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9일 설교
제목 / 가르침을 받는 자의 상태와 교육의 종류
본문 / 디도서 1장 5-16절
5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6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8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9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10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할례파 가운데 특히 그러하니/ 11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도다/ 12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13 이 증언이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14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서론
디도서에서 ‘디도’는 ‘공경, 지불된 대가, 형벌을 치르다’는 뜻으로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디모데서와 같이 가르치는 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나 ‘디도’의 뜻에는 ‘하나님을 공경하다’라는 뜻의 ‘디모데’와는 다르게 하나님이 빠짐으로 해서 ‘사람을 공경한다’라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디도에게 주어진 임무는 그레데인들 중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남편과 자녀를 둔 장로를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청지기로서의 감독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을 말하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고 했습니다.
‘그레데’는 ‘방언’이란 뜻과 ‘버림’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버려져야 할 방언에 대하여는 올바른 사랑이 오면 폐하여 없어질 것이며(고전 13장), 그 방언은 열국의 왕, 백성, 무리와 함께 음녀가 앉아있는 물들 중의 하나입니다(계17:15).
그러므로 그레데라는 신앙적 의미는 본문 12절의 말씀과 같은 마귀의 요구를 따르는 영적 신앙인의 모습니다.
그 그레데에 디도를 남겨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땅 각 성에 장로를 세우라고 하셨습니다(5).
성이란 공격을 위한 성벽이라는 뜻으로, 구약 예언서에서 언급된 성과 같은 것으로 개인이 가지게 되는 각각의 생각의 구역으로 사람이 가지게 되는 서로 다른 모든 상황이란 뜻입니다.
남과 다툴 때, 회의를 할 때, 물건을 강탈당했을 때, 교회에서 비난을 받았을 때, 자신의 치부가 발견 되었을 때 등등, 사람이 당하게 되는 모든 상황에 더하고, 그 대상이 누구인가에 따라 변하게 되는 모든 기준들에 더하여 그 기준을 따라 타인에게 자기를 어떻게 정당화시킬 것인가를 정해놓은 자기만의 틀이며 울타리가 성경으로 말씀하시는 성입니다.
‘천상의 회의를 하다’라는 뜻이 있는 장로의 자격은 첫째, 한 아내의 남편이 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문제는 에베소서나 골로새서에서 언급된 것과 같이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로 차이를 두고 있으나 에베소와 골고새에서의 남편은 신념과 행동과 성품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자신을 가르치는 자로, 그 자신은 그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르치는 자가 되어서 남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세워질 장로의 자격으로서의 남편은, 자신이 가르치는 자가 되어 천상의 삶을 위한 말씀대로 자기의 몸이나 마음의 생각이나 성품을 복종시키게 하는 것입니다.
장로의 자격의 그 둘째는 방탕하다고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두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나 역사로 존재하는 예수그리스도의 모든 사건을 믿는다고 하는‘빌리이브’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믿는다’고 하는 ‘훼이스 풀’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믿어, 생활에서 남에게 받는 조롱이나 비난 그 자체가 전혀 없는 생활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장로의 자격 그 셋째는 ‘자신을 돌아보며 관리 감독한다’는 ‘자기성찰’이란 뜻을 가진 ‘감독’을 세우는 것입니다.
