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 그리스도

[스크랩] 본회퍼의기독론, 기독론의 중요성, 조직신학 - (4) 기독론

하나님아들 2012. 7. 25. 15:09

본회퍼의 계시현상의 실체적 해석학
(D. Bonhoeffers Hypostatische Hermeneutik der Offenbarungsph nomen)
김 재 진
(Dr. theol. 전 계명대학교 교수, 현 케리그마 신학연구원장)
출처: 케리그마 신학연구원(http://www.kerygma.or.kr)
I. 하나님 말씀의 원문(Urtext)인 예수 그리스도
디트리히 본회퍼(D. Bonhoeffer, 1906-1945) 신학의 특성은 해석학적 전망에 따라서 학자마다 다르게 강조되고 있다. 박봉랑 교수는 본회퍼 신학의 특성을 "基督敎의 非宗敎化"라고 특징지어 말한다. 그러나 본회퍼 신학의 특성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그 강조점에 있어서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박재순 박사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본회퍼의 신학을 하밀톤(W. Hamilton)과 필립스(John. A. Phillips)는 세속화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뮐러(Hanfried M ller)는 맑스주의적으로, 몰트만(J. Moltmann)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대리적 사역으로 해석하였다. 그린(Clifford J. Green)은, 본회퍼가 복음을 사회학적으로 전개하였다고 보고 있으며, 파일(Ernst Feil)은, 본회퍼의 신학이 그리스도와 세상에 대한 이해로 일관성있게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베트게(Eberhard Bethge)도, 본회퍼의 신학은 계시의 구체성을 강조하는데 있어서 수미일관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본회퍼 신학에 관한 연구는 최근 트로비취(M. Trowitzsch), 파일(Ernst Feil) 그리고 크뢰트케(W. Kr tke)에 의해서 사회학 뿐만 아니라, 해석학과 철학적 차원에서 새롭게 연구되고 있다. 본회퍼 신학에 대한 이러한 최근 연구는 본회퍼 신학의 철학적 혹은 해석학적 근거를 찾아보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회퍼가 교회와 역사 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자유로운 계시행위를 칸트적 선험철학과 헤겔적 관념철학을 극복하고 그리스도-존재론적으로 전개하게 된 해석학적 방법을 분석해 보고자 하는 연구이다. 왜냐하면 본회퍼의 초기 작품인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 1927}와 {행위와 존재(Akt und Sein), 1930}의 해석학적 방법은 당시를 지배하고 있었던 독일의 위대한 두 철학자 칸트(I. Kant)와 헤겔(G.W.F. Hegel) 철학을 신학적으로 종합한 저작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본회퍼는 여전히 칼 바르트(K. Barth)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개신교 신학의 핵심적 주제를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봉랑 교수는 바르트의 신학이 본회퍼에게 미친 영향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본회퍼는 초기 바르트의 하나님 말씀의 神學을 따라가면서도 ('성도의 교제') 계시의 초월적인 행동과 위기의 지나친 강조에 대해서 계시의 존재의 면으로 억제하고('행위와 존재에서'), 계시의 객관적인 권위성의 위험에 대해서 계시의 세상적인 언어를 강조 했지만('옥중서간') 본회퍼는 '종교적' 인간의 인간학적 가능성으로부터가 아니고, 인간에게 오고 인간에게 말함으로써 행동하는 하나님의 현실로(예수 그리스도: 필자 주)부터 신학을 세우는데 있어서, 다시 말해서 그의 신학의 구조와 골격, 그리고 방법론에 있어서 본회퍼의 신학은 항상 바르트의 신학이었다."

 

