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2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목차>
6:3-15 오병이어
6:15 임금
6:16-21 바다를 걸으신 예수
6:22-27 양식
6:28-31 믿음
6:32-40 하나님의 떡
6:41-46 아버지가 이끄심으로
6:47-51 생명의 떡
6:52-63 걸림이 되는 말씀
6:64-71 영과 육
7:1-9 세상과 예수
7:10-18 자기 영광
7:19-24 율법
7:25-36 안다는 것
7:37-39 목마르거든
7:40-52 갈릴리
8:1-11 간음한 여인
8:10-11 정죄하지 않음
8:12 빛과 어두움
8:13-20 판단치 않음
8:21-30 죄가운데서 죽음
8:31-41 자유
8:42-59 유대인과 말씀
9:1-12 실로암으로
9:13-34 소경의 경험
9:24-38 소경이 보게된 것
9:39-41 본다고 하는 죄
10:1-6 목자와 양
(29강) 6:3-15 오병이어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스스로 부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기에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그리스도를 믿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교회를 다니는 삶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교회를 다니면서 그리스도를 믿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한 답부터 스스로 내려야 할 것입니다. 영생 때문입니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그리스도가 아니면 멸망으로 끝나는 것이 인간의 운명임을 알기에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믿고자 하십니까?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늘의 생명에 대한 문제 때문에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자 하신다면 그것은 참으로 크나큰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먼저 그러한 마음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리스도가 소중한 분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머물러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늘의 생명에 마음을 두고 그리스도를 좇고 있는지, 아니면 하늘의 생명을 사모하는 마음을 다른 것에 빼앗겼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스스로는 믿었다고 생각되는데 예수님이 보실 때는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이라고 붙들고 있는 것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성경을 대할 때 항상 염려하는 것은 성경을 대하기 전 이미 제 생각에 의해서 어떤 결론이 내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이 내려진 후 성경을 보게 되면 결국 자신의 생각에 굳어져 있는 결론을 정립하기 위한 방향으로 성경이 해석되고 이해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되어진 하늘의 진정한 뜻을 왜곡하고 놓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대할 때 내 생각을 버리자는 마음을 가지기도 하지만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 생각을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자고 하지만, 결국 또 내 생각에 의해서 옳고 그름을 먼저 판단해 버리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방향으로 이해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물론 저의 생각이 그리스도 앞에서 바른 생각이라면 감사할 일이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리스도께서 보시기에 잘못된 것인데도 제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제 생각을 신뢰하지 않기 위해서 힘을 씁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말씀에서 나의 입장이나 나의 생각을 옹호하기 위한 결론을 만들어 내지 않으려고 조심합니다.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내 마음 되어서 지금 나에게 말씀하여지는 말씀에 대해 바르게 깨닫기를 소원합니다. 이것이 말씀을 대하는 저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이런 말을 여러분에게 드리는 이유는 '자기 생각을 신뢰하지 말자'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자기 생각을 신뢰해 버리면 모든 것을 자기 생각에 맞추어서 해석하게 됩니다. 말씀 역시 자기 생각을 기준으로 해서 이해해 버립니다. 그럴 때 사람은 아무리 옳은 말이 들려진다고 해도 자기 생각에 틀린 것이면 결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거부해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이 '아니오' 하기 때문에 나 역시 '아니오'라고 하는 것이라면 옳은 것이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성경이라고 믿는다는 것이 커다란 함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는 자신감을 가지기보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이 시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려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가까이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본문을 대했으면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오병이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예수님의 이적입니다. 4복음서가 모두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오천 명을 먹이신 이 이적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사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이 이적은 여러분도 알고 있고 또 많이 들었던 말씀이기 때문에 혹 나름대로 이 이적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있다면 이 시간에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생각과 한 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에 대해서 예수님은 뒤에 생명의 떡과 연관지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는 생명의 떡과 연관지어 이해하기보다는 본문의 말씀 안에서만 그 의미를 이해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4복음서 모두에 기록이 되어 있지만 요한복음과 비교해 볼 때 차이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이 빌립을 시험하기 위해서 묻는 내용과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것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요한은 빌립에게 묻는 예수님의 말씀과, 오병이어가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것임을 구체적으로 말함으로써 무엇인가를 가르치고자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5-6절을 보면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큰 무리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게 하겠느냐?' 라는 질문을 하십니다.
예수님에게 오는 무리가 예수님에게 먹을 것을 달라는 요구도 하지 않았고 다만 병인들을 고치신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무엇으로 먹이겠는가는 말씀을 빌립에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6절의 말씀대로 빌립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큰 무리가 자기에게 오는 상황을 도구로 삼아서 빌립의 사고방식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빌립 한 사람의 잘못됨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빌립을 대표로 해서 모든 사람들의 잘못된 사고방식을 밝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빌립은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7절)는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이 말이 잘못된 것으로 보여집니까? 큰 무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들을 먹여야 할 문제에 대해서 묻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런 물음 앞에서 어떤 답을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이 계신데 무슨 걱정입니까?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지만 예수님이 먹이실 것을 믿습니다'는 답을 할 것이라고 여기십니까? 빌립은 믿음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안된다'는 말을 하지만 여러분은 '돈은 없어도 예수님이 하신다'는 믿음을 보일 수 있다고 장담하십니까?
그렇다면 제가 묻겠습니까? 여러분은 살아오시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많이 겪었을 것입니다. 그 어려움에는 돈이 있어야 해결되는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여러분에게 돈이 있어야 해결되는 커다란 어려움이 있다고 할 때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돈이 있어야 해결되는데 돈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십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이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할꼬' 여러분은 어떤 답을 하시겠습니까? 빌립처럼 '이 일이 해결되려면 돈이 얼마가 필요합니다'라는 답보다는 '예수님이 계신데 무슨 걱정입니까?'라는 반응을 보이면서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십니까? 여러분은 절대 그럴 수 없다는 단정을 하고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속심정이 어떨까를 솔직하게 드러내자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빌립에게 말씀하시는 그 상황이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진다고 해도 그것은 남의 일입니다. 사람은 남의 일에 대해서는 한껏 마음의 여유를 가집니다. 남의 일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믿음을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일로 다가왔을 때는 갖고 있던 여유는 사라지고 초조와 불안만이 남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빌립의 상황을 남의 일로 여기지 말고 지금 우리 자신의 일로 여기고 우리의 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5절에 보면 예수님은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어디서 떡을 사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라고 말씀하심으로 문제를 빌립과 상관있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빌립은 큰 무리를 먹어야 하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기들 수중에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계산합니다. 이러한 계산에 의해서 빌립은 자기들의 힘으로는 큰 무리를 먹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없기 때문에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빌립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빌립은 믿음이 없었다'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빌립이 믿음이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하면 된다'는 믿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빌립에게 하면 된다는 믿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러한 물음을 하신 것이라면, 굳이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오병이어까지 등장시킬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8-9절에 보면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라고 말합니다. 안드레라고 하는 제자가 무리 중에 섞여 있던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라는 말을 함으로서 안드레 역시 빌립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즉 자신이 소유한 것의 양을 가지고 일의 해결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잘것없는 것으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이적을 행하시는 것입니까? 어린아이의 것이 없으면 이적을 행하실 수 없는 것입니까?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은 빌립을 시험하는 질문을 하심으로써 빌립의 잘못된 사고방식을 드러내시고, 사람들이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기는 어린아이의 것으로 이적을 베푸심으로써 무엇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인가를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기 육신의 문제에 국한시켜서 이해하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 입장에서 모든 결론을 내립니다. 예수님이 어린아이의 것으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이적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위대한 일을 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예수님에게 바치기를 힘써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것으로 큰 일을 이루실 것이다'는 이것이 육신의 문제를 기준으로 해서 해석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작은 것으로도 큰 일을 이루시는 분이기에 비록 우리에게 있는 것이 작다 하더라도 믿음으로 하면 예수님이 큰 것으로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에서 보여지는 현상 중에 하나가 예배당을 지을 때 가진 돈이 적다고 하더라도 일단 시작하고 보자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시작하면 예수님이 다 이루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과연 본문이 그것을 말하고 있을까요? 어린아이의 것으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놀라운 이적을 보이신 예수님의 의도가 '너희들이 가진 것이 적다고 하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시작해라. 그러면 내가 도와서 큰 것을 이루게 하리라'는 욕망을 심어주기 위해서 일까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진정한 마음만 살아있다면 그러한 해석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알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겨우 우리들의 일이나 크게 이루어 주기 위해서가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천 명이란 숫자에 비해서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천 명이란 수도 남자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포함하면 훨씬 더 많은 수였음이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안드레가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라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 아니겠습니까? 수천 명이 배고픈 현실에서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것은 결코 대접받을 수 없는 것이 자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이 무시하고 하찮게 여기는 그것으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열 두 광주리나 남게 하셨던 것입니다.
35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합니다. 또 53-55절에서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는 말씀을 합니다.
이 모두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살과 피로 인해서 우리가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자신입니다. 과연 우리가 십자가에서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가 산다는 것에 대해 어떤 마음입니까? 어쩌면 우리는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예수님보다는 이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에게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26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사람들이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영생의 문제보다는 눈앞에 일어난 상황에 더 마음졸이고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삶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빌립과 안드레를 통해서 드러난 것입니다. 빌립은 예수님이 자신과 함께 하고 계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하다는 현실을 봤습니다. 빌립에게 필요한 것은 이백 데나리온의 돈이지 결코 예수님의 살과 피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 많은 사람들을 먹여서 배부르게 하려면 예수님의 살과 피보다는 돈이 필요한 것이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가 돈이 필요한 현실을 해결해주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현실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문제 해결에 있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가치 없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드레는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것을 하찮게 여겼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예수님의 살과 피에 대해서 세상이 무시하고 하찮게 여길 것임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는 세상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린 평소 십자가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피흘리신 십자가의 사건을 입에 달고 말하고, 마치 십자가가 우리의 전부이고 참으로 소중한 것이라고 떠들지만 정작 현실의 문제에 부딪혔을 때는 십자가는 사라지고 빌립처럼 문제 해결에 필요한 것이 수중에 없는 것으로 인해서 낙심하고 염려하는 것은 아닙니까?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한 현실에서 오병이어는 있으나 마나한 것이고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안드레처럼 우리 역시 현실에서 일어난 문제 해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무런 도움도 못되고 있으나 마나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바로 우리의 속마음에 빌립과 안드레의 사고방식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두가 무시하는 오병이어로 오천 명의 사람을 배부르게 먹이시고 열 두 광주리가 남게 하셨습니다. 그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장차 생명의 떡으로서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실 것이지만 세상은 그것을 하찮게 여길 것임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에게 가는 것만이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세상에 주리고 세상에 목말라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고 다시 사심이 철저히 무시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하는 말을 하지만 세상의 현실을 보고 그 해결에 급급해 할 때 십자가의 은혜는 무시되고 반면에 세상의 것을 필요로 하고 목말라 할 것입니다.
세상의 현실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아니라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능력의 예수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러한 예수를 따릅니다. 자기 육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예수를 대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을 거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결코 그것을 믿음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믿음 아닌 것을 믿음으로 붙들고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린 대로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병자를 고치신 예수를 따르는 수준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얻기 위해서 열심을 내고 충성을 한다고 설치지만, 그래서 스스로 생각할 때 자신이 믿음이 있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믿음도 모르고 사랑도 모르면서 단지 열심히 한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은 믿었고 사랑했는지는 모르지만 구원은 그와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는 말씀을 합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실 때가 마침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음을 말합니다. '마침'이라는 것은 유월절과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시는 것이 무관하지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장자 재앙때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인해서 살게 되고 애굽 나온 것을 기념하는 것임을 잘 알 것입니다.
장자 재앙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해서 무조건 살려준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든 애굽이든 구분 없이 오직 어린양의 피를 바른 자만 살리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심판의 대상이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으로 인식할 때 어린양의 피는 곧 생명이지 않겠습니까? 어린양의 피흘림이 자신에게는 생명으로 다가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누구든 자신을 심판의 대상으로 보게 되고,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흘리심이 생명이 되심을 알고 감사한다면 그가 바로 유월절을 지키는 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현실을 벗어나서, 다만 눈앞에 보이는 세상 현실만을 본다면 어린양의 피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다만 돈이 필요하고 돈이 소중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우리는 과연 어떤 현실을 보고 살아가느냐 입니다. 눈앞의 현실만을 본다면 우린 언제나 돈을 필요로 하는 인생을 살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아무런 도움도 못되는 하찮은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히 우리 마음은 십자가에서 멀어질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열심히 십자가를 외치지 않겠습니까?
예배당을 짓고 주차장을 만들고 교육관을 짓는데 십자가에 피흘리신 예수님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다만 병자를 고치시고 어린아이의 것으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그것도 믿음이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으로(27절) 밖에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진심으로 있어야 하는 것은 돈도 병자를 고치는 능력도 아니라 그리스도의 살과 피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고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예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런 믿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안다면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흘리신 예수님의 살과 피는 우리 인생에서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으로 자리할 것입니다.
(30강) 6:15 임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참으로 존귀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의 존귀함을 인정하지 못하고서는 '믿음'을 언급할 수 없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하고 높인다고 자부하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속마음을 깊이 살펴봐야 하는 것은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존귀하게 여기며 높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높인다는 것은 곧 십자가에서 피흘리시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말처럼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일컬어지는 신자들에게서 높임 받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때 사실 우리는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존귀함은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단지 피가 흐르는 비참의 현장일 뿐입니다. 그러한 십자가가 존귀하다는 것은 십자가가 의미하고 있는 것이 존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십자가가 의미하는 바를 보지 못하고서는 십자가의 존귀함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높인다는 것은, 분명 말로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찬송을 부르고 율동이나 몸찬양이라는 것을 하면서 '나는 그리스도를 높입니다'라고 떠든다고 해도 그것으로 그리스도를 높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여기는가는 삶을 통해서 보여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존귀하신 분으로써 여러분의 심령에 자리하고 계신다면 그 증거는 하루하루의 삶에서 그 흔적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빌립의 답변, 그리고 어린 아이가 소지하고 있던 오병이어를 가리키면서 '이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라는 안드레의 말을 통해서 극히 현실적인 시각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 제자들의 수준이었음을 살펴봤습니다.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서 얼마의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나, 어린아이가 소지하고 있는 오병이어는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는 생각 자체가 바로 눈앞의 문제를 현실적인 시각으로만 보고 있는 그들의 자세였던 것입니다.
분명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닥친 현실적인 문제에 있어서 예수님은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고 여겼던 것이 제자들의 시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제자들 앞에서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것으로 이적을 베푸신 것은 결국 사람들에게 무시 받고 하찮게 여겨지는 것이 오히려 사람을 먹이고 배부르게 할 것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겠습니까?
십자가의 걸림돌은 십자가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아무런 도움도 못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 문제에 있어서 십자가는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으로 대접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리스도를 찾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결코 존귀한 것으로 대접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15절)는 말씀대로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삼겠다는 그들의 열심에 대해서 예수님은 산으로 피해버리십니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물론 우리는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는 그들의 의도가 잘못 되었기 때문임을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본문에 대한 이해는 끝난 것입니까? 예수님이 사람들을 피한 이유를 알았으리만큼 우리는 그들과 같은 의도로 예수님을 찾지 말자는 답을 내리면 되는 것입니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임금 삼으려고 한 사람들의 의도를 알았다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데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은 나의 왕'이라고 악을 쓰면서 노래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왕이라면 그리고 우리는 왕의 신하이며 종이라면 종으로서 왕에 대한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을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왕에 대한 종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러한 종의 자세가 여러분에게서 보여집니까? 이것이 본문을 통해서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가져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는 사람들의 의도가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들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었고,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었다 할지라도 굳이 그들을 피해서 산으로 가셔야 할 이유가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산으로 피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임금이 되어서 오병이어의 기적도 계속 베풀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메시아이심을 증거 했더라면 좀 더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그러한 생각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 우선 교회로 모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일단 교회로 모이면 복음을 들을 수가 있고, 복음을 듣다 보면 그리스도를 믿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하게 되는 것이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돈을 들고 가는 선교입니다. 일단 교회로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람들을 교회로 모을 수 있는 방법을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나쁜 생각은 아니라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그러한 것이 정당하다면 예수님은 왜 사람들을 피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은 단지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 일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먹을 것을 보고 모여든 사람들이라면 예수님을 원하기보다는 먹을 것을 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먹을 것이 있다면 모이겠지만 먹을 것이 없을 때는 모일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원하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먹을 것을 가지고 있는 예수님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시는 예수님을 원하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귀함을 안다면 그가 바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종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모아서 교인으로 만드는 교인 양성소가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만을 원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확인하고 교통하는 거룩한 모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는 돈도 먹을 것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돈을 보지 않고 모이기 때문에 돈 있는 자가 높임을 받을 수도 없고 또 높임 받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원하고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온전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보다도 돈을 원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라면 그 교회에서 높임을 받는 것은 돈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돈있는 사람이 중심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돈 없는 사람은 '나도 돈 달라'고 하면서 예수님에게 나오게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런 자들의 왕이 되기를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임금 삼으려는 사람들을 피하신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원하는 것이 아님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과연 예수님을 원하는가?'에 대해서 자문하며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단지 교회를 다니고 있고, 또 스스로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인정한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나는 떡을 보고 예수님을 원하는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원하는지의 여부는 우리의 삶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왕이라면 왕을 섬기는 종의 자세는 삶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은 주인을 위하는 사람입니다. 주인의 뜻과 주인의 일을 행하며 사는 사람이 종입니다. 그런데 만약 종이 주인에게 '나에게 이것을 해달라'고 요구한다면 그것은 결코 종의 자세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가 아무리 '주인님'이라고 불렀다고 할지라도 주인에게 자기를 위해서 뭔가 해주기를 원한다면 결국 주인을 자신의 종으로 여긴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임금 되기를 거절하고 산으로 가신 것도 이런 이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원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배고픔을 위해서 뭔가 해주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입으로는 임금이라고 하면서도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배를 위한 임금이 되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을 자신의 종으로 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예수! 이것이 예수님을 종으로 삼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을 위해 있습니다. 주인이 종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신자인 우리가 분명 그리스도의 종이고,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왕으로 존재하신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도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존재할 뿐입니다.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진정한 종입니다.
비록 자신의 형편이 배고픔이 되고 고통과 어려움에 처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왕이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쓰여지고 있는 순간임을 안다면 얼마든지 고통과 어려움에서도 주님의 뜻을 묻고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길로 나아가기를 힘쓸 것입니다. 내가 고통 당하는 것보다는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것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9:27절에 보면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상황으로 본다면 예수님이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을 오늘 본문과 비교하여 생각한다면 모순이 있지 않습니까? 본문대로 한다면 분명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오히려 임금 되기를 원치 아니하던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런데도 누가복음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자신들의 왕 됨을 원치 아니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대로 한다면 비록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의 왕이 되달라'고 외치면서 예수님을 따랐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그들의 왕을 원한 적이 없음이 됩니다. 그러면 무엇을 원했을까요? 왕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해서 떡을 만들어 줄 종을 원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예수님과 신자의 관계가 이런 식으로 전락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이라고 말하고 왕이라고 하면서도 종이 왕에게 나와서 '제가 무엇을 할까요?'라고 물으며 왕의 명령을 기다리는 자세가 전혀 없습니다. 다만 '날 위해서 이것을 해달라'는 요구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예수는 나의 왕'이라고 외치면서 노래 부르고 몸을 흔들면서 자신이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애당초 예수님을 왕으로 원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원수'라는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오직 한가지 마음으로 예수님을 원하십니까? 오병이어 이적을 행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인 예수가 아니고, 병자들을 고치신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서 피흘리신 예수님을 원하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여러분이 살아가는 현실의 삶에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안되고 힘이 안되는데도 예수님을 원하십니까? 이것은 여러분의 삶에 어떤 상황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존귀히 여기며 살기를 포기하지 않겠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피하신 것은 사람들의 요구대로 떡이나 만들어서 육신의 배를 불리게 하는 종으로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왕이라고 하면서도 어쩌면 우리가 말하는 것을 잘 들어주는 충직한 종을 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고 이루어줄 것만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절대로 예수님이 왕 됨을 원하는 것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결국 마지막에 예수님의 원수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종의 자세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진심으로 종의 자세가 여러분에게 있는지 살피십시오. 입으로는 예수님을 왕이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예수님을 우리의 종의 자리로 끌어내리고 우리가 왕의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닌지 살피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왕의 자리로, 우리는 왕을 섬기고 왕을 위하는 종의 자리에 돌아와야 합니다. 종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종의 자세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왕되신 예수님이 죽으라면 죽고 망해라 하면 망하는 종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이 왕 되기를 원하는 신앙인 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우리의 성공도 돈도 봐서는 안됩니다. 보인다면 우리 같은 자를 위해서 죽으신 십자가의 희생이 보여져야 하고 왕이 종을 섬기는 섬김을 봐야 합니다. 그럴 때 종된 신자는 왕의 섬김 앞에서 굴복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말하면서 십자가 앞에 굴복한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섬김을 말하면서 왕되신 예수님이 하찮은 종된 우리를 섬기는 섬김 앞에 굴복한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희생과 섬김에 굴복한 그들이 바로 종이며, 그들이 바로 예수님이 보이신 섬김과 희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섬김과 희생에 굴복하고 다스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섬김과 희생은 우리들의 힘으로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굴복한 종에게서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의의 열매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루하루를 종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이익을 기대하고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사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과연 예수님에게 순종하는 것인가?'를 묻고 되새기면서 오직 예수님이 높여지는 길로 가기를 소원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사는 종은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오직 왕이신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로 인해서 항상 맺어지는 것은 여러분의 이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의 열매이기를 바랍니다.
(31강) 6:16-21 바다를 걸으신 예수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들이 사실임을 믿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과학이나 상식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건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처럼 상식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기 때문에 '믿음이 있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음이 사실임을 믿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으며, 예수님이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 되셔서 세상에 오셨음을 믿는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은 사건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계시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계시가 되기 때문입니다.
천지 창조를 다시 예로 들어본다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계시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세상이 믿어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관계를 분명히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천지창조의 이야기에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피조물이며 따라서 창조주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피조물다움임을 천지창조를 통해서 깨닫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도 예수님이 행하신 초자연적인 이적의 사건들을 대할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과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으신 사건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이적들이 역사적으로 실제로 있었던 일이냐? 가 아니라 이 사건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냐? 입니다. 그 의미들이 우리에게 복음을 가르쳐주는 계시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것만으로는 계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으셨다는 것만으로 계시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병이어 사건 자체가 복음이 아니며 바다 위를 걸으셨다는 것 자체가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복음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의 생명과 관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결국 오병이어라는 사건 자체를 믿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며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으신 사건을 역사적인 실제 사건으로 믿는 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적에서 이적의 사건만을 볼 것이 아니라 이적의 사건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행하신 사건들 하나하나는 계시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고 사건에서 예수님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이적의 사건들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즉 사건을 사건으로만 보지말고 사건에서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바다를 걸으신 사건에서 어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까? 본문의 내용은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도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대개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다를 걸으신 사건에서 풍랑 때문에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다가오셔서 그들을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즉 세상의 풍랑에서 두려워하는 신자들에게 다가오셔서 구원해주시는 예수님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 지식이나 상식으로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20절에 보면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오셔서 두려워 말라고 하신 것으로 인해서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본문의 내용을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을 구원해주는 예수님으로 생각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결국 본문의 내용에 대한 해석은 모든 복음서가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어떠한 해석이든 예수님을 드러내면 된 것이 아니냐?'라는 말을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된다면 굳이 본문과 동일한 내용을 다른 복음서에서도 말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그 의도 역시 무시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복음서는 그 내용들이 서로 동일한 것이 많습니다. 같은 사건을 동일하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용이 같기 때문에 해석이 같아야 한다면 결국 복음서가 각기 독립되어 계시되고 있는 이유가 모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복음서를 통합해서 하나의 복음서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본문의 사건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먼저 본문을 살피기 전에 다른 복음서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말한대로 본문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비교를 해보면 마태나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육지에 계시다가 풍랑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이 다가오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파도로 인해서 제자들이 두려워하더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자를 보고 두려워했던 것이고, 그분이 예수님인 것을 알았을 때 기쁨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것으로 말합니다. 이것을 볼 때 요한복음에서는 풍랑으로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구원해 주기 위해서 찾아오신 예수님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1절을 보면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마태와 마가복음과는 다른 표현입니다. 마 14:33-34절을 보면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저희가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라는 말을 하고, 막 6:52-53절에서는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세 복음서를 서로 비교를 해보면 한 사건을 두고 각기 다른 시각에서 예수님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는 바다를 걸어오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하고 있고, 마가는 풍랑속에서 바다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통해서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는 예수님을 말하고 있는 반면에 요한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하고 예수님과 함께 한 배가 가려던 곳에 도착하게 된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요한은 우리가 가려고 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되어진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를 체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시는 대로 예수님이 임금만 된다면 자신들의 먹는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피하신 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예수님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떡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했을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심으로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보이셨습니다. 떡의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병이어의 이적의 사건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떡을 보고 있습니다. 떡을 위해서, 자신의 배부름을 위해서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피하신 것이 곧 '나는 너희가 원하는 그런 일을 위해서 온 메시아가 아니다'는 것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떡과 연관지어 생각한다면 이런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지금도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사람이 많은데 왜 예수님은 옛날처럼 오병이어의 이적을 일으키지 않는가? 옛날에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셔서 이스라엘을 먹이셨는데 왜 지금은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시지 않는가? 이런 의문이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이적이라는 사건 자체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적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를 생각하지 않고 이적이라는 신기한 사건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이적이 또 재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포기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신 것도 이스라엘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만나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는다면 만나라는 이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만나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신 8:3절에 보면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신 이유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만나를 먹으면서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를 배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병이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 이적을 베푸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만나나 오병이어 모두가 사람을 배불리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가르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오늘날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옛날과 같은 이적을 주지 않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하나님은 인간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일하신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이적도 육신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존재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오늘날 역시 육신의 문제와 연관지어서 이적을 원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의도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무너지고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건지시기 위해서 일하시고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은 예수님을 좇아서 예수님이 가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고 우리의 삶에 십자가가 의미있는 것으로 존재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이유도 목적도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를 자신의 힘으로 갈 수 없습니다. 세상은 풍랑과 파도가 있는 곳인데 그 모든 것은 자신의 힘으로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신자에게 예수님이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신자는 자신의 약함을 알기에 기쁨으로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함께 하셔서 가려던 곳에 무사히 도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위기에 빠진 제자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를 걸어서 오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기쁨으로 영접하고 예수님이 함께 한 그 배가 가려던 곳에 도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5-26절에 보면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던 무리들이 예수님을 다시 찾아오자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에 그 배부름이 좋아서 예수님을 좇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육신의 배부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님의 함께 하심은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를 가려던 곳에 도착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것이지 예수님이 함께 하시니까 우리들의 일이 잘되고 육신의 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가 가려는 곳은 신자의 힘으로는 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 어떤 선한 일을 한다고 해도 그 선으로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이처럼 천국에 대해서는 한없이 나약한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나약함을 안다면 천국에 대해서 자신의 힘을 의지할 수는 없습니다. 의지한다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안다면, 그리고 진심으로 마음에 천국을 두고 사는 신자라면 분명 기쁨으로 예수님을 영접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으로만 되어지는 것이기에, 그리고 그 사실을 알기에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함께 하심으로서 가려던 곳에 도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천국을 두고 사느냐 아니면 세상을 두고 사느냐에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세상을 마음에 두고 사는 사람들은 오병이어를 보면서 예수님이 함께 하심으로 배부름을 얻을 기대를 가집니다. 그러나 천국을 마음에 두고 사는 사람은 예수님이 함께 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갈 수 있음을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와 신자 아닌 자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떡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떡은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사람은 예수님에게서도 떡을 보게 되고 떡을 기대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천국을 보고 사는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가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나라가 천국임을 알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생명이 되는 떡은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예수님에게서 달리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피의 은혜만으로 만족하고 배부름을 얻는 것입니다. 육신이 배불러서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의 소망이 그리스도로 배부름을 얻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파도가 이는 바다에서 노를 젖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배에 오르시자 그 배는 파도와 상관없이 가려던 곳에 도착하게 됩니다. 배에 주님이 오르심으로써 파도와 상관없는 배가 된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이 세상의 파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신자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주님이 강하시기 때문에 주님으로 인하여 가려던 곳에 도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신자는 기쁨으로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일이 잘되도 기쁘고 안되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망해도 기쁘고 아픔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파도가 치는 것과 상관없이 흔들릴 수 없는 반석 위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이 모두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풍족해지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으로 배부름을 얻을 수 있다면 여러분은 세상의 것으로는 주려하지 않을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강함이고 위대함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보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십시오. 그 나라가 무엇으로 들어가는 나라인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진심으로 그 나라를 원하는가를 생각하십시오. 천국이 진심으로 여러분이 원하는 나라라면 여러분의 마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살과 피에 감사하면서 기뻐할 것입니다.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의지하면서 소망하는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으로 세상에서 승리하는 신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32강) 6:22-27 양식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인간구원'을 위해서라는 것이 지배적인 생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에게서 인간구원을 빼 버린다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무엇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요 10:10절에 보면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세상에 오신 이유에 대해서 스스로 언급하시기를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10:28절에서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이 오셔서 영생을 주신다고 하신 것을 보면 분명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구원에서 찾는 것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에게서 오직 구원만 바라본다면 과연 옳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제가 문제삼고 싶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자기 구원만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오심을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다'는 것으로 끝나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중심의 구원론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구원론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인간을 위한 구원을 이루어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라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많은 내용들이 계시되고 있는 것이 너무 복잡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오직 인간을 위한 구원이라면,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것이 구원의 전부라면 어쩌면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는 말 몇마디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지 않는가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구원이 인간 스스로 예수님을 선택하고 믿어서 되어지는 것이라면 인간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선택하고 믿도록 하기 위한 설득의 수단으로 많은 말씀을 기록해 놓았다는 생각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아는 대로 구원은 인간이 예수님을 선택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선택해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심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이처럼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는 것이라면 우리 앞에 있는 성경은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앞서 말한 대로 성경이 인간을 설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라면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이 구원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할 수 있지만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는다 해도 성경이 인간을 설득해서 예수님을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성경은 신자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것이라면, 그리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목적이라면 굳이 인간에게 성경을 주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믿게 해서 구원시키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물론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거나 성경이 신자에게 필요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오심을 인간 구원으로만 생각해 버린다면 그러한 질문들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많은 계시의 말씀을 남겨두신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이루시기 위함인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특별히 자기 백성으로 따로 구별하여 세우시고, 그들에게 믿음을 주셔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모든 일들이 단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따로 계획된 하나님의 일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택함 받은 자는 하나님의 일에 쓰이는 도구로 택함 받은 것이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자에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 백성에게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는 말씀을 합니다. 오병이어 이적을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가셨는데 그 무리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서 오게됩니다. 어찌 생각하면 예수님에 대한 열성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르기 때문이다'는 책망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때문에 배부름을 체험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에게서 배부름을 얻기 위해서 예수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우린 이 말씀을 보면서 세상 것을 구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으면 안된다는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세상 것을 구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잘못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예수님이 말씀하신 배부름이 꼭 세상 것만을 말하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까?
