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브루너의 신학적 인간론의 전제와 의의
스위스 쮜리히에서 출생, 1922년부터 65년까지 쮜리히 대학의 조직신학교수로 일했던 에밀 브루너(1889-1966)는 칼 바르트와 함께 20세기 개신교 신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신학적 관심과 경향은 19세기 이후 지배적이던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점을 간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고, 동시에 과거 정통주의 신학의 한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성서 이해의 지평을 변증법적으로 펼치는데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신학은 “말씀의 신학,” “변증법적 신학,” “신정통주의 신학”이라 불린다. 그의 인간론은 하나님과 나,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모순과 역설의 변증법적 인간 이해에서 인간의 본질을 발견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에브너(F. Ebner)와 부버(M. Buber) 그리고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의 영향 아래 있다(10, 23). 특히 브루너가 이 「모순 속의 인간」에서 전개해 나간 인간론은 서구 자유주의의 낙관적인 인간론을 거부했다는 점과, 당시 서구 세계가 인간적인 전체주의의 공포를 느끼기 시작한 시기에 출판(최초의 독일어 출판, 1937)되었다는 사실에서 중요한 역사적, 신학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II. 책의 구성과 인간론의 핵심 내용
이 책은 모두 네 부분으로 짜여져 있다: 서론에서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불가해성과 인간관의 중요성과 영향, 그리고 이전에 나왔던 다양한 인간관에 대한 견해들을 소개한다. 여기서 그는 자연주의적, 관념주의적, 과학주의적, 무신론적 인간 이해 등은 인간의 본질 가운데 일부분만 파악했다고 판단하고 이들을 거부하면서, 기독교적인 인간 이해로 넘어간다.
두번째 부분은 그의 기독교적 인간론의 기초를 제공해 주고 있다. 여기서 그는 지식과 존재의 근원으로서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 그러나 타락하여 모순 속에 있는 인간의 본질 등에 대해 설명한다.
세번째 부분은 인간론의 주제를 개별적으로 더욱 심화 시킨 부분이다. 인격성, 인간 영혼, 자유, 개인과 공동체, 영혼과 육체, 진화와 성장, 우주와 역사 속에서 인간, 종말 등이 이 곳에서 다루어진다. 마지막 부분은 이상적인 인간과 실제적인 인간 사이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신앙의 문제를 언급됨으로써 결론을 맺고 있다. 이 서평은 브루너 인간론의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는데 일차적인 관심이 있기 떄문에, 주로 브루너의 책 가운데 첫째, 둘째 그리고
넷째 부분을 중심으로 살펴보게 될 것이다. 브루너 인간론의 특징은 그 기본 출발점이 하나님의 말씀과 존재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데 있다. 이를 “위로부터의 인간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에 있어서 인간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탐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27),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 안에서 화해하고 응답하는데 있다(53). 이런 전제에서 볼 때, 그의 인간론이 가지는 구조와 내용은 이렇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되었다. 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책임적 존재임을 증거한다. 그런데 이 인간의 책임성 안에는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의 자유와 권리가 내재해 있다. 그런 까닭에 인간은 본래부터 모순 속에 있는 존제인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고 타락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실하고 소외된 존재가 되었다. 이제 이 모순 속에 있는 인간을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은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시 그 자체이며, 그 사랑의 드러남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기독교 신앙을 통해서만 본래 하나님과의 관계를 되찾을 수 있다.
