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 보혜사 하나님!!

[스크랩] 성령받음과 능력

하나님아들 2012. 7. 25. 15:49

성령받음과 능력(서철원교수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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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3장 1절-5절(총신대학교 서철원 교수 특강)

20세기는 오순절 운동의 세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00년에 미국에 성결운동에 소속되어 있는 찰스 파함이라는 목사가 1895년부터 성령 운동을 시작해서 캔서스에 벧엘 성경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는 ‘초대교회와 지금교회는 차이가 있다. 초대교회는 성령을 받았을 뿐 아니라, 방언으로도 시작되었다. 그래서 오순절로 돌아가야 하고,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해야 한다.’ 라고 주장하면서 40여명의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아그네스 오즈만이라는 20세의 한 여자가 그의 가르침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가르침대로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받겠다고 말하며 파함 목사와 다른 사람들에게 안수를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1900년 12월 30일 저녁부터 기도를 시작하였는데 1시가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었습니다. 성령이 오셨으면 방언을 해야 할텐데 아무런 연락이 없었습니다. 찰스 파함 목사는 방언을 강조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방언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는데 아그네스 오즈만이라는 여자에게 방언을 받도록 기도했습니다. 1시,2시,3시....새벽녘이 되어서야 방언을 시작하였는데, 중국어, 보헤미안 방언이 연달아 터졌습니다. 미국에 중국 사람이 많이 살았었지만 미국사람이 중국어, 보헤미안어를 하는 것은 기이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찰스 파함 목사의 가르침이 정당하다는 것이 인정되어 다른 사람들도 성령받고 방언받기 위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찰스 파함 목사도 방언을 받았고 힘을 얻어 부흥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캔자스와 미주리 등지를 다니며 부흥 운동을 했는데 2,3년 사이에 교인의 수가 불어 2만명에 가깝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운동이 갑자기 팍 꺼졌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유를 몰랐었는데, 오늘 수도노회의 김양순 목사님이 예배하고 오니까 전화를 하셨습니다.(여기 부분도 살짝.. 이상합니다..;;; 아무튼 제가 뺄 수 없어서.. ㅎㅎ)이번에 성지 순례를 다녀왔는데 자네가 다녔던 암스텔담 자유대학교 앞에서 김삼봉 목사와 같이 얘기했다 하시면서 성령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성령론에 대한 관심이 많아 성령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하고 성령에 대한 책도 많이 읽었지만 그 이유를 몰랐었는데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간음한 사건이 밝혀져서 교회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 1905년에 텍사스로 내려가서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해야 한다고 다시 주장을 하며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감리교의 윌리암 시모라는 흑인 목사가 (그 때는 흑백 분리가 심할 때 입니다. 그래서 백인들이 듣는 강의를 함께 들을 수 없었습니다.) 양해를 구하고 신발장 한 쪽에 자리에 앉아 강의를 들었습니다. 당시 찰스 파함 목사의 강의가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캘리포니아 주변에서의 감리교, 성결교 계통의 사람들도 와서 강의를 들었는데 그들이 돌아가면서 신발장 자리에서 강의를 듣고 있던 흑인목사, 윌리암 시모에게 주목했습니다.