27절에 보면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라는 말씀을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과연 무엇을 썩는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우리의 배를 불리는 떡일까요? 아니면 돈일까요? 그러면 예수님에게서 떡이나 돈만 구하지 않는다면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피하게 되는 것입니까? 26절과 27절을 연결하여 생각해 본다면 분명 '썩는 양식'은 '배부름'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일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일한다'는 말의 의미는 육신의 노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찾아온 것을 의미한 말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서 일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단지 열심히 예수님을 찾아다녔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일하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을 찾아왔다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은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 즉 예수님을 찾는 것이 될 수 있고 어떤 것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것이 어떻게 구분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썩은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썩는 양식이 의미한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말한 대로 썩는 양식을 돈이나 재물, 또는 먹을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대개의 사람들이 무조건 선한 것 옳은 것으로 인정하는 소위 신앙행위입니다. 즉 우리가 옳은 것이라고 여기는 신앙적 행위들이 썩은 양식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나를 찾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말한 배부름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육신의 배부름만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배부름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 만족'입니다. 자기 욕구가 충족되어지는 것을 배부름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많은 사람들이 행하고 있는 신앙행위들이 결국 자기 만족을 위하고 자신의 배부름을 위하고 자기 욕구 충족을 위한 것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썩은 양식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자기 구원을 바라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역시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믿습니다. 예수님을 찾는 것 역시 자기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믿음에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설려고 애를 쓰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장차 천국에 들어가는 일에 잘못됨이 없게 하기 위해서 미리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것들이 예수님을 열심히 믿음으로서 자신이 앞날을 준비하고 나아가서 복이라고 하는 자기 배부름을 위해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의 구원이라는 배부름, 복이라고 하는 배부름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것을 썩는 양식이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스스로는 예수님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했다고 하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도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옳은 것이 아니며, 헌금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앞에서 정당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야말로 썩는 것을 위해서 일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있음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연 예수님 보시기에 무엇이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며 무엇이 영생하도록 있는 것을 위해서 일하는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구분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27절에 보면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준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인자란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27절의 말씀은 뭔가 앞뒤가 안맞는 모순이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고 말해 놓고 그 양식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줄 것이라고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차라지 '받으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는 것은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양식을 거둬들이라는 의미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이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일단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우리가 일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것을 받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일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이 주시는 양식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분명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예수님에게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에게는 그 양식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에게 있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무엇입니까?
4:34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 앞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는 잘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그와 대화를 합니다. 그리고 여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죄를 알게 하고, 자기 앞에 있는 분이 바로 메시아이며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되시는 분임을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여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전파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먹을 것을 구하러 갔던 제자들이 와서 잡수실 것을 청할 때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32절)고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당연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당시 제자들의 수준에서 자신의 배를 부르게 하게는 것은 떡, 즉 육신의 양식 외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예수님의 양식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아버지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그로 하여금 예수가 곧 그리스이심을 알게 하시는 그 일 자체가 예수님을 배부르게 하는 양식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양식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양식을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으로 배부름을 얻는 자 되게 하시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는 것은 영생의 양식을 얻기 위해서 일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을 것을 말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구원을 위해서, 자기 배부름과, 자기 만족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배부르게 하는 양식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에게는 오직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아버지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만이 양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으로 배부름을 얻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러한 양식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떡에 관심을 두고 떡을 얻기 위해서 일하는 모습만 보였습니다. 오병이어를 체험하고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도 제자들과 다를 바 없는 수준입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떡에만 관심을 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만약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우리 자신의 만족을 얻으려고 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양식을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한다면 그 사람은 항상 "하나님,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입니까?'를 물으며 살아갈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인생을 자기를 위해서 일하는 것으로 허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한 인생으로 되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히 예수님을 찾는 믿음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예수님으로 구원을 얻는 신자들이 살아가야 할 삶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주시는 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입니까? 분명 예수님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자 되게 하기 위해 양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즉 신자에게는 구원이 전부가 아니며, 구원이 마지막이 아니라 다만 새로운 삶의 시작인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을 택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자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삶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우리가 자기 구원을 중심으로 성경을 본다면 성경은 단지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만 보여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며 구원을 얻은 자로서 성경을 대한다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새롭게 하신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말씀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답게 사는 것에 관심을 둘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수준에 머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신자다움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다움은 그리스도를 좇는 것으로 증거 됩니다.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좇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벧전 2:9절에서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왕같은 제사장이 되게 하시고, 거룩한 나라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되게 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즉 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기 위한 시작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신자라면 바로 이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을 알게 하시고 어두움에서 구출하셔서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이유는 자기 구원에 만족하고 기뻐하라는 것이 아니라 신자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선전하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섬김과 희생의 덕을 입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섬김과 희생을 덕을 증거하는 자로 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을 아는 자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을 증거하는 자로 살기에 힘쓰게 됩니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을 홀로 즐기는 자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에 감사한다면,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을 힘입어 어두움에서 빛으로 구출된 존재임을 마음 깊이 깨닫고 감사한다면 자연히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삶은 우리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살아가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자신의 인생이 무엇을 위해서 존재한가를 알기에 삶의 이유와 목적을 항상 하나님에게 두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위한 삶으로 치우칠 때 '이것이 아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에게 자신의 삶을 맡길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자가 무엇을 얼마나 했느냐로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에 감사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에 감사하면서 자신보다는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두고 산다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로 사는 것이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자인 것입니다.
(33강) 6:28-31 믿음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가버나움까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예수라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임금 삼아서 자신들 스스로 예수라는 사람의 다스림을 받기를 원할 정도로 예수님과 함께 하기를 원했고 예수님을 필요로 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그들의 동기가 잘못되었음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26절 하반절)는 말씀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그들이 오병이어의 이적에서 보여주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표적을 봤더라면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동기가 달랐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병이어 이적에서 배를 부르게 하는 떡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살리는 참된 생명의 떡을 봤더라면 자신의 배부름을 위해서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을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생명을 위해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필요로 하고 찾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요로 찾는다면 그것이 곧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임을 27절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보면 생존이냐 생명이냐에 의해서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이유 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은 자기 생존을 위해서 예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찾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생존이 아닌 생명을 위해서 예수님이 아니면 안된다는 확고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을 찾는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곤란한 부담과 갈등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존과 생명은 함께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단절될 수밖에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생존에 대한 문제를 초월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먹는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 스스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죽을 때까지 생존에 매어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인데 생명을 위해서 생존을 포기하라는 것은 엄청난 갈등의 요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사단에게 시험받으신 성경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과 사단이 어떠한 문제로 대립되는가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에게 생존의 문제를 제시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생명의 문제로 반격합니다. 떡에 대한 문제에는 오직 말씀으로 산다는 것으로, 기적에 대한 문제에는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는 것으로, 세상 만국의 영광에는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라는 것으로 대립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생존을 포기하라는 것은 살기를 포기하라는 의미의 말이 아닙니다. 생존을 포기하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세상에 보냄을 받은 것이 우리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가 아님을 깨달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서 오신 분임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원하지 생존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생존은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계십니다. 공중을 나는 새도 하나님이 먹이시고, 들풀도 하나님이 입히십니다. 세상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책임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 염려하고 걱정하지 말고 오직 생명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할 일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존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을 찾는다면 그것이 곧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는 무리들에게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먹을 것을 위해서 일하지 말라는 말씀이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직장에 나가고 수고하고 땀흘리는 것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그들은 지금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일하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노동을 가리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찾는 것 자체를 일로 표현하여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라는 말씀은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동기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는 것의 잘못됨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는 말씀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따로 존재하고 있으니 그 일을 찾아서 하라'는 의미의 말씀이기보다는 자신의 생존이 아닌 생명을 위해서 예수님은 없어서는 안될 필요한 분임을 알고 예수님께 나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일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우리들의 몸으로 활동하고 수고하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을 찾는 것 자체를 두고 하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일하라'는 말씀을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일하긴 일하되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을 세상 일로, 그리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하나님의 일로 구분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구분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 일과 하나님의 일에 대한 구분을 교회의 일과 세상에서의 일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세상 일 때문에 교회 일에 대해서 게을러지는 것을 가지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하나님의 일을 게을리 하는 것으로 강조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았던 사람들도 역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잘못된 이해를 하였던 것입니다.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자 그들은 예수님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28절)라고 질문을 합니다. 이들의 질문 내용을 보면 일하라는 말씀에 대해 어떤 이해를 하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이들 역시 일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하나님의 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단지 영생을 위한 일이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일이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요즘 교인들이 교회의 일을 무턱대고 하나님의 일로 연관지어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질문을 한 것은 영원한 생명을 자기들의 노력, 즉 일에 대한 보상과 대가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 물음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가만 가르쳐 준다면 우리가 그 일을 하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행동을 자신들이 실천함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생을 소유하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영생은 자신들의 일과 노력으로 얼마든지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인들의 생각과도 일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대 교회에서 익숙해진 생각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노력에 대한 보상과 대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잘한 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것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 역시 받을만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아무 자격도 없는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을 닫아 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스스로 상상하고 만들어낸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일에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축복이든 구원이든 내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굳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는 질문은 당시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들의 무지한 질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무지한 모든 사람들에게서부터 나올 수밖에 없는 질문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해야 할 일로 이해하고 있다면 본문과 같은 질문의 잘못됨을 전혀 인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29절)라고 답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에 대한 개념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자기들이 실천해야 할 어떤 일에 대한 답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가령 기도를 하루에 몇 시간 하라든가? 교회에서 어떻게 하라든가?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일을 자신들이 실천해야 할 것으로 이해한다면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기다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답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 즉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우리가 실천해야 할 일이라는 개념으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참으로 가치있는 일이라는 개념의 말씀으로 이해를 해 본다면 결국 '무엇이 참으로 가치있는 일인가?'라는 질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는 답을 할 수도 있습니다. 왜 믿음이 이처럼 가치있는 일로, 하나님의 일로 말씀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귀한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우리가 생존 문제에 매어서 생명 문제를 등한시한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역시 가치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보다는 생존을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이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벗어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믿음은 생명의 문제와 연관될 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일을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에서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일은 우리들의 소관도 우리의 실천 문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인간의 노력으로 인한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질문을 한 사람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실천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30절)라는 질문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에게 원하는 것은 자신들이 예수님이 믿을 수 있도록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고전 1:2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라는 말을 합니다. 증거로서의 표적을 구하는 전형적인 유대인들의 요구를 볼 수 있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이들의 요구는 2:18절의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라는 말씀에서도 알 수 있고, 4:48절의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유대인들의 무지한 요구로만 볼 수 있겠습니까? 표적, 즉 믿기 이전에 믿을 수 있도록 보여주기를 구하는 이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들에게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보여주면 더 확실히 믿을 수 있겠다는 바램은 우리들의 속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분명 그러한 생각이 자리할 것입니다. 보지 못한 상태에서 그냥 믿는다고 하는 막연함보다는 실제로 직접 보고 확인한 상태라면 더욱 확실하게 그리고 분명히 믿을 수 있기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믿음을 인간의 소관으로 여기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보고 보지 않고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그리스도의 일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뭔가를 보고 확인함으로서 예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선택해서 믿음으로 믿게 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31절에 보면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옛날 자기 조상들이 먹었던 만나와 같은 표적을 보여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고 믿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믿을만한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신앙인 것입니다.
이처럼 눈으로 보고 확인한 것을 근거로 해서 믿으려고 하기 때문에 눈에 보여지는 행함이나 실천이 없을 때는 자신의 믿음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고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보여질 수밖에 없는 것은 믿음을 보여지는 것을 통해서 확인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44절에 보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예수님에게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여주면 내 발로, 내 스스로 예수님에게 나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신뢰하고 믿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은 바로 이러한 자기 신뢰를 버리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보고 체험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을 수없이 목격하고 체험했던 이스라엘은 왜 믿음에 실패했습니까? 이렇게 볼 때 옛날 조상들이 만나를 먹었음을 언급한 그들은 조상들이 하늘에서 내려진 만나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결국 원망하고 불평하는 길로 나아갔음을 생각하지 않는 무지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까? 이것을 믿음이 나에게 주어지면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내가 일하는 것이 되버리기 때문입니다.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일하시는 것을 믿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곧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붙드는 것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시고 예수님이 나를 붙들어서 하나님에게로 이끄심으로 되어짐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예수님이 일하심으로서 믿음이 있게 되어짐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표적을 본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39절에서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서 믿음은 인간의 소관이 아님을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영생은 예수님이 일하신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에게서 믿음으로 인한 흔적이 보여진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일하시는 결과로 보여지는 것일 뿐입니다. 내가 믿음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믿음이 주어지면 그 믿음이 나를 다스림으로서 생각하는 것이나 속마음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믿음의 흔적이 보여지기 때문에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일하심을 신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일하심을 신뢰하기 때문에 자신의 일함을 신뢰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함과 상관없이 영생을 믿게 되는 것이고 설사 자신에게서 보여지는 행함이 없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행함을 신뢰하는 가운데 영생을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믿음이고, 이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신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로 되어짐을 알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인간의 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신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생명의 문제가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들은 자기 생존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나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그러면 그 믿음은 누구의 것이라고 생각됩니까? 여러분의 것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것입니까? 여러분이 만들어낸 믿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까? 믿음이 그리스도의 것이고,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면 믿음을 자랑거리로 내세워서는 안됩니다. 믿음으로 다른 사람을 차별해서도 안됩니다. 행동을 비교하면서 타인의 믿음을 판단해서도 안됩니다. 이 모든 것은 믿음을 내 것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에서 보여지는 모습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신의 선택과 의지로 예수님을 믿게 되고, 자신의 실천과 행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면 구원은 분명 자랑거리로 내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일한 결과와 보상으로 얻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넌 왜 나처럼 하지 않느냐?'는 말을 자신있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린 단지 믿음을 담은 그릇으로 살면서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증거하는 도구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행함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의 행함에서 믿음의 여부를 찾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은 '믿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만으로 되어지는 것이기에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썩는 양식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었고 필요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도 끊임없이 썩는 양식을 원합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능력이 우리를 다스리고 썩는 양식을 구하고 세상에 이끌리는 마음을 붙들어서 놓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앉아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복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보고 확인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믿게 하신 것입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영생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34강) 6:32-40 하나님의 떡
32-34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찾아온 무리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이 말씀을 보면 4장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생각나게 합니다.
34절 하반절에 나오는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는 말과, 4:15절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에게 말하는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무리들이 한 말과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에게 한 이 두 말을 비교해보면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동일하게 영적인 것을 육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면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에게 그 물을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에게 생수를 달라고 한 것은 분명 자신에게 생수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이 필요로 하는 생수는 한번 마시면 영원히 목이 마르지 않음으로서 다시는 물을 길러야 하는 귀찮음이 사라지게 하는 신비한 물이었습니다. 즉 육신의 삶에 편안함을 제공해주는 물로써 생수를 원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무리들 역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찾은 무리들은 처음부터 관심이 배부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참 떡은 세상에게 생명 주는 것임을 말씀하시자 그 떡을 자신들에게 달라는 요구를 한 것입니다. 과연 이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참 떡을 달라고 한 그 의도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들은 분명 하나님이 주시는 떡이 생명을 준다는 것에 마음이 동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생각하는 생명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들은 영적인 생명을 마음에 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생명을 주는 떡에 관심을 두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서 육신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서 영적인 생명을 본 것이 아니라 자기 육신에 보탬이 되는 좋은 것을 본 것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는 '믿음'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무엇이 믿음이기에 그들이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먼저 생각해 볼 것은, 과연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행하신 오병이어의 이적을 체험한 그들로서는 예수님이 자기들의 왕이 되신다면 먹을 것에 대한 염려는 없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오병이어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만 계신다면 애써 수고하고 일하지 않아도 먹을 것 걱정은 없겠다는 그 생각은 믿음이 아닙니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에 대한 그러한 생각이 믿음일까요 아닐까요? 보고도 믿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던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분명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육신의 문제를 위해서 왕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이러한 결론에 동의하신다면 여러분은 현대 교회가 말하는 믿음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대 교회가 말하는 믿음의 수준이 사마리아 여인이 목이 마르지 않도록 하는 생수를 원한 수준이나, 무리들이 육신의 생명을 마음을 두고 떡을 원한 수준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회의 믿음은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육신의 편함을 위한 세상 것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나아와 구하는 것 모두가 물과 떡을 구하는 수준입니다. 삶이 편안해질 수 있는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이 도와주신다면 육신이 편안해진다는 생각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한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않는 무리들처럼 계시의 말씀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조차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현대 교회의 현실에 대해서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대 교회의 현실에 대해 인정을 하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과연 예수님이 말씀하는 믿음이 있다고 말씀할 수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의 믿음을 의도적으로 부인하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행여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는 무지에 머물러 있다면, 그리고 믿음을 오해하고 있다면 그러한 무지와 오해에서 벗어나고자 드리는 말씀입니다.
믿음에는 믿음의 풍성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35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에서 보여지는 믿음의 풍성함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코 주리지 않는 것이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풍성함이 있는 믿음입니까?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다는 말씀은 앞서 말씀드린 사마리아 여인의 요구와 예수님을 찾은 무리들의 요구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한 것은 육신이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것이었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육신이 아닌 영적인 상태를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느끼는 풍성함은 주로 육신의 문제입니다. 즉 육신적인 것으로는 믿음이 풍성함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실제적으로 다가오지만 영적인 상태로서의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믿음의 풍성함은 기대하고 원하기는 하지만 사실적으로 느끼고 실제적으로 다가오기란 참으로 힘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믿음의 풍성함은 다만 생각에 머무는 추상적인 영적 상태로 머물러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무리 믿음이 있는 신자라 할지라도 누릴 수 없는 고차원적인 것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마나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으로 누릴 수 없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면 적어도 우리에게는 죽은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내게 오는 자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에게 나아간다면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믿음의 풍성함을 누릴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믿는다고 하는 우리 자신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나아가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지만 사실은 예수님에게 나아가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스스로를 인정하고 있지만 사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믿음을 말하면서도 믿음에 있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의 풍성함을 누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에게 나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알아야 하고 믿음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33절을 보면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늘에서 내린 하나님의 떡은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생명을 주기 위해서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여러분 모두 기독교 상식으로도 알고 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있다는 것이 여러분에게 함정이 될 수 있습니다. 누차 말한 대로 알고 있다는 여러분의 생각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믿음이 있는 것으로 속일 수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조심하고 경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지혜 있는 신자의 모습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무조건 의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대한 옳고 그름은 성령에 의해서 가르침 받고 하나하나 깨우쳐 갈 것입니다. 만약 신자가 자신의 지식에 대해서 의심을 해야 한다면 그는 평생토록 의심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알고 있으니 들을 필요 없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앎으로 여기고 그러한 앎이 있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그것이 바로 스스로의 앎에 속는 것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떡은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에게 나오는 자는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에 마음이 동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에게 다른데 관심을 두고 나온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잘못 찾은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과연 내가 진심으로 생명을 원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은 무리들처럼 육신의 생명이 아닌 영의 생명을 원하는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영의 생명을 원하는 마음도 없으면서 예수님을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진심으로 생명을, 하나님의 떡이신 예수님을 원할 자가 누구겠습니까? 예수님에게서 육신의 편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참된 생명을 보는 자가 누구겠습니까?
이것을 사마리아 여인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처음에 예수님에게 마셔도 목이 마르지 않는 물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여인의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남편이 다섯이나 되고 지금 있는 남편은 남편이 아닌 여인의 실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남편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수치스런 실상을 모두 아시고 드러내신 예수님에게 여인은 '선지자'라고 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앞일을 예언하는 선지자로 인식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여인의 입에서 메시야 곧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말이 나오게 되고 예수님이 메시야며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십니다. 그리고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는 말로써 예수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여인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그리스도로 보게 된 것에는 여인의 수치를 드러내신 예수님의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자신의 수치를 보게 된 여인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신을 수치를 보지 못할 때는 예수님에게서 육신의 편한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수치를 본 후에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게 나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자신의 수치를 해결하실 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육신의 편안함을 기대하는 것은 자신의 수치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비참함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전혀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갈급함도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내가 믿고 의지하는 대상이 하나 더 추가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한분 만을 신뢰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었던 다른 모든 것을 쳐버립니다. 우리의 마음에 신뢰의 대상이었던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예수님 홀로 굳게 서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안다면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알게 됩니다. 죽음과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실상을 바로 볼 때 빛으로 오신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인간을 절망에서 건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보는 자들은 자신의 비참함을 보는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그것이 곧 비참이며 절망임을 알 때 자연히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에게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음을 아는 것이 믿음이 아니고, 사실로 인정한다고 해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에게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기 위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분이 아닙니다. 생명을 주기 위해서 여기저기 다시는 분이라면 아마 '가만히 있어라 내가 가서 생명을 줄께'라고 말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게 오는 자는 주리지 않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내게 오라는 것이고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스스로 예수님이 생명을 주는 분임을 믿고 예수님에게 나오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의 힘으로 예수님을 생명으로 알고 나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면 예수님의 죽으심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은 '내게 오는 자' '나를 믿는 자'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스스로 올 수 없는 자에게 오라고 하시고, 스스로 믿을 수 없는 자에게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37-40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주신 자가 있고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자를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기 위해서 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그 비참함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인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는 십자가를 부지런히 말할 뿐 십자가에서 자신의 비참함을 보지 않습니다. 부요함의 자리에서 십자가를 말하기 때문에 자신의 가련한 것, 곤고한 것, 눈 먼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아니면 갈 수 없는 생명의 자리 또한 마음에서 멀어질 뿐입니다. 믿음의 풍성함은 비참한 인간의 존재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예수님은 어둠에 있고 비참에 있는 인간에게만 빛이 되시고 희망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비참을 보지 못한다면 빛이 되시고 유일한 희망이신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희망을 달라는 요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란 성경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달라진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대해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를 신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자란 예수님을 원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자신의 운명이 어떠함을 알기에 예수님을 원하게 된 사람이 신자입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늘의 생명을 보기에 자연히 세상 것에 대해서는 마음이 멀어져 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여기에 믿음의 풍성함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음은 오직 예수님만을 원하는 믿음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원하고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보는 그들이 생명이신 예수님안에서 누리는 상태가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누리는 것일 뿐, 우리가 하지 못해서 주리고 목말라하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생명은 죽음의 자리에서만 가치 있는 것입니다. 생명에 감사하고 생명으로 족함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죽음을 알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죽음을 아는 자, 그가 바로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죽음과 인간의 비참함을 잊어버린 채 예수님에게 나온다면 결국 엉뚱한 것을 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으로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갈급해 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면 희망이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들에게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떡으로 오신 분입니다.
