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복음서!!!

[스크랩] 요한복음 강해 5

하나님아들 2014. 11. 20. 00:05

 

 

 

 

 

 

 

 

 

요한복음 강해 5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목차>

 

17:16-19 진리
17:20-23 하나됨
17:24-26 하나님을 아십니까?
18:1-5 예수님의 길
18:6-11 베드로의 검
18:12-18 베드로의 부인
18:15-18 인간의 연약함
18:19-24 인간의 부패성
18:28-32 행악자
18:33-38 빌라도와 진리
19:1-16 예수님의 십자가
19:14-16 유대인의 신앙
19:17-22 유대인의 왕
19:23-27 십자가의 하나님
19:28-30 다 이루었다
19:31-37 구원의 근거
19:38-42 예수님의 장례
20:1-10 믿는 것과 아는 것
20:11-14 마리아의 울음
20:14-16 예수님의 물음
20:16-18 새로운 관계
20:19-21 평강
20:21-23 죄사함
20:24-31 도마의 믿음
21:1-14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
21:15-17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21:18-25 너는 나를 따르라

 

 

 

 

 

 

 

 

 

(112강) 요한복음 17:16-19 진리


세상이 선악을 판단할 때 그 기준은 결국 인간의 지식입니다. 저마다 자기 입장과 지식이 기준 되어서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을 보면 선과 선이 대립되고 저마다 상대방의 선을 악으로 규정하기위해 애쓰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선의 기준으로 오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선과 악을 분별하는 유일한 기준이며 모든 세상은 예수님을 기준으로 해서 선과 악으로 구별되어 악은 결국 심판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향해 진리를 말하면 외면해 버립니다. 이유는 진리가 결코 세상의 유익을 구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서로 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공통점은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는 세상의 유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말하고 그리스도를 말할 뿐입니다. 그러니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유익도 되지 않은 진리를 선으로 받아들이며, 진리를 기준으로 해서 선악을 판단할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진리는 그 무엇에도 양보될 수 없는 절대 원칙입니다. 따라서 이 절대 원칙을 포기한 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진리에 관심을 두지 않은 믿음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항상 자신의 믿음이 과연 진리 위에 굳게 서 있는가를 살피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될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신자란 예수님처럼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세상이 사는 것처럼 살지 않아야 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만약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을 본받아 산다면 그것이 곧 악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서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 속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사는 것처럼 살아서는 안되는 존재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어려운 점입니다. 미운오리새끼’라는 동화를 잘 아실 것입니다. 백조의 새끼가 오리 새끼의 틈바구니에서 오리들로부터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천대를 받고 살다가 결국 자신이 백조임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자는 마치 오리들 틈에 끼어 있는 백조와 같은 존재입니다. 때문에 구별된 존재로 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차라리 세상을 빠져 나와서 신자끼리 어울려 살면 그나마 낫겠지만 하나님은 신자를 세상에 집어넣으시고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라고 하시면서 신앙으로 살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돈을 바라보고 살아갈 때 신자는 진리를 바라보고 하늘을 소망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세상이 잘못 가고 있음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신자는 그렇게 살아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돈 때문에 불의를 행하고, 내 유익 때문에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처럼 내 유익을 따라가는 것이 곧 진리를 버리는 것이고 역시 세상 것이 좋다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 되버리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은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세상을 염두에 두지 말라는 말이고, 세상을 무서워하지 말라는 의미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오면서 세상의 속성을 몸으로 배워 알고 있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세상에 속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크나큰 부담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로 하여금 그러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신자가 진리를 사랑할 때, 진리만을 원할 때 두려운 것은 아무것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언제나 진리를 사랑하는 자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진리는 신자에게 세상의 유익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세상의 유익을 제공해준다면 진리를 증거한 사도들이 진리 때문에 죽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의 신앙에 진리가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대신 돈과 출세 등 세상의 복이 들어 있습니다. 진리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영원한 생명인데, 영원한 생명보다는 세상에서 대가를 얻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음을 생각해 볼 때 신앙에 있어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항상 예수님에 대해 깨어있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람이 롯에게 자기를 떠나라고 하면서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다’는 말을 합니다. 땅의 선택권을 롯에게 준 것입니다. 그때 롯이 선택한 것은 보기에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처럼 먹을 것이 풍부하게 보인 요단이었습니다. 롯이 땅을 보는 기준은 어디 가면 먹고 살기 좋으냐는 것이었습니다.

 

 

 

 

요단에는 장차 하나님께 멸망을 받은 소돔과 고모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롯에게는 소돔과 고모라의 악함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땅의 윤택함만 본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세상에서 무엇을 보며 삽니까? 세상이 하나님 동산 같고 애굽 땅처럼 보입니까? 아니면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의 악이 보입니까? 세상에서 멸망당할 악을 본다면 세상은 결코 신자가 본받고 따라갈 곳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말씀하고 19절에 보면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진리가 우리를 거룩하게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한 거룩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상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19절에서 예수님이 나를 거룩하게 한다는 말씀 역시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을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증거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이 있는가 없는가로 세상을 판단하십니다. 우리에 대해서도 역시 진리를 기준으로 판단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진리에 마음을 두고 진리로 살고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신자로서의 본질을 상실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신자는 진리로 거룩함을 입었습니다. 진리가 우리에게 오심으로써 이미 신자는 세상에서 구별된 자로 보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진리로 살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살면서 세상의 악을 드러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무엇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십니까? 여러분의 삶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습니까? 진리입니까? 아니면 세상입니까?

 

 

 

 

 

(113강) 요한복음 17:20-23 하나됨


세상의 것에 배고파하는 사람들에게 ‘진리’는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배고픔을 진리가 채워줄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보다는 하나님께 더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관심을 두는 하나님도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사랑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일 뿐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을 살리기 위해서 일하신다고 말하면, 그것보다는 육신으로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 주기를 원할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에 대해 말하면 ‘예수가 밥먹여 주냐?’라는 말로 무시해 버립니다. 이 말은 모든 가치 평가를 밥이 되어지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결정하는 세상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것은 분명 쓸데없는 짓거리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세상에 하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한쪽에 울타리를 쳐 놓고 믿는 사람을 따로 분리해 놓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섞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비록 섞여 살고는 있지만, 그 생각만큼은 절대로 섞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신자로서의 생각과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15절에 보면 세상에서 데려가기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시고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해달라는 예수님의 기도가 있습니다. 이 기도에서 볼 수 있는 예수님의 마음은 신자가 세상의 악에 빠지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이 살아가는 것처럼 살지 않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상의 사람들은 삶의 모든 목적을 자기 육신에 두고 있지만, 신자만은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을 목적 하고 살아가는 삶이 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일 때 세상에 대해 여유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남들이 가지는 것 나에게 없다고 해도 상관없고, 남들이 사는 것처럼 못산다고 해서 한탄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좋은 것을 누리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리가 그 마음에 있는 모습이고,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20절에 보면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예수님의 기도가 누구를 위해서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당시 제자들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제자들의 복음을 듣고 믿음이 있게 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즉 오늘 저와 여러분을 위한 기도도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이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의 기도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지금 이 시간도 세상을 향하기보다는 하늘을 소망하고 예수님께 내 마음을 두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곧 주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할 때 자기 신앙에 대해 교만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죄인으로 태어난 자가 세상이 아닌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것이 곧 새롭게 되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은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죽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되어지지 않은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은혜며 복입니다.

 

 

 

 

신앙은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든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내쪽에서 하나님을 믿어주고 섬기는 것을 가리켜서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된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는 힘을 두고 신앙, 즉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 되게’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신자와 예수님과의 하나됨, 신자와 신자의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 됨에 대해 말할 때, 신자끼리의 하나 됨은 어느 정도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 육신으로 존재하고, 교제할 수 있고, 얘기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음만 맞으면 하나 되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맞았다고 해서 하나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의 마음이 신앙이 아닌 것에서 하나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래 악한 속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악한 속성은 서로 통하여 얼마든지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통한다고 해서 하나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인가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하나 됨은 먼저 그리스도와 하나됨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다면 자연히 신자는 서로 하나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신자의 하나 됨을 통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을 통해서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23절에 보면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신자를 그리스도안에서 하나 되게 하시는 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세상으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하나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이 나에게도 주어졌음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랑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사랑은, 무조건 잘해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시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고 참된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 세상을 보호해주고 잘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사람이 굶어 죽고, 고통과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럴 수 없다고 항변합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 자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완성된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완벽하고 온전한 사랑을 베푸셨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 사랑을 보지 못합니다. 이러한 세상에 신자로 하여금 아들이 받은 그 사랑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 된다는 것은 신자의 육신을 위해서가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 됨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세상으로 알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은 무엇입니까? 이 역시 세상이 말하는 사랑의 시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세상이 생각하는 사랑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삶이 편안한 것도 아니었고, 세상의 것을 마음껏 누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세상의 반대를 받고 죽으셨습니다. 뭐가 아버지의 사랑입니까?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사랑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 즉 하늘의 영생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아버지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영원한 하늘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육신의 편안함은 없지만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바로 이러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써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세상 것을 구한다면, 세상의 것이 주어지지 않은 것으로 실망하고 한탄하며 산다면 과연 무엇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 것으로 확인되어진다면 사랑을 보이는 것은 부자들, 성공한 사람들의 몫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러나 신자는 압니다. 성경을 통해서 배웠다기 보다는 그리스도를 알게 됨으로써 자연히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세상의 좋은 것을 입혀주는 것이 아니라 사망에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보신다면 여러분은 예수님과 하나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여러분은 서로 하나된 관계로 살아갈 것입니다. 세상 것을 보지 않고 하늘의 영생만을 소망하며 사는 관계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향한 예수님의 뜻입니다.

 

 

 

 

 

(114강) 요한복음 17:24-26 하나님을 아십니까?


세상은 하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처음부터 세상은 하나님에 대해 전혀 무지한 상태에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저마다 마음대로 하나님을 상상한 것뿐입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조카아이가 저에게 하나님은 누가 만드셨는가를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밝힌 대로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라는 말 외에 달리 할말이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하나님이 그러한 말씀조차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뭐라고 답해야 하겠습니까? 이러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는 구체적인 설명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의 역사로 일관되어 있고, 신약에는 예수님의 행적과 사도들이 복음에 대해 가르친 내용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까?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이 개입한 역사입니다. 즉 그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간섭하셨는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증거한 복음 역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일하는 분이 아니라는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이고, 사도들을 보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편안함과 성공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답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사도들의 모습들 하나하나가 하나님을 계시하는 도구로써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하나님은 우상일 뿐입니다. 인간의 탐욕에 의해서 상상된 우상, 즉 인간의 탐욕을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이라 이름하는 우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이 문제를 말씀하시고 기도를 마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17장의 예수님의 기도의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의 마지막이 아버지를 아는 문제를 언급하고 마쳐지고 있다는 것이 뜻밖입니다.

 

 

 

 

25-26절을 보면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는 기도를 하십니다.

 

 

 

 

간단히 말하면 예수님이 아는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택한 자들에게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는 오직 아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래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아는 분으로 세상에 오신 아들로 인해서만 아버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은 아버지를 모른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닙니다. 만약 교회를 다니지 않아서 하나님을 모른 것으로 여겨진다면 반대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안다는 결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세상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 일컬음 받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수준의 앎은 아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은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유대인만 보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민족으로 자처했습니다. 자신들만큼 하나님을 아는 민족이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 대하여 하나님을 모른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유대인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버지를 아는 상태는 결코 지식적인 것이 아니라 뭔가 다른 것을 두고 말씀한 것이 분명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법을 잘 지키기를 원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담겨 있는 십일조나 제사, 안식일, 이런 것을 지키는데 힘을 썼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셨다면 하나님이 십일조를 행하고 제사하고 안식일 지키는 것으로 기뻐하실 것이라고 믿은 그게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자신들을 위해서 메시아를 보내시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는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힘이 있는 용사였습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메시아를 보낼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앎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증명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이긴 하셨으나 약자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약자의 모습으로 메시아를 보내셨는가?’를 알아야 진심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하나님을 알았다면 아는 것으로 끝납니까? 26절의 말씀을 보면 제자들에게 아버지를 알게 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라는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신 아버지의 사랑이 제자들 안에 있고, 그 사랑으로 예수님이 제자들 안에 함께 하시는 것을 위해 아버지를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아버지를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아는 것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을 많이 할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그 말은 추상적인 것으로 그친다는 것을 아십니까? 보이지 않는 분이 함께 함을 아는 것, 바로 이것을 위해서 아버지를 아는 문제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신 사랑은 세상 것을 기준으로 해서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사랑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깊이 생각해야 할 내용입니다. 여러분이 아버지의 사랑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세상적인 것을 기준으로 해서 사랑을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잊지 마십시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십자가에 죽으신 아들을 살리셔서 영원한 나라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랑을 제자들 안에 있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제자들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세상으로부터 고난과 미움을 받을 때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사랑은 세상에서 편한 인생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그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25절에 보면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음을 잊지 마시고 여기에 우리가 원하는 다른 것을 첨가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아버지의 사랑을 세상 것에서 찾으려고 할 것이고, 세상 것이 풍족하게 주어지면 하나님이 함께 하고 사랑하신다고 여기고, 힘들고 어려우면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지 않으시고 나를 사랑하지도 않으신다는 생각을 하게 될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이 아버지를 아는 수준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택한 백성을 사망에서 살리셔서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아들을 보내심으로 보여주시는 것이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심으로써 그 사랑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신자가 십자가로 증거된 아버지의 사랑을 안다면 세상에서 어떤 형편과 상황에 처하든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셨음을 통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아버지의 사랑을 모를 때는 세상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알게 되면 세상을 전부로 여기고 살았던 것에 대해 애통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여러분께 하늘의 생명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이 사랑에 붙들린다면 여러분의 삶은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115강) 요한복음 18:1-5 예수님의 길


사람에게는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길이 있습니다. 자기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되어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에 결국 소망은 소망으로 끝나버리고 언제나 원치 않는 길로 가야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낙심을 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신자의 바른 태도인가를 다시 한번 물어야 할 것입니다.

 

 

 

 

18장부터는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수난 당하신 십자가 사건은 우리 모두가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것만큼 십자가로 잘 살아가고 있는가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십자가를 아는 것과, 십자가로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과연 우리가 잘 안다고 자부하는 십자가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얼마나 주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잘 안다는 것 때문에 십자가 사건을 가볍게 여길 수가 있지만, 만약 십자가 사건을 가볍게 여긴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예수님만의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죽으신 십자가이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만 해당된 것이라는 생각이 십자가 사건을 가볍게 여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은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4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일에 대해 다 알고 계셨습니다. 당할 일에 대해 아셨다는 것은 얼마든지 피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피하지 않으시고 고스란히 모든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일부러 고난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부터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는 전혀 맞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점을 치는 이유는 앞일을 미리 알아서 좋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미리 막아보자는 것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내일 당할 일을 미리 아신다면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모두 내게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행동하지 않겠습니까? 가령 한 달 후에 어느 지역의 어떤 땅이 수십 배로 오른다는 것을 아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오를 땅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입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가 틀리는가를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말입니다. 설사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라 해도 당장 수십 배의 이익을 포기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당할 일이 미리 아시고 당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은 분명 우리에게는 매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할 일을 아시고 수난을 받으신 것은, 자신의 뜻보다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아버지의 뜻이었다고는 하지만 예수님의 인생은 세상이 볼 때는 비참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같은 죽음으로 인생을 끝낼 마음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분명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안다 하고 예수님을 말하는 자가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그가 진정한 제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를 통해서 예수님이 세상에 증거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모여서 예배드리고 찬송 부르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끼리 모여서 소리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모여서 말하고 소리치는 것대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우리끼리 모여서 예배하는 것에 대해서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끼리 모여 있으면 모두가 신자 같습니다.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모두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만 믿는 신자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세상 속에서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세상 속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비춰지고 있습니까? 신앙은 교회용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기 위해 믿음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세상 안에서 여러분을 그리스도인으로 굳게 세우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믿음으로만 산다면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세상이 사는 것처럼 살지 않는 것 때문에 미움을 받는 것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욕을 먹는 것은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예수님을 믿는 자가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다고 하셨지 욕을 먹는다고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신자가 욕을 먹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가신 길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고집하는 것의 결과입니다. 결국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오히려 예수님에게 방해가 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산다고 하면서 나의 유익을 고집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지신 짐은 거부해 버린다면 그것을 두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모든 짐을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짐을 지는 것을 회피합니다. 아무런 짐도 지지 않은 채 살다가 마지막에 좋은 것은 내 소유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과연 이것을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을 말렸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하느냐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런 생각이 곧 오늘 우리들의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우리에게 있는 원망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이유를 하나님의 도움으로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속셈도 있었는데 어려움이 닥치니 원망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와 같은 수준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죽으면 안된다는 것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는 책망을 들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우리의 삶까지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이 예수님을 인도하신 것처럼 우리를 인도해도 복종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신자에게 있어서 손해 보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위로와 기쁨과 감사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로 산다고 하면서 믿음으로 인해서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하며 산다면 얼마나 큰 손해겠습니까? 세상 것은 영원히 우리의 소유로 남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내 수중에 있을 뿐입니다. 한순간에 다른 곳으로 옮겨질 수 있는 것이 세상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합당하게 살아가기를 힘씁시다.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가 생각하며 예수님의 길을 따라갑시다. 그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116강) 요한복음 18:6-11 베드로의 검

