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1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목차>
1:1-5 부활 후
1:6-8 증인
1:9-11 다시 오심
1:12-14 기도의 사람
1:15-26 유다와 맛디아
2:1-13 성령강림
2:4-11 성령과 방언
2:16-21 말세에
2:22-36 베드로의 설교
2:37-41 회개
2:42-47 자유
3:1-10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3:11-16 기적의 주체는
3:17-26 기적이 말하는 것
4:1-4 붙잡힘
4:5-12 베드로의 싸움
4:12-22 오직 예수
4:23-31 사도의 기도
4:32-37 믿음의 모습
5:1-11 교회의 순수함
5:12-16 표적과 기사
5:17-26 기적의 의미
5:27-42 기적 이후
6:1-7 일곱 집사
6:8-15 스데반
7:54-60 스데반의 설교
8:1-8 흩어진 교회
(1강) 1:1-5 부활 후
사도행전을 보면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없는 이적의 사건들이 많이 등장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부르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행하는 신비한 이적들에 사도행전의 중심을 두기도 합니다. 즉 성령이 역사 한다면 사도행전에서처럼 능력의 이적이 있어지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굳이 성령행전이라고 이름 붙인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없지만 성령행전이란 성령이 일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지 성령을 받아서 신비한 능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를 한다면 그것이 곧 사도행전을 크게 오해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행전을 읽으면서 조심해야 할 부분은 사도들이 행한 이적 자체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어떤 기적을 행하고 승리를 이루었는가를 알리기 위해서 사도 행전이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행전은 부활하셔서 하늘로 가신 예수님이 세상에 세우신 사도들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기록한 책입니다. 즉 예수님은 비록 하늘로 가셨지만 그것으로 예수님의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님이 세우신 사도들로 인해서 예수님의 시대가 계속 이어져 감을 보여주는 것이 사도행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사도행전에서의 사도들의 사역은 사도 개인의 사역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계속된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행전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배경으로 해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저자는 누가며, 누가는 누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한 사람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면 사도행전은 분명 누가 복음과 연관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1-2절을 보면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에서도 1:3절에서 데오빌로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이 데오빌로에게 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내가 먼저 쓴 글', 즉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신 것을 기록하였고, 두 번째 글에서는 예수님이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신 일을 기록하였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시는 일에 대한 글이고,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에 대해서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합하면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가 사도들에게까지 어떻게 이어지고 오늘날까지 진행되느냐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마가복음은 사도행전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마가복음은 고난 받으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살아 계시고 계속해서 제자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신다면 예수님의 일은 여전히 예수님이 이루십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입니다. 즉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적이나 사도들의 일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예수님이 사도들을 세워서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일을 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 오후에 마가복음을 공부하면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이 이야기의 끝이 아닙니다. 마치 옛날에 있었던 위인전을 대하는 것처럼, 어떤 한 위인이 영웅다운 삶을 살다가 죽었는데 다시 살아나서 하늘로 갔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린 대개 부활로서 예수님의 이야기가 완성되고 끝난 것으로 인식을 해버립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서 일하시는 것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16장은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20절)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아무래도 한 권의 성경이 끝나는 마지막의 말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마가는 부활하신 주께서 함께 하심으로서 살아가는 삶이 있음을 말하고 마가복음을 끝낸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함께 하심으로 살아가는 삶을 사도행전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가복음은 사도행전과 연결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은 믿었다는 것으로 완성된 것이 아님이 명백해집니다. 믿음은 시작이라는 말을 여러번 했습니다. 믿음이 왜 시작입니까?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으면 그것으로 믿음의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믿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마음이 멀어져 있기 때문에 믿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얻을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믿음을 주신 분의 뜻에 대해서는 도외시 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분부하기를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4-5절)고 하십니다.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것은 성령으로 세례 받을 때를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때까지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령을 주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제자로 삼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성령 받은 것을 하나님이 내편이 되어주는 증표로 여깁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인도하시고 나를 도와주실 것이라는 증거로서 성령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시고 성령을 주신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믿음을 자기 유익을 위한 한 방편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그쳐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원래 자녀가 아니었던 우리를 자녀로 삼으신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으신 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지 우리를 자녀로 삼아서 세상에서 잘되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닌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40일간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과연 제자들을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그냥 데려가면 되는 것이지 무엇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는 것은, 이제 제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에는 자신을 위해서 자기 일을 이루기 위해서 살았던 제자들이지만,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서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붙드십니다. 그것이 성령 세례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제자들을 붙드시고, 그리고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자로 살아가게 함으로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계속 되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결코 신자로 하여금 죽어도 다시 산다는 소망을 갖게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령 받는 것을 원합니다. 성령 받기를 소원합니다. 그 이유는 성령을 받으면 자신의 구원이 확실시되고, 또한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신분이 확실히 되며 하나님의 더욱 큰사랑과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성령을 받은 모습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마음이 보여지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면, 성령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그 마음대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에 마음을 두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 세례입니다.
5절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신비한 능력을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삶을 살아가도록 하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 붙들린 인생입니다. 이제는 자기 인생이 없고 예수님이 가신 길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인생으로 뒤바뀐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했다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 역시 성령이 함께 한 인생을 사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 세례 받은 자는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신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사셨던 예수님이 하늘로 들어가신 것처럼 성령으로 살게 된 신자 역시 그 마지막은 하늘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소망인 것입니다.
성령의 증거는 신비한 현상이 아닙니다. 방언도 아닙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증거는 관심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관심이 뒤바뀌게 됩니다. 내 일에서 하나님의 일에 마음을 두게 됩니다. 내가 가야할 길을 스스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신 길을 내 길로 받아들입니다. 나를 나타내고 나를 내세우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나타내고 예수님을 자랑하기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받은 증거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있는 신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이것으로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일에 매달려서 걱정하고 근심하고 울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은 성령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자녀로 삼으신 이유가 아닙니다. 성령 받은 신자가 할 일은 오직 예수님을 내세우고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일에 부름 받았음을 잊지 마시고 예수님으로 살아가는 삶에 부지런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2강) 1:6-8 증인
신자로서 크게 잘못 하는 것 중에 하나는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할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이 나에게는 언제 이런 복을 주시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자기 자신에게 쏠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말을 하면서도 마치 자신을 위해서 구원하신 것처럼 생각합니다. 나를 천국 보내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을 굳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목적을 도외시한 생각임은 분명합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일하심 안에서 주어지는 결과일 뿐, 목적은 아닙니다. 즉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도 사랑도 모두를 자기 개인에 국한시켜 생각합니다. 내가 잘되는 것이 은혜고 사랑이며 잘못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자기 개인적인 일에 국한시킴으로서 참으로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 신자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버리는 것입니다.
본문에도 하나님을 자기들의 일을 위한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본문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익숙해져 있는 구절은 아마 8절일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는 이 말씀은 전도와 선교를 강조하기 위한 구절로 많이 애용되어 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면서 세상에 마지막 남기신 지상 명령이라고 하면서 전도하고 세계를 향해서 선교하는 것이 곧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말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 열심히 전도하고 또는 선교사로 나가게 되는 경우도 많은 것입니다. 물론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 자체를 문제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전도와 선교의 의미 자체가 왜곡되어져 있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본문에서 8절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다른 구절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8절 한 절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볼 때 조심할 것이 이것입니다. 어느 한 구절에 대한 중요성을 마음에 두고 있을 때 자연히 다른 구절에 대해서는 별 의미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구절을 별로 중요하지 않고 다른 의미도 없는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구조를 볼 때, 8절의 말씀은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예수님이 가만히 계시다가 하늘로 가시면서 갑자기 한마디 명령을 남기신 것이 아닙니다.
8절은 6절의 말씀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6절)라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셔서 자기들 앞에 나타나 계시는 예수님에게 이스라엘이 회복할 때를 묻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이것을 생각해 볼 때 제자들이 묻는 이스라엘의 회복이란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를 얻으면 세상위에 굳게 서게 되는 날을 뜻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는 것은 분명 예수가 메시아임을 의미하는 것임을 그들도 알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고통 중에서 해방하고 회복시키기 위해서 오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메시아로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고 자유를 얻게 하는 그 날이 바로 이 때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이스라엘의 회복과 연관지어 생각한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다시 부활하게 하신 것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자기들을 위한 때를 기대했습니다. 자신들을 돕기 위해서 부활하신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라는 말씀을 합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핍박하는 세력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굳게 세워주시는 것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오직 자신들을 위한 분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곧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도와주시는 것에만 마음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때와 기한은 아버지의 권한에 속한 문제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나 그 기한에 대해서는 관심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한이니 만큼 하나님이 정하신 때와 기한에 주시는 대로 받으면 될 일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일로 고생을 한다고 할 때, '하나님, 저의 이 고생이 끝날 때가 언제입니까? 빨리 이 고생이 끝나도록 해 주십시오'라는 생각을 말라는 것입니다. 고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하나님이 주셨다면 주시는 때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이었던 것처럼 그 기한이 언제든 끝날 때가 언제든 하나님의 권한이니만큼 끝날 때를 관심두기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인가에 관심을 두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때와 기한에 대한 말씀을 하신 후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8절)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8절 한구절만을 보고 예수님이 전도하라는 명령을 하셨다라고 이해하기보다는 세상에 존재하는 신자는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단지 전도하라는 명령으로만 이해하면 이런 오류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 오류란 전도라는 명령을 실천하기 위해서 애쓰는 한편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일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분명 때와 기한은 하나님의 권한이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열심히 전도하니까 하나님이 자신을 더욱 많이 도와주지 않겠는가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8절의 말씀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위해서 일해줄 때에 대해서 관심을 둔 제자들의 물음을 배경으로 하고 주어진 말씀임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열심히 증인으로 살았으니까 그 보답으로 하나님이 나의 때를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진다면 그것은 결국 자신의 행위를 버리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너희들을 위한 때와 기한은 하나님께 속한 권한이니 마음두지 말고 너희들이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에 대해서 마음을 두라'는 의미입니다. 그 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 곧 8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로서 당장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곧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당시 제자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유대인으로서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을 하나님의 선민으로 여겼습니다.
때문에 구원은 자기들에게 해당된 자기들의 몫이고 이방인, 즉 사마리아인이나 또는 다른 지역의 사람들, 즉 땅 끝에 해당되는 사람들에게는 해당될 수 없는 구원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유대만이 아니라 그들이 개처럼 취급하는 사마리아와 이방 나라까지에서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구원은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는 말씀은 신자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어떤 지역으로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어디에서든 언제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있게 하시고 살게 하시는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신자의 본분이며 그것이 곧 성령의 권능으로 살아가는 성령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은 성령이 임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야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리스도는 오직 성령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읽고 성경 공부를 한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3년 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이적을 목격하고 말씀을 들을 제자들조차도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능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 역시 성령이 임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증인으로 산다는 것이 곧 성령의 권능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더 깊이 이해해야 하는 것은, 증인은 단순히 예수님을 전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고 '예수 믿으라'는 것으로 증인의 일을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증인은 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런 분임을 증거하는 것인데, 이것은 증인이 실제 그리스도가 사셨던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가 사셨던 삶을 살고, 그분이 가셨던 길을 감으로써 그리스도가 누구신가가 증거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권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자가 곧 성령이 임한 성령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곧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드리는 이런 말씀들이 기존의 교회가 하고 있는 것을 모두 부정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있다면 그 생각을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기존의 교회가 하고 있는 전도나 선교에 대한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입각해서 신앙인으로서 바르게 살아가는 삶의 방향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드리고자 할 뿐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나를 증거하기 위한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신앙 모습을 보면 무엇을 하면 그것을 자기를 증거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을 하게 되는 경우가 아주 많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고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하는 모든 것을 결국은 나 자신의 신앙을 높이고 굳게 세우고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우월한 자신으로 드러내는 도구로 이용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많이 하고 열심히 했으면 더 한 것만큼 더 겸손해지고 더 낮아지고 형제를 사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를 못하는 안타까움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령의 사람으로서 증인으로 살아가야 할 신자의 본분대로 나아가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바로 이러한 약점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문제에만 집착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에 진심으로 나는 맞고 저 사람이 틀리다면 틀린 그를 맞는 그리스도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를 힘쓰는 것이 아니라 틀린 그를 공격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바로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라고 질문하는 제자들과 같은 것입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백성인 자기들은 굳게 세워지고 자신들을 핍박하는 세력들은 망하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옳은 자신들 편을 들어서 하루 속히 틀린 저들을 심판하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에게는 틀린 자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겠다는 의도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결국 그들이 할 일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것이지 누군가를 심판하고 공격하고 저주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에게 있는 것들이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여러분 자신을 내세우는 방향으로 쓰여지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있으시다면 그 열심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더욱 더 형제를 사랑하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성령의 사람으로 증인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자는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떠하셨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일을 도구 삼아 자신의 이름을 높이셨습니까? 하나님이 자기편을 들어서 자신을 핍박하는 무리들을 심판해주시기를 원했습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가를 생각하시고 그 길을 가십시오. 그것이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는 증인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고, 성령이 임하여 권능을 받지 않고는 증인이 되어질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삶과 인생을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일에 쓰는 일에 있어서 너무 어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일에 너무 익숙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내게 있는 것으로 나를 세우며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공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셨다면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향은 분명 달라져야 합니다. 지금껏 익숙하지 않았던 새로운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성령이 임하시고 권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현실은 성령 받음이 그를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성령 받은 자신을 타인과 구별하는 도구로 이용되버리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릴 것은 그러한 것은 성령의 모습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알았다는 것으로 그쳐 버린다면 결국 안다는 것으로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은 알게 하실 뿐만 아니라 알게 된 분을 생명으로 여기고 그분만을 따르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고 그분이 가신 길을 감으로서 그가 존재하는 그 자리에서 증인으로 나타나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때문에 이웃이 그리스도를 알고 배우는 일에 유익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때문에 이웃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증인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날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은혜와 희생에 대해서 감사함이 사라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희생에 여러분의 마음이 머물러 있을 때 그런 여러분에게서 보여질 것은 겸손과 용서와 섬기는 모습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있는 자리에서 증인되는 성령의 사람으로 이루어짐을 다시 한번 마음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여러분의 본분이며 존재 이유인지를 마음 깊이 묵상하시고 신자로서 마땅한 삶의 길을 부지런히 가시기 바랍니다.
(3강) 1:9-11 다시 오심
신자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것과 교회의 부흥은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교회 부흥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 부흥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시면서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교회를 부흥시키라는 사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늘로 가고 안계신 세상에서 그리스도는 이제 성령을 받은 너희로 인해서 증거될 것이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성령을 보내시고 권능을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을 증거할 자로 선택받았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군대에 가면 어떤 일을 위해서 부대원 중 몇 사람을 뽑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차출'이라고 말합니다. 헌병으로 차출되기도 하고, 공수부대로 차출되기도 하고, 하사관으로 차출되어 가기도 합니다. 군대는 차출되었을 때 오직 복종만을 요구합니다. '나 못하겠다'는 것이 없습니다. 무조건 가야 합니다. 그리고 군대는 차출한 사람을 무작정 '하라' 고 시키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는다는 것을 이런 의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차출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할 증인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것이 우리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삶이나 그 생각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과 같은 생각, 같은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즉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 받은 신자는 이제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만 남았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으로 쓰여져야 합니다. 참으로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를 위한 삶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로서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의 포기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증인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 성령이 오시고 우리에게 권능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도록 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권능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성령 받았다는 가장 큰 증거는 그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삶이 되기 위해서 힘쓴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그리스도는 막연하게 멀리 하늘에 계시고 언제 오실지 알 수 없는 약속만 세상에 남겨놓으신 분이 아니라 실제 살아 계셔서 다스리는 분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가 곧 예수의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예수의 증인이라는 의식이 희박합니다. 내가 곧 예수님이 살아 계심을 세상에 증거하는 증인이라는 의식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삶이고, 나의 인생이고, 나의 직업이지 예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증인으로 사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11절의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신다는 것은, 다시 오심 즉 재림에 대한 약속입니다. 하늘로 가신 것이 마지막이 아니라 세상에 다시 오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의 권한이기 때문에 우리가 관심 둘 필요가 없지만 분명한 것은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땅은 하늘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하늘로 예수님이 가셨습니다. 이것은 지금 이 세상은 예수님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증인으로서 신자가 증거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예수님이 살아 계시고 예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옛날 이스라엘처럼 예수님이 육신으로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신다 해도 그것과 상관없이 여전히 예수님이 나를 다스리고, 나는 그분의 다스림 아래 있음을 보여주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증인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신자는 예수님의 말씀의 인도를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성경책의 말씀이고 교훈이 아니라 살아 계신 예수님이 외치는 말씀이기 때문에 복종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종은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지만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에게 말씀하신다는 의식이 살아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삶은 이러한 복종에서 너무 동떨어진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보이지 않는 분이기에 아예 무시해 버린 삶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공경하고 그 말씀을 예수님의 외침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성경책에 적혀 있는 글로 여기고 책을 대하듯 읽고 치우는 것이 곧 우리의 현재 모습일 수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3:32-37절에 보면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을 오늘 본문과 연결하여 생각하면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신자의 삶이 어때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세상은 끝장이니까 세상일은 다 집어치우고 교회에 모여서 예배나 드리고 기도만 하면 된다고 여기십니까?