자신을 관리하는 것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영의 행동에서부터,
제고집대로 하지 않게 자신을 관리감독하며,
급히 분내지 않도록 자신을 관리감독하며,
마귀의 유혹을 따라 욕심대로 살려고 하는 바벨론의 금잔에 담긴 포도주라는 의미의 ‘술’을 즐기는 것 즉, 타인이 자신의 말에 복종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 영적 행위를 하지 않도록 자신을 관리감독 해야 하며,
영의 일을 가르치는 자로서 육신의 것을 좇는 것이 사람 앞에 드러나게 되는 일이란 뜻의 ‘더러운 이(망신스러운, 부끄러운, 상스러운, 볼꼴 사나운 등)’를 탐하지 않도록 자신을 관리감독 하면서,
나그네를 대접하며(사람을 사랑하다), 선을 좋아하며(선행, 덕행을 좋아하다), 근신하며(온건하다, 자제하다, 분별력 있는), 의로우며(공정한, 거룩한, 흠 없는), 거룩하며(하나님의 성격을 따라 올바른, 하나님께 바쳐진), 절제하면서(일에 힘이 있는, 능란한, 식욕을 절제하는<‘결단력’으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함>), 미쁜(사람이 믿을 만 한, 신뢰하는, 확신하는, 신실한, 진실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카타<κατά>다양한 관계에서 그것에 연결된 격에 따라=문자가 말하는 대로 행동이 아님) 지키기 위해 자신을 관리 감독해야 하는 의무가 그레데인 중에서 세워야 할 그 장로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레데인들에게는 12절로 설명하신 행위적인 특징과 함께 하나님이 보시는 그들의 영적 행위가 16절에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자들로 교회에 출석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교회에서 예배하고 교회 밖에서는 전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애를 쓰나 그 말과 행동들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이 보시는 영의 일로 마음이 하는 말이나 행위를 모르는, 감독이 있고 자녀와 아내를 거느리는 남편이 있는 장로에 대해 전혀 모르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겠다고 애를 씀으로 인간은 그 누구라도 육신의 행위나 마음의 성품까지도 아무것도 못 바꾸고 아무것도 못 지킨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자가 되었고, 영의 일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변화를 받고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적하여 자신이 자신을 고치고,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 하나님과 싸우는 자, 하나님을 부인하면서 아무것도 거룩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거룩한 척 가증을 떨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복하고, 자신을 고침 받기위해 죄인인 것을 고백하는 하나님이 보시는 모든 선한 것을 버리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본문 13-14절은 처음교육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잘못 그린 그림을 지우고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리기란 무척 어렵고 힘이 듭니다.
그러나 백지에 그려지는 첫 그림이 제대로 된 것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붓을 옮기면 옮기는 대로 제대로 된 그림이 완성됩니다.
본론
그레데인의 상태는 성삼위 하나님을 믿으며, 그 하신 일을 믿으며, 교회는 다니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인 영이 하나님과 같이 온전해 져야 하는 하나님의 일을 모르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들은 그래서 교회에 나가거나 교인들의 모임에서는 온전하고 거룩하며 오래 참고 용서하는 자 같이 가증을 떨지만, 교회 밖에만 나오면 교회조차 나올 줄 모르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신앙의 문제로 볼 때 항상 거짓을 말하고, 자기의 욕심을 따라 자기의 이를 위해 자기의 배를 채우려고 애쓰는 자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위한 일에는 태만한 게으름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로서 디모데 적인 믿음에게는 바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디도에게는 바울과 함께한 자가 다 네게 문안(연합을 전재로 한 포옹)하니 우리를 사랑하는 자 안에서 너도 문안하라(딛3:15)고 명령하므로 디도는 바울과 연합된 자와 연합이 임박하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디도서 1장은 디도가 그레데에 남겨져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
2장은 그레데인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들에 대해 설명했고,
3장은 가르치는 자로서의 디도의 자세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3장 3절에는 가르치는 자가 되어있는 바울이 자신의 과거를 설명하고 4-7절로 그런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긍휼을 베푸셔서 하나님의 일군으로 세우셨음을 설명하며 1-3절에 피교육자와 다투거나 피교육자의 발언을 못하도록 훼방하지 말며, 관용하며 온유한 자세를 가지고 세상 모든 일에서, 정사(선재의 의미에서 모든 것의 시작, 첫, 모퉁이, 우두머리<우주의 주관자 하나님을 뜻하는 것>)와, 권세 잡은 자(<합법적인>초능력 인간, 특권 능력<공중 권세 잡은 자로 하나님의 명을 받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는 자를 상징하여 그 마귀의 유혹을 따라 자기의 욕심을 가지고 시험하는 모든 사람들까지 포함>)에게 복종하고 순종하여 하나님이 보시는 마음을 위한 일들을 하는 하나님이 보시는 선을 행하기 위한 기본 준비 자세를 갖추도록 가르치라고 하고 있습니다.
창조사건의 아홉 번째 문단으로, 창세기 2장 5-6절에는 새로 지음 받은(처음 교회에 출석한) 땅의 상태가 나옵니다.
그 땅에는 비도 없고, 경작자도 없고 초목도 없고, 채소도 없는데 땅에서 올라오는 안개만 있다는 표현은,
자신이 느끼는 하나님의 은혜나(비), 세상의 모든 일들을 자신을 죽이기 위한 하나님의 무기로 보는 것도, 또 말씀대로 자신을 죽이고 영으로 살기위한 노력(초목)도 없으며, 자기의 육신을 죽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도 없는 자이며, 말씀을 생각하며 자신의 마음의 땅을 갈아엎고자 하는 생각(경작자)도 없는 상태에서 자기의 마음에 있는 보편적 욕심을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땅에서 올라오는 안개) 것 밖에 모르는 사람을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이 고침 받고 새 생명을 얻은 대로 타인에게 새 생명을 얻게 해야 할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가르치는 자를 설명하고 있는 디도서는 이렇게 창조사건의 아홉 번째 비밀을 풀어주고 있습니다.
