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귀신의 침투
- 이다윗목사
귀신의 공격은 멈추지 않습니다. 어제도 귀신의 공격이 있었고 오늘도 귀신의 공격이 있습니다. 물론 내일도 귀신의 공격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모든 귀신들과 귀신의 아비된 마귀를 붙잡아 무저갱에 집어넣을 때까지 저들의 공격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계 20: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계 20:3]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귀신이 우리를 공격하는 한 우리는 자유할 수 없습니다. 오직 천국만이 우리가 자유해지는 장소입니다. 천국은 귀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더 이상 귀신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사도요한은 천국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계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천국은 눈물도 없고 사망이 없으며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질병도 없기때문에 아프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듯 천국이 좋은 것은 천국에 귀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귀신과 귀신의 아비된 마귀는 지옥불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계 20: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귀신을 조정하고 다스리는 마귀가 유황불에 떨어질 것입니다. 또한 마귀가 권세를 허락한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유황불에 떨어질 것입니다. 모든 귀신들은 백보좌심판대에서 저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차피 저들도 이전에 하늘의 천사였음으로 심판대 앞에서 저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아 지옥불에 떨어질 것입니다.
"[계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계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결국 천국에는 마귀도 없고 짐승도 없으며 거짓 선지자와 귀신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평화스러운 곳이며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마음에 상처도 없고 고통도 없고 눈물도 없으며 그 어떠한 질병도 없이 영원토록 죽지 않고 살게 될 것입니다.
귀신의 침투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이 땅은 마귀에게 속한 땅입니다. 우리가 귀신의 공격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귀신이 어떻게 우리를 공격하는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마귀는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삶 가운데 귀신들과 접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는 이처럼 이 세상을 통해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요일 5: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세상이 악한 자, 곧 마귀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마귀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마귀는 세상을 통해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귀신들을 사용합니다. 그렇기때문에 실제적으로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마귀가 아니라 귀신인 것입니다. 우리는 귀신들이 어떻게 침투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귀신들의 활동을 막을 수 있으며 귀신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귀신들이 어떻게 침투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 보겠습니다.
1. 귀신은 거짓말로 침투합니다.
우리가 거짓말을 할 때 귀신은 그 거짓말을 통해 우리 안으로 들어옵니다. 거짓말은 마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짓말을 할 때 그것은 귀신에게 내 안으로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주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마귀는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모두 마귀의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누군가 거짓말을 하게 될 때 그 사람은 스스로 마귀의 영역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거짓말을 밥먹듯이 합니다. "거짓말은 필요악이다"고 말합니다. "진실만 가지고는 살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말은 다 마귀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미 마귀의 영역에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마귀는 이미 우리 삶 깊숙히 스며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사업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말은 하나님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짓말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나라에 거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계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하나님 나라는 거짓말 하는 자를 받지 않습니다. 거짓말 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거짓말 하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거짓말 하는 것이 마귀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그 어떠한 것도 하나님 나라에 거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거짓말을 멈춰야 합니다. 선의의 거짓말이라도 해서는 안됩니다. 누구에게라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아시는 모든 것은 그대로 사람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심령을 모두 아십니다. 당신의 생각도 헤아리십니다. 그렇기때문에 당신은 하나님께 정직해야 하며 사람에게도 정직해야 합니다. 이미 하나님이 아시는 것을 사람에게 감춰서 무엇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시는 내용은 사람들도 알게 하십시오. 그것이 당신을 정직한 사람으로 만들 것이며 거짓말 하지 못하게 만들 것입니다.
실제로 거짓말을 할 때에 귀신이 그 거짓말을 타고 우리에게 들어옵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자주 하는 사람은 그 속에 귀신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 귀신의 정체를 밝히면 거짓말을 했을 때 들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귀신을 싫어한다면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거짓말을 할 때 귀신은 '기회(chance)'를 얻은 것입니다. 당신이 거짓말을 할 때 귀신은 먹을 것을 발견한 개처럼 달려들 것입니다.
2. 귀신은 참소를 통해 침투합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참소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누군가를 참소할 때 귀신은 당신의 참소를 통해 들어옵니다. 왜냐하면 참소는 마귀의 영역이기때문입니다. 당신이 누군가 참소할 때 그것이 마귀의 영역에 속한 것이기때문에 귀신이 합법적으로 당신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계 12: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위 본문은 마귀의 정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귀는 '참소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참소'는 헬라어<카테고르>로 '고소자' 혹은 '비난자'의 뜻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오직 이곳에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마귀가 참소하는 자라는 것은 고소를 잘 하고 비난을 잘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정체입니다.
마귀가 이처럼 남을 비난하고 고소하는 자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비난을 잘 하고 고소하는 자는 마귀의 영역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남을 비난하고 고소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난하지 않고 고소하지 않으면 제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세상이 험해져서 남의 잘못을 비난하지 않고 고소하지 않으면 수많은 피해를 당하기 때문에 어쩔수없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마귀가 비난하고 고소하는 자이기때문에 나도 모르게 마귀의 성품이 내게 묻어진 것입니다. 내가 너무 세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마귀의 성품이 내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내가 누군가의 잘못을 비난하고 고소할 때에 귀신이 그것을 틈 타 내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귀신은 우리가 남을 비난할 때 들어옵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고소할 때 귀신이 들어옵니다. 귀신의 정체를 밝힐 때 그 귀신들이 비난과 고소할 때에 들어왔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남을 비난합니다. 잘못한 사람을 비난하기도 하지만 잘못하지 않는 사람도 비난합니다. 또한 우리는 남을 고소합니다. 그 사람의 잘못을 고소합니다. 주위 사람에게 고소하기도 하고 심하면 법에 고소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남의 잘못을 고소하는 것으로 먹고 산다고 합니다. 이처럼 오늘날 고소문화는 너무나 자연스러워졌습니다. 변호사와 검사가 명예로운 직업이 된 것도 이처럼 고소문화가 발달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또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가까이 하지 못하게 우리를 고소합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를 나눌 때 악한 영은 매우 교묘하게 나를 고소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깊은 기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너같이 악한 자가 무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그러니?"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가만히 그 말을 듣고보니 그 말이 맞았습니다. '나같이 못난 자가 어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가?'란 생각이 제 머리 속에 스며들어왔습니다. 계속해서 악한 영의 음성이 내게 들렸습니다. "너를 보라고! 너는 죄인이잖아~ 너같이 더러운 자가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듣고보니 모두 옳은 말이었습니다. 그렇게 계속된 악한 영의 고소를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고개가 떨궈지고 마침내 내 머리는 땅바닥까지 다다를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한참 나 자신에 대한 처참한 모습을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성경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성경말씀에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사하셨다는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주님께서 내 모든 죄를 사하셨음이 깨달아졌습니다. 그런 생각이 내게 들어오자 그동안 악한영이 내게 고했던 고소들이 모두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더러운 귀신아! 너는 지금 내게 거짓을 고했구나. 나는 너의 말이 틀림을 깨달았도다. 그러니 너는 내게서 떠나가라!"고 담대하게 소리를 쳤습니다. 그랬더니 그 순간부터 고요해졌습니다. 내 마음에 평안이 깃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하나님의 깊은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체험한 것은 영적인 체험입니다. 내면의 음성을 통해 성령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뿐 아니라 마귀의 음성도 들었던 것입니다. 그 일로 나는 내 영이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으며 마귀의 음성도 들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에 성령하나님께 많은 질문을 하였고 성령님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귀신은 우리를 고소합니다. 이런 영적인 음성으로 고소하기도 하지만 실제적인 삶 가운데서 고소하기도 합니다. 주로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사람에게 자주 나타나는 고소가 있습니다. 교회는 담임목사가 매우 중요합니다. 담임목사가 얼마나 정결하고 거룩하게 사느냐에 따라 교회 전체적으로 얼마나 정결하고 거룩한지 판가름이 됩니다. 그렇기때문에 귀신은 다른 사람보다 담임목사를 더 집요하게 고소합니다. 그래서 귀신은 자주 "네가 그러고도 목사야!"라는 고소를 많이 합니다. 나도 이런 고소를 많이 들었습니다. 내 아내로부터 그런 소리를 자주 들었지만 귀신한테는 더 많이 들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런 고소를 하지 않아도 나 스스로 더럽고 추한 목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네가 최고다! 내가 너를 세웠도다"라고 치켜 세워주십니다. 하나님의 그런 위로가 없었다면 이미 나는 목사의 자리에서 내려왔을 것입니다.
이처럼 귀신은 끊임없이 우리를 고소하게 합니다. 남편으로 하여금 아내를 고소하게 하고 아내에게 남편을 고소하게 만듭니다. 부모가 자녀를 고소하고 자녀가 부모를 고소하는 것은 귀신들의 활동때문입니다. 내가 이웃을 고소하고 이웃이 나를 고소하는 것은 귀신이 우리를 멸하기 위해 활동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귀의 고소작전에 속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귀신은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비난하게 만듭니다. 나는 내 아내를 얼마나 비난했는지 모릅니다. 처음 목사안수를 받은 후에 몇 개월 안되어서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갓난 아이와 이제 2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가장 전도율이 낮은 지역에 가서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아파트를 렌트할 비용이 전혀 없었습니다. 직장도 없었습니다. 개척동역자도 없었습니다. 후원자도 없었습니다. 있는 것이라고는 어린 두 아들과 아이들때문에 일할 수 없는 아내가 전부였습니다. 미국은 만 14세 이하의 아이들은 반드시 부모와 함께 있어야 하는 법이 있습니다. 이 법을 어길 경우는 아동학대죄에 걸려 감옥에 가야하고 아이도 뺏깁니다. 심할 경우 다시 아이를 찾을 수 없으며 아이는 다른 사람에게 의탁되어 양육받아야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힘든 상황에서 개척을 한 것입니다.
