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유다 왕국
1. 사울 왕국
개별적인 이스라엘 지파들이 이른바 사사들의 시대에 긴박한 위협의 압박 아래서 서로 단결하였다.
카리스마적인 지휘자들이 다스렸던 이스라엘 영토를 침해하는 이웃 적들의 공격들은 본질적으로 시대적으로나 지역적인 경계지었다.점차 제도적으로
조직정돈된
세력이 서쪽 해안지대에서부터 밀어들어와 전체 영토를 확장하려는 물결 속에서 이스라엘인들의 지역을 수축시켰다.따라서 절실하게 호소되었던것은 한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의
장기 지도체제, 즉 종신집권 사사통치였다.이런 고찰들을 살펴볼때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은 처음에는 여전히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우선적으로 지파들을 동원하는 지도자였고 한 군대의 왕이였다. 이스라엘은 하나의 지파공동체였다.
삼상 11장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왕위에 오르는 길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사무엘의 중재자적인 기능만이 연결을 제공해 주는것으로 보인다. 중요한것은 사무엘이 ‘왕을 세우는 자로서’ 더분명하게 알려진 것이리라.
본질적인 면에서 왕국 형성은 첫째로 왕의 인물을 선택하는 이는 야웨이시다는 것과 백성들의 구두 동의 표결에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서는 누구도 자신의 독자적인 힘의 완비로 왕이 될 수 없음을 뜻한다. 그런 한계에서 설정된 지배자의 정신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있던 것이 아니라, 왕은 엄밀하게 야웨와 백성 중간에 서 있었으며 또 양쪽의 동등권을 가진 대리인들의 이념.정신. 가운데 존제한다.
사울은 왕위에 등극하는 순간 일련의 산적된 과업에 직면했던 사실이 틀림없다. 우선적으로 시급했던 일들은 외교정치의 일들이었다. 우선 암몬인들의 위협이 처리되었다. 사울 당시 진저리나게 오래 끄는 전투는 블레셋인들과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다윗이라는 젊은 소년의 등장하여 블레셋의 골리앗을 죽임으로 승리를 얻게 된다. 골리앗과의 싸움은 일련의 국지적인 관심에 해당된다. 그것은 사울 통치 아래 있는 이스라엘들을 블레셋인들에게 보내는 전렬(戰列)들이다. 그것은 서로 합심해서 얻었던 승리다.
이후 이스라엘의 숙적 아멜렉인들과의 교전은 삼상 15장에서 사울가문의 왕국 발전의 전기가 된다. 야웨몫을 생각하지 않고 이스라엘인들의 전리품을 횡령한 것을 사울이 요인했다. 사무엘은 사울의 왕국이 박탈당할 것이라고 일찍부터 언명했다. 그후 사울왕은 우울증에 빠지고 다윗을 병적으로 질투하며 괴롭힌다. 결국 사울은 블레셋인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죽는다.
사울은 모든 기도에서 다만 지파들의 군대에게만 원조를 받았다. 사울의 왕국이 초창기에 아무런 관리의 구성이 없이 불정확한 체제로 수축되었으며 단순히 지파들의 가결로 지지 받았고 전적으로 그들에게 의존되었지, 완전한 국가방어를 위한 기본적인 저력은 발전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것은 블레셋 힘의 수준을 따르지 못해 그의 제물이 되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투에서 사울은 패하고 그곳에서 자결한다. 새로운 발전은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좌우 된다. 다윗은 유다왕이 된다. 그것이 새로운 가능성들을 열어 놓는다.
2. 다윗 제국
블레셋이 갈릴리 산맥의 도시들과 요르단 건너편을 장액했다고는 하지만 우선권을 요구할정도는 못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에브라임 산맥은 점령되지 못했으나, 동부 요르단의 남쪽 경우는 확실히 점령했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사울의 사령관 아브넬은 사울의 아들중 한사람을 발견한다. 그아들은 분명히 블레셋을 공략하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고로 그는 패배의 파국을 모면하고 살아 남을수 있었다. 삼하2,9에따르면 아브넬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에스바알이라 하고 길으앗과 므깃도 평지의 소도시에 군림하는 왕으로 삼았다. 에스바알도 그가 무엇인가를 성취하려고 했었다면 성취할 수도 있었을것이다. 서부 요르단 땅, 기드온 가까이 베냐민 지역에서 아브넬 휘하의 에스바알의 부대와 요압이 이끄는 다윗의 용사들 사이에 전초전이 벌어진다. 아브낼과 에스바알의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아브넬은 다윗과 협상을 취한다. 이때에 다윗은 이미 유다의 왕이었고 헤브론에 거하고 있었다. 아브넬은 자신의 의도를 분명하게 표명한다. 그는 옛 사울의 국가인 이스라엘인들이 다윗과의 계약을 통해, 유다의 왕이 이스라엘도 통치하도록 움직일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삼하 3,21절의 결정적인 귀절은 “그때 다윗은 아브넬을 보냈다. 그리고 그는 평안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브넬이 헤브론을 떠나기가 무섭게 요압이 전투를 마치고 돌아왔다. 요압에 의해 아브넬은 죽임을 당했다. 아브넬의 죽음은 에스바알과 그의 이스라엘에게 죽음을 갖다주어 맥이 풀리게 하였다.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에스바알이 들었을때 그의 손에 맥이 풀리고 전체 이스라엘이 경악했다”. 에스바알은 자기에게 중요한 인물을 잃었다. 이스라엘은 위기에 직면했고 그의 마지막 희망을 빼앗겼다. 사건들은 전도되었다. 사울 주위에 있던 용병들이 반역을 하였다. 이들은 에스바알을 살해한다.
