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오경

[스크랩] 창세기 개요

하나님아들 2015. 2. 10. 21:24

창세기 개요 1

 

 

                                                                                              김세윤(신약학. 풀러신학교)

 

창세기 개론  1 - 창세기 개요

 

 

   오늘은 창세기 개요다. 우리가 구속사를 한다고 했는데도 그 개념이 잘 정립이 안되고 또 적용하는 것이 철저하지를 못해서 해석이 좀 미진 한데가 있었다. 그 중에서 특별히 창세기 앞부분이 해석이 왔다 갔다 한다. 왜냐하면 창세기 앞부분은 진화론하고 논쟁들 이런 것이 우리 안에 박혀 가지고 그것을 해석하는데 여러 가지로 어려웠다.  

 

그래서 그 부분을 이번 강론하는 중에 교정하고 민수기로 들어 갈 것이다. 주님의 족보를 읽으면서 설명을 하겠다.  모세 오경은 모세가 기록했다. 기록자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구출한 구원자요 시내산 언약 곧 첫 언약의 중보자다. 그는 이런 자격자로 이것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모세가 기록한 오경은 첫 언약의 책이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이스라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조상들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모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사 시내 산에 이르게 하시고 시내 산에서 언약의 말씀을 이루시고 기록하게 하셨다. 그것이 모세가 행한 일이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이루신 언약의 말씀은 구체적으로 출애굽기와 레위기다. 그렇지만 창세기나 민수기 신명기 이 오경 전체가 언약의 책인 것은 모세가 언약의 중보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출애굽기와 레위기만 언약 체결의 책이 아니라 언약의 중보자로서 모세가 기록한 다섯 권의 책이 곧 언약의 책이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해석에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특별히 창세기 해석에서 유의해야 할 사항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창세기는 인류 고대사로 접근하기 쉽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 곧 역사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구원 역사는 그것이 완성되는 시점에서 해석되면 그리고 더욱 온전한 성취를 향해서 진행이 된다. 일반 역사를 기술할 때에도 사건에 대한 진술로서 기록은 사건 당시의 것일지라도 그 사건과 기록이 후에 나라와 왕조의 책으로 기록되어 보존되는 것은 나라와 왕조의 토대가 잡혔을 때이다. 그러한 기록을 통하여 왕조의 출현과 그 사건과의 필연성을 밝히며 왕조의 성격을 규명하며 미래의 소망을 가지게 한다. 그것이 일반 역사 기술에서도 그렇다 그 말이다.  

 

가령 요새 문민 정부가 태어났다. 그러면 4.19에 대한 기록 5.18에 대한 기록은 그 당시 기록이 중요하다. 그래도 그것을 의미 있게 이 정권과 연결을 시킬려면 또 새로운 작업을 해야 한다. 3.1절까지라도 그래서 삼일절에 만세 불렀던 운동하고 이 문민 정부하고 어떤 성격을 가지는가? 그것을 연결시켜서 기록을 다시 해줘야 이 정부에서 삼일절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기록은 느닷없이 꾸며내서 할 수는 없다. 그 당시 자료들 이런 것을 전부 모아서 하겠지만 이 삼일절 같은 것은 군사 정권은 잘 못한다. 가령 광주 학생 사건이든지 그런 것을 아예 기념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을 기념하자면 그 의미하고 군사 정권하고 안 맞아 들어간다. 그러니까 기록은 똑 같이 있어도 그 기록은 군사 정권하고 상관이 없고 이제 문민 정부가 들어서면 그 때 삼일절 문제든지 마산 문제든지 데모한 사건은 전부 뽑아다가 연결시켜서 이러이러한 것이 드디어 여기서 열매 맺었느니라 하고 권위적인 문서로 기록되고 해석이 되는 것이다. 아마 요새 여러분이 12.12사태 같은 것을 다시 규정하는 것을 보면 알겠지요? 똑 같은 사건을 규명하고 그 기록을 검토해도 의미는 군사 정권에서 의미하고 문민정부에서 의미하고는 다르게 접근을 하는 것이다.

 

 내가 그 전에도 얘기한적 있지만 가령 국사책에 보니까 '어느 날 우렁찬 아이의 울음소리가 났다.' '어느 아이가 골목에서 큰 아이들의 대장 놀이하고 있었다.' 쭉 기록을 하면 그것은 어떤 사람의 행적을 일기책으로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 영웅의 출현을 기록하려고 그렇게 특별히 기록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강감찬이나 이순신이나 용감한 사람들 그것을 기록하려고 기록한 것이지 그것을 읽고 '아, 이 사람 어렸을 때 울음도 컸구나.' 그것만 열심히 보고 있으면 의미가 없고 이 사람이 장군이었다는 의미로 읽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목표로 기록했으니까. 

 

그러니까 그 전에는 문장도 주로 단어의 의미나 한 단어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고 하는 것에 치중을 하고 그리고 이 단어가 이 문장 구조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 그런 구문론적인 의미들 주로 많이 연구했다. 그런데 지금은 문서 해석에 있어서 특별히 성경 해석에 있어서 그것만 가지고는 온전하지 못하고 소위 그 사람이 그 문장을 어떤 배경에서 썼는가하는, 환경적인 배경이나 문맥적인 배경을 따져야 된다. 그것이 최후 의미다.

 

가령 우리 나라 말 중에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하는 말이 있다. 요새 젊은 사람들 잘 모를 란가? 그전에 홍수환이가 권투하러 가서 두들겨 맞고 여러 번 쓰러졌다. 코너에 몰렸는데 한방 쳤는데 상대가 쓰러져 버렸다. 그래가지고 챔피언 먹었다. 그 때 라디오로 들었는데 그것이 유명한 말이다. 그러면 그것을 안 사람은 안다. 그러면 그것을 단어적으로 설명하면 챔피언을 알겠는데 먹었다는 말은 단어 의미만 가지고는 모르겠지요? 그러면 그 의미의 확대를 해석할 것이다. 먹었다는 말이 밥 먹는 것만 먹었다는 말이 아니라 무엇을 얻었다는 말도 먹었다는 말이 된다. 의미가 확대 해석이 될 것이다.  

 

그런다 할지라도 만일에 어떤 사람이 국민학교에 다니는데 집에 들어오면서 '엄마 나 오늘 챔피언 먹었어.' 엄마가 '아, 이놈이 권투 대회에 나갔었나?' 그렇게 알아들을 부모가 한 명도 없고 '응 오늘 너 시험 잘 봤냐?' 이렇게 물어 볼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나? 그런데 월말 고사보고 와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그 말은 월말 고사 일등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만일에 이 사람이 대학교 시험을 보고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그러면 이놈 시험 잘 봤나보구나.' 아직 발표가 안되었으니까. 그런데 합격자 발표는 보고 와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하면 '아, 일등 했구나' 하면 똑 같은 말을 써도 이 사람이 어떤 배경에서 쓰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져 버린다.


그러니까 단어 풀이만 하고 문장 구조만 봐 가지고는 그 의미를 모른다. 그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의미로 이 말을 썼는지 그 사람이 쓰는 배경들을 보아야만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특별히 성경 언어를 그전에는 고전어 단어 연구 그것이 그 단어가 희랍어에서는 어떻게 쓰고 히브리어에서는 어떻게 썼는가? 여기 까지만 추적하고 그 추적도 일반 언어로 추적하고 그것만 가지고는 의미 설정이 안된다. 왜냐하면 항상 구약은 모세 언어로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세 때 언약을 체결했으니까. 신약도 모세 언어가 토대다. 그리고 나서 이 구원의 의미가 그 문장 그 당시 구원 역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온전히 성취되었는지 그렇게 읽을 때만 신약 교회가 읽을 수가 있다. 그러니까 항상 문맥을 봐야 한다.

 

그 사건은 그 상시 것을 그 당시 기록했다 할지라도 그 당시 누가 기록했냐 이것만 가지고는 해석이 안되고 그것이 무엇을 위해서 기록되었는가를 읽었을 때만 의미가 있다. 가령 여호수아가 여호수아서를 기록했다. 전쟁 종군 기사처럼 사건을 보고 그대로 기록했다. 그러면 우리들은 사건을 아는 것을 관계가 있지만 그 여호수아의 전쟁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런 문제들은 잘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만일에 이것이 다윗 왕조 초기에 그 왕조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서 기록했다. 그렇게 이해되면 여호수아가 어떻게 온 땅을 정복했는데 어떻게 중요한 요소들은 정복하지 못했는가? 그러나 다윗은 가장 강력한 여부스 족속을 정복했는가? 그렇게 했을 때 다윗 왕조의 특성을 드러내려고 여호수아서를 기록을 해줘야 한다.

 

특별히 사사기를 보면 왕이 없음으로 제 좋은 소견대로 행하더라. 그러면 사사기 때는 그 당시 역사적인 상황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한참 뒤에 왕이 나타나니까. 그런데 사사들의 통치를 왕의 통치하고 쭉 연결시켜서 기록을 해준다. 그러면 그것은 특별히 사사 당시에 누가 기록을 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편집해서 왕국의 권위 있는 문서로 요새 같으면 성경으로 그렇게 기록했으면 그것은 사사 당시의 문제가 아니라 다윗 당시에 기록을 해줘야 한다. 그래야 다윗 왕조가 필연적으로 출현해야 될 의미와 다윗 왕국의 성격을 드러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전에는 영감설 일점일획 어김없이 기록됐다. 한참 후에 기록한 것은 권위가 없다. 이런 일반 증인에 대한 관점으로 들어가니까 그 당시 누가 기록했는가 거기다 만 총 초점을 맞춘 것이다.  

 

사무엘서 하면 사우엘이 기록했고 이런 말이다. 그러면 사무엘서를 사무엘이 기록했는가? 요새 학자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전부 왕국에다가 돌린다. 그러니까 아마 제가 하고 있는 말은 그 당시 누가 기록했는가를 학문적으로 밝힌 것은 아니지만 구원 역사에서 이 기록과 구원 역사의 관계를 해석 한데는 제가 하고 있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전에는 그 당시 그 사람이 기록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요새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반 역사까지라도 그 왕조가 든든히 섰을 때 이전의 기록들을 다시 편집한다. 어떻게 이전에 의거 사건과 이 왕조의 성격과 연결을 시키려는 것이다. 끊임없는 민족의 의거가 드디어 여기서 열매를 맺었다. 그렇게 했을 때만 이 왕조가 그 특성을 드러내고 이 왕조를 통한 미래의 통치가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구약 역사의 마지막 사건은 예수가 지상 생애다. 예수가 지상 생애를 보도하는 4복음서가 기록적으로는 예수 당시의 이야기를 토대로 하는 것이다.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도 교회의 책이 되도록 기록되어 보존 된 것은 예수 당시가 아니라 예수의 부활후 곧 예수께서 하늘에 중보자로서 그 나라를 완성하셨을 때다. 예수의 하늘 통치와 지상 통치를 연결시킬 수 있도록 복음서를 기록한 것이다. 땅에서 그렇게 행하신 그분이 곧 보좌에 계신 그분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나님 앞에는 일으키심을 받아서 보좌에 계신 분이다. 그렇게 했을 때 예수의 지상 생애의 통치를 부활의 빛으로 읽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해준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첫 언약과 새 언약의 두 경륜에서 집행이 되었다. 그러므로 첫 언약이 모세 언약이 모세 이전과 이후의 역사를 해석하는 토대요 빛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예수 이전과 이후의 역사를 해석하는 온전한 빛이다. 새 언약은 시내 산에 첫 언약을 하늘에 속한 성소로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약은 모세 언약을 근본 의미로 하여 해석되어야 한다. 모세 언어와 제도가 모든 성경 해석의 토대이다. 모든 성경은 모세 언어를 토대로 하여 문학적 문맥과 구원 역사 문맥 위에서 해석하며 기독론적인 해석을 통하여 교회의 책으로 읽는다. 그것이 성경은 해석하는 방식이다.

 

똑 같은 말도 어떤 문장에 들어가 있는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그러니까 단어가 같다고 해서 똑 같은 의미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항상 문학적인 문맥 그 문장 구조가 어떻게 되었는지 어떤 기록 방식을 가지고 있는지 그런 것을 봐야 되고 이것이 그 당시 구원 역사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해석해야 된다. 이것이 그 문장의 역사적인 의미다.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교회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렇게 읽으면 신약 교회의 책이 된다. 만일에 그렇게 읽지 않으면 그 책은 영원히 휘장으로 가리워지고 신약 교회의 책이 되지를 못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역사를 경영하기를 두 경륜으로 집행시켰다. 물론 모세 이전의 이야기도 있지만 성경은 말하자면 모세 이전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온 세상의 하나님이다. 모세 언어로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항상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온 세계의 하나님이다. 그것이 신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지 모세 이전에도 천지 창조의 하나님이시고 노아를 어떻게 하고 뭐 그런 이야기를 할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곧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이것이 성경에서 증거 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면 역사적으로 볼 때야 이스라엘의 출생 이전에도 하나님은 계셨다. 많은 역사가 흘러갔다. 그러나 그것도 그렇게 직접 접근을 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한 것이 성경이 말하는 역사적인 구조다.  

 

 첫 언약은 에덴의 언약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모세 언약이 첫 언약이라고 히브리서는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 둘째 언약은 예수님이 세우신 언약이다. 우리야 신학적으로 창3장15절이 은혜 언약의 시초라 그러지만 그러나 성경에서 말할 때는 항상 모세 언약을 첫 언약으로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경영하기를 모세를 중보자로 세우신 그런 경륜의 시대와 하나님의 아들을 중보자로 세우신 새로운 경륜의 시대 두 경륜의 시대에서 하나님은 역사를 경영하신다. 그러기 때문에 모세 이전의 문제도 모세 언어로 읽어야 한다. 더 설명하면 지금 부활하신 예수의 빛으로 역사 이전을 읽는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역사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지금 앞으로 미래에 될 일도 부활하신 예수의 빛으로 읽어야 된다.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그 나라가 왔거든요. 이 부활하신 예수를 떠나서는 역사의 전과 후를 읽을 수가 없다.

 

그러면 구약 성경은 어떻게 하겠는가? 모세 때 하나님이 강림하셔서 함께 하시는 나라를 설립하셨다. 그리고 모세에게 창세기를 기록하게 하셨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천지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기록하도록 했다. 그러니까 창세기를 모세 언어로 읽어야 되지 고대 문헌을 연구하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된다 그 말이다 그런데 창세기의 기록 형식을 보면 이야기 체로 역사를 기술한다. 역사 기술 방식은 사실을 보도하는 이야기 체가 역사 기술 방식이다. 열 개의 족보 형식으로 구분된다. 문학적인 구조를 보면 열 개의 족보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족보라는 말은 성경에서는 대략이 어떠하다. 계보는 이러하다. 후예는 이러하다. 그런 말들로 되어 있다. 내용상으로는 창조 시의 에덴에서부터 처음 세계를 홍수로 심판하여 새롭게 하시고 노아와 함께 하시기까지와 그러니까 처음 창조 에덴에서부터 노아 홍수를 통해서 의의 세계를 새롭게 짓는 거기까지와 그 다음에 가나안 땅에서 족장들의 역사 그렇게 되어 있다.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기업으로 주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는 역사다. 그전에는 이것을 나눌 때 그냥 형식상 인류 고대사 족장들의 역사 하니까 이야기가 안된다. 그러니까 고대사처럼 읽어 버린다. 그렇게 하지 말고 에덴에서부터 노아 홍수로 만물을 새롭게 하시기까지 옛 세계를 새롭게 하시기까지 옛 세계를 새롭게 하고 완성하시기까지 거기까지가 하나고 거기로부터 이제 가나안 땅을 구별하시고 가나안 땅에서 조상들과 함께 했던 조상들의 역사 두 구분으로 되어 있다.

 

창조부터 노아까지에 다섯 개의 족보가 있고 조상들의 역사에 다섯 개의 족보가 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나누는 것은 나눈 것을 읽으면 되겠다. 짧게 붙이는데 재미 붙이지 말고 내용이 드러나도록 요약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자꾸 익혀야 한다. 옛 세계가 노아 때 완성되었다. 홍수를 통해서 의의 세계로 완성되었다. 바로 그 역사가 족장들에게서 반복될 것이다. 족장들의 가나안 땅의 역사다. 그것이 애굽까지 내려간다. 족보는 구원 역사인 성경이 하나님의 생명 역사를 기술하는 형식이다. 왜냐하면 생육하고 번성하라 했기 때문에 족보적인 방식으로 한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복을 주셨고 죄와 사망의 권세에도 불구하고 이 생명의 역사를 진행시킨 것이 구원 역사다. 먼저 출생에 의한 총체적인 족보를 기록하고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의 언약의 목표를 향해서 진행되는 계통의 족보를 기록하는 방식을 동심원적으로 반복한다.  

 

가령 우리 나라 족보식으로 하면 누구 집인데 아들들을 쭉 기록한다. 그리고 그 집 아들들이 이런 잘난 아들들을 기록한다. 그리고 그 집 아들들을 쭉 기록하고 나서 그 다음 한 장을 넘기고 그런데 그 아들 중에 누가 있느니라하고 한 아들을 지목하고 이 가문이 그 쪽으로 내려간 것이다. 그런 기술 방식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가문에 속한 전체를 기록하고 나서 언약이 진행되는 새로운 대표자를 뽑아서 다시 기록한다. 그것이 창세기가 족보를 기록한 방식이다. 그냥 쭉쭉 연결된 것이 아니라 전체를 그 중에 그 가문이 내려가는 계통을 따라서 다시 기록한다. 그런 기술 방식이다. 그러면 창1장하고 2장은 어떤 관계가 있을 듯 한가? 1장에는 하나님이 무엇을 만드셨는가? 만물을 많이 만드셨다. 2장에는 아담 만든 이야기를 다시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아담 만든 이야기는 1장 만물을 만드실 때 이미 언급이 되었다. 그리고 나서 천지의 대략은 이러하니라 하고 사람 창조를 다시 기록한다. 이 아담이 언약의 머리라고 기록한다. 그러니까 아담의 제대로 의미는 2장에 나타난다.

 

여러분이 아브라함의 후손 이야기를 봐도 아브라함이 후처에게서 누구누구 낳은 이야기를 쭉 기록하고 그 다음 땅까지고 떠난 이야기하고 이스마엘을 쭉 기록하고 그 다음 이삭을 기록한다. 족보를 기록할 때도 그리고 제대로 하려면 후처들을 기록하려면 저 뒤로 돌아가야 될 것이다. 이스마엘이 장남 이삭이 그 다음 후처들의 이야기가 그 다음 이렇게 기록하면 맞을 것 같은데 오히려 후처들 이야기 먼저 기록하고 그 다음 이스마엘 이야기 기록하고 그 다음 이삭 기록이다. 그런 방식으로 진행된다.  

 

노아의 아들 셈 함 야벳도 실은 셈의 계통으로 내려간다. 셈이 장자인데도 앞쪽으로 세우지 않고 뒤쪽으로 세워 났다. 야벳 함 셈 그리고 다시 셈의 족보 중에서 기록한다. 이런 식으로 쭉 진행된다. 왜냐하면 이런 형식을 잘 봐야 구조에서 여기가 차지하는 문장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창1-2장 관계가 잘 규명될 수가 있다. 왜냐하면 1장의 창조 기사하고 2장의 창조 기사하고는 너무 다르다. 1장은 식물을 다 창조하고 사람을 만드셨는데 2장은 사람이 없음으로 땅은 안개만 가득하고 채소가 나지 아니하고 그리고 사람 만든 이야기다. 전혀 거꾸로 되어 있다. 그러면 지금 사람이 차지한 언약적인 위치가 무엇인가는 2장에서 설명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에서 새로운 족보가 나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족보의 이름 곧 그 족보의 머리 그 사람이 머리가 된 족보에서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출생시킴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그 사람과 그 후손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된 것이다. 그리고 그 족보에 속한 자들은 거기에 참여하도록 출생된 것이다. 그 족보에 묶어진 사람은 전부 그 족보에 포함된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역대기에서 족보를 기록하는데 아담으로부터 다윗 그 왕들에 이르는 족보를 쭉 기록한다. 그런 족보는 아직 나타난 적은 없다. 아담 때부터 쭉 기록한다. 기록함으로 돌아온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약속을 보증한다. 이스라엘 성소에 계신 하나님은 천지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역사의 처음부터 함께 했던 하나님이 아니냐? 그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복을 주셔서 다윗의 후손 왕들까지 온 것이다. 그 하나님이 돌아가서 성소를 지으라고 그랬다. 그 하나님이다 그런 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옛 언약의 성취인 신약의 처음 책인 마태복음도 족보로 시작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그러나 이 족보는 족보의 머리가 맨 나중에 출생된 분으로 언급된다. 다른 족보는 누구누구의 족보니라 그러면 그 사람이 족보의 머리고 바로 그 족보로부터 출생된 후손이 있다. 그리고 나머지 쭉 이어지는 후손들이 있다. 그런 구조인데 예수의 족보는 예수로부터 시작되지 않고 예수로 끝나는 족보다. 그런 족보가 구약에는 없었다. 맨 나중에 출생된 분으로 언급한다. 예수의 출생에서 하나님의 출생의 역사 곧 생명의 역사가 완결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그후로 예수는 누구를 낳고 그런 이야기가 없다.  

 

그를 믿는 모든 백성에 그에게 참여하지 이제는 누구를 낳고 하는 방식은 없다. 왜 그에게서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하는 복이 완결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지금은 혈통으로 참여하는 복이 아니다. 믿음으로 누구나 참여한다. 그래서 예수의 족보는 끝에 예수 출생으로 마무리된다. 성령으로 출생된 예수에게서 영의 속한 인류의 새로운 시대가 열렷다. 그전에는 혈육을 따른 출생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친히 성령의 권능으로 그 아들을 낳도록 하셨다. 새로운 인류의 출현이 여기 있는 것이다. 누가는 예수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서 하나님에게 이르게 함으로 하나님에게 이르게 하는 분으로 예수님을 증거 한다. 드디어 예수에게서 하늘에 이르는 생명의 길이 열렸다고 증거 한다. 족보를 예수로부터 하나님에 이르도록 기록한다. 이런 족보도 없다. 신약의 족보 방식이 독특하다. 그래서 족보 기록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완결됐다고 말한다. 그것이 창세기에서 기록한 족보 기록 방식이다.

 

만일에 개론을 한 번 더 하려면 이제 창세기 전체를 개략적으로 요약을 해야 될 것이다.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리고 나서 구체적으로 풀어 나가면 될 것이다. 이제 창세기 1장을 읽을 때 인류 고대사를 연구하면 안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아무 증인도 없다. 그것을 기록한 사람은 모세다. 아담도 본적이 없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창조했을까 신학적으로 읽어 들어가도 못 읽는다. 모세 언어로 읽어야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이제 그것을 과학과 맞추려고 하니까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적인 언어가 아니다 그러면 당장 공격하기를 저 사람은 신 복음주의 자구나. 성경은 구원에 관계된 것만 있고 과학과는 무관하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인 성경을 기록한다는 의미로 하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내 말이 신 복음주의하고 비슷하게 들린다고 해도 그렇게 들으면 안된다. 아까 말하기를 기록은 사실이라 할지라도 기록의 의미는 그 왕조가 관계된 의미로 해석되어 있다. 하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역사적인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그것은 더구나 명시적인 언어이니까. 그러나 그 의미 해석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관계된 의미로 읽어야지 우주론적인 천지 창조의 기원을 탐구한 방식으로 읽어 봤자 안된다 그 말이다.  

 

오늘은 족보 구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생명의 역사를 완성했는가? 이 족보 기록 방식은 창세기 기록 방식만이 아니라 바벨론에서 돌아왔을 때 역대기 기록 방식이고 그리고 새 언약의 책을 여는 기록 방식이다. 그런데 특별히 신약 성경의 족보 방식은 구약 족보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그런 기록 방식은 구약에는 없다. 그리고 에덴에서부터 쭉 기록한 족보는 역대기 족보지 없다. 그런데 창세기는 족보는 그렇게 기록되지 않고 열 번의 족보가 있다. 그 족보마다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역사가 집행되는 방식이다. 특별히 아브라함의 후손 이삭의 출생에서는 그 역사는 구약 경영에서는 혈육을 따른 출생이 아니라 약속을 따른 새로운 인류의 출현의 역사가 바로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데라의 후예 아브라함의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다. 그런 이야기를 기록한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 나라 전통 가치관이 무너지고 서양 가치관이 들어오니까 이제 가족 관계도 누구 후손인가 하는 것은 별볼일 없고 지금 현실이 중요하지 않냐 해서 족보에 별로 관심이 없다. 그것은 소위 성경적인 역사관도 아니고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개념이다. 누구 후손인가는 관계가 없고 이 사회에서 기능만 문제가 되니까. 가령 직업만 문제가 되지 누구 후손인가는 상관이 없도록 되어 있다. 물론 전통적으로 누구의 후손 해 가지고 조상들 것을 우려먹으니까 몹시 잘못됐기는 했지만 그러나 우리의 존재라는 것은 그냥 출발하지는 않는다.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하는 축복 때문에 조상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씨앗이 출생하고 그렇게 해서 조상들이 받았던 그 기업을 물려받고 이렇게 해서 점점 영광 부요함으로 발전하는 것이 실은 역사다. 더구나 이스라엘은 이 언약 역사를 맡았기 때문에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하는 것은 구원받은 백성으로 특징이다. 그래서 그 족보를 가지고 기록을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족보를 가지고 구원을 자랑할 수는 없다. 우리 몇대손에 군수가 있고 이런 이야기나 자랑할까 그러니까 내가 지금은 망했어도 뿌리는 그렇지 안해야 좀 알아 주라. 이런 이야기나 될까 그리고 그전 양반들은 과거 시험도 보지 않고 조상들의 것으로 대대로 먹고 쌍놈 해 가지고 왕노릇 해 버렸다. 그러다가 서양 사상이 들어오니까 족보는 아무 가치 없고 옛날 문서고 더구나 요즘은 한자라 읽지도 못하고 별관심 없게 되어 있지만 실은 생명은 부모로부터 이어 받는 것이고 역사는 그렇게 진행되는 것이지 그냥 지금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조상들로 자랑할 수도 없고 조상들로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유대인이다. 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거기에서 집행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언약밖에 있었다. 그래서 족보 기록 방식으로 말한다.


다윗의 족보를 보면 그 족보가 끊어졌다가 이어진 적이 있다. 나오미 때 그 집이 다 죽어 버렸다. 그런데 보아스가 룻을 얻어서 기업을 얻었다. 만일에 그런 은혜의 제도가 아니면 다윗 왕조는 출현이 안되게 되어 있다. 그런 식이다. 그러니까 그런데서 생명의 약속이 나타난다.

 

인류 고대사로 읽지 말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천지 창조의 하나님이다 그렇게 읽어라 그 말이다. 모세 언어로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했을 때 모세 제도에 임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처음부터 역사에 함께 하셨는가? 그러니까 처음부터 함께 하신 것도 모세 제도 중에 함께 하신 의미로 읽어라 그 말이다. 그래야 설명이 된다. 그래서 드디어 모세가 기록하도록 한 것이다. 그것이 중요한 의미다.

 

 

창세기 개론  2 강


오늘은 주보를 읽으면서 창세기 전체적인 개요에 대한 전반부를 하고 다음에 한 번 후반부를 하고 그 다음 1장부터 몇 장을 강론하도록 하겠다. 창세기는 열 개의 족보로 되어 있다. 창조 시부터 노아까지 그리고 조상들의 역사에서 각각 다섯 개가 있다. 그 족보는 구원 역사인 성경이 하나님의 생명의 언약 역사를 기술한 형식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복을 주셨고 죄와 사망의 권세에도 불구하고 이 생명의 역사를 진행시킨 것이 족보의 역사다. 새로운 족보는 하나님께서 그 족보 이름 곧 그 족보의 머리에게서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출생시킨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창조시킨 것이다. 족보의 내용은 그러한 사실을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족보의 끝부분에는 족보에 기록된 후손들을 총체적으로 기록하고 이어서 하나님의 언약이 진행되는 선을 따라 결론을 맺고 그리고 다음 족보로 넘어간다. 이러한 형식을 반복해서 하나님께서 그 역사를 목표를 향해서 진행시킨다.


창세기에서 역사의 목표는 무엇인가? 처음 세계를 홍수 심판을 통해서 새롭게 하시고 노아를 머리로 하여 만물과 맺으신 영원한 생명의 언약에서 한 단락을 이룬다. 거기가 일단 목표다. 그리고 새로운 성소 가나안 땅에서 복의 근원으로 세우신 아브라함과 그 후손으로 말미암아 모든 족속에게 미치는 복 거기서 그 복이 선취적으로 창세기에서 이루어지고 또 완전한 것을 소망하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출생과 죽으심과 부활에서 생명과 승리의 역사 그 목표에 도달했고 그를 믿는 교회로 이것을 누리게 하셨다.


창세기는 열 개의 족보로 되어 있는데 창조부터 노아까지 다섯 개 족보가 있고 그리고 족장들의 역사에 다섯 개의 족보가 있다. 그러면 이 족보는 어떤 형식이냐면 하나님의 출생의 역사가 족보다. 그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 이 복을 주셨는데 새로운 번성의 조상이 오면 그것은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누구의 계보니라 하고 이름이 있으면 그 이름이 곧 머리다. 그 머리에게서 새로운 출생 다른 말로 하면 새로운 창조 그 역사를 시작하신 것이고 그 족보의 내용은 그것을 쭉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족보의 결론쯤 도달하면 족보의 머리에서 이루신 그 생명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요약을 하고 그 다음 그 족보 약속이 새로운 단계로 진행되는 선을 따라서 결론을 맺고 다음 족보로 넘어간다. 그것을 반복해서 진행시킨 것이 창세기다.

 

그러면 창세기에서 역사의 목표는 어디가 있느냐? 했을 때 두 번에서 목표를 볼 수가 있는데 처음에는 창조부터 노아까지에서 노아 때 그리고 족장들의 역사에서 야곱 때 나타날 수가 있다. 그러면 창세기에서는 노아 때 홍수로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노아를 머리로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시고 영원히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는 영원한 생명의 언약을 체결하셨다. 거기서 한 목표에 도달한 것이다. 거기가 한 단락이다. 그 다음에는 이제 에덴이 아니라 새로운 가나안 땅이 새로운 성소인데 거기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복을 주셨다. 이 복이 아브라함 당시에도 선취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야곱 때 아브라함의 후손이 애굽에 내려가고 야곱의 후손 때문에 애굽과 온 세상이 구원을 받는다. 복의 근원이 되리라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했다. 복의 근원이 되리라 했는데 야곱의 아들 요셉 때문에 온 세상이 구원을 받는다. 그리고 요셉이 죽을 때 나는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 여전히 가나안 땅에 소망을 두는 소망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다.


이제 출애굽기에서는 그 소망으로 자기 백성을 인도하고 있는 과정 그것이 출애굽기의 언약 체결이 되는 것이다.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이 역사에서의 완성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이제 새로운 출생의 역사가 시작됐고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그를 믿는 백성들이 하늘에 속한 영원한 생명과 승리를 누리도록 하신 데서 역사가 목표에 도달했다.

 

이제 전반부 노아 홍수까지 요약을 하도록 하겠다. 에덴에서 노아 홍수까지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냐면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사람과 함께 하신 그 역사의 시작과 홍수 심판을 통한 완성을 말한다. 에덴에서 시작하고 노아 홍수에서 완성하셨다. 거기까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 에덴에서 노아 홍수까지다.


1장은 2장의 서론 격이다. 그래서 1장은 무엇의 족보니라 그런 말은 없다. 오히려 족보니라 하는 말은 2장4절에 천지 창조의 대략이 이러하니라 그런 말이 있고 1장에 그런 말이 있지는 않다. 그래서 1장의 2장의 서론적인 성격이다. 그러면 이제까지 말씀 드렸던 것 어떤 족보가 나오면 그 족보에서 이루신 일이 그 족보의 내용인데 그것의 결론쯤 도달하면 족보에 속한 것을 전체적으로 기록하고 그리고 그 약속이 진행되는 선을 따로 뽑아서 결론하고 다시 진행하고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앞에 있는 족보의 결론은 뒤에 있는 족보의 토대를 놓는다. 왜냐하면 앞에 있는 족보의 결론에서 새로운 족보의 머리를 지시한다. 그 성격이 창1장의 성격이다. 1장에서 하나님께서 만물을 만드셨다. 족보 식으로 하면 한마디로 만물을 낳았다. 이것저것 다 지으셨다. 그 중에 제일 끝에 가면 사람을 지었다 하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사람 이야기를 다시 2장에서 시작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가령 아브라함이 아들들을 여러명 낳았으면 죽을 때쯤 되면 후처의 아들들은 이러고 그리고 그들은 다 떠나 보내고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땅을 주었다. 그리고 또 이스마엘을 기록하고 그 다음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그러니까 제일 뒤에 후처의 아들들 이스마엘 이삭 한꺼번에 쭉 나온다. 그러면서 이삭에게 모든 것을 물려줬다는 말을 결론하고 나서 그 물려받은 이삭은 어쩌냐? 다시 이삭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또 이삭의 아들들을 보면 에서와 야곱이 있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를 쭉하고 결론쯤 되면 드디어 야곱이 자기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에서는 기업을 받아 떠나고 있다. 거기서 에서와 야곱을 다시 기록하고 오히려 에서 족보가 먼저 나온다. 그리고 나서 야곱이 아들 낳는 이야기다. 거기서는 요셉 이야기로 들어가겠지요?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거의 모든 형식이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족보 구조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본문도 어떤 앞 단락의 결론에 이르면 그 결론은 새로운 단락의 출발점을 거의 가져온다. 본문이 연결되면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그런 구조를 보면 되겠다.


1장에도 창조의 이야기가 나오고 2장에도 창조 이야기가 나오니까 사람 창조가 전혀 거꾸로 되어 있어서 이것이 무엇이냐 해 가지고 자유주의 자들은 여러 문서 근원을 이야기한다. 뭐 제이문서 티문서니 해 가지고 이것은 근원이 다르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셨으면 그 중에 만물의 대장이 사람이다. 사람에게서 약속이 진행된다. 때문에 사람에 대해서 기록한다. 이런 식이다. 그 다음에 아담의 아들들로 보면 가인과 아벨이 있다. 하나님은 아벨은 기뻐하신다. 그런데도 족보 기록은 가인 족보를 쭉 먼저 기록하고 그 다음에 죽음 아벨 대신에 셋을 낳고 그 다음에 아담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아담이 자기 형상으로 셋을 낳고 실은 죽은 아벨 족보다. 그런 식으로 쭉 기록을 한다.


그래서 1장은 천지와 만물의 창조 이야기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렇게 되어 있다. 천지와 만물의 창조가 다 이루었느니라. 2장1절에 그렇게 결론되고 있다. 그래서 여러 종류를 만드셨는데 6일 동안 만드셨다. 그런데 '보시기에 좋았더라'하는 것이 결론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주적인 성소다. 하나님이 지으셨는데 다 좋다. 보시기에 좋다. 그런데 한꺼번에 다 만든 것이 아니라 날을 따라서 6일 동안 만드셨고 제 7일이 날의 왕관이 되겠지요? 항상 끝이니까  모든 만물 중에는 왕관이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다. 그렇게 지으셨다. 그것이 천지 창조 창1장의 문제다. 그런데 무엇으로 지었다고요? 말씀하시매 이루었더라.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려고 그러냐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다. 천사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고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 그렇게 해서 아름다운 성소로서 삶을 살아 줘야 한다.