(35강) 6:41-46 아버지가 이끄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되어진 일입니다. 이 계획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세워진 것입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1:4절에서 언급하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했다는 말씀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했다면, 그리고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면, 그리고 그것으로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셨다면 결국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뜻안에서 생각해봐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단지 이 땅에 세상을 있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과 연결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서 자기 백성을 택하사 아들로 삼으시는 일은 창세 전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안에서 자기 백성을 삼으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연결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창세 전에 이미 계획된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창세전에 계획된 일이라면 우리가 한가지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구원에 대해서 인간은 무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구원의 길로 세상에 있게 하신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창세 전부터 인간은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죄짓기 전의 인간은 생명 아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주어지는 은혜인 것이지 스스로 생명을 얻은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인간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생명에 대해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줬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의 있었던 어떤 일도 인간의 구원을 위한 방편으로 주어진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가령 구약에 하나님의 율법이 있지만, 그리고 그 율법을 지키는 자는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십자가의 사건을 전제하고 율법을 대한다면 결국 율법은 인간의 죄악과 무능함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실제로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한 길로써 주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행하신 신비한 이적을 직접 목격을 한다면 평생 예수님만 믿는 믿음으로 살 수 있겠다는 상상을 하기도 하지만, 예수님이 이적을 베푸신 것은 사람들을 구원시키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이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이적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을 책망하는 말씀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른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무엇을 목적하고 따르느냐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신의 육신의 유익 때문에 예수님을 찾는 자들은 많지만 진심으로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보고 따르는 자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전제한다면 이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하기 위한 도구로 행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행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적을 왜 행하신 것입니까? 이적이 우리의 구원에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일에 있어서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왜 이적을 행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이적을 통해서 자신의 일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이적을 통해서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적에서 단지 신비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볼 수 있는 자가 바로 믿음이 있는 자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이유는 신자의 존재 의미에 있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자로 부름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일을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로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만약 그리스도의 일이 무엇인가를 모른다면 엉뚱한 일을 하면서 그것을 그리스도의 일로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아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주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뭔가를 주시기 위해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많은 신자가 오해하는 것이 바로 이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뭔가를 주시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면 그 상으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자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언제나 하나님에게 받을 것만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세상에서 신자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주셨습니다. 하늘의 생명을 주심으로서 그 생명을 세상에 증거하라고 하십니다. 믿음을 주시고 믿음으로 살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신 것입니다. 44절에 보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된 근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그리스도에게 갈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이적을 목격하고 체험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힘으로 해서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인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6절에서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는 너희란 오병이어의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의 행하심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기독교에는 해당이 안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세상의 종교와 다른 것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세상의 종교는 모두가 자신이 신을 선택하고 자신이 믿어서 구원에 이릅니다. 선택과 구원이 모든 자기에게 달린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만은 구원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은혜입니다. 내가 믿는다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애당초 예수님을 믿을 수 없는 존재임을 선포해 버립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이 행하시는 놀라운 이적을 보고서도 믿지 않는 것이 인간임을 말합니다.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예수님에게 나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이처럼 성경은 믿음은 우리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가르칩니까? 그것은 믿음은 우리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절감할 때 상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높여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인간의 힘과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말해주는 증거물이 아닙니까? 십자가 자체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너희는 스스로 구원으로 나아갈 수 없는 무능하고 강퍅한 인간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자신의 무능함을 절감하는 신자에게서 높여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인간의 죄악됨과 무능함에서 빛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인간이 믿게 된 것,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이끄심의 결과입니다. 내가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끄심을 아는 신자는 믿음을 내세워서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끄심에 대해서 감사할 뿐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이끄심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믿어서 구원을 얻은 줄로 압니다. 결국 감사함이 없습니다. 있다면 믿음을 비교하면서 경쟁하고 싸우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으라는 권면을 하지 않습니다. 믿는 것을 우리가 해야 할 일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이루어주시는 복으로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믿으라'고 말씀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믿을 것을 요구하는 말씀이 아니라 아버지가 믿음을 선물로 준 자기 백성들에게 대한 권고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믿으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고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모른다면 그는 믿음의 가치를 모른 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세상이 알 수 없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받지 못한 것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가능해진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은 세상의 멸망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죽어서야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죽어서 안 것은 더 이상 기회가 사라진 것을 의미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그것을 잘 말해줍니다. 부자는 나사로가 알았던 것을 몰랐던 사람입니다. 부자의 눈에 보인 것은 단지 병들고 거지인 나사로의 모습입니다. 나사로가 천국을 소망했다 하더라도 부자에게 의미 있는 것은 세상에서 부자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부자가 죽고 나서 내세를 알게 됩니다. 하지만 내세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부자가 목이 마를 때 자기에게 긍휼을 베풀어서 나사로의 손가락에 물한방을 찍어서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까지 거절된 것이 음부였습니다. 부자는 나사로를 자기 집에 보내서 이곳에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죽어서 음부에 간 부자로서는 그러한 고통의 내세를 몰랐다는 것이 후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세상에 살았던 것처럼 내세를 모르고 사는 자기 형제들이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오늘 우리가 내세를 알고 있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살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45절에 보면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는 사람입니다. 아버지께로부터 듣고 배우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아버지의 가르침은 성경만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바를 직접 우리의 삶에서 배우게 하십니다. 즉 머리로만 배우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에게 감사할 것은 신자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주어진 삶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고 말씀하심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여 내가 죄인입니다. 주님만 의지하게 해주십시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복된 자리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그 어떤 일에서도 하나님의 가르침을 듣지 못합니다. 자연히 그리스도도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힘만 바라볼 뿐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그리스도를 고백할 수 있다고 해서 세상 사람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하시면 안됩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신분으로서는 세상의 그 어떤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지만 그러한 고백을 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더 나은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가르치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시는 은혜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실패속에서 주님을 의지하게 해달라는 고백을 할 수 있고, 자신의 연약함과 죄인됨을 고백할 수 있는 믿음안에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 조차도 하나님의 간섭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신자만이 누릴 수 있는 풍성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시고 믿을 수 없는 자가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믿는 자로 이 자리에 있다는 것에 깊은 감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36강) 6:47-51 생명의 떡
예수님이 마귀에게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시험을 받으셨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사람이 무엇으로 살 것인가?'에 대한 것임을 잘 아실 것입니다. 마귀가 제시하는 것은 사람은 떡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떡이 없이 사람이 살 수 없기 때문에 떡의 문제는 생존을 위한 사람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 분명합니다. 세상에서 떡은 오늘을 살기 위한 힘이고 내일의 삶을 보장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마귀에게 예수님은 말씀으로 사는 삶을 제시합니다. 분명 말씀이 우리의 목숨을 지탱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아무리 말씀을 읽고 믿는다고 해도 그 말씀이 우리 배를 부르게 하는 것도 아니고 그 말씀이 양식이 되어서 목숨을 유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말씀으로 사는 삶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분명 마귀든 예수님이든 사는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삶 자체가 각각 다른 본질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말하는 삶은 생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는 삶은 생명입니다. 몸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목숨으로서의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는 존재가 되는 생명을 밀씀하는 것입니다.
생존에 있어서 말씀은 무용지물입니다. 생존을 위한다면 말씀은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떡에 관심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마치 아이가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교회에 부지런하기보다는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지혜롭다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 생명을 위해서는 떡에 눈을 돌려서는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모든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이처럼 떡과 말씀 그 어느것 하나도 생존과 생명을 동시에 책임지지를 못하기 때문에 결국 어느 것 하나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존과 생명을 동시에 바라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 둘은 항상 서로 대치되는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48절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을 가리켜서 '생명의 떡'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는 이 말씀에 얼마나 절실한 마음을 가지십니까? 사실 항상 그리스도 앞에서 부끄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는 우리로서는 예수님이 곧 생명의 떡이라는 말씀을 대할 때 예수님보다는 세상의 떡에 더 절실한 마음으로 살았던 우리 자신의 부끄러움을 또 다시 발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다만 부끄러운 줄 알아라는 차원에서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부족을 발견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면 그것으로 오늘 말씀이 할 일을 다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자기의 부족함과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해서 신자된 것이 아닙니다. 부족과 부끄러움을 느꼈다면 부족하고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떠나는 것이 진짜 신자다움이 아니겠습니까?
생명의 떡으로 오시고 생명을 말씀하는 그리스도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자신이 생존의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삶에서 말씀을 듣는다면 분명 자신의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생존의 자리에 머물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단지 부끄러움을 즐기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현실을 깨닫게 하고 부끄러움을 알게 하셨다면 그것은 신자로서 부끄러운 자리를 벗어나라는 의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부끄러움을 아니까 됐다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자리에 머물지 말라는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끄러운 자리에 머물지 않으려는 것은 없이 항상 예수님을 부르면서 '부끄럽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부끄럽다는 말 한마디로 신자의 자리에 머물려는 것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부끄럽다는 말이 신자를 신자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자리를 벗어나서 신자로서 정당한 자리에 머물고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끄러움을 벗어나서 신자로서 정당한 자리에 살아가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49-50절을 보면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과 옛날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먹었던 만나를 비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나는 먹었어도 죽었지만 예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만나의 차원에서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 이스라엘이 만나를 바라보던 시각에서 예수님을 바라봐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만나가 내려진 그 시대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만나가 내려지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원망 때문이었음을 잘 아실 것입니다.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이 광야에 이르렀을 때 먹을 것이 전혀 없는 배고픈 상황에서 우리를 주려서 죽게 한다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던 것입니다. 그 원망을 듣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만나를 주신 것은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하시기 위한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만나가 하늘에서 내려진 것은 단지 하늘에서 주신 신비한 것이라는 차원이 아니라 만나가 인간의 수고와 노력으로 거두어진 열매가 아님을 의미합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루하루를 자기의 수고와 노력으로 거둔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 바로 만나를 거둘 때 다음날 것까지 미리 거두면 썩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출 16:17-20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다음 날 것까지 미리 거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하루하루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임을 배우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수고와 노력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 은혜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음날 것까지 미리 거둔다는 것은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지 못하는 것이며 결국 자신들의 힘으로 내일을 준비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생존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음날까지 남은 것은 썩어버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만나의 역할은 분명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랬을 때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임을 잊지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그들에게는 만나를 먹었다는 것이 생명이 아니라 만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이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만나를 먹으면서도 결국 생명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것은 만나를 단지 자기 배부름을 위한 것으로만 봤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만나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며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않게 하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은 결코 사람의 배부름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님을 말씀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26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예수님을 찾았다는 것으로 만족하신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았는가를 보셨던 것입니다. 자기 배부름, 즉 생존을 위해서냐 아니면 영원한 생명이 예수님에게 있음을 알고 예수님을 찾은 것이냐를 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배부름을 위해서 예수를 찾는 것이라면 그것은 예수님을 찾는 것도 아니며 생명과도 전혀 상관없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보면 생명과는 상관없이 예수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자기 배부름을 기대하고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만 자기가 선택한 기독교란 종교의 교인의 명목을 유지하는 차원으로서 예수를 찾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일에 교회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예수를 찾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예수님에게서 자기 자신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한 예수로만 인식을 하고 있을 뿐이지 하늘의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 밖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예수님이 자신의 일에 함께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만 간절할 뿐, 예수님이 우리에게 살과 피를 나누시기 위해서 죽으신 십자가에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자로서의 부끄러움은 예수님에게서 자기 배부름을 기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자로서의 정당한 자리는 예수님에게서 오직 자기 생명을 바라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51절에 보면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의 살을 내어놓는 것이지 세상의 배부름을 위해서 이적을 베풀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시간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할 것은 '나는 과연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가?' 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믿습니까? 여러분이 기독교를 자기 종교로 선택했기 때문에 믿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한 분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오직 생명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은 생명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자는 생존보다는 생명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게 됩니다. 생명을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에 생존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애통해하면서 회개하고 주님에게 도움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생명을 소망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전부일 수밖에 없고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신자는 죄를 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기뻐하시고 원하는 신자의 자리에서 살기를 소원하고 그것을 위해서 힘쓰며 사는 사람입니다.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힘은 돈입니다. 세상의 지위며 권력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위해 사는 신자에게는 예수님이 힘이시며 위로자가 되십니다. 물론 이것이 마음대로 안된다는 것을 저도 알고 여러분도 압니다. 항상 세상의 생존에 매이는 우리 자신을 볼 때마다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 생명이며 진리인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이 신자로 사는 것인가를 아는 사람들이며 무엇이 헛된 것이고 무엇이 참되며 진실하며 영원한 것인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것을 바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되어진다 안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자로서 무엇을 소망하고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루하루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리스도롤 소망하고 살아가는 신자의 정당한 삶입니다. 여러분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서 열심히 달려갈 것입니다. 자기의 배부름을 위해서 열심히 수고하고 땀흘리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속에서 소위 기독교신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자기 성공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는 모습을 많이 볼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렇다 할지라도 여러분의 마음은 그리스도에게 굳건히 서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아셨다면 옳은 것 위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 무엇이 생명이 있는 길인가를 분명히 하시고 그 길을 포기하거나 다른 길을 위해서 타협하는 길로 나아가지 마십시오. 신자는 오직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삼고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임을 안다고는 말할 수 있을지라도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삼고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으로 신자가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란 말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로서 다른 삶을 사는 것은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신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삶을 수정하면서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신자로서 사는 삶이 되기 위해서 힘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37강) 6:52-63 걸림이 되는 말씀
대개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문제를 예수님을 찾아 나오는 것으로 다 되는 줄로 착각을 합니다. 내가 예수님께 나오고 있고 예수님을 부르고 있기 때문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한다'라고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으나 그들 모두가 예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찾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찾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6장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6장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는 이적으로 시작합니다. 그 이적을 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붙잡아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가지고 유대인들은 그러한 예수님을 포기하지 않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결국 가버나움이라는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대단한 열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절)는 책망을 듣게 됩니다. 떡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은 것이지 생명과 진리 때문에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단지 찾았다는 것으로 그 신앙을 옳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찾느냐를 보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책망에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배부름을 위한 떡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는 것은 신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배부름을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서 오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찾고 구할 것은 생명이지 결코 배부름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분명하게 언급하신 말씀입니다. 떡이라고 하는 자기 필요를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을 책망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33절),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5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53절)는 말씀을 하심으로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생명에 있음을 분명히 하셨던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와 목적에 우리의 배부름을 위한 떡을 주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결코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물론 35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뜻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여기서 말씀하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다는 것은 육신의 배를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처럼 성경 어느 곳에서도 예수님은 육신의 필요를 공급해주시고 채워주시기 위해서 오시지 않았음을 말씀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서 우리의 필요를 얻고자 한다면 예수님을 잘못 찾은 것이며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신 것은 자기 살이며 피입니다. 53-55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는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을 찾은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떡을 원했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며 예수님이 줄 떡은 곧 자기 살이며 피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60절)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절)는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그들의 이러한 반응을 보면서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어렵다'고 하며 예수님을 떠나버린 그들이 쉽게 이해 안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쩌면 여러분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전혀 어렵지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한가지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본문의 말씀이 과연 어렵지가 않습니까? 한국교회를 돌아볼 때 여러분만이 아니라 모든 교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어려워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어려워하기보다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을 때 '어려워서 못 듣겠다'라는 반응을 보이기보다는 '아멘'을 외치면서 은혜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찾았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어려워서 결국 예수님을 떠나고 다시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우리들은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과연 우리가 그들보다 신앙의 수준이 높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들보다 머리가 좋아서일까요?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렵다고 한 것은 말씀에 사용하는 단어나 문장 자체가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의미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에 사용된 단어나 문장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말씀의 의미였습니다. 가령 예수님은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이 보실 때 이 말씀에서 어려운 단어나 문장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나의 살을 먹고 나의 피를 마셔라 그리하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하고 너희 속에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먹고 마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말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그 의미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자기 살을 누군가에게 먹게 하고 피를 마시게 해서 그를 살린다는 것이 말이 안되는 일인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말씀이 그들에게는 그토록 어려웠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에 대해서 말씀하는데 이들은 생명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떡에 있었던 것입니다. 생명의 문제는 율법에 있었고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생명에 거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생명을 얻기 위해서 누군가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의 말씀입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의 말씀이 전혀 어렵지가 않다면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그 말씀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다면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의미를 말할 수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리고 죽으신 것을 믿는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리고 죽었다는 것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까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믿지 않을 뿐이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해서는 웬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아는 것은 지식의 차원에서 머리에 담고 있는 것을 의미하고, 믿는다는 것은 알고 있는 바를 따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십자가를 아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인자의 살은 세상의 죄인을 위해서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를 위한 섬김을 의미합니다. 몸으로서 죄인된 우리를 섬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자의 피는 사망에 처한 우리를 생명으로 건지기 위해서 흘리신 희생을 의미합니다. 몸은 섬김이요 피는 희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내 속에 그리스도가 함께 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그리스도가 섬기신 섬김과, 희생하신 그 희생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십자가를 믿는 것이고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말씀은 이해하지 못해도 믿으면 된다는 식입니다. 말씀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어쨌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피의 희생과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을 믿으면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해하지 못하고 믿는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알지도 못하면 믿는다고 외치는 우스운 현상들이 교회에 난무하게 된 것입니다. 알지 못하기에 엉뚱한 것을 붙들고 예수님에게 나오게 됩니다. 알지 못하기에 예수님은 책망하실 수밖에 없는 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기쁘게 하겠다고 설칩니다. 이것이 오늘날 현대 교인들의 신앙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알려고 하지 않고 단지 믿고 있다는 자기 생각에 만족해 버리기 때문에 말씀으로 인한 갈등과 고민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분명 우리들의 사고방식과 충돌되는 위치에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사고방식과 어울릴 수 없고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이 이해될 때 그 말씀은 우리 속에서 우리 자신을 책망하고 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갈등과 고민이 있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떡이라는 자기 필요를 위해서 예수님을 임금 삼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을 책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알았다면 자신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한 것이 무엇이며,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면 우리들의 필요를 위해서 예수님을 찾는 것은 결국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는 것임을 아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신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오직 생명과 진리를 찾을 뿐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떡을 구하지는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진심으로 말씀을 아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찾았던 유대인들과 똑같이 예수님에게서 떡, 즉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구한다면 본문의 유대인들의 수준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말씀을 듣고 있고, 들으면서도 말씀이 어렵지가 않다면 그것은 말씀을 알려고는 하지 않고 단지 믿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교회에서 정직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기회조차 없었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정직한 복음, 정직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곳이 교회인데 교회가 성경에서 멀어진 복음을 말하기 때문에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가질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멀어진 다른 복음은 인간의 사고방식으로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본래 인간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오직 성령의 지혜로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인데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되는 것을 복음이라고 외치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복음을 어렵다고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말씀이 어렵다며 예수님을 떠나가겠습니까?
57-58절의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는 말씀 역시 이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고,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냈다고 말씀을 하는데, 정작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부모와 형제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요셉을 알고 마리아를 압니다. 그리고 자신들 앞에서 하늘로서 왔다고 말하는 예수가 바로 그들의 아들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로서 온 떡이라고 말합니다.
하늘로서 왔다는 말이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이해되십니까? 대개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하늘은 아마 공중이라는 의미의 하늘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자신을 공중에서 왔다는 의미로 '하늘로서 왔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분명 거짓말을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공중에서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비록 잉태는 성령으로 되어진 것이지만 태어나신 것은 여느 인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스스로 공중에서 왔다고 하신다면 인간의 몸에서 나신 것을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늘로서 왔다는 말씀은 공중이란 뜻으로서 하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늘을 공중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42절에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는 의문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말씀들을 종합해 볼 때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어려워 한 이유는 그들의 생각이 '육'에 매어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63절의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말씀을 어려워하고 예수님을 떠나게 된 것은 그들 자신이 육에 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61절에서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라는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이 유대인들에게 걸림이 되었던 것은 예수님이 말씀을 어렵게 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은 영에 대해 말씀을 하시는데 정작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육에 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하늘이란 곧 생명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공중에 있는 나라라는 의미가 아니라 땅, 즉 멸망의 나라인 세상과 다른 생명의 나라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스스로를 하늘로서 왔다고 하시는 것은 죄로 인해 사망에 처한 세상에 생명의 나라에서 생명을 가지고 오신 분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결코 예수님의 육적인 몸이 온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인간의 부귀와 생활을 책임지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새로운 생명을 위해서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지 우리의 배부름과 떡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예수님에게서 구할 것은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두 육과 상관없는 영에 관한 일입니다. 영에 관한 일이란 육에 매어 있는 동시에 영에도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에 관심을 가진다면 자연히 육에 대해서는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살리는 영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나오는 신자라면 예수님에게서 육의 문제를 구하지도 찾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어려운 자가 누구겠습니까? 이러한 말씀이 걸림이 되는 자가 누구겠습니까? 당연히 육에 매인 자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육의 문제를 구하는 자, 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깨달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머나먼 얘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일 뿐입니다. 결국 그들은 말씀으로부터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생각에 어울리고 이해되는 말씀을 찾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떠난 것입니다. 비록 '교회 나가니까 예수님을 떠난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말씀인데 그 말씀이 이해가 안되고 걸림이 되어서 말씀을 떠난다면 그것은 결국 예수님을 떠난 것이라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는 다니지만 정작 예수님에게서 멀어진 신자아닌 신자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말씀이 여러분에게 걸림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인간 본래의 사고방식으로 말씀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지혜로 말씀을 보는 분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신자는 예수님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것으로 얼마든지 기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육의 문제로 인해서 고민하고 고통스런 일들을 많이 겪습니다. 그럴 때 단지 어렵고 힘들다는 것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육의 문제 안에서 영의 문제를 찾으십시오. 분명 길이 있습니다. 육의 문제가 해결되는 길이 아니라 힘든 육의 문제 안에서 새로운 기쁨과 힘과 소망을 발견하게 되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문제는 언제나 육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자신이지 예수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애당초 예수님은 우리들의 육의 문제를 도와주거나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지 않았습니다. 육은 우리를 살리지 못합니다. 오직 영이 우리를 살립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이라면 영의 문제만을 말씀하시고 우리들의 영적인 문제를 위해서 일하실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우리를 살리는 떡은 없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 만나를 먹고서도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찾은 유대인들은 떡을 구합니다. 영적인 생명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만 먹고도 죽은 떡을 필요로 할 뿐입니다.
여러분, 살고자 하십니까? 영원한 생명에 머물고자 하십니까? 이것이 진정한 여러분의 마음이라면 그리스도에게서 오직 생명만을 보십시오. 그분의 희생과 섬김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만 바라보십시오. 날마다 그분의 긍휼을 구하면서 의의 나라를 소원하며 살아가십시오. 생명이신 그리스도 때문에 어떤 어려움과 고통도 능히 감수하는 자로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생명이 있는 신자로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서 어려움이 없고 걸림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축복에 거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서 예수님에게로 인도하신 결과입니다.
세상에서 대접받고 사는 것에 마음 뺏기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아무리 귀한 대접을 받고 산다 해도 그 세월은 몇 십년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멸망에 빠진 채 고통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힘들게 산다 할지라도, 사람들에게 대접받지 못하고 오히려 무시 받는 자로 산다 할지라도 몇 십년 참음으로 가는 세월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원토록 대접받으며 살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에 대해서는 부러울 것이 없어야 하고, 없어서 애타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 싸움을 하며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살과 피, 예수님의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 놓으셨는데 그 모든 것을 받았다고 하는 우리가 정작 세상에 대해 부러워하고 애타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섬김과 희생을 세상 것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말씀들이 이해가 되십니까? 걸림이 안되십니까? 그러한 자로 살아가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으로 육과 싸우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38강) 6:64-71 영과 육
6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오늘은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언급하시는 영과 육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영과 육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사람들은 쉽게 세상과 교회라는 상상을 합니다. 즉 세상을 육으로 교회를 영으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교회와 연관된 일은 영적인 일이며, 교회보다 더 우선으로 하는 세상의 일은 육적인 일이라는 답을 내려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는 영과 육은 그런 수준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렇듯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과 육의 의미를 떠나서 영과 육을 구분하기 때문에 육을 영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발생하는 것입니다. 영과 육을 세상과 교회로 구분을 하려는 것은 행위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것이고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교회에서의 일은 곧 거룩한 일이며 하나님을 위한 영적인 일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과 육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로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린다거나 기도를 한다고 해서 영의 일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 보면,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에게 예배드리는 장소에 대해서 질문을 합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 즉 유대인들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하는데 어디에서 예배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진짜 예배가 되느냐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4:23-24)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영이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신령과 진정을 인간의 정성과 진심으로 오인을 해버립니다. 그러나 신령과 진정이란 성령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즉 아버지에 대한 참된 예배는 성령과 진리 안에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의식으로 짜여진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예배에 대한 것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에게 문의했지만 예배로 인정받지 못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영이란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은 성령과 진리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성령과 진리 안에서 살기 때문에 그가 생각하는 것은 곧 성령과 진리에 합당한 것이며 성령과 진리에 합당한 생각을 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생각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자기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육이며 성령과 진리의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 영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즉 영과 육은 행위를 두고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생각으로 살아가느냐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5-6절을 보면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 역시 육과 영에 대한 이해가 없을 때는 무작정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곧 영의 일을 생각하고 영의 생각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즉 교회를 위한 일을 생각하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을 좇는다는 것을 자신을 위해 사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육신의 일이란 결국 자신을 위한 일이며 그 일에는 자신이 예수님을 찾는 것까지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비록 예수님을 찾는 다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을 위해서 찾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신의 생각인 것이며 결국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은 오병이어의 이적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을 먹이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은 이적을 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하자 예수님이 그들을 피해버리십니다. 여기서부터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 자체가 예수님의 생각과는 맞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한 것은 그들의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진심을 외면해 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진심이 예수님이 오병이어 이적을 향하신 마음과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피해버린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다시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며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다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생각으로 예수님을 찾는다면 예수님에게서 자신의 배를 위한 떡을 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에 합당한 생명을 볼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는 영과 육은 앞서 말한 대로 행위를 말씀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도 예수님을 임금 삼기 위해서 찾은 행위는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행위만을 놓고 보자면 유대인들은 분명 영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생각했습니다. 자기를 위한 자기 생각으로 예수님을 찾은 것을 육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영은 예수님이 오신 그 이유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자의 살과 피를 주심으로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한 예수님을 일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찾는다면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육신을 위한 떡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볼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영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을 살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교회에 나오는 것도 누구의 생각으로 나오느냐에 따라서 육이 될 수도 있고 영이 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을 위한 자기 생각으로 교회를 나오고 예배드리며 예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임금 삼기 위해서 찾았던 유대인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의 생각과 같은 것이고 결국 예수님으로부터 육이라는 판단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기도하는 것 역시 같습니다. 기도가 육이 될 수도 있고 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하는 기도라면 그것은 육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각으로 하는 기도라면 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차이점을 잘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으로부터 떠나버립니다. 자기 생각으로 찾았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생각을 내어놓자 하나같이 그 말씀이 어렵다 하며 뺑소니를 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육신의 떡을 위한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생명을 위한 예수님을 말씀하고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말씀에 머리를 흔들고 떠나 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을 가지고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자기 생각으로 예수님을 찾는 것에 대한 좋은 이야기가 또 하나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마 아버지가 죽고 나자 형이 모든 재산을 차지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형에게 명해서 재산을 자신에게도 나누어주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예수님에게 그런 부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예수님을 선지자쯤으로 여겼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자기 형에게 명해달라는 부탁을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 판단한다면 누가 책망을 들어야 합니까? 분명 모든 재산을 혼자 차지한 형입니다. 형이 나쁜 사람이며 당장 형을 찾아가서 재산을 동생에게 나누어주라고 호통을 쳐야 당연하다는 생각이 곧 우리들의 생각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동생에게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는 책망을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각과 다른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은 자기 생각으로 자신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형에게 명령해서 재산을 나누도록 하실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 사람, 곧 인간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관계에서의 잘잘못을 판단하는 재판장으로 오신 분이 아닙니다. 물건을 나누는 일을 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생각에서 판단할 때 자기 생각으로 자기를 위해서 예수님을 찾는 그자가 책망을 들어야 마땅했던 것입니다. 물론 재산을 혼자 차지한 형이 잘못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형은 아예 예수님을 찾지 않은 자로서 언급할 이유도 없는 것이고, 소위 예수님을 찾는다고 하는 사람을 두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예 교회를 찾지도 않는 사람들은 언급할 가치도 없는 것이며,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을 찾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두고 무엇이 영이며 무엇이 육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와 세상을 두고 영과 육으로 나누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영과 육으로 나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을 때 자신을 위한 자기 관심사를 가지고 나온다면 그것은 육이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은 무엇입니까?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의 관심사에 관심을 두고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왜 인간적인 시각에서는 피해자인 동생을 책망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영과 육은 서로 양자간에 타협을 이룰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영은 육을 배척하고 육은 영을 용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영과 육을 함께 말해버립니다. 즉 육을 위해서 영에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육을 위해 필요한 것, 즉 육에 대한 관심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영의 일을 힘쓰라는 것입니다. 영의 일을 힘쓰면 그에 대한 상으로 원하는 육의 일을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말을 하는 그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사람들이 원하는 육에 대한 소원을 이용해서 영의 일이라고 말하는 교회 일로 끌어 들이고자하는 속셈이 아니겠습니까? 이 역시 예수님의 관심에는 무관심한 채 오직 자기 관심사를 위해서 예수님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과 육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우리들의 생각으로 예수님을 찾는 것은 육일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각이나 관심은 모두가 자신을 중심으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에게 되어지는 일을 가지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면 예수님은 자신을 도우실 것이고, 예수님의 도우심은 세상에서의 일이 잘되는 여부로 증거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일이 잘되면 예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으로, 잘못되면 뭔가 자신에게 잘못한 것이 있어서 예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기 때문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삼서 2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순복음 교회의 조용기 목사는 소위 삼박자 구원이라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첫째 영혼이 잘되고, 둘째 범사에 모든 일이 잘되고, 셋째 육신이 건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는 3,4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3요 1:3-4)는 말씀을 보면 요한은 자신이 편지를 쓰고 있는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기뻐한다는 말을 합니다. 즉 요한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말할 뿐, 가이오의 영혼과 그가 하는 모든 일과 육신이 강건하기를 바라는 말은 전혀 하지 않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본다면 영혼이 잘됨 같이라는 말은 가이오가 진리를 알게 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며, 범사에 잘된다는 것은 범사, 즉 모든 일을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강건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육신의 강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강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영혼과 육신이 다 잘되야 한다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그 생각이 예수님의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자신의 생각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영이 잘되는 것은 육이 잘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육이 잘된다 못된다라는 것은 인간의 시각일 뿐 하나님의 시각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면 바울에게 무엇이 있든 바울은 그것으로 자신이 잘됐다고 보지 않을 것입니다. 가령 돈을 많이 벌었다면 세상은 잘된 것으로 보지만, 모든 것이 배설물로 여겨지는 바울에게는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서 잘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서 세상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역시 세상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세상 것이 많고 적음을 가지고 잘된 것 잘못된 것으로 구분을 하시겠습니까?