다윗이 일찍부터 적절한 기회를 보아 사울의유업을 차지하려고 의도를 굳혔는지는 문제로 남아있다. 고대 사울의 통치 관할지역에 있던 이스라엘인들은 계속해서 삽시간에 패배를 당했다. 두 왕들이 죽고 그들 가운데 가장 유능한 이를 잃은 고통은 극도에 달했다. 성문 앞에는 계속해서 승리의 개가를 울리는 블레셋인들이 몰려 들고 있었다. 준비되었던 사건의 과정이 이제 성취되어 나갔다. 모든 지파들의 만장 일치에 따른 것이든 아니든 에브라임 지파의 북쪽은 자발적으로 그 당시 땅에서 가장 강한자였던 다윗의 보호 아래 종속하였다. 에브라임 지파 동맹과 유다 남부 지역과 통합의 순간은 그의 의미와 문제성이 언제나 과소평가 되어 왔다. 왜냐하면 유다가 언제나 이스라엘에 속했음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기서 전적으로 새로운 발전의 단계가 나타났다. 이스라엘이 ‘백성’이 되었다는 것, 다윗이 이스라엘과 유다를 군합국, 인격의 연합속에 통합시킨는 순간까지 걸었던 과정은 이제 그의 건국초기, 즉 사울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추구할 수 있다.
다윗은 음악 연주자로 있다가 사울의 경호원으로 발탁되어 승진한다. 다윗은 젊은 용사로서 전투부대 지휘관으오서 첫번 전과를 올린다. 사울은 천명이요, 그러나 다윗은 만명을 죽였다. 사울은 다윗의 우월성과 통솔력을 두려워 하게 되었다. 다윗이 거기서부터 자신을 위해서 전적으로 새로운 실존을 구축할 수 있었던것은, 다시 말해서 에브라임과 베냐민에서 가능성이 희박했던 그런 실존의 형성은 유다 남부의 독립성을 해롭게 입증한다.
유다 지역에서 다윗의 작전은 사울의 박해와 전승을 결속시킨다. 사울은 증오, 질투와 불신으로 가득찼다. 그에게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싸우는 동안 그에게 이스라엘을 대항해서 싸워야만 하는 것은 면제되었다. 길보아 산지 꼭대기에서 사울의 죽음은 새로운 정세를 만들었다. 다윗은 유다인들의 뜻대로 행동한다. 그는 실력자요, 그 땅의 무시할 수 없는 힘이다. 이러한 총체적인 회전에 대한 불충분한 전달사항에 첨부된 4절의 내용은 명백하게 효력을 나타낸다. “그때 유다의 사람들이 와서 헤브론에서 다윗을 유다 왕가의 왕이 되게 기름을 부었다” 다윗은 최종적으로 그것을 의도했던가? 그것은 부인되지 않는다. 다윗이 아말렉인들로부터 탈취한 물건을 나눌만큼 그는 의식적으로 친구들을 만들었다: 그들은 다윗이 블레셋인의 신뢰를 유지하고 블레셋인의 공포에 인격적인 보증을 나타낼것을 바라고 있었다. 내정과 외교 정치적으로 유다인들의 조치는 이해할 만하고 숙고되었으며, 시기 적절했다.
다윗이 계속 정치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데는 신뢰할 만한 몇가지 지시들이 있다. 그는 헤브론에서 기름 부음을 받지 않았다. 그는 예의 사절단과 함께 길르앗에 야베스로 사람들을 보냈다. 그 사절을 통해서 다윗은 야베스인들의 공적에 감사를 표한다. 삼하 3장에서 아브넬이 에스바알에게서 떨어지고 다윗과 첫번 접촉을 맺으려고 했을때 다윗은 갑자기 기대하지 못한 요구를 행한다. 아브넬은 사울의 딸 미갈을 데려오지 않고는 다윗 앞에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윗은 같은 요구를 에스바알에게도 직접 전한다.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중개의 시도와 마지막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왕위를 넘기는 결과와 함께 다윗 역사의 계속적인 설명이 중단되었던 점에 이른다. 다윗에게 넘긴 북쪽 지파들의 왕권은 한 인격통합 , 군합국의 설정을 뜻한다. 결코 철두철미 통일된 국가제도의 설립은 이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그들의 독자성을 유지한다. 예루살렘은 그들의 독자성을 지금까지 주장할 수 있으며,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특별한 계획들을 구상했다.
다윗이 전체로 칠년 반 동안 왕노릇했던 헤브론은 대 유다를 위해서 혁혁한 중심점을 이루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대신 아마도 왕도를 위해 세겜울 택하는 것이 자명했으리라. 세겜은 중부 팔레스틴 에브라임의 패권을 장악한 위치의 고대적인 중심지였다. 그러나 세겜은 유다에게는 너무 북쪽으로 나아가 있었다. 다윗은 그 도시를 유다인이나, 이스라엘인의 군대의 힘으로 정복하지 않았다. 단순히 그의 용병들을 동원하였다. 가나안인들 도시에서 곧잘 일어났던 경우와 같이 예루살렘 점령의 전열에 의해서 그곳에 거처하는 도시 왕이 제거된 사실이 전해지지는 않고 있다. 세겜의 경우에서처럼 그 도시의 귀족적인 법률제도는 배제되지 않는다. ‘다윗의 도시’ 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 넘겨받은 이름을 그대로 두었다는 것은 더욱 중요한 입증이다. 그러나 한가지 점에서 다윗이 필요하다고 본 것은 예루살렘에다 이스라엘 지파들 눈에 특수위치, 특별한 품위와 비중을 부여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중에 군합국 ,인격연합이 분열된 후에 이스라엘 북왕국에 소속된 이들이 한번도 법궤의 요청을 명문화해서 주장하지 않고, 그의 자리를 예루살렘에다 궁극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윗의 예루살렘 정복과 유다와 이스라엘 분잔국들의 경계점에 왕의 거처를 위한 도시가 발전되었고, 다윗 시대후에도 계속해서 국가안에 사건들과 도시를 위해서 특별히 가장 중대성을 띄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다윗 국가 영토, 지역의 재구성을 인정하는 본래 기록 문서는 모든 무기를 다룰 수 있는 남자들의 수효와 관계를 맺은 국가 경계 기술이다. 민족적인 국가에서 영토적인 국가로 다소간 확고한 경계를 가진 ‘나라’로 국토, 영토(한 국가 통치자의)로 더 나아가서 한 지파들의 통일만이 아니라, 한 왕의 통치하에서 나타난 영토적인 국가의 단계가 사울에게서는 부정 되었으나 다윗에게서는 성취되었다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이제부터 블레셋 해안가 평지들은 정치적인 의지 형성의 독자적인 중심지들로서 분리되었다. 더욱이 앗수르 시대에는 재차 블레셋 도시 국가 군주들이 독립을 쟁취하면서 등장했다. 다윗 국가 동맹의 상은 다양하다. 그러나 이제 바로 윤곽적인 영토의 국가로만 제한되지 않았다. 다윗은 그의 경계를 훨씬 넘어갔으며, 그는 그것을 위해서 정식으로 속박당했다. 동부와 남동부의 이웃 나라들이 다윗에게 도발하여 왔다. 암몬인들과의 큰 대결은 잘 알려진 ‘암몬인-전쟁보고’ 삼하10,1-11+12,26-31절이다. 그안에 밧세바와의 사건과 나단과 다윗의 대화(네가 그 남자이다.)가 있으며, 동시에 장차 왕위 계승자의 선출에 대한 고차적인 희극적인 준비가 설명된다.
