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복음서!!!

[스크랩] 요한복음 강해 1

하나님아들 2014. 11. 20. 00:04

 

 

 

 

 

 

 

 

요한복음 강해 1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목차>

 

1:1-5 생명과 빛
1:6-8 증거하로 온 자
1:9-13 하나님께로서 난 자
1:14-18 말씀이 육신 되어
1:19-28 나는 아니라
1:29-34 하나님의 어린양
1:35-42 무엇을 구하느냐
1:43-51 나다나엘
2:1-12 가나혼인잔치
2:13-22 예수님의 열심
3:1-8 거듭남
3:9-15 거듭남(2)
3:16-21 하나님의 사랑
3:22-30 요한의 기쁨
3:31-36 위로부터 오신 이
4:1-10 사마리아 여인에게
4:9-10 누구인줄 알았더면
4:11-18 생수
4:19-26 신령과 진정으로
4:27-38 예수님의 양식
4:39-42 말씀을 인하여
4:43-54 믿음없는 이유
5;1-9 베데스다의 병자
5:9-18 은혜와 율법
5:19-29 아버지와 아들
5:30-38 증거
5:39-47 성경과 그리스도
6:1-2 표적을 봄이러라

 

 

 

 

 

 

 

(1강) 1:1-5 생명과 빛


사람과 사람이 모여서 살아가는 것을 보면 참으로 무질서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치도 경제도 사업도 질서가 아닌 무질서 속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을 많이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의 기준을 두고 그 기준을 향해서 일관되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기준이 존재하고 서로 자기가 세운 기준이 맞다고 우기면서 자기의 기준을 따라오지 않으면 틀렸다고 주장합니다. 끊임없이 맞다 틀리다의 싸움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립니까? 누군가가 '이것이 맞다'라고 할 때 모든 사람이 '그래 이것이 맞다'하고 동의하겠습니까? 분명 어느 한쪽에서 '아니다 그게 아니라 이것이 맞다'라고 다른 답을 제시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가령 정치에서 야당이 하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면 여당이 하는 것이 옳습니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지방에 따라 다를 것이고 사람의 감정이나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각기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답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수많은 기준이 존재하는 것이 세상의 무질서라고 한다면, 질서란 하나의 기준이 존재하고 모든 사람이 하나의 기준을 따라 움직이고 살아가면 그것이 곧 최고의 질서입니다. 옳고 그름의 답도 항상 일관되고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하나의 답으로 통일되어 내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서의 나라를 살아가려고 한다면 하나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기준을 버리고 그 하나의 기준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질서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의 기준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태초란 천지창조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창세기 1:1절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똑같이 '태초'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 1:1절의 태초와 창 1:1절의 태초는 서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요 1:1절의 태초는 말씀의 존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주의 처음부터 이미 말씀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말씀의 존재에 처음이 있다는 것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말씀의 존재에 처음이 있다면 그 처음을 있게 한 또 다른 존재를 말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말씀 역시 창조되어진 것으로 얘기되어져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창 1:1절의 태초는 분명 세상의 시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곧 천지 만물은 분명 시작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시작된 시작입니다.

 

 

 

 

3절에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만물은 말씀에 의해서 지은바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에 의한 시작입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만물은 말씀에 의해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지음을 받았다면 분명 만물이 지어진 의도와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음 받은 이 세상에 세워진 단 하나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은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바로 세상이 지향해야 할 단 하나의 기준이며 이 기준을 따라 살아갈 때 그것이 곧 질서의 나라이며, 이 기준을 벗어난다면 질서의 나라가 무질서의 나라로 전락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세상은 바로 하나의 기준을 벗어난 무질서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말씀에 의해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말씀 아래 존재해야 합니다. 이것이 질서이며, 말씀을 벗어난다면 그것은 곧 무질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세상은 왜 말씀을 지향하고 살아가지 못합니까? 그 이유는 4,5절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것이 바로 세상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만물이 말씀에 의해 지음을 받았을 때 만물 안에는 생명이 있었습니다. 이 생명은 세상의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상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의 처음 상태였습니다. 생명이 있었기에 빛이 비취면 빛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지향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생명은 단지 오래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지향하고 살아가는 그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이 곧 생명이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상태가 곧 질서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삶의 모든 행동과 방향이 한분의 뜻과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면 그것처럼 제대로된 질서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세상은 그러한 상태를 잃어버렸습니다. 말씀 아래 존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존재하려고 하고, 하나님의 뜻과 기쁨과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목적이 오로지 자신의 뜻과 기쁨과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결국 기준이 자기 자신이 되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곧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기쁨을 위해서 선악과를 먹은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은 생명을 잃어 버렸습니다. 생명을 잃어버린 현상은 빛이 오되 빛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어두움입니다.

 

 

 

 

요한이 요한복음의 처음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어떤 상태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창조되어진 세상은 생명과 빛이 있는 세상이었는데, 그래서 빛을 깨닫는 세상이었는데, 그 생명을 잃어버리고 빛을 깨닫지 못하는 상태가 되버렸다는 것입니다. 즉 요한은 세상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를 언급하고 요한복음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두움이라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심으로 사실로 드러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말씀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세상은 예수님의 말씀을 대하고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입니다. 이것이 어두움의 모습입니다. 빛이 왔으되 빛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단지 세상은 어두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어두움을 드러내시는 것으로 끝나시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빛을 잃어버린 세상에 다시금 생명과 빛이 있는 나라를 창조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이 일을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세상 나라와 다른 점은 생명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신자라는 증거는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생명 되신 분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명이란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란 생명 되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생명이 주어진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곧 생명 되신 그리스도를 아는 믿음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빛이 오되 빛을 깨달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었는데 빛을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을 가진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생명이 있는 자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지향할 뿐입니다. 그리스도가 삶의 기준이며 그리스도가 원하는 것이 곧 내가 원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가 하고자 하는 것이 곧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되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질서의 나라입니다. 생명 되신 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찾으시고 주시고자 하는 것은 생명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해서 눈이 뜨이게 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주어진 참된 복이며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이 선물에 또 다른 것을 덤으로 얹어 주시지 않습니다. 이미 최고의 선물을 주셨기에 뭔가 보충해야 할 또 다른 선물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살아간다면 이미 최고의 복을 얻었음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하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신자라면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 외에 또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세상이 알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는 생명 되시고 빛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는데 또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담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선물인 생명을 담을 그릇이라는 사실입니다. 생명은 여러분의 인생에 담겨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인생의 하나하나가 생명이 보여지고 증거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우리의 것을 담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질서의 나라를 무질서의 나라로 바꿔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때 자기 백성에게 주실 것을 이미 결정하고 오셨습니다. 생명이 있는 나라가 곧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기쁨을 회복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하실 일은 오직 생명을 주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원하는 것을 따로 간직한 채 그리스도를 찾는다면 그것이 불신자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신자란 자기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 앞에서 '이것을 달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예수님이 주신 생명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신자의 할 일이란 예수님이 주신 생명에 감사하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 안에 생명이 있음으로 기뻐하셨다면 오늘날 역시 생명으로 기뻐하십니다. 즉 하나님이 신자된 자를 보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신자가 많은 일을 해서가 아니라 신자에게 있는 생명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그리스도로 인한 생명으로 감사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자신을 바라볼 때 돈 없는 자신을 보지 마십시오, 돈 없는 자신이 보일 때 여러분에게서 나올 것은 한숨이고 자신에 대한 실망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그것밖에 주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돈많은 자가 보일 것이고 그들이 부럽게만 느껴질 것입니다. 자신은 불행한데 그들은 참으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여겨질 뿐입니다.

 

 

 

 

자신을 볼 때 남들보다 없는 것을 보지 마시고 남들에게 없는 것이 주어진 자신의 복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두운 세상이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고 있고, 어두운 세상에 없는 생명이 자신에게 있음을 보십시오. 물론 이것은 생명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것인가를 알았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생명이 있는 자라면 생명의 귀함을 알 것입니다. 그럴 때 그는 세상에서의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늘에서의 자신의 모습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을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잃어버리고, 누리지를 못하고 살고 있다면 그것은 이방인들처럼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으로 염려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말하되 생명의 복됨을 마음에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시한부 인생입니다. 암에 걸리고 죽을병에 걸린 사람만이 시한부 인생이 아닙니다. 모든 인생이 시한부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죽든 인간은 죽습니다. 다만 시간의 차이일 뿐이며 그 시간의 차이라는 것은 극히 미미한 차이입니다. 영원이란 시간 앞에서 생각한다면 몇 십 년이란 순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시한부 인생에서 인생의 종말을 두고 생각한다면 소중한 것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늘의 삶으로 이어가게 하는 생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생명을 지금부터 소중히 여기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백성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서 구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피흘리시고 고난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받아 누리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구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날마다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구하십시오.

생명이 없는 세상은 어두움이며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최후에 오직 생명만을 남기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만 두시고 나머지는 모두 심판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두고 생각한다면 생명과 빛으로 산다는 것은 심판에서 건짐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심판에서 건짐 받은 증거가 곧 생명과 빛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신자된 우리가 세상에서 구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결국은 사라질 것들입니다. 물론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들이기는 하지만, 그 필요하다는 것은 단지 있으면 편리하다는 의미로 봐야 합니다. 돈이란 있으면 있을수록 사는 것을 편리하게 하고 편하게 하는 것이지 돈이 곧 생명이다는 것은 아닙니다. 권력 역시 있으면 있을수록 사람을 즐겁게 하고 쾌감을 누리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권력이 생명은 아닙니다. 돈과 권력이 그리스도를 알게 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이 오심으로 인해서 그리스도를 알게 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살아가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바로 복된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할 것은 오직 생명밖에 없는 것입니다. 생명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이 아닌 것에 마음을 두지 않도록 우리를 지킵니다. 그래서 생명이 있는 자는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피조물이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본래의 창조물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바로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본래의 창조물을 새롭게 만드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하시기 위해서 오셨는가는 명백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생명 되신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생명이 주어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어두움은 빛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데 빛을 보고 깨닫는다는 것은 그는 이미 어둠의 자식이 아니라 빛의 자녀라는 뜻입니다. 빛의 자녀로 산다는 것, 여기에 모든 마음을 두십시오. 어둠의 자식이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보다 더 큰복은 없습니다. 생명이 없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의 할 일입니다.

 

 

 

 

 

(2강) 1:6-8 증거하러 온자

 
사람은 하나님을 벗어나 살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만유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엡 4:5-6절에 보면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만유의 아버지로 일컫습니다.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신다고 말합니다. 만유를 통일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서 만유가 하나라는 것을 의미하는 뜻입니다.

 

 

 

 

만유란 세상의 모든 것을 포함한 말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만유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비록 스스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큰소리를 쳐도 그도 결국 만유 안의 한 일부일 뿐입니다. 따라서 만유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믿는 신자라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벗어나 살아갈 수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만유의 아버지라고 말할 때 결국 만유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안에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피조물다움이고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만유의 아버지라 말하고, 우리 역시 만유에 포함된 피조물이라고 말할 때 결국 우리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 안에서 찾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만유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서 태어남을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존재 이유를 하나님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합니다. 삶의 목적 역시 자기 자신에게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만유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존재하며 하나님을 위해 존재합니다. 만유 안에 사람으로 지음 받은 우리 역시 이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주인이 따로 존재하시고 그분의 뜻이 있었기에 우리가 숨을 쉬며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에 항상 마음을 두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유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입은 것은 오직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왜 사람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까? 다른 만유에 비해서 사람의 존재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다스리는데 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입어야 합니까? 세상을 다스리라는 것은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입은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자로 지음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생명이 사라져 버립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생명이 사라지면 사람은 다만 흙입니다. 이처럼 흙에 지나지 않은 인간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 그리스도로 인한 생명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서 잃어버린 생명을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다시 생명이 있는 자로 만드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다만 우리를 천국에 보내시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창조 때의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포기되어지지 않은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새로운 생명을 가진 자로 존재한다면 그 이유는 우리 자신의 행함이나 선함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6-8절)는 말씀은 하나님이 요한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서 보냄을 입은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단지 '태어났다'라고 말하기보다 '보냄을 입었다'라고 말한다면 우리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좀 더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냄을 입었다는 것은 보낸 분이 있다는 뜻이고, 보내신 분이 있다면 왜 보내셨는가를 묻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생일'이라는 것도 단지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파견한 날로 기념하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요한은 빛에 대해서 증거하라고 보냄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요한의 삶의 의미는 빛되시는 분을 증거 하는 것에 있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과연 요한에게만 국한된 것이겠습니까? 요한이 보냄을 입었다면 오늘 우리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무슨 이유로 무엇 때문에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는지는 요한의 존재 이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의 존재 이유가 빛되신 그리스도에게 있다면 우리 역시 존재 이유는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를 주셨다면 그 이유도 그리스도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이것을 주셨는가?'라는 물음에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도구로 주신 것이다'라는 답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주셨다는 것을 굳이 우리를 부요하게 하는 것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고난과 어려움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실 수도 있고 어려움에 빠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도 고난과 어려움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빛이란 어둠에 있는 자를 인도하는 인도자입니다. 따라서 어둠이란 길을 모르는 상태를 뜻합니다. 생명의 길을 모르는 것이 곧 어둠의 상태입니다. 따라서 빛에 대하여 증거한다는 것은 생명의 길이 무엇임을 증거 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된 우리가 세상에 보냄 받은 이유입니다.

 

 

 

 

부요함으로 산다고 해도 생명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 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주신 부요함에 빠져 산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돈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세상의 사고방식을 확인시켜 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부요하게 하신 것도 돈이 생명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생명임을 부요라는 환경에서 증거하라는 이유인 것입니다.

 

 

 

 

반대로 고난과 어려움이 주어진다면 그것도 역시 고난과 어려움이라는 환경에서 생명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에서 염려하고 낙심하고 절망한다면 그리스도의 생명 됨을 결코 증거 되지 못합니다.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찾는다면 그것 역시 그리스도가 생명 됨을 가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신자란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빛에 대하여 증거 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삼고 살아간다면 그 흔적은 삶에서 묻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하시면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이것이 사단과 예수님의 다른 점입니다. 사단에게 있어서 생명은 떡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 4:34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에게 양식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떡으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신자라면 신자에게서 증거 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참으로 부담이 되고 어려운 말이지만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우리의 양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삶이 빛되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떡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으로 전락한다면 결국 우리 역시 어둠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은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자라고 말합니다. 요한이 높임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요한은 이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가리켜서 장차 오실 자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요한은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입니다. 내 손가락을 보라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라고 증거한 사람이 요한이었습니다. 따라서 들을 귀가 있는 자라면 요한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요한이 가리키는 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빛에 대하여 증거 하는 자의 역할은 다만 빛을 제대로 가리키는 것뿐입니다. 빛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는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실망할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달을 제대로 가리키고 있지 못하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입니다. 내가 달을 제대로 가리키지 못할 때 결국 소경된 자가 소경을 인도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음을 주의하고 지금 우리가 빛에 대하여 증거 하는 역할, 즉 달을 제대로 가리키는 자로 살아가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증거자인 나를 높이려고 하지말고 사람들이 빛 되신 분을 바라보는 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진정한 증거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것으로 삶의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신자는 빛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역할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그리스도가 높아지는 것이지 우리가 높아지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말하고 하나님을 말하고 천국을 말하는 우리가 과연 무엇을 가리키기에 열심인가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 하나하나에서 나타나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부담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생명이 주어진 자로 살아가고, 세상에 보냄 받은 이유를 아는 신자라면 어둠에서 빛을 보게 될 것이고 빛을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신자에게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부담이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여기게 될 것이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제대로 증거하지 못하는 것으로 안타까워하며 살아갈 사람입니다.

 

 

 

 

신자란 하나님의 뜻에 순종되기 위해서 자신을 버린 사람입니다. 삶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위한 도구로 주어진 것입니다. 복을 받았다면 남을 위해서 주어진 복이며, 고생을 한다면 그것 역시 주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세상만을 보고 산다면 우리의 삶에서는 그리스도의 흔적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의 흔적들만 잔뜩 보이게 될 것입니다. 삶의 뒤를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에게서 남겨지는 흔적들이 과연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를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행동하고 말하는 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3강) 1:9-13 하나님께로서 난 자

 
누군가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 그것은 누가 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라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만을 하기에는 뭔가 꺼려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믿게 하신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신자가 전도를 할 필요가 없느냐?'는 질문을 받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또 본인 스스로 생각해도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라면 굳이 인간이 그리스도를 전하고 전도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라는 의구심이 남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하신다는 것과 인간이 해야 한다는 것을 같이 충족시키기 위해서 하는 말이 '주님이 인간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인간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이 말이야말로 주님이 일하시는 것과 인간이 일한다는 것이 같이 충족되는 만족할 만한 대답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와 인간 양쪽 다 서운함이 없는 적절한 대답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말을 잘하고 설득을 하면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이 하는 전도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믿음이 인간의 언어나 설득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일까요?

 

 

 

 

9-11절을 보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은 말씀에 의해서 지어진 바 되었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주인은 말씀이신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주인이 세상을 방문했을 때 세상은 주인을 알아보고 영접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주인이 오되 알지 못하고 영접치를 않았습니다. 주인을 알지 못하고 주인에게 복종치를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신 세상의 모습입니다.

 

 

 

 

주인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주인을 알아보지 못했겠습니까? 그리스도가 자신이 누구인가를 함구하셔서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깨닫지를 못한 것입니까?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신가를 사람들에게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세상에 오셨는가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귀신 들린 자로 취급을 했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참람한 말을 하는 불경스러운 자로 여겼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하고 자신을 직접 드러내셨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이 과연 우리가 찾아가서 예수님에 대해서 말을 잘한다고 해서 그 말에 의해 예수님을 영접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시 예수님은 말을 조리있게 못해서 사람들의 반발을 산 것입니까? 논리적으로 말을 못해서 유대인들의 분노를 사서 죽게 된 것입니까? 믿음과 사람의 말재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말하는 전도 역시도 사람을 믿게 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즉 전도를 '사람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12-13절을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서 나오는 말씀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게 되는 것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일이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만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저 사람을 전도해서 그리스도를 믿게 해야지'라는 사람의 뜻이 성취되어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을 자는 이미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선택되어져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어진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린 바가 있듯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되어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할 수 있는 말인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는 누가 하나님의 택한 자인가를 모르는 우리 입장에서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해야 할 일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자기 백성을 찾는 일이 곧 전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전도는 안믿는 자를 믿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찾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즉 전도가 자신의 욕심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전도가 자기 욕심이 되면 결국 내 교회로 출석하도록 하기 위한 전도가 될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의 일과는 전혀 무관한 전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로 하여금 전도하도록 하시는 것은, 이미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에게 믿는 자를 보내서 부르시기 위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택한 자가 아니라면 그 어떤 조리있고 설득력 있는 말을 한다고 해도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교회의 부흥을 위한 것도 아니고 사람의 재주와 연관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전도에 대한 바른 이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도했는데 안믿는다고 해서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전도의 결과는 하나님의 몫이지 우리의 몫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믿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지 우리의 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지금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그리스도를 선택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일이 성취됨으로서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믿음을 두고 자신을 자랑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혹 남들보다 좀 더 나아 보이는 믿음의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그것으로 다른 사람의 믿음을 판단하고 무시한다면 그것이 바로 믿음이 없는 모습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믿음의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믿음의 능력이지 우리의 능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믿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주인을 알아보고 영접을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지혜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난 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베풀어진 은총이며 능력이라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로 산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며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믿음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하고 살아갑니까? 여러분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며 살아가십니까? 오늘날 신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문제점이라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하고 항상 받고 싶은 것만 생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증거물입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곧 사탄의 종으로서 영원한 멸망에 처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운명이 믿음이 주어짐으로 뒤바뀌게 된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바 된 것입니다. 아무나 그리스도를 믿겠다는 말만하면 던져주는 믿음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에게만 선물로 주셔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큰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받은 것으로 감사하기보다는 받고 싶은 것이 주어지지 않은 것을 생각하며 섭섭해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애당초 예수를 영접할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알아보고 영접할 지혜와 깨달음이 있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놀라운 기적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하나님의 기적에 관심 없고 항상 다른 기적에만 마음을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전혀 기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믿음은 인간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가령 누군가에게 '예수 믿으라' 고 하자 '지금은 바빠서 안되고 나중에 믿겠다'고 했다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과연 바쁜 세상일일까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바쁜 일이 사라지고 한가해지면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바쁘다는 것 역시 그냥 예의상 말하는 핑계라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있어서 믿음의 방해물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하찮게 생각하고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한가해진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스스로 바꿀 수 있는 생각도 아닌 것입니다.

 

 

 

 

결국 그 사람이 믿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 중대하고 급한 일이라는 인식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스스로 믿음에 대해서 그러한 인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이 주어졌을 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믿음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기적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것이 인간의 의지라면 믿지 않는 것은 어떻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믿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교회를 나오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물론 마음만 먹으면 교회를 나오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은 마음만 먹으면 여러분의 마음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을 깨끗이 지울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는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증거밖에 안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에게 붙들린 사람입니다. 그 마음은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육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질 때 그 마음은 탄식을 합니다. 애통해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있는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연약함에 대해서 그리스도가 탄식하시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성도 역시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서 탄식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는 탄식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탄식이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기에 믿음에 의해서 되어지는 탄식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기쁘신 뜻을 알기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는 자신으로 인해서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고자 마음 먹는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마음은 이미 신자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고자 할 때 그 마음이 경고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며 두려워 하게 될 것입니다.

롬 8:39절에 보면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붙들었기 때문에 그 무엇으로도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를 끊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붙드신 이상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결정하고 하나님을 떠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에 의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혹 선물에 대해서 소홀히 여기는 것은 아닙니까? 신자의 신앙이 쉽게 흔들리는 것은 '믿는데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에게 천국을 보장해 주는 것이지 세상의 삶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믿음의 결과는 천국이지 이 세상의 풍성한 삶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믿음보다 더 가치있는 선물은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에 힘이 없다면 믿음보다 더 귀한 선물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스스로 확인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소망하며 살아가게 된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이며 은혜의 선물이며 신자가 자랑할 유일한 것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기적을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초대를 받은 사람입니다. 세상의 일이 끝나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자로 택함 받고 부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기적으로 살아가는 신자를 흔들자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방해할 자는 없습니다. 그 무엇도 여러분을 생명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권세가 없습니다. 이것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 신자의 힘이요 권세입니다. 날마다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은혜의 선물인 믿음에 감사하고 찬송하며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신자가 원해야 하는 삶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선물로 감사하고 찬송하는 삶이 바로 신자가 추구해야 하는 삶입니다.

 

 

 

 


(4강) 1:14-18 말씀이 육신되어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성육신'이라는 단어로 줄여서 말하기도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스러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들은 이 말씀을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으로 가볍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1절의 말씀대로 말씀은 하나님인데 왜 하나님이 육신으로 세상에 오셔야 했는가에 대해서부터 물으며 시작해야 할 말씀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셔야 했습니까? 이 세상에서 뭔가 하실 일이 있다면 그냥 하늘에서 모든 일을 하실 수는 없었던 것입니까?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말씀 하나만으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이루실 수는 없었던 것입니까? 만약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면 굳이 육신으로 오실 필요 없이 그냥 말씀으로만 우리를 구원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까? 단지 천국 보내는 것이 목적이라면 분명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오시는 일이 없이도 그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필히 말씀이 육신 되어 하나님이 세상에 오셔야 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구원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님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말씀, 즉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육신이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죄악을 담고 있는 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죄없으신 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육신이라고 해서 무조건 죄가 있는 몸이 아니라 아담의 혈통으로 태어난 육신이 죄있는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죄 없으신 몸입니다. 그냥 죄없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죄없으신 몸으로 사셨습니다. 결국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죄없으신 몸, 즉 참 사람으로 오셔서 참 사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세상에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그리스도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이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야 했던 이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으로 인해서 결국 세상에 사람은 많지만 참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 증명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사람은 많았지만 진실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로 인해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날 때부터 육신을 가지고 태어나는 우리 입장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장에서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린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고 하늘에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세상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별된 나라입니다. 전혀 다른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하늘은 영원한 생명이지만 세상은 한시적 생명입니다.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하늘을 버리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을 버린 것과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 예수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에 오셨습니까? 세상에 오셨어도 세상으로부터 환영을 받고 높임을 받으셨다면 그나마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빛이 오되 세상은 빛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아무도 영접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오심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말씀에 대한 순종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십니다. 그것으로 세상은 전혀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스스로 말씀에 순종한다는 사람들에게 반발을 사신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말씀에 순종하신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내 힘으로 말씀에 순종해 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곧 말씀입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입니다. 즉 '예수님=말씀=하나님'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이나 예수님의 마음이 같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과는 다른 예수님 자신의 마음을 가지고 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곧 예수님의 마음 되어서 사셨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순종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순종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 자기 마음으로 사신 것이고 그것이 순종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해하기 힘듭니까? 그렇다면 우리들의 경우를 예로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자들이 소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고 할 때 대개의 경우 내가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과 내 마음이 서로 분리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내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고 싶지 않은데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니까 할 수 없이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실천해 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순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만 맹목적인 신앙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분명히 하라는 명령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불신자에게 하는 명령이 아니라 신자에게 하는 명령입니다. 그럴 때 말씀은 지켜야 할 명령이 아니라 당연히 살아야 할 삶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즉 신자로서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산다면 말씀은 이미 명령이 아니라 당연히 살아야 할 삶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순종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이미 같은 마음이기에 예수님에게는 굳이 말씀에 순종한다는 의식이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만약 말씀대로 하고 싶은 마음을 가졌다면 그것은 내 마음이 아니라 곧 그리스도의 마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곧 하나님의 생명에 함께 함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자신의 일을 도와주기 위한 함께 하심으로 생각을 하지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생명에 함께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을 통해서 볼 때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된 존재이기 때문에 의 앞에서는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존재, 즉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기 위해서 필히 죄문제가 해결되어야 했습니다.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것이 이스라엘 안에 성막을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생명이 무엇으로 연결되어지는가를 성막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막에서는 제물의 피가 흘려집니다. 제물의 피로 인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성막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했습니다. 이처럼 구약에서 하나님의 성막에 충만했던 하나님의 영광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라는 성전에 충만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신자는 바로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안에서 이 모든 것을 보는 자를 말합니다. 제물의 피가 흘려짐으로서 하나님의 생명에 나아갈 수 있게 된 은혜와 진리를 보고 사는 자가 신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이 모든 영광과 은혜의 충만함을 그리고 진리가 무엇임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4절의 우리는 바로 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대한 아들의 순종으로 말미암은 영광을 보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독생자 그리스도의 순종을 영광으로 볼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순종하는 것을 하나님에 대해 영광으로 볼 수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아들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역시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16-17절을 보면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모든 것이 은혜라는 고백입니다. 은혜는 은혜를 받는 자의 어떤 행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은혜 받을만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베푸는 것은 은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은혜가 요구하는 것은 단지 은혜를 은혜로 받으라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은혜와 다릅니다. 율법은 받는자에게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즉 율법은 율법을 지켜야 하는 행위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복종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종하지 않으면 형벌을 내립니다. 이러한 율법의 요구에 개입된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고 죄인된 우리의 모든 것을 홀로 담당하신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다고 말하지만, 사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우리에게 은혜이시며 진리가 아니겠습니까?

 

 

 

 

신자가 그리스도에게서 보는 것은 스스로 비참함에 처하심으로 비참에 있던 우리를 건지신 은혜를 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하나님임을 보게 됩니다. 진리가 무엇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한 신자에게는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 비참함으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영광된 빛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리스도안에서 낮아진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역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봤습니까? 그들은 병고침을 봤습니다. 자신들의 이득을 본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는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지 못한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보고 사십니까? 낮아지신 예수님에게서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을 보고 계십니까? 독생자의 영광을 보셨습니까?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 진정 은혜와 진리로 보여지고 영광된 것으로 보여진다면, 우리는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이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이 영광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18절의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는 말씀을 보면 신자는 독생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를 봄으로서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산다고 했지만 결국 그들이 하나님을 위한 것은 자기들만의 종교적 행위로 그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기에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잘못됨을 범하고 있는지를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은혜와 진리를 보십니까? 그리고 독생자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세상이 은혜로 보지 않은 것이 은혜로 보이고 영광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영광으로 보여진다면 그분들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에게서 은혜와 진리를 볼 수 있기 바랍니다.