 

만물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이루셨고 아름답게 되었다. 사람도 그렇게 순종해 줘야 한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지으셨는데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매 이루셨다. 그 말씀했다는 말이 항상 앞에 나오고 강조되어 있다. 왜냐하면 바다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모래 턱에 오면 멈춘다. 그런데 내 백성은 내 말을 안 듣고 마음대로 한다.

 

우상은 말을 못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것이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에 대한 상이다. 시내 산에서 말씀하심은 나는 우상이 아니다. 말 못하는 우상이 아니다. 너희들은 내 말을 잘 들어라 만물을 내가 말하는 데로 잘 움직이지 않냐 너희들은 내 말을 들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만물이 아름다운 질서와 충만함을 가지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렇게 지어졌다. 이것은 우주적인 성소다. 그것이 1장에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제가 지금 문단을 기록할 때 뒤에 밑에는 별표가 붙어 있다. 그것이 말하자면 족보의 결론에 해당되는 부분이고 그 족보의 결론에 해당되는 부분이 다음 족보의 토대를 이루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별표를 붙여 놨다. 그래서 1장은 제일 길게 기록된 것이 무엇인가? 5일 동안 창조를 쭉 기록했다. 그리고 제일 끝에 기록이 사람 창조인데 다른 5일 창조하고는 다르다.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도 다르다. 그리고 7일은 다른 6일의 창조하고 다르다. 그것이 결론이다. 그리고 그 결론을 가지고 새롭게 시작한 것이 2장이다. 사람 이야기를 다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대리자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다른 것도 다 좋았지만 보시기에 심히 좋은 그 중에 심히 좋은 장소가 어딘가? 에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마치 가나안 땅이 온 땅의 중심인 것처럼 에덴은 처음 창조된 세계의 중심 지역이다. 온 우주가 성소인데도 에덴은 특별한 성소다. 그런 구조를 가지고 기록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2장4절에는 천지창조의 대략 해서 천지 창조의 족보를 기록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사람과 에덴에서 그런 이야기다. 그래서 기쁨의 동산 에덴에서 에덴은 곧 기쁨의 동산이다. 풀어서 쓴 것뿐이다. 기쁨의 동산 에덴에서 첫 사람과 그 후손과 함께 하신 역사다. 2장에서는 무엇을 기록하고 있냐면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과 함께 하신 역사의 시작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직무가 무엇인가? 대리 경작자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장소는 에덴이다. 거기서 직무를 받았고 언약을 맺었다. 거기 돕는 배필로 하와를 주었다. 그것이 역사의 처음 장면이다. 온 우주가 성소이지만 특별히 에덴은 기쁨의 동산이고 생명이 가득하고 그런데 누가 대리자냐면 하나님의 대리 경작자로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다. 사람은 그 직무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아니함으로 집행할 것이다. 그런 언약 체결이 나와 있고 그 언약의 동행자로 여자를 지어 줬다. 그런 이야기가 2장의 족보 내용이다.


그리고 이제 다음 족보로 넘어가는 2장 족보의 끝이 무엇이냐면 뼈중에 뼈요 살중에 살로 연합했고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을 이룰지니라. 둘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더라. 그렇게 되어 있다. 다른 족보들을 보면 그 조상이 죽었더라 하면 족보가 끝나고 그리고 넘어간다. 여기서는 그런 의미로 족보의 결론이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을 이루가 해 놓고 그 다음에 둘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럼을 몰랐다. 그것이 처음 에덴에서 하나님과 함께 했던 역사요 이 역사가 목표 지향하는 바다. 온전한 연합. 부끄럼이 없는 완전한 교제 그것이 역사가 2장에서 역사가 지향하는 바다.

 

그 다음에 3장을 보면 이제 그 문제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나온다. 돕는 배필이 완전한 배필이 됐는지 또 완전한 연합을 가졌는지 또 그 일이 아담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함을 통해서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그런 문제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3장에서는 아담이 실패하고 그리고 그에 대한 저주와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언약이 기록되어 있다.


간교한 뱀이 하나님의 언약 관계를 파괴하도록 했다. 먹으면 하나님처럼 지혜롭게 되리라고 먹고 나니까 하나님과 관계가 어떻게 되었다고 기록하기 전에 즉각 아는 것이 그들의 눈이 밝아 벌거벗은 줄을 알았다.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1장 족보의 목표는 연합과 온전한 교제 번성 문제다. 에덴에서 가장 큰 기쁨의 동산에서 충만한 생명의 교제를 나누라고 거기서 아담이 하나님의 대리 경작자로서 수고하는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아니함으로 이 충만한 생명의 역사를 진행한다. 그 일에 있어서 하와는 한 몸이요 돕는 배필로서 수고하도록 했고 이 몸의 교제가 온 인류에 확산되는 것이 역사의 목표인데 3장에 보니까 이 뱀이 언약 관계를 파괴하도록 유혹했고 그들이 먹은 즉시 눈이 밝아서 서로 벌거벗은 줄을 알았다. 그래서 무화과 잎으로 가리웠다. 하나님의 심판 이야기는 그 다음에 나오고 둘이 연합 관계가 깨뜨려진 것이 먼저 나온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함께 함이 인류에게서 나타나게 하는 것이 역사의 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교한 뱀이 유혹했는데 먹으면 하나님처럼 지혜롭게 되리라 했는데 먹고 몸이 벗은 줄을 알았다. 이것은 분명히 먹으니까 그들이 지혜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찾으시니까 숨었다. 우리가 벌거벗어서 숨었나이다. 하나님이 누가 너의 벌거벗었음을 알렸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먹었냐? 그렇게 물으셨다. 그러니까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을 그들이 먹음으로 눈이 밝아서 벌거벗은 줄을 알았다. 그러면 그 먹는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다. 지혜의 나무였다.

 

그런데 먹자 말자 눈이 밝아서 부끄러워서 가리웠다. 그러니까 이 지혜는 하나님이 먹으라고 해서 먹는 그런 지혜가 아니고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먹어서 자기들이 알고 있는 지혜다. 그러니까 그들이 하나님이 그들을 보시는 방식대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지혜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서 먹고 독립했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존재가 벌거벗은 부끄러운 존재 인줄 알았다. 지금도 우리들이 그런다. 가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혜대로 주님의 상에 앉아서 먹고 마시는 교제대로 형제를 알면 형제를 부끄러운 존재로 알지를 않는다. 주님께서 몸을 주셔서 연합시키는 완전한 영광의 존재로 서로 알지 아 형편없구나 그렇게 알지를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서 그런 것을 보기 시작하면 거기서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덧입고 주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그런 서로의 부끄러움이 없는 완전한 교제를 누리지를 못한다. 하나님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그것을 먹고 그것이 그의 지혜다. 그렇게 했을 때 그것은 눈이 밝으면 밝을수록 서로의 부끄러움밖에 아니다. 그래서 먹은 즉시 서로가 부끄러워 가리웠다.


그 다음에 심판 이야기가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뱀과 그 후손 여자와 그 후손이 싸울 것을 말씀하셨고 여인의 후손의 뱀의 후손의 머리를 밟을 승리를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 이제는 기쁨의 동산 충만한 생명이 아니라 저주와 죽음의 질서 가운데 살도록 하셨고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복을 주셨기 때문에 하와는 모든 산 자의 어미다. 이처럼 죄와 저주 죽음의 그런 세계에서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입히셔서 그들의 부끄럼을 가리워졌다. 그것이 첫 범죄와 하나님의 약속이다. 이제는 그들이 가죽옷을 입으면 서로 부끄러워서 무화과 잎으로 서로 부끄러워 가리우는 그런 것은 없다. 그렇게 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 결론이 에덴의 쫓겨났다 하는 것이 그 족보의 결론이다.


이제 그들은 기쁨의 동산에 산것이 아니라 저주받은 땅에서 사는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하와는 산 자의 어미고 그들을 가죽옷으로 가리워서 부끄러운 수치를 면토록 했다. 그것이 에덴에서 범죄한 이후의 인류의 역사다. 그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4장이다.

 

특별히 가인은 에덴 동편 놋 땅에 살았다고 그랬다. 그런데 4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아이를 낳는 기사와 그들이 싸운 이야기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죽은 아벨 대신에 셋을 주신 승리의 이야기 그런 이야기가 4장에 기록되어 있다.


아벨과 가인이 출생했다. 하나님이 생명의 약속이 여기 나타났는데 거기서 아벨과 그 예물은 받으시고 가인을 받지 않으셨다. 이것을 이제까지 우리들은 그 제사법이 어떤가 이쪽으로 연구를 했다. 그런데 이것은 그 말이 아니라 앞에 있는 기쁨과 연결을 시켜야 된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기뻐하셨거든요? 하나님이 특별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셨고 그들을 큰 기쁨의 동산에 두셨다. 그들이 범죄 하니까 여기서 쫓겨났다. 그들이 이제 저주받은 땅에 살도록 되었다. 에덴에 살지를 않는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하와를 산 자의 어미로 복을 주셔서 생명의 약속이 진행되도록 했고 그리고 가죽옷으로 가리워 주셨다. 그렇게 했을 때 그 다음 문제는 누가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인가 하는 문제다. 쫓겨났거든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쫓아 내셨다. 그런데도 후손을 출생케 하셨고 그 후손 중에 아벨을 기뻐하여 그 예물을 기뻐하셨다. 아벨을 기뻐하신 증거는 하나님께서 그 예물을 받으신 것이다. 히브리서도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이 예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 문장에서 해석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이 받으신 증거가 그의 예물을 받으신 것이다.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아벨을 기뻐하셨다.

 

만일에 아벨의 후손 중에 하나님이 기뻐하신 자가 없으면 아무리 가죽옷을 가리워 입혔어도 그들이 저주받은 에덴 동편에 살면서 만일에 기뻐하신 후손이 없으면 그 나라는 끝장 나는 것이다. 마치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신 것처럼 아담의 후손 아벨을 기뻐하시고 그의 예물을 받으셨고 가인은 받지 않으셨다.

 

이것은 왜 그랬는가? 이론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마치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한 것처럼 에서와 야곱의 출생처럼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적으로 지적한 문제지 여기서 다른 문제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니까 아벨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이다. 모세 언어를 빌리면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하나님이 아벨을 기뻐하신 것이다. 그러면 가인은 아벨을 따라서 하나님이 기뻐하신 자를 따라서 나가는 것만 유일한 길인데 하나님의 기뻐하신 자를 죽인 것이다. 그래서 아벨은 에덴에서 쫓겨난 정도가 아니라 가인은 땅에서 저주받아 유리하리라. 그렇게 되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가인을 보호하셨다. 그것은 어떤 사람은 도피성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거기 까지 갈 필요는 없다.


그 다음에 가인의 족보를 보면 가인의 의미를 알 수가 있다. 가인이 이제는 하나님 앞에 떠나서 유리하고 모든 사람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가인을 보호하셨고 가인이 에덴 동편 놋 땅에다가 성을 짓고 거기서 번성했다. 그 아들 에녹 때 번성해서 에녹이라 이름을 짓고 그 후손 라멕 때는 크게 번성해서 두 아내를 얻고 그리고 여러 문화가 번성했고 그리고 누가 나에게 창상을 입히면 내가 그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죽이면 벌을 일곱 배를 받지만 나를 죽이면 칠십칠배를 받으리라 하면서 힘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니까 땅에서 그 힘을 가지고 성을 짓고 그리고 거기서 신약 문헌에서도 말한 것 같으면 그 때 제일 처음 중혼 문제가 나온다. 본래는 그렇지 않는데 그렇게 하고 하나님께서 생명을 보호하심 때문에 오히려 다른 사람까지 죽이고도 넉넉하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나서 음행하고 그리고 힘을 자기 성을 삼고 그런 문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신 자를 대항하는 즉 뱀의 후손인 인류의 실상이다. 그러니까 역대기를 보면 가인 이야기는 기록하지 않는다. 다른 족보들은 역대기에 다 포함이 되지만 그러나 가인의 족보는 기록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담에게서 나타난 문제는 싸움 이야기가 아담 이야기의 핵심이다. 아담이 범죄한 뒤로 역사의 이야기는 싸움 이야기다. 싸우리라 그러나 발뒤꿈치를 물리는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밝고 승리하리라. 싸움과 승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담 족보의 핵심이다. 그래서 둘이 싸웠다. 그러나 죽임 받은 아벨 대신에 하나님이 셋을 주셨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가 진행되고 가인의 족보에서는 성을 쌓고 하나님의 보호를 힘입어서 자기를 대적하는 자를 조롱하고 멸시하는 그런 문화가 있다. 그것이 아담 족보의 핵심이다.

 

그 다음에 보면 아벨 대신에 을 주셨다 하는 것이 말하자면 창4장 족보에 결론 부분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벨 대신에 주신 셋 여기서 진행이 된다. 그런 의미로 아벨은 죽었지만 살았다. 왜 하나님이 싸우셔서 승리하니까. 아담 족보는 승리에 대한 문제다. 그래서 4장 셋으로 넘어간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면서 아담 자손은 이러하니라 하고 아담으로 다시 넘어간다. 왜냐하면 아벨은 온 인류의 시조는 아니다.


그래서 다시 아담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아담을 자기 형상으로 지었다. 아담은 자기 형상으로 셋을 낳았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담을 자기 형상으로 지었고 아담은 자기 상으로 셋을 지었다. 그러니까 아담은 자기 후손에게 자기 형상을 주는 창조적인 위치에 있다. 그런데 아벨은 죽었지만 아벨 대신에 셋을 낳고 그 계통이 장수한다. 근 천년씩 산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안 죽고 올라간 사람이 있다. 에녹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10대 손은 역사의 마지막 즉 노아가 마지막 결론이다. 그런데 거기 보니까 이 아들이 죄로 말미암아 저주받은 세계에서 안식을 주리라. 그 아버지가 그렇게 소망하고 이름을 지었다. 그래서 노아가 이 족보의 마지막이다. 그렇게 해서 죄로 말미암아 저주받은 세계의 승리의 안식 그 문제를 아담 계보에서 다시 기록하고 있다. 아벨은 시조가 아니기 때문에 아담으로 올라가서 기록을 해도 핵심은 아벨 대신에 셋을 주셨다. 누가 하나님은 아담을 자기 형상으로 지었고 아담은 자기 모든 후손에게 형상을 주는 아버지로서 셋을 낳았다. 그런 창조적인 자리에다 아담을 올려놓고 있다. 하나님이 아담을 자기 형상으로 지은 것처럼 아담도 자기 상으로 셋을 지었다. 그러니까 셋을 지은 것을 창조적인 사역에다가 배정을 시키고 있다.


그런데 거기 보니까 그 후손들이 다 장수하고 하나님과 동행한다. 그렇게 해서 죽음을 이긴 사람도 있고 그리고 마지막 노아 때 이 저주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다. 그 문제를 말하고 족보적인 결론은 노아인데 그 다음에 뒤에 붙어 있는 사람이 번성할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고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음 이것이 그 족보의 결론 부근에 해당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노아 때 하나님께서 옛 세계를 심판하심으로 안식을 주셨다. 그래서 노아 때를 중심 해서 그 역사를 기록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창5장의 족보의 결론 부근이다.


노아 때 안식을 주셨는데 어떤 세상으로 안식을 줄 것인가? 죄가 가득한 세상으로부터 안식을 준다. 다 하나님과 동행했는데도 죄가 가득한 세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하는 이야기를 우리들은 이제까지 하나님의 아들들을 거룩한 셋의 계통 사람의 딸들을 가인 계통 그냥 그렇게 읽었다. 그런데 족보의 형식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족보 형식은 일단 앞 족보에서 총체적으로 요약해서 재끼면 그 다음에 언약이 진행되는 족보만 쭉 언급하지 한쪽으로 제껴진 족보를 다시 끌어다가 언급을 안한다. 그런 언급을 안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사람의 딸들은 가인 족보다 아니다. 단지 우리들은 양반 따지는 것처럼 계통만 쭉 따지니까 두 계통으로 나누려고 그런다. 여기서는 아담의 계통 셋의 계통에서 나타난 타락을 이야기하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냐? 보통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 하면 천사다. 욥기에서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문장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범죄 했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는 다시는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범죄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범죄 했다 해 놓고 다시는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라 이런 말이다.

 

그러니까 그 문장 내용에서 보면 이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가 아니고 또 특별히 성경은 천사를 성적인 존재로 언급을 않는다. 그러면 이 문장에서는 네피림 장부들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10장에 넘어가면 니므롯 같은 사람이 나오는데 그런 장부들 그러니까 그 당시 통치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칭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들이 힘이 있어서 아름다움을 보고 마음대로 축첩하고 있다. 마치 라멕이 축첩 했던 것처럼 그런 식으로 해서 완전히 함께 육체가 되었다. 어떤 의미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는 보살피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떠나 육체가 되었다. 그것이 아담 때부터 노아까지 이르는 즉 사람이 번성할 때 나타난 죄들이다. 여기서는 가인의 족보와 셋의 족보가 혼족이 됐느니 하는 이야기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한 번 가인의 족보는 일단 끝났으면 다시 언급되지 않는다. 그 모든 족보들이 총체적으로 기록하고 나서 그 다음 언약의 약속들이 집행되는 족보로 다시 넘어가면 이전에 총체적으로 언급했던 족보는 다시는 그 다음 족보에 끼여들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사람의 딸들을 가인의 족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연합은 뼈중에 뼈요 살중에 살이로다. 한 몸의 연합 하나의 연합을 말했다. 그런 연합의 의미가 없어져 있다. 그것이 창세기 앞에 의미로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는다. 그런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는 은혜를 입히셨다. 이 타락한 세대 가운데서도 노아는 은혜를 입었다. 그러면 은혜를 입은 노아를 중심 해서 다시 족보가 시작되면 된다. 그래서 6장9절에는 노아의 사적이 나온다. 그런데 은혜를 입은 노아의 그 족보에 머리는 어떤 의미냐면 새 세계의 머리다. 아담은 인류의 머리다. 범죄한 뒤로는 그 족보는 싸우는 이야기였다. 왜 그가 싸워서 졌다 싸움의 이야기다. 이제는 노아 때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이 범죄해서 멸망시킬 것이다. 그 중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은혜를 입히셨다. 어떤 의미로 세계의 보존 자로 새 세계가 머리로 은혜를 입히셨다. 그것이 노아 족보의 내용이다.


그래서 홍수로 새롭게 된 새 세계의 머리가 노아 족보의 내용이다. 6-7장까지는 어떤 말이 있냐면 노아의 행적을 기록한다. 하나님과 동행한 당세의 완전한 자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방주를 지어서 보존해라. 암수를 보존해서 유전케 해라 그런 이야기가 6-7장 이야기다. 노아는 새로운 세계의 머리 보존 자다. 아담처럼 자기 형상으로 셋을 낳고 그런 머리는 아니다. 보존 자다.

 

그리고 8-9장에 심판과 그 보존으로 말미암은 영원한 생명의 언약이 있다. 심판은 하나님께서 홍수로 처음 세계를 지었던 것처럼 홍수로 혼돈 되게 했고 그러나 방주 안에 있는 노아와 짐승들을 권념하셨다. 바람을 불어서 육지가 나타나도록 했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는 노아가 번제를 드리니까 하나님이 흠양하셨다. 이전의 세계는 어쨌는가? 하나님이 아벨을 흠양하시니까 가인이 죽여 버렸다. 그것이 첫 세계의 상이었다. 그리고 가인의 세계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야기는 없다. 하나님이 아벨 대신 주신 셋 때 그리고 셋의 아들 에노스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그 세계까지라도 완전히 타락됐다. 하나님께서 노아만 보존하셨다. 왜 새 세계의 머리로 보존했다. 그가 짐승의 암수를 전부 자기에게로 불러서 보존하고 암수를 보존해서 생명을 유전케 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는 새 세계의 머리요 보존 자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방주 안에 있는 것들을 권념하시고 바람을 불어서 홍수를 끝내시고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나타내셨는데 그 세계는 노아가 번제를 드리니까 하나님이 흠향하셨다. 그 세계는 새로운 성소다. 노아는 거기서 제사장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신 자다. 그러면 죄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의미로 그러는가? 창세기에서 죄에도 불구하고 그런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들의 마음이 날 때부터 완악하기 때문에 다시는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흠향하셨다. 마치 모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죄의 권세 아래 있는데도 하나님이 그들의 예물을 받으신 것처럼 노아를 머리로한 새로운 세계는 여전히 사람의 마음까지 새롭게 된 세계는 아닌데도 하나님께서 노아를 머리로 해서 그 땅을 기뻐 흠향하시는 기쁨의 세계로 새롭게 지으셨다. 그것이 의가 거하는 새로운 세계다. 성소다. 그리고 거기서 언약을 체결하셨는데 거기는 다시는 살인자가 없을 것이고 이제는 모든 만물과 언약을 맺었는데 다시는 멸하지 아니하리라 무지개로 표를 두고 언약을 맺었다. 다시는 심판이 없으리라는 영원한 생명의 언약을 세우셨다.

 

홍수로 말미암아 옛 세계를 심판하시고 노아를 의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그가 드리는 모든 번제를 흠향하시고 그리고 그 세계를 기뻐하셨다. 완전히 죄가 정결케 되었다는 그런 말은 아니다. 그것이 첫 세계를 정결케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족보의 결론쯤 가면 노아의 세 아들을 이야기한다. 이 아들들로 말미암아 홍수 후에 온 땅에 번졌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고 그리고 그 이어서 가나안에 저주와 셈의 하나님의 이야기가 나온다. 함이 자기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웃어서 저주받았다.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면 그 다음 족보는 무슨 이야기가 되겠는가? 노아의 세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 그 쪽으로 나오겠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셈의 하나님이 되셨다는 목표로 다시 새로운 족보가 진행되면 되겠지요?

 

그래서 10장의 보면 노아의 아들 셈 함 야벳이 후예라. 그런 족보가 나온다. 이제 그들로부터 온 땅에 백성이 번졌다. 땅을 정복하라는 약속이 노아의 세 아들들에게서 완성된 것이다. 숫자를 세자면 70명이다. 각 종족과 방언대로 온 땅에 퍼졌다. 총 결론에서 노아의 이 세 아들로 말미암아 각 나라가 번성했다 그렇게 결론하고 있다. 그런데 그 족보의 결론 뒤에 11장에 바벨탑 심판이 나온다. 온 땅에 번졌는데 그냥 그들이 하나님을 순종해서 온 땅에 확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교해서 뭉쳤는데도 하나님이 다시는 홍수 심판처럼 심판하지 않도록 그들의 죄가 연합되지 못하도록 흩으셨다. 그래서 온 땅에 퍼졌다. 그들이 자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이 다시는 죄의 힘으로 결합되지 못하도록 흩으심으로 그렇게 되었다. 특별히 10장 때 보면 셈의 아들 벨렉때 흩어졌다. 그래서 10장에 온 땅에 흩어졌다는 말을 해 놓고 흩어진 의미를 그 족보의 결론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면 역사의 소망은 무엇이겠는가? 하나님께서 이 흩어진 민족 중에서 셈의 하나님으로 활동하신다. 그리고 천하 만민을 모으시면 될 것이다. 누구를 통해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세우셨다.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셈의 하나님의 복을 받으리라.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첫 단계는 노아 홍수와 그 후손들이 온 땅에 흩어진 것으로 일단 완성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노아 아들들의 역사에서는 11장 바벨탑 심판이 그 족보의 결론이 되는 것이다. 흩어졌다. 흩어진 중에서도 다시 셈을 중심 해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셈의 하나님 셈의 족보에서는 셈의 하나님이다 하는 약속인데 족보의 내용을 보면 어떤 내용인가? 살다가 누구를 낳고 또 계속 살다가 누구를 살다가 죽었다는 말이 한마디도 없다. 창5장에서는 살다가 죽었다는 말이 가득했는데 여기서는 죽었다는 말이 없고 번졌다는 말만 쭉 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전에도 말씀했지만 이 집안은 시집도 일찍 갔다. 5장 족보는 한참 늦게 아이를 낳았는데 10장쯤 오면 젊어서 낳았다. 그러니까 굉장히 번진 것이다. 셈의 하나님으로 그들 중에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한 약속을 따라 번성하고 번성했다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이라 하는 것이 10장의 족보다.

 

그 족보의 제일 결론이 데라다. 다른 사람은 누구를 낳고 몇 살을 살고 이 말인데 데라 때는 누구누구를 낳았다 아들 전부를 기록한다. 그리고 나서 이 데라로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그렇게 나가고 있다. 이 데라의 족보부터가 실은 족장의 역사다. 데라의 족보의 역사는 무엇인가?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던 것이 데라의 역사다. 그 중에 들어간 사람은 데라가 아니라 그 후손 아브라함이다. 항상 후손의 역사다. 그러나 출발은 데라 때 출발했고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의 복의 근원이다. 이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새로운 구원 시대를 열었다.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 족장들의 역사다.


이 복의 근원은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인데 이제 이 복의 근원으로부터 난 이삭은 어떻게 났는가? 다 죽은 몸으로부터 새로운 씨를 주셨다. 이전에 처음에서는 죽은 아벨 대신에 셋을 주셨다. 그런데도 아담은 생명의 기원이 되어서 그가 자기 후손에게 형상을 주는 자다. 그런데 이제 아브라함은 그런 자는 아니지만 다 죽은 몸으로부터 아들을 낳았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으로서 족보의 내용이고 이삭은 상속자로서 족보의 내용이다.  야곱은 그 모든 상속을 누리고 온전한 가문을 이룬다 하는 것이 야곱의 내용이다. 그리고 그에게서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것이 창세기의 끝이다. 그렇게 진행이 된다. 다음에는 이제 족장들의 역사를 요약하면서 전체적인 개괄을 잡도록 하겠다. 이렇게 큰 틀을 보면 부분들을 해석하는데 곁길로 가지 않고 전체를 파악하기 좋다.  아담의 위치가 어디 위치냐면 하늘의 태양을 권세로 두셨고 아담은 땅에 지은 모든 것은 다스리고 주관하도록 했다. 아담이 하나님이 심히 기뻐하시는 머리다. 모든 것은 아담의 지배 아래 있다. 모세 언어로 하면 아담이 제사장이다. 나머지는 성소고 그래서 아담의 지배 아래 있는 모든 것이 심판에 들어간 것이다. 족보 읽는 방식을 알겠지요?

 

질문. 

 

아브라함 때는 이제 까지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신 장소가 어딘가?

 

에덴에서는 기뻐 동행하셨고 그리고 범죄한 뒤로는 아벨을 기뻐하셨고 홍수 심판 후에는 노아를 기뻐하셨고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했던 사람은 가나안 땅에 아브라함밖에 없다. 거기서 예배하면 받으신다. 그래서 그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것이 출애굽이다. 조상들의 약속의 성취를 마무리하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 때는 큰 기근이 들어서 완성하지 못하고 이사갔다. 그런데 이사가는 것이 저주가 아니라 애굽의 구원이 됐다. 그런 이야기다.

 

그러니까 족보 형식 기록한 구조를 보면 우리가 해석하는데 곁길로 가지 않을 수가 있다. 물론 제사법 이야기는 무슨 제사인가 모세 언어로 읽어야 한다. 그래서 피 있냐 없냐 이 쪽으로 했다. 그런데 본래 소제 같은 것도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 앞에 향내나는 제물로 드리도록 되어 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아담의 족보 내용이 기쁨 하나님이 심히 기뻐하셨다. 하나님만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서로를 기뻐했다. 부부끼리도 서로를 기뻐했다. 완전한 교제의 동산 기쁨의 동산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무너졌을 때 문제는 순종하지 못하고 싸워서 졌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죄를 이겨서 승리할 것인가? 그리고 다시 하나님을 기쁘게 예배하는 기쁨의 대상이 누군가? 하는 문제가 아담 족보의 핵심이다. 그러니까 제사 문제가 핵심이 아니라 누구를 기뻐하는가 하는 문제다. 그리고 문장 자체를 읽어봐도 그 문제다. 단지 하나님이 제물을 받으신 데서 아벨을 기뻐하신 증거를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숨은 동기고 해석할 것이 없고 숨은 동기를 해석하니까 도덕적으로 풀어 버린다. 그러니까 소산이 합당하냐 마냐 보다도 누가 아담과 같은 제사장으로 기쁨의 상속자가 후손 중에 되겠는가 하는 문제다. 제사장 문제고 기쁨의 문제다. 열납하셨다. 기뻐 받으셨다. 가인은 안 받으셨다. 그러면 아담 후손의 질서는 선 것이다. 아벨이 머리다. 아벨을 따라 살면 그 땅은 기쁨의 성소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거절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가인의 정신은 가인 후손에게서 나타나는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성을 의지하고 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보호 때문에 오히려 조롱해 버리고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러나 아벨은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아벨 대신에 셋을 주심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예배가 거기서 진행되고 있다. 기쁨과 예배에 대한 문제가 아담 족보의 핵심이다.


아브라함의 복의 근원 문제고 이삭은 복의 상속인 것처럼 아담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 문제다. 기뻐했고 심히 기뻐했고 큰 기쁨의 동산의 자기 대리자를 두셨다. 그리고 하나님만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도 서로 기뻐하도록 벌거벗었어도 아무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도록 한 몸의 교제로 지으셨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함께 함을 떠났을 때 사람끼리도 그런 연합이 없다. 서로 부끄럽게 되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아담의 범죄 후에도 그 후손을 출생케 했을 뿐만 아니라 그 후손 중에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자를 세우셨다. 그는 배교를 받아 죽었지만 하나님은 죽은 자 대신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예배가 아담의 후손 중에서 진행되게 하셨다. 그것까지가 아담 족보의 핵심이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전체적인 중심을 잡고 풀어야 되지 그 때 가인이 제물은 드렸을 것인데도 자기 동생을 죽인 것 보니까 진짜 하나님을 경배하려는 것이 아니고 동생보다 조금 앞서려는 시기심 이런 것이 있었을 것이 아니냐? 그런데 하나님이 뻔히 그 속을 알아 버리고 안 받으니까 시기심이 드디어 발동해 가지고 없는 죄가 생기지는 않거든요? 일이 이렇게 된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우리가 예배할 때도 순전히 하나님만 의식해야 되지 서로를 의식하고 경쟁하면 안된다 하면 도덕적인 책망을 들어가지만 하나님이 누구를 기뻐하셨는가? 범죄하고 죽은 세계 중에서 어떻게 가죽옷을 입혔고 어떻게 후손 중에서도 그를 기뻐하는 새로운 대상을 세우셨는가? 이 대상이 없으면 아담 가족은 끝나는 것이다. 출생했고 기쁨의 대상이 있는데 그 기쁨의 대상을 사람들이 싫어해서 죽여 버렸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셔서 그 예배가 진행되도록 하시고 죽음을 이겼다. 아벨이 이겼다. 그 이야기를 5장에서 족보를 통해서 다시 반복함으로 역사를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중심을 잡고 풀어라 그 말이다. 그러니까 가인 연구하지 말라 그 말이다.

 

족보 중심만 잡아야 한다. 아브라함의 모든 족보는 새로운 땅에서 복의 근원이다. 새로운 땅은 새로운 성소다. 그것이 멜기세덱의 나라다. 그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다. 그 이야기다. 이 언약은 영원히 불변하시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헌신에서 하나님이 맹세하셨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다.

 

이삭 이야기는 상속자 이야기라서 아버지가 팠던 우물을 다시 파고 아버지가 차지했던 땅을 다시 차지하고 이런 이야기다. 그리고 그 상속을 하나님이 택한 자가 한다. 야곱에게서 완성된다. 야곱의 이야기는 많은 식구들을 낳는 이야기다.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밧단아람에 가서 식구를 여럿 낳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야곱 이야기에서 핵심적인 이야기다. 그래서 열둘을 세운다. 그래서 이삭에게 상속된 그 상속이 야곱에게서 한 가문을 이룸으로 완성된 것이다. 그런데도 그 장자에게서 이루어진다. 장자를 버렸는데도 그 장자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세우신 마지막 장자는 유다 지파다. 그래서 유다 지파를 끼어 넣고 있다. 나머지는 전부 요셉 이야기다. 그 족보의 중심만 가지고 풀어라 그 말이다. 족보 내용은 족보의 머리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 대한 설명이 전부다. 그리고 족보 결론은 흐지부지 끝난 것 같지만 결론이 다음 족보로 넘어가는 토대다. 그 족보 끝에는 그 족보에 포함된 모든 후손들이 한꺼번에 기록되면서 이제 한쪽으로 제끼고 약속 있는 장자를 중심 해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도 아담의 족보에서는 싸움의 족보이기 때문에 가인의 족보는 기록되지 않는다. 다른 족보는 싸움 족보가 아니었다. 그러기 때문에 역대기를 보면 다 들어간다. 이스마엘이고 에서고 다 들어간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법을 연구할 것도 아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누구를 기뻐하셨는가 하는 이야기다. 아벨을 기뻐하셨다.


입다의 서원에 대해서?


레위기를 보면 전부 드린 사람은 죽이라고 되어 있다. 다시 무르지를 못한다. 그러니까 평생 성소의 종으로 봉사한 것이다. 그래서 이제 해석 자마다 다르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도덕적으로 따지니까 사람으로 하는 제사를 하나님이 명령하시겠는가? 이조 세계가 자기 장자가 불 가운데로 지나가면 하나님이 저주하시는데 하나님이 사람을 드리라는 제사법을 명령할 수가 있겠는가? 레위기를 보면 짐승을 통해서 제사하라고 했지 사람을 통해서 하라고 했는가? 그렇게 우리가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런데 장자를 드린 이야기는 말하자면 거짓된 신에게 바쳤다는 의미로 정죄된 이야기지 제사법 자체를 말하는데 강조점은 아니다. 그 신에게 자기 장자까지 드렸다 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구약 제사법에서는 하나님께서 가령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했을 때 그냥 연습 삼아서 진짜 한가 안한가 볼려고 했는데 진짜 죽이려고 하니까 살인날뻔 했구나 하고 말리고 그런 이야긴가? 우리는 구약 예배를 도덕적으로 푸니까 그런다. 그런데 레위기는 말하기를 온전히 드리면 무르지를 못하고 만일에 도중에 무르려면 죽여야 되지 해방되는 법이 없다.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도덕적으로 풀 문제들이 아니다. 그러니까 입다의 서원은 그가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한 맹세다. 누구든지 처음에 나오면 드리겠나이다 그렇게 해서 그렇게 했을 때 그 딸이 죽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그를 평생에 성소에 드리게 했는지 하는 문제를 해마다 여인들이 애곡하더라 하는 문제 가지고는 문제의 해석을 못한다. 어떻든 그는 드려진 그날로 온전히 죽은목숨이다. 그 정확한 내용은 모른다. 양쪽 해석이 가능해져 버린다.

