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창조 이야기
- 김정우 교수(총신대 신대원)
1968년 성탄절 자정 예배 때, 아폴로 8호를 타고간 프랭크 보만 (Frank A. Borman)은 무한한 우주 공간에서 창세기 첫 장의 첫 10절을 읽으며 우리에게 성탄 메시지를 주었다. 영원한 침묵과 어둠 속에 잠긴 우주에서 들려오는 태초의 천지 창조 이야기는 우리 모두를 전율케 하였다.
그로부터 약 3년 후인 1971년 2월 5일, 아폴로 15호의 선장인 에드가 미첼(Edgar Mitchell)은 달 나라에 가서, 성경전서를 담은 마이크로 필름을 땅에 묻었다. 그 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창세기 1:1을 16개의 언어로 번역하여 함께 묻었다고 한다(우리 말도 포함되었을까?).
사실 우리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성경 첫 장 첫 절을 읽고 들을 때마다 새롭게 감동을 느끼는 이유는 이 단어 속에 바빙크(B. Bavinck 1932)가 말한 바대로 “시간과 공간과 실체와 인과율”이라는 물리학의 4가지 기본 개념이 다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영블라드(R. Youngblood 22)가 간파한 바와 같이 “태초에 [시간] 하나님이 하늘과 [공간] 땅을 [물질] 창조하시니라 [인과율]”의 네 개념이 나타난다.
우리는 창조 이야기를 새롭게 들으며,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원래 무엇을 의미했는지 살피며,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 배우고자 한다.
본 장의 구조는 아래와 같다.
1.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 선언적 요약 (1:1)
2. 창조 직전의 혼돈과 공허 (1:2)
3. 창조 과정과 창조 사역 (1:3-31)
4. 창조 완성과 하나님의 안식 (2:1-3)
우리는 이 구조를 따라 창조 기사를 이해하며, 이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1:1)
앞 장에 제시된 창세기의 구조에서도 보았지만, 창세기에는 10개의 ‘대략’ 혹은 ‘사적’(톨러도트)이 있으며, 각 단락은 이 표제로 시작한다.
그러나 첫 장에는 이런 표제가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장은 창세기 전체의 서론으로서 10개의 톨러도트를 열어주는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구절은 천지 창조의 선언적 요약일 뿐 아니라 창세기 전체의 표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 표제 아래에 10개의 톨러도트가 뒤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10개의 톨러도트는 모두 천지창조의 후예들이 된다. 따라서 여러 역사 비평가들이 주장하는 바 1:1-2:4 상반절까지를 한 단락으로 보고, 2:4 상반절을 첫 창조 기사의 표제로 보는 입장은 인위적인 문서설의 기준으로서 이것은 창세기의 구조를 왜곡시키는 것이다.
창세기 1:1은 창조 기사 전체의 선언적인 요약이다. 히브리어로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일곱 마디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7이라는 완전 수를 통해 하나님 창조의 완전함을 담고 있다. 그렇지만, 이 일곱 마디가 담고 있는 내용은 (1) 태초에 (2) 하나님이 (3) 천지를 (4) 창조 하시니라는 네 가지이다.
이 네 가지 말씀이 모든 성경 내용의 근본이 된다. 또한 이 네 가지 말씀은 세 가지의 질문에 대한 답을 준다. 즉 이 세 가지 질문은 아래와 같다.
(1) 세상은 언제 어떻게 생겼는가?
(2) 누가 이 세상의 주인인가?
(3) 첫 창조는 오늘 우리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러므로 1:1은 창조주를 소개하며, 세상의 기원을 설명하고, 창조 질서와 구원사의 근본을 세우는 삼중적 목적을 가진다. 우리는 1:1에 담긴 네 가지 가르침을 하나씩 살펴보고자 한다.
1) ‘태초에’
성경은 ‘태초에’라는 심오한 말씀으로 시작한다.
‘태초에’라는 말씀은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내어준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4).
우리는 이 ‘태초’가 정확하게 언제인지 모른다. 성경 저자도 이 때가 언제인지를 내는 데 관심은 없다. 그는 천지가 창조된 한 순간을 기억하고 있지만, 연대에는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초에’라는 말씀은 창조의 역사성을 말해준다. 우리는 창조가 언제, 어떻게 다 이루어졌는지 모르지만, 시간이 생긴 한 순간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이 ‘태초에’는 어떤 추상적이거나 개념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실체가 아니며, 바로 역사의 시작이었다.
이 역사성은 창조의 사실성을 말해주며, 우리 신앙이 역사성과 사실성을 띠고 있음을 처음부터 강조해 준다. 우리 신앙의 모든 요소와 부분은 철저하게 역사적이다. 이 역사성이 우리의 신앙 개념에서 사라질 때, 우리의 신앙은 역사적 책임은 외면하고, 몸이 없는 영혼의 세계만을 찾는 가현설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요한 복음의 저자도 ‘태초에’로 자신의 복음을 시작한다. 요한은 창세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로고스로서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하셨으며, 또한 그 자신이 하나님이었다고 말한다(요 1:1).
2)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가 만물을 만들었기 때문에 소유하신다.
이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이방의 신들과 다른 분이다. 그는 천지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의인화시킨 어떤 가공의 존재가 아니며, 온 세상을 설계하시고 시공하시고 완공하신 건축자 같은 인격적 존재이시다. 그는 태초 이전에 스스로 계신 분이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루터는 “하나님은 미주알 고주알 케묻기 좋아하는 자들을 벌주기 위해 스위치를 만들고 계셨다”고 대답하였다.
이제 주님은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온 세상을 만드신다. 이 하나님은 세상으로부터 초월해 계시며, 자존하시고, 거룩하신 인격적 존재이다.
창세기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이 창조주 하나님은 족장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열국의 신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분이시다. 열국의 신들은 우상일 뿐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이것을 예레미야가 잘 말했다.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 하라”(10:11).
“만방의 모든 신은 헛 것이요 여호와께서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시 96:5)
창세기의 맥락을 넘어 오경의 맥락에서 보면, 이 창조주 하나님은 족장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바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시다.