다윗의 대국 형성은 그의 개인적인 실적이다. 그런 형성은 남쪽의 대국 에집트가 국가적으로 안고 있던 위기때문에 유리해졌다. 즉 21왕조, 라메시스가 멸망당한 후에 북부와 남부의 세력의 구성이 균열 되었다. 다윗을 위협하던 위난들, 국명을 열거하자면 블레셋인, 암몬인, 모압인, 에돔인과 시리아 지역 아람인들 이었는데, 다윗은 군사력을 동원하여 외교적으로 민활한 정책을 취하면서 그들을 추방했다. 다윗은 그의 외교정책을 위해서 충분한 내정의 배경, 그 자신이 점차로 만들어 놓았던 배후세력을 끌어들였기에 그의 대국을 꼴찌로 세우거나 차지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개인의 궁전을 세우고 독립적인 공무원 국가로 발전시킨다. 다윗은 행정부 책임을 일련의 전문직업 공무원들에게 담당시키고 나머지 고급 국가 공무원들 가운데 소페르(sõfẽr)(דעפ),본래는 서기관 마즈킬(דיכזט)의 직위가 눈에뜬다. 최상으로 말해서 그것은 ‘전령관’의 재연이다. 이런 모든 관직들은 예루살렘 왕의 측근에 있던 국가 공직자들이다. 그들은 국가 행정권 아래 종속되어 있다. 따라서 왕은 한 특수한 위치를 굳혔다. 이러한 숙고들은 유다 왕의 의식완성에 관한 문제로서 중요하다. 왕에 의해서 의식적으로 이방의 모형들을 전수했고 동화시켰다. 그와 동시에 ‘암픽티오니’ 지파동맹의 협력 원칙들이 지파들의 질서있게 형성되었던 시대에서 부터 협력하고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이런 이유에서 부정되어서는 안된다.
구약 전승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위한 그들의 국가적인 공동생활의 이와같은 새로운 종류의 형태에 직면해서 다윗의 예정된 후계자 문제가 특별한 문제였다는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즉 북쪽 이스라엘 국가의 불안정한 동인으로 인식되었다. 압살롬과 세바에 관한 이러한 기고들이 들어 있는 다윗의 왕위 계승의 역사는 내부에서 나타난, 더군다나 왕의 아들들의 즉위에서 생긴 위기로 말미암아 전체 국가 터전이 적지 않게 위기를 조성케 했음은 분명하다. 다윗의 계승의 문제는 점차적으로 치열하게 대두되었다. 우리는 다윗의 말년에 예루살램 궁전에서 벌어진 제 상황 관계들을 본다. 파당들이 형성되었다. 사태는 극적으로 절박하게 진전된다. 아도니야는 그의 파당들과 예루살렘에 아주 가까운 샘에서 희생제사를 올린다. 이러한 왕위 등극사는 개별적으로 여러가지 많은 문제를 갖게 한다. 왕위 등극사는 속임수로 부동하고 있다. 다윗과 같이, 유다인의 관습에 따르면 솔로몬도 역시 지도자급의 한 작은 그룹에 의해서 기름부음을 받는다. 왕조의 원리는 솔로몬의 계승으로써 증명되었다. 그것은 정치적인 필요성과는 일치하지 않았다.
다윗은 40년간 통치한 후에 죽었다고 한다. 솔로몬도 사십년을 통치했었다고 한다. 다윗통치 시대에 관한 확실히 여러 의도적인 개별적인 보고들을 제쳐 놓는다면, 그래도 정치적인 전체적인 형세, 유다와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시간 그 정황은 다윗에게 의심 없었던 탄력성 있는 인격성이었다. 필요한 것과 가능한 것을 해결하는 데에는 외교적으로 독창적인 사상을 지닌 천재적인 인품이었다. 새로운 자의식을 창조하는데 기여했다. 그의 계획의 대담성과 결단력은 놀랄 정도였다. 그는 국가적인 정치인의 지혜에서 모든것을 통달하였다. 그는 유다 뿐만아니라 마지막에는 반항하는 이스라엘까지도 승복시켰다.
솔로몬은 다윗이 이룩했던 복잡한 국가 구조를 그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상속받았다. 솔로몬은 내부기강을 엄격하게 바로 잡았다. 그런 질서는 나중에 철저하게 나타나겠지만, 그런 의도와 목적과는 반대로 국가 내부에서의 이방적인 경향들을 재촉하였던 것이다.
