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4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목차>
14:1-3 근심하지 말라
14:2-3 처소
14:4-6 길, 진리, 생명
14:7-12 나를 본자는
14:12-14 신자의 기도
14:12-15 신자의 기도(2)
14:16-17 진리의 영
14:18-24 버려두지 아니함
14:25-31 신자와 성령
15:1-6 포도나무와 가지
15:7 기도의 기쁨
15:7-10 사랑안에 거하라
15:11-15 기쁨
15:16-20 신자와 세상
15:21-27 보혜사 성령
16:1-4 기독교와 하나님
16:5-12 성령의 역할
16;12-20 성령이 오시면
16:19-22 근심과 기쁨
16:23-24 구하라
16:25-33 하나님의 사랑
17:1 영화
17:2 권세
17:3 영생
17:4-8 하나님을 아는 자
17:8-10 예수님의 영광
17:11-15 보전
(85강) 14:1-3 근심하지 말라
1절에 보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갑자기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신다면 앞에서 제자들이 뭔가 근심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사실 앞의 내용에서는 제자들이 무슨 일로 인하여 근심했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13장이 끝나고 14장이 새롭게 시작되니까 새로운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애당초 성경은 장 절의 구분이 없습니다. 다만 성경을 번역하면서 장 절로 구분을 하였을 뿐입니다. 따라서 14장이니까 새로운 말씀을 하신다는 것은 틀린 생각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지금 제자들이 근심을 하고 있기 때문에 권면하는 말씀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앞으로 제자들에게 닥칠 상황이 지금의 제자들로서는 근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근심하지 말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제자들에게 닥칠 상황이란 어떤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시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가실 것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왜 제자들에게 근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까?
이것을 이해하자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부터 생각해봐야 합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많은 군중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왕을 영접하는 것 같은 영접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뒤를 제자들이 따라가면서 어떤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역시 예수님은 우리들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즉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더욱 굳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눈에 보이는 예수님을 의지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능력이 있고 힘이 있고 기적을 베푸는 그런 분이 자기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분명 제자들에게는 큰 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의지하고 신뢰한 예수님이 그들 곁을 떠나 버리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뢰하던 대상이 눈에서 보이지 않게 될 때, 자기들의 곁을 떠났다고 여겨질 때 그들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인생에 대해서 걱정이 앞서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뢰하던 분이 없으니까 이제는 모든 것을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시고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심하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근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만약 어떤 어려움에 빠져서 근심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 '너무 걱정하지 마라 잘 되겠지 뭐, 희망을 가져라'는 말을 한다고 해서 근심이 사라지고 희망이 생길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근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문제가 해결되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만한 힘있는 사람이 와서 '걱정마라 네 문제는 내가 다 해결해 줄께'라고 한다면 근심이 사라질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만한 사람이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말씀을 하실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근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근심하지 않게 될 것이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오늘 우리들의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치고 근심없이 사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모두가 마음에 근심과 걱정거리를 한아름씩 안고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형편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은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근심하지 않을 것이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대로 말하면 근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점을 기억하시고 오늘의 말씀을 살펴본다면 근심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냥 '나를 믿으라'고 하실 수도 있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도 믿고 나도 믿으라는 말씀입니까? 이 말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것과 나를 믿는 것이 결코 다르지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하면 이렇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켜주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에 대해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다스림을 받고 있었습니다. 고통의 세월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믿었던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메시아를 보내서 지금의 우리들을 해방시키고 세상에서 으뜸가는 나라로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소망이 그들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안겨줄 메시아가 아니라 자신들을 해방시키고 행복하게 해줄 메시아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힘이고 기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메시아가 자신들을 떠나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제는 무엇을 믿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는 오셨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메시아를 보낼 것이라는 약속은 없습니다. 그러니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그들의 전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떠난다면 이제 그들에게는 믿어야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메시아가 오신다는 소망으로 살았는데, 오신 메시아가 가버린다면 무슨 소망으로 살아야 합니까? 그러기에 근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2-3절)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가는 것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겠다고 합니다. 즉 지금은 가시지만 다 제자들을 위해서고 가신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여 예수님이 계신 곳에 영원히 있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제자들은 어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이 자기들 곁에서 자신들을 챙겨주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예수님이 계신 곳에 영원히 함께 있는 그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그들의 소망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마치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를 소망하고 기다리는 믿음으로 살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즉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았던 것처럼 다시 온다는 나의 약속을 믿고 살아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근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예수님이 계신 곳에 우리도 있게 하시기 위한 길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기 위해서 하늘로 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길 되시는 그리스도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임을 알고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예수님이 오실 것을 소망하고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이 우리의 세상일을 챙겨주기를 기대하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한 기대를 가진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것보다 세상일에 더 마음을 두고 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근심이 끊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오실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님의 백성된 자들이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전에는 육신의 눈으로 예수를 보고 만났지만 이제는 마음의 눈, 심령으로 예수님을 보게 되고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풍랑도 주관하시는 분이 아닙니까? 제자들은 풍랑 때문에 죽을 것만 두려워했지 예수님이 풍랑도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이 나의 풍랑을 잠잠케 해 주실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풍랑도 다스리는 분이고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지금 내가 겪는 이 일이 전부가 아니고 끝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풍랑속에서도 주님이 잠잠하시다면 주님의 뜻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나를 예수님이 계신 곳에 영원히 있게 하기 위해서 일하시고 계시고 나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기에 풍랑에서도 근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능력입니다. 신자는 세상에서는 나그네입니다. 우리의 거처는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있습니다. 이것을 굳게 하시고 이 소망으로 힘있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86강) 14:2-3 처소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를 궁금하게 하는 것은 처소라는 단어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물론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처소=천국이라는 답을 내려버릴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하늘에 가신 것은 천국을 예비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천국을 다 예비하시면 다시 오셔서 제자들을 영접하여 예수님이 계시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하신다는 말씀으로 이해하면 가장 간단하고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식으로 이해하려고 할 때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는 것은 아직까지 처소가 없다는 뜻이 되는데, 처소를 천국으로 이해한다면 결국 그때까지 천국은 없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기 전까지 천국은 존재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천국을 만들기 위해서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는 것은, 단지 공중이 아니라 예수님의 나라로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명 그 나라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라와 천국은 서로 다르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이 천국을 예비하기 위해 하늘로 가신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처소라는 것이 무엇이며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도 단순히 재림을 의미하는 말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살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현대 신자들은 재림에 대해 일단 지루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오신다고 말씀해 놓고 2천년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니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지금까지 재림이 없으니 아마 내 살아 생전에도 재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재림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사건으로만 생각합니다. 아직 오시지 않고 하늘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재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사건이지만, 이렇게만 생각해 버리면 결국 지금 예수님과 신자는 서로 분리되어 살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도 다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먼저 처소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처소란 거한다는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집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소가 집은 집인데 과연 어떤 집을 의미합니까? 과연 예수님은 어떤 집, 어떤 처소를 예비하기 위해 하늘로 가신 것입니까? 그리고 처소는 하늘에다가 마련하는 것입니까? 처소를 이해하는데 가장 방해되는 것은 처소를 하늘에 있는 천국의 의미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혹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지워버리시기 바랍니다.
일단 천국에 대해 생각해 보면, 대개 천국은 신자가 죽은 후에 가서 살 집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의미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천국이라는 집을 만들어 놓고 그 집에 들어가서 사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든 하나님이 계신 그곳을 천국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즉 천국은 고정된 어떤 장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21절에 보면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고정된 장소적인 의미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즉 고정된 장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너희 안에 거하신다면 너희 안이 곧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님이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신 말씀은, 장차 제자들이 거할 집을 하늘에 마련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제자들이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는 집을 예비하기 위해서 하늘에 가신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으면 제자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에 거하게 하면 되는데 왜 달리 처소를 예비하기 위해 하늘로 가시는 것입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인간의 본질은 선이 아니라 악입니다. 즉 죄악가운데 태어나기 때문에 본질상 죄가운데 있고 더러운 존재가 인간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에 더러운 존재가 하나님께 나아가면 죽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악한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길은 더러움이 해결되고 깨끗한 존재가 되는 것 밖에 없습니다.
13:36절에서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자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말씀합니다.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시는 것은 의인만이 갈 수 있는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처소를 예비해서 예수님이 계신 곳에 제자들도 있게 하겠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해같이 빛나는 변화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은 그처럼 빛나는 곳입니다. 어둠은 함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신자가 더러움에서 씻김 받고 깨끗함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으신다고 모든 죄가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피로 씻음 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은혜에 감사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로 여김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이 우리의 지식과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로 가시고 성령을 보내심으로서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고 예수님의 은혜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시는 그 마음만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는 것은, 자신은 죄인이며 사망에 처한 자임을 알았음을 뜻합니다. 그러한 자신을 예수님이 피흘리심으로 모든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생명에 거한 자가 되었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된 마음이며 깨끗한 마음입니다.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처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성령으로 되어진 일이고 성령안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성령이 곧 예수님이 예비하시겠다는 처소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성령이 함께 하시는 그 마음이 곧 하나님이 함께 하는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처소가 우리 안에 있다면 그러한 신자가 과연 마음에 근심하며 살아가겠습니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5:8절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마음의 깨끗함을 뜻합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마음에 더러움이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마음의 더러움이 다 씻김 받았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청결한 것은 자신의 악함이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았음을 알고 그 은혜로 가득찬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하나님의 모습을 본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계시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볼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에 성령이 계신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이미 내 마음에 오신 분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예수님이 언제 오시려나' 하늘만 바라보고 오시기를 기다리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근심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고 주관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이미 영으로써 오신 분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처소로써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성령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여러분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 안에 있다면,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신자라면 여러분에게서는 필히 보여지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사는 것으로만 생각하지만, 사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그 순간부터 우리의 뜻이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만이 최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복종할 뿐입니다. 통치자에게 복종하지 않는 나라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처소는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여러분에게 오심으로써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신자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늘을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시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살피면서 그 뜻에 복종하시면 됩니다.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주의 은혜를 알게 하신 그것만으로도 신자는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처소는 여러분 안에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87강) 14:4-6 길, 진리, 생명
신자의 신앙에 있어서 항상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은 육의 문제라는 것에 대해서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의 문제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약한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여실히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6: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신이 함께 하지 않는 인간은 육체에 불과할 뿐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죄 가운데 거하는 인간의 본질이 어떠한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는 것은 육체에 매인 자로 살아가는 인간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육체에 매임으로 인해서 영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고 날마다 육체의 일로 허덕이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일생동안 육체의 일이 짐이 되고 그 짐에 의해서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게 된 것이 인간의 운명인 것입니다. 이러한 악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육체가 된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생명으로 가는 길이 이미 막혀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사망으로 끝나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인간의 비참함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육체가 된 인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의 일은 생각하지도 믿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영의 일보다 육체의 일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육체밖에 모르는 자였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우리 마음이 영의 일을 생각하는 새로운 마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사는 것입니다. 육의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의 일을 더욱 중요한 것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볼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보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만을 보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자 되게 하기 위해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으로 살고, 영의 일을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으며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길과 진리와 생명은 곧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께 나오면 되는 것이고, 예수님이 진리이기 때문에 다른 도를 깨달을 필요가 없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면 진리를 아는 것이고 예수님이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안에 있으면 곧 생명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문제의 해결은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이 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길이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하고, 진리가 무엇인가를 깨닫기 위해서 도를 닦고 수행을 한다고들 합니다. 이러한 세상을 향해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불교인들도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고들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부처의 가르침을 배운다고 합니다. 즉 부처의 가르침에서 진리가 무엇인가를 깨닫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가 그들의 길이요 진리는 아니라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어떤 교훈과 가르침을 통해서 진리를 발견하게 하기 위함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자꾸 제자들에게 어디론가 가신다는 말을 하십니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근심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잘 가시라고 인사할 수도 없는 처지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자신들의 희망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베드로는 죽더라도 예수님을 따라가겠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을 더욱 답답하게 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어디로 가신다는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고 하시면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만 하실 뿐입니다. 제자들로서는 이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먼저 아버지께 가는 길이 있다는 것부터 이해를 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높은 하늘에 계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다만 성전에서 제사드림으로서 섬기는 것이 그들의 전부였던 것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전부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었기 때문에 감히 하나님과 함께 한다거나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에게 하나님은 높은 하늘에 계시는 신이 전부였기 때문에 어떤 길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는 예수님에게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개념으로서는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시고 아버지와 함께 거하는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육체가 된 인간의 실체입니다. 하늘의 일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지금 하늘의 일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고 또 믿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육체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의 사람이기에 영의 일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시는 길은 성전에서 제사드리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율법을 실천하는 것도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지금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좇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자신들이 사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신다는 말씀에 근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하는 것은 육신이 사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이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른다면 그것은 헛된 일을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가는 길은 아버지께 순종해서 자신의 몸을 버리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육신의 생명보다 더 큰 하늘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이고 그 길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인데 제자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말리고 붙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알고 그분을 섬겨주는 것으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곧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곧 생명안에 거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재주로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길로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죽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근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아들이 아버지께로 가시는 길이 되는 것이며 제자들을 위해서 처소를 예비하러 아버지께로 가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리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이기에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곧 아버지의 생명에 거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면 하늘에 속한 모든 것이 예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하늘에 속한 자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수님 한분의 고난으로만 보려고 합니다. 