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3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목차>
10:7-9 양의 문
10:10-21 선한 목자
10:22-24 예수를 밀어내는 것
10:25-28 주안에 있는 영생
10:25-42 예수님의 죄
11:1-6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11:7-10 빛에 다니라
11:11-16 믿음을 위하여
11:17-30 부활과 생명
11:31-37 예수님의 눈물
11:38-44 예수님의 감사
11:45-53 기적과 진리
12:1-8 마리아의 향유
12:9-19 나귀타신 예수
12:20-24 한 알의 밀이 죽으므로
12:25-26 생명과 예수님
12:27-30 아들을 영화롭게
12:31-36 죽으시는 메시아
12:37-43 믿는다는 것
12:44-45 다른 하나님은 없다
12:46-50 선지자 예수
13:1-11 끝까지 사랑하심
13:4-11 발을 씻음
13:12-20 서로 발을 씻기라
13:21-30 가룟 유다
13:31-32 인자의 영광
13:33-35 새계명
13:36-38 주님의 사랑
(57강) 10:7-9 양의 문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사실로 인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그 의미는 피조물된 인간이 전적으로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것에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아무리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외친다고 해도 우리의 삶이 그 말씀에 따르는 것으로 보여지지 않는다면 우리 스스로 우리가 한 말을 무너뜨린 결과가 되는 것이며, 성경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긴 하되 우리가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는 것임을 드러내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리 '예 예'하고 '맞습니다. 맞습니다'라고 한다 할지라도 예가 예로 드러나는 것은 말씀대로 순종되어질 때인 것입니다. '예'하면서 그 말씀에 순종치 않는다면 스스로 자신의 '예'라는 답을 부정하는 것 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1장에 있는 비유인데 한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습니다. 하루는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니까 '예'라고 대답은 했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에게 일하라고 하니까 처음에는 '가기 싫다'고 하더니 나중에 뉘우치고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였느냐고 묻습니다. 아버지가 원한 것은 '예'라는 답이 아니라 포도원에 가서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점에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부지런히 '예'라고 답하면서도 정작 말씀에서는 멀어진 채 살아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종말이 있다'고 하셨을 때 '예'라고 했다면 종말이 있음을 믿는 자답게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천국을 지향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집착하는 자신을 스스로 책망하면서 회개하는 것으로서 종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곧 죄의 모습임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입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몸에 있으며 행동에 있고 삶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라고 대답했으면 '예'에 대한 책임이 주어졌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고 참으로 조심스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기 바랍니다.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목자가 와서 우리에 있는 자기 양을 불러내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 정작 그 말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도무지 알아듣지를 못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비유에 대해서 다시 설명하시는 내용중 일부가 본문입니다.
먼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알아듣지를 못했다고 하는데, 사실 우리가 볼 때 예수님의 말씀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내용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수준 높은 지식적인 단어를 구사하신 것도 아니고 평소 유대인들의 사회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목축을 비유로 들어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분명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알아듣지를 못한 것입니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어려워 알아듣지를 못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들이 알아듣지 못한 것은 내용 자체가 아니라 그 내용이 담고 있는 의미를 알아듣지 못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는 우리에 있는 양이라고 해서 다 목자의 양이 아님을 말합니다. 그래서 목자가 와서 우리에 있는 자기 양을 부르고,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 목자를 따른다는 것으로 말씀한 것입니다. 제가 볼 때 바리새인들이 바로 이것을 알아듣지 못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구원에 대해서 유대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만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따라서 이스라엘만이 구원받을 자라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난 것이고 구원받은 자로 태어난 것임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증거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율법대로 할례를 행하고 있고, 또 자기들만이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따라서 할례도 하지 않고 성전도 없으며 제사도 드리지 않고 율법조차 지키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아닌 우리 입장에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겠지만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데 또 다시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진다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7절에서 "나는 양의 문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을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우리에 넘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라고 하신 말씀과 연결하여 생각해 본다면 결국 예수님으로 들어가서 양들을 부르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것이 곧 절도요 강도라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절도요 강도냐 아니면 목자냐라는 문제는 우리를 넘어서 양들에게 가느냐 아니면 문이신 예수님으로 들어가서 양들에게 가느냐로 구분되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문이신 예수님으로 들어가지 않고 우리를 넘어가는 것은, 유대주의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율법을 가졌고 할례를 행하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열심히 봉사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복주시고 천국으로 인도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곧 그와 같습니다. 이것을 절도요 강도라고 표현을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되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다는 것 자체도 우리 스스로 예수님에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우리들에게 찾아오심으로 되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구원은 인간의 공로는 철저하게 밀치면서 오직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공로로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곧 목자와 양이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진다는 것인데, 예수님이 문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세워진 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내가 구원에 참여하게 된 것에는 나의 공로는 전혀 없고 오직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내가 죄에서 깨끗함을 입었기 때문이다'는 고백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백이 있다고 해서 신자로서 할 바를 다했다고 여기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대로 '예'라고 했으면 '예'에 대한 책임이 그의 삶에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고백했다면 끝까지 예수님의 은혜를 세우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예'라고 대답해 놓고 포도원에 가지 않은 맏아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공로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의 공로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능력이고 힘이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모든 삶이 그 믿음을 바탕으로 되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행위를 전혀 보지말고 살아가시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여러분의 행동이 옳은가 그른가를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행동이 공로가 되어서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에게는 참으로 위험한 생각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을 자신의 공로로 되어진 것으로 가로채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절도요 강도일 뿐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도달할 수 없음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 어떤 행위도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의가 될 수 없음을 외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것을 벗어나면 그것은 이미 기독교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우상을 찾는 타종교와 다를 바가 없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양의 문이신 예수님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기독교가 절대로 소홀히 해서 안될 가장 중요한 본질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 같은 처지에 있었습니다. 죄인으로서 심판을 받을 대상이었습니다. 사망에 갇힌 자가 바로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자신의 힘과 재주를 신뢰하면서 큰소리치며 살았습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왜 죄인일 수밖에 없으며 왜 영원한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의 죄를 해결해줄 유일한 길은 바로 예수님 밖에 없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에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 말할 수 없는 은혜로 남게 될 것이고, 내가 뭘 한다고 해도 그것은 예수님의 은혜에 비해서 아무것도 아님을 생각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에게서 자신의 행함에 대한 공로를 내세우고 자랑하는 것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8절에 보면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양들에게 문이 되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안계시는데 양의 문이신 예수님이 오기 전에 이미 다른 문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양들에게 가려고 한다면 그게 곧 절도요 강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지 않았다면 양에게 나아가는 문이 없다는 뜻인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문이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이 구약입니다. 구약은 예수님이 아닌 다른 문을 세워두는 것이 아닙니다. 즉 구약은 예수님이 아닌 율법이 문이고 그 문으로 안되니까 신약에 다시 예수님을 문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약은 오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구약은 오실 예수님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의 율법이 지향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으로써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스스로 의를 이루고자 하는 것을 포기하면서 의가 되시는 분이 오실 것을 기다리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됩니다. 때문에 구약이든 신약이든 동일하게 양의 문은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9절에 보면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예수님으로 들어가고 나갈 때 꼴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구원이 있고, 예수님에게서만 양식을 얻을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여러분을 살리는 양식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에게는 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도, 은혜를 아는 것도,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수 있는 것도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되어진 일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문이 되신 예수님만 자랑하는 것이 옳습니다. 오직 예수님으로 들어가고 나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58강) 10:10-21 선한 목자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그들은 목자가 우리에 있는 자기 양을 각기 불러내고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안다는 말씀에 대해서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그것은 구약의 사상대로 목자를 하나님으로 이해할 때 결국 우리 안에 있는 양이라고 해서 모두가 하나님의 양, 즉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얘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비유에 대한 자세한 해석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다시 '선한 목자'라고 표현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1-15절)
여기 보면 선한 목자와 삯꾼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선한 목자와 삯꾼은 양과의 관계에서 구분되어집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지만 삯꾼은 제 양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선한 목자라고 할 때의 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선함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선함은 대개 성품적인 차원일 것입니다. 착하고 온순하고 다른 사람을 잘 도와주고 화를 잘 안내고 다른 사람의 실수를 너그럽게 용서를 잘해주는 것을 두고 '그 사람 참 선하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의 성품을 내세워서 선한 목자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 예수님이니까 당연히 선하지 않겠는가라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이 말씀한 선함의 의미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을 두고 한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삯꾼 역시 양과의 관계에서 그 정체가 드러나는데 이리가 올 때 도망치는 것이 삯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입니다.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자가 선한 목자라면 선한 목자는 오직 예수님 한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분이고, 때문에 양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버린 목자를 알고 그분을 따르는 것이 선한 목자의 참된 양이라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선한 목자는 자기 양으로 하여금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생명이라는 큰 이익을 주기 위해서 대신 자기 목숨을 버리는 분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반대로 삯군은 목자의 행세를 하지만 그 일을 통해서 얻어지는 자기 이익을 바랄 뿐입니다. 때문에 자신이 얻을 이익보다 더 큰 손해가 될 일이 닥치게 되면 양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선한 목자의 양은 누구겠습니까? 14절에서는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처럼 목자와 양의 관계는 어느 한쪽이 다른 쪽으로 일방적으로 알고 있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아는 관계입니다. 즉 내가 목자를 모른다면 나는 그 목자의 양이 아니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은 선한 목자다'로 끝날 것이 아니라 '나는 과연 선한 목자의 음성을 아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 분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 음성이 나의 목자이신 선한 목자의 음성임을 알고 그분을 따라가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생명이라는 큰 이익을 주기 위해서 대신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선한 목자의 양이 목자를 안다면 그것은 내 목자가 나에게 생명을 안겨주기 위해서 대신 자기 목숨을 버렸음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자가 목숨을 버림으로서 안겨준 생명이라는 큰 이익은 세상에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아는 것이 목자의 양입니다. 이런 양이라면 과연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겠습니까? 이것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에 있는 자기 양을 불러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자기 양을 찾아서 붙잡고 강제로 끌고 나오시는 것이 아니라 양을 부르고 양은 그 음성을 듣고 자신의 목자임을 알고 스스로 목자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의 생명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 목자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그가 진정한 목자의 양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얻어진 생명이 세상에서 얻는 이익보다 더 큰 것임을 알기 때문에 세상에서 이익 되어지는 것으로 인해서 생명이라는 이익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의 이익을 앞세우는 말에 대해서는 귀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아는 자로써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우리의 목자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세상에서 양의 이익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큰 손해의 길을 가신 분입니다. 이러한 목자를 따라가는 양이라면 자연히 목자의 모습이 보여지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세상에서 얻어지는 이익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소중한 것은 예수님 때문에 얻어진 이익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고 대신 우리에게 얻게 하신 그 생명이 얼마나 큰 이익인가를 알 때 세상의 이익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비록 세상에서의 이익이 줄어들고 손해가 되고 불리한 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을 가기 위해서 목자를 찾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삯꾼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15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합니다. 목자가 양을 알고 양이 목자를 아는 것이 아버지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를 아는 것은 양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과 그 뜻이 어떠한가를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양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과 뜻을 아는 예수님은 양에 대해서 일할 때 자신의 뜻대로 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도 예수님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종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과 그 뜻을 알고 행동하지만, 삯꾼은 양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을 결코 보지 않습니다. 그러니 양을 자신의 이익의 수단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양의 주인은 목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양의 주인이 따로 있다고 할 때 목자는 양을 위해서 주인이 보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목자가 양을 위해서 일한 그 대가는 누구에게서 받겠습니까? 양에게서 받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목자를 양에게 보낸 자는 양의 주인이기 때문에 목자는 일한 대가를 양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양의 주인에게서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양을 위해서 보냄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양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대가를 양인 우리에게서 받으셨습니까? 우리에게 '목숨을 버려서 너희를 살려준 대가를 내놔라'는 요구를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만 '너희를 살린 예수님을 증거하라'는 것을 요구하실 뿐입니다.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은 아버지에 의해서 다시 살리심을 받고 하늘의 영광의 자리에 앉으심으로 그 대가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선한 목자는 양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보고 일하지만 삯꾼은 양의 주인을 보지 않습니다. 때문에 양을 위해서 일하면서도 그 대가를 양에게서 받으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위해 이만큼 일했으니까 너희는 나에게 그 대가를 내놔야 한다'는 이것이 바로 양에게서 일의 대가를 받음으로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고 하는 삯꾼인 것입니다. 이처럼 양에게서 일한 대가를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왕이면 많은 이익을 줄 수 있는 소위 좋은 양들이 많은 목장에서 일하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목사와 비교해서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목사에게 있는 큰 유혹 중에 하나는 소위 좋은 교회를 맡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생각하는 좋은 교회가 무엇이겠습니까? 부자가 많아서 헌금이 많이 나오고, 열심히 봉사하는 교인들이 많이 있고, 그러면서도 목사의 일에 항상 협조하고 목사의 말에 반대하지 않고 목사가 시킨 대로 아무말 없이 잘 순종하고 대접 잘하는 그런 교회를 의미할 것입니다. 목사가 생각하는 나쁜 교회는 그 반대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양의 주인을 보지 않고 양만 보고 일한다면 결국 좋은 교회에서 일함으로써 많은 대가를 받고 싶어할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이왕 목회하는 것 좀 더 편안하게 했으면 하면 유혹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목사에게 있어서 신자는 신자를 위해서 보냄받은 관계일 뿐이지 신자에게서 자신의 이익을 얻어내는 관계는 결코 아닙니다. 신자를 흔히 양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양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목사입니까? 양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목사는 하나님의 양을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일 뿐입니다. 따라서 목사가 일한 대가는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받는 것이지 양에게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목사가 양의 주인을 보지 않고 양만 보고 일한다면 결국 양에게서 자기 이익을 얻어내려는 삯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목사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살피는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교인과 친하게 지내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푸른초장으로 인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된 부분에 대해서는 추호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 곧 목사의 일이라 여겨집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인이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서로가 하나님을 생각하는 그 마음안에서 서로의 마음이 일치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이익을 생각하고 모이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주어진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세상에서의 이익을 생각하며 산다면 그것은 곧 삯꾼일 뿐입니다. 우리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따라가는 양이라면 세상에서의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해도 예수님은 잃을 수 없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어야 합니다.
(59강) 10:22-24 예수를 밀어내는 것
현대 사회에 있어서 믿음은 인간이 가지고 있던 미신적 성향에 의해서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 버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교인들이 말하고 있는 믿음이 주님으로부터 발생한 복음적인 입장에서의 믿음이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발생한 미신적인 믿음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신적인 믿음이란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기도를 할 때 열심히 기도하면 뭔가 일이 잘 될 것 같은 생각이 들며 기분이 좋아지고, 기도를 하지 않으면 뭔가 모르게 하나님이 벌을 줄 것 같은 불안감이 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헌금에서도 역시 내가 헌금하면 자신의 재물이 증가되고 헌금하지 않으면 재물이 축소된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에서 재물의 증대는 복이며 축소는 곧 징벌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복과 저주는 자신의 행동 여부에 달렸다는 잘못된 이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신적인 사고방식에서 돌출된 잘못된 믿음인 것입니다.
미신은 꼭 점치는 것이나 무당이 굿하는 것, 그리고 시골에서 서낭당에서 기도하는 것들만이 아닙니다. 점쟁이나 무당들이 말하는 것은 복과 저주가 인간의 행동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하고, 액운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하라는 등등의 지시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복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하고 저주를 피하기 위해서는 어떤 행동을 하지 말라는 등의 지시를 한다면 그것도 결국 미신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들에게는 '징크스'라는 것이 있습니다. 투수가 공을 던질 때 껌을 씹지 않으면 공을 제대로 던지지 못한다든지, 시합전날에 수염을 깎으면 그날 시합은 진다든가, 많은 선수들이 각자 나름대로의 징크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징크스라는 것 역시 자기 행동에 달려 있습니다. 말이 좋아 징크스지 결국 미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행동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미신적 믿음에 의해서 참된 믿음이 믿음으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미신적인 믿음에 의해서 참된 믿음을 밀쳐내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24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보면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지 않으니까 우리가 당신에 대해서 의혹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리스도라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당신을 믿겠습니다'라는 의도가 있는 것 같은 말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을 믿으려는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싶은데 그리스도라는 확실한 증거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의혹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의도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의 현실적인 신앙체제를 허무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신앙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24절의 말 역시 예수님을 알아보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는 자기들 나름대로의 확실한 답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도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왜 그토록 예수님을 배척을 하는 것입니까? 22-23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도전을 받을 때는 본문대로 하면 수전절이라는 절기가 이르렀을 때입니다. 그리고 그때 예수님은 솔로몬의 행각이라는 곳을 다니시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먼저 수전절이라는 절기와 솔로몬의 행각이라는 곳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수전절은 성경에서 본문 한곳에만 등장하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지키라고 명하신 절기가 아니라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절기입니다. 이 절기가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은 이렇습니다. 수전절은 더럽혀진 성전을 성결하게 하고 다시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서 '하누카', '빛의 절기'라고도 합니다. 이 절기가 형성된 배경은 BC 168년 수리아 총독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제우스 제단으로 바뀌었는데, BC 164년 마카비의 반란에 의해 성전이 탈환되고 재봉헌된 것을 기념하여 제정된 것입니다. 이때 축제는 8일간 계속되었으며, 크리스마스와 동일한 계절에 지켜졌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수전절이란 절기는 하나님을 위한 절기라기 보다는 우상으로 더렵혀진 성전은 다시 찾고 깨끗이 정화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절기로 보여집니다. 즉 성전을 위한 헌신의 절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솔로몬 행각은 성전의 제일 바깥쪽 벽에 있는 한 문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전은 그 내부가 여러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제일 바깥쪽 벽으로 해서 안쪽에 벽이 있고, 다시 또 그 안쪽이 벽이 있어서 경계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전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는 지성소에 가까이 올 수 있는 자격을 제한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의 제일 바깥쪽은 '이방인의 뜰'이라고 해서 이방인들은 그곳까지밖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쪽은 유대인들이 들어갈 수 있고 그 안쪽은 제사장들이 들어갈 수 있으며 가장 안쪽은 지성소가 있으며 일년에 한번 대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가지고 속죄제를 드리기 위해 들어가는 가장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전에서 솔로몬의 행각은 이방인들이 들어가는 이방인의 뜰에 있는 한 문이었던 것입니다. 즉 솔로몬의 행각은 성전에서 가장 천하게 취급되는 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을 예수님이 다니시다가 유대인들의 도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만나시기 위해서 만드신 거룩한 곳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성전에서 가장 거룩한 지성소로 나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신데 인간은 악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아무데서나 하나님을 부르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이 거룩한 존재가 되어져야 했습니다. 그것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해 죽은 제물의 피를 들고 지성소로 나아가서 피를 뿌림으로 이스라엘의 죄가 깨끗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문이 되시는 분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스스로 제물이 되시고 피를 흘리심으로서 누구든 그분의 피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성전이셨고 지성소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문은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성전을 만드시고 지성소에 피를 뿌림으로서 이스라엘을 만나주신 것은, 장차 오실 참된 성전이 되시는 분이 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계시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제물의 피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올 수 없음을 보여주시는 것이 성전의 지성소였던 것이지 눈에 보이는 성전의 지성소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문이 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참된 문으로 오실 분을 보도록 하기 위해서 지성소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이나 지성소는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는 다만 그림자 역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정작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은 솔로몬의 행각, 즉 유대인들이 가장 천한 곳으로 여기던 이방인의 뜰에 계셨고 유대인들은 참된 문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자에 지나지 않은 지성소를 여전히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통로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이미 하나님께 나아가는 문으로서의 역할을 다 마치고 폐지되어 버린 문을 여전히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에게는 자기들 나름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년에 한차례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나가서 피 뿌리면 그것으로 변함없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나가는 다른 통로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예 그들은 지성소에 나가서 피 뿌리는 것말고 하나님께 나가는 다른 통로가 있을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시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께 나갈 수 없다고 하실 때 유대인들로서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미 문이 있는 그들로서는 또 다른 문이 필요치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이 예수님을 밀쳐내는 이유였던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는 성전이 있었고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거룩한 성전이기에 성전에 헌신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를 보내신 나를 믿는 곳이 곧 아버지께 영광이고 아버지께 헌신하는 것임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이 수전절에 솔로몬의 행각에 다니셨다는 것은 뭔가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수전절은 성전에 대한 헌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성전에 대한 헌신이 곧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수전절 역시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성전을 높이는 수전절에 성전이신 예수님은 성전에서도 가장 천한 곳에 계십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거룩하게 여기는 것은 결코 거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가장 거룩한 곳으로 여기는 지성소는 결코 거룩이 아니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도 될 수 없음을 보여주시는 의미에서 수전절에 솔로몬 행각에 계셨던 것입니다. 거룩은 어떤 장소에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행동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유대인들처럼 예수님말고 또 다른 거룩한 것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곧 예수님을 밀쳐내는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창 2:3절에 보면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거룩이란 말이 최초로 등장한 성경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일곱 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은 구별하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거룩은 구별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레 20:26절의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는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거룩은 세상과 구별된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거룩한 자로 여김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달리 거룩한 것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이 아닌 그것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예배당을 거룩하게 여기면 예배당에 헌신하는 것을 곧 하나님께 나가는 것으로 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을 밀쳐내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할 일은 거룩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뿐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믿음 안에서 거룩한 자로 불려집니다.