창조주 하나님은 ‘얼굴 없는 신적 존재’가 아니다. 그는 족장을 부르시고, 자기 백성을 이집트에서 속량하시고,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시며,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분이다.
3) ‘천지를’
성경에서 천지는 단지 창공과 땅 만을 말하지 않는다. 히브리어에는 ‘우주’ (cosmos, universe)라는 말이 없기 때문에 ‘천지’는 ‘짜여진 우주’로서 모든 ‘만물’을 포함한다(전 11:5; 사 44:24; 렘 10:16; 요 1:3).
달리 말하자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나왔다(시 33:6; 히 11:3).
4) ‘창조하시니라’
‘창조하다’ (bara)는 동사는 두개의 특징을 가진다.
(1) 하나님이 항상 이 동사의 주어이며, 인간이나 그 어떤 신도 주어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 어떤 이방신도 창조자로 성경에서 소개되고 있지 않다.
우리는 가끔 “새 역사를 창조하자” 혹은 “새 나라를 창조하자”는 정치적인 슬로건을 내걸지만, 결코 인간은 창조할 수 없다. 인간은 ‘만들고’, ‘빚고’, ‘세울 수는 있지만’, ‘창조’는 하나님의 영역이다.
(2) 이 동사는 전치사나 목적격을 가지지 않는다. 즉 하나님은 그 어떤 기존하는 것을 수단으로 사용하여 ‘창조’하시지 않는다.
(3) 창조의 산물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인간(창 1:27)과 예기치 않은 새로운 것(민 16:30; 사 65:17)이다. 이 새로운 것으로 가끔 큰 물고기(창 1:21), 산(암 4:13), 동물(시 104:30)이 언급된다.
창조하다 (bara)라는 용어에 근거하여 볼 때 ‘무에서 유의 창조’라는 입장을 만들 수 없다. 예로서, 이스라엘의 창조(사 43:15)와 ‘새 마음의 창조’(시 51:10)에도 이 동사가 사용된다.
하나님께서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입장은 다른 구절에서 명시되고 암시된다(시 148:5; 잠 8:22-27).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용어는 막카비서에 가장 먼저 나타난다(마카비 2서 7:2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용어는 하나님의 활동을 묘사하는 데만 사용되며,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자유스러운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
일곱 개의 단어로 구성된 이 첫 절은 창조주와 창조의 역사성에 대해 명백한 선언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절은 선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다 (Westermann, 94).
시편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할 때,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Creator of heaven and earth)로 부른다. 이 고백이 창세기 1:1에서는 동사 문장으로 바뀌어졌다. 창세기의 첫 줄 자체가 찬양의 외침일 뿐 아니라, 창세기 1장 전체가 찬양인 것이다.
2. 창조 전의 혼돈과 공허 (1:2)
1:2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땅을 준비하시기 전의 땅의 상태를 묘사한다.
‘그리고 땅은’이란 절은 분절 접속사절로서 3절의 주절을 이끄는 상황절이다. 따라서 2절은 3절에 있는 첫 창조 명령 직전의 땅의 상태를 묘사해 준다.
이와 유사한 구문 구조가 3:1과 4:1에도 나타난다. 1:2은 현재 우리가 사는 땅이 나타나기 전의 상태를 삼중적으로 묘사한다. 그 중 두 가지는 부정적이며, 하나는 긍정적이다.
(1)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2)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3)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신다.”
첫 두 가지는 부정적인 상황이며, 세 번째는 긍정적 상황을 보여준다.
1)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혼돈과 공허’는 히브리어로 ‘토후 와보후’(tohu wabohu)로서 아주 아름다운 시어이다. 이 단어는 ‘황량하고 텅빈’(waste and void) 상태를 말하는 중언법(hendiadys)이다.
‘황량함’은 ‘무’(사29:21), 혹은 여기에서처럼 ‘무질서, 혼돈’의 두 가지 개념을 갖는다. 그렇지만 성경의 ‘혼돈’(tohu)은 우리가 생각하는 ‘마구 헝클어진’ 상태나 ‘혼잡한 물질 덩어리’ 상태가 아니라, 길 없는 사막이나 문명 이전의 상태를 가리킨다.
신명기 32장에서 이 단어는 이스라엘이 광야를 통과하던 시간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신명기 32장10절; 욥 6:18).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면, 땅은 ‘거주할 수 없는 곳’(토후)이 되며, 백성은 포로로 잡혀간다(렘 4:23-26).
포로로 잡혀간 후 땅은 창조 이전의 상태로 묘사된다. 창세기 1:2의 ‘혼돈’은 창조가 완성되었을 때 이루어진 질서와 대조되는 짜여지지 않은 상태를 말해주고 있다.
‘공허’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질서를 만들기 전에 아무 것도 아직 존재하지 않은 ‘텅 빈’ 상태를 강조해 준다.
이 두 단어는 곧 보겠지만, 창조 과정의 두 중심 축을 이루어준다. 즉, 첫 삼일 동안 하나님은 ‘혼돈’에 대항하여 구조를 짜시고, 나머지 삼일 동안은 ‘공허’에 대항하여 채우신다.
문맥을 통해 볼 때에도, “혼돈하고 공허하다”는 ‘어둠’이 있고, 땅은 ‘물로 덮여 있는 상태’이다. 이 용어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평가하시기 전의 땅의 상태를 묘사한다. 이 땅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not-yet) 상태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이전의 상태이다.
이런 점에서 2:5-6의 땅에 대한 묘사와 유사하다. 두 본문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를 묘사한다. 이것은 “인간이 거주할 수 없는, 인간이 거주하기에는 아직 준비가 안된 상태를 의미할 뿐이다”(Young 28).
그렇다면, 3절에서 “빛이 있으라”는 첫 창조 명령 전에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였다”는 상태는 얼마나 오랫동안 존재했을까?
