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 그리스도

[스크랩] 아버딘 조직신학 출신 레담의 기독론

하나님아들 2012. 7. 25. 15:11

 

아버딘 조직신학 출신 레담의 기독론

 


『국제신학』 1 (1999):
<서평> 성경적, 개혁파적 그리스도의 사역 이해를 지향하며
Letham, Robert. The Work of Christ. Downers Grove, Ill.: InterVarsity Press, 1993.

서평자: 이승구 (교수/조직신학)

이전에 런던 바이블 컬리쥐(London Bible College)에서 기독교 교리 담당의 선임 강의자 (senior lecturer, 미국식으로 하면 부교수)로 있던, 그리고 미국 웨스트민트터 신학교에서 기독론을 강의하기도 했던 로버트 레담이 (지금은 미국 델라웨어 주 윌밍톤에 있는 엠마누엘 장로교회의 목회자로 있다고 한다) 기독론의 둘째 부분인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좋은 교과서를 내었다. 이는 제랄드 브레이(Gerald Bray)가 편집하고 있는 <기독교 신학의 양상들> (Contours of Christian Theology)이란 제목으로 일련의 신학자들(Gerald Bray, Robert Letham, Paul Helm, Charles Sherlock, Sinclair Ferguson, Donald MacLeod, Edmund Clowney, Klaas Runia)이 쓰고 있는 씨리즈의 하나로 나온 책이다. 전통적인 교과서를 그대로 옮기지 아니하면서 현대적인 문제들을 더하여 다룸으로 전통적 교과서를 보충하며 최상의 의미에서의 적극적이고 복음주의적 입장을 표방하는(9) 이 씨리즈는 아미 나온 신론의 저자인 제랄드 브레이와 함께 다른 집필자들의 성격과 그 체제 및 성향을 생각할 때 영국에서 나온 또 하나의 씨리즈 보다 좀 더 복음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어서 우리의 관심을 더 모으게 한다. 1993년에 나온 레담의 이 기독론 책은 이런 우리의 관심에 대해 상당한 만족을 가져다주었다고 할 수 있다.



제 1 부에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해하는 토대로 그리스도와 구원의 계획(제 2 장)이란 제목 하에서 언약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다루고,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제 3 장)의 관계를 다루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제 4 장) 문제를 다룬 후, 전통적인 그리스도의 삼중직론(三重職論)에 근거해서 선지자로서의 그리스도(제 2 부)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의 관계를 논의하고,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제 3 부)를 다루면서는 속죄 문제 전반과 속죄와 칭의 문제까지를, 그리고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제 4 부)에서는 그리스도의 중보적 왕권의 우주적 차원과 집합적 차원을 다루고 있다. 이런 기본적 구조를 지닌 이 논의는 "부활하신 주님에 의해서 개인의 삶들과 민족들과 전체 문명이 변하고 재형성되었고," "기독교는 번성하며," "그리스도의 사역은 실제로 우리가 직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실재들을 대변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하고 있다(17).

레담의 이 논의에서 아주 중요한 공헌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로, 이 책은 우리가 흔히 나누어서 다루기 때문에 (사실은 그런 의도도 없고, 그래서도 안되지만 흔히 나누어서 다루는 방식 때문에) 생겨지는 오해를 해소할 수 있도록 개념들의 관계를 잘 연관하여 설명해 주고 있다.