개척하여서 제대로 교회가 부흥되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개척에 대한 사명이 없었기때문에 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내의 고백을 들었는데 처음 개척했을 때 아내는 개척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냥 남편이 하니까 따른 것이지 온 심령을 다해 동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잘 도와주지 않는 아내를 많이 비난했습니다. 욕까지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내 모습은 마귀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아내를 핍박하고 욕설을 할 수 있을까 도저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것도 신령한 목회자가 그렇게 했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내가 그렇게 했습니다. 아내는 그때의 내모습을 회고하면서 "그때는 자기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어"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때는 내가 아니었습니다. 마귀에게 붙잡힌 자였기 때문입니다.
비단 이러한 배우자 비난은 내게만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는 나처럼 배우자를 비난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배우자로부터 몹쓸 비난을 받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비난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줍니다. 상대방이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아파합니다. 이처럼 귀신은 비난을 통해 우리를 좌절케 하고 실패케 합니다. 우리 인생을 처참하게 짖밟습니다.
3. 귀신은 세상의 오락을 통해 침투합니다.
귀신은 세상의 정욕을 통해 우리를 침투합니다. 세상의 정욕은 마귀의 것입니다. 마귀가 세상을 사로잡고 있기때문에 마귀는 세상의 정욕을 통해 우리를 침투합니다. 사도요한은 세상의 정욕이 마귀로부터 좇아 온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세상의 정욕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은 '마귀공격 실체'에서 구체적으로 다뤘기때문에 이곳에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귀신이 이러한 세상의 정욕을 통해 우리를 공격하는 실제적인 활동에 대해서 살펴 보려고 합니다.
세상의 정욕에 대한 귀신의 실제적인 활동은 '오락'입니다. 세상의 오락은 귀신이 우리를 공격하는 주무기입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오락을 탐할 때 그것은 마귀로 하여금 길을 열어줍니다.
요즘 아이들은 게임을 좋아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오락입니다. 아이들이 좋지 않는 게임을 할 때 게임화면을 통해 귀신이 아이들에게 들어갑니다. 영안이 열린 사람은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게임이 얼마나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게임을 즐겨하는 아이들에게는 주님의 보혈을 많이 뿌려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에게 전혀 게임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이들을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은 것이기때문입니다. 만일 아이들에게 게임을 하지 못하게 막는다면 어른에게도 세상에 나가지 못하게 집안에 가둬야만 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리'떼에 보내신다 하셨습니다.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우리가 세상을 두려워 피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이 무서워 숨어지낼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이리떼'가 있는 세상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를 안전한 장막에만 거하게 하지 마십시오. 연약하게 키우는 자녀는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녀 스스로 무엇이 악하고 선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십시오. 다만 저들이 힘들어하지 않도록 주님의 보혈을 뿌리시고 선포하심으로 자녀를 악으로부터 지키십시오.
만일 당신이 주님의 보혈을 뿌릴 손이 없거나 주님의 보혈의 권세를 믿을 수 없는 심령을 가지고 있을 땐 아이들로부터 게임기를 뺐으십시오. 만일 당신이 자녀를 강하게 키우고 싶지 않고 세상에 눌려사는 아이로 키우길 원한다면 치마폭에 감싸서 키우십시오. 결코 세상은 만만한 곳이 아니기때문에 당신이 아이들을 평생 안전하게 보호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스스로 당신이 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자녀를 의탁해야 합니다. 당신이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키울 수 있도록 의지해야 합니다. 다만 우리가 할 것은 주님의 보혈로 자녀에게 뿌리며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결국 당신의 자녀는 세상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세상과 부딪혀 싸워야 할 것입니다. 싸움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자녀를 강건하게 키우십시오.
세균이 무서워 자녀가 더러운 흙을 만지는 것을 못하게 하지 마십시오. 자녀는 흙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모기에게 물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려하지 마시고 모기에게 물리게 하십시오. 물려도 죽지 않습니다. 모기에게 물려 죽는 사람은 벌에게 쐬면 더 빨리 죽을 것입니다. 그러니 죽지 않을만큼 두들겨 맞도록 환경을 조성하십시오. 그래야 자녀가 강건해집니다.
자녀들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세상의 오락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나는 지금 거의 6년 동안 집 안에만 갇혀 살고 있습니다. 전화기로부터 모든 전화번호를 없앴으며 거의 한 달에 한 명도 만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시키신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정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게하기 위하심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집안에만 갇혀 지내는 나에게도 부정결하고 부거룩한 삶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결코 우리는 세상의 오락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남편들이 좋아하는 세상적인 오락은 동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입니다. 심한 경우엔 술도 마실 것입니다. 더 심한 경우엔 더 좋지 않는 것도 취할 것입니다. 하지만 동료들과 함께 하는 것은 남편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막을 수 없는 세상적인 오락입니다.
아내에게 있어서 세상적인 오락은 쇼핑입니다. 남편을 위해 쇼핑할 수도 있고 자녀를 위해 쇼핑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쇼핑 자체가 즐거움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매스 미디어에 빠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스 미디어란 신문, 라이오, 텔레비젼, 책, 음반, 영화, 비디오 등을 가리킵니다. 요즘은 컴퓨터와 핸드폰이 발달됨으로 인해 인터넷의 문화가 가장 강력한 매스 미디어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 검색으로 시간을 보내는지 모릅니다. 이것 역시 세상의 오락인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오락은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세상적인 오락을 통해 귀신이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동료와의 모임을 통해 귀신은 우리 안으로 침투합니다. 쇼핑을 하고 있을 때 귀신은 우리 안으로 침투합니다. 갑자기 동료와의 모임을 하고 온 남편의 태도가 여느 때와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는 귀신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쇼핑을 갔다온 아내의 모습이 여느 때와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녀 또한 귀신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매스 미디어의 영향력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한 두시간 인터넷 검색을 하고 나온 사람은 마치 실제 삶과 매스미디어 삶과 구분을 할 수 없을만큼 정신을 잃어버립니다. 이것은 다른 마약 중독이나 술중독과 같은 중독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백화점, 술집, 모임, 영화관, 음식점, 마켓, 인터넷, 핸드폰, 골프장 등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 곳에 갈 때에는 항상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가야만 합니다. 그렇지않으면 귀신의 공격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런 준비없이 세상의 오락을 즐길 때 귀신은 조금도 인정사정없이 쳐들어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오락은 귀신이 깔아놓은 덫이기 때문입니다. 쥐만 덫에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귀신의 덫에 걸릴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귀신의 덫에 걸리고 있습니다.
4. 귀신은 음란을 통해 침투합니다.
귀신이 즐겨 사용하는 공격에는 음란이 있습니다. 이러한 음란은 다른 세상의 오락보다 훨씬 강력한 덫입니다. 다른 세상의 오락은 모두 몸 바깥에서 이뤄지는 것이지만 음란만큼은 몸 안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더욱 강력한 덫이 되는 것입니다. 음란에 빠진 사람은 그만큼 상처가 크며 귀신들의 활동 또한 강력하게 됩니다.
"[고전 6: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음란이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능력을 더럽히는 것이기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창조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낳으셨듯이 우리 또한 자녀를 낳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창조의 능력인데 그 거룩한 창조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거룩하게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귀는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더럽고 추잡한 성행위를 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심해지면 세상의 가장 끊기 어려운 오락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음란한 것을 탐할 때 마귀는 그것을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우리가 음란한 생각을 할 때 마귀는 자연스럽게 걸어옵니다. 우리가 음란한 짓을 행할 때 마귀는 큰 걸음을 하고 들어옵니다. 우리가 음란에 중독되었을 때 마귀는 자기 집에 들어오는 것처럼 뒷짐 지고 걸어옵니다.
우리가 음란할 때 마귀는 매우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성적능력은 하나님의 고유한 창조능력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을 가지고 더러운 음란 짓을 행하는 것만큼 귀신들이 기뻐하는 것은 없습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음란때문에 귀신의 밥이 되었습니다. 목회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버지도 예외가 아닙니다. 음란때문에 많은 교회가 무너졌으며 음란때문에 가정이 무너졌습니다. 음란은 한 나라를 망치게 합니다. 음란으로 인해 멸망한 나라는 많습니다. 음란은 이처럼 모든 것을 망하게 합니다.
음란한 것이 여러분 생각을 사로잡을 때 "보혈!"하고 외치십시오. 그러면 음란한 생각이 떠나갈 것입니다. 음란한 환상이 생각 중에 아른거릴 때 그것을 보지 마십시오. 그럴 때 오히려 "보혈!"하고 외치십시오. 그러면 음란한 환상이 떠나갈 것입니다. 누군가 당신을 음란한 것으로 유혹할 때 "보혈!"하고 외치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이 떠나갈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기도 중에 음란한 행위를 하는 영상이 떠올라 괴로워했던 사람이 도무지 기도가 되지 않아 내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기도를 할 때마다 음란한 생각이 떠나질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전해 줬습니다. "음란한 영상이 떠오를 때 그 영상에 주님의 보혈을 뿌리십시오. 그러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 사람은 나의 말대로 행했고 그때부터 그런 영상들이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음란한 것으로 귀신이 들어올 때 그 사람은 계속적으로 음란한 생각을 하고 음란한 짓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더 심한 음란행각으로 번지게 합니다. 이렇듯 음란한 것이 커지면 커질수록 당신의 가정은 위험에 빠져있으며 당신의 교회 또한 위험에 빠져 있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가정주부가 음란함에 빠져있습니까? 어린 자녀들까지 안전할 수 없습니다. 남편이 혼자서 인터넷 보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아내가 혼자 있을 때 정욕을 참아야 합니다. 인터넷은 혼자 있는 주부에게 음란물을 제공합니다.
