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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 Start - 고통은 기도의 창조 2

하나님아들 2018. 10. 21.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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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기도의 창조 2

(삼상 1 : 9 - 11)


2005. 7. 24 늘푸른 주일 낮

  축구천재라 불리는 박주영 선수를 아시죠? 축구를 참 잘합니다. 그런데 이 선수 가 더 매력적인 것은 축구시력만큼이나 신앙도 좋다는 겁니다. 골을 넣을 때 마다 그라운드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세레머니를 연출하는 선수로도 유명합니다.


  이 박 선수에 대한 각종 언론의 보도를 보면 축구를 잘하게 된 이유를 여러 가지로 꼽고 있는데 그중 주목할 만한 것은 어릴 때부터 맨발로 축구를 즐기며 볼 감각을 익혀왔다는 것입니다. 박 선수는 ‘공의 터치감을 익히고 볼을 자유자재로 다루기 위해서는 맨발 축구만큼 좋은 것이 없고 이 맨발 훈련을 통해 튼튼한 발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을 합니다.

  

  저도 어렸을 때 종종 맨발로 다녀봤는데 다 경험들 해보셨겠지만 쉽지 않습니다. 아스팔트길을 맨발로 걷다가 조그만 돌이라도 밟으면 그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죠. 군대시절에도 여름이면 발바닥을 든든히 해야 가을과 혹서기 훈련 행군할 때 물집이 안 잡힌다고 맨발로 다니게 하고, 맨발로 축구하고 태권도 하고 했는데 그때 참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효과는 만점입니다. 좀 고통스럽지만 좀 힘들었지만 여름동안 맨발 훈련을 잘 하면 정말 가을과 겨울 훈련 때 수월합니다. 저희 부대는 한번 행군 나가면 한 7-800M가 너는 가파른 산악지역을 완전군장하고 2~300Km는 기본으로 걷기 때문에 발에 물집 잡히면 정말 힘듭니다. 그래서 여름에 맨발 훈련은 필수적입니다.


  고통은 결코 좋은 거 아닙니다. 고통이 좋아서 고통을 즐기고 고통스러운 삶을 기뻐하고 왜 ‘고통이 없지’ 하면서 고통을 기다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은 우리의 삶에 필연적입니다. 자의 던 타의 던 우리의 삶에는 반드시 고통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고통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우리가 그 고통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고통이 지난 후의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고통의 시간이 오면 은근 슬쩍 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피하면 그 순간은 편하고 좋은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결코 그의 삶에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고통이 오면 지레 겁먹고 주저앉는 사람도 있습니다. 해볼 생각도 않고 두 손 들고 맙니다. 그런 사람도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고통이 오면 그 고통과 맞서 싸웁니다. 그리고 이겨냅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한층 성숙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을 몇 번만 하고나면 용기가 생기고 당당해지고 어떤 고통이 몰려 와도 다 이길 수 있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제 후배 목사 가운데 시골의 200명 정도 모이는 교회에 부목으로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그 교회 부목으로 가자마자 담임목사님이 문제가 있어서 사임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30밖에 안된 부목사인 이 친구가 담임목사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 어린 부목사가 그래도 200여명 모이는 교회면 큰 교회인데 담임목사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길어야 몇 달이면 되겠지 했는데 문제가 좀 복잡해져서 2년 넘는 시간동안 고생하다가 지난달에 새로운 담임목사님이 오셔서 한시름 놓게 되었습니다.


  저하고 친하기 때문에 종종 만나기도 하고 전화통화도 하는데 이 친구가 하는 말이 정말 힘들고 어렵다는 겁니다. 한국교회에서 담임목사와 부목사는 하늘과 땅 같거든요. 역할은 담임인데 위치는 부목. 이거 정말 사람 피 말리는 겁니다. 이 생활을 2년 하면서 어디 가서 돈 주 고도 못할 목회의 훈련을 제대로 받은 겁니다. 그래서 이제 어느 교회를 가도 목회 잘할 자신 있다는 겁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웠지만 너무도 값진 재산을 얻었다는 겁니다.