신자에게는 세상 것이 얼마가 있든, 어떤 일을 하든 상관없이 다만 하나님이 있게 하신 자리에서 하나님이 하게 하신 일을 하면서 진리 안에서 행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만원이 있으면 만원으로 진리 안에서 행하며 사는 것이고, 백만 원이 있으면 백만 원으로 진리 안에서 행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이 가진 것을 보면서 '나는 적게 받았다'고 생각하며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이런 저런 일을 했는데 왜 나는 저 사람보다 적게 가져야 합니까?'라는 항변을 한다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65절에 보면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에게 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에게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그 믿음으로 예수님에게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에게로 가는데 있어서 우리의 발판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행위라든가 육신의 일들 그 어떤 것도 예수님에게로 나아가는데 전혀 도움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육신의 일이 잘되는 것을 자신이 예수님과 바른 관계에 있기 때문으로 여긴다면 결국 육신을 발판 삼아 예수님에게 나아가는 것에 불과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육을 위해서 영이 존재하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혼만 강건하면 되니까 육신은 아무렇게나 살아가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이원론일 뿐입니다. 육신은 아무렇게나 살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위한 자기 생각으로 사는 것이 육이고, 예수님의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영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모두가 생명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오직 육신의 유익, 즉 떡만을 기대할 뿐입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생각으로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피하신 것은 예수님의 육의 일을 해결해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시험했을 때 사단의 말대로 돌을 떡으로 만드는 능력을 보여주지 않고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고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그 이유를 분명히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떡을 위해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찾느냐 찾지 않느냐를 물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왜 찾느냐?'를 물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자칫 잘못하면 '아 예수님 앞에서는 육신의 문제를 구하지 말라는 말이구나'라는 생각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또 '나는 육신의 문제를 구하지 않으니까 나는 정당하다'는 답을 스스로 가지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단지 육신의 문제를 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오직 생명만을 보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문제를 찾는 것은 생명을 보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문제를 구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오직 생명만을 보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66절에 보면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곧 생명의 떡으로서 하늘에서 오신 분이며,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하는 문제가 너무 어려워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 버립니다. 관심이 오직 육신에 있으며 육신의 잘됨이 곧 사는 길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하늘의 생명을 언급하며,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생명에 거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단어나 문장들이 너무 어려워서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 생각이 육신이 머물며 단단하고 강퍅한 마음이었기 때문에 영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난 후에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6:68)라는 참으로 멋진 말을 하는 것입니다. 누구는 말씀이 어렵다며 도망을 치고, 누구는 말씀을 생명으로 인식하며 생명의 말씀이 여기 있는데 뉘게로 가겠는가라는 고백을 합니다. 이거야말로 안다 모른다의 차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멸망이라는 엄청난 차이로 끝나는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곧 영생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두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육신을 꾀한다면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으로는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영과 함께 육을 보장해 준다는 예수 아닌 예수, 즉 다른 예수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기적 때문에 남은 것도 아니고 떡 때문에 남은 것도 아닙니다. 영생의 말씀 때문에 예수님에게 남은 것입니다. 이것이 곧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에게 남이 있는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영에 속한 싸움입니다. '누가 더 열심히 잘 믿어서 세상의 복을 더 많이 얻느냐?'라는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을 찾으면서 이러한 싸움을 포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기 생각을 포기하지 못한 채 예수님을 찾는 것이고 무익한 육에 거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이 믿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베드로처럼 "주여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는 고백을 하시는 분이라면 여러분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보내주신 분입니다. 그러한 여러분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살을 내어놓으시고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붙잡은 자 되었기 때문에 말씀이 어렵다며 예수님을 떠나는 사람들 가운데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말씀이 꿀송이보다 더 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고 세상의 그 어떤 것을 취하는 것보다 영생의 말씀을 아는 것이 더 즐거운 사람들입니다.
영생의 말씀을 알게 된 것으로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말씀 안에서 행하고 살아가십시오. 영과 육이 무엇인지 생각하시고 육이 아닌 영으로 사는 복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39강) 7:1-9 세상과 예수
성경을 읽다 보면 뜻밖에도 서로 모순되는 내용들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더 뜻밖인 것은 모순된 부분들에 대해서 전혀 의문점을 가지지 않고 마치 당연한 것처럼 읽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성경을 무조건 믿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믿으면 안된다는 뜻이 아니라 성경을 무조건 신봉하는 것 때문에 모순된 내용들을 만나도 의문점을 가지지 않고 지나쳐 버리는 맹목적인 믿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의심을 가지는 것 자체가 성경에 대한 불경죄를 짓는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마치 성경은 의심해서도 안되고 의문을 가져서도 안되고 성경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진리입니다. 우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는 완벽한 진리입니다. 죄인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을 계시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담겨 있는 말씀의 의미를 모른다면 그 사람에게는 진리라 말할 수 없습니다. 진리가 진리되는 것은 말씀에서 하나님이 가르치시고자 하시는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았을 때 비로소 진리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었다고 해서 진리를 읽었다고 말할 수 없으며, 진리를 알았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살았으며, 모세가 어떤 일을 했으며, 선지자들이 무슨 말을 했으며, 예수님이 어떻게 죽으셨는가를 안다고 해서 진리를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고 일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알았을 때 '진리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담겨진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알 때 비로소 십자가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거룩한 말씀이기 때문에 의심을 하면 안되고, 의문을 가져도 안된다는 것은 잘못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충분히 의문을 가질 만한 모순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8절과 10절의 말씀입니다. 8절을 보면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10절에서는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은 유대로 가기를 청하는 형제들에게는 가지 않겠다고 하시고는 몰래 혼자서 유대로 가신 모순적인 행동을 하신 것입니다. 가지 않겠다고 하셨으면 계속 안가시는 것이 당연한데 왜 혼자 몰래 가시는 것입니까?
가지 않겠다고 하시고 가시는 예수님의 행동에는 분명 예수님이 가르치시고자 하시는 의도가 있습니다. 이처럼 모순된 행동에 담겨 있는 예수님의 그 의도를 깨달았을 때 비로소 말씀이 진리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이 있을리 없습니다.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계시의 말씀이기에 모순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이해에 모순으로 보여지는 것뿐입니다.
먼저 유대로 가기를 원하는 형제들의 요청을 거절하신 이유부터 알아보겠습니다. 1절에 보면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에서 오신 생명의 떡이라고 선포하심으로써 유대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자신에 대해서 신적인 주장을 하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음모를 피해서 유대에 다니지 않으시고 갈릴리에 다니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웠을 때 형제들이 예수님에게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3절)라는 권유를 합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왜 예수님에게 갈릴리를 떠나 유대로 갈 것을 권유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4절)라는 말씀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의 형제들은 초막절이라는 명절을 이용해서 예수님이 자신의 능력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내기를 권유한 것입니다. 즉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증명하라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형제들은 오병이어 이적을 행하시고 또 다른 많은 이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행위를 마치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 능력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으로 이해한 것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초막절은 유대인의 명절입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유대로 모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갈릴리라는 조그만 마을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유대로 가서 이적을 행하고 능력을 보이는 것이 자신을 나타내는 일에 있어서는 아주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의 형제들은 바로 이러한 계산을 한 것입니다. 일단 많은 사람들에게 명성과 영광을 얻어야 예수님이 의도하고 하고자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세상의 이치대로 한다면 분명 잘못된 생각은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 나쁜 일도 아니고, 자신을 드러내고 증명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으로 간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야 하고, 호응을 얻기 위해서는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어야 하고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두고 5절에서는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게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라고 부추기는 형제들의 행동이 결국 예수님을 믿지 않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자신이 하늘에서 온 메시아임을 증명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온 메시아임을 나타내는 일을 하려거든 사람들이 많은 유대로 가서 능력을 나타내서 명성을 얻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형제들도 메시아에 대해서 철저하게 자기 구원적이고 세상적이고 물질적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떡을 얻기 위해서 예수를 임금 삼기 위해서 쫓는 유대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지 아니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 이적을 보이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사단의 시험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한 것은 모두가 예수님의 능력을 과시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떨치는 기회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예수라는 이름의 명성을 떨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지 자신의 명성을 떨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의 명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고 그 길을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명성을 얻으라고 권유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모른다는 것이고, 이것이 곧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현실을 보면 이상하게 십자가의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마치 십자가의 죽으심을 자신의 이름을 떨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쯤으로 여기는 것 같은 현상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보면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름이 세상에 오르내리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서도 같은 선전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대신 지고 희생하신 분으로 광고함으로서 예수님의 희생으로써 그 명성을 세상에 알리려고 하는 의도가 많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이 바라보는 예수님은 단지 선하게 세상을 살다가 세상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위대한 성인의 한사람으로 그 명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신 것입니다. 세상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주신 자기 백성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그 뜻에 복종하시는 것뿐입니다. 이처럼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것이 예수님에게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면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 역시 세상이 예수님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안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의 이름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즉 예수님을 이용해서 내 이름을 세상에 나타내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을 자신을 증명하고 자신의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이용을 한다면 그것은 곧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신자가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은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을 알고 마음을 알기에 그 뜻에 복종하는 것일 뿐,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를 말하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신자 아닌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역시 예수님을 말하는 사람으로서 내 자신이 바로 믿음이 아닌 믿음의 자리에서 스스로 믿는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혹시 내가 내 이름과 명성과 체면과 자존심을 포기하지 못하고 그러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지 않았는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목사들이 큰 교회를 그토록 원하는 이유 역시 자신의 이름과 명성에 상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골 조그만 교회에 있는 것보다는 도시의 큰 교회에 있는 것이 자신을 나타내고 자존심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목사로서 같은 마음이 있을 수 있기에 오직 복음만을 생각하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할 수 있는 그 마음을 하나님에게 구할 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판이하게 다른 두 사고방식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형제들의 사고방식으로서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자기 이름과 명성을 위해 사는 것이 형제들의 사고방식인 반면, 철저하게 자신의 명성을 버린 채 오직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해 사시는 예수님의 사고방식이 그것입니다. 세상은 곧 이 두 사고방식으로 구분이 되고 어떠한 사고방식에 순종하느냐에 의해서 하나님 편의 사람인지 아니면 세상 편의 사람인지로 나뉘어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로 가라고 권유하는 형제들에게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6-8절)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님의 때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분명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질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때는 예수님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되고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것을 예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복종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반면에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다'는 것은 스스로 선택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로 가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이르러야 하지만,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는 형제들이라면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유대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 일하신 분이라면 형제들의 말처럼 초막절에 유대로 가는 것은 자기 명성을 위해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늘 준비되어 있는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명성을 위해서라면 기회만 되면 어느 때라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 명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예수님으로서는 초막절에 유대로 가는 것이 때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때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때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한 때이지만 형제들이 생각하는 때는 자기를 나타내기 위한 때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때를 기다리지만 형제들은 초막절이라는 절기가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어떠한 때를 살아가야 합니까? 바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위한 때를 기다리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만약 세상에서 실패하는 일이 있다고 할 때 우리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위해서 산다면 그 실패는 원하는 때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산다면 실패도 하나님이 주신 때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신자와 신자 아닌 자의 서로 다른 때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예수님의 형제들은 전혀 상반된 사고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세상과 예수님으로 구분을 합니다. 이것이 7절의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도 우리는 한가지 의문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자신을 미워하고 그 이유는 예수님이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은 무엇을 두고 세상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세상은 어떤 것입니까? 모르긴 몰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 즉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세상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불신자들이 나를 미워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불신자들의 행사를 악하다고 증거하였다는 것입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불신자들의 행사를 악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고, 또 불신자들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사건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로마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의 죄에 대해서 말한 것이 있기도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 믿는다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에게도 이방인들과 같은 죄가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서 한 말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방인들을 공격하고 책망하시거나 그들의 행사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 역시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간섭을 했다는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의 고소로 인해서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실 때 이방인이었던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없음을 알고 살려주려고 까지 했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빌라도의 미움으로 인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미움으로 인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말씀하는 세상은 단순히 이방인들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적대감을 나타내는 세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나타내고 자기 명성을 위해서 사는 것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는 예수님의 사고방식을 거부하는 세력을 곧 세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자기를 나타내는 도구로 이용을 합니다. 기도를 해도 시장 거리에서 큰 소리로 합니다. 금식을 하는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서 일부러 얼굴을 흉하게 하고 슬픈 기색을 나타냅니다. 구제할 때는 자기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회당과 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외식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가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미워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형제들에게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세상이 볼 때 착한 일을 많이 해서 미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세상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행동에 대해서 같은 일치감을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이 같은 일치감을 가지고 있는 그들을 미워할 리가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 자신이 자기 이름과 명성에 매어 있는가를 생각하십시오.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지 않은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고 우리 자신의 명성에 마음을 두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세상의 사고방식에 머물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때를 기다리며 오직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실패가 있다 할지라도 낙심치 않고 실패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어떻게 하는 것이 그 뜻에 복종하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리 이름을 떨치고 자신을 나타내었다 할지라도 결국 썩어질 몸의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이 대대로 그 이름과 업적을 높인다고 해도 그것으로 생명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높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름은 예수님의 십자가 뒤에 감춰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그 어떤 이름도 정당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모든 행동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타내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필히 우리 자신의 이름에 대해서는 포기를 해야 합니다. 내가 증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그 순간 예수님에 대한 증거는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개인을 보지 마시고 오직 예수님만을 보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세워진 신자입니다.
(40강) 7:10-18 자기 영광
사회가 자신을 인정하고 알아준다면 이것처럼 신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요즘 심심찮게 연예인들이 마약을 복용함으로서 구속되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연예인들이 마약을 복용하게 되는 것은 인기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사실 연예인은 인기가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연예인의 가치는 인기가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에 인기가 있을 때에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지만 인기가 하락하고 사회가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을 때의 그 마음은 죽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고 세상 속에서 인기 있는 존재로 부각되고 싶어하는 것은 연예인들에게 국한된 일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본래 마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해주고, 꽤 괜찮은 사람으로 평가하고, 높여준다면 마치 자신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세상 속에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고 인정을 받고자 하는 마음은 현대 사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옛날 예수님의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예수의 형제들은 예수님에게 많은 사람이 모이는 초막절이 되었을 때 유대로 가서 자신을 나타내라는 권유를 합니다. 예수님이 제대로 일을 하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정해야 되지 않겠느냐면서 세상에 자신을 나타낼 것을 권유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형제들의 권유를 거절하고 유대로 가지 않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유대로 전혀 가시지 않겠다는 의도에서 하신 말씀은 아니었다는 것을 10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분명 형제들이 명절에 유대로 올라간 후에 자신도 올라갔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유대로 전혀 가시지 않겠다는 의도로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신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8절 말씀에서도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는 말씀을 보면 아직 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유대로 가실 때는 따로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로 가시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예수님의 때를 위해서입니다. 형제들처럼 예수님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과 형제들의 생각이 각각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형제들은 명절을 자기를 나타내기 위한 때로 삼을 것을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때를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형제들에게 세상이 자신을 미워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형제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면 분명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것이고 그 권위가 높아질 것으로 여겼지만, 예수님은 세상이 오히려 자신을 미워함을 말씀한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이라 함은 불신자들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방인을 개처럼 취급하는 유대인이 이방인의 세계에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지는 않을 것이고, 또 유대로 가라고 함은 유대인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지 이방인의 세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분명 서로 맞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7절에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예수의 형제들을 미워하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의 형제들은 세상과 맞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예수님과 세상이 서로 연합할 수 없는 벽으로 존재하는 것입니까? 이것을 생각해 보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예수님과 맞습니까?' 아마 '나는 예수님을 미워하지 않으니까 예수님과 맞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수가 아닌 나에게 맞는 예수를 내 스스로 만들어 놨기 때문일 수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에게서 내 마음에 맞지 않고 내 생각에 부합되지 않는 부분은 빼버리고,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대신 보탬으로서 내 마음에 맞는 예수를 만들어 놓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자신과 맞는 예수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사실 오늘날 현대 교회가 이처럼 예수 아닌 다른 예수를 스스로 만들어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며 믿고 있는 실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믿고 있는 예수가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일하시는 예수님인가를 다시금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명절 중간에 유대로 가서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15절)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예수님을 보고 유대인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의 언어는 히브리어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어를 쓰는 것이 당연한데 당시 이스라엘의 언어는 아람어가 중심이었습니다. 아람어는 바벨론의 언어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에 자기들의 언어인 히브리어가 중심이 아니라 아람어가 중심이 된 것입니까? 이것은 옛날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패망하고 포로로 끌려가서 70년의 세월을 지낸 것과 이유가 있습니다. 즉 바벨론에서 70년이란 세월 동안 히브리어를 쓰지 못하고 바벨론 언어인 아람어를 씀으로 해서 자연 이스라엘은 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 중심으로 흘러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예수님 당시에 히브리어는 누구나 알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가 아닌 종교지도자들이나 알 수 있는 언어가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수의 아들인 예수님이 히브리어인 말씀을 가르치자 그러한 반응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당시 상황으로서는 당연히 보일 수 있는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우지도 않았는데 안다는 것은 분명히 기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유대인의 반응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디에서 배웠다는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16절)는 말씀을 하십니다. 성전에서 가르쳤던 말씀은 예수님의 교훈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다'는 말씀에 중심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유대인이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예수님에게 유대인들이 기이하다는 반응을 보인 것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안다는 것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국 그들이 '배워야 안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것이 어디 유대인들만의 사고방식이겠습니까? 오늘 우리 역시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러한 사고방식이 잘못된 것입니까? '배워야 안다'는 사고방식이 잘못된 것이라면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옳다는 얘기가 됩니다. 하지만 분명 이러한 사고방식을 옳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세상은 배워야 알 수 있습니다. 지식이란 배웠을 때 충족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지식 역시 배움을 통해서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하나 예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교훈만큼은 배워야 할 수 있는 지식의 차원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훈도 배운 자가 알 수 있는 것이라면, 유대인들의 반응은 당연합니다. 전문적으로 배우지도 않은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친다는 것은 분명 기이한 일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배움과 상관없는 것이 하나님의 교훈이라면 결국 유대인들의 생각이 잘못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이 배운 사람이 많이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력이 낮은 사람보다는 학력이 높은 사람이 더 많이 알 것이고, 더 잘 가르칠 것이고, 배울 것도 많을 것이라는 생각을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여러분 앞에 일자 무식인 사람과 박사가 말을 한다면 누구의 말을 신뢰하겠습니까? 당연히 박사의 말을 신뢰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말이 옳기 때문에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박사라는 학위를 신뢰함으로 그의 말까지 신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것이 세상적인 지식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공부하지 않은 사람보다는 전문으로 공부한 사람이 더 많이 알고 옳게 알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복음만은 예외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배워서 아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지식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 교훈은 내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즉 배움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배워서 알 수 있고, 배워서 전할 수 있는 것이라면 복음은 신학전문가의 소유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복음을 아는 자는 모두 신학자요 목사일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전문으로 공부하지 못한 일반 신자가 아무리 복음을 안다고 해도 그 수준은 절대로 목사나 신학자를 따라갈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복음이 그러합니까? 복음이 과연 배운 자들의 몫입니까? 이것이 복음이라면 복음 역시 가진 자, 배운 자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나에게서 나오는 교훈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나의 지식과 배움에서 나오는 교훈이 아니기 때문에 배웠느냐 배우지 못했느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하나님의 교훈이라는 말씀입니다. 현대 사회에는 '지적 재산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지식도 소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배움과 지식에 의해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내 것'이라는 소유를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조차도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하물며 우리들에게야 복음이 하나님의 것임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복음을 말한다면 그것은 나의 배움과 지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서 받아서 전한다'는 것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교훈은 인간의 지식이나 학력을 가지고 증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복음을 가르치는 것을 지식의 산물로 여깁니다. 그래서 복음은 오직 목사만이 가르치고 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 팽배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까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교회에서 교사를 선정할 때 학력을 보고 뽑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교사란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인데,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왜 학력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까? 박사가 복음을 더 잘 전할 수 있다는 기준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기에 복음을 아는가를 보면 되는 것인데 학력을 본다는 것은 결국 유대인이 사고방식이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전 1:21절에 보면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말합니다. 자기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학력이 높고 많이 배웠다고 해서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복음을 더 잘 말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고전 2:4-5절에서도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말씀하는 것을 봐도 복음은 사람의 지혜와 지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복음서와 사도 바울서신에서 뭔가 지적인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서와 사도바울 서신의 복음의 질이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글 자체가 지적이냐 지적이 아니냐라는 것은 복음에 있어서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평신도가 복음을 말하는 것과, 목사가 복음을 말하는 것에 전혀 차이가 없다고는 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복음을 설명하고 성경을 가르치는데 있어서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복음의 차이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목사의 복음이 평신도의 복음보다 더 깊다라는 식으로 이해해 버린다면 결국 복음을 사람의 지혜와 지식에 의해서 증거되는 것으로 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증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많이 배운 자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의 배움의 수준으로 복음을 판단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17-18절에 보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은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힘쓰는 사람들이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말씀을 가르치는 예수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조건만을 보고 그 말을 판단했던 것입니다. 저 사람에게서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느냐 없느냐만 보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의 조건을 보고 말을 받아들이는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자들이 극히 조심해야 할 문제입니다. 가령 목사가 복음을 말할 때는 귀를 기울이면서 목사가 아닌 신자가 말할 때는 '유치하다'고 여기면서 귀를 기울이지 않고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그 스스로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밖에 안됩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복음에는 '안다'는 반응이 아닌 '복음으로 사느냐?'라는 반응이 나와야 합니다. 복음을 가르칠 때 '다 아는 말이다'라는 반응이 나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는 관심이 없고 다만 복음을 듣는 것이 전부라는 것 밖에 안됩니다. 따라서 나의 지식으로 복음을 들을 것이 아니라 삶으로 들어야 하는데 지식으로 복음을 듣기 때문에 '안다'는 반응을 보이면서 시큰둥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가 아닌 심지어 어린아이가 복음을 말한다 할지라도 그 말에 마음을 기울이는 그가 바로 복음 앞에서 겸손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덧붙여서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을 구한다고 말씀합니다. 스스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배워서 알게 된 복음을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것이 아닌 자기 것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의 것으로 자기 영광을 삼으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목사가 설교를 잘해서 인기를 얻고 설교를 잘하는 목사라는 인정을 받기를 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이용해서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바로 그 속에 불의가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불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불의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가로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아서 전한 것이라면 모든 영광이 아버지에게 돌아가야 마땅한데 그 영광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면 불의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형제들의 서로 맞지 않은 생각이었습니다. 형제들은 자기 영광을 구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구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 역시 자기 영광을 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때문에 오직 아버지의 영광만을 구하는 예수님과 맞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19절부터 언급하는 율법에 대한 얘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율법을 대했다면 율법이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을 것입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자기 영광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어떠해야 합니까? 예수님처럼 자기 영광이 아닌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복음은 인간을 십자가 앞에 죽게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영광은 불의일 뿐입니다. 신자가 무엇을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게 되어진 것이지 스스로 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알았다면 하나님이 알게 하신 것이지 스스로 알게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 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복음으로 산다해도 그것은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때문에 마땅히 나를 그렇게 살게 하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게 하신 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능력으로 살고, 그분의 능력으로 복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분을 잊어버리고 말하고 행하는 나를 보는 것이야말로 자기 영광을 위해서 스스로 행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내가 한다는 이 사고방식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수시로 자기 영광을 구하는 길로 가게 될 수 있음을 잊지 마시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말하고 하나님이 하게 하셔서 한다는 이 생각에 여러분의 마음이 굳게 세워져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참된 신앙입니다.