1992년에 이런 식으로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오직 하늘만 쳐다봤습니다. 땅에서 그들이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해서는 도외시하고 예수님이 오시기만 목놓아 기다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복종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테니까 그때까지 세상 일은 그만두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11절에 보면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실 때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것에 대해 흰 옷 입은 두 사람, 즉 천사들이 제자들에게 외치는 말이었습니다. 하늘을 쳐다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가신 그대로 오실 것이니까, 하늘을 보고 있지 말고 다시 오실 예수님이 말씀한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증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심으로 하늘에 살아 계신 예수님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을 믿는 신자라면, 하늘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 증인의 삶을 살기에 힘쓸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재림의 삶입니다. 비록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고 멀리 하늘에 계시지만 현재 이 세상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과 동일하게 그분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 곧 재림의 삶이며 동시에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3장에서 말씀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주인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가면서 문지기들에게 각각 권한을 주고 사무를 맡기며 깨어 있으라고 명합니다. 여기서 깨어 있으라는 것은 주인이 맡긴 일에 충실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과연 어떠한 종이 주인의 일에 충실하겠습니까? 그 종은 바로 주인이 비록 멀리 타국에 가 있지만 지금 현재 자신과 함께 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종일 것입니다. 주인은 없지만 주인의 명령이 종의 심령에 살아 있을 때 종은 주인이 현재 자신에게 명령하시는 것과 같이 주인의 면전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인의 일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실제로 잠을 자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없다고 해서 주인의 명령에 대해서는 도외시하고 자기를 위한 자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주인이 돌아 왔을 때 어떠한 종이 충성된 종으로 칭찬을 받겠습니까?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으며 사는 신앙은 하루하루 예수님이 언제 오실까 궁금해하면서 손꼽아 기다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마치 군인이 군대에서 제대할 날을 기다리며 어쨌든 26개월만 버티는 그러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할 날은 언젠가는 오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26개월을 군인답게 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언젠가는 오십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맡겨진 인생을 신자답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오신 것처럼 말씀에 복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셨을 때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즉 증인의 본분을 다하며 살았는가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늘로 가시면서 '증인이 되리라'고 하시고, 이 일을 위해서 성령을 보내시고 권능을 주셨다면 다시 오셨을 때는 성령을 보내신 예수님의 의도에 복종하는 삶이었는가를 보시는 것은 자명합니다. 깨어있는 삶이었는지 아니면 자는 삶이었는지가 주님이 오심으로 판명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신자라면,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는 신자라면 이미 주님이 오셔서 나를 살피시고 계시는 삶이 되어져야 마땅합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증인으로 산다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특별한 일을 해야 하는 특별한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남들보다 더 많이 더 부지런히 전도하고 봉사하고 착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는 것입니다. 살긴 살되 예수님이 없이 나 홀로 나를 위해 살아가는 삶에서 살아 계신 예수님이 내 앞에 버티고 서 계시는 것처럼 예수님과 함께 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인으로 사는 것이며 재림을 믿는 삶입니다.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는 말씀은 신자에게는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러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기껏 가지는 두려움은 평상시에는 아무렇지 않게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주일에 빠지면 행여 하나님이 벌주지 않을까라는 정도에 머무는 수준입니다. 교회 일에 부지런하지 못하고 성경 읽지 않고 기도하지 않은 것 때문에 하나님이 복주지 않는 것이 아닌가라는 염려에 머무는 수준입니다. 이런 것 자체가 이미 증인으로서의 삶을 상실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5-6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도적같이 오신다는 것은 오시는 때를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오실 것을 전혀 생각지도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도적은 생각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찾아옵니다. 따라서 도적같이 임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자기 백성들에게는 오실 날을 미리 알려주셨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실 것을 알고 산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실 것을 알았다면 이미 오신 것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존재 이유는 세상에서의 성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에 있습니다. 증인으로 사는 것이 곧 여러분의 존재 이유이며 의미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하나하나가 이 땅에서 여러분 개인을 위하고 준비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으며 예수님이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것으로 보여져야 합니다. 천국을 소망하고 사는 신앙이 여러분의 삶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삶은 무엇을 보이는 것이고 무엇을 표현하는 것으로 드러납니까? 세상보다는 천국이 제일이고, 우리의 눈으로 보고 사는 것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 예수님이 오시는 것으로 세상이 끝난다는 것을 표현하는 삶입니까? 예수님이 지금 살아 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표현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신자는 이 일에 부지런해야 합니다. 믿음을 받았고 성령을 받은 자라면 당연히 이 일에 부지런하고 힘써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저와 여러분이 이 자리에 부름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예수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아래에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위한 삶이지 삶을 위한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삶과 예수님의 관계는 뭔가 뒤바뀌어 있는 것 같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이 이시간 여러분의 마음에 외쳐지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멀리 계셔서 우리를 간섭할 수 없는 예수님이 아니라 지금 여러분 앞에 오셔서 여러분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이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을 쳐다보면서 하늘로 가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 나중에 되어질 일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되어진 일로 살아가는 것이 진짜 재림 신앙으로 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여러분이 잘 아시는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주인이 타국으로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은 그것으로 일해서 많은 것을 남겼는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받은 것을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돌아왔을 때 무익하고 악한 종으로 책망을 받고 어두운 곳으로 쫓겨남을 받았습니다. 받은 것을 땅에 묻어 둔 것은 일해봐야 자기 것으로 남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수 있고, 받은 것이 남들에 비해 하찮은 것이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는 주인으로부터 받은 것을 묻어 버림으로서 한달란트를 가지고 살아가지 않고 그저 자신의 것으로 사는 인생이 되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 주인으로부터 받은 것을 땅에 묻어 버리고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에게 주어진 증인의 삶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분명히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며 맡기신 증인의 삶에 대해서 물으실 것입니다. 그 날이 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4강) 1:12-14 기도의 사람
사도행전은 그 시작부터 하나님나라의 일과 성령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이 임하면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하시고 하늘로 가십니다. 이처럼 사도행전의 분위기는 그 시작부터 성령이 오시니 일이 되어지더라는 것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실제로 오순절 날에 성령이 오시고, 성령이 오심으로써 방언을 하게 되고 베드로 같은 경우는 설교를 함으로 삼천 명이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았다는 얘기를 합니다. 이처럼 성령이 오셔서 사도들에게 역사하심으로 능력적인 일들이 보여진 것으로 인해서 마치 성령만 임하면 모든 일이 되어질 것 같은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성령에 대한 오해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의 성령 이야기는 성령이 오시기만 하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닙니다. 또한 성령 받기 위해서 힘쓰라는 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성령이 오시면 신비한 하늘의 힘을 공급받아서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위대한 일들을 하게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분명 그것은 종교적 측면에서 능히 기대해 볼 수 있는 매력적인 일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되면 성령의 오심과, 신자의 신앙이 무조건 능력을 받자는 쪽으로 흘러갈 위험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오심은 예수님의 오심(초림)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승천 이후에 성령의 오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뭔가 임무 교대와 같은 느낌을 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처음 오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시기까지의 일에 있어서 제자들의 역할은 전혀 없었습니다. 모든 일을 예수님 홀로 이루셨고 제자들은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을 친 모습만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외치셨던 '다 이루었다'는 말씀도 모든 일을 예수님 홀로 담당하셨다는 의미가 포함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루신 의와 구원 앞에서 우리의 공로를 내세울 수 없는 것이고 다만 예수님이 이루신 것을 감사함으로 누리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모든 일을 홀로 다 이루신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후에 다시 성령이 오십니다. 왜 오시겠습니까? 물론 성령의 오심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때처럼 홀로 모든 일을 담담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신자와 함께 하심으로서 일을 이루시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성령만 오시면 모든 일이 자동적으로 다 되어질 것 같은 생각을 하기보다는 어떤 일로 부름 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로 부르시고 그 일에 사용하시기 위해서 성령이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하시고 성령이 오신 일 사이에 1:12-26절의 말씀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에 힘썼다는 것과 함께 맛디아를 제비뽑아서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게 하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기도에 힘썼다는 말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 '기도에 힘썼다'는 말씀이 언급됨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은 성령 받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본문의 구조는 그런 오해를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쓰고 있는데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다고 말씀하니 성령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오신다는 생각을 가질만도 할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에 대한 인식이 크게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현대 교회가 생각하는 기도는 대부분이 하나님에게 원하는 것을 받는 것입니다. 즉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에게 받아내기 위한 방법과 수단으로서 기도를 활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 교회가 말하는 소위 기도제목을 보면 모두가 인간 편에서 원하는 것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되게 해주시고, 가정이 평안하게 해주시고, 건강하게 해주시고, 아이가 잘되게 해주시고, 사업이 번창하게 해주시고, 나라가 통일되게 해주시고' 이처럼 뭔가 해달라는 것이 기도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에 대한 생각이고 수준이다 보니 함께 모여서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에 힘썼는데 뒤에 성령이 임하는 사건이 등장하기 때문에 성령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오신다는 것이 상식으로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기도해서 성령을 받는다면 결국 성령은 하나님이 정하신 하나님의 사람에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에 의해서 성령이 오시는 대상이 결정되어진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 성령이 말씀하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성령의 오심을 말하기 전에 기도에 힘썼다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까? 사실 이러한 내용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냥 성령이 오기까지 제자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있었다는 의미로만 이해해도 될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뿐이라고 말하기에는 본문의 구조가 그리 간다하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1:4절에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 것을 말씀하시고, 본문 13-14절의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는 말씀을 보면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볼 때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도에 힘썼다는 사실은 단지 성령 받기 위해서 기도했다는 것보다는 신자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신비한 힘과 능력이 부여되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영의 사람'이 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은 곧 하나님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하늘의 일을 마음에 두고 생각할 수 있는 영의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됨의 의미가 성령이 오심으로 영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신자 됨의 의미, 신자 되었다는 근거가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성령을 받았느냐로 구분되어지는 것이지 착한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 또는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보느냐라는 것으로 구분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육신의 것으로 되어질 수 없는 것이 '신자'라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령을 받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영의 사람이 되게 하셔서 세상으로 보내시겠다는 의도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신자란 교회를 세우고, 많은 사람을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의도 역시 세상에서 교회를 세우고 많은 사람을 교회 다니게 하시기 위해서 신자를 있게 하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고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은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 속에서 성령 받은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모든 일을 육신의 것으로 이루고자 합니다. 육신의 것이 곧 힘이며 능력이고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이고 증거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는 사람은 육신의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육신으로는 되어질 수 없는 은총을 입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은 자로 산다는 것은 육신의 것을 힘으로 하지 않을뿐더러 육신의 것을 가지고 자신을 증거하지도 않는 사람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 존재 의미를 성령에 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령이 오시기 전에 예루살렘에 모여서 기도에 힘썼다는 것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일은 자기들의 육신의 힘으로 이루어 낼 수 없는 일임을 알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령이 오시기 전에 기도에 힘썼다는 것을 언급하는 이유를 능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받아내기 위한 수단도 방법도 아닙니다. 이것은 기도에 대해 크게 오해한 것이며, 하나님을 우상과 같이 여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그 일에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의 계획과 원하시는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것이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사람으로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는 우리가 상식처럼 생각하는 것과는 정 반대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에 나를 맡기는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힘을 포기하는 것을 뜻합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해주십시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힘을 빌어서 자기 일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에 의해 존재하며 하나님의 뜻으로 사는 자입니다'라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자신을 부인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면 '그러면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의문의 내면에는 내 스스로 참된 기도를 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잘못된 기도가 될 수 있는 것은 하지 않고 참된 기도가 되어질 수 있는 것을 함으로써 기도를 이뤄보고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의 내용을 바꿈으로서 참된 기도를 해보려는 생각 역시 잘못된 것입니다. 속은 검은데 겉만 흰색 칠을 했다고 해서 전부가 흰색은 아닙니다. 겉만 하얗게 보일 뿐, 속은 검은 색 그대로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이 이런 식으로 흘러갈 위험이 많은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을 배우면서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칫 잘못하면 스스로 잘못된 것을 제하고 옳은 것을 채택함으로서 옳은 사람으로 존재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기도할 때 세상 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니까 그러한 기도는 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안하는 것이라면 잘못된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신자가 세상 것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게 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을 알아 가는 자로서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다 아시는데, 나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도 아니고 그것을 위해서 부름 받은 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나를 신자로 부르신 것은 세상 것보다 더 놀라운 하늘의 것을 소망하고 살라고 부르신 것인데'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속 심령으로 알아갈 때 자연히 세상 것을 위해서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것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나에게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다 아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어진 것으로 살아가면 되는데 지금 있는 것에도 더 요구하고 요청하는 것은 결국 내 욕심이 아닌가라는 깨달음이 있기에 세상 것을 위한 기도를 하지 않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옳은 기도를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세상 것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욕심은 속에 그대로 남겨둔 채 겉으로만 욕심을 가리는 것일 뿐, 세상 것을 기도하지 않는다고 해서 신자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옳은 기도를 하려고도 하지 마시고, 잘못된 기도를 하지 않으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이러이러한 기도는 잘못된 기도니까 하지 마십시오'라는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에게 성령이 오시면 성령이 여러분을 영의 사람으로 만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영으로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성령에 의해서 옳은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말씀드릴 뿐, 하라 하지 말라는 말은 안하려고 합니다.
신자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신자가 기도의 사람이라는 것은 '기도를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도의 사람이란 세상의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육신의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기도의 사람인 신자는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나의 나됨도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지 내가 되고자 해서 되어진 것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은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열심히 기도했기 때문에 환난과 핍박도 이기며 위대한 일을 해낼 수가 있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과 다른 사람으로 존재합니다. 다르다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세상 것으로 자기 일을 이루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것을 얻기 위해서 기도한다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도 세상 것을 얻기 위해서 신을 찾는 일에 부지런하지 않습니까? 신자가 기도의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은, 자기 힘과 세상 것을 의지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성령을 주시는 것도 신자는 바로 이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이 아닌 영으로 사는 사람이기에 성령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기까지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고 하신 말씀이나, 예루살렘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썼다는 말씀은 모두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존재할 신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증거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는 것은 우리를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이 하신 일을 할 사람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주님이 하신 일은 세상에서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세상에서 자신을 포기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주님을 증거할 자로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에 있어서 장애물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옛사람이, 나 자신이 주님에게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실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세상보다는 하늘의 일에 관심을 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기도의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자기 일을 이루기 위한 자로 보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으로 그리스도의 일을 이루기 위해 보냄 받은 사람이기에 신자는 자신을 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사람입니다.
(5강) 1:15-26 유다와 맛디아
사도행전은 성령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는 것을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또한 오순절에 성령이 오신 얘기도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이 성령에 대해서 교회가 많은 오해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즉 신자들로 하여금 주님의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힘을 주고 도와주기 위해서 성령이 오신 것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성령이 오신다는 것을 힘을 받고 능력을 받는 것으로 기대하기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할 때 마음에 무슨 감동이 오고 또는 힘이 생기고 의욕이 일어날 때 그것을 성령이 오신 흔적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성령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성령이 우리들에게 힘을 주고 능력을 주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을 기다렸다가 성령을 받고 나가서 주의 일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가룟 유다로 인해서 결원이 된 제자의 자리에 맛디아를 보충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왜 이런 일을 하는 것이겠습니까? 맛디아가 없으면 일을 할 수 없는 것입니까? 무슨 시합을 하는 것도 아니고 꼭 열 두 명을 채워야 한다는 이유가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제자의 수는 항상 열 둘을 유지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하기도 하셨습니까? 성경 어디에도 그러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굳이 맛디아를 집어넣어서 열 둘을 채우는 것입니까? 이처럼 본문의 맛디아를 뽑아서 사도의 수를 열 둘로 채우는 것은, 맛디아를 뽑았다는 것보다는 성령이 오신 것에 연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맛디아는 실패한 가룟 유다의 자리에 보충된 사람입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가룟 유다의 실패는 유다 한 사람의 실패가 아니라 열두 제자 전부의 실패라는 사실입니다. 열한 사도는 실패하지 않았는데 유다는 실패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유다 한 사람의 실패로 본다면 실패한 유다는 없다 할지라도 실패하지 아니한 실력 있는 나머지 열 한 사람이 주님의 일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실패한 유다는 있으나 마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치 축구 시합을 할 때 실력이 없는 사람이 끼어 들어 있다면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것입니다. 그럴 때는 그 사람을 빼버리고 실력있는 나머지 사람들이 경기를 하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유다의 실패는 유다 한사람의 실패가 아니었기 때문에 성령이 오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는 것은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의 믿음을 보충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시고 세상에 남겨진 인간들끼리는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남은 제자들끼리는 안되기 때문에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4-5절을 보면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하늘로 가시면서 예수의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남기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그 말을 듣고도 예수의 증인되기 위해서 나가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약속하신 성령이 오시기까지 예루살렘에서 기다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시기를 기다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뜻을 모른 사람이라면 아마 '우리가 나가서 증인이 될 수 있는데 왜 성령을 기다려야 하는가?'라는 의문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들 생각에는 자기 힘으로도 능히 증인으로 살 수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들 힘으로는 나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이 오기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씀 앞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주님의 일은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막연히 그런 생각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의 자리에 있으면서 실패한 가룟 유다를 보고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의 수에 참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가룟 유다의 실패는 그 한 사람의 실패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유다의 실패를 나 자신의 실패로 받아들인다면, 우린 과연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들 실력으로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실패할 것이 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유다의 실패를 보면서, 성령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6-17절에 보면 베드로가 일어서서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는 말을 합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유다에 대해서 미리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20절의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시편에 있는 다윗의 말을 성령이 다윗의 입을 빌어서 가룟 유다에 대해 미리 예언한 말씀으로 보고 있습니다.
장차 자신들에게 오실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유다에 대해서 미리 말씀하신 것이라면, 결국 성령은 인간의 실패 때문에 오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라고 말합니다. 유다의 자리에 다른 한 사람을 세워서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실패한 유다의 자리에 대신 들어간 맛디아는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자로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할 일이 주어진 것입니다. 유다가 실패한 직무에 대해서 유다 대신 그 직무를 이루기 위해서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 직무란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비어있는 한 자리를 굳이 채우고자 한 것은 한 자리가 비어 있으면 주님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이 오신 후에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우리들의 직무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맛디아를 세워서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 것입니까? 앞서 말한 대로 유다의 실패는 유다 한사람의 실패가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의 실패입니다. 그런데 유다의 자리에 맛디아가 세워졌습니다. 이 역시 바로 우리 자신들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실패한 우리들에게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고치심으로 말미암아 유다가 아닌 맛디아로 살아가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오신 이유입니다.
오늘 이 본문은 교회에 사람을 채워 넣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이미 있던 직분자가 죽거나 다른 교회로 감으로서 비게 된 자리를 채우는 것을 맛디아를 뽑는 것으로 비유하기도 하고, 또는 무슨 장로 투표나 집사 투표하는 것은 본문의 비어있는 자리를 뽑기 위해서 투표하는 것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본문은 교회에 직분자를 뽑아 세우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본문은 실패한 유다의 자리에 맛디아를 대신 세워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게 하겠다는데 중요함이 있습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자신에게서 유다와 맛디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옛사람과 새사람이 있습니다. 옛사람은 주님에 대해서 실패한 우리의 본성이며, 새사람은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되고 고침 받은 새로운 성품입니다. 이 성품으로 인해서 성도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패한 유다의 자리에 맛디아를 세워서 유다의 직무를 대신하게 하고, 그 직무란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은, 오늘 성령이 오셔서 새사람된 자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과연 무슨 직무를 위해서 세움받았는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결국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우리는 가룟 유다로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 오심에 대해서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 오심 앞에서 감히 우리의 능력을 내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것은, 무엇을 위해서 세움을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를 어떤 사람되게 하기 위해서 우릴 뽑았느냐는 것입니다.
24-26절에 보면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제비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이 맛디아를 뽑은 것은 유다 대신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다고 말합니다. 제 곳이란 주님이 가게 하시는 길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자기의 길을 갔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멸망이었음을 봅니다.
저와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유다처럼 제 곳으로 가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러한 우리를 택하셔서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로 세우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제 곳으로 갈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게 하시는 곳으로 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제 길이 아니라 주의 길을 갈 사람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직무입니다. 제 곳으로 간 것은 예전의 일로 멈추어야 합니다. 지금 현재의 길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이 오심으로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부름을 입고 세워졌습니다. 여러분의 직무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직무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의 여러분의 직책이나 위치는 바로 여러분에게 맡겨진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 주어진 도구들입니다. 목사는 직책일 뿐 직무가 아닙니다. 장로 역시 직책일 뿐 직무가 아닙니다. 목사의 직책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라는 직무가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를 구원시키기 위해서 뽑으신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전부라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얻은 것으로 다 되었는데 달리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구원이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임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셔서 뽑으신 것은 여러분을 새롭게 하시고 고치셔서 실패한 유다의 자리에 맛디아로 세우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이유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성령이 여러분에게 오셨습니다. 여러분의 직무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시고 하나님이 맡기신 직무대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6강) 2:1-13 성령 강림
본문은 드디어 오순절에 성령이 오셨다는 내용입니다. 먼저 이러한 내용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성령이 임한 사건, 즉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대할 때 성령이 오신 형태나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성령 받은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3절에 보면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라고 말합니다.
성령이 오실 때 일어난 현상은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온 집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고 하고,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 때문에 현재에도 성령 강림에 대해 그러한 현상이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 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현대 교회에서 성령 강림의 표적으로 바람소리 같은 것을 말하기도 하고, 가슴이 뜨거워진다는 것을 말하기도 하고, 특히 방언을 중요시하는 것도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소위 보수교단이라고 하는 교회들에게서는 성령에 대한 신비적인 모습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다보니 평가되는 것은 성령강림에 대한 신비적인 현상을 기대하는 교회에 대해서는 '뜨겁다'는 표현을 하지만 신비적인 것에 대해서는 가급적 배제하려고 하는 교회들에 대해서는 '냉랭하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은 성령이 오실 때 발생하는 현상이나 형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본문에서 있는 현상이기 때문에 현재에 있어서도 그와 동일한 현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성경에 대한 잘못된 이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 오늘날 모든 신자들이 동일하게 경험해야 할 표준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의 성령 강림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너희도 장차 이런 경험이 있어야 그것이 진짜 성령 받은 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셔서 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뒤에 왜 성령이 오셔야 하는 것입니까? 몇 주간 계속 말씀드렸던 것은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면 예수의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성령의 오심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 오신 이유는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증인이란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셨던 말씀이나 그 삶들이 진리였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증거하는 것입니까? 믿지 않는 자들에게 논리적으로 설명을 함으로 가능한 것입니까? 사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말이 아무리 그럴듯하다 할지라도 삶이 말과 다르면 말에 대해서 불신하게 되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시는 것은, 신자로 하여금 말을 잘하는 사람되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진리이며, 예수님이 곧 생명이며 길임을 믿는다면 그 믿음대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삶의 유일한 원칙과 기준으로 삼고 그 원칙대로 기준대로 살아가도록 하는 능력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것으로 심판 받을 자와 생명을 얻을 자로 구분되게 됩니다. 과연 누가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사셨던 그 길을 생명으로 알고 따라가느냐로 그리스도의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그러한 말씀을 하셨을 때, 세상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 예수님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심으로 결국 누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이냐가 증명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말씀이 틀렸고,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이 옳았다면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옳았기에 하나님이 그분을 그냥 죽음에 놓아두시지 않으시고 죽인 자들 앞에서 살리심으로서 예수님의 모든 것이 옳았음을 하나님이 증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세상의 옳고 그름은 인간의 윤리나 도덕이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삶이 기준되어야 합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의 삶의 길을 따라가는 것만이 선한 것이고 의로운 것이며, 그렇지 않은 모든 것은 악으로 규정될 뿐입니다.
인간은 죄인임을 선언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행위로 맞섰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이 아니며,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었음이 예수님의 부활로 증거 되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처럼 부활은 단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있다기 보다는, 세상에 대해서 선과 악을 분명히 규정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불의 혀같이 오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해 볼 수 있습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진 것이 보였다고 했는데, 불의 혀란 심판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고, 갈라진 것이라는 것은 구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 본다면, 결국 성령의 오심은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해서 심판할 자를 심판하고 구원할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방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방언은 현대 교회가 말하는 방언과는 다릅니다. 7절부터의 말씀을 보면 성령이 오심으로 성령을 따라 말할 때 각 지방에서 모인 모든 사람들이 그 말을 알아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성령이 오셔서 방언으로 말하게 한 이유입니다. 방언은 각 나라의 사투리를 의미합니다. 세상은 맨 처음 말이 나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이 바벨탑을 쌓음으로서 말이 나뉘게 된 것입니다. 결국 말이 나뉘어서 말이 서로 통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을 모아서 자기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하나님에게 도전한 증거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한 제자가 말을 할 때 그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는 것은 결국 말이 하나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성령이 오심으로서 그리스도안에서 모두를 하나 되게 하시는 일을 하실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새술에 취하였다'며 조롱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임한 자의 말에 의해서 말을 듣는 자와 듣지 못한 자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방언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방언을 우리 멋대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은 오셔서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신비한 능력을 주셔서 우리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무엇이 심판받을 모습인가를 증거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성도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세상에 대해서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가 성령안에서 하나라는 것은, 기독교란 종교를 기준으로 한 집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서로 이해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임한 자의 말은 성령이 임한 자만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같은 나라의 말을 한다 할지라도 듣긴 듣되 이해되지 않는 말이라면 결국 그에게는 방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되게 하기 위해서도 오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것이 성령이 오신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서로 이해되어진다면 성령안에서 하나라는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할 일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교회가 진리라고 말하고 생명이라고 말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원칙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증거물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보지 않고 예수님이 가신 하늘을 소망하고 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이 임한 신자에게서만 볼 수 있습니다. 천국을 소망하십니까? 그리고 그 소망으로 살아가기를 힘쓰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곧 성령이 임한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7강) 2:4-11 성령과 방언
여러분이 그리스도인 되어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는 이제 내 백성이다'는 선언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우리가 자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선언하셨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러한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인이 아닌 그냥 세상의 사람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 됨을 자각하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하시는 일이 곧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것이 '내가 누구인가?'라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나를 그리스도인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 오심으로서 하나님의 생각과 뜻과 그 마음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9절에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육신과 영의 차이는 그리스도의 일을 생각하느냐 생각하지 않느냐에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기에 그리스도의 일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영이 없다면 결국 자기 일, 즉 육신의 일만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의 일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음으로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오심이 단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말을 듣게 하시기 위해서겠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성령이 오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하신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하셔서 하실 일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 사명은 우리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이 오셔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오심을 결코 신비한 요소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람 자체가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생각하지 않던 것을 생각하게 되었고, 중요하게 여기지 않던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즉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시각 자체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 성령의 오심인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오순절에 성령이 오셨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다고 해서 오순절에 특별한 의미를 둘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오순절을 성령이 강림하신 날이라고 해서 특별하게 여긴다면, 결국 우리는 주일 외에 성령이 오신 날로서 오순절을 지켜야 될 것입니다.