신학생 시절 남양주 어느 교회의 부탁을 받아 H-빔을 이용한 철골공사와 함께 조립식패널, 보일러 설치공사를 했습니다.
그때 같은 신학교를 다니던 어느 분이 자신의 분을 이기지 못하고 난동을 부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요구를 따라 그분을 집으로 데려다주려고 하면서 저는 하나님께 <아버지 어떻게 저런 사람을 하나님의 일군으로 쓰시려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제게 <너는 안 그랬냐?>라고 반문하셨습니다.
저는 저의 지나온 날들을 생각했습니다.
인제와 홍천의 딱 중간지점에 있는 휴게소공사에서 그들의 억지에 분을 참지 못하여 제 나이의 곱이 거의 된 어른과 욕을 하고 싸우고, 매장의 유리진열대들을 다 부수고 난동을 부린 일, 여의도 대한화재 빌딩공사 때 기술의 우위를 자랑하며 기사와 다투었던 일, 춘천국군병원 공사장, 원주 교회공사 등, 크리스챤이라고 생각하기에는 한참이나 거리가 멀게 행동했던 저의 행위가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포악스럽고 안하무인이었던 저의 일들이 떠올라 운전대를 잡고 한참을 울었고, 울면서 그분을 붙들고 그러지 말자고 하소연을 하고, 울면서 교문리까지 그분을 데려다 주었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사람들은 다 그렇게 제 마음과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폭언과 폭력에 상상불가의 욕설을 하는 그 모든 것들을 생각하며 사람이란 자신의 한계에 도달한 그런 때가 되면 다 그런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고, 다만 하나님을 참 뜻을 알지 못하여 자신을 변화시켜주시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만나지도 못하여 그런 것을 알게 되어 다시는 그런 사람들을 정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행위나 육신의 모양을 보면서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방법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문제에서는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 또 상황을 설명하며 자신에게는 철저히 관용을 베풀며 자신의 사정을 이해해주길 기대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도 남을 보는 시선에는 그 마음이나 감정 기분 상황은 배제한 채, 행위의 올바름만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행위에 대한 자신의 기분을 피력하며 상대방이 그 행위를 고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행위를 자신 스스로 고치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면 그 잘못된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만 고쳐주실 유일한 분으로 인식하고 자신이 인식한 잘못에 대하여 고쳐달라고 변화시켜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핵심은 입으로 하는 기도가 아닌 행위 속에 있는 의미를 찾아 인식하며 그 인식속의 의미에서 영의 사람으로 변화받기 위한 결단을 보이는 것이 궁극적 하나님방법의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의 지도자는 자신이 아는 말로 사람을 훈계하는 것이지만 교회의 지도자는 영의 의미로 보는 모든 잘못됨을 찾아 알게 하고 그 알게 된 것을 피교육자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고침 받으려고 하는 절대 의지를 하나님께 보이는 생활예배의 삶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교육자가 피교육자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는 지침을 디도서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 속에서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하늘의 일을 생각하면서, 그의 몸은 자신의 생각에 복종시키며, 육신을 좇던 행위들을 발견하는 족족 범죄 하지 않기 위해 멈추어 사람들에게 망신당하지 않게 하며, 그 자신 스스로도 자신이 해야 할 말이나 생각 행동들을 관리감독하며 하나님의 일에서 벗어난 것들을 찾아가는 신앙인을 만드는 것이 디도적인 신앙의 교육자에게 내린 하나님의 지침입니다.
디도적인 믿음에 대하여 그가 지내온 과정을 설명하는 곳이 있습니다.
한글개역성경의 모체인 알란더 역에는 없지만 보편적 원어성경의 정석으로 보는 스테판역에는 디도서 3장 15절 후반절이 더 있습니다.
마케도니아의 니고볼리에서 그레데 교회의 첫 번째 감독으로 임명된 디도에게 쓰여졌다.
