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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목사의기원과 역사 (2)

하나님아들 2017. 11. 11. 14:35

 

 

목사의기원과 역사 (2) 

 

 

      

6. 그리스와 로마 문화의 영향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에워쌌던 그리스와 로마 문화는 서서히 교회 안으로 침투하는 계급제도를 강화시켰다. 그리스와 로마 문화는 본질적으로 계급의식이 강했다. 새로 회심한 사람들이 그들의 문화적 배경을 신자들의 공동체 속으로 갖고 들어왔을 때 이런 영향이 교회 안으로 스며들었다.

 

인간의 계급의식과 공식적인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제도화했다. 4세기에 가서 이런 요소들이, 한 때 살아 숨 쉬던 하나님의 에클레시아(그 안에서 모든 믿는 자가 기능을 발휘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고,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삶을 나누는 사역을 하던 교회)의 동맥을 경화시켜버렸다.

 

5세기에 가서는,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라는 개념이 그리스도인의 관습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하나님께 가는 통로는 이제 성직자 계급에 의해 좌우되었다. 성직 독신제도가 시행되기 시작했고, 가끔 있었던 성찬식이 소위 평신도의 정기적 습관이 되었다. 교회 건물은 이제 향과 연기로 뒤덮이게 되었고, 성직자의 기도는 비밀리에 올려졌다. 그리고 성직자를 평신도에게서 분리하는, 작지만 아주 중요한 칸막이가 소개되었다.

 

감독의 역할 또한 바뀌어 지역 교회의 머리에서 할당된 지역의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위치로 올려졌다. 감독들은 로마 총독들이 그들의 담당지역을 다스리듯 교회들을 다스렸다. 궁극적으로 로마의 감독에게는 가장 큰 권세가 주어져서 그의 위치가 마침내 교황의 자리로 발전하였다.

 

7. 콘스탄틴과 로마의 계급 구조

리더십의 계급구조는 고대 이집트, 바벨론, 그리고 페르시아에서 처음 생겨났다. 그것이 나중에 그리스와 로마 문화 속으로 옮겨? 완성되었다.

 

역사가 트루먼은 이렇게 기술했다: “페르시아인들은 고대 사회에 두가지 뛰어난 공헌을 했다: 그들 제국의 조직과 종교의 조직. 이 공헌은 둘 다 서방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제국의 행정 체계를 알렉산더 대왕이 이어받았고, 로마제국이 채택했으며, 궁극적으로 현대 유럽이 물려받았다.

 

기독교가 퍼져 나갔던 세계의 사회는 단일 통치자인 황제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콘스탄틴이 4세기 초에 권좌를 손에 넣자마자 곧 교회는 완전한 상명하달식의 계급조직 사회가 되었다.

 

에드윈 해치는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대부분 영역에서 기독교 교회들은 스스로 연합하여 로마제국의 줄에 섰다.”이것이 교회가 도입한 계급구조를 교회의 리더십 구조 안에 적용했을 뿐만 아니라, 전부 상명하달식의 리더십 체계에 의해 지배되는 교구와 지역과 행정구역들의 등급으로 교회가 분할되게끔 적용되었다. 해치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기독교 교회들의 조직은 서서히 발전했지만, 그 조직을 구성한 요소들은 이미 인간사회에 존재하고 있었다.”

 

윌 듀란트도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기독교는 이교 신앙과 의식을 흡수해서 자랐고, 로마의 조직방식과 사조를 물려받아서 승리자의 교회가 되었다...유대 나라가 기독교에 윤리를 주었듯이, 그리고 그리스가 신학을 주었듯이, 이제 로마는 조직을 주었다. 이 모든 것이 여기저기서 흡수한 신앙과 섞여서 기독교 혼합물 속으로 들어왔다.

 

4세기에 가서 교회는 로마제국의 예를 따라 같은 길을 걸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로마의 지방 행정구역 방식을 본떠서 교회를 교구들로 조직했다. (교구라는 말은 로마제국의 큰 행정구역을 일컫는 세속적인 용어였다.) 나중에 그레고리 교황은 교회의 사역 전체를 로마법에 따라 정리했다.

 

듀란트는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했다: “기독교가 로마를 정복했을 때, 이교 교회의 구조, 폰티펙스 막시무스(최고 제사장 혹은 사제를 뜻하며 우리말로는 교황으로 옮김-편집자주)의 직함과 복장... 그리고 기억도 희미한 의식의 겉치레가 산모의 피가 태아에게 흘러들어 가듯 새 종교 안으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사로잡혔던 로마가 그 정복자를 사로잡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방식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류역사의 드라마 속으로 들어오셨을 때 리더십 계급구조뿐 아니라 전문적인 종교 아이콘도 다 폐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본성과 사명의 연장선상에서, 초대 교회는 역사상 최초의 평신도 주도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사도들과 그들이 훈련한 사람들의 죽음과 함께 뭔가 바뀌기 시작했다.