(60강) 10:25-28 주안에 있는 영생
흔히 성경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이기 때문에 성경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저는 이 말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은 맞다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성경대로 사는 것 자체를 잘못 이해하고 있을 수는 있습니다. 대개 보면 성경대로 사는 것을 성경에서 하라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안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성경에서 기도하라고 하면 기도하고, 구제하라고 하면 구제함으로써 성경대로 사는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성경이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니까 주일을 잘 지키면 성경대로 사는 것이고 그것이 곧 천국을 향해 가는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실천이 곧 성경대로 사는 것이라면 스스로의 실천으로 천국을 향해 가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는 전적으로 무시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실천으로 영생을 붙들겠다는 십자가의 원수된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14:6절에서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 말을 바꾸어서 '성경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성경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수가 없다'라고 한다면 이 말은 맞습니까 틀립니까? 어찌 생각하면 '성경이 곧 예수고 예수가 곧 성경이니까 맞는 말이 아니겠는가?'라고 여겨지기도 하겠지만 사실은 아주 틀린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요한복음 5:39절을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는 말씀을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당시 바리새인들에게는 성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대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경대로 살았다는 것은 성경대로 실천하며 살기를 힘쓴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이 증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즉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며 그분을 믿을 것을 말하는 것이지 성경대로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요구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면 과연 성경대로 산다는 것을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이겠습니까? 그것은 분명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성경을 가지고 자기들 나름대로는 성경대로 살아간다고 믿었지만 성경을 주신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결코 성경대로 사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도 역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규례에서도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하고, 제사 규례에서도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영생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고 성경 자체를 진리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을 부정하는 말로 받아들이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결코 성경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사는 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임을 말씀드리는 것이고, 단지 성경이 말하는 것을 실천한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길이 될 수 없고 진리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길이 되고 진리가 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분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을 실천하는 것이 성경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성경대로 사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들고 자기 스스로 천국을 향하려고 합니다. 성경이 곧 진리이기 때문에 성경을 실천하는 것이 진리대로 사는 것이고 따라서 천국에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잘못됨이며 그러한 잘못을 많은 현대 교회가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 홀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실 때 갈 수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우리에게 천국의 길을 알려준다면 과연 어떤 길을 제시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지 않겠습니까?
영생에 관심을 가진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나를 좇으라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영생은 분명 우리의 실천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주어지는 것이 영생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즉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버릴 수 없는 자신을 생각하면서 스스로의 실천으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예수님이 왜 오셨는가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영생은 인간의 실천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고, 결국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인간이 스스로 얻을 수 없는 영생을 인간에게 주시기 위해서임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단지 도저히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천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냥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끝까지 자신의 실천 여부만 생각한 결과입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만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결코 이것을 실천하면 천국 간다는 식으로 예수님이 아닌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부르짖는 축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때문에 뭘 어떻게 하면 복을 얻는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부자청년처럼 '아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라는 의미로 이해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밀쳐 내는 것입니다.
28절에 보면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영생은 예수님에게 있는 것이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심으로 얻어지는 것이지 우리 쪽에서 예수님에게 뭔가를 드렸기 때문에 그 대가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설마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영생을 주시겠는가?'라는 의심과 의문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나오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신 영생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지키는 것도 없습니다. 즉 성경대로 실천하는 것을 영생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희생으로 값을 치르시고 구속하신 자기 백성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신자가 사탄의 그 어떤 유혹에서도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지키심 덕분이지 우리들 스스로의 힘으로 영생을 지킨 덕분이 아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생을 얻는 것에도, 영생을 가진 자로 살아가는 것에도 우리의 노력과 실천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자는 다만 예수님의 은혜 아래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를 영생으로 붙들어 놓는 것이고, 천국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노력과 실천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고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면 그것이 곧 성경대로 살아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여러분을 살아가게 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은혜 안에서 은혜로 다스려질 때 여러분은 그리스도안에서의 삶이 어떤 것이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자연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여러분에게 지혜가 되고 힘이 되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25-27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유대인을 향해서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는 의미의 말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예수님에게 나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사람이 자기 노력과 실천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고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에게로 나와야 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러한 믿음이 없는 것은 애초부터 예수님의 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양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믿음 역시 우리들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믿음도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고, 그 선물을 받을 자는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양으로 택함 받지 못한 자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택함 받지 못한 자는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까? 이러한 의문도 나올 수가 있겠지만 믿음을 받지 못한 자가 예수님을 믿고 싶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음을 안다면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믿음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스스로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즉 스스로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의지하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생은 오직 예수님이 주심으로 받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십니다. 대신 우리는 희망이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희망이 없음을 알 때 모든 희망을 예수님에게 둘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에게 희망을 두면서 자신이 성경을 실천하면 뭔가 되어질 것 같은 생각이 있으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단호히 말씀드리건대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신앙의 근거는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 위에 신앙을 세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고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헛된 것입니다. 영생은 예수님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성공한 것입니다. 내가 실패한다고 해도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나의 실패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 이것이 신자의 힘이며 기쁨입니다.
(61강) 10:25-42 예수의 죄
예수님은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을 '하나님과 하나'임을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고 하늘에서 왔다고 합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과 같은 신이라는 주장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오직 황당하다는 느낌뿐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하나님과 하나인 존재로 주장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며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죄로 여겨질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의 죄는 바로 '참람죄'였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 예수님의 죄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유대인들은 돌로 쳐서 심판하려고 합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32절)라고 묻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보였는데 그 중에 어떤 일이 잘못된 것이기에 돌로 치려 하느냐는 뜻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33절)고 말합니다. 즉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로부터는 그 어떤 잘못된 것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일인데 조그만 꼬투리라도 찾아내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서는 조그마한 잘못된 것도 찾아내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 볼 때 신자가 예수님의 도를 전하는 것은 결코 말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은 채 다만 교회에 대한 봉사를 염두에 두기도 하지만 사실 신자의 삶은 곧 그리스도를 전하는 언어로 남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아무리 그리스도를 전하고 천국을 말하고 심판을 말한다고 해도 진심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삶이 과연 그리스도를 말하는 삶이고 천국과 심판을 말해주는 삶이냐는 것입니다. 이점을 소홀히 한다면 입으로는 예수를 말하되 삶으로는 예수를 부인하는 겉과 속이 다른 모습만 보여줄 뿐입니다. 즉 내가 전한 예수를 내 스스로 부인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죄를 사람이 되어서 자칭 하나님이라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34-36절)는 말씀을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사람으로 봅니다. 그런데 사람인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는 것은 율법에 보면 하나님도 사람을 가리켜서 '신'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도 사람을 신이라고 하셨는데 너희가 사람으로 여기는 내가 나를 하나님이라고 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사람을 신이라고 하신 적이 있다면 예수님의 말은 옳은 것입니다. 아무리 유대인이 예수님을 사람으로 보고 있고, 사람인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한 것이 죄라고 말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사람을 신이라고 하신 적이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에는 전혀 오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과연 하나님이 사람을 신이라고 말한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시편 82:6절을 보겠습니다. 거기 보면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라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분명 하나님은 사람을 가리켜서 신이라고 하고 지존자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경은 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경말씀대로 하나님이 사람을 가리켜 신이라고 한 것은 변할 수 없는 것이고 그렇다면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한 것이 죄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얘기가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람이 신입니까? 사람이 하나님과 같습니까?
시편 82편을 읽어보면 6절에서 언급하는 '너희'는 단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제사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재판장을 두고 신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재판장은 백성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억울한 자가 없도록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재판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비록 재판은 사람이 하지만 그 사람은 자기의 생각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였기 때문에 결국 판단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재판장을 신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재판장이라는 사람 자체가 신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일이 신적인 일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서 신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재판장이 하는 일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보여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재판장이 사사로이 자기 유익에 매이지 않고 자신의 권위를 이용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기준으로 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이 세우신 재판장이라는 것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82편을 보면 당시 재판장들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2절에 보면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셀라)"라는 말을 합니다. 악인의 낯을 본다는 것은 재판을 할 때 악인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엉터리 재판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로 인해서 돈없고 힘없는 약자들이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82편의 마지막 구절은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판단하소서 모든 열방이 주의 기업이 되겠음이니이다"로 끝납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지존자의 아들의 역할을 하고 신의 역할을 하라고 세운 재판장이 모두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유익을 따라서 뇌물을 받으며 잘못된 판단을 하는 이 세상에 이제 하나님이 일어나서 판단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삽의 말대로 세상을 판단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시고 말씀만을 기준으로 해서 세상을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예수님이 진정한 지존자의 아들임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37-38절에 보면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신을 믿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행한 그 일은 믿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은 곧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예수라는 분을 하나님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분으로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서 하나님을 보게 되고 그 하나님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을 믿어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 하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령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 시편 82편에서 말하는 재판장처럼 뇌물을 받고 악인의 편을 들고 약자를 무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천한 자 죄인들을 가까이 하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왜 약자를 무시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불의함이 되는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라고 하였지만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을 내걸고 자신들의 현세적인 위치를 지키기 위한 심사였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유대인과 같은 실수를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타인에 대한 비판과 정죄가 곧 나에 대한 것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62강) 11:1-6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은 날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소위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이지만 이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큰 오해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오해로 인해서 신앙까지도 전혀 신앙이 아닌 신앙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을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는 신자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의 나사로에 대한 얘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11장의 나사로 얘기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단순하다고도 할 수 있고 간단하다고도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병든 나사로를 예수님이 다시 살리신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예수님이 자신의 부활을 가르치기 위해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는 기적을 보이신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또 나사로의 얘기를 이런 시각에서 이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에서 4절의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는 말씀과 5절의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는 말씀과 6절의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라는 말씀을 주의 깊게 생각해 본다면 단지 부활에 대한 교훈을 하기 위해서 시작된 얘기는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와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그냥 나사로를 문병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나사로의 병을 고쳐달라는 의미의 부탁이었을 것입니다. 5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본래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를 사랑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이 든 것이고, 예수님이 사랑하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와달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의 태도는 우리의 상식을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면, 그리고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다른 모든 일을 제치고 빨리 달려가서 고쳐주는 것이 우리의 보편적 상식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은 죽을 병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씀을 하면서 이틀을 더 유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부러 이틀이나 늦게 가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나중 일로 본다면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고 또 살리실 것을 아셨으니까 나사로가 죽은 뒤에 가신들 나사로는 손해 볼 것이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그만큼 고생을 하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는 염려와 근심이 지속될 것이고, 또 오라비가 죽은 상황에서는 큰 슬픔과 고통과 절망을 겪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왕 살리실 것이라면 하루라도 덜 고생을 하게 하고, 빨리 근심과 걱정을 덜어주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여기서부터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이 등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나사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위해서 애매하게 병이 들고 고생한 것이 됩니다.
이것과 비슷한 사건이 요한복음 9장에 등장하는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소경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이 누가 죄를 범했기 때문인가?' 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누가 죄를 범해서 소경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 소경된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사건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에도 순종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생각하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실제 병이 든 나사로나 소경으로 태어난 자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병이 들지 않아도 될 것을 하나님 때문에 병이 든 것이고, 소경으로 태어나지 않아도 되었는데 하나님 때문에 소경으로 태어났다는 억울함과 불만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육신이 편안할 때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직접 당사자가 되어질 때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과 어려움의 상황에 대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할 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입니다. 여러분이 중한 병에 걸렸을 때, 그것을 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그러면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병이 들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고, 따라서 뭔가 억울하다는 반발이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병에 걸리지 않을 나사로를 하나님이 억지로 병에 걸리게 하고 소경되지 않을 사람을 소경되게 한 것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신자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납득하기 곤란한 경우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병에 걸린 것이라면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병에 거리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서 걸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점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사로가 병이 든 것이 병이 안들어야 할 사람이 병든 것입니까? 소경된 것이 소경이 안되어야 할 사람이 소경이 된 것입니까? 세상 그 누구도 질병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은 죄속에 있고 사람은 날 때부터 죄속에서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갈수록 후패해져 가고 병들고 죽는 것은 죄속에 있는 인간에게는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이 늙어 가는 것이 우리는 늙지 않을 수 있었는데 하나님이 늙게 하신 것입니까? 죽을 사람이 죽는 것이고, 늙을 사람이 늙는 것이고 병들 사람이 병이 든 것뿐입니다. 사람이 실패해서는 안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살아가면서 실패한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다만 실패가 없이 편안한 삶을 살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기 때문에 누구도 인생에 대해서 교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남들은 다 실패해도 나만큼은 실패하면 안되고, 남들은 다 병에 걸려도 나는 병에 걸리면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때도 자신을 실패하지 않게 해주고 병에 걸리지 않게 해주는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가정을 사랑하셨다는 말에 대해서도 우리의 사고는 나사로의 병을 고쳐주심으로써 그 가정의 우환을 해결해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로의 가정을 사랑하셨으면서도 병이 든 나사로의 소식을 들었을 때 일부러 이틀을 지체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안된다는 인간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하심이 아니라면 우리는 전혀 희망이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사로가 병든 것이 어떻게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까? 앞서 말한대로 나사로가 병든 것은 병이 들지 않아야 할 사람이 병든 것이 아니라 죄속에 있는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병을 고치시는 분으로 예수님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병을 고치셨던 것은 단지 육신의 질병을 고쳐주시는 차원이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을 짊어지기 위해서 오셨음을 보여주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의 경우에는 병을 고치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죽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죽은 자를 고치심으로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신 것은 인간의 존재가 전혀 희망이 없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전혀 희망이 없는 존재를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사랑은 지금 당장 병을 고쳐주심으로써 육신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없는 인간을 고치셔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병들고 죽는 것은 죄가운데 있는 인간의 운명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절망의 상태인 인간을 보여주고, 그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죽은 자를 일으키심으로 인해서 인간의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되어짐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영광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절망의 상태인 죄인에 불과한데 예수님의 은혜로 일으킴을 받았음을 고백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얻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왜 이렇게 하십니까?'라는 반발을 가진다면 그것은 아직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았다는 증거물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를 항복시키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실패하게 하셔서 '너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아느냐?'를 물으십니다. 질병이 있게 하셔서 '너는 병들 수밖에 없는 약한 존재임을 아느냐?' 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 물음 앞에서 '예 나는 이런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오셔서 나를 일으키시는 은혜와 사랑이 아니면 나는 절대로 희망이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라는 믿음으로 예수님에게 나아갈 때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육신을 근거로 해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후패하고 썩어지는 육신을 기준으로 하지말고 영원한 생명을 기준으로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록 지금 순간은 어려움이고 고통일 수 있는 것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더욱 더 하나님께 끌어 놓기 위해서, 하나님께 붙들어 놓기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것에 수긍이 되어질 것입니다.
실패와 어려움 속에서 마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인간의 좁은 소견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무지의 결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살아가면서 어떤 일을 겪든 그것으로 억울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힘들게 살든 질병으로 고생하든 그 모든 것은 죄인된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만을 의지하는 것이 곧 그분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63강) 11:7-10 빛에 다니라
성경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주어진 책이라면 구원을 얻은 자에게 성경은 무엇일까요? 아마 자기 구원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말하거나 아니면 구원을 얻은 신자로서 보여줘야 할 도덕이나 윤리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구원시키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복의 수단으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신자에게 있어서 성경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일까요?