이 점에 대해 에드워드 J. 영은 “그 기간이 얼마나 길었는지에 대해 우리는 물론 알 길이 없다. 그러나 2절에서 볼 수 있듯이 지구의 상태는 창조되었을 때의 상태 그대로이며 하나님께서 현재의 세계와 같은 형태로 만들기 시작할 때까지 그런 상태가 계속되었다”(26쪽)라고 말하였다.
2)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어둠이 깊음 위에 있다”라는 상황이 제시된다. 아직 빛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3절), 어둠이 온 세상을 덮고 있다. 그러나 이 때의 세상은 ‘깊음’에 덮여 있었다.
여기의 ‘깊음’은 ‘깊은 물’이다. ‘깊은 물’은 태초의 바다로서 땅을 감싸고 있는 것이다.
이 깊음은 항상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며 하나님의 구원사를 거스른다(출 15:8). 여기에서 ‘깊음’은 바벨론의 창조 신화에 있는 티아맛 같이 독자적인 신적 존재로 나타나지 않는다.
‘어둠이 깊음을 싸고 있는’ 상태는 태초의 황량함을 묘사해준다. 이 상태는 곧 나타날 하나님의 계시를 기다리고 있다.
은유적 관점에서 보면, 빛은 하나님을, 어둠은 하나님에 대해 적대적인 모든 것을 상징한다. 악한 자(잠 2:13), 심판(출 10:21), 죽음(시 88:13)은 모두 어둠으로, 구원은 빛으로 묘사된다(사 9:1).
이 어둠은 특히 사람들에게 공포스러운 존재였다(암 5:18, 20). 깊음도 우리에게 두려움을 준다(욘 2:3, 5). 그렇지만 하나님은 어둠 속에서도 다 보시며(시 139:12), 또한 어둠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다(신 4:11; 5:23; 시 18:12).
3)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신다’
이제 성경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신’이 나타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을 ‘강한 바람’, 혹은 ‘하나님의 바람’, 혹은 ‘하나님의 숨결’(서인석)로 번역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 혹은 야웨의 영은 단 한번도 ‘강한 바람’으로 사용된 적이 없고, 항상 하나님의 영으로 나타난다.
히브리어 ‘운행하다’(rachap)는 시리아어에서 “알을 품다” 혹은 “부화하다”라는 뜻을 가지므로, 김이곤은 “마치 알을 품고 있는 날짐승처럼 하나님의 창조적 영이 혼돈의 물을 품고 있었고 그 어느 것도 그분의 품에서 벗어나 있을 수는 없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페니시아의 창조론에 나타나는 개념이며, 창세기 1장에서는 이런 뜻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다(Wehnam, 17참조).
이 단어는 신명기 32:11에서는 독수리가 그 새끼 위를 “너풀거린다”는 모습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우가릿어 라하프(rhp)도 새들이 날아가는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되며(Gordon 1965:484), 바알이 얌과 일전을 할 때, 바알의 힘찬 행동은 매가 위에서 갑자기 급습하는 영상으로 묘사된다(Kline 1977:253, n. 7).
신명기 32장에서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에 있는 새끼 위를 ‘너풀거리는’ 모습은 기본적으로 자기 새끼를 지키고 보호하며 돌보는 영상을 준다. 동물들은 새끼를 낳을 때, 그 보호 본능이 강하다.
이 영상을 창세기 1:2로 가져온다면, 하나님의 신이 아직 혼돈과 공허, 깊은 물로 가득찬 세상을 지키며 보호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난다.
여기의 동사형은 지속적인 동작을 가리키므로, 성령은 현재의 땅이 수면 위로 나타나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곳이 될 때까지, 혼돈과 공허로 뒤덮인 땅, 깊은 어둠으로 뒤덮인 땅을 지속적으로 지키고 있다. 마치 독수리가 새끼의 보금자리를 보호하고 준비하듯이 하나님의 신이 움직이고 있다.
워필드(B. Warfield, 1895)는 창조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신은 구약의 최초부터 만물의 존재와 존속의 원리이시며, 모든 움직임과 질서 그리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성의 원인으로 나타난다”(윤영탁 번역, 1985:110).
3. 창조 과정과 창조 사역 (1:3-31)
1) 천지 창조 이야기 구조
실제적인 창조과정을 담고 있는 이 단락은 아래와 같이 삼일을 대칭으로 제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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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물과 궁창
③ 땅과 채소
④ 광명
⑤ 어족과 조류
⑥ 짐승과 인간
⑦ 하나님의 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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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조를 수직적인 대칭으로 보면, 첫 삼일은 주로 ‘나누다’와 ‘모으다’의 동사군을 이루어 땅의 공간적인 구조를 이루며, 나머지 삼일은 주로 ‘채우다’, ‘번성하다’, ‘생육하다’는 동사군을 이루어 빈 공간을 채우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리하여 1:2에 있는 ‘혼돈’에 ‘질서’를, ‘공허’에 ‘채움’을 이루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하늘과 땅은 결코 ‘공허한 곳’이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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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창조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bohu)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사 4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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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구조를 수평적인 대칭으로 보면, 첫째 날은 넷째 날과, 둘째 날은 다섯째 날과, 셋째 날은 여섯째 날과 대칭을 이룬다.
이리하여 ‘빛’은 ‘광명’과 이어지며, ‘물과 궁창’(둘째 날)은 ‘어족과 조류’(다섯째 날)와 ‘땅과 채소’(셋째 날)는 ‘짐승과 인간’(여섯째 날)을 위해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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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육일 중 셋째 날과 여섯째 날은 각 삼일의 절정으로 나타나며, 이 날 하나님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다른 날들과는 달리, 셋째 날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여 가라사대”가 두 번 나타나며, 여섯째 날에는 세 번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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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3일과 6일은 형식에 있어서 서로 어울리며, 내용에 있어서도 3일에는 하나님께서 땅과 식물을 만드시고, 6일에는 땅 위에 사는 동물들과 인간을 만드시어 서로 어울리게 된다.