점점 세상은 더 악해져서 인터넷이 온통 음란물로 가득 채워지고 있습니다. 음란물이 이메일을 점령하고 있으며 모든 검색창구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거룩"이란 단어를 검색해도 음란한 영상이 눈에 띄게 될 정도로 음란은 가장 확실한 귀신의 활동을 돕는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음란한 것으로 인해 귀신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회개해야 합니다. 단순한 회개가 아니라 가장 절실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성령의 불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불은 그 사람에게 임하는 주님의 보혈과 함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서 그 사람 안의 모든 음란한 귀신들을 쫓아낼 것입니다.
5. 귀신은 시기와 질투를 통해 침투합니다.
귀신은 당신의 시기심과 질투심을 통해 당신을 침투합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시기하고 질투할 때 귀신은 합법적으로 당신에게 침투합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거은 악한 것이며 이 또한 마귀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약 3: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약 3: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약 3: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시기하는 것과 질투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우리 삶에 깔려있습니다. '시기'라는 헬라어 <젤로스>단어는 '열심'이라는 뜻입니다. 젤로스라는 단어에서 '젤롯당'이라는 당이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 시대에 있었던 당이었는데 이스라엘 독립을 위해 충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시몬이 젤롯당원이었습니다.
이 말의 근원에서 보는 것과 같이 원래 '시기'라는 것은 열심히 일하고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좋은 말입니다. 하지만 이 좋은 단어가 나쁜 단어로 변질된 것은 마귀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하나님의 총애를 받은 매우 뛰어난 천사였고 그 또한 누구보다 하나님을 위해 충성을 다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그가 다른 천사를 거짓말로 고해 바쳤고 다른 천사를 참소하였기때문에 시기하는 자가 돼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기 자신만이 가장 큰 총애를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기 외에는 그 누구도 하나님으로부터 총애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욕심이 가득했기때문에 다른 천사를 참소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마귀로 인해 시기라는 단어가 좋지 않는 단어로 변질된 까닭입니다.
마귀가 이렇듯 하나님의 총애를 받았지만 오히려 시기하는 자가 돼버린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의 총애를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때문에 시기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한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가 남편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때문에 그 마음에 시기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장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직원에게서도 시기심이 들 수 있습니다. 한 선생을 위해 열정적으로 충성하고 섬김을 다하는 제자의 마음에도 시기심이 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귀는 우리의 마음에 시기심을 불러 일으키게 하여서 우리 마음에 들어옵니다.
이러한 시기심과 함께 따라 다니는 것은 '질투심'입니다. '시기심'이 열정적인 마음을 의미한다면 '질투심'은 그러한 열정에 의해 나타난 결과를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시기와 질투라는 단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시기'나 '질투'를 뜻하는 단어는 히브리어 <칸나>이며 이 단어는 여러곳에서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라헬이 아이를 먼저 가진 언니 레아를 향해 질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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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0:1]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또한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꿈을 듣고 그 마음에 시기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결국 그러한 시기하는 마음때문에 요셉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창 37:10]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창 37:11]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이렇듯 시기와 질투하는 마음은 죄를 낳습니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시기'나 '질투'는 원래 좋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누구에 의해 사용되었느냐에 따라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하고 반대로 나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른 '시기'와 '질투'가 있을 때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위한 더욱 귀한 사역을 감당케 하지만 그것이 마귀의 영향을 받는 것이라면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가리켜 '질투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자주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쁜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사랑하심에 있어 가장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질투의 하나님이시기때문에 우리가 우상숭배하는 것을 참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내가 바람피는 남편을 참지 못하는 것이 아내의 성질이 못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편이 나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것에서 질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귀신은 우리로 하여금 마귀의 영향에 사로잡힌 '시기심'과 '질투심'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형제를 미워하게 하며 서로 죽이게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마귀의 영향력에 사로잡혀 시기와 질투로 형제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시기와 질투를 조심해야 합니다. 잘못된 시기와 질투심이 우리 심령을 가득히 채워질 때 귀신은 아주 재빠르게 우리 안으로 침투한다는 사실입니다.
6. 귀신은 다툼으로 침투합니다.
귀신은 다툼이 있는 곳에 함께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다툼이 있을 때 그 다툼을 통해 우리 안으로 들어옵니다. 다툼이 마귀의 영역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다툼이 마귀로부터 온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약 3: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약 3: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약 3: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다툼'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에리데이아>인데 이 단어는 '비열한 본성' 또는 '이기주의적인 성품'을 뜻합니다. 성경은 이 '다툼'이라는 단어를 '당을 짓다'라는 뜻으로도 표현하고 있습니다.
"[롬 2: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이렇듯 당을 짓는 것 자체가 마귀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귀는 이처럼 우리로 하여금 당을 짓게 함으로 서로 분열되게 만듭니다. 이러한 분열로 인해 얼마나 많은 교회가 갈라졌으며 얼마나 많은 가정이 파괴되었습니까.
우리에게 다툼이 있을 때 그것은 귀신에게 합법적으로 우리에게 들어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합니다. 왜냐하면 다툼은 지극히 천한 마귀의 속성에 포함되는 것이기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다투는 자는 천한 자입니다. 고상한 인격을 가진 사람은 다투지 않습니다. 고결한 성품을 소유한 사람은 다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다투지 않습니다.
저희 부부는 결혼한지 15년이 다 되어 가지만 다툰 적이 거의 없습니다. 실질적인 다툼은 두 번 있었습니다. 주먹으로 치고 박는 그런 다툼이 아니라 목소리가 올라가고 서로의 생각을 강하게 주장하는 그런 다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의 다툼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부부가 싸워야 더 가까워진다"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싸우지 않으면 더 가까워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어떤 부부도 싸움의 휴우증을 가지지 않는 부부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부부들이 상처를 지니고 살아갑니다.
내적치유를 해 보면 그 어떤 사람도 상처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결혼한 사람에게는 거의 대부분이 배우자에 대한 상처가 있습니다. 특히 여자의 경우에 더욱 심합니다. 지금껏 남편에 대한 상처가 없는 아내는 없었습니다.
마귀는 이처럼 우리에게 다툼이 있게 하고 그러한 다툼이 있을 때에 귀신이 잠입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짖눌렀던 것입니다. 당신의 삶에 다툼이 없게 하십시오. 다툼이 있는 것은 당신의 원래의 모습이 아닙니다. 당신은 다툼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누구와도 다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도 다투지 않으셨습니다. 성령님도 다투지 않으십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다투게 하려고 유혹합니다. 하지만 그 유혹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넘어가면 지는 것이고 당하는 것입니다.
나는 결혼하여 신혼 때의 일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결혼하여 얼마되지 않았을 때 아주 사소한 문제로 아내와 다퉜던 적이 있었습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아내는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습니다. 나는 응접실의 탁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내 마음 속에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습니다. 화가 많이 났던 것입니다. 하지만 결혼할 때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화해하자"란 약속이 생각났기에 속으로 '내가 먼저 화해해야지'라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맘처럼 몸이 움직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있었는데 갑자기 누가 내 뒤에서 나를 껴안는 것이었습니다. 아내였습니다. 어느새 방에서 나와서 내게 다가왔던 것입니다.
아내는 내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잘못했어. 나를 용서해줘"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고 화해를 했어야 했는데 아내가 나보다 먼저 화해를 했던 것이 너무나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그 뒤로부터는 내가 먼저 화해할 것이라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가끔씩 간단한 말다툼이 있을 때마다 어김없이 아내가 먼저 화해를 했습니다. 크게 다퉜던 두 번의 순간에도 아내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두 내가 잘못한 일이었습니다. 잘못은 내가 했지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빈 것은 아내가 했습니다.
이런 아내의 덕분으로 인해 우리 부부 사이에는 그 어떠한 다툼으로 인한 귀신이 엄습하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승리한 것입니다. 나는 귀신이 다툼을 일으키고 그 다툼을 통해 우리 안으로 침입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귀신에게 속아서 부부사이에 심한 다툼이 있었고 그 다툼으로 인해 몇 개월 혹은 몇 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떨어져 원수처럼 사는 부부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비록 몸은 같이 한 집에 살아도 마치 부부가 아닌 남남처럼 그렇게 사는 부부도 알고 있습니다. 더 이상 귀신에게 속고 살지 마십시오. 부부끼리 하나가 되십시오. 둘이 한 몸이 되십시오. 정신적으로도 하나가 되십시오. 서로 기도하십시오. 귀신에게 당하지 마십시오. 지금 당장 배우자에게 무릎을 꿇으십시오. 용서를 비십시오. 그러면 당신을 속이고 조정하는 귀신은 당신으로부터 떠나가게 될 것입니다.
7. 귀신은 거짓 가르침으로 침투합니다.
귀신은 거짓된 가르침이 있는 곳에 거합니다. 거짓된 가르침은 마귀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거짓된 것을 가르칩니다. 거짓 선지자는 마귀로부터 권세를 받았습니다. 마귀로부터 권세를 부여받은 짐승이 거짓 선지자에게 권세를 부여했기때문에 거짓 선지자는 마귀로부터 권세를 부여 받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계 13:4]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용은 곧 마귀를 가리킵니다. 마귀는 짐승에게 권세를 주었고 짐승은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을 통해 마귀의 사역을 감당합니다. 예수님은 말세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사람을 미혹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오늘날 귀신들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도와 마귀의 사역을 돕고 있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은 거짓된 구세주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수많은 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마 24: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수많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 사람을 미혹케 하는 방법 중 대표적인 것은 거짓된 가르침입니다. 이처럼 거짓된 가르침이 사람들에게 임할 때 사람들은 미혹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거짓 가르침에 미혹을 받게 되면 사람들이 거짓된 가르침대로 살게 됩니다.