성령이 오신 이유를 알기 위해서. 성령이 오셨을 때 제자들에게서 보여졌던 현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현상이 곧 방언입니다. 지난 시간에 잠깐 언급을 했지만,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 제자들에게 있게 된 방언과 오늘날 교회가 말하는 방언을 동일시해서는 안됩니다. 9-11절에 보면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라는 말을 합니다. 현대 교회에서 말하는 방언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외국의 말이기에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언어가 아닌 신비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이 오셨을 때 제자들에게 있었던 방언은 우리가 생각하는 신비한 말이 아니라 그냥 외국말이었습니다. 여러 외국에서 온 이방인들이 각기 자기나라 말로 듣게 된 것입니다. 즉 한국 사람이 말을 하는데 미국 사람은 영어로 듣게 되고, 중국 사람은 중국어로 일본 사람은 일어로 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냥 다른 나라의 언어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성령이 오신 증거로서 방언을 말하고 그 방언을 이세상의 말이 아닌 신비한 용어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오신 것은 신자로 하여금 방언을 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가 성령을 받은 증거로 방언을 내세우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고 그로 인해서 제자들이 방언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성령이 오셔서 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오신 것을 우리 멋대로 상상할 것이 아니라 방언을 하게 된 것으로부터 그 이유를 찾아가야 합니다.
앞서 말한대로 방언이란 단지 신비한 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제자들의 말을 그 자리에 몰려 있던 모든 이방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언어의 통일입니다. 4절에 보면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자기들 멋대로 방언으로 말했던 것이 아니라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이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들은 복음을 말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복음을 이방인들이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땅끝이란 신자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야 할 범위는 정해져있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방나라까지 모두 포함된 것이 땅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땅 끝에 해당되는 이방나라의 사람들이 제자들의 말하는 복음을 듣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왜 오셨는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복음을 이방인이 듣게 되었다는 것은, 복음은 이제 유대인들의 것만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복음은 어느 특정인의 것으로 소유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유대인의 것만이 아니라 유대인이 개처럼 여기는 사마리아인에게도 허락되었고 이방인들에게까지 허락된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 이방인 상관없이 천하에 퍼져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오심은 신자에게는 특별한 체험이나 어떤 감동으로만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성령이 오신 것에 대한 감동이 있을 수는 있지만 감동을 주기 위해서 성령이 오신 것이 아님을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뭔가 하실 일이 있어서 오셨음을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오심을 생각하는 신자라면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이 성령을 받으니까 배우지도 않은 외국말을 하게 되더라 우리도 성령을 받으면 외국말을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다'는 이것은 옳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증인으로 사는 삶의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증인이 되어라'고 말씀하셨다면 '성령을 보낼테니까 성령을 받아서 증인의 일을 잘 해봐라' 는 뜻이 되겠지만,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것은 되어질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한 예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신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범위를 땅끝까지라고 말씀하신 것은, 복음은 이미 이방인에게까지 허락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허락하신 복음의 대상을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마음과 생각으로 거부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신 것은 신자를 그리스도의 사람되게 하셔서 세상으로 보내시겠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성령을 임하게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아들로서 세상으로 보냄 받은 분임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성령을 받은 것은, 예수님의 기뻐하는 신자로서 세상에 보냄 받았음을 증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 받으신 예수님은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에만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은 신자라면 자신을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만 순종하게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방언은 제자들을 세상속으로 보내셨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함께 나누라고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증인으로 보낸 것이지 심판자로 보낸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제자들과 같은 방언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과 방언은 성령이 오셨을 때 꼭 있어야 할 증거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시고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을 방언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성령이 주어지고 복음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우월해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나서 알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서 복음을 맡겼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을 맡겼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전달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복음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전달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사명을 잊어버리고 산다면, 우리는 헛된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복음을 맡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과 자비하심을 함께 나누라는 것이고, 예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돈을 나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서로가 나누어야 할 관계로 만났습니다. 여러분이 깨닫게 된 복음을 나눌 자로 함께 한 것입니다. 서로 비판하고 비난하고 미워할 대상으로 만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가를 새롭게 정립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엉뚱한 길에서 엉뚱한 일로 세월을 허비하며 살아가는 일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받은 분들이라면 그것은 복음을 나눌 자로 부름 받았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명임을 기억하시고 이 일에 마음을 두고 힘쓰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8강) 2:16-21 말세에
신앙생활은 삶의 일부가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의 한 일부로 여기신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자인 우리의 행동 몇가지를 모아서 그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모든 것이 곧 신앙으로 살아가는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활과 신앙을 별개의 것으로 여긴다면, 그는 결국 신앙으로 살아가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 몇 개를 모아서 신앙생활로 내세우고 있는 것뿐입니다.
때문에 만약 자신이 신앙으로 여기는 그 몇 개의 행동에 대해서 부지런하지 못하면 스스로 자기 신앙에 대해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신앙을 서로 비교하고 누구의 신앙이 더 깊다거나 누구의 신앙이 약하다는 등의 평가를 하게 되는 것 역시 신앙이라고 여기는 몇가지의 행동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신앙생활을 두고 서로 비교한다는 것은 곤란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은 삶 전체인데 어느 일부를 가지고 비교하면서 누가 낫다 못하다라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성령이 세상에 오신 것 역시 신자로 하여금 삶의 한 부분에 대해 열심을 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베드로의 설교중 한 부분입니다. 오순절 날에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이 성령을 따라 각나라의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거기 모여 있던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놀라고 기이히 여깁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조롱하면서 '저희가 새술에 취하였다'고합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 내용을 보면 우리가 생각할 때 뭔가 특이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인데 쉽게 말하면 극히 평범한 설교이고 지금 우리들 입장에서는 전혀 새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교 내용에 대해서 우리가 트집 잡을 것이 뭐겠습니까?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베드로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인간의 마음을 뜨겁게 하거나 부추기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열심을 내라는 말도 하지 않고 우리가 뭘 어떻게 하자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설교를 통해서 사람들을 어떻게 해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설교를 통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뜨겁게 한다거나 열심을 내게 하겠다는 의도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말할 뿐입니다. 이것이 설교입니다.
베드로의 설교에서 본문은 성령이 오신 것에 대해 변증하는 내용입니다. 13절에 보면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 나라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들은 사람들이 그들을 조롱하면서 한 말입니다. 베드로는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15절)는 말을 함으로써 시간적으로 술을 마시고 취해 있을 시간이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 삼시는 지금 우리 시간으로 계산하면 오전 9시에 해당합니다. 사람은 대개 오전에 술을 마시지 않고 모든 일과를 마친 오후에 마십니다. 유대인들 역시 오전보다는 오후에 술을 마십니다. 물론 술 중독자라면 오전에도 술을 마실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극히 일부 사람의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성령의 역사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은 성령으로 하는 방언을 술에 취해서 횡성수설하는 것으로만 알았던 것입니다.
이들에 대해서 베드로는 성령 강림 사건에 대해 변증하는 설교를 하는데, 요엘서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6-18절을 보면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요엘 선지자의 말을 인용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세상이 곧 말세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시고 성령이 오신 것은 결국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만 남겨 놓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그것으로 세상은 끝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의 세상은 말세라는 역사 속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요엘서 2:28절의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라는 말을 인용함으로써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그 날이 이르렀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날이 성령이 오심으로서 너희들에게 이르렀으니 정신차리라는 것입니다.
예언을 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는 것은 구약에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방법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구약에서 자신의 계시를 알리는 방법으로 선지자를 세우시고 그들에게 예언와 꿈과 환상을 통해서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이 주어짐으로서 꿈을 꾸고 예언을 말하고 환상을 보게 된다면 결국 선지자들에게만 주어지던 계시가 성령이 임한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신 지금의 시대에서는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특정한 계시가 주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자녀와 젊은이 노인, 즉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계시이기 때문에 목사라고 해서 따로 개별적인 계시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성령이 임한 모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깨닫게 되고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각기 다른 계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계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성도들에게 각기 다른 영으로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으로서 동일한 성령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성령안에서는 같은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면 같은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어떤 행함에 대한 같은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만약 행함에 대해서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같은 성령을 받은 신자는 같은 행동을 하게 된다는 이상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성경을 보면 같이 성경을 보고, 한 사람이 기도하면 같이 기도하게 되는 식의 행동의 통일이 성령이 오신 이유가 아닌 것입니다.
같은 마음은 19-21절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영을 부어주시면 남종이나 여종이 예언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예언은 곧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심으로 말하게 되어지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예언은 단순히 장차 되어질 앞으로의 사건을 미리 말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세상에 되어질 일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 자체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으로 예언을 하게 하실 때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땅에서는 징조를 베푼다고 하십니다. 그 징조는 피와 불과 연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이 확실하게 드러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이 세상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속에 있음을 증거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의해서 죽으심으로 세상이 곧 어두움인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바로 그러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보기에 세상은 평화롭고 힘만 쓰면 살기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가지게 하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지 않게 되는 지름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심판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면 굳이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죽으신 이 세상이 곧 심판을 받을 어두움인 것을 알게 된다면 성도가 취하고 바랄 것은 구원 밖에 없습니다. 어두움에서 자연히 빛을 찾고 빛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한 성도라면 세상을 희망으로 보지 않습니다. 만약 세상에서 자신에게 희망이 되는 것을 찾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힘을 쓰는 삶을 산다면 그는 성령의 마음으로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령은 신자로 하여금 세상에 희망을 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세상에서 유일한 희망인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성도의 같은 마음은 오직 그리스도로 소망을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심판의 대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성도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에 성령이 임한 자와 성령이 없는 자의 차별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방언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소망으로 삼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가지 않는 것이 곧 성령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우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시는 분이지만 옛날 이스라엘에 오셔서 죽으신 그분이 지금은 하늘에서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는 것과 예수님을 죽인 이 세상이 곧 어둠이고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성령 받은 신자이며 구원받은 자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모든 관심을 세상으로부터 예수님에게로 바꿔놓기 때문입니다.
(9강) 2:22-36 베드로의 설교
본문은 베드로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는 설교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극히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말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는데 그 수가 삼천이나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한번 베드로의 설교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마음에 찔림이 있고 '어찌할꼬'하는 심정으로 회개하게 되어집니까?
베드로의 설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죽였고, 하나님이 다시 예수님을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음을 중점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설교에 의해서 삼천이나 마음에 찔림을 받았고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베드로의 설교를 대하는데도 마음에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입니까? 그저 성경책의 한 부분을 대하고 있는 것일 뿐, 마음에 찔림도 없고 회개도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는 것은, 베드로가 23절에서 말하는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라는 내용을 자신들이 행한 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일을 자신들이 스스로 행한 것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모든 말씀들이 자신들과 상관이 있는 얘기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자신들이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셨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정당성을 하나님이 인정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곧 주가 되시며 그리스도이심이 증거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세우신 분을 정작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신들이 죽였음을 생각할 때, 자신들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대해 무지한 자들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자신들의 허물이며 무지임을 알게 되었을 때 마음에 찔림이 없을 수가 없고 회개하게 되어진 것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한 설교를 목사들이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베드로가 했던 설교의 내용을 전혀 바꾸지 않고 그대로 했을 때 과연 베드로의 경우처럼 삼천 명이 마음에 찔림을 얻고 회개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대개 숫자에 의미를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베드로의 설교에 단 한 명이 회개를 했다면 아마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삼천이라는 많은 수가 회개했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삼천이든 한 명이든 중요한 것은 마음에 찔림을 얻고 회개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생각할 때 한 명을 회개시키는 것이 힘듭니까? 아니면 삼천 명을 회개시키는 것이 힘듭니까? 보나마나 한 명보다는 삼천 명을 회개시키는 것이 힘들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죽은 사람 한 명을 살리는 것이 힘듭니까? 아니면 죽은 사람 삼천 명을 살리는 것이 힘듭니까? 답은 분명합니다. 한 명이든 삼천 명이든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사람 한 명을 살리든 삼천 명을 살리든 모두가 큰 능력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회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도 마음도 감각도 죽은 자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생각하는 자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됨으로 인해서 자신의 허물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회개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한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이 그 속에 창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찔림을 받았다는 것 역시 자신의 허물을 볼 줄 아는 감각이 생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회개한다는 것은 죽은 자가 새로운 생명을 얻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능력은 회개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는 자가 하나님을 생각하는 자가 된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삼천이라는 수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기를 바랍니다. 만약 한 명은 회개시킬 수가 있는데 삼천 명은 안되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많은 수의 회개에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일 뿐, 회개가 죽은 자가 성령에 의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결과라는 것은 도외시한 것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즉 단 한 명의 회개라 할지라도 인간의 논리나 설득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단 한 명이라 할지라도 베드로의 설교를 대하면서 회개할 수 있다면 그는 베드로가 설교하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바로 자신의 일로 여겼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즉 회개한 사람들처럼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이라는 것이 마음 깊이 느껴질 때 베드로의 설교는 그 사람의 마음에 찔림이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베드로의 설교를 대하면서 마음에 찔림이 없고 회개함 역시 찾아볼 수 없다면 그것은 베드로가 말하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자신과는 별 상관이 없는 얘기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설교를 목사가 그대로 설교한다 할지라도 자신과 상관이 없는 얘기로 듣는다면 그 사람에게는 단지 설교일 뿐, 그의 마음을 찌르고 움직이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신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기 때문입니다. 설사 불신자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는 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단지 예수님에게 있었던 일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귀신들도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습니다. 마가복음 3:11절에 보면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귀신들도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5:7절의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라는 말을 보면 귀신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으되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분으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성경을 보든 설교를 듣든 중요한 것은 이것은 바로 나의 이야기이며 나와 상관이 있는 얘기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성경도 설교도 결국 여러분의 마음에 남지 못하고 듣고 본 것으로 끝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예수님을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사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생각들을 주로 합니까? 혹시 예수님 때문에 세상의 복을 받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대개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은 예수님을 죽인 자의 자리에 자신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죽인 자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성경에서 예수님을 죽였다는 얘기가 나오면 모두가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얘기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문 25절에 보면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라고 말합니다. 다윗조차도 아직 오시지 않은 주를 뵈웠다고 말하면서 그분이 다윗의 우편에서 다윗이 요동치 아니하도록 붙드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다윗도 예수님과의 관계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과연 예수님과의 관계안에서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부활의 사건이 우리의 마음에서 멀어질 때, 우리는 우리 일에 열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설교는 그저 다 아는 이야기로 들려질 것입니다. 성경 보는 것은 귀찮은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 역시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저 교회 다닌다는 것으로 신자의 명목을 이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예배드리고, 간혹 좋은 일에 헌금하는 것으로 믿음이 있음을 확인할 뿐입니다.
그러나 신자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자신을 신자로 여기신다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세상 사람은 돈 없으면 못살지만 신자는 돈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없으면 못산다는 심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무엇을 하시고자 하는가에 대해서도 마음을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가 죽인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뭔가를 하시고자 합니다. 우리가 죽인 예수님을 다시 살렸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큰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둘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신앙생활의 근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 신자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신앙생활을 해야 할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할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으며 신앙으로 살아가야 할 근거도 이유도 없이 교회를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로서 참으로 불행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근거로 삼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냥 무턱대고 아무 생각없이 주일이니까 교회를 나오는 것말고 교회로 모여야 할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할 근거가 여러분들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직장 생활을 힘들어 하고 싫어합니다. 그러나 해야 하는 것으로 압니다. 왜냐하면 가족들의 생활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직장생활은 싫다고 해서 마음대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힘들고 하기 싫어도 하게 되는 것은, 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현실적으로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편한대로 행동합니다. 교회 역시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하지 않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로 모여야 할 이유도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하고, 신앙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도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내가 못박아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로 세우셨다는 것을 통해서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는가를 생각할 때,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답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시고 예수님을 생각하며 살아가십시오. 삶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10강) 2:37-41 회개
본문은 베드로의 설교에 의해서 삼천명이 회개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미 말씀드린 대로 베드로의 설교가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있는 본문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들 역시 삼천 명이라는 수에 관심 둘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설교를 두고 생각한다면 사실 베드로가 설교를 잘했기 때문에 삼천 명이 회개했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삼천 명의 회개가 베드로의 설교에 의한 결과라면 베드로가 아닌 다른 사람의 설교에도 같은 반응이 나와야 하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도행전에는 베드로말고 스데반의 설교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회개는커녕 스데반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이것이 과연 스데반의 설교가 베드로보다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목사가 설교를 잘해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회개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신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삼천 명이 회개한 것 역시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신 결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설교한 베드로나 회개한 사람에 대해서는 다른 의미를 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군가가 회개를 하면 회개를 한 그 사람을 높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굳이 회개를 두고 말하지 않는다 해도 모든 것을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습성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 기도하게 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당사자를 생각합니다. 봉사하면 봉사하게 하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하는 사람을 생각합니다. 이것이 곧 우리들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삼천 명이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삼천 명의 회개가 어디로부터 왔다고 생각합니까? 베드로의 설교입니까? 아니면 회개한 사람들의 자질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입니까? 복음서의 얘기는 하나같이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시고 가르쳤지만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죽이는 것으로 끝납니다. 누구하나 예수님 말씀에서 스스로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제자들까지 예수님으로부터 도망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계셨던 세상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를 하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 뭔가 달라진 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말씀을 가르쳐도 반응하지 않던 세상이 사도가 전하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반응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가시고 성령이 오심으로서 이루어진 새로운 세상입니다.
성령이 아니면 우리는 그 누구로부터 어떤 말을 듣는다 할지라도 반응하지 않을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말씀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려고 달려들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들의 실수와 허물을 발견하고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을 성령이 간섭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즉 성령의 간섭을 받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간섭하시는 새로운 세상은 우리의 힘과 자질로 살아가는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는 세상입니다. 여러분은 신자로서 이와 같은 새로운 세상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를 간섭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이며 하늘입니다. 이것이 세상과 다른 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회개는 곧 말씀에 대한 굴복입니다. 즉 삼천 명의 회개는 베드로가 전한 그리스도 앞에서의 굴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가 없다면 그것은 곧 그리스도에 대한 굴복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38절에 보면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마치 구원이 우리의 회개로 시작하여 세례 받는 것으로 이어지고 죄사함 받는 것으로 주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구원의 조건은 회개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죄사함 받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한다는 말도 하게 됩니다.
회개가 성령을 받는 조건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성령이 없는 상태에서도 회개는 가능한 것이 될 수밖에 없고 결국 구원은 인간이 회개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린 것이 되버립니다. 회개는 분명 성령이 오셔서 일하신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자는 성령을 받은 자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8절의 말씀은 회개하면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회개함으로서 그가 성령을 선물을 받았고 죄사함 받은 자임이 증거 되어진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스스로 성령 받았다고 외친들 그것을 누가 알 수 있습니까? 성령이 오셨다면 오신 흔적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말씀에 의해서 마음이 찔림을 받고 회개하게 된 것으로 증거된 것입니다. 세례 역시도 의식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허물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죄로 인해서 죽어야 할 자는 바로 나라는 고백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바로 성령이 함께 한 열매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내가 살아가는 길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다른 길로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새로운 세상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힘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신자는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새로운 세상에서의 삶에는 회개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고 용서해 달라고 울면서 기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를 그렇게 이해하기 때문에 회개를 하지 못합니다. 회개는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가 진리임을 알고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힘써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사는 것이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의 회개입니다.
