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2일 주일설교
완전한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영의 일이란???(히브리서 강해)
본문 / 히브리서 13장 10-17절
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 8 예수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 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서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 하였느니라 / 10 우리에게 제단이 있으니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도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 13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로 나아가자 / 14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 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 16 오직 행함과 서로 나누어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 하시느니라 / 17 너희를 인도하는 자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서론
히브리서의 ‘히브리’는 ‘경계를 넘어 온, 물을 건너온’이라는 뜻입니다.
육신적으로 히브리인들은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하여 왔기 때문에 히브리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이 찾아야 하는 히브리의 의미는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과 육체를 가진 사람이 사는 지구의 경계로서 영과 육의 경계를 이야기해야 하고 영으로 사는 땅 하늘과, 육체가 사는 땅 그 사이에 존재하는 궁창위에 있는 물을 건너 온 하나님의 입에서 하나님의 기운을 받고 지구에서 태어난 사람의 영을 논해야합니다.
그 히브리서가 아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예법을 지키려고 애쓰던 구약시대의 예언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칭호가 시온의 딸이었고, 마음중심을 외치시던 예수님의 사역이 있는 신약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의 호칭은 아들이었습니다.
갈라디아 4장 4-6절에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다>라고 하시며 그 아들의 영을 받을 수 있게 된 아들이 된 과정에 <율법에 매여 있어 육신의 예대로 말하던 모든 것을 버릴 그 때 비로소 아들을 보내셨다>고 하셨습니다.
타인을 보면서 서로의 옳고 그름을 가리며 육신의 복을 위해 기도하며 육신의 자유를 위해 기도하던 그 때 그 종으로 매였을 그 때를 가리켜 여자의 때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천국으로 돌아가서 영원히 살아야 하는 영을 위해, 그 영이 소망하는 새로운 방법의 생활이 자신에게 있을 것을 소망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자기와의 전쟁을 치루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부여하신 영적 호칭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에 마음중심으로 사는 생활이 되면 하늘의 집으로 덧입는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마음에 집을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로마서에서 죄인인 육신의 혈통으로 기록하신 다윗은 영원히 지어지는 성전의 의미를 몰라 다윗의 혈통이 되는 예수그리스도를 잊고 솔로몬을 자신의 혈통으로 생각하여 하나님이 짓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신 백향목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전체로는 구약시대에 존재했던 그 성막에서의 제사를 온전한 것이 아니라 모형일 뿐이라고 하시면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또 다른 마음의 제사를 요구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사람의 영이 마음이라는 장소에 영으로 지어야 할 하나님의 성전에 관한 명령서이며, 구약시대에 존재했던 성막으로 설명되는 영이 지어가야 할 성전 최후의 모습인 지성소가 되기까지 광야교회를 시작으로 지성소교회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한 영적 해설서입니다.
히브리서 13장에서 1-6절은 가르치는 자에게, 7-17절은 가르침을 받는 자에게, 그리고 18-19절은 히브리서의 기록자 자신의 영적상태와 하나 되기 위한 소원이 있고, 20-21절은 히브리서의 기록목적으로, 22-25절은 인도받는 자들에게 주는 응원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가르침을 받아야 할 자들에게 주는 본문에서,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모습(8)과 비교하며 가르치는 자들의 행실이 어떠한가를 보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7).