  고통은 이렇게 힘든 것이지만 그 고통의 순간들을 잘 이겨내면 우리의 삶에 많은 유익이 되고 값진 재산이 됩니다. 특히 신앙인의 삶에 있어서 고통은 보배와도 같습니다. 고통 때문에 마음에 강렬한 소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소원이 나를 움직이게 하고, 기도 하게하고 하나님께 매달리게 만듭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신앙이 자라나고 이 훈련의 기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통은 소원의 창조요 기도의 창조라고 했습니다.


  한나는 아들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고통을 당했고 그 고통은 ‘나도 아들 낳았으면 좋겠다.’라는 강렬한 소원을 갖게 하고 그녀로 하여금 기도의 자리에 나오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고통이 기도의 창조가 된 것입니다.


  지난주에 이 한나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기도가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요, 기도는 하나님의 의지하는 것이요 기도는 하나님께 믿음의 닻을 내리는 것이라고 했죠? 그럼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기도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의지하며 하나님께 닻을 내리는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요즘 우리교회가 ‘뭔가 될 것 같은 데 안 되고, 될 것 같은 데 안 되고, 부흥 할 것 같은 데 그 속도가 느리고 그런 이유가 뭘까?’ 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여러분들이 느끼시기에는 ‘잘 되는 데 뭐!’ 그러실지 모르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그렇지 않거든요. 그 이유가 뭘까? 이것이 요즘 저의 고민입니다. 이유가 뭘까요? 정말 우리교회 저력 있거든요. 제가 몇 번 말씀 드렸지만 시설적인 부분에서도 3층이라는 것 말고는 참 잘 갖춰진 교회거든요. 교인의 연령 분포도 0살에서 70대까지 다 있거든요. 어느 연령대가 와도 카바가 된 단 말이죠. 목사의 설교 극동방송이나 기독교 텔레비전에 나오는 유명한 목사님 같이 잘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 나이에 이정도면 괜찮게 하는 편이거든요. 사모 때문에 목회 죽 쓰시는 분들도 많은데 그래도 사모로서 괜찮거든요. 여러분들도 정말 열심히 충성하시거든요. 목사의 말에 순종 잘하시고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시거든요. 하여튼 목사가 “이거하쇼.” 하면 죽도록 충성하시니까요. 저 이번 성경학교 준비하면서도 감동 먹었다는 거 압십니까? 제가 하라면 다 합니다. 누가 그러대요. ‘하라고 한 사람은 보이지도 않는데 하긴 다 했다고.’


  그런데 뭐가 문제일까요? 제가 연초 신년축제 때 말씀을 드렸는데 교회성장학 중에 NCD라는 것이 있습니다. ‘natural church development - 자연적 교회성장’ 이라는 것인데 이 NCD 교회성장 방법론 중에 ‘최소치 전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 교회 부흥의 여러 가지 요소 중 가장 부족한 것, 가장 취약한 것 그것이 교회 부흥의 장애 요인인데 이것을 극복하면 교회는 성장한다는 원리입니다.


  사진과 같은 거 간혹 보셨을 겁니다. 독일의 전통 맥주 통인데 널빤지를 붙여서 만든 통입니다. 그런데 이 통에 맥주를 담으려면 널빤지의 높이가 같아야 합니다. 만약 널빤지의 높이가 다 1M인데 딱 하나면 50Cm라면 이 통은 물이 1M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50Cm 밖에 채우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이 통에 물을 많이 채우려면 다른 널빤지를 조금씩 잘라서 50Cm 밖에 안 되는 널빤지의 높이를 높여야 합니다. 그래서 평균 80Cm정도로 맞추어야 물을 80Cm 만큼 채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NCD의 원리입니다.