 

 

 

 

 

(5강) 1:19-28 나는 아니라


신자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란 말 그대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신자의 존재 이유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모든 것은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도구로 주어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 개인을 위한 인생이란 사실상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신자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자로 부름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증인이란 단지 삶의 일부를 그리스도를 전도하는 일에 사용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즉 시간을 내어서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증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증인으로 사는 것은 삶의 전부이지 결코 일부가 아닙니다. 이것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증인의 자리에서 증인으로 존재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증인의 증인다움은 자신을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자로 이해하는 것에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나에게 유익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인가?'를 물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나 개인을 전적으로 포기한 자에게서만 보여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에게는 참으로 힘든 고난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는 증인이라면 그렇게 사는 것이 내 삶의 본질이어야 한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인정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인정하는 증인으로서의 삶의 본질이 지금 현재 우리들의 삶을 고발하고 책망하며 지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앞에서 다만 증인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기 때문에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한다거나 기대해서는 안되는 것이 증인입니다. 신자는 증인으로서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할 일만 있을 뿐이지 증거했으니까 나는 높임을 받아야 한다거나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힘이나 능력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증인으로 보내시면서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즉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셨습니다. 그것이 믿음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비록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았다고 해도 그것은 주님의 은혜이지 우리의 능력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증인으로서 받아야 할 별개의 영광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를 도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증인은 증거해야 할 그리스도에게 모든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증인이 만약 자신에게 관심을 두게 되면 결국 증거한 일에 대한 영광을 기대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증거자로서의 참된 모습을 세례 요한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9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인 유대인들이 제사장과 레위인을 요한에게 보내어 요한이 누구인가를 알아오도록 지시합니다.

 

 

 

 

24절에 보면 이들은 바리새인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요한에게서 알고 싶은 것은 요한이 어떤 사람이기에 세례를 베푸느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세례는 죄씻음, 즉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의식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세례는 아무나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만한 권세가 있는 사람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세례를 준다는 소문을 듣자 요한이 어떤 권세를 가진자인가에 대해 궁금증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단순히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요한에게 사람을 보낸 것이라기 보다는 나름대로 요한에 대한 자신들의 의도가 있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만약 요한이 세례를 줄만한 권세가 있는 사람이라면 요한을 자기들 세력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의도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몰리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위치에 위기감을 느끼고 그런 의도를 가졌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요한에게 보냄 받은 사람들은 요한에게 '네가 그리스도냐?'라고 묻습니다. 본문에는 '그리스도냐?'라고 묻는 내용이 나와있지는 않지만 요한이 20절에서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대답한 것을 보면 그들이 먼저 '네가 그리스도냐?'라고 물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하자 두 번째로 '그러면 네가 엘리야냐?'라고 묻습니다.

 

 

 

 

이 물음은 말라기 3:1절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는 말씀과 4:5절의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는 말씀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언젠가는 위대한 엘리야가 다시 나타나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온 질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물음에도 역시 '아니라'고 답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의문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분명히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14절에 보면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고 말씀을 하고, 17:10-14절에서도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그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오리라 한 엘리야로 말씀을 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나는 엘리야가 아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시겠다고 하신 엘리야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었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요한이 겸손해서 자신을 감히 엘리야라고 말할 수가 없어서 아니라고 한것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요한이 당시에는 자신이 곧 오리라고 한 엘리야로 보냄 받은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까? 사실 우리가 어떤 추측을 해도 본문에서 그 사실을 밝히지 않은 이상 정확한 답은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추측을 한다고 해도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의 '아니라'고 한 답을 기록하는 것에 중요성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단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상황에서 요한에게 '오리라고 한 엘리야' 로서의 역할이 있음을 언급하는 것은 '소리'(23절)로서의 역할을 가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는 비록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언급을 하셨지만 요한 자체가 엘리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한을 엘리야의 역할로 사용을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요한의 편에서 자신을 엘리야로 광고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요한을 엘리야로 사용을 하신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세례 요한이 '내가 엘리야다'라고 자신을 증거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자신이 엘리야로 보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그리스도 앞에서 요한은 다만 '소리'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목사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란 하나님이 말씀을 전하는 자로 쓰시고 있다는 것뿐이지 목사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목사임을 증거하고 내세울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증인이요, 그리스도의 종으로만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실제 엘리야가 올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 그들 앞에서 '내가 엘리야다'라고 답을 한다면 그들은 요한을 실제 하늘로 간 엘리야로 이해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가 아니다'고 답한 요한에게서 우리는 예수님이 요한을 누구라고 말씀하셨는가를 요한이 알았든 몰랐든 상관없이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요 다만 '소리'라고 말하고 있는 그 고백에 마음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아니라'고 한 요한의 거부가 곧 오늘 우리들의 거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에게 보냄을 받은 사람들은 세 번째로 선지자냐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 역시 신 18:15,18절에 하나님이 언젠가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시라는 약속을 잘못 이해하고 믿어온 사람들의 질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역시 이 질문에 대해서도 '아니라'는 짧은 답을 할 뿐입니다.

 

 

 

 

여기서 참고로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엘리야 또는 선지자로 이해를 했느냐는 것입니다(마 16:14). 그것은 세례 요한에 대한 시각과 같은 시각으로 예수님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메시야라면, 엘리야나 선지자가 온다면 상상도 못한 큰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올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사람의 겉을 보고 판단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보낸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요한에게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돌아가서 요한이 누구인가를 말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밝히기를 요구한 것입니다.

 

 

 

 

어찌 보면 '너는 ∼이냐?'라는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하는 것은 쉬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너는 누구냐?'라고 물을 때 '나는 ∼이다'라고 답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존재성에 대해서 명확한 이해를 하고 있지 않는다면 답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직책이나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자신의 존재를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목사가 '나는 목사다' '나는 모 교회 담임 목사다'라는 식의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사람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리스도 앞에서 누구인가를 염두에 두고 산 사람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목사가 그리스도 앞에서 목사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어라고 답해야 합니까? 여러분이 사회에서 어떤 직책과 직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 앞에서의 여러분 자신의 모습은 아닙니다.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십시오. 그리고 나는 나를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는지 그 답을 요한의 답에서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3절에 보면 요한은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고 답합니다. '너는 ∼이냐'라는 질문에 '아니라'고 답했던 요한은 자신에게 어떤 중요성도 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요한 자신은 다만 '소리'라고 말할 뿐입니다. 바로 이러한 요한의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면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시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내 자신에 대해서 중요성을 두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증인의 바른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요한은 자신을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봅니다. 주의 길을 곧게 한다는 것은 오실 주가 누구인가를 바르게 증거하는 일을 두고 말합니다. 그런데 소리라는 것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전혀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소리에 지나지 않는 나를 보지말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를 보라는 것입니다.

 

 

 

 

소리란 내는 자가 있기에 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소리는 소리를 내는 자를 보게 하는 것이지 소리를 통해서 소리를 확인하고 소리를 보는 것은 아닙니다. 즉 소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은 자신을 철저히 그리스도 때문에 존재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자신은 중요하지 않고 자신은 할 일을 하고 사라지는 존재일 뿐 자신을 통해서 세상에 증거되고 드러나야 하는 분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세례 요한이 이러한 답을 할 때는 예수님이 아직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신 때입니다. 그렇다면 '광야에서 외치는 자'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바로 요한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란 결국 '나는 나의 소리다'라는 뜻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요한의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요한의 외침이 요한의 안에서 외치는 그리스도의 외침이라면 우린 세례 요한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요한의 외침은 요한 자신의 말이 아니라 요한의 안에서 외치는 주님의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소리일 뿐이었습니다. 외치는 분은 그리스도지 자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 2:20절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산 것이 아니라 요한의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요한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부디 요한의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해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요한에게 그러하셨듯이 여러분 자신 역시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고 내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며 나는 그분의 소리일 뿐이라는 신앙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요한의 말에 '그렇다면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세례는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한 의식적인 행위입니다. 그런 세례를 아무런 권세도 없는 요한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요한은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26-27절)고 말합니다.

 

 

 

 

세례 요한은 모든 면에서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자로만 머무르기를 원합니다. 자신이 주는 세례조차 죄를 용서할 수 없는 세례로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자신이 세례를 주는 것을 특별하게 바라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요한의 세례 역시 오실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위한 도구이기 때문에 요한은 자신과 자신의 세례는 앞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요한의 물세례는 그리스도안에서만 그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을 뒤에 오시는 분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고 말함으로서 철저하게 그리스도에게 종속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종으로 존재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두 종류의 사람을 발견합니다. 하나는 바리새인, 즉 사람이 보낸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보낸 사람입니다. 사람이 보낸 사람들은 오직 사람만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만 관심을 두고 그가 어떤 자인가를 아는 것에 급급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보낸 사람, 즉 세례 요한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요한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를 앞에 내세우는 것에 모든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나가 아니요 그리스도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힘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증거자입니다. 증거자가 보이는 것은 그리스도지 증거하는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증인으로 산다고 할 때 우리의 시험은 항상 그리스도가 아닌 나 자신을 보이고 높이는데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세운 신자들의 모임입니다. 따라서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라면 당연히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힘을 써야합니다. 만약 교회가 사람이 중심이 되고 사람이 증거되고 사람이 높여진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의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것이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닌 사람의 교회로 전락한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에게서 사람을 보지 마십시오, 만약 누군가가 믿음으로 산다해도 그 사람을 보지 마시고, 그 사람 안에서 일하시고 행동하시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드신 그리스도를 찬양하시고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교회이며 참된 증인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나와 함께 하시고 내 안에서 외치시는 그리스도의 소리일 뿐입니다. 따라서 외치는 자는 다만 외쳐지는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면 됩니다. '내가 외쳤으니까 너보다 나은 사람이 아니냐'라는 생각은 스스로 증인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외쳤다고 해서 증인이 아니라 모든 삶에서 그리스도가 보여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니다'는 요한의 말이 곧 우리의 말이 되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우리에 대해서 관심을 두기보다는 무엇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것인지에 더욱 깊은 마음을 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6강) 1:29-34 하나님의 어린양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알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점검해보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가 맞다는 것입니다. 또 자신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극히 소홀한 생각을 가지는 반면에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강한 집착을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앎은 결국 잘못된 믿음으로 나아가게 할 뿐입니다. 잘못된 앎에서 참된 믿음의 모습이 보여질리 없습니다. 참된 믿음은 오직 참된 앎에서 증거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내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앎이 과연 참된 것인가를 점검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앎에 있어서 그 범위가 매우 좁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누구냐라고 물을 때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구세주' '독생자' 등등 몇 가지의 답만 나열하면 되는 정도로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답들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단지 그리스도에 대한 상식에 머무를 뿐 앎이 그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자신이 아는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가령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분임을 안다면 그는 먼저 자신의 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야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피흘리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감사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진심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증거는 사람을 대하는 것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자신의 허물을 안다면 그는 자기 의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앞에서는 죄인이라고 말하면서 누군가를 대했을 때는 그 사람보다 더 나은 자로 있고 싶어한다면 그가 과연 진심으로 자신의 허물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자신이 죄인임을 마음깊이 인정하지 못하면서 죄를 대신해 죽으신 그리스도라고 말한다면 말은 맞지만 다만 기독교인의 상식에서 나온 말로 그쳐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앎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는 '내가 곧 죄인이다'는 것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안다면 그 앎은 여러분의 마음과 삶을 변화시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앎이 결코 지식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그리스도에 관심이 있습니까? 요한의 말처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에게 관심이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세상살이를 도와주는 그리스도에 관심이 있습니까? 인간의 본성으로 따진다면 당연히 우리 인생을 도와주는 그리스도가 더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에 더 관심이 있고 그분이 우리의 마음에 채워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우리가 죄로 인해서 죽어야 할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결코 우리의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에게 마음이 갈 수 없습니다. 다만 상식에 머무르고 있는 그리스도일 뿐입니다.

 

 

 

 

26,27절에 보면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자신의 물세례를 언급하면서 물로 세례를 주는 자신보다 뒤에 오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에게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물세례는 인간이 죄로 인해서 죽어야 할 자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은 죄인임을 고백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물세례가 뒤에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고 성령은 우리를 죽이고 살리는 일을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곧 뒤에 오실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물로 세례를 베풀고 나서 그리스도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죄로 인해서 죽어야 할 자신의 실체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죄와 죄의 결과를 보지 못한다면 그에게 예수의 겉모습은 보일지 언정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그리스도는 결코 보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부각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보면서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오셔야 할 이유가 바로 자신 때문임을 아는 것이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아본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죽음의 자리에서만이 어린양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죽음을 해결해줄 유일한 통로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참으로 귀한 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라 하면서 과연 우리 인생에 그리스도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얼마나 큰가를 생각해본다면 참으로 부끄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인생에 개입되어 있는 분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밖으로 밀쳐 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밖으로 밀쳐내어 있다가 필요할 때 개입하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편리한 대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과연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비록 그가 그리스도는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신 분이라고 말을 한다고 해도 그 앎을 참된 앎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 앎이 참된 것이라면 분명 그는 자신을 죽어야 할 인생으로 볼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어린양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나의 생명'임을 진심으로 마음 깊이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다만 그리스도를 믿을 것만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느냐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중요성을 두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인들로 하여금 잘못된 신앙의 길을 가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되 나의 삶에 도움이 되는 그리스도로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삶에 도움이 되고 보탬이 되어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어주기 위해서 오셨다면 세례 요한은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말했겠습니까? 차라리 '보라 세상의 인생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소개는 듣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 낼만한 말이 아닙니다. 죄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은 별 의미가 없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어린양은 자기 인생에 덮여 있는 죄로 인한 죽음이라는 그림자를 발견한 자에게만 그 그림자를 걷어주실 구원자로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죄를 보지 않고 자기 인생에 덮여 있는 죽음의 실체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기 때문에 죄를 짊어지신 그리스도에게 관심이 없고 대신 인생을 도와주는 그리스도 아닌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31절에 보면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대로 하면 요한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자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32절에 보면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사람들만큼이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던 요한이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은 성령이 그리스도에게 내려와 그 위에 머물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알게된 요한의 지식은 육체적인 지식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알게 된 지혜였다는 것입니다. 즉 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 위로부터 요한에게 계시되었다는 것입니다.

 

 

 

 

33절에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라는 말씀에서도 이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내려서 머무는 자가 곧 성령으로 세례 주는 자, 다시 말해서 우리를 죽이고 다시 살리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예수님에게 내리신 것은 단지 이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성령께서 예수님으로 하고자 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하면 큰 능력을 받은 것으로 오해를 합니다. 보통 인간과는 다른 능력을 소유하는 것이 성령 세례인 것으로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하긴 성령을 무슨 큰 능력을 부여하는 분으로 오해를 하고 있으니 성령을 받았다는 성령 세례를 그렇게 오해를 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성령이 내리신 것이 우리가 상상하는 큰 능력을 행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예수님에게 성령이 내리신 것은 앞으로 예수님의 행적은 성령에 의해서 되어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고,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성령의 일이라면 오늘날도 성령은 자기 백성을 예수님과 같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길을 가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요한은 성령이 내리신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성령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성령 세례를 주신 이유는 신비한 능력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곧 성령을 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은 인간이 하는 일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했다면 그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해서 성령에 붙들린 자로 사는 것입니다. 요한의 물세례는 인간은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세례를 받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자신의 물세례를 보지말고 자기 뒤에 오셔서 성령으로 세례 주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오직 성령세례를 통해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 그리스도라면 죽어야 할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로만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자신을 살리신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구경만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증인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는 필히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에게서 어린양이 지고 있는 세상 죄가 누구의 죄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와 상관없는 죄가 아니라 바로 내 죄를 짊어지고 가셨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바로 세상 죄에 해당되는 사람이고, 그 죄를 지고 가신 분이 그리스도임을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은혜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진정한 신자이며 그리스도를 아는 자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생명이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안다면 그 사람의 삶은 자연히 그리스도가 중심이 될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분, 나에게 참으로 소중한 분이라면 그 분을 중심으로 살아가지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살펴봅시다.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지만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살아가는지 생각해 봅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혹시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해서 소홀했으며 죄 가운데 죽어야 할 비참이 나와 관계가 없는 일처럼 여기고 살지 않았는가 생각해 봅시다. 주님이 지고 가신 세상 죄에 해당된 자가 바로 내 자신임을 보지 못할 때 어린양은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소중함의 가치도 없는 다만 이름만의 그리스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7강) 1:35-42 무엇을 구하느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소망과 욕망을 혼동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욕망에 불과한 것을 소망으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 욕망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을 들어주시는 분이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의 욕망을 들어주시는 하나님보다는 소망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뭔가 옳은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소망이란 하나님이 주시고자 약속하신 것을 마음에 소원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 소망의 실체인 것입니다. 반면에 욕망은 하나님이 약속하지 않고 내 쪽에서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한 집착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욕망은 성취되지 않았을 때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낙심하고 절망을 하게 합니다. 설사 욕망이 성취되었다고 해도 그 성취는 인간으로 하여금 또 다른 욕망으로 나아가도록 만들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시는 분이라고 오해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참된 소망은 때로 넘어지고 낙심하고 좌절하는 환경 속에서도 삶의 목표를 잃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힘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참된 소망은 세상에 대한 소망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대한 것이기에 세상에서 넘어지고 좌절할 일이 있다 해도 참된 것이 무엇이며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잃지 않게 하기 때문에 힘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소망이 이루어지느냐 이루어지지 않느냐가 아니라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일의 성패가 중요하고 무엇이든 원하는 것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굴뚝같겠지만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두고 생각할 때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내가 과연 무엇을 원하고 있느냐?'가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를 먼저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소망과 욕망을 혼동하고 살아가는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에서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것은 바른 신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본문 38절에 보면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고 말씀합니다.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서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길을 가시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자 요한은 제자들에게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다'고 말합니다. 요한의 증거를 듣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요한의 제자들을 향해서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누구를 구하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에 주의를 기울어야 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증거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사실 '무엇을 구하느냐?' 라는 질문은 어울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당시 상황에 맞는 질문을 한다면 '무엇'이 아니라 '누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누구를 좇느냐?'가 죄를 지고 가신 어린양을 좇는 제자들에게 맞는 질문이 아니겠습니까? 누구를 구하느냐라는 질문에 '그리스도를 구합니다'는 답을 하는 것이 상황과 맞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누구'가 아닌 '무엇'은 그리스도말고 그리스도에게서 구하는 다른 것이 있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그 마음에 다른 의도가 들어 있음을 아시고 그것을 드러내시는 질문으로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제자들의 답변을 보겠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어떤 답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신 그리스도라면 그분에게서 구할 것은 죄 사함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답변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질문과 전혀 상관이 없는 답을 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물었으면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답하는 것이 옳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가 어디 계시는가를 되묻는 것입니다.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어린양이 아닌 선생, 즉 뭔가 가르침을 배울만한 학식이 있는 스승으로 여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그들이 예수님에게 어디 계시는가 묻는 것은 지금 예수님이 어디 계시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기거하는 곳이 어디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찾아서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의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으로 증거하는 것은 모든 문제의 해결은 오직 죄를 해결하시는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죄로 인해서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도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생명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필히 죄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생명을 잃어버린 인간의 상태를 가리켜서 비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헐벗고 굶주리고 살아가는 것을 가리켜서 비참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영원한 고통에서 사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영원한 고통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없고 다만 세상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자로 살아가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생명에서 멀어진 인간이 생명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증거물들인 것입니다.

 

 

 

 

죄로 인해서 영원한 고통에서 살아가게 된 인간의 실체를 발견한 사람이라면 영원한 고통에서 건져내시는 능력이 있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원한 고통에서 건짐 받는 것이 어린양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것 외에는 없음을 안다면 그에게 있어서 참된 복이 생명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생명을 하늘의 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복의 근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로 인한 영원한 고통을 아는 자라면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그리스도가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무어라고 답하는 것이 정상입니까? 아니 어쩌면 진심으로 인간의 고통과 비참함을 알고 주님을 따르는 자였다면 주님은 '무엇'이 아니라 '누구를 구하느냐?' 라고 물으셨을지도 모릅니다.

 

 

 

 

죄의 결과인 죽음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생각한다면 그리스도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보배로우신 분입니다. 이러한 보배로우신 분 앞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 앞에서 육신의 편함을 위해서 돈을 구한다거나 세상일이 잘되게 해달라는 요청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누구든 그러한 구함을 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죄를 보지 않고, 주님이 지고 가시는 죄도 보지 않고, 주님이 지신 십자가도 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만 자신만을 보고 그리스도만을 외치며 찾을 뿐입니다. 즉 마음에는 그리스도가 없으면서도 현재의 내 삶을 위해서 주를 부르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이루어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이런 식으로 기도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주실 것을 믿는다고 외칩니다. 뭐든지 자기 생각대로이고 자신의 마음대로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없고, 온통 내쪽에서 뭔가를 만들어서 예수님에게 들이미는 식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바란 것은 주께서 영광 받으실 때 '하나는 주의 오른편에 하나는 주의 왼편에' 앉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영광은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의 십자가는 보지 않고 자신들이 누릴 영광에만 관심을 두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똑같은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막 10:38)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의 잔과 죽어 다시 사는 세례를 모르는 너희들이 어찌 자기들이 바라고 구하는 것이 무엇인줄 알겠느냐? 는 것입니다.

 

 

 

 

이 얘기 다음에 나오는 것이 소경 바디매오가 눈을 뜨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소경 바디매오를 불러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소경은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소경을 향해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고 하십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자기 영광을 구하는 제자들이나 자신의 눈이 뜨이기를 바라는 소경이나 모두가 자신을 위해서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소경이 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소경을 내세워서 제자들이 지금 진심으로 구해야 할 바가 무엇인가를 모른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모른다면 그것은 그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모른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자신의 실체를 보지 못한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지적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반면에 소경은 자신이 소경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보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즉 소경이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소경임을 알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보기를 원한다는 그 구함이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길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소경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소경임을 몰랐기 때문에 지금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이 보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영광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무엇을 구하느냐고 묻자 다만 선생인 예수님에게서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제자들은 자신들이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는 소경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디 계십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선생인 그리스도에게서 무엇인가 배울 것이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자기 스승인 요한과 예수님을 비교하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한번 배워보자는 것이고 들어서 배울만하면 예수님을 인정하겠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눈입니다. 요한의 말처럼 그리스도에게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의 죄를 보고 주님을 찾는 신자임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본다면 그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보게 되는 것이지 세상에서의 자기 영광을 주님에게 구하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보는 신자라면 주께서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진심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지 않기를 구할 것입니다. 죄인으로서 생명 되신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진다는 것 자체가 멸망을 의미하기 때문에 자연히 그의 소원은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39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 시쯤 되었더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어디 계시는가를 묻는 제자들의 의도를 아시고 '와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거하게 되고 그 때가 제 십시쯤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 십시가 무슨 뜻이냐'보다는 왜 시간을 말하고 있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인생의 변화가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몇 시에 변화되었느냐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한 것이 바로 그들의 인생의 변화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시간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두고 우리가 거듭나거나 구원을 얻는 시간을 생각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거한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들의 인생의 변화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좇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나 삶에는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은 결코 그리스도를 좇는 것이 아니라 뭔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쫓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서 예수님은 뒤돌아보시고 '무엇을 구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무엇을 구하십니까? 마음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속마음을 한번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좇는지 아니면 자기 영광을 구하면 들어줄 그리스도를 좇는지, 그것도 아니면 그리스도든 예수든 전혀 관심없이 다만 좇는척하고 믿는 척 할 뿐인지 우리가 스스로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의 길에 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죄의 결과가 사망이며 비참임을 알고 있다면 인생에서 최대로 중요한 것은 우리를 사망과 비참에서 구출하시는 그리스도인데,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마음을 두지 않고 산다면 그것은 자신의 사망과 비참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는 관심 밖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의 불의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를 사망에서 구출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그리스도를 보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사망과 비참함의 자리에서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럴 때 우리가 진심으로 구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8강) 1:43-51 나다나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에게 부름을 받은 제자들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에게 병을 고치기 위해서 찾아왔던 많은 군중들, 그리고 예수님의 행동과 가르침에 대해서 반발을 하고 시비 걸기를 끊이지 않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신 후에는 더 이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거리가 먼 얘기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육신으로 직접 만났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남기신 말씀에서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의 만남은 예수님이 하늘에 가신 이후에도 계속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오직 그분의 말씀 안에서만 참된 만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그분의 메시야 됨을 발견하고 그분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죄인된 우리를 하나님나라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분임을 발견하는 것이 곧 참된 만남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다만 육신으로만 대했다면 그것은 예수를 만난 것이지 결코 메시야를 만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메시야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메시야이며 그리스도이신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이지 예수님의 육신을 대했다고 해서 깨달아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육신으로 존재하시든 아니든 상관없이 말씀이 존재하신다면 우리는 말씀으로 인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고 그분만이 메시야이심을 능히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꿈에서라도 예수님을 보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꿈에서라도 예수님의 모습을 대하게 되면 뭔가 자신에게 신비한 힘이 주어질 것 같은 착각에서 그러한 환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이시간 예수님이 육신으로서 여러분 앞에 나타나신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육신에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몸을 바라본다고 해서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이 예수님의 육신을 통해서 증거 되는 것입니까? 예수가 메시야이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예수님의 육신이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이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말씀에서 예수가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시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메시야이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오신 그분의 모습이 어땠는가는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이 생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리스도라는 분을 육신으로 만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그리스도 되심을 발견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난 내용입니다. 43절에 보면 예수님이 빌립을 만나서 '나를 좇으라'고 하십니다. 빌립은 그리스도를 좇게 되고,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전하게 됩니다.

 

 

 

 

45절에 보면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말합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입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자신이 만난 그분이 곧 모세가 율법에 기록한 그이, 즉 메시야임을 말합니다. 또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 즉 메시야를 우리가 만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빌립의 말에 대한 나다나엘은 반응은 어땠습니까? 나다나엘의 반응은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였습니다. 나사렛이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던 동네였습니다. 나사렛이란 동네는 아주 작은 동네로서 빈곤한 사람들과 이방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습니다. 즉 천대와 무시를 받는 작은 동네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목메어 기다리는 메시야가 그런 동네 출신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나다나엘의 반응은 일반 유대인들처럼 나사렛 출신인 예수에 대해서 빈정대고 경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가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거부하는 나다나엘에 대해서 빌립은 '와보라'고 말합니다. 즉 예수의 출신을 생각하지 말고 반드시 와서 스스로 그리스도를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믿음은 그리스도를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보지 않고 다만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거부하지 말고 '와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대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라는 의도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믿음은 그리스도를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말도 성립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오늘날 그리스도를 대할 수 없는 우리들의 믿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보라'는 것은 다만 그리스도를 만나보면 생각이 바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그분의 말씀을 들으라는 의미로 봐야 합니다. 즉 빌립은 나다나엘이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그분이 누군가를 알기를 바랬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나다나엘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47절에 보면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가리켜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간사하다는 것은 자신의 유익을 얻기 위해서 상대방의 환심을 사려고 위선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나다나엘의 마음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위선적인 행동을 하는 마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참 이스라엘의 마음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다나엘은 분명 빌립이 예수님에 대해서 한 말을 듣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며 노골적으로 예수님의 출신을 거론하면서 무시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가 예수님에게서 참 이스라엘이요, 그 속에 간사함이 없다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우린 먼저 나다나엘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즉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하신 말씀은 나다나엘 한 개인을 평가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나다나엘을 내세워서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 있으신지입니다. 저는 후자가 더 타당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에게 참된 이스라엘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나다나엘을 내세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다나엘에게 참 이스라엘다운 모습이 전혀 없는데도 무턱대고 참 이스라엘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분명 나다나엘에게는 참 이스라엘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나다나엘은 나사렛 예수를 무시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참 이스라엘의 모습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48절부터의 말씀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48절에 보면 나다나엘이 자신을 향해서 참 이스라엘이요 그 속에 간사함이 없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에게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다나엘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나다나엘은 처음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나사렛'이란 출신 때문에 무시했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단지 예수님이 자신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예수님을 향해서 위와 같은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과는 만난 적도 없는데 빌립이 자신을 부르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을 때부터 이미 보았다는 것에서 나다나엘은 예수가 메시야 되시는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아시는 것은 다만 인간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웃을 알고 있는 차원의 앎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속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즉 나다나엘은 자신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그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왕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나다나엘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이 예수가 자신을 알고 있다고 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자 서기관들은 마음속으로 예수가 참람한 말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죄는 오직 하나님만이 사하실 수 있는데 예수라는 사람이 그러한 말을 하자 자신을 스스로 하나님으로 칭하는 참람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이러한 생각을 아시고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보면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생각을 미리 아시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이미 아시는 예수님을 대하면서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를 않았습니다. 이것이 나다나엘과 서기관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나다나엘의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서 정직한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에 대한 자존심이 강했던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소위 말씀대로 산다고 스스로 자부하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적어도 종교적인 면에서는 남에게 질 수 없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이기에 그들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서 반발이 나올 뿐입니다. 이것이 자기 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하나하나가 우리의 속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속셈으로 하나님을 찾는지, 그리고 어떤 간사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말하는지, 우리의 실체가 2천여년 전에 남겨진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낱낱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말씀을 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말씀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거부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마음인 것입니다. 이들처럼 자신의 의를 스스로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우리의 허물을 드러내는 말씀에 대해서 자신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남들이 보기에 훌륭한 신앙적인 행위가 있다고 하더라도 말씀 앞에서는 항상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멸망에서 구출될 수 없는 죄인이었음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자신을 아는 말씀 앞에서 예수가 곧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참 이스라엘입니다. 나다나엘이 보여준 것이 바로 이것이었고 예수님은 이 마음을 참 이스라엘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 정직한 간사함이 없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의 모두를 미리 아시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남에게는 감추어져서 보이지 않는 속마음까지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서는 모두 폭로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어떤 욕망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지, 우리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 말씀입니다. 말씀이 곧 그리스도라면 결국 우리의 모두는 그리스도 앞에서 이미 노출되어 있는 상태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그리스도를 대한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담대하게 위선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봉사를 하면서도 기쁨으로, 자원해서,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복, 즉 자기 이익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것을 간사함이라고 말씀하고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그 증거물은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하나하나가 우리의 부족함과 허물과 멸망을 받아야 할 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출할 수 있으시다고 말씀합니다. 만약 말씀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깊이 발견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숨길 수 있을지 몰라도 이미 2천년 전에 남기신 말씀은 우리 속마음까지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알고 계시는 그리스도 앞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시오, 나의 주 되심을 고백한다면 그가 바로 참 이스라엘이며 간사함이 없는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입니다. 참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없음을 아는 자입니다. 그들만이 하나님과 자신의 사이에 개입되어 있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최초로 이스라엘이라고 불려진 야곱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항상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깁니다. 그러한 그가 하나님과 씨름을 하게 되고, 힘의 근원이 되는 환도 뼈를 꺾입니다. 그때 야곱이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나는 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야곱을 향해서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라고 말씀합니다. 즉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축복으로 사는 자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이스라엘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들인 것입니다.