III. 브루너 인간론의 주요 개념
1. 책임적 존재 브루너에 있어서 인간 본질의 특성은 “책임적 존재”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임성은 인간의 속성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깊은 본질을 이루는 실체(substance)다(50). 인간이 이 책임성을 상실한다면, 그는 더 이상 인간이기를 그만 두어야 할 것이다: “진정한 책임성은 진정한 인간성”(51)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구별짓는 것은 바로 이 책임성에 있다. 이 책임성 안에 인간의 자유, 고유성, 이웃과의 연대성, 하나님과 세계와의 근원적인 관계가 존재한다(50). 따라서 브루너는 누구든지 인간의 존재를 책임적인 존재로 이해한 자는 인간의 본질을 이해한 자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책임성은 칸트의 경우처럼, 인간 스스로의 책임성과는 다르다. 칸트에게는 “사랑의 계명”이라는 측면이 빠져 있다. 그의 도덕적 명령에서는 예수의 십자가가 나올 수 없고, 그의 윤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인격적이지 못하다(158). 그것은 나 자신에게 의존하도록 하는 책임성이다. 책임성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는 도덕적이고 율법적인 이해로 나아가게 하며, 책임성을 잘못 이해하는 것 가운데 최고의 극치를 이룬다(161). 브루너가 말하는 책임성이란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의존하는 책임성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의 부름과 그 부름에 대한 응답의 행동에서 자신을 책임적인 존재로 이해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존재의 근원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사랑 안에서의 책임성”을 인식하게 된다. 결국 브루너의 책임성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이해되고 완성된다. 사랑은 모든 책임성의 의미이다(74).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그의 사랑 안에 책임적으로 존재할 때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된다.
2.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브루너의 해석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그의 인간론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그는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기본적인 기독교 교리를 수용한다. 그러나 그는 과거의 전통적인 해석처럼, 이 하나님의 형상을 단순히 “존재의 유비”로 이해하지는 않는다. 그는 칼 바르트처럼, 이 형상을 관계의 유비로 이해하려고 하는 듯하다. 그에 있어서, 죄에 의해서도 파괴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뿐이다(105). 그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하나님과 책임적인 응답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이는 인간을 하나님과 이웃 인간 사이의 책임적인 관계로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그는 가톨릭이 하나님의 형상을 형상(imago)과 모양(similitudo)으로 구분하는 것이나, 종교개혁자들이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relic)을 하나의 실체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한다. 다만 그는 인간의 책임성이라는 말로 이 관계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책임성이라는 것이 실체가 없는 하나의 관계성만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분명 그는 이 책임성을 인간 실존의 실체(50)라고 한 바가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해석의 이중적 여지가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가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 즉 책임성이 남아 있고, 내용적으로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그것이 상실됐다고 주장하는(170) 부분에 이르면 또다시 그의 설명이 애매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형식적, 내용적이라는 구분은 사실 내용상 가톨릭의 형상과 모양의 구분과 크게 다른 바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3. 모순 속의 인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께 반항하고 불순종하게 되는 것은 그가 책임적인 존재이며,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브루너에 있어서, 죄의 본질은 존재의 상태가 아니라, 행위를 의미한다(116). 여기서 인간의 모순이 나온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하나님께 죄를 짓게 되는 존재가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인 책임적인 존재가 아니었다면, 죄도 범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은 “죄의 전제 조건”이다(132). 그래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모순 속의 인간”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본래부터 악의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이 악의 경향성은 원죄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설명한다. 사실 그는 원죄에 대해서는 명쾌한 입장을 개진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인간의 본질 속에는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욕망과 교만이 숨어 있다. 이것은 인간의 독립성을 선언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129). 이것이 인간을 최초의 모순 상태인 타락으로 끌고 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제기 될 수 있는 문제는, 왜 인간에게는 악의 경향성만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 논리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악의 경향성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의 경향성도 가지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본래 하나님의 형상이 책임성으로 나타났지만, 그 책임성이 필연적으로 악을 낳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브루너에게는 이 선의 경향성, 즉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경향성은 쉽게 간과되고 말았다는 느낌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에게 인간론의 구조 속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모순 속의 존재”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 인간 타락의 상태는 회복불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성도 손상시킨다. 여기서 죄의 연대성 개념이 나온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파괴하고 연대감의 끈을 단절한 뒤, 인간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존재가 되었고, 서로에게 대항하는 존재가 되었다(141).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안에 있는 실존이 되었다(163). 하나님의 진노 안에 있는 인간은 곧 “죽음 앞에 놓인 실존”이다. 두려움과 의심 그리고 절망은 바로 이러한 인간 모순의 결과물이다.