 

<본문>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 18:6-11)

 

 

 


<설교>

 

신자에게 자신의 현실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현실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가 추구하는 것이 전혀 다른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안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현실을 보시는 것과 이스라엘이 자신의 현실을 보는 것이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현실문제는 구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보는 현실문제는 로마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구원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필요한 것은 의입니다. 의가 없는 세상이기에 의로우신 분이 오셔서 세상을 구출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해방이라는 현실문제에서 보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용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용사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 같은 자는 필요 없다는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이처럼 필요 없는 무가치한 존재로 여겨져 세상으로부터 버려지는 예수님의 모습이 18장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을 붙잡기 위해 온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드로가 칼로 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0-11절에 보면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이 장면에 대해서는 사복음서 모두가 언급을 하고 있는데 그 의미가 모두 같지 않고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저자의 기록의도와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저자의 기록의도와 배경에 의해서 이해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복음서의 내용이 서로 중복되는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같은 해석을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고 하시면서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고 말씀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천사들을 불러서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붙들려 죽으시는 것은, 그렇게 해서 성경을 응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셔서 세우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검으로, 즉 힘으로 세우는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 즉 희생과 섬김으로 세워지는 나라임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의 행위에 대해 다른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종을 쳐서 귀를 떨어뜨린 자가 베드로라는 이름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검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을 책망하실 뿐입니다. 결국 이 말씀이 어떻게 보면 검과 몽치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과 베드로를 같은 속성을 가진 자로 일치시키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세상의 힘에 의해 죽으셨음을 말함으로써 예수님과 힘을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힘을 가지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며 오히려 힘을 버리는 것이 믿음이며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라는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것까지 참으로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22:51)고 되어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와는 다른 장면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누가는 예수님을 용서하시고 치료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신의 대적을 위해 죽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용서하시고 희생과 섬김으로써 고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묘사하는 것이 누가복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검을 집에 꽂으라’고 하시면서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을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라는 말에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예수님이 담겨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힘이 없어서 붙잡혀 죽으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붙들리고 죽으시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요한은 예수님을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결코 성경을 쉽게 소홀히 대할 수 없음을 생각합니다. 주의 깊게 살펴야 하고 그래서 성경마다 전달하고 있는 예수님을 깨닫고 그 예수님을 믿고 그분이 가신 길을 함께 가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고 일하신 분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위기를 피할 수 있고, 또 물리칠 수 있지만 잠잠히 붙잡히시는 모습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힘도 포기해야 하는 어려운 것임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검을 집에 꽂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검이 있으되 그것을 빼지 않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참으로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생각할 것은 눅 22:35-36절의 말씀입니다. 거기 보면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나이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찌어다”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은 검을 집에 꽂으라는 말씀과 맞지 않습니다. 또한 검을 가지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는 말씀에도 위배되지 않습니까? 검을 가지는 자는 검으로 망하다고 하시면서 왜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을 35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없었다고 대답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게 보냄 받았을 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로 보내어졌는데도 예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부족함이 있더냐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을 수밖에 없는 것은, 예수님이 보내셔서 하게 하신 일이 돈과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돈과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을 때, 그 사람은 돈 가지고 힘을 가진다고 해서 그것으로 일할 사람이 아니라는 뜻으로 검을 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힘이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증인으로 세상에 보냄 받은 자로서 진심으로 예수님만을 전하는 자로 살고자 힘쓴다면 아무것도 부족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할 때 필요한 것은 복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시고 복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조건이 충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만을 전하고자 한다면 달리 힘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예수님을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붙들려 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지는 것임을 베드로는 몰랐던 것입니다.

 

 

 

 

세상은 칼을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칼로서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며 힘을 과시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신자는 칼이 있으되 칼을 휘두르는 자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칼 자체가 자신의 힘이 아님을 알고 있기에, 또한 신자로서 세상에서 해야 하는 일이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신령한 것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하늘의 복된 것에 모든 마음을 두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칼을 원하고 칼을 휘두른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정신과 어긋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또한 세상 것이 아닌 하늘의 신령한 것을 구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교회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칼을 휘둘러 다른 형제에게 상처를 입히고, 또한 자신도 지지 않기 위해서 칼을 구하는 모습이 보여진다면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모습을 잃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검으로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하다는 말씀처럼, 교회가 힘을 추구하면 그 교회는 망하는 교회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외형적으로 거대하다 할지라도 그 심령이 하나님에게서 떠나있다면, 십자가의 정신이 상실되어 있다면 그 교회는 망하는 교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쇠약해져 있고 피폐해져 있는 교회라 일컬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에 보면 부자와 가난한 자가 교회에 올 때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있습니다. 교회가 재물의 소유를 기준으로 해서 부자와 가난한 자로 구분하고 차별하여 대한다면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세상의 단체와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교회의 가장 악한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힘을 원하기 때문에 힘이 된다고 여겨지는 부자에 대해서 마음이 쏠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교회 아닌 교회로 전락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은석교회는 결코 이러한 악한 길로 가지 않도록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묵상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힘을 원하면 이 교회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회가 되어져 버림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신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다 보니 하나님이 주신 것 말고 또 다른 것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베드로는 칼로써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검을 꽂으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뜻을 깊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혈기가 아니라 죽는 것임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시로 칼을 빼어서 남을 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을 칼을 꽂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칼이 있으되 칼이 없는 약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길이며 우리를 향하신 뜻입니다.

 

 

 

 

 

(117강) 요한복음 18:12-18 베드로의 부인


<본문>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요한복음 18:12-18)

 

 

 

 

<설교>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일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이 사건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말할 때마다 예로 들어 설명되어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의 결론이 ‘우리는 베드로처럼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말자’라는 것으로 내려지고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본문이 너무 가시적인 교훈으로 이해되고 있는게 아닌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싶어서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주를 위해 내 목숨까지도 버리겠다’는 결단과 각오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적어도 그 순간은 진심으로 자기 목숨을 버려서라도 주님을 따를 것을 각오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각오와 결단도 막상 생명에 위협을 주는 상황에 도달했을 때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음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수시로 각오하고 결단하며 삽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을 때마다 ‘그래 그렇게 살아야지’ ‘예수님만 믿어야지’라는 각오와 결단을 다지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나의 각오와 결단이 나의 신앙을 지켜주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수시로 체험하지 않습니까?

 

 

 

 

신앙이 마음먹은 대로 되어지는 것입니까? 내가 각오하고 결단했다고 해서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각오하고 결단하면서 자신을 다지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 앞에서 ‘설사 목숨이 위태로워도 주님을 안다고 해야지’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나약한 모습이 곧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인간은 자기 환경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신앙에 대해서는 큰소리 칠 수 없는 것이며 다만 하루하루 하나님이 주시는 상황과 환경에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기를 기도하며 도움을 구하며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님을 결박하여 안나스에게 끌고 갑니다. 요한은 안나스를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14절)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당시 예수님이 유대를 소란케 하던 인물이기 때문에 유대를 위해 예수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유익하다는 뜻입니다. 가야바란 이름은 마태나 마가 누가가 모두 언급하고 있는 이름이기는 하지만 가야바가 이런 말을 했다는 사실은 요한만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유대인들의 대표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희생과 섬김을 나타내 보여야 할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 유익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유익을 위해 예수를 죽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제자들의 대표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서 역시 자기를 위해 예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요한은 가야바와 베드로를 언급함으로써 예수님이 자기 유익을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았음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적 유익보다는 육신의 유익에 더 치우쳐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부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 유익을 위해서는 차라리 잠시 예수님을 잊을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신을 이기지 못하는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어떻게 나의 결단과 각오로 예수님을 믿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로마서 7:19절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 역시 자신이 원하고 생각한바 대로 살아지지 못하는 자신을 두고 고민하고 애통해 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원하는 선은 하지 못하고 원치 아니한 악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신을 두고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럴 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어진 것입니다. 이 믿음과 감사가 바울을 강건케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내 힘으로 뭔가를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강한 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살 수 없는 자신의 존재를 깊이 깨닫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강한 마음이며 그것을 신앙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이 내 자신을 붙들어서 행할 바를 가르치고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을 두고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나의 생각과 의지로는 절대로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의지 내 생각은 오직 내 편입니다. 따라서 내 육신에 위험이 닥칠 때, 또는 유익이 되는 일이 있을 때 결국 내 자신에게 유익 되는 쪽으로 흘러가는 것이 내 생각이며 의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행하게 되는 것은 원치 않은 악일뿐입니다. 결국 내 몸이 나를 사망으로 끌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망에서 나를 건질 분이 누구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한분 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감사함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붙들어 놓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생각은 비록 그리스도안에 있다 할지라도 육신이 우리의 생각을 그리스도에게서 끄집어내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끝까지 내 육신을 중심으로 육신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뭐겠습니까? 예수님을 보내신 감사함 밖에 없습니다. 뭘 해야 하겠다는 생각부터 버리셔야 합니다. 내가 하겠다고 마음먹고 되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감사함부터 회복하십시오. 감사함은 여러분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신자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118강) 요한복음 18:15-18 인간의 연약함


<본문>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요 18:15-18)

 

 

 

 

<설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베드로가 고의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이 베드로로 하여금 예수님을 부인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바울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은 약하다’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인간이 연약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강한 분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연약한 존재가 강한 분을 의지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는 말을 했습니다. 마음은 항상 하나님의 법을 생각하고 그 법에 순종하고자 하는데 정작 육신은 죄의 법을 따라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육신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죄의 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이상 죄에서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여전히 죄가운데 살아가는 이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죄 안짓겠다고 아무리 각오하고 금식기도까지 하면서 결단한다고 해도 결국 소용없는 행위로 드러나고 맙니다. 40일 금식기도하고 산에서 내려오면서 죄짓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육신을 가진 인간의 한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육신을 육신으로 극복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신자가 죄에서 벗어나는 것은 육신을 벗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기 전까지 죄에 대한 문제는 해결이 안되니까 포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육신은 숨을 쉬고 있으되 죽은 자로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갈 5:24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죽음입니다.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육체가 죽으면 그 정과 욕심이 함께 죽습니다. 결국 육체가 살아있으니 그 정과 욕심이 끊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육체를 어떻게 하는 것이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까? 육체가 죽었다는 것은 욕심이 사라짐을 의미합니다. 욕심이란 육체에 대한 소망이며 욕망입니다. 따라서 육체가 죽었다는 것은 육체에 대한 소망이 사라짐을 뜻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육체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육체가 잘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으며, 뛰어난 육체가 되어지기를 소원하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육체의 소망이 끊어지는 것이 곧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육체의 소망은 무엇으로 끊어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소망이 다른 것으로 바뀌면 되지 않겠습니까? 육체의 소망으로 살던 사람에서 영의 소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면 자연히 육체의 소망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산다면 썩어질 육체에 대한 소망이 헛된 것임을 깨닫게 되는 이것이 곧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4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이란 육신에 대한 욕망을 의미합니다. 즉 육신에 대한 욕망이 끊임없이 우리를 시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즉 내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왜 있게 된 것입니까? 바로 우리의 연약함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십자가가 있어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 육체를 못박는 것은 우리의 무능함을 철저히 자각하고 그리스도의 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주어진 하늘의 생명을 바라보며 세상의 생명이 헛된 것임을 깨닫는 것이야 말로 육체를 못박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신자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잊지 않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잊지 않으면서 나의 소망인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위해 기도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연약함을 보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연약한 나를 구원하시고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일에서 사랑과 자비하심과 긍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능한 존재며 연약한 존재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무능하고 연약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까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랑해도 될만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랑할만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세워서 이루신 일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것이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욕망은 무슨 일이든 자신을 높이는 쪽으로 끌고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욕망에 의해 자랑이 나오고 자기 과시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로 서로 비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곧 악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연약함에서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항상 육체의 문제가 우리를 예수님 밖으로 끌어내려고 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시험과 유혹을 이겨낼 수 없는 것이 연약한 우리의 실체임을 자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머리 숙여 하나님의 도움의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안됩니다. 나를 도우소서’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도움을 구하는 기도가 없이 산다면 그것은 뭔가 의심을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로마서 8:13절에 보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합니다. 육신대로 산다는 것은 육신의 욕망대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몸의 행실을 죽인다는 것은, 나쁜 행동을 죽이고 착한 행동을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몸의 행실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몸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악한 행실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육신을 높이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육신을 높이고 자랑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항상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뤄보려고 애를 쓰게 될 뿐입니다. 때문에 사망에 처하는 악한 행실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으로써 죽이라는 것은 성령에 의해 우리의 악함을 책망 받고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자로 살아갈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망에 처한 존재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한들 그 모든 것은 사망속에서 놀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육체로 사는 우리의 운명입니다. 이러한 운명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망에서 건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힘을 자랑할 수 있고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베드로처럼 날마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손을 예수님이 붙들고 계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 때문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육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육체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사망으로 끝날 몸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육체를 자랑하기보다는 예수님을 아는 영의 사람이 되어진 것을 자랑하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보다 더 복되고 대단한 일은 없습니다. 이것을 진심으로 깨닫고 감사하며 산다면, 그것으로 육체의 욕심을 이기게 될 것입니다. 이미 귀한 것을 얻었기에 육체의 욕심에 거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119강) 요한복음 18:19-24 인간의 부패성


<본문>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요 18:19-24)

 

 

 

 

<설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에서 우리는 인간의 연약함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은 신앙으로 살기 위해 힘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절감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육신 앞에서 인간은 연약할 수밖에 없음을 절감하며 다시금 주를 바라보고 주님께 내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없음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사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다만 자신의 삶에 매어 산 사람이라면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고 십일조 하고 기도하는 자신의 모습을 신앙으로 여김으로써 신앙의 문제점을 전혀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교회 생활로 생각하는 사람은 교회 일에 부지런한 자신을 바라보며 믿음에 전혀 문제없다는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의 정신을 따라 사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항상 세상을 향하고 육신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 모습에 절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나의 욕망을 이길 수 없음을 자각할 때 연약함을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의를 더욱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내 마음으로는 내 모든 것 다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고 싶어 한다 할지라도 내 육신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연약함을 대신 담당하신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베드로의 사건이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주고 있다면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인간의 부패성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19절에 보면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라고 말합니다. 대제사장이 붙들려 온 예수님에게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이 전파하신 교훈에 대해 물었다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20절)고 답합니다. 예수님의 답변을 보면 제사장이 예수님의 교훈에 대해 물은 것은 예수님이 전파한 교훈의 사실여부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의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보면서 한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답변이 너무 번거롭다는 것입니다. 사실 제사장이 ‘이런 교훈을 한 것이 사실이냐?’ 는 식의 질문을 했다면 ‘그래 사실이다’는 말 한마디면 간단할 것입니다. 굳이 ‘나는 드러내놓고 말했으니까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는 뭔가 복잡한 듯하면서 답변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듯한 답변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의 물음에 대해 ‘그래 사실이다’는 답을 하셨다면 제사장과 예수님의 대화에서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이 전파한 교훈에 대한 사실 확인이 전부일 것입니다.

 

 

 

 

제사장이 예수님에게 교훈에 대해 물은 것은 심문을 해서 죄가 없으면 풀어줄 의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교훈을 꼬투리 잡아서 예수님을 죽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사장에게 예수님은 ‘그래 사실이니까 빨리 날 죽여라’는 반응을 보이신 것이 아니라 ‘내 말을 들었고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아는 너희가 나를 죽였다’는 것을 드러내시기 위한 답변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죽인 자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전혀 듣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교훈을 들었고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 교훈을 트집 잡아 예수님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답변은 진리를 들었으면서도 진리를 배척하고 있음을 가르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진리를 들었고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러한 우리가 진리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갑니까? 혹시 진리를 배척하는 자가 곧 우리 자신은 아닙니까?

 

 

 

 

제사장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교훈에 트집을 잡는 것은, 교훈의 내용 자체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전파하신 모든 교훈들이 제사장과 서기관들의 기득권을 무너뜨리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진리를 배척하고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아들이 아니라고 밀쳐내며 죽이는 것입니다. 결국 진리를 들었으면서도 진리의 말씀이 자신의 기득권을 보호하고 인정하지 않는 것 때문에 ‘이것은 진리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배척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진리가 우리의 생각과 기득권을 옹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진리가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까? 진리는 오히려 인간의 부패성을 드러내고 지적하고 책망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진리의 말씀 앞에서면 자신의 죄인 됨을 깊이 들여다보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들었고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이 말은 말씀을 들었고 안 사람으로서 말씀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들었고 알았다고 해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 복종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결국 말과 행동이 각기 따로 노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교훈의 말씀을 들었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심문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것은 진리가 나타날 때 세상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 자신은 진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합니까? 진리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내 감정 내 생각조차 진리에 순종하기를 힘쓰며 살아가는 것입니까? 아니면 진리가 뭐라 말하든 내 생각과 감정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인간의 부패성은 진리에 대해 배척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아무리 진리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기득권을 무너뜨릴 때는 결코 진리로 간주하지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겠다는 것이 인간의 고집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런 고집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진리의 말씀은 진리를 들었고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고 무시를 받는 것입니다. 과연 그 속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말씀에 무엇을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영혼을 살리는 말씀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그저 마음이나 편하게 해주는 위로의 말씀을 원하십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부패한 인간에게는 그 속을 찌르는 송곳과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니 누가 그 말씀을 원하겠습니까?

