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스크랩] 제 3 부 바울의 1차 전도 여행(1)

하나님아들 2018. 7. 25. 23:37

사울은 바나바 그리고 마가와 함께 기독교 역사에 찬란한 보석처럼 빛나는 전도여행의 첫 발을 옮기게 되였다.

사도행전 13장 1절 부터 14장 28절 까지가 1차 전도 여행한 내용이 기록 되어 있는데, 성경을 중심으로 사울의 전도행적을 따라가며 사울과 같은 애뜻한 심령으로 함께 출발 해 보자.

 

 

사울이 전도여행을 출발한 시기는 다메섹에서 회심한 이후 17년째가 되는 해였다.

사울의 1차전도여행 출발시기는 AD46년으로 사울이 45세 때에 1차전도 여행을 출발하게 된다. 2천년 전 로마제국 시민들의 평균수명이 50세 안쪽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당시의 연령상으로 사울은 중년에 해당하는 나이였다.

그때 사울의 외모는 기록에 의하면 작은 키에 안짱다리, 대머리에 맞붙은 두 눈썹 그리고 유난히 큰 코의 외모를 지니고 있어 균형 잡힌 외모라고 말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모습이었다.

바나바와 사울 그리고 마가는 성령의 인도 하심을 힘입어 첫 출발지인 실루기아 항으로 가는데 안디옥 교인들은 바나바와 사울을  위해 안디옥에서 이곳 항구까지 하룻길을 걸어와 배웅을 해 주었다. 실루기아는 안디옥 서쪽 26Km 지점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 항구 도시였다.  

 

실루기아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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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교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바나바와 사울, 그리고 마가 요한은 실루기아에서 배를 타고 구브로(Cyprus)를 향해 떠났다.

바나바 일행이 구브로를 선교 여행의 첫 목적지로 삼은 것은 그곳이 바나바가 태어난 곳이어서(행 4:36) 다른 낯선 곳보다 나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구브로 즉 키프로스는 고대로부터 안디옥에 모여든 동방의 문물이 지중해로 진출하는 관문이고 통로였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애굽을 지배한 프톨레마이오스1세는 구브로의 살라미 항구를 먼저 장악하여 이 동서 교역의 통로를 선점하고 흩어진 유대인들을 살라미에 정착하도록 했다.

구브로는 길이가 225 km, 폭이 100 km 에 달하는 섬이었고 시리아와 터어키의 해안에서 각각 100 km 정도 떨어진 지중해 동편의 섬이다.

실루기아 항을 떠난 바나바와 사울일행은 구브로섬 살라미 해변에 도착하였다

 

살라미해변

 

살라미는 구브로섬 동쪽에 위치한 해안도시이다. B.C. 58년 이후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지중해를 통한 해상 무역으로 인해 상업 도시로 커갔다. 그러나 A.D. 116년 트라야누스(Trajanus) 황제에 의해 파괴되었다.

살라미에는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회당이 많이 있었다.

바나바와 사울은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있는 기회를 포착했다. 비록 그들은 이방인들의 사도로 전도 여행을 떠났지만 실제적으로 전도는 주로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유대인들도 그들의 전도 대상에 포함되었음을 의미한다.

마가는 바나바와 사울을 대신하여 세례를 베푸는 일을 도왔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사울은 전도 여행시 몇 사람에게만 직접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이다(고전 1:14-17). 또한 마가는 두사람의 여행 경비를 관리하는 등 전도 여행 중 그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도왔다. 살라미에서 복음을 전한 바나바와 바울 일행은 살라미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반대편에 있는 바보에 도착했다.

바보는 살라미로부터 약 180여km의 거리에 있다. 바보에서 바나바와 사울은 서기오 총독 관저에서 일하는 바예수라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게 되였다.

바예수라는 박수는 당시 마술적 또는 주술적 치료 행위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거짓 선지자라 자칭하며 하늘의 계시자로 행세하면서 혹세무민하고 있었다.

유대인인 그가 그 같은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활동을 지속 했다는 사실은 그곳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그의 행동에 미혹되었거나 아니면 총독이 그를 보호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를 율법에 따라 처벌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 바예수라 하는 박수는 총독의 신임을 얻어 바보에서 특정한 지위세력을 가진자로 총독 서기오 바울이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할 때 여러 가지로 방해하고 총독 서기오 바울에게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게 방해 하였다(행13:7~8)

그러나 지혜로운 총독 서기오 바울은 바예수의 뜻을 저버리고 사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바예수라는 박수를 바라보고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찾게 되였다(행 13: 10~11)

총독 서기오 바울이 사울이 전하여 준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고 또한 사울이 바예수라는 박수(엘루마)를 질책과 함께 저주를 하자 소경이 된것을 목격하면서 하나님의 임재함과 능력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믿기에 이르렀다.