(41강) 7:19-24 율법
'율법이냐 복음이냐?'에 대한 논의는 예수님 시대부터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오는 여러 논의 중에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은 율법 시대고 신약은 복음 시대라는 주장도 있고, 율법은 단지 그리스도를 위해서 있는 것이니 그리스도가 오신 이상 율법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복음 시대이지만 말씀으로 사는 것은 있어야 하니까 지금도 역시 율법은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율법이든 복음이든 어느 한쪽을 포기하고 하나만은 선택해야 한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율법도 하나님의 말씀이니 만큼 율법 역시 버릴 수 없다는 입장에서 율법과 복음 모두를 수용하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율법과 복음을 서로 구별해서 율법이냐 복음이냐는 논의 자체가 성경을 벗어난 것으로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신 것이 과연 복음과 상관없이 주신 것이겠습니까? 어떤 신학자들의 주장처럼 구약은 율법으로 구원받는 율법 시대인데 이스라엘이 율법에 대해서 실패했기 때문에 다른 구원의 길로서 복음을 주신 것이겠습니까? 물론 지금은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적다고 할 수 있지만 적어도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서 성경이 말하는 분명한 길에 서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말하면서도 율법에 매어 있는 모습이 많이 보여지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면서도 결국 판단은 자신의 행위를 기준하는 것 역시 많이 보여집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 대해서 모호한 입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무섭다'라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율법은 항상 지켰느냐 안지켰느냐만을 묻습니다. 지킨자는 정당하고 지키지 않은 자는 죄지은 자로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 곧 율법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직 그들이 주장하는 율법에 준수하는 것만이 신앙이고 옳은 것으로 인정받을 뿐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곧 복음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사실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을 죽이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부터 그 이유를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유대인들의 말대로 하면 예수님은 피해망상증 환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적이 전혀 없는데 예수님 스스로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5:18절의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는 말씀을 보면 분명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마음을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결국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행동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것을 내세워서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셨기 때문에 나를 죽이려고 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이 단지 유대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죽이려고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기 보다는 율법에 대한 그들의 자세가 곧 복음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살아가는 유대인들이라면 결국 자신들의 율법을 보호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니까 나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기 위한 너희들의 열심이 나를 죽일 것이다'는 의미의 말씀인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시 유대인들뿐 아니라 오늘 우리 자신들에게도 책망이 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방향으로 나아간 적이 너무 많았음을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렇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율법적인 사람은 항상 자신의 법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죽이는 일에 열심입니다. 예를 들어서 현대 교회에 기도하는 것, 헌금하는 것,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 봉사하는 것, 이런 것들은 거의 율법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지켜내야 하는 신앙의 본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나 헌금이나 주일 지키는 것을 법적인 것으로 인식할 때 사람들은 자연히 지킨 자와 지키지 않은 자로 구별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킨 자는 당당하게 지키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 비판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법을 가지고 상대방을 심판하고 죽이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난 지켰는데 넌 왜 안지켰느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역시 예수님에 대해서 이러한 반응을 보입니다. 이미 5:18절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을 말씀드렸는데, 유대인이 이런 마음을 가진 것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친 것이 빌미가 되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것을 단지 안식일을 어긴 것으로만 볼뿐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안식일을 지키느냐 안지키느냐에 있는 것이지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과연 율법의 기능이 지킨 자와 지키지 않은 자를 구별해서 지키지 않은 자를 비판하고 심판하는 것인가 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율법에 대해서 유대인과 논쟁하는 것은 율법을 지켜야 하느냐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율법이 과연 무엇을 위해서 있느냐? 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점에 대해서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만약 율법이 무엇을 위해서 있느냐?에 대해서 도외시 해버리면 결국 율법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단순히 지켰느냐 지키지 않았느냐를 가지고 싸우고 심판하고 정죄하는 유대인의 수준에 머무르는 것 밖에 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율법을 지켰느냐 지키지 않았느냐에 대한 논의는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어떤 사람도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땅에 속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결코 지킬 수 없는 하늘의 법을 주신 것입니다. 때문에 지킬 수 없는 법을 두고 지켰느냐 안지켰느냐를 따진다는 것은 사실 의미없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지킬 수 없는 법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일부러 인간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지킬 수 없는 하나님의 법 앞에서 한가지 사실을 깨닫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법은 분명 준수를 요구합니다. 준수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오직 심판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법 앞에서 모든 인간은 심판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 밖에 없습니다.
율법은 완전 준수를 요구합니다. 100개 중에 99개를 지켰으니 나머지 한 개는 비록 지키지 못해서 봐준다는 것은 법에게는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이 있다고 할 때, 그 사람이 실수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면 법은 그 사람이 착한 일을 봐서 사람을 죽인 것을 없는 일로 넘어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착한 일을 해도 법은 단 한 개의 법을 기준으로 해서 심판을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법을 완전히 준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애초부터 법에 대한 준수를 목적으로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법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죽어야 할 죄인임을 알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허물 많은 존재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죄인을 대신해서 죽을 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대속의 제물로 오신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깨닫고 그분을 의지할 자는 자신의 죄와 허물을 아는 사람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단지 착한 성인으로 여깁니다. 즉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 다만 그 착한 행위를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자신은 누군가의 희생을 의지해야 할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역시 자신들을 대신해서 심판받고 죽어야 할 분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름대로 율법을 준수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에서 문자만을 봤을 뿐 율법의 의미는 보지를 못했습니다. 율법은 사랑을 요구하며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결국 이웃을 사랑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을 전혀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진심으로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었다면 율법을 지키지 않은 자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쪽으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을 지킨다고 하나 사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됩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율법은 복음을 위해서 주어졌습니다. 지켜내라는 것이 아니라 지킬 수 없음을 깨달아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 밖에 되지 않음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대신 심판을 받고 대신 죽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애당초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한 길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을 믿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몽학선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갈 3:24-25절의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는 말씀의 의미인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로 인도하기 위해서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서 자신의 죄인 됨과 예수님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자임을 발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감사하고 의지하는 그것이 바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산다면 그것이 곧 율법의 완성안에서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신자들은 스스로 율법의 조항을 하나하나 지키려고 하지 않아도 믿음안에서 율법을 이룬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뛰어 넘어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믿음으로 산다면 그의 삶의 하나하나는 율법을 이루는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즉 사랑하라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사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랑이기에 믿음으로 사는 삶의 열매가 사랑으로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22-23절에 보면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곧 할례입니다. 할례는 태어난 지 8일만에 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태어난 날에 따라서 할례를 행하는 날이 안식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유대인들은 과연 무엇을 포기해야 합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할례를 미룬다면 그것은 곧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 됩니다. 하지만 할례를 행한다면 안식일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법을 어기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결국 이들은 할례라는 법을 지키기 위해서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했으며 이런 경우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거룩하게 되는 길이었기 때문에 거룩한 안식일에 거룩하게 되는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안식일에 할례를 행할 수 있다면, 전신을 건전케 하는 병자를 고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당연하지 않느냐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신 것은 안식일을 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율법을 지키고자 하였다면 예수님으로 인해서 드러나는 율법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순종했어야 합니다. 자신들의 종교적 자존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못 알고 있었던 율법에 대한 의미에 순종하는 것이 진심으로 겸손한 자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그들의 자존심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들의 종교적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그들의 노력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에 대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종교에 대한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그런 위험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죽이려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은 우리를 굳세 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남을 비판하기보다는 나 역시 비판받을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게 합니다. 24절에 보면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을 지켰는가 안지켰는가, 행위를 두고 판단하지 말고 그가 하나님의 공의 아래 거하는가를 보고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가로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가는 이웃에 대해서 자신을 어떤 자로 드러내는가로 알 수 있습니다. 은혜는 자기 영광을 구하거나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세우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자신을 죽임으로서 드러나는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자신을 죽인 자가 자기를 자랑하거나 남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이겠습니까? 오로지 예수님의 은혜로 살았음을 자랑할 뿐입니다. 진정한 율법은 지켰느냐 안지켰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가를 묻습니다. 은혜를 알고 은혜 앞에서 겸손해지고 자랑하지 않고 경쟁하지 않고 무시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는 자로 살아가는 그것이 진정한 율법이며 율법을 이루는 것입니다.
(42강) 7:25-36 안다는 것
신자라면 누구나 나름대로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성경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에 대해서는 모르는데 어떻게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결국 성경과 상관없이 가지게 된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스스로의 교회 생활을 통해서 습득한 지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교회 생활을 통해서 나름대로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쌓아갑니다. 교회에서 만나는 기존의 교인들을 통해서, 그들이 말하는 것, 기도하는 것, 그들의 교회 생활 등이 스승이 되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에 대한 부분을 습득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교인들의 행동과 삶에 대해 전혀 책망이 없는 목사의 설교는 자신이 습득한 지식에 오류가 없음을 믿게 해버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스스로 습득한 지식이 참된 복음을 믿는데 커다란 장애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기존의 지식이 다른 지식이 들어오는 것을 방어하고 본래의 지식을 보호하고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참된 그리스도가 배척되고 그리스도가 아닌 그리스도가 진짜 구실을 하면서 잘못된 신앙에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제가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자신의 앎에 대해 신뢰를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알고 있는 것을 무조건 의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앎이 성경에 의해서 확인되고 보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성경과 상관없이 내가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맞다는 쓸데없는 고집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고집에 의해서 복음이 배척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앎이 참된 것인가 참된 것이 아닌가는 여러분이 자신의 앎에 복종되고 있는가를 보시면 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지식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알게된 하늘의 지혜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여러분에게 복종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해 참된 앎을 가진 신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복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자신의 앎을 기준으로 해서 누군가를 판단하고 비판하고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면 자신의 앎을 성경을 상고함으로 점검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것은 성경이지 여러분의 앎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면서 여러분이 알고 있는 앎이 '과연 그러한가' 끊임없이 살피고 상고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7:11절에 보면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는 말씀을 합니다.
베뢰아 사람의 신사적인 모습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한 것입니다. 즉 이들이 신사적이라는 것은 사람에 대한 태도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대한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들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것이 그러한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사적인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러한 신사적인 모습이 필요합니다.
현대 교인은 들은 것으로 끝나 버립니다. 자신이 신뢰하는 목사가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받아들이고, 그것은 자신의 앎으로 굳혀 버립니다. 스스로 성경을 상고함으로 확인하고 성경에 의해서 굳게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목사를 신뢰하기 때문에 그의 말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에 대해 신사적이지 못합니다. 성경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를 신뢰하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태도로 구축된 앎이 오히려 복음에 대해 큰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지식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25-27절을 보면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 말하되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친 가르침은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내용에 전혀 반대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저지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두고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라는 조롱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왜 이 사람의 가르침을 가로막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안다'는 것입니다. 즉 이 사람은 갈릴리 사람으로서 요셉의 아들이라는 출신성분을 안다는 것이고, 이것을 말하는 것은 이사람은 아무것도 아님을 강조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데 무엇이 겁나서 그가 말하는 것을 막지를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굳은 신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지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이 오신다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지식으로 예수님을 볼 때 예수는 절대 그리스도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가 어디서 왔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부인하는 이유였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지식에 대해서 예수님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하신대"(28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너희가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앎은 잘못된 것이라는 지적을 하시는 것입니다. 즉 '그래 너희는 내가 어디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너희들의 생각일 뿐이다'는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이 있다'는 것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그분에 대해 '참이시니'라는 말을 함으로서 그분이 곧 하나님이신 것을 언급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가 하나님을 안다면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보내서 오게 되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는 것을 보니까 결국 너희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모른다는 말은 그들을 분노하게 하고도 남을 만큼 엄청난 말입니다. 그들의 신앙을 부인하는 것이고 모욕하는 말입니다. 유대인이라면 스스로 하나님에 대해서는 완벽하다할 정도로 철저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을 모른다'는 말은 그들의 분노를 살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나는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 나는 안다. 따라서 나를 모르는 너희는 하나님을 안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자기를 높이는 자기 고집에 지나지 않고 정신나간 사람의 외침이며 신을 모독하는 이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얘기는 신약에 와서 비로소 언급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구약의 예언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구약에 대한 자기들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또 메시아에 대한 지식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의 지식을 기준으로 할 때 예수님은 도저히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강한 자였습니다. 강한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는 극적인 일을 이루어 내실 분이 그들의 그리스도며 메시아였기 때문에 예수는 도저히 그들의 메시아 조건에 충족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이사야서 53:1-6절에서 예언되는 것처럼 메시아는 강한 자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질고를 당하고 매맞음을 당하는 약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말씀과는 정 반대의 메시아를 소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곧 그들이 성경을 말하되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요, 하나님을 말하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말하나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 다릅니다. 예수님을 말하나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 예수님이 맞다고 여깁니다. 이들은 '네가 하나님을 모른다'는 말에 대해서 발끈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앎을 신뢰하고 있기에 자신의 신뢰를 부인하는 말을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너만 아느냐 나도 안다', '너만 복음이냐 나도 복음이다', '다른 사람은 다 틀리고 너만 옳으냐?'라는 것입니다. 아마 당시 유대인들도 예수님에 대해 이런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겨우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며 목수의 아들인 자가 전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 앞에서 성경을 말하고 하나님을 말하며 심지어 스스로를 하나님이 보낸 자로 일컬을 때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여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너만 아느냐 나도 안다', 또는 '너만 복음이냐 나도 복음이다'라는 등의 말은 결국 자신의 앎과 자기 복음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기존의 앎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앎을 세웁니다. 이 모두는 성령이 오심으로 되어집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는 자가 그리스도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필히 거치는 과정은 기존의 앎에 대한 부인입니다. 내 지식과 상식으로 알고 있었던 신에 대한 지식이나 예수님에 대한 앎들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신에 대한 인간의 앎을 부인해야 합니까? 그것은 인간은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인간이 생각하는 신이란 자기를 위한 신일 뿐입니다.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신이며, 그러한 신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 신에게 나름대로 정성을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오심 조차도 자기중심적으로 오해합니다. 즉 나를 구원하고 천국 보내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의 구원으로 끝나고 마는 십자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에 대해서도 무감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십자가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에 대해서도 크게 오해를 합니다. 이적을 단지 신기한 능력으로 받아들입니다. 당시 유대인들도 이러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31절에 보면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에 예수님을 믿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예수님을 알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근거한 믿음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그리스도가 온다고 해도 예수가 행한 표적을 따르지 못할 것이다는 말까지 합니다. 이들은 누가 진짜 그리스도냐라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관심은 이스라엘을 해방할 강한 자였던 것입니다. 자신들을 해방시키는 사람이라면 그를 믿겠다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잘못은 오늘날 신자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다며 예수님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정작 예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들은 '무엇이 참된 예수냐?'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어떤 예수든 상관없이 자신의 일을 도와주고 문제가 있을 때 해결해줄 수 있는 신이라면 진짜로 여기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에게 있어서 가짜 예수는 인간의 편을 들지 않고 인간을 위하지 않는 예수이며, 오히려 인간에게 예수님이 가셨던 길을 가기를 원하는 예수일 것입니다.
예수라 해서 우리에게 생명이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피흘리신 바로 그분이 우리의 생명 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저마다 '내가 믿는 예수는 참된 예수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만약 그 예수가 여러분의 삶에 도움이 되어주고 세상에서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예수라면 십자가 지신 예수라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십자가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생명이기 때문에 십자가로 끌고 가시면서 우리를 죽이시는 분이 참된 예수님인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 앞에서 여러분은 '안다'는 생각을 버리셔야 합니다. '안다'는 생각으로 여러분으로 하여금 성경을 상고해야 할 이유를 상실하게 해버립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말씀에서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다면 여러분의 삶은 앎을 따라가는 것으로 증거되어야 합니다. 안다해도 아는 것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식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삶이지 지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알았다는 것이 아닌 따라가는 것으로 믿음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그 앎이 여러분 안에서 진리가 되고 여러분의 삶은 진리에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43강) 7:37-39 목마르거든
37절에 보면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목이 마르면 마실 물을 찾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목마름을 무엇으로 해결하느냐에 대해서는 많은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지 물을 필요로 하는 목마름이라면 물을 찾아서 마시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있어서 목마름이 단지 물을 필요로 하는 목마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한 목마름이 있을 수 있고, 자신의 성공에 대한 목마름이 있을 수 있고, 사업에 대한 목마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목마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목마름은 자신이 얻기를 갈급해하는 것을 소유하게 됨으로서 해갈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하지도 않는 것을 주면서 이것으로 목마름을 해결하라는 것은 그 사람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말씀에서의 전제 조건은 예수님에게 오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목마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을 마시기를 싫어하는 나귀를 끌어다가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에 대해서 갈급해하지도 않고 목말라 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아무리 내게로 오라고 외쳐본들, 또 억지로 끌고 온들 예수님을 찾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는 것이나 열심을 내라고 강조하는 것은 중요한 것 하나를 뛰어 넘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열심히 믿으라고 외치는 것은 예수님을 열심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인데 믿지 않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스스로의 의지를 발휘해서 열심을 내라는 것과 같은 것이지만 예수님을 향한 열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목마름과 갈급함에 의해서 나타나지는 자연적인 반응이며 열매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고기 맛을 모른 사람에게 '이것은 맛있는 고기인데 왜 먹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고기 맛을 안다면, 자연히 고기를 먹고 싶어할 것이고, 먹지 말라고 해도 자연히 고기로 손이 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에게로 나아가자'라고 무작정 말할 것이 아니라 과연 내 마음이 예수님을 향하고 있으며 예수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우선인 것입니다. 먼저 37절을 다시 살펴보면 예수님은 명절 끝 날에 유대인을 향해서 '내게로 오라'고 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명절은 7:2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초막절을 말합니다. 초막절 끝 날에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초막절은 유대인에게는 삼대 명절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절기를 지키지 않을 때 이스라엘에게 끊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절기는 이스라엘에게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절기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절기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초막절은 추수절로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야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 그 땅에서 얻은 소산물로서 초막절을 지켰던 것입니다. 초막절의 중요한 의미는 자신들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자체를 생각한다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살았던 그들이기 때문에 가나안 땅은 선물이며 은혜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초막절에 드리는 소산물은 단지 열매를 바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얻어진 것임을 고백하는 차원에서 드려지는 것이었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원망으로 가득했던 이스라엘의 자손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게 된 근거가 어디에 있었는가? 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던 근거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 개념이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의 피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에 내린 마지막 재앙인 장자의 죽음은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해서 피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죽음의 재앙에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피를 바른 사람들은 그때부터 생명의 근거가 피에 있었던 것입니다. 심판에서 해방되는 피의 은혜를 입은 자로 애굽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 군대는 모조리 죽은 홍해에서 이스라엘만이 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도 피의 은혜를 입은 자로 애굽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결국 광야에서의 원망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은 피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이스라엘이라면 초막절에 드려지는 열매에서 열매를 얻게 된 것은 모두가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되어진 것임을 감사하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초막절을 지키게 하신 이유였던 것입니다. 초막절만이 아니라 유월절이나 맥추절 역시 같은 이유로 지키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삶의 이유와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지 초막절이란 절기를 지킨다고 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절기를 지키는 것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초막절을 통해서 자신들을 살리기 위한 제물된 어린양의 피를 보는 것이 진심으로 절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로 살아가게 된 것은 모두가 어린양의 피의 은혜로 맺어진 것이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진짜 초막절이고 절기입니다.
이것은 현대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 교회는 절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교회로서 절기를 지키지 않으면 이상한 교회로 여겨버립니다. 하지만 진정한 절기는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믿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감사절에 헌금한다고 해서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감사절과 같은 절기를 지키면 안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절기를 지킨다는 의미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초막절의 끝날에 '내게로 오라'고 외치시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이것은 유대인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음을 드러내시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길은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에 모여서 제사하고 절기를 지키는 것이 그들의 신앙이며 그것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전과 절기라고 하는 그들 나름대로의 신앙의 길이 있었기 때문에 성전에서 절기를 지키는 것을 생수를 얻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자신들의 길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미 길이 있었기에 다른 길을 필요로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목마름이 없게 된 이유였던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믿음의 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마름은 자신이 믿음의 길로 여기는 그 길을 가지 않은 것이지 그리스도에 대한 목마름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현대 교인들에게 있어서 믿음의 길은 기도하고 주일 지키는 것이라고 할 때, 이들은 자신들이 생명을 얻고 생수를 마시게 되는 것을 그 길에서 찾을 것입니다. 즉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자기들이 사는 길이고 은혜를 누리는 것이라고 여길 것이고,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이 곧 예수님에게 나아가는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이들은 기도하는 것에 갈급하게 되고 주일 지키는 것을 목숨처럼 지키게 됩니다.
이런 얘기를 할 때 노파심에서 제가 꼭 드리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도하지 말고 주일 지키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원하고 그리스도로 갈급해하는 사람은 기도하게 되어 있고 성도가 모이는 그 자리를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자연히 기도하게 되고 자연히 주일이면 성도의 모임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고 주일 지키는 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여겨버리면,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 갈급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 대해 갈급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단순히 자기 행위를 좀 더 열심히 하는 쪽으로만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함으로써 갈급함을 해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대해서 목말라 하십니까? 여러분의 속에 목마름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세상 것은 아닙니까? 그러한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은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지금 가는 길이 잘못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행위에 목말라 하지 마십시오. 행위에 목말라 하게 되면 결국 행위로서 만족을 얻고자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목말라 할 분은 오직 예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해 목말라 하라'고 외친다고 해서 순순히 그 말을 따를 사람들이 아니기에 우리를 돕기 위해서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목말라 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있는 다른 길을 하나하나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길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생명된 길을 발견하고 그 길로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사는 길이 돈입니까? 출세입니까? 우리의 사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확실히 증명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 때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때가 이르렀을 때 참된 생명의 길이 무엇이었는가가 확고하게 증거될 것입니다. 문제는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보지 못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심판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의 것이 더 큰 가치로 다가오게 되고, 결국 세상 것으로 목말라 하면서 예수님이 아닌 다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씀합니다. 바라는 것, 보지 못하는 것은 장차 주어질 것을 말합니다. 현재에서 보지 못하는 것이고 보이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장차 되어질 것 주어질 것에 대한 실상과 증거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인해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가지게 되고,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삽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실상과 증거를 가지고 살아가기에 그에게 있어서 심판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오늘 현재의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심판에서 우리를 살리는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에 있음을 생각하게 되고 자연히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마음이 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의 길 되심을 알기에 예수님을 목말라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들은 자신의 행위 역시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 자신의 행동이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38-39절에 보면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수의 강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믿는 자에게 오십니다. 믿었기 때문에 성령이 온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성령은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나 상의 차원이 되버립니다. 그리고 성령이 없이도 믿을 수 있다는 것이 됩니다.
믿는 자에게 성령이 온다는 것은 성령을 받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어떤 노력과 종교적 행위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이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모할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도, 어떤 길로도 죄에 대한 해결책이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에게로 끌어갈 수 있음을 믿는 자들만이 예수님을 사모하게 됩니다. 이것을 잊고 있다면 신자로서 누릴 수 있는 큰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손해가 있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뭘 지키고 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자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자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돌아볼 때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를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으로 목말라 하며 주님 안에서 얻어지는 풍성한 열매로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4강) 7:40-52 갈릴리
교회에서 가장 빈번했던 싸움을 말한다면 아마 성경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 자신의 성경 해석이 진리이고 참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과 맞지 않은 상대방의 성경 해석을 공격하고 심지어 비진리라고 몰아붙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기독교에는 수많은 교단들이 우후죽순처럼 발생했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현재 한국에는 몇 개의 교단이 있는지 정확히 파악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교단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소위 '진리싸움'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서로가 자기 것이 진리라고 내세우면서 비진리와는 함께 할 수 없다며 분리를 서슴치 않은 행동을 보면, 참으로 성경을 사랑하고 비진리에 대해 양보할 수 없다는 그리스도의 군사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그 내막에는 대부분 인간의 감정이 개입되어 있으며 자기들의 유익을 위한 행동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진리 싸움이란 진리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오직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은 싸움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싸움이 없이 진리를 따라간다는 것은 거짓말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세상은 싸움 없이 진리를 따라갈 수 있는 진리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사탄의 세력안에 있습니다. 사고방식 하나하나가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의 사고방식 자체를 거부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로 사는 것은 자신이 부인되어지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포기하지 못한 자는, 세상으로부터 거부되는 것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고 그런 자가 자기를 포기하며 진리를 따라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성경 지식을 고집하는 것을 진리 싸움이라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결국 지식과 지식의 부딪힘이고 고집일 수 있는데도 진리 싸움이라는 명목으로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누군가를 정죄하고자 할 때 가장 좋은 무기는 성경입니다. 성경을 말하면서 '당신은 우리와 맞지 않으니까 나가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어찌 보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하며 성경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보여질 수 있지만, 사실은 오히려 성경을 무너뜨리는 것이고 성경의 권위에 순종하기보다는 성경을 자신의 뜻대로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안다'는 것을 스스로 조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안다고 여기는 그 앎이 자칫 잘못하면 복음에 장애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으로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결과가 있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초막절에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을 두고 '선지자다, 아니다 그리스도다, 아니다 선지자도 그리스도도 아니다'라는 쟁론도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선지자 혹은 그리스도로 말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닌 이유'로 내세우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오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하고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닌 근거로 내세운 성경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41-42)라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그들은 그 이유로서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다윗이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온다는 성경 말씀을 내세운 것입니다. 사실 미가서 5:2절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는 말씀을 보면 분명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나옵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를 두고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말한 것을 보면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는 하나님으로서 하늘로부터 오시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베들레헴 사람이 아닙니다.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은 '베들레헴 예수'로 불리우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로 불리웁니다. 그렇다면 미가서의 예언의 말씀대로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나온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갈릴리 사람인 예수는 그리스도일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말은 분명 성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예언과 지금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조건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여러분 같으면 누구의 말에 더 신빙성을 두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답을 가지고 성경을 보기 때문에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겠지만, 그들이 근거로 삼는 성경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사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입장이라면, 성경을 근거로 내세우는 그들의 말에 동조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봐라, 미가 선지자가 예언하기를 이스라엘을 다스릴 분은 베들레헴에서 난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여기 예수는 갈릴리에서 왔지 않느냐. 그런데 어떻게 이 사람이 그리스도일리가 있느냐? 만약 이 사람이 그리스도라면 미가 선지자의 예언이 잘못된 것이란 말이냐?'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그 말에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반대하려면 역시 성경으로 그들의 말이 잘못되었음을 증거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러면 성경에 '그리스도는 갈릴리에서 온다'라는 구절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바로 성경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의 헛점입니다. 성경을 문구대로만 이해하면서 이 문구와 다르기 때문에 아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 곧 성경에 무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문구대로 했을 때 맞지 않는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도 보면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마 2:2)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헤롯 왕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는지 묻습니다. 그때 그들 역시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말하면서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난다는 것은 유대 정통적인 성경해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선지자는 베들레헴에서 난다는 예언을 했는데, 정작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워지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2:22-2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합니다.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이 말씀에 보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선지자는 예수가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는 예언을 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이 나사렛으로 가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베들레헴에서 난다고 하셨으면서,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라고 하셨으면 예수님을 베들레헴 사람 되게 하셨으면 적어도 베들레헴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예수님을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말은 하지 못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좁은 소견이고 낮은 생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예수님이 옛날 예언대로 태어나시고 오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단지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을 예언하시고, 그 예언대로 맞아떨어지는 점쟁이 같은 수준에서의 놀라운 일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증거하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의 오심이나, 베들레헴에서 나시고, 갈릴리 사람이라 칭함을 받게 하시는 그 모두가 그저 말이 맞아떨어지는 수준이 아닌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증거하는 것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14절에 보면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도 우리에게 의문을 갖게 하는데, 그 이유는 요셉이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헤롯을 피해서 애굽으로 가서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다고 했는데, 그것을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분명 요셉의 가족은 예수님과 함께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고 한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애굽으로 갔는데 애굽에서 불러냈다는 말이 어떻게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까? 이것을 보면 선지자로 말씀하신 애굽은 애굽이라는 실제 지명을 두고 한 얘기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나와서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것을 애굽에서 나온 것으로 말씀한다면, 결국 예루살렘이 애굽이라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을 거부한 그것이 곧 애굽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성경 문구만을 가지고 해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난다는 문구만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성경의 의미를 모르면서 성경을 이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난다는 것은 베들레헴 사람으로 온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베들레헴 사람으로 온다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릴리 사람은 그리스도일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9:1절에 보면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의 나사렛 사람으로 오신다는 말은 이 말씀과 연관이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나셨지만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도망쳐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난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동방에서는 박사들이 경배하러 왔는데 예루살렘은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로 인해서 예수님은 이방 갈릴리의 빛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들레헴에서 나셨지만, 나사렛 사람이라 칭함을 받게 되는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자들이었다면, 성경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 앞의 예수가 곧 그리스도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성경을 앞세워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거부합니다. 애당초 예수님을 인정할 의사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을 하게 되면, 자신들이 그동안 누려오던 종교지도자로서의 위치는 흔들리게 될 것이 뻔합니다. 때문에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성경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52절에서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는 말을 하면서 예수는 그리스도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님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50절에 보면 3장에서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등장합니다. 이 니고데모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는 말을 합니다. 모세의 율법을 보면 재판은 공정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두 세 사람의 증인을 들어서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 재판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약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조치였던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자들이었다면, 자기들 스스로 말씀을 벗어나는 일을 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이 싫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증인을 세우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면서 재판을 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무작정 자기들이 알고 있는 성경 구절을 내세우며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들에게 '이것이 과연 율법이냐?'라는 말을 했습니다. 율법을 사랑하고 지킨다고 하는 그들에게 '너희들 스스로 율법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질책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니고데모를 그들은 예수와 같은 갈릴리 사람이냐는 말로서 예수와 한패거리로 몰아갑니다. 니고데모 입장에서 보면, 성경을 말하는 그들은 참으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45절부터도 그러한 얘기가 나옵니다. 사람을 보내서 예수를 잡아오라고 했는데 잡아오지 않습니다. 왜 잡아오지 않았는가 물으니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이 이때까지 없었다"고 합니다. 즉 예수님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까 지금까지 누구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한 놀라운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는 말로 질책을 한 것입니다.
