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2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목차>
선한 일 (마 19:16-26)
버림과 좇음 (마 19:27-30)
은혜의 나라 (마 20:1-16)
나귀 타신 예수 (마 21:1-11)
저주 받은 나무 (마 21:18-22)
회 개 (마 21:28-32)
악한 농부 (마 21:33-41)
머릿돌 (마 21:42-46)
천국은? (마 22:1-14)
어떻게 살것인가? (마 22:15-22)
신자의 하나님 (마 22:23-33)
사랑 (마 22:34-40)
다윗의 주 (마 22:41-46)
차별 없음 (마 23:1-12)
종말 (마 24:3-14)
깨어 있으라 (마 25:1-13)
종의 비유 (마 25:26-30)
주의 마음으로 (마 25:31-46)
몸과 피 (마 26:26-29)
기도하라 (마 26:36-40)
검으로 망함 (마 26:47-56)
베드로의 부인 (마 26:69-75)
힘없는 메시야 (마 27:1-10)
바라바냐 예수냐 (마 27:11-26)
조롱받는 메시야 (마 27:32-44)
주님의 죽으심 (마 27:45-56)
신자의 능력 (마 27:57-66)
불쾌한 부활 (마 28:1-10)
예수님의 분부 (마 28:16-20)
선한 일(마 19:16-26) - 31강
인간의 본성에는 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악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자기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본성은 모두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발전시키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위해서는 이웃도 희생시키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은 이 본성에 대해서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천국은 이 본성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세상에서는 이 본성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지혜로 통용되지만 천국에서만큼은 결코 용납되지 않기 때문에 이 본성이 있는 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대로 바꾸거나 없애버릴 수 없는 본성의 문제를, 언제나 내 속 깊이 자리하고 수시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을 천국에 들어가는 장애물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 문제 앞에서 우리는 난감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인간을 변화시켜서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얼마나 무지한 것인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켜서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자는 발상 또한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결국 내가 살고 있는 환경을 좋게 만들어서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아 보겠다는 인간의 본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적인 것이 변화되지도 않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본성의 악함과 그 뿌리의 깊음을 절실히 깨닫고 결국 천국은 우리의 힘도 아니며, 우리의 의도 아니고, 오직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라는 것을 깊이 깊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만큼 악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그 어떤 희망도 두지 않는 것이 곧 믿음이며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신이 변화되어지기 위해서 종교적인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십자가 없이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신앙은 좇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사셨던 주님의 길을 좇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본성적인 삶이고, 무엇이 주님을 좇는 삶인가를 잘아야 합니다. 본성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결국 자기의 욕심을 좇았으면서도 스스로는 그것을 신앙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19장에서도 자신의 본성을 쫓아 행하였으면서도 스스로는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또 하나는 본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주님을 떠나는 사람이 나오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바리새인들인데 이들은 예수님께 이혼 문제에 대해서 언급을 합니다. 즉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3절)라는 질문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말했던 '이혼을 하려면 이혼증서를 써주라'는 법을 빌미로 해서 이혼해도 괜찮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이 책망하신 것은 '너희들이 하나님의 법을 빙자해서 너희들 욕심을 채운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바리새인들은 다른 여자에 대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이혼증서라는 법을 이용한 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혼 증서만 써주면 아내와는 얼마든지 이혼해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 살면서도 스스로는 말씀은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듣는다고 해도 모든 관심이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것에 있기 때문에 천국과는 상관없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법을 지키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을 이용할 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향하여 하신 비난이었고 오늘 우리들을 향하신 책망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신앙의 행위, 즉 예배나 헌금이나 기도, 이러한 모든 행위들이 나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법적인 행동이 될 때 천국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신앙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등장하는 사람은 부자 청년입니다. 오늘은 이 청년의 이야기를 중점으로 해서 천국의 성격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청년은 예수님께 나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이 청년의 질문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 어떤가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청년은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목적이 자기의 영생에 있습니다. 즉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선한 일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에 갈 수 있는 조건을 자기에게 두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하는 것에 따라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성경은 왜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리새인이나 청년이 예수님께 하는 질문이나 대답사이에서 뭔가 우리가 크게 오해하고 잘못 생각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고쳐주시기 위해서 바리새인을 동원시키고 청년을 동원시켜서 그와 같은 질문을 주고 받은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 이 청년의 모습이 지금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다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청년의 이야기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청년이 예수님께 선한 일에 대해서 물었을 때 예수님이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무엇을 어떻게 해라는 말씀이 아니라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17절)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만 선하시고 나는 선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선한 일이란 이미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나타내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또 다른 선한 일에 대한 계명을 가지고 오시지 않았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청년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계명이 선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자 청년은 '어느 계명이오니이까'라고 묻고 예수님께서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시자 그 모든 것을 지키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청년의 생각에는 계명의 모든 것을 지켰으니까 자신은 천국에 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법적인 신앙 생활의 함정입니다. 신앙 생활을 할 때 어떤 기준을 정해서 하다보면 그것을 잘 함으로서 자신은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청년의 생각을 깨버리는 것이 21절의 말씀입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청년에게 '네가 계명으로 온전해 지고자 한다면 어디 해봐라 가서 네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 나누어 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청년은 자신의 계명을 지킨 삶을 선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은 선하지 않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구제를 말씀하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전 재산을 팔고 주님을 좇으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행동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지 자신의 모습을 바르게 알고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그 손을 잡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에게는 선한 것이라고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선한 일을 우리가 믿고 순종할 때 우리는 천국으로 인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신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도저히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선한 일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하신 선한 일을 따르는 것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믿고 좇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법적인 계명을 지키는 것 같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좇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신을 이해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남을 위해서 희생하고 버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이것이 온전하신 하나님의 선한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대로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청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네 소유를 다 팔아라'는 것입니다. 결국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간 것은 자기의 소유를 포기하지 못한 것 때문입니다. 이 청년의 모습이 바로 이 자리에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인간의 본성이 천국에 가는데 장애물이 되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소유욕입니다. 무엇이든 자신의 소유는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 본성이 천국의 장애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청년과 같이 주님의 요구 앞에서는 근심하며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습을 두고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십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 제자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25절)라면 놀랍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세상의 그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26절)고 하십니다. 사람이 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선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청년의 잘못은 선한 일을 자기 스스로 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청년은 열심히 계명을 지키면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천국에 가는 길 인줄로만 알았습니다. 열심히 예배드리고, 열심히 헌금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 믿는 것인 줄로 착각한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따르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천국에 함께 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에게 있는 옛 사고방식 그대로는 따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에서 나오는 사고방식과 예수님의 사고방식이 서로 충돌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은 항상 내가 소유하는 것입니다. 천국까지도 내가 소유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뭔가 값을 치르면 천국을 소유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값을 치르기 위해서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유가 많은 자는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무소유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선한 것은 무소유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정신이었습니다. 소유와 무소유가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소유하고자 하는 본성은 우리에게서 사라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 악한 본성이고 이것을 가지고서는 주님을 다를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혜는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지 인간 스스로의 깨달음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만약 무소유의 정신이신 주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그것은 내 신앙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인간의 사고방식을 싫어하고 예수님의 사고 방식을 좋아하며 따르고자 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안되는 일을 하나님은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인간의 소유욕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한 일만이 이길 뿐입니다. 그러나 소유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 안에 예수님의 정신이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좋아서 주님을 따라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날마다 내 안에 소유욕과 싸우면서 말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열심을 믿지 말고, 여러분의 종교 행위를 믿지 마십시오. 믿을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내 소유욕을 내가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우린 항상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부자는 돈이 많은 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소유욕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부자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무소유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어도 그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행복의 조건도, 천국에 가는 조건도 세상의 소유에 있지 않음을 알고 주님만을 좋아하고 주님을 따르는 자가 무소유로 사는 자입니다. 이러한 삶을 위해서 날마다 하나님께 구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버림과 좇음(마 19:27-30) - 32강
그것이 뭐 그렇게 큰 문제냐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은 우리의 생명과 연관이 되어있는 문제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부르기만 하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이름을 그토록 열심히 부르고 제사를 드렸던 이스라엘은 왜 선지자들로부터 책망의 소리만 들은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선지자들의 외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것으로 안심하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찾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나의 목표와 힘을 버리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신앙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에게는 하나님만의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 앞에서 나의 관심은 버려지는 것이 신자에게 있어야 할 당연한 모습입니다.
지난 시간에 영생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 '영생을 얻으려면 어떤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청년의 오해는 자신이 선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청년에게 요구하신 것은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라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청년에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선한 일이란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그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기 때문에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 자신을 좇아야 한다는 의도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을 좇기 위해서는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좇아야 하는 것입니다.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이 부자 청년은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모습만이 아니라 당시 제자들의 모습도 그 청년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 증거는 예수님께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고 하셨을 때 제자들이 심히 놀라면서 "그런즉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리이까"라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놀란 것은 예수님을 좇는다는 것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버려야 가능한 것인 줄을 몰랐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제자들의 심성 속에도 재물에 대한 미련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제자들은 청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들에 대한 잘못을 지적 당하고 있는 그런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할테니까 너는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따라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따라가는 것이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청년은 자기의 선한 일을 통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는데 까지는 가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릴 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에게서는 결코 구원의 조건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그 어떤 행위도 구원의 조건으로 등장할 수 없습니다. 우린 다만 하나님이 하신 선한 일을 따를 뿐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 때문에 부자가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까?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천국은 자기 소유를 버리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소유를 가지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고 합니다. 이 무소유는 본문에서만 강조하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삶이 무소유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29절을 보면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영생이 주어지는 상태의 조건적인 것을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은 소유가 아니라 무소유된 상태에서 영생이 주어진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왜 천국은 우리에게 버릴 것을 요구합니까?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버리지 않으면, 무소유 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 중에 그 누구가 천국에 갈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세상에 자기의 소유도 전혀 없고, 혈족도 없는 혈혈단신인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버림이라는 것, 즉 무소유 개념은 그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재산을 다 팔아 남 줘 버리고, 부모 형제도 다 버리고 떠난다는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29절의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실제로 모든 재산을 버리고 부모 형제까지 버린 사람이 있다고 하지만 본문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부모 형제를 버려야 주님을 좇을 수 있다는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때 옛날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는 문자적으로 이행할 수 있다고 해도 주님이 계시지 않은 지금은 주님을 좇는다는 것이 어떻게 이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흔히 생각하는 대로 다른 나라에 선교사로 나가는 것이 주님을 좇는 것입니까? 그러면 선교사 말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실제로 재산과 부모 형제를 버리는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를 좇으라는 말씀을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주님만을 사랑하라'는 의미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만 사랑하는 것을 버림이라는 의미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소유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고 관심입니다. 따라서 무소유라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이 다 버려라는 의미가 아니라 나에게 있는 것을 사랑하고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더 관심이 가 있고 주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이 이런 의미로 해석할 때, 여러분은 은연중 현재 자신의 소유를 버려야 한다는 부담에서 해방되는 느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뭔가 숨통이 트인다는 기분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곤란합니다. 주님께 더 관심이 가 있고 주님만 사랑한다는 것은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이 오늘 다 사라진다고 해도 여전히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 삶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것이 나를 살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에 가치를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는 모습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신자는 세상의 것이 얼마가 있든 거기에 상관치 않고 주님만을 바라봅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사랑합니까?
27절에서 베드로는 부자 청년의 이야기 뒤에 자기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다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아마 베드로는 재물을 버리지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간 부자 청년과 자신을 비교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부자 청년에 비하면 신앙적으로 우월한 사람인 것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였던 것입니다. 즉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주님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결국 주님보다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붙잡히셨을 때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을 때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세상의 것을 버리라는 말씀을 하신 주님의 의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내 이름을 위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왜 '내 이름을 위하여'라는 말이 버리라는 말 앞에 나와야 합니까? '내 이름을 위하여'라는 말이 없이 그냥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라고 말씀하면 안되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는 행동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만한 일이지만 주님은 행동 자체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하느냐'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라는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해도 자기를 위하여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 무엇인가 할 일을 가르쳐 달라고 했지만 그것은 자기의 영생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자기 구원을 위해서 뭔가 자기가 할만한 일을 찾는 것입니다. 신자가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구원에 매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뭔가 할 일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자신이 신자임을 확인하고 안심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찾아다니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이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자기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다고 말하는 것도 결국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신자가 하는 모든 일을 오직 하나님의 뜻이 보여지기 위해서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좇는 것입니다. 내 열정, 내 열심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성취되는 것을 기뻐하며 움직이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모든 관심에서까지 떠나서 주님을 이름을 위해서 사는 것이 곧 주님을 믿는 것이고 이 믿음으로 영생을 상속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생은 우리의 그 어떤 행위로도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한다는 것에 대해서 많은 생각들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 즉 하나님의 뜻 앞에는 나라는 존재는 사라져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는 것까지 자기를 위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나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위하는 모습은 이웃에 대한 여러분의 섬김과 사랑을 통해서 보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나의 편안함을 지키기 위해서, 나의 유익을 위해서 주님의 뜻을 무시하고, 이웃이 나로 인해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의 기회를 끊어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하다못해 신자의 모임의 자리에 참석하는 것까지도 이웃의 유익을 생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의 유익을 앞세우다 보니까 소홀히 여겨버리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아닙니까? 이것은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28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지금 예수님 앞에 있는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은 아닙니다. 30절에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리라"고 말씀하는데 이 말씀들을 복합적으로 생각해 보면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지금 제자들같이 외적으로 따른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며 마지막 때까지 주님만을 사랑하며 주님만을 바라보며 사는 자가 주님을 따르는 자이고 영생을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주님을 따르고, 지금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다 된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세상 것보다는 새로운 나라의 주님을 사모하며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될 자가 많다는 얘기를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영생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하신 선한 일,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가는 것만이 필요한데 그것까지도 우리의 의지, 우리의 힘으로 될 수 없는 일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을 깊이 깨달으며 주님을 의지하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나라(마 20:1-16) - 33강
무소유라는 것은 나에게 세상의 것이 얼마가 주어져 있든 그 소유물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자신에게 있는 것을 사랑하거나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더 사랑하고,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버린 자가 영생을 상속받는다고 말씀 하신 것은 무엇이 더 가치 있는 것이냐를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버린다는 것은 가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은 신자가 영생을 상속받는데 있어서 세상의 것은 그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가 세상의 것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까? 영생의 가치를 아는 자입니다. 천국의 가치를 아는 자만이 세상의 것을 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천국을 소망한다고 말하며, 영생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임을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의지하고 삽니까? 내가 천국 백성임을 알고 세상의 것이 있든 없든 주님만 의지하는 삶을 삽니까? 물론 하나님 나라가 영광의 모습으로 완성되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때가 되면 신자 아닌 사람들까지도 진짜 영광되고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가서 천국에 들어갈 자와 들어가지 못할 자로 구분하시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 땅에서 그 모습이 구분된 자로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세상에 살면서 이미 천국에 가 있는 자로 살아가는 사람을 신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들은 이미 천국을 알고 살기 때문에 세상 재물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세상에 가치와 소망을 두지 않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자가 세상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는 자이며 이 모습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의 구별된 모습입니다.
신자와 불신자는 교회 출석을 가지고 구분하지 않습니다. 교회 출석이란 불신자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즉, 그 마음에 천국이 없는 자라 할지라도 교회는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를 단지 자기의 소망과 욕심을 이뤄주는 곳으로만 이해합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기 위해서 교회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채우기 위해서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전혀 다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서 천국 백성된 것에 감사하면서 교회로 모입니다. 은혜를 서로 서로 나누기 위해서 모이고, 은혜를 아는 자로서 바르게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하며 십자가를 바라보고 회개하기 위해서 모이고, 자신을 천국의 소망으로 더욱 더 채우기 위해서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현재 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며, 무소유로서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이런 신자의 모습은 우리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된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때문에 신자들은 항상 이런 모습을 사모하면서 주님께 기도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천국은 어떤 법칙과 원리로 살아가는 나라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라고 말합니다. 즉 본문에 나오는 집주인의 마음이 곧 천국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포도원 주인과 품군의 품삯의 관계를 잘 살펴보면 천국이 어떤 곳인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포도원 주인이 품군을 얻기 위해서 이른 아침에 나갑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 삼 시, 제 육 시, 제 구 시, 제 십일 시에까지 계속 나가게 됩니다. 유대인의 시간 계산법은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를 12등분해서 해뜨고 몇 시간 경과, 이런 식으로 계산합니다. 따라서 해뜨는 시간을 아침 6시, 해지는 시간을 저녁 6시로 볼 때 제 삼시는 해뜬 후 세시간을 말하는 것으로서 아침 9시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포도원 주인은 품군을 이른 아침부터 시작해서 아침 9시, 12시, 오후 3시, 5시에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품군으로 부름 받은 시간은 각각 다르지만 일을 마치는 시간은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품군들이 불려 나온 시간에 따라서 일을 한 시간도 각각 다르기 마련입니다. 만약 세상적인 방식으로 계산한다면 일을 한 시간에 따라서 품삯이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일한 시간을 계산하지 않고 모두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의 품삯을 줍니다. 한 데나리온이란 당시 어른들의 하루 일당을 말할 때 쓰는 단위입니다. 현재로 계산하면 약 3-4만원 정도의 액수입니다.
그런데 모든 품군에게 동일하게 품삯을 줬다는 것이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일찍 온 품군들이 포도원 주인에게 원망을 한 것입니다. 즉 늦게 와서 한 시간만 일한 사람들과 온 종일 일한 자기들이 똑같은 품삯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포도원 주인은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합니다. 나중에 온 사람에게 똑같이 주는 것은 주인의 마음이고 어쨌든 너는 약속한 대로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았으니까 불평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일찍 온 자로서 아무리 약속한 대로 품삯을 받았으니까 할말이 없다고는 하지만 늦게 와서 1시간만 일한 사람도 똑같이 받는 것을 볼 때 불평이 나지 않겠습니까? 뭔가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그 불평이 드러나도록 합니다. 만약 주인이 품삯을 계산할 때 일찍 온 사람부터 계산하여 돌려보낸 후 늦게 온 자들에게 품삯을 줬다면 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일부러 늦게 온 자들부터 계산을 함으로서 일찍 온 자들에게 뭔가 기대를 갖게 만든 것입니다. 일찍 온 자들이 늦게 온 자들이 받는 품삯을 보고 자기들은 더 받을 것으로 기대하였다는 것은 자기의 공로를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1시간 일한 저사람보다는 하루 온종일 일한 자기가 더 공로가 크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내 공로가 더 크니까 더 받아야 한다는 것은 세상에서는 당연한 생각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천국은 세상과는 반대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이와 같이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교회에 먼저 출석한 자가 나중되고 늦게 출석한 자가 먼저 된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본문을 통해서 천국에서 먼저된 자가 누구인가를 말씀하고 있을 뿐입니다. 교회를 일찍 출석하든 늦게 출석하든 하나님 앞에서 먼저 된 자는 자기의 공로를 생각하지 않고 은혜를 생각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은혜를 아는 자의 편이지 인간의 공로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자가 하나님이나 천국에 대해서 오해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을 많이 한 자를 칭찬하시고 천국에서도 일을 많이 한 자가 더 많은 상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많이 한 자가 많이 받는다는 것은 세상적인 방식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세상과는 반대입니다. 세상적인 법칙과 원리가 결코 통용되지 않는 곳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늦게 온 품군은 1시간 일하고서도 하루 품삯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일한 것에 대해서 그 대가가 엄청납니다. 아마도 이 품군은 하루 품삯을 받으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을 것입니다. 놀고 있던 자기를 불러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기 때문에 얼마를 주든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받아들고 갔을 것입니다. 품삯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감사를 알고 은혜를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놀고 있던 자기를 불러준 것에 대한 감사와 은혜를 가지고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미 은혜를 받은 자로서 일을 했기 때문에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는 다른 칭찬이나 대가를 주장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아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미 나에게 주어진 것으로만 해도 은혜가 넘치고 감사로 충만한데, 또 다른 대가나 칭찬을 바라거나 욕심 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은혜로 채워져 있는 나라입니다. 은혜와 자비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인간의 공로는 전혀 개입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뭔가 잘해서 들어오거나 상을 받는 나라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은 은혜로 들어가지만 상은 인간의 공로에 따라서 차등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내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 천국에 들어왔다는 것을 아는 자가 자기의 공로를 주장하겠습니까? 만약 은혜로 들어왔다고 하면서 자기의 공로를 주장하고 상을 기대한다면 그것이 바로 본문에 먼저 온 품군과 같은 모습이다. 이런 자는 분명히 나중 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온 자와 나중 온 자를 들어서 말씀하시고 싶은 것은 세상을 살아갈 때 이미 은혜와 자비를 받은 자로서 살아라는 것입니다. 이미 은혜와 자비로서 내 마음이 채워져 있기 때문에 세상의 다른 것을 기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것을 버린 자로서 살아가는 모습이고, 이것을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과연 여러분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서 채워져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분은 세상의 다른 것을 기대하지 않게 됩니다. 이미 채워져 있기 때문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채워져 있지 않은 자는 항상 부족을 느끼게 되고 결국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대가를 기대하게 됩니다. 날마다 만족이 아니라 불평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사람은 세상의 것을 버릴 수 없습니다. 내가 버리겠다고 해서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버리려고 할수록 더 애착이 가는 것이 세상 것입니다. 버린다는 것은 이미 받은 자에게만 가능합니다. 받은 것을 모르는 자가 버리려고 한다고 버려지겠습니까? 여러분이 받은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온 자나 나중 온 자나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포도원 주인에게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불러주지 않았으면 한 데나리온은 만져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놀고 있던 자가 부름 받은 그 은혜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한 데나리온을 받게 된 것은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부름받았기 때문에 한 데나리온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각각 다른 시간에 품군을 부른 것입니다. 1시간 일한 사람도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인간의 노동과는 전혀 상관없이 부름 받은 은혜 때문에 받는다는 것을 교훈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한 일은 천국에 가는 것이나 천국에서 상받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그 어떤 선한 일을 했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칭찬 받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자가 하나님 앞에서 먼저 된 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있어도 됩니까? 예,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있어도 천국가는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또 사실 인간이 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나 그 일을 우리 인간을 통해서 하실 뿐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서 그 은혜가 드러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일은 교회 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살아가는 삶 전체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 때문에 그 은혜가 나도 모르게 나를 통해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육신의 생존을 위해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아는 자로서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어진 인생입니다. 생존의 문제는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모습으로든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생존의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이 할 일입니다.
신자는 땅의 것 때문에 사는 존재가 아님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이미 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세상의 다른 것은 필요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삶이 되기 위해서 주님이 주신 힘으로만 만족하면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품삯에 관심을 두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불러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충성하면서 주님만을 보여주는 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천국을 맛보며 살아가는 삶이며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길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이런 인생이 되기를 바라며, 이것을 위해서 주님께 기도하는 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귀 타신 예수(마 21:1-11) - 34강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은 나름대로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은 말로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관심이 주님께 있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주님께 더욱 큰 관심을 두고 사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든 관심을 주님께 두고 살아갈 때 우리는 무엇을 해도 사랑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공부한다고 해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공부할 때 그 사람은 오직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 가는 것으로 최고의 기쁨을 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이 배우기에만 열심일 때 그 사람은 결국 자기에게 있는 지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자기를 내세우는 교만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또 목사의 경우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이 성경을 연구한다면 결국 그 목사는 성경을 통해서 주님을 알아가기 보다는, 오직 자기의 목적과 자기의 뜻을 옹호해 주는 성경으로만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이든 목사이든 성경을 보거나 배우거나 설교를 들을 때는 필히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신자가 행하는 모든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참석하는 것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과,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단지 법적인 관계로 참석하는 것과는 전혀 다를 것입니다. 헌금을 하든 봉사를 하든 전도를 하든 주님의 사랑으로 하지 않는 것이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원하시지 우리의 행위를 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오늘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오신 것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나왔다면 이 예배가 여러분에게 기쁨이 될 수 없을 것은 당연합니다. 한시간의 시간이 지루할 것이고 여러분의 머리 속에는 빨리 예배가 끝나고 다른 일을 하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단지 사람이 하는 말로만 들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그 어떤 것도 기쁨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이것을 교회 탓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교회가 재미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스스로는 부정하고 싶으시겠지만 그것은 어김없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것을 용납하기 때문입니다.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의 여러 가지 일들이 눈에 거슬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에 기쁨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은 이 시간도 여러분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마치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처럼 오늘 이 시간도 여러분에게 '네가 나를 사랑해서 이 자리에 나왔느냐?'를 묻고 계신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대답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 대답이 우리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를 위해서 못할 것이 없고, 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됩니다.
오늘 본문을 이야기하기 전에 주님을 사랑하는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여러분이 많이 들어 왔고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는 상식적인 문제로 여겨지는 내용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신자들에게 상식으로 여겨지는 내용을 말씀드릴 때마다 느껴지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 알고 있는 상식적인 문제를 말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관심을 두지 않고 있기 때문에 어떤 말을 해도 그것이 자신에게 감동과 은혜로서 다가오지를 않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는 문제를 먼저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본문을 생각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말을 해도 여러분들에게 아무런 기쁨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탁드리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이야기를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본문은 여러분들이 아시는 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드디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데, 들어가실 때 그냥 들어가시는 것이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시고, 거기에 있던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하고 부르면서 예수님을 환영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 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이 내용을 통해서 어떤 감동을 받습니까? 아마 별 감동을 느끼지를 못할 것입니다. 그냥 성경이 기록하고 있으니까 '아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 가셨구나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겸손을 의미하니까 우리도 예수님같이 겸손해야 하겠구나' 아마 이 정도가 고작일 것입니다.
신자들을 보면서 답답한 것은 어떤 사람이 간증이라는 것을 할 때, 예를 들어서 십일조 해서 복받았다거나, 기도해서 병 나았다거나, 꿈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봤다거나 이런 얘기들을 하면 관심을 두고 들으면서 성경의 이야기를 하면 시큰둥해지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나에게서 일어난 실제적인 이야기로 보지 않고 단지 책에 적혀 있는 내용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아무리 봐도 감동이 없고 깨달음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점은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흔히 이것을 해석하면서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의 겸손을 말합니다. 물론 5절에서 겸손하여 나귀를 탔다고 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겸손을 말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겸손이 어떤 겸손이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귀를 타신 겸손을 단지 말을 타야하는데 나귀를 탔다는 정도로 이해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랜저를 타야 할 것을 티코를 탔다, 우리도 예수님같이 자기를 낮추자는 식으로 겸손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겸손은 이러한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이란 말을 타야 할 것을 나귀를 타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겸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겸손은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단지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오직 그 사랑으로만 세상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서만 보여질 수 있는 겸손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나귀 타신 겸손이 어떤 겸손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 5절을 보면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겸손하여 나귀를 탔는데 나귀를 그냥 나귀라고 하지 않고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귀를 타신 것은 말을 타고 들어가야 하시는데 겸손해서 나귀를 타셨다는 얘기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데 예루살렘에서 하실 일이 어떤 일인가를 나귀를 통해서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귀가 하는 일은 어떤 일입니까? 사람이 나귀를 키우는 것은 오직 한가지 용도밖에 없습니다. 짐을 싣는 것입니다. 나귀는 농사용도 아니고, 식용도 아니고, 군사용도 아닙니다. 단지 짐을 나르는 운반용으로 사육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모든 짐을 홀로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과 나귀의 모습을 결합시켜 놓은 것입니다. 죄인된 인간의 모든 짐을 짊어지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남의 짐을 대신 지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남의 짐을 대신 져줄 때는 그만한 대가가 있을 때입니다. 아무런 대가도 없는데 남의 짐을 대신 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남의 짐을 져주는 것이 주님의 사랑이며 주님의 겸손입니다. 이러한 겸손을 누가 보일 수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짐을 지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짐은 죄인이기 때문에 지는 짐입니다. 자기를 성공시키고, 보다 잘 살기 위한 그 욕심이 많은 짐을 만들어서 우리에게 지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짐을 대신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의 겸손은 남의 짐을 대신 지시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람의 인생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사랑한다면 인생의 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를 맨다는 것은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5절에 선지자가 한 말은 스가랴서 9:9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슥 9:9을 보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본문과 비교해 보면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라는 말이 빠져 있습니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해했던 부분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해하기를 자기 나라를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고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 분, 즉 메시야가 장차 오시는데 그분은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이 오해하고 있었던 것은, 자신들은 이미 선택받은 민족이고 하나님 백성이기 때문에 구원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또 다른 누군가를 믿어야 한다고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이 지금 받아야 할 구원은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실 메시야는 자기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메시야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메시야로서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호산나'라고 외치는 것도 결국은 자기 나라를 해방시키는 영웅을 환영하는 소리이지, 자신들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는 분으로서 환영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힘의 메시야였습니다. 자기들을 잘 살게 해주고, 적으로부터 보호하며, 원수를 물리쳐주는 그런 메시야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다시 슥 9:10절을 보면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힘을 가지고 싸우시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오신 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구약과 다르게 '멍에 메는 짐승'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6절과 7절을 보면 제자들이 자기의 겉옷을 나귀의 위에 얹고 그 위에 예수님이 타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함께 가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지신 짐을 같이 지고 가는 자만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결국 오늘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 같이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만 의지하는, 주님에게 자기의 모든 죄를 맡기는 그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신자가 세상의 힘을 포기하지 못하는 한 주님의 사랑과는 거리가 멀어질 뿐입니다. 돈이 있어야 힘이 나고, 자식이 공부를 잘해야 안심이 되고, 사업이 잘 돼야 기쁩니까?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위해서 주님을 따르고자 합니까? 진심으로 주님을 위해서입니까? 그렇다면 주님이 가신 길에 함께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신자입니다.
저주 받은 나무(마 21:18-22) - 35강
마태복음 1:21절에서는 분명히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세상 모든 사람이 아니라 자기 백성으로 한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백성은 예수님을 믿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백성으로 선택되어져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어져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고,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주님의 십자가를 믿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과 백성 아닌 자가 서로 구별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이 아닌 자를 구분하는 기능도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이 아닌 자를 구분해서 한쪽은 멸망으로 한쪽은 구원으로 인도하십니다. 이 때를 가리켜서 마지막 때, 또는 종말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종말의 징조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크나큰 기상의 변화나, 어떤 자연의 이변 같은 것을 보면서 종말의 때를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종말의 징조는 그런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말의 징조는 우리들의 주변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백성과 백성이 아닌 자를 구분하는 기능이 있다고 했습니다. 즉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과 같이 주님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백성이지, 주님의 길이 고난의 길이고 세상의 것을 포기해야 하는 길이기 때문에 주님이 세상을 사신 방식대로 살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주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구분되어지는 것이 바로 마지막 때의 징조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는 거짓 그리스도가 여기 저기서 신자들을 유혹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허용하시는 이유는 백성과 백성 아닌 자가 구분되어 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거짓 그리스도는 항상 사람들이 소원하고 있는 것을 제시하면서 유혹합니다. 그것을 따라가는 사람은 결국 백성이 아닌 자로 확인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때를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마지막 때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이시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게 된 이유는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침에 성에 들어오실 때 시장하셔서 무화과 열매를 얻고자 무화과 나무를 향하여 가셨는데 열매가 없어서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러자 나무가 말라죽고 맙니다. 저주를 받고 말라죽었다는 것은 심판을 말합니다. 그런데 심판을 받게 된 이유가 예수님이 원하신 열매가 없었던 것입니다. 21:43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열매 없는 자는 저주 아래로 들어가고 열매 맺는 자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 때의 징조는 예수님의 백성과 백성 아닌 자가 구분되어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백성된 조건은 바로 열매입니다. 열매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백성과 백성 아닌 자로 구분되어집니다. 그리고 열매있는 자만 구원되고 열매가 없는 자는 저주 아래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열매를 구하는 것입니다. 열매를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열매가 없는 자는 저주하신다면 우리에게 가장 급한 일은 열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엇을 급한 일로 여기고 있습니까? 우리의 육신을 가지고 세상을 행복하게 사는 일을 더 급한 일로 여기지 않습니까? 만약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때가 마지막 때가 아니고 종말의 때가 아니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내 육신을 위해서 살아도 상관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 예수님께서 열매를 찾고 계시는 때라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나에게 예수님이 찾으시는 열매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마지막 때를 믿는자로서 당연한 행동이 아닙니까?