 

사도행전 13장 9절에 처음으로 사울을 바울이라고 언급하게 되는데 이 후로는 사울이라는 이름은 없어지고 바울로 불리게 된다.

사울이라는 이름에서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 이유에 대해서 사울이 회개한 이후부터 새사람된 표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는 주관적 추측에 불과하다. 오히려 바울이라는 이름을 본래부터 갖고 있었는데 서기오 바울을 만난 이후부터 누가가 사울을 로마식 이름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유대식 이름 외에 로마식 이름을 동시에 갖고있는 사람들이 있는데(1:23;12:25;13:1) 특히 사울은 나면서 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졌던 사람이었으므로(22:28) 로마식 이름을 가졌을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럼에도 불구하고 누가가 바울이라는 로마식 이름을 언급하게 된 것은 본격적으로 사울이 이방선교를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즉 이방 지역에서는 로마식 이름으로 언급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여질 것이고 설교에도 도음이 되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바보에 있는 바울의 채찍교회와 채찍맞을 때 묶였던 돌기둥

 

 

 

 

 

 

 

 

 

 

 

 

 

 

바보에는 2000여년전 바울은 40에 하나 감한 매를 맞는 고통을 겪은 후에도 전도여행을 포기하지 않고 이곳 바보 항구에서 배를 타고 오늘날 터키 남부에 있는 버가로 전도여행을 계속했다. 바울이 채찍이 맞았다는 바울채찍교회는 항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교회는 영국 성공회에서 바울이 채찍에 맞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교회이다. 교회 앞에는 300년께 세워진 교회터가 발굴되어 있었고 그 교회 유적 옆에는 ‘성 바울의 기둥’이란 푯말이 그리스어와 영어로 새겨져 있는 대리석 기둥이 놓여져 있다. 바로 바울이 40에 하나 감한 매를 맞기 위해 묶였던 기둥이다. 고린도 후서 11장 24절에는 바울이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그 매를 맞은 장소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이곳 바보에 있는 바울이 채찍에 맞은 것을 기념하는 기념교회와 바울이 묶였다는 대리석 기둥은 그 중의 한곳임을 증거하고 있다. 교회 오른쪽으로 얼마 되지 않는 곳에 카타콤이 있다. 비록 작은 규모이기는 하나 초기 기독교의 박해와 순교사에 등장했던 카타콤이다

 

버가에 있는 로마시대의 체육관 및 목욕탕 유적들

 

버가에 도착한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마가

 

구브로 섬의 바보에서 전도를 마치고 바울은 바나바 그리고 마가와 함께 배를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로 향하였다.

사도행전 기록자 누가는 사울을 바울로 호칭하면서 전도여행의 중심 인물을 바나바에서 바울로 바꾸었다.

바보에서 박수 엘루마의 사건 이후 누가는 여기서부터 바울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누가의 관점에서, 바울이 엘루마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총독 서기오 바울을 기독교인으로 회심 시킴으로써 선교 사역에 있어서 지도자 격으로 부상된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바보에서 바울 일행이 도착한 밤빌리아는 지중해 북단에 있는 소아시아의 남쪽 해안에 접한 지역이다. 해안의 길이가 120km이며 내륙쪽으로 폭이 48km 정도의 이 지역은 동편에는 길리기아, 서쪽에는 루기아, 북쪽에는 비시디아가 인접해 있다.

그리고 버가는 밤빌리아의 중심 도시로 해안에서 내륙쪽으로 13km정도에 위치해 있다.

바울이 버가에서 전도하지 않고 안디옥으로 가게 된 것은 버가가 저지대 습지역으로 여러가지 풍토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몸이 약한 바울이 이 질병으로 인해 고지대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먼저 전도의 발길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돌아오는 길에서 다시 이곳을 들르게 된다.

가에 도착한 마가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들을 도우려 따라왔던(5절) 마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사유를 누가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마가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지게 되는 점으로 보아 바울은 요한의 귀향으로 크게 실망하고 상심한 듯하다(15:37-39).

마가가 떠난 후 바울과 바나바는 바시디아 안디옥으로 향하였다.