하나님께서 미리 ‘풀과 채소와 과목’을 내게 하시며, 6일에는 동물과 인간으로 먹게 하신다. 이리하여 고정된 생명의 지원 구조와 그 안에 움직이는 생물 사이에 평행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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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일은 표준 구조에서 벗어나 있으며, 안식일 제도의 기원으로 제시되고 있다. 하나님의 안식으로 창조가 끝나는 날로부터 인간의 노동이 시작된다.
이리하여 인간의 노동은 하나님의 안식과 기쁨 속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엿새에 걸쳐 창조를 이루시며, 제 7일에 완성하신다. 이리하여 제 7일이 창조의 절정을 이룬다. 즉, 안식일은 창조의 절정으로, 창조를 기억하며 창조주를 기리는 날이 된다.
2) 창조의 형식
하나님의 천지 창조는 엿새라는 ‘날’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나, 이 여섯 날을 내부적으로 묶어주는 형식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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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조 명령 서론
“하나님이 가라사대”는 창세기 저자의 선언으로서, 모두 10회 나타난다(1:3, 6, 9, 11, 14, 20, 24, 26, 28“그들에게 이르시되”,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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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열 마디의 말씀에 대해, 서인석은 “본문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7일간의 긴 시간 안에 10회의 말씀을 차례대로 발설하게 하고 있다. … 창조의 이야기에서 하느님의 후미지고도 평화로운 말씀들의 분절이 얼마나 장엄하고도 위력이 있는가를 독자들은 느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 위엄찬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을 듣고 있으며, 이 순결한 말씀이 폭력과 무질서와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2)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명령은 “으라”는 형식으로 8회 나타난다. 서인석은 이 명령을 군사령관의 호령으로 보나, 오히려 건축자의 명령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물론 히브리인들의 창조 개념 속에는 전투 개념이 있으나, 건축 개념도 중요한 자리를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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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라”는 명령은 “(물들이) 모여라”(9절), “나타나라”(9절), “(움이) 돋아나라”(11절), “우글거려라”(20절), “날아라”(20절), “나오게 하라”(24절), “다스려라”(26절), “우리가 만들자”(26절)는 명령과 함께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의 명령은 능력이 있으며, 모든 혼돈을 질서로 바꾸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있다.
(3) 창조의 완성 형식
창조의 완성 형식으로 “있었다”(1회)와 “그렇게 되었다”(6회; 7, 9, 11, 15, 24, 30절)가 뒤따른다. 하나님의 창조 말씀은 불가항력적이며,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다.
(4) 하나님의 제작 행동
하나님의 제작 행동이 묘사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셨다”(7, 16, 17, 25), “나누셨다”(4, 7절), “창조하셨다”(21, 27절), “돋아나게 하셨다”(12절).
이 행동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돋보이게 한다. 하나님은 "창공에 두 큰 광명을 만드셨다"에서 해와 달이 신적 존재가 아니며,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분명히 한다.
(5) 평가 혹은 승인 형식
평가 혹은 승인 형식은 “좋았다”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좋고 선하다. 창조 이야기는 이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사실 이 구절은 1장에서 일곱번 나타난다(4, 10, 12, 18, 21, 25, 31 [“매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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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창조에 대한 승인 형식 (approval formula)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능을 갖는다. 창조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을 증거해 준다. “성서는 아름다움에 대한 단어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6) 명명 (命名) 형식
명명 형식은 “그리고 그가 불렀다”는 말씀으로 나타난다(5회; 5[2회], 8, 10절 [2회]).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 또한 하나님은 “축복하신다”(22, 28절).
(7) 날에 대한 언급 (6회)
날에 대한 언급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날이라”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6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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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10번이나 말씀하시고, 8번 명령하시지만 일곱 날로 분류된다. 이 반복적인 구조가 천지 창조 이야기의 뼈대를 이루어 문체를 단조롭게 하지만, 창조의 초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즉 천지 창조는 다른 사건과는 달리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과 손길을 따라 조화있게 또한 목적을 따라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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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는 단순한 인과법칙을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솜씨로 만들어졌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이 창조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로고스가 모든 창조 배후에 있으며,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하나님의 신이 함께 일하신다. 창조에서와 같이 출애굽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한다. 하나님 말씀의 신학은 창조에서부터 시작된다.
3) 창조의 날들
(1) 첫째 날: 빛과 어둠의 구별 (1:3-5)
성경에 나오는 첫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 있으라”이다. 이 말씀과 함께 창조의 과정이 시작된다. 하나님의 첫 창조 작품인 ‘빛’은 창조의 첫 날에 이루어진 것으로 소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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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첫 창조는 하루 종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만들어졌다. 말씀을 통한 창조는 6일 노동의 패턴에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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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있으라”는 명령 다음에, “빛이 있었다”는 실행이 뒤따른다. 이 명령이 누구에게 주어졌는지, 누가 이 명령을 실행하는지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명령이며, 그 명령을 따라 창조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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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처음으로 창조한 것은 빛이다. 그러나 16절이 되기까지 태양을 만든 이야기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3절의 빛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에 대해 학자들은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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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부류는 이런 ‘빛’과 ‘광명’을 다른 실체로 이해한다. 그들은 여기의 빛을 우주 속에 있는 빛으로서, ‘모든 기본적인 힘 중 가장 미묘한 것’ 혹은 ‘신비로 가득찬 물질’(A. Dillmann), ‘가장 숭고한 요소’, ‘실재하는 것’, ‘미묘한 물질’(H. Gunkel)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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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빛은 제 4일에 창조된 광명체와는 구별된 것으로서, 신의 영광에 비유될 수 있다”는 김이곤의 입장은 전통적인 입장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 빛을 하나의 실체로 본다면, 측량할 수 없는 우주 속에 있는 빛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태양계 자체도 은하계 (Milky Way)라는 갤럭시에 위치해 있고, 이것은 렌즈 모양의 우주 섬을 이루고 있으며, 약 10만 광년의 거리로 추정된다. 이런 갤럭시가 우주에는 수백만 개가 넘는다고 한다. 이런 시각에서 빛을 보면, 너무나 모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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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여기의 ‘빛’을 태양 빛으로 본다(Sailhammer, Youngblood). 즉 1:2에 처한 땅의 상황, 즉 ‘혼돈과 공허’, 그리고 ‘어둠이 깊음 위에 있는’ 상황에 드디어 태양의 빛이 비친 것으로 이해하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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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입장의 근거는 (1) 천지 창조 기사는 철저하게 땅을 중심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2) 일반적으로 해와 달과 별들은 모두 ‘하늘과 땅’ (1:1)에 다 포함된다. (3) 만약 우리가 1절을 창조행위로 본다면, 이미 천체는 다 만들어졌다고 보는 점들이다.