  우리교회가 다른 건 다 90인데 딱 하나가 50이라서 그곳으로 교회 부흥의 다 새나간다면 교회부흥의 요소가 저의 모두 갖추어 졌는데 단 한 가지가 모자라서 단 한 가지가 최소치라서 그것 때문에 교회가 부흥하지 않고 성장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지난주에 제가 새벽기도 나오시라고 그렇게 까지 설교를 하면 그래도 새벽에 단 한분이라도 일주일 중 단 하루만이라도 나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게 설교한 저만 무안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새벽기도 설교 안한다 했는데 오늘 또 합니다. 바보같이 또 합니다. 교회의 살길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고 양떼들이 살길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듣기 싫어하고 거북해 하고 심지어 짜증스러워 해도, ‘아기고 저 소리 듣기 싫어 딴 교회로 가든지 해야지 못 살겠네’ 해도 저는 또 할 겁니다. 이게 저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잠자는 영혼을 깨우는 것이 저의 사명입니다. 우리교회 부흥의 길이 기도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건 충분합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넘쳐납니다. 그런데 기도는 너무도 부족 합니다. 저 자신도 그렇고 지금 우리교회의 최소치는 기도입니다. 이 최소치를 극복하지 않으면 우리교회는 부흥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들의 신앙 상태를 점검해 보세요. 여러분의 최소치가 무엇입니까? 최소치가 두개 세 개 되는 분은 없으십니까? 기도도 부족하고, 예배생활도 부족하고, 충성과 봉사도 부족하고, 사랑도 부족하고, 열심도 부족하고, 그렇다면 그 부족한 것 그 최소치를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심령의 부흥도 없습니다. 지금 돈버는 것이 중요한거 아니고 자식들 교육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사회를 보세요. 돈이 없어서 지식이 부족해서 문제입니까? 아니요 오히려 돈이 넘치고 지식이 넘쳐서 지금 우리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가난하고 못 배웠을 때는 하나님만 의지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살만하고 좀 배웠다 싶으니까 건방지기 작이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사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돈버느라고 공부한다고 출세하려고 교회생활, 신앙생활 게을리 하면 언젠가는 땅을 치며 후회할 날이 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그런 사람들을 너무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정신 차리세요.(옆 사람하고 인사하세요. 정신 차리고 삽시다)


  지금 외국에 나가서 생명 걸고 복음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여러분 생각보다 많은 선교사님들이 현지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있어요. 지금도 중국이나, 인도, 스리랑카 같은 나라에서 수많은 선교사님들이 본토인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거 아십니까? 얼마 전 스리랑카에서는 불교인들이 교회에 쳐들어 와서 때려 부수고 선교사님 폭행을 하고 그래서 죽기도 했고요. 지금도 인도에서는 끊임없이 기독교인들을 향한 박해가 일어나고 있고요. 이슬람 이슬람국가에서는 그야말로 생명 걸고 복음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너무 배가 불렀어요. 너무 편하게 예수 믿고 있어요. 저는 간혹 여러분들이 도대체 누구 때문에 예수 믿는 건지 착각이 들 때가 있거든요. 예배 빠지지 말라고 하고 기도하라고 하는 말들이 꼭 저 때문에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도 그런 착각하시는 것 같아요. 저 때문에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 거 아닙니다. 저 때문에 교회 나와 주는 거 아니거든요. 혼동하지 마세요. 착각하지 마세요. 누구 때문에 교회 나오고 누구 때문에 예수 믿는 거 아닙니다.


  우리 정신 차리고 믿읍시다. 이왕 믿는 거 제대로 믿읍시다. 한번 목숨 걸고 믿어 봅시다. 목숨 걸고 기도해 봅시다. 목숨 걸고 덤비는 사람이길 자 없거든요. 실력은 좀 없어도 죽기 살기로 덤비는 사람이 이깁디다. 우리가 좀 그래야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죽기 살기로 매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다 나름대로 고통스러운 일이 있잖아요? 그것 가지고 기도의 자리로 나오세요. 혼자 끙끙대지 마시고, 괜히 해결도 못해주는 사람 찾아다니지 마시고. 기도의 자리에 나오세요.


  어떤 사람은 꼭 문제가 생기면 점쟁이 찾아 간다네요.? 믿는 사람이. 우리나라 인터넷 점술사이트 접속량이 1000만 건 넘는 다는 거 아십니까? 인터넷으로 접속해서 점보는 사람이 1000만 명이 넘고 있어요. 그러니까 점쟁이 직접 찾아가는 사람까지 하면 인구의 절반 이상은 점쟁이 믿고 사는 겁니다. 그런데 한심하게도 그중에 믿는 사람이 상당하다네요. 점쟁이들이 고백하기를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상당수 찾아온대요. 어떤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하고 하도 부흥이 안 되서 점쟁이 찾아가 우리교회가 부흥 할지 안할지 묻더랍니다. 여기도 정월 초하루면 몰래 찾아가는 사람 있는지 몰라요. 신문에 나오는 금주의 운세 펴 놓고 ‘맞다 맞어’ 그런 사람 있는지 몰라요.  점쟁이는 부도수표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보증 수표입니다. 그 하나님의 향한 기도는 확실합니다. 떼이지 않아요. 부도나지 않아요. 여러분들의 그 말할 수 없는 고통 끌어 않고 부도내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 나오세요. 그리고 그분께 애절하게 기도하세요. 사람들 찾아다녀봐야 소용없습니다.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시각장애인을 인도 합니까? 예수님께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하셨잖아요? 고통과 문제를 가지고 사람 찾아다는 것은 둘 다 구덩이에 바지는 꼴 밖에 안 됩니다.


