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론 / 강의에 들어가는 말 / 결론
이 강의의 주안점은 현대의 중요한 인간학적 견해들을 소개하고 평가하며, 또한 기독교적 신학적 인간학을 설명하는 데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두 가지 인간학적 압장들을 단순히 나열하거나 서로 비교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이 둘을 일정한 관점, 즉 '열린 인간이해'의 관점으로부터 해명하고, 그래서 이러한 관점 아래서 일반적 인간학과 신학적 인간학의 대화와 상호이해 혹은 상호보완을 추구하는 데 주안점을 둘 것이다.
그래서 이 강의의 이러한 관점을 대하는 학생들은 언뜻 칼 포퍼(K. Popper)의 책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상기할 것이다. 히틀러가 자신의 조국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 칼 포퍼는 이 책에서 전체주의, 유토피아주의, 역사법칙주의와 같은 것들이 사회 전체를 변혁하거나 통제하는 사회공학의 원인이라고 보고, 이것들을 열린 사회의 적들로 지목하고 있다. 그에 반해 그는 이성과 자유에 대한 신념 위에서 비판과 논증을 통해 합리적 원칙과 합의를 찾아 나가는 사회를 '열린 사회'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강의의 주안점을 의도적으로 여기서 따온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의 권위를 빌려서 인기를 얻자거나, 이 책의 근본정신에 의존하여 그 아류적 이론을 내놓고자 시도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이 개인주의와 자본주의에 가장 어울리는 사회를 열린 사회의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나, 혁명이나 유토피아적 정신을 거부하고 점진주의를 택한 것을 나는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 책이 우리 사회에서 보수주의 이데올로기를 편들어 온 것도 못마땅하다. 하지만 나도 사회만이 아니라 우주와 인간, 인간의 모든 체계와 사상은 항상 열려 있을 때에만 건강할 수 있고, 그 진정한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포퍼의 '열린 사회'에 대한 또 하나의 유토피아적 이상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내가 열린 사회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단순히 전체주의에 대한 반발에 있지 않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줄곧 강조해 온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신앙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존체제를 변혁하고 들어오는 역사의 힘이요, 역사의 가시요 그 진통이다. 그것은 종교적 율법주의, 정치적 패권주의, 죽음과 절망의 전체주의, 분리-차별-소외문화 등 온갖 닫힌 벽들을 깨트리고 역사 안으로 들어오는 미래의 변화적 힘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 앞에서는 애당초 '닫힌 사회'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살고 있는 나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저항하고 열린 사회를 거부하는 가장 집요한 개인적, 사회적 혹은 사이비-종교적인 전체주의적 힘으로서 자본주의 혹은 그 물신주의(物神主義)를 지목하고, 이것을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종교사회주의적 이상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유토피아적 신앙과 결합하여 설명한 적이 있다. 이런 확신은 나의 졸저 '하나님의 나라와 이데올로기', '하나님 나라의 윤리'('하나님의 나라 운동의 신학'으로 종합, 증보하여 출판할 예정임)를 빌려 집중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열린 사회만이 아니라 열린 인간을 창조한다. 열린 사회를 방해하고 이에 대해 저항하는 또 하나의 전체주의적 힘은 개인주의적이며 닫힌 인간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열려 있지 않는 물신숭배적-사탄적 힘들은 하나님과 세계와 이웃에 대해 열려 있지 않는 인간 안에서도 자리잡고 그 위력을 떨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강의는 '열린 사회'를 주장한 이전의 나의 기본적 입장과 조화를 이루면서 '열린 인간'을 주장하려는 하나의 시도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요구되는 필수적인 자세는 과거의 편견이나 전통의 강압에 대해 자유로운 거리를 유지하고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다. 새로운 것이 닥쳐 올 때면, 처음에는 누구나 심리적으로 반사적인 거부반응을 보이겠지만, 새로운 것을 무조건 거부하는 자세는 결코 건강한 자세일 수가 없다. 존재하는 일체에 대한 경외가 없이는 존재를 이해하고 변형하고 이용할 수가 없다. 물론 새로운 것이 항상 유익한 것은 아니며, 새로운 것이 항상 진보적인 것은 아니다. 