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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세계관

하나님아들 2016. 2. 5. 16:43

세계관(문경규)

서 론 /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세계관(World-View)이란, 세계를 조망하고 이해하는 관점을 말한다. ‘창조-타락-구속’의 저자인 월터스(A. Walters)는 세계관을 “사물들에 관한 기본적 신념의 포괄적인 틀”이라고 정의하기도 하였다. 세계관은 인간이 현실의 삶에서 방향감각을 갖도록 인도하며 실제적인 삶의 문제들을 결정하고 선택할 때 보다 나은 가치를 지향하도록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세계관은 신앙 또는 신념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여러 가치들로 구성된 ‘가치체계'(system of values)라 할 수 있다.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기독교세계관(이하 '기세'로 약칭)이란 무엇인가. 기세는 기독교의 관점으로 세계를 조망하고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성경을 근거로 세계를 이해하며 세계 안에서 행동하는 원칙을 성경으로 세운 관점을 기세라 부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교회가 동일하게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아니며, 모든 교회가 동일한 세계관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기에 통일된 규범을 가진 기세를 말하는 것은 아직 어려운 단계다.

그렇더라도 현재의 개신교가 개혁주의에서 비롯되었고, 기세에 대한 관점이 주로 화란을 중심으로 한 개혁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제시되었으므로 현재적으로 기세란 개혁주의적(Reformational) 세계관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말은 작금의 기세가 어거스틴에 의한 서방신학의 전통을 따르며 또한 칼빈이 제시하는 개혁주의 신학을 따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럼 이제부터 화란의 개혁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기세가 어떻게 촉발되고 어떻게 체계화 되었는지 또한 작금의 기세 안에 어떤 문제와 심각성이 있는지 그리고 그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제 1 장 / 세계관의 시작

- 기독교 세계관의 태동 배경

중세 1,000년의 유럽은 인간 이성이 신앙에 종속된 시기였고, 사회는 교회가 중심이 되는 봉건적 공동체였다. 그러다가 르네상스의 출현과 함께 인간 이성은 신과 교회로 둘러쳐진 중세를 탈출하게 되고 탈종교화된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게 되었다. 인간 이성은 과학과 기술로써 힘을 축적하고 문화의 영역을 새로이 구축하면서 드디어 자신만을 위한 근대도시를 건설하는 위용을 갖추었다.

19세기를 지나면서 인간은 더욱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키고 산업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도시화(都市化)를 급속히 확장시켰다. 도시의 확장은 이성과 과학을 통해 이룩한 인간 능력의 놀라운 업적이었다. 이로써 서구에서의 인간은 과학의 힘과 그 찬란한 기술문화로써 더 이상 교회의 간섭이 필요없는 탈종교화된 '세속도시'를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세속도시’가 출현하면서 서구사회는 산업과 문화가 세상을 지배하는 후(post)기독교시대를 맞이하였다. 세속도시로 인한 탈기독교시대의 도래와 현대 문화의 급류가 몰아치자 충격을 받은 것은 교회였다. 교회는 인간이 만든 세속도시의 위용에 놀라며 그 세속문화의 현란함에 뒷걸음질쳤다. 단순히 교회의 하부구조에 불과하다고 여긴 세속문화가 그 막강한 위력을 키워 교회를 외부로부터 위협하는 것에 대해 교회는 당황하였다. 그 때까지 교회는 문화 혹은 세속문화에 대한 성경의 규범이나 문화를 포용할만한 성경적 세계관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교회는 세속문화의 거대한 급류에 잠식될 위험에 처하였다.

서구교회는 20세기를 눈앞에 두고야 비로소 자신이 신앙 우위의 이분법에 빠져 인간과 문화와 능력을 과소평가하였음을 깨우치게 되었다. 교회가 구원과 영혼의 문제에 치우쳐 세속문화를 아우르는 균형있는 세계관을 마련하지 못한 것을 반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급속하게 성장한 세속문화에 대응할 수 있는 기독교적 삶의 원리들을 마련하고 문화에 대한 성경적 규범을 마련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기독교 세계관의 촉발 / 아브라함 카이퍼

교회로 역류하는 세속문화의 도전에 대응하여 새로운 기독교의 삶의 원리를 마련하고 문화의 문제를 성경적으로 대응하려는 교회의 노력은 20세기초 화란의 수상이자 신학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 1837-1920)에 의해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카이퍼는 1898년 10월, 프린스턴 신학교(Princet Theological Seminary)의 스톤강좌(Stone Lectures)에서 서구교회가 부딪힌 난제들, 곧 교회의 문화에 대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으며 그 대안으로써 칼빈주의(Calvinism)의 기독교 원리를 제시하고 칼빈주의야말로 세속문화에 맞서는 성도의 강력한 삶의 체계(Weltanschauung:세계관)임을 주장함으로 기독교세계관 운동을 촉발시켰다.

다방면의 어마한 경력을 가진 카이퍼는 이원론적 사고에 갇힌 경건주의 신자들에게 과학, 예술, 정치 등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도록 일깨우고자 하였다. 카이퍼는 개인적 헌신이나 단순한 영혼구원에 지우친 신앙을 반대하며 개인은 교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미를 “사회문화적인 영역으로 확대”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성도는 신앙과 문화를 통합하는 균형있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카이퍼는 칼빈주의(Calvinism)가 이러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가장 명료하게 나타냈다고 보았으며 칼빈주의 정신을 새롭게 이해하고 적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진정한 칼빈주의자는 사회문화적 분야들을 세상적인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되며 그렇다고 비그리스도인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문화활동에 참여해서도 안된다고 하였다. 오히려 기독교인은 각각의 분야에서 사회문화적 책임을 다하며 문화의 총체적인 국면에서 하나님의 왕국이 건설되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일반은총론과 문화적 낙관론

당시까지만 해도 문화에 대한 마땅한 기독교적 관점이 부재한 가운데 카이퍼는 문화에 대한 성경의 근거로써 ‘일반은총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일반은총이야말로 타락에도 불구하고 창조세계를 보존하고 죄를 억제하며 문화를 발전시키는 성경적 근거가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카이퍼에 의하면 일반은총은 아담의 타락시에 역사하기 시작한 것으로써 소극적으로는 타락으로 인한 죄와 죄의 결과를 제어하며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문화를 형성하는 힘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반은총은 죄의 근원을 제거하거나 타락된 창조를 완전히 회복치 못하며 단지 그리스도의 구속-특별은총을 예비하는 기초가 될 뿐이라고 말하였다.