신자는 종말을 믿는다면 그에 따른 행동이 보여지게 마련입니다. 모든 재산을 다 교회에 바치고, 예배당에서 날마다 기도하고 찬송만 부르고 있으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예배당에서 기도하고 찬송만 하고 있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종말을 믿고 알고 있는 신자라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위해서 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무시해 버리고 자기 멋대로 살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나타내 보이지 못한 자는 결국 저주 아래로 들어가게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심각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지금 무화과 나무의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구하기 위해서 찾아오시는 무화과 나무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예수님께 내어 보일 열매가 있습니까? 이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최대한으로 급한 문제입니다. 하루 세끼 밥먹는 문제가 급한 것이 아니고, 돈버는 것이 급한 문제가 아닙니다. 열매가 있느냐, 없느냐, 이것보다 급한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느긋합니다. 예수님은 열매를 찾고 계시고 없으면 저주해 버리시겠다고 하시는데도 정작 당사자인 우리들은 그 문제에 대해서 전혀 심각해하지 않고 답답해하지도 않고, 오직 먹고사는 문제에만 답답해하고 심각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흔히 교회에서 말하는 열매는 전도해서 사람을 교회로 데려오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문제들을 가지고 열매 운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매를 가지고 나무를 안다고 하셨는데 그 열매를 종교행위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심 있는 전도, 열심 있는 봉사, 열심 있는 기도, 이러한 것들이 좋은 나무를 증명하는 열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무를 증명하는 열매가 내편에서 열심만 있으면 된다면 열매가 뭐 그리고 심각한 문제이겠습니까?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다 해결된 문제 아니겠습니까?
열매라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 보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너희가 세상을 어떤 사고 방식으로 살아가느냐'입니다. 결국 주님은 세상을 살아갈 때 주님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열매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주님의 백성이란 증거는 주님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그 자체를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고방식은 세상에서 모든 것을 구별해 버립니다. 세상의 방식과 전혀 다르기 때문에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 주님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열매란 내쪽에서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는 단지 주님의 편에 서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자는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5,16절에서 어린아이의 찬미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전혀 어떤 계산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예수님이 좋아서 찬양하는 그 마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신자가 주님의 편에 서서 주님의 사고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그 사람은 주님의 백성으로서 이제는 무화과 나무의 입장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입장이 되어서 세상을 심판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무화과 나무가 말라죽는 것이 심판을 말하듯 산을 바다에 빠뜨리는 것도 심판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 심판의 때에 저주가 아니라 구원으로 들어가는 자는 예수님이 원하신 열매가 있는 자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들이 세상을 내 편에 서서 나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면 너희는 자연히 세상을 심판하는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을 심판하는 입장에서 산다는 것은 세상을 예수님 편에서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저주 아래 들어갈 자와 구원으로 들어갈 자로 나누어서 보십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들도 세상을 살면서 항상 이런 시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좋은 것을 다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도 부러움의 마음이 아니라 '세상의 것을 다 가지고 있어도 결국은 심판이다'는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심판하고 있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주님 편에서 사는 자는 자연히 이런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으로 세상을 산다면 남들이 무엇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부러워서 마음 상해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서 그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신자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백성된 모습이고, 이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고통으로 얼룩지고, 수치와 멸시로 얼룩지고, 사람들이 멀리할 수밖에 없는 약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주님 편에 있는 자의 구별을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편에 서서 주님의 시각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는 십자가라는 그 자리가 너무나 편하고 기쁨의 자리가 되는 것이지만, 주님의 시각으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행복과 기쁨을 향한 욕망으로 세상을 보는 자는 주님의 십자가가 너무나 추하고 약하게 보이기 때문에 자연히 회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과연 세상을 심판하는 입장에서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다른 세상 사람과 똑같이 자신의 행복과 미래의 안락을 향한 꿈속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십니까? 예수님은 주님의 편에 서서 살기만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럴 때 열매는 자연히 맺어지게 될 것입니다. 직장을 다니든, 공부를 하든, 어떤 봉사를 하든 오직 주님의 편에 서서 주님의 입장에서 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믿음 생활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에게 급한 문제가 무엇임을 아셨을 것입니다. 주님의 편에 서서 세상을 산다는 것은 우리의 결심으로 되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의 능력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열매가 맺어지는 삶을 위해서, 주님 편에 서서 주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구분해서 볼 수 있는 그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무엇이 필요한가를 진심으로 깨닫고 주님만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주께 나아오는 자를 주께서는 결코 외면치 않으십니다. 주님은 지금 이 시간도 여러분에게 열매를 구하기 위해서 찾아오십니다. 과연 여러분에게 열매는 무엇입니까? 주님의 편에 서서 세상을 살아가십니까? 자신에게 묻고 또 물으면서 심판 받는 자리가 아니라 심판하는 자리에 설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회 개(마 21:28-32) - 36강
지난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에게 열매를 원하셨다가 열매가 없어서 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 사건 역시 마지막 때를 말해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이야기를 과연 긴장감과 위기감을 가지고 들었습니까? 아니면 그 말씀을 듣고 나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결코 느긋한 마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얼마나 자각하였습니까? 마지막 때에 대한 긴장감을 느끼셨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때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 자체로서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상을 멸망 받을 자와 구원받을 자, 이렇게 둘로 구분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면 자동적으로 '자기 백성'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은 멸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이 아닌 자는 결코 스스로 자신을 따를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이 거부할 수밖에 없는 삶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신자가 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는 예수님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든 삶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습과 반대되게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신을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회개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회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 요한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쳤습니다. 회개란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요한은 세상을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있는 상태로 보았습니다. 언제 잘라질 줄 모르는 상태로 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이 할 수 있는 말은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있는 상태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말은 지금 우리들을 향한 말입니다. 결국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요한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자들에게서 보여지는 자연적인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세상을 보는 시각은 구약에서 등장하는 선지자들의 시각과 동일합니다. 즉 선지자들도 세상을 심판 받을 대상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를 외쳤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할 것을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의 시대나 선지자들의 시대나 동일한 것은 그들의 외침을 사람들은 허황된 소리로만 들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원했던 것은 세상에서 잘 사는 복이었는데 정작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은 세상에서 떠나는 것이 복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이해하지도 못했을뿐더러 허황된 말로 일축해 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성경 그대로 소개하고, 예수님이 가신 길에 함께 동참하자고 외칠 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그 소리를 한낱 허황된 말로만 여겨버린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선지자들의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보신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내가 회개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를 세상에서 떠난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은 심판 받을 수밖에 없고, 구원은 그 심판 받아야 할 곳에서 떠난 자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떠난다는 것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세상문명과 등지고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단지 세상 사람과 똑같은 시각으로 이 세상을 보지 말자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은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관심은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기 육신의 문제로 집중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 없고 자기의 삶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세상에서 사는 사람치고 자신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자신보다 더 관심을 두고 사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자신보다 십자가에 관심을 두고 살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려고 하기보다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이 허황된 말로 들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도 주님의 십자가에도, 나를 대속하기 위해서 흘리신 그 귀하신 피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세상에서 살아가는 육신의 문제에 모든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것을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쉽게 잘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 설령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고 하더라도 모두 말씀을 통해서 나타나고 주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이 왜곡하고 변질시킨 잘못된 하나님의 뜻을 내세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 증거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것이 진짜 주님의 십자가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위한 복에 관심을 두고 순종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간들이 내세운 하나님의 뜻은 모두가 십일조하고, 목사 섬기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에 순종해야 복이 주어진다고 가르칩니다. 결국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봐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과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인가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 이야기는, 두 아들이 있는데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을 때 큰아들은 '예 가겠습니다'라고 대답은 하였는데 끝내 가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싫소이다'라고 거부하였는데 나중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포도원에 일하러 갔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는 것이 예수님의 물음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한 자는 처음에는 거부하였다고 할지라도 뉘우치고 일하러 간 둘째 아들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은 무엇을 보시느냐'입니다. 예수님은 대답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마지막에 어떤 결과를 보였느냐가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포도원에 일하러 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선선히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겠다고 한 큰아들이 명령을 거부한 둘째 아들보다는 더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원한 것은 대답 자체가 아니라 일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결과가 어떤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열매가 있느냐 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시면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것은 세리나 창기는 무조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세리와 창기를 처음에는 아버지의 뜻을 거부한 둘째 아들로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자신들의 삶을 돌이켰을 때 마지막은 세리와 창기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했다'가 아닙니다. 회개했다면 마지막 때까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가 아니라 마지막 때까지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의 정신으로 세상을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으로 세상을 사는 것은 주님이 세상을 보신 그 시각으로 요한이나 선지자들이 세상을 바라본 그 마음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고 마지막 때까지 우리에게서 보여져야 할 의의 열매이며 이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여러분이 신자로서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살고자 하신다면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후에는 자신의 삶과 육신의 손해보다는 단지 하나님의 뜻에만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서는 열매가 보여질 수 있습니다.
열매는 자연적으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9절에 보면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이 말은 우리에게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으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이 이러한 말씀을 잘못 오해하면 열매를 맺으라는 명령으로 알고 자신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 노력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세상에 어느 인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해서 착해지고 의로워지고 진실해질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신 대로 살지 못한 자신을 회개하면서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 편에서 세상을 살아갈 때 빛의 열매는 자연적으로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회개하는 나무가 되면 좋은 열매는 맺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믿음으로 살겠다고 하면서도 모든 관심은 자신의 육신의 문제에 있는 것은 아닙니까? 육신에 대한 책임자는 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나에 대한 문제를 내가 스스로 책임지려고 할 때 그 사람은 이미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아무리 믿음을 말해봐야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믿음이 될 것입니다. 이미 그 머리 속에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복주시는 하나님으로만 자리잡고 있고, 세상을 떠날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 자리잡도록 도와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요한의 외침이나, 선지자의 외침이 들려온들 그 외침이 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지 못할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요한의 입장에, 선지자의 입장에 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을 심판하시고, 그 심판을 통해서 알곡은 곳간으로 가라지는 불에 던져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심판을 바라보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박국 3:2절을 보면 하박국 선지자가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흔히 교회는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라는 이 기도를 자신의 교회를 부흥케 해달라는 표어나 기도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는 수년 내에 자기들의 죄를 심판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심판으로 끝나지 않고 심판 속에 긍휼을 발견하고 회개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마지막 때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심판주로서 다시 오실 때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요구하실 것은 열매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다. 우리의 종교적인 열심과 행위들이 열매가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나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주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주님 편에서 살아갈 때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신자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세상보다는 주님의 십자가를 더 사모하고, 관심을 두기 때문에 모이는 것이 교회입니다.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보다 나 자신의 육신에 더 관심이 가 있는 사람은 절대로 주님의 몸된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회개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이 단지 말로만 들려지지 않고 요한의 외침으로 선지자들의 외침으로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통해서 열매가 보여지기를 바랍니다.
악한 농부(마 21:33-41) - 37강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의 귀함도 모른 채 단지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해결해 버리려고 합니다. 이 말 한마디면 구원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버리고 남은 것은 축복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에 가치를 두고 살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도 별다른 느낌없이 받아들일 뿐입니다. 안믿으면 교인이 아니니까 믿겠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또 사실 교회에서 교인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관심도 한 영혼이 진실로 천국에 가느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문제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는 말 한마디로 해결해 버리고 그 믿음의 증거로서 교회에 대한 열심과 봉사를 강조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에서 자라온 교인들이 과연 십자가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겠습니까? 자신의 모든 것보다 더 가치 있고 귀한 십자가로 여겨지겠습니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십자가만큼은 잃을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십자가를 단지 바라만 보고 있는 방관자이지 참여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참여할 것을 요구합니다. 주님의 길에 대한 방관자가 아니라 참여자를 부르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결코 말한마디로 해결되는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참으로 어려운 길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성령이 우리에게 함께 하셔야 가능한 것이 십자가의 길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굳이 어렵다고 말씀드려야 하는 이유는 십자가에는 고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십자가를 쉽게 생각하는 것은 고난을 제외시켰기 때문입니다. 왜 청년들이 군대에 가기를 꺼려합니까? 힘들기 때문입니다. 단지 26 개월 동안 집을 떠나 있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군대에서 겪어야 할 여러 가지 힘든 훈련들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군대에서 훈련을 제외시켜 버린다면 군대를 결코 어려운 곳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군대를 제대한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 자랑하는 것은 어려운 훈련을 겪은 얘기들입니다. 그럴 때 전혀 훈련도 받지 않고 힘들지 않은 곳에서 군생활을 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편하게 지냈던 것이 자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에서 고난을 제외시켜 버린다면 누가 십자가 지기를 꺼려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의 고난은 주님의 몫이지 우리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고통의 십자가이지만 우리에게는 고난과 고통이 아니라 축복을 가져다주는 십자가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고통에 눈물 몇 방울 흘려주고, 헌금하면 그것으로 십자가에 대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관심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신에게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자기를 따르는 길을 '좁은 길'이라고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자신을 따르는 사람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고 하셨습니다(요 16:33). 그런데도 우리가 십자가에서 고난을 제외하고 싶어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빙자해서 어떤 혜택을 받기를 원하는 불의한 생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믿음이 아니고 불신앙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믿음이라고 우긴다면 그 사람은 천국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믿음 아닌 믿음을 붙잡고 스스로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불쌍한 존재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 아닌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신 실제의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신자를 통해서 그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고, 그 반응은 진짜 십자가를 보여주는 신자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할 때 그것을 쉽게 수긍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포기 못했기 때문이거나, 자존심 때문이거나, 자기의 고집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자신의 잘못을 수긍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잘못을 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런 모습입니다.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아는 신자를 주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의 십자가가 나타날 때 자기의 잘못을 지적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따르는 자가 받는 고난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조롱 당하고, 진짜가 오히려 가짜 취급받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누구의 편에 서겠습니까?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주님 편에 서기를 소원하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열매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 악한 농부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달으면 주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서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는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다른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러다가 포도가 맺힐 때가 되자 주인은 실과를 받기 위해서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종들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쳤습니다. 주인은 또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냈지만 결과는 같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자기의 아들을 보내면 그 농부들이 아들은 공경하리라 생각하고 아들을 보냈지만 농부들은 아들을 죽이면 그 포도원을 자기들이 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여기고 아들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고 나서 예수님은 물었습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40절). 이 말을 들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41절)라고 대답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나쁜 일을 보면 분개를 합니다. 신자가 십자가를 보면서 생각하는 것도, 예수님이 악한 자들의 손에 죽으셨다는 것만 생각하지 내가 바로 예수님을 죽인 악한 자라는 생각은 상상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내 손에 죽으셨다는 것은 지나쳐 버리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죄인의 자리에 서는 것이 아니라 심판자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쉽게 심판자의 자리에 서서 '악한 농부'들이라고 분개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악한 농부들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은 왜 하지 않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찌른 자가 바로 자신임을 왜 생각하지 않습니까? 자신은 그런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것은 교회를 다니지 않고 교회를 조롱하고 핍박하는 자들이 하는 것이지 나는 철저하게 주님 편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자신은 철저하게 주님 편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어떤 말에서도 자신의 죄를 지적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을 옹호해주고 자기의 적을 책망하는 말로만 듣기 때문에 회개는 없고, 교만만 보여질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런 자들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농부가 주인이 보낸 종들과 아들을 죽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실과를 원해서 왔으면 실과를 주면 되는데 왜 그들을 죽였습니까? 그것은 실과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농부들이 놀았기 때문에 주인에게 줄 실과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는 것을 꺼려한 나머지 종을 죽이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제 때에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에게 포도원을 주겠다는 것이 주인의 의도인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45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즉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십일조를 철저하게 했고, 구제도 했으며, 이레에 두 번 금식을 했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 쏟았고, 제사도 철저하게 드렸습니다. 이만하면 그들은 신앙의 열매를 많이 맺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열매로 여기시지를 않는 것입니다. 우리 보기에는 열매가 많은데 예수님 보시기에는 열매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바리새인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그들이 한 행위는 무조건 잘못이고 나는 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바리새인을 보면 바리새인이 곧 지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종교인들의 모습과 일치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종교의 열심에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의 종교생활이 그들과 다를 바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했는데도 불구하고 왜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까? 그들의 것을 열매로 여기시지 않는다면 도대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어떤 것입니까? 열매가 없다는 것은 책망이고 심판입니다. 만약 우리가 당시 유대인들과 비슷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면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열매가 없다는 책망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그 책망을 오늘 성경을 통해서 듣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맺어지는 쪽으로 삶을 고쳐나가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열매를 자기들의 열심에 의해서 발생된 결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즉 자기들이 열심히 한 만큼은 열매가 맺어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설교를 한 목사는 설교에 대한 결과를 기대합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고 열심히 신앙 생활할 때 그것을 열매로 생각하고 마음 뿌듯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열매입니다. 전도를 해서 많은 사람이 자기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을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설득해서 교회에 나오게 된 사람을 바라보면서 자기가 맺어놓은 열매라고 생각하고 마음 흐뭇해합니다. 이것이 유대인이 생각한 열매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이러한 열매는 열매로 취급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런 점에서 바리새인들과 충돌을 일으키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충돌을 일으키시게 된 여러 가지 원인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충돌을 일으키신 것은 율법 문제, 표적 문제, 이혼 문제, 성전 문제, 부활 문제 등이었습니다. 즉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종교 형식을 깨뜨려 버리신 것입니다. 어떤 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착각을 공격하셨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말씀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잘못됨을 공격하셨고,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엉터리 믿음을 공격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21:31)는 말씀을 하심으로 그들의 종교적 지위에 대한 자존심을 공격하셨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 주일성수 등 여러 가지 법적인 것을 요구하는 교회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예배당에 거룩성을 두며 예배당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르는 것과 유대인들이 성전을 중시하던 것과 뭐가 다르며,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은 하나님의 집인 거룩한 성전에서 봉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특별히 세운 사람이고 때문에 지도자로서 대우받고 섬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과 오늘날 목사들이 거룩한 교회에서 평생을 봉사하는 자기들은 하나님이 특별히 세운 지도자이고 신자들은 그 지도자를 섬겨야 하고 그래야 복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틀린 점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외에도 지금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신앙 생활을 보면 유대인의 종교적인 모습을 따라가고 있으면서 십자가를 따라가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을 도저히 부인할 수 없습니다.
본문을 보면 주인이 농부를 거부한 것이 아니고 농부가 주인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주인은 농부들의 그 행위에 대한 심판을 할뿐입니다. 농부들이 주인을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들이 내세운 종교적이 행위는 열매가 되지 못하고 주인이 요구하는 열매가 따로 있기 때문에 종과 아들을 죽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자칫 농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열매를 내놓으면서 열매라고 우기는 것은 안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방관자가 아니라 참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참여자는 자신의 죄를 아는 자입니다. 자신의 죄를 알 때에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신앙 생활에 대한 오만과 자만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누군가가 자신을 공격할 때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오만은 자신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인으로 만듭니다. 스스로 의인된 자는 결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스스로 의인된 자에게는 십자가가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열심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예배당 세우고, 자기들이 전도해서 교인 채우고, 자기들의 업적을 가지고 하나님께 칭찬 받으려는 헛된 야망을 우리는 버려야 합니다. 이런 야망 자체가 불신앙임을 알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 나올 자격도 없는 죽어야 할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입어서 이 자리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자는 '나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십자가 때문에 산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에 대한 사랑보다 십자가에 대한 사랑이 앞서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는 자식에 대한 사랑보다 아내에 대한 사랑보다 남편에 대한 사랑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앞서야 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사랑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고 다시금 자신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때 그것이 곧 우리를 겸손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고, 이것이 주님이 요구하시는 열매이며 십자가에 참여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머릿돌(마 21:42-46) - 38강
믿음이란 앎이 아닙니다. 삶이 없는 앎은 단지 지식에 불과할 뿐입니다. 지식이란 생명의 문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구원이란 앎으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앎에 인해서 삶이 다스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앎과 삶의 일치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은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는 말을 했다고 해서 야고보 사도와 바울 사도가 서로 반대되는 말을 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성경을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이란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 인간의 힘이 개입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 믿음을 말한 것입니다. 즉 사도 바울이 말한 믿음이란 자기의 힘을 모두 포기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상태를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고보 사도는 자기의 모든 힘을 부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산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에게서 보여지는 삶이 어떤 모습인가를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즉 야고보 사도는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야고보서에서 강조되는 행함이라는 것도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것 같이 전도하고, 성경 읽고, 구제하는 식의 행위를 말하지 않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앎과 삶의 일치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과 인간이 단지 자신의 종교적인 행위로서 나타내는 믿음이 어떻게 다른가를 깨닫게 하기도 합니다. 앎이 제대로 되지 못한 삶은 스스로를 착각으로 몰아갑니다. 즉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무엇을 원하시고 바라시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제대로 깨닫지 못한 사람은 죄인인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판단하기 때문에 인간이 선하게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도 선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인간이 선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모두가 죄라는 것을 상상치도 못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누군가를 도와주었다고 할 때 그 행위를 모든 사람들은 선한 행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선한 행위로 보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남을 도와주는 행위를 그만두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제가 뭐냐는 것을 알고 하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단지 남을 도와주었다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기 때문에 그것을 선하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으시고 속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선의 기준은 미가서 6:8,9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할지니라"고 말합니다. 그 앞서 6절, 7절을 보면 하나님은 경배도 제물도 우리 몸의 열매, 즉 우리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행위들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다고 하시는 것은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것이 완전한 지혜라고 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가지고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기 때문에 또는 교회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무조건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구제를 하고서도 그것이 죄가 될 수 있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사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을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사탄이 세상에 강도가 많게 하고, 사기꾼이 많게 하고, 도둑이 많게 하고, 도덕과 윤리를 떨어뜨려서 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결과일 뿐이지 원인이 아닙니다. 문제는 사탄이 세상을 몽땅 자기를 중심으로 살도록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악한 행위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아까 한 예로서 말한 구제가 죄가 될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내가 뭔가 남을 도왔을 때 그 행위는 나의 도덕과 윤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내가 주를 경외하고 하나님과 함께 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다스림 아래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결과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것은 자신의 보람으로 삼고, 그 일을 통해서 스스로 만족해한다면 그것은 결국 자기의 힘으로 한 행위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셨으면 합니다. 물론 이해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이러한 말을 세상의 기준이나, 상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이야기라고 해서 하나의 괴변으로 여겨버리면 여러분은 점점 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구렁텅이로 들어가는 결과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제가 말씀드린 앎과 삶의 일치라는 것은 어떤 종교적인 행위를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기준이 무엇인가를 알았다면 그 기준대로 살아가는 모습이 있어야 그것을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이란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서 한가지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은 사탄의 권능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의 권능에서 빠져나올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의 모든 행위가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사탄을 알지 못하면, 분명히 성경에 경배도 제물도 선한 것이 아니다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 헌금이 죄가 될 수 있습니다'는 말을 하면 그 말에 분개를 하고 반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구원이라는 것은 사탄의 권능에서 빠져나온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탄의 권능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은 우리 왕이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태를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난 시간에 주인이 포도원을 열매를 바칠 만한 자에게 준다는 얘기를 했는데, 열매라는 것은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맺을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얘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42절에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집을 짓고자 하십니다. 집을 지을 때는 돌이 필요합니다. 돌을 쌓아서 집을 지어가야 하기 때문에 좋은 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 쌓아져 가는 돌이 되고 싶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하나님 집을 쌓아 가는 돌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안되는 이유는 우리가 사탄의 권능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보면 사탄의 권능 아래 사탄의 종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모습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집의 돌의 역할을 하려고 설치는 사람들로 인해서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이 가려지는 것을 수없이 볼 수 있습니다. 앎이 없기 때문에 사탄의 종으로 움직이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종으로서 움직이는 것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세워지는 돌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탄의 권능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사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삶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사탄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때문에 개입된 것이 외부의 능력인 것입니다. 사탄을 이기는 외부의 능력이 우리에게 개입되어서 우리를 사탄의 종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아는 신자라면 자신을 사탄의 종에서 하나님으로 종으로 바꾸어 놓은 그 외부의 능력만을 바라보아야 마땅합니다. 나를 영생으로 바꾸어 놓은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의 말씀에만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 참된 신자의 앎과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말은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고, 믿음으로 산다고 아무리 떠든다고 해도 그 행하는 것이 사탄의 모습이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으로서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신세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머릿돌이라는 것은 기초를 말합니다. 집이 세워지는 기초입니다. 머릿돌 위에 모든 것이 세워지기 마련입니다. 기둥, 벽, 지붕이 머릿돌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결국 주가 머릿돌이라는 것은 주가 우리의 기초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기초로 해서 그 위에 세움 받을 존재는 누구인가? 주께서 건축자들에게 버림받은 돌이 된 것 같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자가 곧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집에 세움 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머릿돌 되시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누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돌이냐를 찾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주가 많습니다. 너도나도 주를 말합니다. 그러나 버림받은 주를 말하는 곳은 그렇게 많지 않은 듯합니다. 아니 버림받은 주를 말하기는 해도 우리가 그 위에 세움 받기 위해서 나 또한 버림받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버림을 받은 것입니까? 세상의 상식과 법칙을 따라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나 유대인들이 사탄의 종으로서 자기의 유익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죄인된 인간으로서는 극히 당연한 삶의 법칙과 상식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나섰기 때문에 버림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세상에서 살 수 없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기초로 해서 세워지는 하나님의 집이라면 그 집에 쓰이는 돌은 어떤 돌이어야 합니까? 예수님과 같은 사고방식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세상이 살아가는 상식을 거부하고, 세상으로부터 벗어날 힘이 없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개입되는 것입니다. 44절에 보면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진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고집을 벗어버리고 부서지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기초가 되시는 주님의 힘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우리는 버림받은 주님의 능력으로 주님을 알고, 주를 바라보는 자가 되었는데 왜 또 다시 사탄의 말에 순종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능력으로 나의 고집이 깨어진 자가 되었다는 것은 내가 세상을 소망으로 삼지 않고 주님만을 소망으로 살고 싶어하고, 주님의 십자가가 곧 나의 십자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듯 나 또한 주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종된 모습이고, 하나님의 종이라면 하나님께 순종하고 말씀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을 주님으로부터 받고 있음을 알고 주께 감사하면서 주님께 나오는 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 안에 있는 자는 주님을 알고 자기를 압니다. 자신이 주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자신에게 입혀졌기 때문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으로 세상을 살아가지 못하고 항상 세상에서 버림받는 자신을 수시로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 때 능력을 입은 하나님의 종은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회개하고 항상 주님의 힘으로 은혜 안에서 살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탄의 종은 제 아무리 하나님을 말한다고 해도 전혀 다른 반응을 나타냅니다. 45,46절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고 공격한다고 느껴질 때 그들은 예수님을 잡고자 했습니다. 자기들의 생각과 자기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과 자기들이 생각하고 있는 종교와 전혀 다른 말을 했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삶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종교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대신 자신의 종교의 자리에서 자기를 지켜주는 예수 아닌 예수입니까? 그것이 아니면 나의 종교를 포기하고 머릿돌이신 주님의 운명에 동참하여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어느 것이 하나님의 종의 모습인가를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님을 머릿돌로 하여 하나님의 집에 세움 받은 돌로서 세상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천국은?(마 22:1-14) - 39강
인간은 자기 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성경을 배우는 사람들이 그 성경을 거부할 때 저에게서는 울분이 일어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자기 중심적인 모습에 불과했습니다. 목사는 자기가 갈고 닦은 성경 지식이 아니라 성령께서 깨닫게 한 것만큼만 전하고 가르치면 그것으로 할 일은 다하는 데도 제가 가르치는 성경을 거부하는 것을 곧 나 자신에 대한 거부와 도전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울분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역시 자기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죄인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면 나는 이미 나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즉 나는 나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할 말을 내가 만들어 낸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전달할 뿐이라면 그 말속에 이미 나는 없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말한 대로 단지 소리일 뿐입니다. 신앙은 하나님 중심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이란 나를 버리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던 것, 여러분이 경험한 신앙의 체험들, 지금까지 지켜온 종교적인 전통들을 가지고 오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그 옛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버린 것 같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버리고 내 마음에 드는 예수 아닌 예수를 찾아가게 될 뿐입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은 우리의 머릿돌이 되심을 말씀드렸습니다. 머릿돌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모습이었습니다. 전통에 의해서, 사람들의 종교적인 지식에 의해서, 사람들의 고집에 의해서 버림받은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버림받으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심판 받을 세상의 죄가 무엇인가가 분명히 보여졌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는 예수님을 거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님이 죄인인 인간들에 의해서 버림당하게 하심으로 세상의 죄를 보이셨고, 그 죄속에서 구원하실 자기 백성은 버림받은 예수님을 좇는 자임을 나타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좇는 자는 자기 또한 주안에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주'라고 부른다고 해서 아무나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주'가 과연 어떤 '주'인가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성경을 통해서 주님을 버린 세상의 모습을 발견해야 하며 그 죄의 모습이 바로 내 안에 있음을 찾고 회개하는 것이 곧 주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회개란 내 삶을 고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회개한 자는 주님의 길을 가게 될 수밖에 없고, 주님의 길을 가기 때문에 자연히 세상이 주님께 반응했던 그 반응이 나에게도 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아들을 중심으로 일하십니다. 즉 예수님을 중심으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자만이 주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불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불려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의 열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달려듭니다. 하나님의 아들 되신 주님 안에서만 나도 주님과 함께 아들로 여김 받는다는 것은 알지도 못하고 자기의 열심있는 종교생활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여김 받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심판의 대상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중심으로 일하신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서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은 모두 자기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는다고 하면서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려고 하지 않고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은 바리새인 중심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신 예수님 중심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교단이 많고, 한국에도 많은 교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단이 하나 발생할 때마다 제각기 내걸었던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단들은 지금도 하나님은 자기 교단을 사랑하신다고 공공연하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교단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움직이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은석교회가 속해있는 재건교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재건교단을 가장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일제시대때 신사참배를 안했다는 과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중심으로 일하시지 어떤 교단의 전통과 과거를 중심으로 일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어떤 전통 과거라고 할지라도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모두 저주해 버리시는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철저하게 주님을 중심으로 일하십니다. 만약 그 어떤 교단이라고 할지라도 전통과 과거를 앞세우며 하나님을 찾고자 할 때 그들은 오직 주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말씀을 무시한 것이고 또 주님의 피를 무시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 '그럼 교단을 다 없애 버리고 개 교회로 하자는 말이냐'라고 반박을 합니다. 교단이 있든 없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을 중심으로 살고자 하느냐입니다. 재건교회이든 고신이든 합동이든 상관없이 교단에 전혀 의미를 두지 않고 교단을 앞세우지 않고 주님만을 중심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단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단을 위해서 존재하는 교회는 단지 인간의 조직체일 뿐이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지 교단의 몸이 아닙니다. 신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께 속해 있는 것이지 교단에 속한 존재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결국 충성의 대상도 주님이지 교단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할 때 또 반박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교단에 남아 있느냐, 교단을 탈퇴하면 될 것이 아니냐'라고 합니다. 참으로 답답합니다. 교단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존재한다면 교단에 있든 없든 그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기존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에 반발해서 독립교회, 또는 무교회라는 것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알지 못한 것은 그러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즉 교단을 탈퇴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렇게 하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지 어떤 인간 조직체에 반발해서 나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 '교단에 반발하니까 너는 필요 없다' 라고 해서 쫓아낸다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목사 입장에서 교단을 예로 들어서 길게 이야기하였지만 신자입장에서는 가장 가까이 자신이 속한 교회를 예로 들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하지 말고 주님을 중심으로 사시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행동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중심이 곧 주님 중심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주님 중심에서 벗어나게 되면 기독교라는 종교는 결국 사람들의 오락이요, 취미 생활로 전락될 수 있으며 교회는 인간의 조직체요 사업체로 뒤바껴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교회를 지칭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서, 또 이 글을 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도 역시 죄인으로 이 땅에 왔기 때문에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참된 예수님을 멀리하는 이상, 우리는 잘못된 기독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헤매이다가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절대로 예수님을 멀리하지 않아'라고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신앙이란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쉽게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한 대로 우리 안에서 죄의 본성이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참된 예수님을 멀리하고 가짜 예수님을 좇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언제나 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케 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2절을 보면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아까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일하신다는 것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천국은 잔치를 베푼 것인데 그 잔치는 임금을 위한 잔치가 아니라 아들을 위한 잔치였습니다. 아들의 혼인 잔치입니다. 천국이 예수님 중심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섬겨 가지고는 천국 못간다는 이야기와 동일합니다. 이게 또 무슨 괴변이냐? 하실지도 모릅니다. 흔히 사람들은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만 잘 섬기면 천국 갈 것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도 하나님을 잘 섬기는 예수님을 믿는 것인 줄로 여겼던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섬겨서 천국을 간다면 바리새인들은 왜 못가는 것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입니까? 그러면 하나님을 잘 섬긴 것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였다면 그 누구도 천국가지 못한다는 결론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도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님의 길을 함께 가는 것을 '섬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하나님 중심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 중심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학적인 어려운 얘기이기 때문에 깊이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천국이 아들 중심의 나라라는 것은 오늘 비유에서 청함을 받았으나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참석지 않으며 오히려 임금이 보낸 종들을 죽인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랐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고 말합니다. 아들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멸망의 원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들 중심으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는 단 한 번의 잔치로서 세상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그 혼인 잔치에 참석한다는 것은 아들을 위하는 임금의 마음을 안다는 것입니다. 즉 임금이 아들을 위하듯, 임금의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청 받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참석을 거부했습니다. 주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 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뜻은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하나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자만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다면 먼저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영접하고 주님이 가신 길을 함께 가야 합니다. 나에게 손해라고 피해버리고, 어렵다고 거부하고, 힘들다고 그만둬 버린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임금의 마음이 아들을 향해 있는 이상 우리의 마음도 아들을 향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임금은 종들을 보내어서 길에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임금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사환들에게 말하여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13절)고 합니다. 예복이란 당시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주인이 내어주던 옷을 말합니다. 따라서 예복을 입는다는 것은 주인이 베푼 잔치를 함께 기뻐하는 마음으로 참여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아들에 대해서 무시하는 것이며, 아들을 위한 임금의 마음도 무시해 버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들에게 나오긴 나왔지만 단지 구경하는 마음으로 나온 것입니다.