3.솔로몬 치하의 다윗제국
솔로몬은 평화의 왕으로 여겨진다. 솔로몬의 치적은 종교,경제와 문화적인 영역에 있다. 그는 예루살렘에 성전만 건축하고 봉헌한 것 뿐만 아니다. 성전의 건축, 화려함, 생활양식은 국제적인 규모와 형태를 띄었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솔로몬은 그의 전임자 다윗처럼 그렇게 폭넓게 창조성을 발휘했던 인물은 아니다. 따라서 그는 한번도 방어전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격연합은 지속되었다. 특히 세바의 폭동 후에 이스라엘의 군대는 눈에 띄게 약해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솔로몬이 자기에게 넘겨진 왕국을 굳게 다질 수 있었던가 하는 것은 그의 계속적인 유능한 외교관계에 기인했다. 왕은 여러가지 수단을 동원해서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잘 유지해 나갔다. 그런것 가운데 한가지 수단은 후궁들이었다.
솔로몬 시대에 있어서 블레셋을 공략하는 에집트 왕의 전쟁행위의 가담은 구약의 증거에 의하면 극도로 소외되어 있다. 그것은 아마도 에집트는 솔로몬의 대국에게 아직은 문제 삼을 만한 위험물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솔로몬과 페키니아, 그리고 더우기 티루스의 왕과의 관계이다. 그와 더불어 공고한 유대관계, 계약관계가 성립되었다.
솔로몬은 그의 외교적인 접촉이외에도 경제교역 관계들을 확장해 나갔다. 우선적으로 오빌 오피르라는 땅으로 취항된 항해가 언급된다. 돈벌이가 되는 말, 전마와 전차를 수출하는 중간상인 노릇을 솔로몬은 장려했다. 전차는 에집트에서 들여왔으며, 말들은 킬리키엔에서 수입해왔다. 솔로몬은 그런 말들과 병거들을 ‘헷족 왕들과’ ‘아람 왕들’에게 팔아 넘겼다. 아마도 그런 왕들은 시리아에 있던 약소국가들의 왕들로 이해될 수 있겠다. 이렇게 점증된 관계에서 스바 여왕의 방문이 있을 수 있다. 아마도 남부 아라비아에서부터, 현재의 예멘 지역에서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 여왕이 솔로몬을 방문했다는 사실에 관한 역사적인 신빙성은 나오지 않고 있다.
솔로몬은 다윗이 이룩한 대국의 기반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으나, 정확하게 말해서 많은것을 상실하게 했음에 틀림없다. 하다드라는 에돔의 왕자는 다윗 시대에 에집트로 도망했다가 다윗이 죽은 후에 에돔 일부의 통치자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이런 솔로몬 행정의 외교정치의 결산은 그의 부정적인 내역을 가질 수 있다. 예루살램에서 일어난 정권교체는 외부에 가장 빠르게 영향을 끼쳤다. 솔로몬은 이전과 같이 공략의 위험에 대처해서, 특별히 국경 변방에서 나타나는 위기에 대처하여 국가를 방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보았음에 틀림없다. 전초지 요새의 조직적인 건설은 모든 이런 규정의 실제적인 수행에 이바지한다. 아마도 왕은 여름철 동안 놀고 있는 사람들을 이용했었을 것이다. 이미 다윗이 임명했던 노동장관의 이름은 솔로몬 치하에서도 아도니람으로 나온다. 이 사람이 확실히 동일한 사람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행정지역들은 왕궁의 생활을 부양해야만 했다. 실제로 솔로몬은 예루살렘 도시를 현저하게 증축하고 확장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전을 왕실과 결속시키는데 이르렀다. 그것들은 고고학적인 잔재의 부족으로 극도로 문헌적인 전승에 근거해서 조사되고 설명되도록 시도되어야 하겠다. 성전건축은 왕의 일이었다. 그는 그의 계획과 수행을 결정했다. 예루살렘 성전 건축설립이 지방에 있던 성소들의 효력을 제한시키거나 전적으로 파기시켰던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 없다. 그 곳에서 생활은 습관화된 진로를 계속해 나갔다. 그러나 이미 여기서 알수 있다고 보는 것은, 구약의 종교의 발전은 예루살렘에 결속된 야웨 예배가 왕의 결단에 의해서 실행된 흔적은 역력했다. 예루살렘 전통의 보호는 그의 전통의 생존과 영향을 재가했다. 그러나 새로운 종교적인 감각의 성전의 도시 예루살렘과 더불어 점차로 왕국시대 과정에서 관철되었던 것의 특징적인 것은 ‘시온산’ 개념이 보여지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산 언덕을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왕실 규모와의 결속이요, 새로 획득한 그의 야웨의 거처됨을 공언한다. 솔로몬은 예루살렘을 하나의 국제도시로 만들었다. 거의가 다윗의 공무관리들이 솔로몬 치하에서도 계숭하고 있음을 보인다. 그러나 역시 행정에 몇 개의 확장이 나타났다. 이런 모든 관리들은 지파동맹 조직에서 나온것이 아니었다. 부분적으로 그의 모형 범례들은 외국의 궁전들의 관례들을 취한다. 따라서 다윗의 극가는 솔로몬의 수중에서 행정적 기술이 더욱 완벽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군사와의 접촉은, 유다인들에게는 촉구되지 않았다. 유다에게는 솔로몬의 통치시대는 정말로 만족한 시대라고 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이 얼마나 매우 자기 독자적인 길로 독주했으며, 왕은 그 당시로서는 얼마나 ‘국제적인’ 면모를 갖추었는가 하는 것은 무조건 종교적인 것만은 아니었던 일반 정신문화 생활의 참여를 알게 했던 기록들에서 드러난다. 이스라엘인의 배타적인 감수성에 비해 세계적이고 외적인 화려함은 보이기 위해서 결국 솔로몬은 이웃나라에서 여자들을 데려다 아내로 맞이한 것이다. 그들의 신들을 위해 감람동산 안에 신전들을 건립케 하였다.
여기에 장차 예언자들의 진노의 근거가 놓여졌다. 왕국시대가 지나는 동안 한 국가는 사라졌다.