카이퍼에 따르면 일반은총은 특별은총을 위한 무대다. 카이퍼는 창조를 유지하는 일반은총은 구원을 성취하는 특별은총과 상호보완적인 것으로써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핵심적인 두 축이라고 보았다. 일반은총은 창조세계를 보존함으로 특별은총을 준비하는 기반이 되며 역으로 특별은총은 창조를 회복함으로 일반은총을 완성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지를 따라 카이퍼는 일반은총으로 인한 문화들은 특별은총을 통해 하나님나라에 합당한 문화적 업적이 되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보았다.

따라서 카이퍼는 이 땅에 형성된 문화적 업적은 사라지고 불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예루살렘에 편입되는 것이라는 “문화적 낙관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계21:24절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로 그리로 들어오리라”는 말씀이 곧 열국의 문화적 영광이 하늘의 새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해석함으로써 문화의 낙관론을 주장한다. 이처럼 카이퍼는 일반은총에서 문화의 근거를 찾고 특별은총이 부가됨으로 문화까지 완전해 질 수 있음을 주장하며 교회의 문화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나아가 두 은총 사이의 관계를 일치시킴으로 땅과 하늘, 창조와 구원을 일치시키고 신앙과 문화를 아우르는 통일적인 세계관을 제시하려 하였다.


제 2 장 / 체계화 과정

기독교 세계관의 구조화 / 도예베르트

헤이그에 있는 카이퍼연구소의 소장으로 재직하였던 도여베르트(H. Dooyeweerd, 1894-1977)는 카이퍼에 의해 시작된 기독교세계관 운동을 더욱 발전시키고 체계화시켰다. 도여베르트는 기세를 “창조 타락 구속”의 구조로 체계화시킨 장본인이다.

그가 체계화한 “창조 타락 구속”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계와 인간은 태초의 창조로부터 시작되었고 창조의 7일에는 모든 것이 완전하였다. 그 때 우주만물에는 온전한 “창조질서(Creation Order)"가 수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단절되었고 창조세계는 인간에 의해 반역적으로 도용되었다. 그러자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질서의 구조가 허물어지지 않도록 일반은총을 허락하사 피조세계를 붙들어 주셨다.

타락에 있어서 도여베르트는 죄가 창조구조 자체를 왜곡시킨 것이 아니고 창조의 방향을 왜곡시켰으며 인간의 마음의 방향을 왜곡시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타락에도 불구하고 일반은총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창조질서와 구조가 유지되었다고 보며, 이에 따라 인간과 자연은 시간의 역사를 계속하면서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리스도의 구원에 의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다시 회복될 때 전 피조물은 다시 창조 본연의 질서로 돌아가게 된다고 한다 .

이처럼 도여베르트는 ‘창조질서’를 키워드로 창조를 설명하며,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문화가 발전하는 근거를 일반은총에서 찾았다. 그리고 일반은총을 기초로 하여 구원이 역사하고 구원은 다시 창조질서를 회복함으로써 창조와 구원이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음을 말하였다. 그는 이같은 “창조 타락 구속”의 틀을 성경이 말하는 세계관의 틀로 제시하며 이 흐름으로써 기세를 구조화하였다


기독교 세계관의 심화 / 스킬더

기세를 한층 심화시킨 사람은 스킬더(Klaas Schilder, 1890-1952)다. 스킬더는 카이퍼 이래 화란 최대의 문화신학자로 불리운다. 스킬더는 문화의 근거가 일반은총에 있다는 카이퍼의 주장을 부정하며 인간은 처음부터 일반명령(창1:26-28)에 의해 문화적 본능을 부여받았으므로 문화의 근거는 일반은총이 아니라 일반명령에 있다고 말하였다. 스킬더가 주창한 일반명령은 오늘날 문화명령이라는 용어로 널리 수용되고 있다.

또한 스킬더는 성경이 문화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카이퍼가 주장하는 문화적 낙관론이나 경건주의자들의 문화적 금욕주의가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만물이 새롭게 바뀌는 “문화적 종말론”이라고 설명한다. 스킬더는 문화란 태초의 에덴동산에서부터 아담에게 부여된 사명이며, 예수께서 죄를 제어하고 자연과 문화를 본래의 목적으로 회복시킴으로 아담에게 주신 문화적 사명을 대신 성취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문화의 열쇠이며 문화를 완성하는 분이 된다.


기독교 세계관의 종합 / 월터스

기세의 종합은 토론토 기독교학문연구소의 월터스(A. Walters)에 의해 제시되었다. 월터스는 자신의 저서 ‘창조-타락-구속’(The Creation Regained)에서 위와 같은 화란의 기세의 전통들을 편집하고 정리하여 그 전체적인 내용들을 종합하였다. 월터스에 의해 종합된 세계관은 한마디로 ‘문화명령’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월터스는 태초의 창조의 정점은 문화명령(창1:26-28)에 있으며 본래 인간은 문화명령을 수행함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계발하고 확대하는 청지기의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그는 인간이 피조계를 배경으로 하여 문화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며 창조사역의 정점이라고 주장하였다.

월터스에 의하면 문화명령은 창조계시의 출발이고 역사는 하나님의 계시를 점진적으로 이루어 가는 과정이므로 하나님나라는 결국 문화명령이 완전히 성취되는 나라라고 한다. 그래서 월터스는 창세기의 계보가 구속사의 계보만이 아니라 문화명령을 존속시키고 성취하기 위한 문화사적 계보라고까지 설명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구속 역시 문화명령의 성취를 위한 의미로써 이해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월터스는 그리스도 유일론에 빠지지 말하야 한다고 하며, 그리스도의 구원만을 유일한 관점으로 이해하지 말고 구원이 문화의 완성을 위한 것임을 이해하라고 주문한다.