 

그런데 레위기를 보면 그를 죽이라 그랬지 번제로 드리라 그런 말은 없다. 사람을 태워서 드리는 제사는 없다. 반드시 죽여서 다시는 하나님의 성소 봉사 외에 쓰이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평생에 성소에 매이고 만일에 해방될려면 죽여야 된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용도로는 쓰이지를 못하니까. 그런 의미지 레위기는 제사법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니까 입다가 만일에 사람을 죽여서 번제로 드렸다면 상당히 문제가 심각해진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이야기할 때는 처음에 내용을 이해할 때는 이해력을 가지면 되지만 일단 이해가 끝난 뒤로 표현할 때는 다시 이야기를 반복하지 않고 그 이름으로 말한다. 가령 칼빈주의 하면 칼빈을 몰라도 칼빈주의자가 있다. 이론을 쭉 아니까 칼빈이 전매특허 낸 것도 아니잖아요? 성경대로 하면 칼빈주의 되니까 칼빈을 몰라도 된다. 칼빈에게 판권 소유가 있어서 인용하려면 칼빈의 허락을 받고 그런 이야기는 상관이 없다. 그러나 이제 칼빈이 일단 역사에서 그 일을 봉사하고 났으면 그 다음에는 그 이론을 다시 설명하지 않아도 칼빈주의 하면 막 포함되어 버린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구약 성경을 읽을 때도 일단은 이해를 해야 되겠지만 그 다음에는 이야기할 수 있도록 쭉 이야기를 해야 된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구체적인 이름이나 사건까지 이야기 할 수 있을 만큼 읽어야 한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없어진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재생 테이프 복사한 것처럼 기능이 나쁘다. 잡소리가 많이 들어가서 기억이 선명하지를 않는다. 비유법에 속지 말아야 한다. 기계는 쓸수록 기능이 떨어진다. 그러나 기억은 그렇지 않다. 자기 손자 이름 기억 못한 할아버지 봤는가? 여러분이 기억력 없다고 스스로 속지 말고 열심히 읽어야 한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절대 비유법에 속지 말아야 한다. 사랑이 우리 기억력이다.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손자 이름 잘 안다. 생일도 안다. 국경일을 몰라도 자기 손자 생일은 잘 기억한다. 그러니까 하여는 열심히 읽으면 기억력을 주실 것이다. 반사들도 아이들이 사건을 잘 기억하고 있는지 살피고 해석을 간단히 해줘야 한다. 성경은 보도를 통해서 알리는데 이야기 체의 보도를 빼 버리고 해석만 들어라 해 가지고는 성경을 가르치지를 못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더구나 구약은 이야기 체로 되어 있으니까 잘 이해하도록 가르치고 그 다음 해석해 주고 그렇게 해야 한다.


문장을 봐도 아벨과 그 예물을 받으시고 히브리서 해석도 하나님께서 그 예물을 받으심으로 증거 했다. 그런 말이다. 예물을 받으심으로 아벨을 기뻐하신 것을 증거 하신 것이다. 만일에 하나님이 예물을 기뻐하지 않으셨으면 아벨의 예물을 받지 안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제사법이 잘됐냐 잘못됐냐 이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제사를 드리는 자를 자기가 기뻐하는 제사장으로 세웠는지 세우지 않았는지 그 문제에 대한 증거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하신 자를 가인은 싫어했다. 그리고 가인의 모든 후손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벨의 계통은 죽었지만 하나님이 죽은 자 대신에 셋을 주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가 기쁨이 계속되도록 했다. 그 이야기가 일단 아담 족보에서 마무리된 것이다. 그러니까 제사법이 잘됐냐 안됐냐 이것을 연구한다거나 아벨이 인격이 어떻고 가인의 인격이 어떻고 추측하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신 자가 누구냐?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해석하라 그 말이다.

 

노아에 대해서도 제사법이 잘됐냐 안됐냐 문제보다도 하나님이 그 번제를 흠향하시고 하는 사실에서 전체에 대한 헌신을 받으셨다. 이제 그 세계는 노아의 번제를 흠향하신 것처럼 온 세계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아직도 죄가 있는데도 그것이 첫 세계의 완성이다. 마지막 세계는 온전히 죄를 제거함으로 하나님이 온전히 흠향하시는 세계를 지으신다. 불로 여기서 제사법은 연구하지는 않는다. 단지 모세 언어의 제사법으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셨다. 온전히 헌신했다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 제사법 자체가 양으로 드렸다. 하는 그런 이야기는 상관이 없이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들은 왜 정결한 것은 암수 일곱 쌍이고 부정한 것은 암수 한 쌍인가? 정결한 것은 제사 지내려고 이쪽으로 돌리는데 그런데 여기서는 제사법을 언급하려는데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 기쁨의 세계로 다시 받으셨다. 온전한 헌신의 세계로 받으셨다 하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지 다른 제사법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개진시키지를 않는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하나님이 번제를 받으시면 하나님이 그들의 헌신을 기쁘게 받으신 것이다.

 

 창세기 개요 3 강


창세기는 열 개의 족보로 되어 있다. 족보는 새로운 출생의 역사다. 만물을 지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복을 주신 하나님께서 새로운 출생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일들을 새롭게 진행시키시고 드디어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이제 거기서 출생의 역사를 마무리 짓는 것이다. 그 분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되고 그렇게 함으로 하늘에 속한 새로운 인류가 출현한 것으로 끝나고 있다. 그런데 창세기 처음부터 노아 때까지 다섯 족보가 있고 그리고 이제 조상들의 역사에 다섯 족보가 있다.

 

그런데 노아 때까지는 옛 세계의 완성이 한 단락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조상들의 여사는 가나안 땅의 역사다. 그러면 창세기 앞부분을 보면 하나님께서 온 세계를 기쁨의 성소로 지으셔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 중에 제일 기쁜 대상이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렇게 해서 우주적인 성소의 장자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서 첫 족보의 천지 창조의 대략을 이러하니라 하면서 사람 짓는 이야기를 다시 하고 있다. 왜냐하면 장자 이야기를 다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온 세계가 아니라 에덴 그 중에 사람이 있는데 남자 그 다음에 여자 이런 식으로 쭉 짓는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생명의 교제 기쁨의 교제가 있었다. 그런데 그 세계가 아담의 죄 때문에 타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 때 홍수로 말미암아 옛 세계를 새롭게 지으셨는데 새롭게 지은 세계는 노아를 머리로한 의의 세계다. 노아를 머리로한 의의 세계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노아가 지낸 번제를 흠향하셔서 기쁨의 세계로 지으셨다. 거기 까지가 전반부다. 새롭게 된 세계에 노아의 세 아들이 70명 민족을 이루어서 온 땅에 흩어지고 그 흩어짐을 통해서 온 땅을 정복하라는 약속이 성취되어 있다. 그래서 노아의 세 아들들에게서 온 땅을 정복하는 역사가 이루어 졌는데 그 중에 장자가 셈이다.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이다. 그래서 다시 셈부터 다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노아의 세 아들들을 다 기록하고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기록하고 있는데 셈의 족보의 마지막에 데라가 있는데 그 데라로부터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셈의 하나님인데 데라 때는 가나안 땅에 하나님으로 시작이 된다. 그것이 이제 창세기 후반부의 문제다. 그래서 가나안 땅은 새로운 성소다.

 

그 성소에서 제사하는 사람은 아브라함이다. 그리고 그 성소에서 영원히 함께 계심이 모세 때 이루어 진 것이다. 그 일들을 지금 기록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족장들의 역사는 17장부터 50장 끝까지인데 새로운 성소 가나안 땅에서 조상들과 함께 하신 그런 역사다.

 

이번에는 각 장이 너무 길기 때문에 요약을 앞에다 두었다. 이처럼 새로운 성소 가나안 땅에서 조상들과 함께 하신 이 은혜의 역사를 아브라함의 후손 이삭으로 말미암아 출생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옮기시고 친히 그들 중에 성소가 되셔서 함께 하심에서 이루시고 그것이 모세 오경이다. 하나님이 조상들과 함께 하셨는데 왜 이 사실을 모세에게 알리시느냐? 너희들의 하나님은 조상들의 하나님이신 데 조상들과 함께 했던 가나안 땅으로 너희들을 옮겨서 조상들과 함께 했던 그런 교통을 나누기를 원한다. 그 일을 위해서 드디어 모세에게 알리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조상들과 함께 했던 이 은혜의 역사를 아브라함의 후손 이삭으로 말미암아 출생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옮기시고 친히 그들 중에 성소가 되셔서 함께 하심 그것이 모세에게 나타난 것이고 그것을 온전히 이루신 것이 다윗 때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신령한 후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에 속한 영원한 생명의 교제를 그리스도의 교회에 주심으로 온전케 하셨다. 구약 때 하나님과 함께 하심은 가나안 땅의 삶인데 그리고 그들은 아브라함의 육체의 후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삭으로 출생된 그리고 야곱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이 이것이 구약이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은 이삭으로 말미암아 출생된 새 인류에 비견될 수 있는데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옮기시고 함께 하심이 구약 역사이다. 그래도 아브라함의 후손은 다 죽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그 아들을 보내셨는데 이 아들은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신 분이고 영원히 죽음을 끝내신 아들이다. 이 아들로 말미암아 출생된 것이 교회다. 이 교회와 하늘 성소의 교제로 영원히 함께 하셨다. 그것이 교회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50장까지 전체적인 설명이다.

 

이제 각 장별로 설명하도록 하겠다. 그래서 창세기에 대한 전체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  11:27절에 보면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면 데라 후손의 족보의 특징은 무엇이냐? 가나안 땅에 역사가 데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데라의 핵심이다. 그러기 때문에 데라의 기사를 보면 데라의 가족 관계를 쭉 이야기하고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 말을 기록한다. 그리고 나서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여 하란에 이르러 거기 살다가 죽었다. 함으로 데라가 죽음으로 끝난다. 하란에 거주했다. 그것이 데라의 행적을 기록한 마지막이다.  그래서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해서 하란으로 이주한 것이 데라 역사의 핵심이다. 그러면 데라는 일단 갈대아 우르에서 떠났다. 애굽으로 가고자 했는데 들어가지 못했다. 하란 까지 이주했다. 그래도 하란에서 데라의 후손이 있다. 갈대아 우르에서 떠난 새로운 성소를 떠난 새 백성이 일단 거기 있다. 나중에 야곱이 장가 갈 때 그 쪽으로 간다.

 

여기서 데라의 가족에 대한 전체적인 이야기를 하고 그 다음 항상 그 족보에 포함되는 총괄적인 이야기를 하고 나서는 그 다음에 족보의 약속이 진행되는 장자 족보 던지 족보의 약속이 진행되는 선을 따라서 다시 기록한다고 했다. 여기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했는데 데라의 가족 관계를 다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데라의 행위의 목표는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한 것이었는데 하란에 거주하다가 죽었다. 끝나고 있다. 그러면 다시 누구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데라의 장자는 아브라함이다. 약속은 아브라함에게서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부터 다시 기록하는데 그것이 12장이다. 그래서 데라에게서 시작하신 일이 후손에게서 완성되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데라의 후손 아브라함은 누구냐 하면 데라의 장자인데 아브라함에게서 핵심은 무엇이냐면 성소 가나안 땅에 복의 근원으로 세웠다. 한 것이 아브라함의 핵심이다. 데라에게서 일단은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기는 떠났는데 여러 명이 떠났다. 그리고 하란에서 죽었다. 갈대아에서 떠난 것이 데라의 장자 아브라함에게서 이루어졌다. 이 아브라함이 데라를 갈대아에서 부르신 목표인데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복의 근원으로 세우셨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족보의 핵심 내용이다.

 

그래서 성소 가나안 땅의 복의 근원 성소에서 복의 근원이면 하나님을 섬긴 복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행적도 보면 몇 단계로 나눌 수가 있다. 처음에 보면 복의 근원이라 했는데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 그랬다. 그래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면 한 단락이 되겠지요? 동심원적인 물결 구조로 확산된다고 그랬다. 그래서 씨와 땅으로 출발해서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 하는 그런 이방인이든지 그런 확산이 나오면 거기서 한 단락을 이루고 그 다음 또 새로운 단계로 진행되고 이런 동심원적인 물결 구조로 진행이 된다. 그 말이다. 지금은 하늘에 계신 씨 하늘 보좌에 계신 우주적인 성소 그렇게 완결된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복이다.  이 아브라함의 복이 모세 때는 죄가 지배하는 질서 가운데서 집행되고 이 아브라함의 복이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복으로 집행이 된 것이다. 그래서 몇 단계로 나누는데 처음에는 복과 복의 근원에 대한 문제가 있고 그 다음 몸에서 날 상속자에 대한 문제가 있고 그 상속자의 출생 그 다음에 그 상속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아서 그가 상속받은 이야기 그런 단계로 구분될 수가 있다.

 

복의 근원에 대한 문제인데 12장에 보면 거기서는 핵심이 복의 근원 아브라함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세웠다 하는 이야기다. 거기 있는 내용들을 보면 가나안 땅으로 옮긴 이야기 그리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고 큰 민족으로 이루고 너를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약속 그리고 그 가나안 땅에서 제사하고 있는 아브라함 그리고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서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아내가 이뻐서 바로가 건드렸다가 애굽에 큰 재앙이 임했다. 이것은 아브라함을 손대지 말라 그 말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증거 하셨다. 여기서 이미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말이 한 단락을 품고 있다. 첫 출발에서 이미 품고 있다. 그렇게 해서 증거 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다 하는 내용이 12장에 총체적으로 들어 있다. 가나안 땅을 새로운 기업으로 삼고 거기서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다 그런데 아직 그 땅에 기근이 들어서 상속을 하지 못했다. 배고파 내려갔는데 큰일 날뻔 했다. 하나님이 애굽에 큰 재앙을 내려서 아브라함을 손대지 못하도록 증거 하셨고 아브라함이 애굽이 모든 보화를 가지고 올라왔다. 12장에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임이 총체적으로 들어 있다.

 

그 다음에 이 복의 근원이 어디에 확산되는가? 가나안 땅에 소유자는 아브라함이다 하는 것이 13장이다. 롯이 가나안 땅을 상속했다. 아브라함과 롯의 것이 너무 많아서 함께 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요단 들판을 차지하고 점점 소돔까지 들어갔다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 좌우로 걸어 봐라 이 땅을 다 너에게 주마 그리고 헤브론에 거했는데 거기서 아브라함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즉 하나님을 예배했다. 헤브론이 아브라함의 나라 수도다.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기 전에 이 수도에 아브라함의 후손 다윗 왕이 7년동안 있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소유자는 아브라함이 한 것이 13장이다. 롯도 기업을 얻었고 아브라함이 밟은 곳을 다 하나님이 주셨다. 그리고 헤브론을 중심지로 삼았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롯이 이중 마음을 품었니 말았니 하는 것은 창세기 문맥에서는 직접 말할 필요가 없다. 거기서는 너무 너무 번성해서 함께 거할 수가 없어서 그렇게 갔다 그런 이야기니까 항상 그 문맥에서 풀어야 한다.

 

그런데 가나안 땅의 소유자는 아브라함이다 하는 것이 13장이고 가나안 땅의 성격은 거기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땅이었다. 그 성격이 14장에 드러나는데 그것은 멜기세덱의 나라다. 전쟁이 나서 소돔왕도 잡혀가고 롯도 잡혀갔다. 아브라함이 롯을 건지기 위해서 전쟁해서 그 당시 세계 연합국을 쳐서 이기고 돌아왔다. 아브라함을 멜기세덱이 축복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너를 승리케 했다. 그리고 소돔 임금이 우리 연합 하냐 하니까 내가 소돔 왕 때문에 부자 되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니까 내가 신들매 하나라도 받지 않겠다. 그리고 연합 제의를 거절했다. 그 땅은 멜기세덱의 나라다. 멜기세덱의 왕권을 대신해서 싸운 사람이 아브라함이다. 그것이 14장의 이야기다.

 

여기서 그 나라의 성격 그 나라를 하나님을 예배하는 나라인데 그 하나님의 통치가 지극히 높으신 대 제사장 멜기세덱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남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는 나라를 이루셨는데 멜기세덱의 나라다. 이 멜기세덱의 나라는 아브라함 때 전부 정복되었다. 거기 아브라함에게 연합한 사람들이 있다. 에스골과 아넬 가나안 땅의 사람들 소돔왕과는 연합을 하지 안했지만 에스골과 아넬은 연합했고 천한 모든 권세가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함으로 복의 근원인데 그 복은 아브라함이 섬기는 하나님을 섬기는 복 아브라함이 섬기는 멜기세덱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 그것이 복이다.

 

그 나라가 온 천하를 정복했다. 아브라함 때 멜기세덱의 나라가 온 땅을 정복했다. 그렇게 함으로 복의 근원이 될지니라 한 약속이 한 단계를 이루고 있다 그런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씨 이야기를 다시 한다. 여기서는 씨에 대한 문제보다도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무엇이냐? 아브라함의 복이 무엇이며 그 복이 어떻게 온 세상에 미치느냐? 그것은 가나안 땅의 하나님의 성소의 복이 미치는 것이다. 멜기세덱의 나라의 복이 미치는 것이다 하는 이야기가 14장까지 전체적인 내용이다. 이것은 씨에 대한 문제보다는 물론 이 씨를 하늘에 별처럼 번성시키리라 그런 말이 있지만 핵심은 그 나라의 번성이 강조점이다. 상속할 씨가 문제가 아니라 그 나라의 번성이 핵심이다. 네 죽을 몸에서 씨를 주시겠다 하는 이야기는 14장까지는 없다. 이것은 멜기세덱의 나라 천한 만민이 멜기세덱의 나라에 복종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다.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이다.

 

이제 15장부터는 몸에서 날 상속자에 대한 언약이다. 이 나라가 아브라함이 죽으면 이 나라가 끝나는데 이 나라가 끝나 버려서는 그 멜기세덱의 나라는 죽음의 세력에 복종하는 나라가 된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두려워했다.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너의 방패라 하면서 너에게 씨를 주리라 그렇게 약속하셨다. 너의 종이 상속자가 아니라 너의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다. 아브라함이 믿었다. 자기 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는 나의 친구라 의롭다고 하셨다. 의롭다는 말은 법적으로 무죄하다는 그 말이나 도덕적으로 완전하다는 그런 말하고 상관이 없이 씨에 대한 약속을 아브라함이 믿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친구다. 그런 의미로 의롭다. 그렇게 한 것이다.

 

그래서 15-20장까지는 몸에서 날 상속자의 약속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복이 천한 만민에게 미친 것 까지 진행이 된다. 항상 복의 천하 만민이 복을 받아야 복의 근원이 된다. 그래서 14장까지는 멜기세덱의 나라의 복을 이야기하고 15장부터는 몸에서 날 상속자에게서 이 나라가 진행되지 않으면 아브라함의 죽음과 함께 멜기세덱의 나라는 죽음의 권세에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상속자가 출생되면 아브라함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멜기세덱의 나라는 죽는 법이 없다. 왜 하나님이 영원한 생명이시니까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20장까지다. 그런 말씀이다.


15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상속자가 있다. 그 약속을 아브라함이 믿었다. 그래서 친구라 의롭다 그렇게 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시행하실 것은 언약 체결 식을 통해서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불이 제물 사이로 지나가셨다. 하나님이 그 약속을 친히 이루실 것이다. 그런데 그 약속은 애굽에서 400년 동안 고난을 받고 그리고 나서 이루어질 것이고 그들이 차지할 땅은 어디 어디다 해서 언약이 성취되는 과정과 그들이 차지할 언약의 땅까지 말씀하심으로 한 단락을 이룬다. 항상 처음에는 머리인데 머리에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야 맞다. 그리고 그런 것을 점점 풀어 나가는 것이 그 다음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논문을 쓸 때에도 처음에는 주제를 선언하면 실은 본론이 전부 포괄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본문에서 차례차례 풀고 결론을 맺는 것인데 항상 새로운 단계에서는 전체를 포괄하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12장에 가나안 땅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포괄적인 것이 있는 것처럼 15장에 몸에서 날 상속자 거기서 그 씨들이 애굽에서 고난을 받고 그리고 가나안 땅을 상속하리 한 약속의 포괄적인 문제들이 15장에 있다. 그런데 그 몸에서 난 상속자가 처음에 난 아들이 여종이 난 이스마엘이다. 그런데 여종이 난 것은 상속자가 아니다. 여종은 주인에게 복종해야 되고 그런데도 그도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복을 줄 것이다. 한 것이 16장의 이야기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몸에서 씨를 주리라 약속을 했다. 그러면서 하신 약속이 그 씨를 사라를 통해서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하갈은 종이다. 사라를 통해서 주실 것인데 17장에서 그 두 사람의 이름을 바꿔 주셨다. 아브라함의 이름과 사래의 이름을 바꿔 주셨다. 아브람을 아브라함 사래를 사라로 바꿔 주셨다. 물론 단어 풀이를 이렇게 저렇게 하고 있지만 단어 풀이를 몰라도 된다. 그 본문을 보면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되라 아브라함 사라는 열국의 어미가 되리라고 했으니까 그것은 열국의 아버지와 어머니 사라다.

 

하갈이 낳은 자가 아니라 사라에게서 난자가 상속자라고 했을 때 아이를 낳지 못하는 두 사람에게 열국의 아버지 어머니로 바꿔 주셨고 그리고 드디어 거기서 하나님의 자녀된 할례의 언약을 주셨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열국의 아비와 어미로 출생할 뿐만 아니라 그 출생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할례 받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출생될 것이다. 이런 것이 땅의 제도가 말하는 거듭남의 약속들이다. 모세 제도가 말하는 거듭남의 약속들이다. 다시 나야 한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분명히 열국의 아버지 어미니인데 그 출생을 통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할례 받음으로 새롭게 출생된다. 그래서 할례 언약을 주셨다.

 

그 내용을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 후손을 줄 것이라고 약속하시고 열국의 아비와 어미의 이름으로 그들의 이름을 바꿔 주셨고 할례의 언약을 주셨다 그리고 나서 다시 한 번 반복하기를 언약의 상속자는 사라가 낳을 이삭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아이도 없는데 열국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될지니라. 이런 말을 하고 할례를 행해라 하니까 아브라함이 하는 말이 아니 이스마엘이나 복을 주십시오 그러니까 아니다. 이스마엘이 아니라 사라가 낳을 자가 네 상속자다. 하고 이름까지 지어 주시면서 이름까지 지목을 하고 그 때 아브라함의 남자들이 다 할례를 받았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는 씨가 더 구체적으로 진행이 된다.

 

이 사라는 본래 말하기를 11장 끝에 말하기를 사라는 본래 아이를 낳지 못하더라. 처음부터 그 말을 하고 있다. 지금 가나안 땅에 새로운 인류 출현을 말하려고 데라 때부터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라가 낳은 자 이삭이다. 그리고 그 약속 안에서 할례가 있었다. 새로운 출생의 약속들이 있었다 그리고 18장에서는 이제 하나님께서 이삭 낳는 이야기를 직접 사라에게 말씀하시고 그리고 거기 아브라함의 집에서 식사하시면서 하나님이 그이 친구로서 내가 왜 너를 택했는지 앞으로 할 일을 전부 알리셨다. 그 일은 가나안 땅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도가 집행되는 나를 세우는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을 순종하지 못한 자들은 멸망시킬 것이다. 그 야기를 18장에서 하고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집에 방문하셔서 식탁에서 교제하셨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내가 내 친구 아브라함에게 내가 하는 일을 숨기겠는가? 요즘 목사들이 미래를 봤다 그런 이야기하고 다른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는 잘못된 이야기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일 왜 아브라함을 불렀는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도를 집행하려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냐? 그렇게 하고 그 공의로운 도를 따라 살지 않는 도성이 소돔고모라다. 죄악이 가득 찼다. 그 성은 멸망시킬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기도했다. 만일에 그 성에 의인 열 명이 있으면 그럴 때 아브라함의 기도 때문에 용서하시리라고 그랬다. 그러니까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에게 속하고 그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도가 집행되는 나라고 그 하나님의 공의를 배반하고 살면 하나님이 그 성을 심판하신다. 그런데 그 나라는 아브라함께 속한 나라다. 그렇게 해서 18장 아브라함의 집의 식탁의 친교에서 이삭의 출생 아브라함과 이삭 그 후손들이 상속할 것이고 대대로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한다. 그것을 지키지 않는 자를 심판하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그 나라의 왕으로 세우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른 자가 있으면 심판하지 않을 것이다. 롯이다. 롯은 아브라함에게 속한 자이다.

 

그래서 19장에 롯을 구원한 이야기가 있다. 롯만 구원한 것이 아니라 롯의 후손들을 이야기했다. 롯의 후손들은 출생은 아주 부끄럽게 출생됐지만 롯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구원된 것처럼 롯의 후손들도 롯의 기업을 받는 것이다. 그것이 신명기에서 하고 있는 말이다. 그 종족이 형편없다는 것을 기록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아브라함의 속한 자다. 비록 산으로 도망해서 굴속에 있었지만 그들도 가나안 땅의 소유자가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니까 창세기는 창세기의 문맥이 있는데 그것을 빼 버리고 해석을 하면 안된다.


그 다음에 20장을 보면 롯만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제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증거 하시고 그 집을 축복하게 하셨다. 여기서도 사라를 빼앗길뻔 했다. 하나님이 아비멜렉이 태를 전부 닫아 버렸다. 그는 선지자니까 그가 기도하지 않으면 너희 집은 망할 것이다. 아브라함이 기도하니까 그 집 여자들의 태가 열렸다. 아브라함이 이처럼 만국을 축복하는 사람이다. 롯만 건짐 받는 것이 아니라 불레셋 임금 그랄은 불레셋이다. 아비멜렉에게도 하나님이 증거 하시고 그 집도 아브라함의 기도 때문에 살았다. 롯만 산 것이 아니라 아비멜렉도 살았다. 왜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니까.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고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그도 축복을 받는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한 단락이 끝난다.

 

그리고 나서 21장에 또 상속자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젖은 떼고 잔치했는데 이스마엘이 조롱했다. 왜냐하면 자기는 크고 이삭은 조그마한데 이삭이 장자거든. 옛날로 비유하면 잘 알 것이다. 옛날에 장가를 갔는데 본처가 아이를 못 낳는다. 그래서 이제 옛날에는 또 얻지요? 아내를 두고 얻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아들이 20세쯤 됐다 말입니다. 여러명 있는데 느닷없이 본처가 아이를 낳았다. 그래 가지고 젖 떨어지면 구약 때 보면 자기 분깃이 있다. 만일에 젖떼었다고 어린아이를 장남이다. 이 아들이 장남이다. 나머지는 다 서자니까. 그렇게 하고 나면 서자로 난 아들이 이것을 인정하냐면 두고두고 인정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스마엘이 이삭보고 웃어 버린 것이다. 자기가 먼저 태어났는데 이것이 장자여? 그래서 비웃어 가지고 쫓겨났다. 그래서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났다. 그런데 그 다음에 그 복에 참여한 사람이 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다. 그 사람이 브엘세바에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와 함께 계시다 하고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고 셈이 큰 셈인데 제일 끝에 보면 아브라함이 불레셋에 여러 날을 거하더라. 그전에 애굽에 갔을 때는 도망쳐 나왔다. 그래서 브엘세바는 아브라함이 셈이 되고 그렇게 해서 이스마엘은 쫓겨나고 언약에 참여한 이방 왕이 들어온다. 그래서 출생과 함께 쫓겨난 자와 들어온 자가 있다. 거기서 한 단락을 이루고 있다. 이방까지 포함되면 한 단락이다. 그 다음에 또 씨 이야기가 다시 나온다.

 

22장이다. 드디어 이 씨를 데리고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를 드리라고 그랬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진짜 드렸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보고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겠다. 하고 하나님이 맹세로 자기 언약을 보증하셨다. 그전에는 맹세했다는 말이 없다. 히브리서에서는 맹세로 그 언약의 불변을 보증했다. 가장 강력한 보증이다. 하나님이 맹세로 언약을 보증하셨다. 그리고 나서 이삭의 아내가 된 리브가의 가계를 조금 붙이고 있다.

 

히브리서는 이것은 비유컨대 죽은 자가운데 도로 받은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씨는 죽은 자 가운데 도로 받은 씨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제사는 모리아 산의 제사가 항상 원본이다. 거기 짐승이 아니라 사람을 드렸는데 짐승이 대신 죽었다. 것이 항상 모든 제사의 모델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삭은 드렸다가 살아났고 이 살아난 이삭으로 말미암아 가문을 이룬 리브가에 대한 이야기를 함으로 시작하고 있다. 장가갈 이야기를 미리 하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에 리브가가 후손을 얻지 못하면 아브라함의 약속은 무효가 된다. 그래서 가문을 이룬 리브가의 가계를 기록하고 있고 그리고 드디어 23장에 사라가 죽었는데 죽으면 끝나는 것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22장에는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 도로 받은 씨가 있을 뿐만 아니라 23장에서 아내는 죽었지만 아브라함은 그 땅을 값주고 등기 이전을 했다. 내것이다. 거기에 소위 사라의 죽음과 아브라함의 소유 매장지 이야기가 나오고 그 다음에는 상속자 이삭의 결혼 이야기가 길게 나온다. 24장의 이삭 장가간 이야기가 창세기에서 제일 길다. 그래서 만일에 이 상속자가 결혼하지 못하면 아브라함의 약속은 무효가 된다. 그렇게 해서 상속자가 결혼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하란으로 가서 결혼하고 있다. 이 하란은 데라의 후손이 살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나서 25장에 모든 것을 상속받는 이삭과 다른 아들들의 복이 나온다. 아브라함이 늙었는데 모든 복을 이삭에게 주었다. 후처들도 아들을 낳았는데 미리 돈을 누어서 떠나도록 했다. 그리고 이스마엘도 함께 장례는 치렀지만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를 못했다. 그 때도 먼저 후처의 아들들 그 다음 이스마엘 그리고 이삭 이런 식으로 기록했다.

 

아브라함의 복이 이삭에게 상속됐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후처의 아들들이 이삭과 함께 그 땅에는 거하지 못했지만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동방으로 건너갔다. 그렇게 해서 온 땅에 퍼지는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그 다음에 이제 이스마엘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이도 약속의 씨에 나타난 아들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후처의 아들들은 약속의 씨 하는 그 족보에 직접 언급되는 것은 아니었다. 누가 씨냐 한 것은 이삭과 이스마엘이다. 그래서 이스마엘의 족보를 쭉 기록하는데 이 족보는 큰 나라를 이룬다는 것이 핵심이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냈을 때 울지 말아라. 그를 통해서 큰 나라를 이룰 것이라고 했는데 큰 나라는 열두 방백이 난 것이 큰 나라다. 그리고 그들의 거처는 애굽 길가에 즉 이스라엘과 애굽 사이에 거처하고 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다. 가나안 땅을 넘어서고 있다. 그러므로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하는 것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열두 방백이면 큰 나라를 이룬 것이다.


그 다음 25:19절 이하에서 이삭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본격적인 언약 후손의 족보가 기록되고 있다. 이스마엘의 후예는 열두 방백이 애굽과 가나안 사이에 있는 땅에서 살고 있는 것이고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의 후손은 이삭이다. 그 일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이삭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인데 그 이삭의 후예 그 족보의 핵심적인 문제는 상속자다. 그가 상속자가 하는 것이 핵심이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 그것이 핵심이다. 아브라함의 복은 씨로 말미암아 상속될 것이다. 그런 이야기인데 이제 이삭은 상속됐다. 어떻게 이삭이 아브라함의 복을 상속하고 그가 참으로 상속자로서 자기가 받은 것을 후손에게 물려주는가? 그것만 감당하면 이삭은 자기의 사명을 감당한 것이다. 그래서 상속자가 핵심이다.

 

25:19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이 정하신 장자 문제가 나온다. 먼저 이삭의 생애를 기록하기 전에 그도 자기 아버지처럼 아이를 낳지 못했다. 만일에 못 낳으면 이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복이 약속의 씨인 이삭에게는 상속됐지만 만일에 또 번성하지 못하면 그 나라는 끝나는데 기도해서 낳았다. 그런데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고 바꿔져 있다. 실제로 장자 명분을 팔아서 바꿔졌다. 명분 바꿔진 것까지가 25장의 내용이다. 이제 이삭이 상속자인데 이삭이 상속한 즉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씨가 상속한 이 나라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서 상속된다. 그 문제가 야곱과 에서 문제다. 그래서 이삭은 상속자다. 이 상속을 누구에게 상속할 것인가? 상속 문제를 말하는 장자 문제를 먼저 언급하고 그리고 나서 그가 아브라함으로부터 받을 구체적인 복을 말하고 그 다음에 그 상속자 즉 장자 야곱이 이야기를 쭉 기록한다.


우리 같으면 25장하고 26장을 바꾸면 좋을 것 같다. 아브라함에게 받은 복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그 복을 후손에게 넘겨준다는 식으로 25장을 26장 다음으로 하면 좋겠는데 성경은 그렇지 않다. 상속받은 장자에 대한 이야기다. 이삭은 자기가 상속받은 것을 다음 대에 상속시켜야 그는 죽음을 이긴 상속자로서 의미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해서 아들 낳는 이야기 그리고 누가 상속을 받을 것인가? 하는 상속자 장자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처음을 연다. 왜 이것이 이삭 기사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만일에 예수께서 그가 얻으신 것을 교회에 물려주지 못하면 예수가 부활은 한마디로 하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삭은 자기가 상속받은 것을 상속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다. 이삭도 죽을 것이다. 그래서 출생을 통해서 후손에게 넘기지 못하면 그는 상속자라는 의미가 반감된다. 받기는 받았지만 넘겨주지 못하니까 그러니까 이삭의 생애를 열면서 제일 처음에 하는 말이 그도 기도해서 낳았는데 이제 장자가 바꿔졌다. 이 장자는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다. 실제로 장자의 명분을 팔아 버렸다. 그래서 야곱이 장자다. 그렇게 이삭의 장자 이야기를 먼저 함으로 이삭의 생애를 열고 있다. 항상 첫 번에서 전체를 연다고 했다. 첫 번에가 그 사람의 생애의 전체가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가 받은 상속 이야기 그리고 그 상속을 받을 장자 이야기를 쭉 기록하고 있다. 그가 받은 약속은 약속한 언약의 땅에서 받은 상속 이야기다. 어떤 이야기냐면 기근 시에도 백배나 받았다. 아브라함은 기근 시에 애굽에 내려갔다. 그런데 이삭은 기근 시에도 내려가지 않고 백배나 받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셈을 아베멜렉의 종들이 막아 버렸는데 다시 셈을 파면 물이 나오고 아버지의 이름을 불렀다. 아버지 것을 전부 다시 회복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불렀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예배하고 있다. 그것이 이삭이 상속한 내용이다.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 가나안 땅의 성소다. 그리고 나서 이 복을 누가 인정했냐면 하나님이 거듭 거듭 이렇게 하니까 아비멜렉이 찾아와서 범사에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더라. 우리 언약을 맺자 하고 언약을 맺었다. 즉 아브라함이 이전에 그 땅의 주인이었는데 그 복을 이삭이 받은 것이 이방 왕 아비멜렉이 시인하고 과연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다. 하고 언약을 체결했다. 이것은 이방인까지 미쳤다는 문제보다도 이방인이 시인한 문제다. 하나님도 시인 하사 기근 시에도 복을 주셨고 그리고 아버지의 셈을 아들이 파면 다시 물이 나오고 아버지의 이름을 불렀고 그것을 보고 이방인이 와서 과연 너희 하나님이다 시인하고 그런 이야기가 26장 이야기다. 이렇게 26장은 상속에 대한 이야기가 전체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27장부터는 다시 이제 이삭의 것을 상속할 야곱에 대한 이야기가 쭉 나오고 야곱이 도망갔다가 자기 아버지 집에 돌아오면 상속받은 것이다. 그래서 자기 아버지 집에 돌아온 것으로 끝난다.  27장에 장자 상속식이 있다. 이것을 가지고 요새 부흥사들은 헌금 내야 복준다고 그런다. 별미 축복. 이삭도 별미를 먹고 복을 빌려고 했으니 별미 헌금을 하라고 그런다. 별 헌금의 종류도 많다. 그러나 이것은 그것이 아니라 이제 상속식 잔치를 할려는 것이다. 이 아버지는 에서를 굉장히 좋아한다. 털도 많이 나고 사나이처럼 생겼다. 사냥도 잘하고 그래서 내가 잡아온 별미를 먹고 크게 기뻐하고 복을 주마. 그렇게 해서 에서 보고 잡아오라고 한 것이지 무슨 돈 내면 복주고 그런 이야기하고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그래서 지금 장자 상속식을 하려고 그러는데 자기도 눈이 침침해 지고 죽을 것 같아서 에서야 내가 너에게 복을 주마 하고 상속식을 했는데 그 상속식에서 장자가 바꿔졌다. 처음 25장에 있었던 포괄적인 일에 구체적으로 집행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데 바꿔졌다. 28장에는 이제 야곱이 장자가 되었기 때문에 야곱을 죽이려는 에서의 계획이 있었다. 이런 싸움은 창세기 처음에 있었던 싸움이다. 이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장자가 야곱인데 그를 시기해서 죽이려고 한 것이다. 만일에 야곱이 죽으면 이삭의 장자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실은 결혼한다는 핑계를 대고 야곱이 떠났다. 그런데 야곱이 떠나기 전에 에서의 결혼 이야기도 한다. 왜냐하면 실은 에서의 상속자 이삭의 아들이거든요? 장자권은 야곱에게 있지만 그도 여전히 이삭의 아들이다. 여기서는 장자권에 대한 이야기다. 상속하고 쫓겨나고 그런 이야기보다도 장자권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에서가 결혼한 이야기를 쭉 하고 그 다음 야곱이 결혼하려고 벧엘로 해서 자기 삼촌 집에 간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벧엘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다. 이제 자기 아버지만 장자로 축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장자에게 나타난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에서는 항상 장자가 예배한다. 하나님께서 벧엘에 나타나셔서 내가 너를 모든 환난에서 지키고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겠다 염려하지 말아라 그렇게 했다. 야곱이 거기서 맹세했다. 나를 돌아오게 하시면 이곳이 하나님의 전이되겠나이다. 그것은 거래적으로 언약한 것이 아니라 언약이다. 돌아오게 하면 그는 마땅히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장자로서 그를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야곱은 돌아오면 거기서 하나님을 섬길 것이다. 그런 약속을 했다. 그렇게 해서 야곱의 하나님은 벧엘의 하나님이시다. 야곱에게처럼 하나님이 오르락내리락 한적이 없다.

