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들 설교 모음

[스크랩] Re Start - 고통은 기도의 창조 1

하나님아들 2018. 10. 21. 18:07

설교 오디오 듣기

고통은 기도의 창조 1

(삼상 1:9-11)


2005. 7. 17 늘푸른 주일 낮

  여러분 만약에 우리의 삶에 고통이라는 것이 전혀 없다면 어떨 것 같으십니까? 좋을까요? 우리의 삶에 고통이라는 것이 전혀 없다면 마냥 좋기만 할까요? 만약 우리의 삶에 고통이 없다면 승리의 기쁨 또한 없을 것입니다. 승리의 기쁨은 그 과정에서 겪는 고통을 이겨냈을 때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에 고통이 없다면 그 삶은 무미건조할 것이고 재미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통을 싫어하지만 고통은 우리의 삶에 없어는 안 되고 우리의 삶을 만들어가는 귀한 도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고통 때문에 마음의 강렬한 소원을 가지게 되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움직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도 고통을 통해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이 찾아오면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과 직면해야 하고 고통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 하나님과 친밀하게 연합함으로 인생의 짜릿한 역전을 이루어야 합니다.


  고통은 소원의 창조라고 했습니다. 고통 때문에 마음에 강렬한 소원을 가지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원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데 그 움직임의 시작은 바로 기도입니다. 고통은 피할 수 없습니다. 또 피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고통을 통해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 7,8월 무더운 여름의 계절에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하는 한나는 고통 받는 여인이었습니다. 그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그 고통 때문에 밥을 굶으며 울었다고 했습니다. 브닌나가 그를 무시하고 그의 마음을 격동케 하며 괴롭혔습니다. 한나는 고통으로 인하여 마음이 괴로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한나에게 강령한 마음의 소원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도 아들을 낳고 싶다.’이 소원이 한나를 움직이게 했습니다. 그래서 한나가 어떻게 합니까? 오늘 본문 10절을 보십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한나는 그 고통을 피하여 달아난 것이 아니라 혹은 남편이 나를 이렇게 사랑해 주면 됐지 뭐! 하고 현실에 안주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끌어 오르는 강렬한 소원을 가지고 고통과 직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 하나님앞에 자신의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을 솔직히 털어 놓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아들을 달라는 겁니다. 11절에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간단합니다. 지금 한나의 고통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한나는 기도합니다. 아들주세요. 이 기도에 무슨 거창한 수식어가 필요합니까? 그냥 “아들주세요.” 그러면 됩니다. 우리가 자꾸 기도에 어/떤 거창한 수식어를 생각하니까 기도가 어렵습니다. 기도가 어렵다고 생각을 하니까 기도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기도는 쉬운 겁니다. 아들필요하면 아들주세요. 돈이 필요하면 돈 주세요. 건강이 필요하면 건강 주세요. 지식이 필요하면 지식주세요. 또 뭐가 필요하십니까? 여러분이 필요한거 있으면 그냥 그거 달라고 기도하세요. 무엇인가 부족해서 없어서 고통 중에 있으시다면 채워달라고 기도하세요. 바보처럼 멍~ 하니 앉아 있지만 말고, 포기하지도 말고 낙심하지도 말고 절망하지도 말고  하나님께 구하세요. 약 1: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했으니까 구하세요. 이게 기도입니다.


  없는 거 달라고 하는 기도 절대 잘못된 기도 아닙니다. 없으니까 달라고 하지 있는데 달라고 하겠습니까? 아들이 아버지한테 달라고 하는 것이 뭐가 잘못된 겁니까? 아버지니까 다라고 하지 지나가는 아저씨한테 달라고 합니까? 없으면 구하세요. 달라고 하세요. 달라고 하는데 복잡할 것도 없고 유창한 수식어도 필요 없고, 그냥 “아버지 주세요.” 하면 끝입니다. 교회가 작아서 속상하십니까? 기도하세요. 사람 보내 달라고 기도하세요. 불신자 100명 구원시켜달라고 기도하세여. 불신 남편 , 아내, 자식, 친구 동료 우리교회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하세요. 그런데 혼자 기도하는 것 보다는 둘이 하는 것이 낳고 둘이 하는 것 보다는 열이 하는 것이 낳고 열이 하는 것 보다는 백이 하는 게 낳겠죠? 하나님은 우리가 힘을 모아 함께 모여 힘써 울며불며 기도하면 꼼짝 못하십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땡강 부리면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간청하는 기도의 비유를 하셨잖아요.