월터스는 창조의 시작과 역사의 과정, 그리스도의 구속과 하나님나라에 있어서까지 문화명령이 중심이 되는 것이므로, 문화명령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필연적으로 감당해야 할 중요한 사명이라고 강력하게 제시한다. 더욱이 문화명령은 대명령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주요한 두 명령이므로 성도는 동일하게 두가지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으로써 교회의 문화에 대한 거부감을 일소하고 이원론적 사고를 극복할 뿐만 아니라 문화를 변혁시켜야 할 책임이 그리스도인의 것임을 강조하면서 문화사역의 의미를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월터스의 주장대로라면 창조시에 주어진 문화명령(창1:26-28, Cultural Mandate)이 주님의 복음전파 명령인 대명령(마28:19-20, Great Command)보다 근원적이며 최종적인 의미로 세워지는 일이 발생한다. 그리스도의 구속마저 문화명령이 온전히 성취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라면 사실상 문화명령은 대명령보다 궁극적인 의미, 곧 하나님나라의 최종적인 사역으로써의 의의를 획득하고 만다. 이 때문에 월터스는 카이퍼나 쉐퍼(Francis A. Schaeffer)의 뒤를 좇아 이 땅에서 기독교적으로 변혁된 문화는 하나님나라에 곧바로 편입되는 것으로 믿으며 문화의 완성을 하나님나라와 동일시하는 문화적낙관론을 펼치고 있다.


제 3 장 / 세계관의 분열

- 기세는 개혁주의의 외적 표현이다

앞에서 기세의 태동 배경과 발전 과정을 살펴보았다. 물론 앞서 말한 것만으로 기세 전체를 다 다루었다고 할 수 없고 또한 그것은 개혁주의 관점을 정리한 것이기에 타 교단의 관점에서 보면 다른 의견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앞 장에서 논한 기세는 발전 과정 중에 있는 하나의 모습일 뿐 아직은 온전한 시스템을 갖춘 기세라고 하기 어렵다.

그렇더라도 앞서 논의된 기세는 기세로서의 대표성은 충분하다 하겠다. 무엇보다 기세는 개신교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개혁주의의 교리를 충분히 전제하였고 그 교리에 충실한 세계관을 피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창조-타락-구속이라는 기세의 틀은 개혁주의의 그것과 다르지 않으며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에 대한 설명 역시 개혁주의의 전통에 충실한 설명이라 할 수 있다. 어차피 기세란 기독교 교리의 표현이며 교리의 외적 모습이기에 화란의 개혁주의자들에 의해 제시된 기세는 개혁주의의 내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외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세의 문제들

그런데 개혁주의 전통과 교리를 반영하고 있는 기세는 많은 모순들로 점철되어 있다. 첫째로 기세가 주장하는 ‘문화적 낙관론’은 성경적이지 않다. 기세는 이 땅의 문화적 열매가 하나님나라에 유입되는 것이므로 문화를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세의 주장대로라면 교회는 문화적 업적을 위해서도 사역해야 하며 성도 역시 문화를 중대한 목적으로 삼게 되는데, 이는 교회의 본질을 흐리는 일이다. 교회는 문화를 문화를 목적으로 사역하지 않고 단지 문화를 통로로 삼아 사역해야 한다.

둘째로 기세는 문화명령을 과대하게 취급한다. 월터스는 창조의 정점이 문화명령에 있고, 인간은 문화명령의 수행을 위해 지음 받았으며, 타락은 문화명령의 수행이 지체되는 것이고, 구원이야말로 문화명령을 완전히 성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성경을 너무 그리스도 유일론으로 보지 말고 문화명령의 성취라는 문화사적 관점으로도 볼 것을 주문한다. 이는 월터스의 사설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그의 주장을 따르게 되면 그야말로 문화명령이 창조의 핵심이 되고 구원의 목적이 되어 성경의 본질은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다.

셋째, 문화를 ‘명령’으로 해석하는 것도 문제다. 현재의 기세의 핵심에는 문화명령이 자리잡고 있다. 어차피 기세란 세속적 문화의 위협으로 인해 촉발된 것이고 교회가 문화에 대해 올바른 대응을 하도록 돕기 위해 마련된 관점이다. 그러다보니 문화의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는 점에 초점이 있다. 이 점에서 기세는 문화명령을 문화에 대한 중대한 성경적 근거로 제시하며 세계관의 중대한 핵심인양 다루고 있다.

하지만 기세는 문화명령을 말 그대로 명령으로 해석함으로써 스스로 왜곡을 자초하고 있다. 월터스는 문화명령은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반드시 성취되는 것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해 종말적으로 완전하게 성취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문화명령은 명령의 의미가 아니다. 문화가 명령이 되면 문화는 인간의 임무나 중대한 목적으로 격상한다. 그럴 경우 인간은 문화를 성취하는 수단으로 전락하며 창조와 역사와 하나님의 모든 섭리조차 문화를 목적하는 것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문화는 인간이 완수해야 할 목적이 아닌 인간의 ‘본질’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문화적으로 존재하며 문화적인 존재방식을 갖고 살게 만드셨다. 인간이 땅에서 자연을 계발하여 문화를 생산하며 사는 존재가 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것은 인간이 자연을 근거로 문화를 생산하고 문화적으로 사는 존재라는 정체성(Identity)을 ‘선포’하는 말씀이지, 문화를 생산하는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의 의미가 아닌 것이다.


문화명령과 대명령의 분열

기세는 구원 못지않게 문화의 의미를 격상시키려고 무척 애를 쓴다. 그래서 제시하는 것이 문화명령(창1:26-28)과 대명령(마28:18-20)을 병행시키려는 논리다. 기세는 교회가 대명령 중심으로만 사역해서는 안되며 문화명령을 병행해서 성취해야 한다며, 두 명령은 마치 수레를 끄는 두 바퀴와 같아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면 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같이 두 명령을 병행시켜아 한다는 것은 위험스러운 주장이다. 왜냐하면 문화명령은 대명령과 병행하는 것이 아니라 대명령 안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대명령을 주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8-20) 여기서 앞 부분의 말씀을 보면 대명령이 선포되는 전제가 잘 나타나 있다. 즉 대명령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18절)라는 말씀을 전제로 하여 선포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제는 문화명령을 선포할 때의 전제와 상당히 다르다. 문화명령은 오직 땅을 전제로 선포되었다. 성경은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땅에 있는 것을 다스리라”(창1:28)고 명하며 문화명령의 범주가 단지 땅에 국한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대명령의 범주는 이와 다르다. 대명령은 주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위임받아 명하셨다. 그러므로 대명령은 문화명령보다 더 상위적이고 더 완전한 명령이 되는 것이다.