 

그 시대 이래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교회가 있던 사회들에서 교회의 조직방식을 취했다 - 주님께서 독특한 성격을 지닌 새로운 사회를 시작하신다는 주님의 경고에도.(23:8-11과 막 10:42) 시내산에서 시작된 구약과는 두드러지게 대조적으로,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은 둘 다 새 이스라엘을 위한 어떤 고정된 조직방식도 부과하지 않았다.

 

 

 

8. 콘스탄틴과 영광스러운 성직제도

 

313년에서 325년까지, 기독교는 더는 로마정부의 핍박을 견뎌내며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종교가 아니었다. 이제는 돈과 지위를 보장받고 제국의 태양 아래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 콘스탄틴의 통치 아래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더는 불리한 조건이 아니고 유리한 조건이었다. 황제의 종교에 소속되려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리고 성직자 중에 끼는 것은 가장 큰 이점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성직자들은 로마제국의 가장 높은 고위관리들, 아니 황제 자신이 누리는 것과 똑같은 영예를 얻었다. 사실, 콘스탄틴은 그가 로마 총독들에게 준 것보다 더 큰 권세를 로마의 감독들에게주었다. 그는 또한 성직자가 고정적인 연봉(사역 수당)을 받도록 명령을 내렸다. 313년에 그는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면세 혜택을 주었다 - 이교제사장들이 전통적으로 누렸던 혜택. 그는 또 성직자들을 공공 및 사회적 의무에서도 면제시켜 주었다. 그들은 일반 법정에서 재판받는 것에서도 자유로웠고, 군 복무도 면제되었다(감독들은 일반 법정이 아닌 감독의 법정에서만 재판받았다.)

 

이 모든 것에 성직자는 특별계급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콘스탄틴이 더 높은 사회계층을 표현하는 클레라클(성직자)과 클레릭스(성직자)라는 말을 사용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또 기독교 성직자가 정부 관리들과 똑같은 특권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감독들이 일반 재판장들과 똑같은 위치에서 재판하게 되었다.

이것은 불안한 결과를 가져왔다: 성직자들이 교회 관리의 위상, 수혜 계층의 특전, 그리고

부유한 엘리트의 권세를 골고루 갖추게 되었다. 그들은 구별된 사회적 신분과 생활수준을

가진 동떨어진 계급이 되었다(이것은 독신 성직자들에게도 해당되었다.)

 

그들은 옷을 입고 치장하는 것도 일반 사람들과 다르게 했다. 감독들과 사제들은 머리를 밀었다. 삭발이라고 알려진 이 관습은 고대 로마의 입양의식에서 온 것이다. 이렇게 머리를 삭발한 사람들이 사무원 또는 성직자라고 알려졌다. 그들은 또한 로마 관리들의 복장을 하기 시작했다.

 

콘스탄틴 시대에 수많은 사람이 갑자기 "사역으로의 부르심"을 경험했던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들의 생각에, 교회의 직책을 맡는 것은 부르심이라기보다는 평생의 직업이었다.

 

9. 거짓된 이분법

 

콘스탄틴의 통치 아래에서, 기독교는 정부에 의해 합법화되었고 높여졌다. 이것이 교회와 세상의 구분을 흐려놓았다. 기독교 신앙은 더는 소수자의 종교가 아니었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은 황제들에 의해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 결과로 교인의 수가 급속도로 늘어났다 - 회심이라고 보기에는 의심스러운 수많은 사람이 교회에 합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이교사상을 교회 안으로 갖고 들어왔다. 윌 듀란트에 의하면, "기독교가 세상을 회심시키는 동안, 세상은 기독교를 회심시켰고 인류의 자연적 이교사상을 전시했다."

 

우리가 3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비주의 종교의 관습들이 교회 예배에 도입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성한 것과 불경스러운 것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이교개념이 그리스도인의 사고방식 속으로 침투했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바로 이런 이분법에서 나와 자라났다고 하면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제 두 부분으로 분리되었다: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 - 불경스러운 것과 신성한 것.

 

3세기에 가서는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격차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벌어졌다. 성직자들은

교회의 훈련된 지도자였다. , 정통의 수호자들이었고, 사람들을 다스리고 가르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찮은 사람들은 가질 수 없는 은사와 은혜를 소유했다.

 

평신도들은 훈련되지 않은 이류 그리스도인이었다. 저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가 정확히 지적했다: '평신도'라는 말은 종교 용어 가운데서 가장 나쁜 말 중의 하나이므로, 그리스도인의 대화 속에서 추방되어야 마땅하다.