 

 

 

 

세상적인 시각에서 볼 때 예수님에게 치명적인 일은 예수님의 제자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팔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약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이 붙들린 지금 예수님을 찾거나 함께한 제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도망을 쳐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제자들에 대해 실패한 스승으로 비춰질 수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성경은 감추지 않고 그대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말씀을 들었고 배웠던 제자들까지 예수님 편에 있지 않았음을 말함으로써 모든 인간의 부패함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겠습니까?

 

 

 

 

22절을 보면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고 말합니다. 대제사장에 대한 태도가 불순하다고 해서 하속이 예수님을 친 것입니다. 이 하속은 예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대제사장이란 높은 직책을 가진 사람에게 잘 보이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때려서 자신의 유익을 얻고자 하는, 즉 예수님을 배척하고서라도 자신의 이득을 따라 행하는 부패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따라가도록 합니다. 그런데 신앙을 말하는 우리가 가는 길은 과연 무엇입니까? 이점을 두고두고 묵상하면서 여러분 자신의 길을 점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고 부패한 존재들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살리시고 생명을 얻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의 은총과 희생과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자신의 연약함과 부패함에서 생각해 볼 수 있기 바랍니다.

 

 

 

 

날마다 자복하고 회개하면서 통회하는 마음을 주의 은혜에 두지 않으면 안됩니다. 신자는 사랑을 알게 되고 사랑에 깊이 빠져들 때 그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따라 살게 하고 예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부인하게 되어질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사랑이 능력의 힘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이 자기 힘과 의지를 가지고 하려고 하기 때문에 안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 예수님을 찾기 때문에 예수에게서 세상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에게서 인간의 연약함과 부패함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부인하며 살아가고 진리에 대해 등을 돌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연약함과 부패함을 모두 짊어지시고 피흘리신 예수님을 속 중심에 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자에게는 예수님이 전부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함을 잃지 마시고 여러분의 심령이 은혜와 사랑과 긍휼로 채워짐으로써 날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달프고 힘든 삶에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고난을 받고 죽으신 예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보고 살아가는 그가 진정으로 복있는 사람입니다.

 

 

 

 

 

(120강) 요한복음 18:28-32 행악자


<본문>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하니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요 18:28-32)

 

 

 

 

<설교>

 

본문 28절에 보면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 하더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유대인들의 신앙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는데 그들의 신앙은 자기들의 법과 율례를 철저히 지키는 것에 있었습니다. 28절을 보면 예수님을 끌고 온 자들은 빌라도의 관정에까지 왔으면서도 관정에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이유는 더럽힘을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즉 관정에 들어가면 자신들이 더러워지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유월절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이방인의 관정에 들어가면 그것은 곧 이방인과 함께 하는 것이고 따라서 자신이 더럽혀지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0:28절에도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초대를 받아 갔을 때 유대인들로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이 위법이라는 말을 한 것이 나옵니다. 십자가 이후에 사도들도 이러한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어떠했겠는가는 두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들의 율례에 철저한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율법에 대해서 자기들과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예수님이 그들 눈에 신앙이 온전한 사람으로 보여질 리가 만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30절에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행악자라고 고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행악자라는 것은 살인과 도적질 같은 나쁜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큰 행악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의롭게 하고 법을 지키며 정당하게 살기 위해 애를 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 의해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은 오늘날 어떤 사람에 의해서 예수님이 죽으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의롭다고 인정해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의로운 것으로 여기고 정당하다고 믿는 모든 것이 엉터리고 잘못된 것임을 고발하고 드러내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를 믿으라는 말씀 자체가 곧 유대인들의 노력과 공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유대인들을 노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함에 의해서 자기들의 의의 기준이 도전을 받기 때문에 예수님을 행악자로 규정하고 죽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불필요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의 의에 큰 걸림돌이 되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의가 아니라도 자기들의 의로도 충분히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겼기에 예수님의 의를 팽개쳐 버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이 잔치 집에서 유대인들이 죄인으로 취급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것으로 트집을 잡습니다. 또 하나는 요한의 제자와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고 기도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느냐고 트집을 잡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트집을 잡지는 않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주위에서 어떤 사람은 성경을 많이 보는데 다른 사람은 성경을 보지 않을 때 누가 더 믿음이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까? 우리의 판단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성경을 많이 본다는 것에 기울어지기 십상입니다. 이것이 항상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는 우리의 수준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가까이 하셨던 것은 그들이 무엇을 행하고 행하지 않는가를 보지 않으신다는 선언입니다. 유대인들이 세리 창녀들을 멀리 하는 것은 그들이 행하는 것을 보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행하는 것이 더럽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할 때도 창녀에 대해서는 더럽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창녀는 더럽고 나는 깨끗하다는 생각입니다. 창녀는 몸을 파는 일을 하니까 더러운 존재고 나는 그런 일을 안하니까 깨끗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이것이 곧 유대인의 시각인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악하고 더러운 존재입니다. 우리는 내 자신에게서 이 더러움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나의 행위에서 더러움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십일조를 하는 행위에서 더럽고 악한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보지 못하면 교회를 다니고 십일조를 하니까 나는 깨끗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깨끗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악하고 더러운 자들이 모여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다같이 악하고 더러운 존재이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 차별하고 구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행악자라 고소하고 있지만 그러나 정작 행악자는 유대인 그들이었습니다.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그것이 곧 예수님에 대한 행악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 스스로 예수님을 높인다고 말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예수’ ‘예수’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예수님이 높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예수 하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이로움의 근거로 삼고 '이러한 것을 하니까 나는 믿음이 있다'는 자기 교만으로 나아간다면 오히려 예수님에게 행악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죽는 그 순간까지 버리기를 힘써야 하는 것은 자기 의이며 자기 공로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하기 때문에 결국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할 때 일수록 자신을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제하면서 자신을 경계해야 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자신을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할 때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믿음이 없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 내 속에 있는 악한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나를 경계하지 않으면 내가 곧 예수님에 대한 행악자로 나서게 됨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살 수 있는 존재임을 믿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가난한 심령의 소유자를 말합니다. 오늘 내 자신이 이러한 가난한 심령으로 그리스도 앞에 섰는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다만 마음속으로 ‘그래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러면 나는 가난한 심령의 소유자네?’ 라는 한순간의 생각으로 자신을 판단하지 마시고 평소 그런 심령으로 살았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혹 형제를 대할 때 ‘너는 왜 그것 밖에 안돼’라는 판단을 내리지 않았는가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여러분, 내가 누군가보다 낫다는 생각만큼은 버려야 합니다. 항상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누군가와 비교하고 싶거든 예수님과 비교하십시오. 큰소리 치려거든 예수님 앞에서 치기 바랍니다. 만약 예수님 앞에서 큰소리칠 수 없는 입장이라면 형제에 대해서도 그런 입장으로 대하십시오. 그것이 옳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반대하고 다른 신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열심히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행악자라 하며 죽였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녔고 어떤 열심을 내고 있는가? 라는 문제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느냐에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에게도 교회를 잘 다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가를 물으십시오. 분명 우리는 그 물음 앞에서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워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상태로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공로와 의가 주께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형제를 대하는 것이 곧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고 참된 교회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는 것은 예수님을 죽이는 행악자로 나아갈 뿐입니다. 율례를 빙자하여 형제를 악하다 정죄하고 죽이고 상처 주는 이것이야 말로 행악자의 모습인 것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21강) 요한복음 18:33-38 빌라도와 진리


<본문>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요한복음 18:33-38)

 

 

 

 

<설교>

 

본문은 유대 총독인 빌라도가 자신에게 끌려온 예수님을 심문하는 내용입니다. 우린 이러한 빌라도를 통해서 오늘 우리의 신앙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33절에 보면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34절)라고 답합니다. 그런데 빌라도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다른 세복음서와는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나 마가나 누가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물음에 대해 ‘네 말이 옳도다’라고 답하신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을 대할 때마다 신자들이 가지는 혼란은 ‘과연 누구 말이 진짜냐?’라는 것입니다. 이 경우 역시 그 때 예수님이 어떤 답변을 하셨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분명 혼란이 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수결에 원칙에 의해서 요한 혼자보다는 세 명이 말한 것이 더 확실하고 맞지 않겠는가라는 답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어떤 답변을 하셨는지 정확하고 사실적인 것을 가려내는 것이 성경의 목적이 아닙니다. 성경은 역사적으로 정확한 사실을 기록하고 알려주기 위한 역사 편찬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에 대해 계시하기 위해 주어진 진리의 책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계시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 되신 참된 그리스도를 바르게 분별하고 그분만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 성경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저자들은 각자 같은 사건에 대해서 말한다고 해도 그들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예수에 대해 증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똑같은 역사적 사실로 기록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각자 자기 위치에서 자신이 깨달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라고 되묻습니다. 이 말은 ‘네가 나를 유대인의 왕으로 보는 것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내게 대해 한 말을 듣고 하는 말이냐?’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 대해 빌라도는 35절에서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가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유대인이 아니니 네가 유대인의 왕이든 말든 나하고는 상관이 없으니 다만 네가 무슨 잘못을 해서 여기로 끌려 왔는지만 말하라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과 자신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지은 죄가 어떤 것인지 밝혀내서 처벌만 하면 된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빌라도를 두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행여 현재 우리들의 신앙이 바로 이 빌라도와 같은 수준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물으면서도 예수님이 왕이든 아니든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유는 어떻든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설사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온 분이라고 해도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니까 예수님과 연관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시각입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일에서 예수님을 바라볼 뿐입니다. 유대의 총독으로서 일을 잘 하는 것이 자기 신상에 좋을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고소 사건에 대해 일을 잘해야 한다는 생각만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에게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가리켜서 나의 생명이라고 일컫습니다. 여기서 말한 생명은 하늘의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생명은 죄인으로서 죄를 자복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신자들의 몫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신자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불의함을 보며 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용서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은 죄인이기 때문에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벗어나서는 영원한 사망에 처하게 됨을 깊이 자각한 사람이 신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그리스도 앞에서 오로지 생명을 볼 뿐입니다. 죄인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구하게 되는 것은 생명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자신의 직무에서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때문에 유대인들이 고소한 것처럼 예수님이 죄가 있는가 없는가 만을 살필 뿐입니다. 유대교의 총독이라는 자기 입장에서 예수를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역시 현재 처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면 빌라도와 같은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생명이 보이기보다는 자신을 도와주고 이롭게 해줄 가능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이신 예수님과의 잘못된 관계인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교회가 이러한 잘못에 처해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라 말하고 우리의 생명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말하면서도 정작 예수님 앞에서 죄인으로 서기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오직 자신의 입장을 고수할 뿐입니다. 내 입장이 이러니 나를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36절에서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이 왕이신 것은 분명한데 나라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나라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 앞에 서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의 사람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왕이신 새로운 나라의 백성으로 서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앞에서 세상나라의 일을 구하고 의논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관심은 세상 속에서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서 보여 지는 것은 세상 나라의 모습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나의 왕이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잘못됨입니다.

 

 

 

 

신자의 나라는 분명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새로운 나라입니다. 따라서 신자라면 새로운 나라에 관심을 두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육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 나라에 처한 입장을 고수하며 예수님께 나온다는 것은 생명이신 예수님과 죄인의 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즉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보고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7절을 보면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라고 말합니다. 빌라도는 여전히 예수가 왕이냐 아니냐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빌라도에게 예수님은 진리에 대해 증거하러 왔다고 말씀하고 진리에 속한 자만이 예수님의 말을 들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해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반응을 보일 뿐입니다. 이것은 진리에 대해 가르쳐 달라는 뜻이 아니라 ‘진리 그까짓게 뭐냐?’는 식의 조롱의 말인 것입니다. 즉 빌라도에게는 진리가 필요치 않았던 것입니다. 유대교의 총독이라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진리보다는 자신의 자리를 잘 지키고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그것을 위해 유대인의 요구를 들어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예수라는 한 사람보다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는 것이 더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빌라도의 진리였습니다. 여러분에게 진리는 무엇입니까? 혹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반응하는 빌라도가 우리의 속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세상에서 힘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내 자리를 지키는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진리를 원하고 진리를 사모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보고 있기 때문이고, 자신에게서 불의함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이 참된 신자인가는 여러분도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죄로 인해서 사망에 처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피 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분 앞에서 우리가 바라볼 것은 천국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진리이며 이 진리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122강) 요한복음 19:1-16 예수님의 십자가


<본문>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 (히브리 말로 가바다) 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 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 주니라(요한복음 19:1-16)

 

 

 

 

<설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기독교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면 기독교 자체가 잘못될 수밖에 없고 신앙 역시 십자가와 상관이 없는 종교로 전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신자가 십자가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말하는 대다수의 신자들은 십자가에 대해 더 이상 알 필요가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유는 자신은 십자가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십자가에 대한 설교에 대해서는 금방 지루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잘 알고 있는 얘기를 또 언급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응이 소위 십자가를 신앙의 중심에 두고 있다고 자부하는 신자들에게서 흔히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모습을 볼 때마다 참으로 이상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로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받음을 감사한다고 하면서도 십자가에 대한 말씀이 전해지면 쉽게 식상함을 느끼고 관심이 멀어지는 현상에 대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스스로의 입술로 고백을 하면서 사랑하는 분에 대한 얘기를 하고 사랑하는 분을 위해 살아가는 삶에 대해 얘기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관심이 멀어져 있다면, 그런데도 불구하고 과연 그 속에 주님에 대한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사실 현대 교회는 예수 얘기보다는 자신의 얘기에 더 귀를 기울이는 것 같습니다. 가령 믿음으로 자신이 잘된다는 얘기에 더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십자가 얘기 보다는 교회 얘기에 더 관심을 두는 모습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하나의 간판이나 장식에 불과할 뿐, 십자가 밖에서 십자가와 상관이 없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 일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이 피 흘리고 죽으신 현장임을 인정하고 믿는다고 해서 십자가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십자가를 진심으로 알게 된 신자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아들을 죽이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분을 유일하신 참된 신으로 믿고 의지하는 그것이야 말로 십자가를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나십니까? 여러분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어떤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간증이라는 제목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에서 아들을 죽이시는 하나님은 안계십니다. 다만 십일조나 주일 성수와 같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복을 주는 하나님을 기다리고 만나려고 할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단호하게 그런 하나님은 가짜일 뿐임을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19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내용을 대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말씀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으로 출발하여 그동안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과 행하신 행적으로 더듬어 오면서 예수님이 증거하시고자 했던 복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내용까지 온 것입니다.

 

 

 

 

어쩌면 19장부터는 앞서 언급한 대로 여러분이 잘 아는 내용들이어서 별 관심을 두지 않고 넘어가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십자가를 아는 자는 십자가에서 필히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이 십자가에서 어떤 하나님을 만났으며, 또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있는가를 통해서 십자가를 알고 있는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에서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먼저 예수님을 누가 죽였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과 빌라도에 의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게 하실 계획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은 죽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뜻의 실현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십자가를 겉도는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과 빌라도가 십자가의 사건과 무관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유대인과 빌라도의 횡포에 대해 침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침묵하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고 싶어 했습니다. 4절에서도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못박아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다’라고 소리치며 빌라도를 몰아 붙였던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빌라도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 것 같습니까? ‘예수님을 놓아준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닌데 나 같으면 놓아 줬겠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빌라도가 유대인들의 강압에 결국 예수님을 못박는 것은 유대인의 총독이라는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못박지 않으면 유대인들이 소요를 일으킬 것이고, 결국 로마 황제로부터 유대인을 잘 다스리지 못한 것에 대한 추궁을 염려하여 유대인들의 요구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빌라도와 같지 않다면 그 모습은 세상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예수님만을 따르는 것으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빌라도의 행위에 대해 침묵하시는 것은, 그것으로 세상의 악이 드러나며 죄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가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7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유대인이 말한 예수님의 죄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려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다리던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해줄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늘로서 왔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수님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줄 능력이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니 그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곧 그동안 그들이 품고 살아온 소망을 포기해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다릅니다. 빌라도에게는 유대인과 같은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빌라도가 예수님을 못박은 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현재의 자신의 위치를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8절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유는 혹 예수라는 자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신에게 큰 문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감히 신의 아들을 심문하고 사형을 시킨다면 신의 모든 저주를 자신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9절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너는 어디로서냐’라고 물으면서 예수가 진짜 하늘에서 온 하나님의 아들인가를 확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가 아닌가에 대해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하나님의 아들에게 복종하고 경외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대한 유대인과 빌라도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볼 때 아들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아들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빌라도는 아들에 대해 복종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저주로부터 피하자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미칠 화를 고려해서 예수를 놓아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유대인과 빌라도의 모습이 현대 교인들에게서 보인다는 것입니다. 현대 교인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님에 대해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자신을 위해 복종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복종하지 않았을 때는 자신에게 미칠 화를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유대인과 빌라도를 통해서 드러난 죄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창조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주가 자신을 위해 존재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 이것이 곧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죄악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면 날 위해 살아가는 자신의 악을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소망을 드러내고,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존재해주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십자가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을 말하면서 하나님만을 위해 사셨던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진심으로 하나님께만 복종하는 신앙이라면 하나님만을 위해 살아가셨던 예수님을 높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유대인의 모습은 지금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예수님만 섬길 것을 말하면 내심 불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인간을 위한 예수를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 소망과 나의 꿈을 버리고 십자가에 피흘리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아들을 죽이신 하나님을 만날 때 비로소 신앙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흘리신 피는 내가 흘려야 할 피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피로써 죄 용서함과 함께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피의 은혜를 말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세상에 욕심을 두고 있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피로 얻고, 거기에 세상의 복을 보너스로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의 반발이 오늘 우리들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말하고 피의 은혜를 말하고 구원을 말할 때는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다가도, 세상의 복과 상관없이 오신 예수님을 말하면 불만이 생기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좋지만 내 육신에 도움을 주지 않는 예수는 싫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유대인이며 빌라도의 속성입니다. 눅 23:34절에 보면 예수님은 죽으시면서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라고 말씀합니다. 날마다 예수를 죽이고 나 살기 위해 말씀을 버리고 살아가는 우리를 보시면서 ‘저들을 사하소서’라고 외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십자가에서 이러한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곧 예수님을 죽인 악한 자라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잊어버립니다. 1절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써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5절에는 예수님이 가시관을 쓰고 나오십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우리는 의의 면류관을 쓰게 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자색 옷을 입으심으로 우리가 의의 옷을 입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이 당하신 결과로 주어진 은총이며 복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기 백성이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며 장차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사모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불의함을 발견하고 주님의 은혜가 참으로 크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실 그 날을 사모하며 소망 중에 살아가는 것이 신자된 여러분이 할 일입니다.