먼저 우리가 생각할 것은,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게 된 것은 '그가 성경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죄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믿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믿음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어떻게 나왔고, 그들을 누가 인도했으며 그들이 도착한 땅이 어디였는가에 대해서 모른다고 해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는 전혀 지장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한편 강도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간단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죽지만 예수라는 저 사람은 죄없이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자기 영혼을 맡긴 것이 한편 강도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자기들과 함께 죽어 가는 예수님을 힘없이 당하는 존재로 보지 않고 자신의 영혼을 맡길만한 분으로 본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한편 강도의 믿음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영혼을 맡길만한 분으로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내 영혼을 책임지시는 분이고 내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분임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에 창세기를 알아야 하고 출애굽기를 알아야 한다는 조건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경에 대해서는 백지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알고 구원을 얻는 일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지금 우리는 성경을 공부해야 하고 이스라엘을 알아야 하고 오늘 이처럼 요한복음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까?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리석기 때문에 얼마든지 풍성함으로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이 참으로 메마른 상태가 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 순간 죽고 천국에 가는 것이라면 성경을 공부해야 한다거나 신앙의 풍성함이라는 문제와는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당장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은 자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고 말씀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예수 믿고 오늘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삶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줘야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주어진 믿음의 책임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책임있는 삶이라는 것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은혜로 살아감으로써 그리스도를 믿는 삶의 풍성함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의 풍성함은 자신에게 주어진 믿음이 어떠한 것이며,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아는데 있습니다. 즉 단지 예수를 믿는다며 교회를 출입하는 것으로 신자의 삶의 풍성함이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부터 받은 바 은혜가 무엇이며 어떠한 것인가를 아는 것에서 신자로서의 삶의 풍성함을 맛볼 수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고,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주어진 것이며 그 믿음이 우리를 어떻게 만들어 가는가? 이처럼 그리스도안에 약속된 것을 성경을 통해서 하나하나 알아가고 깨닫게 되고 이해함으로써 삶의 풍성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 간다는 것보다는 그 믿음이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었는가를 깨달았을 때 주어진 믿음에 더욱 감사하게 되고 기쁨이 충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믿음이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위해서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죽으신 그 분이 누구인지 아느냐? 너희가 과연 그 믿음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아느냐? 이런 것들을 깨닫게 됨으로 인해서 주어진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깊이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삶의 풍성함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이러한 신앙인으로서 만들어 가고 이끌어 가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성경인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라는 말을 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은 나사로를 사랑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병든 나사로에게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혼란을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가 아플 때 즉시 달려와서 아픔의 고통에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로를 통해서 보여진 사랑은 병든 나사로를 외면하고 아예 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삶은 참으로 풍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는 자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을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플 때 달려와 주는 예수, 내가 고통에 있을 때 그 고통에서 건져주시는 예수, 이것이 우리 입장에서 기다리는 예수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아플 때 전혀 반응이 없는 예수님이라면 예수님에 실망하게 될 것이고 자연히 믿음으로 인한 풍성함이란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의 풍성함은 내가 어떤 형편에 있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그리스도가 소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삶의 풍성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예수님의 사랑을 오해하고 있다면 고통 속에 있는 자신의 형편이 나아지지 않을 때 스스로를 예수님의 사랑에 있지 않다고 단정할 것이고 자연히 예수님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이 15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한다'고 말씀합니다. 즉 나사로가 병든 그 자리에 예수님이 안계셔서 그가 죽게 된 것을 오히려 기뻐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나사로가 죽은 일을 두고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나사로가 병이 들어 죽게 되는 것이 그들의 믿음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예수님에게 기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에 대해서 항복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 일하시고 그래서 믿음을 위해서라면 우리가 부르는 소리를 외면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예수님을 아는 신자라면 지금의 형편이 비록 자신에게 힘이 들고 고통이 된다고 해도 '그 일로 인해서 믿음이 굳건해 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하십시오'라고 자기 인생을 맡기는 것이 바로 예수님에게 항복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든 나사로를 찾아가시는 것이 아니라 죽은 나사로를 찾아가십니다. 죽은 나사로는 아무 희망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 나사로를 찾아가시는 것은 예수님이 찾아오신 우리가 곧 그와 같은 상태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병든 나사로를 찾아가서 나사로야 일어나라고 하셨을 때 나사로가 '예'하고 대답하고 나온 것이 아닙니다. 죽은 나사로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스스로 일어날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예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이것이 말하는 것은 우리는 예수님이 일으켜 주지 않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상태의 존재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9-1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신자는 빛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아닌데 왜 세상을 살아갈 때 눈을 감고 사느냐는 것입니다.
빛을 볼 수 있는 신자라면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인도하시는 빛의 길을 볼 수 있을 것인데 그 길을 보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든 상황과 형편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시고자 하시는 길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이 왜 이렇게 일하시는가를 보지 않기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둠만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빛을 보지 않으면 어둠밖에 없습니다. 병든 나사로의 형편에서 빛을 보지 못하면 죽음이라는 어둠만 남을 뿐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 일하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빛에 다니는 것입니다.
(64강) 11:11-16 믿음을 위하여
신자들이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믿음의 힘을 잃어버리는 이유 중의 대부분은 믿음의 본질이 아닌 것을 믿음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에 있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생명입니다. 믿음은 신자를 하늘의 생명으로 인도하는 능력입니다. 때문에 하늘의 생명에 마음을 둔다면 그는 얼마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기쁘고 힘있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힘있는 삶을 상실한 채 살아간다면 그것은 믿음에서 생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을 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믿음의 결과로 세상의 것을 더 많이 받게 되고 누리게 될 것을 기대함으로 인해서 상대적으로 기대한 것을 믿음에서 얻지 못할 때 자기 믿음에 대해 실망을 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된 자로서 모든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두게 하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 마음을 두는 것이 곧 생명과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오신 분이시고 생명을 위해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몇 주 동안 계속해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일부러 나사로를 찾아가지 않으시고 결국 죽은 뒤에 찾아가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분명 예수님의 그러한 행동은 우리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기대하는 것은 우리가 힘들고 곤란할 때, 그래서 예수님을 부르고 도움을 청할 때 달려와서 우리의 일을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병이 들었으면 병에서 건져주시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어려운 일에서 건져주셔서 우리를 평안하게 만들어 주실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을 원하지만 정작 예수님의 행동은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릅니다. 병든 나사로 때문에 와달라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이틀을 늦게 가십니다. 그 결과 나사로는 죽습니다.
물론 예수님 편에서 생각하면 다시 살리실 것이니까 죽어도 상관없다고 하실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사로의 가족 입장에서 본다면 고통이고 어려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병든 나사로의 입장에서 행동하지 않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자기 백성을 생각하십니다. 그런데 자기 백성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은 우리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우리 사정만 생각합니다. 병이 들었으면 병든 내 사정만 생각합니다. 힘든 일을 당하면 힘든 일 때문에 고통을 받는 자신만 생각합니다. 이처럼 세상에서의 자기 사정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보지 못하는 하늘에 대한 자기 입장입니다. 하늘의 생명을 보지 못하는 것이고, 예수님 또한 세상에서의 우리 사정을 도와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늘의 생명을 위해서 오셨음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설사 듣고 배웠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이 하늘에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의 생명을 위해서 행동하시기를 바라기보다는 세상에서의 내 사정을 도와주시는 행동을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이미 받은 복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복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받은 복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복을 달라'고 애원하면서 말입니다.
우리들의 눈에 세상의 것들이 좋은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하찮은 것들로,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배설물로 썩어질 것으로 보여질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진심으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다면 사랑하는 자기 백성에게 하찮은 것, 썩어질 것, 배설물과 같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행동하시겠습니까? 지금 당장 우리들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행동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오히려 우리들의 생각을 바꾸시기 위해서 행동하는 것으로 증거될 것입니다. 생각이 잘못되어서 썩어질 것을 썩어질 것으로 보지 못하고 귀하고 소중한 것을 귀하고 소중한 것으로 보지 못한다면 썩어질 것을 썩어질 것으로 보게 하시고 귀한 것을 귀한 것으로 볼 수 있도록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바꾸시고 고치시기 위해서 일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아닌 믿음을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병든 나사로에 대한 예수님의 행동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라는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은 병든 나사로가 죽은 뒤에 가시는 이유를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으로 드러내십니다. 즉 믿음을 위해서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렸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에게서는 원망밖에 나올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다도 나사로가 죽은 뒤에 오신 예수님에게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32절)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오지 않으신 예수님에 대한 원망입니다. '이왕 오실 것 좀 더 빨리 오셔서 나사로의 병을 고쳐주셨으면 좋지 않습니까?'라는 원망인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왜 늦게 오셨을까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늦게 오셔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에게 자기 마음을 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으신 것에 대한 원망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러한 원망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과 사정을 좋게 해주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이렇게 고쳐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믿음의 길을 결코 제대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예수님에게서 기대할 것은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지고 오신 것은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 역시 예수님에게 기대할 것은 하늘의 생명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서 다른 것을 기대하기를 포기하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는 신자라고 하면서도 예수님과는 다른 생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항복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마음을 하나님에게 항복시키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우리 마음을 하나님에게로 회복시키시고 굴복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지혜로 우리와 싸우시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 예수님이 동원되신 것이고 이 싸움이 있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 보자면 힘든 일이 있고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일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나사로의 생명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육신의 생명을 살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일으키시기 위해서 오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사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것이고 이 믿음을 위해서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생명과 예수님이 생각하는 생명이 다르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죽은 나사로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사람들이나 제자들이 생각하는 영생은 내가 죽지 않는 것입니다.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도록 사는 것이고 성공하고 출세한 자로서 큰소리치며 사는 것이 인간들이 기대하는 생명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참된 생명은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가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참된 생명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25절에서 예수님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부활을 우리의 육신이 다시 사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부활된 것이고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죽어도 사는 것이기 때문에 나사로가 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느냐가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믿음을 위해서 나사로가 죽는 그 자리에 계시지 않은 것을 기뻐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늦게 가셨다는 뜻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죽은 것으로 말하지 않고 잠든 것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13절에 보면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고 말합니다.
죽은 자를 가리켜서 '잔다'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의 표현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죽은 것은 죽은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고 마지막입니다. 하지만 잠든 것은 '다시 일어난다'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다시 일어날 때가 있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나사로에게 '잔다'라는 말을 하신 것은 나사로가 예수님으로 일으킴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생은 예수 안에서 보는 것과 예수 밖에서 보는 것에 따라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 밖에서는 죽은 것으로 끝납니다. 죽음으로써 다시 일으킴을 받지 못하고 영원한 사망과 멸망으로 끝납니다. 죽은 자로 끝나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의 인생은 죽음이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다시 일으킴을 얻는 것이 하늘의 생명을 허락 받은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생명을 마음에 두고 사는 신자에게 유일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무엇에도 양보할 수 없고 타협할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행동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부르는 소리도 외면하십니다. 고통에 있는 우리를 그냥 그대로 두고 보시기도 합니다. 육신의 일이 해결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된 생명을 위하여 사는 것이 더욱 더 중요한 일임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그렇게 행동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이해하신다면 여러분은 진심으로 복에 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손에 잡히는 것으로 은혜와 사랑을 확인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참된 생명을 위해서 사신다면 예수님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65강) 11:17-30 부활과 생명
기독교의 본질은 부활과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부활과 영원한 생명, 이것을 빼 버린다면 기독교는 분명 한낱 종교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모든 신자들이 부활과 생명에 대한 믿음을 말합니다. 부활을 알고 생명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복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모든 신자들은 부활을 알고 생명을 아는 자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활과 생명을 아는 자로 살아간다고 할 때 과연 그 부활과 생명으로 인한 삶의 유익이 있느냐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부활과 생명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신자들에게만 이해되고 환영을 받고 인정을 받습니다. 세상에서는 부활과 생명이 아무것도 아닌 허무맹랑한 말로 여겨지지만 그리스도안에서는 능력이고 엄청난 축복이며 인생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바로 부활과 생명을 알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부활과 생명을 알고 믿는 자로 살아간다면 그것으로 인한 삶의 유익이 있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부활과 생명을 아는 자나 모르는 자가 살아가는 것이 동일하고 부활과 생명으로 인한 삶의 유익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면 혹 부활과 생명을 알기는 하되 그 능력과 축복에서는 멀어져 있기 때문은 아닌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과 마르다가 대화하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르다가 예수님에게 말하는 것에서 부활과 생명을 알기는 하되 그 능력에서 멀어진 자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을 나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자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절)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마르다의 불만이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있을 때 예수님이 일찍 오셔서 계셨다면 죽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라는 불만인 것입니다. 결국 나사로가 죽게 된 것을 예수님이 오셔서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르다의 불평에 대해 예수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23절)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에 대해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대화에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지막날 부활에서 다시 살 것을 압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면 결국 마르다는 다시 산다는 말씀을 단지 마지막 날이 되면 부활한다는 의미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에 대한 마르다의 생각이고 이 생각이 오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부활에 대한 보편적인 사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 교회 역시 부활을 말하면, 마지막 때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지막날 다시 산다는 것이 부활에 대한 현대 기독교의 교리고 믿음이고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가 말하는 부활신앙이라는 것은 단지 죽은 후에 다시 살 것을 믿으면 그것을 부활신앙이라고 말합니다. 그저 막연하게 성경이 그렇게 된다고 말하기 때문에 성경을 믿는 신자로 살아가는 이상 믿어야 하는 교리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로 살아가고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최고의 복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러한 복으로 기뻐하기보다는 세상의 복을 더욱 염원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부활에 대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 지식이 마르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부활을 아는 자로서 부활을 모른 자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마르다는 사람이 죽으면 마지막때 다시 산다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예수님이 계시지 않음으로 나사로가 죽었다고 불평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말해주는 것은 신자가 안다고 하면서도 아는 것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과 삶이 별개의 문제로 각각 구별되어져 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저 막연하게 마지막 때가 되면 살아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새롭게 다시 살아날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나사로의 몸이 다시 살 것을 말하기보다도 인간의 생명이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온전케 됨을 의미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다만 마지막 때가 되면 다시 산다는 부활 교리만을 내세울 뿐입니다. 부활이 그리스도에게 있고 그리스도와의 관계안에 있는 것이 곧 영원한 생명에 거하게 되는 것임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죽은 자가 때가 되면 다시 사는 것으로 설명하지않습니다. 다만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할 뿐입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부활은 죽은 내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이 이런 것이다라고 설명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활과 생명이 누구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부활 자체시고 생명 그 자체시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부활과 생명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지 부활과 생명에 대한 지식은 아니라고 말할 수있습니다.
부활은 마지막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이고 생명이시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것이 곧 부활이고 생명인 것입니다.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사는 것만이 부활과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과 생명이시라면 내가 어떤 환경과 상황에 있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심으로써 부활과 생명에 참예한 것입니다. 때문에 나사로가 죽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그와 함께 하신다면 그는 죽은 자가 아니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몰랐습니다. 다만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부활로 이해했기 때문에 그에게 나사로는 죽은 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라비가 죽을 때 왜 여기 안계셔 주셨는가만 가지고 불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존재 이유가 부활과 생명에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병을 고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사망에서 일으키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에게서는 우리 육신의 문제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육신의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그분에게 순종하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때 그는 세상에서 되어지는 일로 인해서 예수님을 원망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육신을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내가 육신적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 도우시지 않았다는 것으로 원망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믿음으로 인해서 얻어지는 삶의 유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나중에 죽으면 천국 간다거나 마지막 때 부활된다는 수준에서 벗어난 신앙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은 단지 마지막 때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일 뿐 현재를 살아가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일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한 것이지 우리가 원하는대로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점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예수님은 이런 분이라는 답을 이미 가지고 예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의 육신을 생각하지 마시고 영혼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사망에 처한 내 영혼을 예수님이 일으키셨습니다. 이 은혜로 예수님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신자가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관심을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에 둔다면 예수님으로 인해서 어떤 유익을 얻고 살아가는 가를 능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을 바라볼 때 예수님으로 인한 그 어떤 유익도 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형편이 더 나아진 것도 아니고, 어떤 경우에는 더 못한 형편이 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예수 믿은 것 때문에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으로 불평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으로 인해서 누리는 그 어떤 유익도 없는 채 예수님을 말하고 천국을 말하고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무덤에 죽어 있는 나사로는 예수님이 없는 인간의 운명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인간의 몸은 썩을 몸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사망에서 일으키시고 산 몸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은 바로 우리를 산 몸이 되게 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나를 일으켜 달라'는 요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일으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예수님이 베푸실 일을 기대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베푸신 일에 감사하고 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장차 천국에 갈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천국에 있는 자로 사는 것이어야 하고, 부활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부활된 자로 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인해서 누리는 유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는가를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시고 예수님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66강) 11:31-37 예수님의 눈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은 많이 들어왔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많이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 자비, 긍휼이고 우리가 많이 말하는 것도 역시 사랑이며 자비하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믿는 것 또한 우리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보여지는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일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의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의 형편은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 맞지 않는 부분이라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나에게 힘든 일이 없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면 본문의 예수님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사로가 병든 것은 예수님의 사랑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즉 사랑하기 때문에 병든 것이 아니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병든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병든 것은 나사로가 죽어야 할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이것 하나입니다. 우리의 몸은 죽을 몸입니다. 썩어질 몸이고 실제 썩어져 가고 있는 몸입니다. 따라서 썩어질 몸으로 사는 사람의 몸이 병든 것은 당연한 일이고 죽는 것 역시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병들게 했다라고 말하기보다는 이미 병든 몸을 가지고 사는 것이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사로 역시 예수님의 사랑의 대상이었지만 그 사랑과는 상관없이 병이 들고 죽음을 향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질병을 막아주는 방패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아래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것 때문에 질병과 상관없이 살고 설사 질병에 걸렸다고 해도 사랑이 우리를 낫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육신의 문제와 연관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사랑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서 나사로가 병든 소식을 전할 때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병든 나사로를 고쳐주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이러한 말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뒤에 찾아가심으로써 예수님의 사랑은 병을 고쳐주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일으켜 주시는 것임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병에서 고침 받는 것과 사망에서 건짐 받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큰 은혜로 여겨집니까? 당연히 사망에서 건짐 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러한 큰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병든 나사로를 찾아가시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무덤에 있은지 사흘이나 된 나사로를 찾아가시는 것입니다. 병은 고침 받아봐야 또 다시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죽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사랑이 병을 고쳐주시는 것이라면, 결국 그 사랑도 한계가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뭔가 부족한 사랑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완전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영원히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자로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랑으로 찾아가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한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는 원망과 불평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왜 오셨으며 무엇을 가지고 오셨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원망이요 불평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도 마르다처럼 육신의 문제로 인해서 예수님을 원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 때가 많습니다. 설령 예수님이 누구시고 무엇을 위해서 오셨는가를 배워서 안다 할지라도 내 속마음이 원하는 것은 다른 것일 때 원망과 불평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되 자기 식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의 믿음의 실상이고 또 우리가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는 믿음의 모습일 수 있는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마르다가 예수님을 영접하러 나갈 때 마리아는 그냥 집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 마리아에게 마르다가 예수님이 부르신다는 소식을 전하고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 예수님께 갑니다. 그리고 마리아 역시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32절)는 말을 합니다. 33절에 보면 마리아가 울면서 이 말을 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대성통곡을 하면서 울지 않았겠습니까? 마리아가 울고 마리아를 따라온 유대인들도 같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35절의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는 말씀대로 예수님도 함께 우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가 울고 유대인들이 우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데 도대체 예수님은 왜 우셨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는 마리아와 같은 것이었겠습니까? 마리아는 오라비의 죽음이 슬퍼서 우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그러한 마리아가 불쌍히 여겨져서 울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우셨을까요? 유대인들처럼 마리아가 불쌍해서 아니면 나사로의 죽음이 슬퍼서 우셨을까요?
