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스크랩] 사도행전 강의안

하나님아들 2014. 6. 27. 15:43

 

 

 

사도행전 강의안

 

                                                                  심 상법 교수(총신대 신대원 신약학)

 

교회역사 속에 사도행전은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놀라운 영감을 불어넣은 엄청난 ‘보고’(寶庫)로 평가되어 왔다. 사도행전을 통해서 교회는 복음전파의 확신과 열정과 비전과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은 단순히 핑크빛의 낭만적인 체험이 아니라 수많은 역경과 도전가운데서 보여준 그러한 경험들이었다. 이런 점에서 사도행전은 교회의 삶과 사역에 있어서 대단히 실제적인 면을 다루고 있다. 즉 역사적 교회가 직면하는 여러 가지의 도전과 역경과 환난과 시련을 보여주고 있는데 거기에는 복음의 대적자들과 위선들과 부도덕들과 이단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과 역경과 도전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성령의 능력가운데 놀라운 증인의 삶을 살고 있음을 본다.

 

결론적으로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토대로 하여(행 1:1-2) 어떻게 성령께서 사도들(제자들)을 통하여 예수의 사역(전파/가르침/행하심)을 계속하게 함으로써 하나님 나라(교회)를 건설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기도와 말씀과 성령의 능력 가운데 사도들이 수난을 받으면서도 두려움 없이 담대히 복음을 전할뿐만 아니라 복음에 합당한 삶을 추구함으로써 교회가 양적으로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잘 성장(성숙)하여 감을 보여준다. 이처럼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형성과 발전의 역사를 기술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한 예루살렘 교회의 탄생과 함께 이어지는 성령 충만한 교회의 짧은 밀월의 기간(1-2장); 예루살렘 유대종교 지도자들에 의한 핍박들과 스데반의 순교(3-7장); 큰 핍박으로 인한 교회의 흩어짐과 빌립의 전도와 사울과 고넬료의 개종과 안디옥에서의 헬라 교회의 건설(8-12장); 이방선교의 시작과 바울과 바나바의 구레네와 갈라디아 선교(13-14장); 예루살렘 공의회에 의한 이방선교의 적법성의 확증(15장); 유럽선교의 시작과 함께 제 2 차 선교여행과 제 3 차 선교여행(16-20장); 바울의 체포와 이어지는 법정신문들과 가이사에 상소(21-26장); 로마를 향한 항해기사(27-28:15); 로마에서의 청문회와 가택연금과 금할 수 없는 복음의 전파(28:16-31).

 

결론적으로 누가는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28:30-31)에서 사도 바울이 셋집에 연금된 상태임을 언급하면서도 자신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금할 수 없는 복음임을 제시한다. 비록 자신은 잉여의 몸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메이지 않는 복음이며(cf. 딤후 2:9), 승천하셔서 위탁하신 이러한 주님의 복음은 끝까지 승리의 팡파르를 울리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부활하신 주님에 의해 위탁된 복음은 성령의 능력을 받은 증인들(교회)을 통하여 금할 수 없이 증거 되어지고 있다: 예수/성령 - 사도 - 교회 - 복음전파 - 세상 끝.

 

이와 같이 사도행전은 역사상 교회를 향해 끊임없는 도전과 영감을 불어넣어 왔다. 본 강의는 사도행전에서의 성령과 교회와 복음전파의 이러한 역동적인 모습을 깊이 상고하면서 우리의 영성에 커다란 도전과 족적(足炙)이 남는 공부가 되기를 기원하면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누가복음과의 관련성>

사도행전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가복음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사도행전이 주제에 있어서나 구속역사의 발전에 있어서도 누가복음과 연속성 혹은 통일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호 관련성은 행 1:1-2과 눅 24:46-53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누가복음]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행 1:1-2).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 시니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눅 24:46-53).

 

누가복음이 예수께서 승천하시기까지 그가 행하시고 가르치기 시작하신 모든 것에 관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면, 사도행전은 예수께서 그의 영(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도들)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행하신 일을 묘사한다. 즉 사도행전은 승천하신 후에도 예수께서 계속적으로 행하시고 가르치신 바를 서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Van Unnik 1960; Marshall 1993[1970] 117, 234). 이와 같이 누가복음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성취된 것으로 소개된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없는 누가복음이란 불완전하고, 누가복음 없는 사도행전이란 오해될 소지가 있다. 특히 누가복음서에 주어진 약속들이 사도행전에서 성취됨을 본다(e. g,. 눅 21:15과 행 6:10).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한 책으로 묶어 ‘누가-행전’(Luke-Acts)이라고 부른다. 그 뿐 아니라 신학적 주제(theological theme)의 통일성(연속성)과 그 문학적 형태(literary pattern)에 있어서의 병행적 모습은 이들이 각기 다른 두 권의 책이라기보다는 한 권으로 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입증해 준다.

 

<주제의 연속>

- 구원의 연속성: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푸셨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크리스천들에게 구원을 주신다. 누가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하여 구원을 제공하시는 방법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면, 사도행전은 이러한 구원의 대상인 참된 이스라엘로서의 크리스천들을 수립하는 일을 서술하고 있다(O'Toole 1984). 특히 누가복음은 하나님께서 만민에게 구원을 베푸심에 대한 예언들이 사도행전에서는 어떻게 그것들이 성취되어 가는지를 보여주는데 이것은 유대인의 거절로 인해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전환됨으로써 만민(모든 족속)을 위한 구원으로 나타난다. 세리와 죄인과 이방인인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함이 강조되고 있다.

- 복음전파: 곧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전파(눅 24:47): ‘회개하다’ 혹은 ‘회개’라는 단어가 누가복음에 14번, 사도행전에 11번 나온다. 세례요한의 사역(눅 3:3)/예수의 사역(눅 5:32; 10:13; 11:32; 13;3-5; 15:7, 10, 18-21; 16:30)/사도들의 사역(눅 24:47과 행 2:38; 3;19; 5:31; 8:22; 17:30; 26:20).

-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심의 사역의 연속성: 지상에서의 예수의 사역(earthly Jesus)과 예수의 영(the Spirit of Jesus)을 통한 천상사역. 예수와 예수의 영(행 16:7)

- 기도: ‘누가-행전’(Luke-Acts)은 기도의 사람 예수와 기도하는 공동체인 교회의 모습사이에는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잘 보여준다. 여기에 사도행전은 교회가 예수의 기도의 가르침을 얼마나 잘 따르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누가에 따르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위해 예수와 예수의 공동체가 함께 기도에 항상 힘쓰는 존재로 제시되어지고 있다(Plymale 1990:533).

- 성령: 성령에 대한 언급은 누가-행전의 주된 주제임이 분명하다(103구절에 106번 언급). 누가복음에서 세례요한의 탄생과 사역(눅 1:15, 41; 1:67)과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1:35; 2:25-27; 3:22; 4:1; 3:16; 4:14, 18-21; 10:21; cf. 10:38)에는 항상 성령과 깊은 관련성이 있음을 본다.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11:13)과 더불어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이르시기를 약속하신 성령이 오셔서 그들에게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는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삶이 불가능함을 말씀하시고 성령의 강림과 능력 받음을 위해 예루살렘에 머물러 기도할 것을 명하셨다(24:46-49). 여기에 사도행전은 이 약속이 어떻게 실현되어지고 있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행 1;1-2, 5, 8; 2L1ff, 17ff; 4:8, 31-35; 6:3, 8-10, 55; 8:14ff, 39; 9:31; 10:44ff, 13:2-4, 52; 15:8, 28; 16:6-8; 등). 이같이 성령의 강림과 능력 부어주심은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행 10:38)일 뿐 아니라 제자들(사도들)의 사역의 핵심(행 1:8)이기도 하다.

 

<문학적 형태의 병행>

- 유사한 서문으로 시작: 눅 1:1-4과 행 1:1-5.

- 누가복음(3:21-23)에서는 성령이 예수가 기도하실 때 강림하셨다면, 사도    행전(2:1-13)에서는 성령이 기도하는 제자들 위에 강림하였다.

- 예수님과 제자들 이들 둘 다 그들의 사역을 예언의 성취의 주제에 집중    된 설교로 시작한다: 눅 4:16-30과 행 2:14-40.

- 두 권 다 앉은뱅이 혹은 중풍병자의 고침 받은 기사를 가지고 있다.

- 종교지도자들의 갈등기사(눅 5:29-6:11과 행 4:1-8:3)

- 자기 집에 주요한 사람(예수와 베드로)을 초대하는 백부장에 대한 기사    (눅 7:1-10과 행 10 장)

- 과부와 부활에 대한 기사(눅 7:11-17과 행 9:36-43)

- 이방인에 대한 선교여행 보고(눅 10:1-12과 행 13-20장)

- 주인공(예수와 바울)이 거짓된 기소에 의해서 체포되어질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긴 여행기사(눅 9:51-19:28과 행 19:21-21:17)

- 그리고 이들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경험한 일들 사이에 유사점들

- 유사한 심문기사: 4번 심문 받고 3번 무죄로 선언.

- 둘 다 백부장에게는 좋게 여겨졌어도 유대인들에 의해서는 배척(거절)됨

- 둘 다 성경의 성취에 대하여는 긍정적 기술(눅 24:45-47과 행 28:23-28).

 

여러 가지 제목들이 보여주는 대로 사도행전은 말 그대로 ‘사도들의 행적’(전통적인 제목) 혹은 ‘성령의 행적’(Bengel; Pierson), ‘그의 사도들을 통하여 그의 성령에 의한 예수의 계속되는 말씀과 행동’으로 불려지는데 이러한 제목들은 사도행전의 주체(subject)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 주제(theme)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 준다. 여기에 ‘사도들의 행적’이란 인간중심을 강조한 느낌을 가진다면, ‘성령의 행적'은 신적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성령께서 일하게 하신 주역들인 사도들을 간과한 듯하다. 그러므로 마지막 제목이 보여주는 모습은 성령에 대한 강조와 함께 사도들의 역할의 중요성을 시사하면서 예수의 사역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있다(Stott 1990:32-34). 특별히 행 16:7의 ‘예수의 영’에 대한 표현을 유의하라.

 

<사도행전의 구조이해>

지리적 구분에 의해서 사도행전의 구조가 주로 이해되어졌는데 여기에 중심구절은 행 1:8(cf. 눅 24:47)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온 유대와 사마리아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행 1:9-8:3(예루살렘)

- 행 8:4-11:18(유다와 사마리아)

- 행 11:19-15:35(안디옥으로부터 이방선교로 땅 끝까지[아덴과 고린도]와    예루살렘 공의회)

- 행 15:36-19:20(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에베소까지)

- 행 19:21-28:31(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결심과 예루살렘에서 로마에게로의 호송)

 

이러한 지리적 전환에 대한 이해는 사도행전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특히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 뒤로 남겨진 것으로 이해되어졌다면 로마는 앞으로 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은 선교의 중심이지만, 로마는 그 목표가 된다(Powell 1991:26). 종국적으로 예루살렘은 복음을 거절하였고 이에 복음은 그것이 수용되는 곳이면 어디서나 전진한다.