주님은 대명령에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20절)고 명령하셨다. 주님은 주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주님이 분부한 ‘모든 것’은 문화의 부분이나 삶의 부분을 제외하고 영혼과 구원의 부분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삶과 문화와 인격과 영혼을 포괄하는 모든 것을 가르치고 행하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대명령은 문화명령의 내용을 포괄하는 것이며 그보다 훨씬 크고 신령한 내용들을 명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문화명령과 대명령은 서로 병행되는 것이 아니다. 문화명령은 주님의 대명령 안에서 완전히 폐해지고 다시 회복되며 더욱 온전케되는 것이다. 대명령이란 영혼 구원에 대한 부분만 명령만 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문화의 부분을 뺀 반쪽의 명령을 하는 것도 아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명령은 그 자체로 땅과 하늘의 모든 것, 교회와 문화를 포함하는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대명령을 지키는 자는 모든 것을 완전하게 지키는 자가 될 수 있다.


제 4 장 / 교회의 이원론

- 기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

기세는 비록 문화에 대한 성경의 관점을 세우는데는 실패하였지만 그렇더라도 기세의 시도 자체는 정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교회 역사에서 기세만큼 문화의 중대성을 제대로 인식한 일이 없었고 그만큼 문화의 문제를 제대로 다룬 적도 없었다. 기세 운동이야말로 교회가 세상 문화에 대해 가져야 할 건강한 관점을 찾고자 했던 대단히 긍정적인 운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기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필요하다 하겠다. 첫째로 기세는 교회가 문화의 문제를 해결할 세계관이 없다는 사실을 올바로 통찰하였다. 물론 세상 문화의 위세에 놀라 뒷걸음치며 알게된 사실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기세가 그 점을 가장 먼저 인식했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둘째로 기세는 교회가 전통적으로 이원론의 문제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반성하였다. 교회가 이원론의 문제에 빠져 있다는 점은 교회의 커다란 맹점이다. 이원론으로 인해 교회는 세상과 문화와 현실에 대한 균형있는 시각을 갖지 못하여 도리어 세상에서 소외되는 일을 자초하였다.

셋째로 기세는 창조론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찾고자 하였다. 기세는 그 동안 교회가 구원 중심의 시각에 빠져 창조와 세계에 대한 인식과 책무를 다하지 못했음을 반성하였다. 그래서 기세는 창조와 구원간의 균형있고 통합적인 시각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같은 관점 역시 과거의 교회가 인식하지 못했던 중대한 것이었다. 넷째로 기세는 교회가 창조, 땅, 문화, 현실의 문제를 통일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성경적 대안을 찾고자 하였다. 그래서 교회가 세계 안에서 방관자가 되거나 세상으로부터 소외되는 일없이 사회문화적 책무를 다하는 균형있는 교회가 되도록 돕고자 하였다.


문화관의 규범이 없는 교회

기세의 주장처럼 교회는 전통적으로 문화의 문제에 대해 마땅한 성경의 규범을 갖지 못하여 왔다. 그러면 그 동안 교회는 문화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 왔을까. 이에 대해서는 리차드 니버(Richard Niebuhr)가 그의 저서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니버는 역사적으로 교회의 문화에 대한 태도에는 5가지 유형이 있다고 하였다. 니버의 설명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문화를 배척하는 입장 - 신앙과 문화를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문화 자체를 악하고 죄된 세상의 것으로 보며 문화를 배척함으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 터툴리안이나 톨스토이가 이런 분리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2. 문화와 일치하려는 입장 - 신앙과 문화를 동일한 것으로 일치시키려는 입장이다. 과거 헬라의 교부들처럼 기독교와 철학을 조화시키려 하거나 신앙과 지식 혹은 세상과 교회를 일치시키는 모습들에서 볼 수 있다. 나치 정권하의 기독교도 이런 부류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3. 문화를 하위로 보는 입장 - 문화를 신앙의 하부구조로 이해하는 입장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대표적인 인물로서 그는 교회를 하늘의 영역으로, 문화를 땅의 영역으로 구분하며 교회를 상위에 둠으로써 문화에 대한 교회의 지배적 위치를 강조한다.
4. 문화와 갈등관계에 있는 입장 - 문화를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는 입장이다. 루터가 이 입장을 대표하는데 그는 신앙과 문화는 세상 끝까지 서로 갈등과 긴장의 관계에 있는 것이라고 본다. 루터에게 세상 문화란 어쩔 수 없이 견디고 살아야 하는 현실의 고통이 된다.
5. 문화를 변혁하려는 입장 - 신앙으로 문화를 변혁하려는 적극적인 입장이다. 칼빈이 이를 대표하며 신앙이 세상 문화를 변혁할 수 있다고 보고 땅에서 하나님나라가 성취되도록 만들고자 한다. 기세론자들도 대부분 이 부류에 속한다.

이렇게 교회가 문화에 대해 가졌던 태도를 보면 그것은 문화의 대해 보일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다 보여준 것과 같다. 교회는 문화에 대해 배척, 일치, 군림, 갈등, 변혁 등 마치 카멜레온같은 모습으로 응대하였다. 그만큼 교회는 문화에 대한 일관된 입장을 갖지 못하고 시대적 정황에 밀리거나 신학적 배경에 의해 제각기 다른 문화관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런데 문화에 대한 성경적 대안이 없기는 니버도 마찬가지였다. 니버는 자신의 책에서 결론적으로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은 위의 5가지 유형 중 실존상황에 따라 하나의 유형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며, 문화에 대한 단일한 규범을 갖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모독이라고까지 주장하였다. 니버는 결국 교회가 이제껏 되풀이 했던 시행착오를 계속하거나 자신이 분류한 5가지 유형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궁색한 말을 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이원론

교회의 문화에 대한 문제는 곧 이원론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교회가 문화의 문제를 성경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곧 이원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도 같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경우 문화에 대해 이원론의 관점을 고수하여 왔다. 문화란 세상의 것이요 장차 없어질 것이기에 별 가치를 갖지 못하며 혹은 악하거나 거리를 두어야 할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럼으로써 교회와 문화의 관계를 이원론으로 분열시켜 왔다.

그런데 교회 이원론의 뿌리는 어거스틴으로부터 연원한다. 어거스틴은 교회 안에 이원론을 유입시킨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신학 안에는 헬라의 이원론의 사고가 깊이 담겨 있다. 그는 현실세계에 대한 본질세계의 우위성, 자연세계에 대한 정신세계의 우위성, 감성적인 것에 대한 이성적인 것의 우위성이라는 헬라의 이원적 사고를 수용하였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영혼은 불멸적 실체이고 육체는 질료적 매개물이라고 보며 이성적인 영혼이 육체 속에 거주한다고 말하였다.