사실 따지고 보면 마리아와 유대인들의 울음의 원인은 예수님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을 고칠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런데 일부러 늦게 오셔서 나사로가 죽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울음의 원인은 예수님에게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모르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는 무지의 결과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36절에 보면 예수님이 우시는 것을 본 사람들이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이 나사로를 많이 사랑했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사랑하지 않았다는 뜻입니까? 이것은 뒤의 말로 알 수 있는데 37절에 보면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는 말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소경의 눈도 뜨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사로의 병쯤이야 충분히 고칠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치지 않고 죽게 내버려뒀다는 것은 예수가 나사로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냐라는 뜻의 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6절의 말은 나사로를 사랑하니까 운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자체를 의심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니까 죽게 내버려뒀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식의 생각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은 홍해도 가르시고 이스라엘에게 하늘에서 만나도 내려주신분임을 압니다. 이스라엘에게 그러한 기적으로 도우시고 그들을 살리셨으니까 나에게도 같은 기적을 베푸셔서 나를 도우시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내가 어려울 때 하나님은 돕지 않으십니다. 도우실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해결되어질 일인데 돕지 않으시는 것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의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든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라는 말을 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이 뭡니까?' 라는 반발이 앞서게도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바로 이런 사람들로 인해서 흘리시는 눈물이었습니다. 나사로가 불쌍해서도 아니고 마리아의 울음에 마음이 감동되어서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인데 그저 마지막날 다시 살 것에 대한 막연한 기대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울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시라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 자체가 부활과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사로의 죽음에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슬픔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러한 수준의 믿음에 대해 통분히 여기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마르다나 마리아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삶이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를 말하면서도 예수님으로 더불어 살아가지 않는 이것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통해서 볼 수 있는 우리들의 신앙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르다와 마리아로 인해서 우신 것처럼 바로 우리를 향해서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될 것입니다. 신앙으로 주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면서 말만 주를 말하는 것, 이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통분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구원을 나중에 멸망으로 가지 않고 영생하는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나중에 마지막 날 오라비가 다시 살 것을 안다고 말하는 마르다와 같은 수준입니다. 구원은 지금 현재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다면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나로 인해서 흘려지는 애통의 눈물이 있을 것입니다.
(67강) 11:38-44 예수님의 감사
사람들은 기적에 대해 거의 모두가 신비적이고 놀라운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즉 기적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흔히 볼 수 없는 놀라운 현상으로 보여지는 것이지 흔히 보여지는 일상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개념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일하시는 것에 대해서도 항상 특별한 것으로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상적이고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여지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과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일하심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우리 신앙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에서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려냈다는 것보다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실 때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입니다. 41절에 보면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듣기에는 단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말씀이지만 당시 상황의 순서를 생각해 볼 때 41절의 말씀은 분명 순서가 뒤바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1절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감사가 오늘날 우리들의 감사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삶의 표준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예수님 한분의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말씀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예수님 개인이 하신 기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기도의 모본으로 제시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예수님 개인의 삶과 행동으로만 인식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신자가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에게 있어서 완벽한 신자의 모습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완벽하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분이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 내시기 전에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시는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인데 우리들이 하는 감사와는 다르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들이 하는 감사와 다르다면 결국 우리들의 감사가 잘못되어 있음을 예수님의 감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면에서 우리의 감사가 예수님의 감사와 다르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는 것을 두고 하는 감사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때까지의 상황은 단지 무덤의 돌이 치워졌을 뿐입니다. 즉 무덤의 돌이 치워졌을 뿐이지 아직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또 나사로에게 나오라는 말씀을 하기도 전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다는 예수님의 말이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덤의 돌이 치워진 것을 하나님이 예수님의 말을 들으신 것으로 말씀하는 것일까요? 하지만 39절에 보면 예수님이 무리들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고 지시하신 것이지 하나님께 돌이 옮겨지기를 기도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예수님은 나사로에게 나오라고 말씀하시고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는 것을 두고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다는 말을 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거듭말하지만 우리 상식대로라면 이 말씀은 나사로가 무덤에 나온 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감사는 어떤 결과가 있을 때 그 결과를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기쁜 일이 있을 때 그 일을 두고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지 아직 이루어지지도 않을 일을 두고 미리 '하나님 감사랍니다'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로를 일으켜 나오게 하고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덤의 돌만 치워놓은 상태에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실 본문과 같은 말씀은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예수님이 신자의 표준이라면 신자는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것을 배워야 하고 옳고 그름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이 행하신 것만이 옳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행하신 것과 우리의 행함이 다르다면 그것은 우리가 잘못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잘못됨이 드러나는 말씀을 대하면서도 전혀 심각해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이 애초부터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말씀에 의한 것도 아니며, 말씀이 기준된 것도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성경일 뿐 나의 삶과는 관계없다는 식으로 살았고, 자신의 삶을 말씀에 의해서 점검하는 것도 없으며, 말씀이 나의 삶을 인도하는 푯대라는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신자라면 말씀 때문에 고민되는 것이 있어야 하고 갈등이 있어야 하고 애통함이 있어지는 것이 당연한데 그러한 모습들이 없다면 그것은 나의 삶이 말씀과 거리가 멀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감사에서 우리들의 감사가 어떠한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감사가 어떤 것인가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감사가 예수님 한 분의 감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고쳐야 하고 배워야 할 감사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의 감사가 현재 우리들과는 다른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앞서 말한대로 우리는 말씀을 기준으로 하는 삶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우리 상식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되어진 일이 있을 때 감사를 합니다. 때문에 되어진 일이 없을 때는 자연히 감사도 없게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일이 되어지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하는 습성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원하는 일이 되어지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에서 드러나 있고 확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으로,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 것으로 확증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을 보지 않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일이 되어지지 않으면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여겨 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일, 즉 내 인생에 대한 욕심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눈을 멀어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무엇 때문에 세상에 보내셨는가를 알았습니다. 죽음에 처한 자기 백성을 일으켜 무덤에서 나오게 하게 위함인 것을 알았습니다. 42절에 보면 예수님은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는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거나 예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둘러선 무리들에게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믿게 하기 위해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항상 자신의 말을 들으시는 줄을 알았다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것을 믿고 나사로를 무덤에서 나오라고 말씀하기 전에 미리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마음과 일치된 것이기 때문에 되어진 결과가 있기 전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거나 아예 외면하고 살아가는 것이 태반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일을 고집하게 되고 우리의 일을 이루어 달라고 매달리기 일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왜 세상에 있게 하시는지 그 이유와 그 마음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에 오직 내 일이 잘되면 그것으로 만족해하려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오로지 되어진 일로만 기뻐하고 감사하는 모습만 보일 뿐이며 자연히 예수님의 감사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나오라고 말씀하기 전에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되어질 결과를 미리 알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예수님의 감사가 이런 것이라면 우리는 결코 예수님과 같은 감사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되어질 결과를 미리 아는 재주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하나님께 기도해 놓고 미리 감사한다는 것도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무모한 것이며 하나님을 농락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했으면 되어진 줄로 믿고 감사하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비오기를 기도했으면 하나님이 이미 그 기도를 들으신 것으로 믿고 하나님이 비를 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하늘에 구름 한점 없더라도 우산을 가지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믿음이 아닙니다.
소위 기도라는 것 중에 십일조를 얼마를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도 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하나님께 많은 헌금을 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그 속마음은 많은 돈을 벌고 싶다는 것임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십일조를 얼마를 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으면 그 기도가 응답되기를 기다리지 말고 하나님이 들어주신 것으로 믿고 기도한대로 십일조를 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믿음을 보시고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것은 믿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고 만약 이런 것을 가르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빙자하고 믿음을 빙자한 사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결코 이런 차원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예수님의 모든 일이 하나님 안에 있음을 고백하는 차원의 감사입니다. 나사로가 나오는 것도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그 이유와 일치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믿게 하기 위한 일이고 무엇 때문에 보내셨는가를 보여주시는 일이었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 안에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사로를 나오라고 말씀하기 전에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일도 하나님 안에 있는 일입니다. 일이 내 생각대로 되어지든 되어지지 않든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하나님 안에 있는 일입니다. 이것을 마음에 두고 사는 것이 진심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내 생각을 앞세웁니다. 교회와 연관된 일이면 무조건 하나님 안에 있는 일로 여겨버립니다. 때문에 내가 원한대로 되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는 일 중 그 어느것 하나도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이 없습니다. 어떤 결과로 드러나듯 우리에게 유익되지 않는 일은 없습니다. 모든 일이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 되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믿음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은 무리들의 믿음을 위해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 일하십니다. 때문에 신자는 어느 순간도 어떤 부분도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 있거나 하나님의 계획에서 이탈된 인생이 없습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물론 이런 이유로 인생이 고통스러울 수는 있습니다. 신앙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잘라내실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아프고 고통이 된다 할지라도 그런 교정을 통해서 나의 마음이 비워지고 대신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 살아가는 신자의 인생이기 때문에 신자의 감사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일이 되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믿으십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일은 분명 여러분의 신앙의 유익으로 열매맺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기에 신자는 되어질 모든 일이 우리의 신앙적 유익으로 맺어질 것으로 알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감사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신자의 감사입니다. 신자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되어 있음을 다시 한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68강) 11:45-53 기적과 진리
보물은 보물의 가치를 알아보고 보물로 여기는 사람에게 보물이지 보물을 모르고 하찮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보물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진리에 대해서도 같습니다. 진리란 진리의 귀함을 알아보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진리일 뿐 진리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결코 진리일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찮은 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귀한 보물로 착각을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귀한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진리가 아닌 것을 귀한 진리인 것처럼 여기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진리인데도 불구하고 소홀히 여기기도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문제에서 이런 잘못됨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신자의 믿음에 있어서 크게 잘못된 것 중 하나는 믿음을 귀하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을 받은 것인지를 마음 깊이 느끼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별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물을 보물이라고 말하면서도 팽개치고 보물로 여기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저 옆에서 '이것은 보물이다'라고 말하니까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가지고 있으려고 하는 수준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혹 이런 잘못됨에 있지 않은지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돌을 치우고 '나사로야 나오라'는 말씀으로 부르십니다. 그러자 죽어있던 나사로가 수족에 베를 동인 채로 무덤에서 걸어 나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옛날 이야기로만 듣지 마시고 이 기적을 실제 목격을 하고 있고 체험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기적에 대한 우리들의 사고방식 가운데 우리들의 착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설사 우리가 기적을 목격했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놀라운 기적을 하나만 보여줘도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의심없이 믿겠는데 기적같은 기적을 전혀 보지 못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증거물을 찾지를 못하겠다는 생각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47-48절에 보면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죽어서 무덤에서 썩고 냄새가 나는 나사로 일으켜 나오게 하셨다는 것을 듣고도 그런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것을 걱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만 더욱 굳어질 뿐이었습니다.
인간은 기적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감히 인간이 행할 수 없는 기적을 들었으면서도 그 기적을 행하시는 분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로 인해서 방해가 될 수 있는 자기들의 지위를 굳건히 지킬 수 있을 것인가만 연구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었다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리치는 그분이 죽은 자를 말씀으로 무덤에서 나오게 하셨다는 것을 들었다면 '우리가 죽이려고 하는 예수라는 저 사람이 과연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인가?'를 생각해야 하고 그것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옳은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여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 행하는 것은 아닌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을 몰라보고 죽이려고 하는 엄청난 죄의 길로 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것은 분명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기적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이미 선포한 것이고 보여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인간이 행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이미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님을 증거하셨는데, 그것으로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분이라는 것이 증거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것을 걱정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들에게는 놀라운 기적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감히 사람이 할 수 없는 기적을 보이셨는데도 '우리가 죽이려고 하는 저 예수라는 자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도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다만 죽여 버리면 많은 사람이 예수를 좇는 것을 막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유대인 사회안에서의 자신들 지위 또한 굳건히 지킬 수가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리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태도가 어떤 것인가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말씀이 전파되는 환경을 살아갑니다. 말씀을 듣고 또 듣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따라 자신을 살피는 것이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혹 말씀을 잘못 아는 것으로 인해서 말씀과 다르게 사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음으로써 보여지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말을 하면 따분해 합니다. 다 아는 사실을 또 반복한다고 하면서 지루해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면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을 말한다고 하면서 마치 자기를 무시하는 말인 듯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말하면 유치원생에게나 할 유치한 말이고, 윤리와 도덕에 대해서 얘기하면 자신들의 인격 향상을 위해서 필요한 말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고자 하고 진리를 알고 진리로 살기를 소원하는 신자라면 그리스도말고 나눌 이야기가 뭐겠습니까?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 무엇인가?' 이런 얘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어야 합니까?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오직 자신들의 위치를 위협하는 적이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에서도 예수님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기적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만 보일 뿐입니다. 이들의 관심은 진리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들의 권위와 위치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자기 인생에 대한 욕심이 결국 기적에서 생명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목적과 욕심이 있는 인생을 고집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진리들이 나를 망치는 적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말씀을 보면서도 그리스도가 보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과 자비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축복이 보일 뿐입니다.
때문에 아직까지 자기 목적과 욕심을 버리지 못한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놀라운 것은 지금 이시간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는자로 이 자리에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고집하고 포기하지 못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믿고자 하고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불씨가 살아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고 놀라운 기적입니다.
여러분이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모닥불 위에 물을 계속 붓고 있는데도 불씨가 죽지 않고 살아있습니다. 그 불씨로 인해서 물이 부어지는데도 계속 불이 붙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런 경우와 같습니다. 사실 우리 스스로는 믿음의 불씨를 꺼뜨리는 식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예수보다는 세상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고 나의 욕심을 내 인생을 살아가려고 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예수님에 대한 불씨가 꺼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인 것입니다. 이 기적으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 자리에 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내 스스로 교회를 다니고 내 뜻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봐도 그 기적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보고 기적을 체험한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고 높이는 도구로 이용해 버립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수준이기 때문에 지금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이 마치 우리들이 스스로 예수님을 찾는 것처럼 여겨서는 안됩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기적을 봤다고 해도 그것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도 나사로가 살아난 기적보다 더한 기적안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믿는 자로 사는 것은 참으로 귀한 축복안에 있는 것입니다.
(69강) 12:1-8 마리아의 향유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이 병든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려 찾아가신 것은 나사로의 죽음을 이용해서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가르치시겠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의해서 무덤에서 걸어나오는 나사로를 통해서 예수님은 죽어서 무덤에 있는 우리를 일으키시고 나오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임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었듯이 세상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이러한 무덤에서 우리를 일으키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분이 곧 예수님이라는 것을 나사로의 기적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인생의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무덤이라는 인간의 운명을 보고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에서 일으키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두고 생각할 때만 예수님이 유일한 희망으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지막을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보다 귀한 것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는 그 무엇도 아까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본문 이야기는 11장의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후에 다른 곳으로 가셨다가 다시 유월절 엿새 전에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에 오십니다. 그러니 그 동네가 예수님을 얼마나 환영하겠습니까? 그래서 2절에 보면 예수님을 위해서 잔치까지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는 말씀을 보면 나사로가 예수님을 위해서 잔치하는 그 자리에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나사로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바로 무덤입니다. 무덤에서 썩어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나사로의 본래 자리입니다. 그러한 그가 지금 살아서 예수님을 위해 잔치하는 자리에 예수님과 함께 앉아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에베소서 2:5-6절에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나사로가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는 그 모습이 바로 이 말씀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신자가 예수와 함께 하늘에 앉힌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기에 그것은 이루어진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그때가 아직 오직 않았을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사로는 바로 예수안에서 신자에게 되어질 일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덤에 있을 자가 예수와 함께 잔치 자리에 앉아있는 것, 이것이 신자에게 주어질 복이며 영광이기에 신자는 이것을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희망으로 삼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막연하게 예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진심으로 귀한 분이기에 보여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아깝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본 가룟유다가 시비를 겁니다. 왜 그것을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마리아가 부은 향유는 삼백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이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마리아가 부은 향유는 상당한 값어치가 있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유다의 말대로 예수님의 발에 부어서 허비해 버리는 것보다는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더 실리적이지 않겠습니까? 사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행위를 두고 어떤 것이 더 의미있고 가치있는 행위인가를 따지기도 하지 않습니까?
비록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으니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것보다 더 가치있다는 생각을 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예수님이 안계셔서 예수님의 발에 부을 수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과연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7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을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관해서 말씀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관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나서 예수님과 함께 앉아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실 일은 우리를 죽음에서 일으키시는 것임을 보여주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에게는 소중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세상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마리아의 행위인 것입니다. 마 26:13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행동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파할 때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그 행위까지 함께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처럼 향유를 부을 것을 가르치라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도 안계시는 지금 어디에 누구에게 향유를 부어야 합니까? 마리아가 보여준 행동은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이 향유보다 더 귀하고 가치있는 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마리아의 행동이 보여주는 것은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키신 예수님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7절에서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장차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 절대로 헛된 일이 아니라 무덤에 있는 사랑하는 자기 백성을 살리시기 위해서 죽으시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무덤에 있는 비참한 자로 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귀하고 소중한 것은 마리아의 행동을 보고 배우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말한 마태복음에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마리아의 행동도 같이 전하라고 하시는 것은 마리아가 행한 대로 할 것을 가르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이 사망에 있는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가를 가르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심을 감사합니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살아가는 삶이 그 무엇도다 예수님을 가장 소중히 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예수 하면서 돈을 더 아까워한다면 그것은 진실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룟유다는 마리아에게 그것을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나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지 않은 것을 나무랬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진심으로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돈이 아까워서 한 말이었습니다. 6절에 보면 유다는 돈 궤를 맡은 자로서 거기 넣은 것을 훔쳐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유다를 도적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단순한 공금횡령으로 보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분명 지금 우리는 유다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유다가 돈 궤를 맡았다는 것은 유다에게 있는 돈이 자기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줍니다. 즉 유다에게 있는 돈이라고 해서 유다의 소유가 아니라 단지 맡은 돈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우리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돈 궤를 맡은 자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에게는 돈 궤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이 그 궤에 돈을 넣어주십니다. 얼마가 되었든 하나님이 넣어주신 것을 여러분이 맡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돈 궤에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자신만 보인다면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하기보다는 돈을 위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내 소유이기 때문에 내가 지켜야 한다는 마음만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 할지라도 돈이 아까울 것입니다. 내 돈이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마리아의 행위에서 예수님을 보기보다는 돈을 봤습니다. 평소 돈을 더 소중히 한 마음이었기 때문에 돈을 훔쳤던 것이고 그런 마음이기 때문에 향유가 허비되는 것만 봤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분은 예수님입니다. 돈이 우리를 무덤에서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를 사망에서 일으키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돈을 보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예수님보다 돈을 더 소중히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신자가 돈이 있든 없든 그리스도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가장 소중하고 귀한 분임을 보여야 할자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어서 예수님으로 기뻐하고 돈이 많다고 해도 돈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귀한분임을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아까울 것이 없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비싼 향유를 소유하고 있다는 기쁨보다는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향유를 부은 행위로 보여준 것처럼 돈을 가지고 있는 기쁨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기쁨을 보여줘야 할 사람이 신자인 것입니다.