이는 그를 가르치는 자들의 전하는 말과 행동이 전혀 다름이 없으니 그들의 믿음을 본받아야한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보면, 이 말씀은 성경의 모든 말씀을 영의 일로 강론할 수 있는 지도자는 자기가 먼저 변화 받고, 디모데적인 과정과 디도적인 과정을 넘어 빌레몬적인 사랑과 애정을 이미 마음에 품고 사는 지도자로서 흠을 잡을 수 있는 것이 없게 된 신앙교육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말과 행실이 동일하지 않은 교육자는 그 믿음을 본받으면 안 된다고 하는 명령이 함께 존재하여 그런 지도자는 로마서 16장 17절 이후의 말씀처럼 자기의 배를 위하는 교육자라는 단서를 부여하는 것으로 배우면 안 되는 즉, 그런 교육자라는 것을 안다면 떠나가라는 명령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9절의 말씀에는 식물과 하나님의 은혜를 구분하여 놓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유익이 있고 식물을 찾아다니는 자는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이끌리는 자로 하나님이 주시는 유익이 없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에게 배우려고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말씀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배우는 자들에 대한 경고로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10절에는 가르치는 자로서 예수그리스도로 보여주신 십자가의 죽음이 있는 희생을 드리는 제단과, 예수사역의 전 단계로서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는 장막을 구분하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3장으로 설명하는 제단에서 가르치는 대제사장은 먹을 수 있지만 장막에서 섬기는(라트듀오=하나님께 항복하는 예배를 드리는) 자들은 먹을 수 없는 그 고기는 <타인의 죄를 일깨워 그가 자신의 죄를 내어놓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동을 취하게 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자기의 죄의 해결과 그 죄를 따르는 행동을 해결받기위해 하나님 앞에 제사하는 장막에 있는 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육신적 죄의 문제도 온전하게 해결 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타인의 죄에 대한 가르침이나 신앙의 길을 설명하는 것 자체를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죽음 후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사역하시면 먼저 제자들에게 보이신 후에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말과 지식보다는 행위나 열매에 그 초점을 맞추고 남들이 인정하는 것으로 본이 되고, 편지가 되고, 빛이 되라고 하시며 본문에도 그 말하는 것과 행동이 일치하면 그를 본받으라고 하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설명하는 제단이란 11절의 성소와 같은 개념으로, 11절에 기록된 피를 가지고 가는 대제사장이 등장하여 그 장소가 지성소리는 것를 알 수 있습니다.
그 피는 지성소의 법궤 위 제단 뿔에 바르는 것이고, 17절에 있는 지도자의 상태처럼 매년 한 번 대 속죄일에 온 백성의 죄를 하나님께 해결받기위해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가는 대제사장의 모습과 함께 이 제단은 떡을 먹는 떡이 있는 성소가 아니라 백성의 죄를 해결 받기 위해 대제사장이 들어간 지성소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11절에서 생명을 상징하는 피란 <생명같이 여기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문 밖에서 태우는 육체는 번제단에서 태워지는 고기를 상징합니다.
번제단에서 죽어야 할 육체는 또 다른 제사장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지금 지성소의 모습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장소로서 자기중심의 사람의 성품이 타인을 배려하고 사랑하여 본을 보이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 것을 보여주는 믿음의 상태로 변화 받기 위한 교육을 받는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문 밖이란 것은 교회 밖이라는 것으로 육체를 태우는 제사며 그 예배는 교회 밖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으로 11절은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일상의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산 제사에 대한 규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2절은 우리들이 육체를 죽이는 일을 말씀을 배우는 교회가 아닌 일상의 생활을 하는 세상에서 이루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예수께서 성전이 아닌 성전의 문 밖 갈보리 산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것을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3절은 교회에서 배운 죽음의 법을 따라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육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영문 밖으로 그 능욕을 지고가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능욕’이란 단어가 ‘오네이디스모스’로 ‘중상모략, 조롱, 비난, 욕하다, 빈정거리다’라는 뜻의 ‘오네이조’에서 유래되어 ‘오만 불손, 비난’이란 뜻이며, 그 ‘오네이디스모스’는 빌레몬서에 등장하는 ‘오네시모’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입니다.
‘능욕’은 타인의 빈정거림을 <스스로가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만불손은 자신 스스로 <타인에게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십자가 앞으로 가지고 가야 할 번제의 제물은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행하는 오만 불손이었습니다.
이 오만 불손이란 로마서에서부터 계속 이어져 온 어두움의 일들 전부로 인간의 보편성을 바탕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모근 것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오만 불손이라는 것입니다.
그 오만불손을 교회에서 교육자에게 배운 대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행하는 오만불손을 찾아보고 살펴보아 생활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의 제물로 드려야 할 이유에 대하여 보편적 인간방법에서는 영구(永久)한 하나님의 도성이 마음에 지어지는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14).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본문의 결론을 내리는 15-16절은 오직 선을 행함과 나누어주는 것이 예수로 말미암는 찬미의 제사이며, 그 제사를 드리는 것이 예수의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정의 합니니다.
여기에 ‘선’은 ‘유포이아’로 ‘은혜를 베풀다’라는 뜻입니다.