 1                                13                              28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이방선교)

     (베드로: 예루살렘)                       (바울: 안디옥)

 

<1-12장과 13-28장이 모두 내용과 결과에 있어 병행되고 있음(Powell: 26)>

- 성령의 놀라운 입증과 그로 인한 설교(2:1-4, 14-40; 13:1-40)

- 앉은뱅이의 치유와 그로 인한 설교(3:1-26; 14:8-17)

- 스데반과 바울이 돌에 맞음(6:8-8:4; 14:9-23)

- 베드로와 바울의 이방선교와 감옥10:1-11:18; 12:1-19과 13-28장)

 

 1       3           8                  13           16                       28

 

교회가 수립되고 성장함   교회가 흩어짐        교회가 온 세계로 확장됨-------->

 성령강림                                 예루살렘

교회탄생->시련가운데 성장  유대와 사마리아로     소아시아/마케도니아/아가야/로마 -> 땅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 -> 제자들 -> 성령 -> 복음전파 -> <수난가운데> ->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위에 -- 복음

성령의 역사 하심에 의하여--- 성령 -> 하나님 나라가 확장 -> 땅 끝까지

일군들의 헌신(기도/말씀)과 봉사를 통하여-- 일군

 

 

<인물그룹에 의한 구조분석>

- 사도적 단락(1:6-5:42)

- 집사적 단락(6:1-9:31)

- 베드로 단락(9:32-12:24)

- 바울 단락(12:25-28-31)

 

<선교를 중심으로 한 구조분석>

서론(1:1-5)

본론(1:6-28:31)

- 선교의 기초(1:6-2:41)

- 선교의 실현(2:42-28:31)

* 유대인을 향한 선교(2:42-12:24)

* 이방인을 향한 선교(12:25-28:31)

 

사도행전의 주제는 성령강림이후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도들을 통해서 땅 끝까지 확산되어 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주제는 사도행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교회의 선교 사역을 통하여 어떻게 실현되어 가고 있는 지를 매우 일관성 있게 보여주며, 그 모든 역사는 구원사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명령(1:8)에 기초한 것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사도행전의 중심인물 즉 주역이란 베드로나 바울과 같은 사람들을 부활의 증인들(사도들)로 사용하시면서 이 모든 선교역사를 앞에서 주도해 가시는 성령님이라고 말 할 수 있다(박 응천). 이 경우 성령강림의 사건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예수의 선교명령 -> [기도하는 120문도] -> 성령강림과 베드로의 설교 -> 예루살렘[교회] -> 사도들의 복음전파와 수난(핍박) ->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 유대와 사마리아[빌립의 전도] -> 다메섹[사울의 회심] -> 가이사랴[고넬료의 회심] -> 예루살렘 보고 -> 안디옥 ->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의 투옥]-> 예루살렘 -> 이방선교의 중심 안디옥 -> [바울과 바나바] -> 구브로/비시디아 안디옥/이고니온/루스드라 -> 안디옥 보고 ->예루살렘 공의회 -> 안디옥 -> [바울과 디모데] -> 갈라디아 -> 빌립보/데살로니가/베뢰아/아덴/고린도/에베소 -> [예루살렘] -> [죄수로 로마 이송] -> 바울의 심문과 왕 앞에서 선 바울 -> 로마

 

<참고문헌>

Stott, J R W 1990. The Message of Acts. London: IVP (정옥배 역.  1992. 서울: 한국 기독학생회 출판부).

박응천 1997. 세계를 향한 복음: 설교를 위한 사도행전 연구. 서울: 한국   성서학연구소.

하워드 마샬. 1993. 누가행전. 이한수 역. 서울: 엠마오 출판사.

 

 

 

<숙제 1>

사도행전을 자세히 읽고(적어도 2-3번) 자기 나름대로 간략한 구조적인 개요를 만들어 보라.

 

 

 

 

 

 

 

 

 

 

 

 

 

 

제 1 과: 서론과 선교의 예비적 단계(행 1 장)

 

1. 사도행전의 서론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1-5).

 

서론에서 언급하고 있는 대로 성령의 세례를 통해서 시작될 사도들의 행적은 복음서에서 그 주인공이신 예수께서 자신의 공 사역을 위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시작되는 것(눅 3:21-22; 4:14, 18; cf. 행 10:38)과 병행을 이룬다. 세례 받으신 후 성령께서 예수님 위에 강림하셔서 그의 공 사역을 이룰 수 있게 준비시키신 것처럼, 이제 성령께서 또한 그의 사도들 위에 강림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사역을 잘 할 수 있게끔 준비시킬 것이다. 이처럼 누가-행전에서 성령은 예수의 사역과 사도들의 사역의 원동력으로 제시되고 있다. 특히 예수의 사역에 이어지는 성령의 사역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완성된 구원을 그들에게 적용시킬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이 구원의 복된 소식을 능력가운데 전파하도록 해 준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며 그들로 하여금 ‘사람 낚는 어부’(증인)로서의 삶을 살도록 부르셨다. 이제 예수님은 자신의 공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성령으로 명하시면서 이르시기를 이들이 성령의 세례를 통해 권능을 받아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함을 말씀하신다(행 1:5; cf. 1:8).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성령의 세례는 그들이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능력의 원천으로 이해된다(눅 24:48-49; 행 1:8; cf. 행 10:38). 이러한 성령의 세례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면서 성령의 능력을 받고 일하신 것처럼(눅 3:21-22; cf. 행 10:38), 예수의 제자인 사도들(예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도 기도를 통해 성령의 세례를 받고 능력 있는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능력 있는 부활의 증인들’로서의 사도들의 삶은 사도행전을 통하여 잘 입증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부활의 증인으로서 능력 있게 살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곧 성령(의 강림)을 기다려야만 하였다(눅 24:49; 행 1:4-5). 이러한 그들의 기다림의 모습은 행 1:6-26에 잘 나타난다.

 

2. 성령 강림을 기다림: 선교의 예비적 단계(행 1:6-26)

 

본문에서 제시된 사도들의 기다림(눅 24:49; 행 1:4-5)은 단순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사역을 위한 준비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네 가지의 일들이 준비되었다: 사명 부여(6-8절); 승천하신 그리스도(9-11절); 기도(12-14절); 빠진 사도의 선출(15-26절). 이들 네 가지 일들은 ‘기독교 선교를 구성하는 근본 요소들’(Longenecker 1981:253ff)로 이해된다: 1). 복음전파의 명령; 2). 하늘로부터 이 사명을 지휘하시는 승천하신 주님; 3). 사도적 중심성(일군의 중요성); 4). 이들에게 권능을 주시는 성령의 강림. 이 네 가지 요소들이 적절히 준비될 때 우리의 선교는 완성될 수 있다.

 

<선교의 예비적 단계>

 

1) 복음전파의 명령(1:6-8): 

이 명령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으로서 요약하면 하나님 나라의 전파이다. 하나님 나라의 전파는 그의 공 사역의 메시지의 핵심이었고(막 1:14-15). 부활․승천하신 후에도 그의 메시지의 요지(要旨)이기도 하다(행 1:3). 그렇기 때문에 6절에서 사도들이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이까?”라고 질문하였다고 본다.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직접적인 답변을 피하시고 성령의 강림에 대한 언급과 함께 그들이 ‘자신(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의 삶을 우선적으로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8절).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의 요지가 하나님 나라성령에 있음을 알게 되고,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예수(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되어야 함을 이해할 수 있다.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주로 예수의 사역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졌다면, 사도행전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사도들을 통한 성령(‘예수의 영’)의 사역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져 있다. 이 점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하나님 나라 - 성령 - 예수; 하나님의 나라 - 성령 - 사도들 혹은 하나님 나라 - 사도들 - 성령. 아무튼 하나님의 나라와 성령은 서로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 점은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서도 잘 제시되어졌다. 선지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메시아의 나라를 세우실 때 그 분의 영을 부어 주실 것이며, 하나님의 영이 넘치게 흘러나와 모든 사람이 이것을 즐거워함은 하나님의 통치하심의 명백한 표시이며 축복으로 제시되어 졌다(사 32:15ff; 35:6ff; 43:19ff; 겔 11:19; 36:26-27; 37:11ff; 39:29; 욜 2:28-29). 정말 ‘하나님의 영’이야말로 그 백성에게 하나님의 통치를 삶의 실제가 되게 할 것이다.

 

사도행전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세 가지 모습으로 제시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 범위; 도래의 시기. 사실 이러한 모습들은 6절의 질문(“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때이나이까”)에서 보는 대로 사도들이 오해한 것으로서 사도행전은 여기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하고 있다.

 

- 영적인 특징(권능으로): 여기서 권능이란 무력(영역/정치적 개념)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구현되는 그 분의 (의롭고 자비로우신) 통치를 말한다. 그러므로 ‘회개와 믿음을 통한 죄 사함(구원)의 선언’이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핵심을 이룬다.

 

- 모든 사람들에게(열방):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눅 24:47];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3:39]; 등등). 구약의 구심적 선교(모여듦: “만방이 그리[예루살렘/시온]로 모여들 것이라”[사 2:2-3])에서 원심적 선교(흩어짐: “예루살렘에서 ... 땅 끝까지 이르러” 혹은 “너희는 가서”)로 지향된다. 여기에 행 1:8은 명백한 지침서이다. 인종(人種), 국가(國家), 계층(階層), 성(性)의 장벽을 뛰어 넘어서 모든 족속, 열방(列邦)들에게. holiness -> wholeness.

 

- 점진적으로 확장: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즉 그 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시간적으로는 (승천 후) 성령의 강림에서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을 말하며 공간적으로서는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를 말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땅 끝까지 이르러’와 ‘다시 오실 때까지’(세상 끝날 까지’)인 시간과 공간의 끝까지로 볼 수 있다.

 

2) 승천하신 그리스도(9-11절):

이것은 예수의 지상사역의 종결을 의미하며, 또한 성령(‘예수의 영’)을 통해 그의 천상 사역의 시작을 의미한다. 예수의 승천은 속죄 사역의 완성을 의미하며 또한 그의 영을 보내심으로서 구원과 중보 사역의 시작을 의미한다. 초림(오심) -> 승천(가심) -> 성령강림(오심) -> 복음전파(감) -> 재림(오심). 그 분이 명하시고 그 분이 성령을 통해 구원의 사역을 행하신다.

 

3) 성령강림을 위해 합심된 헌신(지속)적인 기도(12-14절): 

그러나 이 명령을 수행하려면 무엇보다도 그들이 성령(의 강림)을 기다려야 한다. 결국 명하심(눅 24:49; 행 1:4-5, 8)을 따라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인 사도들과 그 외 사람들(120문도)은 성령강림과 능력 받음(‘약속하신 것’)을 위한 찬양(눅 24:53)과 기도(1:14)의 시간을 가졌다. 본문에 나타난 대로 그들의 기도는 간절한 기도였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찬양과 기도는 성령의 역사 하심을 위한 아름다운 준비이다. 특히 여기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o`moqumado.n)라는 표현은 누가가 좋아하는 표현이기도 하다(1:14; 2:46; 4:24; 5:12; 7:57; 8:6; 12:20; 15:25; 18:12; 19:29). 이것은 ‘한 마음, 한 목적, 한 갈망을 가진’(BAGD) 기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힘쓰니라’(proskarterou/ntej[proskartere,w])의 단어는 헌신과 지속성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곧 이들의 기도는 합심과 헌신된 기도를 말한다.

 

4) 빠진 사도의 선출(15-26절):

기다리는 동안 ‘최초의 공동체’(120문도)가 행한 또 다른 일은 빠진 사도(가룟 유다)를 보충하는 일이었다. 물론 이것은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비워진 열 두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21-22절)를 임명하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야지, 로마 카톨릭이 말하는 사도직의 계승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유다로 인하여 비워진 자리는 맛디아에 의해 채워짐으로서 사도팀(‘부활의 증인들’)이 정비되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에 의해 비워진 자리는 ‘예수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 채워져야만 하였다.

 

이처럼 ‘성령의 강림전의 시간이란 기다림의 시간이며, 기도의 시간이며, 성령 없이는 주어진 사명을 실행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란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는 시간이다’(O'Reilly 1987:15-16).

 

 

 

 

 

 

 

 

 

 

제 2 과: 오순절의 성령강림과 베드로의 설교(행 2:1-41)

 

성령의 강림(오심)은 신약 시대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것은 예수의 가심(승천)으로 이어지는 구속역사의 중대한 사건(요 16:7)으로서 구원 역사의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의미한다. 이처럼 성령 강림은 예수의 초림과 견주어 이해되지만, 육체로 오신 예수님과는 차별성이 있다(cf. 요 14 장과 16 장을 보라): “또 다른 보혜사”(요 14:16)로서의 성령의 강림.