마리아가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긴 행위에서도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었는가가 보여집니다. 여자에게 머리털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간에게서 가장 낮다고 할 수 있는 발을 씻기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낮은 자이고 반면에 예수님이 얼마나 높으신 분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시고 과연 지금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70강) 12:9-19 나귀타신 예수님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을 한다면 분명 여러분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답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로 오셨다고 마태복음에서 밝히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면 그 외에 다른 목적은 없습니까? 즉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목적말고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오신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성공한 인생이 되게 하기 위한 목적이 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성경에서 그러한 말씀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사실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육신의 문제를 도와주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그 어떤 내용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로 영의 문제, 즉 구원의 문제에만 관심을 두고 예수님을 찾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우리가 예수님을 찾는 목적이 일치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그 목적안에서만 일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예수님이 오신 목적에서 벗어난 다른 이유로 예수님을 찾는다면 결국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예수님에 대해 실망하게 될 뿐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내용입니다. 12절을 보면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명절은 '유월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온 무리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소리 높여 외칩니다. 이것을 보면 이들은 예수님을 반기는 정도가 아니라 열렬한 환영을 한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월드컵에서 4강을 한 국가대표 축구선수들과 감독인 히딩크가 카퍼레이드를 할 때 그들을 '영웅'으로 떠받들면서 환영을 하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는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시 그들에게는 영웅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호산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호산나라는 것은 '지금 우리를 구원해 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호산나를 예수님을 찬양하는 용어로 오해를 합니다. 그래서 교회 성가대의 이름에 '호산나'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호산나라는 용어가 '예수님을 찬양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 달라'는 의미임을 생각해 본다면 이들이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는 이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구세주로 본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핍박받고 억압받는 자신들을 구원해줄 메시아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능히 그럴만한 능력을 목격했습니다. 오병이어 이적을 행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들은 '이분이야말로 우리를 핍박에서 구원해줄 메시아로 오신 분이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그동안 핍박받아온 눈물의 세월이 끝나고 이제는 모든 나라의 중심에 굳게 설 이스라엘을 꿈꿨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영웅처럼 환영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9절에 보면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고 말합니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예수님만 보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를 보면서 이들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보면서 자신들이 죽어야 할 몸이고, 그러한 자신들을 살리실 분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임을 생각하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이들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을 것이고, 그러한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경외의 시각으로 봤을 것입니다. 능력이 있는 분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에서 자신들의 해방을 꿈꿨던 것입니다.
11절에도 보면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고 말합니다.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를 보면서 예수님의 신기한 능력을 믿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오시는 예수님을 '호산나'라고 외치면서 열렬히 환영을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도 살리시는 그 놀라운 능력으로 자신들을 이방나라의 압제로부터 구원해주실 분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기적과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에 반해서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열렬히 예수님을 환영한 무리들이 결국 예수님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요 19:12절에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환영했던 그 무리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왜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돌변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무너진 것에 대한 분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자신들의 구원을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능히 자신들의 기대를 이뤄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눈에 비췬 예수님은 붙들려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의 위기에 처할 정도로 맥없고 나약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또 자신들이 메시아로 여겼던 사람이, 소위 하나님이 보냈다고 하는 그러한 자가 죽어 가는 데도 하늘에서는 전혀 예수님을 구해줄 기미가 없습니다. 그저 나약하기 짝이 없는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이 자기들을 구원해줄 가능성은 전혀 없음을 본 것입니다. 그러자 한순간 예수님은 전혀 쓸모 없는 분으로 전락 되버립니다. 자신들이 기대한 것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예수이기에 예수님을 믿어야 할 이유도, 의지해야 할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버려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본문을 대하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유대인은 예수님을 배신했지만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을 배신하지 말자'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본문은 '우리는 유대인처럼 하지 말자'라는 각오와 교훈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우린 본문에서 유대인이 예수님을 환영했다가 버려버린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 혹 그러한 잘못된 모습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은 아닌가 살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가졌던 잘못된 기대가 혹 우리들에게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보면서 이적의 의미는 생각하지 못하고 이적을 행하는 그 능력만 선호했습니다. 이적을 행하는 그 능력이 자기들에게도 도움이 되어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신 것은 능력을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었습니다. 오병이어 이적을 행하시면서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심을 보이시고자 하셨고,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시면서 진심으로 소경된 것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기적 하나하나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왜 세상에 오셔야만 했는가를 암시하는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표적을 표적으로 보지 못하고 자기들의 육신에 도움이 되어줄 예수님으로 기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곧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농사용으로는 말을 키울 수가 있지만 전쟁용으로는 키우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힘으로 살아가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을 위해서 말을 기른다는 것은 스스로의 힘을 기르겠다는 의도가 되는 것이고 이것이 곧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시 20:7절에 보면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병거, 말을 의지하는 나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나라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귀, 그것도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나귀는 전쟁용이 아닙니다. 농사지을 때나 물건을 실어 나르는 용도로 쓰는 동물입니다. 더군다나 나귀 새끼라면 그러한 용도로도 쓸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힘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을 타고 오신다면 힘의 상징인 늠름한 장군을 연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힘과는 거리가 먼 나약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명백히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힘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서 약자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다만 자신들의 구원을 기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대는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달랐습니다. 애당초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구원해주기 위한 목적을 갖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잘못된 기대를 가짐으로써 결국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쓸모 없는 분으로 여기고 버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으로 감사하고 기뻐하십니까? 과연 그것이 전부이십니까? 혹 그것말고 또 다른 기대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나를 도와서 육신의 일을 좀 편안하게 해줬으면 하는 기대는 없습니까? 십자가가 십자가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과 같은 다른 기대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버리는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만 있는 십자가만 아니라 돈이 포함되어 있고, 형통함이 담겨 있는 십자가 아닌 십자가를 기대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힘을 주기 위해서 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늘의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여기에만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71강) 12:20-24 한 알의 밀이 죽으므로
본문에서 유명한 말은 24절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 구절을 대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예수님이 희생에 대해서 가르친다고 생각합니다. 즉 '예수님이 희생하신 삶을 산 것처럼 신자도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에 대한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알의 밀이 죽으므로 많은 열매라는 결과를 맺은 것처럼 신자가 희생하는 삶을 살 때 그 희생으로 말미암아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20절을 보면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명절은 '유월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유월절에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빌립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뵙고 싶다는 청을 합니다. 그러자 빌립이 그 사실을 안드레에게 말하고 다시 안드레와 빌립이 함께 예수님을 찾아가서 헬라인 몇이 예수님을 뵙기를 원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23절)라는 답을 하십니다. 예수님을 뵙고 싶다는 청에 대해서 '만나겠다'라든가 아니면 '만나지 않겠다'라는 답이면 족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상관이 없는 듯한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는 답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보면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것과 헬라인이 예수님을 뵙기를 청하는 것이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처럼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음을 언급하신 후에 24절의 한 알의 밀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24절의 말씀이 있게 된 배경을 생각해 보면 24절의 말씀을 신자에게 희생을 가르치는 교훈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희생하는 삶에 대해서 가르친다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라 본문의 내용이 희생하는 삶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혹 예수님이 산상수훈과 같은 상황처럼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설교를 하는 것이라면 24절의 내용이 희생에 대해서 교훈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상황은 설교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교훈적인 의미로 본문을 이해하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만약 희생의 삶에 대해서 교훈하는 것으로 끝나버린다면 헬라인 몇이 예수님을 뵙고 싶다는 청을 하고, 그에 대한 답으로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묻혀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예수님을 뵙기를 청하는 헬라인의 요구에 대해 왜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먼저 요한복음에는 '때'에 대한 말씀이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맨 먼저 '때'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2:4)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의 상황적 배경은 잘 아실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기적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님의 모친인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2:4절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 후에 항아리에 물을 붓게 하시고 그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예수님의 때는 십자가의 죽으심을 의미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포도주가 떨어져서 난처함에 처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때를 언급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난처한 상황을 해결해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시고는 포도주를 만들어 주신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이것은 물이 포도주가 된 기적이 곧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 때와 연관된 것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포도주가 떨어진 난처한 상황을 해결해주기 위해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때가 이르렀을 때 있게 될 기적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기적이 곧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때가 되었을 때 물이 포도주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2장의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 뒤에 3장에서 니고데모와의 거듭남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인간이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태어나게 될 것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 역시 예수님의 때가 이르렀을 때 이루어질 일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때가 이르렀을 때, 즉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서 이 땅에 성령의 역사가 있게 되고 그로 인해서 죄인된 자의 새롭게 태어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시는 기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물이 포도주가 된 것은 쓸모 없는 존재가 쓸모 있는 존재로 변화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은 물대로 포도주는 포도주대로 쓸모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이 흔하다는 것 때문에 포도주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세상은 물없이 존재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물이 포도주가 된 것은 가치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되어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진다는 것이 가치적으로 변화되어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새롭게 되어짐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가나혼인잔치에서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하신 예수님이 본문에서는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가나혼인잔치의 이야기와도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가나혼인잔치에서 말씀하신 '내 때'는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헬라인이 예수님을 뵙기를 청하는 상황에서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되었음을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인자의 영광은 헬라인, 곧 이방인까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2:11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으로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을 행하심으로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내셨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새롭게 된 포도주가 예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신 것은 죽어야 할 자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거듭나게 되고 하늘의 생명을 얻은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임을 보여주신 기적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때가 되면 그러한 기적이 이루어질 것이고, 예수님은 그 기적으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위대하심은 성도로서 증거됩니다. 하늘의 생명을 얻은 성도가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보여주고 증거하는 증거물로 존재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영광은 새롭게 되어진 성도로써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으며 생명 없는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한 위대한 죽음이었다는 것이 세상에 존재한 성도로서 증거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도 되어진 것은 단순히 나를 구원하시겠다는 목적때문이 아니라 너를 새롭게 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시겠다는 예수님의 거룩한 뜻이 담겨 있음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서 많은 자가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를 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내게 되고 그것으로 예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이 예수님을 뵙기를 원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예수님을 뵙기를 원하는 상황이 구원의 빛이 이방인에게까지 이르러 온 세상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때는 그리스도의 존귀함이 드러나는 때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새롭게 됨을 입은 성도를 통해서 증거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되어진 성도들은 오직 그리스도만 영화롭게 하고 존귀한 분으로 여기고 그분만을 섬기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나라입니다.
24절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말씀은 곧 이것을 의미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희생할 것을 가르치는 교훈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많은 열매, 즉 하늘의 생명을 얻은 새롭게 된 자들이 있게 될 것임을 의미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의 죽음으로 맺어진 열매이기에 그들은 오직 한 알의 밀만을 바라보며 감사할 뿐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자랑하기보다는 한 알의 밀을 자랑하고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광의 나라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본분은 그리스도만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맺어진 그리스도의 열매로서 그리스도가 흘리신 보혈의 피를 자랑하고 감사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영광이 돌려지는 것을 기뻐하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는 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한 삶을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주어진 하늘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그 생명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되어진 하늘의 생명이 얼마나 귀한가를 잊지 아니하며 그 생명이 주어진 자로 산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의 본분을 잊지 마시고 날마다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분만을 따르기에 힘쓰심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삶이 되길 바랍니다.
(72강) 12:25-26 자기 생명과 예수님
사람에게는 누구나 무엇인가를 자기 삶의 으뜸으로 삼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돈이나 권력, 혹은 자기 체면이나 명예, 혹은 출세 아니면 자존심 등등 비록 무의식적이라 할지라도 사실상 자기 삶에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어떤 것이 있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은 자신을 높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질, 또는 자신의 이름, 이처럼 자신을 높여주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25-26절)는 말씀을 하십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에게 자기 생명을 사랑하면 잃어버릴 것이고 반대로 미워하면 영생하도록 보존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사람은 자기 생명을 잃어버리기보다는 영생하도록 보존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자기 생명을 잃지 않고 보존하기 위해서 돈이나 권력 등등을 사랑하고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즉 사람들은 세상에서 힘이 되는 것을 소유함으로써 자기 생명의 가치가 향상되고 지켜지고 보존된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자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자기 생명을 미워해야 합니다. 즉 자기 생명에 가치를 두지 않고 포기하는 것만이 영생하도록 보존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는 것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미워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미워해야 한다면 우리 모두는 스스로 목숨을 버려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살아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도 무색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를 살게 하시고 살아있는 것을 미워하라는 이상한 말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 생명'은 단지 목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거나 무너질 때 그것으로 인해서 삶의 의미도 잃어버리게 되고 인생에 대해 낙심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게 하는 모든 것이 곧 자기 생명이라는 범주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것이 영생하도록 보존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참된 빛이시고 생명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나사로를 살리신 것이었습니다. 이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은 예수가 생명이시며 이것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성취되어질 것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즉 이 일은 사람들에게는 생명을 주는 것이지만 예수님에게는 죽음이 요구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11:25-26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곧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말씀은 생명이신 예수님이 함께 하신 곳에는 죽음이 있을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신앙이며 사람은 이 신앙으로써 예수와 함께 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서 죽음이 없는 생명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육신이 죽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육신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삶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한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신앙은 절대로 개념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생명을 포함하고 있고 이 생명은 왕성하게 활동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활동은 신자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삶에서 표현되고 현실화되는 신앙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는 것은 신자가 실천해야 할 덕목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빛이시고 참된 생명이심을 깨달은 신자에게서 보여지는 자연스런 결과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생명을 사랑할 때 예수님이 주신 하늘의 참된 생명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 생명에 가치를 두고 살아갈 때 참된 생명의 가치는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곧 잃어버리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12장에는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얘기는 자신의 전부를 포기하면서까지 예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본문의 말씀과 연관지어 볼 때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는 것은 자신의 전부를 포기하고 예수님만을 선택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생명을 사랑하고 유지하면서도 참된 생명은 잃지 않고 싶어합니다. 즉 두 마리의 토끼를 잡겠다는 욕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세상대로 살면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믿음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가치관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임을 모른 채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예수를 잘 믿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봉사와 섬김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이 세상에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든 상관없이 하나님을 섬겨주고 하나님을 위해 봉사해주면 만족하시고 기뻐하시는 분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 생명은 그대로 유지하고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믿고자하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사는 것에 대해 정당함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모른다는 것이 곧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모른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0:28절에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이라는 신분에 대한 세상의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섬김의 최고는 하나님이 죽으시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섬김에 보답하기 위해서 우리 쪽에서 뭔가 열심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섬김이라는 예수님의 행위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우리의 행위에 전혀 가치를 두지 않는 것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내 생명 대신에 희생하신 예수님의 생명을 보게 하는 것이고, 따라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기보다는 미워하는 쪽으로, 그리고 예수님의 생명을 선택한 자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의 생명을 선택한다는 것은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것, 즉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포기해도 될 정도로 예수님의 생명이 존귀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죽음은 끝을 의미합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죽으심이 곧 하나님에게 돌아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은 예수와 함께 하는 것에는 결코 끝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죽음조차도 끝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시작이기 때문에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잔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신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고 그러기에 자기 생명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5-8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예전에 자신이 자랑거리고 여기고 사랑했던 육신의 모든 조건들에 대해서 배설물로 여긴다는 말을 합니다. 바울의 이러한 말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고 미워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바울이 말했던 육신의 조건들을 자신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으로 여기고 자랑했다면 바울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육신의 모든 조건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참된 생명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육신의 조건이 길이 되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 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음은 자기 생명은 포기하게 하고 대신 예수님이 주신 참된 생명에 모든 가치를 두게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곧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할 것이 요구되기 때문에 결국 자기 생명을 버리고 예수님이 주신 생명에 감사하면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섬김은 행위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얼마나 부지런히 하느냐에 의해서 섬김이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섬김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따르는 것인데 세상의 것에 가치를 두는 것이 있다면 그것에 의해서 붙들리게 될 것이고 결국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육신에 대한 희망사항들이 살아있습니다. 혹 그 희망사항들이 탐욕이 되어서 여러분을 붙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자에게 주어진 몫은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73강) 12:27-30 아들을 영화롭게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에게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것에 대해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과연 누가 이러한 모습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자기 경험, 지식, 행위 등 자신의 모든 것들이 타인보다 뛰어남을 보여주고 싶어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기에 자기 부인이란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인데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말 그대로 '거꾸로 사는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거꾸로 사는 삶'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신자들에게 세상이 사는 것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인생을 살아가야 할 존재로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하는 것이 신자에게 주어진 삶의 몫이기 때문이며,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상태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생명을 미워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아버지가 귀하게 여기는 자는 예수님을 섬기는 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섬긴다는 것은 흔히 이해하는 것처럼 교회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기도 많이 하고 십일조 잘하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까? 과연 예수님이 세상에 사시면서 보여주셨던 것이 그런 것이었습니까?
마 16:24절에 보면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즉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나를 따라올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이며 십자가의 길이 곧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는 자기 영광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이렇게 희생하면 세상이 나를 존경하겠지'라는 계산을 가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다만 아버지의 뜻에만 순종하실 뿐이었습니다. 때문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로서는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것이 영생하도록 보존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분이 가신 길이 어떤 길이었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예수님만이 가신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붙들어서 함께 가시는 길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각자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예수님을 섬긴다고 할 수도 있고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착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 영화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삽니다. 이것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말은 십자가의 고통을 면하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성경이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27절의 말이 어찌 보면 예수님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나약하신 분이 아닙니다. 강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왜 이 때를 면하게 해 달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까? 실제로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도 나약하셨음을 보이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겠습니까? 그러나 뒤의 구절을 읽어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27절의 말씀을 하시자 하늘에서 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30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결국 초점은 제자들입니다. 이 때를 면하게 하여 달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도, 실제 십자가에 대한 예수님의 속마음을 드러내신 말씀이 아니라 무엇이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것은 자신의 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포기하고 오직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 갈등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 해도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일일 때는 갈등과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히 어려움에서 구원해 달라는 외침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 때를 면하게 하여 달라'는 기도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라는 말씀을 하시고, 28절에서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스스로의 뜻을 포기하신 것이 결국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인간에겐 누구나 자기의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이 자기 뜻대로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신자라면 세상의 모든 일이 우리의 뜻이 아니라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짐을 알 것입니다.
세상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진다는 것은, 세상을 하나님 마음대로 주무르시겠다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일이 존재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셔서 세상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자신의 뜻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28절)라는 말은 아버지의 뜻대로 일하시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택하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것을 아는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대로 그대로 일하실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으시는 것보다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심으로써 제자들에게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 되어집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영광되게 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뜻은 모두 포기하시고 오로지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으로는 되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생명을 미워하고 자신의 뜻을 포기한 자로 살기를 소원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미워하지 않고는 아들을 영화롭게 할 수 없고 아들을 섬길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 되게 하셔서 세상에 남겨두신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이 우리의 뜻, 우리의 일과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라고 믿음을 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은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도구로 쓰기 위해서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의 뜻을 포기하게 하는 힘이며, 자기를 미워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내가 구원받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만 생각한다면 아직 자기 욕심에 머물러 있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로 살고 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구원을 위한 필수 조건인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목적으로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믿음이 우리의 구원만을 지향한다면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후에 믿음의 역할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이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세상에 존재하는 그날까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면 신자는 한순간도 믿음에서 벗어난 자로 살아갈 수 없음이 자명한 것입니다.