"[딤전 4: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거짓 선지자는 귀신들을 통해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거짓된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심어줄 때에 사람들은 믿음에서 떠나기도 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저주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적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이처럼 거짓된 가르침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의 미혹에 말려들게 되는 사람은 거짓 가르침을 전하게 되는데 이런 거짓된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에게는 귀신들이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한번 거짓 선지자를 통한 거짓 가르침에 빠진 사람은 거짓된 지식을 전하는 귀신들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거짓된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들은 귀신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역을 하다보면 이러한 거짓된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너무나 잘못된 가르침인데도 그 사람은 그 가르침이 진리라며 전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 모든 것이 거짓 가르침에 미혹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기도만이 모든 것을 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이 귀신을 쫓지 못하였을 때 "기도만이 이 모든 일을 능하게 하실 것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 [막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그런데 어떤 사역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도와 금식 외에..."라는 말로 바꿔서 가르칩니다. 물론 어떤 사본에는 '금식'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본에서는 '기도'밖에는 언급되어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금식'하는 것도 다소 일리는 있겠으나 대부분의 사본이 '기도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라고 말했으니 우리는 '기도'에 더욱 열심을 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된 가르침에 빠진 사역자는 '기도'외에 '금식'을 포함시키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거짓된 가르침입니다. 이런 거짓된 가르침을 전하는 자는 모두 귀신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어떤 사역자는 '기도'외에 '선행'을 집어 넣기도 합니다. 어떤 사역자는 '기도'외에 '헌신'을 집어 넣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가르침은 거짓된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말씀을 왜곡해서 전하는 무리들은 모두 귀신의 가르침에 빠진 것입니다.
자신을 가리켜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사람도 귀신에게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자신이 '구세주'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귀신에게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외에 '하나님 어머니'도 계시다는 가르침도 귀신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가르치는 무리들도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구원받을 길이 많다"라고 가르치는 무리들도 귀신에게 붙잡힌 자들입니다. 귀신은 이처럼 우리에게 거짓된 가르침을 전하기도 하고 또한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 속에 들어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마귀의 가르침을 가르치도록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된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그런 사람을 만나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이 당신 집을 방문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런 사람은 최대한 멀리하십시오. 그런 사람과 변론하지 마십시오. 비록 당신이 옳은 것을 가지고 있고 그 사람들이 거짓된 가르침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변론은 당신을 악한 것에 사로잡히게 만들 것입니다.
" [딤후 2: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바울은 변론하지 말라 경고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변론은 '다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다툼'이 일어나게 하는 것은 귀신의 유혹입니다. 이것 또한 덫입니다. 귀신은 우리로 하여금 거짓 가르침에 대해 변론하기를 원합니다. 그런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것이 덫이 되는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마귀의 지혜보다 더 뛰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마귀의 지혜를 이길 수 있습니다.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당신은 이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변론은 다툼밖에 만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의 마음에 거짓 가르침에 대해 변론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귀신의 유혹입니다. 당신이 변론하기 시작하는 순간 빨대로 쥬스를 빨아 마시듯 귀신은 당신 영혼을 빨아 먹을 것입니다.
나는 단기선교를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많이 만났습니다. 대체적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변론하길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단종파에 속한 사람들은 더욱 변론하길 원합니다. 그중의 한 종파는 '여호와증인'입니다. 그들은 변론하길 좋아합니다. 그래서 변론하도록 유도합니다. 그들의 전하는 가르침을 듣자면 한심하기도 하고 금방 그들의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럴 때 변론하고 싶은 마음이 찾아 옵니다. "변론하지 말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알고 있지만 그런 상황이 되면 영웅이 되고자하는 마음이 생겨서 변론하지 않고는 배겨날 재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증인 사람과 변론을 하기 시작합니다. 한참을 변론하고 나면 그들을 이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부분 간단한 지식을 암기해서 저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전하는 초보적인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번 변론에서 이기게 되면 다음에 또 다른 사람이 찾아옵니다. 그 사람들은 이전의 변론했던 사람보다 수준이 높은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도 이겼습니다.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또 다른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그때 나는 깨달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지. 나는 결코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변론은 마귀의 유혹 중 하나임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후로 다시는 변론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변론하다가도 금방 그 배후의 조종세력을 발견하기때문에 더 이상 변론하지 않습니다. 비록 내가 그 변론에서 이긴다 할지라도 이미 나의 영혼은 더럽고 추악한 가르침에 빠져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8. 귀신은 미움으로 침투합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는 귀신이 함께 합니다. 만일 당신이 누군가를 미워하면 이미 귀신에게 당신의 문을 열어준 것입니다. 당신의 미움 때문에 귀신은 합법적인 침입을 허락받은 것입니다. 미움은 하나님에 속한 성품이 아니라 마귀의 것입니다. 마귀는 미워하는 자입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미워할 때 그것은 당신의 성품이 마귀의 성품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사도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어두움에 거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요일 2: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그가 어두운 가운데 거하기 때문에 그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형제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한 자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요일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러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하리라"고 경고했습니다. 사도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얼마나 악한 것이기에 영생까지 얻지 못한다 경고했을까요? 그가 그렇게까지 말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서 그렇게 확언한 것일까요? 만일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이며 그렇기때문에 영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긴장해야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중 영생을 취할 자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미워하다'는 헬라어 단어는 <미셋오>입니다. 이 <미셋오>란 단어는 말 그대로 '미워하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미워하다'란 뜻이 단순히 어떤 사람의 행동에 대한 반감을 의미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미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에는 그 형제를 창조하신 하나님까지 미워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귀는 형제를 미워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원수관계를 맺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이러한 음흉한 계략을 막기 위해 우리에게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명하셨습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베풀라고 명하셨습니다.
"[눅 6:27]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우리가 이렇게 원수를 사랑하며 미워하는 자를 선대할 때 귀신이 틈을 타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이런 명령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납니다. 죄를 지은 것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라고 하면 얼마든지 무릎을 꿇고 죄에 대한 용서를 빌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지은 죄에 대한 잘못을 시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짓지도 않는 죄의 값을 치루기 위해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을 시인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내게도 그런 일은 자주 있었습니다. 억울합니다. 죄를 짓지 않았기때문에 솔직히 잘못을 시인하기 싫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네가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로 인해 그 사람이 변화된지 안된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내 마음엔 말할 수 없는 평강이 찾아 왔습니다. 그렇게 나는 귀신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막아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억울한 일은 많습니다. 억울하다고 해서 그것을 다 드러내놓을 수 없습니다. 목사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목사는 입이 있어도 내 맘대로 그 입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목사는 손이 있어도 내 맘대로 사용해서도 안됩니다. 발이 있어도 내 맘대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사용하라고 할 때 사용하며 하나님이 하지 말라 하실 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억울하게 죽으셨습니다. 죄가 하나도 없으셨지만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형을 받았습니다. 오직 중한 죄인만이 짊어질 수 있다는 십자가를 나때문에 지셨습니다. 주님께서도 입이 있으셨지만 주님 뜻대로 입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도 손이 있으셨지만 주님 뜻대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아버지의 뜻대로 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나요? 피해갈 수 있는 길은 없나요?"라고 하셨지만 한번도 내게 "왜, 내가 너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니?"라고 경멸차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주님의 길을 걸어갑니다. 당신도 주님의 길을 걸으십시오. 쉬운 길은 아니지만 주님을 위한 길입니다. 힘든 길이지만 주님께서 영광받으실 것입니다. 내 가족을 위한 길이 아니지만 주님의 나라를 위한 일입니다.
모든 미움을 버리십시오. 미움을 가져다 주는 형제를 사랑하십시오. 주님의 크신 사랑을 그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그 사람이 느낄지 모르겠지만 이미 주님은 당신의 큰 사랑때문에 감격하고 계십니다.
9. 귀신은 슬픔으로 침투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은 배우자가 죽음을 당하였을 때라고 합니다. 자녀가 죽을 때에도 큰 슬픔이나 배우자의 죽임이 더 큰 슬픔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슬픔이 있을 때 귀신은 그 사람 속으로 들어갈 틈을 얻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슬픔으로 인해 근심에 쌓이고 영혼이 번뇌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렘 8:18]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나의 중심이 번뇌하도다."
이처럼 슬픔은 근심을 가져오며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를 얻기가 힘이 들기 때문에 그 영혼이 번뇌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업하는 사람에게 사업의 실패는 엄청난 슬픔을 가져다 줍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또한 그렇습니다. 사람에게는 예기치 못한 재난으로 인해 슬픔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슬픔은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슬픔이 없습니다.
" [계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천국에서 애통함도 없고 눈물도 없는 것은 그곳엔 마귀의 존재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졸개인 귀신들도 없습니다. 모두 지옥불에 떨어졌기 때문에 천국은 평화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땅에 사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슬픔은 존재합니다. 여러가지 이유로 우리는 슬픔을 경험합니다. 귀신은 그러한 슬픔을 통해 우리 안으로 침투하려고 기회를 노립니다. 베드로는 고난을 받을 때 슬픔을 참으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벧전 2: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베드로는 고난이 찾아올 때 사람이 슬픔에 빠지게 되지만 "하나님을 생각하게 될 때" 그 슬픔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슬픔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원하든 원치 않던간에 슬픔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슬플 때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다"란 구절의 '생각하다'는 단어는 헬라어 <쉬네이데시스>입니다. 이 단어는 '양심'이라는 단어와 함께 '인식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슬플 때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보다는 보다 깊이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슬픔이 찾아올 때 우리는 어쩌면 마귀와의 관계를 더 깊이 맺을 수 있습니다. 모든 생각도 마귀의 생각이고 모든 행동 또한 마귀의 행동의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슬플 때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깊이 가져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 나올 수 있게 해야 함을 말합니다. 물론 이 일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슬퍼할 때 마귀와 관계만 맺는다면 우리는 귀신에게 당하고 말 것입니다.