- ‘예수의 영’으로서의 그의 사역을 이어감.

-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 속에 계심(요 14:16-17)

- 기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일(행)하시는 예수님

 

물론 이 성령의 강림과 권능을 부여하심은 사도들의 사역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마치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께서 예수님 위에 내려오심으로써 그가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의 인도로’, ‘성령의 능력이 충만하여’, 성령에 의해서 ‘기름 부으심’을 받고서 자신의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신 것처럼(눅 3:21-22; 4:1, 14, 18; cf. 행 10:38), 이제 같은 성령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사도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그들이 주께 받은 사명을 능력 있게 수행하도록 무장시키기 위해서 그들에게 오셨다(행 1:5, 8; 2:33). 그러므로 성령이 없는 증인으로서의 제자의 삶이란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성령은 생명을 주시고(생명의 영),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고(진리와 증거의 성령), 참된 연합과 교제를 하게 하시고(성령의 세례),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을 갖도록 하시고(성령의 열매), 능력 있는 증인이 되게 하신다(권능의 성령). 성령이 없는 교회란 죽은 교회(‘마른 뼈들의 교회’)이다.

 

1. ‘오순절 사건’과 요엘의 예언의 성취로서의 성령 강림:

 

- 성령강림과 오순절

추수감사절(출 23:16; 레 23:15-21; 신 16:16) 혹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부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날인 오순절에 나타난 성령 강림의 모습은 바람과 불 가운데 음성으로 나타난 여호와의 강림의 모습(출 19 장)과 유사하다. 특히 오순절이 의미하는 것처럼 추수와 율법 수여라는 이중적 상징성을 발견한다.

 

1) 성령강림의 모습: 초자연적인 사건

자연적인 현상(바람; 불; 말)처럼 보였지만, 그 기원과 특성에서 초자연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언어적인 모습을 지닌 이적(language miracle)으로서 계시(revelation)와 복음전파의 사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졌다(cf. Tannehill 1990:27): 소리(h=coj); 불의 혀(glw/ssai); 방언(glw,ssaij). 특히 천하 각국으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들은 사건 곧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들은 사건(2:4-5, 11)은 사도행전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인 선교적인 의미를 지닌다. 오순절 사건은 구약의 바벨의 사건과 상호 대조적인 병행을 이룬다. 여기에 대해 Stott(1990:68)는 “오순절의 축복은 바벨의 저주를 의도적이면서 극적으로 역전한 것”으로 이해한다.

- 바벨사건(창 11:1-9): 땅이 하늘까지 올라감(교만); 언어적 혼잡과 흩어짐    (다 민족)

- 오순절사건: 하늘이 땅에 내려옴(겸손); 언어적 장벽의 극복과 그리스도    로 모임(계 7:9)

 

이처럼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성령 안에서 복음(그리스도)을 통하여 인종적, 국가적, 언어적 장벽이 극복되는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을 상징하고 있다(cf. 갈 3:28).

 

2) 성령을 부어 주심(2:33)과 성령 충만(2:4)

능력 있는 증인의 삶을 위해서 성령은 오셔서 각 사람에게 임하여 그들을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즉 ‘능력 있는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신다. 표적과 기사가 드러나게 되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3) 성령과 말씀선포: 

성령은 ‘증거의 영’으로 오셔서 주님(복음)을 증거하며 기사와 표적을 통해 복음을 확증해 준다.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주님을 증거 하신다(cf. 요 15:26). 주님을 증거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우리는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본다.

 

2. 베드로의 설교(14-41절)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이 모인 각 사람들에게 임하여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게 됨으로써 소동이 일어나게 되자 베드로가 여기에 대해 자연스럽게 설명(14-21절)을 하고 연이어 예수의 복음을 전한다(22-40절).

 

사도행전은 단순히 사도들의 행적만이 아니고 그들의 설교(연설)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행적과 설교. 약 19번의 설교(연설)가 나타난다: 베드로의 설교 8 편(1, 2, 3, 4, 5, 10, 11, 15장)과 스데반과 야고보의 설교 각 1 편(7장과 15장), 그리고 바울의 설교 5 편(13, 14, 17, 20, 28장)과 4 개의 법정연설(22-26장). 전체의 25%에 해당된다.

 

1) 사건에 대한 설명(14-21절): 요엘의 예언 성취

오순절 날에 일어난 놀라운 사건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영을 부어 주시리라는 요엘의 예언(욜 2:28-32)이 성취된 것이다. 구약의 성령의 역사(役事)와는 달리 욜 2:28-32에 언급된 종말론적인 성령의 강림은 ‘아낌없이 부어 주심’(generosity); ‘최종성’(finality); ‘보편성’(universality)이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성령강림은 예언의 강조와 함께 구원의 사역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놀라운 사건은 구원을 위한 전주곡과 같다. 설명에 이어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를 소개함으로써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2) 복음의 제시(22-40절)

베드로가 전한 복음(케리그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사역과 수난/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의 간략한 스토리이다(Dodd).

- 공생애(22절):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신 나사렛     예수.

- 수난과 죽음(23절): 하나님의 뜻(경륜)과 인간의 악함

- 부활(24-32절): 부활의 진정성을 구약(시 16:8-11)을 통해 입증하고        생명의 길로서 제시.

- 승천(33-36절): 승귀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보내심(부어 주심)

- 복음 전파(37-39절)와 회심의 역사와 세례 받음(40-41절): 새로운 공동체    의 탄생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8-39)

 

 

 

제 3 과: 예루살렘 교회의 성령 충만한 모습(행 2:42-47)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성령의 임재하심과 충만하심이 있는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본다. 성령이 현존하는 성령 충만한 교회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 가르치는/배우는 교회

교회 안에 성령이 계신 증거로서 첫 번째의 모습은 교회가 ‘사도의 가르침’(apostolic teaching)을 받는 일에 힘쓰고 있는 점이다. 건강한 교회, 즉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있는 교회는 올바른 가르침과 함께 적절한 배움과 그에 따른 순종이 있는 교회다. 흔히 우리는 성령이 충만한 교회라고 하면서 신비적인 체험이나 소위 말하는 영적 은사에만 집중한 교회를 바라보는데 이러한 교회는 성령 충만한 건강한 교회가 아니다. 반지성주의 혹은 몽매주의(蒙昧主義)에 빠져 있는 교회는 성령 충만한 건강한 교회가 아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 교제하는/사랑하는 교회

두 번째 증거는 참된 ‘사귐’ 즉 교제(Koinonia)가 있는 교회가 성령이 현존하는 성령 충만한 교회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귐’(교제)이란 (삼위) 하나님과의 사귐과 함께 성도들 간의 사귐을 말한다. 특히 성도간의 사귐은 형제우애와 물질적 돌봄(caring)을 포함한다(cf. 고후 8:4; 9:13). 소유와 나눔.

 

- 예배하는 교회

성령이 현존하는 성령 충만한 교회의 세 번째 증거로서는 예배의 아름다운 헌신이다: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이들의 예배는 삶의 예배이며(“날마다”), 연합된 예배이며(“마음을 같이하여”), 극한 기쁨과 순진한 마음(단순함/겸손/경건)을 동시에 가진 예배였다(“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 증거 하는 교회

성령이 현존하는 성령 충만한 교회의 마지막 증거는 증거 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느니라”. 예루살렘 교회는 배우고 나누고 예배하는 일에 너무 전념한 나머지 전도하는 일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참된 교회의 모습은 배우고 나누고 예배하는 일에 그치지 아니하고 보냄 받는 일에 열중한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부르셔서 자신과 함께 있게 하시고 또한 그들을 보내어 전도하게 하셨다. ‘함께 함’과 ‘보냄’은 교회의 제자사역의 골격이다. 보냄 받으신 예수는 제자들을 보내시고 또한 성령을 보내셔서 교회로 하여금 보냄 받는 삶을 살게 하신다. 보냄 받으신 성령은 교회로 하여금 스스로 화석화되거나 게토를 구성하지 않고 세상 밖으로(“땅 끝까지”) 나아가도록 종용하시는 ‘선교의 영’이시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아름다운 모습들은 세상사람들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하다.

 

성령 충만한 교회의 특징은 네 가지 관련성을 통해 요약된다: 1). 사도들과 관련성(가르침과 배움); 2). 성도간 상호관련성(교제); 3). 하나님과 관련성(예배); 4). 세상과 관련성(증거).

 

 

 

 

 

 

 

 

 

 

 

 

 

 

 

 

 

 

 

제 4 과: 시련을 통해 성장하는 교회

(행 3:1-6:7)

 

 

이제 누가는 성령강림이후 밀월가운데 있는 목가적인 예루살렘 교회의 초기 모습에서 시련가운데 성장하는 역동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장면을 전환한다. 성령의 강림과 함께 권능을 받은 사도들(교회)이 그리스도로부터 복음전파의 위임을 받아 맹렬한 핍박가운데서 선교의 항해 길을 가는 모습을 그려가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주님으로부터 복음전파(선교)의 사명을 받아 밤의 항해 길을 떠나는 교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밤에 광풍을 만나 시련가운데 있는 배(교회)의 모습이라고 할까. 시련과 성령 충만함과 복음전파는 사도행전의 주요한 주제이다.

 

우리는 여기서 핍박당하는 교회의 모습이란 곧 영적 전투 가운데 있는 교회의 모습임을 깨닫게 된다. 영적으로 전투하는 교회의 모습은 요한계시록을 통해 잘 제시되고 있다. 사도행전이 역사의 무대 위에 펼쳐지는 사건들(인간들의 반대)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면, 계시록은 그 배후에 작용하는 세력들의 갈등(사탄의 반대)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탄의 반대(계략)는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물리적 박해(physical violence); 도덕적 타락/안일함(moral corruption/compromise); 잘못된 우선 순위(distraction). 위의 이것들은 교회가 담대한 복음전파와 순결(진리)과 연합(사랑), 그리고 영적 우선성(말씀과 기도)을 이루어야 함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들은 성령으로 충만의 은혜로운 삶의 결과이기도 하다.

 

성령이 강림하셔서 각 사람들(사도들) 위에 임함으로써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담대히 복음의 말씀을 전파하자 여기에 대한 사탄의 반격 또한 거세었다. 그것의 기존 불신의 세력(이 세상)에 의한 박해(미움)였다.

 

1) 물리적 박해

사탄의 가장 거친 방법인 핍박은 교회 역사에 아주 현저하다. 교회(제자들)의 핍박받음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은 누가복음에 잘 나타난다(눅 6:22, 26; 12;11; 21:12ff): 미움, 모욕, 거절; 재판 받음; 박해, 옥에 갇힘. 이것은 예수와 그를 따르는 제자들(베드로(와 요한); 스데반; 야고보; 바울; 등)에게도 동일한 운명으로 찾아온다.

- 첫 번째 박해(4:1-22): 체포/투옥/재판/경고/석방(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 담대히 증거 => 담대히 말씀을 전파하게 해 달라고 기도(24-30절)

- 두 번째 박해(5:17-42): 체포/투옥/재판/금지령/매질/석방(하나님을 대적) -> 지속적 순종 => 그리스도(복음)를 위해 능욕 받는 것에 하나님을                        찬양(41절)

 

박해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교회로 하여금 기도찬양으로 이끌었다. 그 결과 교회는 박해 속에서도 더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된다.

 

2) 도덕적 안일과 타락: 거짓과 위선

두 번째의 사탄의 공격은 교회 내의 ‘위선’과 ‘거짓’을 야기한 일이다. 아름다운 봉사의 교제 즉 사랑의 결속에 칼을 들이 댄 사건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5:1-11)이었다. 이러한 일은 성장하는 교회에 치명적인 위협으로 나타난다(구약 여호수아서의 아간의 사건에 비교됨).  이 사건은 ‘부정직’(不正直)과 ‘속임수’로 결합된 이중적 범죄였다. 이들의 관심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사랑의 돌봄(자신을 내어줌[ 곧 재물을 팜])이 아니라 자신의 인기와 명예와 명성만을 구하는 위선적인 경건(敬虔)으로서 오직 자신을 살찌우게 하는데 관심이 있었다.