날 위해서 죽었다는 것만 생각하고 끝나버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어주면 천국의 문제는 다 해결되는 것으로 여기고 여전히 육신의 문제로 허덕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보고 산다면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죽으셔야 했는가를 마음 깊이 새긴다면 우리는 세상을 헛된 것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육체로 끝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처소로 인도하시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며 사랑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내 인생의 전부라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의 전부일 수밖에 없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육으로 사는 것과 영으로 사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른 길에서 헤매는 세상과 달리 참된 길에서 진리로 살아가고 생명을 누리는 신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88강) 14:7-12 나를 본자는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는 애당초부터 논의할 가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기 때문에 볼 수 없다는 차원이 아니라 육체가 된 인간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단절됨으로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는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처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서 보여주시기만 한다면 나는 진짜 하나님만 믿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꿈속에서나마 하나님 보기를 소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철저하게 감추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스스로를 세상에 나타내셔서 보여주셨습니다. 다만 세상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던 것뿐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보여줘도 볼 수 있는 눈이 없다면 계속해서 하나님 보기를 소원할 것이고, 결국 평생 하나님이 누구신지 보지 못하고 인생을 마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면 그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6-7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후에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8절)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들로서는 하나님을 보고 싶다는 것은 다만 바램으로 그쳐야 했던 문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알았고 또 보았다는 말씀을 합니다. 그러니 스스로 하나님을 본 적이 없다고 여기는 빌립으로서는 하나님을 보여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하늘 높은 곳에 계시는 분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오늘날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도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 높은 곳에서 우리를 살피고 계신다는 것만 생각하지 하나님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알았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자면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되시고,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라면 예수님만이 참된 진리이기 때문이고,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은 곧 생명에 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생명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고서는 아버지를 알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믿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지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아버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아버지를 믿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가 말하는 하나님은 그 대부분이 그리스도를 앎으로 인해서 알아진 하나님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개념으로 하나님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증거는 여러 종교에서 말하는 신이나, 또는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사고방식이 현 교회가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이상하게 하나님이라는 신의 명칭을 제외하고는 세상이 말하는 신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기능과 능력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짜 하나님이고 우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원인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제쳐버리고 인간의 종교적 개념과 상식에서 하나님이란 신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모르고서는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스스로 계시하시고 증거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만약 하나님을 알고 싶고 보고 싶다면 방법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뿐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 때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유기적인 존재와 실체론적으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가 매우 죄송하지만 지금 여러분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가짜일 수도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교회를 출입하면서 학습해온 지식과 세상적인 사고방식에 의해서 여러분의 지식으로 형성된 하나님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다는 우려의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예수님을 앎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여러분이 아는 예수님은 분명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로마군대나 유대인에게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들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고 창으로 찌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허용하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지 않습니까? 만약 하나님이 허용하지 않았다면 전 세계가 힘을 모아 예수님을 죽이고자 해도 안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면서 외치신 말씀처럼 아들을 버리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어찌 보면 비정하다 할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닙니까? 이처럼 하나님은 아들을 버리시고 죽음에 내어주심으로 해서 죄악 가운데 있는 세상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임을 외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본다면 그 하나님은 죄악된 인간을 버리시는 분입니다. 죄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심판으로 갚으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안에서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가리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앎으로 알게 된 하나님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에게는 헌금을 많이 하면 복을 준다느니, 봉사를 많이 하면 하늘에서 상이 크다느니, 무엇을 구하든 열심히 기도하면 다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등의 말이 해당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것은 인간들이 예수님을 보지 않고 자기들 머리에서 멋대로 상상하여 만들어 낸 우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에 나를 복종시키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내가 세운 기준에 하나님이 따라와주기를 원하고만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에 대해 그렇게 사셨습니까?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이 세우신 기준에 자신을 복종시키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일에 부름 받은 도구인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 인생은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내 개인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에 복종하는 것입니까?'를 물으며 살아야 하고,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할 것은 예수님을 앎으로 하나님을 알고 본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문제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을 알았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봤다 이제 됐다'라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봄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이라면,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은 과연 누구를 통해서 예수님을 보이고 알게 하시는 것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부름받은 신자를 통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을 알게 하셨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게 하셨다면 그것은 여러분 개인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이 시대에 여러분을 예수님을 보이고 증거하는 자로 세워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계속 드러내시고 보여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도덕과 윤리적인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즉 도덕적인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심으로써 아버지가 누구신가를 보이신 것처럼, 신자가 주님의 뜻에 복종하기를 힘쓰며 살아갈 때 자연히 하나님이 누군신가가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된 여러분은 삶의 목표를 하늘에 소망이 없는 세상의 사람들처럼 세상의 것을 소유하고 얻기 위한 것에 두지 마시고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셔서 이루고자 하시는 그 일에 맞추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세상에 남겨지고 있음을 기억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자신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삶의 목표와 뜻을 그리스도에게 맞추고 살아가기 바랍니다.
(89강) 14:12-14 신자의 기도
인간은 나약한 존재입니다. 육신적으로든 심적으로든 결코 강한 존재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그만 일에 대해서도 염려하고 근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하나님은 기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신자가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맡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맡김으로서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해결해 보려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이루어주신 일에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자신의 힘으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능력과 힘을 믿는 것이지요. 자신의 능력과 힘을 믿기 때문에 심령에 궁핍이 없는 것입니다. 이미 자신에 대한 믿음과 확신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주님을 의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자신의 힘으로 신앙을 지킬 수가 있고 살아갈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주님께 구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신자란 날마다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주님을 의지하는 것을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한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성경에 마음을 기울이고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성경을 공부하면 알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온통 자신들이 목표하고 원하고 계획한 것을 내세우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고치지 않으면 결코 신자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기도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13절에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14절에서는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구하든지 시행한다는 말씀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즉 무엇이든지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철저하게 왜곡되어진 인간의 기도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기도하십니까? 금요기도회에 참석하고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참석하지 않는 것이 정당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가라고 묻는 것은 기도라는 행위를 하고 있는가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삶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방식이 여러분의 힘으로 계획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 힘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고 되어지는 일에 순종하고자 하는 방식이라면 그것이 곧 기도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라는 행위는 수시로 주어지는 삶에서 믿음으로 굳게 서지 못하고 흔들리고 염려하고 약해지는 자신의 모습이 보여질 때 애통함과 안타까움에 자연히 기도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결코 강요할 성질의 것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구하면 시행한다'는 것은 주님이 친히 하신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약속을 믿고 기도하십니까? 아마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러한 경험을 한적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구하든 다 이루어주시더라'는 경험이 아니라 '아무리 기도해도 안되더라'는 경험이 태반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구하면 시행한다' 는 약속에 대해서 강한 부정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기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래서 오늘은 '무엇이든 구하면 시행하신다'는 내용에 대해 살펴봄으로서 과연 기도가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12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 뒤에 기도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무엇이든 구하면 시행한다'는 말씀을 12절과 연관해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12절을 무시한 채 기도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 왜곡된 기도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12절은 내용대로만 이해한다면 예수님은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해하지 못할 것은 '이보다 큰 일'즉 예수님의 일보다 큰 일을 할 것이라는 구절입니다. 어떻게 감히 사람이 예수님의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12절은 그렇게 말합니다. 이것까지 바르게 이해할 때 기도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믿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본문대로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우리의 일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나 방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을 하기 위한 힘이요 능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것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믿음이고 거짓된 믿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잘못 이해하게 되면 믿음을 사회에서 구제하고,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개 세상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을 믿음이 좋은 것으로 평가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과연 옳은가를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앎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세상에서 하신 일이 세상이 말하는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합니까?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예수님의 일은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시고 복음을 전하신 것이 전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병을 고쳐야 하고 기적을 행하고 전도하면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과연 누가 예수님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할 수 있고, 38년된 병자를 고칠 수 있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의 일은 병고치고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병자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니면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오직 한가지 일을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죄인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신 일은 오직 하나입니다. 바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즉 예수님이 해야 할 일을 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바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었음을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그러면 병고치고 기적을 행하신 것은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그것들은 모두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고 가르치는 도구였음을 뿐입니다. '장차 저희가 죽일 나 예수는 이러한 존재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나약함과 죄를 위해서 오신 분인데 그분을 죽인 것이 너희라는 것을 보이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은 곧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처럼 죽는 자가 되게 한다는 것이 12절 말씀의 의미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곧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죽고자 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과연 누가 살 수 있습니까? 살고자 하는 것이 세상의 방식이고 인간의 본질인데, 그러한 인간의 본성을 거스리고 죽고자 한다는 것은 인간 스스로 보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즉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살고자 하는 삶이 아니라 죽고자하는 삶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여전히 자신을 살리고자 하는 본성이 있기에 믿음과 수시로 부딪히며 갈등하면서 결국 자신의 본성에 순종해 버리는 나약함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의 나약함을 파악하고 하나님의 믿음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애통하는 심령의 궁핍함이 있는 신자는 자연히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믿음 없음을 고백하며 도와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무엇을 위해 기도하겠습니까? 살기 위해 기도하겠습니까? 오히려 주님처럼 죽는자로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에 의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포기하기 위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기도에 그대로 시행할 것이라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즉 '무엇이든'이라는 말은 우리의 욕심에 의한 '무엇이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무엇이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도 주님의 이름만 들먹이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일에 걸맞는 것을 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십자가에 죽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일보다 큰 일을 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신자가 믿음으로 행하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게 된다면 그것은 인간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일보다 큰 일을 한다는 것은 너희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희 안에서 일하신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고 계시며 그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일을 행하게 하십니다. 살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 사는 것, 이것이 신자의 일인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90강) 14:12-15 신자의 기도(2)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일에 대해 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물론 보이지 않는 것을 실제로 보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이기에 비현실로 여기고 지나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 마치 보고 있는 것과 같은 현실로 여기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론이고 예수님도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분입니다. 성령 역시 볼 수 없는 분입니다. 하늘의 것, 즉 영생이니 생명이니 하는 것들 역시 죄인된 우리들의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미심쩍어 합니다. 불신자는 말할 것도 없고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까지 하늘의 것에 대해 미심쩍어 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믿음은 단지 말에만 있을 뿐, 삶에서 그 자신을 지배하는 능력으로 자리하지를 못합니다. 이유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사람은 보이는 것을 믿습니다. 보이는 것만이 현실이며 참된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단지 가상으로 여기려는 버릇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보이는 것으로 확인하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 눈에 보이는 증거물이 없다고 여겨지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보이는 것을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합니다. 보이지 않아도 무작정 믿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보는 것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의심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가상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라 날마다 현실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는 자의 기도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현실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세계를 현실로 보기 때문에 결국 참된 현실인 믿음을 위해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하지 못하는 현실에서의 소유와 복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엉뚱한 것을 보고 있다는 것 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의 기도는 자기 중심입니다. 자기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의 기도는 예수님이 중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보다 더 귀하고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자연히 자신은 포기되어지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기도로 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13절에 보면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신자의 기도가 아버지의 영광과 연관되어 말씀되어집니다.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시행하겠다고 말씀합니다. 응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응답하시는 이유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기도와 다른 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영광을 위해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때문에 기도 응답을 바라는 것 역시 자기 영광을 꿈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시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바른 기도로 나아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응답하셔서 내가 잘되면 그것으로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내세워서 결국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 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잘됨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장사해서 많은 돈을 벌어서 성공을 했어야 아버지께 영광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약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힘없이 죽으신 것은 결국 아버지를 조롱거리로 만드는 것밖에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과 신자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살아갑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뜻과 마음이 우리와 연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는 것이 신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고 우리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실 길은 따로 있었던 것이고 우리가 가야할 길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신자로 부르신 것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감으로서 세상에 남은 예수님의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신 길이 곧 우리가 가야 할 길이며 그렇다면 예수님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신 그것이 곧 우리가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서의 성공이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가난한 자는 아버지의 영광에 해가 된다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서만 영광을 얻으십니다. 즉 아들의 일로만 영광을 얻으시는 것이지 그 어떤 인간의 일로도 하나님께는 영광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교회 일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영광을 자기들 멋대로 꾸미고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상관없이 인간의 행위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해보겠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결국 하나님의 뜻과 마음은 무시해버린 불신앙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아들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아들이 하신 일만이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하늘에 계신 지금에 있어서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것은 신자가 아들의 일을 행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아들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아들이 하신 일을 위해 구하라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아들이 하신 일을 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 이것이 진정으로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아들의 이름,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을 다만 기도의 정당성을 위해서 하는 주문처럼 여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을 해야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는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신의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수준의 기도는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가는 그가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물입니다. 마음에 그리스도를 두고 살아가는 신자라면 그리스도가 가신 그 길을 가기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세상의 일을 두고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음에 그리스도가 있는 신자라면 세상의 일에서도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 되어지기 위해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신자가 주님의 일을 두고 기도할 때 예수님은 분명히 시행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즉 신자를 통해서 예수님의 일이 계속되어지게 함으로써 아버지께 영광이 되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두고 기도하시든 먼저 이것이 주님의 이름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자식이 대학에 합격하기를 위해서 기도하시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먼저 내 자식이 대학에 합격하는 것과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생각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믿음은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꼭 대학에 합격시켜주기를 바라는 욕심에서 대학에 떨어진다고 해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함으로써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게 도와달라는 기도로 뒤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자식이 대학에 붙기를 바라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면서까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 살아가지 못하는 자 되는 것을 더 두려워하기에 그러한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이름에 합당한 기도이며 예수님은 그 기도를 분명히 들으시고 시행하실 것입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말입니다.
