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복음서!!!

[스크랩]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 5:10)/팔복 (여덟째 복)/아더핑크

하나님아들 2014. 9. 11. 19:47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0)

그리스도인의 삶은 인간 이성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지만, 영적 지성으로는 쉽게 이해되는 이상한 역설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아주 이상하게 보이는 비탄으로 애통하기도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모든 열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만족의 근원과 접촉하게 되었지만, 목마른 마음처럼 갈망으로 헐떡이기도 한다(시 42:1).

그리스도인은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고 곡을 만들기도 하지만, 날마다 깊이 신음하고 있다. 그의 체험이 종종 고통스럽고 당혹스러운 것이지만, 세상의 금과 은을 다 주어도 그 것에서 떠나지 않으려 한다.

영문모를 이 역설이야말로 참으로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랴!

본문이 불러 일으키는 생각은 바로 이상과 같은 것이다. 단지 이성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치고 욕을 먹는 자, 핍박받는 자, 비방을 받는 자가 복 있다는 결론을 누가 내리겠는가?

인간의 저주와 그리스도의 축복이 같은 사람에게서 만나야 한다는 것은 인간이 타락했다는 강한 증거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고 욕을 먹고 모든 악한 말을 들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누가 했었겠는가? 그리고 악한 사람들이 정말로 이웃을 속이고 해치는 자를 사랑하고 정의를 미워하는가? 그렇지 않다. 자기 자신에 관한 의는 그들이 싫어하지 않는다. 그들의 증오심을 자극하는 것은 하나님과 종교에 관한 종류의 의일 뿐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는 데에만 만족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그만둔다면(미 6:8) 평안하게 뿌만아니라 박수갈채를 받으며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을 것이다(딤후 3:12). 그러한 삶이 사람들의 경건치 못함을 책망하여 원한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앤드류 풀러).

10~12절은 분명히 하나가 되어 이 일련의 팔복 중 여덟째이자 마지막 복을 이룬다. 이것은 이중적인 행동 방침에 이중적인 축복을 선포하고 있다. 이것은 곧 여덟 번의 복을 두 가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10절에 나와 있는 것은 팔복 전체의 부록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그 앞의 여러 절에서 그리스도께서 그 성품에 관해 묘사하신 사람들이 반드시 겪게 될 체험을 나타내고 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기 때문에(롬 8:7),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으면 닮을수록 하나님의 적들이 가진 앙심을 자신에게 내려놓을 것이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옳게 살기 때문에 반대를 받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본분을 다하는 사람들은 그 자체가 벌써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사는 사람들을 정죄하기 때문에 그들의 증오심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이 때 일어나는 핍박은 방해와 조롱으로부터 억압과 고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10~12절에는 일곱째 복을 보충하는 단어가 담겨져 있다. 사탄의 분노를 일으키고, 그 추종자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것은 바로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는 그리스도인의 노력이다. 주님과 주님의 복음에 충성하면 우리 자신의 평화가 깨뜨려져 투쟁과 싸움이 예상되게 되는데, 주님은 여기서 우리로 하여금 바로 그것을 기대하도록 준비시키신다.

이에 대한 증거는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가장 가혹한 반대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위한 섬김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단번에 증명했듯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11절에서 주님의 제자들이 본분을 다할 때 받아야 할 것으로 기대되는 고난 세 가지를 언급하신다.

첫째는 욕, 즉 말로 하는 욕지거리 또는 욕설이다.

둘째는 핍박이다. 이 단어는 “뒤쫓다”는 뜻을 가진 희랍어 단어를 문맥에 맞게 옮긴 것인데 이 경우(신체적으로나 말로써) “괴롭히다”는 뜻이 있다. 다소(Tarsus)의 사울이 그리스도에게 붙잡히기 전에 교회에 가한 것과 같은 종류의 박해를 그것에 들 수 있다(행 8,9장).

그리스도께서는 셋째 유형의 고난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신다.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주님은 자기의 성도들이 당해야 할 명예 훼손을 이렇게 묘사하신다.