 

이 거짓된 이분법은 신성한 직업('사역'으로 부르심받은 것)과 평범한 직업(세상의 직업으로 부르심 받은 것)이 있다는 식의 크게 잘못된 사상으로 인도했다. 역사가 필립 샤프는 이런 요인들을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묘사했다: "그리스도교의 깨끗한 물줄기"가 오염된 곳에 "교회의 세속화"가 이루어졌다. 이런 잘못된 이분법이 오늘날 아직도 많은 신자의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음을 주지하라. 그러나 이 개념은 기독교 사상이 아니고 이교사상이다.

그것은 매일의 삶이 하나님에 의해 거룩해진다는 신약성서의 진리를 파괴한다.

 

이런 사고방식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용어가 생겨났다. 그리스도인들이 이교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4세기에 폰티펙스(이교의 직함)라는 직함이 기독교 성직자의 일반적인 호칭이 되었다. '의전관''단장' 같은 말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신비를 관리하는 사람으로서 성직자의 신비성을 강화시켰다.

 

요약하자면,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쯤 성직자는 신성한 계급('거룩한 사람들'의 영적 엘리트 그룹)이 되었다. 이것은 다루기 어려운 주제인 안수로 우리를 인도해준다.

 

프랭크 바이올라/ 조지 바나, <이교에 물든 기독교> 중에서

 

10. 안수의 오류

 

4세기에 신학과 사역은 사제들의 독점적 영역이었고, 노동과 전쟁은 평신도들의 영역이었다. 사제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과의식은 무엇이었는가? 바로 안수였다.

 

안수에 관한 역사적 뿌리를 살펴보기 전에, 초대교회에서는 지도자가 어떻게 인정되었는지를 알아보자. 1세기의 사도적 일꾼들(교회 개척자들)은 교회를 세우고서 떠났다가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 교회를 다시 방문했다. 그들은 그 교회 중 몇몇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장로들을 세웠다. 모든 경우에 장로들은 공개적으로 승인받기 전에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장로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회 안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그들은 어떠한 직책으로 임명받지 않았다. 그 게 아니라, 교회의 연장자로서 영적 섬김을 통해 교회에 이바지한 것을 토대로 인정된 것이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교회 안에서 특정한 은사가 있는 지체들을 인정하는 것은 본능적이고 유기적이다. 모든 신자는 교회 안에서 여러 사역을 수행하는 은사가 있는 사람을 인정하는 분별력을 갖고 있다.

 

놀라운 것은 신약성서에 장로들이 공개적으로 세 구절밖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장로들은 갈라디아의 교회에들에서 세움받았다(14:23).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에서 장로들을 세우라고 했다(딤전 3:1 이하). 그는 또한 디도에게 그레데의 교회들에서 장로들을 세우라고 했다(1:5 이하).

 

이 구절들에 등장하는 '안수하다'(ordain)라는 단어는 직책을 만들어 거기 앉히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미 벌어지는 것을 인정하고, 지지하고, 드러낸다는 개념을 갖고 있다. 그것은 또한 축복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장로들과 다른 사역들을 공개적으로 인정할 때 보통 사도적 일꾼들이 손을 얹었다(일꾼들이 보냄을 받을 때도 교회나 장로들이 이렇게 했다).

 

1세기에 손을 얹는 것은 직책에 앉히거나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역할을 인정하거나 확인한다는 뜻이었다. 유감스럽게도 2세기 말과 3세기 초에 그 반대의 의미가 받아들여졌다.

 

3세기 때는 '안수'(ordination)가 완전히 다른 뜻이 되었다. 안수가 공식적인 기독교 의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4세기에 가서는 안수식이 상징적인 복장과 엄숙한 의식으로 꾸며졌다. 안수는 신자의 제사장주의를 짓밟는 교회의 계급을 만들어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디서 안수의 방식을 도입했을까? 그들이 로마의 행정관리들을 임명하던 관습에서 안수식을 본뜬 것이다. 안수식의 모든 과정이, 사용하는 말까지도, 로마 관료사회에서 직수입되었다.