이러한 박봉랑 교수의 해석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본회퍼 신학에 대한 해석학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본회퍼가 그리스도론적으로 안내된(christologisch orientiertes) 말씀의 신학 내지 계시의 신학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학자들마다 공통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봉랑 교수의 본회퍼 해석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정당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제기된다: 어떠한 근거에서 본회퍼의 신학이 그리스도론적으로 안내된 말씀의 신학이라고 볼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변의 일환으로서 트로비취(M. Trowitzsch)는 본회퍼의 해석학에 대한 10가지 중요한 명제를 제시하였다. 그 첫 번째 명제에 의하면 "근원적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차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하는, 필연적인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이와같이 트로비취가 이해하고 있는 본회퍼의 해석학적 명제는, 본회퍼의 해석학이 철저히 기독론적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더 자세히 말하면 본회퍼는 "신학의 대상은 그 자체의 대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교회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이 말씀, 곧 성서의 원전(Quelle), 혹은 최초의 본문(Urtext)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으로 본회퍼는 본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격적인 말씀이다. 바꾸어 말하면 본회퍼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선포되고 있는 말씀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적 말씀에 기초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 설교자는 분명히 말씀을, 곧 십자가에 달리신 분에 관한 말씀을 회고해야하고, 그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왜냐하면 설교자의 회고에는 오로지 신적인 사건에 대한 '회상(Ged chtnis)'에서 나온 일반적인 '문장들'과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씀들을 설교자는 따라 말할 수 있고(nachsprechen), 그러나 그리스도인격(Christusperson)의 살아있고 창조적인 말씀 자체를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예수가 성서 텍스트와 설교자에 의해서 선포되는 말씀의 원본문(Urtext)이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의 존재는 단순히 육신으로 살았던 33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자의 말씀 속에 존재하게 되고, 더 나아가 그 말씀이 실현되는 곳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본회퍼가 하나님의 말씀의 세가지 형태, 더 자세히 말하면 '설교'와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 속에는 "그리스도의 인격(Christusperson)"이 계시되었다고 봄으로서 말씀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본회퍼에게 있어서 존재(ist)는 단지 "있음(es gibt)"이 아니라 "행위(in Akt)" 속에서 인식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격은 행위를 통하여 인식되어지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 곧 로고스( )라는 것은 본회퍼의 {그리스도론(Christologie), 1933}에서도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자유 안에서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왜냐하면 인간도 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말씀하시는 로고스 안에서 인간과 만나시기로 결정하셨다. 인간의 로고스 안으로 하나님의 로고스가 들어오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인격 속에 말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더 자세히 말하면 "하나님의 인격적인 말씀"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격적인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교회의 말씀, 곧 설교 속에 실존(existieren)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포된 말씀으로서 현존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설교 속에 현존한다. 바꾸어 말하면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재 형태(Daseinsgestalt)"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설교 속에 현존한다는 것은 그가 "객체적 말씀"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주체, 곧 "...에게 말씀을 건네는 분"으로 현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설교를 듣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의 설교는 전적으로 인간의 말이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인격적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본회퍼 해석학은 말씀의 세가지 형태 속에 현존해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본회퍼의 성서 해석학은 곧 그리스도론이다.

삼위일체의 내용은 기독론을 이해하는 데서도 중심적인 위치에 있다. 그것은 삼위일체론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를 기독론에서도 인식하게 된다는 것, 기독론은 삼위일체론을, 삼위일체론은 기독론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것, 삼위일체론이 기독교 신앙의 구원론과 절대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기독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말이다.

  기독론의 핵심은,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 이라는 기독교의 규범적 사고 안에서 찾을 수 있고, 그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과 ‘인자’(사람의 아들)에 대한 말씀에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으로서 예수 안에서 예수의 본질과 두 본성(신성, 인성)에 대한 내용을 명확하게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에 대한 신학적인 질문은 먼저 예수의 본질을 생각하게 된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예수의 본질은 무엇이냐? 그리고 예수의 본질을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본질과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의 질문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질문에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내용, 예수는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신가?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져 있다.

  삼위일체론에서 알아보았듯이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예수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동일 본질(동질)이어야 한다. 예수에 본질이 아버지의 본질과 비슷하다, 유사하다, 열등하다 등의 생각은 삼위일체론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된다. 그것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어 버린 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본질과 예수의 본질이 비슷하다, 유사하다, 열등하다 라 는 표현들은 둘이라는 개념 안에서 하나 라는 개념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 라는 하나님에 대한 신비를 받아드리지 않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동질이란 개념 안에는 둘 안에 하나가 있고 하나 안에 둘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 역시 인간의 합리적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질은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 그리고 기독교 교리의 삼위일체론과 구원론에 대한 내용을 표현할 수 있도록 신학적인 근거를 마련해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삼위의 하나님, 하나의 본질’에서 동질에 대한 신학적인 인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사고는 동질에 대한 의미가 기본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에 대한 두 번째 질문은 한 인격체로서 예수 안에서 신성과 인성에 대한 내용이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과 ‘인자’(사람의 아들)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기도 하고 기독론의 핵심적 주제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인격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 한 인격, 두 본성이라는 기독론의 내용도 삼위일체처럼, 인간의 합리적 사고와 언어로 이해하거나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인격과 두 본성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인 언어로 설명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나타내는 것이 되고 만다. 예수의 두 본성에 대해서 우리가 꼭 설명을 해야 한다면, 예수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은 혼합되어져 있거나, 바뀌어져 있거나, 나뉘어져 있거나, 분리되어져 있지 않다 라 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기독론의 핵심은 결국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에 대한 내용에서 찾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 대답은 삼위일체론과 구원론의 요점을 바르게 표현하고 나타낼 수 있을 때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삼위일체의 내용을 바르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고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분을 아버지이신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예수가 우리의 죄를 대속(속죄)하시기 위해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이다. 십자가의 고통에서의 예수는 분명히 혼자였다. 그러나 그때도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함께 하셨다.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은 동질이란 개념과 삼위의 하나님은 항상 함께 하신다는 고백에서 아버지와 예수는 함께 하신 것이다.

