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복음서!!!

[스크랩] 마태복음 강해 1

하나님아들 2014. 11. 20. 00:02

 

 

 

 

 

 

 

 

 

마태복음 강해 1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목차>

 

자기백성 (마1:18-25)
동방박사 (마2:1-12)
세례 요한 (마3:1-12)
시험받으심 (마 4:1-11)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 4:12-25)
천국의 모습 (마5:1-12)
소금과 빛 (마5:13-16)
하나님의 요구 (마5:43-48)
참된 금식 (마 6:16-18)
염려 (마 6:31-34)
대접하라 (마 7:1-12)
주의 이름으로 (마 7:13-27)
믿음 (마 8:14-17)
제자 (마 8:18-27)
권세 (마 9:1-8)
전도 (마 9:35-38)
합당치 않음 (마 10:34-39)
인기 없는 예수 (마 11:15-24)
안식일 (마 12:1-13)
예수님의 가족 (마 12:46-50)
천국의 아들 (마 13:1-12)
세례요한의 죽음 (마 14:1-12)
바뀌어진 관심 (마 14:22-33)
외식 (마 15:1-11)
교회와 교회 아닌 것 (마 16:13-20)
자기 십자가 (마 16:24-28)
큰 믿음 (마 17:14-20)
천국에서 큰 자 (마 18:1-4)
잃어버린 양 (마 18:10-14)
교회 (마 18:15-20)

 

 

 

 

 

 

 

자기 백성(마 1:18-25) - 1강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일하실 때 사용하시는 도구는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은 나를 사용하셔서 일을 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즉 내가 하나님의 도구로서 쓰여져야 한다는 사실을 외면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누군가의 어려움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어려움에 있는 신자를 도와 주세요'라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즉 우리의 바램은 하나님이 손수 그 신자를 도우셔서 그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시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기도했다는 것으로 '내 할 일은 이제 다했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내 형제를 위하여 기도했으니까 나는 그 형제를 사랑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형제를 위해서 기도했느냐가 아니고 형제를 위해서 어떤 도움을 줬느냐를 보시는 것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의 사랑의 도구가 되어서 그 형제에게로 다가가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장소는 우리 자신이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도 우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희생과 섬김입니다. 기도했다고 해서 말로 위로했다고 해서 신자의 할 일을 다 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어려움과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서 무엇을 했느냐를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물으십니다.

 

 

 

 

신자의 할 일은 내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움직이는 것이지 나는 가만히 앉아 있고 하나님께서 어떤 능력을 보이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신자는 바로 이런 삶의 정신의 소유자입니다. 이런 자가 바로 21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는 "자기 백성"인 것입니다. 그럼 자기 백성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1:1-16절까지는 예수님의 족보에 대한 기록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예수님의 내력을 설명하기 위한 족보가 아니라 심판을 받아야 할 인간이 무엇을 근거로 해서 구원을 받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족보임을 알아야 한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선조모들인 사라, 리브가, 레아 그리고 또 그밖의 여자들이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는 비천하고 미천한, 유명하지 않은 자들을 택함으로써 사람들이 보기에 위대한 것을 선택하지 않는 하나님의 특이한 의의 일면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누가 누구를 낳고'하다가 '누구는 누구에게서'라고 말이 바뀌는 부분이 있습니다. '누구 누구에게서'라고 칭하는 사람은 모두 다섯 사람입니다.

 

 

 

 

첫째는 다말(룻 4:12)에게서입니다.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로서 유다와 동침한 이방여인입니다. 다말이 유다와 동침하게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다의 가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다의 자손을 잇고자 한 것입니다. 유다는 인간적인 생각에 빠져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야된다는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단지 자기 아들을 살리려고만 했던 것입니다. 결국 다말은 자기가 창녀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가문을 잇고자 한 희생 때문에 약속이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둘째는 라합(수 2:1; 6:25)에게서입니다. 라합도 이방여인이요 창기로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살려주게 된 것입니다. 셋째는 룻(룻 1:4,22)에게서입니다. 룻은 남편을 잃은 시어머니의 고향으로 돌아갈 때 자신의 편한 길을 찾아가지 않고 시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된다하면서 나오미를 좇아간 모압여인입니다. 이방여인이 유대 땅으로 갔을 때 겪을 고초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나오미의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는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넷째는 우리야(삼하 11:3)의 아내에게서입니다. 우리야는 헷사람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밧세바는 이방여인입니다. 우리야의 아내는 밧세바입니다. 그런데 밧세바가 기록되지 않고 우리야가 기록되고 있는 것은 다윗의 죄로 인해서 죽음을 당한 우리야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어지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 여인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예수 안에서 그의 목표에 도달하게 될 모든 이방인까지도 구원하는 하나님의 행동을 시사하려는 것입니다(마 28:19).

 

 

 

 

1:1-17절까지의 본문의 의미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의 역사를 이미 아브라함의 선택에서 시작했으며, 예수 안에서 인간들의 모두 불투명한 의심스러운 죄적인 행위를 꿰뚫고서 역사의 목표에로 역사를 이끌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복음서 기자의 신앙 고백이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문제는 우리가 어떤 구속력 없는 역사적인 논쟁으로서가 아니라, 이런 신앙 고백에 ''라고 대답할 수 있느냐는 데 달려있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마리아에게서입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사이로서 동침만 안했지 법적으로는 부부로 인정된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 부부 사이에 예수님께서 개입하신 것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의 개입은 아주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부부이긴 하지만 아직 처녀인 마리아를 예수님께서 사용하심으로 인해서 마리아는 수많은 멸시와 고초를 받아야 할 위기에 빠진 것이고 요셉은 요셉대로 어려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천사의 말대로 마리아를 집으로 데려오게 되고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않았다고 말합니다. 동침치 않은 것은 성령으로 잉태되어서 태어난 아이가 행여 자기로 인해서 태어났다는 오해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동침치 않은 것입니다.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정식으로 하면 요셉의 아들이 되어야 할 것이지만 요셉은 그러한 모든 것까지 포기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용하셔서 일을 하시고자 하실 때 마리아와 요셉은 다같이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하고 오히려 그로 인해 받을 수 있는 고초와 어려움까지도 거부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섯 사람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의 도구로 내어놓았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자기를 희생시키는 모습을 드러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인들의 이런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인간들이 생명의 족보에 실릴 수가 있었다는 것을 예수님의 족보가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희생의 삶은 그때에 그쳐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땅에 완벽한 희생자를 보내셔서 그 희생을 근거로 해서 자기 백성을 찾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따르는 자를 '자기 백성'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잉태(1:18)나 탄생(2:1)은 직접적으로 보도되지 않고, 다만 그 결과만이 보도됩니다. 즉 한편으로는 요셉의 당황함이, 또 한편으로는 헤롯의 당황함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사생아로서의 예수의 의심스러운 출생에 대한 그리고 예수가 베들레헴 대신 나사렛인이라는 공격에 대항하여 마태가 예수의 출생은 베들레헴에서 이루어졌으며 성령에 의해 잉태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는 이를 통하여 다만 이 출생은 하나님의 의해서 의도되고 이루어졌으며, 예수는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만을 말하려고 할 뿐입니다.

 

 

 

 

19절에 '요셉의 의로움'이 등장합니다. 21절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23절에 보면 이사야는 아들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 즉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거짓과 참을 구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구약과 신약의 아이의 이름이 각각 다르게 예언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7:14절의 예언이 있게 된 것은 남쪽 이스라엘이 북쪽 이스라엘과 이방 연합군의 공격을 받게 된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아들 수알야숩을 데리고 아하스에게로 가라고 하십니다.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의미의 이름입니다. 즉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이런 전쟁을 통해서 참된 이스라엘로 남는 자가 생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전쟁 속에서 가짜 이스라엘과 참된 이스라엘로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아하스에게 징조를 구하라는 것도 이긴다는 징조가 아니라 남은 자는 돌아온다는 징조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임마누엘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즉 자기 백성과 함께 하셔서 자기 백성과 백성이 아닌 자를 구별해 놓겠다는 의미의 말씀으로 예수라는 이름과 그 의미가 같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백성이라는 것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수시로 개입하십니다. 나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서 개입하실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나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당연히 누릴 권리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포기하고 그 권리를 하나님께 넘겨 드리는 자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마리아와 요셉의 모습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일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나의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다른 자를 죄에서 건지는 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의 목적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는 예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봉사를 하고 헌금을 해도 나의 귀한 시간과 나의 귀한 돈 때문에 누군가가 죄에서 건짐 받기를 소원하면서 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모든 일은 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의 권리와 자기의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그 일에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그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부할 때 그 자는 결국 예수님의 자기 백성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이 아닌 자를 구별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비천한 나사렛 예수로 오신 것입니다. 마굿간에서 태어나시고 목수의 아들로 오시고 비천한 마을에서 자라시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외형을 보고 따르는 자들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외형적인 것을 보고 예수님을 무시했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백성은 낮고 천한 그 모습 안에서 구세주를 바라보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자기 백성을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백성은 세상에서의 잘 됨을 위해서 예수님을 좇는 자가 아니고 십자가를 알고, 예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고자 하실 때 나의 권리를 포기하면서 예수님의 도구로 쓰여지기를 기뻐하는 자가 곧 예수님의 자기 백성인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는 것에 만족할 뿐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하늘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독선적이고 일방적인 요구라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또한 심판을 받아서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야 할 존재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생명을 얻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한다면 땅의 것은 나에게 무의미한 것이고 하늘의 것을 바라보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것보다는 세상의 것에 더 가치를 두고 있고 그리스도의 희생도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도움이 안된다는 생각을 가진 자에게는 예수님의 오심이 결국은 심판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십자가를 발견한 자들에게는 구원이지만 십자가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도구로 존재해야 합니다. 직장은 돈을 벌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남에게 헌신하고 봉사하기 위한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도 행복을 누리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야 할 장소로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백성으로서 죄에서 건짐 받은 신자들입니다. 이제는 우리들이 다른 자들을 죄에서 건지는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나를 사용하시기를 기다리는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동방 박사(마2:1-12) - 2강


신자라면 누구든지 예수님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자신의 죄가 무엇임을 알고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과 죄가 무엇인줄도 모르면서 상투적으로 '죄인입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 상투적으로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말로만 죄인이지 정작 자기 자신 스스로는 항상 의인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의 증거로서 자신의 종교생활을 앞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죄를 알고 진심으로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등장하는 또 하나의 잘못된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만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죄만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의 모습에서 실망을 하게 되고 나중에는 크나큰 신앙의 고통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죄에서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것까지는 필요하지만 실망에서 고통으로 빠져버리면 결국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은 우리를 정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그 정죄 속에서 우리를 지키고 있는 용서와 사랑을 보게 하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자신의 죄 속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함께 볼 수 있어야 기쁨이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더러운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전혀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에 크나큰 힘이 될 것입니다. 신자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있는 모습입니다.

 

 

 

 

본문에 보면 동방박사가 등장합니다. 흔히들 동방박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이 땅에 태어나신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해서 먼 곳에서부터 베들레헴까지 온 사람이라고만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한가지 의문점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에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갔느냐는 것입니다. 박사들이 자기들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라면 길을 잘못 들어서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박사들은 처음부터 별의 인도를 받아서 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박사들을 그들의 땅에서부터 인도하셔서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박사들을 통해서 무엇을 보이시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만약 앞서 말한 대로 경배가 목적이라면 별은 그들을 곧장 베들레헴으로 인도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박사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십니다. 그곳은 왕이 있는 곳이고 또 유대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박사들은 그곳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습니다. 즉 예루살렘에 있는 왕을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예루살렘은 크게 소동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박사들에게 두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지금 아기 예수께 예물을 드리면서 경배하는 박사들의 신앙을 소개하려고 이 말씀을 남겨 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했습니다. 즉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를 구별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그러면 자기 백성은 어떤 사람입니까? 요셉과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이 자기의 삶에 개입하시자 자신에게 오게 된 수치와 멸시를 감당하며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수치와 멸시 즉 자기 손해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고 예수님의 백성된 모습입니다. 이러한 자기 백성과, 자기 스스로 의를 드러 내려고 하고 자신의 행위를 가지고 의의 근거로 삼으며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면 세상에서 잘되고 성공한다는 생각 속에서 자신보다 못해 보이는 자들을 무시하는, 자기 백성이 아닌 자를 구별하기 위해서 임마누엘로 오신 분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박사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하셨던 임마누엘을 이루시기 위해서 즉 예루살렘에 대하여 심판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예루살렘에 있는 너희들은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박사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는다'고 하자 헤롯왕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그들은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미가 5:2절의 말씀을 들어서 베들레헴에서 난다고 대답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날 것을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단지 예수님이 탄생할 장소를 예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이들은 성경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아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죄의 모습을 깨닫고 그 죄를 감싸고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성경을 아는 것을 가지고 교만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성경을 잘 아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교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의 그들이었기 때문에 미가서에 기록된 말씀도 자신들의 죄의 모습을 드러내고 심판하겠다는 예언이었지만 그들은 단지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신 장소로만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적인 생각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바라볼 때 말씀을 통해서 발견하는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전혀 반대된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그러했습니다.

 

 

 

 

미가 5:2절은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칠 자가 베들레헴에서 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재판자는 종교지도자입니다. 그들의 뺨을 친다는 것은 그들을 심판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당시 미가는 종교지도자들에 대해서 이런 예언을 했을까요? 미가 3:11절을 보면 당시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이 돈을 받고 재판하고, 제사장은 삯을 위해서 교훈하며, 선지자는 돈을 위해서 점치며,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하시니 재앙이 임하지 아니한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교회 지도자가 돈을 보고 축복하고, 헌금을 많이 내면 잘산다고 가르치고, 헌금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세상에서 잘산다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지도자들에 의해서 쫓겨난 자들을 딸 군대라고 일컫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그들의 뺨을 치는 자가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이라고 예언했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탄생은 심판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베들레헴이라는 장소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자기들만큼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박사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동방박사가 예수께 경배하고 돌아간 뒤에 예수님은 헤롯의 손을 피하여 애굽으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헤롯이 죽기까지 애굽에 있게 되는 데 이것을 15절에서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는 호 11:1절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앞뒤가 맞지 않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애굽으로 내려간 상태이기 때문에 애굽에서 불렀다라는 예언이 맞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예수님인데 애굽에서 불렀다라고 말하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여기서 해결점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애굽을 지리적인 요소로 생각하지 말고 누가 존재하느냐로 생각하는 것이 해결점입니다. 즉 구약에서 애굽은 바로 왕이 다스리고 있었던 것 같이 헤롯이 있는 곳을 애굽으로 보고 예수님이 계신 곳을 이스라엘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바로가 있던 곳에서 이스라엘이 핍박을 받았던 것 같이 헤롯이 있는 곳에서 예수님이 핍박을 받았던 것입니다. 결국 마태는 애굽을 지리적인 시각으로 본 것이 아니라 누가 있느냐를 가지고 애굽과 이스라엘로 구분 지은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예수님으로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예수님입니다. 즉 새로운 출애굽을 말하는 것입니다. 애굽은 예수님의 사상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곧 세상을 애굽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거짓과 참을 구별할 때 참된 것이 거짓된 것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함으로써 구별하십니다. 즉 핍박을 받는 쪽이 예수님이고 이스라엘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 신자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예수님 때문에 어떤 고난을 받았느냐가 증명하는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헤롯이 두 살 아래의 사내 아이를 다 죽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도 이스라엘의 아이를 죽인 일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살아난 아이가 모세이고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어낸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모세에게는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참 이스라엘)을 세상에서 끌어내는 새로운 출애굽을 일으키는 예수님의 모습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모세를 따라 나온 자가 이스라엘인 것 같이 예수님을 따라 나온 자가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헤롯이 두 살부터 그 아래로 아이들을 다 죽인 것을 렘 31:15절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18절을 보면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라고 합니다. 라마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포로로 끌려가기 위해서 한군데 모여졌던 장소입니다. 자연히 여기에는 자식을 잃어버린 어머니의 통곡소리가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포로된 것은 오로지 왕과 지도자의 죄로 인해서입니다. 결국 이것은 헤롯때 왕과 지도자로 인해서 두 살 아래의 아기가 당하게 되고 이로 인해서 어머니의 통곡소리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한다는 것은, 라헬은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로서 라헬의 울음은 곧 야곱의 울음이고 야곱은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운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교회입니다. 따라서 교회라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같이 울음에 참여하는 자가 곧 교회이고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헤롯이 죽은 후에 예수님은 나사렛이란 동네로 와서 살게 됩니다. 이것도 또한 '나사렛 사람'이라는 선지자의 말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나사렛은 나실인이란 말에서 나왔습니다. 나실인이란 구별, 새로 시작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나사렛이란 소외받은 동네로부터 세상적 사고방식으로 존재하는 곳을 치시겠다는 것입니다

 

 

 

 

종교생활 잘하고 열심히 한다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며 기쁨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을 부지런히 보고 배운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자격증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를 발견하고 그 십자가의 정신으로 자신을 위해서 살기보다는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의 종교단체로 전락해 버릴 때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해 버리실 것입니다.

 

 

 

 

우리들은 스스로 나는 말씀 앞에서 나의 죄를 발견하기에 힘쓰고, 헌금을 해도 축복을 기대하고 하는 것이 아니며, 봉사를 해도 칭찬을 듣기 위해서 하지 않고 있으니까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판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이든 아니든 그것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문제입니다. 신자는 단지 예수님만 따라가기 위해서 힘쓰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죄를 감싸고 있는 그리스도의 피가 너무 고맙고 좋아서, 십자가가 너무 귀해서 다른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예수님만 좇는데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버리라고 하시면 버리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살아라고 하시면 그렇게 살뿐입니다. 이런 자가 신자이고 하나님은 그를 자기 백성이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의 것을 버리겠다고 해서 버려지는 것이 아니고 돈을 사랑하지 않겠다고 해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 가족에 대한 사랑, 이 사랑이 예수님을 향한 사랑보다 더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런 잘못을 알고 예수님을 붙들 때 예수님은 우리의 한계를 보충하실 것입니다. 성탄절은 이런 예수님을 기다리는 날입니다. 동방 박사가 예루살렘을 심판하듯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심판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말씀 앞에서 말씀이 아닌 삶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세례 요한(마3:1-12) - 3강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보일 수 있는 가장 신자다운 모습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웃의 어려움을 도와주는 것입니까? 아니면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는 것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을 보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이런 것을 신자가 가져야 할 모습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행위들이 신자임을 증명하는 도구가 되지를 못합니다. 신자의 가장 신자다운 모습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그리스도의 피로 덮으시고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신다는 그 약속만을 믿고 기뻐하는 것이 가장 신자다운 모습입니다.

 

 

 

 

신자답다는 것은 주위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행위를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그 마음을 보고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행위들은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행위가 되어야지 내가 자신의 의, 즉 신자다운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더러운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누군가를 세웠습니다. 바로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약속만을 전하면서 그 약속을 믿지 않고 무시하고 거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고 고발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선지자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일을 선포하는 자입니다. 선지자는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말을 전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할뿐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선지자의 모습입니다. 선지자는 구약에서 끝난 직분입니다. 그러나 선지자의 역할은 지금도 계속해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 역할을 이어 받은 사람이 바로 신자입니다. 벧전 2:9절에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우리를 빛 가운데 거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외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신자에게 주어진 선지자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참된 선지자의 모습입니까? 구약에 세움 받았던 여러 선지자들이 나타내었던 모습은 자기는 감추어지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나타났다는 것이 선지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해야 선지자직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신약식으로 말하자면 성령으로 충만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일하던 선지자들이 오직 하나님만 드러내고 하나님만 높였다는 것을 볼 때 오늘날 성령 충만한 모습도 결국 하나님만을 높이고 그리스도만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 자신이 나온다면 그것은 결국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왕이 되어 있는 모습에 불과합니다.

 

 

 

 

구약의 선지자가 하나님의 증인이었던 것 같이 오늘날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일입니다. 사도행전에도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권능이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권능은 어떤 물리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 된 나에게서 내가 나오지 않고 그리스도만 나오도록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것을 권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령을 받은 증거입니다. 때문에 신자나 교회는 무엇을 해도 그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만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인간의 의나 행위가 드러나게 될 때 그것은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최초로 선지자의 역학을 하는 사람이 세례요한입니다. 마 3장에서는 세례요한이 갑자기 등장합니다. 세례요한이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한 곳은 유대 광야입니다(1절). 유대광야는 요단강 앞에 있는 장소입니다. 요단강 앞 광야에서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 약속의 땅에 들어가 있는 자들이 자기들의 할 일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3절의 말씀대로 이사야가 미리 예언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의 모습은 4절을 보면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착용하는 복장이나 음식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이 사는 모습이 아니라 세상과 상관없는 이방인의 모습입니다. 즉 세례요한의 이 모습은 나는 너희와 같은 사고 방식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의 생활 모습을 가지고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고 있습니다. 결국 요한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회개하라는 선포를 통해서 지금 있는 곳에서부터 나올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홍해와 요단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그러나 홍해는 건넜으나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자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지 않았던 후손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데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야 했던 것입니다. 홍해나 요단강은 신약적인 의미로는 세례를 뜻함으로 이것은 모두 죽고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약속의 땅은 새롭게 된 자가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 때 그 약속의 땅에 있는 자들이 새롭게 태어난 자로서의 구실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들을 광야로 다시금 끌어낸 다음에(즉 애굽에서 나온 것을 연상하면 됨) 세례를 받게 해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이스라엘 땅에서 광야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즉 신약의 출애굽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애굽으로 피신한 형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곳에서 나오라는 것이 요한의 외침인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어떤 영토에서 나오라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왕이 다스리고 있는 곳에서 탈출하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선지자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6절에 세례요한에게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그에게 세례를 받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5,6절을 보면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요한에게 나아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출애굽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자기에게 나아오는 것을 보고는 '독사의 자식'이라는 욕을 하게 됩니다. 구약의 이사야나 예레미야나 아모스 등의 선지자의 책망의 외침이 세례 요한의 입을 통해서 바리새인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요한에 대한 호기심으로 온 것이지 결코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세례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의로운 자라고 일컬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회개도 자신들과 상관이 없고 세례도 상관이 없다고 여겼던 사람들입니다. 요한은 그것을 공격한 것입니다. 겉모습의 의를 내세우고 있는 그들의 감추어진 더러운 것을 드러내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더러운 면, 실수, 허물 등 나쁜 것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잘하고 있는 것만을 보일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말씀 앞에서 스스로 감추어 놓은 더러운 면을 내어놓고 회개하는 자입니다. 여기서부터 진짜와 가짜의 구별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선지자의 사상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그것을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여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10절).

 

 

 

 

신자들 가운데는 실천적 무신론자라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겉으로는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려고 하는 것 같고 신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속은 하나님이 없고 자신의 의만을 드러내려고 하는 무신론자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에는 열심히 나오고 여러 가지 열심도 보이는데 그 삶은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발하는 것이 6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8절에 보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합니다. 여기서 열매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나타난 열매는 성령의 열매뿐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서 맺혀지는 열매인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고 말합니다. 열매 없는 나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무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 찍혀서 불에 던지운다는 것입니다. 눅 3:11절에 보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온 자들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고 합니다. 13-14절의 말씀도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결국 열매는 기존의 사고방식을 무너뜨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열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구분하여 심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고 말합니다.

 

 

 

 

13절에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운명에 예수님이 들어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세례라는 것은 세례 주는 자의 운명에 함께 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이 죄인된 우리의 운명에 들어오신다는 의미로서 세례를 받은 것이고, 결국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내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운명에 함께하겠다는 고백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15절에서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시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죄인의 운명에 들어오셔서 죽으시는 것이 의를 이루시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을 의로 여기시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16-17절을 보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나서 물에서 올라오시자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예수님의 머리 위에 임하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성령을 받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령이 예수님의 머리 위에 임하신 것은 성령이 임한 이 분, 즉 예수님이 성령세례를 줄 분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향해서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죄인의 운명으로 전환되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을 보시며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요한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진심으로 출애굽을 하였습니까? 세상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우리의 육신을 편안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는 모든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있는 쪽을 바라봅시다. 그곳은 광야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었던 곳이 광야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요한의 외침이 있었습니다. 회개하라는 외침을 바라보고 광야로 탈출하는 것이 출애굽입니다. 다시 말해서 땅의 것 보다는 우리를 살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더 사모하고 그 말씀이 나를 천국 보낸다는 것을 알고 말씀에만 관심을 두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한 신자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기존의 자리에서 일어나서 빠져 나올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자리에서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오라고 합니다. 비록 그 길이 좁은 길이고 어려움과 핍박이 있는 길이라도 그것만이 우리가 천국 가는 것임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시험받으심(마 4:1-11) - 4강


신자가 세상에서 살면서 신앙 생활을 하기가 힘든 이유 중의 하나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 혼자 세상을 살아간다면 내가 뭘 소유하고 있든 소유하지 않고 있든 그것은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진 것이 적다는 기준을 내릴 상대방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소유를 가지고 적다 많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모두가 내 옆의 사람과 비교해서 내리는 결정입니다. 상대방이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내 것이 적을 때 스스로 나는 적게 소유하고 있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따지고 보면 좋은 것이라는 것은 타인을 이기고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 주는 도구로서 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도 남보다 뛰어나기 위해서 필요한 도구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을 편하게 살기 위해서 믿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세상을 벗어버리기 위한 믿음이 아니라 타인과 경쟁하며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믿음을 요구하고, 욕심을 벗어버리기 위한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더 채우기 위해서 신의 힘을 빌리는 목적으로 믿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믿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은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성령에게 이끌리어 시험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성령께서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사단에게 시험을 받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시험을 받도록 하십니까? 그것은 어떤 것이 하늘의 모습이고 어떤 것이 하늘과 상관이 없는 세상의 모습인가를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조건으로 제시한 것은 우리가 볼 때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단의 것이 되고, 예수님께서 제시한 것은 우리가 볼 때 아무리 싫은 것이라고 해도 하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너무 쉽게 남발합니다. 자신이 생각할 때에 좋은 것이라면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 되고 좋지 않은 것이라면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삶의 길을 가셨는가를 잊으면 안됩니다.