[1]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관계이다. 이 둘은 결코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데도 흔히 기독론을 이렇게 나누어 생각하는 방식 때문에, 그리고 현대에 들어가는 의도적으로 그 둘을 떼어 내는 바람에 마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분리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 (레담이 언급하고 의식하고 있는 현대의 이런 경향으로는 신약 성경에는 오직 기능적 기독론[functional Christology]만 있다는 오스카 쿨만의 주장1 , 던의 주장2 , 해방 신학자들의 주장3 과 판넨베르그의 '및으로부터의 기독론'[Christology from below]이다). 레담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연관성에 대한 강조를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그가 누구신가와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그의 사역의 유효성을 결정짓는 것은 그의 인격의 독특성이다"(24). 그리고는 동시에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분만이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순종하실 수 있다는 취지의 칼빈의 말(Institutes, 11, 12, 13)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563) 제 15 문답에서 제 17 문답까지와 "그가 취하시지 않은 것은 치유될 수 없다"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의 말을 인용하여 고대로 부터 기독교에서는 "그가 누구신가 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결정지운다"는 것을 강조하여 왔음을 밝힌다(24-25).4 또한 이레니우스(Irenaeus, Against Heresies, v)와 안셈(Anselm, Cur Deus Homo), 그리고 현대 신학자들 중에서는 베르까우어의 다음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언급한다는 것은 그의 사역을 지적하는 것이며, 그의 사역의 복을 언급한다는 것은…교회가 찬양 가운데서 '참 하나님과 참 사람'(vere Deus, vere Homo)으로 고백하는 그 분의 사역을 다루는 것이다."5 그리고 바르트와 판넨베르그도 같은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말하며 그들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후에 판넨베르그의 "밑으로부터의 기독론"에 대한 레담 자신의 언급에서 잘 드러나듯이 이는 그들 신학의 전체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지 지금까지 언급한 이들과 같은 점을 그들이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려는지 의문이다. 또한 이 맥락에서 캄벨(John McLeod Campbell, 1800-72)의 그의 인격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언급된 것(31)도 좀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가 아닐 수 없다.

(2〕 개념간의 관계를 잘 드러내는 작업의 둘째로, 언약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잘 드러내어, 성경을 이해하는 일에서 언약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로버트슨, 머레이, 클라인의 논의에 근거하여 설명하고, 성경의 언약들이 "하나님의 하나의 은혜의 목적"이라는(42) 통일성을 가지고 있어서 후대의 언약은 이전 언약들에 근거하여 세워진다는 점을(42) 잘 드러내고, 그리스도가 그의 언약의 주님이심을 말하는 등의 논의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3〕세째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설명한 후에 속죄와 칭의를 연관시켜서 설명하는 것도 이런 개념간의 관계를 잘 설명하는 시도의 하나이다. 그의 논의의 핵심은 예수의 부활은 그의 칭의이고, 그의 이 칭의는 마지막 날 우리가 부활할 때에 온전히 우리의 것이 되는데,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 때문에 칭의는 지금 여기서 선취되고 믿음으로 받게 된다는 것이다(179). 또한 이 논의 중에서 그는 칭의와 성화도 연관하여 다루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184). 이와 연관해서 레담이 "화목과 순종이 구속(atonement)을 칭의와 연관시키도록 한다면, 구속(redemption)은 이를 성화와 연관시킨다"(149)고 지적하는 점도 언급해야할 것이다.

〔4〕 넷째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제 4 장으로 제시한 것 역시 독특한 것이다. 흔히 전통적으로 구원론의 일부로 다루어지는 "우리 구원의 모든 측면의 토대"가 되는(75)이 부분을 그리스도의 사역의 한 부분으로 다룸으로서 레담은 기독론과 구원론의 밀접한 관계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5〕다섯째로, 레담은 구원론과 교회론의 밀접한 관련도 잊지 않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구원은 "교회 안으로,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와 관련하여 일어난다"(Salvation…takes place into the Chruch, in the Church and in connection with the Church, p. 217). 구원론과 교회론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의 열매(outflows of the accomplishment of Christ)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특히 현대 복음주의에서 이 둘이 분리되어 나타나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218), 레담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성경적 언약 개념과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그것이 열매맺고 온전히 표현된 것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제시한다(219).

〔6〕여섯째로, 레담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삼위의 한 위이신 성자만의 사역이 아니고 삼위일체 전체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각각 다른 방식으로 관여하신 사건임을 강조하고 있는 점도 연관성을 잘 드러내려는 노력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129, 142).

이렇게 개념들 간의 관계를 잘 드러내고 잘 연관시키고 있는 점 외에도 이 책의 논의의 장점의 둘째로, 복음서의 "예수의 역사는 또한 그 자체가 해석을 제공한다"고 하면서, "복음서가 이렇게 신학적인 문서들이지만 그것이 복음서를 덜 역사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님"을 잘 지적하고 있는 점(36)이 이 책의 또 하나의 기여라고 할 수 있다.