요일 2:17절에 보면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뜻은 이 세상을 향해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정욕을 담고 있는 것이 우리의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세상도 정욕도 다 지나가는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영원히 거할 자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 밖에 없다고 선포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나가는 것에 목말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런 우리가 믿음을 선물로 받고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것에 마음을 두는 자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지나가는 것과 영원한 것 둘 다 담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는 포기한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믿음은 지나가는 것을 포기하게 합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한 자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아들을 영화롭게 할 자로 세움 받았습니다. 아들을 따라감으로써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 길에 손해가 있다고 해도 포기할 수 없는 신자의 길입니다.
(74강) 12:31-36 죽으시는 메시아
죄있는 세상에 죄없으신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이 보편적인 시각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전부라면 너무 단편적인 시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혹 여러분은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는 방법으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는가?'라는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기 위해서라는 말을 하기는 하지만 애당초 율법을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것을 요구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셨음을 생각해 본다면, 그렇게 하시지 않고 예수님도 세상에 보내시지 않고 말씀만으로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은 말씀만으로도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말씀만으로도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말씀만으로도 죄있는 자의 모든 죄를 용서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인간의 죄를 극복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전능하심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죽게 하시고 다시 부활하게 하시고 하늘로 올리우시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예수님을 믿어야 죄가 용서된다고 하느냐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서라면 굳이 아들을 죽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죽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속빈 강정이 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은 성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늘에 전쟁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타락한 천사가 하나님에게 도전한 전쟁입니다. 그 전쟁에서 악한 천사가 패하게 되고 땅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땅에는 이미 타락한 천사, 즉 사탄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어떻게 죄가 들어오고 사탄이 존재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답을 내릴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는 사탄의 세력에 의해서 타락할 것을 미리 아셨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을 지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엇이 의며 무엇이 죄인가를 확실하게 구분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의는 구원하시고 죄는 멸하시기를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서 창조된 세상에는 항상 죄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죄의 세상에 하나님은 의를 가진 자를 등장시킵니다. 그리고 죄에 의해서 의가 핍박을 받고 희생당함으로써 세상의 죄를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세상의 죄인들 속에서 '너 너는 내 백성이다' 이렇게 점찍고 무조건 그 사람들의 죄를 용서 해 버리시고 천국으로 데려가 버리신다면 구원받은 자는 있겠지만 의와 죄는 드러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고 죽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이 함께 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계시고 하나님의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고 예수님의 행동 하나하나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봤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인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배척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자 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이러한 악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세상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자신들이 기다린 메시아가 아니라고 해서 죽여 버린 것입니다.
31절에 보면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다고 말씀하는데 사실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세상에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심판이 이르렀고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죽으시면 곧 바로 그 죄를 묻고 세상을 멸망시킨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으로서 세상의 악이 드러나게 되고 결국 악으로 뭉쳐진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으로 규정되어지는 의미로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시간적인 의미로 이해함으로써 '예수님이 죽고 하늘로 가셨는데 세상은 왜 아직 멀쩡한가?'라는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을 죽인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속에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입니다.
신자는 심판이 언제 이를 것인가를 따지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자는 심판의 때를 기다리고 산다기 보다는 하나님이 맡기신 인생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에 힘쓰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판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심판 속에 있는 세상에서 신자의 본분을 잃지 않고 살아감으로써 세상과 그리스도안이라고 하는 새로운 나라가 구별됨을 증거하는 것이 신자된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임금도 쫓겨날 것입니다.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죄의 세력이 쫓겨날 때가 분명 이를 것입니다. 그 때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때이기 때문에 피할 수도 취소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세상의 권력에 마음을 둬서는 안되는 사람이고, 세상 것을 쫓아가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사라지고 쫓겨날 것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세상을 향해서 무엇이 영원한 것이고 무엇이 진리인가를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있던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3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자신이 죽어야 하는데 그 죽음이 어떤 죽음인가를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어떤 죽음입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이 죽어야 다른 죽은 생명이 살 수 있는 죽음이었습니다. 그것을 말씀하는 것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24절)는 말씀입니다.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이었던 것입니다. 그 밀알이 죽지 않으면 다만 한 알 그대로 있습니다. 즉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죽지 않고 계신다면 다만 예수님 한분이 영웅시되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것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으시면 많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에서 하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알의 밀로 인해서 맺어진 많은 열매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을 들은 무리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34절에 보면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그리스도, 즉 메시아는 영원한 분입니다. 이들은 이사야 9:6-7절의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는 말씀을 그 근거로 했는지도 모릅니다.
분명 이사야의 예언에는 하늘에서 한 아들을 이스라엘에게 주는데 그 아들로 세워진 나라가 영원토록 보존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여기서 말하는 영원을 세상에서의 영원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메시아로 오신 분이 죽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런 자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이 그들 입장이었습니다. 결국 죽으셔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을 하지 않게 되고 배척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입니다. 비록 그것이 죽어야 하는 길이라고 해도 그 길을 가심으로써 순종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5절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보다는 자신의 생명을 지키려고 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생명을 요구한다면 가차없이 거부해 버릴 것입니다. 결국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그 사람만이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에 의해서 세상에 증거된 의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증거된 의를 따라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그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75강) 12:37-43 믿는다는 것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되어진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믿음에 문제에서 어떤 오해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의지와 결심에 의해서 믿음의 여부가 결정되어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 쪽에서 믿기를 거부하면 안믿는 것이고 믿기를 결심하면 믿을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를 믿든 안믿든 그것은 내 마음에 달렸다고 하기도 하고 나중에 죽을 때 믿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언제든지 결심만 하면 믿을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죽을 때 믿어서 천국가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오늘날 교회가 하는 전도라는 것도 고쳐야 합니다. 현대 교회가 이해하는 전도라는 것은 상대방이 예수 믿기를 결심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중심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주어지는 혜택들을 설명하면 믿음이 육신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설명함으로써 자기 육신을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좋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도에 대해서 사람들은 '바빠서'라고 하기도 하고 '나중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을 자기 소관으로 여기고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답인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부르심이며 선택입니다. 우리의 결심은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인간은 스스로 예수 믿기를 결심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함을 증거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인간은 뭐든지 자신에게 도움될만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도 자기에게 도움이 되어진다고 판단될 때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항상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믿었는데 어떤 이익을 얻었는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바라보는 믿음은 처음부터 믿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믿음은 부르심이고 선택이라고 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되어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어지는 것은 없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이나 표적도 우리의 믿음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37절에 보면.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과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목격하고 체험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을 믿게 된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반대로 사람이 어느 정도로 완악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심지어 죽은 나사로를 일으키는 놀랍고 신비로운 기적을 봤으면서도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시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인간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보고도 믿지를 못하는 인간이 믿게 되었다면 그것은 죽은 자를 살린 것보다 더 엄청난 기적이 그에게 함께 한 결과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되어질 수 없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음을 깨닫고 믿을 수 없는 우리를 고쳐서 믿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위대하심에 감사해야 할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의 결과로 주어진 믿음으로 감사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38절에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이사야 53:1절의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라는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또 외쳐도 믿는 자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아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사야 선지자가 외치는 말을 듣지 않았구나'라고만 생각하고 지나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39-40절의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는 말씀을 읽어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39-40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믿지 못한 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들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그들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고침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을 막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벧후 3:9절에서는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보면 하나님은 분명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해서 고침을 받지 못하도록 눈을 멀게 하시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는 것입니까?
본문과 같은 말은 요한만 한 것이 아닙니다. 행 28:25-27절의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라는 구절을 보면 사도 바울도 요한처럼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같은 말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고침 받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것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과연 하나님이 고침 받을 것을 막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스스로 고침 받고 여호와께로 돌아올 수 있었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 때문에 구원받지 못했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 아닙니까?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은 인간으로 인해서 생명나무를 감추어 버리십니다. 그리고 천사와 화염검으로 그 길을 지키십니다. 이것은 그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 없도록 하나님이 막으시고 계심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 길을 열어주지 않으시면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완고하게 하시고 눈을 멀게 하셨다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이 그 마음을 고쳐주시고 눈을 뜨게 하지 않은 이상 스스로 깨달을 수 없고 하나님을 볼 수도 없는 존재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스스로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믿음이 없는 자로 증명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3년 간의 공생애를 통해서 증거되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3년 간 공생애를 보내셨습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증거된 것은 누구하나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3년 간의 예수님의 일이 실패하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것을 목적으로 하여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치시면서도 믿을 것을 기대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는 이렇게 말해도 믿지 않을 자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또 42-43절에 보면 다른 말을 합니다.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는 말씀을 보면 분명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 관원 중에 믿는 자가 많았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믿기는 믿되 예수님을 바리새인들 앞에서 드러나게 말하지를 못했습니다. 이유는 에수를 드러나게 말함으로써 자신들에게 출회라고 하는 불이익이 올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믿음이라는 것은, 단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맞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무엇이 더 가치있는 것인가를 판단하게 해 줍니다. 사람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더 귀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출회를 두려워 하지 않고 누구 앞에서나 예수님을 드러낼 수 있는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다고 말하기 전에 과연 사람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사는 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끊어지지 않는 사랑이 우리의 믿음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이 아닌 믿음을 두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기쁨과 기도가 끊어질 수 없습니다. 육신을 기준으로 한다면 좋을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하고 기뻐하겠지만 믿음을 두고 생각한다면 항상 감사하고 기뻐하고 믿음을 하나님께 맡기기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믿음의 가치를 아는 신자의 삶입니다.
(76강) 12:44-45 다른 하나님은 없다
신자가 하나님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그대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연스럽게 스스로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가르침 받기 전에 이미 자기 생각이 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에서 가지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하나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무지와 어둠의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에 계시되는 하나님과는 다를 수밖에 없으며 결국 신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상식과 잘못된 개념에 의해서 고안해 낸 하나님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모세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 스스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직접 만난 것과 비교하면 그림자에 불과하다 할 수 있지만 어쨌든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신 사건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도 하나님을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습니다(출 33:20).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 자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갈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의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성경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시고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예배하고 섬겨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그 기준을 정하시고 우리의 생각을 다스리며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서 표준은 신에 대한 우리 상식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고 한다면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한 대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참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사람이 주장하는 것이라고 해도, 설령 그가 신학자고 성경을 전문으로 공부한 목사라고 할지라도 성경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말씀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모두 다 어둠에 속한 사상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서 가장 명확하고 확실한 표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곧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세상에 나타내신 자기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떠나서 생각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일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말하고 있으며 자신을 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을 계시하는 존재로 세상에 오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계시되는 하나님은 사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대접받는 영웅의 모습으로 오셨고, 또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님 편을 들어서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들을 물리치셨다면 얼마든지 이해가 되고 또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으로 이해되겠지만 오히려 예수님은 약자의 모습으로 오셨고 세상에 의해 힘없이 죽어가는 모습만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러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7:46절에 보면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음을 외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볼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께는 사랑하는 독생자 아들입니다. 그러한 아들을 버리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버림받아 죽는 자신을 보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경험은 아버지로부터의 버림받음이었습니다. 우린 이것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행하신 일로 당연한 것처럼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구경하는 사람일뿐 고난과 죽음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의 사람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욥기서에 욥을 책망하는 사람으로 등장하는 욥의 세친구들은 자신들을 욥의 고난과 상관이 없는 입장에서 욥을 바라봤을 뿐이지 욥의 고난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실수를 우리가 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버림받음과 죽으심을 예수님이 당해야 하는 일로만 바라볼 뿐 예수님의 버림받으심에서 바로 나 자신의 버림받음을 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나 자신의 죽음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본 것이 된다는 것은 겉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님은 잘 아실 것입니다. 혹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님을 닮은 모습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둠에 속한 생각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몸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겉모습 또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갈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이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많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시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고 또 수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개입하시는 사건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활동과 사도들의 활동이 보일 뿐,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개입하시고 역사 하시는 것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일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서지 않아도 되었던 것입니까?
그러면 한가지 물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이 누가 일하신 결과입니까?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누가 일하신 결과입니까? 분명히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하게 역사하시고 일하셨던 것입니다. 다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보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을 봄으로써 예수님에게 일하신 하나님을 볼 수가 있고, 바로 그분이 참되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라는 것이 자신을 위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괴로움과 고통이 있을 때 해결해주시는 것을 사랑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에게서 보여지는 하나님은 아들을 버리신 분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항상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성경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예수님 편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세상은 하나님은 분명 예수님 편이 아님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자기들 상식으로는 하나님은 아들을 버리는 그런 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자기들의 손에 의해서 힘없이 죽는다는 것은 곧 그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살아나셨습니다. 자신들이 죽인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은 예수님 편이라는 것이 증거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은 버림받은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에게 버림받고 죽어야 할 자는 예수님이 아니라 오늘 우리 자신들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존재임을 예수님을 버리심으로써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버림받음을 보면서 ‘하나님 내가 버림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 나를 버리소서’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면 그가 바로 진심으로 하나님을 본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고 기뻐하시는지 하나님의 마음과 그 뜻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가진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이방인들은 버림받아 마땅하지만 자신들만은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증거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신자가 누구겠습니까? 교회 잘다니고 돈 많이 내는 사람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바로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아 마땅한 자임을 알고 겸손히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신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고백으로 하나님께 나올 것을 요구하시고 또 그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은 마치 우리가 교회를 많이 세우고 크게 부흥시키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으로 잘못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4:25절에 보면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버림받으심을 우리 범죄함을 인하여 내어줬다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심으로써 ‘이것이 너희들 운명이다’는 것을 외치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원히 사단의 권세 아래서 죽음에 처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운명인데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살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부활로 증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혼자만의 부활이 아니라 예수안에 있는 모든 신자들의 부활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안에 있는 자란 예수님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경험이 있는 자를 의미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버림받은 경험이 있을 때 버림받아 마땅한 자가 예수님의 피로써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그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받은 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구원의 길을 가는 참된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77강) 12:46-50 선지자 예수
신앙생활은 교회 다니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교회 다니는 것으로 구원에 대해 안심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구원을 꼭 교회와 연관시킵니다. 마치 교회가 없으면 구원에 지장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마음대로 교회를 세울 수 없고 교회를 다닐 수 없는 국가에 남아 있는 신자들은 구원에 지장이 있는 것입니까? 교회에 안다녀도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에 대한 바른 시각을 가지라는 의미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임을 생각하고 다른 그 무엇도 개입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든 아니면 선하다고 생각하는 예배, 기도, 헌금이든 그 무엇이든 구원과 연관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만 적당히 다녀주면 다른 것은 몰라도 구원의 문제만은 보장된다는 생각이야말로 사단의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구원의 문제가 교회를 다니는 것으로 해결되어 버린다면 자연히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교회를 다녀주면 됐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됐지, 자기를 부인하라느니 십자가를 따르라느니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외면해 버리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성경은 절대로 구원을 그러한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것 또한 교회를 다니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나는 지금 교회를 다니니까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다면 그러한 생각은 믿음에 있어서 걸림돌일 수밖에 없음을 강조 드립니다.
신자는 교회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신자는 교회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자입니다. 교회에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께 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절대 금물입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교회로 대체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신뢰하지 않으려는 버릇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보이는 것이 더 확실하다는 생각이 굳어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보이는 어떤 표적으로 나타나 주시기를 기대하고, 예수님 역시 세상에서 우리를 위해서 일하신다는 것이 보이는 어떤 증거물로 드러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런 버릇에 의해서 막연하게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보다는, 교회에 충성하고 교회를 위해서 열심을 내는 것을 더욱 확실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분명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구약에서는 선지자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결국 구약에서의 선지자 활동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자기 백성을 간섭하시고 다스리셨다는 증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말씀으로 다가오신 선지자는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 1:1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말씀이 되어서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선지자입니다. 선지자의 역할은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심판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본문 47-48절을 보면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않는다고 해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유는 예수님은 심판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서 오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삶은 말씀과 상관없이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늘에 대놓고 예수님을 욕한다고 해도 하늘에서 벼락이 치거나 벌이 내리지 않습니다. 교회가 잘못을 행해도 교회가 망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잘되는 교회도 많습니다. 이러한 결과들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잘못된 것은 벌을 받아야 하고 참된 것은 잘돼야 한다는 상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식으로 세상을 판단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혼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잘못된 것에 대해 아무리 말을 한다고 해도 눈에 보이는 증거는 다른 것입니다. 잘못되었다면, 분명 복음과 다르다면 하나님이 벌을 줘야 하고 그런 교회는 망하게 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잘되는 것을 보니까 그 교회가 옳지 않느냐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심판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보여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 49-50절에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 자의로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이르신 것을 그대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신 예수님의 마지막은 어떠했습니까? 세상이 볼 때 예수님의 마지막은 실패며 망하는 것으로 판단되어질 뿐입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선지자나 사도들의 생애 역시 세상적인 시각에서는 성공이 아니라 실패일 뿐입니다. 이처럼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증거하고 있는 확실한 증거물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증거물에 더욱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잘됐다면 '저 사람이 어떻게 했기에 저런 복을 받게 된 것인가?'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복은 그리스도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복안에 있는 것이라고 아무리 외친다고 해도 사람들의 마음에 박혀들지 않습니다. 이미 모든 관심이 세상적인 것에 쏠려있기 때문에 세상 것이 주어짐으로써 입맛을 채워주기 전에는 그리스도니, 천국이니, 영생이니 아무리 말해도 마음에 와 닿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세상을 보지 않는다 하고 그리스도를 말하고 복음을 외치다가도 힘든 삶이 지속되어질 때 자신이 말하는 복음에 대해 의심하는 경우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인내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되어진 결과를 가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되어진 결과가 좋으면 옳은 것이고 좋지 않으면 잘못된 것으로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든 교회가 부흥되어진다면 그것을 진리로 여기는 것입니다. 진리이기 때문에, 참된 복음이기 때문에 부흥이라는 좋은 결과가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현 시대에 악한 자가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은 심판의 때가 따로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 심판하실 분이 따로 계십니다. 그리고 심판의 기준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지 않았다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잘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옳은 것으로 보는 것은 아주 잘못된 시각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잘된 것이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을 세상에 두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진리로 믿어진다면 그 믿음으로 끝까지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말씀을 따라가는 나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고 득이 되는 것도 없는데, 엉터리로 사는 사람들은 잘되고 성공하는 것이 보인다고 해도 말씀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가 있음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옳고 그름은 현재의 세상에서 드러나고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마지막 때, 그것도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된 것이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기준 되어서 판단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때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누가 뭘 어떻게 했더니 복을 받았다더라'는 것에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이고 무엇이 진리며 참된 복음인가를 살피고 주님을 좇아가기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생명이다. 이것이 아니면 너희는 망한다'는 것을 외치셨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을 듣지 않아도 자신들의 삶에는 아무런 손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무시해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제멋대로 살아도 하늘은 잠잠하다는 것 때문에 말씀을 받지 않는 것에 대한 심각함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가 있고 그 때가 되면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이 교회에 대한 열심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우리의 착한 행동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이 증거하신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믿는 신자라면 모든 삶의 중심을 그리스도께 두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신 것은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을 세상에서 잘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은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는 말씀을 자기 백성들만큼은 진리로 받아들이게 하심으로써 누가 주의 백성인가를 구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세상 것으로 판단하지 말고 진리이기 때문에 좇는 삶이 되기 바랍니다.