 

 

 

 

50-51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51절의 말씀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야곱의 경험입니다. 야곱은 거짓으로 이삭을 속이고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길을 떠났을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때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 야곱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가 있다는 생각만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씨름을 한 후 야곱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곧 자신이 사는 길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인자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는 말씀도 나다나엘이 오직 인자 외에는 하나님에게로 갈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참 이스라엘은 오직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에게로 갈 자가 없음을 알고 우리의 스스로의 힘과 노력과 행위로서 하나님에게 나아가려는 의지를 버리고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인자로 오신 그리스도만이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길이 되십니다. 즉 멸망의 자리일 수밖에 없는 땅에서 생명인 하늘로 갈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큰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중보이신 그리스도를 볼 자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을 고백하는 참 이스라엘뿐입니다. 우리의 속까지 아시고 드러내시는 말씀 앞에서 우리가 죄인임을 고백하게 될 때 그리스도가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놀라운 큰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참 이스라엘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 그들이 바로 간사함이 없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참된 신자입니다.

 

 

 

 

 

(9강) 2:1-12 가나혼인잔치


본문은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물로서 포도주를 만드신 이적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단지 초자연적인 이적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본문의 내용만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기적들이 초자연적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시의 기능을 가지고 등장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이적의 사건을 대할 때 이적 자체에 매료되기보다는 이적의 사건 자체가 말해주고 있는 예수님의 계시에 관심에 기울어야 합니다.

 

 

 

 

혼인 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것을 이유로 본문을 결혼식과 연관해서 생각을 한다거나, 물이라는 하찮은 것이 포도주라는 귀한 것으로 변화된 축복의 사건이라는 생각으로 이해를 하려고 한다면 본 사건이 내포하고 있는 깊은 의미를 찾지 못하고 지나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본문에서는 물이 포도주가 된 사건을 이적이라고 말하지 않고 표적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이적을 이적으로 말하지 않고 표적이라고 말씀하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표적이란 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장차 되어질 일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것이 표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역시 신비한 이적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되어질 일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기 위한 이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사건은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표적입니까? 본문에서 표적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구절은 4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는 이 말씀이 예수님이 장차 되어질 어떤 일을 계시하기 위해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을 표적으로 행하셨는지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는 구절인 것입니다.

 

 

 

 

먼저 이 구절에서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문구가 있습니다. 하나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표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구절에 대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1절을 보면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거기에 있고 예수님과 그 제자들도 잔치에 청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모친도 있고 예수님도 청함을 받은 것은 잔치 집이 예수님의 친척집이 아닌가하는 추측도 있지만,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즉 예수님의 친척집인가라는 추측은 얼마든지 해볼 수 있지만 이 문제에 대한 사실 여부에 관심 둘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잔치 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지게 되고, 예수님의 모친은 예수님을 찾아와서 포도주가 없음을 말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혼인 잔치는 아주 특별한 기쁨의 잔치입니다. 그리고 이 잔치는 하루 이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간 계속되는 잔치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회의 잔치에서 아주 중요한 포도주는 넉넉히 준비해야 했던 것입니다. 만약 계속되는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다면 그 잔치는 불완전한 것으로 여겨지고 잔치는 엉망이 되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참으로 급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포도주가 없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모친은 이 위기의 상황을 예수님이라면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을 많이 목격을 했을 것이기 때문에 포도주가 떨어진 위기의 상황도 예수님이라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친에게 예수님은 우리가 듣기에는 참으로 매정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것이 위기의 상황을 말하는 모친에게 하신 예수님의 답변이었던 것입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은 듣기에는 '포도주가 떨어진 이 상황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의미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이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는 것으로 이해를 한다면, 뒤에 예수님이 물로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구절은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이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떨어진 위기 상황을 말하는 모친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모친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이 모친과의 관계를 끊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혈육의 관계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지 말라는 의미로 하신 것입니다. 혈육의 관계에서 보여지는 예수님은 마리아에게는 다만 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신비한 힘을 가진 아들로 비춰질 뿐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3:35절에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땅에서의 혈육의 관계로서 사람들을 대하신 것이 아니라 하늘의 관계로서 대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과의 관계는 하나님의 뜻안에서 이루어짐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육신의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과의 혈육적인 관계는 구원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즉 육신으로 예수님의 모친이라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로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 받으시고 피 흘리심으로 나의 모든 죄가 용서함을 입었다는 것을 아는 자가 곧 예수님과의 관계에 들어가게 된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을 단지 아들로만 바라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단지 아들로만 안다면 자기 백성을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출하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 문제 때문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이나 해결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붙들고 있는 어둠의 권세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과의 관계는 오직 죄문제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알고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이 아니면 해결될 수 없음을 자각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비로소 그리스도와의 깊은 관계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아들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그리고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을 해결해줄 수 있는 예수로만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에 대해서 그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그리스도에게서 구하시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는 세상에서의 여러 상황에 대해서는 참으로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조금이라도 힘든 상황이 발생하면 예수님을 찾으면서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참지를 못하고 '주여'하면서도 장차 닥칠 보이지 않는 세상의 위기 상황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둔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심판을 받고 멸망하게 되고, 어둠의 권세 아래 있는 세상 모두가 영원한 고통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위기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 불신자들은 모를 수밖에 없다 해도 소위 심판을 말하는 신자들조차도 관심을 두지 않고 둔감한 반응으로 살아간다면 어쩌면 우리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자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구세주이십니다. 세례 요한이 증거한 것처럼 세상 죄를 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어린양이십니다. 때문에 어린양과의 관계에 있기 위해서는 필히 어둠이 권세 아래 있는 우리 자신을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둠의 권세, 즉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우리 자신을 보지 못하고 항상 세상에서 남들보다 못나고 부족하고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 자신만 보고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를 좋은 상황으로 인도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곧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는 말씀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아직 이르지 아니한 예수님의 때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33절에 보면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라고 말씀합니다. 요한은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장차 오실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곧 그분인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는 곧 구원을 의미합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인해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구세주로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것은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의 일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 때'라는 것은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사건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은 세상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지 포도주가 없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즉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주는 해결사로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린양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은 십자가 사건에서 분명하게 계시됩니다. 이 때를 '내 때'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이 바로 예수님이 일하실 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발휘할 때가 바로 포도주가 떨어져서 잔치가 엉망이 될 이 때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어머니가 생각하는 때이지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때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이 일하실 때를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어려운 상황이 되었을 때 예수님이 나서서 일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때일 뿐이지 예수님의 때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4절의 말씀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이해할 수 없는 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것은 결국 예수님은 포도주가 없는 위기의 상황을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자신은 포도주가 없는 상황이나 해결해 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는 십자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 큰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포도주가 없는 상황을 해결하셨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것을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시기도 하셨지만, 우리들의 삶에서의 어려운 문제들도 해결해주시는 분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포도주를 만드셨다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끝까지 자기 일에 대해서 관심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이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 자기 문제를 들고 나온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하셨던가를 생각한다면 십자가와 자기 문제를 결코 함께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기 문제에 대한 염려를 벗어버리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예수님의 일에는 십자가도 있지만, 우리들의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 문제의 염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믿음 없음으로 한탄하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찾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만을 마음에 둔 신자의 믿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포도주를 만드신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5절에 보면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예수의 모친인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든 그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마리아는 아직까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 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내 때'를 십자가의 고난으로 보지 못하고, 포도주가 없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일할 때로 이해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때는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성취하는 때인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때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때 마침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그것이 곧 포도주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연회장은 물로된 포도주를 맛보고 좋은 포도주로 인해서 잔치의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있었다는 것은, 마가복음 7:3절의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라는 말씀대로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기 위한 규례 때문에 준비된 항아리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 손을 씻는 것은 정결함을 위한 유대인의 결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몰랐던 것은 손을 씻는다고 해서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깨끗해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때가 되었을 때 성취되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때가 성취되었을 때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정결함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모세의 율법에 의한 정결 의식 또한 폐기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시하기 위해서 정결함을 위해서 준비된 항아리에 물을 채우게 하시고 그 물을 포도주가 되게 하셔서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물을 포도주가 되게 하신 것은 단지 포도주가 없는 위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의도라면 '내 때'를 말씀하실 이유가 없이 즉시 포도주를 만드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사건에 대해서 표적이라는 말도 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11절에서 '이 처음 표적'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본문을 표적의 시각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장차 되어질 어떤 일을 계시하시기 위해서 일으키신 사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단순히 잔치가 엉망이 될 수 있는 위기 상황을 해결해주신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기 전에 '내 때'를 말씀하신 것은 포도주를 만드셔서 나누어주시는 일을 단지 포도주가 없는 상황을 해결하는 차원에서 보지말고 예수님의 때인 십자가의 고난의 차원에서 이해하라는 의도이십니다. 그래서 표적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포도주를 나누어주심으로서 잔치 집에 큰 기쁨을 주시는 것처럼 십자가의 고난이 성취될 때 그리스도로 인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이 나누어지고 결국 참된 기쁨을 얻게 될 것을 계시하시는 표적인 것입니다.

 

 

 

 

11절에 이 표적으로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다고 말합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표적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십자가 고난의 성취로 인해서 증거 되어질 그리스도의 영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세상에 신비한 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그리스도로 성취되는 것에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에 그리스도가 보여주시는 표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믿으면 너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는 표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때가 성취됨으로 인해서 성령이 오시고 그로 말미암아 죄악으로 더러워진 우리가 깨끗함을 입게 된다' 는 표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참된 관계에 있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문제는 모두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맡기는 것이 옳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이상 우리가 어떤 요구를 한다고 해도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포도주를 나누어주시기 위해서 오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거하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때를 마음에 두고 사는 신자라면 눈에 보이는 포도주에 마음을 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우리에게 무엇이 나누어 졌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서 사망에 처한 우리에게 어떤 은혜가 주어졌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포도주에 마음을 두고 그리스도를 찾는다면 결국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자로 머물게 될 것입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씀이 혹시 십자가의 은혜보다는 삶에 마음에 두고 예수님을 찾는 우리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는 말씀은 아닐까요?

 

 

 

 

 

(10강) 2:13-22 예수님의 열심


여러분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열심은 무엇으로 보여지고 있습니까? 아니 그것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향한 열심이 있는가부터 묻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열심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 열심은 무엇으로 어떻게 보여지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대개 열심을 부지런한 어떤 행동으로 이해를 합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와 관련되고 교회와 연관된 일에 대해서 부지런히 행할 때 '열심이 있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리스도를 향한 열심이 그런 것일까요?

 

 

 

 

봉사나 충성, 또는 열심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실 때 항상 염두에 두셔야 할 것은 '하나님의 공평하심'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봉사 충성 열심이 어떤 특정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봉사나 충성, 또는 열심은 믿음에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기에 자연적으로 맺어지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믿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에게 충성하고 봉사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사람의 조건을 보고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자에게만 주어지는 놀라운 은총입니다. 믿음은 병에 걸려서 병상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누워 있는 사람에게 주어질 수도 있고, 돈 한푼 없어서 제대로 헌금도 하지 못하는 가난한 자에게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봉사와 충성이 믿음으로 인해서 맺어지는 것이라면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도, 헌금도 할 수 없는 가난한 자에게서도 보여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만약 봉사와 충성, 열심이 건강하고 돈 있는 사람들에게서만 보여질 수 있는 것이라면 결코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말할 수 없습니다. 병들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가난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병들게 하시고 가난하게 하셔서 봉사와 충성을 못하게 되었다면 하나님은 그들에게만큼은 충성하지 않고 봉사하지 않았다고 책망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심을 우리의 행함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행함으로 이해한다면 몸의 조건상 행함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은 열심히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열심에 대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봉사와 충성에 대해서 크게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결코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을 열심으로 말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기도든 헌금이든 구제든 금식이든 무조건 많이 하는 것을 열심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봉사와 충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열심이 있는 것을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열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열심은 과연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흔히 '예수님의 성전 청결'이란 제목을 붙여 부르는 사건입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울 때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린양의 피를 통해서 애굽에서 구출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날에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서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성전에 이러한 장사꾼들이 앉아 있게 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구약의 규례를 보면 제물로 바칠 짐승은 흠없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은 제물로 가져온 짐승들을 심사를 했던 것입니다. 즉 제물로 쓰여질 만한 것인가를 따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물의 심사에서 탈락이 되면 참으로 곤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예 제물을 집에서 가져오지 않고 성전 안에서 파는 것을 샀던 것입니다. 성전에서 판매하는 제물이라면 심사에서 탈락될 염려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소나 양을 파는 장사꾼들은 제물에 대해서 폭리를 취한 것은 기정사실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배를 핑계 대고 예배하는 자들을 착취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소나 양을 구입할 수 없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비둘기를 바치도록 말씀하셨는데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뜻은 전혀 무시해 버리고 비둘기조차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폭리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물을 사고 파는 성전에는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출 30:13절에 보면 성소에 반세겔을 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규례 대로 성전에 제사하러 온 사람들은 성전세를 바쳐야 했는데 오직 유대 화폐로 바쳐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에는 돈을 바꿔주는 환전상들이 있게 된 것이고, 돈을 바꿔 주는 과정에서 수수료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엉망이 된 성전의 모습을 보신 예수님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양이나 소를 다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고 상을 엎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본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18절)라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이 성전에서 그렇게 행동하실 수 있는 권리가 있는가를 보여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표적 요구에 대해서 예수님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절)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쫓을 수 있는 권리를 보여라고 요구하는데, 예수님은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표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21절에서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예수님 자신이 곧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를 함으로서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든 사람들을 쫓아내실 수 있는 정당한 권한은 예수님이 곧 성전이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내용이 아닙니다. 성전에서 장사를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행하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을 옳지 못하게 보시고 행동하신 것으로 이해한다면 결국 예수님은 보이는 성전에 대해서 집착하신 것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비록 인간의 손으로 지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마음대로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우신 성전을 인간이 마음대로 허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지금 유대인들이 보고 있는 성전은 참 성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얼마든지 인간의 손으로 허물어질 수 있는 집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볼 때 구약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성전은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담긴 성전이었던 것입니다. 즉 건물이 성전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행해지는 제사가 성전의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전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계시가 실체로서 오신다면 구약의 성전은 그 역할을 다 마친 것이 됩니다. 결국 다만 건물로만 존재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인간이 허물어 버릴 수 있는 건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오직 성전에 나와서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은 성전으로 지어진 건물이 하나님의 거처로서 특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즉 건물 자체에 무슨 신비한 현상이나 효능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거처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성전에서 제사가 행해졌기 때문입니다. 제사는 불의한 인간의 죄를 씻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허물과 불의함을 짊어지고 대신 죽는 제물의 피가 있었기 때문에 제사가 드려지는 곳은 거룩하고 정결한 곳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성전에서 거하실 수 있는 것은 성전의 정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정결은 제물의 피로서 유지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아는 이스라엘이라면, 성전이라는 건물 자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성전이 의미하고 있는 바를 바라보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성전을 통해서 무엇 때문에 불의한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하심이 가능하게 되어졌는가를 생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마음에는 건물인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라 해도 그들의 마음에는 자신들의 불의함을 대신해서 피흘리실 메시야가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참성전으로 세워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전에 나와서 제사만 드리면 자동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고 하나님 역시 이스라엘을 돌보실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이러한 의도가 선지자로부터 철저한 책망을 받았던 사실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들고 나오는 제물에는 관심이 없으셨고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무엇인가를 알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성전을 헐라 사흘만에 일으키겠다'는 말씀은 '너희가 성전을 헐면 내가 그것을 사흘만에 다시 세우는 능력을 보여주마'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에는 헐어지는 성전과 세워지는 성전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사람의 손으로 지어진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며, 예수님에 의해서 세워질 성전이 있는데 그것이 참된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실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성전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라는 뜻이 되고 결국 신자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됩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다만 자기들의 손으로 46년 간 지은 것을 단 사흘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터무니없는 것으로만 여겨졌던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22절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고 하신 말씀처럼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야 그 의미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열심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심은 구제를 많이 한다거나 기도를 많이 하는 식의 열심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쫓는 열심을 보이셨습니다. 참된 성전을 세우시려는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에서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하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제자들이 기억했다고 하는 성경 말씀은 시편 69:9절의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는 말씀입니다.

 

 

 

 

시편 69편은 복음서에서 자주 인용되던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시편 69:4절의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내 머리털보다 많고 무리히 내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취치 아니한 것도 물어주게 되었나이다"는 말씀을 인용해서 요 15:25절의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시 69:21절의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라는 말씀 역시 요 19:28절의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성취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시 69편은 메시야를 말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시 69:9절의 말씀은 다윗의 여호와를 위한 열심의 결과로 인해서 다윗 자신에게 해가 미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보고 성전을 위하는 예수님의 열심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해를 입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말씀대로 예수님의 몸은 유대인들에 의해서 허물어지게 되고 예수님은 그 몸을 사흘만에 다시 세우셨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손으로 지은 성전을 허문 것이 아니라 참된 성전이신 그리스도의 몸을 허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심은 인간의 마음에 세워져 있는 자기들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허물고 대신 참된 성전이신 그리스도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열심이었습니다. 이 열심이 있었기에 십자가에 죽기까지 말씀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님에 대한 신자들의 열심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신자의 열심이 앞서 말한 대로 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하고, 헌금을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보는, 즉 종교적인 행위가 많은 부지런함으로 이해된다면 그것은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보여준 잘못된 열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월절이면 만사를 제치고 성전에 모여서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는 열심을 보였지만, 결국 그들은 자기 편함과 자기 이익을 위해서 열심을 낸 것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교회에서 행하는 열심 역시 그런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열심은 우리의 삶에 헛된 성전을 허물고 참된 성전이신 그리스도를 세우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 대한 열심입니다. 예수님은 성전 회복에 대한 열심을 보이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열심으로 살아간다면 우리 역시 우리들 속에 참된 성전을 회복하는 것으로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충성이며 열심입니다.

 

 

 

 

그러나 현대 교인들의 열심은 대개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다만 종교적 열심에 지나지 않는 것을 그리스도에 대한 열심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자기 만족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을 그리스도에 대한 열심으로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열심은 바로 그러한 잘못된 믿음을 허물고 참된 믿음이 세워지고, 그리스도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열심이기도 했습니다. 참된 것을 세우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열심으로 인해서 예수님 자신이 유대인에게 삼키움을 당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열심은 중지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날마다 허무십시오. 여러분의 삶에서 세워진 헛된 것을 허무십시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서 주어진 참된 생명을 두고 생각한다면 세상의 것은 헛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헛된 것을 세우고 지키기에 열심입니다. 헛된 것을 붙들고 포기하지 않으려는 열심으로 인해서 참된 생명이 허물어집니다. 자신을 위한 열심 때문에 대신 그리스도가 허물어지고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열심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참된 열심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의 중심이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분으로 자리하셔야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삶은 날마다 헛된 것을 허무는 것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11강) 3:1-8 거듭남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신앙인이라면 대개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내 믿음이 강한지 약한지, 이런 믿음으로 천국에 갈 수 있을는지,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과 고민이 신앙인으로 하여금 믿음에 대해서 긴장을 가지고 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겠지만, 대개 성경적으로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깊이 주의해야 할 문제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선물입니다.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다음부터는 믿음이 우리를 붙들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반대의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내 스스로의 노력이나 의지로서 믿음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믿음을 계발하고 향상시키고 더욱 자라게 해야할 책임이 자신에게 주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믿음을 우리 스스로의 노력이나 의지로서 향상시키고 자라게 할 수 있을까요? 만약 믿음이 인간이 노력에 의해서 자랄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면, 인간의 힘으로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논리도 가능합니다. 인간이 믿음을 자라게 할 수 있다면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있지도 않겠습니까?

 

 

 

 

하지만 분명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엡 2:8-9절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한 것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믿음이 주어진 것이나 우리에게 함께 하시는 것에는 인간의 행위는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행위와 노력, 그리고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선물로 주어진 것이 믿음인데, 어떻게 우리들의 노력과 의지로서 이 믿음을 더욱 자라게 하고 지킬 수가 있다는 것입니까?

 

 

 

 

믿음은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에 믿음과 연관된 모든 것에 대해서는 믿음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것에 대해서나,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의 노력과 의지로 자라고 지켜지는 믿음이라면 결국 자랑과 칭찬은 인간을 향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할 때 믿음은 그 자체로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각자에게 주어진 믿음의 질과 분량이 다르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차별되게 믿음을 주셨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남보다 적은 믿음을 받은 자라면 '부족하다'는 말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런 논리가 가능할까요?

 

 

 

 

사람들은 자기 의지와 노력으로 자신을 건지려는 노력을 하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넉넉합니다. 진리는 진리 그 자체만으로 족하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를 찾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이르렀다면 그것은 우리가 진리를 위해서 애를 쓰고 노력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붙들고 건졌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선물이며 우리의 힘으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믿음이 인간의 의지나 행위와 전혀 상관이 없다면 하나님 나라의 문제 역시 인간의 의지나 행위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이 바로 이러한 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바리새인으로서 유대인의 관원중 한 사람인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 내용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절)라고 말합니다. 니고데모가 유대인의 관원이라면 니고데모는 유대 사회에서는 가장 높은 유대 의회의 회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우리가 ∼ 안다'라는 말을 합니다. '내가'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볼 때 니고데모 개인이 아니라 다른 바리새인들도 예수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임을 인정한다는 것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으로 이해하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 때문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목격을 했거나 소문으로 들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이적을 베풀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며,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임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에 대한 니고데모의 시각입니다. 이렇게 볼 때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을 단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표적으로 밖에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니고데모에게 있어서 예수는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초자연적인 이적을 일으키는 선생일 수는 있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보게 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니고데모는 예수님에게 다만 '행하신 표적을 보니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라는 말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니고데모의 말에 대해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분명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에 대한 니고데모의 시각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이 모든 것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으로 되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의지나 순종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즉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연적 과정을 통해서 탄생되어지는 것이 아닌 영에 의한 창조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 즉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되어지는 것은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서 가능하기 때문에 위로부터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으로 되어지고 위로부터 되어지는 것이라면 거듭 강조하지만 인간의 의지나 노력은 절대적으로 언급해서는 안될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위로부터 되어지는 거듭남이 있어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는 것은 니고데모에게서 인간의 행위를 높이는 모습을 보셨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니고데모가 단순히 바리새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가 행위를 높일 것이라고 추측하신 것은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속중심까지 보시는 분이시지만 사실 니고데모의 속중심은 이미 그의 말에서 드러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다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여주는 표적으로만 봤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에게서 능력을 받았기에 신기한 이적을 행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은 예수님의 신기한 힘을 증명하기 위한 표적이 아닙니다. 표적이란 말은 2장의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처음 나옵니다. 2:11절에 보면 가나 혼인잔치를 처음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을 처음표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장차 행하실 일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이적이라는 의미에서 표적이란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이적에서 신기한 능력만을 봅니다. 신기한 능력이 있는 것을 보니까 분명 하나님이 함께 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이라는 것 뿐 그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육의 모습이며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서 그 이상의 것, 즉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메시야라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야말로 영으로 거듭난 결과라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다만 행한 일을 보고 판단하는 수준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의 시각입니다. 이러한 니고데모는 곧 율법의 수준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수준이란 행한 일을 통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영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은 행위로 판단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은 오직 영으로만 되어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으로 산다는 것은 행위를 높이고 행위를 가지고 믿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믿음으로 되어짐을 감사하고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인간의 행함을 버리지 못한 수준의 사람입니다. 인간의 행함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은 행함을 가졌다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을 인간이 천국에 가게 되고 거룩한 자가 되기 위한 요건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은 지금의 인간으로는 도저히 천국에 해당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위대한 행함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천국에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롭게 태어난 자 되게 해서 천국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거룩한 행위를 하기 위한 조건이 아니고 인간의 자질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거듭남을 인간의 자질이 달라지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은 성격도 달라지고 믿음도 있고 열심과 봉사와 충성이 남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행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니고데모의 수준인 것입니다. 이처럼 육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니고데모는 거듭난다는 것도 육의 차원에서 이해를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4절)라는 반문을 하게 됩니다.

 

 

 

 

니고데모의 질문은 거듭남에 대해서 부정하는 말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이나 위로부터라는 말에 대해서는 무시해버리고 순전히 육적인 시각에서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 자라서 늙기까지 한 사람이 어떻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고 태어날 수 있느냐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

으로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니고데모야말로 참된 진리를 볼 수 없는 소경된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니고데모만이 아니라 율법을 단지 행함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모든 사람의 시각입니다. 특히 자신이 노력과 의지로 열심히 봉사하고 많은 종교적인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그것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이미 구원받은 자임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며 율법을 받은 자이고 또 열심히 율법을 행하고 지키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미 천국이 자기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이 거듭나야만 천국 간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육의 시각만을 보여주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절)고 말씀합니다. 새로운 탄생은 물과 성령으로 되어집니다. 그런데 왜 물이 개입되는 것입니까? 사람이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면 오직 성령으로만 된다는 뜻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물을 성령과 함께 말씀하심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물을 물세례로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목사가 교회에서 행하는 물세례와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 절대적으로 반대되는 이해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행함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행함으로 되어지지 않음을 말씀하면서 물세례라는 인간의 행함을 언급하신다는 것은 크나큰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목사가 행하는 물세례는 결코 신자가 천국을 가는데 그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에 대해서도 같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를 직접 받았다고 해도 그것이 천국에 대해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는 것은 물과 성령을 따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의미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물로 난다는 것이나 성령으로 난다는 것을 같은 차원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례요한이 베풀었던 물세례를 다시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세례는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로서 베풀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물세례를 베풀면서도 물세례 자체를 강조하고 의미 두는 것이 아니라 성령 세례를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1:33절에 보면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요한의 물세례는 요한이 독자적으로 만든 의식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분이 따로 존재합니다. 그분이 요한에게 말하기를 성령이 내려서 머무는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요한은 이미 성령으로 세례 주는 분이 있음을 아는 가운데 물세례를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물세례는 성령세례를 의식한 것이었고 그런 이유로 물세례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세례를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물세례의 실상은 성령세례이며 그런 뜻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요한의 물세례는 죄인된 인간이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물속에 잠겼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이 물세례인 것처럼 성령세례는 죄인된 우리를 위로부터 다시 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이며 물세례는 성령세례가 이렇게 주어진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고전 15:50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육으로 태어난 인간은 육일뿐입니다. 육으로서 영을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육으로 태어난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죄악된 본성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변화된 새로운 삶으로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새로운 창조를 입은 성도는 육이 아니라 영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과 거듭나지 못함은 성령에 의해서 인도됨과 육신을 의지하고 따르는 것으로 구분되어지는 것입니다. 신자는 성령에 의해서 거듭남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활동이나 의지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성령의 활동으로 가능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활동 역시 인간의 의지에 매이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기쁨에 의해서 활동할 뿐입니다.

 

 

 

 

6-8절에 보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말씀합니다. 바람은 임의로 붑니다. 인간의 능력이 바람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바람이 원하는 대로 불뿐입니다. 이처럼 성령도 하나님의 뜻과 기뻐하심에 의해서 믿음과 생명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또한 바람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이 지나갈 때 다만 그 흔적이 보일 뿐입니다. 성령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임하는 것을 인간의 눈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성령이 임하신 그 흔적만 느껴지고 보일 뿐입니다. 성령은 인간의 뜻과 원함에 의해서 활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을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만들어 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보여지는 믿음은 '자기 소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물로 위로부터 주어지는 믿음은 '자기 소리'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소리를 내게됩니다. 이것이 성령에 다스림 받고 있는 흔적입니다.