  우리를 온전하게 그리고 가장 안전하게 인도하시는 주님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애절하게 기도하실 때 하나님은 가장 기뻐하시고 그때 역사하십니다. 이 애절한 기도가 바로 눈물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무릎을 꿇고 그저 울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눈물에 약하시다니까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눈물에 약하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바벨론의 포로 잡혀가서 고국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울며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느 1:4. 3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 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히스기야 왕은 질병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눈물로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뭐하셨습니까?

  왕하 20:5-6에 “5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 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 6 내가 네 날을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15년이나 생명을 연장 시켜 주셨습니다. 이 기적이 여러분의 삶에도 일어나길 축원합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나단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얼마나 울며 회개했는지 모릅니다. 시 6:6에 보면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침상을 눈물로 띄우고 요를 적실만큼 눈물로 회개하며 기했더니 하나님께서 그 죄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다윗은 시편 곳곳에서 기도에 대한 표현을 눈물이라고 쓰고 있는데 그때마다 응답을 경험하게 됩니다. 시 126:6에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경험한 기도의 능력입니다. 이 기도의 능력이 여러분의 삶에 있으시길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만드신 자연에는 ‘자정능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더러워지면 스스로 깨끗해지는 능력을 말합니다. 물도 산도 짐승도 나무도 다 자정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도 하나님은 자정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쓰러지면 다시 일어납니다. 병균이 들어오면 백혈구가 싸워서 이겨냅니다. 그런데 점점 우리에게 주신 이 자정능력이 그 기능을 잃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정신적 육체적 질병과 문제와 고통을 안고 살아갑니다. 왜 이 자정 능력을 잃어가는 것일까요? 거룩하게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깨끗하게 살지 않고 더럽고 추하게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아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살아야할 우리의 몸과 마음이 알콜이나 니코틴 같은 세상의 더러운 것들로 채워지고 세상 것들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거룩하지 못하고 더럽고 추하게 삽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거룩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이고,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 안에 있는 자정능력은 더 강렬해 지고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깨끗하고 거룩하게 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우리의 삶에 엄습해 오는 고통도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올 때 우리 안에 있는 자정능력이 더 강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하고 기도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시골 마을에 밤새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목숨만 경우 지킨 사람이 폭풍이 멎고 통이 틀 무렵 피해 상황을 보기 위해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일으켜 밖에 나가 보았습니다. 폭격을 맞은 것 같이 성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산산 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닭장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듯 하더니 아주 늙은 수탉 한 마리가 무너진 닭장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힘겨운 발걸음으로 무너진 닭장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비에 젖고 앙상한 뼈만 남은 날개를 힘겹게 퍼덕이더니 혼신을 다해 ‘꼬꼬댁’하고 울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수탉 안에 담아주신 본성입니다. 이 본성이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시련 중에도 고통 중에도 다시 일어 설 수 있는 본성을 담아 주셨습니다. 이 강한 본성은 예수를 내 마음에 모셔드리는 순간 그리고 그분을 향하여 기도하는 순간 더 강렬해 집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오뚝이처럼 넘어져도 쓰려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혹시 우리는 지금 밤새 폭풍과 싸워 기진맥진한 수탉같이 너무 처절한 고통으로 뼈만 아상하게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실패, 배신, 가난, 좌절, 절망, 질병, 과거의 상처, 버림 받음, 그리고 무거운 짐. 그러나 낙심하제 마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탉처럼 힘차게 소리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기도하고 있다면, 기도의 사람이라면, 내 안에 담아주신 자정능력이 강력하게 움직이고 있다면....


  힘들면 우세요. 통곡하세요. 그리고 기도하세요. 한나처럼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희망의 하나님을 의지하세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잡으세요.

출처 : 홍이석목사
글쓴이 : 홍이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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