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오경

[스크랩] 성경인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8) 하나님의 맹세

하나님아들 2015. 9. 2. 16:56
성경인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8) 하나님의 맹세
아브람을 믿게 하기 위해서라면 언약의식보다 더한 일도 하시는 하나님
입력 : 2005년 08월 14일 (일) 19:31:51 / 최종편집 : 2005년 08월 16일 (화) 01:15:01 [조회수 : 1626] 이용대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창 15:7~8)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고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신 여호와께서는 아브람에게 '내가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 땅으로 인도한 이유가 네게 이 가나안 땅을 주어 네 기업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하시는데, 이 말씀은 새삼스러운 약속이 아니라 이전에 하셨던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의 반복으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에 다름 아닙니다(12:7,13:15,). '네 후손이 하늘의 별 같으리라'고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은 아브람이니, 땅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듣는 즉시 '아멘, 감사합니다' 하며 기뻐할 것 같은데 뜻밖의 반응을 보입니다.

"내가 이 땅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가 있겠습니까?"(공동번역)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시겠다고 반복하여 약속하시는 것이 후손과 땅입니다. 이전에는 믿음이 없어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니 그 약속을 믿지 못해도 이해할 수 있지만, 이제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번성할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자손에 대한 말씀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으니, 이어서 하시는 땅에 대한 말씀은 당연히 믿어야 할 것 같은데 '무엇으로 알 수가 있겠습니까?'라니 우리가 보기에도 참 답답하고 딱해 보이지 않습니까?

믿어지지 않는 이유

아브람의 반응이 보는 믿는다는 표현은 분명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은 무슨 생각으로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라고 하는 것일까요?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주 안 믿어지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을 수는 있지만 그 하시는 말씀이 너무 허황되다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믿어지지가 않아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시는 이 가나안 땅은 이미 여러 족속들이 자기 소유로 삼아 살고 있으며 아브람과 동맹을 맺은 아브넬의 형제들도 이 땅을 차지하고 있는, 주인이 있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약속이지만 이미 '주인이 있는 땅'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믿기에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였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약속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너무 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조카 롯이 가 있는 소돔 같은 성을 하나 주신다 해도 감지덕지할텐데, 아직 자식도 없는 외로운 나그네에게 여러 족속이 사는 드넓은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니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으며, 또, 주신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상식선에서 이해할 만한 규모면 믿기가 쉬울 텐데 너무 거창하기 때문에 오히려 믿을 수 없는 아브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하긴, 홍해를 마른 땅 같이 건너고 바위에서 샘이 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을 수없이 목격한 모세조차도 2백만 명(장정만 60만)의 이스라엘 족속에게 한 달 동안 고기를 먹여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하며 '아무리 하나님이시라도 설마…' 하는 회의적 반응을 보이는 바람에 하나님께서는 "내 손이 짧아졌느냐?" 하시며 섭섭해하십니다(민 11:18~23).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의 세계'는 물론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 가능한 '상상의 세계'까지 초월한,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에 쉽게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일개 나그네인 아브람에게 한 나라를 주시겠다는데 믿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80의 나이에 자식도 없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나안에 들어온 이후의 여러 경험들, 빼앗긴 아내를 되찾아주신 애굽에서의 경험, 조카 롯을 구하도록 감동하시고 역사하신 일, 하나님의 제사장인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나기까지의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아니었다면 대화인들 가능했겠습니까?

