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의 계시현상의 실체적 해석학
이러한 박봉랑 교수의 해석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본회퍼 신학에 대한 해석학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본회퍼가 그리스도론적으로 안내된(christologisch orientiertes) 말씀의 신학 내지 계시의 신학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학자들마다 공통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봉랑 교수의 본회퍼 해석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정당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본회퍼가 하나님의 말씀의 세가지 형태, 더 자세히 말하면 '설교'와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 속에는 "그리스도의 인격(Christusperson)"이 계시되었다고 봄으로서 말씀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본회퍼에게 있어서 존재(ist)는 단지 "있음(es gibt)"이 아니라 "행위(in Akt)" 속에서 인식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격은 행위를 통하여 인식되어지기 때문이다. |
삼위일체의 내용은 기독론을 이해하는 데서도 중심적인 위치에 있다. 그것은 삼위일체론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를 기독론에서도 인식하게 된다는 것, 기독론은 삼위일체론을, 삼위일체론은 기독론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것, 삼위일체론이 기독교 신앙의 구원론과 절대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기독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말이다.
기독론의 핵심은,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 이라는 기독교의 규범적 사고 안에서 찾을 수 있고, 그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과 ‘인자’(사람의 아들)에 대한 말씀에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으로서 예수 안에서 예수의 본질과 두 본성(신성, 인성)에 대한 내용을 명확하게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에 대한 신학적인 질문은 먼저 예수의 본질을 생각하게 된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예수의 본질은 무엇이냐? 그리고 예수의 본질을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본질과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의 질문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질문에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내용, 예수는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신가?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져 있다.
삼위일체론에서 알아보았듯이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예수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동일 본질(동질)이어야 한다. 예수에 본질이 아버지의 본질과 비슷하다, 유사하다, 열등하다 등의 생각은 삼위일체론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된다. 그것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어 버린 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본질과 예수의 본질이 비슷하다, 유사하다, 열등하다 라 는 표현들은 둘이라는 개념 안에서 하나 라는 개념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 라는 하나님에 대한 신비를 받아드리지 않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동질이란 개념 안에는 둘 안에 하나가 있고 하나 안에 둘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 역시 인간의 합리적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질은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 그리고 기독교 교리의 삼위일체론과 구원론에 대한 내용을 표현할 수 있도록 신학적인 근거를 마련해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삼위의 하나님, 하나의 본질’에서 동질에 대한 신학적인 인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사고는 동질에 대한 의미가 기본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에 대한 두 번째 질문은 한 인격체로서 예수 안에서 신성과 인성에 대한 내용이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과 ‘인자’(사람의 아들)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기도 하고 기독론의 핵심적 주제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인격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 한 인격, 두 본성이라는 기독론의 내용도 삼위일체처럼, 인간의 합리적 사고와 언어로 이해하거나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인격과 두 본성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인 언어로 설명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나타내는 것이 되고 만다. 예수의 두 본성에 대해서 우리가 꼭 설명을 해야 한다면, 예수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은 혼합되어져 있거나, 바뀌어져 있거나, 나뉘어져 있거나, 분리되어져 있지 않다 라 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기독론의 핵심은 결국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에 대한 내용에서 찾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 대답은 삼위일체론과 구원론의 요점을 바르게 표현하고 나타낼 수 있을 때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삼위일체의 내용을 바르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고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분을 아버지이신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예수가 우리의 죄를 대속(속죄)하시기 위해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이다. 십자가의 고통에서의 예수는 분명히 혼자였다. 그러나 그때도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함께 하셨다.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은 동질이란 개념과 삼위의 하나님은 항상 함께 하신다는 고백에서 아버지와 예수는 함께 하신 것이다.