윌리암 시모를 감리교회의 담임목사로 1906년에 초청했고 첫 설교를 했는데, 이 목사는 아직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오후 예배 설교 후에 이를 빌미삼아 당신의 설교를 들을 수 없다고 예배당의 문을 잠궈 버렸습니다. 초청 받은 교회에서 설교 한 번 하고 끝나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더 이상 돌이킬 수가 없어서 1906년 4월7일부터 부흥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하고 그 표로 방언을 한다고, 방언을 해야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열심히 주창했습니다. 윌리암 시모가 흑인 목사였기 때문에 흑인 성도가 많았는데 그래서 미국의 오순절 운동은 하층민들로부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부흥운동에서 사람들이 1주일 사이에 방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윌리암 시모도 그 방언 운동이 일어난 후에 방언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방언 운동이 계속되면서 부흥운동이 진행되었습니다. 1904년 4월부터 시작된 부흥운동이 한 자리에서 1909년까지 진행되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처음 부흥운동 할 때, 월요일 저녁에 시작해서 토요일에 마쳤습니다. 지금은 보통 월요일에 시작해서 수요일 저녁이나 목요일에 마칩니다. 두 주간 부흥회를 하는 경우도 거의 없지요. 전에는 총회도 성총회이니 주일을 끼고 해야 한다고 했다가 설교를 안 할 수 없다고 하여 지금은 총회도 화요일부터 시작하여 금요일날 마칩니다. 1960년대 이후 천막 부흥운동을 할 때 2주,3달 가량 했던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미국에서처럼 4년동안이나 부흥운동을 한 일은 없습니다. 이 부흥운동이 전 미국으로로 퍼지기 시작했고, 오순절 운동이 굉장히 크게 일어났게 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1918년 미국에서 assemblys of God이라는 하나님의 성회라는 총회를 조직하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교파를 이루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모여보자는 취지에서 모여 그 뒤에 계속해서 총회를 이루었고 2,30년 기간에 2,30개의 오순절 교파가 생겼습니다.

이 운동이 북구의 스칸디나비아 지역에까지 퍼졌습니다. 원래는 영국 계통인 토마스 바라틴이라는 목사가 있었습니다. 스칸디나비아지역 감리교에서 목회를 하는 사람이었는데 뉴욕에서 모금운동을 하던 중에 모금에 어려룸이 있었나 봅니다. LA의 부흥 운동의 얘기를 듣고 직접 갈 수는 없으니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했습니다. 어떻게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하는지를 가르침을 받은 후, 하루에 3시간씩 기도하기 시작했으나, 아무런 연락이 없었습니다. 기도시간을 점차 늘려서 하루에 13시간을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방언을 받게 되고 스칸디나비아의 교회에 필요한 것은 미국의 달러가 아니라 이 성령운동이라고 생각하고 교회로 돌아가서 1907년부터 부흥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구라파에 이어 전쟁 중에는 이탈리아에까지 이르고, 남미에 퍼지고 아직도 LA에서 오순절 운동이 진행되고 있는 중에 1908년에 남아공에도 이르러 아프리카로 북상하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1953년에 전라남도 순천에 상륙, 북상하여 1970년에 서대문 순복음 교회(? 목사님도 모르심 ㅋㅋ) 가 여의도로 가서 여의도 순복음 교회로 발전하고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가 되었습니다. 제가 책을 쓰면서 오순절 운동에 대한 많은 책들을 봤는데 다른 오순절 운동에는 성령으로 사는 것,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하는 것이 강조되어 있었으나 한국의 오순절 운동은 교회가 부흥 되고 잘 사는 것에 치중되어 있는 문제가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 오순절 운동이 전 세계에 퍼졌고 1924년에 영국의 오순절 운동이 교단을 이루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를 믿고 중생의 은혜를 받았어도 성령은 못 받았다, 왜냐하면 방언을 못 하기 때문이다. 중생 후에 방언은 별도의 체험이다. 성령 세례를 받아야 능력 힘입어 전도하고 봉사를 잘 할 수 있다. 성령받은 표는 방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장로교, 감리교, 할 것 없이, 심지어는 로마 교회에까지 퍼져 들어갔습니다.

은사운동이라는 이름으로 1975년에 바티칸에서 벨기에의 추기경 세르네스의 집전아래 만 명이 모여 세계 은사자 대회를 할 정도였습니다. 1978년에는 오천명이 켄터베리에서 은사자 대회를 했습니다. 오순절 운동이 이와 같이 은사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로마교회, 그리고 영국교회까지 점령을 할 정도면 세계의 어느 교회가 영향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나라도 많은 영향을 받아 철야 기도를 도입하고, 새벽기도 때 찬양도 하고, 헌금도 내며 열심히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예수를 믿어도 방언을 하지 못하므로 너희는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것이다 라고 말했고, 여전히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은혜를 받지 못하고 구원의 은혜만 받은 줄로 알고 있게 되었습니다.