예복을 입는다는 것은 주님을 중심을 일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께 나아와 복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린 다같이 길에서 떠돌던 사람들이었는데 잔치에 부름을 입은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순종하면서 오직 주님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는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모인 것을 천국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주님을 중심으로 삽니까? 아니면 아직까지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까? '나는 잘하고 있다' 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주님의 길을 보여주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살것인가?(마 22:15-22) - 40강
창세기에 시작된 악은 세상이 멸망당하고 사라져 버릴 때까지 그치지 않고 계속될 것입니다. 인간이 어떤 노력을 다하고, 힘을 합한다고 해도 이미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의 힘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또는 한국교회의 신자가 천만이 넘는데(얼마전 신문에는 약 8,800,000으로 발표) 천만인 신자가 신자답게 산다면 세상은 변화되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지금 세상이 이렇게 악해가고 범죄가 늘어가는 것은 신자들이 신자답게 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소리가 교회에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마치 교회나 신자의 할 일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인양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도 역시 세상을 변화시키시는 것이 목적이었습니까? 그래서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던 것입니까? 그렇다면 왜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셨다는 기록이 없는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을 변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심판을 받아야 할 세상의 죄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이 심판을 받아야 할 죄가 무엇인지는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는지를 보면 됩니다. 그리고 그 심판속에서 구원받을 자는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살아가셨던 그 정신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는 도덕, 윤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정신 그대로만 살면 됩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신자의 모습은 개인의 의지와 열심, 또는 인격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나타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에게서 보여져야 할 도덕과 윤리라는 것은 예수님의 정신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에 불과합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것인가?라는 문제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것은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것과는 전혀 연관이 없습니다. 신자가 세상을 바르게 살아야 할 이유는 신자가 주님의 뜻에 맞게 세상을 살아가야 세상에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가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선을 보여주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신자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양심대로 살고,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며 살았다고 해서 그것이 선한 삶이 아닙니다. 그런 삶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습니다. 신자는 교회 나온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대로 세상을 사는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항상 방해꾼으로 등장하는 것은 '내뜻'입니다. 사람에게는 각자 자기가 원하고 소망하는 삶의 모습이나 방향이 있는데 그것을 버리지 않는 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천국은 소망한다고 하면서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천국과는 상관없는 인생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신자로서 바르게 사는 것이고, 또 무엇이 악한 것인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계속해서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모든 일은 예수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신자라면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당하셨던 일들을 우리가 피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신자가 아무 어려움도 받지 않고, 반대도 받지 않고 신앙 생활을 편안하게 하고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길을 가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냐는 생각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신자는 꼭 어려움이 있어야 하고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어야 주님의 길을 가는 것이다라고 못박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길을 갔다면 분명히 닥쳐야 할 일들이 주님의 길을 피해버렸기 때문에 겪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대세라는 것을 무시하고 살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나 혼자 거부한다면 그 집단으로부터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가신 길은 대세를 거부한 길이었습니다. 아무리 세상 모두가 원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거부하신 것이 주님의 길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쓸모 없는 분이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원했던 것은 좋은 세상이었습니다. 예수님만 따라가면 먹을 것 걱정 없고, 병도 걱정 없는 그야말로 자기의 소망을 이뤄주는 예수님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를 전혀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욕심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닐 이유를 더 이상 찾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세상을 원합니다. 예수님 덕분에 집안에 문제없이, 문제가 있더라도 쉽게 해결되고, 언제나 평안하게 세상을 살다가 천국도 가는 그런 인생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대세 속에서 세상에 대한 소망을 끊으라고 말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사람에게 문병을 갔다고 합시다. 가서 예배를 드리면서 뭐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쳐주신 얘기를 하면서 예수님만 믿고 기도하면 낳을 수 있다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저는 사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부터 그런 믿음이 있는지를 항상 궁금해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죽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고 얼버무리고 지나가 버릴 것이 아닙니까? 만약 예수님이 그 환자에게 찾아가셨다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당연히 고쳐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마태복음 8:16,17을 보면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신 것은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는 이사야의 말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저주를 짊어지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그 환자를 향해서 말씀하신다면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으니 하나님께 맡기고 너는 이제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뜻을 쫓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고자 힘써라'는 의미의 말을 하시지 않았겠습니까? 즉 살아도 은혜요 죽어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죽음을 앞에 둔 환자에게 가서 '죽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해서 듣는 사람이 기분나빠하고 화를 내면 어쩌나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면 그런 말을 하지를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듣는 사람의 기분이나 감정은 전혀 생각지 않으시고 오직 죄를 알리고 천국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의 반대를 받으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같이 한다면 결국 세상으로부터 많은 반대를 받을 일이 수없이 많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기 위해서 한 말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기 때문에 세금을 로마에 바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라는 질문을 통해서 예수님을 곤란하게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예수님이 세를 바치라고 하신다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면서도 세상의 힘 앞에는 별수 없구나'라는 구실로 시비를 걸 것이고,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에 대한 반역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로마에 신고해서 잡아죽일 수 있는 좋은 구실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치라고 한다면 기독교가 무너지게 되고, 바치지 말라고 하면 목숨이 위태롭게 되도록 빠져나갈 구멍이 없이 만들어 놓고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방법으로 바리새인들의 말의 올무를 피했습니까? 19-21을 보면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기 위해서 들고 나온 것은 세금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신 것은 '너희는 관심이 세상의 문제에 있지만 나는 세상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오늘날 신자들이 세상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와서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것은 인간의 관심이지 하나님의 관심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이가 대학 입시를 볼 때 '하나님 어느 대학을 시험쳐야 합니까?'라고 묻는 것은 하나님 관심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어느 대학에 들어가든 하나님의 뜻을 보이는 신자로 살아라는 것입니다. 설령 대학에 떨어진다고 해도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삶을 살아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관심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말씀의 의미는 이 세상에 가이사의 것이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여호와의 소유입니다. 인간이 누리고 있는 권력까지도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에 가이사의 것이 따로 있고, 하나님의 것이 따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말은 세상일에 대한 관심은 세상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께만 관심두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세상사람의 수준에 있으면서 말로만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살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세상 어디에서 살든지, 무슨 일을 하면서 살든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바르게 사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세상을 편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에 목적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가 아무리 변화되어서 좋은 환경이 된다고 해도 환경으로 인해서 인간이 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신자는 자기가 살아가는 환경이 언제나 좋은 환경이기를 기대하는 마음부터 버려야 합니다. 좋은 환경, 나쁜 환경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신자로서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남이 나를 욕하든 칭찬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하신 말씀만을 전하며 사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것 때문에 욕을 먹든, 쫓겨나든 그것은 하나님의 소관이지 우리의 소관이 아닌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고, 무슨 행동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확실한 기준을 세우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일치가 되느냐에 관심을 두면서 살아갈 때 나머지 모든 문제는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입니다. 욕을 먹는 것도 하나님이 책임지신 결과요, 쫓겨나는 것도 하나님이 책임지신 결과입니다.
여러분의 환경이 항상 좋은 환경되기를 기대하는 마음보다는 날마다 내가 처한 자리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되는가?'에만 관심을 두고 사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올무에 매이지 않고 열심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르게 사는 것이 어떤것인가를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세상일에 대한 걱정과 염려는 세상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일은 하나님의 책임으로 알고 오로지 하나님을 전하는 일에만 관심두고 살뿐입니다. 이것은 욕먹는다고 해서 그만 둘 일이 아니요, 쫓겨난다고 해서 타협해 버릴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삶의 태도인 것입니다.
신자의 하나님(마 22:23-33) - 41강
성경에 선지자들이나 사도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설교들을 보면 하나같이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한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제시함으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말씀을 통해서 발견한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따라서 설교는 들을 귀 있는 자만이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그 어떤 아름다운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즉 자신의 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듣기 싫은 소리로만 들려질 뿐입니다.
때문에 여러분들은 설교가 나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만약 여러분들에게 그런 생각이 있다면 나중에는 자신이 변화되지 못하고 신자답게 살지 못한다고 생각될 때 모든 원인은 설교로 돌려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설교하는 사람으로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는 여러분을 향해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나 자신을 향한 설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르게 전함으로서 내가 누구에게 붙들려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세우시고 설교를 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신 자들을 교회로 부르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게 하심으로 자신 스스로가 누구에 붙들린 삶을 살고 있는 가를 확인하게 함으로써 구원으로 자라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설교는 그리스도안에서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하나님께 붙들린 삶을 살기를 소원하는 신자들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다가갈 뿐, 자신의 삶을 내세우고 자신의 꿈을 포기하기 못하는 사람들에게 설교는 한낱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마태복음 22장에서도 낱낱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는 말씀을 드리면서 세금 문제를 들고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했던 사람들의 문제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즉 그들은 세상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으나 사실 예수님은 세금을 바치고 안바치고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신자들 가운데는 세금 문제에 대해서 민감한 분도 있습니다. 세금을 국가에서 내라고 하는 대로 내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법이 허용하는 내에서 최대한으로 피하는 것이 옳으냐, 어떤 것이 신자다운 것이냐?라고 묻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릴 것은 세금을 국가가 내라는 대로 정당하게 바쳤다고 해서 그것이 나를 신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세금을 덜 냈다고 해서 신자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이런 문제를 가지고 어느 것이 신자의 양심에 바른 것이냐라고 묻기도 하지만 신자의 양심이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지 세상과의 관계를 가지고 따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자가 어떤 자리에서든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사느냐를 말씀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자신의 행동이 자신을 신자되게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어떻게 하는 것이 신자다운 것이냐?'를 묻게 되는 것이고, 자신이 생각하는 신자다운 행동을 함으로써 스스로 '나는 신자'라는 만족감과 위로감에 젖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새로운 율법으로 빠져들게 하는 것이고 소위 큐티라고 하는 것의 위험성이 여기에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적용이라는 것이 자신을 법적인 삶에 매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자라는 것은 세상과의 관계에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증명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유지되고 있을 때 자연적으로 보여지는 열매일 뿐입니다. 따라서 세금에 대한 문제는 땅의 문제일 뿐 하나님과 관계된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러면 세금을 포탈하든 말든 하나님과의 관계만 바르게 유지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께 헌신하면서 오직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서 살고자하는 사람이 세금 포탈까지 하면서 돈을 모으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의 이 문제가 끝난 후에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부활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사두개인은 부활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활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은 다같이 자기들의 성경 지식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 지식이 잘못된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또한 그들에게는 잘못된 말씀으로 들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성경을 각기 자기들의 전통과 지식에 의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위배된 것은 모두 잘못된 것으로 평가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도 그들의 공격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난처하게 하고자 했던 질문은 세상적인 이치로 생각하면 틀림없이 곤란해질 수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을 세상적인 이치로만 생각하려고 하는 그들의 잘못을 되려 책망하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질문한 부활의 문제는 이러합니다. 일곱 형제가 있는데 맏이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맏이가 죽자 둘째가 형수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둘째도 죽고 셋째가 형수와 결혼하고 다시 죽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곱 형제가 다같이 한 여자와 결혼을 하고 다 죽었는데 나중에 부활했을 때 그 여인의 남편은 누구냐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도 사두개인과 같이 세상적인 이치를 가지고 부활을 생각한다면 이 질문에 참으로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가 장례식을 치를 때 위로한다면서 하는 말은 나중에 부활해서 다시 만난다는 것입니다. 죽은 남편, 죽은 아내, 죽은 부모도 부활하면 만날테니까 슬퍼하지 말고 기쁨으로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두개인의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우리는 그 답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성경도 오해하고 하나님의 능력도 오해했다고 말씀합니다. 어떤 오해인가 하면 30절에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는 말씀과 같이 부활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가를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세계는 세상의 연장선이 아닙니다. 즉 세상에 있는 일들, 관계가 계속 유지되는 곳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오해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천국에서도 그대로 유지되는 것으로 알았고, 또 세상에서 열심히 봉사하면 천국에서 상이 남들보다는 크다는 생각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은 세상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세상 관계도 세상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산 것은 다 쓸데없는 것이고 허무한 것이냐는 생각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부터가 이미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고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행하였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단지 죽은 사람의 몸을 다시 살리시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소생일 뿐입니다. 나사로가 그렇고 회당장의 딸 야이로가 그렇습니다. 부활이란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인데 이들은 또 다시 죽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능력을 죽은 자를 살리는 것과 같은 물리적인 힘으로 오해하고, 그러한 힘이 자신에게 주어지기를 갈구하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분명히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을 다시 살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죽는 것은 무엇이고 다시 살리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32절을 보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들은 산자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죽어서 이미 흙으로 돌아간 예전의 사람들을, 아직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고 부활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인데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산자로 지칭하는 것은 무엇때문입니까? 결국 살았다, 죽었다라는 것은 육체의 문제를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죽었다'라는 의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죽었다는 것은 죄악 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이미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몸이 죽지 않았다고 산자로 불리는 것이 아닙니다. 몸의 죽음 여부와는 상관없이 죄인으로 이 땅에 온 자는 모두 죽은 자입니다. 때문에 저나 여러분은 모두 죽은 자입니다. 사람이 죄악 속에서 죽은 자의 모습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틈만 있으면 죄의 열매가 보여지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하나님을 불러도 자기를 이롭게 해줄 하나님을 찾습니다. 자기의 행위를 가지고 남과 비교하고 자랑하는 이러한 모든 모습들이 자기 중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죽은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와 같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죄악 속에 있던 자를 생명으로 옮기시는 것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능력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가 깨달을 뿐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처음에는 죄속에서 죽은 자였습니다.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기의 힘으로 약속을 이루어 보고자 한 아브라함이나, 장자가 어떤 자인가를 알지 못하고 자기 생각대로 장자를 지목한 이삭이나. 세상에서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복이라 여기고 남을 속이고 술수를 부렸던 야곱이나 모두가 죽은 자, 죄인의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약속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들을 살리신 것입니다. 그들이 산 자가 되었을 때 그 모습은 더 이상 자기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살아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에게는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의 오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오해할 때 자신은 이미 죽은 자였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단지 열심히 신앙생활해서 장차 부활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다같이 죽은 자로서 왔습니다. 다같은 죄인입니다. 죄인인데 좀 나은 죄인이 있고, 더 악한 죄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죽은 죄인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진심으로 자기를 아는 자입니다.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죽은 자에게만 임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아는 자만이 자기를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할 수 있는 것이지, 자신이 죽은 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자는 하나님이 살리신 은혜 또한 무시해 버리고 항상 자기의 공로를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은 자로서 하나님이 살리신 권능을 입은 자는 언제나 자기를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만을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해도 자기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주장합니다. 죽은 자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이것은 오직 하나님이 나에게 함께 하셔서 하나님이 하신 것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자는 자기의 행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산자이고,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부활한 자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활한 자로서 살기 때문에 세상의 권력과 힘에 대하여 두려움을 내지 않습니다. 이미 산 자이기 때문에 죽음이 그를 위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말씀에서도 현재 여러분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죽은 자로서 살아갑니까? 모두가 죄인이고 다같은 흙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나를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감사하며 이웃을 그 사랑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산 자입니다. 내가 죽은 자임을 아는 자가 하나님 편에서 산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산자는 세상을 죽은 자로 살아가는 사람인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마 22:34-40) - 42강
그러나 신자가 부활을 믿는다면 그 믿음의 모습이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죽어도 산다는 것입니다. 죽어도 살 것인데 그 부활을 믿는다면 죽는 것을 겁을 내겠습니까? 부활을 믿는자가 세상의 권세와 힘이 두려워서 믿음을 고집하지 못하고 타협과 양보의 길로 가겠습니까? 세상이 나에게 어떻게 한다고 해도 이미 세상에서의 성공과 출세를 포기한 자에게는 죽음이 두렵지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신자가 세상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세계를 이미 이 세상에서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세상이 요구하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능력과 힘을 최대한 발휘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이미 자기 인생의 책임자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의 성공을 방해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각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에 대하여는 산 자이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미 죽은 자압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죽은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는 죽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를 포기하는 자는 하나님에 대해서 살아있는 자이며 그것이 곧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사두개인들이 대답을 못했다는 소식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또 한가지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율법사가 말한 율법이라는 것은 구약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총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율법사는 '당신이 구약의 율법을 다 알 수 있느냐'라는 시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사는 평생을 율법을 읽고 연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들만이 율법을 제일 잘안다고 스스로 자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안다는 것이 그들을 신자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된 우리가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암기를 잘한다고 해서 성경이 저절로 깨달아지는 것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읽고 암기하는 것을 나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나는 성경을 몇 번 읽었고 어디를 암기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성경 지식을 자랑한다면 그것은 율법사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 전체를 다 암기한다고 해도(암기하는 사람도 없지만) 그것 때문에 천국 가는 것도 아니요, 암기하는 성경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가 성경읽기 운동을 하면서 성경을 많이 읽도록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참으로 조심해야 할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읽는 것이 실적 위주로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기 위해서 읽는 것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은 단지 인간들의 종교행사이지 하나님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을 많이 읽는 것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지키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법을 지킨다는 차원에서의 말이 아닙니다. 즉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내가 말씀을 지킴으로 신자답게 되거나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의 말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말씀을 지키는 것은 이미 신자로서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성경을 100번을 읽고 암기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율법사는 율법 중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율법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서 사랑하라는 것은 사랑은 마음만으로도 안되고, 목숨만으로도 안되고, 뜻만으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은 행함이 있어야 하며, 사랑 없는 행함 또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행함은 위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행함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목적하고(자기 자랑을 위해서든, 천국을 가기 위해서든) 의도적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 율법사들의 수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중심을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고, 둘째는 이웃 사랑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조심할 것은 첫째 둘째는 사랑의 우선 순위를 정해놓은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사랑이 크고 그 다음으로 이웃사랑이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39절에 보면 "둘째는 그와 같으니"라고 합니다. 그와 같다는 것은 첫째와 같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같은 사랑이다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우선 순위가 없습니다. 누구를 먼저 사랑하고 누구는 그 다음에 사랑한다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중심을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마 5:17절에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합니다. 즉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을 위해서 오셨는데 완성은 사랑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통해서 구약의 모든 율법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들이 그리스도안에서 산다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구약 율법을 이룬 자입니다. 구약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중심 사상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모든 율법들은 사랑에 대한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면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법적인 차원에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말씀을 지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하나되어 살아가는 신자의 삶입니다. 자기의 욕심도 버리고, 자기의 뜻도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우리 마음에 담고 그대로 살아가기를 즐거워하는 자입니다.
신자는 무엇을 해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도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기도는 나의 요구를 말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내 뜻을 포기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기도할 때는 결코 내 요구를 하나님께 내세울 수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자기의 욕심을 버리고, 자기의 뜻을 포기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봉사를 해도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나는 봉사한다'가 아닙니다. 나는 지금 봉사하고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려야 합니다. 단지 지금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냐를 물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봉사입니다. 이외에 모든 것을 자기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행동할 때 그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어떤 사람은 '먼저 내 몸을 사랑할 줄 알아야 이웃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다. 자기 몸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할 수 있는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웃 사랑은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음을 아는 자가 그 사랑을 다시 내어놓는 것인데 그 대상이 이웃입니다. 그것을 이웃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웃 사랑은 나에게 있는 사랑으로 이웃을 좋아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흔히 사람들이 하는 이웃 사랑이란 그 대상이 자기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한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 사랑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의 이웃 사랑입니까? 하나님 사랑은 구원 사건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은 홍해에서 자기들을 살리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십자가의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 심판의 자리에서 건짐 받은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는 구원의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같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살아난 자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이러한 구원의 사건을 경험한 자들이 '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났다'라는 것을 깊이 알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를 원할 것이고 말씀대로 살기를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안 자만이 사랑을 내어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사랑하며 사는 것을 이웃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많은 사람들은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그냥 사랑하라고 하면 부담이 덜 되겠는데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니까 내가 나를 위해서 하는 것만큼 이웃에게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즉 나를 위해서 만원을 썼다면 이웃을 위해서도 만원을 써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 사랑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똑같이 유월절의 피로 인해서 살아난 사람들이고, 똑같이 홍해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난 자들입니다. 즉 어린양의 피로 출발한 공동운명체이고, 똑같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건짐 받은 경험이 있는 공동 운명체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죽음에서 살아났다면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웃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난 경험을 가진 관계입니다. 즉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면 내 이웃도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저 이웃을 사랑하신 것처럼 나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저 사람을 사랑하겠습니다'라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 자는 이웃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껏 해봐야 사랑하는 척 할 뿐입니다.
때문에 내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의미도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몸이라면 저 이웃도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몸이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즉 나나 저 사람이나 똑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서 살아난 몸이다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몸이 아니고 같은 몸입니다. 차별이 없고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남녀노소를 따지지 않고 사회적인 위치나 소유를 따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 될 수 있는 관계입니다. 이것이 이웃 사랑이며 같은 운명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운명이 아닐 때는 어떻게 합니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모른다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알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구원받은 사랑을 모른다면 그들은 같은 운명의 공동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같은 운명이란 서로가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같은 길을 간다면 같은 것이 나와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구원받았음을 아는 자는 오직 주님의 피만을 드러내며 예수님의 은혜만을 자랑하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그리스도를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드러내고 자랑하는 것은 자기의 행위이고, 자기의 열심이고, 몽땅 자기 것만 드러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같은 운명의 공동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이웃이 아닙니다.
공동체라는 것은 조직체로서의 교회의 한 일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공동체라는 말을 많이들 하고 있지만 그 공동체라는 것은 단지 어떤 조직의 일원으로서 서로 사랑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같은 조직에 속해있으니까 싸우지 말고 서로 잘 지내자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공동체란 같이 밥먹고, 같이 일하고, 재산도 공동으로 하고, 수입도 공동으로 해서 나눠 가지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한 공동체는 같은 운명을 말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서의 운명입니다. 세상의 조직체를 떠나서 누구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은혜만을 자랑하고 사는 자라면 그 사람이 이웃이고 같은 운명에 있는 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은 서로 만날 때 나타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입니다. 그 관계 속에서 서로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곧 교회입니다. 자기 자랑과 자기 열심으로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은혜와 같은 사랑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아예 대화도 하지 말고 멀리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들 가운데는 미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하나님의 백성도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내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난 것을 기억하고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바로 가르쳐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즉 이웃의 관계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할 뿐이지 불러들이는 일은 성령이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죽을 죄인의 몸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에 살아났다는 것을 진심으로 안다면 모든 사람을 나와 똑같은 자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며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과 행함의 일치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한 운명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에게서 보여져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같은 운명에 있는 자로서 영원한 나라가 주어지기까지 힘을 잃지 말고 은혜와 사랑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열심히 살자고 서로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할 관계입니다. 이것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들은 서로 권면해주고, 격려해주고, 다른 길로 가지 않도록 도와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은석교회 여러분들은 이런 관계를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어려울 때 물질적으로 도와주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내가 기도해준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이 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교회의 모습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웃을 동정하는 것이지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몸같이 사랑한다면 어려움과 고통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지켜주면서 도와주고 기도해줄 것입니다. 단지 문제 해결이 아니라 굳건히 사랑 안에 서 있기를 말입니다. 항상 감사하고 사랑을 받았은즉 사랑하며 살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천국 백성의 모습입니다.
다윗의 주(마 22:41-46) - 43강
때문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내뱉는 '교회가 사랑이 없다'는 말도 결국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는다는 뜻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신이 한 주간만 교회에 출석을 하지 않아도 목사가, 장로가, 같은 구역의 집사가 전화해주기를 원하고, 만약 전화를 하지 않으면 '성도가 교회를 빠졌는데도 왜 관심이 없느냐'는 불평을 하기 일쑤인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자기에게 관심이 없고,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면 다른 교회로 옮겨보기도 합니다. 즉 '사랑 찾아 삼만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속성을 잘아는 교회는 그들이 원하는 사랑을 베풀며 '우리 교회는 사랑이 많은 교회입니다'는 것을 내세우며 교회에 정을 붙이도록 하기 위하여 성도끼리 관심을 가져라고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랑이 많은 교회, 친절한 교회, 아름다운 교회라는 인상을 심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회는 친절한 교회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경에서 말씀한 사랑을 보여주는 교회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친절한 교회를 원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주일에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사랑은 인간의 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같은 운명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서 살아났을 때 거기에 함께 했던 자들은 모두 같은 운명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으면 다른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난 자인 것입니다. 내가 깨달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데 그 대상이 같은 은혜 안에 있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몸인 것을 알 때 다른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웃이란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운명에서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유로 인해서 그 은혜와 사랑에서 멀어지는 자를 권고하고 가르쳐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나의 운명으로 붙잡아 놓으려고 하는 그 간절함이 곧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내 몸같이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관심이란 친절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운명에 같이 있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그리스도의 운명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닙니다. 우린 단지 하나님의 도구로서 쓰여질 뿐이지 결과는 우리의 주권이 아닌 것입니다. 결과는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제아무리 천사 같은 말로서 상대방을 가르치고 설득한다고 해도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수많은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한다고 하고 있지만,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고 성경을 말한다는 것은 인간의 지식도 능력도 아닙니다. 오직 성령이 함께한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란 어떤 유명한 신학교로 유학을 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수십 년간 성경을 연구한다고 해서 발견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성령이 함께 하신다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지식의 차이를 불문하고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현대교회는 분명히 그리스도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이단이라고 정죄하기도 합니다. 말은 맞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이 맞는다고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즉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받습니다'는 말을 한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며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는 얘기입니다. 이 땅에는 성령이 함께 하는 자들이 말하는 그리스도가 있고,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자들이 말하는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한 자들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드러냅니다. 성경을 통해서 증거되는 그리스도는 우리를 죽이고 십자가에서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 하지 아니한 사람들에게서는 비록 십자가가 외쳐지고 있지만 십자가는 주님이 지신 것으로 끝났고 이제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는 일만 남았다고 말하게 됩니다. 이것이 다른 예수입니다. 이 예수는 결코 죄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교회 다니는 모든 사람들은 내가 믿는 예수는 분명히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내가 믿는 예수가 다른 예수라는 것을 끝까지 부인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과연 진짜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자됨의 증거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진짜 예수님을 주로 모신다면 그 삶은 달라져야 합니다. 삶의 모습을 통해서 과연 진짜 예수님을 섬기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예수를 섬기고 있는지를 판단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내가 믿는 예수는 진짜 예수다'라고 미리 결론 내리지 말고 처음부터 하나하나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판단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하는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날마다 기다리는 것은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 즉 메시야를 기다리긴 하였지만 그토록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도가 자기들 눈앞에 있는 예수라고는 믿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증거해도 바리새인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출신성분이나 모습이 전혀 그들이 상상하는 그리스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온다는 구약의 예언을 문자 그대로만 믿었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다윗의 혈통을 따라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왕이었으니까 분명히 그리스도도 왕과 같은 힘과 영광을 소유한 모습으로 와서 자기들을 로마에서 해방시킬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로 초라하게 태어나신 예수님께서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하실 때 인간의 정상적인 생각과 이해로서는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질문을 합니다. 질문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면 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칭하였느냐'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이라면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가 나지도 않았을 때 다윗이 자신의 후손으로 올 그리스도를 '주(창조주)'라고 칭하였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즉 다윗은 아직 나지도 않은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주'라고 칭하고 있고, 성경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칭하고 있는 묘한 관계를 질문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답변을 못했습니다. 답변을 못한 것은 그들이 알고 있던 그리스도가 진짜 그리스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에 답을 내릴 수가 있겠습니까?
다윗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했기에 아직 오지도 않은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주'라고 칭하였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다윗의 자손으로 오십니다. 그런데 그 자손이 어떻게 다윗의 주가 될 수 있습니까? 결국 예수님은 인간의 혈통에 보냄 받은 자로서 이 땅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누가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으신 예수님이냐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명확히 구분해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혈통에 보냄 받은 그리스도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44절을 보면 "주께서(하나님) 내(다윗) 주께(그리스도) 이르시되 내가(하나님) 네(그리스도) 원수를 네(그리스도) 발아래 둘 때까지 내(하나님)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즉 원수를 이기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를 통해서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창 3:15을 보면 원수가 등장을 합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원수의 관계인데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여자의 후손의 원수는 누구입니까?