종교지도자인 자신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데 왜 그의 말을 믿으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무조건 우리가 하는 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목사가 말하는 것만 믿고 따르면 된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줄 알지 무슨 말이 그리 많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기보다는 교회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옳을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교회에 해가 되는 논리나 주장들에 대해서는 교회가 함께 뭉쳐서 배척을 하고 이단으로 몰아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에 해가 되는 것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발전과 존속에 해가 되느냐 되지 않느냐를 따질 뿐입니다. 교회가 발전되는 논리라면 무조건 옳은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보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성경을 대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이익을 위해서 성경을 이용하고 있는 수준입니다. 주일에 대해서 성경으로 말을 하면, 마 23:23절의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는 구절 하나로서 주일의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주일에 모이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주일 하루만이 거룩한 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말하는데도 성경 한 구절을 들이대면서 주일은 거룩한 날이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말씀을 사랑한다기보다는 교회의 존속을 위해서 끝까지 주일이란 한 날을 거룩한 날로 주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자는 성경이 아닌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 구절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는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린 자칫 잘못하면 내가 알고 있는 성경에 대한 확신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더 깊은 뜻을 놓쳐버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은 우리의 머리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스스로의 생명력을 가지고 행동하시고 일하십니다. 내삶에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대한 깨달음은 어느 하나로 고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여겨버린다면 그것은 말씀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을 나의 생각에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 구절 안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아는 것이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린 과연 그리스도의 말씀을 경외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내 생각 내 의도를 주장하기 위해서 성경을 인용하는 사람인지 마음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45강) 8:1-11 간음한 여인
본문의 말씀은 여러분이 잘 아는 내용일 것입니다. 특히 본문의 내용 가운데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도 많이 인용할 정도로 유명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인용하는 목적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비판하고 욕할 때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을 함으로써 '네가 나를 비판하고 욕할 자격이 있느냐? 너 역시 나와 똑같이 실수하고 잘못을 범하는 인간이 아니냐?'는 공격을 함으로써 상대방의 비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무기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은 그러한 의미로 하신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에서 단순히 '우리는 남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 그러니 남을 비판하지 말자'는 교훈만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본문에 담겨 있는 예수님의 깊은 의도를 깨닫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그리고 또한 누군가의 공격과 비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인용을 한다면, 그 역시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의 깊은 의도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의 상식 정도로 알고 있는 성경을 어떻게 인용을 하든 우리가 상관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진리이며 말씀으로 삶의 인도를 받기를 원하는 신자라면 본문에 담겨 있는 예수님의 깊으신 뜻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로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말하기를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마치 죄를 지은 여인을 재판하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온 것처럼 보입니다. 즉 예수님을 재판장으로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선생' 즉 랍비라고 부르는 이유도 자신들이 마치 예수님을 재판하시는 분으로 높이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6절에서 그들이 고발할 조건을 얻기 위해서 예수를 시험함이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은 간음한 여인을 재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얻기 위한 고의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물음에 대해서 답할 수 있는 것은 세가지입니다. 즉 '율법대로 돌로 치라'는 것과 '나는 사랑이니까 율법대로 하지말고 용서해라'는 것과 '율법이 있기는 하지만 율법대로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은 너무한 처사니까 매를 몇 대 때리고 용서해라'는 식의 답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했던 답도 이 세가지의 범위를 넘어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율법대로 쳐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라는 물음에 대해서 이 외에 다른 답이 나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세가지 중에서 어떤 답을 할 때 예수님이 그들의 시험을 피할 수 있습니까? 결론은 '아무것도 없다'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답을 한다고 해도 그들의 시험을 피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율법대로 돌로 치라는 말씀을 한다면 비록 율법대로 행한다는 말은 들을 수 있을지 몰라도, 평소 죄인들을 가까이 하셨고 또 율법에 대해서 바리새인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써 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리(7:49)라는 비난을 들으셨고, 그리고 내게로 와서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는 말씀을 하신 예수님과는 전혀 맞지 않는 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평소의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들을 예수님 스스로 부인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대로 돌로 치지 말고 용서해라는 말씀을 하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약 그러한 답을 하신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이 세우신 율법을 폐지하신 것이 됩니다. 율법에는 음행한 자는 돌로 치라고 되어 있는데, 치지 말라고 하신다면 예수님은 곧 율법을 무너뜨리고 폐지하신 분으로 낙인찍힐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5:17절에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분명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돌로 치지 말라는 말을 하신다면 스스로 율법을 폐한 것이 되기 때문에 그 역시 고소할 조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돌로는 치지 말고 그냥 매만 때리고 용서해줘라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것 역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는 말씀에 어긋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 누구도 더하거나 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은 그들이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8:7)라는 말씀은 그들의 허점을 명백히 드러내는 말씀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9절을 보면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어른으로 시작해서 젊은이까지 하나씩 다 나갔다고 말합니다. 결국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스스로 '죄 있는 자'로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는 것은, 자신들 역시 죄 있는 자인데 자기의 죄는 생각하지 못하고 여인의 죄에 대해서만 심판하려고 한 잘못됨을 깨닫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생각처럼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에 의해서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그 한마디의 말에 의해서 자신들은 여인을 심판할 자격이 없음을 알았다는 것인데, 과연 사람이 그렇게 쉽게 자신의 죄를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대해서는 철저했으며 그것으로 자신들은 의인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셨다는 6절의 내용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고 자부하는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내용일 수 있으며, 그들의 죄를 드러내는 글을 쓰셨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본문에서는 어떤 내용인지에 대해서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그러한 추측은 능히 가능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죄를 드러내고 고발하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여인에게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9절에 보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어른은 단지 나이 많은 사람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유대인 사회에서 어른으로 존경받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자신들이 어른으로 공경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그 자리를 떠나는데 감히 젊은이들이 '내가 돌로 치겠다'고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어른이 돌아가니 자신들은 더욱 돌아가야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땅에 글을 쓰신 것에 대해서 한가지 의문은 무엇 때문에 두 번이나 글을 쓰셨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땅에 글을 쓰시고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8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글을 쓰신 사이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 이유를 안다는 것은 어찌보면 무리라고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언급되지 않는 것을 알려고 한다면 결국 인간적인 생각과 추측이 개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성경에서 그 의미를 한번 찾아보고자 합니다. 이것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음행한 여인을 데리고 와서 율법이 무엇을 요구하는가에 대해서 말합니다. 즉 그들은 율법의 문제를 들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이 묻는 것은 쳐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생각하는 율법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율법을 범한 자를 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율법이라면 그리고 그들이 율법을 진심으로 아는 자였다면 먼저 자신들부터 율법에 의해서 정죄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자신은 율법으로 정죄를 받지 않고 다만 남을 정죄하려고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을 안다하나 율법을 모르는 것이며 율법을 지킨다 하나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율법이 규정한대로 행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의도를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에 의해서 자신이 정죄함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곧 불의한 자이며 허물 있는 자임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 진심으로 율법 앞에 자신을 세운 사람이며 율법을 알고 율법을 지키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지킬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율법에 대해서 실패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과 예수님이 두 번 글을 쓰신 것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직접 글을 쓰신 것이 세 번 등장합니다. 하나는 다니엘서에서 교만한 벨사살 왕 앞에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을 쓴 것이 있고, 다른 두 번은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에게 율법을 받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1:1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돌판에 기록된 십계명은 모세가 받아 적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쓰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돌판을 받아 산을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돌판을 깨버립니다. 그런 후에 다시 산으로 올라가게 되고 다시 두 번째 돌판을 받아 올 때도 역시 하나님이 직접 쓰셨던 것입니다. 이 역시 출애굽기 34:1절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 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는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쓰신 돌판과 돌판 사이에 있는 것은, 우상을 섬김으로서 율법에 대해 실패한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또 다시 율법을 주신 것입니까? 이미 우상을 섬김으로서 율법에 실패한 이스라엘인데 다시 율법을 줘봐야 지키지 못하고 실패할 것은 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주신 것입니까?
이것은 출애굽기 33:19절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방식이 은혜와 긍휼이지 율법이 아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두 번째 돌판을 주시기 전에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두 번 째 돌판은 구원의 조건으로 주신 것이 아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 돌판은 어떤 기능으로 주어진 것입니까? 그것은 은혜와 긍휼을 바라보도록 하는 기능입니다. 그것이 곧 인간의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율법 앞에서 정죄함을 받는 것이고 자신은 구원받을 수 없는 불의한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은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글을 두 번 쓰시고 그 사이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이 있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 쓰신 글은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는 말씀이 아니었는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모든 사람은 죄인임을 드러내는 말씀이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은 어떠했습니까? 분명 예수님은 '돌로 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율법대로 시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조건은 죄없는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판자는 율법에 대해서 흠이 없는 자라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렇게 볼 때 여인을 심판할 분은 오직 율법에 대해 흠이 없으신 예수님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11절)는 말씀을 하십니다.
율법은 율법을 범한 자를 심판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규례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음행한 자는 돌로 치라는 규례가 분명히 주어져 있다면,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돌로 치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율법은 돌로 치라고 하는데, 무작정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하신다면 돌로 치라는 그 규례는 있으나 마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분명 율법의 요구는 이루어집니다. 누구에게 입니까? 바로 음행한 여인에게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인이 맞아야 할 돌을 예수님이 대신 맞으십니다. 여인이 죽어야 할 죄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공의와 사랑이 모두 만족케 되는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입니다. 간음한 여인도 간음한 여인을 고소하는 사람도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즐겨하는 것 중 하나가 남을 고소하는 것이 아닙니까? 타인의 실수와 허물에 대해서 고소하고 비판하기를 즐겨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이대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은혜와 용서하심에 마음을 두고 있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 자신이 용서함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타인의 허물에 대해서 가려주고 용서할 마음의 자세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행동에 대해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동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여러분은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얻은 자 아닙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옛사람인 내 본성으로 마음대로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새생명을 얻은 새사람된 마음으로 마음대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이런 신자가 마음대로 살아라고 해서, 이웃에게 해가 되고 자기 유익을 위해서 이웃을 해치는 행동을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남의 실수와 허물을 고소하고 정죄하려고 하겠습니까? 그것은 옛사람된 본성에서 맺어지는 열매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가서 다시는 음행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너의 죄가 무엇으로 용서받았는가를 잊지 말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여인에게 다시는 간음하지 말 것을 원하셨다면 '가서 다시는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간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서 또 간음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간음이란 행동은 예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자연히 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뜻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간음, 살인, 도둑질과 같은 행동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죄는 우리의 죄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은혜를 잊고 있고 마음에 두지 않고 있기 때문에 간음이 나오게 되고 살인 도둑질 같은 이웃을 해치는 행동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간음하지 말아야지' '내가 남은 비판하지 말아야지'라는 의지를 스스로 갖지 않는다고 해도, 예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이고 내가 예수님 앞에서 어떤 자인가를 염두에 두고 살아간다면 자연히 그 마음에서는 간음이라는 것, 남을 비판하는 것 등의 모습을 보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그러한 욕구를 이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시기나 비판이 있겠습니까? 율법은 남을 정죄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정죄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바로 정죄 받은 이 경험이 있는 자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 비판할 자기 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고 이것이 죄를 범치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정죄함을 받지 않고 용서를 받았음을 잊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46강) 8:10-11 정죄하지 않음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11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을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신 말씀은 죄에 대한 완전한 사면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누군가를 정죄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에 대한 유일한 심판자이십니다. 예수님 외에는 누구도 심판자의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일한 심판자이신 예수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셨다면, 결국 그 여인은 누구에게서도 죄에 대한 정죄를 받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인을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시고 이어서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다시는 간음을 행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범치 말라는 것은 죄의 종으로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일한 심판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죄에 대한 사면을 받았으니 이제는 죄의 종이 아닌 주의 종으로 살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오해는 예수님을 마치 죄를 용서하는 전문가로 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즉 아무리 죄를 범한다고 해도 '예수님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말 한마디면 모든 죄가 사라진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곧 예수님을 인간중심에서 생각하는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용서해 달라는 말 한마디면 모든 죄를 용서해주실 것 같은 생각은 우리의 죄를 정죄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은혜에 마음을 두기보다는 죄를 용서받은 자신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마음을 두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신자라면 자신이 죄가 용서받은 것을 즐기기보다는 용서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교인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모습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기뻐하고 감사하기보다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죄에 대한 용서를 즐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결국 죄에 대한 담대함까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죄를 범해도 예수님이 계시는데 무슨 걱정이냐?'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 없다는 생각이 결국 죄에 대한 담대함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두어야 합니다. 다시는 죄의 종으로 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죄의 종이 아닌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대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자유를 얻었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자유는 죄의 종에서 해방된 자유를 말하는 것이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산다면 그것은 여전히 죄의 종으로 살아감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본성대로 산다면 그것은 곧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에서 해방되었다면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얽매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정죄하지 않으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증인이라 부르며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려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제대로 알고, 성경에 대해 묻는 질문에 대해서 정확히 성경적인 답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신앙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 우리 행위로 구원을 얻나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이지요' 이것이 정확한 성경적인 답이지만, 이러한 답을 말한다고 해서 신앙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성경적인 고백을 한다고 해서 신앙으로 인정되는 것이라면, 천국은 시험을 쳐서 들어가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간음한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정죄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간음이란 행위에 대해 정죄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간음이란 행위에 대한 사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행위에 대해 정죄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간음은 용서하고 다른 행위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행위에 대해 정죄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여인의 '간음'이라는 행위를 들고 예수님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간음이란 행위에 대해 돌로 치라는 처벌 규례를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묻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행위에 대해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행위에 대해 정죄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역시 누군가를 행위로 판단하고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용서 아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행위에 대해 정죄하지 않으심을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우리가 행위를 가지고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신자가 다른 사람의 행위를 두고 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자신 스스로 예수님의 용서 아래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현재 우리 자신이 간음한 여인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에게서 항상 보여지는 것은 바리새인의 모습입니다. 다시 말해서 간음한 여인인데도 바리새인의 입장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이 누구입니까? 정죄하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선언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율법에 의해서 죽었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것이 곧 우리가 아닙니까? 예수님의 용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율법의 정죄를 피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간음한 여인은 나와는 별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여인을 정죄하고 끌고 오는 바리새인의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행위를 기준해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나는 간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위를 기준하여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있는 잘못된 행동이 자신에게는 없을 때 적어도 나보다 잘못된 행동을 한 그 사람에 대해서는 당당한 입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안에서는 이처럼 행위를 기준하여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도가 성도의 행위를 두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곧 죄인의 행위를 정죄하지 않으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원수는 은혜를 은혜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5:20절의 말씀대로 은혜는 죄가 더한 곳에 더욱 넘칩니다. 우리 형편이 좋아지는 것이 은혜가 아니라 내가 죄인임을 깊이 자각할 때 예수님의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신자가 누군가의 행위를 보면서 '나는 저 사람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머물게 된다면 그것은 사탄의 함정에 빠지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탄은 신자로 하여금 죄짓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를 은혜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행위에 있어서 모든 인간은 똑같습니다. 다같이 같은 행동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행동에 있어서 전혀 의가 없다는 것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서로 어떤 행동을 하건 하지 않건 상관없이 인간에게서는 의가 나올 수 없음이 분명한 만큼 누구에게도 의의 행동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모두의 행동은 죄가 되는 것이라는 결론만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간음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간음한 여인을 징벌할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마치 자신들은 간음한 여인을 징벌할 자격이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당당히 예수님에게 여인을 끌고 온 것입니다. 복음은 죄인된 자가 예수님의 은혜로 살았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의가 있다면 예수님의 은혜는 필요 없는 것이 되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를 보는 것이 복음의 원수이며 적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점을 잊어버린다면 복음의 원수로 존재하면서 정작 자신 스스로는 가장 복음을 잘 아는 사람이며 복음안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정죄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무턱대고 여인의 죄를 덮어 버리겠다는 의도가 아닙니다. 죄에 대한 값은 분명히 치러져야 합니다. 그것이 죄의 값입니다. 그 값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시고 여인은 죄의 값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은혜를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위해서 예수님이 오실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에게는 스스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자질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이 나의 환경과 형편만 좋게 만들어 주시면 열심히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것은 이미 이스라엘을 통해서 증명된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불평할 때마다 그들의 불평의 이유를 다 들어주셨습니다. 40년 간 광야에서 지냈지만 사실 지내는데는 전혀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의복이 헤어지지도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도 않았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게 지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음에 실패했습니다. 결국 좋은 형편과 환경이 믿음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님이 드러난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선언이야말로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내 힘으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인간이기에 내 마지막은 멸망뿐임을 아는 신자들에게는 큰 축복의 말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죄에 대한 감각이 없이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무가치한 것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멸망의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말세의 징조로 소돔과 고모라 때와 같고 노아 때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지금과 다른 더 큰 죄를 범한 것이 아닙니다. 노아 때의 사람들 역시 우리보다 더 큰 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멸망의 이유는 죄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노아 때 심판이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심판을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죄에 대한 감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감각이 없기 때문에 자연히 심판에 대한 감각도 무디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결국 살아가는 것은 자신들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의 죄인 됨을 다시 자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입술로만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할 것이 아니라 죄인이면 죄인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행위를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를 보지 않기에 형제에 대해서도 행위로 판단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은혜로 사는 신자입니다.
(47강) 8:12 빛과 어두움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왔던 말씀이지만 많이 들었다는 것일 뿐 사실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 얼마나 예수님의 뜻에 가까이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심을 해봐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할 말씀은 예수님이 스스로에 대해서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어두움에 다니지 않는다'는 말씀과, '생명의 빛을 얻는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 보면 이 말씀들은 쉽게 생각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세상을 비추시는 분이라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즉 세상을 비춘다는 의미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이 세상을 비추시고 계신다고 느껴지십니까? 그러한 빛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을 어두움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세상에 어둠이라면 어둠속에서는 조그만 빛이라도 금방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둠인 세상은 왜 빛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어쩌면 우리는 그저 구원자이신 예수님이니까 당연히 멸망 받을 세상의 빛이라는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두움이라면 당연히 빛을 깨달아야 마땅한데 왜 깨닫지를 못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생명의 빛이란 분명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어두움을 다니지 않고 예수님을 얻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처럼 본문은 예수님은 왜 스스로를 빛으로 말씀하는지, 그리고 어두움을 다니지 않는다는 의미는 무엇이고, 예수님을 얻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생각보다는 간단한 말씀이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어두움을 다닌다고 할 때 여러분을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아마 죄속에 살아가는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어두움을 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실제로 어두운 가운데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어둠을 비출 수 있는 빛을 찾고자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둠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볼 수 없게 하고 바른 길을 갈 수 없게도 합니다. 이처럼 어두움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빛을 찾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어둠에 있으면서도 어둠을 깨닫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은 빛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둠에 있으면서도 전혀 불편하지 않기 때문에 빛을 필요로 할 리가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해가 져서 오게 되는 자연적인 어둠을 보면서 이 세상이 어둠이라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둠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어둠에 다니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빛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절에 보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한 이유는 어둠이 자신을 어둠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빛이 필요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빛이 왔으되 빛에 관심을 두지도 않고 빛으로 볼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된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분명 세상은 어두움인데 어둠을 살아갈 때 여러분에게 맞지 않고 불편한 것이 있습니까? 아니면 전혀 불편한 것이 없이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만약 어둠을 살아가는 것이 여러분에게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필히 여러분들은 빛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은 강자가 우대 받는 곳입니다. 반면에 약자는 피흘림을 당할 수밖에 없고 손해를 본다고 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둠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곧 어둠의 삶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고 그 삶의 방식을 따라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러한 세상을 살기 위해서 필요로 하고 얻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힘이 되는 것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상을 어둠으로 본다면 그들은 예수님이 곧 빛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오심은 어둠인 세상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강자가 우대 받는 세상에 하나님이시면서 약자로 오신 분이시고,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 살아가는 세상에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스스로를 십자가에 달리는 분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둠의 세상에서 예수님을 빛이라 말씀하신 의미인 것입니다.
불의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이 불의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의를 찾지 않게 됩니다. 의가 필요하지 않기에 의를 찾지 않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마찬가지로 어둠에 있으면서도 어둠을 깨닫지 못하니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고 필요하지 않기에 찾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으로 오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 빛을 비춰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입니까? 그렇다면 세상이 예수님을 빛으로 알아줘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작 세상은 예수님이 빛으로 오신 분임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는데 홀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외쳐본들 그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예수님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오신 것은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어둠에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약자로 오시고, 십자가에 죽는 자로 오심으로서 강자로 살고 자기 유익을 위해 타인을 피흘리게 하는 이것이 곧 어둠인 것을 고발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어둠으로 보십니까? 어둠으로 여겨지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세상은 불편한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는 세상이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마치 내 고향처럼 내 집처럼 불편함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예수님의 나라가 부담스럽고 불편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강자가 살아남는 세상에 지는 자로 살아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지는 자로 사는 것이 불편하고 부담이 됩니다. 이것이 어둠을 어둠으로 보지 않고 있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보시면서 세상이 어두움으로 보여지고 예수님이 빛으로 깨달아진다면 여러분은 바른 길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답은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얻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얻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얻은 자로 산다는 것은 모든 인생에서의 답을 예수님에게서 찾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세상에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찾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답을 찾는다면 그 답은 언제나 강자될 수 있고 손해를 보지 않고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서 답을 얻는다면 분명 세상의 답과는 다를 것입니다. 그 답을 따라가는 것이 어두움을 다니지 않는 것이고 예수님을 얻은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에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죄악된 세상을 피해서 어디 멀리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지만 모든 답은 세상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얻으며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사람들에게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을 때 다들 도망을 쳐버립니다. 이것은 그들이 자신의 죄를 알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죄를 알았으면서도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여 버립니다. 이것이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들의 삶의 방식, 즉 어둠의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삶을 포기하겠음을 뜻합니다. 세상이 살아가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은 어둠을 다니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고 예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둠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뜻까지도 포기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진리가 주어지면 그것으로 남을 비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에 율법이 주어졌을 때 그들은 율법을 남을 죽이고 비판하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선한 것이었는데 거룩한 것이 죄인된 인간에게 주어질 때 인간은 거룩한 것을 죄의 도구로 사용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어둠에 있는 인간의 실체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았을 때 진리를 가지고 남을 비판하기에 바빴습니다. 정작 진리는 내 자신이 어둠이고 죄인임을 선언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선언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그 선언을 하기에 바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습입니다. 나는 진리를 가졌기에 정당하고 옳다고 여기고 그 진리를 도구 삼아 다른 이를 비판해 버립니다. 때문에 진리를 아는 것으로 그쳐 버릴 뿐, 진리가 우리를 인도하고 이끌어 가는 그리스도에게로는 나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는 우리를 정당하고 옳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죄인되게 하셔서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갑니다.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되게 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진리 앞에서 자신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이 어둠임을 깨달은 사람은 '나에게 진리가 주어지면 나는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밖에 안된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예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곧 내 인생의 빛이시다'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두움에 다니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의 빛을 얻는 신자에게는 예수님이 모든 인생의 답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강자되는 것도 의미 없는 것이며 오직 의미 있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것뿐입니다. 이것을 알았다면 여러분이 바로 생명의 빛을 얻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답을 예수님에게서 찾으십시오. 이것이 어두움을 다니지 않는 것입니다.
(48강) 8:13-20 판단치 않음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이 빛이신 자신을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는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을 대할 때 과연 누가 예수님을 따르겠습니까? 그는 바로 자신이 어두움에 다니고 있음을 아는 자입니다. 어두움은 그 길이 멸망을 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두움에서 자신을 벗어나게 해줄 빛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빛을 찾았다면 빛을 향해서 나아가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겠습니까? 그는 바로 자신이 어두움에 있음을 모르는 자입니다. 아예 어두움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어두움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두움의 상태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빛이 필요가 없습니다. 빛은 어두움에서만 필요한 것인데 어두움을 모르니 빛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빛을 따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다만 '예수님을 믿는다'라는 말을 한다고 해서 빛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세상의 빛으로 보느냐는 것입니다. 단지 세상을 구원하시는 분으로서 빛이 아니라 어두움을 살아가는 자신에게 빛이 되시는 분으로 보는가 입니다.
어두움을 홀로 걷는다면 그는 분명 잘못된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빛이 필요한 것이고 빛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대로 어두움이 어두움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굳이 빛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맹목적인 신앙이며 단지 종교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왜 어두움이라고 말합니까? 창세기를 보면 뱀이 하와를 유혹한 사건이 등장합니다. 하와는 뱀의 유혹에 빠져서 선악과를 먹음으로 세상은 어두움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나무가 하나님에 의해서 감춰졌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생명을 원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에덴동산에 뱀이 존재했다는 것은 곧 죄가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죄가 정체를 드러낸 것이 바로 하와를 유혹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죄의 정체는 선악과를 먹음으로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같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인간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높이고 자신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인간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뱀으로 인해서 드러난 죄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어두움입니다.
어두움은 하나님이 감춰버린 생명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이 곧 생명보다는 자신이 하나님 같이 된다는 유혹에 더 이끌린 결과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생명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예 관심도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육체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 부지런히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곧 어두움의 상태인 것입니다. 이러한 어두움에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생명에 관심을 두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곧 생명의 빛임을 알기 때문에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는 말씀에 해당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간음한 여인을 끌고온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행위가 곧 생명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에 대한 순종과 실천이 곧 빛이며 생명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율법으로 타인을 정죄했던 것입니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들이 빛 가운데 행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예수님은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서 간음한 여인만이 아니라 그 여인을 끌고온 모든 사람들, 나아가서 온 세상이 어두움에 있음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어두움에서 중요한 것은 어둠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빛으로 오신 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뭔가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곧 나의 생명의 길임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전혀 의를 두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의지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신 것은, 그리스도안에서는 정죄함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고 자신의 악함을 알고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것을 죄를 범치 않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13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라고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증거를 부정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자신을 위해서 증거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이 자기 스스로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참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말인즉슨 네 자신에 대한 너의 증언을 확증해줄 증인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너의 증거는 참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부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만약 예수님이 생명의 빛임을 인정한다면 그동안 자신들이 지켜왔던 신앙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도, 제사를 드리는 것도 전혀 의가 될 수 없다면 결국 자신들이 지금껏 행해왔던 모든 것들이 부정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때문에 예수님이 빛이심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예수님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아버지와의 연합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오셔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시는 분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아시지만 바리새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홀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와 함께 하신 상태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시는지를 모릅니다. 즉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증거를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누구도 증거할 수 없는 말을 홀로 하시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육체를 따라 판단하고 있을 뿐임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 육체의 조건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를 나사렛에서 난 볼품없는 자로 볼 뿐이고 그러한 사람이 스스로를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체를 따라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처럼 육체로 그들을 판단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비록 판단하실 자격은 있으시지만 세상에 오신 이유가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하러 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그러나 그 판단은 우리의 행함의 여부가 아니라 어둠을 향한 강퍅한 마음에 대해서인 것입니다. 육체를 포기하지 못하는 인간의 강퍅한 마음에 대해 판단하심으로써 어두움이 무엇인가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판단은 예수님 혼자만이 판단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된 판단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판단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판단은 참되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 기준은 육체였습니다. 예수님의 출신 성분과 여러 가지를 근거로 삼아서 예수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 하는 것은 참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하나님과 연합된 분으로서 하나님의 뜻안에서 판단합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판단만이 참된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는 그 누구도 판단할 자격이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설사 간음을 하지 않은 바리새인이라 할지라도 간음한 여인을 판단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판단 기준은 항상 육체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판단을 받는 자들이지 누군가를 판단하는 자가 아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는 형제를 판단하는 것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19절에 보면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예수님을 모르는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는 일방적인 말로 들려질 것입니다. '나를 알지 못하니 아버지를 알 수 없다. 나를 알았다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는 이 말씀이 바리새인들에게는 일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이 보내시고 하나님의 뜻만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결국 그들이 어둠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진심으로 말씀안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다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예수님이 곧 하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알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모른다면 그 누구도 아버지를 알 수 없고 아버지께로 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여러분이 직접 목격하지도 못하고 다만 옛날부터 내려오는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에 대해 듣고 있을 뿐인데 과연 그리스도를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믿는다하지 마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가를 살피십시오. 이것이 신자된 우리들에게 있어야 할 마땅한 본분입니다. 우리의 삶이 과연 육체를 따르는 것인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인지를 깊이 살피십시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인지를 살피지 아니할 때 우리들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어둠일 수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자신을 살피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마시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 힘쓰십시오.
