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대별 통치자들
로마 황제 | 유대 통치자 | 갈릴리/베뢰아 | 이두레/드라고닛 |
아우구스투스(BC31-AD14) - 옥타비안/옥타비아누스 | 헤롯대왕(37-BC4) | ||
아켈라오(BC4-AD6) | 헤롯 안디바 (BC4-AD39) | 헤롯 빌립 (BC4-AD34) | |
코포니우스(AD6-9) | |||
마르쿠스 암비불루스 (AD9-12) | |||
안니우스 루푸스(AD12-15) | |||
티베리우스(AD14-37) | |||
발레리우스 그라투스(AD15-26) | |||
폰티우스 필라투스(AD26-36) | |||
시리아에 병합 (AD34-37) | |||
마르켈루스(AD36-37) | |||
가이우스 칼리굴라(AD37-41) | 마룰루스(AD37-41) | 헤롯 아그리파 1세 (AD37-44) | |
헤롯 아그리파 1세 (AD39-44) | |||
클라우디우스(AD41-54) - 클라우디오 | 헤롯 아그리파 1세(AD41-44) | ||
쿠스피우스 파두스(AD44-46) | (로마 총독 통치) | 헤롯 아그리파 2세 (AD44-100) - 부분 통치 | |
티베리우스 알렉산더(AD46-48) | |||
벤티디우스 쿠마누스(AD48-52) | |||
안토니우스 벨릭스(AD52-60) | |||
헤롯 아그리파 2세 (AD54-100) - 부분 통치 | |||
네로(AD54-68) | |||
포키우스 베스도(AD60-62) | |||
알비누스(AD62-64) | |||
게시우스 플로루스(AD64-66) | |||
유대전쟁(AD66-73) | |||
베스파시안(AD69-7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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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AD79-81) | |||
도미티안(AD81-96) | |||
네르바(AD96-98) | |||
트라얀(AD98-1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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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안(AD117-138) | |||
안토니우스 파우스(AD138-161) | |||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AD161-180) |
2. 유대의 로마총독들
1) 헤롯 사후의 팔레스타인 통치
헤롯이 죽고 그의 아들 아켈라오는 헤롯의 모든 아들 중에서 가장 잔인했으며 그의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 아켈라오의 통치는 단지 BC 4년에서 AD 6년까지만 지속되었다. 그의 난폭한 통치방식은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온 사절단에 의해 아우구스투스에 귀에 들어갔다. 결국 그는 면직되어 고올로 보내졌다. 그의 통치방식이 시리아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중요한 무역로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였다는 방식으로 그의 면직이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켈라오의 영토는 이제 시리아의 로마지방 일부가 되었고, 총독에 의해 지배되었다.
2) 코포니우스(Coponius)
AD 6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던 아르켈라우스 왕을 폐위하고 코포니우스를 그 지역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사형집행권을 포함한 모든 권력을 부여 받았다. 코포니우스 총독은 자기 관할 지역에 주민세를 부과했다. 주민세로 말하면 12세 또는 14세부터 65세까지의 주민은 누구나 한 데나리온씩 바쳐야 하는 인두세였다. 이에 갈릴리 지역 가말라 출신 유다가 주민세 거부운동을 벌였고 열심당을 창설했다.
그들은 하나님 외에 한낱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인간을 지배자로 용인하는 r서은 겁쟁이와 같이 비겁한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하나님만이 이스라엘 통치자요, 황제의 흉상과 대비의 좌상 따위가 양각된 은화 데나리온을 세금으로 바치는 것은 우상숭배라는 것이었다.
코포니우스의 통치기간에 사마리아인이 예루살렘 성전에 사람의 유골을 뿌려 더럽힌 사건이 일어났다. 유대인들은 분노했고, 이에 대해 총독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하여 적개심을 품고 미워하게 되었다. 결국 코포니우스는 곧 로마로 소환되었다.
3) 마르쿠스 암비불루스(Marcus Ambibulus)
두 번째 유대총독이다. 암비불루스에 대한 역사는 현재로써 얻을수 없다.
4) 아니우스 루푸스(Annius Rufus)
세 번째 유대총독이다. 루푸스에 대한 정보도 현재로써 얻을 수 없다.
5) 발레리우스 그라투스(Valerius Gratus)
그라투스는 유대의 대제사장 아나누스(안나스)를 그의 아들들 이어 사위 가야바를 차례로 대제사장직을 교체했다. 그라투스가 안나누스를 강제로 폐위했기 때문에 그라투스에 대한 유대인들은 반감을 가졌다.
6)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 개역성경에서는 ‘본디오 빌라도’로 표기한다.
로마가 유대를 통치한 처음 20년 동안에는 비교적 마찰이 적었다. AD 26년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지역의 제 5대 총독으로 파견되었다. 그의 통치기간에 사회적인 동요가 증가했다. 빌라도는 여러 번 예루살렘 궁전에 황제의 초상화가 그려진 방패를 세움으로써 유대교의 감정을 건드렸다. 유대인들은 이를 제국의 의식의 시작으로 보아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인 티벨리우스에게 항의하였다. 그는 빌라도에게 명령하여 그 방패를 가이사랴에 있는 주둔지로 가져가도록 했다.
그가 예루살렘의 수도 시설의 개선을 위해 주요 수도관을 만들려고 했을 때, 폭동이 일어났지만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특히 빌라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재판을 맡았는데, 죄의 증거 없이 재빨리 형벌을 선고하고 처형해 버렸다. 빌라도가 사마리아의 광신적인 종교 운동에 대해 무모하고 무자비하게 대처했다는 이유로, 시라인 총독 비텔리우스는 그를 로마황제에게 소환할 것을 건의했다. 이후 그는 자살을 종용받은 듯하다.