 

 

 

 

 

(123강) 요한복음 19:14-16 유대인의 신앙


<본문>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 주니라(요한복음 19:14-16)

 

 

 

 

<설교>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들로부터 율법문제로 인하여 많은 시비를 받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으로 인해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시비를 받았고, 음식을 먹을 때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은 것으로 인해서 정결 문제에 대해 시비를 받기도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요한복음 9:16절에서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고 부인하였을 정도였던 것입니다. 지금식으로 말하면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믿음의 기준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눈에는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때문에 신앙의 척도인 율법도 지키지 않는 자를 하나님께로서 온 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은 유대인들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까? 마 5:17절에 보면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한편으로 생각하면 모순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율법은 완전했습니다. 즉 불완전한 율법을 예수님이 오셔서 완전한 것으로 완성시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완전한 율법을 완전케 하려 오셨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이것은 율법에 대한 이스라엘의 잘못된 이해로부터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완전한 율법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의 허물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죄악된 인간이 완전한 율법이 요구하는 선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의 행위로 의에 도달할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의를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열성과 믿음과 의지로 율법을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는 자신들을 의로운 존재로 여겼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는 한 하나님의 백성 됨은 의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예수님이 율법을 완전케 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완전의 의미는 율법의 참된 의미를 드러내시겠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율법을 소중히 여기고 잘 지킨다고 하는 유대인들로 인해서 율법이 오히려 무너지고 잘못 오해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십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지 않고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즉 안식일 규례는 안식일에 무엇을 하고 안하는 것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를 생각해 보면 신앙의 많은 부분들이 옛날 유대인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서 참된 것을 찾아가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의 것을 참된 것으로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참된 진리를 찾아가기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14절에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날이 유월절 예비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월절 예비일에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이 유대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고 소경이었던가를 말해줍니다. 유대인에게 유월절은 아주 중요한 절기입니다. 31절에서도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안식일은 유월절의 안식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있어서 유월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세상을 둘로 구분하는 역할을 합니다. 십자가의 피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구분해서 믿는 자는 생명에 믿지 않는 자는 사망에 처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유월절은 바로 이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하나님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과 바르지 않은 집으로 구분하여 피를 바른 집만을 살리고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가 생명의 근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유월절이고 신약의 십자가 역시 이러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월절은 구약의 십자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유월절 예비일에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죽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유월절에 대한 유대인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은 유월절에 대해 어떤 오해를 했습니까? 출 12:21-25절에 보면 하나님은 유월절 규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여기 보면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일을 규례로 삼아라고 말씀하는 것은 어느 한 날을 지킬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규례로 삼아라는 뜻입니다. 즉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영영히 규례로 삼아야 하는 것은 어린양의 피를 보시고 이스라엘을 살리신 하나님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일에서 ‘우리가 산 것은 어린양의 피 때문이다’는 것을 영영히 잊지 말아야 했던 것입니다. 결국 유월절을 지키지 않으면 이스라엘에서 끊어진다는 것은 바로 어린양의 피로 살았다는 것을 잊는다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아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유월절이라는 날을 크게 여기고 유월절의 어린양은 무시해버렸습니다. 즉 그들은 유월절이라는 절기만 지키면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참된 유월절은 어린양의 피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을 죽여서 자신들을 살리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유월절 예비일에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신앙이며 오늘날 믿는다고 자처하는 소위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의 신앙이 곧 이런 식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큰 날로 여기고 그 날을 지킨다고 해도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들 스스로는 신앙으로 여긴다 해도 하나님은 결코 신앙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신앙은 어린양의 피를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에서 어린양의 피를 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어린양의 피를 본다면 자신의 죄에 애통해 하면서, 결코 자신의 행위를 의로 여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무엇인가를 행하고 지키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이 곧 유대인의 신앙임을 알아야 합니다.

 

 

 

 

유월절을 큰 날로 여기는 사람들이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못박아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들의 유월절에는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가 필요치 않았던 것입니다. 이들에게 어린양은 따로 있었습니다. 예수가 없이도 얼마든지 어린양을 잡고 유월절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아무리 유월절을 지킨들 그것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의 신앙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유대인의 신앙이 현대 교회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신앙이 유대인의 신앙처럼 예수님을 보지 않는 잘못된 신앙이 아닌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무엇을 행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유월절을 명하신 하나님의 규례에 이스라엘이 복종한다면 그것은 어린양의 피로 생명을 얻었음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종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복종이 있는가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결코 주일 하루 예배드리는 것으로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날을 정하여 모이고 기도하고 예배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유대인처럼 어린양의 피의 의미가 사라진 채 모양과 형식만 남아 있는 빈 껍질의 신앙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어린양의 피를 바라보는 신자는 자신의 의를 보지 않습니다. 그 어떤 선한 행위를 행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은혜의 열매로 여길 뿐 자신의 의로 여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서는 선이 나올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방해하는 여러분의 적은 바로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유대인처럼 ‘나는 이것을 행하고 이것을 지키고 있으니 저 사람보다 믿음이 좋다’라고 여기는 자기 의가 바로 여러분의 구원을 방해하는 적입니다.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의를 잊어버리게 하는 가장 큰 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대적과 날마다 잘 싸우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승리는 예수님의 피에 있음을 믿으며 예수님께 감사하고 사는 것이 곧 승리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신앙은 열심히 지키고 행하는 자신을 보는 것으로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었음을 생각하며 참된 신앙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124강) 요한복음 19:17-22 유대인의 왕


<본문>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 히브리 말로 골고다) 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요한복음 19:17-22)

 

 

 

 

<설교>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내용입니다. 본문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면서 패를 써서 붙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패에 기록된 글은 ‘유대인의 왕’입니다. 19절을 보면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빌라도가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말로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써 놓은 것은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빌라도에게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항변합니다. 예수는 자기 스스로 왕이라고 한 것이지 자신들의 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요구에 대해 빌라도는 ‘나의 쓸 것을 썼다’(22절)고 답합니다. 이 말은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것은 당연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온 존재로 여겼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즉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했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왕으로 인정을 했기에 ‘나의 쓸 것을 썼다’는 말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설사 빌라도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을 했다 해도 빌라도에게는 유대인의 왕일 뿐 자신의 왕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비록 예수가 왕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복종해야 할 분으로는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왕에 대한 백성의 바른 모습은 복종입니다. 이것이 왕을 왕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패 아래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세상은 비록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유대인의 왕으로 죽으신 것이 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십자가에 대해 수많은 말을 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안다고 자부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십자가에 기록된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에 대해 관심을 두신 적은 있습니까? 패야 있든 없든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고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죽었든 말든 그것 역시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죽으신 것이 유대인이 아닌 현 시대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생각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곧 빌라도의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빌라도가 쓴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의 글은 분명 거짓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나라는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왕으로 오신 분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18:36절에도 보면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따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님이 왕으로 존재하시는 예수님의 나라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빌라도는 패에다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지만 그는 예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나라는 따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섬기는 왕도 따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의 눈에 예수님은 왕이면서도 왕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를 받고 초라하게 죽어가는 한 인물로만 비춰졌을 것입니다. 유대인들 역시 자신들이 소망하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이룩해줄 왕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왕이라고 자처하는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염원하는 나라를 결코 이뤄줄 수 없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여러분의 왕으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왕에 대한 복종이 있는가에 있습니다. 왕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한다고 해도 복종이 없다면 그것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써서 십자가에 달아 놓는 빌라도와 다를 바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 우리 왕이여’하고 아무리 노래를 부른다고 해도 그것으로 예수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곧 예수님의 백성이라는 뜻인데, 백성이라면 왕에 대한 복종은 필수적인 것인만큼 예수님에 대한 복종이 있는가를 깊이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복종이란 왕의 권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있는 왕으로서의 권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나라를 열고 닫는 권세입니다. 즉 예수님의 나라에 들일 자는 들이고 쫓아 낼 자는 쫓아내는 권세가 왕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의 공로와 행위로 천국을 들어가 보려고 하는 시도를 감히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모든 권세가 예수님에게 있는 만큼 이것을 아는 백성이라면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달리 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복종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유대인이라 불려지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죽였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백성인 유대인은 달리 존재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면서 그분 앞에 복종합니다. 그분의 모든 것에 대해 순종을 합니다. 세상의 밑바닥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 세리와 창녀 죄인들과 가까이 하시고 함께 하신 예수님에게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약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약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곧 세리요 창녀이며 죄인임을 아는 것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고, 이것이 곧 진정한 예수님의 백성이며 참된 유대인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달리 다른 세상을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꿈꾸는 세상을 두지 마시고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그 나라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빌라도와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나라가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나라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입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이 나라를 원하신다면 이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결코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대인은 예수님을 자칭 왕이라고 떠드는 사람으로 치부했습니다. 유대인들 앞에 예수님은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데 홀로 ‘내가 왕이다’고 소리치는 정신이상자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께 복종이 없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자칭 왕으로 떠들고 다니는 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복종하십시오.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으면 예수님만을 구원에 이르는 길로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말씀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자기 의를 보지 않고 자신의 공로와 행위를 자랑하지 않고 십자가에 피흘리신 예수님의 의로우신 행위와 공로를 믿으며 사는 것이 복종입니다. 그것이 말씀대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복종이 있는 그들이 곧 참된 유대인이며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왕으로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125강) 요한복음 19:23-27 십자가의 하나님


<본문>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한복음 19:23-27)

 

 

 

 

<설교>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달려 있는 십자가 아래서 군병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23-24절의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고 말한 것처럼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서로 나눠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 아래에서 있었던 군병들의 행위는 여러분도 잘 아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대개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벗겨서 서로 나누는 일들도 마지막에는 옷까지 빼앗기고 벌거벗겨져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낮아지심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물론 옷까지 빼앗기는 모습에서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생각할 수는 있지만, 저는 군병들의 모습에서 현재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군병들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의 옷을 서로 나눠 가지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이 고급 천으로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새 옷도 아닐 것이고 다 낡아빠진 볼품없는 옷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옷을 군병들이 무엇 때문에 서로 나눠 가지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대단한 분이었으니까 기념으로 보관하기 위해서 나눠 가지려고 했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억측일 뿐입니다.

 

 

 

 

성경은 군병들이 옷을 나눠 가지는 것에 대해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24절의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옷을 나누고 제비뽑는 일에 대해 미리 예언한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배후에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24절의 이 구절은 시편 22:18절의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시편 22편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구절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알다시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하셨던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외치신 그 말씀이 이미 시편 22편에서 등장하고 있고, 또 22편의 내용을 보면 모두가 고난과 연관되어 있으며 22:18절의 말씀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이루어진 것을 생각해 보면 22편은 예수님이 대해 미리 예언하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한다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곧 구약시대부터 예언된 메시아임이 증명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성경에 계시된 모습 그대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장차오실 메시아에 대해 예언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 하늘로부터 온 메시아라면 예언된 모습 그대로 오시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53장에서 메시아에 대해서 예언하기를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2절)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습은 온 세상이 흠모하고 영웅으로 대접할만한 인물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영웅이었으며 자신들이 흠모할 만한 위대한 모습의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도외시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유대인들과 같은 시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를 도와주시고 어려움에서 건져 주시는 예수님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메시아의 모습인가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시편 22편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 전혀 생각 밖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어려움에서 부르짖어도 듣지 아니하시고 외면해 버리신 하나님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에 처했는데도 하나님은 자신을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처럼 대하셨던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53:10절에서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상함을 받으시고 질고를 당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임을 말합니다.

 

 

 

 

과연 누가 이러한 하나님을 원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인해서 상함을 받지 않고 질고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상함을 받게도 하시고 질고를 당하게도 하신다’라는 말을 한다면 달가와 하겠습니까? 분명 그런 하나님은 거부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만큼은 우리의 생각은 절대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계시한 그 모습 그대로의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역시 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의 모습 그대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그 모습들이 우리가 원하는 바가 아니고, 지금까지의 생각에 벗어난 것이라 할지라도 성경에서 그렇게 말한다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실제로 다윗의 옷을 벗기고 나누고 제비뽑아 가졌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윗에게 그러한 일이 있었느냐 없었느냐가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의 택함 받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고난과 어려움에서 돕지 않으시고 오히려 부르짖음에 대해서도 듣지를 않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독생자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대하셨던 것입니다.

 

 

 

 

현대 교인들은 십자가는 부지런히 말하되 십자가 위에서 살아가는 삶은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멸시를 받고 죽으시는 고통과 어려움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생각하십시오. 물론 죽으신 예수님이 결국 부활했지 않느냐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죽으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인들은 죽음은 회피하고 부활만 소유하려고 합니다. 마치 빵을 먹을 때 맛없는 부분은 골라서 버리고 팥이 들어있는 맛있는 부분만 골라서 먹는 잘못된 신앙이 대부분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예수님을 열심히 믿으면 뭔가 달라질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열심히 잘 믿으면 예수님이 자신을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특별히 대우해서 세상에서 높여주는 그러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기 전이나 믿은 후나 사는 것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신앙이 있음으로 해서 천국과 지옥을 알게 되고, 세상을 심판받을 땅으로 바라보게 되고,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절실히 원하는 자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달라지는 것은 분명히 있습니다. 결국 달라지는 것은 환경이나 형편이 아니라 속마음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십자가 아래서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지는 멸시를 받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냥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보기에는 침묵하셨지만, 그래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조롱도 받으셨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위해 나서시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억울한 일을 당하고 고통과 어려움에 빠짐으로서 도와달라고 열심히 부르짖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냥 침묵하시고 도와주시는 흔적이 전혀 없다고 여겨질 때 과연 어떤 마음이 되겠습니까? 아마 맥이 빠지고 ‘신앙이 뭔가?’ 실의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볼 때 침묵으로 보일 뿐,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시기 위해서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부르짖고 애원을 해도 가만히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그것이 우리에게는 침묵하시는 것으로, 마치 아예 하나님이 안계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일이 우리를 도우시고 복주는 것으로 행하여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모두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이 되어지기를 원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소망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성공에서 하나님을 보려고 할 것이고, 재물에서 하나님을 보려고 할 것입니다. 이들은 결코 말씀에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말씀 안에는 이들이 원하는 하나님은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항상 기적과 세상의 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게 될 뿐입니다. 이것이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신자는 아들을 죽이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신자는 필히 십자가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고 제비뽑게 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나에게 득이 되는 사건에서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계시는 참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어려움과 고통에서도 돌아보시지 않으시고 부르짖어도 침묵하시는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행하면 복준다’는 말이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가장 초라하고 낮아진 모습으로 돌아가신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만이 여러분을 생명에 이르도록 할 것입니다.