(11강) 2:42-47 자유
베드로의 설교로 인해서 3천 명이 회개한 것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시대가 시작된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3천 명의 회개에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성령이 일하시는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에 대해 관심을 둬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에서 보여진 것은 회개만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서로의 필요에 따라 나누고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새시대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43절에 보면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라는 말을 합니다. 기사와 표적은 사도들이 자신들의 능력으로 베푼 일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성령이 일하시는 표적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치 설교는 베드로가 했으되 설교를 들은 자들을 회개케 한 것은 성령이 하신 일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도들로 인하여' 라는 말은 사도들의 설교를 두고 한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로 인하여 삼천 명이 회개하게 된 것 같이, 다른 사도들의 설교로 인해서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기사와 표적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기사와 표적'이라고 하면 불치병이 낫는 등의 신비스러운 일들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43절에서 말하는 기사와 표적은 44-47절의 내용을 두고 한 말입니다. 즉 물건을 통용하는 것, 재산을 나누는 것,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함께 음식을 먹는 것, 어찌보면 신비스럽다고 말할 수 없는 일상생활들을 기사와 표적이라고 말하는 것에 염두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기사와 표적의 의미는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신기한 사건이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사와 표적이 무엇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에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시대가 어떤 것인가를 미리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서 기사와 표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물건을 서로 통용하며 재산을 나누고 음식을 함께 먹고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는 모습들은 무작정 현대 교회들이 본받아야 할 모본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가르치는 기사와 표적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대한 현대 교회의 입장은 한마디로 말해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을 아름다운 공동체, 또는 현재 교회가 지향하고 실천해야 할 모범적인 교회로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본문의 모습에서 현대 교회가 무엇에서 잘못되어 있는가를 생각하고 배우는 것은 유익이 된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단지 그것이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로 삼천 명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초대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새롭게 시작된 초대교회의 모습을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필요에 따라 나누어 준 것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은, 뭔가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초대교회로서 교회를 더욱 확장시키기 위해서 열심히 전도했다거나 선교했다는 이야기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 소유가 없는 자로서 함께 나누는 것으로 증거되는 것은, 성령이 일하시는 참된 교회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 소유가 없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실제적으로 자신의 소유로 가진 것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가지고 있든 그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하나님의 것으로 여겼으며 잠시 맡은 것이니 내것이 아닌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때문에 비록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다른 필요한 사람이 있을 때는 팔아서 나눌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초대교회를 본받자거나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목사님들 또한 이 부분에서 참으로 난처해하기도 합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라는 것은 목사들이 참으로 반기는 말이고, 집에서 떡을 떼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는 것 역시 교회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있는 재산도 팔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준다는 것은 가진 것이 있는 자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만큼은 목사에게도 난처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현대인에게 재산을 팔아서 나눌 것을 강요하거나 명령하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기사와 표적은 미래의 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역시 현대 교회가 실천해야 할 사항으로 주어졌다기보다는 장차 미래에 주어질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미래를 지향하며 나아가는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로서 자연히 그 흔적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희년에 대한 규례가 있습니다(레25장). 희년이란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인간이 자신의 소유를 주장할 수 없음을 알게 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희년에는 종된 자들에게 자유를 주고, 가난한 자들에게서 산 땅을 다시 되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4:18-19절에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이 곧 레위기에서 말하는 희년 사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한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을 누가복음의 후편이라고 말할 때 누가복음의 희년 사상과 사도행전의 본문 내용이 서로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하심으로서 자유를 전파하게 하셨다면, 성령이 오심으로 시작된 초대교회가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을 팔아 필요한 자에게 나눠주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로 인한 자유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로 인한 자유는 육신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붙들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붙들린 자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자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우리가 잘아는 부자청년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자 청년이 영생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왔을 때 예수님은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부자 청년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좇지 못하도록 붙드는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자기 소유입니다. 자기 소유에 붙들려 있다면, 그래서 영생을 원하면서도 예수님을 좇지 않았다면 결국 그 청년은 자기 소유에 붙들려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들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성령이 오셔서 교회를 시작하시고, 교회를 통해서 보이시고자 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자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천국이 곧 완벽한 자유의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그 무엇에도 붙들리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지향하며 살아가는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모습이 현세에서 보여지는 것이 바로 본문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사와 표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교회는 결코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현대 교회가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을 따르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그 목표를 향하여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가 증거 되어야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설교로 삼천 명이 회개하고 시작된 초대교회가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기사와 표적으로 증거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초대 교회는 모여서 교회 발전을 목표로 삼고 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이 더하게 하셨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초대교회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단지 그들의 삶으로 인해서 되어진 열매였던 것입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2:43-47)는 말씀을 다시 한번 마음 깊이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초대 교회가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역시 교회로 모이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우리를 교회로 모이게 하셨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들의 목표를 가지고 모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를 붙들어서 모이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할 것은 성령이 하고자 하시는 일이지 우리들이 스스로 교회의 목표를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성령이 원하는 일이 곧 우리들의 목표와 지향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현대 교회가 보여주는 것은 큰 예배당과 많은 교인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애쓰는 교회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리고 분란과 다툼도 있고 경쟁도 있습니다. 성령이 일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배워야 합니다. 교회가 무엇을 지향하고 살아가야 하는가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신자가 준비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흔적이 여러분의 삶에서 보여지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자유가 무엇인가를 배워가면서 자유자의 신앙이 보여져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된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12강) 3:1-10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은 그 옛날 엘리야 선지자가 여러분 앞에 나타난다면 그에게서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혹은 사도 바울이 나타난다면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그분들이 능력의 선지자요 사도이기 때문에 병고침이나 아니면 여러분에게 득이 되는 어떤 일을 행해줄 것을 기대하겠습니까? 여러분의 기대가 그렇다면 과연 선지자나 사도들은 여러분의 기대에 맞는 것을 제공하기 위해서 힘쓸까요? 저는 결코 그렇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선지자나 사도들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한 제가 결코 그렇지 않으리라는 확신의 말을 드리는 것은 성경에서 소개되고 있는 그분들을 볼 때 결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주기 위해서 존재하신 분들이 아니었고, 또 실제로 그분들은 그렇게 사셨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종으로 존재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분들의 관심은 그리스도에게 있었으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그분들의 사명이요 존재이유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는 우리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사도들의 위대한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적의 사건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킨 사건입니다.
이적의 사건을 말씀드릴 때마다 제가 강조드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적을 행한 사람이나 이적의 혜택을 받은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적을 행한 사람에게 관심을 두게 되면 '나도 능력을 받아서 저런 이적을 한번 행해 봤으면'하는 유혹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적의 혜택을 받은 사람에게 관심을 두며 '나에게도 저런 이적이 일어나서 병도 고쳐지고 돈방석에도 앉아 봤으면'하는 유혹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를 살리신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면 어떤 이적의 사건에서도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성경에 대한 바른 시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의 관심을 그리스도께 두게 하는 분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6절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대하면서 '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말하면 뭔가 되어지겠구나'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일종의 주문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유혹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러가라'고 외치면 죄를 이기는 능력이 생기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결코 그러한 용도로 쓰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아무리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외친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뭔가 되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단어에 어떤 신비한 힘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6절의 말씀은 베드로와 요한이 자신들이 일하는 것은 모두가 자신들의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힘이며, 그리스도의 말씀이 성취되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도구로서 존재할 뿐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6절의 말을 하게 된 것은 성전에서 만난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하는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은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서 구걸을 하며 살았습니다. 아마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 사람들을 만나서 구걸을 하면 성전에 기도하러 가는 입장에서 거절을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주일에 예배드리러 갈 때 좋은 일을 하면 왠지 복을 받을 것 같은 인간의 심리를 이용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쨌든 앉은뱅이는 평소대로 성전에 올라가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을 합니다. 베드로는 그러한 앉은뱅이에게 6절의 말을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이 내용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먼저 앉은뱅이의 처지를 본다면 2절의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는 말씀과 같이 스스로는 움직일 수 없는 처지이고, 구걸을 하는 것조차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처지인 것입니다. 그는 돈이 필요할 때면 스스로 나가지 못하고 누군가가 자신을 성전 문에 데려다 주기를 애타게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마음은 원이지만 그 몸을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참으로 연약하고 무능한 처지에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앉은뱅이의 처지에서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앉은뱅이의 모습에서 여러분 자신의 처지를 발견할 수 있고 스스로 그렇게 인정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은 여러분 안에서 성공했으며 여러분은 참으로 희망이 있는 성도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목사인 저로서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실 앉은뱅이는 바로 우리 자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돈을 벌고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돈에 대해서는 앉은뱅이와 같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만큼은 우리는 죽은 자요 무능한 자요 나면서 앉은뱅이된 사람처럼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믿는다면 그것은 분명 그리스도의 일이 여러분 안에 시작되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앉은뱅이에게서 우리 자신의 처지를 볼 수 있다면 6절의 베드로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돈을 구합니다. 그것은 앉은뱅이가 필요로 한 것은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앉은뱅이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일어나 걷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에게 '나를 일으켜 곧게 해달라'는 요구를 한다면 분명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사람에게도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울 권능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앉은뱅이에게 베드로는 '우리를 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앉은뱅이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바라봅니다. 아마 그는 분명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많은 돈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말하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는 말은 앞서 말한 대로 단순히 돈이 없다는 말로 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돈 대신에 병고침을 주는 결과가 되버리기 때문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다는 것은 베드로와 요한의 일이 은과 금, 즉 세상의 재물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것으로 되어지지 않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은과 금이 있어서 수많은 은과 금을 준다고 해도 앉은뱅이는 여전히 앉은뱅이일 것입니다.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앉은뱅이라는 질고를 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에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한 것은 너의 질고는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로만 해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고침 받은 것은 단순한 병고침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8:17절에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예수님의 병고침은 곧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표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베드로가 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바로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일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6절의 베드로의 말은 단순한 주문형식의 말이 아니라 '연약하고 무능한 너를 일으켜 세울 분은 오직 너의 모든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복음의 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앉은뱅이가 곧 우리의 처지를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의에 대해서는 스스로는 전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들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담당하시고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일어나 걸을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스스로 걷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내 힘으로 내 스스로 걷고 뛰는 것으로 착각함으로 인해서 우리들의 입에서 하나님에 대한 찬미가 사라지고 대신 우리 자신에 대한 자랑이 나오게 됩니다. 일어난 앉은뱅이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인해서 구원받은 우리들이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가 앉은뱅이의 처지에서 일어나 걸을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생명을 얻었고, 천국을 소망하게 되었고,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만 우리를 일으켜 세우신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단지 말로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누구를 만나든 나올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구원받은 그 은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6절의 말씀을 본다면 베드로에게 있는 것은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서로서로에게 줄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분이어야 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로 생명을 얻은 우리라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앉은뱅이가 모인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자들이 모인 교회인 것입니다.
(13강) 3:11-16 기적의 주체는
책에는 저자가 있고, 책의 내용에는 저자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책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저자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저자의 의도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의도를 따라 읽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바른 독서의 태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책이든 저자가 있고, 저자는 책을 읽을 사람들의 의도와 생각과 바램을 따라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의도에 충실하여 글을 쓰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성경을 두고 생각해 본다면 성경 역시 같습니다. 성경에도 저자가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기록된 책이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도와 뜻을 벗어나지 않고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경에 대한 우리의 기대와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성경을 기록하신 것이 아님을 잊지 않는 것도 필요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의 사건 역시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에 충실해야지 기적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욕구를 가지고 대한다면 단지 신비롭게 보이는 기적에 매달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은 사실 성경에서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많은 기적을 통해서 일하셨고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은 다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 중 하나일 뿐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적이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적에 대해 신비성과 초월성을 버리지 못합니다. 즉 신비하고 초월적인 사건일 때 그것을 '기적'이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 대부분이 기적의 신비하고 초월적인 모습에 매료 되버립니다. 결국 기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철저히 가려진 채 다만 기적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적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기적만이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들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신 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애굽에 내려진 열 재앙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하며,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징벌을 받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사건들은 단지 역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계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적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이와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적은 단지 초월성과 신비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라면 다른 종교가 감히 따라올 수 없는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기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종교가 더 센 신비와 초월을 보여주느냐로 우월을 판가름하는 분위기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다른 종교에서 신비하고 초월적인 사건이 있다고 할 때 무턱대고 부정하려는 분위기가 되기도 합니다. 다른 종교의 기적을 인정한다는 것이 마치 '네 종교가 내가 믿는 기독교보다 더 세다' 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초월적인 기적의 사건들이 기록된 것은 절대로 종교적 우월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기적을 종교적인 우월감을 드러내는 도구로 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은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에 대해서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기적의 사건 후에 있게 된 일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즉 기적을 목격했을 때의 사람들의 반응을 말하면서 그것이 왜 잘못된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분명 신비스러운 일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히 그러한 일을 행한 것으로 여겨지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12절)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13절)라는 말을 합니다. 결국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으킴으로 끄집어내게 된 말은 하나님이 주장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났다는 것이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일을 주장하신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앉은뱅이를 단지 병자라는 차원에서 보지말고 어떤 권세에 매어 있는 실체로 보자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단의 권세 아래 있는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한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은 사단의 권세로부터 해방됨을 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베드로는 14절에서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는 말로 이어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은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셔서 주장하신 일이고, 하나님이 그 일을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과 회복을 주장하시는 분이심을 가르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심으로서 그분이 바로 생명의 주였음을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의 사건을 통해서 증거하고 말씀하고자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적은 단순히 신비스러운 일이 아니라 우리를 가르치고 돌이키고 말씀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장하신 일인 것입니다. 모든 일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장하신 일임을 항상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어떤 일에 대해서 인간이 주체로 나서게 된다면 그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는 결과가 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베드로와 요한의 입장이라면 과연 어떤 태도를 보였겠습니까? 어쩌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을 하면서도 그러한 말을 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 대견한 생각을 잊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것은 좀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한 경우 앉은뱅이를 일으킨 놀라운 일의 능력을 자기 것으로 삼아서 자신을 위대한 능력자로 내세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처음부터 모든 능력은 그리스도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자신들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생명의 주되심을 계시하기 위한 능력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은 자신들이 한 일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살리신 예수님이 생명의 주가 되시는 분이었음을 증거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말을 통해서 어떤 일에서든 사람이 주체로 등장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간증이라는 것의 오류도 이것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간증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간증에서 인간이 그 주체로 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간증의 거의 대부분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비한 체험을 한 한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그가 그러한 체험을 할 수 있게 된 이유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많이 들을 수 있는 간증 중에 죽을 병에 걸렸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체험담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의 모두가 가만히 앉아 있는데 병이 나았다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기도를 어떻게 했다거나, 금식을 했다는 등의 자기 노력이 개입을 합니다. 그리고 신비로운 체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모든 사람들은 신비한 체험의 주장자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 자체에 마음이 끌리게 되고 체험도 인간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물로 인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사람들이 체험한 신비한 사건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만 보더라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길을 돌이킨 체험이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눈이 멀었다가 다시 뜬 체험도 했고, 죽은 자를 살린 체험도 했고, 독사에 물렸는데 죽지 않은 체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삼층천의 신비로움을 체험하기도 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체험으로 따지자면 바울도 할말이 많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쓴 서신서를 대할 때 바울은 모든 성경을 자신의 체험을 중심으로 쓰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다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었습니다. 설령 자기 체험을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 체험을 주제로 삼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기 위한 도구로서 자기 체험을 언급하는 차원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의 체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는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주장하신다는 것을 믿는 신자라면 인간의 체험에 마음을 뺏겨서는 안됩니다. 또한 어떤 사람처럼 나도 저런 체험을 해보고 싶다는 유혹에 빠져서도 안됩니다. 누가 어떤 체험을 했다고 해도 담담할 수 있어야 하고, 설령 내 자신이 신비로운 체험을 했다 할지라도 그 체험에서 하나님의 일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로지 하나님의 일하심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어떤 체험을 했다면 그것이 그 사람의 마음을 붙드는 힘이 될 수도 있고 감정적인 기쁨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 그 사람은 자기 체험을 믿는 오류에 빠질 위험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평생토록 신앙의 근거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체험에 머물러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체험을 하지 않은 사람의 신앙에 대해서는 수준 낮은 것으로 여겨버리게 될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이해 역시 '하나님은 그러한 체험을 주시는 분이다'라는 것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에 대해서도 '내가 이렇게 했더니 이런 일이 있게 하셨다'는 생각에 머물 것이 아니라 '이 일의 주장자는 하나님이시다. 나는 하나님의 일의 증거일 뿐이다'는 생각에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은 오직 복음을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자의 자리에 있다면 어떤 일도 내가 아닌 복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에게 주신 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14강) 3:17-26 기적이 말하는 것
신앙생활은 말 그대로 신앙으로 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에 모여서 교회와 연관된 일을 하는 것을 두고 '신앙생활'이라고 규정짓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신앙생활로 말씀하시느냐에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은 신앙생활로 보지 않으시는데 우리들끼리 교회에서 하는 몇가지 행동들을 붙들고 그것을 신앙생활로 생각하고 만족하고 있다면 우린 그야말로 헛것을 붙들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종교적인 행동을 보이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우리가 행하는 몇가지의 행동을 두고 신앙생활을 '한다 못한다'로 규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앙생활을 해야지'라는 생각 역시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게 되고 '내 삶은 내 멋대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살게 하신 분이 계신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는 이미 신앙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신자가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본문의 말씀에서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우린 몇주동안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의 사건을 두고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으킨 자신들을 주목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12절)고 말한 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16절)고 말한 내용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성하게 한 것은 자신들의 권능이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한 일임을 말함으로서 기적의 주체자가 자신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심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러한 말을 한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9절을 보면 베드로는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는 말을 합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을 내세워서 회개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가 이 기적의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기적의 사건은 그냥 겉으로만 본다면 신기하고 놀라운 사건입니다. 기적을 일으킨 사람도 놀랍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것도 신기한 일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기적을 놓고 '회개'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의 참된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무작정 회개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16절을 보면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베드로의 말을 종합해 본다면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유대인들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즉 앉은뱅이의 상태가 바로 너희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앉은뱅이는 스스로 자신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처량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앉은뱅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믿는 믿음이 그 사람을 낫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것을 두고 스스로 일어나 걷는다고 여기는 유대인더러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앉은뱅이와 같은 상태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량한 존재입니다. 그러한 우리를 깨끗이 하고 성하게 한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으로 말미암은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내가 깨끗함을 입었음을 믿게 하는 것이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깨끗함을 입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 스스로 얼마든지 일어나 걷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나를 믿어야 낫는다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배척을 했고 죽였던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의 '우리 스스로 일어나 걷는다'는 사고방식이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것을 회개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된 은혜를 멸시한 것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하는 회개는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21절에 보면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세상에 대한 영원전부터의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말합니다. 즉 하나님은 만유를 회복하시기 위해서 일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만유가 회복된다는 것은 악한 세상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으로 새롭게 시작되는 때를 의미합니다. 결국 베드로는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게 된 이 사건을 두고 만유를 회복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유를 회복하시고자 하신다면 지금의 이 세상은 끝장나야 할 곳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신자로서 세상에서 지향하고 살아가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분명 세상의 사고를 좇아 살아가는 것과는 달리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완성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답게 악한 세상에서의 그의 삶도 세상의 마지막과 함께 새로운 세상이 있게 될 것임을 선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안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완성된 세계를 지향하는 삶이 아니라 눈에 보인 세상에 집착한 삶에 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자에게만 있을 수 있는 회개인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단순히 자신의 잘못된 행동 몇가지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성하게 되고 낫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일은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 계속되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깨끗함을 입게 되었다는 것도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믿고 산다면 세상에서 하나님이 이루실 그 나라를 지향하는 삶이 될 것이고, 이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절처럼 단순한 종교단체가 아닙니다. 내 교회를 유지하고 교회를 발전시키고 내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을 많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존재하는 교회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라 이름할 수 없습니다. 즉 교회는 교회를 위해서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이 어떠한 계획으로 일하시는지도 알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만유의 회복을 위해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모인 교회라면 당연히 보여져야 할 것은 세상의 마지막과 하나님이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 모습 중의 하나가 2장에서 말씀드렸던, 초대교회의 사람들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을 팔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네 것 내 것이 없고 단지 맡은 자로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그 모습이야말로 소유하기 위해서 경쟁하지 않는 회복된 세계, 즉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교회가 할 일은 하나님이 이루실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선포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성을 위해서 일하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이 이루실 완성을 바라보고 살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교회에 집착을 하고 교회를 위해서 교회로 모이고 교회가 잘됨을 소망하는 것으로 인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잊어버리고 산다면 우리가 회개할 것이 무엇인가가 분명해지지 않겠습니까? 흔히 말한 대로 우리가 열심이 없어서 교회가 부흥되지 못했음을 회개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서 몸의 완성을 소망하는 삶을 살지 못한 것을 두고 회개하는 것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에 보여지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믿음으로 앉은뱅이가 성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믿음이 우리를 어디로 끌어갈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소망을 달성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실 완성까지 우리를 붙들어서 끌어갈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참된 모습은 하나님의 완성을 보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완성된 그 나라를 보고 살아가기 때문에 사망에 처한 세상에 대해서는 날마다 벗어나는 자로 사는 것이 곧 믿음으로 사는 것이며 이것을 신앙생활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우리가 이러한 신앙생활을 하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21절의 말씀 중에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둔다는 것은 하나님이 만유를 회복하실 그 날까지 예수님이 하늘의 영광 중에 계실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린 때로 이런 아쉬움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하늘의 영광된 모습을 보여주시면 세상이 금방 예수님을 믿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에 계신 예수님 역시 영광된 하나님으로 계십니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는 죽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조차도 하늘의 빛을 보고 눈이 멀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오셔서 일하신다면 예수님의 영광 앞에서 우리는 눈이 멀거나 죽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구약 때 하나님이 모세를 대신 세우신 것처럼, 그리고 선지자를 세워서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고 세상의 마지막을 외쳤던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은 선지자를 세워서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을 선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을 맡은 자가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25절에 보면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곧 선지자의 자손입니다. 여러분을 세상에 선지자로 세워서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선지자로 살아야 할 사람들이고, 선지자로 사는 것은 세상의 마지막과 완성될 세상이 있음을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교회가 있는 것이며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15강) 4:1-4 붙잡힘
오늘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기적의 사건 뒤에 따라오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인기일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기적을 행한 자가 목사라면 그 교회는 몰려드는 사람들로 미어터질 것이 분명합니다. 사실 이러한 결과를 염두에 두면서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도 있고, 이러한 환상을 꿈꾸며 목사로서 남다른 능력을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는 그러한 결과가 있을 수 있다 할지라도 실제 그 일이 있었던 사도행전에서는 과연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복음도 각기 다른 시대에서는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과연 어떤 것이 복음으로 인한 진실된 결과인가를 생각해 보자는 의도에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현실이 복음의 참된 결과라면 그것으로 지금 우리의 삶이 복음을 담고 살아가는 것인지를 판단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3장에서 베드로는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게 된 기적의 주체자가 자신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죽였으나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를 성하게 하였음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선지자를 세우신 것도 예수님의 오심을 증거하기 위해서임을 가르칩니다. 이러한 가르침 뒤의 결과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사도가 전한 복음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한 결과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4절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고 말하는 것을 봐도 사도가 전한 복음으로 인해서 남자의 수만 오천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가 전한 복음으로 인해서 이러한 결과를 가져왔다면 앞서 말한대로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라면 그 사도의 이름은 전국을 떠들썩하게 할 것입니다. 능력있고 이름있는 목사로 대우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사도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믿는 자는 오천이나 되었지만 정작 말씀을 가르친 사도 자신들은 오히려 붙잡혀서 갇히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었습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1-3절) 여기 보면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들에 의해서 붙잡히고 갇히게 됩니다. 이유는 그들이 싫어하는 것이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는 가르침이었는데 그것을 사도들이 전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싫어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전했던 복음이 세상에서의 삶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말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종교적인 체제를 흔들어 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을 제거했는데 그가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갔다면 결국 자신들이 한 일이 크게 잘못된 것임이 드러나는 것이 됩니다. 때문에 누구든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도를 가르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만 해도 누구든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만 해도 유대교에서 출교 해버리는 엄벌을 가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복음을 전함으로써 붙잡혀 갇히게 된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제사장,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기에 예수님을 싫어했고 예수님을 전한다는 이유만으로 사도들을 가두는 것입니까?