 

이러한 부정직(不正直)과 속임수는 성장하는 교회를 향한 사탄의 교묘한 반격이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3절). 여기에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있었고 이 일로 인해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배우게 된다(5-11절). 결과적으로 큰 기쁨과 함께 두려움을 가진 교회. 이것이 교회의 참다운 경배(기쁨과 경건)이다.

 

3) 잘못된 우선성(영적 우선성): 말씀과 기도

세 번째 사탄의 공격은 보다 전술적이었다. 그것은 교회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영적 일에 등한히 하도록 하는 일(6:1)이었다. 곧 영성의 부재를 초래하게 하는 일이었다. 여기에 대한 사도들의 반응은 무엇보다도 영적 우선 순위를 결정하여 교회를 재정비하는 일이었다(행 6:2-6):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2절).

 

봉사의 일을 위해 교회는 집사를 선출하였고(위임), 그 결과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게 됨으로써 교회는 부흥․발전․강성하였다(7절):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 하니라”. 

 

 

<시련을 통해 성장하는 교회>                                       

 

 

                    연합(사랑)                           

                     시련                          순결과 연합        

 예루살렘            순결(거룩)                          성장 흩어지는 교회

   교회                                                                                                                                “지면에 흩어지라”                                                                                                            “온 땅에 퍼져라”

 

탄생 -> 외적이고 내적인 시련 가운데 -> 복음전파/순결/연합/말씀과 기도 -> 성장(2:43, 47;                                                                                                                                                      4:4; 5;14; 6:1, 7) 

 

성령으로 탄생한 교회는 많은 (외적/내적) 시련을 통해서 성령 안에서 순종하며 거룩하고 연합된 교회로 자라가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성장이란 단순히 외관상의 비대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질적(質的)이고 양적(量的)으로 성장해 가는 것을 말한다.

- 인기의 시험(3:1-26): 지도자들(베드로)  => 행 3:12f                                      말씀

- 충성의 시험(4:1-12): 외부적 핍박    => 행 4:19                    일심으로          기도

- 물질의 시험(4:23-5:11): 내부적 시험    => 행 4:32-35; 5:11     한 마음과 뜻으로    교제

- 담대함의 시험(5:12-42): 외부적 핍박    => 행 5:29-32; 5:41-42 성령의 권능(충만)    전도

- 책임의 시험(6:1-15): 내부적 시험    => 행 6:3-4           큰 은혜를 얻어     순종

- 은혜의 시험(7:1-8:1): 지도자들(스데반) => 행 7:55-60                                사랑

 

 

 

 

세상사람들의 칭송 가운데서 날마다 하나님의 교회는 강성해 진다: 복음의 힘과 도덕적 힘. “말씀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는‘ 교회의 모습은 누가가 강조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제 5 과: 이방선교를 위한 준비들

(행 6:8-12:25)

 

 

안팎으로 밀어닥친 시련 가운데서도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 안에서 올바른 성장을 유지했다. 성령의 강림으로 힘있게 시작된 교회는 사탄의 공격과 유혹에도 불구하고 두려움 없는 믿음(기도와 찬양)과 함께 복음전파는 가속화되었고 교회는 큰 기쁨과 경건한 두려움을 가지고 성장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예배의 참된 모습(큰 기쁨과 두려움)과 함께 교회의 참된 모습인 순결(purity)과 연합(unity)을 유지함으로써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는 교회가 되었다. 이제 성령 안에서 참된 능력(dunamis)과 권위(exusia)를 가진 교회는 행 1:8에서 언급한 대로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의 땅으로/모든 족속에게 복음전파(선교)의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여기에 현 단락(6:8-12:25)은 세계선교를 위한 결정적인 기초가 되는 사건들(순교자 스데반; 빌립의 사마라아 전도; 사울의 회심; 고넬료의 회심; 안디옥 교회의 탄생)을 다루고 있다.

 

1. 스데반의 순교와 흩어지는 교회(6:7-8:3)

 

기사와 표적으로 말미암아 강한 반대와 논란이 제기되어졌고(6:8-15), 여기에 대한 답변으로 주어진 스데반의 설교(7:1-53)는 구속역사의 한 획을 긋는 매우 중요한 설교로 새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종소리와 같았다. 스데반의 설교(변론)와 운명(죽음)은 예수님의 교훈과 삶을 고스란히 재현한 것이었다: 죄명(신성 모독 죄)과 기도(용서와 영혼을 맡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셨던 그 길을 걸어간 주의 제자 스데반은 결코 그 주인을 능가하지 못하였다. 결국 자신의 설교를 통해 스데반은 순교자의 길을 갔고 그로 인해 큰 핍박이 일어나 제자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전역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의 순교의 피는 생명(교회)의 탄생(씨앗)을 알리는 예시(豫示)였다.

 

정비된 교회에 대한 사탄의 반격은 보다 거세어졌다. 특히 스데반의 반대자들이 취한 행동은 우리의 교회역사에서도 자주 재현되는 모습들이기도 하다. 여기에 반대자들이 취한 행동과정에 대한 관찰은 사뭇 흥미롭다(Stott: 127): 공개적 (신학) 논쟁(9-10절) -> 중상모략(11-14절) -> (세속의 힘/법을 빌려) 폭력(7:57-59).

 

스데반의 설교(변론): 성전(Temple)과 율법(Law)

스데반에 대한 그들의 (거짓된) 기소는 거룩한 곳인 성전과 거룩한 경전인 모세의 율법을 거슬려 말함으로써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였다는 것이었다(11-14절). 여기에 대한 스데반의 변론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었다: 예수님 자신이 성전의 대체자(새로운 성전)며 율법의 완성자이시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새로운 성전인 몸이신 성전을 세우셨다(막 14:58). 그리고 그는 율법을 이루지 못한 자들의 율법의 저주가 되셨고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셨다(마 5:17). 성전(Temple)과 율법(Law)은 둘 다 그 분(메시아)을 지향해 왔으며, 이제 그 분 안에서 완성되었다. 이 점을 스데반은 구속역사를 통해서 변론하고 있다.

 

<성전>

하나님의 현현하심과 임재하심은 결코 어떤 특정한 장소에 제한된 적이 없었다.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 백성과 함께 동행하시는 ‘순례의 하나님’이시다. 즉 구약의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 항상 이동하시며 활동하시는 하나님, 항상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즉 동행하시는 하나님이셨다. 아브라함(7:2-8)에게와 요셉(7:9-16)에게서도, 그리고 모세(17-43절)와 다윗과 솔로몬(44-50절)에게서도 하나님은 그들이 가는 곳에는 어디든지 동행하셨다: 우르 -> 하란 -> 가나안 -> 애굽 -> 가나안(아브라함); 애굽(요셉); 미디안 광야 -> 애굽 -> 광야(모세); 장막 -> 성전(다윗과 솔로몬).

 

결론적으로 스데반은 “지극히 높으신 이는 [인간의]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는다”(7:48)고 말하고 있다. 이사야 66:1-2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건축물 안에 제한되시는 분이 아니시다: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 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행 7:49-50). 이러한 스데반의 변론의 핵심은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동행하심은 한 장소에 국한되지 않으며, 어떤 건물도 그 분을 제한하거나 그 분의 활동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자기 이름을 위하여(자기 이름으로) 모인 곳이면 어디든지 계시는 분(cf. 마 18:20; 28:16-20)으로서 사도행전의 선교의 주제를 잘 뒷받침한다(행 14:27; 15:12). 언약의 백성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하나님은 현존하시며 그들과 함께 하신다. 이 점은 종말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완성되어졌고 성령을 통해 구현되어졌다.

 

<율법>

과연 누가 율법과 모세를 거슬렸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른 자신인가 아니면 그들(의 조상)인가? 스데반은 너희의 조상들과 너희가 율법과 모세를 거슬린 자들이 아닌가 라고 도리어 그들을 고소하고 있다(7:51-53):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슬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 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치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행 7:51-53).

 

결론적으로 스데반의 변론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으로서 이러한 변론은 사도행전을 통해 명확하게 제시되어졌다. 예수의 영은 그를 믿는 사람들과 어디서나 함께 하였고 그들이 모여 예배하는 곳이 곧 거룩한 처소였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전은 더 이상 예배의 중심부가 되지 못한다. 어디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면 그곳은 예배의 처소가 된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교회란 건물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이란 장로들의 유전이나 전통이 아니라 성경이었다.

 

결국 이러한 변론을 통해 스데반은 순교의 첫 열매가 되었다. 스데반의 순교는 교회의 태동을 위한 모태(씨앗)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사도 바울의 회심의 계기가 되고, 제자들이 흩어져 전도하는 큰 핍박을 야기하였다(7:54-8:3).

 

2. 전도자 빌립(8장)

 

스데반의 순교가 기폭제가 되어 일어난 대 핍박으로 흩어진 사람들(평신도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8:4). 이것은 행 1:8에 주어진 선교 위임령의 성취의 한 모습이기도 하였다. 대 핍박은 복음전파의 종결이 아니라 복음전파를 가속화시켰다: “바람이 불길을 더 크게 만든다”(벵겔). 이러한 과정에 누가는 또 다른 집사였던 빌립의 이방사역을 소개한다. 빌립은 먼저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할 뿐 아니라 축귀와 치유의 이적을 베풂으로서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고 이로 인해 예루살렘으로부터 파송된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 성령의 강림이 있었다. 연이어 빌립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에티오피아의 내시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세례를 베풀었다.

 

1) 빌립과 사마리아 성의 복음화(8:5-25)

- 사마리아 성의 복음화(8:5-8)

- 마술사 시몬(8:9-13, 18-24): 잘못 이해된 성령의 은사

- 베드로와 요한의 사마리아 파송과 성령강림(8:14-17)

 

<사마리아 성의 성령강림 사건>

사마리아 사람들의 성령의 경험(8:14-17)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하게 겪어야 할 보편적인 영적 경험으로 받아들려야 하는가? 아니면 반복될 수 없는 특별한 사건 즉 예외 규정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두 번째 영적 경험으로 주장하는 견해로는:

- 로마 카톨릭교회(외향적): (1). 세례(baptism) -> (2). 주교의 견진 성사(confirmation)

- 오순절교회(내향적): (1). 회심과 중생 -> (2). 성령세례(‘제 2 의 축복’)

 

과연 성령을 받는 것이 회심과 세례 후에 일어난 두 번째 영적 경험인가? 이것이 사도들의 가르침인가? 신약의 가르침에 따르면 기독교의 입문은 한 단계의 체험으로서 회개하고 믿고 세례를 받으면 죄 용서를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행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그 이후에는 내주(內住)하시는 성령에 의해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라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분명히 사마리아인들의 경험은 두 단계로 나타났다. 이것은 구원역사의 특별한 단계로서 복음이 새로운 지리적 경계(사마리아)를 넘어서서 선포된 첫 번째 경우로서 이제 이들에게 주어진 성령강림의 ‘역사적 사건’(historical event)은 유대의 신앙공동체와 동등하게 구속받은 공동체(한 몸)로서 역사적으로 인준된 공적인 표시(cf. 고전 14:13)로 여겨진다. 이 일 후로는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아무런 차별 없이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되었다.

 

2) 에티오피아 사람 내시를 전도한 빌립(8:26-40)

성령의 인도를 받은(26, 29, 39절) 빌립은 이제 가사(Gaza)의 광야 길로 나가서 거기서 에티오피아(‘더운 남쪽의 거주지역의 끝’[Hengel]) 사람인 내시(개종한 아프리카 흑인 유대인)를 만나 그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겸손한 구도자 내시는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는다.