 

 

 

 

흔히 신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죽으심을 우리를 살리러 온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그렇게 해야했다라고 간단하게 생각해 버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왜 하필이면 그렇게 죽으셔야 했는가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예수님은 꼭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우리를 구원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과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결국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어떤 것인가라는 그 실체를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 외에는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를 구원시키지 못하고 생명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이 죽으신 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야 할 우리의 인생의 길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더 잘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하나님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길을 가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원하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라 미워하는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이 항상 조심해야 할 것은 세상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님도 좋아하실 거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반대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이 좋아하고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미워하시고 싫어하신다는 것을 우리 신자들은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예수님이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사건입니다.

 

 

 

 

에수님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은 성령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 이유는 어떤 것이 마귀의 모습이고 어떤 것이 예수님의 모습인가를 분명히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즉 예수님의 시험받으심은 분리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좇을 때 무엇을 소원하고 좇느냐를 통해서 마귀의 편과 예수님의 편으로 구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험을 보면 마귀가 제공하는 것과 예수님이 제공하는 것이 다릅니다. 마귀는 떡과, 이적과, 세상의 영광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말씀만을 제공하실 뿐입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세상에 대한 관심은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첫 번째 시험은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는 것입니다. 사단은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보라'고 합니다. 사단이 이렇게 하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의 떡을 위해서 오신 분이라고 오해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신자들은 거의 이런 사단의 시험에 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의 떡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여기서 떡은 하루 세끼 먹기 위한 떡으로까지 발전합니다. 떡이 없으면 죽을 것 같고 세상에서 살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들이 모두 사탄의 시험인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 시험에 예수님은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시면서 시험을 물리치십니다.

 

 

 

 

시험을 물리치시기 위해서는 성경보고 기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단순히 성경 본다고해서 시험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신 8:3절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주신 것은 사람은 떡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하신 말씀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주신 이유는 만나를 단지 배를 불리는 음식으로 주신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을 안식으로 이끌어 가는 양식으로 주신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을 떡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떡으로 살면 배부를 때는 만족함이 있지만 배고픔을 느낄 때는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말씀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말씀으로 사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떡이 없어서 들어가는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없어서, 믿음이 없어서 들어가지 못하는 곳입니다.

 

 

 

 

두 번째 시험은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하나님의 아들이면 뛰어 내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시 91편의 말씀을 인용해서 네가 다치지 않을 것이라고 시험합니다. 사단은 거룩을 눈에 보이는 어떤 건물로 말하고 있습니다. 거룩은 예수님의 피와 연관된 것만이 거룩한 것인데 사단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거룩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들이 교회와 연관되어 있으면 그것을 거룩한 것으로 오해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 안에서 하는 것은 다 거룩한 일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거룩한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거룩은 우리의 행위도 정성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세 번째 시험은 마귀가 예수님에게 세상의 영광을 보여주면서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합니다. 마귀가 제시한 세상의 영광이란 우리가 평소에 원하고 바라는 것들입니다. 결국 마귀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들어주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영광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 경배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기라는 말씀은 모든 관심을 하나님께만 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이 내 힘이고 세상의 것이 있어야 산다고 생각할 때 자연히 관심은 세상으로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자유롭게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너무 많이 보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너무 두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주위 사람들에게서 받을 멸시와 수치를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모든 것은 악한 것이고 결국 멸망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신자가 항상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세상의 것이 나에게 없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보다는 다른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포기하기를 두려워 할 때 결국 우리들은 예수님께 나아와서 세상의 것을 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분명히 그것을 '사단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것은 세상을 말씀으로 살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된 존재로 사는 것이고,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만 경배하기 위해서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2-25) - 5강


사람들이 생명을 유지시키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상 것을 통해서 자기 힘으로 유지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안에서 주님의 생명과의 관계 속에서 내 생명을 유지시키는 방법이다. 전자의 경우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와의 관계 밖에서 단지 자신의 육신의 생명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면서 땅의 것을 자신의 힘으로 삼고 있는 모습이고 후자의 경우는 육신의 생명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에 관심을 두면서 그리스도안에 거하고자 힘쓰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연히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힘으로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란 이름을 놓고 기도하거나 예배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내 생명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있는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만 영생이 있음을 알고 예수님 밖으로 나가지 않기를 힘쓰는 삶을 말한다. 예수님만 좋아지고, 예수님만 붙들고 싶어하는 것이 곧 믿음이 있는 신자의 마음이다. 그래서 신자는 자연히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과 다를 수밖에 없다. 교회 다니는 자와 다니지 않는 자의 모습이 다른 것이 아니다. 진실로 예수님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점이다. 예수님을 아는 자는 세상에는 생명이 없음을 잘 안다. 세상의 힘이 자신을 천국 보낼 수 없음도 잘 안다. 오직 그리스도께 붙들려 있는 것만이 천국 가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자연히 자신에게 세상의 것이 있고 없고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오늘날 교인으로서 살아가는 사람은 많아도 신자로 살아가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가 되었다. 교인은 많지만 신자는 찾아보기가 어렵고, 하나님을 부르는 자들은 많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찾기가 어렵다. 신자가 되는 것은 결코 구제 같은 착한 일을 하고,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보는 것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느냐만 묻고 있다. 예수님 안에만 생명이 있음을 알고 예수님을 붙들기를 소원하느냐를 묻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할 때 맨 처음 외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천국이란 무엇이냐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는 천국이란 개념이 성경적인 개념이라기 보다는 극락이라는 개념으로 깊이 알고 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지금까지 알고 있던 극락의 개념으로 천국을 상상하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천국도 자기가 알고 있는 그런 천국을 말하는 것으로 당연하게 여겨버리는 것이다. 보석으로 지은 집이 있는 곳, 세상에서는 어렵게 살았어도 교회 잘 다니고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살았다면 천국에서는 큰집으로 보상을 받게 된다는 것, 아픈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는 세상, 이것이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천국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도 동일하게 말하고 있다. 즉 불교의 극락과 기독교의 천국이 전혀 다르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국은 그런 곳이 아니다. 예수님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말씀한다. 즉 천국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천국이란 하늘 어딘가에 존재하는 장소로서 우리가 세상에서 신앙생활 열심히 했을 때 하나님이 들여보내 주는 그런 곳이 천국이 아니다. 신자들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고 선물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모든 것이 천국을 장소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국은 누가 나를 주장하고 있느냐를 말하는 것이다. 천국은 새로운 나라이다. 즉 하나님 나라를 가리켜서 천국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 나라에 함께 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존재하시는 분에 의해서 붙들려 있는 것, 내 마음에 예수님이 오셔서 나를 주장하고 계시는 것, 그것을 가리켜서 '천국이 나에게 왔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천국에 갈 수 없다. 인간이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한다. 결국 우리가 천국 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도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셔서 일방적으로 그리스도의 지체되게 하신 것이지 내가 세상에서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고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그것을 보고 그 댓가로 상을 주셔서 하나님 백성 되게 하신 것이 아니다. 때문에 신자가 천국 가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일 하는 것도 결국 인간의 욕심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은 죄인이다. 그 어떤 착한 일을 해도 죄인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신 것이다. 우리를 영광스런 하나님의 나라에 들여보내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거듭나게 해서 하늘의 영광에 우리를 참여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한 자, 예수님께 붙들려서 그 마음이 예수님의 주장을 받고 사는 사람은 곧 천국이 임한 것이다.

 

 

 

 

16절을 보면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흑암에 앉은 백성은 이방인들을 말한다. 즉 이방인들의 형편이 전에는 흑암에 앉은 것과 같았는데 이젠 그들에게 빛이 비취었다는 것이다. 이 말의 뜻은 이사야가 사8:14,15에서 예언하기를 장차 나타날 메시야가 이스라엘에게는 오히려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 올무, 함정이 될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스스로 하나님의 법도를 잘 지키며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려고 애를 썼던 민족이지만 그들의 마음은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16절은 그들에게서 율법을 봉함 하라고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서 떠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도 유대인들은 요한을 붙잡아서 옥에 가둔다. 그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셨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이것은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히려 요한을 옥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즉 요한이 증거했던 말씀들이 유대인들에게는 거치는 돌이 되고 걸리는 반석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을 거부한 이스라엘을 떠나서 이방인에게로 가심으로 인해서 흑암에 처한 이방인에게 큰 빛이 비취게 된 것이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빛이 비취게 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의 행위로 바꾸어 버리는 자들에게서는 천국을 빼앗아 버리고 흑암에 처해 있던 사람들은 흑암에 처해 있던 자신들의 처지를 바라보고 그런 자신들에게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하는 것이다. 오직 은혜의 주로서만 영접하는 것이 곧 천국의 시작이다.

 

 

 

 

오늘날 우리는 흑암에 처해 있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빛으로 오셨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안고 오신 것이다. 이런 예수님 앞에서 우리가 내어놓을 공로가 무엇이 있는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감사할 뿐이다. 그것을 말해 주는 것이 23절부터 나오는 병고침이다. 예수님은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모든 악한 것을 고치신다. 각색병,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오자 그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여기에 나오는 질병들은 모두가 당시 인간의 의학이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할 그들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그들을 고통에서 기쁨으로 바뀌게 하신 것이다. 이 병자들은 자기의 힘을 내세울 근거가 전혀 없다. 오직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에만 감사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도 그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고쳐주심으로 세상에 온 천국이 어떤 모습인가를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이다. 천국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자,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보며 사모하는 자,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지 않는 자들에게 천국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천국에는 새로운 기쁨이 있다. 그 기쁨은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보며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는 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기쁨이다. 이것이 곧 주님과 함께 거하는 곳은 그 어디나 천국이라는 것이다. 18절부터 보면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다 내버려두고 예수님을 좇는 자들이 나온다. 이제 그들은 어부라는 인생이 아니고 주님께 매인 새로운 인생으로 시작하게 된다. 육신의 생명을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일하는 자로 바뀌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신다. 여러분들이 예수님께 붙들려서 천국으로 끌려 갈 때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의 몸을 위한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인생으로 바뀐 것이다. 아무쪼록 천국에 거하는 자로서 천국의 모습을 드러내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천국은 내가 예수님께 다스려지고 있는 상태이다. 나를 위한 인생이 아니라 예수님께 붙들려서 예수님에 의해서 간섭받고 다스려지면서 새롭게 변해 가는 인생이 된 것이다. 천국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은혜로서 만족하는 삶이 되기를 바란다.

 

 

 

 


천국의 모습(마5:1-12) - 6강


천국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소망하고 바라고 있었던 천국은 과연 어떤 모습의 천국입니까?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여러분이 알고 있었던 천국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확실히 알고 그것이 과연 성경이 말하고 있는 천국과 어떻게 다른지를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이란 하나님께서 세상에 약속하신 마지막입니다. 그리고 이 천국은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차 주어지는 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미 이 땅에 와 있는 천국에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땅에 와 있는 현재의 천국에 대해서는 무시해 버리고 단지 내가 죽어서 갈 좋은 곳, 즉 극락의 의미인 천국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천국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주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말씀을 통해서 천국은 어느 한곳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성질의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온 천국, 이것이 현재의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천국을 볼 수 있습니까? 보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현재 이 땅에 와 있는 천국은 우리가 지금까지 상상했던 좋은 곳이라는 의미의 천국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기 때문에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천국이란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그냥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사람들이 원하는 세상 영광, 명예, 재물 등 세상의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당하신 그대로 수치와 멸시와 희생을 담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대신 자신의 열심, 종교적 행위, 정성을 천국으로 들어가는 과정으로 대치시켜 버렸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천국은 결국 성경과는 거리가 먼 천국 아닌 천국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살아 계신다면 나는 자연히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늘의 방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이 원하는 땅에 속한 것들은 나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이고 단지 주님의 사랑과 섬김을 나를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시는 주님의 간섭에 순종하게 될 뿐입니다. 이것이 거듭난 자이고 곧 현재의 천국에 속한 자입니다. 장차 영광으로 주어질 천국은 지금 이 천국에 속한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땅에서 천국을 보지 못하고, 천국의 모습과 전혀 다르게 살고 있다면 장차 주어질 천국은 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미래의 천국만 연상하고 있고, 그 천국은 단지 좋은 곳이라는 상상 속에서 자신의 종교 행위를 통해서 세상에서 복받고 죽어서도 천국 가고자 하는 잘못됨을 연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천국의 모습과 미래의 천국의 모습이 같지 않습니다. 이 땅에 와 있는 천국은 주님께서 자기 백성만을 부르시기 위한 천국입니다. 즉 주님의 십자가를 보고 그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습이 내 모습이고, 주님이 가신 길이 곧 내가 가야 할 길임을 알고 그 길로 뛰어든 사람만이 주님의 백성입니다. 사람의 본성이라면 피할 수밖에 없고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것을 주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백성이기 때문에 자신이 가야 할 길로 보게 되는 것이고 피하려고 하기보다는 주님과 함께 그 길을 가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자가 바로 천국에 있는 자입니다.

 

 

 

 

사람들이 천국의 모습에 대해서 얼마나 잘못 알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은 팔복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에 널리 알려져 있는 내용입니다. 본문은 복이 있는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은 이것 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 외에 복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들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복의 모습입니까? 심령의 가난, 애통, 온유, 의에 주리고 목마름, 긍휼히 여김, 마음의 청결, 화평, 핍박받음입니다. 이것은 복이 여러 가지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이라는 복을 가진 자가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복있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즉 천국은 이 여덟 가지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는 것까지 천국의 모습입니다. 세상과는 철저하게 반대입니다. 이 복에는 재물을 많이 모으고, 자식이 잘되고,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합니다. 천국이 이런 모습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한 자는 이런 천국을 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는 것이고 오히려 멸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나중에 주어질 천국을 소망한다고 하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천국의 모습은 첫째, 마음의 가난입니다. 마음의 청결은 예수님께서 내 안에 자리하실 수 있도록 내 마음에 있는 세상의 욕심과 소망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주님께서 채우실 것입니다. 세상의 것은 비워지고 주님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 마음의 가난이며 이것이 곧 천국입니다. 둘째,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 애통은 자신의 억울함에 대한 애통입니다. 그러나 이 억울함은 세상의 일로 당한 억울함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대로 사는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으로부터 받는 억울함에 대해서 천국은 위로를 주는 것입니다. 애통은 주님 편에 서 있는 자들이 세상으로부터 고통 당하는 애통을 말합니다.

 

 

 

 

셋째,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합니다. 온유라는 것은 세상의 환경을 보지 않고 하나님만 믿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때로 좋지 않은 환경으로 인해서, 또는 어려운 일로 인해서 염려하고 걱정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 편에서 모든 일을 이루실 것임을 아는 자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장대 같은 적군과 싸워야 할 입장에 있으면서도 전투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승리한 것으로 여기고 땅을 분배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만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온유한 자이고 천국에 있는 자에게서 보여져야 할 모습인 것입니다.

 

 

 

 

넷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를 것이라고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먹고 입는 것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 있는 자는 그 욕구가 의를 향해 있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면서 의만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와 있기 때문에 의에 주려 있는 것이고 세상을 향한 욕구를 나타낼 수 없는 것입니다.

 

 

 

 

다섯째,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합니다. 천국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압니다. 죄인된 우리를 죄에서 끄집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아는 자만이 긍휼을 베풀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자가 곧 천국에 있는 자입니다. 여섯째,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본다고 합니다. 천국은 우리가 상상하는 모습과 다르다고 했습니다. 즉 세상의 인간들이 소망하는 모습이 아니라 피하고 싶은 모습으로 이 땅에 와 있습니다. 이 천국을 본다는 것은 결국 세상의 욕심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마음의 청결은 세상에 대한 모든 소망과 욕심을 다 버리고 주님의 십자가만이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일곱째,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화평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른다면 그것은 화평케 하는 일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화평케 하는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덟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연상하는 천국은 환난이 없고 핍박이 없는 곳입니다. 물론 장차 주어질 영광된 나라는 환난도 핍박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된 나라는 세상에서 핍박을 받았던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핍박은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자에게는 자연히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핍박이 있을 때 그것을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여덟 가지가 천국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이 모습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이 모습이 내가 나타내야 할 모습이란 것을 안다면 여러분은 천국에 있는 자입니다.

 

 

 

 


소금과 빛(마5:13-16) - 7강


산상설교는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하신 설교로서 5장부터 7장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산상설교에 대해서 가지는 오해는 산상설교는 우리들이 지켜야 할 규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산상설교는 지켜야 할 규례가 아니다. 지난 시간에 산상설교의 맨 처음에 나오는 팔복은 현재 이 땅에 와 있는 천국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그 천국을 영접한 천국 사람의 모습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것이 곧 산상설교의 내용이다. 즉 예수님은 산상설교를 통해서 천국 백성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 신자들에게 천국 모습과 다른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여 우리의 죄악 됨을 깨닫고 온전히 천국에 거하고 있는 삶의 모습을 나타내기를 힘 쓸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 땅에 와 있는 천국을 영접한 자의 모습이다. 다시 말해서 산상설교는 이렇게 해야 천국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천국 사람이 된 자로서 천국 사람다운 모습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모습이 자신을 통해서 나타나기를 힘쓰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지난 시간에 천국을 장소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또 세상에 있을 때 열심히 봉사하고 착하게 살았던 것 때문에 그 보답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천국으로 들여보내 준다고도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미래의 천국은 분명히 영광된 곳이고 죽음과 고통이 없는 곳이지만 이 천국은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세상의 영광을 버린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하나님을 위해서 고통을 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영광된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관심 두어야 할 것은 현재 이 땅에 와 있는 천국의 모습이지 미래에 주어질 천국은 아닌 것이다. 아예 관심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현재의 천국을 모르는 자는 미래의 영광된 천국과도 상관없는 자가 되기 때문에 현재의 천국에 대해서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관심도 내가 천국 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가지는 관심이라면 잘못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내가 어떻게 되느냐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말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현재 이 땅에 천국이 있게 하시고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때 천국의 모습이 눈에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여러분들 마음속에 있고 여러분들 주위에 있는 것이다. 팔복의 천국 모습을 알고 세상의 영광보다는 의를 위해서 목마르고 주리면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세상의 장애물을 하나 하나 치워 가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입은 긍휼을 아는 자로서 남을 긍휼히 여기고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그 마음이 천국이고, 그 모습이 천국이다.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멸시하는 자는 이 천국도 따라서 멸시하고 무시할 수밖에 없다. 이 자는 장차 주어질 영광된 천국과도 영원히 상관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수치와 고통을 아는 자는 이 천국을 귀하게 여기며 자신 또한 이 천국의 모습을 나타내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금의 천국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사람들이 들어가고 싶어하지 않은 모습으로 와 있기 때문에 세상과 천국 사이에는 십자가라는 걸림돌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 땅에서 천국은 하나님이 주신 것만 가지고 기뻐할 때 그 자리가 곧 천국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만 가지고 기뻐한다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던 것에 또 다른 것을 더해 주신 것 때문에 기뻐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더 많아진 것을 기뻐하는 것밖에 안된다. 하나님이 주신 것만으로 기뻐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있던 기존의 것을 빼앗아 가시고 대신 나에게 하나님을 더욱 깊이 보게 하고 의지하는 은혜를 주셨다면 그 은혜로 인해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의 모습인 것이다.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이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빼앗아 가셨다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간 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또 다른 것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그 자리는 천국으로 되는 것이다. 만약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들이 함께 소원하고 부러워하는 모습이라면 그것은 천국이라 할 수 없다.

 

 

 

 

신자를 소금이요 빛이라고 하신 말씀도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 흔히 소금과 빛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소금은 썩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니까 세상의 썩어짐을 방지하는 역할을 신자가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는 것이니까 신자는 세상에서 맛을 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 빛의 특성을 들어서 말하기를 빛은 어두운 곳을 비추는 것이니까 신자는 세상의 어두운 곳을 비추는 삶이 되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말을 들을 때 신자들은 무엇을 생각하게 되는가? 일단 주눅이 들게 된다. 그리고 마음에 중압감이 오게 된다. 내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어두움을 비취고 맛을 내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할 텐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고 또 하지도 못하고 있는 자신 때문에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사실 신자가 어떤 역할을 한다고 해도 세상은 변화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죄악된 땅이기 때문이다. 죄악된 땅이 인간이 뭔가 선한 일을 한다고 그것을 보고 변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세상이 다른 인간의 선한 행위를 보고 변화될 수 있다면, 썩어지는 것이 방지될 수 있다면 예수님은 괜히 세상에 오셔서 죽으신 것이다. 그런데도 신자들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 그것을 위해서 선한 일을 하고 이웃을 위해서 뭔가를 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도 없고, 어두운 곳에 빛을 비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신자들에게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고 말하는가? 소금이고 빛이라는 것은 분명히 세상에서 무엇인가 감당해야 할 역할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그 역할이 무엇인가? 천국을 보여주는 역할이다. 신자가, 천국 사람이 천국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짠맛을 잃은 소금이고, 말 아래 둔 등불이다. 그러나 신자가 보여야 할 천국 모습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좋은 것이 아니다. 신자가 보여야 할 천국 모습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심판 받아 마땅한 자임을 알고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그런 모습을 통해서 천국을 보이는 것이다.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고 하신 것은 이 땅에 온 천국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나타내 보이는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에 천국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꼭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만이 하나님의 일이 되어지는 것으로 착각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겸손함으로 나에게 주신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소금과 빛의 역할인 것이다. 즉 우리가 할 일은 세상에 나가서 뭔가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보냄 받은 자리에서 주님의 사랑으로 만족하며, 주님만 의지하면서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그러한 삶 자체를 무시하고 멸시할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천국이 그들 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지 못하고 오히려 거부하고 멸시했던 것이 그들로 하여금 마지막 심판 때에 핑계치 못하도록 할 것이다.

 

 

 

 

신자로서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이 땅에 온 천국의 모습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자신에게 그러한 모습이 요구돼도 거부하지 않고 그 모습을 입기를 소원하고 살아가는 것이 소금과 빛의 역할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신자라고 하면서 세상에서 고통 없는 천국을 원하고 모든 일이 잘되는 천국을 원하고 세상의 영광을 누리는 그런 천국을 원한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소금의 맛을 잃어 가는 것이고 빛을 말 아래 두는 것임을 잊으면 안된다. 소금이 맛을 잃었을 때 사람들의 발에 밟힌다는 것은 소금 그 자체도 아무런 거치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금이란 소금의 형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짠맛이 중요한 것 같이 신자도 세상에서 무엇을 얼마나 소유했느냐, 얼마나 열심히 봉사하고 일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연 천국 모습을 보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은 이미 천국에 들어 온 자로서 항상 감사하며 세상에서의 영광보다는 하늘의 영광을 더욱 소망하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소금이고 빛의 삶이니까.

 

 

 

 


하나님의 요구(마5:43-48) - 8강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봐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가를 찾아가지 아니하고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결정지으려고 하는 잘못함이 많이 보여지고 있다. 사람들은 생각을 모두가 자신을 유익되게 하는 방향으로 결정한다. 이런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결국 자신을 유익하게 하는 하나님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읽으라고 요구하시는 것도 나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고,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도 우리의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요구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요구는 힘이 아니고 경쟁이 아니고 세상 영광이 아니고 팽창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요구일 뿐이다. 인간의 요구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으로 바꿔놨을 뿐이다. 이것은 결코 복음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본문은 산상설교 중의 한 부분이다. 예수님은 산상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신다. 그 마음은 한마디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힘을 추구하고 힘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고 수고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사랑은 힘을 추구하는 것과 반대이다.

 

 

 

 

오히려 나에게 있는 힘을 이웃을 위해서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사랑이다. 결국 사람들은 이런 복음에서는 떠나고자 한다. 자신의 유익과 상관없고 오히려 손해를 유발시키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고 생각해 버린다. 결국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로 남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교회는 절대로 세상의 방식을 따라 가서는 안된다. 힘을 추구하는 교회,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교회, 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으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도록 하는 교회는 교회가 아닌 것이다. 교회는 철저하게 버리라고 외쳐야 한다. 십자가만 외쳐야 한다. 그럴 때 이 십자가만을 원하고 교회를 찾아 나오는 사람들을 진정한 신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이 택하신 신자이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신자인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누가 십자가만을 바라보는가를 생각해야지 누가 돈이 많고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는가를 생각하면 결국 그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인간의 교회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잘되기를 소원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져서 나에게는 손해가 있을지언정 다른 이웃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보일 수 있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달라는 그런 교회, 그런 신자가 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이런 기도에는 자기의 꿈과 소망을 포기해야 하는 아픔이 실려 있다. 이 아픔이 실려 있는 기도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인 것이다. 언젠가 실천적 무신론자라는 말을 한적이 있다. 하나님을 알고는 있고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는데 실천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오늘 우리들이 바로 그와 같은 모습이 아닌가를 심각하게 돌아봐야 한다.