당시 제사장은 유대교의 권력자로서 성전에서의 모든 예배를 집행하고 주관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종교든 종교적 의식을 주관하고 집행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종교적 권력을 지니는 것을 볼 때 그들의 권력이 어떠했던가는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군중들을 모아놓고 집회를 하는 것은 그들의 소관이었던 것인데,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도를 가르치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위치에 대해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그런 이유로 예수님을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시 아무런 합법적 권한도 부여되지 않은 사도들이 군중들에게 예수님의 도를 전한다는 것은 곧 그들의 권한을 침해하는 행위로 보여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 맡은 자라는 것은 성전을 지키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며 제사장 다음가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레위 지파 출신의 제사장을 포함한 사람들로서 부유하고 지체가 상당히 높은 사람들로 초자연적인 것을 부인하는 종교적 합리주의자들이었습니다. 때문에 죽은 자가 다시 산다는 것은 그들의 합리주의적인 사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극히 현세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장차 오실 메시야를 기대한다는 것조차 헛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메시야는 단지 이상이었을 뿐이지 실제 인격적인 존재로서 자신들에게 올 분으로는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이들에게 있어서 사도가 가르치는 예수님의 도, 즉 죽었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는 헛된 도일 수밖에 없었고, 자신들의 종교적인 체제를 흔들고 허물어뜨리는 한마디로 이단적인 가르침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두개인들은 극히 현세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을 지배하던 로마와의 유대관계를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로마와 유대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이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을 붙잡아 가둔 이들은 한마디로 이 세상이 중요하고 세상에서의 자신의 삶이 전부였던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면 그것이 곧 그들의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의 신앙체제를 모두 무너 뜨리는 것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는 예수님의 선포 자체가 이 세상이 중요한게 아니라 천국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는 그들의 종교 체제와는 전혀 맞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은 로마와 타협하면서 잘 살고 있는 그들의 삶의 기반을 흔들어 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했던 것이고, 따라서 사도들을 붙잡아 가둔 이유도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님을 전하는 사도들을 붙잡아 가둔 것은 당시 제사장이나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이라는 특정 인물로 국한 지을 것이 아니라 세상을 전부로 보고 세상에서 별 탈 없이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을 꿈꾸는 사람들이 사도들을 가두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가령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아는 목사가 부흥과 성장 그리고 교회는 그저 평안하면 된다는 것을 추구하는 교회로 부임을 했습니다. 그러한 교회에서 순수하게 복음만을 전한다고 할 때 과연 어떤 일이 있게 되겠습니까? 복음은 분명 기존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종교 체제를 거부할 것입니다.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교회로 굳게 서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치는 것이 복음이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신자의 의가 되기 때문에 신자가 헌금하고 예배드리는 것이 결코 의가 되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러한 복음이 전해졌을 때 분명 교회에서는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복음도 중요하지만 교회가 시끄러워지고 흔들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하면서 그러한 복음 전하는 것을 막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으로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바른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것보다 현세적인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며, 본문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의 사고방식과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교회에는 필히 싸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 앞에서 다른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며 내세우는 것이 있지 않은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복음이 중요한가 아니면 교회 유지가 중요한가에 대한 생각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했다고 해서 복음을 전하는 개인이나 교회의 앞날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니까 하나님이 우리 교회는 아무일 없도록 잘 지켜주시겠지'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앞에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붙잡히고 갇히는 사도들의 얘기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갇혔지만 사도들의 가르친 말씀으로 인해서 남자만 오천명이라는 많은 수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것은 복음은 결코 쇠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자의 안위도 보장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인해서 고난에 처하고 어려움에 처한다고 해도 복음만은 결코 쇠하지 않고 그 능력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의 바른 태도는 복음 덕분에 자신의 안위를 꾀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복음만 전하면 교회가 부흥되겠지라든가 복음만 전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서 평안한 길로 인도하시겠지라는 생각은 모두가 복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위와 행복을 중요하게 여기는 생각일 뿐입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산다면 평소에 복음을 말하다가도 그 복음으로 인해서 현재의 삶에 흔들림이 오고 위태로움이 올 때 현재적인 삶의 안정을 위해서 복음을 포기해 버리게 될 것입니다.
복음이 있는 곳에는 삶의 형통도 있다는 약속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이 살아가는 삶의 체제를 거부합니다. 그러한 복음을 전한다면 분명히 현재적인 삶의 체제에서 안정을 원하는 사람들로부터 거부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복음이 중요하고 천국도 소중하다고 하지만, 지금의 내 삶이 흔들리고 어려움이 오는 것은 피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복음을 말하지만 내 교회가 아무 일 없이 잘되어지고 내 삶이 안정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리 안에 굳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복음으로 살아갈 수 없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삶을 흔들고 나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이 곧 사도들을 가둔 자들의 생각과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닫기 바랍니다. 복음은 결코 우리의 삶을 안정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복음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16강) 4:5-12 베드로의 싸움
세상에서의 성공의 의미는 강한 힘이 있는 자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돈이든 권력이든 남들보다 많이 그리고 높이 존재함으로써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발 앞에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을 두고 성공이라고 말합니다. 때문에 성공하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하고 높은 권력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힘있는 자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떨쳐 버릴 수 없는 유혹입니다. 남에게 머리를 숙이기보다는 명령하고 군림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 사는 맛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공에 대한 유혹을 가진 채 교회를 선택함으로 인해서 교회조차도 인간의 성공을 돕기 위한 교회 아닌 교회로 추락해 버린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보다는 사람을 선택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교회 역시 성공을 원함으로서 나타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의 성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선 교회의 성공을 많은 수의 사람이 모이고 재정이 늘어가는 것으로 단정짓는다면 과연 그러한 교회의 성공을 성경에서 인정하는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사실 성경에서 교회의 성공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때의 사도들이 행했던 모습들을 보면서 교회다운 교회가 어떤 것이고 교회는 무엇을 고집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혹 우리는 복음이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교회의 성공을 원하게 되면 필히 이러한 현상이 보여지게 됩니다. 세상이 보는 교회의 성공은 말한대로 사람과 재정의 증가입니다. 큰 예배당과 교육관 등 부수적인 건물들, 이러한 것들이 성공의 증거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성공을 원할 때 결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을 모으고 내 교회에 붙들어 놓아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에서 무엇을 원하는가를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불만을 가지고 떠나지 않도록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성공을 원합니다. 때문에 복음에 성공을 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잘 믿는자에 대한 복을 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공을 원하는 자에게 성공을 제공하면서 대신 교회에 대한 헌신을 조건으로 내겁니다. 교회에 대한 헌신이 곧 예수에 대한 헌신이요 예수님은 성도의 그러한 헌신을 결코 외면치 않는다는 말을 함으로써 사람들의 행위에 희망을 불어 넣어줍니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교회들에게서 볼 수 있는 행태들입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초대 교회 때의 사도들은 결코 성공과는 거리가 먼 결과를 보여줬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헌신의 결과가 그냥 조용하게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세상에 떨치게 된 것도 아니고 큰 권력을 가진 자가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도를 전한다는 것 때문에 붙들려서 갇히는 결과만을 가져올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복음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즉 복음은 결코 우리를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으로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때로는 복음으로 인해서 손해를 봐야 하고 고난에 빠질 수도 있음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을 붙들어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들과 서기관들 대제사장이 다 참예한 가운데 사도들을 심문을 하게 됩니다. 심문의 내용은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절)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베드로는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8-12절)는 답을 합니다.
사실 당시 베드로가 처해있던 분위기는 상당히 고압적인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유대교에서 권력자들만 모인 자리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들이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고 예수의 도를 전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 앞에서 예수를 주장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분위기에서도 베드로는 변함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일을 행했느냐고 묻는 그들 앞에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다시 일어나 섰다'라고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다시 사신 분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무덤에 시체가 없는 것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훔쳐서 숨겨 놓고 다시 살았다고 거짓으로 소문을 낸 것으로 여겼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게 된 것을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 일을 했다고 한다면 결국 예수는 살아서 역사하고 계시는 분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도들이 행한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한 것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7절에 보면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했다고 합니다. 즉 성령이 충만하여 관원들과 서기관, 장로, 대제사장들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성령 충만은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성령 충만이 베드로를 둘러싸고 있는 핍박자들을 힘으로 이기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하게 예수님 편을 들게 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에게는 바로 이것이 부족한 것입니다. 현실적인 문제에서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가려지는 쪽으로만 나아갑니다. 어떤 어려운 현실에서도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믿음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성령 충만이고 예수님 편을 드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우린 항상 현실의 문제에서 믿음으로 굳게 서려고 하기보다는 세상적인 방식을 의지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성령 충만의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신자된 우리가 포기해야 하는 것은 세상에서 이기는 자로 설려고 하는 것입니다. 힘있는 자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남을 이기고 힘있는 자가 되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 성령 충만도 남보다 더 믿음이 있는 자로 보여주기 위해서 원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힘있는 자로 만드시지 않습니다. 설령 여러분이 남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힘있는 자로 만드시기 위해서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가지지 않은 자로 살아가고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힘없는 자로 살아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라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도구를 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자된 우리가 신자됨을 지키고 증거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는 성령입니다.
신자는 어떤 상황과 어떤 현실에서도 끝까지 예수님 편에 서 있는 자로 존재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어두움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 어둠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빛이 증거되는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베드로는 지금 싸우고 있습니다. 힘에는 힘, 이에는 이라는 정신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그 이름이 우리를 일으킴을 부인하는 자들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들은 힘과 권세를 가지고 베드로의 입을 막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붙드신 것을 성령이었으며 성령은 베드로로 하여금 어떤 힘에도 굴복하지 않고 예수님 편에 서 있는 사도로 살아가게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의 싸움은 바로 그와 같습니다. 어둠의 세상에서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 세상에서 신자가 신자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이름으로 일으킴을 받은 신자에게 있어야 할 싸움인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의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살았고 그리스도 때문에 살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 신자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헛된 싸움에 우리의 모든 것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남들보다 좀 더 나아지기 위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타락상입니다. 예수님 편에 서 있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싸움에 부지런한 것입니다. 세상은 항상 세상 것을 드러냅니다. 그속에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싸움을 하고 사는 것이 신자이며 이 싸움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곧 승리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변에서 누군가가 세상 것을 자랑할 때 여러분 자신이 초라하게 보여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 과연 무엇이 진심으로 초라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자로서 진심으로 초라한 것은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어 버렸을 때 남은 것은 밖에 버리어져 밟히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가장 초라한 신자의 모습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의 싸움은 세상 사람을 항복시키기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만원을 자랑하면 나는 하나님에게 십만 원을 받아서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잘한 것인가를 보여줌으로서 이기는 싸움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의 싸움은 끝까지 예수님을 붙드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신자의 연약함은 신자 자신에게조차 예수 그리스도가 복의 증거물로 자리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일으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이름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것을 신자 스스로 우습게 여김으로 인해서 증거할 것도 내놓을 것도 없는 허약한 자로서 싸움은커녕 오히려 세상과 벗된 자로 살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다시금 여러분의 심령에 예수그리스도의 권세와 이름으로 얻은 구원이 얼마나 큰 복인가를 굳게 세우시고 복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싸우는 신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돈으로 살고 돈을 자랑할 때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살고 예수의 권세를 자랑함으로써 싸우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17강) 4:12-22 오직 예수
12절의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는 말은 그 무엇으로도 포기할 수 없는 절대적인 뭔가를 붙들고 있는 사람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로들과 제사장 서기관들은 사도들이 예수의 도를 전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붙들어 심문을 합니다.
사도들은 그들 앞에서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로만 얻을 수 있으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증거 합니다. 사도들은 그 어떤 힘에도 굴복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을 고집합니다. 이것은 사도들에게 있어서 소중한 것은 그리스도로 얻어지는 구원이었고 이 구원은 그 무엇으로도 심지어 자신들의 목숨으로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끝까지 예수의 도를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사도행전의 사도들이 처한 상황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상황이 서로 다르다는 것 때문에 지금 우리들의 상황에서는 '예수님 외에 천하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은 없다'는 단호한 선언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들이 처한 본문의 상황에 대해서 단지 구경하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상황에서는 그러한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옛날 일제 시대나 공산 치하에 있던 상황에서 총 칼을 들이대고 예수를 부인하라고 위협 당하는 처지라면 본문과 같은 사도들의 말이 마음 깊이 다가올 수 있겠지만 지금은 소위 말하는 평화시대이니 만큼 예수의 도를 전한다고 해서 붙잡아 가두는 것도 없고 핍박하는 것도 없으니 사도들처럼 목숨을 내 걸고 예수의 이름을 증거 해야 할 그런 시대는 아니라는 생각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 시대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국가적인 상황은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고 전도한다고 해서 붙잡아 가두는 것은 없습니다. 소위 종교의 자유를 말하면서 어떤 종교를 믿고 어떤 종교를 전파한다고 해도 인정해주는 것이 국가의 법입니다. 하지만 국가가 인정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종교라고 해도 국가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위협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를 인정하는 것도 국가를 위한 종교로 존재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국가를 해롭게 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 종교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국가가 취하는 입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니까 마치 기독교는 무조건 국가를 반대해야 한다는 것처럼 들릴 수가 있는데 국가를 반대해야 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니라 국가라는 권세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에 존재하는 권세는 오직 하늘의 권세뿐입니다. 하늘의 권세에만 복종하는 것이 기독교이지 국가의 권세에 복종하는 것은 기독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국가라 할지라도 예수의 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요구한다면 복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복종해야 할 권세는 오직 하늘의 권세뿐이라는 말은 국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목사와도 연결되고 교회와도 연결되고 교단과도 연결되는 말입니다. 즉 신자에게는 목사가 권세로 존재할 수 없으며, 교회나 교단 역시 권세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목사나 교회나 교단의 권세에 복종할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 역시 무조건 목사에게 반대하고 교회나 교단에 대해서도 반대적인 입장을 취해라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말하는 것이 그리스도가 말씀하는 것과 일치되는 것이라면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말씀한 것을 말한다면 복종할 것이지만 그리스도가 말씀하지 아니한 것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왜곡되게 전하고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면 복종할 수 없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인 것입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은 현세적인 삶의 안정입니다. 그 어떤 것도 현세적인 삶을 위협하고 흔드는 것이라면 모두 악으로 규정을 해버립니다. 사도들을 붙잡아 가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습니다. 사도들이 전한 예수의 도가 그들의 현재적인 종교 체제를 위협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 역시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전할 때 많은 교회가 이에 대해 반발합니다. 기도에 대한 성경적인 의미, 예배나 헌금 십일조 등에 대한 성경적인 참된 의미를 그대로 드러낼 때 그것을 예수의 도로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이단적인 것으로 규정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적인 이유는 진리가 아니라는 것보다는 교회의 기초를 흔들어 버린다는 것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를 보호하고 진리를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보호하고 교회를 굳게 세우기 위해서 예수의 도를 도가 아니라고 하면서 거부하고 몰아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기초는 주일 성수나 십일조 준수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인들이 주일을 잘 지키고 십일조를 준수하는 것만이 교회가 흔들림이 없이 잘 유지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주일 성수 또는 십일조 준수를 말하지 않습니다. 주일을 지키지 말라거나 십일조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주일 성수나 십일조 등이 그리스도 앞에서 의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에 대해서 거부하는 것은 현대 교회가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교인들로 하여금 주일을 지키도록 하고 십일조를 잘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는 교인들의 행위를 그리스도와 연결시켜야 하고, 복과 연결시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그 어떤 행위도 의가 되지 못한다고 해버리면 결국 교인들의 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꺾어 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것이 교회의 현세적인 유지가 위협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지금의 이 시대가 신앙적으로 결코 평화로운 시대라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어떻게 보면 교회가 성행하고 난무한 것으로 인해서 예수의 도가 위협받고 무너지는 심각한 위기의 상황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러한 위기의 상황은 복음 안에서만 보여지는 것입니다. 복음 밖에서 본다면 현대 교회가 행하는 것이 극히 당연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종교적인 모습들이기 때문에 결코 예수가 도전 받는 위기 상황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현재를 본다면 지금의 이 시대야말로 교회는 풍요로우나 복음은 빈곤하다고 말해야 할 상황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현 시대는 사도들의 시대보다 더 심각하고 큰 위협 속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학과 문명이 발달한 현 시대가 옳은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과학적 사고와 합리적인 사고에 맞을 때이기 때문입니다. 즉 현대 사회는 어떤 하나를 절대적인 진리로 규정하고 그 진리에 의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고에 의해서 인정되는 것을 진리라 하기 때문에 사실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예수를 말할 때 마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절대적인 진리를 세우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 역시 자신들의 사고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것이기 때문에 수시로 바뀌는 것이 그리스도고 주어진 상황에 따라서 통용되는 것일 뿐, 절대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서 예수의 도를 전한다는 것은 분명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더욱 분명히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들 역시 교회 밖에서 이방인들에게 위협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위협을 받은 것입니다. 절대적 진리가 없는 무리들 안에서 절대적 진리를 전함으로써 서로 조화할 수 없는 무리로 규정받고 배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것과는 조화할 수 없습니다. 서로 조화하고 인정하고 타협하는 것이 세상이 볼 때는 그것이 좋은 것이고 사랑인 것처럼 보여지지만 진리 안에서는 오히려 진리를 포기하는 것밖에 안됩니다. 그래서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은 독선적이고 자기 것만 옳다고 주장한다는 말을 많이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만을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조화를 이루고 양보하고 타협함으로써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사실 얼마나 보기에 좋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이 아닌 구원을 두고 생각해 본다면 도저히 그럴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부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에 있기 때문에 신자는 어떤 경우와 상황이든 그리스도를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을 붙들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여야 합니다. '다른 이름으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이것이 여러분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그 어떤 것으로도 예수 그리스도만은 양보할 수 없고 포기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어떤 힘든 일이 있고 배척을 받는다고 해도 말입니다.
사도들을 붙들었던 사람들은 사도들을 힘으로 굴복시킬 수도 없고 회유할 수도 없음을 알고 곤란에 처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더 이상 사도들로 인해서 예수의 도가 전파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도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경계를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19절)고 말합니다. 이것이 진리에 대한 사도들의 복종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며 살았던 것이지 사람의 말에 복종하며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복종한 것이지 목사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무엇이 옳은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옳습니까? 편한 삶을 위해서는 사람의 말을 들어줘야 합니다. 힘있는 자가 요구하는 대로 움직인다면 배척받지 않는 편한 삶이 약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은 진리를 포기한 자로서의 마지막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구원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 졌는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참으로 소중한 것임을 알 때 구원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 진리로 알고 살다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은 누군가를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아는 신자로서 사람들에게 진리를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사는 것 밖에 없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권세에도 굴복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해야 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은 자로서 그 이름만을 굳게 세우는 삶이 되기 바랍니다.