 

우리는 빌립의 전도사역을 통해 복음은 인종(사마리아인과 아프리카 흑인)과 계층(평민들과 고위 공무원)을 넘어서서 누구에게나 필요한 복된 소식으로서 증거 되어야 함을 배울 뿐 아니라 그가 사용한 복음전파의 두 방법(개인전도[내시에게]와 대중전도[여러 성에서])은 우리의 복음전파에 유의하여야 할 점이라고 여겨진다.

 

3. 사울의 회심(9:1-3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는 이방선교의 방향과 기틀과 밑거름이 되었고, 빌립의 전도 사역은 이방선교의 여명을 연 사건이 되었다. 이제 누가는 세계 선교의 주역이 된 ‘이방인의 사도’인 사울의 다메섹 회심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다메섹에서의 사울의 회심의 사건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회심사건으로서 사도행전에서 여러 번 반복하여 진술되고 있다. 특히 다메섹 사건은 사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부름 받은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앞으로 그의 서신을 통해 진술될 그의 신학(구원론과 교회론)의 골격을 이루는 사건이 되기도 한다.

- 회심이전의 사울: 포행자/핍박자(행 9:21; 갈 1:13, 23; 빌 3:6; 딤전 1:13)

- 사울과 예수(회심): 하나님의 은혜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4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5절)

- 사울과 아나니아(부르심): 기도와 환상과 소명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 9:15-16)

- 복음전파 후 다메섹을 떠나는 사울: 의기 양양하게 다메섹에 들어선     사울이 썩은 물고기들을 실어 나르는 광주리를 타고 다메섹을 도망쳤다.

  ‘핍박하는 자’에서 ‘핍박받는 자’로 그의 삶이 바꾸어졌다(고후 11:32-33).

- 사울과 바나바(동역): 

 

교회의 핍박자이었던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까지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로우신 사랑(인내)이 있었을 뿐 아니라 또한 거기에는 아름다운 형제애(brotherhood)를 지닌 참된 주의 제자들인 아나니아와 바나바와 같은 겸손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기억하자. (하워드 헨드릭스의 생애에도 그와 같은 사람이 있었다.)

 

4. 베드로의 순회사역과 고넬료의 회심(9:32-10:48)

 

‘이방인의 사도’가 된 사울의 회심기사에 이어 누가는 고넬료의 회심 즉 첫 번째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된 기사로 나아가고 있다. 이 두 사람의 회심은 이방선교의 초석이 되는 사건이었다. 특히 고넬료의 회심에서 베드로의 역할은 복음을 유대적 틀에서 해방시켜 주는 중요한 중개인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이후 13 장에서 바울은 이방선교의 주역으로서 나타난다. 그러기까지 바울은 잠시 동안(거의 7-8년간) 다소에 머물게 된다(9:30).

 

이 단락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행적을 보게 된다. 베드로의 순회사역이 소개되면서 베드로는 룻다에 사는 성도 애니아의 8 년 된 중풍병(질병의 벽)을 고치고, 욥바에 사는 여 제자 다비다 혹은 도르가의 죽음(죽음의 벽)을 기도로 소생시킴으로써 룻다와 사론의 사람들 그리고 욥바의 사람들이 주께 돌아온다. 베드로는 놀랍게도 욥바에 있으면서 시몬이라는 피장의 집에 머물게 된다. 이제 인종적 편견의 장벽 앞에서 베드로는 복음으로 이 벽을 허물고 있다.  거기서 그는 놀라운 환상을 보게되고 이 일로 그의 편견은 무너지고 주의 뜻에 순종하여 고낼료의 집으로 나아간다.

 

1) 고넬료의 회심(10장)

 

욥바(Yoppa)의 피장 시몬의 집에 머문 베드로(바 요나[요나의 아들] 시몬)의 모습은 독자들로 하여금 마치 니느웨 성의 이방사람들에게 전도하라는 명령에 불순종한 요나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배를 탄 곳인 그 욥바(Yoppa)를 상기시켜 준다. 이 욥바의 피장(皮匠) 시몬의 집에서 하나님은 기도하는 베드로에게 이방선교를 위한 놀라운 환상을 보여주었다.

- 고넬료와 기도 중 환상(10:1-8)

- 기도 중 환상을 본 베드로(10:9-23)

- 고넬료의 집이 이른 베드로와 복음전파(10:23-48)

 

특히 고넬료의 집에 이르렀을 때 고넬료가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려 하자 그는 자신도 사람이라고 하며 그를 일으킨 일과 그를 부정한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함께 교제한 일(25-28절)은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정말 아름다운 복음적인 행동이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행동을 통해 인간에 대한 두 극단적인 잘못된 태도를 버려야 함을 배운다: 신으로 숭배하는 태도와 부정한 자로 경멸하는 태도. “과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다”(행 10:34).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결코 인간을 외모(外貌)나 인종(人種), 피부(皮膚), 국적(國籍), 계층(階層), 성(性)과 같은 외적 기준에 의해 판단하지 아니하신다. 그러므로 복음(福音)은 이러한 편견을 넘어서서 누구에게나 복음(福音)으로 전달되어져야 한다.

 

5. 이방인의 회심에 대한 논쟁(11:1-18)

 

이 사건이후에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방인에 대한 자신의 전도사역 중에 행한 이방인과의 식탁교제로 인해 크다란 도전을 받게된다. 그것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하였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하여 베드로는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들을 그들에게 증거 하였다. 즉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계획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그들에게도 또한 성령주심을 증거 하였다.

- 신적 환상(5-10절): 기도 중 환상

- 신적 명령(11-12절): 성령의 명령

- 신적 준비(13-14절): 고넬료의 환상

- 신적 행동(15-17절): 성령의 강림

 

베드로의 증거에 예루살렘교회는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고 하였다(11:18). 결국, 고넬료의 회심사건은 (예루살렘) 교회로 하여금 이방선교의 문을 여는 놀라운 계기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고넬료의 회심의 사건을 통해서 누가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는 말로 그 단락을 끝맺고 있다. 예루살렘 교회의 이러한 선언은 이제 이방인들도 구속받은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음을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복음이 공식적으로 이방인에게 증거 되는 한 계기가 되었다.

 

6. 안디옥 교회의 탄생(11:19-30)

 

이제 복음은 대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무명의 사람들에 의해서 주로 유대인들에게만 전해지다가 전해진 복음이 구브로와 구레네 사람들에 의해 또한 헬라인들(헬라문화권에 속한 사람들/헬라어를 말하는 사람들)에게도 전해지면서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함으로써 수다한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게 되었다. 이 소문이 예루살렘에 전해지자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내어 이방인을 위한 복음사역을 시작하게 되자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바나바를 통해 큰 무리가 주께 더하게 되었다.

 

이제 복음은 지리적이고(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서서 북쪽 안디옥까지) 문화적인(이방인들 혹은 헬라인들) 경계를 넘어서서 크게 확장되었다. 바나바는 사울과 더불어 동역 함으로써 안디옥에서 큰 교회를 이루게 되었고 이와 같이 성장한 안디옥 교회는 흉년이 닥쳐 어려운 예루살렘 교회를 형제애를 가지고 돕기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부조의 일이 진행되는 가운데(11:27-30과 12:25) 누가는 지금 12장을 통하여 세상과 교회라는 두 공동체사이의 갈등과 힘의 본질과 결말을 보여주고 있다(12:1-24).

 

7. 야고보의 순교와 헤롯의 죽음(행 12 장)

 

행 12장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세상과 교회 사이에는 갈등이 현존함을 보여 주면서, 하나님 나라의 전파와 확장은 이러한 갈등가운데 수난을 통하여 이루어짐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갈등가운데 세상(사탄)은 세속적 힘과 권세에 의해 무력을 사용하고 있다면, 교회는 기도의 능력에 의존하고 있음을 본다. 과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확장하기 위해서 교회가 지닌 참된 능력과 권세는 무엇이며, 또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선교의 역사에는 앞에 나타난 대로 놀라운 복음전파의 모습과 교회의 성장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 다시 맹렬한 핍박의 바람이 예루살렘 교회에 불어왔고, 이로 인해 야고보(요한의 형제)는 순교하게 되었고, 베드로는 투옥이 되는 심각한 상황을 겪게 되는데 이 사건은 역사적으로 폭군인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한 발생된 맹렬한 핍박이었다. 이처럼 저자 누가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전파의 놀라운 역사를 기술하면서도 언제나 이 세상가운데서는 환난(반대)과 성장(승리)이 교차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인간(사탄)의 힘에 의해 무너지지 않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도행전 12장을 통하여 누가는 사탄의 파괴적인 능력과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잘 대비되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결국 죽음과 지옥의 권세라도 하나님의 교회(복음)를 이길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시온성과 같은 교회”(찬송가 245). 특별히 23-24절의 말씀은 이러한 대비(對比)를 잘 보여준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興旺)하여 더하더라(행 12:23-24).

 

행 12장은 헤롯이 자신이 지닌 권력으로 교회 지도자들을 죽이고 체포하고 핍박하면서 모진 횡포를 부리지만 그러나 그 끝에 가서는 병들어 죽게 됨을 보여 주면서 참된 능력과 권세가 무엇인지를 독자들에게 암묵적으로 교훈하고 있다. 비록 처음에는 야고보가 살해당하고 베드로가 체포됨으로써 헤롯이 승리하는 것처럼 시작되지만, 결국 헤롯은 죽고 베드로는 자유롭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興旺)하여 승리하는 것으로 끝난다. 로마의 역사에서 보는 것처럼 비록 폭군들이 일시적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복음전파를 방해하고 교만과 자랑과 광기를 보이나 결국 그들의 권세란 영구적이지 못하다. 마침내 이들의 권세는 꺾이고 이들의 교만은 수치를 당할 것이다(cf. 삼상 2:10). 하나님 나라의 권세는 세상 나라의 권세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제 6 과: 땅 끝까지(행 13:1-28:31)

 

 

이미 앞 단락에서 우리는 이방선교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많은 것들을 보아왔다. 즉 성전(temple)에 대한 스데반의 설교(하나님은 어디서나 계신다)는 이방선교의 신학적인 기초가 되었고, 그의 순교의 피는 이방선교의 씨앗이 되었다. 그리고 연이어 일어난 사울의 회심(이방인의 사도로서 바울의 소명)과 백부장 고넬료의 회심, 그리고 그 집에 성령을 부어 주심(하나님이 이방인을 동일한 유업으로 받으심)은 이방선교의 길을 예비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사건들과 함께 발생한 야고보의 죽음과 헤롯의 죽음은 독자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교(복음전파)가 갈등과 시련가운데 확장되고 있음을 제시한다. 비록 세상 즉 사탄은 무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저지하려고 애를 써도 하나님의 나라는 기도하는 백성들을 통하여 성령으로 무장되어지고, 복음전파는 도리어 더 크게 나아 간다.

 

드디어 이방의 선교는 행 13 장에서 잘 준비된 안디옥 교회를 통해서 성령께서 자신의 뜻을 따라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따로 세워 파송함으로써 선교의 깃발을 든다. 여기서부터 바울의 제 1 차 선교여행(13:1-14:28)이 시작되고, 여기에 대한 평가는 15 장에 나타나는데 선교사들의 선교보고와 함께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15:1:16:5)으로 제 1 차 선교여행은 끝을 맺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제 2 차 선교여행은 빌립보(16장), 데살로니카, 베뢰아, 아덴(17장), 그리고 고린도(18장)와 에베소(18:24-20:1)로 이어지고, 끝으로 그의 선교여행은 드디어 예루살렘(20:1-21:26)에서 종결된다.

 

특별히 첫 번째 단락에서의 사도 바울의 이방 선교의 족적(足炙)은 행 9:15-16에 나타난 그의 소명에서부터 그 청사진이 잘 드러났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9:15-16) 

 

이 예언적 구절은 사도 바울의 선교가 어떠한 모습으로 진행될 지를 일목요연하게 잘 보여준다. 즉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복음(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전하는데 많은 고난이 있음을 암시할 뿐 아니라 그가 또한 복음을 위해 임금들 앞에 서야할 것임을 또한 암시한다.