 

 

 

 

마5장에는 '하지 말라' 하라는 부분이 많이 나온다. 살인하지 말라 하면서 미움까지도 살인이라고 말한다. 간음하지 말라 하면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한다. 이것은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살인하고 간음하는 존재라는 것들을 고발하는 말씀이다. 또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세상은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나의 머리카락까지도 하나님의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은 세상은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결국 세상의 그 어떤 일에도 우리는 개입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흔히 사람들은 '이 일은 내가 꼭 이루겠다'는 다짐을 많이 한다. '교회를 부흥시키겠다' '신자들을 제대로 양육해보겠다'등등 많은 각오와 결심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마음대로 하실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스스로 어떤 일에 대해서 계획을 세우고 다짐을 하고 움직이면서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결국 자기 계획을 들어줄 것을 하나님께 요구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누구시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망각한 모습에 불과하다. 물론 이 말이 어떤 계획도 세우지 말고 아무렇게나 살고 일하라는 것이 아니다. 계획을 세우되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일이 잘되든 안되든 그 일에 대해서 실망하거나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신자는 오직 주어진 자리가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자리로 인정하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백성된 모습이며 피조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이다. 어떤 자리에서 살아가든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삶이 되라는 것이다. 자신의 욕심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곧 하나님의 종이다.

 

 

 

 

또 예수님은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 뺨도 돌려대라고 한다. 오른편 뺨이 맞는 것은 상대방이 손등으로 때렸을 때이다. 손등으로 맞는다는 것은 엄청난 모욕을 당한 것이다. 그럴 때라도 대적하지 말고 오히려 왼편 뺨을 대라고 한다. 이것은 모든 자를 대할 때 자신의 자존심을 갖고 대하지 말라는 말이다. 또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주라고 한다. 겉읏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침구와 같은 역할을 했던 담요 같은 것을 말한다. 이것은 최소한의 삶의 도구이다. 이것까지도 포기하라는 것은 자신에게 힘이 남아 있을 때 남을 돕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십리를 동행하라고 한다. 당시 로마군인들은 무거운 짐이 있을 때 옆에 있는 유대인에게 오리를 들고 가도록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럴 경우에 오리만 가는 것은 할 수 없이 가는 것이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십리를 동행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는 거절하지 말라고 한다. 이 말씀대로 한다면 신자는 모두가 빈털터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요구이다. 결국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신자의 수준을 우리의 생각으로 마음대로 상상하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이웃을 사랑한다고 해도 내게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남겨두는 것이 인간이다. 이런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선하고 착하다고 생각하는 행동도 하나님 편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감히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라고 자랑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라는 것을 알리는 말씀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내가 좋아하는 자,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반응이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나에게 잘해줄 때 사랑하는 것은 인간적인 사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 누구에게나 공평한 사랑이다. 하나님은 악인이나 선인에게 동일하게 비를 내리고 해를 비친다고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만약 우리 같으면 악인과 선인을 골라서 비를 내리고 해를 비추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군가를 고르지 않고 동일한 혜택을 주신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판단으로, 또는 자신에게 있는 감정으로 상대방을 대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한다. 상대방이 나에게 어떻게 하든 내가 상대방을 향한 사랑에는 변함이 없는 것, 이것이 사랑이다. 상대방이 변한다고 내가 따라 변하고 상대방이 식어진다고 나도 따라서 식어지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 사랑을 보이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사랑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어떠한 해를 입혀도 그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이것을 온유라고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된 모습이다.

 

 

 

 

산상설교 앞에서 나를 바라볼 때 남을 미워하고, 간음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내 힘을 믿었고, 남이 나에게 하는 대로 나도 악은 악으로 갚으려고 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려고 하는 그런 자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나를 위해서 자기의 피를 흘리신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교회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신자가 세상에서 잘되는 것인가? 아니면 교회가 번창하는 것인가? 이 모든 것은 인간이 자기의 욕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지 절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신자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모습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피를 이해하고 그 피로 인해서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피의 은총을 드러내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예수님의 피는 깨끗한 자를 위해서 흘리신 피가 아니라 나같이 더럽고 악한 자를 위해서 흘려지신 피라는 것을 알고, 그 피의 은총과 자비가 아니었다면 지금 우리들은 영원한 멸망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했음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의 그 귀한 사랑을 받았은즉 나도 그 사랑으로 세상을 살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하는 자가 신자이고, 이 신자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습이다. 여러분 자신의 감정과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욕심으로 세상을 살 때 그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알고, 그 사랑, 그 자비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을 포기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자의 모습니다.

 

 

 

 


참된 금식(마 6:16-18) - 9강


성경을 보고 있노라면 한가지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 신자들의 형편이나 마음은 전혀 관심 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요구사항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무조건 자기의 모든 소망을 버리고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겠다고 따라 오는 자만을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찌 보면 엄청난 독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방적 요구사항이 독선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미 우리들이 하나님 밖에서 하나님과 독립된 존재로서 나의 생각과 의도대로 이 땅에서 살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나의 욕망이 포기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욕망을 꺽어버리는 하나님의 요구가 달갑지 않게 느껴지고 하나님의 독선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취한 행동은 하나님과의 타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요구를 인간이 욕망과 섞어버린 것입니다. 즉 인간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요구를 따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인간의 종교행위라고 말합니다. 종교행위에는 신의 요구를 따르면서도 그 내면에는 자신이 소원을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이 깔려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해야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신자의 표로 삼았던 것입니다. 마 6장이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6장을 보면 종교행위가 나옵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이 나오는데 이 세 가지는 당시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의 신앙을 보여주는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여기에 한가지를 더 보탠다면 십일조입니다. 따라서 구제, 기도, 금식, 십일조는 바리새인들의 대표적인 종교행위였던 것입니다. 이 행위는 오늘날에도 신자들에게 중요한 행위로 되어 있습니다. 이 4가지만 잘한다면 그 사람은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떠받들여지게 됩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금식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잘못된 금식과 바른 금식을 말씀하시면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금식에 대해서 책망을 하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할 때 자신이 금식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야 자신의 신앙이 좋다는 것을 이웃들이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을 할 때 세수를 안했으며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일부러 초췌한 모습을 하였습니다. 아마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믿음이 좋다고 칭찬을 할 때 그 칭찬이 금식을 하는 그들의 힘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금식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금식을 강조합니다. 특히 목회자들은 40일 금식기도를 하고 나면 기고만장한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40일 금식기도를 하지 않은 사람들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교인들도 40일 금식기도한 목사님이라면 뭔가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대합니다. 40일 금식기도라는 것을 하고 나면 자신에게 어떤 큰 능력이 주어질 것 같은 착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금식이 어떤 것인가를 분명히 알고 주님 앞에 합당한 금식을 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금식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개인적으로 금식했고, 또는 국가적으로 금식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금식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뭔가 잘못됨을 발견했을 때 하는 금식이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고 돌판을 깨뜨려 버리고 다시금 말씀을 받기 위해서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40일 금식을 하였습니다. 신 9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 40일 금식기도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볼 수 잇습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패했거나 회개의 표현으로 금식한 것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금식들이 말하는 것은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금식의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정상적인 관계가 되지 못하고 잘못되고 있을 때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바로 고쳐나가라는 것이 바로 금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신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세우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땅에 세워나가야 할 우리가 그 뜻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면 분명히 우리가 잘못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자는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여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미움과 경쟁으로 채워져가고 자꾸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면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금식자체가 중요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금식은 밥을 먹지 않는 것이 금식이 아닙니다. 이것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 58:6,7을 보면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금식을 단지 밥을 먹지 않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향해서 사랑의 행동을 하는 것을 금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금식이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엇으로 인해서 잘못되었는가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먹고사는 문제에 민감합니다. 자기 몸에 대한 문제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았을 때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음식을 먹지 않으므로 자기 몸에 대한 관심을 끊는다는 것이고 또한 나는 세상의 음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산다는 것을 배우라는 것이 금식입니다. 그리고 그 금식이 곧 행동으로 드러나는 데 그것은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몸에만 관심을 두고, 자기 몸만 귀하게 여길 때는 이웃과 나누는 마음이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땅에 것에 소망을 버리면 버릴수록 이웃과 나누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참된 금식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신자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것인데 내 몸에 대한 욕심 때문에 사랑을 나타내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세우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 회개하면서 자신은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 금식의 자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금식할 때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금식하는 행위는 우리를 신자되게 만드는 방법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언제나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잘못됨을 발견하고 그것을 고쳐나가는 자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면서 회개하는 것이 금식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며 나누는 삶으로 점차 변화되어 가는 것이 금식입니다. 때문에 금식이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서나 어떤 능력을 받기 위해서나 자신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마 9:15절에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금식하는 날에 금식하지 않는 것을 트집을 잡자 예수님께서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시면서 금식해야 할 때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금식할 때는 신랑을 빼앗길 때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예수님을 빼앗겨서 기쁨을 잃어버렸을 때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 생활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이 기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과 동행할 때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일로 인해서 그 기쁨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신앙을 빼앗긴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세상에 빼앗겨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앙 생활은 정상적으로 되지 못합니다. 교회 나오는 것도 기쁨이 되지 못하고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도 들지 않고 말씀을 보고자 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빼앗긴 것입니다. 이럴 때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금식하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고 싶어서입니다.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돌아보고 자신에 대해서 한심해하면서 이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진심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기쁨을 누려보고 싶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금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간을 정하지 말고 자유롭게 하십시오. 기간을 정하면 다시금 금식이라는 종교행위에 매이게 됩니다. 자유롭게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마음에 기쁨이 일어날 때 금식을 그치면 됩니다. 금식은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마음으로, 어떤 소원으로 하나님 앞에 나왔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음식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고 싶습니다라는 소원이 음식을 먹지 않는 행위에 실려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금식의 행위가 아니라 그 마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은 남들이 모르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은밀한 금식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금식을 과시하고자 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만을 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금식을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고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원한다면 이미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칭찬했을 때 이미 그것으로 모든 상을 받은 것이 됩니다. 하지만 은밀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영광된 하나님 나라를 상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염려(마 6:31-34) - 10강


지난 주일에는 금식에 대하여 말씀드리면서 금식이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뭔가 잘못되었음을 발견했을 때 무엇으로 인해서 잘못되었는가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민감한 것은 먹고사는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몸에 대한 문제에 가장 민감합니다. 때문에 언제나 자기 몸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서 잘못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발견했을 때 몸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먹는 것을 포기하면서 신자는 먹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배우라는 것이 금식인 것입니다. 신자가 떡으로 살고자 하지 않을 때 이웃과 나누는 사랑으로 살 수 있는 것이고 땅에 대한 관심에서 하늘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있는 신자라면 자신이 몸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지를 못하고 있고 하나님의 뜻을 세워가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 회개하면서 애통해하는 것이 금식의 자세인 것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몸에 관심을 두면 땅의 일에 모든 마음을 두게 됩니다. 그럴 때 신자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자신을 포기하고 주님이 가신 길을 가는 것인데 주님은 결코 세상에 마음을 두는 삶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몸에 대해서 포기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또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신자는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이란 전혀 다른 두 가지의 것에 동시에 동일한 관심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은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때문에 재물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살겠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내가 결국 포기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세워야 합니다. 뭔가 내가 버려야 할 것을 분명히 정해놔야 그것을 버리기 위해서 힘쓰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어디를 향해 있습니까? 땅입니까? 하늘입니까? 여러분이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19절과 20절을 보면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에 헌금하고 구제하는 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보물이 있는 그 곳에 마음이 있다는 말씀과 같이 지금 우리들의 마음이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땅에 관심을 두고 사는 것은 결국 보물을 땅에 쌓는 것이고 땅의 것은 가지지를 못하고 누리지를 못해도 하나님께 대한 관심만큼은 버릴 수 없다는 소원으로 세상을 살 때 그 자의 보물은 하늘이고 결국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땅에 대한 관심에서 떠나지는 못했기 때문에 우리에게서는 염려라는 것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산상수훈을 말씀드리면서 강조했던 것은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실천명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도 실천법으로 봐서는 안됩니다. 세상의 사람은 그 누구도 염려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염려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염려를 물리칠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주님 말씀대로 염려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염려할까봐서 염려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는 것을 실천법으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염려라는 것은 내 몸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몸에 대한 관심, 땅에 대해서 관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에게서는 염려가 끊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땅에 대한 관심을 버려라, 즉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모습은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찾고 세상에서는 돈을 찾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대로 세상에서 돈을 찾는 사람이 교회에 왔다고 해서 하나님만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세상의 재물에 관심을 두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는다고 해도 자신의 세상일에 동작하고 복을 내려주는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결코 신자가 아니고 천국과도 상관이 없는 모습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이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도 자신의 일이 잘되기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잘되든 못되든, 어떤 일이 있든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알고 그대로 순종하겠다는 것이 곧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결국 염려라는 것은 단순히 걱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관심을 땅에 두고 산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즉 돈을 주인으로 삼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돈을 주인으로 섬길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염려입니다. 그래서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돈의 힘으로 세상을 사는 삶이 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세상을 사는 삶이 될 것을 요구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위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해서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그 목숨과 몸을 누가 책임지고 계시는가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돈이 있어야 우리의 목숨과 몸을 지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공중의 새는 어떻게 사느냐고 말합니다. 심지도 않고 모아들이지도 않는 새는 어떻게 몸을 지탱하는가? 모두 하나님께서 기르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새들보다 더 귀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기르시지 않겠느냐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먹고사는 것은 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이니까 너는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삶의 목적은 몸과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새는 단지 몸과 목숨을 유지하면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인간인 우리도 몸과 목숨은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만이 할 수 있는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직 몸과 목숨에만 관심을 가지고 산다면 그것은 공중의 새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새보다 더 귀하다는 것은 새도 하나님이 기르시는데 너희를 안기르시겠느냐 그러니까 먹을 것 입을 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새보다 더 귀하다는 것은 우리는 새와 같이 살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즉 새같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해서 이 땅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삶은 몸과 목숨을 위한 삶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책임지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몸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사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또 솔로몬의 모든 영광도 들의 백합화보다 못하다고 말씀합니다. 솔로몬은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만큼 세상의 모든 영광을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이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신 들의 백합화보다 못하다고 합니다. 결국 세상의 것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크고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들의 백합화보다도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목숨을 위해서, 몸을 위해서만 산다는 것은 들의 백합화보다 못한 인생을 사는 것이고 결국 풀이 아궁이에 던져지듯이 우리 또한 멸망의 구렁텅이로 던지움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열심히 아주 열심히 몸을 위해서 목숨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몸을 좀 더 치장하고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 돈을 벌려고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돈이 없어서 고통스러워하고, 돈이 없어서 슬퍼하고, 돈이 없어서 낙심하고 세상을 비관합니다 돈을 자신의 힘으로 삼고 주인으로 삼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절대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인생은 결국 흙에 묻혀버릴 인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인생을 사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이방인들이고 그들이 결국 구하고 염려하는 것은 먹을 것, 입을 것에 대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신자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신자의 할 일입니다. 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일을 해도 그 일을 하나님이 주신 일로 알고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일을 하는 목적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편안한 삶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과 생명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나의 의도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아야 할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땅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삶을 원하고 계십니다. 날마다의 삶을 세상에 매여서 돈에 대한 염려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돈에 대한 염려로 살았다고 해도 이 말씀으로 통해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고 내일은 돈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사는 날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대접하라(마 7:1-12) - 11강


염려라는 것은 사람이 세상을 자기의 힘으로 자신이 계획하고 원하는 바를 이루어 나가고자 힘 쓸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세상의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염려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다고 해도 자신의 모든 생각과 계획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인간은 몸을 위해서만 살 때 그것은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 같은 인생에 불과하며 하나님께 부름 받은 신자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살아야 할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자신의 몸을 위해서 살 때 그것이 곧 땅에 보물을 쌓아 가는 삶이고, 이런 사람은 언제나 입을 것, 먹을 것, 마실 것을 위해서 염려하며 살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가 자신의 몸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전에도 말했지만 산상수훈은 실천법으로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우리가 실천해야 할 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꼼짝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법 아래서 우리의 의로움이나 행위를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산상수훈인 것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바라봐야 하는가, 왜 우리가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해서는 안되는가를 가르쳐주는 것이 산상수훈인 것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법은 우리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 산상수훈의 법대로 안하면 지옥 간다고 했을 때 누가 그 법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모두다 지옥가야 마땅할 죄인밖에 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얻는 것입니까? 법 아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1절을 보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네가 남을 비판하면 남도 너를 비판하니까 비판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비판이라는 것은 일단 '나는 너보다는 낫다'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즉 내가 상대방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남을 비판할 때 자신도 남의 비판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비판을 받아야 할 대상이 됩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남의 비판을 받지 않고 비판할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님뿐입니다. 따라서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는 모두가 죄인이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에는 그 누구도 남을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가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누구도 남의 잘못을 지적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상대방의 죄를 의도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이 상대방보다 더 낫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형제의 잘못을 드러내고 약점을 공격하는 것을 금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절에서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합니다. 티나 들보는 죄의 경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의 잘못만을 보지 말고 자신의 큰 죄인임을 알아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같이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서로의 행위를 가지고 비교하고 경쟁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내 형제입니까? 형제란 한 아버지를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가 같은 자가 내 형제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해서 무조건 형제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구원시켰음을 알고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고 이웃을 대하는 자가 곧 내 형제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누가 내 형제다운가'하고 옆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스스로 형제의 자리를 벗어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스스로 남을 판단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네 형제인가를 보지말고 내가 저 사람의 형제로 다가가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즉 언제나 내가 죄인임을 알고 이웃을 대하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는 법 아래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를 내세웁니다. 자신의 의를 자랑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도 죄인의 몸이라는 것을 거부합니다. 결국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며 거룩한 것을 발로 밟아 버리는 개와 돼지 같은 존재입니다. 개, 돼지는 당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을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앞서 말한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자를 이방인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 어떤 종교적인 행위를 열심히 한다해도 그것이 자신의 의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종교적인 행위를 의로 삼을 때 '나는 죄인이다'는 것이 사라지게 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게 됩니다. 교회가 아무리 커도 그것이 목사의 자랑이 되고, 의가 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결국 신자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법을 지킬 수 없고, 따라서 구원과도 상관없는 존재입니다. 이런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선물로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선물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이 7절의 말씀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은 기도의 방법으로 많이 강조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은 우리는 스스로 법을 지켜서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5장에서도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셨다고 합니다. 또 우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즉 서기관과 바리새인도 법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했지만 그것으로 천국을 가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형제를 욕하면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뿐 아니라 모든 말씀이 우리의 의를 자랑할 수 없도록 입을 다물게 하는 말씀들입니다. 때문에 구원은 하나님 은혜를 근거로 해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행위를 근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간절한 마음으로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내가 뭔가를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을 알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결론이 12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남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한다면 남을 대접하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남이 나를 대접한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께 대접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즉 우리는 법 아래서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그런 존재였는데 예수님께서 대신 법 아래 순종하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안겨주신 것을 예수님이 우리를 대접한 것으로 말씀한 것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법을 제시해서 우리는 그 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철저히 깨닫게 해서 예수님의 은혜만 바라보는 존재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자신에게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간절함으로 구하게 하는 그런존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자가 이러한 인간의 존재를 알고 형제를 대한다면 서로 비교하면서 경쟁하거나 비판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항상 자신도 예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자세로 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신자에게서는 예수님만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이 예수님께 대접받았음을 알고 자신도 남을 대접하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서 기도합니까? 우리가 구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진심으로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구하십시오. 땅에서 편하게 지내고 어려운 문제가 사라지는 은혜가 아닙니다. 죄인된 우리를 하나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대신 법 아래 순종하신 은혜입니다.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자는 비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남을 대접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께로부터 대접을 받았음을 아는 신자의 모습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주의 이름으로(마 7:13-27) - 12강


믿음이란 내 힘으로 뭔가 할 수 있다는 모든 가능성을 버리고 오직 주님의 힘만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우리가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힘으로 천국가지는 못하지만 천국 가는 일에 뭔가 보탬이 되고자 애를 씁니다. 천국은 신자로서 착한 일 많이 하고 열심히 교회 봉사한 사람이 갈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분명히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은혜가 주어질 만한 사람을 스스로 구별하는 것입니다. 저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질리 만무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질 만한 사람,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자기편에서 뭔가 신자다운 행동을 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도 거리가 먼 종교인에 불과한 모습일 뿐입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기대할 것이 없다는 선언입니다. 인간은 그 어떠한 선한 행동을 해도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의로 여길만한 것이 인간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은혜를 구하는 것이 인간편에서 할 일입니다. 따라서 은혜를 구한다는 것은 자신은 무엇을 해도 죄악의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외부에서 나를 끄집어 내 줄 힘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도 구원을 받기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너 자신은 오직 더러움 그 자체임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만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그 은혜를 소원하라는 말씀이지 이것저것 다 필요없이 천국 갈려면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이것저것 다 필요없이 단지 교회에서 목사가 시킨 대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면 그것이 곧 천국 가는 길인 것으로 착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과 반대되는 모습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크게 좁은 문과 넓은 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보다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편하고 좋은 것을 원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은 편하고 좋은 것을 일부러 거부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불교식으로 고행을 말하는 것이 좁은 문이 아닙니다. 좁은 문이란 세상과 다른 사고방식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 즉 예수님을 진실로 아는 자와 모르면서도 아는 척 하는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서 세상과 다른 사고방식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진실로 아는 자는 자기의 욕심을 버리고 주님의 뜻에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좁은 문입니다.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그런데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을 넓은 문으로 바꾸어서 다가오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을 거짓 선지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한 것을 자랑하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불법이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다시 말해서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대로 남을 그 은혜로 대하는 것을 주님의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권능을 행하고, 병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어떤 표적을 주님의 은혜로 바꾸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거짓선지자입니다. 좁은 길을 말하지 않고 넓은 길을 말하는 것은 모두가 불법입니다. 이 땅에 대한 우리의 욕심을 버리라고 말하면서도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열심히 구하면 주신다고 하면서 욕심을 조장시킵니다. 이런 모든 것이 불법입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표적입니다. 기도가 응답되고, 병이 낫고, 열심 있는 종교생활이 그들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쁜 열매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제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행한다고 해도 주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은 누가 더 많은 권능을 행하고 누가 더 열심히 봉사했느냐를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사람들을 좁은 문으로 영생의 길로 인도했느냐만 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주의 이름입니다. 인간의 생각이 개입되지 않고, 인간의 욕심이 개입되지 않고 오직 주님의 말씀만을 가르치고 주님만을 보여주는 것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내 이름이 아니고 주님의 이름이라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에는 인간의 의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모습만이 보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에게 다스려지고 있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에 대한 답을 내리고 있는 것이 24절부터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반대로 26절에서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서로 똑같이 집을 짓기는 지었는데 한쪽은 반석 위에 지었고 한쪽은 모래 위에 지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 때 무너짐과 무너지지 아니함의 차이인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이 반석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것은 예수님은 기초만을 중요시하게 여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초만을 중요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기초 위에 세워진 집 전체를 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즉 반석 위에 세워진 집은 튼튼하고 좋은 집으로 보시고, 반면 모래 위에 세워진 집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집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아니하는 참된 신자이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신자라고 구분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해야 할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수훈 전체입니다. 이 산상수훈의 말씀을 행하지 않는 사람의 인생은 마지막때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산상수훈을 말하면서 수없이 강조했던 것이 이것입니다. 절망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뭔가 흐뭇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남보다 뭔가 괜찮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들을 버리기를 요구하는 것이 산상수훈입니다. 따라서 산상수훈을 읽고서 자신에게 대해 절망감을 가졌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본 것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우리에 대해서 그토록 절망감을 가지도록 하십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로마서 5:20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자신의 실체를 알아야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한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자가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살려고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자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이름으로 세상을 사는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 앞에서 우리는 참으로 악하고, 더럽고, 죄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발견한 자는 이런 자신의 더러움을 씻어주시고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더 크고 놀라운 은혜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실패한 나의 모습을 아는 것만큼 은혜는 더 큰 기쁨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서 우리를 절망케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산상수훈은 우리에게 부담을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함을 우리에게 깊이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하신 예수님의 은혜의 말씀인 것입니다. 신자는 이 은혜를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세상일이 잘되더라는 그런 잘못된 은혜가 아니라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의 은혜를 전하는 자가 곧 하나님의 신자인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알기 때문에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은혜를 보고 있는 자는 이 땅의 것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산상수훈 앞에서 자신을 의로 삼지 않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깊이 알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는 자가 곧 마음이 가난한 자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면서 팔복을 먼저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결국 천국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복임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국은 세상에서 많은 일을 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만 바라보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땅의 문제 때문에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더러움과 죄 때문에 주님만 바라보는 자입니다.

 

 

 

 

주님만 바라보는 자는 어떤 환난과 유혹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이 고백 속에서 은혜를 바라며 모든 소망을 주님께 두고 사는 것이 기쁨으로 사는 것이고 이런 신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은 하나님 없이도 세상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여, 주여'라고만 하면 천국 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은혜는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만 찾는 해결책으로 전락되어 버렸습니다. 자신의 죄를 모르면서 죄의 용서를 말할 수 없습니다. 산상수훈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누리시기 바랍니다.