여러분 기도하십니까? 기도하신다면 무엇을 위해 기도하십니까? 여러분 자신의 일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 기도하십니까? 진심으로 여러분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되어지기 위해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하십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잘하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 살아가고 있음이 그 기도로 증거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참으로 기뻐할 일입니다. 하지만 욕심에서 헤어나지 못한 기도가 계속되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저주만 쌓아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기도 잘못했다고 지옥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말씀을 통해서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기도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곧 믿음에 있지 않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기도가 문제가 아니라 믿음 없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항상 말씀을 대할 때 말씀은 지금 나를 고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임을 생각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합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기도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뤄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주님께 도움을 구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주님과 나의 관계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가가 내가 지금 주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기도가 오직 주님의 뜻을 위해 사용되어지기를 바랍니다.
(91강) 14:16-17 진리의 영
17절에 보면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이 영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왜 진리의 영이라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깊은 생각을 안하는 것 같습니다.
진리의 영이라는 것은 진리를 위한 영이라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은 진리를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을 두고서 우리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 나에게 임하시면 무슨 신비한 힘이 주어진다든지 신령한 체험을 한다든지 하는 쓸데없는 생각에 머무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의 영을 세상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에 대해서는 세상도 말합니다. 무당들도 신내림을 받았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신내림을 받았다는 것이 곧 영이 임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영이 임해있기 때문에 신비한 힘이 주어지고 그 힘으로 앞일을 예언하기도 하고 병을 고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 역시 성령에 대해서 이러한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많습니다. 신자가 성령을 받은 것을 마치 무당이 신내림을 받은 것처럼 하늘에서 신비한 영적인 것이 내 속에 들어와서 내가 신비한 힘의 사람으로 되는 것을 성령 받음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령을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성령 받은 표를 자신의 경험으로 확인하려고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성령이 들어왔다면 분명 어떤 변화가 있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감정의 상태가 아무런 변화도 없는 밋밋한 상태로 있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영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상식과 지식을 그대로 적용하여 성령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일 뿐이지 성경과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성령이 어떤 분이시고 무엇 때문에 성령에 오셨으며 성령을 받은 자에게서는 어떤 현상이 있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성경을 통해서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빌립이 예수님에게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아마 빌립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에 대해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마음은 사실 우리의 마음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싶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을 보고 싶다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에는 단지 성경만 보고 목사의 말만 듣고 믿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불만일 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성경을 그대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라고 하지만 성경만 가지고는 안되고 실제 내 자신이 체험하고 확인함으로써 성경의 내용이 사실로 여겨졌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만약 자신이 직접 보고 체험을 하게 되면 하나님에 대해서 의심하지도 않을 것이고 확고한 믿음으로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고 싶기도 하고 기적과 같은 신비한 일을 체험하고 싶은 마음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분명 직접 보고 체험한 것처럼 믿음에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고 여겨질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을 위해서 좋은 방법인데 하나님은 왜 그 방법대로 하지 않으시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성령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말합니다. 다른 보혜사란 성령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주시는 이유는 하늘로 가시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영원토록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은 하늘로 가시지만 성령이 오심으로써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과 함께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면 세상에는 계시지 않고 볼 수 없게 되는 것인데 어떻게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17절에서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진리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영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영이라는 것이고 예수님의 영이란 예수님께 속한 영으로써 오로지 예수님을 증거하고 전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진리의 영으로 오신 성령이 우리에게서 하시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깨달은 그 상태를 가지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실제 몸이 함께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만나게 되는 것을 곧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신자된 자가 이것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마치 성령이 일부러 오시지 않아도 내 믿음은 내 알아서 잘 할 수 있다는 식입니다. 내가 마음만 굳게 가지면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고,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도 모두 나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17절 뒤의 말씀을 보십시오.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알거나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상에 우리도 속해있었습니다. 그런데 진리의 영이 오심으로써 진리를 알게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길을 가도 마다하지 않고 따라갈 수 있고 어떤 길로 인도하든 불평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고 신뢰함으로 그 길을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성령이 일하신 결과임을 말씀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런데도 과연 성령이 오신 사건이 우리에게 별것 아닌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 기적을 체험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또 사실 인간적인 면에서는 그런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기준으로 생각할 때 그러한 마음은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뭔가 체험을 하고 싶다는 그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는 내 속이 채워지지 않음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아무리 여러분이 기적을 체험한들 그 체험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되어집니다.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믿으면 그것으로 구원의 문제는 완벽하게 해결됩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다시 병 고침 받는 기적을 체험하라는 요구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믿는 것에 대해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뭔가 그것으로는 부족할 것 같다는 의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부족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것이고 신비한 체험도 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구원은 그리스도를 알고 믿음으로 되어집니다. 때문에 구원에 가장 확실한 것은 구주되시는 그리스도를 알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우리의 지식과 지혜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진리의 영이신 성령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진리의 영으로 오셨다는 것은 구원을 사모하는 성도에게는 놀라운 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이 내 안에 계시는 가장 확실한 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알고 깨달은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말고 다른 증거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깨닫고 믿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달리 무엇을 체험하고 싶다느니 눈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성령이 오심으로 그 마음이 그리스도로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체험을 하고자 하고 눈으로 보고자 하는 것은 신앙의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오심으로써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고 오직 그분에게만 마음을 두고 살게 한다는 것에 대해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홍해의 기적을 목격하지 못했고 병고침 받은 기적이 없다고 해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았다면 세상이 맛볼 수 없는 놀라운 기적을 맛본 것입니다.
성령이 오신 것은 자기 백성을 진리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은 사람은 그 어떤 수고를 해도 알 수 없는 것이 진리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할 때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진리가 앞에 있는데 진리가 무엇인가 묻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영이 오셨다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리의 영으로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기 바랍니다.
(92강) 14:18-24 버려두지 아니함
성경은 믿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전에 한가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그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지 다른 믿음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믿음이라고 해서 다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에도 구원의 능력이 되는 참된 믿음이 있고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가짜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은 이 점을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믿음이 잘못된 믿음이라는 생각을 전혀 안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으로 여기고 평생 그 믿음으로 살았을 때의 결과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믿음에 대해 점검할 필요성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내 믿음은 가짜가 아니다'라는 확고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는 일에 대해 불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가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여겨지고 뭔가 화가 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믿음에 대한 잘못된 착각을 가지지 않기 위해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자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서만 주어지는 것이 믿음이고, 그것이 아무런 조건없이 자기 백성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끊임없이 스스로 믿음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때문에 여러분의 믿음이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선물인지 아니면 여러분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인지는 분명히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다 똑같다거나 대강 믿으면 된다거나 교회 잘다니는 것이 믿음이라는 등의 생각은 버리십시오. 그러한 생각들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믿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게 할 뿐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믿음인가?'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결국 이것을 위해 우리는 말씀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씀이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에서 참된 믿음의 실체에 대해 배우고 우리의 믿음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먼저 18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합니다. 우린 이 구절에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는 말씀을 합니다. 고아라는 것은 말 그대로 부모가 없는 아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부모가 없다고 해서 무조건 고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장성한 사람은 비록 부모가 없다고 해도 고아라고 말하지 않지 않습니까? 장성한 사람에게는 부모가 없다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에게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해서 돈을 벌고 먹고 살아갈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일할 능력이 없는 아이에게는 부모가 없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의지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런 고아의 상태로 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시는 것입니까? 제자들은 어른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그런 연령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을 마치 부모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살아갈 수 없는 어린아이로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않는다는 말씀은 '너희들은 내가 돌봐주고 지켜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어린아이 같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은 바로 이렇게 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시는 제자들의 상태라면 오늘 우리 역시 동일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없다면 우리 자신은 제자들보다 더 나약하고 누가 돌봐주지 않으면 전혀 살아갈 수 없는 어린아이처럼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바로 여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믿음의 대상을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의지한다는 것은 나는 힘이 없다는 뜻입니다. 나에게 힘이 없기 때문에 힘이 있는 분을 의지하고 그분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 부분이 소홀해져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힘을 믿고 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잘못된 믿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믿음을 말하면서도 자신의 나약함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고아와 같은 그런 존재임을 말씀하는데 정작 우리 자신들은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해도 얼마든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있는 것입니다. 내가 알아서 교회도 잘 다닐 수가 있고, 열심히 봉사하고 기도하고 말씀 보면서 신앙생활 열심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 믿음은 내가 알아서 지킬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날 신자는 고아가 아니라 장성한 자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저 힘들고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을 찾아 도와달라고 할 뿐이지 생활에 별 문제가 없으면 도와 달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계에 대한 문제에서 모든 사람은 고아가 아니라 어른으로 살아갑니다. 내 생계는 내가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어른 의식이 신앙에서도 그대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기 나름이고 마음먹기 나름이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즉 뭐든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결단을 하지 않고 하려는 마음을 가지지 않아서 그렇지 하려고 하기만 하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른의식입니다. 하지만 신앙은 우리 마음먹은 대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바로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현대 교회는 신앙으로 사는 것을 성경보고 기도하는 것, 그리고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것 등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믿음을 그렇게 허술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21절에 보면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생각합니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사랑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 마음은 사랑하는 자로 살고 싶어하지만 우리 안에 다른 무엇인가가 그런 마음을 막고 훼방하는 것을 수없이 경험하지 않습니까?
신자라면 세상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또 그렇게 살고자 원하는 것이 신자다운 생각일 것입니다. 이웃에 대해서도 같습니다. 이웃을 미워하며 살고 싶어하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말씀대로 희생하며 섬기며 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마음먹은 대로 안된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나약함은 사랑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인간은 고아와 같이 나약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음으로 해서 아버지와 함께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아버지와 거처를 함께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과 거처를 함께 한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높이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고 살아갈 뿐이지 자신은 생각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과연 이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인간은 그럴 존재가 못됩니다. 결국 하나님과 함께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못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여전히 자기 사랑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늘의 생명에서 멀어져 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는 일에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것이 인간이기에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그냥 버려 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도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내시는 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갈수록 자신의 악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과 의를 포기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에 더욱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신자는 성령이 오심으로서 세상은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게 해달라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살아가십니까?
(93강) 14:25-31 신자와 성령
성경을 얘기할 때 힘든 것은 성경의 내용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느냐 입니다. 하지만 제가 힘들다고 말하는 것은 제 자신이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마나 성경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두고 힘들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성경을 보면서 나름대로 이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해가 맞다고 여깁니다. 그것은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저의 성경 해석에 대해 틀리다고 생각하면서 설교를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들의 성경 해석도 존중하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해석을 존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해석이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인가는 분명 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욕심을 위한 해석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높이고 그리스도를 높이고자 하는 해석인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어떤 성경 해석을 대한다 할지라도 '이 해석이 그리스도를 높이고 있는가?'를 살피는 자세만큼은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것을 기준으로 하여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성령에 대한 얘기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성령이란 우리가 느낄 수 없는 신비스런 분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을 우리 멋대로 상상할 수는 없습니다.
26절에 보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대개 사람들은 성령이 오면 없던 능력이 생기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물론 성령이 오시게 되면 능력이 생기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26절의 말씀대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는 말씀은 예수님에게서 들었던 말씀을 잊고 있었는데 성령이 오셔서 기억하게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이해를 하지 못하고 그것이 진리인줄 깨닫지를 못했기 때문에 소홀히 여기고 마음에서 지워버렸는데, 성령이 오심으로써 그 말씀이 진리며 생명인 것을 알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말씀을 깨닫는다는 것은 성령의 은총으로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누구든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닫는 자로 산다면 그가 곧 성령이 함께한 신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은 보이는 세계에 미련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오신 것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보이는 세상의 개혁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제자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보이지도 않고 느낄 수 없는 세상에 대해 소망을 둔다는 것이 헛된 것을 쫓아가는 미련한 짓으로 보여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심으로써 비로소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게 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무슨 뜻이었던가 알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신자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성령이 함께 하셔봐야 여러분이 원하고 필요로 한 것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하십니다. 성령은 성령이 하실 일이 따로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시면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도 주시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가지신다면 그것은 성령이 누구신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실 일은 정해져 있습니다. 성령이 하고 싶은 대로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기 뜻대로 세상을 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심 받은 성령께서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분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아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고 그것을 위해 일하시는 것이지 우리의 육신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결국 그 사람은 세상의 일과 하나님 사이에서 갈피를 찾지 못하고 방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가르치시겠다는 것은 우리는 무지한 자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1+1=2라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성령이 오셨다면 누구에게 성령이 필요하겠습니까? 분명 1+1=2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수에 대해 가르치기 위해 성령을 보내셨다면 그것은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모른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 대한 생각은 우리의 상식과 틀에서부터 시작할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시는 말씀에서 시작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분명 불신자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행위가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신 자로 산다는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신 자로 산다는 것은 성령이 우리를 책임지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4:17절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성령안에서 사는 삶은 결코 물질적인 복과 연결되어 있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나의 삶에서 맛볼 수 있다면 그것은 세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 모든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가볍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보다도,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보다도 세상의 것을 소유하고 누리며 사는 것을 더 크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크나큰 복을 땅에 묻어버린 어리석은 자로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주인에게 한달란트 받은 종은 그것을 땅에 묻어 버립니다. 종의 행동은 다른 사람에 비해 자신이 적게 받은 것에 대한 불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여러분이 하나님께 받은 선물을 한 달란트처럼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아닙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았는데 나만 겨우 한달란트를 받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닙니까? 이것은 세상적인 시각일 뿐입니다. 세상이 크게 보인다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 보잘 것 없이 보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심으로 주어진 생명되시는 그리스도는 세상무엇보다도 큰 선물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복입니다.