100년이 지나고, 21세기에 들어왔어도 아직도 오순절 운동이 사라지지 않았고 신오순절 은사 운동이라고 해서 아직도, 여러 주요한 교단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에 근거하여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운동에 따르면 성령 세례를 받는 위해서는, 예수 믿은 후에 또 다른 조건들을 이행해야 합니다. 예수 믿음으로 성령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개혁 신학에 의하면 예수 믿음으로 성령받고 기도로 능력받아 행사하는 것인데, 이 사람들은 성령 세례를 받으려면 특별한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조건은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7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먼저 첫째로 철저히 회개를 해야한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지은 모든, 생각나는 죄를 철저히 아뢰고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장로교도들은 ‘우리는 죄인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사오니,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회개를 합니다. 철저한 회개를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지요.

저도 오순절 운동이 성할 때, 성령세례를 받고 싶어서 조용기 목사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제가 경상북도 영덕에 군목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회개 기도를 철저히 하라고 하셔서 교회에 가서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회개가 철저히 되지 않았고, 그래서 방언 받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장로교들은 우리 자체가 죄로 가득하기 때문에 생각나는 죄들만 죄인 것이 아니라, 우리 자체가 죄이며 죄의 덩어리임을 인정합니다. 모든 죄를 철저히 나열하는 것은 오히려 완전하지 못합니다.

둘째 조건은, 죄를 철저히 회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우리 안에 죄를 완전히 뜯어내야한다는 것입니다. 회개했다고 하더라도 돌아서면 유혹이 작용하고, 거룩하신 성령은 죄인의 심령에 함께 사실 수 없기 때문에 죄를 뜯어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예수의 피로 한다는 말은 그 어디에도 강조되어 있지 않습니다. 순전히 나의 힘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새사람이 되었으나, 옛사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서목사님께서 총신신대원 졸업식에서 설교하신 내용에 참 감명을 받았습니다. ‘내가 70이 다 되었어도 아직 내 안의 옛사람의 문제가 다 해결되지 않았고 지금도 금식하며 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킨다’ 고 하신 말씀이 마음에 와서 박혔습니다. 루터는 그보다 더한 ‘우리는 옛사람을 장사하기 위하여 무덤을 파도 내 손으로 장사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옛사람을 없애지 못합니다. 우리에겐 육의 욕망이 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죄사함은 피로 받지만 죄를 뜯어내는 것은 보혈로 한다는 것은 강조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기독교가 은혜의 종교에서 율법주의로 넘어옵니다. 내 노력과 수고로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하게 되는 것입니다. 혈기 부리고 고집 부리는 것은 진정한 순종이 아니므로 온전히 다 바치는 완전한 순종을 해야하는데, 완전한 순종은 성령 받아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성령을 받기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받기 전 완전한 순종을 할 수 있다면 성령을 받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더욱이 성령을 받고서도 가능치 못한 것이 내 힘으로 가능하겠습니까.

또한 성령 받기 위하여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언제까지요? 주실 때 까지요.. 죄를 무릅쓰고 심지어는 구르며 기도합니다. 안수도 받고 기다리며, 예수믿는 믿음이외에도 성령에 대한 열정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이 기독교이기는 하나 특별히 성령에 대한 신앙을 강조합니다.