 

 

 

 


믿음(마 8:14-17) - 13강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구약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법을 선포함으로서 이스라엘은 모두 하나님의 법 아래서 죄인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과 같은 입장에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왜 자꾸 용서받은 죄를 들먹이고, 끄집어내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하셨으니까 이제 남은 것은 그 용서의 은혜를 누리면 되는데 왜 자꾸 자신이 죄인이라는 굴레에서 떠나지를 못하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언뜻 들을 때는 그럴듯하고 또 그것이 타당할 것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엄청난 오류가 담겨 있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5:20절에서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말씀한 것과 같이 죄가 있는 곳만이 은혜가 넘칩니다. 죄가 더하면 더할수록 은혜는 상대적으로 더욱 넘쳐납니다. 이 말은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크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죄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더욱 누리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의 법 아래서 자신이 얼마나 악한 죄인인가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절망한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구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알지 못하고 용서의 은혜를 누린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선포함으로 그들이 스스로 법 아래서 자신의 의나 행위에 대해서 절망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심정이 산상수훈에 담겨 있는 예수님의 심정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뭔가 행위적으로 경건하고 착한 사람을 만드시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신자라는 증거를 착한 행실을 통해서 증명하려고 합니다. 신자 됨의 증거는 자신의 선택을 포기하고 주님께서 선택하신 길에 순종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믿음은 멀리해 버리고 착한 행위를 가지고 신자라는 증거를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확인해보려는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산상수훈은 절대로 실천법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이 산상수훈을 실천법으로 보고 실천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삶을 살았지만 결국에는 스스로 많은 짐을 지는 결과만 낳았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이 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그대로 이루신다고 하면서 이것을 지키지 않은 자는 그 집이 무너진다고 하셨습니다. 산상수훈에는 주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를 저주 가운데서 놓임 받게 하시고 죽음 속에서 생명으로 건지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한 사랑의 말씀이 산상수훈입니다. 우리는 산상수훈을 읽으면서 두려움을 가짐과 동시에 그 두려움을 덮어버리는 사랑과 은혜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우리 모두가 멸망 받아야 할 존재임을 선언합니다.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법입니다. 죽음의 저주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자신이 저주 안에 있는 존재임을 알 때, 멸망의 구렁텅이를 빠져나올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자신의 착한 행위를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을 간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마음이 가난한 자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곧 천국에 있는 자의 모습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산상수훈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은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에게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 어떠한가를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착한 행위와 양심을 믿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믿을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한 것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사람들의 병을 대신 앓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16절을 보면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라고 말한 것 같이 우리의 연약한 것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는 말의 의미는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를 쫓아내시고, 병을 고치신 사건을 두고 의미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사야의 말을 이루시기 위해서 병을 고치셨다는 의미입니다. 연약하다는 것은 죄의 모습이고, 병은 저주받은 자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병을 고치신 것은 이 땅에 오신 메시야는 우리의 저주와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한다 하면서도 예수님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될 때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인생 주인이 되어야 할 것은 저주의 인생이 생명으로 바꿔지는 것은 오직 주님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는 주님을 찾아오게 됩니다. 주님께 나아와서 자신의 처지를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자신의 처지가 어떻다고 생각합니까?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육신의 처지만을 가지고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자신의 영혼의 처지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 앞에서도 긍휼을 구하지 않고 은혜와 사랑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형편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 8장에는 문둥병자와 백부장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들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을 알고 주님을 바라보는 자의 태도가 어떠함을 보이시고자 하십니다. 1-4절에는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둥병이라는 것은 저주받은 자의 대표적인 모습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나을 수 없는 병입니다. 문둥병자는 예수님께 나와서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애원합니다. 지금 문둥병자는 단지 자신의 육신의 병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둥병 안에서 자신의 처지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즉 육신의 병이 문제가 아니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자신의 영적인 처지가 문둥병자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7:28,29절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무리들이 놀랐다고 말합니다. 결국 이 문둥병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저주받은 상태를 발견할 수 있었고 주님께 나아와서 '주님이 원하시면 자신을 깨끗케 하실 수 있다'고 애원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 앞에 나오는 자의 자세입니다.

 

 

 

 

문둥병자는 자신의 육신의 병을 가지고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문둥병을 통해서 몸만이 문둥병이 아니라 영혼이 문둥병에 걸린, 저주 아래 있는 모습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깨끗케 해주실 것을 구한 것입니다. 이것이 산상수훈을 제대로 들은 자의 모습입니다. 산상수훈 앞에서 문둥병의 상태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오는 자는 오직 주님의 종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백부장 이야기를 통해서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시고 있는데 한마디로 믿음이란 종으로 자처하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듣고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자 백부장은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고 하면서 자기의 밑에도 군사가 있는데 그들도 자기가 시킨 대로 모든 것을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지금 백부장은 자신은 주님의 종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이 시킨 대로합니다. 그러니 자기도 시켜달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통해서 유대인들을 공격합니다(11,12). 유대인들은 자기들 스스로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지키고 하나님 백성이라고 자처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믿음은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믿음이었음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자기 스스로 뭔가 실천해서 의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처지를 알고 하나님께 나아와 은혜를 구하고 주님의 종으로 살기를 소원하는 것이 곧 믿음이며 구원받은 자가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문둥병자는 일반 백성들과 함께 거할 수 없는 더러운 자이고, 백부장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 문둥병자와 이방인을 들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구원은 우리의 행위나 혈통과 전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신 그 예수님을 바르게 아는 자, 그 자만이 오직 천국에 거하는 자가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봤습니까? 자신이 문둥병자임을 고백했습니까? 또한 여러분은 자신과 하나님이 어떤 관계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종으로 살기를 소원하고 있습니까? 나는 주님께서 시키신 대로 움직이겠다는 각오가 있습니까? 이런 사람이 곧 믿음이 있는 신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신자는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신자란 이런 것이다'를 인간의 생각으로, 인간의 기준으로 상상하지 마십시오. 신자는 문둥병자같이 자신의 처지를 깊이 알고 주님께 나오는 자이며, 오직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움직이는 자가 곧 신자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 무엇을 부탁합니까? 육신의 문제를 부탁합니까? 우리가 부탁드릴 것은 문둥병 같은 내 처지입니다.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나의 처지를 주님께 부탁드리고 우리의 모든 인생을 주님 말씀에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제자(마 8:18-27) - 14강


신자 아닌 사람이 신자되는 길은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신자되는 길을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신자되고 싶어서 발버둥을 친다고 해도 우리의 힘으로 신자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과 생각에 따라서 교회에 나온 것을 가지고 이제부터 나는 신자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착각일 뿐입니다. 단지 교회 다니는 것하고 신자로서 부름을 받아서 교회에 나오는 것하고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전자의 경우는 그냥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후자의 경우가 곧 신자인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다닌다고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세상에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신자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교회 다녀서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교회를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들 눈에 보이는 교회라는 울타리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도구가 될 수 없으며, 교회라는 울타리가 거룩한 공간이 되는 것도 아니며,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예배나 기도도 우리를 신자로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자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만 가능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열심히 종교생활을 함으로써 자신이 신자인 것을 증명하려고 하고, 또 소위 믿음이 큰 신자가 되어 보려고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스스로 십자가의 은혜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인간편에서 시작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은혜로 주어진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의 모습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은혜를 아는 증거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모든 공로를 버리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행해지는 자신의 열심 있는 종교생활을 바라보며 스스로 신자라고 자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기도할 수 있고, 은혜 때문에 교회 나올 수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인간의 종교행위를 의로 삼는 죄악을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자로부터 출발하면 안되고 죄인으로부터 출발을 해야 합니다. 죄인으로서 출발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눈에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내가 되고 싶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다니고 싶다면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우리 마음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라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좇는 자가 신자인데 십자가를 좇는다는 것이 단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십자가를 좇고 싶다고 해서 좇아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세상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인간 스스로가 이길 수 없습니다. 결국 나 자신을 이기는 힘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힘, 즉 은혜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대로 신자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된 사람과 제자가 아닌 사람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 본문입니다. 먼저 19절을 보면 스스로 예수님을 좇겠다고 작정하고 나선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제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제자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나온 사람입니다. 결심한 사람답게 주님이 어디로 가든지 주님만 좇겠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우리가 생각할 때 이 사람은 신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래 착하다'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단지 '나는 세상에서 머리 둘 곳도 없다'(20)라는 말씀을 하셨을 뿐입니다. 즉 이 땅에는 예수님이 계실만한 곳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계실 곳은 어디입니까?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가 예수님의 본향입니다. 세상에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뿐입니다. 예수님을 좇는 자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나그네로 사는 것이 제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서기관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기관은 예수님을 좇으면 많은 혜택이 있을 것으로 착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좇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뭔가 혜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 나그네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로보고 세상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나라만을 바라보는 자가 예수님을 좇는 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세상을 나그네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자는 우리의 결단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으로 가능한 것이고, 주님의 부르심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고치시면서 제자 되게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21절과 22절에 나온 얘기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께 부름 받은 제자입니다. 그런데 부친을 장사지내고 가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거절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친을 장례 지내는 것을 금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수님께서 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실 일은 영생을 주는 일, 생명을 주는 일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죽음과 상관없는, 오히려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일으키는 일을 주님께서 하십니다. 따라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 또한 세상과 상관없는 일을 하는 자이며 영생과 생명을 위해서 일하는 자가 곧 제자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영생과 생명을 줄 수 있는 일에 도구로 쓰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 나온 것을 단순히 종교생활, 즉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기 위해서 나왔다면 그것은 단지 예수라는 선생을 좇고자 하는 서기관과 같습니다. 제자와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이 땅에서 오셔서 이루신 영생과 생명의 일에 부름 받았음을 알고 그 도구로 사용되어지기 위해서 나오신다면 그것이 바로 부름 받은 제자의 모습인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주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진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고쳐 가실 것입니다. 본문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믿음이 적다고 책망하시면서 주가 누군가를 알게 하신 것 같이 주님은 우리들의 믿음 적음을 책망하시면서 우리들에게 주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은혜만큼은 거부하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자리에는 우리를 두렵게 하고, 괴롭게 하는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제자들도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도중에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두려워서 떨었습니다. 그리고 주무시는 주님께 달려가서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외쳤습니다. 주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책망하십니다. 제자들의 믿음 적은 모습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주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면 어떤 어려움과 괴로움도 닥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있는데 풍랑이 일어나고 죽을 지경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주님은 평안하시는데 우리는 평안하지 못하고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 적은 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풍랑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풍랑을 잔잔케 하시려면 처음부터 풍랑이 없도록 하시지 무엇 때문에 풍랑이 일게 하시고 그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것입니까? 결국 풍랑을 통해서 제자들의 적은 믿음을 고치시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풍랑을 통해서 주님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27절을 보면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풍랑을 통해서 새로운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처음의 제자들의 생각에는 주님이 누구시냐에는 전혀 관심없이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어떤 풍랑도 없이 평안할 것이라는 기대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풍랑을 통해서 주님이 누구시냐에 관심을 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름 받은 제자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풍랑도 은혜요, 괴로움도 은혜요, 두려움도 은혜입니다. 단 풍랑과 괴로움과 두려움 속에서 주님께 관심을 두고 주님을 발견한 자에게만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다녀서 세상의 것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제자 아닌 자의 모습입니다. 제자는 오직 주님을 얻고자 애쓸 뿐입니다. 주님을 배우기 위해서, 주님을 내 마음에 가득 채우기 위해서 내 손에 있는 것을 버려가는 것이 제자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나그네로 사는 것이고 주님을 좇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런 제자로 고쳐 가시기 위해서 풍랑과 괴로움으로 우리를 빠뜨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서 부르신 신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제자 아닌 자는 어떤 모습입니까? 28절부터 보면 귀신들린 자 얘기가 나옵니다. 귀신들린 자는 예수님이 누군지 알았습니다.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자기를 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괴로움 때문에 주님을 거부하는 것, 괴로움이 담겨 있는 십자가는 싫다는 것, 이것이 바로 제자 아닌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애당초부터 이런 자였습니다. 괴로움 때문에 주님을 거부하는 그런 모습이었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에 우리를 고쳐 가시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주님을 바라보는 것, 비록 지금 풍랑과 어려움 때문에 흔들린다고 해도 주님을 바라보고 싶어하는 것은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고 그것이 제자의 모습임을 감사하기 바랍니다.

 

 

 

 

본문에는 또 하나 제자 아닌 자의 모습이 나옵니다. 귀신이 돼지 떼에 들어가서 돼지 떼가 물에 빠져 몰사하자 그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입니다. 세상의 것 때문에 주님을 거부하는 모습, 이것이 제자 아닌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도우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우리를 제자로 고쳐 가시는 능력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종교생활을 잘해서가 아니라, 구제를 잘하고 선교를 잘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부르신 제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기뻐하고 감사할 때 어떤 풍랑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면서 감사할 수 있고 주님을 좇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권세(마 9:1-8) - 15강


사람들은 세상에 교회가 많고 교인이 많은 것을 가지고 기독교의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교회가 많고 교인이 많은 것을 가지고 기뻐하고 가슴 뿌듯해 하는 것은 종교라는 울타리 안에 존재하는 기독교로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가 하나의 종교 조직으로서 자기의 조직을 강하게 하고, 든든하게 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인원과 재정의 넉넉함을 위하여 모든 힘을 기울이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은 힘이 없으면 무시를 당하게 되어 있고, 힘이 있는 자에게 눌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죄인된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다스리는 것이 사회의 질서입니다. 이런 질서 속에서 사람들은 다스림 받는 것보다는 다스리는 것을 원합니다. 남보다 뒤쳐지는 것을 싫어하고 항상 다른 사람의 우위에 있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가인이 아벨과 함께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만 받으시자 자신이 뭔가 아벨보다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에서 분을 내고 결국 아벨을 죽이게 된 가인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힘을 원하게 되어 있고 그 힘은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재물이 힘이고, 지식이 힘이고, 양심이 힘이고, 권력이 힘이고, 자식이 힘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힘을 자기 마음대로, 원하는 대로 얻지를 못합니다. 힘은 갖고 싶은데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초월적인 존재를 찾게 됩니다. 뭔가 능력이 있는 신을 찾아서 자기의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들이 만들어 낸 것을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심심해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종교에는 인간의 모든 꿈과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신에 의해서 이 땅에서 보살핌을 받으면서 어려움도, 고통도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항상 기쁘고 좋은 날만 있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종교에 의해서 자신이 보호받기를 원하고, 종교에 의해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심에 의해서 신을 섬기게 될 때 신은 비록 다르다 할지라도 섬기는 형태는 같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먼저 신을 섬기는 목적이 같아지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신 앞에서 행동하는 모습이 같아집니다. 물론 의식의 모양이나 방법은 틀리겠지만 그 길은 같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기독교가 하나님께 예배하고, 헌금하고, 헌신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힘을 통해서 자신을 보호하고, 복을 누리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면 불교가 예불하고, 기원하는 모든 것도 부처의 자비하심을 통해서 자신의 모든 일이 잘되어 나가기를 추구하는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런 종교심을 신앙이라고 부추기고, 더 많은 열심을 이끌어 내려고 하는 것도 결국에는 자기의 교회라는 조직을 더 강하게 하고자 하는 욕심에서 나오는 것이고, 이것을 성경은 죄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있다고 해도 그 관심은 모두가 자기 자신을 좋게 해주는 하나님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말하는 것이 자비하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입니다. 물론 그 자비와 사랑도 성경적인 자비와 사랑이 아니라 단지 이 땅에서 교회 나오는 사람들을 무조건 보호해주고, 복을 주고, 죄를 용서해서 죽어서는 천국 보내주는 자비와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을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자신의 신앙을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종교심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신앙인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자기로부터 출발한 종교심은 믿음이라는 것이 자신에게 별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주님으로부터 떠나버립니다. 이것이 스스로 주님을 좇고자 하는 제자아닌자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신앙은 모든 형편과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기를 소원합니다. 일단 세상의 것을 소유하는 것이 힘이 아니고 진짜 힘은 하나님을 아는 것임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이런 자가 자신의 모든 삶속에서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을 발견하고자 힘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발견한 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이고, 하나님 나라에 거하는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이런 신앙을 만들어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그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성공적인 삶을 바뀌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교식으로 고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과 고통이 있었다고 해서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과 고통 속에서 세상의 것이 의미 없다는 것을 알고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은즉 오직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겠다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와 알지 못한 자의 믿음은 정반대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십니다. 그러나 본문은 병자를 고치신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한 자들이 예수님께 어떤 태도를 보였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속으로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참람하다는 것은 신을 모독했다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받았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권리를 침해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바람과 바다도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서기관들에게 죄용서를 받았느니라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 중에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고 묻습니다. 이 말은 둘 중에 쉬운 것을 골라라는 뜻이 아닙니다. 둘 다 어렵다는 것입니다. 죄인에게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이나 전혀 꼼짝도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실려온 사람에게, 그것도 자기의 믿음으로 온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믿음 때문에 오게 된 처지인데 그 사람이 일어나서 걸어가게 되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중풍병자 자신에게 어떤 가능성이 있어서 일어난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죄사함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고, 중풍병자가 일어나 걸어가게 되는 것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중풍병자를 일어나서 걸어가게 한다면 그 분은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도 있다는 것을 믿으라는 얘기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내가 누구냐'를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고 있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권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권세라는 것은 우리가 요구해서, 우리의 정성과 노력을 보시고 그것이 가상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편에서 예수님의 권리로 예수님 마음대로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죄사함도 예수님의 권세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권세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권세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신들의 제사, 십일조, 금식 등 종교 행위가 자신들은 신자되게 하고, 복을 받게 하는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안다는 것은 오직 예수님만 소망한다는 의미입니다. 나머지 모든 것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권세로 우리에게 일하실 분입니다. 바람과 바다도 예수님 앞에서는 순종하는 것 같이 우리의 모든 것도 주님 손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그 권세를 인정하는 것은 결국 주님만으로 만족하고 나머지는 주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걱정, 근심, 낙심들은 모두 예수님의 권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바람과 바다도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알고 믿는다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권세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 있는 그 자체를 가지고 기독교는 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복에 눈을 뜨지 못했습니까? 중풍병자 같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움직이지도 못한 그런 처지에 있던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다면 이것은 놀라운 주님의 권세 안에 내가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오직 예수님입니다. 때문에 쓸데없는 걱정과 염려는 다 버려라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이런 기독교에는 절대로 힘을 구축하기 위하여 신을 찾는 모습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왜 신을 찾습니까? 오늘도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습니까? 그냥 예수님만으로, 예수님만으로 모든 것을 만족한다는 그런 믿음에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권세에 의해서 신자되었고, 예수님의 권세에 의해서 죄사함 받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나에게 소중한 것이 아니고 목적도 아니며 오직 주님 안에서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며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나는 오늘도 제자 편에 서 있는지 바리새인과 서기관 편에 서 있는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전도(마 9:35-38) - 16강


전도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전도를 얼마나 했습니까를 묻기 전에 먼저 전도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란 물음을 먼저 해야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성경의 말씀들을 잘 지키며 산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하신 바를 알고 그 원하신 바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자에게는 자기 생각과 자기 판단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것도 우리가 생각과 판단을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단지 우리 인간에게는 죄악된 본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내 스스로의 생각과 판단에 의해서 움직인다면 그것은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걸쳐 논 인간의 종교놀이에 그쳐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 생각과 자기 판단을 금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철저히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각을 찾아가야 합니다. 말씀이 나타내는 하나님의 생각이 곧 내 생각이 되어야 하고 그 생각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신자입니다. 이것을 순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죄인된 인간의 생각과는 정반대입니다. 왜냐하면 죄인된 인간의 생각은 모두가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움직이고, 세상에서 힘으로 모으는 쪽으로 나아가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언제나 이러한 인간의 생각을 부정하는 쪽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결국 내 생각과 반대되게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갈등 속에서 내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께로 다가서는 것이 신앙이고 주님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따라서 전도를 말할 때도 하나님 편에서 말씀하시는 전도와 인간편에서 말하는 전도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많은 교회들은 수없이 전도행사를 하고 있지만 그 대부분이 인간편에서의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편에서 하는 전도는 인간의 본성인 욕심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비록 하나님을 믿게 한다는, 그리고 구원을 받도록 한다는, 그러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일이다는 이름을 내걸고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악을 쌓아갈 뿐입니다.

 

 

 

 

지금 보여지는 전도는 단지 사람 모으기에 불과합니다. 내 교회 숫자 채우기에 급급해 있습니다. 특히 총동원 전도주일은 교회를 키우지 못해서 발버둥치는 죄의 모습만이 보여질 뿐입니다. 목사는 교회 부흥이라는 자기의 꿈과 소망을 달성시키기 위해서 신자를 이용합니다. 또한 신자는 하나님께 열심 있는 신앙생활은 전도하는 것이고, 한 생명을 구원하는 것은 귀한 일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교회를 채우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바벨탑을 쌓아 가는 심판의 도구가 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두는 하나님을 빙자한 인간의 꿈과 소망을 채우는 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전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신자라면 자기의 뜻대로 세상을 사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이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일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가장 많이 실수하고, 또 가장 많이 조심해야 할 것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하나님은 무조건 환영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이니까, 목사가 하라고 하는 일이니까, 기독교와 연관된 일이니까(물론 진짜 기독교는 아니지만) 이 일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결론 내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에 반대하거나 협조하지 않은 사람은 자연히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요, 신앙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이런 이유로 신자들은 이 일이 성경적인가, 아닌가를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단지 교회에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무조건 하나님의 일로 간주하고 거기에 복종해야 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전도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전도를 위해서 힘쓰는 신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부르셔서 추수를 위해서 보내시는 내용입니다. 먼저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12제자를 부르셨느냐 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쉽게 전도를 위해서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도록 하기 위해서 12제자를 불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런 의문이 있습니다. 12제자를 부르신 것이 단지 우리가 생각하는 전도를 위해서라면 왜 하필 12명이냐는 것입니다. 좀 더 많은 수의 제자를 부르셔서 빠른 시간에 많은 사람을 예수 믿도록 하면 더 효율적일 것인데 무엇 때문에 열 둘이라는 적은 수를 택하셨는가라는 의문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모두가 아무 생각없이 하신 일이 아니라 예수님 편에서의 목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제자를 굳이 열 둘이라는 숫자로 부르신 것도 이유가 있으며, 그 제자를 어딘가에 보내시는 것도 예수님 편에서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마음에 맞는 전도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37절과 38절을 보면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금은 추수할 때인데 추수할 일군이 없으니까 너희가 추수하는 주인, 즉 하나님께 청해서 일군을 보내어 달라고 요청하라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그대로 생각해 보면 이렇습니다. 지금 추수할 일군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일군을 위해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제자들은 일군이 아니라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일군을 달라고 하라 해놓고 그 제자들을 부르셔서 보내십니다. 결국 일군으로 보낼 자들에게 추수할 일군을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청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제자들을 바로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추수할 일군을 위해서 하나님께 청하라는 말씀을 먼저 하십니까? 그 이유는 추수할 일군은, 현재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군이 적은 것에 대한 애타는 마음을 가지고 가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군이 할 일은 추수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개념을 깨뜨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전도를 내가 씨를 뿌려서 내가 거두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내편에서 상대방을 설득하여 교회로 오게 하는 것으로 목적을 삼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앞서 말한 대로 단지 한사람을 교회인 만드는 것이고, 내 교회의 숫자가 한 사람 늘어난 것 외에는 그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전도는 내가 뿌려서 거두는 것이 아닙니다. 뿌리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단지 그 뿌려진 것을 거두는 일에 부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추수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3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10:1절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실 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는 권능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즉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그대로 이어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추수할 일군의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다시 주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다고 합니다. 왜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까? 8:17을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 복음, 즉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후에 곧 병자를 고치신 일을 설명하기 위해서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은 우리에게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그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선포하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 앞에서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입니다. 이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병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질병에 붙들린 자, 즉 저주에 붙들린 자이지만 예수님의 긍휼 하심을 입어서 구원받았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병고치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셔서 예수님과 똑같이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게 하는 것은 제자들을 통해서 세상은 저주 아래 있고, 자신의 선함과 양심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죄인'이라는 것을 산상수훈을 통해서 알게 함으로, 결국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요, 죄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 누구의 긍휼도 사랑도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그들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이라고 하십니다(36절). 자신의 죄인 됨을 모르고, 예수님의 사랑도, 긍휼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던 그들은 목자없이 유리하는 그런 신세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 스스로는 자신을 그렇게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들은 분명히 하나님이라는 목자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목자는 자기들의 전통과 생각에 의해서 만들어진 목자였지 참된 목자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 여러분은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자신이 목자 없이 유리하는 양의 모습이 아닌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이스라엘과 같이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이제 더 이상 죄를 용서받는 긍휼과 사랑보다는 세상 것을 누리고 복을 받는 사랑 아닌 사랑을 원하는 그런 내가 아닌지를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자없이 유리하는 양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참된 목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양을 위해서 대신 희생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아는 양은, 자신이 목자없이 유리하는 양인 것을 발견한 양은 이 참된 목자를 따를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이 할 일은 '너희들은 목자없이 유리하는 양'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신앙이 있고,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고, 말씀에 순종한다고 떠들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참된 목자를 따라가는 것이 아님을 산상수훈을 통해서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에게는 목자가 없다. 너희는 유리하는 양이다. 여기 너희를 대신해 희생하신 참된 목자가 있다. 긍휼과 자비로서 오신 목자가 있다. 이 목자를 따라 오라'고 선포하는 것이 제자들의 할 일이고 이것이 곧 전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습니다. 5절, 6절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무데나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십니다. 사람을 모으기 위해서라면 사람이 있는 곳은 다 가야 마땅한데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라는 말씀을 하십니까? 예수님은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잃어버린 양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참된 목자를 원하는 자를 찾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자라고 하고, 예수님을 원한다고 하면서도 긍휼과 사랑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의 죄인된 모습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인을 살리는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은 사람들에게 외면 당합니다. 그러나 반면에 우리에게 세상의 복아닌 복을 주는 거짓 목자의 사랑에 목말라 하고 있는 것이 지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서 피 흘리신 그 이유를 모릅니다. 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을 무시해 버립니다.

 

 

 

 

예수님은 목자없이 유리하는 잃어버린 양을 찾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잃어버린 양의 모습으로 주님께 다가가야 합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지금까지 주님의 긍휼과 사랑보다는 세상을 더 원했던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고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죄 때문에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꼭 필요하다고 간절해 하는 사람에게만 목자입니다.

 

 

 

 

보냄 받은 제자들의 할 일은 천국 복음을 그대로 전파해서 잃은 양을 찾는 것입니다. 설득하는 것도 아니요, 예수님을 믿겠다고 작정하고 교회 나오는 사람을 모으는 것도 아닙니다. 철저하게 천국 복음, 즉 모두가 죄 아래 있음을 선포하고 복음은 우리를 세상에서 잘 살게 하고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 떠나도록 하고, 많은 어려움이 있게 한다는 것을 선포해서 예수님을 목자로 영접하면 그 자가 곧 잃어버린 양이고 거절할 때 그 자는 구원과 상관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14절).