 

 

 

 

성령의 흔적은 성령으로 거듭난 모든 신자들의 행함과 고백으로 증거 됩니다. 즉 같은 행함이 있다 할지라도 육으로 태어난 자는 자기 소리, 즉 자신을 자랑하고 높이는 소리를 내지만 성령으로 난 신자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높이는 소리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활동하기에 성령에 의해서 영의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이것에 성령에 인도 받는 삶입니다. 어떻게 임하시고 역사 하시는 가에 대해서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신비한 하나님의 일이지만 성령이 역사하고 계심은 우리의 삶에서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증거 되는 것입니다.

 

 

 

 

 

(12강) 3:9-15 거듭남(2)


5절에 보면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을 니고데모에게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흔히 얘기들 하는 '비결'이라고 말해도 좋을 듯합니다. 즉 '천국 가는 비결'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비결이라는 말을 하면 사람들은 무슨 특별한 비법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비법대로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많은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기도 응답 받는 비결' 이라든가 아니면 '축복 받는 비결' 등등 비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의도가 모든 것은 인간이 뭘 어떻게 얼마나 하느냐에 달려있음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소위 '천국 가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 가는 비결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것만으로는 비결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거듭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거듭나는 비결'에 마음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비결', 즉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거듭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하면 성령을 받아서 중생할 수 있느냐는 것이 천국에 대한 최대의 관건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나, 그것은 마치 바람이 부는 것처럼 인간의 의지나 노력과 뜻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에 대해서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9절)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니고데모의 반응은 가능과 불가능을 인간의 행위와 의지의 여부에 두고 있는 합리주의자의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모든 되어진 일에 대해서 '율법에 순종한 인간의 성취'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가 있기에 행위에 대한 성취로서 결과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노력한 것만큼 그 결과가 나타난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바로 합리적인 사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합리적인 사고는 인간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성취가 주어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거듭나는 것이 오직 성령으로만 되어지는 일이라면 성령이 주어지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뭔가 인간 쪽에서 하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실만한 사람이기에 오시는 것이지 아무에게나 성령 마음대로 오신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니고데모의 사고였습니다.

 

 

 

 

사람들은 가능과 불가능이 인간의 행위와 의지에 의해서 결정되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하는 것만큼 얻는다는 것이 세상이 말하는 극히 합리적인 사고가 아니겠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불가능이 가능해지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노력과 열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것을 얻는데는 노력과 열심에 의해서 성취의 정도가 다르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세상의 일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일은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니고데모는 하늘의 일도 베풀어질 만한 자에게 베풀어진다는 법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적인 사고이며 앞서 말한 대로 극히 합리적인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에는 사람이 거듭나는데 있어서 비결이라는 것이 있다고 여기십니까? 거듭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 있고 그 방법대로만 하면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사람이 거듭날 수 있는 비결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비결은 있으되 그 비결의 실천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하심에 달린 것이지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거듭남에 대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만 거듭난 자, 즉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난 자로 새로운 삶을 살아감으로써 성령이 역사 하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도구로 존재할 뿐입니다.

 

 

 

 

거듭남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대개 거듭난 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 때문에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거듭남의 필요성을 느끼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심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증거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스러운 일입니다. 인간의 임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어떤 방법이 제시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성령에 의해서 되어진 일을 느끼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바람에 비유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을 인간이 임의대로 할 수 없는 것처럼 성령이 그렇습니다. 바람이 오고 가는 것을 인간이 볼 수 없는 것처럼 성령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만 바람이 불 때의 흔적인 스치는 소리만을 들을 뿐입니다. 성령의 능력도 이처럼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뭇가지의 흔들리는 소리가 바람이 왔다는 증거물이듯이 성령으로 난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이 성령의 능력의 활동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도 이러한 일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지금껏 이해해왔던 구원에 대한 사고를 스스로 버리고 바꿀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사고가 바뀌어진다는 것까지도 인간의 의지로는 안되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고는 새롭게 깨달아 진 것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스스로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쫓아가는 것이 인간의 사고라면, 그리고 옳다는 판단은 인간의 의지로서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대한 결과라면 결국 사고는 깨닫게 하시는 분에 의해서 변화되어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단지 깨달음의 모습을 보여주고 드러내고 증거하는 증인의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의지나 노력이란 구원에 대해서는 전혀 무능력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단지 모른다는 것에 대한 책망일까요? 성령으로 되어지는 일에 대한 것은 인간의 지식이 아닙니다. 만약 인간의 지식이라면 선생이면서도 모른다는 것에 대해 얼마든지 책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지혜입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의 선생이라 할지라도 성령이 아니면 깨달을 수 없는 것이 하늘의 일이며 성령님의 일입니다. 이렇게 볼 때 10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면 니고데모에 대한 단순한 책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하신 말씀일까요? 니고데모를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니고데모가 이스라엘 안에서도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권위있는 자임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거듭난다는 성령님의 일에 대해서 이해를 못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저는 이 말씀에서 성경에 대한 그 어떤 지식도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해서 권위있는 지식자라고 할지라도, 그가 신학박사라고 할지라도 그 지식이 그 사람을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의 일을 깨닫는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오직 성령으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의 지식은 성령의 일을 깨닫기에는 무용지물이다'는 것을 암시하는 의미로서 10절의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렇게 볼 때 어떤 사람이 성경에 대해서 잘안다는 것만으로 그가 믿음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성경을 잘 모르면 믿음이 없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해 버리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목사가 성경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해서 무조건 믿음에 대해서만큼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실수를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목사의 믿음을 의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경에 대한 지식이 믿음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님을 알자는 것입니다. 이처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구원이 왜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되어질 수 없는가에 대해서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7절에 보면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거듭나야 하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네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거듭남이 필요하니까 거듭나기 위해서 힘쓰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구원은 인간의 애씀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생명이 주어져야 한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무능함과 부패성에 대해 인식해야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인식이 없는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13-15절을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영생, 즉 구원이 어떻게 주어지는가를 옛날 구약의 사건을 말씀하심으로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라는 말은 민수기 21장에 등장하는 사건을 언급하시는 것입니다. 민 2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스라엘의 원망에 대해서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서 그들을 물게 하심으로 많은 사람을 죽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불뱀의 고통으로 인해서 모세에게 여호와께 기도하여 불뱀을 자기들에게서 떠나가게 해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애원대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하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하시고 물린 자마다 그것을 바라보면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물린 자들이 장대에 달린 놋으로 만든 뱀을 봄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말씀하시면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린 이것을 쉽게 장대 높이 놋뱀이 달린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들릴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모세가 뱀을 들었다는 것의 의미와 인자도 들려야 한다는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뱀을 들었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불뱀에 물려 죽은 사건은 그들의 원망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결과가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이 죽음에서 구출 받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모세에게 불뱀을 자기들에게서 떠나가게 해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신들이 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보다는 자신들을 죽게 하는 것을 없애달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요청에 대해 하나님은 불뱀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불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고 그것을 바라보게 하심으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불뱀이 많은 광야를 지나면서 불뱀으로부터 보호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마실 것 먹을 것으로 하나님을 원망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고 있음을 무시해 버립니다.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 결과가 불뱀으로부터 노출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보호하지 않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뱀을 만들어 달게 하시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를 살게 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을 때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죽게 했던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단 것은 이스라엘에게는 저주의 도구였던 뱀도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결국 장대에 달린 뱀을 바라본다는 것은 자신들을 죽게 하는 뱀도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음을 알고 오직 하나님만 믿는 것이 곧 사는 길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씀하시면서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놋뱀도 들리고 예수님도 들렸으니 구약의 놋뱀은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해버리면 결국 뱀, 즉 성경이 마귀로 상징하는 것이 예수님을 상징하는 이상한 결론이 되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놋뱀=예수님"이라고 해석하면서 단순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라면 구원을 얻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냐가 중요한 관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 예수님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고 믿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뱀에 물린 자가 장대에 달린 놋뱀을 바라봄으로 살았다는 것은, 죽음에서 생명을 얻는 것 즉 구원을 얻는 것은 땅에서 인간들이 어떤 일을 행한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를 바라봄으로 되어지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저주와 심판 모두가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신자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권세 아래 거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임을 알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이스라엘을 죽게 하는 뱀을 장대에 매단 하나님의 권세를 믿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권세 아래 거하는 것이 곧 생명임을 믿는 것이라면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를 믿는다는 것은 인자로 오신 그리스도에게 영생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오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시고 죄를 해결하심으로서 영생이 주어진다는 그 사실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사는 자라면 영생을 위해서 스스로 노력하려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의 거듭남 역시 하늘에서 오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하늘에 가심으로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영생은 단지 영원히 산다는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신약 성경 전체를 두고 볼 때 '영생'이란 용어는 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경이 같은 의미에서 영생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을 두고 생각할 때 공관복음에서 말하는 영생은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영생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요한복음에서는 영생을 하늘 나라 임금이 내려주는 선물의 의미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지 땅에서 인간의 노력으로 맺어지는 열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은 예수님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는 말씀처럼 그리스도가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믿음 안에서 이미 생명을 얻은 자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자가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 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자에게는 생명을 얻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무엇인가가 없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한 생명을 얻은 자이기 때문에 생명에 대해 부족함을 느낄 이유가 없고 그러므로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뭔가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영생은 하늘에서 주어진다는 것에 대해서 이견이 없습니다. 누구나 다같이 공감하고 이구동성으로 외치고 있는 신앙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영생이 주어질 만한 자에게 주어진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스스로 노력해야 할 것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스스로 벗어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영생은 노력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 믿음으로 거하는 자들의 소유입니다. 신자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힘쓰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자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살기에 힘쓰는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영생을 얻기 위한 힘씀이 아니라 믿음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아가기에 힘쓰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신자에게서 보여지는 신앙의 모습이며 거듭난 깨달음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3강) 3:16-21 하나님의 사랑


오늘 본문을 읽을 때 누구나 16절의 말씀을 가장 중요한 구절로 여길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6절)는 말씀은 교회 안에서는 기독교의 중심 구절인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앞뒤의 말씀은 생각하지 않고 다만 16절의 한 구절에 하나님의 사랑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것처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16절 하나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게 된다면 결국 사랑에 대해서 곡해하는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대개 16절을 가지고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그 누구도 멸망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도 할 수 없이 그들을 멸망시킬 수밖에 없으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주신 사랑에 응답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그들만이 천국에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16절 한 구절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쉽게 들어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들의 생각과 상식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생각해 볼 때 과연 그러한 말들이 옳으냐에 대해서 먼저 결론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세상의 그 누구도 멸망 받기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주셨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심판을 받는 것이라면 결국 심판 받기를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그 마음이 누구에게 지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믿기 거부하는 인간의 의지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그 어떤 일도 다 이루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면 인간의 불신앙도 극복하고 모두를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증명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모두를 구원하고자 하셨다는 것이나 인간이 예수를 믿지 않아서 할 수 없이 심판하신다는 말들은 모두 성경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간의 생각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반면에 소위 장로교 교리를 말하는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선택을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만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스스로도 자신들의 말에 대해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자를 기어코 구원하시고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결국 믿고자 하는 우리들의 열심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해서 구원하시려고 믿음을 선물로 주셨으니 우리는 선물로 받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잘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라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의지가 합하여서 구원을 이루어낸다는 논리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선택하고 구원하고자 한다고 해도 인간의 의지가 그에 부합되어 일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선택은 실패된다는 결론이 되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7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 역시 16절의 말씀과 연결하여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이 세상의 심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사실 본문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직 세상을 구원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인데 왜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옥 간다고 해도 할 말이 없지 않느냐는 것이 본문을 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 말한대로 구원을 받게 하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인간의 불신앙에 패배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네가 아무리 날 구원시키려고 해봐라 나는 예수 안믿고 구원 안받는다'는 인간의 완악함에 대해서 하나님도 어쩌지 못한다는 것이 되버립니다.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10-21절까지가 모두 니고데모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16절이나 17절 한구절만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니고데모에 대한 말씀 가운데 한 부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16절만 가장 중요한 말씀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성경을 잘못 대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의 대화에는 16절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만한 증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16절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니고데모에게 하시는 모든 말씀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율법학자로서 자기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리고 거듭남 역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전혀 알 수 없는 신비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지키려고 하는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아무런 힘이 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이것을 니고데모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니고데모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고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니고데모에게 '그러니까 너희가 독생자 예수를 잘 믿어야 한다'는 의미로 하셨겠습니까? 오히려 믿음을 말씀하시면서 믿음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짐작하게 해주는 것이 18절의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16절이 아니라 18절의 말씀일 수 있습니다. 18절의 말씀은 심판을 받지 않을 자가 예수님을 안믿어서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심판 속에 있는 자가 독생자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서 심판을 받을 자라는 사실이 확정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심판과 구원의 중간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간 위치에 있다가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 가고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5:12절에 보면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은 인간을 심판과 구원의 중간 위치에 두는 것이 아니라 사망, 즉 심판의 자리에 두고 있습니다.

 

 

 

 

아담으로 인해서 이미 죄는 세상에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믿음이 아니라 죄를 선택해서 그 결과로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죄가운데 태어나기 때문에 이미 심판, 즉 사망에 처한 자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믿지 않아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성경과는 맞지 않습니다. 얼른 생각할 때는 믿지 않음으로 심판을 받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인간은 이미 심판에 있습니다. 그러한 인간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인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으로서 심판을 받을 자가 분명하다는 것이 확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인간을 구원받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심판 속에 있는 우리를 선택하셔서 구출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사랑은 심판에서의 구출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출의 대가는 독생자 그리스도의 죽으심입니다.

 

 

 

 

인간이 심판에서 구출되기 위해서는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명한 원칙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죄에 대한 아무런 대가도 없이 우리를 죄에서 구출하신다면 하나님의 의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를 굳게 하시기 위해서 그리고 사랑을 실행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우리가 담당해야 할 죄의 몫을 담당하게 하시고 우리는 심판에서 구출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말하기 위해서는 필히 심판을 언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심판에 있던 자가 바로 우리 자신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판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들의 의지로는 되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의지로 힘써 노력하고 애쓴다고 해도 심판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며 죄의 강함입니다. 그처럼 강한 죄의 사슬을 끊어 버리시고 우리를 구출하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죄의 사슬을 끊어버리는 강한 능력은 예수님의 피에 있는 것이지 결코 우리들의 윤리나 도덕 양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니고데모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자신의 의지로 살지말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자 되는 것은 오직 거듭남으로 되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이 심판 속에 있음을 아는 자에게만 의미가 있습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심판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음을 알 때에만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믿게 하시는 믿음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에게 주어지는 환경에서 확증하려고 합니다. 즉 자신의 환경이 좋아질 때,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증은 우리의 환경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5:8절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서 확증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은 우리의 심판 안에서 확증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심판에 버리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버림을 받으심으로 대신 우리가 구출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네가 율법을 지킴으로서 심판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심판에 버림을 받음으로 구출되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버림받은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이란 어두움에 살아가는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들을 의미하는 세상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19-21절은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빛은 어두움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결국 빛을 미워하는 자는 자신의 행위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빛으로 나오는 자들은 자신의 행위가 악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무엇 때문인가를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악한 행위를 미워하게 되고 반면에 그리스도의 행위를 따라 살기를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성령이 함께 한 자에게서 보여지는 성령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행위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위로부터 났다는 진리를 증거하는 증거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오심과 버려지심으로 인해서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아는 자가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14강) 3:22-30 요한의 기쁨


사람은 저마다 세상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있고 싶어합니다. 각자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또한 자신이 활동하는 삶의 범위에서 중심적인 인물로 대우받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나를 기억해주고 알아준다는 것으로 흐뭇해하고 기뻐합니다. 이처럼 중심적인 위치에 있고 싶어한 것은 예수님 당시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에게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 20:21)라고 요청하는 제자의 어머니나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 10:37)라고 요청하는 야고보와 요한 역시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집단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앉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중심적인 위치에 있고 싶어함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타인이 자신보다 높아지고 타인으로 인해서 자신이 소외될 때 타인에 대한 시기심과 미움과 저주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볼 때 세상의 중심은 그리스도십니다. 이 세상에서 높아지실 분은 오직 그리스도밖에 안계십니다. 그리고 신자인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리스도만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로 선택받아 쓰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중심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멀어져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항상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나는 소외되어야 하고 뒤로 물러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말입니다. 우린 오늘 본문에서 이처럼 그리스도만을 높이기 위해서 자신은 그리스도 뒤로 사라지는 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본문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대땅으로 가서 거기 유하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 일행은 유대 땅에 유하시면서 세례를 주셨습니다. 비록 22절에서는 예수님이 세례를 주신 것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공관복음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예수님이 세례를 주셨다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실제로 세례를 주신 것이 언급되어 있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마 지금 교회에서 행하는 세례 의식은 구원과 연관된 굉장한 의미를 가지고 행해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22절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행하신 것처럼 언급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4:2절에 보면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례는 예수님이 친히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주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제자들이 마음대로 세례를 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세를 가지고 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22절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주신 것으로 언급한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해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세례를 주고 계실 때 근방 애논이라는 곳에서도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23절). 그런데 이것으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25절에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라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각기 베푸는 의식을 보고 한 유대인과 요한의 제자중 한사람이 결례에 대해서 토론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결례는 정결의식을 말합니다. 깨끗함을 입게 되는 의식이기 때문에 의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유대인들 가운데 과연 '예수라는 사람이 베푸는 세례가 나으냐 세례 요한이 베푸는 세례가 나으냐?'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변론으로 인해서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찾아와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26절)라는 불만을 고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의 입장에서는 요한이 중심적인 인물이 됨으로서 자신들 역시 같은 대우를 받게 됩니다. 그럼으로 자기 스승이 다른 사람에게 밀리는 것에 대해서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라는 사람보다 자기 스승인 요한이 세상에 먼저 온 사람이고, 또 세례 역시 예수보다는 자기 스승이 더 선배인데 그러한 요한에게보다도 뒤늦은 예수라는 사람에게 군중들이 몰리는 것을 볼 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심정을 우리 역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같은 물건을 파는 두 가게가 있는데 한 가게로만 손님이 몰릴 때 다른 가게 주인의 심정이 어떠할지를 헤아려본다면 요한의 제자들의 그 불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고 바로 오늘 우리들이 항상 내뱉는 불만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한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하면서도 내 교회 근처에 다른 교회가 있다면 아예 처음부터 그 교회를 교회로 인정하지 않고 다만 싸움과 경쟁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과 같은 속성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경우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라는 말씀의 중요성보다는 내 교회보다 저 교회로 사람들이 더 많이 몰린다는 것으로 속상해하는 모습만 보여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 스승이 증거하던 예수라는 사람으로 인해서 세례 요한이 사람들 사이에서 소외되고 인기가 추락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요한의 제자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는 우리들 역시 하나님에게 '저 교회는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데 내 교회는 왜 사람들이 늘지 않습니까?' 라는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잘되는 일이라면 다른 사람의 것까지도 빼앗아서 나에게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까? 이러한 마음이 남 잘되는 것을 도저히 그냥 두고 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제자들의 말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27-30절에 보면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한 말입니다.

 

 

 

 

요한이 한 말 가운데 마지막 말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흥하여야 할 분은 그리스도지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의 말을 자세히 살펴보십시다. 그리고 요한의 말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한번 배워보십시다.

 

 

 

 

요한은 먼저 하늘에서 주신 바가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는 말을 합니다. 요한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거룩한 권위나 사명들 그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가 자신보다 더 큰 권위와 사명을 가지시고 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로 왔던 것 역시도 하나님이 사람을 자신에게 보내신 것인데 그것은 내 사람으로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장차 하늘로부터 오실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되어진 것임을 잘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자기에게 왔던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고 자신은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세례 요한을 대하면서 참으로 멋지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자신이 해야할 일에 대해서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그 생각대로 행동하는 요한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오늘날 우리에게도 요한과 같은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이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특히 목사는 더욱 더 요한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굳건히 서 있어야 할 줄로 압니다.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로 모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내 교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기보다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라고 나에게 보낸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 교회도 아니고 내 교인도 아닙니다. 예수에게로 인도하라고 하나님이 보낸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자신에게 보내어진 사람을 예수에게로 인도하고 자신은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교회의 세태를 보면 '내 교인'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교인수 늘리기에 급급하고 한번 내 교인이 된 사람은 다른 곳에 빼앗기에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과연 이러한 모습에서 사람들을 예수에게 인도하고 자신은 사라지는 요한과 같은 사명을 볼 수 있습니까? 요한처럼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흔적이 보입니까? 오히려 내 교회가 흥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가 흥하는 것이고 내 교회가 쇠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가 쇠하는 것으로 여기고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를 흥하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교인의 사명을 운운하고 전도의 부담을 안겨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기쁨은 내가 잘되는 것입니다. 내가 흥하는 것입니다. 내 교회가 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요한도 그러한 기쁨으로 살았습니까? 요한은 자신의 기쁨을 신랑 친구의 기쁨에 비유합니다. 신랑의 친구는 결혼하는 신랑의 들러리 역할을 맡습니다. 신랑 친구의 역할은 신랑의 결혼을 도와주는 것이고 신랑이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맞이함으로서 끝나게 됩니다. 이때 신랑 친구의 기쁨은 신랑의 음성을 듣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이 말하는 자신의 기쁨이었습니다. 즉 신랑이신 그리스도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지 자신이 사람을 취하고 자신이 흥함으로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아는 대로 신자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증인이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가 드러나도록 해야 하고 자신은 사라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우린 항상 그리스도 앞에 서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으로 기뻐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나를 보지 않는다고 섭섭한 마음을 가집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의 제자들과 같은 모습이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세례 요한의 역할은 예수님을 계시해주는데 있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백성을 자기에게 매어두려는 중개자는 예수님의 사람을 가로채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 교인'이라는 생각 자체가 곧 예수님의 사람을 가로채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 교인이란 없습니다. 있다면 다만 그리스도의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흥하여야 한다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한다는 말을 했을 때 흥함이란 과연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흥함은 사람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회사라면 수입이 늘고 사원이 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교회라면 교인수가 많아지는 것을 흥함으로 생각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로 사람들이 간다고 했을 때 그는 흥하여야 한다는 말을 한 것 때문에 사람이 많이 몰리는 것을 흥함으로 생각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인보다는 기독교인 수가 많아야 기독교가 흥하는 것으로 여기고 내 교회의 교인수가 많아야 교회가 흥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요한이 사람이 많이 몰린다는 이유 때문에 그는 흥하여야 한다는 말을 했을까요? 단순히 사람이 많이 몰리는 것을 흥함으로 얘기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외면한 그때는 철저하게 쇠하여진 예수님이었습니까?

 

 

 

 

요한은 단지 자신에게 오는 사람의 수보다 예수님에게로 가는 사람의 수가 많은 것을 보고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이 말한 흥함은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에게로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단 한사람도 자신을 바라봐서는 안되고 자신에게 나와서도 안되고 자신의 사람이 되어서도 안되며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흥하여야 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요한의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의 이유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를 자는 자기 죄를 아는 자이고 그리스도가 자신의 죄를 담당하심으로서 사망에서 구출되었음을 아는 자입니다. 그들만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자신에게 보내어진 사람에게 다만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일에 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사람이라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 힘써야 하는 것이 목사입니다. 그러므로 목사의 기쁨은 자신의 사람이 많아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는 것을 보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요한이 신랑의 친구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기쁨을 누렸듯이 말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있는 자입니다. 중심은 그리스도지 우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이 중심이 됨으로서 기쁨을 누리려고 합니다. 내가 중심적인 자리에 존재하기 위해서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곧 신자의 사명을 잃어버린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에게 사람이 가는 것을 시기하기는커녕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것이 자기 일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할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몸담고 있는 교회에서 중심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여러분의 할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할 일은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흥함을 위해서 여러분 자신은 쇠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쁨은 여러분과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15강) 3:31-36 위로부터 오신 이


성경의 맨 처음인 창세기 1: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세상의 존재성에 대한 선포의 말입니다. 세상이 이 말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다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만 선포할 뿐입니다. 우린 흔히 복음을 선포한다고 말합니다. 선포란 일방적으로 던지는 말이지 부탁도 아니고 믿어달라고 애걸하는 것도 아닙니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라는 결과를 기대하고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이 하신 일이 이런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이 이렇다는 것만 말하고 끝날 뿐입니다.

 

 

 

 

선포한 후의 결과는 결코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에게 성령이 오셔서 믿게 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복음을 잘 설명하고 말을 잘해서 믿게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다만 증거 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고 해도 그 결과를 두고 마치 자신이 그를 믿게 한 것처럼 여기면 참으로 곤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남겨두신 것으로 하나님의 모든 일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이 하나님이 택하신 자기 백성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붙들어 인도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에 저와 여러분이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 일은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이며 어떤 분인가를 선포하라고 있는 것이지 결코 그리스도를 믿게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보게 된 것이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예수에 대해서 설명을 잘해줬기 때문입니까? 나는 믿지 않으려고 했는데 너무나 기독교에 대해서 설명을 잘해주고 예수님에 대해서 간절하게 말한 것 때문에 감동을 받아서 예수를 믿은 것입니까? 과연 그렇다면 성령의 역사하심은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여러분 자신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리스도를 믿은 것임을 분명히 고백한다면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복음을 선포할 때도 바로 그와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전도함으로서 하루에 열 명이 믿게 되었든 아니면 백명이 믿게 되었든 그것은 모두가 성령의 역사하심이고 하나님의 일하신 결과이지 나의 공로는 전혀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공로에 대해서 전혀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공로로 되어진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원칙입니다. 비록 인간이 일하고 인간이 일함으로 되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사건들이 많이 있지만 그러나 그 배후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존재하셨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된 그 배경에는 사도 바울의 선교가 영향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여러 곳을 다니면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복음을 전파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복음이 홀로 독립적인 힘으로 복음을 전파했습니까?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자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그리스도가 찾아오시고 그를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증거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알았던 바울이기에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결코 자기 업적이나 공로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은혜와 기적의 종교입니다. 인간의 공로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굳게 세워지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과 돌보심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있을 뿐이지 일을 많이 하고 열심히 한 사람을 높이거나 경배하고 찬양한 것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서 바울을 찬양했던가요? 성경 어디에서 사도들을 찬양하고 선지자들을 경배했던가요? 오히려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자신들을 통해서 드러난 능력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자기를 신으로 섬기려고 하자 그들을 꾸짖으면서 그 자리를 피해버린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업적도 공로도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알아주고 자신에게 나아오는 것에 대해서는 책망을 하고 그들이 바라보고 나아갈 분은 그리스도임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사도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도, 사도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선포한 것도 모두가 다 하나님께로,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었지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들의 관심은 오직 영생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생은 오직 그리스도안에서만 주어지는 축복이기에 그리스도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의 마음을 오늘 우리는 세례 요한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요한의 제자들이 자기 스승인 요한에게 불만을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들의 불만은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에는 자기 스승인 요한에게로 왔던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몰리는 것을 본 제자들의 불만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불만에 대해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다만 그를 증거하라고 보냄 받은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신랑의 친구로서 신랑이 신부를 취하는 것으로 이미 기쁨이 충만하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본문의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한마디로 말해서 '왜 요한 자신은 쇠하여야 하고 그리스도는 흥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성을 언급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자신은 그리스도의 뒤로 사라져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을 깊이 이해한다면 오늘 우리 자신들도 그리스도 앞에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분명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목사로서의 마음가짐, 성도로서의 마음가짐, 교회에서 봉사를 하든 전도를 하든 헌금을 하든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본문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먼저 31절에 보면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라고 말합니다. 위로부터는 하늘로부터라는 말로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으로부터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즉 세례 요한은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고 자신은 다만 땅에서 난자로서 땅에 속한 자이며 그러기 때문에 자신의 말은 땅에 속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간다는 불만을 보이는 제자들에게 예수라는 분과 자신과는 결코 동등될 수 없는 위치에 있음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자신을 예수님과 대조시켜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지만 자신은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한 자에 지나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32절에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라는 말을 보면 요한이 자신의 말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차이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셔서 직접 보고 들은 하늘의 일을 말씀하시지만 자신은 땅에서 난자로서 제한된 인간적 경험으로 알게 된 것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은 예수님과 자신을 철저히 대비시키면서 자신은 예수님과 비교될 수도 없고 동등될 수도 없는 존재임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신학을 연구하고 성경에 해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말하는 것은 제한된 체험과 깨달음 안에서 말할 뿐입니다. 즉 그가 직접 보고 들은 하늘의 일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누구든 자신의 말에 대한 부족함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완벽하며 자신의 복음이 전부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다만 깨달아진 복음을 전함으로서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으로만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자신이 말하는 신학이나 성경에 대해서 과신을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마치 내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 들여야 그것이 참된 신자가 되는 길이고 만약 반발한다면 신앙이 아닌 것처럼 여기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한 자로서 아무리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고 해봐야 결국 우리 자신의 깨달음과 체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그가 과연 성령을 힘입어서 복음을 전하느냐의 여부는 자신이 말하는 것을 과신하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며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를 힘쓰는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지 그의 말재주나 수준으로 구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이 높은 수준과 낮은 수준으로 구분될 리가 만무하지만 때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말재주에 의해서 복음의 수준을 구분하게 되는 경향이 많습니다. 유식한 문장을 사용하고 논리적으로 설명을 잘한 것에 대해서는 수준이 높다는 생각을 하면서 귀를 기울이는데 반해 평이한 문장을 사용하면서 전하는 말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귀를 즐겁게 하고 자기 지식의 만족을 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복음을 꼭 수준 높게 전해야 사람들이 그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32절에서 말하기를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라고 합니다. 그의 증거란 바로 위로부터 오신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늘의 일을 직접 보고 들은 분입니다. 그분이 증거하셨다면 그 복음의 수준은 땅에 속한 우리에 비해서 얼마나 높은 수준이겠습니까? 제한된 깨달음으로 전하는 우리에 비해서 완벽할 수밖에 없는 증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증거를 받는 이가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증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증거를 받는 이가 없었는데 하물에 땅에 속한 우리가 아무리 신학지식과 말재주를 다 동원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그 말에 설득을 당하고 그 말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겠느냐는 것입니다. 요한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증거해도 그 증거를 받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자신이 증거한들 그 증거를 받아들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즉 영생은 자신의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가장 중점으로 말하는 것은 영생입니다. 그러면서도 아무리 말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생소하게 들려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린 지금 그리스도를 믿고 있고 복음에 대해서 전혀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에 있어서 자신은 그 '아무도'에 해당되지 않는 것 같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거듭나는 것은 성령으로 되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힘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결국 믿음이나 영생에 있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이 증거하셨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은 '거듭남'으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결국 목사의 설교가 여러분을 구원시킬 수 없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목사의 설교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성령이 목사가 전하는 복음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붙드실 뿐입니다. 즉 목사는 전하는 자로서 그 할 일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성도는 결코 목사를 바라봐서도 안되고 목사의 사람이 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살아가는 목사라면 사람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가는 것을 오히려 기뻐할 것입니다. 그것으로 감사할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33절-36절을 보면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참되시다고 고백할 수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는 바로 그리스도의 증거를 받는 자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늘의 일을 직접 보고 들으신 분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증거하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의 증거를 믿고 받아들이는 자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이 오직 한분 참된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인을 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은 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참된 마음을 계시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 자신이 결코 그리스도를 따라갈 수 없고 동등되게 여김 받을 수 없는 이유이며, 무엇 때문에 자신은 예수님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며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인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참으로 높으신 분으로 보고 있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높으신 분으로 여겨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오신 그분이 증거하시고 말씀하신 것들이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고 보지도 못한 하늘의 일이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예수님에게 주셨고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영생이 예수님에게 있음을 알았기에 높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36절의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는 말씀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영생은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생을 위해서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아는 요한의 심정에서 생각해볼 때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향하지 않고 자신에게로 향했다면 오히려 그것으로 고민하고 염려하고 애통해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알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고 있었던 요한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의 재주로 사람을 영생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말재주가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믿게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 앞에서는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일 일 뿐입니다.

