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기원과 역사(마지막)
16. 목사는 어떻게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가?
현대 목사는 하나님의 사람들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해를 끼친다. 목사의 직책은 그 울타리 안에 들어오는 많은 사람을 엉망으로 만든다. 우울증, 탈진, 스트레스, 그리고 신경쇠약 같은 증상들이 목사 중에 비정상적으로 그 비율이 높에 나타난다.
이 책을 쓰는 현재, 사례를 받으며 교회를 섬기는 목사가 미국에만 500,000명 이상이라고 보고되어 있다. 이렇게 엄청난 수의 종교 전문가 중에, 목사 직책의 치명적인 위험을 입증하는 다음의 통계를 고찰해보라.
1. 94%가 이상적인 가정을 가져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다. 2. 90%가 일주일에 46시간 이상 사역활동을 한다. 3. 81%가 배우자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4. 80%는 목회사역이 가정에 부정적으로 작용한다고 믿는다. 5. 70%는 그들에게 절친한 친구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없다. 6. 70%가 목회하기 전보다 더 낮은 자존감을 갖고 있다. 7. 50%가 직책이 요구하는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 8. 80%가 좌절 또는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9. 40% 이상이 탈진 상태에 있고, 일정에 짓눌려 있고, 비현실적인 기대에 압도당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10. 30%는 목회가 가족에게 엄청난 위험요소라고 생각한다. 11. 33%가 지난 해에 목회를 그만둘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12. 40%가 목사의 사임 요인이 탈진 때문이라고 믿는다.
대부분 목사에게는 한꺼번에 주요 임무 16가지를 수행하는 재주를 부릴 것이 기대된다. 그리고 그 중 대부분은 압력에 못 이겨 나가떨어진다. 이런 이유 때문에 미국 전역의 모든 교단에 있는 사역자 1,400명이 매달 해고당하든지 아니면 사임을 강요받고 있다. 지난 20년 여 동안, 목사가 한 교회에서 사역하는 평균 기간이 7년에서 4년을 약간 웃도는 정도로 줄어들었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목사의 직책에 있음을 발견하는 목사는 거의 없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그 누구에게도 오늘날의 목사가 가지는 엄청난 부담을 다 감당하라고 의도하신 적이 없다. 주님은 결코 어떤 한 사람이 그 많은 짐을 지도록 의도하신 적이 없다.
목회에 대한 요구는 목사들을 짓누른다. 그렇게 짓눌러서 그들을 고갈시켜 말라비틀어지게 한다. 여기서 잠깐, 당신이 사람들을 얼마나 기분 좋게 했는가에 기초해서 당신에게 급여를 주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고 가정해보라. 만약 당신의 급여가 당신이 얼마나 사람들을 잘 대우했는가, 얼마나 친절한가, 당신의 아내와 자녀가 얼마나 인기가 있는가, 당신이 얼마나 제대로 옷을 입는가, 그리고 당신의 행동이 얼마나 완벽한가에 달렸다면? 당신은 이것이 당신에게 가져다줄 짓누르는 스트레스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가? 그런 중압감이 당신으로 하여금 위선으로 가장하도록 얼마나 강요할지 알 수 있는가? - 당신의 권위와 위신, 그리고 안정된 직장을 잃지 않으려고.(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목사가 어떤 도움도 받으려 하지 않는다.) 목사라는 직업도 다른 직업(교사, 의사, 변호사)처럼 행동규범을 지시한다. 그 직업이 목사가 어떻게 옷을 입고,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지시한다. 이것이 왜 많은 목사가 아주 부자연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지를 설명해주는 주요 이유 중 하나이다.
이런 점에서, 목사의 역할은 정직하지 못한 삶을 조장한다. 회중은 그들의 목사가 언제나 쾌활하고, 대단히 영적이고, 여차하면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기를 기대한다. 그들은 또한 목사의 가족이 완벽하게 훈련되어 있기를 기대한다. 더 나아가서, 목사는 결코 분을 내거나 쓴 뿌리가 있음을 보여서는 안 된다. 많은 목사가 마치 그리스 연극에 등장하는 배우들처럼 이런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전에 목사였던 사람들에게서 들은 많은 개인적인 증언에 근거해보면, 많은(대부분이 아니라면) 목사가 목사의 직책에 있으면서 어느 정도는 타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목사라는 직책에 뿌리박힌 정치적 관료의식이 그들 상당수를 고립시키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크나큰 문제이다.