(78강) 13:1-11 끝까지 사랑하심
1절을 보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말합니다. 여기 보면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이라는 말을 하고 계십니다. 자기 사람이라는 것은 즉 자기 사람이 아닌 자도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오시지 않았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요 3:16절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을 가지고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요 6:39절에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인데 아버지의 뜻이 뭔가 하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자들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분명 하나님은 사람을 구분하고 계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0:26절에서도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셨고 본문에서도 자기 사람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부름 받은 자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은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을 겸손으로 이해합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긴 것이기 때문에 높은 자이면서도 낮은 자를 섬기는 겸손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살아가자는 말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같은 말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 1절에서 말하는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는 가려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에 충실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에서는 자기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이 과연 어떤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내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이것이 내가 너희를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4절부터 보면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베드로의 순서가 되자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라고 하면서 사양을 합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예수님은 나의 스승이고 나는 제자인데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겨주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섬기는 것이 마땅한데 어떻게 높으신 분이 낮은 우리를 섬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세상의 질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말하는 도덕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발씻기를 사양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8절)고 말씀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9절)라는 말을 합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발만 씻는 것보다 손과 머리까지 씻으면 예수님과 더 깊은 관계가 되어지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아마 베드로는 예수님이 다른 제자들은 발만 씻어주었지만 만약 나를 손과 머리까지 씻어주신다면 저들보다 내가 더 예수님과 가까운 관계가 되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품었는지도 모릅니다. 즉 다른 제자보다 자기가 예수님께 더 가까운 관계가 되고 싶어한 것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과 더 가깝다는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한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많은 교인들이 목사에 대해서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다른 교인들보다 목사와 더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 가운데는 우리 집은 한번 심방 왔는데 저 집은 두 번 심방 갔다는 것으로도 서로 신경전을 펼친다고도 합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에게는 '목사와 가까운가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과 가까운 자로 살아가는가?'를 생각하라고 외쳐주고 싶습니다. 목사와 가깝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닌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목사를 바라보는지 답답할 뿐입니다.
현대 교인들은 쓸데없는 경쟁에 힘을 소비합니다. '나는 하는 일이 잘됐는데 너는 실패했다. 그러니 하나님이 나는 사랑하지만 너는 사랑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세상 것을 가지고 사랑을 받았는가 받지 못했는가 판단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믿음이 없는 불신앙이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무시하고 짓밟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손과 머리까지 씻어 달라는 베드로에 말에 대해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10절)는 말씀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는 말을 날마다 지은 죄를 회개하고 살아가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발만 더럽기 때문에 발만 씻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발이 더럽기 때문에 씻어준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온 몸이 깨끗하다는 말을 하십니다. 온 몸이 깨끗하다는 것은 발까지 포함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즉 발도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깨끗한 발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더러워졌기 때문에 씻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즉 세상을 사느라고 지은 죄를 회개하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0절 말씀대로 하면 목욕했다는 것은 곧 온 몸이 깨끗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대로 하자면 온 몸이 깨끗하기 때문에 발도 씻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몸이 깨끗하다고 해도 발은 씻어야 한다는 의미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과 연관이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발을 씻어주시는 것은 더러운 발을 깨끗하게 해주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예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목욕을 해서 온 몸이 깨끗하다는 것은 더러운 자와 구분하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더럽습니다. 세상에 속한 모든 자가 더러운 존재입니다. 더럽다는 것은 어디에 속한 존재인가를 두고 판단합니다. 행동이 도덕적으로 나쁘기 때문에 더럽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의 권세에 속한 자면 더러운 것이고, 주님의 권세에 속한 자면 깨끗한 것입니다. 내가 착한 일을 했기 때문에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했다는 그것만으로 더러운 존재에서 깨끗한 존재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끗하다는 것은 우리의 행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깨끗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힘쓴다는 것도 성경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깨끗함은 주님에 의해서 되어진 은총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신 예수님의 의로우신 피가 우리의 모든 더러움을 가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몸이 깨끗한 자로 목욕한자로 일컬음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깨끗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안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은 곧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더러운 우리를 불러주신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발을 씻어주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입니다. 발을 씻기시는 것은 목욕한 네가 다시 더러움에 빠지지 않도록 내가 널 지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말합니다. 왜 난데없이 유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까? 그것은 유다와 다른 제자들을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다와 다른 제자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는 것은 유다의 생각자체가 마귀적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예수도 팔아버리는 것이 마귀의 생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생각이 유다만의 것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이것이 과연 유다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유다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예수보다는 내 삶이 소중하고 내 이익을 위한 일이라면 예수님은 얼마든지 포기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사고방식이 아닙니까? 그러나 유다와 다른 점은 유다는 주님의 사랑안에 거한 자가 아니었고 다른 제자는 주님의 사랑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다와 달리 다른 제자는 항상 주님의 사랑이 그들을 붙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유다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를 붙들어서 주님의 은혜안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우리는 항상 사단의 유혹을 받고 살아갑니다. 그러한 우리를 붙드시고 지키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자로 살아가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날마다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는 주님의 끝없는 사랑인 것입니다.
내 믿음으로 산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나로 하여금 믿음으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내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자기 한 것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끝없는 사랑으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잊지 마시고 지금 여러분의 믿음에서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모든 것이 주님 덕분이라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주님의 끝없는 사랑을 믿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자신의 힘과 착함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오늘도 나를 주님안에 붙들어 놓았다는 고백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어떤 일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끝없는 사랑을 의지하기 바랍니다.
(79강) 13:4-11 발을 씻음
여러분은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됩니까? 막상 '사랑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려고 하면 그동안 많이 말했고 잘알고 있다고 여겼는데 쉽게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설명해봐야 남을 도와주는 것,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 등으로 말하는 것이 전부이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사랑도 하나님이 우리를 좋아하시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좋아하시려면 사람들 모두를 좋아해 주시는 것이 옳고 어려움에 있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옳은데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사랑하지 않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역시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구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 일을 도와주고 세상을 잘 살아가게 해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들에게 있는 욕망에서 나오는 사랑일 뿐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일이 잘될 때에는 하나님을 부르다가 실패하고 무너지면 당장 원망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사랑이냐?'고 반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일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1절을 다시 보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자기 사람을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사랑하시려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이 더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지옥 갈 사람을 건지시는 것이 사랑이라면 누구는 지옥가지 않게 하고 누구는 지옥에 가도록 버려두시는 것이 과연 사랑입니까?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에 대한 상식으로는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예수님의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 즉 끝없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 과연 끝까지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해서 결혼하여 부부로 살아가는 인간관계에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변함없이 계속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분에 대해서 사랑을 받는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고 반응하든 상관없이 처음의 사랑이 변치않고 계속되는 것이 끝없는 사랑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에게 끝없는 사랑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부부관계라해도 때때로 미움이 나오고 싸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싸우고 다시 화해하고, 미워했다가 다시 미움이 사라지고,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사랑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수시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조금만 섭섭하게 하면 미움이 나오고 싸움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한번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면 어떤 일로 인해서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있다면 우리에게 어떤 행함이 보여지든 그 행함으로 인해서 주님의 사랑이 나에게서 떠날까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악용하여 자기 멋대로 행하고 살아간다면 그것 자체로서 주님의 사랑에 거하지 아니한다는 증거가 되겠지만 어쨌든 우리의 행함 때문에 우릴 사랑하던 주님이 마음을 바꾸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을 예수님의 행위에서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그 행위란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일입니다. 이것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끝없는 사랑이 무엇인가가 밝혀지는 것입니다.
당시 풍습대로 하자면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 도리며 윤리고 질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세상 질서를 무너뜨리시고 오히려 거꾸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이처럼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것으로 사랑을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죄를 씻어준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만약 죄를 씻어준다는 의미로 발을 씻기고 계신다면 베드로가 말한대로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 씻어주시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미 목욕하여 온 몸이 깨끗한 사람은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이 말 역시 온 몸이 깨끗하지만 발만 더럽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발을 씻어주시는 것은 더러운 발을 씻어주신 의미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발을 씻으시는 것은, '네가 세상에 나가 놀다가 발이 더러워졌으니까 발을 씻어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네가 나와의 관계안에 있음으로 인해서 너는 이미 온 몸이 깨끗한 사람이다'는 것을 표현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온 몸이 깨끗하다는 것은 죄를 짓지 않은 상태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관계로 인해서 그리스도 덕분에 깨끗한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지 우리가 죄를 극복할 수 있거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 몸이 깨끗하다면 더럽지가 않다는 뜻인데, 성경이 세상을 더럽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을 죽이고 강도 짓을 하는 그런 나쁜 행위들을 하기 때문에 더러운 것입니까? 성경이 세상을 더럽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자신을 사랑하며 사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죄고 죄는 곧 더러운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세상이 더러운 것입니다.
그러면 온 몸이 깨끗하여 졌다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데 과연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 보실 때는 악한 것이고 더러운 것이라면 온 몸이 깨끗하게 된 존재라면 그런 더러움이 없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아갈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며 산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의미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온 몸이 깨끗하다는 말씀은 '너희를 깨끗하게 했으니까 이제부터는 깨끗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해라'는 것을 요구하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살면서 지은 죄를 씻어주심으로써 깨끗함을 유지하게 하겠다는 뜻도 아닌 것입니다.
온 몸이 깨끗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하심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깨끗함은 예수님의 피 흘리신 용서안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용서란 이제부터 죄를 안짓는다는 것이 아니라 있는 죄를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다 갚으셨으니까 우리의 죄에 대해서 더 이상 묻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를 이미 용서의 은혜안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용서를 구하면 용서가 되고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용서를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용서해 달라는 말조차 할 수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용서를 구해야 용서가 된다고 여기고 용서를 구하기 위한 회개라는 것을 한다면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회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는 이미 온 몸이 깨끗하게 되어진 사람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일방적인 은총입니다. 우리가 요구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이러한 은총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이미 용서라는 은총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라, 용서라는 것이 우리가 부탁하고 요청할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자란 이미 용서의 은총안에 거하고 있음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발을 씻기시는 것은 날마다 지은 죄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용서란 그리스도와의 관계안에 있음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 자체가 용서의 은총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힘으로 그리스도안에 거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깨끗함을 입은 것, 용서함을 받은 것, 모두가 예수님의 일방적인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이러한 은총에 감사하는 것뿐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이유는 '너희는 너희의 힘으로 나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만약 제자들보고 십자가에 죽으신 주를 사랑하라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으면 아마 제자들보고 예수님의 발을 씻기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은 제자들은 결코 할 수 없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주님이 이루시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연약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을 버리지를 못합니다. 만약 우리가 약하지 않은 존재라면 예수님이 깨끗케 하신 것을 우리보고 지키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내가 해줄 것은 다 했으니까 이제부터는 너희가 너희를 책임지고 살아가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우리가 지켜야 할 몫으로 남기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끝까지 책임지실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입니다.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할 것을 알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배반할 것을 알지만 그러한 제자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붙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끝없는 사랑이고 이것을 발을 씻어줌으로써 보이시는 것입니다. 물론 가룟유다는 예외입니다. 그는 택한 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게 하신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은총을 생각하며 주님만 자랑하며 사는 것이 신자의 본분인 것입니다. 주님만 자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80강) 13:12-20 서로 발을 씻기라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자기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표로써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일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자기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설령 우리의 행위가 잘못된 것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붙들어서 생명으로 이끌어 가시겠다는 주님의 의지를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구원은 확고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포기하지 않으시겠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에 신자의 구원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고 흔들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안심하고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습니까? 그것은 분명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으로부터 끝없는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신자에게서는 '이제는 안심하고 내 마음대로 살자. 내 마음대로 살아도 예수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고 구원하지 않겠는가?'라는 불순한 생각이 보여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것을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의 말씀이 바로 이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13-15절을 보면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과연 무엇으로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을 받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확인되어지는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다고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신자가 행해야 할 덕목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고 제자들에게도 이처럼 행하라고 했으니까 우리도 예수님처럼 발을 씻기는 행위를 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서로 돕고 사랑하고 희생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순히 행할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15절에서 예수님이 행함의 본을 보이셨다고 하시는 것은 신자에게 예수님과 같은 행함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엉뚱한 행함에 매달리지 말고 예수님이 행한 것 같은 그런 행함으로 살아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함에서 잘못되는 이유는 무엇을 행할 것인가를 예수님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몽땅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교회의 상식과 윤리 도덕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엉뚱한 행함에서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것은 예수님이 '행하라'고 하셨다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라는 말씀에 주의해서 과연 예수님이 무엇을 행하셨는가에 먼저 관심을 두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함은 예수님의 행함과 일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이 행함의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행함을 구제하고 봉사하고 헌금하는 것 등으로 이해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행함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기사람들에게 그러한 행함을 원하신다면 15절의 말씀대로 예수님이 먼저 그러한 행함으로 본을 보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본을 보이신 행함은 분명 그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본을 보이신 행함은 분명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처럼 우리도 서로 발을 씻겨줘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러한 행함을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제자들과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을 계속 붙들어 주심으로써 깨끗함을 입은 그리스도의 은총안에 살아가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즉 깨끗하지 않은 제자들이 그리스도로 인해서 깨끗함을 입은 은총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행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과연 이 행함이 무엇을 의미하냐는 것입니다.
서로 발을 씻긴다는 것은 어느 쪽도 우월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서로 발을 씻어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은 절대로 동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깨끗함을 입어야 할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은 처음부터 깨끗하고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서로 발을 씻기라는 것은 형제를 대할 때 '더러운 내가 예수님으로 인해 깨끗함을 입었다'는 은총을 형제의 관계에서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형제 앞에서 자신의 의와 옳음을 주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너와 다르다'는 태도가 보여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발을 씻김 받아야 할 더러운 자고 악한 자인데 오직 예수님의 은총으로 깨끗함을 입었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그가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을 입고 있음이 확인되어지는 것입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은 형제를 나와 동등하게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몸처럼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적인 기준으로 따지면 자신보다 훨씬 못하게 보여질 수 있지만 세상적인 기준을 아예 악한 것으로 보고 예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기준으로 해서 형제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지식과 소유를 떠나서 모두가 동일하게 예수님의 은총으로 깨끗함을 입은 존재임이 확인되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고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본받아 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20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서로 발을 씻기라고 말씀한 뒤에 영접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이 발을 씻기시는 본을 먼저 보이시고 예수님의 행하신 것처럼 행하게 하심으로써 뭔가 의도하신 것이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20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홀하신 후에 하늘로 가실 분입니다. 계속해서 세상에 남아서 제자들을 부르고 그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뒤에 어떻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자기 사람을 부르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그 일을 염두에 두시고 서로 발을 씻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단지 신자답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행함을 하게 함으로써 자기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나의 보낸 자'가 나옵니다. 여기서 나의 보낸 자라는 것은 예수님이 보낸 자를 말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 사람을 일컫는 것입니다. 바로 그들을 영접하는 자는 곧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고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곧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치'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나를 본자는 하나님을 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함이 하나님과 일치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를 영접한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되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신자가 말하고 행하는 것이 예수님과 일치되어질 때 가능한 것입니다. 신자가 말하고 행하는 것을 보고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시고 행하셔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나의 행하는 것과 말하는 것이 예수님과 일치하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으로부터 보냄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자기 사람을 찾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기 행함으로서 예수님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도덕과 윤리적인 행위로써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행함은 '우리가 깨끗함을 입은 것은 우리의 행위를 보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방적인 은총 덕분이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처럼, 신자는 서로 발을 씻기면서 '우리의 깨끗함은 우리의 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총으로 되어진 일이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행함과 일치되는 것이고 그것으로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어떤 경우에도 누구에 대해서도 자신의 잘남과 행위의 공로를 드러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증거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고 오히려 자신을 증거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항상 주의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행함이 있고 너는 없으니까 내가 너보다 더 낫지 않느냐?'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을 받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자신의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은총을 보여줄 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받습니다. 우리의 행위는 결코 내세울 수 있는 공로가 되지 못합니다'라는 말을 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말을 받아들이고 '예 맞습니다. 아멘'하는 사람이 있을 때 예수님은 그를 예수님을 영접한 자로, 그리고 하나님을 영접한 자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자는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사람을 부르는 일에 쓰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책임과 사명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이 있기 때문에 그 분의 뜻을 살피고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행하는 것은 그냥 행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증거하는 도구로 쓰여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81강) 13:21-30 가룟 유다
본문에 나오는 가룟 유다는 아마 기독교에서는 가장 나쁜 사람으로 치부될 것입니다. 제자가 스승을 팔았다는 것도 그렇지만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팔았다는 것만으로도 손가락질과 침뱉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자신을 가룟 유다보다 나은 사람의 위치에 두고 가룟 유다를 욕하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나는 가룟 유다가 아니다'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를 욕하는 것에 기꺼이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 대한 얘기를 하시는 것은 단지 가룟 유다를 성토하고 그의 악한 계획을 폭로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본문을 보면서 과연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 대해 말씀하시는 의도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21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마귀가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을 때 이미 그것을 아시고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팔려고 생각하지 아니한 제자들은 깨끗하고 예수를 팔려고 생각한 유다는 더럽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유다와 예수님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이 1절에서 말씀하신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희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자 제자들은 서로를 보면서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의심을 하게 됩니다(22절). 아마 그들은 '나는 분명 아닌데 과연 누구를 두고 하신 말씀인가?'라는 생각으로 이 사람 저 사람에 대해 의심하면서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나름대로 짐작해 보지 않았겠습니까?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은 분명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저마다 자신에 대해 '나는 아니다'는 확신을 가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인간의 존재성에 대해서 깊이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에 대해서도 의심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 당장 내가 그런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나도 충분히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를 팔 생각이 전혀 없지만, 알 수 없는 상황과 형편에 의해서 얼마든지 생각이 변하고 달라질 수 있는 존재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아니다' '나는 괜찮다'라는 생각이 굳어 있다 보니까 항상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이 앞서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실수와 허물을 꼬집고 드러내는 것이 앞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비판이라는 행동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대의 실수와 허물에서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비판은 상대방의 허물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보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상대방에게 있는 허물이 나에게도 있을 수 있는 허물로 여겨진다면 그를 비판하고 판단하는 것이 앞서기보다는 자신도 그와 같이 허물 많은 자임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그를 판단하고 비판할 자격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너희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서로 보며 의심하더라고 했습니다. '나는 아니다'는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에 대한 이야기 뒤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어떤 제자도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지 못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돈이든 무엇이든 자신을 위해서 예수님을 버린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 역시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자신은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장담도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상황에 빠지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우리도 지금 이 순간은 자신에 대해서 장담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굳은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여러분의 생각과 장담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의 생각과 장담은 상황과 형편에 의해서 수시로 변하고 달라지는 것이 연약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은 유다 한 사람을 책망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도 베드로 한 사람의 신앙에 대해서 언급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를 내세워서, 그리고 베드로를 내세워서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보이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보이심으로써 우리 스스로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연약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몫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담당해 주실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끝까지 사랑하심입니다.