솔로몬의 평화시기는 이와같이 기술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국제 세계에 연대했다.솔로몬의 ‘계몽사상’ 그리고 지혜는 궁전에서 효력을 나타냈다. 그 정신은 궁중의 역사기록의 형태에서 구약에 끼여들어 왔으며 왕의 명성은 증대되었다. 그때 솔로몬은 가능한한 부역, 강제노동을 북부 이스라엘인들에게 전가해서 억눌렀다. 소페르의 관직은 헛되이 이중적인 겸직을 하지 않았다. 국가의 문서를 작성했으며, 솔로몬의 요건들과 문제들을 실록으로 다루었다. 그것은 국가이념의 양상에서 역시 지파들의 자라나는 자의식의 양상에서도 초기 시대의 전승들을 수집하고, 그들의 본질적인 부분들을 고정하려는 양상에서 자리잡을 수 있었다.
4. 제국의 분열과 남북의 후계자들
이스라엘과 유다의 분단된 국가들 안에 왕권 교체에 대한 보고이며, 이스라엘 안에서 행해진 바알 제단과 엘리야 예언자의 투쟁에 관한 기록들이다. 원칙상 이런 전승사적인 전제들은 587\86년에 끝난 예루살렘 몰락까지의 이른바 왕국 시대에 적용된다. 전승의 뼈대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정권 교체에 관한 보고들로 이루어져 있다.
유다와 이스라엘 국가 사이에 인격 연합의 존속 문제는 행정 중심지 예루살렘과 함께 솔로몬 후계자의 통치 시기에서 나오는 첫 번째가 되는 주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대두이다. 이스라엘 북방 지파들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왕이 자동적으로 그들을 다스리는 주권을 갖게 되는 것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왕상 12장에서 빚어진 전경에서 ‘국가 분단’이란 협정된 개념은 아주 객관적으로 일치될 수 있는 것이며, 여기서는 기구가 나누이고, 법칙에 어긋난 강제가 있었다는 감촉을 일깨워 주었다. 정말로 사건들은 거꾸로 뒤집혔다. 성장 발전된 질서 조직들의 한계에까지 돌아왔다. 강권 정치로 가능했고, 북방 지파들의 헌신적인 충성으로 이루어진 다윗과 솔로몬의 대국 정치는 일화(Episode)로 되어 버렸다.
유다를 향해 독자적인 정치를 펴나갈 왕을 지명하는 것이 세겜 회의에서 결렬되었을 때, 여로보암이 발견되었고, 이스라엘인들은 여로보암을 북왕국의 왕으로 추대했다. 한 예언자의 말씀이 마지막에 북방 이웃을 쳐들어가서 전쟁을 하려는 왕을 금지시켰다. 르호보암 통치 말년을(왕상 14:30) 요약하는 기록에서는 다르게 읽는다. 그것은 그들이 살아 있던 동안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는 내용이다.
여로보암의 제사, 종교, 정치는 이중적으로 정력적이고 그의 왕국과 국가의 안전을 위해 이바지했다. 역대기 12:2-12절에 자세한 보고의 기사들은 에집트인들이 점령했던 유다의 성곽들을 말하고 있다. 그 다음에 에집트왕은 예루살렘으로 간다. 거기서 르호보암은 항복했다. 따라서 모든 것을 다 바치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은 르호보암이 가가의 조공을 바쳐 그 도시를 건졌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한다. 그러므로 성전보물을 바로왕이 노획한 것이 아니라 유다왕 자신이 도시와 행정을 안전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생전 동안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있었던 전쟁은 베냐민 지파의 땅을 가지려는 싸움이었다. 그 지역을 차지하려고 다음 왕들은 계속해서 같은 관점 아래서 싸웠다. 외교 정치적인 시각에서 이 두 왕국들은 손실만 있을 뿐이었다. 한 새왕국이 에돔에서 탄생되었다. 에돔은 이미 솔로몬 치하에서 독립을 취했던 나라이다.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집권 말기에는 열왕기 상에서 처음으로 양 국가들의 왕들의 집정 연수들이 동시대적으로 병렬되었다. 연대들을 산출하면, 르호보암은 932\31-916\15년대로 올라간다. 여로보암은 932\1-911\10년대로 여겨진다. 이스라엘의 왕이된 여로보암의 후계자는 그의 아들 나답이 되었으나, 블레셋과의 전투중에 바샤가 집돈에서 죽였다. 바샤가 왕이 되고 여로보암 왕가를 송두리째 뽑았다. 여로보암 가문의 재앙을 예언한자는 예후 벤 하나냐 예언자였다.
바샤 가문에 멸망을 예언한 예후 벤 하나냐는 동일한 예언자로 있었다. 바샤는 자연사를 했고, 아들 엘라가 왕위에 오른다. 시므리가 엘라를 살해하고 즉시 이스라엘 왕으로 행세하였다. 시므리는 오므리로부터 살해될 것을 알고, 전 가옥과 함께 불태워 자살했다. 오므리가 왕이 되어 12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오므리에게서 이스라엘은 제 1왕조가 시작했다. 그 왕조는 수십년간 지속할수 있었다. 또 오므리는 이스라엘에서 사마리아 도시를 영구적인 새 도읍지로 창건했다.
5.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
오므리 왕은 아무도 거주하지 않던 장소를 사들였다. 그는 그것을 사들였고, 그것이 이스라엘인들의 것이 아니라 가나안인들의 소유였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세메르는 이스라엘 주민이 정착하게 이전부터 있었다. 전체적인 조처와 방법은 다윗이 행했던 것과 매우 흡사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다윗의 도시라고 명칭을 바꿀 수 있었고 도 그렇게 했던 것처럼 오므리가 사마리아 도시를 ‘오므리의 도시’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그는 정치사적으로 다윗과 솔로몬 이후로 제 일인자였다. 오므리는 죽어서 사마리아에 매장되고 이것은 그의 생애 마지막이었다. 그것은 한 프로그램의 확증이다. 오므리는 그의 도시에 안장되어 있다.