목사들에게 쓴 "성직자의 고갈 상태를 예방하기"라는 제목의 글에서, 저자는 뭔가 놀라운 것을 제안했다. 목사들을 향한 그의 충고는 목사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관료주의를 우리가 분명히 엿볼 수 있게 한다. 저자는 목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했다: "다른 교단 목사들과도 교제하십시오. 그들이 여러분의 공식적인 울타리 속에 있지 않다고 해서 여러분에게 해로운 존재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당신을 잡아맬 정치적인 줄은 없습니다." 직업에서 오는 고독이 목사 중에 창궐하는 또 다른 바이러스다. 외톨이 질병이 일부 사역자들을 다른 직업으로 몰아내고 있다. 그것이 또다른 사람들을 잔혹한 운명으로 내쳐버리고 있다. 이 모든 병은 목회의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이외에는 결코 그 누구도 정상에 세우지 않으셨기 때문에, "정상에서는 고독"하다! 사살상 현대 목사들은 신약성서에 58번이나 등장하는 "서로(또는 피차)" 권면하라는 것을 어깨에 짊어지려 하고 있다. 그 목사 중 많은 사람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눌려서 뭉개지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17. 결론
현대 목사는 21세기 기독교에서 가장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존재이다. 하지만, 성서에는 이 직책의 존재를 지지해주는 단 한 가닥의 증거도 없다. 오히려 오늘날의 목사는 이그나티우스와 시프리안에 의해 널리 퍼진 단일감독체제에서 생겨났다. 그리고 감독은 지역 장로로 발전하였다. 중세의 장로는 카톨릭의 사제가 되었다. 종교개혁 때는 '설교자' 또는 '사역자'로 바뀌었고, 결국 개신교 전체가 목을 매는 '목사'가 탄생했다. 이 모든 것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개신교 목사는 약간만 개혁한 카톨릭의 사제일 뿐이다.(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어떤 개인이 아닌 직책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무렵, 카톨릭 사제들에게는 7가지의 임무가 있었다. 설교, 성사, 양떼를 위한 기도, 절제되고 경건한 삶, 교회의식, 가난한 자의 구제, 그리고 병자 방문이 그것이다. 개신교 목사는 위의 모든 임무를 자신에게 지우고, 거기에 때대로 지역사회의 행사들에 가서 축사해 주는 것을 첨가했다. 저명한 시인 존 밀턴은 다음과 같은 그럴 듯한 표현을 했다: "새 장로는 옛 사제를 크게 썼을 뿐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현대 목사는 옛 사제를 큰 글자로 썼을 뿐이다!
18. 심층 탐구(책 저자들을 향한 질문과 저자들의 답변)
1. 초대교회가 한 교회에서 오랜 시간 동안 머무르지 않은 교회 개척자들에게서 도움을 받았음을 당신들은 주목하지만, 훈련된 지도자들이 드물어서 - 오늘날 아직도 같은 상황에 부닥쳐 있는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처럼 - 다른 여러 교회와 공유해야 했기 때문이 아닌가?
저자 답변: 그렇지 않다. 교회 개?자들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 아래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려고 일부러 떠났다. 만일 교회 개척자가 교회에 머물렀다면, 지체들은 자연적으로 그가 인도하는 것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지체가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방해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신약성서 전체에 나타난 방식은 교회 개척자들(사도적 일꾼들)이 언제나 기초를 놓고 나서 교회를 떠나는 것이다. 더 상세한 것은 다음과 같은 워치만 니의 책을 참조하라: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생명의 말씀사)
2. 야고보서 3:1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고린도전서 12:27-31은 성령이 각 지체에게 각기 다른 은사를 주셨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 모든 사람이 사도나 선지자나 교사의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니고, 믿는 자가 제각각 다른 기능을 갖고 있다. 교회 전체를 향해 설교하고 가르치고 사역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따로 부르셨다는 것을 이 성서구절이 지지하고 있지 않은가?
저자 답변: 정말 그렇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교사들, 말씀 전하는 사람들, 선지자들, 사도들, 복음 전하는 사람들, 그리고 목자들까지도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현대 목사의 직책은 이 성서본문이 그리는 그런 것이 아니다. 사실, 오늘날 목사들이 일반적으로 아주 많은 역할을 하도록 기대되기 때문에, 그들은 종종 자신의 은사들 밖에서 활동해야 한다. 이것은 그들과 몸 안에 있는 다른 지체들 두 부류에 다 불공평하다. 왜냐하면, 그 다른 지체들도 이런 은사들을 갖고 있는데 그들은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3. 당신들은 안수를 이교에 뿌리를 둔 공식적인 기독교 의식으로 간주하지만, 이런 과정이 교회 지도자들로 하여금 성서를 제대로 이해하고 공개적으로 교회를 세우는 데 자신을 바치도록 확증해준다. 그러므로 안수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중요한 보호장치로 사용되지 않는가?
저자 답변: 이 질문은 현대 성직자 제도가 기독교 사역의 모델이라는 가정을 기초로 하고 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성직자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리고 틀림없이 그들은 안수받은 성직자에 관해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4. 당신들이 "많은(대부분이 아니라면) 목사가 목사의 직책에 있으면서 어느 정도는 타락할 수밖에 없다."고 할 때 이것은 무슨 뜻인가? 내가 아는 가장 경건하고 헌신된 사람 중엔 하나님나라를 위해 아주 열심히 사역하는 목사들이 있다.
저자 답변: 우리도 역시 열심히 사역하는, 경건하고 헌신적인 목사들을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대개 사역 말기에 가서, 목사의 직책 때문에 어느 정도는 타락할 수밖에 었었다고 고백하는 수도 없이 많은 목사를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어떤 목사들은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그것(목사의 직책)이 몇 해동안은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얼마 후부터 부지 중에 나를 변질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의 '청중'에게 연극을 하고, 특별한 이미지를 유지하려고 했는지를 설명했다. 이런 관측은 목사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비성서적인 제도의 막강한 영향력과 관련이 있다.
5. 이 장을 읽고 나서 당신들이 개인적인 공격을 퍼붓는다고 느끼는 목사에게 당신들은 뭐라고 할 것인가?
저자 답변: 우리에게 그 어느 목사나 사역자의 품위를 손상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우리는 그들 대부분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 장을 읽을 때 공격받는다고 느끼는 목사들을 이해한다. 어떤 경우는 그들의 주체성이 그들의 지위와 단단히 묶여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우리가 만들어내서 대물림해 온 리더십 구조와 제도를 고려할 때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자시의 직책이나 역할에 안정감을 느끼는 목사들은 이 책을 읽고 위협받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결론에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단지 우리의 독자들이 우리가 내린 결론에 마음을 열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교에 물든 기독교> 중에서 |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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