예수가 완전한 하나님이라 함은 기독교에서의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 그러면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신앙으로 인식하고 고백한다는 것에 근거한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예수 하나님이 기독교 신앙에서의 고백하는 한 분 하나님에서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라 함은 예수는 죄가 하나도 없는 사람, 죄를 갖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죄를 지은 적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는 죄를 갖고 태어나서 죄 아래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대속’, ‘속죄’ 등의 용어들은 예수와 십자가를 생각하도록 해 준다(마태복음 20장 28절; 로마서 3장 23-25절, 4장 25절, 5장 10-11절, 19절; 고린도 전서 5장 7절; 고린도 후서 5장 21절; 갈라디아서 1장 4절, 3장 13절; 에베소서 1장 7절; 디모데 전서 2장 5-6절; 디도서 2장 14절; 히브리서 10장 1-18절, 13장 12절; 베드로 전서 1장 18-19절; 요한 일서 3장 5절 참조).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살아 나셨다’ 는 고백은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를 상기 시키도록 해 주는 것이다.
인간의 죄와 용서, 구원에 대한 성서의 내용 중, 로마서의 말씀들(3장 10절, 23-24절, 5장 12절, 14-19절 등)은 인류의 죄는 무엇이고, 예수가 왜? 인류의 구주가 되시는가를 설명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그것은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이라는 신학적 사고 안에서 이루어진다.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에 대한 고백은 기독교 신앙에서의 구원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죄를 갖고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가 없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 받을 수가 없다는 것, 구원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죄에 대한 속죄(용서)와 구원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로서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이루어 주신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면서 죄가 없는 완전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것이다. 인류의 죄에 대한 대속으로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장사 되셨다가 살아나신 분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아들이신 예수이다. 그런데 그 예수는 기독교 신앙의 한 분 하나님에서 다른 하나님이 될 수가 없다. 완전한 하나님이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은 동질이라는 개념, 한 인격체로서 예수 안에서 신성과 인성은 혼합되어져 있거나, 바뀌어져 있거나, 나뉘어져 있거나, 분리되어져 있지 않다 라 는 말의 의미, 그리고 삼위일체론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구별되면서 하나 라는 신학적 사고 안에서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를 고백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면 삼위일체론과 구원론의 내용이 바뀌어 지고, 2000여년의 역사 안에서 꾸준히 이어져 왔던 기독교 공동체의 삶에서 이탈하는 것이 된다. 물론 초대교회에서부터 현대교회에 이르기까지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주장했던 소수의 사람들이 있어 왔지만, 그들은 모두 교회 회의들을 통해서 정죄 되어졌고 거부되어졌다. 그것은 현대교회 안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 중에서 어떤 누군가가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에 대해서 의아한 질문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 하신 이후 2000여년의 동안의 교회 역사 안에서 극소수를 제외한 전체의 기독교인이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구주로 믿고 살아 왔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그리고 현대교회 안에 신학(삼위일체론, 기독론)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기도 하다.
삼위일체의 내용은 기독론을 이해하는 데서도 중심적인 위치에 있다. 그것은 삼위일체론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를 기독론에서도 인식하게 된다는 것, 기독론은 삼위일체론을, 삼위일체론은 기독론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것, 삼위일체론이 기독교 신앙의 구원론과 절대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기독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말이다.기독론의 핵심은,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 이라는 기독교의 규범적 사고 안에서 찾을 수 있고, 그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과 ‘인자’(사람의 아들)에 대한 말씀에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으로서 예수 안에서 예수의 본질과 두 본성(신성, 인성)에 대한 내용을 명확하게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에 대한 신학적인 질문은 먼저 예수의 본질을 생각하게 된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예수의 본질은 무엇이냐? 그리고 예수의 본질을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본질과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의 질문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질문에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내용, 예수는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신가?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져 있다.