 

 

 

 

전도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제공해서 교회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파함으로 '당신은 죄인이고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아니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전도는 세상은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에 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15절). 세상에 두고 있는 희망을 끊도록 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이 아니고, 교회 부흥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 만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곧 전도입니다. 예수님은 그 말을 듣지 않거든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합니다. 미련둘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열 둘인 것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 땅에 보내신 예수라는 참된 목자를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열 두 제자를 보내시는 일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이고, 참된 복음 아래서 자신이 잃어버린 양임을 알고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를 기대하며 나오는 자를 하나님은 새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여기시는 것입니다.

 

 

 

 


합당치 않음(마 10:34-39) - 17강


성경은 신자에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기뻐하신 바를 가르치며 신자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기의 생각과 상식을 가지고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쉽사리 결론을 내려서는 안됩니다. 오직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았을 때는 자신의 생각과 상식은 버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틀에 갇혀서 활동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인간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활동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의 틀에 갇혀서 열심히 사는 것을 믿음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지난 시간에 말한 대로 전도를 할 때도 열심히 수고하고 노력해서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오는 것을 전도이고 믿음이며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 자기의 생각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에 갇혀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전도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에 갇혀있기 때문에 성경을 볼 때도 그 내용이 자기의 생각을 옹호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성경을 볼 때는 자기의 생각과 전통과 상식을 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봐야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도는 사람을 설득하거나, 또 이웃에게 호의를 베풀어 교회에 호감을 갖게 함으로써 사람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교회만 나오게 하면 구원받게 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효과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을 교회로 데려왔다고 할 때 그 신자는 교회에서 신앙 있고, 열심 있는 일군으로 추앙 받게 되고, 또 자기가 전도해서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가 저 사람을 구원시켰다는 가슴뿌듯한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도의 주체가 성령이라는 것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전도의 주체가 성령이고 우리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때 나 자신의 노력과 수고는 전도의 결과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나에게 알게 하신 것을 전달만 했을 뿐이지 나머지 모든 일은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전도는 사람을 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도를 전하는 것이 전도인데 그 도라는 것은 십자가 아래 모두가 죄인이라는 도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신자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도 세상에서 '먹고사는 일에는 자기 힘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예수님은 나중에 내가 죽으면 천국이나 보내주고 지금 세상 살아갈 때 내가 하는 일이나 도와주는 예수님'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선한 목자라고 합니다.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목자가 우리가 따라가야 할 분입니다. 그러나 그 목자는 아무나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아는 자만 따라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목자는 자기의 음성을 아는 양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양이 곧 잃어버린 양이라고 지난 시간에 말했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목자가 없이 유리하던 처지였음을 아는 자가 곧 잃어버린 양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전도라고 하는 것은 천국복음을 그대로 전파해서 잃은 양을 찾는 것입니다. 그 잃은 양을 찾을 때 천국에서 하나님의 기쁨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하나가 하나님께는 더 큰 기쁨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발생합니다. 그것은 천국복음을 전파해서 잃은 양을 찾는다는 것이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 아닙니다. 찾는 것은 성령이 하실 것이고 우리는 누구에게든지 바른 복음만 전하면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채찍과 공격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을 때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에게로부터 공격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동일한 복음입니다. 사람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죄인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이 하신 대로 복음을 전할 때 겪게되는 결과는 예수님이 가신 길 그대로일 것입니다. 다른 복음을 복음이라고 여기고 있는 자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34절)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가정이 화평해지고 모든 갈등도 사라지며 그야말로 행복한 가정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불화 하게 하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36절)는 심각한 말씀까지 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전도의 어렵고 힘든 모습이다. 그러면 전도를 왜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것으로 말씀하고 있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전도는 내가 수고하고 노력해서 상대방이 자신에게 대해서 호감을 갖도록 하여 교회로 오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전도를 이렇게 한다면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게 되고 그런 가운데서 할 수 있는 말은 '예수 믿으면 천국갑니다' '예수 믿으면 복받습니다' '예수 믿으면 병이 낫습니다' '예수 믿으면 집안이 평안해집니다' 등의 말을 하게 됩니다. 이런 전도에는 불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원하고 있고 갖고 싶어하는 것을 예수라는 이름으로 제공하는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듣고도 사람들이 예수 믿기를 거부하는 것은 결국 그들이 자기의 힘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이라는 것은 보이지도 않고 죽은 후의 문제이기 때문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고, 세상에서 주어지는 것은 자기가 열심히 노력하고 일하면 얻어질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구태여 예수를 붙들고 통사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전도는 그러한 것이 곧 죄이고 그 죄 때문에 십자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충돌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고 있는 것을 틀린 것이고 죄라고 말할 때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찾으시는 잃어버린 양은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는 내편에서 적극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어떤 자리에서건 자신의 신앙을 그대로 드러내면 되는 것입니다. 교회 일을 한답시고 가정 일을 소홀히 함으로 겪게되는 불화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화가 아닙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교회이든 내가 있는 자리에서 열심히 성실하게 살면서 주님만 내 목자로 여기고 말씀대로만 살고자하는 신앙에서 오게되는 불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위 환경과 타협하지 않을 때 오게 되는 어려움을 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본문 38절, 39절을 보면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살 때 주님 때문에 져야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져야 했던 그 이유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자가 져야 할 십자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살아가는 사고방식과 다르게 살 때, 세상은 옳다고 여기는 것을 틀린 것이라고 말할 때, 세상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여기는 것을 마귀의 일이라고 말할 때 거기에는 필연코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충돌이 두려워서 피하고자 할 때 그것은 자기 목숨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이고 결국 주님 앞에서 합당치 않은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도는 어렵고 힘든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주님께만 모든 가치를 두고 있는 신앙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는 그냥 자신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신앙고백 그 자체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전도를 상대방과의 다툼을 피하면서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혜로운 것으로 말합니다. 물론 일부러 다투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과 복음이 아닌 것이 만났을 때 필연코 발생하게 되는 다툼까지도 상대방의 마음을 좋게 하겠다는 의도로 피하려고 하거나 다툼과 불화라는 어려움이 싫어서 피한다면 그것은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합당치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합니다. 흔히 이 말씀을 상대방과 부딪힐만한 부분은 피하면서 전도하라는 말씀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신자는 어느 자리에서건, 어떤 상황에서건 자신의 신앙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양이 이리가운데 있는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리로 인해서 찢기고 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7-18절의 말씀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와 순결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뱀의 지혜라는 것은 숨고 도망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뱀을 싫어합니다. 뱀을 보면 돌을 던지거나 공격을 합니다. 그럼에도 뱀은 자기의 모습을 감추거나 바꾸지를 않습니다. 이것을 뱀의 지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신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기 자리에서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어느 것이 심판의 자리고 어느 것이 생명을 얻는 자리인가를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신자가 어떤 핍박과 공격을 두려워해서 전해야 할 복음을 바꿔버리고, 드러내야 할 신앙의 모습을 포기해 버린다면 결국 천국과 지옥의 자리가 구분이 안되는 것입니다.

 

 

 

 

32절, 33절을 보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하십니다.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복음을 바꾸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니 전도가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고 불화 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전도하시다가 받은 그대로 신자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24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 내 말이 아니라 위에 계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전도입니다. 그래서 20절에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사는 자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살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일부러 핍박으로 어려움으로 몰아넣고자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단지 어떤 경우에서라도 외부의 힘에 의해서 자신의 신앙을 굽히거나 포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령 내가 미움을 받게될지언정 내가 깨달은 복음이 나로부터 바뀌어져 나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각오와 신앙으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신자되기를 바랍니다.

 

 

 

 


인기 없는 예수(마 11:15-24) - 18강


오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날입니다. 교회는 이 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을 하였다고 해서 종려주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수많은 교회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사건을 머리에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해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이런 모습을 보면 교회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만 따르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무슨 소리냐 예수님을 믿는 교회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실 지 모릅니다. 물론 교회는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을 환영하며 '호산나'하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열렬하게 주님을 환영했던 유대인들과 같은 모습에 불과합니다.

 

 

 

 

당시 예수님을 환영했던 무리들은 나중에는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라고 외쳤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인기가 있으시던 분이 한순간에 그 인기가 하락돼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이 바라고 원하는 것들을 주지를 못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열렬히 환영할 만큼 인기가 있으셨던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고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실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은 눈에서 사라지고 힘없이 붙잡혀서 온갖 욕을 다 당하시고 수치를 당하여서 말 한마디 못하시는 그런 힘없는 예수만이 그들 눈앞에 비춰졌습니다. 순간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에게 어떤 희망도 주지 못하는 예수를 추종하는 어리석음을 행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가지고 싶은 것도 많고 누리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이것을 제공해주는 존재라면 그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고 쫓아가겠다는 기세입니다. 그런 신이라면 두손을 들고 환영하겠다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예수님은 당연히 이적을 베풀면서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복을 주시는 예수님이지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우리들에게도 이 땅의 모든 것에 미련을 두지 말 것을 요구하시는 예수님은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참지 못하는 것은 땅에 대한 욕심을 버리라는 요구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흘리신 피의 공로로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주신다는 예수님은 사람들이 환영합니다. 이것 만이라면 얼마든지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피의 공로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천국이 우리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이 가신 길,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세상의 영광과 재물을 원하지 않고 세상에 대한 모든 소망을 포기하고 오직 하늘만을 바라고 살 것을 요구하는 그 예수님은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서 예수님은 인기 없는 분입니다. 오로지 인기 있는 예수는 죄를 용서해주는 예수, 천국 보내주는 예수, 병낫게 하는 예수, 복주는 예수에 불과합니다. 교회 내에서도 진짜 예수님은 전혀 인기가 없습니다. 지금 많은 교회는 마치 닮은꼴의 복제판의 예수를 하나 만들어서 섬기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보내신 그 예수님을 찾아서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다른 예수이고, 결코 구원과 상관없는 예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그와 같은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15절을 보면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씀은 귀 없는 자는 들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귀 있는 자는 누구이고 귀 없는 자는 누구입니까? 귀 있는 자란 예수님을 바로 볼 줄 알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자란 뜻입니다. 결국 귀 없는 자라는 것은 자기의 생각으로 예수님을 찾기 때문에 예수를 바로 보지 못하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15절의 말씀은 귀 있는 자만 들으라는 의도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이 세대가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르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만 관심을 두고 사는 자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이 세대의 모습입니다. 이 세대는 자기에게 관심을 두고 사는 세대이지 결코 예수님께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세대가 아닙니다. 그것을 무엇으로 비유하시는가 하면 장터에서 피리 불고 애곡하는 것으로 비유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예수님이 처음으로 하신 비유가 아닙니다. 17절 끝에 보면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니하였다 함과 같다는 말은 이미 있었던 말을 예수님이 인용하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17절의 비유는 누가 먼저 했던 비유입니까? 바리새인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자기 같은 백성들을 향해서 자신들은 지금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 할려고 애를 쓰는 데 당신들은 왜 우리를 따라서 함께 열심을 내지 않느냐는 것을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것으로 비유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그런 말을 하는 바리새인들이 지금 예수님이 이적과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줘도 전혀 따르지 않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대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대입니다. 모든 관심이 온통 자기에게로 쏠려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모습입니다. 세상이 기대하는 예수님은 영광스런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자기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힘있는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에 오신 예수님이 아니고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예수님은 이 세대에서는 인기가 없습니다. 인기 있는 예수님은 번쩍 번쩍하게 영광스런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인 것입니다. 이 세대가 이런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천하게 여기고 무시당하는 그런 자들 속에 오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1:8절에서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대가 악한 이유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대가 들을 귀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 지혜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져야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때문에 말씀을 깨닫는다는 것은 학벌과도 상관없고, 지식과도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 어떤 무식한 사람도 예수님과 같은 사고방식에 서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자가 바로들을 귀가 있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웅장한 예배당에 계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값비싼 파이프 오르간에 계시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생각으로 세상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세대는 무엇을 원하는 세대이기에 예수님을 알아보지를 못하는 것입니까? 21-23절을 보면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세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당시 예수님이 많은 권능을 보이신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이 소돔과 고모라, 두로와 시돈 보다 더 악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뭐나면 그들의 모든 소망은 땅에서 보다 더 잘사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바로 알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보이신 권능이 무엇입니까?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소경, 앉은뱅이, 문둥병자를 고치신 일들입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25절). 자기의 지혜와 자기의 슬기를 믿는자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재주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보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이 찾는 예수는 단지 자기를 도와주는 예수일 뿐입니다. 이들에게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낮고 천한 자를 찾아오신 예수님,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찾고 계시는 예수님은 예수님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 때문에 들을 귀가 없고, 볼 눈이 없기 때문에 귀머거리요 소경된 자일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딴에는 모든 것을 보는 자요, 모든 것을 듣는 자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세대는 예수님이 인기가 없는 세대입니다. 옛날의 그 세대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예수님은 결코 낮고 천한 자를 찾아오신 예수님이 아니라 돈을 갖고 오신 예수님이고, 병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일 뿐입니다.

 

 

 

 

이 악한 세대에서 예수님을 만날 자는 어린아이 같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어린아이 같은 자라는 것은 어린아이 같이 순수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 욕심도 없이 단지 엄마, 아빠와 함께 하는 것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악한 세대에서 나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세상을 원하면서 살았던 자인데 그런 나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신 것을 감사하는 그 모습을 말합니다. 내가 세상의 것은 가진 것이 없고, 지식도 없어도 예수님을 알 수 있는 눈을 뜨게 하시고, 마지막 심판때를 알게 하신 그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그 마음을 어린아이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마음에 함께 하십니다.

 

 

 

 

신자가 교회에 나올 때는 다른 것은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이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만 나오면 됩니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이 좋아서 교회 나왔을 뿐이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교회 나왔을 뿐인데 하나님은 그것을 아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들이 주님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무거운 짐이 있다고 해도 수고하는 삶을 산다고 해도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내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 내가 주님을 알 수 있는 눈을 뜨게 된 것, 내가 심판을 알고 천국만 바라보는 신자가 된 것으로만 기뻐할 때 그 사람은 주님 안에서 평화와 쉼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자체가 이미 짐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큰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위로 받지 못하는 것을 주님 안에서는 위로 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지금 보다 더 많은 것을 차지하고, 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세상에서 신자는 이런 저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남들은 차지하고, 누리는 것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예수님을 향하여 귀가 열리고 눈이 뜨였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신자에게만 주님은 위로의 주님이 되시고 쉼을 주시는 주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억울해하지 말고 십자가의 예수님이 인기 없는 이 악한 세대에서 여러분에게만큼은 십자가의 예수님이 인기 있는 그런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안식일(마 12:1-13) - 19강


옛날부터 사람들은 신성한 것과 신성하지 못한 것, 즉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못한 것을 구별하여 왔습니다. 어떤 특정한 장소, 즉 조상신을 모시는 장소나 신에게 제사드리는 곳, 또는 신과 연관된 어떤 기물을 보관하는 곳 등을 신성한 곳으로 규정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특정한 사람도 거룩한 존재로 여겨왔습니다. 이 거룩한 존재는 신과 연관이 있으며 인간과 신의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특정한 시간 역시 거룩한 시간으로 여겼습니다. 이 특정한 시간이란 신에게 제사드리는 시간을 말합니다. 그 시간만큼은 신과 교통하고 있는 순간이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믿은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종교심이었고 그 종교심이 세상에서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못한 것을 구별하여 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만든 모든 종교에서는 공통적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는 어떻습니까? 지금 기독교의 모습을 보면 이것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하는 장소인 예배당을 거룩하다, 신성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예배당에 비치되어 있는 기물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쓰여지는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만지면 안된다거나 하면서 기물을 신성시할려는 의도나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를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서 대리자의 역할을 하는 거룩한 인물로 여긴다거나 특정한 날, 즉 주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이기 때문에 거룩한 날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옛날 바리새인들에서도 보여졌던 종교심입니다. 바리새인들도 특정한 건물인 성전을 거룩시 했고, 그 성전에서 쓰여졌던 기물을 거룩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라는 특정한 날을 거룩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부정하셨고 결국 이런 문제로 인해서 바리새인과 예수님을 첨예한 대립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성전이라고 하시면서 바리새인들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거룩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을 공격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의 주인은 인자라고 하시면서 그들이 안식일을 거룩한 날로 여기고 여러 가지 규례를 스스로 정해서 소위 안식일을 지키고자 하는 것도 공격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리새인들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바리새인의 모습은 우리들에게서 얼마든지 보여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대신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면서 거룩한 곳으로 여기는 것이나 목사를 제사장이라고 부르면서 거룩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나, 신약에는 안식일 대신 주일이 주어졌다고 하면서 주일을 거룩한 날로 여기는 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문제들 가운데서 오늘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안식일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안식일 문제는 지금도 소위 주일성수라고 하면서 주일이라는 특정한 날을 지킬 것을 교회가 요구하고 있음으로서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고 있는 바리새인을 공격하셨다면 지금도 이 말씀을 통해서 주일을 지킨다고 하는 교회인을 공격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공격하신 것은 특정한 날이 거룩한 것이 아님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이지 '안식일이 거룩하지 않고 주일이 거룩하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안식일 말고 주일을 지켜라'는 의도로 안식일을 지키는 바리새인을 공격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봐도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란 무엇이다를 말씀하고 있지 안식일은 일주일 중 첫날이다 아니면 마지막날이다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안식일이 주일로 변경되었다는 근거를 제시할 구절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날에 그토록 집착을 하는 것은 어느 한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해서 그 날을 지킴으로 자신들도 거룩해지고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일성수라는 것도 이런 개념에서 나온 말입니다. 주일을 지킴으로 신자다워지고,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을 주일답게 더 잘 지키기 위해서 성경에 없는 여러 규례를 만들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세상은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못한 것으로 구별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지막때 거룩한 것은 남기시고 거룩하지 못한 것은 모두 심판해 버리실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못한 것이 무엇이고, 오늘 우리들이 과연 거룩한가 거룩하지 못한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안식일이라는, 주일이라는 특정한 날을 지킴으로 우리가 거룩해질 수 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도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먹은 것을 안식일을 범한 것으로 말합니다. 즉 이삭을 잘라먹은 것을 안식일에 일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날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구약의 모든 규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모든 규례의 의미가 완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구약의 규례의 의미가 완성되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십자가 이후에는 어떤 규례라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가 주일을 안식일이라고 하면서 특정한 날에 대한 규례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무시하는 처사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이후에는 안식일이라는 특정한 날은 없습니다. 따라서 주일이라는 특정한 날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어느 한 날을 통해서 거룩해진다거나, 복을 얻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십자가와 연관이 있는 것이지 결코 특정한 날과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안식일이 어떤 날이냐라고 묻지 말고, 안식일이 누구냐라고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은 시간이 아니라 인격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을 감사하기 위해서 자기 일을 쉬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일해서 얻어진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셔서 얻어진 구원을 감사하면서 예배드리기 위해서 우리의 일을 쉬는 것입니다. 즉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가리켜서 한 말이지 우리가 안식일에 일을 안했다는 것으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을 해도 다 더러운 것입니다. 더럽지 않고 거룩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만이 거룩합니다. 심지어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하는 예배 행위도 모두 더러운 것입니다.

 

 

 

 

단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자신의 더러움을 고백하면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피가 나를 살린다는 것을 알 때 주님의 거룩한 피로 인해서 내가 거룩한 존재로 여김 받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피를 말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예배 행위 때문에 주일을 지켰다고 생각하거나, 헌금 때문에 자기에게 복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님의 피를 말은 하면서도 결국 피를 모독한 것이 되기 때문에 그 예배 행위는 더러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주일에 예배 드렸다고 주일 지킨 것이 아닙니다. 7절에 보면 예수님은 주일을 지킬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고 하십니다. 제사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원하십니다. 즉 하나님께 나와서 내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임을 알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그 마음,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그 마음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날마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는 더러운 존재이고, 부정한 존재인데 이런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리셨다는 것을 알고 그 피안에서만 나는 거룩한 존재로 여김 받을 수 있음을 알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이런 마음으로 살 때 그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를 구하는 인간을 거룩한 인간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비를 원하는 그 마음에만 자리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주일성수라는 것은 유대교의 모습을 그대로 이어 받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어떤 문제를 가지고 공박을 하였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오늘날에도 오늘이 주일인데 이런것하면 되느냐는 말을 많이 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장사를 안하고 일을 안하는 것으로 주일을 지켰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바리새인들을 공격하셨다면 오늘 예수님은 주일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 여러분들을 공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특정한 날에 예배드리고 일을 안했다고 해서 거룩해지거나 복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날마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사느냐를 보시는 것입니다. 자비를 구한다는 것은 자기가 더러운 존재임을 안다는 것입니다. 내가 더러운 존재이기 때문에 나는 뭘해도 그것은 더러운 것이고, 자랑스러운 것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은 그 자를 거룩한 자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특정한 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안에서 산다면 그것이 곧 안식일이고 날마다 주일을 지키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안에 있지도 않으면서, 날마다 자기를 위해 살고 몸을 위해서 모든 힘을 쏟고 있으면서 한 날, 즉 주일에 예배당에 와서 예배드리고 헌금하는 것으로 신자되고 복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무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거룩함과 복은 십자가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날도 신자가 십자가 안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날마다 세상에 대한 자기는 죽고 의에 대한 자로서 사는 것이 곧 거룩이며 그것이 곧 복입니다.

 

 

 

 

12절을 보면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안식일에는 선한 일, 즉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적인 일을 하는 것이 옳다는 말이 아닙니다. 선한 일은 예수님이 하신 생명을 찾는 일 외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예수님 안에서 살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구원을 보임으로 또 다른 하나님의 백성을 찾아가는 삶이 곧 신자가 할 일이고 그것이 안식일에 하는 선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예배 그 자체가 아닙니다. 헌금도 아닙니다. 자신이 더러운 존재임을 알고 하나님의 자비를 원하는 그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 사람을 거룩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자리할 공간이 없습니다. 자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복을 원하는 마음이 가득차 있고, 자기몸을 위해서 오히려 십자가를 멀리하는 모습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알고 자비를 원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이 여러분들 마음에 함께 하시고 그 예수님과 더불어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곧 안식일입니다.

 

 

 

 


예수님의 가족(마 12:46-50) - 20강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각기 자기가 자라난 환경이나 문화에 따라서 생각과 살아가는 방식이 전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한국에서는 당연한 일들이 다른 나라에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일로 여겨지는 것이 많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각기 자기 나라의 문화와 환경 때문에 다른 점은 많다고 할지라도,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똑같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삶의 목적입니다. 자기가 태어나서 자라가는 그 삶의 장소에서 좀더 편안하고 부유하게, 좀더 좋은 환경을 가지고 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입니다. 결국 사람이 아무리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고, 서로 뭔가 통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세상에서 잘살아보자는 목적아래서는 모든 인간이 동일한 것입니다.
인간의 삶의 목적이 같은 이유는, 모든 인간이 다같이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죄 아래서 태어난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하고 자기의 힘으로 세상에서 잘되겠다는 것은 인간의 공통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 세상에 다른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셨습니다. 그 나라는 죄인된 인간의 삶의 목적과 다른 목적을 가지고 건설된 나라입니다. 따라서 그 나라의 백성들도 세상과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백성은 다른 곳에서 투입된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다른 사람과 동일한 목적으로 살아가던 사람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방향을 돌이킨 사람이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자가 세상 사람과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뭔가 외적으로 특별히 달라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을 모를 때와 하나님을 알고 난 후의 삶의 목적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전에는 세상에서 크게 되는 것이 목적이고 그것을 소원하였지만 이제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천국을 소원으로 삼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애당초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고, 자기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보겠다는 사람들만 모인 이 땅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가 발생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자기의 힘과 자기의 가능성과 자기의 소망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맡기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만 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인간이 자기 스스로 세상에 대한 소망을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은데 대한 아쉬움을 가지고 사는 것인데 자기 스스로 그 소망을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가능한 일이 가능한 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면 그것은 분명히 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땅에 대한 소망을 버리고 하늘에 소망을 삼고 산다는 것은 분명히 기적입니다. 하나님은 그 기적을 이 땅에 이루시기 위해서 구세주를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구세주를 보내셨다는 것은 세상에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세상에 심판이 없다면 구세주가 필요 없습니다. 죄인으로 살든 의인으로 살든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그러나 심판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구세주를 미리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세상을 심판하십니까? 세상에 악해서 심판을 해야 하신다면 악한 자만 심판하시면 되지 무엇 때문에 그 심판 속에 우리가 보기에 선한 사람까지도 포함을 시켜놓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서로 다른 선악의 생각에서 나온 차이점입니다. 인간의 선악은 착하게 살고 도덕적으로 좋은 일 하면서 사는 것을 말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선악은 그런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손을 벗어나서 자기의 힘으로 세상을 살려고 하고, 하나님의 뜻을 자기의 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뜻을 이루는 것을 자기의 일로 삼고 있는 것을 악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악에서 제외될 자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이유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심판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사람이 눈앞에서 죽는 것을 보면서도 죽음을 지금 나와는 상관없이 먼 나중의 일로 여겨버리면서 지금 현재 내 하고 싶은 일에만 모든 힘을 다 쏟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죽음의 세상에 구세주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세주를 붙드는 자를 심판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구세주만으로 만족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항상 세상에 대해서 아쉬워하면서, 부족해 하면서 살아갑니다.