(18강) 4:23-31 사도의 기도
예수의 도를 전한다는 것 때문에 붙잡혀 갇힌 사도들이 예수의 도를 전하지 말라는 많은 위협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만 들을 뿐이라는 단호함을 보입니다. 이러한 사도들을 죽이고 싶은 것이 장로들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마음이었으나 사도들이 행한 일을 보고 그들을 따르는 백성들로 인하여 할 수 없이 풀어주게 됩니다. 이렇게 풀려난 사도들이 돌아와서 자기 동료들에게 제사장과 장로들이 한 말을 얘기하게 되고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기도에서 30절의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라는 기도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병나음과 어떤 능력적인 표적을 원하는 기도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구절로 오해되기 십상입니다. 사도들도 그러한 기도를 했으니 우리도 그러한 기도를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기도를 깊이 생각해보면 결코 그러한 의미로 한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24절의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라는 기도를 보면 단지 하나님을 높여 부르기 위한 의례적인 표현법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의 기도에서 고쳐져야 할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도를 시작하면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생사화복을 주장하신 하나님' 등의 표현을 하고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이 그저 기도를 위한 의례적인 표현으로 그쳐버린다는 것입니다. 즉 기도를 기도답게 만들기 위해서 사용하는 미사어구 정도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생각지도 않으면서, 또한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에 복종하고자 하는 뜻도 없으면서 그저 기도를 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언어로 그치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이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라고 기도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높이기 위한 언어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주재로 말하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신 분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주재하고 계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오직 복종할 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가 되시며 세상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주재이시고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 취할 태도는 오직 복종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어떤 식으로 진행해 가시든 피조물인 우리는 복종하는 것만이 대주재이시고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을 부르는 신자로서 합당한 모습인 것입니다. 또 25-26절에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고 기도를 보면 하나님이 세상에 대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열방이 분노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분노를 말합니다. 즉 세상에 대해 하나님이 일하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음으로 분노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방들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인간중심으로 모든 일을 경영하는 것을 두고 허사를 경영한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이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한다는 것은 하늘에 권세가 있음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의 권세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그러한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도들이 이러한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알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들은 대주재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말하면서 '이렇게 해달라'는 기도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복종만이 요구될 뿐임을 아는 사도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병이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표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분명 다른 의미가 있음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자신들의 욕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0절의 기도를 대하면서 사도들도 이렇게 기도했으니까 우리도 우리 병을 낫기 위해서 기도하고 표적과 기사를 보여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분명 성경에 대한 섣부른 판단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대주재이신 하나님은 스스로 창조하신 만유를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되어지는 모든 역사는 우리가 생각할 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되어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는 것에 대해서 인정하는 것이 있는 반면에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개인의 판단을 기준으로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생각할 때 좋은 것이면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라는 말을 하게 되는데, 나쁜 일인 경우 그러한 말을 하기를 꺼려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항상 좋은 것만 주시는 분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지만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것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이 다르다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육신을 유익하게 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영을 유익하게 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말씀합니다. 아무리 육신에 유익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한 이상 결코 좋은 것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좋은 것에 대한 분별이 우리의 영의 문제를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전혀 다른 것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오해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사도들은 예수의 도를 전한다는 것 때문에 붙들려서 위협을 받다가 풀려났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도들을 위협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어떤 징벌도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계속해서 사도들을 괴롭히도록 그냥 두고만 보시고 결국 그들의 힘에 의해서 사도들이 죽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결과가 과연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사도들이니까 그런 핍박을 받고 죽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생각은 없습니까? 사도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핍박이 당연하게 여겨지신다면 여러분은 신자로서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손해를 보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까?
신자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남들보다 더 많은 유익을 받아야 하고 잘살아야 한다는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신자이기 때문에 당해야 하는 것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도들을 핍박하는 세력을 그냥 둠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진행하십니다. 사도들에게 닥친 난관을 없앰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난관을 있게 하셔서 일을 이루십니다. 어떤 난관에서도 끝까지 그리스도를 주장하는 사도들을 통해서 세상에 그리스도를 전파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는 사도들을 핍박하는 무리들을 그냥 두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세상을 둘러보십시오. 과연 누가 하나님을 두려워합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말을 해도 세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러한 불의의 세상을 그냥 두고 보고 계십니다. 하루라도 빨리 불의의 세력을 심판해 버리고 없애 버리는 것이 우리 직성이 풀리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마치 하나님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모든 불의를 인정하시는 것처럼 잠잠할 뿐입니다. 때로 이것이 우리들에게는 불만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힘으로써 세상을 굴복시키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세상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예수의 도를 따라 살아가는 신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를 지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들은 어떤 의미로 병낫게 해달라고 하고 표적과 기사를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까? 병을 낫게 해달라는 것은 자신이 병이 들었을 때 그 병을 낫게 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여달라는 것이 아니라 병을 낫게 하는 모든 일들이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되도록 해달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대주재로 부르는 사도들에게 맞는 기도일 것입니다.
그리고 표적과 기사가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것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쓰여지고 있음을 알게 해달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표적과 기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남에게 내세울 수 있는 멋있고 폼잡을 수 있는 그런 기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쓰여지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즉 사도들은 자신들의 삶이 어떤 환난과 핍박과 위협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오직 주 예수의 이름만이 증거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표적과 기사로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기도는 절대로 자신들의 유익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증거되는 것을 소원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기도에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손을 들어 병을 낫게 하는 일이나 그 외 모든 표적과 기사들이 자신들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는 도구로 쓰여지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핍박을 받아도 괜찮고 위협을 받아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이러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은 대주재이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핍박을 받고 위협을 받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 것임을 확신하기에 그러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십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마음에 소원으로 자리하고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보다는 우리 자신의 일을 더 소중히 여기며 기도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기보다는 내 일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기도를 쉬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사도들의 기도는 우리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기도입니다. 제가 말씀드릴 것은 사도들의 기도가 여러분의 기도가 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사도들의 마음과 일치되고 사도들과 같은 심정의 기도가 나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환난과 핍박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19강) 4:32-37 믿음의 모습
사도들의 기도는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이 대주재이심을 고백하는 것을 근거로 한 기도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주재하시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주재아래 있기 때문에 모든 일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질 뿐임을 믿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에서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모습을 결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직 관심은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증거될 것인가에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고 표적과 기사를 이룸으로 말미암아 예수의 이름만 증거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자신의 핍박과 고난까지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되어진 일임을 확신하기에 그러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자기 일보다 더 크게 여기는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의 모습이 본문에서 보여지고 있습니다. 32절에 보면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2:44-45절에서 언급된 초대교회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이것을 보면 초대교회의 믿음의 모습은 재물을 자기 소유로 주장하지 않고 서로 나누는 특징으로 드러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에 말씀드린 대로 '초대교회가 이렇게 했으니까 우리도 초대교회처럼 재물을 나누자'라는 주장으로 나아가게 되면 곤란합니다. 우리를 그럴 수 없으니까 아예 그렇게 할 생각을 말라는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물건을 서로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이 믿음이니까 이렇게 하자'는 스스로의 결단과 실천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재물을 서로 나누는 것은 믿음의 증거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들의 기도 다음에 재물을 나누는 것이 언급되는 것은 하나님을 대주재로 고백하면서 오로지 예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고자 하는 믿음은 재물에 대해서도 제것이라 주장하지 않는 것으로 증거되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초대교회가 이렇게 했으니까 너희도 이렇게 하라는 의도가 아니라 이것이 참된 믿음으로 되어지는 표적이고 기사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결국 초대교회의 이 모습이 참된 믿음의 기사며 표적이라면 이 믿음의 모습을 기준으로 해서 오늘 우리의 믿음을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믿음은 결코 개인적인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과 나와의 1:1관계로 끝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믿음을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종교적 행동을 기준으로 해서 믿음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보고, 헌금하고, 교회에 봉사함으로써 그것을 믿음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일서 4: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라는 구절을 본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1:1의 관계에서 증거 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서 증거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헌금을 하고 봉사한다고 해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것은 거짓말이라는 말씀이 그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십계명에 보면 부모와 이웃에 대한 계명이 있습니다. 이 계명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부모도 공경해주고 이웃도 사랑해주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부모를 공경하도록 할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할 것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이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 33-35절을 보면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자기 것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가져오고 사도들이 그것으로 필요한 자에게 나눠주게 된 것은 사도들이 예수의 부활을 증거함으로 무리들이 은혜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즉 은혜가 있음으로서 자연히 되어지는 모습들이지 자기 스스로 결단하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는 무리 중에 핍절한 자가 없는 것은 있는 자들이 판 것을 가져오고 그것을 필요에 따라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핍절한 자가 있다는 것은 있는 자가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 소유로 여겼다는 증거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 소유로 여기고 내어놓지 않음으로서 핍절한 자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이 곧 믿음으로 살아가지 않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핍절한 자는 우연이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 주변에 있게 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근거로 해서 여러분에게 '있는 것을 팔아라'는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말을 한다면 그것은 결국 믿음을 위한 또 다른 율법을 요구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누가 하라고 명령한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라는 명령은 오직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에게서만 주어질 뿐입니다. 그리고 그 명령은 예수님의 은혜에 살아있고 믿음에 살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얻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산다면 자연히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목사가 하라고 명령한다고 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주어진 은혜와 믿음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동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이처럼 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다'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는 끝까지 회개할 수밖에 없는 자임을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대로 한다면 우리들 곁에 핍절한 자가 핍절한 채로 지낸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믿음에 순종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즉 우리가 우리의 것을 내것이라 주장하고 내어놓기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 주변에 보내신 핍절한 자가 계속 핍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핍절한 바를 바라볼 때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초대교회가 한 것처럼 너희도 있는 것을 팔아서 나누라는 실천 요구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우리가 과연 믿음으로 살아가는가를 묻고 있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쉽게 말합니다. 은혜를 얻었다느니 예수님의 은혜가 참으로 크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말들은 거의 모두가 개인적인 생각과 묵상에서 나와지는 말에 불과합니다. 물론 그러한 고백도 귀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고백에 대한 순종입니다. 은혜를 얻었고 은혜를 안다면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고백했으면 그 은혜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들의 증거로 은혜를 얻은 자들이 자기 것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크게 곡해하여 말하기도 합니다. 즉 말씀에 은혜 받은 증거를 재산을 교회에 바치는 것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왔다는 것을 목사에게 가져와 바쳐야 하는 것으로 가르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은혜를 얻은 자들이 자기 것을 팔아서 사도의 발 앞에 두는 것은, 사도라는 한 개인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증거한 말씀의 권능에 복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목사에게 가져오라는 것이나 교회에 바치라는 말이 아니라 신자는 자신의 소유까지도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하는 자로서 사용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의 말씀은 믿음이 신자를 어떠한 방향으로 인도해 가는가를 명심하면서 날마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경계하고 고칠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대주재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얻은 우리 소유는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은혜로 얻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주어진 것에 대해서 '하나님 이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것으로 그쳐 버립니다. 즉 주어진 것을 자기 소유의 증가로 여기면서 소유를 증가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받은 자로서의 할 일을 다한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믿음은 참으로 미약하기 그지없습니다. 결코 자신할 수 있는 믿음이 아니며 자랑할 수 있는 믿음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있다 해도 자기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아무리 기도한다고 해도 결코 내것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우리이고, 몇십년 교회를 다녔다고 해도 역시 내것에 대한 마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솔직한 모습이면서도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만 여깁니다. 신자가 믿음에 대한 자신의 연약함을 생각할 수 있다면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할 것인가에 대해 분명한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내것을 쌓고 내것을 만들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을 지켜달라는 기도를 하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러한 요구를 하십니까? 여러분의 연약함을 알고 믿음을 지켜달라는 기도를 하십니까? 어쩌면 더 이상 하나님께 요구할 것이 없는 인생이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 열심과 노력으로 얼마든지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하나님에게 요구할 필요가 없고, 믿음에 대한 문제 역시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아예 하나님을 찾을 필요도 기도할 것도 없는 신자로 전락한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 시간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기도했는가를 말입니다.
본문을 대하면서 우리는 한없이 연약한 자임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초대교회처럼 하라고 해도 할 자신도 없고, 또 그렇게 할 마음도 없는 자가 곧 우리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말하고 예수를 말하고 성경을 말했지만 적당한 수준까지 순종하는 척하고 더 깊이 들어가기는 거부해 버리는 것이 우리가 아니었습니까? 끝까지 내 것은 지키겠다는 의도를 버리지 않는 채 하나님을 찾았던 것은 아닙니까?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떠들었던 우리가 아닙니까? 본문을 대하면서 재물에 대해서 한없이 연약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회개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우리에게 외치는 말씀입니다.
(20강) 5:1-11 교회의 순수함
신자란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막연히 하나님이라는 신이 존재함을 인정해주는 수준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주시고 만유를 다스리는 분임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면 오늘 우리들의 믿음의 모습이 분명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믿음으로 살아가지 않을 때 가차없이 책망하시고 징계하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막연한 분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존재하시고 그들을 다스리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너무 막연한 분으로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도 '잘했다 잘못했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설사 잘못한 길을 간다고 해도 가만히 계시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때로 '하나님은 진짜 계시는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해 담대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담대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동안 자신이 무엇을 해도 하나님은 전혀 간섭한 적이 없다는 경험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쪽으로 흘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도 자신이 어려울 때 생각할 뿐, 불의함과 죄로 나아갈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생각하며 두려움을 가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담대함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믿음의 바른 모습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분명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보여져야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권세에 복종하는 모습이 보여지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교회로서 바른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오늘 본문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여러분이 익히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1,2절에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는 구절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소유를 팔아서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 나머지를 사도들에게 가져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당시 믿는 사람들이 자기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에게 가져오고 그것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줬던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이들 부부도 아마 그러한 것에 영향을 받아 그들도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에게 가져오기로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판 것을 다 가져온 것이 아니라 얼마를 감추고 나머지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결국 두 부부가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헌금의 문제로 인해서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비록 교회를 다닌다고 해도 헌금의 문제가 잘못되면 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사실 본문을 이렇게 이해함으로 인해서 많은 교회가 신자들에게 헌금을 제대로 할 것을 요구하는 것도 많습니다. 특히 십일조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수입에 대한 십일조를 철저하게 할 것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를 철저하게 하기 위해서 봉급의 실 수령 금액의 십일조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명시된 금액의 십일조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문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사건은 현대 교회의 신자들에게 헌금을 제대로 하라거나 십일조를 속이지 말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3절을 보면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베드로는 아나니아가 땅값 얼마를 감추는 것을 성령을 속이는 것으로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사도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삽비라 역시 9절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 대"라는 말씀을 보면 사도에게 땅을 판 값에서 얼마는 감추지 않았다고 거짓말하는 것을 주의 영을 시험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본문의 중점은 이들 부부가 땅 값 얼마를 감추었고, 또 그 사실을 속이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성령을 속이는 것이고 주의 영을 시험하는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단순히 처음에 작정한대로 헌금하지 않은 것에 대한 심판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비록 처음에 얼마를 작정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생각대로 작정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얼마를 헌금해라'고 계시해서 작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얼마든지 작정한대로 헌금할 수 없는 형편이 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빚을 내서라도 작정한대로 헌금을 해야 합니까? 그것이 성령을 속이지 않는 것입니까? 본문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성령을 속인다 시험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신자는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권세 역시 믿는 것이고, 하나님을 섬긴다면 하나님의 권위 아래 복종하는 것이 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에서 보여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왕의 권세는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왕의 권세에 복종합니다. 그러나 왕이 죽으면 권세는 단지 상징으로 남을 뿐입니다. 즉 인정해주는 권세일 뿐 복종할 필요는 없는 권세일 뿐입니다. 죽은 왕이기 때문에 설사 왕이 어떤 지시사항을 남기고 그 지시에 불응한다고 해도 왕이 살아서 자신을 처벌할 수 없기 때문에 자연히 왕의 지시에 대해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왕이 살아있다면 그 권세는 모든 사람에게 결코 무시할 수 없고 복종해야 하는 것이며, 왕의 명령을 불응할 때는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 교회가 하나님의 권세를 말하고 있지만 하나의 상징으로만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즉 살아있는 왕으로서의 권세가 아니라 죽어있는 왕의 상징적인 권세로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왕의 지시를 불응한다고 해도 자신에게 결코 어떤 처벌을 할 수 없는 그러한 왕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의 명령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게 되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서 이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사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들이 헌금을 속인 것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계신다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헌금을 속이면서도 그것을 감출 수가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고방식이었다면 자신들의 거짓말을 사도들은 모른다고 해도 하나님은 아신다는 생각으로 가질 것이고, 그렇다면 자연히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서 헌금을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보여주는 교회의 모습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람들이 모여서 어울리는 친목단체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서로 어울려서 자기들 마음에 맞는 교회로 만들어 가는 단체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생명과 상관없는 인간의 교회일 뿐이라는 것이 오늘 본문이 말해주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내 안에 계시는 분이 성령이기 때문에 성령은 나의 모든 생각과 마음을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과연 성령이 속겠습니까?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이 내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그런데도 속인다는 것은 성령이 내 안에 존재하심을 믿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다면 신자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만유를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알기 때문에 세상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으십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우리가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행위대로 심판하실 분임을 믿으십니까?
그런데 어떻게 형제를 미워하면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까? 형제를 판단하고 비판하면서도 어떻게 담대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조치도 하지 못한다는, 하나님을 죽어있는 신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보여질 수 없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서 다시 생각할 것은 '나는 하나님을 살아 계신 분으로 믿는가?'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기 소유를 팔기로 한 것은 처음부터 인위적인 생각이었습니다.
4:36-37절을 보면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 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고 말합니다. 당시 믿는 사람들은 소유를 팔아서 나눴습니다. 그중에서 요셉이란 사람은 교회에 많은 도움을 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요셉을 바나바, 즉 권위자라는 별명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요셉은 은혜를 받음으로써 은혜에 의해서 행동하게 된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받은 은혜를 나눴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요셉을 바나바로 부르면서 칭찬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요셉이 보여주는 은혜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단지 그가 받은 칭찬에 욕심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역시 자기 소유를 팔아서 헌금함으로써 많은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은혜의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에 막상 자기 소유를 버리고자 할 때 아까워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고 그것으로 얼마의 돈을 감추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을 하나님이 죽이신 것은 하나님이 교회에서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키고자 하시는 교회의 순수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있습니다. 인간의 수단과 인간의 방법으로 세워지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굳게 세워지는 교회가 하나님이 지키시고 굳게 세우고자 하시는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다스립니다.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겠다는 의도로만 모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순수함입니다. 교회가 이것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은 안중에 없고, 성령도 안중에 없고 오로지 인간적인 생각만 하게 됩니다.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골몰해질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지 않는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것은 오늘 본문의 사건이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생각하고 교회로 모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고 계심을 잊지 않고 모여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시는 책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분명 우리가 나서야 하고 우리가 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순수함입니다.
(21강) 5:12-16 표적과 기사
지난 시간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사도들을 속이고 재산 판 돈의 얼마를 감춤으로 인해서 죽게 된 사건에 대해서 생각해 봤습니다. 이 사건은 단지 헌금을 감추었다는 차원에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자가 전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즉 자신들이 한 일을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에서 사도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성령이 우리 안에 함께 하심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들의 행위를 성령을 속이는 것으로 책망한 것입니다. 성령을 속인다는 것은, 성령 앞에서도 자신의 행위를 감추려고 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며 그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 자체를 무시하는 행위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을 두고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고려해야 할 것은 신자된 우리가 그동안 하나님을 부르되 너무 형식적이고 의도적인 부름이 아니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고 말하되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살아 계신 분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신으로 취급한 것은 아니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부르되 그 삶에서 염려가 끊이지를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 살아 계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신자된 우리들의 생각은 하나님을 믿되 삶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음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약한 자를 무시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벗어난 행위이고 성경적인 정신이 아님을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그 행위를 고치지 아니하는 것, 이것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 신자와는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스스럼없이 믿는 자와는 거리가 먼 삶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예수 그리스를 말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 믿는 자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에게 하나님은 진심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나의 모든 것을 살피신다는 그것만으로도 삶에 영향을 받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기를 힘쓰게 되는 모습이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날 신자에게서 믿음의 권세가 보여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신자들이 하나님을 살아 계신 분으로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말은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고 분명하게 고백한다고 할지라도 삶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는다면 믿음의 능력은 결코 보여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현대 교회의 신자들의 믿음이 무능력하고 보잘것없는 것으로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르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만 소리칠 뿐, 하나님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결국 믿음이 세상이 아닌 하늘의 것을 소망하는 능력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으로만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절대로 무능력한 것이 아닙니다. 보잘것없고 하찮은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큰 능력으로 세상에 증거 되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증거가 없다면 그것은 믿음을 선물로 받은 우리들이 정작 사는 것은 믿음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초대 교회는 믿는 자로서의 분명한 증거가 있었고 그 능력이 있었습니다. 12-13절을 보면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말씀을 보면 초대 교회의 믿는 자들과 사도들의 믿음이 얼마나 힘있는 모습으로 증거 되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가 많이 보여지게 되고 그로 인해서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서 침대와 요 위에 뉘우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 혹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덮이기를 바랄 만큼 믿음의 능력들이 많이 증거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힘있는 믿음의 능력과 지금의 시대를 비교해 보면 지금의 믿음은 그 능력을 상실해 버린 채 단지 교회 다니는 사람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날 현대에 보여지는 신자는 강한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와 똑같이 현실에 민감하며 죽지 않기 위해서 지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연약한 모습만 드러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고 무엇을 소망하고 살고 무엇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느냐에 있어서 믿지 않는 자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는자라 할지라도 세상에서 힘있고 성공한 자로 남기 위해서는 세상이 취하는 삶의 방식과 지혜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출세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줄을 잡아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뇌물을 바치는 것도 필요한 것입니다. 결국 믿는 자가 세상의 출세와 성공에 매달림으로 인해서 남들과 똑같이 믿지 않는 자를 찾아가 뇌물을 바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믿음의 능력을 상실해 버린 이름만 신자인 모습인 것입니다.