(94강) 15:1-6 포도나무와 가지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참 포도나무로, 하나님은 농부로, 신자는 포도나무의 가지로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1절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는데 왜 ‘참 포도나무’라고 하실까요? 그냥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참 포도나무라고 하시는 것은 다른 포도나무와 비교하기 위해서임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포도나무로 비유되는 것이 예수님뿐이라면 굳이 참 포도나무라는 말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포도나무이면서도 참되지 못한 존재가 있기 때문에 그것과 비교하기 위해서 ‘참포도나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포도나무를 염두에 두시고 참 포도나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예레미야서 2:21절에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심은 귀한 포도나무라면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은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방 포도나무의 열매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방인을 악하다고 말할 때는 그들의 행동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살인을 많이 하거나, 도적질만 하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이 악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는 그것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면서도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1절에 보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는 말로서 이방인의 악함에 대해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방 포도나무의 가지가 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방인처럼 살아갔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화를 위해 살아가고 자기 영광을 얻기 위해서 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서 보여진 신앙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신뢰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자기들의 열심과 부지런함으로 하나님을 자기들의 편으로 붙들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심을 아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붙드는 힘을 신앙으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이들에게는 열심히 지키고 행하는 것이 신앙이었으며 하지 않은 것은 게으른 것이고 신앙이 아닌 것으로 평가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어떤 행위가 있게 되면 그 모든 것은 열심히 행한 자기들의 공로로 돌렸던 것이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심으신 귀한 포도나무로 살아가는데 실패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했다는 것은 세상 그 누구도 포도나무로 살아갈 수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로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포도나무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인간의 실체임을 생각한다면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참 포도나무라는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4-6절에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고 말씀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아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인간은 실패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없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들은 열매를 맺으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열매를 맺어내는 가지가 되라고 독촉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모아다가 자기만 천국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다같이 천국가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농부로 비유하십니다. 농부는 나무를 가꾸고 기르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을 가꾸고 기른다는 것입니까? 분명 이것은 이상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농부란 가꾸고 기른다는 의미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열매를 기다리고 원하는 농부의 심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이 가꾸고 기르는 것에 대해 가르치기 보다는 열매에 대해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열매를 맺어서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의 기도와 봉사 헌금 등등의 행위라는 것을 열매로 생각하고 그것을 맺어서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야 말로 이방 포도나무의 가지로 살아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열매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열매를 맺는 일에 실패할 사람들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저 안에 저가 내 안에’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참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로 살아갈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열매는 내가 맺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자연히 맺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지입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가지는 다만 나무에 붙어있음으로서 나무에 의해 열매가 맺히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참 포도나무의 가지로 접붙이셨습니다. 따라서 접붙임 받은 가지답게 사는 것은 내 스스로 열매를 맺겠다고 나서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예수님으로 되어질 뿐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신자가 주안에 있으면 주님에 의해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안에서 자연히 주님의 것이 열매로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어떤 열매로든 오직 주님만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안에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지가 된 것, 이것이 복입니다.
(95강) 15:7 기도의 기쁨
마태복음 6:31-32절에 보면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기도에 대해 생각하면서 항상 이 말씀을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분명 세상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공중의 새가 하나님께 기도했기 때문에 먹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 역시 우리의 기도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보면 우리는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은 이미 나에게 충족하다는 것이 우리들의 생각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을 위해 따로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지를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살리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나에게 많이 있기 때문에 자연히 기도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필요한 것들이 성경이 말씀하는 것에 머물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을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으로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냥 사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누리는 삶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게 해줄 다른 것을 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아프리카 오지에서 생활한다면, 그렇다면 그곳에서 기도할 때 과연 어떤 기도가 나와지겠습니까? 지금처럼 자식들이 공부 잘하고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원하는 기도가 필요하겠습니까? 아프리카와 같은 곳에서는 그러한 기도가 의미가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성공이라는 말 자체가 의미 없는 말일 것입니다. 그곳이야 말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으로 모든 것이 충족되는 곳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굳이 기도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주어진 것으로서, 또한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셨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곳에서의 기도는 이미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본문에 보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에서 이 말씀을 생각하면 기도에 대한 무한한 꿈과 소망을 안겨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말씀은 마치 우리에게 알라딘의 마술 램프 하나를 안겨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도 할 것입니다. 램프를 문지르면 램프의 요정이 나와서 ‘주인님 뭐든지 말씀하십시오’라고 하는 것처럼 기도를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 얻을 수 있는 통로나 수단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현대 문명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엇이든’이라는 말은 많은 것을 상상하게 합니다. 자식의 출세 문제, 사업 문제, 직장에서의 승진 문제, 가정의 평화 문제, 등등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든’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대로 여러분이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이 말씀을 대한다고 했을 때 과연 ‘무엇이든’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겠습니까? 출세, 사업, 승진, 아파트, 고급차, 이런 것들이 전혀 의미 없는 곳에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는 말씀을 대했다고 생각해 본다면 결국 현재 우리의 기도라는 것이 우리가 처한 환경과 문명에 끌려가는 수준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내 환경을 초월하지 못하고 오히려 환경에 매이고 끌려가는 기도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해서 크게 잘못된 생각은 기도를 자신이 원하는 어떤 결과를 얻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에 대해 잘한다 못한다는 개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많이 기도하면 잘하는 것이고, 게을리 하거나 하나님이 주신다는 믿음이 없이 하는 것은 잘못하는 것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이 자신을 포도나무로 우리를 가지로 비유하신 것은 열매는 나무에 의해서 맺어지는 것이지 가지가 스스로 맺을 수 없음을 말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기도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겠다는 발상 자체가 가지다운 자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로부터 독립하여 살아가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하시다가 기도에 대해서 언급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지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든 구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지에게 무엇이든 구하라고 말씀한다면 그것은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구하라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5절에 보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과실을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과실은 우리 스스로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과실은 내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내 안에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안에 있으면 저절로 맺어지는 것이 과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예수님 안에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신자가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행위적인 문제가 아니라 관계 문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관계는 곧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그 행위를 믿는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결국 믿음은 예수님이 행하신 십자가의 은총으로 인해서 내가 살아가고 있음을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것이 주안에 사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나를 살리셨음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자기 스스로 뭔가 해보겠다고 나서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기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기도만 하면 준다’는 뜻이 결코 아니라 너희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기도는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가지의 자세로 살아가는 신자들에게서 보여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구하라고 말씀하기 전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말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안에 거하는 신자라면 과연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이러한 신자라면 무엇을 구해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구할 것입니다. 그래서 다 들으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기도할까?’를 생각하기 보다는 먼저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 큰 기쁨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구하면 다 이루시겠다는 놀라운 약속안에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자입니다. 과연 우리가 그러한 신자인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 소원을 두고 기도할 수 있다면 그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은총과 복을 누리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96강) 15:7-10 사랑안에 거하라
9절에 보면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이 나오고, 이어서 10절에서는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두 말씀을 연결해 보면 누구든 쉽게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뜻이구나’라고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들은 생각처럼 간단치가 않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계명을 지키는 것은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계명을 지킨다는 문제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뭔가 실천하고 행하는 문제를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십일조를 하는 것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명을 지킴으로써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면 적어도 계명을 지키기 전까지는 사랑 안에 거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우리의 행함에 대한 대가로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이며 자비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것 하나만이 근거가 되어서 우리를 사랑 안에 있게 하는 것이지 우리의 실천이 근거가 되어서 되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점을 이해하신다면 인간 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에 그 결과로 뭔가가 주어진다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10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10절은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하신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은 말씀에 대한 실천을 함으로써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되었다고 생각해야 합니까? 다시 말해서 처음에는 아버지의 사랑에 거하지 아니하시다가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 대가로 사랑 안에 거하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분명히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런 것이 아니라면 우리 역시 그런 의미에서의 지킴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계명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린 ‘계명’이라는 말씀을 대하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조목조목 실천하는 것으로 떠올립니다. 주일을 지키라든지 십일조를 하라든지 기도를 하라든지 봉사를 하라는 등등의 실천 항목을 계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계명을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12절에 보면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계명을 사랑하는 것으로 결론짓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말씀이 어떤 순서를 가지고 진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7절에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는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문제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으로 조금 구체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10절에서는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함으로써 무엇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고, 12절에서 계명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하심으로써 내 안에 거한다는 문제가 확실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신자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함으로써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 말씀드리지만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님도 나를 사랑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12절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구절을 봐도 예수님의 사랑은 이미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기 전에 이미 주어진 것이 하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하늘의 사랑을 받은 자답게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라 그것으로 너희가 내 사랑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이 확증 되어진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며 살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아무나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 있는 신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를 깨닫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성품이 없습니다. 사랑한다고 해봐야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이성에 대한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욕하고 핍박하는 자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성품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나를 핍박하는 자를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고, 그러한 깨달음에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을 핍박하고 주님을 배척하는 자로 살아가는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주님의 사랑이 참으로 크고 위대하다는 것을 보게 되고 그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님의 사랑 안에서 비로소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과실이 무엇이겠습니까? 9절과 10절의 말씀을 비춰볼 때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맺을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사랑을 우리가 맺어야 할 과실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 사랑이라는 과실을 맺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가지로서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말라죽을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과실은 신자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살아갈 때 저절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날마다 주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마음 깊이 깨달으면서 그 사랑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자로 살아갈 때 주님의 사랑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허물을 용서하신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고 덮어주는 자로 살게 하실 것이고, 우리의 죄에 대해 항상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주님의 사랑처럼 우리 역시 형제에 대해 오래 참고 기다리는 자로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그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있음이 증거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이 증거되어지는 것입니다.
신자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갑니다. 즉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참으로 놀라운 사랑에 매인자로서 사랑에 요구하는 삶을 기쁘게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만이 누릴 수 있는 복된 삶입니다. 신자로서의 감사와 기쁨은 주님의 사랑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거하는 자로 사십시오.
(97강) 15:11-15 기쁨
11절에 보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인데, 이것을 예수님이 내가 기뻐하는 것을 주심으로써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해주시겠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11절을 그러한 시각으로 이해함으로 인해서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크게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주님이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시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바르게 이해하고 정립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쁨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대개 보이는 반응은 ‘기뻐할 일이 있어야 기뻐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기뻐할 일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원하는 기뻐할 일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두말할 것 없이 세상의 일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11절의 말씀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기쁨을 충만하게 하시겠다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라는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간과해 버리기 때문에 내가 기뻐하는 일을 이뤄주심으로서 나에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기쁨을 우리 안에 있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기뻐하신 그 기쁨으로 우리 마음이 충만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기뻐하는 것이 전혀 달라진 사람이 되게 하시겠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14:27절에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구절 역시 11절의 말씀과 비슷합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은 예수님의 평안을 우리에게 줌으로서 평안을 누리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원하는 평안을 누리게 해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렸던 그 평안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평안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되고 근거가 되는 것으로 여기는 세상의 것이 주어질 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조건과 환경들이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 사람들은 평안과 안정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조그만 염려거리만 생겨도 금방 평안을 잃어버리고 마음이 흔들리고 요동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러한 평안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기쁨이 세상 것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듯 평안 역시 환경과 조건에서 오는 것을 말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신 가난한 분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제자들도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고 엉뚱한 말만 합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평안은 커녕 참으로 불행한 삶을 사셨다고 해도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평안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의 평안은 세상적인 물질, 조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평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것을 힘으로 삼는 삶을 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는 하나님이 힘이셨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기쁨이며 평안이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이것을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다는 것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예수님이 주시겠다는 것을 과연 우리가 기쁘게 받고자 하느냐는 것입니다. 과연 내가 예수님의 기쁨으로 충만하고자 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세상 것을 기쁨의 조건으로 여기지 않음을 뜻할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예수님의 것을 받아 누리고 예수님의 것으로 마음이 충족해지는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14절과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여기 보면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는데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종이라고 일컫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서신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된 나 바울은’이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사도 역시 자신을 예수님의 종이라고 일컫고 있는데 정작 예수님은 너희를 종이라고 하지 않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를 예수님의 종이라고 하면 안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종을 다른 의미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수준의 종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사도가 자신을 종이라고 하는 것은 주인의 뜻에만 복종한다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즉 사도가 말하는 종의 의미와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의 의미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주인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왜 이렇게 하는지 그 마음을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만약 주인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그 이유도 모르면서 ‘주인이 말했으니까 실천하자’라고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예수님이 말씀한 종의 수준인 것입니다.