어거스틴의 이원론적 사고는 직업과 노동에 대한 인식에서도 나타난다. 헬라사회에서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은 상대적으로 정신적 여가를 얻을 수 있는 직업이 상위적이며 농사와 같은 육체 노동이 요구되는 직업은 비천한 것으로 여겨졌다.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은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명상의 삶과 활동의 삶을 구분하게 만들었다. 명상의 삶은 영혼의 반성과 기도와 성직에 속한 우월한 것으로 높여졌고 노동이나 농사 등의 활동적인 삶의 대부분은 평가절하되었다. 어거스틴은 농업, 군사, 법, 항해, 무역 등이 바벨론의 산물이며 곧 사라져 버릴 것들이라고 말함으로서 땅의 문화를 육체의 것으로 폄하하였다 .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적 사고는 그의 국가관에도 스며들었다. 그에게 국가는 육의 영역을 관장하고 교회는 영의 영역을 관장하며, 국가는 인간의 자연적 요구를 추구하고 교회는 영적 요구를 추구하는 것으로 분리되었다. 이는 국가가 땅의 나라에 속한 것이며 교회는 신의 나라에 속한 것이라는 그의 역사관에도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분리는 다름 아닌 육과 영의 분리요, 시간과 영원의 분리이며 땅과 하늘 그리고 하부적인 것과 상부적인 것의 분리와 같다. 이것은 일견 기독교적으로 보이는듯 하나 그 안에 헬라의 이원론의 사상이 혼합되어 있는 위험스런 것이다.


이원론의 근본적인 해결점

교회가 갖고 있는 이원론의 뿌리는 어거스틴의 구원론 안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다. 어거스틴의 구원론은 이미 이원론에 오염되어 있다. 그의 구원론에는 구원이라는 형태만 존재할 뿐 구원의 내용은 필요치 않다. 즉 그의 구원론은 영혼의 구원이 중요할 뿐 육체의 삶이나 이 땅에서의 현실적인 행위들은 구원받는 것과 별 상관이 없는 것으로 분리되어 있다.

어거스틴의 구원론에서 영혼과 육체는 철저히 분열되어 있다. 그에게는 죄 사함이라는 추상적인 구원이 핵심이며, 죄를 이기거나 구원의 열매들을 맺는 실제적인 삶의 구원은 단지 옵션에 지나지 않는다. 즉 성도는 그의 삶이 어떠하든지, 그가 사회문화적 삶을 어찌 살든지, 그가 현실에서 어떻게 행하는가에 관계없이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 이는 그에게 구원이란 문화적 삶에 관계없이 오직 신앙만으로 받는 것임을 의미하며, 그의 구원론이 신앙과 문화를 분리시키고 있음을 나타낸다.

여기에 바로 이원론의 근본적인 뿌리가 있다. 이미 구원과 삶, 신앙과 문화가 분열되어 있는 구원론이 바로 이원론의 뿌리다. 그가 주장하는 구원이 오직 믿음만의 구원이다보니 성도의 행위 즉 사회 문화적인 행위들은 이미 구원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믿음이 행위와 분리되어 있고 믿음은 굳이 행위를 온전케하지 않아도 구원받는데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같은 구원론은 이원론에 의해 분열된 구원에 다름이 아니다 .

그러나 이레니우스의 구원론에 의하면 믿음은 행위와 같다. '믿음=행위'다. 그에게 영혼의 구원은 삶의 구원과 같으며, 신앙이란 사회문화적 행위까지 구원하는 것이다. 혹여 사회문화적 행위가 불의하면 그런 자의 믿음은 아직 어린 믿음이거나 가짜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구원론에는 이원론적인 분리가 일어나지 않는다. 신앙은 문화와 일치하고 하늘의 구원은 본질적으로 창조의 땅과 통합한다. 이것이야말로 땅과 하늘이 하나가 되고, 육과 영이 일치하는 온전한 구원론이며 이원론의 문제를 완전히 치유할 수 있는 구원론이 된다.


제 5 장 / 영지주의 이원론

영과 육의 이원론

영지주의는 기독교 최대의 이단이다. 영지주의는 적그리스도의 화신(化身)이요 사단이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세운 전략적 요체라 볼 수 있다. 영지주의의 핵심 사상은 이원론(dualism)에 있다. 영지주의는 페르시아의 선악(善惡)의 이원론, 헬라의 영육(靈肉)의 이원론에 기독교의 이원성(duality)이 혼합되어 만들어졌다. 영지주의 이원론을 본격적으로 교회 안에 유입시킨 자는 1세기 영지주의를 대표하는 세린투스(Cerinthus)라 할 것이다. 그는 영은 거룩하고 선하나 육은 타락하고 악한 것으로써 영과 육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라 주장하며, 영이신 예수는 악한 육을 입은 것이 아니라 육을 입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가현설(Docetism)을 주장한 자였다.

세린투스는 1세기 말에 에베소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사도요한과 충돌하였다. 어느 날 목욕탕에서 세린투스를 만난 요한은 그가 있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언제 이 목욕탕을 무너뜨리실 지 모른다” 하며 목욕도 하지 않고 뛰쳐 나왔다고 한다. 요한은 요한서신을 통해 이같이 그리스도가 육체로 임하신 것을 부인하는 세린투스같은 자들이 적그리스도이며 거짓선지자라는 점을 분명하게 경고하였다.(요일4:2-3)


영지주의의 복음을 경계하라

이원론이 복음과 만나면 복음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 이원론이 복음을 어떻게 손상시키는가는 마르시온(Marcion)이 잘 보여주고 있다. 2세기 영지주의를 대표했던 마르시온은 영지주의의 수장과 같은 자요, 폴리갑이 적그리스도의 맏아들이라고 지목했던 자다. 그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조직신학자였고, 최초로 성경목록을 만들었으며, 교회 조직과 경영에 뛰어나 초기 기독교에서 가장 위협이 된 이단이었다.