  예수가 완전한 하나님이라 함은 기독교에서의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 그러면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신앙으로 인식하고 고백한다는 것에 근거한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예수 하나님이 기독교 신앙에서의 고백하는 한 분 하나님에서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라 함은 예수는 죄가 하나도 없는 사람, 죄를 갖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죄를 지은 적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는 죄를 갖고 태어나서 죄 아래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대속’, ‘속죄’ 등의 용어들은 예수와 십자가를 생각하도록 해 준다(마태복음 20장 28절; 로마서 3장 23-25절, 4장 25절, 5장 10-11절, 19절; 고린도 전서 5장 7절; 고린도 후서 5장 21절; 갈라디아서 1장 4절, 3장 13절; 에베소서 1장 7절; 디모데 전서 2장 5-6절; 디도서 2장 14절; 히브리서 10장 1-18절, 13장 12절; 베드로 전서 1장 18-19절; 요한 일서 3장 5절 참조).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살아 나셨다’ 는 고백은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를 상기 시키도록 해 주는 것이다.

  인간의 죄와 용서, 구원에 대한 성서의 내용 중, 로마서의 말씀들(3장 10절, 23-24절, 5장 12절, 14-19절 등)은 인류의 죄는 무엇이고, 예수가 왜? 인류의 구주가 되시는가를 설명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그것은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이라는 신학적 사고 안에서 이루어진다.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에 대한 고백은 기독교 신앙에서의 구원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죄를 갖고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가 없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 받을 수가 없다는 것, 구원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죄에 대한 속죄(용서)와 구원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로서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이루어 주신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면서 죄가 없는 완전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것이다. 인류의 죄에 대한 대속으로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장사 되셨다가 살아나신 분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아들이신 예수이다. 그런데 그 예수는 기독교 신앙의 한 분 하나님에서 다른 하나님이 될 수가 없다. 완전한 하나님이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은 동질이라는 개념, 한 인격체로서 예수 안에서 신성과 인성은 혼합되어져 있거나, 바뀌어져 있거나, 나뉘어져 있거나, 분리되어져 있지 않다 라 는 말의 의미, 그리고 삼위일체론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구별되면서 하나 라는 신학적 사고 안에서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를 고백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면 삼위일체론과 구원론의 내용이 바뀌어 지고, 2000여년의 역사 안에서 꾸준히 이어져 왔던 기독교 공동체의 삶에서 이탈하는 것이 된다. 물론 초대교회에서부터 현대교회에 이르기까지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주장했던 소수의 사람들이 있어 왔지만, 그들은 모두 교회 회의들을 통해서 정죄 되어졌고 거부되어졌다. 그것은 현대교회 안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 중에서 어떤 누군가가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에 대해서 의아한 질문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 하신 이후 2000여년의 동안의 교회 역사 안에서 극소수를 제외한 전체의 기독교인이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구주로 믿고 살아 왔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그리고 현대교회 안에 신학(삼위일체론, 기독론)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기도 하다. 

 

삼위일체의 내용은 기독론을 이해하는 데서도 중심적인 위치에 있다. 그것은 삼위일체론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를 기독론에서도 인식하게 된다는 것, 기독론은 삼위일체론을, 삼위일체론은 기독론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것, 삼위일체론이 기독교 신앙의 구원론과 절대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기독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말이다.

  기독론의 핵심은,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 이라는 기독교의 규범적 사고 안에서 찾을 수 있고, 그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과 ‘인자’(사람의 아들)에 대한 말씀에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으로서 예수 안에서 예수의 본질과 두 본성(신성, 인성)에 대한 내용을 명확하게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에 대한 신학적인 질문은 먼저 예수의 본질을 생각하게 된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예수의 본질은 무엇이냐? 그리고 예수의 본질을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본질과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의 질문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질문에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내용, 예수는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신가?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져 있다.