현대 교인들은 말씀을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기 보다는 말씀하신 것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종의 수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주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가? 그 마음을 헤아리는데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과 종이 아닌 친구의 관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제부터 나는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만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로 여겨주시는 것이지 내쪽에서 예수님을 친구로 대하는 관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친구라는 말씀을 하십니까? 친구라는 말은 종과 대비된 관계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종이 주인의 하는 것을 모른다면 친구란 주인의 하는 것을 아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로 살아가는 신자를 친구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는 자가 친구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2,13절을 보면 예수님이 명하신 것은 곧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는데, 이 큰 사랑을 보이신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이처럼 친구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형제에 대해 서로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어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한다면 그는 예수님의 마음을 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친구로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신자를 친구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를 예수님의 것을 나누어 받는 관계로 불렀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것을 나누어 받을 마음이 없다면 그는 예수님의 친구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신자의 관계는 예수님의 기쁨을 나누어 받는 관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마음을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목숨까지 버리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하며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바를 따라 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참된 믿음이 있는 신자이며 예수님이 친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기쁨을 달라’ ‘평안을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달라고 하기 이전에 나는 과연 예수님과 친구된 관계에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기쁨은 버리고 예수님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삼기를 원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것을 나누어 받는 친구의 관계에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신앙은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을 나누어 받는 관계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그 마음을 따라 살기를 기도하며 힘쓰시기 바랍니다.
(98강) 15:16-20 신자와 세상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 알게 된 것은 자신의 부끄러움이었습니다. 벌거벗은 것이 부끄러운 모습이라는 것을 아는 지식이 있게 된 인간이 무엇이 부끄러운 것이고 무엇이 부끄럽지 않은 것인가를 스스로 판단하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지식에서 인간이 판단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있는 것을 내가 소유하지 못할 때 그것을 부끄러움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세상 것을 기준으로 해서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앞에서 초라하고 작은 집, 그것도 셋집일 때 그것을 부끄러움으로 여기는 모습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세상에서 부끄럽지 않은 자로 살려고 하는 마음이 신자로 하여금 신앙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부끄러운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서 세상의 것이 필요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힘쓰는 삶이 되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 것을 얻기 위해서는 불의와도 타협을 해야 하고 세상이 살아가는 것처럼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입니다.
18-20절을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 속한 자는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했던 것처럼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대개 믿음에서 생각하는 것은 기쁨을 누리고 천국을 소망하면서 평안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지 신자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대부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세상 속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 정도로 생각할 뿐이지 본문의 말씀처럼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아야 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때로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고 반대를 받는 일이 있을 때 그것으로 당황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나는 정당한데 왜 이런 결과가 주어지느냐?’는 것으로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세상에서 정당하지 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거짓을 말씀한 것이 있습니까?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기 위해 사람들을 이용한 적이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진리만을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예수님을 반대하고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뿐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신자란 자신의 길을 포기하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는 사람을 일컫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기 때문에 예수님의 시대나 지금의 시대나 전혀 변하지 않는 세상에 의해서 예수님처럼 미움을 받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오히려 세상이 미워하는 것으로 인해서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이 증거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반응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정당하게 행했으니까 세상이 나를 인정할 것이다’는 계산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겸손과 온유에 대해 말하면서 예수님을 본받아 살 것을 말하면 ‘내가 그렇게 살면 나를 보고 변화된 사람이 있을까?’라는 계산을 하게 됩니다. 아내가 믿지 않는 남편 앞에서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면 남편이 감동을 받아서 변화하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가지고 용서와 겸손과 온유를 행하려고 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신앙적으로 살아도 세상의 반응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으로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럴 때 ‘내가 이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라는 의심과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신자가 바르게 살면 세상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큰 착각은 없습니다. 신자가 아무리 바르게 살아도 세상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변할 것을 기대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바르게 살아서 세상이 변한다면 무엇 때문에 아들을 보내서 죽게 하시겠습니까? 차라리 신자를 많이 만들어서 바르게 살게 하시는 것이 더 옳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신자를 만들어서 그들을 바르게 살게 해서 변화시키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세상을 다 신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신자가 신앙으로 살아야 할 이유는 누군가를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유는 예수께 속한 자이기 때문에 신앙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자가 세상의 방식과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예수님께 속한 자는 예수님의 생각과 뜻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자신이 누구에게 속했는가를 분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신앙으로 살아갈 때 어떤 불이익이 있게 되고 손해가 있다고 해서 ‘신앙으로 사는 것은 손해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은 세상처럼 세상 것에 가치관을 두고 살아가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애당초 하늘에 모든 가치를 두고 산다면 세상 것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그것을 손해라고 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이기 때문에 세상은 신자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바르게 살고 깨끗하게 사는 사람을 원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자신에게 가까이 있는 것은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나와 가까이 함으로써 자신의 더러움과 악함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17절에 보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하고 뒤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것과 미움을 받는 것이 서로 연결되어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실 때는 우리에게 실천해야 할 사항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께 속한 자에게는 자연히 맺어지는 열매의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에서도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서로 사랑하는 자로 살아간다면 그것으로 예수께 속한 자임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것도 같습니다. 미움을 받음으로써 예수께 속한 자임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시고 미움을 받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미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보다는 세상에서 예수께 속한 자로 살아갈 것을 말씀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께 속한 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 속한 자로서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세상에 대한 기대도 버리고 손해라는 생각도 하지 말고 이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는 것만 생각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99강) 15:21-27 보혜사 성령
지난 시간에는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했던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을 미워할 것이라는 내용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현대 사회를 바라보며 그 말씀을 생각해 본다면 한가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말씀처럼 현대 사회가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자유롭게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특별히 미움을 받는 일은 없으리라 봅니다. 그리고 현대인도 예수님에 대해서는 미워하는 마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성인이라고 하면서 본받아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했다는 것은 예수님 당시 사회에만 국한된 것일까요? 그렇다면 그러한 구절은 지금의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이 그때의 상황만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어지는 것이라면 결국 문제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로 존재하는 신자가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증거했다면 그 현장에서는 반발과 미움이 드러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했다면 현 시대의 사람들도 예수님을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나 현 시대의 사람들이나 타고난 본성은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미워한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그들의 죄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22절에 보면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죄가 무엇인지를 몰랐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심으로써 죄로 여기지 않았던 것들이 모두 죄였음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서 거들먹거리던 사람들이 모두 악한 죄인이었음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평소 선한 일을 하고, 신앙적인 행위를 한다는 것 때문에 스스로 의인이라 자부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미워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말씀들을 보면 인간의 감추어진 악을 드러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말씀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살인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속에 감추어진 본성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본성이 악한 이상 인간의 모든 행위도 악할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미움을 속에 가지고 있으면서 살인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것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속에 탐욕을 가지고 있으면서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속에 악한 것이 가득하면서도 평소 기도하고 금식하고 구제하고 십일조를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람 행세를 했던 사람들이 결국 의인이 아니라 악한 자들이었음이 증거된 것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 꼭 손을 씻고 먹는 바리새인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판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악하다고 규정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인 바리새인들에게는 걸림이 되지 않을 수 없었고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십계명에 보면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말합니다.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것은 탐심을 가져도 곧 죄가 되는 것입니다. 과연 이 죄를 피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교회들은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 주로 말하는 것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과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버이날이 되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설교를 의례적으로 한번 하고 지나갈 뿐입니다.
십계명에 지켜도 되고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명입니다. 그리고 그 계명이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에게 있는 탐심을 죄라고 여기기 않습니다. 아예 자신의 탐심에 대해서는 의식조차 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탐심이 있는 것을 죄로 여기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십일조 하지 않고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을 가지고 죄를 지었다고 하면서 회개하라고 할 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탐심이 가득하면서도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자신들의 행위를 내세워서 스스로 의인이라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실체가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누구든 자신의 죄가 지적될 때 그것을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칭찬듣기를 좋아하지 자신의 약점이나 잘못한 것에 대해 지적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죄가 드러날 때 과연 예수님을 환영하겠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인간의 미움을 받으면서도 아랑곳 하지 않고 죄를 말씀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바울의 말대로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피흘리심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는 우리의 머리로서 깨닫고 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악하고 큰가를 발견했을 때 그 모든 죄를 용서하신 주님의 은혜의 분량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드러나고 죄를 말하는 것을 거북스러워하고 기피하려고 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말하고 기뻐한다는 것은 분명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가지고 선악을 판단하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속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의인이라, 착하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약 다른 사람의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아마 사람을 만나는 것을 기피하게 될 것입
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는 것이 편한 것은 상대방이 내 속을 보지 못한다는 것 때문입
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속을 보십니다. 다만 예수님을 그러한 분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주저함도 없이 예수님께 나온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23-24절을 보면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아무도 못한 일’이라는 것은 죄를 드러내신 일을 두고 한 말입니다. 즉 아무도 인간의 죄를 드러내지 못했고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게 하는 일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처럼 자신의 의를 주장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며, 우리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도우심으로써 죄를 깨닫게 하시고 죄인 됨을 인정하는 사람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보혜사란 옆에서 도우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도우심으로써 죄를 알게 되고 죄인 됨을 고백하며 회개하는 자가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 됨을 알고 죄를 고백하게 되어진 것도 역시 은혜며 도우심이지 우리의 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행위를 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속을 보면서 모든 인간을 악하다고 규정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는 의가 되지 못하고 예수님의 행함만이 의가 되어서 나를 구원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돕기 위해 보혜사 성령이 오셨습니다.
(100강) 16:1-4 기독교와 하나님
2-3절에 보면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는 말씀을 합니다. 예수 믿는 신자를 죽이고 핍박을 하면서도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는 이유를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린 이 말씀에서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목으로 행하는 일들이 과연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인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고, 또한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안다고 할 것이지만 과연 진심으로 아는 자로 살아가는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봐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이 신자를 죽이고 핍박을 한 것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이 진리고 옳은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아는 것과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은 배척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 대한 신앙인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유대인의 모습은 우리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린 흔히 진리 싸움이라는 것을 많이 합니다. 서로가 아는 것을 가지고 내 것이 옳음을 증명하는 싸움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확신을 가지게 되면 어떤 논리에 대해서도 양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지 않고 주장하는 것이 곧 신앙을 지키는 것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리든 뭐든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말하는 나 역시 태어날 때부터 진리를 아는 자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기 전에는 우리 역시 믿음이 없는 자들이었고 복음이 아닌 것을 복음으로 주장하며 잘못된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우리에 대해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으시고 기다리시며 때가 되매 부르셔서 진리를 알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로 인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임을 안다면 그가 하나님을 아는 앎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어떤 악한 자에 대해서도 기다리시고 때가 되면 부르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비록 복음을 알고 진리를 깨달은 신자라 할지라도 ‘나는 복음을 아니까 복음을 모른 사람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배척하고 심판하자’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비록 복음을 안다고 할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안다고까지 말하기는 곤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복음을 알았다고 해서 남을 심판할 권한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복음을 알게 하셨다면 그 복음을 나누라는 하나님의 뜻이 주어진 것이고, 복음을 나누어야 할 자들은 복음을 모르는 자들일 수도 있고 전혀 복음이 아닌 것을 복음으로 주장하는 자들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주장하는 잘못된 진리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배척을 하되 잘못된 것을 말하는 사람까지 배척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진리를 모른 상태에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진리를 모르는 나를 배척하셨다면 지금 우리가 과연 복음을 아는 신자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 은혜를 안다면 신자가 보일 것은 기다리고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기독교는 옳고 그름을 가려서 옳은 것만 남기고 그른 것은 몽땅 없애버리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무시한 죄인들을 부르시고 신자 삼으시고 하나하나 고쳐 가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여주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죄인입니다. 내가 복음을 안다고 해서 죄인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비록 예수님의 피로 의인으로 여겨지기는 하지만 여전히 의인이 의인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죄 속에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복음을 모른 자가 있다고 할 때 그 앞에서 ‘너는 죄인이고 나는 의인이다’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바리새인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알면 알수록 자신의 죄를 알아가는 것이 옳습니다. 자신의 나약함을 발견할 뿐입니다. 복음을 안다고 해서 자신이 정당해진다면 그것은 잘못된 복음이며 다만 지식에 머무는 복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칫 복음을 안다는 함정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대해 같은 이해를 가지고 소위 복음을 안다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면 서로가 죄인이라고 하면서 잘난 것이 없다며 자랑하지 않는 모습을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모르는 자 앞에서는 죄인의 모습이 사라져 버리고 마치 복음을 안다는 것이 복음을 모르는 사람을 다스리고 지배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내 앞에 있다면 그것은 그에게 내가 알게 된 모습을 나눠 주라고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으로 여겨야 합니다. 설령 그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이 나를 대하신 것처럼 기다리고 참으며 기도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며 기독교의 참된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자는 틀린 자들을 가려내어서 그들을 쳐부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신자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사랑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나에게 주어진 은혜입니다. 내가 어떤 존재였는데 어떤 존재로 되어졌는가?를 깊이 생각할 때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항상 의인의 입장에서, 옳다는 입장에서 틀린 것을 구분하고 틀린 것에 대해서는 판단하고 심판하려는 자세를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신자로 부르셔서 맡기신 일이 무엇입니까? 틀리고 잘못된 사람을 가려내서 몽땅 심판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맡기신 일은 세상에서 증인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시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 하는 자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신자를 미워한다면 미움을 당연한 것으로 받되 미워하지 않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을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증거 해야 할 곳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나 자신을 정당하게 만들려고 하지 마시고 나누어 줘야 할 것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위해 오래 참고 기다리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101강) 16:5-12 성령의 역할
7절에 보면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로 가시고 성령이 오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제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예수님이 계시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이 계시면서 자신들을 돕는 것이 유익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가시는 것이 유익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육신으로 계시는 예수님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을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성령이 오신다는 것보다는 예수님이 직접 여러분과 함께 하셔서 이적을 베푸시는 것을 보면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앞설 수가 있습니다. 성령이 오신다고 해서 여러분이 놀라운 이적을 행하는 능력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오셨는지 오시지 않았는지도 알 수 없는 것이 성령이라면 예수님의 이적을 직접 목격하며 사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여러분이 날마다 예수님의 이적을 목격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끝까지 믿음이 변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사람이 놀라운 이적을 체험하고 목격하면 갈수록 좀 더 나은 이적을 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적에 대해서도 시큰둥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육신으로 함께 하신다고 해서 그 믿음이 변하지 않을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유익입니까? 바로 성령이 오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믿음을 도우시고, 날마다 우리를 붙들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들어 놓으시는 것이 끝까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은 상태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의지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육신으로 계시는 예수님을 믿고 있다가 제자들을 떠난다고 하시자 마음에 근심이 되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믿음의 대상이 자기들에게서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불안과 염려인 것입니다. 이제는 무엇을 믿고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수준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항상 의심하면서 믿지를 않습니다. 보이는 것만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을 돕기 위해 성령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구원의 보증이며 기쁨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이 오시는 것은 신자에게 신비한 체험을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고 안받고를 자기 마음에서 느껴지는 어떤 현상을 가지고 판단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무엇을 위해서 오시며, 우리는 무엇으로 성령이 내 속에 거하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8-11절까지 보면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것입니다.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세상의 잘못된 생각을 책망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책망하시는 기준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죄와 의와 심판이 세상에 증거되었기 때문입니다.