 

 

 

 

 

(126강) 요한복음 19:28-30 다 이루었다


<본문>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한복음 19:28-30)

 

 

 

 

<설교>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죽으실 때 마지막으로 외치신 말씀들이 서로 일치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내가 목마르다’ ‘다 이루었다’라는 말을 하신 것으로 되어 있지만 다른 복음서에는 본문과 같은 내용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흔히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외친 일곱 말씀을 가상칠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누가복음에서 하신 말씀이 다른 복음서에 등장하지 않고 마태와 마가복음에서 하신 말씀이 누가와 요한복음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과연 어느 것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냐?’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이 사실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외치신 말씀이 복음서마다 각각 다르게 기록된 것은, 복음서의 저자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서 자신들이 증거하고자 하는 예수님을 잘 나타내주는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 보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역사적인 사실을 알려주는 역사책이 아닙니다. 역사적 사건들이 사실이냐 아니냐에 대해서도 관심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그대로 믿으면서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건과 사실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들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모든 복음서가 비록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모든 사건들이 똑같은 내용으로 기록되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복음서를 한권으로 통합하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복음서가 각각 나뉘어 있는 것은, 복음서의 저자들이 증거하고자 하는 예수님이 각기 다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다른 복음서의 저자가 언급하지 않은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을 기록한 것도 이 말씀이 요한이 증거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모습과 일치하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일의 완성을 뜻합니다. 완전한 성취를 의미합니다. 일의 완성이고 완전한 성취이기 때문에 다른 무엇인가를 더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완벽하게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의 구원과 연결된 것입니다. 따라서 ‘다 이루었다’ 는 말씀은 성도의 완벽한 구원을 뜻합니다. 구원에 있어서는 더 이상 보태야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완벽하게 성취된 구원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구원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허무는 사단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는 이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다 이루었다’는 말씀 앞에서 ‘예수님 우리가 뭘 해야 합니까?’라는 말이 허용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구원 받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행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았으니까 행해야 할 것이 아니냐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구원 받음의 결과가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은 행함이 없으면 구원 받지 못한 것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며, 또한 구원의 결과를 행함에 둔다면 몇 가지의 행함이 기준이 되어서 구원의 여부를 판단하는 오류를 범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행함에 대한 인간의 시각이 세상의 상식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구원받았으면 행해야 한다는 말을 하지만 그 행함이라는 것이 착한 일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행함은 종교를 초월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보여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겠습니까? 구원받은 자로서 행하는 것이라면 구원 받은 사람에게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행함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행함이 종교를 초월해서 보여진다면 구원받은 자의 독특한 행함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구원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요한복음 6:53-54절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으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셨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증거물은 인자의 살과 피에 있는 것이지 인간의 행함에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인자의 살과 피는 곧 예수님의 죽으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셨다는 것은 단지 추상적인 의미의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에 함께 한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이용해서 천국가려고 하지 말고 신자 또한 죽은 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천국가게 되었습니다 .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싫어한다면 그것이 곧 예수님의 죽음을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함께 하는 신자, 그가 곧 생명을 얻은 자라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게 하는 능력이지 착한 일을 하게 하는 힘은 어닌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믿음과 상관없이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려고 하겠습니까?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자신의 명예와 이름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그 모든 것을 포기하는 주님의 길을 가겠습니까? 하지만 믿음은 그것을 가능케 합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증거는 주님과 함께 죽은 자로서 주님의 길을 가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날 위해 죽으신 주님을 위해 살아가게 되는 것으로 생명의 증거물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생명에 대한 모든 것은 완벽히 성취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이 완성하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예수님이 이루신 것을 감사하며 기쁨으로 누리는 것이지 뭔가 다른 것을 보태서 좀 더 멋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얻은 증거물로 다른 조건을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주셨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받은 자로서 있어야 할 행위라면 주신 것으로 감사하는 것이고 기뻐하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받고도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안될 것 같은 조바심에 빠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이 이루셨다는 것은, 인간에게서도 보탤만한 선한 것이 없기 때문인데 그것을 모르고 자기 행위로서 구원을 멋있게 치장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유혹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구원의 결과를 행위에 두게 되면 결국 행위가 없을 때는 ‘내가 혹시 구원받지 못한 것은 아닌가?’라는 불안과 의심과 조바심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신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무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행위란 신자가 믿음에 이끌려 살아가게 되면 자연히 드러나게 되는 열매입니다. 믿음으로 인해서 주님의 희생과 섬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웃에게 해를 입히고, 자신의 편함을 위해 이웃이 힘들게 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자는 행하려고 하기보다는 무엇이 믿음인가를 살피면서 자신의 길을 점검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의로써 불의한 내가 의롭다 여김 받게 됨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의가 불의한 나를 의의 세계로 초청했음을 믿는 자라면 자신의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의의 의미를 두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신자라면 행위를 가지고 자신을 과시하거나 다른 사람의 행위와도 비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 신자에게서만 보여지는 믿음의 독특한 현상입니다.

 

 

 

 

교회가 가르쳐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라면 주님의 살과 피의 의미를 가르쳐야 할 것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도하기 위해 힘쓰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한시라도 잊으면 안됩니다. 교회 역시도 교회가 끊임없는 유혹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어둠의 세계에 빛이 비친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어둠의 세상은 빛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이러한 세상이 한 일은 빛으로 오신 분을 죽인 것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에게 오히려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신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것으로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무엇인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의 행함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사실을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 흔적은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믿고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127강) 요한복음 19:31-37 구원의 근거


<본문>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요한복음 19:31-37)

 

 

 

 

<설교>

 

예수님이 죽으신 뒤에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는 요구를 합니다. 다음날이 유월절 안식일이기 때문에 그들의 거룩한 큰 날에 죽은 시체를 십자가에 매달아 놓기를 꺼려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을 것을 요구한 것은 당시 사형수의 사망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행했던 관습에 의한 것입니다. 이들에 요구에 의해 군병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와서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33절). 대신 한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릅니다.

 

 

 

 

과연 이러한 내용들이 왜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까요? 단순히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에 그 시신에게까지 손상을 입히는 인간들의 악함에 대해서 말하고자 함일까요? 물론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인간의 악함이 더욱 강하게 드러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을 단지 그런 차원으로 이해하는 데는 뭔가 부족함이 있습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을 두고 볼 때 선뜻 납득이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군병들이 예수님의 다리만 꺾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군병들이 예수님이 죽은 것을 알고 그리했다고 말하지만 사실 다리를 꺾는 것은 죽지 않은 죄인을 완전히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죽은 죄인의 완전한 죽음을 확인하기 위한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망여부와 상관없이 다리를 꺾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것입니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은 예수님의 옆구리만 창으로 찌른 것입니다.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것이 죽음을 확인하기 위한 작업이었다면 같이 달린 강도들에게도 같이 행하는 것이 옳은데 왜 예수님만 그러했겠습니까? 사실 당시 군병들의 마음에 대해 성경은 언급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성경은 분명한 답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하셨다는 것입니다.

 

 

 

 

36-37절을 보면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뼈가 꺾이우지 않는다는 성경과 찌른 자를 보리라한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면 분명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고자 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다리를 꺾이지 않게 하시고 대신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게 하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듣는 것이 오늘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오신 이유가 될 것입니다.

 

 

 

 

먼저 뼈가 꺾이지 않는다는 내용은 시편 34:20절에 있습니다.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라는 이 말씀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하나님은 이 말씀을 예수님에게 이루심으로써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시편 34편을 보면 그 전체 내용은 하나님께서 의인을 건지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시편 34:20절을 대한다면 하나님이 그 뼈를 보호하는 자는 의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군병들이 유독 예수님의 다리만을 꺾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뼈를 보호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시편 34편의 내용을 배경으로 해석하면 결국 예수님은 ‘의인’이라는 답을 내리게 됩니다. 즉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서 죽였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오직 예수님 한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민수기 9:12절을 보면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유월절에 희생 제물을 먹을 때 뼈는 꺾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 역시 시편 34편을 배경으로 해서 생각해 보면 희생 제물이 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은 예수님의 뼈를 보호하심으로써 유대인이 죽인 예수님이 그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희생 제물로 오신 의로우신 분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신 또 한가지는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것입니다. 이것은 스가랴서 12:10절의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는 말씀을 성취하기 위한 것입니다.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셨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내가 찌른 그 분을 바라보고 그분을 위해 애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은총을 부어주시면 신앙에 열심이 생겨서 교회 일에 더욱 부지런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찌른 분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심으로 나의 죄로 인해 죽으신 그분으로 인해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찌른 자가 바로 내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내게 부어졌기 때문이며, 내 죄를 알게 되고 애통하게 되는 것 역시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신 결과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게 하심으로써 지금 죽으신 예수님이 죄인된 자를 위해 보내신 의인이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고,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게 하신 것은 바로 너희가 의인을 찌른 자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간구하는 심령을 받은 신자라면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의 것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지는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죄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만을 구할 뿐입니다.

 

 

 

 

시편 51:8절에 보면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라는 말을 합니다. 51편은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에 나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받고 지은 시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51편의 내용은 전체가 죄에 대한 자복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구하는 것으로 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회개를 보면 단지 ‘하나님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주세요’라는 식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실 대개 회개기도를 한다고 하는 것을 보면 무작정 지은 죄를 용서해달라는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다윗은 죄를 용서 받는 것이 목적이기 보다는 죄에서 다른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8절의 내용 중에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라는 구절입니다.

 

 

 

 

뼈를 꺾는다는 것은 완전한 죽음을 뜻합니다. 본문에서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뼈를 꺾는 것처럼 완전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죽음은 죄와 연관되어 죽음을 당하는 것이며, 죄와 연관되어 죽음을 당하는 것은 제물의 희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다윗은 자신의 죄에서 하나님이 죽이시는 제물의 희생을 보고 즐거워하게 기뻐하게 해달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물의 희생 자체가 즐겁다는 것이 아니라 제물의 희생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에 대한 기쁨이고 즐거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제물에 대해서는 자신의 죄로 인해 희생을 당한 것에 대한 애통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다리를 꺾는 일도 이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의 죄로 인한 것이며, 그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와 긍휼하심을 발견하며 그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의 죄로 인해 죽으신 예수님으로 인해 애통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리를 꺾도록 놔두는 것이 옳은데 왜 꺾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은 죄인으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오신 의인으로 죽으셨음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한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도록 하셨습니다. 찌른 자를 본다는 것은 내 죄를 본다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곧 예수님을 찌른 자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 부어진 심령을 가진 신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다니고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찌른 자를 보지 못합니다. 설사 본다고 해도 전혀 잘못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교회에 시비를 걸고, 교회를 다니지 않고, 교회 일에 등한시 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을 찌른 자로 보면 안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니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사람들을 찌른 자로 보게 되면 결국 교회 생활 잘하는 나는 예수님을 찌른 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될 뿐입니다. 이것이 찌른 자를 보지 못하는 것이고, 스가랴서 12:10절의 말씀대로 한다면 하나님의 은총이 부은바 된 심령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애통하는 것은 감정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적 동요와 분위기에 의해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죄에 대해 애통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애통함은 나의 죄로 인해 의인이신 예수님이 죽으셨음에 대한 신자의 반응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애통함이 있는 신자는 예수님의 희생에서 긍휼과 자비하심을 보게 되고 그것으로 기뻐하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찾으며 세상의 것을 구한다면 그는 자기의 죄도, 예수님의 죽으심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도 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신자의 구원의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습니다. 우리의 자격이나 그 어떤 조건도 구원의 근거에 끼어 들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생각할 때 선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 기뻐하시고 나를 더욱 사랑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그것처럼 성경을 무시한 착각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은 우리의 행동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로우신 행위일 뿐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의로우신 행위 덕분으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린 다만 예수님을 찌른 자에 불과합니다. 죄인이 의인을 찌릅니다. 그러데 그 의인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았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찔렀음을 보지 않으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이보다 더 큰 기쁨과 즐거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자로서 이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주어진 이 기쁨과 즐거움을 놓치지 마시고 날마다 누리는 신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신자는 자기 행동의 무게를 달아보면서 구원을 염려하고 의심하는 어리석음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128강) 요한복음 19:38-42 예수님의 장례


<본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요한복음 19:38-42)

 

 

 

 

<설교>

 

십자가의 말씀이 누구에게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받아들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바울은 이들을 두고 전자를 구원을 받는 사람으로 후자를 멸망하는 자들로 구분합니다(고전 1:18). 사람이 구원을 받느냐 멸망하느냐는 인간의 어떤 조건이나 자격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전하는 예수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바로 그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놀라운 기적이나 표적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고 하신 말씀이나 메시아라고 하신 말씀이 무색할 정도로 약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무력하게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예수님은 세상의 악의 정체를 폭로시킨 것입니다.

 

 

 

 

세상의 악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조차 자신의 힘의 수단으로 삼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힘을 얻기를 힘쓸 뿐입니다. 이들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가 있다면 다만 자신들의 죄를 속하여 천국으로 가게 해주는 속죄 기능의 의미만 있을 뿐입니다. 즉 속죄는 속죄대로 챙기고 세상 것은 세상 것대로 챙기려는 속셈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아무리 그리스도를 입술로 고백한다고 해도 복음과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자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전 1:24).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이며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에 대해 전적으로 무능력한 인간의 힘이나 자질을 보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 진다’는 이것이야 말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신자의 고백인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이며 기독교가 말하는 것은 무엇 하나도 우리의 열심과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은 없다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본문은 죽으신 예수님을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장례를 치르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은 단순히 예수님의 장례에 대해 말씀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장례한 충성에 대해 말하고자 한 것도 아님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38절을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고 말합니다. 먼저 38절의 말씀에서 요셉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는데, 그는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던 사람입니다. 은휘라는 것은 드러내기를 꺼려하여 숨겼다는 뜻입니다. 요셉이 과연 무엇을 숨겼다는 것입니까?

 

 

 

 

마태복음에서도 요셉에 대해 말하는데 마태는 요셉을 예수의 제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요셉은 예수님을 믿으며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요셉이 드러내기를 꺼려하여 숨긴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요셉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드러내지를 못하고 숨겼을까요? 그것은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믿는 사실이 발각되면 자신의 신변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요한은 요셉에 대해 예수님의 제자라든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던 자라는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긴 사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에 예수님의 장례에는 요셉과 더불어 한 사람이 더 등장합니다. 그는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니고데모에 대해 “일찍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39절)고 말합니다. 예전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올 때 밤중에 몰래 찾은 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그때도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관원으로서 자신이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밤중에 찾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점을 언급하면서 니고데모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체를 장례한 것을 말하면서 요한은 동일하게 요셉과 니고데모의 신앙의 연약한 모습을 언급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중심이 될 것입니다.

 

 

 

 

요한이 요셉이나 니고데모를 예수님에 대한 마음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한 자로 말하는 이유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과 연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이 이루어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셨기에 인간의 능력은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믿음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되어짐을 말씀하는 것이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임을 생각해 보면, 요한이 요셉과 니고데모를 신앙에 연약한 자로 말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져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예수님을 장례합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 흔히 요셉과 니고데모의 예수님에 대한 봉사를 말하기도 하지만, 요한은 이들의 봉사를 소개하려고 본문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당시 상황은 아주 험악한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벼르던 예수를 죽였습니다. 빌라도는 싫지만 억지로 예수님을 사형시켰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어떤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당당하게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니고데모는 백 근의 침향과 몰약을 가지고 옵니다. 백 근이면 약 33키로 쯤 되는 무게인데 이 정도의 양이면 몰래 숨겨올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 역시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모든 유대인들 앞에서 드러내 보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전의 요셉이나 니고데모였다면 이러한 행동이 가능했겠습니까? 결국 지금의 요셉과 니고데모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예수님에 대한 마음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요한은 요셉과 니고데모의 연약한 신앙을 언급함으로써 그들의 뒤바뀐 모습을 말하고 싶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의 실제 활동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십자가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요셉과 니고데모를 통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두려움으로 예수님에 대한 마음을 감추던 이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위해서는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으로 사람으로 바뀐 것이 이들의 노력이나 능력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십자가의 능력의 결과임을 요한은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알고 믿는 신자라면 무엇 하나도 ‘내 힘으로 했다’는 교만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행동과 신앙을 과시하는 외식과 거짓말을 행하지도 않습니다. 진심으로 ‘나는 무능력할 뿐이고, 만약 되어진 것이 있다면 전적으로 십자가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요한은 지금 우리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 세우고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무슨 능력이 있으며 무슨 힘이 있으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행한다면 못할 일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로 복음이 아닙니다. 믿음을 가장한 사탄의 말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시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과 지혜로 주신 것이지 우리의 일을 이루는 힘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믿음을 자신의 일을 이루기 위한 힘으로 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고 그러한 교회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보다는 기적과 표적으로 도우시는 다른 예수를 꿈꾸고 있을 뿐입니다. 신자란 그리스도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부터 쏟아지는 크나큰 은혜를 값없이 받아 누리며 다만 감사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받기 위해서 뭘 하겠다거나 받았으니 보답을 해야 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력은 항상 신자를 주님 가신 길로 이끌어 갑니다. 그리고 그 길에 순종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이 신자를 붙들어서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연약함에서 두려움이 없는 강한 신자로 서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스스로 강해지려고 애쓰려고 하기 보다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십자가의 능력은 여러분을 강하고 담대한 주의 백성으로 세상에 세울 것입니다.