그의 아들 아합이 후계자가 되어 오므리의 후광을 받았다. 아합은 적극적이고 성공적인 정치적 영향은 우리로 하여금 열왕기서의 신명기 기자적인 편집의 비판에 이해가 갈만큼 환기 시켰다. 그는 그의 조상들보다 야웨의 눈에 더욱 악하게 행하였다. 그는 두로의 잇도바알왕의 페니키아 공주 이세벨을 아내로 맞는다. 이러한 결혼은 아합에게 내정적으로 무엇보다도 제사적인 귀결들을 가졌다. 그는 바알에게 예배했다. 솔로론과 반대로
아합은 사마리아에 공적인 성소로서 바알신전 하나를 세웠다. 왕가를 위해서만 아니라 그의 독자적인 국가 동맹의 한 부분을 위해서도 세운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에서 인정받은 공적인 바알 종교 성소였다. 그러자 야웨를 신봉하는 주위의 반대운동은 일어났고 중단될 수 없었다. 엘리야가 행하는 이스라엘 적에게 기름 부음, 나중에 실제로 엘리사의 제자에 의해서 수행된 예후의 기름 부음이 있다. 뒤에 나오는 열왕기 상 19:119-21절에 보고되는 예언자 제자를 위한 엘리사의 인정을 기름 부음으로써가 아니고 겉옷을 걸쳐줌으로 명료하게 하는데 이런 행위는 아합의 집의 종말이요, 그와 함께 공통적인 배경이 되는 오므리 왕조의 마지막이다. 왜냐하면 다메섹의 사마리아인들은 바로 가까운 장래에 항구적인 이스라엘의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엘리사는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주는 의식을 행하였을 것이다. 바로 엘리사가 마지막 오므리 왕가를 무너뜨린다. 이스라엘 오므리왕조 때에 아람 국가와 다메섹 관계는 점차적으로 약화 되었으며, 아람인들은 나날이 강력해지는 이스라엘을 남부의 강적으로서 경계 주시해야만 했다. 이스라엘과 두로와의 관계가 아합이 이세벨과 결혼을 하여 강조했고, 다메섹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침해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스라엘은 오므리와 아합 통치하에서 그의 이웃 민족들의 세력 놀음에 휘말리지 않고 자신을 주장할수 있었다. 블레셋인들과는 아무런 이렇다하게 내세울 만한 싸움이 없었다. 유다와의 관계는 놀라운 정도로 우호적인 관계를 발전되어 나아갔으며, 따라서 예루살렘의 왕은 거듭해서 이스라엘과 함께 군사 장비를 갖추었다.
아사의 후계자인 오사벳왕은 여러 번 이스라엘과의 동맹의 가담자로서 나타난다. 더욱이 그의 후계자가 된 요람왕은 아합은 딸 아달리야와 결혼을 하였다. 아합과 몇 명 그의 후계자와 함께 예루살렘과 유다에서는 평행하여 여호사밧이 통치했다. 여호사밧의 후계자 요람은 이스라엘 공주 아달랴와 결혼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유다간의 우호표시의 절정이었다. 요람의 후계자 아하시야는 겨우 1년 통치한 자로 그는 바로 이스라엘왕 요람을 예레스엘로 가서 방문했을 때 예후의 잔인한 행위에 제물이 되었다. 오므리는 이스라엘에서 하나의 새로운 전기를 열었다. 그는 왕국을 안정시켰고, 동시에 왕조의 전제들을 창제할 수 있었다.
6. 두 혁명들-이스라엘의 예후와
예루살렘의 아달랴
이스라엘의 예후
이스라엘의 모든 희망과 기대들은 예후라고 부르는 장교요 최고 지휘관에 의해서 성취된 것처럼 보였다. 사건은 예언자 엘리사의 한 생도에 의해서 사작된다. 예언자의 제자는 예후에게로 가서 기름부었다. 예후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이미 사망한 아하샤 왕의 형제들인 유대 왕자들의 그룹은 형편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요람과 사마리아 왕궁을 알현하려고 가는 도중 예후는 즉석에서 살해하도록 한다. 이렇게 예후는 다윗왕조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예후는 바알 예배자들을 죽이고, 사마리아의 바알 성소를 제거했다. 이세벨이 죽은뒤에 이스라엘에 야웨 예배를 재흥 시키는데에 본질적으로 기여했다. 국가의 안정을 위해 기여했고, 이스라엘 새왕조의 기초자가 될 수 있었다.
예루살렘의 아달랴
아하샤의 어머니이며, 이스라엘왕의 딸이다. 오므리 왕조와 우호 관계를 맺고 있을 때 요람왕과 결혼했던 이스라엘의 공주였다. 아들이 죽은후 성숙한 왕위 계승자가 전혀 없음으로 아달리야는 왕국을 자기에게 돌렸다. 그는 예루살렘 왕가의 모든 친족을 살해하고, 6년간 예루살렘에서 정권을 다스렸다. 요세바라고 하는 아하시야 왕의 누이에게 아하시야의 아들 젖먹이 요아스를 안전하게 피신시키는 것이 성취되고, 성전 경내에 숨겼다. 여호야다는 그에게 왕관을 씌운다. 왕의 조서를 헌정한다. 기름을 붓는다. 성전에서 왕의 환호는 아달랴를 자극했다. 왕을 보았고, 모반을 알아 차렸다. 성전 파숫꾼들은 그 여자를 밖으로 끌고 나가 그 여자는 살해를 당했다. 아달랴의 통치는 끝났고 다시 왕좌에는 다윗의 왕조가 앉았다. 통치를 위해 왕의 성소에서 활동하는 제사장의 중재가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7. 앗수르의 팽창 정치하의 이스라엘과 유다
이미 예후 시대에 있어서 앗수르의 팽창으로 말미암아 동부 요르단 땅 지역의 손실이 알려지고 있다. 그의 아들 시대인 요아하스의 후계자 통치 기간에도 아람인들도 북동쪽에서 이스라엘의 위험한 적수들이었다. 요아스는 요아하스를 따랐고, 아스라엘의 요아하스는 유다왕 아마지야를 향해 전쟁을 하였다. 예루살렘을 향해 돌진했고 성전과 궁전에서부터 보불들을 탈취해 갔고, 예루살렘이 북왕국에 의해서 침공당하여 약탈당한 것을 역사적으로 유일한 사건이었다. 요아스의 후계자는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인데 솔로몬의 후계 여로보암과 구별하느라고 여로보암 II세라고 불렸다. 이때에 아모스와 호세아 예언자가 등장했다. 여로보암 II세 이후 아들 스가리야가 계승했다. 스가리야를 죽였던 살룸이 불과 한달만에 므나헴이 그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 그러므로서 이스라엘에는 혁명적인 국면이 돌발하였다. 왜냐하면 스가리야을 죽인 살룸이 이미 예후 왕조에 소속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예후 왕조에는 다만 다섯왕들 예후, 요아하스, 여로보암 II세, 스가리야만 속한다. 신흥 앗수르 정치의 목적은 아람화된 메소포타미야인의 재정복이었다. 신흥 앗수르 대국의 본래 설립자는 앗수르 낫시팔 II세(883-859)로 볼수 있다.