 

 

 

 

우린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한 자이며 땅의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앎은 참으로 빈약합니다. 완벽한 앎도 아니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일에 대해서 예수님이 증거하신 것을 받아들인 수준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앎에 대해서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이 말씀해주시기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 자신의 앎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만약 자신의 앎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게 되면 사람들을 자신의 앎에 머무르게 하려고 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말한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만이 마치 복음을 제대로 아는 것으로 인정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된 우리로서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난 아니요'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교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바라보게 하고 자신을 높이도록 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성도가 전도를 하고 마치 자신이 그를 전도한 것처럼 여기는 것은 금물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다는 것을 잊어버린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 오직 그리스도가 세워지도록 힘쓰십시오. 우리는 감히 그리스도만이 높임 받을 자리를 차지할 수 없는 자임을 잊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게 되는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십시오, 영생은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것이지 은석교회에도 저와 여러분에게도 없습니다. 우린 다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으로 만족할 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진실로 아는 신자입니다.

 

 

 

 

 

(16강) 4:1-10 사마리아 여인에게


본문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오신 내용으로서 여러모로 볼 때 3장에 등장하는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과 대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니고데모는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함께 한 자임을 고백합니다. 사실 니고데모의 이 고백은 거짓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의 고백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 때문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놀라운 이적을 행한 것을 보니까 당신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음을 안다는 고백입니다. 이러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심으로서 니고데모는 거듭나지 못한 수준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고, 거듭나는 것 역시 성령으로 되어진 것이고 성령이 하는 일은 사람이 알 수 없다고 하심으로서 믿음, 즉 하나님 나라를 보고 들어가는 문제 만큼은 사람의 힘으로 되어지지 않는 것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신 일이 4장에 등장하고 있는 것은 니고데모가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리스도와의 만나는 것에 대비해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와 만남으로서 창조되어지는 믿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믿음에 대해서 분명한 답을 내려야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의지에 의해서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서 믿음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창조되어진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 믿음이 있게 된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모두가 그리스도가 우리를 찾아오신 은혜로 되어진 것임을 기준으로 해서 믿음에 대해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4절에서는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단지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시기 위해서 사마리아로 통행하려고 하신 것으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신 것은 단지 갈릴리로 가시는 도중에 우연히 만난 사건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이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우연한 사건일 수 없습니다. 분명 사마리아 여인에게 있어서 예수님과의 만남은 예수님의 찾아오심으로 되어진 은총의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심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게 되어진 모든 것이 예수님의 은총의 사건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유대를 떠나시는 것, 갈릴리로 가시는 것, 도중에 사마리아로 통행하셔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신 것 모두가 오늘 우리들에게 믿음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유대를 떠나시고자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1절의 말씀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는 이 말씀은 당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요한을 두고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어떠한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요한을 보면서 '누구의 세례가 더 뛰어난가?'하는 두 세례에 대한 비교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유대를 떠나시는 이유로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바리새인들은 세례를 보면서 세례의 의미를 보지 못합니다. 세례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보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요한과의 세례를 비교하면서 누구의 세례가 뛰어난가를 비교할 뿐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관심이었습니다. 이러한 유대를 떠나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그들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고 사마리아 여인으로 하여금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게 하심으로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린 이러한 내용을 보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진 것은 결코 우리의 공로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결과로 되어진 것임을 굳게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은 서로 비교하거나 경쟁될 수 없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우리의 것을 내어놓고 믿음의 가치를 판단할 수 없는 것이고, 누구에게 더 많은 사람이 몰리는가를 보면서 능력을 비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무엇입니까? 5-6절에 보면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 시쯤 되었더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단지 사마리아의 지역적인 위치를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종교적 자존심이 있었음을 언급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유대인에게 성전이 있다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야곱의 우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지만, 자신들도 야곱으로 이어진 축복을 대대로 누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인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 있는 종교적 경쟁 관계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유대인 사마리아 모두가 자신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을 가지고 구원의 의미로 삼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을 기르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는 말을 하십니다. 이 말에 대해 사마리아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고 답합니다. 이러한 여인의 말에 대해서 예수님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마리아 여인이 자신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몰랐기에 '왜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는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인의 문제는 물을 달라고 하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몰랐다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로서 진심으로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이며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안다면 그분에게 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이고 생수가 무엇이며 생수를 필요로 하지도 않으며 생수를 주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알지도 못한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하나님을 믿는 일에 있어서 요셉이 준 땅이 있고 야곱의 우물이 있으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여겼습니다. 즉 믿음에 있어서 달리 필요한 것도 구할 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말씀하는 것은 여인의 문제가 무엇임을 드러내기 위함인 것입니디. 결국 예수님은 3장에서는 니고데모의 문제점을 드러내시고, 4장에서는 사마리아 여인의 문제를 드러내심으로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모두의 문제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깨달음으로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가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가 주시고자 한 것이 자신에게 없으면 안되는 참으로 필요한 것임을 알게 된다면 자연히 그리스도에게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아무것이나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주시고자 하신 것을 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수를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여인은 생수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에게는 야곱의 우물이 있고 그리심 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유대인처럼 달리 믿음을 위해 구할 것이 없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우리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서 보여지는 신앙의 문제점은 우리 자신의 문제를 보지 못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를 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찾기 때문에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 생수인데 정작 우리는 생수에 대한 목마름이 없는 것입니다. 대신 일순간 주린 목을 적셔주는 물에 집착을 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여러분, 주일이면 예배당을 찾아 예배드리고 있고, 성경을 보고 기도한다고 해서 신앙인이 다 된 것으로 여기면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것 뿐이라면 우리는 단지 예전의 유대인들의 어설픈 흉내를 내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요청해서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의해서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알아주지도 않는 희생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세상 누구 한사람도 십자가의 죽으심이 있어야 자신이 산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예루살렘도 아니고 율법도 아니고 성전도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생명이 성전에서 나오고 자신들이 철저히 지키는 율법에서 나오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구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영원한 생명에 눈을 두지 않고, 생명이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짐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예배당이 있고 목사가 있고 성경이 있고 예배가 있다는 것 등으로 인해서 정작 그리스도로부터 구해야 할 것은 구하지 않고 현재 자신에게 만족하는 것으로 그쳐버릴 수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는 예수님이 무엇을 주시고자 하는지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자신의 문제를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7강) 4:9-10 누구인줄 알았더면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아마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 상식으로 얼마든지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답을 할 수도 있고, '그리스도는 세상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분입니다'라는 답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성경적인 차원에서는 모두 맞는 답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막 8:29)라고 질문하신 것을 기억합니까?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 8:29)라는 답을 했습니다. 이 답은 우리에게서도 나올 수 있는 답입니다. 성경을 알고 있는 우리가 생각할 때 전혀 틀린 답이 아닙니다. 이것을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서기관과 장로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음을 당하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에 대해서 가르치시자 예수님을 붙들고 간하게 됩니다(막 8:31-32). 이러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는 수준의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주가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했다고 해서 그가 주님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들의 입술만의 대답이 아니라 삶에서의 대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신다면 그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으로서 증거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고백은 곧 삶과 연결되어지는 것이며 고백이 참되다면 그 고백은 삶에서 열매로 보여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고백은 우리의 삶으로 일치되어야 합니다. 만약 삶과 일치되지 못하는 고백이라면 그것은 죽은 고백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쉽게 답하고 또 알고 있다고 여기겠지만, 그 삶의 하나하나를 점검해 볼 때 자신의 입술로 하는 고백과 삶이 별개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안다'는 것 때문에 자신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바른 신앙고백을 하고 있으며, 또 그리스도를 안다고 착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해서 사마리아 사람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라고 반문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물 좀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그에게 생수를 구했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결국 사마리아 여인의 문제점을 지적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단지 유대인으로만 봤다는 것입니다. 자기 앞에 오신 예수님이 누구인줄 모르고 유대인으로만 보면서 사마리아 사람인 자신과의 관계에서만 예수님을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당연히 구할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서 전혀 구하지를 않고 있음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에게 구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그것을 '생수'라고 말씀합니다. 즉 바꿔 말하면 예수님은 생수를 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고, 또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임을 알고, 그 선물을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물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에게 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줄을 모르고 있으며 또 예수님이 선물을 주시는 분임을 모르기 때문에 구하지를 않습니다. 단지 유대인으로만 볼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극히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사전에 예수님이 누구인줄 알았던 것도 아니고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전혀 모른 상태이기 때문에 단지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인의 관계에서 말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소위 예수님이 누구인지 안다고 하는 신자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안다면 결국 어떤 모습이 보여져야 합니까? 본문 말씀대로 한다면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선물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은 생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구합니까? 하나님의 선물입니까 아니면 또 다른 무엇입니까? 예수님에게서 구해야 할 것을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뭔가 문제가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니고데모의 이야기와 대비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이었는데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예수님이 직접 찾아가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이 더 예수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누구인줄 몰랐던 사람으로 등장을 하지만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라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찾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니고데모에게는 거듭남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스스로 찾아가신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예수가 누구인줄 알았으면 구했을 것이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찾았을 뿐입니다. 그 역시 예수님에게 구하는 문제는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니고데모는 예수님에게 무엇인가를 구해야 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는 옛날부터 전해오는 철저한 신앙체계를 가지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것으로 이미 신앙에 대해서는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 때문에 예수님에게 구해야 할 부족한 것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은 말 그대로 눈에 보인 표적에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나는 말씀을 하신 것은 니고데모가 갖추고 있는 조건을 가지고도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언급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에 반해서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인과 같은 철저한 종교적 전통으로 무장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여인을 찾아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깨닫게 하시는 것을 볼 때 결국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구원에 대한 조건이 모두 포기된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우리 나름대로의 종교적 조건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는다면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알 수 없습니다. 입에서는 '주는 그리스도입니다'는 고백을 할지는 몰라도 그 삶에서 주님은 결코 그리스도로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여러분이 알고 계시는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누구인줄 안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구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 기뻐하고 감사할 것입니다. 그것이 삶에서 보여질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다만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 나옵니다. 혹 우리가 니고데모와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행하시는 어떤 표적을 기대하고 예수님을 찾는 것은 아닙니까? 내가 원하는 것이 있어서 내 발로 스스로 예수님을 찾는 것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사마리아 여인처럼 자신은 사마리아 사람이고 당신은 유대인이라는 관계에서 예수님을 만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아마 '나는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는데 어떻게 교회를 다닐 수가 있겠는가?'라는 식의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마리아 여인처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줄 알았다면 생수를 구했을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은혜를 주시는 분임을 알았다면 예수님의 은혜를 구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은혜를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은 은혜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입니다. 그분을 안다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죄를 안다는 것이고 자신의 죄를 알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구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로 인해서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분임을 안다면 우리가 예수님에게 구할 것은 분명해 집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가려주시고 용서하신 십자가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예수님을 제대로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줄 안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서 외면하거나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은 아는 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단지 성경적인 지식만 있을 뿐입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 자신에게 예수님은 누구신가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8강) 4:11-18 생수


10절에 보면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대로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은 생수를 주시는 분이라는 답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과 대화하는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사마리아 여인이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엇을 주시는 분인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처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알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는 것이 자기 스스로의 지혜에 의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람이 스스로 예수님에 대해서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셨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인간이 인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인식할 수 없기에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인식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인식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마리아 여인 스스로 자신과 대화하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스스로 인식하고 판단하는 그리스도라면 그것은 니고데모가 표적을 보고 판단하는 수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가 누구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십니까?

 

 

 

 

11절에 보면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수를 사마리아 여인은 단지 물로 이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에게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생수를 얻겠는가라고 반문합니다. 이것이 여인의 수준이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해의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인은 생수를 물로 이해를 했기 때문에 그러한 반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생수를 물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시각에서는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이해의 한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 범위 안에서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니고데모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을 때 니고데모는 '사람이 어떻게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날 수가 있는가?' 라고 묻습니다. 이것이 니고데모의 이해의 한계였던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인식의 범위에는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듭남을 영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니고데모나 사마리아 여인 모두는 예수님에 대한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수를 야곱의 우물과 비교해서 말합니다.

 

 

 

 

야곱의 우물이란 야곱 때부터 내려온 우물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의 우물이 자기들에게 있다는 것은 우리도 유대인만큼 종교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유대인과 경쟁하는 자존심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야곱의 우물을 언급한 것은 자신들에게 있는 귀한 전통의 우물에서 난 물보다 예수님이 주고자 한 물이 더 귀한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야곱보다 큰 자가 아니라면 당신이 주는 생수는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자기들에게는 예수보다 더 크고 위대한 야곱이 남긴 우물에서 난 물을 먹기 때문에 예수가 주는 생수는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뭔가 있다는 것이 예수님이 주시겠다는 생수를 거절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생수는 야곱의 우물에서 나는 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생수를 자신들이 마시는 물의 수준에서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미 귀한 물이 있기 때문에 당신이 주는 물은 필요 없다는 식의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인에게 물이 전혀 없었다면 예수님이 말씀하는 생수에 관심을 두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들에게는 물이 있었고 또 다른 물에 대한 필요성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세상적인 수준에서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그리스도가 주시는 것을 세상의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복이라고 말하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것이 풍족할 때 자신은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거하고 있다고 여길 것이고 결국 그런 사람이 은혜와 사랑을 구한다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을 주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십자가의 은혜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신자로서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생수를 야곱의 우물에서 나는 물과 비교하여 말하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절)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물의 차별성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는 먹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 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을 여러분은 이해할 것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 물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시 자신의 인식의 수준에서 반문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식과 이해를 총동원해서 하는 말이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절)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육신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목마르지 않고 물을 길러 오지도 않게 그 물을 달라고 합니다. 한번 마시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효능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 자신에게 가져오는 유익함에 대해서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대화를 보면 뭔가 변한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단지 유대인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구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에게 생수를 구합니다. 구하지 않는 자에서 구하는 자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나 생수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 수준에서 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생수를 육신의 편안함을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구하고 살아가지만 그 수준이 생수를 자기 육신의 편안함을 위한 것으로 이해하는 사마리아 여인과 같음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것을 자기 유익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주신다고 할 때 성령을 받으면 자신이 남들과 다른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서 성령을 구하기도 합니다. 은혜를 구하는 것도 역시 은혜가 주어지면 마치 자신의 일이 잘 될 것 같은 기대감을 가지고 구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말하는 여인의 수준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처음에는 예수님을 단지 유대인으로만 여겼던 여인이 이제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사람이라는 관계를 떠나서 자신에게 뭔가 주시는 분이라는 이해 아래 구하게 되었다는 것은 여인이 점차적으로 예수님을 알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신자가 예수님을 알아 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은 단지 '착한 사람' '성현' 정도로만 인식하고 그에게 뭔가 구하면 된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에게 구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물론 그때는 무엇을 구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무지한 상태입니다. 단지 우리의 편함을 생각하며 구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생수를 단지 한번 마시면 목마르지 않는 신비한 효능이 있는 물로 이해하는 여인의 수준인 것입니다. 영적인 목마름이 없는 상태입니다. 여인이 생수가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한 것은 영적인 목마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신앙하는 일에는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에게도 내세울 것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우물이 있었고, 또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에서 예배한다면 자기들 역시 예배하는 산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유대인이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필요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처럼 자기들도 그러한 조건은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유대인이 영적인 목마름을 가질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사마리아 여인 역시 유대인과 같았던 것입니다. 사마리아는 철저하게 신앙에 있어서 유대인의 흉내를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유대인이나 사마리아 모두 같은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자신들에게 있는 것으로 신앙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의 흉내를 내면서 신앙의 경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이기에 영적인 목마름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면서 신앙을 경쟁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자신이 흉내냄으로서 스스로 하나님을 철저히 믿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적인 목마름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신자란 이러한 수준에서 벗어난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신자가 아니겠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된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가르치시듯 본문의 말씀으로 오늘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안다고 하는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있는 것,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구하는 신자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구해야 한다는 것은 '구하지 않으면 안주신다'는 차원의 얘기가 아니라 주시고자 하는 것과 구하는 것이 일치된다면 결국 같은 마음이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과 같은가를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된 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남편이 다섯이라는 것을 드러내심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물 길러 오지 않게 생수를 달라는 여인에게 물을 주겠다 안주겠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생수가 무엇인줄 모르는 여인에게 생수를 주겠다 안주겠다는 말씀을 하실 수는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여인에게 생수가 무엇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씀에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8절)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여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시작으로 해서 결국 예수님이 오리라고 하신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남편에게 다섯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여인의 수치를 드러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라고 말할 정도로 한 남자로 만족하지 아니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평소에 자신의 남편이 다섯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수치가 예수님에 의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수치가 드러났을 때 여인은 더 이상 야곱의 우물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야곱의 우물이 있고 그 물을 마시고 살면 뭐합니까? 문제는 자신은 남편이 다섯이나 되는 수치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점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있는 것을 자랑합니다. 자랑거리가 있다는 것으로 인해서 자신의 수치를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수치를 드러내십니다. 우리의 본질이 어떤가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고 살아가야 할 사람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에게서 우리가 구해야 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기보다는 다른 것에 목말라하면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은혜와 긍휼없이는 살아도 이것 없이는 못살겠다고 갈급해하는 다른 무엇인가가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생수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안다면 세상 것을 가지고 부끄러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상은 비록 돈이 없고 남들보다 적은 소유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며 살아가지만 신자는 세상 것이 적음을 가지고 부끄러워하는 것으로 자신의 믿음 없음을 깨닫고 그것으로 부끄러워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앞에 두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때 신자라고 하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돈을 사랑치 말라'는 말씀 앞에서 우리는 부끄러울 수밖에 없으며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 앞에서 우리는 고개가 숙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우리가 한 것을 내세우며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이 남편이 다섯이라면 우리도 그 여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 역시 세상에 많은 남편을 두고 살기 때문입니다. 신자로서 예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의지하고 산다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너무 많은 것에 우리 희망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 목말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와 긍휼과 자비하심에 대해서 갈급함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이러한 우리의 수치를 발견케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떻게 사는가를 생각하십시오. 말씀대로 살아가는지, 섬기면서 살고 사랑하며 살고 봉사하며 살고 희생하며 살아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 우리의 부끄러움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나는 목사다'는 것이 사라집니다. '나는 장로다'는 것이 사라집니다. 오직 남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수치스럽고 악한 죄인된 자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럴 때 주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에 갈급해 할 것이고 십자가에 피 흘리신 그리스도를 원할 것이 아닙니까? 바로 그에게 그리스도는 생수가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볼 때 그것을 가려주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이 참으로 귀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에게 구할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아는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위해서 여러분 자신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부끄러운 자인가를 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것으로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며 그리스도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참된 신자입니다

 

 

 

 

 

(19강) 4:19-26 신령과 진정으로


현대 교회에서 예배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배가 하나님을 신앙하는 행위의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신앙인의 증표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는 목사들은 '어떻게 하면 교인들의 신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예배를 드릴까?'에 관심을 두고 궁리를 하기도 합니다. 예배의 순서를 이리저리 바꿔보고 다른 교회가 하고 있는 예배를 참고하기도 하고, 뭔가 교인들의 마음에 다가갈 듯한 새로운 순서를 만들기 위해서 고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기존의 예배가 너무 틀에 매어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게 되고 결국 틀과 형식을 탈피한 새로운 방식의 예배를 만들어 낸 것이 '열린 예배'입니다. 결국 교회가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예배를 만들어내는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의 바탕에는 '어떤 식의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예배는 예배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교회가 모여서 드리는 예배에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따로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배의 순서나 그 형식을 보고 받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순서를 어떻게 정하든 사도신경을 하든 하지 않든 주기도문을 하든 하지 않든 그러한 것이 예배의 정당성의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배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예배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를 먼저 정확히 판단해 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할 것입니다.

 

 

 

 

예배 없는 교회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니 예배하지 않는 신자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전에 먼저 생각할 것은 예배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배와 동일한 것인지 부터 점검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예배 없는 신자는 신자가 아니다'는 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예배는 과연 어떤 것입니까? 이것을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배워보겠습니다.

 

 

 

 

24절에 보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예배입니다. 즉 신령과 진정으로 하지 않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는 것은 많이 들어본 말씀일 것입니다. 또 교회에서도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하지만 강조하는 것만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는가를 생각해본다면 그렇지 못하다는 답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신령과 진정을 기존의 예배와 연관지어 생각합니다. 주일이면 예배당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에 신령과 진정을 집어넣으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된다는 생각인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신령과 진정을 인간의 정성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배에 대한 인간의 정성은 예배 시간 늦지 않기, 예배 때 조용하기, 다른 생각 안하기, 근심 걱정 안하기, 설교 때 졸지 않기 등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본문에서도 신령과 진정을 그러한 의미로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는 생수에서 예배로 이어집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수를 육적인 차원에서 이해합니다. 즉 생수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라는 예수님의 말을 듣고 여인은 그 물만 있으면 물 길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생수를 원하게 됩니다. 육적인 차원에서 생수를 원하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갑자기 남편 이야기를 꺼냄으로서 남편이 다섯이라는 여인의 본질을 끄집어냅니다. 도대체 생수와 남편이야기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일단 여인이 원하는 생수는 예수님이 주고자 한 생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인으로 하여금 참된 생수를 구하는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남편의 이야기를 끄집어 낸 것입니다.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라는 자기 본질을 감추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씀에 '남편이 없다'는 답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남편이 다섯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드러난 자신의 본질로 인해서 놀라게 됩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자신과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같은 민족이 아닙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남편이 다섯이라는 자신의 죄된 본질을 밝혀낸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여인은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19절)는 고백을 합니다. 여인은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자라는 시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여인의 시각 변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접근했을 때 단지 유대인으로만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이 생수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을 때에도 다만 신비한 물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으로만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감추어진 본질이 드러남으로 인해서 유대인으로만 보였던 예수님이 선지자로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이해는 자신의 추한 본질에 대해 철저히 인식함으로 되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여인의 부도덕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남편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여인의 추한 본질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보는 여인은 이제 예배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20절)는 여인의 질문은 한마디로 예배하는 장소에 대한 질문입니다. 어떤 장소에서 예배하는 것이 옳으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인이 갑자기 예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드러난 자신의 죄 때문인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의 죄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선지자 앞에서 이제 필요한 것은 죄 씻음 문제인 것을 여인이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씻기 위한 예배를 생각하게 되고, 때문에 우리는 조상 때부터 이산에서 예배를 드렸고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과연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죄 씻음을 받을 수 있는가를 질문하게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인이 말하는 이 산이란 그리심 산을 말합니다. 아마 사마리아 여인은 아브라함과 야곱이 각각 그리심산 세겜에서 단을 쌓았던 것을 말한 것 같습니다(창 12:7, 33:20). 즉 사마리아에는 조상 때부터 예배하던 그리심 산이 있고 당신들에게는 성전이 있는데 어떤 장소에서 예배하는 것이 좋으냐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것이 자신의 죄의 본질을 알게 된 여인이 예수님에게 질문한 겸손함입니다.