 

 

 

 

 

(129강) 요한복음 20:1-10 믿는 것과 아는 것


<본문>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 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요한복음 20:1-10)

 

 

 

 

<설교>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내용이지만 사실 이 내용은 이미 수많은 세월동안 신앙생활을 해 오시면서 많이 들었던 것이고 또 여러분 스스로도 잘 알고 있고 굳게 믿고 있다고 자부하는 내용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며 복음을 전하는 입장에 있는 저로서는 잘 알고 있는 내용을 설교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잘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대다수의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동안 부활절이나 또는 부활에 대한 설교를 해야 할 때에는 부활을 믿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부활을 의심하지 않고 믿고 있다고 자부하는 여러분에게 ‘부활을 믿자’라는 말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드릴 때면 항상 부활이 무엇이며 부활을 믿는 자로 살아가는 것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부활을 믿는다고 자부하는 여러분 스스로 자기 믿음에 대해 점검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에 대한 확인이나 확신이 아니라 믿음의 내용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부활 역시 내가 알고 있는 부활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점검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용이 잘못되어 있다면 그것은 부활 신앙이라 할 수 없고 그렇다면 결국 그리스도의 부활과 상관없는 부활이 되버리기 때문입니다. 본문 역시 그런 방향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무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돌은 무덤에서 옮겨져 있고 예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놀라 돌아와서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이 사실을 고합니다. 예수의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는 요한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말을 들은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무덤을 달려갑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마리아의 말대로 무덤에 예수님은 계시지 않고 예수님을 쌌던 세마포만 남아 있던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런 내용에서 대개 생각하는 것은 ‘부활의 확실성’입니다. 무덤이 비어 있기에 부활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한 내용이 아닙니다. 비어 있는 무덤 또한 부활의 확실성을 말하기 위한 도구로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이 확실하다는 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지 어떤 물증을 통해서 믿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기독교는 물증을 가지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천지창조도 노아 홍수도 그리고 자연을 초월한 수많은 기적들까지 어떤 물증으로 인해서 확신을 가지고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으로 믿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빈무덤으로 부활을 믿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9절을 보면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고 말합니다. 무덤을 찾아온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이들은 비어 있는 무덤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서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가 들어가 보고 믿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8절의 ‘믿더라’는 단어의 의미가 애매한 부분이 있긴 합니다. 왜냐하면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마리아가 무덤이 비었다고 알려준 것 때문에 무덤으로 온 것이니 결국 마리아의 말을 믿게 되었다는 뜻으로도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9절의 내용이 부활에 대한 것임을 생각해 보면 8절의 ‘믿더라’는 말은 부활과 연관된 것임이 분명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믿었는데 9절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미 부활을 믿게 된 제자에게 부활을 알지 못하더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부활을 믿기는 하나 부활의 의미를 알지 못하더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점이 오늘 본문에서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8,9절이 말하고 있는 것은 부활을 믿으면서도 아직 부활을 알지 못한 상태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오늘 우리 자신의 상태일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하여 부활에 대한 모든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닌 것입니다. 부활을 믿어도 부활을 알지 못한 수준에 있는 것이 우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개 신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니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부활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부활 신앙의 전부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말합니다. 그러면 과연 제자들이 믿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고 성경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두고 한 말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9절을 보면 성경 어딘가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말하지만 사실 9절의 내용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시편 16:10절의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는 구절을 보면 9절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의 내용은 이미 죽은 자를 죽지 않게 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즉 다시 살린다는 뜻입니다.

 

 

 

 

시편 16편은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안에서 자신이 다시 살 것을 믿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이 구절을 유대인들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과연 어떻게 이해를 하겠습니까?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을 믿으면 부활 한다’고 여기지 않겠습니까? 즉 다윗이 부활을 믿었으니 우리도 부활을 믿자는 것이 전부입니다. 다윗의 부활 신앙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거룩한 존재안에서의 신앙이었음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부활 신앙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으면 부활한다는 것이 전부일 뿐입니다. 그러니 비록 그들이 부활을 믿었다고는 하나 부활은 알지 못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대개 예수님의 부활을 장차 부활할 우리들에게 미리 시범을 보여주신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날 봐라 내가 부활한 것처럼 너희도 나중에 부활할 것이다’는 식으로 미리 부활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부활을 믿기는 하나 부활을 알지 못한 유대인의 수준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신앙이 현대인들을 단지 종교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의미하는 것은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는 것입니다. ‘나처럼 하면 너희도 부활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니면 너희는 결코 생명에 들어올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모두 보여주셨습니다. 죽으심을 통해서는 우리가 곧 죽어야 할 존재임을 보여주셨고, 다시 살으심으로는 생명의 능력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을 아는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 나는 부활을 믿습니다’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중심의 삶에 있다면 그것이 곧 부활을 믿지만 부활을 알지 못한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예수님이 부활했으니 나도 부활한다”는 막연한 기대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생명이라는 굳은 믿음안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날 위한 삶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삶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육신에 불이익이 올 수 있는 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이 높여지고 말씀에 복종하는 길이라고 여겨질 때 그 길을 가게 되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을 아는 자로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한 채 다만 믿음만 말하는 사람은 여전히 자기중심입니다. 삶을 주님께 드리지도 못할뿐더러 주님을 위한 삶에서도 거리가 멀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것이 없이, 주님을 위해 포기한 것 없이 다만 자기 이익을 기대하며 주님을 추종하고 있는 수준일 뿐입니다. 부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자기 죽음이 없이 다만 다시 산다는 것이 좋아서 믿는 것이 전부일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자기중심의 사람은 일이 잘되고 못되는 것에 따라 드러나는 모습이 달라집니다. 잘될 때는 좋다 하고 주님의 은혜를 말하지만 잘 되지 않을 때는 예전의 은혜는 모두 잊어버리고 대신 원망과 불평으로 자신을 채울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중심의 신자에게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다스리는 결과이며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자기 일이 안된다고 해서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안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을 찾기를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예수님을 아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시범이 아닙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너희는 나에게 나아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아는 자는 ‘나는 부활한다’가 전부가 아니라 ‘나의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부활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느 수준입니까? 그냥 믿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처럼 부활한다고 하니까 그냥 그렇게 믿으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이러한 신앙에는 힘이 없습니다. 부활은 놀라운 능력이며 힘입니다. 그런데 부활을 믿는 신자로서 힘이 없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으나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만 믿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도 못한 채 믿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알 수 있는데 예수님을 모르니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을 잘 아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한 그들은 믿음도 자신들을 위한 것으로 여겼을 뿐입니다.

 

 

 

 

부활을 믿으십니까? 그전에 먼저 부활을 아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으십시오. ‘부활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을 말한다’라는 것으로 부활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부활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부활신앙은 여러분에게 큰 힘과 능력으로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이 두렵지가 않은 것은 놀라운 힘이 아니겠습니까?

 

 

 

 

 

(130강) 요한복음 20:11-14 마리아의 울음


<본문>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요한복음 20:11-14)

 

 

 

 

<설교>

 

안식 후 첫날에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옵니다. 그리고 무덤 입구를 막아 놓은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당시 무덤은 우리처럼 땅을 파서 매장하는 방법이 아니라 굴에 시신을 안치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굴의 입구를 돌로 막은 것이 무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무덤의 돌이 치워졌다면 그것은 무덤이 열린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무덤이 외부인의 침입을 받았음을 뜻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마리아는 돌아가서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고했던 것입니다. 마리아의 말을 들은 제자들이 무덤에 와서 그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갑니다. 그리고 본문은 제자들이 돌아간 뒤에 있었던 마리의 행동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마리아는 제자들이 돌아가자 울면서 무덤을 들여다봅니다. 마리아가 우는 이유는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성경적으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시신이 없다는 것이 울일은 아닙니다. 보통 사람에게 시신이 사라진 일은 시신을 도둑맞은 경우가 되겠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다르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경우는 부활하셨기 때문에 시신이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신이 없다는 것은 곧 부활하심을 의미하는 것인데 마리아가 울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전혀 생각지를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고 다시 사실 것에 대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더군다나 마리아는 오라비인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이 다시 살리신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울면서 무덤을 들여다 본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무지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으로 인해 운다는 것은 그만큼 예수님에 대한 깊은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리아의 감정과 느낌에 국한된 사랑이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예수 자체를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인가를 제대로 알고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나와지는 결과입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인가를 알았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죽은 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신이 없는 것으로 울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근거하지 않은 사랑, 즉 예수에 대한 감정이며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신자들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는 관심이 멀어져 있으면서도 예수를 사랑한다고 떠드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자신의 느낌일 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남기신 진리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기 생각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같은 착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많은 현대인들이 이런 신앙, 이런 사랑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는 상관없이 내가 예수님을 생각해 줌으로써 자신은 예수를 믿는 자로 생각하는 정도를 두고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점수를 매기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 가지 현실에서 마리아처럼 울음을 터뜨리고 때로는 낙심하고 슬퍼하고 염려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과 신자는 피로써 맺어진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가 나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바르게 이해할 때 주님이 하신 모든 일이 감사함으로 남게 되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떠나서 단지 주님을 생각해 주는 것으로 사랑한다 믿는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참으로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신자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당시 무덤 안의 광경입니다. 마리아가 무덤을 들여다봤을 때 무덤에는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뉘였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마리아에게 왜 우는가 물어봅니다. 이것은 우는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울 필요가 없는데 울고 있는 마리아를 책망하고 깨닫게 하기 위한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울 필요가 없는 이유는 예수님이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다시 생존해 계시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심으로써 사망에 처한 우리들에게 엄청난 선물을 안겨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천사가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아 있는 모습은 속죄소를 생각하게 합니다. 속죄소란 법궤를 덮은 뚜껑을 의미합니다. 시은좌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제사드릴 떼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와서 법궤의 뚜껑인 속죄소에 피를 뿌림으로써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속죄소의 뚜껑 양 끝에는 두 그룹, 즉 천사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덤에 천사 둘이 예수님의 시신이 있던 곳의 양 끝에 앉아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무덤의 광경은 구약의 속죄소의 모습을 그대로 실현하여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무덤의 광경은 죄인으로서 죽어야 할 자들이 어린양이 대신 죽으심으로써 죄를 용서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으심도 부활도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자신과 어떤 연관있는 것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만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부활은 생각지도 원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활이 없는 예수라도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리아의 수준에서 예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그것은 내 알바 아니고 나는 다만 예수님이 내 일을 잘 도와서 잘되게 해주면 된다는 식의 신앙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일에서 예수님이 없다는 것 때문에 웁니다. 자기 인생이 뜻대로 안된다는 것 때문에 슬퍼하고 낙심하는 모습을 보일 뿐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시신이 있다는 것은 죽음의 세계를 뜻하는 것이고 시신이 없는 것은 죽음의 세계를 벗어난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세계는 죽음이 없는 생명의 나라인 것입니다. 죽음조차도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어 가지를 못하는 생명의 나라입니다. 신자가 바로 이 나라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명의 나라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살아 역사하시고 간섭하시고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는 염려와 근심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이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떤 일도 우리를 염려로 끌어가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죽음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바로 이 나라의 백성인 것입니다.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개입하시고 간섭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주님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든든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에는 울음이 없고 절망이 없습니다. 다만 기쁨이 존재합니다.

 

 

 

 

 

(131강) 요한복음 20:14-16 예수님의 물음


<본문>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요한복음 20:14-16)

 

 

 

 

<설교>

 

신앙의 문제이든 예수님을 사랑하는 문제이든 이 모든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앎과 이해로 나타나고 증명되는 것이지 내 쪽에서 예수님에 대해 얼마나 생각해주고 내 정성과 내 마음을 보여주느냐에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현대 교인들은 이 부분에 대한 착각과 잘못됨에 깊이 빠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현대 교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정성과 신앙을 내 쪽에서 보여줘야 하고, 그것은 나의 실천과 행함에 의해서 증거 되어 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곧 예수님과의 관계는 단절된 채 자기 신앙에 자기 스스로 취해 살아가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린 이러한 모습을 지난 시간 마리아의 울음을 통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온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 때문에 울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깊은 마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인식될 수 있습니다. 평소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했으니까 시신이 없어진 것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전혀 없거나 관심도 없었다면 예수님의 무덤에 와보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시신이 없어진 것 때문에 울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시신이 없는 것으로 애타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마리아의 모습을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정성으로 보기 때문에 고난 주간에 소위 정사일이라고 하는 금요일에 하루 금식을 하는 것이나, 예수님의 죽으심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들을 신앙이나 사랑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보다 눈물을 흘리는 것이 예수님에 대한 더욱 깊은 사랑인 것으로 오인하고, 금식을 하지 않는 것보다 금식 하는 것이 더 높은 신앙인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곧 신앙과 사랑에 대한 큰 자기 착각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현대 교회는 ‘예수님을 신앙하자’는 말을 하기 전에 ‘신앙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전파해야 할 심각한 상태에 빠져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말한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신앙으로 인정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비록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으로 우는 모습이 예수님에 대한 깊은 신앙이나 사랑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완전 무지에서 보여지는 비신앙일 뿐입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하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마리아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그렇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시신이 없다는 것은 오히려 기쁨이고 희망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다는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주어질 생명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무지한 상태에 있기 때문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아무리 예수님에 대한 깊은 정을 보인다고 해도 그것이 영생과는 상관이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러한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어찌하여 우느냐?”라는 물음은 천사들도 물었던 것이지만 이 물음이 마리아가 우는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본 말은 분명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물음은 마리아가 울 필요가 전혀 없는데 울고 있는 것에 대해 다소 책망이 섞인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무지하여 울고 있는 마리아를 찾아오셔서 ‘어찌하여 우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마리아에게나 오늘 마리아의 신앙 수준에서 맴돌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물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마리아를 예수님의 시신을 찾아다니는 그 상태로 그냥 두었다면 나중에라도 시체가 없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겠습니까? 설령 그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부활이 자신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즉 구원과 상관이 없는 자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마리아를 찾으셨다는 것은 희망이며 힘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리아를 예수님이 붙드시고 책임지심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역시 마리아의 수준에서 울며 살아가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으로 울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각자의 삶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무지함으로 인해 우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우리들입니다. 사실 신자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안다면 울어야 할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살아서 일하시고 나를 책임지고 계심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하심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운다는 것은 절망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힘으로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을 때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이란 내 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을 믿으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믿는다면 자신의 상황이 원치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앙에서는 울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이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울음이 멈추지 않는 삶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울면서 예수님을 찾고 도와 달라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이 어떤 일을 겪든 무관심하게 있다가 도와 달라고 외치면 그때서야 도와주는 분이 아닙니다. 또는 도와줄 준비를 하고 계시다가 간청을 하면 비로소 달려와서 도와주는 그런 예수님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요구를 하고 어떤 반응을 하든 상관없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를 하나님 백성답게 만들어 가시기 위해 도우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마치 예수님의 도우심이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여겨버립니다. 그것은 예수님과의 관계로 인해서 주어지는 영생의 측면에서 예수님의 도우심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이나 형편에서 도우심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울고 있는 연약한 마리아를 찾아오셔서 그를 붙들어 하나님 백성답게 만들어 가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역시 찾아오셔서 우리를 붙드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는 도우심을 베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될 것은, 우리의 신앙은 어느 한 순간도 예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지탱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탐욕과 예수님에 대한 무지와 불신앙으로 가득찬 우리의 악한 심령으로 어떻게 믿음이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예수님의 능력이고 도우심입니다. 이것이 신자이기 때문에 어떤 일에서든 염려할 것도 울 일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리아를 찾아오셔서 ‘어찌하여 우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마리아의 울음이 더 이상 울음으로 지속되지 않도록 도우시기 위해서입니다. 울음을 기쁨으로 바꾸시기 위해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도우심입니다. 부활을 알고 있는 우리들 시각에서 마리아를 보면 분명 마리아의 신앙은 엉터리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부활에 대한 얘기를 들었고 오라비인 나사로가 살아가는 것을 목격을 했으면서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무지한 마리아는 분명 신앙이 있는 모습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마리아를 판단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마리아도 예수님이 버리지 않으시고 찾아오셔서 예수님을 아는 백성으로 고쳐 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를 고치심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극히 삼가야 하는 것은 믿음에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형제를 비판하거나 판단치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연약하고 엉터리 같은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붙드시고 인도하실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마리아에게는 사망이 다스리는 세상이 전부였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신이 없는 것으로 우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리아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이 시간 깊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고집 세고 완악한 우리에게도 찾아오심으로써 주님을 알고 주님의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음을 생각함으로써 믿음에 절대로 교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랑할만한 신앙도 없음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43:1절에 보면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에 연약한 모습만 보여주는 우리에게 이 말씀은 든든함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는 말씀 앞에서 우리를 정죄할 근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너는 내 것이라’는 말씀 앞에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체 모두가 함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소유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고치시고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셔서 연약한 믿음을 도우시는 예수님을 생각하시고 여러분의 인생을 소중히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132강) 요한복음 20:16-18 새로운 관계


<본문>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요한복음 20:16-18)

 

 

 

 

<설교>

 