 

그리고 이제 장자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가문을 이룬 이야기가 29장에서부터 나온다. 그 가문에는 아들 넷 낳는 이야기가 있다. 레아에게서 낳은 네 아들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레아가 낳은 네 아들을 말하고 29장이 끝난다. 이제 그가 아들을 낳고 번성하고 있다. 그 다음 번성하고 번성하는 것은 30장이다. 거기 보니까 이제 장가갔는데 종들이 아들을 낳고 라헬도 아들을 낳고 하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아들만 낳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야곱이 근심하고 있다.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이루겠나이까. 좋다. 그러면 이제 머슴살이 그만하고 월급제로 하자 하는 식이 되어서 얼룩덜룩한 양이 나오면 네것 한 것이 있다. 그렇게 해서 라반의 모든 것이 야곱의 것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아들도 많이 낳았고 부자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야곱이 번성했다 그 말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사촌들이 싫어해서 하나님이 돌아가라 했고 그래서 돌아가는 길에 미스바에서 서약했다. 다시는 라반의 집은 야곱이 집을 넘보면 안된다. 야곱도 그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제 상속자 야곱에게서 완전한 선명한 선이 그어지고 있다. 그리고 32장 돌아오기 전에 얍복강에서 자기 형 에서의 낯이 두려워서 하나님 앞에 살려 달라고 기도하는 내용이다. 만일에 그가 죽어 버리면 상속을 못한다. 그래서 상속을 위한 약속을 성취해 달라고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한 기사가 있다. 거기서 야곱은 끝까지 붙들고 이겼고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 하나님의 왕자 그런 이름으로 바꿔 주셨다. 그는 하나님을 붙들고 이긴 자다. 그래서 상속을 위한 씨름이 32장이고 그 결과로 33장에 에서가 와서 화해하고 그 호위 장관이 되어서 가나안으로 돌아갔다.

 

실은 에서는 호위 장관을 하려고 했는데 야곱이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형님 먼저 가시라고 이제 막 낳은 양 새끼를 몰로 천천히 갈란 다고 그랬다. 실은 호위 장관은 에서다. 그렇게 말하고 세겜에서 머물러 하나님 앞에 단을 쌓는 이야기가 있다. 그전에 하란에서 여호와께 단을 쌓았다는 말은 없고 드디어 가나안 땅에 돌아와서 단을 쌓았다. 그것이 자기 조상들이 단을 쌓았다는 이야기와 같다. 그렇게 해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33장에 있다. 드디어 장자가 자기 기업의 땅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를 죽이려는 자의 분노는 끝났다. 그가 그 종으로 호위하리라고 했기 때문에 끝났다.

 

그런데 실은 겁나서 벧엘로 돌아가지 않고 세겜에서 머물렀다. 세겜은 변방이다. 벧엘로 가야 되는데 안가고 있었다. 실은 에서의 칼이 겁나서 안간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큰 환난을 당했다. 그래서 벧엘로 올라가라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그래서 벧엘로 올라갔다. 그런데 올라가기 전에 잃은 것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 하나님이 거기서 다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불렀다. 바꾼 이름을 다시 불러 쥐셨다. 그리고 거기 아버지의 일을 얻고 아버지는 죽고 아버지의 집에서 야곱이 계속 살았다. 드디어 상속자가 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끝나고 있다.

 

이삭에 대한 문제는 상속에 대한 문제다. 그도 상속을 받고 상속시키고 그 이야기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하신 장자 야곱이 큰 가문을 이루어서 상속받았다. 이제 아브라함은 한 명에게 시켰지만 상속받은 이삭은 말하자면 열두 아들에게 주었다. 야곱은 열두 아들은 낳았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야곱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에돔의 대략은 이러하니라. 에돔 족속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도 이삭의 아들이다. 그래서 에돔을 먼저 기록하고 그가 얼마나 번성했는가 이야기하고 진짜 이삭의 장자인 야곱의 번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야곱의 약전이다. 그런데 에돔에 대략에서 핵심적인 이야기는 세일 산에서 강대했다 하는 것이 핵심이다. 에돔의 족보를 보면 가나안 땅에서 누구를 낳고 한 이야기 그 다음에 세일 산에서 누구를 낳고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을 때 에돔에는 왕이 있고 방백들이 어떻고 쭉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세일산에서 강대한 나라가 됐다. 하는 것이 에돔에 대한 핵심이다. 그도 상속자여서 그런다.

 

그 다음 이삭의 진정한 상속자 가나안 땅 상속자 이야기 야곱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야곱 이야기의 핵심은 열두 아들들의 이야기다. 그는 열둘의 머리다. 열둘은 이스라엘이다. 열둘이 이스라엘의 지파들이다. 그래서 열둘을 이루면 끝이다. 그래서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는 길에 베냐민을 낳았다. 그 때 낳을 때 열둘을 낳은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마치 열둘 낳으려고 정해 놓고 낳은 것처럼 그렇게 하고 있다. 왜냐하면 바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족보의 의미를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야곱의 이야기는 열두 아들들의 이야기다. 그런데도 열두 아들인데도 항상 장자는 있다. 이제는 장자만 상속자가 아니다. 다 상속자인대 장자가 있는 것이다. 구약 역사는 장자의 역사다. 그래서 야곱의 장자는 일단은 요셉이다. 요셉이 핵심인대도 실은 야곱의 일들은 어디서 완성이 되는가? 유다다. 그래서 먼저 요셉을 이야기하고 요셉이 열둘의 장자니까 이 장자 이야기를 쭉 할 것이다. 그런데도 야곱이 상속받은 핵심적인 문제는 유다에게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유다 족보 그 다음에 나머지는 전부 요셉 이야기다.

 

그래서 장자의 꿈을 꾸는 요셉의 이야기다. 꿈꾸는 요셉이 장자다. 이 장자에게 해와 달과 별들이 다 절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장자는 야곱의 집에서 채색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장자 이야기를 먼저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네가 장자여야 아버지가 입 조심해라. 형제들은 분노하고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야곱의 역사가 가나안 땅에서 완성될 유다 지파를 기록하고 있다. 애굽에서까지는 요셉이 장자인데 야곱이 유언할 때 축복은 가나안 땅에 왕국을 유언했는데 그 왕국의 홀은 유다에게 있다. 그렇게 해서 야곱의 나라가 가나안 땅에서 왕국을 이룬 그 장자로 유다를 기록하고 나머지는 요셉이 중심이 된 이야기다.

 

그런데 유다의 가계는 그 가문에 큰 죽음이 왔는데도 죽은 자를 대신해서 씨를 잇게 해주는 형님을 대신해서 씨를 잇게 해주는 그 은혜의 제도로 그 나라가 이루어졌다. 그것도 유다의 믿음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집에 시집온 다말의 믿음 때문에 그 가계가 이어졌다. 완전히 믿음의 역사요 은혜의 역사다. 다윗 왕국은 처음부터 이렇게 되어 있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 다음에 39장부터는 장자 요셉의 이야긴데 그는 애굽의 종으로 팔렸는데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다. 그가 꿈을 해석한 일이 전환점이다. 그래서 그는 애굽이 감옥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바로의 꿈을 해석해서 하나님의 지혜로 인정을 받았다. 39장은 옥에서 꿈을 해석한 이야기 40장은 나와서 꿈을 해석한 이야기 41장은 그가 바로의 집에 치리 자가 되고 이스라엘의 장자가 세상의 구원자다. 큰 흉년이 들었는데 이스라엘의 장자인 하나님의 지혜이신 이스라엘의 장자 때문에 살았다. 애굽이 요셉을 자기들의 치리 자로 삼음으로 살았다. 그러니까 애굽이 실은 요셉에게 복종하는 식이 된다. 바로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자리만 높을 뿐 모든 것은 네것이다. 그렇게 해서 야곱의 장자 하나님의 지혜가 충만한 이 사람을 자기의 치리 자로 삼아서 애굽도 구원받고 열국이 구원을 받았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복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알겠지요? 애굽까지 미침으로 온 세계가 요셉의 손에서 곡식을 사야 한다. 그런데 드디어 42-42장을 보면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두 번 내려간다. 그래서 이제 간첩이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 두 번 내려갔는데 드디어 43장에 유다가 책임을 지고 자기 생명을 볼모 잡히고 베냐민을 돌려보내라고 그런다. 이제 형제끼리 원수는 끝났다. 내 생각에는 야곱이 유다에게 직접 장자의 상속식은 안했는가 몰라도 장자 대우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시므온을 석방시킨다 했을 때도 처음에 르우벤이 말했는데 르우벤의 말은 귓가에도 안 들었다. 유다가 말하니까 들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나중에 열두 아들들을 축복할 때 시므온과 레위 지파는 세겜 사건 때문에 저주했다. 그러면 분명히 아직 장자로서 예언되고 그런 것은 아니어도 아마 장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유다일 것이다.

 

그런데 유다가 총 책임을 지고 우리는 한 아버지한테 속했는데 이 아들과 우리 아버지의 생명이 연결되어 있고 그의 형이 있었는데 그는 죽었고 이제 마지막 이 아들하고 생명이 연결되어 있는데 이 아들이 가지 않으면 아버지가 죽으니까 나를 볼모 잡고 이 아들은 돌려보내라고 그렇게 해서 형제끼리 불화가 전부 끝난다. 이스라엘이 한 아버지에게 속한 아들로 연합되고 있다. 그들의 불화가 끝난다. 그전에 자기 아버지 집에서 에서와 야곱의 분쟁이 있었는데 그런 분쟁이 끝난다.  그들은 누가 장자가 되냐 하는 문제로 분노해 버렸는데 그런 문제도 끝나 있다. 왜 유다가 장자의 역할이면 돌아만 가면 아버지 것을 다 이어 받는데 그가 자기 생명을 볼모 잡히는 것을 보니까 이제는 그런 문제가 다 끝났다. 그래서 드디어 요셉도 놀래지 말라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먼저 보낸 것이 아니냐고 울고 화목했다. 거기서 야곱집의 분쟁들은 전부 끝나 있다. 그래서 45장에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화목에 대한 이야기가 아름답게 나와 있다.

 

그리고 46장에는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됐다는 말을 듣고 애굽으로 이스라엘이 자기 가족들을 데리고 내려간다. 하나님이 내려갈 때 약속하셨다. 너를 돌아오게 하리라. 그리고 너는 거기서 요셉이 네 눈을 감게 하리라. 그런데 내려간 사람이 총 70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70명은 창세기11장에 70 민족이란 말은 없지만 그 70과 상응하는 그런 구조들이다. 70명이 내려갔다. 이제 이스라엘 집에 70인이 내려간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가 애굽으로 내려간 것이고 그것이 그들의 복이다. 그래서 요셉이 세상의 구원자가 되었기 때문에 요셉 때문에 이스라엘과 그 열두 아들들이 그리고 내려갔다. 그들이 고센 땅을 기업으로 받고 거기 우거했다. 그 땅에서 번성하고 자유 자로 살았어도 그 땅은 하나님의 나라 땅은 아니다. 이제 가나안 땅이 기근이 회복되고 하나님이 젖고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으로 바꿀 때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말하자면 애굽에 위탁시킨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세상의 구원이 되도록 그렇게 되어 있다.

 

그리고 48장에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의 아들로 한 등급 올려서 축복했다. 왜냐하면 요셉이 장자니까 두 분깃을 받도록 축복했는데 그것도 손을 어긋 맡겨서 축복했다. 그리고 49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열두 아들을 축복한 기사가 있다. 이 축복의 가장 큰 핵심은 유다에 대한 축복이다. 그에게 왕권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가나안 땅의 번성함 기업을 차지한 문제들로 축복했다. 그리고 자기 아들한테 맹세시켰다. 나를 반드시 조상들의 묘실에 묻어 달라. 그리고 야곱의 장례식이 있었는데 이 장례식에 요셉과 형제들만 올라간 것이 아니라 애굽의 모든 장로들 애굽의 무수한 사람들이 함께 애곡하고 올라갔다.

 

이렇게 한 것은 요셉이 큰 권세의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요셉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바로에게 속한 모든 자들이 슬퍼했다. 애굽이 큰 통곡이 있었다. 그들이 다 함께 야곱의 장지까지 따라갔다. 아브라함의 묘실까지 따라갔다. 그 죽음에 참여했다. 만일에 아버지가 죽었는데 누구누구 함께 장례식을 했더라 아브라함이 죽으면 이삭이 장례식을 하고 이삭이 죽었을 때 에서와 야곱이 장례식을 한다. 여기 보니까 야곱이 죽었는데 바로의 모든 장로들이 함께 참여한다. 그렇게 함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데 까지 올라갔다. 무슨 말인가 짐작이 가지요?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말이 어디까지 진행되는지 그렇게 갔다.

 

그리고 요셉이 다시 한번 화목을 확증했다. 내가 당신들을 보호하리라. 염려하지 말라고 왜냐하면 아버지는 죽었지만 이스라엘의 하나 됨은 깨어지지를 않는다. 이스라엘이 이제 살아 있는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한 혈통으로서 하나를 이루었다. 그리고 요셉도 죽을 때 내 시체를 가지고 나가라고 유언하고 죽었다. 여전히 애굽에서 부요하면서 그들의 소망은 조상들의 묘실 가나안 땅에 두고 있다. 이미 조상들 때 애굽의 모든 장로들이 가나안 땅에 함께 올라가서 울었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400년 종살이하고 드디어 애굽에서 건져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도 많이 변했을 뿐만 아니라 애굽 백성도 요셉을 알지 못하는 임금이 일어났다. 요셉이 누구요 그런 사람이 일어났다. 그래가지고 그를 다 죽이려고 그랬다. 이제는 가나안 땅에 소망을 둔 하나님의 지혜 자를 자기들의 치리 자로 삼았던 그런 시대는 끝났고 이제는 영토적인 문제밖에 없다. 이 사람들이 만일 도망가면 우리는 노동력을 잃는다. 노동력이 국력이거든요? 우리 나라가 돈을 잘 번다고 강대국이라고 하지 않는다. 인구가 너무 적어서 현대도 강대국이 아니다. 그렇게 했는데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구원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가나안 땅에 조상들과 함께 했던 멜기세덱의 나라 하나님이 친히 그들 중에 성소가 되신 나라를 건설할 것이다.

 

바로 그런 현장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하나님이 언약을 기록하도록 한 것이다. 너희들은 구원하신 하나님은 너희와 지금 가나안 땅으로 진행하신 하나님은 누구 신가? 천지 창조의 처음부터 에덴에서 함께 하셨던 하나님 너희 조상들과 가나안 땅에서 함께 하셨던 하나님 이 하나님이 너희들을 가나안 땅을 주시고 거기서 너희들의 성소가 되시어 함께 하시려고 그런다. 그런데 그 때 나올 때는 애굽은 강제적으로 원금을 헌금했고 핍박했다.


그러나 신명기에서는 애굽은 삼대가 지나면 성회에 들어온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고 있다. 그래서 이 모세 제도는 온 세상에 죄의 권세 아래 있었을 때 시행되는 제도다. 가나안 땅 백성은 이미 조상 아브라함 때 증거를 받았다. 그런데도 이 약속이 성취될 때는 온 세상은 어둠의 권세 아래 있고 죄악이 가득 찼다. 그래서 전부 그들을 죽이라고 그런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가나안 땅에 나라를 세운 기사가 출애굽기부터 진행이 된다. 다시 거꾸로 앞에 부분을 읽으면 될 것이다. 이제 아브라함의 신령한 후손 예수 그리스도 혈통을 따라서 난 씨가 아니라 약속을 따라서 난 씨 반복되는 죽음을 통해서 후손에게 나라를 상속한 씨가 아니라 죽음을 영원히 이긴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씨 이 씨안에서 이제 신령한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 신령한 열두 지파 그를 믿는 모든 백성들이 하늘의 속한 권세 있는 왕국 하늘에 있는 권세 있는 복을 누리도록 하나님께서 완성하셨다. 그것이 창세기의 이야기다.

 

이제는 예수 안에서 천하 만민이 조상들의 묘실이 아니라 조상들이 소망했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두고 기뻐하고 있다. 그리고 요셉의 장자가 아니라 하늘의 지혜이신 하나님의 장자이신 그분을 통치자로 삼고 온 세상이 그 상에서 먹는다. 그렇게 완성했다. 그것이 창세기의 내용이다. 이제 이 선을 따라서 풀면 된다. 다음에는 창세기 앞부분을 1장부터 풀면 그전에 이런 사상들이 정립이 덜 되어 있어서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한 것들 교리적으로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푼 것들이 있다. 그런 것을 좀 교정하면 창세기가 전반적으로 그 틀을 갖출 것이다.

 

제가 몇 군데 고친다 고해서 여러분은 한 군대도 안 틀린 사나이처럼 더 맞은 것처럼 아 우리 목사님 것도 못 믿겠다. 그러면 안된다. 제가 이렇게 틀리니 여러분은 얼마나 틀릴까 그리고 더 조심하고 더 읽어야 되지 아 우리 목사님도 별볼일 없구나. 그전에는 그렇게도 옳다 하더니 어느 날 바꾸자고 그런다. 그런데 설교는 성경 해석은 성경처럼 영감된 것이 아니다. 잘못된 해석이 있다. 더구나 우리가 잘못된 전통이 무수히 끼여들어 있다. 그런 것을 벗겨 내야 한다. 그러니까 저도 이런 저런 시행 착오가 있지만 감사하게도 진행적인 시행 착오지 뒤로 물러가는 시행착오는 아직 없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런 점에서는 안심해도 좋다. 그리고 제가 할 때도 여러분이 성경을 다시 보시고 아하 성경이 그렇구나 지금 그 설교는 들어보니까 그전에 목사님 설교가 틀렸구나. 그 정도 알 수 있어야 되지 그냥 따라오면 안된다. 성경이 그런가 자꾸 생각을 해야 한다. 그래야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가 된다.

 

 창세기 개요 강해 4번째: 천지와 만물의 창조 (1)

창1:1 본문을 읽으면서 설명하겠다. 이전처럼 한 시간에 한 장씩을 나갔으면 좋겠지만 창세기 앞부분은 이런저런 잘못된 해석이 있기 때문에 조금 더디다. 그렇게 알로 따라 오기 바란다.

 

이제 1장을 강론하기 전에 1장부터 한 단락이 어떤 중심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먼저 생각하자. 왜냐하면 2장 4절에 천지 창조의 대략은 이러하니라. 하는 족보가 있고 그리고 5:1절에 아담 자손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새로운 족보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1-4장까지가 한 단위다. 그런데 1-4장부터 핵심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계를 지으셨다. 기쁨의 동산에 에덴에 아담을 두셨다. 아담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저주된 세계에 하나님이 복을 주셨는데 그 저주된 후손 중에 하나님이 아벨을 기뻐하시고 그 예배를 받으셨다. 비록 아벨을 죽었지만 죽은 아벨 대신에 셋을 주시고 셋의 후손인 에노스 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그 예배드림으로 단락이 끝난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우주적인 성소 기쁨의 동산 에덴 그리고 죄에도 불구하고 후손 중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아벨을 기뻐 받으심 그 후손들이 하나님을 예배함 이 문제가 4장까지의 중심 문제다. 그래서 1-4장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으로 하여 하나님의 성소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일하고 예배하게 하신 것이 4장까지의 중심 문제다.

 

그 중에 더 구체적으로 1장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주적인 성소 즉 하나님께서 우주적인 성소로 세계를 지으셨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기쁨의 세계였다. 그것이 1장이다. 2장은 그 중에서 사람이 장자다. 우주적인 성소 중에서도 생명이 충만한 중심지는 에덴이다. 그래서 2장은 하나님께서 세계의 상속자인 첫 사람과 에덴에서 함께 하신 일을 기록한다. 여기서 제가 상속자라고 그렇게 다시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대리자로 사람을 지었지요? 그가 하나님의 대리자로 모든 만물을 주관한다. 그런 의미로 상속자 장자다.

 

그리고 3장은 첫 사람의 실패로 세계가 저주된는데 그 저주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약속했다. 그리고 이제 그 승리가 나타난 것이 4장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에덴 동편으로 쫓아냈는데 하나님께서 에덴에서만 사람을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에덴 밖에서도 아벨을 기뻐하셨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휘장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처럼 저주된 세계 가운데서 하나님이 아담의 후손 아벨을 기뻐하셨고 그런데 가인은 그것을 거절했다. 아벨을 죽었지만 셋을 주셨고 그 후손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을 이뤘고 가인은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 힘과 성을 의지하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대적 자로 떨어졌다. 거기 까지가 4장이다.


이제 1장을 풀기 전에 1장과 2장의 관계를 설정해 둔 것이 풀기가 좋다. 왜 이렇게 큰 것으로부터 작은 것으로 들어가냐면 전체적인 흐름 전체적인 문맥을 잡지 못하면 부분을 해석할 때 그냥 곁길로 간다. 그러니까 항상 전체를 보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우리는 진짜 전체를 보는 안목이 생겼다. 해가 뜨고 지고 세월이 지나고 흥망성쇠가 변화무쌍하게 변하지만 우리는 전체를 보는 안목이 있다. 예수가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러니까 흔들림이 없이 걸을 수가 있는 것이다. 만일에 예수의 부활을 모르면 세상 물결에 그냥 흔들려 버린다. 그러니까 전체를 보는 안목이 중요하다. 그 전체를 보는 흐름을 알아도 부분 부분을 몰라도 안다. 괄호 채우기 비슷한 것이어서 몰라도 알고 여러분 한자로 써져서 앞뒤로 읽어보면 몰라도 그냥 괜찮고 그것을 몰라도 상관이 없을 만큼 안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항상 전체를 보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1장과 2장의 관계를 보고 그 다음에 1장을 해석하도록 하겠다. 1-2장의 관계는 창세기 족보 형식에 의하면 만물과 그것에 장자 관계다. 창세기 족보 형식은 항상 족보에 포함된 전체의 후손들을 기록하고 그리고 그 족보의 약속이 진행되는 장자 택한 자 그 사람을 중심 해서 다시 새로운 족보가 진행되고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1장에는 만물을 창조했는데 2장에 다시 사람 창조를 기록하고 있다. 1장에서 만물 창조의 주관자는 사람이다. 만물을 주관하는 것이 사람인데 사람이 누군가? 그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다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인가?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그런 문제들을 2장에서 다시 기록하고 있다 그 말이다. 그래서 1장은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 2장은 그 중에 장자인 사람 그렇게 해서 천지 창조의 대략을 이러하니라. 했는데 사람 이야기부터 한다. 사람 이야기만 한다. 에덴 이야기만 한다 그런 관계라 그 말이다.

 

그러니까 제대로 하자면 아담과 에덴을 보아야 만물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의미가 거기에 있으니까. 그래서 1-2장과 관계는 창세기 족보의 형식에 의하면 만물과 그것의 장자의 관계다. 하나님께서 우주적인 성소인 천지와 만물을 6일 동안 창조하시고 안식하셨다. 그리고 만물의 장자 곧 하나님의 대리자인 아담을 생명의 중심지인 에덴에 두시고 그와 함께 역사를 시작하셨다 .그래서 1장은 만물을 창조하신 역사요 2장은 아담과 함께 하신 역사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1장의 창조 기사는 만물중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대리자인 사람 창조를 목표로 해서 진행이 된다. 그렇게 해서 사람 창조는 다른 창조하고 다르게 되어 있다. 그리고 2장에서는 하나님의 상속자인 사람의 생명의 본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다는데 어떻게 지은 것이 하나님의 형상인지 그 본질과 삶의 의미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대리하는지 삶의 의미를 다시 기술함으로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하시는 언약 역사를 시작하고 있다.


그러니까 역사의 시작은 에덴이다. 우주적 성소에서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안식이 역사의 출발점이요 또 목표다. 에덴에서 하나님의 기사는 이러한 역사의 시작이다. 1장을 보면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주적인 성소를 짓는 것이고 그리고 그 목표는 7일에 나타나는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마치시고 쉬셨다. 날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되어 있는 날은 몇 일 날인가? 7일이다. 다른 날은 저녁이다 아침이다 몇째 날이다 이런 말만 있는데 날에 대한 설명을 쭉 반복하고 잇는 것이 제 7일이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마치고 쉬셨다. 그런 말을 반복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주적인 성소로 온 세계를 지으시고 거기서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하시는 안식 이것이 역사의 출발점이고 목표인데 그것이 어디서 시작됐냐면 인간과는 에덴에서 시작됐다. 그래서 아담의 기사는 이러한 역사의 시작점을 말한다.


아담이 인류의 머리가 된 것은 역사의 시작으로서 머리다. 예수께서 머리가 되신 것을 역사의 완성 자로서 머리다. 아담이 범죄한 자리에서 대신 벌을 받고 대신 지킨 것이 아니라 아담의 실패로 말미암아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역사를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서 순종하심으로 역사를 완성시킨 것이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 법적으로 대신 선 것이 아니다.

 

이제 1장을 보면 먼저 문장 구조를 봐야 한다. 1장의 문장 구조에서는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것과 2장 1절 천지와 만물이 이루니라. 하는 말이 비슷하게 맞아 들어간다. 항상 논문도 서론과 결론이 있고 그 사이에는 소위 본론이 있어서 처음에 선언했던 주제를 진행시키고 강화시키고 그리고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그런데 성경도 거의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먼저 주제적인 선언이 있으면 그 다음에 거기서 선언한 약속들을 어떻게 진행시키는가 구체적인 이야기 체 설명이 있고 뒤에는 그것을 종합하는 결론이 나타난 성격이 있다. 이처럼 문장이 비슷하면 더욱 알게 좋을 것이다. 이렇게 문장이 서로 상응해서 맞아 들어가는 것도 있고 내용상 결론을 맺어 주는 경우도 있고 또 이야기가 진행되어서 결론이 맺어진 경우도 있고 방식은 다르겠지만 그런 구조다.

 

그래서 1:1절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창조의 시작과 그 주제를 나타내는 서론이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시작 일뿐 아니라 1장의 주제적인 서론이다. 그 다음 2:1절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마침과 결론이다. 그 사이에 본문은 창조 과정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 중에 목표는 사람 창조다. 그리고 제 7일의 안식이 목표점이다.

 

창조의 과정은 창조된 땅의 처음 상태가 2절에 있고 그것의 질서와 충만함을 주신 연속적인 6일 간의 창조로 되어 있다. 그러면 내용은 무엇으로 되어 있냐? 하나님이 처음 창조했을 때 땅의 상태 그리고 6일간의 일하심을 통해서 질서를 주시고 구분하셨다. 그리고 구분된 세계를 충만하게 채우셨다. 그것이 그 내용이다. 그리고 6일간의 창조의 목표는 제 7일의 하나님의 안식이다. 6일 창조로 되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날의 강조 강조된 날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신 제 7일이다. 다른 날을 날이 강조가 안되어 있다. 그런데 7일은 날을 설명하는데 세 번을 반복법을 썼다. 다른 때는 연속 진행된다는 의미로 저녁이다 아침이다 몇째 날이다. 그런 말만 있는데 날 자체를 여러 번 설명하고 있는 것은 제 7일이다. 그러니까 항상 마지막 강조된 부분 그런 것이 목표점이 되는 것이다.


2절을 지금 해석하려는 것이다. 2절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는 이 말씀이 어디에 위치하는가 또 그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데 에 여러 이론이 있다. 위치가 무슨 말이냐면 이것을 첫째 날에 포함을 시킬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제가 하고 있는 것처럼 첫 째 날 이전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처음 창조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인지 이런 저런 많은 말이 있다. 그래서 문법적으로 이것이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처음 상태는 이러했느니라 해서 처음부터 물질을 전제하는 방식으로 볼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독립적으로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고 처음 창조된 상태는 이러하다 그렇게 볼 것인지 문법적인 이런 저런 토론들이 있지만 각각 자기 신학적인 사상에서 마지막 결정을 하기 때문에 최후 논거점이 잘 안된다. 그러니까 전체적인 구조의 틀을 잘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본문의 위치 첫째 날인지 아니면 첫째 날 전에 이야기인지 또 그 내용은 무엇인지 하는 많은 이론이 있는데 주로 무엇 때문에 그러냐면 우주와 만물의 기원과 실제에 대한 이방의 신화적 사고와 현대 과학적 사고와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모든 윤리적인 삶에는 자기 존재가 무엇인지 하는 것이 토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주는 어떻게 생성됐고 또 우주는 어떤 구조로 되어 있고 우리는 누구냐? 그것이 해석됐을 때만 바른 윤리가 가능하다. 그러기 때문에 이 창세기 앞부분이 그렇게 많은 논쟁점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은 전부 성경이 말하는 창조론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세계는 하나님이 없는 윤리를 형성을 한다. 그렇게 했을 때 그들을 그들의 존재가 무엇인지 또 영원이 무엇인지 하는 것을 자기들 식으로 설정을 하고 거기 맞는 윤리 설정을 한다.

 

이제 그런 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그것을 반대하느라고 우리도 해석을 한다.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옳기도 하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부작용이 있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신화적 사고는 악한 신과 선한 신의 싸움에 의해서 우주가 생겼다. 하는 것이 고대 신화들 개념이다. 우리는 그 정도 고대 신화는 없고 우리 나라는 천지 창조에 대한 그런 신화는 없고 국가 건설에 대한 신화만 있다. 그래 곰이 마늘 먹고 사람이 되었다는 등 그런 국가적인 신화만 있지 천지 창조가 어떻느니 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없다. 그런데 고대 이방 신화에는 악한 신과 선한 신이 싸워서 그 시체를 가지고 만물을 지었다는 등 그러니까 물질은 악하고 이제 이런 식 그래서 물질을 지은 신은 악하고 다른 신은 높고 하는 두 신의 개념 이런 개념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그런 싸움에 의해서 세계가 생겼다고 이야기를 하고 과학적 사고는 진화론에 근거해서 만물을 해석한다. 우리 사람도 진화론으로 해석을 하고 있다. 또 윤리까지라도 진화론적인 해석을 한다. 더구나 현대 미국 철학은 실용주의라고 그렇습니까? 그것은 어떤 의미로 진화론적인 사고의 극치다. 왜냐하면 현상에 유익한 결과가 나온 것은 선이거든요? 그렇게 해서 거듭 새로운 기계를 만들어 내면 말하자면 그런 방식으로 진행되면 절대적인 윤리는 없는 것이고 소위 그 환경에서 최선만 윤리가 되게 쉽다. 그것은 성경 윤리하고는 전혀 다르거든요? 그런데 어떻든 고대 신화는 두 신의 싸움의 개념이다. 물질은 악하다. 이런 개념들 또 현대적인 사고 개념은 만물을 처음부터 있었고 이것이 환경을 따라서 그 환경에 맞는 것만 살아 남아서 점점 진행됐다 하는 진화론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런 말이다.


그들은 2절은 자기 사고에 맞도록 해석하여 하나님의 6일 창조를 부인하든지 또는 6일을 지질학적 장구한 연대에 대응하는 표현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한다. 무로부터 하나님의 창조를 말하는 것은 성경 외에는 없다. 물론 창1장에서도 있는 물질을 가지고 질서를 주신 것도 창조했다 똑 같은 말을 쓴다 할지라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는 것은 다른 책에는 없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항하는 인류가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은 주로 물질 영원설이 기초다. 이제 현대 사고에 와서는 물질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이 물질의 형을 준다고 하면서 인간 중심으로 바꿔져 있지만 물론 고대에는 그런 사고가 있었지만 현대에는 더 강하고 그래도 이제 처음부터 나타난 사고는 물질 영원설 이런 것이 근본이다. 항상 두 사고의 교차이지만 그런 것이 중심이다.


그래서 지금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보수파 학자까지라도 진화론에 근거하면 지구는 수 억년이다. 보통 45억년 그렇게 잡는다. 그런데 성경은 6일 창조다. 안 맞아 들어간다. 6일만에 창조했다고 하면 젊은 사람들 중에는 믿을 사람이 없다. 교회 아이들까지 왜 전부 학교에서 진화론을 배우기 때문에 안 믿는다. 그리고 요새는 그것을 전부 켬푸터로 조화까지 해 버리면 천지 창조를 눈으로 본것같다. 그러니까 실감이 나거든요. 그래서 안 믿고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이야기는 모세 십계명에나 보면 바다 갈랐다는 이야기나 한 장면 나올까 거의 안 나온다. 그래서 교회 우리 자녀들까지라도 진화론을 믿어도 천지 창조는 안 믿는다. 그러면 어떻게 하냐면 6일간이란 것은 진짜 6일이 아니라 장구한 지질학적인 연대 뭐 무생대 시생대 중생대 있지요? 그 연대를 6일이라는 종교적인 표현으로 쓴 것이지 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과학과 성경을 조화시키려는 그런 방식들 이런 이론들이 많이 있다 그 말이다.