마르시온은 영육의 이원론으로써 복음 전체를 둘로 분열시켰다. 그는 영에 속한 것만이 참된 실체이며 육은 악한 허상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육체와 물질을 만든 창조의 하나님은 악하고 저급하며, 영혼을 구하는 구원의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라고 보았다. 이같은 논리에 의해 창조의 신이 만든 저급한 구약과 율법은 폐기해야 마땅하며 신약과 복음만이 유일한 계시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마르시온은 이원론으로써 기독교 진리를 내부적으로 분열시켰다. 그는 영의 범주 안에 ‘영혼-구원-신약-복음’을 놓고 육의 범주에 ‘육체-창조-구약-율법’을 놓아 양자를 분열시킴으로 성경과 복음 전체를 둘로 쪼개버렸다. 특히 주목할 것은 그가 이원론으로써 믿음과 행위까지 철저히 분열시켰다는 점이다. 마르시온은 믿음을 영에 일치시키고 행위를 육에 일치시켰다. 그리하여 ‘오직 믿음’만이 중요하며 행위는 악하고 저급한 것이므로 완전히 폐기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마르시온에게 복음이란 행위가 완전하게 제거된 ‘오직 믿음’만이 복음이다. 마르시온은 교회 역사상 최초로 “오직 믿음만의 구원”을 주창한 자가 되었다. 그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는 행위가 완전하게 폐기되어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 순복음(Primitive Gospel)을 전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12제자들이 예수가 전한 ‘오직 믿음’만의 복음에 율법과 행위를 섞음으로 복음을 오염시켰다고 주장하였다.

마르시온은 유독 바울만은 다른 제자들과 달리 예수가 전한 순복음을 계승하고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 순전한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믿었다. 그래서 바울이 쓴 10개 서신과 누가복음만을 성경으로 인정하였고 바울이 전한 ‘오직 믿음’을 구원과 복음의 핵심으로 삼았다. 이에 대해 신학적으로는 마르시온이 비록 이단이었으나 ‘오직 믿음’만의 구원을 전한 최초의 복음주의자가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것 참, 대단히 아이러니한 일이다. 기독교 최대의 이단이요 적그리스도의 수장인 마르시온이 복음의 핵심을 증거한 최초의 주창자라니... 그가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을 계승하였다니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바울이 전한 ‘믿음만의 구원’과 마르시온이 주장한 ‘믿음만의 구원’은 모양은 같아 보여도 그 내용이 전혀 다르다. 그런데도 그 내용을 분별치 못하고 눈에 보이는 형태만 보고 그가 주장한 ‘믿음만의 구원’을 바울의 복음과 같다고 믿으니 참으로 경악할 일이다.


행함이 없으나 행함이 있는 믿음

오늘날 많은 교회들도 마르시온처럼 ‘오직 믿음만의 구원’을 외치고 있다. 하지만 마르시온이 주장한 ‘믿음만의 구원’은 영지주의의 구원론이며 적그리스도의 거짓 구원론이다. 그 안에는 행위가 완전하게 제거되어 믿음과 행위가 분열된 이원론의 누룩이 들어 있다. 그 누룩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교회는 영지주의 거짓 복음을 선전하는 나팔수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믿음만의 구원’을 증거할 때, 그 믿음이 마르시온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믿음 말하자면 '믿음=행위'인 믿음임을 증명해야 한다. 그래야만 교회는 ‘믿음만의 구원’에 섞인 이원론의 누룩을 제거하여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을 증거할 수 있다. 성경은 마르시온과 다르게 행위가 빠진 믿음은 믿음이 아니며(약2:26) 또한 행위없는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약2:14) 증거하며 이원론이 제거된 참 믿음을 증거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믿음만의 구원'에서 이원론을 제거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오직 믿음’이란 그것이 (율법적인)행위가 없는 믿음이면서 동시에 (의로운)행위가 있는 온전한 믿음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여전히 영지주의의 미혹에 빠진 체 계속해서 이원론에 잠식된 구원론을 외치고 있는 상황이다.

성경이 증거하는 진정한 복음이란 율법을 완전케하는 복음이며(마5:17), 믿음역시 행위를 온전히 세우는 것이 '오직믿음'(롬3:31)이다. 이러한 온전한 믿음이라야 이원론과 무관한 믿음이 되고 구원을 받는 믿음이 될 수 있다. 성경은 몸이 없는 영혼이 죽은 것처럼 행위 없는 믿음은 구원의 능력이 없는 죽은 믿음으로 여긴다. 행위로부터 분리된 믿음이란 마르시온이 가진 믿음이며 적그리스도의 믿음이기에 성경은 결코 그런 믿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교회 상황은 행위가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으며 '오직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고, 그러한 믿음과 행위가 분열된 이원론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소리높여 외치고 있다.

물론 사람이 처음 믿음을 시작할 때는 '달랑 믿음'밖에 없으며 믿음에 따르는 행위라는 것은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다. 그래도 그 때는 그 달랑 믿음만으로도 충분히 구원을 시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처음 구원을 시작하는 부르심의 때에는 누구든지 '달랑 믿음'만으로 구원을 시작할 수 밖에 없으며 그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도의 믿음이 성령을 좇아 육신의 소욕을 죽일 수 있는(롬8:13) 장성하고 온전하고 믿음에 이르면 이 때의 믿음에는 반드시 온전한 행함이 따른다. 이 때의 믿음은 택하심에 이른 온전한 믿음이기 때문인데, 이러한 성령 안에서 배운 온전한 믿음으로 온전한 구원을 받는 것을 성경은 '오직 믿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전한 행함이 없는 자들은 육에 속한 믿음, 초보의 믿음, 부르심의 믿음에 머물고 있는 자들이며, 이런 자들은 결코 자신의 내면 안에서 벌어지는 믿음과 행위의 이원론적 분열 상태를 극복하지 못한다. 교회나 개인이나 자신 안에 있는 이런 내부적인 이원론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못한다면 어찌 외부적인 이원론의 문제를 논할 수 있으리요. 이런 자들은 어서 속히 성장하여 성령 안에서 믿음과 행위의 분열 상태를 먼저 치유해야 할 것이며 만일 그렇지 못하면 이원론의 문제는 고사하고 결국 천국문 앞에서 쫒겨나는 신세조차 면치 못할 것이다.