 

바울이 나그네의 차림으로 여러 날을 걸어서  변변치 못한 몰골로 이 비시디아 안디옥 산지에 드디어 도착하고 어마어마한 위용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우상 신전과 쭉 뻗은 도로 앞에  도착했을 때의 감회가 어떠했을지 궁금하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해발 약 100m에 달하는 고원지대이다. 오늘날의 터키 중남부 지방의 얄바크 근처의 폐허 지역을 말하며 당시에 이곳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바울은 3차전도 여행때에도 이곳을 들르게 된다(18:23).

바시디아 안디옥에도 셀류쿠스 왕조 때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거주했으므로 유대인들을 위한 회당이있었다. 따라서 바울 일행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거행되는 예배에 참여 하였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였던 유대인의 회당 터

주춧돌만 남은 유대인 회당 터 옆에는 그 후 비잔틴 시대에 지어졌으나 지금은 다 허물어진 채로  있는 옛 교회 터, 바울의 교회가 있다

 

구브로나 이곳에서도 바울 일행이 회당을 먼저 찾은 것은 이방 땅에서 동족에 대한 친밀감을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였고 이를 통해 이방 선교 이전에 유대인에 대한 방문이 선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행13:15)

1세기경의 회당 예배는 쉐마(신 6:4-9) 기도와 율법서와 예언서 낭독 그리고 설교나 권면의 말씀과 축복의 순서로 진행되었던 것 같다. 성경이 회당에서 낭독되었던 전통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시작되었으며 B.C. 163년부터는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율법서 낭독을 금지하여 예언서만 낭독되었으나 마카비 혁명 때에 다시 율법서가 낭독되었다. 회당에서 성경은 히브리어로 낭독된 다음 다시 아람어나 코이네 헬라어로 통역되었다.

예배 순서상 권면의 말씀을 할 차례가 되었는데 회당장은 바울에게 사람을 보내어 설교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당시 예배 중에 설교 또는 권면의 말씀을 담당할 대상을 회당장이 자유롭게 선정할 수 있었고 랍비나 방문자에게 설교를 요청할 수 있었다. 다만 회당장은 예배 전에 설교자를 선정해야지 예배 도중에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외로 회당장이 예배 도중 바울에게 설교를 요청하게 되는데 아마도 바울과 바나바의 일행이 예배 시작과 더불어 회당에 들어왔기 때문에 미리 설교를 부탁할 수 없었던 것으로 추측할수 있다. 이를 통해서 블 때 회당장은  바울 일행에 관한 소문을 많이 듣고, 그들에 관해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고 하며  바울에게 설교를 요청한 것은 조건적 제안으로서 상대방에게 공손하게 요청하는 말이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이러한 의미를 최대한 살려 "두 분께서 혹 격려할 말씀이 있거든 이 회중에 한 말씀 해주셨으며 좋겠습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회당장의 제안에 대한 응답으로 바울은 곧바로 일어나 설교를 하기 시작한다. 본래 회당 안에서의 설교는 관습적으로 앉아서 하는데(눅4:20) 바울은 일어서서 손짓까지 하면서 설교를 하였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열정적인 웅변가로 보여지게 된다. 아마 누가는 바울을 헬라적인 연설가로 묘사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러한 형태의 설교는 유대 회당의 전통과는 다른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바울은 서두를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며 설교를 시작하였는데 회당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유태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이방인, 그리고 유대교에 입교는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 이였기 때문에  모두를 어우르는 인사를 한것이였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것을 비롯 광야에서와 다윗왕조를 말하고 다윗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가 나실 것을 약속하셨는데 그가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거하고, 오시리라 하신 메시아 예수에게 죽일 죄가 하나도 없음에도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고 하여 십자가에 달아 죽였는데 그것 조차도 선지자들의 말을 이룬 것이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하나님께서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게 하셨고 갈릴리 모든 사람들이 그 일에 증인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예수를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것이며,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예수그리스도를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며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다.

바울이 설교를 마치자 회당장을 비롯하여 함께 예배하던 사람들이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전해 달라고 부탁을 할 정도였고 예배가 마친 후에도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고 권하였다(행13:42~43)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회당으로 모여 들었는데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자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나 너희가  그 말씀을 버리고 영생 얻는데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에 우리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다" 고  담대하게 말 한 후 " 주님께서 이같이 우리를 부르시고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셨다" 고 선언 하였다.

이 말을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 된 사람들이 다 믿었다. 뿐만 아니라

주의 복음이 비시디아 안디옥 전체에 두루 퍼지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여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아내였다.

 

사도바울의 교회 터

 

바울과 바나바는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향하여 가는데 복음을 받아들인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였다.

 

출처 : 속초밥사랑공동체
글쓴이 : 밥사랑최효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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