9절에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않음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을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까?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말씀대로 선인이든 악인이든 구분하지 않고 해를 비취고 비를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힘과 노력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단순히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은혜로 살았음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감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죄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착한 일을 하며 산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음을 모른다면 죄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이것을 책망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시고 죄가운데 있던 나를 책망하시고 애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은 의를 인간의 착한 행동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를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셔서 다시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이것이 왜 의가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틀리고 자기들이 옳다고 해서 예수님을 죽였는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옳은 분은 예수님이라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예수님만이 옳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것만이 의롭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의로운 자가 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의가 없습니다. 예수님만 의롭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의로 여김 받고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는 자는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의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 예수님의 행함만을 자랑하고 의지할 뿐입니다. 이것이 의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깨달은 신자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의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시고 의에 대하여 책망하시기 때문에 어떤 자기 행위도 의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11절에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 임금은 권세 잡은 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 권세 잡은 자에 의해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심으로써 세상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다면 남은 것은 심판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기준이 되어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님을 기준으로 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누구를 책망하십니까? 바로 세상속의 자기 백성을 책망합니다. 죄가 무엇이며 의가 무엇이고 심판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중심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에 의해 책망을 받고 살아가십니까?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죄에 대해 책망을 받으십니까? 예수님의 행함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행함을 바라보는 것에 대해 책망을 받으십니까?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심판임을 책망 받으십니까? 책망이 없이 살아간다면 그것은 성령과 함께한 삶이라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의 속에는 불의가 가득차 있는데 성령이 내 안에 오신다면 불의에 대해 책망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진심으로 성령이 함께한 신자는 자신의 불의함을 책망하면서 날마다 의로우신 주님만 의지하며 살아가고자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의가 없음을 알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의 의의 행위만 자랑하고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깨달으며 세상 것을 기준하여 사랑과 은혜를 평가했던 자신을 책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책망하며 주님만 바라보는 그가 곧 성령이 함께한 신자입니다.
(102강) 16:12-20 성령이 오시면
12절에 보면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는 말씀을 합니다. 지금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의 3년 공생애 동안 함께 동행하며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또한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몸소 겪은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것이기에 제자들조차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16절에 보면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예수님은 13장에서부터 제자들을 떠나실 것에 대해 말씀을 하셨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을 떠나신다는 것에 대해 이해를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17절에서도 보면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나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나 다시 볼 것이라는 것이나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말씀에 대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수준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토록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이 세상에서 다른 나라를 만드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새로운 예수님의 나라를 만들어서 예수님이 왕이 되어 다스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자신들은 그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꿈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의 공로를 내세우며 자리다툼까지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세상에서 활동하고 세상을 다스릴 분으로 알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늘로 가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가셔서 성령이 오시고, 성령이 오셔야 그들이 예수님을 다시 만나고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모든 문제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성령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 스스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들을 도와줄 누군가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고 원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항상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수준이고 제자들 역시 이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 본래의 생각에서는 예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인간 본래의 생각에서 이해되는 예수님은 우리를 복주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생각으로 나를 믿는 것은 나와 함께 죽는 것이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죽는 것을 불행으로 알고 있는 수준으로 주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을 어찌 이해하겠습니까? 죽음 자체를 겁내고 두려워하는 수준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진리는 세상 모든 사람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막혀 있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 스스로 찾아갈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는 것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본래 생각과 지식은 접어두고 하늘에서 오시는 분의 도움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의 것은 하늘의 지혜로만 알 수 있는 것이지 세상의 지혜나 지식으로는 접근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예 진리를 진리로 여기지 않고 팽개쳐 버리는 것이 세상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인정해야 하는 것은 인간 본래의 생각이 살아있는 우리는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절대로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진리를 알고 있고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면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주어진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자신을 알고 성령님을 알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4절에서는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고 말합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예수님의 것을 말씀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성공이고 출세입니까? 예수님의 것은 지는 것이고 죽는 것이고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 성령이 오신다는 것인데, 왜 성령이 와서 알려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고, 지기 싫어하는 본성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지는 것, 죽는 것, 섬기는 것이 진리이며 예수님의 것이라고 말해봐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셔서 말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에게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죄와 의와 심판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을 때, 예수님의 것이 왜 진리인가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 힘든 것은 예수님의 것으로 살기 보다는 내 것으로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 것은 이기는 것이고, 높아지는 것이고, 섬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것과는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린 항상 나는 죽어서는 안되고, 져서도 안되고, 낮아져서도 안된다는 유혹속에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이 낮아지신 것처럼 낮아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으로 너희도 죽으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 말이 지극히 타당하고 내가 목숨을 다하도록 순종해야 할 말씀으로 들려진다면 그분이야말로 성령이 함께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0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곡하고 애통한다는 것은 장차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서 곡하고 애통하게 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심으로 근심하게 되지만 그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이런 마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아니라 내가 죽었어야 마땅함을 아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있기 때문에 주님의 죽으심 앞에서 애통하고 곡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마련하신 하늘의 천국을 생각할 때 도리어 기쁨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오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신자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것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103강) 16:19-22 근심과 기쁨
16장을 보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조금 있으면 나를 본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중점적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왜 이토록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제자들의 어리석음과 무지함을 보여줌으로써 오늘 우리 자신이 제자들과 같은 수준에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기대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기대한 것은 십자가의 죽으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나약한 모습 말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앞장을 서서 로마를 부수고 이스라엘을 굳게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죽으신다고 하고 떠나신다고 하니까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도대체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 이해가 안될 것입니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이 그냥 죽고 만다면 무엇 때문에 오신 것인지 이해 안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14:3절의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다시 가시는 이유는 제자들을 예수님이 계신 것에 있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고 관심거리인데 제자들은 관심과 기대를 전혀 다른 곳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육신이 아니라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서 육신의 것을 기대한다면 결코 예수님의 일이나 말씀에 대해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육신이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되는 것을 찾습니다. 이것은 누구에겐가 배워서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래의 생각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나온 생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육적인 생각을 영적인 생각으로 바꾸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는 예수님을 본다고 말합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하늘로 가셨고 육신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볼 수 없고 보이지도 않는데 신자는 예수님을 본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본다는 것입니까? 볼 수 없는데도 그냥 보는 척 하는 것입니까? 물론 개중에는 예수님을 본다는 의미도 모르고 또 보지도 못하면서 남들이 본다고 말하기 때문에 덩달아 본다고 말하는 것도 있겠지만 신자는 분명 예수님을 보며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보며 살아가십니까?
오늘날 예수님을 본다는 것은 육신의 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으로 살아가며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안보이는 분이지만 영적인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보이는 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4:19절에서 조금 있으면 세상은 예수님을 다시 보지 못하지만 제자들은 본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육신으로만 보고 사는 제자들에게 믿음이라는 새로운 영의 눈을 주신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성령이 오심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주어질 때 예수님을 볼 수 있고, 이것이 곧 그들이 살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성령이 오심으로써 세상의 사람이 둘로 구분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도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자가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오심으로 믿음이 주어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해당되는 복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의 신자의 구별입니다. 신자에게는 예수님을 본다는 것이 곧 살았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알았고 본다는 것이 곧 생명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곧 기쁨입니다.
20절에 보면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된다는 말씀을 합니다. 이것은 근심거리가 되는 일을 없애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세상을 육신의 눈으로 보게 되면 모든 것이 근심거리고 염려할 것 밖에 없습니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고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없는 세상살이에서 남는 것은 근심과 염려밖에 없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의지하기에 근심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아셨기 때문에 근심할 것에 대해서도 말씀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로 가신 예수님을 볼 수 있어질 때 그들에게서 근심 대신에 기쁨이 있게 될 것입니다. 육신의 눈이 아니라 하늘을 소망하는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될 때, 세상 일이 내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가고 있음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는 그 일이야 말로 나를 살리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에 거하는 보증임을 깨달을 때 내 마음대로 안되는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기쁨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내 일이 잘되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믿음이 없는 사람의 수준과 같습니다. 성령이 오신 것은 우리를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새로운 하늘의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살아 있다는 것은 숨을 쉬고 맥박이 뛰는 것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향해 마음이 움직이는 것으로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생명이 있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예수님에 대해 마음이 움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죽었기에 예수님에 대해 반응할 수 없는 것입니다.
21-22절에 보면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는 아이 낳는 고통으로 인해서 근심을 하게 되지만 아이를 낳은 후에는 그러한 고통과 근심은 다 잊고 다만 아이를 낳은 기쁨만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아이를 낳았을 때의 기쁨은 보지 못하고 다만 고통만을 생각하고 근심을 합니다. 아이를 낳는 고통도 낳았을 때의 기쁨을 얻기 위한 잠시의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심으로써 근심을 하게 되지만 이것은 빼앗기지 않는 하늘의 기쁨을 제자들에게 주시기 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주신 것을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을 소망하기보다는 세상을 더욱 소망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루신 하늘의 것으로는 기뻐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분명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어지는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다만 우리의 생각이 육신에 머물므로 인해서 기쁨을 상실한 채 근심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입니다.
신자는 새롭게 태어난 사람입니다.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은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자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시 태어났는데 옛사람의 생각 그대로 가지고 살아갈 수는 없지 않습니다. 새롭게 태어난 사람답게 새로운 생각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로운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좋은 것, 선한 것으로 여겼던 것들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며 선한 것이 아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를 유익하게 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들이 오히려 해가 되는 것으로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볼 수 없었던 하늘의 귀한 것을 보게 되고 그것으로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사는 것이 힘들다고 해서 주저앉지 마시고 여러분이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 기쁨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104강) 16:23-24 구하라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응답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기도는 하나마나한 것이고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도의 응답을 구하는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문제입니다. 대개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기도를 열심히 한다는 것으로 신앙적인 문제는 정당화 합니다. 자신의 신앙은 기도하는 것으로 이미 증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내게 관심을 갖고 내 요구를 들어주시도록 하는데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것 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기도에 대해 너무 이방종교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기도에 대해서는 성경적으로 신앙적으로 바르게 정립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자신을 절대로 정당화해서는 안될 것이며 오히려 기도하는 자신에게 어떤 탐욕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닌지 더 긴장하며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많이 열심히 기도하라는 것은 성경에 없는 내용입니다. 성경에 없는 내용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말씀을 벗어난 것이며,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되 참된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신자들에게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는 사람들이 기도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기도는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도로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23절에 보면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나님께 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다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23절의 말씀은 앞뒤가 맞지 않는 애매한 구절이 돼 버립니다. 그날에는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시고 뒤에는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내 이름으로 주신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나님께 구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즉 아무것도 기도할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든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주신다는 말씀을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실 아무것도 구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일 것입니다. 23절의 말씀은 신자가 기도에 있어서 어떤 존재인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즉 23절의 말씀을 그대로 이해해 보면 신자는 구할 것이 없는 사람이며 동시에 구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기도에 있어서 신자는 이런 사람인 것입니다.
구할 것이 없는 사람이며 동시에 구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도대체 뭘 의미하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6장에 보면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1-33절)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신자는 분명 구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즉 세상을 살아가는데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대로 주실 것이기 때문에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이러한 말에 대해 좋지 않은 반응을 보입니다. 성경대로 말을 해도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세상 것이고, 세상 것만큼은 넘치도록 받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욕심입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의 것을 적게 달라고 기도하겠습니까? 결국 세상의 것을 우리의 기도를 따라서 주신다면 세상의 모든 질서는 무너지고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것은 하나님의 필요대로 주시기 때문에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구할 것이 없는 사람이면서 구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육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기도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지만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항상 기도해야 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육신의 문제를 영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육신의 문제를 육신의 시각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빨리 해결되는 것만을 구할 뿐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신자에게서 볼 수 있는 참된 기도인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문장대로 하면 지금까지 제자들이 기도하지를 않았는데 이제는 기도를 하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 의미이겠습니까?