 

 

 

 

여인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21-24절)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한마디로 사마리아의 종교 체제, 즉 그리심 산과 유대인의 종교 체제, 즉 예루살렘 성전을 모두 거부하는 말씀입니다. 즉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종교체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구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른다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종교 체제와 상관없이 아버지께 예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그리심 산 없이도 아버지께 예배하게 되고, 예루살렘 성전 없이도 예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예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고 말씀합니다. 거룩한 장소와 지역에 의존한 예배가 아니라 그것과 상관없는 예배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는 어떤 것인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일단 우리는 예배라고 하면 정해진 장소에 함께 모여서 목사의 인도 아래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설교 듣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설사 혼자 예배드린다고 해도 성경보고, 기도하고, 찬송부르는 것이 있어야 예배가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배는 주일에 예배당에 모여서 목사가 집례하는 예배에 비하면 한 수 낮은 예배라는 생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즉 주일 예배가 정식 예배고, 혼자서 하는 것이나 가정에서 하는 것은 간이 예배라는 의식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생각에 대해서 예수님은 아니라고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 씻음 받기 위해서는 주일에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아니면 가정에서 나 혼자 예배 드려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했다고 할 때 '예배당에서도 말고 가정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른다'는 답을 하신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예배가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이고 오늘 우리가 이 시간 알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왜냐하면 23절의 말씀대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참된 예배이며 하나님은 이렇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신자에게 있어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2절을 다시 보면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배에 있어서 예배의 대상을 아느냐 모르느냐를 문제시하는 말씀입니다.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고 예배한다면 그것을 참된 예배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배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모르는데 단지 예배의 형식과 의식을 행했다고 해서 예배로 받아들여진다면 하나님은 단지 인간에게서 예배라는 의식만을 받으신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나 미가 선지자 등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제물이나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고 예배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것임을 선포하지 않았습니까? 예배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를 아느냐로 시작합니다. 결국 신령과 진정은 아버지를 아는 것으로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22절의 말씀은 사마리아 사람은 아버지를 모르고, 유대인은 아버지를 안다는 뜻입니까?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의 예배는 잘못된 것이고 유대인의 예배는 참된 것이라는 말씀입니까?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의 예배는 인정하지 않으시고 유대인의 예배는 인정하신다는 답이 됩니다. 과연 그럴까요? 과연 유대인이 아버지를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요 8:19절에 보면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아버지를 안다는 것은 결코 예수님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즉 예수님을 거부하면서 아버지를 안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른다면 아버지도 모르는 것이고, 예수님을 안다면 아버지가 누구신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그러한 그들이 과연 아버지를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결론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모른 유대인들은 아버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22절에 말씀하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말씀은 무엇이며 '우리'는 또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이것은 참된 구원을 가져다 주는 유대인이 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참된 구원은 민족적 유대인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참된 유대인, 즉 예수님이 가져다 준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한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다'는 말의 '우리'에 해당되는 사람은 한마디로 말해서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알고 아버지를 아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예수님의 '우리'에 해당되는 참된 유대인이며 이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신령과 진정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아는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가에 대한 문제는 앞서 말한대로 '예수님을 아는가?'로부터 시작해야 마땅합니다. 예수님을 제쳐두고 무턱대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면 유대인들처럼 잘못된 하나님에 대한 생각에 머무르게 되고 결국 정작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은 하나님을 안다는 착각에 빠져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우리의 죄 때문에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피흘리시고 죽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흘리심을 아는 것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자신의 죄의 본질에서 예수님의 피흘리심을 알게 되고 결국 자신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찾아가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마리아 여인의 남편 문제를 끄집어 내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죄 문제에서 예수님을 유대인이 아니라 메시야로 볼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25절에 보면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26절)고 하십니다. 결국 여인은 자신과 대화하는 유대인이 메시야이며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의 본질을 보고 예수님을 보는 자는 예수가 자신을 죄에서 건질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 산도 예루살렘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찾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의를 자랑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예수님을 찾아 나오면서 감히 자신의 행함을 내세우지 못합니다. 아니 처음부터 자신의 행함에 전혀 의의 의미를 두지 못합니다. 자신의 행함에 의의 의미를 둔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무시하는 것임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 어떤 자기 행함도 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행하심만 바라보고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게 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령과 진정을 단지 예수님을 생각하면 다 되는 것으로 여기면 안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있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다면 그 생각과 마음은 행함을 인도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생각과 마음으로 행함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신자는 예수님이 사셨던 삶과 그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낮아지신 길을 가신 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 역시 자신을 낮은 자로 여기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는 길을 가게 됩니다. 이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고 성령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령과 진정이 예배당이나 의식과 상관이 없다고 할 때 그렇다면 '우리가 모여서 예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과 장소를 무시하고 초월하는 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교회가 예수님에게 나아가는 통로이거나 조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된 성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증거를 보이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함께 모여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힘이 되고 위로가 되기 위해서 모입니다. 그리고 함께 한 성도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무능함과 나약함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에 성실해야 합니다. 시간도 잘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예배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폐가 되지 않기 위한 사랑 때문입니다. 교회로 모여서 내 감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형제를 대하고 섬기는 법을 배우고 훈련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며 산다면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은 여러분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함께 하는 형제들에게로 확산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우리의 사랑으로 하나님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이 있다면 이웃에게로 흘러갈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십시오.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살아가는 지혜를 구하고 배우십시오, 이런 마음으로 모일 때 찬송과 감사가 노래되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20강) 4:27-38 예수님의 양식


지난 시간에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신의 감추어진 죄를 알게 된 사마리아 여인이 예배를 언급한 것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여인은 자기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심 산이 있고 유대인에게는 예루살렘이 있는데 어디서 내 죄를 위해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이것이 자기 죄를 알게 된 여인이 예수님에게 보인 반응이었습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죄의 해결책은 예배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곧 구약의 율법적인 수준입니다. 내 쪽에서 종교적인 행위를 함으로 인해서 죄가 해결될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얻을 수가 있다고 믿는 유대인과 다를 바가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어느 산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즉 영으로 예배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여인은 그러한 예배를 드리려면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분이 와야 가능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가 그로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진리에 대해서 무지했던 여인이 점차 점차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뭔가 하나씩 여인의 마음을 가리고 있던 것이 벗겨짐으로서 결국 모든 것을 알게 되고 보게 되는 여인으로 바뀌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8-30절에 보면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이 여인을 찾아오셨을 때의 반응과 전혀 다른 바뀌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여인은 예수님을 단지 유대인으로 봤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찾아온 것에 대해서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찾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예수님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에게는 조상적부터 내려오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고, 또 조상이 예배했던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인 삶에 있어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교인들에게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찾는 교회가 있고, 예배가 있고, 기도가 있고, 찬송, 헌금, 구제 등등의 많은 종교적인 행위가 있기 때문에 사실 예수님이 날 찾아오셔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혹 예수님이 필요하다면 여인이 구하는 생수 수준입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말씀하시자 여인은 다시는 물을 길러 오지 않도록 그 생수를 달라고 합니다.

 

 

 

 

이 여인처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주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도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한 무지함으로 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복을 주겠다'라고 말씀하면 '예, 제발 돈 때문에 고생하지 않도록 복을 좀 주십시오'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으로만 되어지는 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서 오신 분임을 잘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만 우리의 죄가 해결되어진다는 것에도 의의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죄인된 인간은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영원히 의와 멀어진 채 사망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서 용서되는 죄를 사마리아 여인처럼 '어디에서 예배할까요?'로, 즉 인간의 종교 행위를 내세워서 해결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자리에 교회, 예배, 기도, 이런 것들이 자리함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신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자기의 모든 행위를 버리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며 나의 구세주입니다'라는 반응을 보일까요? 아니면 '예수님 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라는 반응을 보일까요? 물론 후자일 것입니다. 결국 이들의 믿음은 자신의 행위를 믿는 것이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찾아오신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그리고 유대인들이 그들 속에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 이 모두가 자신들의 구원에 필요한 것을 모두 스스로 갖추고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구원에 필요한 조건을 이미 갖추고 있는 이상 구원을 위해서 오셨다고 하는 예수라는 사람이 필요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여인이 자신을 찾아온 유대인이 곧 메시야고 그리스도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가서 그리스도가 오셨음을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대하면서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자는 전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오신 이유가 여인으로 하여금 동네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전도하도록 하기 위해서이겠습니까? 물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하겠지만 본문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은 한 개인이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건에 있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많은 교인들은 믿음을 자신으로부터 출발시킵니다. 이것이 믿음의 잘못된 시작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로부터 출발한 믿음은 결국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지키고 유지하고 자라게 하려는 시도만을 이끌어 낼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여인이 예수가 메시야이며 그리스도시라는 지혜가 있게 된 것이 여인의 노력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인이 스스로 예수님을 찾았습니까? 오히려 찾아오신 예수님을 밀쳐내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여인을 떠나지 않으시고 결국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십니다. 이렇게 볼 때 여인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여인 스스로 믿기 위해서 노력하고 수고한 결과가 아니라 예수님이 여인을 찾아오셔서 수고하시고 열심히 일하신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믿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할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4:3-4절을 보면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로 통행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를 통하는 것이 가까운 길이라고 해도 일부러 돌아다녔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겠다는 것이 갈릴리로 가는 가까운 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것은 우연이라는 답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연히 길을 가다가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했다는 이상한 구원론이 되버리는 것입니다. 구원이 분명 선택으로 되어지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것은 의도적입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는 말씀은 길의 멀고 가까운 문제가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의도로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찾아오심으로서 믿음이 있게 되었다면, 오늘도 역시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심으로서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여인으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하시고 자신의 죄의 본질에서 예수님을 보게 하신 것처럼 오늘날 역시 예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시고 우리의 죄를 알게 하시고 죄의 자리에서 주님이 누구신가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 역시 주님이 찾아오셔서 수고하시고 일하신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믿음에 대해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우연히 어쩌다보니 교회 다니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든가, 친구가 나를 전도해서 교회를 다녔다는 식으로 예수님의 수고와 열심을 빼버린 채 믿음을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게 된 지혜를 갖게 된 것이 과연 쉬운 일이며 가벼운 것입니까? 여인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게 된 것은 여인이 가지고 있었던 기존의 생각과 사고방식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격렬한 토론을 하지 않은 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자신을 깨우칩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쉽게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기존의 생각을 바꾼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더군다나 세상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에 어긋나는 것을 진리로 여기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여인도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단번에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자신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드러내었으며 결국 자신의 죄가 드러난 현장에서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주님이 이루신 것입니다. 여인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안 후 바뀐 것은 무엇입니까? 물동이를 버려두고 사람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 것입니다. 여인이 물동이를 버린 것을 가지고 성도도 물동이를 버려야 한다는 요구를 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물동이를 버릴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물동이를 버린 것을 말하는 것은 예수님을 모를 때의 여인과 알고 난 후의 여인의 대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여인이 물동이를 버린 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여인에게 승리하신 결과가 물동이를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동이를 버린 것은 예수님에 대한 굴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물동이가 중요하지 않은 인생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인과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로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구해와서 예수님에게 잡수실 것을 청합니다(31절).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32절)는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은 이 말을 '누군가가 먹을 것을 갖다 드린 것이 아닌가?'로 오해를 합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양식은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떡 외에는 없었습니다. 즉 떡 말고 다른 양식이 있을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른 양식이 있다고 하자 누군가가 양식을 갖다 드린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다른 양식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이것을 아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육신의 배고픔을 채워주는 양식이 아닌 다른 양식이 있었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 역시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양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물동이를 버린 것이 곧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34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다른 양식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아버지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뜻은 무엇이고 아버지의 일은 무엇입니까?

 

 

 

 

요 6:38-40절에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신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시 살리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가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고 예수님에게는 이 일이 곧 양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시고 그를 만나 말씀하시며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신 그 모든 것이 곧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었으며 예수님의 양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나에게 다른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여인을 만나시고 그를 믿게 하신 일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양식이란 무엇입니까? 쌀 , 보리, 밀, 이런 것들을 양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물론 세상은 그러한 것을 양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양식과 음식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양식을 가지고 만든 것이 음식입니까? 이것 역시 요리라는 차원에서는 맞는 말이겠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양식과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양식은 한마디로 말해서 배고픈 자를 배부르게 해주는 것입니다. 배고픔을 채워주는 것, 이것을 양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배고픔이 과연 먹을 것에만 있습니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먹을 것만으로는 배부름을 얻지 못합니다. 먹을 것으로 육신은 배부를지 언정 그 욕망은 언제나 배고픈 상태지 않습니까? 돈에 배고프고, 출세에 배고프고, 좋은 집에 배고파하는 것이 사람이며 그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 돈을 벌고 출세하려고 발버둥을 치지 않습니가? 결국 이들에게 있어서 양식은 음식만이 아니라 돈이며 출세며 남들이 부러워 할만한 세상의 좋은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 모두 이 양식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제자들 역시 이런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한 다른 양식을 육신의 배고픔을 채워주는 먹을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세상이 알 수 없는 다른 양식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에게는 먹을 것이 필요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육신으로 오셨기 때문에 먹을 것이 필요한 분이었습니다. 다만 세상이 살아가는 것처럼 욕심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 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다른 양식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양식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배부름은 곧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이었고 예수님을 믿는 신자 역시 이러한 삶이 되어지는 것이 마땅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게 된 여인이 물동이를 버렸다는 것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물을 길러 올 필요가 없게 하는 생수로 이해한 수준에서 벗어난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졌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알게 된 신자는 그 믿음으로 인해서 물동이를 버린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양식의 개념이 다르기 때문에 추수의 개념 역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35-36절에 보면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렀다고 하는 것은 세상이 생각하는 양식에 대한 추수를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추수는 바로 지금입니다. 세상의 양식을 추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추수는 하나님이 주신 자를 잃어버리지 않고 거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구원이 곧 예수님의 추수인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구원에 이르게 된 것, 이것이 예수님의 추수였던 것입니다.

 

 

 

 

추수는 알곡은 거두고 쭉정이는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추수되었다는 것을 알곡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신자에게 복은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를 알곡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추수에 참여한 자가 된 것이 신자로서 말할 수 없는 복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에 들어가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을 추수하신 예수님의 추수에 참여하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예수님의 일에 참여하게 된 것이고, 예수님의 양식이 여인에게도 양식이 되어진 것입니다.

 

 

 

 

신자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의 생각을 바꾸시고 알곡으로 추수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수고하시고 열심으로 일하신 열매입니다. 그러면 신자는 알곡으로 추수된 것으로 끝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추수에 참여한 삶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어떤 삶입니까? 주님이 십자가 지신 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섬김과 희생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서 보여져야 할 삶이며 추수하는 일꾼입니다. 이것으로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는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양식입니까? 육신을 위해서 먹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먹을 것을 위해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욕심의 배부름을 위해서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신자의 양식은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뜻을 생각하고 그 뜻을 이루는 일에 참여하는 것을 양식 삼고 살아가야 할 사람입니다. 인생의 중요한 것이 바뀐 것입니다. 여인이 물동이를 버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에는 예수님의 찾아오심과 수고하심이 있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우연이 믿게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의 수고로 믿는 자 되었음을 감사하시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여인이 물동이를 버린 것에서 다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양식이 무엇이었는가를 깊이 묵상하시고 신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여러분의 마음에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21강) 4:39-42 말씀을 인하여


믿음은 지식이 아니라 앎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앎은 지식적인 이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삶에서 그분이 어떤 분인가를 지식이 아닌 가슴으로 발견하고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 지식이 많아지는 것과 믿음과는 별개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지식이 많아짐으로 그만큼 믿음이 자란다면 성도는 믿음을 위해서 열심히 성경공부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믿음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전문으로 성경을 공부한 목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것을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3장과 4장을 살펴보면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3장과 4장에서의 등장 인물은 각기 상반된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3장의 니고데모는 성경적인 지식이나 신앙적인 면에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한 위치에 있는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엘리트라고 불리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에 있어서는 전혀 의심할 여지도 없는 사람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반면에 4장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볼 것 없는 가장 밑바닥의 사람입니다. 유대인이 개처럼 취급하는 사마리아 사람에다가 무시 받고 살아가는 여인의 몸이었으며 더군다나 창녀나 다를 바 없는 행실을 가지고 있던 여인입니다.

 

 

 

 

이러한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을 세워놓고 '누가 천국 가겠는가?'라고 물으면 과연 누구 편을 들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어떤 판단을 내리겠습니까? 물론 천국 가는 조건이 무시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도 없고 또 니고데모처럼 엘리트여야 한다는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니고데모다' '사마리아 여인이다'는 답을 우리 스스로 내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두사람을 놓고 '누가 천국갈 가능성이 있겠는가?'라는 물음을 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우리의 생각은 니고데모에게로 기울어지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믿음에는 조건이 없다'고 하면서도 믿음을 받아들일 가능성을 두고 구분을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가령 평소 행실이 나쁘고 도둑질을 일삼는 사람과 아주 착한 사람을 두고서 '그 두 사람 중 누가 예수님을 믿기가 쉽겠는가?'라고 묻는다면 평소 배운 지식으로는 '모두가 악한 죄인인데 믿기가 쉬운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라는 답을 하고 있을지라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래도 도둑질을 일삼는 사람보다는 착한 사람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기가 더 쉽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자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기가 쉬운 사람이 있고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은 어떻게 말해야 하는 것입니까? 물론 믿기가 어려운 사람이 믿게 되었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믿기가 쉬운 사람이 믿게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기 보다는 애당초 사람의 본 바탕이 믿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4장은 믿음에 대한 이러한 오해가 잘못된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3장에서는 믿음에 대해서는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누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 질문을 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왜 갑자기 하나님 나라를 누가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 언급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믿음에 대한 니고데모의 사고방식이 어떤가를 이미 아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오직 성령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믿음은 오직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믿음의 엘리트에게 '믿음은 사람의 힘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는 말씀을 하심으로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신감을 모두 무너뜨려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로 가십니다. 그리고 여인을 만나십니다. 그것도 행실이 아주 나쁜 여자를 말입니다. 비록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해도 동네에서 존경을 받는 착한 사람을 만나시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다섯이라고 할 수 있는 창녀 같은 행실을 가진 여인을 만나서 그 여인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임을 보여주는 기적의 사건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을 받지 않을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는 거듭남을 말씀하심으로서 믿음은 오직 성령으로 되어지는 것임을 가르치시고, 믿음에 대해서는 조금의 가능성도 없이 보이는 사람은 말씀을 통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심으로서 결국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되어지는 것임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조건이 믿을 자와 믿지 못할 자로 구분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구분은 하나님이 택한 자냐 아니냐로 구분되어질 뿐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는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찾아가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두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제자들이 알지 못하던 예수님의 양식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그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기 위해서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찾아간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유대인이 왜 나에게 말을 거느냐?'라고 하면서 거부했습니다. 그러한 그가 결국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물동이도 버려둔 채 동네로 뛰어가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 것입니다.

 

 

 

 

스스로 믿은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심으로 인해서 믿게 되어진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이들이 바로 예수님에 의해서 거두어진 알곡인 것입니다. 처음부터 알곡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알곡이 되어져 추수되어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고 예수님으로 되어진 일입니다. 이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조건을 보고 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조건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고전 1:27-28절을 보면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조건이라는 것들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오셔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심으로서 니고데모를 부끄럽게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니고데모만이 아니라 당시 제자들까지 부끄럽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으로 하여금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한 그 일이 우리가 생각할 때 아무것도 아닌 방법으로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인을 만나서 하신 일은 단지 대화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여인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 머리에 손을 대시고 안수를 하셨다거나, 천사를 보여주셨다거나, 놀라운 이적을 보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믿게 하는 정도의 일은 특별한 이적을 행하지 않고 다만 대화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말씀만 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보다 더 나쁜 사람은 말로만으로는 안되니까 다른 특별한 이적을 보여서 믿게 하시는 것입니까?

 

 

 

 

믿음은 뭔가를 본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적을 목격함으로서 믿음이 있어진다면 아마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만큼 믿음이 좋은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이 믿음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거두기 위해서 수고하실 때 제자들은 다만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양식을 구하러 다녔습니다.

 

 

 

 

사람들은 꿈에서라도 뭔가를 보면 믿음이 더 자랄 것 같은 생각을 가지지만 그것은 믿음에 대해서 대단한 오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꿈에서 뭔가를 봄으로서 믿는다면 그 사람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아니라 꿈에서 뭔가를 본 자신을 믿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꿈을 꾼 자신의 경험을 의지하고 경험을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본문을 다시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39-42절)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된 여인이 동네로 들어가서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고 증거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예수라는 사람이 마치 족집게 점쟁이처럼 내가 어떻게 행하고 살았는지 모든 것을 다 알더라'면서 예수님의 신비한 능력을 증거한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여인이 증거한 것은 인간의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증거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능력이 있는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가 아니냐를 증거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만난 자와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고 단지 자기의 경험만을 가지고 믿는 자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전 처음 본 여인의 행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분명 신비한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자칫 잘못하면 자신이 경험한 신비한 능력을 의지해 버리는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행실을 다 아는 예수님이 신비하게 보여질 수 있었지만 여인은 예수님의 신비한 능력을 증거한 것이 아니라 신비한 능력이 있는 그가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알고 있는 신비함에 심취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알고 있는 것을 보니까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은 신비한 능력이 있으니까 그분이 그리스도다라는 것을 증거를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행실을 능히 아실 수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 차원에서 증거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만난 자로서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서 행해지는 대개의 간증과 다른 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행해지는 대개의 간증은 한마디로 말해서 자신이 경험한 경험을 자랑하고 내세우는 것입니다. 기도해서 암이 나은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내 암을 낫게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은혜요 능력이다. 여러분도 기도하라. 그러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식으로 하는 것이 간증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암이 나았다는 신비한 경험을 강조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암이 나은 신비한 이적 뒤에 가려져 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간증은 예수님을 증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가리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만난 자는 어떠한 간증을 하게 될까요? 그리스도를 만난 자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고 높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암이 나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병원에서도 포기한 암이 나은 것을 보니까 역시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암을 낫게 한 그분은 바로 우리의 생명까지 주관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만난 신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증거입니다.

 

 

 

 

여인이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끝난 것입니까? 신자가 누군가에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그가 예수님을 믿은 것으로 어느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모든 일이 마무리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본문에서는 아주 중요한 내용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인의 증거를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보인 반응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과 이틀을 유하십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왜 예수님에게 자기들과 함께 유해주기를 원했을까요? 그냥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까 믿는자로서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서였을까요? 이것은 예수님이 유하시면서 무엇을 하셨느냐로 알 수 있습니다. 41절을 보면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동네에 유하시면서 말씀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결국 여인의 증거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말씀을 듣기를 원해서 예수님이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볼 때 믿음은 신자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의미는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항상 그리스도를 알고 싶어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기는 싫어하고 그 마음이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져 있다면 과연 그러한 상태를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믿음이 있다는 것은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인생에서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이 있는 자를 누가 말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아도 자연히 그 마음이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다가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를 더 깊이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자들이 여인에게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고 말합니다. 이들의 이 말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자신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된 것은 여인의 말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친히 그리스도로부터 말씀을 들음으로서 예수가 세상의 구주이신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까?

 

 

 

 

이것은 의도적으로 여인의 증거를 무시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예수가 세상의 구주이신 것을 믿게 되었기 때문에 믿음은 곧 그 누구의 힘이나 말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을 인하여 되어짐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나는 목사의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하여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는 이것이 바로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진 자의 증거인 것입니다.

 

 

 

 

믿음은 믿음이 있는 자를 항상 그리스도에 대한 앎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고 싶어하는 열망으로 인도해 가는 것이 곧 믿음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라고 말하기가 곤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다' 라는 말을 함으로서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것은 '예수 믿으라' 는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모든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로 되어졌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라고 해놓고 '목사님의 은혜로운 설교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의 은혜로운 설교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에 있어서 목사의 설교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목사의 설교는 다만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려주는 것이지 믿게 하는 분은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해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목사의 설교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되어짐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우리의 논리와 지식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아무리 성경을 잘 풀이하고 논리적으로 설교를 잘한다고 해도 목사의 설교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하여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인하여 되어진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 말씀으로 나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의 증거로 인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어지고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게 하고 말씀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결국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되어진다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구주이심을 진심으로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되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여러분을 믿게 하셨습니다. 믿음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알고 싶은 마음으로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싶은 마음으로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소위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이, 성경을 바르게 알고 있다고 하는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싶은 마음으로 말씀을 대하려고 합니까? 어느 누구에게든지 그리스도로 되어졌음을 증거합니까? 말씀으로 되어졌음을 증거합니까? 자기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했던 여인에게 한 사마리아 사람들의 말을 마음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자에게서 보여지는 참된 증거입니다.

 

 

 

 

인간적 시각에서는 도저히 믿음의 가능성이 없는 여인이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되어진 기적입니다. 이 기적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음으로 인해서 지금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세상의 구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증거할 것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되어졌음을, 말씀으로 인하여 되어졌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목사의 말도 아니고 그 누구의 수고도 아니고 오직 말씀으로 인하여 되어졌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만난 자의 증거입니다.

 

 

 

 

 

(22강) 4:43-54 믿음 없는 이유


신자가 신앙하는 하나님은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을 보이는 것을 근거해서 믿을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에게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고 말한 것을 보면 이 여인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행위로서의 예배를 눈에 보이는 그리심산이나 예루살렘의 성전을 근거 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의 말에 대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4:24)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은 영이시다'로 시작합니다. 즉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눈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현대 교회에서 신앙의 문제를 모두 눈에 보이는 것을 근거로 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배 방법의 개선과 변화 등을 통해서 좀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겠다는 의도 자체가 영이신 하나님을 영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근거해서 예배하려는 사마리아 여인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1절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합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믿음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눈으로 확인되어지는 믿음은 믿음의 열매이지 믿음 자체는 아닙니다.

 

 

 

 

