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 보혜사 하나님!!

[스크랩] 영에 속한사람, 육의 속한 사람

하나님아들 2012. 7. 25. 15:48

영에 속한사람, 육의 속한 사람

 

영에 속한사람, 육의 속한 사람이란 글을 쓰고 나누면서 많은 지체들에게 질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많은 오해의 여지가 남은 것 같고 그래서 그에 대한 내용의 보강이 더 필요하다 여겨져서 두 번째 후속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 육의 속한 사람]은 우리 안에 은밀히 숨어있는 죄성들을 발견해 내고 경계할 수 있게끔 영의 민감함을 갖자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만약 영의 민감함이 이미 여러분 안에서 발동되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의의 빛이 양심을 비추기 시작했을 것이고 양심을 채찍질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어두움이 두러나는 괴로움에 부딪히게 되셨을 것입니다. 내 안에 숨어있던 죄악들이 이토록 많았는지에 대해 우리는 경악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죄에 직면하게 될 때 일반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현상은 죄에 대한 집중과 함께 죄의 사로잡힘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미워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죄를 스스로 어떻게 해 보려는 잘못을 저지르고 맙니다. 죄를 드러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죄를 용서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면 근본적으로 그 죄를 해결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죄에 집중하게 되면 죄는 우리 안에서 더욱 강성하게 자라서 결국 우리를 죄의 종으로 전락시키고 맙니다. 죄를 이기려 애를 쓰면 쓸수록 죄는 더욱 강하게 우리를 짖누르며 이기지 못하는 우리를 향해 비웃기라도 하듯 많은 정죄를 퍼붓게 됩니다. 죄는 어떻게 하던지 우리로 죄와 씨름하게 함으로써 우리로 주님과 교제해야 할 시간을 허비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노력이 “육신적인 노력” 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죄를 발견하였다면 이제 그 죄도 주님께로 가지고 나가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 죄에 얽매이기 시작하면 믿음의 경주에서 패배하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그분의 은혜로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나아가자. 얽매이기 쉬운 죄는 모두 벗어버리자고요.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1-2]'



저는 분명히 [육신에 속한 사람, 영의 속한 사람]이란 글에서 이렇게 언급한 바 있습니다.



-물론 영이 자라는 것이 스스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영으로 먹이시고 느끼게 하시고 활동할 수 있는 의지를 주어 자라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



영의 활동은 곧 육의 죽음을 뜻하며 우리가 육신의 죄악을 죽이기 위해서 영의 활동을 풍성히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인간적인 노력으로 죄를 이기려 하면 그것은 사도바울이 경고한 것처럼 은혜로 시작했다 율법으로 마치는 것이며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으로 마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3] /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2:21] /



우리를 의롭게 만드시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은혜 뿐입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편안하게 안식할수 있어야 합니다. 영이 살게 되면 육은 자연히 죽게 되는 것이 원리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누릴줄 아는 자만이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은혜 안에서 죄의 억압으로부터 자유해진 자만이 강성한 죄의 세력을 멸하고 점차 영의 사람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육으로 육을 죽이려는(십자가에 못박으려는) 무모한 시도를 해서는 안됩니다. 은혜는 우리의 육적인 노력이 멈출때 비로서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구속만을 바라볼 때 시작됩니다. 우리가 육신적 노력, 율법적 노력을 내려놓을때 비로서 우리안에 성령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죄 자체에 집중하는 삶은 금물입니다. 죄를 발견하면 우리는 그때마다 은혜를 부우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다시 초점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언젠가는 반드시 당신의 문제가 해결될 것임에 대해 의심치 말아야 합니다. 당신안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풍성해지면 그만큼 자연히 죄는 죽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죄에서 당신을 자유케 하시는 복음의 놀라운 능력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은혜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가라’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주님의 뜻을 알고 움직이지 않고 그분보다 앞서 행하는 것은 모두 육신적인 일이 되느냐 하는 언급에 대한 것입니다.