다윗을 보면 다윗의 가장 큰 원수는 자기 속에 자리하고 있는 죄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원수도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는 죄의 세력입니다. 이 죄의 세력을 이기시는 분이 바로 진정한 구세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가 현재 자기의 원수로 자리하고 있는 죄의 세력을 이길 것을 미리 소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메시야는 원수된 죄의 세력, 즉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새로운 생명을 제공하시는 분으로 인간의 혈통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과 같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알고 바라보는 자는 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할 때 죄의 세력인 죽음을 이기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참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을 믿고 나오는 자는 원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주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세상 것에는 소망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참된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내가 알게 되고 그분을 만났다는 것, 이제는 죽음이 두렵지가 않고 주와 함께 영원히 산다는 것이 그토록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고, 그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기쁨을 기도해서 병이 나았다거나, 사업이 잘 된다거나, 교회가 성장한다는 기쁨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설사 교회에 나와서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없다 할지라도 자기만의 기쁨을 원하고 나올 수는 있습니다. 즉 종교생활을 함으로서 누릴 수 있는 마음의 안식이나 평안을 의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원하는 것은 교회의 좋은 분위기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교인들이 서로 서로 친절하게 대하고, 좋은 분위기 속에서 사이좋게 지냄으로 교회에 오면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교회를 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인간적인 것이지 결코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아는 기쁨 가운데 산다면 그런 분위기의 교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모습을 의도하거나 기대한다면 잘못이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런 모습의 교회를 의도할 때 자연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인간 방식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아는 기쁨, 죽음이 겁나지 않고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산다는 즐거움이 창출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인간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는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떤 분위기의 교회든 그 분위기가 나의 신앙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난 기쁨이 나를 지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분은 주님께 매이지 교회에 매인 자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누가 나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않아도 상관없이 자신은 주님을 만난 기쁨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무슨 직책을 맡았다가 그 직책에도 밀려나도 상관없이 기쁨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분이 바로 진짜 신자이고 그리스도를 만난 자입니다.
그리스도는 원수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우리의 죄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자신이 살고자하는 욕망 그 자체입니다. 세상에서 살고자 원하는 내가 곧 나의 원수입니다. 이 죄의 세력을 그리스도가 승리하셨다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주님의 승리가 곧 우리의 승리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된다면, 그리고 그 힘으로 산다면 이제 세상에 대한 욕심은 버릴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세상의 욕심을 조장하고, 세상적인 기쁨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제공받으려고만 한다면 그것을 어찌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은 내 기쁨이지 주님의 기쁨이 아닙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것도 내 기쁨이지 주님의 기쁨이 아닙니다. 내 기쁨을 중심으로 살아가면서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다른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도 만약 세상 사람처럼 세상에 있는 것을 가지고 자기의 기쁨으로 삼으려고 한다면 과연 내 안에 참된 그리스도가 계시는지 아니면 다른 그리스도가 존재하는지를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은 세상 즐거움은 더 이상 즐거움이 아닌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상 것들이 점차 시시해지는 것입니다. 다윗의 주가 우리의 주가 되십니다. 진짜 주를 만난 기쁨과 즐거움을 보여줄 수 있는 성도 되기를 바랍니다.
차별 없음(마 23:1-12) - 44강
그리고 지위가 높아지면 그에 대한 대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지위에 도전을 하는 것을 참지를 못합니다. 지위가 낮은 자는 높은 자 앞에서 굴복을 해야 하고 순종을 해야 합니다. 사람은 군림을 원하지 굴복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군림하는 쾌감 때문에라도 높은 지위를 항상 꿈꾸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단체라는 것은 국가로부터 시작합니다. 국가라는 거대한 단체 안에 여러 크고 작은 단체가 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단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합니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수많은 부서라는 조직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부서를 책임질 능력 있고 재능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적당한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는 장이라는 지위를 주게 되고 그 부서의 모든 사람은 그에게 복종하여 그 조직의 활동을 통해서 그 단체가 더욱 탄탄해져 가는 것이 조직의 목적입니다.
이렇게 하면 분명 어떤 하고자 하는 일은 체계 있고 질서 있게 잘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분명히 이런 단체와 조직 속에서 움직여져야 합니다. 명령체계속에서 위계질서를 지켜나가면 모든 일이 난잡해지지 않고 효율성 있게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급사회입니다. 세상은 이런 계급사회로 존재해야 제대로 되어갈 수 있습니다. 세상은 어차피 발전과 성장을 위해서 일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철저하게 관료제도 속에서 계급사회를 유지해야 발전과 성장에 효율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이라고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은 세상의 사회제도이지 절대로 교회의 제도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계급사회가 교회로 그대로 적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보면 세상의 관료제도, 즉 계급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세상적인 제도가 스며들게 된 것은 교회의 목적을 세상과 똑같은 발전과 성장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장과 발전에 기술은 성경에서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세상의 제도가 필연적으로 필요합니다.
사람이 단체를 만들면 꼭 발생하는 것이 단체를 성장시키고 싶은 욕망입니다. 결국 교회가 하나의 종교단체로 전락됨으로 말미암아 그 단체를 성장시키고 부흥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때문에 그 단체 안에 수많은 조직을 만들게 되고 그 조직이 활발히 움직이고 잘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소위 능력있는 사람을 뽑아서 그 조직의 장으로 앉혀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여기에는 계급이 존재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계급은 철저하게 명령과 복종입니다. 명령과 복종이 없는 계급은 없습니다. 결국 교회가 종교단체로 전락되고, 그 단체를 성장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교회를 세상의 모습과 똑같이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라고 이름하는 종교단체일 뿐이지 교회는 아닙니다. 교회는 단체가 아닙니다. 단체는 단체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단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가 단체가 될 때 신자는 교회라는 단체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봉사해야 하는 의무감에 빠져버립니다.
교회가 신자를 위해서 있는 것도 아니고, 신자가 교회를 위해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신자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의 모임이 교회 그 자체이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느냐를 따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성장하고 부흥해야 한다는 욕구도 필요 없습니다. 지위도 필요 없고 조직도 사실상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조직을 만든다면, 그 조직은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 일의 분담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그 조직도 결코 계급으로 나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상전이 있으면 안됩니다. 교회는 지도자라 자처하는 사람이 있으면 안되고 지위가 있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세상 모습일 뿐입니다. 교회에 지위가 있으면 안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교회는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차별이 없다는 것은 다 똑같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로 모이는 자는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습니다. 죽었다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내 힘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긍휼로서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내세우고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었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부와 명예까지도 함께 포함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난 자는 다시는 세상의 부와 명예를 앞세우지 않게 됩니다. 이런 자들이 모이는 것이 교회인데 그런 교회에서 세상의 부와 명예가 자랑될 수가 없고, 또 다같이 죽은 자라는 처지에서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났을 뿐인데 자신의 믿음을 자랑할 수도 없고, 열심을 내세울 수도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단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만 얘기하면 됩니다. 십자가를 아는 자들이 모여서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내가 발견한 십자가의 은혜를 나타내는 것 외에 또 무슨 할 일이 있겠습니까? 만약 신자가 교회에 대한 부흥과 성장에 관심을 두고 모이게 될 때 이미 그 교회는 십자가의 은혜로서 보이는 교회가 아니라 종교단체로 모이는 것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8절에서는 교회를 형제라고 말합니다. 교회에는 선생도, 아비도, 지도자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선생은 예수님 한분이십니다. 아비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분뿐이십니다. 지도자도 예수님만이 지도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선생과 지도자라는 것을 이 땅의 누군가에게 이양하신 적이 없습니다. 즉 예수님 대신 선생으로, 지도자로 부른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목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선생으로 지도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고 말하지만 도대체 그 말을 성경 어디에 근거해서 하는 말입니까? 성경을 가르친다고 선생입니까? 그렇다면 자신이 깨달은 성경이 자기의 능력입니까? 자신의 실력입니까?
사람이 성경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실력이 아닙니다. 성령이 깨닫게 하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이 선생이 될 수 있습니까? 성경을 가르치는 자는 단지 다른 성도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하여 성령이 깨닫게 하신 바를 그대로 전할뿐입니다. 하나님께 쓰여지는 일의 분담이지 성경을 가르치기 때문에 위대하고, 존경받아야 하고, 특별한 자리에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목사는 지도자도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지시를 받아 삽니다. 예수님의 지시는 말씀을 따라서 주어집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명령은 목사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단지 그 말을 전달하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목사가 지도자의 위치에 군림할 수 있겠습니까? 목사는 성도를 다스리기 위하여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같이 죽은자였다는 것을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성도를 위하여 피 흘리신 분은 예수님이지 목사가 아닙니다. 목사는 특별히 대우받을 자격도 없고, 대우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목사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다같은 형제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 형제의 관계에서 목사는 빠져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은 당시 종교 지도자이고, 선생이고, 신앙의 아비라고 자처하던 바리새인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은 선생도 아비도 지도자도 아니다고 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 똑같은 형제일 뿐입니다. 형제라고 해서 그 안에 형님이 있고 동생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형제는 형님과 동생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 같다는 의미로 쓰여지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교회로 모여지게 된 것은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감동시키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령님의 감동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의지와 종교심 때문에 교회를 찾았다면 그 사람은 비록 모임은 함께 한다 할지라도 같은 은혜와 사랑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교회에 대한 다른 목적이 자리하게 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고 나온 분들과는 항상 다른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른 모습이란 은혜와 사랑을 깨달은 분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나오지만,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의지나 취미로 교회를 찾은 사람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를 바라보게 되고, 목사를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때문에 다른 의지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중심으로 살아갈 뿐, 그외 다른 눈에 보이는 대상을 중심으로 살지 않습니다. 때문에 목사가 교회 중심이다는 말도 성경과는 전혀 다른 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목사가 신앙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목사가 좀 부족하고 잘못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지도 않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지도자, 아비, 선생이라고 칭하는 자들은 그만한 대우를 받고자 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대우를 받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는 꼼짝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지시하는 것을 즐겼고, 자기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경구절을 적어서 머리에 두르는 경문이라는 것을 넓게 해서 차별을 두고자 했고, 옷술도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크게 했던 것입니다. 잔치 자리는 의례히 상석을 차지하고 사람들이 많은 시장에서는 사람들이 랍비라 하면서 문안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입니다. 마치 목사는 지시하는 사람이고 신자는 그 지시대로 일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목사가 가운을 착용하고, 또 매주일 색깔이 다른 목에 두르는 후드라는 것을 착용함으로서 일반 신자와 차별을 두고자 한 것이나, 사람들로부터 '목사님'하면서 문안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모습을 신자들이 보고 배운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저나 여러분이 같이 배워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에게도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하는 바램이 있을 수 있고 그 자리에 앉았을 때 그 지위를 행사하고 싶은 욕심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장로면 장로라는 지위를 행사하고 싶고, 권사면 권사라는 지위를 행사하고 싶은 욕심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교회에서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또는 여러 봉사를 위해서 일을 분담하고 책임자를 세웠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봉사의 일이 주어졌을 뿐이지 결코 어떤 지위의 문제도 아니고 높고 낮음의 문제도 아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럴 때 신자는 교회에서 어떤 직분에 매이지 않고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번 집사면 영원한 집사다.' 다시 말해서 집사가 한 번 되면 그 다음부터 목사는 그 집사를 계속 집사로 세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집사 일을 하다가 집사를 그만두게 할 때 자기를 무시한다는 생각에서 교회에 대한 반발을 가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어지간하면 계속 집사를 하게 하는 것입니다. 집사 안됐다고 감정상하는 신자도 잘못이지만 그것이 두려워서 집사를 맡기는 목사나 다같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 자는 어떤 직책에 연연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서로서로 배워가야 합니다.
지도자, 선생, 아비는 오직 하늘에 계신 분입니다. 그 분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보이지 않으신 분을 믿는 믿음은 보이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목사가 설교를 잘하고 실력이 있다고 해서 그 목사를 의지하고 그 목사 때문에 교회가 잘 될 것으로 믿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다스리고 지도하는 것은 예수님이시지 목사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목사를 대우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여러분도 함께 잘못된 신앙의 길로 빠져가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를 대우하는 것을 즐기면 자신도 어떤 직책을 가지게 될 때 그것을 통해서 대우받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대우받고자 할 때는 꼭 위선으로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과는 좀 다른 면이 있어야 대우받을 조건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기 싫은 일도 기쁜 척 하면서 해야 하고, 억지로 감당해야하는 일도 많아지고, 남들 보기에 경건한 척 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모두가 위선임을 알아야 합니다.
은석교회의 중심은 예수님이십니다. 선생도, 지도자도 예수님이십니다. 목사는 단지 성경을 전하라는 일을 하도록 세움을 입었을 뿐입니다. 성경을 깨달은 것도 목사의 실력이 절대 아닙니다. 내 것을 여러분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여러분께 전달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목사도 여러분과 같은 형제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둥근 원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교회가 목사의 목회 포부를 이루어주는데 이용당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교회는 목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나 신자는 같이 하나님을 믿는 한 형제로서 말씀을 통해서 같이 배워가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사람이 먼저 그 모습으로 살아감으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가르침이 되어야 하는 관계입니다.
목사니까 당연히 신앙이 좋고 배울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목사는 신앙도 없고 사랑도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십시오. 목사가 성경을 바르게 가르친다고 목사를 존경할 필요도 없고, 목사를 대우할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만에 하나 목사에게서 성경대로 주님 중심으로 살아가고,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을 믿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목회하는 모습이 보여진다면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모습을 배우고 본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도 다른 분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나타낼 때 그 모습을 통해서 자신의 믿음 없는 모습을 깨달으며 고쳐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로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11절에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섬기면 큰 자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큰 자의 모습은 섬김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섬김의 모습을 보이신 분은 누구십니까?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만 큰 자이십니다. 그렇다면 큰 자안에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큰 자입니다. 그러나 큰 자안에 산다면 그에게서는 섬김이 보여지게 됩니다. 섬김을 보였기 때문에 큰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큰 자와 함께 하기 때문에 섬김이 보여지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아무쪼록 이런 모습으로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말고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을 믿고 사는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
종말(마 24:3-14) - 45강
현대 신앙인에게 있어서 크게 잘못된 모습은 하나님이 세우신 원칙, 즉 말씀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형편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기분이 좋고 형편이 좋을 때는 교회 다니는 것도 재미있고, 사람만나는 것도 좋은데 무슨 일로 인해서 기분이 나쁘거나 형편이 좋지 않을 때는 모든 것이 귀찮아지고 싫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지 않다고 교회 안나가고, 형편이 어렵다고 교회 안나가고, 마음이 아프다고 교회에 안나가는 일들이 비일비재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분을 맞춰주거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서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도 여러분의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며 교회도 여러분을 달래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생활을 자기 중심으로 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런 사람은 말씀에 의해서 신앙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기분이나 형편에 의해서 신앙이 좌우되는 잘못된 길에 서 있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기분이나 형편은 전혀 무시해 버리고 언제나 변함없이 존재하십니다. 내 기분이 안좋다고 해서 세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형편이 어렵다고 해서 하나님이 사라지고 안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고 말씀도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자기 일에 대한 관심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관심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관심이 가 있고, 말씀에 관심을 두고 사는 사람은 눈앞의 자기 일보다는 세상의 마지막을 보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은 분명히 마지막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끝내겠다는 것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러한 계획을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진심으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있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세상을 자기 기분에 좌우되어 살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순간순간 좋은 일이 있으면 웃다가도 나쁜 일이 생기면 금방 울고, 금방 기뻐했다가도 금방 슬퍼하는 그런 모습으로 세상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지혜로운 신자는 '내가 지금 슬퍼한다고 해서 운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이럴 때 신자인 내가 가져야 될 태도는 무엇인가? 하나님께 대하여는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신자는 절대로 감정에 신앙이 좌우되지 않습니다. 무엇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 인생에 대해서 낙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말, 마지막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는 세상에 대한 한풀이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종말을 말할 때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종말 자체를 거부합니다. 즉 현재의 이 좋은 영화를 포기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온갖 풍파에 시달리면서 힘들게 세상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종말을 말하면 '그래 이놈의 세상 콱 망해버려라'는 식으로 종말을 자기 한풀이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종말은 '세상은 망한다'로 끝나지 않습니다. 종말은 여러분의 현재 삶의 방향을 바르게 해주는 역할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확실한 기준이 종말을 통해서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종말을 무시하고 살면 모든 관심은 눈앞의 일에 둘 수밖에 없습니다. 눈앞의 일에만 관심을 두고 살기 때문에 약간의 힘든 일만 일어나도 신앙도 하나님도 안중에 없고 낙심하고 슬픔에 빠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말에 관심을 두고 살아갈 때 관심은 눈 앞의 일이 아니라 먼 미래에 두게 됩니다. 때문에 현재의 일이 조금 힘들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거나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아무튼 여러분은 종말을 단지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종말을 통해서 현재 여러분의 삶의 방향이 어떠한가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종말을 믿는다면 과연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모습인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은 종말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중점은 마지막 때에 생명으로 들어가는 자가 누구인가에 두고 있습니다. 즉 종말을 아는 신자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말씀들은 종말을 사는 우리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3절)라고 묻습니다.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하게 된 이유는 1절과 2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바리새인, 사두개인들과 논쟁을 하시고 성전에서 나오셨을 때 제자들이 성전에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옵니다(1절). 제자들이 성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3:38절에서 예수님이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고 하신 말씀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마 제자들은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은 듯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2절에서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고 말씀합니다. 세상 마지막 때 남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 때와 징조를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많은 징조를 말씀합니다. 거짓 그리스도가 일어나고, 기근, 지진, 전쟁 등 여러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런 여러 일들이 눈에 보여져도 그것을 끝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이런 여러 가지 일은 세상이 지금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증거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신자로서 바른 삶을 태도를 가질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신자다운 모습을 보여라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뒤에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종말은 죄에 대한 결과입니다. 세상을 멸망시킨다는 것은 세상이 하나님께서 참으실 수 없을 정도로 죄가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세상이 망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왜 세상은 망해야 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망해야 하는 죄의 모습에 내가 들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종말은 우리를 위협하는 말이 아니라 회개를 촉구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합니까? 37절에 보면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고 합니다. 노아 시대를 생각해보면 노아가 당시 홍수로서 세상이 망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개인의 주장에 불과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노아의 주장을 묵살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왜 노아의 주장을 묵살했습니까? 38,39절을 보면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노아 시대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망한 이유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노아도 방주만 만든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시기 위해서 일을 했을 것이고, 또 결혼도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모든 관심을 자기 인생에 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 인생의 행복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종말에 대한 노아의 말을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그 노아의 시대나 예수님의 시대가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지금 이 시대도 노아의 시대와 같다는 것입니다. 심판이 말해져도 사람들은 그것을 무시합니다. 오직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이 망하는 모습이라면 과연 그 모습이 우리에게는 없습니까? 여러분들은 노아와 같이 마지막 때에 관심을 두고 살면서 그 마지막을 외치고 있습니까? 노아 시대 사람들은 홍수가 나서 멸하기까지 마지막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갔습니다. 세상 끝날 까지 하나님께 관심을 두는 삶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들에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 때를 아는 신자가 당장 눈앞의 일 때문에 말씀대로 사는 것을 소홀히 하고 거부할 수 없습니다. 바쁘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일들을 팽개쳐 버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를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노아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 심판을 홀로 말했습니다. 이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도 호응해주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고 오히려 반대하고 틀렸다고 하는 말은 혼자서 주장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노아는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겠습니까? 이것이 마지막을 아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홀로 주장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와 같이 마지막 때를 제대로 살아가는 신자에게는 어려움과 핍박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주님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마지막 때를 아는 신자의 입장인 것입니다.
신자가 마지막 때를 알고 세상을 산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종교적인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단지 날마다 주님이 세상을 바라보는 그 시각으로 세상을 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먹고사는 일이 먼저가 아니고 좀더 좋은 것, 좀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 약속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살아가신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충성이며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깨어 있는 자입니다. 이런 신자는 주님이 언제 오시는지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오늘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가 최고의 관심일 뿐입니다.
40,41절을 보면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데려감을 당한 사람은 특별한 종교 행위를 하고 있던 것이 아닙니다. 둘 다 똑같이 평소와 같은 밭일을 하고 매를 가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이 날마다 일을 하면서 살아가지만 그러나 데려감을 당하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일합니다. 즉 일을 하는 목적을 자기 행복이나 많은 것을 얻기 위한 것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 관심을 두며 세상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46절에 보면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합니다. 종은 주인이 있으나 없으나 주인의 명령대로 살아야 합니다. 즉 가장 종다운 종은 주인이 언제 오시느냐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명령한 것을 언제나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모습이 있는 자입니다. 종이 자기 형편과 기분 때문에 주인의 명령을 소홀히 하고 무시해 버리고 자기 멋대로 살아간다면 그 종은 충성스러운 종이 아닙니다. 기분 좋으면 지키고 기분 나쁘면 멀리하는 것이 말씀이 아닙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신자는 절대로 현재 눈앞의 일에 신앙이 좌우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것을 알고, 세상의 마지막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과 타협할 수 없고,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간다고 해서 그 뒤를 따라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과연 누구를 따라가는 삶입니까? 무엇에 목표를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무엇에 울고 무엇에 기뻐하며 살아가는 삶입니까? 세상의 마지막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땅의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관심을 말씀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세상을 보고 노아처럼 세상을 보고 선지자들처럼 세상을 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울고불고 한다고 해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향한 계획을 변경하지 않습니다. 우린 단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받아들이며 그 일속에서 세상을 포기하는 것을 배우면서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 얻는 자의 모습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깨어 있으라(마 25:1-13) - 46강
우린 지난주에 종말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언젠가는 세상을 끝내버리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불변의 계획입니다. 마지막을 피하기 위해서는 세상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하는데, 이 땅에는 그 무엇도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결국 세상은 끝나야 하는 운명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신자는 세상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분명히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이란 세상의 마지막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마지막 때 나를 살릴 수 있는 것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여러분들은 종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세상의 마지막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똑같이 종말을 거부하고 싶으십니까? 만약 여러분들에게 종말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어느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세상에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여러분의 소유를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유로부터 떠난다는 아쉬움이 뭔가 여러분들을 종말에 대해서 거부하게 하는 쪽으로 붙들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세상의 종말을 기다린다, 천국을 소망하고 산다'고 자신 있게 소리치고 싶습니까? 소리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이 진심으로 세상의 마지막을 알고 천국을 기다린다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초월해야 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자신의 소유를 만들고자 하지 아니한 사람은 세상의 환경에 매이지 않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사건에도 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럴 자신이 있습니까?
여기에 반박을 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좋은 일이 있으면 기뻐하고, 나쁜 일이 있으면 슬퍼하는 것이 당연한데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느냐고 소리치고 싶을 것입니다. 물론 좋은 일에 기뻐하고 나쁜 일에 슬퍼하는 것이 당연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죄인으로서 당연한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를 지은후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자신에게 좋은 일에는 웃고, 나쁜 일에는 울 수밖에 없습니다. 남에게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는 웃음보다 먼저 부러움이 앞섭니다. 남에게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 측은하다는 생각은 들어도 울음은 나오지 않습니다. 자기 중심의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죄인의 모습이고 하나님이 처음 만드신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없애버리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계획속에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달았다면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것이냐'를 생각하면서 살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의 신앙의 삶에 날마다 쉬지 않고 계속되어져야 할 문제인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종말을 말씀하시고 나서 실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 이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유대인들의 결혼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이야기를 유대인의 결혼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고 계십니다. 유대인의 결혼 풍습은 지금의 우리와는 다릅니다. 그런데 옛날 우리나라의 모습과는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랑이 먼저 신부집으로 가서 신부를 데려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결혼 잔치를 두 번을 하는데 한번은 신부집에서, 또 한번은 신랑집에서 합니다. 먼저는 신랑이 신부집을 가서 잔치를 하고, 뒤에 신부를 데리고 신랑의 집으로 가서 잔치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신랑이 신부집을 갈 때는 낮에 가는 것이 아니고 주로 저녁에 갑니다. 그리고 신부집에서는 신랑을 기다리다가 신랑이 올 때 그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신랑을 맞이하는 일을 열 처녀가 합니다. 성경은 이 처녀들이 누구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당시 결혼 풍습을 예로 들어서 신부 들러리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이 누구냐라는 데에는 중점을 두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그들이 하는 일은 신랑을 맞이하여 잔치에 참석하는 것인데 그들 중에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는 자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왜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는가? 이것이 오늘 이시간 우리가 관심을 두고 살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결혼으로 비유하시면서 왜 신랑이 밤에 오는 결혼을 이야기하십니까? 그것은 깨어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13절을 보면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합니다. 신랑이 올 때 세상은 밤이고, 신랑과 함께 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깨어 있는 자다. 이것을 가르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열 처녀가 등장을 하는데 그 중에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잔치에 들어가게 되고,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랑이 올 때 일어날 상황이라면, 즉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에게서 발생할 문제라면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다섯 처녀의 미련함이 무엇인지, 그리고 깨어있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를 잘 알아야 하는 아주 중요한 시간입니다.
열 처녀가 슬기로운 모습과 미련한 모습으로 나눠지게 된 기준은 기름입니다. 기름을 준비한 처녀는 잔치에 들어감으로 슬기로움이 증명되고, 준비하지 아니한 처녀는 들어가지 못함으로 미련함이 증명됩니다. 그리고 기름을 준비하고 준비하지 아니한 것이 깨어있는 것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깨어 있으라'고 할 때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을 기다리면서 잠을 잤고, 슬기로운 처녀는 자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아닙니다. 5절을 보면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열 처녀는 모두 신랑이 올 때 자고 있었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깨어있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또 어떤 사람은 '졸며 잘새'를 나누어 가지고 슬기로운 처녀는 졸았지만 미련한 처녀는 잤다라고 하면서 조는 것은 잠을 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깨어있는 모습이다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말도 되지 않은 말입니다. '다'라는 말속에는 모두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다섯은 졸고, 다섯은 잤다라는 것을 굳이 다른 모습으로 구분해서 슬기로움과 미련함으로 보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은 신랑이 올 때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새벽기도, 철야기도를 강조하는 말이 되어서도 안되고, 교회에 일에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라는 의미로 사용해서도 안됩니다.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니까 열심히 기도하고 신앙생활하자. 그래서 주님오실 때 깨어있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니냐'라고 해버리면 본문에 신랑이 올 때 슬기로운 처녀도 졸며 잤다는 말이 이상하게 되어 버립니다. 결국 깨어 있으라는 것은 신랑이 왔을 때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평소의 삶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있는 삶이란 어떤 특정한 종교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24:40,41절에서는 모두 똑같은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 데려감을 당하고 버려둠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평소에 깨어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세상에서의 슬기로움과 미련함은 언제나 효율을 가지고 판단합니다. '얼마나 효율적으로 행동하느냐' 여기에 따라서 미련한 사람과 슬기로운 사람으로 구분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 사고방식으로 본문을 바라볼 때 과연 기름을 준비한 것이 진짜 슬기로운 행동입니까? 기름을 준비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 사고방식으로는 신랑이 늦게 와서 등불의 기름이 부족하면 그때 준비하면 된다는 것이 더 합리적입니다.
결국 기름을 준비한 것은 신랑이 늦게 옴으로서 슬기로운 행동이었음이 증명된 것이지 만약 신랑이 일찍 옴으로 인해서 준비한 기름이 필요없게 되었다면 기름을 준비하지 아니한 다섯 처녀가 오히려 슬기롭게 행동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이 일찍 오면 기름을 준비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그러면 괜히 헛수고한 것이 되니까 기름이 부족하면 그때 가서 준비하자'는 극히 합리적인 생각으로 살아가는 세상 사고방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고방식은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유익이 되지 않는 것은 모두 쓸데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런 시각에서 신자의 신앙생활을 볼 때 그들의 눈에는 아무 쓸데없는 미련한 행위로만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왜 신앙생활에 소홀해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보다 세상의 일을 하는 것이 현재 더 합리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나중에 해도 된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현재 더 급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일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예수님을 배우는 것보다 세상 학문을 배우기에 더 열심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배우는 것은 세상살이에 전혀 도움이 안되지만 공부는 당장 자신의 인생을 판가름하는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히 신앙보다는 공부에 마음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앙을 가진 부모부터 자기 자녀가 신앙보다는 공부에 더 관심을 두기를 바라고 있고 또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세상적인 사고에서 볼때는 지혜로운 것이 됩니다.
현재만을 바라보고 살기 때문에 신앙을 너무 계산적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열심히 하면 현재 삶에도 복이 된다는 말을 목회자가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현재의 유익을 제공해야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이기 때문에 현재 주님이 아직 안오셨다는 것만 생각하게 되고 주님이 안오셨으니까 우선 급한 것은 세상일이다라고 생각해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안오셨으니까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현재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주님이 안계신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볼 때는 미련한 모습이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극히 지혜로운 삶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이 현재 자신에게 와계신 것으로 간주하고 '주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미련한 처녀는 항상 현실을 생각하고 현실에 맞춰서 자기에게 유익 되는 쪽으로만 살아가지만 슬기로운 처녀는 현재를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미래 일을 지금 일어난 일로 앞당겨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나중 일을 나중 일로만 생각지 않고 지금의 일로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행동이고, 깨어 있는 모습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는 문제는 나중 일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 지금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나중 일을 나중 일로만 생각하면 현실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미련한 모습입니다. 물론 세상 시각에서 볼 때는 지혜로운 것이지만 주님이 오셨을 때는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미련한 모습으로 밝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내 앞에 오셨다면 나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 이것이 충성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여러분들 앞에 계시는데 여러분들의 관심은 어디를 향해 있습니까?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데 무엇 때문에 울고, 무엇 때문에 웃습니까? 주님은 날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만 원하십니다.
지금 신자의 삶은 세상이 볼 때는 미련하기 그지없습니다. 세상의 마지막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마지막을 말하면서 세상보다 신앙을 앞세우고 살아가는 모습이 그렇게 바보스러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모든 것은 판가름됩니다. 우리는 그 때를 바라보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먼 미래의 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금 일어난 일로 여기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만약 진심으로 천국을 기다리고 주님을 사랑하신다면 세상으로부터 미련한 소리를 듣는 것을 마다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이 오셨을 때만을 생각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슬기로움과 미련함의 차이점은 신랑이 오신다는 것을 미래의 일로만 여기느냐, 아니면 현재의 일로 여기느냐입니다. 신랑이 오신 것을 현재의 일로 여기며 사는 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신랑이 오시는 날은 세상은 망하는 날입니다. 세상이 망하는 것을 지금의 일로 보며 살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 가는 자의 삶입니다.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가십니까? 현재를 보며 사는 삶은 불안과 염려와 울음과 슬픔의 연속입니다. 현재에서 자기의 소유가 있기를 바라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래의 일을 현재의 일로 여기며 사는 자는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신자입니다.