  여러분들이 새벽기도 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는 나 자신을 위해서도 새벽기도 해야 하고 교회 부흥을 위해서도 새벽기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새벽기도 안하면 두 가지 죄를 범하는 겁니다. 하나는 기도하지 않는 죄. 또 하나는 교회 부흥을 막는 죄. 우리 기도합시다. 꼭 새벽에만 기도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우리가 하루를 살아감에 있어서 새벽시간이 아니면 따로 시간 내서 기도할 시간이 없잖아요? 새벽의 시간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기도하기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그래서 성경 역사는 대부분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기도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새벽에 기도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도 새벽에 도와주신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정중히 명령합니다. 새벽기도에 나오세요. 나오시려고 힘쓰고 애쓰세요. 여건이 안 되시는 분들은 여건이 되게 해 달라고 새벽에 나와 기도하세요. 집이 멀어서 못 나오시는 분들은 새벽기도 할 수 있도록 교회 가까운 곳으로 이사 오게 해 달라고 매일 같이 새벽에 나와 기도하세요. 아니면 교회가 집 가까운 곳으로 이사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던지....


  기도하셔야 합니다. 고통을 품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기도 밖에는 그 고통을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기도를 통해 고통을 기쁨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한나처럼 아들 달라고 기도하세요.  내게 부족한 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요 조건이 있습니다. 부족한거 다라고 기도한다고 무조건 주시는 거 아닙니다. 그 조건이 무엇입니까?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겠다는 결단입니다.


  한나의 기도를 다시 한번 보세요. 11절.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아들주세요. 그런데 아들 달라는 이유가 뭡니까? 나를 분나게 한 브닌나 코를 납작하게 해주려고요? 아니면 “나도 아들 않았다.”하고 자랑하고 싶어서요. 물론 그런 마음도 있었겠죠. 그러나 더 큰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아들 주시면 그 아들 하나님의 사람으로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받치겠습니다. 이것이 한나의 수준 높은 기도입니다.


  약 4:2-3에. “2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했습니다. 우리가 잘못구하니까 안 주시는 거죠 바르게 구하기만 하면 우리가 구한 것 다 주십니다.


  두 번째 조건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구한다고 무조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고 우리가 구한 것 다스릴 능력이 되었을 때 주십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그때 그 시기에 하나님은 정확하게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계속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세 번째 조건 주시지 않는 것도 응답임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보시기에 필요치 않으면 주시지 않습니다. 주었다간 오히려 그것 때문에 우리가 다칠 것 같으면 안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신 겁니다. 안주신 것이 주신 겁니다. 무응답이 응답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울입니다. 바울에게는 질병이 있었습니다. 눈병이라고도 하고 혹은 간질이라고도 합니다. 그것이 바울에게 너무도 고통스러웠고 전도하는데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세 번이나 고쳐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안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네가 받은 은혜가 족하니 그만 기도해라 그러시는 겁니다. 왜요? 그 고통 때문에 바울이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요. 그래서 바울은 그 뒤로 그 병 고쳐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그 병 그냥 안고 평생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응답입니다. 


  한나는 고통 때문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고통은 기도의 창조입니다. 고통이 없었다면 한나가 이토록 처절하게 통곡하며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한나는 그 어느 여인과 별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이 그를 기도하게 했고 그 기도가 이스라엘 미족의 역사를 세우는 위대한 인물 사무엘을 만들었습니다. 한나나의 고통은 소원과 기도를 창조했고 그 소원과 기도가 민족의 뼈대를 세우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고통이 찾아오면 ‘아하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구나!’ 그렇게 알고 기뻐하세요. 그 고통을 끌어 않고 기도의 자리로 나오세요. 그리고 한나 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통곡하며 기도하세요. 한나는 고통 때문에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음의 강렬한 소원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소원 때문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이 한나를 통해 기도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기도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기도는 문제에 집중된 우리의 시각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문제를 바라보던 우리의 눈을 돌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기도입니다.


  한나는 브닌나에게서 눈을 돌렸습니다. 그녀를 격동시키는 브닌나를 바라보던 눈을 하나님께로 돌렸습니다. 문제를 직면하는 것은 좋은 거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문제를 해결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문제에서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가 문제 붙잡고 시름하고 그 문제에 집중해봐야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어요.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우리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볼 때 길이 열립니다.