제 6 장 / 성경의 문화관

- 문화는 인간의 본질이다

인간은 문화적 존재다. 철학자 반 퍼슨은 문화를 ‘인간의 본질’이라고 표현하였다. 인간은 어미의 태에서 생물학적으로 태어나지만 그가 속한 문화 안에서 다시 문화적 존재로 태어난다. 인간은 문화 안에서 태어나 문화를 통하여 비로소 인간이 되며 문화의 경계 안에서 살며 죽는다. 인간은 누구도 문화를 떠나서는 존립하지 못한다. 따라서 문화란 인간이 땅에서 존재하는 형식이며 인간은 문화를 본질로 갖는 문화적 존재라 할 수 있다.

문화란 기본적으로 땅을 경작하여 일구어 낸 소산을 문화라 한다. 또한 문화란 넓은 의미에서 인간이 땅과 역사 안에서 창출하는 유형, 무형의 모든 소산물을 총칭한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가 “인간은 자연에 노동력을 가하여 문화를 만드는 존재”라고 말한 것은 일리가 있다. 인간은 땅이 없이는 존재하지 못하며 땅을 벗어나서 존재하지 못한다. 인간은 땅에서 사는 존재며 땅을 일구고 땅의 소산으로 살며 땅에서 문화적으로 사는 존재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인간이 땅에서 존재하는 형식과 내용을 규정한다. 곧 인간이 땅에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가운데 땅의 문화로 사는 존재임을 선포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이 말씀으로써 인간이 땅의 유업과 복락을 얻어 사는 존재임을 말씀하셨다. 동시에 인간이 땅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며 땅의 문화적 존재로 사는 존재임을 한계지어 주셨다.


주님은 문화명령을 완성하셨다

인간은 비록 땅의 문화적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그러나 인간이 영원토록 땅의 문화적 존재로 사는 것은 아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발현하여 그 능력으로써 땅을 온전히 다스리는 존재가 되면 장차 인간은 하늘의 초월적 존재로 비약할 것이었다.(땅을 다스리는 일은 하나님의 형상이 갖는 한 특성일 뿐이다) 하지만 태초의 아담은 이 일을 성취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정할 수 없는 존재였으며 결국에는 실패하는 자가 되었다.

인간이 땅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발현하여 땅의 주인이 되는 일은 아담이 아닌 예수께 맡겨졌다. 과연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의 본을 보이시고 땅의 인간으로서 하늘의 영광에 들어가는 최초의 사람이 되셨다. 그럼으로써 창1:26-28절의 문화명령은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땅의 복을 성취하였으므로 또한 하늘의 존재로 비약하며 하늘의 복을 얻은 자가 되신 것이다.

이 점에서 아담과 예수는 그 존재가 차별된다. 아담은 땅의 존재였으나 예수는 땅과 하늘의 존재시다. 아담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1:28)는 말씀처럼 땅의 복을 받은 자였으나 그 받은 땅의 복마저 잃은 자였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1:3)라는 말씀처럼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얻고 그 복을 믿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분이다. 더불어 잃어버린 땅의 복까지 회복케하는 분이시다.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가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는 하나님의 형상을 성취한 자에게 따르는 당연한 권세다. 주님은 이 권세를 가지셨기에 우리에게 대명령을 주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명령을 따라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는 자는 땅을 온전히 다스리는 자가 될 뿐만아니라 장차 주님과 함께 하늘의 권세까지 유업으로 받는 자가 될 것이다.


문화는 대명령 안에서 완성된다

대명령(Great Mandate, 마28:18-20)은 문화명령을 네가지 차원을 통해 승화시킨다. 대명령은 자신 안에서 문화명령을 폐하고, 다음에 회복하며, 다시 완성하고, 더욱 문화명령을 초월케 함으로써 문화명령을 하늘의 것으로 대체시킨다. 대명령은 바로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주어진 명령이다. 대명령은 성도로 하여금 땅을 다스리고 문화를 성취하는 온전한 자가 되게 함으로써, 다시 하늘을 다스리는 자로 준비시키기 위함이다.

이 때문에 대명령은 성도로 하여금 반드시 문화명령의 일들을 모두 성취케 한다. 대명령은 성도가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도록 성장시키며 그 형상의 결과로써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자가 되도록 만든다. 그래서 성도가 능히 땅과 문화와 육의 일들을 온전케하도록 하며 그 온전함을 통해 하늘의 신령한 존재가 되도록 온전케 만든다. 이것이 바로 대명령의 진정한 목적이다. 대명령은 인간이 문화명령을 온전히 성취하는 존재가 되게 함으로써 창조의 본질을 성취하며 창조의 미래적 목적과 완전한 영광에 이르도록 하는 명령이다.

따라서 문화명령의 성취없이 대명령의 성취는 불가능하며 대명령의 성취는 곧 문화명령의 성취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따라서 결국에 대명령과 문화명령은 내적으로 서로 일치하고 통합하게 된다. 양자는 둘이 아닌 하나가 된다. 주님은 이 일을 위해 오셨으며 자신 안에서 대명령과 문화명령 곧 하늘과 땅을 통일하고 계신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는 말씀처럼.

그러나 대명령은 땅의 문화적 업적을 위해 일하지 않으며 문화적 완성을 성취하기 위해 일하지 않는다. 즉 땅을 다스리기 위한 목적으로 일하지 않는다. 대명령은 단지 문화를 통로로 하여 일할 뿐이며 문화의 주체인 인간을 목적으로 사역한다. 문화가 목적이 아닌 문화의 주체인 인간을 목적하는 것, 바로 이것이 대명령의 중대한 목적이다. 따라서 주님의 목적은 '다스림'이 아닌 '형상'에 있다. 주님께서 문화의 존재가 되시어 문화 속에서 사역하신 것도 바로 이 일을 위해서다. 인간이 땅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주체가 되도록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는 것이 주님께서 대명령 안에서 이루시려는 목적이다.

제 7 장 / 성경의 세계관

첫 창조에서 둘째 창조론 나아가는 세계관

성경은 태초의 창조에서 시작하여 계시록의 새 창조(계21:1)로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계시록의 새 창조는 둘째 창조이자 새 창조요 마지막 창조와 같다. 새 창조는 첫 창조에 속한 것들을 다 폐하고(계21:4) 만물을 새롭게 창조하는(계21:5) 창조 사역의 마지막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 비로소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22:13)고 선언하신다. 곧 “나는 창조자요 구원자며 첫 창조와 마지막 창조를 완성한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창조의 완결을 선언하심이다.