종의 비유(마 25:26-30) - 47강
여러분은 '나는 틀림없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근거를 무엇에 두고 있습니까? 교회를 다닌다는 것 때문입니까? 십일조를 잘하고 있다는 것 때문입니까?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고 구제를 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러한 것들을 천국에 가는 근거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나는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까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여러분 스스로의 확신입니까? 하지만 자기 스스로 '나는 예수님을 잘 믿는 신자다'라고 확신하는 것은 자기 최면이나 자기 고집이지 결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문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을 통해서 점검해야지 자기 스스로 어떤 행위를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천국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가를 알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나는 천국 갈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상상하는 천국 아닌 천국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하고 믿어왔던 천국에 대한 모든 생각은 버리고 처음부터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은 누가 들어가느냐에 대해서 생각할 때도 단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들어간다'라는 말로 그쳐 버려서는 안될 문제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맞지만 문제는 '누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라고 쉽게 생각해 버리고, 예수를 믿는 것도 교회를 다니거나 어떤 종교행위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생각해 버리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실 때 잘하면 될 것아닌가'라는 잘못된 생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것은 천국은 지금 내가 하는 행위를 근거 삼아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해 버리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실 때 열심히 하면 될 것 아니냐는 느긋한 마음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못하면 내일이라도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못한 것 내일 용서를 구하고 열심히 하면 된다'라는 생각이 그 사람을 천국에서 상관없는 자가 되게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못하는 신앙생활을 내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 못하면 내일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 생활은 우리의 의지가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이 우리를 믿음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따라 살면서 오늘은 못했지만 내일은 주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겠다고 결심했다고 해서 믿음으로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참된 신자라면 오늘 내가 믿음으로 살지 못했다면 자신의 믿음 없음을 한탄하며 믿음을 위해서 주님께 기도하는 자세를 가질 것입니다. 진심으로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그 마음이 기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라면 이미 믿음으로 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신자는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열 처녀 이야기나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모두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천국에 들어가는 자인가? 한마디로 천국에 가기 전에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는 자로 세상을 살아가는 자가 곧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아직 오시지 않았지만 이미 오신 것처럼, 주님이 자기 앞에 계신 것처럼 살아가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을 미리 준비했습니다. 신랑이 일찍 오거나 오지 않는다면 기름을 준비한 것은 아무 쓸데없는 행동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때는 기름을 준비하지 아니한 처녀가 가장 합리적이고 유능하고 지혜 있는 처녀로 인정이 될 것입니다. 또한 세상적인 지혜로 생각하면 신랑이 올 때 기름을 준비해도 충분합니다. 따라서 미리 기름을 준비한다는 것은 비합리적이며 효율적인 일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천국에 가지 못하는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지혜로운 처녀가 기름을 준비한 것은 어떤 효율이나 세상적인 이치를 가지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기름이 부족하면 그때 준비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때와 그 시는 모르니까 미리 준비해 놓겠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이 오시는 것을 먼 훗날의 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힘들고 어려우니까 주님이 오실 때 잘하자' 이것은 자기를 위한 합리적이고 세상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나와 함께 계신다. 나는 주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생각은 세상적으로는 합리적인 생각이 되지 못하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이것이 슬기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종의 비유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까지 대부분의 교회에서 이 비유를 잘못 해석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교회는 이 비유를 달란트 비유라고 이름짓고는 교회에 대한 충성과 봉사를 강조합니다. 신자에게는 각각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달란트가 있는데 그 달란트를 활용하지 않고 묻어두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헌금을 많이 해야 하고, 건강이 있는 사람은 열심히 교회를 위해서 봉사해야 하고, 장로는 장로대로, 집사는 집사대로 받은 달란트가 있으니까 장로일, 집사 일에 게을리 하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자가 교회 일을 하건, 헌금을 하건 모든 것은 기쁨으로 자원해서 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성경을 인용해서 떠밀 듯이 맡기고 강요하는 일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있다면 '나는 신자답다'는 교만과 자기 의만 드러내 뿐입니다.
본문을 보면 어떤 주인이 다른 나라를 갑니다. 여행을 갔든 사업을 하러 갔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길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서 각기 일을 맡깁니다. 한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 또 한 종에게는 두 달란트, 나머지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돌아와서 회계를 하는데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그것으로 장사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종도 역시 장사해서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주인은 그 두 종에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내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 지어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가 그것을 고스란히 내어놓습니다. 주인은 그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칭찬을 들은 종과 쫓겨난 종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장사해서 남겼기 때문에 칭찬을 들은 것입니까? 차이는 주인이 없을 때 종들이 보였던 태도에 있습니다. 원래 종이란 아무리 일을 해도 그 소득은 자기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주인의 소유로 들어가게 됩니다. 때문에 열심히 하면 할수록 자기에게는 힘만 들뿐입니다. 때문에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종이라면 주인이 없을 때는 게으름 피우고 놀다가 주인이 오면 열심히 일하는 척 할 것입니다. 즉 주인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태도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칭찬을 들은 두 종은 주인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같은 태도로 일했습니다. 주인이 없을 때도 주인이 있을 때와 동일하게 열심히 일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를 남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 가는 모습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자기를 중심으로 삽니다. 주인이 없다는 핑계로 자기의 편안함을 위해서 주인의 일을 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타국으로 떠나면서 시킨 일을 자기 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일해봐야 주인만 좋은일 시키고 나에게는 아무 유익도 없으니까 안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천국에 갈 수 없는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악한 종은 핑계를 댑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음으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라고 합니다. 굳은 사람이라는 것은 사납고 인색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악한 종은 주인에게 '당신은 사납고 인색하며 심지 않은 데서도 거두시는 분인데 내가 만약 한 달란트를 사용하다가 그것마저 잃어버리면 당신은 나에게 본전을 요구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당신의 본전이라도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돈을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결국 악한 종은 주인이 어떤 분인가를 알지도 못했을 뿐더러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주인을 비방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주님은 주인이 없는데도 주인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 사람이 누구냐를 묻고 있습니다. 결코 누가 많은 것을 남겼느냐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을 내 일로 여기고 주님이 없는데도 주님이 있는 것처럼 열심히 주님 일을 하는 사람을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없는 것같이 세상을 사는 사람은 모두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다가 주님이 오시면 그때 주님을 위해서 사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자기를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세상과는 타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오직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만 생각할 뿐입니다. 세상의 힘에 의해서 흔들리거나 참된 복음을 알지 못한 자들에게 눌리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지금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만을 생각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지금 나에게 어떤 삶을 원하시는가만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쪽으로 움직이십시오. 어떤 장애가 있어도 그 길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천국 가는 종의 모습입니다. 천국을 장차 들어가는 곳으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미리 지금부터 주님과 함께 함으로 천국에 있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소위 자기 챙길 것 다 챙기면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일을 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언제나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주님이 여러분 앞에 계시는데 여러분의 이익을 위해서 살 수 있습니까? 주님을 현재 없는 분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날마다의 삶은 자기가 중심이 되어버리고 결국 천국과는 상관이 없는 악한 종으로 판결될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실컷 살아가면서 십일조 바치는 것 때문에 자기를 정당화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십일조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받으십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헌금은 받지 않으십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마음이라면 아예 헌금을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자기를 위하고 있는 여러분에게 더 유익이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시비를 걸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신앙의 모습에서 잘못된 부분은 노골적으로 지적하며 고치도록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저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되건 그것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단지 저는 여러분들이 그 지적을 아프게 받아들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신자로 고쳐나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감사할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신자만이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불려지기 때문에 착하고 충성된 종의 모습에서 어긋나는 것은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디서 살든지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내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고 주님이 내 앞에 계신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충성된 종의 모습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주의 마음으로(마 25:31-46) - 48강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분명 성경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 믿음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으면 제아무리 신앙 좋은 신자의 모습을 가지고 있더라도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신자들은 성경에 제시되어 있는 믿음의 모습보다는 인간들의 종교관에 의해서 믿음의 모습을 결정지어 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 대한 충성의 빈도, 또는 사회에 대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행위, 이런 것들을 통해서 믿음의 정도를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풍토 안에서 신앙생활을 한 신자나, 했던 신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점검할 때도 그 기준을 종교적인 행위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 출석, 십일조, 기도, 성경읽기, 구제 등등 이런 것들을 가지고 내가 지금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판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신자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고, 이웃도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믿음이 있다. 때문에 심판은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착각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두 남녀가 서로 사랑을 한다고 합시다. 서로가 만나면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이 없으면 나는 세상을 살 희망이 없다'는 말을 하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나는 정말 저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여자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평생을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불구로서 지내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남자는 번민을 하게 됩니다. 그 여자와 계속 지내야 할 때 자기가 겪게될 고통과 희생을 생각해 볼 때 도저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여자를 떠나게 됩니다. 그럴 때 그 남자는 진심으로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그토록 사랑한다고 말했던 여자의 고통에 함께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자기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자의 하나님 사랑에도 이런 모습이 많습니다. 자기 사랑을 벗어나지 못한 채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믿음으로 고집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런 신자들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말은 하지만 그 십자가는 주님의 십자가일 뿐 자신의 십자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과연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믿음을 판단하신다는 것은 오직 주님으로 만족하고 있느냐를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말이나 행위를 가지고 믿음을 보신다면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심히 하나님께 제사하고 제물을 드렸던 그들의 행위를 칭찬을 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제사, 제물을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마지막 심판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믿음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믿음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하며, 섣불리 자신의 신앙적인 행위를 가지고 '나는 믿음이 있다'라고 판단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 마음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을 심판에서 제외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누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사느냐를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사는자, 그자가 바로 하나님을 믿는자이며 심판에서 제외되는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란 무엇이며 그 마음으로 믿음의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어떤 자가 영벌에 들어가며, 어떤 자가 영생에 들어가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오늘 본문은 영벌과 영생이라는 전혀 다른 세계로 구분되는 기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영벌에 들어갈 자와 영생에 들어갈 자에 대해서 분명한 기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5, 36절을 보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합니다. 즉 주린 자, 목마른자, 나그네 된자, 벗은자, 병든자, 옥에 갇힌 자에 대해서 어떻게 대했느냐가 영벌과 영생의 기준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법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아 이대로 하면 천국 가는구나'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극히 단순한 것이 믿음입니다. 전혀 복잡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반대된 편에 서서 믿음에 대해서 들을 때에서 아주 복잡한 것이 믿음이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본문은 언뜻 보면 예수님이 구제를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제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본문을 통해서 영생에 들어갈 하나님의 자녀된 자의 자녀다운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새벽기도에 나와서 조용하게 기도하고 있는 모습이 자녀다운 모습입니까? 예배시간에 경건하게 찬송 부르고 있는 것이 자녀다운 모습입니까? 제가 종종 예배나 기도의 행위가 신자의 표가 아님을 말하는 것은, 예배나 기도를 자기 마음대로 하거나 안해도 상관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배나 기도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신자의 표로 삼거나 의로 내세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기도를 제대로 못한다거나, 남들과 같이 봉사를 못한다고 해서 '내가 과연 하나님의 자녀인가?'라는 의구심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방언을 강조하는 교회의 교인들은 방언을 하지 못할 때 '내가 과연 성령 받은 자인가?'라는 의구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그런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자녀된 모습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은 오늘 본문에서 낱낱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33절에 보면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양과 염소로 구분한다는 것은 그냥 구분을 말하는 것이지 양과 염소의 특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양과 염소의 성격이나 특성을 가지고 구분점을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양은 목자를 잘 따른다고 하면서 목사에게 잘 순종하는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고, 염소는 잘 들이받기 때문에 목사에게 반대하고 순종치 않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말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모두 자기 아집에서 나온 엉터리에 불과합니다.
34절을 보면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35,36절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의인들이 대답하기를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37-39)라고 합니다. 이들은 아주 의아해 합니다. 이들은 세상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주님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만났고 그들은 주님을 선대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은 다른 자를 통해서 이 땅에 그 모습을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모습이 무엇입니까? 본문에 있는 대로 주린 자, 목마른자, 나그네 된자, 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의 모습을 가진 자가 곧 주님의 모습을 가진 자였다는 것입니다.
의인들은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들은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는 자들, 주님의 고통에 함께 하는 자들을 만난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주리고, 주님 때문에 목마르고, 주님 때문에 나그네 되고, 주님 때문에 벗은 자가 되고, 주님 때문에 병들고 옥에 갇힌 자들을 만난 것입니다. 이들은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는 그들과 함께 하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마실 물을 주고, 입을 옷을 주는 마음이 곧 주님의 마음이고 그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자녀된 모습이다는 것입니다. 이 관계를 가리켜서 형제라고 말하고 이 형제의 모임이 곧 교회인 것입니다. 형제는 예배당에서 함께 예배한다고 형제가 아닙니다. 주님 때문에 고통의 자리에 있게 된 자들이 있고, 또 그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대하는 자들이 있는 것, 그것이 형제의 관계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예수님께 자기의 정성을 보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때문에 신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한 행동을 보이지 않는 예수님께 한 것으로 간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교회의 일을 위해서 봉사하고, 헌금하는 것,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구제한 것들을 주님을 위해서 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나는 주님을 위해서 산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을 위해서 사는 자라면 주님의 이름으로 당하는 어려움과 수난의 자리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모습은 분명히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 때문에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는 자들은 볼 수 있습니다. 주님 때문에 자기의 것을 포기하고 복음만을 나타내기를 힘쓰고, 주님을 나타내기 위해서 힘쓰는 자들이 우리 곁에 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의 어려움에 함께 하는 것, 그들을 무시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그들의 어려움에 함께 하고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주님 때문에 마음이 하나되는 것, 그것이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보는 것 같이 살아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선행이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윤리나 도덕이라고도 부르지 마십시오. 이것은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일 뿐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자이고, 장차 영생에 들어갈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이런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 때문에 곤란에 처하고 어려움에 빠진 자들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봅니까? 과연 그런 분들을 통해서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십니까? 오늘은 추수감사절로 지내는 날입니다. 추수감사절이라고 해서 다른 특별한 말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추수감사절을 기독교의 전통대로 우리를 이 땅에서 먹이시고 살리신 것에만 감사하는 그런 날로 여기지 않았으면 합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에서 먹고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지만 죽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줄은 모르십니까? 먹고사는 것에 감사하게 되면 사람은 자기가 잘된 것만 연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일년 내내 힘들게 살고 여러 우환이 끊이지 않았던 가정은 무엇을 감사해야 합니까? 남들은 웃으며 감사할 때 이 가정은 뭔가 잘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우환이 끊이지 않은 가정으로 낙인찍혀서 기가죽은채 추수감사절을 지내야 합니까?
오늘 여러분은 내가 과연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에게서 주님의 마음이 발견되어진다면 그것을 주님의 사랑으로 알고 감사하기 바랍니다. 주님의 마음은 어려움을 당하는 형제를 대하는 마음에서 발견되어 집니다. 어려움을 당한 형제를 단지 위로해주고, 걱정해주고,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해준다고 그것을 주님의 마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마음은 예수님을 몰라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어려움에 있는 형제를 바라보면서 십자가의 길을 가신 주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려움을 당한 그 형제가 자신의 어려움을 통해서 십자가 지신 주님을 더욱 바라보기를 원하고 기도하는 그 마음을 주님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모습은 내가 낮아진 자리에서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높아진 자리에서는 주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형제가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의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모두가 낮아지고, 무시당하고, 때로는 욕을 받기도 하는 것인데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모습이 주님의 모습으로 보여지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이름이 나고, 사람들의 칭찬을 듣는 것이 주님의 모습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때문에 이들의 눈에는 주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형제가 보인다고 해도 그들을 무시하고 외면해 버릴 것입니다. 그것이 영벌에 들어갈 자의 모습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실패하게 하시고, 망하게 하시고, 안되는 길로 끌고가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를 낮추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기 위해서 광야로 끌고가신 것 같이 우리를 낮추시기 위해서 우리의 원함과는 정반대의 길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것을 알았다면 실패의 자리에서 무엇을 발견하겠습니까? 낮고 천하고 연약한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된 자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조심할 것은 어려움을 당한 가운데서도 감사하는 것이 신앙의 높은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무조건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병이 들었는데 무조건 '병이 들게 하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정신병자와 같은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도 병이 들므로 인해서 '생명이란 하나님의 손에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내가 내 힘으로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구나 이것이 내 잘못이구나'라고 깨닫게 되었을 때 병든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는 나중에 건강하게 되었을지라도 교만하지 않을 것이고, 설령 죽는다고 할지라도 주님 안에서 죽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고 40절에 나온 대로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형제들을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의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럴 때 그 형제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자는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사는 자들은 형제의 애매한 어려움과 고통에 함께 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형제를 보면서 주님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으로 사는 신자의 모습이며 마지막 때 그 속에 함께 하시는 주님 때문에 영생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속에 이런 마음이 보여집니까? 그것으로 감사하는 신자 되시기를 바랍니다.
몸과 피(마 26:26-29) - 49강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평가할 때 크나큰 문제점은 크고 많은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이 신앙으로 연결되어질 때 결국 좋은 신앙, 나쁜 신앙의 기준도 눈에 보여지는 것을 통해서 판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성격이 좋아서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저 사람은 신앙도 좋을 것이다'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읽고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을 봐도 다른 것을 두고 볼 것도 없이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이 자신에게 속는 경우입니다.
저도 스스로에게 속은 일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했는데 공부한 신학교가 컨콜디아라는 신학교였습니다. 컨콜디아라는 신학교는 그래도 정통이고 성경을 제대로 가르친다는 이름이 있는 학교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학교에서 배운 목사님이라면 성경을 제대로 잘 알고 계실 것이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직접 만나보고 얘기를 나눈 결과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신학교가 달라진 것인지 아니면 그분이 공부를 안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신학교 간판을 기준으로 내세운 제 스스로에게 속은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말씀대로 살려고 힘쓰는 교회가 목사를 청빙한다고 합시다. 후보가 두분이 있는데 이력서를 보니까 한 분은 정통 있고 유명한 신학교 출신이고, 다른 한 분은 이름도 없고 알지도 못한 신학교를 나오신 분이라고 할 때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앞서 말한 저의 경우와 같이 출신 신학교를 가지고 판단해 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름도 없는 신학교를 나오신 그분이 오히려 주님에 대한 사랑과 복음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있는 분이고 유명한 신학교를 나오신 분은 복음에 대한 깨달음이 전혀 없는 분이라면 그 교회는 결국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삼은 나머지 참된 복음을 멀리 해버린 실수를 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삼을 때 사람을 잘못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때문에 주님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분을 배척하고 멀리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주일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러나 크고 많다는 것에 기준을 두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에서 주님을 찾기보다는 크고 많은 것에서 주님을 찾으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진짜 주님을 모습을 담고 나타난 지극히 작은 자를 무시하고 배척할 수 있고, 그것이 곧 영벌에 들어가는 악인의 모습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나그네 되고, 병들고, 옥에 갇힌 자들은 한마디로 세상적인 기준에서 볼 때는 아무런 쓸모 없는 자들입니다. 교회에서도 있으면 귀찮은 존재이고, 다른 교회로 간다해도 하나도 아쉬워 할 것이 없고 오히려 좋아할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주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왜 굳이 세상이 가치를 두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것입니까? 왜 버리고 무시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것입니까? 크고, 많고, 보기에 좋은 것으로 판단하는 세상적 기준, 세상적 가치관이 바로 악한 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런 가치관에 의해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자는 이런 가치관에서 떠난 자입니다. 세상적 기준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자는 결코 주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랑하는 주님은 자기 교회를 부흥시켜주고, 자기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주님 아닌 주님에 불과합니다. 주님은 이런 자들에 의해서 버림 받으셨고, 지금도 버림받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주위에 나의 잘못된 기준에 의해서 나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작은 자가 있지 않은지 돌아보십시오. 하나하나 찾아내서 도와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우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도우시면 됩니다. 그러나 돈으로 돕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들을 단지 가난한 자로 바라보느냐, 아니면 주님의 모습을 담고 있는 자로 보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신자입니다.
지난 주일의 설교를 이토록 장황하게 다시 말씀드리는 것은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작은자 속에 계시는 주님을 보지 못하면 결국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주님을 찾아도 모두가 보이는 것을 위해서 찾게 될 뿐입니다. 이런 자는 주님이 심판주로 오실 때 영원한 멸망의 자리로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25장에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에 대해서 말씀하신 주님은 이제 본격적으로 십자가의 수난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믿으면 우리는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를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하신 일이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느냐를 말해주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은 흔히 예수님이 성찬식을 제정하셨다는 의미로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기 위해서 성찬식을 하고, 그 성찬식에 참여함으로 자신은 십자가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떡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면서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제자들에게 떡을 떼시고 포도주를 나누어주신 것이 오늘 우리들과 어떤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의미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시고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면서 '내 몸이다', '내 피다'고 하셨겠습니까? 오늘 이 말씀은 교회에서 성찬식을 할 때만 소용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즉 성찬식용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의식과 연관지으면 안됩니다. 주님은 지금 의식을 만드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죽으심에 참여하는 자, 십자가에 참여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사함을 위해서 떡을 떼고, 포도주를 나누어 주십니다. 물론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심으로 죄가 사해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죄사함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사함은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말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말을 맞게 한다고 해서 바르게 알고 있고,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바르게 알고 있다고 바른 믿음으로 산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아는 것이 삶의 바탕으로 되어 있지 않으면 아는 것은 한낱 지식으로 그쳐버릴 뿐입니다.
현대교인들이 신앙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죄사함도 교회에 와서 자기의 죄를 말하고 용서해 달라는 말 한마디면 다 해결되는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이때 용서해 달라는 죄가 무엇이겠습니까? 주일에 예배 빠졌다던가? 기도를 게을리 한다던가? 남을 욕했다던가?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해서 죄를 끄집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의 삶속에 죄가 되는 것이 있고 죄가 되지 않는 것이 있다고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죄사함이란 예배 빠지고, 기도 안하고, 성경보지 않고, 봉사안하고, 십일조 안하는 그런 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겨우 그런 문제 때문이겠습니까? 그런 문제라면 예수님이 아니라도 우리가 조금만 의지가 있고 노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죄용서는 우리의 전체입니다. 나의 인생, 나의 삶 전체를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일부분이 아닙니다. 전부입니다. 우리에게는 죄가 되는 부분이 있고 죄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죄가 되지 않는 일을 교회와 연관짓게 되고, 결국 교회 일은 무조건 선한 일로 여겨버리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죄다, 아니다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예배참석하면 죄안짓는 것이고, 십일조 잘하면 죄안짓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예배드리면서도 죄짓고, 기도하면서도 죄짓고, 심지어는 밥먹으면서까지 죄짓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배가 죄고, 기도가 죄고, 밥먹는 것이 죄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문제는 어떤 인간으로 사느냐는 것입니다. 즉 새사람으로 사느냐? 아니면 옛사람 그대로 사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 죄가 되는 부분만 골라내어 가지고 그것을 용서해 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죄사함은 우리 인생 전체가 주님이 아니라면 망하는 인생이다는 뜻입니다. 어떤 잘못된 부분만을 골라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시금 우리의 시각으로 선한 것과 나쁜 것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남을 도와준 것이 있으면 이것은 선한 행위니까 여기에는 주님의 피가 필요 없다는 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말이 좀 복잡한 것 같지만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여러분은 죽을 때까지 자신과 주님의 관계를 깨닫지 못한 채 착각 속에서 신앙생활하다가 인생을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은 죄사함을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29절의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은 죄사함의 의미를 말씀하고 있는데 죄사함이란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관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관계는 우리가 어떤 자리에서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가든지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피로 용서함을 받아야 살 수 있는 그런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피흘리심, 십자가는 우리의 삶 전체에서 적용되는 것이지 우리가 어떤 나쁜 일을 했을 때만 주님의 피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순간순간을 주님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그런 존재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새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인생의 모든 가치를 주님의 십자가에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아니라면 자기의 인생은 아무런 가치 없는 인생으로 끝나버리기 때문에 주님께 모든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주님께 인생의 모든 가치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정작 좇아가는 것은 주님이 아닌 세상의 것이 되는 것이고, 그런 자들에 의해서 주님이 버림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 6-16절의 내용입니다. 6-16절을 보면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귀한 향유 한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여인이고, 또 한 사람은 예수님을 팔고자 하는 가룟유다입니다. 가룟유다는 왜 예수님을 팔았겠습니까? 자신의 인생에서 예수님의 가치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자기 인생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즉 가룟유다는 자신의 삶 전체의 죄문제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단지 자기 육신에 도움을 주는 메시야로 기대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자 결국 돈 몇 푼이 더 가치 있게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향유를 부은 여인은 주님의 가치를 자기에게 있는 그 어떤 귀한 것보다 더 귀한 분으로 본 것입니다. 주님의 가치를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을 포기함으로써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행위를 보고 제자들은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더 낫다고 화를 냅니다. 이것이 선과 악의 기준을 눈에 보이는 행위에 두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생각하는 선한 행위를 하고 있을 때는 주님의 피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죄로 보지 못하고 선과 악으로 구분해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에는 주님의 피가 없어도 되고, 악이 되는 것에만 피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회개한다고 할 때도 자기가 생각할 때 악이 되는 것만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피로 죄사함 받는다고 말은 맞게 하면서 정작 삶은 주님의 피와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는 교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주시면서 '내 몸이라'고 하시는 것은 떡을 먹음으로서 우리의 몸이 주님의 몸으로 변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천주교는 성찬식을 할 때 먹는 떡과 포도주가 실제 주님의 몸과 피로 변해서 우리의 몸으로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몸과 피가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를 고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을 때까지 성찬식을 부지런히 하면 주님과 같은 사람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내 몸이다, 내 피라고 하신 것은 너희는 이제 너희 몸이 아니라 내 몸으로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내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내것으로 살 때는 나를 위해서 살아가지만 주님의 몸으로 살 때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주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를 모르면서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란 결국 나는 죽고 내안에 주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람으로 주님을 위해서 사는 인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용서 안에 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자기가 살아있는 자는 자기를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할뿐입니다. 죄지었다고 생각될 때만 예수님을 불러서 용서받고 복과 천국을 보장받아 놓자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믿지 않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몸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이용하시도록 나를 내어놓는 것이 믿음이지 내가 주님을 이용하기 위해서 주님을 끌어당긴다면 결국 여러분에게 남는 것은 실망과 낙심일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버리고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생과는 전혀 멀어져 버린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해도 주님의 몸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어디에 살든 무슨 일을 하든 중요한 것은 주님의 몸으로 살고, 주님의 몸으로 일하느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몸입니다. 주님의 소유입니다. 주님의 피로 살려내신 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몸으로 사십니까? 향유를 부은 여인과 같이 여러분에게 주님이 가장 가치 있으신 분으로 여러분을 간섭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가치 있는 분으로 되어 있지 않으면 여러분은 주님의 간섭을 귀찮아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주님이 가치 있는 분이라면 주님의 몸으로서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삶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라(마 26:36-40) - 50강
결국 이런 사람들은 주님을 어떻게 생각하게 되겠습니까? 주님은 기도 열심히 하고, 전도 많이 하고, 교회 일에 열심인 사람들과 함께 하시고, 반대로 기도도 하지 않고 전도도 하지 않고 교회 일에도 게으른 사람들에게는 함께 하지 않고 오히려 책망하시고 벌을 주시는 예수님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 그대로입니다. 주님을 알기 전과 주님을 알고 난 후의 모습이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도 주님을 이렇게 생각하고 계신다면 그것은 결코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신 십자가의 주님의 모습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가 무작정 성도들에게 열심을 강조하고 봉사 충성을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제이 제 삼의 베드로를 만들어 내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열심이 있는 신자들은 자기 열심을 믿음의 근거로 삼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나는 열심이 있으니까 주님의 말씀은 무엇이든 지킬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길을 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단지 교회 일에 열심만 있으면 주님을 따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열심을 가지고 주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열심이 있기 때문에 주님을 따를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31절)는 주님의 말씀에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습니다" (33절)라고 자신 있는 대답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에도 베드로는 거듭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면서 호언장담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만이 아니라 모든 제자가 자신의 자신감을 내세웠습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열심을 믿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주님을 부인할 그런 나약한 존재가 아님을 자신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들에게는 주님의 십자가가 필요치 않았던 것입니다. 나약하지 않기 때문에, 열심이 있고 자신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신들의 힘으로도 주님을 따를 수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제자들이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마지막 때까지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 하고 있었더라면, 그들의 열심은 분명 위대한 것으로 판단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제자가 주님을 버렸습니다. 결국 열심은 구원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때문에 앞에서 말한 대로 교회 일에 소홀히 했던 사람들은 기도 안하고, 전도 안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은 주님과 점점 멀어지고 있고, 주님은 그런 나와 함께 하시지 않을 것이다는 생각에 빠진 그 자체가 주님의 피를 믿지 않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열심 있는 자를 천국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자신의 열심으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피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용서한다고 말은 하지만 그 피는 기도도 안하고, 전도도 안하고,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이들에게 주님은 아무 도움도 안되는 단지 명목상의 주님일 뿐입니다. '주님은 가만히 계십시오. 우리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는 식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며, 잘 넘어지며, 잘 실패하며, 자주 주님을 부인하는 자인가를 잘 알고 계십니다. 때문에 그런 무수한 실패가 있는 우리라 할지라도 천국에 보내시기 위해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자만이 주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 열심을 믿는자라면 자신의 열심을 믿지 주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자신의 열심으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기도한다면 어떤 기도를 하겠습니까? 자기의 뜻을 포기하는 기도를 하겠습니까? 회개하는 기도를 하겠습니까? 자신의 연약함을 도와달라는 기도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의 열심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기도 자체가 신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함으로 신앙의 열심을 내세우고 싶을 뿐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이런 신앙인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죽인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신앙을 점검할 수 있는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님의 이 기도를 통해서 단지 기도의 방법만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기도하시는데 함께 기도하지 않고 자고 있던 제자들의 모습을 들어서 새벽기도를 강조하거나 철야기도를 강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본문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할 것은 제자들이 왜 졸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평소와는 다르게 왜 마지막 기도에서는 제자들을 함께 데리고 가셨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기도를 일부러 제자들 앞에서 하십니다. 즉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에게 기도를 보여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자들은 모두 자기의 열심을 믿고 있었습니다. 내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는 것이 제자들의 각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의 각오가 주님의 길을 따르도록 하는 믿음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의 길을 가는 것은 우리의 열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제자들 앞에서 기도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즉 지금 주님이 하고 계시는 기도는 주님만이 해야할 기도가 아니라 앞으로 주님이 가신 길을 가야할 제자들도 해야 하는 기도인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제자들만도 아니라 오늘날 주님의 길을 가야할 모든 신자들이 해야할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기도해야 합니까? 39절을 보면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십니다. 주님의 기도는 고난의 잔을 이기기 위한 기도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주님의 길을 가는 신자들이 해야할 기도는 고난의 잔을 이기기 위한 기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심히 고민하고 슬퍼하시면서 함께 기도하자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제자들이 잠을 잤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그 이유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주님과 달랐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지금 예수님은 세상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시기 직전입니다. 때문에 세상을 바라보시는 마음은 탄식이요, 슬픔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릅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죽인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까지 핍박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즉 세상 안에서 고난을 바라보지 못한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과 같이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긴장감이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자기들은 열심이 있으니 끄떡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보기에는 어떤 문제도 없고, 위험도 없었습니다. 즉 기도할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 일도 없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평안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고난도 없고, 핍박도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약간 시비를 걸기도 하지만 그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시는 주님의 의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십자가를 깨닫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위해서 기도하고, 고난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할 때 흔히 그렇게 하면 기도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곧 잠자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인 것을 아십니까? 왜냐하면 자신은 주님을 잘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새삼스레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이 의미없이 느껴진 것입니다. 또 자신의 환경이 아무런 고난도 없고 시험도 없고 날마다 평안하기 때문에 고난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도 의미없이 느껴지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할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여러분 과연 기도할 것이 없습니까? 기도할 것이 없어서 기도에 나태합니까? 지금 잘 살고 있고, 평안하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잠자는 제자들입니다. 기도를 한다고 해도 형식적입니다. 현재의 삶에 긴장감이 없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의 자리에 서서 현재의 자신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기껏 기도하는 것이 '내 자식 신앙으로 잘 자라게 해주십시오' '우리 가정이 평안하게 해주십시오' 이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보태면 자신은 평안하니까 남의 어려움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지 진심으로 주님의 길을 가기 위한 기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한 대로 자신은 지금 주님의 길을 잘 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의 다른 법이 나를 붙잡아 죄의 길로 끌고 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즉 마귀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우리를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자 합니다.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게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열심이 있을 때 그 열심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치 베드로 같은 모습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알기 전과 똑같이 세상에 그대로 자리하면서 주님을 믿으려고 하고 천국에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교회에 다니고 있고, 교회 일 하는 자신의 열심만 가지고 '내 신앙은 됐다'라고 안심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길을 따르기 위해서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유혹에 빠져있는 상태이며 시험에 들어 있는 상태이며 잠자고 있는 상태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살면서 자신이 유혹에 빠져있고, 시험에 들어있다는 것을 발견합니까? 발견하지 못한다면 십자가의 자리에서 자신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세상에 있는 것을 통해서 여러분을 시험에 들게 하고 유혹하기도 합니다. 자식을 통해서 하고, 사업을 통해서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자식이 잘되기만을 기도했고, 사업이 잘되기만을 기도했지 자식 때문에 걱정 근심에 빠지고 사업 때문에 주님과 멀어지고 있는 자신은 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미 시험에 들어있는데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잠자고 있는 상태입니다. 보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해야 되겠다는 간절함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은 멸망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멸망의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 잘되보려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과연 주님이 원하시는 기도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 지는 것을 위해서 기도할 때 제자들은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신다면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죽인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신자되도록 기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주님이 세상에 남기신 천국의 길을 따라가는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고난의 잔을 마시는 신자되도록 기도하십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주님의 뜻과 반대로 나아가려고 하면서 스스로는 주님을 따르고 있고,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유혹에 빠져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하고 있다면 자신의 기도가 과연 주님을 길을 따라가고 고난의 잔을 마시기 위한 기도인지 아니면 세상에서는 한발자국도 빠져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기도인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세상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기도는 모두가 세상에서 앞서가기 위한 기도가 되버립니다. 교회에서 일군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도 결국은 교회에서 앞선 자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닙니까?