시신을 찾아다니는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처음에는 동산지기인줄로만 알았다가 예수님이 마리아야라고 부르시니까 그때서야 ‘선생님이여’라고 답합니다. ‘선생님이십니까?’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늘은 이 부분을 중점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왜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셨는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답을 생각하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고, 그래서 마리아와는 격이 다르기 때문에 만지지 말라고 하셨을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즉 부활하신 육체는 살아있는 인간의 육체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만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대해서는 이런 생각을 쉽게 가질 수 있고 또 그러한 생각이 극히 타당하게 보입니다. 우리의 육신과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육신이 똑같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그러한 결론을 내리게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다른 성경의 기록으로 인해 차질이 발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28:9절에 보면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즉 마태는 마리아를 포함한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을 붙들고 경배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활의 몸이 인간이 만질 수 없는 것이기에 만지지 말라고 하셨다는 추측은 신빙성이 없는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을 드린 바가 있지만 성경이 이처럼 한 사건을 두고 각기 다르게 말한 것 때문에 우리는 많은 혼란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되 일률적으로 같은 의미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아들로도 오셨고,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로 오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구약의 희년의 성취자로 오신 분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저자들이 각기 자기 시각에서 예수님을 증거함으로 인해서 같은 사건이 다르게 기록되어지게 된 것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 사실적인 역사냐?’라는 면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먼저 17절을 다시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만지지 말라고 하신 이유이지만, 도대체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신 것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질 수 없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답은 그 뒤의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말씀합니다. 내 형제란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형제의 관계로 불려지는 것입니다. 즉 새로운 관계가 되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관계는 예수님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관계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내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라고 표현하는 곳은 본문이 처음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형제로 불려지는 새로운 관계, 예수님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신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진노의 자식일 뿐입니다. 그러한 존재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부를 수 있는 귀한 축복에 머물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그러한 부름을 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감사함이 있습니까? 아마 그러지를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전 본래부터 나의 아버지고 나의 하나님인 것으로만 알고 있지, 우리는 본래 하나님을 부를 수 없는 진노의 자리에 있는 멸망의 자식이었음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새로운 관계와 신분에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소생, 즉 목숨의 연장이 아니라 죽어야 할 자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존재로 만드는 놀라운 부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만지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비록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알아보기는 했지만, 여전히 부활의 의미에 대해서는 무지한 상태입니다. 부활을 모르기에 하늘의 생명에 대해서도 무지한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예수님의 아버지가 마리아의 아버지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이 마리아의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 쪽에서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이라 부른다고 해도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는 들어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생명과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고 해서 무조건 믿음이 아니며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요 17:3절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안다는 것은 마리아의 수준을 말하지 않습니다. 분명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모른 자였습니다. 만약 당시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았다고 한다면 마리아는 부활의 의미도 모르면서 영생을 얻은 자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몰랐기에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붙들고 예수님을 아는 자로 고쳐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도 마리아의 수준에 있으면서 ‘나는 예수님을 안다’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아는 수준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신 예수님의 모든 일의 의미를 아는 것을 뜻합니다. 이 의미를 아는 사람은 필히 ‘내 양심과 내 도덕과 윤리 행함으로는 결코 생명으로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의 아들로 불려질 수 없는데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이 있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 사람은 하늘의 생명에 참여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부활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그 상태에서는 예수님의 부활로 이루어진 하늘의 생명의 관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 그런 상태에서는 부활의 세계에 참여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관계는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고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지 인간쪽에서 손을 내밀고 정성을 보인다고 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있게 된 신자는 오직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공로만 의지할 뿐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생명의 활동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오직 자신을 위해 활동합니다. 자기 세계를 위해서 자신의 유익과 자기 탐욕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의 힘을 구축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신앙도 인간의 유익과 탐욕을 위한 도구로 전락할 뿐입니다. 이것이 현대의 종교 세계이지 않습니까?

 

 

 

 

이러한 세계에서 인간의 가능성을 버리고 주님만 바라본다는 것이야 말로, 세상의 사고방식이 아닌 하늘의 생명의 활동의 증거물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행하시고 이루신 일 때문에 우리에게 믿음이 가능해진 것이고 하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아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이 모인 교회는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과 섬김만을 높이고 노래할 뿐이지 인간이 중심이 안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지 아니하면 필히 인간의 탐욕이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목사는 자기 탐욕으로 교회를 이용할 것입니다. 교인은 또한 그들 나름대로 교회를 자신의 즐거움의 도구로 삼고자 할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비록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하며 여러 가지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것으로 판단될 뿐입니다. 교회는 인간적인 친분과 정으로 모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보다 차원 높은 주님의 희생과 섬김으로 모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용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친분과 정을 뛰어 넘어 만나는 교회의 관계인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생명에 결코 나아갈 수 없는 우리가 생명에 참여하게 된 것이 무엇 때문인가를 묵상하십시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에게 내 마음의 전부를 내어 드릴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되어졌으면 좋겠습니다.

 

 

 

 

 

(133강) 요한복음 20:19-21 평강


<본문>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한복음 20:19 -21)

 

 

 

 

<설교>

 

지난 시간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신 의미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만지지 말라고 하신 것은, 부활하심으로써 보통 사람이 만질 수 없는 신비스런 몸이 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부활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마리아의 수준으로는 예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참여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8절에 보면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주를 본 사실과, 또 주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에 대해 전합니다. 따라서 당시 제자들은 주께서 다시 사셨다는 것에 대해 마리아를 통해 전해 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19절을 보면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라고 말합니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이 체포당할 때 이미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처형된 상황에서 예수를 추종하는 자신들이 언제 유대인들에게 발각되어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비밀스런 곳에 은신하여 문을 굳게 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다시 사신 예수님에 대한 얘기를 전한 것은 저녁때가 되기 전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른 아침에 무덤에 갔었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얘기를 전한 것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얘기를 들은 상태에서 유대인들을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에 대해 믿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볼 때 본문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얘기를 듣고도 여전히 유대인을 두려워하고 있던 것은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말이 그들에게 전혀 어떤 힘을 주지 못하였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서도 제자들과 같은 모습을 얼마든지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설교를 듣고 공부를 하면서 예수님에 대해서나 천국에 대해 수없이 많은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힘이 되고 있으며 위로를 얻고 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다시 사신 예수님에 대한 말을 듣고도 여전히 유대인들을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과 동일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신 본문의 내용은 연약한 가운데 있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여러분의 신앙에 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금까지 제자다운 모습을 드러내지를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붙들릴 때는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예수님께로부터 도망친 그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 앞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한마디로 잘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제자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처럼 우리 역시 신자다운 모습을 보이며 살아가지 못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면서 주님의 일에 사용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며 사랑입니다. 이점을 염두에 두며 살아가신다면 결코 교만이라는 악한 길에 머물지는 않을 것입니다.

 

 

 

 

19절 뒷부분에 보면 유대인을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제자들은 두려움으로 인해 평강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생각할 것은, 비록 예수님이 직접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자들에게 자동적으로 평강이 주입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때문에 갑자기 두려움이 사라지고, 용기가 생겨서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모임을 갖는 그런 결과로 나타나지 않았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말씀하지만 평강이라는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두려움이 있을 때 두려워하던 것들이 전혀 두려워 할 대상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상태를 가리켜서 평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많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의 대상의 모든 것은 하나같이 자신의 안위에 영향을 주는 힘에 대한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에서 염려와 걱정도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세상의 것이 나를 살리기도 하고 죽게도 한다고 생각하는 결과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0:28절에 보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세상의 힘에 대한 두려움은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시는 분을 생각지 않는 결과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평강은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사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에 있음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강이 있을찌어다’라는 말씀은 인사치레의 말도 아니고, 평강이라는 마음을 주시겠다는 뜻도 아니라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대상이 결코 두려워 할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시겠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절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는 구절을 보면 마치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으로 인해 평강을 얻은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은 평강의 상태의 기쁨을 의미하기보다는 죽은 줄 알았던 스승이 살았기 때문에 이제 자기들의 문제는 예수님이 모두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로 인한 기쁨인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예수님을 자기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기쁨 역시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으로 인한 것이지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제자들은 다시 사신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의 다시 사심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고, 자신들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에 대한 관심은 없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이 관심거리가 아니라,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구세주가 다시 생겼다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뿐입니다. 만약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한 것이 평강이었다면 21절에서 다시 평강을 말씀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를 보고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다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21절)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면 그들의 기쁨은 평강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1절 뒤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것 같이 제자들을 보낸다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 마음과 동일하게 제자들을 보내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편안하고 안락한 환경이나 삶에 있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높임 받는 자리로 보내시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천대와 멸시와 고난의 자리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만 바라보시고 아버지께 순종하심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상태, 어떤 환경과 형편에도 평강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께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바로 이러한 자로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에게 보냄 받은 제자답게 살아가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고 평강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예수님의 제자요, 예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두려움과 염려와 걱정은 내가 살고자 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남들처럼 살아봐야 한다는 욕심으로 인해서 자신이 낮아지게 되고 실패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실패하면 인생이 끝이고 희망이 사라진다는 것 때문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고, 결국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세상의 권력자와 힘에 대해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예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제자의 모습과 상이함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신 것처럼 보냄 받은 제자다움은 아버지의 뜻을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신자가 아버지의 뜻 아래 존재한다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신자의 인생은 분명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책임지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쪽으로 분명히 책임지시고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볼 뿐 세상에 대해 두려워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하고자 하시는 대로 되어지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으로 평강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세상의 그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간섭을 벗어나서 되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죽는다면 죽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실패한다면 실패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죽음과 실패를 원하고 기다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세상의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뛰어 넘어서 신자를 해가 되는 쪽으로 끌고 갈 수 없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 실패한다면 그것은 세상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실패로 밀어 넣어서 얻고자 하는 것이 있음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 지혜로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보고 살아간다면 그것이야 말로 평강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다시 사심은 사망에 대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즉 세상은 결코 예수님의 백성을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없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죄로 인하여 몸의 사망은 필히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육신이 죽는 것은 세상의 권력과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인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권세 아래서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승리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에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돈이 없는 것, 실패하게 되는 것, 어느 것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것이야 말로 평강입니다. 이 평강은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살아갈 때 주어집니다. 여러분께 평강이 있기를 원합니다.

 

 

 

 

 

(134강) 요한복음 20:21-23 죄사함


<본문>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한복음 20:21-23)

 

 

 

 

<설교>

 

22절을 보면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이 나오고 23절에서는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아주 엄청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문맥 그대로 이해를 하면 성령 받은 신자에게는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할 권세가 주어졌다는 뜻인데 엄청난 말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우리나라 헌법에 보면 대통령에게 사면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죄있는 자를 사면해줄 권한이 대통령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통령의 사면권은 죄를 지은 자가 치러야 형량을 사해준다는 것이지 그가 죄 없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죄사함은 죄값으로 치러야할 형량을 없이 해준다는 뜻이 아니라 죄없는 자가 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으면 그러한 권세가 있게 된다니 그러면 우리도 성령을 받으면 누구의 죄라도 사해줄 수 있다는 뜻입니까? 사실 이러한 본문으로 인해서 많은 사이비와 이단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사이비와 이단이 말하는 것은 하나같이 교주에게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나와야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죄사함의 권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성령을 받았다 해도 여전히 죄인일 뿐입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죄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만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 대해 눈이 열렸음을 의미하는 것이 성령 받음이며 거듭남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죄와의 갈등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향한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이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령을 받았다 할지라도 죄있는 것이 인간이라면, 그런 인간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겠습니까? 죄인이 죄인의 죄를 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죄사함의 권세는 죄없으신 분의 고유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본문과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22절을 다시 보면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단순히 저희를 향하사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숨을 내쉬며’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뭔가 예수님께 있는 것을 불어 넣으시는 의미로 여겨지지 않습니까? 즉 성령 받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신비한 능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는 것을 받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 있는 것을 죄인된 우리가 공유하기 위해 성령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의 내용을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령은 살아있는 영이라는 뜻으로서, 육신이 뭔가 신비한 체질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는 관계에 있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영적인 존재라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는 관계에 있음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며 항상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을 따라 살기를 힘쓰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존재입니다.

 

 

 

 

반면에 육적인 존재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도 뜻과 기뻐하심도 알 수가 없습니다. 아니 아예 그런 쪽으로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이들은 관심을 자기에게만 둘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과 단절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생명에서 끊어지고 육적인 존재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사 사람이 생령이 된 것과 같은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성령을 받은 자로 세상에 보내시겠다는 예수님의 뜻을 알게 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성도를 성령받게 하셔서 세상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성령 받은 신자의 존재 이유를 명확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23절을 통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을 주셔서 세상에 보내신 뜻이 죄사함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즉 죄를 사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성령 받은 자로 세상에 존재하는 우리의 본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신자에게 죄사함의 권세가 주어졌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은 오직 성령 받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한 것입니다. 죄사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을 때에만 가능한데 피를 믿음은 성령을 받음으로써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성령 받은 신자는 죄사함 받은 자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죄사함 받은 신자는 자신의 죄사함에 대해 증거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죄사함을 증거하라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 죄사함은 결코 한 개인의 구원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죄를 사하신 예수님의 일은 나의 구원으로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의 일이 세상에 계속 전파되는 것으로 지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신자가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이점을 생각하면 신자는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자기 구원의 보장과 확신으로만 이용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 받음이 나의 구원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죄사함을 선포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주어지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무엇에 게을리 했는가를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아무나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리스도를 알게 된 신자들만이 그리스도를 전하고 증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그리스도를 전할 때 받아들이는 사람은 죄사함을 얻게 될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죄가운데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성령 받은 자에게는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고 세상에 보냄 받았습니다. 누구든 신자가 증거하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에 대해 이러한 권세를 가진 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너무 나약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이 보는 것을 똑같이 바라보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신자의 신자됨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교회나 다니고 예배드리는 것으로 신자 됨이 증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신자만의 권세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과 기쁨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머물 자가 아니라 하늘나라에 머물 자라는 것에 대해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신자 된 자로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의 죄사함을 위해 저와 여러분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받든지 받지 않든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부지런히 전도지를 나눠 주라는 뜻이 아니라 신자로서 세상 사람처럼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세상이 정치, 경제, 여러 문제로 인해 불안해 할 때 신자는 그리스도의 죄사함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되어질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주어진 하루하루의 삶에서 다만 그리스도께 충실하면 되는 것입니다.

 

 

 

 

믿음에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하늘을 소망하는 믿음이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께 미친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세상으로부터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이면서 신자에게 주어진 권세를 잊어버리고, 생명의 능력도 없이 교회만 붙들고 살아간다면 참으로 나약한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 때문에 믿음을 말하면서도 불안과 염려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영원한 것 절대적인 것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도 당당하십시오. 신자는 예수를 파는 사람이 아니라 선포하고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성령 받은 신자로서의 책임과 사명을 생각하시고 보냄 받은 자답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일군으로 존재하는 날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35강) 요한복음 20:24-31 도마의 믿음


<본문>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20:24-31)

 

 

 

 

<설교>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에서는 알 수 없고 배울 수 없는 하늘의 세계에 대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세상은 아예 하늘의 세계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서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늘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의 세계는 생명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생명나무를 감추시고 아무도 그곳에 접근할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인간은 생명에 대해서는 무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생명으로 가는 길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설령 인간이 생명에 대해서 말하고 생명을 얻는 길에 대해 말하다고 해도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습득한 경험과 상식에 의한 것이지 하나님이 알려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늘의 세계에 대해 말씀하시는 성경에 충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충실하는 그것이야 말로 생명으로 향하는 바른 길을 갈 수 있는 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우리의 도움이며, 성경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이 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신자로 하여금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주님만이 구원자시며 주님 앞에서 우리의 재능이나 힘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성경입니다. 말씀이 확실한 증거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존재한다는 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체험적인 기적을 원합니다. 그저 믿고 바라보는 것에 대해서는 막연한 것으로 여기고 확실한 체험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체험을 하거나 꿈에서라도 예수님을 보게 되면 자신의 믿음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본문은 어떤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24절을 보면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지를 못했습니다. 25절을 보면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도마는 지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직접 목격하지를 못하고 다른 제자들을 통해서 그 사실을 전해 듣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입장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도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도들이 예수님에 대해 기록한 내용을 전달 받고 있지 않습니까?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받고 있는 것이 같은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제자의 말을 들은 도마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하면 못믿겠다고 합니다. 내가 직접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가 요구하는 것은 직접 손의 못자국을 봐야겠고 내 손가락을 못자국에 넣어봐야겠고 옆구리에 넣어 봐야겠다는 것입니다. 즉 직접 확인을 하고 체험을 해야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도마의 이런 모습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혹시 불신앙이나 믿음이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도마처럼 나 역시 직접 예수님의 못자국에 손을 넣어 보고 만져보고 확인을 한다면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십자가에 죽으심에 대해 믿음이 더 깊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그냥 성경에서 말씀한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보다는 몸소 체험한 것이 더욱 더 살아있는 믿음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때문에 어쩌면 믿음이 없으면서 있는 척 하는 것보다는 내가 봐야 믿겠다고 나서는 도마가 더 솔직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솔직하다고 해서 믿음이 좋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역시 별문제입니다.