그런데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보이지 않는 믿음으로 말한다면, 결국 인간이 바라는 것의 실상을 눈에 보이는 것에서 찾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역시 보이지 않고 볼 수 없는 믿음이라면 이 또한 눈으로 보이는 것을 내세워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증거로 삼을 수는 없다는 얘기가 됩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믿음이라면 믿음이 있는 자는 자신이 바라는 것의 실상을 이미 보고 있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믿음이라면 믿음이 있는 자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증거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있는 자는 바라는 것들을 보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눈으로 보고 확인하기 위해서 발버둥 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보이는 것에 집착하며 보이는 것으로 자신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상과 증거인 믿음이 없으니 결국 보이는 것에 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없는 자는 보지 않으면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믿음을 방해할 뿐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이 믿음을 도와줄 것으로 여기지만 그것은 전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처음부터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마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시고 성령이 함께 하신다면 그리스도를 믿는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는 것이지 보이지 않는 영이신 성령이 보이는 것을 동원해서 우리를 믿음으로 이끌어 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할 때, 어떻게 보이지 않는 믿음이 실상과 증거가 될 수 있습니까? 실상과 증거라는 것은 분명히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믿음이 실상이요 증거다'라고만 얘기해 버리면 뭔가 무리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신자에게 실상으로 이미 계시되어진 것은 바로 말씀입니다. 신자가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로 나타난 것 역시 말씀입니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보지 못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바라는 모든 것의 실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믿는 믿음이 곧 신자에게는 실상이요 증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린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바로 이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44절에 보면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라고 말씀하고 48절에서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본문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에서 이틀을 지내시면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믿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갈릴리로 떠나실 때 하신 말씀이 44절의 말씀입니다. 갈릴리로 가시면서 왜 44절의 말씀을 증거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사마리아에서 말씀을 증거하신 일이나 갈릴리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과 연관이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왜 높임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선지자를 안다는 것 때문입니다. 선지자가 높임을 받는 것은 좋은 대우를 받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를 높이는 것은 선지자로 증거되어진 말씀의 권위에 굴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선지자 개인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는 역할자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말의 권위는 선지자란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말에 굴복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에 굴복하는 것이며 그것이 선지자를 높이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선지자를 잘 안다면 선지자의 말 자체를 무시하게 됩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계시되어지는 말씀을 보기보다는 선지자 자체를 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6:1-3절에 보면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고향으로 가셔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가르침을 듣고는 그 지혜와 손으로 행하시는 권능에 놀랍니다. 예수님이 평소 제자들에게 가르치던 말씀과 다른 특별한 것을 가르치신 것도 아닐 것인데 놀랐다는 것은 그래도 말씀을 들을 줄을 안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다면 그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으면 되는 것인데, 고향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들은 자기들에게 가르치는 예수라는 사람이 하잘 것 없는 마리아의 아들이고, 목수며, 또 예수님의 형제들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고 현재도 그들과 함께 거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해 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가르침에는 놀랐지만,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은 보잘것없는 분이었기 때문에 그 가르침에 굴복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자존심 문제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본다는 것이 믿음을 방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겉모습을 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보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겉모습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배척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유대인으로만 알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예수님이 구주이신 것을 알고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스스로 본다는 것,안다는 것이 오히려 믿음에 장애가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 자신이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을 믿어버리는 우를 범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결국 말씀으로 증거되는 참된 실상, 참된 증거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던 갈릴리 가나에 오셨을 때 가버나움에 있던 왕의 신하 한 사람이 병든 자기 아들을 고쳐달라고 예수님을 찾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의 죽게 된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요청하는 왕의 신하에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말해서 믿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왕의 신하를 향해서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왕의 신하만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대의 사람들이 바로 믿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설사 표적과 기사를 봤다 하더라도 그들은 표적과 기사에만 매일 뿐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는 도무지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왕의 신하는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렇다면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는 말씀을 이 신하의 경우에 대비해 볼 때 어떤 이해를 할 수 있습니까? 왕의 신하는 지금 자기 아들을 고쳐 줄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신하에게 있어서 바라는 것의 실상은 예수님이 자기 집으로 가셔서 아들을 고쳐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신하의 집으로 가시는 것이 아니라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는 말씀만 하십니다.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내려갑니다. 그리고 내려가는 길에 종들을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는 소식을 듣자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 즉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하신 바로 그때였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신하와 온 집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이러한 얘기가 오늘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의 현실은 바로 말씀 자체라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실상과 증거는 말씀을 믿는 것이지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하의 아들이 낫기 시작한 때는 예수님이 '가라 살았다'고 말씀하신 바로 그 때였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말씀이 현실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았다고 말씀하신 그때 이미 아들이 나았다면 현실은 말씀대로 아들이 나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함으로 인해서 이 현실을 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말이 좀 복잡하게 되어진 것 같은데 쉽게 말해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신하는 비록 보지 못했지만 아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때 낫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신하에게 있어서 현실은 아들이 병이 들어 죽게 되어진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인해서 나은 것이 현실입니다. 만약 신하가 말씀을 믿었다면 신하에게 있어서 현실은 아들이 이미 나은 것입니다. 비록 보지 못하고 확인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아들이 나은 것이 현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눈으로 보지 못하고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이 믿지를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믿지 못하는 세대를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50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신하가 아들이 살았다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믿음을 예수님을 믿은 믿음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52절에서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고 하는 말씀을 보면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집으로 길을 떠난 하루 뒤에 종들을 만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하의 집인 가버나움과 예수님이 계시던 갈릴리 가나는 시간상으로 약 4시간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집으로 떠났다면 당일에 집에 도착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하루를 지체했다는 것은 결국 아들이 나았다는 믿음이 아니었음을 짐작해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아들이 나을 것을 기대하는 믿음으로 이해 해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53절에서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아들이 나은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비로소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50절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현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인해서 말씀이 무시되고 배척 당하고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마 6:31-32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이 우리의 실상이요 증거라면 신자의 현실은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에 대해서는 염려함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눈에 보이는 현실을 보면서 염려하고 걱정하는 삶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합니다. 말씀은 신자에게는 현실 자체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말씀이 신자에게는 현실인 것입니다. 공중의 새들도 들의 꽃들도 하나님이 먹이고 입히시는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이 먹이고 입히신다는 것이 말씀이라면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눈에 보이는 것을 실상으로 증거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그 결과는 말씀을 배척하고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서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말씀 안에서 증거 되어지는 신자의 모습은 하늘에서 복된 자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어떤 복을 말씀하셨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 복은 세상적으로 볼 때는 참으로 나약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살면 세상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지?'라는 생각으로 팔 복을 본다면 팔 복의 말씀은 단지 성경책 안의 말씀으로 머물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 아닙니다. 말씀으로 되어지는 현실이 있습니다. 그 현실을 보는 자가 믿음이 있는 자입니다. 눈으로 보려고 하지 마시고 믿음으로 보려고 하십시오. 말씀의 현실은 오직 믿음으로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현실이 믿어지지 않거든,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여러분의 믿음을 방해한다면 예수님에게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말씀은 항상 보는 것을 실상으로 삼고 증거로 삼는 사람들로 인해서 무시되고 배척되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23강) 5:1-9 베데스다의 병자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관심을 두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만약 신자라고 하면서도 신앙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뭔가 관심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자신의 신앙에 관심을 둔다면, 그리고 '내가 신앙이 있는가 없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면 그러한 물음을 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이란 무엇인가?'입니다. 신자가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바르게 알고 있지 못하다면 그가 아무리 자신의 신앙에 관심을 두고 생각한다 할지라도 결국 잘못된 판단을 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서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면서 서울로 갈 수는 없습니다. 물론 서울 가는 열차만 제대로 탔다면 서울에 도착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엉뚱한 열차를 타고 있으면서 스스로는 서울로 가고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떠나서는 우리는 진리에 이를 수 없고 생명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길 되시는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생명 안에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예수를 붙들고 따라가면서 생명을 구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비록 생명 되시는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그리스도를 따랐지만 그 정성을 봐서 생명으로 인도하시겠습니까?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는 참되신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배우고 우리의 신앙이 참된 것인가를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앞서 말한 대로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를 묻기 전에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여기십니까? 대개의 사람들은 신앙의 기준을 교회에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기준으로 해서 어느 정도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가느냐를 신앙의 척도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사실 교회에서도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신앙으로 강조하고 가르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주일이면 잊지 않고 교회를 찾아 나와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교회 일에 빠지지 않고 봉사하는 것으로 신앙을 가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이 없는 신앙임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행동하는 것을 신앙으로 말씀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고 계시하신 신앙 이외의 모든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에서 표출되는 종교 행위일 뿐입니다. 예배당에 나와서 하나님을 부르면서 기도한다고 해서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한 기도는 신앙과 상관없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기도를 책망하셨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들 역시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예배까지도 부정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들 스스로 믿고 있었던 신앙이 신앙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란 무엇인지 본문의 말씀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베데스다 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이적은 이적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어떤 표적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적을 제대로 깨닫는다면 이적 자체에 대해서 놀라움과 신기함을 가지기보다는 이적을 통해서 계시되고 있는 그리스도에 관심을 두게 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신 내용 역시 같습니다. 예수님에게 나아와 아들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신하의 믿음도, 아들이 살았다는 것도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순간 아이의 병이 나았다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우리에게는 현실이며 현재임을 의미하는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금 현실과 상관없는 먼 훗날의 내세에 대한 얘기로만 치부해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자 역시 다시 산다면, 신자의 현실은 부활된 자로 사는 것입니다. 즉 앞으로 부활될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부활 안에 있는 자로서 죽음이 두려워지지 않는 삶이 신자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 역시 단순히 예수님이 불쌍한 병자를 찾아오셔서 고쳐주신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2절에 보면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여러 개의 특정한 문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양문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지금의 서울이 옛날에 한양으로 불리 울 때 사면에 4개의 문을 세워둔 것처럼 예루살렘에도 여러 개의 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양문이란 양이 들어오는 문입니다. 양은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릴 때 제물로 쓰는 짐승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물인 양을 끌고 올 때 양문을 통해서 양을 들여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양문 가까이에는 성전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양문은 이스라엘에게는 그냥 양이 들어오는 문이 아니라 양의 희생을 보여주는 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희생하기 위해서 들어오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희생으로 산 민족입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어린양의 희생의 피가 아니었으면 애굽과 똑같이 장자의 재앙에서 죽어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양의 희생은 생명의 은혜로 부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문은 어린양의 희생과 은혜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양문 옆에 베데스다란 못이 있습니다. 그런데 베데스다란 이름 역시 은혜의 집이란 뜻입니다. 희생의 제물이 들어오는 은혜의 문 옆에 은혜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이 사건을 단순히 병고침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베데스다 못에는 행각이 다섯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행각에는 많은 병자들,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자(중풍병자)들이 누워서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3절). 과연 이들이 기다린 것은 무엇입니까? 4절에 보면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고 말합니다. 많은 병자들이 행각에서 기다린 것은 천사가 못에 내려와서 물을 동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천사가 물을 동하게 한 후 먼저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다 낫게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이것은 베데스다 못에 전해 오는 전설이었다고 여겨집니다. 이 전설을 믿고 많은 병자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병자들 가운데 38년 된 병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병자를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사실 이 질문은 38년 된 병자에게는 하나마나한 질문입니다. 이 사람은 38년 동안 병으로 인해서 고통 받아온 사람입니다. 무슨 병인지는 언급이 안되어 있지만 38년 동안 낫지를 못하고 고통을 받았다면 인간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인 것은 확실합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묻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여기십니까?

 

 

 

 

병낫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단 한달, 아니 단 하루동안이라도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다면 빨리 낫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일년 이년도 아니고 38년 동안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묻는 것은 분명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런 하나마나한 질문을 왜 하시는 것입니까? 병자가 낫고 싶어하는가를 확인하고자 물으신 것입니까? '낫고 싶으면 나에게 부탁해라'는 의도로 질문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질문 의도는 병자의 대답을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물음에 병자는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절)라고 대답합니다. 병자의 대답 또한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낫고자 하느냐'라고 묻는다면 병자로서는 당연히 '예, 낫고 싶습니다'라고 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병자는 자신의 병이 낫고 싶은가에 대한 가부의 여부는 말하지 않고 그 누구도 자신을 못에 넣어주지 않아서 자기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간다는 원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병자의 이 대답을 주의 깁게 살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것은 한 개인에 대한 행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38년된 병자를 도구로 삼아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계시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본문에 나오는 병자의 대답말고 다른 대답을 추정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만약 병자가 예수님의 물음에 대해서 '예, 낫고 싶습니다. 나의 병을 고쳐주소서'라고 대답했다면 그 병자는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대상으로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처럼 자신을 못에 넣어주지 않아서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 버린다는 원망을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을 베데스다 못에 들어가는 것으로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다른 길, 즉 베데스다 못을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38년된 병자의 대답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38년된 병자는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을 스스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데스다 못에 들어가는 것, 이것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먼저 못에 들어간다는 것으로 원망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만 생각하는 인간의 속성입니다.

 

 

 

 

행각에 모여 있는 사람은 모두가 병자들입니다.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 이들 모두가 38년된 병자 못지 않게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38년된 병자를 못에 집어 넣어주기 위해서 자신이 못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해야 할까요? 세상의 사고방식이 과연 그런 것입니까? 당시 베데스다 못은 지금의 세상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은 완전한 경쟁 체제입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물리쳐야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앞서야 합니다. 지금 베데스다 못이 어떤 상황입니까? 물이 동한 후 먼저 들어가면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질병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들어가면 다 낫는다는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들어간 사람이 낫는다고 합니다. 기회는 단 한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런데 행각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절박한 상황입니다. 자신의 병이 나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베데스다 못에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병자들은 어떻게 하든 다른 사람을 물리치고 자신이 먼저 들어가기 위해서 기를 쓸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먼저 들어가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38년된 병자가 남보다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여건이라면 과연 소경의 눈이 되어주고, 절뚝발이의 발이 되어서 그들을 먼저 못에 넣어주기 위해서 봉사하려고 하겠습니까? 결국 자신도 그럴 마음이 없으면서 다른 사람이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것에 대해서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이 병자는 자신이 먼저 들어가야 한다는 열망에서 자기보다 먼저 들어가는 사람에 대해 원망을 합니다. '너희들만 없으면 내가 먼저 못에 들어갈 수 있는데'라는 마음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남보다 먼저 들어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원망스럽지 않겠습니까?

경쟁 체제에서 살아가는 세상 현실도 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신보다 앞서는 자에 대해서는 원망과 시기를 보이는 것이 세상입니다. '너만 없으면'이라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미워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항상 타인에게 두는 것입니다. 마치 38년된 병자가 자신의 병이 낫지 못한 불행의 원인을 자신을 못에 넣어주지 않고 자기보다 먼저 들어가는 사람에게 두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베데스다 못의 현실은 지금 이 세상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러한 모습이 양문 즉 은혜의 삶에 상반된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베데스다 못의 이야기는 은혜와 상반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유대인과 오늘 우리들을 꼬집기 위한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베데스다 못의 모든 병자들을 고쳐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38년된 병자가 불쌍해서 자비를 베풀어 고쳐주신 것이라면, 불쌍한 처지의 사람이 38년 된 병자뿐이겠습니까? 사람의 손으로 고칠 수 없는 질병이기에 베데스다 못에 소망을 걸고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들 모두가 불쌍한 처지에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38년된 병자만 불쌍히 여겼다는 것은 자비의 공평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이 불쌍히 보시는 것은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현실이 아닙니다. 사망의 고통에 영원히 살아가는 것, 이것이 말할 수 없는 불쌍한 처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베데스다 못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참된 신앙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자비입니다.

 

 

 

 

8-9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신 방법은 단지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 병자가 원하는 대로 못에 넣어서 고쳐주실 수는 없었을까요? 물론 못에 들어간다고 해서 낫는다는 것은 없지만 만약 예수님이 병자를 도와서 못에 넣으심으로 병이 나았다면 과연 그 병자는 자신의 병 나음의 근거를 무엇에 두겠습니까? 예수님이겠습니까 베데스다 못이겠습니까? 베데스다 못입니다. 38년된 병자는 자신이 나을 수 있는 길을 베데스다 못에 들어가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를 못에 넣어주셔서 나았다면 결국 그 병자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책을 도와주신 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이러한 분으로 비춰지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나름대로 삶의 방책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좋은 직장을 얻는 것을 내가 사는 방책으로 여깁니다. 자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인생이 잘되는 방책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자신이 믿고 있는 방책을 도와달라고 예수님에게 기도합니다. 이것이 곧 베데스다 못의 병자가 예수님에게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먼저 못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38년된 병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병이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이것은 단지 병이 나은 기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베데스다 못에 모여 있던 수많은 병자들이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책으로 믿었던 베데스다 못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못에 들어가야 산다고 믿었던 사람들 앞에서 말씀으로 38년된 병자를 나아서 걸어가게 하십니다. 이것은 곧 인간의 생명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있는 것이지 베데스다 못에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좋은 직장, 좋은 대학, 돈 등으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참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방책을 포기하고 그리스도께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하신 것처럼 신앙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물론 삶의 문제를 돈을 많이 벌어서 호의호식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허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산다는 것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에 두고 있다면 말씀이야말로 우리를 살리는 유일한 방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신자라면 자기 나름대로의 삶의 방책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삶의 방책으로 여기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는 것만이 사는 길임을 믿고 그리스도에게 모든 소망을 두려고 힘쓰는 그가 바로 신앙으로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신자에게는 그리스도만 계실 뿐 베데스다 못은 없습니다. 교회 역시 같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믿음으로 모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베데스다 못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는 스스로 베데스다 못을 만들고 있습니다. 서로 먼저 들어가기 위해서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베데스다를 스스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해야 하고 저것을 해야 상급이 크다고 가르침으로서 교회를 베데스다의 행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부로 여기지 못하고 별개의 베데스다 못을 만들어서 경쟁과 원망의 체제로 만들어 버립니다. 세상의 사고방식 그대로 모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교회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38년된 병자의 대답이 곧 오늘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 나름대로 삶의 방책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결국 우리는 경쟁에서 뒤처지고 다른 사람이 나보다 앞서는 것으로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방책을 도와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방책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만 의지하라고 말씀합니다. 베데스다 못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데스다 못에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24강) 5:9-18 은혜와 율법


교회가 성경을 멀리 할 수 없는 이유는 성경이 기독교의 경전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이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경 없이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세상 처음부터 인간과 함께 살아오신 분이 아니라 죄악된 세상에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장차 말씀이 육신으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서 미리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 없이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모른다는 것은 곧 어두움에 거하는 것이고 진리와 생명에서 멀어져 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경을 가까이 할 이유는 성경에 우리에게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당연한 말씀을 드린 것 같습니다. 이처럼 너무 당연한 말씀을 마치 초보 신자를 가르치듯 말씀을 드리는 것은 성경에서 생명을 얻기를 원한다고 외치는 교회가 정작 생명에는 관심이 없고 그리스도에게 조차 마음이 멀어져 있는 모습이 많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요 5:39-40절에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성경을 상고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에게 나아오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상고했다면 예수님에게 나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했다고 하면서 왜 예수님에게 나오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성경에서 자기들 나름대로의 영생 얻는 길을 상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아닌 다른 길을 영생 얻는 길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나올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 형편이었으며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영생을 얻는 길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길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목표일 뿐, 길로 여기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길에 충실하면 나중에 예수님의 생명에 도달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결코 신앙의 목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신앙 자체입니다. 그리스도에 도달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길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도달한다는 생각은 다른 복음일 뿐입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에는 저주만이 있을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갈 1:9).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다른 길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도달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곧 율법입니다. 즉 율법을 지키는 것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 것으로 이해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생명을 위한 다른 길이 있기 때문에 예수에게 나오기를 원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신앙입니다.

 

 

 

 

지난 시간에 베데스다 못에 있었던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베데스다 못의 이적은 자기 행위로서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지난 시간의 말씀을 다시 간단하게 요약하면, 베데스다 못은 은혜의 집이라는 뜻으로써 은혜를 뜻하는 희생 제물인 양이 들어오는 양문 옆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베데스다 못에 모인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은혜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베데스다 못에 모인 병자들은 천사가 내려와 못의 물이 동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물을 동하면 누구보다 먼저 못에 들어가기 위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자신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런 자리에 예수님이 오시고 38년된 병자를 골라서 병을 고치십니다.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신 것은 생명은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로 얻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되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자기 나름대로의 다른 길, 즉 베데스다 못에 들어가야 고침 받는다는 조건은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만약 사람이 다른 길을 가지고 있다면 참된 길이 주어졌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이것을 오늘 본문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38년된 병자에게 예수님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8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38년된 병자가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자 그것을 본 유대인들은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10절)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 규례에는 안식일에 일정한 무게 이상의 물건을 들고 걷는 것을 안식일을 어기는 것으로 되어 있던 것입니다.

 

 

 

 

9절 하반절을 보면 "이 날은 안식일이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을 볼 때 예수님은 이미 그 날이 안식일임을 의식하고 일을 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결국 유대인들에 대해서 안식일이란 율법에 대한 시비를 일으키기 위한 의도인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피할 수 있는 시빗거리를 고의적으로 만드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과 부딪히는 것을 드러내심으로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른 길이 무엇인지 그 정체를 드러내시기 위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죽으심은 유대인들의 힘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으심으로 나아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죽으시려고 까지는 안했는데 말씀을 증거하다보니 그것이 예수님을 죽게 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의로 유대인들에게 시비를 일으키시고 그 결과 그들의 마음에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의도를 갖게 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예수님의 원수가 누구인지 그 정체를 드러내시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에 의해서 드러난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유대인들이 목격한 것은 38년된 병자가 베데스다 못이 아닌 예수님에 의해서 고침받는 놀라운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38년의 질병이라는 괴로움에서 해방되는 이 놀라움을 목격했을 때 어떤 반응이 있어야 마땅합니까? 분명 그 병자를 고치신 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적인 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의 눈에는 병자가 고침 받은 놀라운 사실은 보이지 않고 다만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 즉 누군가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만 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네가 어떻게 병이 나았느냐?'라든가 '너를 낫게 한 분이 누구냐?'라는 물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왜 네가 안식일에 옳지 않은 행동을 하느냐?'라는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유대인들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참으로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38년된 병자가 병에서 해방된 은혜는 보지 못하고 겨우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병자의 행동을 보면서 그것을 가지고 책망하는 그들이 참으로 무지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은 38년된 병자를 통해서 나타난 생명의 길을 보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의 통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율법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그들이 지켜야 할 의무사항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곧 신앙이었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신앙인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생각은 현대의 많은 교인들에게도 있습니다. 율법을 신자로서 지켜야 할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신자가 율법을 지킴으로서 예수님이 증거되고 신자의 신앙이 굳건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을 지킴으로서 예수님이 증거되는 것이 아니고, 율법 자체가 이미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이 우리의 길이 되시고 구원의 통로가 되시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지 율법이 또 다른 은혜의 통로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현대 교인들이 율법을 지켜야 할 행함의 문제로 이해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팽배해있고, 이로 인해서 누구 한 사람이라도 소위 율법을 범하는 모습이 보여질 때 가차없이 책망하는 것들이 보여지기 일쑤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율법 지키는 것을 구원을 얻는 것으로 믿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말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또 다른 길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은혜와 율법이 서로 별개의 관계로 공존하고 있는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르침은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이면서도 걸어가는 길은 율법을 지키는 삶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은혜로 살아가는 신자에게만 보여지는 것입니다. 은혜가 아닌 율법의 길에 있는 사람에게는 은혜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만 보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고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병자가 유대인들의 눈에는 안식일을 범하는 죄를 짓는 것으로만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현대 교인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처럼 소위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을 죄로 보는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 자체를 예수님의 은혜를 모르는 것으로 간주해 버리고 신앙이 없는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입으로는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다른 길을 두고 있기 때문에 보여지는 현상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은혜로 생명을 얻게 되었으며, 신앙의 유일한 길 역시 예수님의 은혜에 두고 있다면 율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를 기준으로 삼아서 누군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를 아느냐 모르느냐만 보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죄는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멸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에 대해서 그가 은혜 안에 있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만 본다면 그것이 곧 은혜를 멸시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더 심한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38년 동안 질병의 고통에 시달린 비참한 상태보다 더 심한 상태는 과연 무엇일까요? 38년 보다 더 긴 세월동안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38년 간 앓았던 질병보다 더 고통이 심한 질병을 말하는 것일까요? 더 심한 것이란 육신의 질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십니다. 심한 것이 생기는 것을 죄를 범하는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38년된 병자의 입장에서 예수님에 대한 죄는 예수님의 은혜로 나음을 입었으면서도 여전히 베데스다 못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은혜로 나음을 입었으면 은혜를 감사하고 은혜를 높이고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시는 베데스다 못에 들어가야 산다는 자기 나름대로의 삶의 방책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즉 자기 행함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가 나를 살렸다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은혜로 나음을 입었으면서도 여전히 베데스다 못을 기대하고 산다면 그것이 곧 죄입니다.

 

 

 

 

이러한 죄로 인해서 처하게 되는 38년된 질병의 고통보다 더 심한 것은 무엇입니까? 38년 동안 질병으로 고통받는 비참한 상태보다 더 비참한 상태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죄로 인한 멸망의 상태를 말합니다. 영원한 멸망의 고통에 처하게 된 것, 이것이 38년이 아니라 태어나서 죽는 그 순간까지, 그 기간이 70년이든 80년이든 상관없이 평생을 질병으로 고통을 당했다고 해도 그보다 더 비참한 상태는 없습니다.

 

 

 

 

우리를 멸망이라는 비참에서 건지는 능력은 오직 예수님의 은혜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건 지키지 못하건 상관없이, 율법을 지키든 지키지 못하든 상관없이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를 살립니다. 율법을 잘 지키면 은혜가 주어지고,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은혜가 이런 것이라면 이것은 우리의 조건을 보고 주어지는 은혜에 지나지 않으며 또 이것을 은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 행위에 대한 대가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말 그대로 우리의 어떤 조건도 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38년된 병자의 무엇을 보고 은혜를 베푸셨습니까? 그 병자가 은혜를 받을만한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아마 어쩌면 그 병자는 베데스다 못에 모인 많은 병자들 가운데서 가장 비참한 처지의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비참한 사람을 골라서 낫게 하심으로 예수님의 은혜가 어떠함을 보이시며, 또 은혜는 사람을 보고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고자 하셨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곧 구원의 통로였습니다. 하나님의 복이든 은혜든 사랑이든 그 모든 것은 율법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얻고 사랑을 받는 조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은 그리스도로 주어집니다. 하늘의 복 역시 그리스도로 주어집니다. 모든 것의 통로는 그리스도이지 결코 율법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일을 지키든 지키지 않든 상관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자가 신자이며 믿음이 있는 자이고 하늘의 복을 받은 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만 율법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지키는 것이지 우리의 의지로 지켜내는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라면,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신자라면 예수님의 말씀이 있는 자리를 폐할 수가 있겠습니까? 결국 그리스도를 사랑하기에 그 사랑이 신자로 하여금 주일이면 모이도록 하지 않겠습니까? 주일이기 때문에 모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들이 함께 하는 날이기 때문에 그 모임을 사랑해서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은혜로 생명을 얻었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신자에게 주일을 지켰느냐 지키지 않았느냐, 율법을 지켰느냐 지키지 않았느냐를 따지는 것은 이미 대학을 졸업한 사람에게 초등학교를 다니느냐 다니지 않느냐를 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15-18절을 보면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는 예수님을 더욱 죽이고자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얼마든지 유대인들과의 충돌을 피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고의적으로 유대인들이 싫어하고 핍박할 수밖에 없는 문제를 들고나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철저한 경외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조차 불경스럽다는 이유로 정확하게 발음하지 않는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의 친아버지라 하면서 하나님과 동등 되게 말하는 예수에 대해서 조용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한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정작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이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이유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에 대해서 자기들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말씀이 육신으로 오셔야 한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있고 그 율법을 잘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상고한다고 하면서 말씀이신 예수가 필요 없고 오히려 죽여야 할 대상이 되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역시 마찬가집니다. 교회가 표어로서 많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교회에 충성하고 주일 잘 지키면 그것이 하나님과 성경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하나님을 중심 한다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이 중심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거짓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 중심 역시 마찬가집니다. 성경을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계시하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성경 중심으로 사는 것이고 성경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중심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중심으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의 행함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하심으로 의를 얻고 죄에서 건짐 받은 것으로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는 무엇을 지킨다 지키지 않는다가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은혜를 마음에 둘 뿐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지키는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자에게 예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가르치면 됩니다. 신자들이 무엇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관심을 두게 되면 결국 '은혜를 아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하는가?'만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많이 하는 자는 은혜를 아는 자이며 하지 않는 자는 은혜를 모르는 자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은혜로 시작해서 율법으로 마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 성장에 초조해지면 이러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만 말하다가는 교회가 안된다'는 조급함에 은혜를 빙자해서 행함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행하는 자가 곧 믿음이 있고 은혜를 아는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은혜를 말하면서 베데스다 못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은혜로 나음을 입었으면 은혜만 의지하고 감사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신자는 율법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은혜로 사는 자임을 여러분의 마음에 굳건히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베데스다 못에서 배울 수 있는 은혜와 율법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 은혜와 별도로 신자의 행함의 기준으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행함은 은혜로 인해서 증거되는 것이지 율법을 지킴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살아가는 그가 율법을 지키는 자입니다.

 

 

 

 

 

(25강) 5:19-29 아버지와 아들


복음은 사망이라는 비참에 처한 인간을 생명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구출하기 위해서 하늘에서 의로우신 분이 오셨음을 알리는 소식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기쁜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복음 편에서 복음이 기쁜 소식이라고 외친다고 해도 실제 복음을 듣는 편에서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복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복음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 있어서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복음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비참함의 처지를 자각해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인 사항입니다. 인간의 비참함을 자각하지 못한 자가 자신을 비참에서 건지기 위해서 누군가가 오셨다는 것에 반응을 보일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비참함은 죄로 인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죄로 인해서 사망에 처하게 되었고 이것이 곧 비참함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현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비참함을 자각한다는 것은 인간의 죄를 안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면 죄를 아는 인간에게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반응이 보여질까요? 먼저 죄인된 인간이란 단지 죄 지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스스로 의로우신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없음을 선포하는 말임을 알아야 합니다. 죄인이기에 스스로 의를 찾을 수 없고 의를 이룰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아는 인간은 결코 자신의 힘으로 예수님에게 나아갈 수 없음을 압니다. 그러기에 자신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의 은혜만을 말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를 알고 비참함을 아는 인간이 예수님의 은혜를 입었을 때 보여지는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예수님이 고치신 38년된 병자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38년된 병자는 참으로 비참한 처지였습니다. 비참함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못에 넣어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런 병자에게 예수님이 다가오셔서 말씀으로 그를 고치셨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도 없고 하지도 못한 병자에게 찾아오셔서 아무런 조건도 말씀하지 않으시고 고쳐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38년된 병자를 고치심으로 보여주시는 구원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38년된 병자가 고침 받은 사건에서 죄인된 인간의 구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라는 율법을 지키지 않은 인간의 행위를 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은 의를 행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지 못한 무지함의 결과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충실하는 것이 생명을 얻는 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는 다른 길이 필요 없었습니다. 다른 진리도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지킬 수 있는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주시고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주시고 지키라고 하시는 것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을 깨달아라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즉 자기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자각할 때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에게 굴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율법을 지키는 자기 행함에 가능성을 둔다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에 대해서 얼굴을 돌려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합니다. 19절이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은 본문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18절) 분노하고 죽이려고 한 것과 연관된 내용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분명히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만약 예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다시 오신다면 여러분은 그분을 예수님으로 알아볼 수 있을 것으로 여기십니까? 과연 무엇을 보고 예수인지 아닌지 판단하겠습니까?

 

 

 

 

사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예수님의 생김새에 대해서 예언했습니까? 메시야에 대해서 예언한 선지자들이 그 메시야가 어떻게 생겼다는 것을 말했습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야에 대해서 예언을 한 것은 있지만 기껏 해야 연한 순 같고,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아름다운 것도 없고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이 싫어할 것이라는 말을 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당시 고운 모양이 없는 사람이 한둘이겠습니까? 풍채가 없고 아름다운 것도 없고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는 자가 한둘이겠습니까? 이렇게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해서 죽이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보통 사람과 생김새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흔히 우리가 보는 예수님의 그림에서처럼 머리에 광채가 둘려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변화산에서처럼 하얗게 빛나는 옷을 입고 다니신 것도 아니고 항상 천사들이 예수님 위에서 수종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된 표적이 없으니까 표적을 보여봐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무엇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알 수 있고, 그분이 행하시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9절에서는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하시고 또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행한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와 아들이 일하시는 것, 행하시는 것이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들의 일을 보는 자는 곧 하나님의 일을 보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을 보는 자는 하나님의 일과 같은 일을 하는 것을 봤을 때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알아야 아들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아들이 그들 앞에서 하나님의 일과 동일한 일을 한다고 해도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못한 것은 아들의 생김새에 대한 계시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 앞에서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고 하나님이 율법의 완성자로 대신 보내신 아들을 믿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일을 이해했다면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자로 오실 분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나 아들이나 동일하게 살리는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즉은 자를 일으켜 살리는 것이 아버지의 일이었고 그 일을 아들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여주신 것이 38년된 비참한 처지의 병자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비참한 처지의 병자를 고쳐주심으로서, 이처럼 비참한 처지의 사람들이 바로 너희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율법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알고 자신의 비참함을 발견한 사람이라면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에서 살리는 일을 하시는 아들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23-24절에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 아들을 공경하는 것이고, 아들을 공경하는 것이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버지도 믿고 아들도 믿으면 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아버지를 믿는 것은 무엇이고 아들을 믿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 채 그저 입술로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외치면 다 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아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받기 위해서 필요하고, 아버지는 세상에서 복을 누리고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이러한 믿음은 가짜이며 구원도 있을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들에 대한 공경은 아들이 행하신 의로 인해서 내가 살았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에 세상에 오신 아들에 대한 최고의 공경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고 행함으로 의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의로우신 행함으로 인해서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들을 공경하는 것이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22절에서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심판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들을 믿지 않음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들만 믿으면 하나님은 안믿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고, 이 모든 것이 세상에 오신 아들로 인해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25절에 보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말씀하고, 28절에서는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죽은 자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죽은 자가 어떻게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까? 결국 듣게 하시는 분도 예수님입니다. 이처럼 죽은 자가 살아남에 있어서 모든 것은 예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신자가 외쳐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가 나를 살렸다'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것을 전하면 그것이 '다른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예수님이 아닌 부처를 전하고 통일교를 전한다고 해서 다른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아예 복음이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다른 복음은 복음을 위장해서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위장한 복음, 그것이 바로 인간의 행함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먼저 우리가 살아날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살릴만한 사람을 살린다고 말함으로서 결국 산자가 되기 위해서는 뭔가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위장한 가짜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함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9절에 보면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는 말씀을 합니다. 마치 인간의 행함에 의해서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로 판가름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구절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인해서 자기 행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29절의 말씀을 5장에 등장하는 38년된 병자와 유대인을 두고 비교해 봅시다. 38년된 병자는 분명 예수님의 인해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단순히 병이 고쳐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일으킴을 받은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과연 무슨 선한 일을 행했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한편 강도가 무슨 선한 행위를 했기에 생명의 부활로 나오는 자가 되었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선한 일과는 전혀 상관없이 생명을 얻은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단지 있다면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씀에 일어나 걸어갔을 뿐이고, 자신과 함께 죽어가는 예수가 죄없는 분이고 자기 영혼을 책임지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은 것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반대로 악한 일을 행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되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뭔가 선을 행함으로 그것이 의가 되어서 복을 얻고 천국에 간다는 발상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녀야 믿음이 있는 것이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여긴다면 교회를 다니는 자기 행함을 믿는 것이 되고 그렇게 되면 교회를 다니는 것이 오히려 악을 행하는 결과가 되버립니다.

