려 나간다는 뜻은 우리의 생각이 다시 과거처럼 허망하여지고 하나님과 원수된 생각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과 별다르지 않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구원의 투구를 쓰지 않고 있다가 원수에게 머리 공격 당하면 그는 당장 어리석은 생각에 사로 잡혀 타락의 길을 걷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사랑하는 여러분!
머리가 잘려나간 군인을 상상해 보기 바랍니다. 머리가 잘려나간 군사의 모습은 아군에게 겁을 줄 것입니다. 낙심을 줄 것입니다. 그 흉칙함 때문에 사기가 떨어질 것입니다. 구약 시대 및 로마 시대 때는 전쟁 중에 적군을 목을 베어오는 것은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적을 모독하는 있어서 최고의 행위였습니다. 예를 들면, 다윗은 골리앗의 머리를 잘라 하늘에 듦으로써 블레셋의 사기를 떨어뜨렸습니다. 반면 블레셋도 사울 왕과 싸워 이겼을 때 자실한 사울왕의 머리를 베어 모든 블레셋 사람의 땅에 보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의 투구를 쓰고 다니지 않다가 영적 전쟁에 패배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도 비참을 당할 뿐만 아니라 같은 편인 아군에게 한없는 실망과 비참과 손해를 주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투구를 잃는다는 것은 성경적 생각이 다시 세상적 생각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생각이 바뀌게 되면 이는 더 이상 구원이 가능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성경적으로 ‘배교’라고 합니다. 복음을 변질시키더니 복음을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죄라고 선포한 것을 옳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배교의 생각으로 바뀌어져 버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적군에게 머리가 잘린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결과는 구원의 투구를 착용하지 않은 교회 및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모습인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종말이 다가올수록 구원의 투구를 쓰지 않는 성도들이 사탄의 궤계와 간계와 궤휼에 속아 넘어갈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속아 넘아가는 과정에는 기독교의 사상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즉, 교리를 바꾸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적인 교리에 뭔가를 빼거나 추가하는 교리를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비성경적이고 나아가 반(against)성경적인 비진리를 진리로 외치게 되어 있습니다. 작년에 미국의 가장 큰 장로 교단인 미국장로교(PCUSA)는 동성 연애가 죄가 아니라고 결정하였습니다. 그 전에는 여성 안수는 성경적으로 합법하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 전에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교단은 계속 사상이 바뀌어 왔습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기독교는 종교 다원화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모든 종교에 진심만 있으면 구원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편, 피터 와그너를 중심으로 하는 신사도 및 아이합, 그리고 토론토 블레싱 등은 어떤 신비체험 및 예언을 해야 구원의 보장이 있다는 체험주의 및 예언주의, 은사주의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바로 구원의 투구를 잃은 것으로서 사상의 변화, 즉 교리의 변화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한결 같이 성경에서 조금씩 벗어나다가 나중에는 성경에 반대되는 가르침을 공식적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탄은 사람들의 생각과 그 체계를 공격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의 이성을 공격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라도 미혹하려고 우는 사자처럼 다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구원을 얻게 되면 제일 먼저 변하는 것은 지적 이해입니다. 즉, 우리의 생각하는 사고가 바뀌는 것입니다. 소위 “How to Think”가 바뀌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주님을 만날수록 우리의 생각은 비블리컬하게 바뀝니다. 물론 감정도 구원과 관계가 깊습니다. 그러나 감정은 수시로 변합니다. 뜨겁기도 했다가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우리의 의지도 구원과 관련되어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순종할 때가 있고 불순종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음과 함께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성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무엇이 진리이냐하는 객관적이고 공식적인 싸움과 연결됩니다.