 

이런 이야기는 실은 몰라도 좋은데 조금 설명을 하려니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로부터 만물을 하나님께서 지으셨다 하는 이야기는 성경 이외는 없고 실은 나머지는 그 하나님의 창조주를 부인하는 인간의 죄다. 그들은 무로부터 만물을 지으시고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만물을 하늘의 영광으로 새롭게 창조하신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한 이론이다. 왜냐하면 롬1장에도 그 지으신 만물에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신성과 그 능력이 분명히 나타나 핑계할 수 없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아니다. 과학적으로 거꾸로 설명을 한다. 그래서 이것은 만물을 지으시고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새로운 세계를 지으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런 지식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면 성경에 있는 창조론에서 주로 유행하고 있는 것이 회복론과 유신 진화론이다. 이러한 자들은 앞에 말했던 그런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고의 틀에 맞춰서 조직된 것이다. 회복론은 2절이 혼돈하고 공허했거든요. 왜 혼돈하고 공허했냐? 천사가 반란을 일으켜서 세계가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아담을 회복된 세계의 관리자로 다시 지었다. 그렇게 해서 신화적인 세계를 여기다 집어넣은 것이다. 천사가 반란했던 신화적인 시대를 2장 앞에다가 집어넣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그 회복의 사명을 받고 땅에 태어났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회복론이다.

 

그리고 유신 진화론이라는 것은 진화론은 그냥 교회가 받지 않으니까 유신 진화론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진화적인 방식으로 창조하셨는데 6일간은 장구한 지질학적인 연대라고 말한다. 그런데 진화의 세계를 연구한 사람들은 종과의 구별이 있어서 건너뛰지 못할 간격이 있다. 원숭이가 사람이 되면 그 중간 치기가 있어야 하는데 업거든요? 그러면 이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창조적으로 개입한 것이다. 간격을 그것을 그것이 소위 날의 구분이고 소위 그것이 간격 이론이라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설명을 한다 그 말이다.

 

그래서 유신 진화론은 하나님은 진화의 법칙을 통해서 창조하셨으며 각각의 날은 하나님께서 진화의 법칙에 획기적으로 개입하신 그런 시기라고 이야기를 한다. 이것이 소위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창세기 앞부분의 해석들이다. 제일 영향을 많이 끼치고 있는 것이 유신 진화론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화론적인 과학적인 사고의 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유신 진화론자들은 역사적 사실은 과학자의 영역이고 그것의 종교적인 의미는 신학자의 영역이라고 말함으로 성경에 반대되는 진화론을 성경과 조화를 시킨다.

 

무슨 말이냐면 역사적인 사실은 과학자가 연구하고 그래서 종교적인 의미는 신학자가 말한다. 물론 어떤 면으로 일 리가 있습니다만 그렇게 말해서 과학의 영역과 신학의 영역을 이분화 시킨다. 그러면 진화론이 옳고 그름을 교회는 따질 것이 없지요? 교회는 신학자가 교회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진화론 영역은 과학자가 검증하면 된다 과학자의 싸움이지 신학자의 싸움은 아니다. 그러니까 진화론이 뭐니 교회가 왈가불가할 필요 없고 6일 창조의 종교적인 의미만 따지면 된다. 이제 이렇게 해서 말하자면 교회 안에 있는 진화론자로 출생된 아이들 우리 교회의 젊은 청년들을 다시 교회로 불러들이려는 시도다. 그렇게 해서 역사적인 사실은 과학자가 연구할 영역이고 그것의 종교적인 의미는 신학자가 연구할 영역이다. 이렇게 해서 진화론은 성경과 조화시켰다.

 

그래서 과학은 사실에 기초하고 신학자는 사실의 종교적인 의미를 해석한다고 말함으로 종교를 역사적 사실과 분리시키고 과학적 전제에 성경의 증거를 종속시켰다. 그러면 이제 창조의 사실은 이 논리대로 하면 진화론 하는 이야기가 맞다. 성경은 종교적인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지 의미가 없다. 6일간에 창조했다는 것을 다시 검증하는 것은 어리석고 그것은 진화론자들의 이야기가 맞다. 그러니까 종교란 것은 사실과는 상관이 없고 실은 상징적이다. 사실 자체가 종교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사실과는 상관이 없는 어떤 종교 철학적인 이야기로 종교를 변질시켜 버렸을 뿐 아니라 옳은 것은 무엇이냐? 과학이 먼저고 그것을 종교적인 의미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 성경이기 때문에 이제 과학자의 이야기가 권위가 있고 성경은 권위가 없는 것이다. 소위 이런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부분 영감 교리적인 문제 도덕적인 문제는 영감 됐어도 역사적인 문제 과학적인 문제는 영감이 안됐고 오류가 있고 영감이 안된 것이다.

 

그것은 옛날에 과학적인 사고방식이지 지금 있는 과학적인 발견과는 다르다. 하는 이런 이야기로 성경을 파괴하는 방법들이다. 이것이 아마 현대 우리 교회에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치고 있는 사고방식이 될 것이다. 주로 자유주의 자들이 쓴 책은 거의 이런 토대 위에서 거의 되어 있기 쉽다.

 

이제 보수 진영은 어둠과의 싸움에서 즉 이런 사람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어둠은 성경과 반대되는 사고가 어둠이다). 성경의 반대되는 시대적 사고에 대항해서 성경을 해석하는 경향이 짙다. 물론 싸우기는 싸워야 되는데 거기에 대응해서 싸웠다 그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창1장의 해석이 그렇게 특히 영향을 받고 있다. 왜 그러냐면 창조는 만물의 존재 의미를 결정하는 토대요 윤리의 기초이기 때문에 이 기초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윤리가 결정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전부 성경과는 다른 존재에 대한 기초를 가지고 있다. 만물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가지고 있고 믿는 사람들은 창세기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니까 어둠과의 싸움에서 창세기 처음 부분을 해석했을 때 바로 이런 잘못된 사고에 대항해서 해석하기 쉬운데 특별히 창1장이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 말이다.


우리 나라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이북에 반대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무슨 말인가 알겠지요? 더 이상의 어떤 사고가 없다. 그러니까 그전에 김대중씨가 4개국 보장론 어쩌고 하면 그냥 이것은 사대주의고 매국노다. 왜냐하면 어떻든 이북을 이기는 것만 유일한 방법이거든. 비슷한말만 나와도 공산당이다. 그러니까 우리 나라에서는 남북통일을 위한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하다. 무슨 말인가 알겠지요? 애국해도 공산당 이기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나라 독재 정권이 가능한 것이다. 왜 공산당을 빌미 삼아서 안정이냐 혼란이냐? 그전에 박정희 대통령이 했던 말이 안정이냐 혼란이냐? 나한테 당할래 김일성이한테 당할래 이런 이야기다. 그렇게 해서 애국자 노릇을 한 것이다. 지금도 군인들 사고 방식이 그런 사고 방식이 많다.

 

마치 성경 해석도 더구나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다가 장로교 분열이 우리 나라처럼 많은 곳이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 나라는 장로교가 분열하게 된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신사 참배라는 역사적인 큰 배교 사건이 있다. 그러다 보니까 장로교 분열이 제일로 심하다. 그러다 보니까 만일에 성경을 해석하다가 통합 측이나 기장에서 비슷한말만 우리가 하면 기분 좋은 때는 괜찮은데 저것이 나를 기뿐 나쁘게 하는구나 하면 언제 기억했는지 가져다가 그것으로 이것은 자유주의자 그러면 끝나 버린다. 그전에 이진태 박사라는 분이 신 복음주의로 쫓겨났는데 몇 년뒤에 다시 복귀했다. 그 사과 성명 낸 것도 없고 서로 무엇이 서로 잘못됐는지 말한적도 없다. 그리고 복귀해 가고 이번에는 신학교를 차지해 버렸다. 그러니까 무슨 싸움 인줄을 모른다. 기독교가 그런 정치적인 힘의 원리로 싸우면 안된다. 하나님 앞에 신앙의 양심을 따라 고백해 줘야 되지 무엇을 얻어내려고 작전을 쓰면 안된다.


그런데 특별히 창1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 존재가 무엇이냐? 우주는 무엇이냐? 영원한 실제는 무엇이냐? 이런 것을 토대 삼아서 자기의 삶의 의미를 결정하고 그런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하는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창1장을 해석할 때마다 성경을 반대하는 사상을 대응하는 방식으로 해석하기 쉽고 거기에 의미가 한정되기 쉽다. 특별히 창세기 앞부분이 그 영향을 지대하게 받아 왔다 그 말이다.

 

그리하여 창조는 진화론을 반대하는 논쟁 구절로 취해진다. 하나님의 창조 기사가 논쟁 구절로 취해지고 거기에 한정된 의미로 해석을 한다. 그렇게 해서 구원 역사의 전 경륜에서 창조의 의미를 해석함이 매우 빈약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와 새 창조는 이스라엘과 교회의 생존의 근거이며 의미이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창조와 새 창조의 의미를 해석해야 되는데 우리는 그것보다도 진화론을 반대하는 그런 논쟁 구절로 쉽게 취해서 해석해 버리니까 결국 과학적인 구절로 읽어 들어간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진화론을 반대하는 의미로는 맞을 수 있어도 성경 의미로는 의미가 없다 그런 말이다.

 

그러면 방금 한 말도 아까 말했던 성경은 신학자의 작업이다.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 말과 비슷하게 들릴지는 모르겠다. 만물의 기원은 과학적 증거가 불가능하다. 다시 실험이 불가능하다. 증인도 없고 아담도 증인이 아니다. 소위 과학자들이 말하는 식으로 실험이 불가능하다. 억년 말로 억년이지요? 우리 나라가 오천년이다. 우리 나라 말로 해서 그런데 돈도 억 하면 세지 못한다고 그런다. 그러니까 이것은 거짓말을 해도 하도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해서 아무도 증거가 없을 것이니까 괜찮은 것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증인이 없는 이야기고 실험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실험이 불가능한 것을 과학이라고 하면 안된다. 과학은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따라서 이런 저런 반복적인 실험을 통해서 외에가 없고 그렇게 했을 때 그것이 세계를 해석하는 보편 명제가 되는 것이고 정리가 된다. 만일에 실험이 불가능하면 가설일 뿐 그것은 그 세계를 해석하는 원리는 안된다. 그런데 진화론은 외에 적인 것이 허다하게 나타나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해석을 해 버리는 것이다.

 

진화론 반대 이야기들의 책들을 보면 그것은 기독교 학자들이 할만 일들은 일들인데 복음 변증의 핵심은 아니다. 사람들은 증거가 없어서 예수를 안 믿는 것이 아니라 원수여서 안 믿는다. 하나님이 고루 햇빛과 비를 주셔도 안 믿는데 그 사람 부자 되게 하면 믿을 것 같은가? 하늘의 해와 달을 주어도 안 믿는다. 그보다더 큰 것이 어디 있는가? 온 세계를 다 주어도 안 믿는다. 그런데 자기만 특별히 부자 되고 병나으면 믿을 줄 알아도 그렇게 믿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들 증거를 보면 지층이 여러 지층이 있는데 진화론은 이 정도 지층이 생길려면 토사가 일년에 몇㎝ 씩 싸이면 몇억년 걸리겠다. 이렇게 측정하는 것이다. 가장 단순한 지층 측정 법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러서는 화석이 생기지 않는다. 다 썩어 버리지. 그런데 그 사람들 화석을 보면 여러 지층을 통과한 화석도 있다. 그러면 이것은 도저히 해석이 안된다. 그것은 외에다. 자기들 맞는 것만 뽑았다. 그리고 자기들은 말하자면 짐승을 아메바부터 시작해서 고등동물로 쭉 배열을 해서 제일 위에 죽었으면 이것은 제일 마지막에 생긴 지층이 아니냐? 이런 것이다. 그렇게 생겼는데 뒤죽박죽 생긴 지층도 있다. 왜냐하면 홍수가 나면 사람이라고 꼭 오래 산 것이 아니다. 먼저 죽기도 그래서 뒤죽박죽 생기기도 하는데 그런 것은 외에고 자기들이 생각한 순서대로 맞는 지층만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 이것은 과학자들이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기꾼이지 과학자가 논문을 제시할 일이 아니다.


그 다음에 동의원소 반감기 문제로 요즘 측정을 하고 그렇지만 그것은 상당한 과학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처음 창조했을 때 세상의 나이를 모른다 그 말이다. 아담이 어린아이로 출생되었으면 몇 살 되었으면 알겠는데 아담이 어른으로 출생되었으면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 창조된 세계를 어떻게 해석하냐 그 말이다. 그것을 모른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도 그 후에 연도를 계산해서 하면 안되지요? 그러니까 그런 것도 온당한 방법이 못된다. 그런데 그런 것을 유일한 과학적인 원리들로 말하고 있는데 실은 토대가 아주 빈약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창조 만물의 기원 문제는 어떤 의미로 철학적인 영역이고 종교적인 영역이지 소위 과학으로 탐구 가능한 영역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의 증거와 해석을 따라서 창조 세계의 기원과 의미를 안다. 창조주만 창조 세계의 의미를 말해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가 창조의 역사적인 사실이며 창조 세계의 의미이다. 성경 기록 이상의 다른 어떤 역사적인 사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가 말씀하신 대로가 창조의 역사적인 의미다. 왜 사실이 의미이기 때문이고 사실을 떠난 다른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창조 기사는 과학도 검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보고는 광신자고 자기들은 정신이 총총한 것 같아도 둘다 그런 의미로 소위 과학적인 영역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성경에 기록한 대로가 창조 사실이고 창조 의미다. 우리는 더 이상의 창조 사실과 창조의 의미를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사실대로 증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세계와 함께 하는 관계에 의해서 의미가 주어진 해석된 보도이다. 복음서의 차이점을 우리가 보아도 알 수 있다. 예수님 복음서는 창세기처럼 고대 이야기가 아니고 얼마 전 이야기다. 2000년이라 해도 그 때 증인들이 많이 있고 또 우리들이 로마 영화 볼 때는 오래된 이야기가 아닌데 예수님 이야기를 하면 저 먼 이야기 같지요? 클레오파트라 이야기 들으면 엊그제 미인 같고 그런다. 그런데 예수님 이야기 들으면 고대 이야기 같은데 그렇지 않다 그 말이다.

 

클레오파트라가 있었을 때 예수님하고 얼마 연도 차이가 아니다. 이순신 장군 하면 수염 긴 옛날 양반이고 칼빈 그러면 멋쟁이 모자 쓰고 그러는데 거의 같은 연대다. 그러니까 복음서 기자의 기록은 우리는 사실 인줄 알고 복음서를 만든다. 예수님 행적 비디오로 편집하면 그렇게 하는데 실은 복음서는 편집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각 복음서마다 기록의 차이점이 있다. 조금 빠지고 들어간 것은 차라리 맞추기라도 좋은데 말까지 다른데가 있다. 그러면 할말이 없다. 우리는 처음 듣는 것처럼 놀랜다. 성경은 영감 됐고 일점일획 어김이 없다고 했는데 성경이 묘하게 다르거든요? 묘한 말이다. 그러면 짜 맞추더라 어떤 바보가 권위 있게 할려면 네 개를 맞춰 버리지 틀리게 할 수가 있겠어요? 그런데 각각 차이가 난다. 그래서 자유주의 자들이 이것 가지고 공격을 한 것이다. 봐라 그런데 영감 됐어야 글자가 영감 되고 우리는 할말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따로 네 개를 종합해서 새로운 예수님 행적을 맞추는 것이다. 가령 여리고 성에 소경이 두명이다 한 명이다. 두명이라고 한데도 있고 한 명도 있거든요? 그러면 이 말이 묘하다 말이다. 아 그러면 여리고 입구가 있고 우리도 동광주 있고 서광주 있잖아요? 그러니까 예루살렘 가려면 양쪽에 한 명씩 있었던지 그렇지 않으면 한곳에 둘이 앉아 있었는데 한 명만 말을 했던지 이런 식으로 맞추는 것인데 성경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달리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맞추려면 고약하다.

 

가령 우리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마태복음 보면 딱 산상수훈 읽기 좋은데 누가복음에 보면 여기 저기 섞어져 있다. 무엇인지 난처하잖아요? 그래서 자유주의 자들이 그런 말을 하면 우리 보수파는 조금 난처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의심하냐 틀리면 우리가 틀렸지 하여튼 답은 정해졌다. 틀리면 우리가 틀렸지 하나님이 절대 안 틀린다. 왜 하나님은 절대자고 우리는 피조물이니까. 딱 그것을 정해 놓고 출발을 하니까 우리는 이해가 안되고 자유주의 말을 안들을 것이다. 하나님이 틀렸다는 말을 안들을 것이다. 그런데 실지로 성경이 틀리게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난처해서 4복음서의 조화, 조화 있게 다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된다. 각 복음서는 각 복음서 기자가 증거 한대로 사실이고 의미요 우리는 복음서의 문장을 해석하지 4 복음서를 종합시켜 가지고 예수님의 행적을 다시 차례대로 비디오로 찍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 다니면서 본 사람도 의미를 모른다. 우리는 성경이 예수의 부활의 관점에서 보도 한대로만 그 사실과 의미를 알지 사실은 사실이고 의미는 우리가 다시 해석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지를 않다. 우리는 해석된 사실을 가지고 있고 해석된 사실이 사실이다. 그 외에는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사실 보도는 아니라는 것은 그냥 알 수가 있다. 틀리게 보도되었으니까 그러면 어떤 것이 진짜냐? 우리는 결정한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그 문장에서 그 사실만 해석을 하면 된다. 그것이 성경이 가지고 있는 권위이다. 사실은 객관적이고 해석을 주관적이어서 우리가 새롭게 해석할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고 성경 기록자들이 보도 한대로 사실이고 보도된 대로 사실의 의미다. 각 복음서마다 차이점들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사실대로 보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세계와 함께 하시는 관계, 즉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심은 세계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는 지옥이고 우리만 진짜고 이렇게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말을 쓴 것이다.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이 세상과 함께 하심이요, 교회와 함께 하심이 세상과 함께 하심이다. 그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의미다. 저것들은 완전히 지옥 우리들은 좀 고생을 하고 있어도 진짜 천당 간다 이렇게 갈라놓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일부러 쓴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세계와 함께 하시는 관계에 의해서 의미가 주어진 해석된 보도이다. 그런데도 그 해석된 대로만 사실이고 우리는 다른 객관적인 사실을 모른다. 창세기는 이스라엘의 중보자인 모세가 기록했다. 옛날부터 기록을 쭉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모세가 기록했다 한 것이 핵심이다. 물론 모세가 기록할 때 그전 문서들을 참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열왕기나 역대기 보면 그전에 권위적인 문서들을 참조한 것이 많이 있다. 심지어 누가복음까지라도 먼저 기록한 자들의 증거를 살피고 나도 자세히 살펴서 기록한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영감한 것은 그저 눈을 감고 있는데 하나님이 야 이것 받아라 하니까 기록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창세기도 조상들이 가졌던 그런 계시적인 보도를 가지고 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것을 부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사람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모세가 교회의 책으로 언약의 책으로 기록했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래서 창세기는 이스라엘의 중보자인 모세가 기록했다. 왜 기록했냐? 하나님의 성소인 이스라엘과 그들의 가나안의 삶의 의미를 천지 창조에서 밝히는 의미로 기록한 것이다.

 

내가 너희들의 성소가 되었다. 너희들은 내 성소다. 가나안 땅을 성소 삼아서 영원히 함께 하자. 나는 너희들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했고 새롭게 안식일을 주었다. 그러면 너희들의 삶의 의미는 무엇이냐? 너희들의 존재의 근거가 무엇이고 너희들의 의미는 무엇이고 내가 너희와 함께 하는 역사의 목표는 무엇이냐? 너와 함께 한 나 여호와는 천지의 창조주시오 우주적인 성소에 함께 있었다. 아담이 범죄 했지만 그 범죄에도 불구하고 너희 조상들을 택하시고 함께 하신다. 너희 조상들을 택했을 때 복의 근원으로 택했다. 너희들을 통해서 천하 만민을 복주겠다. 그렇게 해서 그들의 역사적인 의미를 밝혀서 그들로 봉사케 하고자 한 것이다.

 

세상 일반 역사도 그런다고 했다. 일반 역사도 그 왕조가 섰을 때 이전의 기록들을 다시 편집한다. 그러면 그전의 기록 자체가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왕국의 책으로 기록된 것이 왕국의 의미다. 그렇게 해서 그전 독재 정권은 삼일절도 안 논다. 학생의 날도 데모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라서 쉬지 않는다. 일제 항거 한 것이나 독재 정권에 항거한 것이나 엇비슷하거든. 그러니까 비슷해요. 그러니까 그날 쉬면 안된다. 그래서 안하고 국군의 날 그런 날만 행진하고 쉬고 이런 식이 되는 것이다.  이제 다른 것을 시도하고 한다. 그러면 기록은 그 당시 것을 가지고 있을 란가 몰라도 그것의 의미를 해석해서 기록했을 때는 다시 해석한다. 그렇게 해서 그 왕국 그 국가의 정책 등장의 필연성 이 왕국의 의미 이 왕국이 소망하는 바 그런 것을 주어서 백성들로 그 왕국을 봉사토록 하려고 일반 역사도 기록한다.

 

바로 하나님께 모세를 통해서 기록해 준 것이지 그전에 기록해 주신 것이 아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기록하려면 내가 여러 번 말한 대로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기록했을 것이다. 아무도 선생이 없을 때 잊어버리고 말고 책이라고 가지고 있어라 그러면 좋을 것인데 모세 당시는 하나님이 항상 불꽃 가운데 계시고 모세가 물어 보면 하나님이 대답해 주시고 잊어버릴 것 하나도 없었다. 그 때 실은 기록해 줄 필요가 없다. 또 예수님의 행적도 예수님 당시에 속기사가 기록한 것 아니다. 예수님 부활 후에 기록했다. 왜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로만 그가 땅에 오신 의미가 하늘 보좌에서 완성됐거든요. 만일에 예수가 부활하지 안했으면 예수의 땅에 행적은 어떤 의미로는 기록할 필요가 없다. 기록해 해 봤자 한 선지가 반열밖에 안된다. 마지막 언약의 책이 안되어 버린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뒤에 보좌에 계신 분이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사도들과 사도들 반열에 있는 사도들을 통해서 기록하도록 하셨다. 그렇게 해서 보좌 우편에 취임하신 그 나라를 누리도록 했다.

 

그래서 더 이상의 기록이 없는 이유는 예수께서 그 역사를 완결시켰기 때문에 더 이상의 기록이 없는 것이다. 꿈에 보니까 계시록을 그대로 보고 왔다는 사람들은 거짓을 보고 온 것이다. 그런 일이 없도록 하려고 사도 요한을 통해서 기록한 것이다. 이제는 사도들이 기록한 더 이상의 기록이 없다. 왜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부활하신 분의 나라를 기록토록 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기록이 없다. 새로운 기록이 있으려면 새로운 구원 역사의 진행이 있어야 된다. 예수님보다 더 높은 구원자가 오면 새롭게 기록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더 이상의 기록이 없다. 이제는 기록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지 무엇을 봤다는 사람은 눈뜨고도 보지 못한 것을 눈감고 본 것을 믿을 것 없다. 그런데 우리는 묘하게 눈감고 보면 믿는다. 그리고 점쟁이도 얘기 점쟁이면 믿고 묘하다. 그것이 우상 섬김의 어리석음이다.


그렇게 해서 창세기는 이스라엘의 중보자인 모세가 기록을 했는데 하나님의 성소인 이스라엘 또 그들의 가나안 땅의 삶의 의미를 천지창조에서 밝힌다. 그분이 여호와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참 신이시며 이방의 죽은 우상과 다르며 선하시며 전능하시며 신실하시다. 천지와 만물이 이를 증거하며 찬양한다. 이것이 구약 성경에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인용하고 있는 구절들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할 때 하나님의 만물 창조를 이야기한다. 봐라 흉흉한 바다도 모리턱에 모면 멈추지 않냐? 만물이 내 말에 복종하는데 너희들은 누구길래 내 말을 복종하지 않느냐? 이방이 섬기는 모든 신들은 죽은 신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너희 중에 친히 강림해서 듣도록 했지 않냐? 그러니 너희들은 우상을 섬기지 말아라. 나는 말씀으로 만물을 지었고 너희에게 친히 말씀하신 분이다. 그런 의미로 하나님이 창조 하실 때도 말씀으로 지으신다. 그냥 얏 하면 짓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만물이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천사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이스라엘이여 너희들도 만물이 그의 뜻대로 존재한 것처럼 내 말을 들어라. 이런 말이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인용하는 구절들이다.


신론을 말하려는 그런 핵심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리려는 핵심이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알리는데서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여기서 하나님을 알 수밖에 없지만 신 존재를 연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중에 이방과 다른 천지 창조주 하나님 이방 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천지 창조주 하나님이시요 모든 선한 것을 공급하는 하나님이시다. 천지가 그의 말씀 때문에 있고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주에 가득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이것을 주셨다. 그런데 너희들은 이런 이야기다. 그러기 때문에 시편 같은데 보면 이렇게 전부 인용한다. 만물이 창조하고 이스라엘도 창조해라. 왜 하나님은 천지 창조주 선하신 분이시니까. 그런 이야기다.

 

그래서 죽은 이방 신과 다르다. 그리고 하나님은 선하시고 전능하시다. 그리고 여기서 전능하다는 말도 모든 만물을 다 창조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너희들을 위해서 온 세상을 지어 주신 하나님이 아니냐? 그런 의미로 전능이고 예수의 부활도 마귀는 죽은 자를 못 살리는데 하나님만 살리셨다는 그런 능력 비교를 할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명의 약속을 성취시킨 분으로서 부활이다. 신실하심 그러니까 지금도 사람이 못할 일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사람이 서 있는데 얏 하니까 쓰려져 버리고 아 능력 있도다. 그런 능력은 마귀적인 능력이다. 그 능력을 하나님의 백성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을 알게 하는 능력하고는 다르다. 그러니까 사람이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이 하니까 아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것은 이교적인 능력이고 성경이 말하는 능력은 자기 백성의 생명을 부요케 하는 그런 능력이다. 그는 만물을 창조해서 우리에게 주신 분이요 가나안 땅의 모든 젖과 꿀이 흐르는 복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분이시요 그리고 예수의 부활의 생명을 자기 백성에게 주신 분이시다. 그런 의미로 그가 생명의 약속을 이루는데 전능하고 무능함이 없다. 가리울 권세가 없다 그런 말이지 그냥 모든 놀랠 일만 할 수 있다. 그런 의미로 능력이 아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얏 해서 쓰러지는 것이 새 시대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마술사나 하는 이야기일까 그것이 예수의 부활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인데 우리 나라 교회는 그런 것 가지고 놀랜다. 계시록을 보면 앞으로는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능력도 있다고 그랬지요? 구약 표상대로 하면 하늘에서 불이 떨어진 능력은 신성의 능력이다. 그래도 놀래지 말아라 하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그런 권세적인 많은 표적들이 많이 나겠지만 그것이 참으로 예수를 알도록 하고 의지하도록 하는가? 참으로 우리로 예수 안에서 자유토록 하는가? 그런 문제지 놀랠 일만 하면 능력이로다. 그렇게 이해하면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방의 죽은 신과 다르다. 선하시고 전능하시고 신실하시다. 언약에 신실하시고 언약을 이루시는데 전능하시다. 언약의 하나님으로 선하시고 모든 것을 공급하신다. 천지와 만물이 이를 증거 하기 때문에 천지와 만물도 찬양하고 이스라엘도 찬양한다. 왜 하나님은 우주적인 하나님이시니까 모든 우주가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만물을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으로 새롭게 지으심으로 온전케 하셨다. 이전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은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의 신실하심이다.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마치 어린 이이를 길렀을 때 이런 모양과 부분으로 자기 아들을 키운 것과 같다. 그렇게 여러 부분으로 아버지를 나타내 주겠지요? 그것과 같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하시고 신실하심은 예수의 부활에서 하늘 질서로 완성되었다. 구약 때는 하나님이 선하시지 않는 것 같고 신실하지 않는 것 같아요? 왜 조상들도 죽고 하나님의 약속을 보지 못하고 죽으면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이어요? 그래도 아브라함은 자기 죽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을 돈주고 샀다. 자기 죽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었다. 조상들은 믿음의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했다. 만일에 우리가 예수의 약속에 참여하지 못하면 구약이 조상들의 소망은 전부 헛것이다. 구원이 아니다. 단순한 종교적인 환상들이지 구원이 안되어 버린다.

 

그런데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 성소가 되셔서 함께 하신 하나님 그분이 실은 천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것이 신에 대한 인식론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에덴에서 함께 했던 여호와다. 기록은 창세기부터 쭉 기록했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 때는 너희의 구원자가 천지 창조 주시다 그런 말이다. 그래서 천지와 만물이 이를 증거하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만물을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으로 새롭게 지으심으로 온전케 되었다. 더 이상의 선하심과 더 이상의 신실하심의 증거가 없다. 여기서 하나님의 선하심은 완결되었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온전케 됐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의롭게 되었다. 완전한 하나님 노릇을 해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영광으로 새롭게 지으신 세계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비추는 영광의 빛이요 교회의 생의 토대로 의미요 목표다. 이제 예수의 부활에서 새로운 창조의 빛이 비쳤다. 어두운 가운데서 빛이 비치라 하신 하나님께서 예수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아는 영광의 빛을 비쳤는데 그렇게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말씀하고 있다. 이제 예수의 부활에서 우리들은 아직도 세상에는 가리워져 있지만 우리들은 새로운 세계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본다. 예수를 죽음의 세계를 이겨낸 하늘에 속한 사람이다. 그분은 그런 의미로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일어나신 즉 부활로 처음 지어진 첫 열매다.

 

그분이 장자고 상속자다. 그분이 상속자인데 땅에 있는 다윗 같은 상속자가 아니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는 아들 상속자다. 이것이 교회가 서 있는 토대요 하나님의 선하심은 가나안 땅의 부요로 비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의 얼굴에서 비치는 그 영광의 빛으로 교회를 비추신다. 이제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이 영원히 완성되었다. 다시는 죽음의 그림자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조롱하지 못하도록 예수는 죽음의 권세를 영원히 이기셨다 .이것이 교회가 서 있는 토대다. 이처럼 창조와 새 창조는 이스라엘과 교회가 서 있는 생의 의미요 소망이다.

 

그러기 때문에 창세기는 이런 의미를 밝히기 위해서 기록한 것이지 과학적인 논쟁 앞으로 진화론이 생길 줄 알고 이미 야 진화론이 생기면 이렇게 반박해라. 그런 이야기도 써 준책이 아니라 그런 말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진화론이 틀렸다 할지라도 창세기를 가지고 과학적인 언어로 그들을 대적하는 언어로 써 봤자 그것은 과학적인 이론의 대적일 뿐 부활하신 예수를 알지 못하고는 진화론자가 창조론 자로 바꿔지지를 않는다.

 

그러나 여러분이 과학적인 지식은 무식할 란가 몰라도 예수를 믿으면 만물을 하나님이 지으셨고 우리는 그의 품에 있도다. 우리는 능히 감사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과학자들과 논쟁을 잘 하면 그들이 변화 받을 줄로 이해를 하면 안된다. 우리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택한 백성 안에 역사 하셔서 그를 믿게 하심으로 바로 만물에서 지금도 죽음이 권세적으로 역사하는 세상에서도 부활하신 주님의 품에서 즐거워하고 세상에 종이 되지 않고 먹기를 자랑하는 세상 사람들의 종이 되지 않고 죽음의 권세로 지금도 사람을 미혹하는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능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하늘에 속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누가 여호와께서 구약의 여호와 그분이 아들 안에서 자기를 나타내신 분이다. 예수 그분은 곧 하나님이시다. 그것이 마태복음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다. 이것이 교회가 서 있는 토대다.

 

그러니까 구약의 토대는 바다 물결처럼 흔들릴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어도 천지 창조에 여전히 썩어짐이 왕 노릇을 하고 있으니까 또 이방 백성들이 더 잘되니까 그럴 것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지금도 세상에서 천하고 하니까 지금 이런 질서로 교회를 보면 별볼일 없어요? 그리고 십분의 일로 노후 보험만 들어도 대단한 노후 보험을 들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십분의 일을 내면 자 미래를 보장해 준 것은 보험 증서로 없을 뿐만 아니라 별 힘도 없고 세금으로는 막대한 세금이다. 별볼일 없는 것 같다. 또 교회를 위해서 봉사한 것은 높아진 것도 아니다. 세상 임금은 경례라도 잘 받고 눈을 부릅뜰 수도 있는데 이것은 만일에 목사가 교인한테 눈 부릅떴다가는 쫓겨 나 버린다. 그리고 아 능력 있는 목사라고 안하고 못된 목사 이렇게 되어 버린다. 완전히 거꾸로다. 그러니까 이것은 별볼일 없다. 그러나 여러분이 죽음의 권세 가운데 있는 세계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다시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전혀 권세의 세계고 이미 죽음의 세계를 이긴 세계다. 바로 이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이 친히 아들의 죽으심 안에서 우리의 성소가 되셨다. 아들의 죽으심 안에서 우리는 하늘 성소로 옮기셨다.

 

바로 이 성소된 삶에서는 하나님을 순종하는 능력 있는 삶이 진행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넘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전에 예수의 제자들까지도 넘어 졌어도 부활하신 예수와 함께 한 교회는 넘어지는 법이 없다. 왜 주님께서 죽음을 영원히 이기셨기 때문에 이것이 교회가 살고 있는 터요 윤리의 기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새 백성으로 사는 것이다. 주님께서 성소가 되셨으니까 그것이 창세기를 교회가 소유하는 방식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빛으로 다시 창세기를 읽었을 때만 만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읽을 수 있고 그것이 신약 성경에서 증거 하는 것이다. 만물의 창조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데 그 분이 만물을 재 창조하셨다. 이 일을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일어나심으로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셨고 만물의 머리가 되셨다. 그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부활하셨다. 그가 만물의 창조자가.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것이 교회가 창세기를 읽고 해석하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제가 말하고 있는 의미가 어떤 의미로 종교적인 의미로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것은 역사와 구별된 다른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라 이것이 역사의 의미의 자체다. 왜 역사가 생명이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가 능력이고 하나님을 누리는 세계다. 사실이 따로 있고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적인 해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왜 하나님은 창조주시오 그는 창조하심으로 세계의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이것만 진정한 창조의 의미요 또 창조의 사실이다. 예수의 부활이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예수의 부활이 여러분의 사실이고 세계의 사실이다. 그러나 세상은 아직 그것을 모른다.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진화론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그 말이다.

 

그럴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런 것을 막으려고 2장의 위치를 첫날에 넣을 것인지 그런 작업을 할 필요가 없다. 이제는 천지 창조의 의미도 이스라엘의 창조의 의미와 교회 창조와 관계된 의미에서 다시 읽을 것이라 그 말이다. 그것을 앞으로 풀 것이다. 그래야 교회가 구원의 책으로 읽고 능력의 책으로 막 누린다.