셋째로, 몰트만과 융엘의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통찰을 높이 사면서도 "그들이 얼마나 많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성경의 증언 전체에 공정하였는가?"고 묻는 것(37)도 중요한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소외된 자와 억눌린 자에 대한 관심을 장점으로 인정하면서도 이는 "죄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진노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성경 자체가 그것을 보는 것과는 좀 다른 식으로 재 정의된 점에 약점이 있음을 잘 지적한 것(143), 즉 그들에게서 '사회적이고 집합적인 죄에 대한 촛점이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죄에 대한 실질적 배제를 가져왔다"(173)는 점과 "그 견해는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과 버려진 자들에 대한 애호(partiality)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에 근거하고 있다(173)는 점, 그리고 이런 태도는 결국 일종의 펠라기안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됨을(174)옳게 지적한 것(173)도 큰 공헌이다.

넷째로, "구속의 의도"(the intent of the atonement)라는 제목의 부록에서 레담은 보편주의, 알미니안주의, 제한 속죄론, 아미로(Moyse Amyraut)의 가정적 보편주의를 개괄 한 후, 왜 다른 이론들의 "잠정적인"(provisional) 구속론보다 제한 속죄론이 말하는 "유효한"(effective) 구속론이 더 옳은가 하는 것을 설득력 있게 잘 제시하고 있는 점도 이 책의 큰 공헌의 하나이다. 레담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 문제는 구속의 성질에 있는데, 구속의 성질로부터 생각하면 그리스도께서 구속받는 큰 무리의 구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한다(230). 따라서 "구속에 대해서 형벌적 대리 이론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예외 없이 모든 이들을 위해서 잠정적으로 죽어주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불가능하게 보인다"고 한다(230).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레담은 심지어 "현대의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모두가 역사적 알미니안주의는 형벌적 대리 이론과 정합성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까지를 하고 있다.6 결국 "(구속의) 범위를 보편화하면 유효 선언을 제한하게 된다"는 머레이의 말과 같이 보편적 구속은 실제적으로 그 유효성이 제한 받게 된다는 것이다(233).7



이상과 같은 특징과 함께 후반부의 레담의 논의는 잘 정리해 볼만한 내용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 내용을 간단히 간추리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논하면서 레담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되심이 여호와의 불변하는 맹세를 따라 된, 따라서 더 오래되었으며, "영원한 제사장"인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것임을 강조한다(시 110:4 참조). 특히 레담은 창세기 14장을 언급하면서 여기 나타난 멜기세덱의 축복은 12장의 하나님의 축복과 병행이 되므로, "그런 의미에서 멜기세덱은 그를 통하여 약속된 언약의 축복이 전달되고, 심지어 중재된다고도 할 수 있는 분으로 볼 수 있다"고 까지 말한다(109). 그래서 결국 멜기세덱은, 마치 아론이 모세 언약의 제사장이었듯이, 아브라함 언약의 제사장이라고도 말한다(109). 그리고 이 아브라함 언약과 연관된 멜기세덱의 제사장 됨은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다고 한다(110). 이 주장에 대해서는 좀더 구체적인 논의에 의한 보완이 필요하겠지만,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되심을 분명히 하려는 레담의 의도는 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제사장 개념을 사용하신 일이 없다는 맨슨의 주장에 대한 반론(110-112)과 함께 좋은 변증적 서론이 된다고 할 수 있다.8

그리스도의 제사장 됨에 대한 논의에서 흥미로운 것을 지적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의 성육신을 위해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으리라는 표현이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기사를 상기시켜서 "성령에 의한 수태가 비슷하게 주권적이고 창조적인 신적 행위, 새시대의 도입으로서의 급진적으로 새로운 시작이다"(115)는 것을 보여준다고 지적하고 있는 점을 말할 수 있다. 둘째는 오직 그리스도의 유일하신 제사장 되심에 근거해서만 우리가 "제사장 나라"라고 불려 질 수 있는데, 이는 개인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집합체로서의 교회에게 적용되는 것임을 잘 지적한 점이다: "우리는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 됨이 아니라, 교회의 제사장 됨을 생각하기를 배워야만 한다"(122). 그리고 "이렇게 이해하면 교회의 직분이 모든 개개인 신자들의 평등성에 대한 침범이 아니고, 교회에 주어진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사역에 참여하는 한 방식으로 여겨질 수 있다"(123)고 하는데, 이는 잘 적용하면 교회의 직분을 잘 이해하는 방식일 수 있지만 좋은 개념들이 늘 잘 오용되었듯이 오용될 수 있는 여지도 있는 개념일 수 있다.