‘서로 나누어주다’는 ‘코이노니아’로 ‘교제, 상호교류, 분배’라는 뜻이 있으며 빌레몬서에 등장한 ‘분여자’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찬미의 제사는 영이 있는 마음 안에 하나님의 집을 지성소로 짓기까지에 대하여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며, 배우는 사람은 그 배운 것을 생활에 적용하여 하나님이 보시는 어두움과 빛을 구분하여 빛의 행동을 하면서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이 보시는 일로 연관을 시키는 하나님의 사상을 인정하며, 세상에서의 필요가 아닌 천국에 살기위한 사람으로의 변화를 복으로 믿고 구하는 등의 하나님이 보시는 낮의 사람이 되기 위한 생활 자세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행하는 것이 찬미의 제사며, 입술로 하나님을 증거하며 예수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17절은 7절로 설명된 하나님이 인정하는 참 교육자가 사람들이 알지도 보지도 못하지만 자신이 자신에게 하나님이 맡겨주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생각하며 그 죄들을 일일이 점검하며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찬미의 제사에 쓰일 제물을 찾는 일을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생활에서 하는 말과 행동 속에서) 죄들을 말하여 줄 때, 대항하거나 거부하거나 핑계하거나 변명하거나 낙심하는 등 하나님이 필요 없는 사람으로 비춰지는 모든 행위를 교육자를 근심하게 하는 것으로, 그 일을 금하였으며 교육자가 전하는 말에 복종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하게 하라는 말씀으로 설명했습니다.
본론
히브리서를 또 다른 표현으로 하면 모세의 때에 하나님이 제사의 법으로 정하신 성막으로 표현된 영이 찾아야 할 신앙성장의 방법을 설명하는 설명서입니다.
그래서 각 장마다 성막이 설명되기는 했어도 구약시대 행하던 방법은 완전한 것이 아니고 마음에서 그 예배와 제사의 법을 행하는 것을 설명하면서 그 마음에서 드려야 하는 생활 제사를 완전한 제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도 다른 서신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의 모든 인물들과 예수그리스도가 비교되며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 모든 구약의 인물들은 불완전한 신앙의 상태로, 예수그리스도는 완전한 믿음에 대한 모형적 비유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13장은 설명되었다시피 지성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설명하며 지성소를 하나님의 집으로 마음에 지은 자는 사람들 앞에서 성경의 지식을 들어야 할 자들에게 가르치는 지도자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12장의 특징은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2)는 말씀을 시작으로 십자를 지시기 위한 예수의 자세, 십자가에서의 예수, 그 징계의 필요성, 그 징계가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할 이유, 그리스도가 고치신 손과 발 무릎과 다리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에서 천지가 진동했듯이 영존하기 위해, 진동하지 못하는 나라를 불로 소멸 받아 진동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설명하여 생명의 양식으로 일하셨던(요6장) 예수이며 성령으로 인한 출생의 의미를, 성령의 불로 조명되는 생명의 떡이 있는 성소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11장은 모든 구약의 인물들에 대한 평가의 끝에 그들이 받은 약속 성취는 영을 위한 약속을 반드시 성취시키신다는 또 다른 약속의 증표라고 하시면서 영원히 살아야 할 영혼이 구원에 도달한다는 믿음에 대한 설명과 함께(10:39) 그 구원에 대한 믿음의 결론이 보이지는 않지만 실재하는 것이며 그 증거들은 히브리서 11장에 나열된 선진들에게 육신이 복을 받는 방법을 설명하고 그 방법을 따른 자들에게 그 약속을 따라 복을 허락하셨던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11:1-2).
그러므로 11장의 모습은 육신적인 믿음을 따르던 행위를 멈춘다는 의미를 가지고 손과 발을 씻는 물두멍과 새로운 천국의 삶 안에서 천국의 양식을 먹는 성소 사이에 존재하는 예수의 몸의 상징인 성소의 첫 휘장을 상징하는 것으로, 예수의 몸으로 살기위해 예수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 영적 상태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해야합니다.
10장의 핵심은 정결과(2) 맑은 물에 씻음이(22)에 있어 성막에 있는 물두멍의 사건으로 이해해야합니다.
