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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일곱번째복9팔복)/아더핑크

하나님아들 2014. 9. 11. 19:46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이 일곱째 복은 팔복 중 가장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화평케 하는 자라는 단어의 정학한 의미와 범위를 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주 예수께서는 “화평”(평화)을 사랑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또는 ”화평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나니“라고 하지 않으시고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셨다.

겉으로나마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여기에 담긴 것이 자연인에게서 가끔 발견되는 일치와 조화에의 사랑 및 투쟁과 분규에의 증오보다 더 뛰어난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보이는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참된 해석을 모색하는 데에 길잡이가 되는 것에는 다음 세 가지가... 있다. (1)우리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의 성품 (2)본문이 일련된 팔복에서 차지하는 위치 (3)그 다음의 복과의 연결 관계 등이다.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심한 경멸과 증오로써 이방 민족들을 대했으며, 그 민족들에게는 하나님의 선민에게 정복당하거나 멸망당할 때까지, 메시야의 지휘 아래 일련의 공격전이 끊임없이 가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여호수아서에서 선조들의 경험에 대해 읽은 것을 기초로 한 생각이다). 스스로의 판단에 분명히 유대인들은 이교도 민족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잘못을 복수해 줄 왕인 메시야 밑에서 일할 “복 있는”자의 칭호를 받을 만했다. 그러나 새로운 섭리속의 성령은 그것과 얼마나 다른가! 또한 그것은 그 질서를 세운 분의 탄생을 축하한 천사들의 찬송과 얼마나 아름답게 일치하는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의 평화로다!”(존 브라운 박사)

화평케 하기 위한 노력이 있기 전에 먼저 당연히 화평의 영이 있어야 하지만, 이 일곱째 복은 성품보다는 행위에 더 관계가 있다.

산상수훈의 이 첫 부분에서 주 예수께서 자기 왕국의 신민이자 시민인 사람들의 성품을 정의하고 계시다는 점을 기억하자. 우선 주님은 거룩한 역사가 일어난 사람들의 첫 체험의 견지에서 그들을 묘사하고 계신다.

처음의 네 축복은 앞서 말했듯이 그들의 마음의 소극적 은혜들을 제시하는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신민들은 스스로 충분하게 여기지 않고, 의식적으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다. 스스로 만족해 하지 않고 자신의 영적 상태로 인해 애통하는 사람들이다.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겸손한 즉 온유한 사람들이다. 스스로 의롭게 여기지 않고, 다른 데서 오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다.

그 다음의 세 가지 복에서 주님은 적극적인 은혜를 지적하신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긍휼을 베푼다. 성령으로부터 영적인 본성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눈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 만큼 단순해져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만드신 화평 속에 들어갔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다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화평을 누리게 하는 데에 주님에 의해 쓰임 받기를 갈망한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이 일곱째 복의 의미를 규명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은 이 복과 바로 다음에 오는 복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 관계이다. 앞의 여러 장에서는 팔복이 명백히 한 쌍씩 묶여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었다. 심령의 가난에는 늘 애통이 수반되며, 온유나 겸손에도 하나님의 의를 찾는 굶주림과 목마름이 수반된다. 인간을 향한 긍휼은 하나님을 향한 청결한 마음에 연합되며, 화평케 하는 것은 의를 위해 핍박 받는 것과 쌍을 이룬다. 따라서 10-12절이 9절을 푸는 열쇠가 된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다른 관점으로부터 일곱째 복으로 접근하면 같은 결론에 이른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옛 계약하의 자기 백성과 새 계약하의 자기 백성에게 각각 주신 임무 간에 현저히 나타나는 대조를 고려해보자. 율법이 주어진 뒤 이스라엘은 칼을 들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여호와의 적들을 멸망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교회에게 다른 명령을 주셨다. 이같은 복음의 경륜을 통해 항상 우리들은 십자가의 사자로서 만민에게 나아가 본성적으로 우리 주님과 원수된 사람들의 화해를 모색해야 한다.