구속의 성질을 논하면서(제 7 장) 레담은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할 때 죄와 형벌의 연관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생각(126)에 근거해서 구속의 "결과적 절대적 필요성"(Consequent absolute necessity)을 옹호하는 입장에서(127) 다음 몇 가지 성경적 범주들에 근거해서 속죄의 성질을 이해하려고 한다.

첫째는 희생 제사(sacrifice)이다. (아마도 에쎄네 종파적 형태의 이상주의적 유대교로)돌아가려는 위험 중에 있는 히브리서 독자들에게 그리스도가 영단 번에 드려진(hapax, ephapax, 히 9:12, 26, 28; 10:10, 12, 14) 유일한 희생 제사임을 강조하는 히브리서에 근거해서, 레담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성령을 통해서 성부께 자신을 드렸다고 한다. 이로부터 레담은 "삼위 전체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에 관여한다"는 결론을 내린다.9 그러나 레담 자신이 잘 지적하고 있듯이(p. 259, n. 7) "영원하신 영" 이란 말은 "신적이고 영원하신 그리스도의 성질"을 뜻한다는 해석(Westcott, Vos, Spicq, and Hughes)이 주도적이므로, 레담의 이 논의는 그리 성공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로, "순종"이란 범주로 여기서 레담은 그리스도의 전 생애가 순종의 삶임을 잘 밝히면서, "그의 전 생애 또는 사역이 그의 자원하는 순종의 적극적 수행이면서 동시에 우리 대신에 그리고 우리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진노에 복종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고 하거나 좀더 낫게는 "그리스도의 하나의 순종이 적극적 측면과 수동적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고 옳게 지적하고 있다(130).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적극적으로 이 순종에로 나아가셨지만 또한 이 순종이 내적인 투쟁 중에 되어진 것임도 눅 12:50, 막 10:38 등에 근거하여 잘 지적한다(130-31).

셋째로 "형벌적 대리"(penal substitution) 개념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가 받아야 할 "하나님 면전에서의 영원한 축출을 함의하는" "영원한 죽음"을 당하셨음을 특히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hamartian epoiesen)"고 말하는 고후 5:21과 "그리스도께서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라고 말하는 벧전 3:18 등과 다른 많은 구절들에 근거하여 제시하고서는, 대리적 수난의 개념이 고대 사회에서 친숙한 것이었으나, 성경 저자들은 이를 이교 문화의 취향과 선 이해에 종속시키지 않았다고 말하는 마르틴 헹겔의 논의를 긍정적으로 소개하고 있다.10

그리고 이 대리 속죄는 넷째 개념인 "죄책의 제거"를 뜻하는 속죄(expiation) 개념과 다섯째 개념인 "유화"(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킴, hilasterion, propitiation) 개념을 모두 담고 있음을 잘 지적한다(140).11

여섯째 개념인 "화목"(reconciliation)은 원수 관계에서 친구 됨으로, 타락 이전에 아담이 향유했던 하나님과의 교제에로 회복시키는 것임을 지적하면서(143), 레담은 롬 5:10-11, 골 1:19-20, 엡 2:11-22, 고후 5:18-21을 들어 설명한 후, 이 화목에서도 먼저 하나님 자신이 우리와 화목하셨기에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음을 잘 지적한 레온 모리스에게 우리가 크게 힘입고 있음을 잘 지적한다(146).12

일곱 번째 개념인 구속(redemption)은 대속금을 치러 죄와 사단에게 묶여 있음에서 풀려나게 함을 의미한다고 하면서 벧전 1:18-19, 딛 2:14, 롬 3:24, 히 9:12을 언급하고, 사단 속상설을 배격한다(149).