(49강) 8:21-30 죄가운데서 죽음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 스스로 다짐하는 것 중 하나는 '자기 변화'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답게 달라져야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예수님을 믿기 전의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은 삼가고, 착한 일을 함으로서 믿는 자답게 살아가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런 다짐이 스스로에게 올무가 되어 자신의 짐으로 남게 됨을 깨닫지 못합니다. 스스로 변화되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할 때 변화를 위한 노력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변화되어 가는 성취감을 맛보기보다는 실패를 겪게 될 것이 자명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변화를 위해 힘쓸 때 분명 변화되는 듯한 흔적을 자신에게서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흔적으로 변화되었다는 기쁨과 성취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변화를 지탱하는 것입니다. 사실 신자가 자기 변화에서 실패하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일순간 변화된 듯한 흔적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 변화를 지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뭔가 달라지고 변화되는 듯하다가 다시 본래 자기 모습인 원점으로 돌아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럴 때 사람은 철저한 자기 실패를 느끼게 되고 자기 실패에 주저앉아 낙심하고 자신의 믿음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변화하고자 하는 열망이 오히려 자신에게 큰짐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변화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변화하기 위한 노력도 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믿기 전과 믿은 후의 모습이 동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달라짐은 우리 스스로의 다짐과 노력과 열성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달라짐은 우리가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따라감으로 인해서 자연히 보여지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스스로 변화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며 그분이 가신 길이 어떤 길인가를 알고 그분의 길을 나의 길로 삼고 나아가는 것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변화란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는 것 자체가 변화며 달라짐인 것입니다. 신자가 자기 변화라는 올무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자기 변화를 신자됨의 증거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됨의 증거를 자기 변화, 즉 행동의 달라짐에서 찾으려고 할 경우 신앙의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됨의 증거는 무엇에서 찾아야 합니까? 신자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신뢰한다는 것은,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의 힘을 의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뢰란 자신은 전혀 무능력하기 때문에 능력있는 분을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항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항복, 이것이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있다는 신앙의 증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에게 항복한 사람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항복은 먼저 자신에 대한 포기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스스로의 결심과 의지로는 선을 행할 수 없는 악한 자임을 깨닫고 '저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고백으로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 곧 항복이며 신뢰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바리새인들이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 도망을 친 후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나를 따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한 것이겠습니까? 이 말씀을 하시기 전의 상황은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왔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알고 모두 예수님에게서 도망을 친 후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따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는 이 상황과 연결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왔던 사람들은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신들 역시 죄있는 자임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도망을 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상황 뒤에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면, 죄를 알았다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안 것이 아니며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의 길에 함께 하는 것, 즉 주와 함께 죽는 것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며 그리스도에게 항복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를 알았다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에게 나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내가 죄인이구나'라는 고백이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죄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는 곧 어둠을 말합니다. 따라서 자기 죄를 볼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자신이 어둠에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둠에 있음을 안다면 그는 자연히 빛으로 오신 분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12절의 말씀을 하시는 것은, 자기 죄를 알았으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에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도망을 친 사람들을 배경으로 하신 것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가신 길로 따라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분입니다. 하늘에 계신 분을 우리가 어떻게 따라갈 수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에 예수님이 남기신 것은 자신이 걸어가신 길입니다. 그 길을 남겨 놓고 하늘로 가시고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십자가를 지신 길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길입니다. 그 길로 오라는 것은 나와 함께 죽자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과연 그 길을 스스로 가고자 하겠습니까? 죽는 길을 갈자는 자신이 죽어야 할 이유를 아는 자입니다. 그들이 누구겠습니까? 죽음의 이유인 자기 죄를 아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죄를 알았다 하면서도 주님이 가신 길을 가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 죄를 아는 자라 말할 수 없습니다.
21절에 보면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은 24절의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말씀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 가운데서 죽는다'는 것은 죄의 행위의 결과로 죽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인된 사람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된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날 때부터 죄 가운데서 태어납니다. 죄 가운데서 나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가 곧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과 인간의 출신 자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위, 즉 하늘에서 나신 분이고 인간은 아래 즉 세상에서 난 존재입니다.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면 세상에는 무엇이 존재합니까?
요한계시록을 강해하면서 이런 내용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 뱀이 여자를 유혹했습니다. 여기서 뱀은 곧 사탄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탄의 존재 근거는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분명 하나님이 사탄을 창조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탄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아래에 존재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요한계시록 12:7-9절에 보면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늘에 전쟁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전쟁에서 실패한 용, 즉 사탄이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하고 쫓겨난 곳이 바로 땅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단이 이미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는 사단도 죄도 없는 완벽한 곳이었다는 주장을 하려면, 여자를 유혹한 사단이 어디로부터 어떻게 왔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왜 사단을 먼저 멸하시지 않고 세상을 창조하였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을 설명하자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간단히 말씀을 드리자면, 죄가 무엇인가를 드러내고 그 죄를 멸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사단은 온 천하를 꾀는 자로 말합니다. 이러한 사탄이 땅에서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꾀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사단이 존재하는 곳이고, 그러므로 아래서 났다는 것은 단순히 세상에서 태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사단에게서 났다는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 가운데서 난 인간의 실체입니다.
44절에서도 보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귀란 바리새인들만을 두고 한 말은 아닙니다. 바리새인의 행위를 한 자들은 모두가 다 마귀 자식인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행위란 자신의 죄를 알았으면서도 예수님에게 굴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를 알았으되 죄로 인해서 죽어야 할 자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행위입니다.
마귀의 자식이란 증거는 44절의 말씀대로 아비인 마귀의 욕심을 행하고자 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마귀의 욕심이란 앞서 말씀드린 요한계시록의 말씀처럼 하늘에서 자기의 자리를 얻고자 한 것을 말합니다. 마귀의 이러한 욕심이 세상에서 최초로 드러난 것은, 여자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 하나님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눈이 밝아 하나님같이 된다는 것이 곧 자신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사단의 욕심으로 행하는 세상에서 인간들이 드러내는 것은 모두가 자신의 자리를 얻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이 서로 다투는 이유 역시 하늘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차지하는 문제였습니다. 이것이 곧 죄 가운데서 났다는 증거입니다. 마귀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귀 자식이었던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의 양자로 삼으신 것이 곧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그리스도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양자로 삼으신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대개의 사람은 단순히 우리를 천국 보내시기 위해서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단지 천국 보내시기 위한 것이 목적이라면 지금 당장 천국으로 데려가시는 것이 옳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고 아버지의 소원을 따라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마귀에게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한 자임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영원히 사는 길이고 생명임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며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의 길은 죽는 길이기 때문에, 자신이 죽어야 할 자라는 이유를 찾지 못한 자는 결코 그리스도를 따라갈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따를 자는 '나는 죄가운데서 죽어야 할 자'임을 인식하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죽어야 할 자임을 인식할 때 사라지는 것은 '옳고 그름'이라는 판단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힘든 것 중에 하나는 인간과 인간의 갈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갈등은 '옳고 그름'이라는 판단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성경을 통해서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때부터 보이게 되는 것은 옳지 못한 모습들입니다. 그럴 때 그것을 지적하게 됩니다. 그리고 옳지 않은 길을 가는 자들과는 아예 상대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가지기도 합니다. 물론 옳지 않다고 생각되어도 그냥 넘어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나 역시 죄 가운데서 죽어야 할 자임을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판단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정당한 그리스도의 길을 가지 않고 옳지 않은 길을 간다면, 나 역시 옳지 않은 길을 가는 자임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서는 '너는 그르다'는 판단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그리스도의 길이 무엇인가를 내 삶을 통해서 증거하고자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무기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죽이기 위한 말씀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나를 죽이시고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 되게 하기 위해서 말씀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식으로 우리에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이 있는 말씀으로 우리를 다스립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말씀을 아는 신자라면 자신이 알고 있는 성경 지식을 가지고 누군가의 잘못을 드러내고 판단하기보다는 실제 말씀에 이끌려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무엇이 옳은 길인가를 증거하고자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죄가운데서 죽는다는 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실제이며 우리의 현실이었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눈에 구체적으로 보이는 죽음의 현실이 없었다는 이유로 이것을 소홀히 하고 업신여기며 살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 믿음은 인간의 죽음을 사실과 현실로 받아들이게 할 것입니다. 죄가운데서 죽는다는 것이 곧 나의 현실이며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현실에서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죽음에서 구출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신 그 일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50강) 8:31-41 자유
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여러분이 많이 들었고 또 잘 아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 보면 많이 들은 말이며 잘 안다는 것이 뜻하지 않은 함정으로 작용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잘 알기 때문에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잘아는 말씀일수록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32절 말씀 역시 잘 안다고는 하지만 그 수준은 예수님이 우리를 자유케 했다는 것에만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즉 진리를 예수님으로 이해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이해가 잘못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이 말씀을 다만 예수님이 하신 일로만 받아들여 버린다면 결국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아는 것으로 만족하고 멈춰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입니다. 신자들이 대체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부분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나 예수님으로 되어진 일에 대해서는 잘 아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하신 그 일이 정작 신자들의 삶에는 전혀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을 말하되 복음의 능력은 없고 복음을 안다하되 그 삶에서는 복음을 찾아볼 수 없는 신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32절의 말씀도 이런 면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대로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했습니다. 즉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로만 여기고 지나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면, 우리에게는 자유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유케 하셨는데 정작 신자된 자들은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이것은 신자로서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진리로 자유케 된 삶을 산다고 생각합니까? 자유하신다면 과연 무엇을 자유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진리로 자유케 되리라는 말씀을 '나는 복음을 알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괜찮다'는 식으로 받아들입니다. 즉 복음이 신자로 하여금 무엇을 해도 죄가 안되는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기 때문에 담배를 피워도 괜찮고 술을 마셔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담배나 술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것으로 이미 하나님의 백성되었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복음에 대한 큰 오해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유라는 것은 무엇을 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왜 예수님이 자유에 대해 말씀을 하시는가에 대해서부터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는 자유가 필요한 사람들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유가 필요하다면 결국 그들의 현재 상태는 종이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유는 종된 자들에게 필요한 것이지 이미 자유케 된 자들에게는 필요치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뭔가 붙들린 종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자유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의미있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이미 자유케 된 사람으로 여기는 자들에게는 자유란 의미없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러한 반응을 보입니다.
33절에 보면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는 말을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을 이미 자유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때문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에 대해서 위와 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미 자유한 사람으로서 자유케 되리라는 말씀은 이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스스로 살아있다고 여기는 자에게 '나를 믿으면 산다'라고 말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살아있는데 믿으면 산다고 할 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살아있으되 죽은 자임을 아는 자들에게만 믿으면 산다는 말씀이 깊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날때부터 아브라함 자손으로 태어났고 남의 종이 된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자유케 되리라는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이미 자유한 우리에게 어떻게 자유케 되리라는 말을 하느냐 네 말은 엉터리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에게 예수님은 다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34절)는 말씀을 하십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육체가 누군가에 붙들린 종이라는 것이 아니라 죄에 붙들린 죄의 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 역시 죄로부터 자유케 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죄의 종이란 무엇이고, 죄로부터 자유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죄의 종이란 죄가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죄가 주인이기 때문에 죄의 지시를 받으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죄를 많이 범해서 죄의 종이 된 것이 아니라 죄의 종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죄가 보여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보지 못합니다. 때문에 자신들이 죄의 종으로 산다는 것도 전혀 생각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죄를 보지 못함으로써 나타난 것은 자신은 의로 여기고 간음한 여인은 죄인으로 여긴 것입니다. 즉 행동을 기준으로 해서 비교를 하기 때문에 간음이라는 행동을 하지 않은 자기들은 간음한 여인에 비해서 떳떳한 사람이고 그러므로 여인을 심판할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결국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특징은 죄를 전혀 의식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행동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행동으로서 자신과 남을 비교하게 되고 행동의 차이를 두고 의와 죄의 구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죄라는 것은 인간을 의로운 존재로 여기게 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비록 입으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지만, 속마음에서 저 사람보다는 착하다는 생각이 자리함으로써 마치 자신은 이미 예수님의 은혜를 마음껏 받아서 더 이상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기는 이것이 죄이며 그러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죄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의 종으로 사는 사람은 예수님보다는 자신을 더 소중히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무너질지언정 내가 무너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정당하다고 여길수록 당당해지고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정당하다고 생각될수록 자신이 고개를 숙이려는 생각은 멀어지게 됩니다. 반면에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사실은 상대방 역시 나름대로 자신을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인간이 서로 자신을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계속 충돌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생각해 본다면 전혀 다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 가장 정당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당치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당하신 분이 정당하지 못한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정당치 못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이고, 이러한 예수님을 굳게 세우고 보이는 자가 누구인가 하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그가 정당하지 못하다고 여기는 상대방에게 먼저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린 대개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면 정당하지 못하고 옳지 못한 네가 나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를 쉽게 포기하지 못합니다. '내가 옳은데 왜 고개를 숙여야 하느냐?'는 반발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그리스도를 세우기보다는 자신을 세우는 것이고 결국 그리스도를 말하고 복음을 말하는 자가 스스로 예수님을 무너뜨리고 예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진리가 자유케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생각함으로서 비록 내가 정당하고 옳다 할지라도 먼저 고개를 숙이는 이것이 진리로 자유케 사람에게서 보여지는 모습인 것입니다. 즉 자유는 내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강제가 아닙니다. 진리를 알았기 때문에 진리에 의해서 살아가게 되고, 때문에 진리에 의한 삶의 태도가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기 싫은 것을 믿음을 보이기 위해 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안 자로서,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알기 때문에 자신 역시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세우고자 하는 죄에서 이미 자유를 얻은 것이고, 진리가 그를 다스리고 인도하는 자유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는 여러분이 잘 알 것입니다. 우리의 속을 후련하게 하는 것은 내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그 사람의 약점을 붙들어서 자신에게 꼼짝못하게 만들 때 가장 만족한 기분을 누리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서 지는 것보다는 이기는 것을 즐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기고자 했습니다. 자신들을 굳게 세우기 위해서 예수님의 잘못됨을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자유가 필요한 죄의 종으로 판단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판단은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기려고만 하고 지는 것을 싫어하는 우리들에게 지는 자로 오시고, 굴복시키기보다는 굴복한 자로 오신 예수님이 자유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진리를 아십니까? 그러면 진리대로 살아가십시오. 말씀에 거하는 자로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에게 자유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으로 오셨는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에게서 그분의 삶을 배우십시오, 그리고 그 분의 삶을 따라가십시오. 거기에 진리로 자유케 되는 비밀이 있습니다.
진리는 나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세웁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진리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진리를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스스로의 올무에 매이지 않고 자유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51강) 8:42-59 유대인과 말씀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르고 있지만 그들 모두의 하나님이 동일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제가 생각하고 말씀드리는 하나님과 여러분이 생각하고 원하는 하나님도 다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면 다같은 하나님이지 어떻게 하나님이 다를 수가 있느냐?'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하나님을 끄집어 낼 때 하나님은 결코 동일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안에서 서로 만나고 교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충돌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본문을 통해서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유대인들과 예수님과의 대화 내용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모든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조차 부르기를 꺼려하는 그러한 민족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민족이 하나님의 아들을 만난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정상적이고 제대로된 만남이었다면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일하게 대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오히려 심각한 반발을 보이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는 민족과 하나님의 아들과의 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8장은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붙들어 예수님에게로 끌고 온 사건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간음한 여인에 대해서 법대로 해야 하느냐 아니면 당신의 말대로 해야 하느냐를 묻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당신의 말대로 죄에 대해서 용서해야 하느냐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법이냐 사랑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이처럼 8장은 예수님과 유대인의 전혀 다른 입장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법의 하나님입니다. 율법을 주시고 율법대로 잘 실천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하나님입니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법대로 실천하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실천하지 못할 때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법 앞에서 인간의 허물과 죄를 가리시고 용서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이처럼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만남은 하나님에서부터 이미 어긋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46절에 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내가 지금 진리를 말하고 있는데 너희가 진리도 듣지 않고 진리를 말하는 나도 믿지 아니한다. 이것을 보니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는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말하는데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48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혈통적으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나 행동에 대한 적대감을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사마리아 사람이다'는 말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욕이며 모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적대감이 어떠했는가를 여실히 드러내는 말인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예수님을 대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라는 말, 즉 '너는 귀신이 들렸다'는 말을 함께 함으로서 극에 달한 그들의 적대감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적대가 곧 하나님에 대한 적대임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51절에도 보면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말씀은 육신의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는 신자의 죽음을 죽음으로 말하지 않고 자는 것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안에서 신자는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몸이 죽은 것이 죽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창세기에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오게 된 것인데 그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단절된 것을 뜻하는 것이지 몸이 흙으로 돌아가는 육신의 죽음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질 수 있음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이미 율법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진 것으로 여겼던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따로 지켜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미 율법을 지킴으로서 영생을 얻은 자신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한다'고 할 때 그것을 몸이 죽지 않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지금 네가 귀신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이들은 주님의 말씀이 명백히 모순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음을 제시합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위대하다고 여기는 아브라함이나 하나님의 선지자들도 다 죽었는데 예수님이 '내 말을 지키면 죽지 않는다'고 하니 결국 예수님 스스로 자신이 아브라함이 선지자들보다 더 큰 자임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말에 대해서 예수님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56절)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도 자신으로 인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였음을 말합니다. 즉 아브라함에게도 예수님이 소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유대인들을 더욱 기막히게 할 뿐이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57절)는 질문에 대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58절)라고 답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의 분노를 극에 달하도록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 시대를 기준으로 하면 약 2200년 전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다는 예수님의 답은 돌을 들어 예수님을 쳐죽일 정도로 분노하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예수님에게 대한 유대인들의 이러한 반응이 참으로 어리석게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밖에 없는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원하는 하늘의 표적을 보여주며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할 때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서 그 말씀을 옹호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평범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을 2200년 전의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고 주장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야말로 그들의 조상을 모욕하고 하나님도 모욕하는 귀신들린 자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과 유대인들과의 대화는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예수님을 쳐죽이려고 하고 예수님을 그들의 손을 피해서 성전에서 나가버리시는 것으로 막을 내립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예수님이 그들을 설득시키거나 자신에 대해 전혀 납득시키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온 이 일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열심히 증거하고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전혀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분노와 반발만 더 크게 가중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러한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애당초 그들을 설득시키거나 납득시키기 위해서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들에게도 유대인들과 같은 실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언제나 예수님을 환영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내포되어 있는 고집과 완악함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법을 주장하고 나온 유대인들은 사랑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방식에 대한 반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애당초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들 방식대로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법대로 해결하는 것이 옳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법에 대한 잘못이 없다면 하나님에 대해서도 떳떳했습니다. 반면에 법에 어긋나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징벌하는 것이 그들의 정의였던 것입니다. 법을 굳게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법이 아니라 사랑을 굳게 세우는 것이 곧 진리임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죄인된 자가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인간의 고집과 완악함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밀쳐내 버리고 대신 내 고집을 세우고자 할 정도로 굳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린 때로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고 하면서도 내세우는 것은 우리들의 고집임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대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지적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고집과 완악함으로 반응하는 유대인들을 보면서 왜 그들이 그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며 오늘 우리는 유대인들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린 분명히 예수님의 말씀을 '옳다'고 인정하고 받아들인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우리의 신자됨이 증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옳다고 인정하는 그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실천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말씀을 굳게 세운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의 입장이나 고집이나 감정 기분 등을 세우기보다는 말씀이 아니라 하고 말씀이 원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곧 말씀을 세우는 것이고 지키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겠는데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내 감정과 기분이 용납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말씀보다는 내 자신의 감정과 기분에 순종되는 우리의 모습을 수시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고집과 완악함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고 그리스도를 안다고 해서 순순히 예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고 살아가는 것이 압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유대인과 같은 고집과 완악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시로 우리의 것이 고개를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우리 스스로 물리치게 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의하고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간이 어떠한가에 대해 무지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돈을 사랑치 말라고 하셨으면 우리는 그 말씀에 순종할 뿐입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의 말은 맞지만 돈 없이 세상을 어떻게 삽니까?'라는 생각이 우리 속에 남아 있다면 그것이 곧 우리의 고집과 완악함이 말씀에 대해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그대로 순종할 뿐입니다.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묻고 따져서 할 수 있는 것은 실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역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말씀을 이루려는 고집에 지나지 않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으면 그 말씀이 우리가 살아가는 평생의 삶의 푯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 말씀을 이루라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우리의 삶에 깃발이 되고 푯대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말씀 때문에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의 허물과 실수가 보여지는 것이고 회개하고 기도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우리의 감정과 고집이 앞선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생각은 용납하지만 나의 감정과 고집이 용납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말씀이 세워지기보다는 내 감정과 고집이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죄가 어떻게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보다는 우리의 감정과 기분을 앞서도록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내 감정과 모든 것이 다스려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무엇을 가르치는가?'를 알면서도 결국 자신의 감정과 기분대로 나아가게 되는 이것이야말로 스스로 말씀을 물리치는 것이고 말씀보다 자신을 더욱 굳게 세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렸던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말씀 역시 이런 의미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진리가 주는 자유는 우리 몸의 자유가 아니라 마음의 자유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 매어있는 마음에서 벗어나서 예수님에게 매인 것을 뜻합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말씀이 옳음을 인정하는데도 불구하고 내 자신의 감정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때,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기보다는 자기 감정에 충실해서 미워하는 쪽으로 나아갈 때 그는 죄에 매인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유는 자신에게서 벗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자유는 어떤 것입니까? 42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신 대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자유였습니다.
신자 역시 같습니다. 신자는 자신을 보내신 예수님의 기쁨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고민하고 생각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 예수님이 기뻐하는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이 기뻐하는 대로 행하는 것인가?'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 앞에서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앞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말씀은 그렇지만 나는 내 성질대로 하겠다'라고 고집을 부린다면 그것은 내 스스로 예수님을 물리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자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라갈 뿐입니다. 그런데 말씀대로 하면 뭔가 내가 손해가 되는 것 같고 바보가 되는 것 같고 무시 받는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린 수시로 말씀을 거부해 버립니다. 내가 무너지기보다는 굳게 세워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고집이며 완악함 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신자가 말씀을 따라갈 때 발견되는 것은 자신의 허물과 부족함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예수님에게 온 나 자신이 죄가 있는 자이며 부족한 자라는 것이 보여질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가 할 일은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남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날 위해 죽으신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나를 보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며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그 자리에 나를 집어 놓는 싸움을 하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말씀이 굳게 세워지기 위해 우리의 것이 죽어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내가 죽어짐으로서 인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굳게 세워지는 삶에 힘쓰기 바랍니다.