이사야는 우리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을 때 더 이상 슬퍼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슬퍼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슬퍼하는 자를 찾아 슬퍼하는 자를 위로해주는 사역을 감당한다고 말합니다.
"[사 61: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슬퍼하는 자를 치료하지 않으면 슬픔에 빠진 자들은 모두 귀신의 밥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귀신은 슬퍼하는 자를 찾아가 그 사람 속에 들어갈 것이며 슬픔이 지속되는 한 그 사람에게서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그 사람은 귀신에게 사로잡히는 꼴이 되어서 멸망당하는 사람처럼 변하고 말 것입니다.
10. 귀신은 절망으로 침투합니다.
귀신은 또한 절망에 빠져있는 사람을 공격합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은 이미 귀신의 밥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이 절망에 빠지는 것은 더 이상의 소망이 없을 때 일어납니다. 이렇게 절망에 빠진 사람은 더 이상 소망이 없어서 절망하는 것이기 때문에 귀신이 들락거려도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한채 오히려 그 증상이 더욱 심해집니다. 욥은 절망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그 어떠한 소망조차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욥 6:26] 너희가 말을 책망하려느냐 소망이 끊어진 자의 말은 바람 같으니라."
'소망이 끊어진 자'라는 단어는 '절망'이라는 단어를 길게 나열한 것입니다. 결국 욥은 절망했으며 소망이 끊어진 자였습니다. 그의 열 자녀가 하루 같은 시간에 죽임을 당하였고 자신의 모든 재산이 한꺼번에 없어졌으며 사랑하는 아내마져 욥을 저주하며 떠나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육신에는 욕창이 생겨 기왓장으로 자신의 몸을 빡빡 긁어도 시원치 않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욥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욥을 자꾸 질책하시자 욥은 더 이상 소망을 갖지 못했습니다. 욥은 하나님만이 소망되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어떠한 고난도 달게 참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욥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하지만 하나님께서 욥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을 때 욥에게는 더 이상 소망이 없게 된 것입니다. 소망이 완전히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소망이 없을 때 절망하게 됩니다. 이러한 절망의 순간이 오래가면 갈수록 귀신에게 많은 것을 허용하게 됩니다. 귀신은 절망에 빠진 사람 속에 들어가 그곳에 집을 짓고 거주할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동료 귀신들을 불러와 그 사람을 더욱 심한 지경으로 만들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귀신들이 들어갈 때 그 사람의 상태는 이전보다 더욱 심한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우리에게는 소망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소망이 되십니다.
어떤 여인은 남편을 잃었습니다. 남편이 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원래 병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 사람을 사랑했기에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하여 두 딸을 낳고 행복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미국으로 유학도 함께 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행복한 세월은 너무나 짧았고 남편은 병으로 눕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 여인에게는 고생이 찾아왔습니다. 남편을 살리기 위해 이 병원 저 병원을 돌아다녔습니다. 용하다는 의원도 찾아 봤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안되다보니 요양원도 찾아 다니면서 민간요법도 사용해봤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죽인 뱀만 해도 수백마리라고 했으니 남편을 살려보겠다는 지극정성을 다한 것입니다.
하지만 남편은 얼마 가지못해 죽고 말았습니다. 아직 어린 두 딸과 젊은 아내를 두고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교회에 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나님.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그녀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수도 없이 간구해왔습니다. 하지만 막상 남편이 죽게되자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교회를 나가지 않았습니다.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니 모든 것이 미워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생의 슬픔은 절망으로 찾아왔습니다. 결국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두 딸을 생각해서 죽을 수는 없었지만 밤마다 울고 날마다 한숨 쉬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 절망감 속에서 귀신은 어김없이 그녀를 공격했습니다. 귀신은 그녀 안에 거주하면서 그녀의 삶에 기쁨을 빼앗아갔습니다. 수십년이 지난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새로운 남편과 함께 살지만 여전히 죽은 남편을 그리워합니다. 이 모든 것은 귀신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그녀는 새롭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새로운 남편을 만나 다시금 행복한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삶이 묶이기 시작했습니다. 귀신은 그렇게 그녀의 삶을 묶어갔습니다. 생각을 묶었고 그녀의 육신까지 묶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녀의 삶은 기쁨의 삶보다는 인내의 삶의 연속이었으며 수많은 질병과 함께 살아야만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모두에게는 그녀와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남편대신 아내를 잃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사랑하는 자녀를 잃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녀처럼 소망없이 절망스러운 삶을 살았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잃고 살아갑니다. 다른 것은 다 잃더라도 하나님만은 잃어서는 안되는 것이었지만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귀신의 영향때문에 하나님이 소망되심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편기자는 가장 힘이 들 때 스스로의 영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시 43: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절대로 절망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당신보고 절망에 빠지라고 말씀하기 전까지는 절망하지 마십시오. 당신에게 소망이 있으니 그 소망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구하십시오. 당신의 필요를 구하십시오. 당신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주실 것이니 그 방법을 애써 찾으십시오. 그러면 찾게 될 것이고 당신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얻게 될 것입니다.
11. 귀신은 근심할 때 침투합니다.
근심은 우울증을 불러옵니다. 그래서 근심이 많은 사람은 우울해지며 우울증이 심한 사람은 근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근심을 줄이는 것입니다.
'근심(anxiety)'은 '걱정(worry)'과 사촌지간입니다. 두 단어의 어원이 같은데 '조르다(choke)'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번 걱정과 근심이 시작되면 계속해서 그것이 반복됩니다. 이러한 반복은 그 사람의 영혼을 압박하게 되어 스스로 목을 조르듯 영혼을 조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밖으로 표현될 때 우울증 증세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은 일어나지 않을 것에 대한 것입니다.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의 대부분이 전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통계에 따르면 인간의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들 중 95%나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헛된 걱정과 근심으로 스스로 영혼을 조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걱정과 근심이 우리에게 있을 때 귀신은 그것을 이용하여 우리 속에 들어옵니다. 일단 들어온 귀신은 거주하려고 노력합니다. 귀신이 그 안에 집을 짓고 살게 될 때 그 사람에게 우울증이라는 증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울증이 심한 사람은 그만큼 귀신의 영향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목회자는 교회가 반쪽으로 갈라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걱정과 근심에 쌓여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생각을 낳다보니 걱정과 근심이 끊이지 않습니다. 결국 그 목회자는 점점 영혼이 메말라가며 자신의 근심대로 교회가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갈라진 것은 그 목사가 그렇게 생각했기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십니다. 무엇하나 의심하는 마음이 들 때 그 의심은 겉잡을 수 없을만큼 큰 폭풍으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 [약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약 1: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약 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근심은 의심하는 마음을 만듭니다. 의심하게 될 때 여러가지 생각이 사로잡게 됩니다. 이것이 맞는 것 같다가 또 저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이 왔다갔다 하다보니 결국 마음이 번뇌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사람은 주님의 말씀하시는 평안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근심이 번뇌를 불러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잠 12:25]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케 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
'근심'의 헬라어는 <데아가>입니다. 성경에서 언급한 '근심'이라는 단어가 모두 <데아가>로 쓰여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데아가>가 우리가 말하고 있는 '근심'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걱정' '근심' '염려' '두려움'등을 뜻합니다. 결국 근심하는 것은 걱정하는 것이고 근심과 걱정은 염려와 두려움을 가져온다는 말입니다. 그렇기때문에 근심하지 않는 것이 염려와 두려움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대해 근심합니다. 그런 사람은 돈 문제가 그 사람의 영혼을 짖눌러 번뇌케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때문에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바울은 돈을 가리켜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하였습니다.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우리는 근심함으로 귀신에게 틈을 허용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근심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성령님과 지속적인 동행입니다. 성령님과 지속적인 동행을 통해 우리의 근심은 없어질 것입니다. 바울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그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성령 안에서 무시로 기도한다는 것은 항상 기도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기도라는 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나의 기도를 도와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은 보혜사이십니다. 나를 위해 존재하신 분이시며 나를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심지어 내가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 지 모를 때에도 성령님은 나를 위해 대신 하나님아버지께 기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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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은 우리의 복입니다. 우리가 무시로(anytime) 성령님과 동행할 때 우리에게 근심이 없어질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근심을 가만히 놔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성령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안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평안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의 근심도 사라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곳에서 언급된 '근심'은 헬라어로 <타랏소>입니다. 이 단어는 이전에 언급된 <데아가>와는 다른 뜻으로 씌여졌는데 '함께 뒤흔들다' '어지럽히다' 또는 '불안케 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근심이라는 단어는 평정을 누리지 못하고 흔들리는 느낌을 줍니다. 또한 어지럽고 불안케 하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평안과 지극히 반대되는 감정입니다.
주님의 평안이 거하게 하십시오. 주님의 평안이 거할 때는 귀신이 조금도 틈을 타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감정이 흔들리거나 불안할 때 어김없이 귀신은 틈을 타고 우리를 공격해 들어올 것입니다.
사역을 하다보면 정서가 불안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눈동자가 왔다갔다 합니다. 손을 가만히 놔두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정서가 불안하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증상이 나타나는 것은 그 사람의 심령에 근심이 쌓여서 영혼이 번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매사에 근심함으로 안절부절못하고 불안스러워하는 사람은 치유가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성령의 불이 임할 때 일순간 불안스러워하는 증상이 사라집니다. 이처럼 성령의 불은 귀신의 영향으로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불안스러워하는 사람을 치유합니다.
성령의 불은 태우는 성질이 있어서 더럽고 추악한 영들을 태워버립니다. 귀신이 태워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귀신이 거주하는 집을 태우는 것이기때문에 귀신이 더 이상 거할 곳이 없으므로 나가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불이 너무 뜨겁다보니 스스로 자진해서 뛰쳐 나가는 것입니다.
12. 귀신은 화낼 때 침투합니다.