제가 나이드신 분들의 기도에 자주 시비를 거는 이유는 아무리 평생토록 그렇게 기도하셨다 할지라도 아닌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이 아닌 기도를 하면서도 그것을 기도라고 여기고,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다면 결국 주님과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까? 기도 내용이 조금 잘못됐다고 해서 그것이 그렇게 큰 문제입니까? 라고 반문하실 수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주님의 십자가의 자리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나이드신 분들에게 조금 상처가 되고, 저에 대해서 섭섭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고 할지라도 저는 잘못된 것을 가르쳐 드려서 십자가의 길에 서서 주님을 따라가는 삶이 되도록 도와드리는 것이 저의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도움을 받기 위해서 목사가 필요한 것이지 단지 주일 예배드리기 위해서 목사가 필요한 것입니까? 목사는 교회운영하고, 예배드리고, 성찬식 인도하고, 세례주기 위해서 필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목사에게 기대해야 하는 것은 자신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 잘못된 부분들, 마귀의 시험에 빠지고 유혹에 빠져있으면서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들을 말씀으로 지적 받고 책망 받으면서 날마다 세상으로부터는 벗어나고 주님께로 빠져들어 가는 신자되기 위해서입니다.
신자는 평안할 때는 이것이 나를 교만하게 하고 나태하게 하고 주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긴장감을 가져야 하고, 평안하지 못할 때는 이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긴장감을 가져야 합니다. 날마다 이렇게 기도하고 산다면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나도 변함없이 주님만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시험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면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주님께로 점차 빠져들어가는 그 기쁨은 참으로 큽니다.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을 때는 기도하고픈 마음도 들지 않습니다. 현재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했다는 것이 여러분을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만드신 천국의 길, 십자가의 길을 따르기 위해서 기도할 때 그것이 여러분을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주님을 알아가도록 하며, 세상에 머물 때 알지 못했던 기쁨이 여러분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검으로 망함(마 26:47-56) - 51강
세상은 처음에는 힘으로 유지되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신 나라는 오직 말씀으로 유지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어진 그 상태 그대로에서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면서 주신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인간에게 힘을 가지고 접근합니다. '하나님같이 된다'는 그 말에 마음이 쏠리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살기보다는 힘을 추구하는 인간으로 타락된 것입니다. 그후로 세상은 아담의 형상을 따라서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힘을 배격하는 이유는, 인간이 힘을 추구하게 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에게 힘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겠습니까? 설령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해도 힘을 추구하고 있는 한 그들이 부르는 하나님은 '힘을 주시는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불교를 들여다봐도, 기독교를 들여다봐도, 여기저기 종교란 종교를 다 들여다보면 부르는 신의 이름은 각기 다르다고 할지라도 결국 힘의 신을 부르고 있는 것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자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교회들이 정작 귀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한낱 우상의 수준으로 전락시켜 놓고도 자기들 스스로는 하나님을 잘 믿고 있고, 잘 섬기고 있고 신자답게 살고 있다고 하나님께 그 대가로 복을 요구하고 있는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가관이겠습니까?
여러분, 세상이 왜 망하는 줄 아십니까? 힘의 나라이기 때문에 망합니다. 의의 나라가 아니라 힘의 나라이기 때문에 세상은 필연코 망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힘을 추구하는 세상을 짐승이라고 표현하십니다. 다니엘서 4:25부터 보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짐승처럼 되는 징계를 받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왜 짐승처럼 되는 벌을 받습니까? 그는 힘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강대하고 힘이 넘치는 자신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스스로 흡족해 하면서 그 모든 것이 자기의 힘이라고 스스로 교만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을 짐승처럼 만들어서 세상의 그 어떤 힘보다 더 힘이 있으시고, 영원한 권세가 있으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만인에게 가르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힘으로 유지되고,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 나라는 짐승의 나라라고 표현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666이란 짐승의 수도 결국 힘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다니엘서 강해를 통해서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어쨌든 세상은 힘을 좋아하고, 여러분도 힘을 원하며 살아가겠지만, 하지만 여러분, 힘으로 살아가고 힘을 추구하는 그 자리가 바로 멸망의 자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힘은 하나님을 배격하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의인이 없었기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이것은 소돔과 고모라에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망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에도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당장 룻의 가족들만 하여도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당초 힘을 따라서 그 지방으로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힘은 우리의 구원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장애물로 등장할 뿐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제시한 것도 모두 세상에서 힘이 되는 것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힘을 배격하고, 대신 말씀을 앞세웠습니다.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은 결국 사람은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무엇을 추구하며 사십니까? 여러분에게 남들보다 힘이 적다고 한탄하며 한숨쉬며 살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영원한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을 왜 바라보지 못하십니까? 천국은 믿음으로 간다고 말은 하면서 왜 자꾸 세상의 힘이 없음을 한탄하면서 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믿음이란 우리에게 세상의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힘을 포기하고 하나님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시편 20:7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혹은 병거,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교회나 신자된 여러분이 기도해야 할 것은 세상을 살아갈 만한 힘을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힘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고 하나님을 찾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한 믿음은 불교에도 다른 사이비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것도 결국은 자신도 힘을 소유한 존재로서 살고 싶다는 욕망에 불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원하는 능력은 교회를 성장시키고 부흥시키는 능력이고, 물리적이며 사람들의 눈에 뜨이는 능력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세상에서 죽는 능력을 주시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실 능력이란 자기를 포기하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 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능력이 되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능력을 구하시지 않겠습니까?
고후 13:4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약한 모습으로 세상을 사셨고 신자는 그리스도안에서는 동일하게 약한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왜 신자들이 자꾸 이방인과 동일하게 돈을 좇아가고, 출세를 좇아가고, 권력을 좇아가는 것입니까? 이것은 결코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모습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에게 힘이 없음을 애통해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의가 없음을 애통해하시기 바랍니다. 자녀가 공부못하는 것을 한탄하지 말고, 자녀에게 믿음이 없음을 한탄하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힘으로 살아가지만 결국 그 힘 때문에 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유다가 큰 무리들과 함께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왔습니다. 큰 무리들은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대항하기 위해서 그 어떤 준비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잡으려하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검을 빼어서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요 18:10절에서는 그 사람을 베드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평소 급했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힘으로서 예수님을 잡아가려는 무리들에게 힘으로서 대항을 한 것입니다.
'힘에는 힘이다'는 방식을 내세운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검이란 힘을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힘을 가진 자는 힘으로 망한다는 의미입니다. 힘을 가졌다는 것은 단순히 세상의 물질을 가지고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돈, 권력 등을 자신의 힘으로 내세우고 행세하며 상대적으로 힘없는 자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이런 자들은 그들이 그토록 소망하고 추구했던 힘이 그들을 멸망으로 들어가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붙잡히시는 것은 진짜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53절에 보면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진짜 힘이 없어서 이렇게 잡히고 있는 줄 아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힘을 쓰시지 않는 이유는 성경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54절). 천사를 보내어 예수님을 지키고 보호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잡히시게 하신 것 같이 오늘날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지키십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성령께서 함께 하시며 지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키심은 모든 적을 무찔러 주는 것으로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세상의 힘에 의해서 잡히게도 하고, 당하게도 하십니다. 힘들도 어려울 때 하나님은 가만히 침묵하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도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어서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낙심하고, 슬픔에 빠지기도 하는 모든 이유가 바로 나 자신만을 바라보고, 정작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바라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도, 세례 요한이 목이 잘려 죽을 때도, 선지자들이, 제자들이 세상에 의해서 죽어갈 때도 침묵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안계셔서 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과연 이런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해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참으로 복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령의 지혜가 주어진 분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그토록 세상의 힘에 의해서 당하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오늘날 신자들이 때로는 세상의 힘에 의해서 당하는데도 하나님이 왜 그냥 두고만 보고 계시느냐는 문제와도 일치되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외에 제자들이나 예수님을 잡으러 온 유다나 무리들은 모두 힘의 세계에서 힘으로 방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56절에 있는대로 상황이 자기들에게 불리해지고 예수님과 함께 있다가는 같이 당하겠다는 생각이 앞서자 모두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을 칩니다.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따랐던 모든 것이 거짓이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힘에 의해서 자신들의 모든 믿음과 복음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이 제자들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희망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결국 눈앞의 작은 돈이 예수보다는 더 힘이 된다는 판단아래 예수님을 팔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무리들은 자기들의 힘을 이용해서, 세상의 조직과 권력을 이용해서 자기들을 반대하는 한 사람을 잡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힘을 물리칠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힘에 의해서 당하심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유지되는 나라를 세상에 남기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나라는 힘으로 유지되는 나라가 아니라 희생과 섬김과 사랑으로 유지되는 나라인 것입니다. 결국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세상을 힘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사랑으로 사는 자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파벌이 형성되고, 폭력이 발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서로 힘을 굳혀서 힘에는 힘으로 대항하기 때문입니다. 힘에는 힘으로 대항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지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지기 싫어하고 머리 숙이기 싫어하는 것이 세상나라입니다. 그러나 에수님은 친히 눌림 받고, 머리 숙이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하지만 모든 것에 머리 숙이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아닌 것에는 분명히 아니라는 말을 해야 합니다.설령 그것 때문에 상대방의 힘에 의해서 고초를 받고 눌림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복음이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힘을 두려워하고 나에게 닥칠 결과를 겁을 낼 때는 결코 복음을 인정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을 도망치는 제자들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세상의 힘에 의해서 죽게하십니다. 의의 나라는 힘의 나라가 아니라 희생과 사랑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주님을 따른다면 과연 무엇을 보여줘야 합니까? 주님과 함께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양보하고, 손해보고,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다툼은 언제나 손해보지 않고 희생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합니다. 힘을 가지고 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은 반드시 그 힘에 의해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힘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적으로 보기에는 눌림 받고 무시당하는 것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희생하고 섬기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억울해서 어떻게 사느냐?'라고 반문하시겠지만 억울하다는 감정조차 결국 힘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아닙니까? 자신이 보기에는 억울함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것이 천국시민의 모습입니다. †
베드로의 부인(마 26:69-75) - 52강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다는 것은 기독교의 중요한 중심점입니다. 누구나 이것을 고백해야만 신자로 인정을 받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세례문답을 할 때도 이것을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고 죽으셨다는 것을 믿습니까? ' '예 믿습니다'라고 하면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신자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고백이 가짜다, 진짜다라고 어떻게 섣불리 판단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요즘 같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믿음의 의미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단지 자신의 열정 하나만으로 버텨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 때에 우리는 믿음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구원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다른 것을 믿는 신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천국을 바라보고 산다고 해도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곧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가?'라는 것은 출애굽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하시기 위해서 마지막 재앙으로 장자의 재앙이 있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백성이니까 처음부터 장자의 죽음에서 제외시켜 놓은 것이 아닙니다. 단지 문에 발라놓은 어린양의 피 때문에 그 안에 들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보시는 것은 이스라엘이냐 애굽이냐가 아닙니다. 누가 어린양의 피를 발랐느냐를 보시는 것입니다. 즉 어린양의 피가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장자의 죽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 어떤 열정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어린양을 죽여서 그 피를 문에 바른 것 외에는 없습니다. 자기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아무런 잘못도 없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양을 보면서 그들은 피의 의미를 생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피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소홀하게 생각합니다. 너무 당연한 사실로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믿음은 상상이 아닙니다. 믿음은 머리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주님의 피를 믿는다!'는 이런 말을 누가 못합니까? 교회에 나온 사람치고 이런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피를 믿는다는 것은 구원에는 우리의 그 어떤 행위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도 잘 아십니까? 잘 아시면서 왜 자꾸 자기 열심, 자기 열정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십니까? 인간의 열정이 피를 믿는 믿음의 증거라고 누가 말했습니까? 피를 믿는 믿음의 증거가 오직 자기 부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3년간 일하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의 열정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 계셨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열정도 아니고 열심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 사는 것뿐입니다. 마 12:50절에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사는 자입니다. 이외에는 그 어떤 조건도 요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우리는 그대로 할뿐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열심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열심과 신자가 아닌 자의 열심이 다른 것은 한쪽은 자기를 부인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열심이고, 다른 한쪽은 자기가 부각되어지는 열심이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열심은 무엇입니까? 모두가 자기를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1등하기 위해서, 남들보다 앞서가기 위해서,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이것저것 열심히 합니다. 이들은 자기의 열심이 식는 것을 무척 두려워합니다. '혹시 믿음이 떨어진 것이 아닌가?'라고 하면서 불안해하고 기도를 합니다. 그래도 열심이 일어나지 않을 때는 비상수단으로 기도원을 찾아갑니다. 드디어 기도원에서의 새로운 분위기를 통해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고 열심히 기도원을 찾아다니게 됩니다. 이것이 열정을 가지고 신앙 생활하는 신자의 보편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1, 2 등을 가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앙에 서열을 매기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서열을 정하신 적이 없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각각 주의 우편과 좌편에 않기를 원했을 때도 예수님은 주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는 자는 주님이 마시는 고난의 잔을 마시는 자이고 그 사람은 오직 하나님께서 예비하셨다고 말씀합니다(마 20:20-23). 여러분, 주의 좌우 편에 앉는 자는 열심히 있는 사람이 아니고 주님과 함께 고난의 잔을 마시는 자입니다.
죄인된 인간이 생각하는 열심은 결국 사탄의 생각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을 교회로 끌어 모으는 전도의 열심, 앞에 나가서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부르는 찬양의 열심, 성경을 많이 읽는 열심, 교회 일이라면 집안 일도 뒤로하고 앞장서서 일하는 봉사의 열심, 이러한 열심들이 나 자신을 주님의 피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열심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는 앞서 말한대로 열심히 없을 때 스스로 믿음에 대해서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열심, 열정이 곧 믿음의 증거가 아니다는 이 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믿음의 증거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이것이 열심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자신에게 손해가 있게 되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주님 때문에 내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해도 주님에게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 날마다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열심이 아니겠습니까? 이 열심 때문에 때로 전도도 하게되고 사랑으로 봉사도 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꼭 필요한 것은 갈림길에 서게 된 경험입니다. 주님을 따를 것인가? 세상을 따를 것인가? 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 보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경험 속에서 실패도 하면서 살아갈 때 자기 열정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를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은 뜻밖에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많은 부분에서 세상의 것을 포기하거나 손해를 봐야 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기로에 서보신 적이 있습니까? 만약 그런 기억이 없다면 여러분들은 그러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자신의 이익을 중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한 고민이 여러분을 피해갔을 뿐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는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이 세상에서 잘되는 쪽으로 일하시고 도우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문제에 있어서도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냐를 생각하기보다는 이 문제가 잘 해결되도록 도와달라는 요구가 먼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문제가 잘 풀리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는 고민, 선택의 갈림길이라는 고민은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미 주님과 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58절에서 다른 제자와 같이 도망가지도 않고 멀찍이 예수를 좇아서 대제사장의 집뜰에까지 쫓아간 베드로에게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베드로에게서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했던 자신의 열정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베드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마침내 베드로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예수님이냐? 아니면 자기 목숩이냐? 여러분이 베드로 같은 상황이라면 과연 어떤 쪽으로 가겠습니까? 혹시 지금 그렇게 죽는 것보다는 어쨌든 살아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유익이 아니냐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아마 베드로도 그러한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을 부인한다는 자책감을 조금이나마 면해보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오늘 우리는 자신의 열정으로 주님을 쫓던 한 인간의 실패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오늘 우리들의 실패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패하면서 인생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세상을 살았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필요 없고, 누구도 믿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을 과시하면서 교만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즉 인간은 실패 속에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실패하면서 세상을 살아갈 때 회개해야 할 실패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실패, 실수 자체가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생관을 드러내는 것이나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세상을 의지하고 자기 자신을 의지하면서 살다가 드러나는 실패라면 회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드러내는 실패라면 그냥 넘어가지 말자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우리가 잘 아는 베드로의 실패가 나와 있습니다. 죽어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는 열정을 보였던 베드로였지만 결국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자 그 선택은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어 버렸습니다. 죽어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는 열정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마지막에는 주님을 저주하면서 맹세하기까지 했습니다. 나는 예수님과 상관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을 저주까지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이 위기만 벗어나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베드로를 향해서 욕이 나옵니까? '차라리 말이나 하지 말지 죽어도 부인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해!' 형편없는 베드로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러나 욕을 하고 싶은 그 베드로가 지금 예수 믿겠다고 나와 있는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지금까지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위대한 스승 한분을 좇고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세상이냐 죽음이냐는 갈림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갈림길에 서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예 처음부터 세상으로부터 갈라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먼저 살 길을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을 모른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앞서 말한대로 우리는 수많은 갈림길을 겪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갈림길을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세상으로부터 분리입니다. 우리를 하늘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늘 백성이란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살아가면서 이미 세상에서 벗어난 자로서 살아가는 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면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의 분리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소망을 도와주는 예수님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갈림길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때문에 순간순간 주님을 부인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갈림길을 지워버리는 삶이 아니라 갈림길에 서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수많은 갈림길에서 결국 주님을 부인하는 많은 실패 속에서 회개하면서 연약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의 피를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75절에 보면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나서 닭이 울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다고 합니다. 베드로의 통곡은 주님을 부인했다는데 대한 후회가 아닙니다. 마음만 먹으면 주님을 부인 안할 수 있었는데 순간적으로 실수했다는데 대한 통한의 눈물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알게 된 것입니다. 실패하는 자기를 들여다보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의 믿음을 장담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던가를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출발입니다. '나는 연약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는 것을 모르고서는 믿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실패를 모르는 믿음은 결국 베드로와 같이 자신의 열정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의 실패 속에서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린 여기에서 가룟 유다와 베드로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돈을 받고 판 가룟 유다나, 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베드로나 똑같이 주님을 거부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다른 점은 가룟 유다는 단지 주님을 팔았다는 후회만 있었습니다. 즉 자신이 그럴 수도 있는 인간임을 깨닫지를 못한 것입니다. 마치 교회에서 어떤 신자가 실수를 했을 때 교인보기 창피해서 교회 나오지 못하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 이유는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룟 유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인간됨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을 바라볼 수 있고 의지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실패를 연속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우리들의 실패 속에 계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주님의 피는 실패한 인간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성공한 인간은 주님의 피의 의미를 결코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신 것은 이미 베드로의 실패를 알고 계셨고, 그 실패에 함께 하신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용서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 아니겠습니까?
완벽한 신앙생활을 꿈꾸지 마십시오. 남보다 뒤쳐진다고 해서 자존심 상해하거나 열등의식 때문에 낙심해 하지 마십시오. 앞서가는 사람들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은 자꾸 처지는 것 같고, 신자가 아닌 것 같은 생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앞장서서 가시는 분이 아니고 제일 뒤에서 우리를 밀어주고 계시는 분입니다. 열심을 가지고 일등으로 잘하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나 자신의 무능을 한탄하고 실패를 통곡하는 자들을 위해서 피를 흘리신 분입니다.
여러분, 실패했습니까? 마음은 그것이 아닌데 자꾸 엉뚱한 모습이 드러납니까? 그래서 낙심이 되고 신앙에 재미가 없습니까? 그것이 우리들의 본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본모습을 아십니다. 단지 우리가 그 본모습을 깨닫고 주님께 나오기를 원하실 뿐입니다. 그것이 새사람입니다. 자기를 믿지 않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수시로 실패의 자리를 남겨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열심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피를 의지하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한 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다만 실패의 자리에서 자신의 무능을 깨닫고 주님을 바라보는 자가 되었느냐를 물으실 뿐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실패를 아십니까? 혹시 실패의 자리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을 부인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소경은 아닙니까? 나는 지금 믿음 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자신만만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모두가 베드로의 모습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믿음을 장담할 때부터 이미 실패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은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을 때입니다. 오늘 주님은 여러분께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힘없는 메시야(마 27:1-10) - 53강
인간의 열심이 믿음이 아니다는 것은 베드로같이 인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에서 아주 열심히 일하시는 분이 어느 회사에 부장으로 일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회사의 회장이 교회 다니는 사람을 아주 싫어한다고 할 때 그것을 알게 된 교회 다니는 부장은 회장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되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그와 같은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 믿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 않겠습니까? 물론 일부러 교회 다닌다고 광고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그 회장이 예수님을 욕을 하고 하나님을 욕을 하면서 교회 다니는 그 간부에게 맞장구 쳐줄 것을 원한다면 '아니다'고 소리치면서 예수님을 변호하겠습니까? 아니면 같이 맞장구를 치면서 예수님을 욕하겠습니까? 또한 주일에 예배당 앞에서 우연히 그 회장을 만났다고 할 때 어디 가느냐고 묻는 물음에 '저 교회갑니다'라고 떳떳하게 말하고 예배당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교회에서 보이는 열심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회장에게 잘못 보여서 감원 대상이 될 수 있는데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신자임을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열심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이요, 믿음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불리하면 등을 돌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신자의 열심은 그 열심 때문에 자기에게 불리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때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할 그때는 주님 때문에 불리한 지경에 빠지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의 뜰에서 자기가 예수의 제자임을 알아보는 사람이 등장했을 때 베드로는 일순간 주님 때문에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불리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그 베드로가 현재 우리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열심히 교회생활하는 것을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열심을 신앙의 전부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나에게 어떤 불리한 상황이 닥쳐온다고 해도 주님을 믿는 모습을 감추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이냐, 신앙이냐는 갈림길에서도 신앙을 택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좋아서, 나는 주님 안에 있어야 살 수있다는 것 때문에 주님을 떠날 수 없고, 주님을 멀리할 수도 없다는 그 자체가 열심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열심이 있습니까?
우리는 너무나 세상을 두려워합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도 믿지를 못합니다. 세상의 힘이 주어져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려고 하고 안심을 하려고 합니다. 때문에 세상에서 불리한 상황에 빠지게 될 때 타협을 해버리고 양보를 하면서 어떻게든 세상에서 살아보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열심은 주님이 누구신가를 아는데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말씀드리기를 주님은 우리가 실패한 자리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인간은 약하고 무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주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 주님을 아는 것이고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결국 아무리 해도 해도 안되는 자신의 무능을 깨닫고 이제는 주님만 의지해야 살 수있다는 것을 깊이 알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주님만 바라보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주님은 곧 나의 생명이라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열심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무능함을 아는 신자를 원하십니다. 인간의 무능함을 알아야 주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무능을 모르면 자신에게 가능성을 두게 됩니다. 자신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그것이 불신앙이라는 것을 모르는채 자기 열심에 도취되어서 스스로 만족을 느끼며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선택한 존재로 전락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자신의 무능함을 끝까지 깨닫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마감한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가룟유다에 대해서는 종종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전에 '가룟유다가 지옥간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왜 가룟 유다가 지옥갔습니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를 팔아 넘겨서 십자가에 죽게 하셨으니까 지옥가야 마땅하지 않은가?'라고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은 한사람도 구원받을 사람은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도 우리에게 아무 쓸모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어떤 죄도 극복합니다. 심지어 가룟유다같이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 넘긴 그 죄까지도 십자가는 다 끌어당겨서 용서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용서하지 못할 죄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다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예수를 팔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을 판 유다는 예수님이 대제사장과 장로들에 의해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지는 것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됩니다. 양심은 인간의 도덕과 윤리를 깨우쳐주는 역할을 합니다.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유다가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윤리적으로 통회하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유다는 은 삼십을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면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예수를 판 것은 잘못된 일임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그후에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스스로 목매어 죽어버립니다. 유다는 왜 스스로 목매어 죽었을까요?
유다는 많은 괴로움을 느꼈습니다. 이것을 보면 유다는 전에 말한 대로 대단한 양심가입니다. 요즘같이 남에게 손해를 입히고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스승에게 폭력을 휘두르고도 전혀 뉘우치지 않는 세상에 양심의 괴로움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양심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괴로움을 느끼고 후회하는 것이 죄사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회개를 후회로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이것을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란 인간이 무능하다는 것을 아는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능하다고 할 때의 무능은 선을 행할 수 없는 무능을 말합니다.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사단에게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에게 붙들려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사단의 방식, 사단의 생각만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단의 생각만 보여지는 인간이 어떻게 선한 일, 즉 하나님의 일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이 사단의 생각이 어떤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면 자신에게서 보여지는 것이 모두 악한 것임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이고 결국 우리의 행위를 가지고는 절대로 주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주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고 주님의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알고 십자가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자기를 알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곧 회개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괴로움을 느끼고 후회를 하면서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도 결국 주님을 바라보지는 못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괴로워하고 후회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인간은 그런 존재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최후까지 주님을 바라볼 필요성을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괴로워하고 후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괴로움과 후회의 내면에는 잘못한 행위에 대해서 자존심 상해하는 모습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회개는 자기를 아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실수하고 실패할 수 있는 인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에 대해서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을 바라보게 되고 주님의 피가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인간이 자기의 생각대로 일이 안되고 실패하고 무너지는 가운데서 인간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알고 주를 바라봐야 하는 것을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이 땅에 오신 메시야, 그리스도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척 많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 오해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오해와도 같은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힘있는 메시야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힘있는 메시야만이 자기들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습니다. 힘있는 로마에 의해서 압제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을 구할 메시야는 당연히 힘있는 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나서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메시야'라고 하는 그 분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들은 미래에 대한 모든 희망이 사라지게 됩니다. 힘을 얻어서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들의 소망이고 메시야를 바라보는 이유였는데 정작 메시야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모습을 등장합니다. 돈 없고, 천한 신분입니다. 그렇다고 삼손 같이 힘이 센 것도 아닙니다. 때리면 맞고, 팔면 팔리는 모습입니다. 그런 자를 메시야로 섬길 때 유대인들은 무엇을 두려워했겠습니까? 계속해서 로마의 압제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계속해서 자기들이 상상하고 있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눈앞에 있는 데도 그 메시야를 죽이고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 그 모습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해서 오해하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약해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무능해지는 것도 싫어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는 그런 신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무것도 못하는 신자는 신자가 아니라고 여겨버립니다. 힘있는 신자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강한 신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인간은 결코 강해질 수 없고,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인간임을 모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결국 강해지려고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자기의 그런 신앙을 칭찬해주고, 자기가 약해질 때 힘을 줘서 일을 성공시켜주는 그런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힘이 빠진다고 할 것입니다. 신앙의 힘을 풀무에 바람을 집어넣듯이 우리에게 힘을 집어넣어서 이것저것 열심히 하는 그런 힘을 하나님의 도우심이고 신앙의 힘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강해지려고 하고, 뭔가 하려고 하는 것을 부정하는 말이 쉽게 이해가 안되리라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여러분, 모든 것을 백지화하고 차근차근 생각해 봅시다. 도대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강조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힘있는 신앙인이 되라고 하셨습니까?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했습니까? 예배당 세우고 교회 봉사하는 것을 강조하셨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것은 그런 모든 것은 다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어떤 죄를 지시고 죽으셨습니까? 힘의 세상에서 힘으로 살려고 하는 죄입니다. 우리의 모든 실수는 힘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세상의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에는 관심없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힘에는 관심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종교적인 힘에는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교회 부흥도 포기했습니까? 그러면 내 교회가 다른 교회와는 다르게 재미있고, 좋은 일 많이 하고,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없습니까? 그 마음에는 다른 교회와 다르다는 것을 힘으로 삼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이 자리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지금 인간이 어디까지 힘을 원하고 있는가를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교회에서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 보여지지 않고, 작으면 작은 대로 서로 교제하면서 아기자기하게 신앙생활하면서 다른 교회에 내세울만한 것이 보여지지 않을 때 실망을 하고 교회에 대한 사랑이 식어져 버린다면 그 이유는 결국 교회를 힘으로 삼고자하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임을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한 죄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이 어떻게 악한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가장 약한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약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한다면 그자는 힘을 원하고 있는 것이고, 약한 예수님을 따른다면 그자는 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원한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약한 예수님을 따르겠습니까? 약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신도 예수님과 같이 약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약해진다는 것은 세상의 힘에 의해서 힘으로 버티지 않고 죽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과 똑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기준이 될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신자가 자기의 무능과 약함을 모르면 그리스도에 대해서 바로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상상 속의 그리스도를 좇게 될 것입니다. 약한 자로 오시고, 우리에게 같이 약해질 것을 요구하시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신자는 단지 내가 아는 복음대로만 살아갈 뿐입니다. 그것 때문에 때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반대를 당하는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곧 힘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외면을 당하고 버림받는 예수님이 가신 길이기 때문에 그 길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님이 갚으실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유다가 던지 은 삼십을 가지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토기장이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스가랴서 11:12,13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스가랴서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참 목자에 대한 가치를 은 삼십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은 삼십은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고 연락이라는 막대기를 잘라버립니다. 이것은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라고 말하는데 그 뜻은 유다는 하나님의 장자로서 언약이 이루어질 족속을 말하는데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과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은 삼십 때문에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토기장이의 밭을 사게 됩니다. 결국 그들이 저주받을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그들이 저주받아야 합니까? 그들은 힘이 있는 메시야를 기다렸는데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는 너무 힘없는 분이셨기 때문에 그분을 배척함으로 말미암아 구약성경대로 그들이 하나님께 저주받을 자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가룟유다의 죽음을 통해서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자기를 벗어버리지 못한 자는 주님을 볼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힘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는 가장 밑바닥에서 약한 자로 계시는 주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힘으로 살겠습니까? 아니면 믿음으로 살겠습니까? 우리는 힘을 모으기 위해서 믿음을 달라고 하고, 은사를 달라고 하고, 능력을 달라고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힘을 버리지 못한다면 주님을 의지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약한 모습으로 오신 주님은 여러분에게 아무 쓸모도 없는 구원자로 전락되고 맙니다. 그리고 나에게 힘이 되는 주님을 찾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힘이 되십니다. 그러나 그 힘은 나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힘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약해지고, 무시당하면서 주님 때문에 기뻐하는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신앙생활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바라바냐 예수냐(마 27:11-26) - 54강
그런데 서로 마음에 들어서 사랑한다고 결혼한 부부가 왜 다투고 이혼을 하게 됩니까? 그것은 마음에 드는 부분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감추어지고 보이지 않았는데 결혼하고 살면서 차츰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발견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사랑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결국 이혼으로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설령 이혼은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끊임없이 다투며 살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우리들이 말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계산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희생하고서라도 상대방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인간세계에서 가능하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교회가 사랑이 없다고 한탄하지만 교회는 사랑이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죄인된 인간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이 자기 만족을 위해서 존재해 줄 것을 원합니다. 교회에 와서도 신자들이 원하는 것은 목사가, 다른 신자들이 자신을 위해서 존재해 줄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흐뭇하게 해주는 사랑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기대하는 사랑이 채워지지 않을 때 그 사람에게 교회는 사랑이 없는 곳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나는 사랑이 있는 교회를 기대하고 꿈꾸는 것은 환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교회는 이 땅에서 보이는 제도적인 교회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교회에서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은 물론 상처를 주는 외부적인 요인이 있겠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남이 나를 사랑해줄 것을 기대했는데 그 기대에 어긋났을 때 상처를 입게 됩니다. 결국 마음의 상처의 원인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신의 집에서 구역예배를 모입니다. 자신은 평소에 다른 사람들의 구역예배에 잘 참석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많은 음식을 장만하고 기다렸는데 하필이면 그날 많은 분들이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오지를 못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은 그 심정을 충분히 상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자기 집에 왔을 때와 적은 분들이 왔을 때 느껴지는 그 감정의 차이를 경험하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신자들이 모이는 자리를 소홀히 했다면 그 사람에게도 잘못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이야 어떻든 왜 자신이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까? 구역모임에 오지 않은 사람 때문에 내가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자기 중심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는 이기심이 나에게 상처를 주게 된 것입니다. 내 집에 오지 않았다는 서운함 때문에 어떤 사정인가를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간임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결국 우리는 남이 나에게 상처가 되는 말이나 행동을 했기 때문에 내가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해 버리지만 상처는 내 스스로가 입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때 그것을 해소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원인은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이 없는 죄인 됨에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인간은 남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말하는 사랑은 앞서 말한 대로 내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좋아하는 그런 정도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자기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어야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것에는 인정을 하십니까?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죄인인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수없이 하면서 교회를 출석하고 신앙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한다는 그 사랑이 과연 진심일까요? 여러분이 거짓으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들이 주님을 바라보면서 내 마음에 드는 부분만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냐는 것을 묻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바라볼 때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주님은 어떤 모습의 주님입니까? 여러분이 주님을 바라볼 때 여러분 마음에 들지 않는 주님의 모습은 없습니까? 진심으로 주님의 모든 것이 여러분의 마음에 들고, 여러분에게 기쁨이 되고 소망이 되시는 주님입니까? 만약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세상의 모든 재물보다도 주님을 더 귀한 분으로 섬겨야 마땅합니다. 심지어 부모 자식보다도 주님이 더 귀한 분으로 자리하여야 합니다. 과연 이런 믿음입니까? 주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믿음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마 10:37).