가장 새로운 것이 가장 낡은 것 안에서도 존재할 수 있고, 가장 낡은 것이 가장 새로운 것이 될 가능성은 언제나 남아 있다. 그러나 새로운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타적 행위는 생명의 건강성과 미래적 성취에 치명적인 적이다. 그러므로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강의를 들으면서 자신의 입장에 따라 강의내용을 취사선택을 할 수는 있겠지만, 만약 편안한 자신의 편견의 껍질 안에 안주하려고 하여 편견을 전혀 깨뜨리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강의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갖지 않는다면, 결국 자신의 지식을 거꾸로 확인하는 정도로만 끝나고, 새로운 세계를 전혀 얻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결과를 남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시간과 정력만을 낭비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미래의 약속과 희망에 눈이 멀어 새로운 기회마저도 놓쳐 버리는 자가 될 것이다. 아인쉬타인은 언젠가 말했다: "편견을 깨뜨리는 것은 원자핵을 깨뜨리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러나 원자핵을 깨뜨리면 엄청난 에너지가 나온다." 그렇다면 편견을 깨뜨리는 것도 어렵긴 하겠지만, 그것이 깨어진다면 얼마나 엄청나게 큰 정신적 에너지가 나올까!
사물의 일체에 대한 열린 사고방식은 이 강의를 끝낼 때 강의의 결과에 대해서까지 집착하지 말고 이것에 대해 거리를 유지하는 자세를 여러분에게 요구할 것이며, 이런 태도야말로 강의의 진정한 목적을 달성하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자세이며, 해석이 아니라 변화이다. 이 강의 전과 후 사이에 달라진 생각과 모습을 갖고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를 기약하며, 어설픈 발걸음을 다 함께 내딛어 보기로 하자. "진리는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요 8:32).
5.결론 - 인간으로 지양되는 그리스도인
1.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
H. Küng : "왜 그리스도인인가? 참으로 사람이고자! 인간실존을 희생하는 그리스도인 실존이란 없다. 인간실존 이외나 이상이나 이하의 그리스도인 실존이란 없다. ... 그리스도인은 모든 인본주의자 못지 않게 인본주의자다. 그러나 그리스 도인은 사람다움을, 인도적임을 ... 인간성을, 자유, 정의, 생명, 사랑, 평화, 의미를 그리스도에 근거해서 바라본다. 믿음은 사람을 참으로 사람답게 만든다." (그리스도인으로 지향되는 인간, '왜 그리스도인인가' 중에서 4f.).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약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왜곡되고 부패된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하고, 또 그리스도의 형상을 덧입음으로써 종말론적인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살펴본 바대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참 인간이 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 이웃, 세계를 향하여 늘 열린 마음을 갖고 그들과 열린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진정한 인간이 되고 진정한 인간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참 인간이 된다는 것을 뜻하며,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참 인간됨을 그 목표로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자성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명분으로 우리는 그 얼마나 비인간화된 삶을 살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우리는 오히려 더 비인간적인 사람이 되지는 않았는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참 인간이 된다는 것과 정반대의 사실로 생각해 오지는 않았는가? 우리는 비그리스도인들보다 얼마나 더 인간적인가? 인간적인, 참으로 인간적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뭔가 초인간적인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우리는 얼마만큼 하나님에게 우리를 온전히 드리고 온전히 열어 놓았는가? 우리의 가장 귀중한 것은 유보한 채 오히려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구걸하지는 않는가? 하나님을 우리의 제한된 사고, 교리, 전통, 이해관계, 권력구조, 이데올로기 등 안으로 강압하지는 않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끊임없이 섬겨 달라고 졸라대지는 않는가? 우리는 과연 늘 기도하는 자세로 살아가고 있으며, 살아가는 자세로 기도하는가? 우리는 기도와 생활로써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정의를 먼저 구하는가?