여덟 번째 개념인 정복(Conquest)과 관련해서 레담은 그리스도께서 사단을 그 우두머리로 하는 반역적 정사들과 세력들을 정복하신 것을 강조한다. 또한 원칙상 이루어진 이 승리는 "새롭고 정화된 세계를 지시해 주는 것이며, 그 세계의 기초가 이미 놓여졌음에 대한 확신"(152)이라고 한다. 마지막 개념인 "도덕적 모범"(moral example) 개념에서 레담은 그리스도의 구속은 문자적으로 독특한 것이어서, 우리가 본 받을 수 없고, "모범적 요소는 엄격하게는 구속 자체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구속의 결과임을" 잘 밝히고 있다(152).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제사장적 사역에 대한 간단한 논의에서는 "그리스도의 피"라는 표현이 "그의 죽음 이후에도 보존되어 있고, 능동적인 그의 생명을"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제시하는 것을 뜻한다는 웨스트코트의 주장을 반박하는 스팁스 등에 동의하면서, 그리스도의 계속되는 제사장적 사역은 교회를 위한 그의 기도를 포함하는데 이는 잘 모르는 어떤 것에 대한 간구가 아니라 "분명히 정해진 것에 대한 요청"임을 잘 지적하고 있다(156). 그러므로 이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사역의 또한 측면인 축도와 구별할 수 없다고 한다. 왜냐 하면 이 축도는 "이미 실제로 존재하는 사태," 즉 "십자가에서의 그의 죽음에서 흘러나오는 축복을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56). 이에서 나오는 그의 최대의 은사는 성령이며, 교회에 대한 그의 메시지, 사도들을 통한 계속적인 사역, 정치적 사태에 대한 그의 다스리심, 필요한 때에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는 것…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으로서 그의 교회를 복 주시는 방도들이라는 것이다(157).

구속의 이론들에 대한 논의 (제 8 장)는 전통적인 개혁파 기독론의 교과서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이레니우스의 총괄갱신이론, 속상설, 만족설 (대리 형벌 이론), 도덕 감화설, 우주 통치이론, 죤 맥클라우드 캄벨과 호레이스 브쉬넬의 대리 회개설 등을 자세히 설명한 후 각각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외에 칼 바르트의 구속이론과 몰트만, 융엘, 해방신학의 구속이론을 제시하고 비판하는 일을 덧붙이고 있다. 바르트에 대해서는 그의 『교회 교의학』 IV/1, pp. 211ff.에 근거하여 바르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리(substitute)로서 죄가 되셨고, 심판자이시며 동시에 우리의 자리에서 심판을 받으셨다고 주장하였음을 말하고, 이런 독특한 대리형벌이론은 보편주의적 결론을 이끌어 낸다는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 인간, 선택, 그리고 언약에 대한 바르트의 견해는 성육신이라는 아주 중요한 사건에 의해 아주 포괄적으로 주도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구속을 이루셨고,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다는 전반적인 인상이 전달된다"(p. 171). 물론 레담은 바르트가 자신이 보편구원론자가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는 『교회 교의학』 II/2, p. 417을 잘 알며 이를 언급하고 있으나, 이런 부인은 바르트가 다른 곳에서 말하고 있는 것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듯하다고 아주 옳은 지적을 하고 있다(172). 또한 몰트만, 융엘, 그리고 죤 소브리노 등의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은 자로서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집중하는 현대의 이론에 대해서는 이 이론이 하나님의 사랑의 실재와 하나님께서 고통받는 자들과 동일시하신 것에 대해서는 열매있는 통찰력을 제공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문제를 드러내고 있음을 잘 지적한다. 첫째로, 이 이론은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죄를 실질적으로 배제할 정도로 사회적이고 집합적인 죄에만 초점을 맞추고, 이웃과의 관계라는 수평적인 것이 절대화되어, 영원이 시간에 의해 가려지는 철저히 신칸트주의적 틀에 맞는 관점을 형성하게 한다. 둘째로, 이 견해는 하나님이 가난한자 들과 억압받는 자들을 애호하신다는 전제에 근거하고 있다. 셋째로, 사회적으로 낮은 자들을 옹호하려는 선험적 해석학적 헌신은 사회의 직접적 맥락이 어느 정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해하는데 영향을 미치며, 구속의 본래적 성질은 어느 정도 사유를 주관해야 하는지의 문제를 제기한다.

구속 이론에 대한 레담의 결론은 대리 형벌이론(penal substitutionary theory)은 구속의 본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받으셨다는 데에 있음을 주장하면서도, 그것이 개인적이나, 집합적이나, 우주적인 수준에서 구속의 의미를 다 드러내는 것은 아님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174f.).