‘지금껏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뜻과 일치된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뜻과 일치된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오심을 자신의 육신에 이익이 되는 쪽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뜻과 일치된 기도를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다는 것이지 기도라는 행위가 전혀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러한 말씀을 생각한다면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를 부지런히 했는데 정작 예수님 앞에서는 ‘너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다’는 말을 얼마든지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결코 내 신앙을 과시하기 위한 것도, 내 열심을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고백하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믿음에 있어서는 너무나 연약함을 알기에 믿음의 문제를 두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욕심을 가진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알기에 나를 아버지께 부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육신에 대해서는 기도할 필요가 없어지는데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성령으로 인해서 새로운 세계를 살아가게 된 사람입니다. 새로운 세계에서 구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문제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문제 해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에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것이 중요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자연히 기도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구할 필요가 없는 성도로 모든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성도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기도는 무엇이든 들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무엇이든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시고 기도에 담겨 있는 신자의 기쁨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05강) 16:25-33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 생명, 평안, 이러한 모든 것은 인간의 행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의 진리에서 벗어나 있으면서 구원을 원하고, 평안을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이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지 진리 밖에서 살아가는지를 항상 말씀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이 진리를 기초로 하여 세워진 것을 반석 위에 세운 집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바람과 풍랑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단단한 집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앙의 중요성은 얼마나 잘믿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 있느냐에 있습니다. 진리 안에 있지 않으면서 잘 믿겠다고 애를 쓴들 그것은 시작부터가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개인의 열심이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서 판단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도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게 하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린 것은 하나님이 신자에게 약속하신 ‘무엇이든 구하면 들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은 신자가 어떤 존재로 바뀌었는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즉 무엇이든 구하면 하나님이 다 들으시는 존재로 바뀐 것이 신자라는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24절을 보면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제자들은 지금까지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제자들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으로 되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26절에서 말씀하는 그 날이란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고 성령이 오시는 것을 두고 말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6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는 이 말씀에서 쉽게 이해가 안되는 것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을 문장 그대로 풀이하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하여 아버지께 기도하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내용이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앞의 말씀에 대해 제자들이 오해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이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게 되어진 자로 바뀐 것은 예수님의 기도로 되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고, 하늘의 것을 보게 되고, 무엇이든 기도하면 하나님이 다 들으시는 사람으로 되어진 것이 예수님이 아버지께 기도해서 되어진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27절 뒷 구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는 말씀을 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말씀하는 것은 제자들에게 되어진 모든 일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도,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것도,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 하시는 것도, 모두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행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를 향하신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드러내시고 그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확증된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으며 복을 달라고 하고, 사랑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은 결국 이미 확증된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사랑을 보이시고 사랑을 주셨는데 마치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 없는 것처럼 요구하는 것은 진리 안에 있지 못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32절에 보면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제자들은 무서워서 뿔뿔이 흩어지고 십자가의 고난의 현장에는 오직 예수님 홀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참으로 외롭고 쓸쓸한 것이 십자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홀로 계신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유는 아버지께서 예수님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3절을 보면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평안으로 이어지는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평안은 환경적이나 물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평안이 그러한 것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평안은 없어야 합니다. 가장 외롭고 쓸쓸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안을 누리셨습니다. 그것이 곧 아버지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서 제자들이 모두 도망을 쳐도 예수님은 혼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보면 그러한 말들이 말 자체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아는 지혜가 어떤 능력으로 드러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안다면 그 앎은 평안과 담대함의 능력으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33절에서도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우리의 말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되지를 못하면 신자는 무능력한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은 항상 그럴듯한데 삶은 나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택하시고 때가 되어 부르시고 하나님의 백성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살아온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한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려웠던 것 힘들었던 것,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시고 부르시기 위한 조치들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우리의 삶을 편안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만 우리의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붙들어 놓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쉬지 않고 우리를 세밀히 살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생각할 때는 우리에 대해 무관심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지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붙드시고 기어코 천국으로 집어넣기 위해 때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저와 여러분을 살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현재도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앞으로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평안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염려와 근심 걱정은 현재 일의 결과를 알 수 없을 때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되어질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염려와 근심 걱정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해가 되는 길로 밀어 넣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기에 어떤 일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염려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나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 때 비로소 평안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환난을 당할 때 담대하라는 것은 힘을 내라거나 용기를 가져라는 뜻이 아닙니다. 없는 힘을 어떻게 낼 수 있으며, 없는 용기를 어떻게 만들 수가 있습니까? 신자의 담대함은 아버지의 사랑을 믿는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결국 담대하라는 말씀은 아버지의 사랑에 거하라는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 아래 있습니다. 사랑이 우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평안을 누리기 바랍니다.
(106강) 17:1 영화
예수님이 세상에서 행하신 모든 것은 신자에게는 삶의 원칙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나는 나다는 식으로는 절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 나름대로의 원칙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 자체가 하늘의 원칙을 무시하는 것이고 예수님이 가신 길과는 다른 길을 가면서 천국에 가겠다고 설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은 단지 하나님으로서 능력을 보여주는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늘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고, 하늘나라 사람으로서 세상을 살아갈 때 그 삶이 어때야 하는가를 규정하는 원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의 삶의 원칙을 새롭게 정립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거기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7장은 모두가 예수님의 기도로 되어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의 기도는 예수님 개인의 기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기도의 원칙을 분명히 가르쳐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첫머리에 영화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이 하신 기도와 똑같은 말로 기도한다고 해서 예수님의 기도와 같아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화와 우리가 말하는 영화가 전혀 다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생각하는 영화의 의미가 다르다면 아무리 영화롭게 해달라는 말이 같다고 해도 절대 같은 의미의 기도는 되어질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영화라는 것은 영광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영화롭게 하라는 말은 영광스럽게 해달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화, 영광이란 육신의 조건과 신분이 나아지고 상승되는 것에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부러움을 받고, 존경을 받고, 높임 받게 되어지는 것을 영화롭게 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과연 그러한 의미로서 영화를 말씀하였겠습니까?
이부분에서부터 벌써 예수님과 우리의 생각이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 생각, 그 마음 모두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생각 모두를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각 뜻은 버린 채 예수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엉터리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어려운 문제입니다. 내 생각과 뜻을 버리고 예수님의 생각과 뜻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요 능력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영화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의 영화, 영광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구한다면 분명 그것은 잘못된 기도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광을 구하는 사람들은 ‘내가 잘돼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 아니냐?’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영광을 정당화하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아버지께 ‘아들을 영화롭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영화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1절 뒤에 보면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영화롭게 되는 것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아들을 영화롭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서 아버지가 영화롭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때가 이르렀사오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때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영화는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시는 것이 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됩니까? 십자가의 죽음은 세상으로부터 모든 멸시와 천대를 받으신 현장입니다. 영화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영화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고 완성된 현장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라는 일로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는 것 자체를 영화롭게 되는 것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영화는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증거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기도를 생각해 본다면 오늘날 신자와 하나님의 관계가 무엇으로 연관되어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세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전적으로 순종할 수 있기를 원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순종으로 인해서 개인에게 어떤 영향이 주어진다고 해도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하는 도구로 존재하기를 원하고, 그것을 자신이 영화롭게 되어지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임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일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뭔가를 드려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높이겠다는 발상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져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관심을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관심이 하나님께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믿음을 은혜로 받은 신자라면 관심이 점차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 정상인 것입니다. 이처럼 관심을 하나님께 두고 사는 신자라면 그가 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보다는 하나님의 일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증거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그것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린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는커녕 하나님을 방해하는 악한 종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두고 여러분의 마음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기도에 어떤 마음이 실려 있는가를 보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 곧 우리를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107강) 17:2 권세
본문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2절)라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아버지께 권세를 주신 것에 대해 기도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권세가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주어진 것인가를 분명히 하는 기도인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예수님은 우리들처럼 ‘무엇을 달라’는 기도를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 확인하는 기도를 하신 것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기도와 차이점입니다. 즉 우리들의 기도를 예수님의 기도와 비교해 볼 때 우리는 기도의 참된 의미에서 벗어난 기도를 할 때가 많음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달라고만 하지 이미 주어진 은혜를 확인하고 돌아보는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를 생각하며 은혜 받은 자로 살아가야 할 삶을 두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가 좀더 풍성한 유익을 누리는 쪽으로 나아가야 하고 고쳐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권세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권세하면 사람들은 권력을 상상합니다. 사람들을 다스리고 지배할 수 있는 힘으로서의 권세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권세를 받으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권세는 분명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다스리는 권력은 아닙니다. 사람을 지시하고 명령하는 권세가 아닌 것입니다. 교회를 보면 권세를 가진 사람이 난무합니다. 특히 목사가 목사에게 주어진 권세를 말하면서 교회를 지배하고 모든 사람을 다스리려고 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목사에게 권세를 주신 적이 없습니다.
또한 사회에서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든 그것을 교회에 가져와서는 안됩니다. 교회에서는 세상의 권력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는 죄인만이 존재하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를 보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서의 자신의 지위를 보게 되고, 결국 교회에서도 대우받고자 하고 섬김을 받으려는 악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어떤 지위나 소유를 주셨다면 그것으로 이웃을 섬기라고 주신 것임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직분 역시 결코 권세가 아닙니다. 어떤 직분이라 해도 사람을 다스리고 지배할 권세는 주어지지 않았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직 모든 신자가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돕고 섬김으로서 교회의 모습을 증거하는 일에 유익이 있게 하기 위해 직분을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애에서 예수님이 만민을 다스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까? 오히려 만민에 의해서 죽으시는 것만 있지 않습니까?
권세란 복종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예수님의 권세 앞에서 복종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권세는 도대체 어떤 권세입니까?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습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권세가 무엇이기에 세상이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까? 그리고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권세에 복종하는 자로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까?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권세를 주신 것은 예수님을 세상에서 높이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 즉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권세를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 죄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찾아 나오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다 할지라도 내 쪽에서는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에 대해 아예 관심을 두지도 않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자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붙들어서 죄에서 건져낼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힘을 가진 분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것을 권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권세는 우리의 심령을 다스리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붙들어서 다스리시며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는 힘이 바로 예수님의 권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권세에 복종하는 것은, 날마다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곧 복종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18-20절에 보면 “예수께서 나아와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을 주관할 권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하늘 아래 어디에 있든 예수님의 권세 아래 거하는 것이 됩니다. 어느 한순간도 예수님의 권세에서 벗어나지 않게 됩니다. 비록 매 맞고 고난 받는 것이 있다 해도 다 예수님의 권세 아래서 되어진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권세로서 제자들을 지키시고 다스리신 것은 제자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 믿음이 변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권세로 제자들을 다스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집니다.
오늘 우리들 역시 예수님의 권세 아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건지신 권세로서 여전히 우리를 다스리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가 아니면 우리는 한순간도 예수님에게 마음을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신앙과 힘을 자랑하지도 내놓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로 되어진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권세 아래 산다는 것은 굳건한 반석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가 우리를 그렇게 만드실 것입니다. 이 권세를 믿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세상을 바라본다면 주님의 권세는 권세로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천국을 소망하시고 천국이 우리의 인생의 전부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권세를 필요로 하게 될 것입니다.
(108강) 17:3 영생
영생이란 말을 하면 대개 ‘영원히 사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즉 부활과 영생을 함께 생각하게 되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서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존재하는 것을 영생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인가 하면 현재와 영생을 별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영생을 죽은 후의 일로 이해하게 되면 현재와는 거리가 먼 일로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결국 현재는 나중에 주어질 영생을 위해 예수를 믿는 것으로만 여겨질 뿐입니다. 즉 믿음을 나중의 영생을 위한 준비 작업 정도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영생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잘못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다시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영생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이다’라는 설명을 하지 않는다는 것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물론 신자는 부활하여 영원히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산다는 것은 신자에게만 주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자들이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좀 이상한 말로 들리지 않습니까? 하지만 요 5:29절의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부활은 선한 일을 행한 자나 악한 일을 행한 자 모두에게 주어지는 일입니다. 다만 생명이나 사망이냐가 다를 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악한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잘 아실 것입니다. 이러한 얘기는 사도행전에서도 볼 수 있는데 24:15절의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는 말씀에서도 역시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사는 것을 신자들의 몫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태로 영원히 존재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부활은 부활이되 생명의 부활이 있는 반면 사망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영생을 단지 시간적으로 영원히 사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사실 놀라운 약속이며 복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놀라운 복을 약속받고 있는 것이 신자이면서도 이 영생의 복이 현재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별 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영생에 대한 잘못된 이해, 또는 그동안 상식으로 알고 내려오던 통속적인 시각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영생이 복이 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앞서 말한 대로 영원히 살기 때문에 복입니까? 그렇다면 악한 자가 영원히 사는 것도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사망의 부활이란 영원한 멸망에 빠지는 것을 뜻합니다. 사망의 부활에 처할 수밖에 없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죄를 멸하시는 것이 마지막 때에 있을 일이기 때문에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자신의 죄와 함께 멸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부활로 나오는 자는 죄없는 자로 다시 살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죄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영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단지 오래 산다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에 거할 수 있는 것은 죄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죄없는 자입니까? 분명 우리는 죄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죄있는 자가 죄없다 함을 받을 수 있는 복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믿는 것이 곧 예수 안에서 모든 죄가 해결된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이 곧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생명 안에 존재하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영생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인은 영원한 사망에 거하게 됩니다. 그들이 영원한 사망에 거하는 이유는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결코 용납하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죄의 값을 철저히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친히 그 죄값을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 예수님을 자신의 의로 여기고 믿는다면 예수님이 받으신 그 죄값을 보고 그냥 넘어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복으로 여기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복을 알지 못하는 가난한 신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에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서 모든 사람들의 장자를 치셨습니다. 그때 살아난 사람은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간 것입니다. 어린양의 희생의 피가 장자를 살린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양의 피로써 살아난 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무리들을 가리켜서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오늘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은 신자인 것입니다.