 

1. 이방선교의 여명: 안디옥 교회에서부터(13:1-3)

 

헬라인(Seleucus Nicator 장군)에 의해 세워진 (시리아) 안디옥(Antioch)은 여러 인종들의 사람들(50만 명)로 구성되었는데 이점은 안디옥 교회가 국제적 교회로서나 전세계의 기독교 선교의 발판으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다고 본다. 이처럼 다양한 문화적 배경들을 가진 인종들이 함께 모여 신앙공동체를 이룩한 안디옥 교회의 선교적 사명은 그 구성원(cf. 11:18-21)에서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도자들(다섯 명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바나바(구브로 태생의 레위인[4:36]); 니게르('검은‘)라 하는 시므온(아프리카 흑인); 구레네 사람 루기오(북부 아프리카 흑인); 분봉 왕 젖 동생 마나엔; 사울(다소사람 베냐민인).

 

사도행전을 통해서 우리는 안디옥 교회의 예배(예언/주를 섬김/금식/기도)와 교제(식탁교제)와 봉사(부조)가 문화적으로나 인종적으로 상당히 열려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열린 선교지향적 교회’로서의 안디옥 교회. 이와 같은 안디옥 교회에 성령이 말씀하실 때에 그들은 순종하여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워서 그들을 선교사로 보내었다(13:2-3).

 

성령이 내주 하시는 교회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교회이며 이러한 교회는 예배(기도)와 금식(禁食)과 주(主)를 섬기는 일에 열심 하는 교회이다. 특히 금식과 기도는 성령의 음성(하나님의 뜻)을 듣고 순종하는 일에 매우 중요하다. 안디옥 교회의 선교는 성령의 명하심에 민감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즉각 순종하는 일로 나타났다. 사실 선교란 ‘교회를 통해 성령에 의해서 보냄을 받음’(성령과 교회의 합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모습은 선교가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거나(성령님이 직접 개인적으로 인도) 제도적인(성령과는 아무 관계없이 교회가 이 일을 함) 두 극단적인 성향을 견제해 주는 역할을 한다.

 

2. 제 1 차 선교 여행(13:4-14:28): 바울과 바나바[와 마가 요한]

 

바울의 제 1 차 선교 여행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안디옥 -> (실루기아) -> * 구브로의 살라미(Salamis)와 바보(Paphos) -> (밤빌리아의 버가: 요한의 예루살렘 귀향) -> * 비시디아 안디옥 -> * 이고니온(Iconium) -> * 루스드라(Lystra)와 더베(Derbe) -> 루스드라/이고니온/비시디아 안디옥 -> * 버가 -> (앗달리아) -> 안디옥으로 이어진다.

 

안디옥 교회가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교회의 설립자들인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를 위하여 따로 세워 파송한 일은 이방선교가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잘 보여준다. 특히 행 1:8에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선교의 명령은 성령의 보내심을 통해 재 확증되었고 이 일에 안디옥 교회는 순종함으로 참여하였다.

 

성령의 보내심으로 바나바와 사울(바울)은 조력자(helper)인 마가 요한을 데리고 실루기아로 내려가 거기서 배를 타고 구브로(Cyprus)로 갔다(4절). 누가는 구브로(바나바의 고향)에서 이들이 주로 두 곳에서 집중하여 전도하였던 기사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한 곳은 구브로의 동쪽 해안의 상업 도시인 살라미(Salamis)와 다른 한 곳은 서쪽 해안이 있는 구브로의 수도인 바보((Paphos)였다. 살라미(Salamis)에서는 주로 유대인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후(13:5), 섬을 가로질러서 구브로의 수도인 바보(Paphos)로 가서 거기서 서기오 바울이라는 총독에게 복음을 전하고 유대 거짓 선지자인 마법사 바예수(Bar-Jesus)와 대적하였다. 특히 바보에서의 전도는 매우 전투적이었다.

 

1) 바보(Paphos)에서의 놀라운 복음전파(13:6-12)

바보(Paphos)에서 만난 복음전파의 장애물은 바예수(‘구원의 아들’)라는 유대 거짓 선지자로 일종의 마법사였다. 그는 총독 곁에서 자신의 복지를 챙겨 갔는데 바나바와 바울의 방문으로 인해 자신의 명성과 생계에 위협이 되는 줄을 알고 총독이 믿지 못하도록 그들을 대적하였다. 여기에 바울은 담대히 그의 행동을 정죄하고 주의 심판을 선언하였다(10-11절):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바울의 이 선언은 성령 충만에 의해 되어진 것이었다고 누가는 기술한다(9절).

 

바울의 선언대로 이 사람은 ‘구원의 아들’(“바예수”)이 아니라 ‘마귀의 아들’로 종교를 빙자한 사기꾼이며 협잡꾼인 의(義)의 대적자였다. 그는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였고, 사람들로 하여금 회심하도록 하는 대신에 타락하도록 하였다. 결과적으로 총독은 이 놀라운 표적과 가르침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최초의 이방인의 회심을 본다. 이제 사울(Saul)의 이름은 이 기사로 시작하여 바울(Paul)로 불리워 진다(13:13이하를 보라). 바보에서 이들은 배를 타고 북쪽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Perga)에 이르렀다. 거기서 마가 요한은 그들을 떠나(“버리고”: cf. 15:38)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13:13), 바나바와 바울은 버가를 지나 험한 산을 넘어 비시다아 안디옥으로 갔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 주로 유대인들 청중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16-42절).

 

2)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전도(13:14-52): 놀라운 회심과 반대

먼저 바울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대 다수의 유대인 청중들에게 ‘어떻게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주를 세우셨는지를 역사적으로 서술하면서 그 기다리고 기다리던 구세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입증하면서 이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즉 그를 믿음으로써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고 설파하였다(16-42절).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에 큰 관심을 보였을 뿐 아니라 또한 시기하여 비방하고 반대하였다(42-45절). 이에 두 사도는 유대인들의 거절과 박해로 인해 그들을 떠나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이방인들은 기쁨으로 복음을 받아 들여 믿게 되었다(46-48절).

 

복음은 언제나 ‘수용’(reception)과 ‘거절’(rejection)의 두 반응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바울은 유대인 대적자들의 선동에 의해 물리적 핍박을 받고 이 곳 안디옥 지역을 쫓겨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실망치 않고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여 이고니온(Iconium)으로 나아갔다. 핍박 중에서도 기뻐하는 이들의 모습(13:52; cf. 8:8; 16:25)은 예수의 교훈(눅 6:22-23)을 따르는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리고 기쁨은 성령의 열매이다(갈 5:22). 안디옥에서부터 시작된 박해와 고난은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점점 그 강도가 세어진다(cf. 딤후 3:10-11, 특히 11절에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받은 것”의 언급을 유의하라).

 

3) 이고니온(Iconium)에서의 전도(14:1-7)

이고니온에 온 바울과 바나바는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게 되자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게 되었다. 그러나 거절과 반대도 만만찮았다. 유대인 대적자들은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사도들을 중상 모략(모욕)하고 돌로 치려고 하자, 사도들은 루스드라와 더베로 가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4) 루스드라(Lystra)에서의 전도(14:8-20)

루스드라에서는 나면서 앉은뱅이가 된 사람이 전도 중에 바울에 의해 일어나 뛰어 걷게 되자 무리가 놀라 그들을 쓰스(Zeus)와 허메(Hermes)의 신들로 경배하려고 하였다(11-13절):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이에 바나바와 바울은 놀라며 자신들은 신(神)이 아니고 저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임을 분명하게 증거 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미신(迷信)에서 돌이켜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였다. 자신들의 사역가운데 믿음의 역사(役事)가 아무리 크고 놀라와도 사도들은 자신들의 인간성(人間性)의 본질을 바꾸지 아니하였다. 참된 신앙은 바로 이러한 인간성의 본질(신이 아니라 피조물로서의 인간)을 회복하는 것이다.

 

흔히들 일군들이 복음을 전한 후에 사람들이 놀라운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고 자신들을 숭배하고자 할 때(“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가운데 내려오셨다”) 참된 복음의 일군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이 때라 이 때라 이 때를 위함이라”고 하여 그들의 왕(王) 또는 군림자가 되고자 하는가 아니면 바울과 바나바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이 허탄한 일로부터 돌이키도록 권면하는가? 이것이 기독교가 사이비(거짓) 종교와 다른 점이다.

 

이러한 놀라운 이적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원정 온 유대인들에 의해 돌로 침을 당하는 수난(시련)을 받아 성 바깥으로 내 던져졌다(딤후 3:10-11; 고후 4:9; 11:25). 여러분은 이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니 어떻게 이러한 놀라운 능력의 사람들이 이처럼 무력하게 이와 같은 수난을 당하여야 하는가? 성령의 능력과 수난 받음 혹은 더 나아가 순교는 너무도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보인다. 과연 기독교가 말하는 능력(dunamis)과 권세(exusia)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생애)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능력의 하나님 즉 전능자 하나님(의 아들)께서 저주의 십자가를 지신 일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비밀이며 또한 계시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이다.

 

돌로 침을 당한 바울은 깨어나 그 다음 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았다. 사실 복음전파는 여러 가지 유혹과 핍박과 고난이 몰려오는 시련의 행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사함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보람이 있다.

 

4) 시리아 안디옥으로(14:21-28)

그 동안 복음을 전하였던 길을 되돌아가면서 바울과 바나바는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사도들이 전해준 믿음)에 거하라 권면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cf. 딤후 3:11-12)이라고 말하여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며 비시디아를 지나 밤빌리아의 버가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를 타고 시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와서 그 동안의 선교상황과 결과(“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셨는가”)를 보고하였다.

 

3. 예루살렘 공의회(행 15:1-16:5)

 

이방인들이 가이사랴(고넬료 집안)와 수리아 안디옥(헬라인들)에서 복음을 받아 믿게 되자 예루살렘 교회는 이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인정은 하였지만 그러나 회개와 믿음에 의한 그들의 회심을 완전히 공적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11장). 과연 할례를 받음 없이 믿고 세례 받는 것만으로도, 율법의 행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도, 이방인들이 메시아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는가? 과연 유대인이 되지 않고서도, 유대법의 규례를 지키지 않고서도 이것이 가능한가? 이와 같은 논쟁이 마침내 안디옥 교회에까지 이르게 되었다(15:1). 이에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대표자로 파견하여 이 문제를 정식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상정하기로 하여 그들을 예루살렘에 보내었다(15:2).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에 이들은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온 일’을 보고하자 이들은 기쁨으로 반응하였다.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의 영접을 받은 바울과 바나바는 그 동안 자신들이 행한 선교 사역을 보고하였다.

 

선교보고 중에 바리새파 중의 믿는 사람이 이방인들에게도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 문제는 이제 예루살렘 교회의 공적인 문제로 부각이 되었다. 결국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 문제에 대하여 명확한 결정을 하여야 하였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여 이 문제를 깊이 있게 토의하였다(15:6). 격렬한 논쟁 - 1). 바리새파 중에 믿는 자(5절); 2). 베드로(7-11절; 특히 11절을 유의하라); 3). 바나바와 바울(12절) - 끝에(7절) 의장(議長)인 야고보는 자신의 의견과 함께 구약(암 9:11-12)을 인용하여 논쟁을 요약하여 결론을 내리기를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것을 결정하여 회람형식의 편지를 작성하여 [이방교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13-21절).

 

이에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 의견을 받아 들여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유다와 실라를 보내어 이 결의를 그들에게 전달하고자 가결하였다(22-28절). 결과적으로 이 가결은 회람형식으로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 그리고 갈라디아까지 전달되었다(15:30-16:5).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가결이 전달되어진 결과에 대해 누가는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고 언급하고 있다(16:5).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른 공의회(공교회)의 올바른 가결(치리와 권징을 포함)은 교회의 성장의 초석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가결을 한 행 15장은 사도행전의 분수령에 해당한다. 즉 행 15장의 가결은 행 1:8의 선교 명령에 대한 법적 정당성을 밝혀주는 근거가 되었다. 예루살렘 공의회의 이 결정은 은혜의 복음을 확증해 주는 진리의 승리와 교제와 연합을 보존하는 사랑의 승리를 보여준 성숙하고 눈부신 가결이었다(Stott 255ff).