방언을 하는 것이 성령받은 증거라는 이러한 주장은 결국 방언과 성령관이 같은 것임을 말합니다. 1세기 중엽, 바울이 세운 갈라디아 교회에도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전도여행 초기에 세운 갈라디아 교회는 지금의 소아시아, 터키 지역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부활을 증거함으로 교회가 성령을 받아 큰 기쁨으로 예수믿는 것을 시작하고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많은 핍박과 환난과 어려움에도, 성령으로 시작했으므로 모든 것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야고보에게 가르침을 받은 예루살렘 교인들이 소아시아에 와서 보니 갈라디아 교회는 예수를 믿기만 하지 할례도 행치 않고 율법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을 모아놓고 바울이 가짜 사도여서 복음을 반쪽만 전한 것이다, 그는 정식 사도가 아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에 제자도 아니었고 승천하실 때에 함께 했던 500명 안에 들지도 않았다라고 말하며 예루살렘 교회의 야고보가 가르친 것처럼 행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할례를 행하고, 율법도 지켜야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예수믿음에 율법을 더하시오라고 말한 후 떠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완전해지고 성령받기 위하여 열심히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혹은 에베소에서 전도하고 있을 때 전해듣고 가슴이 무너져 편지를 급히 씁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못박히심이 밝히 눈에 보이거늘 누가 여러분을 꾀었습니까. 내가 예수를 증거할 때 예수 믿고 성령받았소, 아니면 지금 율법 지킴을 시작한 이후에 성령받았소?’ 우리가 가진 성경에는 ‘듣고 믿음으로’ 라고 적혀 있지만 본문 성경에는 ‘믿음에 들음으로’(믿으매 들으므로 인가요?? ㅡㅡ;;)라고 되어있습니다. 듣고 믿는 것이 같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렇게 먼 사건이 아닙니다. 길게 잡아서 17년정도 전의 사건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우리에게 십자가는 2000여년 전의 사건이며 그래서 충격과 감격이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그러나 17년 전의 사건은 눈에 생생합니다. 제가 95년에 교수 세미나로 예루살렘에 갔을 때 다른 곳에서는 그렇게 큰 감동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교회당에 들어서는 순간, 십자가를 눈 앞에 보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또 이렇게 말하며 힐난합니다. ‘십자가는 율법의 완성이며 마침입니다. 십자가 이후에는 율법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킴으로 성령을 받겠다는 생각이 옳은 것입니까.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할례받고 육체로 마치려 합입니까. 어찌 그렇게 어리석습니까.’

1세기의 바울의 편지가 오순절 운동에 대한 답을 이미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성령은 예수 믿을 때 예수 믿음으로 받고 인간적인 조건-그것이 혹여 종교적인 조건이라 하더라도- 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선물로 받습니다. 내가 노력함으로 자격을 가지게 되어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는 딱 하나의 조건은 예수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방언을 하지 못해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방언도 하고 신유의 능력도 있고 해야 성령을 받은 것 아닙니까?’ 라고 말합니다. 방언은 성령 받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순절 운동의 신학적인 아버지는 아레이 톨입니다. 그는 성령세례를 여러 번 체험했다고 글을 썼지만 방언 받았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운동이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다고 선언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1절부터 24절을 읽겠습니다. (~~~~~~~~~)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나’ 라는 부분이 이해가 안 되지 않습니까? 21절 처음부분은 이사야서 28장 11절의 인용입니다. 이사야서에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셔도 듣지 않으니 나중에 이들에게 다른 방언으로 다른 입술로 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결국, 이전에 하나님의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 뿐이었으나 이후에는 하나님의 백성됨이 이스라엘에서 다른 백성으로 옮겨갈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다는 말은 다른 이방인을 말함이 아니고, 유대인들 가운데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에는 하나님의 백성됨이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넘어갑니다. 때문에 방언은 언제나 유대인이 있는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2장 4절에 보면 오순절날, 이스라엘 복판에서 방언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마가의 다락방으로 옮겨갔습니다. 정확한 수가 성경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믿는 자의 수가 남자만 3000명이라고 했으니 여자와 어린아이가 합쳐진 전체는 10000명 가까이 된다고 봐야 합니다.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수도인데, 수도의 복판에서 방언으로 말을 합니다. 또 언제 방언이 나타났습니까?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이 자신들을 위해서만 이루어졌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방인에게 전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 모든 일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하나님이 부르시는 모든 먼데 있는 자들에게 약속-성령을 주신다는-을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먼데 있는 자’라는 말은 지역적으로 먼 곳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방인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벽이 얼마나 높은지 모릅니다. 먼곳에 있는 사람들 뿐 아니라, 가까이 있는 이방인들도 그들에게는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을 주신다는 약속이 이방인들에게도 열려 있다고 설교하면서도 이방인들에게 전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로 가서 함께 먹고 마시고 교제해야 하는데 그러한 일이 알려지면 유대의 법에 의해 유대인들에게서 제명, 출교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가이사랴까지 와서 도르가를 살려주고 교회를 돌봤으나 이방인들을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예루살렘 교회는 야고보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에 교회의 설립자이며 수사라고 할지라도 율법에 의해 출교될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행동하지 못했던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하여 강권적으로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환상에서 하나님께서는 개, 돼지, 뱀, 두더지, 두꺼비를 먹으라 말씀하시고 베드로는 그것을 어찌 먹겠냐고 강변합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돼지기름에 볶은 음식조차 입에 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깨끗하게 했다, 먹어라 말씀하셨지요. 안됩니다, 깨끗하게 했다 먹어라.. 반복되었던 이러한 대화를 통해 보십시오.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예수님의 말씀보다도 세지 않습니까.