 

 

 

 

이처럼 봐야 믿겠다는 도마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시고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의 못자국을 직접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기준으로 해서 도마와 다른 제자를 차별할 수 있습니까? 도마는 예수님의 못자국을 직접보고 만졌지만 다른 제자는 만지지를 못했다고 해서 도마가 더 은혜를 받았다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식의 구분을 많이 합니다. 체험적인 것을 기준으로 해서 은혜를 많이 받았다 적게 받았다는 말을 합니다마는 오히려 정반대의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도마에게 못자국을 만져 보라고 한 것은 도마가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도마에게 오신 것인데 도마가 더 낫다는 말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결국 체험이라는 것이 절대로 자랑거리로 등장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뭔가 체험을 하고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그것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믿지 않을 정도로 완악했기 때문인 것이지 특별히 사랑하거나 더 나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체험을 특별한 은혜를 받은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체험을 한 사람이 간증집회를 다니면서 자신의 체험을 자랑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못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이 있기 때문에 너희와는 다르다는 식으로 자신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부끄럽습니다. 여러분은 저 같은 체험을 하지 않고도 예수님을 믿는데 나는 얼마나 못나고 형편없으면 체험을 줘서 믿게 하시는 것입니까?’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27절에 보면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도마에게 직접 손을 넣어 만져 보게 하시는 이유는 도마를 믿음 없는 자로 그냥 두지 않으시겠다는 주님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특별히 도마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도마는 만져 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고 하니까 믿음 있는 자 되게 하시기 위해 도마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28절을 보면 도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이렇게 믿음을 고백하는 도마에게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절)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보고 믿는 것과 보지 못하고 믿는 것에 차이를 두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즉 보고 믿는 것보다는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 더 수준이 높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또 다시 ‘체험을 했는가 하지 않고 믿는가’로 믿음의 높고 낮음을 구별하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체험을 하는 것이 나은가 안하는 것이 나은가를 구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믿음은 우리의 체험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체험을 하지 못하고도 믿는 자들이 나타날 것인데 그들이 바로 복받은 자들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의 결과를 자신의 삶에서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중에 가장 많이 원하는 것이 기도 응답이라는 체험일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이 현실에서 차곡차곡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실 기도 응답으로 신앙을 싸우는 모습들을 교회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지 않습니다. 같이 기도를 했는데 한 사람은 응답이 되고 한 사람은 안됐을 때 이미 상대방보다 신앙이 낮은 것으로 치부되 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 응답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안된다고 해서 잘못된 것도 아니고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마저도 몸의 가시를 인해 세 번 기도했으나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체험을 했든 기도 응답이 있든 없든 그 모든 것은 주님을 바라보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30-31절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기적만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몇 개만 기록하신 것은 기적의 의미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게 하시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임을 믿으신다면 별도의 기적이 필요하겠습니까? 필요치 않는 것입니다. 이미 믿음이 있는데 기적이 왜 필요합니까? 우리는 아무 체험이 없이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성령이 도우셨기 때문이고 하늘의 믿음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우리가 보지 못하고 믿는 자에 해당되는 것이고 결국 믿음이 있는 그것이 복을 받은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으로 가능해진 것입니다. 봐야 믿겠다는 것은 믿음을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도마의 믿음이었습니다. 나에게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어야 믿겠다는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세상에 하나님은 하늘의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믿음을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믿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있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으로 모든 것을 다 누리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복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마음이 흔들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어떤 체험을 얘기한다 해도 거기에 마음이 흔들리면 안됩니다. 그것을 부러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리스도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체험이 필요 없는 자리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복있는 신자입니다. 이 복을 상실한 자로 산다면 그는 참으로 불신자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체험이나 엿보는 자로 말입니다.

 

 

 

 

 

(136강) 요한복음 21:1-14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


<본문>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요한복음 21:1-14)

 

 

 

 

<설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바르게 아는 것은 신앙생활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는 하나님이 신자에게 요구하시는 것에 대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 종교성으로 나름대로 판단해 버릴 뿐,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통해서 그 답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습니다. 이미 답을 알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답을 알기 위해 성경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신자가 성경을 떠나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음을 기억하시고 본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바랍니다.

1절을 보면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14절을 보면 본문의 나타나심이 세 번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왜 세 번씩이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야 하는 것입니까? 혹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확인시키기 위한 차원이라면 한번으로 족할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이미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한 제자들에게 거듭 나타나시는 것은 부활에 대한 확인을 떠나 뭔가 다른 의도가 있으심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두는 내용은 아마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더니 153마리나 되는 고기를 잡았다는 내용일 것입니다. 이것을 축복으로 비유하면서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은 넘치는 복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즉 말씀에 대한 순종을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대해서는 결국 교회 일에 대한 열심이 등장할 수밖에 없고, 목사의 가르침에 순종할 것을 가르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고기 잡는 내용은 복 받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본문처럼 뭔가 주어지고 받는 것을 무조건 복과 연관 지어 생각해 버리는 이것은 말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의도나 뜻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온통 자신의 복에 마음을 기울이는 불신앙의 모습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3절을 보면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에서 먼저 생각할 것은 베드로는 무엇 때문에 옛날 직업인 어부로 되돌아갔느냐? 는 것입니다. 어부는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가졌던 직업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제자로서 다시 옛날 직업으로 되돌아갔다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신앙이 타락된 모습으로 보여 질 수 있습니다. 과연 베드로가 어부로 되돌아간 것이 신앙의 타락 때문일까요?

 

 

 

 

그러나 이것을 신앙의 타락으로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나서 자신의 행위를 깨닫고 심히 통곡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이나 만났습니다. 이런 사람이 신앙이 타락해서 다시 옛날 직업으로 되돌아갔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15절부터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신앙이 타락한 자에게 이런 질문을 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어부로 되돌아간 것을 신앙의 타락으로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가 어부로 되돌아간 것을 밝히기란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언급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뒤의 내용을 살피면서 생각해 본다면 어느 정도 추측도 할 수 있습니다. 20:21-23절을 보면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신다는 말씀을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죄사함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제자들은 세상에 보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죄사함을 위해서입니다. 죄사함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되어짐을 생각해 보면 결국 제자들에게 맡기신 일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께 그리스도를 전하라고 한다면 무엇을 생각하시겠습니까? 어쩌면 내가 누군가에게 가서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고 설득함으로써 교회 다니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대다수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으로 이런 차원에서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도에 열심을 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결국 전도, 그리스도를 전하고 믿게 되고 죄사함을 받는 모든 일에 있어서 중심은 인간의 열심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열심을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열심이 곧 신앙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열심에 있어서 한번 실패를 해 본 사람이라면 다를 것입니다. 베드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철저하게 자기 열심의 실패를 맛본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자기는 주를 따르겠다고 장담을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자기 열심도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예수님의 일에 있어서 스스로 열심을 내서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열심으로 되는 일이 아님을 깨달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일에 대해 인간의 열심이 쓸모가 없다고 할 때 나타나는 현상은 혼란입니다. ‘그럼 뭘 하느냐?’는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자기 열심에 실패한 사람으로서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자 뭘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인지 혼란을 가진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고 말합니다. 어부는 베드로의 직업이었습니다. 즉 고기 잡는 일에는 기술이 있고 노하우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기술 등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밤새도록 한 마리도 못잡은 것입니다. 결국 이제는 고기를 잡는 일에 조차 자기 열심과 재주가 쓸모가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먹고 사는 문제에서까지 자기 재주가 힘을 발휘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문제에서 자기 열심에 실패한 사람이, 이제는 생계 문제에서까지 자기 열심에 실패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더니 153마리의 고기가 잡힌 것입니다. 결국 생계까지 예수님이 책임지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즉 먹고 사는 문제에서까지 인간의 열심이 해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재주나 기술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먹고 살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열심을 철저히 포기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것이 곧 신자의 신자다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를 세상에 보내서 그리스도를 전하게 하시지만 믿게 하는 것은 제자들의 능력이나 열심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건지시고 믿게 하심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냄 받은 자는 ‘아무리 전해도 안믿는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보냄 받은 자는 전하는 역할을 맡을 뿐이지 믿게 하는 책임까지 부여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그러한 내용이 없지만 예수님이 어부인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실 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대개는 예수님이 능력을 줘서 많은 사람을 믿게 하는 자로 부르신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본문을 배경으로 생각한다면 베드로에게는 믿게 하고 건지는 능력이 없습니다. 어부는 어부인데 자신의 재주로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어부입니다. 어부로서 베드로가 할 일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지는 것뿐입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힘으로 사람을 낚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 교회는 전도 자체를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도는 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전도인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힘을 믿는 사람입니다. 내 재주로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했다 해도 그것은 주님이 하게 하신 것임을 부인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신자는 다만 보냄 받은 그 자리에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의 사명입니다. 사랑하라 했으면 사랑하는 자로 살면 되고 용서하라 했으면 용서하는 자로 살아가면 됩니다.

 

 

 

 

신자는 예수 믿기 전에는 내 힘으로 살았고, 내 생계를 위해 내 재주를 발휘했지만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내 힘으로 사는 것도 아니고 내 생계를 위해 사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도구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신자의 모습을 통째로 잃어버리는 것 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의 신자 됨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에 있습니다. 내 힘을 의지하지 않고 내 열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 바라보면서 주님만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신자다운 모습니다. 이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기 바랍니다.

 

 

 

 

 

(137강) 요한복음 21:15-17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본문>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한복음 21:15-17)

 

 

 

 

<설교>

 

교회에서 신자에게 강조하는 것의 중심에는 열심이 있습니다. 마치 열심이 없는 것은 신앙이 없기 때문인 것처럼 열심을 신앙과 연관하여 ‘열심을 내라’라는 말을 부단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사람들이 듣기에도 매우 타당하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열심이 없는 자신의 신앙을 탓하면서 열심을 내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개인 신앙에서 열심을 내는 것이 신앙과 연결되는 것처럼 교회 역시 교인들이 열심을 내면 활발하게 보여지고 그것을 ‘살아있는 교회’로 연결하여 말하기도 합니다. 교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이 교회가 살아있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신앙이나 교회를 상식선에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말로 들려지겠지만, 사실은 성경에도 등장하지 않는 말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란 성경에 있는 말만을 듣고 믿어야 합니다. 목사 역시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말씀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결국 미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그대로 끝나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신앙의 좋고 나쁨은 교회에서의 열심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열심은 아주 이기적입니다. 내가 편하고 기분이 좋을 때는 열심을 내는 반면에 편치 않고 기분이 나쁠 때는 열심을 낼 마음조차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결국 열심이 믿음에서 나와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기분 상태와 환경에 의해 결정되어짐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열심을 어떻게 신앙과 연관하여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도 자기 열심으로 예수님을 쫓고자 했으나 결국 실패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바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의 열심은 제가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결국 옛날의 직업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베드로는 열심을 내었으나 무엇 하나 되어진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또한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진다’는 말씀까지 들었습니다. 이것은 죄사함을 위해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신다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만약 평소의 베드로였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다. 이제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열심히 예수님의 일을 하자’라고 나서는 것이 베드로답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다시 옛날 어부로 되돌아 가버린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베드로는 열심에 있어서 실패한 사람입니다. 장담을 했지만 자신의 장담대로 예수님을 따르지를 못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가 또 다시 자기 열심으로 무엇인가 해보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열심을 빼버리면 신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열심을 주장하는 사람은 열심을 가지고 할 것이 많습니다. 기도하는 일, 전도하는 일, 봉사하는 일, 모든 일에 열심이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바쁘게 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에게 인간의 열심으로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을 때 과연 어떤 대안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막막할 뿐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느냐?’라는 고민만 남을 뿐입니다. 베드로 역시 이러한 상태에서 다시 옛날의 직업으로 되돌아갔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베드로에게 고기를 잡게 하십니다. 베드로의 열심이나 실력이 아니라 순전히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했더니 그냥 잡히는 경험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앞으로의 삶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면 되는 것임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며 신자로서 신자답게 사는 것입니까? 이것을 본문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세 번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왜 이러한 물음을 하실까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하신 것은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시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베드로에게 ‘내가 너에게 요구하는 것은 사랑이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인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원하시는 것은 베드로의 열심이나 실력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주신 그 사랑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것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여러분께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의 열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기분 따라 주위 환경과 형편에 따라서 수시로 변하는 변덕 많고 믿을 수 없는 우리의 열심을 과연 예수님이 필요로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일에 있어서 우리의 열심이 진심으로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죽는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열심을 포기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항상 내 유익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우리들인데, 그래서 우리 역시 베드로와 다를 바가 없는데, 그런 우리가 여전히 열심을 주장한다면 아직까지 자기 실패를 맛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랑을 원하십니다. 왜 사랑을 원하십니까? 그 이유가 ‘내 어린양을 먹이라’는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양을 치라는 것이나 양을 먹이라는 것은 다같은 의미입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에게 양을 치는 일이 맡겨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양은 베드로의 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입니다. 그래서 ‘내 양’이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에게 양을 맡긴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예수님의 양을 치는 자로 세운 것입니다. 많은 목사들이 이 점에 대해 오해를 합니다. 즉 하나님이 목사에게 양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양을 치는 자로 세우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양으로 하여금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사랑하는 양으로 만드시겠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할 일은 날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예수님의 양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음성을 알게 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양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이고 저와 여러분을 신자로 부르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일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만 바라보는 신자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것을 사랑할 때 그것을 잘라 버리시기 위해서 사랑하는 세상 것을 내게서 끊어버리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을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만드셔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양들을 목자, 주님만 바라보는 양으로 만들어 가시기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할 일은 내가 머무는 그 자리에서 주님만을 사랑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에게 열심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열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의 열심을 믿지 않는 일에 열심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다움이고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명이고 책임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신자의 큰 병은 자신의 힘과 열심을 앞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많은 일을 하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하는 이것이 큰 병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기도 많이 하는가 전도 많이 하는가?’를 물으신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물음을 하셨음을 다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물로 기도나 전도 등등의 행위 자체를 없애라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에서 나와지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들어서 복을 얻으려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알기에 그 사랑에 감사하고 더욱 주님만 사랑하는 자로 살고 싶어서 기도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신자의 신자다움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잃지 마십시오

 

 

 

 

 

(138강) 요한복음 21:18-25 너는 나를 따르라


<본문>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한복음 21:18-25)

 

 

 

 

<설교>

 

3년의 기간동안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오늘 드디어 요한복음을 마치면서 과연 요한복음에서 내가 배우고 알게 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씀에 대해 기억하십니까? 이 말씀을 기억한다면 적어도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금하는 것들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는 말씀은 기억하십니까? 그렇다면 영생을 단지 영원히 사는 것으로만 이해하면 막연한 마음을 가졌던 것이 어느 정도는 해소되어질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우리는 그 사건을 통해서 신앙이 우리의 의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대해서만큼 교만하지 말아야 함도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여러분이 장차 성경을 읽거나 들었을 때 여러분에게 생각나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말씀을 통해서 바르게 분별할 수 있는 신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8-19절에 보면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그러나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제자의 모습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가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고기 잡는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의 경험과 예수님의 말씀의 결과를 체험하기 위함입니다. 베드로는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베드로는 자신의 재주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으로 일이 이루어짐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뛰어난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3년씩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보고 들으면서 배운 사람들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엉터리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는 한 사람의 제자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따로 제자들을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떠나버린 제자들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 외에는 달리 제자될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신다고 해도 동일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기 때문에 다른 제자를 선출할 이유가 없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제자들을 찾아오심으로서 드러난 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셨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과의 관계에 계속 거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영생은 제자들의 믿음이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찾아오신 사랑이 제자들을 영생에 거하게 한 것입니다. 앞으로 제자들이 증거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도 이런 의도에서입니다. 예수님이 물으신 것은 ‘내가 너를 사랑한 그 사랑을 아느냐?’라는 의미가 포함된 것입니다. 제자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신 사랑으로 인해서 영생이 주어지게 되었음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아는 제자라면 앞으로 그가 증거할 것은 주님의 사랑으로 맺어진 영생에 있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그 어떤 행위로도 영생을 얻을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증거해야 할 사명이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주님의 사랑을 알고 주님을 사랑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고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를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증인은 주님이 가게 하신 길을 가는 것이지 스스로 원하는 길을 가는 존재가 아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달라는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인으로 부름 받은 자의 운명입니다. 이 길이 베드로에게는 죽는 길로 예비 되어 있었습니다.

 

 

 

 

신자에게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 붙들린 것이 여러분이라면 이제 여러분에게 내가 원하는 길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이 원하시는 길로 이끌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길이 어떤 길이든 여러분이 할 일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다같이 출세하고 성공하는 길을 가고자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증인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 그 길이 설사 죽는 길이라 할지라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증인으로서의 모습입니다. 주님이 증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 몸을 내어 놓으신 예수님의 사랑일 뿐, 세상에 이름을 남길만한 업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업적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부어진 사랑이 드러나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즉 요한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21절)라고 묻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묻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같이 예수님이 따르는데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될지 궁금한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22절)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요한을 살려둔다 하실찌라도 그것이 베드로와 무슨 상관이냐는 것입니다. 결국 증인으로 사는 것은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증거하는 것에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내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시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의 인생, 남의 미래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인생길에서 주님의 증인으로 살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향한 우리의 탐욕을 버리고 우리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과 소망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시기 바랍니다. 무엇 때문에 볼 것 없는 우리를 부르시고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사랑하셨는지를 깊이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우리가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귀한 사랑을 팽개치지 말고 이제 다른 택한 백성을 위해서 나에게 주어진 사랑을 증거 하는 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를 포기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시고 그 사명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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