이러한 주님이 여러분에게 전혀 부담이 되지 않습니까? 산상수훈을 잘 아실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 산상수훈을 읽어도 전혀 부담이 되지 않습니까? 그냥 윤리와 도덕으로 보신다면 별 부담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려고 노력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도 별 부담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치의 부족함도 없이 다 이루지 아니하면 지옥 간다고 할 때, 그대로 부담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너무 편하고 쉽게 보려고 합니다. 즉 나의 죄를 지적하고, 드러내고, 나무라는 말씀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약점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자신의 더러움이 보여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고 더러움을 다 알고 지적을 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지도록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인간의 모습을 본문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섣불리 말씀하지 마시고 오늘 본문을 다 살핀 후에 천천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예수님과 강도를 비교시켜서 이 둘중 누가 당시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고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강도중 누가 더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을 것 같습니까? 뻔히 아는 질문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과는 정반대의 일이 그때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2천년 전의 그때 그 일이 지금 이 은석교회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을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야 '아니 어떻게 예수님을 원하지 않고 강도를 원하지'라고 울분을 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살려달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연한 일을 그때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엉뚱하게 강도를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그때는 유월절이었습니다. 그리고 명절을 당하면 무리가 원하는 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가 있었습니다. 그 전례대로 빌라도는 무리에게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라고 묻습니다. 그때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라"고 무리를 선동합니다. 결국 무리들은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아라고 이구동성으로 외치게 됩니다. 왜 사람들은 그토록 예수님을 싫어했습니까? 도대체 예수님이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셨기에 강도인 바라바보다 예수님을 더 싫어하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강도가 죽는 것보다 예수님이 죽는 것을 더 원했습니까?
성탄절 때 성탄이 과연 기쁜가를 말씀드렸습니다. 무엇 때문에 성탄이 기쁜가를 생각해 보자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단지 달콤한 사탕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단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정도로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좋은 선물을 가지고 오신 분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무 생각없이 기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에게 선물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 선물은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죄를 아는 자만이 생명되신분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낱낱이 알고 계십니다. 산상수훈을 보더라도 예수님은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 보시고 계시고, 인간의 약점을 훤히 알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대제사장과 장로들 앞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죄를 낱낱이 지적합니다. 조금도 봐주는 것이 없이,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외치시면서 '마귀 자식'이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지적합니다. 회개를 기대하시고 잘못을 책망을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겸손함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 앞에 예수님이 서 계셔서 여러분의 죄를 지적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물론 예수님이 천군천사를 대동하고, 불수레를 타고 오셔서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을 하고서 우리들을 책망하신다면 금방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군천사와 함께 오시는 때는 잘못을 지적하기 위함이 아니라 아예 심판을 위해서 오십니다. 잘못을 지적하러 오셨을 때는 천한 존재요 약한 모습입니다. 만약 이 은석교회에 어떤 거지가 예배를 드리러 와서는 은석교회는 신앙도 엉망이고, 자기 먹고살기에만 바쁘고,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는다라고 심하게 나무란다면 '예 맞습니다. 우리는 너무 엉터리입니다'라고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겠습니까?
앞서 말한 대로 사람은 자신의 약점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면 필사적으로 공격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과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싶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드라마를 보면 자신의 죄를 알고 있는 사람을 죽이는 장면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의 심리를 이해하신다면 왜 무리들이 예수님을 싫어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남을 사랑할 때 자신의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어야 사랑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당시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앞에 서면 자신들의 죄가 드러났기 때문에 예수님이 강도 바라바보다 더 부담스러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담이 되는 존재를 자기들 앞에서 치워버리고자 바라바를 선택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라고 소리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약점을 가리고, 잘못된 것, 실수도 가리면서 자신이 그럴듯한 존재로 남에게 보여지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기도도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기를 좋아했고, 힘든 금식도 많이 했고, 십일조를 하고, 구제를 하면서도 남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는 그 마음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나옵니다. 속에 감추어진 죄를 몽땅 드러냅니다. 예수님 앞에 서기만 하면 기가 죽고, 할말이 없고,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가 없는 것이 자기들에게는 유익이고, 자기 사랑을 할 수 있는 길이라고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은석교회에 오신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은석교회 목사부터 시작해서 모든 성도 여러분들을 책망하고 찌르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그토록 사람들이 거부하고 부담스러워하는 말씀을 하셔야만 합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 중요한 사람은 자신이 찔림을 받을 때 자신의 죄를 알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교회라는 단체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죄를 알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를 중요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책망하고 지적하시는 말씀을 하지 않을 수 없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자리에 오셔도 예수님은 여러분들의 마음에 드는 말만 골라서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목사인 제가 성경을 그대로 말씀드릴 때 여러분이 그 말에 부담을 가지고, 그런 말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 불만을 가지고,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여러분은 바라바를 선택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라고 외친 그때 그 무리들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내 마음에 드는 말이란 없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은 온통 인간의 본성과 반대되는 말로만 가득차 있습니다. 어떤 가르침이 인간의 마음에 들기 때문에 스스로 그 말씀을 따르겠다고 나서는 것은 불교나 유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지 기독교는 그것과는 다릅니다.
기독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때문에 지금 여러분들이 자기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부담과 거부보다는 자신의 죄를 발견하게 된 것에 대해서 기뻐하고, 더 십자가를 바라보고 더 주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믿음이 생긴다면 그것은 성령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가 아니면 주님을 사랑할 수 없는 것,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내 감정만 가지고 쉽사리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바른 소리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기대하고 원하는 말을 하지 않고 듣기 싫어하고, 부담을 느끼게 되는 말을 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가 자기들 곁에 있는 것을 싫어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여러분 곁에 있다면 그것을 환영하겠습니까? 예수님이 곁에 계신다면 잘못할 때마다 책망하고 지적하는 예수님 때문에 세상사는 것이 굉장한 부담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래도 주님이 내 곁에 계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래 주님이 곁에 계셔야 내가 정신차리고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고, 내 잘못된 것을 바로 알아갈 수 있지'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은 주님 편에 서 있는자요, 바라바보다는 주님을 선택하는 자요, 주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 백성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은 지금 여러분들 곁에 분명히 계십니다. 말씀으로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주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가를 오늘도 지적하고 책망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소리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잘못만 드러나는 말씀 앞에 서기를 싫어한다면 그순간 여러분은 예수님보다는 바라바를 선택한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적하고 나무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심판에서 건지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여러분에게 부담이 되고, 여러분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말씀을 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피하지 말고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죄가 드러나고 약점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자존심 상해하지 마시고, 거부하지 마시고 '예수님 오늘도 이 말씀을 통해서 내가 죽을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라고 하면서 주님 의지하고 살아가기 바랍니다. 우린 예수님을 내 마음에 드는 부분만을 골라서 사랑할 수 없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 마음에 드는 예수님은 없습니다. 성령이 함께한 자에게만 예수님이 자신에게 기쁨이 되신다는 것을 발견할 뿐입니다. 심판을 아는 신자답게 주님만 의지하고 살아가기 바랍니다.
조롱받는 메시야(마 27:32-44) - 55강
여러분들은 마태복음을 들으면서 그리스도가 큰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습니까? 뭔가 주님 곁에 있으면 항상 손해를 봐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는 인생의 성공을 원합니다. 잘되는 인생, 편안한 인생을 원합니다. 그런 인생을 추구하면서 그리스도를 찾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그리스도도 내가 어려울 때 그 어려움이 해결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기도하면 당장 달려와서 힘이 되어주시고, 내 가정에 평안과 행복을 주시는 그런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성경에 나타나는 그리스도를 향해서 한발한발 띄어 놓을 때마다 내 머리에 있던 그리스도에 대한 환상들은 저 멀리 도망가 버리고, 나의 복주머니로 알았던 그리스도는 오히려 큰 부담으로 다가오고 나중에는 '그래도 하나님이라면, 예수님이라면 우리의 생활도 도우시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라는 반발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생에 뭔가 도움을 얻어보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주로 찾았다면 그러한 반발은 당연할 것입니다.
제가 마태복음을 말씀드리면서 가졌던 우려 가운데 하나는 마태복음 강해를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일어나는 반발이 참된 그리스도에 대한 배척과 소홀함으로 이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그때 그 무리들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러한 우려 때문에 그 반발을 삭히기 위해서 말을 바꾸거나 소위 부드럽게 설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반발을 일으키고자 하는 의도로 설교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성경에 있는 그대로,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를 전하고자 충실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 사건 속에서 다시 한번 주님이 왜 죽으셔야 했는가에 대해서 외치고자 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바라는 것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들으며 믿음과 믿음 아닌 것, 교회와 교회 아닌 것, 신자와 신자 아닌 것의 모습에 대해서 바르게 분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서 주님을 십자가에 매단 그런 죄악이 보여질 때 가차없이 그 죄를 끊어버리기 위해서 힘쓰는 삶으로 나아가는 교회와 신자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천국을 세상에서 살다가 죽으면 덤으로 주어지는 복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작 신자들도 민감하게 생각하는 것은 세상에서의 삶이지 천국은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조금만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야단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면서도 천국과 연관있는 신앙의 문제에서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런 마음으로 이 자리에 모였다면 결국 또 여러분에게는 전혀 심각하지 않는 문제를 저 혼자 심각하게 여기고 있고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 또한 먼 옛날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하나의 비극으로만 들려지게 될 것이고, 혹시 나중 일을 계산해서 예수를 믿는다고는 했지만 결코 십자가에 나도 예수님과 함께 못박히겠다는 그런 바보짓은 하지 않겠다는 신자아닌 신자, 신자라는 껍데기만을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으로 전락되어버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쪼록 오늘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를 바로 알고 그 십자가를 자신의 생명으로 여기는 참된 신자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대제사장과 장로들, 모든 무리들이 예수가 아닌 바라바를 선택하고 난후 죄인 아닌 죄인을 십자가에 매다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는데, 그 분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죄인으로 몰아세우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먼저 마귀가 어떤 식으로 일하는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세상은 마귀의 사고방식에 놓여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귀의 사고방식이 예수님의 사고방식과 같을 리가 없습니다. 전혀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죄인이 아니다는 것은 마귀의 사고방식으로 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정녀 탄생만이 예수님이 죄인이 아닌 증거가 아닙니다. 물론 동정녀 탄생은 육으로 나지 않고 영으로 났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에서도 죄인이 아닌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분명한 것은 성경 어디에서도 예수님에게서는 마귀의 사고방식, 즉 이 땅의 사고방식, 땅을 지배하는 마귀의 정신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죄인이 아닌 증거입니다.
따라서 교회와 교회아닌 증거는 예수님이 세상을 사신 그 정신이 어떤 것인가를 통해서 판단해야 합니다. 만약 교회에서 마귀의 정신이 발견되어진다면 그것은 분명 예수님과 상관없는 교회 아닌 교회일 것이고, 예수님의 정신이 보여진다면 그것은 누가 뭐래도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생각하듯 악한 죄의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귀는 사기나, 강도, 도둑질, 살인 같은 그런 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마귀는 사람들이 선호하고 오해하기 좋은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양의 탈을 쓴 이리 같은 모습입니다. 예를 들면 윤리나 도덕 같은 모습으로도 다가오는 것이 마귀라는 것입니다. 즉 교회가 제아무리 사회사업을 하고, 환경운동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교회가 교회 되는 기준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하는 사회사업이나 환경운동 같은 것을 보면서 '역시 우리 교회는 교회다운 교회야'라고 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요 마귀의 유혹에 빠져있는 모습에 불과한 것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선교를 수십 군데하고, 구제를 하고 철야기도에 열심이고 이런 저런 행사에 열심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교회 되는 기준이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 되는 기준은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알고 있느냐가 교회 되는 기준입니다. 여러분, 은석교회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재산이 없었습니다. 머리 둘 곳도 없었습니다. 병을 고치고 이적을 일으키시는 능력만 잘 이용하시면 떼돈을 벌 수 있었지만 전혀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오늘날 기도원에서 병을 고친다고 안수기도하면서 헌금을 요구하는 것은 결국 주님과 전혀 상관없는 마귀가 하는 짓임을 알아야 합니다. 병을 고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병 고치는 은사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런 은사가 있다면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이 육신에 대한 소망을 버리고 하늘을 바라보도록 인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을 바라보는 삶, 믿음의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을 위해서 염려하지 않는 삶,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만 구하는 삶,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는 자 되기를 구하는 삶, 세상의 것보다는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으로 그것으로 기뻐하고 힘을 얻고 살아가는 삶, 이런 것들이 바로 믿음의 삶입니다. 여러분, 신자가 주님을 이렇게 제대로 알고 살아간다면 과연 무엇에 소원을 두고, 무엇을 바라고 살아가겠습니까? 교회에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제대로 안다면 과연 무엇을 목표로 하고, 무엇을 가르치는 교회가 되겠습니까?
회사 사장이 회사를 위해서 열심히 일했던 사원을 단지 경제문제 때문에 회사를 위해서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 몰아버리는 이 세상 같이 교회에서도 당회장이란 사람이 부목사나 전도사는 자신의 비서쯤으로 여기고 자신에게 잘못보이면 마음대로 짤라 버리는 그러한 것이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교회입니까? 부목사도 전도사도(사실 성경에는 부목사, 전도사가 없지만) 자기와 같이 그리스도를 전하는 동역자로 대하는 목사가 그리운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교회 아닌 교회의 모습을 너무나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은석교회에서도 그러한 모습은 부지기수로 보여집니다. 우리는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에 우리도 매달린 채로 우리의 교회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과연 무엇이 십자가의 정신이 아닌가를 하나하나 점검해 봐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씀을 듣고 모이는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온갖 조롱을 다 받으십니다. 로마 군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혔습니다. 왕이 입는 옷의 흉내를 낸 것입니다. 가시 면류관을 머리에 씌웠습니다. 왕관을 흉내낸 것입니다. 갈대를 손에 들리었습니다. 왕의 지팡이인 홀을 흉내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엎드려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인사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래 왕으로 대우해줄께'하면서 모독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손에 쥐어줬던 갈대를 빼앗아 가시 면류관이 씌어 있는 머리를 때립니다. 그리고 입혔던 홍포도 벗겨 버립니다. 이러한 모든 조롱을 다 당하신 예수님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인데, 예수님이 가신 길인데 우리도 이런 길이 주어진다면 마다하지 않고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들에게는 베드로가 검을 빼어서 종의 귀를 친 것이 더 마음에 들지, 때린 대로 맞고, 조롱하는 대로 다 당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정말 답답해서 견딜 수 없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때릴 때 나도 같이 때리고 조롱할 때 나도 같이 조롱하는 것은 땅의 방식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같이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후에는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39절에 지나가는 자들이 나오는데 이 지나가는 자들은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형을 지켜보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들은 예수님을 모욕하기를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합니다. '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뭐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고, 그러면 그 십자가에서 한번 내려와봐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줄께'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결국 뭐가 없어서 못믿겠다는 것입니까?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당하는 것을 보니까 절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절대로 인간들의 손에 당하지 않을 것이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마귀의 지배아래 있기 때문에 마귀의 사고방식으로 예수님을 생각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모습은 소위 바보 같은 모습입니다. 자식이 밖에서 남에게 맞고 들어오면 '바보 같은 자식아 왜 맞고 들어오니'라고 하면서 꾸지람을 합니다. 자식이 남에게 맞아서 마음이 아픈 것도 있겠지만 남에게 맞고 들어오는 약한 모습이 부모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것입니다. 물론 남에게 맞는 것이 무조건 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맞는 것은 바보 같은 것이고 남이 나를 때릴 때 같이 때려줄 수 있는 힘이 있어야 정당한 것으로 여기는 그것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의 정신에서 벗어나 있는 모습임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남에게 맞고, 당하는 것을 바보 같은 모습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눈에는 가난한 자, 약한 자, 힘없는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만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함부로 대해도 괜찮은 사람으로 비춰지게 됩니다. 나보다 힘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나보다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내속에서 무시하는 마음이 싹트고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마음이 아니라 마귀의 마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마음으로 살기에 힘들어하는 것은 신자인 우리에게서 주님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싹터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가 너무 자연스럽게 여기는 것은 바로 마귀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힘을 원하고, 약한 자는 얕잡아 보고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너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임을 알 때는 주님을 생각하고, 말씀을 대하고, 주님께 기도할 때입니다. 때문에 날마다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지 않는 신자는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죄악된 본성에 자신을 내어 맡기고 살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은 뭐라고 희롱합니까?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합니다. 지나가는 자들과 동일한 조롱을 합니다. 그리고 또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라고 조롱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이 어떤분이신지를 모르는 인간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와 기뻐하지 않으신 자의 증거를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구해주시는 것 같은 이적적인 일을 통해서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는 어려운 일도 미리 방지해 주시고, 설사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잘 해결해주시고 오히려 더 큰복으로 채워주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신자들이 신자를 향해서도 하는 말이지만 신자들도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힘든 일이 끊이지 않을 때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아닌가보다'라고 스스로 낙심해 버리는 것입니다. 또 이런 분위기를 교회가 은연중에 조장하고 있는 것도 크나큰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도대체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에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죽는 것이나 사도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당하는 일들이나 그외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죽거나 겪게 되는 고초가 기록되어 있는 부분을 삭제해 버리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차라리 그들에게는 복음을 열심히 전했던 그들이 결국 복을 받아서 한편생을 갑부로 잘 살게되었다는 것이 더 마음에 드는 내용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세상을 강자로 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강한 교회, 힘이 있는 교회, 세력이 있는 교회가 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정신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물질을 버리고 일부러 작은 교회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힘을 모으는 것에 목표를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있어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가난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신자에게 눈을 돌리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이런 신자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약한 자의 모습으로 죽으셨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십자가의 예수님은 세상 죄가 무엇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같이 약한 자가 되자고 부르십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보고 살아가십니까? 과연 어떤 십자가입니까? 그냥 입술에만 붙어 있는 십자가입니까? 아니면 장식용으로 그쳐버리는 십자가입니까? 나를 약한 자로 초청하는 그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이 원하는 예수님은 큰 권세를 가지고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자들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자기들 앞에 나타나는 예수님입니다. 자기들이 필요한 것을 구하면 군말없이 들어주는 그런 예수님을 원합니다. 내편이 되셔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잘대해주고, 보호해주는 그런 예수님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런 예수님은 성경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있다면 양의 탈을 쓴 이리, 즉 다른 예수, 마귀일 뿐입니다. 우스운 것은 이런 마귀의 방식, 마귀의 정신을 신앙이라고 따르고 있고, 성령이라고 정신 못차리고 있으니 이런 사람들에게 약한 자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어떻게 예수님으로 보여지겠습니까?
여러분 어떤 주님을 믿고 있습니까? 약한 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서 인간들의 온갖 수모를 다 당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속에서 죄가 무엇인가를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그 죄가 저와 여러분 자신에게서 보여지는지 점검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죄를 고백하십시오. 이것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고 약자로 세상을 사는 길입니다. 그리고 심판 속에서 건짐받는 참된 신자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죽으심(마 27:45-56) - 56강
풍요로운 설교들이 진심으로 성경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데에 모든 힘을 쏟고 있다면 그야말로 '풍요속에 풍요'로서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겠지만 정작 그 수많은 설교들은 성경의 본래적인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음성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종교성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의 음성만을 들려주고 있을 뿐입니다. 결국 풍요로운 설교 속에서 선지자와 사도들의 음성은 들을 수가 없고, 하나님의 뜻도 발견할 수 없는 빈곤의 시대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풍요속에 빈곤'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 이유는 하나입니다. 말씀에 대한 권위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로서 말씀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자꾸 개인적인 어떤 이득을 얻어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이득이 되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발각되고, 하나님 앞에서 더욱 더 작아지고 나중에는 형체도 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해서 발견할 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이란 그릇의 뚜껑을 열면 그 안에는 달고 맛있는 사탕이 가득할 것으로 기대하고 그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설교자는 이 기대를 채워주기 위해서 성경안에서 달고 맛있는 사탕을 끄집어 내주기에 애를 쓰다보니 교회에서 성경의 권위란 찾아볼 수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주장이 너무 무리한 주장일까요?
시 119:103절을 보면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분명히 성경안에는 꿀보다 더 단맛의 말씀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104절에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란 말씀을 보면 결국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게 하고, 그 죄를 미워하게 하는 명철을 가져다준 말씀의 맛이 꿀보다 달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해석하는 것도 인간이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기록한 주체는 성령이며, 해석하는 주체도 성령입니다. 인간은 하나의 도구로서 등장할 뿐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교리적으로 많은 신학적인 학설이 있습니다. 기계적 영감설, 축자영감설 등 여러 학설이 있지만 지금 저는 여러분들과 성경의 기록자에 대한 신학적인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하려고 이러한 문제를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해석의 잘못은 설교의 잘못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정통을 주장하는 칼빈주의라는 교회라면, 성경은 인간의 손으로 기록되었지만 인간이 자기의 학식을 가지고 기록한 것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였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즉 성경은 인간이 자기 학식, 자기 경험, 자기 상식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고 성령의 지혜로 기록하였다는 것에 동의한다는 것입니다. 우린 성령의 지혜로 기록하였다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령의 지혜로 기록하였다는 것은 성령은 불러주고 인간은 그것을 받아썼다거나, 가만히 묵상하고 있는데 써야할 내용이 생각나도록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경을 기록한 자가 자기가 보고들은 모든 사건의 하나하나를 하나님 편에 서서 바라볼 수 있는 깨달음을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마다 똑같지 않습니다. 깨달음이 같지 않다는 것은 성령이 다르다거나, 서로 틀린 것을 깨닫게 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단지 어떤 사건을 하나님편에 서서 바라볼 때 어떤 저자는 '예수는 메시야다'는 것을 깨달은 반면, 또 다른 저자는 '십자가를 믿는 것은 고난이다'는 것으로 깨달았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지금 매주일 마태복음을 설교하고 있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이 동일하지 않습니다. 같은 사건을 이야기하면서도 서로 다르게 이야기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같은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하면서도 서로가 다른 부분이 많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강도도 예수님을 욕한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한편 강도가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해 달라는 말을 함으로 구원을 받는 내용이 있습니다. 또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로부터 시작하는데 마가와 누가는 예수님의 족보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한 예를 든 것으로 이러한 차이점은 수없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약 복음서가 단지 예수님의 출생부터 시작해서 부활하실 때까지의 역사적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기록되어진 것이라면 모든 복음서가 같은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저자들마다 이야기하고 싶은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고,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한 사건을 가지고도 서로 다른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참고적으로 마태는 예수님만이 구약에서부터 언약된 메시야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메시야임을 변증하는데 초점이 모아져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마가는 복음을 소개하면서 고난은 예수님의 생애에 동참하는 것임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누가는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라는 분을 통해서 성취되어짐으로 온 인류에게 미치는 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본의 아니게 신학적인 성경 해석의 문제를 언급함으로써 여러분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 것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성경의 해석에 대한 문제를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왜 교회가 풍요속에 빈곤이 되었는가?'를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그것은 성경을 저자와 같이 하나님의 편에 서서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자가 의미하고 있는 것을 무시해 버리고 그것과 전혀 상관없는 자기의 말이 나오기 때문에 설교는 많으나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설교는 찾아보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그때 그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참으로 우리의 빈곤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풍요 속의 빈곤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말씀은 풍요로우나 그 말씀 속에서 십자가의 정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삶에는 빈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혹시 이런 상황이 아닙니까? 십자가는 풍요로운데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삶은 너무나 빈곤하지 않습니까? 십자가의 정신이 흐르지 않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듯,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지 않는 삶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나는 십자가를 잘 알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잘안다'고 자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을 안다는 것은 자기를 포기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를 포기하는 일에 너무나 빈곤합니다. 십자가의 정신이 흐르고 있는 교회보다는 발전하고 성공하는 교회에 더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자기를 포기하는 삶속에서 주어지는 기쁨이나 위로보다는 부요와 물질 속에서 주어지는 기쁨과 행복을 더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를 포기하는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꼭 물질을 멀리하고, 교회 부흥을 멀리해야만 하는 것이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물질을 멀리한다고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며, 교회 부흥을 멀리한다고 해서 십자가의 정신이 흐르는 교회가 아닙니다. 문제는 십자가의 위로와 기쁨을 위해서 사느냐, 아니면 세상에서 얻어지는 기쁨과 행복을 위해서 사느냐 입니다. 만약 십자가로 인해서 주어지는 기쁨을 안다면 물질에서, 교회부흥에서 기쁨을 찾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린 지금 주님의 죽으심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해져있는 주님의 죽으심입니다. 너무나 익숙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에 대해서는 기독교이기 때문에 의례히 해야하는 말 정도로 여겨버립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식상해져 있다보니 십자가에 대해서 날마다 새로움을 가지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풍요 속의 빈곤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말은 풍성한데 십자가에 대한 새로움은 너무나 빈곤합니다. 때문에 십자가의 정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삶도 빈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 부분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해보셔야 합니다.
46절에 보면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사실 이 외침은 우리가 외쳐야 할 외침인 것을 아십니까? 마지막때 우리들이 심판으로 버림받을 때 '하나님 어찌하여 우리를 버리십니까'라고 우리들의 입에서 나와야 할 외침이 주님의 입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당할 버림받음을 예수님이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돕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시편 22편을 보면 주님이 어떤 자리까지 낮아지신 것인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주님의 외침은 이미 다윗이 하나님께 했던 외침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6절부터 보면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다윗이 지금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윗언약을 통해서 오실 왕이 사람들에게 어떤 대우를 받으시게 되는가를 다윗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모습까지 낮아지셨습니까? 벌레의 자리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벌레로 취급받는 그 자리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벌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자리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아십니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아십니까? 내가 벌레 같은 인간인데 그 자리에까지 예수님을 밀어 넣으시고, 한분의 희생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생명으로 초청 받게 된 것을 아십니까? 이것을 진심으로 아는 분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기쁨으로 노래할 것입니다. 세상 것이 없다고 해도 이 사랑만으로 배부르며, 세상일이 괴롭다고 해도 이 사랑 때문에 노래가 나올 것입니다.
우리는 벌레 같은 인간입니다. 이사야서에는 지렁이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분 나쁘십니까? 하지만 이것을 인정하게 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벌레로 취급하는데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마음상해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나를 자랑하고 내세우는 것도 없을 것 아닙니까? 십자가는 우리를 이러한 삶으로 끌고 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삶에 너무나 빈곤합니다. 그래서 수없이 자기 자랑과, 욕심과, 비교와, 시기와 다툼이 끊이지 않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를 새사람되게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벌레로 취급받는 그 자리까지 낮아지신 주님의 죽으심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게 되고 자신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 남이 여러분을 욕하고 괴롭힌다고 고통스러워하지 마십시오. 물론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이 당하신 것을 생각하면서 자신을 돌아본다면 과연 어떠할까요.
주님은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당하신 것입니다. 그 고통을 짐작할 수 있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낳아서 온갖 정성으로 길렀는데 나중에 커서 자신에게 힘이 주어졌을 때 부모를 멀리하고 부모에게 칼을 들이댄다면 부모로서 그 고통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자식을 사랑하고, 그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를 안다면 그리고 내 삶에 받아들였다면 우리에게서 보여져야 하는 것은 오로지 주님의 희생만이 보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모습에는 너무나 빈곤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1절과 52절을 보면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일어난 현상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일어난 현상은 세가지입니다.
첫째는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진 것입니다. 성소 휘장은 하나님이 계신 곳에 인간이 들어갈 수 없도록 만들어논 장치입니다. 휘장은 법궤가 있는 거룩한 곳과 법궤가 없는 곳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법궤가 있는 곳은 생명이 있습니다. 매년 한번씩 대속죄일에 피가 뿌려짐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죄인인 인간은 거룩한 그곳에는 들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죄를 거두어 가셨기 때문에 더 이상 법궤에 피뿌림이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은 온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거룩한 장소가 따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디든지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여주는 그 자리가 바로 거룩한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거룩한 삶입니다. 누구든 이것을 외면할 때는 심판을 면치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지성소는 성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이 하나님이 계시는 지성소이기 때문입니다. 지성소에 피없이 들어온 자는 죽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를 무시하고, 십자가의 정신을 외면하고 자기 멋대로 하나님을 부르며 세상을 사는 자는 결코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둘째는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졌습니다. 이것은 죄악으로 가득차 있는 이 땅의 세상은 다 깨어지고 사라질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는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사는 것만이 망하지 않고 새로운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길임을 보여줍니다.