제가 [육신의 속한 사람,영에 속한 사람]에서 지적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그분의 의향은] 물어 보려고 생각지도 않고 너무나 당연하게 스스로 계획하고 일을 시작해 왔던 우리의 만연된 태도에 대해 경고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일을 시작함에 있어 그분의 뜻을 다 알고 행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셨다면 그것 또한 큰 오해입니다. 우리의 영적 선배이신 사도바울의 삶을 통해 이에 대한 통찰력을 얻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행16:6-8] /



결과적으로 볼때 사도바울은 아시아로 전도여행을 떠나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시아로 전도여행을 떠나려 했습니다. 그럼 사도바울이 육신적으로 일을 행한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모든 경우에 우리가 그분의 뜻을 먼저 알고 행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단이 가장 잘 사용하는 기만적 가르침 중 하나는 우리가 주님의 지시를 받을 때까지는 꼼짝도 하지 않고 골방에 틀어박혀 앉아만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럼으로써 사단은 우리의 귀중한 시간을 한도 끝도 없이 허비하게 만듭니다 (물론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사역을 의도적으로 중단시키시고 다음 계획을 위해 기다리게 하시는 경우를 종종 볼수 있습니다만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것은 그와는 매우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께서 주셨던 소망과 비전의 푯대를 붙잡고 가지고 있는 정당한 영적 지식들을 통해서 일을 계획해고 시행에 옮겨야 합니다. 우리가 일을 시작함에 앞서 그분께 뜻을 구하는 자세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겠지만 그분의 뜻을 명확히 알 수 없다 해서 계속 그대로 앉아 있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그분의 뜻이 NO인지를 명확히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움직여야 하고 또한 움직이면서도 그분의 말씀에 민감히 반응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을 진정 협력자로 인정하는 성숙된 사역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뜻과 다르게 일을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역의 과정 속에서 주님께서 STOP을 요구하실 때 바로 멈춰설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일을 결코 육신적인 일이라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영적 활동은 그분의 뜻을 먼저 알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경우가 아닌 특수한 사역에 있어서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듣기 이전에는 결코 행동으로 옮기지 말아야 할 경우들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육에 속한 사람, 영의 속한 사람]에서 썼던 제 자신의 치유를 위해 기도했던 경험과 같은 경우에 있어서 말입니다. 이런 경우를 저는 [행하는 즉시 주님이 역사하셔야만 하는 사역]이라고 칭해 두겠습니다. 즉 내가 말을 던지는 순간에 행동으로 옮기는 순간에 판가름이 나야만 하는 일들, 선포하는 행동이나 말은 주님의 분명한 응답을 받기 이전에는 행동으로 옮겨서는 안되는 것들입니다. 만약 이런 것들을 섣부른 충동이나 맹목적인 믿음으로 행동에 옮기게 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큰 낭패와 실망감을 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던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읽고 두 부류의 사람이 그 일을 똑같이 실천에 옮겼습니다. 한 부류는 조용기 목사님이 저서하신 [4차원적 영적세계]에 등장하는 삼각산의 세 청년입니다. 이들은 부흥회에 참석하기 위해 삼각산을 올랐다가 홍수로 인해 불어난 강을 건너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문득 성경책에서 물위를 걸은 베드로를 기억해내고 합심하여 기도한 후 믿음으로 강 위에 발을 디뎠습니다. 결과는 어찌 되었습니까? 세 명 모두 강에 휩쓸려 다음날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신문과 언론은 이 사건을 대서특필해 [그들의 신이 그들을 버렸다]라는 제목으로 기사화 시켰습니다. 덕택에 수많은 크리스챤들이 당시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대체 이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이 21C를 사는 우리 시대에 또 한번 일어납니다. 바로 멜 형제의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에 등장하는 인도네시아 전도팀원들입니다. 그들은 전도하러 가기 위해 불어난 강을 건너야만 했습니다. 그때 한 형제가 베드로의 사건을 기억해 내고 감동을 받아 모든 이들에게 강을 건널 것을 권고했습니다. 모두 두려워 망설이고 있을 때에 처음 이 제안을 했던 형제가 강가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형제는 강에 휩슬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지체들도 용기를 내어 강에 뛰어들었고 그들은 발 밑에 무엇인가가 그들을 받쳐주고 있음을(그들의 말로는 땅이 아래 있는 것같은 느낌) 느꼈다고 합니다. 그들이 강을 건너고 있을때 그것을 보고 기이히 여기던 토착 이방인들이 그들을 흉내내 강가에 뛰어들었다가 모두 뛰어들자마자 급류를 타고 휩쓸려가 버렸다고 합니다.