  둘째, 기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기도의 대상,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신가? 11절에서 한나는 “만군의 여호와여”라고 기도합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말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한나는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믿었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문제를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믿을 수 없는 중에도 믿고 바라는 것이 의지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새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공급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능력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어Rm제 초복이라고 누가 영양가 있는 음식 먹자고 해서 식당에 가서 먹는데 참 맛있게 먹었습니다. 초복이라고 목사도 챙겨 주시고 참 감사했어요. 그런데 그 음식 먹으면서 여러분들 얼굴이 필름처럼 싹 돌아갑디다. 누가 요즘 힘이 없어 보이던데 이거 자시면 힘 날텐데.... 여러분들은 맛있는 거 먹을 때 제 생각나는 지 안 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맛있는 거 먹으면 부모님보다도 여러분들이 먼저 생각납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렇다고 제가 여러분들 다 불러다가 사줄 수도 없고 그래서 맛있게 먹으면서도 아픔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영양가 있는 음식은 못 사드려도 그보다 더 능력 있고 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여드리려고 합니다. 사 40:31 말씀.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 주 여호와를 앙망 하는 자 새 힘을 새 힘을 얻으리로다

    독수리 같이 날개를 치며 높이 높이 푸른 창고 나르네

    뛰어가도 고단치 않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네 ♪


  주 여호와를 앙망하자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새 힘을 얻는 다고 합니다.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감 같다고 합니다. 달려가도 피곤치 않는 다고 합니다. 걸어가도 고단치 않는 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붙잡고 독수리 날개 침 같은 새 힘을 얻어 이 무더운 여름을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셋째, 기도는 하나님께 닻을 내리는 것입니다.

  파도가 높으면 배가 흔들립니다. 그때 닻을 깊이 내려야 배가 안전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의 파도가 몰려오면 우리 인생의 배가 심하게 흔들립니다. 의심이 찾아오고 절망이 찾아옵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나와 믿음의 닻을 내려야 합니다.


  히 6:19절에서 히브리기자는 말하기를.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라고 했어요. 우리가 고통의 파도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영혼의 닻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닻이 바로 기도입니다.


  희망을 의미하는 성경의 용어 소망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티그바’입니다. 이 티그바는 ‘서로 꼬아서 한데 결합시키다.’라는 말인 ‘콰바’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즉 소망은 따로 떨어져 있는 두 개를 한데 꼬아 하나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망이란 하나님과 나를 하나로 묶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멀리 떨어졌던 나를 하나님과 하나로 묶는 것이 배가 부두에서 멀리 떠내려가지 않도록 닻을 내리듯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로 묶여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늘푸른 믿음의 동지들이여 우리의 삶에 고통의 파도가 밀려올 때 하나님과 나를 하나로 묶는 기도의 닻을 깊이 내리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닻을 깊이 내리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닻을 깊이 내리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시련과 역경이 찾아오고 고통이 깊어질 때 우리는 하나님 보좌로 나와 안식해야 합니다. 이곳 하나님의 보좌에서 새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이 고난을 헤치고 날아오를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어떤 고통이 여러분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습니까? 그때 절망합니까? 아니면 기도합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전능하신 여호와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면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도할 수 있는 힘이 남아있다면 아직 포기하지 마세요.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가 믿고 의지하고 닻을 내를 전능하신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 앞에 나와 통곡할 수 있다면 아직 절망하지 마세요. 그리고 기도하세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면 이루어집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 가운데 붙잡혀 쓰임 받는 찬란한 인생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고통 중에 일어나 우뚝 서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손에 붙들려 살아가는 이 기도의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어떤 고통이 나를 짓누르고 있습니까? 마음의 무거움이 있습니까? 눌림이 있습니까?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으면서도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고통이 있습니까? 조용히 가슴에 손을 얹으세요.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세요.


  “하나님 내 마음을 주님 앞에 엽니다. 성령님이 임하셔서 나를 치료하시고 나를 새롭게 하시고 나를 치유하시고 나를 고쳐 주옵소서. 내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답답한 나의 마음을 시원케 하옵소서.”

출처 : 홍이석목사
글쓴이 : 홍이석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