그렇다면 3절은 태양을 만든 것을 묘사하기보다 태양이 아침의 어둠을 깨고 나오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 동트는 것이 위와 같이 묘사되었다(창44:3; 출10:23; 느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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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창세기 저자가 ‘빛’과 ‘광명’을 구분했을 때, 그는 의도적으로 ‘빛’을 모호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둘 사이에는 명백한 유사성이 있지만, 저자는 ‘빛’의 상징성 때문에, ‘광명’과 구분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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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창조의 틀 속에서 보면, 빛의 창조가 시작에 놓여 있으며, ‘빛의 창조’를 통해 다음 창조가 가능해진다. 빛은 땅의 시간 구조를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빛이 어둠으로부터 구별될 때, 시간의 구별이 생긴다. 빛은 시간적 구별을 위한 것이지 공간적 구별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셔서, 시간과 질서의 기본 싸이클을 만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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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빛의 상징성 때문에, 이후 이사야 선지자는 빛이 태초의 어둠을 뚫고 하나님의 첫 축복의 여명을 알리신 것처럼, 새 구원의 시대를 빛이 어둠을 부수는 것으로 묘사한다(사 8:22-9:2; 마 4:13-17; 요 1:5, 8-9).
사도 바울도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빛이 어둠을 깨고 비치는 것으로 묘사한다(고후 4:6; 요일 1:5; 계 21:23 참조).
(2) 둘째 날: 창공과 바다의 구별 (1:6-8)
개역 성경에서 ‘궁창’으로 번역한 단어는 라틴어(firmamentum, 단단하게 만들어진 것)에서 나온 것으로, 마치 하늘에 단단한 물체가 있는 것 같은 잘못된 인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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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8절에서는 ‘하늘’ (sky, ‘창공’; 표준번역)로 번역된다. 또한 14절에서 “궁창에는 광명이 있으며, 이곳은 새들이 날아다니는 곳”으로 그려지므로(20절), ‘창공’으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창세기 7장에서는 ‘창공의 문들’이 열려 비가 쏟아진다(7:11-12; 시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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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8:28에서는 창세기 1장의 궁창이 명백하게 ‘구름’을 가리킨다(‘구름 하늘’ [개역], ‘구름 떠도는 궁창’ [표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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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6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공을 있게 하지만, 7절은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말한다. 하나는 말씀으로, 다른 하나는 행동으로 이루어 진 것 같다. 창조 기사에서 말씀과 행동은 자주 이렇게 나타나, 마치 중복된 것 같은 인상을 준다(11, 12절; 14, 16절; 24, 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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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나님이 만들다”라는 표현은 저자의 관점을 보여주며 (창2:4; 시104:27-30 참조), 이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여기에 하나님의 주권이 있음을 강조해 준다.
(3) 셋째 날: 뭍과 물의 구별 (1:9-13)
셋째 날에 하나님은 마른 땅과 바다를 나누시고, 마른 땅에 풀과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가 나게 하신다. 물과 뭍을 둘 다 ‘좋다’고 말함으로써, 이것들이 인간의 유익을 위해 지어졌음을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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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나누는 행동은 홍수 기사(창 6-9)와 홍해를 나누는 기사(출 14-15장)와 이어지고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땅을 누리기 위해, 물을 제거해야 했다.
창조 기사에서 하나님이 물을 길들인 것은 인간의 유익을 위한 것이나, 홍수 기사에서는 큰 물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다.
(4) 넷째 날: 해와 달과 별로 채우심 (1:14-19)
우리가 넷째 날에 대해서 늘 난처한 질문을 받게 된다. “정말 본문은 넷째 날에 해, 달, 별들이 만들어졌다고 하는가? 그렇다면 그 전에 3일은 해 없이 있을 수 있는가? 셋째 날에 만들어진 초목과 채소는 해 없이 있을 수 있는가?”
우리는 넷째 날의 중심 관심이 해, 달, 별들의 창조에 있기 보다, 그 삼중적 기능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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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먼저 창세기 1:1의 ‘천지’는 우주로서 해, 달, 별들을 포함한다.
② 6절에서 ‘궁창이 있으라’고 말할 때, 하나님은 이전에 없었던 궁창을 만드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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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4절을 보면, 구문 구조가 다르다.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금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즉, 빛은 이미 궁창에 존재했는데, 이제 날과 밤을 나누며, 사시와 날과 해를 표시하는 역할을 한다. 이 명령을 통해, 봄이 오면 새싹이, 여름이 오면 이슬이, 늦가을이 오면 서리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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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15절과 16절의 구조가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15절에서 저자는 “그대로 되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저자의 보고를 마무리하며, 16절에 있는 그의 평을 시작해 준다.
즉, 16절은 해, 달, 별을 넷째 날에 만들었다는 보고가 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이미 말한 것의 뜻을 설명해 준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광명을 만들어 공중에 두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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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에 선포되고 있는 6일 간의 천지 창조는 철저하게 ‘땅의 관점’에서 소개되고 있으므로, 넷째 날은 해와 달과 별이 땅에서의 생활에 어떤 기능을 가지는지 설명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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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여기에서 저자는 해와 달과 별들을 ‘광명’으로 부른다. 이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이다. 틸리케는 이것을 아래와 같이 표현하였다. “매우 부드럽게 어조를 낮추어서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이 두개의 램프를 궁창에 달아 놓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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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세계관에서 보면, 당대의 사람들은 “별은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점성술을 믿는 자들에게는 모든 항성의 움직임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별의 움직임을 잘 관찰하는 것은 우리의 생사화복과 직결된 것이었다. 이런 배경 속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향하여, 성경의 기자는 “별은 우리의 운명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으며, 그들은 우리의 ‘등불’일 뿐”임을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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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하나님만이 하늘의 광명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그가 받아야 할 영광과 존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렇게 해서 주님은 햇빛이 땅에 비취게하여, 초목과 동물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신다.