4. 새로운 인간 인간이 모순적인 존재라고 하는 말은 또 다른 의미에서 보면, 이상적인 인간과 실제적인 인간 사이에서 모순 속에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즉, 창조와 죄 사이의 모순 속에 있는 인간을 의미한다(478). 그런데 브루너는 이런 모순 관계를 철학이나 과학적 지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에 논리에 따르면, 인간의 모순성을 인식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순 속의 인간은 오직 신앙을 통해서 회복 가능하다. 그리고 이 신앙은 인간의 교리에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교리에서 설명된다(479). 그러므로 기독교교리의 진정한 핵심은 기독론에 있고,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실존적 결단을 통해서만 인간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 브루너에 있어서, 신앙은 기원에서부터 잘못 걸어온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다. 이 신앙은 모순과 죄에 대해 “아니다”하고 외치는 것이다(480). 그러나 이 신앙은 나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용서를 인식할 때만 나의 회개가 의미를 가진다.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나 자신을 인식함으로써 반응하게 되는 인격적 행위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삶을 의미한다(486).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이는 신앙은 세상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 속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이 참여하는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와 이웃, 즉 공동체 속에서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인간, 즉 모순을 극복한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 역사와 우주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참 자유 그리고 책임성을 소유한 인간이다. IV. 브루너 인간론의 평가 1. 특징 지금까지 살펴 본 브루너의 인간론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 그의 인간론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기독교 인간론과 그 구조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창조와 타락과 회복이라는 틀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그 문제의 해결 방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출발점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인간론은 철저히 기독교적이다. 그리고 방법론적인 면에서는 “위로부터의 인간론”을 전개한다.
둘째,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존재론적인 것으로 해석하지 않고 관계론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이 관계 속에서 그는 인간의 본질을 책임성을 파악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 즉 인간의 독특성을 관계론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브루너의 것만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가 그 핵심을 책임성에 두었다는 것은 그의 신학적 공로로 돌릴 만 하다. 이 책임성을 통해 인간과 하나님은 하나의 접촉점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이 측면은 일체의 접촉점을 거부한 칼 바르트와의 차이이기도 하다.
셋째, 이 책임성의 강조는 인간의 결단과 행위의 강조로 이어진다. 브루너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와 의지적 결단은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써, 이는 구원론의 문제에도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아무런 의지적 반응을 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절대적인 주권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도 관계 속에서 이해된다. 따라서 죄인 없는 하나님의 사랑은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넷째, 브루너의 인간론은 철저히 기독론적이다. 모순 속의 인간을 회복시키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인간론을 이해하는 열쇠는 도리어 그의 기독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칼 바르트와 더불어 현대 신학에서 정통적인 기독론을 다시 회복시킨 공로를 인정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 문제점
첫째, 하나님의 형상을 관계론적으로 이해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것을 다시 형식적인 형상과 내용적인 형상으로 구분하여 모호한 개념 설정이라는 인상을 남기고 말았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가톨릭적 견해와 칼 바르트적 견해가 종합된 것과 같은 결과를 낳게 되었다.
둘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는 인간의 책임성을 말하다 보니브루너는 자연계시를 인정하는 쪽에 서게 되고, 인간 편에서 하나님께 응답하는 책임적 결단을 강조하다 보니 그리스도의 계시의 절대성을 약화시킬 소지가 없지 않다.
이는 그가 싸워왔던 19세기 자유주의가 다시 움터 나올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그는 내용적 형상이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형식적 형상에 근거하여 긍정적으로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다는 주장과 서로 모순되는 논리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셋째, 브루너는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짐으로써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의 악의 경향성만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인간은 선을 선택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을 가지 못했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브루너의 원죄 개념의 문제가 제기 된다. 그는 원죄가 유전된다고 보지 않을 뿐 아니라, 타고난 속성도 아니라고 말한다. 죄는 상태가 아닌 행위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이러한 측면은 죄의 기원에 대한 그의 인간론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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