믿음이란 믿음의 내용에 대한 싸움입니다. 처음에 성령에 의하여 믿음이 생기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과 구세주로 영접하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 분은 나를 위하여 십가가에서 내 죗값를 대신 치루셨으며 그분은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 받았음을 우리의 이성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를 구원 받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당연히 여기게 되며 노아 사건 및 홍해가 갈라진 사건을 성경의 말씀대로 진리로 받게 됩니다. 이처럼 구원을 받은 후 구원의 투구를 쓰고 있으면 그는 점점 바르게 생각할 줄 알게 됩니다. 모든 사물과 사건이 성경적으로 보이고 성경적으로 이해됩니다. 그는 소위 ‘성경적 사고’(Biblical Thinking)을 하는 것입니다. 이 현상이 거듭난 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투구를 내려 놓고 사탄의 공격을 받게 되면 그의 모든 이성이 다시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됩니다. 구원의 확신이 사라지고 그의 사고 방식이 무너집니다. 신사참배가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분별할 수 없게 됩니다. 종교 다원화를 가르치는 목사의 말이 옳다고 여겨집니다.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으니 함께 친하게 오고 가게 됩니다. 체험을 해야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하니 이곳 저곳 집회를 찾아다니며 예언을 받고 방언을 하고 거품을 물고 쓰러집니다. 이 즈음이 되면 그는 배교함으로 머리 잘린 패잔병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가 잘리고 나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라 볼 수 없습니다. 도리어 참 교회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징그럽고 끔찍한 머리 잘린 신자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다시 머리를 붙여주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의 머리는 사탄의 손도끼에 의해 이미 잘려 나갔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도끼로 머리 잘린 병사는 더 이상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부활은 단지 긍정적인 사고인 줄 압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보혈을 흘리셨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은 일종의 위대한 위인일 뿐 나와 매일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이나 친구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에도 별 관심이 없게 됩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존재마저도 다시 의심하게 됩니다. 이때 자신은 잘 모르지만 그는 이미 구원의 투구를 잃은 머리 잘린 병사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사단과 관련하여 ‘속인다’는 뜻은 거짓 가르침과 관계합니다.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 2:11).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고후 11:13). 여기서 ‘계책’이라는 단어는 사단이 그리스도인들을 속일 때 우리의 ‘생각’에 어떤 거짓을 집어넣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귀가 하와를 속일 때도 마찬가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또한 거짓 선지자와 관련해서 속인다는 원어의 뜻은 물고기를 낚을 때 사용하는 ‘미끼’라는 뜻으로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비정상적인 교리를 갖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몇년 전 단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도마 복음등과 같은 영화나 소설등은 사탄이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투구를 벗기려는 노골적인 공격이었습니다. 마치 객관적 증거가 있는 것처럼 ‘미끼’를 준비하고 사람들의 생각을 붙들어 구원의 투구를 쓰지 못하게 만드는 계책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만일 구원의 투구를 쓰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면 사탄의 미끼에 걸려 목이 잘려 나갔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 10:4-6). 이 구절은 마귀의 역사를 선명하게 보여주는데 ‘견고한 진’이라고 표현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견고한 진의 특성을 “모든 이론”,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 “모든 생각”이라고 풀어 놓았습니다. 여기서 ‘견고한 진’은 사탄이 쌓은 진을 말합니다. ‘진’의 뜻은 ‘아무도 나가거나 들어가지 못하는 꽉 막힌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사탄이 그의 계책과 미끼를 사용하여 사람들의 생각을 쇠뇌시켜 놓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지금 이 세상은 마귀에게 철저하게 속아서 비논리적인 이론들이 그럴듯하게 진리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정신병자들이 세워놓은 엉터리 이론들이 진리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이론들과 지식들은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구원의 투구를 공격하는 마귀의 이론들과 지식들인 것입니다.
사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인간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사탄은 이를 막기 위해 혼미케 하는 작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즉, 사탄이 제일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것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그들의 마음을 최대한으로 혼미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영혼이 복음을 듣고 그의 영혼이 살게 되면 처음으로 변하는 것이 이성적 변화입니다. 사고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이 없던 사고 방식에서 하나님을 고려하는 사고 방식으로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이제 세상을 바로 보며 역사를 바로 보고 진리를 알게 됩니다. 점점 성경을 통하여 바른 지식을 소유하게 되면서 살아있는 진리를 체험하게 됩니다. 나아가 사탄의 정체도 알게 되니 사탄이 얼마나 큰일 날 지경입니까? 그러니 이 진리를 왜곡 시켜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사탄의 목적이요 이를 위해 계책과 미끼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속에서 사탄이 한 일은 여러 인본주의 종교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는 이방 종교들입니다. 불교, 유교, 도교, 힌두교, 밀곰, 바알, 아스다롯, 그리스 신화, 이슬람 등등의 세상 종교입니다. 그리고 여러 인본주의 철학 및 과학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진화론도 그러하고 모든 세상 철학이 그러합니다.