 

우리는 여기서 예루살렘 공의회가 이 문제를 어떻게 논의하고 결정하고 있는 지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우리의 논의에 적절한 교훈을 준다.

- 하나님의 일하심과 성령의 역사

- 자신들의 체험

- 사도들의 증거

- 성경의 증거

 

예루살렘 공의회의 가결을 가지고 시리아 안디옥에 유다와 실라와 함께 내려온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의 교회에 예루살렘 교회의 편지를 전하니 교회는 기뻐하였다. 바울과 바나바는 얼마동안 안디옥에 유하면서 주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다.

 

수일 후에 바울은 바나바에게 선교사역 동안 세웠던 교회들을 돌아보자고 제안하였고 여기에 둘은 데리고 갈 동반자로 인하여 서로 심히 다투었고 결과적으로 피차 갈라서게 되었다. 이 사건은 선교 역사상 선교사들 간의 최초의 갈등 혹은 선교정책에 대한 최초의 갈등으로 기록된다. 바울은 그전에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버리고’) 한 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cf. 13:13] 자인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15:38)고 주장함으로써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배를 타고 구브로로 갔고, 바울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사역에 유능한(?) 실라를 불러 그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로(험한 내륙으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였다(15:36-41). 로마시민이었던(16:37-38) 실라는 바울의 선교 동역자로서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제 여기서부터 우리는 소위 바울의 제 2 차 선교여행이 시작됨을 본다.

 

4. 제 2 차 선교 여행(행 15:36-18:22): 유럽선교의 시작

 

바울은 실라를 동역자로 데리고 안디옥을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를 다녀가며 교회를 굳게 하였고 특별히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된 규례들을 전해들은 그곳 교회들은 오히려 믿음이 더 굳세어 지고 더 큰 부흥이 있었다(16:4-5):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바울과 실라는 더베와 루스드라에 이르러 거기서 자신의 영적 아들(cf. 고전 4:17)인 ([외조모와] 어머니는 믿는 유대인이며 아버지는 헬라인인) 디모데를 데리고 갔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여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하였지만 성령이 허락지 아니하여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다. 거기서 바울은 밤에 환상 중에 마게도니아 사람 하나가 그에게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하는 부름이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부름으로 받아 들여 마게도냐로 떠나고자 한다(16:1-10). 제 1 차 선교 여행은 소아시아 지역이었다면 제 2 차 선교 여행은 유럽의 관문인 마게도냐 지역이었다. 이에 바울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바위섬)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게 된다(16:11-12). 240킬로나 되는 길을 이틀 안에 도착한 것을 보니 순풍이 불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나아갈 때 순풍이 있었다(열린 길).

 

1) 빌립보에서의 선교(16:11-40)

마게도냐 지경의 첫 성인 빌립보(빌립왕의 이름을 따 불렀음)에서 바울은 기도처를 찾다가 문 밖 강가에 모여있는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고 그 중에 자주 장사 루디아가 복음을 듣고 그 집이 다 세례를 받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다. 그리고 이어 기도처를 항해 가는 도중에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이 여러 날 바울을 쫓아다니며 괴롭히게 되자, 바울은 그녀로부터 귀신을 쫓아내 주었다. 결과적으로 주인은 자신의 수입원이 없어지게 되자 시장(市場)에 있는 관가에 고발함(반유태주의적이고 인종적 자만을 강조한 선동적 고소[20-21절])으로써 바울과 그 동행자들이 심한 매질과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이 세상에서 옳은 일, 구원의 일을 한다고 모든 것이 잘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 악한 세상에서 우리는 황금률이 반드시 적용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도 우리는 생명의 일, 의로운 일, 선한 일을 수행한다.

 

혹시 우리는 이 기사를 보면서 ‘아니 어떻게 성령께서 이곳으로 오라고 손짓하시고는 이러한 어려움과 시련을 안겨주나’고 불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인 바울과 실라는 이러한 고통스러운 옥고(獄苦) 중에도 한 밤중에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힘든 상황에서도 기도하고 찬양하게 하였겠는가(cf. 행 5:41; 빌 4:6-7)? 고난 속에서도 ‘노래하는 예수 그리스도’(singing Christ)의 모습 즉 ‘시편의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이다.

 

마침내 기도찬양을 통하여 놀라운 역사(役事)가 감옥에서 일어났고(26절), 이 일로 인해 간수와 그 온 집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어 세례를 받았다. 바울이 당한 일(그의 매임)은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cf. 빌 1: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로마 사람인 바울은 그 모든 일에서부터 자유의 몸이 되자, 루디아의 집에 가서 형제들을 만나 위로하고 빌립보를 떠났다(40절).

 

2) 데살로니가에서의 선교(17:1-9)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통해서 풀려 나온 바울은 데살로니가로 가서 안식일에 규례를 따라 회당에서 (구약)성경을 강론하면서 그리스도(메시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야 할 것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 하였다(17:1-3). 그 결과 헬라파 유대인들과 귀부인들이 설득을 당하여 바울을 좇았고, 유대인들은 깡패들을 동원하여 그들을 잡으려 하였으나 그들이 피신하여 발견치 않게 되자 야손과 형제들이 대신 고난을 당하였다.

 

3) 베뢰아에서의 선교(17:10-15)

피신한 후에 바울과 실라는 밤에 베뢰아로 가서 그곳 유대인의 회당에서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였다. 베뢰아 사람(유대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유대인)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 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열심을 보였다(17:11). 그러나 거기에도 복음에 대한 수용(reception)과 거절(rejection)이 있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이곳까지 와서 무리를 선동하여 바울을 대적하였다. 바울은 이곳을 떠나고 아덴으로 갔고, 실라와 디모데는 당분간 그곳에 남아있었다.

 

4) 아덴에서의 바울(17:16-34)

아덴(로마제국의 지적 중심지: 학문)에서 바울은 동역자인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며 홀로 있는 동안에 우상으로 가득한 도시를 바라보며 마음에 분노(분통/의분/혐오감)를 느껴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무리들에게 저자(market place)에서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복음을 변론하였다.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도시를 바라보며 바울은 절망하거나 체념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보다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한다. 그 이유는 복음 외에는 다른 소망이 있을 수가 없기에....

 

특히 아레오바고의 법정에서 행한 바울의 연설(22-31절)은 다소 개인적인 면을 지니고 있었지만 매우 변증적이었다. 이 연설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창조주며, 섭리자며, 통치자요 이버지요 심판주로 명확하게 선포하면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회개를 촉구하였다. 여기에 믿음의 반응이 있었다. 우리는 바울이 회당(종교인들)에서나 저자(일반인들)에서나 법정(철학자들)에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음을 본다. 어디서나 어떤 계층에게나 복음은 전달되어야 한다.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이 전한 복음은 창조와 십자가의 복음, 심판과 구원의 복음이었다.

 

5) 고린도에서의 선교(18:1-18)

아덴을 떠나 고린도(상업적 중심지: 교역)에 이른 바울은 장막 일을 하면서 안식일에는 회당에서 강론하며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을 권면 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본도(Pontus) 출신의 유대인으로 장막 업을 하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게 되었고 후에 그들은 바울의 동역자가 된다. 그리고 얼마 후에 실라와 디모데가 합류하였다. 처음에는 유대인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아)임을 밝히 증거 하였으나 그들의 반대로 회당을 나와 디도 유스도의 집에 거하며 이방인들에게 집중적으로 전도하였다. 회당장 그리스보와 그의 온 집이 주를 믿었고 수많은 고린도인들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

 

바울은 밤에 주께서 환상가운데서 말씀하신 것(“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에 기초하여 그곳에서 약 1년 6개월 간을 유하며 하나님이 말씀을 전하였다. 그 후에 유대인들의 고소로 바울은 갈리오 총독의 법정에 서게되었지만 (유대 종교적인 문제로 인한) 그들의 소송은 기각되었고(이점은 바울을 보호하시겠다는 주의 예언의 성취)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夫婦)와 함께 이곳을 떠나 수리아로 가게 된다.

 

6) 귀향 길의 바울(18:18-22)

이제 바울의 제 2 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수리아로 귀향한다. 귀향 길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동행을 하였다. 겐그리아에서 바울은 서원이 있어 머리를 깎았고 에베소로 가서는 거기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변론한 후에 다시 올 것을 약속하며 에베소를 떠나서 가이사랴로 와서 안디옥(시리아)으로 올라갔다.

 

5. 제 3 차 선교여행(18:23-21:17)

 

안디옥에서 얼마를 지낸 후 바울은 갈라디아와 부르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들을 굳게 하였다. 여기서부터 제 3 차 선교여행이 시작된다. 특별히 전에 그가 “다시 오리라”고 약속한 에베소의 방문과 그곳에서의 3년 간의 사역은 매우 중요한 사역이었다. 제 3 차 선교여행의 시작에서 아볼로에 대한 누가의 언급(24-28절)은 특이하다.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고 70인경(LXX)이 번역되었으며 필로(Philo)가 살았던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 아볼로가 에베소에 이르러 회당에서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지만 요한의 세례만 알기 때문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가르쳤다. 이처럼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아볼로가 아가야(Achaia)로 건너가 거기서 믿는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면서 (구약) 성경을 가지고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고적으로 유대인들에게 강력히 증거 하였다. 이러한 배경 가운데 바울이 위의 지방으로부터 에베소로 왔다.

 

1) 에베소에서의 바울의 선교사역(19:1-41)

에베소(종교적 중심지: 종교)에 온 바울은 그곳에서 제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믿을 때 성령 받았음의 여부와 어떤 세례를 받았느냐를 질문함으로써 예수를 증거하며 그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함으로써 그들이 예언도 하고 방언도 하였다. 이들 12명의 사람들은 물세례와 성령의 세례를 동시에 받았다. 이 기사(19:1-7)는 앞의 사마리아와 가이사랴의 고넬료 집에서의 성령 받음의 기사와 더불어 제 2의 영적 체험으로서의 성령세례를 주장하는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의 주요한 증거본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성령을 믿음과 연결시킨 점이나 성령을 세례와 연결시킨 점을 볼 때 이것은 믿은 사람은 성령을 받았으며 세례를 받은 사람은 성령을 받았다는 중생시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에베소에서 바울은 먼저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였다. 반대를 받자 바울은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두 해 동안을 날마다 강론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들었다. 놀라운 이적적인 능력으로 인해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두려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회개와 회심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19:11-19). 결론적으로 누가는 이러한 사도 바울의 사역의 결과를 요약하면서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 하여 세력을 얻었다”(19:20)고 말한다.

 

예베소에서의 3년 간의 사역을 끝내면서 바울은 이제 자신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처서 예루살렘을 가기를 경영하였고, 또한 거기로부터 로마를 방문할 것을 계획하였다(19:21).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의 마음은 제국의 중심부(Rome)를 지나 땅 끝까지(Spain) 나아간다(롬 15:24, 28). 바울은 주님의 지상명령(至上命令)에 사로잡혀있는 ‘비전의 사람’(man of vision)이었다. 이 작은 베냐민 사람, 사울(‘작은 자’)의 마음속에 복음이 들어오게 되니 온 세계가 자신의 교구가 되었다.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세력을 얻게 되자 사탄의 반격 또한 거세어 졌다. 복음은 언제나 삶의 바른 길을 요구한다. 이러한 모습은 에베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성령의 역사로 놀라운 이적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전해진 복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와 회심을 불러 일으켰다. ‘주님을 따라가는 삶’(제자도)으로 인하여(19:23의 누가의 지적) 에베소 지역과 그 일대에 미신(우상숭배)이 철폐되어지자 은으로 된 아데미 신당을 만들어 파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인 은장색 데미트리오가 자신의 경제적인 손실로 인하여 주위의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존경심을 부추기며 교묘하게 무리를 선동하여 큰 소동을 일으켰다(24-29절). 이 소동으로 인해 모인 무리의 “태반(太半)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도 알지 못한 채 모였던 사람들이었다”(32절)는 누가의 언급은 군중의 몽매성(“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욘 4:11])을 잘 보여준다.