이 정결예식은, 하나님이 온전한 것으로 여기시지 않는 번제와 속죄제가 있는 번제단과(5-8) 하나님이 온전하게 여기시는 피의 제사인 그리스도 예수의 사건이 있는 성소(10-18) 사이에 존재하며, 번제와 속죄제로는 안 된다고 하는 신앙을 가지고 그리스도가 피 흘려 죽으신 집의 상징인 성소에 들어가며,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받고 머리에 받아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지식을 더함과(16), 죄가 완전히 사하여 없어지는 그 날(17)을 위해 전진하려고 하는 자신의 결단이며 행동입니다.
이 사건은 번제단을 설명하는 9장 9절이 설명하듯 하나님 앞에 온전할 수 없는 사람의 양심이 하나님 앞에 악한 것인 것을 깨달은 후에 드러나는 행동을 상징하는 것으로 자기의 양심을 따라 행동하던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사상의 물에 씻어 그 행동들을 멈춘다는 것입니다.
결국, 도둑질을 멈춘 전직 도둑들이 쓰는 표현에 <이제 손 씻었다>고 하는 표현이 바로 우리 신앙인들이 써야 하는 것으로 물두멍의 사건은 보편적인 인간들이 평상시나 별고(別苦)시에 행하던 모든 행동들이 하나님의 법을 떠나서 죄를 짓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 하던 행동을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9장에서 ‘섬기다’는 ‘라트레이아’로 남을 위해 하나님의 집에서 일하는 ‘사역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13장에 있는 자기를 죽여야 할 예배자와는 완전히 다른 표현입니다.
9장은, 성막의 구조를 설명하며(1-5), 그 성막을 다시 제사장들이 일하는 첫 장막 즉, 성소의 안마당과, 대제사장이 타인의 죄를 가지고 들어가는 성소로 구분하여 놓았습니다(6-8).
그리고 9절에는 본론으로 제사장들이 일하는 첫 장막에서 죽는 짐승의 피와 성소 안에서 죽으신 예수의 피를 구분하면서 번제에서 죽는 피는 사람의 양심이라고 설명했고 그 양심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의롭다 하심을 받는 거룩함에 이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양심’은 ‘쉬네이도’로 ‘공통된 지각, 도덕적 의식’이란 뜻을 함께 가지고 있어 교회 안에서 인간의 도덕이나 예절, 그 도덕을 바탕으로 하는 윤리를 설명하고 가르치며 그 윤리를 바탕으로 교회나 사회의 정의를 구현하자고 하는 발상은 하나님 앞에서 더욱 죄를 짓자고 외치는 마귀의 요구적인 외침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번제단의 제사로 자기의 양심을 따르던 모든 것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되고 고백하는 사건에서 어느 누구나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한 번 죽는 것으로 설명하였고, 그 번제를 심판이라 하신 것이며, 그 심판 후에 구원을 받기위한 예수가 다시 오신다는 표현으로 성소에 들어가기 위한 절대적인 믿음인 11장의 예수로의 중생, 거듭남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8장의 주제는 하나님의 요구를 따라 제사장들이 가지고 들어가는 제물에 있습니다.