제 4 부에 나타나고 있는 그리스도의 중보적 왕 되심에 대한 논의는 이 왕권을 우주적 차원에서와 집합적 차원의 이중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가장 간단한, 그러나 현대의 주해적 논의를 창조적으로 반영하는 흥미로운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주적 차원에서의 중보적 왕권을 설명하면서 레담은 예수께서 외현적으로 분명하게 왕이라고 선언하시지는 않으셨으나, 그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에 그의 왕직에 대한 함의가 있다고 보면서 그의 온전한 권위가 드러나게 된 것은 그의 부활에서라고 한다(198). 중보적 왕권에 대한 그의 논의는 삼 단계로 진행되고 있다. 첫째로, "우주의 창조자요 인도자요 목표이신 그리스도"라는 제하에서 그는 골로새서 1:15-20에 근거하여 첫째로, 이 구절에서는 왕이요 구속자이신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 선재하셨으며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본성을 가지신 것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여기서 그는 이 구절이 선재성을 함의하지 않고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라는 바르트와 마르셀루스의 견해와13 인격적 선재가 아직 분명히 진술되지 않은 지혜문학의 용어로 바울이 생각하고 있을 뿐이라는 던의 주장에14 대한 반대를 잘 표현하고 있다(199). 특히 던의 주장에 대해서는 그가 지나친 주장을 하고 있다는 모울의 평가와 함께15 선재 사상을 포함한 비교적 온전한 기독론이 바울의 기독교적 경험의 초기부터 유효하게 그의 사상 내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김세윤 교수의 주장에16 동의하면서, 그리스도의 절대적 우위성을 부인하는 이단과 싸우고 있던 골로새서의 문맥이 김 교수의 주장을 지지해 준다고 한다(199). 즉, 온전한 선재 교리를 포함한 바울의 전체적 기독론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와 만난 것에서 나왔다는 김세윤 교수의 논의를 따르면서 레담은 그리스도께서 계시사에서 뿐만이 아니라 신성의 영원한 관계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199-200). 둘째로, 이 구절(골 1: 15-20)은 (이렇게 하나님과 동등하신) 아들이 창조의 주님임을 보여준다고 한다(200). 만물보다 먼저 나신 자로서 그 아들이 상속자라는 것은 그의 우선성과 우위성을 드러내어 주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레담은 선재하신 아들과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동일시에서 (신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영원하신 로고스라고 주장하는 553년의 제 2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교리적 지위를 얻은)17 '내인격성 교리' (the dogma of enhypostasia)의 성경적 지지를 찾고 있다(201). 셋째로, 성자께서는 우주의 창조자와 통치자이므로, 모든 것은 그 안에서 (즉 그를 그 머리로 하여), 그리고 그를 통하여, 그리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으므로,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며, 그 목표도 그리스도에게 일치하는 것이고, 그 통일성도 그에게 있다고 한다(200). 넷째로, 성자께서는 또한 우주를 유지하시므로 그가 우주의 질서와 정합성과 역동적 방향성을 제공하신다고 보아야 한다고 한다(200). 다섯째로는, 성자께서 그의 교회의 구속자가 되셔서, 그로써 그의 피조계를 갱신하시고 온전케 하신다고 한다 (200). 이때 바울은 선재하시는 성자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통일성을 가정하고 있는데 이것이 소위 그리스도 인성의 내인격성(enhypostasia) 교리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201).

창조와 구속의 관계에 대해서 논의하면서는 레담이 서철원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을18 인용하면서, 궁극적으로 우주의 갱신이라는 목표를 위해 성육신이 필요했다고 보는 전택설적인 "승귀 중심"의 신학(elevation-line theology)과 성육신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후택설적인 "회복 중심"의 신학 (restitution-line theology)이 모두 그 나름의 강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면서(pp. 203-204), 성경적인 증언은 그리스도께서 창조의 중보자이시며 동시에 갱신과 회복 사역의 주체이심을 강조한다고 잘 지적하고 있다(pp. 204-206).

그리스도의 중보적 왕권의 집합적 차원(the corporate dimension)을 설명하면서는 교회가 새롭게 되고 갱신된 우주의 첨단이 되어야함을 강조한다(p. 211). 따라서 이 부분에서는 기독론에 근거한 성령을 잘 강조하고, 구원론과 교회론을 밀접히 연관시키는 논의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 전체에서 레담은 그리스도께서만이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서 독특하신 분(p. 223)으로서 독특하게 이루신 일을 성경 주해에 근거해서, 그리고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기독론적 주장과 조화되게, 그리고 현대의 여러 논의 가운데서 적극적으로 취하여야 할 점을 잘 취하면서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 몇 가지 점에서 그의 논의 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로는 언약을 논의하면서 로마서 3:22의 소유격을 목적의 소유격으로보다는 주격의 소유격으로 취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된다고 해석하는 점이다(253, n. 17). 물론 이는 문법적으로 둘 다 해석 가능성이 있고 따라서 두 가지 견해를 모두 신중하게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그가 이런 해석을 하는 것 배후에는 몇몇 경향성을 지닌 해석자가 있지 않나19 우려되어서 이를 지적하게 된다.