귀신은 우리가 화를 낼 때 침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분노와는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악인을 향한 분노이지만 우리의 분노는 우리를 위한 분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르시며 분노하셨던 것은 하나님을 위한 분노였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예수님의 분노는 귀신의 영향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런 예수님을 바라본 제자들은 예수님의 분노에 대해 좋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 [요 2: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요 2: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요 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예수님의 분노를 가리켜 제자들이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고 말한 것은 좋은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그런 열심이 오히려 예수님께 해가 될 것을 염려하여 말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위한 분노라 할지라도 위험한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귀신이 우리의 거룩한 분노를 통해 흘러 들어올 수 있기때문입니다.
나도 설교를 할 때 자주 불의한 자를 욕할 때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사님, 왜 화를 내세요?"라고 불평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분노할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물론 성령님은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나는 불의한 자에 대해서 분노의 말을 했을 때 어딘지 모르게 마음에 침울함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주님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는다 말씀하셨습니다.
"[마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내가 그 꼴을 당하지 않으리라 생각지 않습니다. 나는 형제에게 화를 내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내가 무엇이 잘나서 형제에게 화를 낼 수 있겠습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불의한 형제에게 화를 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나도 형제에게 노한 것으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심판이 되는지 형제에게 노한 것에 대한 심판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분노를 통해 얻게 되는 것이 심판때문에 두려운 것은 아닙니다. 그 분노를 통해 귀신이 내게 침투하는 것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목사가 오히려 분노함으로 귀신의 밥이 된다면 우스운 이야기거리가 될 것입니다. 성경은 분을 내지 말라고 말합니다.
"[엡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분을 낸다'는 헬라어는 <오르기조>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분노를 포함하여 사람의 분노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분노와 사람의 분노는 완전히 대치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하나님의 것이지만 사람의 분노는 마귀의 것입니다. 마귀에게도 분노함이 있습니다. 마귀는 그러한 분노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계 12: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입니다. 자신의 존재가 지옥불에 떨어질 때까지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우는 자입니다. 이제는 마귀가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마귀의 분노함이 우리에게 떨어지고 있습니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우리에게 마귀의 분노함이 붙게 됩니다. 성경은 미련한 자가 분노한다고 말합니다.
"[잠 12:16]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그렇습니다. 미련한 자는 분노를 빨리 드러냅니다. 쉽게 분노하는 자는 참으로 미련한 자입니다. 그는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입니다. 한번 분노함으로 귀신의 침투가 있게 되면 그 사람은 계속해서 분노하게 됩니다.
나의 경우에도 얼마나 분노했는지 모릅니다. 원래 나의 성격은 베드로와 같은 성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술을 먹지 않아도 화를 잘 냈습니다. 그러니 술먹고 화를 내는 사람보다 더 나쁜 자였습니다. 틈만 나면 아내에게 화를 냈습니다. 자녀에게도 버럭 화를 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화를 많이 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화를 내면 낼수록 더 많은 화가 치밀어 오른다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화를 낸 것이 점차적으로 횟수가 많이지면서 매일 화를 낼 때도 있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모두 귀신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분노의 죄를 짓고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화내고 저 사람에게 화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순간적이라도 급하게 화를 내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화를 내는 사람은 더 나쁩니다. 화를 내고 그 화를 평생 끌고 가는 사람은 더 지독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귀신은 우리로 하여금 분을 품게 하고 분을 내게 함으로써 우리를 망하게 인도하고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분노로 인해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 31:9]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근심'은 '분노'에 가까운 단어 <카아스>입니다. 이 단어는 '분노' '노여움' '격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노는 우리의 눈과 혼과 몸을 쇠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분노를 많이 하는 사람은 수명이 짧습니다. 분노하게 됨으로 몸과 영혼이 쇠약해지기 때문입니다. 귀신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분노하도록 유혹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과 영혼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13. 귀신은 불안할 때 침투합니다.
또한 귀신은 우리가 불안할 때 침투합니다. 불안한 것은 주님의 평안함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미 우리는 '근심하다'는 단어 속에 '불안하다'란 의미가 담겨져 있음을 살펴봤습니다. 실제로 마귀는 불안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물론 귀신의 영향력을 받은 사람은 불안한 모습을 보입니다. 시편 기자는 불안함으로 심령이 상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시 77:3]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셀라)"
'불안'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하마>입니다. 이 단어는 '중얼거리다' '투덜거리다' '으르렁거리다' '떠들썩하다'란 뜻입니다. 실제로 이런 불안한 사람은 혼자서 중얼거립니다. 뭔가를 혼자서 계속해서 말합니다. 또한 이런 사람은 조금만 옆에 가면 공격적으로 으르렁거립니다. 또한 이런 사람은 주변을 산만하게 만들며 떠들썩거리게 합니다. 이런 모든 증상은 불안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이런 증상을 나타나는 이유가 귀신의 영향아래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신질환이나 기타 장애로 인해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축사사역하는 사람은 그것이 정신질환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귀신의 영향에 의한 것인지 분명하게 영분별을 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영분별은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77편 3절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을 생각한 사람이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하나님을 생각하다'는 하나님에 대해서 상기하고 기억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만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평소에 하나님을 많이 생각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 불안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 불안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 중에 불안한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과 매우 깊은 관계를 맺는 사역자에게도 불안함은 존재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 모두는 불안함을 감출수 없습니다. 내게도 불안함은 손님처럼 찾아옵니다. 그럴 때마다 성령님께서 나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시고 위로함을 주시지만 여차하면 나의 평온함은 금새 회오리바람으로 치닫습니다.
우리가 불안할 때 우리의 심령이 상하게 됩니다. 심령은 우리의 영을 의미합니다. 불안하면 할수록 우리의 영은 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상하게 될 때 우리의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불안함을 막아야 합니다.
성령의 불은 우리의 불안함을 없애주는 매우 좋은 도구입니다. 만일 당신이 기도를 하는 사람이라면 성령의 불을 간구하십시오. 성령의 불은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임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은 성령충만함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물로 세례를 주시지만 또한 불로 세례를 주십니다. 물로 주신 세례는 물세례이지만 불로 주는 세례는 불세례입니다. 불세례는 곧 성령의 불을 주심을 의미합니다.
" [마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성령의 불을 사모하십시오. 성령의 불이 당신에게 충만히 임하도록 간구하십시오. 당신의 삶이 항상 성령님과 동행하게 하십시오. 그렇게 성령의 불이 당신에게 충만히 임할 때 귀신이 조금도 당신을 건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14. 귀신은 두려워할 때 침투합니다.
귀신은 우리가 두려워할 때 침투합니다. 두려움은 마귀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귀를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마귀를 더 무서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어떠한 피해나 상처를 주지 않으시지만 마귀는 우리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합니다. 그렇기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마귀를 더 무서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성향은 잘못된 것입니다. 마땅히 믿는 자는 마귀보다 하나님을 더 무서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귀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귀는 우리의 몸을 죽일 수 있어도 우리의 영혼을 죽이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떨어지게 할 수 있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귀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마귀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 자녀가 엄마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린 자녀는 엄마 아빠만 있으면 든든합니다. 그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무서운 상대가 있을지라도 엄마 아빠 뒤에 숨기만 하면 든든합니다. 이것은 어린 자녀가 부모를 매우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뢰를 가리켜 성경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그 어떠한 두려움도 물리칩니다. 사랑은 조금도 두려움을 갖게 하지 않습니다. 사도요한은 사랑이 얼마다 강력한 것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온전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쫓아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려움이 있는 사람에게는 형벌이 따릅니다. 두려워하는 자에게 형벌이 따르는 이유는 저가 온전한 사랑을 갖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요한은 천국을 보았습니다. 그가 천국을 보았을 때 천국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계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사도요한은 지옥불과 유황으로 불타오르는 못에 영원토록 빠질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하였습니다. 그 명단에는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행음자들', '술객들', '우상숭배자들', 그리고 '거짓말 하는 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중에 '두려워하는 자들'이 끼어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처럼 지옥에는 두려워하는 자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자들을 다른 죄인들처럼 취급하셨을까요? 실제로 두려워하는 것 때문에 지옥 간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지옥에 갈 명단에 적혀져 있는 '두려워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마귀를 두려워했던 자들입니다. 마귀를 두려워하는 자들은 마귀의 밥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귀신을 보내어 두려워하는 자들을 마음껏 주무르게 할 수 있습니다. 마귀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귀신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결코 귀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주님께서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셨기때문에 우리 또한 귀신을 승리한 것입니다. 이미 게임은 끝났고 승부는 결정되었습니다. 우리가 귀신을 이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귀신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우리가 승리자임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귀신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귀신의 출입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결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이미 마귀를 이기셨으니 우리 또한 귀신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귀신은 두려워하는 자를 좋아합니다. 당신이 귀신을 두려워하면 귀신은 더욱 당신을 좋아합니다.
귀신이 당신을 공격할 때 당신은 주님의 보혈을 뿌리십시오. 주님의 보혈을 뿌릴 때 귀신은 그 피가 어떠한 권세가 있음을 압니다. 그 즉시 떠나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귀신은 주님께서 보혈로 승리하셨음을 알고 있기때문입니다. 또한 당신은 주님의 이름으로 "이 더럽고 악한 귀신아 내게서 떠나라!"고 선포하십시오. 주님의 이름은 권세가 있습니다. 당신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귀신에게 선포할 때 귀신은 기겁을 하고 달아날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귀신을 대적하면 귀신이 달아날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약 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15. 귀신은 죄를 지을 때 침투합니다.