베드로조차도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습니다. 세 번이나 먹으라 말씀하셔도 듣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큽니까, 율법이 큽니까. 베드로가 환상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을 때에 고넬료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베드로를 찾습니다. 가이사랴에까지 와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전하는 것을 망설였던 베드로는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넬료의 집에 가서 말씀을 전합니다. 아침 일찍 고넬료의 집으로 떠날 때 베드로는 혼자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의 집에 혼자 갔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면 어떤 일을 당할지 훤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유대 그리스도인 남자들을 증인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벌써 성령의 말씀을 들은 이후임에도 불구 하고 고넬료의 집에서 왜 나를 청했느냐 또 묻습니다. 기도하고 있는데 천사가 나타나서 네가 들을 구원의 말씀을 베드로에게서 들으라고 하셨습니다라고 고넬료는 대답했습니다.

제서야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묻지 아니하시는 줄을 깨달았고, 하나님께서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분하지 말라셔서 왔다고 말합니다. 고넬료의 집에는 그의 친지들과 군인들이 가득히 있었습니다. 전도라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말하고 이 예수를 믿으시오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전도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0장 43절을 찾아봅시다. (~~~~~) 자신의 말로 이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 말해야 하나, 예루살렘에서 겪게 될 일이 무서워 선지자들이 그렇게 말했다고 간접 인용했습니다.

이 구원은 이방인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유대인을 위한 구원이다라고 인정한 것입니다. 그 말 후에 성령이 그 곳에 임하시고 그들이 방언을 시작했습니다. 같이 간 유대인들이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성령은 유대인들을 위한 것인데, 우리가 처음 성령 받은 때처럼 그들이 방언 받고 찬양하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성령 받고 방언으로 말하는데 물세례는 왜 못 주겠습니까. 베드로가 그제서야 세례를 주고 교회를 삼았습니다. 이방인들이 구원에 이르렀을 때 예루살렘의 온 교회가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1장2,3절에 보면 온 교회의 장로들이 베드로의 목을 치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강권적으로 밀어서 갔다, 전도도 나의 말이 아니라 선지자의 말로 했다, 같이 간 이 동료들이 증인이다라고 설명했더니 그제서야 그렇다면 이방인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주셨다고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이 때에도 성령을 주셨다고 말하진 않습니다. 단지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주셨다고만 말합니다. 예수 믿어서 성령받는 것이 방언하는 것과 아무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만으로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성령받은 것을 증거할 수 없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앞에서 방언을 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방언하는 것은 4군데에서만 나타납니다. 19장 2절, 6절을 읽겠습니다. (~~~~~~) 이것은 교회가 아닌 에베소의 회당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볼로가 전도할 때였습니다. 그는 들어서 믿은 2세 기독교인입니다. 물론 유태인이며 구약에 대하여 능통한 자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잘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열심히 예수에 대하여 전하고 난 뒤 18장 25절에 보면 세례요한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사람들을 유대인의 회당에 가입시킵니다. 바울이 왔을 때 여기도 믿는 사람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궁금해진 바울은 그 회당에 찾아갔습니다.