 

그런데 그전 해석을 보면 2-3절을 들어가면 진화론과 싸우고 이런 이야기뿐이다. 그리고 자유주의 자들이 예수의 부활 무슨 죽은 사람이 살아 나냐? 그것은 유관순 누나가 삼일절마다 민족의 가슴속에서 살아 난 것처럼 그의 사랑은 미움을 이긴다는 의미로 부활이지 무슨 죽은 사람이 살아 난 다냐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니까 부활은 사실입니다. 어디서 일어났습니다. 증인이 몇 명입니다. 그 때 예수님 죽은 것보고 산 사람이 많아요? 그래도 믿는 것 아니다 마태복음 보면 시체 도둑질 해 갔다 그래라. 졸병들도 가서 다 보고하고 다 안 믿는다. 그것은 비디오로 찍어도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문제는 그 사실이 지금 하나님의 교회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렇게 해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나님을 누리도록 설교했을 때만 그것이 진정 누려진다. 단순한 사실 보도로 보도 해 가지고는 된 것이 아니다. 왜 성경은 사실 보도 문제가 아니니까. 그러면 사실 보도가 아니냐 그러면 기록된 대로 사실 보도라 그 말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사실을 밝히는데 핵심이 아니라 그 사실이 예수의 부활이 어떻게 죽음의 세계를 끝낸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새로운 질서를 가져왔는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새롭게 창조된 교회만 그것을 사실로 받고 믿을 수가 있다. 그 외에는 못 믿는다. 그러니까 그런 차이점을 알면 되겠다.

 

진화론 유신 창조론 이런 이야기는 앞으로 모르는 이야기다. 성경을 설명하려고 기초로 조금 이야기를 했지 이런 것은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쯤 알고 이제 이스라엘의 창조와 교회의 창조가 무엇인지 여기서 읽어 낼 것이다. 그것은 상징적인 해석법이 아니라 첫 창조는 새 창조를 위해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다. 4장까지가 아직 중심이 잘 안 잡혀 있다 그리고 구속사적인 해석을 한다고 했는데도 이전 사고방식이 그 틀에 깔려 가지고 순리롭게 잘 벗어나지 못한 부분들이 꽤 있다. 이제 그것을 교정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창세기 1장으로 설교하면 무엇만 할까요? 진화론 반대한 이야기만 설교하지 그러면 창1장을 설교 할 때가 없다. 하나님이 형상으로 지었다는 이야기나 조금 하고 그리고는 못하지요? 왜냐하면 고대 이야기로 읽어 버렸으니까.

 

 창세기 개요 5 번째 : 천지와 만물의 창조 (2)

오늘은 창1장 두 번째 시간이다. 창1장은 천지와 만물의 창조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2장1절에 보면 천지와 만물이 이루니라 하는 그 결론에서 내용을 알 수가 있다. 내용을 더 풀어 요약을 하면 하나님이 말씀으로 일하셨고 그렇게 해서 우주적인 성소를 지으셨고 그리고 날에 사역을 통해서 안식하신 내용으로 되어 있다. 조금 더 풀면 말씀하심으로 창조하셨고 그 창조는 질서와 충만의 창조고 연속되는 6일간의 창조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

 

그리고 다시 결론적인 부분에서 사람 창조를 말하는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고 그에게 직무를 주시고 북을 주셨다. 그리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그리고 제 7일에 안식했다 함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이 전체적인 흐름은 이런 것이다. 지금 창세기를 해석할 때 제일 어려운 점은 창세기 1장의 성격 문제다. 무엇 때문에 이것을 기록하고 있는가? 그런데 이제까지 이것을 과학적으로만 해석을 해서 문제가 된다고 말씀을 드렸다.


실은 성경은 창세기로부터 쭉 올라와서는 안된다. 우리가 교회에서 배울 때는 창조로부터 쭉 이렇게 되었다 해도 실은 창조를 알 때는 부활하신 예수를 알았을 때만 드디어 창조의 의미를 알고 그 전에는 모른다. 하나님의 모든 계시와 예수의 부활에서 완결되었기 때문에 부활의 빛에서만 이전의 창조가 해석되고 올 재림의 나라도 해석이 된다. 단지 교회에서 배울 때는 역사가 무엇이냐 했을 때 창조부터 차근차근 배워 나가지만 해석을 그렇다 그 말이다. 그러면 구약 때는 어떤 것이 해석의 빛이냐? 구약 때는 시내 산에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가 그 이전과 그 이후를 해석하는 열쇠다.


읽어 가면서 설명하겠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창조로 시작해서 가나안 땅에 메시야 나라에서 마친다. 구약 계시의 한계가 여기 까지다. 그러나 신약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예정과 선택에서 시작해서 하늘 보좌에서 속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마친다. 이것은 구약 때 계시된 것은 아니다. 이제 신약 때는 첫 창조를 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 하사 창세 전 이야기를 이야기 할 수 있고 또 가나안 땅의 메시야 나라가 아니라 만물이 새롭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 할 수 있는데 왜 가능한가?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아니까 가능하다.


그러면 왜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는 창세전과 종말의 재림 때까지 해석할 수가 있는가? 그분이 곧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아들이시거든 요. 구약 때 휘장으로 가리우신 하나님 모세 제도를 통해서는 땅의 제도 이상이 안 밝혀진다. 왜냐하면 땅의 중보자니까 그러나 이 중보자는 하나님 안에 영원히 아버지와 아들로 교제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다. 그분이 오셨기 때문에 이제는 처음 창조를 넘어선 처음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이 뜻이 이제 이루어졌다. 왜 이제 여기 임하신 이분이 아버지와 함께 계신 아들이시거든 요.

 

소위 말하자면 우리가 말하는 영원 영역까지 열릴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단지 이런 것은 창세전에는 영원이고 재림 후에는 영원이고 그런 언어 개념은 쓰고 있지만 그 영원 개념은 이제는 시간 개념이 아니다 시간과 대립되는 그런 구조는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재림 후에도 이 몸으로 살지요? 영광스런 몸이어도 이 몸으로 산다. 소위 피조물 질서가 없어진 것이 아니다. 성경은 피조물이냐 하나님이냐 그런 대립 구조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 문제 특별히 죄 문제다. 이제는 아들 안에서 아버지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복을 누리지만 여전히 지음 받은 사람이다. 거기서 피조물 성격을 넘어서고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창조자와 피조물의 대립 구조가 아니고 영원이냐 시간이냐 그런 대립 구조가 아니라 하나님은 그가 지으신 세계에서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느냐? 항상 하나님은 그가 일하심에서 자기를 나타내시기 때문에 실은 우리가 말하는 재림 후에 영원까지라도 이 시간 질서의 영원이다. 우리 몸의 영원한 생명까지라도 이 몸의 영원한 생명이니까 그렇게 이해를 해야 한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는 처음 창조 이전과 처음 창조된 세계가 불로 소멸되고 새롭게 나타날 세계까지 열릴 수 있는 것은 처음 창조는 땅에 속한 아담 땅에 속한 모세 땅에 속한 성소 거기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으면 이 완성은 이제는 아들 안에 완성인데 이 아들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하신 아들이시다. 그러기 때문에 창세전 문제와 이 세계가 새롭게 될 후 세계까지 열릴 수가 있다. 왜냐하면 중보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성경이 가지고 있는 계시의 한계점들이다.

 

그러니까 예수의 부활에서 계시가 넓어졌고 깊어졌다. 창조 이전과 이 세계 종말 이후까지 확대되고 높아졌다. 왜냐하면 그분이 곧 아버지와 함께 계신 아들이시거든 요. 왜 지금 이 말을 하냐면 그래야 창세기 처음 기사 성격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기 때문에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은 이제 예수의 부활에서 그의 그의 부활에 참여하는 교회에 나타났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가 만유를 지으시고 만유를 회복하고 만유를 통일하고 그리고 그는 교회의 머리이시면서 완성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예수께 연합되기 때문에 예수가 계셨던 창세전 이야기와 종말 후 이야기까지 연결이 된다. 왜 우리는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니까 그러나 구약 때는 중보자가 그런 분이 아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지음 받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처음 창조 세계인 에덴부터 그리고 조상들과 함께 했던 가나안 땅까지 더 이상 열리지를 않는다. 왜냐하면 처음 제도는 가나안 땅에 성소 중에 함께 계신 하나님과 함께 하거든요? 지금은 하늘 보좌에 계신 분과 함께 하신다. 그러니까 신약 계시는 훨씬 폭이 넓다. 그러기 때문에 창조 기사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지의 창조주임을 계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홍해에서 씻으사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며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에덴에서 인류의 조상과 함께 하시며 조상들과 가나안 땅에서 함께 하신 하나님이시다. 무슨 말이냐면 지금 우리 신약을 보면 안다.

 

부활하신 예수의 아버지는 누구 신가? 창세전에 아들과 함께 했던 아버지시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표로 함께 하신 그분이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했거든요? 그것이 신약이 고백하는 하나님이시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택하신 분이고 창세전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셨던 분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그리스도 안에 계획이 이제 나타났다. 왜 이분은 아버지와 창세전에 함께 계셨던 분이다. 우리의 대표자와 함께 하신 가운에서 하나님이 열린다.


그런데 구약 때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고 이스라엘 중에 계신 하나님이 일단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면 이스라엘을 성소 삼으시고 함께 계신 하나님은 누구시냐? 그분이 천지 창조주의 하나님이시다. 에덴을 지으시고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조상들과 함께 하신 그 하나님이 이제 그 후손과 함께 가나안 땅에서 함께 하신다. 이것이 구약에서 말하는 계시다. 지금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보좌 우편에 앉히신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신대 그분은 지금만 아들과 함께 보좌에 계신 것이 아니라 그는 창세전에 아버지와 영원히 함께 계셨던 분이다. 그리고 오시면 바로 이 예수님이 만유를 회복시키시고 그리고 이제는 그 아들도 아버지께 복종하는 신적인 질서로 나라를 회복한다. 왜 그분이 하나님이시니까. 우리는 그분에게 참여되어 있다. 그래서 창조 이전과 종말 이후의 세계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오신 그분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구약 때 창조 기사는 만물의 기원이 어떻고 하는 그런 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누구시냐? 그 하나님은 천지 창조주이시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에서 살리신 아버지는 누구시냐? 아들과 함께 창세전에 계셨던 아버지시다. 이런 이야기다. 그러니까 예수의 부활이 역사를 해석하는 시점이고 예수의 부활이 아니고는 창세 이전과 종말 이후의 세계가 열리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구약 경륜에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누구 신가? 가나안 땅에 계신 하나님이 누구 신가? 에덴에 계셨던 하나님이시다. 이런 이야기다.


역사적인 순서는 영원부터 창조로 에덴으로 이렇게 쭉 나오지만 구약 때는 창조 이전 이야기를 알 수가 없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 이상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지 아니하는 신성한 권세들을 한다. 왜 예수께서 모든 권세에 오르셨기 때문이다. 구약 때는 그것을 알 길이 없다. 그것이 창세기의 성격이다. 그러면 그 하나님이 누구냐?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에서 씻으셨다. 애굽의 종으로부터 건지사 홍해에서 씻으셔서 그들 중에 친히 강림하셔서 그들과 함께 하는 나라를 세우셨다. 이제 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엿새 동안은 걷게 하고 7일은 쉬게 하고 일하신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그렇게 일하실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들이 안식도 하나님의 처음 안식을 누리고 소망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처음 창조를 열어 주고 있다. 이스라엘이 구약에서 새 창조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구약에서 새로운 창조다. 바로 새로 창조된 장자인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처음 창조된 세계를 열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새로운 창조를 입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에 속한 장자 하나님의 아들 그 아들을 열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에서 가지고 있는 계시의 틀이다.

 

그러니까 이 창조 기사는 만물의 기원이 어쩌느니 하는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물로 씻어서 지으셨다. 그리고 그들 중에 성소가 되셔서 함께 하셨다. 그들과 동행하시고 동거하시고 함께 일하시고 엿새 동안은 일하시고 제 7일은 쉬시고 이렇게 사실 것이다. 그 하나님은 누구 신가? 가나안 땅의 그 하나님은 누구 신가? 처음부터 땅을 지었던 하나님이다. 우리는 하늘 보좌에 참여했기 때문에 우리는 땅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그는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분이다. 그렇게 열고 있는 것이다.


부활의 정점이 아니고는 역사가 해석이 안되는 법이다 바로 그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나는 여호와라 이 이름으로 나를 알린 적이 없다. 나는 너희 조상들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알렸어도 내가 여호와로 알린 적이 없다. 모세에게 알렸다. 그런데 창세기에 여호와란 말이 많이 나오거든요. 그러면 책을 1페이지부터 보면 묘한 말이지요? 그런데 창세기는 누가 기록했다고요? 모세가 기록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그분이 만물의 창조자 여호와 셨다. 처음부터 함께 계셨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아들을 안 적이 없다. 드디어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이분이 누구시냐? 이분은 아버지와 영원히 함께 계셨던 분이시다. 드디어 이제 열리고 잇는 것이지 예수께서 오시지 않았으면 그것은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구약에서 말하는 창조 기록 방법이다. 그런 말이다. 그런데 태초에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혼돈하고 공허한 땅에 질서와 충만함을 주시어 하늘과 땅을 기쁨의 성소로 지으셨다. 말씀하신 즉 그대로 되었다. 수면 위에 하나님의 신은 운행하셨는데 하나님은 그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이 일을 이루셨다.

 

땅은 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고 베드로서 3장 5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물로 지음 받은 백성은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은 반복된 씻음으로 새롭게 출생되고 그런다. 그런데 이 세계도 그렇게 씻음으로 출생됐다. 그러면 죄로부터 씻었는가? 그런 말은 아니다. 처음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셨을 때 땅은 혼돈하고 공허했다. 땅 이야기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지으셨다 하는 이야기는 신약에서 나타나고 구약에서는 전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면 왜 보이지 않는 것을 지으셨다는 말이 신약에 나타나는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기 때문이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신성의 본체의 형상으로 아들이 오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모든 것을 신약에서 이야기를 한다. 구약에서는 땅을 지은 이야기 이상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그 땅은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땅은 혼돈하고 공허했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셨고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말씀으로 지으셨는데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셔서 세계를 닭이 알을 품는 것처럼 품고 계셨다. 여기서 직접 삼위일체 이야기를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했다는 말은 있지만 그가 일하셨다는 말은 전면에 나타나 있지를 않다. 하나님의 말씀하시매 이루셨다. 이것이 창1장에서 일하시는 방법이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했다. 온 세계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매 든든히 섰다.

 

하늘의 천사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중 든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시중 드는 장자로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이 만물을 붙드심이 신실하신 것처럼 이스라엘을 붙드실 것이다. 만물이 하나님의 뜻대로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야 한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창조 기사다. 우리는 어떻게 한가? 이제는 천지 창조로 해석을 하지 않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로 우리의 신실을 보증한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은 영원히 신실하시다. 지금도 세계에 죽음의 그림자가 있는가?

 

예수를 죽은 자 가운에서 살리신 하나님은 너희 죽을 육체까지라도 예수의 몸의 영광으로 변화시키리라. 그 하나님이 신실하신 것처럼 너희들은 죽을까 두려워 종노릇하지 말고 신실하게 말씀을 이루라. 하나님의 아들은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 오셨고 너희들을 하늘 세계로 지었으니 하나님의 아들의 뜻을 이루도록 해라. 그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장자인 것처럼 너희들은 하늘에 속한 자로 아버지의 뜻을 이뤄라. 이런 이야기가 신약에서 말하는 메시지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보니까 혼돈하고 공허한 땅에 질서와 충만함을 주셔서 세계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세계로 지으셨다. 여기서는 물질이 있냐 없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무에서 유를 짓고 하는 것은 단어 이야기는 근본 개념은 아니다. 말씀하신 즉 그대로 되었다. 땅은 물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고 벧전3:5절에서 말한다. 이 말은 무슨 말을 하려고 베드로가 그 말을 하냐면 처음 세계가 물로 말미암아 지어진 것처럼 마지막 세계는 불로 말미암아 새롭게 지어진다. 구약에 보면 물과 불이 정결법이다. 이스라엘의 정결법을 가지고 세계의 정결법을 쓰고 있다. 교회를 구원하신 예수의 부활로 만물의 진동과 새로움을 이야기한다.

 

예수께서 죽으셨을 때 땅이 진동하고 하늘도 흔들렸다. 예수님 재림하실 때 우리는 진동치 않는 나라를 받을 것이다. 즉 교회 구원 이야기를 세계 진동 세계 구원 이야기와 연결을 시키는 것이다. 구약에서도 이스라엘의 정결법 용어로 세상 창조와 만물의 새롭게 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땅은 물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고 베드로서에서 말한다. 하나님께서 6일간의 사역으로 혼돈하고 공허한 땅에 질서로 주시고 충만케 하사 기쁨의 세계로 지으셨다. 하나님은 그 지으신 세계를 사람과 함께 기뻐하시고 제 7일에 안식하셨다. 그냥 얏 하니까 되는 것이 아니라 6일간의 연속되는 날을 통해서 일하셨고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사람을 지으시고 그 지으신 세계를 함께 기뻐하셨다.

 

날에 일하신 방식을 보면 무엇이 있으라는 말씀 그대로 되었더라. 또 보시기에 좋았다는 보도 그리고 나누셨다. 그리고 각각의 이름을 주시고 복을 주셨다. 몇째 날이라 대개 이런 구조로 되어 있다. 첫 삼일은 나누는 일이고 후 삼일은 나누신 세계를 충만케 하시는 사역이다. 더 말하면 첫날은 빛을 지으셔서 낮과 밤을 나누셨다. 그 다음날은 궁창을 지으셔서 궁창 위에 물고 아랫물로 나누셨다. 그리고 삼일에는 그 아래의 물을 바다와 육지로 나누시고 육지를 풀과 채소와 과실로 채우셨다. 그리고 다음 삼일을 보면 이제 하나님께서 빛을 지으셔서 낮과 밤을 나누셨는데 낮을 주관하고 밤을 주관하는 광명채를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낮에는 해가 가득 차고 밤에는 달과 별들이 가득 찼다. 그렇게 해서 땅을 비추게 하시고 이것으로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루게 하셨다.

 

실은 징조 사시 연한 일자는 이것은 단순히 달력을 세라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징조 이스라엘의 사시 이스라엘의 일자 이스라엘의 연한을 이루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로 하늘에 광명채를 통해서 땅에 비침을 통해서 모든 복을 주셨고 그 모든 복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그런 징조들이었다. 이스라엘은 이런 월력을 따라서 하나님의 축제의 절기를 기억하고 지켰던 것이다.

 

5일째는 위에 물과 아랫물로 나눈 날이 두 번째 날인데 이제 밑에 물에는 생명이 번성케 하고 위에는 새가 날도록 명령하시고 그리고 충만 하라고 복을 주셨다. 그러니까 하늘에는 새가 가득하고 땅에는 고기가 가득하고 그렇게 축복하셨다. 그 다음 여섯 번째 날에는 하나님이 마지막에 바다와 육지를 나누셨지요? 그래서 땅은 생물대로 종류를 내라 명하시고 그렇게 육지에다가 생물을 종류대로 지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다. 그리고 바다와 하늘과 땅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6일 제일 뒤에 보면 다스리라 여기 까지 하면 다 끝이겠는데 제일 뒤에 보면 다시 반복하시기를 그 지으신 모든 생물에 각기 식물을 주셨다. 공중에 새 한테는 뭐 물고기 한테는 뭐 사람한테는 뭐 이렇게 전부 식물을 주셨다.

 

그러니까 이 세계는 창2장과 비교하면 먹거리 세계다. 먹을 것을 주셨으니까. 그런데 그 먹거리가 제일 많은데는 에덴 동산이다. 그런데 지으신 세계의 모든 동물에게 먹을 것을 주셨다. 그렇게 말함으로 6일의 사역이 끝난다. 이것은 풍성한 생명의 세계고 기쁨이 세계다. 그리고 나서 보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세계가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그런데 우리 번역 성경에는 감탄법이 잘 안 나와 있는데 영어 성경만 봐도 그렇게 나와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아서 보라 아마 제가 봤을 때는 혼자 좋아서 감탄법보다도 그가 지으신 사람과 함께 좋아하셨을 것이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질서를 주셨고 명령하니까 질서대로 있었다. 밤은 밤이고 낮은 낮이고 혼돈 되는 법이 없었다. 땅은 땅이고 바다는 바다고 혼돈 되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생물이 살 거처를 주시고 그가 지으신 모든 세계에 생명체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게 먹을 것을 주셨다. 그러니까 이것은 온전한 기쁨의 세계고 생명이 가득한 세계다.


그 중에 중심지는 2장의 에덴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1장은 우주적인 성소를 짓는 이야기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매 만물이 이루었다. 그 중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은 만물을 주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대리자로서 주관자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 중에 사람을 대리자로 세우셨는데 그의 말씀을 시중 드는 종으로 세웠다. 네가 모든 만물을 다스리라. 하나님이 말씀에서 이루신 세계를 그 말씀대로 봉사하는 자로서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

 

그러니까 사람의 직무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자로 주관하는 직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형상대로 지은 받은 사람의 직무가 이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람을 직접 하나님의 형상 이런 칭호는 안 쓴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 모양을 따라 지음을 입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시고 우리는 아들 안에 그 형상을 덧입었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시다. 그는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신 아들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었다. 하나님의 아들 안에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됐다. 그런 표현법을 쓰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의 직무는 하나님의 대리자다. 주관자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매 이루어졌는데 말씀을 순종하는 세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자다. 그가 사람이다. 그런데 나중에는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장자로 부르셨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만물을 지으시고 생명으로 충만케 하시며 그의 권능과 선하심과 신실하심으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바로 모든 세계를 지으시고 모든 생명을 붙드신 그분이 특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고 나는 너만 알았다. 너는 나의 장자다. 고루 햇빛과 비를 만민에게 주신 하나님 모든 짐승에게 호흡을 주시고 먹을 것을 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보호자다. 하는 이야기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장자로 지으신 이스라엘을 만물의 장자로서 하나님의 성소에서 6일 동안 하나님과 함께 일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누리게 하시며 제 7일에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며 완성된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며 살게 하셨다. 그것이 구약 역사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소는 가나안 땅이다. 그러나 가나안 땅이 성소면 온 세상은 성소의 뜰 정도 될 것이다. 모세 제도를 확대시키면 왜 하나님은 온 세계의 주관 자시니까. 그런 방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장자고 나머지는 아니다. 그 장자 권은 모든 만 민중에 장자요 모든 피조물 중에 장자다. 더 좁히면 처음 창조 세계에 사람 아담과 하와 같은 자리다. 그런 역할이 이스라엘의 역할이다. 그 말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창세기 기사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참 신이시며 이방의 죽은 우상과 다르며 선하시고 전능하시고 신실하시다. 천지와 만물이 이를 증거하며 찬양한다. 이스라엘은 이 증거와 찬양에 있어서 장자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삶이다. 구약의 인용 구절은 전부 시편 19편 또는 119편 또는 시편 33편 이사야 44장 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히브리서 1장 또 요한 복음 1장 그런 것이 될 것이다.

 

그들을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서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다. 구약 중보직임을 써 보면 그렇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그 말씀을 따라 대리하기 때문에 해석자요 또 그것을 지배하는 왕이요 또 그들의 대장이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머리다. 지금은 어느 정도 교회가 머리가 되었냐면 교회의 찬양에 하늘에 천사들도 참여하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왜 교회 머리되신 분은 하늘 보좌에 계신 분이시다. 구약은 그렇게는 안되어 있다. 그런 장자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비치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으로 그의 교회에 비추사 만물을 새롭게 지으셨다. 처음 창조의 빛과는 달리 새 세계의 빛이 왔다. 처음 창조의 빛은 피조된 빛이지만 새 창조의 빛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아들이시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나오셨지만 지음 받은 분은 아니라고 골로새서 1장은 말하고 있다.


보좌 우편에 앉은 그리스도는 창조의 중보자시오 만물의 회복자시오 완성자시다. 교회는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시오 본체의 광채이신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다.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으로서 그의 통치에 참여한다. 첫 사람 아담에게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주관하도록 하셨다. 그런데 참된 주관자는 누군가? 아담은 땅에 있는 것만 주관했으면 하늘에 있는 것을 주관하신 분은 위로 오신 아들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아들 지음 받은 형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신 아들 이분은 천사까지 지배하는 분이시다. 그 지배권이 예수님의 부활에서 드디어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러니까 교회가 복음을 증거 하면 하늘에 권세들도 떨어진다.

 

70인이 전도할 때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이야기가 전부 그런 이야기다. 그러니까 교회는 보좌에 취임하신 예수님의 통치권에 참여한다. 첫 인류가 아담의 통치권에 참여하면 그것을 대리하는 자가 이스라엘 백성이면 교회는 이제는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신 아들의 통치권에 참여한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에 살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만물을 새롭게 하시도록 가나안 땅까지 새 창조의 복음의 말씀이 역사 하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이 나타난다. 어떻게 참여하는가? 하나님이 말씀으로 만물을 지으셨지요? 우리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에서 일으키신 새 창조의 말씀 이 부활의 말씀을 증거 하면 하나님은 그 복음의 말씀으로 하늘에 속한 새로운 세계를 지어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는 천지의 창조주요 그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보이지 않는 모든 권세들의 왕이다. 어둠의 권세는 물러서고 만물을 주관하시는 주님의 권세가 자기 백성을 그 영광에로 참여시킨다.


항상 새 창조를 생각하면 첫 창조를 그냥 이해할 수 있다. 여러분이 여전히 옛 세계에 살고 있는데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새로운 피조물로 지어졌다. 여러분은 어디가 보이는가?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분 그분이 우리의 중보자고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 것만큼 세계는 열린다. 그런데 구약 때는 그런 빛은 없다. 이스라엘 백성이 살고 있는 곳은 땅의 세계다. 그래서 그들이 봉사하고 있는 영역에 대한 창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천지의 창조자다. 이스라엘을 씻으면 분이 만물을 씻어서 질서 있는 세계로 지으셨다. 재림하시면 만물을 불로 씻어서 새롭게 하실 것이다.

 

이처럼 창조의 처음은 처음부터 새 창조를 지향하는 것이다. 물론 죄 때문에 예수가 우리와 같은 죽음의 권세에 갇히는 식으로 되었지만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예수를 창세전에 예비하신 어린양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그것이다. 창조 이전에 하나님이 가졌던 영원한 계획은 만물을 그의 영광의 세계에서 함께 하신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출발점에서는 에덴에서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 사실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제 그 역사가 목표에 도달했다. 목표에 도달하니까 하나님이 일하신 처음과 끝이 열린다.


구약 때는 거기 까지는 열리지 않는다. 창조의 처음과 가나안 땅 이상은 열리지 않는다.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분이다. 이것이 교회의 영원한 토대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누구 신가? 천지 창조 주시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토대다. 하나님은 그처럼 자비하시고 신실하시다. 그런데 이처럼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신성의 능력과 지혜가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나타나는데 사람이 핑계하지 못하도록 나타나는데 사람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전부 우상으로 타락해서 전부 죄의 종이 되었다고 롬1장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 보다 더 광명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영원한 하늘에 속한 창조를 보고 있다. 핑계할 수 없도록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서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도 만일에 그 하나님을 싫어하고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세상의 종이 될 것 같으면 그것은 비참한 일이다.  구약 때는 천지 창조주 이상이 안 보인다. 신약 때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지으신 영원하신 하나님을 안다. 왜 우리의 중보자가 그런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계시 된 만큼 자기를 자기 백성에게 주신 분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를 알리신 것만큼 하나님을 안다. 그 존재를 안다 그런 말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의 일하심에서 자기를 알리시니까 우리는 알리신 것만큼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존재다.

 

이제 신약에서는 하늘에 속한 것을 알리셨다. 그것이 창세기 1장을 보는 방법들이다. 물론 여기서 하나님이 각기 종류대로 지으셨다. 각기 종류라는 것을 보니까 진화론은 안 맞다. 맞는 이야기다. 물론 진화론을 대항해서 각기 종류대로 지었다고 조직신학이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있다. 또 6일 만에 만드셨다고 분명히 그렇게 되어 있다. 우리는 기록된 대로 사실이기 때문에 더 이상 사실을 모른다. 6일 만에 지으셨다. 그것이 역사다.


진화론과 대항하면 우리는 그 이야기밖에 못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와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질서가 맞는 것처럼 우리가 살고 삶고 있는 삶의 질서가 맞다. 우리들도 여전히 날의 질서로 살고 있는데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의 새로운 질서 안에서 살고 있고 이 질서를 떠난 삶이라는 것은 실은 종교가 아니다. 그러니까 만물의 존재 의미나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의미나 같은 것이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모든 존재에 대한 비밀들이다. 그것이 사실이고 또 우리의 삶의 의미다. 그러니까 진화론과 대항해서 이야기하려면 6일 창조를 열심히 이야기하겠지만 그것은 과학의 이야기일 뿐 그 이야기가 우리를 구원한 것은 아니다. 성경은 진화론에 대응하려는 문제로 6일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삶의 질서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같다. 새 창조된 이스라엘의 삶의 질서가 처음 창조 질서와 같다. 하나님이 처음 창조 질서에서 아담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새 창조된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실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교회와 함께 하신다. 그것이 만물의 존재의 의미다. 그 이야기를 본질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 해석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다.


가령 영혼과 육체로 지어졌다. 삼분설을 대항하면 이분설이 맞다. 그러나 영혼과 육체를 아무리 나누어서 설명을 해도 구원을 설명하지 못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 하나님의 대리자로 사람 하나님을 순종하는 생명으로 사람 그 문제에다 강조를 두고 있고 하나님이 생기를 호흡하심으로 지으신 사람 하나님의 영이 호흡된 새로운 사람 그런 하나님과 관계로서 인간론을 개진하지 영혼은 어떻고 육체는 어떻고 하는 그런 것은 사변적인 이야기는 되어서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 이야기는 안된다.  삼위일체 이야기도 똑 같다. 셋이고 하나로 하나고 셋이고 우리는 모르는 이야기다. 그러면 이단을 대항해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우리의 구원이 안된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다. 이제는 아버지와 아들의 교제로서 영이 우리 안에 오셨다. 이런 구원론적인 이야기가 안되면 삼위 일체로 우리의 구원이 안된다. 그러니까 여호와 증인을 대항하는 의미로 삼위일체를 개진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성경은 해석하는 복음 적인 요소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성경을 이단과 대항하는 의미로 해석하면 그 말은 맞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이야기는 안된다. 그런 것을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제까지 조직신학은 이단과 대항하는 그런 신학적인 이야기였고 곧 그것이 성경의 의미인 것처럼 설명을 했기 때문에 이단을 대항하는 사상은 개발되는데 그리스도 안에 부요함 삼위 하나님 안에 있는 부요한 교제 그런 것은 교회에 거의 선언되지를 못해 버렸다. 그러니까 삼위일체는 신자가 처음부터 대면할 하나님이신데 그것은 신학교 졸업해도 모른다. 하는 높은 경지로 올라서 버린 것이다. 구원은 삼위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에베소서가 처음부터 그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신학교 졸업을 해도 모른 이야기로 되어 버렸다. 삼위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같다.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 아버지의 영원한 자기 계시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로 일하신 이전의 이야기다. 그는 창세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오셨다. 둘은 영원히 우리로 하나이시다. 그런데 그 사랑의 교제를 성령이 오셔서 아버지와 아들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성령은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셨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교회가 주님과 하나이다. 그런 이야기다.  가령 예수님이 분명히 하나님이고 사람이시다. 그러나 두 본성을 나누는 설명은 성경은 안한다. 조직신학은 그 이야기를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예수님이 참 사람이 아니라고도 그러고 참 하나님이 아니라고도 그러고 공격 하니까 아니다. 진짜 신이고 참 사람이다. 그래서 이단을 대항하느라고 설명을 쭉 하겠지요?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으로 하신 일 신성으로 하신 일 그런 구분은 전혀 없다. 그는 우리 중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격을 말하지 죽었을 때는 사람으로 죽고 부활하실 때는 신으로 살고 그런 이분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 말이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우리 보수 교단이 이단을 대항하는 의미로는 옳았지만 그것을 바로 성경의 의미로 해석해 들어왔기 때문에 이단과 투쟁하는 장자로서 역할을 했는가 몰라도 복음의 부요함을 거의 그렇게 되지를 못했다. 성경 문맥을 따라서 풀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런 것을 조심해야 한다.

 

여러분이 해가 지고 여전히 우리가 살고 있다. 날을 살고 있다. 여전히 시간이고 여전히 죄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새로운 빛가운데 있는 날이다. 이 날에서는 저녁이다 밤이다 새로운 날이다 6일 동안 반복되는 그런 날은 없다. 이제는 밤이 깊고 아침이 가까웠다. 낮이 가까웠다. 우리는 아직도 이런 반복된 날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이제는 광명한 새벽별로 오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살고 있지 구약처럼 반복되는 안식의 구조로 살고 있지를 안해요?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고 신약에서는 소위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일하신 것은 예수의 부활에서 끝났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의 부활에서 하늘에 속한 세계를 지음으로 완성되었다. 우리는 그 완성을 누리면서 오는 시대를 바라보고 살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위치다. 그분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에서 살리신 새 창조 주시다. 그분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아들을 주셔서 우리를 새롭게 지으셨다. 그는 영원히 자비하시고 권세가 있다. 우리 안에 활동하는 권세는 예수님을 살리신 권세니 두려워하지를 말아라.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를 순종하신 것처럼 하늘에 속한 뜻을 이루어라. 그것이 우리가 하는 주기도고 우리가 살고 있는 믿음의 질서다.

 

이스라엘에 처음 창조의 하나님을 제시한 것처럼 우리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에서 살리신 분은 하나님과 함께 계신 아들이시다. 영원한 하나님의 경륜이 이제 너희에게서 집행되고 있다. 그것이 교회에 주신 복음이다. 그것이 창1장을 해석하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창세로해서 신약으로 오면 안된다. 창조로부터 부활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부활을 통해서 창조가 해석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교회가 해석된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해석되어 한다. 역사적인 순서는 이스라엘이고 교회고 창조고 새 창조이겠지만 이제 하나님을 아는 빛은 그런 것이 아니다. 완성의 시점이 아니면 이전 것은 열리지를 않는다.

 

예수의 부활이 아니면 옛 세계는 영원히 죽음의 세계에 갇힌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처럼 밝은 빛가운데 사는 백성이 없었다. 우리처럼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신실하심을 알고 있는 백성이 없다. 휘장밖에 두는 천지 창조가 아니라 부활하신 아들의 영으로 영원히 우리 안에 계신 사랑의 확증으로 주신 주님이시다. 누가 죽은 자를 이기신 하나님의 아들 갑자기 우리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아버지의 계획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선택이고 영원한 작정이다.  창1장에는 예수 이응 자도 안 나온다. 그 문장만 풀어 보고 있으면 여러분은 창조 연구가가 되는데 그래 가지고는 하나님을 모른다. 창조는 이스라엘을 열어 주고 있는 것이다. 새 창조된 이스라엘을 위해서 장자 이스라엘을 위해서 첫 창조가 열린 것처럼 하늘에 속한 장자인 교회를 위해서는 영원한 창조 이전의 문제를 열어 주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개요 강해 : 창세기1장 (3) 


물로부터 만물을 지으셨고 엿새 동안에 지으시고 칠일에 쉬시고 그런 구조로 알리신다. 또 교회를 그의 피로 씻으사 하늘에 속한 새 백성으로 지으신 그리스도는 창조의 대행 자이며 창세전에 미리 알리신 바 된 어린 양이신데 이제 세상 끝에 나타나셨다고 말씀을 한다. 우리를 지으신 주님은 누구시냐? 그냥 전능 자다 그런 말이 아니라 창세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오셨고 함께 하신 분이시고 그가 모든 만물을 지으셨는데 이분이 십자가로 화목케 하시고 만물을 회복하는 주님이시다. 그렇게 설명을 해준다. 그러니까 우리의 주님을 설명했을 때 그냥 전능 자다 그런 말이 아니라 교회를 지으신 의미로 설명을 한다.