 

결국 이 도시의 서기장에 의해 소요는 진정이 되고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면하고 작별을 고한 후에 이곳을 떠나 마게도냐로 갔다(20:1). 거기서 다시 헬라(Greece)로 가서 (아마도 고린도에서) 3개월을 지낸 후에 수리아로 가고자 하였지만 유대인들의 살해모의를 알고 마게도냐의 빌립보를 지나 거기서 배를 타고 드로아로 갔다(20:3-6).

 

2) 드로아에서의 강론과 유두고 사건(20:7-12)

드로아에 도착한 바울과 그 일행은 이곳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주일날(“안식 후 첫 날”), 예배로 모인 저녁시간에 밤중까지 이어지는 바울의 긴 강론(문답식 강론?) 도중에 유두고라는 청년(소년?)이 창에 걸터앉아 듣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삼층누((三層樓)에서 떨어져 죽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바울은 즉시 그의 설교를 중지하고 내려가 그를 죽음에서 일으킨 후에 다시 올라와 날이 새기까지 성만찬을 나누면서 얘기하고 떠났다. 드로아를 떠난 바울은 앗소에 도착하여 거기서 급히 배를 타고 기오와 사모를 거쳐 밀레도로 갔다(20:13-16).

 

3) 밀레도에서의 고별설교(20:17-38)

바울은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장로들을 오도록 청하였다(20:17). 도착한 이들에게 바울은 그 유명한 고별설교(18-35절)를 하였다. 바울의 고별설교는 에베소에서 그가 행한 과거의 눈물어린 사역을 언급함(18-21절)과 함께 그의 미래의 불확실한 운명과 그에 대한 각오(22-27절), 그리고 장로들에 대한 현재적 권면(28-35절)으로 이어졌다.

- 과거의 자신의 사역(18-21절): 기억하라

- 미래의 운명과 각오(22-27절): 자신의 미래는 불투명하지만 각오와 삶은.

- 교회를 위한 현재적 권면(28-35절): (자신과 양떼들을 위해) 깨어있어라;    자신의 본을 따라 탐하는 생활을 하지말고 섬기는 삶을 살아라.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20:36-38).

 

4) 예루살렘으로(21:1-17): 결박당할 자신에 대한 예언에도 불구하고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작별한 후에 이제 바울에게는 예루살렘을 향하는 마지막 여정이 시작된다. 이 여정은 밀레도에서 두로를 거쳐 예루살렘을 항해 나아가는 여정이다. 특히 두로에서 바울은 제자들과 함께 일주일을 그곳에서 머무는 동안 성령의 감동으로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가지 말 것을 권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작별하고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 배타고 돌레마이를 거쳐서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일곱 집사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머문다(21:7-8). 머무는 동안 아가보라고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바울에게 자신이 받은 바울에 대한 불길한(?) 예언을 전하지만 바울은 개의치 않고 죽을 각오를 하고 예루살렘으로 나아간다(10-14절). 우리는 여기서 예언(豫言)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에 대한 성경적 입장을 만나게 된다(Carson의 견해). 은사적 예언(11절)과 계시적 예언(행 9:15-16)사이의 차이와 예언에 대한 해석의 문제를 보게된다.

 

6. 로마를 향한 향해 길(21:18-28:31)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로 나아가 야고보와 장로들을 문안하고 자신의 선교사역을 보고한다. 보고가 끝나자 혹 유대신자들 중에 율법에 열심있는 사람들이 바울을 해코지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바울로 하여금 결례를 행하게 함으로써 앞으로 생길 문제를 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주일정도가 지난 후에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성전에서 보고 무리를 충동하여 ‘바울 죽이기’를 시도함으로써 바울에게 심각한 환난(수난)이 닥쳤다(21:27-36). 이 환난은 유대주의자들에 의하여 제기되어 바울은 소요로 인하여 선동된 무리들에게 잡혀서 성전 밖으로 끌려가 죽을 지경이 되는 순간에 이 소문이 천부장에게 들리게 되었고 이에 천부장은 군사들을 데리고 가서 바울을 구원하고 그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감금한다.

 

결국 바울은 천부장에게 자신이 변호할 기회를 요청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변호하나(22:1-21) 도리어 그들은 바울을 살려둘 수 없다고 소리지르며 죽이려고 달려들자 천부장이 백부장을 시켜 심문하는 도중에 바울이 로마 시민인 줄을 알고 그에게 정당한 법적 권한을 주어 온 공회 앞에 변론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변호 도중에 그들의 반응이 더욱 격렬해 지자 바울은 부활의 문제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이에 논쟁을  일으켜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지만 그를 죽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송 도중에 살해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자 바울은 천부장의 호송으로 벨렉스 총독 앞에 서서 재판을 받고 이어서 베스도 총독 그리고 헤롯 아그립바 왕에게 차례로 이양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결국 바울은 로마의 가이사의 법정에 이 문제를 호소함으로써 로마로 향하는 여행을 하게 된다. 사실 이 시련은 이미 앞에서 예언된 일(행 9:15-16; 21:4, 11; 23:11)이었고 이 일로 인해 바울은 임금들 앞에 서서 복음을 변호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로마의 법정에서도 복음을 변호(증거)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 단락에는 바울이 받은 다섯 번의 재판기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재판기사(심문기사)를 통해서 복음을 예루살렘에서뿐만 아니라 임금들 앞에서 증거 하게 된다(cf. 행 23:11; 행 9:15):

- 성전 모퉁이에서 유대인들에게(22장):

- 유대 산헤드린에서(23장):

- 가이사랴의 벨렉스 총독에게(24장): 2년 간 감금됨(24:27)

- 베스도 총독에게(25장):

- 헤롯 아그립바 2세에게(26장):

 

<바울과 예수>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과 바울(사도들) 사이에 공통점을 발견한다. 이 공통점은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으로 그것은 수난의 상(像) 즉, 핍박받는 삶의 모습이다. 즉 핍박받는 예수와 핍박받는 사도들(바울). 예루살렘에서 당하였던 모습과 고난의 법정심문이 예수님과 바울 모두에게 동일한 모습으로 찾아왔다.

- 자신의 백성들에게 배척 당함

- 이유 없이 체포당하고 투옥됨

- 거짓 증인들의 고의적인 허위진술

- 법정에서 얼굴을 맞음(23:2)

- 유대인들의 은밀한 음모의 희생자(23:12ff)

- “그를 없애 버리라”고 외침(21:36)

- 다섯 번에 걸친 재판:

  바울: 무리들/의회/헤롯 아그립바 왕/벨렉스/베스도.

  예수님: 안나스/의회/ 헤롯 안디바 왕/빌라도(2x)

 

1) 가이사랴에서 그레데로(27:1-12)

드디어 바울은 죄수의 몸이지만 그토록 자신이 가고자 하였던 로마(Rome)를 향한 여행길에 오른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삼분의 일(19:21-28:31)은 예루살렘에서 로마에 이르는 바울의 여정(旅程)을 기술하고 있다. 이 여정(旅程)은 그가 죄인의 몸으로 가는 선교여행길이다. 비록 그는 죄인의 몸으로 이 길을 가지만 아름다운 복음 전파자의 삶을 살고 있다(cf. 고후 6:3-10). 마치 주님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죄인이지만 구원자.

 

이제 가이사랴(2년 간 감금되어 벨릭스와 베스도와 아그립바에게 재판을 받았던 곳)에서 출발된 뱃길은 백부장 율리오의 호송책임 하에 다른 사형 선고된 사람들(죄수들)을 싣고 두 단계에 걸쳐 두 배 즉 두 편의 선항(아드라뭇데노 배[2절]와 알렉산드리아 배[6절])으로 연결되었다. 가이사랴에서 아드라뭇데노 배를 타고 시돈을 거쳐 광풍 때문에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여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성(Myra city)에 이르렀다. 거기서 다시 알렉산드리아 배로 갈아 탄 후에 니도(Cnidus)를 지나 살모네 앞을 통과하며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미항(美港)이라는 곳이 이르렀다(8절).

 

여러 날이 지난 후에 행선이 어려워지자 바울은 백부장에게 이 번 항해는 위험하기 때문에  떠나지 말 것을 경고하였지만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고 그레데(Crete)의 항구인 뵈닉스(Phoenix)에서 과동(過冬)하기로 결정하며 떠난다.

 

2) 유라굴로의 광풍기사(27:13-38): 절망에서 구원으로

잠시 동안 순한 남풍으로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여 행선하는 중에 북동의 광풍인 유라굴로(Euraquolo: 동풍[Euros] + 북풍[Aguilo])를 만나 십 여일 간의 방황 끝에 거의 파선직전의 절망의 상황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자에 의해서 전해진 구원의 메시지(21-26절)를 전하였다. 비록 죄수의 몸이지만 그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구원자의 모습을 본다. 열 나흘 째 되는 날 밤에 사공들은 더 이상 소망이 없음을 알고 거루를 바다에 내려 도망치고자 할 때 바울은 그들이 함께 있어야 됨을 백부장에게 알림으로써 이 계획이 무산되었다. 다음 날 아침 바울은 그들에게 위로의 말과 함께 구원을 위해 음식을 먹도록 권유한다(33-34절). 음식을 먹고 힘을 얻은 이들은 그 다음 날 아침이 되자 경사진 한 해안을 발견하고 배를 대려고 하였지만 급류로 인해 배가 파선이 됨으로써 겨우 멜리데라는 섬에 상륙한다. 마침내 배에 탔던 276인이 모두 구원을 얻게 되었다.

 

바울의 이 모습은 복음서의 광풍기사에서의 무서움에 빠져 믿음 없는 모습을 보인 제자들의 행동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특히 27:21-38을 보면 바울은 광풍의 상황에서도 배에 함께 탄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

- 용기를 잃지 말라(21-26절)

- 함께 머물러 있어라(27-32절)

- 음식을 먹어라(33-38절)

 

3) 멜리데 섬에서(27:39-28:10)

섬에 도착한 바울의 일행은 섬사람들로부터 따뜻한 영접을 받는다. 그러나 불을 피우는 중에 나뭇가지로부터 나온 독사에게 물리게되자 그들은 그가 ‘살인자’이기 때문에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하지만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을 보자 그를 ‘신’(神)이라고 부른다(루스드라의 상황과 비교해 보라). 그곳에 거하는 중에 그곳의 지도자에 해당하는 사람인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熱病)과 이질(痢疾)에 걸려 누워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안수하매 병에서 낫게 되었고 이 일로 인해 다른 병든 사람들도 고침을 받았다. 석 달 동안 그곳에서 후한 예(禮)로 대접(待接)을 받은 바울은 과동(過冬)을 마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그곳을 떠나 수라구사에 사흘을 지낸 후에 레기온(하루 머묾)과 보디올(일주일)을 거쳐 로마로 간다.

 

4) 로마에 도착한 바울과 그의 사역(28:11-31):

죄수의 몸으로 바울은 마침내 로마에 도착한다. 도착하여 사흘이 지난 후 바울은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에게 변론하고 그곳에 거하면서 자신을 찾아 온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관하여 설득하였다. 바울이 온 이태를 가택연금 형식으로 셋 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나아 온 사람들을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쳤다(31절).

 

결론적으로 누가는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복음전파의 사명은 모든 역경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방해받지 아니한 채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열려져 있음을 언급함으로써 이 책을 끝내고 있다(cf. 딤후 2:9): “with all openness, unhindered”.

 

 

 

 

 

 

 

출처 : 개혁하는 교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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