설교자가 서있는 ‘강단’이라는 뜻을 가진 ‘기둥’이 있는 이 성막의 문에는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두고 생각에 기록하신다고 하는 것과는 반대의 순서로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마음에 기록한다고 하여 신앙성장의 순서상 제사장의 손에 이끌려 제물이 되어 들어가는 짐승이 먼저 머리로 인간의 원리와 하나님의 원리가 다른 것을 고백하고 후에 그 말씀들이 마음에 심어지는 자기를 위한 말씀의 깨달음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1장부터 7장의 내용들을 유의하여 보면 그 영들이 성막의 문으로 들어가는 짐승이 되기 위해 필요한 개념적인 어떤 신앙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그런 개념이 없는 사람들은 영이 온전히 살기위한 목적이 없이 보편적인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성막을 영적인 문제로 풀어놓은 해설서이며, 성막이란 개인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변화되는 과정에서 순서적으로 지어가는 교회의 이름으로서 보편적인 인간의 삶의 형태인 광야교회를 살다가 하나님이 요구하는 생활방식과 인간의 생활 방식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의 방식을 포기하면서 성막의 문 교회, 번제단 교회, 물두멍 교회, 첫 휘장 교회, 성소교회, 지성소 교회로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삭의 출생을 믿기 전까지의 아브라함도 포함되지만, 모세의 때부터 이스라엘의 남 북 왕국이 멸망하는 때까지를 기록한 출애굽기부터 시작되는 역사서는 광야교회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욕심대로라고 하는 욕심의 상징인 마귀 바벨론에게 포로가 된다는 것은 자기의 생각대로 세상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고 포기하는 과정으로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이며,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의 모습에서는 새롭지만 초라한 성전, ‘바벨(신의 문, 하나님의 문이란 뜻으로)에서 태어났다’는 뜻의 ‘스룹바벨’의 성전을 짓는 그 모습에서는 마음에 새로운 성전을 짓고, 그 성전으로 입성하기 위해 성막의 문 앞에서 생명을 포기하여 제사장의 손에 이끌려 성막의 문으로 향해 들어가는 짐승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대적자라는 이름과 복종자라는 이름을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
사람들과 다투다가 <너를 의롭다하므로 나를 불의하다하느냐>고 하는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서야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입을 닫으면서 타인을 위해 화목제를 지낸 욥기 사건부터,
주는 나의 구원자, 산성, 원수 앞에서 말씀의 상을 펼쳐주시는 분, 그리고 그 삶의 전체를 성소로 올라가기 위한 노래들로 채우고 있는 시편,
지혜와 명철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고 하나님만 온 우주의 지배라고 고백하는 잠언,
육적인 믿음의 종말과 함께 <새 생명을 위하여>라는 뜻인 살구꽃을 피우는 종말이 있는 전도서,
보편적인 사람방법의 사랑을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로 믿어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방법을 소유하는 것으로 풀어야 하는 아가서,
이 다섯 편의 시가서에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 위한 고백과 결단들로 가득 차 있어 성막으로 말하자면 성막의 문을 통과하는 과정으로 이해해야합니다.
선지서 전체에는 하나님을 오해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치 않고 잘 못 가르치는 자들에게 주신 예언서로 <메시아의 시대가 오면>이라는 단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주를 통치하시는 방법 전체와 십자가와 연결된 인간의 삶을 기록한 스갸랴와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가는 생활에서 십자가와 연관된 영적 헌물인 십일조의 생활을 기록한 말라기에는 실제로 <메시아 대망>이라는 결론으로 그 끝을 맺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서는 번제와 물두멍이 있는 성막의 안뜰에서 인식해야 할 하나님의 교훈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복음서는 생명의 양식으로 일하신 예수의 탄생과 죽음이 기록되어 예수그리스도의 육체라고 하신 두 휘장 사이에 계신 예수그리스도의 영을 위한 육신적 사역을 성소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설교의 주제가 부활입니다.
그 부활의 상황은 나팔이 불 때 일어나는 것이며 그 나팔은 사람들과 나누는 말, 언어 전쟁 즉 말로 다투고 옳고그름을 나누는 것이며 부활한 사람의 모습은 육신적인 원리로 따지고 마음을 아프게 할지라도 영의 소리,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해야 하는 과정이나 뜻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여 타인들과 전혀 다른 개념과 행동을 기쁨으로 할 수 있는 때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는 제자였던 사도들이 사도행전에서 성령을 받아 그 자신들이 변화 받고 하나님의 사역자로 일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사도행전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이 부활의 과정에서의 일이었다는 것을 설명하며 이 사건은 예수의 죽음과 같은 둘째 휘장 다음의 일로 지성소의 성물들을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서신서들의 발신자들은 모두 사람들입니다.
지성소의 주인공인 대 제사장이 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역을 유업으로 받아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것을 하나님은 성경 전체의 그 마지막 순서로 기록하셨습니다.