 

그러니까 그는 창세전에 미리 알리신 바 된 어린 양이다. 이제 세상 끝에 나타나셨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지어졌다. 구약은 물의 씻음으로 지어졌다. 반복된 씻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법이다. 홍해에서 씻었다. 그러니까 천지창조도 물로부터 질서 있는 세계로 지으신 그런 방식으로 언급이 되어 있다. 노아 홍수도 물로 만물을 심판하시고 물로 지어진것처럼 되어 있다. 왜 이스라엘을 물로 씻어서 지었거든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짓는 상에 맞추어서 처음 창조를 그렇게 언급하고 있다.

 

지금 교회 창조는 죄로부터 지어졌다. 하나님의 대면하는 방식으로 지어졌다. 아버지의 뜻을 하늘에서 이루신 방식으로 지어졌다. 땅에서 이루는 이스라엘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지음을 받지 않고 나오셨는데 그는 아버지의 말씀이시다. 그가 만물을 지으셨다. 그는 창세전에 미리 알리신 바 된 어린양인데 이제 나타나셨다. 우리는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흠도 없고 티도 없이 아버지앞에 서게 할려고 택하심을 입었다. 모든 문제를 교회 출생과 관계된 언어로 묘사한 의미가 그런 것이다.  거기서 하나님의 존재론을 연구 해 봤자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말이다. 물론 알려진 대로 하나님의 존재를 말하지만 그 존재가 있기 때문에 이러하다고 이쪽에서 거꾸로 올라가서는 안되는 것이다.

 

만물 위에 세우신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만유를 성소로 통일하시며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충만히 임재하시어 그의 뜻을 이루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충만함이 모든 육체로 거하신 분이시며 교회는 그의 몸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충만하게 지어졌다. 하나님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 예수님안에서 충만하게 지어졌다. 이분은 아버지를 보았고 아버지의 일을 행하신 분이다. 그는 아버지의 모든 계시자다. 그가 창조자고 새 창조자다 교회가 새로운 피조물이니까. 이처럼 교회의 주님이 누구 신가? 그런 관점에서 열고 있다. 이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지어졌다. 하나님의 충만함이 교회에 임한다. 왜 예수님은 신성의 충만함이 육체로 거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분이시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모세에게 이루어진 것처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아들에게서 이루어진 것이 교회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이 신약에서 창조자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골1장에서 특별히 그렇게 설명되어 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나셨는데 지음을 받지 않으셨는데 만물보다 먼저 나셨다. 그가 모든 만물을 자기를 위해서 지으셨고 자기를 위해서 붙드시고 그리고 때가 되매 십자가의 피로 화목케 하셨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모든 것의 머리가 되셨는데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다. 교회는 신성의 충만함이 육체로 거하신 예수님 안에서 충만함을 입었다. 교회가 완성되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충만케 하심으로 임하신다. 그것이 신약에서 종말까지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창세전과 소위 종말 후가 열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열리는 것은 땅에 있는 천지 창조와 가나안 땅까지 열어진 세계다. 그러니까 기록된 대로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역사적인 사실이지만 그것은 이제 진화론을 대항하는 의미로 사실을 밝힐려는 의미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삶의 사실의 의미를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그러면 진화론과 대항하려면 창세기를 읽을 수밖에 없다. 맞다. 그러나 창세기를 펴자 말자 진화론만 공격하고 있어 가지고는 그것이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조직신학은 그 당시 유행하는 잘못된 사상들에 대해서 변증적인 의미로 변론한 것이 강하다. 가령 우리가 신앙 고백한 것도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이 있다. 참 하나님이고 참 사람이시다. 이런 말은 그 당시 이단들에 대항해서 교회가 모여서 고백했던 것이다. 그는 온전한 사람이시고 온전한 하나님이신 데 그는 인성과 신성 두 본성이 있고 사람의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 두 의지가 있다. 이런 말은 이단에 대항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을 폈을 때 이것이 하나님의 의지인지 사람의 의지인지 이것이 인성의 일인지 신성의 일인지 그런 것을 구별해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시킨 분으로 설명하지 인성의 일이냐 신성의 일이냐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인성으로 죽었는가 그런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죽었다. 그는 신성으로 부활했는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부활하셨다.

 

만일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의 우리의 대표자가 아니면 우리의 구원이 아니다. 그러니까 부활을 신성에다만 귀착시키면 인성은 여전히 죽음에 갇혀 있어야 된다. 그런 대비 구조로 가르치지 않는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성경을 펴자 말자 그런 교리 논쟁을 해서는 구원을 가져올 수 없고 항상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교제의 관점에서 풀어야 된다.  그러면 이단과 대항하는 의미로는 맞을 수 있지만 본문은 그 의미를 말하려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을 그렇게 풀어서는 안되다 그 말이다. 진화론적인 사고이면 윤리가 없다. 절대적인 윤리라는 것이 없다. 왜 계속 진화되고 환경에 적응한 것만 선이다. 이런 것은(어떤 물체) 출발도 끝도 없는 것이다. 어디 까지 진화할줄을 모른다. 이것은 완전히 성경 윤리는 파괴한다. 그러니까 그런데 대항해서 아니다. 하나님이 6일만에 만드셨다. 지극히 맞는 말이다. 그러니까 진화론 사상이 있을때는 그렇게 대항할 것이다. 진화론 사상이 없었으면 창세기를 그렇게 적응을 하지 안햇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시대마다 나오는 과학적인 사상들을 배격할려고 처음부터 기록해 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누구신가? 그 하나님을 알릴려고기록해 준 것이다. 창조된 세계의 삶의 의미를 부여해 줄려고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본래적인 의미를 빼버리고 그 당시 유행하는 이단들을 대적할려고 그 본문을 풀어 버리면 이단을 대항하는 신학적인 의미로는 맞지만 그것은 본문 자체가 의미하는 그 문맥에서 말하는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풀어서는 교회가 생명을 못 가져온다.

 

그것이 우리 보수파가 이제까지 했던 일이다. 창1장을 펴면 진화론 공격이다. 그리고는 설교한 것이 없다. 그 논쟁뿐이다. 거기서 진화론을 반격해 봤자 거기서 무슨 그리스도 예수를 알 수가 있는가? 알수가 없다. 몇일만에 지었냐? 6일만에 지었냐 수 억년만에 지었냐 이것 싸우고 있는것이지 예수님이 누구신가는 증거할수 없다. 성경은 전체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구원의 책으로 읽을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보수파가 셩경을 열심히 해석하고 이단을 방어하고도 소위 빼빼 마른 교리 아무런 감동이 없는 교리가 된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기도원에 가면 소위 기도원 목사들이 무식한 편이다. 그러니까 그런 것은 잘 모른다. 진화론이 어떻고 윤리가 어떻고 잘 모르고 우리 죄 예수 이것은 안다. 그러니까 막 욕도 하고 공격하면 주여 감동을 받아 버린 것이다. 왜 거기가 무슨 생명이 있는 것 같거든요. 그런 사람한테는 진화론이니 그런 말을 들어오지도 않는다. 말하자면 진화론을 모른 사람한테는 들어오지를 않는다. 왜 그 삶이 성경하고 연결되기 때문에 들어오지를 않는다. 그래서 거기서 은혜 받았다고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보수 교단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잘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성소에서 사람의 직무를 제6일의 사람 창조에서 이스라엘과 교회에 계시하셨다. 이스라엘에게서는 6일 동안 일하고 제 7일에 쉬는 방식으로 알리셨고 우리에게는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리셨다. 이스라엘과 교회에 계시했다는 말이 그런 말이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읽을 수가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읽어야 된다. 진정 구약은 교회에서 열린 책이다. 구약은 모세 제도 안에서 맡아 있었지 장자로 상속을 못한다. 휘장 밖에서 누렸지 하나님의 보좌에서 못 누린다. 구약을 진정 하늘의 것으로 누린 것은 교회다. 그러니까 교회가 진정한 소유자요 상속자다.

 

그러니까 이스라엘과 교회에 계시하셨다 이렇게 바로 쓰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방법은 다른 것을 지으신 것과는 다르다. 다른 것은 있으라 하면 있었다. 창1:26-27절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그렇게 되어 있고 2:7절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람을 제일 마지막에 만드셨는데 다른 것들은 이렇게 만드시지 않으셨다. 있으라면 있었고 복을 주셨다. 사람은 이렇게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어서 이러이러한 일을 하게 하자. 그리고 2장에 또 사람 지은 이야기가 또 나온다.


이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야기가 조직신학에 보면 여러 가지고 나온다. 그래서 개혁파는 육체와 영혼을 형상에 다 포함시키고 루터파 같으면 영혼의 기능에 주로 제한을 시킨다. 천주교는 자연과 은총에 대비해서 말한다. 그런 여러 가지 설명 방식이 있다. 그런 것은 실은 몰라도 된다. 그런 것은 종교철학적으로 분석해 들어간 것이지 성경 자체가 말한 것은 아니고 성경 자체가 말한 것만 알면 나머지는 쉽게 분별해 버리니까 우리들이 거꾸로 할 필요가 없다. 바른 것을 알면 나머지가 보인다. 틀린 것을 전부 검토한 뒤로 이것이 맞다 거꾸로 안 것이 아니라 진리를 앎으로 모든 거짓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옳은 것을 알면 나머지는 어려움이 없이 잘 알 것이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항상 문맥을 보는 법 앞뒤를 보는 법 전체를 보는 법 거기에 비추어서 해석을 하라고 그랬다. 그 부분만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잘 모른다. 그러면 1장과 2장을 비교시켜 보면 잘 알 수가 있다. 1장에서는 하나님이 각기 종류대로 지으셨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주관하게 하고 충만케 하셨다. 그리고 먹을 것을 주셨다. 그것이 1장에서 짓는 일이다. 각기 종류대로 지으시고 복을 주셨다. 1장 끝에서도 이런 저런 먹거리를 주셧다고 말하고 끝내고 있다. 짐승에게는 풀을 사람에게는 채소를 주셨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끝내고 있다. 각기 종류대로 지었고 사람도 남자와 여자로 지었다고 되어 있다. 2장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먼저 아담을 짓고 나중에 하와를 짓는 식으로 나온다. 그런데 1장은 남자 여자로 지었으면 각기 종류대로 지은 것이다.

 

그러니까 1장에서는 각기 종류대로 지어서 하나님이 배정한 곳을 주관하도록 하고 충만하게 하셨고 먹을 것을 가득 주셨다. 그것이 1장에서 말하는 창조의 큰 흐름이다. 2장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이제 사람이 없음으로 땅에 채소가 없었다. 사람 짓는 것도 1장에서는 각기 종류대로 있으라 하니까 지어졌다. 1장에서는 실제로 사람을 어떻게 지었는가는 없다. 있으라는 말도 없고 사람을 지은 목적 사람의 직무는 언급이 되어 있어도 종류대로 지은 것이 자기가 있는 영역을 주관한다. 사람은 지으신 모든 것을 주관하는 직무는 있어도 어떻게 지어졌는가 직접 언급은 없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지은 방식은 2장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2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 사람의 존재적인 특성을 말한다. 그가 어떻게 산 생명이 됐는지 그런 의미로 사람 창조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1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남자와 여자의 직무를 말씀하시며 2장에서는 사람의 생명의 존재가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그런 의미에서 그 직무를 설명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하는 말은 우리가 이전에는 삼위일체를 알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그런데 창세기 처음에는 물론 거기 있는 역사가 완결되니까 그림자들이 있겠지만 항상 구원 역사를 누리지 못하면 밝혀지는 것이 없다고 그랬다. 삼위일체는 신약 시대에 밝혀진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영의 교제로 구약 때는 그런 방식으로는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하시는 우리는 누구냐? 삼위일체 하나님의 복수적 인격을 직접 말하는 표현이 아니다. 삼위일체는 세 위격으로 계신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은 각각 인격적인 특성이 있다. 그런데도 하나이시다. 그 하나는 우리가 말하는 하나요 셋이요 그런 개념은 아닌 것 같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했을 때 그런 경우에는 말하자면 그 문맥들에서는 실은 무수한 우상과 대비된 방식으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세상에 많은 신들이 있어도 여호와는 한분 뿐이시다. 이스라엘이 섬기는 분은 한분 뿐이시다. 그런 경배의 대상으로 하나의 개념이지 하나둘 셋 넷 하는 식으로 하나 그런 개념에 언급되어 있는 구절들은 아니다. 구약 문법도 그러겠지만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복수적 인격을 직접 말하는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전 회의 장면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어전 회의가 많이 있다. 계시록에서도 어전 회의 비슷한 것이 나온다.

 

땅에 교회가 핍박을 받고 있는데 하늘이 열리고 거기 보좌가 보인다. 어린양이 보이고 천사들이 둘러 진치고 있다. 계시록에 나온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모든 땅에 있는 일들이 펼쳐지고 있다. 마치 그런 것처럼 구약에도 어전 회의 장면이 많이 나온다. 우리가 제일 쉽게 알 수 있는 것을 욥기를 보면 알수가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앞에 모였다. 천사들이다. 거기 사탄도 참여 했다. 하나님이 물었다. 내 종 욥을 보았냐? 내 종 욥처럼 신실한 사람이 어디 있냐? 하니까 사탄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복을 많이 주니까 그렇지 고생 조금 해보면 마음이 달라질것이라고 그래서 하루 아침에 망해버렸다. 그랬는데 원망을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야 본전치기 했으니까 원망을 하지 않겠지요? 왜 자기 몸이 아직 성하니까 아직 원망을 하지 않지 몸의 질병을 주면 분명히 원망할것이라고 해도 욥이 원망을 하지 않았다. 거기 보니까 어전 회의 장면이 나온다.

 

거기 보면 의인의 고난의 의미들이 설명되어 있다. 실은 그 고난은 하나님이 고통스럽게 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요새 말하는 은사 주의자들이 말하는 모든 병은 마귀가 준다 하는 말은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그것으로 마귀 쫓아내는 놀음을 하고 있으니까 문제지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시고 모든 파괴적인 것은 한마디로 하자면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기도 욥의 질병 문제를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의인의 생명을 손 하나 까딱 못하는데 그런 역할이 있다. 욥은 어떻게 보면 애매하게 고난을 받고 있는데 고난의 의미들을 말씀하고 있다. 거기만 그런 장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왕상19장에도 그런 장면이 있는데 거기 보면 아합을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이다. 아합을 누가 미혹해서 죽게 하겠느뇨? 어전 회의가 열렸다. 거기 거짓 영들이 나타나서 우리가 거짓 선지자들 속에 들어가서 아합을 미혹하겠나이다. 들어가라 네가 이루리라. 그래서 거짓 영들이 거짓 선지자 속에 들어가서 아합에게 좋은 예언을 했다.

 

당신이 가면 땅을 빼앗을 것이다. 그렇게 하고 가서 죽어 버렸다. 거기 보니까 어전 회의가 있다. 또 진짜 어전 회의가 있는 것은 렘23장에 보면 있다. 거기보면 예레미야를 대적하는 하나냐라는 거짓 선지자가 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그렇게 예언을 했다. 돌아올 궁리 하지 말고 집짓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거기서 편안히 살아라. 70년이 차면 돌아오게 하리라. 그것이 예레미야의 예언이다. 그런데 보니까 거짓 선지자가 이것은 매국노다. 절대로 이방 백성이 우리를 치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소고 성소의 고기고 이방인은 성소에 들어오지 못한것처럼 예루살렘에 못들어온다.

 

거기서 한술 더 떠서 잡혀 간 사람들은 멀리 멀리 가거라. 너희들이 두고 간 땅은 전부 우리 땅이다. 그렇게 하고 듣지 않았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한 명이고 하나냐와 거짓 선지자는 많다. 뺨을 때리고 야단을 한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이야기를 한다. 네가 어전 회의를 봤냐? 하나님의 어전 회의를 네가 봤으면 네 말이 맞지만 너는 어전 회를 참석한 적이 없지 않냐? 자기는 어전 회의가 참석했다 그 말이다. 즉 하나님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어전 회의를 보았다는 의미다. 그것을 직접 본 사람은 이사야다. 높이 들린 보좌를 봤는데 천사들을 얼굴을 가리우고 발을 가리우고 두 날개로 날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가겠는가? 실은 어전 회의에 선지자 이사야가 참석하고 있다. 내가 가겠나이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그리고 종말에 구원할 약속들을 이사야가 증거하고 있다.

 

보면 이사야는 하나님의 어전 회의를 보았고 예레미야도 그런 의미로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진짜 하나님의 어전 회의로부터 파송 받은 분이 있다. 나는 아버지를 보았고 아버지의 말을 들었느니라. 내가 하는 일은 아버지의 일이니라 하신 마지막 선지자가 왔다. 그분이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짓자 하는 그분이다. 그분은 다니엘서에도 어전 회의가 나온다.

 

창세기 개요 강해 2장 : 생명과 언약 역사의 시작


2장과 4장은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하는 그 말씀이 머리가 되는 말씀이다. 2장4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이 말이 4장까지 포함하는 그런 족보 적인 언어다. 오늘은 2장인데 2장에는 생명과 언약 역사의 시작을 말씀하고 있다. 내용을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대리자인 사람과 에덴에서 함께 하신 역사다.

 

내용을 구분하고 그 간략한 개요를 말하면 1-3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제 7일에 안식하신 내용이고 4-17절까지는 에덴에서 생명의 언약을 주신 것이고 그 다음 18-25절은 돕는 배필인 여자를 한 몸의 관계로 지으신 기사다. 1장에 천지와 만물 창조는 2장에 에덴과 아담 창조에 서론이다. 만물 중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아담은 하나님의 대리자요 장자다. 그러니까 만물 창조가 1장이면 장자 창조가 2장이다 그 말이다.

 

이러한 구조는 2장에서 6일간 모든 일을 마치시고 제 7일에 안식하는 것과 그 다음에 이어지는 기사 사이에도 상응한다. 무순 말이냐면 2장을 보면 제 7일 안식일이 1-3절까지 있고 그 다음에 이제 아담을 지은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서 1장2장의 관계 1장이 만물 창조고 2장이 장자 창조다. 1장이 서론이면 2장은 장자와 함께 역사를 시작하신 본론에 해당이 된다. 그런 문제들이 2장 구조들에도 나타나는데 처음에도 6일간 일하시고 제 7일에 쉬는 안식일이 앞에 있고 그 다음에 아담 이야기가 나오는데 실은 이 안식의 의미를 아담 창조에서 더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런 말이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것을 기뻐하시는 안식의 세계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대리자인 아담과 함께 하시는 에덴이 중심지이며 거기에서 생명을 주시며 동행하시는 역사를 시작하셨다.

 

2장을 보니까 하나님이 안식하셨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대리자를 지으셨고 그 중심지는 에덴이다. 거기서 생명을 주시고 동행하는 역사를 시작하셨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그 안식의 역사를 설명하신 방식이다. 에덴에서 생명 언약을 주시고 하나님의 대리자의 직무를 아담과 한 몸으로 지으신 배필인 하와와 함께 집행하게 하셨다.

무슨 말이냐면 에덴이 중심지인데 에덴에서 생명 언약을 주셨다. 그런데 이 생명의 언약이 아담과 함께 그 직무를 대신할 하와를 한 몸으로 지으시고 인류가 되게 하심으로 그 언약 역사를 집행하도록 하셨다. 대충 들어만 두시고 다음주에 정리를 해야 되겠다.


1-3절이다. 하나님께서 제 7일에 안식하셨다. 하나님께서 제 7일에 안식하심은 그가 지으신 기쁨의 세계를 완성시킨 축제의 쉼이다. 하나님은 그 날을 복 주셔서 거룩하게 하셨는데 그 날 주신 복은 그 날을 거룩하게 하신 것이 그 복이다. 또 거룩하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세계를 기뻐하시는 축제의 날로 그 날을 구별하신 것의 곧 거룩이다. 여기 까지는 본문을 그냥 설명하는 것이다. 제 7일에 안식하셨는데 그 날 쉬신 것은 6일 창조를 마치시고 그 지으신 세계를 기뻐하시는 쉼이다. 그래서 그 날에 쉬셨다. 더 일하지 않고 함께 축제하는 쉼이다.

 

그 날을 복 주셔서 거룩하게 했는데 그 날에 복은 거룩한 날로서 복이고 거룩한 날을 하나님의 안식의 기쁨 축제의 기쁨 그것을 누리를 복으로서 구별한 날이다. 제 7일에 하나님의 안식에 사람이 참여하는 것이 인류의 역사의 시작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안식일 역사를 구분하기를 1 장 끝에다 포함하지 않고 2장 앞에다 포함시켜 놨다. 이 구분까지 영감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대단한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다. 그래서 6일 창조가 하나님의 우주적인 성소인데 그 성소의 목표는 제 7일의 기뻐하심에 있다. 제 7일이 6일의 목표다. 7일에 하나님이 안식하셨는데 사람은 지음 받은 첫날부터 안식하셨는데 이 안식의 역사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심의 역사를 2장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제 7일은 1장의 끝이면서도 2장의 토대다. 그렇게 해서 제 7일을 2장에다 포함시켜 놨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안식하시고 그가 지으신 세계를 기뻐하시고 그 기쁨을 함께 누리도록 제 7일을 구별하셨는데 그 안식의 역사를 장자 역사에서 다시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담을 에덴에서 지은 그런 이야기다. 그래서 제 7일에 사람이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이 역사의 시작이요 또한 목표이다. 하나님의 안식이 처음 창조의 완성이요 목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세계를 지으시고 7일에 쉬셨다. 그래서 이것이 역사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목표다. 왜냐하면 이것이 6일 동안 일하고 제 7일에 안식하는 하나님의 장자인 이스라엘 자손의 삶의 질서요 소망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 안식은 역사의 시작에서 주신 생명과 안식이고 종말에 그리스도 안에서 주실 온전한 안식은 아니다. 안식은 주어졌어도 종말에 완성될 안식은 아니다 그 말이다. 이것은 히브리서에서 인용하고 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의 안식을 주었어도 이것은 안식의 완성은 아니었다. 이것은 창조의 처음부터 그랬다. 그렇게 히브리서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생명과 안식을 주셨는데 그것은 역사의 시작점에서 주신 것이지 역사의 종말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것은 아니다. 창조의 처음에 주신 생명과 안식은 아담이 하나님을 순종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과 동행하여 일함으로 역사의 종말에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케 될 것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죄가 지배하는 역사 가운데서 모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나안 땅과 성소에서 이 안식을 주시어 누리게 하시고 모세 제도 안에서 자기와 동행하는 백성으로 삼으셨다. 이처럼 역사의 시작점에서 하나님께서 안식을 주셨고 이 안식은 역사의 종말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누리는 안식은 무엇이냐? 처음 주셨던 안식을 죄와 사망의 지배 가운데서 주신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누린 안식은 에덴에서 누린 안식이 아니라 모세 제도 안에서 누리는 안식인데 모세 제도는 아담이 범죄 해서 죄가 지배하는 시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어서 누리게 하시고 동행하는 것이다.


4-7절을 보면 에덴에서 생명 언약이 있다. 다음 주 주보에는 더 자세하게 설명이 되겠지만 1장에서 천지를 지으시고 안식하신 하나님의 이름은 엘로힘이다. 지금 1장과 2장을 보면 둘다 창조 기사를 다루고 있는데 많은 차이점들이 있다. 그 차이점들을 이제 대배시켜 보면 1장과 2장의 의미를 알 수가 있다. 1장은 만물 창조고 2장은 아담 창조가 중심인데 그런 똑 같은 창조 이야기를 하면서도 차이가 난다. 가령 아브라함의 후손들 똑 같은 아들들인데 다른 아들들과 이삭은 차이가 난다. 그런 차이점들에서 이삭의 특성이 있다. 그런 것처럼 2장의 특성이 1장과 비교해 보면 차이점들을 알 수가 있고 그것이 2장의 강조 점들이다. 그래서 그런 것을 비교해 보면 제일 처음에 나타난 것이 하나님의 이름인데 1장에는 천지를 지으시고 안식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여기는 하나님 그렇게 번역되어 있다. 말하자면 엘로힘 히브리어로는 그런 단어다.


그리고 2장에 에덴에서 생명을 주시고 언약을 명하신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시다. 그래서 2:4절부터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나와 있다. 4절 이하 끝에까지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더 작은 단위로 나눌 수 있다. 가령 4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있고 5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다음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8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9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다음 쭉 내려가면 15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16, 그리고 18, 그렇게 쭉 나와 있다. 이런 단위들은 전부 작은 단락들이다. 가령 1장에서 작은 단락들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가라사대 그런 것이 단락들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런 말로 단락들을 이루고 있는데 2장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 말이 나오면 작은 단락들이다. 그런데 2장은 전부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것으로 되어 있고 1장은 엘로힘이 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고대인에게 이름은 단순한 부호가 아니며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이 나타나신 것이다. 사람이 지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인격 곧 그 본성의 계시이며 그 이름에 나타내신 대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고대에서의 이름은 그 인격과 곧 직결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단순한 부호다. 옛날 노인들은 이름을 지을 때 시를 따지고 이 아이가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 해서 이름을 크게 짓는다.  옛날 이름은 그랬는데 요새 이름은 부르기 좋게 짓는다. 요새 이름은 부호다. 고대인들은 이름 그러면 그것은 이름과 인격은 일치된다. 특별히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이 칭호로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셨다. 그러기 때문에 그 이름은 이름대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그 이름에 나타남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이름에서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은 일하심으로 자기를 나타내신다. 그러기 때문에 그 일하심은 이름에 일하심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그 이름의 나타남이다. 1장에 창조는 엘로힘의 나타남이다. 2장에 아담을 짓고 언약을 체결하신 분은 여호와의 나타나심이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전부다 했다 그런 말이다.  천지를 지으시고 사람을 그 안식에 참여케 하신 엘로힘은 천지를 지으시고 제 7일에 기뻐하신 하나님이시다. 엘로힘은 초월 자이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리라. 그가 초월 자시다. 전능 자고 그리고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다. 제 7일에 쉬게 하셨다. 그것은 기쁨의 교제 축제의 교제다. 그는 경배를 받으신 분이다. 그런 이름이 엘로힘 그런 계통의 이름이다. 그래서 엘 자가 들어가면 거의다 의미를 담고 있다.

 

구약에 보면 여러 하나님의 이름이 나온다. 엘자 계통이 들어가면 신성의 충만함 권세의 충만한 구약에서 복수형은 단순한 숫자의 복수형보다도 그런 의미다. 그러기 때문에 이름은 초월 자요 전능 자요 경외를 받으시고 경배를 받으실 분이다. 이런 계통의 이름이다. 그리고 여호와는 2장에 보면 생기를 호흡 하사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고 기쁨의 동산 에덴에서 사람과 함께 하시며 그에게 자기와 동행하는 지혜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신 데 그분은 생명과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순종과 경배를 받으신 분이며 생명의 역사를 완성시키시는 신실하신 분이다. 그것이 여호와의 이름이 나타내는 것이다. 2장에 보니까 에덴에서 생명을 주셨고 거기서 언약 체결을 하시고 그리고 선악과는 먹지 말아라. 내 말을 잘 들어라. 듣지 않으면 죽는다. 그렇게 언약 체결을 하셨다. 그러기 때문에 이 하나님은 생명과 언약의 하나님이고 순종과 경배를 받으신 분이고 그리고 생명의 역사를 완성시키는 분이다. 에덴에서 처음 생명의 역사를 출발시키고 있다. 그 역사를 완성시키는 분이다.

 

이것은 완전히 두 하나님으로 구분된 것이 아니라 강조 점이 거기 있다 그런 말이다. 1장과 2장은 전혀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둘다 창조고 둘다 성소 이야긴데 1장은 만물에 대한 강조 점이고 2장은 에덴과 사람이 강조 점이지 둘은 전혀 별개의 신처럼 그렇게 구분된 것은 아니다. 열국의 장자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지으시고 애굽에서 구원하여 그들에게 가나안 땅과 성소의 양식을 주시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언약과 지혜를 주신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주이시오 성소 에덴에서 함께 하셨던 여호와시다. 2장에서도 19절에 보면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을 지으시고 여전히 창조자로 나오는데 창조 방법이 전혀 다르게 나온다. 그분이 여호와시다. 즉 이스라엘의 창조자 즉 이스라엘의 성소에 계신 분 가나안 땅에서 함께 계신 분 이스라엘에게 순종하면 생명을 주고 범하면 너희도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분 그렇게 해서 그들과 동행하신 분 그들은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성소로 지키고 다스린다.

 

마치 에덴을 아담이 그런 것처럼 그런 권세로 자기 백성을 부르셨고 그런 권세 있는 봉사를 이스라엘 백성이 감당한다. 그분의 하나님은 여호와시다. 언제 계시 한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건 3-4장에서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나는 여호와시다. 조상들에게는 그렇게 알리지 않았는데 내가 이제 나를 여호와로 알린다. 그 여호와가 곧 천지 창조 주시고 아담에게 생기를 호흡해서 산 생명을 주시고 그리고 모든 부요함을 주시고 그리고 순종하도록 요구하시고 그리고 다스리며 지키는 권세를 주시고 함께 했던 분이다.  그리고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을 이룰 지로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고 그렇게 생명의 공동체 언약의 공동체를 이루도록 그 중에 거하신 하나님은 누군가? 곧 여호와시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열굴의 장자로 자기 백성으로 지으시고 애굽에서 구원하여 그들에게 가나안 땅과 성소의 생명과 안식을 주시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언약과 지혜와 권세를 주신 하나님은 천지 창조 주시오 성소 에덴에서부터 함께 하셨던 여호와시다. 여호와는 자기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장자로 지으신 자존하신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하늘에 속한 생명으로 지으시고 하늘 성소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기쁨과 생명을 주셨다. 만물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는 하늘에 속한 장자로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은 그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에게 속한 생명과 지혜와 권세를 그의 교회에 주셨다. 살려주는 영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 끝날 까지 그의 교회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시다.

 

마태복음 제일 끝에 보면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함께 하리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마태복음 처음에는 임마누엘로서 말하고 있는데 그분이 부활 자인데 세상 끝날 까지 교회에 임해서 함께 하신 분이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요한 복음에서는 내니라 내가 그니라. 여호와를 희랍어로 번역하면 에고 에이미다. 내기 있다는 강조 법이다. 그 말을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는 말들은 전부 여호와 자신을 지칭하는 표현법들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이제 다음 주보에서는 2:4절 이하에 있는 그런 차이점들을 전부 대비를 시키고 그 대비 점을 따라서 2장을 풀어 가면 1장과 2장의 차이점을 알면서 2장의 강조 점을 잘 잡을 수가 있다.

 

그 대비 점을 첫째는 하나님이 이름이 다르다. 두 번째 다른 것은 1장은 천지 창조고 2장은 땅에 에덴 창조 이야기다. 하늘의 별들이 한 이야기는 다 빠져 있다. 에덴 이야기만 있다. 전혀 다르다. 1장은 보시기에 좋았더라 기뻐했는데 2장은 땅이 비를 내리지 않고 경작할 사람도 없음으로 안개만 자욱하고 채소가 없더라. 처음부터 없다는 이야기로 시작을 한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 대리자로 사람을 지었는데 사람도 일장에서는 막 지었다고 되어 있는데 2장에서는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호흡했다. 사람도 어떻게 봐서는 두 단계로 지어진 것처럼 되어 있다. 그리고 1장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막 지었는데 2장에서는 먼저 아담을 지으시고 한참 있다가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배필을 지으리라 앞에는 아담 창조고 두 번째는 하와 창조다. 그렇게 둘로 나눠져 있다.

 

1장에서는 만물을 지으시고 마지막에 사람을 지었는데 2장은 사람을 짓고 그 다음에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려고 만물을 지어 데리고 왔다. 1장에서는 하나님이 이름을 지었는데 2장에서는 아담이 이름을 짓는다. 전부 다르다. 이런 차이점들을 쭉 대비시켜 봤을 때 그것이 2장이 1장의 소위 장자인 것을 만물 창조에서 특별히 아담 창조 우주적인 성소에서 특별히 에덴 성소 이런 문제를 알 수 있고 1장에서는 먹을 것을 다 주었다. 차이가 없는데 2장은 먹을 것이 가득한데 중앙에는 생명 나무도 있더라. 먹을 것이 등급이 있다. 1장에서는 먹지 말라는 것이 없는데 2장에서는 등급도 있고 먹지 말라고 한 것도 있다. 전부 다르다. 그런 문제들이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성소에 계신 하나님이 에덴에 계신 분이다. 그러니까 모세 언어로 에덴을 읽을 수밖에 없다.

 

바로 그 역사를 이제 하늘 보좌의 성소로 완성하시고 교회는 요한 복음을 보면 부활 자께서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 새로운 존재로 그들을 지었다. 그가 처음 창조자신데 그의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이제 교회는 하늘 성소에 속한 백성으로 지어졌고 교회는 그냥 땅에 에덴을 지키는 문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지키는 그런 제사장 그런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우주적인 성소를 관리하는 백성으로 지어졌다. 권세가 그런 권세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표자가 그런 권세의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의 대표자는 하나님의 형상 자신이다. 아담과 전혀 다르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전혀 다른 권세에 있다. 그것을 실을 창2장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항상 완성된 빛가운데서 이전을 읽어 나가야 된다. 그래야 그 의미를 알 수가 있다. 이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분이 처음부터 에덴에서 함께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내 산에서 말씀하셨는데 내니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니라. 그분이 영원히 자기 백성과 함께 여호와 자신이시다. 이런 것을 존재론적으로 일치시키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계시에서 그런다 그런 말이다. 왜냐하면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다. 분명히 아들과 아버지는 다르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다고 해 버리면 큰일 난다. 그런데 세상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심은 아들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주셨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은 같다.

 

만일에 아버지와 아들이 같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 곧 교회와 함께 하시는 예수가 곧 여호와시다. 그분은 자기 몸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그 언약의 영원함을 보장했다. 그는 우리는 사랑해서 자기 몸에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지으셨는데 이제는 죽음을 이기신 하늘에 속한 새로운 인류로 지으셨고 그는 자기 몸의 죽으심과 그의 영의 내주를 통해서 영원한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의 사랑은 불변하다. 영원히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타났다. 이제 교회 안에서는 먹지 말라 한 것이 없다. 왜냐하면 처음 주었던 안식과는 다른 하늘에 속한 안식을 주셨기 때문에 그렇다.