(5) 다섯째 날: 바다와 창공을 채우심 (1:20-23)
생물 창조는 다섯 째 날과 여섯 째 날, 두 날에 걸쳐 이루어진다. 다섯째 날에 하나님은 바다와 공중의 생물을 만드시고, 여섯째 날(1:24-28)에 땅 짐승을 만드시며, 남녀를 만드신다.
창조 기사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활동을 묘사할 때에는 ‘창조하다’(바라)를 의도적으로 쓴다(1:1의 우주와, 1:21의 큰 물고기와, 1:26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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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창조 기사에서 처음으로 ‘축복’ 개념이 나타난다(1:22; 2:3; 5:2).
바다와 공중의 생물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인간도 축복을 받으나, 통치력까지 받는다. 여기에서 ‘축복’은 생명을 주는 것과 연결되고 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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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축복은 창세기의 중심 주제이다. 하나님은 동물들(1:22), 인간(1:28), 안식일(2:3), 아담(5:2), 노아(9:1), 족장들(12:3; 17:16, 20)을 축복하신다.
하나님의 축복은 후손의 선물로 가장 명료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축복은 생명과 연관된 모든 것에 임한다. 축복의 기본 개념은 생명이 번성하는 것이다. 이 생명의 번성으로 가족과 나라에 축복이 임한다(신28:1-14). 현대인은 성공을 찾지만, 구약은 축복을 찾는다.
(6) 여섯째 날: 동물과 인간으로 채우심 (1:24-31)
여기에는 크게 두 종류의 창조가 나온다. 즉 땅에 거하는 ‘생물’과 ‘인간’이다. 땅의 생물은 다시 셋으로 나누어져, ‘집짐승’(육축), ‘땅에 기는 짐승’과 ‘들짐승’으로 나누어진다.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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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동물과 식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신다. 그들의 형태와 구조와 성격을 주님께서 다 만드시고, 그 다양성으로 천지를 채우신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선인장과 제비꽃의 모습 속에 하나님의 아련한 영상이 배여 있다. 즉, 이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자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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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하나님의 명령이 나타나며 (24절), 그리고 평가가 뒤따른다 (“그렇게 되니라”, 25절). 25절은 24절에 아주 중요한 것을 첨가하고 있다. 11절에서는 “땅이 채소를 내도록 한다”. 그러나 25절(하나님이 들짐승을 만드셨다)은 하나님이 생물을 만드신다는 점을 강조한다.
식물과 동물을 만드는데, 명령은 같지만, 이 두 형태의 생명은 다른 기원을 갖고 있다. 식물은 땅에서 나오며, 생물을 하나님 자신이 만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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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기사에서 인간 창조가 그 절정을 이룬다. 모든 드라마나 오페라에 있어서 절정에 도달하면, 숨을 죽이며 듣는다. 결혼식에서도 서약을 할 때, 숨을 죽인다.
하나님은 이제 그동안 창조하신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을 만드려고 하신다. 그는 자신과 가장 닮은 존재를 만들어 보려고 하신다. 이 인간이란 존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대해 생각도 해보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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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정말 나의 창조의 절정이 될 것인지, 아니면 창조의 흉물이 될 것인지? 이들이 진정 나를 닮은 자가 될 것인지, 혹은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할 것인지, 이들 가운데 마리아 데레사 같은 성인이 나올 것인지, 혹은 히틀러 같은 인간이 나올 것인지 하나님은 생각해 보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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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주님은 인간의 거처인 땅 (9-13절)을 준비하였고, 그 생명의 순환을 결정하는 해와 달과 별을 만들었다 (14-19절). 이제 인간 창조로 넘어가면서, 인간 존재의 의의를 말하고 있다. 인간 창조는 앞에 있는 다른 창조와 다르게 독특하다. 저자는 미묘한 변화를 만들고 있다.
① 먼저 26절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전형적인 형식이 나온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3인칭 명령 "있으라" (let there be)가 아니라, 보다 인격적인 1인칭 명령인 "우리가 만들자"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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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앞에서는 "그 종류대로" 생물을 만들지만, 인간 창조는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모양 대로" (우리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 진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닮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창조주를 닮았다. 오경 저자는 인간을 소개할 때, 동물과 다르다는 점 뿐 아니라,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인간은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특별한 존재이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것은 이원론적인 생각을 배제해 준다. 인간의 몸과 영혼은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고 있다. "육체는 경멸하고 영혼을 높이도록 애쓰라"고 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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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인간 창조는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진다. 다른 생물에서 성구별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지만, 인간에서는 아주 중요하게 부각된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원래 사람은 남녀가 서로 잘 어울려 살도록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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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인간 창조의 목적은 땅을 다스리는 것이다. 오직 인간 만이 하나님의 창조계를 다스릴 수 있다. 인간은 모든 생물을 다 다스린다. 공중과 바다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이다. 주님은 인간을 자연의 지배자로 만드신다. 이것은 인간의 원래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의 "지배"는 착취나 위협이나 권력의 남용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잘 돌보고 가꾸는 데 있다. 하나님은 단지 인간을 모든 피조물의 먹이 사슬 중에서 최고로 높은 층에 있도록 만들었다는 뜻도 아니며, 삼라만상의 귀족으로 세우셨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가장 고등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을 메시야 왕처럼 돌보고 다스리도록 지음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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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인간 창조에서 하나님이 "복을 주신" 모티프가 중요하다. 창세기와 오경에서 "복"은 중심 주제를 이루고 있다. 생물들은 이미 다섯째 날에 복을 받았다 (1:22). 하나님의 축복은 모든 생물에게까지 다 확대된다.