우리는 얼마만큼 이웃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갖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 신앙을 명분으로 삼아 이웃을 외면하는 거짓 정당화를 추구하지는 않는가? 우리는 가까운 이웃의 물질적-정신적-영적 필요에 얼마나 호응하고 그를 섬기는가? 우리는 특히 고통당하는 인간의 울부짖음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우리는 이웃을 자신의 목적실현의 수단으로 대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이웃에게 교만하고 이웃의 일에 태만하고 이웃을 기만하지는 않는가? 우리는 자기중심적 삶을 얼마나 극복하고 있는가? 우리는 참으로 이웃에 대해 열린 인간인가?
그리고 우리는 이 세계의 문제, 억압과 소외와 폭력과 전쟁과 환경파괴를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는가? 우리는 피조물의 탄식소리를 듣고 있는가? 우리는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 이웃의 울부짖음, 생명의 환희와 고통, 혼돈과 파괴의 영들의 어지러운 놀이를 느끼고 있는가? 우리는 이 세계의 미래, 지구와 우주의 미래를 진지하게 걱정하고 이에 참여하고 있는가? 우리는 이 세계의 완성을 위해서도 일하고 있는가?
2. 위대한 인간이 된다는 의미
몇몇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대개의 철학적, 신학적 인간학자들은 그 어떤 다른 생명체들보다 인간이야말로 우주 안에서 가장 높은 가치와 비중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인간이 위대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며, 어떤 점에서 인간은 다른 생명체보다 더 위대할 조건을 갖추었는가? 그것은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는 달리 주어진 본능체계나 생활조건을 끊임없이 벗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말하는 자들은 처음부터 인간이 다른 생명체보다 더 우월한 능력을 갖춘 존재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어느 진화의 단계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 예를 들면 돌고래보다 지능이 더 낫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뛰어넘었고,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켰고 개변시켰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보다 훨씬 큰 동물조차도 지배할 수 있는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이 위대한 것은 다른 생명체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실에 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태초에 완성형으로 주어진 특별한 소여, 소유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앞에서 배운 바대로 바로 그 무엇이라기 보다는 그 무엇이 될 수 있는 가능성, 끊임없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 안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잘 실현된다. 그렇다면 인간이 위대해진 것은 항상 자신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고, 역으로 인간이 항상 자신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늘 더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위대함과 동시에 비참함의 근원도 존재한다. 동물은 비동물이 될 수 없다. 여우는 비여우가 될 수 없다. 단지 더 나은 혹은 더 못한 여우가 될 수는 있지만, 여우가 아닌 존재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은 비인간이 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가능성을 닫아 버리고 후퇴함으로써 동물보다 더 경직된 자가 될 수 있다. 그는 교만, 불순종, 정욕을 통하여 자기중심적인 이기적 존재가 됨으로써, 동물보다 더 못한 존재가 될 수 있다. 동물은 타락을 모른다. 인간의 눈에 아무리 잔인한 행동같이 보이는 것이라도, 그것은 본능에 충실한 자연적인 반응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는 본능과 무관하게, 환경과 조건과 무관하게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바로 그만큼 위대해질 수도 있고 타락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무한한 자유, 세계개방성, 가능성은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의 조건이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인간은 참다운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를 따름으로써, 즉 그와 같이 그리고 그의 구원의 능력으로 하나님과 이웃과 세계에 온전히 헌신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를 온전히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품성,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최대의 약속을 희망으로 갖고 있다. 우리는 정말 위대한 존재로 창조되었고 또 위대한 존재로 재창조될 수 있다. 죄악이 크다고 이 일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더 넘쳤다"고 말하지 않는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 새로운 인간이 가까왔다. 그러니 우리는 늘 회개(변화, 개혁, 혁명)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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