둘째로 이 화평케 하는 은혜는 그 앞 절에 언급된 여러 가지 은혜를 보충한다. 이 복이 일곱째가 되었다는 사실이 가리키는 바는 아마 그것이 바로 이 속성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성품에 완전성과 전체성이 갖추어진다는 것을 가르치시려는 주님의 의도였다는 점이다.
확실히 결말을 지어야 할 것은 화평의 사신으로서 보냄을 받는 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특권이라는 점이다. 더군다나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같은 죄인들의 구원에 아무 관심이 없다면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불완전한 기독교이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물려받는 복된 유산을 나누어 갖게 되리라고 기대할 권리가 없다.

셋째로 우리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되는 이 문제와 우리 주님이 10-12절에서 언급하고 계시는 핍박 사이에 명백한 연결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설교에서 그리스도인의 성품과 체험의 이 두 양상을 나란히 언급하심으로써 제자들이 본분을 다하는 중에 당하는 반대가 그들이 부름 받은 섬김에 충실한 결과라는 것을 가르치고 계신다. 따라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본문에서 말하는 화평케 함이 우리가 바로 하나님을 상대로 하여 적극적으로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화해시키려는 목적을 위해 하나님 손에 쥐어진 도구라는 사실을 우선적으로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다(참고 요 15:17-27)

대부부의 주석가들의 설명이 매우 불만족스럽기 때문에 우리는 본문에서 말하는 화평케 하는 자가 죄인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간청하는 사람들(고후 5:20)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는 몇 가지 이유들을 상당히 길게 다루었다.

주석가들은 이 복에서 합일을 꾀하고 터진 로(路)를 치료하며 사이가 멀어진 자들을 다시 가깝게 하는 사람에게 선포된 그리스도의 축복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한다. 우리도 그것이 매우 복된 행동이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내주에 힘입어 평화와 일치된 것을 사랑하는 자가 된다는 점에 완전히 동의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여기서 염두에 두고 계신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악인에게는 평화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기를 간절히 바란다(욥 22:21). 믿는 자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다는 것을 안다(골 1:19-20).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다른 사람에게 주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발은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고 있다”(엡 6:15).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관하여 증거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런 성도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다.

“아름답도다! 화평의 복음을 전하고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자의 발이여!”(롬 10:15). 우리 주님은 그러한 사람들 모두가 복되다고 선포하신다. 사실 그들은 복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영혼 안에 있는 평화를 누린 후에는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이 평화에 이끌려 오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

넓은 의미로 적용될 때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말씀은 거친 물결을 잠잠케 하기를 기뻐하고, 잘못을 바로 잡으려 하며, 어려움을 처리하고 제거함으로써, 그리고 혹독한 것들을 중화시키고 가라앉힘으로써 우호관계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에게 있는 그러한 심령을 가리키기도 한다고 볼 수 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일컬음이라는 단어는 여기에서 “승인됨”을 의미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아들로 인정하게 되신다는 뜻이다.

그분은 “평강의 하나님”(히 13:20)이시다. 놀라운 속죄의 계획 속에 있는 그 분의 위대한 목적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는 것이다(엡 1:10). 그래서 기독교 진리의 영향 아래에서 화평케 하는 자된 모든 이들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계획 속에서 “순종하는 자녀들이”(벧전 1:14)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같은 행동 원칙으로 활기에 차 있음을 보여준다.(존 브라운 박사)

세상이 그들을 광신자라고 경멸하며, 종교학 교수가 그들을 편협한 종파의 신도로 간주하며, 친지들이 그들을 바보로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지금 그들을 자기의 자녀로 인정하시고, 그 특유의 배려의 표로 그들을 구별하여 그들 속에 계사는 성령으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그들 자신에게 증거 하게 하신다. 그러나 닥쳐올 그날에 주님은 온 우주가 함께 보는 앞에서 그들과의 관계를 공개적으로 서약하실 것이다. 그들의 현재 생활 상태가 아무리 천하다 해도, 동료들에 의해 아무리 멸시와 오해를 받는다 해도, 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마 13:43). 그 때, 오래 기다리던 대로 영광중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다(롬 8:19).

출처 : 개혁주의 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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