특히 끝없는 이단을 만들어내어 복음을 변조하고 개조하면서 교회를 혼미하게 만듭니다. 수십년 전부터 최근까지 사탄은 신학교를 공격하였습니다. 앞으로 더욱 신학교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곳이 엉터리가 되면 교회는 저절로 엉터리가 되는 것을 사탄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구원의 투구를 착용하지 않은 교만한 신학생 및 교수들을 공격하여 그들의 생각을 바꾸는데 성공했습니다. 현재 많은 신학교들이 성경의 절대 권위를 포기했습니다. 칼 바르트의 사상을 받아들여서 성경은 단지 신적 사상을 포함할 뿐이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 자체라는 주장은 우상 숭배로 일축 시켜 버렸습니다. 현재 수도 없이 많은 신학도들은 성경의 권위를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사탄은 이제는 성경에서 죄라고 정한 많은 것들에 대하여 하나의 문화적 삶의 스타일로 만들어 버리는데 성공했습니다. 동성 연애, 진화론, 접신, 세속주의에 대해 성경을 잃은 현대 교회는 무방비 상태입니다. 자유주의 신학, 기복주의 신학, 해방 신학, 여성 신학, 신정통 신학, 종교 다원화를 외치는 신학등이 그러합니다. 더우기 쇠뇌 방법, 뉴에이지, 요가 등으로 교회를 운영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따라서 교회 내에서 악령이 성령처럼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들의 신학을 통하여는 구원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는 성경적으로 볼 때 배교 현상이요, 고후 5장에서 보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적 지식에 편을 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탄에게 우리의 생각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반드시 구원의 투구를 써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구원 문제와 직결되며 우리의 자녀들, 그리고 이 땅의 교회의 구원 문제와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투구를 쓴다는 것은 지금 이 시대에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즉, 성경적 생각, 성령적 생각으로 나와 가정과 교회를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첫째, 복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확신을 성경을 통해 직접 확인하며 성령 안에서 가져야 합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
둘째, 하나님의 계시가 알려 주는 만큼 겸손하게 배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6-18).
셋째, 바른 지식이 없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른 지식을 좇지 않고 종교적 열심으로 하나님을 믿다가 멸망하였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반드시 바른 지식이 있어야 구원 얻는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넷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제하는 마음을 주셨음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 여기서 절제하는 마음이란 믿음 안에서 갖는 논리 체계를 말합니다. 바른 신학 및 성경적 사고를 뜻합니다. 성경의 말씀이 다 아멘으로 받아들여지면서 구원의 투구를 통하여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의식하면서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에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투구를 쓰고 있으면 성령의 생각을 따라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의 투구는 성령의 생각을 따르는 생각을 말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6). 그리고 이렇게 구원의 투구를 쓰고 살면서 시간이 지나면, 그는 지각을 사용하여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 5:13-14).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은 우리의 영혼의 구원이지만, 그 구원이 바른 지식으로 보호되지 않으면 구원의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지 못합니다. 나아가 마귀의 미끼에 속아서 마귀의 도구가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바른 지식이, 성경적인 생각이, 성경적인 세계관이 우리의 구원을 보호하며 그 구원이 이 땅에 우리의 삶을 통해 증거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합니다. 이때 우리는 구원의 확신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마음을 겸손하게 하고 우리의 구원의 투구를 반드시 쓰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며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맘껏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권면드립니다. 구원의 투구를 쓰고 있으려면 두 가지를 공부해야 하고 이를 위해 성령을 의지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첫째는, 개혁주의와 관련한 역사 속의 교리 문답을 반복하여 읽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벨직, 하이델베르그 고백등을 자주 읽어야 합니다. 또한 성경을 자주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바르게 읽기 위해 드흐라프의 <약속과 구원>을 추천합니다. 그리고 청교도 신학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신학적으로 최고봉을 이루었던 때입니다. 그러므로 청교도 신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그들의 책을 많이 읽기를 당부합니다. 스펄전, 조나단 에드워드 등 개혁주의의 거장들의 책들을 읽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원의 투구를 철저하게 쓰고 있으려면 우리에게는 반드시 ‘공부’와 ‘학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구원의 투구를 관리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물론 성경과 성령의 역사가 우리의 구원을 보호하고 지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구원의 투구를 착용하려는 개인적인 수고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마지막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에 구원의 투구를 항상 착용하여 영적으로 성숙한 하나님의 군사가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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