가르친다는 것은 반대로 배워할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배워야 할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마귀 중심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영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하나님 중심적이며 타인을 위한 성품과 행동으로 완전히 변화 받는 온전히 자라가는 영을 위한 말씀의 순서들로 구성되었고, 그 구성의 순서는 영원한 성전을 지어가는 하나님 방법의 성막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따라 변화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때부터 기독교가 대한민국이 들어오기까지는 착하게 사는 것이 대세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성품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타인을 중심으로 하는 성품으로 변화 받고 또 그 성품을 따라 타인을 위하고 타인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 받기를 소원하여 감추어진 행동마저도 타인의 영을 사랑하는 그 행동으로 변화를 받아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 복음의 대를 위해 쓰임 받은 모든 사람들 역시 하나님이 정하신 때,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만큼 일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도덕적 관념이나 윤리를 따라가지 못하면 그런 사람들을 죄인시하며 사형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할 정도로 정죄하고 매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 안에서는 오히려 가르치는 자라고 믿는 자신이 먼저 죄인이라고 말하며 자신이 하나님께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을 간과했습니다.
제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우리들의 지도자였던 예수그리스도도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기보다는 먼저 우리의 손에 의해 우리의 죄를 지고 그 자신 스스로가 먼저 죽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변하지 않고 서로 물고 뜯으며 싸우는 것은 그들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께 명을 받아 교육자의 사명이 있는 제가(교육자들이) 하나님 앞에 완전한 의인으로 변화 받지 못한 것 때문이기에 타인을 향한 손을 멈추고 아직까지 남아있는 제 안에 존재하는 마귀적 사상이나 성품들을 찾아 하나님께 고백하고 저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의 예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저를 변화시켜주신 하나님이 타인이 이해 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성경을 알게 하시고 깨달아 전하게 하시며, 종교개혁, 인류개혁을 외칠 수 있게 하신 것도 이제는 그 마지막 때가 찼기 때문인 것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글을 씁니다.
이제 세상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하는 법이라고 하는 고정 관념을 버리고 지킬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고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생활방법과 연계하여 착하게 살자고 말하는 고집을 버리고, 지성소가 지어지기까지 변화 받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게 되는 순서의 시작으로 돌아가 자신부터 하나님의 법을 따라 영이 살기 위한 영적 노력을 시작 할 수 있는 신앙의 때를 찾아 가르치고 믿고 따를 수 있는 하나님의 복이 가득하시길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히브리서 강해 설교에서 누락된 설교문입니다.
이는 창세기의 창조에 대한 비밀을 푸는 과정에서 히브리서의 위치를 반드시 말해야 하기 때문에 같은 문장으로 보기않고서는 성경의 순서가 온전히 일치하는 것을 말할 수 없어 함께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서 설교의 본문의 맨 끝에 놓고 읽어주세요
그럼 창조의 비밀을 푸는 열쇠로서의 히브리서와 창조사건의 12번 째 의 문단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에 대하여 찾는다면 창세기 2장 8-14절의 내용을 보아야 합니다.
이 내용들의 핵심은 하나님이 입의 기운으로 창조하신 영으로 사는 사람을 에덴의 동편 동산에 두었고, 그 에덴의 동편 동산에는 에덴에서 시작되어 영의 사람이 사는 동편 동산으로 흘러드는 네 줄기의 강물이 있었습니다.
강의 이름을 풀어보면 첫째인 비손 강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사역하시며 마음의 성품을 강조하신 마태복음과 일치하며 성령사역의 그 첫째인 사자 같은 뜻이 있고, 둘째 기혼 강은 종으로 사역하시며 타인의 영을 섬겨야 하는 것을 강조하신 마가복음에 또 성령사역의 그 둘째인 소와 같은 뜻이 있습니다.
에덴에서 동편동산으로 흘러 들어온 셋째인 힛데겔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하는 사람의 아들 인자(人子)를 강조하신 누가복음과, 성령의 셋째 사역인 사람의 뜻이 있고, 그 넷째인 유프라데 강은 사람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강조하는 요한복음과 성령의 그 넷째 사역인 독수리의 뜻이 있습니다.
에덴의 동편에 두신 사람은 영이며 그 영은 선악과와 생명과를 가리어 먹을 줄 알아야하며, 그 모든 것은 영이 지배할 수 있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한 말씀으로 유프라데의 뜻처럼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 돌격을 외치며 독수리처럼 하늘에 올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짓고 있는 죄들을 독수리의 눈처럼 밝게 보아 그 죄들을 조목조목 알 수 있게 가르치는 유업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타인을 가르칠 수 있는 때까지 자라가게 하는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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