7) 마르셀루스(Marcellus)
마르셀루스는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산헤드린에서 대제사장의 예복을 입게 했다. 로마의 황제가 티벨리우스에서 칼리굴라로 바뀌는 시기였기 때문에 마르셀루스의 유대총독 재임기간은 짧았다.
8) 마룰루스(Marullus)
아그리파를 총애했던 칼리굴라는 마룰루스를 로마로 소환하고 아그리파의 조부인 헤롯이 통치하던 유대지역으로 아그리파를 총독으로 보냈다.
9) 아그리파의 통치기간
아그리파는 스스로 율법을 정확하게 따르는 경건한 사람으로 언명하였다. 그 때문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로부터 매우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중적인 면을 보였는데,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주의자로 보였고, 총독으로서는 헬라주의적인 영주로서 행동하였다. 그는 한편, 바리새인들을 위해 예루살렘의 기독교 공동체를 박해하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를 처형하였고, 베드로를 체포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헬라주의적인 사람들에게 신이 보내신 영주로서 신적인 칭송을 받으려고 했다. 그가 죽자 지배권이 그의 아들에게 넘겨지지 않고 시리아의 식민지로 떨어졌다.
유대인들은 재건된 헤롯 왕국이 단기간에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총독제도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로마는 네로의 통치하에 헬라문화가 선동적으로 권장되었기 때문에 증오심은 갈수록 고조되었다. 특히 열심당원들은 로마의 방식에 대해 격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AD 44-66년은 로마에 대한 불만이 폭발해 유대전쟁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10) 쿠스피우스 파두스(Cuspius padus)
새로운 유대총독간구의 첫 번째 총독인 쿠스피우스 파두스 시대에는 위신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되었다. 파두스는 대제사장 임명권한을 다시 로마의 통제에 두려고 했다. 하지만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대제사장 임명권한까지 건드리지 않도록 했다. 하지만 황제가 유대인들을 강경하게 통치하라는 위임을 받았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이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당연했다.
파두스가 통치하는 기간에 튜다(Theudas)라는 한 마술사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유대인들에게 자기를 따라 요단강으로 가도록 설득했다. 그는 자신이 예언자이며, 자기 명령으로 요단강을 갈라지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때에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그 난을 진압하기 위해서 파두스를 유다에 파견했다. 파두스는 잔인하게 그 난을 진압했으며, 튜다를 참수형에 처했다.
11) 티베리우스 알렉산더(Tiberius Alexander)
유대의 두 번째 총독은 티베리우스 알렉산더이다. 그는 유대교 헬라주의자인 필로의 조카였다. 그 역시 철학에 심취해 있었으며, 짐승들은 이성이 없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는 유대 민족주의자들의 눈에 이방 독재자를 섬기는 변절자에 불과했다. 그는 열심당의 선구자인 갈릴리 사람 유다의 두 아들 야곱과 시몬을 십자가에 처형함으로써 유대 민족주의를 핍박하기도 했다. 그 후 알렉산더는 이집트의 지방관이 되었다.
12) 벤티우스 쿠마누스(Ventius Cumanus)
유대인들은 그의 부임 처음에는 매우 평화로운 태도를 취했지만,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서 일어난 소요들과 관련해 AD50년 이후부터는 또 다시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쿠마누스는 이런 반란에 대해 매우 강경하게 대처하기도 했으나 대부분 매우 무력한 태도로 보였다. 그의 무력함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열심당과 함께 사마리아인들에 대항해 내란을 일으켰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문화전쟁에서 쿠마누스는 어느 편에 설지 갈팡질팡했다. 이 전쟁으로 인해 두 민족의 대표가 황제 앞에 섰는데, 황제는 유대인들에게 유리하게 판결했고, 쿠마누스는 총독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13) 안토니우스 펠릭스(Antonius Felix)
펠릭스는 황제의 어머니 안토니아의 해방 노예였다. 따라서 그의 이름은 안토니우스이다. 펠릭스는 재무장관 팔라스의 동생이며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후손인 로마 공주의 부군이었으므로 로마정부에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는 총독 취임 이후 아그리파 1세의 딸 드루실라와 재혼할 수 있었다. 펠릭스는 재임기간 중 절반은 로마인과 유대인이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살아있는 동안 무력한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는 억제하는 자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리스인의 친구인 젊은 네로 황제가 AD 54년에 황제로 선출되자 팔레스타인에서는 그리스인과 로마인을 적대시하는 열심당원들이 조직적인 테러행위를 시작했다. 그는 사도바울의 소송기간만 2년이나 걸렸을만큼 모든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그의 미숙한 통치력은 네로황제로부터 결국 파면을 가져 왔다.
참고문헌
H. 야거스마, 배용덕 역, 「신약배경사」(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1993)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성서자료 연구원 역, 「요세푸스: 유대전쟁사1」(서울: 도서출판 달산, 1992)
김희성, 「신약의 배경사」(서울: 기독교서회, 2006)
헬뮤트 쾨스터, 이억부 역, 「신약성서 배경연구」(서울: 은성, 2003)
에두아르트 로제, 박창건 역, 「신약성서 배경사」(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95)
보 라이케, 번역실 역, 「신약성서 시대사」(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6)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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