믿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경험 밖이고 상상할 수도 없는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에 믿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설사 그렇더라도 하나님을 믿었으면 끝까지 믿어야지 '믿습니다' 해놓고 "무엇으로 믿을 수 있습니까?"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 같으면 감히 여쭤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주시겠다고 하시니 주시겠지' 했을 것 같은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런 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니 믿어지지 않거나 궁금한 것이 있으면서도 두루뭉술 넘어가는 것보다는 여쭤보거나 짚고 넘어가는 것이 훨씬 낫겠다 싶고, 그런 절차가 꼭 필요한 것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의심은 믿음과 반대되는 개념이지만, 믿음이 견고해지기 위해서는 의심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 또한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계약서를 대충 훑어보고 선뜻 도장을 찍는 사람이 내용을 꼼꼼히 챙기는 사람보다 통이 커 보이고 시원시원해 보이지만, 계약 내용을 살피지 않은 것이 화근이 되어 어려움을 당한다면 결코 잘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도장을 찍기 전에 꼼꼼히 따져보고, 찍은 후에는 스스로의 결정에 책임을 지는 자세가 더 바람직하겠지요. 마찬가지로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 않는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고 믿게 해달라고 하는 자세는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지 결코 비난의 대상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이렇게까지 확인하고 믿었다면 다시는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여야겠지만….

우리는 믿어지지 않아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지금 아브람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믿음의 세계는 오히려 '믿어지지 않으니 믿게 해달라'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브람이 믿을 수 있게 수고를 아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정말로 주의해서 읽어내야 하는 것은 아브람의 절실한 심정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또 그 약속 또한 믿고 싶지만 도저히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믿게 해달라고 할 수밖에 없는 그의 안타까운 마음을, 그리고 그런 아브람의 심정을 아시기에 전혀 책망하지 않으시고 그의 요구대로 믿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말입니다.

나를 위하여 취하라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창 15:9~11).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암 염소와 수양과 산비둘기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라' 하십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짐승들을 잡아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새는 쪼개지 않고 그대로 두고서 솔개가 고기를 먹으려고 내려앉으면 쫓으면서 무언가를 기다립니다. 이것을 번제라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제사의 제물은 각을 뜨지 중간을 쪼개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이 쪼갠 고기를 태울 생각은 하지 않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제사는 분명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취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짐승들을 쪼갠 것이 하나님과 관련된 것만은 확실합니다.

"송아지를 둘에 쪼개고 그 두 사이로 지나서 내 앞에 언약을 세우고 그 말을 실행치 아니하여 내 언약을 범한 너희를, 곧 쪼갠 송아지 사이로 지난 유다 방백들과 예루살렘 방백들과 환관들과 제사장들과 이 땅 모든 백성을, 내가 너희 원수의 손과 너희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붙이리니 너희 시체가 공중의 새들과 땅 짐승의 식물이 될 것이며 또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 방백들을 그 원수의 손과 그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희에게서 떠나간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붙이리라"(렘 34:18~21)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성경으로 풀 수 있도록 중요한 것들은 그 짝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짐승의 중간을 쪼개는 이야기는 창세기와 여기 예레미야 34장에만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동족인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케 하고 다시는 종을 삼지 못하게 하셨는데, 쪼갠 송아지 사이로 지나면서 이 언약에 참가한 방백들과 모든 백성이 말씀대로 순복하여 놓아 보내었다가, 후에 마음이 변하여 언약을 어기고 놓았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노비를 삼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쪼갠 송아지 사이로 지나면서 한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너희를 쪼갠 송아지처럼 죽여 새와 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송아지를 쪼개 놓는 것은 언약 의식입니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동족 노비를 풀어주기로 언약하고 쪼갠 송아지 사이로 지난 것은 '이 언약을 어길 경우 쪼갠 송아지처럼 되겠다'는 목숨을 걸고 하는 언약의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언약을 하고도 그 언약을 어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어긴 백성들을 언약대로 죽이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쪼갠 고기 사이로 쌍방이 함께 지나가면 그 언약에 대한 이행 의무가 양쪽 모두에게 있는 쌍무계약(雙務契約)이고, 어느 한 쪽만 지나면 그 지난 쪽만 약속 이행의 의무가 있는 편무계약(偏務契約)인데, 성경의 두 계약은 모두 편무계약입니다. 이 부분은 제사가 아닌 언약 의식임이 고증으로도 입증된 것으로 압니다.

너는 정녕히 알아라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 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창 15:1~21).