마케도니아는 ‘숭배’, 니고볼리는 ‘정복, 승리, 승리의 성’이란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과 다투면서 승리를 얻은 자가 아니라, 모든 생활에서 자기와의 전쟁을 위해 하나님이나 사람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처음부터 섬김으로 승리하는 감독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 디도라는 이름을 하나님께 얻게 되었다는 말씀이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신앙의 그 시작이며 처음인 로마서부터 숭배의 의미를 하나님의 방법에 초점을 맞추어 놓았습니다.
그 방법은 사람과의 문제에서 애매히 당하는 고난(논리적으로는 자신이 옳지만 자신이 져주어야만 하는)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하며, 그 하나님의 뜻은 사람과의 언쟁이 아니라 영적인 자신의 문제를 찾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활을 자신의 성품과 행위가 온전히 변화 받는 과정을 통과하는 그 모든 삶에 적용시키면서 영적 승리를 일구어 낸 사람들을 하나님은 가르치는 지도자로 사용하십니다.
지금 교회의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던 의로움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말할 수 있는 행위의 온전함을 추구하여 교회가 아니더라도 의로운 지도자를 만들어가며 세상의 평화를 추구하는 W.C.C 같은 이상한 기구가 만들어지고, 기독교, 로마 카톨릭, 불교 등, 아무 것에서라도 인간적 행위의 올바름을 추구하는 세계성직자 연합회 같은 단체를 만들겠다고 나서는 미? 사람들이 있어 목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도 하나님 밖에서도 하나님이 보시는 의로움이 있다고 말하는 분들이 난립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논리를 보면 당연히 하나님의 힘은 필요가 없고 하나님만이 우주의 절대 권력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들의 노력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래도 오직 자기들만은 의롭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입으로 기도는 하지만 그들의 그 행위에서 찾는 영의 말에는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말을 들어줄 복종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 문제는 비단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보는 행위의 문제와 하나님이 보시는 행위의 문제를 구분하지 못한 우리 전체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남의 문제에서 찾는 인간적 공의를 과감히 버리고, 나 하나를 변화시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공의를 찾아, 육신의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이나 마귀를 다투고 싸우는 전쟁의 그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오직 영의 세상인 자기와 자기의 마음에 존재하며 자신을 유혹하여 세상과 다투게 하는 마귀를 그 대상으로 삼아야합니다.
결론
디도서의 목적은 가르쳐야 할 하나님의 일군이 갖추어야 할 덕목의 두 번째 과정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사람의 상태를 이해하고 그들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는 예수그리스도나 우리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있던 사도들의 교훈을 따라 아는 것을 가르치는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이제 하나님이 정하신 신앙성장의 길을 체험하고, 교과서인 성경의 법을 따라 그 체험되어진 영의 길을 가르쳐야 합니다.
남의 생각이나 기분 감정 행동을 억압하여 자기의 방법으로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자유, 평화, 이 모든 것들을 보면 지금까지 지구에서는 또 다른 전쟁과 억압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방법 속에 존재하는 자유를 바탕으로 하는 참 평화는 남의 생각이나 기분 감정 행동 등을 모두 이해하고, 하나님이 정하신 그 내면의 잘못을 하나님께 고백하게 함으로, (이루어지지 못할 이상향 같게 느껴지지만) 모두가 전쟁 없는 세상,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세상, 세상의 신은 오직 하나님만으로 인정되는 세상, 기독교가 종교가 아닌 생활이 되는 세상으로 변하는 날이 올 것을 믿고, 모든 신앙인들 각자가 다 새로운 종교개혁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사람을 통해 다수를 택한 것이 아니라, 각자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만나자고 한 사람을 훈련시켜 교육받게 하시고 그 다수가 다 세상에 새로 태어나는 자들의 교육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사람을 통해, 단체를 통해 하나님을 만난다는 모든 인식을 버리고, 말씀은 교육자에게 배우지만 하나님은 모든 생활, 모든 시간에서 마음으로 만나는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생활, 기도와 감사와 행복이 가득한 생활을 찾는 귀한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은혜 설교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역전 인생을 위한 5대 요소 (시 118;19-29) (0) | 2012.09.02 |
---|---|
[스크랩] 주라! 그리하면 넘치도록 안겨 주리라! (눅 6:38) (0) | 2012.09.02 |
[스크랩] 완전한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영의 일이란???(히브리서 강해) (0) | 2012.09.01 |
[스크랩]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0) | 2012.09.01 |
[스크랩] 듣는 자 행하는 자 (순종, 생명) (0) | 2012.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