이 때 첫 창조에 속한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의 모습으로 변화한다. 첫 사람 아담에게 속한 창조는 둘째 사람 그리스도께 속한 둘째 창조로 완성되며, 첫 하늘과 땅은 둘째 하늘과 땅으로 변화하고, 최초의 첫 안식은 완전한 둘째 안식에 들어간다. 땅에 속한 인간의 낮은 몸도 하늘에 속한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며, 아담 안에서의 인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신성(神性)의 둘째 사람으로 거룩하게 완성된다.

이렇게 성경은 첫 창조에서 시작하여 둘째 창조로 종결되는 창조의 세계관을 증거한다. 첫 창조의 모든 것은 둘째 창조를 향한 것이요 둘째 창조 안에서 다시금 모든 것이 완전케되는 것이다. 둘째 창조는 첫 창조시의 어쩔 수 없는 타락으로 인한 임기응변의 조치가 아니며 그것은 이미 창조 이전부터 감취어 있던 창조 계획의 비밀과 핵심이었던거다. 이와 같이 성경은 첫 창조에서 시작하여 둘째 창조로 완성되는 세계관의 전환적인 구조를 보여준다.


그리스도 중심의 세계관

성경의 세계관은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그리스도 중심의 세계관이다.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시며 동시에 구속주시다. 그리스도는 인간이며 동시에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는 첫 창조의 목적이 됨과 동시에 둘째 창조의 목적이다. 또한 하늘에서 나심과 동시에 땅에서 나신 분이며, 인성과 함께 신성을 가지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다. 그러므로 땅과 하늘에 속한 모든 세계와 육과 영의 모든 것을 통합할 자격과 능력은 오직 그리스도께 있다.

세계와 그에 속한 만물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나누어진다. 모든 세계는 그리스도 이전의 세계와 그리스도 이후의 세계로 나뉜다. 곧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첫 창조의 세계와 둘째 창조의 세계로 나뉜다. 그래서 첫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은 스러지고 폐하여 질 것이요 둘째 창조에 속한 것이 영원히 설 것이다. 인간 역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두 존재로 나뉘어진다. 마치 좌우편에 선 강도와 같이 인간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둘로 나뉘어진다. 그리하여 첫 창조에 속한 모든 인간은 영벌에 들어갈 것이요, 둘째 창조에 속한 인간은 하늘의 영생으로 들어갈 것이다.

만물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어졌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어졌으니(골1:16) 그리스도는 만물의 으뜸이시다. 모든 세계는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통일되고 그리스도께 돌려질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자신 안에서 하늘과 땅, 영과 육, 교회와 세상, 문화명령과 대명령을 통합하고 일치시켜 하나가 되게 하신다. 이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세계관이다.


형상 목적의 세계관

하나님의 섭리와 성경의 기록과 그리스도의 사역의 모든 목적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는 것’에 달려 있다. 창조의 목적도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는 것에 있고 구원의 목적 역시 그와 같다. 교회와 땅과 만물의 목적 뿐만아니라 믿음과 복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목적으로 하는 세계관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모든 것의 목적이기에 구원의 목적 역시 하나님의 형상에 있음을 주의하여야 한다. 구원의 목적은 죄 사함을 받고 천국행 티켓을 받는 것에 있지 않다. 구원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에 있다.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요 인생 최대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는 이 일을 목적으로 사역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은 세계관의 구조, 중심, 목적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첫 창조에서 둘째 창조로 전개되는 세계관의 구조를 보여주며, 세계관의 중심이 만유를 통일하고 완성하는 그리스도께 있음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형상'이 세계관의 목적이 됨을 보여준다. 곧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성하려고 세계를 첫 창조에서 둘째 창조로 새롭게 하는 것이 성경적 세계관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결 어 / 세계관을 마치며

구원 중심의 관점에 모든 혼란의 원인이 있다

그 동안 교회는 구원 중심의 세계관으로 일관하여 왔다. 그러다 보니 창조의 의미가 소외되고 창조와 함께 땅과 문화의 일들까지 소외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런 구원 중심의 불균형을 바로 잡기위한 것이 바로 기세의 등장이었다. 기세는 구원에 치우친 세계관을 바로 잡기 위해 창조의 의미를 확대하여 구원과 균형을 이루도록 하려 하였고 그 안에서 교회와 문화의 일치를 꾀하려 하였다.

하지만 기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기세의 시도 자체는 긍정적이고 고무적이었으나 아무래도 구원 중심의 세계관의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했기 때문이리라. 기세는 구원 중심의 세계관의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본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단순하게 구원 옆에 창조를, 교회 옆에 문화를 병렬시켜 양자를 동시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세계관과 문화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그것이 도리어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말았다.

구원 중심의 관점이 창조의 의미와 목적을 소외시켜 온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며 땅과 문화를 소외시켜 온 것도 부분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성경 전체의 본질과 핵심을 소외시키는 문제이며 나아가 구원의 목적까지 왜곡하는 큰 문제라 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구원 중심의 관점은 창조의 목적과 구원의 목적을 유실하여 왔고 그로 인해 성경의 크게 핵심에서 벗어나 있다. 구원 중심의 관점은 창조의 목적은 물론 자신의 목적까지 잃어버린 가운데 단지 첫 창조를 회복하는 과거적 의미에 빠져 자신의 미래적 영광을 저버리고 있는 상황이다.


이레니우스의 창조론으로 돌아가라

성경은 구원에서 시작하여 구원에서 끝나는 책이 아니라 창조에서 시작하여 창조로 끝나는 책이다. 구원을 포괄하는 보다 큰 틀이 창조요, 구원은 창조를 위해 있고 창조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구원은 태초의 창조를 회복하는 죄 사함이 핵심이 아니라 인간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드는 둘째 창조의 완성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구원의 미래적 목적이 제대로 조명되지 않는 한 현재와 같은 구원 중심의 왜곡된 관점은 교정되기 어렵다. 그런 가운데 창조의 본질은 결코 회복되지 못할 것이며 성경의 세계관과 문화관을 세우는 일은 더욱 혼란스럽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제라도 창조와 구원을 일치시켜 그 안에서 이원론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얼른 이레니우스의 창조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가 어거스틴과 칼빈으로 인한 구원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이레니우스의 창조 중심의 세계관으로 돌아간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 그 안에서 창조와 구원의 핵심과 목적은 서로 조화하고 일치할 것이다. 또한 교회과 문화의 이원론적 분열은 물론 성도 안에서 일어나는 믿음과 행함의 이원론적 분열의 문제까지 모두 치유되고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새노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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