이 마지막 고난은 예민한 기질에 이중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며, 마귀가 하나님의 자녀들의 고난에 도를 더하게 하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만들어 내는 무수한 중상 모략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다”는 말과 “나를 인하여”라는 말씀이 주는 경고는, 우리가 오직 주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반대와 증오를 받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잘못된 행동이나 천박한 태도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벧전 2:19~24절 참고).

박해는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의 차지였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다. “어떤 연고로 죽었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요일 3:12)

요셉은 자기 형제들에게 핍박을 받았으며, 애굽에서도 의로움 때문에 투옥되었다(창 37, 39장). 모세가 욕을 먹은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출 5:21, 14:11, 16:2, 17:2). 사무엘은 버림을 당했다(삼상 8:5). 엘리야는 경멸을 당했고(왕상 18:17) 핍박을 받았다. 미가야는 증오의 대상이었다(왕상 22:8). 느헤미야는 억압과 모욕을 당했다(느 4장).

하나님의 신실한 증인이신 주님 자신도 자신의 사역의 대상이었던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고, 베드로와 요한은 옥에 갇혔으며, 야고보는 목베임을 당했다. 이와같이 사도 바울의 신앙생활과 사역의 전 과정은 쓰라리고 무자비한 박해의 오랜 연속이었다.

사실 오늘날 성도가 당하는 핍박은 사도 시대에 비해 상당히 부드러운 형태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핍박이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해 우리는 오랫동안 법적인 핍박으로부터 보호를 받아 왔지만 사담의 적의는 스스로를 나타낼 다른 ㄱ리과 수단을 찾고 있다.

핍박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위로의 진리를 기억하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요한복음 15:19-20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결코 철회된 적이 없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세상의 증오는 조소와 비난, 중상 모략 및 배척으로 나타난다. 거룩한 은혜로 인해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기를!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20)

주 예수께서는 여기서 주님에의 헌신을 통해 고난을 받게 될 사람이 복되다고 선포하신다. 이들이 복된 것은 구주의 고난에 참여하는 말할 수 없는 특권이 주어지기 때문이다(빌 3:10). 그들이 복된 것은 그러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며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하기 때문이다(롬 5:3-5). 그들이 복된 것은 닥쳐올 위대한 그 날ㅇ에완전한 보상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참으로 값진 위로가 있다.

십자가의 군사는 악한자의 화전이 날아온다고 당황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거룩한 갑주를 더욱 단단히 졸라 매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려는 자기의 노력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몇몇 사람들이 악한 말을 한다고 해서 용기를 잃으면 안된다. 그리스도인은 불같은 연단을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증거라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그리스도께서 신실할 때 수반되는 고통은 끈기 있게 참아야 할뿐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해야 할 이유가 세 가지 있다.

(1) 이 고통이 바로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에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의 속죄를 위해 너무나 많은 고난을 받으셨으니, 우리가 그분을 위해 적은 고난을 받을 처지에 놓이게 될 때 크게 기뻐해야 한다.

(2) 이러한 연담에 의해 우리는 고귀한 순교자들과 교제를 나누게 되는데, 그것은 고통을 당함으로써 거룩한 선지자 및 사도들과 연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제에서 비난은 찬양이 되고, 치욕은 영광이 된다.

(3)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을 받은 우리들에게는 하늘에서 큰 상이 약속되어 있다. 진실로 우리는 현재의 투쟁이 아무리 모질어도 기뻐할 수 있다. 또한 잠시 죄의 즐거움을 누리기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기를 택했기 때문에(히 11:25) 주님의 확실한 약속에 따라 주님과 함께 다스릴 것이다(롬 8:17).

베드로와 요한이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간 것(행 5:41)을 기억하라. 그래서 바울과 실라도 빌립보 감옥에 갇혀 등에 피를 흘리면서도 ‘하나님을 찬미“했다(행 16;25). ”더 낫고 영구한 기업이 있는 줄“알기 때문에 자기의 ”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사람들이 있다(히 10:34).

박해와 오해와 억압을 받는 성도들이 거룩한 은혜에 의해 이 귀중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부터 꼭 필요한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기를!

출처 : 개혁주의 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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