그는 정복자로서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혼합형의 존재들의 조각 형상들이 엄호하고 있었다. 그것들이 앗수르 예술의 상징이 되었다. 더 큰 대규모의 것은 그의 아들 샬 마낫사르 III세(859-824)의 계속된 전투였다. 그가 바로 9세기 중엽에 위대한 앗수르 정복자였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샬 마낫사르 III세가 다메섹에게 공략을 가했던 4회의 출정이다. 다메섹의 국가 전 영토를 향한 공략이었다.
역사의 의미와 장차의 사건의 막연한 예보를 이스라엘의 대예언자들이 그들 말씀의 계기와 자료로 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확실성, 공의의 감각, 미래의 기대와 그런 결속에서 이스라엘의 가장 본래적인 정신성이 있었다. 미래의 대망은 예언자의 예언의 본질을 이루게 하였고 저런 하나님의 사람들을 제시하였다. 자유 이스라엘 인들의 토지 소유 옆에 때때로 직위의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경작되는 국유지를 발전시키는 것을 확실하게 볼 수 있다. 전적으로 관리 행정은 왕실의 재판 관할권 지배하에 있었다. 즉, 왕국 세대의 이러한 경제-행정 구조의 재구성은 여러 관점에서 가설적으로 머물러야만 했고, 역시 그런 이유로 인해서 예언자의 말씀들의 배경의 명칭도 그렇게 머물고 있다. 국가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 사이에 있는 분리, 또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힘의 정치와 영적인 사상간의 분리는 원래 이스라엘에게는 없었다. 이스라엘은 예언자들 앞에서 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국가들은 내외적으로 가장 어려운 부담을 받은 후 중단되었으며, 그들 생존은 멸망 당했다. 팽창의 추진력들은 종전처럼 이스라엘과 유다의 문앞에서 결코 정지하지 않았다.
8. 앗수르의 팽창과 사마리아의 몰락
주전 745년에 칼라하 봉기 이후에 티클랏 필레세 III세는 앗수르 통치를 자기 수중에 넣는데에 성공했다. 그는 앗수르의 대국을 조직적으로 편성하였고 군사 제도는 무기 장비와 기술적, 전술적 자질에서도 다른 나라를 앞질렀다. 앗수르는 그 시대의 가장 두려운 군사력을 보유하였다. 앗수르 군사력의 특징은 자국민의 잘 훈련된 직업군인뿐만 아니라 여러 국가들의 용병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제 일차적인 전투는 738년이었고, 다메섹을 붕괴시킨 하맛의 북부와 중부 시리아를 굴복시켰다. 그후 수많은 시리아 국가들과 페니키아의 해변 도시들은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쳤다. 이들 국가들 중에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였던 왕은 다메섹의 라준스와 이스라엘의 므나헴이었다.
주전 733년부터는 약소 국가들 사이에 동맹 체제가 들어서게 되었고, 다메섹은 이를 이용하여 앗수르로부터 독립을 시도했다. 다만 유다만이 그 동맹에 가담하지 않았고 그로 인하여 다메섹의 르으진 왕과 르말리아의 아들 페카는 유다를 공격하였으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이 특이한 전쟁을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이라 한다. 이것을 성경에서 보면 이사야 7:1-9절과 관계되며 10-17절이 연속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왜 아람인들과 이스라엘이 동맹을 맺고도 예루살렘 공격이 성공하지 못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앗수르의 왕권 교체는 시리아와 팔레스틴에서 정치적으로 반잇스의 동맹체를 결성케 했다.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왕 페카의 다음인 호세아는 그의 조공을 중단했고, 이집트의 왕 소(So)와의 연결을 시도하였다. 이것은 왕하 17:1-6절에서 알 수 있다. 이로 인하여 호세아는 앗수르의 포로가 되었고, 사마리아의 왕도 포로가 되고 사마리아는 722년에 함락되었다.
9. 요시아 즉위 때까지의 유다
유다는 앗수르의 공격을 모면하려 했다. 그럼에도 동시대인이었던 이사야 선지자가 사마리아의 멸망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 사마리아 멸망 후 주전 8세기 말까지의 시대는 일련의 반발 운동들이 연속되었던 때이요, 앗수르에 대항하는 동맹 운동으로 일관되었다. 그 결과 히스기야도 거기에 말려 들어가는 상황이 되었다. 주전 713-711년에는 블레셋 도시 아스돗에서 시작된 반앗수르 운동이 대규모의 반앗수르 운동이었다. 결국 아스돗이 패하기는 했지만 그 영향으로 앗수르의 사르곤 III세는 죽고 705년부터 산해립의 통치가 시작되었으며 유다의 히스기야는 조공을 중단했다. 이뿐만 아니라 히스기야는 “네후스탄”, 즉 구리뱀의 숭배를 중지시키는 등 많은 개혁을 시도하였고, 이를 사람들은 히스기야의 개혁이라고 부른다.