(52강) 9:1-12 실로암으로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스스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부터 보냄 받은 것임을 말씀합니다. 이처럼 아버지께로부터 보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나 말씀 자체가 예수님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의 것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7:16절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는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보냄 받으신 것은 예수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이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17:18절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라는 말씀을 하시고, 또 20:21절에서도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9장 역시도 이것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7장과 8장도 역시 예수님이 아버지께로부터 보냄 받으셨다는 것이 중점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돌로 쳐죽이려고 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께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아들이신 예수님을 제대로 볼 수 없다면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자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반발을 했습니다. 스스로 흠없는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자신들을 흠있는 죄인으로 선언하고 책망하는 그 말씀에 자존심이 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보존하고 여전히 율법에 충실한 의인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교훈은 모두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즉 아버지의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이 아버지의 말씀과 일치하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이 당연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안다고 할지라도 그 앎은 말씀에 근거한 앎이 아니라 자신들의 주관적인 개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개념으로 하나님을 상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말을 전하고 가르치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전혀 하나님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17-18절을 보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무지함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부요하고 부족함이 없는 자로 살아갈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처지가 어떤 상태인가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속에 있는 자신의 처지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필요하지 않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서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하고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 교회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말씀을 실천하고 교회 일을 열심히 함으로써 신앙에 대해서는 부요하고 부족함이 없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이 곧 자신의 수치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자신의 부족함과 수치를 보는 자가 곧 진정한 의미에서 보는 자이며 참된 신자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 역시 스스로 본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부족함과 벌거벗은 수치와 눈먼 것 가련한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 눈에 보이는 것은 다만 율법에 대하여 엄격하고 충실하며 말씀을 실천하고자 힘쓰는 자신들의 모습뿐입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참으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이 그들에 대해서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그들에 대한 말씀은 곧 오늘 우리 자신을 경계하고 교훈하는 가르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염두에 두고 본문의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치신 이적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단순히 소경을 고치신 것으로만 말씀하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본문은 소경을 두고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본문과는 별 상관이 없는 듯한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4-5절)는 말씀을 하시고, 소경의 눈에 침을 뱉아 이긴 진흙을 바르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눈을 뜬 소경을 두고 다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시비를 걸게 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처럼 소경을 고치신 사건은 소경이 눈을 뜬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상태를 책망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갑니다. 이것은 9:40-41절의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는 말씀을 보면 분명해집니다. 이 말씀대로 소경 이야기는 스스로 본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보지 못하는 소경이며, 스스로 소경임을 모르는 그 상태가 바로 죄있는 것임을 드러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의 말씀은 소경을 내세워서 스스로 본다고 하면서 자신의 소경 됨을 모르는 자들의 죄있음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제자들이 소경에 대해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2절)라는 질문을 합니다. 제자들은 소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고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징벌을 받게 된 가능성을 소경과 그의 부모에게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특정한 불행과 고난을 죄로 인한 결과로 돌렸습니다. 이것은 욥기서에서 욥의 친구들이 욥이 당하는 고난을 욥의 죄의 결과로 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도 이러한 생각이 성행하고 있었으면, 오늘 현대인들 역시 그러한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경이 날 때부터 이미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라면, 제자들은 무슨 생각으로 소경의 죄인가를 물어봤을까요? 날 때부터 소경이라면 이미 모태에서부터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까? 제자들이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마 당시 랍비들의 사고방식을 따른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창 25:22절의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라는 말씀이나 시편 58:3절의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는 말씀을 이유로 사람이 모태에서부터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이 질문은 제자들 스스로 자신들이 문제점을 드러내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문제점은 소경의 죄만 볼 줄 알았지 자신들의 죄는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소경이 아닌 것을 마치 죄가 없기 때문인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오늘 우리 자신들에게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누군가의 고난과 어려움을 대할 때 우리 자신도 모르게 '혹시 저 사람이 하나님에게 죄를 지은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자신의 평안을 마치 하나님에 대해서 죄가 없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제자들의 잘못된 점이며 오늘 우리들의 잘못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소경과 자신들은 다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경에게서는 죄를 봤으면서도 자신들에게서는 죄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에 있는 자와 평안에 있는 자신을 다르게 본다면 그것은 결국 제자들의 문제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본문이 존재하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는 것의 잘못됨을 지적하는 것이 본문의 의미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3절)고 답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죄 문제를 배제하시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에 의해서 소경된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4,5절에서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예수님이 세상에서 하실 일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으로서 빛이신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일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우리들 스스로의 결단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인 됨을 깨닫고 빛이신 그리스도로만 죄에서 해방될 수 있음을 발견할 때 가능한 것임을 생각해 볼 때 결국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보게 하시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소경을 내세워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소경을 고치시기 위해서 하신 일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6,7절을 보면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고 말합니다. 마가복음 8장에서도 예수님이 소경의 눈에 침을 뱉아 고치신 내용이 있지만, 침을 진흙에 이겨서 소경의 눈에 발라 씻게 하시는 것은 아주 특이한 방법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을 소경을 고치시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분명 말씀만으로도 소경을 고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침이나 진흙에 어떤 치유 효과가 있기 때문으로도 생각할 수 없으며, 사람이 흙으로 빚어 졌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무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본문은 하나의 독립적인 사건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 전체, 그리고 앞서 있었던 바리새인들과의 시비와도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고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소경으로 하여금 실로암으로 가야 할 이유를 제시해 주시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진흙을 바르지 않고 실로암으로 가서 씻으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흙을 바른 상태에서 가는 것과, 진흙을 바르지 않은 상태에서 가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으로 가는 것은, 뭔가 씻을 것이 있는 상태에서 가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몸의 더러움을 씻기 위해서 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반면 진흙이 없는 상태에서 실로암으로 가는 것은 단지 씻는다는 흉내를 내는 것일 뿐, 씻을 것이 있는 자로 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소경에게 진흙을 바르신 예수님의 행동은 소경을 씻어야 할 것이 있는 자, 즉 더러운 자로 실로암에 보내시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씻어주기 위한 분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악함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도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진리를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의 행위가 그들의 아비가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라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말씀하시자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까지 합니다. 이처럼 그들은 진리의 말씀을 들어도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에게 실로암에서 씻고 눈이 밝아진 소경을 보내심으로서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로 되어진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특히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의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보냄을 받은 분입니까?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대로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예수님이 유일한 생명이요 길이요 진리가 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소경이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의 실로암으로 보냄을 받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예수님만이 우리의 악함과 더러움을 씻어주시고 눈을 뜨게 하셔서 빛을 보게 하시는 분임을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경이 눈을 뜬 후에 자신을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돌아가서 눈을 뜬 것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것은 악한 우리들이 깨끗함을 입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로만 되어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열심과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만으로 되어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이 보냄을 받으신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자는 소경과 같은 실로암의 경험이 있는 자라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악함과 더러움을 알고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인해서 씻겨지고 깨끗함을 입게 되었음을 알았을 때,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나를 깨끗케 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으로 깨끗함을 입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예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신자의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실로암의 경험이 있는 신자는 자신의 열심과 행위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그 어떤 행위로서 깨끗함을 입을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자랑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고, 우리를 깨끗케 하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하신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 자랑할 수밖에 없는 그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입니다.
(53강) 9:13-34 소경의 경험
소경이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된 사건을 대하면서 행여 소경의 믿음에 대해 관심을 두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믿음이 있게 되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믿음을 보고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가 원하는 일을 이루어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소경의 믿음에도, 또 소경이 눈을 떴다는 일 자체에도 관심을 두지 말고, 다만 예수님이 소경을 찾아오셔서 소경에게 있게 된 일,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기 위해서 소경을 만나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눈을 뜨게는 하셨지만 그것은 눈을 뜬 자들에게 진정한 소경이 누구인가를 가르치기 위한 시작이었을 뿐입니다. 소경은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결국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마음의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얻어지는 귀중한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경험이 있을 때 눈을 떠서 세상을 보는 것이 귀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을 떠서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이 귀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소경이 눈을 떠서 세상을 보게 되었다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눈을 뜨게 했으니까 예수님에게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아니냐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도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러이러한 일만 해주신다면 평생을 두고 하나님만 믿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자신에게 주어진 어떤 유익을 근거로 한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계속되어지기 위해서는 원하는 것이 주어져야 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상을 것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분명 소경도 자신이 눈을 떴다는 것으로 인해서 예수님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초보의 수준입니다. 어린아이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가 좋은 것을 주면서 가르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더 크고 귀한 것을 주시기 위한 도구일 뿐이지 세상 것을 주시는 것이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늘의 귀한 것을 보게 되는 눈이 뜨이게 되었을 때는 자신에게 주어진 세상 것이 별 것 아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을 뜬 소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소경이 눈을 떠서 세상을 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임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를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일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내신 자를 믿게 하기 위해서 일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일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대해야 할 하나님의 일은 절대로 우리 일을 이루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보내신 분을 믿게 하기 위해서 일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설령 여러분이 살아가시면서 세상이 축복이라고 말하는 땅의 것을 풍족히 받았다 할지라도 여러분의 마음이 그것에 머물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분을 믿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로 받아들이시고 예수님을 믿게 됨으로써 세상 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자리로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순순히 인정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이 소경을 불러서 그 사실을 확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추궁에 대해서 소경은 예수님이 자신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증거 합니다.
25절을 보면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소경이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그 근거는 자신이 눈을 떠서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지 못하던 내가 본다는 것이 소경의 경험이었던 것입니다.
35-38절에 보면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는 말을 합니다. 눈을 뜬 자신의 경험을 의지해서 '예수가 내 눈을 뜨게 한 분이다'는 증거를 하던 그가 예수님을 다시 만나고 그분이 인자이심을 믿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아는 마음의 눈이 뜨인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이 소경을 찾으신 것입니다. 때문에 소경에 대한 하나님의 일은 육신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을 뜨게 하심으로 인자로 오신 예수님을 믿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제부터 소경은 예수님이 자신의 눈을 뜨게 했다는 것을 증거하기보다는 인자로 오신 예수를 증거하는 자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만난 신자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소경의 진짜 경험은 인자로 오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눈을 떠서 세상을 보게 되었다는 경험보다 인자로 오신 예수님을 보게 된 것이 더 큰 경험으로 자리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을 믿습니까? 혹시 우리가 눈을 뜬 자기 경험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수준에 있는 것은 아닙니까? 자녀가 좋은 직장에 들어간 경험이나, 사업이 잘되는 경험이나, 소위 세상의 복을 받은 것을 경험으로 해서 '나에게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는 증거를 하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은 인자로 오셨습니다. 고난 받으시는 하나님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분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예수님을 만난 분은 자신이 받은 세상 것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 받으심으로 주어진 하늘의 은혜를 내세울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을 근거로 해서 인자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의 소경이 눈을 뜬 사건은 8장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8장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이 선포하는 생명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소경을 만나서 눈을 뜨게 하시고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알게 하시는 사건들을 통해서 눈을 떠서 세상을 본다고 해서 소경이 아닌 것이 아니라 인자로 오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면 모두가 다 소경임을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토록 거부하고 예수님이 말씀하는 진리와 생명에 대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은혜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를 아실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생명과 나라에 참여할 수 없는 우리가 예수님의 희생과 고난으로 인해서 참여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것을 거부한다면 그 누구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라면 분명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잘 알고 믿을 것이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이미 하나님의 백성된 자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대해 철저했기 때문에 구원은 당연히 자기들의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자신들을 죄인으로 여기지 않았고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의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생명과 진리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잘 아는 우리 역시 은혜에 대해서 혼동할 수 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구원 얻은 것이 아니다'는 말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합니다. 구원은 분명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인데, 그렇다면 믿어야 구원을 얻는 것이고 따라서 내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 분명한데 우리가 믿었기 때문에 구원얻은 것이 아니라고 할 때 쉽게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를 안다 하면서도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경험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즉 내가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경험에서 구원이라는 결과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붙드셨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말할 것은 오직 은혜일 뿐이지 우리의 그 어떤 경험도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소경이 눈을 떴다는 것이 신앙의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한 그 어떤 것도 신앙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어떤 봉사를 하고 무엇을 얼마나 했든 그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보여지는 것일 뿐이지, 그것들이 믿음의 경험으로 내세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말할 수 있는 경험은 오직 그리스도를 알았다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찾아오심으로서 인자로 오신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예수님에 대한 눈이 뜨였다는 것, 이것만이 우리의 경험으로 자리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의 모든 경험을 무시해 버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에게 있게 된 삶의 경험에서 그리스도의 은혜의 흔적을 더욱 깊이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할 것은 그 어떤 경험도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발판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발판은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붙드신 것 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우린 그리스도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54강) 9:24-38 소경이 보게된 것
예수님이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은 유대인들로서는 참으로 곤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소경을 고치는 것과 같은 신비한 일은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하나님의 선지자들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유대인의 사고방식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러한 능력을 보인다는 것은 곧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종이라는 증거로 작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입장은 예수님 스스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았다는 주장에 대해서 전혀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하였는데 만약 소경을 고치신 것을 예수님의 능력으로 인정한다면 결국 자기들 스스로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하는 것이 되버립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눈을 뜬 소경을 직접 목격하고 있으면서도 그 일을 예수님이 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경을 불러서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갑니다. 그리고 영광을 하나님에게 돌리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로 소경 스스로 고백하게 함으로써 소경이 눈을 뜬 것을 목격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으로 몰아가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에게 소경은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31-33)는 말을 합니다.
소경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소경은 과연 무엇을 근거로 해서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일까요? 소경이 예수님을 잘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경은 예수님이 자신의 눈을 뜨게 하신 일을 근거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눈을 뜨게 했다는 것 때문에 무작정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놀랍게도 소경의 주장은 참으로 논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로부터 출발합니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은 죄인을 듣지 않으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소경으로 난자의 눈을 뜨게 한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창세 이후로 아무도 소경으로 난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소경은 그것을 창세 이후로 아무도 경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없었다는 증거로 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소경은 그것을 하나님이 예수님의 말을 들으신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예수님의 말을 들으셨다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주장과는 달리 죄인이 아닌 것이며, 경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는 유일한 분이라는 것이 소경의 주장인 것입니다.
소경의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몰아세우는 유대인들은 결국 자신들 스스로 '우리는 죄인이 아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되는 것이며, 그들이 곧 경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무리들임을 주장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들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소경을 고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이유로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으로 불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되는 어떤 행동이 있기 때문에 죄인으로 불려지는 것이 아니라, 죄의 행동이 있느냐 없느냐에 상관없이 인간은 죄인인 것입니다. 그것은 죄인의 규정이 행동을 보고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 자체를 두고 판단되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본질 자체가 죄라는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원하는 것은 언제나 자기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이 포기되어지기를 바라는 욕구로 살아갑니다. 그러한 인간이 기도한다면 그 기도에 과연 어떤 뜻이 실려있겠습니까? 요 14:14절에 보면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15:7절에도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무엇이든지 구하면 시행하겠다고 하고,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이루리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 말에 많은 희망을 두기도 합니다. '무엇이든'이라는 말을 마치 도깨비 방망이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기도만 하면 다 주신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열심히 기도만 하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에 대한 대단한 착각이요 병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무엇이든'이라는 말로써 자신의 욕구에 더욱 부채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이라는 말은 인간의 욕구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을 보면 '무엇이든'이라는 말 앞에 붙어있는 단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이름으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거할 때,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거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면 과연 우리가 원하는 것은 누구의 뜻이겠습니까? 내 뜻이겠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뜻이겠습니까? 분명 그리스도의 뜻일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마음에 세우고 살아가는 신자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리스도의 뜻에 일치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엇이든'에는 하나님은 시행하시고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도는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며 내 뜻을 포기하는 자로 살아가는가를 확인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면, 그것은 그 기도가 우리의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뜻에 일치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죄인의 기도는 듣지 않으십니다. 소경이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소경의 말에는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극히 성경적이며 하나님의 가르침에 전혀 벗어나지 않습니다. 소경은 자신의 경험에서 그리스도만을 보고 있으며, 그분을 자신이 알게된 사실 그대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경의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34절을 보면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고 말합니다. 소경이 유대인들로부터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을 증거한 것 때문에 출교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소경은 눈을 뜬 대신에 자신이 함께 거하던 무리들로부터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소경의 입장이라면 과연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차라리 소경으로 살지언정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살기를 원하겠습니까 아니면 쫓겨나도 눈을 뜨는 것이 좋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눈도 뜨고 쫓겨나지도 않는 길을 꿈꿀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바로 최후의 순간까지 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보호하려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예수 믿는다고 해서 우리 인생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서 인생이 힘들고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마치 예수를 싫어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임을 증거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살아가는 세상은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끼리 어울리고 사는 곳이 아닙니다. 복음을 알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어울려 형제 자매하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섬기고 희생하며 살아가는 천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사는 곳은 예수 믿기 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것은 믿기 전에는 세상과 어울리고 세상의 사고방식이 옳은 것으로 여겨졌는데 그리스도를 안 후에는 그 모든 것이 악한 것으로, 그리고 세상이 멸망의 곳으로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속에 머물면서 세상과 맞지 않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힘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을 전투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로 인한 어려움 속에서 신앙은 결코 입으로 고백하고 생각만 하는 차원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많은 말을 하며 삽니다. '이렇게 하겠다 저렇게 하겠다'는 뜻을 세울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말들이 내것이 아닌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그냥 한번 해본 말이 아닐 수도 있고, 그 순간은 진심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인생의 어려움이 없는 가운데서 쉽게 나온 말인 경우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을 증거하고 고백함으로 해서 어려움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이 참된 신앙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울타리가 아닙니다. 보호막이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쫓겨나지 않고 외면당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라면 그것은 단지 예수라고 이름하는 우상을 하나 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어려움이 있을 때 그동안 신앙을 떠벌렸던 자신의 말이 얼마나 힘이 없고 말만 있는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소경은 유대인들로부터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소경에게는 예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35절을 보면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말합니다. 쫓겨남을 당한 소경을 예수님이 만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구출하신 분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신을 세상과 다른 세계로 끄집어 내셨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방식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세상에서 끄집어 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마음은 세상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소경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할 것이며 예수님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세상으로 인해서 마음이 부요하니 십자가 지시고 낮은 자로 오신 그리스도의 섬김과 희생이 보일리가 없습니다.
쫓겨난 소경에게 찾아오셔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물으신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인자는 고난받으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과 함께 고난에 거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세상에서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신자만이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신자가 고난을 거부하고 회피한다면,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증거하기를 피해버린다면 어떻게 고난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혹시 오늘 우리가 그러한 자는 아닌지 생각해보시고 여러분 모두 인생에서 단지 이름만의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신 고난의 예수님을 만나시고 그분이 여러분의 인생의 중심이 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55강) 9:39-41 본다고 하는 죄
현대 교회가 주로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교회의 숫적 팽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교회는 숫자와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우선으로 하면서 우리의 죄로 인해서 흘릴 수밖에 없었던 보혈의 피에 대해 감사하고, 자기의 죄에 대해 회개하며 그리스도께 나오는 지체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영광의 날을 소망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날마다 발전하고 성장하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보다 더 그리스도인으로 굳게 서기 위해서 힘쓰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날 악하고 타락한 인간의 품성들이 그러한 참된 교회의 모습을 외면하고 조롱하고 무시해 버립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마음인가?'를 보기보다는 '얼마나 성장했느냐?'를 보는 것입니다. 이런 풍조로 인해서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감사하고 복음으로 기뻐하며 살아가는 참된 신자의 삶이 놀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세워진 교회라면 분명 그리스도를 우선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내 교회라기보다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차원에서 그리스도에게 기쁨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는 다만 명목일 뿐 관심의 대상도 삶의 푯대도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기쁨을 위해서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말하되 복음의 깊은 뜻과 내용에 대해서는 외면해 버린 채 살아가는 거짓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마음에 충실해야 합니다. 내 기쁨보다는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것에 충실해야 하고, 내 영광보다는 그리스도께 영광이 되어지는 것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사람됨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 때문에 존재하고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것이 곧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소경을 고치신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이었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즉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스스로 본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41절)는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소경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소경을 내세워서 바리새인들이 곧 죄있는 자들이며 또한 그들의 죄가 무엇인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 인자로 오신 예수님을 믿게 하신 것도 예수님의 일이 소경 한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하고자 하신 일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자된 자들에게는 중요한 문제라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한 개인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 전부가 아니라 믿게 하셔서 그리스도께서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할 삶의 이유는 잊어버린 채 우리의 일에 매달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39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는 심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심판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심판을 인간의 죄에 대해 신이 주는 벌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벌은 재앙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사람들은 심판을 하나님에게 뭔가 잘못한 것이 있을 때 재앙을 내리는 것으로 상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한가지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무 일 없이 편안하게 잘 살아가는 것을 심판이 없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스스로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잘못된 행동을 했는데도 아무 일이 없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에 대해 무감각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서 보여지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면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심판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39절에서 예수님의 심판을 생각해 본다면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는 것'이 곧 예수님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는 것은 심판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보지 못하는 자가 보게 된 것은 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을 심판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심판은 죄지은 자에 대해 재앙을 내리는 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먼저 39절의 말씀이 실제로 보지 못한 자들의 눈을 뜨게 해서 보게 하고 보는 사람들은 소경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즉 육신의 눈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다른 눈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한다는 말씀을 보여주는 사람은 소경입니다. 그리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한다는 말씀은 바리새인을 두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심판은 소경과 바리새인들을 구분하면서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이 실상은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음을 드러내는 것을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 유대인들의 시각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시각에서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죄있는 자는 분명 자신들이 아니라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도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소경을 봤을 때 '저 사람이 소경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물은 것입니다. 소경된 것을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긴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들은 소경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은 것이고, 그것은 곧 자신들은 죄가운데 있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서 죄 있는 자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보지 못한 자들을 보게 하시고 보는 자들을 소경되게 하심으로써 죄 있는 자가 보지 못하는 소경이 아니라 본다고 하는 유대인들이었음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결국 죄있다 없다는 소경인가 아닌가라는 외적인 문제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는 문제로 판단되어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으로써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보고 보지 못하는 차원이 아니라 인자로 오신 예수님을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로 죄있다 없다가 판단되어진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소경을 볼 때는 소경은 죄있고 나는 죄없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나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등장할 때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을 가지기가 쉽습니다. 이것이 소경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생각을 죄있는 것으로 심판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바리새인 중 어떤 사람이 '우리도 소경인가?'라고 묻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된 것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보지 못하게 한다'는 말씀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서 분명 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보지 못하는 자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스스로 소경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서 '우리도 소경인가?'라고 묻는 것은 우리도 복을 누릴 사람들인가라는 의미의 질문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은 자신들을 항상 복받을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에 대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41절)입니다. 이 말씀에서 죄있는 것과 죄없는 것이 무엇인가가 드러납니다. 그것은 곧 죄없는 것은 소경된 것이고, 죄있는 것은 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본다고 하는 것이 죄가 그저 있는 것입니까? 죄가 그저 있다는 것은, 죄가 여전히 있다는 뜻입니다. 즉 전에도 죄가 있는 상태였는데 그 상태가 계속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죄의 상태가 계속되어진다면 그것이 곧 멸망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그저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야 말로 바리새인들을 심판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죄의 기준이 잘못되어 있는 세상에 '무엇이 죄가 있는 것인가?'가 제대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오심으로 죄와 상관이 없다고 여겼던 자들이 곧 죄 있는 자로 판단된 것, 이것이 예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죄가 그저 있다'는 것은 죄가 해결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죄를 해결하실 분은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뿐입니다. 그분이 곧 우리의 죄를 해결하실 분임을 믿는 것이 곧 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의로운 행동을 함으로써 스스로 죄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에게로 나아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죄를 안짓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스스로 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죄가 그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과 열심히는 해결되지 않는 것이 죄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실 때 눈에 진흙을 발라서 실로암으로 보냈습니다. 이것은 '너는 씻을 것이 있는 자다'는 뜻입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보냄받은 분은 예수님입니다. 이렇게 보면 소경이 눈을 씻기 위해서 실로암으로 가는 것은 씻을 것이 있는 더러운 자가 하나님에게서 보냄 받으신 예수님에게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나아가서 더러움을 씻음 받았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깨끗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동과 아무런 상관없이 오직 그리스도로 인해서 죄씻음 받고 '죄없다'는 선언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한다'는 말씀은 자신의 악함을 보지 못하는 자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을 보게 하시고 씻어야 할 것이 있는 자임을 알게 하셔서 인자 되신 그리스도를 보게 하신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을 보지 못한다면 그는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여길 것이고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죄가 그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이 대신 죽으심으로 그들이 영원히 산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그들의 죄는 그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마음의 법으로 두고 사는 신자는 '죄없다'는 선언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고백은 '십자가의 어린양의 피로써 영생을 얻었다'는 것으로 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관심은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그 마음에 법이 되셔서 모든 일에서 '이것이 그리스도께 기쁨이 되는 것인가?'를 묻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리스도의 법이 마음에 있지 않고 밖에 있다면 그리스도를 생각은 하고 고백은 할지언정 살아가는 것은 '내 법'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겉으로는 예수님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자신의 영광과 자기 이름과 자기 기쁨을 위해서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불의함을 보지 못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시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법이 되어서 나를 붙들고 있는가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56강) 10:1-6 목자와 양
본문에서 말하는 목자와 양은 흔히 이해하는 목사와 성도의 관계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를 목자로 성도를 양으로 말하면서 마치 목사가 성도를 이끌어 가고 성도는 목사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마치 좋은 믿음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제가 항상 주장하는 것은 목사든 성도는 같은 그리스도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양으로서 그리스도가 친히 목자가 되셔서 인도하십니다. 목사는 다만 그 일에 말씀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은 자로 부름 받은 것 뿐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목사의 가르침에서 그리스도를 배우는 유익을 얻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목사를 존중할 것은 성도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그의 말씀에 대한 것이지 목사라고 하는 한 인간에 대한 존중이 되어서는 곤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말하는 목자와 양의 이야기가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2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우리에 양이 있는데 우리에 들어가는 자가 둘로 구분되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입니다. 다른 데로 넘어간다는 것은 문이 아닌 울타리를 넘어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성경은 이 둘을 두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라고 말하고,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목자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10장의 시작이 절도요 강도라고 일컫는 사람과 목자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9장을 다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10장에서 말하는 목자와 양의 이야기가 9장에 있었던 이야기와 무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9장에서는 나면서 소경된 사람을 예수님이 고치신 사건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고치신 사건으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고 계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것이 9:39-41절의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는 말씀으로 드러납니다. 즉 스스로 본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보지 못하는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스스로 본다고 하는 것은 율법주의를 두고 한 말입니다. 즉 율법을 잘 지킴으로서 자신들이야말로 구원받은 자임을 자부하는 것이 바로 스스로의 죄악 됨을 보지 못한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후에 절도요 강도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절도요 강도로 불려지는 사람들은 스스로 본다고 자처하는 바리새인들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목자와 구분이 되고 있는데 목자와 다른 점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이해할 것은 예수님은 왜 절도와 강도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시느냐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은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목자가 문으로 들어가서 자기 양을 따로 불러냅니다. 이것은 우리에 있는 양이라고 해서 다 목자의 양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우리에는 목자의 양이 따로 있는데 목자가 양을 부를 때 그 목자의 음성을 아는 양이 목자를 따라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목자의 양만이 목자를 따라나온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이렇게 이해해 보겠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율법적인 신앙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비록 율법을 지킨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의도를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즉 율법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의만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문은 오직 율법을 지켜서 스스로 의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율법을 주셔서 이스라엘을 율법 안에 있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의 악함을 깨닫고 죄를 씻어주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율법에 주어진 진정한 문은 자기 의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을 바리새인들이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점을 생각한다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우리나 우리에 있는 양, 그리고 목자와 절도 강도, 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다른 데로 넘어 간다는 것에 대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풀이해 보겠습니다. 우리에 들어가 있는 양들을 하나님이 주신 율법 안에 있는 이스라엘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럴 때 다른 데로 넘어간다는 것의 의미는 하나님이 율법에 세워 놓으신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율법에 세워진 문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통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누구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자는 자신의 악함을 깨닫고, 자신의 악함은 오직 그리스도로만 깨끗케 될 수 있음을 아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경을 실로암으로 보내실 때도 눈에 진흙을 발라서 씻을 것이 있는 자로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데로 넘어간다는 것은 바로 바리새인들의 소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율법에서 자신의 악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힘쓰는 의가 보여지기 때문에 달리 의가 되어줄 분을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데로 넘어가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두고 절도요 강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절도는 훔치는 자고, 강도는 빼앗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훔치고 빼앗은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공로와 은혜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율법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구원은 우리의 공로와 의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흘리신 은혜와 공로로만 되어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행함을 주장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은혜와 공로를 훔치고 빼앗은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절도요 강도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바리새인들처럼 믿음에 있어서 행함을 중요시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믿음은 행함을 무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의 시각은 믿음에 행함을 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에 행함을 더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행함은 같은 것입니다. 즉 행함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맺어지는 것이고 발생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 행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행함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있다면 그것은 믿음의 증거물일 뿐이지 결코 우리의 의를 드러내는 수단이나 도구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함이 있는 것을 믿음에 더 수준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바리새인과 같은 율법적인 사고방식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은혜를 가로채는 절도요 강도의 행위라는 것 역시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의를 세우는 자가 아니라 우리의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의를 세우기 위해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의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자의 본분에 충실하는 것은 나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자랑하는 것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말처럼, 이론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행위에 대한 자랑을 포기한다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자기 행위를 버릴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행위조차도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되어진 것임을 알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어떠한가를 철저히 인식할 때, 그리고 날마다 그 믿음에서 멀어지지 않고 살아갈 때 그가 바로 그리스도를 만나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이 과연 이러한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행여 행위를 비교하며 믿음의 수준을 구분하는 것은 아닌지, 또는 나에 비해서 열심이 없는 것으로 보여지는 사람에 대해서는 신앙의 차별을 두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하나하나 말씀으로 점검하는 삶이 되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말에 머물러 버리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순간순간 예수님의 공로와 은혜를 가로채면서도 정작 내 자신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절도요 강도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안타까운 일이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목자의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그 목자를 자신의 목자로 알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신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아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은 말씀을 두고 여러 소리를 외치고 있습니다. 예수를 말하지만 같은 예수가 아니고, 성경을 말하지만 하나님의 계시가 아닙니다. 이처럼 혼란스럽고 혼탁한 세상 안에서 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 목자를 따라나온다는 것은 진심으로 목자의 양이 아니면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성경을 통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고방식이 유대인들이 율법을 생각하는 수준에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할지라도 따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으로 살아간다면 그가 바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를 수 있는 신자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뭘 해도 좋습니다. 열심히 하십시오. 그러나 하시면서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행함이 여러분 자신의 의로 머물지 않도록 날마다 자신을 치며 말씀에 복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 예수님이 여러분을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내가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 생각이 여러분에게 머물러 있을 때 여러분은 예수님을 따르는 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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