둘째로는 레담이 자신의 학위 논문과20 다른 논문에서 제시한 바에 따라서 언약 신학의 발전을 언급하면서 하는 몇몇 강한 주장들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 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는 불링거에게서부터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언약을 이루신 것보다는 우리가 우리편에서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초점이 되었다고 하면서(51f.), 특히 피터 라무스(Peter Ramus, 1514-72)의 영향을 받은 후에는 이분법적 구분과 구속사보다는 구원의 서정에 대한 관심 때문에 개인의 경건이 핵심이 되고 개개인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관심을 보이는 경건주의가 나타나게 되었고, 이로써 "기독교적 확신이 흐려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52). 또한 이 시기의 언약신학의 주장자들은 물론 개인의 차이는 있으나 은혜 언약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있고, 우리 대신에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되었다는 핵심적 요점을 보지 못했다고 까지 말한다(52). 더 나아가서 1648년에 코케이우스에게서 처음 언급되어 사용되게 된 성부와 성자 사이의 구속언약(covenant of redemption) 개념은 더 극단적인 발전 형태로 이는 성령을 제거하며, 성자에 대한 강한 종속론적인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고, 삼신론적 경향들도 주목할 수 있다고 한다(52f.). 그러나 과연 이렇게 강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주장들이 오래 동안 아버딘과 에딘버러에서 나왔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강한 주장 배후에는 우리가 다음에 지적할 그의 학위과정 동안에 그가 받은 영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필자가 읽기에 가장 문제가 될 수 있는 표현 양상은 레담이 "성육신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제목 하에서 논의하고 있는 데서 드러난다. 그는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으로 (우리의 인간성을 취하시어서) 우리와 연합하셨음으로 우리가 그와 연합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기서도 다른 곳에서처럼 하나님의 주도권이 앞선다고 하면서 그의 논의를 시작한다(77). 그는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되심으로서 자신을 인류와 연합시키셨다"고 하며, "그가 참 인간이시므로 그는 인류의 한 부분이셨다"고 한다 (79). 레담 자신은 이런 표현이 이끌고 올 수 있는 오해를 잘 의식한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인간성은 일반적인 것(a generic one)이 아니라, 특정한 구체적인 인간성"이라고 말한다(78). 또한 "그리스도의 인류와의 연합이 그 자체로 이제까지 살았던 모든 개개인의 구원을 분명히 하는 것은 아니다"고 하기도 하고(79), 이런 표현이 복음주의자들에 의해서 보편주의의 의혹을 일으킬 수 있고, 따라서 회피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즉 그는 옛날에도 또 영원히 우리 중의 하나이시다"와 같은 표현을 하는 의도는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에서 둘째 아담으로서 구속된 인류의 머리가 되셔서 자신을 우리와 연합시키셨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79). 그러나 그가 보편주의적 위험에 빠지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인류와 자신을 동일시하신 것에 공정하려고 한다고 하면서 사용하는 이런 표현 양식들이 과연 좋은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자신이 우려하고 있듯이 이런 표현들은 보편주의의 냄새를 풍기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그런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표현은 피하면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의하여 이제 새로운 인류가 생겨짐을 드러낼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러나 이런 표현에 대해서 우리가 갖게 되는 우려는 전통적으로 이런 표현을 해 온 사람들과 관련된 우려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표현은 칼 바르트가 즐겨하던 표현이고, 영국의 문맥에서는 바르트의 영향을 잘 드러내는 톰 토랜스(Thomas F. Torrance)와 그의 동생 제임스 토랜스(James Torrance)가 즐겨 사용하던 표현이었다. 따라서 아버딘에서 학위를 한 레담이 이런 표현을 할 때 그가 제임스 토랜스의 영향하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레담은 바르트나 토랜스 형제들의 표현이 가진 보편주의적 성향을 피해 가면서 자신을 표현해 보려고 애쓰고는 있지만, 그의 표현 방식이 그런 기원을 가지고 있어서 드러낼 수 있는 문제를 과연 피할 수 있는가를 묻게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한가지 흥미롭게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레담이 선택을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할 것을 강조하면서, 핫지와 벌코프가 이 둘을 분리시킴으로서 성경적 관점을 떠났다고 지적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점에 있어서 레담의 진술 방식만이 아니라, 그의 사상의 나아가는 방향에 대해서 의아심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몇 가지 문제를 제외하면 레담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이 기독론 교과서는 개혁파 신학의 현대적 기독론 진술을 잘 감당하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시리즈에 속하는 데이비드 웰즈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좋은 개혁파적 논구와21 함께 이는 현대 개혁파 기독론의 좋은 이정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Oscar Cullmann, The Christology of the New Testament (London: SCM, 1975), pp. 215-66. 후의 제한과 보충으로 "The Reply of Professor Cullmann to Roman Catholic Critics," SJT 15 (1962), pp. 36-43도 보라.