그러나 인간이 받은 복은 특히 후손의 복이며, 후손을 통해 문화적 사명을 이루도록 한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축복은 "후손"과 "생명" 개념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문화란 결국 생명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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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평가 형식 (4, 10, 12, 18, 21, 25절)이 여기에서 세가지로 수식되어 최종 작품의 완전성을 강조해 준다.
먼저 "모든 것"이다. "좋았다"는 온 창조에 적용되고 있다. 개체 뿐 아니라 전부가 좋다.
둘째로, 일반적으로 앞에서처럼 "이는" 대신에, 여기에서는 "참으로"가 나온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마치셨을 때, 흥분했음을 말해준다.
셋째로, "심히 좋았다"는 완전한 조화가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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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의 형식은 독특하다. 앞에서는 "한 날" (day, Xth) 형식으로 나오지만, 여기에서는 정관사가 나와, "제 여섯째 날" (day, the sixth)로 부른다. 이 형식은 인간을 만든 날과, 안식일을 묘사할 때만 나타난다. 안식일은 "제 이레" (day, the seventh)로 불린다 (2:3).
4. 창조의 완성: 결론적인 요약적 진술 (2:1-3)
제 7일은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앞의 육일과 아주 다르다. 그러나 이 세절은 아주 아름답게 배열되어, 창조기사를 끝맺어 준다.
2:1에서는 "하늘과 땅"을, 2:3에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시다"를 언급함으로써, 1:1과 교차 대귀적으로 연결된다.
1) 창조의 완성 (2:1)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니라"에서 "만물"은 보통 하늘을 가리키며, 구체적으로 "하늘의 만상"을 뜻한다.
시편 찬양에서는 땅도 포함되어, "하늘과 땅과 그 모든 만물"이란 표현이 나온다. 별 (신4:19; 사40:26)과 아주 드물게 천사들 (왕상22:19)이 하늘의 만물로 언급된다.
아마 여기에서는 천사가 제외되었을 것이다. "땅의 만물"은 그 어디에도 언급되고 있지 않다. 이 절은 1장의 요약적 결론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제 7일에 아직도 마치지 않은 일을 끝내었다는 뜻은 아니다".
2) 제 이레와 하나님의 안식 (2:2-3)
저자는 제 7일을 다른 날과 구별하고 있다. 이 날에 대한 설명 문체도 독특하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다른 날처럼 말씀하시거나 일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안식일을 축복하시는 것이 독특하다. 성경에서 축복은 주로 생물에게 제한된다. 즉 인간, 동물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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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인간과 동물을 축복하실 때, 그것은 생육과 번성과 성공을 뜻한다. 하나님이 창조적 활동을 마치신 날을 복되다고 말하는 것은 역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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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에서 "거룩하게 하시다"도 이례적이다. 날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그 날 속에 "거룩의 속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문법적으로 선포적인 의미를 가지며 (declarative), 이 날을 "거룩하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왜 "거룩하다"고 선포하는가? 왜냐하면, 이 날은 특별히 구별되어 하나님에게 속한 날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거룩하시며, 하나님과 연관된 장소와 사람과 물건들이 거룩한 것으로 선포된다.
안식일 외에, 축제일이 거룩하다고 불린다 ( 느8:9, 11에서만). 구약에서 거룩한 것으로 묘사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선택하여 구별하였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거룩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서, 특별한 위치를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는 안식일의 거룩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하는 날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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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에서 "마치다" (kalah)는 "완성하다"는 의미이다.
"안식하였다" (shabat)의 일차적인 뜻은 "중단하다" (cease)이다. "휴식하다"는 동사는 따로 있다 (nuah). 여기에서는 "휴식" 보다는 "중단"이 더 강조된다 (출31:17 참조).
엿새 동안 하나님은 일을 완성하셨고, 제 7일에는 중단하셨다. 이 노동의 중단은 안식 개념에 대단히 중요하다. 현대인들은 쉬지 못한다. 창세기 저자는 노동의 중단을 통한 하나님의 안식을 강조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이 쉬셨다는 표현은 세 번 나와서 안식을 강조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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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도 제 7일에는 쉬어야 한다 (출 20:8-11). 지주나 사장 만이 쉬는 것이 아니다.
이 날에는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명하신다 (출 20:10; 신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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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일의 하나님 "안식"은 신학적 표상으로 미래에 중요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안식" 주제는 앞에 있을 것에 대해 미리 예시해 준다 (2:15; 5:29; 8:4; 19:16; 출 20:11; 신 5:14; 12:10; 25:19).
후대 성경 저자들은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안식"과 경건한 자를 위해 기다리는 미래의 "안식" 사이에 있는 연관성을 말해 준다 (시 95:11; 히 3:11).
5. 천지 창조에 대한 신학적 명상
1) 천지 창조는 스스로 계시며 천지를 지으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증거한다.
창세기 1장은 고대의 신화적인 세계관 속에 살던 사람들에게 천지 개벽과 같은 내용을 전해준다. 그들은 우주의 삼라만상 속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그들에겐 태양도 달도 별도 나무도 곰도 뱀도 다 신이었다.
창세기 1장은 세상의 종교가 신성화 시킨 모든 것을 비신화화 시키며,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어졌음을 증거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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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구별된 자존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증거해 준다. 하나님은 이 우주의 일부가 아니다. 그는 시간과 공간을 만드시고 채우시는 초월적인 인격이시다.
구약의 신관은 물활론이나, 정령 숭배나 다신론이나 일신교 등을 통해 진화해 간 것이 아니다. 구약 신앙은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말씀과 창조로 계시한 것이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은 암울한 바벨론 포로 시대를 살던 어느 제사장의 신학적 사색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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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창조를 지켜보았는가?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창조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가? '…이 있으라'는 말씀을 들은 사람도 없고, 천지가 만들어지는 것을 본 목격자도 없지 않는가? 그러나 성경은 마치 목격자의 증인이 말하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이런 논리는 상당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고, 우리에게는 위협적이다. 이것은 "내세를 가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동일하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직접 체험해 보아야만 알 수 있다는 인식론에 기초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 중에서 "부자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보면, "죽은 자를 보내면 믿을 것이다"라고 부자가 말하자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자가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아브라함이 대답한다.