그런데 26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예수님의 품에 안겨 있는 제자가 '주여 누구오니이까'라고 물었을 때 왜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고 말씀하시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가룟 유다의 계획을 폭로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그냥 '가룟 유다가 나를 팔 사람이다'고 말씀하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한조각을 찍어다가 주시는 행동을 하심으로써 유다를 지목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유다를 내세워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인가를 가르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 수 있는 것은 한조각을 찍어서 유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행동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찍어 주신 한조각이란 유월절에 먹는 무교병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유월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무교병을 먹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찍어주는 한 조각이란 무교병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어린양의 희생으로 살아났음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을 통해서 유월절의 의미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은 자신을 상징하는 떡을 찍어서 유다에게 주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너무 알레고리적인 해석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해석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한조각을 찍어서 준다면 그것은 '바로 네가 나를 팔 사람이다'는 선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참된 제자라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옳습니까? '예수님 내가 바로 예수님을 팔려는 악한 생각을 한 죄인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태도로 나오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것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참된 제자들에게서 보여질 수 있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30절에 보면 유다는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버립니다. 결국 유다는 네가 나를 팔 사람이라는 예수님의 선언 앞에서 피해버리는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한가지 더 재미있는 것은 27절에 보면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상한 것은 이미 2절에서 사단이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 유다의 생각은 사단에게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단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27절에서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겠습니까? 사단이 들어 있는데 또 다른 사단이 들어갔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사단이 들어갔다가 잠시 나왔는데 다시 들어갔다는 뜻입니까?
여기서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사단이라는 존재는 사람의 속에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단이 사람에게 들락날락 한다면 사단이 들어갔을 때는 죄를 짓는 악한 사람이 되고 사단이 나왔을 때는 죄를 짓지 않는 선한 사람으로 산다는 것입니까?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말입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사단의 자식으로 납니다. 사단의 자식도 하나님의 자식도 아니었다가 사단이 들어오면 사단의 자식이 되고 성령이 들어오면 하나님의 자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은 없습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입니다. 그런데 날 때부터 사단의 자식이었다가 하나님의 택한 자는 사단의 세력에서 구출되고 하나님의 자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이 들어갔다고 말하는 것은 가룟 유다의 행동이 곧 사단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면 유다의 행동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떡조각을 받고 나가버린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유다가 망한 이유는 예수님을 팔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떡조각을 주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고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가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가 죄인임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멸망받아야 할 죄인임을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유다에게 떡조각을 주시면서 '네가 날 팔 자다'고 선언하시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너희가 멸망받아야 할 죄인이다'는 것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의를 자랑한다면 그것은 유다와 같은 사단의 사고방식일 수밖에 없고, 참된 제자라면 예수님의 은혜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은혜로만 삽니다'라는 고백으로 주되시는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이 제자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30절에 유다가 나가니 밤이러라고 말하는 것도 물론 그 시간이 밤이었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지만 유다와 같은 상태가 곧 밤, 어둠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 앞에서 자신의 의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어둠인 것입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부지런히 살피면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마음에 담은 참된 제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82강) 13:31-32 인자의 영광
교회에서 많이 하는 말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배당 안에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현수막을 붙여 놓기도 하고, 기도하면서도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은 염두에 두지 않고 다만 사람들끼리 북치고 장구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다만 기독교적인 행동이라는 이유로 당연히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처럼 막연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쪽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질거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하나님이 지금 이것으로 영광을 받으시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우리쪽에서 우기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1,32절을 보면 영광이라는 말이 4번 나오고 있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었다고 하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영광을 얻으셨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과연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영광을 말할 때 영광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러분은 영광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만약 여러분께 영광된 일이 주어졌다면 그것은 여러분께 어떤 결과가 주어졌다는 뜻입니까? 세상이 이해하는 영광은 자신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입니다. 세상이 자기 이름을 높여주는 것, 그것을 영광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높여질 때 그가 속한 가문이나 집안에 영광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영광을 세상에서 높임을 받는 것, 칭송을 받는 것, 자신이 귀한 존재가 되어지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영광에 대한 잘못된 오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오해로 인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것에 대해서도 큰 오해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잘되고 내 이름이 높아지고 내가 칭찬 듣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이 세상에서 초라해지거나 업신여김을 받고 조롱을 받게 되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때문에 자연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명목에 의해서 자신이 잘돼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그러한 의도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높임 받는 것이 영광이라면 예수님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지 못한 분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지자나 사도들 역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지 못했다고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비롯하며 선지자 사도들은 결코 세상으로부터 존경을 받거나 그 이름이 높임 받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죽임을 당할 정도로 반대를 받았던 것을 볼 때 영광과는 무관한 사람들이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은 세상에서 이해하는 영광이 아닌 다른 의미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잘되고 못되는 것과 상관없고, 내가 존경받고 높임 받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세상에 속한 상식을 따라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겠다고 할 것이 아니라 과연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지는 것인지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31절을 보면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저가 나간 후에라는 것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에게서 떡조각을 받고 나가버린 일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일 후에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과연 가룟 유다가 나가버린 그 상황에서 예수님에게 영광이 되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이해한다면 신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인자의 영광이라는 말씀하시는데, 예수님이 자신을 인자로 표현하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인자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무작정 '인자=예수님'이라는 답을 내려버리면 예수님을 인자라고 말하고, 예수님의 영광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굳이 인자의 영광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인자란 예수님의 고난과 연관된 호칭입니다. 인자란 말 그대로 풀이하면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지만 그러한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지칭해서 인자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으로 오신 것 자체가 예수님에게는 고난이었기 때문에 인자란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자의 영광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영광은 고난과 연관된 것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에게서 조각을 받고 나가버립니다. 그것은 이제 예수님에게 시행되어질 것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유다에게 조각을 주시면서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가 하는 일은 예수님에게는 십자가의 고난으로 이어집니다. 그 일을 속히 하라는 것은 예수님은 고난을 피하실 의도가 전혀 없으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끝없는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고난 받으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내 한몸이 잘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반면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자의 영광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인자의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인자를 통해서 증거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자의 영광은 곧 아버지의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받고 죽으심으로써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영광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고난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는 과연 무엇을 영광으로 말합니까? 여러분은 과연 무엇에서 자기 영광을 찾습니까? 고난은 예수님의 몫으로 제쳐두고 우리는 세상에서 높임 받을 수 있는 자기 영광을 좇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신자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신자라면 주님이 무엇을 영광이라 하셨는지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내 이름이 높여지는 것에서 영광을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지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다시 말해서 흔히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생명이며 나의 전부임을 믿을 때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무엇을 받고 그것으로 영광을 누리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만이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고난을 피하려고 하고,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행함을 자랑하고, 그리고 자신의 행함으로 복을 얻고자 힘쓴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오심을 무시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결국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름을 가리는 것이 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32절에 보면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이 인자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영광을 얻으신 것으로 인하여 인자에게 영광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자의 영광은 세상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에 함께 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자의 영광도 세상에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신자는 아버지의 영광에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광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위해 살기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곧 여러분의 영광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83강) 13:33-35 새계명
유다가 예수님을 돈을 받고 제사장들에게 넘긴 사건은 유다라는 한 개인의 부도덕한 행위로만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물론 유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유다만 보지말고 유다를 통해서 보여지는 사단의 계략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다가 예수님에게서 떡 조각을 받고 나갔다고 되어 있는데, 유다의 그같은 행위에는 사단이 개입되어 있음을 본문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7절의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는 말을 보면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이 유다의 행위에 대해서 사단이 개입된 것으로 언급하는 것은, 유다 한 사람의 행위에 대해 질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 사단이 공격하는 하나의 싸움으로 언급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유다를 내세워서 예수님을 판 것이 사단의 생각이라면 과연 사단은 어떤 결과를 목적하고 예수님을 팔도록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겠습니까?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유다를 내세워서 예수님을 팔게 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까 결국 사단이 목적한 것이 이루어진 것입니까? 그러다가 다시 부활하심으로써 사단의 일이 실패한 것으로 봐야 합니까?
하지만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사단에 의해서 되어진 결과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계획되어진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진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사단이 예수님을 팔도록 한 목적이 예수님을 죽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단의 목적과 하나님의 계획이 일치되는 모순이 있게 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세상의 죄가 해결되고 생명을 얻게 되는데 사단이 그것을 도울리가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볼 때 사단은 예수님을 팔게 하고 십자가의 죽음의 위기까지 몰고 감으로써 달리 노리는 것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제시했던 것은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과, 성전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과, 세상의 모든 영광을 줄테니까 나에게 경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단이 제시한 이 세 가지 시험은 지금 세상의 사람들이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들입니다. 결국 사단은 예수님이 자신이 다스리는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도록 시험을 했던 것입니다. 먹을 것을 위해서 살아가고, 자신의 능력과 힘을 보여주고, 세상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에든지 고개를 숙일 수 있는 사고방식의 삶으로 이끌어 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세상에 오신 구세주는 세상이 원하는 모습으로 보여질 것이고, 힘있는 자가 제일이라는 것이 진리가 되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에 대해 예수님은 사람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말씀하시고, 오직 하나님만 경배한다는 말씀으로 물리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은 말씀보다는 떡이 먼저입니다. 말씀은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만 천국을 위해 말씀을 붙드는 형식을 취할 뿐입니다. 하나님께만 경배한다고 하지만 이것 역시 부처에게 절하지 않고 제사 안지내면 되는 것으로 인식해 버립니다. 그러면서 세상 것을 얻기 위해서는 도움이 되는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이 다스리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사단이 예수님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 넣어서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떤 조치를 취하겠습니까? 아마 죽지 않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자 할 것입니다. 설사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할지라도, '내가 죽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인가?'라고 반발하면서 살기 위해서 힘을 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은 죽으시는 것입니다. 사단은 그러한 예수님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 넣어서 죽음을 거부하는 메시아로 보여지기를 기대한 것입니다. 내가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선이라고 여기는 세상에서, 역시 구세주는 나를 살리고 나를 도와주는 분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죽음의 위기에서 천사를 동원하고 하늘의 권세를 동원해서 멋있게 죽음에서 탈출하는 모습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으로 하여금 구세주는 힘과 능력으로 다스리는 분으로 오해하도록 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이 목적한 것이라면, 예수님의 승리는 하나님의 뜻에 그대로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입니다. 죽으심조차도 거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복종함으로써 의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심으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나간 뒤에 영광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유다가 나간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광은 곧 십자가의 죽으심을 의미하는 것이고, 세상이 볼 때는 실패하는 것이고 불행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는 고난과 유대인들에게 붙들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것이 영광이 될 수 있는 것은, 앞에서 말한대로 사단과의 싸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고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영광도 함께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32절에 보면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아버지가 아들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니 아버지가 아들에게 영광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과연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시는 영광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부활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자에게 있어서 영광이라는 것도 절대로 이 세상의 것과는 철저하게 무관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만약 세상의 것에 영광을 얻으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사단의 생각에 불과함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안에서 영원히 부활한 자로 생명을 누리고 사는 것이 우리에게 약속되어진 최고의 영광인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 뒤에 예수님은 33절에서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곳에 올 수 없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가신 곳과 우리가 사는 곳은 우리의 힘으로는 갈 수 없는 전혀 다른 곳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의 힘으로 갈 수 없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가시는 그곳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생각을 바꾸고 삶의 방식을 바꾸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하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으로 생각하고, 목표로 삼고 평생을 추구하며 사는 것들이 예수님이 가신 곳에서는 모두 거부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가 소망하고 추구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스스로 버릴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하는 욕망의 사람들이기에 예수님이 가신 곳에는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장에 보면 보혜사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실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보내셨다는 것은 우리가 무능하기 때문인데, 사람들은 성령을 우리로 하여금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이나 주는 존재로 인식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로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스스로 길을 만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되는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34-35절을 통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34-35절을 보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은 새 계명이라고 하면 구약에는 없고 신약에만 있는 새로운 법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옛 계명은 구약, 새 계명은 신약이라고 단순히 구분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계명과 옛 계명은 내용의 변경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새 계명으로 등장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구약의 정신입니다. 구약의 중심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리고 레위기에서는 이웃을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새 계명이라고 해서 내용이 구약에 없는 새로운 계명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로마서에 보면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구약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있는 것은, 우리들의 사랑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이웃도 사랑할 수 없는 죄를 깨닫게 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사랑하라는 계명 앞에 우리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능한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옛 계명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없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끝까지 사랑하시겠다는 말씀과 연관되는 것입니다.
새 계명은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라면 그 사랑안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그것으로 내 제자인줄 알리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낸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는 사랑이 신자를 통해서 보여진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이 증거된다는 것입니다.
새 계명은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줄기가 되고 우리는 가지가 되어서 예수님으로 인해서 가지인 우리에게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구약은 스스로의 열심으로 열매를 맺고자 하였지만 신약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안에서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있을 수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죽음으로써 우리를 살리신 것이 아닙니까?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랑은 나 자신을 위해 살아가도록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를 내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의 특징입니다. 어떤 이웃이든 여러분 자신과 동일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권세도 돈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느냐? 는 것만 요구될 뿐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이웃과 자신을 다르게 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사랑은 겨우 내가 좋아하고 내 마음에 드는 사람과 친분을 쌓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불쌍하게 여기게 합니다. 나를 불쌍한 자로 볼 수 있기에 이웃도 불쌍한 자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죄에서 영원히 죽어야 할 인생이 바로 우리입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러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안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어떠한 죄도 우리를 해치 못하는 안전한 곳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대로 살아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안에 있으니 사랑이 맺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열매로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이 증거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의 전달자입니다. 그런데 내가 받은 것이 없으면 전달 할 수 없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는 일이 잘되는 것에서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지 마시고, 영원한 사망에 처한 여러분의 본질에서 은혜와 사랑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이웃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자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러분에게서 보여질 것입니다. 이것이 새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84강) 13:36-38 주님의 사랑
본문은 내용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베드로에게 있었던 유명한 사건중의 하나입니다. 아마 베드로에게 있어서 가장 후회스럽고 안타까운 사건을 꼽으라면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하여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본문은 바로 그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디론가 가실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어디로 가시는지를 묻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가겠다는 의도로 물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나의 가는 곳에 지금은 네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는 예수님의 답변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베드로는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베드로의 자신만만한 장담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예수님은 무엇을 근거로 해서 베드로의 장담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느냐는 것입니다. 단지 베드로의 평소 믿음이 좋지 않았고, 베드로의 사람됨이 큰소리만 치는 것이었기 때문에 베드로를 믿지 않아서였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사람을 구분하시고 평가하셨다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담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베드로 개인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인간 자체를 부정하시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그러한 자질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베드로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겠다고 큰소리치고 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한번 해본 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베드로는 그럴 마음이 있었고 또 자신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위험이 닥쳐와도 주님을 따라갈 자신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인간의 자신감과 의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신감이나 의지는 항상 상황이나 형편에 의해서 변화되기 마련입니다. 아무런 위험과 어려움이 없을 때는,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마음먹었다가도 막상 어려움이 닥치면 자신도 모르고 원망이 일어나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의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사랑의 능력이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우리의 것, 즉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주님의 사랑을 가진 자만이 주님을 위해서 자신을 버리고 포기하는 길로 가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베드로에게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몰랐습니다. 그저 자신의 사랑으로 주님을 따라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담을 부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따를 수 없는데 어떻게 후에는 따를 수가 있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후'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신 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이 오셔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을 가져오셨을 때 비로소 그 사랑이 신자로 하여금 주님만을 섬기게 하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까지라도 주님을 따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후에는 나의 사랑이 너희를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나를 따르게 할 것이라는 의미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베드로라는 한 개인을 책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우리가 어떤 힘에 의해서 주님을 의지하게 되고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답은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함께 하기 때문에 그 사랑에 의해서 주님을 따라가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신앙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지는 것은 인간의 힘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의 믿음이나 의지로 주님에게 순종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겠다'고 마음먹고 다짐하고 '믿겠다'고 작정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라면 능력자는 주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일 것입니다. 성경이 인간을 무능력한 자로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인간의 의지와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이나 생각은 언제나 상황과 형편에 의해서 흔들리고 변하고 바뀐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편안할 때의 우리 마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만 믿을 수 있을 것 같고,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주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은 사라져 버리고 자신의 육신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 앞에는 새계명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즉 사랑의 문제인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리기를 새계명과 옛계명의 내용이 다르지가 않다고 했습니다. 다만 다른 점은 옛계명은 인간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법을 이룰 것을 요구하고 있고 새계명은 하나님의 법을 이루신 주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옛계명은 인간의 사랑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이룰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진다는 것이 새계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는 것은, 너희들의 힘으로 사랑을 실천하라는 율법이 아니라 사랑을 행하는 자로 만들겠다는 선포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행하는 자로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피흘리고 죽으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신변에 위험이 왔을 때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주어지는 새로운 생명에 대한 소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생명과 베드로가 생각하는 생명의 질이 달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신 생명은 우리의 생명을 버리고서라도 포기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베드로가 그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 것입니다. 죽더라도 예수님을 따라가겠다는 말은 했지만 막상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와졌을 때 예수님보다 자신이 더 소중히 여겨진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에게 성령이 왔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이 이루어주신 하늘의 생명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신자는 예수님에 의해 이루어진 하늘의 생명을 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는다고 해도 하늘의 생명을 얻었다는 것보다는 못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이 말대로라면 신자라는 존재가 얼마나 부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처럼 부요한 자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신자의 부요함을 증거하지를 못합니다. 세상처럼 세상 것을 가지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만 보여집니다. 이것이 신자의 나약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라보지 않은 결과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은 네가 따라올 수 없지만 후에는 따라오리라'는 말씀은 연약한 우리에게는 참으로 위로가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안되지만 주님이 이루시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소원해야 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함께 하신 성령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할 때 그 사랑에 깊이 빠지고 매이게 될 것을 소원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이 하는 것은 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남에게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것은 억지이기 때문에 기쁨이 없고 감사가 없습니다. 누군가를 도와줬는데 그것을 몰라줄 때 섭섭함만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행한 자는 남을 도와줬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사람을 보지 않고 그리스도를 보기 때문입니다. 다만 나같은 자가 남을 돕고 섬길 수 있다는 것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있다면 '실천하라'고 소리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이 그 사람을 행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행함은 곧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알았기에 자기 행함을 의지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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