자 똑같은 상황에서 왜 우리는 아주 다른 결과를 보게 되는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행동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걷고자 했을때 그가 무작정 물위에 뛰어들지 않았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역자들은 믿음을 [일을 저질러 놓고 보는 무대포 정신, 그리고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 심한 경우에는 [내가 하고자 하는 대로 하나님을 조정할 수 있는 비밀무기]처럼 믿음을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정말 심각하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믿음은 그분을 굳게 신뢰함으로 그분의 명령을 수행해 낼 수 있는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걸어라”라고 명령하실 때 믿음으로 발을 내 디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용기있게 받아들여 행동으로 옮기는 것 그것이 믿음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도네시아의 전도팀은 주님이 주시는 성경말씀을 통한 계시로 말미암에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받았고 믿음을 행동으로 옮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치유를 위한 선포기도를 할때나 기적을 위한 선포기도를 할때 섣부른 판단은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축소시키고 큰 낭패를 가져오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하나도 땅에 떨어짐이 없이 성취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께 들은 말씀만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요12:49-50] /

그러므로 이러한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움직이는 일은 매우 필수적이라 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기도에 있어서는 어떨까요? 우리는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합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기도할 것에 대해 미리 계시하시거나 주님의 뜻을 알리셔서 우리로 준비케 하시는 기도를 하게 하실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분의 뜻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소원을 아뢰며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구하는 것이 육신적인 기도가 아닌가 하고 헛갈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계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굽히지 않을때의 경우이며(요나의 경우와 같이) 우리가 그분의 뜻을 분명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성경에서 가르치신대로 우리의 소원을 그분께 믿음으로 간구하는 것이 정당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를 통해 끈질긴 구함의 기도자세가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한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대부분 우리의 구하는 것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 구하는 것이 그분의 뜻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끝까지 믿음으로 구하지 못하고 중도에 좌절함으로써 포기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7-8]/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이런 믿음을 가진 자가 마지막 때에 몇이나 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그분의 뜻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용기이면서 동시에 구하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히11:6] 의심치 않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고 우리의 소원을 아뢰는 기도를 드려야 하는 이유는 또다른 이유는 내가 구하는 그 기도가 주님의 뜻에 합당한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영적 대선배 사도바울형제님도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주시라고 하나님께 간곡히 기도했습니다. 그는 혹시 육체의 가시를 두신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닐까 하고 기도하길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강청하며 믿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이 그에게 임했고 육체의 가시가 주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았을때 그는 미련없이 구하던 기도를 포기했습니다.



/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고후12:7-9] /



믿음은 결국 그분을 향한 신뢰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그분의 뜻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망설이며 시지부지되는 기도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땅히 빌바를 그분께 담대하게 아뢰십시오. 그러나 주님이 어떠한 응답을 주시더라도 그 말씀에 순종하실 준비가 되어 계신다면 여러분은 이미 육신이 아닌 영으로 기도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물론 저나 여러분이나 그분의 생각이 나를 지배해 그분의 뜻대로 자주 기도할수 있는 차원높은 중보기도의 영역까지 올라갈 수 있기를 기도해 봅니다.

출처 : 주사랑
글쓴이 : 항공모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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