창조의 말씀과 내세에 대한 모든 말씀은 궁극적으로 주님의 계시이다. 이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믿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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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천지 창조의 구조를 유심히 볼 때, 여기에 하나님을 증거하는 말씀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의 표현에 따르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저희가 핑계치 못할 것" (롬 1:20)이다.
또 시편 기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고 탄성을 지른다 (시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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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은 단지 유일하신 하나님 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 만물을 지으시며,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신이 수면을 운행하신다.
천지 창조는 "말씀"과 "하나님의 신"으로 이루어진다. 이미 창세기 1장 속에 삼위일체의 씨앗이 나타나고 있다. 유일하신 하나님은 삼위로 계신다.
2) 천지 창조는 창조 질서를 증거한다.
가끔 우리는 "왜 교회당 꼭대기에 피뢰침을 달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십자가 위에 피뢰침을 다는 것은 신성 모독은 아닐지라도, 약간 방정스러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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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어떤 상황에도 주께서 교회를 지키시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피뢰침을 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께서 실수하실까 두려워 피뢰침을 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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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자연 질서와 초자연 질서의 관계 문제가 단지 피뢰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된다.
우리가 병이 들 때, 자연 질서를 따라 약을 먹고 쉴 것인가, 아니면 초자연적인 기적이 나타나길 기다려야 하는가? 많은 신자들 중에 병이 들면, 기도와 안수를 받고 금식으로 낫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믿음이 좋을수록 의사를 기피하고 약도 사양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기도원에서는 손톱으로 병든 환부를 파내는 소위 "성령 수술"을 한다고도 한다. 이런 곳에서는 멋있는 순환 논법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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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치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고침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고침을 받지 못할 때에는 나의 능력이나 믿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책임이다. 왜냐하면, 나는 고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이 고침받지 못한 것은 당신의 불신앙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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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과격한 사람들은 모든 병을 귀신에게 돌린다. 감기까지도 귀신의 역사로 보므로, 귀신을 내어쫓아야 한다. 이런 사람은 모든 질병을 영계의 역사로 본다. 이 세상에는 성령과 악령 뿐이며, 성령으로부터 오지 않는 것은 악령의 것으로 본다. 이들은 창조 질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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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깊이 들어가보면, 카톨릭 교회에서는 초자연적인 생활을 추구하며 이상적이고 신비로운 품성에 도달하기 위해 자연적인 생활이 해롭고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자연적인 생활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장애가 된다. 가장 선하고 가장 확실하게 완전에 이르는 길은 빈곤, 순종, 청빈과 성결의 네가지 덕행이다.
따라서 보다 경건한 삶과 이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수도원적인 삶을 추구하며, 인간의 자연성을 구성하는 식욕과 성욕과 혈연을 부인해야 한다.
카톨릭 신학에서는 자연과 초자연이 갈등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초자연의 우월성 때문에 자연에 대한 억압이 있다. 왜냐하면, 초자연적인 것이야 말로 본연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초자연적인 삶이야 말로, 자연적인 생활을 넘어 높이 우뚝 솟아 있으며, 이것을 위해 자연적인 삶을 가능한 많이 부인해야 한다. 수도승은 종교적으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신자이다. 이런 신앙은 인간의 기본 질서가 원래 창조 질서였음을 간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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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위의 여러 교회에서는 입시철이 되면 수험생을 위한 기도회를 하게된다. 물론 정신적인 스트레스 속에서 고통받은 수험생과 그 부모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성적과 상관 없이 운수 대통하여 내가 아는 문제가 많이 나오고, 모르는 것도 잘 찍을 수 있도록 기도한다면, 비성경적인 기도회가 될 것이다. 사업에도 우리는 가끔 "별미 축복"을 운운하며, 야곱이 이삭에게 맛있는 음식을 드려 축복을 받은 것을 가지고 목회자를 대접하여 복받으려고 한다. 이런 행태는 신앙을 주술로 바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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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2:8에는 "집을 지을 때 지붕에 난간을 세우라"고 명한다. 난간의 유무에 따라 지붕에서 떨어진 사람에 대한 책임 문제가 가려진다. 난간에서 떨어지는 것을 운명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은 실수로 먼저 죽을 수 있기 때문에, 건축적인 대책을 세우라고 말한다. 예수 믿고 난폭 운전을 하는 사람은 이런 구절을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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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세우신 가장 기본적인 질서는 창조 질서이다.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팥나는 것이 주님의 질서이다.
주님은 창조 질서의 아버지이다. 창조 질서도 하나님의 질서이다. 우리는 이 질서를 더욱 사랑하고, 이 질서 속에서 참된 지혜의 기초를 찾아야 한다 (잠 3:19-26; 8:22-31; 14:31; 20:12; 욥 38장 이하).
3) 천지 창조는 구원 질서를 증거한다.
첫 창조가 완전한 창조였다면, 구원은 죄로 말미암아 일그러진 창조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며, 창조질서를 더욱 견고하게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과 창조 사이에 있는 내재적인 통일성을 바로 보아야 한다. 우리 주님은 "구속주와 창조주"이시다 (사 44:24). 우리의 구원은 창조와 완전히 동떨어진 별개가 아니며, 창조의 질서를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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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조는 구원의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하나님께서 혼돈의 깊음을 가르고, 어둠에 빛을 비추어 질서를 세운 창조는 구원의 파라다임이 된다 (시 74:12-17). 하나님께서 물을 정복하신 사건은 역사에서 그의 구원을 보증해 준다 (사 42:5; 43:1; 49:5; 시 22:9; 139: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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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창조는 출애굽 구원의 모델이 된다.
주님은 홍해를 가르고 육지를 내사 자기 백성들로 통과하게 하시며,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신다 (사 5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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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회의 구원은 새로운 창조이다(고후 4:6; 5:17).
창조주 그리스도께서 (요 1:1; 골 1) 옛 것보다 더 나은 새 창조를 이루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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