신자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다른 세상을 소망하고 그것을 위해서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신자를 세상에 대해서는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비유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그네가 나그네답게 살지 않고 행인이 행인다운 행동을 보이지 않습니다. 나그네라고 하면서 행인이라고 하면서 세상의 무거운 짐을 잔뜩 짊어진 채 그것이 무거워서 허덕대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이 과연 그것을 보고 신자를 다른 세상을 소망하고 사는 사람으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신자이면서도 보여줄 증거물이 없는 신자, 이것이 신자에게는 참으로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자로서의 당당함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는 무기력한 모습만 보여진다면 우리는 분명히 신자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자에게서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 보여져야 합니다. 성공해야 하고 출세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다른 삶으로 증거 되어져야 합니다. 이 세상말고 우리를 기다리는 다른 세상이 있음을 보일 수 있는 다른 삶으로 신자의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이 표적과 기사가 초대교회에서는 재산을 팔아서 서로 나누고 그로 인해서 핍절한 자가 없게 된 것으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이 원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복에 거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능력입니다.
물론 본문을 보면 '신자의 능력, 표적과 기사라는 것이 병을 고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오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을 고치는 능력이 없다면 신자로서의 표적과 기사도 보이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사도가 병을 고치는 것은 사도들 개인적 능력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살아감을 증거 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행하셨던 일이 그대로 사도들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사도가 그리스도의 능력 아래 존재함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들이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덮이기를 바라는 것은 베드로의 권세가 드러나는 것이라기보다는 베드로가 의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즉 베드로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기를 소망하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는 이러한 증거물이 없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믿는 자들을 보면서 믿는 자가 의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마음을 두게 하는 표적과 기사가 사라진 것이 오늘날 믿는 자의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불러서 세상과 다른 구별된 인생이 되게 하셨습니다. 인생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고 자기 계획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생을 부르셔서 하나님이 인도자가 되시고 보호자가 되시며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준비해주시는, 하나님이 모든 근원이 되시는 인생으로 불러내신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힘으로 삼고 살던 인생에서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사는 인생으로 불러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자된 우리가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지 않고 예전과 똑같이 세상의 것을 힘으로 삼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로서의 구별된 삶을 증거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믿는 자로서의 표적과 기사가 있습니까? 그것을 어떤 세상적인 차원에서 생각하지 마십시오. 병이 낫는다거나 기도를 했더니 응답을 받았다거나 어떤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차원의 표적과 기사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신자에게 있어야 표적과 기사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든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는 새로운 인생으로 불러냄을 받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서 보여질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는 모든 삶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힘으로 삼는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없기에 하나님을 힘으로 삼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 것을 힘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신자에게서 마땅히 보여져야 할 표적과 기사가 보여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누리는 것을 똑같이 누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을 같이 가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차지한 자리를 같이 차지하려고 마십시오. 신자는 세상을 나그네와 행인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지금 있는 자리도 잠시 후면 훌훌 털고 떠날 사람들이고, 지금 갖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도 다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갈 사람이 신자입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갈 때 신자로서의 표적과 기사가 증거 되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신자에게서 표적과 기사로 증거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구별된 인생으로 불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저와 여러분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신자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고 염려하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힘으로 삼을 뿐입니다. 믿는 자의 이러한 표적과 기사가 보여질 수 있기 바랍니다.
(22강) 5:17-26 기적의 의미
본문의 내용은 성경에서 많이 대할 수 있는 기적 중 하나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믿는 자들이 많아지고 표적과 기사가 있게 되자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의 당파들이 그것을 시기해서 사도들을 잡아서 옥에 가둡니다. 그런데 밤중에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옥에 갇힌 사도들을 구해준 것입니다. 말씀드린대로 성경에 이러한 기적은 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 군대에 쫓길 때 홍해가 갈라진 것이나, 히스기야가 기도했을 때 그 생명이 연장된 것이나, 다니엘이 사자굴에 빠졌을 때 천사가 사자의 입을 막아서 다니엘을 지킨 것 등 많은 이적들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적을 대할때마다 우리는 나에게도 그러한 이적이 있었으면 하는 기대가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성경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이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물론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기적적으로 살았다거나, 고층 아파트에서 떨어졌는데 나뭇가지에 걸려서 가벼운 상처만 입고 살았다는 얘기는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처럼, 그리고 성경에 등장하는 이적처럼 옥에 갇혔을 때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문을 열어준 것과 같은 직접적인 기적은 사실 찾아볼 수 없습니다.
때문에 본문과 같은 기적을 대할 때 곤란한 것은 현실에서는 전혀 일어나지 않는 기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적이라면 어쨌든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사실로 일어난 기적인데 왜 지금 현실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느냐는 것이 본문과 같은 기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라는 의문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적이기에 혹 신자가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혔다고 해도 '성경처럼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옥문을 열어 줄 것이다'는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지금도 그러한 기적이 있게 하실 수 있음을 믿으면서도 그러한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현실에서는 그러한 기적이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왜 지금에는 그러한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시는지 이유를 모른다면 결국 본문과 같은 기적은 우리에게 혼란을 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적을 이해하는 시각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옥에 갇힌 사도들을 구해주신 것을 단지 곤란에 처한 사도들을 도와주고 보호하신 것으로 이해를 한다면 '지금도 그러한 곤란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많은데 왜 지금은 그런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시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옥에 갇힌 것과 같은 어려움은 초대교회 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기적에 대한 시각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성경에 나타난 기적이 특정한 사람이 처한 난관과 어려움에서 건져주시는 것으로 나타날 때 '나도 어려움에 처하면 하나님이 구해주시겠지'라는 기대를 갖게 되는 것이 기적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적은 어느 한 사람이 처한 난관을 해결해주는 것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기적의 목적은 결코 한 개인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 결국 '성경에 등장하는 기적이 왜 지금에는 일어나지 않느냐?'라는 의문이 사라지지 않게 되고 기적 자체에 대한 관심이 멀어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이 본문처럼 사도들이 처한 난관에서 역사하셔서 그들을 구해내기도 하시지만 그 기적이 계속 있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주의 사자를 보내서 옥에 갇힌 사도들을 구해내시지만 그 사도들이 나중에 핍박을 받고 순교를 당할 때는 그냥 그대로 둬 버리십니다. 옥에 갇힌 그들을 구하셨다면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할 때도 천사를 보내서 구하시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옥에서도 건지시는데, 왜 어떤 경우에는 그냥 두고 죽게 하십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기적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구절은 19-20절의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도들을 옥에서 구해내시는 것은 다만 사도 개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사도가 옥에 갇힌다면 그것은 사도 개인이 어려움을 받고 곤란에 처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이 전파되는 일이 방해를 받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생명의 말씀이 전해지는 하나님의 일은 그 무엇으로도 방해받을 수 없고 막을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의 사자를 보내서 사도들을 구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들이 기적으로 옥에서 나오게 된 이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없으면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그 무엇으로도 방해할 수 없고 막을 수 없음을 증거하시는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기적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사도행전에 나타난 기적은 그때만의 기적으로 중지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베풀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기적이 그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베풀어지고 있기 때문에 정작 하나님의 기적의 간섭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기적을 기적으로 보지 못하고 기적으로 여기지 않고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때 하나님이 사도들을 세우신 것은 생명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한 이유 때문이지 결코 사도 개인의 일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이 앉은 뱅이를 일으키고 병자를 고치는 이적이 있게 하신 것도 그 기적을 통해서 생명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었지 기적을 통해서 사도 개인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적을 개인의 이름을 높이는 수단으로 여깁니다. 때문에 '저런 기적이 나에게 있다면'이라는 기대감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현대 사회에서는 기적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기적을 성경에 등장하는 것처럼 초자연적인 특이한 사건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것을 기적으로 여기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여겨지는 사건이 없는 현대를 볼 때 '초대교회와 같은 기적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베풀어지고 있는 기적은 무엇입니까? 어떠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말씀이 전파되는 것은 중지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기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저와 여러분들이 세상속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간섭 아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기까지 하시면서 여러분을 붙드시는 간섭으로 인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생명의 말씀을 증거하시기 위해서 우리 인생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대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곤란에 처하게도 하시고, 또 필요하다면 곤란에서 건지기도 하시면서 인생을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면서 생명의 말씀이 드러나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때문에 현대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특별한 일로 주어진다기 보다는 그냥 살아가는 것 모두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되어지는 일 안되어지는 일,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으로 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 기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신앙에 힘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리스도가 여러분을 붙든 결과이지 여러분 스스로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그리스도에게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사는 것보다는 세상 것으로 사는 것을 더 즐거워합니다. 그런 우리의 성품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은 방해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서 죽게 하시면서까지 우리의 마음을 붙드십니다. 이것이 바로 그 무엇도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기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감옥에 갇힌 사도들을 구해내시는 것보다는 사탄의 권세에 갇힌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희생하게 하신 것이 더 큰 기적이 아닙니까? 병에 걸렸다가 나은 것보다, 높은 데서 떨어졌는데 다치지 않는 것보다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된 것이야 말로 최고의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기적으로 마음 깊이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신비한 사건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신비한 사건보다 더 신비한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났음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이 믿음에서 실패하고 맙니다. 사탄의 권세에 붙들린 인간의 성품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생명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붙드시고 건지신 것입니다. 사도들을 옥에서 구하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을 사단의 권세에서 구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이 기적안에 머물고 있습니다. 한순간도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곧 저와 여러분입니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고 간섭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시기 위함이기보다는 우리를 세워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있게 되는 어려움도 곤란도 모두가 다 우리를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로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생명의 말씀이 전해지는 것은 중지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열심이 그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의지가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이루고야 마실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개입하시고 간섭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우리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적안에 사는 삶입니다
(23강) 5:27-42 기적 이후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이로 인해서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고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이것을 시기한 대제사장과 사두개인 당파가 사도들을 붙들어서 옥에 가둡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의 사자를 사도들에게 보내서 옥에서 그들을 나오게 하십니다. 옥에 갇힌 자가 옥에서 빠져나왔다는 것만 두고 본다면 그렇게 신기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주의 사자가 와서 그들을 구출했다는 것은 사도들을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놀라운 이적이고 표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할 때는 사도들에게 그런 놀라운 이적이 일어났으면 이제는 아무도 사도들을 건들지 못하고 두려워하게 되고, 사도들은 마음놓고 복음을 전하게 되어지는 것으로 상황이 바뀌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본문을 보면 옥에서 나온 사도들을 다시 붙들어다가 공회 앞에 세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기적으로 옥에서 구출된 사도들이 다음부터는 순탄하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붙들림을 당하고 대제사장으로부터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28절)는 위협을 받음을 볼 때, 도대체 '주의 사자로 인해서 옥에서 구출 받은 기적을 체험한 것이 사도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느냐?'라는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적을 체험하기를 원하는 것은, 기적을 체험하기만 하면 자신이 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적을 입으면 자신이 현재보다 수준 높은 사람이 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주위의 다른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고 차별화된 신앙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그러한 생각이 기적에 대한 큰 착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적은 기적을 베푸신 분이 누군가를 증거하기 위한 것으로 등장하는 것이지 기적을 입은 자를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하기 위해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기적을 경험했다고 해도 그 기적으로 인해서 차별화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문둥병자, 중풍병자, 소경 등등의 병자를 고치시면서 수많은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기적들 하나하나가 목적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증거하는 것이었지 병고침을 받은 사람을 특별히 다른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병을 고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은 자신을 고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었음을 많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기적을 경험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죽을 병이 들었다가 나은 기적을 경험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다시는 죽지 않는 불사의 몸으로 변형된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고 해서 나사로의 몸이 다시는 죽지 않은 신비한 몸으로 변형되었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죽은 몸이 다시 사는 참으로 놀라운 신비한 이적을 직접 체험한 나사로라 할지라도 그 몸은 여전히 썩을 몸이었고 결국 그도 나중에 다시 죽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하고 '예수님이 무엇을 위해서 오셨으며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명백히 증거해주는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기적을 입은 나사로는 여전히 죽기 전의 나사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놀라운 기적을 한번 체험을 하기만 하면 뭔가 삶이 달라지고 다른 사람과는 차별된 존재가 될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기적에 대한 착각이고 잘못된 생각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기적은 기적을 베푸신 분에게 그 목적과 초점이 있는 것이지 기적을 입은 자는 단지 기적을 보여주는 도구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적이 있다면 그 기적에서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이 마땅하지 '나는 기적을 경험한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들과는 다르다'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는 기적을 헛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실수를 범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사자가 와서 사도들을 옥에서 나오게 한 것은 분명 신비한 일입니다. 사도 개인적으로 본다면 다른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 것입니다. 경험만으로 본다면 특별한 사람들임이 분명하고 우리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옥에 갇혀도 주의 사자가 구출해주는 그런 기적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적을 입은 사도들이 다시 붙들려서 공회에 서게 됩니다. 앞서 말한 대로 기적을 경험했다는 것이 사도가 복음을 전하는 데 환경적으로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때문에 죽음을 당할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주의 사자를 보내서 사도들을 구해준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그것을 20절에 있는 말씀을 근거로 해서 '주의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 때문에 구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옥에서 구출된 기적 이후에는 그 누구도 사도들을 위협하지 못하고 붙들지도 못하고 순탄하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시 붙들려서 공회에 세워지고 죽음의 위기에까지 처해지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옥에서 구출한 주의 사자의 능력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기적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고 그저 한순간의 기적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우린 본문에서 사도들에게서 보여지는 기적의 증거물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위협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기적을 경험한 자에게서 볼 수 있는 증거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모습이 있다면 우리가 곧 기적을 맛본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도들을 옥에 가두어 붙들어 놓은 것은 세상의 권력입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 당파들은 당시 종교적 권력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막강한 힘으로 군림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가둘 수가 있었던 것이고, 결국 '사도들은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에 의해서 갇혔다'라고 말하기보다는 권력에 의해서 갇혔다고 보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사자가 사도들을 풀어주게 되고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생명의 말씀이 전파되는 것은 그 무엇도 방해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권력에도 방해받지 않는 것이 복음 전파입니다. 생명의 말씀이 전파되는 것은 인간의 책임 아래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책임 아래서 되어지는 것이고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 역시 하나님의 책임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면, 그리고 그들이 사도들이었다면 아무도 그들을 위협하지 못하고 붙들 수 없도록 막아주시는 것으로 드러나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본문에서는 전혀 반대된 모습으로 보여집니다. 권력이 붙들고자 할 때 붙들려지고 죽이고자 할 때 죽임을 당하는 연약한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과연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인간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맡기신 생명의 말씀을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복음을 맡은 자가 설사 죽음의 위기에 처한다고 해도 절대로 복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증거 되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오해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29-32절에 보면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고 말합니다.
사도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이 어떠한 것인가와 상관없이 복음을 전합니다. 이들은 무엇을 근거로 이러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주의 사자를 보내서 옥에서 그들을 구출해준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들은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 아래 있음을 알았기에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면 어떤 위기에서도 살려준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책임아래 있고 지키심과 보호 아래 있기 때문에 설사 복음을 전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죽음을 당한다고 해도 그것 역시 하나님의 책임 아래 되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옥에서 구출된 기적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책임 아래 있고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면 우리를 어떤 위기나 나쁜 상황에서도 구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즉 되어지는 모든 일이 설령 내 입장에서는 나쁜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책임 아래 되어진 것이라는 시각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신자들의 문제점은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을 배워가는 것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하나님만 상상합니다.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을 만들어 갑니다. 이것이 결국 하나님이라고 이름하는 우상을 세워 가는 것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에게서는 참된 믿음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고, 그러한 믿음에는 생명과 구원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적이 사도들을 가르친 것은 앞으로 어떤 위기에서도 구출해준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위기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전할 자로 세움 받았기에 하나님의 책임 아래 있고 생명의 말씀을 위해서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에 어떤 권력에 붙들림을 받는다고 해도 두려워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설사 고난을 받고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책임 아래서 되어진 일임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41절에서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책임 아래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을 책임지신다는 것은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편한 삶으로 책임지신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맡은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신자로 하여금 어떤 고난과 힘든 일에서도 복음을 포기하지 않는 쪽으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편하게 살게 하는 것이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자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지키심이고 보호하심입니다.
여러분이 살아가시면서 겪는 힘든 일들,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그냥 애매하게 있는 일들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말씀을 맡기신 여러분에게 그런 일들을 통하여 복음의 열매를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것으로 말씀이 살아있음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여러분이 겪는 삶의 어려움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한다면 결국 어렵고 힘들고 눈물이 흐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를 보게 되고 감사할 수 있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적 아래 살아가는 신자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사소한 문제에서까지 하나님이 계심을 잊지 마시고 감사하시고 기쁨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4강) 6:1-7 일곱 집사
세상에는 분명 교회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교회를 있게 하신 것은 세상에 천국을 보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즉 천국이 어떤 것인가를 교회가 보여줘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천국을 보일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인격과 성품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갈 때 자연히 보여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천국을 증거하는 일보다는 교회의 일에 매달리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제를 한다거나, 선교를 하는 등의 일에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이러한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구제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중요시하는 것은 그러한 일들이 교회를 선전하고 교회를 전파하기 위한 일, 즉 교회를 위한 일이 되어버린다면 결국 그 일 자체가 교회의 자랑거리가 되어버릴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씀드리지만 교회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한다고 해도 모든 일은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천국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교회는 교회가 하는 일들로 인해서 예수님보다는 자기들의 일을 더욱 높이고 자랑하게 되어질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모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떠나지 않고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스스로를 점거하고 모일 때 교회가 교회로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를 보지말고 그리스도를 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구제든 선교든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아닐 때 교회는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초대교회에서 이것을 확인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초대교회에 구제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들 과부가 구제에 빠진 것 때문에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 것입니다. 구제는 주고 받는 일입니다. 가난한 자의 쓸 것을 주고 받는 것이 구제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구제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일만 볼 뿐 일속에 담겨 있는 의미는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구제를 하라고 하신 것은 구제라는 일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구제를 함으로써 천국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제라는 일을 중요시 할 뿐 구제에 담겨 있는 의미는 중요하게 여기지를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가난한 사람을 도왔다는 일은 있고 가난한 자가 쓸 것을 받은 결과는 있을지 언정 증거되어지는 것은 있는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을 믿는 신자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구제라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제보다 전도가 우선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복음을 증거하는 것과 구제하는 것이 서로 별개의 일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구제든 무엇이든 그 목적은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빠진 구제는 단지 가난한 자의 쓸 것을 주고 받은 것일 뿐 다른 의미는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이점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구제라는 일을 많이 한 것으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제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천국이 무엇인가가 증거된 것으로 기뻐하시는 분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도외시하고 교회가 교회의 일에 매인다면 결국 말씀을 기초로 한 말씀 위에 선 교회가 아니라 교회의 일을 위한 교회가 되어질 뿐입니다.
빌 4:18절에 보면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는 말씀을 합니다. 오전에 빌립보 교회와 사도 바울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드렸지만 빌립보 교회가 옥에 갇혀 있는 바울에게 선물을 보낸 것은 구제입니다. 빌립보 교회와 사도 바울이 서로 주고 받는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로부터 물질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보낸 선물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향기로운 제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해 본다면 구제란 단순히 물질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물이란 가난하고 어려운 자에게 준 물질이 아니라 그 마음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것이 빠진다면 그것은 단순히 구제일 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물이라는 말은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세상의 구제와 교회의 구제가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문제는 바로 이점이 없었습니다. 단순히 물질을 주고 받는 관계로만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기들 과부가 구제에 빠졌다는 것을 원망을 했던 것입니다. 즉 구제가 복음을 증거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단지 자신들의 파벌만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벗어나 있는 결과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 문제로 인해서 일곱 집사를 세우게 됩니다. 사도들이 입곱 집사를 세우는 이유는 2-4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이 구절을 보면 열두 사도가 일곱 집사를 세운 이유는 교회를 조직하기 위해서라거나 구제는 사도가 할 일이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구제의 일을 맡기기 위해서 집사를 세운 것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집사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은, 집사를 교회라는 조직안에서 하나의 직책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사실 거의 모두가 집사에 대해서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교회를 몇 년 나오면 자동적으로 집사가 되는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가 집사를 세운 것은 교회의 조직이나 교회 일을 좀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즉 조직을 탄탄하게 해서 교회의 발전과 성장을 이루기 위한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열두 사도는 구제하는 일은 일곱 집사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겠다고 말합니다. 즉 열두 사도는 오직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만 전무하기 위해서 집사를 세워 구제를 맡긴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초대교회가 구제하는 일에 사도들이 개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그 일을 집사에게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에만 전무하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은 초대교회에 발생한 구제로 인한 분쟁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구제로 인해서 발생한 문제를 교회가 말씀을 기준으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되어진 결과로 보고 있습니다. 말씀을 떠난 구제였기 때문에 결국 인간의 파벌에 의한 그러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으로 보고 구제는 집사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에 전무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구제는 집사가 할 일,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은 사도가 할 일, 이런 식으로 일에 구분을 두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도가 말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은 구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제가 교회의 중심이 아니라 말씀이 교회의 중심이 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구제나 전도 등의 일이 중단되면 안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중단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도를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무엇이든 복음이 증거되고 드러나는 것이 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제는 계속되지만 복음은 중단되는 위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전도는 하지만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는 위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점을 여러분이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가 교회 일에 매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제든 무엇이든 교회 일은 여러분에게 맡기는 것이 옳습니다. 목사가 할 일은 다만 교회에 복음이 중단되지 않도록 기도하고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에 전무해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것도 신자가 교회 일에 열심을 내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일을 복음이 전파되는 도구로 인식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일을 많이 하는가 적게 하는가로 논하고 평가되어서는 안됩니다. 일을 많이 하면 교회다운 교회고 적게 하면 게으른 교회라는 평가는 금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대로 교회의 본질은 말씀이 전파되는 것에 있는 것이지 일을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은 오로지 생명되는 복음을 세우는가 훼손하는가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하게 보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일로 인해서 복음이 훼손되고 있다면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구제를 부지런히 한다고 해도 그 일로 인해서 복음이 훼손된다면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분명 우리가 착한 일로 여기는 구제를 부지런히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분쟁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구제가 말씀을 기초로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구제로써 복음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 받는 관계로만 있었기 때문에 복음을 소중히 하지 않는 마음에서 분쟁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든 하고 싶은대로 하십시오.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저는 그것을 막을 이유도 마음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살피는 것은 과연 그 일로 인해서 복음이 훼손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저는 말씀을 전파할 것입니다. 일을 많이 하는 교회가 아니라 복음을 생명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교회로 굳게 서기 위해서 날마다 말씀을 전할 뿐입니다. 여러분에게 생명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저에게 주어진 일입니다.