 

 

 

 

신자는 기적을 입은 자입니다.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자가 하나님을 알게 된 기적을 입은 자입니다. 18절에도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아무나 심판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자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나 알게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땅에 구세주로 오실 때 무시당하고 버림당하는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세상의 누구나 환영할만한 번쩍이는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면 사람들 누구나 예수를 환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성령을 받은 자인가를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안목으로 보면 무시당하고, 버림당할만한 모습, 즉 목수의 아들로, 나사렛 마을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겉을 보고 거부하고 무시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마지막 날에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뭔가 달라서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돈이 더 필요하고, 자식이 공부 잘하는 것이 더 필요하고, 높은 지위가 더 필요한 세상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세상을 이사야의 말을 통해서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로 비유하십니다.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라는 것은 예수님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존재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자기들 힘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지만 나중에 심판을 견딜 수 있는지 두고 보겠다는 의미의 말씀인 것입니다. 철저하게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는 사람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고쳐주시자 그것을 사탄의 힘을 입어서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철저하게 예수님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출신성분이 볼품없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은 구원받을만한 자격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유대인, 바리새인이라는 출신성분이 자기들을 얼마든지 구원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원이란 그런 것이 아님을 가르치기 위해서 눈먼 자 벙어리된 자를 고쳐주신 것입니다. 즉 외부의 힘이 아니면 도저히 고침 받을 수 없는 병자가 나은 것은 구원이란 인간의 힘이 아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자기들에게 구원을 받을만한 의가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볼품없는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핍박하고 무시하고 거절하는 그것이 바로 표적이 되어서 세상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세주를 무시하고, 거부하고, 핍박한 그것이 세상 악의 증거인 것입니다. 그래서 표적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뭔가 이적으로 눈으로 직접 보게 되면 하나님을 더 잘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은 이적을 그 누구보다도 많이 체험한 민족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믿지를 못했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나서 금방 마실 물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존재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십자가를 생각하며 주님이 나의 구세주이심을 고백하고 감사하면서도 세상의 어떤 문제 앞에서는 금방 십자가를 잊어버리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그들과 틀리지 않은데 우리가 비록 지금 홍해의 사건을 체험한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를 구원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능력은 오직 주님의 보혈에 있습니다. 어떤 체험이나 이적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의 피를 믿는 그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할 뿐입니다.

 

 

 

 

주님의 피를 믿는 믿음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만족을 줍니다. 세상의 것을 소유하지 못하고, 많은 것이 부족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피에 대한 믿음 때문에 모든 것에 기뻐하고 산다면 그자가 바로 예수님의 가족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십니다. 영원토록 예수님과 함께 거할 가족은 세상의 혈통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자만이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예수님의 가족을 이 땅에서는 교회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서로 뜻이 통하고 말이 통합니다.

 

 

 

 

왜냐하면 주님 안에서 서로의 생각과 사고방식이 주님의 것으로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만 바라보고 사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자기의 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거부하고 무시하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게 주님만 바라보고 사는 신자들이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바로 눈먼자요 벙어리 된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은혜를 주시지 않는 한 우리는 주님을 볼 수 없고,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의지합시다. 땅의 것이 우리의 구세주가 아님을 기억합시다.

 

 

 

 

세상은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향한 자기들의 소망과 일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서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이 우리들 마음에서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만 원하고 나오는 자를 가족으로 여기십니다. 누구든지, 세상에서 아무리 무시당하고 비천한 자라고 할지라도 그 자가 예수님만 원하는 삶을 산다면 바로 예수님의 가족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바로 그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를 알고 그분을 영접한 자들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 백성으로서 하루하루를 주님만 바라보며 예수님의 가족으로 사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천국의 아들(마 13:1-12) - 21강


지난 주일에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세상에서 남보다 크게 되기 위해서 힘쓰며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원리입니다. 남들보다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소유함으로 자기를 과시하는 것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요구하시는 세상을 살아가는 원리는 전혀 반대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자를 이 땅에 남겨 놓으신 이유는 우리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즉 신자는 세상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떠들고, 십자가를 말하는 사람들이 교회 밖을 나서면 세상에서 보여지고 들려지는 세상 원리에 치우쳐서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원리를 벗어나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도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 모든 흉내를 내고자 힘을 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세상의 것은 썩어질 것이라고 하셨고, 세상의 마지막 때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한 대로 모든 것이 심판을 받을 때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평가받기를 원하고 삽니다. 자식이 잘됐다는 평가, 부자라는 평가, 출세했다는 평가를 받고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자 원합니다. 결국 세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원리로 살지 않고 세상의 원리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결국 심판 속으로 사라져 버릴 세상을 좇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신자가 세상을 하나님의 원리를 따라 산다는 것은 너무 힘들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수도 없이 말씀을 듣고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또 잘 알고 있지만 정작 세상에 발을 딛고 살 때 내가 알고 있는 대로, 내가 생각하고 있는 대로 살 수 있는 만만한 세상이 아님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나는 세상을 하나님의 원리대로 잘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원리를 잘 모르고 있든지 아니면 원리 아닌 것을 원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이기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길 수 없는데 이겨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길 수 없으나 이길 수 있는 분이 나에게 등장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은 모두가 천국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3장에서 말하는 천국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미래의 천국이 아니라 지금 현재에 누릴 수 있는 천국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천국을 말하면 무조건 좋은 곳으로만 상상을 합니다. 즉 극락적인 개념으로만 천국을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고생했던 것, 고통 당하며 살고, 여러 가지 겪었던 어려움들, 그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편안함과 좋은 것만이 주어지는 곳을 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미래에 주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은 고통과 고생과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 이 땅에 와 있는 천국은 그렇지 못합니다.

 

 

 

 

사람들에게 이 땅에서 천국을 찾아보라고 하면 찾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천국 하면, 좋은 환경에 편안하게 사는 것만을 연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천국을 보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천국입니다. 천국의 특징은 인간들의 상식과, 상상력 가지고는 찾을 수 없도록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13절의 말씀과 같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는 것이 천국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을 수 있는 것이 천국입니다. 인간의 마음대로, 인간의 힘으로 찾고 들어갈 수 없는 곳이 천국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비유를 하시고는 그 비유에 대한 해석을 하시는 말씀입니다. 씨뿌리는 비유에 대해서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유명한 비유입니다. 그러나 그 해석을 잘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비유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어떤 농부가 씨를 뿌렸는데 그 씨가 네가지 밭에 떨어졌습니다. 첫 번째 밭은 길가 밭인데 새가 와서 그 씨를 먹어버립니다. 둘째 밭은 돌밭인데 환난이나 핍박 때문에 견디지를 못합니다. 세 번째 밭은 가시떨기 밭인데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서 자라지를 못했다고 합니다. 네 번째 밭이 옥토 밭인데 여기에 뿌려진 씨는 30, 60, 100배의 결실을 맺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신자는 사단을 이기고 환난과 핍박을 이기고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이기고 옥토가 되어서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인간의 힘으로 천국을 들어가자는 잘못된 가르침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유에서 나오는 사단이나 환난, 핍박, 염려, 재물의 유혹들은 사람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대상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이 열심히 하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비유를 보면서 우리가 사단을 이기고 환난과 핍박을 이기고 염려를 이기고 유혹을 이겨야 한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상태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들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다면 그것은 복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고 16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와 있는 천국을 이해하고 천국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복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우리의 지식과 힘으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세상을 이기지 못합니다. 천국도 우리의 힘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모두다 길가에 떨어진 씨이고, 돌밭에 떨어진 씨이고,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옥토에 떨어진 씨가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의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예수님이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있고, 십자가를 알고 있는 것도 내 스스로의 지식이나 의지가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귀를 이기고 환난과 핍박을 이기고 염려와 유혹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 속에 계시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극복하고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굳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자기 힘을 주장하고, 자기 노력을 내세우는 자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왜 메시야인 자신을 거부하고 이 땅에 온 천국을 보지 못하고 있는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비유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믿고 있다면 그것은 하늘의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24절부터 보면 예수님께서 가라지 비유를 하시고 계십니다. 38절에 보면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천국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택하여 뽑힌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부르신 그 사랑과 자비에 대해서 감사하고 찬양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세상을 이기고, 도덕과 윤리적으로 깨끗한 사람이 되어서 천국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사단의 생각이며 가라지입니다. 그런데 이 가라지가 좋은 씨와 함께 자란다는 것입니다. 종들이 가라지를 뽑기를 원하느냐고 물을 때 주인은 뽑지 말라고 하십니다. 무엇 때문에 가라지를 뽑지 말도록 하십니까. 그것은 좋은 씨가 왜 좋은지를 가라지를 통해서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즉 가라지가 있음으로 해서 좋은 씨의 모습, 천국의 아들이 어떤 모습인가가 상대적으로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아들은 자기의 힘으로 세상을 살지 않고, 세상의 원리를 따라서 살아가는 자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힘으로 하나님의 원리를 따라서 세상을 살아가는 자이기 때문에 어떤 환난과 핍박, 염려와 유혹 속에서도 주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감사하는 자로서 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자신의 양심과 윤리와 도덕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피가 자기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윤리와 도덕이 자신을 신자로 만들고, 천국의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결국 자신의 윤리와 도덕으로 인해서 실패하는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서 어둠에서 빠져 나왔고, 천국은 자신의 노력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예수님의 손에 붙들려서 들어가는 나라인 것을 알고 마지막 날까지 주님 안에 붙들려 있기를 소원하면서 언제나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양한다면 그자가 바로 천국의 아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사단을 이기고 환난과 핍박을 이기고, 염려와 유혹을 이기고자 힘썼다면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핍박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염려를 이기도록 해 주십시오. 재물의 유혹을 이기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데 이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이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결국 내가 이겨보고 싶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도는 내 힘으로 이길 수 없으며 주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주님께서 내 안에 계셔서 나를 붙들어서 끌어주시기를 소원하는 기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옥토에 떨어진 씨가 자라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이 하셨다면 그렇다면 이 열매는 누구의 열매입니까? 우리들의 열매가 아니라 예수님의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씨가 자라서 열매가 맺어진 가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뭔가 열심히 해서 자신의 힘으로 열매를 맺어보겠다고 애를 씁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천국은 가리워져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을 하나님의 원리로 살아가는 모습은 오늘도 하나님의 붙드시고 인도하심 때문에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십자가를 깨닫고 천국을 알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었기 때문임을 알고 자신에게 주어진 복에 감사하며 날마다 그 은혜와 사랑을 찬양하며 나의 힘과 노력에 의미를 두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가 천국의 아들이라는 것을 꼭 마음에 두시기 바랍니다.

 

 

 

 


세례요한의 죽음(마 14:1-12) - 22강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자들이 얼마나 믿음이 없는가 하는 것은 단 한가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내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하며 사느냐 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세상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어떤 일을 하시든지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 대해서 일언반구 할말이 없다는 것,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뻐하며 찬양할 뿐이라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일에 대해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경우는 하나님이 하신 일로 인해서 자신에게 세상적인 어떤 유익이 발생했을 때입니다. 하지만 유익이 아니라 오히려 손해와 고통으로 다가왔을 때 사람들은 대부분이 '하나님이 나에게 왜 이렇게 하시는가'라는 불만을 토로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하나님께 대해서 한 것을 내세웁니다. '나는 하나님께 이만큼 했는데 하나님은 왜 나에게 그에 따른 보상은커녕 오히려 괴로움을 안겨줍니까?'라고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지금의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결국 여러분은 지금까지 수없이 믿음을 말하고 외쳤지만 결국 믿음이 없는 채로 살아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지금 많은 교회들은 믿음을 너무나 오해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로 만들어 낼 수 있고, 사람의 열심으로 얼마든지 꾸밀 수 있는 것을 믿음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믿음을 스스로 만들어 보려고 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의 적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말씀은 거들떠도 안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 밑에서 모세가 없을 때 한 것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섬긴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을 자기들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믿음은 자기들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믿음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오늘날 신자들은 누구나 믿음을 갖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기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믿음을 사용한다면 그 믿음의 대상은 자연히 우상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일이 있게 하셔도 그 일을 기뻐하고 찬양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독선이고 상식에 맞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독선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상식에 전혀 어긋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너무나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쪽으로만 생각했고, 그 사랑과 자비도 나를 세상에서 잘되도록 도우시고 지켜주시는 사랑과 자비로 생각했기 때문에 나를 해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시는 하나님은 전혀 상상하지도 않습니다.

 

 

 

 

때문에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모두 자신에게 어떤 죄가 있어서 징계를 받은 것으로 생각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행위에서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모습으로 지금까지 강조되어 왔지만,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전혀 없는 모습입니다. 결국 고통을 당한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서 뭔가 하나님을 화나게 한 부분을 찾아내서 그것을 고치면 모든 문제가 사라지고 복이 올 것으로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믿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독선의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을 자기 상식에 맞추어서 생각해서도 안되고, 내 마음에 드는 쪽으로만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은 내 기대와, 내 생각과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안식을 위해서 일하실 뿐입니다. 이것을 알고 오직 내 자신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존재가 되기에 힘쓰는 것이 곧 믿음이고 신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우리가 부르는 찬송과, 예배와, 기도와, 봉사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가를 알고 그 요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내가 죽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라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선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이러한 독선의 하나님을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상상과 생각으로 만들어 논 하나님이 자기 머리 속에 깊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 아닌 하나님이 자기 머리 속에 있는 동안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은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볼 때 오늘날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서 '나는 믿음이 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외칠 수 있습니까? 당장 내 손에 가시만 하나 박혀도 불만이 나오고 화가 나는 우리인데 만약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나의 소유에 대해서 손을 대시고, 내 자식, 가족에 대해서 손을 대시고, 재산에 대해서도 손을 대실 때 그 일을 인정하실 수 있습니까? 사람은 자기의 고통과 손해에 대해서는 참지를 못하는 법입니다. 아무리 내가 믿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할지라도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신자라면 자신의 입으로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믿음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자들은 결국 하게 되는 말은 '주님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믿음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믿음입니다. 그 신자는 이 믿음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런 신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말씀을 기록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인간의 모든 불신앙의 모습과 그 인간을 극복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건 하나하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자의 삶이 무엇인가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4천년 전의 사건, 2천년 전의 사건이라 할지라도 시간과 환경을 뛰어 넘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내용입니다. 본문은 세례 요한이 죽음을 당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은 아주 처참한 죽음입니다. 쉽게 말해서 위대한 영웅의 죽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하찮은 죽음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영웅의 죽음은 나라를 위해서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는 죽음이나, 이웃의 생명을 구하다가 대신 죽는 그런 모습만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에게서는 그런 죽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한 여인의 말 한마디에 의해서 목이 잘리는 죽음입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의 죽음은 어떤 죽음입니까? 하나님은 세례 요한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세례 요한의 죽음의 동기는 헤롯왕의 불법적인 행동을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헤롯 왕헤롯 안디바라고 부르는데 그 헤롯 왕에게는 헤롯 빌립이라고 하는 이복 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생의 부인은 헤로디아였는데 헤롯이 그 동생의 부인인 헤로디아를 강제로 자신의 아내로 삼아버린 것입니다. 이런 불법적인 행동을 세례 요한이 책망을 하자 헤롯을 요한을 옥에 가두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날 헤롯의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인 살로메를 불러서 춤을 추게 하는데 춤을 춘 모습을 보고 헤롯이 너무 기뻐한 나머지 살로메에게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다 주겠다고 맹세를 합니다.

그러자 살로메는 자기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세례 요한의 목을 원하게 되고 결국 헤롯은 근심하다가 요한을 죽여서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살로메에게 준다는 내용입니다.

 

 

 

 

헤롯은 요한을 죽이고 난 후 심리적으로 많은 압박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하시는 여러 가지 일을 듣고는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 살아난 것으로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세례 요한의 죽음이나, 스데반의 죽음 등을 생각하면 의문감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죽음의 가치가 뭐냐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가치를 영웅적인 죽음에 두고 있습니다. 즉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가치 있게 죽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나, 스데반의 죽음을 놓고 생각하면 그들에게는 어떤 위대함이나 영웅적인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 그들의 죽음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그들의 죽음에 어떤 가치를 두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입장에서는 세례 요한의 죽음에 반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보다 일찍 세상에 와서 예수님을 위해서 복음을 증거했는데 그 결과가 이런 죽음인가라는 반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이런 죽음도 결국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면 도대체 하나님은 왜 그런 죽음이 요한에게 있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한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것입니까? 이것이 독선의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으시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만 하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요한 한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의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도구로 쓰실 뿐입니다. 결국 세례 요한의 죽음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쓰여진 도구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일하는 목적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희생이라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도 희생에는 자기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일의 결과는 누군가의 희생이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찬사를 하고,열매를 보고 탐스럽다고 합니다. 그러나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 것은 땅속에 파묻힌 보이지 않는 뿌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꽃도 열매도 저절로 맺힌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뿌리는 생각하지도 않고 단지 꽃과 열매만을 생각합니다. 모든 영광과 찬사가 꽃과 열매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뿌리보다는 꽃과 열매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그 의중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로서 영광 돌리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는 꽃과 열매가 되어서 영광 돌리는 것을 원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죽음에서는 그러한 것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단지 헤롯의 불법적인 행동을 책망하다가 죽게 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죽고 사는 문제보다는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나무라는 것이 자신의 할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 앞서 세상에 온 것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요한의 죽음까지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고하니라"고 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왜 죽으셔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세상의 죄를 지적하고, 사람이 자기의 의와 기쁨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곧 멸망의 도구임을 지적할 때 세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에게는 그 어떤 유익도 없는 것입니까? 세례 요한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을 보여줌으로 예수님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의 유익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여줄 때 예수님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들이 누릴 복입니다.

 

 

 

 

이제 우리의 할 일은 분명합니다. 세상에서의 영광과 내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신 일을 인정하고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이 없는 것을 도와달라는 기도 속에서 나는 보이지 않고, 사라지는 그런 역할이라 할지라도 나를 통해서 주님이 보여지는 것을 감사하는 신자로 살아갈 때 그 신자만이 주님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 입장에서 세상을 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살려고 힘쓰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그 속에서 여러분이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바뀌어진 관심(마 14:22-33) - 23강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서 죄악으로 심판을 받을 세상에 생명을 얻는 길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남기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데에는 아무도 반대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명 성경을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제시하는 말씀으로 본다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무엇을 찾고자 해야 합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생명을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즉 성경을 통해서 생명 아닌 다른 것을 찾고자 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말씀을 남기신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나아가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볼 때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신 의도대로 생명에 관심을 두고 성경을 보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관심이 아닌 자기의 관심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기록된 사건들, 내용들을 인간의 마음에 좋은 방향으로 제멋대로 해석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오늘 본문이 기록돼 있는 14장의 내용 중에 흔히 오병이어라고 부르는 이적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이적을 가지고 해석하기를 '예수님은 적은 것을 가지고 많게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예수님만 믿으면 우리에게 있는 아무리 적은 것도 풍성하게 해 주실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할 때 과연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는 말이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적은 것이 많아진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구원과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세상에 있는 것은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 못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심지어는 산을 들어 바다에 빠뜨리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생명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믿음이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하나님이 관심 가지신 것에 내 관심이 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인간의 관심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늘의 것에 대한 것이지만 우리의 관심은 모두 땅에 대한 것에 불과합니다. 땅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하늘에 대한 관심으로 바꾸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관심이 바뀌어지고 나서 성경을 볼 때 진리가 무엇이며 생명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눈이 열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스스로는 본다고 하지만 정작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소경된 자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해석하여 가르친다고 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 입을 통해서 나오는 것은 모두 생명과 상관없이 인간의 관심이 몰려 있는 세상의 욕심을 더욱 부추기고 조장하는 말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를 가리켜서 '거짓 선지자'라고 하셨습니다. 복음 아닌 것이 복음으로 위장하고, 생명 아닌 것이 생명으로 위장하여 세상에 판치고 있습니다. 신자는 복음 아닌 것, 생명 아닌 것을 거부하고 물리치면서 오로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생명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면서 성경을 볼 때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서 우리를 생명 되는 진리의 길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삽니까? 물론 하나님에 대한 관심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혹 다른 관심 때문에 밀려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에서 먹고사는 일에 대한 관심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일에 게을리 하고 있다면 그것은 악한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의 바른 모습이 분명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귀 있는 자만 들을 수 있습니다. 아무나 듣고 깨달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만 들려지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관심을 두고 사는 자만 들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은 이 악한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생명을 얻는 길인가를 찾고자 하는 간절한 심정으로 이 말씀을 봐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세례요한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인간적인 입장에서는 참으로 가치 없는 죽음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시각입니다. 하나님 편에서의 가치 있는 죽음은 세상에서 어떤 업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여주다가 죽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도 세례 요한 같이 죽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하나의 계시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요한의 죽음을 통해서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한가를 미리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죽으셔야 했던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미리 요한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세상에는 선이라는 것은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악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겠다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의인이 같이 멸망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의인 오십을 찾으면 용서하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나중에 아브라함의 요청대로 의인을 10명만이라도 찾으면 용서하시겠다고 하지만 10명을 찾지를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왜 1명까지 내려가지 못했는가라고 아쉬워하기도 하지만 1명까지 내려갔다 하더라도 아브라함은 그 1명의 의인을 찾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의인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의라는 것은 없습니다. 악으로 채워져 있는 세상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요한의 죽음이었습니다. 바른 소리를 한 사람이 죽는 세상입니다. 자기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을 싫어해서 옳은 사람을 죽이는 세상입니다. 자기 중심으로,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곧 악으로 가득한 세상의 모습입니다. 요한은 이런 세상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세상이 악하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악으로 가득 채워져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의를 찾습니다. 그러나 의가 없기 때문에 그 세상을 심판해 버리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요한의 죽음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요한은 세상은 이렇게 악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이 악한 세상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시체를 장사하고 나서 예수님께 와서 요한이 죽었다는 것을 알립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이 하신 일은 오병이어의 이적이었던 것입니다. 14장의 사건은 서로가 각각 다른 의미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요한의 죽음을 출발로 해서 이 악한 세상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신 일들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자 길을 떠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온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저녁이 되어서 배가 고파지자 제자들은 예수님께 무리들을 마을로 보내서 먹을 것을 사먹게 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있는 것은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면서 자신들이 이 많은 무리들을 먹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오병이어를 가지고 많은 무리를 먹이시고 12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슨 이유로 이런 이적을 일으키셨습니까? 앞서 말한 대로 단순히 배가 고픈 사람들을 먹이기 위한 것이었습니까? 조금 시장하다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였을까요? 구세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단지 먹을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일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통해서 이 악한 세상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할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아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그들에게 있는 것이나 인간적인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이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도 하지를 못한다. 하물며 생명을 주는 일은 너희의 힘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주시니라"고 합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시는 것은 우리를 살리시는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나 우리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이 악한 세상에서 구원을 얻는 길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신자가 세상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앞에서 보여주는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보다는 배고픔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 제자들이 배고픈 문제에서 어떤 문제로 관심이 바뀌어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배고픔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바라는 것은 자기의 배고픔을 채워달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님께 가지고 있는 관심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서 나를 배불리게 하는 예수님입니다. 모든 관심이 예수님이 주시는 것에 있지, 우리의 필요한 것을 주시고 우리를 살리시는 그 분이 누구냐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이 일을 하시는 분이 누구냐보다는 자기에게 주어지는 양식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주님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배에 태워서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예수님은 나중에 물위로 걸어오십니다. 그것을 본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요청을 하고 예수님이 오라하시자 베드로가 물위를 걷게 되는데 바람이 불자 무서워 하다가 바다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손을 붙잡아서 건지셨다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의 의심은 세상을 두려워하는 모습입니다. 세상에서 남들보다 덜 가지고, 세상의 힘을 남들 같이 소유하지 못한데 대해서 두려운 마음을 가지는 모습입니다. 즉 의심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있다고 하면서 결국 세상의 것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세상에서 그 어떤 바람이 불어도 주님만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를 건져내신 주님을 보면서 제자들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합니다. 배고픔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는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던 제자들이 이제는 주님이 누구시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이 악한 세상에서 구원을 얻는 길입니다.

 

 

 

 

우린 모두 악한 세상에 빠져 살아갑니다. 주님보다는 배고픈 문제에 더 관심이 있고, 믿음으로 살려고 하지만 세상에서 부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면서 믿음에서 멀어지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 우리를 붙잡아 건지실 분은 예수님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외침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악한 세상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더 세상의 것으로 인생의 기쁨을 누리려고 할 때 그것이 생명과 멀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주님을 찾습니까? 배고픔의 문제입니까? 아니면 세상에서 부는 바람입니까? 우리는 주님을 나에게 무엇을 주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이 악한 세상에서 나를 붙들어서 건지시는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 악한 세상에서 건짐 받는 길입니다.

 

 

 

 


외식(마 15:1-11) - 24강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필연코 접해야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의식입니다. 의식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예전부터 모양새를 갖추는 것을 아주 중요시 해왔기 때문에 의식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의식을 치르는 목적이 무엇이냐 보다는 어떻게 하면 그 의식을 잘 치를 수 있느냐에 더 치중을 하게 되었습니다. 의식이라는 것은 뭔가를 담아서 전달하는 그릇에 불과한데도 사람들은 그릇을 꾸미고 치장하는데 더 관심을 둬 버린 것입니다. 그릇을 금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그 그릇에 담긴 것이 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릇에 담긴 것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릇 자체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그릇에 대하여 눈길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의식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교회에서도 그대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교회에도 여러 가지 의식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예배입니다. 교회는 예배를 아주 중요시하게 여깁니다. 예배를 신성한 의식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주관하는 이 의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예배를 드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예배를 의식화해서 그 의식에 참여한 것이 곧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 의식을 좀 더 거룩하게 드려야겠다는 욕망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도록 해야 겠다는 발상에서 인간이 만든 여러 가지 의식법이 등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라는 것을 인간 스스로가 거룩한 의식으로 만들어 보고자 여러 가지 규례를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 드릴 때는 깨끗한 옷을 입어야 한다거나, 아이들이 떠들면 안된다거나, 헌금은 깨끗한 돈으로 미리 미리 준비해야 한다거나 등등 인간의 정성을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행동들을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만이 아니고 기도할 때도 두 손을 모으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눈을 감고 해야 하는가? 무릎을 끓고 해야 하는가? 이와 같이 인간의 행동 자체에다가 의미를 두는 것입니다.