바울은 어느 곳에 전도하러 가든지 이방 민족에게보다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회당으로 찾아갔던 사람입니다. 그는 뜨거운 민족애를 품고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맡았던 유대인 선교를 자신이 맡고 싶었습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입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뉠 때 10지파가 떨어져 나가고 2지파가 남았는데 베냐민 지파와 유다 본 지파였습니다. 10지파가 떨어져 나갈 때 가장 먼저 나와야 할 지파가 베냐민 지파입니다. 그 지파에서 사울왕이 나지 않았습니까. 다윗의 집과 가장 사이가 좋지 않은 지파가 베냐민 지파임에도 떨어져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 때부터 유다지파의 사명은 다윗의 집에서 떨어져 나간 10지파를 유다지파에게로 돌리는 것이 되었습니다. 떨어져 나간 유대 백성들을 새 다윗, 참 다윗-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에게로 돌리는 것이 베냐민 지파의 사명(전도사님, 이상해요 ㅡㅡ;; 유다지파의 사명이 몇 문장 사이에 베냐민 지파의 사명이라고 바뀌어요..켁..) 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베냐민 지파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전도하는 것을 바랐으나 그것은 허락되지 않았고 대신에 어느 곳에 가든지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 들렀습니다. 그는 자기 종족을 먼저 전도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이방인을 전도하기를 바랐습니다.

바울이 그러한 마음을 품고 에베소의 회당에 갔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았으면 성령 받은 표가 있어야 하는데 그들의 안에 옛사람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들이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더니, 성령에 대하여 들은 바가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세례는 받았냐는 바울의 물음에 물론 세례요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놀라 ‘요한의 이름으로 세례받아서는 죄용서 받고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사도들의 시대에는 삼위일체의 이름으로는 세례를 주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세례를 주었습니다-’ 라면서 그들에게 새로이 가르치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아볼로는 열심이 있었어도 요한의 세례밖에는 몰랐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의 설교를 듣고 열성은 있으나 전도자로써 무지하다고 하여 집으로 데려가서 다시 가르친 이야기가 18장 26절에 나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로마에 살았던, 후에 바울의 동역자가 되기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아볼로를 어느 정도 가르쳐서 고린도로 보내었는데, 아볼로는 고린도에서도 많은 분쟁을 낳게 됩니다.

방언을 하는 것이 성령 받은 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백성됨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으로 옮겨간 것을 유대인들 앞에서 널리 알리게 되는 증거는 되었습니다. 에베소의 회당의 많은 유대인들 앞에서-에베소는 큰 도시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방언이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도 하나님의 백성됨을 믿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방언으로 그 증거를 삼은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처음 예수 믿을 때에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했다면, 믿기 시작하였을 때부터 성령 받아 성령으로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장로님~ 이런 대화도 뺐어요 ;;)

저는 1945년부터 교회 나가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믿고 있습니다. 처음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전에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었겠습니까? 언제 뵈었다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예수믿고 성령 받은 가장 확실한 증거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을 보시겠습니다. (~~~~~) 성경에는 아바 아버지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사실 우리말로는 아빠 아버지라고 해야 합니다. 동양어권에서 동일하게 사용하는 말이 이 ‘아빠’ 입니다. 어린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제일 처음 배우게 되는 말이 ‘아빠’ 입니다.