  삼위일체론에서 알아보았듯이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예수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동일 본질(동질)이어야 한다. 예수에 본질이 아버지의 본질과 비슷하다, 유사하다, 열등하다 등의 생각은 삼위일체론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된다. 그것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어 버린 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본질과 예수의 본질이 비슷하다, 유사하다, 열등하다 라 는 표현들은 둘이라는 개념 안에서 하나 라는 개념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 라는 하나님에 대한 신비를 받아드리지 않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동질이란 개념 안에는 둘 안에 하나가 있고 하나 안에 둘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 역시 인간의 합리적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질은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 그리고 기독교 교리의 삼위일체론과 구원론에 대한 내용을 표현할 수 있도록 신학적인 근거를 마련해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삼위의 하나님, 하나의 본질’에서 동질에 대한 신학적인 인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사고는 동질에 대한 의미가 기본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에 대한 두 번째 질문은 한 인격체로서 예수 안에서 신성과 인성에 대한 내용이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과 ‘인자’(사람의 아들)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기도 하고 기독론의 핵심적 주제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인격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 한 인격, 두 본성이라는 기독론의 내용도 삼위일체처럼, 인간의 합리적 사고와 언어로 이해하거나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인격과 두 본성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인 언어로 설명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나타내는 것이 되고 만다. 예수의 두 본성에 대해서 우리가 꼭 설명을 해야 한다면, 예수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은 혼합되어져 있거나, 바뀌어져 있거나, 나뉘어져 있거나, 분리되어져 있지 않다 라 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기독론의 핵심은 결국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에 대한 내용에서 찾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 대답은 삼위일체론과 구원론의 요점을 바르게 표현하고 나타낼 수 있을 때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삼위일체의 내용을 바르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고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분을 아버지이신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예수가 우리의 죄를 대속(속죄)하시기 위해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이다. 십자가의 고통에서의 예수는 분명히 혼자였다. 그러나 그때도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함께 하셨다.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은 동질이란 개념과 삼위의 하나님은 항상 함께 하신다는 고백에서 아버지와 예수는 함께 하신 것이다.

  예수가 완전한 하나님이라 함은 기독교에서의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 그러면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신앙으로 인식하고 고백한다는 것에 근거한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예수 하나님이 기독교 신앙에서의 고백하는 한 분 하나님에서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라 함은 예수는 죄가 하나도 없는 사람, 죄를 갖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죄를 지은 적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는 죄를 갖고 태어나서 죄 아래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대속’, ‘속죄’ 등의 용어들은 예수와 십자가를 생각하도록 해 준다(마태복음 20장 28절; 로마서 3장 23-25절, 4장 25절, 5장 10-11절, 19절; 고린도 전서 5장 7절; 고린도 후서 5장 21절; 갈라디아서 1장 4절, 3장 13절; 에베소서 1장 7절; 디모데 전서 2장 5-6절; 디도서 2장 14절; 히브리서 10장 1-18절, 13장 12절; 베드로 전서 1장 18-19절; 요한 일서 3장 5절 참조).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살아 나셨다’ 는 고백은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를 상기 시키도록 해 주는 것이다.

  인간의 죄와 용서, 구원에 대한 성서의 내용 중, 로마서의 말씀들(3장 10절, 23-24절, 5장 12절, 14-19절 등)은 인류의 죄는 무엇이고, 예수가 왜? 인류의 구주가 되시는가를 설명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그것은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이라는 신학적 사고 안에서 이루어진다.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에 대한 고백은 기독교 신앙에서의 구원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죄를 갖고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가 없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 받을 수가 없다는 것, 구원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죄에 대한 속죄(용서)와 구원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로서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이루어 주신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면서 죄가 없는 완전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것이다. 인류의 죄에 대한 대속으로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장사 되셨다가 살아나신 분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아들이신 예수이다. 그런데 그 예수는 기독교 신앙의 한 분 하나님에서 다른 하나님이 될 수가 없다. 완전한 하나님이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은 동질이라는 개념, 한 인격체로서 예수 안에서 신성과 인성은 혼합되어져 있거나, 바뀌어져 있거나, 나뉘어져 있거나, 분리되어져 있지 않다 라 는 말의 의미, 그리고 삼위일체론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구별되면서 하나 라는 신학적 사고 안에서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를 고백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면 삼위일체론과 구원론의 내용이 바뀌어 지고, 2000여년의 역사 안에서 꾸준히 이어져 왔던 기독교 공동체의 삶에서 이탈하는 것이 된다. 물론 초대교회에서부터 현대교회에 이르기까지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주장했던 소수의 사람들이 있어 왔지만, 그들은 모두 교회 회의들을 통해서 정죄 되어졌고 거부되어졌다. 그것은 현대교회 안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 중에서 어떤 누군가가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에 대해서 의아한 질문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 하신 이후 2000여년의 동안의 교회 역사 안에서 극소수를 제외한 전체의 기독교인이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구주로 믿고 살아 왔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그리고 현대교회 안에 신학(삼위일체론, 기독론)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기도 하다.

[출처] [본문스크랩] |작성자 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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