셋째는 무덤들이 열리고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무덤은 인간의 죽음 때문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인간의 죽음이 있는 이상 죄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무덤이 열렸다는 것은 그 죄에서 풀려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시고 죽으심으로 모든 죄에서 해방을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무덤에 갇혀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우리는 이 복에 대해서 너무나 메마른 마음으로 교회를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너무나 풍요로운 복에 대해서 풍요로운 마음으로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해서는 메마르고 빈곤한 마음이고, 반대로 세상에 대해서는 갈급한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 채 주님을 찾아 나오고 십자가를 말하고 있으니 그것이 무슨 은혜가 되겠습니까? 눈에 보여지는 것들이 그렇게 좋습니까? 돈이 손에 쥐어질 때 기분이 좋고 마음이 든든해집니까? 예 좋습니다. 그렇게 사십시오. 그러나 마지막 때에도 그 모든 것들이 여러분을 기분 좋게 하고 마음 든든하게 할 것이라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오히려 그것들이 여러분을 망하는 길로 끌고 갈 것입니다.
세상은 지성소입니다. 우리의 삶 하나하나가 하나님 앞에서 판단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판단하시는것은 얼마나 도덕적으로 옳은 삶을 살았느냐가 아니라 날마다 그리스도의 피를 기억하며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살았느냐를 보실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대하여 풍요로운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자의 능력(마 27:57-66) - 57강
여러분, 신자가 세상을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의 결단과 의지 가지고는 불가능합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말은 많이 하고 살았지만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세상의 힘이었습니다. 주님이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세상이 믿음의 대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말해왔습니다. 내가 주님께 소홀해지고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내 호주머니에 돈이 말라가고 저금통장에 돈이 없는 것을 한탄하고 걱정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가장 답답하게 생각하는 것은 세상에서 어떤 일이 있다고 해서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 마음이 복잡해서 교회에 나갈 여유가 없다고 합니다. 오늘은 기분이 좀 좋지 않아서 교회에 나갈 마음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교회로 나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결국 그런 사람들에게는 교회에 다니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의 취미생활이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취미생활이란, 마음의 여유가 있고, 기분이 좋고, 세상에서 복잡한 일이 없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오는 것을 가고 싶으면 가고 말고 싶으면 마는 그런 정도의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내 감정과 기분에 의해서 좌우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여러분의 결단과 의지에 달렸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믿음이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은혜다는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하고 있는 이 사실에 대해서조차 감사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소중한 감사와 은혜의 기회를 한낱 우리의 감정이나 기분 때문에 잃어버린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돈걱정 때문에 은혜와 감사를 잃어버린다면 참으로 빈곤하고 메마른 신자가 되어갈 것입니다. 돈이 있어야 웃고, 하는 일이 잘돼야 웃는 그런 웃음은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에게서는 그런 웃음 말고 세상 사람들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웃음, 주님 때문에 기분 좋은 웃음, 그런 웃음들이 보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일과는 상관없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든 주님은 죽지 않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계신다는 그 믿음 때문에 여유 있게 웃어 보일 수 있는 그것이 참으로 주님안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일 때문에 은혜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감정에 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없는 자, 주님을 모르는 자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입니다. 물론 주님을 믿는자는 감정도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의 감정이 믿음에 의해서 다스림 받는 것입니다. 내 감정대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움직여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신앙의 힘, 또는 신자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능력에 대한 것을 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능력을 원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고 누구든지 능력을 받은 자는 큰 힘을 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성령께서 능력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내가 그 능력을 소유한 자가 되었다는 의미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지금 많은 신자들이 능력을 이런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병을 고치는 능력이 주어졌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능력은 내가 개발했거나,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라고 말은 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 능력을 나에게 주었기 때문에 이제부터 그 능력은 내가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즉 능력을 자기 소유화하는 것입니다. 비록 성령께서 주신 능력이지만 나에게 주었기 때문에 내가 능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능력은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능력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고 어떤 물리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자의 능력은 단지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힘을 말합니다.
여러분,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것을 능력이라고 말하기가 좀 지나쳐 보입니까? 주님의 길을 가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능력이라는 말까지 쓰느냐는 생각이 듭니까? 하지만 주님의 길을 가는 것은 씨름판의 천하장사라고 할지라도, 돈많은 재벌이라고 할지라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길을 따르고 있는 것은 크나큰 능력 안에 있는 것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신자라면 능력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능력이 아니라 능력이 있으신 분이 내 안에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그분의 능력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주님의 능력 안에서는 못할 것이 없습니다. 이 말은 흔히 쓰는 '불가능이 없다'라는 말이나 '하면 된다'는 말과는 전혀 다릅니다. 불가능이 없다는 것이나 하면 된다는 말은 인간의 고집이고 오기에 불과합니다. 세상에 불가능은 있습니다. 오기, 고집 가지고도 하지 못할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중에서 인간의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고, 세상이 발전해서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고 해도 최후까지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세상에 없는 엄청난 능력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정작 그 능력 안에 있는 신자가 능력을 능력으로 여기지 않고 하찮은 것으로 여겨버리는 데 있습니다. 그 이유는 능력을 물리적인 힘이나 어떤 재주로 생각하는 버릇 때문입니다. 신자는 주님의 능력 안에서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은 주님의 뜻안에서 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주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신자된 우리가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그 능력으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도록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을 능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슨 일을 맡기면 '나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어서 못하겠다는 변명을 늘어놓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교회일이든 무슨 일이든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야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성공시켜야 합니다. 즉 결과가 중요한 세상이기 때문에 자기의 능력을 발휘해서 좋은 결과가 나타나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지만 신앙은 다릅니다. 신앙이란 주님을 믿는 것이고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신앙안에서의 일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일이건 모든 일에서 십자가 지신 주님을 따르는 모습이 보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집사 일을 하든 교사 일을 하든 마찬가지입니다. 집사를 맡음으로 교회를 위해서 위대한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사 일을 해서 주일학교가 부흥하도록 만들어라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집사로서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주님을 따르고 주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줘라는 것입니다. 또한 교사 일을 하면서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교사로서 주님을 따르는 모습을 보여줘라는 것입니다. '목사님, 주님을 따르는 그 모습도 보여줄 힘이 없는데요' 예, 맞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모습을 보여줄 재간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이 함께 하셔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능력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기도하십시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약한 자신의 모습을 고백하고 주님이 도우셔서 십자가의 길에서 주님을 따르는 그 모습이 나를 통해서 보여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능력 안에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에게서 이러한 능력이 점차 보여지지 않습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주님만을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능력있는 신자가 점차 희박해져 가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살아계신 주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이 죽으시고 나서 예수님의 제자였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요셉은 자기의 새무덤에 예수님을 장사했고,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단지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이들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믿었던 스승이 적들의 손에 의해서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죽어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모든 힘을 잃어버렸을 것이고, 소망도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단지 예수님의 장사나 잘 지내줌으로서 모든 것을 끝내고자 했습니다. 장사 지냈다는 것은 이젠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들이 평소에 주님이 하셨던 말씀, 즉 죽고 사흘만에 부활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들의 추억 속에 존재하는 분이 되어버렸습니다. 더 이상 의지할 수도, 힘이 될 수도 없는 주님입니다. 주님이 자기들을 지켜줄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셔서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는다면 왜 신앙에 힘이 없습니까? 주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다면 어떤 어려움 속에서 허둥대고 낙심하는 모습만 보여주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주님, 주님이 살아 계심을 믿습니다. 주님이 살아 계셔서 이 문제가 다 해결될 것으로 믿습니다'라고 기도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아는 신자가 주님이 살아 계심을 믿고 있다면 주님이 지금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떤 모습을 보이시기를 원하는가를 잘 알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실로 부활의 주님을 믿고 있는 신자라면 '내가 지금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주님을 믿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능력을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부활하신 능력의 주님 안에 살아가는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아예 생각지도 않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사흘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부활을 막아보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막아보고자 무덤을 파숫군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을 믿지도 않고 있던 세상, 부활을 막아보려고 애를 쓴 세상, 그 세상에 부활하신 몸으로 다시 나타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지 사흘만의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무덤에서 사흘을 기다리셨습니까? 십자가에 죽으시고 바로 부활하시면 안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무덤에서 계셨던 사흘의 기간은 세상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오히려 부활을 막으려고 했던 인간의 죄를 보여주는 기간입니다. 그 모든 것을 뒤엎어 버리고 부활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의 인간들의 모든 죄악을 정복하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부활의 주님이시고 능력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그 능력에 의해서 우리의 죄가 정복되어질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내 죄가 하나하나 주님에 의해서 정복되어지는 것입니다. 죄가 사라져 간다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으면서도 그것이 죄로 끝나버리지 않고 그 죄속에서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주님에 의해서 내 죄가 정복되어지고 다스려짐으로 인해서 이제는 죄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의 모습을 보이는 그런 신자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능력있는 신자입니다. 여러분 능력있는 신자입니까?
우리가 '나는 못한다' '나는 안된다' '나는 부족해서 할 수 없다'라는 말을 하는 것은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의 힘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바라보고 자신의 가능성을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흔히 말하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져라는 말이 아닙니다. 즉 '나는 못한다'는 생각 대신에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가져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못한다'는 것이나 '나는 할 수 있다' 는 것이나 둘다 동일하게 자신의 능력과 재능과 힘을 가지고 모든 일을 해보려는 사고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해보려고 하기 때문에 그러한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우리를 끌고가는 것입니다. 어디로 끌고갑니까? 주님이 지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힘을 내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 바리새인들은 부활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방지책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 인간의 믿음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는가를 보여주십니다. 부활을 막아보려는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부질없고 쓸데없는 일이었는가를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의 주님이 되시고 능력을 공급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힘이 없다는 것을 주님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주님을 따라갈 수 없고, 세상에서 조그마한 일을 가지고도 낙심하고 슬퍼하는 그런 인간임을 잘 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도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께 나아와 예배하는 것도 주님의 힘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지나 결단이 아니라 우리에게 함께 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입니다. 그것을 인정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그것만 가지고도 감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예배당에 나오고, 주를 믿고, 봉사하고, 헌금하는 모든 일들을 나의 믿음의 힘으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버리기 때문에 감사 대신에 자랑이 나오고, 겸손 대신에 교만이 나와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위대한 일을 해도 절대로 능력이라고 할 수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님은 살아계시는 주님입니까 아니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으로 끝나버린 주님입니까? 여러분들이 세상일에서 염려하고 걱정하며 한숨 쉬면서 살아간다면 주님은 여러분들에게는 죽어 계시는 분에 불과합니다.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주님입니다. 여러분은 단지 주님을 추모하고 있는 믿음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셔서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힘을 공급하시고 도우시는 주님을 믿으신다면 여러분은 어떤 일속에서도 걱정과 한숨보다는 주님의 능력을 바라보게 될 것이고, 그 능력으로 주님의 제자된 모습이 보여지기를 기도하며 살아가는 신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주님의 능력이 주어졌다면 여러분은 하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입니다. 우리가 기뻐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의 능력을 가지려고 애쓰지 말고, 세상의 능력으로 살려고 하지도 마십시오. 세상의 능력은 부활의 주님을 잊어버리도록 합니다. 하늘의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에 매여서 하늘의 소망은 희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능력이란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묵묵히 그리스도안에서 주님의 길을 가는 것이 능력입니다.
빌 4:13절에 보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있느니라"는 사도 바울의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자신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분명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고 합니다. 즉 주님 안에서입니다. 바울은 주님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합니까? 11절과 12절을 보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궁핍이나 풍부에서 항상 자족하는 비결을 배운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으로 인해서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천하다고 낙심하지 않고, 풍부하다고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능력입니다. 부활의 주님안에서 이러한 능력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불쾌한 부활(마 28:1-10) - 58강
지금 신자들은 대부분이 신앙생활을 자기가 해보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참된 신앙은 우리 힘으로 소유할 수 없고, 신앙의 삶 또한 우리 힘으로 되지 않는 일임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힘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뭔가 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들의 노력과 열심으로 구제를 하고 선교를 함으로써 그것이 주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리고 자신은 주님을 위해서 이만한 일을 하고 있으니까 괜찮은 신자가 아니냐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착각 속에 빠져서 살아가는 스스로 신자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가장 큰 착각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분량을 가지고 신앙의 척도를 삼기 때문에 뭔가 하면 할수록 자신의 신앙은 자라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고 이러한 착각이 커갈수록 '나는 죄인이다'는 고백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설사 '나는 죄인이다'는 고백을 한다고 할지라도 '나보다 일을 적게 한 사람보다는 덜 죄인이다'는 생각을 벗어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이들은 일을 더욱 많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원하게 됩니다. 좀더 많은 일을, 좀더 성과 있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능력을 주셔서 많은 일을 하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 내세울만한 자랑스런 일을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즉 능력을 구하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이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립니다. 부활은 천국을 우리의 능력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누구도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고, 단지 주님의 죽으심을 바라보면서 모든 소망과 힘을 다 잃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주님의 죽으심을 바라보면서 평소에 주님이 하셨던 부활에 대한 얘기를 기억하며 부활을 기다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당시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무엇을 원하셨겠습니까? 장사를 멋있게 지내주는 것을 원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을 장사지내는 것은 전혀 쓸데없는 일입니다. 3일 후에 부활하실 예수님을 장사지낸다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부활을 기다리는 것을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도망을 친 상태이고,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의 새무덤으로 예수님을 장사지냈습니다. 그리고 여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고만 있었습니다. 부활을 전혀 믿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이러한 인간들의 불신앙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을 가지고 주님을 섬겨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또 예수님을 위해서 일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겠다고 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자꾸 신앙의 능력이라는 것에 매력을 느끼게 됩니까? 그것은 나도 남들같이 많은 일을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돋보이는 인물이 되어보겠다는 욕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능력을 구해서 그 능력으로 전도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는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이지 능력을 구해서 내가 희생하고, 사랑하고, 주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것에는 희박한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능력은 희생할 줄 모르는 나를 희생하는 자 되게 하고, 사랑할 줄 모르는 나를 사랑하는 자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인간들의 종교적인 열심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종교적인 열심에 빠지면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을 또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열심에 빠진 자들은 자기에게 능력이 있기를 구합니다. 능력있는 자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이 따라올 수 없는 위대한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능력이 있는 신앙인인체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열심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의 모습이 이것과 다르다고 말할수 있습니까?
지금 교회는 종교 열심에 빠져있고, 교인들에게도 종교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들에게 주님의 부활은 결코 환영할 만한 일이 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부활이 아주 불쾌한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자신이 예수님을 죽이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세상에 의해서 죽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죽인 세상에 관심을 두고 있으면서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겠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기를 싫어합니다. 따라서 세상에 대하여 죽음을 요구하는 부활도 싫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소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죽음을 요구하는 부활이 불쾌할 수밖에 없고, 단지 몸이 죽어서 다시 산다는 그 부활만이 마음에 들뿐입니다. 부담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불쾌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진심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여러분에게 힘이요 소망입니까? 이것을 오늘 이시간에 확실히 하여야 합니다. 자칫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단지 인간의 종교성을 가지고 이해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종교성이 이해하는 부활이란 주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까 우리도 교회 다니고 예수님 믿으면 죽었다가 나중에 다시 사는 부활입니다. 전혀 부담감이 없는 부활입니다. 전혀 거부감이 없는 부활입니다. 이런 부활을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나중에 진짜 부활이 있든 없든 일단 죽었다가 산다는 것을 믿는다고 해봐야 손해될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현재 기독교의 부활입니다.
기독교가 부활을 말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그대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부활을 기독교라는 종교가 주장하는 교리의 한 일부분으로 이해할 뿐입니다. 교회도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엇이 주님의 부활인지는 전혀 관심도 없이 단지 죽으신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우리도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도 다시 산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일년에 한 차례, 교회가 정해놓은 부활절에만 전해질뿐입니다.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부활이라는 요행을 생각할 뿐입니다.
부활은 기독교라는 종교가 주장하는 교리가 아닙니다. 부활은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자가 누구냐에 대해서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의 부활에는 그 누구의 도움도 개입되지 못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진 일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인간들의 모든 신앙, 모든 힘, 모든 열심들을 다 부정해 버린 일입니다. 세상 인간의 종교성이나, 열심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 즉 자기에게 뭔가 불리해질 때 자기의 이익을 따라 가버립니다. 그리고 주님의 죽으심을 보고 그저 실망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이 우리들의 믿음과 열심을 가지고 뭔가 해보겠다고 나선다면 그 역시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의 신앙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활을 모르고 자기들의 믿음과 열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자기에게 불리한 상황에서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멀리 떨어져 버립니다. 또는 자기들이 어려울 때 아무 힘도 쓰지 못하는 주님에 대해서는 실망하고 낙심해 버립니다. 지금 우리가 뭔가 믿음의 열심이 있는 것 같고 뜨거움이 있는 것같이 느껴지는 것은 아직까지 예수님과 함께 죽는 십자가를 체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죽는 것을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신앙의 갈등도 없이 자기 열심을 가지고 뭐가 해보려고 이리저리 설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와 같이 자기 믿음과, 자기 열심을 포기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부활의 의미를 말한다면 과연 그들이 그 부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게 되겠습니까?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쾌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자기 열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번 멋있게 해보겠다고 단단히 결심하고 나선 사람들에게 부활은 자기 신앙, 자기 열심을 버리는 자기 포기가 있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할 때 그들에게 부활은 불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본문을 살피면서 과연 내가 주님의 부활을 믿어온 신자였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절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옵니다. 이들이 무덤을 찾아온 것은 부활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한때 자신들이 의지했던 예수님에 대한 정성으로 무덤을 관리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런 여인들에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부활을 알려준 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세계는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세상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나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소망하고 살기 싫습니다'는 고백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천사가 사는 그 세계를 사모하는 것이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의 세계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소망하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러한 사람들을 일컬어서 성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도입니까?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는 멀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세계가 여러분들의 희망이 되어야 하고 힘이 되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여러분에게 힘이 되고 소망이 된다면 그것은 주님의 부활의 세계를 믿지 않는 증거가 됩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그 나라를 바라보고 산다면, 그리고 그 믿음으로 모인 자들이 바로 우리 교회라면 우리가 교회에서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답을 내리기 전에 하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신자는 눈에 보이는 세상을 힘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말에는 동의하십니까?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지금 당장 이 모임에서 떠나셔야 합니다. '세상이 힘이다'는 사고방식은 십자가의 원수된 것이고, 곧 우리의 원수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힘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에 동의하신다면 일단은 십자가를 아는 우리의 형제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 있다고 하셔도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세상을 우리의 힘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말에는 동의한다고 해도 과연 그렇게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우리의 삶은 세상과 믿음 사이에서 이리저리 갈팡질팡하고 갈등하는 그런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힘으로 삼지 않고 주님만을 힘으로 삼고 산다는 것이 왠지 석연치 않고 뭔가 불안한 그런 마음까지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세상을 힘으로 삼는 사고방식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했고, 부활의 세계는 세상이 힘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힘으로 삼는 세계인데 나는 여전히 세상을 힘으로 삼는 옛사람의 모습이 보여지고 있음을 발견했다고 할 때 그 사람은 과연 무엇을 우선으로 삼겠습니까? 뭔가 주님을 위해서 일해보겠다는 생각보다는 '내가 이런 죄인인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여전히 죄속에 파묻혀 있는 죄인인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고민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히 주님의 도움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세상이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이 내 힘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나는 여전히 세상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악한 죄를 용서하시고 예수님의 그 보혈을 의지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힘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힘은 너무나 하찮은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죄인임을 깊이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있는 것을 내세우지 않고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죄인임을 아는 그 마음이 다른 지체를 사랑하도록 합니다. 그 사랑이 때로는 봉사로도 나타나고, 때로는 어려운 자와 나누는 구제로도 나타나고, 말씀을 듣고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에 말씀이 있는 자리를 사모하고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열심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세계를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때문에 이미 지금 부활의 세계를 살아가는 신자는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낙심하고 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활의 세계는 돈이 힘이 아니라 예수님이 힘이기 때문에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교인 수가 많고 적고 상관없이 주님을 아는 자가 모인다면 단 두명의 모임이라 할지라도 기쁨이 있는 모임이 됩니다. 교인수가 많다고 힘이 나고, 적다고 힘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종교성에 불과하지 결코 부활의 주님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돈을 원하는가, 예수님을 원하는가. 솔직한 심정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세상을 사는데 돈이 필요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당장 교회가 운영되는데도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있는 것만큼 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만큼만 쓰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들의 계획을 줄줄이 세워놓고는 이 계획은 선한 계획이니까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계획을 위한 기도이지 하나님의 계획을 위한 기도는 아닌 것입니다.
5,6절을 보면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말합니다. 여자들의 생각에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이지 부활하신 주님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주님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상식 속에서 예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그들이 찾은 곳은 무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상식 속에 계시지 않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결코 예수님을 우리의 상식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상식을 가지고 다가가면 그곳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발견한다면 부활의 주가 아니라 다른 예수가 있을 뿐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말들이 이해가 안된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종교 상식 안에 갇혀서 주님을 찾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종교 상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생각하지도 않고 단지 무덤을 관리하기 위해서 찾아간 여인들의 수준밖에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열심을 주장하는 것은 모든 종교에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차역에서 나무 막대기를 두드리며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두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때로는 아이를 업고서 우산을 쓰고 나무막대기를 두드리는 여인을 본적도 있습니다. 그들은 천리교입니다. 천리교만이 아니라 여호와증인은 어떻습니까? 대합실에서 누구에게나 접근해서 자기들의 교리를 전합니다. 여러분, 그들의 열정을 누가 따라가겠습니까? 또 바리새인들의 열정은 누가 따라가겠습니까? 하지만 그 열정이 주님을 죽였다는 것만 아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종교상식은 자신의 정성이고 자신의 열정입니다. 여인들이 죽어서 무덤에 있는 예수님을 찾아간 것도 예수님에 대한 하나의 열정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열정도 주님의 부활을 돕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그 열정으로 찾아간 무덤에는 주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미 부활하신 주님의 세계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자신의 종교열정으로 일하는 그것에 주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실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따로 있습니다.
7절에 보면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갈릴리를 중심으로 시작합니다. 갈릴리는 유대인으로부터 이방으로 취급되며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 곳입니다.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의 세계가 새롭게 시작되는 중심이 되는 것은 부활의 정신이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웅장한 예배당이 아니고, 인간들의 열정도 아니고, 자신을 낮고 천한 자로 인식하는 그 정신 속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죽음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나라안에 영원한 부활의 세계가 스며들었습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죽음에 매이지 않고 부활하신 주님을 알게 된 기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으로 일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는 것, 이것을 능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활의 주님을 믿는다면 죽어도 다시 산다는 믿음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 믿음은 세상 것에 매이지 않고, 세상 것이 힘이 아니고, 오직 주님을 힘으로 삼고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부활이 혹 불쾌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에게 기쁨으로 밀려옵니까?
예수님의 분부(마 28:16-20) - 59강
오늘 마지막 본문 20절에 보면 예수님은 부활 후에 만난 제자들에게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말씀을 하시는데 그 말씀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인가 분부하셨던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마태복음을 공부한 우리들을 향하신 분부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마태복음을 끝내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대하는 여러분들은 과연 예수님이 무엇을 분부하셨다고 생각됩니까? 여러분은 그동안 예수님에게서 어떤 분부를 들으셨습니까?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하신 많은 말씀들이 나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복잡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직 한가지 중심을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무서워하지 말고, 세상을 따르지 말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과연 우리가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믿을만한 분이십니까? 바로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마태복음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마태복음을 끝내면서 여러분들에게 남아 있어야 할 한가지는 '예수님은 과연 내 모든 것을 맡길만한 분이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여러분에게 살아있다면 여러분들은 그야말로 수지맞은 인생을 살게 되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내 모든 인생을 맡겨도 될만한 분이라는 것은 내가 예수님이란 분을 이리저리 재어보고 나서 나에게 손해가 없겠다는 판단 아래 내 모든 것을 맡긴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아실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내가 맡긴 내 인생을 이리저리 간섭해서 성공을 시켜줄 만한 능력있는 분이라는 계산 아래 내 인생을 맡기는 것도 아님을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인데 그 천국은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오직 주님만을 의지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것만이 하나님 나라로 인도되는 길임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눈에 뜨인 자는 항상 주님의 손에서 벗어날 새라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을 살피면서 주님을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라가는 길이 절대로 평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핍박을 받고 고통을 겪으시는 인생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천국 복음을 전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당시 자기들의 생각으로 자기 멋대로 성경을 이해하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에게는 인간의 생각과 전혀 다른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이해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이단으로 여겨졌습니다. 자기들의 종교를 해치는 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수없이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들의 손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전혀 양보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천국 복음은 오직 하나만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세상과의 결별입니다. 세상에서의 명예, 권력, 재물을 향한 욕심은 복음을 향한 눈을 멀어버리게 합니다. 천국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천국은 말하고 하나님도 말하는데 전혀 다른 천국, 다른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을 믿고 있고, 천국을 소망하고 있고, 열심히 주님을 따르고 있다고 착각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책망을 합니다.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고, 자기를 돋보이기 위한 신앙, 자신의 종교를 지키기 위한 신앙,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미련을 두고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복음을 외면해 버리는 신앙 아닌 신앙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조직과 힘을 동원해서 죄인으로 몰아 세워서 십자가에 달리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가신 길입니다. 그리고 성도인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여러분, 이 주님의 길이 우리가 가야할 길임을 인정하십니까? 내가 그 길을 가는 자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가 여러분의 마음속에서부터 기쁨으로 나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마태복음을 잘 들으신 것입니다.
믿음이란 오직 주님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주님 외에 다른 것에는 전혀 의미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에도 미련이 없으며, 재물에도 미련이 없으며, 세상의 성공에도 미련이 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천하에 찾아볼 수 없는 귀한 보물을 이미 소유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쓸데없는 것을 가지고 아옹다옹하지 않습니다. 산다는 것이 고통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살려주시는 대로 살아갈 뿐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유익되는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설사 당장 죽는다고 해도 그 죽음조차도 복으로, 은혜로 다가오게 됩니다. 남들같이 건강하지 못하고 병상에 누워지내는 신세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세상 사람같이 낙심하고 신세타령을 하지 않습니다. 천국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내어쫒김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당당하게 기쁨으로 그 자리를 물러 날 수 있습니다. 주님만이 힘이고 교회에 미련을 두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믿음 위에서 담대하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서의 실패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힘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세상에서 힘없는 자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자신에게 힘이 주어지기를 원합니다. 병이 들었다고 해도 낫고,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기도하면 해결되고, 닥칠 재앙도 하나님이 미리미리 막아주는 그런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정작 마태복음을 통해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오히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을 위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 것은 이방인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부자가 천국 가기는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합니다. 영생에 관심을 두고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에게는 모든 소유를 다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믿기를 주저주저합니다. 불안해합니다. 내 인생이 실패하지 않을까 조바심을 가지게 됩니다. 마태복음에서 제자들도 항상 그런 모습만을 보여줬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데 불안해하고 조바심을 가지는 모습만을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이 오늘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계속해서 아무 걱정 말고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합니다. 무조건 걱정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이유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승리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맨 처음 하신 일이 사단과의 싸움입니다. 맨처음 인간은 사단과의 싸움에서 실패했습니다. 당시 사단이 제공한 '하나님같이 된다'는 유혹에서 실패했습니다. 자기 성공을 보장하는 사단에게 자기를 맡겨버린 것입니다. 그 사단이 이번에는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을 보장합니다. 나에게 경배만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사단의 권세 아래 있는 세상과의 싸움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염려를 가져오고, 불안을 가져오고, 두려움을 가져오게 하는 세상과 싸우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누구와 어떻게 싸우시는지, 그리고 누가 승리하는지를 똑똑히 보고 제발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내편에 서서 살아가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가 곧 예수님의 모친이요 형제요 자매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신자가 주님 편에 서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사단의 사고방식과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큰짐이 되는 것은 세상이 곧 사단의 사고방식에 지배받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우리에게도 사단의 사고방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사고방식은 육신의 성공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떡을 위해서 살아가고,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서 일하고, 남을 위한 희생보다는 자기를 위한 삶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사단의 방식입니다. 내 한몸 잘되는 유혹에 빠져서 살아가는 것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과 싸운다는 것은 결국 자기 포기이며 세상에서 내 육신이 잘되는 것에 소망을 두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싸움조차도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배후에 계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무능력을 고백하고 조용히 예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당혹하게 한 것은 그토록 믿고 따랐던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손에 힘없이 못박혀 돌아가시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능력으로 그 난국을 헤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실망하고 낙심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부활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고 자기 갈길로 가고 만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조차도 이기신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을 끝내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예수님께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가 예수님께 있습니다. 세상은 사단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권력과 힘도 예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일을 조정하시고 있습니다. 사람의 죽고사는 모든 문제가 예수님의 손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지금 우리가 그분을 믿고 의지하고 있다면 더 이상 걱정될 일이 무엇이며 근심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단이 권세로서 우리를 붙들고 있을 때는 우리를 죄로 이끌어가고, 멸망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 였지만 이제 예수님께서 권세로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것은 죄가 아니라 의로, 멸망이 아니라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그런데 무엇이 불안하고, 무엇이 두렵습니까? 여러분의 배후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이 여러분의 배후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 분을 믿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것은 지금 교회에서 하고 있는 물세례의 의식을 베풀어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권세가 우리의 죄를 씻어주심을 보여주라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권세가 우리의 죄를 씻어주셨음을 보여줄 수 있습니까? 내가 주님의 권세로 죄씻음 받은 것 같이 남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용서는 단지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그냥 용납하고 넘어가 주는 그런 용서를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용서는 먼저 내 죄를 씻어주신 주님의 권세에 내가 굴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죄를 용서하신 주님의 권세에 굴복하는 것은 자신이 진심으로 죄인 됨을 알때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자기도 주님으로부터 죄용서 받아야 할 존재인데 어떻게 남의 죄를 따질 수가 있느냐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도 주님의 죄사함의 은혜 안에 거하고, 그 배후에는 주님의 권세가 있는 자로 대하게 됩니다. 이것이 죄 사하시는 주님의 권세를 가르치는 것이고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주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명령대로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부터 예수님의 권세아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도 예수님의 권세를 느끼지 못하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의 권세를 알려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된 자는 언제나 예수님의 권세를 느끼며 사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일이 예수님의 권세 아래 있음을 아는 신자만이 불안함과 두려움이 아니라 담대함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된 우리부터 살아가는 삶에서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똑같은 방식이 보여지고, 세상 사람과 똑같이 세상일 때문에 두려워하고 불안해한다면 누가 그런 모습을 보고 예수님의 권세를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제자된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신 것은 세상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세상 것은 모두 헛된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 매여 산다는 것은 곧 멸망을 자초하는 것임을 알아라고 하십니다. 세상은 절대로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세상을 통해서 얻을 수 있지만 만족은 얻지 못합니다. 만족이 없는 곳에는 기쁨도 없습니다. 비록 내가 원하는 것을 얻었다는 일순간의 기쁨은 있지만 계속되는 기쁨은 없습니다.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족을 누리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권세 아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을 예수님께 의지한다는 것만이 우리를 만족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권세는 저 멀리 밀쳐버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힘으로 자기 욕심 안에서 모든 일을 계획하고 이루어 보려고 하기 때문에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는 낙심하게 되고 욕심 때문에 염려하고 불안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아직도 예수님의 권세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세상의 힘을 통해서 자신의 욕심을 성취해 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마태복음을 마치면서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세상 것이 여러분을 살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통해서 행복을 누리고 싶어하고, 기쁨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 주님의 권세 아래 들어감으로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찾고 누리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세상을 이기셨고, 우리는 그 권세 아래로 부름을 입었습니다. 우리의 배후에는 주님의 권세가 있습니다.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마시고 주님의 권세 아래 있는 제자로서 세상을 살아가라는 것이 주님의 분부입니다.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여러분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날마다 승리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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