귀신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우리 안으로 침투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귀신으로 하여금 합법적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죄는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누구든지 죄를 지을 때 그는 귀신의 편에 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죄가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하였기때문에 죄 짓는 모든 자의 첫번째 열매인 것입니다. 모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의 죄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죄가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갈라놓기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죄의 값이 얼마나 큰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 59: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사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길 원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못합니다. 죄가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는 '담벼락'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볼 수도 없게 만들고 동행하지도 못하게 만듭니다. 이 담벼락을 허물어트려야 더 이상 마귀의 영향력에 빠져살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마귀의 영향력을 받지 않고는 결코 죄를 짓지 않습니다. 사도요한은 하나님께로 난 자는 결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요일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씨가 우리 안에 거하기 때문에 범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귀는 죄의 원천이기때문에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죄에 대해서는 전문가입니다. 죄를 어떻게 짓는지도 잘 알 뿐더러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없애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 [요일 3: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희망되십니다. 당신은 죄를 지었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죄를 지었기때문에 주님을 피해 달아나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절대로 마귀에게 나아가지 마십시오. 당신이 죄를 지었기때문에 마귀가 당신을 반겨줄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죄를 지음으로 마귀에게 나갈 때는 마귀로 인해 당신 인생은 처참하게 짖뭉게질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당신의 지은 죄를 사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요일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게 깨끗케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희망입니다. 그 어떠한 죄라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들이 생각할 때는 크고 작은 죄가 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는 그 어떠한 죄도 똑같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깨끗케 되는 죄는 모두 같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마약을 한 번 취한 것과 천 번 취한 것이 다르다 하겠지만 하나님께 있어서는 한 번이나 천 번이나 모두 똑같은 죄인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누가 죄를 회개하느냐를 중요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으면서도 회개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지만 중한 죄를 지었을지라도 회개하며 나오는 자는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다.
16. 귀신은 우상숭배할 때 침투합니다.
귀신은 또한 우리가 우상숭배를 할 때 침투합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외에 다른 신을 섬길 때 우리는 마귀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됩니다. 이렇게 우상숭배로 인해 마귀의 영향권 속에 들어가게 되면 그때부터 귀신은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귀신의 사로잡음은 비단 우리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온 가족을 붙잡고 온 가문을 사로잡기때문에 우상숭배로 인해 가계에 저주가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매우 싫어하십니다. 우상숭배를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우상을 섬기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섬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의문을 제기할지 모르겠습니다. 결코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출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출 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출 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만일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길 때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우리의 자손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너무나 끔찍한 형벌입니다. 너무나 심한 형벌이어서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강력하게 말씀하시는지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사역을 하다 만난 사람들 중에 가계에 흐르는 저주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들의 부모나 조상이 우상을 섬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많은 충격을 받습니다. 단순히 성경말씀만 볼 때는 그것이 그렇게 심각한 죄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지만 실제로 우상숭배로 인해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임한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조금도 틀리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절대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긴다면 당신의 인생은 그야말로 끝난 인생입니다. 당신으로 인해 당신 가족이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당신 가족뿐만 아니라 당신의 자손들까지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삼사 대"는 매우 많은 가족수입니다.
결코 당신의 우상숭배로 인해 당신 가족과 가문에 하나님의 저주가 흐르지 않게 하십시오. 하나님은 한 번 하신 말씀은 결코 변치 않으시기 때문에 당신은 지금 당장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이라는 것은 당신이 섬기고 있는 다른 신을 말합니다. 그것이 부처일수도 있고 다른 신일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수많은 신을 모시고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는 더 많은 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가정이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을 섬김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단 우리나라나 일본 뿐만 아니라 하나님 외의 신을 섬기는 나라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나의 부모도 여러 잡신을 섬겼습니다. 부엌에는 부엌신이 있었고 지붕에는 지붕신이 있었습니다. 자전거에는 자전거신이 있었고 각 방마다 신이 있었습니다. 1년에 지내는 제사만 10번이 넘었습니다. 나는 자라면서 제삿밥과 제사 국을 먹었습니다. 제사 때 가족들과 함께 절도 했습니다. 아무도 믿지 않는 가정이기에 어린 나로서는 아무런 의식도 못한 채 따라야만 했습니다. 모든 가정이 그렇게 하는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비록 내가 의식 없이 여러 신을 섬겼고 제사를 지냈을 때 내게 많은 저주가 임했습니다. 무엇을 해도 안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왜 내 인생이 막히고 막혔던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집안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겼기때문입니다. 이것때문에 인생이 꼬이고 꼬인 것입니다.
나는 어린 나이에 예수님을 영접하고서 기독교인이 되었기에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자연스럽게 끊은 것은 아닙니다. 다른 신을 섬겼기 때문에 흘러내리는 저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부터 그 저주가 서서히 끊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주님의 보혈이 얼마나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잘 끊게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파쇄되도록 선포하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만일 당신의 가정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고 있다면 당신은 지금 가계에 흐르는 저주 아래 갇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하십시오. 물론 섬기는 다른 신을 파쇄하는 것이 우선일 것입니다. 집안에 있는 모든 잡신의 흔적을 파쇄하십시오. 불상이 있으면 버리십시오. 다른 신의 모습이 새겨진 달력이나 물건들을 없애십시오. 다른 신에 관한 책도 버리십시오. 그런 후에 주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겼던 것을 회개하십시오. 눈물로 회개하십시오. 그렇게 회개할 때 당신은 가계에 흐르는 저주로부터 자유케 될 것입니다.
나는 치유를 위해 사람들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그 집에 있는 각종 우상들을 없애라고 권합니다. 집주인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때문에 구체적으로 이것을 없애고 저것을 없애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집안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주님의 보혈을 뿌립니다. 참석하는 사람이 10명이라면 10명 모두 일어나 내 뒤를 따르며 주님의 보혈을 뿌립니다. 나는 집안 구석구석에 좋지 않는 잡신의 흔적과 다른 신의 흔적을 발견합니다. 그것들을 없애라고 말하면서 주님의 보혈을 더 강력하게 뿌려줍니다.
실제적으로 집들을 방문하면 각 집마다 다른 영적인 분위기를 느낍니다. 특별히 다른 신을 섬기는 집은 흐르는 악한 기운을 더 강하게 느낍니다. 잡신을 섬기는 집에도 악한 기운을 느낍니다. 머리가 심하게 아파오기도 하고 머리가 심하게 죄어 오기도 합니다. 때로는 온 몸에 소름끼치는 증상도 나타납니다. 그런 집에서는 더욱 주님의 보혈을 의지합니다. 더욱 강하게 주님의 보혈을 뿌려줍니다. 그렇게 한번이나 혹은 두 세차례 보혈을 뿌리고 나면 그 집의 영적기운이 깨끗해집니다. 하나님은 온 땅에서 우상을 끊어지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슥 13: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당신도 과감하게 모든 우상을 버리십시오. 어떤 분은 불로 태우기도 하고 망치로 깨기도 합니다. 이런 결단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결단으로 인해 가계에 흐르는 저주는 파쇄될 것입니다. 자유를 누리십시오. 당신의 누리는 자유는 이 땅에서 풍족한 은혜의 삶을 보장할 것입니다.
17. 귀신은 주술에 의해 침투합니다.
귀신은 주술에 의해 침투합니다. 주술은 사술과 요술로 구분되어 집니다. 사술은 개인적으로 어떤 사람을 피해주기 위해 벌이는 것이지만 요술은 단체가 집단을 피해주기 위해 벌이는 것입니다. 사술과 요술 그 자체가 악한 것이며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성경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왕하 21:6] 또 그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격발하였으며."
'신접한 자'는 히브리어로 <오브>입니다. 이는 '강신술사(무당, 신접한 자)'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강신술사' 혹은 '영매'는 주로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는 일을 행하였습니다. '신접한 자'는 주로 여인을 가리키고 '박수'는 주로 남자를 가리킵니다. 신접한 자와 박수 모두 강신술사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이러한 강신술사는 땅의 구멍을 통해서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었습니다. 성경에서 신접한 자를 찾아간 왕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사울이었습니다. 그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점을 쳤습니다.
"[삼상 28:8]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는 사울이 가로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올리라."
신접한 여인은 사울의 요청대로 죽은 사무엘의 영혼을 나타나게 했습니다. 이는 실제적으로 사무엘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신접한 여인의 마술을 통해 사무엘을 나타나게 한 것입니다. 강신술사는 이러한 마술을 행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무당 역시 이러한 강신술사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저들은 귀신의 힘을 빌려 죽은 사람의 영혼이 잠시 나타나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사람의 영혼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들의 가지고 있는 마력을 통해 사람의 넋을 가로채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러한 강신술사를 싫어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귀신을 가리켜 죽은 자의 영혼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를 귀신들이 주로 가족의 이름을 들먹이며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죽은 자의 영혼이 귀신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귀신의 존재는 영적인 존재이며 이 귀신들은 하늘전쟁이 있었을 때 마귀와 함께 지상으로 쫓겨난 존재입니다. 이들 수는 더해지지도 않으며 감해지지도 않습니다. 이들은 마귀와 함께 모두 지옥불에 떨어질 운명을 가지고 있으며 지옥 불에 떨어질 때까지 저들은 마귀와 함께 할 것입니다.
다만 저들이 우리 가족의 이름을 말하고 내가 아는 친척의 이름을 말하는 것은 우리를 공격하기 위함입니다. 저들은 가족의 내력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귀신은 우리의 삶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태어났고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알고 있습니다. 부모의 이름이 무엇이고 형제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이런 지식을 이용해서 우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죽은 가족이 그 안에 들어와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귀신은 신접한 자나 박수를 이용하여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와 하나님의 자녀를 현혹합니다. 죽은 자의 영혼을 만난 사람은 영락없이 귀신의 현혹에 빠져버립니다. 죽은 가족을 만날 때 당사자는 얼마나 충격을 받겠습니까? 기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귀신은 얼마든지 그 사람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지금 다니고 있는 교회를 다니지 말라"고 말을 하면 그 사람은 가족의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또는 "네가 지금 살고 있는 아내와 빨리 헤어져!"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아내와 헤어지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귀신은 죽은 가족을 이용해 우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하고 죽은 자의 영혼이 귀신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마귀와 그와 함께 추방당한 타락한 천사만 말할 뿐입니다.