‘아빠’란 말을 들은 아버지가 아이를 으스러지도록 안아도 그 정이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 이 호칭에는 사랑의 정이 농축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우리가 어떻게 아들이 되었습니까? 예수를 믿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아들입니다. 아들이라는 말에는 ‘낳은 자’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을 우리 안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 믿기 시작할 때부터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신다면, 성령을 받은 가장 확실한 증거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5절도 찾아봅시다. (~~~) 우리는 하나님의 친아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양자’입니다. 하지만 양자는 친아들과 같은 지위를 갖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양자의 영을 보내심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신 분의 성령을 받아 같은 성령의 힘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 기록은 마가복음 14장 36절에 있습니다. (~~~~) 이 기도는 겟세마네의 기도입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세 명의 제자가 이 기도를 듣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설교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 곁에서 졸면서도 이 기도는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들은 기도 그 대로 인용하여 설교를 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아바 아버지’라고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약학자들은 아버지라고 부른 부분도 분명 ‘아빠’라고 불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많은 정부들이 정권을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형벌들을 만들었습니까. 그런데 그 중에서도 십자가는 극악하기 이루말할 수 없을만큼 참혹한 형벌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능지처참이라는 산 자를 손과 발을 소에 묶어 네 방향으로 당겨 찢어 죽이는 잔인한 형벌이 있으나, 그래도 그 형벌은 금방 끝나게 됩니다. 그에 비해 십자가의 형벌은 건장한 사람을 산채로 나무에 매달아 놓습니다. 손과 발의 뼈 사이에 못을 박았기 때문에 뼈도 그다지 상하지 않고 큰 핏줄도 건드리지 않습니다. 피가 조금씩 조금씩 흘러내리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건장한 사람은 일주일, 열흘도 십자가에 매달려 있습니다. 아픔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저주를 퍼부어 가며 몸부림치다가 죽습니다. 독수리가 와서 눈을 파먹고, 뜨거운 햇빛이 갈증을 더욱더 견디기 힘들게 합니다. 주님은 매달린 채로, 사람들과 눈을 마주쳤습니다. 얼마나 치욕스러웠겠습니까. 사형수에게도 지켜주는 최소한의 예의가 있습니다. 그의 눈을 가려서 사형집행자의 눈을 못 보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형벌은 이렇게 참혹하면서도 치욕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못 박힌지 여섯시간 만에 죽었다고 하니 빌라도 총독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이런 무서운 십자가를 앞에 두고 주님이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땅에 왔지만 십자가의 형벌을 나에게서 돌리실 수 없으십니까 기도하실 때에 그냥 ‘아버지’라 하지 않으시고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동일한 영에 의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받은 표는 이것입니다. 방언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또 이의를 제기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예수를 안 믿어도, 성령 못 받아도,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그냥 부르는 사람이 있지 않겠느냐고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게 말합니다. 로마서 8장 16절에 보면 다른 사람이 하기 때문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자녀라고 증거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또 다른 문제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 세례를 받으면 방언을 할 뿐 아니라 능력받아 전도와 봉사를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 다 쉽지 않습니다. 특히 전도가 여러분에게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전도가 어려운 제일 큰 이유는 우리 믿음의 근본인 십자가에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1장 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라고 했는데 이를 뒤집으면 십자가가 부끄러울 수 밖에 없는 일이라는 말이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셨음을 증거하며 전도하는 것은 맨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정신이 약간 돌아야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 말이 아닙니다. 전도는 고린도전서 2장 4절에 나타난 바울의 말대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만 된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전도를 위하여 아테네에 갔었습니다. 당시 문명의 중심지였던 아테네시에는 우상이 가득했습니다. 심지어 어느 동상에는 ‘알지 못하는 신’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을 정도였습니다. 혹시 빠진 신이 있어 노할까봐 그렇게까지 했던 것이지요. 당시는 이미 철학 체계가 다 잡힌 후이기 때문에 아테네에서는 철학자들이 모여서 새로운 것에 대하여만 듣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곳에서 예수와 그의 부활에 대하여 전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신인 것 같아 궁금증을 표했고 바울이 그들 앞에서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살게 하셨고 여러분 안에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살아계시다라고 말하며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섬기는 신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다라고 전했으며 심판 후에는 부활이 있을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31절이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설명했던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십자가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두렵고 떨려서 철학자들 앞에서 십자가에 대하여 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도 헛수고는 아니어서 몇 몇 사람, 다마리와 디오누시오 등이 예수를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아테네의 처절한 실패를 되씹으며 고린도로 돌아갔고 그 곳에서 나는 더 이상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못 박히심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기를 원하지 않겠노라고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5절의 처절한 고백이 이렇게 나온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십자가는 정말 어리석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로마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반역자입니다. 황제에게 반역해서 유다를 독립시키려고 했던 유대인의 왕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를 세상의 구주라고 전파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십자가의 형벌은 로마 시민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으며 국가적인 반역을 일으킨 사람에게만 특별히 행해진 형벌이었습니다. 귀족이나 중류층 이상의 사람들은 십자가 처형을 입에 담기도 꺼려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철학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을 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심판과 그리스도의 부활만 얘기하고 십자가에 대하여는 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고린도에 돌아와서는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겠노라 말합니다. 물론 고린도는 아테네처럼 철학자가 많은 도시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 유명한 디오게네스가 알렉산더와 만난 장소가 고린도의 시장 한 귀퉁이입니다. 그곳도 성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아테네의 실패 이후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만 전도하겠다고 고백합니다.