 

 

 

 

교회는 분명히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깨끗케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할 일은 그 피를 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피를 말하면서 피를 믿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만이 거룩하고, 우리가 그 피를 믿을 때 나 또한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깨끗한 존재가 될 수 있는데 그 피의 기능을 인간의 의식과 인간의 정성으로 대체해 버린 것입니다. 사람이 의식을 치르면서 분명히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러나 마음은 이미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의식에 참여하고 하나님을 입술로 불렀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교회는 의식에 참여한 것을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강조해 버리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를 요구하셨을 때도 짐승을 잡는 의식 자체를 요구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죄가 제물된 짐승에게 전가되어 제물이 심판 받고 나는 산다는 그 은혜와 긍휼을 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차 자신들이 제사를 드리는 의식이 자기들의 의가 되는 줄로 오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기들의 의와 자기들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해보려고 하는 열정으로 나가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를 보여줘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으면 존재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죄인이 아니면 모일 필요가 없는 교회에서, 죄인만 계속 생산해야 할 교회에서 자꾸 사람들을 의인으로 만들어 가고 의인만 자꾸 발생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교회와는 상관없는 모습인 것입니다. 의식은 살아 있고, 입술로 여호와를 부르는 자들은 차고 넘쳐도 하나님께서 내 백성이라고 부르는 자는 단 한명도 없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를 아는 하나님 백성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들으며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식을 중요시하게 될 때 결국 그 사람은 형식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외식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의식을 중요시하게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이 좀더 정성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스스로 정한 법률을 가지고 예수님께 시비거는 모습이 나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시비거는 이유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떡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고 먹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규례였습니다.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은 위생 때문이 아닙니다. 손을 씻는 것을 정결로 본 것입니다. 기도할 때도 손을 씻고 기도해야 하나님이 그 기도를 받으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손을 씻지 않고 하는 것은 모두가 더러운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따라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으면 그 음식이 더러운 음식이 되어서 자기를 더럽힌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우리들이 식사를 할 때 기도를 안하고 먹으면 그 음식 먹은 것이 뭔가 잘못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이 더러워지고 깨끗해지는 것을 의식에다가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시비에 대하여 부모공경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부모공경을 어떻게 해석했는가하면 자기들이 하나님께 드렸으면 부모에게는 안드려도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드린 것이 부모에게 드린 것과 같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향해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외식이라는 것은 두마음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속마음은 따로 있는데 그 마음을 감추기 위해서 깨끗한 척 행동하는 것을 외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18절부터 보면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는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뭘 하느냐를 가지고 더럽고 깨끗함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마음이 어떠냐를 가지고 평가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놓고 볼 때 누가 감히 나는 깨끗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내 속에 더러움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의식을 앞세우고 형식을 앞세우고 자신의 행동을 앞세워서 자신의 정결함을 주장하겠습니까? 그러나 자기 속에 있는 더러움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러움의 기준을 바리새인과 같이 의식에다가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식의 규례를 정해서 그 규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외식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외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더러운 것입니다. 제 아무리 경건해 보이는 의식으로 행동한다고 해도 그것은 더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더러움을 모르고 사랑으로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공경할 때도 하나님은 '네가 부모에게 뭘하였느냐'를 보시는 것이 아니고 '네 속마음이 어떠하냐'를 보시는 것입니다. 속으로는 귀찮아하고 싫어하면서도 그 속마음을 감추고 겉으로 공경하는 척 하는 것은 부모 공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듯이 부모를 섬기는 것이 아니고 남들이 보는 눈이 있으니까 부모에게 효도하는 척 하는 것은 공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부모 공경을 예로 들어서 참된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한 일을 앞세우기 마련입니다. 자기가 한 일을 통해서 자기를 정당화하고, 자기는 옳은 사람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행위를 버리지 못합니다. 만약 그 어떤 행위도 없으면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에 신자로서 최소한의 행위라도 있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행위를 가지고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누구라도 그 행위를 부정하고 나선다면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죽으신 것입니다.

 

 

 

 

참된 신앙이란 자기를 알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시작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와서 귀신들린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시면서 그 가나안 여인을 개로 취급을 하십니다. 그러자 가나안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7절)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개로 취급하는데도 그것은 자기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개든 뭐든 그것은 상관없으니까 오로지 주님으로부터 얻는 것이 있게 해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큰 믿음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에 관심을 두고 살기 때문에 외식적인 행동이 나오게 되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전시용 신앙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편에 서 있는 참된 신앙은 내가 남에게 어떻게 보여지건 말건 그것은 상관없이 오직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자신이 채워지기를 소원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일 때 그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사랑과 은혜와 긍휼로 채워지는 것이고, 결국 그 사람에게서는 주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가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 사랑과 자비와 온유와 화평으로 모든 자를 대하는 것이고 부모 공경도, 형제를 대하고 이웃을 대하는 것도 자신을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에게 있는 주님의 사랑이 나를 그렇게 움직이게 하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천부께서 심지 않은 것은 다 뽑힐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은 결국 망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나에게서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모습이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나는 더러운 존재임을 알고 오직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얻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채워져서 겸손함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을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어떤 의식을 행하고, 어떤 보기 좋은 행동을 해도 그것이 여러분을 깨끗케 하거나 신자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내 행동을 내 의로 삼는 것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뽑혀버릴 것입니다.

 

 

 

 


교회와 교회 아닌 것(마 16:13-20) - 25강


교회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한다면 사람들은 각기 나름대로 교회에 대해서 설명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설명도 여러 가지 방향으로 되어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교회를 설명할 때도 획일적으로 하나만을 가지고 교회라고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마다 각기 다른 시각에서 교회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교회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특성들이 사람들이 보는 시각에서 각기 다르게 표현되어질 뿐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말할 때 결코 빠져서는 안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교회에는 사람의 것은 개입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만 보여지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배당이 있다고 교회가 아니고, 모이는 사람들이 있다고 교회가 아니며, 목사가 있고 교인이 있어 가지고 매주일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신자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면 그 교회는 사람이 흉내낼 수도 없고, 할 수도 없는 일들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지만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라고 이름 붙이고 교회 흉내만을 내는 교회 아닌 교회는 모두 사람의 일들만이 보여질 뿐입니다.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모이고, 세상의 복을 위해서 모이고, 내가 변화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교회 아닌 교회가 하고 있는 사람의 일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을 찾을 때 과연 어떤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나를 복주고, 잘되게 도와주는 그런 하나님을 찾게되는 것입니다.

 

 

 

 

교회란 그리스도를 알고 십자가를 알게 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사람이 십자가를 알게 되었다면 그는 거듭난 사람입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하늘로부터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교회가 거듭난 사람들의 모임이고, 거듭난다는 것이 땅의 일이 아니고 하늘의 일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일이라면 그런 사람들이 모였을 때 보여질 것은 오직 그리스도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구분함에 있어서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현대인의 사고방식을 개입시키지 않고 정직하게 성경을 공부하며 성경이 말하는 바만 따라가면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한 대로 모든 것을 현대인의 사고방식에 맞추어서 생각해 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 사람의 윤리와 도덕으로 그쳐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은 교회가 현 사회에서 추구하고 있는 윤리와 도덕적인 모습들을 많이 나타내면 그것이 교회다운 교회가 되는 줄로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교회 아닌 교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기들의 교회 사업이 목적이 되어 버립니다. 물론 내세우는 말은 하나님의 일이고 교회가 할 일이라고 말하지만 결코 하나님의 일은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2:2절에 보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아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교회를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안다면 분명히 무엇인가 표가 있어야 하고, 그 표는 사회에서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집약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윤리와 도덕적인 모습을 교회의 표로 삼아버리는 것입니다. 소위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것을 종교 단체로서 윤리와 도덕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사명으로 주어진 명령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 그리스도적인 생각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것은 천국가는 모습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교회인 것과 교회 아닌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오늘 우리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 교회의 원리와 얼마나 일치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시는 것은 세상이 예수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궁금하시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에 대한 세상의 생각이 어떻다는 것을 모르실리도 없지만 모르신다고 해도 거기에 관심을 두실 예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예수님을 아는 자들과 모르는 자들의 생각의 차이점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시각과,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의 시각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 혹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자기들의 시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내린 평가입니다. 이들에게는 예수님이 단지 어떤 위대한 일을 행하고 있는 인물로만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위대한 일을 함으로써 자신들에게 이익이 주어진다는 그런 시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잘 압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남에게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내 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 주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 나의 모든 인생을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인생을 주관하시고 나는 예수님이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겠다는 것이 예수님을 내 주로 영접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일을 평가하는 입장에 있으면 예수님을 내 주라고 말은 할지언정 예수님께 내 인생을 맡기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신자들이 예수님을 평가하는 입장에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도 평가하는 입장에서 말합니다. 때문에 십자가를 말할 때 그 십자가에서 나도 주님과 함께 달려야 한다는 것은 삭제해 버리고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나에게 돌아온 혜택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이 죽으셔서 나에게 구원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평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나에게 어떤 혜택으로 돌아오는가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자신이 아주 착실한 신자이고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고 있던 베드로의 고백은 다릅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합니다. 즉 '당신은 나의 주인입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평가하는 시각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철저하게 예수님께 종속된 자라는 입장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 즉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그에 대해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알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8절에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17절에서는 베드로를 바요나 시몬아라고 부르시고 18절에서는 베드로라고 부르십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베드로 같은 신앙고백이 있는 자들이 모여서 교회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하나님이 알게 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 인해서 새롭게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새롭게 변화된 자들이 모여서 교회가 된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예수님을 평가하는 입장에 서서 예수님의 모습은 이래야 한다, 교회는 이래야 한다고 하면서 인간편에서 교회가 할 일을 정해 버린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교회는 아니다고 봐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내 주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주이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에 속한 모든 자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은 자입니다. 세상이 힘이 아니요, 자기의 행위가 의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힘이고, 주님의 십자가만이 나의 의로서 나는 오직 은혜로 그 의에 속한 자가 되었다는 것을 깊이 아는 자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예수님을 연구하고 공부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고백이 아닙니다. 하나님 편에서 알게 하신 고백입니다. 하늘로부터 새롭게 태어난 존재, 거듭난 존재입니다. 이런 자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을 알게 된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하십니다. 결국 복은 주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시몬은 베드로로 불립니다. 시몬은 육신으로 난 사람 그 자체이지만 베드로는 주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된 하늘로부터 새롭게 태어난 존재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권위가 있습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것입니다. 즉 땅에서 교회가 하는 일이 하늘의 일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교회는 지상에서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일과 동일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지상에 보여주는 역할을 할뿐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계획하고, 움직여야 하는 것은 없습니다. 교회는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만 보여주면 되는 것입니다. 은혜로 주어진 구원, 하늘의 소망, 영생,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죄가운데 있고 악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찬양하면서 하나님만 힘으로 삼고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교회의 모습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알기 때문에 남을 비판하고 평가하는 위치에 있을 수 없음을 알고 용서하는 것, 이것이 교회가 나타내 보여야 할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 아닌 모습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21절부터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앞으로의 일을 알리시기 위한 것보다는 앞서 말씀하신 교회가 나타내야 할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교회가 나가야 할 길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 같이 십자가를 져야 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흔히 십자가를 진다고 말하고 고생과 고통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란 고생과 고통의 대명사로 쓰이는 말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진 하늘의 생명을 알게 된 것이 너무 기뻐서 세상의 것에 대한 소망이 자연히 소멸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본질은 기쁨이지 고생이 아닙니다. 만약 세상의 것을 포기하는 것으로 인해서 뭔가 어려움이 있다해도 그것을 고통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기쁨이 그 어려움을 어려움으로 여기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회가 단지 사람들이 모여서 간판을 내걸고 예배를 드리고 사회적으로 활동하고 구제하고 선교한다고 해서 발생되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말할 때 베드로가 그것을 만류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베드로를 향해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절)라고 책망하십니다. 앞에서는 주님께 대한 신앙고백으로 칭찬을 들었던 베드로가 뒤에는 사단이라고 하는 책망을 들은 것입니다. 그러면 앞에서 했던 신앙고백은 거짓말이냐는 의문점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일의 중심을 이해하면 쉽게 해결되는 문제입니다.

 

 

 

 

성경은 당시 등장하는 사람들이 중심이 아닙니다. 즉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을 본받아라거나, 본받지 말라는 의도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은 하나님께 쓰여지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나타내시기 위해서 쓰여지는 도구이기 때문에 우리는 한 인간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리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해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말씀하시고 나서 교회 아닌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를 베드로에게 사단이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심으로 보이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 아닌 교회, 즉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단에 속한 교회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십자가가 없는 예수님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천국을 말하는 것이 교회 아닌 모습입니다. 세상을 포기하는 것 없는 영생을 말하는 것이 교회 아닌 것입니다.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세상에 더욱 소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 교회 아닌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교회와 교회 아닌 것이 어떻게 다른가를 깊이 이해하고 우리 교회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마 16:24-28) - 26강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잘 안될 때 자기의 환경 탓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 입시에 실패했을 때 환경이 공부하기에 좋지 않았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자녀가 잘못된 길로 갔을 때도 주위 환경이 나빴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신자들도 동일합니다. 많은 신자들은 교회 다니기에 좋은 환경과 좋지 않은 환경으로 구분합니다. 예를 들어서 집안이 기독교 집안이면 교회 다니기에 좋은 환경이라고 말하고, 기독교 집안이 아니고 교회 나가는 것을 반대한다면 환경이 신앙을 지키기에 좋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공부하기에 좋은 환경은 있을 수 있고, 자녀들이 도덕적으로 바르게 자라 가는데 좋은 환경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지키기에 좋은 환경이란 없다고 봅니다.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신자가 날마다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하는데, 과연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환경이 있을 수 있습니까? 대부분의 신자들이 원하는 환경이란 교회를 편하게 다닐 수 있는 환경을 생각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 살 수 있는 환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교회를 다니기에 편한 여건 속에서 열심히 교회를 다니는 것을 신앙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을 지킨다는 것,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다는 것은 교회를 다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나 여건은 신앙의 문제에 전혀 영향이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신자가 자신의 상황이나 여건 속에서 항상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즉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은 신자가 자기 중심적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 자기 몸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운다면 모든 것은 쉽게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몸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겠다는 마음으로 살면서 신앙을 지킬 수 있는 환경을 원한다는 것은 결국 내 몸도 위하고 신앙도 지켜보겠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사단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어떤 환경을 가지고 신자들이 교회에 나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 따라가며 주님의 은혜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믿고 자기 힘으로 세상을 살도록 부추기는 것이 곧 사단입니다. 환경을 말한다면 에덴 동산만큼 좋은 환경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 속에서도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이 사단의 지배 아래 있고, 신앙을 지킬만한 좋은 환경이란 결코 없다는 것은 세상은 구원받기에 좋은 환경이 절대 아니란 말과 동일합니다.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그런 환경에서 구원을 받았다면 그것은 분명히 외부에서 은혜가 개입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을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사단의 지배아래 있기 때문에 사단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사단의 사고방식이란 오직 자기를 위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세상의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도 자기를 위해서 믿는 것, 그것이 세상의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그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정상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그 모습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은 결코 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내가 비정상적인 것으로 깨닫게 되었다면 그것은 나의 지혜가 아니라 외부에서 개입된 지혜이기 때문에 기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기적이 임한 자로서 맨처음 보여지는 것이 베드로와 같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신앙은 좋은 환경에서 열심히 교회 다니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쁜 환경에서도 불구하고 열심히 교회 다니는 것을 신앙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신자들 가운데는 좋지 않은 환경에서도 열심히 교회 나오는 것을 간증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자랑으로 삼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신자는 어떤 환경에서도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는 것, 그것이 신앙이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신앙고백을 했던 베드로가 주님의 십자가를 만류하는 바람에 사단이라는 책망을 들었던 것을 통해서 교회와 교회 아닌 것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으로부터 사단이라는 책망을 들을 것은 신앙고백 할 때와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십자가의 죽음을 만류한 것은 사단의 사고방식이 어떤 것인가를 그대로 드러내주는 것이었습니다. 즉 고난이 없이, 십자가에 자기 죽음이 없이 주님을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위해서 주님을 믿는 모습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신의 손과 발을 잘라내는 것만큼 고통입니다. 이 고통이 없이 주님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 사단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만류한 베드로가 사단이라는 책망을 들은 것입니다.

 

 

 

 

때문에 만약 교회라고 말하면서도 십자가의 자기 부인을 말하지 않고 주님을 따라가자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사단이라고 책망 받은 베드로의 모습은 십자가를 만류했지 주님을 거부한 것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로 위장하고 교회를 흉내내는 교회 아닌 교회가 많이 있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도 많은 신자들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을 자기를 포기하는 것 없이 단지 교회에 나와서 교회 일에 열심히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24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신앙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그 목적지나, 따라가는 방법이나, 따라감으로서 주어지는 혜택 같은 것을 내편에서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약 내 방법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가고, 내 형편대로 따라가고, 내가 가고싶은 곳으로 가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라면 그것을 누가 어렵다고 하겠습니까? 우리의 생각이나 우리의 형편이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전혀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것이 어려운 것이고 우리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능은 자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자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를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십자가를 따른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십자가는 믿어야 하기 때문에 양보와 타협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면서 적당히 교회 일을 하고, 교회가 하는 좋은 일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참으로 우리를 난처하게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주님을 따르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부담이 되는 이유는 우리는 내 목숨을 지키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버리는 것이 오히려 목숨을 찾는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사고방식과 주님의 생각이 부딪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땅에서 잘되고,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내가 사는 길로 여기지만 주님께서는 그것이 오히려 자기의 생명을 잃는 길이기 때문에 그 길로 가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고집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가고 있는 길이기 때문에 나도 그 길로 가야한다는 고집을 부립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자기 목숨을 주고 바꿀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온 천하도 내 목숨과는 바꿀 수 없습니다. 온 천하를 얻어도 내가 없는 마당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내가 지금 지옥으로 가고 있는데 땅의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의 야심과 소망을 버리지 않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힘써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이란 이 땅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온 천하를 얻어도 그 속에서 생명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땅의 것은 우리의 생명을 방해하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땅의 것을 거부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땅의 것을 거부하라는 것은 땅에 대한 자기의 소망과 야심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인생이 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드렸지만 그래도 여러분들의 마음에는 부담이 사라지지 않고, 또 어떻게 사람이 세상에 대한 소망을 버릴 수가 있는가라는 생각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아예 처음부터 세상을 버릴 의도가 없는 자기의 마음을 감추기 위해서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대한 소망을 십자가로 바꾼다는 것은 자기 마음먹은 대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바꾸고 싶다고 해서 바꾸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 상대적인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땅의 것을 버릴 만한 가치있는 것, 그것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해야 자기를 위해 사는 삶을 바꿀 수 있는 것처럼 세상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해야 기쁜 마음으로 세상의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보다 가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영광입니다. 27절에 보면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신자가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영광이 곧 우리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입은 영광은 17장에서 해같이 빛나는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이 영광이 우리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단 세상을 포기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에 한해서입니다.

 

 

 

 

여러분, 과연 여러분에게 주님은 어떤 분으로 존재하십니까? 진심으로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하신 분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을 우리는 너무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 직장보다 더 가치 없는 예수님이고, 내 사업보다 더 가치 없는 예수님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보다 돈벌이가 더 소중하고,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뜻이 더 앞서 있고,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목회 성공의 영광이 더 귀중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자기 목숨을 잃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을 알고 십자가를 알며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한다면 그것은 결코 여러분의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이며 무가치한 일이 아니고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한 일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여러분이 입은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세상을 소망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여러분이 온 천하를 얻는 것보다도 더 좋은 것은 주님과 함께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결코 무가치한 일로 여기지 마시고 기쁜 마음으로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갈 수 있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큰 믿음(마 17:14-20) - 27강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적은 것보다는 많은 것, 낮은 것보다는 높은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많고 높은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고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힘의 체계입니다. 가진 자가 못가진 자를 지배하고 다스리며, 높은 자가 낮은 자 위에 군림합니다. 다스려지고 지배당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눌림 받고 살지만 그 속에는 자신 또한 힘을 길러서 그 눌림에서 벗어나고, 다른 사람들 위에 서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힘을 얻기 위해서 땀을 흘리며 수고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힘의 세상에 세상이 추구하는 힘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힘이 등장을 합니다. 그 힘은 세상이 추구하고 바라고 원하는 힘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약하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등장을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선포를 합니다. 이 힘의 주인을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이 힘의 주인을 따라오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 힘의 주인을 거부하고 죽여버립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원하는 힘을 얻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당하신 고난이었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시자 세상은 둘로 나뉘어 집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와 주님을 거부하는 자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주님이 가지고 계신 그 힘을 자기의 힘으로 삼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자이고, 주님을 거부하는 자는 주님의 힘을 무시하고 외면해 버리는 자입니다.

종교는 세상의 힘을 얻기 위해서 또 다른 힘을 빌리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속에서 발생되었습니다. 힘을 통해서 힘을 얻는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은 자신을 세상에서 힘있는 자로 만들어 주는 신만을 참된 신으로, 진짜 신으로 인정을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라고 이름하는 기독교가 아닌 기독교에서 보여지는 모습도 바로 그러한 모습입니다. 세상의 힘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힘을 빌려보고자 열심히 교회를 찾아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단코 교회가 아닙니다.

 

 

 

 

목사나 신자들이 그토록 원하는 교회 성장이 왜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의 일입니까? 교회 성장은 사람을 힘있게 만들어 주고 자존심을 세워주는 것이지 교회가 성장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자신들이 세상에서 크게 되는 것은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21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자이심이라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입니다. 이 땅에는 예수님의 백성이 있습니다. 그 백성을 찾으시는 방식이 세상이 추구하는 힘의 체계와는 전혀 반대의 힘을 가지시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세상에 보기에는 약하고, 천하고, 무시할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으로 오셔서 그것이 곧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힘을 따르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여기에서 세상은 둘로 나뉘어 지는 것입니다.

 

 

 

 

우린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오는 것은 천국에 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붙들어서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때문에 교회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바르게 가르쳐야 하며 여러분은 어떤 예수님이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참된 예수님인가를 바르게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같은 세상을 살고, 예수라는 같은 이름의 구세주를 믿는다고 해도 한쪽은 이름만 같을 뿐 구세주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힘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믿음도 힘의 체계로 이해하게 됩니다. 길을 가다가 불량배를 만났을 때 자기를 도와줄 힘을 찾는다면 당연히 그 불량배를 물리칠만하고 생각되는 체격이 건장하고 힘이 있어 보이는 사람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세상의 힘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믿음도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그런 힘있는 믿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17장은 예수님이 세 제자(베드로, 야고보, 요한)를 데리시고 변화산에 올라가신 일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세 제자만을 데리고 가시고 나머지 9명의 제자는 산 아래에 남겨 놓으신 것입니까? 그것은 변화산의 주님의 영광을 본 자와 보지 못한 자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변화산에서 일어난 일은 예수님께서 해같이 빛나는 영광으로 장차 이 땅에 오실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영광으로 오시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죽으심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변화산에서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의 죽으심이 없는 주님의 영광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잘못된 이유는 십자가의 죽으심이 없는 주님의 영광만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영광은 좋아하면서 십자가의 죽음은 거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4절의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자 그것이 너무 좋아서 초막 셋을 짓고 그곳에서 계속 거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음성이 들립니다. 저의 말, 즉 예수님의 말을 듣는 것이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을 듣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우리도 기뻐하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의 영광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체험한 세 제자는 구약의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예언이 세례 요한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엘리야는 불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선지자입니다. 불을 타고 올라갔다는 것 때문에 유대인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엘리야는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맞는 그런 모습으로 하늘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 엘리야가 세례 요한을 의미한다고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 제자는 엘리야가 곧 세례 요한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믿음의 방식에서 벗어나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해서 변화산 아래 있던 제자들, 즉 주님의 영광을 체험하지 못한 제자들은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자 밑에서 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귀신이 들려서 간질병이 들린 아이를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데려왔는데 제자들이 고치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러자 아이를 데리고 온 한 사람이 예수님께 꿇어 엎드려서 아이를 고쳐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17절에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는 책망을 하십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길은 세상에서 주의 말만 듣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신 길만 따라가면 그것이 곧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우리가 고분고분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따라갈 수 없도록 환경을 악하게 허락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속에서, 몽땅 세상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세대 속에서 어떤 것이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참된 믿음이고, 어떤 것이 주님의 이름만 이용하는 가짜 믿음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세상을 악하게 허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자 제자들이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린 이 말씀에서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 그러니까 믿음을 가지자'라고 하면서 금식기도하고, 철야기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이 바로 패역한 세대의 모습이고, 세상의 힘의 방식을 가지고 믿음을 흉내내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은 믿음을 자기들이 뭔가 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오해하였던 것입니다. 믿음이란 내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님만 바라보기 때문에 주님 앞에 나와서는 단지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만 있으면 됩니다. 주님의 힘이 아니면 나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자로서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그 고백이 곧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대개가 자신이 할 수 있도록 힘을 달라는 것이지 나는 할 수 없으니까 주님께 맡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도록 힘을 달라는 것은 그 힘을 이용해서 자신이 세상에서 큰 자가 되어보겠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힘을 위해서 힘을 구하는 패역한 세대의 모습인 것입니다. 자기가 높아지는 것을 위해서 믿음을 이용하고 있는 믿음 아닌 믿음인 것입니다.