목사는 여러분의 편에 서서 여러분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서 말하는 자가 아닙니다. 만약 저에게서 그러한 모습이 보여진다면 가차없이 저를 거절하십시오. 그것이 옳은 것이고 여러분에게 유익된 것입니다. 목사는 오로지 말씀편에 서서 말할 뿐입니다. 말씀이 말하는 것, 말씀이 옳다 하는 것만을 말할 뿐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교회가 말씀 위에 굳게 서기를 바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이고 저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의 일을 맡아 하는 것은 바로 이 일을 돕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25강) 6:8-15 스데반
세상의 사고방식에는 '돈이면 안되는 일이 없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돈을 좋아하기 때문에 돈만 주면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돈이 우선인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입니다. 돈보다도 다른 것을 더 우선으로 하는 것이 있다면 그러한 사람에게는 돈을 줘도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돈을 우선으로 하고 산다면 그런 사람은 돈이면 뭐든지 다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도행전의 사람들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산을 팔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줌으로써 돈으로 살아가지 않는 믿음의 모습을 보여준 사도행전의 사람들이 오늘은 육신의 목숨까지도 신경쓰지 않고 복음을 고집하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삶입니다. 자기 삶이 우선이고 복음은 뒷전입니다. 우선 내가 살고 복음이 있는 것이지 '복음이 있고 내 인생이 있다'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찾아보기가 힘들 지경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내 인생보다도 복음을 우선으로 하면 살아가는 것이 힘들지 않겠는가라는 생각만 할 뿐입니다.
사실 우리는 내 인생보다 복음을 우선으로 하면 그 인생이 얼마나 힘들어지겠는가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마음고생이 많을 거라는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본문에 등장하는 스데반은 여러분이 아다시피 복음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입니다. 즉 자기 목숨보다 복음을 우선으로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스데반이 과연 마음 고생을 하며 살았습니까?
15절에 보면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고 말합니다.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과연 마음고생을 하며 산 사람의 얼굴입니까? 고민하고 근심 걱정하며 산 사람의 얼굴입니까? 돈이 없어서 실망한 사람의 얼굴입니까? 그렇다면 이 얼굴은 무엇으로 인해서 만들어진 얼굴입니까? 분명 돈이 아닙니다.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는 것은 마음의 평안을 의미할 것입니다. 근심 걱정이 전혀 없는 얼굴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만을 바라봤고 하나만을 소망했고 한분만을 의지하고 살았던 믿음으로 인해서 보여진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천사의 얼굴을 하고 살아가지 못합니다. 우리의 얼굴에는 세상 것으로 인한 온갖 고민과 염려와 걱정 근심이 담겨져 있습니다. 스데반과는 분명 다른 얼굴일 수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스데반은 오직 복음 하나만을 생각했고 우리는 복음말고 돈과 내 인생까지 함께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돈과 내 인생까지 함께 생각하기 때문에 원하는대로 되어지지 않은 인생으로 인해서 실망하게 되고 미래에 대한 염려와 걱정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얼굴에서 천사의 얼굴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데반은 하나님이 주신 참된 진리를 발견한 사람이었고 그 진리만이 자기 인생의 길이 됨을 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자신의 인생에 의미이고 희망임을 알았습니다. 돈이 주지 못하는 것을 그분이 주신다는 것을 알았고 돈으로 되어지지 않는 것이 그분으로 되어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소망을 두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이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알고 살아간다면 우리도 스데반처럼 천사의 얼굴로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스데반에게 있어서 그 복음이 우리에게도 있다면 우리도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고 오직 복음만을 고집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우리 인생에 대해 예수님보다는 돈이 더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에게 어쩌면 예수님이 강한 힘이 아니라 돈이 더욱 강한 힘으로 우리를 붙들고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 사실이 그럴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스데반의 이야기는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8절에 보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스데반은 분명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사와 표적을 행했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스데반이 오늘 본문에서 말한대로 체포되어서 공회에 끌려오게 되고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고 돌에 맞아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가지고 있는 불만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필요한 때 나타나 주기를 원합니다. 스데반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이 나타나야 할 때는 그가 돌에 맞을 때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돌에 맞아서 죽어갈 때 하나님이 나타나서 그를 구해내서 스데반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주시는 것이 옳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 가는데도 잠잠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삶에서 배운 것이 '내가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지 않으시더라'는 생각이 쌓이고 쌓임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어떤 기대도 갖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즉 천국을 가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하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하나님은 필요치 않고 도움도 안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것을 말은 하지만 정작 기대는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도우셨다거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자신의 삶에서 확인하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린 항상 세상 것을 기대어서 자신감을 가지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세상은 오직 세상의 것을 얼마나 소유했느냐를 근거로 해서 그 사람을 대우하기 때문에 세상 것이 있을 때 세상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습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도 세상의 것을 달라고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세상이 알아주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는 증표라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만약 세상으로부터 조롱을 받는 모습으로 전락이 되면 하나님에 대해 반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빙자해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서 자신을 증거하십니다. 그러나 그 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통해서 세상의 악함을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스데반이 바로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은, 하나님이 스데반의 일에 개입하지 않은 결과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입하신 결과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서 세상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싫어하시는가를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스데반이 죽는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같이 세상에서 성공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증거하게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결국 그리스도말고 다른 것을 보고 살아간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증거되는 것이지 세상의 성공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잘됨으로 하나님이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편에서도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 모습으로 하나님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고통과 어려움에 버려 두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고통과 어려움에서도 오직 믿음을 고집하는 것을 통해서 믿음이 얼마나 강한가, 믿음의 능력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은 스데반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길래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스데반에게 요구하신 것은 죽음을 면하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일 수 있습니다.
믿음은 내가 사는 길이 아니라 죽는 길입니다. 내가 죽고 대신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음을 때 그분이 죽으심으로서 우리가 살았습니다. 그분으로 인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때문에 날 위해 죽으신 그분 안에서 이제는 그분을 위해서 내가 죽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고 그리스도안에 사는 것입니다.
우린 자꾸 세상을 이기려고 합니다. 물론 신자는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에서 믿음으로 굳게 서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한 것으로 이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것을 이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억울함을 당하고 손해를 보는 그 길이 하나님이 가게 하시는 길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정당하게 사는 신자가 세상으로 인해서 오히려 억울함을 당한다면 그것은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신자를 억울한 길로 인도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생각하도록 하십시오. 그리스도를 위해서 내가 해야 할 것이 뭔가만 생각하십시오, 이렇게 했을 어떤 손해가 올 것인가에 대해서는 계산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이 내 인생을 책임지고 계심을 믿으시고 여러분에게 맡겨진 일, 날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 일에만 충실하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우리를 부르셔서 말씀하고자 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데 너무 신경을 쓰는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쓰여지는 것보다는 세상에서는 편한 인생을 더욱 소망하고 기대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가게 하시는 길을 외면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스데반의 이야기는 신자가 무엇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스데반의 이야기 앞에서 부끄러움이 있어야 하고 우리의 잘못됨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스데반이 부름받은 것처럼 우리도 부름받았음을 아시고 신자로서 걸어야 할 인생이 어떤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26강) 7:54-60 스데반의 설교
인간관계에서 참으로 힘든 것 중에 하나는 누군가에게 바른 말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바른 말이 상대방의 잘못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면 상관이 없을 수도 있지만 만약 상대방의 잘못과 실수를 드러내는 바른 말이라면 그동안 유지해온 인간관계가 깨어지거나 서먹하게 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상대방이 기분 나빠 할 것을 우려해서 잘못임을 알고도 모른 척, 또는 아닌 척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 이것은 매우 힘든 문제입니다. 그래서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예수를 전하는 것보다도 친한 인간관계에서 예수를 전한다는 것이 더욱 힘들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친하다는 인간관계가 걸림돌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넘지 못하면 결국 우리는 옳고 그름을 알면서도 그것을 증거하지 못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남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바른 말을 듣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의 잘못된 문제를 지적하고 바른 것이 무엇인가 말해줄 때 겸허하게 그 말을 받아들이십니까? 아마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지배적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이든 사람이 그보다 어린 자의 잘못을 지적을 하면 공손히 들을 수는 있습니다. 물론 현대 사회는 그마저도 사라졌다고 하지만 어쨌든 어른이 바른 말을 하면 어린 자는 듣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어른의 말이 맞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어른이라는 권세에 눌려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보다 어리거나,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지적을 할 때 과연 그 바른말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사람에게는 자존심이 있습니다. 자존심은 자신이 무너지고 깎여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자존심은 항상 인간을 세우려는 욕망으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그것도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 잘못에 대해서 지적을 받고 바른 말을 듣는다면 과연 인간의 자존심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십중팔구 상대방의 말에 대해 반발하거나 분노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인간의 본모습이고 본능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자존심에 의해서 죽음을 당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대로 스데반 집사인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보면 그는 구약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의 말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에 찔림이 되었습니다. 마음에 찔림이 되었다는 것은 스데반의 설교가 옳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설교를 들은 자들이 자신들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발견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드러낸 반응은 스데반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그들의 분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은 나쁘다. 왜 스데반이 맞는 말을 하는데도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스데반을 죽이는가?'라는 반응을 보인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여러분은 스데반을 죽이는 그들의 분노에서 여러분의 분노를 보지 않습니까? 그들의 분노가 여러분의 분노임을 모르시겠습니까?
현대 교회에서 갈수록 말씀이 말씀대로 증거되는 것이 사라지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물론 오직 진리만을 사랑하면서 진리만을 증거하고 드러내는 것이 자신이 할 일임을 잊어버리고 두려움 가운데 있는 목사가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또 하나는 진리에 대한 여러분의 분노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사랑하십니까? 진리는 절대로 우리를 변호하거나 옹호하지 않습니다.
진리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죄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시고 덮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죄가 보여지지 않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하기를 즐겨합니다. 즉 자신의 약점과 더러움은 드러나지 않고 깨끗하고 의로운 존재로 보여지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죄속에서 보여지고 증거되는 것이지 인간의 의에서 사랑과 은혜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이 지적되고 드러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한다면 진리가 우리의 불의함을 지적할 때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불의함에서 은혜가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진리가 증거될 때 진리를 증거하는 자에 대해 마음속에 분노를 간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자신에 대한 악한 감정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될수록 진리를 드러내기보다는 감추어버리고 대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교회적인 사업을 중심으로 복음 아닌 복음을 전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51-53절에 보면 스데반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고 외칩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던 것처럼, 애굽 사람들에게 매를 맞는 이스라엘을 구해준 모세에게 오히려 반발을 했던 것처럼 너희들이 그와 똑같이 행한다고 한 것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한 것은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잘되는 것을 참지 못한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은 경쟁에 익숙합니다. 경쟁을 쉬지 않습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시기로 인해서 예수님을 배척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진리가 중요한게 아니었습니다. 만약 진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신들이 성경을 잘못 알고 있었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크게 오해하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진리에 관심이 있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마음이 찔릴 때 그 말씀에 굴복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가는 것만 봤습니다. 자신들은 작아지고 상대방이 커지는 것으로 봤습니다. 이에 대한 시기심으로 예수님에 대해 분노하게 된 것입니다. 스데반이 설교하는 것은 과거 조상들이 시기심으로 요셉을 팔아 버리고 모세를 배척했던 것처럼 너희들도 예수님을 시기하고 죽였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믿는다고 자부하는 너희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데반 설교의 중심이었습니다.
스데반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장로들의 잘못됨을 지적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교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죄에 있는가를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설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를 볼 수 있어야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취한 조치가 무엇인가를 보게 될 것이고, 결국 하나님이 행하신 조치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말한 인간의 시기심의 예는 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궁에서 자라게 되고 나중에 자기 형제의 고통당함을 보고 애굽 사람을 칩니다. 그런데 다음에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그것을 만류하자 오히려 모세를 배척합니다. 26-27절의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목시키려 하여 가로되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하느냐 하니 그 동무를 해하는 사람이 모세를 밀뜨려 가로되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 조상의 잘못된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도와서 남을 비판해주는 것은 잘도 용납하면서 자신들의 잘못됨을 비판할 때는 참지 못하고 분노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임을 모세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꼭 옛날 이스라엘처럼 행동하지 않습니까? 내가 곤란에 처했을 때 누군가가 나를 도와서 내편에 서서 상대방을 비판하면 좋아하면서 막상 내 자신을 비판하고 나의 잘못됨을 드러내면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에 대해서도 같은 마음입니다. 진리가 내편을 들어주고 나를 옹호하면 진리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막상 진리가 내 자신의 잘못됨을 비판하고 드러내면 밀쳐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또 우상에 대해서 손으로 지은 성전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게 되고 보이지 않는 하늘에 대한 소망은 사라져 버린 채 입으로만 하나님을 말하는 수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하늘에 대해서 말하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진리는 관심 밖일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예수님이 증거하시는 말씀에 대해서도 전혀 마음두지 않았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예 마음에 찔림조차 없다면 우리는 유대인들보다 더 수준 낮은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이나 요셉을 시기하고 애굽에 팔아버리고 모세를 배척한 이스라엘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과 동일한 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이 스데반의 설교에서 마음에 찔림조차 없다면 참으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행히 마음에 찔림이 있다면 본문의 유대인들처럼 분노하기보다는 말씀에 굴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에서 우리의 잘못됨과 죄가 무엇인가를 보시고 우리에게 진심으로 귀하고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의 관심은 오직 진리에 있었습니다. 진리를 전한다는 것만 생각했지 진리를 전함으로 자신에게 돌아올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진리를 전하는 것으로 그 마음에 가득 채워졌기 때문에 죽으면서도 그 얼굴은 천사의 얼굴이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진리를 말하는 자가 아니라 진리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면서 깊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 진리를 말하되 진리로 살아가는 것은 도외시하는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말하되 진리로 사는 것이 없기 때문에 마음에 찔림이 있을 때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요셉을 시기했던 이스라엘의 조상들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기 위해서 보내신 모세를 배척한 것처럼, 진리를 말하되 진리로 살아가지 못하는 그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현재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우리가 정작 예수님을 해치는 자로 살아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기심과 자존심이 우리를 그러한 길로 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는가 봅니다.
시기심과 자존심이 무너질 수 있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불의하며 무능력한 존재이며 무가치한가를 철저히 인식할 때 나의 자존심과 시기심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나를 사로잡고 주님 가신 길로 나를 붙들어 가시기를 소원하시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에 분명 응답하실 것입니다. 신자는 그렇게 사는 사람입니다. 내가 아닌 예수님을 내세우고 자랑하면서, 예수님의 희생과 섬김으로 베풀어진 은혜를 되새기면서 한발 한발 주님 가신 길만 따라가려고 힘쓰는 사람입니다.
(27강) 8:1-8 흩어진 교회
7장은 스데반 집사의 죽음으로 끝납니다. 우리는 이러한 스데반의 죽음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의 죽음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의 사건을 대하는 우리는 그 죽음을 칭송하고 높이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하고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죽는 것까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스데반이 증거하고자 했던 것은 '그리스도'였습니다. 스데반의 마음은 분명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죽고 사는 것과 상관없이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한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전파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스데반의 마음을 안다면 스데반의 죽음을 높이기보다는 그리스도를 보는 것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을 보면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는 삶은 결코 편한 삶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만을 믿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고 보호하실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고 헌신한다면 나를 더욱 더욱 높이 쓰시기 위해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려운 상황이 주어지게 되면 당장 믿음에 대해 의혹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라는 의문에 휩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우리를 편안한 삶이 되도록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믿음은 오히려 우리가 겪게 되는 모든 위기와 어려운 상황과 힘든 삶의 현장에서도 자신을 포기하고 대신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생애를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생각해 보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더 힘들고 고달픈 인생을 걸어가는 것임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매하고 별 의미가 없는 고생과 어려움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서도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것으로 남게 되는 것이 신자의 생애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보면 스데반의 죽음으로 인해서 교회가 오히려 핍박을 받게 됨을 볼 수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스데반의 죽음이 교회의 핍박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핍박으로 인해서 교회가 유대와 사마리아의 모든 땅으로 흩어집니다. 아마 사울은 교회를 없애기 위해서 교회를 핍박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습니까? 4절을 보면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라고 말합니다. 과연 교회가 사라진 것입니까?
우리나라에 교회에 대한 핍박이 일어났다고 가정합시다. 그리고 전국에 있는 모든 교회를 폐쇄를 시켰다고 합시다. 과연 그것으로 교회가 다 무너지고 사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까? 교회가 완전히 없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만약 교회가 건물이라면 인간의 단체라면 분명 교회는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은석교회'라는 간판이 사라지고 단체가 없어졌다면 은석교회는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4절의 말씀처럼 은석교회의 성도가 다 흩어졌다고 해도 예배당이 문을 닫았다고 해도 여러분이 흩어진 곳곳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며 사신다면 결코 교회는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바로 여러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생명력이 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근거로 하는 말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으로 사는 것이 신자이기 때문에 예배당이 문을 닫고 은석교회 간판이 사라진다고 해도 여러분의 심령에 함께 하시고 여러분을 다스리시는 성령님이 죽지 않고 살아 계시는 한 교회는 죽지도 사라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석교회라는 교회 간판을 내세워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심령 심령에 성령을 보내시고 여러분을 붙드셔서 사용하심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핍박이 나서 모든 성도가 흩어졌다면 그것은 곧 교회가 흩어진 것이며 따라서 교회의 확산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핍박으로 인해서 교회가 흩어질 때 성도들이 낙심하고 믿음을 포기해 버렸다면 핍박은 그야말로 무의미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핍박으로 인해서 교회가 사라졌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은 세상이 교회를 핍박은 할 수 있을지언정 결코 교회를 무너지게 할 수는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가 핍박으로 인해서 흩어지고 성도들이 믿음을 포기했다면 그들은 예루살렘에서만 신자라는 이름으로 살았을 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 와서는 신자인데 교회를 떠나서 흩어지면 신자가 아닌 자로 살아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신자는 예배당에서만 신자가 아니라 흩어진 이후에도 신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모였을 때만 교회이고 흩어지면 교회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금 교회로 모였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마치면 모두 자기가 사는 곳으로 흩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곧 교회가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흩어진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어디서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시든 교회로서의 모습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서 복음을 전파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주일용 신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어딜 가도 신자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점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우리는 세상속에서 세상 사람과 접하며 살아가면서 내 자신이 신자임을 잊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구를 대한다고 해도 '나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아가는 신자'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내가 어떻데 행동해야 하고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내려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자주 주어진 상황과 형편에 끌려가게 됩니다. '어디에서든 어떤 형편에서든 오직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어야 한다.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어떻게 하면 이 형편을 해결할 수 있을까?'만 생각함으로 인해서 복음의 전파는 사라지고 대신 세상과 똑같은 한 인간의 삶의 발버둥만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곳에 교회로 모였지만 흩어지면 여러분이 있는 그곳이 교회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흩어진 이후에 여러분이 할 일이 무엇인가는 잘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교회가 자기 한 몸을 키우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잘못은 그리스도를 생각하기보다는 내 교회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내 교회가 확장되는 것에 모든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도 내 교회의 확장을 위해 필요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내 교회를 위해서 나 자신을 위해서 믿는 것일 뿐입니다. 신앙으로 살기를 힘쓴다고 해도 그 목적이 하나님으로부터 뭔가를 얻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5-6절을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고 말합니다.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진 사람들 중에 빌립이 있습니다. 빌립이 그리스도를 전할 때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봄으로써 빌립이 말하는 것을 좇더라고 합니다. 이것을 단지 '빌립이 열심히 전도했다 우리도 전도하자'는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빌립은 그리스도를 말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행함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표적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 표적이 이적이든 무엇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빌립의 행함까지도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으로 보여졌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함도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표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빌립의 삶 모두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본문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신자는 어디에서든 신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흩어지면 흩어진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신자로 삼으셔서 여러분이 현재 거하는 곳으로 파송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가 선교사라 할 수 있습니다. 직장이 보냄 받은 선교지이며 주어진 형편과 환경은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한 도구로 주어진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그리스도를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내 하고 싶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살피면서 '이럴 때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 되겠는가?'를 생각하고 고민하며 사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흩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흩어짐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육신의 문제에서 생각한다면 예루살렘의 신자들도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러 사는 것이 편할 것입니다. 흩어진다는 것은 결국 나그네 됨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것은 육신으로는 힘들고 피곤한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흩어진 그곳에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주어진 직장, 집, 환경, 여러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그것이 싫다'는 이유로 불만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로 산다는 것은 내 하고 싶은대로 내 마음대로 사는 것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 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심령은 성령에 의해서 다스림 받습니다. 인생 또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것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되어진 환경과 조건에서 오직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표적을 나타내는 삶이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힘쓰는 것만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할 본분인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성도의 모임이 참으로 소중하지만 흩어진 자로 살아가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성도가 모여서 은혜를 나누고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배우고 확인하셨다면 그 믿음으로 흩어진 자리에서 복음을 전파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의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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