 

 

 

 

교회 다니는 것을 무조건 선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되어진다는 믿음으로 교회를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고 나오는 것이라면 그것이 곧 악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이 악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오늘날 교회가 소위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도 얼마든지 악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이라고 여기고 행하는 것들이 주님 보시기에는 얼마든지 악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안식일에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무서운 진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진노가 안식일 지킨다고 해서 해결되겠습니까? 주일을 지킨다고 해서 피해갈 수 있는 심판이라면 그것을 심판이라고 말할 수도 없거니와 그런 심판에서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실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누구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중보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신 중보자를 신뢰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 처한 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은혜에 깊은 감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6강) 5:30-38 증거


여러분은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다 참된 것으로 인정할 생각이 있습니까? 아마 모든 분이 ''라고 답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말이 되느냐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무조건 참된 것으로 받아들일 자신이 있다고 확고하게 믿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비록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자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참으로 복잡 미묘한 자기 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사람이 누군가의 말을 듣고 그 말을 참된 것으로 인정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의 관계가 얽히게 됩니다. 먼저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신뢰하지 못할 때는 그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말이 자신의 사고에 맞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사고와 상식에 맞는 말일 때 그 말을 참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예수님의 말씀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결국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대에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은 성경의 기록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해석하여 전하는 사람은 목사입니다. 즉 목사를 세워서 예수님의 말씀이 전파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신자들에게 크게 작용하는 것이 목사에 대한 신뢰인 것입니다. 즉 목사를 신뢰할 때 그가 말하는 것은 무조건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목사의 학력, 인품, 자기 신뢰, 이런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목사가 전한 가르침에 대해 '과연 그러한가'라는 판단이 없이 참된 말로 인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즉 목사를 신뢰하기에 그 말 역시 신뢰를 해버리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신이 싫어하고 반대하는 목사가 하는 가르침이라면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신뢰하지 않습니다. 목사가 싫기에 그가 전하는 말도 싫어지는 것입니다. '저 목사라면 틀린 말을 하지 않을거야. 저 목사는 성경을 제대로 알고 있으니까 저 목사가 하는 말이라면 다 믿을 수 있어' 여러분은 혹시 누군가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가져 보신 적이 없습니까? 있다면 이것은 속히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목사인 저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고, 여러분은 그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은 목사와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습니다. 목사는 다만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나올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말씀을 대신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은 목사와의 관계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목사가 싫으니까 그 말 역시 듣기가 싫어지고, 목사가 좋으니까 그 목사의 말이라면 무조건 좋다는 식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이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내가 신뢰하는 사람의 말이기에 참된 것으로 신뢰가 가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누군가의 말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대한다면 혹시 내가 그 사람에 대해서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닌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말의 내용보다는 사람 자체를 반대해 버리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비록 예수님을 믿는 신자라고 하지만,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지만, 이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은 인간적 관계와 우리들이 이미 자기만의 답을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비록 참된 말씀이 증거된다고 해도 그 말씀을 참된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물리치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유대인이 바로 이런 관계에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회가 되면 죽이려는 생각을 일찌감치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사고에 정면으로 도전을 하였다는 이유입니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자신에 대해서 증거한다고 해도 과연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참된 것으로 인정할까요?

 

 

 

 

31절에 보면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예수님이 자신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모두 참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되버립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자기에 대해서는 전혀 증거할 수 없다는 뜻입니까? 만약 이러한 해석이 참된 것이라면 8:14절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 31절과 8:14절이 서로 반대됩니다. 31절에서는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왜 8:14절에서는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 하여도 내 증거는 참되다고 말씀하는 것입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구절의 서로 다른 상황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안식일 문제로 예수님에게 시비를 건 유대인을 향한 것입니다. 유대인은 이미 예수님에 대해 악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한다고 해도 그 말씀에 대해서 꼬투리를 잡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사실로 드러난 것은 8:12-13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는 말씀대로 자신이 곧 세상의 빛이라고 증거하시자 바리새인들은 당장 '네가 너를 위해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않다'고 반박을 한 것입니다. 이들이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않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예수님을 반대하기에 그 말씀까지 반대하는 반응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31절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지금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계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서 예수를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아마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아들 같지도 않은 한 청년이 감히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에 대해서 적절한 처벌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신들이 할 일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지 않는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말씀하는 것은 자신은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원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의 일을 본다면 곧 하나님의 일을 본 것이고 아들을 공경한다면 그것은 곧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래서 30절의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외면하고 독자적인 뜻과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시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의 심판 역시 의롭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존재와 뜻에 있어서 하나임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아버지이신 하나님에게 종속되어서 꼼짝없이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관계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아들의 사역과 뜻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의 통일성을 강조하시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통일성이란 아버지를 안다면 아들을 알 수 있고 아들을 안다면 아버지를 알 수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라는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이 단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기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증거하는 것이라면 그 증거는 참되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면 오늘날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관계, 예수님과 우리 자신의 관계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신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다만 하나님을 잘 믿어주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잘 나오면서 예수님을 잘 믿어주면 그것이 예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과, 그리고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는 신자라면 그 뜻과 일은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한 일치를 이룰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완전한 일치의 관계를 말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의 관계에 있다는 것 역시 일과 뜻에 있어서 완전한 일치를 이루었다는 것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관계에 있는 예수님이기에 아버지의 뜻과 일치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버지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있는 예수님이라면 그분이 자신을 위해서 증거하는 것은 곧 아버지를 증거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와 일치된 뜻안에서 증거되어지는 예수님의 증거는 참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8:14절의 말씀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참된 증거를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사고에 전혀 맞지 않는 말씀을 하신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반대하기에 나아가서 그 말씀까지 반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되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 관계에 있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 관계에 있었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반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되 철저하게 자기 생각과 뜻을 가지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에 대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세상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진심으로 아는 신자라면 결코 자신을 증거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사상을 증거하기 위해서 애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자는 신자인 자신을 증거하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남들에게 신자답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답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 착한 일을 하고, 목사답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 의도적인 표정과 행동을 만들어 낸다면 그는 결국 자기를 증거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가 아무리 맞는 말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결국 자신의 지식을 포기하지 않는 주장이라면 그의 증거는 참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의 말이 참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참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33-36절에 보면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왜 세례 요한이 증거를 언급하시는 것입니까? 요한이 예수님에게 증거한 것은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요한의 증거가 자신을 위해서 필요하셨기 때문에 요한의 증거를 말씀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심으로서 요한의 증거를 앞세우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증거는 단지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증거, 즉 요한의 말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이루시는 역사, 예수님이 하시는 그 역사가 그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이루시는 역사가 무엇입니까?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행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들 하나하나가 개인적인 공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셔서 이루게 하시는 역사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의 완성이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요한의 말보다는 아버지가 이루시는 역사 안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의 행함이 더욱 큰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들을 예수님이 표적을 행하신 그 본래의 의도대로만 볼 수 있었다면 그 표적들에서 아들을 증거하시는 아버지의 의도를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보지를 못합니다. 단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과 신앙사상에 반대되는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예수님에 대한 반감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유대인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37-38)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속에는 말씀이 거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가 보내신 분을 믿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말씀이 거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소경이요 귀머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듣는다고 하고 본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약 때부터 이미 예수님을 증거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고 구약을 믿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그 속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그 속에 있는 신자라면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행하심을 볼 것이고, 그리스도의 행하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39절에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앞에서 우리 개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한다면 성경을 대하는 신자는 오직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증거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이 속에 있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대하면서 자신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를 증거할 지식을 쌓는데 열중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증거가 아닌 것입니다.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증거라면 그것은 결국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기에 참된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이 세상에서 옳은 것으로 인정을 받는가 받지 못하는가 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라고 할 뿐입니다. 남들이 믿어주든 믿어주지 않든 그것은 증거하는 자의 소관이 아닙니다. 그런데 남들이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속이 터진다면 그것은 내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에 대한 분함이 아닐까요?

 

 

 

 

우리가 예수님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본다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속 시원한 것은 보란 듯이 하늘에서 천군 천사를 불러서 유대인들을 혼찌검을 내주는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봐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 맞지'라고 하면서 의기 양양하게 그들을 눌러 버리는 것이 가장 속시원한 것이 아닐까요? 아마 우리 같으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내가 인정받지 못한다는 분풀이를 함으로서 그들을 후회하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우리 본성에 맞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만약 자신이 그렇게 한다면 그 증거는 참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그런 뜻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요 17:18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아들이신 예수님이 저희를, 즉 하나님이 아들에게 주셔서 살리신 자들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인해서 산 자가 된 신자는 예수님에게로부터 보냄 받은 자입니다. 보냄 받은 자는 자신의 독자적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셨기에 예수님을 아는 신자는 예수님과 일치된 뜻 안에서 역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인해서 산 자들이라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자들이라면 보냄 받은 자의 삶은 결코 자신을 증거하는 것에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 우리 개인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계실 뿐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으로 구분될 수 없는 것이 말씀입니다. 나의 감정 역시 무시될 수밖에 없는 것이 말씀입니다. 이것이 어찌 생각하면 참으로 속터질 정도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내 뜻과 생각 감정보다 말씀이 앞서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보냄 받은 자의 자세임을 잊지 말고 이 일에 부지런히 훈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안다면,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에 붙들려 살아가는 신자라면 나보다는 그리스도를 앞세운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임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27강) 5:39-47 성경과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성경을 읽어야 하느냐 읽지 말아야 하느냐라는 질문을 한다면 그 사람은 교회에서 아주 이상한 사람으로,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으로 공격받을 것입니다. 신자가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마치 사람이 하루 세끼 밥을 먹어야 사는 것처럼 필수적이며 자연스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신자가 성경을 읽는 것을 아주 중요한 것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도 부지런히 많이 읽을 것을 강조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성경 읽기를 게을리 한다면 그는 분명 믿음이 없거나 열심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될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라면 성경을 읽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도 부지런히 읽어야 한다는 교회의 분위기에 저는 돌을 던지고 싶습니다. 하지만 먼저 분명히 말씀드릴 것은, 저는 신자가 성경을 읽지 말아야 한다거나, 성경을 읽는 것이 필요 없다거나, 성경을 많이 읽지 말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제가 여러분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신자는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너무나 굳은 상식에 의해서 단지 성경을 읽는 것에 중점을 둠으로 정작 중요한 것은 잊어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기에 이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덧붙여 말씀드리면 성경을 많이 읽고 적게 읽는 것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신자는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합니까? 아니면 적게 읽어도 괜찮습니까? 사실 이런 질문에 대해서 답을 내리려면 먼저 많이 읽는 것과 적게 읽는 것의 기준이 분명해야 할 것입니다. '하루에 몇 장 이상을 보는 것부터 많이 읽는 것이고 몇 장 이하는 적게 읽는 것이다'라는 기준이 있어야 '많이 읽는다 적게 읽는다'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쉽게도 성경에는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답을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을 많이 읽으라는 가르침도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신자가 성경을 많이 읽고 적게 읽는 것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무조건 성경을 많이 읽을 것을 강조하지만 이상하게도 복음을 전했던 사도들은 성경을 많이 읽으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많이 읽고 적게 읽는 것에 대해 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말을 적게 읽어도 괜찮다는 말로 받아들이지도 마십시오.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성경을 많이 읽어야 되는가 적게 읽어도 되는가에 대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도가 성경을 읽으면서 '나는 성경을 많이 읽고 있다'거나 '성경을 적게 읽고 있다'는 개념을 가지게 된다면 그 사람은 성경을 읽는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자기 영광을 위해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진심으로 성경을 대하는 사람은 자신이 성경을 읽는다는 개념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많이 읽는다 적게 읽는다는 생각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친김에 한가지 더 질문을 하겠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성경을 읽으면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까?' '신앙이 있는 사람만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까?' 사실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신앙이 없다고 해도 성경은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다거나 하루에 얼마를 읽는다는 것 등을 기준으로 해서 믿음의 여부를 판단하려고 하는 것은 극히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신자가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39절의 말씀을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여 이 말씀을 '성경을 상고하라'는 가르침으로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성경을 상고하지 않는 죄를 말씀하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성경을 상고하고 있었음을 예수님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고 해서 시비를 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심으로서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되게 여겼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성경이 곧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로 오신 메시아임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더 질문을 하겠습니다.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성경을 읽는 사람은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알 수 없습니까? 분명 이치대로 한다면 성경은 곧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야 하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제대로 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는 사람들입니까 읽지 않는 사람들입니까? 그들에게는 모세의 말이 있었으며 또 그 말을 믿는다고 한 사람들입니다. 모세의 말, 즉 모세오경을 믿었으며 부지런히 읽었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모세의 말은 분명 성경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경이 신약성경만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는 지금과 같은 신약성경이라는 것이 아예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경이란 분명 모세의 말을 의미해서 하신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46절의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는 말을 통해서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말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모세를 믿었다면 예수님을 믿었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모세를 믿지 않아서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입니까? 그들은 분명 모세를 믿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은 결국 유대인 스스로는 모세를 믿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모세를 믿지 않았던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였지만 믿지 않았던 것, 이것이 유대인들의 실상입니다. 모세의 글을 읽었다고 하지만 결국 읽지 않은 것, 이것이 유대인들의 실상입니다. 모세의 글이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라면 모세의 글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게 되고 그분을 믿게 되는 것이 자명한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면 모세의 글을 읽지 않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의 실상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일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유대인의 실상에서 오늘 우리들의 신앙의 현실과 실상을 정확히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성경을 많이 보고 적게 보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린 것이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성경을 읽었다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읽으면서도 읽지 않은 것과 같은 유대인들의 실상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신 스스로는 '성경을 읽었다'는 것 하나만을 붙들고 자신이 신앙이 있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처럼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상고하는 이유는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한 것이라면 성경이 증거하는 영생의 길로 오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예수님에게 나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반대로 영생의 길이신 예수님을 반대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까? 혹시 그들이 신약성경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 말 역시 설득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모세조차도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하였다고 밝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세는 예수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모세가 자신에 대해서 기록하였다고 말씀하는 것입니까? 갈수록 머리가 혼란스러워지는 것 같지 않습니까? 성경이 참으로 복잡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이 복잡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방식이 모세를 따라가지 못하고 예수님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서 모세의 의도, 예수님의 의도를 보면 되는데 항상 우리들의 생각과 사고를 가지고 성경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예수님과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상고한 유대인들이 왜 영생의 길이 되시는 예수님에게 나오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은 이것을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44절)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믿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 가능성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예 믿을 가능성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가능성조차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의 영광을 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롬 2:29절에 보면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참된 유대인의 칭찬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로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41-42절에 보면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병자를 고치신 일에 대해서 칭찬하고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서 영광을 얻기 위해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음을 아셨기에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목적으로 성경을 상고하고, 기도를 하고, 구제를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읽었다고 해서 다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며, 기도를 했다고 해서 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상고했으면서도 결국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는 것으로 머물러 버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경에서 영생을 얻기 위한 어떤 방법을 구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모세의 말을 지키는 것입니다. 모세의 말을 지킴으로서 영생을 얻을 것으로 알았기에 부지런히 모세의 말을 지키는 것이고 결국 지킨다는 것으로 사람에게 칭찬을 받고 자기 영광으로 삼게 된 것입니다.

 

 

 

 

현대 교회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것은 '○○ 받는 비결'이라는 말입니다. 축복 받는 비결, 기도 응답 받는 비결, 구원 받는 비결, 등등 여러 비결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비결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방법론이 아닙니까?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어진다는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과연 성경이 우리에게 어떤 비결을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까?

 

 

 

 

마 6:6절에 보면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에서 기도 응답 받는 비결을 찾는다면 과연 어떤 방법이 나오겠습니까? 골방에 들어가서 은밀한 중에 기도하라는 것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분명 기도 응답 받는 비결을 가르치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한 말이지만 어쨌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성경에서 우리가 어떤 방법을 취하고 이루어서 되어지는 것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되어진다'는 비결, 방법론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가 몰라서 안했지 알기만 하면 할 수 있고 하기만 하면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러한 사상 자체가 반성경적이고 비그리스도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결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인간의 노력과 열심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어보겠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상관없이 자기 영광을 위해서 방법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예수님에게 나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에게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다는 말씀을 드려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그렇게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을 자신이 생각해 볼 때 자기만큼은 예수님에게 나오는 것 같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속에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 나온다는 것이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속에 있다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교회만 열심히 다니고, 교회에서 하라고 하는 것들 즉 기도하는 것이나 성경 보는 것이나 헌금하는 것 등에 부지런하면 예수님에게 나오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은 유대인들에게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예수님에게 부인을 당한다면 그러한 행위들로 예수님에게 인정받을 수 없으며 또한 예수님에게 나오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예수님에게 나온다는 것은 자신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나오는 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대상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방법을 생각했다면 그들이 할 것은 영생 얻는 방법을 실천하는 것이지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예수님을 찾고 도와달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방법을 잘 이룰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자기의 행함으로는 의를 얻을 수 없고 생명에는 근처에도 갈 수 없는 자신을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 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신자라면 하나님 앞에서 어떤 방법을 찾지 않습니다. 방법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 가능성을 두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을 멸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린 이것을 구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구약을 보실 때 무엇을 보십니까? 혹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기적들에게 매료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홍해를 갈라서 건너게 하신 기적을 체험하게 하시고, 하늘에서 내려진 만나를 먹었고,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나아갈 바를 인도 받았던 그들이 부럽지 않습니까? 현대처럼 하나님이 살아계신지 안계신지 조차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하다고 생각되어지는 시대보다는 뭔가 눈앞에서 당장 확인되어지는 시대가 신앙에 더 좋을 거라는 생각은 없습니까?

 

 

 

 

분명 이스라엘은 우리가 목격하지 못한 놀라운 기적들을 수없이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그 결과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놀라운 기적을 한번만 체험해도 하나님을 잘 믿을 것 같이 여겨지지만 기적을 한번도 아니고 수없이 체험한 이스라엘은 결국 하나님을 배반한 자로서 멸망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결국 구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은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어떤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하신다고 해도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기적을 체험한 자기 영광을 구할 뿐입니다. 인간은 기적을 체험했다고 바뀌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었다고 바뀌지 않습니다. 애초부터 죄악 가운데서 태어난 인간은 아무런 가능성도 희망도 없습니다. 이것을 증거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가 누구신가'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일에 대한 인간의 반응, 이러한 사건들 하나 하나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처럼 희망 없는 인간에게 빛으로 유일한 희망으로 오셨음을 성경이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다면, 그 내면에는 인간에 대해서도 증거함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을 모르고서는 예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거합니다. 이것을 모르는 것이 곧 어둠입니다. 빛이 왔으되 빛을 모르는 것입니다. 요 1:5절에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합니다. 빛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어둠의 상태이며, 빛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희망임을 모른다는 것이고, 이것은 자신에게 가능성과 희망을 두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에 결국 어둠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가능성을 두고 살아가는 사고방식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슨 비결이니 방법을 찾아 헤매는 모든 것이 다 어둠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성경을 보십니까? 혹시 성경을 보지 않으면 신자가 아닐 것 같아서 성경을 봄으로 '나는 신자다'는 자기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는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는 모습이며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이고 자기 영광을 취하는 행동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왜 예수님만이 나 자신에게 유일한 희망일 수밖에 없는지, 왜 예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인가를 깨닫는 것이 제대로 성경을 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하루에 몇 장을 봤는가 몇 번을 읽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성경을 100번을 읽으면 뭐합니까? 100번을 읽은 자기 자신이나 자랑하고 한번도 읽지 못한 자는 무시한다면 그는 빛을 깨닫지 못한 어둠입니다. 성경을 보지 않는 것과 동일합니다.

 

 

 

 

성경은 분명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예수님, 성경을 보니 나는 아무런 희망이 없으며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한 희망임을 더욱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자기들의 가능성을 찾았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에게 나오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이도 자신들이 찾아낸 방법을 통해서 영생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가능성이 없는가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으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으로 여실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을 하셔도 그것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이 살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생명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는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희망도 가능성도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실 수밖에 없었음을 믿는 것만이 참된 믿음이고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길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시고 우리의 희망이신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만 의지하기 바랍니다. 우리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우린 다만 예수님이 이루신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고 즐기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28강) 6:1-2 표적을 봄이러라


요한복음 20:30-31절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들뿐만이 아니라 수없이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이 그 모든 표적을 모두 기록하지 아니한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기록함으로서 신기한 이적을 행하는 예수님의 능력을 만인에게 소개하고 그러한 예수를 따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위의 말씀 그대로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그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기록한 요한의 의도요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표적은 하나의 독립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어떤 이적을 행하셨든 간에 이적은 이적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성취를 미리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표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표적은 결코 표적 자체로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표적은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는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표적은 표적 자체를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표적에 대한 진정한 반응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표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결코 주님의 의도를 따라가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표적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표적에 매료되고 도취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표적을 단지 경이로운 능력으로만 여겼을 뿐 자신들의 생명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증거하기 위한 예수님의 일로 보지를 못한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읽어 보면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을 때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예수님이 병자들에게 행하신 표적을 목격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병자들을 고치신 예수님의 능력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의 신기한 능력에 매료되어서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오병이어의 이적을 목격한 뒤에는 예수님을 억지로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으려고 함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그 자리를 피하게 됩니다(15절). 우리는 무리들의 이러한 모습이 곧 우리 자신들에게 있는 모습 그대로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떠한 병도 고치시는 그분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신 그분을 임금으로, 아니 현대적으로 말해서 대통령으로 삼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전세계의 모든 나라가 동일하겠지만 사람들이 대통령을 뽑을 때는 그 사람이 우리나라의 경제를 일으켜 세울만한 능력이 있는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 특히 경제가 어려운 나라일수록 그러한 시각은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천명이라는 무리들이 겪고 있었던 배고픔을 일시에 해결하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를 임금으로 삼는다면 배고픔의 문제만큼은 얼마든지 해결되고도 남겠다는 바램이 있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피해버리십니다. 결국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는 그들의 의도는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잘못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한 것은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소중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갖고 계신 능력이 소중한 것이고 그 능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큰 무리가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른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생명되신 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병자를 고칠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 앞에서 자기들이 얻을 수 있는 유익을 기대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되신 분임을 안다면 그가 알고 있는 자신의 본질은 예수님이 아니면 영원한 사망에 처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운명을 보지 못한 자가 예수님을 무작정 자신의 생명으로 믿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아다시피 성경은 인간을 사망에 처할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말합니다. 비록 세상은 이것을 무시하고 있고 또 영원한 사망이라는 것에 대해서 별 두려움도 가지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세상이 믿든 안믿든 관계없이 인간의 운명은 비참이며 사망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운명을 아는 사람이 예수님을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라면 신자는 예수님에게서 이미 말할 수 없는 유익을 얻은 사람입니다. 생명에서 단절된 자가 생명에 참여되었다는 놀라운 유익을 이미 얻었기에 또 다른 유익을 기대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로 인해서 누리는 생명의 귀함과 소중함의 가치를 모른다면 그는 언제나 자신이 기대하는 다른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에게 나오고 예수님을 따르려고 할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11:41-42절에 보면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이미 죽어서 무덤에 있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기적을 보이셨는데,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표적으로부터 예수님 자신이 드러나기를 기대하시기보다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표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의도였습니다.

 

 

 

 

이처럼 표적은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행하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보게 하기 위한 유익은 말할 수 있을지 언정, 병이 낫고 배고픔을 면하게 하는 유익을 위한 표적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표적에서 보는 것은 영적인 차원의 유익이 아니라 육신의 유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도 자기 육신의 유익을 위한 의도였던 것입니다.

 

 

 

 

표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성경에서 분명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지 않은 다른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예수님을 따른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의도에 전혀 부합되지 않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유익을 주는 존재를 좇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병인들을 고치신 예수님을 따르고 추종하려는 경향이 많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이신 그리스도보다는 병자를 고치신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에게 더 매력을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 역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선포하고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되심을 증거하기보다는 예수님을 따름으로 얻을 수 있는 유익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유익 때문에 예수님을 좇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실 말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을 체험한 뒤 예수님을 좇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표적에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본 것이 아니라 표적으로 인해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배부름을 보게 된 것입니다. 즉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배부름을 봤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보시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을 좇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과연 예수님에게서 여러분의 생명을 보셨습니까? 예수님이 없는 인간의 비참함을 아시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에게서부터 멀어질 수 없기에 예수님을 좇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참된 생명의 길을 가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행복자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게서 생명을 보고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여러분은 비참함에서 해방되고 영원한 생명에 참여된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으며,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을 찬송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에게서 아무것도 보지를 못하신다면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앙에 대해 긴장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여러분의 유익을 기대한다해도 그 역시 자기 신앙에 대해서 긴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표적의 의미는 하나님이 아들이신 예수 안에서 행하신 구원의 사역 안에서만 식별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표적은 결코 우리들에게 주어질 육신의 유익을 말해주기 위함이 아님을 다시 한번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때문에 우리가 성경에서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놀라운 믿지 못할 이적을 행하셨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 해도 그 사건들을 우리 개인이 예수님에게서 얻을 수 있는 유익으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것은 우린 과연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더 묻고 싶은 것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이전에 과연 보는 것이 있기는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이신 그리스도이든, 아니면 우리의 육신에 유익을 주는 그리스도이든 뭔가를 보고 예수님을 따르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마음은 셋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무관심, 또 하나는 잘못된 관심, 마지막 하나는 참된 관심입니다. 무관심은 생명이든 세상의 유익이든 전혀 관심이 없이 교회를 다니는 것입니다. 관심이 있다면 교회에 있을 뿐 예수님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잘못된 관심은 본문에서처럼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통해서 자기 유익을 기대하는 관심을 말합니다. 그리고 참된 관심은 예수님에게서 오직 영원한 생명을 보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신자의 모습인지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인생에만 관심을 두려고 합니다. 생명에서 멀어진 인생이 얼마나 비참한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채 다만 편안한 육신으로 살아가는 것에 마음을 둡니다. 이러한 잘못된 관심이 항상 예수님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바른 생각으로 정립되어야 합니다. 물론 병자가 낫거나 육체적인 만족이 우리에게는 매력적인 일임이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 경우 예수님을 인지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준비하신 것은 우리들의 영적 필요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떠나서는 그 필요가 얻어질 수 없음을 보여주는 진리가 바로 예수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서 인간의 육신의 만족이나 유익만을 바라본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자는 오직 생명의 문제로 예수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 역시 예수님이 없는 인간의 운명은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기에 자연히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운명에 정해진 심판과 멸망을 보지 않는다면 자연히 생명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보일리 만무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따르는 예수님은 다만 이적을 행하고 인간의 육신의 만족을 채워주는 예수일 뿐입니다.

 

 

 

 

믿음은 믿는 자들 안의 하나님의 일입니다. 자기 백성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하시는 일이 믿음입니다. 이 일을 예수 안에서 행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이해한다면 모든 일에서 자기 만족과 유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빛이요 생명이기에 그분을 따를 것입니다.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 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으로 굳건히 흔들림없이 예수님을 구주로 의지하며 따를 것입니다. 이것이 오직 생명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요한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예수는 기적을 행하는 자가 아닙니다. 배고픈 자에게 떡을 공급해주는 예수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사망에 처한 자에게 유일한 희망인 생명을 공급하시기 위해서 스스로의 몸을 버리시는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그 희망을 보는 그 사람이 바로 십자가에서 진심으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보고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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