2 James D. G. Dunn, Christology in the Making (London: SCM, 1989).

3 Jon Sobrino, Christology at the Crossroads (London: SCM Press, 1978); Juan Luis Segundo, The Historical Jesus and the Synoptics (London: Sheed & Ward, 1985).

4Gregory of Nazianzus, 'Epistolae 101' (MPG, 37, 181c). 이에 대해서 그는 또한 Aloys Grilmeier, Christ in Christian Tradition, I (London: Mowbrays, 1975), pp. 329-91; J. N. D. Kelly, Early Christian Doctrines (London: A. &. C. Black, 1968), pp. 289-301을 보라고 한다(p. 250, n. 8).

5G. C. Berkouwer, The Work of Christ (Grand Rapids: Eerdmans, 1965), p. 19.

6J. K. Grider, "Arminianism," in Water A. Elwell, ed.,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Basingstoke: Marshall Pickering, 1985), pp. 79-81; R. Letham, "Arminianism," in S. B. Ferguson, D. F. Wright, and J. I. Packer, eds., New Dictionary of Theology (Leicester: Inter-Varsity Press, 1988), pp. 45-46.

7John Murray, 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 (London: Banner of Truth, 1961), p. 64.

8T. W. Manson, The Teaching of Jesu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39).

9Cf. P. E. Hughes, A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Hebrews (Grand Rapids: Eerdmans, 1977), introduction.

10Martin Hengel, The Atonement A Study of the Origins of Doctrine in the New Testament (London: SCM Press, 1981), pp. 1-32.

11C. H. Dodd, "Hilasterion, its Cognates, Derivatives and Synonyms in the Septuagint," JTS 32 (1931), pp. 352-60. 이에 대한 비판으로 Roger Nicole, "C. H. Dodd and the Doctrine of Propitiation," WTJ 17 (1955), pp. 117-57; Leon Morris, The Apostolic Preaching of the Cross (London: Tyndale Press, 1965), pp. 144-213 등을 보라.

12Morris, pp. 214-50.

13Cf. Karl Barth, CD, III/1, 54ff.; Marcellus of Ancyra, cited in J. B. Lightfoot, Saint Paul's Epistles to the Colossians and Philemon (London: Macmillan, 1879), p. 147 (p.264, n.2).

14James D. G. Dunn, Christology in the Making (London: SCM Press, 1980), pp. 187-96.

15C. F. D. Moule's review of Dunn's Christology in the Making, in JST 33 (1982), pp. 258-63.

16Seyoon Kim, The Origin of Paul's Gospel (Grand Rapids: Eerdmans, 1982), pp. 151ff., 196ff.

17Cf. H. M. Relton, A Study in Christology (London: SPCK, 1917).

18Chul Won Suh, The Creation Mediatorship of Jesus Christ (Amsterdam: Rodopi, 1982).

19그는 이런 해석에 대해 다음과 같은 도서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TDNT, 6, pp. 182f.; T. F. Torrance, "One Aspect of the Biblical Conception of Faith," Expository Times 48 (1957), pp. 11-14 (p. 253, n. 17).

20"Saving Faith and Reformed Theology: Zwingli to the Synod of Dort," 2 vols. (Ph. D. thesis, University of Aberdeen, 1979).

21David F. Wells, The Person of Christ: A Biblical and Historical Analysis of the Incarnation (Illinois, Westchester: Crossway Books, 1984), 한역, 『기독론: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서울: 엠마오, 1994).


출처 : 주사랑
글쓴이 : 항공모함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