산해립의 집권후 블레셋의 아스칼론과 에크론 두 도시는 앗수르군에 반기를 들었으나 무의미했다. 산해립은 시리아와 페니키아 지역을 휩쓸고 남쪽의 이집트의 항복을 받았다. 산해립은 선왕들처럼 해안가에 머무르지 않았고, 유다의 산악 지대로 방향을 전환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유다를 장악했다. 701-622년의 여러 사건들은 본질적으로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유다는 국가 지역을 상실하였고 블레셋의 주권 밑에 귀속되었다. 7세기 동안의 앗수르 점령 기간은 유다에게 불행한 시대였다. 산해립이 죽고난 후 그의 아들 앗사르 핫돈은 이집트 정복을 수행했으나 저항운동으로 말미암아 실패했고, 앗사르 핫돈도 그때 죽었다. 그의 아들 앗수르 바니팔은 바벨론의 대항했고,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다만 앗수르가 하향길에 접어들고 있었기에 이집트를 독립국으로 내어주고 말았다.
므낫세는 단기간의 통치를 했고, 그의 아들 요시아는 앗수르로부터 독립을 유지했으며 유다는 물론 이스라엘에게도 새로운 정책을 가지고 나아갔다.
10. 요시아의 중흥과 앗수르의 멸망
하향길로 접어든 앗수르는 국가적 붕괴로 치닫고 있었다. 중앙집권은 총독 관구 체제로 변환되었고, 총독 관구들은 저마다 독립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때를 맞추어 바벨론에서는 나봇 폴라사르가 바벨론의 권리를 강화시켰다. 메데와 움만만다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산악 지대에서 나왔던 스크트 정복자의 백성은 앗수르에 대하여 공격적인 태도를 강화하였다. 이집트는 북쪽의 새로운 이동 민족과 손을 잡고 앗수르에 대항했고, 결국 앗수르는 멸망했다. 이때 요시아는 이방인의 신들을 제거하는 개혁을 시도했고 벧엘 제단의 아세라상을 불태웠다. 이러한 개혁이 사마리아의 도시들에게도 효과를 나타냈고 유다와의 원대한 정책이 이스라엘 인들에게도 나타났다. 요시아는 그의 개혁을 야웨 예배에서 시작하였다. 최고의 제사장이였던 힐기아는 야웨의 집에서 ‘율법책’을 발견했고, 이것은 왕에게 중대한 행동을 하게 했던 것이다. 발견된 책에서는 신명기의 기본 논제들을 포함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결국 아주 세부적인 면까지도 상세하게 다루고 있었기에 요시아는 개혁 정치를 하나님 중심으로 설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요시아는 하나님과 무관한 이방 종교인 제사 행위는 완전히 제거했고, 이를 합법화 하였다. 또 요시아는 이스라엘과의 통일론적 의지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것들은 유다의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고, 국내외적인 심각한 변형들을 극복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그의 역사적인 핵심은 의심할 나위없이 신명기의 전승의 기본적인 명령들이 대 이스라엘의 이념을 되찾는 시도가 되었고, 요시아의 개혁의 정신적 배경이 되었다. 요시아는 앗수르와 같은 정책으로 나가는 이집트에 대항했으나 패하고 요하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나 이것은 유다의 불행이었다.
11. 바벨론과 유다의 종말
이집트는 남쪽을 국가 영토의 확장지로 삼고 침공을 시작하였고, 시리아와 팔레스틴은 그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이집트의 정책은 예루살렘의 왕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요이하스는 요시아의 정책을 계속했다. 이로 인하여 이집트는 요이하스를 체포하고 조공을 부과시켰다. 요이하스는 유다로 돌아오지 못했고 이집트에서 죽었다. 그의 뒤를 이은자는 엘리아킴이었다. 그 후로 유다는 이집트의 무조건적인 통치로 들어간다.
605년 바벨론과 이집트는 전쟁이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바벨론이 승리하였다. 이로 인하여 바벨론은 이집트 정복을 계획하였다. 바벨론과 이집트는 장기간의 커다란 접전이 있었고, 서로의 피해는 아주 큰 것이었다. 결국 바벨론은 이집트 정복에 실패했고, 이를 구실삼아 유다를 공격했고, 여기서 유다는 참패했다. 그 결과로 엘리아킴은 사로잡히고 그의 삼촌 여호아킨의 아들 요시아가 왕위에 올랐다.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은 그에게 시드기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시드기아는 역사상 예루살렘의 마지막 왕으로 등극하였고, 바벨론은 예루살렘의 관리들과 핵심 인물들을 포로로 잡아갔고 그중에 에스겔도 있었다.
예레미아는 예루살렘은 구출된다고 부르짓는 거짓 예언자에 대항하면서 등장하였다. 예레미아는 바벨론의 포로들에게 그들의 멍에를 메고 그들에게 순종하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살 수가 있기 때문이였다. 거짓 예언자들은 예레미아를 미워했고, 바벨론과 공모하는 자로 못미더워 했다. 시드기아가 집권한 9년 되던 해 시드기아는 바벨론왕에게 봉신관계의 끝을 선언했다. 그 결과로 바벨론은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공격했다. 이 공격은 3년간 지속되었고, 결국 예루살렘성은 함락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서 느브갓네살왕에게 끌려갔다. 지도급층에 있던 상부층은 가혹하게 징벌되었고, 예루살렘 시민의 대부분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에 끌려갔다. 이것이 바벨론의 2차 포로였다. 그러나 시골에는 노동에 종사하는 농부들이 남아 있었으며, 따라서 사골에는 토착민들의 넓은 층이 남아 잔존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유다에게 독립 국가의 최후를 뜻하며 정치적 독립의 임시적인 종지부였다. 그 역사는 이제까지 가나안 땅을 점유한 이래로 발전되어 왔었다.
유다의 전체적인 파멸은 예루살렘의 멸망으로써 어렵지 않게 충분히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의 판단을 위해서는 끝없이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야웨 신앙의 전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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