또한 성경은 '복술자'의 말을 듣지 말라 하십니다. 만일 누구든지 복술자의 말을 듣는 자는 하나님께서 용납지 않으시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신 18:14]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복술자'는 주문을 외우며 장래 일을 점치는 자를 말합니다. 이러한 복술행위는 하나님의 능력을 거부한채 복술자(점쟁이)의 말에 더 좌지우지하는 행위이기때문에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민족을 싫어하신 가장 큰 이유는 저들이 복술자의 말을 듣는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 외에 다른 사람을 의지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것이 복술자가 되었든지 신접한 자가 되었든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사람을 의지케 하는 것이기때문에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도 말고 그것들로 인해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하셨던 것입니다.
"[레 19:31]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부적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또는 결혼식 날찌를 잡을 때 '길일'택하는 등 주술행위를 즐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 점술가나 부적을 의지하는 것이 되기때문에 하나님께서 매우 싫어하십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우리의 영혼이 더러워집니다. 귀신은 이러한 것을 통해 그 사람 안으로 침투해 들어옵니다. 그리고는 계속적으로 그런 것을 더욱 탐하도록 유혹합니다. 그렇기때문에 한번 점술가를 통해 첨을 치거나 부적을 이용하는 사람은 지속적으로 즐겨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나라에 아직도 널리 알려진 주술의 내용으로는 공알바위에 돌을 던져 넣는 것이나 출산한 산모가 입었던 치마를 입으면 아기를 가진다는 것은 주술의 하나입니다. 또한 돌부처의 코를 깎아서 그것을 물에 타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생각이나 상대방의 그림을 가져다가 침을 놓는 행위, 또는 상대방의 베개사이에 부적을 넣고서 주문을 외는 식의 행위는 모두 주술적인 행위입니다. 이러한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주술행위를 그대로 따라 할 경우에도 귀신은 그런 행위를 타고 침투합니다.
또한 주술의 한 가지로 요술이 있는데 요술에는 마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술 또한 싫어하십니다. 마술 또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과 이적을 흉내 내는 사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마술을 행하던 모든 사람의 책들을 모두 불태우는 놀라운 일을 하였습니다.
"[행 19: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행 19: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바울에 의해 악한 귀신들도 예수님의 이름 앞에 굴복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에베소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지은 죄를 회개하며 나올 때에 자신들이 즐겨 사용했던 마술책과 관련서적을 모두 가지고 나와 불을 태웠습니다. 그렇게 태운 마술 책 값이 은 오만이나 되었습니다. '은 오만'의 값어치는 오늘날로 계산할 때 대략 25억쯤 되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은 이 금액을 '수백만달러'라고 표기했습니다(NIV).
지금 당신은 모든 주술과 연관된 행위를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귀신으로부터 자유해질 수 없습니다. 스스로 끊기 어려우면 가까운 사역자를 찾아가십시오. 그리고는 안수를 받으십시오. 안수를 통해 성령의 불이 당신의 끊기 어려운 주술과 연관된 죄들을 끊어줄 것입니다. 그렇게 당신은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는 요시야 왕의 선행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왕하 23:24]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박수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18. 귀신은 교만한 자에게 침투합니다.
귀신은 교만한 자를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누가 교만하다고 판단되면 금새 그 사람에게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교만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갑니다. 일단 귀신이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 사람의 교만은 날이갈수록 심해집니다. 보통적으로 사람들은 처음엔 겸손하다가 뭔가 됐다 싶으면 교만하게 되는데 귀신은 그러한 경향을 잘 알기 때문에 사람이 교만할 때를 기다립니다. 물론 교만할 수 있도록 환경을 최대한 만드는 것도 귀신의 역할입니다.
성경은 교만한 사람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멸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귀의 자녀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죄나 좋지 않은 행동은 그렇게까지 멸망되지 않지만 교만은 다른 것보다 훨씬 강력하게 멸망당합니다.
"[잠 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사람이 교만하게 될 때 그것이 우리를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은 교만이라는 것이 마귀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교만의 모든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교만한 사람은 마귀의 성품을 그대로 본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마귀가 어떻게 교만했는지 구체적으로 말해주었습니다.
"[사 14: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사 14: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사 14: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계명성'은 사탄의 다른 이름이며 '루시퍼'라 불립니다. 마귀는 이사야의 표현대로 "하늘에서 떨어졌습니다." 하늘의 천국전쟁때 패하여서 이 땅으로 쫓겨난 것입니다. 하지만 마귀는 모든 천사보다 뛰어난 천사였습니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천사들 중에서 매우 빼어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천사들보다 자신이 더 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어떤 다른 천사가 자기보다 더 낫다고 생각되면 그 천사를 참소하였습니다.
"[계 12: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마귀는 이처럼 다른 천사들을 참소했던 것입니다. 마귀의 참소가 어찌나 심했던지 성경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라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표현은 마귀가 얼마나 다른 천사들보다 뛰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귀는 결코 다른 천사가 자신보다 뛰어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마귀는 그 마음에 교만이 찾아왔고 급기야 자신이 하나님과 견줄만한 자라고 스스로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런 마귀의 모습을 가리켜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절대로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은 것입니다. 아무리 그가 뛰어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견줄수는 없었습니다. 자신을 지은 창조주와 어찌 견줄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마귀는 자신 스스로 너무 점수를 많이 준 나머지 교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교만이 충만하게 채워지니까 형제들도 몰라보고 심지어 하나님까지 몰라뵀던 것입니다. 이처럼 교만은 매우 심각한 죄악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해서 하나님까지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신 8:14]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교만합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은 결코 그 자신이 교만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교만한 자는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 스스로 교만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만의 특성때문에 교만한 자에게 귀신은 어김없이 달라붙고 그 사람을 더욱 교만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한번 교만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계속적으로 교만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늘 우리는 교만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교만은 능력자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서도 교만은 나타납니다. 교만은 나이의 차이에 따라 강도가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교만은 강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도 교만할 수 있지만 못 배운 사람도 교만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주님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의 겸손을 배우는 자는 교만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하나님아버지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셨지만 종의 형체로 내려 오셨습니다. 창조주이신 주님께서 피조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또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본받을 모습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주님과 같은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마귀는 왕같은 모습으로 등장하며 임금같이 등장합니다. 결코 그 누구를 위해 종으로 섬기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처럼 종의 모습으로 다른 사람을 섬길 때 비로소 우리는 교만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잘났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교만의 시작입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겸손의 시작이며 교만을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빌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19. 귀신은 저주할 때 침투합니다.
귀신은 누군가를 저주할 때 침투합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저주했다면 이미 그 사람은 귀신의 침투를 당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이미 그렇게 선포한 것이기때문입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저주한 것은 그 저주가 그대로 이뤄지도록 선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이 당신의 선포를 듣고 그대로 행한 것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선포할 때 그 선포대로 이뤄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자녀에게 저주를 선포했다면 당신의 선포대로 자녀는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 어머니들이 흔히 쓰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고, 이 망할 놈아"
"이런 썩을 놈아"
"이런 쳐 죽일 놈아!"
"차라리 죽어라. 이놈아!"
"너는 안돼!"
"평생 돼지처럼 살거다!"
"너 잘 사나 봐라!"
"에이, 이 못난 놈아!"
이런 욕설은 저주입니다. 이런 저주의 말을 할 때 이 저주의 말을 들은 자녀는 그대로 됩니다. 실제로 어머니의 저주스런 말 때문에 자녀의 인생이 망치게 됩니다.
또한 자기 자신에게 저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자신에게 저주한 것도 자신에 대한 선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에게 저주할 때 귀신이 우리 안에 들어올 합법적인 권리를 얻게 됩니다. 야곱의 어머니 레베카는 자식을 끔찍이 사랑했던 어머니였습니다. 여느 어머니처럼 자식을 사랑했던 여인이고 남편에게 순종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레베카가 삶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원인은 본인 스스로 저주의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창 27:11] 야곱이 그 모친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창 27:12]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자로 뵈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창 27:13] 어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오라."
리브가는 야곱의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라고 말을 했습니다. 야곱의 저주를 자신이 받겠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렇게 한 말이었지만 실제로 리브가는 인생의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창 27:46]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을 인하여 나의 생명을 싫어하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면 나의 생명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리브가의 삶은 재미가 없었습니다. 이삭이 헷 사람의 딸들과 결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심지어 "나의 생명을 싫어하거늘"이라고까지 고백할 정도로 자신의 삶에서 재미를 못 느꼈습니다. 그래서 만일 야곱이 이삭처럼 헷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면 삶에 재미가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리브가는 이삭이 헷 사람의 딸들과 결혼했기 때문에 삶이 재미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저주스런 말을 했기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리브가의 삶은 어떠한 좋은 환경에 놓인다 할지라도 재미없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 스스로에게 저주의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저주의 말은 귀신을 불러옵니다. 그래서 귀신은 그 사람에게 저주의 영으로 가득차게 만들고 끝내 그 사람을 저주한대로 살아가게 만듭니다. 우리는 결코 저주의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 스스로에게 저주의 말을 합니다.
"나는 안돼!"
"나 같은 사람이 무슨 큰 일을 하겠어!"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
"나는 실패할거야!"
"그 사람이 나를 죽일 거라고!"
이런 저주의 말은 실제로 우리 삶을 그대로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저주의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축복의 말을 해야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저주를 짊어지셨다고 했습니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저주에서 속량하셨으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저주의 말을 행한 과오를 회개해야 합니다. 나의 저주스런 말로 인해 타인이 얼마나 피해를 입고 상처를 당했는지에 대해 철저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주님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보혈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요일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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