20세기가 지난 지금은 십자가가 멀리 있기 때문에 십자가를 전하는 일이 쉽습니까? 아닙니다. 지금도 십자가를 전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가 처음 전도하기 시작할 때도 십자가에 대해서 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믿고 구원 얻읍시다, 천당 갑시다라고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 믿고 구원받고 복 받읍시다였습니다. 전도문속에서 십자가를 언급하지 못했습니다. 십자가를 증거해야 사람들이 회개하고 진짜 그리스도인이 될 터인데 한국 교회가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에 대하여 말하지 못해 왔습니다.

전도할 때는 그렇다고 쳐도, 교회 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가 용서되니 십자가를 믿으라고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출생후에도 인큐베이터에서 자라는 어린아이와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 내 정신으로 할 수도 없거니와 그것은 결실도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는 것은 기도로만 됩니다. 복 받으려고 하는 ‘주십시오’의 기도가 아닌, 옛사람을 죽이는 기도만이 능력을 행사하게 돕습니다. 성령은 한 번 받으면 떠나가는 일이 없지만, 능력은 한시적이어서 소모되면 끝납니다.

계속 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한국의 유명한 부흥사들 중에 예전의 능력이 계속 있는 줄 알고 행세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입니다. 능력은 기도로 행사하고 기도로 받는 것이며 계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능력을 구하는 기도는 나의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요구들을 만드시고 그것들을 기도하게 하십니다. 우리 삶에 절실한 필요의 요구가 없으면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쏟아부어주시고 잘 되게만 하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평안하고 형통할 때는 인간은 죄를 생각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늘 기도하게 하시려고 문제와 필요를 주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기도를 넘어서서 옛사람을 죽이는 기도를 시작할 때 능력을 힘입게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기도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육의 욕망을 따라 하고 싶은 것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하기도, 간절히 하기도 힘듭니다. 또한 그러한 기도는 단 몇 분의 기도로 이뤄낼 수 없으며 깊은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능력은 기도로 행사합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한 사람이 간질병 환자인 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환자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환자의 아버지가 달려가서 예수님께 할 수 있거든 나를 불쌍히 여기사 나의 아들을 고쳐달라고 말합니다. 그 때 예수님의 대답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왜 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까? 그들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옆에 모시고 있다 하더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능력을 행하지 못합니다. 기도가 능력 행사의 길입니다.

오순절파는 신학을 모르고 성경을 몰랐기 때문에 성령 받는 것과 능력 받는 것을 혼동하고 어리석은 주장을 하였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성령은 예수 믿음으로 받고 예수 믿을 때 받습니다. 성령 받은 가장 확실한 증거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능력은 성령오심과 같지 않으며 기도로 받고 기도로 행사합니다. 계속해서 공급받아야만이 전도하고 봉사하며 옛사람을 죽이는 것이 가능합니다.

출처 : 주사랑
글쓴이 : 항공모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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