 

 

 

 

주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자, 장차 주님이 나를 붙들어서 영광에 나라에 들여보내신다는 것을 아는 자, 그리고 그 영광의 나라를 소망하는 자는 오직 주님만 의지합니다. 그 믿음을 큰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 믿음은 산을 옮기는 믿음보다도 더 큰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산을 옮기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 능력이 자신을 구원시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능력이 있는 믿음은 오로지 주님만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때문에 산을 옮기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를 구원시키지는 못하기 때문에 그 믿음은 겨자씨 만한 믿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산을 옮기는 그러한 능력이 있는 믿음을 바라는 것은 패역한 세대에서 함께 세상적인 사고방식에 빠져 살아가는 모습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믿을 때 우리도 주님과 함께 다시 살기 때문에 지금 죽어도 괜찮다는 믿음이 큰 믿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산을 옮기는 믿음보다 더 큰 믿음이 있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믿음을 원합니까? 산을 옮기는 능력의 믿음을 원합니까, 아니면 사흘만에 다시 사신 주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을 원합니까? 주님이 세상에서 죽으신 것은 주님의 힘이 세상이 원하는 힘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혀 자기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그런 힘이었기 때문에 세상은 주님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혹시 오늘에도 여러분은 주님을 거부하지 않는지를 돌아봅시다. 세상의 힘을 얻는데 도움이 안되는 힘이라고 외면하지 않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은 힘있는 자가 행세하고 다스리는 곳입니다. 힘없는 자는 무시당하고, 외면 당하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 의해서 주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믿음이란 이런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런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 사람과 똑같이 세상의 힘을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에 걱정과 근심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는 큰 힘이 있습니다. 우리를 장차 영광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과는 전혀 상관없는 힘입니다. 그 힘을 의지하는 것이 큰 믿음입니다. 세상에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잃으면 찾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어도 다시 산다는 것을 믿고 땅의 것을 버릴 수 있는 자가 큰 믿음을 소유한 자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세상을 사는 자는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을 거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마 18:1-4) - 28강


신앙생활은 종교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그 종교에서 행하고 있는 의식에 참석하고,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교회를 위해서 일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주일에 교회 나오고, 헌금하고, 가끔 기도하면서 성경을 보고, 또 성경묵상을 한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착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고 있는 여러분들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열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 편에서 보시기에는 신앙과 전혀 상관없는 종교생활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언제나 명심해야 합니다. 열심히 예배드리고, 열심히 기도하고, 구제하고, 봉사하고, 십일조 하면서도 멸망에 빠진 자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교회 나왔다는 것이 여러분의 구원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왔습니까?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것입니까? 교회에서 봉사하고, 선교하고, 구제하는 모든 것까지 내가 왜 이것을 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나 자신의 종교열심에서 나오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니는 교회를 위한 종교열심, 많은 교회는 그것을 주님을 위한 신앙생활로 강조하고 있지만 그러나 성경을 보면 바로 그러한 종교 열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종교 열심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기쁘게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나의 만족을 위해서 일하고, 나의 기쁨을 위해서 주님을 찾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열심과 노력을 통해서 자기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 때문에 열심이 있을 때는 만족해 하지만 열심이 없고 뭔가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는 스스로 낙심하고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게 되며 나아가서는 믿음에 대해서까지 의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열심을 가지고 신앙을 판단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판단 기준은 자신뿐만 아니라 남들이 나를 판단하는 기준도 되기 때문에 사람은 종교열심이라는 유혹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많은 교회들은 종교열심을 예수님과 십자가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 교인들에게 강매하고 있는 실정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종교열심은 우리를 복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삼켜 버린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시 69:9-11절에서 다윗은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내가 곡하고 금식함으로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저희의 말거리가 되었나이다"라고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성전에 대한 열심이 오히려 자기를 삼켰다고 합니다. 또 기도하고 금식하는 열심이 오히려 욕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은 우리를 삼킬 뿐입니다(요 2:17). 즉 신자는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의 은혜 때문에 교회를 찾는 것이지 교회를 사모하는 열심으로 교회를 찾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이 이 자리에 나왔다면,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없이 이 자리에 나왔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는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은혜를 집어 넣어주는 곳이 아닙니다. 단지 주님의 은혜가 무엇이고,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을 통해서 전달할 뿐입니다. 나머지는 여러분 스스로 자신을 생각하고 자신의 부족과 죄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발견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주님의 은혜에 깊이 들어가는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발견했기 때문에, 그리고 내 마음이 즐거움으로 넘치기 때문에 예배드리게 되는 것이고, 봉사하게 되는 것이고, 헌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종교 열심이 아닙니다. 주님의 힘입니다. 오늘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종교 열심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의 모습이 본문에 등장을 하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을 보면 당시 제자들이 무엇에 관심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천국에서 누가 높아지느냐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만큼 천국에서 대우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 상에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열심을 가지고 주님을 찾는 자들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열심의 정도에 따라 대우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죄인된 인간에게는 극히 당연한 생각입니다. 세상 방식은 능력에 따라 차별을 두는 것입니다. 능력에 따라 차별을 두어야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힘을 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단이 지배하는 땅의 속성에 불과합니다. 천국은 차별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행함에 대한 결과에 따라서 다르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죄악된 사고방식이 우리의 본성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인간적 본성을 고발하고 죄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신자는 자신의 사고에 맞추어서 성경을 보면 안됩니다. 자신의 사고에 맞추어서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은 우리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되고 맙니다. 인간적인 사고와 전혀 맞지 않은 성경을 인간적인 사고에 맞추어서 해석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 생각을 고치려고 하지 않고 성경을 고쳐버리고 그로 인해서 예수 아닌 예수가 난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단호한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이 보이고 있는 그런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양보나 타협의 여지가 없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누군가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리의 문제에서만큼은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한마디로 잘라서 말씀하는 방식으로 일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런 태도 때문에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게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천국이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천국은 어린아이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천국의 존재여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신자는 천국의 존재여부보다는 천국의 모습이 어떠한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이미 이 땅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와 있는 천국이지만 그 모습을 알지 못하면 천국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천국이 어떤 모습인가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만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지옥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지옥은 어린아이 같지 아니한 모습, 즉 생존을 위해서 경쟁하고, 높고 낮은 자가 존재하고, 서로 높아지기 위해서 다투고 하는 모습이 곧 이 땅에서의 지옥의 모습이 되는 것이고, 이 땅에서의 천국은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이 모인 그 모임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어린아이에 비유하신 것은 천국은 계급이 없고, 차별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계급이 없고 차별이 없는 것이 천국이기 때문에 계급 의식을 가지고 살고, 자기의 행위를 가지고 남들과 다른 대우를 받고 싶어하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천국에 함께 하는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자신들의 열심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무엇을 해도 단지 좋아서 할뿐입니다. 뭔가 다른 계산을 가지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환경을 가지고 차별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위도 없으며 자신보다 못하다고 남을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모습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어린아이를 내세우신 것입니다.

 

 

 

 

4절을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 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천국에서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큰 자이고, 낮추지 못한 사람은 작은 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낮추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올 수도 없는 데 천국에서 자기를 낮춘 사람과 낮추지 못한 사람의 차이를 둘 수는 없습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큰 자입니다.

 

 

 

 

천국은 어린아이 같은 자만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속성이 아니면 결코 천국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종교 열심으로 주님을 만나고자 하고, 천국에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코 천국을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종교 열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열심에 대한 대가를 기대하게 되는데 천국은 열심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같이 자기 힘을 의지하는 않는 모습, 다른 사람의 도움이 있어야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모습, 이 모습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만 보여지는 것이 천국입니다. 제자들이 '누가 크냐'고 묻는 것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열심과 힘을 가지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모든 가능성을 두고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내 힘으로도 세상을 얼마든지 살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예수님도 열심히 믿을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부모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즉 신자의 모습은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자기 힘을 내세우는 사람은 자기 행위에 대해서 합당한 대우를 받으려고 하고,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면 반발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예배를 드리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종교 열심으로 생각하면 그 예배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내 힘과 의지로 예배당을 찾아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 또한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이 나를 도우셔서 주님을 찾아 나올 수 있는 힘을 주시고, 기쁨으로 헌금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아이 같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주님이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그 마음이 진심으로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께 관심을 두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자들의 모임이 천국이고, 그 천국의 모습을 지금 교회가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계급이 없고, 차별이 없고, 행위에 대한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면서 모여드는 그것이 바로 교회이며 천국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들이 종교 열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어보려고 하고 이 은석교회가 남들에게 자랑이 될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곧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고 나를 삼키는 열심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교회가 나타내야 할 모습은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 다 함께 주님의 힘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에 더 관심을 가지고 살면서 하나님을 아는 일에 게을리하고 있는 자신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어린아이 되는 것이고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천국에 거하는 것입니다.

 

 

 

 

종교열심, 교회에 대한 열심은 여러분을 삼킬 뿐임을 기억하시고 지금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이 종교열심이 아닌지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대한 열심이 여러분을 예배당으로 나오게 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모하는 그 마음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삶 되기를 바랍니다. 내 열심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모하는 그 힘이 나를 강권해서 예배하게 하고, 헌금하게 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나를 어린아이 같이 되게 하고 천국에서 큰 자로 여김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마 18:10-14) - 29강


성경은 맨 처음은 태초로 시작하고, 마지막은 주님의 재림으로 끝납니다. 창조와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 성경이고, 이 세상의 처음과 나중이 어떻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마지막 때는 분명히 심판이 있으며, 그 심판 후에는 영원한 천국과 지옥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도 지옥의 자리에서 천국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신자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것은 불신자들에게는 허무맹랑한 소리로만 들려집니다. 천국과 지옥이란 사람들이 세상에서 살 때 착한 일을 많이 하고 나쁜 일을 삼가도록 하기 위해서 종교가 만들어 낸 교리에 불과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머리에는 천국은 세상에서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이 가는 곳이고, 지옥은 나쁜 일을 많이 한 사람이 가는 곳이라고 여깁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과 지옥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에서도 동일하게 말합니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일단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전제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압축됩니다. 그리고 진실되게 교회 다니는 것은 교회 봉사와 여러 가지 선행을 가지고 증거로 삼습니다. 때문에 신자들도 천국은 열심히 교회 다니고 선행을 많이 한 사람이 가는 곳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렇다고 신자들이 천국과 지옥을 마음에 두고 사는 것도 아닙니다. 신자라는 사람들도 천국과 지옥에 대한 얘기를 하면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를 한다며 외면해 버리려고 합니다. 자신은 이미 교회에 다니고 열심히 믿고 있는데 이미 천국을 확보한 사람으로서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특히 지옥에 대한 이야기는 목사가 교인들을 협박하기 위한 술수 정도로만 생각해 버립니다. 물론 지옥 이야기를 교인들에게 경각심을 주어서 교회 일에 게으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기도 할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면서 지옥의 이야기를 할 때 신자는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국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든지 사람들에게 공통된 것은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을 좋아하고 지옥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당신 지옥 간다'라고 하면 당장 반발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더구나 신자에게는 지옥 간다는 소리가 크나큰 욕으로 들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옥 가는 것은 싫어하면서 어떻게 하면 지옥 가지 않느냐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삽니다. 불신자들이야 애당초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는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지라도 신자만큼은 불신자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신자는 천국과 지옥을 믿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소홀히 생각하며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에게도 천국과 지옥의 문제가 관심 밖이 되어 있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교회 다닌 것으로 천국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국과 지옥에 대한 문제를 그렇게 간단하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우리가 생각하듯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께서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 사람은 어린아이 같지 않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즉 '누가 크냐'를 따지는 그런 사고방식이 곧 천국 갈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누가 크냐'를 따지는 것은 인간의 자연 본성인데 그것을 지옥의 사고 방식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천국과 지옥은 우리가 생각하듯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지옥은 예수 믿지 않고 죄지은 사람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수 믿는다는 것이나 죄짓는다는 것이 현재 신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분명히 이것이 믿음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성경은 믿음이 아니라고 하고, 죄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죄라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봐도 '누가 크냐'라고 서로를 비교하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죄다는 것을 알았다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로 알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무엇이고 죄가 무엇인가를 알았을 때는 신자는 분명히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 힘써야 할 것이고, 죄를 멀리 하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관심 가져야 할 것은 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방해가 되는 것은 모두 잘라내 버리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손이나 발이 나로 하여금 범죄케 하면 찍어 내버리라고 합니다. 또 눈이 범죄케 하면 빼어 내버리라고 합니다. 아무리 소중한 내 몸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천국에 방해가 된다면 잘라 버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두고 사는 신자의 모습이다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잘라 버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몸에 대한 관심을 버린다는 것은 신체를 잘라내듯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각오로 오늘 말씀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나에게서 하나님 나라에 방해되는 것은 모두 잘라내겠다는 그런 결심으로 성경을 보지 않으면 성경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갈 수 없습니다.

 

 

 

 

10절에 보면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죄입니다. 누가 소자를 업신여기게 됩니까? 바로 제자들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소자를 업신여기게 됩니다. 세상에서 살던 방식 그대로 천국에서도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큰 자는 세상에서 많은 일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연히 자기보다 적게 보이는 사람은 업신여기게 됩니다. 그 사람을 보면서 '너는 적은 것을 얻지만 나는 큰 것을 얻는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소자를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에서 천국에서의 상급의 차이를 말하면서 열심히 봉사하고, 전도하고, 헌금하도록 강조하는 것은 결국 사람들에게 지옥의 사고방식을 가르치는 모습밖에 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에서 큰 자, 작은 자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자기보다 봉사가 적은 자, 교회 생활에 부지런하지 않는 자를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크고 적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차별을 두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소자가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소자를 무시하고 업신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자가 그들에게 나타남으로 해서 그들의 죄악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세상에서 복을 얻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십자가가 걸림돌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소자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입니까? 지난 시간에는 소자의 모습이 어린아이로 비유되었습니다.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소자로서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소자가 어떤 모습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소자란 잃어버린 양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양은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도 길을 잃어서 하나님이 다시 찾은 그 양을 더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세상 이치로 생각하면 한 마리보다 아흔 아홉 마리가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목자는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보다는 길을 잃어버린 하나를 기쁨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결국 목자는 어떤 숫자를 보거나 길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양의 능력과 힘을 대견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달리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바 되었다가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다시금 돌아오게 된 양에게서 보여지는 그 마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잃어버린 양입니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양은 어떤 모습입니까? 도움을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길을 찾을 수 없음을 절실히 알고 도움을 간절히 기다리고 찾는 그 마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찾으시고 기뻐하시는 신자의 모습은, 재능이 있어 가지고 봉사를 많이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은 아무런 힘이 없음을 알고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만을 간절히 사모하며 살아가는 그 신자를 하나님은 찾으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능력과 힘을 의지할 때는 나의 도움을 원치 않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모든 일을 함으로서 자기를 과시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에게서는 결국 '누가 크냐'고 물었던 제자들의 모습만이 보여질 뿐입니다. 모든 일을 자기의 힘으로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얼마나 했는가를 따져보고 자기의 것이 더 많아 보일 때 스스로 만족해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까지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고자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서 천국 간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이 사람은 단지 자신의 믿음과 열심으로 천국에 가게 된 것으로 여기게 될 뿐입니다. 만약 이런 사람들이 천국에 보인다면 그 천국에는 여전히 자기 자랑이 있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것은 지옥의 모습에 불과한 것입니다.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지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힘으로 삼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는 것까지 여러분이 힘으로 삼고자 하는 것을 요구하는 기도는 아닙니까? 돈을 힘으로 여긴 자는 하나님께 돈을 요구하고, 지식을 힘으로 여기는 자는 더 많은 지식을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흔적을 찾으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주어진 흔적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나와 있다는 것을 깊이 알고 감사하는 신자에게서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이런 신자만이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소자란 바로 이런 신자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이런 신자가 어린아이 같은 모습입니다.

 

 

 

 

사람이 '누가 크냐'를 따지지 않고, 자기의 행위를 가지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니면 도저히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아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기 때문에 사는 것을 아는 자가 어떻게 자기의 것을 내어놓겠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자기의 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은 흔적만 계속 나타낼 뿐입니다. 자신이 은혜와 사랑을 알게 된 것까지 모두 하나님의 간섭이 있었기 때문인 것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흔적을 가진 소자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신자를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바라보면 자연히 업신여기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음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은 자임을 모르기 때문에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소자를 누가 함께 하는가하면 천사들이 함께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소자가 귀하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귀하기 때문에 그 흔적을 가지고 사는 자를 천사가 지켜주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자기에게 주어졌음을 알고 감사하며 사는 자입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바 된 양이었던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흔적을 나타내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교회(마 18:15-20) - 30강


교회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할 때 사람마다 여러 가지의 대답이 있을 수 있지만 과연 성경적으로 정확하게 교회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교회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구원의 방주라고 하기도 하고, 교회가 신자를 천국으로 가게 하는 중보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어서 천국간다고 말은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다는 표를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에 다녀야 천국간다는 결론을 스스로 내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모든 정성을 쏟는 것도 아마도 이런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주일이면 교회나오는 이유도 교회나오는 것이 신앙 지키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표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신앙의 표시로서 교회나오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에 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하는 것이고, 복을 얻는 길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교회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가 현재 자신의 신앙생활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에 나와도 기쁨이 안된다는 말을 많이 할 것입니다. 또 사실 오늘도 교회에 나왔지만 기쁨과 즐거움으로 나온 분이 얼마나 될지 참으로 의문스럽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 자신에게 기쁨이 없고 즐거움이 없는 그 모든 원인은 교회에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분위기나, 설교, 만나지는 사람들, 교회가 하는 일들 이런 것들이 내 맘에 안들기 때문에 나에게 기쁨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교회 분위기가 좋고, 설교가 내 맘에 꼭 들고, 만나는 사람들이 나에게 친절하게 해주고 할 때 기쁨은 저절로 발생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들의 크나큰 착각입니다.

 

 

 

 

교회 나오는 기쁨이 없든 즐거움이 없든 그 모든 원인은 본인에게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책임을 교회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기쁨은 교회가 제공해주지 않습니다. 신앙의 기쁨을 교회가 제공해주려고 할 때 교회는 자연히 앞서 말한 대로 예배 분위기나 모든 것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보려고 애를 쓰게 될 것이고, 목사는 신자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는 말을 의도적으로 피하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 신앙인들은 교회를 부담없이 다니고자 합니다. 그 어떤 짐도 지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갔다가 돌아올 수 있는 교회를 원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서만 교회에 발을 들여놓겠다는 심사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생각들이 있다면 하루속히 그 생각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신자들이 교회에 대해서 오해할 때 같이 오해되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할 일이 뭐냐는 것입니다. 교회가 할 일이 무엇인가? 여러분들의 머리에는 일단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이 떠오를 것이고 그 다음에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선교하는 것, 다음은 구제하는 일, 즉 복음전파와 사회사업이 교회가 할 일의 전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신자들은 교회가 이런 일을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소속된 교회가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하고, 열심히 복음 전파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을 자신의 의로 여기고 스스로 만족해하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내교회가 저런 좋은 일을 한다는 것 때문에 마음뿌듯해 하고 자신도 헌금을 해서 그 일을 도왔다는 생각에 교회 일을 자기 소유화하는 것입니다. 내가 다니는 교회가 무엇인가 열심히 하는 것이 곧 자기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교회가 무엇인가 할 일을 자꾸 제공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일에 참여함으로 신앙의 만족을 누려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아무런 할 일이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무얼 하라고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불만이 있으신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불만은 교회가 열심이 없다, 뜨겁지가 않고 냉랭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뜨거움, 열심은 교회 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신앙의 모습은 교회의 일로도 보여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적인 열매로서 보여지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뭔가를 알고서 스스로 움직이는 신자, 교회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준 분위기에 대한 기쁨이 아닐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기쁨으로 누군가가 강요한 것도 아니라 스스로 할 일을 찾아서 움직일 때 그것이 교회에서 여러 가지로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뜨거움이고 열심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들이 이런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합니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단지 사람들의 모임에 불과합니다. 다만 왜 모였느냐? 어떻게 해서 모여지게 되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왜 모였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해서 모여지게 되었습니까? 오늘 여러분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해서 모여지게 되었습니까? 오다가다 만나서 우연히 모이게 된 것입니까? 그냥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것이다고 생각합니까? 사람들은 교회는 내가 가고 싶으면 마음대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교회를 무시하는 생각입니다. 교회란 내 마음대로 가고 싶으면 간다는 생각은 나를 교회로 가게 한 보이지 않는 손길의 힘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생각 때문에 교회가 할 일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도 오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교회로 모이게 된 것은 절대로 여러분 스스로의 의지가 아닙니다. 뭔가 여러분을 간섭한 손길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교회를 찾을만한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인류역사를 보면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원수로 등장한 일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니라 오히려 사탄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여러분들 스스로를 생각해 봐도 결론은 뻔합니다. 여러분들에게 과연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일주일의 삶은 누구를 위한 삶이었습니까? 하나님을 위한 삶이었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위한 삶이었습니까? 교회를 나온 것도 겨우 신앙을 지탱하는 명목으로 나온 것은 아닙니까?

 

 

 

 

인간은 죄악 가운데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자기만을 바라보고 자기를 위해서 세상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인간이 누군가를 위해서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러한 인간들이기 때문에 뭔가 나은 사람을 골라서 구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혹시 자신이 죄인이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는 좀 낫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그래 난 죄인이야, 그래도 도둑질하고, 강도질하고, 살인하고, 사기쳐서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사람보다야 낫지' 이런 생각은 없습니까? 남이 나에게 '너는 교도소에 있는 죄수하고 똑같은 인간이야'라고 했을 때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들보다야 낫다고 할 수있겠죠. 그러나 교도소에 갈만한 행동을 안했다는 것이 구원을 받은 조건은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과 똑같은 죄의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이나 나나 같은 것은 이기주의라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은 같습니다. 단지 이기주의가 커져서 교도소에 갔을 뿐이지 우리들에게도 이기심은 동일하게 존재하고 그 이기심이 알게 모르게 다른 이들에게 해로움으로 존재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선택이라는 구원의 방식을 채택하십니다. 즉 인간의 모습은 전혀 보지 않으시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선택을 보여주는 것이 구약성경입니다. 아벨로 시작해서 이어지는 선택이 지금 이 시간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이는 것도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이 자리로 밀어 넣으신 것이지 여러분의 신앙으로 스스로 찾아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모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의 힘에 의해서 모여진 모임을 교회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모여진 교회를 누가 무시합니까?

 

 

 

 

이렇게 모여진 교회라면 그 교회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나를 교회로 모이게 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과 부르심과 나를 붙드시는 그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할 일입니다. 보여주고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일입니다. 인간의 의로움과 열심과 사회적인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는 것을 보여주면 그것이 교회의 할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들은 하나님을 보여준다고 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고 할 때 남을 돕고 구제하는 쪽으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은 참으로 쉽습니다. 왜냐하면 남들이 좋아하고 환영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도와주는 것을 싫다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도와주는데 하나님을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여준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보여준다는 것은 자기 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어리석고 멸망으로 들어가는 길이라는 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때문에 어렵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삶이란 인간의 본성을 거스리는 것이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삶이라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생업도 여러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여러분의 모든 인생까지도 여러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없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어떤 모습으로도,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야 하기 때문에 너무 너무 어려운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때문에 교회가 할 일을 쉽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주일 오전 한시간 나와서 신앙을 지킬 수가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으로 신앙생활한다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은 그렇게 편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희생도 없이 아무런 부담도 없이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마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여러분, 눈을 들어서 주님이 계신 자리를 바라보십시오. 주님이 계시는 자리는 십자가이지 호화스럽고 편안한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 십자가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들어가기를 싫어하면서 어떻게 주님을 만날 수 있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자의 운명은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우리를 그곳으로 밀어 넣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천당가는 길은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은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 누구도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부르셔서 천국가는 자가 되게 하시고 교회로 모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럼 그 교회가 할 일은 하나님의 그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랑을 나타내는 것은 결국 용서받지 못할 자가 용서함 받은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용서받은 자로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서론이 아주 길었지만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교회가 할 일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형제가 죄를 범하면 권고하고 듣지 않으면 나중에는 교회에까지 말했다가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같이 여기라고 합니다. 이것은 교회는 죄가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는 것을 확고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만약 회개하지 않는 자는 교회에서 추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죄가 교회에 들어올 수 없다면 죄 없는 자가 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누구입니까? 결코 죄를 용납하지 않는 것이 교회라면 그 교회에 누가 들어 갈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로 모일 수가 있다면 그 죄의 문제를 누군가가 처리한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용서함을 입고 교회로 들어왔기 때문에 교회로 모인 우리가 할 일은 용서받은 자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죄는 하나님의 용서함을 모르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용서함을 아는 자가 소자이고, 용서함으로서 천국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누가 크냐'는 경쟁과 다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용서받은 것을 아는 자는 남을 용서하는 자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21-35절의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신자들이 생각하는 교회의 할 일은 뭔가 일을 해야 하고 법을 지켜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관심 두어야 할 일은 용서받은 자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나는 교회 나왔으니까 천국갈 것이다'라든가 '나는 이만큼 일했으니까 신앙이 좋은 신자다'라고 하면서 자신이 교회에 뭔가 한 것을 내세우는 사람은 교회에 합당치 않은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 용서함 받은 것을 아십니까? 용서함 받아서 교회 왔다는 것은 내 잘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자기의 것을 전혀 주장하지도 않고 내세우지도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분은 천국에 사는 분입니다. 언제나 예수님을 찾고자 교회에 나오십시오.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무엇을 해도 나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여지고, 용서가 보여지고, 사랑이 보여지는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에게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사느냐를 묻습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자인데 왜 백 데나리온을 포기하지 못하고 살아갑니까? 그것이 죄입니다. 아무쪼록 용서를 바로 아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에게서 보여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신 교회의 모습입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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