 

이제는 에덴 중앙에 생명 나무가 있고 거기서 강이 흘러서 땅 사방을 적신 정도가 아니라 계시록을 보면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생명 강이 흘러서 온 땅 길에 가득하게 흐른다. 이제는 생명 아닌 것이 없다. 그것이 교회가 누리는 복이다. 이제 반복되는 감은 있겠지만 1장과 2장의 차이점을 전체로 나열을 하고 그것을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는 많은 단락이 있는데 그 단락 순서를 따라서 비교해 보면서 풀어 나가면 이제 1장과 2장의 강조 점들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에덴 하면 제일 좋은 장소 인줄 아는데 여러분이 조그만 눈을 뜨고 읽어보면 부족함이 가득함이 가득 한데가 에덴이다. 좋은 것이 가득하면서 좋은 것이 가득하다. 전부 안 좋다는 이야기가 결론으로 나와 있다. 먹으면 죽으리라는 이야기도 에덴에서 들어본 이야기다. 1장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없다.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말도 2장에 있다. 창조 이야기가 완전히 아담을 중심한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1장은 각기 종류대로 우주적인 성소 개념인데 2장은 완전히 에덴의 주인인 아담을 중심한 기록이다. 하와도 아담을 위해서 지어졌다. 전부 다르다. 왜냐하면 아담이 하나님의 대리자로 역사를 하나님과 함께 동행한다. 1장은 전부 하나님 혼자 하셨다. 사람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는데 2장은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사람이 해야 되고 사람이 수고하지 않으면 땅은 채소를 내지 않는다. 완전히 사람의 이야기로 집중되어 있다. 이런 차이점들이 있다. 그런 것을 비교하지 않고 해석해 버리니까 에덴은 영원한 이상향처럼 해석하는데 에덴은 역사의 출발점일 뿐 영원한 이상형은 아니다. 인류가 도달할 목표는 부활하신 예수 안에 있는 것이고 이제 교회는 그 영원한 안식에 참여했기 때문에 영원한 보좌가 우리에게 열렸다. 누군가?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원한 선택이 이제 나타났다. 이제 교회를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땅에 에덴 이야기가 아니라 창세전에 아버지 안에 있었던 영원한 교제를 이야기한다. 땅에 있는 성소에서 사는 이스라엘은 땅에 에덴이 계시됐지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성소는 계시가 안된다. 교회는 부활 자 안에서 하늘 보좌에 있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 안에 영원한 경륜이 계시되고 선택이 이제 나타나 있다. 만일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없으면 사람은 땅에 에덴 이야기밖에 못한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삶의 터전을 설명한 것이지 하늘에 속한 교회를 설명하는 터전은 아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땅에 에덴도 하늘에 영원한 성소로 바꾸어져 해석된다. 완성이 아니면 이전 것은 벗겨지지 않는다. 예수의 부활이 없으면 인류는 영원한 휘장밖에 있다.


1장은 6일 동안 지었는데 2장은 하루에 지은 것 같다. 날짜 이야기가 없다. 1장은 7일이 근본 구조다. 그런데 2장은 그런 날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아담이 주인이다 는 이야기만 있지 다른 이야기는 없다. 이제 이런 차이점 때문에 엘로힘 문서 또 여호와 문서 해 가지고 자유 주의자들이 이야기를 한다. 창조에 대한 신화가 여러 계통을 따라 제사장 계통에서 이어 내려온 창조 기사가 있고 여러 기사가 있는데 후대에 편집해서 짜 맞추어서 나온 것이다. 이것이 자유주의 자들 이야기다. 그런데 하나님이 얼마나 지혜가 없으면 틀린 이야기를 맞춰 놓고 하나님의 말씀이다. 일점일획 어김없다 그렇게 말씀하시겠는가 ? 그것이 아니라 1장과 2장이 다르다. 1장은 우주적인 성소 개념이고 2장은 이제는 땅에 에덴에서 장자인 아담과 함께 하는 역사를 열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본문을 해석해야 되지 창조한 사실을 다시 재구성하려고 읽으면 못 읽는다.

 

우리는 본문대로 창조를 다시 구성하지 이것을 섞어 놓고 재구성을 못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 행적도 복음서 자체대로 사실이지 사복음을 종합시켜서 하자 말자 복음서의 의미는 없어져 버린다. 우리는 기록된 문서 그것을 교회의 영원한 기업으로 받았다. 문장을 해석해야 한다. 오늘은 하나님의 이름의 다른 점과 가지고 설명을 했다. 그러니까 2장은 몇 번해야 될 것이다. 그 차이점들을 대비시키면서 해야 되고 이제 4장까지만 나가면 이제 앞부분이 조정이 될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 믿으시오 그렇지 않고 예수님 믿으시오 그런다. 전도도 그렇게 하고 지금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 그렇게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교회 그런다. 구약 때는 여호와의 교회였다. 지금은 하나님의 교회 그렇게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그런다. 그리고 주 하나님 그렇지 않고 주 예수 거기다 강조를 자꾸 둔다. 예수는 주님이시다. 그것이 교회의 구원이다. 그래서 삼위일체론이 구원의 근본이다.

 

창세기 개요 강해 2장 : 생명과 언약 역사의 시작-2


오늘은 두 주간의 주보를 공부해야 되기 때문에 성경 읽는 것을 생략하고 주보를 읽으면서 강론하도록 하겠다. 창2장은 생명과 언약 역사의 시작을 가르친다. 그런데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의 대리자 사람과 에덴에서 함께 하신 생명과 언약 역사다. 첫 시간에는 1-3절까지 안식일에 대한 문제를 강론했다. 오늘은 두 번 째 단락 4-17절 에덴에서 생명 언약에 대한 부분을 강론하도록 하겠다.

 

창세기는 열 개의 족보로 구성되어 있음을 잘 안다. 그런데 족보의 이름에 속한 역사를 기록한 후에 거기에 속한 후손을 전체 기록하고 이어서 그것을 상속한 장자의 이름으로 새로운 족보를 시작하는 것이 창세기 기록 형식이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역사를 쭉 기록하고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들을 마지막에 후처에서 낳은 아들 하갈에게서 낳은 아들 사라에게서 낳은 아들 이렇게 아들들을 이야기하고 그리고 나서 이삭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장자 이삭으로부터 새로운 족보는 시작한다. 실제적으로 아브라함의 생애의 마지막 부분에서 자세히 기록된 것은 이삭이 아니고 실은 다른 아들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래도 아브라함이 자기 모든 소유를 이삭에게 주었다. 이삭이 상속자다 하는 문제를 강조하고 그리고 나서 상속받은 이삭의 역사를 다시 기록하고 그 다음 이삭 역사를 쭉 기록하고 나서 마지막에 이삭이 낳은 두 아들 에서와 그리고 야곱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는데 에서에 대한 족보를 더 전면에 기록하고 그리고 나서 야곱의 약전은 이러하니라. 야곱으로 들어간다. 그것이 창세기 전체적인 구조다. 기록한 형식이다.

 

1장과 2장도 그런 족보 형식이다. 왜냐하면 2장 4절에 보면 천지 창조의 대략은 이러하니라. 그렇게 시작하고 있다. 천지 창조의 대략은 이러하니라. 해서 족보를 시작하고 있다. 그러면 앞에 있는 1장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만물에 대해서 기록하면 2장은 만물의 장자인 아담과 그리고 세상에 중심 처소인 에덴에서 역사를 다시 기록한다. 그러니까 2장은 만물 중에 장자인 아담에 대한 이야기다. 창세기 기록 형식에 맞추어 보면 그렇다 그 말이다.


1장과 2장은 다 같이 창조를 기록하지만 창세기의 족보 형식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의 성소인 천지 만물과 만물 중 왕자인 사람과 그의 거처인 에덴의 관계다. 그것이 1장과 2장의 관계다. 왜냐하면 창세기의 기록 구조를 보면 아브라함의 역사를 쭉 기록하고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들을 전체로 기록하고 그리고 그 약속의 상속자인 이삭을 중심 해서 새로운 역사를 기록하고 또 이삭의 역사를 쭉 기록하고 또 이삭이 낳은 아들들을 한꺼번에 기록하고 그리고 그 상속자인 야곱을 기록하는 그런 구조에 맞추어 봤을 때 1장과 2 장은 똑 같이 하나님이 지으셨다. 창조 이야기인데도 1장은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에 대한 이야기고 2장은 하나님이 지으신 아담과 에덴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2장은 1장에 대해서 장자의 역사를 기록한 것과 같다.


이러한 관계는 두 기사의 형식과 내용에 차이점에서 계속 나타난다. 1장과 2장의 차이점들을 대략 보면 이런 여러 비교 점들을 알 수가 있다. 강론은 이런 비교 점들을 대조시키면서 강론하면 1장과 2장의 의미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그런 차이점이 있다. 1장은 전부 하나님 그렇게 되어 있다. 그리고 2장은 여호와로 그렇게 되어 있다. 2장4절부터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되어 있다. 그리고 1장은 7일 동안 창조했다 이런 날짜를 계산한 것이 있는데 2장은 그런 날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아담의 직무를 따라 지었다. 그런 이야기밖에 없다. 그 다음 창조의 범위를 보면 1장은 우주적인 창조이면 2장은 아담과 에덴을 중심한 창조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창조된 상태를 보면 1장은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런 말이 있고 그렇지 않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 그런데 2장은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런 말보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땅에는 비를 내리지 않고 경작할 사람이 없으므로 밭에는 채소가 없고 전부 이런 부족한데서 완전하게 지어 나간 그런 이야기만 있다. 그리고 지으신 방법을 봐도 1장은 하나님의 말씀하시매 그대도 되니라 말씀의 창조 그대로 되니라. 하는 말이 반복적인 표현법인데 2장은 말씀하시매 그대로 되었더라 그런 말씀이 아니고 그것을 지으신 구체적인 재료들을 언급한다. 사람은 흙으로 짓고 그 다음 하나님이 생기를 호흡하니까 산 영이 되었고 또 하와는 갈비대로 짓고 살을 채워 넣었다. 그렇게 해서 뼈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 되었다. 그리고 짐승을 지을 때도 1장은 땅은 내라 이렇게 말씀하시매 되었는데 2장은 보니까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짐승을 짓고 이렇게 재료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언급에서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는데 남자와 여자로 지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남자와 여자 사람으로 막 한꺼번에 언급을 하는데 2장에서는 형상으로 지었다 그런 말은 없고 대리 경작자를 지었는데 아담을 지으시고 그리고 돕는 배필로 여자를 지었다. 전반부는 아담을 짓고 에덴에 두신 이야기 후반부는 그 배필로 하와를 짓는 이야기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도록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한꺼번에 지은 것으로 되어 있지를 않다. 그리고 주신 복도 보면 1장에서는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이런 말로 되어 있다. 이것은 짐승에 대해서도 충만 하라 그런 말로 되어 있다. 그런데 2장에서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이런 말은 없고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을 이루라. 그렇게 되어 있고 정복하라 그런 말보다도 에덴을 다스리며 지키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에덴의 파수꾼 정도로 이야기가 되어 있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번성해서 가득 하라 그런 말보다도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라 이렇게 한 몸으로 인류가 번성되도록 되어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그런 말보다도 뼈중에 뼈요 살 중에 살로 아내를 짓고 이어서 말하기를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을 이루라 한 몸에 연합의 번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1장에서는 하나님이 이름을 지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에 이름을 주셨다. 낮이라 했고 밤이라 했고 또 해와 달을 두시고 이런 이름을 주셨는데 2장에서는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는가 보시려고 하나님이 지으신 짐승들을 아담 앞에 끌고 왔다고 되어 있다. 아담이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1장에서는 지으신 각각에게 먹을 것을 주셨다 그렇게 되어 있다. 1장 제일 끝에 보면 먹을 이야기를 한꺼번에 다시 이야기를 한다. 사람에게는 채소를 주고 짐승에게는 풀을 주고 이렇게 다시 언급하고 있다.

 

짐승에게 풀을 주는 이야기는 이미 앞에서 언급하고 있는데도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신 그 이야기에서 짐승에게 주는 이야기 그런 것을 한꺼번에 언급을 한다. 각각 지으신 것에게 먹을 것을 주셨는데 2장에서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셨다는 이야기만 있고 짐승에게 먹을 것을 주셨다는 그런 이야기는 전혀 없다. 에덴에 먹을 것이 많은데 이런 것만 먹어라 그런 이야기만 있다.

 

또 1장에서는 땅에 모든 식물 풀과 채소 과목 이런 것들이 전부 먹을 것이다. 그런데 2장에서는 먹을 것이 등급이 있다. 먹기에 좋고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들이 있고 그리고 에덴 중앙에는 생명 나무가 있고 또 먹지 말라는 금지령까지 있다. 그러니까 먹을 것에 각종 등급이 있다.

 

그 다음에는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홀로 세상을 지으셨고 거기 생명이 가득한 세계다. 땅도 하늘도 바다도 가득하고 다 가득하다 그렇게 되어 있는데 2장에서는 세계는 하나님이 경작할 세계고 그리고 가득한 것이 아니라 에덴에서 강이 흘러서 땅 사방을 흐르고 적신다. 그리고 사람에게 직무를 주셔서 바로 생명의 언약을 세우셨다. 이런 직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다. 이처럼 생명이 가득한 것이 아니라 생명이 에덴의 중심에서 흘러 넘치고 땅 사방으로 흘러 나가고 그리고 사람에게 생명이 완벽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먹으면 죽으리라 이런 약속 안에서 생명이 진행되도록 되어 있다.

 

이런 차이점들을 가지고 있다. 이런 차이점들은 무엇을 말하냐면 아까 설명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 그것의 장자인 아담 그런 관계다. 그러면 이 차이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어떤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렀을 때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니라. 아브라함에게 속한 모든 자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다. 그런데도 그 약속은 약속을 따라 난 이삭 그 상속자에게서 진행이 된다. 다른 아들들도 다 아브라함의 복을 주어서 떠나 보내는데 심지어 롯도 복을 받는다. 그런데 그 상속은 이삭에게 있다. 또 이삭이 받은 약속은 에서까지라도 자기 아버지의 땅에서 아들을 낳고 번성했고 세일 산에 가서 번성되어 있다. 그래도 그것의 상속자는 야곱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속한 자들이 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아브라함의 상속자인 이삭에게서 하나님이 약속되고 그 약속이 성취됐을 때만 실은 아브라함에게 속한 모든 자들이 복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만일에 이삭에게 그 약속이 성취되기 전에는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속한 자로 복은 받아도 이삭에게 상속된 복을 제대로 받지는 않는다. 복의 근원이 될지니라 해서 모든 사람이 거기 참여되어 있어도 실은 이삭을 통해서 그 약속이 진행되도록 까지는 이삭을 통한 약속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그들은 여전히 이삭과 다른 아들로 구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구분하는 방법이다. 그러니까 창1장과 2장의 내용에서는 2장에 있는 약속이 완성되기 전에는 그런 의미로 1장은 하나님이 지은 세계가 성소이면서도 2장에서 진행된 약속이 완성되기 전에는 그 완전한 것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에덴과 세상은 구분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구약 적인 안목으로 읽으라고 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성취되었을 때만 이스라엘과 이방의 간격은 없어지고 제사장의 백성의 간격은 없어질 것이다. 이스라엘이 장자고 그 중에 장자가 대제사장이어도 여전히 대제사장이 있는 동안에는 분명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인데도 대제사장이 누리는 축복의 빛은 누리지 못한다. 그러나 대제사장에게 약속한 그 약속이 이루어지면 이제는 이스라엘도 그 복을 누리고 이방도 누리게 될 것이다. 그것이 그 간격이 제거되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창1장의 우주적인 성소와 2장에 에덴 성소는 에덴 성소에서 진행된 약속이 완성됐을 때 이제는 에덴과 세상이 구분이 없는 온전한 역사가 완성될 것을 그렇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먼저 해석하도록 하겠다. 차이점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이름인데 이름은 구약에서는 단순한 부호가 아니라 실제 그 자체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면 곧 그것은 이름의 소유자인 하나님의 인격적으로 거기 계신 것이고 하나님이 거기 계신 것은 그들은 소유하고 통치하는 의미다. 그냥 하나님이 존재 적으로 나 여기 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거기 계시면 하나님이 그 이름 중에 나타내시면 하나님이 거기 계시고 바로 그 이름을 나타낸바 된 대상들은 하나님의 소유요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그런 개념이다. 그런데 1장 천지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은 엘로힘이다. 이 이름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명칭이다. 그것은 남성 복수형이 힘인데 복수형 엘로힘은 장엄의 복수이며 그의 초월성과 능력의 충만함을 지시한다. 그는 경배와 경외의 대상이시다.

 

여기 엘로힘의 복수형을 가지고 그것이 하나님 안에 어떤 인격적인 복수 즉 삼위 일체성을 나타낸다고 해석하는 것은 구약 자체에서는 나타난 방식이 아니고 창1장에서 분명히 나타났을 때 엘로힘은 그가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다. 그가 말씀하시매 모든 것이 그 말씀대로 이루어졌다. 그가 말씀하시매 그 모든 그 말씀대로 이루었고 그분께서 모든 만물을 충만하게 지으셨다. 이것이 엘로힘이 말하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장엄의 복수 신성의 충만함의 복수 이런 표현법이지 삼위일체를 말하는 그런 내용은 창1장에서 직접 거론해서는 옳지 않다. 그것이 아무리 남성 복수형이라 할지라도 창1장에서 말하는 내용이 엘로힘의 내용이다. 왜 엘로힘은 창1장에서 나타난 하나님이니까 그것은 충만한 권세와 능력 그의 초월성 이런 것이 1장에 나타난 문제이기 때문에 그는 경외할 분이고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이시다. 특별히 안식일에 사람과 함께 기뻐하신 사실에서 그는 경배 받으실 하나님이시다 .그는 창조주이신 데 그는 초월 자요 권세 자요 그리고 모든 만물에 충만한 생명의 능력을 주신 분이다. 그렇게 1장은 말씀하고 있다.


이 신성의 충만함은 어디서 나타났는가? 이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하나님의 아들 그분에게서 온전한 충만함이 드러났다. 그는 만물을 충만케 하기 위해서 땅 아래 곳으로 내려오셨고 그리고 모든 하늘 위에 오르셨다. 그렇게 해서 그는 아래와 모든 위를 통치하시는 분이고 다른 표현에서는 그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주이시다. 모든 세계가 그의 권세에 복종한다. 바로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초월하심과 전능하심이 완벽하게 드러났다.

 

2장에서 하나님은 누구냐면 아담에게 생기를 호흡하시고 에덴을 거처로 주시고 생명의 언약을 명하셨는데 그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시다. 그러니까 여호와는 누구냐? 했을 때 2장의 내용이 여호와다. 그분은 창조와 언약의 하나님이다. 그는 사람을 지으셨고 그리고 생명의 약속을 주셨다. 사람을 지을 때도 1장은 능력으로 지어서 권세를 나타냈는데 2장은 그것이 아니라 생기를 호흡해서 사람으로 산 생명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생기의 호흡하심이 사람의 생명이다. 이처럼 친근한 생명의 연합으로 지으셨다. 여호와는 창조와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그러한 하나님 되심을 역사에서 펼쳐 내신 분이다.


왜냐하면 창2장을 보면 부족한데서 완벽 한데로 진행이 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는 역사의 시작점이고 역사에서 여호와 되심을 펼쳐 보일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땅의 피조물의 머리인 아담에게 생명의 언약을 주시고 그와 함께 역사를 경영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이 존귀한 이름을 이스라엘의 구원에서 나타내서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고 동행하셨다. 출3장에 나는 여호와로라. 그렇게 드디어 나타내셨다. 이 여호와가 에덴에서 아담에게 생기를 호흡하시고 함께 하셨던 분인데 이분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다. 하나님의 생기를 호흡한 것 같이 이스라엘을 살리셨다.

 

바로 이스라엘의 구원에서 그리고 그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성소로 성별한 일에서 자신을 여호와로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이 언약의 신실하심을 그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온전히 성취하셨다. 자기 백성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 하사 주가 되신 그리스도 예수는 교회를 그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그들과 영원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소유다. 그런 의미로 신약에서 예수를 주라고 그렇게 칭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를 구약에서는 주로 그렇게 대명사로 불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이기 때문에 부르지를 못했다. 그것을 70인 번역 성경에서 주로 번역했고 그리고 사도들은 예수님께 그 칭호를 그대로 붙였다. 예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셨다. 시내 산 보다 더 큰 영광으로 바울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마태복음 끝에서 말씀하시기를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누가 구약 때는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생명의 언약을 주시고 그의 생기를 호흡해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리고 생명의 약속 안에서 동행한 이 은혜의 일을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의 구원과 가나안 땅 성소를 주심에서 나타내셨고 그리고 이 은혜스러운 이름을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교회에 나타내셨다. 교회를 그의 형상으로 지으셨다. 그가 친히 그이 생기를 호흡해서 교회를 지으셨다. 그리고 영원히 함께 하신다. 이제는 자기와 함께 하는 생명의 교제로 함께 하신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한 것처럼 친히 아들과 함께 하는 생명으로 함께 하신다. 그렇게 하고 교회는 그의 몸으로 온전히 지으신 것이다.


또 다른 차이점은 창조의 구조이다. 1장은 7일 구조고 2장은 아담의 직무 적인 구조다. 1장에 천지와 만물은 연속되는 7일의 구조에서 창조하셨다. 창조하시자 마자 저녁이고 또 아침이다 또 첫째 날이다 이런 말로 반복해서 단위를 나누고 있다. 그리고 제 7일이 되니까 모든 것을 마쳤다고 7일을 축제의 날로 구별하셨다. 만물 중 하나님의 대리자요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이스라엘의 삶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따라 일하면서 안식의 완성을 소망하는 것이다. 바로 이 삶의 의미를 천지 창조에서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하나님과 함께 기뻐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안식일 축제의 날에는 하나님의 성소에서 열두 덩어리 떡을 하나님 앞에 진설해 드리고 그리고 더욱 큰 번제를 드리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신명기에서는 이런 하나님의 일하심에 구조로 안식일을 말하지 않고 애굽의 구원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안식을 말씀하고 있다. 출애굽기는 언약 체결이다. 언약 백성의 동행의 문제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따라 일한 것이다. 그것이 안식일 구조에도 나타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7일 창조를 따라 하나님의 대리자로 일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명기는 가나안 땅의 안식 그들이 죽음의 권세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부요함을 누린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의 삶을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공급하고 누리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들을 내가 애굽에서 건져냈으니 너희 종들에게도 자유를 주어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똑 같은 십계명인데 어떤 십계명이 맞냐 그렇게 하면 안되고 출애굽기는 출애굽기 적인 성격이 있고 신명기는 신명기적인 성격이 있는 것이다. 물로 우리가 안대로 어느 것이 먼저 기록되었냐 하면 출애굽기다. 그러면 신명기에 나오는 십계명은 틀린 것이냐? 틀린 것이 아니라 이제 언약 체결 이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언약 백성으로 구별된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부요함을 누렸을 때 이제 하나님의 풍성함을 그들의 삶에서 나타내야 하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 축제의 날을 이제는 비천한 종들에게도 너희가 얻은 자유를 주어라 그렇게 말함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삶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담이 만물의 장자인 것처럼 그들은 열국 중에 장자요 만물을 장자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안식하는 백성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의 대행 자로 일하면서 그 완성된 안식을 소망하면서 사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질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얼굴에서 비치는 하나님을 아는 영광의 빛을 세상에 비치고 하늘에 속한 안식의 세계를 완성하셨다. 처음에 빛이 있으라 빛이 있었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첫날에 일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새로운 질서를 가져온 첫날은 그런 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얼굴에 비치는 그 영광의 빛을 세상에 비쳤다. 이것은 창조의 빛이 아니라 그는 분명히 우리와 같은 형제이면서도 친히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하셨던 영광의 분이시다. 그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 영광의 빛가운데서 그 영광의 빛에 속한 새로운 세계를 지으신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늘에 속한 안식의 세계를 완성하셨다. 교회는 이런 안식을 누리며 역사의 종말을 소망하며 그리스도의 상에서 그와 함께 먹고 마시며 일한다. 이제 우리들은 땅에 있는 밭에 채소를 먹고 그런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늘에 속한 것을 먹는다. 왜냐하면 주님의 살과 피에 참여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속한 것을 먹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속한 것을 먹었지만 이제 우리들은 주님의 피와 주님의 피에 참여하는 새로운 양식을 얻었고 새로운 빛가운데 살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는 새 창조의 시작이고 그는 새 창조의 머리다. 부활하신 예수가 새 창조의 새로운 질서다. 이제 우리들은 그 영광의 날을 소망하면서 그 완성을 소망하면서 먹고 마신다. 구약 때는 아직 완성되지 안했다. 왜냐하면 6일과 다른 날을 달랐다. 제 7일은 달랐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그렇지 않다. 첫째 날을 축제의 날로 모여도 이제는 첫날은 거룩하고 다른 날은 거룩하지 않고 그런 구별이 없다. 또 일하는 것은 거룩하지 않고 쉬는 것은 거룩하고 그런 구별이 구약처럼 있지를 않다. 우리들은 먹든지 마시든지 뭐든지 주의 이름을 위해서 일하고 다 주님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그런 생명의 교제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그런 구별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은 첫날을 축제의 날로 모든 삶을 성별 해서 살아야 한다.


이제 우리들은 당장 주일날 일하는 것부터 거꾸로 끌어들인다. 물론 여러분이 일할 수 있다. 구약 때처럼 하나님께서 그 날에 주신 것을 위해서 모든 것의 수고를 놓고 강제적으로 쉬게 했다. 어떤 안식하는 날에 일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셨다. 특별히 안식일은 모든 날의 왕관이고 머리다. 그렇게 해서 그날에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도록 강제적으로 하였다. 그날에 일하면 죽고 불만 피워도 하나님이 심판하도록 되어 있다. 지금 우리들은 그런 상황 가운데 있지는 않다. 구약 때는 성소에서 먹는 것과 성소 밖에서 먹는 것이 다른 것처럼 엿새와 제 7일을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먹는 것이 같은 것인 것처럼 모든 날이 같다. 그런 의미로 구약의 안식일은 끝난 것이다.

 

하나님의 성소 제도 옛 제도가 끝나면 옛 모든 질서들이 끝난 것이다. 물론 우리들이 해석하기를 천지 창조는 창조 질서이기 때문에 그것은 율법이 끝난 뒤로도 영원하다고 그런 말을 끌어 들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는 새로운 창조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스라엘은 옛 경륜에서는 창조된 새 백성이다. 이스라엘을 위해서 창조를 열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새로운 창조가 나타났기 때문에 교회는 하늘에 속한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러니까 창조 질서가 어떻고 율법이 어떻고 창조 질서 그 다음 율법 질서 이런 식으로 해석해서는 성경이 잘 맞아 들어가지를 않는다.

 

지금은 여러분은 구약의 규범에 매어 사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여러분을 맘대로 일해도 좋고 당장 그런 방식으로 끌로 들어온 것은 부활의 새로운 질서에는 맞지 않다. 여러분은 먹을 때도 주님을 위해서 먹어야 된다. 한마디로 여러분이 텔레비를 봐도 주님 때문에 봐야 한다. 말하자면 예수님 섬기는 것은 너무 너무 피곤하고 스트레스 쌓이니까 이제 코메디좀 보면서 편안히 웃는 시간좀 가져 보자해서 우리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굉장히 피곤하고 긴장하고 거룩하고 그리고 코메디 보는 것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맘대로 한 번 웃어 보고 농담 할 때는 그런 식으로 여러분의 삶을 이중화시켜서는 안된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이 분명히 하나님과 함께 하고 내가 이것을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한다 하는 확신 가운데서 움직여 줘야 한다.

 

만일에 그런 것이 없으면 그런 것은 이방인으로 사는 것이다. 유대인들까지라도 그런 이중 구조는 가지고 있지는 않는다. 이제는 부활의 새로운 질서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여러분이 주님과 함께 성소에서 안식일에 제사장이 일한 것처럼 더욱 활동적으로 일할 수가 있는데 그 활동적인 것은 이제는 새로운 시대에 속한 백성으로 일함이지 그냥 이전에 일하던 그런 데서 벗어났다. 그런 식으로 맘대로 일하라 그런 말이 아니다. 물로 여러분이 다른 날도 일해야 되지만 여러분이 주의 상에 모이는 날에 오늘도 일하지 않으면 굶어 죽겠다. 그런 방식으로 하는 것은 새로운 질서에 맞는 것이 아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일날 그렇게 보내면 다른 날 일하는 것도 여러분은 생명 되신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심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은 세상에 매여서 안죽을려고 일하는 것뿐이지 하늘에 속한 새 생명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을 해석하고 조절해야 한다.

 

그런데 그전에 내가 개건 교회 있을 때는 일기 예보도 보지 못했다. 그것도 내일을 미리 염려한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구약에다 한 수를 더한 것이다. 또 말하자면 무디 같은 사람들은 주일날 신문도 보지 안았다. 그래서 이제 뉴스를 안보는 것이나 신문을 안보는 것이나 똑같다. 그래 가지고 우리는 그것도 못 들었다.

 

그전에도 예를 들었지만 주일날 불이 꺼지면 난처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일날 물건 사지 않는 것만 배웠다. 돈 안 쓰는 것만 배워서 번개탄을 사러 가지 못했다. 그리고 의자 부서진 것 칼로 쪼개서 연탄 불 피우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일을 더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계율에 매였다. 그러니까 성경을 모르면 얼마나 어리석은가 모른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그 헛고생을 죽어라고 한 것인데 성경은 몰라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래도 그 교단은 어리석게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이렇게 한다는 의식은 있다. 너 왜 이렇게 하냐 성경은 잘못 해석했어도 성경이 이러니까 이런다고 확신을 가지고 움직이니까 양심이 더러운 것은 아니다. 어리석었다 뿐이지 그런데 이 쪽 교단에 와 보니까 자기 마음대로 살아 놓고 은혜요 복음이다.

 

왜 그렇게 하는지 모르고 그냥 자기 좋을 대로 살아 놓고 복음이고 은혜더라고요. 그리고 성경이 이렇다고 그러면 그냥 율법 주의된다. 얽어맨다고 그러니까 자기 마음대로 산 것이 은혜다.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주일날 무엇을 하냐 마냐 하는 것은 구약에 계율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고 부활하신 주님과 새로운 질서 가운데서 여러분의 삶이 활동 있게 움직여 줘야 한다. 그렇게 했을 때 여러분이 다른 날 일한 것은 거룩하지 않고 주일날 쉬는 것은 거룩 하라는 의미에서 문제가 아니라 주일날 우리가 부활의 축제의 상에 모여서 그리고 주님의 나타남을 소망하고 주님의 몸을 이루고 주님의 몸으로 서로를 봉사하고 또 주님의 몸을 이룰 수 있도록 더욱 구제하고 헌신하고 왜 주님께서 몸을 주셨으니까 그런 일에 우리가 더욱 축제의 날로 모이기 때문에 그 날에 우리가 주님의 상에 앉는 것이 너무 허전하고 의미가 없는 것이고 그리고 오늘 가서 일해야 살겠다 그런 식으로 일하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 주님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죽음을 이긴 백성으로 사는 방식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이 조절을 해야 한다.


이제 그 다음에 어떤 사람은 일하고 어떤 사람은 일 안하기도 한다. 그런 것을 불공평하다고 이야기하면 안된다. 구약 때는 그런 것이 획일화 돼지만 신약 때는 그런 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참으로 주님의 교회를 위하는지 주님의 교회를 부끄럽게 하는 것인지 그냥 대충 살다가 주일날 할 수 없이 일하고 다른 것은 다 예비를 한다. 그런데 주일날은 예비를 못하는가? 이방인을 자기 주관대로 주일날 하는데 왜 우리들은 주의 상에 앉고 주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섬기는 일에 더구나 직무 자들이 그런 일에 해석을 하지 않고 우리들이 살수가 있는 것인가? 여러분의 사고로서는 합법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런 것은 자기 양심을 잘 생각을 해 봐야 되는 것이다.

 

부부끼리도 그렇다. 듣고 보니까 남편 말이 합법 하기는 한데 대단히 섭섭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움직이기 때문에 그렇다. 들어보니까 경우는 그럴 듯 한데 대단히 섭섭하다 그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합법적으로 여러분을 변론할 란가 몰라도 여러분이 예비해야 되고 주님의 교회로 부끄럽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것이 창조의 7일 구조가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우주적인 성소에서 이제는 새 시대에 속한 새 창조의 빛가운데서 주님의 몸에 참여하고 주님의 몸을 이루는 일에 우리가 주님의 식탁에 앉아 그것을 먹고 마심에서 주의 대리자로 일해야 한다.

 

2장에서는 날에 언급은 없고 사람의 직무를 중심한 창조다. 땅에 경작자로 아담을 지으시고 아담의 거처와 일터로 에덴에 동산을 지으시고 그리고 아담의 돕는 배필로 하와를 지으시고 각종 새와 짐승도 아담이 이름을 짓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그에게 이끌어 가셨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을 언약 역사에 머리로 지으신 것이다. 아담에게 생기를 호흡 하사 산 생명으로 지으시고 그를 생명의 근원인 에덴에 두심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하는 생명의 역사를 시작하셨다. 아담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기의 호흡하심이요 아담의 거처는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동산이다.

 

구약이다. 아브라함의 상속자인 언약의 씨 이삭으로 말미암아 출생된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의 삶과 직무는 그들의 생명의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소 가나안을 지키며 다스리는 것이다. 살려주는 영이 되사 그의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주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이 생명의 역사를 완성하셨다. 그리스도께서 그 생명의 기운을 제자들에게 호흡 하사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제자들에게 죄 사함의 권세를 주어 세상에 보내셨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사는 그의 몸이며 그이 지체로서 그의 사역에 동역 하는 하늘에 속한 권세 있는 새로운 인류다. 이처럼 에덴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으셨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지어졌는가? 아브라함은 죽었는데 하나님께서 다 죽은 몸에서 이삭을 출생시켰다. 마치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호흡 하사 산 생명이 되게 하신 것처럼 그렇게 지었다. 그런데 아담의 죽은 몸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 하는 저주된 몸이다. 그냥 땅으로 지어졌다는 말이 아니라 죄 때문에 죽음에 갇힌 몸이다.

 

하나님께서 거기 생명의 약속을 일으키셔서 이삭을 출생시켰고 이스라엘은 이삭으로 말미암아 출생된 새로운 인류다 새로운 기운을 호흡한 그런 인류다. 가나안 땅은 에덴과 같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소로 지키고 관리하고 그리고 그곳에서 흐르는 강물이 온 땅을 흐른 것처럼 여호와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 생수의 약속이 온 땅에 흘러 넘치도록 온 땅을 성소 가나안화 시키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의미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에서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가나안 땅의 삶을 위해서 에덴을 열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약속이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에서 완성됐는데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는데 그분은 친히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해지리라.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처럼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라. 부활하신 주님은 새 창조주이시다. 요한 복음은 처음부터 창조주로서 말씀하고 있는데 그분이 부활하셔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처럼 죄 사람의 권세를 가진 새로운 인류로 그들을 호흡하셔서 보내셨다. 이제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의 호흡으로 사는 하늘에 속한 새로운 인류다.

 

    이제는 하늘에 속한 죄 사람의 권세를 베푸는 새로운 인류다. 이제 구약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했으면 이제 아브라함의 후손 이삭으로 출생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의 하나님의 성소를 봉사하고 거기서 흘러 넘치는 복으로 세상을 봉사하는 것처럼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의 호흡하심으로 살고 이제는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 넘치는 생수의 강이 온 땅에 흘러 넘치도록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고 주님과 동행하는 백성으로 새롭게 지어진 것이다. 그 이야기를 지금 창2장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 개혁하는 마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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