삼위일체론에서 알아보았듯이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예수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동일 본질(동질)이어야 한다. 예수에 본질이 아버지의 본질과 비슷하다, 유사하다, 열등하다 등의 생각은 삼위일체론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된다. 그것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어 버린 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본질과 예수의 본질이 비슷하다, 유사하다, 열등하다 라 는 표현들은 둘이라는 개념 안에서 하나 라는 개념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 라는 하나님에 대한 신비를 받아드리지 않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동질이란 개념 안에는 둘 안에 하나가 있고 하나 안에 둘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 역시 인간의 합리적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질은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 그리고 기독교 교리의 삼위일체론과 구원론에 대한 내용을 표현할 수 있도록 신학적인 근거를 마련해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삼위의 하나님, 하나의 본질’에서 동질에 대한 신학적인 인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사고는 동질에 대한 의미가 기본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에 대한 두 번째 질문은 한 인격체로서 예수 안에서 신성과 인성에 대한 내용이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과 ‘인자’(사람의 아들)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기도 하고 기독론의 핵심적 주제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인격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 한 인격, 두 본성이라는 기독론의 내용도 삼위일체처럼, 인간의 합리적 사고와 언어로 이해하거나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인격과 두 본성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인 언어로 설명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나타내는 것이 되고 만다. 예수의 두 본성에 대해서 우리가 꼭 설명을 해야 한다면, 예수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은 혼합되어져 있거나, 바뀌어져 있거나, 나뉘어져 있거나, 분리되어져 있지 않다 라 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기독론의 핵심은 결국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에 대한 내용에서 찾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 대답은 삼위일체론과 구원론의 요점을 바르게 표현하고 나타낼 수 있을 때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삼위일체의 내용을 바르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고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분을 아버지이신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예수가 우리의 죄를 대속(속죄)하시기 위해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이다. 십자가의 고통에서의 예수는 분명히 혼자였다. 그러나 그때도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함께 하셨다.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은 동질이란 개념과 삼위의 하나님은 항상 함께 하신다는 고백에서 아버지와 예수는 함께 하신 것이다.
예수가 완전한 하나님이라 함은 기독교에서의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 그러면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신앙으로 인식하고 고백한다는 것에 근거한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예수 하나님이 기독교 신앙에서의 고백하는 한 분 하나님에서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라 함은 예수는 죄가 하나도 없는 사람, 죄를 갖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죄를 지은 적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는 죄를 갖고 태어나서 죄 아래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대속’, ‘속죄’ 등의 용어들은 예수와 십자가를 생각하도록 해 준다(마태복음 20장 28절; 로마서 3장 23-25절, 4장 25절, 5장 10-11절, 19절; 고린도 전서 5장 7절; 고린도 후서 5장 21절; 갈라디아서 1장 4절, 3장 13절; 에베소서 1장 7절; 디모데 전서 2장 5-6절; 디도서 2장 14절; 히브리서 10장 1-18절, 13장 12절; 베드로 전서 1장 18-19절; 요한 일서 3장 5절 참조).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살아 나셨다’ 는 고백은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를 상기 시키도록 해 주는 것이다.
인간의 죄와 용서, 구원에 대한 성서의 내용 중, 로마서의 말씀들(3장 10절, 23-24절, 5장 12절, 14-19절 등)은 인류의 죄는 무엇이고, 예수가 왜? 인류의 구주가 되시는가를 설명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그것은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이라는 신학적 사고 안에서 이루어진다.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에 대한 고백은 기독교 신앙에서의 구원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죄를 갖고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가 없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 받을 수가 없다는 것, 구원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죄에 대한 속죄(용서)와 구원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로서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이루어 주신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면서 죄가 없는 완전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것이다. 인류의 죄에 대한 대속으로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장사 되셨다가 살아나신 분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아들이신 예수이다. 그런데 그 예수는 기독교 신앙의 한 분 하나님에서 다른 하나님이 될 수가 없다. 완전한 하나님이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은 동질이라는 개념, 한 인격체로서 예수 안에서 신성과 인성은 혼합되어져 있거나, 바뀌어져 있거나, 나뉘어져 있거나, 분리되어져 있지 않다 라 는 말의 의미, 그리고 삼위일체론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구별되면서 하나 라는 신학적 사고 안에서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를 고백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면 삼위일체론과 구원론의 내용이 바뀌어 지고, 2000여년의 역사 안에서 꾸준히 이어져 왔던 기독교 공동체의 삶에서 이탈하는 것이 된다. 물론 초대교회에서부터 현대교회에 이르기까지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주장했던 소수의 사람들이 있어 왔지만, 그들은 모두 교회 회의들을 통해서 정죄 되어졌고 거부되어졌다. 그것은 현대교회 안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 중에서 어떤 누군가가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에 대해서 의아한 질문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 하신 이후 2000여년의 동안의 교회 역사 안에서 극소수를 제외한 전체의 기독교인이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구주로 믿고 살아 왔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그리고 현대교회 안에 신학(삼위일체론, 기독론)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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