신자는 흠없고 깨끗한 영광된 상태로 부활합니다. 즉 죄없는 상태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안에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영생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안다는 것을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부르고 예수님을 부르는 수준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성경 지식 몇가지를 알고 있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에 내 마음을 일치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은 예수님을 통해서 확실하게 증거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셨던 그 삶을 따라가기를 소원하는 그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그것을 가리켜서 영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장차 누릴 것이 아니라 지금 누려야 할 복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마지막은 사망의 부활임을 안다면 세상이 누리며 살아가는 것에 대해 욕심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영생을 믿는다고 하면서 마지막을 보고 사는 것이 없기 때문에 영생이라는 승리의 기쁨과 힘을 누리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생은 황당한 것도 허황된 것도 아닙니다. 신실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죄가 해결된 사람이고, 하나님은 예수님의 의로 인해서 우리를 이미 죄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죄없는 자가 거할 곳은 깨끗한 나라입니다. 의의 나라입니다. 죄를 용납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지 않는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이 곧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놀라운 복임을 잊지 마십시오
(109강) 17:4-8 하나님을 아는 자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영생은 시간적인 의미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은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나약한 것으로 전락돼 버릴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현재 우리들의 신앙이 그런 모습에 처해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영생이라는 엄청난 기적을 소망하면서도 막상 현세에서의 삶은 세상에 매어서 허덕이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본모습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에 대한 바른 이해를 새롭게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결코 현세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현세를 털어버리는 것이며 나약한 것이 아니라 강하고 힘있는 것임을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 것이 아무것도 없으셨던 예수님이 당당하게 사셨던 그 모습이 오늘날 신자들을 통해서 증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안다’는 문제입니다. 과연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바르게 이해해야 우리의 앎에 대해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6절에 보면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존재하시는 영이시고 인간은 땅에 존재하는 육신이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나타내시기 전까지는 결코 알 수 없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6절을 보면 세상에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 오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왜 아버지를 나타낸다고 말씀하지 않고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낸다는 표현을 쓰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름의 의미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아버지를 나타낸다고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지상에 모셔 와서 나타내 보인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를 나타낸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 이름을 나타낸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름이란 이름을 가진 분을 대신하여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이름에는 그분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신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버지의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아버지의 성품과 일하심 모두를 나타내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예수님의 삶의 모습은 모두가 아버지를 증거하는 것이고 나타내는 것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세상 모두에게 나타내신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내게 주신 자에게 나타내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세상의 사람들 중에서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주신 자들에게만 영생을 주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처럼 영생은 누구나에게 허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택한자 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택한자 들에게만 하나님을 나타내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아버지에 대해 무지합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아버지를 나타낸다고 해도 세상은 깨닫지를 못합니다. 자기들만의 신, 하나님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신에 대한 지식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새롭게 깨달은 하나님을 믿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지식의 차원이 아닙니다. 그러한 지식은 유대인들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부인하셨습니다. 따라서 바꿔 말하면 유대인들처럼 하면 아버지를 모르는 것이라는 뜻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유대인처럼 하는 것이 뭐겠습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잘 지키면 그것이 곧 신앙인줄로 여겼습니다. 율법을 잘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잘 아는 것인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교회에서 뭔가 열심히 하는 것이고 종교의식과 행위를 부지런히 하는 것인 줄로 안다면 그것은 유대인처럼 하나님을 모르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러한 것을 요구하지도 않으셨고, 그러한 것으로 기뻐하신다는 말씀을 한 적도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아버지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하라고 주신 일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일이 뭐겠습니까? 당연히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아닙니까? 따라서 4절을 뒤의 구절과 연결하여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아버지의 백성들에게 아버지를 나타내시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해서라는 답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보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고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주고 세상일을 실패하지 않게 도와주고 복주는 자신만을 위한 신이지만,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은 사랑하는 독생자를 버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며 구원하시는 분인 것입니다. 때문에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난 신자는 감히 그 앞에서 세상의 복을 언급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일부러 참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하늘의 복을 만났기에 세상의 복이 복으로 여겨지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것은 고난이고 죽으심이었습니다. 그것이 땅에서 예수님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하늘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바라볼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지 않으신 것이라면 우리에게도 주지 않습니다. 아들에게 주신 것 말고 다른 것을 준비하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뭘 준비하고 계시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은 세상 영광을 주기 위해 일하시는 분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자는 자연히 세상의 영광을 위해 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세상 영광을 구하면 잘못된 기도가 되기 때문에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세상 영광에 대해 의미를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면서 그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십자가를 말하면서 세상의 복과 영광을 소망한다면 그건 절대로 십자가를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안다면 그러한 모습은 보여 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제아무리 예수님에 대한 모든 것을 머리에 담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는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점을 생각하시면서 여러분의 앎은 과연 어떤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8절에 보면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을 우리에게 주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오신 분임을 참으로 안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증거하고 믿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때문에 말씀을 가지고 다른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말이 나온다면 그것은 분명 거짓된 말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세상 영광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신 것은 영생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여전히 세상의 것을 구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르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아니라 하늘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이것은 이제 우리의 몫입니다. 하늘을 보여주는 삶은 하나님을 아는 신자에게서만 나타날 수 있는 증거물입니다. 이 증거물이 여러분에게서 보여지고 증거되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10강) 17:8-10 예수님의 영광
교인이 되는 것은 인간의 의지적인 결정과 선택에 의해서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신자가 되어지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결정, 그리고 선택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것을 하나님이 막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애초부터 인간의 의지와 선택은 하나님을 향하지를 않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생각할 때 유익이 되는 것을 좇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 역시 뭔가 유익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기에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인의 특성은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관심을 가져봐야 자기 신앙이고 교회일 뿐입니다. 더군다나 교회가 그것을 가르치니 모두가 한마음 한 뜻이 되어서 철저히 그리스도를 배척할 뿐입니다. 이러한 틈 속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이 발생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 놀라운 일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음을 생각할 때 우리의 신자 됨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며 선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말씀을 받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줄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을 아는 것은 오직 말씀을 받은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은총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받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으로부터 성경책을 받았다는 것입니까? 말씀을 받은 것은, 예수님이 내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게 하신 것을 뜻합니다. 말씀을 내 머리에 남게 하는 것은 우리들의 노력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말씀을 읽고 외우고 이해한다고 해도 그 말씀이 내 마음에 남지는 못합니다. 이는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성령이 말씀을 깨닫게 하심으로써 말씀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될 때 비로소 말씀이 우리들의 마음에 담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상태를 곧 말씀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받은 신자는 말씀으로 인해서 깨닫게 된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신앙에 머물게 되는 것이고 이 확고한 신앙은 어떤 환경과 형편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설령 잠시 흔들림이 있다 하더라도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불평과 원망도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아무에게나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아버지의 백성들에게만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확정되어지는 것이고, 다시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에 발생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요한복음 3:16절에서 말씀하는 세상은, 우리가 몸담고 사는 세상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택함 받은자들에 국한된 세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 되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선택과 확정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라면, 인간의 종교 행위를 개입시켜서는 안될 것입니다. 인간의 종교 행위나 열심 감정 등은 하나님의 선택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말씀은 바로 이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받은 저희가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오셨으며 아버지께서 보내신 줄을 믿었음을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부터 오셨음을 모른 자들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아버지가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교회를 다니는 사람치고 모른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사실을 대단한 것을 깨달은 것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단순히 예수님을 아버지가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는 차원이라면 대단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아버지가 보내셨다면, 결국 세상에는 구원의 가능성을 둘 만한 것이 없기 때문임을 알아야 그것이 참된 앎입니다. 참된 앎과 믿음은 언제나 인간의 가능성을 포기시키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인간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은 채 아버지가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다만 성경의 내용을 알고 있는 수준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러한 수준으로까지 자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보내신 예수님에게 붙들리고 매이는 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자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을 것을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먼저 1절에 보면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일은 아들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아들에게서 죽고 사는 생명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으면 자연히 아버지의 영광은 나타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죽으심과 부활)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기도는 제자들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영광을 받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1절의 말씀에 빗대어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을 주심으로써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께 있음을 믿는 믿음을 세상에 나타내심으로써 영광 받으실 것을 말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은 예수님이 곧 나의 부활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명으로 믿을 때 그것이 예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두렵지 않게 하고, 고난과 어려움에서도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갈 때 그 믿음이 예수님을 영광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영광을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신자에게 복된 것은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말씀이 우리를 그렇게 바꿔놓습니다. 세상에 좋은 것을 바라보고 살던 우리에게 하늘에 더 좋고 귀한 것이 있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은 하늘의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어떤 규례와 법칙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붙들려서 불려 나온 자입니다. 나의 선택이 아니라는 점에서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내세울 수 없는 입장으로 하나님께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붙들어서 구출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영원히 저주와 사망에 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은 말할 수 없는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은혜와 사랑이 완성되어서 우리에게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생명으로 믿으며 그리스도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와 실천을 가지고 예수님께 영광 돌리겠다고 한다면 이미 출발부터 하나님을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결국 자기 행위를 과시하는 것으로 열매 맺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말씀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세상이 힘이 아니라 말씀이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강함입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예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힘이 되는 삶으로 예수님의 생명이 세상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의 편함을 위해서 힘을 달라고 기도할 때가 많지만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세상에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더욱 더 말씀에 붙들려 살아가심으로써 예수님에게 영광이 되기를 바랍니다.
(111강) 17:11-15 보전
신앙생활을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얻기 위한 기대를 가지고 한다면 그 사람은 결국 낙심하고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신앙생활에서 알게 되는 것은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아무런 도움이 안되더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 때문입니다. 때문에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생활이 삶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에는 ‘하나님을 믿어도 아무 소용이 없더라’ 는 말밖에 나올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일을 돕지 않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일을 도우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필요해서 만들어 낸 결과가 내 쪽에서는 내 삶에 득이 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즉 나에게 득이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이고 득이 안되었다고 해서 돕지 않으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돕기 위해서 일하셨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일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득으로 나타날 수 있고 때로는 손해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일이 잘되면 그것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여깁니다. 반면에 안될 때는 하나님이 돕지 않으신 것이 되버립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을 잘못된 길로 끌어가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 일이 잘되고 못되는 것이 우리의 영혼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내 일이 잘되었다고 해서 천국가고 못되었다고 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육신의 편안함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이 언제나 육신을 향해 있습니다. 영혼이 잘되기 보다는 육신이 잘되기를 더 간절히 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전혀 돕지 않으시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 우리를 도우십니다. 과연 무엇을 도우시는지 오늘 말씀에서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아버지께 우리를 보전해 달라는 기도를 하십니다. 보전한다는 것은 안전하게 보호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기도를 아버지께 하셨다면 아버지는 우리를 항상 안전하게 보호하시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나를 안전하게 보호하신다’는 느낌이 희미한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그런 경험을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전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보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면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세상에는 제자들만이 남게 됩니다. 이런 제자들을 아버지께 부탁을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세상으로부터 육신의 화를 입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예수님은 세상에 남은 제자들의 믿음을 아버지께 부탁을 하시는 것입니다.
14-15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신자는 예수님에게서 말씀을 받은 자로서 예수님과 하나되는 관계에 거하게 됩니다. 이는 성경책을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하나된 관계에 있을 때 필히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은 환난과 핍박을 받을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속히 세상에서 구출해내시는 것이 오히려 좋지 않겠습니까? 신자에게는 어려움만 있는 것이 세상인데 그러한 세상에 오래 남겨둘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려움과 고통에서 건지는 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기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알수 있는 것은, 세상에서 편안히 지내게 하는 것이 이 세상에 자기 백성으로 남겨 놓으신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남겨 놓으시면서 아버지께 부탁하는 것은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전해 달라는 것입니다.
악에 빠진다는 것은 도둑질 살인과 같은 나쁜 짓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세상의 악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오로지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그것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악으로 규정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해달라는 것은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이 세상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빠져들지 않도록 보호해달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기도인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움은 신자가 세상의 삶의 방식에 빠져들지 않도록 지키시는 것입니다. 신자가 아무리 말씀을 앞세우고 살려고 해도 항상 주변에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유혹으로 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이 사는 것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살았으면’하는 바램을 가지면서 마음이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안전하게 보호해달라는 것이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아버지께 부탁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연약합니다.
여러분 세상을 보실 때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이왕이면 좀 잘 살았으면'하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사단의 유혹입니다. 우리 옆에 세상 사람들이 있게 함으로써 그들을 통해 우리를 흔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라고 시험한 사단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영혼을 책임지시고 천국 보내는 하나님이 아닌 내 육신을 위해 일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으로 믿게 하기 위해 세상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습니다. 지금은 아무리 번성한다고 해도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에게 가장 귀한 보물은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전하사 믿음을 지켜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이 감사가 지금 이 세상에서부터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편함을 누리는 것을 일부러 마다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갖기 위한 목적으로 산다면 그것은 잘못된 길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편하게 하실 수도 있지만 힘들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이 보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키심입니다. 이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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