아브람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언약)이 좀 깁니다만, 요점정리를 하면 '너는 알아라. 내가 이 땅을 400년 후에 네 자손에게 줄 것이다'입니다. 아브람이 알게 해달라는 요구에 대한 답변이기에 '알아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4백 년 동안의 일, 애굽으로 요셉을 따라 내려가고, 이후에 노예가 되고 모세와 여호수아를 앞장세워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경계를 설명하시고, 이 땅에 살고 있는 10족속의 이름을 거명하시면서 네 후손이 돌아올 때쯤 이들의 죄악이 가득해서 쫓아내고 너희에게 바로 이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하시더니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고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갑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쪼개라고 하셨고 아브람에게 '분명히 알라'고 하시는 것으로 봐서 '알게 해달라'는 아브람의 요구에 대한 언약의식인 것 같은데, 왜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고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는지 잘 이해가 안갑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능히 밝혀낼 수 있도록 완벽하게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의 반석은 두려움을 인하여 물러가겠고 그의 방백들은 기호를 인하여 놀라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여호와의 불은 시온에 있고 여호와의 풀무는 예루살렘에 있느니라"(사 31:9).

하나님께서는 아스라엘 자손들에게 북왕조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유다를 위협하는 앗수르를 두려워 말고 그렇다고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이제 앗수르가 물러가는 것은 여호와의 불이 시온에 있고 여호와의 풀무가 예루살렘에 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바꿔 말하면 앗수르가 두려워 물러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기 때문이란 말씀인데, 그렇다면 여호와의 불과 풀무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은 '알게 해달라'와 '증거를 달라'는 이중적 요구가 담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아브람의 후손에게 주실 4백 년의 장구한 계획(언약)을 설명하셔서 아브람의 '알게 해달라'는 요구를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고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날 때에 언약을 세워 말씀하셨기에 '증거를 달라'는 요구까지 다 들어주셨습니다. 바꿔 말하면, (무엄하고 참람한 말이지만)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어기실 경우 쪼갠 고기처럼 되시겠다고 아브람 앞에서 맹세하시면서 이 언약의식을 행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이 부분을 '하나님께서 아브람 앞에서 목숨을 걸고 맹세하셨다'고 해석했다가 선배 목사님께 혼이 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 앞에서 맹세를 하시며, 더구나 목숨을 걸고 맹세를 하다니 그런 망발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그분처럼 이해가 안 갔습니다만, 그러면서도 그렇게 밖에 해석이 안되니 저야말로 얼마나 두렵고 답답했겠습니까? 다행이도 그 뒤에 언약의식임이 고증(考證)되었다는 어느 교수의 말을 듣고 얼마나 안도의 숨을 쉬었는지요.

맹세하시는 하나님

그러고보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아브람에게 맹세하였노라'고 수차 말씀하셨으며(창 26:3, 출 6:8, 33:1, 민 14:23, 32:11) 요셉과 모세도 여러 번 인용하였습니다(창 50:24, 출  13:11, 민 11:12,16). 이후에 다른 약속을 하실 때에도 맹세란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하긴 맹세나 약속이나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사람은 무능하여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또 식언하여 약속을 어기기 때문에 언약 의식이 필요하고 맹세가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자가 아니시고 전능한 분이시니 식언(食言)하실 일이 전혀 없으십니다(민 23:19).

그런데도 이 언약 의식을 행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지 않아서 믿게 해달라는 아브람의 요구를 들어주셔서 그로 믿게 하시려는 의도이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루어질 일을 약속하셨고 설명을 하시면서 '정녕히 알라'고 하시지만,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 '미지의 세계'임을 아시기에 네 머리로 알 수 없고 마음으로 믿어지지 않더라도, 이 언약의식을 행한 사실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즉 네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더라도 내가 목숨을 걸고 맹세했으니 나의 이 행위를 보고서라도 믿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믿게 하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건 언약의식보다 더한 무슨 일이라도 하셨을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께서는 이런 열심으로 아브람을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키워내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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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은별나라 신학
글쓴이 : mats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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