 

4세기에 가서는 로마 관리를 임명하는 데 사용한 용어들과 기독교 안수에 사용한 용어들이 동의어가 되었다.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선택의 종교로 공인했을 때, 교회 리더십 구조는 정치적 인가를 받아 보장되었다. 구약의 제사장제도 방식이 그리스 계급제도와 합쳐졌다. 비통하게도 교회는 이런 새로운 방식에 안주했다 -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안수는 철회할 수 없는 의식으로 간주되었다. 어거스틴은 안수가 사제에게 "절대로 지울 수 없는 인장"을 박아서 그의 맡은 역할을 완수하도록 권한을 부여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기독교의 안수는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성립시키는 제도로 이해되었다. 그것에 의해 성직자는 성사를 주관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신성한 의식을 거행하는 사제가 모든 그리스도인 중 가장 완전하고 거룩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와 크리소스톰은 사제들에 대한 기대가 높았기 때문에, 성직자들이 자신이 수행하는 역할의 거룩함에 따라서 사는 데 실패한다면 그들에게 위험이 닥칠 것이라고 했다. "크리소스톰의 의견에는, 사제가 그의 교구 사람들에 의해 천사처럼 평가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부서지기 쉬운 재질처럼 평가되어서는 안되었다."

 

사제가 어떻게 그런 순수한 거룩함의 상태로 살 수 있었을까? 그는 어떻게 "천사들의 성가대"에서 섬기기에 합당할 수 있었을까? 그 대답은 안수였다. 안수에 의해 신성한 은혜의 물줄기가 사제에게로 흘러들어 그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이었다. '성직의 부여'라고도 알려진 이 사상은 닛사의 그레고리의 문헌들에 최초로 등장한다.

 

그레고리는 안수가 사제를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 다르고 더 월등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신도 위에 그를 높이 세워준다고 주장했다. 그레고리는 이렇게 기술했다: "말씀의 똑같은 능력이 사제를 숭고하고, 존귀하고, 구별되게 만들어준다...어제까지 사제는 일반대중의 하나요 뭇 사람 중 한 명이었지만, 졸지에 안내자, 총수, 의의 스승, 숨겨진 신비의 선생이 된다."

 

4세기 때의 문서에 있는 말을 들어보라: "감독, 그는 말씀의 사역자요, 지식의 보존자요, 신성한 예배의 여러 부분에서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의 중재자입니다... 그는 여러분의 통치자이고 총독입니다...그는 여러분에게서 존귀하게 여김을 받을 자격이 있는 하나님 다음의 존재이며 땅에 있는 여러분의 신입니다." 사제들은 "땅에 있는 하나님의 대리자"와 동일시되었다.

 

사제들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다는 것을 더 보여주고자, 그들의 생활방식과 복장은 평신도들의 그것과 달리했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안수의 개념은 기독교 신앙을 결코 떠난 적이 없다. 그것은 오늘날의 기독교에도 살아있고 또 잘 나가고 있다. 사실, 만일 당신이 현대 목사가 왜,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토록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높여졌을까 의아해한다면, 바로 이것들이 그 근원이다.

 

에두아르트 슈바이처는 그의 고전 Church Oder in the New Testament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사역이나 성직의 능력을 부여하는 안수에 관해서 사도 바울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1세기의 목자들(장로들, 감독들)은 오늘날의 안수 비슷한 것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다른 양떼 위에 높여진 적이 없었다. 그들은 양떼 중에서 섬기던 사람들이었다. (20:20-28과 벧전 5:2-3을 참조할 것)

 

1세기 장로들은 다만 그 교회를 돌봐주던 순회 사역자들(사도적 일꾼들)에 의해 공개적으로 인정되었을 뿐이다. 그런 확인작업은 단순히 그들의 역할에 대한 인정이었다. 그것은 특별한 능력을 부여하지도 않았고, 영구적인 자격도 아니었다.

 

현대 안수의 관습은 그리스도인의 특수계층을 형성해낸다. 카톨릭 사제이건 개신교 목사이건 간에 그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가장 중요한 사역은 소수의 '특별한' 신자들에게 국한된다는 것.

 

그런 사상은 비성서적이다 못해 아주 해로운 것이다. 신약성서 그 어디에도 설교하고, 침례(세례) 주고, 주의 만찬을 인도하는 것이 '안수 받은 사람'에게 국한된다는 말은 없다. 저명한 학자인 제임스 던은 다음과 같이 아주 멋지게 표현했다: 성직자 - 평신도 전통은 대부분 다른 이단들보다 신약성서의 권위를 더 손상시켰다.

 

교회의 직책이 오직 안수식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기 때문에, 안수를 주는 권세가 종교적 권위를 소유하는 데 결정적인 쟁점으로 떠올랐다. 성서의 전후 문맥은 사라졌다. 그리고 성직자/평신도의 계급 구분을 정당화하려고 '본문을 증빙자료로 사용하는' 방법들이 난무했다. 가장 좋은 예는 아마 교황제도와 사도권 계승의 교리를 정당화하려고 마태복음 16장을 사용했던 초기 카톨릭일 것이다. 그 결과, 대개 교육을 받지 못해 무식했던 일반 신자들이 전문 성직자의 자비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교에 물든 기독교> 중에서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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